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4

『토지』, 지리산 평사리 마을을 다녀오다

저자소개

김영숙
독서 동아리 ‘파란 지붕 아래 독서회’ 회원



글  김영숙

소속 동아리  파란 지붕 아래 독서회

여행 지역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여행지 한 줄 추천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이 맞닿은 평야에 자리한 마을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일본까지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는 토지 탐방


딸에게


2018년 12월, 『토지』 전집을 구입했단다.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어. 생일 며칠 전 주문해서 생일에 책을 받아볼 수 있었어.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고, 저녁이 되어서 문자가 왔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으니 경비실에 책을 놓고 간다는 거야. 26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내려갔지. 한참을 밖에서 책을 받아 들고 서성거렸어. 꼭 하늘이 내게 준 선물 같았거든. 책장 맨 위 칸에 20권을 꽂았어. 나를 지켜 줄 신주처럼. ‘안 읽어도 좋다. 이렇게 모셔두기만 해도 이미 책은 읽은 거다.’라는, 사실 혼자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해 변명하듯 진열된 책만 보아도 마냥 좋았거든.


2022년 11월, 그러니깐 4년이 지나서야 읽었어. 몇몇 사람들과 모임을 갖고 우리 함께, 책 읽을까요? 혼자는 읽기 힘든 장편을 읽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 모두 좋아했어. 모임 중에 가장 나이 많은 선생님이 “대하소설 『토지』부터 읽읍시다.”라고 하시는 거야. 우연일까? 이런 것을 두고 필연, 아니면 인연이라 하는 거겠지? 장편을 다 읽고 문학관과 배경이 된 지방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어. 그날 이후, 우리 집에 신주처럼 모셔진 『토지』를 한 권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단다.


매달 격주 수요일 오후 2시에 모였어. 연령은 70대 60대 50대 40대 30대, 정말 다양하지? 각 세대 다섯 명이 모였으니 책을 읽은 생각과 감정이 많이 달랐어. 30대는 신분 계급에 따라 인간 존엄이 무시되었던 시대 민초들의 삶과 운명을 볼 수 있어서 역사를 재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고, 40대는 소설 속 인물들이 하나 같이 어긋나는 사랑을 하는 것에 안타까웠다 하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897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전통사회의 세습화된 사상이 근현대로 넘어서는 접점, 농민들이 봉기를 들고 혁명을 일으켰고 일본이 침입하여 나라를 빼앗는 조약을 맺었고, 공간적 배경은 지리산 섬진강이 흐르는 하동 악양 평사리 마을에서 시작해 중국 간도, 북경 용정, 그리고 일본까지 이어져. 평사리 마을 중심에 섰던 양반 최참판 최치수의 어머니 윤씨 부인에서 손녀 최서희,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까지 4대에 걸쳐 급변했던 시대의 삶과 사랑, 죽음의 역사를 소설은 실제보다 더 실감 나게 이야기하고 있어.



사랑. 50대인 나는, 인밀 이인실에게 관심이 많았어. 여성도 학문의 기회가 자유롭게 주어지기 시작한 시기. 신여성 인실은 일본 동경까지 유학을 갔지. 학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어. 그건 나라의 독립과 민족 주체성을 갖게 하는 것이었어. 뜻을 함께 한 이들 중에는 일본인도 있었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자국의 만행을 탄압하려 들었던 일본인도 있었지. 그의 이름은 오가타 지로. 그는 인실과 사랑을 하게 되었어. 오가타는 그 사랑을 순수히 받아들이지만 인실은 그러지 못했어. 인실에게 그 사랑은 이뤄져서는 안 되는 거였어. 조국을 앗아간 일본인과의 사랑을 용서할 수 없었어. 끝내 인실은 오가타와의 사이에서 아이 하나를 낳고 아무도 모르게 떠나. 나라의 독립 이념과 사상이 인간의 근원적 사랑을 뛰어넘은 것일까? 글쎄, 만약 나라면 어떠했을까? 의문과 질문을 갖게 된 지점이기도 해.


60대는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죽음에 관심을 가졌어. 1907년 콜레라가 마을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 윤씨 부인 역시 전염병을 피해갈 수 없었어. 최참판댁에 종사하던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 어린 최서희만이 남겨졌어.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중심 인물 윤씨 부인이 속수무책으로 죽을 줄은 몰랐다는 거야. 읽는 독자 역시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고. 그런가 하면 70대는 소생에 더 관심을 가졌어. 열 살 최서희는 모든 것을 잃고 만주 간도까지 올라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빼앗기고 잃었던 것을 되찾기 위한 강인한 정신과 생명력을 보여주지. 일제의 지배와 통치 핍박과 억압으로 겪어내야만 했을 역경. 생명이 있는 한, 생존 본능의 지속성은 대를 잇고 다음 세대를 이으며 생과 사, 사랑, 지금껏 이어온 토지를 밟고 선 우리의 역사를 읽는 내내 함께 할 수 있었지.



2023년 6월 『토지』 20권을 다 읽고 지리산 하동 악양의 평사리 마을로 향했어. 지리산 자락이 펼쳐진 평사리 마을의 평야는 광활한 대지처럼 보였어.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지어진 고택, 주인공 최서희 4대가 살았던 최참판댁에도 가보았어. 고택은 실제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소설에 나오는 배경을 중심으로 마을과 고택을 하동에서 만든 세트장이야. 고택의 누각에 앉아보니 섬진강 큰 물줄기가 평사리 마을을 키우는 어머니 젖줄처럼 보이더라. 민초들이 살았던 마을 농가 벽에는 농기구들이 걸려 있고, 외양간에는 소가, 닭장에는 닭들이, 초가에는 지금이라도 밥을 짓고 식구들이 둘러앉아 먹을 것만 같더라. 마당에선 곡식을 펼쳐 말리고, 낫이며 곡괭이를 손질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 마을 주막에선 장국이 끓고 사람들이 오가고 국밥과 막걸리를 놓고 노동의 시름을 내려놓으며 술에 취해 얘기할 것만 같은, 어린 서희와 함께 자란 봉순이와 길상이도 꽃밭에서 나비를 쫓으며 놀 것만 같았지.


혼자서는 읽지 못했을 거야. 함께 읽었기에 가능했어.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독서회가 얼마나 소중한가. 함께 소설 인물들과 울고 웃고 분노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1년을 『토지』와 함께 보냈어. 26년간 집필한 작가 박경리 선생님의 큰 물줄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여행지에서 맞닥뜨린 『토지』, 그 뿌리의 역사에 분명 내가, 우리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았어.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