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8

수저, 바퀴, 책

저자소개

움베르토 에코·장 클로드 카리에르
움베르토 에코/ 20세기를 대표하는 기호학자이자 미학자, 그리고 세계적 인기를 누린 소설가. 1932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중세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학위 논문을 발전시켜 1956년 첫 번째 저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 문제』를 펴냈다. 이후 이탈리아는 물론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1971년에는 볼로냐 대학교 부교수로 임명되었고 이때부터 그의 기호학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정교수로 승진해 2007년까지 볼로냐 대학교에 재직했으며 국제기호학회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1980년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을 출간했고, 이 작품은 곧바로 <백과사전적 지식과 풍부한 상상력의 결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에서 3천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이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프라하의 묘지』, 『제0호』 등 역사와 허구, 해박한 지식과 놀라운 상상력이 교묘하게 엮인 소설들을 발표했다. 소설 외에도 그의 저서는 철학과 미학, 역사와 정치, 대중문화 비평 등 인문학 전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방대한 영역을 포괄한다. 독선과 광신을 경계하고 언제나 명석함과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는 2016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자택에서 암으로 별세했다.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은 에코가 잡지 『레스프레소』에 <미네르바 성냥갑>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던 칼럼 중 2000년 이후에 썼던 것을 모은 책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출간되었다. 장 클로드 카리에르/ 프랑스 소설가이자 영화 시나리오 작가. 1957년에 첫 소설 『도마뱀Lézard』을 발표했고, 자크 타티, 루이스 부뉴엘 등 유명 감독들과 영화 작업을 함께했다. 1982년 영화를 소설화한 『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쓴 이후 수많은 문학작품의 시나리오 각색 작업에 참여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프라하의 봄」 「양철북」 「시라노 드베르주라크」 「죽은 군대의 장군」 등이 있다.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알파벳의 시대로 되돌아왔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이미지의 문명으로 진입했다고 믿고 있었죠. 그런데 컴퓨터로 인해 우리는 다시 구텐베르크의 우주로 들어왔고, 이제 모든 사람은 글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되었어요. 읽기 위해서는 매체가 있어야 해요. 물론 컴퓨터도 이 매체가 될 수 있죠.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읽노라면 두 눈이 테니스공처럼 부풀어 오를 겁니다. 우리 집에는 이러한 모니터를 장시간 사용할 때 눈을 보호해 주는 안경까지 있지요. 또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욕조 안에서 읽을 수도 없고, 침대에 누워 읽을 수도 없지요. 이런 점들을 감안해본다면 책은 컴퓨터보다는 훨씬 더 유연한 도구입니다.


다음의 둘 중 하나가 될 거예요. 책이 독서의 주요 매체로 남게 되든지, 아니면 책과 비슷한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겠죠. 다시 말해서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부터 책이 항상 지녀온 특성을 지닌 무언가가 존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난 5백 년 동안 책이라는 물건의 형태에는 이런저런 변화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기능과 구성 체계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책은 수저나 망치나 바퀴, 또는 가위 같은 것입니다. 일단 한번 발명되고 나면 더 나은 것을 발명할 수 없는 그런 물건들이 말이에요. 수저보다 더 나은 수저는 발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들은 코르크 따개를 개선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어요. 또 그렇게 나온 대부분의 물건은 제대로 기능하지도 않았고요. 예를 들어 필립 스탁은 레몬 압착기를 혁신해 보려고 시도했었죠. 하지만 그가 만든 기계는 지나치게 미학적 순수성에 집착한 나머지 레몬 씨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어요. 책은 자신의 효율성을 이미 증명했고, 같은 용도의 물건으로서 책보다 나은 것을 만들어 내기는 힘듭니다. 어쩌면 책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 요소들이 변할 수는 있을 거예요. 예를 들어 책장이 더 이상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책은 지금의 것으로 남아 있게 될 겁니다.



─ 움베르토 에코·장 클로드 카리에르, 『책의 우주』,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2011,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