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1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세계를 향한 비전

저자소개

저자 · 김도현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의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노들장애인야학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연구 활동가로도 일하고 있다. 《차별에 저항하라》,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장애학의 도전》 등을 썼으며,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 《철학, 장애를 논하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1장

장애학의 시선


단상들


첫 번째 이미지 


시선의 시선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노들장애학궁리소는 노들장애인야학약칭 노들야학 부설 기관으로 2017년 만들어졌다. 1997년부터 2020년까지 노들야학의 교장을 지냈던 박경석 선생님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약칭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이기도 해서 장애인권 관련 집회에 발언자로 자주 나서는데, 발언에 더해 종종 노래 솜씨를 뽐낸 후 내려오곤 한다. 그가 즐겨 불렀던 민중그룹 젠ZEN의 노래 〈공간이동〉 중에는 다음과 같은 랩으로 된 소절이 있다. ‘랩하는 장애인 할아버지’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제법 화제가 되기도 했다.


내 모습 지옥 같은 세상에 갇혀버린 내 모습, 그 모순! 자유, 평등, 지키지도 않을 거짓 약속 흥~ 닥치라고 그래. 언제나 우린 소외받아왔고 방구석의 폐기물로 살고 있고. 그딴 식으론 오히려 동정의 시선, 위선 속의 동정 받는 병신인 줄 아나?


‘시선’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본다. 장애인은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홈리스 등 다른 소수자들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시선을 많이 받는 존재다. 어떤 시선일까? 위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차별의 시선이고 동정의 시선이다. 시선이라는 단어는 ‘자선을 베풂’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기에, 약간의 언어유희를 부리자면 ‘시선施善의 시선視線’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혐오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동정과 연민은 흔히 혐오와 반대되는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혐오의 양면에 가깝다. 시선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려보면 이 점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자기연민에 빠져 있을 때 자기혐오에 빠질 가능성이 높고,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 자기연민에 빠질 가능성 역시 높다. 양자는 매우 쉽게 전환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또한 동정은 혐오라고 인식되지 않기에, 선의로 포장되어 있기에 더욱 공고하고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2001년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한국사회의 장애인운동은 지난 25년간 치열하고 끈질긴 투쟁을 벌여왔고, 적지 않은 변화도 일구어냈다. 그러나 장애인을 향한 이 사회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는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를 달 수밖에 없다. 특히 정권을 틀어쥔 권력자들의 시선 말이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인간다운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정당한 권리로 요구하며 싸워왔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여전히 그것을 일종의 배려와 시선施善으로 여긴다.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던 시인 에드몽 자베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방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방인은 당신이 고향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시선의 폭력》 저자 시몬느 코르프 소스는 그 말을 다시 다음과 같이 바꾸어 쓴다. “장애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장애인은 당신이 비장애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자베스의 시 속에서 ‘고향’이란, 무엇보다도 차별과 동정과 혐오의 시선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장소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장애인이 된다. 장애인에게 아직 고향은 없다.


2020년 초 《철학, 장애를 논하다》라는 번역서를 냈는데, 얼마 후 한 인터넷 매체에 이 책에 대한 긴 서평이 올라왔다. 제목은 〈‘장애’라는 유령이 나타났다〉. 강렬하고도 적절한 제목이라 생각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장애인는 실제로 유령처럼 취급되어왔으니. 그리고 다시 문득, 2018년 말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였던 이해찬씨가 전국장애인위원회 출범 행사에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장애인들을 앞에 두고 “정치권에 …… 정신장애인들이 많이 있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라는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장애인들은 그에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2020년 1월에도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는 황당한 장애인 비하 발언을 했고, 이를 비판한답시고 제 1야당은 “삐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장애인”이라는 혐오 발언으로 맞받았다. 장애계 안팎에서 많은 비판이 이어졌고, 전장연은 ‘정치인의 장애인 차별·혐오 발언 퇴치 서명운동’에 나섰다. 필자 역시 정치인들의 반복되는 장애인 혐오 발언에 몸서리쳤고, SNS에서 서명운동을 독려했다. 그러나 이내 다소간 복잡한 심경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운동에 기꺼이 동참해주었을 이들의 SNS 글에서도 장애 비하 표현들을 계속해서 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노동운동 단체는 변희수 하사 강제 전역과 관련해 〈소수자는 심신장애 3급? 그런 사회야말로 심신장애〉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가 이후 제목을 바꾸고 사과 공지를 냈다. 어떤 이는 정치권을 비판하는 글에서 “지탈 발광”이라는 용어를 여러 차례 반복했고, “돌았냐?”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신장애인 혐오다. 그 당시 논란이 된 한 문학상을 비판하는 글에서는 “기형적 운영”이라는 표현이 쓰였는데, 이 역시 신체적 장애인에게는 비하적 표현이 될 수 있다. 나 또한 한 글에서 “일정한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맹점을 갖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무심코 쓰고 나서, 퇴고할 때 고친 경험이 있다. 그것이 시각장애맹盲에 대한 비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 표현이 반복되는 건 여성혐오misogyny와 마찬가지로 장애혐오가 단지 어떤 개인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로 범주화된 대부분의 특성들 자체가 가치절하되어 있고, 우리가 쓰는 익숙한 표현숙어 속에 장애 관련 용어들이 내재해 있으며, 어릴 때 자연스레 익힌 욕들 중 많은 것이 장애와 결부되어 있다. 그러니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장애혐오 표현을 완벽히 피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가급적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으니, 그건 장애인들의 존재를 감각感覺하는 것이다. 그들이 유령이 아니라 내 곁에서 숨 쉬며 함께 살아가는 시민이며, 따라서 지금 내가 쓰는 글을 읽는 사람들 중 당연히 ‘장애인이 있다’는 점을 말이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그 역이 이 사실에 더 가깝겠지만, 그런 표현이 거리낌 없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장애 차별의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시도가 확장될 리 만무하기도 하니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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