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지 오웰
영국의 작가 · 저널리스트.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인도 아편국 관리였던 아버지의 근무지인 인도 북동부 모티하리에서 태어났다. 첫돌을 맞기 전 영국으로 돌아와 명문 기숙학교인 세인트 시프리언스(예비학교)와 이튼 스쿨(사립학교)을 졸업한 뒤 영국의 경찰간부로서 식민지 버마에서 근무(1922~1927)한다. “고약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경찰직을 사직한 뒤, 자발적으로 파리와 런던의 하층 계급의 세계에 뛰어들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르포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발표한다.
1936년은 오웰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이다. 그해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을 취재하여 탄광 노동자의 생활과 삶의 조건 등을 담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을 쓰고, 스페인에 프랑코의 파시즘이 발흥하자 공화국 민병대 소속으로 스페인내전에 참전하여 부상과 배신을 당하는 경험을 기술한 『카탈로니아 찬가』(1938)를 펴내면서, 자신의 예술적·정치적 입장을 정리해나간다.
폐렴 요양 차 모로코에 가서 쓴 『숨 쉬러 나가다』(1939)는 그러한 큰 전환점 이후 쓴 첫 소설이자, 대표작 『동물농장』(1945)과 『1984』(1948)를 내놓기 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2차대전 중에는 민방위대인 ‘홈 가드’에 복무하면서 BBC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했고, 이후 <트리뷴>지의 문예 편집장, <옵저버>지의 전쟁 특파원 노릇도 한다. 소설가인 동시에 저널리스트로서, 오웰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엄청난 양의 글을 썼다. 생전에 11권(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의 책을 낸 것 말고도 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 통쾌한 독설이 번뜩이는 수백 편의 길고 짧은 에세이를 남겼다. 짧은 인생 말년에 쓴 『동물농장』과 『1984』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남긴다.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 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 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 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 — 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 조지 오웰, 「교수형」,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