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생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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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리와일딩 선언
호랑이와 같은 궁극의 야생 동물도 되찾으려 하는 움직임이 바로 리와일딩이다.
“오늘, 야생 동물을 본 사람이 있나요?”
강연을 시작하며 이따금 청중에 던지는 질문이다. 대부분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한 명이 조심스레 손가락만 꼼지락거린다. 뭔가 보긴 했지만 질문의 대상에 해당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서 나오다가 새 한 마리를 보긴 봤는데……. 동네에서 마주친 이런 흔하디흔한 생물도 정말 야생 동물인 말인가? 물론 같은 동네라 하더라도 야산에서 뛰쳐나온 멧돼지였다면 이야기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대체 야생이 무엇이기에,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다른 많은 용어가 그렇듯 아마 명확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결국 인간의 인식과 분별이 낳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지 않은가? 반드시 물 샐 틈 없는 개념적 정리가 완수되어야만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 말이 가리키는 속성들, 우리의 마음과 세상에 불러일으키는 효과, 그리고 꿈꾸게 만드는 세상에 집중하면 더 생산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야생에는 바로 그런 정도의 중요성과 힘과 마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야생! 야생이란 이름이 붙는 순간 어떤 약동하는 생명력이, 길들일 수 없는 자유로움이, 예측 불허의 주체성이 느껴진다. 함부로 재단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떨림과 전율이 감지된다. 당장 눈앞에 없더라도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이 감돈다. 같은 생명이라도 뭔가 더 생명답다. 아니, 야생이어야 생명의 본질에 가까운 것만 같다.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하고 씩씩한 기개. 이것이 바로 야생의 심상이다.
자연 중에서 가장 자연다운 자연. 어쩌면 이것이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야생의 의미인지도 모른다. 한 문장에 자연이 세 번이나 등장할 정도인 걸 보면 뭔가가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다. 또한 자연이라도 다 같지 않다는 전제가 함의되어 있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창가에 놓인 화분, 발치에 앉은 강아지, 냉장고 안의 식품, 아무리 봐도 야생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냉장고에 유별난 내용물을 챙겨 두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우리와의 관련성이 야생을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야생은 인간을 떠나서는 이야기할 수 없다. 야생을 야생이라 부르는 것도 결국 인간이다.
우리는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야생의 자연에 심취했다. 단 한 번도 그 치명적인 매력을 잊은 적이 없다. 깊은 굴의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기어 들어가 횃불을 밝히며 기어코 암벽에 그려 놓았던 선사 시대부터, 상당수가 멸종한 이후에도 특히 창작과 유희 문화에 여전히 대거 동원하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야생에 집중하고 현혹되고 탐닉해 왔다. 국가의 상징적인 생물, 주요 스포츠의 팀 마스코트, 수많은 브랜드와 아이콘에도 야생의 자연은 이미 오래된 단골손님이면서 또 끊임없이 새로 등장한다. 영화에도 게임에도 축제에도 술병에도 야생의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원래 있어야 할 실제 자연만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야생은 더욱 번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생을 소비하며 할수록 실제 야생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는 반비례 관계 속에서 야생 생물에 대한 기이한 사랑은 지속된다.
야생에 대한 우리의 이중 태도를 비꼬기 위해 사용한, 기이하다는 표현조차 사실은 너무 약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감안하면 그에 합당한 단어를 선택하기가 훨씬 실상에 가깝다. 차고 넘쳐나는 수많은 연구 중 몇 가지만 들여다봐도 그림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인간 활동의 직접적 영향으로 변형되어 더는 ‘야생의 공간’이라 불릴 수 없는 곳이 지구 육상 면적의 77퍼센트, 해상의 83퍼센트에 육박한다. 공간의 차원에서 실제 동식물의 수준으로 들어가 보면 생태계가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로 갖춰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곳은 고작 3퍼센트로 추산된다. 사람들이 그나마 가장 공감하는 분류군인 포유류와 조류의 예를 보면 실태가 더 충격적으로 와닿는다. 전 세계 포유류의 36퍼센트가 인간, 60퍼센트가 가축이고 오직 4퍼센트만이 야생 포유류이며, 조류 전체의 70퍼센트가 사육되는 가금류이고 나머지 30퍼센트만이 야생 조류다. 게다가 이 엄청난 상실은 대부분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당대에 일어났고 지금도 왕성한 현재 진행형이다. 대표적인 국제 환경 단체 세계 자연 기금World Wide Fund for Nature, WWF이 격년으로 발간하는 지구 생명 보고서《리빙 플래닛 리포트Living Planet Report》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8년까지 야생 동물 개체군의 약 70퍼센트가 자취를 감췄다.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매달린 채 겨우 연명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야생이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부가 공식적으로 지정하고 관리하는 멸종 위기 야생 생물만 이제 거의 300종에 달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기초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파악하고 있는 최소한의 목록이라 봐야 한다. 이미 호랑이, 표범, 늑대, 스라소니 등 대형 포식자는 사라진 지 오래라 현대 한국인은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한 감이 없다. 1970~1980년대 이후 아예 사라진 크낙새나 소똥구리에서부터, 한때 도시에도 많았지만 이젠 부쩍 보기 힘들어진 땅강아지나 하늘소 등에 이르기까지, 야생 생물에 대한 우리의 기준과 감수성은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일례로 우체국의 상징인 제비는 과거에 흔한 새였지만 18년 동안 개체군이 무려 100분의 1 수준으로 급락했다.
하지만 이를 눈치채고 우편 업무를 보는 시민은 없다. 오히려 실제 상황과 정반대되는 인식은 쉽게 발견된다. 가령 아프리카돼지열병의 누명을 쓴 멧돼지는 지난 3년 간 전체 개체군의 절반 이상인 무려 27만 마리가 사살되었다. 그러나 대학살 이후에도 되레 감염이 확산되어 뒤늦게야 멧돼지 ‘무죄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멧돼지 한 마리만 도시에 나타나도 출몰, 공포 운운하며 멧돼지의 ‘습격’에 시달리는 듯한 호들갑이 지배적이다.
이래저래 작금은 야생의 생물에게 혹독한 시대다. 그런데 귀 기울여 보라.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지평선 너머로부터 작지만 분명한 새로운 움직임이 조용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솟아오르고 있다. 그렇다. 애초에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자 모두에게 소개하고 또 설득하고자 하는 궁극의 주제다. 바로 리와일딩rewilding이다. 리와일딩의 번역어는 잠시 제쳐 두자. 재야생화, 다시 야생으로, 야생의 귀환, 그리고 내가 제안한 ‘활생活生’ 등 후보는 많지만 아직 정착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새로운 자연 보전 패러다임인 리와일딩에 눈과 귀를 열고 모든 지구인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하게끔 하는 새로운 현대적 세계관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저 탁상 공론에 그친 관심 몇 가지가 학자들 사이에서만 회자되고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이미 곳곳에서 한창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정말로 야생이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다.
『리와일딩 선언』은 리와일딩의 운동이 드디어 한국에도 상륙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동시에 이제 우리도 리와일딩에 동참하고 더 나아가 선도해야 한다는 외침이다. 단순히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어서가 아니다. 망가진 생명계와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 하나가 전 지구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야생의 귀환의 풍부한 이야기를 다 담기에는 물론 역부족이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으로 이 사상이 자리를 잡고 현장에서 실현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바도 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분명한 시작점은 될 수 있다는 확신과 기대감을 안고 출발하려 한다. 온갖 동식물이 넘실거리는 자연과 조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미래를 진정으로 그리려는 의지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큰 포부를 안고 이 땅에 리와일딩을 선언하는 바다. 우리 함께 야생을 공식적으로 초청하고 맞이하는 이 작업에 함께 박차를 가해 보자.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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