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장면마다 발견하는 순우리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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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소멸의 풍경
감치다
어떤 사람이나 일, 느낌 따위가 눈앞이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감돌다
그해 겨울은 집 앞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보도블록이 차례로 거둬지고 공사 차량이 바쁘게 오갔다. 새 보도블록이 도로를 차곡차곡 다시 메꿀 때쯤, 우리 집 3층짜리 건물의 1층 칠성슈퍼 간판이 떼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하루 만에 떼어진 간판만큼이나 사뿐하게 슈퍼 내부도 말끔히 비워졌다.
내가 처음으로 칠성슈퍼를 찾아간 날은 이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늦봄 어느 밤이었다. 잘그랑 슈퍼 문을 밀자, 오랜 시간 겹겹이 쌓인 플라스틱 포장지 냄새와 옅은 사탕 냄새가 코끝으로 훅 밀려들었다. 칠성슈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보기 좋게 배열된 도시의 여느 슈퍼들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나는 진열대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 어렵사리 과자 몇 개를 고른 뒤 냉장고에서 맥주 두어 캔을 꺼내 들었다. 동네 사람이 아니면 들를 일이 없는 곳에, 처음 보는 여자가 물건을 찾아 진열대 통로를 기웃거리는 모습은 긴 하루 끝에 선 주인아주머니에게 흥미로웠던 모양이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나는 서둘러 과자와 맥주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주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계산기를 눌렀다.
아주머니의 기억력이 바코드를 대신하는 곳이군. 저 가격이 맞기나 한 건가. 미리 맥주 안 사 놓은 내 잘못. 나는 고시랑고시랑* 머릿속 말을 뇌며 슈퍼를 나섰다.
*고시랑고시랑 못마땅하여 군소리를 자꾸 좀스럽게 하는 모양
그러나 두 번째 방문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에 이어졌다. 그 날은 아이를 데리고서였다. 아이는 칠성슈퍼에는 진귀한 사탕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친구들에게서 들었다 했다. 그곳을 방문하고야 말겠다는 사뭇 결연한 아이의 표정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칠성슈퍼의 문을 다시 열어야 했다. 아이가 들은 이야기는 헛소문이 아니었다. 여섯 살의 내가 먹던 눈깔사탕이, 학교 앞 문방구 아저씨가 공책 사고 나면 끼워 주던 별사탕이, 언니들과 나눠 먹던 신호등 사탕이 오랜 시간을 건너와 그곳에 버젓이 진열돼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내가 그곳을 왜 방문했는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두 번째 방문 이후로 나는 종종 칠성슈퍼를 들러 이것저것을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괜히 사탕 진열대를 지나치며 달보드레한* 사탕 냄새를 큼큼거리면서. 들숨에 달려온 옅은 사과 향에 어김없이 불려 오는 내 어린 날을 뒤적일 수 있는 슈퍼에서의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달보드레하다 약간 달큼하다.
이제 칠성슈퍼는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칠성슈퍼가 사라지고서야 아주머니가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늘 전기장판을 켜 놓은 채 계산대 옆 평상에 비스듬히 누워 계셨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짤그랑하고 손님이 들어서면 아주머니는 부스스하게 일어나 앉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로 누워 계셨지만 아주머니가 태만하다거나 친절하지 않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아주머니 얼굴에 옅게 번지는 반가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주머니는 나를 낯알고 난 이후로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거냐 물어보셨고, 아이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도 하셨다. 어느 날은 퇴근이 늦었나 보다고 했고, 또 어느 날은 바람이 참 좋은 날이라며 말을 걸어 주셨다. 녹초가 된 몸을 겨우 끌고 슈퍼를 찾아간 어느 밤은 아주머니의 관심이 귀찮았고, 말이란 걸 꺼내는 순간 눈물이 질서 없이 쏟아져 내릴 거란 마음속 주의보가 울렸던 어느 날은 부러 고개를 떨구고 서둘러 슈퍼를 나오기도 했다.
칠성슈퍼 자리에 들어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당연하게도 내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주머니의 가늘고 다정한 목소리는 이제 바코드 찍는 소리가 대신한다. 마음을 들킬까 조바심 낼 필요도, 대답할 필요도 없어 홀가분해진 마음의 자리에 아주머니가 자주 떠오른다. 사과 향 사탕에 어린 날의 기억을 불러 보던 날들이, 아주머니가 건네준 다정한 온기의 공간이 이제 와 마음 구석구석 감쳐서겠지.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기억이 더해진 곳이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칠성슈퍼에는 대체 왜 ‘칠성’이란 이름을 붙었던 걸까. 나는 그게 왜 이제야 궁금해졌을까. 어쨌거나 나는 그 이유를 영영 알 길이 없어졌다.
‘감치다’는 음식 맛이 맛깔스러워
계속 먹고 싶다는 뜻도 갖고 있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혀끝에 남는 감칠맛과 같은 기억,
기억이 마음속을 긴 시간 동안 감도는 것을
‘감치다’라고 한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오래도록 내게 감쳐졌다.
기억을 부르는 순우리말
칠성슈퍼가 사라진 후로 나는 꽤 오래도록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유독 긴 시간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일, 감정이 있다.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어떤 사람이나 일에 대한 기억이 계속 맴돌 때 ‘감치다’라는 순우리말을 쓸 수 있다. ‘감치다’는 음식 맛이 맛깔스러워 계속 먹고 싶다는 뜻도 갖고 있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혀끝에 남는 감칠맛과 같은 기억이 마음속을 내내 감도는 것을 ‘감치다’라고 한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오래도록 내게 감쳤었다.
슈퍼 아주머니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던 건 내 얼굴을 기억하면서부터였다.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볼 때 쓸 수 있는 순우리말에는 ‘낯알다’가 있다. 낯알고 인사를 주고받고 사소한 이야기를 건네는 일은 삶의 크고 작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얼마나 오래도록 칠성슈퍼를 기억할 수 있을까. 슈퍼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책에 남기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잊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마음속에 또렷하게 기억해 두는 것을 이르는 순우리말이 있다. ‘아로새기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 놓아도 기억은 뭉개지고 흐려져 잊히기 쉽다. 기억이나 생각이 또렷하지 않고 흐릿해져 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때는 ‘아렴풋하다’를 쓰면 된다. 기억이란 건 시간이 덧대어질 때마다 아렴풋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떠오를 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은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상막하다’로 말하면 된다. ‘몇 년간 못 만나고 지내다 보니 이제 얼굴을 떠올리려고 해도 상막하기만 하다’라는 문장으로 써 볼 수 있겠다.
또렷하지 않은 기억을 표현하는 순우리말이 또 있다. ‘아령칙하다’이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령칙하다’와 같은 문장에서 쓰면 된다.
흐릿해졌다고 해서 기억이 온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슈퍼에 사과 향을 맡고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내 어린 날이 불려 나온 것처럼, 기억은 예상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잊혔던 생각이나 기억이 다시 떠오를 때 우리는 ‘되살아오다’를 쓴다. 또 기억은 온전한 모습으로 떠오르지 않고 숭덩숭덩 여기저기 잘린 채로 등장할 때가 많다. 상황이 뒤숭숭해서 생각이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웅송망송하다’, ‘옹송옹송하다’라고 표현한다. 이 두 단어는 정신이 흐릿해 어떤 생각이 났다 말았다 할 때도 쓴다. 한편 잊었다고 여겼던 생각이나 기억이 어떤 순간에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는 ‘파뜩하다’ 또는 ‘퍼뜩하다’라고 한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생겨났다 사라진다. 오래 자리하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는 건 쓸쓸한 일이다. 소멸해 가는 풍경들에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말 뜻풀이
감치다 (동) 어떤 사람이나 일, 느낌 따위가 눈앞이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감돌다.
낯알다 (동) 얼굴을 기억하고 알아보다.
아로새기다 (동) 마음속에 또렷이 기억하여 두다.
아렴풋하다 (동) 기억이나 생각 따위가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다.
상막하다 (동) 기억이 분명하지 않고 아리송하다.
아령칙하다 (동) 기억이나 형상 따위가 긴가민가하여 또렷하지 아니하다.
되살아오다 (동) 잊혔던 생각이나 기억이 다시 떠오르다.
옹송망송하다 (동) 뒤숭숭하게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아니하다. (형) 정신이 흐리어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흐리멍덩하다.
옹송옹송하다 (동) 정신이 흐리어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고 흐리멍덩하다.
파뜩하다/퍼뜩하다 (동) 어떤 생각이 순간적으로 갑자기 떠오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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