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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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
달러의 여정과 이를 이해하려는 나 자신의 여정을 서술하기 전에 몇 가지 핵심적 사실을 배경지식 삼아 알려주고자 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계를 지배하는 통화의 주인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100~200년 집권하는 것은 예사이며 세대 교체기에는 옛 군주와 새 군주가 공존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달러 패권의 시대는 100년을 갓 넘었으므로 아직 중장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대 교체의 주원인은 갈등이지만 네덜란드의 경우에서처럼 혁신이 작용하기도 한다. 네덜란드가 17세기 지배적 통화의 주인으로 군림한 데는 네덜란드 길더 주화와 더불어 ‘플로린’이라는 은화 태환 은행권을 유통한 혁신이 주효했다.
금융 언론에서는 달러를 대체하겠노라 떠벌리는 외국 지도자나 실리콘밸리 혁신가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사실 오늘날 세계 금융 시스템을 호령하는 그린백Greenback, 미국의 달러 지폐. 뒷면이 녹색이어서 붙은 이름이다―옮긴이의 지배력은 16세기 스페인의 ‘8의 주화’스페인 은화. 헤알화 주화 여덟 개의 가치를 지니며 한때 8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옮긴이, 그 뒤 떠오른 네덜란드 길더화, 심지어 나폴레옹 전쟁 종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대영제국에서 세계 곳곳을 식민지로 삼아 해가 지지 않던 시절 정점에 오른 영국 파운드화 등 이전의 모든 통화를 능가한다. 달러는 고도로 세계화된 오늘날 무역 시장과 금융시장에서 독보적인 국제 공통어다. 실제로 세계화가 진행되고 금융 시스템이 진화하면서 지배적 세계통화의 의미가 더욱 확대되었다. 스페인 통화 페세타는 16세기 인도와 중국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달러는 아시아 전역에서 (적어도 지금은) 중심적 역할을 한다.
나머지 세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 체제에서 가장 꺼림칙한 대목은 미국이 채무불이행default을 선언하지는 않더라도러시아나 중국에 물어보지는 말라 실질 채무 가치를 줄이려고 인플레이션을 활용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긴 예상치 못한 돌발적 인플레이션은 부분적 채무불이행과 다르지 않다. 달러로 돌려받은 대부금의 구매력이 대출 당시보다 훨씬 작아지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바로 이 일이 일어났다. 유럽 중앙은행들은 보유한 달러의 가치가 쪼그라드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달러의 구매력은 코로나 이후 다시 한번 급감했다.
채권 보유자에게 인플레이션은 정부가 발행하는 현대 화폐의 골칫거리다. 고인플레이션의 위험은 여전히 체제의 아킬레스건이다. 물론 미국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은 결코 인플레이션이 급격히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연방준비제도의 인플레이션 목표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면 향후 지속 불가능한 채무나 예상치 못한 비용이를테면 긴급 방위비 지출, 녹색전환, 행정부의 돌발 행동에 대처할 안전밸브는 무엇일까? 긴축일까? 금융억압저금리 채무를의 강제로 보유하게 하는 것일까? 대놓고 채무불이행을 선언하려나?
사실 인플레이션은 15세기 인쇄기가 발명되기 전부터 있었다. 예전에는 일으키기가 훨씬 힘들었을 뿐이다. 주화를 귀금속으로 만들던 시절에는 정부가 통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싶으면, 즉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싶으면 주화를 회수한 뒤 은 함량이 적은 새 주화를 발행해야 했다. 옛 주화를 깎아내어 재유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질적저하debasement 수법은 도쿄, 예루살렘, 드레스덴의 화폐 박물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한 나라에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발행된 주화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크기가 점차 작아졌음이 한눈에 보인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아내 여섯 명 중 두 명을 참수한 일로 유명하다. “이혼, 참수, 사망, 이혼, 참수, 생존”이라는 구절은 영국 학생들이 배우는 옛 민요 노랫말로, 최근 재치 있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식스〉에도 등장했다. 하지만 화폐경제학 분야에서 헨리 8세는 영국 주화를 참수한 일로 그에 못지않게 유명하다. 1551년 스털링의 은 함량을 50퍼센트 낮춰버린 것이다. 물론 헨리 8세는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뒤에서 보겠지만 두 사람은 21세기에 현대 인쇄기의 도움을 받아 초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스페인이 1500년대에 지배적 세계통화를 보유하게 된 데는 감모減耗, 줄어들거나 닳아, 수량에 부족함이 생기는 것―옮긴이를 남발하지 않은 덕도 있다. 신대륙 광산에서 쏟아져 들어온 귀금속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귀금속을 가공한 인력은 고된 여건에서 일하는 토착민들이었다. 안데스산맥 동부 포토시 광산과 멕시코 사카테카스 광산에서 수탈한 산더미 같은 은을 이용하여 스페인은 가난한 유럽 경쟁국들을 훌쩍 뛰어넘는 규모로 병력을 충원하고 선박을 건조하고 무기를 조달했다. 그리하여 16세기의 으뜸가는 경제·군사 강국이 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노획물만으로 왕실의 야심을 충족할 수 없게 되자 마구잡이로 돈을 빌렸으며 급기야 1557년부터 1647년 사이에 여섯 차례나 외국 채권자들에게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특히 1557년 ‘삼국 채무불이행Trinity Default’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세계 금융위기 중 하나로, 스페인·프랑스·네덜란드가 거의 동시에 채무불이행을 선언했다.
〈시 호크The Sea Hawk〉는 노골적으로 편향된 영국계 미국인의 시각에서 시대상을 포착한 고전 영화다. 시대 배경은 1580년대이며 배우 에럴 플린은 호전적인 영국인이자 사략선승무원은 민간인이지만 교전국의 정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무장 선박―옮긴이 선장으로, 무수한 난관을 이겨내고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을 찾아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를 급습하려고 대함대를 꾸리고 있다고 경고한다. 영화는 영국인 포로들이 스페인 선박의 노잡이 노예 신세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삼지만 플린이 연기한 등장인물은 스페인 선박을 나포한 뒤 생존 선원들에게 자신의 사선私船을 자유롭게무기고만 빼고 이용하도록 해준다. 스페인의 아르마다 무적함대가 가라앉은 사건은 악천후 탓도 있었지만 지배적 통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19세기가 되자 파운드화와 영국 은행 시스템은 펠리페 2세가 꿈도 꾸지 못했을 국제적 영향력을 확립했다.
20세기에 파운드에서 달러로 패권이 넘어간 사건도 분쟁에서 비롯했다. 다만 이번 싸움에서는 미국과 영국이 동맹국이었다. 치열한 양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많은 부를 소진했으며 산업 기반을 상실했다. 더는 식민지들을 건사할 수도 없었다. 반면에 미국은 큰 고통을 겪긴 했지만 매번 훨씬 적게 잃었다. 파운드와 달러가 공동으로 지배하던 전간기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가 지나자 패권은 확실히 미국으로 넘어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세계 경제 패권은 압도적이었다. 1950년 미국 경제는 세계 GDP의 무려 36퍼센트를 차지했다. 1944년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전후戰後 고정환율제가 체결되면서 미국 달러는 전 세계 통화의 중심에 놓였을 뿐 아니라 남다른 특권을 의도적으로 부여받았다. 나머지 모든 참여국은 자국의 환율을 달러에 대해 고정해야 했으며 이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필요한 달러소소한 변동에 대비한 충당금를 보유하는 것은 각국의 책임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금리와 물가 상승률 정책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단 어느 나라 정부가 요구하든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있어야 했다.
국제적 통화 유통에서는 네트워크 효과한 상품의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가치가 커지는 효과―옮긴이로 인한 자연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그렇기에 어떤 통화가 국제 교역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면 나머지 대부분의 통화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150개 이상의 통화가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쓰이면 국제 교역과 금융은 바벨탑 같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외환 거래의 무려 90퍼센트에서 한쪽 통화는 달러다. 대부분의 통화는 거래 시장이 너무 작기 때문에 달러를 ‘매개통화vehicle currency’로 써서 (이를테면) 캐나다 달러를 미국 달러를 거쳐 호주 달러로 환전하는 것이 캐나다 달러와 호주 달러를 맞교환하는 것보다 싸게 먹힌다. 두 번의 교환캐나다 달러에서 미국 달러로, 미국 달러에서 호주 달러로에 드는 거래 비용이 맞교환보다 저렴하다. 놀라운 사실은 유로존에 인접한 나라들 사이의 교환이를테면 튀르키예 리라와 불가리아 레프에서도 유로가 아니라 달러가 주된 매개통화라는 것이다.
달러가 통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음은 여러 정량적 지표로도 확인된다. 이를테면 미국은 세계 총 산출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지만2024년 시장환율 기준 외환 보유고에서는 60퍼센트 가까이를 차지한다.
달러는 국제 상품·금융 자산의 가격을 결정하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전 세계 석유 거래에서 달러로 가격이 표시되는 비중은 여전히 80퍼센트가량이다최근 중국이 위안화의 비중을 늘리려 애쓰고 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상품도 비슷한 규모로 달러로 거래된다. 전 세계 상품 교역의 40퍼센트 이상이 달러로 이루어지는데, 실제 수치는 더 크다. 유로존 회원국 간의 거래도 국제 교역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유로로 체결되는) 유로존 내 거래를 제외하면 달러의 비중은 훨씬 커진다. 이를테면 인도는 교역의 85퍼센트 이상을 달러로 체결한다. 세계 채권 시장은 더더욱 달러 위주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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