2025-06-25

나의 역사 해방일지

저자소개

김나연
독서동아리 ‘역동’ 회원


고요한 새벽 시간 홀로 분주하다. 어떤 날은 서희를 또 다른 날은 월선이를 만나 눈물을 쏟다가 주갑이 아저씨의 노랫소리에 위로를 받는다. 해가 어스름 밝아오면 밥솥에 물을 안친다. 그러다 다시 머릿속에 장면을 곱씹어본다. 어느새 책 속 인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을 준비한다. 『토지』와 함께 그렇게 살았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진주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갓 말문을 튼 아이와 함께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아이만 바라보는 삶은 나에게 꽤 고통스러웠다. 홀로 낯선 행성에 남겨진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나를 위한 시간을 갈망했고 그 기분은 나를 죄의식처럼 옥죄었다. 그러다 동네에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엄마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나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강의를 신청했다.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이야기가 나를 스쳐 갔다. 마녀 육아, 채식, 기후 위기, 그린 뉴딜, 내 안의 불안. 그러던 중 『백년아이』 그림책을 그린 김지연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다.


“역사는 주변에 있는 게 아니에요. 내가 사는 공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이 모두 역사에요. 멀리서 찾지 마세요. 당신도 역사를 살고 있어요.”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내 작은 삶이 역사의 물결이 될 수 있구나. 가슴이 다시 뛰었다. 도서관을 주축으로 역사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역사책으로 역사를 시작하지 말아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공감의 눈빛을 보냈다. “문학책. 그중에서도 우리 지역을 담은 책을 찾아봅시다.” 그래서 선택된 책이 박경리 작가님의 『토지』였다. 『토지』는 하동 평사리 최 참판 댁으로 시작하여 상해, 용정을 거쳐 진주로 장소가 이동한다. 진주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주변이 어떤 곳인지조차 파악되지 않던 나에게 『토지』는 길잡이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구가 되었다.



책을 읽고 그 책 속에서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거리를 발문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또한 그 속에서 역사 이야기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서 나오는 질문거리를 정리하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이 필요했고, 어쩌다 내가 선정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부족하다 느껴 책을 깊이 읽기 시작했다. 일단 한 번 읽고 전체 내용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요약을 하기 위해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모임 하루 전에 발제가 미리 올라오면 그 내용과 연계해서 다시 한번 읽었다. 읽을수록 내가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책 읽기에만 급급했다면 인물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 허투루 볼 수가 없었다. 막중한 책임감과 동아리에 대한 애정이 나를 그렇게 변화시켜 갔다.


『토지』는 총 21권의 장편으로 호흡이 긴 책이다. 자칫하면 느슨해지고 또 힘이 들어가면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책이다. 모임 시간을 결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일 오전 역동는 김계주와 윤씨 부인의 만남이 있던 구례 천은사를 시작으로 최 참판 댁의 배경이 되었다는 조씨 고가를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평사리의 너른 들이 보이는 박경리문학관 앞에서 여정을 마무리했다. 박경리 선생님의 치열한 삶 앞에 모두 겸허해졌다.



지금 우리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고 있다. 『토지』에서 광복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으니 그 뒤를 이어 광복 이후의 역사를 담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으로 연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사이에 인원 충원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모임을 많은 이들과 함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원 충원하는 사이에 눈을 우주로 돌려 『코스모스』를 바라보기로 했다. 책장 한 편에 언젠가 읽자며 다짐했던 책이라 모두 공감하며 읽어보자는 마음이 모아졌다. 한 장을 넘기기도 어렵던 『코스모스』가 함께 읽으니 깊이 읽기가 가능해졌다. 과학책이 아니라 인문 철학책처럼 읽혔다. 나의 성장을 몸소 느낄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역동’을 통해 책을 읽고 사람과 만나며 깊이 빠져 움직이지 않는 고독의 웅덩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고민은 이 길을 걸어왔던 누군가의 고뇌와 함께 희석되었다. 치열하게 당시를 살아온 사람들이 스쳐 가며 등을 토닥여준다. 신분의 허물이 자신을 휘감아도, 본인의 길을 향해 걷는다. 고뇌하는 자 부딪히는 자가 뒤섞여 세상을 살아간다. 인물을 만나며 나와 닮은 부분을 더듬고 내 주변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세상에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다시금 책 앞에 앉는다. 고요한 산속에서 책만 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관계가 나를 옭아매는 기분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그러나 관계가 나를 해방시켰다. 같은 목표로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숲에 둘러싸여 나는 기름진 토양의 나무처럼 숨 쉬고 있었다. 진정한 삶의 해방은 나를 둘러싼 공동체 속에서 단단히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역동’을 통해 배웠다.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