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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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흙장난에 빠진 아이들을 보면 ‘인간이란 원래 흙을 공부하도록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흙장난만 시작하면 시간도 자기 몰골도 잊었다. 조몰락조몰락 흙을 주무르고 물에 개어 떡을 만들 때면, 잠시의 지루함도 못 참던 아이들이 열반의 경지에 머물렀다. 그런 아이들에게 흙으로 먹고사는 내 팔자가 나쁘지 않아 보일 듯했다. 흙을 공부한 뒤로 흙 덕분에 참 많은 인연이 시작되었고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어왔을 때 “흙 공부해요”라고 답하면, 이 말이 기폭제가 되어 꿈도 못 꾸어본 재밌는 경험과 대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흙에 대해 간직한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모든 인간이 공통분모이기 때문이 아닐까?
흙이 정말 재밌는 것은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흙을 만드는 데 식물과 동물 및 미생물이 맡은 역할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또는 반대로 흙 없이는 식물, 동물, 미생물의 삶을 이해할 수 없기에, 흙 공부는 생태학으로 이어진다. 흙을 이루는 물질의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광물의 유래와 변용에 중점을 두고 흙을 보면 우주를 이루는 원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결정 구조를 만드는 과정과 해체 과정을 살피게 되고, 어느새 지질학에 이르게 된다. 뒤죽박죽인 것은 물질―죽어 있든 살아 있든―만이 아니다. 시간 또한 뒤죽박죽인 게 흙이다. 흙 속에서는 수억 년 전 마그마에서 주조된 광물만이 아니라 물에 녹은 양이온과 음이온이 결합 침전해 생긴 최신의 점토 광물이 섞여 있다. 수만 년 전 죽은 동식물에서 유래한 오래된 유기물부터 조금 전 뿌리에서 분비된 최신 유기물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뒤죽박죽 공존하는 곳이 흙이다.
잠깐 흙이 아닐 뿐인 인간은 그 잠깐의 시간조차 쟁기질―즉 흙을 가는 노동―로 지상에서의 생을 보낸다. 흙은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깊이 경험한 자연이다. 흙 이야기는 농업을 통해 인간이 근육으로 체험한 흙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흙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부분이다. 자연권이면서 동시에 문화권에 속한 것이 흙의 정체다. 이 점은 자연과학자인 나에게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흙을 연구하러 먼 곳을 다녀올 때면, 흙에 대해 새롭게 밝혀낸 과학적 사실만큼이나 흙과 고리 지어진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따라왔다. 하지만 흙의 과학을 논문으로 써내고 토양학 수업에 쓰고 나면, 사람―흙 이야기는 갈 곳을 잃은 채 남아 있었다. 버려지는 것은 먼 곳에서 온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식구들과 텃밭을 가꾸면서, 부모님의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또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 생활과 의식 속에 소리 없이 깊이 들어와 있던 흙을 거듭 발견하게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것은 나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이야기였고, 이 작은 발견들에 반응하는 나의 느낌과 생각 또한 세월과 함께 차곡차곡 쌓였다.
이렇게 지층처럼 축적되는 이야기들이 어느 순간 논문에 넣을 과학 관찰의 결과와 토론 못지않게 가치 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들을 혼자만 즐겼다는 은밀한 기쁨보다는 뱉어내지 못하는 답답함이 더 커졌다. 내가 알게 된 흙 이야기를 게워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도통 경기에 등장할 기회가 없는 후보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은 이야기들에 눈이 갔다. ‘주전으로 불러내려면 내가 뭘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렸고, 2018년 봄 ‘세계 문화 속의 땅과 사람’이라는 1학점짜리 미니 수업을 전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처음 열었다. 재밌어하는 학생들에게 힘을 얻어, 폭과 깊이를 대폭 확장해 2020년 봄에 3학점 수업을 열었고, 그렇게 인간과 지구 사이의 흙, 그리고 사람의 삶과 의식에 깊게 자리잡은 흙을 안정적으로 살필 기회를 얻게 되었다. 수업은 천만다행 학생들의 인기를 누렸고, 2024년 봄에 이 수업으로 나는 우수 학부 강의상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을 쓴 첫째 이유는 이처럼 자연권이며 동시에 문화권에 속한 흙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두 ‘권圈’이 겹치는 곳에 흙이 위치함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만, 인류가 맞닥뜨린 커다란 문제―즉 기후변화, 그리고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수많은 인구가 잘 먹고 잘사는 길―의 중심에 흙이 있음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그러나 누구나 하나쯤은 있을 흙과의 인연을 함께 다룸으로써만 흙이 인류의 문제이기 전에 우리 자신 그리고 나 자신의 문제임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책을 쓰게 된 둘째 이유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음을 흙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토지 이용의 자연과학과 역사를 알아가다 보면 문화권마다 고유한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알게 되고, 이에 대해 섣불리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임을 배우게 된다. 오늘날 대학의 환경과학 교과과정은 지나치게 문제 풀이 중심이다. 그런 방식을 따른다면, 망치를 들면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처럼 학생들은 인간과 자연이 맺은 모든 관계를 풀어야 할 문젯거리로만 보게 된다. 이는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방식의 도전에 담긴 개별적인 특성 외에도 오랜 시간과 세대에 걸쳐 해당 지역과 사회의 지질, 생태, 문화, 역사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연결고리를 간과하게 만든다. 관계맺기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을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서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그랬듯 누구나 흙과의 인연이 있을 것이다. 책의 틈틈이 끼워 넣은 나의 사적인 흙 이야기들 때문에 읽는 분들 또한 흙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좋겠다. 이 책이 독자를 만나고 그들이 누린 흙과의 인연을 들은 기회가 내게 온다면, 나는 더욱 더 다채로워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책을 쓴 셋째 이유는 경이로움이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찬미는 많은 과학 도서에서 볼 수 있고, 이것은 흙을 주제로 한 책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흙이라는 물질 또는 공간에서 물과 기체, 광물과 유기물, 그리고 생명체들이 벌이는 기적 같은 작용뿐만 아니라, 지구의 기후 그리고 생태계와 긴밀히 공조하는 흙에 대해 풀다 보면 책이라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기후변화, 식량 안보, 생태위기라는 시대의 어두운 과제들 때문에, 흙은 경이로운 것만큼이나 우리의 돌봄의 대상이어야 했다. 인간에게 흙이야말로 지구의 가장 친밀한 부분이라는 말은 인간이 흙에 하는 것이 곧 지구에 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다. 흙의 경이로움은 그래서 우리의 책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흙을 중요하게 다루는 환경 생태 책들이 인간과 문명에 대한 고발로 수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자연권과 문화권에 모두 속한 흙에 관해 쓰면서 흙과 나란히 찬미하고 싶은 대상은 인간이었다. 특히 자연과 가장 오래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농부와 세계 곳곳의 토착민이 땅에서 거둔 탁월한 기술적 성취에 찬미와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또한 흙을 통해 자연 속 인간의 자리를 성찰해온 다양한 문화와 흙을 아끼고 궁금해하던,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인류의 이런 성취 중 적잖은 부분이 빠르게 잊혀가고 있거나 이미 잊혔거나 짓밟힌 지 오래인 탓에, 이러한 찬미와 존경은 아픈 것이 되곤 했다.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어려운 과제에서 이루었던 인류의 성취를 마치 없었던 것처럼 만들어버린 무자비한 힘과 그 배후에 있던 인간들이 보여, 인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이내 복잡한 마음으로 바뀌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게 될 때면 그리고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현대의 과학자나 활동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볼 때면 인간이 가진 회복력에 또다시 감탄하곤 했다. 인간에 대한 경탄, 찬미, 그리고 존경이, 토양학자라면 으레 가질 흙에 대한 경탄, 찬미, 존경과 똑같은 무게를 갖게 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책을 쓰고 싶었지만 막상 쓰려니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보내준 수업 평가와 격려에 용기가 들었다. 논문에 담으면 편집자와 리뷰어가 빨간펜으로 그어버릴 이야기, 과학 강의 들으러 온 학생의 잠 깨기용으로나 치부될 이야기에 나 스스로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어 그들을 주전으로 내보내길 두려워하고 있음을, 막상 용기가 생기고 나서야 알았다. 학생들이 준 용기와 내가 품었던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되자 이 책을 쓸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책을 쓰면서 오랫동안 후보로만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진정 주전급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감독으로서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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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짜임과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본다. 흙을 무대로 인간과 자연의 운명이 질기게 엮인 것 중에 농사만 한 것이 없기에, 농사 이이야기로 책의 포문을 열었다. 작물 생산을 위한 흙 관리의 첫째 문제인 토양 비옥도 유지의 문제를 짚는 것이 똥1장과 화전2장을 주제로 한 글이라면, 둘째 문제인 잡초는 쟁기3장를 통해서, 셋째 문제인 물은 논4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여기서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는 농사란 과거를 향하면 인간이 자연을 상대하면서 얻은 가장 오래된 경험이자, 미래를 향해 보면 지구를 망가뜨리지 않고 80억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릴 무한 책임을 짊어진 생태문명의 핵심이다. 이 책을 이루는 씨줄과 날줄은 자연과 인간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똥1장의 문제는 자연 또는 문화 여건에 따라 사람 똥이나 가축 똥 중 하나에 방점을 두어야 했던 과거의 농업 문명을 배경으로 다루어지기도 하고,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농업 생산력 증대에 필수적이었지만 한편으론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등극한 질소 비료의 문제로 다루어지기도 하며, 먹을거리 생산을 지구의 희생과 교환하지 않는 성숙한 문명을 향한 시작점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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