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집
![]()

이월
입춘이 지나갔다는 걸 나무들은 몸으로 안다
한문을 배웠을 리 없는 산수유나무 어린것들이
솟을대문 곁에서 입춘을 읽는다
이월이 좋은 것은
기다림이 나뭇가지를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 동쪽에는 허벅지까지 습설濕雪이 내려 쌓여
오르고 내리는 길 모두가 막혔다는데
길가의 나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다
삼월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이월은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
녹았던 물을 다시 살얼음으로 바꾸는 밤바람이
위세를 부리며 몰려다니지만
이월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지나온 내 생애도 찬바람 몰아치는 날 많았는데
그때마다 불이 빨갛게 언 나를
나는 순간순간 이월로 옮겨다 놓곤 했다
이월이 나를 제 옆에 있게 해주면 위안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도 이월이 슬그머니 옆에 와 내가
바라보는 들판의 푸릇푸릇한 흔적을 함께 보고 있다
소원
올해도 소한 대한 지나며 폭설 퍼부을 것이다
사나흘 눈 쏟아져 산짐승 다니는 길도
사람들이 세상으로 낸 길도 다 지워지는 날
내가 찍은 내 발자국 데리고 고요도 데리고
더 깊은 곳에 깃든 내 집 찾아가고 싶다
올해도 청명 곡우 지나면 꽃사태 나고
남쪽에선 매화 산수유 벚꽃이 지천으로 필 것이다
꽃 보러 가고 싶은 마음 눌러 앉히고 꽃출석부 들고 나가
뒤뜰에 오종종 핀 봄맞이꽃 주름꽃 꽃다지
출석 부르며 내 집 마당 먼저 꽃교실로 가꾸고 싶다
올해도 폭우 쏟아져 도시가 무릎까지 젖고
천둥과 번개의 번쩍이는 채찍이
인간의 마음과 캄캄해진 하늘을 쩍쩍 갈라놓곤 할 것이다
그때마다 오만과 허세와 어리석음을 속죄하고
가장 겸허한 언어로 기도하고 싶다
올해도 비명 소리 아우성 소리 골목골목 넘칠 것이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가 있고
외면하지 않아야 할 목소리 있을 것이다
그 둘을 구분해 들을 줄 아는 귀와
균형과 중정中正의 지혜를 갖게 해달라 간구하고 싶다
올해도 가을 오면 굴참나무 잎은 지고 쓸쓸해질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장의 낙엽처럼 우주의 부름에 귀 기울이고
순간순간이 은총이었던 날들과
아직도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마른 얼굴로 하늘 올려다보고 싶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