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9

이중현 시집

저자소개

저자 · 이중현
시인. 1987년 『소설문학』 시 부문 신인상, 1988년 『세계의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물끄러미 바라본 세상』, 『좋아요를 수집합니다』, 『이 앱은 열 수 없습니다』 등이 있고, 동시집으로 『공부 못하는 이유』, 『힘도 무선 전송된다』, 『나는 나』, 동화집으로 『나의 비밀친구』, 『여울 각시』, 『마지막 은어 낚시』 등이 있다.

생활 방식


어느 날 그의 눈에 하늘이 자랐다

사랑을 눈물 흘리며 굽어보는 분이 있다고

전후좌우만 볼 줄 아는 불우한 우리를 찾아와

눈 씻어주는 그분이 있어 이젠 위만 우러러본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무엇이든 만지고 나면 죄를 씻으려는 듯이

반드시 거품 많은 비누로 손 씻어야 하는 사람

검은 넥타이를 매어야 앞날이 잘 풀린다는 사람

빚을 내서라도 쇼핑하지 않으면

해체된 택배 상자처럼 슬픔이 쌓인다는 사람

세상은 어쩔 수 없는 일로 번잡하다


태양이 고열을 앓다가 목숨을 소등한다면

별이 있어도 밤을 켤 수 없는

그 황망한 세계에서 누가 외로움을 밝힐까마는

어쩔 수 없는 일인데

몸은 자신의 그림자에서 도주할 수 없고

목숨은 나날이 누출되어 어둠으로 흐르는데

웃음 한 장으로 흥건한 눈물 닦아 내며

조붓한 사랑 지펴 서로의 체온 데우는 일

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반려


키워도 자랄 수 없는 것

운명이라든가 운명의 반려인 영혼 같은 것


별들도 계절을 타서 외로움을 수놓던 날

찔레 향기 에 꿈틀거리는 밤의 속살을 훔쳐보다가

키워서 자랄 수 있는 재스민을 입양했다


말이 없어도 대화는 울창할 수 있다

그의 체온이 식으면 별을 덮어 주고

그리움이 목마르면 물을 축이며


그는 내 품을 떠날 생각이 없었고

나도 그를 반려로 의심하지 않을 무렵

그를 껴안고 있던 도자기 화분이 깨졌다


키울 수 없는 것의 목록이 길어지거나

그의 몸 냄새를 숨 쉴 수 없다거나

나를 떠나겠다는 파경의 몸짓이거나


나도 금이 가서 의심이 새고 있었다

그를 오래 부둥켜안은 것은

내가 아닌 도자기 화분이었다는 사실


화분을 버리며, 금이 간 나를 버리며

새어 나온 의심을 닦아 낸 자리

내가 그의 반려였는지 다시 의심이 얼룩졌지만


내가 아픈데 당신이 몸져눕듯이

마음 자주 빌려 쓰고 빌려주는 사람이

사람의 반려라는 믿음을 그곳에 키우고 싶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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