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팡트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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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참담함의 기록
파리에서 우연히 레베카 라테를 봤다. 그 배우가 그간 맡아온 캐릭터가 머릿속에 차례차례 소환되어 다시 상영되었다. 위험하고, 치명적이며, 연약하고, 애처롭다가도, 때론 영웅적이기까지 한 여자. 얼마나 숱한 날을 레베카와 사랑에 빠졌던가. 무수히 많은 사진이, 허다한 집을 거치며, 얼마나 많은 침대 머리맡을 장식했던가. 얼마나 많은 나날을 그 사진을 보며 꿈꾸었던가. 그런데 끝으로 치달은 한 시대의 비극적 은유를 목도한 것이다. 절정에 이른 여인의 유혹이란 얼마나 매혹적인 것인지 무수한 소년들이 레베카를 통해 입문했는데, 지고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단지 나이 때문만은 아니다. 레베카는 살이 올랐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옷차림에 피부 상태도 엉망이었다. 칙칙하고 수선스러운 캐릭터 같았다. 그야말로 난장판. 사람들 말로는 레베카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아이콘 같은 존재라고 한다. 비참한 이들의 대표 격으로는 여전히 강력한 셈이다. 그래서 얼마나 충격받았느냐고? 전혀. 언짢은 기분으로 소파에 구겨져 비기의 노래 ‘힙노타이즈’를 무심히 반복해 들을 뿐.
레베카
친애하는 개자식에게.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봤습니다. 어깨에 똥을 싸지르는 비둘기보다 당신이 나은 게 하나라도 있을까요? 역겹고 불쾌하기 짝이 없군요. “왈왈왈. 나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허접한 머저리입니다. 사람들 주목을 받고 싶어 칭얼거리는 개새끼입니다.” SNS에 영광을 돌려야겠네요. 아주 잠시나마 유명세를 누렸을 테니. 내가 당신에게 답장을 쓰는 게 그 증거입니다. 당신도 분명 아이가 있겠죠. 당신 같은 놈들은 생식 활동에 목숨을 걸더라고요. 혈통이 끊기는 게 상상이 안 가죠?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멍청하거나 딱할 만큼 쓸모없는 사람일수록 혈통을 이어야 한다는 집착에 시달리더군요. 당신 아이들이 트럭에 깔렸는데 손도 쓰지 못한 채 당신이 무력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를,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면과 고통에 찬 비명이 매일 저녁 당신을 찾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에게 바라는 건 그 정도로 충분해요. 자, 그럼 엄한 비기는 건들지 말고 그냥 두세요. 한심한 인간 같으니.
오스카
의도적으로 신랄하게 쓴 글이었습니다. 변명하자면 당신이 읽을 줄은 진심으로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읽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진짜로 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게시글과 댓글은 전부 지웠습니다.
어쨌든 당신 글도 적의가 가득하네요. 처음 읽었을 때는 충격받았습니다. 그다음 반응은, 솔직히 말하자면 꽤 재미있었다고 해야겠네요.
제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앉아 있던 브르타뉴 거리 테라스 자리에서 테이블 몇 개 건너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걸 용기도 없으면서 끈질기게 당신을 보고 있었죠. 그런데 제 얼굴을 보고도 당신이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자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나서지 못하는 제 소심함도 싫었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에 관해 그토록 비열한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날 당신에게 제가 코린의 막내 남동생이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킬지 모르겠네요. 당신과 누나는 80년대에 친구 사이였어요. 오스카 제이야크는 제 필명입니다. 실제 이름은 오스카 조카르예요. 우리 가족은 모리스 바레스 광장 뒷동네에 살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신은 칼리에 살았어요. 다뉘브라고 불리는 건물에요. 당신은 종종 우리 집에 놀러 왔습니다. 저는 집안의 막내였고, 멀리서 당신을 몰래 지켜봤을 뿐 직접 이야기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제 장난감 자동차 레이싱 트랙 앞에 있던 당신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때도 당신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자동차가 탈선하는지 제게 보여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초록색 자전거가 한 대 있었죠. 경주용 남성용 자전거요. 또 알뒤리브르 서점에서 가방 한가득 음반을 훔치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제게 데이비드 보위의 〈스테이션 투 스테이션〉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음반이 두 개였던 거죠. 덕분에 저는 아홉 살에 보위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 음반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후 저는 작가가 되었어요. 당신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썩 괜찮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의 메일 주소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소를 저장해둔 이유는, 당신을 주인공으로 한 일인극 희곡을 쓰고 싶어서였습니다. 연락을 취할 용기는 한 번도 내지 못했지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레베카
이봐요, 그딴 사과 집어치워요. 일인극도, 그 밖에 다른 것도요. 전혀 관심 없으니까. 무슨 확신에서 그랬는지 몰라도 그런 고백을 늘어놓겠다고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를 들먹거리다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한 온갖 모욕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구는군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당신의 삶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의 작품도, 당신과 관련된 모든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나, 당신 누나를 제외하고는요.
당연히 코린을 기억합니다. 오랜 세월을 잊고 지냈지만, 이름을 보자마자 기억의 서랍을 열기라도 한 듯 선명히 떠오릅니다. 코린의 방에서 탁자 대용으로 쓰던 썰매에 카드를 펼치고 카드놀이를 했죠. 겉창을 열어둔 채 내가 어머니에게서 몰래 훔쳐 온 담배도 피웠고요. 가족 중 당신의 방에 가장 먼저 전자레인지가 생겨서, 그걸로 녹인 치즈를 비스킷에 올려 먹기도 했습니다. 보주로 코린을 만나러 간 일도 생생합니다. 시골 오두막에서 코린은 혼자서 말을 돌봤어요. 난생처음 바에 들어갔을 때도 코린과 함께였습니다. 우리는 바에서 거리낌 없는 태도로 핀볼 게임을 했어요. 평생 그걸 해온 사람들 흉내를 내면서요. 코린에게 오토바이가 한 대 있던 게 기억납니다. 그때 나이를 감안하면 분명 개조된 전동 자전거였겠죠. 코린은 빨간 포장의 던힐 담배를 피웠고, 레몬 반 개를 넣은 물을 마셨습니다. 이따금 동독 문제나 마거릿 대처의 정책 등 당시 내 주변 누구도 관심 갖지 않던 일을 이야기했어요.
낭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끔찍이도 싫었기에 그곳 생각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어요. 그 시절이 딱히 그립지도 않고요. 그런데 젊은 시절을 생각할 때 몇 가지나마 괜찮은 추억이 떠오른다니 놀랍기만 하네요.
코린에게 전해주세요.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해보기도 했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 결혼을 해서 성이 바뀌었기 때문이겠지만요. 나 대신 꼭 안부를 전해주세요. 당신에 대해서는, 솔직히 죽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지만.
오스카
누나는 SNS 계정을 만든 적이 없어요. 기술을 싫어해서라기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소시오패스에 가까워요. 당신이 우리 집에 왔을 때가 기억나네요. 얼마 후 당신은 영화계 스타가 되었고, 바로 그 사람이 우리 부엌에 앉아 오스카 시상식을 십오 분간 같이 보다 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당시에 그런 명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선택된 소수의 사람만 가능한 것이엇으니까요. 우리 동네에서 그런 유명인이 나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사실로 느껴졌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몰랐다면 감히 첫 소설을 출간해줄 편집자를 찾을 용기도 못 냈을 겁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틀렸다는 증거가 바로 당신이었어요. 저도 꿈꿀 권리가 있다고 알려주었으니까요. 당신에 관해 비열한 글을 쓴 건 정말이지 머저리 같은 짓이었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당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선택한 지극히 초라한 방법이었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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