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7

김홍 장편소설

저자소개

저자 · 김홍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여기서 울지 마세요》, 장편소설 《스모킹 오레오》 《엉엉》 《프라이스 킹!!!》 《말뚝들》이 있다. 문학동네소설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하나


1

불행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고 장은 생각한 일이 있다. 누구나 조금씩은 불행하고, 가장 불행한 사람조차 끊임없이 불행하지만은 않으므로 호들갑 떨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마침내 이루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장은 불행이란 단어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는 데 한참이나 모자람을 깨달았다. 지난날의 견해가 오만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 불행의 일부를 감경받는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장의 불행을 덜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장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전부 내 것이라고? 이렇게나 크고 많은 것이? 이 정도 불행이면 모두가 함께 나눠야 공평하지 않은가? 비록 내가 누군가의 불행을 나눠 가진 적이 없더라도 말이야. 그의 불행은 온전히 그의 것이기만 했다. 자꾸만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지?


그런 질문조차 사소해지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


좋은 대출 백 개를 통과시키는 것보다 나쁜 대출 한 개를 잘라내는 게 중요하다. 자리보전하려면 언제고 명심해야 할 원칙이었다. 대출심사역이 되고 장이 만난 첫 번째 사수는 서류 뭉치 세 개를 그의 앞에 던졌다. 셋 중 하나는 이미 부결 처리된 건이라고 했다.


“서류만 보고 찾아내. 퇴근 전까지.”


셋 다 작은 규모의 제조업 사업장이었다. 만드는 물건은 서로 달랐지만 비슷한 규모의 매출로 발생하는 비용도 비슷했다. 이미 일으킨 대출이나 담보 규모도 엇비슷했다. 함께 묶인 다른 서류에 빠진 항목이 없었고 하나같이 규정대로 작성되어 있었다. 장은 종일 같은 서류를 여러 번 들여다봤다. 자신이 담당자였다면 모두에게 대출을 내줬을 거라고 결론을 냈다. 퇴근할 때가 다 돼 사수가 장에게 물었다.


“찾았어?”


“이거 함정 아닙니까? 부결 난 대출은 없는 거죠?”


장의 반문에 사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서류 뭉치 하나를 찍었다. 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사장이 박카스를 들고 왔는데 나는 카페인이 영 안 받거든. 게다가 거짓말하는 눈이었어. 눈은 거짓말 못 한다잖아.”


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굉장히 당황했는데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사수가 원하는 게 바로 장의 당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의 삶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근거를 제공하고 싶지 않았다. 옳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이유로 대출을 거절했다가는 민원 폭탄을 맞기 십상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 이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중요한 건 찜찜한 일에 모가지 걸지 말라는 거야. 대한민국에 은행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정 그런 일을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는데 나까지 엮지는 말아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수는 이직했다. 동기 중에 승진이 느린 편이라며 늘 불만이 많았다. 좋은 기회를 잡아 직급을 높여 갔으니 그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옮긴 곳에서도 여전히 여신 업무를 했을 것이다. 그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박카스를 들고 가지 않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십 년도 더 지난 일인데 업체 이름이 장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장은 마치 아주 오래전 일들까지 불러내어 따져보는 중이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규명하기 위한 절차의 일환이었다. 이미 폐쇄된 법인의 등기부 등본으로 폐업 일자를 확인했다. 장의 은행에 다녀간 뒤 일 년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사태를 파악하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 최선을 다해 버텨내는 분투의 시간이었을 수도. 돌이키기 힘들만큼 기울 회사와 자연스럽게 정리된 시간일 수도 있었다.


사수가 현명했을까?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회사였고 그걸 알아차린 사수가 눈치 빠른 사람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부주의와 냉대가 불운하게 연속되면서 받아야 할 기회를 받지 못해 쓰러진 거라면? 대표자로 기록된 이름을 검색창에 입력했다. 특별히 확인되는 행적은 보이지 않았다. 장이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잘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수는 잘 지내나? 바라던 대로 골치 아픈 일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안락을 누리고 있나? 그게 발판이 되어 더 나은 삶으로 뻗어 갔을까? 나쁜 태도가 길들여져 생각지 못한 일을 겪었을까?


그때 부결된 대출에 장의 책임은 없었다. 다만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 원리를 알고 싶을 따름이었다. 이전까지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영역이었다. 스스로가 불행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


일이 터진 시점에 장은 유배 중이었다. 본부장의 눈 밖에 나 감정평가사를 따라 전국에 흩어진 담보 물건을 확인하러 다녔다. 대출심사역의 업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실행 중인 대출 건을 관리하고 새로운 업체와 영업을 트는 것만으로도 업무는 빡빡했다. 포천으로, 평택으로, 아산으로 한 번씩 출장을 다니려면 집에까지 일을 싸 들고 가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장이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을까? 그럴 리 없었다. 불행에 대해 겸손한 태도는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땐 아직 압도적인 불행을 만나기 전이었다. 장과 늘 동행하는 감평사 전아정 씨의 유쾌한 성격이 적잖은 위로가 됐다. 아정 씨 또한 업무지원본부 팀장의 눈 밖에 나 귀찮은 외근을 전부 떠맡는 처지였다. 중형 감정평가법인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은행의 전문 위원으로 이직한 지 막 삼 년을 채워가고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의 엄마이기도 했다. 괄괄한 성격에 운전을 잘했다.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은 어김없이 아정 씨가 거침없이 칼치기 실력을 뽐낸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유배자 신분으로 의기투합해 몇 번이나 술판을 벌였다.


“버텨. 인사라는 게 어차피 돌고 돌고 도는 거잖아. 버티다 보면 니네 본부장이 영전을 하든 떠내려가든 결판이 나겠지. 나야 재계약 안 돼도 어디든 이직하면 그만이지만 장 과장은 공채 출신인데 아깝잖아.”


“역시 전문직이 최고네요.”


“자기도 한 이삼 년 잡고 도전해보든가. 학교 다닐 때 공부 잘 했을 거 아니야.”


“위원님은 어쩌다 팀장하고 척진 거예요?”


“쓰라는 대로 안 쓰니까 고까운 거지 뭐. 애 엄마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만만하게 안 해주니까 빡친 거고. 그렇게 여기저기 눈치 보고 다닌다고 누가 임원 시켜준다니? 그러다 사고밖에 더 나냐고. 메뚜기도 한철이야. 우리 팀장 내년 못 넘긴다에 내 왼쪽, 오른쪽 손모가지 세트로 건다. 형님, 형님 하면서 따라다니는 부문장 나가리 되면 완전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두 사람은 꼼장어를 안주 삼아 소주를 각 일 병씩 비웠다. 술이 애매해 아정 씨도 별로 취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논산까지 내려가야 했다. 맥주를 딱 한 잔 더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아정 씨의 집에서 연락이 왔다. 미련 없이 자리가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아정 씨가 부른 대리운전 기사가 운전대를 잡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장은 택시를 잡았다. 자정이 다가오는 시내에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택시에 타려는 취객은 많았다. 장은 걷기 시작했다. 걷는 데까지 걷다가 지치면 다시 택시 잡기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본부장이었다. 장은 눈을 의심했다. 특별히 눈에 든 적도 없지만 확실하게 눈 밖에 나고부터는 장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이 시간에 맨정신일 리가 없었다. 받으면 받는 대로 안 받으면 안 받는 대로 피곤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우려 속에 미묘한 기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장 과장.”


“예, 본부장님.”


“나 여기 천왕봉이야. 지리산 종주 왔다.”


“아, 그런…… 그러시군요. 너무…… 축하드립니다. 잘하셨네요.”


“너 내가 휴가인 것도 몰랐지?”


“예에. 아, 제가 뭐, 계속 외근이라서…… 아시잖아요. 아시지 않나?”


“요즘 네 생각 많이 했다.”


“아, 그거…… 잘하셨네요…… 잘하신 건가? 본부장님, 약주 하신 거 아니죠? 음주 산행 위험합니다. 동행 있으시죠?”


“너 나한테 왜 그런 거냐.”


본부장의 말이 훅처럼 묵직하게 장을 파고들었다. 좀 전까지 아정 씨와 마신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왜 그랬더라. 왜 그랬는지는 대충 기억이 나는데 왜 그래야 했는지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묻고 싶기는 장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그랬죠. 제가 그랬는데 너는 나한테 왜 그러셨어요?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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