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3

오늘도 만나러 간다

저자소개

이두현
독서동아리 ‘공유독서’ 회원


성석제의 소설에서 만난 만수는 투명 인간이었다. 가족과 남을 위해 사느라 자신은 그 존재가 닳고 닳아 없어져 결국은 안 보이게 된 만수를 보며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어쩌면 경제 활동을 중단하고 엄마로 사는 나도 이 사회에서는 투명 인간일지 모른다는 불편한 생각이 스쳤다. 병원이나 가야 불러주는 내 이름이 더 어색해지기 전에 나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언가 나를 위한 일을 찾아 열심히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외로웠다. 내 이름 석 자보다 아무개 엄마가 익숙해지는 상황이 두렵고 불안했다. ‘애 키우는 엄마가 다 그렇지 뭐.’ 스스로 달래며 꾸역꾸역 버텨왔지만 내 마음을 받쳐 줄 체력마저 허락되지 않는 날은 와르르 무너졌다. 외로움과 불안함을 직면할 용기도, 조급함을 달래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나를 믿고 잘 버텨낼 자신도 없었다. 나에게 있는 최대치의 긍정을 끌어다가 지금 당장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다 보면 이것 때문에 안 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되고, 결국 다시 외로운 현실을 확인하고 끝났다. 친구들과 신나게 노는 아이를 보며 놀이터에서 만난 아이 친구의 엄마가 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있지만, 꼭꼭 숨겨둔 나를 꺼낼 용기가 없었다. 어색한 시간을 채우는 피상적인 얘기들은 외로움보다 더 큰 피로감이 되었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놀이터에 강제 소환된 엄마들에게 어젯밤 읽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완벽한 엄마는 없다’는 것만 인정해도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가벼워진다는데 그게 참 쉽지 않네요. 나에게도 없는 걸 자꾸 아이한테 기대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 아직도 엄마의 자리가 어렵게만 느껴져요. 언제쯤 쉬워질까요? 오늘따라 더 힘이 빠져요.” 


내가 먼저 슬쩍 경계를 허물었다. 책을 핑계로 아이가 아닌 나를 꺼내 보이기 시작했다. 놀이터에서 만난 지 반년이나 되었지만, 오늘에서야 우리는 조금 아는 사이가 된 것 같았다. 나만 외롭고 불안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 시간을 버텨낼 힘이 된다는 걸 느꼈다. 이렇게 나는 느닷없이 엄마들과 독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동네 엄마 7명이 2주마다 예쁜 카페에서 만나 책 수다를 떤다. 거창한 독서 모임은 아니지만, 밑줄도 긋고 플래그도 붙여가며 정성스럽게 읽은 책을 들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노트에 꾹꾹 눌러쓴 생각을 나누기 시작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비싼 커피가 나를 삶의 변두리에서 중앙으로 앉히는 것 같다. 적어도 이 시간만은 나는 투명 인간이 아니다. 귀를 쫑긋하고 반짝이는 눈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들을 보면 내가 참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행복하다. 아무개 엄마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으로 만나는 이 시간이 즐겁고 기다려진다. 책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내 이야기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싫지 않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만난 시간과 비례한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안에 숨겨둔 힘들었던 순간을 꺼내려다 목이 멘 친구를 눈빛으로 위로하며,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보다 가까워졌다. 내 이야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놔도 괜찮은 이 시간은 힐링이라는 단어와 참 많이 닮아있었다.


힐링과는 상반되었던 우리의 첫 모임 날이 떠오른다. 설렘과 어색함이 공존했던 그 날, 우리는 왜 독서동아리를 하려는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려 했었다. 책을 꾸준히 읽고 싶어서, 다양한 책을 읽고 싶어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 조금은 뻔한 이야기로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내고 있는데, 누군가 고요 속의 외침 같은 한 마디를 뱉었다. 


“외로워서요. 혼자서 책을 읽는 게 처음엔 즐거웠는데 어느 순간 외로워졌어요. 책을 읽으면 무슨 말이든 하고 싶고, 듣고 싶어요. 책 친구가 간절해요.”


무방비 상태에서 팩트 폭격을 당했다. 첫 만남이라 조심하며 수위를 계산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눈치를 보니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외로웠나 보다.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 누군가의 엄마로 안간힘을 다해 살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헛헛했다.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나의 가치를 인정해 준다면 나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더 작아지고 작아져 안 보이기 전에 나를 잡아준 건 책이었고 책은 사람으로 연결되었다. 


한 달에 두 번 우리가 만나는 날을 남몰래 기다렸다. 아무것도 없던 달력이 빨간 동그라미에 하트까지, 설렘으로 가득했다. 독서 모임은 내 생각이나 마음을 가장 편하게 꺼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만은 나를 꾸며낼 필요가 없었다. 없는데 있는 척할 필요도, 모르는데 아는 척할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의 상태로도 언제나 괜찮았다. 함께 읽은 책이 쌓여갈수록 나는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진짜 나를 드러내기 위해 엄청난 용기를 장착하지 않아도 책이라는 도구는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책 속에서 항상 나를 만났다. 주어는 내가 아니었지만, 항상 내 이야기를 실컷 하고 오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웠는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책에서 만난 사람들과 책으로 만난 우리의 시간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이 좋아서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사람이 좋아서 만난다. 친구가 내 생각에 같은 마음을 얹어주는 날은 그 어떤 응원보다 든든한 힘이 되고, 내 생각을 틀어서 바라봐주는 날은 한 번 더 생각해 볼 소중한 기회를 얻는다. 혼자 읽고 덮었던 책을 이제는 함께 읽고 새롭게 읽는다. 내 생각이 맞는지 틀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 내가 어떤 질문에 마음이 움직였고, 왜 움직였는지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며 치유이고 성장이다. 책에서 만난 문장 하나가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나는 언제 행복하며 언제 슬퍼지는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는 책을 핑계로 일상에서 하지 못한 질문을 편하게 주고받는다. 천천히 질문을 곱씹으며 우리는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서로를 이해하며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오늘도 만나러 간다. 내가 환대받는 이 시간과 사람이 소중해 정성을 다해 이날을 준비한다. 그냥 흘려보내려던 생각을 놓치지 않고 적어본다. 나를 설레게 했던 문장을 그 설렘까지 꾹꾹 베껴 써본다. 이 생각과 설렘을 나누며 나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읽는다. 함께 읽은 책을 통해 생각과 깊이가 자라는 것도 감사하지만 내 옆의 사람들과 그 과정을 공유하는 순간이 진짜 소중하다고 느낀다. 우리가 함께한 책과 시간이 쌓여 나는 조금 달라졌다. 내가 나를 증명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나와 엄마인 나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냥 나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든 나는 나로서 소중하고 빛난다. 이것을 깨닫게 해준 책과 나의 친구들책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2022 독서동아리 수기 공모전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책이 만나다」에 선정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