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은 어떻게 생겨나고 왜 반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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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왜 지금
차별을 이야기하는가
“난민 수용은 국민에 대한 역차별이다”, “이주노동자가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다문화 정책은 세금 낭비다”,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차별한다”, “성소수자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슬람 사원 설립에 반대한다”, “카페에 아이를 동반하는 것을 금지한다”, “피트니스 클럽에 65세 이상은 출입 금지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는 시민을 볼모로 잡은 인질극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 “지역 할당제는 수도권에 대한 역차별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글을 반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얘기들이었다. 처음에는 특정 인터넷 게시판에서만 볼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순간 인터넷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 되었다. 지금은 오프라인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이 되었고, 심지어 이런 말을 하는 정치인들까지 등장했다. 이런 문제를 혐오와 차별의 문제라 규정하고 적극적인 대응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 힘은 미약하다. 2010년대 들어 혐오와 차별에 대응하는 입법이나 정책적 시도는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그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국에서 혐오·차별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대략 2010년 전후다. 바로 이때 인터넷에서 이주자·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반다문화, 외국인 노동자 반대, 외국인 범죄 척결 등을 내세운 인터넷 커뮤니티가 개설되었고 온라인의 여러 게시판에도 인종적 혐오를 표출하는 글들이 늘어났다. 2010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인터넷상의 인종차별적 표현 모니터링에 따르면, 이 글들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외국인이 일으키고 있다고 선동하면서 인종적 우월성을 얘기하거나 위협적 존재로서 외국인에 대한 증오감을 표출하기도 했고, 외국인을 비하하거나 희화화하거나 인종차별을 정당화·증진하려고 시도했다.
혐오와 차별의 대상은 이주자나 외국인에 머물지 않았다. 2013년에 문제가 되었던 일간베스트게시판(일베)에서는 여성, 5·18유공자, 세월호 유족, 민주화 운동가들이 표적이 되었다. 소수자나 약자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은 ‘놀이’가 되기도 했고 사뭇 진지한 정치적 주장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특정 성별이나 세대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어졌다. 그사이 혐오와 차별의 대상은 성소수자, 난민, 조선족, 중국인, 비정규직 노동자, 무슬림으로 확대되었다.
2021년 미국 애틀랜타의 한 마사지숍에서 총기 살인 사건이 있었다. 여덟 명이 살해되었고 그중 아시아계 여성이 여섯 명이었다. 피해자 가운데는 한국 이름을 가진 여성 네 명도 포함되었다. 여성 아시아인을 특정했다는 의심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인, 아시아 여성에 대한 혐오를 중단하라는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코로나19 이후에 터져 나온 것이었다. 아시아인이면서 여성이라는 이중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 특별히 목소리를 높였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모임이 결성되었고 거리에서는 “아시아인 혐오를 중단하라”고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다. 2023년 11월 미국의 싱크탱크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미국 내 아시아인 7000여 명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의 38퍼센트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44퍼센트는 비하적인 호칭을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인종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정기적으로5퍼센트 또는 가끔61퍼센트 경험한다고 답했다. 13퍼센트는 인종적 이유로 고용되지 않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고, 식당 등 서비스업체에서 인종적 이유로 부실한 대접을 받았다는 응답은 44퍼센트에 달했다.
차별이 확산되는 이유
그렇다면 오늘날 혐오와 차별이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별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하면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편견이나 혐오가 있어도 그것을 드러내거나 실행에 옮기는 것은 자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을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강의에서 만나는 청중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는데요, 아무튼 차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두 시간의 특강으로 사람들의 마음까지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차별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차분하게 이성적인 토론을 한다면 이 정도의 합의는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세상에는 나의 강의실처럼 너그럽고 진지한 청중들만 있는 게 아니다. 강의실 밖의 세상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경제 위기, 기후 위기 등 다양한 차원의 복합 위기가 사회를 위협하고 있고 개인 삶의 불안이 심화되고 있다. 실제로 자연재해, 전염병 확산, 전쟁, 경제 위기, 대량 실업 등과 같은 사회적 위기가 혐오와 차별을 확산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위기가 위기인 이유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진, 태풍, 해일, 산불 등의 자연재해, 흑사병이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의 확산,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 같은 전쟁, 1997년 금융 위기나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의 경제 위기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뻔한 정답은 바로 ‘모두가 힘을 합쳐서 위기를 극복한다’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사람들은 이런 정답 대신 다른 선택지를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기보다는 엉뚱한 희생양을 찾아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혐오와 차별이다.
위기 상황에서의 약한 고리는 힘이 없는 존재들이다. 취약한 존재들이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위기에 맞서 싸우는 대신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들을 척결한다면 위기가 극복될 거라는 환상에 빠진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세의 마녀사냥이다. 마녀사냥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 나이가 많은 여성이었다. 여성이 다수였지만, 하층민 남성이나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 남성도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유럽이 대기근과 흑사병의 위기에 빠졌을 때 중세인들은 마녀를 지목하여 마녀재판과 화형식을 거행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때는 유대인이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코로나19가 확산되었을 때는 아시아인과 중국인이 표적이 되었다. 유럽과 미국이 만성적인 위기에 빠지자 이주노동자와 타민족·인종 구성원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흑사병, 중세의 위기, 코로나19, 현대의 만성적인 사회경제적 위기 중 그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진짜 문제를 가리는 손쉬운 방법
종종 개신교 지도자들의 강연 영상을 분석해야 할 때가 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심각한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었을 때 갑자기 엉뚱한 결론이 도출된다. “이 모든 것이 동성애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런 강연을 볼 때마다 교회의 진정한 위기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의심한다. 진짜 위기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는데,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마땅치 않고 그럴 의지도 없으니 엉뚱하게도 동성애 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정말로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진지한 논의는 발 붙일 곳이 없어진다. 혐오는 문제를 은폐하고 도외시하는 것을 넘어,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미국과 유럽의 극우 세력들은 ‘먹고살기 힘들어졌다’며 동유럽,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책임을 넘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과 유럽이 먹고살기 어려워진 것이 과연 이주자 때문일까? 오히려 이주자 덕분에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이주자 없이는 한순간도 사회가 지탱될 수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추방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실행에 옮길 수조차 없는 선동으로 정치적 사기극을 벌이는 동안 진짜 ‘잘 먹고 잘 살기’위한 방안에 집중해야 할 사회적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 사이에 여성혐오가 만연해 있다고 한다. 젊은 남성들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이는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그런데 삶이 어려운 것은 여성도 매한가지다. 여성이 더 행복해졌기 때문에 남성이 불행해진 것도 아니고, 여성에 대한 법과 정책 때문에 남성이 힘들어진 것도 아니다.
역차별의 상징이 되어버린 여성가족부가 폐지된다고 남성들이 행복해질까? 실제로 여성가족부 예산의 대부분은 가족·청소년 분야에 쓰이며 여성 분야 예산은 17퍼센트뿐이다. 이 예산은 성희롱·성폭력·성매매 예방 및 피해자 보호, 아동·청소년 성 보호, 경력 단절 여성 지원 등에 배정되어 있다. 이것을 남성에게도 공평하게 분배하면 평등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또 다른 원흉으로 꼽히는 ‘여성 할당제’도 마찬가지다. 사실 한국에서 여성 할당제가 실효성 있게 실행되는 곳은 거의 없다. 공무원 양성평등채용목표제의 최근 수혜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절반을 여성으로 강제하고 있고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 임원이사의 최소 한 명을 여성으로 두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지만, 여전히 국회의원과 경영진의 여성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다.
여성 징병 논의도 마찬가지다. 징병 문제는 중요하다. 군 복무 기간 축소, 정당한 임금 지급, 폭력·괴롭힘 금지, 의식주 개선, 충분한 휴식·휴가 보장, 모병제 도입 등 징병 남성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줄이고 군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여성을 징병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 징병은 손해와 고통을 분담하고 줄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여성에게로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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