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이디푸스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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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침에 듣는 라디오 음악방송에서는 주중에 매일 클래식 음악에 관한 퀴즈를 진행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 청취자가 무슨 퀴즈가 이러냐며 불만을 제기하더군요. 힌트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난이도가 제로거든요. 진행자는 더 많은 청취자가 퀴즈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문제를 쉽게 내는 것이겠지만, 그게 못마땅한 청취자도 있는 거죠. 매일 이 방송을 듣다 보니 저도 답이 뻔한 객관식 퀴즈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앞글들에서 객관식 문제를 몇 번 냈더니 선배가 너무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객관식 문제 내는 걸 자제했는데 다시 퀴즈 병이 도졌습니다. 오늘은 간만에 질문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다룬 작품으로는 핀다로스Pindar, 기원전 518년~기원전 438년의 『승리의 송가Olympian Ode와 아이스킬로스Aeschylus, 기원전 525/524년~기원전 456/455년의 『테베를 공격한 일곱 장수Seven Against Thebes』 3부작기원전 467년,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480년~기원전 406년의 『포이니케 여인들Phoenissae』과 『크리시푸스Chrysippus』, 『오이디푸스Oedipus』 등이 있습니다. 물론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서기 17/18년의 『변신 이야기』8년에도 오이디푸스 신화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변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를 물리친 일에 대해 언급할 뿐 오이디푸스와 그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룬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단연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96년~기원전 406/405년의 『오이디푸스 왕』기원전 429년이라 할 수 있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가 시라는 것은 다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어떤 장르에 속할까요?
1. 희곡
2. 소설
3. 수필
4. 시
힌트를 드리지 않아도 정답이 희곡이라는 걸 다 아실 겁니다. 앞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오이디푸스 왕』은 희곡 작품이지만 대사가 운문verse이라서 희곡이면서 동시에 시인 극시dramatic verse입니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비극에는 이후의 희곡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코러스chorus입니다. 이 코러스는 무대에서 보여줄 수 없는 배경 이야기를 요약해서 관객에게 들려주기도 하고 자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에 대해 논평을 가하기도 합니다. 연극 전반에 관해 설명을 제공해 주는 일종의 해설자라 할 수 있죠. 12~50명 정도로 이루어진 코러스는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때로는 가면도 썼습니다. 우디 앨런Woody Allen, 1935~ 이 『마이티 아프로디테Mighty Aphrodite』1995에서 이 코러스를 코믹하게 동원했더군요. 코러스가 궁금하신 분은 이 영화를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문제를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는 흔히 3부작trilogy으로 일컬어집니다. 1부에 해당하는 『오이디푸스 왕』기원전 429년은 오이디푸스가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해서 자기 존재의 비밀이 드러나자 스스로 눈을 찌르는 결말을 보여줍니다. 2부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41년경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삶의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고요. 그렇다면 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무엇일까요? 사실, 이 마지막 작품이 두 번째 작품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보다 먼저 쓰였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오이디푸스의 두 딸 중 한 딸의 이름과 같습니다.
1. 이스메네
2. 이피게네이아
3. 안티고네
4. 엘렉트라
정답은 3번 안티고네입니다. 이스메네 역시 오이디푸스의 딸이지만 언니에게 제목을 뺏겼습니다. 이피게네이아와 엘렉트라는 아가멤논의 딸이고요. 이피게네이아와 아가멤논의 신화는 딜레마의 두 번째 범주인 사적 이익 대 공적 의무의 범주에서 다룰 예정이니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마지막 작품인 『안티고네』기원전 441년에서는 오이디푸스 사후 왕권 다툼을 벌이다 죽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두고 크레온 왕과 안티고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보여줍니다. 안티고네의 신화 역시 사적 이익 대 공적 의무의 범주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삼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가족사家族史입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3부작을 토대로 이 가족사를 간략하게, 아니 조금 길게, 요약해 보도록 하죠.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인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라이오스는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자신이 아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예언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아들을 죽이는 쪽을 선택합니다. 라이오스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예언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아들의 발목을 뚫어서 묶어 놓았고, 이오카스테는 양치기 하인에게 아기를 근처 산에 버리라고 하죠. 그런데 아기를 불쌍하게 여긴 하인은 오이디푸스를 다른 양치기에게 넘겨줬고, 이 양치기는 오이디푸스를 코린토스의 폴리버스 왕과 메로페 왕비에게 데려다줍니다. 자식이 없던 이들은 오이디푸스를 자식으로 키웠고요. 오이디푸스는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예언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오이디푸스는 이런 운명을 피하려고 부모를 떠나 테베로 가기로 합니다. 테베로 가던 도중 그는 교차로에서 마차를 몰던 라이오스 왕과 부딪히게 되고, 누가 먼저 지나갈 것인지에 대해 다투다가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말죠. 물론 오이디푸스는 이 남자가 자기 생부라는 걸 까맣게 몰랐고요. 테베로 여행을 계속하던 오이디푸스는 테베 입구를 막고 행인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답을 맞히지 못하면 죽여버리는 스핑크스를 만나게 됩니다. 스핑크스는 흔히 얼굴은 여자인데 사자의 몸에 독수리 날개가 달린 괴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스핑크스의 얼굴을 남자로 그려놓은 작품도 있더군요.
|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오이디푸스, 기원전 470년. 적화 도기, 바티칸 박물관, 로마. 위키미디어 제공. |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그림들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배경이 붉은색이고 형상이 검은색이면 흑화 도기黑畫陶器; black-figure pottery, 배경이 검은색이고 형상이 붉은색이면 적화 도기赤畫陶器; red-figure pottery라고 불립니다. 이 적화 도기 속 스핑크스처럼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얼굴은 남자인데 몸은 사자입니다. 한 가지 큰 차이점은 이집트의 스핑크스에게는 날개가 없습니다.
| 기자의 대 스핑크스, 기원전 2500년경. 석회암. 기자, 이집트.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Great_Sphinx_of_Giza_-_20080716a.jpg#/media/File:Great_Sphinx_of_Giza_-_20080716a.jpg 제공. |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의 만남을 그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Oedipus and the Sphinx』1864입니다.
| 귀스타프 모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년. 캔버스에 유화, 206 × 105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
적화 도기 속 스핑크스도, 모로의 그림 속 스핑크스도 오이디푸스에 비해 몸집이 살짝 작은 감이 있죠? 저렇게 작은 몸집으로 어떻게 (몇몇 신화 텍스트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그래도 날개를 고려하면 스핑크스의 몸집이 작은 게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 같기도 합니다. 몸이 너무 크면 무거워서 날기 힘들 테니까요.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목소리는 변치 않은 채, 네 발이 됐다가, 두 발이 됐다가, 세 발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내고, 오이디푸스는 “아기 때는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어른이 되면 두 발로 걸어 다니고, 노년에는 지팡이를 사용하는 인간”이라고 답하죠. 그런데 사실 『변신 이야기』에도, 『오이디푸스 왕』에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오이디푸스의 답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와 있진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와 답은 후대에 덧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를 구한 공로로 죽은 왕의 왕좌를 차지하고 선왕의 왕비인 이오카스테와 결혼도 하죠. 물론 이오카스테가 생모인 줄은 까맣게 몰랐고요.
몇 년 후 테베에 역병이 돌자, 오이디푸스는 아폴로의 신탁에 따라 선왕을 죽인 범인을 추적합니다. 오이디푸스는 눈이 안 보이는 예언자 티레시아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티레시아스는 “나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오. 그대는 그대의 운명을 짊어지시오. 나는 내 운명을 짊어질 테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소. 내 말을 믿으시오.”라고 말하며 오이디푸스에게 범인 찾기를 중단하라고 조언합니다. 격분한 오이디푸스가 티레시아스를 라이오스의 살인 공모 혐의로 고발하자 티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에게 진실을 폭로합니다.
티레시아스: 하! 그렇다면 그대는 이제 그대가 내린 명령에 따라 나나 이들 중 누구에게도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마시오. 그대가 살인자요. 그대가 이 나라를 부정하게 더럽힌 사람이오… 그대는 자신과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과 수치스러운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데도 사악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소.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는 티레시아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혹시 자신이 범인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이미 진실을 알게 된 이오카스테는 범인 추적을 중단하라고 간청합니다.
오이디푸스: 이만큼 실마리를 잡았는데도 내 출생을 밝히지 않고 그대로 둘 수는 없소.
이오카스테: 제발 부탁이니 그대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범인 수색을 멈춰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오이디푸스: 걱정할 게 전혀 없소. 설사 내 어머니가 노예고, 설사 내가 삼대째 내려오는 노예라는 게 밝혀지더라도 그대의 고귀한 출생이 의심받게 되지는 않을 테니까.
이오카스테: 내 말을 들으세요. 간청합니다. 제발 그 일을 계속하지 말아요.
오이디푸스: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소. 나는 완전한 진실whole truth을 알아내겠소.
이오카스테: 그대에게 좋은 제안을 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대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예요.
오이디푸스: 당신의 그 “좋은 제안”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소.
이오카스테: 불행한 분. 그대가 누구인지 결코 알게 되지 않기를!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이미선의 강조.
오이디푸스가 어디 말을 듣나요. 티레시아스의 말대로 “일어날 일은 일어나는 법”이라서 오이디푸스는 선왕 라이오스의 죽음과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의 조각을 하나씩 모아서 전모를 알게 됩니다.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 바로 자신이었던 거죠. 마치 사낭꾼인 악타이온이 사냥감이 되는 것처럼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도 탐정인 오이디푸스가 범인으로 밝혀지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것 역시 아이러니입니다. 오이디푸스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타났으니까요. 이런 반전反轉; reversal의 효과가 아이러니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사실도 알게 되죠. 진실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시력을 잃고, 이오카스테는 자살합니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이곳저곳을 방랑하다 콜로노스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 쟁탈전을 벌이다 둘 다 죽고 이들의 외삼촌인 크레온이 왕위에 오르죠. 크레온은 적국의 군대를 끌어들인 폴리네이케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장례 의식을 치르지 못하게 합니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칙령을 무시하고 오빠를 묻어주고요. 크레온의 명령을 어긴 벌로 바위 동굴에 갇혀 있던 안티고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 중 하나는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인간의 오만함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맞서 싸우다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는 주인공이 되죠. 신이 정한 운명에 맞서는 것은 신에게 오만húbris의 죄를 범하는 것이니까요. 오이디푸스의 오만함은 자신의 지성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아폴로의 신탁을 받았을 때는 코린토스를 떠나는 것으로 이를 피하려 했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자기 능력을 믿고 범인 추적을 중단하라는 티레시아스의 경고를 무시하죠. 티레시아스가 사실을 폭로해도 오이디푸스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출생의 비밀을 찾아내려 합니다. 자기 능력에 대한 이런 과신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cs』기원전 335년에서 “비극적 결함”이라 부른 ‘하마르티아hamartia’에 해당합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코러스는 “폭군은 지독한 오만의 자식이다. 어울리지 않는, 부적당한 음식으로 헛되이 채운 오만은 가장 높은 곳까지 기어올랐다가 발을 디디려 해봐야 소용없는 파멸 속으로 곧장 추락한다”라고 신들이 확립해 놓은 법을 따르지 않는 오만이 파멸의 원인임을 지적합니다.
이 오만 때문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결점을 보지 못했고, 자신이 어떤 일을 했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겠다는 예언을 무의식적으로 이행하게 됐죠. 예언자 티레시아스는 신체적으로는 눈이 먼 상태지만blindness 지적, 도덕적으로는 뛰어난 통찰력insight을 지닌 반면, 오이디푸스는 신체적으로는 시각sight을 지녔지만 지적,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blindness였습니다. 오이디푸스 자신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상태였던 거죠. 티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정신적 맹목 상태를 “그대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소.”라고 지적합니다. 이것 역시 『오이디푸스 왕』에서 찾을 수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티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가 외관appearance과 실체reality의 불일치에서 나타나는 반전을 보여주니까요. “완전한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찔러 앞이 안 보이는 상태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징벌이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실을 깨달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앞이 보였을 때는 못 봤던 것을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볼 수 있게 된 거죠. 이것 역시 반전인 아이러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진실의 발견, 즉 인식이 수반되는 반전이 가장 좋은 반전이라고 말하면서 최고의 예로 『오이디푸스 왕』을 꼽습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만이 초래한 비극으로 보는 해석과 더불어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을 하나 더 꼽는다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근친상간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로 보는 견해일 겁니다. 오이디푸스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대한 과신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의 죄를 저질렀고, 또 한편으로는 근친상간을 통해 짐승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사회가 확립하려 한 신-인간-짐승의 위계질서를 혼란스럽게 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중의 죄를 저지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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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동물 사이에 위치한 인간이 지켜야 할 것은 신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짐승과 같은 상태로 타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도정일의 신화 읽기: 근친상간, 양성兩性 존재, 그리고 괴물」1997에서 그리스 신화 체계에서는 “이것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한계limit’이며 이 한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고 ‘지혜’”라고 지적합니다. 신과 인간 사이의 “한계”를 깨뜨리는 것이 오만이라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려서 그리스 신화 체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도정일은 근친상간과 양성兩性 존재, 그리고 괴물을 꼽습니다. 괴물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동시에 이것이면서 저것인” 존재로 동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며, 동시에 동물이면서 인간이죠. 예를 들어, 몸의 반은 사람이고 반은 동물인 미노타우로스는 인간과 동물 중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질서 체계를 교란하는 괴물이 되는 겁니다. 양성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죠.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동시에 남자면서 여자이기 때문에 양성 존재 역시 질서를 교란하는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근친상간 역시 가족구조 내에서의 역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질서 훼손의 주범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딸이 결합하게 되면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남편이 되고, 딸은 딸이면서 동시에 아내가 되죠. 어머니와 아들이 결합하게 되면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아내이며, 아들은 아들이면서 동시에 남편이 되고요. 오누이가 결합하게 되면 오빠나 남동생은 형제이면서 동시에 남편이며, 누이는 누이이면서 동시에 아내가 되죠. 근친상간은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형제자매의 역할 구분을 완전히 망쳐 버립니다. 신들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에서는 근친상간이 규제되지 않지만, 인간에게도 근친상간이 허용된다면 인간세계는 신이나 동물의 세계와 하등 다를 게 없어지겠죠. 신, 인간, 짐승의 세계가 모두 같아지면 경계와 구분이 사라져서 질서가 무너지고 말 겁니다. 인간에게 근친상간을 금할 때 신과 인간,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생겨나는 겁니다. 즉, 근친상간을 금할 때만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명사회에서 근친상간의 금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질서 체계를 무너뜨리는 인간의 행동은 항상 예외 없이, 가차 없이 처벌당합니다. 신에 대한 오만의 죄를 범한 인간과 근친상간을 저지른 인간들은 반드시 처벌당하고, 괴물들과 양성 존재들은 가차 없이 제거당하죠. 특히, 근친상간의 경우에는 죄를 범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자손에게도 처벌이 가해집니다. 아버지 키니라스를 사랑해서 어둠을 이용해 아버지와 결합한 미라는 몰약 나무로 변했고, 미라와 키니라스의 결합으로 잉태되어 몰약 나무껍질을 뚫고 태어난 아들 아도니스 역시 멧돼지에게 치명상을 입고 죽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하고, 이오카스테는 목을 매 자살합니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딸 안티고네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요. 현대판 오이디푸스 이야기라 할 수 있는 영화, 『사랑과 슬픔의 여로The Voyager』1991에서는 파버Walter Faber와 사베스Sabeth가 실제 부녀지간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여행 중 사랑에 빠져 근친상간을 범하게 되죠. 아버지를 사랑한 딸은 뱀에 물려서 죽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근친상간을 범한 아버지들은 무사하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오이디푸스, 아들과 결혼한 어머니 이오카스테,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딸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내려지는 것과는 대조적이죠. 그런데 딸과 결합한 아버지 키니라스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딸에게 처벌을 내리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칼을 뽑아 들고” 딸을 죽이려 합니다. 『사랑과 슬픔의 여로』에서도 파버는 아무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다음 문단에서 이야기하겠지만, 키니라스와 파버의 입장이 오이디푸스와 다른 것은 이들이 법을 집행하는 아버지기 때문이죠.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법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처벌하기는 불가능하니까요. 여기에서 근친상간의 금지가 지극히 가부장 중심의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근친상간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로 간주하는 해석의 연장선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빌려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반적인 개념을 『꿈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Dreams』1899에 처음 소개했고, 「남성에 의한 대상 선택의 특별한 형태A Special Type of Choice of Object Made by Men」1910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이 개념에 의하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은 특별히 오이디푸스만 갖고 있는 욕망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닌 원초적 욕망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이 욕망을 추구하게 되면 사회 자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되겠죠? 아버지의 위치가 심각하게 위험해질 겁니다. 마치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7세기경의 『신통기神統記』기원전 8세기에서 우라노스가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한 후 쫓겨나고, 크로노스가 다시 아들 제우스에게 쫓겨나는 것처럼, 아버지들은 계속 아들들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겁니다.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1913에 의하면, 최초의 부친 살해 후 아들들은 불안과 죄의식에 시달리며 이후에 또 일어날 부친 살해를 방지할 방안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부친 살해의 금지와 근친상간의 금지를 모든 사회구성원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내면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금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간단하게 표현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아이가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금지를 내재화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성장의 한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조금 길게 풀어 볼까요? 오이디푸스처럼 아이에게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합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실현하려 하면 아버지가 개입해서 거세 위협으로 이런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네 자식의 자식을 낳지 마라,” 자식에게는 “네 어머니와 자지 마라. 그러면 널 거세해 버리겠다”라고 명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은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계율이자 법으로 작용하고, 아버지가 법의 집행자가 되는 겁니다. 아이가 아버지의 법을 인정하고 자신은 어머니와 결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즉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2식으로 표현해서 “상징적 거세”를 당하면, 아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하게 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한 아이는 가족구조 내에서 (자식으로서의) 한 위치를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 개별적인 주체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고요. 어머니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 생물학적인 탄생이라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단계를 통해 가족과 사회 속에서 이름과 역할을 갖게 되는 것은 사회 내의 제2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의 금지를 내재화하는 것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는 거죠.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과하면서 주체가 되듯이 사회는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을 금지함으로써 무의식적 욕망을 억압한 토대 위에서 형성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원시사회에서 문명으로 넘어가는 문지방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는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을 범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사회구성원들에게 근친상간을 범하지 못하게 막는 강력한 경고음 역할을 하고요.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이런 여러 해석을 토대로 이제는 이 신화에 들어 있는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죠. 오이디푸스에게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여럿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델포이의 신탁을 받았을 때, 교차로에서 라이오스 왕과 시비가 생겼을 때, 테베로 가는 길목을 스핑크스가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살인과 출생에 대한 진실이 모두 드러났을 때, 오이디푸스는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만 했죠. 그런데 이런 선택 상황은 딜레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양자택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서 테베를 구했던 것처럼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서 테베를 다시 구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던 오이디푸스에게 티레시아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지 않겠다며 범인 추적을 중단하라고 조언합니다. 티레시아스는 테베인들에게 “신들의 성스러운 예언자”이자 “진실을 타고난 유일한 인간”이며 “말할 수 있는 것이건 말할 수 없는 것이건, 하늘의 일이건 땅의 일이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존경받는 존재입니다. 티레시아스 같은 권위자가 범인 추적을 중단하라고 한다면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오이디푸스도 고민이 됐을 겁니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 추적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계속할 것인가? 이 선택은 선택지가 둘밖에 없는 딜레마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죠. 범인 추적을 중단하면 역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어서 테베를 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죠. 반면에 범인 추적을 계속하면 티레시아스로 대변되는 신의 뜻을 거스르게 되고 끔찍한 진실을 알게 될 것 같아 불안합니다. 범인 추적을 중단할 수도, 계속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인 거죠.
먼저, 오이디푸스의 딜레마는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은 티레시아스입니다. 그는 “아폴로의 하인Apollo’s servant”으로서, 아폴로 신을 대신해서 신의 뜻을 전합니다. 신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거죠. 범인 추적을 포기하라는 티레시아스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신의 권위에 대한 순응이고, 그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은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대결 구도에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다 비극을 맞이한 비극이 됩니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오만함에 대한 경고로 보는 해석과 비슷합니다.
오만함의 죄를 저지를 이 대결 구도의 범위를 조금 좁히면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알고 싶은 욕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티레시아스의 말에 순응함으로써 호기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됩니다. 오이디푸스의 딜레마도 결국에는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이어집니다. 범인 추적을 중단하라는 티레시아스의 조언은 오이디푸스의 호기심을 가로막는 규제로 작용합니다. ‘진실을 알면 오히려 더 불행해질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언젠가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굳이 나서서 찾을 필요는 없다. 지금은 그냥 덮어두고 현재 상태를 유지하라.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말이죠.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티레시아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스스로 진실을 찾아 나섭니다. 티레시아스가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오이디푸스고, 그가 어머니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폭로했을 때도 오이디푸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진실의 조각을 하나씩 맞춰 가며 자신의 기원을 찾아갑니다. 범인 추적 과정이 자신의 기원에 대한 진실을 찾는 과정인 거죠. 설사 그 진실이 자신을 불행으로 이끌 수 있다 해도 말입니다.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 신화는 진실을 알고 싶은 욕구를 추구하다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는 이야기가 됩니다.
지적 호기심 대 규제라는 대립 구도의 관점에서 오이디푸스의 신화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는 이 신화가 완전한 진실을 인식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티레시아스가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이 오이디푸스고,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해도 오이디푸스는 이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오이디푸스는 교차로에서 혼자 사람을 죽였는데, 이오카스테는 라이오스 왕이 여러 명의 도적에게 살해됐다고 알려 줬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 오이디푸스는 폴리버스와 메로페를 자신의 진짜 부모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티레시아스의 말도 믿지 않습니다. 폴리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온 코린토스의 사자로부터 자신이 폴리버스와 메로페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오이디푸스는 이미 상황을 눈치챈 이오카스테에게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소. 나는 완전한 진실whole truth을 알아내겠소”라고 단호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결국에는 오이디푸스의 출생에 대한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고 말죠. 이오카스테로부터 아기를 산에 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코린토스의 양치기에게 오이디푸스를 맡겼던 양치기 하인이 등장해서 티레시아스의 말이 모두 사실임을 확인해 주니까요. 완전한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하고요.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세멜레가 제우스의 본래 모습을 봤을 때 광휘를 견디지 못하고 번갯불에 타죽는 것이나,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벌거벗은 몸을 본 후 사슴으로 변신한 것, 혹은 메두사를 본 사람들이 돌로 변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상징적 죽음이라 할 수 있죠. 오이디푸스의 신화를 오만에 대한 경고로 보는 해석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실명이 자신의 무지에 대해 스스로 내리는 일종의 징벌이라면, 오이디푸스 신화를 근친상간에 대한 경고로 보는 해석에서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근친상간의 죄에 대한 처벌의 형식인 상징적 거세입니다. 오이디푸스의 실명이 해석의 관점에 따라 이렇게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게 흥미롭죠?
실명이나 변신 모두 죽음의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진실을 조우하는 순간이 죽음의 시간이라면, 그것은 진실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겠죠? 오이디푸스의 신화는 세멜레나 악타이온의 신화, 메두사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지식의 인식 불가능성, 혹은 도달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진실이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터 브룩스Peter Brooks, 1938~ 는 『육체와 예술Body Work: Objects of Desire in Modern Narrative』1993에서 오이디푸스처럼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려는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지 말고 부분적인 지식에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알고자 하는 충동, 그리고 보고자 하는 충동에서 태어난 욕망은이것은 본질적으로 충족이 불가능하다 지식의 대상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부분적으로만 눈에 보이게 할 뿐, 관찰자-탐구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전체에 대한 조망과 이해에 도달시키지는 못한다...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이 욕망을 극도로 추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완전한 지식은 탐구자를 눈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화 속의 극단적인 보기일 뿐이다. 실제 현실에 있어 우리는 결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가 아닌 부분만으로, 또한 몇몇 계시적 순간들과 옷을 벗는 순간들, 그리고 베일 사이로 보이는 틈새만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물론 실제에 있어 우리는 결코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명하게도 완전한 진실에 도달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분적인 진실에 만족함으로써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은 신화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한번 추측해 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두 글에서는 지식/진리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면서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은 두 신화의 주인공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오이디푸스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는 한이 있더라도 알고 싶은 욕구를 따라가시겠어요? 아니면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진실을 덮어둔 채 모른 척 살아가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