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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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원칙과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서술하라 하셨으니 그리하겠습니다. 비단보로 감싼 은수저도 시나브로 닿은 공기에 검게 변해버리듯이, 사태는 굳이 그것을 훼손할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펜을 들어 글을 쓰는 순간부터 재구성이라는 명분으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와 심장이 그리 안전하지도 무결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온 우주에서 제일 불안정한 공간임을 상기하면, 뭐라도 말하거나 쓰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거나 쓰지 않기보다는 한 발자국만큼이나마 낫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말로도 하고 글로도 써내려가겠지만 가능한 한 저의 해석과 감정이 그 일들을 덜 변색시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겹의 문장으로 감싸게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진실은 은닉과 착란 속에서 뒹굴 때 비로소 한 점의 희미한 빛을 얻기도 합니다.
대여섯 살 무렵 동화를 읽다보면―특히 그중에서도 신화와 민담과 전설을 아우르는 설화를 읽을 때면, 아무리 상상과 환상의 영역이라도 이것만큼은 도저히 양보 못하겠다는 개인 상식선이 명확한 나머지 분노에 가까운 의문에 사로잡혔던 적 없습니까. 예를 들어 이 오르페우스라는 머저리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걸 왜 꼭 돌아봐서 에우리디케를 놓칠까. 그맘때는 인간의 본능인 의심이나 빈곤한 믿음에 대한 교훈 내지 운명 비극 같은 걸 조리 있게 고찰하기보다는 생리적인 안타까움이 앞서게 마련이니까요. 에우리디케가 등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오다가 지옥으로 다시 끌려갈 때, 반드시 오르페우스의 눈과 손이 닿을 수 없을 때라야 비로소 그의 궁극의 노래가 성립된다는 삶의 본질적 아이러니를 떠올릴 나이는 아니니까요. 글쎄요, 지금은 워낙 아이들 어릴 때부터 독서 논술 교육을 하드하게 시키니까 또 모를 일이지만. 이브는 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판도라는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고 프시케는 보지 말라는 얼굴을 굳이 어둠 속에 등불을 밝혀가면서까지 들여다보고. 그렇잖습니까. 하지 말라는 걸 해야만 비로소 세상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이치를. 이야기의 배태란 일상의 붕괴와 질서의 와해 그리고 소망의 파탄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시기는 아니니까요.
이야기의 세부에 의문을 품었던 최초의 기억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제 경우는 인어공주였습니다. 마녀에게 목소리를 주어버려서 말을 못한다면, 왜 사실은 바다에서 당신을 건진 게 바로 나라고 편지로 써서 왕자에게 호소하지 않나. 이야기의 핵심이 그게 아닐뿐더러 주제와 상관없는데도 저는 그토록 지엽적인 요소가 답답했답니다. 어릴 적부터 억울한 걸 조금도 못 참던 성격이기도 하거니와―내가 아니에요. 오빠가 그랬어요! 길길이 뛰다가 입 안 닥치고 변명에 말대꾸한다고 더 얻어맞는데도 거품 물고 쓰러질 때까지 끝끝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지요, 내 입장을 해명하기를,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기를. 그런다고 오해나 오독이 일소되기는커녕 더 깊은 억측의 못이 박히고 재단의 늪에 빠져버린다는 사실은 웬만큼 자란 뒤 알게 됐지만, 차라리 규명하기를 단념하는 선택에 이르기까지는 더 오랜 세월이 걸렸지요―이야기를 글로 읽고 있었으니,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도 문자 전달 체계가 존재하리라 믿었던 겁니다. 국적도 시대도 불분명한 어느 상상의 공간이라는 걸 모르는 채, 왕자가 있으니까 당연히 국가라는 것도 있겠지, 문명이 있고 종이와 펜과 잉크가 있겠지, 하고요. 이야기에서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있었을 법하지요. 종이와 펜과 잉크 정도는. 설령 그런 게 없더라도 사람은 나뭇가지 끝에 재를 묻혀 바닥에라도 쓸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인어공주에게 문자에 대한 지식이 없으리라는 생각은 못한 겁니다. 단지 기존 삶의 터전이 해저라서가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 귀족과 성직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듣고 말하기 외에 읽고 쓰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했으리라는 개연성은, 훗날 정규 역사 교육을 받은 다음에나 인식하게 되었고요. 마녀의 힘으로 지느러미가 다리로 변하고, 사람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더욱 납득할 수 없는 장면들이 동화 속에는 태반인데 저는 그런 현실적인 요소들에만 이의를 제기하고 싶었답니다.
한편 설화에는 권력자가 부과한 세 가지 과제를 해결하고―텍스트에 따라 어떤 경우 과제는 일곱 가지, 헤라클레스는 열두 가지에 이릅니다―그 보상으로 왕국을 얻는 청년을 다루는 이야기가 흔한데요, 안데르센도 그런 모티프에 충실한 동화를 쓰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사악한 마법에 걸린 공주가 구혼자들에게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내고 그들을 사형시키기를 반복하는데, 역시 구혼자로 입후보한 주인공 청년을 처리하기 위해 마법사에게 상담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법사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혀보라고 해라. 너는 아무거나, 가령 네 구두 같은 거나 생각하고 있으면 돼’라고 하지요. 공주는 그의 조언대로 구혼자에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혀보세요’라 하는데, 능력 있는 정보원을 길동무로 데리고 있던 청년은 단박에 ‘구두!’라고 말하는 겁니다. 구두에 장갑까지 청년이 연달아 두 번이나 답을 맞혀서 낭패에 빠진 공주가 마지막 문제를 내기 전날 밤, 마법사는 ‘이건 절대 못 맞히겠지. 내 얼굴을 생각하고 있어라’ 귀띔하기에 이릅니다. 다음날 세번째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맞혀보세요’라는 공주의 말에, 구혼자는 길동무가 베어 온 마법사의 머리를 그 앞에 올려놓습니다. 공주는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렸고, 아마 그뒤에 무슨 술책과 변신 장면이 더 이어졌던 것도 같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려는 건 제가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하는 점입니다. 구혼자가 실제로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던 게 아니라 불가사의한 존재인 길동무, 실은 망자의 영혼에게 도움을 받았을 뿐이라는 건 차치하고, 애초에 본질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스핑크스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죽이지만, 거기에는 발이 네 개였다가 다음으로 두 개가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세 개가 되는 게 뭐냐는, 최소한의 서술형 단서라는 게 존재합니다.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맞혀보라는 게, 수수께끼로서 요건 성립이 된다 할 수 있나. 타인의 마음속인데, 주인공이 자신만만하고도 뻔뻔하게 ‘구두!’라고 답하는 순간 출제자는 얼마든지 마음을 바꿔먹고 시치미를 뗄 수 있지 않나. 구두 아니라고 실은 황금 술잔이라고 붉은 장미 한 송이라고, 아니 그보다 뭐였는지 네놈한테 알려줄 까닭도 필요도 가치도 없고 아무튼 틀렸다고, 이놈을 끌어내어 목을 치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사전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증인 노릇으로 구두라는 답을 미리 받아둔 신하들이 있다면 몰라도, 동화에 그런 전후 상황까지 구체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읽을 때는, 읽음의 행위 끝에 도출한 결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물며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를 읽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FBI가 코와 입술과 눈썹에다 손끝까지 미세한 보디사인 리딩 기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기계보다 정확하게 거짓말 탐지를 하고 사실관계를 가리는 일은 가능하나, 그것은 사람 마음속에 가라앉은 빙하 가운데 극히 일부의 꼭대기를 포착하는 데 불과하며, 가짜와 진짜를 가려낸 다음 그 사람이 왜 거짓을 말하게 됐는지 알아내기까지 하려면 좀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할 겁니다. 더 깊은 물밑에 자리한 상대의 생각을 읽는 일은, 그 마음의 복잡성과 가변성으로 인해 대체로 오답을 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모두 오답인 동시에 정답일 수 있다는 마음의 속성을 전제로 시작해야 합니다. 청년의 입에서 구두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공주는 언제든지 머리에서 구두를 치워버리고 완두콩이나 부싯돌을 떠올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답이든 정답이든 간에 뭐라도 답이라는 걸 내놓는 게 미덕 내지 당위로 여겨지는 독서 교육 풍토와, 그에 따라서 주제―눈앞의 이 텍스트는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에 대해 정확하고도 안심되는 길잡이 및 인물 행위에 대한 명료하고도 공감되는 설명 내지 그것의 총합 결론 격인 교훈이 책 안에 모범 답안처럼 직관적으로 제시되기를 기대하는 독해 경향은,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는 않으니 다음 기회로 말하기를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일의 처음은 ‘읽는’ 데에서 비롯했기에, 나는 그 행위의 목적어가 어떤 사태와 사람에 닿아 있다 할지라도, 본질적인 오독을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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