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신경과학자가 나눈 우정, 감각,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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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리에 박힌 질문
2007년 2월 22일
수에게,
…
정말이지 놀라웠던 그 첫 번째 편지에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모로 무척 강렬하고 생생한 편지였어요… 교수님은 편지를 참 잘 쓰십니다—그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친분을 쌓게 되었지요… 그러니 교수님 책도 잘 나올 겁니다. 내 책들도 대부분 동료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나는 책을 모두에게적어도 그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편지’로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내게 서간체는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와 소통의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마 교수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네요.
올리버 색스가 이 편지를 내게 썼을 무렵, 우리는 이미 2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종이 위에 써서 봉투에 넣고 미 우편국을 통해 보낸 실물 편지였다.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50대였고 올리버는 70대였다. 나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신경생물학과 교수였고, 올리버는 신경학 병례집으로 이름을 떨친 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 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우리는 전부 합쳐서 150통이 넘는 편지를 썼고,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받았다.
*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갈림길을 만난다. 그중 어떤 것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선택할 때처럼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저 멀리서 꺾이는 우회로처럼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다가 나중에야 인생을 바꾼 중요한 결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색스 박사에게 ‘정말이지 놀라웠던 그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만 해도, 나는 이 편지가 내 생각과 일, 심지어 정체성에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을 뻔했다.
원래 그 편지는 내 ‘시력 일지’에 적은 글이었다. 나는 마흔여덟 살까지 사시에 입체맹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두 눈의 초점을 한 곳에 맞춘 다음, 양쪽 눈에 입력된 정보를 뇌에서 통합해 단일한 3차원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내 눈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한쪽 눈으로만 보고 다른 한쪽의 정보는 무시했다. 그래서 3차원을 볼 수 없었다. 입체시가 없을 때 세상은 어수선하고 납작해 보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몇 달간 시력 훈련을 받은 끝에 결국 두 눈의 초점을 한곳에 맞춰 입체의 깊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고, 나는 이 놀라운 변화를 일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시력 일대기를 올리버 색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정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색스 박사를 그의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환자에게 깊이 공감하는 통찰력 있는 글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9년 전쯤 우주비행사인 내 남편 댄이 존슨우주센터에서 색스 박사와 만나 안면을 텄다. 그 뒤로 첫 우주선 탑승을 기념하는 행사에 색스 박사를 초대했고, 그가 초대장에 응했다는 소식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행사 때 우리는 고작 5분간 대화했을 뿐이지만, 그날 색스 박사는 내게 던진 질문은 이후로도 계속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나는 시력 훈련을 통해 시각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잇달아 경험하면서 점점 더 자신감 있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었고, 머릿속에서 색스 박사와 몇 번이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지는 그 내적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색스 박사님께,
우리는 1996년 1월 10일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남편 댄 베리가 우주왕복선을 타고 첫 임무를 떠나기 전날 밤이었어요. 우리가 만난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저는 우주선 발사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을 대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저는 제 지각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다소 다르다고, 그건 늘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시였고,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사님은 양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상상할 수 있다고 답했고요. 어쨌든 저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신경생물학 교수니까요. 시각 처리와 양안시, 입체시에 관한 논문을 그간 수없이 많이 읽었었죠. 저는 그렇게 얻은 지식으로 제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어요.
뛰어난 검안사의 조언에 따라 새 안경을 맞추고 매일 시력 훈련을 한 덕분에, 지난 2년간 저는 비로소 두 눈을 함께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시각의 변화는 정말 대단했어요. 이제 세상은 더 둥글고, 더 넓고, 더 깊고, 더 질감이 살아 있고, 더 세밀합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물체 사이의 빈 공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시력은 계속해서 바뀌며 나날이 제게 새로운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터라,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상세히 풀어놓으려 합니다.
여기서부터 나는 내 시력의 일대기를 빽빽한 아홉 페이지 분량으로 쏟아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나의 사시를 발견했으나, 의사들은 시간이 지나면 아마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내가 여전히 사시였던 두 살 때 우리 가족은 코네티컷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예일뉴헤이븐병원의 저명한 안과 의사인 로코 파사넬라에게 진찰을 받았다. 그는 새 안경을 처방하고 내가 두 살과 세 살, 일곱 살 때 총 세 번 안구 근육 교정 수술을 해 주었다. 수술 후 내 눈은 더 똑발라졌다. 하지만 처음에 나는 학교에서 글 읽기를 힘들어했고 자전거 타는 법도 힘겹게 배웠다. 몇 년 뒤부터는 더 이상 그에게 진료받지 않았다.
4학년 때 마지막으로 파사넬라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은 제 안경을 벗기며, 이제 비행기 조종만 빼면 정상 시력인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양안시가 없다는 것을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고, 저는 대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습니다. 제 눈은 더 이상 사시처럼 보이지 않았고, 두꺼운 안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야구 포수 마스크처럼 생겨서 피구의 재미를 앗아가는 거추장스러운 안경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쉬는 시간에 마음껏 뛰어놀 수도 있었고요. 저는 제가 다 치료된 줄 알았습니다.
수술은 미용 면에서 성공적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제 눈은 이제 똑발라졌어요. 가끔 눈이 가운데로 모여도 오로지 부모님만 그걸 알아차렸고, 그럴 때면 이렇게 주의를 주시곤 했습니다. “눈에 힘 줘라….” 먼 곳을 보고 싶으면 양쪽 눈이 서로 멀어지도록 바깥쪽으로 열심히 힘을 줘야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얼굴이 작고 눈이 큰 탓에, 저는 화들짝 놀란 벌레 같은 인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저를 ‘개구리 눈’이라고 불렀어요. 그리 유쾌한 별명은 아니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똑바른 제 눈이 자랑스러웠거든요.
몇 년 뒤 나는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에서 신경생리학 수업을 듣다가 내가 대다수 사람과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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