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1

듀나 소설집

저자소개

저자 · 듀나
소설가이자 영화비평가. 1990년대 초, 하이텔 과학소설 동호회에 짧은 단편들을 올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각종 매체에 소설과 영화평론을 쓰면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소설집 『나비전쟁』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두 번째 유모』 『구부전』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 『시간을 거슬러간 나비』 『너네 아빠 어딨니?』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파란 캐리어 안에 든 것』, 단편소설 『바리』, 중편소설 『대리전』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었다』 『우리 미나리 좀 챙겨 주세요』, 연작소설 『제저벨』 『아직은 신이 아니야』 『아퀼라의 그림자』, 장편소설 『민트의 세계』 『평형추』 등과 논픽션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가능한 꿈의 공간들』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여자 주인공만 모른다』 『남자 주인공에겐 없다』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등이 있다.

태평양 횡단 특급


1


내가 태어난 곳은 베이징을 막 지나치는 유라시아 횡단 특급의 B-27번 침대차 2호 객실이었다. 내가 첫 생일을 맞은 곳은 치첸이트사Chichén Itza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을 질주하는 산타 빅토리아호의 식당 칸이었다. 내가 속 좁은 마야인 가정교사에게 시달리며 물리학을 배우던 곳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도버 터널 안에서 미적거리던 플렌테지네트의 별호 2번 객차였고,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군 장교와 첫 키스를 한 곳은 시베리아의 타이가 위로 솟은 고가 철교를 달리는 예카테리나호 지붕 전망실이었다. 나는 지중해 횡단 특급의 기관실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칼레발 가봉행 방탄 열차 안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인도네시아 국경을 통과하는 만덜레이호의 중역실에서 회사 기밀을 만주국 정보부에 팔아넘기려던 남편을 처형했다. 내 인생의 모든 중요한 일들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가끔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철로를 벗어나 단단하고 고정된 땅에 서 있어야 할 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철로에 속해 있었고 철로 또한 나에게 속해 있었다.


나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통치자다. 오대양 육대주 모든 곳에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너비는 겨우 6.8미터밖에 되지 않는 제국. 380년 전에 러시아 어딘가에 설립된 이후로 이 제국은 설립자로부터 그의 아들에게로, 그의 딸에게로, 그녀의 사위에게로, 그의 애인에게로, 그녀의 제자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진 긴 사슬을 따라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이 제국의 정식 명칭은 국제철도회사다. 얼마나 안전하고 지루하게 들리는 이름인가. 얼마나 얌전하고 기만적인가. 만약 교외의 집과 회사를 오가는 평범한 회사원이라면, 그래서 그 짧은 거리를 오가는 데 우리 회사의 철도를 이용하는 평범한 시민이라면, 국제철도회사는 단순히 운송 수단을 제공해주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에 불과하리라. 


그러나 그런 그도 열차에서 내리기 위해 3등 객실에서 빼곡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는 일본인 정치범들과 에스파냐인 망명객들을 지나칠 때면, 자신이 완벽한 치외법권 지대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국제철도회사의 레일과 그 열차들은 우리의 영토다. 우리가 관리하며 우리가 통치한다. 그 평범한 회사원이 열차에 타려고 티켓을 끊을 때, 그는 한 제국으로 들어가는 비자를 받는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려는 바보 같은 시도가 있었다. 42년 전 고려인들이 바로 그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들이 철도 국유화를 선언하고 우리 직원을 역에서 쫓아냈을 때, 회사는 아무런 항의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사는 고려를 지나는 모든 철로들을 차단하고 말없이 기다렸다. 고려인들은 아마 바다를 믿었을 것이다. 아마 가스로 소 내장을 채운 엉성한 풍선이 비행선인가 하는 것도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른 운송 수단들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했음이 분명하다. 넉 달 뒤 수백 명의 아사자가 생기자 그들은 우리에게 항복했고 그로부터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정부가 뒤집혔다. 고려인들은 옛 지도자들의 목을 국제철도회사 개성 지부 건물의 깃대에 매달았다.


고려인들의 만용은 아버지가 즐겨 이야기하는 일화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을 부채꼴 모양으로 앉혀놓고 이 잔인한 이야기를 ‘생쥐와 호박 요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쾌하게 들려주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종종 어떻게 고려인들은 우리 회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었을까 궁금해하곤 했다.


나는 지금 그 모든 일들을 회사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아버지가 뒤에서 조작했다고 믿는다.


2


남편과 나는 아프리카 해변 철도에서 만났다. 코트디부아르 어디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와 만나기 한 달 전,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죽었다. 내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회사를 나에게 물려주었다. 그때 나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장례식 이후 나는 내 어깨에 얹혀진 짐들로 매일같이 허덕거렸고 늘 악몽을 꾸었다. 내 객차를 아프리카 관광 열차에 연결한 것도 최소한 창밖 풍경만이라도 낫게 꾸미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2등 식당 칸에서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내가 국제철도회사의 새 지배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고 그 역시 자기가 만주국에서 간신히 탈출해 온 정치범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우리는 열차에서 만난 젊은이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허물없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내 관심을 끈 것은 대화가 한참 진행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우연히 이야기는 열차 여행으로 흘러갔고 나는 깊은 생각 없이 국제철도회사가 세계사에 끼친 공적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제적인 운송 시설이 모든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적인 영리 회사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국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이 깨지고 세계는 보다 평등해진다는 것. 이 생각의 일부는 아버지가 고용한 가정교사들의 심심하면 내 머릿속에 주입했던 것이었지만 상당 부분은 내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


내 미래의 남편이 될 남자는 나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는 어떤 영리 회사도 주변 상황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맞섰고 나는 회사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만큼 강대하다고 받아쳤다. 우리는 한참 동안 터지게 싸웠다. 


논쟁은 저녁까지 이어졌지만 아무도 이기지 못했다. 대신 그는 나를 14번 객차의 3등석 승객들이 연 신년 파티에 초대했다. 나는 그곳에서 매우 진부한 감정, 그러니까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부잣집 딸이 거친 하층 부류 사람들의 조잡한 삶을 접하게 되면 대부분 거치게 마련인 그런 열광에 사로잡혔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쯤 위였고, 다 합쳐도 평생 동안 겨우 한 달 정도밖에 열차에서 내린 적이 없는 나 같은 어린 애가 보기엔 정말 모든 일들을 다 겪은 남자였다. 만약 지금 그를 다시 만난다면 그의 겉멋 부린 어설픔에 웃음만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는 나를 구슬려 열차 밖으로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갑작스럽게 굳어진 대지 때문에 현기증과 구토에 시달리느라 그 데이트는 결코 로맨틱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3개월 뒤, 나는 그와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보다는 실리 때문이었다. 나는 죽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은 회사 이사들과 맞서기 위해 동료가 필요했다.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이사들에게 적당히 험한 소리를 읊어댈 급진 성향의 남자를 아무나 잡아 남편으로 삼아야 할 판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적당한 자리를 하나 주고 내 부하로 두었다. 그 이후로 데이트 때 상황의 역전이 일어났다. 내가 ‘보도 잠자리’로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 역시 ‘철도인’으로 태어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의 신혼 생활에 대해 그 흔들림만큼 끝없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에게 있어서 열차는 여행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일 수는 없었다. 그는 나와 회사가 목적과 과정을 착각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남편 주장에 따르면 국제철도회사가 이런 정신 나간 사업을 3세기 동안이나 끌고 온 것도 결국 우리 모두가 진짜 미치광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무시했다. 끝없이 불평을 해대고 멀미를 해댔지만 그는 나에게 여전히 쓸모 있었다. 그는 이사들을 불안하게 했고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그들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취할 수 있었다. 남편은 불평쟁이일 때 가장 쓸모가 있었기에, 나는 그가 열차에서 내리려고 할 때마다 막았다.


지치고 지친 그가 엉뚱하게도 자신을 박제로 만들려고 했던 고국 만주국에 팔을 벌린 것도, 이사들이 믿는 것처럼 원래부터 스파이여서가 아니라 단지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땅이 그리웠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슬프게도 그는 동아시아 구석에 붙은 별 볼일 없는 빈국이 국제철도회사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었다.


호주머니가 두둑한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내 개인 금고를 잔뜩 후벼 파고 침실에서 나오는 남편을 중역실로 불러들인 뒤 목뼈를 부러뜨려 죽인 사람은 만덜레이호의 2급 기관사였다. 철로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의 권한 아래 놓여 있었지만 일단 시체가 철로 밖에 버려지면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에 기관사는 우리가 탄 열차가 인도네시아를 벗어날 때까지 시체를 움켜잡고 열어놓은 문 앞에 서 있어야 했다.


열차가 공해에 도달하자 나는 그에게 눈짓을 했고, 그는 콘크리트 블록을 단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 나는 그가 시체를 안고 있는 동안 담배를 물려주고 불을 붙여준 다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입이 무겁고 사다즘과는 거리가 먼, 선량하고 믿음직한 체르키족이었다. 나는 그 뒤로도 개인적인 처형에 그를 종종 기용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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