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이들을 느끼러 떠난 새로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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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수미
소속 동아리 꿈페니
여행 지역 일본 니가타현 에치고유자와, 교토현 교토시, 교토현 우지시
여행지 한 줄 추천 당시의 작가가 되어 작가의 마음을 직접 느껴보고 작품을 더욱 이해하게 되며 동아리원들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음
단순한 이유였다.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떠나자는.
어느 장소를 택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의 끝에 우리는 독서동아리이니 문학 기행을 가 보자는 중지를 모았다. 동아리 회원들은 코로나19도 종식됐으니 해외를 가고 싶어 했는데, 직장인도 있어 시간이 허락하는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우리의 선택지는 일본, 그중에서도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윤동주 시인을 느낄 수 있는 곳인 교토가 낙찰되었다. 거기에 살짝 곁다리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배경이 된 다카한 료칸을 들러보면 어떻겠냐는 나의 의견에 모두 반색하며 환영했다. 문학 기행이 아니면 결코 가보지 않을 곳이기에 일본에 가는 김에 들러보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 경로를 들은 다수의 사람들은 꼭 이렇게 여정을 짜야 했냐, 길에다 돈을 내다 버릴 작정이냐 등 우려 섞인 의견을 표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카한 료칸은 도쿄 근교이고, 교토는 오사카 근교이기에 이 둘 사이를 이동하는 신칸센 비용은 웬만한 비행기 가격과 같았다. 하지만 우리에겐 매우 납득되고 가치 있는 비용이었다. 설국이 아닌 계절에 방문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료칸에서 틀어준다는 설국 영화가 우리들이 책을 읽으며 상상한 장면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해 볼 수 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이 가득한 박물관을 둘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었다. 거기다 윤동주 시인이 거닐었을 강가, 공부했던 대학 등지에서 시인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다니... 이 벅찬 감정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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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첫날. 우리는 나리타행 비행기 안에서 구름 위를 나는 기분으로 정말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1시간 30여 분 후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나리타 에서 도쿄로 이동, 신칸센을 갈아타고 니가타현까지 가야 하는 여정이 아직 남아있었기에 지체 없이 이동하려고 했으나 일행 중 한 명이 공항에서 화장실을 다녀온 후 여권을 분실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타국에서 여권의 분실은 실로 대단한 사건이어서 우리는 서로 조력해 가며 빠르게 여권 찾기에 나섰고 다행히 다른 친절한 여행자 덕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여권, 휴대폰, 돈, 이 3인방이 잘 있는지 수시로 가방 속을 확인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도쿄 와이드패스를 구매하러 가는 길에 만난 스타벅스의 커피는 우리의 심신을 금세 안정시켜 주었다.
패스를 구매한 후 넥스 기차를 타고 도쿄역으로 이동하는 동안 내 마음은 벌써 낭만으로 가득했다. 차창 밖으로 비바람이 치는 플랫폼에 어느 여성분이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마저도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였으니 말 다한 것 아닐까. 도쿄역에 도착해 역사 내 샌드위치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사고 조에츠 신칸센으로 갈아타 에치고유자와역으로 향했다. 다소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풀어지면서 맛나게 샌드위치도 먹고 주변 경관도 구경하며 목적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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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하는 그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이 터널은 어디일까를 고심하며 꼭 내가 알아 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기대뿐이었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잠이 쏟아지던 내 몸은 도착 10분 전 단잠에 빠져든 것이다. 일행이 깨워 겨우 일어나서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헛웃음이 나왔다. 료칸으로 전화를 걸어 송영버스를 요청해 타고 다카한에 도착했다. 『설국』을 집필할 당시의 건물은 폐허로 남아있고 새로 건물을 지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오랜 세월이 묻어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꿉꿉한 카페트 냄새와 오래된 나무 향이 났다. 우리가 배정받은 방은 동관 404호실. 방에 들어서서 창문을 내다보니 우리가 달려온 신칸센 선로와 에치고유자와역, 갈라유자와역이 보였다. 또 멀지 않은 곳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들과 삼나무숲이 내다보였다. 작가가 묘사한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현실을 안고 미리 신청해 둔 가이세키를 체험한 뒤 「설국」 영화 상영 장소로 이동했다. 일본어로 상영되고 있었지만 미리 책을 읽어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2시간 남짓한 긴 시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고마코에 집중한 내용으로 각색되어 있어 주인공 시마무라의 심리 묘사가 자세히 표현되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과 달라 조금 아쉬웠다. 피곤했던 탓인지 온천욕 탓인지 모르지만 정말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와 달리 하늘이 맑게 개어 창밖으로 펼쳐진 에치고유자와의 모습은 청량함이라 칭할 수 있었다. 조식을 먹고 료칸 내에 있는 설국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나라의 번역본 책들과 「설국」 영화 촬영 당시의 생생한 모습들, 고마코의 실모델을 사진으 로 만나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아직까지도 『설국』은 기억되고 있었다.
다시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이동했다. 오후 늦게 도착한 우리는 저녁 먹기 전 숙소 근처 ‘마루젠 서점’을 둘러보았다. 교토의 교보문고 격인 대형 서점인데 한국과 달리 선정적인 주제의 만화책들이 아주 다양하게 전시되어 일본 문화를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셋째 날은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 전철을 타고 우지시로 향했다. 윤동주 시인이 체포되기 직전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소풍을 즐겼던 아마가세 구름다리가 있고, 일본인들이 직접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억과 화해의 시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름다리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었던 것 같다. 매우 무더운 날씨여서 땀이 옷을 적셨지만 걷는 동안 윤동주 시인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지 상상하며 그 마음을 느껴보느라 더운 줄도 몰랐다. 매우 센 물살을 자랑하며 흘러가는 우지 강가가 위험하지는 않았을지, 지금과 달리 시인은 저 흙길을 걸었을 테지, 친구들과 어떤 이야기를 하며 걸었을까, 우리나라를 통째로 삼켜버린 일본에서 바라봤을 자연은 시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등 많은 생각이 들었다. 구름다리에 도착해 시인이 마지막으로 찍었던 사진과 비교해 가며 구도를 잡아 인증샷을 남겼다. 구름다리가 사진 속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감탄했다. 잘 보존해 준 일본에 감사했다.
다리를 지나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한쪽 구석에 그렇게도 만나고 싶었던 ‘기억과 화해의 시비’가 보였다. 시비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났다. 그리웠고 보고 싶었고 가여웠고 내가 이 시대를 살게 해준 선생님의 희생에 감사한 마음이 교차했다. 시비에는 시인의 「새로운 길」이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마음껏 새로운 길을 걸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시인에게 꼭 알맞은 추모 시였다. 감정이 조금 정리되고 보니 꽃 한 송이 준비해오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쉬웠다. 시비에 기대어 선생님을 추억하고 느껴보고 사진도 찍으며 이 시비가 더 눈에 잘 띄는 위치로 옮겨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더위도 식힐 겸 우지의 특산물인 말차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넷째 날은 윤동주 시인이 재학했던 도시샤 대학으로 향했다. 교정의 한가운데 지킴이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참 포근한 캠퍼스였다. 아담한 교정의 중간쯤 정지용 시인 시비와 사이좋게 나란히 윤동주 시인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두 번째 마주했건만 여전히 울컥해 오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보다 먼저 시비를 방문한 부부 여행객도 묵념을 하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시비 앞에는 태극기, 꽃, 선물들이 놓여 있었고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나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보았다. 다녀간 사람들의 짧은 소감을 담은 방명록이 시비 앞에 젖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젖은 방명록을 양지바른 곳에 펼쳐두고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우리도 소감을 작성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학생이었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니 멋진 대학생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상만으로도 멋있었다.
도시샤 대학을 나와 세 번째 기념비를 만나기 위해 교토조형예술대학으로 이동했다. 예술대학의 본 건물에서 10여 분 떨어진 거리에 조형예술분과가 있는 건물이 윤동주 시인의 옛 하숙집 터라고 한다. 그곳 건물 앞 조그마한 화단에 시비가 수줍게 세워져 있어서 찾느라 조금 애를 먹었다. 세 번째 시비를 마주하고 보니 교토도 우리만큼이나 윤동주 시인을 무척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그 사랑이 이어져 오늘까지 간직해 주고 있음에 감사했다.
책을 좋아하는 우리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근방의 작은 서점에 들렀다. 교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유명세를 타는 곳이었는데 입구가 정말 예뻤다. 일본어로 된 『앵무새 죽이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유명한 책을 통해 일본의 출판 양상이 우리나라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며 문학 기행을 마무리했다. 여행에 문학이 함께 한다는 것은 마치 심심한 음식에 집간장 한 숟갈을 넣었을 때 음식이 맛깔스러워지는 것과 같다. 여행이 더욱 풍미 가득해지고 각인되어 오래 남는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두고두고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 행복이 나도 모르게 나를 다음 문학 기행으로 이끈다. 신나게.
★2023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독서동아리를 담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