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9

김혜순 시집

저자소개

저자 · 김혜순
1979년 『문학과지성』 겨울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또 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음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 『슬픔치약 거울크림』 『피어라 돼지』 『죽음의 자서전』 『날개 환상통』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시 산문집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산문집 『여자짐승아시아하기』, 시론집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 시하다』, 인터뷰집 『김혜순의 말』, 합본 시집 『김혜순 죽음 트릴로지』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미당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형기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삼성호암상 예술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시 부문) 아시아인 최초로 독일 국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영국 왕립문학협회 국제작가,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AAAS) 회원으로 선정됐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학부 명예교수이다.

그리운 날씨


날씨와 나, 둘만 있어

다정했다 매서웠다 날씨의 기분


나는 날씨와 둘만 살아

날씨에 따라 당연히 옷을 갈아입고

춤춰줄까 물구나무서줄까 물어봐


날씨는 오늘 화가 많더니 울었어

나는 그 변덕을 사랑해


화의 날과 수의 날이 동시에 진행되면 너무 좋은 날

손뼉을 치면서 햇빛과 함께 빗줄기 맞으러 나가주지


나는 날씨를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늘 불면이야


날씨와 나 늘 둘이지만

아침이면 말하곤 해


날씨야 내가 너를 열어줄게

멀고먼 곳으로 열어줄게


날씨는 오늘 엄마 사라진 뒤의 나처럼

밝았다 잠들었다 바람 불었다 깨어났다


나 사라진 뒤의 어느 날에도 어제의 날씨처럼 그렇게


연못에 몸을 담그고 머리칼을 강아지처럼 흔들며

내일은 둘이 뭐할까?

미지근한 구름 속에서의 축축한 키스


화내고 파란 병 깨고 여름 구름

내 창문을 쾅쾅 치면 쫓아내고 싶지만


날씨에 촘촘히 박혀 떠나간 나날의 씨앗들이

어디서 활짝 피었는지 궁금하진 않아


오늘 지나고 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날씨에게

하루도 같은 하늘을 준비하지 않은

나의 날씨에게

어제 날씨는 없었던 것처럼

나는 늘 말해

이 세상에는 너와 나 둘이면 충분해


다른 건 필요없어





초저녁


유리잔 속에서 자고 갈래?

파란색 물에 뜬 파란색 샹들리에는 조금 촌스럽지만

그래도 자고 갈래?


자기 전에 물 마실래?

얼굴에 내려오는 수중식물의 가느다란 뿌리

곤충의 다리보다 더 가는 것

괜찮아 그것쯤이야

당신 얼굴 속으로 뿌리내리기는 아주 쉽지

당신 입꼬리를 살짝 올려줄까?

물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

이건 어때?


두 발을 타고 작은 식물들이 올라오는 방식

평온하고 슬픈 망각의 방식

당신 몸에 식물들이 칭칭 감기는 장식


예배하라

식물과 합체된 물의 몸!


당신 입술엔 살짝 파란 거품

흐르지 않는 물에 매일 보태는 눈물

물에 잠긴 흰 새의 몸 냄새

흰색 망각


올빼미가 푸른 밤을 높이 날아가며 본 것

너와 내가 잠든 푸른 유리잔 한 개


잔에 뜬 푸른 얼음처럼 푸른 샹들리에 

그 아래 깊은 물속에

우리


죽은 자들이 전해주는 어떤 나라의 소식


물속에 잠겨 가노라면 있는 나라

블루 라군 롱 드링크 버전

심연에는 우리를 부르는 이들의 수많은 손가락

손가락마다 미끄러운 투명 손톱들


레몬을 깔고 잠드는 시린 밤

우리에게 무관심한 이 슬픔

자기 전에 물 한잔 마실래?


우리를 천천히 들어 마셔버리는 초승달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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