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웹진 나비http://nabeeya.yes24.com/ko 문화웹진 나비 (http://nabeeya.yes24.com//)문화웹진 나비http://nabeeya.yes24.com/테일러의 ‘불온한 산책자’<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4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_%ED%91%9C%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여는 글<br /> 철학자들은 죽었는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철학자들은 죽었는가? 철학자가 9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졸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다큐멘터리 &lt;성찰하는 삶<sup>Examined Life</sup>&gt;을 세상에 내놓으며 이 두 가지 질문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았다. 첫 질문은 철학을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활동으로 보는 일반인의 시각을 반영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우리 다큐멘터리가 역사물로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투자할 시간도, 추적할 인내심도 없는 유별나고 무모한 기획 말이다.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한탄하게 된다.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힘과 한계를 연구하는 분야고, 우리가 집단으로 살아가는 환경에 자리 잡은 핵심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분야다. 이런 문제는 기본적이지만 쉽게 다루기 힘들다. 그럼에도 두 번째 질문은 철학자들을 피곤한 사람으로 만든다. 다르게 보면 호기심과 교양, 역동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을 그런 사람들인데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학이 이처럼 곰팡내 나는 분야라는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특히 오늘날 지성인을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반<sup>反</sup>지성주의<sup>anti-intellectualism</sup>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 같은 나라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철학자들은 문화와 정치에 비교적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텔레비전은 수십 년 동안 철학 토론을 방송하고 있는데, 이런 오랜 전통이 일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인문학이나 비판적 사고, 예술 등을 강조하는 인문교육을 멀리하고 시장 친화적 분야를 가까이하는 흐름이 철학의 대의를 훼손하고 있다. 물론 철학이 전문화되고 철학의 언어가 협소해지는 현실도 이런 상황에 이바지했다. 일반 대중은 오늘날 진행되는 학문적 논쟁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별난 세계의 신비한 이야기 정도로 여긴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한번쯤은 철학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자구책을 찾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나 우리 세상을 이해할 통찰을 구할 때 [철학 대신] 과학을 바라본다는 얘기다. 동시에 통신 기술은 끈질긴 &lsquo;연결성<sup>connectivity</sup>&rsquo;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연결성은 종종 덧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에게 황홀감과 고통을 안겨 준다. 우리는 이런 황홀감과 고통에 몰두하면서 인내심과 지구력을 잃어버렸다. 철학이 인도하는 독특한 명상과 대화에는 이런 인내심과 지구력이 반드시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큐멘터리 &lt;성찰하는 삶&gt;은 이러한 단절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lt;성찰하는 삶&gt;은 영상과 단순한 대화법으로 철학과 일상을 연결한다. 이 제목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명한 격언 &ldquo;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rdquo;를 가리킨다.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탄생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겉으로 드러난 현상<sup>appearances</sup>, 창조의 기원, 좋음<sup>善</sup>의 의미, 대중적 지혜의 변덕스러움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가리켜 영원한 모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찰하는 삶은 정말 어렵다. 성찰하는 삶 때문에 많은 사람이 회의에 빠져 생활이 마비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광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성찰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혼란에 빠진 사회의 공분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소크라테스 생애에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삶은 열정과 용기가 아로새겨진 매우 소중한 삶이며 보상도 따르는 삶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를 본보기로 삼는다.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ldquo;하늘에서 내려오는 것&rdquo;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를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열정을 다해 토론을 벌였다. 사람들이 성가신 나머지 근거도 없는 가정이나 주장을 내세우며 장난기 섞인 그의 엄밀한 논증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가정이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두루 다니며 철학을 하려는 충동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 살아남아 루소는 이 충동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sup>Reveries of a Solitary Walker</sup>』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우울한 산책으로, 임마누엘 칸트는 유명한 정시 산책으로, 발터 벤야민은 수수께끼 같은 도시의 한량으로 표현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철학을 하려고 했던 니체는 『우상의 황혼<sup>Twilight of the Idols</sup>』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ldquo;늘 앉아만 있는 삶은 실제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다. 걸으면서 도달한 사고만이 가치가 있다.&rdquo; 그러나 철학적 사색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집이나 대학 강의실로 들어갔고 서가에도 자리를 잡았다. &lt;성찰하는 삶&gt;은 철학자 여덟 명을 거리로 초대한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자기 생각을 사람들과 나누게 한다. 철학을 다시 밖으로 불러 내 철학과 산책이 오랫동안 맺어 왔던 중요한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학자의 산책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역사적 선례를 떠올려 보면, 철학자의 산책에는 철학의 과거가 살아 숨 쉰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기법 면에서 보자면 산책 모티프는 움직임과 몸짓, 다양한 장면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다. 덕분에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징적으로 산책은 철학을 상아탑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들어가게 한다. 정치와 문화의 관점에서 이 대화들이 펼쳐지는 배경은 공공 공간이 줄어드는 사회며, 속도와 효율성을 숭배하는 사회가 된다. 동시에 산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즉 예측할 수 없는 발견이나 우연한 마주침이 빚어내는 조용한 성찰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책 접근법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이 접근법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동차나 노 젓는 배, 휠체어 등, 다른 이동 수단을 활용하는 세 차례 짧은 여행을 기획했다. 이런 이동 수단으로 처음 내구상은 확대되고 현대화됐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sup>Judith Butler</sup>는 내 동생 수나우라 테일러<sup>Sunaura Taylor</sup>와 통찰력 있는 대화를 나누며 이 과정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산책은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산책의 의미에 도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t;성찰하는 삶&gt;을 구상하면서 나는 사회 문제나 윤리 문제를 주로 다루는 사상가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우리의 집단 환경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의 핵심에는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다는 내 신념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모두 반영한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철학 분야가 많다. 언어철학과 논리학, 과학철학, 현상학, 심리철학 같은 분야 말이다. 이 책은 포괄적인 철학 개론서가 아니다. 내가 원한 것은 지역과 문화, 지적 전통 등이 서로 달라 한데 모이기 쉽지 않은 여러 사상가를 만나고 그들의 시각이 가진 특징을 파악하면서 주제의 통일성을 얻는 것이었다. 나는 분석학이나 실용주의, 공리주의의 전통에 있는 사상가와 대륙 철학, 정신분석학, 퀴어 이론,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해체주의처럼 이른바 &lsquo;학설&rsquo;로 분류되는 이론에 관련된 사상가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내 사유에 오랫동안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이 기획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연구가 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시청자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읽은 피터 싱어<sup>Peter Singer</sup>의 『동물 해방<sup>Animal Liberation</sup>』은 내게 채식주의를 이해할 윤리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 &lsquo;페미니스트&rsquo;와 &lsquo;여성&rsquo;(혹은 문제가 된다면 &lsquo;남성&rsquo;)의 의미를 알려고 씨름하던 십 대에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sup>Gender Trouble</sup>』을 꼼꼼하게 읽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다룬 마사 누스바움<sup>Martha Nussbaum</sup>의 연구를 접하고 나서는 장애인 문제를 어떤 식으로 사고해야 하는지 알게 됐고 수나우라의 경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다큐멘터리 &lt;지젝<sup>Žižek</sup>&gt;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함께 고생한 슬라보예 지젝<sup>Slavoj Žižek</sup>이나, 마이클 하트<sup>Michael Hardt</sup>는 내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던 가정들을 재평가하도록 끈질기게 자극했다. 코넬 웨스트<sup>Cornell West</sup>와 콰메 앤서니 애피아<sup>Kwame Anthony Appish</sup>는 지역적인 것과 전 세계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인종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지젝과 하트도 이들만큼이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분야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시기에 공교롭게도 대학원에서는 아비탈 로넬<sup>Avital Ronell</sup>과 이미 고인이 된 자크 데리다<sup>Jacques Derrida</sup>의 공동 강좌가 개설되었다. 당시 나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강의가 큰 영감을 주었다. 나는 영화와 철학에 늘 독특한 매력을 느낀다. 철학의 여러 이론들이 까다로운 사안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 세상을 새롭게 볼 기회를 준다면 영화는 주변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변화시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비슷한 능력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철학은 논증 전개 과정이 고도로 전문화돼 있고, 그 과정에서 분석을 위해 사용하는 범주도 언뜻 보면 너무 복잡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ldquo;위대한 철학자들이 품고 있던 핵심 전망은 본래 단순하다.&rdquo; 언젠가 이사야 벌린<sup>Isaiah Berlin</sup>이 버트런드 러셀<sup>Bertrand Russell</sup>을 인용하며 한 이야기인데 내 생각도 그렇다. 철학자들이 가진 기본적인 힘impetus이나 통찰을 제시하되,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든 말은 모두 빼고 일상의 경험과 관심사가 배어나오게 정리해 제시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사실 사람들이 철학을 하면서 강한 전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처음에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개념이 갑자기 분명해져 좀처럼 헤아릴 수 없던 문제나 상황, 감각이 완벽하게 해명될 때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 정리해 놓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감격을 여러 번 맛보았다. 독자들도 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진리의 전모를 파악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순간을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사상가들이 비범한 지성과 집중력,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때로는 엉뚱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됐다. 또한 사상가들은 자기 사상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종종 우리 문화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복잡한 사상을 일반인에게 쉽게 전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력하고, 공개 강좌를 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며, 유선방송 뉴스쇼에 초대 손님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들은 학문과 지식의 민주성을 지키는 투사인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철학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다른 철학자들과 서로 논쟁이 될 만한 주제를 골랐고, 모든 대화가 그 주제에 매우 핵심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폭넓게 진행됐다. 동시에 이 기획에서는 모든 철학자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불평등과 박해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고 타인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덧붙여 나는 인터뷰 무대가 단지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터뷰의] 핵심 성격을 드러내는 곳이 되도록 노력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지나가는 행인들이 [우리의 토론에] 개입해 주길 바랐으며, 사소한 것들이 주제에 대한 내 상상력에 불을 지펴 주길 원했고, 장소의 지정학이 우리가 갈 수 있고 갈 수 없는 길을 결정해 주길 기대했다. 피터 싱어의 소비 윤리나 슬라보예 지젝의 생태처럼 어떤 경우에는 논제를 확정하는 순간 저절로 촬영 장소가 결정됐다. 피터 싱어는 현명하게 명품 쇼핑 거리인 맨해튼 5번가에서 촬영하자고 직접 제안했고 슬라보예 지젝의 경우 논제를 정하자마자 쓰레기 처리장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무대들은 인터뷰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마이클 하트와 맨해튼 센트럴파크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배를 탄 것과 코넬 웨스트와 차를 타고 맨해튼을 가로지른 것도 그렇다. 하지만 모든 무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 우리가 계획할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한 반응과 통찰을 이끌어 냈다. 이 기획 덕분에 우리는 내가 점유한 공간과 &lsquo;나&rsquo;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공간은 우리를 틀 짓고,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의 물리적 움직임을 인도하고, 우리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사유 과정에 개입하며,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형성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학자들과 산책을 하며 어디가 됐든 90분에서 네 시간 분량의 영상을 촬영했지만 결국 그렇게 오랫동안 나눈 대화를 10분 분량으로 정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예리하고, 도발적이며, 해학적인 장면을 많이 잘라내야 했다. 잘려나간 장면은 다른 매체를 통해 전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편집 과정의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영화는 장점도 많으나 내용을 압축해야 하는 구성상의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터뷰 내용을 모두 제시해 대화의 어감을 잘 전달하고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독자들은 나름의 리듬에 맞춰 명상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럼없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고자 했지만, 그 대화를 책에 담을 때는 좀 더 엄격한 산문 형식에 맞게 재구성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담긴 대화들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코넬 웨스트가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것처럼, 총체성이나 절대 진리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낭만적 욕구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시각이 도덕적 상대주의의 수렁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온한 산책자』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시각은 오히려 지적인 탐구, 연민, 그리고 정치적 헌신이라는 광활한 윤리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이것이 『불온한 산책자』가 전하는 주된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모든 것을 다 다루지도 않으며, 여기서 다루는 어려운 문제에 뚜렷한 답을 제시하는 체하지도 않는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면 철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오히려 그들을 처음 철학으로 이끌었던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도덕적 분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상은 언제나 사람과 시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철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그들을 끝없이 탐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 책에 들인 노력으로 사람들이 잠시라도 쉬면서 자기 신념이 어디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윤리적 가정과 선입견에 의문을 제기해 보거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재고하거나, 어떤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만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이 책을 읽은 뒤에 사람들이 일상에서 철학을 실천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히고 그 훈련에서 억누를 수 없는 큰 즐거움을 맛본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2009년 애스트라 테일러<sup>Astra Taylor</sup></p> <hr /> <p>&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1장 코넬 웨스트: 진리</span><sup><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truth</span></sup></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size: smaller">코넬 웨스트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교수로 『뉴스위크<sup>Newsweek</sup>』는 그를 가리켜 &ldquo;저항하는 달변의 예언가&rdquo;라고 했다. 최근의 저서 『외줄 위에 놓여 있는 희망<sup>Hope on a Tightrope</sup>』에서 웨스트는 인종과 리더십, 믿음, 가족, 철학, 사랑, 봉사 등 미국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이 논평하고 있다. 웨스트의 또 다른 책으로는 『뉴욕 타임즈<sup>New York Times</sup>』의 베스트셀러로 꼽혔고 &ldquo;전미도서상<sup>American Book Award</sup>&rdquo;을 받기도 한 『인종 문제<sup>Race Matters</sup>』와 『민주주의 문제<sup>Democracy Matters</sup>』 등이 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맨해튼에 땅거미가 깔릴 무렵 우리는 코넬 웨스트를 태우려고 도시 한복판의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코넬 웨스트는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sup>Simon Critchley</sup>와 함께 뉴스쿨<sup>New School</sup>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마침 같은 날 우리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코넬 웨스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사이먼 크리츨리는 뉴스쿨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이) 내 원래 기획은 산책을 하며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지만 드라이브를 하면서 인터뷰하는 것도 산책 개념을 현대화하는 적절한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이보다 더 여유로운 여행이 또 어디 있을까? 카메라맨은 앞좌석에 앉았고 보조 카메라를 든 음향 기사와 웨스트가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퇴근 시간 붐비는 거리를 헤치고 나가면서 최선을 다해 대화를 이끌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웨스트</strong> 마침내 이렇게 빅애플(Big Apple, 뉴욕 시의 별칭. 옮긴이) 한가운데서 만나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테일러</strong> <em>대화 주제를 미리 정해 놓지 않았는데, 주제를 몇 가지 제시해도 될까요? 진리나 믿음, 사랑&hellip;&hellip;, 이런 건 어때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진리가 좋겠습니다. 그게 좋아요. 아주 마음에 드는 주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좋아요. 그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무거운 주제네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는 시동을 걸고 번화가 드라이브를 시작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ldquo;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rdquo;</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 생각에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예요. &ldquo;진리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려고 씨름합니까?&rdquo; 테오도어 아도르노<sup>Theodor Adorno</sup>의 말이 맞아요. 아도르노는 진리의 조건은 고난이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리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죠. 그래서 우리는 삶의 방식으로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나요? 세상에 일련의 사물에 부합하는 일련의 명제가 있다면 그것들과 대립하는 그런 진리가 있죠.</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주제를 결정하니 마음은 벌써 플라톤을 향해 달려가네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렇죠. 나도 사람들이 버트런드 러셀보다는 플라톤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비범한 분석철학자 러셀은 진리란 실제로 세상의 사물에 부합하는 명제에 관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반면 플라톤은 늘 진리를 삶의 방식과 연결된 것으로, 특정한 존재 양식으로 이해했고요. 플라톤은 우리에게 파이데이아(paideia, 고대 그리스에서 파이데이아는 자녀 양육, 또는 교육으로 폭넓게 정의된다. 크세노폰<sup>Xenophon</sup>은 파이데이아를 &ldquo;사람을 가르쳐 인간의 참된 모습, 진정한 본성을 갖추게 하는 과정&rdquo;이라고 정의했다)에 함께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도 모든 진지한 철학적 기획의 중심에는 결국 파이데이아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이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나요? 플라톤이 볼 때 파이데이아는 생성<sup>becoming</sup>에서 존재<sup>being</sup>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 과정의 특징을 이렇게 봅니다. 피상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경박한 것에서 진지한 것으로, 나아가 자아를 갈고 닦아 현실과 역사, 필멸성과 씨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성숙입니다. 물론 플라톤의 경우에도 생성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은 영혼이 진정한 본성으로 돌아서서 특정한 인격을 갖추게 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존재 양식으로 이해하는 나 역시 고전 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셈이죠. 따라서 철학은 삶의 양식에 더 가까워집니다. 삶의 양식은 담화 양식과는 대립하는 것이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그럼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면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 기획의 제목이 &ldquo;성찰하는 삶&rdquo;입니다. 우리는 지금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큰 화면에 옮겨 놓으려고 노력하는 셈이죠.</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좋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소크라테스 방식으로 성찰하고 있습니까? 플라톤은 『변명<sup>Appology</sup>』(『소크라테스의 변명』,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1999) 38a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ldquo;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rdquo;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심문할 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당신이 암암리에 갖고 있는 가정과 논리 정연하지 못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플라톤은 철학이란 죽음에 대해 명상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죽음은 사건<sup>event</sup>이 아닙니다. 삶이 끝나는 사망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없으면 다시 태어남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변환<sup>transformation</sup>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죽는 법을 어떻게 배우나요? 물론 몽테뉴도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sup>To Philosophize Is to Learn How to Die</sup>」이라는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죽는 법을 배우지 않고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법입니다. 죽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옛 자아를 더 나은 자아로 바꾸어야 당신은 실제로 더 열심히, 더 비판적으로,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죽는 법을 배우는 일과 변화하고 변환을 맞이하는 일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당신 세계의 위아래가 바뀌고, 당신의 세계가,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년~1853년.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슐레거 형제, 피히테, 셸링 등과 친분을 다졌으며, 그들과 함께 초기 낭만파 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여기서 코넬 웨스트는 『위 아래가 뒤바뀐 세상<sup>The world turned upside down</sup>』이라는 제목이 붙은 루트비히티크의 희곡을 언급하고 있다. 옮긴이)가 자신의 유명한 희곡에서 강조하는 방식으로 뒤집히면 당신은 새로운 자아를 갖게 됩니다. 진리와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옛 자아가 죽고 당신이 사랑하게 된 또 다른 자아와 깊은 관계를 맺는 새로운 자아의 출현을 뜻하니까요. 이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사랑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로 해요. 생각하기에 따라 사람들은 사랑이 적절한 철학 개념이 아니라고 볼 수 있어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니요, 사랑은 모든 철학적 담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해 말하려면 에로스<sup>eros</sup>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철학이 사실상 소피아<sup>sophia</sup>를 기반으로 하는 지혜 탐구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 탐구는 지혜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구체적인 인간과 대립하는 추상적인 형상을 사랑합니다. 이 점에서 나는 플라톤을 비판합니다. (웨스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본다. 거리는 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로 흘러넘친다.) 아, 무슨 개막식이 있나 보네요. 멋있지 않습니까? 길 양쪽으로 사람들이 늘어서 있네요. 이게 뉴욕입니다. 레드 카펫이며 온갖 것이 다 있죠!<br /> 에로스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자전적 방식으로 에로스를 정의합니다. 한편으로는 부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창적이기도 하죠. 플라톤은 『향연<sup>Symposium</sup>』(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0)에서 사랑과 씨름하는 가운데 에로스를 정의합니다. 알다시피 『향연』은 사랑을 다룬 위대한 책이랍니다. 에로스는 중요합니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면 철학적 사유는 없습니다. 이 점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나는 철학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좋아해요.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ldquo;철학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rdquo;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철학은 살면서 겪는 경험, 말하자면 거리의 삶, 다양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그게 철학의 전부죠. 거리 철학을 굳이 도시의 철학으로 제한하고 싶지는 않아요. 시골에서 할 수도 있거든요. 철학은 근본적으로 자기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는 방식에 대한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분수에 맞게 사는 삶을 뜻하고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나는 철학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유한한 상황을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lsquo;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rsquo;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우리는 대소변 사이에서 깃털 없이 태어나 두 발로 다니면서 의식도 있고 언어도 사용하는 피조물입니다. 우리 몸은 언젠가는 땅 속의 벌레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먹이가 되겠죠.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욕망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바라는 욕망이지요. 물론 우리는 신념을 가진 존재기도 합니다. 신념이란 확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다양한 노력, 여러 형태의 우상 숭배라 할 수 있죠. 한편으로 당신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화를 합니다. 또한 구조와 제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합니다. 사람들은 책임 있는 엘리트들에게 왕, 여왕, 봉건영주, 기업 엘리트, 정치인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이런 엘리트에게 사람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맡기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한편으로는 죽음과 신념과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하고, 신념이 있음에도 대화하며,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합니다. 그렇다면 철학 자체는 죽음 앞에서 욕망과 씨름하고, 신념 앞에서 대화하려 노력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비판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철학은 지배와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제국주의 권력, 국가 권력 앞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매우 허약한 실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합니다. 집중화된 권력은 그 권력 아래 영향 받는 사람들을 결코 책임지지 않거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m>철학은 &ldquo;권력을 향해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rdquo;이라는 말인가요?</em></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권력 없는 사람들에게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알다시피 권력 있는 사람들만 탐욕이나 증오심, 두려움, 무지를 독점하는 게 아니니까요. (빨간 불이 들어와 차를 세웠다. &lt;뉴욕 공공 도서관<sup>New York Public Library</sup>&gt; 앞이었다. 도서관 계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세요. 여기서 힙합 그룹을 보게 되네요. 힙합에서도 저런 걸 브레이크댄스라고 하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어젯밤 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힙합 대가들이 모두 모여 네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도 방금 전 당신 시디를 봤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t;잊지 못할 계시 여행<sup>Never Forget: A Journey of Revelation</sup>&gt; 말이군요. 프린스<sup>Prince</sup>와 &lt;아웃캐스트<sup>OutKast</sup>&gt;의 안드레3000<sup>Andr&eacute;3000</sup>, 위대한 고<sup>故</sup> 제럴드 레버트<sup>Gerald Levert</sup>, &lt;데드 프레즈<sup>Dead Prez</sup>&gt;의 엠 원<sup>M-1</sup>, 케이알에스 원<sup>KRS-1</sup> 등과 함께 만든 앨범입니다. 전부 예언적이고 진보적이고 비범한 힙합 아티스트들입니다. 알다시피 케이알에스 원은 철학자이고요.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거리 생활을 하다 힙합 1세대가 된 사람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는 글,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hr /> <p style="text-align: center">|철학자 소개|</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저항하는 달변의 예언가&rdquo; 코넬 웨스트<sup>Cornell West</sup></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C%BD%94%EB%84%AC%20%EC%9B%A8%EC%8A%A4%ED%8A%B8_s(1).jpg" />당신은 한편으로는 죽음과 신념과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하고, 신념이 있음에도 대화를 하며,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합니다. 그렇다면 철학 자체는 죽음 앞에서 욕망과 씨름하고, 신념 앞에서 대화하려 노력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비판적 성향을 의미하게 됩니다. 철학은 지배와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제국주의 권력, 국가 권력 앞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매우 허약한 실험에 생명을 불어넣는 셈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철학의 변두리에 거주하는 해체주의자&rdquo; 아비탈 로넬<sup>Avital Ronell</sup></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C%95%84%EB%B9%84%ED%83%88%20%EB%A1%9C%EB%84%AC_s(1).jpg" />당신은 타자를 안다거나 파악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없습니다. 타자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그들을 죽일 준비가 된 겁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lsquo;그래, 저들은 이런저런 일을 저질렀지. 그들은 악의 축이야. 그러니 폭탄 몇 개를 떨어트려도 돼.&rsquo; 그러나 당신은 그들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다른 면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때 &lsquo;다른 것&rsquo;이란 당신이 가진 이해로는 침범할 수 없는 타자성을 뜻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rdquo; 피터 싱어<sup>Peter Singer</sup></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D%94%BC%ED%84%B0%20%EC%8B%B1%EC%96%B4_s(1).jpg"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는 늘 비상사태고 위기입니다. 날마다 어린 아이 2만 7천 명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질병으로 죽어 갑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분개하면서도 굳이 현실을 바로 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풍요롭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 바로 앞에 놓인 상황 너머로 확장되지만 늘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이방인을 위한 철학자&rdquo; 콰메 앤서니 애피아<sup>Kwame Anthony Appiah</sup></strong><sup><br /> </sup><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C%BD%B0%EB%A9%94%20%EC%95%A4%EC%84%9C%EB%8B%88%20%EC%95%A0%ED%94%BC%EC%95%84_s(1).jpg" />사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맞대며 교류하는 사람들은 고작 백여 명이지만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은 60억 명에서 70억 명에 이릅니다. 우리는 그들을 볼 수 없고 간접적으로만 영향을 주죠.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정의론의 새로운 영토 개척자&rdquo; 마사 누스바움<sup>Martha Nussbaum</sup></strong><sup><br /> </sup><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B%A7%88%EC%82%AC%20%EB%88%84%EC%8A%A4%EB%B0%94%EC%9B%80_s(1).jpg" />장애인과 노약자, 빈곤층, 동물은 정의의 새 영토가 될 겁니다. 정의론은 이제 막 이 세 영역에 들어와 새로운 땅 다지기에 나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계급과 지위, 성 평등과 같은 기존의 많은 문제를 잘 해결해 왔습니다. (&hellip;) 그러나 이 세 쟁점을 다루려면 이론은 새로운 종류의 압력을 받게 되고, 우리는 더 이상 기존의 이론적 구조에 의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의를 생각하는 방식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세계화 시대의 혁명가&rdquo; 마이클 하트<sup>Michael Hardt</sup></strong><sup><br /> </sup><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B%A7%88%EC%9D%B4%ED%81%B4%20%ED%95%98%ED%8A%B8_s(1).jpg" />우리는 좌파가 합법성을 확보하려면 혁명을 포기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좌파에게 남은 것은 저항과 비판, 시민 불복종입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부정적인 소명만 남은 셈이지요. (&hellip;) 좌파가 이런 비판적인 역할을 스스로 떠맡게 된 이유는 바로 좌파가 혁명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좌파는 철저하게 방어적이고 비판적인 입장에 갇혀 버린 것 같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세계 지성계의 슈퍼스타&rdquo; 슬라보예 지젝<sup>Slavoj Žižek</sup></strong><sup><br /> </sup><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C%8A%AC%EB%9D%BC%EC%98%88%EB%B3%B4%20%EC%A7%80%EC%A0%9D_s(1).jpg"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으로 규정했지요. 나는 같은 이유에서 생태가 서서히 민중의 새로운 아편이 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무슨 뜻이냐고요? 우리는 종교에서 완벽한 권위를 기대하죠. 신의 말이니까 따지지 말라는 겁니다. 종교는 이처럼 궁극적인 권위를 제시합니다. 어떤 조치나 금기, 명령을 신성한 계명이라고 정당화한다면 논쟁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나는 오늘날 생태가 점점 더 궁극적인 통제 수단이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ull; <strong>&ldquo;퀴어 이론의 창시자&rdquo; 주디스 버틀러<sup>Judith Butler</sup></strong><sup><br /> </sup><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9" height="1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3_%EB%B6%88%EC%98%A8%ED%95%9C%20%EC%82%B0%EC%B1%85%EC%9E%90/%EC%A3%BC%EB%94%94%EC%8A%A4%20%EB%B2%84%ED%8B%80%EB%9F%AC_s(1).jpg" />우리 모두가 의지와 상관없이 폭력적인 침해를 받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불확실성이라는 감각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그 불확실성을 구현하길 바랍니다. 그렇게 자신들은 불확실성에서 보호받고 있다거나 그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끼고 싶은 거죠. (&hellip;)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몸으로서 우리는 취약하다는 점입니다. 몸은 스스로 움직이는 전동기도 아니고 자기 충족적이지도 않습니다.</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애스트라 테일러</strong><sup>Astra Taylor<br /> </sup>애스트라 테일러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2005년에 만든 &lt;지젝<sup>Zizek</sup>!&gt;은 2007년 『가디언』의 평론가 피터 브래드쇼가 꼽은 10대 다큐멘터리에 선정됐으며, 테일러는 2006년 『필름메이커 매거진』이 뽑은 &ldquo;주목해야 할 독립 영화 감독 25인&rdquo;에 선정됐다. 열세 살까지 공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덕분에 &ldquo;매일 아침 하얀 캔버스를 마주하는 느낌&rdquo;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br /> 『불온한 산책자』의 바탕이 된 다큐멘터리 &lt;성찰하는 삶<sup>Examined Life</sup>&gt;을 찍을 당시 애스트라 테일러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lt;성찰하는 삶&gt;은 &ldquo;영혼에 이로운 영화&rdquo;(『필름메이커 매거진』)에서부터 &ldquo;철학을 섹시하게 보여 주는 영화&rdquo;(『글로브 앤 메일』)라는 평을 두루 받았다.&nbsp;&nbsp; <br /> 뉴스쿨에서 인문학 석사를 마치고 조지아 대학교와 뉴팰츠 뉴욕 주립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네이션』과 『어드버스터』 등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2011년 월가 점령 시위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며, 시위 전개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녀의 현실 참여적 성향은 이 책의 전반적인 방향을 설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한상석<br /> </strong>대학과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시장체제』, 『나를 찾아온 철학씨』, 『어떻게 성숙한 자답게 살 수 있는가』, 『모두스 비벤디』, 『문명 이야기 1, 2』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17 오전 11:12:00《236》초등학생에게 데리다의 ‘해체’를 가르치겠다고?!<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300" height="264"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6/%EC%B2%A0%ED%95%99%EC%9E%90%EA%B0%80%20%EB%93%A4%EB%A0%A4%EC%A3%BC%EB%8A%94%20%EC%B2%A0%ED%95%99%20%EC%9D%B4%EC%95%BC%EA%B8%B0%20%EC%B4%9D%EC%84%9C.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font face="맑은 고딕">2010년 6월 26일<br /> <span style="font-size: medium">&lsquo;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rsquo; 총서</span>(자음과모음)를 읽고</font></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래전 헌책방에서, 자음과모음이라는 출판사가 낸 &lsquo;철학자가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rsquo;라는 이름의 총서물 가운데 두 권을 발견하고 기가 막힌 적이 있었다. 이미 70여 권 넘게 나온 이 총서 가운데 내가 발견한 것은 서정욱의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2007)와 강용수의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2008)이다. 두 권은 각기 이 총서의 52번과 72번으로 출간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학 교수가 알기 어려운 철학을 쉽게 풀이하는 책을 쓰거나 강의를 하는 것은 본연의 임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총서처럼 철학 교수들이 초등학생들에게 데리다의 &lsquo;해체&rsquo; 개념과 벤야민의 &lsquo;복제&rsquo; 이론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면, 문제는 좀 다르다. 물론 두 책의 표지나 띠지, 그리고 표지를 열면 바로 볼 수 있는 발간사 어디에도, 이 총서가 초등학생을 위해 기획되었다는 설명은 없다. 그러나 주로 어린이용 동화책에 이용되는 큼직한 판형과 활자는 물론이고, 본문 가운데 들어 있는 &lsquo;총천연색 전면 삽화&rsquo;들은 이 책이 중․고등학생용도 못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욱 명확한 증거는 데리다와 벤야민의 철학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지은이들이 선택한 기술 방법이 &lsquo;학습 동화&rsquo;라는 점이다. &lsquo;동화로 저학년에게 철학 개념을 가르치기&rsquo;, 아마 이것이 이 총서의 핵심 개념이자, 판매 전략일 것이다.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의 여주인공이 누군가를 &lsquo;중학생 언니&rsquo;로 지칭하고,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군가를 &lsquo;6학년 형&rsquo;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이 총서가 초등학생용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이 총서는 주인공의 나이나 학년을 절대 밝히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지은이들은 어쩌자고 초등학생들에게 데리다의 이름과 그의 &lsquo;로고스 중심주의&rsquo;니 해체니 하는 것을, 또 벤야민의 이름과 그의 &lsquo;아우라&rsquo;니 &lsquo;정치의 미학화&rsquo;니 하는 것을 가르치겠다고 나선 것인가? 『데리다가 들려주는 해체 이야기』와 『발터 벤야민이 들려주는 복제 이야기』에서 한 대목씩을 뽑아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00ff"><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지난번에 아줌마가 언어에 대한 해체 이론을 주장한 사람이 데리다라고 했잖니? 데리다는 철학의 흐름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하는 사람인데&hellip;&hellip;.&rdquo;<br /> &ldquo;포스트모더니즘이오.&rdquo;<br />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말인데 자세히는 알지 못해서 아줌마에게 다시 여쭤 볼 수밖에 없었다. <br /> &ldquo;아 그걸 먼저 설명해야겠구나. 포스트라는 건 &lsquo;무엇 뒤에&rsquo;라는 뜻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 후에 나타난 이념이라고 할 수 있지. 모더니즘 시대는 보통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말하는데, 그 지나친 이성 중심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다. 데리다는 바로 그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인 거지.&rdquo;</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ff"><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벤야민은 경험<sup>Erfahrung</sup>과 체험<sup>Erlebnis</sup>을 구분해. 경험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면 체험은 부서진 조각처럼 흩어져 있어. 유식하게 말하자면 파편화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점에서 전통과 공동체의 의미가 없어진 대중예술에는 경험이 아닌 체험만이 있다고 할 수 있어.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각 작용은 매번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에 민감해지면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고 했어.&rdquo;<br /> &ldquo;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rdquo;<br /> &ldquo;그럼 예를 들어 볼까?&rdquo;<br /> 아저씨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br /> &ldquo;체험 중에 &lsquo;충격&rsquo;이 있어. 매일 방송을 통해 충격적인 정보를 접하게 돼도 그것이 내일이 되면 잊히고 다시 새로운 정보로 채워지거든. 그것처럼 체험은 서로 연결되지 않고 흩어진 채라고 볼 수 있지.&rdquo;</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용된 여러 사항 가운데 어느 것도, 초등학생이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없다. 지은이 가운데 누군가가, 저런 것을 초등학생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태도는 &lsquo;몰아세움&rsquo;이고 &lsquo;닦달&rsquo;이라고 말해줘야 한다. 언젠가 이 총서로 무엇인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거의 새것인 두 권의 책을 사놓은 것도 벌써 몇 년 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던 오늘, 도서관에서 같은 총서로 출간된 김선욱의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2006)를 우연히 발견했다. 연번이 &lsquo;04&rsquo;인 이 책은, 앞의 두 권보다 비교적 앞서 나온, 이 총서의 초기 간행물이다. 그런데 이 책의 뒷표지 날개에 이런 문구가 떡하니 인쇄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00ff"><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br /> &lsquo;철학적 사고&rsquo;와 &lsquo;통합형 논술&rsquo;을 한꺼번에!</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려했던 것처럼, 이 총서는 초등학교 저학년용이었다! 내가 아는 어느 동화 작가가 &ldquo;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은 너무 많은 것을 배운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만물박사로 만들려고 한다. 내가 동화 작가이지만, 나는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는 것도 반대한다. 아이들은 그저 놀아야 한다&rdquo;(노경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어쩌자고!</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이 총서로 게거품을 물자, 누가 이렇게 말해준다. &lsquo;그게, 초등학생용으로 나왔더라도, 실제로는 중․고등학생들이 볼 것&rsquo;이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ldquo;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lsquo;철학적 사고&rsquo;와 &lsquo;통합형 논술&rsquo;을 한꺼번에!&rdquo;라는 문구를 보고, 초등학생 자녀에게 70권도 넘는 저 책을 경쟁적으로 사다 안길 부모가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저 문구에 혹해서 아이들을 몰아세우고 닦달할 부모가 없지 않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 총서의 초기에 사용된 저 문구가, 그 후의 총서에서는 왜 삭제되었을까? 속내는 알 길이 없지만(실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저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더 많은 철학 교수들이 모른 체하고, 이 총서의 필자가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대학원생이나 강사가 이런 총서의 집필에 응했다면 사정이라도 보아 줄 수 있지만, 버젓한 철학 &lsquo;교수&rsquo;란 것들이&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더 웃기는 것은, 이런 책에 &lsquo;표4&rsquo;의 추천글을 쓴 작자들이다. 양해림(충남대 철학과 교수)․홍윤기(동국대 철학과 교수)․박구용(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안광복(중동고등학교 교사) &hellip;&hellip;. 겨우 세 권의 책만 보고도 저런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니, 70여 권이 넘는 총서에는 얼마나 많은 어처구니들이 등장할 것인가. &lsquo;표4&rsquo;의 추천글, &lsquo;쓰지도, 받지도&rsquo; 말아야 한다. 할 수 없이 쓸 때에라도 &lsquo;내가 어떤 자리에 초대되었는지&rsquo;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당신이 똥물을 뒤집어쓰는 자리다(나는 여태껏, &lsquo;네 번&rsquo; 뒤집어썼다. 그중에 동고동락하는 친구의 시집과, 내가 그 소설의 첫 독자였으면서 그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며 열렬히 후원한 탓에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느 경우는, 지금도 영예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 이름만 빌려주고 추천글은 출판사가 알아서 만들었던 두 사례를 포함한 도합 네 번의 경험은, 모두 10여 년이 훌쩍 넘은, 아스라한 시절의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사회는 워낙 &lsquo;연고 사회&rsquo;라서 &lsquo;표4&rsquo;의 추천글과 같은 낯간지러운 부탁을 뿌리치기 힘들다. 그래서 글쟁이들은 자꾸 선언해야 한다. &ldquo;나는 표4의 추천글은 쓰지 않습니다.&rdquo; 자꾸 선언하고 다니면, 어느 날은 아무도 부탁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방법이 없지 않은데도 자꾸만 똥물을 뒤집어쓰는 사람은, &lsquo;자기선전&rsquo;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lsquo;표4&rsquo;의 추천글을 수만 번 써봤자, 그런 일로는 결코 알아주는 &lsquo;저자&rsquo;가 되지 못하고, 유명해질 리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표4&rsquo;의 추천사를 쓰는 사람들은, 독자들에게 그 추천사들이 어떻게 읽히는지, 한 번도 역지사지해보지 않나 보다. 독자들은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lsquo;또 누가 개소리하는군!&rsquo;<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5-17 오전 10:22:00에셀과 모랭의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9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2_%EC%A7%80%EA%B8%88%20%EC%9D%BC%EC%96%B4%EB%82%98%20%EC%96%B4%EB%94%94%EB%A1%9C%20%ED%96%A5%ED%95%A0%20%EA%B2%83%EC%9D%B8%EA%B0%80/%EC%A7%80%EA%B8%88%EC%9D%BC%EC%96%B4%EB%82%98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1<br /> <span style="font-size: large">세계화</span>, 인류에게 일어난 <br /> 최상이자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최악의 사건</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친애하는 동지들이여, <br /> 우리의 발언은 우리를 파탄으로 몰고 가는<br /> 무지몽매한 정치의 그릇된 흐름을 고발하고자 함이다.<br /> 공공의 안녕을 위한 정치적 방향을 언명하고자 함이며, <br />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고자 함이다.</span><br /> <font face="맑은 고딕">-------------------------------------------------</font></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프랑스, 유럽,&nbsp; <br /> 그리고 <br /> 세계</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 나라는 외부와 단절돼 있지도 요지부동의 세계 속에 있지도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므로 우리는 범지구적 운명공동체의 일원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류 전체는 핵무기 확산, 민족적&middot;종교적 갈등 분출, 생태계 파괴, 통제 불능인 세계경제의 양면적 흐름, 금권의 횡포, 태곳적부터의 폭력과 산업적ㆍ경제적 이해관계 특유의 차가운 폭력의 결합이 야기한 치명적 위험을 공통적으로 안고 있다. 20세기에 전체주의의 폭력을 겪고 난 인류는 이제 금융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덤벼드는 동시에 갖가지 민족적&middot;국가적&middot;종교적 흑백논리와 광신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인류는 그 자체로 인간을 인간적인 삶으로 이끌지 못하는 대공황을 일으킬 만한 온갖 위기들의 총체에 직면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폴 발레리는 대공황이 지속되던 1932년에 이보다 더 시사적일 수 없는 통찰력으로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일찍이 인류가 이토록 막강한 힘으로 이토록 많은 혼란, 이토록 많은 근심과 희생자들, 이토록 많은 지식과 불확실성을 이끌어낸 적은 없었다. 불안과 무의미함이 오늘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두 축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얼마 후, 이번에는 콘라트 로렌츠가 이런 의문을 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오늘날 인간의 영혼을 가장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은 무엇인가. 돈에 대한 맹목적 집착인가, 아니면 열띤 조급증인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답은 둘 다이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를 내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에겐 두 가지 의무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하나는 지구의 운명에 동참하고 보편적 원칙을 지켜나가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이다. 이 보편적 원칙은 오늘날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11절과 12절에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11절)<br /> 유럽이 찬미하는 프랑스가<br /> 자유를 되찾았다<br /> 이제 각 시민은<br /> 평등의 법칙 아래 숨 쉰다(반복)<br /> 언젠가 존귀한 프랑스의 이미지가<br /> 전 세계로 확장되리라<br /> 민중들이여, 속박의 쇠사슬을 끊으라,<br /> 그리하여 조국을 얻으라!<br /> (후렴)</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12절)<br /> 초기 로마를 지배했던<br /> 로마 군대가<br /> 인권을 짓밟으며<br /> 국민들을 노예화했다(반복)</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우리는 가장 원대하고 가장 현명한<br /> 목표를 위해 전쟁에 뛰어든다<br /> 우리 프랑스인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는<br />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야 할 때뿐</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44년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채택한 개혁안과 그로부터 4년 후에 르네 카생의 활약으로 파리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에도 이와 같은 열망이 펄떡거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의 운명을 우리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노랫말과 개혁안과 선언문에 명시된 원칙들에 의거하여, 우리 프랑스를 포함한 세계 각국을 병합하고 존중하는 지구나라(Terre-Patrie), 즉 지구라는 하나의 조국을 향해 넓고 길고 험난한 길을 닦아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국이 다른 영역에서는 각자의 주권을 철저히 수호하되, 지구촌 시대의 총체적 문제들에 직면해서는 주권을 초월하여 협력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데올로기 행세를 하는 경제자유주의는 실패한 시스템임이 밝혀졌다. 자유방임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풍요보다는 빈곤을 초래했다. 경제자유주의 시스템 하의 세계화, 개발, 서구화(똑같은 현상의 세 가지 이름)는 인류의 사활이 걸린 문제들을 다루기에 역부족임이 드러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스스로 초래한 치명적 문제점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경제자유주의 시스템은 존속하는 동시에 변화할 수 있도록 자체적으로 변모하는 환경을 창출해내지 않는 한, 와해되고 퇴보할 운명을 면치 못하리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의 시대를 지배하는 이 시스템은 변모하지 않으면 붕괴할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변모는 하천들이 모여 거센 강물을 이루듯 개혁과 변화를 위한 여러 가지 과정들이 결합한 끝에야 비로소 결실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변화 중인 현재야말로 진정한 시대 교체의 서막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세계화가 인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상이라 함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지탱하는 모든 영역이 상호의존적이 되었다는 점에서이다. 인류는 운명공동체가 되었고 이로써 지구라는 하나의 조국, 지구나라가 탄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때의 지구나라는 개별적 국가들을 부정하지 않되 병합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두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악이라 함은 연쇄 재앙으로 향하는 광적인 질주의 출발이라는 점에서이다. 파괴적인 과학 및 기술이 통제 불능으로 비약적 발전을 거두고 이윤 경제가 전방위적으로 맹위를 떨침으로써, 대량살상무기의 확산과 생태계 파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20세기의 전체주의를 계승하여 한계를 모르는 금융자본주의의 횡포가 국가와 국민을 금권에 굴복시켰으며, 외국인 혐오, 타 인종과 민족, 영토에 대한 배타적이고 국수주의적인 흐름이 다시금 부상했다. 금융투기에 무분별한 맹신과 흑백논리가 합세한 폐해는 재앙을 예고하는 일련의 절차들을 증폭시키고 가속화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또한 오늘날 추진되고 있는 개발이 &lsquo;서구식으로&rsquo; 세계 인구의 일부에게만 번영을 가져오는 반면, 그 밖의 수많은 지역에는 불행을 양산하고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따라서 세계화와 탈세계화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치명적 위기에 처한 전 세계 모든 인간이 어우러진 운명공동체를 우리 인류에게 선사하는 세계화를 추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이 지구의 운명에 연대를 느끼고,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를 수호해야 한다. 우리는 세계화에서 비롯된 모든 상호 연대와 문화적 풍요로움을 발전시키고 영속시키는 동시에, 국가&middot;지방&middot;지역의 시급한 자치권을 복원하기를, 세계 도처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장려하기를 제안한다. 한편 농업 경제를 수호하고 식량 생산 농업과 그에 직결된 식품 공급 및 지역의 수공업과 상업을 보호함으로써 농촌의 공동화(空洞化) 현상과 곤경에 처한 도시 외곽지대의 공공시설 부족을 막기 위해, 사회연대경제에 모든 자리를 내주는 탈세계화를 추진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획일화된 개발이 연대감과 전통적 사회가 보유한 지식 및 역량을 자칫 간과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공동체를 감싸안는 연대감을 보존하는 방식의 개발을 거듭 고민하고 다각화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프랑스를 필두로 우리는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을 규정함으로써 성장지상주의의 편향된 요구를 복합적인 요구로 대체해야 한다. 즉 친환경 에너지, 대중교통, 사회연대경제, 학교, 문화, 대도시의 인간화를 목표로 하는 개발 등을 지향하는 한편, 농업의 산업화, 화석연료와 원자력 에너지, 기생적인 유통업계, 군수산업, 소비중독, 경박한 과잉경제, 낭비하는 생활방식은 지양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성장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편을 가르고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지향해야 할 것과 지양해야 할 것의 리스트를 작성할 때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극화의 시대를 맞아 우리는 유럽에 통일성, 자치권, 정치적 의지를 부여함으로써 국가 간 응집력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 그래야만 유럽이 현 세기의 모든 중대한 문제점들을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평화의 관점에서 풀어나갈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사회 편입을 위한 공동의 정책을 고심하여 입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비극적 분쟁처럼, 세계 도처에서 발발하고 연장되어 폭력을 증폭시키는 분쟁의 첨예화를 저지하기 위해 개입해야 하리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정한 유럽의 거대한 목표는 이렇다. 15~16세기 유럽의 르네상스가 그리스 철학의 이상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명을 창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다른 문명의 도덕과 정신, 특히 동양의 지혜를 흡수함으로써 새로운 르네상스 출현에 공헌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 지금 그대로의 서구화를 지속할 것이 아니라 지구적 차원에서 문화적 특수성 및 빈부의 격차를 고려하여 모든 문명의 장점을 집대성하는 데 주안점을 둔 인간적 정책을 실현해가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바로 그러한 문명의 공생이야말로 문명 간 충돌이나 전쟁을 결정적으로 방지하는 길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유럽은 인도주의, 실질적 민주주의, 인권과 여성의 권리를 계속해서 발전시켜가는 동시에 국경 안팎에서 자신들의 문명에 의해 자행되는 날로 폐해가 커지는 파괴 행위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대응해야 한다. 프랑스는 자국에서부터 먼저 &lsquo;문화정책&rsquo;을 위한 운동을 실시하는 것으로 이러한 흐름의 선봉장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대대적인 변모는 여러 형태의 과정과 발전을 거쳐야만 이룰 수 있는 것임을 알았으니, 우리는 이제부터 유엔을 개혁하고 재정비하는 일뿐만 아니라, 대량살상무기 확산, 생태계 파괴, 기근의 재발과 식량 부족, 원자재 가격을 상승시키는 국제투기금융자본의 폐해를 줄이는 실질적인 경제 규제의 필요성 등 시급한 현안들을 처리하도록 국제결정기관을 창설할 수 있는 국제정부를 세우자고 전 세계에 제안하는 바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멸을 향해 치닫는 인류의 질주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위태로운 상황들을 유발했고, 이러한 상황들은 분노한 민중의 움직임이 지리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설명하고 정당화한다. 불평등의 증대, 오만하고 파렴치한 부패, 만성적 실업. 바로 이것들이 지난봄에 혁명을 일으킨 아랍인들과 스페인, 그리스, 이스라엘, 칠레 등지의 분노한 민중,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여타 대도시의 폭도들, 이스라엘의 저항자들, 인도의 반란자들이 한목소리로 성토하던 공통된 몇 가지 문제점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지금 인류에게 지극히 중대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인식하자. 이 시대의 양면성, 위험과 위기뿐만 아니라 기회 또한 인식하자.<br /> &nbsp;<br /> <br />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스테판 에셀 St&eacute;phane Hessel<br /> </strong>94세의 레지스탕스 투사이자 사회운동가. 출간 7개월 만에 2백만 부를 돌파한 《분노하라》는 전 유럽에 &lsquo;분노 신드롬&rsquo;을 일으켰다.<br /> 191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7세에 부모를 따라 프랑스로 이주했다. 193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선배 사르트르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입대한다. 드골이 이끄는 &lsquo;자유 프랑스&rsquo;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1944년 파리에 밀입국해 연합군의 상륙 작전을 돕던 중 체포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으나 극적으로 탈출한다. 전쟁이 끝난 후 외교관의 길을 걷는다. 1948년 유엔 세계 인권 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고, 유엔 주재 프랑스 대사,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다. 퇴직 후에도 인권과 환경 문제 등에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에드가 모랭 Edgar Morin<br /> </strong>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역사, 사회학, 경제학, 철학, 법학을 공부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문학비평가. 인류학, 생물학, 물리학, 생태학, 환경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현대의 인간, 사회,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많은 저서를 펴냈다. 현재 파리 국립과학연구소 석좌 연구부장이며, 유네스코 부설 유럽 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장소미 <br /> </strong>대학과 대학원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파리3대학에서 영화문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지도와 영토》《이런 사랑》《10월의 아이》《포기의 순간》을 우리말로 옮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16 오전 11:16:00‘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 1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798" alt=""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D%95%9C%20%EB%82%A8%EC%9E%90%EC%99%80%20%EB%91%90%20%EB%B2%88%20%EC%9D%B4%ED%98%BC%ED%95%9C%20%EC%97%AC%EC%9E%90/%ED%95%9C%20%EB%82%A8%EC%9E%90%EC%99%80%20%EB%91%90%20%EB%B2%88%20%EC%9D%B4%ED%98%BC%ED%95%9C%20%EC%97%AC%EC%9E%901_600.jpg" />&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medium"><b>&lsquo;한 남자와 두 번 이혼한 여자&rsquo; 1회</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중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수학과목을 제일 싫어했다. 그녀 어머니의 권유로 대학생이던 친한 친구 오빠가 집에 와서 일주일에 두 번 그녀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이 세상에서 수학을 제일 싫어하던 그녀는 그 친구 오빠 덕분에 수학이 좋아졌다. 조금씩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 캄캄한 밤에 별을 헤는 일처럼 아름답게 여겨질 무렵, 군대를 갔다 와 복학생이던 친구 오빠는 오래 사귄 여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이후 친구 오빠를 다시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전처럼 수학이 싫지는 않았다. 수학뿐 아니라 모든 과목 성적이 썩 좋은 편은 아니던 그녀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전문사립대학, 안경학과에 입학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그녀는 누군가 장래 희망이 무어냐고 물을 때마다 곤혹스러웠다. 아무것도 되고 싶은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릴 적 처음 시력검사를 했을 때를 잊지 못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잘생긴 청년이 그녀에게 커다랗고 무거운 검안 안경을 씌우고 점점 조그매지는 숫자와 글씨들로 그득한 신비로운 시력검사 판을 막대기로 짚어가며 작은 글씨들이 보이냐고 묻던 그 장면이 그녀는 늘 잊히지 않았다. 그 이후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고 사람들의 시력을 재는 검안사가 되고 싶었다. 참 독특한 미래의 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날 때부터 눈이 나빴던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썼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안경점 쇼윈도를 들여다보길 좋아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갖가지 모양과 색깔의 안경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마치 낯선 나라의 신기한 나비들이 박제되어있는 채집 상자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날 때부터 한집에 같이 살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베개맡에 덩그마니 할머니의 돋보기안경이 남아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사람은 죽은 뒤 육신은 땅에 묻히고 이 지상에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안경을 남긴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긴 사람이 남기는 게 안경뿐이랴? 옷도 구두도 치약도 화장품도 비누도 다 남기고, 그저 그 물건들을 한 때 소유했던 사람만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 할머니의 유품은 안경 한 개로 남았다. 만일 안경에 관한 논문을 쓰라면 &lsquo;유품으로서의 안경에 관한 연구&rsquo; 그런 제목을 붙이면 될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안경학과라는 과가 대학에 생긴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과 선택을 하느라 노심초사하다가 안경학과라는 과를 발견하고 그녀는 탄성을 질렀다. 안경학과는 안경에 관한 모든 것을 공부하는 과였다. 사실 안경에 관한 과학적인 접근 말고도 그녀가 늘 관심을 갖는 것은 안경의 디자인이었다. 얼마나 많은 모양의 안경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안경을 만들고 싶었던 그녀는 사실 안경학과가 아니라 디자인을 전공하는 미술대학에 갔어야 할지 모른다. 안경학과에서는 기하광학, 안경광학, 콘택트렌즈 가공 실습 등 안경원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깊이 있게 공부한 뒤 졸업 후 일선 안경원이나 안과 등에서 검안 테크니션으로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일 그녀가 친구 오빠가 가르쳐준 수학의 신비에 심취한 적이 없었다면 그 꿈을 접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안경사란 수학에서 아니 숫자에서부터 시작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안경사는 안경이나 콘택트렌즈, 선글라스를 납품할 때 착용자의 얼굴이나 눈에 맞게 제조하여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도록 착용자를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정도는 안경학과에 들어간 학생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는 기초적인 사실이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피검사자로부터 얻은 개인의 신상 기록이나 데이터를 타인에게 누설하지 않을 의무가 있고, 이러한 모든 일을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면허를 취득하여 국민의 시력 향상을 위해 일하는 사람― 그가 바로 안경사였다. 안경사 면허제도의 입법 취지는 국민의 눈 건강 향상을 위해 무자격자의 주먹구구식 무분별한 안경 조제 및 시력검사를 막아주고 정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안경 조제와 시력검사, 콘택트렌즈 공급을 위해 제정한 제도이며, 전문대학 안경광학과 졸업자만 국가고시의 응시자로 제한되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는 사립전문대학 안경학과를 졸업한 뒤, 안경사 국가고시 시험에 합격, 꿈에도 그리던 안경사가 되었다.<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5-15 오전 11:07:00박영호의 ‘죽음공부’<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82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1_%EC%A3%BD%EC%9D%8C%20%EA%B3%B5%EB%B6%80/%EC%A3%BD%EC%9D%8C%EA%B3%B5%EB%B6%80_%ED%91%9C%EC%A7%80.jpg" /><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머리말<br /> <br /> 죽음 공부가 삶 공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예부터 사람들은 &ldquo;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rdquo;고 말하였다. 비록 하룻밤이지만 그 하룻밤의 의미가 만리장성처럼 높고 깊다는 뜻이다. 하룻밤의 소중함은 이리 잘 알면서 하루 삶의 소중함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하루를 사는 동안 구만리장천(九萬里長天)을 뚫어 우주 정신과 이어져야 한다. 온통(전체)이신 하느님과 이어지지 못하면 낱동(개체)인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없다. 사람은 하느님과 이어져 하느님의 생명인 얼로 소통되어야 삶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에는 못 먹어서 비쩍 마른 사람 없이 경제적으로 넉넉한데도 우울증에 빠진 이가 많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자연 우울해지는 것이다. 인정받는 일에 목을 매면 그만큼 삶이 힘들어진다. 인심은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탓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이 여느 짐승보다 나은 것은 사상(思想)을 내놓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한마디로 온통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온통인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실을 적어놓은 것이다. 예수가 &ldquo;구하라(ask), 받을 것이다. 찾으라(seek),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knock), 열릴 것이다.&rdquo;(마태오 7 : 7)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삶의 기쁨과 보람을 주신다. 사람에겐 하느님이 삶의 기쁨이요 보람인 것이다. 예수가 또 한 번 분명히 말하였다. &ldquo;하느님 나라는 침노하는 이가 차지한다.&rdquo; 마태오복음 11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이다. &lsquo;침노한다&rsquo;는 말은 들이친다는 말이다. 들이친다니? 이것은 하느님께 불경을 저지르는 짓이 아닌가? 예수는 하느님을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였고 마지막엔 목숨까지 바쳤다. 그런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침노하라고 하다니 무슨 말이 이런가? 예수의 말은 반쪽 예수라도 되어야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다. 류영모는 하느님 아버지께 부자유친(父子有親) 하자고 들이덤벼야 한다고 말하였다. 침노하라는 말이나 들이덤비라는 말이나 똑같다. 류영모는 하느님 나라를 들이치는 법을 일러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제 숨 끊다<br /> <br /> 제 밥 먹고 제 밑 제가 씻어야 그누는(말숙한) 누리인데<br /> 제 머리를 제 못 깎지만 제가 깎는 이도 더러 있다<br /> 제 목(숨) 제 끊는다는 건 위(하늘)를 뚫을 것 같아<br /> &mdash; 《다석일지》(1959. 11. 30.)</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 곧 제나(ego)를 깡그리 부정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를 침노하는 길이다. 이 제나는 없음(無)이요 빔(空)인 영원 무한 속에 잠시 일어서 꺼지는, 생사(生死)의 거짓 존재다. 이 제나의 근원이요 귀처(歸處, 돌아갈 곳)인 하느님께 나를 돌려 드릴 때 존재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영원 무한의 없음(無)&middot;빔(空)이 참나이다. 이것은 제나의 생사를 뛰어넘는 일이다. 그러니 삶도 삶이 아니요 죽음도 죽음이 아니다. 예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ldquo;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영원한 생명(얼나)을 얻고자 멸망의 생명(제나)을 버림이라.&rdquo;(요한 10 : 17, 박영호 의역) 이것은 또한 석가 붓다의 사성제(四聖諦)인 고집멸도(苦集滅道)의 가르침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ldquo;없음(無)을 머리로 삼고 삶(生)을 등뼈로 삼고 죽음(死)을 꽁지(尾)로 하였다. 그 누가 알리? 죽고 나고 있고 없음이 하나인 것을.&rdquo;(《장자》 대종사 편) 없음(無)에 달린 꼬리 같은 제나는 있어도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 공부는 죽지 않는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자 하는 공부다. 이것은 석가&middot;예수&middot;노자&middot;장자가 가르쳐준 공부이기도 하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lsquo;웰빙(well-being)&rsquo;이니 &lsquo;웰다잉(well-dying)&rsquo;이니를 말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ldquo;나의 말은 죽을 때 필요하고 죽은 뒤에 필요한 말이다. 내 말은 죽음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죽음 공부야말로 마지막 공부요 귀중한 공부다.&rdquo;라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필자는 이제까지 &lsquo;다석 사상&rsquo;에 관한 책을 여남은 권 썼다. 스승님인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가 아무런 저서도 남기지 않고 일기(다석일지)만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 일기는 영원한 생명(얼나)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필자가 쓴 &lsquo;다석 사상&rsquo; 글은 모두가 이편에서 말하면 &lsquo;제나의 죽음 철학&rsquo;이요 저편에서 말하면 &lsquo;얼나의 생명 철학&rsquo;이라 하겠다. 그래서 따로 &lsquo;죽음 공부&rsquo;라는 제목으로 책을 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정순 님이 &lsquo;죽음 공부&rsquo;에 대해서 따로 글을 써주기를 청하여, 다석낱말사전 만들기를 잠시 밀쳐 두고 &lsquo;죽음 공부&rsquo;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lsquo;죽음 공부&rsquo; 책을 쓰고 보니 죽음과 생명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독자께서 이 책을 읽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밝아졌다면 그것은 서정순 님의 공이라 하겠다. 또한 출판을 맡아준 한예원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하 중략)</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4월 박영호</p> <hr /> <p>&nbsp;</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1장 죽음 생각</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5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1_%EC%A3%BD%EC%9D%8C%20%EA%B3%B5%EB%B6%80/%EA%B7%B8%EB%A6%BC1_%EB%B0%80%EB%B0%AD%EC%97%90%EC%84%9C.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b>죽음의 종 노릇에서 벗어나는 길</b></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만일 네 마음의 빛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마태오 6 : 22~23)</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예수가 &lsquo;마음의 빛&rsquo;이라고 한 것은 하느님의 얼생명을 말한다. 얼나의 눈이 밝은 이는 이 우주의 자연현상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박동을 느낀다. 그러나 얼나의 눈을 뜨지 못한 이는 신맹(神盲)이라 영성(靈性) 불감증을 앓는 이다. 짐승처럼 하느님이 계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민망히 여겨 얼나의 눈을 뜨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류영모도 이렇게 말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빛은 자연계를 비치는 해와 달의 빛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비치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진리의 빛, 곧 적광(寂光)이다. 이 빛을 가지고 인류가 깨어나 대우주의 무한히 찬란한 빛처럼 이 세상에도 찬란한 정신 문명의 얼빛이 밝아졌으면 한다.&rdquo;(류영모, 《다석어록》)</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무한한 대우주를 쳐다보면 너무 넓어서 까마득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가장자리 없는 영원 무한한 허공에도 해처럼 빛나는 광명체가 너무 많아서 그것이 별구름(星雲)을 이루고 있다. 그 별구름의 모습이 마치 가지가지 꽃으로 만발한 꽃밭과 같다. 그런 별꽃밭의 임자(하느님)가 생각난다. 19세기 사람인 미국의 초월주의자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도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고 하느님을 느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밤하늘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으니 너무도 안타까워, 밤마다 별이 나타나지 않고 천년마다 하룻밤씩 별이 나타나게 된다면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밤새 뜬눈으로 밤하늘의 신비로운 별빛을 만끽하지 않겠느냐고 말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네덜란드 태생의 캐는 이(哲人),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 1677)는 우주의 질서에 감격하여 하느님을 느꼈다. 그래서 자연을 곧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연 그 이상의 빔(허공)과 얼(성령)이다. 예수 &middot; 석가 &middot; 노자 &middot; 장자는 없음(無), 빔(空), 얼(靈)이 참나인 하느님이심을 깨달았다. 미국이 낳은 위대한 사람,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는 자연 속에서 하느님과 숨바꼭질을 하였다. 소로는 &ldquo;나의 직업은 자연 속에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이 숨어 계시는 장소를 알아내며 자연의 모든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귀 기울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다.&rdquo;라고 말하였다. 늘 남쪽 바다를 바라보면서 사는 길벗 박동선은 바닷물이 생겨나 저리 가득 차 있는 것을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고 했다. 그 바닷물에서 지구 위의 생명이 생겨났으니 생명의 어머니로 여겨져 거룩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박동선은 날마다 바다를 보면서 하느님을 생각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인생은 한정된 곳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무한한 하느님 나라에 뜻이 있다. 정신과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이것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얼생명의 율동을 느껴야 한다. 하늘에 머리를 두고 있는 사람은 하늘을 우러르며 우주에서 얼생명의 고동을 느끼면서 살라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느님을 멀리서 찾을 것 없다. 몸이 닿아 있는 빔(허공, sunyata)이 하느님이고, 내 맘이 닿아 있는 얼(성령)이 하느님이시다. 얼이 충만한 빔이 하느님이시다. 《다석어록》에 실린 류영모의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① 장엄은 정말이지 허공이 장엄하다. 허공의 얼굴인 공상(空相)이 장엄하다. 이 우주는 허공을 나타낸 것이다. 이 만물이 전부 동원해서 겨우 허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붓끝 같은 몬(物)만 보고 허공을 못 보다니 제가 좀팽이 같은 것이 되어 몬밖에 못 본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②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 한데(허공)이다. &lsquo;빈탕 한데&rsquo;란 &lsquo;허공&rsquo;을 순우리말로 말해본 것이다. 백 칸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야 하듯 우주 또는 그 이상의 것도 내 것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빈탕 한데인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늘 스스로 반성하면서 좋은 일에 힘을 다하면 마음이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악해질 리가 없다. 악한 사람이 길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세상은 거의 세기말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악에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고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상에 무슨 하느님의 아들들의 시대가 오겠느냐고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들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③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는 허공이다. 색계(色界, 물질계)는 단일(單一) 허공에 눈의 티검지와 같이 섞여 있다. 이 사람은 단일 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으로 느낀다. 허공은 우리의 오관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수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테두리 없이 영원 무한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보고서 빈탕이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서라도 단일 허공을 알아야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④ 빈탕 한데(허공)에 맞춰 놀이를 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나는 해와 달에 맞춰서 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맘과 몬(物)을 생각한다. 몬(물질계)에 맘이 거하면 맘속의 얼나가 어두워지고 참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몬에 마음이 살면(집착하면) 맘의 자격을 잃고 만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⑤ 참은 상대 세계인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다. 빈탕 한데에 들어가야만 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거짓에 마음 붙잡힐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잠깐 빌려 쓰는 것이다. 절대(絶對)의 허공을 사모한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허공이 참인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실존이고 진실이고 어디에 있는가? 우주조차도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늘을 보고 하느님을 느끼고, 바다를 보고 하느님을 느끼고, 산천의 자연을 보며 하느님을 느끼는데 이 사람은 사람을 보며 하느님을 느낀다. 예수&middot;석가 같은 영성(불성)의 사람을 보면 신비하여 하느님이 저절로 느껴진다. 예수&middot;석가의 이름만 들어도 하느님이 생각난다. 60조 세포로 이뤄진 몸뚱이에서 온통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는 &lsquo;정신 현상&rsquo;이 일어난다는 것은 신비가 아닐 수 없다. 몸에서도 신비한 일이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 사람이 모인 데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면 저마다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러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게 드러난다. 이 지구상에는 무려 70억이나 되는 사람이 살고 있는데, 모두 다르게 생겼다.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서 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느낀다. 만일 한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처럼 사람들의 생김새가 꼭 같다면 인류 사회는 &lsquo;너, 나, 그&rsquo;를 구분하지 못하여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고, 사회가 유지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70억이 넘는 사람이 다 다르게 태어난다는 것이 기적적인 신비가 아니고 무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개인의 가정으로만 보면, 딸 부잣집이나 아들 부잣집이 있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성비가 엇비슷하다. 누군가가 남녀의 수를 맞추고 있는 듯하여 신비하기 그지없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느님의 섭리가 깔려 있다고 느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하늘, 땅,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계심(存在)을 느낄 수 있는 얼나의 빛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얼나의 빛을 못 지닌 사람이 있다. 얼나의 빛을 지닌 이는 &lsquo;얼나를 깨달은 사람&rsquo;, 즉 깨달은 이(覺人)다. 얼나의 빛을 못 지닌 이는 &lsquo;그밖의 보통 사람&rsquo;, 즉 여느 이(俗人)다. 죽음에 대응하는 것을 보면 이 둘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얼나의 빛을 지닌 이는 이미 생사(生死)에 갇힌 제나를 넘어선 이다. 그러므로 제나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이는 멸망의 생명인 제나의 생사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몸삶밖에 모르는 짐승인 제나의 사람들은 짐승의 성질인 탐욕(avarice), 진에(anger), 치우(lust)라는 삼독의 조종을 받아 끌려만 다닐 뿐 임자로서 생각을 못한다. 짐승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달아나듯이 여느 이는 죽음에 관한 일은 보지도 듣지도 않고, 말하려 들지도 않는다. 죽음은 숫제 금기(터부)다. 그러나 금(禁)줄을 친다고 죽음으로부터 안전지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둘레에서 얼마든지 죽음이 일어날 수가 있다. 비단 내 둘레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직접 일어나기도 한다. 죽을 고비를 한번 겪고 나면 신경과민이 된다. 뿐만 아니라 끔찍한 상상이 번개처럼 날아든다. 그래서 두렵기만 한 죽음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혼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조차 싫어한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말벗, 놀이벗이 필요하다. 벗이 없으면 반려 동물을 대리 벗으로 삼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수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홀로 기도하라고 말하였다. &ldquo;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실 것이다.&rdquo;(마태오 6 : 6) 골방이 무엇인가? 예수는 머리 둘 곳 없는, 집 없이 사는 노숙자라 골방조차 없어 산속에 들어가 혼자서 기도하였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외로이 홀로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홀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골방이란 바꾸어 말하면 고독의 방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나의 사람들은 고독한 골방조차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표층적인 기복 신앙(샤머니즘)만 좇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하는 방편으로 오락이나 도박, 구경거리 그리고 작업에 몰두한다. 거의 중독되다시피 한다. 아니면 건강 염려증에 빠져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병원 순례를 일삼는다. 요즈음 죽음을 잊게 하는 그럴듯한 도피처가 생겼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이 그것이다. 아, 이것들을 못 보게 하고 못 다루게 하면 불안해한다. 심하면 병리적인 금단 현상이 일어난다. 텔레비전, 컴퓨터, 스마트폰 등에 몰두하는 것이 바로 일종의 우상숭배다. 그래서는 올바른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기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죽음은 환상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나는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은 바로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달아나려고 하는 태도이다.&rdquo;(사이먼 크리칠리, 《죽은 철학자들의 서》)</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수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ldquo;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rdquo;(마태오 11 : 28~30)</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즘 신학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 답을 구했더니, 예수의 삶은 존경하나 예수처럼 살기는 싫다고 하였다. 그토록 힘든 인생을 산 예수가 무엇을 어떻게 해주겠다고 &ldquo;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rdquo;고 했을까? 사람들이 예수의 처지를 뻔히 아는데 어찌 예수의 말만 믿고 예수한테로 가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는 말만 앞세우는 허풍쟁이였단 말인가? 예수의 인격으로 봐서는 그런 허풍을 칠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왜 뒷감당도 못할 것을 알면서 큰소리를 쳤을까? 예수가 말한 무거운 짐은 결국 &lsquo;죽음&rsquo;이다. 죽음을 없애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게 해주겠다는 것이 예수의 말이었다. 이 말씀을 사람들은 못 알아들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삶과 죽음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뒷면이 죽음이고 죽음의 앞면이 삶이다. 그런데 어떻게 삶이 죽음을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이 시작되었을 때 죽음도 시작되었고, 삶이 끝날 때 죽음도 끝난다. 하느님의 얼나라에는 이따위 삶도 죽음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죽음의 나라가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사를 초월한 영생의 얼나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이먼 크리칠리는 말했다.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만 도망가려 하는 태도가 우리 시대의 가장 치명적인 특징이라고.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만이 그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여느 이(俗人)는 죽음에서 도망치려다가 죽음에 붙잡혀 죽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여느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짐승과 다른 점은, 죽지 않게 해 달라고 무엇에고 비는 기복 신앙(샤머니즘)을 생각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복 신앙은 재물을 바치고는 안 죽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한데 그렇게 빌어서 안 죽은 사람이 있었던가? 모두 다 죽었다. 그래도 비는 순간만큼은 불안감이 덜했다면 나로선 할 말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과학 시대라 호언하는 오늘날에도 기복 신앙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복 신앙의 맹점을 아는 이들은 대신 병원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병원의 의사가 샤먼 노릇을 해주는 셈이다. 물론 평균 수명을 30살에서 80살까지 끌어올린 것은 의학의 크나큰 공로라지만 평균 수명을 80살까지 끌어올리고 나니 늙은이 문제가 큰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말았다. 이래도 탈, 저래도 탈인 것이 세상 이치다. 이제는 오래 안 살고 죽어주는 것이 이 사회를 돕는 일이 되었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병원을 찾지 않으려고 한다. 죽음은 자연현상이니 그저 자연스레 죽기를 바라서다. 비록 더 살 수 있다고 해도 몸에 자꾸 칼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약을 밥처럼 자꾸만 먹고 싶지 않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을 이기는 바른 길은 제나로는 죽고 얼나로는 영생하는 것이다. 몸뚱이로 몇십 년 더 살게 되었다고 무에 그리 만족스럽겠는가? 백 년을 산다 해도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이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에서 펼친 주장은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표층 종교는 기복 종교를 가리키는 말이고, 심층 종교는 영성 신앙을 가리킨다. 예수와 석가가 가르치고 간 얼나의 깨달음만이 유일한 생명의 구원이요 목적의 완성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을 너무도 두려워한 나머지 죽음이란 말만 나와도 &lsquo;나는 살아야지&rsquo; 하면서 달아나던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캐는 이, 곧 철인(哲人)이 비로소 나타났으니 바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기원전 399)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인 소크라테스는 삶이 선하면 죽음도 선하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죽음을 직시하는 철인들이 이어져 나왔다. 그러나 철인들은 예수 &middot; 석가처럼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난 이로는 보이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깨달은 이, 곧 각인의 본보기는 예수 &middot; 석가라 할 것이다. 예수는 짐승이요 멸망의 생명인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났다. 제나 쪽에서 말하면 깨달은 것이고, 얼나 쪽에서 말하면 솟난 것이다.사람들이 얼나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멸망의 생명인 제나는 거짓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나에 집착하는 마음을 온전히 버리면 얼나는 저절로 깨닫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론, 본문 1장 일부)</p> <br /> <br /> <table border="2" cellspacing="1" cellpadding="2" width="600"> <tbody> <tr> <td>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medium"><b>앎과 삶이 하나로 일치한 우리 겨레의 큰 스승,<br /> 다석 류영모(1890~1981)</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석 류영모는 불경, 성경, 동양철학, 서양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였다. 그는 우리 말과 글로써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으며, 불교, 노장 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고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 체계를 세웠다. 모든 종교가 외형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히는 다석의 종교관은 시대를 앞선 종교 사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890년 3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난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론 첫 YMCA 총무를 지낸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를 받았다. 1907년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해 2년간 수학했으며,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광수, 정인보와 함께 191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다. 1921년(31세)에 고당 조만식 선생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3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세례를 받고 8년 동안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뒤로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 석가, 공자, 노자 등 여러 성인을 두루 좋아하였다. 나아가 《노자(老子)》를 한글로 완역하는 등 여러 성인의 말씀을 우리 말과 글로 알리는 일에 힘썼다.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하여, 한자를 쓰는 대신 옛말을 찾아 쓰거나 &lsquo;씨알(민중)&rsquo; &lsquo;얼나&rsquo; &lsquo;제나&rsquo; 같은 말을 만들어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류영모는 생활에서도 성인의 삶을 실천했다. 51세에 믿음에 깊이 들어가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얇은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누워 잠을 잤으며, 새벽 3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했다.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늘 &ldquo;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다.&rdquo;라고 말했으며, 가족과 함께 직접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다.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 이 땅에서 90년 10개월 21일을 살다가 숨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전에는 함석헌의 스승으로만 알려졌으나, 지금은 독특한 신관과 인생관을 지닌 철학자로서 다석 류영모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진 데 이어 2007년 10월 5일에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철학자들과 종교학자, 재야 학자들이 모여 &lsquo;재단법인 씨알&rsquo;을 만들었다.&nbsp;(출판사 보도자료 발췌)</p> </td> </tr> </tbody> </table>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박영호</strong>(朴永浩, 1934~) <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97"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1_%EC%A3%BD%EC%9D%8C%20%EA%B3%B5%EB%B6%80/%EC%A7%80%EC%9D%80%EC%9D%B4_%EB%B0%95%EC%98%81%ED%98%B8.jpg" />공업학교를 다니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 열일곱 살에 헌병대에 징집되었다. 살벌한 전장에서 그는 죽이는 사람과 죽어 가는 사람, 죽은 사람을 수없이 목격하였다. 밤이 되어 눈을 감아도 해골과 시체들이 눈앞에 떠다녔다. 그렇게 신경쇠약에 걸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며 방황하던 중 톨스토이를 알게 되었다. 그는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고 &lsquo;하느님&rsquo;을 알게 되었으며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br /> 톨스토이 전집을 다 읽고 난 뒤 우연히 &lt;사상계&gt;에서 함석헌 선생의 &lsquo;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rsquo;란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함석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톨스토이 사상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임을 알아본 그는 곧바로 함석헌에게 편지를 쓰고 이후 40~50통의 서신을 교환했다. 1956년 천안에 농장을 마련한 함석헌 선생이 농사 짓고 공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같이 지내자고 청하자 그곳으로 곧장 달려가 스승과 함께 생활하였다. 낮에는 과수원에 똥거름을 주고 밭을 매는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성경, 톨스토이, 사서삼경, 고문진보, 간디 자서전을 같이 읽고 토론한 시간이 3년이었다. 비록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그에겐 영적으로 새로 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그렇게 준비가 되었을 때, 그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줄 새로운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br /> 1959년 함석헌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함석헌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의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늘 &ldquo;농사 짓는 사람이 예수&rdquo;라고 말하며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던 다석 선생처럼 제자 박영호도 농사 짓는 일을 양심적으로 참되게 사는 유일한 길이라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의왕에 6천 평 농장을 개간해 밭을 일구면서 짬짬이 책을 읽고,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 YMCA 연경반(硏經班)에서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댁으로 찾아가 다시 가르침을 받으며 5년의 세월을 보냈다. <br /> 1965년 어느 날 스승이 &lsquo;단사(斷辭)&rsquo;라는 말을 꺼냈다. 이젠 스승을 떠나 독립해 혼자 살아가라는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승을 떠난 그는 5년간 이를 악물고 혼자서 공부해, 정신이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세 가지로 정리한 그의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다. 그 무렵 류영모 선생으로부터 &lsquo;졸업증서-마침보람&rsquo;이라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류영모의 참제자로 인정한 것이었다. 스승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했다는 확인이기도 했다. 그 뒤 류영모는 박영호에게 자신의 전기 집필을 맡겼다. 1971년부터 준비한 다석 전기는 1984년에야 책으로 나왔다. 스승이 읽은 책을 모두 독파하고, 스승이 살아온 이야기를 구술받고, 스승이 평생 써온 일지를 필사하면서 10년 자료를 준비한 후 스승이 돌아가신 1981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만 13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br /> 박영호는 지금껏 다석 류영모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써 스승을 세상에 알렸다. 류영모 전기인 《진리의 사람 다석 류영모》 외에도 《다석 류영모 어록》《다석 류영모 명상록》《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다석 마지막 강의》 등이 있고, &lt;문화일보&gt;에 다석 사상에 관한 글을 325회 연재한 후 이를 묶어 〈다석사상전집〉(전 5권)을 간행하였다. 또 《잃어버린 예수》《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다석 류영모가 본 예수와 기독교》 등을 썼다. 지금 그는 다석 사상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절실한 &lsquo;다석 류영모 낱말 사전&rsquo;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15 오전 11:01:00제러미 리프킨의 ‘3차 산업혁명’<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9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0_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br /> <br /> 워싱턴 D.C.</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의 산업 문명은 현재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산업적 생활방식을 구성하는 석유 및 여타의 화석연료 에너지는 마치 일몰과 같이 서서히 지고 있으며, 이러한 에너지들을 토대로 움직이는 수많은 기술 또한 시대에 뒤진 구식이 되었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구축한 산업 인프라 역시 전체적으로 노화하고 있으며 점점 황폐해진다. 그 결과 세계 전역에서 실업률이 위험한 수위로 치솟고, 각국의 정부와 기업 그리고 소비자는 빚에 허덕이며, 생활수준은 모든 곳에서 곤두박질쳤다. 뿐만 아니라 세계 인구 중 7분의 1에 달하는 10억 명의 사람이 지구 곳곳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욱 심각한 것은 화석연료에 기초한 산업 활동의 결과로 기후변화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현재 지구의 기온 및 화학작용이라는 잠재적 격변에 직면해 있으며,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생태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한 금세기 말에는 동식물이 대멸종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로 인해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받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따라서 갈수록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우리를 안내할 새로운 경제 내러티브가 아주 절실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에 들어서자 화석연료가 주도하는 산업혁명은 정점에 이르렀고 인류가 야기하는 기후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지구에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증거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 30년간 나는 탄소 후 시대(post-carbon era, 탈탄소화 시대)를 안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았다. 지금까지 다양한 연구 결과, 내가 깨달은 것은 역사상 거대한 경제 혁명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와 결합할 때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에너지 체제는 더욱 상호 의존적인 경제활동을 창출하며 상거래를 확대할 뿐 아니라 보다 밀접하고 폭넓은 사회적 관계를 촉진한다. 여기에 수반되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새로운 에너지 체계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시간적․공간적 동력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수단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대 중반, 나는 커뮤니케이션과 에너지의 새로운 수렴 현상이 목전에 닥쳤음을 인식했다. 인터넷 기술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들이 곧 서로 융합하여 세계를 변화시킬 3차 산업혁명(Third Industrial Revolution, TIR)을 위해 새롭고 강력한 기반을 창출할 것이다. 다가오는 시대는 수억의 사람이 가정이나 사무실 또는 공장에서 자신만의 녹색 에너지를 생산할 것이며, 현재 우리가 인터넷에서 정보를 창출하고 교환하듯 &lsquo;에너지 인터넷&rsquo;으로 에너지를 주고받을 것이다. 이런 식의 에너지 민주화는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 비즈니스와 정치, 자녀 교육의 방식은 물론이고 시민 생활에 참여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워튼 스쿨의 최고 경영자 프로그램(Advanced Management Program, AMP)에서 3차 산업혁명이 지닌 비전을 소개했다. 워튼 스쿨은 내가 지난 16년간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과 기술, 경제, 사회 등의 새로운 트렌드를 강의한 경영대학원이다. AMP는 5주 교육프로그램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CEO들과 기업 경영자들에게 21세기에 직면할 여러 현안 및 도전을 가르친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 소개한 3차 산업혁명의 개념은 곧 여러 기업의 내부로 흘러들어갔고, EU의 정상들 사이에서도 흔히 통용되는 정치 용어로 자리 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0년경, EU는 지속 가능한 경제 시대로 이행하기 위해 탄소 의존도를 현격히 줄이는 여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유럽인은 그에 따라 목표와 벤치마크를 준비하고 연구개발 우선 사항을 재설정하며 새로운 경제적 여정을 위한 규약과 규정, 표준을 확립하는 데 주력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실리콘밸리에서 내놓는 &lsquo;킬러 앱(killer app)&rsquo;과 최신 장치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주택 보유자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가 바람을 넣은 부동산 시장 호황에 흥분과 기대감에 빠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원유에 대한 불안한 예측과 끔찍한 기후변화에 대한 경고, 그리고 수면 아래에서는 사실상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여러 징후에 관심을 가진 미국인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전국적으로 만족하는, 심지어 안주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국민은 미국은 역시 운이 좋으며 다른 국가에 비해 우월하다고 확고하게 믿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조국에서 다소 이방인이 된 나는 1850년 호러스 그릴리가 불만 가득한 이들에게 전했던 &ldquo;서쪽으로 가게 젊은이, 서쪽으로.&rdquo;라는 현명한 조언을 무시하고 반대편으로 방향을 틀어 유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달리 유럽은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시점에서 많은 미국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잠깐, 유럽은 무너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네잖아! 그냥 하나의 큰 박물관일 뿐이라고. 여행하기에는 좋은 곳일지 몰라도 세계 무대에서는 더 이상 강력한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 대륙이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 역시 유럽의 수많은 문제와 결함, 모순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경멸적인 비방은 미국이나 여타 국가의 정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들이 지닌 많은 한계를 지적하자면 말이다. 그리고 미국인은 자만심에 도취하기 이전에 미국이나 중국이 아니라 EU가 세계 최대의 경제기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EU 27개 회원국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 50개 주의 GDP를 초월한다. 국제적으로 군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지 않지만 EU는 여전히 국제 무대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세계의 여러 정부 가운데서 미래 인류의 생존을 심각하게 고민하며 큰 질문을 던지는 곳이 오직 EU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연유로 나는 동쪽으로 향했다. 지난 10년간 내 시간의 40퍼센트 이상을 EU에서 보내며 때로는 주 단위로 대서양을 가로질러 양 대륙을 오갔고 여러 정부와 비즈니스 공동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과 협업하여 3차 산업혁명의 개념을 발전시켰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006년 나는 EU 의회의 리더들과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3차 산업혁명 경제개발계획의 초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7년 5월, EU의회는 공식 선언문을 작성해 3차 산업혁명을 EU의 장기적인 경제 비전이자 로드맵으로 공인했다. 현재 EU 회원국은 물론이고 EU 집행위원회 내의 다양한 기관에서 3차 산업혁명의 비전을 구현하고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EU 의회의 선언문이 나온 지 1년 후, 다시 말해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고 불과 몇 주 지난 2008년 10월, 나는 서둘러 워싱턴 D.C.에서 모종의 회합을 주최했다. 이 회합에는 재생 에너지, 건설, 건축, 부동산, IT, 전력설비, 운송 및 물류 등에 종사하는 세계 각국 대표 기업들의 CEO와 최고 경영진 80명이 참석했다. 여기서 우리는 작금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임에 참석한 기업 리더들과 동업자 단체들은 이제 더 이상 단독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하고 3차 산업혁명 네트워크를 결성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글로벌 경제를 광범위한 탄소 후 시대로 진입하게 유도한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네트워크가 있어야 각국의 정부와 지역 기업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들과 공조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필립스, 슈나이더 일렉트릭, IBM, 시스코 시스템스, 악시오나 에너지, CH2M 힐, 아럽(Arup), 에이드리언 스미스 앤드 고든 길 건축, Q-셀 등을 포함하는 경제개발 그룹을 결성했다. 이 그룹은 동종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개발 네트워크로, 현재 각국의 경제를 3차 산업혁명 인프라로 전환하는 마스터플랜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도시와 지역 그리고 중앙 정부들과 공동 작업을 펼쳐 나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차 산업혁명의 비전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각 나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2011년 5월 24일, 나는 34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5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할 때 3차 산업혁명의 다섯 가지 핵심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아울러 이 프레젠테이션에서 나는 각 나라에서 탄소 후 시대의 산업사회를 준비할 때 본보기로 이용할 수 있는 OECD 녹색 성장 경제계획도 처음으로 공개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3차 산업혁명의 비전과 경제개발 모델을 내부 관계자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또한 그것의 성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각국의 정상과 글로벌 CEO, 사회적 기업가, 비정부기구(NGO) 들과 같은 참가자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성향까지 고찰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차 산업혁명을 위한 EU의 청사진을 설계하면서 나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이탈리아의 로마노 프로디 총리, 스페인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총리, EU 집행위원회 마누엘 바호주 위원장, 그리고 유럽이사회의 다섯 정상 등을 포함해 다수의 유럽 지도자와 함께 일하는 특권을 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우리 미국인이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일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없을까? 나는 분명 배울 것이 있다고 믿는다. 먼저 우리의 유럽 친구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시도하는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긴 해도 유럽인은 적어도 화석연료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녹색 미래로 진입하는 경로를 그리기 시작했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안타깝게도 미국인은 대부분 과거에 너무도 훌륭했던 경제체제가 이제는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계속 부인하는 행태만 보인다. 우리도 유럽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정신을 차려야 할 때가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미국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비록 유럽이 먼저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이야기 만들기와 그 전달에 관해서라면 미국만큼 재능 있는 나라가 없다. 매디슨 애비뉴와 할리우드 그리고 실리콘밸리가 특히 그 방면에 탁월하다. 그동안 미국에 우위를 안겨 준 것은 생산 및 제조 감각이나 군사력이라기보다는 미래를 생생하고 명확하게 그려 내는 묘한 능력이었다. 이러한 능력으로 기차역을 떠나기도 전에 목적지에 도착한 듯한 느낌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미국인이 진정으로 3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분명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미국인은 예의 그 월등한 능력을 발휘하며 발 빠르게 움직여 그 꿈을 현실로 바꿔 놓을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위대한 산업혁명의 마지막을 장식할 3차 산업혁명은 부상하는 협력의 시대를 위한 기초적 인프라를 마련할 것이다. 40년에 걸쳐 구축할 3차 산업혁명 인프라는 수십만 개의 사업체와 수억 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이번 산업혁명을 완성하면 근면한 사고와 사업 시장, 대규모 노동력을 특징으로 200년에 걸쳐 회자된 영리주의 전설은 종결될 것이다. 동시에 협력적 행동 방식과 소셜 네트워크, 창의적 전문가 및 기술 인력이 특징인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릴 것이다. 다가오는 반세기에는 1차, 2차 산업혁명의 전통적인 중앙집권화 경영 활동이 3차 산업혁명의 분산 사업 관행으로 점차 대체될 것이다. 또한 경제 및 정치 권력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계급 조직이 사라지고 사회 전반에 걸쳐 교점 중심으로 조직되는 수평적 권력(Lateral Power: 이 책에서 power는 힘이나 권력 또는 동력이나 전력을 가리킨다. 문맥에 따라 &lsquo;권력, 힘, 파워, 동력, 전력&rsquo; 등으로 표현했다. ─ 옮긴이)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언뜻 보기에 수평적 권력의 개념은 우리가 전반적인 역사에서 경험한 권력 관계와 너무 심하게 모순된다고 느낄 수 있다. 권력은 어쨌든 위에서 아래로 피라미드처럼 구성되는 것이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터넷 기술과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융합으로 생겨난 공동 권력은 근본적으로 인간관계를 상하 구조가 아닌 수평 구조로 재조정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 사회의 미래에 심오한 변화를 안겨 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1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점점 더 많은 상업 활동을 인공지능을 갖춘 기술적 대체물이 관리 및 감독할 것이다. 그로 인해 인류의 상당수는 일에서 해방되어 비영리 시민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는 데 주력할 것이고, 더불어 세기 후반부에는 사회적 자본 창출이 지배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상업은 여전히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인 부분이겠지만 더 이상 인간의 염원을 정의하는 무엇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다음 반세기 동안 우리가 인류의 물질적 니즈를 충족하는 데 성공한다면(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필수조건이다.), 인류 역사의 다음 시기에는 초월적인 관심사들이 훨씬 더 중요한 원동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문에서 우리는 3차 산업혁명 인프라와 3차 산업혁명 경제의 근본적 특징 및 작용 원리를 탐구하고 다음 40년 동안 우리가 밟을 가장 가능성 높은 행보를 예측한다. 한편 세계 각국과 공동체에 혁명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생겨날 장애와 기회도 살펴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차 산업혁명은 우리가 금세기 중반에 다다르기 전에 비극적인 기후변화를 피할 수 있으며 지속 가능한 탄소 후 시대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준다. 우리는 그러한 희망을 현실화할 수 있는 과학과 기술, 전략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우리가 너무 늦기 전에 저 앞에 놓인 경제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곳에 도달할 의지를 끌어모을 수 있느냐 여부일 뿐이다.</p> <hr /> <p>&nbsp;<img alt="" width="600" height="39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0_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_%EA%B7%B8%EB%A6%BC2.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large">1장<br /> 모두가 놓친 <br /> 진짜 경제 위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새벽 5시. 나는 러닝 머신 위를 달리면서 한 케이블 방송의 아침 뉴스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그때 리포터가 흥분한 목소리로 자칭 &lsquo;티 파티(Tea Party)&rsquo;라는 새로운 정치 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나는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러닝 머신에서 내려섰다. 텔레비전을 보니 노란색 바탕에 똬리를 튼 방울뱀을 그려 놓고 그 밑에 &lsquo;나를 건드리지 마라.&rsquo;라고 쓴 깃발을 든 중년의 미국인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어떤 이들은 카메라를 향해 &lsquo;대표 없는 과세 없다.&rsquo;, &lsquo;국경을 봉쇄하라.&rsquo;, &lsquo;기후변화는 거짓말이다.&rsquo;라고 적힌 팻말을 들이밀었다. 리포터의 목소리는 시위자들의 구호와 섞여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자발적인 풀뿌리 운동 운운하며 유권자들의 희생으로 자신의 배만 불리기에 급급한 진보적 정치인들과 워싱턴 D.C.의 거대 정부에 저항하는 그 운동이 지금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 내가 보고 듣는 내용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내가 거의 40년 전에 조직했던 무언가의 왜곡된 반전을 보고 있는 듯했다. 이 무슨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1973년 보스턴 오일 파티</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73년 12월 16일, 동이 트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보스턴 시내의 패늘 회관을 향해 걸어가는 내 얼굴 위로 차가운 바람이 스쳤다. 패늘 회관은 한때 조지 3세와 그의 법인체들이 펼치는 식민지 정책에 대항했던 샘 애덤스 및 조지프 워런과 같은 급진파가 모이던 아지트나 다름없던 곳이다.(그들은 악명 높은 영국 동인도회사를 가장 큰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시는 벌써 몇 주간 궁지에 빠져 있었다. 평소 교통체증이 심했던 도심 지역은 기름이 동이 난 주유소가 늘어나자 며칠 사이에 무척 한산해졌다.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몇몇 주유소에는 자동차들이 몇 블록에 걸쳐 길게 늘어서서 한 시간 혹은 그 이상을 기다렸다. 운 좋게 기름을 넣은 운전자들은 주유기에 적힌 가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2~3주 만에 휘발윳값이 배로 뛰어 당시 세계 최대 원유 생산국이던 미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인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만했다. 미국이 20세기의 주도적 위치에 올라 초강대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풍부한 석유 매장량과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국민에게 저렴한 자동차를 안겨 주던 약빠른 능력 덕분이었음을 알기에 특히 그랬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인의 국민적 자부심에 충격을 준 사건은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두 달 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미국이 4차 중동전쟁 동안 이스라엘 정부에 군용 장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석유금수조치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lsquo;오일 쇼크&rsquo;는 파문을 일으키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12월에 이르러 국제 유가는 배럴당 3달러에서 11.65달러까지 치솟으며 월 가와 중산층을 극심한 공포에 빠뜨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현실은 가장 먼저 동네 주유소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많은 미국인은 거대 정유회사가 뜻밖의 횡재를 누리고자 독단적으로 기름값을 올려 상황을 악용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되자 보스턴 및 전국 각지의 운전자들의 분위기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973년 12월 16일 보스턴 항구에서 일어난 격렬한 사건의 배경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날은 영국 왕조를 향한 식민지 민중의 반심에 불을 지른 보스턴 티 파티(일명 보스턴 차 사건)라는 역사적인 사건의 200주년 기념일이었다. 모국에서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로 수입되는 차와 여타의 상품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한 것에 분노한 샘 애덤스는 일단의 불만 세력을 규합했고, 그들 중 일부는 보스턴 항구에 정박한 화물선을 급습하여 차 상자를 깨뜨리고 그 안의 차를 모조리 바다로 던져 버렸다. &ldquo;대표 없이 과세 없다.&rdquo;라는 표현은 곧 급진파들의 플래카드 구호가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인 저항은 군주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에 일련의 반발과 역반발을 야기했고 결국 1776년의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으로 이어졌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념일을 앞둔 몇 주 동안 거대 정유사를 향한 분노는 갈수록 쌓여만 갔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와 같이 기본 권리로 여겼던 저렴한 휘발유와 자유로운 이동성에 대한 권리가 바가지요금을 부과하는 거대 정유사들 때문에 위협받는 사실에 많은 미국인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나는 1960년대의 시민평등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참여했던 28세의 젊은 사회운동가였다. 그 1년 전에는 몇 년 후면 맞이할 1776년 독립선언 200주년 기념일에 맞춰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닉슨 행정부가 설립한 &lsquo;미국 200주년위원회&rsquo;에 대한 급진적 대안으로 &lsquo;민중 200주년위원회&rsquo;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출범시키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대안을 만들어 낸 부분적인 이유는 뉴레프트(New Left: 1960~1970년대의 신좌익) 운동에 동참한 동료에게서 점점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상인과 정비공, 경찰관, 소방관 그리고 가축시장이나 철도 조차장, 인근의 제강소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주로 거주하는 시카고 남부의 노동자 계층 동네에서 자랐기에 애국심이 핏속에 흘렀다. 다른 지역에서 온 방문객은 동네 곳곳의 현관마다 걸려 있는 성조기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동네는 1년 365일이 국기 다는 날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자라면서 토머스 제퍼슨과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페인, 조지 워싱턴 등과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닌 급진적 의식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이들은 기꺼이 목숨을 내걸고 삶과 자유에 대한 침해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추구한 혁명적인 사상가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뉴레프트 운동에 참여한 동료들은 대부분 미국의 엘리트 교외 거주지에서 자란, 나보다 집안 배경이 좋은 친구들이었다. 사회정의와 평등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헌신하긴 했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외의 혁명적 투쟁에서, 특히 2차 세계대전 후에 발생한 반식민지주의 투쟁에서 점점 더 많은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 모종의 지침을 세우고 이타적 행위를 독려하기 위해 마오쩌둥과 호치민, 체 게바라의 사상을 논하던 수많은 정치 모임들이 떠오른다. 지난 200년 동안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반식민지주의 투쟁은 우리 미국의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이라고 믿으며 성장한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이 매우 낯설기만 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행사는 젊은 세대에게 미국의 급진주의 약속과 다시 연결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터였다. 특히 닉슨 대통령과 일단의 영리 목적 후원자들이 주도하는 백악관 공식 기념행사가 우리가 기념해야 할 미국의 영웅들에게 보다 어울리는 경제적&middot;사회적 정의보다는 귀족적 특권에 대한 군주적 과시를 근본으로 삼는 것으로 보였기에 더욱 그러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보스턴 티 파티 기념일을 정유사에 항거하는 시위의 날로 계획했다.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해 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거대 정유사에 반대하는 시위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고, 그래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예측할 방도도 없었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하여 참가자 수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는 점점 깊어만 갔다. 1960년대에는 반전 시위를 계획할 때 일정을 항상 봄철로 잡았다. 당연히 보다 많은 군중을 끌어모으기 위한 의도였다. 사실 경험 많은 사회운동가들 중에서도 한겨울에 집단 시위를 조직했다는 기억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퉁이를 돌아 패늘 회관이 있는 길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천 명의 인파가 회관을 향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lsquo;정유사가 책임져라.&rsquo;, &lsquo;거대 정유사를 타도하자.&rsquo;, &lsquo;미국 혁명 만세&rsquo; 등의 격문이 적힌 플래카드와 팻말을 들고 &lsquo;엑슨 타도&rsquo;라는 구호를 외치며 회관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먼저 연단에 올라 시위자들에게 오늘을 &lsquo;에너지 독립&rsquo;을 위한 또 다른 미국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기억할 것을 촉구하는 짧은 열변을 토했다. 그런 후 우리는 200년 전 &lsquo;티 파티 시위자들&rsquo;이 그리핀스 항구로 향할 때 이용했던 노선을 그대로 밟으며 거리 시위에 돌입했다. 부두로 향하는 우리의 행렬에 학생과 노동자, 중산층 전문직 종사자, 가족 전체가 나선 그룹 등 수천 명의 보스턴 시민이 추가로 동참했다. 살라다 티 컴퍼니의 선박(원래의 배를 재현해 놓은 것)이 정박해 있는 선창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시위대가 2만 명을 넘어섰으며, 그들은 모두 부둣가에 늘어서서 &lsquo;거대 정유사를 타도하자.&rsquo;라는 구호를 외쳐 댔다. 시위는 세심하게 준비한 200주년 기념행사를 압도했다. 멀리 북쪽의 글로스터 지역과 여타의 지역에서 온 낚싯배들이 일종의 함대를 이뤄 경찰의 봉쇄를 뚫고는 연방 및 지방 고위 관리들이 공식 행사를 기다리는 살라다 티 컴퍼니의 선박으로 향했다. 낚시꾼들은 선박에 올라 선상을 장악했으며, 어떤 이들은 돛대 꼭대기에 올랐고 또 어떤 이들은 차 상자 대신 빈 휘발유 통을 강으로 내던졌다. 이를 지켜보던 시위자들은 연신 환호성을 질러 댔다. 다음 날 《뉴욕 타임스》를 위시한 미국의 여러 신문은 이 사건을 &lsquo;1973년 보스턴 오일 파티&rsquo;라 칭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30_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3%EC%B0%A8%20%EC%82%B0%EC%97%85%ED%98%81%EB%AA%85_%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2차 산업혁명의 종반전</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흐른 2008년 7월의 어느 날, 유가는 국제 원유 시장에서 배럴당 147달러라는 기록적인 가격에 도달했다. 불과 7년 전만 해도 배럴당 24달러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2001년, 나는 수년 안에 유가가 5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하며 석유파동이 터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나의 의견에 많은 이가 회의적이었으며 심지어는 조롱하는 태도까지 보였다. 대부분의 지질학자와 경제학자는 물론 석유업계 관계자들까지 나서서 적어도 자신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2007년 중반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을 넘어서자 전 세계적으로 전반적인 상품 및 서비스의 가격 또한 동반 상승했다. 이는 글로벌 경제의 모든 상업적 활동이 사실상 원유나 여타 화석연료에 의존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에 기인했다. 우리의 식량 대부분은 석유화학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여 재배한다. 시멘트나 플라스틱 등과 같은 대부분의 건설자재와 제약 제품도 화석연료로 만든다. 우리가 입는 옷 대부분 역시 석유화학 합성섬유로 만든다. 교통과 동력, 난방, 전력 또한 모두 화석연료에 의존한다. 세계의 전체 문명은 석탄기의 탄소 퇴적물을 토대로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류가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가정했을 때 5만 년 후 태어나서 살아갈 후손들은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분명 우리를 &lsquo;화석연료 사람들&rsquo;이라 부를 것이며 우리가 과거를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 같은 이름을 붙였듯이 현시대를 탄소 시대로 정의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석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서자, 다시 말해서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터지자 곡물 가격이 차례로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22개의 나라에서 각종 시위와 폭동이 발발했다. 멕시코의 토티야시위, 아시아 몇몇 지역의 쌀 폭동이 그것이다. 확산된 정치적 불안은 공포를 낳았고 결국 원유와 식량의 연결성에 관한 범세계적인 논의를 촉발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류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인구가 하루 2달러 이하의 금액으로 살아가는 까닭에 주요 식량 가격의 변화는 그 수준이 미미하더라도 크나큰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2008년경 콩과 보리 가격은 두 배나 뛰었고 밀은 거의 세 배, 쌀은 네 배나 올랐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사상 초유로 10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배고픈 채 잠이 든다고 밝혔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선진국의 중산층 소비자들까지 유가 폭등에 영향을 받기 시작하자 두려움은 더욱 확산되었다. 기본적인 품목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기름값과 전기요금이 오르고, 건설자재와 의약품, 포장자재 등의 가격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식으로 가격이 오른 상품의 목록이 끝없이 이어졌다. 봄이 끝나갈 무렵 물가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상승했고, 구매력은 지구 곳곳에서 빠르게 하락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8년 7월, 글로벌 경제는 일제히 멈춰 섰다. 바로 화석연료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거대한 경제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그로부터 60일 후 발생한 금융시장의 붕괴는 여진에 불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부분의 국가원수와 경제학자, 비즈니스 리더 들은 지금도 세계를 뒤흔든 경제 붕괴의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한다. 그들은 여전히 신용시장 거품과 정부 부채가 유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굳게 믿는다. 이 두 가지가 석유 시대의 종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용 위기와 부채 위기는 단지 규제가 철폐된 금융시장을 잘못 관리해서 발생했다는 사회적 통념이 지속되면 될수록 세계 각국의 리더는 위기의 근원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 근본적인 치유책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이 부분은 잠시 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2008년 7월에 일어난 이 일련의 사건을 세계화의 정점으로 정의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아직 잘 모르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화석연료와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 내에서 글로벌 경제성장을 확대할 수 있는 최댓값, 즉 그 외곽 한계에 도달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 우리는 석유 시대와 그에 기반한 2차 산업혁명의 종반전에 접어들었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여야 할 냉정한 현실이다. 인류의 모든 구성원은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서둘러 전혀 새로운 에너지 체제와 새로운 산업 모델로 옮겨 가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명의 종말까지 감수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화 측면에서 우리가 문제에 직면한 이유는 &lsquo;글로벌 피크 오일 생산&rsquo; 때문이 아닌 &lsquo;1인당 글로벌 피크 오일&rsquo; 때문이다. 글로벌 피크 오일 생산은 석유지질학자들이 세계 석유 생산이 이른바 허버트 종형 곡선의 정점에 도달하는 단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피크 오일 생산은 최종적으로 채굴 가능한 석유 매장량이 절반 정도 고갈되었을 때 발생한다. 곡선의 윗부분이 석유 채굴의 중간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생산은 증가했던 속도만큼 빠르게 하락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매리언 킹 허버트는 1956년도에 쉘 오일 컴퍼니에 몸담았던 지구물리학자였다. 그는 미국 48개 주의 석유 생산이 1965년에서 1970년 사이에 정점에 다다를 것이라고 예측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명해졌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원유 생산국이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의 예상은 동료들의 비웃음을 샀다. 미국의 위대한 강점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개념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바로 묵살되었다. 그러나 허버트의 예언은 옳은 것으로 드러났다. 1970년, 미국의 석유 생산은 정점에 달했으며 이후 기나긴 시간 하락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40년간 지질학자들은 글로벌 피크 오일 생산이 언제 발생할지 그 시점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펼쳐 왔다. 낙관론자들은 자신들의 모델을 토대로 아마도 2025년에서 2035년 사이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반면 세계 최고의 지질학자 몇몇을 포함한 비관론자들은 2010년에서 2020년 사이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리에 사무국을 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주요 석유 소비국들이 설립한 OECD 산하의 에너지 집단 안보체제로서 각국 정부에 에너지에 관한 정보와 예측을 전달하는 기관이다. IEA는 2010년 세계 에너지 전망 보고서에서 글로벌 피크 오일 생산에 관한 논란을 잠재우는 듯한 내용을 밝혔다. 즉, 원유의 글로벌 피크 생산은 추정컨대 2006년 하루 생산량이 7000만 배럴에 다다르면서 이미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 인정은 국제 석유 공동체에 큰 충격을 던지며 원유에 중점적으로 의존하는 글로벌 기업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EA는 글로벌 경제의 급격한 붕괴를 막으려면 석유 생산량을 하루 7000만 배럴에 못 미치는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할 수 있으려면 향후 25년간 기존 유전에서 남아 있는 원유를 최대한 추출하거나 찾아는 놓았지만 생산량이 적을 것 같아 손대지 않던 유전까지 파헤치고, 갈수록 찾기 힘든 새로운 원전을 찾아내는 등의 작업에 8조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바로 1979년 2차 산업혁명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에 일어난 &lsquo;1인당&rsquo; 피크 오일에 관한 부분이다. 영국석유회사(BP)가 시행한 연구와 이후 동일한 결과를 보여 준 다른 연구에 따르면, 공평하게 분배한다는 전제 아래 이용 가능한 원유가 바로 그해에 1인당 피크 오일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 우리는 더 많은 유전을 찾아냈지만 동시에 세계 인구는 그보다 더 빠르게 증가했다. 현재 세계에 알려져 있는 모든 원유를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68억 인구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면 1인당 이용 가능한 양은 1979년보다 더 적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중국과 인도의 경제는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탔다.(2007년 인도는 9.6퍼센트, 중국은 14.2퍼센트 성장했다.) 이는 곧 인류의 3분의 1이 새로 석유 시대에 합류했음을 의미했고, 결국 기존의 석유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가가 치솟아 앞서 언급한 배럴당 147달러까지 올랐으며, 그 직접적인 여파로 물가가 상승하고 소비가 하락하면서 글로벌 경제가 멈춰 선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0년, 경제는 주로 고갈된 재고 물량을 보충하기 위해 조금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장을 시작함과 동시에 유가가 따라 움직였고, 2010년 말에는 배럴당 90달러까지 올랐다. 결국 다시 연쇄적인 생산 및 공급 과정 전체에 걸쳐 가격이 상승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1월, IEA의 수석 경제학자인 파티 비롤은 경제적 생산량의 증가와 유가 상승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주목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경제 회복에 탄력이 붙으면 &ldquo;유가가 위험 지대에 진입하여 글로벌 경제를 위협할 것&rdquo;이라 경고했다. IEA에 따르면 대부분 부유한 선진국인 OECD 34개 회원국의 2010년 원유 수입은 연초 2000억 달러 수준에서 연말에는 790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EU의 2010년 원유 수입 상승폭은 7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 비용은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재정 적자를 합친 금액과 맞먹었다. 미국만 해도 원유 수입 상승 폭이 720억 달러였다. 이러한 비용 증가는 OECD의 GDP가 0.5퍼센트 손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0년 개발도상국은 원유 수입 비용이 200억 달러 정도 증가하자 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는 GDP의 거의 1퍼센트에 달하는 수입이 사라진 것과 같기 때문이다. 특히 GDP 대비 원유 수입 비용의 비율은 2008년에 보였던 것과 동일한 수준에 육박했다. 글로벌 경제의 붕괴 직전과 유사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IEA는 &ldquo;원유 수입 비용의 증가가 경제 회복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rdquo;라며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EA가 2010년 보고서를 공개한 바로 그날, 《파이낸셜 타임스》의 경제 칼럼니스트 마틴 울프는 중국과 인도 그리고 서구 열강 사이에 일고 있는 &lsquo;1인당 생산량&rsquo;의 역사적인 수렴 현상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컨퍼런스 보드(Conference Boar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0년대에서 2009년 사이에 미국의 1인당 생산량 대비 중국의 1인당 생산량 비율은 3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증가했고, 인도의 비율은 3퍼센트에서 7퍼센트로 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울프는 미국의 1인당 생산량 대비 중국의 1인당 생산량이 2차 세계대전 후 경제 회복을 개시했을 무렵의 일본과 유사하다고 썼다. 일본의 1인당 생산량은 1970년대 미국의 70퍼센트 수준까지 올랐으며, 1990년에는 미국의 90퍼센트 수준까지 상승했다. 만약 중국이 이와 유사한 궤적을 밟는다면 2030년에 미국의 70퍼센트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사례와는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2030년이면 중국 경제는 미국 경제의 세 배 규모가 될 것이며, 미국과 서유럽의 경제를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벤 버냉키는 2010년 11월의 한 연설에서 2/4분기에만 신흥 경제국들의 실질 총생산량이 2005년 초 수준에 비해 41퍼센트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그 기간에 중국의 총생산량은 70퍼센트, 인도의 총생산량은 55퍼센트 증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총 경제 생산량이 21세기 초 8년 동안과 같은 속도로 다시 증가한다면(지금 현재의 상황이 그렇다.) 유가는&nbsp; 배럴당 150달러나 그 이상 수준으로 빠르게 되돌아갈 것이다. 이는 여타의 모든 재화와 용역의 비용을 급상승시킬 것이고 또다시 구매력 하락과 글로벌 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난 10년간 경제적 탄력을 되찾기 위해 쏟아부은 각각의 모든 노력이 배럴당 150달러 수준의 유가를 만나면서 멈출 것이라는 얘기다. 재성장과 붕괴 사이의 이러한 거친 선회는 글로벌 경제의 종반전을 고할 것이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대론자들은 유가 상승 원인이 공급에 대한 수요 압력 때문이라기보다는 큰돈을 벌기 위해 원유 시장을 도박판으로 만드는 투기꾼들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투기꾼들 때문에 문제가 악화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새로 발견하는 원유 1배럴 대비 3.5배럴에 해당하는 원유를 소비해 왔다는 것이다. 바로 이 현실이 우리의 현재 상황과 미래 전망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점차 고갈되는 원유에 대한 수요 증가의 압력은 중동의 정치적 불안 때문에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2011년, 튀니지&middot;이집트&middot;리비아&middot;이란&middot;예멘&middot;요르단&middot;바레인 등 중동 여러 나라의 수많은 젊은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혹은 수세대에 걸쳐 이어져 온 부패 독재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60년대 서구 젊은이들의 저항을 연상케 하는 중동 젊은이들의 모반은 막대한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세대교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종족에 대한 전통적 충성은 물론 페이스북 프로필과도 동질감을 느끼며 글로벌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상하는,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 세대에게 예전의 방식들은 그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구세대의 가부장적 사고와 엄격한 사회규범, 국수적 행동 방식 등은 투명성과 협력적 행동방식, 개인 간의 관계를 중시하며 소셜 미디어 네트워크 내에서 성장한 신세대에게는 너무도 낯설기만 하다. 이는 신세대와 구세대의 의식 자체에 역사적인 분열이 일고 있음을 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민의 궁핍을 대가로 자신의 배만 불리는 독단적이고 잔악한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으며 실력보다는 배경이 좌우하는 부패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진력이 난 젊은이들은 변화를 요구했다. 불과 몇 주 만에 그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정부를 몰락시켰고 리비아를 내전으로 몰아넣었으며 요르단과 바레인 정권을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동 지역이 그토록 피폐해지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석유다. &lsquo;검은 황금&rsquo;으로 통하던 석유는 오히려 음울한 저주로 작용했다. 중동 지역 대부분이 소수 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단일 자원 사회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수장들은 석유를 유통하여 억만장자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빈약한 복지 지원금과 정부 고용 정책으로 국민을 침묵시켰다. 그 결과 이들 나라는 탄탄하고 다면적이며 기업가 정신이 살아 있는 경제와 이를 관리할 만한 인력을 창출할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을 조성하지 못했다. 결국 수세대에 걸쳐 수많은 젊은이가 자신의 잠재 능력을 제대로 계발하지도 못한 채 시들어 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구세대에 비해 자율적이며 대담한 오늘의 신세대는 나약한 어른들의 사고와 관습에서 탈피하여 권력에 맞서면서 그들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승리를 맛보았다. 구체제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으며, 비록 발전이 더디고 고통스러운 긴축이 따르겠지만 수세대에 걸쳐 아랍 세계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기나긴 가부장적 통치가 향후 10년 후까지 지속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 우리가 중동에서 목도하는 것은 계층적 권력에서 수평적 권력으로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대형 미디어 복합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음악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시작된 인터넷 세대가 중동에서는 독재 정부의 중앙집권화 통치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수평적 권력을 선보인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중동의 정치적 불안은 앞으로 수년 동안 세계시장의 유가에 큰 타격을 입힐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초, 리비아에서 정치적 대격변이 발생하자 자국 내 수많은 유전이 문을 닫았다. 그&nbsp; 결과 하루 160만 배럴에 해당하는 원유 생산을 중단하면서 유가를 배럴당 120달러로 끌어올렸다. 석유 산업 분석가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에서 원유 생산에 이와 같은 비슷한 차질이 생긴다면 하룻밤 사이에 유가가 20~25퍼센트 상승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글로벌 경제 회복에 대한 그 어떠한 희망조차도 처참하게 뭉개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론, 본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제러미 리프킨</strong><br /> 미국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났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경제, 사회,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해 온 저명한 사회사상가이다. 1994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워튼 스쿨 최고 경영자 과정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또 비영리 단체 &lsquo;경제동향 연구재단(the Foundation on Economic Trends)&rsquo;을 설립해 사회의 공공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계몽 운동 및 감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 『엔트로피』, 『육식의 종말』, 『생명권 정치학』,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수소 혁명』, 『유러피언 드림』, 『공감의 시대』 등이 있다.<br /> 전작 『공감의 시대』에서 적자생존과 부의 집중을 초래한 경제 패러다임의 종언을 선고했던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에서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재생에너지와 인터넷 네트워크를 토대로 한 수평적․분산적 모델을 제안하며, &lsquo;3차 산업혁명&rsquo;을 계기로 협업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안진환</strong><br /> 경제 경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문 번역가이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번역 활동을 하며 명지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했고, 2012년 현재 번역 에이전시 인트랜스와 번역 아카데미 트랜스쿨 대표이다. 저서로 『영어실무번역』, 『Cool 영작문』 등이 있으며, 역서로 『스티브 잡스』, 『넛지』, 『아이디어맨』, 『빌 게이츠@생각의 속도』, 『포지셔닝』, 『괴짜경제학』, 『온워드』, 『마켓 3.0』, 『불황의 경제학』, 『이코노믹 씽킹』, 『스틱!』, 『스위치』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14 오후 2:34:00《235》달과 술의 시인, 이백<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5/%EC%9D%B4%EB%B0%B1%20%EC%8B%9C%EC%84%A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25일</span></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신하윤 선역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이백시선』</strong></span>(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3[당대편<sup>唐代篇</sup>])을 읽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달과 술의 시인</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의 민요 가운데 &ldquo;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rdquo;라는 노래가 있다. 태백<sup>太白</sup>은 이백<sup>李白</sup>(712~770)의 자로, 가장 밝은 별인 금성<sup>金星</sup>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낳을 때 금성 꿈을 꾸었다 하여, 그것을 자로 삼은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39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5/%EC%9D%B4%EB%B0%B1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이 &lsquo;달의 시인&rsquo;이라는 것은 현존하는 1,049수 가운데 달을 노래한 작품이 300여 수나 된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동시에 이백이 &lsquo;술의 시인&rsquo;이라는 것은 그가 남긴 숱한 음주시<sup>飮酒詩=頌酒歌</sup>가 입증해 준다. 그 가운데 &ldquo;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돼야지&rdquo;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을 권하다<sup>將進酒</sup>」의 전반부를 보자.(어느 번역본도 자연스럽지 못해, 여러 번역을 취합하여, 윤색했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대 보지 못하는가<br /> 하늘에서 내려온 황하의 물이<br /> 바다로 흘러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br /> 그대 보지 못하는가<br /> 넓고 큰 집의 거울 속에서 백발이 슬퍼하는 것을?<br /> 아침의 검은 머리가 저녁에는 흰머리가 되는구나<br /> 인생에서 좋을 때 맘껏 즐길 일이니<br /> 금술잔을 빈 채로 달 아래 두지 마오<br /> 하늘이 나 같은 재목을 낸 것은 필히 쓰일 데가 있음이니<br /> 천금을 다 써버린들 아깝지 않다<br /> 양 삶고 소 잡아 한바탕 즐겨보세<br /> 한 번 마시면 삼백 잔은 돼야지</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달과 술은 이백의 시에서 늘 함께 등장하는 불가분의 이미지로, 한 편의 시 속에 두 가지가 동시에 나와야 진짜 이백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sup>月下獨酌</sup>」와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다<sup>把酒問月</sup>」의 첫머리를 차례로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br /> <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꽃 넝쿨사이에 술 한 동이<br /> 홀로 마시니 벗이 없네.<br /> 잔 들어 달님에게 권하니,<br />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구나.<br /> 달은 마시지 못하고,<br /> 그림자만 날 따라다닌다.<br />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여<br /> 이 봄이 가기 전에 즐겨볼까나. (신하윤 역)</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푸른 하늘의 달이여 언제부터 있었느냐<br /> 나는 지금 잔 멈추고 네게 한번 묻는다<br /> 사람은 저 밝은 달을 잡을 수 없는데<br /> 달은 되레 사람을 따르려 한다 (김원중 역)</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의 시에서 불가분이었던 달과 술은 그의 죽음에까지 따라와서, 시인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백이 &lsquo;뱃놀이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해,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채석강에 빠져 죽었다&rsquo;라는 소문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연구자도 &lsquo;술에 취해, 강물에 비친 달&rsquo;을 잡으려다가 익사했다는 허무맹랑한 설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소문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김원중은 『당시감상대관』의 「이백」 편에, 이백이 달과 술에 홀린 까닭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달.</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는 달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당나라 특히 현종이 통치하던 시기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시비<sup>是非</sup>가 전도된 난세였으며, 이를 초극하기 위한 이백의 노력은 홀로 심산유곡에 들어가 &lsquo;그 자신을 보호하는<sup>康其身</sup>&rsquo; 은둔적 태도로 선회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hellip;] 그에게 달은 교결투명<sup>皎潔透明</sup>의 상징으로 설명될 수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동서양을 불문하고 시와 자연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특히 이백에게 자연, 그중에서도 달은 은둔의 상징이요 유락<sup>遊樂</sup>의 대상이며, 정적무욕<sup>靜寂無慾</sup>의 경지인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음은, 술.</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백이나 맹호연에게 술이라는 것은 속세를 떠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하면서도 벼슬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성격의 모순과 심적 갈등으로 인한 고민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이백은 현실적인 고통과 괴로움, 절망 등 고통스러운 감정을 해소시키는 매개체로 술을 즐겼는데, 시성 두보에게서는 술이 뼈 저리는 애수를 동반하여 처량한 느낌이 들었던 것과 달리, 그에게는 오히려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과 감정이 깃들어있어 시의 분위기를 서정적이고 명랑하게 바꿔놓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 흔히 말하는 차이점이다. 그러기에 두보가 말했듯이 이백은 술 한 말을 마시면 백 편의 시를 지을 정도로 시적 상상력이 풍부하였으며, 당나라 어느 곳이든 술만 있으면 그의 고향이요, 고관대작도 부럽지 않았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진사시 거듭 낙제, 이백은 &lsquo;돌머리&rsquo;였나?<br /> ...당대 독서인이 권력에 다가서는 세 가지 방법</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80"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5/%EC%9D%B4%EB%B0%B1%20%EB%91%90%EB%B3%B4%EB%A5%BC%20%EB%A7%8C%EB%82%98%EB%8B%A4.jpg" />21세의 나이로 보란 듯이 진사시에 합격했던 왕유를 제외하고 이하&middot;맹호연&middot;이백&middot;두보 등 기라성 같은 당대<sup>唐代</sup>의 시인들은 누구도 그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 물론 진사시는 1천 명이 응시해서 겨우 10~20명만 합격하는 만큼 낙제생이 많았다. 하지만 시를 짓는 시험에 세 사람이 모두 두 번씩이나 미끄러졌다니, 가휘 때문에 응시 자체가 가로막혀 있었던 이하를 제외한 맹호연&middot;이백&middot;두보는 모두 &lsquo;돌머리&rsquo;에 불과했지 않을까? 이 문제는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고전이라는 당시<sup>唐詩</sup> 최대의 추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보면, 이들이 매번 진사과에 떨어진 데에는 숨은 이유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카시마 도시오의 『이백, 두보를 만나다』(심산, 2003)를 보면, 당나라 시대의 독서인(사대부)이 권력에 다가서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번째 길은 과거<sup>科擧</sup>. 이 길은 문관 등용으로 통하는 정식 통로다. 과거는 표면상의 방침으로는 독서인 누구나 응시할 수 있으며 성적이 좋으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았다. 지은이의 말을 들어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과거 응시에는 국립학교 학생이 되어 공부하다가 거기서 지원하여 시험을 치르는 코스와, 향공<sup>鄕貢</sup>이라 하여 혼자 공부하다가 지방 관청의 예비시험을 치르고 거기서 합격한 후 추천을 받아 중앙 시험을 치르는 코스가 있었다. 국립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관리의 자제였고, 예외적으로 권력과 관계가 깊은 호상<sup>豪商</sup>의 자제도 입학을 허가받았지만, 이백과 같은 가문의 자제가 입학하기란 애당초 어려웠다. 향공의 경우에는 지방 관청과 지방 유력자의 승인을 얻고, 다시 중앙 관청인 호부(戶部: 호적에 관한 사무를 취급하는 관청)의 심사를 거쳐야 비로소 중앙 관청이 시행하는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예로 든 &lsquo;상지상<sup>上之上</sup>&rsquo;에서 &lsquo;하지하<sup>下之下</sup>&rsquo;까지에 랭크된 293개 집안 중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사실상 응시가 불가능했으며, 설령 응시를 할 수 있었다고 해도 합격은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이백이 과거를 거쳐 정면으로 당당하게 관계에 진출할 길은 처음부터 막혀 있었던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은 중국 서남쪽 끝의 촉도<sup>蜀道</sup>에서 태어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삼국지』의 유비가 근거지로 삼기도 했던 이곳은 중원과는 꽤 격리된 변방이고, 서역과 왕래가 잦은 지역이다. 이백의 아버지인 이객<sup>李客</sup>은 중국과 서역 간의 통상 교역에 종사한 상인이다. &lsquo;객<sup>客</sup>&rsquo;은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을 부르는 별호라니, 이백의 집안은 원래 촉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이객은 성<sup>姓</sup>마저 촉으로 이주해 오면서 바꾼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lsquo;~하면 내 성을 간다&rsquo;는 말이 있듯이, 중국에서도 성을 바꾼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그래서 이객이 수배자였다는 주장에서부터 호인<sup>胡人</sup>, 즉 투르크인이라거나 이백의 어머니가 이란계였다는 설까지 나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의 문인들은 자신을 황제의 일족으로 꾸미기를 좋아해서, 이백 역시 죽을 때까지 자신을 당 황실과 같은 농서<sup>隴西</sup> 이 씨라고 우겼다. 하지만 당나라 황실조차 선비<sup>鮮卑</sup>족이었던 자신의 혈통을 은폐하고자 족보를 날조하여 명문인 농서 이 씨에 억지로 연결시켰으니, 이백의 혈통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그의 시에 볼 수 있는 호인에 대한 낯설고도 비우호적인 묘사를 보건대, 이백이 그쪽 계통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아생전 황족으로 대접받은 적도 없었다. 그때는 &lsquo;개나 소나&rsquo; 모두 농서 이 씨였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 태종의 명령으로 편찬된 『씨족지<sup>氏族志</sup>』에 가장 고귀해야 할 황실의 가문 순위가 아홉 단계 가운데 세 번째에 불과한 &lsquo;상지하<sup>上之下</sup>&rsquo;로 평가된 예에서 보듯이, 그 시절의 문벌 의식은 황제조차 거리낌 없이 멸시할 정도였다. 하므로 서남쪽 변방에서 올라온 근본 없는 이백이 과거를 통해 조정으로 출사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당시의 과거는 반드시 성적순으로 합격&middot;불합격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자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시험이 시행되기 전에 수석이 미리 정해져 있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과거와 함께 독서인이 권력에 가까이 나가는 두 번째 길은, 중앙의 현관<sup>顯官</sup>이나 지방 장관에게 접근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그 추천으로 관직을 얻는 것이다. 이 통로는 이른바 &lsquo;뒷문&rsquo;에 해당하는 편법인데(이외에도 군인이 되는 무관과 생식기를 잘라내고 환관이 되는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별외다), 이것도 거저 되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유력자만 믿고서는 관직을 얻을 확률이 낮기 때문에 몇 명 혹은 몇십여 명의 유력자를 찾아 다녀야 했고, 다양한 관리 지망생과의 격심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어야 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유력자의 문전을 방문하는 관리 지원자는 대개 우선 서<sup>書</sup>와 시를 바친다. 서는 편지를 말하지만, 이는 용건을 전하는 편지가 아니라 문학 작품이므로 세련된 문장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보통 상대방의 가계, 재능, 공적을 극찬하고 말미에 자신을 추천해 주었으면 한다는 취지를 덧붙인다. 이것을 놓고 온 지 며칠이 지나면 재차 방문하여 다시 시와 서를 바친다. 제2차 파상 공격인 셈인데, 이를 &lsquo;온권<sup>溫卷</sup>&rsquo;이라고 했다. 앞서 날린 제1탄을 다시 가열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상대가 장래성이 있다고 인정해주면 직접 면회를 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에 들면 출입을 허락받아 객<sup>客</sup>의 일원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lsquo;등용문<sup>登龍門</sup>&rsquo;을 돌파한 셈이다. 제2탄까지 발사해도 아무 소식이 없으면 다시 제3차 파상 공격을 가해도 되지만, 일단 전망이 없으므로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편이 현명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통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ldquo;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작품의 힘으로 끌어당겨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문학 수업이 필요했다. 중국의 정통 문학, 즉 사대부의 문학은 방대한 고전에 대한 지식이 넓고 깊지 않으면 창작도 이해도 불가능했으므로 오랜 세월을 바쳐 고전 공부를 해야만 했다.&rdquo; 게다가 여기에는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구직자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아첨하여 마음에 들어야 발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비굴한 존재다. 그러나 고관에게 스스로를 철두철미하게 비굴한 존재로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독서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비굴하기만 한 사내는 자칫하면 비참하게만 보일 뿐 아무런 흥미를 끌지 못하여 상대가 그런 사내를 발탁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굴함만으로는 전술적으로 효과가 없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구직자는 본질적으로 비굴하지만, 그래도 기개가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ldquo;건방지고 오만하면서도 그 건방짐과 오만함이 상대에게 교묘한 아첨&rdquo;이 되어야 했다. 기막힌 성공 사례를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이백보다 조금 연상인 노홍일<sup>盧鴻一</sup>이라는 은자<sup>隱者</sup>는 수도에 초청받아 현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변변히 인사도 하지 않았다. 재상이 깜짝 놀라 나중에 사람을 보내 힐난하자, 노홍일은 &ldquo;노자는 예의라는 것은 진심이 옅은 곳에서 나온 것이므로 따르기에 부족하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촌놈이기 때문에 진심으로써 알현한 것입니다.&rdquo; 하고 답했다. 늘 남들이 자신에게 굽실거리는 모습만 봐왔던 현종은 이 말을 듣고는 노홍일의 &lsquo;진심&rsquo;에 대단히 감격해서 내전으로 불러들여 술과 음식을 하사하고 일약 간의대부<sup>諫議大夫</sup>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사태의 경과를 계산하고 또 계산한 뒤에 결정한 전술이다. 당사자로서는 성패를 판가름하는 일대 도박이었겠지만, 이와 같은 &lsquo;건방짐과 오만함&rsquo;은 진정 비굴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비로소 활용해서 뜻을 이룰 수 있는 요소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딱하게도 이백에게는 이런 기술이 없었다. 그는 &ldquo;애써 굽히지 않고 남에게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증명해 보여야만 하는 장소가 다름 아닌 스스로를 굽히고 남에게 바라는 자리&rdquo;라는 딜레마를 매끄럽게 해결하기에는 자존심과 기개가 너무 높았다. 다카시마 도시오는 아부(비굴)와 오만(저항) 사이를 조절하지 못했던 이백의 약점을 파헤친 다음, 만약 그가 고관들에게 총애를 받을 만한 &ldquo;조금도 빈틈이 없이 노련한 편지를 쓰는가 하면 총애를 받도록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면, 그가 아무리 많은 시를 지었다고 해도 진정한 &lsquo;시인&rsquo;은 될 수 없었다&rdquo;고 평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lsquo;도교 루트&rsquo; 타고 황실로</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과거도 추천도 여의치 않다고 일찌감치 포기해서는 안 된다. 당나라 시대에 두 가지 통로 말고 또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이름 하여 &lsquo;도사<sup>道士</sup> 루트&rsquo;. 이는 당나라 황실이 도교<sup>道敎</sup>를 존숭했기 때문에 생겨난 특수한 길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원래 도교는 민간신앙으로서, 본래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노장사상<sup>老莊思想</sup>으로 장식된 수준 낮은 종교였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당나라 황실이 가계를 중시하던 당시의 분위기 때문에 자신들의 가문을 치장하기 위해 같은 이씨 성을 가졌다는 노자를 먼 조상으로 떠받들어 현원<sup>玄元</sup> 황제라 부르고 도교를 존숭하여 장안과 낙양 그리고 각주<sup>各州</sup>에 노자묘<sup>老子廟</sup>를 세운 이래 도교는 국가 종교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로 인해 황실과 도교 지도자 간에 유착 관계가 생겨서 도사가 되는 것은 권력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루트가 되었으며, 이백도 이 루트를 타고 조정에 들어갔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과 도교&middot;도가<sup>道家</sup>의 연관성은 꽤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사항이다. 아래는 김원중이 『당시감상대관』에 쓴 일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이백은 어려서부터 도가적 분위기에서 자라 도가의 습속에 낯설지 않았고, 기이한 서적을 섭렵하는 데도 남달랐고, 심지어 다섯 살 때부터 육갑을 외웠을 정도였다 한다. 19세, 22세, 25세, 30세, 35세 등등 그는 평생 동안 산에 가서 도사들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그의 시 중에서 6분의 1이 도가적 특징을 지니게 된 것도 그의 도가적 성향 탓이리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가 연거푸 인용하고 있는 다카시마 도시오는 김원중보다 좀 더 자세히, 이백의 도교 수업에 대해 밝히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위한 공부와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촉은 도교가 왕성하여 도사가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건은 좋은 편이었다. 도교 교단 형성의 기원이 된 후한 시대의 오두미도<sup>五斗米道</sup>가 발생한 곳이 바로 촉이었다. 촉에 도사가 많았던 이유로는 수업에 적합한 깊은 산이 많다는 점, 농업 생산이 풍부해서 지역 사회에 도사라는 비생산적이고 기생적인 존재를 부양할 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그러한 지역 사정으로 인해 이백이 도교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백은 후일 &ldquo;5세 때 육갑<sup>六甲</sup>을 배웠다&rdquo;, &ldquo;15세에 기서<sup>奇書</sup>를 읽었다&rdquo;는 등의 글을 썼다. 육갑이라는 것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다. 기서란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책, 즉 노장<sup>老莊</sup>, 신선, 참위<sup>讖緯</sup>에 관한 서적 등을 말한다. 5세라고 하면 그의 아버지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직후였으므로 그 나이 자체는 믿기 어렵다고 해도 그가 상당히 어릴 때부터 도교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정이 이러하므로, 도가의 풍격이 물씬 나는 이백의 시 한 편을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제목은 「고풍 - 5<sup>古風 五</su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008080">태백산은 어찌하여 푸르디 푸른가?<br /> 별들이 그 위에 줄지어 있다<br /> 하늘과는 삼백 리<br /> 아득하구나 속세와의 절연이여<br /> 산 속의 검은 머리 노인 있어<br /> 구름 헤치며 송운<sup>松雲</sup>에 누워 있다<br /> 웃음도 말도 없이<br /> 깊숙한 굴에 깊숙이 살고 있다<br /> 내가 진인<sup>眞人</sup> 찾아 만나<br /> 무릎 꿇고 비결을 묻노니<br /> 빙그레 웃으며 옥 같은 흰 이를 드러내<br /> 연약설<sup>鍊煉說</sup>을 가르쳐준다<br /> 뼈에 새겨지도록 그 말씀 전해주고는<br /> 몸을 솟구쳐 번개같이 사라진다<br /> 우러러보아도 미칠 수 없어<br /> 창연하여 애만 태운다<br /> 내 장차 단사<sup>丹砂</sup>를 다루어<br /> 영원토록 속세인과 헤어지리 (김원중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은 자식 교육에 열성이었던 아버지의 후원으로 유가와 도가를 착실히 공부했다. 그리고 25~26세 무렵에 촉을 떠나, 16년 동안 구직을&nbsp;한답시고 고관대작과 명문권세가를 사귄다. 그때 이백은 집에서 가지고 나온 30여 만금을 초기 몇 년 사이에 다 탕진해 버렸는데, 이 독후감의 첫머리에 나오는 「술을 권하다」에 그때의 일이 두 구절로 압축되어 있다(&ldquo;하늘이 나 같은 재목을 낸 것은 필히 쓰일 데가 있음이니/ 천금을 다 써버린들 아깝지 않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25~26세에 촉을 떠나 42세에 장안에 들어가기까지 이백이 벌인 16~17년 동안의 만유<sup>漫遊</sup>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연보를 작성할 수 없다고 한다. 수수께끼 투성이의 첫 번째 결혼에서부터 장안에 올라가게 되기까지의 복잡한 역정을 신하윤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스물다섯 살 때쯤 이백은 삼협<sup>三峽</sup>을 거쳐 촉 지방을 나와 전국 각지를 만유한다. 만유는 당대에 특히 성행한 것으로 시인들이 견문을 넓히고 다른 지방의 여러 문인들과 창작경험을 교류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겉으로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듯 세속을 떠나 은일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문인들은 만유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지명도를 높이기도 하고 권력자와 친분을 쌓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십여 년간 이백은 장강 유역의 각종 명승지를 다니면서 [열일곱 살 연상의] 맹호연과 같은 당대의 유명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742년 드디어 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으로 가서 대조한림<sup>待詔翰林</sup>의 벼슬을 제수받게 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설명에서 신하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이백이 명문 사대부의 추천이 아니라, 현종의 초빙을 받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도교 지도자(도사) 오균<sup>吳筠</sup>의 천거로 한림공봉(翰林供奉=대조한림)이 되었다는 것이다. &ldquo;문학 루트와 도사 루트의 양다리 걸치기 중에 도사 루트가 드디어 걸려든 것이다. 더구나 도중 단계를 전부 건너뛴 천자의 직접 초빙이다. 이보다 더한 명예는 없다. 15년의 신고辛苦가 마침내 보답을 받았다면서 이백은 미친 듯 기뻐하여 씩씩하게 출발했다.&rdquo; 다카시마 도시오의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197" height="36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5/%EC%9D%B4%EB%B0%B1.jpg" />하지만 이백이 맡았던 벼슬은 그리 중요한 직책이 아니었다. &ldquo;단지 제왕의 포고문에 윤색을 가하고 초안을 잡는 시신<sup>侍臣</sup>으로 때로는 연회에서 노래할 시를 쓰기도 하였을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이백이 지니고 있는 이상과 크게 달랐다. 황제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이백 자신의 꿈이었[다].&rdquo;(신하윤), &ldquo;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는 실로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배속되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히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어서, 그는 신분으로 말하자면 변함없이 포의(布衣: 민간인)였던 것이다. 관직이 없으므로 당연히 정해진 업무도 없다.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 한림원의 임무로 되어 있지만, 반드시 여기서 작성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이 이곳의 임무인 것도 아니다. 천자가 뭔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으며, 물론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다.&rdquo;(다카시마 도시오). 그런데 뭐하자고 이런 부서를 만들었을까? 아래는 다카시마 도시오의 설명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설치 이유를 알 수 없는 이러한 부서도 권력 측에서 보면 설치해 둘 의미가 충분한 것이었다. 국가는 인재를 소중히 여겨 결코 초야에 현인을 버려두지 않으며, 우수한 인물은 모두 모아 천자의 밑에 집결시켜 조정에 참여시킨다는 점을 천하에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중국에서는 &lsquo;승평<sup>昇平</sup>을 점철<sup>點綴</sup>한다&rsquo;고 한다. 승평이란 세상이 매우 잘 다스려지고 있는 상태를 뜻하고, 점철이란 화려하게 꾸민다든지 채색을 한다는 의미다. 이백과 같은 인물을 불러 한림원에 넣은 것은 &lsquo;승평을 점철하기&rsquo; 위함이었던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백이 처음으로 황제에게 문안을 드린 날, 현종은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맞이하고는 식탁으로 불러서 친히 국을 따라 주었다고 한다. 이는 극히 정중한 대우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백이 관리로서가 아니라 도사나 은사<sup>隱士</sup>로서 대접을 받았음을 뜻한다. 여기에 대한 이백의 처신은 어떠해야 했던가? 다카시마 도시오가 가르쳐 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앞서 교묘한 아첨의 말로 현종을 기쁘게 한 노홍일이 금세 간의대부로 발탁된 것을 언급했다. 실은 그 이야기에는 속편이 있다. 노홍일은 그것을 고사하면서 자신은 아무래도 산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이럴 때 천자는 물론 간곡히 만류한다. 그러나 만류를 하면 할수록 그것은 천자가 사의<sup>辭意</sup>를 하는 증거인 것이므로 언제까지고 마냥 우겨대지 않으면 안 된다. 현종은 결국 사의를 인정하고, 특별히 &lsquo;노홍일이야말로 세상에 보기 드문 청결한 선비&rsquo;라는 의미의 말을 장황하게 적은 조칙을 내려 간의대부 직을 유지한 채 산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이후 매년 쌀 100석과 비단 50필이 약값으로 그에게 배달된다. 더구나 향후 정치에 대해 느낀 점이 있으면 꼭 알려 달라는 고마운 의뢰와 함께 은거용 의복을 하사받고, 노홍일은 아쉬움을 남긴 채 조정을 떠났다. 바로 이것이 잘 다스려지는 치세의 아름다운 미담이며, 바로 이렇게 해야 문자 그대로 은일전<sup>隱逸傳</sup>에 나오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실 &lsquo;은일전&rsquo;은 이런 종류의 미담으로 가득 차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처신은 도사 또는 은사가 된 사람이면 반드시 심득하고 있어야 할 것인데도, 이백은 이런 미묘한 사정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lsquo;꼭 천자를 도와주었으면 한다&rsquo;는 형식으로 부른 것이므로, 면전에서 단호하게 &lsquo;이제 그만 산으로 돌아가라&rsquo;고는 말하지 않는다. 천자 대신 주위 사람들은 이백에게 점점 짓궂게 굴고, 이백은 하찮은 간신 무리들이 자신과 천자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lsquo;자신은 보석에, 주위 사람들은 똥파리&rsquo;에 비유한다. 그러면서 이백과 그 주변은 서로 상종하지 못할 사이가 되어 간다. 결국 천자가 약간의 돈을 주어, 이백을 장안에서 내쫓았다. 「고풍 - 37<sup>古風 三十七</sup>」의 일부는 그런 이백의 억울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008080">그런데 내가 대체 무슨 죄가 있어,<br />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는가.<br /> 뜬구름이 황궁을 뒤덮어,<br /> 태양이 빛을 비출 수 없었네.<br /> 무수한 모래가 아름다운 구슬을 더럽히고,<br /> 무리진 잡초가 한 송이 꽃을 엉망으로 버려놓았네. (이원규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작품에서, &lsquo;태양․구슬․꽃&rsquo;은 천자와 이백 자신을, &lsquo;뜬구름&middot;모래&middot;잡초&rsquo;는 간신배를 가리키는 상투적인 은유다. 하지만 &lsquo;도사 루트&rsquo;를 따라 황실에 들어간 이백은 애초부터 황실의 대신이나 관료들로부터 존중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므로 이백이 간신들의 시기와 모함에 더 견디지 못하고 장안에서 쫓겨났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44세에 장안에서 쫓겨난 이백은, 이후 젊었을 때 했던 것과 똑같은 &lsquo;고등 걸식&rsquo;을 하며 살았다.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이라고는, 가족과 함께였다는 점이랄까? 그러다가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현종의 두 아들인 형<sup>亨=肅宗</sup>과 린<sup>璘</sup>이 후계자 싸움을 할 때, 줄을 잘못 선 탓으로 역적이 되어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사면이 되었지만, 이백은 린의 막객<sup>幕客</sup>으로 있다가 화를 당한 55세부터 병으로 객사하게 되는 62세까지 처참한 말년을 보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성공해야 은일도 할 수 있다</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맹호연&middot;왕유&middot;이백&middot;두보&middot;이하 등의 당대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도록 만든 절대적인 힘은 회재불우<sup>懷才不遇</sup>다. 『당시감상대관』의 「이백」 편에서 뽑은 두 편의 시를 보자. 먼저, 「인생살이 어려워라<sup>行路難</su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008080">푸른 하늘 같은 큰 길<br /> 나만 홀로 못 나간다<br /> 부끄럽구나 일찍이 장안의 시정배들이여<br /> 개부리기 닭싸움 밤과 배 내기만 하는구나<br /> 칼 치고 노래하며 괴로운 마음 달래고<br /> 왕문에 옷자락 끄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네<br /> 회음의 시정배들 한신을 비웃었고<br /> 한조의 공경들 가생을 피했건만<br />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옛날 연왕이 곽외를 존중하여<br /> 비 들고 허리 굽혀도 싫어하지 않음을<br /> 극신과 악의는 그 은혜를 느껴<br /> 간과 쓸개 빼내어 재능을 바쳤다<br /> 소왕의 백골도 잡초 속에 묻혔으니<br /> 그 누가 황금 누대를 쓸겠는가<br /> 인생살이 어려워라<br /> 차라리 돌아가련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음은, 「선주 사조루에서 교서 숙운을 송별하다<sup>宣州謝朓樓餞別校書叔雲</su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008080">나를 버리고 가버리는<br /> 어제의 날을 붙들 수 없고<br /> 내 마음 어지럽히는<br /> 오늘 하루 하고많은 번뇌에 휩싸인다<br /> 가을바람 만리나 기러기를 보내니<br /> 이런 때 높은 누각에서 술에 취하련다<br /> 봉래의 문장, 건안의 풍골<br /> 이 가운데서 사조의 글 맑고도 매서웁다<br /> 모두 뛰어난 흥취를 품고 세속을 날아<br /> 푸른 하늘에 올라 밝은 달 보려 했는데<br /> 칼을 빼어 물을 베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br /> 잔을 들어 시름을 없애도 시름은 더욱 깊어만 간다<br /> 인생살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br /> 내일 아침 머리 풀고 조각배 타고 놀리라&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두 편의 시는, 재주를 가지고도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한 사대부 문인의 회재불우가 절절히 드러나 있다. 중국 시인들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던 &lsquo;회재불우의 동력&rsquo;은, 그 어떤 은거의 유혹 앞에서도 결코 지치지 않는다. 예컨대 이백은 「인생살이 어려워라」에서, 평소에 존경해마지 않았던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한 구절을 빌려 와 &ldquo;인생살이 어려워라/ 차라리 돌아가련다<sup>行路難 歸去來</sup>」라고 맺고 있지만, 그는 귀거래 할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호탕방일하고 탈속초연한 기풍이 넘치는 그의 사상은 도가에 더 기울었지만, 그가 죽을 때까지 행동으로 옮기고자 했던 정치참여의 정열(그것은 분명 유가적 태도이다)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그의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열망과, 세상을 버리고 자연에 돌아가겠다는 소극적인 은둔사상은 일견 양극의 모순같이 보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현실이란 거울에 비쳐진 그의 사상적 영상에 불과한 것이니, 현실이 맑고 밝으면 나서서 공명을 세우고, 이와 반대로 사회가 어둡고 부패했을 때는 과감하게 버리고 은퇴함으로써 내 한 몸이라도 깨끗하게 보존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중국 지식인의 태도이다. 이 시의 분위기는 후자 쪽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강에 배를 띄워 흥을 일으키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멸시감과 자유롭고 아름다운 이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김원중)</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백은 부와 지위에 대한 욕망이 극히 박약한 사내였다. 그가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은 영광이며 명성이었다.</span><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러므로 처음부터 은자가 되어서 아무도 모르는 산림에서 생애를 마치는 따위는 물론 논외였다. 그런 삶을 산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우선 큰 공을 세워 천하 사람들에게 우레와 같은 찬양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제1단계다. 그렇지만 이백에게 더욱 소중한 것은, 그 뒤이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빈둥거리고 있는 것은 볼썽사납고 더구나 위험하다. 이백의 시에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랐으나 거기에 연연하다가 꼴사나운 최후를 맞거나 혹은 비명횡사한 역사상의 인물(그런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다)을 책망하고 비웃는 작품과, 영광의 정점에서 미련 없이 물러나 행방을 감춘 인물(이 쪽은 그리 많지 않다)을 찬미하는 작품이 많이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백은 물론 후자를 따를 생각이었다. 영광의 정점에서 횡하니 물러난다. 사람들이 놀라고, 잠시 뒤에 &lsquo;아깝다! 그렇지만 얼마나 훌륭한가&rsquo; 하며 탄성을 지른다. 이백이 평생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은 이 순간이었다. 그리고 앞선 영광이 빛나면 빛날수록 뒤의 효과가 커진다. 그 때문에 이백은 관리가 되고 정치에 참여하여 공을 세울 기회를 찾았던 것이다.(다카시마 도시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깨끗이 귀거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그런 과정이 없다면, 은일 도인이란 한낱 필부에 지나지 않으며, 경전을 읽고도 성인이 될 기회가 없다는 것! 이것이 다카시마 도시오의 &lsquo;출사와 은일&rsquo;에 대한 또 하나의 얄미운 해석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백은 자신의 회재불우를 달과 술에 의탁했던 시인이지만, &ldquo;여인과 소녀의 염원을 노래&rdquo;(김원중)한 뛰어난 규정시의 작자이기도 한다. 「옥계의 원망<sup>玉階怨</sup>」&middot;「원망<sup>怨情</sup>」&middot;「자야오가-가을편<sup>子夜吳 秋歌</sup>」&middot;「장간행<sup>長干行</sup>」 등은, 이백이 이 분야에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듯 중국의 남성 시인이 여성 화자로 말하는 규정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는 여성 시인이 없던 시절에 남성 시인이 &lsquo;입이 없는 여성&rsquo;의 몫까지 도맡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 사대부들이 아주 잘 훈련된 &lsquo;트랜스젠더화 된 자아&rsquo;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충성을 바쳐야 하는 천자에 대해, 스스로를 수동적인 여성의 자리에 놓았다. 때문에 이백처럼 출세 욕망이 크면 클수록, 천자를 향한 뛰어난 충군시<sup>忠君詩</sup>와 여성 화자를 가장한 규정시를 누구보다 더 잘 쓸 수 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면 이백의 대표적인 규정시인 「장간행」을 감상해 보자. 내용은 같은 마을에서 소꼽친구로 지내다가 결혼을 했던 부부의 이야기다. 화자로 등장하는 상인의 아내는, 멀리 장사를 하러 떠난 남편을 그리며 무사 귀환을 바라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008080">내 머리가 막 이마를 덮었을 때<br /> 꽃 꺾으며 문 앞에서 놀았지요<br /> 당신은 죽마 타고 와서<br /> 난간을 돌며 청매로 희롱했지요<br /> 장간 마을에서 함께 살며<br /> 우리 둘은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어요<br /> 열넷에 당신 아내 되어<br /> 수줍어 얼굴 펴본 적도 없고<br /> 머리 숙이고 어두운 벽 향하고<br /> 천번 불러도 한번 대꾸도 못했지요<br /> 열다섯에 겨우 눈썹 펴고<br /> 생사를 함께 하길 바랐지요<br /> 언제나 기둥을 안는 신의를 지녔는데[노<sup>魯</sup>나라 미생<sup>尾生</sup>의 고사]<br /> 어찌 망부대에 오를 줄 알았겠어요<br /> 열여섯에 당신은 멀리 갔으니<br /> 구당은 염여의 돌로 가로 막혀[구당 협곡을 막은 암초]<br /> 오월이 되어도 배 갈 수 없고<br /> 원숭이소리 하늘에 슬피 울렸지요<br /> 문 앞에 당신 발길 끊기고<br /> 푸른 이끼 여러 번 돋았지요<br /> 이끼 짙어 미처 쓸지도 못했는데<br />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졌어요<br /> 팔월에는 나비들 날아와<br /> 서쪽 동산 풀밭에서 짝지어 놀았어요<br /> 이 광경에 나는 속상해<br />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여위었어요<br /> 언제로 삼파로 내려오시면<br /> 미리 집에 편지 보내어 알려주셔요<br /> 길 멀다 탓하기 전에<br /> 곧 장풍사로 달려가겠어요</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시 속의 아내는 소꿉친구였던 남편과 &ldquo;열넷&rdquo;에 결혼하고 서먹해졌으나, &ldquo;열다섯&rdquo;에 이르러서야 다시 부끄러움 없이 서로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남편이 &ldquo;열여섯&rdquo;에 대상<sup>隊商</sup>이 되어 집을 떠났다. 옛날에는 고속전철도 없고, 비행기도 없었다. 그래서 장사꾼이 한 번 돈벌이를 나가면, 몇 년씩이고 집을 비웠다. 낙타나 말에 짐을 싣고 대륙을 떠돌았을 것이다. 장사가 잘 안되면 본전 생각이 나서, 또 장사가 잘되면 그 재미로 돌아오기가 힘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내는 사랑하는 사람과 오순도순 한 집에서 &ldquo;생사를 함께 하길 바랐&rdquo;는데, 내가 어쩌다 &ldquo;망부대[望夫臺: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된 바위]에 오를 줄 알았겠&rdquo;느냐고 한탄한다. 가을에는 &ldquo;나뭇잎 떨어&rdquo;지는 게 자연의 순리다. 하지만 팔월이 되어 &ldquo;나비들 날아와/ 서쪽 동산 풀밭에서 짝지어&rdquo; 노는 것을 보자, 시 속의 아내는 &ldquo;나는 속상해/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여위었어요&rdquo;라고 남편을 원망한다. 그렇지만 곧바로, 집 가까이 오게 되면 &ldquo;편지 보내어 알려주셔요/ 길 멀다 탓하기 전에/ 곧 장풍사로 달려가겠어요&rdquo;라고 말하고 있으니, 아직 사랑이 식지는 않은 모양이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5-14 오전 11:20:00《234》조선의 사대부, 도연명에 화답하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4/%ED%95%9C%EA%B5%AD%EC%9D%98%20%ED%99%94%EB%8F%84%EC%82%AC%20%EC%97%B0%EA%B5%AC_s.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24일</span></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의 「화도사」 연구』(남윤수, 역락, 2004)</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난 회에 왕유에 대한 글(<a target="blank" href="http://nabeeya.net/Life/detail_view.aspx?CD_MENU=45&amp;SUB_CD_MENU=45&amp;ID_CONTENT=7364"><span style="color: #666699">《233》 완전한 탈속을 이룬 산수전원시의 대가, 왕유</span></a>)을 마치면서 나는, &ldquo;산수전원파에 속하거나 산수자연시에 전념한 중국의 시인들은, 도연명이 만든 귀거래와 무릉도원이라는 &lsquo;문학적 토포스&rsquo;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rdquo;라고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귀거래와 도화원(무릉도원)은 각각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라는 시부<sup>詩賦</sup>로부터 기원한다. 「귀거래사」는 도연명이 나이 40세에 관직을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며 쓴 시로, 속세를 잊은 채 고향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겠다는 염원을 드러낸다. 또 「도화원기」는 한 어부가 우연히 산속에 숨은 평화로운 마을을 발견한 이야기로, 난세에 지친 백성들의 평화롭고 풍족한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화도사<sup>和陶辭</sup>」 연구』를 쓴 남윤수는 &ldquo;도연명은 中&middot;韓&middot;日로 대표되는 한자문화권의 정신사에 2가지 토포스를 남겼다. 문학에서 토포스란 &lsquo;A configuration of motifs'로 주제상<sup>主題上</sup> 또는 수사상<sup>修辭上</sup>의 한 형식&rsquo;을 지칭한다. 그 두 가지 토포스란 &lsquo;귀거래<sup>歸去來</sup>&rsquo;와 &lsquo;도화원<sup>桃花源</sup>&rsquo;이다&rdquo;라고 도연명의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늘의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귀거래사」와 「도화원기」를 되뇌며 산다. 힘들 때마다 &lsquo;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rsquo;라고 푸념을 하거나, &lsquo;좋은 세상&rsquo;을 꿈꾼다. 도연명의 작품을 읽었든 아니든, 또 글을 쓰든 아니든,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조선의 사대부, 도연명에 화답하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남윤수의 『한국의 「화도사」 연구』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영향을 받아, 거기에 화답한 시를 &lsquo;화도사&rsquo;라는 별개의 장르로 지칭하면서, 근 800년 동안 한국에서 쓰여진 150여 수의 화도사 가운데 71수를 모아 놓고 분석하고 있다. 지은이가 확인한 한국인 최초의 화도사는 고려 무신정권기에 쓰여진 이인로<sup>李仁老</sup>의 「화귀거래사<sup>和歸去來辭</sup>」며, 가장 최근의 것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통분한 나머지 &ldquo;귀거래할 것이 아니라, 정면 대결 의지를 펴 맞서 싸워야 함을 역설&rdquo;했던 심산<sup>心山</sup> 김창숙<sup>金昌淑</sup>이 1956년에 쓴 「반귀거래사<sup>反歸去來辭</sup>」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 책의 지은이가 &ldquo;우리 선인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더욱 알게 되는바, 도연명의 시에 화운<sup>和韻</sup>한 &lsquo;화도시<sup>和陶詩</sup>&rsquo; 몇 편이라도 없는 문집은 거의 없었다&rdquo;라고 쓴 것처럼, 대부분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거의 한 편 이상씩의 화도시를 썼다. 그러므로 허다한 조선의 사대부로 하여금 화도사를 짓게 했던, 도연명의 원작품을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66"><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돌아가리라!<br /> 전원이 황폐해 가거늘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br /> 이미 내 스스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으니,<br /> 어찌 괴로워하고 홀로 슬퍼만 하랴?<br />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br /> 장래의 일은 올바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네.<br /> 참으로 길을 잘못 든 것이 멀지 않은 때에,<br />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네.<br /> 고향으로 가는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나아가고,<br /> 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나부끼네.<br /> 뭍에 올라 행인에게 앞길을 물어서 가노라니,<br /> 새벽빛의 희미함이 원망스럽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6666"><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이윽고 사립문과 지붕 바라보고는,<br /> 기쁜 마음에 가슴은 설레고 발걸음은 한달음.<br /> 머슴들은 반갑게 마중 나오고,<br /> 어린 자식들은 문에서 기다리네.<br /> 꽃심어 가꾸던 세 갈래 좁은 길은 황폐해졌으나,<br />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있네.<br /> 어린 자식 손잡고 방으로 들어가니,<br /> 담근 술이 술통에 가득 차 있네.<br /> 술병과 잔을 들어 자작하면서,<br /> 정원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표정을 짓노라.<br /> 남창南窓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만족함을 즐기고,<br /> 좁은 방일망정 안락의 쉬움을 깨닫네.<br /> 뜨락을 거니는 것으로 하루의 취미를 이루고,<br /> 대문은 있으나 찾는 이 없어 늘 잠겨 있노라.<br /> 지팡이에 의지하여 내키는 대로 거닐다가 쉬며,<br /> 때로는 머리 들어 멀리 향산香山을 바라보노라.<br />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br /> 새는 날기에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옴을 아네.<br />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지려하고,<br /> 홀로 서있는 소나무 어루만지며 머뭇머뭇 배회하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6666"><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돌아왔음이여!<br />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라.<br /> 세상은 나와 어긋나 있으니,<br /> 다시 수레를 타고 나선다 한들 무엇을 구할 것인가?<br /> 친척들과 정겨운 대화에 희열을 느끼고<br /> 소금素琴과 서적을 즐기니 근심 걱정 사라지네.<br /> 농부가 나에게 &lsquo;봄이 되었다&rsquo;고 알려주니,<br /> 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br /> 때로는 포장을 씌운 수레를 타기도 하고,<br /> 더러는 작은 배를 노 저어가며,<br /> 깊고 멀리 배 띄워 골짜기 찾고,<br /> 수레 타고 험한 언덕도 넘어,<br /> 나무는 싱싱하게 물올라 잘도 자라고,<br /> 샘물은 끊임없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네.<br /> 만물이 때를 얻어 피어오름을 부러워하면서,<br /> 내 생이 휴식에 다가감을 느끼노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6666"><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끝났음이여!<br /> 천지간에 이 몸이 맡겨 있는 동안이 그 얼마나 되랴?<br /> 어지 본심을 따라가고 머물음을 자연에 맡기지 않으리?<br /> 무엇을 위하여 황황급급히 어디로 가겠다는 건가?<br /> 부귀는 나의 소원이 아니고,<br /> 선계仙界는 기약할 수 없네.<br /> 좋은 날이라 생각되면 혼자 나서서,<br /> 때로는 지팡이 꽂고 잡초도 베고 북돋기도 하리라.<br />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기도 하고,<br /> 맑은 물을 내려다보면서 시를 읊으리라.<br /> 애오라지 천지자연의 변화를 따라 목숨을 다할 뿐이니,<br /> 저 천명을 즐길 것이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남윤수에 따르면 4단으로 되어 있는 「귀거래사」를 통해 도연명이 말하고자 한 것은, 다음의 세 구절에 압축되어 있다. ①1단에 나오는 &ldquo;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었으니<sup>以心爲形役</sup>&rdquo; ②3단에 나오는 &ldquo;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sup>將有事於西疇</sup>&rdquo; ③4단에 나오는 &ldquo;저 천명을 즐길 것이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sup>樂夫天命復奚疑</sup>&rdquo;. 세 구절을 주해하면 &ldquo;&lsquo;以心爲形役&rsquo;은 마음이 육신의 부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사회적&middot;인위적 자아를 떠나 본래적 자아인 참된 나를 찾는 것이며, &lsquo;將有事於西疇&rsquo;는 손수 직접 농사를 지어 생활하겠다는 것이고, &lsquo;樂夫天命復奚疑&rsquo;는 부여받은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현실 수용의 자세&rdquo;를 다짐한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274" height="37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4/%EB%8F%84%EC%97%B0%EB%AA%85.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도연명은 나이 40세 때, 마지막 관직이었던 팽택현<sup>彭澤縣</sup>의 현령을 80여 일 만에 사퇴하고 63세로 죽을 때까지 20여 년을 은거 생활로 마쳤다. 그 사이에 황제가 그를 저작좌랑에 징소(徵召: 국법으로 부름)했으나 불응했다. 그는 전원에 묻혀 음풍농월<sup>吟風弄月</sup>을 하거나 소작인들의 농사를 감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지었다. 남송南宋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걸쳐 활약하였던 증선지<sup>曾先之</sup>가 태고<sup>太古</sup> 때부터 송나라 말기까지의 중국의 역사를 요약&middot;편찬한 『십팔사략<sup>十八史略</sup>』에 &ldquo;남편이 앞에서 갈면 처는 뒤에서 호미로 흙을 잘게 부수&rdquo;었다니, 실제로 도연명은 벼슬을 청산하며 지었던 「귀거래사」처럼 살았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연명의 삶에 공감하여 「귀거래사」의 운에 맞춰 모방작을 썼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화도시는 대부분 원본과 같은 형태의 4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보다 길거나 한 단 짧은 3단짜리도 간혹 있다. 그러나 단락의 길이와 상관없이 1단의 첫 줄은 반드시 &ldquo;돌아가리라!<sup>歸去來兮</sup>!&rdquo;로 시작하고, 마지막 단의 첫 줄은 반드시 &ldquo;끝났음이여!已矣乎!&rdquo;로 시작한다. 또 2단은 긴장을 늦추고 변화를 주고자 했던 원시와 같이 자유로운 서두로 시작한다. 형식을 익히기 위해 맛보기로 두 편을 들어 본다. 먼저 선조<sup>宣祖</sup>대의 명신으로 영해<sup>寧海</sup> 부사를 역임했던 우복<sup>愚伏</sup> 정경세<sup>鄭經世</sup>의 「차귀거래사<sup>次歸去來辭</su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br /> 돌아가리라!<br /> 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br /> 무엇이 나를 기로에서 헤매게 했던 것인가?<br /> 홀로 방황하며 근심에 겨워하노라.<br /> 나중엔 후회한들 그 어찌 늦지 않으리.<br /> 미혹의 길에 든지 이미 오래됨을 알았고,<br /> 내 차마 잘못 저지를까 저어하노라.<br /> 잠<sup>簪</sup>도 홀<sup>笏</sup>도 바다에 던져 버리고,<br /> 설려<sup>薛茘</sup> 여라<sup>女蘿</sup>를 마름질하여 옷을 만들리라.<br /> 깨끗한 우직성을 온전히 지켜 귀거래하여,<br /> 즐거운 마음으로 꽁꽁 숨어 현미<sup>玄微</sup>의 세계에 잠기리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저 명성과 이욕을 돌아다보니,<br /> 뭇사람들의 치열한 경쟁.<br /> 궁달<sup>窮達</sup>은 명<sup>命</sup>이 있는 것이요,<br /> 앙화와 복록은 일정한 문이 없는 법.<br /> 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br />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br /> 배고프면 가마솥에 밥짓고,<br /> 목마르면 표주박으로 떠마시리.<br /> 일단식일표흠<sup>一簞食一瓢飮</sup>을 바꾸지 않을 것이지만,<br /> 감히 안연<sup>[顔淵=顔回: 공자의 촉망을 받은 제자였으나, 일찍 죽었다]</sup>을 바랄 수야 없지.<br /> 어려서부터 고량진미에 젖지 않았고,<br /> 가난한 나날의 생활에 안분지족 하리라.<br /> 흰 구름은 날아서 장막이 되고,<br /> 푸른 산은 둘러서 문이 되도다.<br /> 간천<sup>澗川</sup>이 졸졸 흐름을 고요히 듣고,<br /> 바위 위에 꽃이 핌을 그윽히 바라보노라.<br /> 때로는 소나무 오솔길로 풀을 헤치고 들며,<br /> 고라니 사슴이랑 함께 오고 가노라.<br /> 홀로만의 꿈속의 말 알리지 않고,<br /> 오로지 일구일학<sup>一丘一壑</sup>을 오며가며 지내리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돌아왔음이여!<br /> 애오라지 우유도일<sup>優遊度日</sup>로 생을 마추리로다.<br /> 진실로 내 마음 속의 세계는 쫓을 것이로되,<br /> 어찌 뜬 구름 같은 부귀를 구하랴.<br /> 오직 취한 듯 살다가 꿈꾸듯 가는 것이,<br /> 참으로 내가 마음속으로 우려하는 것이다. <br /> 옛 성현께서 나에게 떳떳한 행동을 가르치셨거늘,<br /> 내 이것을 버리고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br /> 일컬어 호랑이 같은 심보요,<br /> 정이란 배처럼 두둥실 떠 흘러가는 것이라고.<br /> 도에 뜻을 두고 외정<sup>外情</sup>에 쏠리는 마음을 쫓아 버리고,<br /> 높은 언덕에 부용꽃을 함께 심으리라.<br /> 다행히 이미 처음 관직에 나아가던 마음을 되돌아 볼 수 있으니<br /> 바라건대 마침내 형편없는 존재로 타락함을 면할 것일세.<br /> 분화함을 떨쳐버리고 염담허정<sup>恬惔虛靜</sup>을 키우리라.<br /> 맹세코 이 생명 끝나고야 그만 둘 것이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끝났음이여!<br /> 인간의 일생은 허무한 것이요.<br /> 살 같은 세월은 나를 위하여 멈춰주지 않는 것,<br /> 어찌하여 어리석게 갈팡질팡하랴!<br /> 과거는 이미 미칠 수 없지만,<br /> 그 누가 무위 속에서 얻음이 있다 하는가?<br /> 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br /> 숙흥야매<sup>夙興夜寐</sup>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br /> 시경 소아<sup>小雅</sup> 보전장<sup>甫田章</sup>의 분명한 교훈을 따르리라.<br /> 진실로 지극한 즐거움은 여기에 있는 것,<br /> 진리를 알았으니 조문석사<sup>朝聞夕死</sup>한들 또 무엇을 의심하리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음은 중종<sup>中宗</sup>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sup>明宗</sup>대까지 이조판서&middot;한성부좌윤 등의 관직을 맡았던 간제<sup>艮齊</sup> 최연<sup>演崔</sup>의 「화도사<sup>和陶辭</su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br /> 돌아가리라!<br /> 성현이 아니라면 내 뉘와 돌아갈 것인가?<br /> 하늘이 만물을 냄에 각각 그 적재<sup>適材</sup>를 주었나니,<br /> 물오리의 다리를 길게 이어대면 슬픈 것이니라.<br /> 처음 학문을 시작하면서 옛 성현들을 살펴,<br /> 정도<sup>正道</sup>의 자취를 존봉<sup>尊奉</sup>하여 높이 나아가려 하였네.<br /> 현인군자를 이어받아 내면을 가꾸어,<br /> 종선여류<sup>從善如流</sup>할 것을 기약하고 잘못을 고치리라 다짐하였네.<br /> 안연이 누항에 살면서도 안빈낙도 하시면서,<br /> 나물밥과 거친 옷에도 불개기락<sup>不改其樂</sup>하셨네.<br /> 아아! 뭇사람의 욕심이 틈새를 들어내나,<br /> 도덕적 양심은 어두워질수록 더욱 은미한 것이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감정의 물결이 도탕해지며 거세어지네,<br /> 마음이 날뛰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네.<br /> 신상에 자색<sup>紫色</sup>의 인수<sup>印綬</sup>를 끌면서,<br /> 발길은 권문세족의 문턱에 이르네.<br /> 장과 곡 두 사람 모두 양을 잃기는 마찬가지요,[장곡구망<sup>臧穀俱亡</sup>]<br /> 진정한 존재는 나라는 존재임을 알라.<br /> 눈으로 미인을 바라보며,<br /> 마음은 향기로운 술에 취하네.<br /> 신령스러운 거북 고기를 버리고 남의 것에 침을 흘린다면,<br /> 항상 귀를 막고 얼굴을 숙이리라.<br /> 물질의 근본을 새기면 참됨을 잃나니,<br /> 편안한 삶은 사람을 해치는 짐새의 깃털 술.<br /> 긴 끌채를 구절양장으로 몰아,<br /> 몸으로 무겁게 잠긴 빗장을 들어올리리라.<br /> 당초의 마음을 돌아보니 아직도 오히려 마땅치않아,<br /> 문득 깊이 생각에 잠겨 반구제기<sup>反求諸己</sup>하노라.<br /> 아예 방심<sup>放心</sup>을 수습하고 떠났던 것을 함께 모아,<br /> 팔환<sup>[八還 : 불교에서 말하는 매우 추운 여덟 지옥]</sup>에 물아일체<sup>物我一體</sup>를 붙이리라.<br /> 성품 다지기를 외성<sup>外城</sup>을 쌓고 적군을 막듯이, <br /> 자아<sup>自我</sup>를 고양하는 무장<sup>武裝</sup>으로 다져 굳세게 하리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돌아가리라!<br /> 육근<sup>六根</sup>의 정욕을 막고 자연에 자적하리라.<br /> 흘깃 봄에도 도가 있음이여,<br /> 내 이것을 버리고 또 무엇을 구하리?<br /> 만약 속으로 반성하여 허물이 없다면,<br />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해져서 걱정이 없느니라.<br /> 그리 멀리 이탈하지 않았기에 돌아올 줄을 알게 되었나니,<br /> 좋은 땅에 아름다운 벼를 키우리라.<br /> 나는 환한 거울을 더욱 갈고 닦아,<br /> 나 자신을 마음의 배에 띄우리라.<br /> 분화<sup>紛華</sup>스러움을 끊고 근본으로 돌아감이여,<br /> 인류<sup>仁類</sup>의 본분을 체득하리라.<br /> 나의 뜻에 얻어짐이 있음을 기뻐하노라.<br /> 모로 흐르는 욕망의 물결을 막았네.<br /> 명분의 가르침 속에 자연히 행복이 있음을 찾으며,<br /> 다시 무슨 사연으로 돌아가 쉴 것인가?</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끝났음이여!<br /> 진덕수업<sup>進德修業</sup>은 때가 있는 것.<br /> 세월은 만류하더라도 그래도 흐르는 것이거니,<br /> 아아! 애를 쓰면서 어디로 가려는가?<br /> 과거는 따라잡을 수 없지만,<br /> 미래는 오히려 기약할 수 있는 것.<br /> 민둥산이 된 우산<sup>牛山</sup>에 싹돋아 오르게 북주고<br /> 가라지 따위의 잡초를 쳐버리고 혹운혹자<sup>或耘或耔</sup>하리라.<br /> 옛 사람을 살펴 마음의 벗을 삼으리라.<br /> 어찌 그저 송시<sup>誦詩</sup>만을 일삼을 것인가?<br /> 샘물이 나지 않으면 우물을 버리는 법,<br /> 이 언사는 지극간절한 것이니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대량생산되는 화도시의 레시피</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예로 든 두 편의 시는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똑같이 1단의 첫 줄은 &ldquo;돌아가리라!&rdquo;, 2단은 각자의 자유로운 창의<sup>cadenza</sup>, 3단은 다시 &ldquo;돌아가리라!&rdquo;, 마지막 4단은 &ldquo;끝났음이여!&rdquo;로 첫 구절을 시작한다. 하지만, 뒤이어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동일한 형식이라도 먼저 나온 우복의 작품과 뒤에 실린 간제의 작품은 지향하는 초점이 퍽 다르다. 그래서 『한국의 「화도사」 연구』를 쓴 지은이는 이렇게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똑같은 도사<sup>陶辭</sup>의 원운을 밟아 화운작<sup>和韻作</sup>을 쓰는 데도,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의식과 성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각도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 「화도사」 연구의 한 가지 결론이다. [&hellip;] 100여 편의 「화도사」는 매편마다 고유의 철학과 미학이 들어 있어, 단 한 편이라도 버리고 싶지가 않다. 어떤 「화도사」는 강호자연<sup>江湖自然</sup>과의 친화를 감동적으로 묘파하였으며, 또 다른 「화도사」는 능력과 국량이 상당한데도 미관말직이나 외직으로만 저회하고 있는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적군은<sup>赤君恩</sup>을 외쳐 마치 상감이나 고위직에게 읽혀져서, 자기를 인정받아 내직이나 상위직으로 승차되기를 바라는 듯한 충분한 자<sup>尺</sup>을 가지고 쓴 느낌이 드는 작품들도 보인다. [&hellip;] 또한 귀거래의 지향처가 단순히 자연에의 회귀나 귀고향<sup>歸故鄕</sup>만이 아니고, 퇴계 이황의 『주자서절요<sup>朱子書節要</sup>』만이 학문적 요체이니, 지금까지의 사장지학<sup>詞章之學</sup>을 버리고 위기지학<sup>爲己之學</sup>에 힘쓰겠다는 방향 전환이기도 하며, 우주와 인생의 오묘한 철리는 『주역<sup>周易</sup>』에 있으니, 일심으로 위편삼절 하겠다는 귀거래, 주일무적<sup>主一無敵</sup>의 경공부<sup>敬工夫</sup>에 전념하겠다는 귀거래, 어머님 공양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귀거래 등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이 같은 변모작<sup>變貌作</sup>들은 각 개인의 정신현상학에 따라 큰 편차인 절정 체험<sup>Peak experience</sup>이 다르기 때문이라 여겨진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복의 「차귀거래사」는 1단에서부터 &ldquo;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rdquo;라고, 단호히 귀거래의 의지를 밝힌다. 이어지는 2단의 &ldquo;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rdquo;나, 4단에 나오는 &ldquo;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 숙흥야매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rdquo;는 우복의 귀거래 결심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한다. 도연명이 그랬듯이, 또 스스로 &ldquo;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rdquo;라고 했던 것처럼, 진짜 밭을 갈고 논을 맸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간제의 「화도사」는 3단에 &ldquo;좋은 땅에 아름다운 벼를 키우리라&rdquo;, 4단에 &ldquo;가라지 따위의 잡초를 쳐버리고 혹운혹자하리라&rdquo;라는 시구가 나옴에도 불구하고, 도연명의 귀거래와는 거리가 멀다. 인용된 두 시구는, 위기지학의 염원과 거기에 이르기 위한 자기 절제를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1단에 &ldquo;나물밥과 거친 옷&rdquo;이 나오지만, 그것은 간제 자신이 그렇게 살고 있거나 살겠다는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 가운데 가장 불우하고 가난했던 안연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연을 떠올리며 옷깃을 잠시 여며보았다고나 할까? 남윤수에 따르면, 간제의 귀거래는 도연명처럼 낙향하는 귀거래가 아니라, 그 방향이 &ldquo;수양을 쌓고 학업을 닦는 &lsquo;진덕수업&rsquo;&rdquo;을 향해 있는 그런 귀거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고 해서, 우복과 간제의 귀거래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멀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한 오해도 없을 것이다. 우복과 간제의 두 작품은, 어느 사람이 자신의 한 팔을 앞으로 쭉 뻗친 다음 손가락을 폈을 때, 그 손가락 끝과 심장 사이의 거리만큼도 안 된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차귀거래사」와 「화도사」뿐 아니라,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실린 71수의 작품이 모두, 자동차왕 포드의 공장에서 대량생산된 자동차처럼 똑같다는 것이다. 같은 책의 지은이는 &ldquo;매편마다 고유의 철학과 미학&rdquo;이 담겨 있는 제각기 다른 맛의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화도시가 제작된 원리<sup>recipe</sup>는 다르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는 한 명의 상인(上人: 스님)과 한 명의 사대부 부인, 그리고 두 명의 중인 계급 문인(여항문인)이 쓴 화운시가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벼슬을 한 사대부가 쓴 작품들이다. 화도시를 쓴 창작 담당 층의 이런 특질이 화도시의 공통된 특질을 낳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의 사대부들은 어려서부터 경학을 통해 ①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익히고 ②과거에 나가 자신이 배운 세상에 펼치는 것으로 교양(배움)과 생활을 완성시켰다. ①과 ②는 체제의 도덕이나 가치에 내화되는 과정이면서, 호구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요구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는 독서인은 없었다. 그것이 출사<sup>出仕</sup>다. 그런데 조정<sup>朝廷</sup>은 잠시도 풍파가 그치지 않는 만만치 않은 곳인 데다가, 핵심 관료가 아닌 다음에는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에 담긴 대부분의 화도시들이 30대 후반에서 40대 말년 사이의 관료들에 의해 쓰였다는 것이 증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출사와 은구, 유학의 처세 이념</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중앙의 주요 관직에서 밀려나면, 중앙의 한직을 나돌거나 지방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럴 때마다 사대부들은 은구<sup>隱求=隱逸를 </sup>생각했고, 그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한편, 값을 올리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런 사정은, 오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인사과에서 당신을 명예퇴직자 명단에 올려놓고, 책상을 치운다거나 오지로 발령을 내리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lsquo;내 더러워서&hellip;&hellip;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rsquo;. 그런다고 떨어진 나의 값이 다시 오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든, 아무리 더러워도 &lsquo;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지&rsquo;를 좀체 실행할 수 없는 오늘의 도시 월급쟁이들과 달리,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이 귀거래를 호기롭게 읊으며 은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고향에 땅과 소작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서 두 대목을 인용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대체로 조선조 사대부들이 귀거래와 정치 참여를 함께 할 수 있었음은 &lsquo;재지성<sup>在地性</sup>&rsquo;에 있었다 함은 이미 밝혀진 연구의 결과인 것이다. 재지사족들이라 용사행장에 신축성이 자재하였던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이와 같은 점은 직접 땀흘려 일하는 노동의 즐거움과 성스러움은 아닌 것이며, 조선조 한문소설에 가끔 등장하는 감농<sup>監農</sup>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전원생활은, 몸소 땅을 파면서 준농<sup>準農</sup>에서 순농<sup>純農</sup>의 참 생활인이 되어, 자연을 읊은 도연명과는 일정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바로 이런 때문에 우복은 &ldquo;벼슬살이 즐겁다지만 돌아감만 못하리라!&rdquo;, &ldquo;즐거움은 전원에 있으며,/ 나의 사념이 뛰노는 곳이어라&rdquo;, &ldquo;곳집이 그들먹함은 농업에서 오는 것인데/ 숙흥야매로 부지런히 일하며 욕됨이 없으리라&rdquo;라며 고향이 있는 상주<sup>尙州</sup>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한 번도 조정을 잊지 못하였나 보다. 도연명은 공자의 &ldquo;사십이면 불혹이라<sup>四十而不惑</sup>&rdquo;는 가르침에 맞추어 귀향을 한 뒤에 63세로 몰하기까지, 20여 년 넘도록 영영 벼슬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하지만 우복은 45세 어름부터 대구 부사와 강릉 부사직에 다시 나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고 해서, 우복의 행태를 위선적이라고 지탄할 필요는 없다. 출사와 은구는 공자孔子가 명한 유학의 처세 이념이다. 『논어<sup>論語</sup>』 「위영공<sup>衛靈公</sup>」 편은 &ldquo;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부하고 귀한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sup>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sup>&rdquo;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계시<sup>季氏</sup>」 편에서는 &ldquo;숨어 살 적에는 그 뜻을 구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의를 구하라<sup>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sup>&rdquo;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들은 다 &lsquo;나라에 도가 있으면<sup>邦有道</sup> 출사하고, 나라에 도가 시행되지 않으면<sup>邦無道</sup> 은거하여 자기 뜻을 찾으라&rsquo;는 지침이다. 또한 굴원<sup>屈原</sup> 역시 「어부사<sup>漁父詞</sup>」에서 &ldquo;창랑지수가 맑으면 갓 끈을 씻고, 창랑지수가 흐리면 발을 씻고 숨으리라<sup>滄浪之水 淸兮可以濯我纓, 滄浪之水 濁兮可以濯我足</sup>&rdquo;고 선비의 처세를 가르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연명이나 도연명을 따라 한 우복은 모두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하겠다는 포부가 여러 가지 난관에 꺾였을 때 귀거래를 읊었다. 물론 귀거래를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두 사람이 낙향 이후에 보여준 태도는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 앞서 본 것처럼 도연명은 「귀거래사」의 정신인 ① ② ③ 모두를 실행했으나, 우복뿐 아니라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수록된 모든 화도사의 주인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도연명이 워낙 다른 길을 갔을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다. 맹호연에 대한 독후감에서 이미 썼듯이, &ldquo;한자문화권 속에서 은일과 출사는 도가와 유가의 관계처럼 시차적이며, 구심력(은일)과 원심력(출사)처럼 한 편이 다른 편을 이상화하면서 긴장관계를 형성&rdquo;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복과 간제는 서로의 이면<sup>裏面</sup>으로 보아야 하며, 그런 뜻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화도사는 물제<sup>勿薺</sup> 손순효<sup>孫舜孝</sup>의 「화귀거래사」다. 조선시대의 태평성대였던 성종<sup>成宗</sup>대의 총신이었던 그는 50세에 쓴 같은 작품에서 &ldquo;도잠<sup>[陶潛: 도연명]</sup>을 의모<sup>意慕</sup>&rdquo;하지만 &ldquo;진실로 태평성대를 저버릴 수 없음이여&rdquo;라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귀거래는 미래에 &ldquo;기약하겠다&rdquo;고 끝맺었다. 다시 말해, 귀거래를 동경은 하지만 지금은 태평성대이므로 &lsquo;조금만 기다려 달라&rsquo;는 것. 이건 귀거래를 한 것도 아니고,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어려서부터 경학을 통해 ①조선의 지배 이념인 유학을 익히고 ②과거에 나가 자신이 배운 세상에 펼치는 것으로 교양(배움)과 생활을 완성시켰던 사대부들의 이상이요 현실이면서, 그들의 로도스<sup>Rodhos</sup>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귀거래, 마모된 독서인의 치료소</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자신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도연명은 유교 문화권의 &lsquo;슈퍼스타&rsquo;다. 맹호연과 왕유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그를 흠모했던 문학적 친자<sup>親子</sup>들이지만, 그들은 물제만큼도 솔직하지 못했다. 산수전원파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천하 주유와 은거를 반복하면서 일평생 벼슬에 대한 욕구를 끊지 못했던 맹호연이 손가락질 받는 것에 비해, 왕유는 탈속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맹호연은 평생을 전원에 은거하였지만 공명에 대한 욕망을 접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실의와 분개의 감정이 종종 드러나 있어, 일반적으로 왕․맹(왕유․맹호연)이라 병칭하며 당시 산수전원시의 대가로 평가하지만 왕유와 같은 탈속적인 작품이 적다.(류성준 선역, 『왕유시선』, 해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왕유의 약력을 따져보면, 위의 평가가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왕유는 진사시에 합격한 21세부터 관직 생활을 했으나 크게 요직을 맡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30세에 아내와 사별하면서부터 불도에 몰두하게 되고, 반은 관직에 있으면서 반은 은거를 하는 어정쩡한 상태가 된다. 그가 관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된 것은 55세에 안록산의 난으로 횡액을 당하고나서이며, 장안을 떠나 종남산의 망천 별장에 은거하게 된 때는 58~9세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나서 2년 뒤에 죽었으니, 어찌 온전한 귀거래를 누렸다고 할 수 있으랴?</p> <p style="text-align: justify">왕유가 쓴 「기무잠의 귀향에 부쳐<sup>送綦毋潜落第還鄕</sup>」를 보면, 그 또한 유학의 &lsquo;구심력(은일)과 원심력(출사)&rsquo;이라는 &lsquo;10m 왕복달리기&rsquo;를 벗어나지 못하는 원숭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br /> 본래 태평성대에는 은거하는 자 없고,<br /> 현명하고 재주있는 선비들이 모두 조정으로 모여든다.<br /> 동산에 은거하던 선비로 하여금<br /> 은거생활을 할 수 없게 하였구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또 도연명의 출발점이 그랬고, &lsquo;짝퉁 산수전원시인&rsquo;이라고 호된 비난을 받는 친구 맹호연이 그랬던 것처럼, 왕유의 귀거래 동기 역시 &lsquo;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rsquo;일 수밖에 없었다. 「떠나 보내며<sup>送別</sup>」와 「초가을 산에서<sup>早秋山中作</sup>」에서 한 대목씩을 뽑아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br /> 그대는 말하네 속세에서 뜻을 이루지 못해<br /> 종남산 근처로 돌아가 은거할 거라고.</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336666">재능 없이 관직에 머물러서 있을 수 없으니<br /> 동쪽 시냇가로 돌아가 옛 울타리 지키고 싶어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국의 「화도사」 연구』의 지은이는 &ldquo;외부적 갈등이 재래<sup>齎來</sup>했을 때, 또는 벼슬을 떠난 사람의 물외간인적<sup>物外閒人的</sup> 생활을 누리면서 한 생을 마칠 때, 동양인의 심성을 사로잡는&rdquo; 것이 도연명의 귀거래적 인생관과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의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쓴 화도사를 모아 놓은 이 책을 보면서, 무엇인가 모자란다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다. 왜 중국과 한국의 사대부들은 관직을 박탈당하는 말년에 가서 하나같이 &ldquo;자연 발생&rdquo;에 가까운 귀거래 정서를 느끼는 것일까? 앞서, 이 정서의 정치적 원리(술수)와 경제적 토대는 간략하나마 설명이 됐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가가 사대부들에게 강요하는 &lsquo;성인<sup>聖人</sup> 만들기&rsquo;와 출사는 개인의 자아를 굉장히 억압한다. 말이 좋아 &lsquo;수신<sup>修身</sup>&rarr;제가<sup>齊家</sup>&rarr;치국<sup>治國</sup>&rarr;평천하<sup>平天下</sup>&rsquo;지, 그 과정은 개인이라는 &lsquo;모서리&rsquo;를 깎고 깎아서, 차츰 자신보다 더 넓은 것의 &lsquo;머릿돌&rsquo;로 바치는 과정이다. 출사에 성공하면 할수록, 성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lsquo;나&rsquo;라는 바닥짐은 사라지는 게 유가의 완성태가 아닐까? 그럴 때, 사대부들은 토끼가 너럭바위 위에 자신의 간을 말리려고 널어놓았다고 거북이를 속이는 것처럼, 자신의 손상되지 않는 자아를 고향에 은닉해 놓았다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인간이 &lsquo;공적 이성<sup>公的 理性</sup>(치국평천하)&rsquo;에 너덜너널해진 한참 뒤에, 공적 이성으로부터 방면되었을 때, 손상 받지 않은 내 자아의 한 부분이 어느 곳에 간직되어 있으리라는(혹은 어느 곳에 가면 찾을 수 있으리라는) 원초적인 믿음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쉽게 말해, 귀거래는 공적 이성에 마모 당한 독서인이 자아치료하는 심미적 공간이다.(이런 헛소리가 그럴듯하다는 게 아니라, 답답해서다. 왜 유교권을 이루고 있는 중국과 한국의 관료들만이, 다른 문화권의 관료들보다 더, 퇴직하고서 &lsquo;고향/자연&rsquo;을 되찾고자 하는가? 이런 게 궁금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화도사의 다른 패러다임, 농민시와 민중시</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남윤수는 자신의 책 끝에 ①&ldquo;앞으로의 세대는 한문 세대가 아니다&rdquo;라면서, ②우리나라에서 &ldquo;한문으로 쓰여지는 &lsquo;화도사&rsquo;의 제작은 무망&rdquo;하리라고 전망한다. 그러면서 ③&ldquo;앞으로도 다른 패러다임으로 &lsquo;화도사&rsquo;는 계속 쓰여질 것&rdquo;이라는 미련을 남겨 두었다. 하지만 지은이의 전망과 달리, 앞으로의 세대는 &lsquo;한문 세대&rsquo;가 될 공산이 크다. 21세기에는 한국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lsquo;영어 회화 붐&rsquo;보다 더 위력에 찬 &lsquo;중국 회화 붐&rsquo;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에 한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나라 것이면서 우리나라 사람이 읽을 엄두도 못 냈던 조선시대의 온갖 문서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은총을 마련해 준다. 그것은 우리나라 문학과 역사가 부흥하는 계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것이다. 그런 뜻에서 ①은 터무니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문이 살아나니 누군가 화도사도 쓰게 될 것이다. 하므로 ②도 정확한 전망은 못 된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앞으로의 세대가 한문 세대가 되더라도 화도사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도연명이 한자 문화권에 선사한 두 개의 문학적 토포스는 참으로 강력했다. &lsquo;귀거래&rsquo;는 오랫동안 사대부 계층의 숨은 자아로 기능하고, 상처받은 자아를 치료하는 정신 병원 역할을 해왔다. 또 &lsquo;무릉도원(도화원)&rsquo;은 지배 계층이 벌이는 전쟁이나 수탈에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고, 무릉도원에 대한 상상력은 중국 농민으로 하여금 종교적 결사와 결합한 농민봉기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유교권 대중이 품은 이상주의적(유토피아적) 대중운동이 딱히 도연명의 무릉도원을 가리키는 게 아니게 되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화도사」 연구』에는 백성의 곤경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온 마음을 바쳐 봉사하겠다는 시구가 빛나는 화도사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사대부는 자신의 교양(배움)과 생활이 합체된 채, 체제 내화 되어 있었던 때문에, 혁명을 생각할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의 귀거래는 지극히 사적인 은일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이 읊거나 누렸던 귀거래의 현대적 양태는, 중산층이면 기를 쓰고 누리고자 하는 &lsquo;웰빙<sup>Well-being</sup>&rsquo;일 것이다. 그런데 이게 참 웃기는 것이,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lsquo;고향/자연&rsquo;으로 내려가려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오늘의 도시 중산층은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다 해먹으려고 한다(이렇게 말하면, 오늘의 도시인들에게는 시늉을 해 볼 &lsquo;고향/자연&rsquo;조차 없기 때문에 더 불행하지 않느냐고 타박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걸 없앤 장본인이 본인들인 바에야!)</p> <p style="text-align: justify">①②는 빗나간 전망이 되었지만, ③은 생각해 볼 여지가 많은 대목이다. 전통적인 &lsquo;귀거래사류&rsquo;는 기본적으로 낙향한 사대부가 &lsquo;고향/자연&rsquo; 쪽에서, &lsquo;수도/왕궁&rsquo;을 애모하며 바라보는 시였다. 이때 노래를 하는 창작자는 일종의 대기 발령 상태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볼 수 있는 &lsquo;농민시/민중시&rsquo;는 여전히 &lsquo;고향/자연&rsquo; 쪽에 있지만, &lsquo;수도/왕궁&rsquo;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때 노래를 하는 창작자는 더 이상 대기 발령 상태가 아니다. 그들은 &lsquo;수도/왕궁&rsquo;의 부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선 자리를 생산과 투쟁의 기지로 삼는다. 전통적인 귀거래사류는 창작자 자신을 &lsquo;수도/왕궁&rsquo;으로부터 주변부화하는 동시에 &lsquo;고향/자연&rsquo;으로부터도 소외시킨다. 반대로 &ldquo;다른 패러다임&rdquo;의 귀거래사류인 현대의 &lsquo;농민시/민중시&rsquo;는 정확히 그것과 반대되는 양태를 보여준다. 『한국의 「화도사」 연구』에 나온 시들과 한국 현대의 &lsquo;농민시/민중시&rsquo;를 비교하면, 창작 주체와 결부된 더욱 흥미 있는 비교점이 보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체제의 관리인으로 국록을 먹었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무리 잘 봐주어도 독립적인 예술가라고 할 수 없다(중국과 조선의 사대부들이 쓴 시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문학 작품이 아니다. 오직 중국과 한국의 과거 사대부들이 쓴 시와 오늘의 문학 작품을 비교할 때만, &lsquo;순문학<sup>純文學</sup>&rsquo;이라는 말이 허용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쓰겠다). 때문에 &lsquo;고향/자연&rsquo;은 사대부 문인들의 심신을 치료하는 임시 공간이었을 뿐, 나의 문제의식을 담는 공간이 되지 못했다. &lsquo;고향/자연&rsquo;을 무대로 처음으로 &lsquo;농민시/민중시&rsquo;를 쓴 사람들 또한 결코 농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적인 예술가의 눈에 포착됨으로써 &lsquo;고향/자연&rsquo;은 비로소 사실주의적인 대변자를 갖게 됐다(농민들이 전문 작가의 &lsquo;사실주의&rsquo;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항상 불만스럽더라도 말이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5-11 오후 2:52:00이세기의 ‘이주, 그 먼 길’<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4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난 몇 해 나는 꿈을 품은 많은 이주민과 만났다. 임금 체불, 폭행, 산업재해 등이 주였지만, 간혹 정신 질환을 앓는 환자도 상담했다. 극도의 긴장으로 과호흡 증상을 보이는 이주노동자도 있었으며,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이도 있었다. 또한 밤만 되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단속과 강제 추방에 대한 공포로 작은 발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많았다. 이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한국 사회와 아시아를 이해하는 임상 분석과도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새로운 삶을 위해 더 나은 세계를 꿈꾼다. 이유가 무엇이든 현재의 삶이 신산(辛酸)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가 물구나무서 있어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목말라한다. 그리고 그 간절한 목마름이 꿈을 낳는다. 꿈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때로는 목숨도 걸게 한다. 어떤 이는 국경을 넘다가, 또 어떤 이는 출입국 단속에 쫓기다가 하나뿐인 생명을 한줌의 잿더미로 태워 버린다. 그 꿈은 악몽이 되기도 하는데, 꿈을 꾸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만난 대다수 이주노동자들은 악몽을 꾸는 이들이 아닌가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5년 전에는 나도 악몽을 꾸는 공장 노동자였다. 하루에 열여덟 시간씩 잔업에 철야까지 해가며, 월요일에 출근해 토요일 새벽이 되어서 퇴근하곤 했다. &lsquo;아우슈비츠&rsquo;라고 명명한 성형<sup>成型</sup> 공장을 나와 목재 공장을 전전하던 내 청년 시절은 온통 현장 노동자의 이력으로 채워졌다. 공단 주변에 있는 허름한 산동네에 살면서 꿈 많은 노동자가 되었다. 당시 일당이 3천1백 원이었는데, 그 돈을 모아서 월세를 냈고 쌀과 한두 종류의 찬거리를 사서 생활했다. 차비마저 빼고 나면 수중에는 2주일 치 담뱃값만 남았다. 집을 나와 부양할 가족이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온몸에서 진이 빠졌지만, 정작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니 한 달을 참아 내기란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괴물 같은 시대의 악몽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노동 현장에 투신했던 그때와, 오늘날 이주노동자가 처한 현실이 다르지 않다. 오히려 악화된 것도 있다.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들여다볼수록, 부끄러운 한국 사회의 짙은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산업 연수생들은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자 신분을 보장받지 못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는커녕 사용자에 대한 단결권&middot;단체교섭권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주노동자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값싼 노동력 취급을 받거나 영혼이 없는 그림자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낯선 땅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대개 번듯한 사업장이 아니라, 30명 안팎의 노동자가 일하는 공장에서 주로 야간 전담 노동에 투입되었다. 한국인이 퇴근한 텅 빈 공장에서 기계 소리와 함께 밤샘까지 마친 뒤에야 비로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컨테이너 방으로 갔다. 살림살이라고는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전부인 한 칸짜리 방에 납덩어리 같은 몸을 뉘었다. 고향에 있는 대가족의 생계가 그의 노동에 달려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주노동의 고달픔에 대해 묻곤 했는데, 그들은 오히려 &ldquo;나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를 이길 수 있겠는가.&rdquo;라고 반문하며, 고통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는 인내를 보였다. 그때마다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주 과정에서 겪는 문제는 간단치 않다. 가령 사업장에서 폭행을 당한 이주노동자는 임금 체불이나 사업장 이전 문제와도 연계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의료와 체류 자격부터 생존권과 정주권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특징을 보인다. 때로는 치도곤 같은 모멸과 치욕을 견뎌야 한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느 곳에 있든지 인간으로서 존엄을 보장받아야 함에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주가 전 사회적이고 일국을 넘어 전 지구적인 문제임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줄 노동권과 시민권이 보장되기까지는 여전히 요원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동의 역사와 현실이 운명의 사슬처럼 이어진 오늘날의 아시아는 이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세계화가 곳곳에서 활개 치는 지금, 그 어떤 국가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시아 곳곳에서 숨 쉬고 생활하는 모든 이들은, 언제라도 이주의 삶으로 전락할 수 있다. &lsquo;아시아 체제&rsquo;의 이 같은 질곡을 극복할 주체는, 세계 경제체제의 하위자로 전락한 모든 아시아인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 힘은 결국 인간애를 지닌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lsquo;화&rsquo;(和)와 &lsquo;쟁&rsquo;(諍)의 &lsquo;다름과 같음&rsquo;을 사유하게 된다. &lsquo;화이부동&rsquo;(和而不同), 서로 같되 다름을 통해 종당에는 서로 다름이 하나라는 화엄의 아시아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시아의 하늘은 이어져 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하든, 피부색이 어떻고 쓰는 언어가 무엇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사람이다. 생존과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길을 떠나는 우리 모두는 이주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이주민의 문제가 당사자의 목소리로 발언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의 문제로 외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목소리가 아시아에 대한 애정과 연동(連動)의 단초가 되었으면 한다. 세계사의 고리에서 억압당하고 천시되었던 아시아에서 새로운 문명이, 모든 인권이 존중받는 새로운 도약이 움트기를 기원한다. 자신의 존재를 부당하게 잃어버린 투명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의 아픔에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실린 글은 대부분 2005년에서 2011년 사이에 &lsquo;한국이주인권센터&rsquo;와 &lsquo;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rsquo;에서 활동하며 썼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주노동자와 이주민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이 책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값진 것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lsquo;우리 모두는 이주민&rsquo;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주의 삶은 꿈을 꾸는 것이다. 비록 신산한 삶이 기다릴지라도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은 포기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신성한 꿈을 모시고 있다. 나도 꿈을 꾼다. 국경이 없다면, 민족과 이데올로기가 없다면, 차별이 없다면 이 세계는 어떨까 상상한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모두에게 평화의 인사를 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4월<br /> 이세기<hr /> </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불안한 귀환, <br /> 그 후</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br />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이주, 그 먼 길</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color: #80800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사욍</span></strong></span> 씨가 고향을 떠나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온 것은 그의 나이 28세였다. 타이 동북부 오지인 잠롱에서 한국으로 올 때, 그는 고향에다 땅을 사 연못이 딸린 집을 짓고 가정을 건사하며 사는 꿈을 품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에는 180여 가구, 7백여 명이 살고 있다. 지방 국도의 조그만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집 몇 채가 흩어져 있고, 마을 입구에 초등학교와 보건소, 그리고 사원이 하나 있을 뿐, 타이의 여느 농촌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농사를 짓는 부모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사욍 씨(37세, 타이)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지만, 다른 또래들처럼 일자리가 없어서 무직으로 지내야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고향을 등지고 방콕 등지의 대처로 떠났다. 그 역시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가까운 소도시로 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돈으로는 가족의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장래를 계획할 수 없었다. 아무리 벌어도 남는 것은 밑도 끝도 없는 생활고와 절망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한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9만 바트라는 거금을 빌려 송출 브로커 비용으로 주고, 1999년 고향을 떠나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인천 5공단이었다. 인천의 대표적인 기계 단지로 주로 프레스 직종이 몰려 있는 공단이다. 그는 밤낮으로 일해 매달 70만여 원을 받으며, 5년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았다. 산업 연수생 계약 기간인 3년이 지났지만 귀환하지 않은 채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남았다. 그러다가 2003년, 미등록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병행해 이뤄진,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합법화 조치로 구제되어 출국한 후 비전문 취업E-9 비자(비숙련공 비자)를 받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그와 만난 것은 2006년 봄이었다. 그는 인천 5공단에서 타이 이주노동자 네 명과 함께 사출직으로 일했는데, 다니던 회사에서 임금이 체불돼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은 3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공장은 폐업했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 확인을 하니, 사장은 한국의 여느 사업주와는 다르게 정중한 태도로 노동부에서 만나 해결하자는 의사를 전해 왔다. 노동부에서 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부분의 3D 업종 사업주들처럼 여러 차례 클레임을 당해 심한 자금난을 겪은 끝에 부도를 낸 상태였다. 다행히 체당금 처리를 할 정도는 아니어서 체불임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지급 기일을 합의한 뒤 헤어졌다. 그 후 몇 차례의 중간 정산을 거치면서 다섯 명이 받지 못한 체불임금 1천7백만여 원을 받았다. 그렇게 사욍 씨와의 만남이 시작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후 그는 합법적인 구직을 스스로 포기하고 예전에 근무했던 공장에서 프레스 직종의 일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비전문 취업 비자가 있으면서도, 고용지원센터를 이용하지 않고 임금을 더 주겠다는 공장에 가기 위해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두 차례 이주노동을 하러 오는 과정에서 진 빚 때문에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겠다는 공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런 그의 선택과 생활은 얼마 못 가서 끝났다. 단속에 걸려 강제 출국을 당했던 것이다. 그는 한국에 들어와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잔여기간조차 채우지 못하고 타이로 귀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짧은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그런 그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우연찮은 일이 종종 벌어지는 법이어서, 귀환한 사욍 씨를 만날 기회가 찾아왔다. 타이로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위해 도서관에 비치할 타이 책을 구해 오는 한편, 인권 여행의 일환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몇 나라를 여행하며 귀환한 이주노동자를 만날 목적으로 가는 출장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0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방콕</span></strong></span>은 비가 내렸다. 우기의 비는 느닷없었다. 누군가는 우산이 필요 없다며 그냥 맞으면 된다고 했다. 괜한 짐만 될 뿐이라고 했다. 과장이 아니었다. 숙소로 정한 방람푸의 거리에도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다. 비가 갠 날은 습도가 높아져 숨이 막힐 듯한 열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열대야의 더위가 게스트 하우스의 천장에서 도마뱀과 함께 내려왔다. 푹푹 찌는 더위가 무슨 전염병 같았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몰려든 카페에서는, 세계의 여러 인종이 모인 곳답게, 젊음의 열기가 밤새 식을 줄 몰랐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이들과 섞이지 못한 나는, 이 도도한 자본주의의 기세에 휘둥그레진 채 명멸하는 밤의 방콕을 걸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줄라롱컨 대학 구내 서점에서 책을 구하고 잠시 거리를 구경하니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동굴에 들어서자, 신비한 세계가 열린 듯했다. 알록달록하고 진귀한 온갖 차들과 매연에 그을린 도시의 건물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열대의 꽃들이 거리를 장식했고, 차이나타운은 사람들의 물결로 파도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나는 내내 홀린 듯한 토끼 눈을 하고는 거리의 불빛과 차들과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세계 각지에서 온 젊은 여행객으로 방람푸의 밤은 짧기만 하다. 시간이 질주하고, 취해 흐느적거린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400" height="71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A%B7%B8%EB%A6%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첫 번째 일을 끝낸 나는 드디어 사욍 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적어 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몇 차례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씨름했지만 번번이 그와 통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여동생과도 몇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응답이 없다. 수화기에서는 타이 말만 들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패감이 커진다. 사욍 씨와 이야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그의 고향집에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이 절망스럽다. &lsquo;내 이런 절망이 이주노동자들이 이주 과정에서 겪는 문제가 아닐까.&rsquo; 나는 몇 번이고 되새김질했다. 외지에서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겪으면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막막하리라. 사욍 씨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그랬을 것이다. 나는 외로움을 달래려 맥주를 사서 여느 유럽 배낭족처럼 거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신 술은 한낮의 온도처럼 내 몸을 뜨겁게 달궜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듯 가슴이 답답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아무도 없다. 나는 그 길로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었다.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심장이 뛰고 숨이 곧 멎을 듯한 기세다. 말의 침묵이 이런 것인가. 이런 것이 바로 모국어를 할 수 없는 이의 감옥살이이자 이주노동자가 겪는 고통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일도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주노동자 메네트(41세) 씨가 실어증에 걸리고 정신착란에 빠진 것이다. 한국에 온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그는 밤만 되면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공장 창문을 넘어 어딘가로 가려 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도 없이 벽을 손톱으로 긁거나 천장을 뚫어지게 봤다. 어느 날은 벽에서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동료들이 벽과 천장을 뚫어서 보여 줘도 믿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려니 했지만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작업 시간에도 방에서 나오지 않은 채 괴성을 지르고 몸부림 치며 날뛰자, 공장 동료들은 그를 기숙사 방 안에 가두었다. 결국 그는 병원에서 신경안정제를 맞고 사지가 묶인 채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며칠간 해야만 했다. 입원해도 호전되지 않자 곧 본국으로 귀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늦은 밤 방람푸의 거리에서, 메네트 씨와 내가 서로 다르지 않고, 실어의 고통 또한 모든 이주노동자가 겪는다고 생각하니, 답답함이 벼랑처럼 다가온다. 어둠 속, 창문 밖에서 들리는 우기의 빗소리가 정처 없다.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마음이 겨우 진정되어 잠시 눈을 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가까운</strong></span></span> 사원의 닭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느닷없이 빗줄기가 쏟아진다. 공중전화를 붙잡고 다시 사욍 씨와 통화를 시도했다. 그의 여동생과 겨우 연락이 되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사욍 씨와 만나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간밤에 극심하게 온 공황증도 그렇거니와 점점 죄어 오는 실어증은, 내게 감옥살이와 다름없었다. 여행사에서 출국 예약을 하고는 곧바로 숙소에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차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한국에 있는 타이 이주노동자였는데 사욍 씨와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고, 이제 내가 묵고 있는 숙소로 사욍 씨가 전화하리라고 전해 주었다. 이내 전화벨이 울린다. 사욍 씨다. 반가운 목소리다.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란다. 내일 아침 사람을 보낼 테니 숙소에서 기다리란다. 다행이다. 그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며칠간의 마음고생이 절로 치유되는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전화벨이 울린다. 나를 데려갈 사람이 찾아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잠시 뒤 카운터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전했다. 내려가 보니, 낯선 타이인이 &ldquo;안녕하세요?&rdquo; 하며 내 이름을 부른다.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는데 뭔가 뭉실하다. 손가락이 없다. 직감적으로 그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가 산재를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근무하는 한국의 3D 업종은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그들은 야간전투를 위해 전선에 배치된 군인처럼 일해야 한다. 작업 효율성을 높인다며 안전장치도 제거한 채 한 공장에 두세 명씩 배치되어 생산성 향상을 위한 치열한 전투를 치른다. 전투에서 실패한 전투원은 가차 없이 해고되거나, 다른 전선에 배치되기 위해 작업장을 떠난다. 임금 체불은 다반사고 산업재해에도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일하다 팔목이나 손가락이 절단된 채로 산재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허리디스크에 시달린다며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본국의 임금수준으로 책정된 형편없는 보상금뿐이다. 손가락을 잃고 받는 돈은 겨우 몇 백만 원에 불과했다. 그들은 평생을 불구로, 때로는 노동력이 상실된 채 살아가야 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재 보상금을 받아 출국해 봐야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대부분 암담한 현실이다. 전쟁을 치른 군인이 고향에 돌아와도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그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산재를 당한 몸으로 한국에 남아 치료받거나 다른 변통을 찾으려 애쓰지만, 노동력을 상실한 이주노동자를 받아 주는 사업주는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를 찾아온 이는 사욍 씨의 친구인 리욤(32세, 타이) 씨였다. 경기도 용인에 있는 사업장에서 산재를 당했다고 한다. 2005년경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왔는데 입국한 지 2개월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 프레스에 그의 손가락이 싹둑 날아간 것이다. 다섯 손가락이 잘린 보상으로 3천1백만 원을 받았는데, 그 돈을 가지고 타이에 와서 택시 두 대를 소유한 사장이 되었다. 내가 타이에 와서 처음 만난 귀환 이주노동자였다. 그는 사욍 씨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오른 나를, 웬일인지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오른손을 치켜세우며 배웅했다. 마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달라는 뜻 같았다. 그의 삶이 송곳이 되어 폐부를 찔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A%B7%B8%EB%A6%BC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상담을 하면서 많은 이주노동자가 산재를 당하는 것을 봐왔다. 사출이나 프레스 직종에서 발생하는 산재는 주요 상담 중 하나다. 하루에도 일곱 명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고 한다. 그래도 리욤 씨는 적은 보상금이나마 헛되이 쓰지 않고 생활 기반을 마련한 터였다. 그는 내게 앞으로 6백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여행하게 될 테니 한숨 푹 자두라고 했다. 저녁때쯤에야 잠롱에 도착할 것이란다. 간밤에 잠을 자지 못한 데다 푹푹 찌는 날씨 탓에 온몸이 녹초인 채로 길을 떠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를 태운 차가 타이 동북부의 메마른 도로를 달렸다. 택시 운전사인 리응조(41세, 타이) 씨는 자신의 아내가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lsquo;수정&rsquo;이라고 했다. 한국 동료들이 지어 준 이름이라며, 지금도 그렇게 부른단다. 그는 운전하면서, 아내에게 배웠다는 한국 대중가요를 연신 불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차는 끝도 없이 불볕더위 위를 달린다. 실어증이 떠나가자, 정신적인 고통이 뒤를 따랐다. 간밤의 후유증으로 탈진해 기력이 쇠했다. 나는 잠시 사욍 씨가 이주를 위해 떠나왔을 길 위에서, 내가 떠나온 길을 생각해 봤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나를 어떤 고통으로 내몰았다. 나는 물었다. 내게 사욍 씨는 어떤 존재인가. 내가 굳이 사욍 씨를 만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되묻고 되묻는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스칠 때마다 나는 고통스러웠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불현듯 볼 때마다 나는 내 정처가 고통으로 다가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통이 더할수록 이 길을 오갔을 이주노동자의 꿈과 좌절이 떠오른다. 아시아의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가부장제 아래 집안 전체를 건사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들은 비록 세계 경제체제 속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취급받지만, 그들의 양 어깨에는 가족은 물론이고 자신의 장래까지 챙겨야 하는 몇 겹의 멍에가 짊어져 있다.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실업률만 증가하다 보니, 일이 있는 곳으로 노동력이 몰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을 찾아 국경을 넘어 목숨을 건 이주를 단행한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겨운 이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많은 이주노동자에게 &ldquo;왜 고향을 떠나와서 고생을 하느냐?&rdquo;라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다. 자신의 나라에는 &ldquo;일이 없다.&rdquo;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욍 씨가 살고 있는 마을까지 가는 길은 온통 흙구덩이 투성이다. 우기 때 내린 소낙비로 사방이 파헤쳐진 채 방치되어 있다. 느릿한 풍경은 우리네 시골 풍경과 닮았다. 흰 소가 풀을 뜯어 먹고, 구름은 한가로이 흘러간다. 마을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웅덩이가 심하게 패였다. 사욍 씨도 이 길을 따라 한국으로 이주노동을 왔을 것이다. 방콕에서 6백 킬로미터를 달려온 차가 마침내 잠롱에 나를 내려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A%B7%B8%EB%A6%BC3.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잠롱</strong></span></span>은 2개월째 비가 내리지 않았다. 논바닥은 갈라지고 심어 둔 벼는 이삭을 피우기도 전에 쭉정이로 메말라 가고 있었다. 흰 구름은 정처 없고 먹구름도 지나치기만 할 뿐이었다. 메마른 대지는 물을 간절히 애원하는 듯하다. 집집마다 어슬렁거리는 닭처럼 마을 사람들 역시 정처 없다. 닭과 병아리가 빈 마당을 거닐고, 연못에는 부레옥잠과 연꽃이 피어 있다. 바나나 나무와 야자수가 있을 뿐 사는 모습은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아열대기후로 숨이 턱 막힌다. 내륙의 기온 탓인지, 아직 본격적인 우기가 오지 않아서인지 그야말로 용광로처럼 푹푹 찐다. 먼 곳에서 손님이 왔다고 대접한 선풍기조차 열기를 더할 뿐이다. 그 사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는 몇몇 사람들이 모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안부를 묻는 내게 사욍 씨가 대답한 첫마디는, &ldquo;이곳 사람들 일 없어. 나도 일 없어.&rdquo;였다. 이곳 청년들은 하나같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어 한단다. 그도 그럴 것이 이주노동자로 한국에 다녀온 동네 청년 몇몇은 이곳에 그럴 듯한 집을 장만했다. 차와 농사를 지을 트랙터를 장만한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업자로 지내고 있었다. 어스름이 몰려오자 한두 명씩 더 모여들었다. 그런데 모두들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잠롱에서만 스무 명 넘는 사람이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갔었다고 한다. 인천 5공단과 남동 공단뿐 아니라 의정부&middot;평택&middot;성환&middot;여주&middot;용인 등지를 떠돌며 이주노동을 했다는 것이다. 일하다가 자진 귀환하거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지내다 단속에 걸려 귀환한 이들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고사는 문제다. 이곳에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일이 많은 나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A%B7%B8%EB%A6%BC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들의 말마따나 한국은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렀고, 독재 정권에서 벗어났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다. 그들에게 한국은 말레이시아&middot;일본과 더불어 이주노동자로 가고 싶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속내를 들어 보니 한국 사회는 야만이 지배했다. 작업장에는 욕설과 폭행이 난무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산재를 위협받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걸핏하면 몇 개월씩 임금이 체불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욍 씨의 안내로 묵게 된 집은, 지금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집이었다. 열대야 때문만은 아닌 듯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가끔씩 어둠에 잠긴 지평선에서 메마른 천둥이 울었다. 한밤중에 비가 바나나 나무 잎사귀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진다. 다시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 밤이 깊어 간다. 한참 마당을 서성거린 뒤에야 잠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침에 일어나니 인천 남동 공단에서 일했다는 룽(34세, 타이)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는 자신의 아내 역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했다면서 자신을 &lsquo;한국통&rsquo;이라고 소개했다. 함께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어제 만났던 이주노동자들이 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시 있으니 사욍 씨가 왔다. 묵고 있는 집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단다. 엊저녁에 먹었던 까오똠이라는 죽이 커피와 함께 나왔다. 다시 먹으니 맛이 난다. 한국의 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식사를 마친 뒤 사욍 씨와 동네 구경에 나섰다. 정자처럼 생긴 곳에 마을 사람 몇몇이 앉아 있다. 그곳을 지나쳐 조금 걸으니 장례식을 하고 있는 집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모여 장례를 치르는 모습은 영락없이 우리네 시골 같다. 초등학교로 향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는데, 때마침 1학년생들이 마을 견학을 하던 중이었다. 인솔 교사의 제안으로 아이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교실에 들어가 &ldquo;안녕하세요.&rdquo;라는 말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학교를 나와 보건소와 사원을 둘러보고 사욍 씨의 집으로 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욍 씨는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근무했던 사람들의 집도 구경시켜 주었다. 나름대로 번듯하다. 그림 같은 집들이다. 그러나 모든 귀환 이주노동자의 집이 그렇지는 않았다. 사욍 씨는 자기 집을 보이길 꺼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누추한 집을 보이고 싶지 않았단다. 사욍 씨는 한국에서 7년 동안 일했지만 처음 5년간은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그 때문에 부인과는 아들 하나를 낳고 헤어졌다. 그는 7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아서는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다고 했다. 그 뒤에도 한 번 더 한국에 이주노동자로 가서 1년여 일했지만, 빚만 졌을 뿐 지금은 방 한 칸 딸린 집이 전부다. 집터는 있지만 집을 짓지 못할 만큼 궁핍했다. 돈을 벌기는커녕 실업자에 새장가도 못 들고 나이만 든 상태라며 자신의 처지를 책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욍 씨는 여건만 되면 다시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집을 짓고 결혼도 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도 건사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잡초만 무성한 텅 빈 집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시 마을을 둘러보고 숙소로 왔다. 이제 긴 이별의 순간이다. 한국에서 귀환한 이주노동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해 서로 인사를 나눴다. 사욍 씨를 불러내 택시비를 주려고 하니 한국에 있는 타이 이주노동자들이 이미 4천8백 바트를 지불했단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차비를 사욍 씨에게 주려고 했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그와 포옹하면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택시에 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리응조 씨 역시 부인인 수정 씨와 인사하고 차에 올랐다. 그는 3개월에 한 번 정도 이곳 집에 온다고 한다. 부인은 1개월에 한 번씩 방콕으로 간다. 이를테면 집안 자체가 이주의 삶이다. 그는 내게 간밤에 잘 잤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내가 짓궂게 되물었다. 그는 매우 좋았다고 넌지시 말했다.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의 나이 스물두 살에 아내를 만났고, 아들 둘은 이미 장성했다. 큰아들은 방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작은아들은 이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그는 한국이 돈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아내가 한국에서 5년간 번 돈을 택시에 투자했고, 그러고도 남은 돈으로 집을 지어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을을 떠난 차는 방콕을 향했다. 다시 6백 킬로미터를 달린다. 처음 떠나온 자리로 나를 다시 되돌려 놓으려는 듯 달리고 달린다. 나는 방콕으로 오는 내내 내가 겪은 일들이 진실과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계의 안팎에서 중심으로 열린 길은, 언제나 진실이 왜곡되고 과장되어 보인다. 자신의 터전을 벗어나 중심으로 가면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질 것이라는, 세계화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 많은 이들을 이주노동자로 내몰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전 지구적 차원으로 이동되고 있는 자본의 요구와, 이에 맞설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그 길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생각이 벌레처럼 스멀거려 온몸이 몸서리친다. 주변부에서 떠밀린 이주노동자들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른다. 이주노동자들이 왔을 길을 따라 뒤를 돌아본다. 하늘은 청명하다. 그 아래 들판에는 흰 소가 느릿느릿 걷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다시</strong></span></span> 돌아온 방콕의 방람푸 거리에는 온종일 우기의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거리에서는 젊은 청춘들이 그들의 세대를 향해 돌진하듯 열정을 불사른다. 불야성에 취한 불빛이 나의 눈빛을 홀린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방람푸의 카오산 거리를 걷는다. 웬일인지 나는 정처가 없다.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발길 가는 대로 비가 내리는 밤의 카오산 거리를 걸을 뿐이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카오산의 휘황한 불빛이 흐른다. 거리 곳곳에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젊음이 아름답다 못해 비극적이다. 거리의 한쪽에는 젊은이들이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고, 그 옆에는 성을 파는 여인이 온몸을 드러낸 채 활보한다. 다른 한쪽에는 늙은 악사가 기타를 연주하며 몇 바트의 동전 앞에서 흐느끼듯 노래하고 있다. 연애를 하고 술을 마시고 끝없이 대화를 하고 또 아침이면 어디론가 그들은 달려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른 한편에서는 몇 푼의 돈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수십만 킬로미터를 넘어온다. 국경을 넘어 생명을 건 이주를 선택한다. 서로 다른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질주한다. 양극화의 지점에 내가 있다. 나는 천천히 방콕의 밤길을 걷는다. 자본주의의 불빛이 멈출 것 같지 않은 카오산 거리에는 이국의 수많은 여행객들이 밀려온다. 질주는 끝이 없어 보인다. 극단의 세계와 함께 동거하는 현실이 이처럼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어째서일까. 왜 이처럼 세계는 극단으로 내밀리고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화를 요구하는 전 지구적인 자본에 맞서자고 요구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일지 모른다. 발가벗긴 채 자본이 선사한 굴욕과 치욕 속에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지금 이곳, 나와 연결된 아시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가 겪고 있는 고통의 지점이 아닌가.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지금 우리는 아시아의 고통이 이주의 고통으로 되살아오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한다. 사욍 씨가 오간 길 위에서, 아니 잠롱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오갔을 길을 되돌아오면서 묻는다. 아시아의 고통은 무엇인가. 이주의 삶을 통해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불안한 이주의 삶을 통해 무엇이 변화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천 국제공항에 내리자 하늘이 푸르다. 전날 비가 내렸는지 활주로에 빗물이 고여 있다. 비로소 나는 앨리스의 동굴을 빠져나와 현실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짐을 찾고 출입국 신고를 위해 기다리던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주노동자였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빠져나가는 출구에는, 고용허가제<sup>EPS</sup>로 들어오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 30여 명이 유니폼을 입은 채 입국 심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에 긴장과 경계의 눈빛이 잔뜩 서려 있다. 바로 그 순간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세계는 무엇인가. 갑자기 온몸이 답답해졌다. 방콕의 카오산 밤거리에서 느낀 바로 그 공황증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심경이 아열대의 빗줄기처럼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들의 눈빛이 두려움의 눈빛인지, 아니면 새로운 꿈을 향한 눈빛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스스로 이주노동자가 되어 천천히 공항 출구를 빠져나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A%B7%B8%EB%A6%BC5.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78"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9_%EC%9D%B4%EC%A3%BC%20%EA%B7%B8%20%EB%A8%BC%20%EA%B8%B8/%EC%A0%80%EC%9E%90_%EC%9D%B4%EC%84%B8%EA%B8%B0.jpg" />이세기<br /> </strong>1963년 덕적군도 문갑도에서 태어나 인천 뭍으로 건너왔다. 1985년부터 세창물산&middot;신흥목재(우아미가구)&middot;청호가구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당했고, 그 후 동일제강과 협신사, 그리고 목공소 등을 전전하며 현장 노동자로 살았다. 1998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았고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집 『먹염바다』와 『언 손』을 냈다.<br /> 이 책에는 시인이며 인권 운동가로 살아온 내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2005년부터 &lsquo;한국이주인권센터&rsquo;와 &lsquo;아시아이주문화공간 오늘&rsquo;에서 이주노동자, 이주민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크고 작은 고통들을 직면하며 받아 적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소박한 꿈을 위한 &lsquo;오디세이아&rsquo;의 모험을 함께하는 친구들이므로, 이 기록들은 나와 같거나 다른 이들에 대한 헌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10 오전 11:17:00김삼웅의 ‘진보와 저항의 세계사’<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0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8_%EC%A7%84%EB%B3%B4%EC%99%80%20%EC%A0%80%ED%95%AD%EC%9D%98%20%EC%84%B8%EA%B3%84%EC%82%AC/%EC%A7%84%EB%B3%B4%EC%99%80%20%EC%A0%80%ED%95%AD%EC%9D%98%20%EC%84%B8%EA%B3%84%EC%82%AC_%ED%91%9C%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역사는</span></span></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달리 말하면 곧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저항사다</span></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p> <p style="text-align: justify">저항의 물결이 전 지구적으로 출렁이고 있다. 자본주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에서 사회주의 심장부 모스크바까지, 중동&middot;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에서 유럽과 아시아까지, 99퍼센트의 민중이 눈을 부릅뜨고 1퍼센트를 향해 분노한다. 『분노하라』, 『점령하라』 같은 책이 세계 출판시장을 점령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대원으로 나치에 저항했던, 우리 나이로 96세의 노인인 스테판 에셀은 20여 쪽짜리 소책자에서 젊은이들에게 노골적으로 &ldquo;분노하라&rdquo;고 말한다. 제목도 아예 분노하라는 뜻의 &lsquo;Indignez-Vous!&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젊은이들이여,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참지 말아야 하는 게 어떤 것인지, 곧 알게 된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lsquo;내가 뭘 하겠어? 내 일이나 잘해야지&hellip;&hellip;&rsquo; 하는 태도다. 그러면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의 하나인 분노의 힘을 잃게 된다. &lsquo;참여&rsquo;의 기회도 영원히 놓치는 것이다.&rdquo;-에셀의 &lsquo;정다운&rsquo; 채찍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초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독재자를 몰아낸 시민봉기가, 같은 해 9월 17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으로 나타났다. 시위자들은 미국 맨해튼 남쪽 주코티 공원에 천막을 치고 1퍼센트의 기득권층에 저항했다. 분노의 목소리는 곧 유럽으로 번지고 전 세계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다소 가라앉은 듯하지만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이다. 인류 역사상 전 세계적으로 99퍼센트가 동시다발적으로 &lsquo;분노&rsquo;와 &lsquo;점령&rsquo;의 기치를 내걸고 1퍼센트에 대적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지난해 시사주간지 &lt;타임&gt;이 &lsquo;올해의 인물&rsquo;로 &lsquo;시위자(the protester)&rsquo;를 선정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lsquo;시위자&rsquo;는 곧 &lsquo;분노하는 다수&rsquo;의 다른 이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은 분노할 줄 아는 동물이다. 분노를 모르는 인간은 노예다. 그리고 역사는 달리 말하면 곧 저항사다. 저항이 없는 역사는 공동묘지일 뿐이다. 태초에 분노가 있었다. 무화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제(禁制)의 철망을 뚫을 때 분노가 치솟았다. 그때 아담이 분노하지 않았다면 &lsquo;이성적 인간&rsquo;은 태어나지 못하고 에덴동산에는 박제된 &lsquo;유인원&rsquo;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를 가리키는 말의 &lsquo;아(我)&rsquo;는 손(쒜)에 창(戈)을 들고 서 있는 모양의 상형이다. 손에 창을 들고 자기를 지키는 형상을 &lsquo;나&rsquo;로 표기한 옛 사람들의 예지가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때의 &lsquo;나(我)&rsquo;는 사적 개인과 더불어 공적 국민, 인류 등을 포함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만일 노예가 그 앞에 서 있다면 반드시 진심으로 슬퍼하고 분노해야 한다. 진실로 슬퍼함은 그의 불행을 슬퍼하기 때문이며 분노하는 것은 그가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근대 중국의 저항작가 루쉰의 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哀其不幸<br /> 怒其不爭</p> <p style="text-align: justify">루쉰은 또 이런 말도 남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밝은 빛의 세력이 어둠의 세력과 끝까지 싸우지 않고, 만약 사악한 세력이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너그럽게 감싸는 것인 줄로 착각하여 덮어두고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상태는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마틴 루터 킹도 여기에 한마디 보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백인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은 흑인 스스로의 열등감이다. 복수하지 않고도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릴 방법은 혹인 스스로 권리의식을 찾는 길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대 그리스의 시인 솔론은 &ldquo;피해를 입지 않은 자가 피해를 입은 자와 똑같이 분노할 때 정의가 실현된다&rdquo;라고 말하고, 미국의 워싱턴은 &ldquo;사슬에 묶여서 똑바로 걷는 것보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쪽이 훨씬 더 났다&rdquo;고 주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래되고 낡은 집을 뜯고 새로 지으면 진보요 그대로 두면 보수다.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은 전진한다. 신체구조부터 그렇다. 후퇴할 때도 뒷걸음질이 아니라 뒤로 돌아 걸어간다. 인류는 원시상태에서 진보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 뒷걸음질이 정상이 아니듯이 역사를 뒤로 돌리는 것은 무지이거나 무모한 짓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故) 리영희 교수가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J. B. 베리(1861~1927)는 『진보의 관념』에서 &ldquo;진보는 서양문명의 중심개념&rdquo;이라 지적하였다. 서양문명뿐이겠는가. 태고에 서양문명과 동양문명이 비슷한 시기에 싹이 트고 진행되다가 중세(中世) 이래 동양(중국)에서는 요&middot;순&middot;우&middot;탕의 치세를 이상향으로 하는 상고주의(尙古主義)가 통치철학이 되면서 &lsquo;동양적 전제&rsquo;가 계속되고, 서양에서는 천부인권론에 따른 분노와 저항이 자리 잡으면서 합리주의와 과학정신으로 동양을 앞서게 되었다. 물론 동양에서도 분노와 저항의 진보사관이 있었고, 서양에서도 전제군주 천년왕국의 퇴보사관이 있었다. 동양에서도 전제와 싸운 사상가가 있었고 서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유하는 &lsquo;이족동물(二足動物)&rsquo;은 지극히 이기적이어서 좀체 손해 보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려 한다. 또 오랜 &lsquo;동양적 전제&rsquo;로 노예근성도 DNA(유전자) 속에 남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일의 저항 목사 마틴 니뮐러의 시 「그들이 왔다」는 많이 인용되지만 항상 새롭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다<br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br /> 그들은 유대인을 잡으러 왔다<br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br /> 그들은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br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br /> 그들은 천주교인을 잡으러 왔다<br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br /> 나는 개신교인이었으므로<br />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다<br /> 그런데 이제 말해줄 사람은<br />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lt;기독교사상&gt; 2009년 2월호부터 2년여 동안 &lsquo;인간 진보와 저항의 발자취&rsquo;란 이름으로 연재한 것을 보완하고 추가하여 묶었다. 연재 기간은 이명박 정권 아래 민주주의 후퇴, 서민생계 파탄, 남북관계 적대라는 반동의 시대였다. 이런 상황에서 용산참사, 총리실 민간인 사찰, 촛불집회 참가자 지명수배, 노무현 전 대통령 정치보복, 4대 강 파헤치기 등 반시대적 &lsquo;백색전제&rsquo;가 활개치고, 족벌신문과 어용화된 방송이 &lsquo;이명박 찬양&rsquo;을 한목소리로 내면서 비판과 저항세력을 좌경종북으로 몰아쳤다. 6월항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유신&middot;5공 시대로 회귀하는 듯한 천박한 모습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학혁명, 3&middot;1항쟁, 4월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그리고 두 차례 민주정부 수립의 역사를 가진 우리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lsquo;아랍의 봄&rsquo; 시위가 계속될 때 &lsquo;먼 산 불구경&rsquo;을 했다. 리비아의 카다피, 이집트의 무바라크, 튀니지의 벤 알리, 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쫓겨나거나 처형될 때 한국에서는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이 다시 세워지고, 박정희의 거대한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역사의 역설일까, 아니면 역사의 반동현상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인간 진보와 저항의 발자취&rsquo;를 연재하면서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시기마다 소수의 선각자들이 분노와 저항을 통해 인류사를 진보시켜왔음을 보았다. 그들 대부분이 기득세력의 구조화된 폭력에 육신이 찢겼지만, 그들의 순혈이 몽매한 민초들을 각성시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데 기여했음을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을 쓰는 데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남미,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의 진보와 저항의 사력을 담지 못했다. 이것은 순전히 저자의 한계 때문이다. 그쪽 분야에 도통 지식이 없다. 쿠바 해방의 체 게바라는 알면서도 베트남 인민들의 위대한 저항, 아시아인 최초의 반제투쟁 기수 필리핀의 호세 리잘, 라틴 아메리카 5개국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는 몰랐다. 오로지 무지의 소산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단행본으로 엮는 용기를 낸 것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1퍼센트가 99퍼센트의 자산을 독점하는 한국사회의 구조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신념에서다. 다행히 이 땅에서도 분노의 목소리, 저항의 대열이 움직이고 각성한 진보와 저항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맥을, 경험을 아는 지혜가 중요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덧붙이자면, 에릭 홉스봄이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갈파한 경구 때문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출판 시장이 지극히 어려운 때 책을 내주신 &lsquo;철수와영희&rsquo;의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연재가 쉽지 않았던 시기에 글을 실어주신 &lt;기독교사상&gt;의 한종호 주간님께 사의를 표한다.</p> <p style="text-align: right">&nbsp;2012년 새봄, 김삼웅</p> <hr /> <p>&nbsp;</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br /> 태초에 저항이 있었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대 <br /> 동양 사회의<br /> 진보와<br /> 저항사상</span></strong></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lsquo;상고주의&rsquo; 속에서도 진보사관 싹터</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일반적으로 동양에는 진보의 개념이 없었던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옛날의 문물을 숭상하여 모범으로 삼는 &lsquo;상고주의(尙古主義)&rsquo;가 동양사의 중심 개념어가 될 만큼 동양사에서 인간의 꿈은 현세나 미래보다 과거 지향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양(중국)의 유교는 과거에서 이상향을 찾았다. 백성이 &lsquo;격양가&rsquo;를 불렀다는 전설의 요&middot;순 시대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뿐만 아니라 주(周)의 문왕과 무왕, 한나라의 고조와 당의 태종과 현종이 다스리던 시대, 심지어 이민족인 청(淸)의 강희&middot;건륭 시대 역시 성군들이 정치를 펼쳤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고주의 유교사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혁신이나 진보의 개념이 설 땅을 찾기 어려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신 자연스럽게 천명사상(天命思想)이 나타나 자리 잡게 되었다. 백성을 다스리는 제왕은 하늘의 명령을 받는 사람으로, 곧 &lsquo;천자(天子)&rsquo; 라는 인식이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는 선정을 베풀어야 하며, 왕조나 시대에 따라 유기체같이 생성&middot;발전&middot;쇠퇴&middot;멸망한다는 순환론이 있을 뿐, 인위적인 변혁은 용납되지 않았다. 일치일란(一治一亂) 즉, 태평성대와 난세가 순환적으로 교체된다는 인식이었다. 카를 비트포겔의 &lsquo;동양적 전제&rsquo;란 바로 이런 체제를 두고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자와 같은 대학자&middot;사상가들이 나와서 요&middot;순&middot;우&middot;탕을 찬양하고 임금을 사모하면서 동양에서는 상고주의 유교사관이 수천 년 동안 지배 질서로 정착되고 유지되었다. 고대 동양 사회는 왕조의 흥망성쇠는 있었지만 역사의 진보에 대한 의지는 매우 희박했다. 그렇다고 진보와 저항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압제와 불평등이 있는 곳에는 늘 저항이 나타나고 진보사상은 이를 토양으로 삼아 자라기 마련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에서는 서주(西周) 말기에 금(金)&middot;목(木)&middot;수(水)&middot;화(火)&middot;토(土)의 5원소가 우주 간의 모든 생성 변화의 근본이 된다는 오행사상(五行思想)이 생겼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진보의 실천을 희구하는 오행사상의 최초 주창자는 추연(鄒衍)이었다. 이 사상은 제나라 산동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중국 사상의 큰 줄기가 되었다. 동중서(董仲舒)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도 유행했다. &lsquo;하늘과 인간은 하나&rsquo;라는 세계관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것들을 보면 천명사상&middot;오행사상&middot;민본사상 등과 함께 유가의 전통 사상 속에서도 진보사상은 싹트고 면면히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동양의 유교는 서양의 가톨릭에 비해 전제적 권력이 약했던 까닭에 역설적으로 동양에서 진보사상이 싹트기가 그만큼 더뎠던 것 같다. 그러나 억압에 저항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에 속한다. 고등동물인 인간도 저항과 비판이라는 본성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주자학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는 비시지심(非是之心) 즉,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을 사단(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 중의 하나로 치지 않았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양에서 진보&middot;저항사상의 선각자를 꼽으라면 단연 기원전 4세기 인물인 맹자(孟子)라고 할 수 있다. 맹자는 태평세와 난세가 순환적으로 교체되는 치난론(治亂論), 즉, 일치일란의 역사 법칙을 제시하면서 난세의 절대왕권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졌다. 그는 인간의 정치와 역사는 고정불변이 아니라 순환적인 변혁의 과정을 밟아 진보하는 것으로 보았다. 『맹자』에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느 날 제나라 선혜왕은 하왕조(夏王朝)의 걸왕을 쫓아내고 은왕조(殷王朝)를 세운 탕왕과 은왕조의 주왕(紂王)을 축출하고 주왕조(周王朝)를 창건한 무왕(武王)의 사례를 들며 맹자에게 물었다. <br /> &ldquo;아무리 폭군이라도 신하로서 군주에 반역하는 것이 타당한가?&rdquo; <br /> 맹자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br /> &ldquo;인(仁)을 해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이미 군주가 아닙니다. 일개 야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일개 야인인 걸주(걸왕과 주왕)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지만, 군주를 반역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것은 맹자의 폭군방벌(暴君放伐) 사상의 핵심이다. 인의와 왕도를 저버리고 백성을 학대하는 패도를 행할 때는 천자나 군주라도 서슴지 않고 쫓아내거나 교체해야 한다는 혁명 사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삼아 500년 동안 사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유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공자는 숭배하면서 맹자는 배척했다. 그의 혁명 사상을 배척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 역사는 혁명을 모르는 정체된 사회가 되고 말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 나라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되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에 들게 되면 대부가 되는 것이다.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을 위태롭게 하면 제후를 바꾸고, 천자가 국가를 위태롭게 하면 그를 몰아내고 현군을 세운다. 그리하여 좋은 재물로 시기에 따라 제사를 올렸는데 정해진 한발이나 홍수의 재해가 발생한다면 사직단과 담을 헐어버리고 다시 세워야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맹자의 거침없는 폭군방벌론, 혁명 사상을 들은 제나라의 선혜왕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를 돌려보냈다. 동양에서는 맹자 말고도 진보 인권 사상을 제기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기원전 468~376년경에 살았던 묵자(墨子)는 전통적인 유가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겸애설을 주장한 진보사상가이다. 그는 주(周)나라 대(代)에 확립된 봉건제의 근간인 군왕과 귀족들의 세습 제도를 반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신분과 재산의 상속은 &ldquo;자기 노력에 의하지 않은 부귀&rdquo;(無故富貴)로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재산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고 공동 소유를 주장했다. 이런 묵자의 사상에 대해 기세춘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는 사유 제도가 있는 한 도둑을 없앨 수 없다는 민중적이고 혁명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재산상속과 사유제를 반대했다는 것만으로도 묵자는 위대한 인간해방 사상의 시조라 할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묵자는 자신의 책 『묵자』에서 &ldquo;하늘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귀한 자와 천한 자, 측근인 자와 소원한 자를 차별하지 않지만 어진이는 들어 높이고 어질지 못한 자는 억누르고 내리친다(雖天亦不辨 貧富貴賤 遠邇親疏 賢者擧而 尙之 不肖子 抑而廢之)&rdquo;라며 인간의 평등사상을 과감하게 주창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기 2세기 무렵의 학자 하휴(何休)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서 소박하지만 체계적인 진보사관을 제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군왕이 바뀌고 왕조가 교체되면서 점점 더 좋은 임금이 나온다고 보았다. 즉 복희&middot;신농&middot;황제 등 전설적인 제왕들로부터 시작해서 성군으로 추앙되는 요&middot;순&middot;우를 거쳐, 은의 탕왕, 주의 문왕으로 이어지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거쳐서 곧 이상적인 신왕이 출현될 것이 기대된다고 했다. 이렇게 이상 군주가 장래에 출현할 것으로 공자도 예상했다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그는 &lsquo;장삼세(長三世)&rsquo;의 이론을 내놓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의 역사 발전 사관은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삼세(三世)란 공자가 알고 있었던 세 개의 시대를 말한다. 즉 공자가 자기 눈으로 직접 본 시대, 할아버지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시대, 그리고 전문(轉聞)해서 알게 된 증조부&middot;고조부의 시대, 이렇게 세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전문의 시대는 쇠란(衰亂)의 시대이고, 들어서 알던 시대는 승평(昇平)의 시대이며, 보던 시대는 태평(太平)의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쇠란 &rarr; 승평 &rarr; 태평으로,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세상은 발전&middot;향상되어 간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밖에도 17세기 당나라의 문인&middot;사가 왕부지(王夫之)가 있다. 왕부지는 정통적인 유교 사상의 일대 혁신을 주장하면서 사회와 문화 심지어 인간의 도덕조차도 점차 진화한다는 진보사관을 제시했다. 끝까지 청조(淸朝)에 출사를 거부하고 산림에서 방대한 저술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저술은 대부분 금서로 묶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ldquo;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나&rdquo;</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체로 역사의 흐름에서 치세는 짧고 난세는 길었다. 동서양이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36명의 군주가 신하에게 피살되고 140개의 제후국 가운데 10여 개만 남고 모두 멸망했다. 이 시기는 극도의 혼란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周)나라 왕실이 서안에서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 이후부터 기원전 403년에 이르는 360여 년간을 춘추시대라 한다. 공자가 편찬한 『춘추』를 토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이 시기 주 왕실이 쇠퇴하고 수백 개의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다투다가 전국(戰國) 7웅(七雄)의 하나인 진(秦)이 천하통일을 했다. 진왕은 통일 후 왕호를 황제로 고치고 스스로 시황제라 불렀으며, 짐(朕)&middot;폐하(陛下)&middot;조(詔) 등의 용어를 정했다. 봉건제를 폐하고 36군으로 나누는 등 군현제를 시행했다.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소전(小篆)이라는 통일된 문자를 만들고, 도량형과 화폐를 통일시켰으며 법전을 완성했다. 대외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족을 몰아냈으나 초호화 아방궁 등 대형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에 큰 고통을 주었다. 백성이 정치에 대한 논의를 못 하도록 분서갱유를 감행했다. 영생을 추구하며 불로초를 구하다가 창업 16년 만에 지방 순행 도중 병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시황제는 뒷사람이 &lsquo;천고일제(千古一帝)&rsquo;라 부를 만큼 유사 이래 최고의 권력과 호사를 누렸다. 백성에게는 그만큼 고통과 질곡이 따랐다. 대를 이어 황제가 된 아들 호해는 진시황의 과오를 고치기는커녕 더 극단으로 몰아갔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호해 때의 정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법령과 형벌이 날로 가혹해지자 여러 신하들과 사람들이 스스로 위험을 느꼈고 모반하려는 자가 많아졌다. 계속해서 아방궁을 짓고 치도(馳道)와 동궤(同軌)를 건설하느라 세금은 더욱 늘어났고 부역의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hellip;) 신하를 처벌하는 것이 더욱 엄격해졌고 백성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는 자가 현명한 관리라고 여겨졌다. 길에 나가보면 행인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형벌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시장 바닥에 가보면 사형당한 시체가 하루가 다르게 쌓여갔다. 이러다 보니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오히려 충신 대접을 받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중국 사서에 가끔 나오는 &lsquo;저의반도(楮衣半道)&rsquo;라는 말이 있다. &lsquo;저의&rsquo;는 죄수가 입은 주황색 옷으로 이 말은 즉 길에 다니는 사람의 반이 죄수라는 뜻이다. 폭정의 극한을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시대나 폭정에 저항하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죽어버린 공동묘지와 다르지 않다. 춘추전국시대 말기에 노나라의 대학자&middot;사상가&middot;교육자인 공자는 인(仁)의 정치 곧 덕치를 주장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중시했다. 그러나 진시황과 호해를 거치면서 인의 왕도정치는 실종되고 패도정치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의 고혈을 빨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 처음으로 저항의 횃불을 든 사람은 진승(陳勝 ?~208 BC)과 오광(吳廣 ?~208 BC)이다. 중국 역사에서 크고 작은 내란이 수백 수천 번 발생했고, 중국 전체를 혼란으로 빠뜨린 &lsquo;대동란&rsquo;도 아홉 차례나 일어났다. 대부분 농민들이 중심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농민반란을 시작으로 녹림&middot;적미의 난, 황건적의 난, 수나라 말기의 농민반란, 안녹산의 난, 황소의 난, 백련교도의 난, 이자성의 난, 태평천국의 난이 뒤를 이었다. 모두가 &lsquo;농민에 의한&rsquo; 반란으로서, 개중에는 왕조를 창건하기도 했다. 그 시작이 진승과 오광의 횃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나라의 폭정 가운데 특히 분서갱유(焚書坑儒)는 독특하다. 분서는 진나라 역사 기록, 박사관 소장의 책, 의약&middot;점복&middot;농업서 이외는 민간이 소장하는 책을 전부 소각하고 위반자를 극형에 처한 걸 말한다. 갱유는 학자 460여 명을 함양에서 흙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인 일을 말한다. 이로써 선비&middot;학자의 씨가 마르고 비판과 저항은 멸문지화를 각오하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동한(東漢)의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에는 당시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황제에 이르러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는데, 안으로는 큰 공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수확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징수했다.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상인들을 모두 징발했다. 남자들이 힘써 농사짓고 여자들은 힘써 방직했지만 늘 양식과 의복이 부족했다. 천하의 재물을 모두 긁어모았어도 황제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마침내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하여 도망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기원전 209년, 그러니까 호해가 즉위한 다음 해에 마침내 진승과 오광은 반란을 일으켰다. 진승은 남의 집 머슴 출신이고 오광은 농민이었다. 이들은 노력 동원에 징발된 무리 900명과 함께 지금의 북경 지방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때마침 홍수에 길이 막혀 정해진 날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기일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참수되는 것이 당시 진나라의 법령이었다. 가도 죽고 가지 못해도 죽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승과 오광은 인솔하던 장교를 죽이고 무리들을 향해 &ldquo;어차피 죽을 바에는 큰일을 위해 싸우다가 죽자. 어찌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rdquo; 하며 선동했다. 이것은 마른 들판에 던진 불씨가 되었다. 도처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반란군은 순식간에 불어났다. 진나라에 멸망당한 6국의 옛 귀족들, 진시황의 폭정에 숨죽이고 있던 식자들, 원한이 쌓인 백성, 정치 변혁기에 한몫 잡으려는 기회주의자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진승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인민정부라 할 장초국(張楚國)을 세우고 장초왕이 되었으며 오광은 가왕(假王)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한(西漢) 시대의 학자 가의(賈誼)는 진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옹기를 새끼로 꿰어 창문으로 삼을 만큼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천하고 일정한 거처도 없었으며, 재능은 중간치도 못 되어 현명하지도 부유하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병졸들 속에 섞여 있다가 수백의 무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는데, 나무를 꺾어 병기를 만들고 장대를 세워 깃발을 걸자 천하가 구름같이 호응했고, 산동 호걸들이 모두 일어나 진을 멸망시켰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미천하고 재능도 없는 사람이 왕후장상하유종(王侯將相何有種), 즉 &lsquo;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나?&rsquo;라는 만민평등&middot;진보사상의 기치를 들고 저항에 나선 것은 세계사적인 피압박 민중 해방운동의 횃불이었다. 두 사람은 얼마 뒤에 부하들에게 암살되어 품은 뜻을 펴지는 못했지만, 인류사에서 어느 사상가&middot;철학자에 못지않은 인간 진보의 큰 획을 그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승이 세운 장초국은 불과 6개월 후에 사라졌지만, 그의 과업은 같은 농민 출신인 유방(劉邦)이 계승하여 성공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얼마 뒤 유방은 한(漢) 제국을 세우고 한고조가 되었는데, 진승을 위해 묘지기를 둘 만큼 그를 높이 평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을 열전이 아닌 세가(世家)에 배열하면서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찬술한 이유를 &ldquo;진의 멸망이라는 대사건은 진승의 거병이 발단이 되었&rdquo;기 때문이라고 썼다. 진승을 그만큼 높이 평가한 것이다(진섭은 진승의 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김삼웅<br /> </strong>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 &lt;민주전선&gt; 등 진보매체에서 주간을 역임했으며, &lt;대한매일신보&gt;(현 서울신문) 주필로 활동했다. 제7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으며,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 제주4&middot;3사건희생자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자문위원, 『친일인명사전』 편찬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로 있다.<br /> 저서로는『친일정치 100년사』,『곡필로 본 해방 50년』,『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단재 신채호 평전』,『백범 김구 평전』,『심산 김창숙 평전』,『녹두 전봉준 평전』,『안중근 평전』,『약산 김원봉 평전』,『장준하 평전』,『죽산 조봉암 평전』,『만해 한용운 평전』, 『김대중 평전』,『리영희 평전』,『김상덕 평전』,『이회영 평전』,『송건호 평전』등이 있다.<br /> 출판 잡지 &lt;라이브러리&amp;리브로&gt;에 권두서평 &lsquo;역사의 물굽이를 바꾼 한편의 글, 책&rsquo;과 &lt;책과 인생&gt;에 &lsquo;책수레 만리길&rsquo;을 연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09 오전 10:54:00김수박의 ‘사람 냄새’<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EC%82%AC%EB%9E%8C%EB%83%84%EC%83%88_%ED%91%9C%EC%A7%80.jpg" />&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싸움은 생명의 문제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돈</b></p> <p style="text-align: justify">돈이나 경제라는 단어는 나에게 먼 이야기 같았다. 멋 부리듯, 돈이란 그저 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따라오는 것쯤으로 여겨 왔다. 돈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주식이나 대출 같은 것도 잘 몰라서 내가 하고 있는 금융활동이란 돈이 생겼을 때 이 돈을 보관하는 통장 두 개가 전부다. 그나마 나보다 돈 사정에 조금 더 밝은 아내가 이자를 더 주는 곳에 돈을 옮기자고 해서 그렇게 한 적은 있다. 그때도&ldquo;거기에서 우리한테 이자를 더 주고, 그 대신 받아 가는 게 뭐냐?&rdquo;고 했다가 가정경제에 무심한 남편으로 찍혀서 빈축만 샀다. (처제와 장인어른에게는 소문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삼성을 생각한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있고부터 삼성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삼성의 영향력이 그렇게 큰지 잘 몰랐다. 다만 저 기업은 무슨 이유로 텔레비전에 나와서 국민들에게 으름장을 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삼성이란 기업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은 적이 없는데&hellip;&hellip;. 게다가 나 같은 사람들은 삼성 제품이 마음에 들면 돈을 주고 사는 소비자인데, 장사꾼이 손님한테&lsquo;우리 가게 망하면 당신들한테도 좋지 않아.&rsquo;하고 말하는 거 아닌가? 흔히들 손님은 왕이라고 하는데, 손님한테 협박하는 장사꾼도 있나?</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도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는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삼성이 아무리 엄청난 재벌 기업이라 해도 장사하는 주체일 뿐이지 누구를 지배할 수 있는 주체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모르는 소리 그만 하라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삼성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 황상기 씨 이야기</b></p> <p style="text-align: justify">삼성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말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이 운전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딸이 죽는 걸 봐야 했던 아버지, 황상기 씨 이야기가 들려왔다. 황상기 씨의 딸 유미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 아버지의 목소리는 삼성의 목소리보다 너무 작아서일까,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삼성은 황유미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얻은&lsquo;직업병&rsquo;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적인 질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7년부터 시작된 황상기 씨와 삼성의 싸움은 삼성의 경제 지배력에 묻혀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못하고 있다. 혹은, 알고는 있지만 삼성이 가진 영향력 때문에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돈이 문제다. 그러나 황상기 씨의 싸움은&lsquo;돈&rsquo;문제 때문이 아님을 알리고자 한다. 이 싸움은 현장 노동자들이 위협받고 있는&lsquo;생명&rsquo;의 문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황유미는 2003년에 삼성반도체에 입사해, 2005년에 백혈병을 진단받았고, 병과 싸우다 2007년 사망했다. 그리고 삼성반도체에서 이렇게 죽은 사람은 황유미 한 사람만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한편으로 삼성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추적했다. 회사에서 일하다 얻은 질병으로 직원들이 죽어 가는 동안 삼성은 무엇을 외면하고,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삼성은 우리 나라에서 중요한 기업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만든 제품을&lsquo;사람&rsquo;에게 팔고 있다면, &lsquo;사람&rsquo;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는 성장할 수 없다. 삼성이 올바른 경쟁력을 가져서, 기꺼이 좋아할 수 있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여기, 눈 앞에서 딸의 죽음을 지켜 보고, 삼성과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란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4월<br /> 김수박</p> <hr /> <p>&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4.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5.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8.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9.jpg" /><br /> &nbsp;<img alt="" width="600" height="90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1.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1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2.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1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3.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4.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5.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6.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7.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1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8.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19.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2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21.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22.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23.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9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24.JPG" /><br /> <br /> <br /> (작가의 말, 본문 일부)<br /> <br /> <br /> &nbsp;</p> <table border="1" cellspacing="1" cellpadding="2" width="600"> <tbody> <tr> <td>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font-size: medium"><strong>이제 이들의 죽음을 알아야 할 때</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300" height="2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7_%EC%82%AC%EB%9E%8C%EB%83%84%EC%83%88/%EC%82%BC%EC%84%B1%20%EB%91%90%EA%B6%8C%20%ED%91%9C%EC%A7%80.jpg" />보리출판사가 삼성 직업병의 실체를 파헤친 르포만화집 『삼성에 없는 단 한 가지-사람 냄새』와 『먼지 없는 방-삼성반도체 공장의 비밀』을 나란히 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 냄새』는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택시 기사 황상기 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딸 유미 씨가 자신이 몰던 택시 뒷좌석에서 눈감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유미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2년 동안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지 없는 방』에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1년 동안 일했던 정애정 씨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는 삼성맨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했고 일터에서 남편 황민웅 씨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삼성으로 인해 결국 남편을 잃었다. 민웅 씨는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둘째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채 보지 못하고 백혈병으로 사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 작업에는 『내가 살던 용산』과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도 참여한 바 있는 김수박, 김성희 작가가 참여했다. 김성희 작가는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에 속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상세히 그려냈으며, 김수박 작가는 삼성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사회의 모순까지 담아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까지 &lsquo;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rsquo;에 제보된 반도체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는 155명에 달하며, 이 중 62명이 사망했다. 이중 삼성전자, 삼성전기, 삼성SDI 등 삼성 직업병 피해제보는 137명으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삼성 직업병 피해 제보자 중에서는 54명이 사망한 상태다. 불과 하루 전인 7일에도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 진단을 받고 투병해 온 이윤정 씨가 유명을 달리 했다. (<a href="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amp;id=55459" target=blank><span style="color: #800000">관련기사 보기</span></a>)</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지난 4월 10일에는 근로복지공단이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재생불량성빈혈을 앓게 된 김지숙 씨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이는 삼성반도체와 관련한 첫 산재 인정이다.</p> </td> </tr> </tbody> </table>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strong>작가&nbsp;소개<br /> 김수박</strong><br /> 만화가 김수박은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나 건축공학을 전공했다. 대학 신문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린 책으로 《사람의 곳으로부터》《아날로그맨》《오늘까지만 사랑해》《만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모두 2권)《빨간 풍선》이 있고, 만화집 《내가 살던 용산》《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 참여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08 오후 1:52:00《233》완전한 탈속을 이룬 산수전원시의 대가, 왕유<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3_%EC%99%95%EC%9C%A0%EC%8B%9C%EC%84%A0/%EC%99%95%EC%9C%A0%EC%8B%9C%EC%84%A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23일<br /> <span style="font-size: small">류성준이 선역한</span>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font-size: large">『왕유시선』</span></span>(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2[당대편])</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을 읽다</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백, 두보와 함께 성당의 3대 시인으로 받들어지는 왕유<sup>王維</sup>는, 이백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맹호연보다 12년 늦게 태어난 그는 맹호연과 함께, 동진 시대에 활약했던 도연명의 전원시<sup>田園詩</sup>와 사령운<sup>謝靈運</sup>의 산수시<sup>山水詩</sup>를 종합한 산수전원시<sup>山水田園詩</sup>의 대가로 평가된다. 전원시와 산수시라는 양대 흐름을 집대성한 까닭에 두 사람은 언제나 왕․맹(왕유와 맹호연)이라는 병칭<sup>竝稱</sup>으로 불린다. 하지만 맹호연이 평생 전국을 주유하거나 전원에 은거하면서도 출사의 욕망을 접지 못했던 반면, 왕유는 자연과 불도에 귀일하면서 완전한 탈속을 성취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급 관리를 아버지로 두고, 독실한 불교 신자를 어머니로 둔 왕유는 21세 때, 맹호연이 40세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던 진사시에 장원 급제했다. 하지만 그의 관운은 크게 피지 못했고, 실망한 그는 43세부터 반관반은<sup>半官半隱</sup>하는 생활에 들어갔다. 그런 왕유에게 사회와 격리된 완벽한 은둔생활을 결심하게 만든 것은 안록산의 변이다. 안록산의 군대가 장안에 쳐들어 왔을 때 미처 도망을 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던 왕유는, 난리가 평정되자 역적으로 몰려 옥에 갇히게 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왕유는 더는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장안 외곽의 종남산<sup>終南山(=망천輞川)</sup>에 집을 짓고 불도와 시작에 몰두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9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3_%EC%99%95%EC%9C%A0%EC%8B%9C%EC%84%A0/%EC%99%95%EC%9C%A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중년이 되면서 불도를 좋아하게 되었더니<br /> 만년에는 종남산 기슭에 살게 되었다.<br /> 흥이 나면 매번 혼자 나서는데<br /> 즐거운 마음 그저 홀로 알뿐이네.<br /> 다니다가 물이 샘솟는 곳에 이르면<br />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때를 보노라.<br /> 우연히 산 속 노인을 만나게 되면<br /> 담소하다가 돌아갈 날 잊는구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종남산 별장<sup>終南別業</sup>」이라는 제목을 가진 위의 시는, 관직에서 물러나 불교에 귀의했던 왕유의 만년을 보여준다. 불교는 도가<sup>道家</sup>와 함께 당 황실을 사로잡은 종교였으나, 많은 사대부들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유가 사상을 익혔다. 때문에 이백은 시선<sup>詩仙</sup>으로 불리지만 도가에 못지않게 유교 사상이 복합되어 있고, 시성<sup>詩聖</sup>으로 불리는 두보에게서는 유가 정신이 지배적이다. 반면 왕유는 어머니의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데다가, 30세 무렵에 아내를 잃고 나서 본격적으로 불교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국의 사대부들은 상처를 하고 혼자 사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는 재혼도 하지 않은 채 투도<sup>偸盜</sup>&middot;사음<sup>邪淫</sup>&middot;망어<sup>妄語</sup>&middot;살생<sup>殺生</sup>&middot;음주<sup>飮酒</sup> 등을 삼가는 거사<sup>[居士 : 출가하지 않은 재가신자]</sup>의 삶을 살았다. 늘 채식을 하며 육류는 물론 마늘과 생강 따위도 먹지 않았다는 왕유의 돈독한 불심을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시를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홀로 앉아 늙어감을 슬퍼하니<br /> 텅 빈 방에 이경<sup>二更</sup>이 되려 한다<br /> 비 속에 산 과일 떨어지고<br /> 등불 아래 풀벌레 우네<br /> 흰 머리는 끝내 검은 머리가 되기 어렵고<br /> 쇠는 황금이 될 수 없으니<br /> 늙음과 병을 없애는 법을 알고 싶어<br /> 무생<sup>無生</sup>을 배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99"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3_%EC%99%95%EC%9C%A0%EC%8B%9C%EC%84%A0/%EB%8B%B9%EC%8B%9C%EA%B0%90%EC%83%81%EB%8C%80%EA%B4%80_295.jpg"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에서 찾은 「가을 밤에 홀로 앉다<sup>秋夜獨坐</sup>」의 마지막 줄에 &lsquo;무생&rsquo;이란 단어가 있다. 이 불교 용어는 ①모든 사물과 현상이 공<sup>空</sup>이므로 생기고 사라짐의 변화란 있을 수 없음 ②일체의 미로<sup>迷路</sup>에서 초월한 경지 ③다시는 번뇌에 시달리는 중생계<sup>衆生界</sup>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 만한 법도가 없게 된 자리의 부처를 이르는 말이라고 하니, 왕유가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는지 가늠된다. 하지만 위의 시에서 더 재미난 것은, &ldquo;쇠는 황금이 될 수 없으니<sup>黃金不可成</sup>&rdquo;라고 한 여섯 번째 줄이다. 이 시구를 통해 왕유는, 단약<sup>丹藥</sup>을 만들어 불로장생을 이룰 수 있다는 도가[=선가<sup>仙家</sup>]의 노력을 허망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왕유의 시는 유가를 기본 정신으로 했던 중국의 사대부가 &ldquo;한 평생 마음 상한 일 얼마나 많았던가? / 불교에 귀의하지 아니하고 어디서 녹일 수 있으리!&rdquo;(「백발을 탄식하며<sup>歎白髮</sup>」 중에서)라고 노골적으로 불심을 토로한 희귀한 경우에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교의 영향으로 시와 선(禪=깨달음)을 불가분의 관계로 놓았던 시적 특질과 함께, 왕유를 왕유답게 한 또 다른 특질은 &ldquo;시중유화, 화중유시<sup>詩中有畵, 畵中有詩</sup>&rdquo;다. 송대의 시인 소동파<sup>蘇東坡</sup>가 왕유의 시를 일컬어 했다는 저 말은 &lsquo;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rsquo;는 뜻으로, 붓으로 그린 듯한 풍경 속에 시인의 뜻을 숨겨 두는 시인의 작풍을 잘 짚어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시인이 자연이나 사물에 자신의 뜻을 의탁하는 것은, 중국시의 특질이 아닌가? 『당시감상대관』을 평역한 김원중은 대다수의 당시가 &ldquo;정경융합<sup>情景融合</sup>의 경지&rdquo;를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ldquo;특히 왕유의 산수시는 경<sup>景</sup>을 위주로 순연한 서정시를 썼다는 것이 대서특필할 일로 주목&rdquo;받았다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시중유화, 화중유시 작법&rsquo;으로 쓰인 왕유의 산수전원시가 가진 의의는 아래와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br />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의 산수전원시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주관적인 색채를 배제한 왕유의 산수 묘사에는 무한한 여운을 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산수자연시는 은일한 낭만성과 도가와 불가 의식 및 사회적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탈속의식, 회화적인 시적의 운용이라는 다양한 특성을 표출하면서 중국 당시<sup>唐詩</sup>의 거작으로 대두되었다.(류성준)</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가 자연을 시의 소재로 취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실망으로 한적한 생활을 추구한 나머지 자연에 도피하여 그 속에서 염담과욕<sup>恬談寡慾</sup>으로 자락<sup>自樂</sup>하는 경지를 추구하였고, 거기에서 마음으로나마 위안을 얻고자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 완숙한 정신의 자유로움이다.(김원중)</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왕유의 자<sup>字</sup> 마힐<sup>摩詰</sup>은 『유마경<sup>維摩經</sup>』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유마거사<sup>維摩居士</sup>의 &lsquo;마<sup>摩</sup>&rsquo;로부터 빌려온 것으로, 그의 이름 &lsquo;유<sup>維</sup>&rsquo;와 자인 &lsquo;마힐&rsquo;을 합치면 &lsquo;유마힐<sup>維摩詰</sup>&rsquo;이 된다. 이를 통해 왕유의 돈독한 불심을 잘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불교와 함께 그의 삶과 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도연명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왕유가 19세에 쓴 「무릉도원의 노래<sup>桃源行</sup>」는 설명이 없어도 도연명의 「도화원기<sup>桃花源記</sup>」에 의거해서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도연명에 대한 왕유의 흠모는 종남산(=한산<sup>寒山</sup>)에 은거하면서도 식지 않았다. 「망천에서 배적에게 주며<sup>輞川閒居贈裵秀才迪</sup>」를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br />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쌀쌀한 산에 푸른 기운 감돌아드는데<br /> 가을 물은 날마다 졸졸 흐른다.<br /> 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서서<br /> 바람맞으며 저녁 매미 소리 듣는다.<br /> 나루터엔 석양빛이 물들어 가는데<br /> 마을 위로 외로운 연기 한 줄기 피어오른다.<br /> 다시 접여 같은 그대 만나 취하면<br /> 오류<sup>[五柳 : 도연명]</sup>선생 앞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리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산수전원파에 속하거나 산수자연시에 전념한 중국의 시인들은, 도연명이 만든 귀거래와 무릉도원이라는 &lsquo;문학적 토포스&rsquo;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5-07 오후 4:11:00허스트베트의 ‘사각형의 신비’<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599" height="8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6_%EC%82%AC%EA%B0%81%ED%98%95%EC%9D%98%20%EC%8B%A0%EB%B9%84/%EC%82%AC%EA%B0%81%ED%98%95%EC%9D%98%20%EC%8B%A0%EB%B9%84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림은 작품 전체가 동시에 존재한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작품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소설이나 교향곡, 영화는 단어나 음, 장면의 연속으로서만 의미를 갖지만, 그림은 시간이 흐른다고 더해지거나 잃는 것이 없다. 그림에는 시작도, 중간도, 끝도 없다. 나는 그림이 변함없는 정적 속에서 다른 어떤 예술 장르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간 바깥에 존재하는 것 같아서 그림을 사랑한다. 아마 더 나이가 들수록 지금 이 순간이 다음 순간에 밀려 과거가 되기 전에 세상을 정지시켜 현재를 붙잡고 싶은 마음도 강해질 것이다. 그림은 영원한 현재의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법에 걸려서 시계가 째깍거리기를 멈춘 듯 내 눈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림의 역사는 대개의 경우 탁자 상판만큼이나 평평한 물건을 둘러싼 이야기다. 재현적인 그림은 실제 세계에서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이나 인물(여기에는 가상의 존재, 괴물, 요정 등도 포함된다)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의 시각적 기호로 옮겨놓는다. 한편 추상 작품은 그림 속의 사물이나 인물을 알아보는 문제를 놓고 유희를 벌이거나, 그림은 평평하다는 진실을 숨기지 않으며 그림 속 사물이나 인물을 알아보는 일을 완전히 포기한다. 그림은 조각과 달리 뒷면이나 뒷모습이 중요하지 않다. 그림을 볼 때는 캔버스 둘레를 걸어 다니지 않으며, 대체로 사각형인 그것 앞에 서서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을 응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테두리는 그림의 경계와 규모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 안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가? 그림 속 인물들이 나만큼 큰가 아니면 축소되었는가? 아주 작은 그림은 거대한 그림과는 전혀 다른 자극을 준다. 또한 그림의 테두리는 일상적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의 시야를 제한한다. 거리를 걸어갈 때 나는 결코 모든 것을 보지 않는다. 나의 시야는 필요에 따라 걸러져서 어떤 이미지들은 무시하고 다른 이미지들은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다양한 감각이 뒤섞여 있어서 시각적인 부분만 골라내기가 쉽지 않은 한 덩어리의 자극들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회색 티셔츠와 파란 바지를 입은 남자가 내 앞에서 길을 건널 때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쓰레기 냄새와 빵 굽는 냄새가 뒤섞여서 나는 식이다. 반면에 그림은 절대적인 경계선으로 둘레가 정해진 어떤 공간에 내 눈이 집중해서 정지된 채 고요하고 냄새 없는 그 이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몹시 제한적인 관조적 응시의 한 형태이며,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무수히 많은 광경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여러모로 훨씬 더 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그림의 구성요소가 변하거나 시간에 따라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그림을 경험할 때는 그런 동시성이 작용한 적이 없다. 내가 어떤 그림과 특별하게 만나는 일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났고, 나는 좀처럼 하나의 이미지가 갖는 다양한 측면을 모두 단번에 완전히 흡수할 수 없었다. 가끔은 미술관에서 내가 &lsquo;짤막한 농담&rsquo; 같은 작품이라고 부르는 캔버스 무리를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두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상황이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순간에만 의존하는 작품들, 농담에 모든 힘을 쏟아버려서 곧바로 내 관심 밖으로 벗어나는 작품들이다. 농담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그 말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와 달리,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과 판화들은 내가 바라보았던 긴 시간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이미지는 그 모든 측면을 검토하려면 오랜 시간 바라보아야 하고, 그 이미지가 마음에 정착할 수 있도록 휴식 시간까지 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탁월한 미술작품들은 계속해서 분명한 정의를 피해 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뭔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일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받아들이려면 그것이 무엇이든 따로 고립시키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만일 내가 구상회화를 보고 있다면, 나는 캔버스 중앙에 서 있는 여자를 먼저 알아본 후에 왼편 구석에 떨어져 서 있는 남자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자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나 그녀가 입은 드레스 단의 얇은 레이스를 알아보는 것은 그 남자를 본 이후가 될 것이다. 만일 여러 가지 색과 형체로 이루어진 추상회화를 본다면, 황토색보다 빨간색을 먼저 볼 것이고, 크고 육중한 형체를 그 근처의 자잘한 물감 자국들보다 먼저 볼 것이다. 우리는 이런 구별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렇게 구별하는 능력은 경험의 생리학에 뿌리를 둔다. 앞을 못 보던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회복한들,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갖고 있던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똑같이 볼 수는 없다. 그들의 시각은 조직화되지 않아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흐릿한 형체를 이해하는 데 몇 년이 걸리거나, 심지어 끝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샌디에이고의 캘리포니아대학 언어연구소 소장 엘리자베스 베이츠는 &lsquo;언어 경험이 성숙한 뇌의 형태와 구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rsquo;는 결론을 내렸다. 유아의 뇌가 성인의 뇌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을 보지 못하다가 시력을 회복한 사람들은 가장 초보적인 시각의 세계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내적인 시각 표상과 연상들을 획득하지 못했다. 이런 획득 과정에는 언어를 습득하고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언어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포함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그리고 언어와 함께 도달하는 인간 경험의 상징성을 통해 &lsquo;저쪽에 있는 것&rsquo;을 지각한다. 여기서 인간 경험의 상징성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기대하거나 알아보거나 기억하게 하는, 오랜 기간 형성된 문화적 위계와 회화의 코드를 가리킨다. 맹시<sup>盲視</sup>(blindsight. 사물을 보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현상. 시야의 자극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광원이나 자극의 존재 자체는 정확하게 느낀다―옮긴이)라는 이상한 장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모두 시신경에서 흥분을 받아들이는 후두엽의 시각피질에 손상을 입었다. 이런 환자들은 뇌의 손상되지 않은 부분에서 여전히 시각 정보를 처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보고 있다는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마크 솜즈와 올리버 턴불이 공저 《뇌와 내적 세계》에 썼듯이, 맹시를 겪는 사람들의 뇌는 &lsquo;시각적으로 계산할 줄은 알지만 시각적 자각은 갖지 못한다&rsquo;. 이런 자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앞에 놓인 시각적 정보를 &lsquo;추측&rsquo;해보라고 요구받으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보이면서도 사실상 앞을 보지 못한다. 우리 모두 시신경이 망막으로 들어가는 지점에 맹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뭔가를 볼 때 그런 공백을 경험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것들로 그 틈을 메우기 때문이다. 경험에서 생겨난 기대가 틈을 메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설명이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 같은 내용은 뇌의 시각 능력이 기계적이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작은 카메라를 머릿속에 갖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기억은 과거에 보았던 것과 동일한 복사본을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는 컴퓨터 파일이 아니다. 오히려 지각은 역동적이고 고정되지 않는 기억, 우리가 본 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기억에 의존하는 극도로 복잡한 신경세포의 작용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술작품을 보자마자 잊어버린다면 맹인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편하리라. 우리가 관심을 갖는 미술은 기억 속에 오래 살아남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나 평범한 시각 능력으로는 아무리 몇 시간씩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해도 나중에 그 그림을 고스란히 떠올리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을 기억할 때 세부 사항을 놓치거나 배경을 흐릿하게 기억하거나 색을 바꿔놓는다. 나는 조르조네의 &lt;폭풍우&gt;를 감상하면서 인물 한 명을 완전히 빠뜨렸다. 등장인물이 세 명밖에 없는 그림인데 말이다. 그 그림을 다룬 에세이에서 설명했듯이, 남자 등장인물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행방불명되었다. 때때로 지각의 오류가 그림의 내적 논리를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본다는 것은 항상 해석을 동반한다. 그리고 기억의 왜곡은 단순한 실수 그 이상의 것을 드러낸다. 그때까지 어떤 작품에서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갔거나 무심결에 &lsquo;보고&rsquo; 지나친 측면을 보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의 모든 특성이 그렇지만, 시각 능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러시아의 유명한 신경학자 알렉산더 루리아의 환자 중에는 자기가 본 것을 모조리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있었다. 마치 카메라처럼, 그의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이미지들을 찍어내는 것 같았다. 동물학자이자 자신의 자폐증에 대해 글을 쓴 템플 그랜딘도 사진기 같은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는 일에 비유했다. 그녀의 특출한 시각 능력은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고 모든 기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는데, 그러면서도 이 내면의 그림들에 어떠한 감정적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각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더 평범한 사례도 있다. 내 딸 소피가 다섯 살이었을 때 딸애가 다니던 유치원의 교사는, 20년간 교사 생활을 했지만 사람을 그릴 때 뒷모습을 그리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딸이 사물을 색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시각적인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물론 그 기억이 편집과 착오를 거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떤 그림을 볼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lsquo;전면적&rsquo;으로 파악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술작품을 다룬 책을 읽다가 내가 그 작품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한 부분, 심지어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나는 지독한 근시여서 안경을 끼지 않으면 세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시각적 애매함을 견디지 못하는 편이다. 남편에게는 쾌적하게 느껴지는 어둑하고 깜깜한 방이 나에게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나는 편두통과 거기에 동반되는 전조증상에 시달려왔다. 편두통이 오려고 하면 눈앞에서 빛이 깜빡이고, 검은 형체들이 떠다니며, 아주 작은 구멍들이 반짝거린다. 뿐만 아니라 단 한 차례이지만 &lsquo;왜소 환각<sup>Lilliputian hallucination</sup>&rsquo;이라 불리는 증상도 경험했다. 내 침실 바닥 위에 분홍색의 아주 작은 인간이 두 명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아마도 그런 경험들 때문에, 나는 그런 시각적 장애를 전혀 겪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미심쩍게 여기게 된 것 같다. 의심하는 마음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랫동안, 열심히, 그림의 모든 부분을 살펴보면서 나는 미술사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과거에 한 번도 논의하지 않은 부분들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메르의 &lt;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gt;의 창틀에서 계란 모양의 세부 장식을 발견했다. 나는 이 부분이 전체 퍼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전체가 수태고지를 나타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 고야의 &lsquo;로스 카프리초스&rsquo;에서는 숨겨진 자화상을 여러 점 발견했고, &lt;5월 3일의 처형&gt;에서도 자화상을 발견했다. 이런 발견 덕분에 나는 직업적으로 미술작품을 분석하는 사람들에게도 맹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주 오래된 그림, 아주 유명한 그림에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견의 순간은 온다. 르네상스 화가들이 거울을 흔히 이용했다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론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호크니의 주장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의 통찰이 현직 미술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개별 캔버스들을 꼼꼼하게 연구한 결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그의 아이디어를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호크니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런 가능성을 점친 적조차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각예술은 오직 보이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바라보는 &lsquo;나&rsquo;와 대상인 &lsquo;그것&rsquo;의 소리 없는 만남이다. 하지만 &lsquo;그것&rsquo;은 다른 인간의 의식이 남긴 물질적 자취이기도 하다. 화가 자신은 작품 속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는 우리에게 작품을 남겨주었다. 그것은 어떠한 실용적인 목적도 갖지 않는, 순수한 의지의 행위다. 그림에는 어떤 &lsquo;나&rsquo; 혹은 어떤 &lsquo;너&rsquo;의 흔적이 담겨 있다. 미술에서 바라보는 자와 사물의 만남은 상호주관성을 전제로 한다. 아마도 그림이 실제로 말을 건다면 나는 질겁하고 도망치겠지만, 인간 존재가 그림의 일부라는 사실은 의식한다. &lsquo;그림이 정말로 내게 말을 걸었다&rsquo;는 화랑가의 상투적인 표현처럼,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술을 그렇게 느낀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술작품을 바라보는 데 상호주관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말은 그것이 개인적인 행위이지 몰개성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그림이 유령이라고, 살아 있는 몸의 망령이라고 곧잘 생각해왔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생각의 엄격한 적용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붓놀림과 물감의 흩뿌림, 얼룩 등 한 인간의 육체적 행위가 남긴 흔적들을 느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림은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고요한 기억이며, 그에 대한 우리 개개인의 반응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즉 우리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에 달렸다. 이 말은 누구도 그림을 보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지 않는다는 뜻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조안 미첼의 그림을 접한 경험은 추상표현주의의 낭만적인 성격에 대한 혐오감이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주황색에 대한 오랜 끌림,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 심지어 계속되는 복통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나는 미술에 대해 글을 쓸 때 결코 내가 쓰는 문장에서 나 자신이 사라진 것처럼, 다시 말해서 나의 기억이나 감정, 나의 특수성이 어떤 그림에 대한 나의 반응을 형성하지 않은 것처럼 굴지 않는다. 글로 쓴 작품에서는 항상 누군가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lsquo;나&rsquo;를 제거하는 것은 잘못된 일처럼 느껴진다. 마치 말하는 사람이 객관적인 어조, 편견 없는 어조를 대변할 의도로 아무도 아닌 자의 가면 뒤로 숨는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미술비평가들이 특정 미술가들에 대한 비난이나 숭배를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일도 많다. 하지만 그럴 때는 전문지식, 그들의 더 훌륭한 지식을 앞세워서 그렇게 한다. 미술사학자들은 심지어 미술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혐오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실제로 이는 미술을 다루는 관련 학계에서 너무 많이 무시되어온 주제여서, 데이비드 프리드버그는 아예 책 한 권을 몽땅 할애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저서 《이미지의 힘》 서문에서 &lsquo;나는 미술사가 모든 계급의 사람들, 모든 문화권의 사람들이 이미지에 반응해온 방식을 보여주는 엄청나게 많은 증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데 무엇보다 관심이 갔다.&rsquo;고 밝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동안 파노프스키, 아도르노, 곰브리치 같은 위대한 미술이론가들이 많이 등장했다. 앞으로도 더 낫든 못하든 대학 안팎에서 이론 중심의 미술 작가들이 계속 배출될 것이다. 또한 어떤 그림의 내력을 밝히느라 수고하는 학자들, 그림이 진품인지 확인하려고 안료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검사하거나 밑칠을 알아보려고 엑스선으로 촬영하여 검토하는 학자들, 화가의 전기와 역사적 시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런 연구 작업의 가치는 결코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런 작업만으로는 사람들이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들도 몇 명 있다. 마이어 샤피로, 프레드 리히트, 로버트 휴즈, 데이브 히키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지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훌륭하게 글로 옮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흥미를 끄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왜 어떤 미술작품은, 심지어 아주 오래된 작품인데도 계속해서 미술이론이나 작품의 유래, 그 문화적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그다지 없는 관람자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미술관에서 나는 사람들이 어떤 그림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들 모두가 직업적인 미술비평가는 아닐 것이다. 디드로, 반 고흐, 프루스트, 보들레르 같은 다양한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베르메르, 샤르댕, 고야 같은 화가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그림은 많은 관람자들에게서 유사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예술작품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기억이 다른 종류의 기억보다 더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소설의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아도 그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떤 그림을 바라본 후 남는 것은, 내 마음속에 똑같이 새겨진 그림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킨 느낌이다. 몸으로 경험하는 감정들은 우리가 거기에 붙이는 이름보다 다듬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 느낌에 분명한 이름을 붙이지 못해 고심하곤 한다. 하지만 이미지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들은 필연적으로 의미로 이끄는 길이다. 어떤 그림이 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그 수수께끼를 추적하는 것만이 이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가장 성과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헨리 제임스는 &lsquo;예술에서는 느낌이 의미다&rsquo;라고 하지 않았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미술관의 세계는 전문지식에 대한 숭배와 위대함의 신화를 생산해왔고, 이런 것들이 미술작품을 바라보고 거기에 반응하는 평범한 즐거움을 무지에 대한 경고로 눌러버렸다. 때로 난해하고 대체로 따분한 &lsquo;해설&rsquo;이 여러 쪽씩 실려 있는 전시 카탈로그, 방문객들을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옮겨가게 하는 유료 오디오 가이드, 전시실마다 각 그림 밑에 붙어 있는 긴 설명들, 이런 모든 것들이 관람객에게 혼자 힘으로 나아가려면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고,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그리고 아마도 최악의 경우가 될 텐데, 이끌어주는 존재 없이는 구경꾼들이 벽에 걸린 미술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되뇌인다. 카탈로그와 가이드, 온갖 종류의 정보들은 미술의 세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일단 작품을 보고 나서 참고할 때만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천재나 걸작, 가장 위대한 작품, 가장 좋은 작품 등등의 선입견이 대개는 우리 앞에 있는 사물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는다고 믿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악의 경우, 가련하게도 자기 명성에 포위되어 익사하는 작품도 있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 반 고흐의 &lt;해바라기&gt;, 뭉크의 &lt;절규&gt;, 그리고 더 최근에는 베르메르의 &lt;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gt; 같은 작품이 그 이름만으로도 일반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역할을 할 정도의 명성을 얻어서 엽서부터 샤워커튼에 이르는 갖가지 물건으로 재생산되었다. 그런 작품들은 점점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안개를 피우는 통념에 가려서 우리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책이 미지의 것을 향한 정신적 방랑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 그림 한 점이 데려다놓은 알 수 없는 곳을 두루 거니는 한가로운 산책이었고, 또 때로는 어떤 전시장 전체의 풍경 속을 헤치고 다니는 산책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해 글을 쓰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분명히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그림들이다. 나는 이미지를 글로 풀어쓸 마음도, 복잡한 그림을 이전에 형성된 이론적 틀 안에 밀어넣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를 매혹하는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해서 오직 바라보기만 하는 여행이다. 이를 위해 특별히 신비로운 직관력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미술작품을 지각하는 일은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시각적 모험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바로 그런 환상적이고 기묘하고 움직임이 없는 세계를 다녀온 나 자신의 여행기다. 그림 앞에 멈춰 서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려고 한동안 기다리는 고독한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글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br /> 어리둥절한 기쁨</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6_%EC%82%AC%EA%B0%81%ED%98%95%EC%9D%98%20%EC%8B%A0%EB%B9%84/%EC%A1%B0%EB%A5%B4%EC%A1%B0%EB%84%A4_%ED%8F%AD%ED%92%8D%EC%9A%B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조르조네의 &lt;폭풍우&gt;와 나의 인연은 올해로 26년째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이 열아홉 살 때이다. 원화는 아니었고, 미술사 수업 시간에 슬라이드 필름을 벽에 비춰 재생한 이미지였다. 그때까지 나는 조르조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그림은 내게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정말로 온몸이 다 떨릴 정도로 놀랐다. 그때 그곳에서, 교수가 다음 슬라이드 필름으로 넘기는 버튼을 누르기 전 40초 사이에, 나는 그 그림과 사랑에 빠져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왜?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특정 그림 앞에서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보고 싶어 하던 그림 한 점을 직접 보려고 엄청나게 먼 거리를 여행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물감으로 뒤덮인 납작한 사각형 캔버스 앞에 서서 자신에게 &lsquo;소중한 경험&rsquo;이 될 순간을 맞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lt;폭풍우&gt; 앞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한 순간을 이해하려면, 어쩌면 시각과 뇌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한 나 자신의 심리도 더 잘 이해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그때 교수가 그 그림에 대해 한 말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림 자체는 기억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그 이미지는 거의 충격적일 정도로 선명하게 내 기억 속에 각인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강박적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고, 수채화와 유화에도 손을 댔다. 책 여기저기서 발견한 그림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했다. 하지만 내 관심은 마구잡이였다. 나는 르누아르, 반 고흐, 마티스, 피카소 등 대중의 인기를 얻은 작가의 작품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그림을 보는 게 좋았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대학 강의실에서 &lt;폭풍우&gt;의 복제 이미지를 보기 전까지는 내가 진정으로 &lsquo;초월적인&rsquo; 순간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문화권에서는 미술작품이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조르조네의 이미지 앞에서 겪은 경험과 관련이 없는 현상이다. 2년 전 나는 딸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려고 1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렸다. 하지만 그 박물관에서 &lt;모나리자&gt;를 잠시라도 바라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작품이 두꺼운 유리로 덮여 있는 데다, 관람객들이 시야를 막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그림의 사진을 찍거나 그림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바라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들 잘 알고 있는 대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조콘다 부인의 초상화는 이제 더 이상 제대로 볼 수 없는 그림이 되어버렸다. 내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이유들로 인해 그 그림은 위대함을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라 위대함의 기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가르보나 먼로의 이미지처럼 문화적 유행이 되었고, 이제는 최상급의 것을 대변하는 아이콘, 즉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신비롭고 가장 가치 있는 그림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런 문화적 무게는 그림 속 귀부인에게 20세기의 콧수염을 다는 불운을 선사하기도 했다. &lt;폭풍우&gt;도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었다. 이 그림은 수백 년 동안 미술사학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왔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lt;폭풍우&gt;는 그런 운명을 면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시리 허스트베트 Siri Hustvedt</strong><br /> 시인이자 소설가로 문학과 미술 관련 에세이를 집필해온 시리 허스트베트는, 1955년 미국 미네소타 주 노스필드의 노르웨이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에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지내기도 했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노르웨이어 교수로 재직하던 세인트 올래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영문학을 공부했고, 디킨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br /> 1983년에 작은 시집 《Reading to You》를 출간했고, 1992년에 첫 소설 《눈가리개<sup>The Blindfold</sup>》를 발표한 이후 《릴리 달의 황홀<sup>The Enchantment of Lily Dahl</sup>》《내가 사랑한 것<sup>What I Loved</sup>》《미국인의 슬픔<sup>The Sorrows of an American</sup>》《남자 없는 여름<sup>The Summer without Man</sup>》등의 소설을 출간했다. 그녀의 소설들은 현재 2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1981년 시 낭송회에서 작가 폴 오스터를 만나 이듬해에 결혼하여, 현재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신성림</strong><br /> 196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10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지은 책으로 《클림트, 황금빛 유혹》《여자의 몸》 《춤추는 여자는 위험하다》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프리다 칼로 &amp; 디에고 리베라》《화가로 보는 서양미술사》《미술은 똑똑하다》《미완의 작품들》 《카요 부인의 재판》《품위 있는 사회》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07 오전 9:46:00박삼철의 ‘도시 예술 산책’<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5_%EB%8F%84%EC%8B%9C%20%EC%98%88%EC%88%A0%20%EC%82%B0%EC%B1%85/%EB%8F%84%EC%8B%9C%EC%98%88%EC%88%A0%EC%82%B0%EC%B1%85_%ED%91%9C%EC%A7%80.jpg" /><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1</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랑하며 살고 싶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사는 삶터, 우리 함께 사는 세상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다. 이 잿빛 도시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아무리 잘 보려 해도 좋아 보이는 게 별로 없고,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예쁜 구석이 별로 없다. 투덜대며 불평할 거리 천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시가 문제다. 무정하고 무례하고 무리한 도시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더 문제다. 무도한 도시를 방관하고 방조한다. 방관자로 보려 할 뿐이다. 방조자로 봐주려 할 뿐이다. 주체자로 잘살고자 몸부림치지 않는다. 구경꾼에 들러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삶의 어엿한 주체를 삶으로부터 분리하고 관리하는 근대적 장치가 관객&middot;고객이다. 본래 주인이었던 사람을 눈만 살아있는 구경꾼, 돈만 내는 들러리로 낮잡는 장치다. 주는 대로 짐을 싣는 낙타에게는 사막이 보이고, 거칠지만 주인으로 살아가는 늑대에게는 넓은 들판이 있다. 잘 보고 잘 봐주려고 하는 세상을 잘 살려고 몸부림치는 세상으로 바꿔야 제대로 살 수 있다. 보는 세상을 사는 세상으로 바꿔야 들러리 아닌 주인으로 살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번에는 도시 안으로 파고들었다. 냉소적이고 수동적인 시선으로 배돌았던 아웃복싱을 접고 인파이팅으로 작심하고 대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속 5킬로미터로 동네 구석구석을 걸었다. 시속 10킬로미터로 강변을 내달렸다. 시속 19킬로미터 한도의 자전거로 도시 곳곳을 훑었다. 때로는 다비드 르 브르통의 &lt;걷기예찬&gt;을 따라 했고, 때로 김훈의 &lt;자전거 여행&gt;을 폼 잡았다. 밀란 쿤데라의 &lt;느림&gt;을 방패 삼아 에둘러가고 느리게 가는 모든 것을 옹호하면서 도시에서 개개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squo;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rsquo; (고은, &lt;그 꽃&gt;)</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사는 도시&rsquo;는 &lsquo;보는 도시&rsquo;에서 접하지 못한 많은 것으로 잘살게 해주었다. 좋은 것만 가져다주었다는 말이 아니다. &lsquo;사는 도시&rsquo;에서는 내가 도시의 주인이고 도시 삶의 주연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내 요량대로 내가 간수할 수 있어 전혀 다른 도시를 사는 것 같다.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누리고 안 좋은 것은 좋게 고치려 간수하니, 세상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이 삶의 &lsquo;의미&rsquo;요, &lsquo;재미&rsquo;요, &lsquo;선미<sup>善美</sup>&rsquo;다. 걷고 타고 뛰었더니, 도시를 &lsquo;3미&rsquo;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살아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결국은 아름다움이다. 도시를 열심히 탐람하며 찾고자 한 것, 삶으로 열심히 살고자 한 것, 모두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름다운 세상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상상하는 것,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만날 때 저항하고 치유하는 것, 모두 아름다움을 통해 가능하다. 키츠가 &lsquo;아름다움이 진리!&rsquo;라고 선언했고, 니체가 &lsquo;살기 위해 예술과 함께 산다&rsquo;고 했다. 참된 아름다움은 세상을 제대로 살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이 넓은 도시를 건너는 징검다리로 공공예술을 선택했다. &lsquo;생산의 도시&rsquo;를 &lsquo;생활의 도시&rsquo;로, &lsquo;체계 중심의 도시&rsquo;를 &lsquo;사람 중심의 도시&rsquo;로 바꾸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요즘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공공미술과 공공디자인을 끌어들여 &lsquo;살만함<sup>Livability</sup>&rsquo;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삶이 머무는 풍경<sup>Life-Scape</sup>과 거처<sup>Place-Making</sup>, 더불어 사는 공동체<sup>Community-Building</sup>, &lsquo;지금 여기&rsquo;를 향유하는 참여<sup>Participatory Design</sup> 등을 새롭게 창의하는 공공예술의 궤적을 따라가니 개체와 기능의 근대를 넘어 더불어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를 만날 수 있었다. 비로소 도시에 아름다움이 살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2</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공공예술, 도시담론, 마을지도 세 가지로 엮였다. 아름다움의 표상인 작품을 찾아 도시를 유람한다. 공짜로 누리는 안복<sup>眼福</sup>에 운동까지 덤으로 해결하니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왜 작품만 아름답고 도시는 그렇지 못할까? 정작 아름다워야 할 게 삶인데. 그래서 도시를 작품으로 사는 조건을 상상하고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도시담론을 엮는다. 담론은 현장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해서 아름다움의 로컬<sup>Local</sup>, 콘크리트<sup>Concrete </sup>버전으로 동네 예술지도를 짠다. 이렇게 하다 보니 도시 작품 유람하기, 인간적인 도시담론 짜기, 마을 예술지도 그리기 세 가지가 하나로 버무려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작품 유람은 &lsquo;걷는 만큼 보인다!&rsquo;를 모토로 길 위의 작품 50개를 탐람한다. 이 유람길은 몸으로 밀고 나가는 완보<sup>緩步</sup>의 길이자, 도피 안으로 가는 완상<sup>玩賞</sup>의 길이다. 길에서 길<sup>道</sup>을 묻는 강력한 현장성과 상징성 덕분에 이 길은 걷는 길이자 아름다움을 만나는 길, 세상 사는 길을 겸했다. 이 길의 여정은 7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되는 &lsquo;사람이 제일 아름답다&rsquo;, 더불어 사는 도시 서사를 모색하는 &lsquo;이야기하기 위해 살다&rsquo;, 물화된 시대를 반조하는 &lsquo;소유냐, 존재냐&rsquo;, 호돌로지<sup>Hodologie</sup>의 미학을 찾는 &lsquo;길에서 길을 묻다&rsquo;, 더불어 아름답고자 하는 &lsquo;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rsquo;, 사랑을 삶의 뼈대로 제안하는 &lsquo;일상과 이상, 그 사이&rsquo;, 관자<sup>觀者</sup>의 풍경을 행자<sup>行者</sup>의 풍경으로 바꾸는 &lsquo;풍경이 되는 도시&rsquo; 등을 거쳐 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길에 놓이는 작품은 성격에 따라 공간적으로 영구 설치되거나 시간상으로 잠시 전시되다 사라진다. 작품 유람 중에는 사라진 작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있는 작품은 도시의 풍경<sup>City-Scape&middot;People-Scape</sup>으로 즐기고, 없어진 것은 기억의 풍경<sup>Memoir-Scape&middot;Story-Scape</sup>으로 간직하고자 있고 없음보다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작품을 골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두 번째 도시담론은 &lsquo;아는 만큼 보인다!&rsquo;를 기치로 몸과 예술로 밀고 나간 길을 머리와 사유로 뒤따르고 성찰한다. 몸으로 비비고 나아갈 때 너무 가까이 붙어 있거나 현장의 높은 열기에 치여 제대로 조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도시담론은 몸의 걷기를 머리의 걷기, 신체적 사실성<sup>Corporeality</sup>을 사유의 사실성<sup>Reality</sup>으로 보완하는 작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과 도시의 상생적/상극적 관계를 살피는 &lsquo;시골쥐와 도시쥐&rsquo;, 제대로 살기 위해서 도시의 구조와 기능, 내용을 작품의 그것처럼 바꾸자고 하는 &lsquo;제품, 작품을 밀어내고 도시를 점령하다&rsquo;, 더불어 숲이 되자 하는 &lsquo;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rsquo;, 미학의 일상화를 꿈꾸는 &lsquo;미의 일상화, 일상의 미화&rsquo; 등의 가설을 펼칠 것이다. 작품 보는 것 따로, 도시를 사는 것 따로 될 것을 우려해 작품 탐험 7개의 주제에 맞춰 도시담론을 나눠 배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걷는 만큼 보인다&rsquo;의 부록이자 실험판으로 동네예술지도를 덧붙였다. 제아무리 아름답고 제아무리 논리적이더라도 그것이 내가 사는 &lsquo;지금 여기&rsquo;에 있지 않다면, 허깨비일 뿐이다. 미의 부재다. 그래서 생활의 현장단위인 동네에서 예술길을 긋는 실험을 시도한다. 정동길, 광화문거리, 서촌길, 인사동길, 삼청동길, 청계천길, 을지로, 대학로, 잠실 올림픽로와 강남 테헤란로 등 9개의 동네길을 대상으로 삶과 예술의 동행을 실험한다. 명소 중심으로 짰다거나 작품으로만 길을 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이 실험은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들을 주민이 주인이 되어 찾고 이어 동네마다 아름다움의 지도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주된 의도임을 이해하고 동네지도의 허점을 혜량해주시기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3</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책을 내는데 도움을 주신 분께 잠깐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에둘러가고 비뚤게 가는 나의 인생길을 너그러이 지켜봐 준 부산과 분당 가족들, 친구 동료와 선후배, 지인 모든 분께 머리를 숙인다. 죄송해서, 감사해서. 광화문과 삼청동 선후배들, 미술판 인연들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나의 길이 얼마나 더 꼬였을까.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과 관련해서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한겨레신문에 특별히 감사를 표한다. 오 전 시장은 &lsquo;무모하고 무용한&rsquo; 예술가들의 몽상을 포용하고 공공미술 프로젝트인 &lsquo;도시갤러리&rsquo;를 함께 만들어 도시에 예술이 살 수 있는 토양을 가꾸었다. 한겨레신문은 2007년 10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lt;박삼철의 도시디자인 탐험&gt;이란 코너를 연재해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작품을 친근하게 만날 기틀을 만들었다. 도시 작품 탐험에 나온 작품은 대부분 그때의 연재를 재구성했다는 점도 함께 밝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친구 잘못 만난 죄로 혹독한 디자인 사역을 치른 디자이너 김선태, 새 친구로 책과 세상의 동반이 되어준 김삼권 나름북스 기획팀장. 두 분 아니었으면, 책은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우의와 후의로 참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예쁜 마누라 이진이 감사하고, 사랑하는 딸 박지윤 미쁘게 잘 자라주어 매우 고맙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분들께 이 잡설 졸필이 누가 될 것이나, 염치없게도 질책과 가르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대속하고자 한다. 모두 아름다우시라.</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br /> 사람이 제일 아름답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666666"><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돌로 쌓아 올린 희망</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9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5_%EB%8F%84%EC%8B%9C%20%EC%98%88%EC%88%A0%20%EC%82%B0%EC%B1%85/%EA%B7%B8%EB%A6%BC1.JPG" /><br /> <br /> <br /> <strong>서울광장, 김석 &lt;서울, 황금알을 품다&gt;</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변변찮지만 정말 괜찮은 작품이다. &lsquo;작품&rsquo; 하면 진기한 재료와 대단한 작가, 웅대한 크기를 성공의 요건으로 따진다. 이 작품은 그 반대다. &lsquo;변변찮은&rsquo; 돌멩이가 재료이고, 실력이 &lsquo;어쭙잖은&rsquo; 시민의 손으로 만들어졌고, 소시민들의 &lsquo;하찮은&rsquo; 삶 얘기가 주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도, 아니 그래서 성공했다. 예술 저 홀로 취하는 작은 성공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삶을 동반하는 큰 아름다움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함께 만들고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lt;서울, 황금알을 품다&gt;는 세계금융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던 2009년 초봄 서울광장에서 만들어졌다. 시민의 소망을 새긴 돌멩이를 함께 쌓아 난관을 극복하는 실존적인 표상을 만들자는 취지로 태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왜 돌멩이였을까? 돌은 짱돌로서의 무기와 소망 돌로서의 의기<sup>儀器</sup>를 한 몸에 품는다. 쌓으면 사람들의 간절한 희구를 하늘에 전하는 의기이고, 던지면 불의와 부정을 타파하는 투석의 무기다. 서낭당이나 돌탑의 쌓음은 아련하고 먼 기억이다. 사사로운 기억이다. 반면, 갈등과 투쟁의 던짐은 근년의 일이었다. 공적인 역사다. 그래서 돌은 공공영역에서 경계되고 징계된다. 웬만한 곡절이 아니고서는 서울의 배꼽인 서울광장에 돌무더기를 쌓을 수 없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93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5_%EB%8F%84%EC%8B%9C%20%EC%98%88%EC%88%A0%20%EC%82%B0%EC%B1%85/%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사연이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매서운 경제 한파가 우리나라에도 몰아치자 작가는 돌덩어리를 모으자고 제안했다. IMF 구제금융 당시 외환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금덩어리를 모으고 똘똘 뭉쳤던 1997년의 일을 기억하고서다. 그에게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 금보다 돌이었다. 금은 고예독왕<sup>孤詣獨往</sup>하는 욕망이고, 돌은 동고동락하는 희망이다. 금은 홀로 소유하고 돌은 함께 쌓을 때 제 물성이 잘 드러난다. 그래서 예부터 돌은 하늘에 소망을 전하는 통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더불어 사는 숲</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는 삶의 어려움을 돈이나 물건이 부족한 탓으로 돌린다. 돈과 물건이 부족하면 어렵게 살지만, 희망이 없으면 사는 게 아니다. 희망으로 사는 게 삶이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정말 아름답다. 소망 돌을 쌓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희망의 초상<sup>肖像</sup>, 희망으로 사는 초인상<sup>超人像</sup>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한 그루 나무가 되지 말고 더불어 사는 숲이 되자.&rdquo;(신영복) 독야청청하는 한 그루의 나무가 근대의 희망이었다면, 더불어 사는 숲이 앞으로의 희망이다. SNS, 소셜 커머스, 소셜 디자인 등의 열풍을 보라. 더불어 꿈꾸고 같이 잘사는 참여와 연대에 진짜 희망을 걸어야 한다. 삶의 문제에 관한 한 &lsquo;저마다의 발밑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rsquo; 참여와 &lsquo;그러한 나무들이 더불어 우람한 역사의 숲을 만드는&rsquo; 연대가 참희망이다. 해서 &lsquo;얼마나 이루었느냐?&rsquo;에 이어 &lsquo;얼마나 통하였느냐?&rsquo;, &lsquo;얼마나 나누었느냐?&rsquo;가 희망을 재는 새 잣대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학의 흐름도 그렇다. 지금껏 좋은 작품은 &ldquo;손대지 마시오!&rdquo;의 지시를 달고 다녔다. 성배처럼 범접하지 말고 그저 신앙하라는 지시였는데, 그 일방적 계몽주의는 수동적인 타자를 만들었다. 그걸 치유하기 위해 참여와 체험<sup>Hands-on</sup>은 핵심적인 미학의 단위가 되었다. 참여는 함께 꿈꾸고 나누는 아름다운 동반자를 만든다. 정말 아름다워야 할 것은 작품이 아니라 세상이다. 참여는 더불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디자인의 첫 단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품에는 1천800여 명의 시민작가가 참여해 소망의 돌을 그리고 쌓아올렸다. 어린이, 학생, 아주머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등 참여 주체는 초동급부, 갑남을녀, 장삼이사로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하는 공동창작자 그룹을 만들었고, &lsquo;로또 대박&rsquo;, &lsquo;내신 1등급&rsquo;, &lsquo;가화만사성&rsquo;, &lsquo;◯◯◯ 사랑해!&rsquo; 등 참여 주제 역시 세상만큼 넓고 다채로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참여가 있기 전에는 앙상한 골조와 속이 숭숭 뚫린 철망으로 된 사람이 버겁게 세상의 짐을 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참여가 하나하나 늘어나자 작품의 볼륨은 날마다 부풀어 올랐다. 달이 차오르듯. 참여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자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의지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이었다. 마침내는 고난의 짐을 황금알로 바꾸어 들고 삶을 축하하는 사람을 만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참 아름다운 작품이다. 삶과 예술이 동행하고 시민과 예술가가 동시대의 동반으로 연대해 세상 고난의 파도를 아름답고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세상을 꿈꾸었다. 시민은 그런 세상을 구성하는 참여자, 창작자이고 작가는 그런 시민들을 아름다움으로 인도하는 멘토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산사나 산에 가면 소망을 쌓은 돌탑을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접착제나 시멘트도 없는데, 그 소망들은 서로서로 단단히 붙들고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하고 일어섭니다. 비바람이 와도, 시간이 수없이 흘러도 거뜬합니다. 혹 돌무더기가 쓰러지더라도 그만입니다. 누군가가 또다시 소망의 돌을 쌓아올립니다. 더불어 소망하는 돌무더기는 오래 삽니다.&rdquo; _ 김석, &lt;서울, 황금알을 품다&gt;를 만들며</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말,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박삼철 <br /> </strong>스포츠조선 문화부에서 6년간 미술 분야 기자로 일했다. 이후 이주헌, 이섭, 김진하 등 큐레이터들과 함께 차린 미술기획사 &lsquo;아트컨설팅서울&rsquo;에서 미술관 바깥의 미술인 공공미술을 맡아 작업했다.&nbsp; 미술인회의 공공미술위원장, 서울시 도시갤러리 추진단장 등을 역임했고, 희망제작소 간판문화연구소, 행정중심복합도시 기획조정단 등에 객원위원으로 참여했다.&nbsp; 광주비엔날레2000 영상부문 &lt;상처&gt;, 제1회 서울국제도예비엔날레, 광복60주년기념 &lt;시련과 전진&gt;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에로스 바로보기』(이섭 공저, 심지출판사, 1997), 『미술, 공간, 도시』(역서, 학고재, 2000), 『미술전시기획자들의 12가지 이야기』(김홍희 등 공저, 한길아트, 2005), 『왜 공공미술인가_미술, 살만한 세상을 꿈꾸다』(학고재, 2006) 등의 저서가 있다. 현재는 서울디자인재단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비스디자인팀장으로 일하고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03 오후 1:06:00《232》맹호연, 울분과 욕망으로 대자연을 노래하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2_%EB%A7%B9%ED%98%B8%EC%97%B0%EC%8B%9C%EC%84%A0/%EB%A7%B9%ED%98%B8%EC%97%B0%EC%8B%9C%EC%84%A0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22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남종이 선역한 <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font-size: large">『맹호연시선』</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er">(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1[당대편])</span>을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맹호연</strong><sup>孟浩然</sup>(689~740)은 당대<sup>唐代</sup>는 물론이고 중국 고전문학 전체를 대표하는 성당 시절을 대표하는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263수의 시를 남긴 그는 이백&middot;두보 다음의 대가로 인정받는 한편, 왕유와 함께 산수전원파의 대표로 평가받는다. 『맹호연시선』의 첫머리에 놓여 있는 「북쪽 시내에 배 띄우고<sup>北澗泛舟</sup>」부터 읽어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넉넉히 흐르는 북쪽 시냇물.<br /> 배 띄우면 어디고 갈 수 있다네.<br /> 물 따라 오르내리면 절로 흥취가 나.<br /> 멀리 오호<sup>[五湖 : 범려가 숨었던 호수]</sup>까지 갈 것도 없지.</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맹호연에 대한 전기적 사실이 전무한 채로 위의 시를 보면, 시인은 그저 팔자 좋고 무욕한 인물로 보인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절에 인용된 범려<sup>范蠡</sup>의 고사는, 출세 따위는 안중에 없는 시인의 절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맹호연의 삶을 보면 「북쪽 시내에 배 띄우고」에 나오는 범려의 고사가 자기 희화나 비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lsquo;나는 임금을 도와 큰일을 맡았던 적도 없는 못난 놈이니, 토사구팽을 피해 숨을 이유도 없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울분과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노래한 대자연의 아름다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시인 이하의 일생을 절망에 빠트린 것은 가휘에 걸려 진사시를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마찬가지로 맹호연은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다. 10세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30세가 되도록 고향에서 문장에 매진했으며, 그 이후에는 장안<sup>長安</sup>으로 올라가 저광희<sup>儲光羲</sup>&middot;포융<sup>包融</sup>&middot;기모잠<sup>綦毋潛</sup> 등과 어울렸던 결과가 그렇게 참담했던 것이다. 진사시에 떨어진 맹호연은 장안에 머물며 장구령<sup>張九齡</sup>&middot;왕유 등의 조정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황제에게 글을 바치는 방법으로 출사를 꾀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현종<sup>玄宗</sup>의 노여움을 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이 일화가 궁금하신 분은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 415~416쪽을 보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과 조선의 독서인(선비)들이 과거에 목을 매는 이유는 자아성취도 있지만,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실질적 이유도 크다. 과거에 낙방하거나 벼슬을 얻지 못한 독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향으로 내려가 훈장질을 하는 것밖에 없다. 맹호연은 훈장이 되는 대신 전국을 방랑하고 방외거사들을 사귀면서 출사에 실패한 비분을 달랬다. 맹호연의 많은 작품이 여행과 교우를 소재로 하고 있고, 또 벗과 술 마시는 즐거움이 자주 묘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62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2_%EB%A7%B9%ED%98%B8%EC%97%B0%EC%8B%9C%EC%84%A0/%EB%A7%B9%ED%98%B8%EC%97%B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맹호연은 생전부터 줄곧 산수전원파의 대표로 추앙되어 왔으나, 거기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산수전원시란 농촌과 대자연에 은거하면서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작가의 염담<sup>[恬淡&middot;恬澹 :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함]</sup>한 심경을 나타내는 시다. 그런데 맹호연의 시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너무 많은데다가, 그의 시가 거의 일관되게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드러낸다. 「전원에서 지음<sup>田園作</sup>」이란 시를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낡은 오두막은 속세의 시끄러움과 사이를 두고 있으니,<br /> 선조께선 고요함과 소박함을 숭상하셨다.<br /> 살기 좋은 곳을 가려 은거처로 삼으시곤,<br /> 과일나무 가꾸어 천 그루 채울 정도이셨다.<br /> 나의 세대에 이르러선 그저 흐르는 세월에 맡겨두고 있을 뿐,<br /> 서른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알아주는 사람 만나지 못하고 있다.<br /> 책 읽고 벼슬하고 칼 들어 공 세울 시기 늦어져가건만,<br /> 산야의 전원에서는 하루해는 또 하릴없이 저물어간다. <br /> 새벽에 일어나서는 절로 생각이 많고,<br /> 한낮에 정좌를 해봐도 깨달음은 늘 적었다.<br /> 하늘까지 날아오르는 큰기러기를 부러워하고,<br /> 모이 다투는 닭과 오리를 부끄러이 여긴다.<br /> 황제를 알현하는 금마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br /> 나무하러 오가는 길에서 괴로움의 노래를 부른다.<br /> 궁벽한 시골마을에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br /> 조정에도 친지가 드무니,<br /> 그 누가 양웅<sup>揚雄</sup> 정도의 인물인 나를 위해,<br /> 한번 그의 감천부<sup>甘泉賦</sup> 같은 내 작품을 추천해줄 것인가?</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전원에서 지음」이라는 제목을 가진 위의 시는, 산수전원시의 풍격을 기대했던 독자들의 기대를 참람하게 배반한다. 산수전원시의 대표 시인이 지었다는 이 시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속세를 떠난 은일군자의 여유자적이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ldquo;서른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알아주는 사람 만나지 못하고 있다&rdquo;는 울분과, &ldquo;황제를 알현하는 금마문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며&rdquo; 출사의 욕망을 키우고 있는 흉한 괴물(?)의 모습만 보인다. 특히 맹호연 자신을, 「감천부」라는 뛰어난 시로 성제<sup>成帝</sup>에게 발탁되었던 서한<sup>西漢</sup>의 문학가 양웅과 비교하는 마지막 두 구절에서는, 이 시인이 과연 산수전원시를 쓸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테면 맹호연의 이런 태도는 한&middot;중&middot;일로 대표되는 한자문화권에 &lsquo;귀거래<sup>歸去來</sup>&rsquo;라는 불후의 문학적 토포스<sup>topos</sup>를 제공한 동진<sup>東晉</sup>시대의 시인 도연명<sup>陶淵明</sup>의 「귀거래사<sup>歸去來辭</sup>」의 풍격이나 정신과 커다란 차이가 난다. 남윤수의 『한국의 「화도사<sup>和陶辭</sup>」 연구』(역락, 2004)에서 「귀거래사」의 요체라고 할 만한 3단을 인용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돌아왔음이여!<br /> 교제를 그만두고 교유도 끊으리라.<br /> 세상은 나와 어긋나 있으니,<br /> 다시 수레를 타고 나선다 한들 무엇을 구할 것인가?<br /> 친척들과 정겨운 대화에 희열을 느끼고<br /> 소금<sup>素琴</sup>과 서적을 즐기니 근심 걱정 사라지네.<br /> 농부가 나에게 &lsquo;봄이 되었다&rsquo;고 알려주니,<br /> 장차 서쪽 밭이랑에서 봄갈이 하리라.<br /> 때로는 포장을 씌운 수레를 타기도 하고,<br /> 더러는 작은 배를 노 저어가며,<br /> 깊고 멀리 배 띄워 골짜기 찾고,<br /> 수레 타고 험한 언덕도 넘어,<br /> 나무는 싱싱하게 물올라 잘도 자라고,<br /> 샘물은 끊임없이 졸졸거리며 흐르기 시작했네.<br /> 만물이 때를 얻어 피어오름을 부러워하면서,<br /> 내 생이 휴식에 다가감을 느끼노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41세에 벼슬을 걷어찬 도연명이 낙향을 결심하며 쓴 「귀거래사」와, 출사에 실패한 맹호연이 쫓기듯이 고향으로 돌아가 쓴 「전원에서 지음」은 똑같은 전원산수시가 아니다(같지 않기 때문에, &lsquo;귀거래&rsquo;의 정신은 흔한 전원산수시와 다른 명칭을 얻게 됐다). 도연명에게서 느껴지는 도저한 탈속이 맹호연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은일, 독서인들이 자신을 비싸게 파는 방법</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맹호연시선』을 선역한 이남종은 이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에게 석&middot;박사 학위를 얻게 해준 맹호연을 옹호한다. 현대 문명(도시화)과 자기 계발(출세욕)에 찌든 &ldquo;오늘날의 독자로서 옛 시문을 통하여 세상일에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의도&rdquo;는 잘 알겠지만, 동아시아 전통에서의 은일은 단순히 &lsquo;자신의 욕심을 모두 비운 채, 대자연에 숨는다&rsquo;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대목을 인용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실 은일과 출사는 &lsquo;숨어살면서 자신의 뜻을 보전하고, 의로움을 행하여 도를 관철하는&rsquo; 사인계층<sup>士人階層</sup>의 행동방식으로서 이미 유가사상의 범위 안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은일이 출사의 관문으로 채용되어 있었던 그의 시대에서 은일 행위는 더욱 적극적인 의미가 인정되기 때문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처음부터 출사의 생각을 접어둔 채 그저 전원의 한적을 노래한 중국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세상에 욕심을 갖지 않고 은둔으로 일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시인이라기보다는 은자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독서인들의 은일은 때를 얻지 못해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을 뜻하지, 스님이나 도인들처럼 속세를 떠나거나 등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서인들의 은일이 자신을 비싸게 파는 방법이었다는 것은 남송<sup>南宋</sup>의 대유학자였던 주희<sup>朱憙</sup>나, 그를 따라 했던 조선의 노론<sup>老論</sup> 영수 송시열의 행적이 잘 입증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자문화권 속에서 은일과 출사는 도가와 유가의 관계처럼 시차적이며, 구심력과 원심력처럼, 한 편이 다른 편을 이상화하면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맹호연의 많은 시들은 산수전원시에 미달하는 것이 아니라, 은일과 출사가 서로 배척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한 해가 저무는 세모에 세상을 잊고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시인이 망망대해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다시 바다 저편에 있다는 전설 속의 선경<sup>仙境</sup>을 묻는 「세모에 바다 위에서<sup>歲暮海上作</sup>」를 읽어본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공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br /> 나 또한 배타고 바다로 나왔다. <br /> 저녁에 북두성 자루가 돌아간 것을 보고,<br /> 그제야 한 해가 다 가버렸음을 알았다.<br /> 빈배는 제가는 대로 맡겨두었고,<br /> 낚시 드리웠지만 달리 바램은 없다. <br /> 떼를 탄 사람에게 물어보나니,<br /> 창주<sup>[滄洲 : 바다 저편에 있다는 선경]</sup>는 또 어디에 있는가?</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맹호연은, 안절부절,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고, 어디에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5-03 오전 10:38:00전강수의 ‘토지의 경제학’<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848"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4_%ED%86%A0%EC%A7%80%EC%9D%98%20%EA%B2%BD%EC%A0%9C%ED%95%99/%ED%86%A0%EC%A7%80%EC%9D%98%EA%B2%BD%EC%A0%9C%ED%95%99_%ED%91%9C%EC%A7%80.jpg" />&nbsp;<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말</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2009년경이었다. 꽤 오랫동안 부동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고 사회운동을 해왔지만 막상 내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기회가 없었구나 하는 반성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의 구성과 내용을 결정하는 데는 나 개인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요인이 작용했다. 그것은 부동산 문제에 관한 논의의 혼란상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2002년경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이 최대의 화두로 부각된 이후 소위 부동산 &lsquo;전문가&rsquo;라는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너무도 자신 있게 그리고 줄기차게 외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문제는 그들의 주장 속에 일리 있는 것도 있었지만 터무니없는 내용도 많았다는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중에는 노무현 정부 당시에 기득권층과 보수 언론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급성장한 자칭 &lsquo;시장주의자&rsquo;들(이들은 시장 만능주의자 혹은 시장 근본주의자라 불러야 마땅하다)이 있다. 그들은 투기의 해악을 부정하고, 불로소득의 환수에 반대하고,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공급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 시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모두 정당하고, 정부가 현실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는 것은 무조건 잘못이라는 것이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생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그들의 반대편에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집값이나 전세금이 오르는 것은 정부가 잘못 대처했기 때문이고 그럴 때는 무조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집값과 전세금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온 사람들이 있다.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좌파 인사들도 이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lsquo;정부개입 만능주의자&rsquo; 혹은 &lsquo;가격규제 만능주의자&rsquo;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현실의 부동산 시장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들은 시장원리(즉, 수요-공급의 법칙) 자체를 불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부동산 부자들과 건설업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집값과 전세금을 끌어올릴 수 있고, 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집값과 전세금을 직접 끌어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이들은 모르는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보기에,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경제학 이론을 중시하며 시장원리를 강조하지만, 사실은 이론과 시장원리의 이름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동산 시장을 분석할 때 의존하는 이론에 근본적 오류가 있고 그런 이론이 탄생한 데는 특별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한편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착하여 이론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론 없는 운동은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기 쉽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요컨대 전자는 잘못된 이론으로 부동산 시장을 분석하고, 후자는 이론 자체를 무시한다. 결국 이론이 문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제투성이의 주장들임에도 시장 만능주의자와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는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자는 부동산 부자들과 건설업자들, 그리고 강남 지역 부동산 소유자들 같은 기득권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후자는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데 익숙한 일반 시민들의 정서에 부합하는지 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기득권층과 일반 시민들의 지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과 정부는 시장 만능주의와 가격규제 만능주의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경향을 보인다. 게다가 부동산 투자 전문가들까지 가세해서 시민들의 판단을 흐린다. 이들은 애당초 정확한 시장정보를 제공하는 데는 관심이 없고, 무조건 부동산 시장에 자금을 끌어들이는 일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다. 상황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진실을 말해줄 수 있는 지식인들이 나서서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텐데, 요즈음은 그런 지식인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경제적 이익도 없고, 인기도 얻기 어렵고, 더구나 자칫 잘못하면 기득권층으로부터 탄압을 받거나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하는 괴로운 일을 감당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침묵은 사회가 내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징후인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보이고 있으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문제건 올바로 인식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이론에 기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론이 없거나 잘못된 이론에 기댈 경우, 진단도 잘못되고 처방도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기대고 있는 이론이 오랜 세월의 검토를 거치는 동안 타당성이 증명된 이론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애덤 스미스<sup>Adam Smith</sup>가 &lsquo;보이지 않는 손&rsquo;을 이야기한 이래 경제학에서 수요-공급의 법칙이나 &lsquo;시장의 자기조절 기능&rsquo; 같은 것은 도저히 부정하기 어려운 진리의 반열에 올랐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토지와 부동산을 분석하고 대안을 말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절대로 잘못될 수 없다는 것이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생각이다. 그들은 수요-공급의 법칙이나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신들이 신봉하고 있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성립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왜곡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사실 시장주의 혹은 자유방임주의의 원조인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시장 만능주의자들과는 무척 다른 토지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고전학파의 토지이론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꾸며서 시장 만능주의자들 앞에 내놓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하다. 짐작건대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단번에 그것을 반反시장적인 이론으로 규정지을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토지가 다른 자원이나 일반 재화와는 매우 다른 물건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토지시장의 동향이 경제의 다른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는 소득(지대)이 어떤 성질을 갖는지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토지를 절대적․배타적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잘못이며 지대소득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무겁게 과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형성되고 있던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는 헨리 조지<sup>Henry George</sup>라는 걸출한 경제학자가 등장하여 고전학파의 토지이론을 완성했다. 헨리 조지는 당시 영미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sup>Karl Marx</sup>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메이슨 개프니<sup>Mason Gaffney</sup>에 의하면, 헨리 조지의 엄청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의 지주 세력이 당시 엘리트로 꼽히던 경제학자들을 고용해서 헨리 조지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전개했다. J. B. 클라크<sup>Clark</sup>, E. R. A. 셀리그먼<sup>Seligman</sup>, R. T. 일리<sup>Ely</sup>, 프랜시스 워커<sup>Francis A. Walker</sup>, 프랭크 나이트<sup>Frank Knight</sup> 등이 그때 동원되었던 경제학자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바로 미국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아버지들이라는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중에서도 클라크는 헨리 조지 경제학을 논파하기 위해 책을 무려 24권이나 썼다고 하니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만하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자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여 토지와 자본의 차이를 흐릿하게 만들고 양자 사이의 벽을 허무는 것이었다. 다른 경제학자들도 클라크와 마찬가지로 토지와 자본의 차이, 지대소득과 다른 소득의 차이를 제거하고자 노력했다. 이들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더 이상 토지는 특별히 구별해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고, 토지이론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사라져버렸다. 미국에서 신고전학파의 성립과정은 바로 주류 경제학에서 토지가 빠지게 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의 부동산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토지문제에 관한 한 자기 아버지(신고전학파)가 할아버지(고전학파)를 배반하고 엉터리 이론을 만든 줄도 모른 채 아버지의 주장이 시장주의의 전범<sup>典範</sup>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하지만 토지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전범이 되어야 할 것은 고전학파와 헨리 조지의 경제학이다. 토지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중시하는 고전학파와 헨리 조지의 시각이 복원되지 않는다면 시장주의가 본연의 모습을 갖추기 어려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장 만능주의자들과는 달리,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의 경우 이론이 아예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의 눈에는 가격을 부당하게 올리는 나쁜 사람들만 보인다. 그리고 그런 나쁜 사람들을 그냥 방치하는 나쁜 정부만 보인다. 그래서인지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은 가격을 부당하게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나쁜 짓을 적발하고 폭로하는 일에 전력<sup>全力</sup>을 기울인다. 정부더러는 가격 상한을 설정해서 이런 나쁜 짓을 막으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서 값싼 주택을 공급하여 가격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경제학원론 교과서만 읽어보더라도, 가격이란 나쁜 사람의 마음대로 올리고 내리고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위적인 가격 통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고 부작용을 낳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이 이론 없이 자신들의 경험과 피상적인 현상 인식만 가지고 엉터리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이들의 주장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경제학이론을 앞세워서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바람에,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의 유치한 주장이 도리어 힘을 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장 만능주의자들 같은 이데올로그<sup>ideologue</sup>들과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 같은 선동가들이 부동산의 진실을 왜곡하여 시민과 정치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올바른 정책이 실시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일반 시민들이 부동산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이들의 왜곡과 선동은 설 자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이 책의 내용을 구상하고 집필한 목적은 토지와 부동산에 관한 올바른 이론과 정책 대안을 정리하고 소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이 부동산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데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부에서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토지를 무시하게 된 배경, 일반 재화나 자본을 다루는 데 사용되는 경제이론을 토지와 부동산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 토지의 특수성, 지대와 지가의 결정원리, 토지가 거시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설명한다. 토지의 특수성과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토지이론을 올바로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1부의 기본 문제의식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에서는 부동산 투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투기의 해악과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막상 그것이 왜 발생하고 또 소멸하는지 이론적으로 해명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에서는 부동산 가격이 심한 변동성을 보이는 이유, 투기와 거품을 유발하는 원인, 거품의 붕괴를 야기하는 내적 요인, 그리고 거품의 형성과 붕괴<sup>boom and bust</sup>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 요인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함으로써 &lsquo;투기의 경제학&rsquo;을 구축해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부에서는 토지공개념의 원조라고 불리며 노태우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던 헨리 조지의 토지이론을 소개하고 그것의 정정<sup>訂正</sup>을 시도한다. 토지이론과 부동산 정책에 관한 논의에서 헨리 조지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에 대해 본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헨리 조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나는 시장친화적인 방법으로 토지의 공공성을 실현해야 한다는 헨리 조지의 정신에는 완전히 공감하지만, 그의 이론 가운데 적지 않은 오류와 논리적 결함이 들어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런 오류와 결함을 수정하는 동시에 현대 경제에 적합한 형태로 그의 이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3부를 집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4부에서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소개한 이론을 바탕으로 올바른 부동산 정책의 조건을 제시한다. 이 조건에 비추어 전두환 정부에서부터 현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각 정부가 실시한 부동산 정책들을 평가하고 많은 시민과 정치인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는 잘못된 정책 대안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5부에서는 다음 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어떤 방향으로 펼쳐야 할지 주요 정책 과제들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정책 제안의 대상을 진보개혁 정부로 한정하는데, 그 이유는 수년간 토지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리나라의 보수 정치 세력은 헨리 조지 식 정책 대안을 수용할 만한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찍이 헨리 조지는 &ldquo;(경제문제에 관한 잘못된 견해들이: 인용자)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고 부조리를 예리하게 의식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정치권력의 궁극적인 원천인 국민 대중을 자칫 사이비 지도자 내지 선동가의 지배하에 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려면 정치경제학 이론에 부합하면서 일반 대중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rdquo;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독자들이 이 책에서 그런 해답의 일부라도 발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는 토지정책학회(구 헨리조지연구회)나 부동산연구회 멤버들과의 토론, 토지정의 운동 관계자들과의 교류, 시장 만능주의자들과 가격규제 만능주의자들과의 논쟁 등을 통해 숙성되고 정리된 생각들이 많이 녹아 있다.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이런저런 모양으로 내가 생각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중략)</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3월 전강수</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01</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large">현대 경제학의 미스터리</span><br /> </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왜 경제학자들은 토지를 무시하게 되었을까?</span></span></span></strong></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학원론을 수강한 적이 있는 학생들에게 생산의 3요소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바로 &ldquo;토지, 노동, 자본이요!&rdquo;라고 대답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경제학원론 교과서가 초반부에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의 3요소라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원론 교과서는 폴 새뮤얼슨<sup>Paul Samuelson</sup>의 『경제학』<sup>Economics</sup>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책에서 새뮤얼슨은 경제문제를 세 가지로 요약하는데, 그것은 &lsquo;무엇을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가?&rsquo;, &lsquo;어떻게 생산할 것인가?&rsquo;, &lsquo;누구를 위하여 생산할 것인가?&rsquo;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문제는 모두 생산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생산요소를 어느 분야에 얼마만큼씩 배분하여 생산물을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생산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결합하여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며, 세 번째는 생산물을 생산요소 제공자들에게 어떻게 귀속시킬 것인가(즉,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지가 생산의 3요소 중 하나고 3대 경제문제가 모두 생산요소를 다루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면, 경제학 책들이 토지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원론 교과서들을 읽어보면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초반부에 분명히 토지를 생산의 3요소라고 해놓고는, 조금 뒤 기업의 생산함수를 다루는 부분에 가서는 슬그머니 토지를 빼버린다. 생산량은 토지와 노동과 자본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야 함에도, 노동과 자본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해버리는 것이다. 왜 토지를 제외하는지 이유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다음부터는 분배이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한두 페이지 정도 언급하는 것을 제외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토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경제학원론 교과서라서 초보적인 내용만 다루다 보니 그렇게 됐겠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경제학원론보다 좀더 심화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 교과서들을 보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재정학, 화폐금융론, 경제정책론 등 주요 경제학 각론 교과서에서도 토지에 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경제학 전체 체계에서 토지가 실종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지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물론 토지경제학이라는 분야가 있고 거기서는 분명히 토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이 분야는 경제학에서 일개 변두리 분야로 간주되기 때문에, 전공하는 학자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소수일 뿐 아니라 대학 강단에서도 소홀하게 취급된다. 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도 토지경제학을 한 번도 수강하지 않은 채 졸업하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토지를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토지를 전체 경제의 틀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떼어내서 그것만 미시적으로 다루고 끝내는 것이다. 토지경제학 분야에서 토지와 임금, 토지와 금리, 토지와 빈곤, 토지와 고용 등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는 드물다. 어찌 보면 지금의 토지경제학은 토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보다는 토지를 칸막이 안에 가두어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으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토지는 현실 경제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왜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거나, 아니면 토지경제학이라는 조그만 변두리 영역 안에 가두어놓고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일까? 현실 경제의 움직임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무시할 경우 분석의 설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한데도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경제학자들이 처음부터 토지를 무시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sup>David Ricardo</sup>, 존 스튜어트 밀<sup>John Stuart Mill</sup> 등의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토지의 특수성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각자 나름대로 토지가치가 소득분배나 거시경제의 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고전학파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던 19세기 후반에도 미국에서 헨리 조지라는 걸출한 경제학자가 등장하여, 토지가치의 변화로 진보 속의 빈곤을 설명하고 토지 투기로 불황을 설명하는 토지 중심의 경제학을 가지고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1879년에 출간된 그의 책 『진보와 빈곤』<sup>Progress and Poverty</sup>은 19세기 말까지 나온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의 책 가운데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으로 기록되었고, 경제학 책만 가지고 따지면 지금까지 최고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헨리 조지의 이론은 그의 사후 1920년경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부터 90년 전까지만 해도(즉,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 이후 140여 년 동안은) 토지를 중시하는 지적 전통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던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지가 경제학 체계에서 빠져버린 것은 헨리 조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초기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 때문이다. 1870년대 초에 K. 멩거<sup>Menger</sup>, W. S. 제본스<sup>Jevons</sup>, L. 발라<sup>Walras</sup> 3인이 한계효용 이론을 주창한 것을 계기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영국에서는 A. 마셜<sup>Marshall</sup>과 A. C. 피구<sup>Pigou</sup> 등이, 미국에서는 클라크, 셀리그먼, 일리 등이 고전학파의 자유방임주의, 생산비 가치론과 한계효용 이론을 결합하여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성립시켰다. 이때 성립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 국가의 대학들에서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주류 경제학의 뿌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크는 미국 신고전학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오늘날 그를 기리는 클라크상이 미국에서 노벨경제학상에 버금가는 상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미국 경제학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클라크가 한계생산력설을 만들고 초기 미국 신고전학파를 주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가 경제학에서 토지를 빼버리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가 토지를 누락시키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자본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여 토지와 자본의 차이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기계, 건물, 원료 등과 같이 생산을 돕기 위해 투입되는 생산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던 자본을, 클라크는 이런저런 물건들로 형태 전환할 수 있는 비물질적인 실체로 정의했다. 그에 의하면 자본은 올해는 기계의 형태를 취하다가 내년에는 건물, 내후년에는 토지 등으로 얼마든지 형태 전환을 할 수 있다. 자본을 여러 사람의 몸을 들락날락하는 일종의 영적 실체처럼 취급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클라크의 자본을 &lsquo;젤리 자본&rsquo;<sup>jelly capital</sup> 혹은 &lsquo;플라스틱 자본&rsquo;<sup>plastic capital</sup>이라고 부른다. 자본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자연적으로 자본과 토지의 차이는 무의미해진다. 실제로 그의 자본 개념이 나온 이후 경제학자들은 점점 토지를 자본의 한 형태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제학의 무대에는 토지는 사라지고 노동과 자본만 남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크가 만든 한계생산력설도 토지와 자본 사이의 벽을 허무는 데 일조했다(한계생산력설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한계생산력설에 의하면, 생산요소에 대한 대가는 그 생산요소의 마지막 단위가 만드는 생산물(한계생산)의 가치를 반영한다. 즉, 임금은 노동의 한계생산 가치를 반영하고, 이자는 자본의 한계생산 가치를 반영하며, 지대는 토지의 한계생산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세 가지 생산요소에 대한 대가가 모두 동일한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야기는 세 가지 생산요소가 동질적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클라크는 그렇게 이해해서 한계생산력설을 토지와 자본의 벽을 허무는 도구로 활용했다. 더욱이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임금이나 이자가 불로소득이 아닌 것처럼 지대도 불로소득이 아니라는 사실을 논증하는 데 한계생산력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지대가 토지의 생산성에 대한 정당한 대가임을 입증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였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크는 물질적 실체임이 분명한 자본을 가지고 왜 그런 이상한 짓을 한 것일까? 그는 왜 그렇게 토지와 자본의 벽을 허물고 지대와 다른 소득의 질적 차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한 것일까? 어떤 학문의 발전이 개념이나 논리 같은 학문적 요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해관계나 권력과 같은 학문 외적 요인이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개프니에 의하면, 미국 신고전학파의 형성과정에 바로 그런 학문 외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했다. 클라크의 주된 관심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논리적 오류를 바로잡아 경제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지주 세력을 위협하고 있던 헨리 조지의 이론을 무너뜨리는 데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크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895년에 콜롬비아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그는 셀리그먼과 함께 헨리 조지 비판에 몰두했다. 그는 1886&sim;1914년 사이에 헨리 조지를 비판하는 책을 무려 24권이나 썼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대표적인 이론인 한계생산력설은 헨리 조지의 임금이론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이론이라고 클라크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클라크를 경제학 교수로 뽑은 사람은 부유한 실크 수입업자이자 지주였으며 당시 콜럼비아 대학교 총장이었던 세스 로<sup>Seth Low</sup>였다. 1895년에 로는 뉴욕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그의 유력 상대가 바로 헨리 조지였다. 클라크를 영입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짐작케 한다. 당시 콜럼비아 대학교 외에도 존스 홉킨스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등이 반<sup>反</sup>헨리 조지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대학교들 모두가 클라크를 영입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고 한다. 이 대학교들의 설립과 발전에 지주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크와 함께 헨리 조지 비판에 앞장섰던 미국의 신고전학파로는 셀리그먼 외에도, 미국 경제학회 초대 회장과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교<sup>MIT</sup> 총장을 역임한 프랜시스 워커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 경제학 교수로서 토지경제학 분야를 개척한 일리를 들 수 있다. 시카고학파를 창시했던 프랭크 나이트가 그들의 뒤를 이었다. 헨리 조지를 비판하기 위해 클라크, 셀리그먼, 워커, 일리, 나이트 등이 한결같이 동원했던 방법은 토지와 자본의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미국의 경제학계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들은 많은 책과 논문을 집필하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함으로써 토지를 무시하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발전과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수많은 경제학 교과서에서 토지가 무시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학문이 특권층의 이해관계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는 경우 학자들은 각광을 받고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학문 자체는 처량한 처지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오늘날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현실 경제와 유리되어 올바른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없는 처량한 처지에 빠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들어가는 말,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전강수</strong><br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제금융부동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br />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부동산 투기의 종말』, 『부동산 신화는 없다』(공저), 『위기의 부동산』(공저), 『헨리 조지, 100년만에 다시 보다』(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희년의 경제학』, 『부동산 권력』(공역), 『현대 경제학과 청지기윤리』(공역)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5-02 오전 10:49:00《231》기괴한 상상력의 시인, 이하<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1_%EC%9D%B4%ED%95%98%EC%8B%9C%EC%84%A0/%EC%9D%B4%ED%95%98%EC%8B%9C%EC%84%A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21일</span></strong><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이하의 </strong></span><span style="font-size: large">『이하시선』</span>(민미디어, 2001, 중국시인총서 106[당대편<sup>唐代篇</sup>])<span style="font-size: small">을 읽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헌책방을 다니다 보면, 언제 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 민미디어라는 낯선 출판사에서 나온 &lsquo;중국시인총서&rsquo;가 그렇다. 중국 시인만으로 100여 권이 넘는 총서가 기획되었다니, 장관이 아닌가? 누가 내어 놓았는지, &lsquo;당대편&rsquo;에 속하는 열두 권(연번 101~112)이 나와 있길래 모두 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관능적인 유혹이 깃든&nbsp;시 - &nbsp;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와 맹호연<sup>孟浩然</sup>&middot;왕유<sup>王維</sup>&middot;이백<sup>李白</sup>&middot;두보<sup>杜甫</sup>&middot;백거이<sup>白居易</sup>를 다 제치고, 김민나가 선역<sup>選譯</sup>한 『이하시선』부터 집어 들었다. 이하는 이십대 때 내가 좋아했던 시인이기도 하거니와, 그의 시 가운데 어느 한 편을 특별히 다시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하가 남겼다는 240여 수의 시 가운데, 39수를 가려 실은 이 선집에는 그 시가 없다. 내 기억에, 이십대 때 읽었던 이동향 선역 『이하시선』(민음사, 1976, 세계시인선68)은 편수가 이 시선보다 더 적었는데도 그 시가 있었다. 뿐 아니라, 김원중 평역 『당시감상대관<sup>唐詩鑑賞大觀</sup>』(까치, 1993)은 딱 두 편의 이하 시를 골라 실으면서 이 시를 싣지 않았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이규일이 선역한 『이하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469)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던 것도 바로 그 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규일 선역은 이동향이나 김민나 선역보다 훨씬 많은 64수나 되었는데도, 내가 좋아했던 그 시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젊었을 때 읽었던 이동향 선역 『이하시선』은 마흔 살, 중학교 시절부터 모았던 모든 책을 내다버릴 때 내 곁을 떠났다. 『당시감상대관』은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책상 앞에서, 의자를 돌려 팔을 뻗으면 바로 잡을 수 있는 책이지만, 여기에 실린 번역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또 이번 일로 뒤늦게 알게 된 송행근 선역 『이하시선집』(문자향, 2003)에서 새로운 번역을 찾아냈지만, 왠지 옛날에 읽었던 그 시가 아닌 것 같다(이 선집에는 112수가 실려 있다). 왜 그럴까? 어린 시절의 입맛이 변하지 않듯이, 처음에 읽었던 번역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이동향이 번역한 그 시를 찾아봤는데 헛수고였다. 대신 처음 이하를 발견했던 시기에 더불어 읽었던, 이원섭 역해 『당시<sup>唐詩</sup>』(현암사, 1965)에 실려 있는 그것을 찾을 수 있었다. 제목은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제 집은 횡당<sup>橫塘</sup>이구요. 창에는 <br /> 계수 향이 풍기는 붉은 사<sup>紗</sup>가 쳐 있지요. <br /> 푸른 구름을 시켜 머리를 틀어 올리게 하고 <br /> 둥근 달이 내 귀고리 된답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연꽃에 바람 일어 <br /> 강은 봄인데 <br /> 긴 둑 여기에 <br /> 내사 임 못 놓겠어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당신은 잉어의 꼬리를 잡수세요. <br />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 <br /> 이렁성 여기서 지내시되 <br /> 아예, 양양<sup>壤陽</sup>에 갈 생각은 마세요. <br /> 다시 돌아오기 어려우니까.</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보세요, 오늘 창포꽃이 향기롭지만 <br /> 내일이면 단풍이 벌써 시들어버릴 걸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시의 원제는 「대제곡<sup>大堤曲</sup>」이지만, 김원중은 「떠나는 님을 저어하며 부르는 노래」로, 송행근은 「대제를 노래함」으로 번역했다. 이동향은 이원섭처럼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와 비슷하게 번역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대제는 중국 양양 근방에 있는 유명한 색향<sup>色鄕</sup>으로, 이 시는 대제의 술집 아가씨가 근무지 내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정부를 놓치지 않으려는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것이다. 성성이(고릴라) 입술 요리와 잉어 꼬리 요리에는, 정부를 잡으려는 아가씨의 정성과 관능적인 유혹이 깃들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하(790~816)는 중국시의 황금기인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흔히 당나라는 초당<sup>初唐</sup>&middot;성당<sup>盛唐</sup>&middot;중당<sup>中唐</sup>&middot;만당<sup>晩唐</sup>으로 시기 구분을 하는데, 이하가 활동을 했던 시기는 안사<sup>安史</sup>의 난(755~763)이 끝나고 국운이 쇠락하던 중당 시절이다. 이 시기는 맹호연&middot;왕유&middot;고적<sup>高適</sup>&middot;이백&middot;두보 같은 대시인들이 친근하고 진솔한 감정을 노래했던 성당과 달리, 이성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사회시가 등장하는 시기다. 이 시기의 유명한 시인으로는 원백파라고 불리는 원진<sup>元稹</sup>&middot;백거이, 한맹시파라고 불리는 한유&middot;맹교<sup>孟郊</sup>가 있다. 전자가 쉽고 통속적인 표현을 즐겨했다면, 후자는 어렵고 기괴한 표현을 좋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당 시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이하는 한유에게 재능을 인정받고 지원받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감정의 표현이나 묘사가 일상적이지 않았고 시재<sup>詩材</sup>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이하의 유미주의적인 시작 태도와 독특한 표현법은 대숙륜<sup>戴叔倫</sup>&middot;장벽<sup>張碧</sup>&middot;유언사<sup>劉言史</sup>&middot;장남걸<sup>莊南傑</sup> 등의 동시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만당 시기의 후대시인들인 이상은&middot;두목&middot;온정균<sup>溫庭筠</sup>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런 뜻에서 이하는 한맹시파의 마지막 주자면서, 중당과 만당을 잇는 가교이기도 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초자연적 시세계 - 가난과 좌절된 벼슬길, 끈질긴 병력</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 문학사에서 희귀한 재능을 뽐냈던 이하의 시는 몇 가지 배경을 갖고 있다. 먼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가 살았던 당나라 중엽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정치&middot;사회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때였다. 환관들이 군권을 장악하여 조정을 농단하고, 각 지방을 차지한 지방장관들은 중앙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조세제도가 무너진 가운데 백성들은 무거운 과세로 고통을 겪었다. 이런 사회적 혼란상이 이하로 하여금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탐닉과 현실 비판적인 풍유시<sup>風諭詩</sup>는 물론이고, 색정 문학가<sup>色情文學家</sup>로 오해받는 농염한 시마저 아울러 쓰게 만들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귀신과 초자연의 세계를 넘나본 이하의 시는 『초사<sup>楚辭</sup>』의 신화적이고 주정적인 시풍에 크게 빚졌다. 이하가 절친한 친구에게 보냈던 「진상에게 드림<sup>贈陳商</sup>」이란 시의 일부와, 「상심하여 노래하다<sup>傷心行</sup>」와 「창곡의 북원에 새로 돋은 죽순 네 수&middot;둘째<sup>昌谷北園新筍 其二</sup>」의 전문을 차례로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장안<sup>長安</sup>에 대장부 있는데<br /> 스무 살에 마음은 벌써 썩어 버렸네<br /> 능가경<sup>楞伽經</sup>은 책상머리에 쌓여 있고<br /> 초사도 손에서 놓지를 못하네 <br /> 인생살이 곤궁하고 못났기만 하니<br /> 해질 무렵에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br /> 현재 길은 이미 막혀 버렸으니<br /> 백발을 기다릴 필요 어디 있으랴? (송행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목 멘 소리로 초사를 읊조리나니<br /> 병든 몸의 아픔은 하얗게 적막하여라<br /> 가을 같은 몸엔 백발이 자라고<br /> 나뭇잎 위로 비바람이 운다<br /> 푸르스름한 등잔엔 기름이 말라가고<br /> 떨어지는 빛 속에 춤추는 나방의 날갯짓<br /> 오래된 벽엔 짙은 먼지들이 자라고<br /> 나그네의 영혼 꿈속에서 중얼거린다 (이규일 역)<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대나무의 푸른 껍질을 벗겨 초사를 쓰니<br /> 춘분[春粉 : 새로난 대나무에 묻어 있는 하얀 가루]은 향기 진하고 글씨는 뚜렷하구나<br /> 대나무와 그 위에 쓴 시를 어느 누가 보겠는가?<br /> 안개를 누르는 이슬만이 수많은 가지에서 울고 있는데 (송행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세 편의 시는 이하가 『초사』를 좋아했으며, 그것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해 준다. 그러나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lsquo;鬼&middot;神&middot;死&middot;老&middot;血&middot;墓&rsquo; 등의 단어는 스물일곱 해 밖에 살지 못했던 그의 개인적 병력과 상관해서 풀이해야 한다. 『신당서<sup>新唐書</sup>』에 실린 「이하전<sup>李賀傳</sup>」에 따르면 그는 피를 토하는 병을 앓았으며, 17세 때 머리가 하얗게 세는 신체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죽음의 공포를 대면해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병을 많이 앓아 약 달이는 냄새가 집에서 가시지 않았다던 그의 병력에 더하여, 극심한 집안의 경제적 궁핍과 좌절된 벼슬길 또한 이하의 시세계를 초자연적 영계<sup>靈界</sup>로 밀어붙인 배경이다. 그의 집안은 황실의 후손이었으나,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평민이나 같은 수준으로 몰락했다. 집안을 일으켜야 했던 그는 21세 때, 응진사거(應進士擧:진사가 되기 위한 시험)를 치러 장안으로 갔으나, 경쟁자들이 피휘<sup>避諱</sup>를 문제 삼은 탓에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이하 아버지 이름인 진숙<sup>晉肅</sup>의 진<sup>晉</sup>이, 응진사거의 진進과 발음이 같았기 때문에 시험을 치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봉예랑<sup>奉禮郞</sup>과 같은 말단 관직에 머물렀다(원래 피휘란 군주를 일컫는 휘<sup>諱</sup>가 암시하듯이,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쓰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법칙이지만, 차츰 조상이나 부친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데까지 확장됐다.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풍습처럼 보이지만, 대선수를 기억하기 위해 등번호를 영구 결번시키는 프로야구의 관습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화리에서 황보식과 송별하며<sup>仁和里雜叙皇甫湜化</sup>」라는 시에서 그는 &ldquo;낙양 바람결에 말 타고서 장안을 들어서려 하였더니/ 문을 열기도 전에 미친개 만났구나&rdquo;(송행근 역)라고, 가휘<sup>家諱</sup>를 문제 삼아 자신의 진사시를 방해한 진사과의 경쟁자들을 &lsquo;미친개&rsquo;라고 격하게 비난한 바도 있거니와, 「숭의리<sup>崇義里</sup>에서 비 내려 머물다」 혹은 「숭의리의 장마」라고 번역되는 시에서는 출세가 막힌 울분을 애달프고 차분하게 노래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저 초라한 이는 어느 집의 자식인가<br /> 장안의 쓸쓸한 가을을 느끼고 있네<br /> 젊은 나이로 나그네의 울분을 품고<br /> 꿈속에선 백발을 슬피 우네<br /> 야윈 말은 썩은 풀만 먹고<br /> 빗물은 차가운 도랑 위에 날린다<br /> 남궁<sup>南宮</sup>엔 고색창연한 휘장이 어둡고<br /> 젖은 공기 사이로 종소리 들려온다<br /> 고향은 멀어 천 리 길<br /> 구름은 동쪽으로 흘러간다<br /> 칼집을 베고 잠드는 우울한 밤<br /> 여관의 잠 속에선 제후가 되는 꿈을 꾸네 (이규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진상에게 드림」과 「상심하여 노래하다」란 시에서 독자들은 이미 &lsquo;백발&rsquo;을 본 바가 있거니와, 위의 시에서 다시 보게 되는 백발은 그의 일생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병력을 되새기게 한다. 거기에 더하여 방금 읽은 시는, 벼슬에 나가고자 하는 수그러들지 않는 욕망과 벼슬에 오를 수 없는 좌절감을 그 어느 작품보다 더 짙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준 짙은 좌절감도 「나무를 심지 마라」 혹은 「나무를 심지 말자」로 번역되는 시에 비하면 견딜만 하다고 말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뜰에 나무를 심지 말자.<br /> 나무를 심으면 사시사철 근심하게 된다. <br /> 홀로 잠드는 남쪽 침상으로 비쳐드는 달<br /> 올 가을 지난 가을 한결 같다. (김민나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중국시나 우리나라 사람이 쓴 한시에는 책 앞이나 뒤에 작품 전체에 대한 총평(해설)도 있지만, 시마다 편편이 주해가 달려 있는 게 특징이다. 지금 읽고 있는 김민나․이규일․송행근의 역본도 그런 관례를 따랐다. 세 사람의 선역자는 &lsquo;나무를 심으면 왜 근심하게 되는지&rsquo; 제각기 다른 주해를 붙였다. &ldquo;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뜻을 둔다는 의미이다. 일단 뜻을 두면 뜻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 언제나 조마조마 근심하게 된다.&rdquo;(김민나) &ldquo;나무는 계절을 알려주고 세월을 알려준다. 세월만 보면 금년 가을이나 작년 가을이 다를 바 없지만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수심이 생긴다. 더구나 항상 공명을 생각하는 이하는 나무를 보며 헛된 세월을 세는 일이 더욱 괴로울 것이다.&rdquo;(이규일) &ldquo;나무 심는 일이란, 곧 자신의 마음에 수심을 심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인은 뜰 앞에 심어 놓은 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는 등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기는커녕, 심은 나무가 자라면 자신의 수심도 그만큼 늘어나고 깊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rdquo;(송행근)</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사실주의 - 강도 높은 현실 비판 의식</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개인의 병력과 가로막힌 관직이 이하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로 눈길을 돌리게 했을테지만, 신괴시<sup>神怪詩</sup>로 불리는 이 계열의 시는 고작 10여 수에 불과하다. 물론 그에게 시선<sup>詩仙</sup>내지 선재<sup>仙才</sup>라고 불렸던 이백에 견주어 시귀<sup>詩鬼</sup> 내지 귀재<sup>鬼才</sup>라는 칭호를 선사한 것은 이 계열의 시 10여 수와 그의 시에 그들먹한 기괴한 상상력 덕분이지만, 그 때문에 소홀히 취급받은 현실에 바탕한 사실주의적인 시들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정약용의 「스스로 거세한 남자를 슬퍼함<sup>哀切陽</sup>」을 떠올리게 하는 「느낀 바를 풍자함 - 하나」를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함포엔 진주가 없고<br /> 용주엔 귤이 없네<br /> 조물주의 힘이야 족히 알지만<br /> 태수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네<br /> 아낙들이 베를 짜지 못한 것은<br /> 어린누에들이 이제야 꿈틀거리기 때문이네<br /> 현관이 말을 타고 오는데<br /> 성난 수염 규룡의 모습이라<br /> 가슴에서 판을 꺼내는데<br /> 판에는 글이 몇 줄 쓰여 있어라<br /> &ldquo;태수가 노하지 않았다면<br /> 어찌 네 집을 찾아왔으리&ldquo;<br /> 아낙은 현관에게 절을 하며<br /> &ldquo;뽕잎이 아직 작으니<br /> 늦봄까지 기다려야<br /> 겨우 베틀을 돌립니다&ldquo;<br /> 아낙이 애원을 할 때<br /> 시누이는 좁쌀로 밥을 짓네<br /> 현관이 음식을 남기고 떠나면<br /> 부리가 다시 찾아와 마루에 오른다 (이규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시의 원제는 「感風五首 其一」인데, 감풍<sup>感風</sup>은 풍자와 같은 말이다. 이 시에 나오는 함포와 용주는 각기 진주와 귤의 산지인데, 산지에 진주와 귤이 없다니 그만큼 수탈이 심했다는 뜻이다. 또 뽕잎과 누에가 다 자라지 않았는데도 베를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관리의 행태로부터, 한 숨 돌릴 틈조차 없었던 백성의 곤경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관<sup>縣官</sup>이 가자마자 지방의 말단 관리인 부리<sup>簿吏</sup>가 들이닥치는데, 이것은 중당 시기 현실 풍자시의 전형적인 창작 기법이라고 한다. 이 시뿐 아니라, 「마시 스물세 수<sup>馬詩二十三首</sup>」&middot;「황가동<sup>黃家洞</sup>」&middot;「환관 사령관이 밤 지샐 대까지 즐김<sup>貴主征行樂</sup>」같은 시들을 보면, 혁명적이라 할만큼 강도 높은 현실 비판 의식을 엿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하는 초자연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신에게 부르는 노래<sup>神鉉曲</sup>」 같은 시와, 방금 읽은 「느낀 바를 풍자함」과 같은 현실 풍자시를 더불어 썼다. 이하는 이 두 계열 외에도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나 「궁녀를 노래함<sup>宮妵歌</sup>」처럼 여성 화자를 빌려 애틋한 연애 감정을 드러내거나 여성의 애환을 노래한 작품, 그리고 「황두랑<sup>黃頭朗</sup>」․「공후를 타며<sup>箜篌引</sup>」 같이 떠나간 남편을 그리는 규정<sup>閨情</sup>을 읊은 시도 많다. 약 30~40수에 이르는 이 계열의 작품 가운데, 「붉은 옷 그만 빨아요」혹은 「붉은 옷 빨지 마세요」라고 번역되는 작품을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붉은 옷 그만 빠세요<br /> 여러 번 빨면 붉은 색 바래지니<br /> 당신께서는 젊음을 자랑했었지요<br /> 어제 은교<sup>殷橋</sup>에서 만났을 적에<br /> 벼슬하면 빨리 돌아오세요<br /> 시위 떠난 화살 되지 마시고 (송행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시 역시 내가 처음 읽은 이동향 선역에 실려 있는 것이니, 그걸 다시 보고 싶다. 붉은 색 옷을 자주 빨면 색이 엷어지는 것처럼, 젊음이나 애정도 시간이 흐르거나 오래 못 보게 되면 퇴색한다. 그러니 서울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어서 내게 돌아오라는 여성 화자의 안타까움이 베여 있는 이 시는, 이하가 많은 시에서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색채 감각이 두드러진다. 온갖 붉고 푸른 색깔이 어우러져 있었던 「나는 성성이 입술을 먹고」만큼은 아니지만, 붉은 옷과 타오르는 정념이 한 색깔로 섞여 여성 화자의 간절한 염원을 눈에 선히 드러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입이 없는 여성의 정한을 대신 노래해준 이런 작품들 때문에 &ldquo;이하는 귀족 출신으로 여색<sup>女色</sup>을 매우 탐하였고, 그의 시에 농염한 시들이 많다는 측면에서 색정 문학가로 평가&rdquo;(송행근)받기도 했다는데, 그것은 시인에 대한 오해다. 「소년을 비웃다<sup>嘲少年</sup>」같은 시는 죽었다 깨어나더라도, 색정에 빠진 문학가 따위가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살진 청총마[靑驄馬 ; 푸른색과 흰색 털이 뒤섞인 말]에 빛나는 황금 안장<br /> 비단옷에 스미는 진한 용뇌[龍腦 : 귀한 향의 이름]의 향<br /> 미인과 포개 앉아 옥 술잔을 건네는데<br /> 가난한 사람들은 천상의 도령이라고 부른다<br /> 특별히 지은 누각은 대숲에 가깝고<br /> 낚시를 드리워 연못에서 잉어를 잡는다<br /> 어떤 날은 꽃밭에서 취하고<br /> 뒤돌아 쏘는 황금 구슬에 새가 떨어진다<br /> 평생에 나그네 된 적 없다 하고<br /> 일생에 거쳐 간 미녀가 삼백이 넘는다 하네<br /> 그가 어찌 알리 땅 파는 농가엔<br /> 관아의 세금 독촉으로 베자는 처녀 하나 없음을<br /> 황금 보옥 쌓여 있어 위풍당당하고<br /> 빈객들과 인사하며 자신이 넘친다<br /> 이제껏 책 반 줄 읽은 적 없으나<br /> 오직 황금으로 귀한 신분 되었다<br /> 소년이라 어찌 영원한 청춘일까<br /> 바다의 파도도 한순간에 뽕나무 밭이 된다네<br /> 영화와 쇠락은 화살처럼 빠르게 뒤바뀌나니<br /> 하늘이 어찌 그대만을 편애하리<br /> 아름다운 청춘 영원하다 말하지 마오<br /> 백발과 주름진 얼굴이 그대를 기다린다오 (이규일 역)</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시인은 주색에 빠진 귀족 자제의 사치스러운 일상과 관가의 수탈로 농가의 처녀들이 부잣집 첩으로 팔려가거나 기녀가 된 상황을 생생하게 대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니, 이제라도 주색에서 깨어나기를 충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재미나게도 「붉은 옷 그만 빨아요」에 주해를 단 송행근은, 시 속에 나오는 &ldquo;경경<sup>卿卿</sup>&rdquo;이나 &ldquo;봉후<sup>封候</sup>&rdquo;와 같은 단어를 들어 &ldquo;시인이 봉예랑직을 수행하기 위해 아내와 이별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rdquo;고 적고 있다. 그는 말미의 해설에서도 &ldquo;그의 시 「출성<sup>出城</sup>」 등에 결혼 생활에 연관되는 &lsquo;경경&middot;학병<sup>鶴病</sup>&rsquo; 등의 시구가 나타나는 걸로 봐서 결혼은 한 것으로 보인다&rdquo;라고 재차 시인의 결혼 여부를 확정했다. 하지만 이규일의 해설에는 &ldquo;이하는 또 일생 동안 결혼하지 못했다고 한다&rdquo;라고 나와 있다. 송행근이 근거로 삼은 「출성」은 해설에 나온 제목과는 다른 「장안을 떠나며」라는 제목으로, 그 자신이 선역한 『이하시선집』에 실려 있다. 이 시에는 분명히 &lsquo;아내&rsquo;가 등장한다. 그 부분을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만 리나 떨어진 장안에 와서 과거를 보았으나<br /> 관인<sup>官印</sup> 없기에 스스로 슬픔을 감당하네<br /> 사랑하는 아내 애써 나를 위로하겠지만<br /> 거울에는 두 줄기 눈물이 떨어지겠지</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같은 선역자가 실어 놓은 「아우 보게나<sup>示弟</sup>」나 「돌아가는 꿈을 짓다<sup>題歸夢</sup>」는 오히려 그가 독신이었다는 증거로 읽힌다. 두 시를 차례대로 전문 인용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br /> 아우와 이별한 지 삼 년 만에<br /> 집에 온 지 열흘 남짓<br /> 녹령은 오늘 저녁 술인데<br /> 상질로 싼 책들은 예전 그대로구나<br /> 병든 몸 홀로 살아 있으니<br /> 세상에 무슨 일인들 없겠는가?<br /> 우마<sup>牛馬</sup>에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으니?<br /> 던진 주사위에 모든 것을 맡겼거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장안의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br /> 객지 서생은 창곡[昌谷 : 시인의 고향]을 꿈꾸었네<br /> 어머니는 기뻐 즐거운 웃음소리를 내고<br /> 동생은 산골 개울에서 푸른 미나리를 꺾는구나<br /> 집안 사람들의 두터운 사랑과 기대는<br /> 나에게 주린 배 채워 주길 바라지만<br /> 피곤에 지친 마음<br /> 등불만이 잠 못 이룬 눈 비춰 주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성 화자를 흉내냈던 이하의 궁체시<sup>宮體詩</sup>가 그의 혼란된 성정체성을 보여주는 게 아니듯이, 「장안을 떠나며」에 나오는 아내 역시 이하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식으로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이하가 죽은 뒤에 그의 시집에 서문을 쓴 두목이나 그에 대한 짤막한 전기를 썼던 이상은, 그리고 앞서 소개된 『신당서』의「이하전」이 그의 결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하는 당대<sup>唐代</sup> 뿐 아니라, 송대<sup>宋代</sup>의 대표적 문학 양식인 사<sup>詞</sup>, 원대<sup>元代</sup>와 명대<sup>明代</sup>의 여러 시인들 그리고 청대<sup>淸代</sup>에 이르러서는 『홍루몽』의 작가인 조설근<sup>趙雪芹</sup>에게까지 두루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근대에는 공자진<sup>龔自珍</sup>이 이하의 영향을 받았고, 루쉰과 마오쩌뚱도 그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이 독후감에서는 이하의 본령인 신괴시 계열의 시를 한 편도 소개하지 않았다. 까닭은 초자연적인 세계나 유계<sup>幽界</sup>에 크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내 좁은 소견머리 탓이다. 다음 기회에는, 세 사람의 선역자가 미처 거론하지 못한, 중국 현대 시인들에 끼친 이하의 영향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이다. 시 쓰는 일에 이십대 초반을 모두 바쳤던 시절,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시인은 마야코프스키&middot;이하&middot;T.S. 엘리엇이다. 엘리엇은 꽤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살았지만,&nbsp; 마야코프스키와 이하는 평균인들의 성공이나 행복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세 사람이 내 시작에 미친 영향을 세세히 밝히는 것은 부질없지만, 스무 살 무렵에 쓴 시들 가운데 &lsquo;무덤&rsquo;이나 &lsquo;요절 충동&rsquo;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마야코프스키와 이하의 영향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 「길목집」&middot;「편지」&middot;「지하인간」을 차례대로 실어 본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trong><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길목집</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봄이 오면 들러 주십시오<br /> 강정가는 길목의 나의 집</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들 발걸음이 울릴 때<br /> 나는 부르짖습니다<br /> 눈 뜨고 입 벌리면<br /> 흙이 차고 들어오는 여기에서<br /> 나는 당신이 그리워 부릅니다<br /> &ldquo;여보세요,<br /> 들리십니까?&rdquo;</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걸음을 멈추십시오<br /> 나 있는 곳 너무 어두워<br /> 아가씨의 흰 종아리<br /> 정말 보지 못합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걸음을 멈추십시오<br /> 둥글고 파란 지붕<br /> 이게 나예요!</span></span></p> <span style="color: #666699"><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trong><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편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무덤 속에 내가 있을 대는<br /> 당신이 불러도 대답 않으리.</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산 아래 마을 겨울의 남은 얼음은 녹아 흐르고<br /> 동구에 복사꽃 피고 또 난리진다 하고<br /> 떠흐르는 버들씨앗 속에 온 세상이 <br /> 혼자 취해 흔들리는 날<br /> 한 번만 같이 살아 보자고<br /> 봉숭아 꽃 그늘이 진 지방 지방<sup>紙榜</sup>에 <br /> 고운 우표 동동 띄워 부친다 해도,</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귀와 콧구멍, 눈과 입 속으로 <br /> 흙이 차고 들어와<br /> 대답은커녕 나는<br /> 울음소리조차 못 낼 것이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지하인간</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내 이름은 스물두 살 <br />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무덤이 둥근 것은 <br />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br />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br />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br />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br />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br />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br />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 먹으리</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nbsp; <br />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br />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br /> 말없는 찬사이므로.<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nbsp;</span></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30 오전 10:09:00클레망의 ‘정원으로 가는 길’<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1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3_%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어판 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작은 책에서 제안하는 정원의 이야기는 보다시피 길지 않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전 세계에서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두꺼운 책 여러 권에 수많은 이미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독자는 하나의 글로 이루어진 제안을 바탕으로 몇몇 공간을 상상하는 데 만족해야 할 테다. 그런데 대체로 보이는 것을 다룬 어떤 주제를 논할 때 최소한의 삽화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한다. 공간에서의 표현을 넘어서― 몸으로 여러 장소를 누비고 그 넓은 땅을 스쳐가며 다른 모든 감각을 통해 그 풍요로움을 지각하기를 권유하며― 정원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 이야기는 말들로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답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하나의 &lsquo;이야기&rsquo;를 하는 정원들의 &lsquo;역사&rsquo;를 말하기위해서도 이 책에 포함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페이지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관건이 되며, 나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독자를 대상으로 할 때, 따로 설명해둬야 할 점도 있다. 이 책에서 아시아, 적어도 그 북부는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풍요로운 문화를 통해 화려한 건축과 훌륭한 정원을 낳은 지역에서 왜 이런 누전<sup>漏電</sup>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다. 나는 정원사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땅에 대한 실험―만을 이해하려는 이런 고집 때문에 나는 이 실험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이고, 여행은 이 실험의 일부를 이룬다. 하지만 중국과 한국에서의 체류는 너무도 짧았고,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곳저곳 움직이다 보니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런 탓에 나는 궁궐과 사원, 그리고 이곳을 둘러싼 정원의 건축, 때로는 자연의 손길로 빚어지거나, 왕릉을 이루는 저 웅장한 봉분들처럼 기묘한 인공의 손길로 만들어진 놀라운 풍경을 지배하던 저 엄청난 깊이의 사유와 세련미를 그저 멀리서만 감지했을 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적인 평온을 추구하며 몸과 마음 모두를 위해 마련된 이 장소에서 하루쯤 시간을 내서 명상에 나 자신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1998년 가을의 그 날 저녁, 경복궁 정원의 장엄하고도 간결한 건축은 마치 모든 것이 안개로 이루어진 듯 창백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는 단풍이 빛깔을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정원과, 이제 그 누구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도 &lsquo;삶의 기술&rsquo;이라고 일컬을 만한 그 무엇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뒤얽힘에서 비롯되는 듯했다. 나는 유럽에서는 낯설기만 할 어떤 물건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대신, 마루 아래 설치된 저 놀라운 난방 장치를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서도 편안함을 창시하는 우아한 방식이었다. 거기서 내게, 동물들이 그 어떤 행복감으로 그렇게 하듯 바닥에 웅크리고 싶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야 하리라.</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3월<br /> 질 클레망</p>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3_%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EC%95%99%EB%93%9C%EB%A0%88%EC%8B%9C%ED%8A%B8%EB%A1%9C%EC%95%B5%EA%B3%B5%EC%9B%902.jpg" /><h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1장 <br /> 아프리카, 유목에서 정착까지<br /> </strong></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방랑을 그만두기로 하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젱[Dzeng, 카메룬 중부 지역의 마을] 숲의 늪 지대는 가시 달린 종려나무들로 뒤덮여 있다. 이 종려나무들은 키 큰 나무들의 보호 아래 서로 뒤엉키며 자라난다. 젱의 주민들은 통나무배를 타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그때마다 배가 지나간 자국이 미동조차 없던 물 위에 천천히 그려졌다가 사라진다. 어린아이, 노인, 어부, 혹은 마약을 운반하는 자들은 긴장한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아주 여유 있게 자기가 맡은 일에 몰두한다. 먹처럼 새까만 혈맥이 무늬처럼 갈라지며 온통 푸른색인 몸체를 관통하는 대형 나비 살모식스가 어슴푸레함 속에서 반짝 어른거리며 얼핏 우리 눈에 들어온다. 그러곤 튼튼해 보이는 날개로 힘차게 날아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드넓은 숲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는 이 아프리카 고장에서는 살모식스를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이 나비는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 서편, 그러니까 드야 강변을 지나 콩고 국경으로 이어지는 일대에 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북쪽의 건조한 대초원을 뒤로한 채 나무가 우거진 카메룬의 습지대를 통과했다. 숲 가장자리의 외진 장소에 광선 덫을 설치하고 야행성 종들을 유인해 그 행태를 연구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였다. 간단한 매뉴얼만 있으면 날이 어두워질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 30분 간격으로 어떤 종이 나타나는지 관찰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기온을 거의 2분의 1도까지 꼼꼼하게 기록하고 달의 상태와 풍속<sup>風速</sup>도 적었다. 우리에겐 밤에 빛이 없고 그다음 날 비가 내리는 상태가 유리했다. 그런 조건에서 부화와 다산<sup>多産</sup>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곤충들은 환히 밝혀진 수은등에 유혹당해 두 개의 말뚝 사이에 씌워놓은 사냥용 천에 내려앉는다. 부속장치가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수은등의 전구는 세로가 가로보다 길고 깨지기 쉽기 때문에 야영지를 옮길 때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텐트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바람에 잠잘 곳이 없어져버린 이후로 우리는 오두막집에서 기거했다. 이동 중에 제공받은 원주민들 소유의 이 초가집은 연기에 그을려 검게 변색됐고 바닥에는 짚을 넣은 우툴두툴한 매트가 깔려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앙투안 르두알라는 협상과 통역을 맡은, 우리의 해결사다. 4리터 휘발유로 100킬로미터를 가는 우리의 자동차는 발전장치와 비축용 휘발유, 식량을 잔뜩 싣고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주변의 대형 자동차들은 진창에 빠져 꼼짝도 못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자동차는 불편한 비포장도로를 가볍게 통과했다. 마치 홍토와 범람지대 위를 떠다니기라도 하듯 말이다. 차에 탄 우리 세 사람은 다른 차들을 보며 놀랐다. 1974년만 해도 사륜구동 자동차는 거래 자체가 잘 되지 않았다.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lsquo;랜드로버&rsquo; 자동차들을 바큇자국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윈치를 밧줄로 나무에 매어 고정시켜 놓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자동차들을 추월하면 이 자동차들이 다시 우리를 따라잡고&hellip; &hellip;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오지<sup>奧地</sup> 경주를 벌였다. 그러고는 경기 결과를 결산해 보기 위해 자동차를 멈춰 세우곤 했다. 이번에도 또 한계를 넘어섰다. 드야 강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탐험가라는 핑계를 댔다. 아프리카 낮나방들 중에서 가장 큰 파필리오 안티마쿠스 암컷에게 접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파필리오 안티마쿠스의 암컷 표본 하나는 파리 박물관의 귀중한 소장품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런던에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수컷은 자진해서 길 옆에 모습을 드러낸다. 글라이더나 장난감처럼 소리 없이 움직이는 수컷은 열대의 대기 속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암컷은 나무 꼭대기에 몸을 감춘 채 결코 내려오지 않는다. 오직 피그미족들만 이 나비의 유충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고 암컷도 찾아낼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598" height="57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3_%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ED%85%8C%EB%B2%A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의 목표는 피그미족들을 만나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피그미족은 여전히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프리카 연안에 살고 있다. 가봉의 넓은 지역과 카메룬 남부를 포괄하는 이곳에는 체구가 작은 숲코끼리와 물사슴, 고릴라, 초록원숭이, 심지어 에볼라 바이러스도 서식한다. 이 바이러스는 가봉의 나무숲 최상층에서만 제한적으로 활동하는 절지동물문(곤충을 포함해서)에 기생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에는 초록원숭이가 옮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여행을 하던 당시만 해도 이 바이러스가 지금처럼 엄청난 피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줄라보 제2구역에서 원숭이의 최상급 부위인 엉덩이를 대접받았다. 우리는 손님들을 위해 준비된 이 요리를 거부감 없이 먹어치웠다. 훌륭한 요리였다. 이 고기를 나눠 먹는 것은 하나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죽음의 의식이 돼버렸다. 1998년 라도데심 탐사단<sup>Mission Radeau des Cimes</sup>이 머물던 마칸데 야영지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가봉의 숲 한가운데서 마을 주민 전체가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오직 하나의 원인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벌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경을 따라 흐르는 드야 강에 도달하기 전의 마지막 야영지인 줄라보 제2구역에는 아프리카 오지의 숲 속 공터라면 으레 그렇듯 식민지 건축물 건축 기준에 따라 처마와 함석지붕을 얹어 얼기설기 지은 무료보건소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간이주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정부뿐만 아니라 과세<sup>課稅</sup>의 신께서도 역시 임무를 주어 파견한 것이 틀림없는 네덜란드 수녀들은 인구조사를 하고 세금을 매기는 등 이곳에 피그미족들을 정주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사적 기록들에 따르면 피그미족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족과 사헬 지대의 뵐족, 호주의 애버리지니족, 북극의 이누이트족 그리고 다른 몇몇 부족과 함께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유목민 사회라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목민들은 정원을 만들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냥을 하고 고기를 잡고 채취를 하는 피그미족은 야영지를 정하면서 숲 속에 빈터를 만든다. 갖고 있는 연장이 조악한 탓에 그들은 잘린 면이 들쑥날쑥한 채로 밑동만 남기고 나무를 대충 잘라낸다. 낮고 둥근 오두막집을 지을 때는, 쓰러뜨린 나무에 붙어 있는 나뭇가지들에서 적당히 가늘고 낭창낭창하며 긴 것들만 골라서 사용한다. 임시로 살 집을 만드는 것이다. 피그미족들은 허리를 숙이고 터널 모양의 유일한 출입구를 통해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야영지는 걸어서 왕복 하루 걸리는 거리의 반경 내에 정해지고 이 유목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이상 제공할 수 없게 되면 버려진다. 그 뒤에는 숲이 다시 자신의 권리를 찾는다. 유기물<sup>遺棄物</sup>로 이루어진 야영지는 부식토로 되돌아가고, &lsquo;제2의&rsquo; 식물이 숲 속 빈터를 차지하고 그곳을 무성하게 뒤덮으면 원래 있던 큰 나무들이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초의 숲들이 유목민의 영향을 받아 2차화되는 것은 현대에 이루어진 대규모 개발의 여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오래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20세기 이전에는 2차화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의 대규모 삼림들이 최초의 체계(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를 위협받는 일은 결코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줄라보 제2구역 근처에 있는 피그미족의 야영지로 접근하던 우리는 숲 속에서 무슨 사고가 일어난 줄 알았다. 나무들이 꼭 싸움터에서 치명상을 입고 죽음의 고통을 참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땅바닥에는 마른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뜨거운 태양에 달구어진 빈터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눈부신 햇빛이 그 불안정한 땅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어떤 힘이 작용했던 것일까? 전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숲을 그렇게 만들어놓을 정도의 격렬한 감정이 왜 들었던 것일까? 피그미족들은 늘 이런 식으로 격렬하고 난폭하게 행동했던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드야 강가의 피그미족 야영지는 진짜 야영지가 아니었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야영지가 아니라 사실은 일종의 전진기지로서 처음으로 정착을 시도한 마을이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세계 곳곳에 침투한 정착수단들을 알고 있다. 알코올과 마약, 슈퍼마켓 말이다. 원주민 거주지역이라는 자의적인 이름이 붙여지기에는 자못 광대한 영토 안에 이 모든 것이 있다. 그리고 이 거주지역에서 원주민 부족은 정착수단의 원조를 받아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숲으로 뒤덮인 카메룬과 가봉 국경에 있는 줄라보 제2구역 너머, 그러니까 드야 강가에 사는 정착 피그미족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1974년 7월(이곳의 짧은 우기는 부화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오두막집과 같은 자재로 지었지만 형태는 전통적인 열대지방 가옥인 어느 주택 앞의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우리는 이 난쟁이 인간들에게 파필리오 안티마쿠스의 암컷을 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얘기했다. 빗방울이 이중으로 경사가 진 지붕을 흘러내리더니 차곡차곡 쌓아놓은 판다누스 잎사귀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 주저주저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우리를 쳐다보다가 자기들이 주의를 기울여 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의 통역 겸 안내인 겸 조수인 앙투안은 그들의 언어를 알지 못했다. 피그미족이 아닌 그 지역 사람 하나가 우리를 도우러 왔다. 우리는 나비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걸 보자마자 그들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우리 존재를 잊어버린 듯했다. 한 사람은 줄을 팽팽하게 당겨서 만든 악기를, 또 한 사람은 작은 실로폰을 가지러 갔다. 우리가 나비 얘기를 했으니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음악이. 당신들은 그 대가로 우리에게 뭘 줄 거요? 당신들은 세계를 약탈하러 왔으면서 왜 거의 항상 빈손으로 나타난단 말이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3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3_%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EB%B2%A0%EB%A5%B4%EC%82%AC%EC%9C%A0%20%EC%A0%95%EC%9B%9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드야의 피그미족들은 우리에게 파필리오 안티마쿠스 암컷을 보여주지 않을 태세였다. 우리가 때를 잘못 맞춰 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과감해 보이는 피그미족이 내 손을 잡았다. 그는 우리를 오두막집 너머로 데려가더니 울타리가 쳐진 땅 앞에 멈춰섰다. 네모진 화단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고 감탄해야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들이 온몸으로 그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잔뜩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몸에서는 극도의 불안감이 풍겼다). 그것은 현대적이며 위태로운 체험이자 광적이며 기묘한 체험, 우리를 땅으로 불러들이는 체험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정원으로 불러들이는 체험이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은 우리에게 정원을 보여준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것은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초기적인 형태의 정원이었다. 동시에 가장 인상적인 정원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땅콩 세 그루와 카사바 다섯 그루, 바나나나무, 토란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무슨 나무인지 구분이 안 되는 나무 한 그루 등에서 나오는 약간의 소출을 보호하기 위해 대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땅이 아프리카의 숲 한가운데 외딴 곳의 폐허로 변한 빈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이곳에 미래가, 사유의 조직체가, 최초의 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중에 여행을 하면서 나는 정착한 모든 유목민족들이 정원을 만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정원이 지구상 어느 곳인가의 유목민족들 중 하나가 정착하면서 생겼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역사상 최초의 정원은 역사책에 나오는 최초의 정원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목 활동을 그만두고 그들의 영토 어느 한 지점에 정착한 민족들의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정원, 바로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정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주 잘 꾸며놓은 사막의 오아시스는 유목민의 노정 위에 위치하는 숙영지로서 여행자들을 위한 지표 겸 정원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아시스의 정원사들은 결코 길을 떠나지 않고 정원에서 산다. 정주사회가 거기 멈춰선 유목사회와 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던 오아시스의 원형으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알제리의 가르다이아와 리비아의 가다메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드야에서 겪은 경험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초의 정원은 방랑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던 인간의 것이었다. 어떤 인간이나 어떤 사회의 삶에, 이 단계를 위한 시대는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초의 정원은 식량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다. 채소밭이 최초의 정원이다. 채소밭 정원은 시간을 초월한다. 채소밭으로부터 정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원의 역사를 관통하는 모든 시대마다 깊은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초의 정원은 울타리 쳐진 땅<span style="color: #800000"><strong><sup>1</sup></strong></span>이다. 울타리를 두른 땅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꽃과 동물, 생계수단 등 정원의 소중한 재산들을 보호하는 데 적합했다. 어느 시대든 그런 것들을 잘 지켜내야 가장 좋은 정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화적 규범에 따라 최고의 정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달라졌고 또한 정원의 유형이 결정되었다. 가장 좋은 것, 매우 소중한 것의 개념이 시대마다 변화되어 왔다. 가장 좋은 정원의 가치를 고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정원설계술은 정원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이 변화할 때마다 그에 발맞춰야 했다. 그러나 정원의 원칙은 언제나 같았다. 즉 낙원<span style="color: #800000"><strong><sup>2</sup></strong></span>에 최대한 가까워야 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hr /> <span style="color: #800000">1</span> 정원이라는 단어는 울타리 쳐진 땅(라틴어 Hortus conclusus)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Garten에서 파생되었다.<br /> <span style="color: #800000">2</span> 낙원(paradis)은 라틴어 paradisus와 그리스어 paradeisos에서 파생되었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페르시아어 pairidaeza(울타리를 두른 땅)와 pairi(&lsquo;주변&rsquo;을 뜻하며 그리스어 peri를 탄생시킴), daeza(성채)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낙원 혹은 정원은 무엇보다도 성채이자 보호구역이다.<hr />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8"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3_%EC%A0%95%EC%9B%90%EC%9C%BC%EB%A1%9C%20%EA%B0%80%EB%8A%94%20%EA%B8%B8/%EC%A0%80%EC%9E%90_%EC%A7%88%ED%81%B4%EB%A0%88%EB%A7%9D.jpg" />질 클레망</strong> Gilles Cl&eacute;ment<br /> 1943년 프랑스 앵드르 출생. 원예가이자 조경 디자이너이며 식물학자 및 곤충학자이다. 소설 몇 편을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에서 수학했고 오랫동안 교수로 가르쳤다. 2011년 말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rave;ge de France)의 교수다. 유년시절 정원에서 아버지를 돕다 농약에 중독되어 이틀간 혼수상태에 빠진 경험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정원의 대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85년 공모전을 통해 설계에 참여한 앙드레 시트로엥 공원은 예술적이며 생태적인 정원 디자인으로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프랑스와 유럽은 물론 칠레, 뉴칼레도니아, 발리 등 세계 각지에 공공정원을 조성하며 독창적인 생태주의 정원 철학인 &lsquo;움직이는 정원&rsquo;, &lsquo;제3의 풍경&rsquo;, &lsquo;지구 정원&rsquo;을 실현해 보이고 있다. 『움직이는 정원』(1991), 『토마와 여행자』(1997), 『행성의 정원』(2007), 『아홉 개의 정원: 지구 정원에 대한 접근』(2008), 『계곡에서: 생물학적 다양성과 예술, 그리고 풍경』(2009) 등 많은 저서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재형<br /> </strong>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상명대, 강원대, 한국외국어대에서 강사로 일했다. 현재는 프랑스에 머물며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레이스 뜨는 여자』, 『황새』, 『레제르 만화 컬렉션 2』, 『카트린 드 메디치』, 『프로이트 평전』, 『사막의 정원사 무싸』, 『이중설계』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7 오전 11:02:00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img alt="" width="600" height="93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2_%EC%8B%A0%20%EC%97%86%EB%8A%94%20%EC%82%AC%ED%9A%8C/%EC%8B%A0%EC%97%86%EB%8A%94%EC%82%AC%ED%9A%8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말<br /> 신 없는 사회에 대하여</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요즘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광적인 형태의 이슬람교가 중동 전역에서 점점 인기를 얻으면서 정치적으로도 더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레바논이나 이란처럼 40년 전에 어느 정도 세속화되었던 이슬람 국가들도 지금은 근본주의로 가득하다. 터키와 이집트에서는 종교적인 헌신을 새로이 다짐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다시 베일을 쓰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종교가 번성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만의 현상이 아니다. 브라질에서 엘살바도르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복음주의가 성공적으로 전파되면서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활기차고 거룩한 종교적 열정을 심고 있다. 오순절교회도 활발히 세력을 넓히는 중이다. 라틴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는 물론, 심지어 중국까지 진출할 정도다. 필리핀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제적 번영을 중시하는 교리를 지닌 엘샤다이 같은 새로운 종교운동에 투신하고 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무신론을 강요받았던 구소련의 많은 나라들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도 신앙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강하고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종교적인 활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캐나다조차도 영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에서 르네상스를 겪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저명한 종교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의 말을 빌리자면, &ldquo;세계 대부분의 지역이 종교적 열정으로 들끓고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에서 종교는 틀림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실 미국에서 종교는 하느님&middot;예수&middot;성경에 대한 믿음, 교회 출석률 등을 기준으로 할 때 대부분의 선진 민주국가들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하고 활기차다.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 남부 일대를 차로 돌아다녀만 봐도, 예수나 하느님, 성경을 찬양하는 범퍼 스티커를 붙인 차가 세 대에 한 대꼴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의 종교적 열정은 범퍼 스티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최근 애리조나 주 투손에 갔다가 시내 전역에 주님에 대한 예배와 기도를 권하는 광고판들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미국에서 종교는 이처럼 수많은 범퍼 스티커와 광고판을 낳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으로 종교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방송되고 있다. 정치가들 또한 공화당이나 민주당을 막론하고 공개적으로 종교적인 발언을 할 때가 그 어느 때보다 많으며, 자신의 신앙을 강조하는 데 특히 노력을 기울인다. 미국 국민도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사실 2004년에, 조지 W. 부시가 기도로 하느님께 조언을 구한 끝에 이라크를 침공하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발언은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서 부시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거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약하자면, 네브래스카 주에서 네팔에 이르기까지, 조지아 주에서 과테말라에 이르기까지, 유타 주에서 우간다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의 인간들은 현재 다양한 신들을 열심히 찬양하고 있으며, 교회나 절이나 사원의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경전을 꾸준히 공부하고, 신성한 의식을 착실히 수행하고 영적인 의식을 활기차게 실천하며, 죄악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려고 진지하게 애쓰고 경건한 마음으로 단식하고, 열정적으로 점점 더 많은 기도를 하고 노래와 찬양을 하고 이런저런 구세주나 예언자나 신을 사랑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모든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세상에는 눈에 띄게 비종교적인 곳이 몇 군데 존재한다. 비록 드문드문 흩어져 있기는 해도, 오늘날 세상에는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열정과 교회 출석률이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곳들이 분명히 있다. 세상의 대세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이처럼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곳들은 그 어느 때보다 종교적인 다른 곳들과 반대로 그 어느 때보다 덜 종교적이다. 아니, 애당초 종교적인 열정이 그다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 특별히 두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덴마크와 스웨덴, 이 두 나라는 십중팔구 세계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국가일 것이다. 어쩌면 역사를 통틀어서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전 세계에서 신앙이 생생하게 활기를 띠고 신성함이 파도처럼 거대하게 부풀어가는 와중에, 덴마크와 스웨덴은 작지만, 행복하고 튼튼한 세속주의의 배처럼 떠 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예수나 비슈누에게 예배를 드리지도 않고, 경전을 애지중지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위대한 종교들의 기본적인 교리를 그다지 믿지도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환경을 중시하는, 깨끗한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는 하느님을 말하는 사람도 신학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쏟는 사람도 거의 없다. 최근 들어 그곳의 대중매체들도 종교에 대해 이례적으로 보도를 많이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조차 세상 여기저기에서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이상하고 낯선 현상, 즉 종교적 열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이 종교적 열정은 모든 사람에게 불길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에게만은 예외다. 만약 비종교적인 사람들을 위한 지상 천국이 존재한다면, 현재의 덴마크와 스웨덴이 바로 그곳일 가능성이 높다. 이 두 나라에는 색다른 모습의 마을들,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들, 아름다운 숲, 인적 드문 해변, 건강한 민주주의 체제,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범죄율과 부정부패, 뛰어난 교육제도, 혁신적인 건축, 강한 경제, 탄탄한 지원을 받는 예술, 성공적으로 발현되는 기업가 정신, 깨끗한 병원, 맛있는 맥주, 무상 의료, 개성이 강한 영화들, 평등한 사회정책, 멋진 디자인, 편안한 자전거 도로 등이 있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별로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2005년 5월부터 2006년 7월까지 14개월 동안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살았다. 아내와 두 딸도 함께였는데, 그곳에 있는 동안 아이가 하나 더 태어났다. 우리가 살던 곳은 덴마크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오르후스였다. 그곳에 사는 동안 나는 덴마크 사회를 최대한 많이 관찰하면서 연구하고,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글도 최대한 많이 읽고, 덴마크 전역을 최대한 많이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비종교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들 개인의 종교적 믿음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사실은 그런 믿음이 아예 없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어떤 자리에서든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카페테리아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이웃집 디너파티에서 과자를 씹고 있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비공식적인 대화 외에도, 나는 미리 준비된 정식 심층 인터뷰를 150건 가까이 시행했다. 녹음기와 메모지와 펜을 손에 들고 앉아서, 나이와 학력을 불문하고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개중에는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7학년이나 8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도 많았다. 대도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나 중소 도시 출신도 있었다. 직업도 다양해서 요리사, 간호사, 컴퓨터 기술자, 교수, 예술가, 변호사, 도축장 직원, 유치원 교사, 심장외과 전문의, 농부, 경찰관, 언론인, 고등학교 교사, 잠수함에서 근무하는 군인, 정신과 의사, 사회복지사, 그래픽디자이너, 전업주부, 식품점 점원, 공학자, 상점 관리자, 소기업 사장, 물리치료사, 세금 컨설턴트, 캐스팅 담당자, 비서, 우체국 직원, 학생, 수위, 실업자 등이 인터뷰에 응했다. 심지어 베이스 연주자도 한 명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많은 덴마크인, 스웨덴인과 나눈 심층 대화를 통해 나는 상대적으로 비종교적인 사람들의 삶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미미하고 주변적인 사회에서 삶의 본질이 어떤 모습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분석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이 책은 개인적인 성찰의 결과물이자, 내가 지상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지역에 살면서 발견하고 경험하고 새로이 배운 것들에 관한 사회학적 분석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은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 즉 비종교적이거나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대단히 중요하지만 거의 연구되지 않은 인구 집단에 속하는, 비교적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을 사회학적인 렌즈로 바라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중요한 문제들도 다루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선 나는 신이 없는 사회가 단순히 가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단히 점잖고 쾌적한 곳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라는 건 알지만, 내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지상의 지옥이 될 거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입에 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하느님이 없는 사회는 부도덕이 판치고, 사악함이 가득하고, 타락이 들끓는 곳이 될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안전하고, 건전하고, 도덕적이고, 번영하는 나라다. 사실 이 두 나라가, 적어도 사회학의 표준적인 기준에 따르면, 세계 &lsquo;최고&rsquo;의 국가에 속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종교적 근본주의가 점점 세력을 얻고, 종교와 정치가 더욱 강하게 결속하는 시대에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종교적인 믿음이 사라져도 여전히 훌륭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믿음이 없어도 사람들은 건실한 법을 만들어 지킬 수 있고, 도덕과 윤리로 이루어진 합리적인 제도를 잘 따를 수 있다. 하느님을 찬양하는 열정이 사그라지고, 기도를 포기하고,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예의 바르게 대할 수 있다. 학교와 병원도 여전히 문제 없이 잘 돌아가고, 범죄율도 여전히 미미하고, 아기와 노인도 여전히 필요한 보살핌을 받고, 경제도 여전히 번영하고, 공해도 여전히 잘 억제되고, 사람들이 속도위반 범칙금도 여전히 잘 내고, 아이들도 여전히 따뜻하고 안전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랄 수 있다. 하느님이 일상생활의 핵심 요소로 존재하지 않아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두 번째 목적은 종교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독특한 세계관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사람들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을까? 자신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처할 방법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에 종교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이론에 따르면 그렇다), 종교에서 위안을 얻으며 심리적 안정을 구한다는 것이다. 대체로 옳은 주장이기는 해도 이 이론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특히 수많은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에게는 틀림없이 적용되지 않는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무시무시한 사신<sup>死神</sup>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죽음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그래서 가깝거나 먼 미래에 자기들의 존재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거나, 또는 불편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오르후스에서 호스피스 간호사로 일하는 마흔세 살의 안네가 무척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면서, 무신론자들이 대개 임박한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안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안네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이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이 망가져서 죽음을 가장 힘들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죽음의 공포가 인간에게 불가피한 현실이며, 따라서 이 &lsquo;보편적인&rsquo;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종교가 &lsquo;필요&rsquo;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커다란 의문을 제기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의 공포 외에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곳에 살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는 과연 무엇이냐는 무겁고 거창한 의문에 답변을 제공해주기 때문에 종교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을 때 종교에 기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는 그런 사람이 별로 없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는 궁극적으로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lsquo;없다&rsquo;고 믿는다고 단호하게 주장한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여전히 도덕을 지키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데도, 그들의 삶에는 사랑이 있고 경제적 번영도 있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세속주의적인 사회에서 세속주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론들, 즉 종교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거나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라는 주장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어쩌면 의미심장한 도전을 제기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마지막 목적은 지극히 종교적으로 변해가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유난히 비종교적인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덴마크와 스웨덴이 비종교적인 나라들의 선봉에 서 있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 중에도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종교적 열정이 유난히 낮다고 평가되는 곳이 여럿 있다. 이 나라들(대부분 서유럽에 집중되어 있다)이 하느님이나 예수나 내세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들 나라의 어떤 점 때문에 종교가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 존재가 된 걸까? 나는 여러 훌륭한 사회학 이론과 내가 덴마크에 살면서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런 의문들의 답을 찾아보려고 애쓸 것이다. 덴마크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관찰했던 것들을 설명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p> <p style="text-align: center">(중략)</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부분의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온 세상에 죄악이 퍼져 있다거나,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아니, 아예 종교적인 &lsquo;죄악&rsquo;이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덴마크와 스웨덴에는 성경이 신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다. 북유럽 국가들의 교회 출석률 또한 지상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덴마크와 스웨덴 인구 중 상당수가 신을 믿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신은 자기들이 나름대로 해석해서 만들어낸 모호한 개념이다. 인간에게 벌을 내리거나, 분노하거나,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성경 속의 하느님과는 다르다. 게다가 북유럽인들은 이 모호하고 막연한 신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에 최소한의 의미만을 부여하고 있다. 덴마크의 사회학자인 올레 리스가 지적했듯이, &ldquo;살아가면서 신에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미적지근하고 다소 회의적인 것이 스칸디나비아인의 전형적인 태도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단히 헌신적인 근본주의자들이 여기저기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 찾아보면 심지어 신도가 많은 오순절교회도 하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진정한 신자들을 찾기란 다른 나라에 비해 힘든 일이다. 사회의 주변부에 극소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덴마크 전문가인 앤드루 벅서는 &ldquo;분명하게 정의된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보다는 과학에 기대는 사람이 대부분&rdquo;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스웨덴인 학자 에바 함베리에 따르면, 인격체의 특징을 갖춘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스웨덴인은 20퍼센트가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ldquo;아직 신을 믿는 그 스웨덴인들 중에도 믿음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덴마크나 스웨덴에서는 사람들이 신을 그다지 믿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살인을 그다지 저지르지 않는다. 덴마크인이나 스웨덴인은 원래 뚱하고 우울한 사람들이 아닌가? 미국인들 중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주님과 그토록 뚜렷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면 절망이 널리 퍼져 나갈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기도도 안 하고, 성경에는 뽀얀 먼지가 앉게 내버려두고, 일상적으로 예수를 찬양하지도 않고, 전능하신 주님에게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다. 이처럼 종교에 무지한 북유럽인들은 영혼 깊숙한 곳에서 공허를 느끼지 않을까? 불행하지 않을까? 하지만 에라스무스 대학의 루트 벤호벤 박사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벤호벤 박사는 나라별 행복도에 관한 세계적인 권위자다. 그는 최근, 전 세계에서 실시된 수많은 조사들로 축적된 점수를 분석한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91개국의 행복도 순위를 정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국민의 전체적인 행복도 면에서 전 세계에 우뚝 선 나라는 작고 평화롭고, 신의 존재가 비교적 미미한 덴마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인인 나는 그 나라에 살면서 스칸디나비아에 종교의 존재가 미미한 것에 매혹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때로는 안도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나 같은 비非신자 겸 불가지론자가 종교적 성향이 강한 미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종교가 공동체를 제공해주고, 희망을 심어주고, 가족 간의 유대를 강화해주고,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고, 중요한 의식과 통과의례로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는 등 좋은 역할을 아주 많이 한다는 점은 분명히 인정할 수 있지만, 미국처럼 종교적인 나라에서 사는 것이 항상 편안하지만은 않다. 미국에서 기도는 다이어트만큼이나 널리 퍼져 있고, 주요 도시의 경찰 국장들은 자기 관할구역에서 범죄율이 증가하는 것을 사탄의 탓이라고 말하고, 주지사들은 자연재해가 났을 때 주민들에게 기도로 가장 먼저 대처하라고 호소하고, 학교 이사회에서는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인간의 진화 과정을 가르치는 것에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한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내게는 덴마크에 산 것이 1년여 동안 세속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것과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덴마크나 스웨덴 문화에서 종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겠다. 내가 이 책에 『종교 없는 사회<sup>Society without Religion</sup>』 대신 『신 없는 사회<sup>Society without God</sup>』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 중 하나는, 루터교의 많은 요소들이 지금도 덴마크와 스웨덴 문화에 깊게 배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 대다수는 지금도 각각 자국 국교회에 소속되어 교회세를 내며, 교회에서 올리는 결혼식을 선호한다. 목사 앞에서 아이가 세례를 받게 하는 사람도 대다수를 차지한다.(참고로 요즘은 여자 목사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은 자식들이 사춘기 초입에 이르면 교회에서 견진성사를 받게 한다. 하지만 이처럼 분명하게 남아 있는 루터교의 흔적들조차 믿음이나 영적인 확신 때문에 지켜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보다는 문화적 전통이라는 의미에서 기독교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 국교회의 재정을 위해 1년 수입의 1퍼센트를 교회세로 낸다고 말했지만, 그건 순전히 &ldquo;다들 하는 일이기&rdquo; 때문에 지키는 규칙일 뿐이었다. 하느님이나 예수, 종교적 확신이나 믿음 때문에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인터뷰 대상자 중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 역시 순전히 &lsquo;전통&rsquo;이나 &lsquo;낭만&rsquo;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다. 시청에서 무미건조한 식을 치르는 것보다는 교회에서 아름다운 예식을 치르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덴마크에서 사는 동안 나는 덴마크 루터파 국교회 소속인 서른아홉 살의 목사 미켈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 미켈은 오르후스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조용한 마을에서 소수의 신도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집전한 결혼식은 200건에 이른다. 미켈은 항상 결혼식을 집전하기 전에 예비부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청이 아니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예비부부들이 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들려주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ldquo;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rdquo;라고 말할 것 같겠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200쌍 중에서 하느님을 언급한 사람들은 대략 열 쌍쯤 되는 것 같아요. 그중에 두세 쌍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했는지도 모르죠. 어쨌든 하느님을 언급한 사람들은 열 쌍, 그러니까 대략 5퍼센트예요. 나머지는 마치 &ldquo;그런 걸 왜 물어요? 당연히 전통이니까 하는 거죠&rdquo;라고 말하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군요. 내가 그런 걸 물어봤다는 사실 자체를 농담으로 생각할 거예요. &ldquo;이건 전통이에요. 오래된 교회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진짜 결혼식을 치러야죠. 아시잖아요&rdquo;라면서 말이죠.</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는 것 역시 아기의 영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전통 때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이 아니라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아기의 세례식을 치렀다고 말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철저히 비종교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아기가 세례를 받게 하는 스칸디나비아인의 사례를 보고 싶다면, 오르후스에서 컴퓨터 기술자로 일하는 스물네 살의 리세를 살펴보면 된다. 리세는 유틀란트 중부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부모님 역시 하느님도 믿지 않고 교회에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어렸을 때 리세의 친구들 중에도 하느님을 믿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사실 하느님은 리세의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에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리세도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예수도, 악마도,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덴마크인들이 그렇듯이 리세 역시 &ldquo;하늘과 땅 사이에는 뭔가가 있다&rdquo;라고 말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리세는 현재 약혼한 상태인데, 나는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아기를 키울 생각인지 궁금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아뇨.</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견진성사를 받게 할 건가요? 네. 세례도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이유가&hellip;&hellip;? 그게 일반적이잖아요. 다들 그렇게 해요.</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게 전부였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의는 믿지도 않으면서 왜 아기가 세례를 받게 하겠다는 거냐고 계속 물어보자, 리세는 그냥 어깨를 으쓱하며 그건 원래 덴마크인들이 다 하는 일이라는 말을 다시 했다. 내가 인터뷰한 기테라는 덴마크 여성도 마찬가지다. 오르후스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는 마흔 살의 기테는 조부모 대부터 신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다. 기테도 조부모나 부모와 마찬가지로 신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두 아이에게는 세례를 받게 했다. 나는 예수나 하느님을 전혀 믿지 않는다면서,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라는 신성한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교회에 앉아 목사가 하느님이나 예수에 관한 온갖 종교적인 말을 하는 걸 어떻게 가만히 들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기테는 목사의 말들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세례식은 좋은 경험이었으며 궁극적으로 자신은 세례식 자체를 &ldquo;문화적 행사 중 하나&rdquo;로 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견진성사에 대해서도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대부분이 순전히 &ldquo;다들 하는 일이기&rdquo; 때문에, 그리고 열네 살짜리 아이라면 거절하기 힘든 파티와 선물, 돈 등이 그 행사에 따라오기 때문에 치렀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이름만 남은 다양한 종교의식과 기독교 예식에 참가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례식에서 헌금에 이르기까지, 견진성사에서 교회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스칸디나비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루터교의 요소들은 종교적인 색채가 가미된 세속적인 전통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한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대부분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덴마크인 중 82퍼센트가 인간의 진화에 관한 다윈 이론의 증거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이는 서구 세계에서 진화론을 믿는 인구 비율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는 숫자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대부분의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성경의 신성함을 거부하고, 예수를 믿지 않고, 죄악이나 구원이나 부활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느님도 믿지 않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다니. 나는 1년간의 연구에서 이 의문을 반복적으로 파고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문화적 전통이나 역사적인 의미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내가 &lsquo;기독교인&rsquo;이라는 말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를 지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거의 한결같이 같은 것들을 강조했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자와 병자를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기독교인의 의미를 설명할 때 하느님이나 예수, 성경을 언급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거나 메시아였다고 믿느냐고 구체적으로 물어보자, 그들은 거의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저 없이. 그럼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거나 무덤에서 일어났다는 건?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대개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걸 묻는 게 바보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르후스 출신의 40대 중반 남자로 자그마한 가게를 소유한 안데르스를 예로 들어보자. 안데르스는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고, 예수의 신성은 믿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도 믿지 않고, 성경은 순전히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런데도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나는 인간의 좋은 점들을 믿는다. 그 좋은 점들이야말로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이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 노인을 보면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것 등등. 이런 것들이야말로 살아가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좋은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스웨덴 남부 출신으로 쉰여섯 살의 인적 자원 컨설턴트인 엘사의 경우도 살펴보자. 엘사 역시 하느님과 예수, 천국, 지옥, 성경을 전혀 믿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내가 그 말의 의미를 묻자 엘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예의 바른 인간이 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그래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기독교인이라는 말에 대한 미국인들의 전형적인 생각과는 다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주류 기독교인 중에도 물론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지만,17 안데르스와 엘사는 세속적인 인본주의라고 규정해도 무리가 없을 생각들을 상당히 솔직 담백하게 표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의 차이점, 적어도 종교와 관련해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이점은 상당히 눈에 띌 뿐만 아니라 다양하다. 나는 덴마크에 머무르는 동안 일종의 경외감에 휩싸여 지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애너하임 같은 곳과 오르후스가 얼마나 다른지가 항상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바꿀 때마다 중간중간 설교자들이 죄악이나 구원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끼어들고, 미식축구나 야구 경기를 시작할 때도 먼저 예수에게 기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미국인들 중 75퍼센트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걸 믿는다고 주장한다.18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신학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보다는 자신들의 가족, 가정, 자전거, 지역 정치, 직업, 날씨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영국이나 브라질의 인기 축구 선수들조차도 종교보다 더 관심을 받는다. 게다가 지옥의 존재를 믿는 덴마크인과 스웨덴인은 겨우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치다.19 사랑스러운 모습의 유서 깊은 교회들이 덴마크와 스웨덴의 풍경 속에 점점이 흩어져 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기독교에 대해 배우지만, 스칸디나비아에서 종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아주 조용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점을 더욱 잘 보여주는 사례를 두 가지 더 들어보겠다. 정치와 학교 운동장이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미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싶은 정치가는 성실하게 교회에 나가고 &lsquo;믿음&rsquo;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자주 공개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주지사나 상원 의원이나 대통령이 하느님을 믿고 찬양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의논한 결과를 토대로 결정을 내리는 편을 좋아한다. 따라서 미국에서 무신론자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확률은 알카에다 조직원이 대통령으로 선출될 확률과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정반대다. 이 두 나라에서 정치가들은 무슨 종교를 믿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신앙이 전혀 없다면, 그편이 훨씬 더 좋다. 정치가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하거나, 기도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리거나, 대중 연설에서 가끔 하느님을 언급하기만 해도 금방 공직에서 쫓겨난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공직에 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center">(중략)</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과 스칸디나비아가 종교에 관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례로 학교 운동장을 생각해보자. 미국 전역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가 하느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밝히면, 어느 정도 곤란을 겪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내 딸이 여섯 살 때, 쉬는 시간에 학교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데 한 친구가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다. 딸이 안 믿는다고 대답하자, 그 친구는 즉시 그네 타기를 그만두고 내 딸에게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말한 뒤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내 딸과 함께 그네를 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스칸디나비아의 상황은 거의 정반대다. 하느님이나 예수를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비정상적인 사람, 괴짜로 낙인찍힌다. 유틀란트의 작은 마을 출신으로 식품점에서 일하는 스무 살의 사라는 내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젊은이들에게 종교는 일종의 금기예요. 젊은 사람들은 &ldquo;나는 기독교인이고 그것이 자랑스럽다&rdquo;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런 말을 했다가는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거든요.</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스칸디나비아의 학교 운동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아주 드문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거나 조롱을 당하거나 그보다 심한 일을 당할 수 있다. 토르벤이 바로 그런 아이였다. 그가 하느님과 예수를 독실하게 믿는다는 사실이 알려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조롱과 괴롭힘은 일상이 되었다. 토르벤은 몇 번이나 전학을 다닌 끝에 결국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피난처를 구했다. &ldquo;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어요.&rdquo; 그는 인터뷰 중에 눈물을 비치며 탄식했다. 지금 토르벤은 스물다섯 살로 기혼자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덴마크 루터파 국교회가 동성애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몇 년 전 교회에서 탈퇴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lsquo;자유로운&rsquo;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는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옮긴 책이며 아담과 이브는 실제로 존재했고,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으며 악마도 실제로 존재하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지옥에 갈 거라고 믿는다. 나는 그에게 유대인들이 모두 지옥에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렇게 믿고 있어요.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성경이 내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까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럼 불교도와 힌두교도도? 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미국인들은 토르벤을 보고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그의 신앙을 불편해하며 기괴한 것으로 볼 것이다. 심지어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서 그런 믿음을 갖게 됐다고 볼 가능성도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에서는 토르벤과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 상당히 흔한 반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지극히 희귀하다는 얘기다. 나는 오덴세에서 공립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서른세 살의 안드레아스에게 학생들 중에 토르벤처럼 신앙을 지닌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ldquo;2~5퍼센트&rdquo;라고 대답했다.</p> <p style="text-align: center">(중략)</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이런 나라들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종교적인 신앙이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하고, 하느님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사회라니. 오늘날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또 각각 어떤 모습일까? 삶에 대해 그들이 품은 (비종교적인) 생각은 어떤 것일까? 물론 어떤 사회에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사회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앙이 없는 상태가 일반적이고 흔한 주류로 인식되는 곳은 스칸디나비아뿐이다. 따라서 단순히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이 없는 상태를 아무렇지 않게 볼뿐더러 오히려 그것이 일상적이고 규범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회학적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르스가 바로 그 점을 보여주었다. 라르스가 &lsquo;전형적인&rsquo; 스칸디나비아인인지 아닌지는 쉽게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아인에 아주 근접한 모습인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그를 간단히 설명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말을 끝맺고 싶다. 덴마크에 머무르면서 만나고 인터뷰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라르스가 내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인생에 대한 강렬한 애정과 함께 만족감과 건강한 정신이 느껴졌다. 나는 라르스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기뻤고, 2월 중순의 어느 춥고 눈 내리던 캄캄한 밤에 카테가트 해안가의 아늑한 집에서 한 시간 반 동안 함께 앉아 그의 인생과 믿음에 관해 물어볼 수 있었던 것도 기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르스는 일흔일곱 살이다. 지금도 아주 건강하며,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핀 섬에 살고 있다. 작은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지내다 퇴직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 우파다. 딸이 둘 있고 50년 전에 결혼한 아내와 지금도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신도들 가운데 지도자급이었다. 하지만 라르스의 어머니는 무신론자였다. 외할아버지도 역시 무신론자였다. 라르스는 외할아버지가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승진에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외할아버지가 살던 1800년대에는 무신론자라는 사실이 남들에게 알려지면 상당히 곤란한 입장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르스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아버지는 엄청나게 큰&hellip;&hellip; 큰 기독교 단체의 우두머리였어요&hellip;&hellip;.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신도들을 가르치는 위치였죠. 그 사람들을 이끌었어요&hellip;&hellip;. 신도들 말이에요. 어머니는 무신론자였어요. 두 분은 내가 네 살 때 이혼했습니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라르스는 두 형제와 함께 주로 어머니 손에 자랐지만, 가끔 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예배에 참석할 때도 있었다. 라르스는 자신이 무신론자라며 옛날부터 항상 그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견진성사까지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65년 전에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이유를 묻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거야 장모님이 워낙 강경하셨으니까 그랬죠.</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라르스의 어머니는 2003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무신론을 계속 유지했는지 궁금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말년에 하느님에게 의지한 적은 없었나요? 아뇨&hellip;&hellip;. 3개월만 더 살았으면 108세가 되셨을 겁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렇게 오래 사셨어요? 가서 어머니 묘비를 확인해봐요. 이 마을에 있으니까. 1895년부터 2003년이라고 돼 있을 테니.</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군요&hellip;&hellip;. 그래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럼 줄곧 무신론자셨습니까? 언제나 그랬죠.</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가 바랐던 대로, 기독교식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화장했다는 이야기. 나는 라르스를 바라보며(지금은 거의 여든 살이 되었을 것이다), 곧 다가올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hellip;&hellip; 옛날에 우리 생물 선생님은 항상 우리 몸을 구성하는 화학물질들의 가치가 덴마크 돈으로 4크로네 정도라면서 최대한 빨리 그 돈을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곧장 화장장으로 가야 한다고. 나도 같은 생각입니다&hellip;&hellip;. 하지만&hellip;&hellip;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죽은 뒤에도 삶이 있다는 걸 안 믿으시는&hellip;&hellip;? 그래요&hellip;&hellip;.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어. 내 경우에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하지만 &ldquo;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rdquo;이라면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생의 의미가 뭐죠?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내 의무죠.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고&hellip;&hellip;.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살다가 힘든 일이나 슬픈 일을 겪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시죠? 그럴 때 뭘 하세요? 뭐라고 해야 할까? &hellip;&hellip;난 슬픈 순간이 전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난 아주 행복하게 살았어요. 원하는 건 뭐든지 얻고, 직업도 원대로 다 해봤으니까. 아내도 얻고, 우리 두 딸은 아주 많이 배웠고, 네 손주들 넷도 머리가 좋아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 color: #808000">그럼 행복하신 건가요? 그럼, 물론이오. 뭐&hellip;&hellip; 불만스럽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건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아요. 그래요. 하지만 날 지탱해줄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어요.</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그 밖에도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했을 때의 이야기, 최근 이슬람교도들이 덴마크로 이민을 오는 것, 그가 교장으로 있던 고등학교에서 그를 위해 기념 만찬을 열어주었던 것. 그날 500명의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를 위해 건배를 해주었고, 그는 그날을 자기 인생의 &ldquo;황금 같은 순간&rdquo;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내내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라르스가 전체적으로 따뜻한 사람이며, 삶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감이 전혀 꾸밈없는, 정직한 감정으로 보인다는 점이었다. 라르스는 정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같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행복한 결혼 생활, 사랑스러운 딸들과 손녀들, 만족과 보람을 느꼈던 직장 생활, 덴마크에서도 가장 푸른 섬에 있는 아름다운 집, 건강. 다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만이 없을 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르스 같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이해하고 싶다는 깊은 소망, 그리고 라르스 같은 사람들을 이토록 많이 만들어내는 문화를 살펴보고 설명하고 싶다는 소망이 이 책을 쓰게 된 근본적인 동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지금 종교적인 열정으로 부글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라르스 같은 사람들, 이 부글거리는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이 더욱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된다. 또한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비교적 &lsquo;신이 없는 사회&rsquo;를 분석하는 일이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들어가는 말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필 주커먼(Phil Zuckerman)</strong><br /> 피처 대학 사회학과 교수.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종교와 사회의 관계를 사회과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며 세속성, 무신론 등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이 책 『신 없는 사회』에서는 몇몇 사회가 비종교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된 배경을 조사하며, 설득력 있는 사회학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적용한다. 그의 연구는 자신의 고향인 미국 사회뿐 아니라 연구 대상이었던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뒤이어 출간된 저서 『신앙은 그만<sup>Faith No More</sup>』(2011)에서는 신앙을 버린 미국인들을 인터뷰하며, 전 세계 어느 곳보다 종교적인 사회에 살고 있는 이들이 종교와 멀어진 이유를 탐구하는 등 &lsquo;신 없는 사회&rsquo;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종교 사회학으로의 초대<sup>Invitation to the Sociology of Religion</sup>』(2003), 『성소 안의 투쟁<sup>Strife in the Sanctuary</sup>』(1999) 등을 출간했다. 『신 없는 사회』는 &lt;포워드 매거진&gt; 선정 &lsquo;올해의 책&rsquo; 은상을 수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승욱</strong><br />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했다. &lt;동아일보&gt; 문화부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 『블랙 에코』 『시인』 『실종』 『밤의 의미』 『행복의 지도』 『분노의 포도』 『임기종료』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 『도플갱어』 『살인자들의 섬』 『스티븐 호킹 과학의 일생』 『톨킨』 『듄』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6 오전 10:37:00핑커턴·홉킨스의 ‘우리가 사는 곳에서 로컬푸드 씨 뿌리기’<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1_%EC%9A%B0%EB%A6%AC%EA%B0%80%20%EC%82%AC%EB%8A%94%20%EA%B3%B3%EC%97%90%EC%84%9C%20%EB%A1%9C%EC%BB%AC%ED%91%B8%EB%93%9C%20%EC%94%A8%20%EB%BF%8C%EB%A6%AC%EA%B8%B0/%EB%A1%9C%EC%BB%AC%ED%91%B8%EB%93%9C_%ED%91%9C%EC%A7%80.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8년 가을부터 런던 시장<sup>London Mayor</sup>의 먹거리 자문관으로 일하면서 풀뿌리 수준에서 흥미진진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매일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런 일들은 먹거리 재배와 더욱더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을 찾는 사람들 양쪽 모두에서 일어나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가 정말로 이상한 세상을 창조해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높은 직함과 많은 봉급이 지역공동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값싼 가공식품이 지역에서 재배된 건강한 제철 먹거리를 대체했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대가가 수반되었다. 금융위기, 비만과 건강위기, 사람들의 집단들을 묶어주어 안정감과 소속감이라는 필수적인 느낌을 제공해주는 연대의 파괴가 그 대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처음 참석한 전환<sup>Transition</sup> 행사는 웨일즈의 램피터<sup>Lampeter</sup>에서 열린 것이었다. 500명이 전환운동에 관한 롭 홉킨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참석했다. 무척이나 분명했던 것은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고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주차장을 파라고? 좋아! 동네 학교에 텃밭을 일구라고? 좋아!</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먹거리가 오는 곳으로부터 너무나 많이 단절된 나머지, 우리 중 다수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너트와 볼트가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먹거리가 온다고 믿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먹거리는 우리의 근본적인 욕구이다. 우리가 먹거리를 기르는 경이로움에 아이들을 다시 연결시킬 수 있다면 그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lsquo;먹거리와 농업의 해<sup>The Year of Food and Farming</sup>&rsquo; 기획의 일부로 실시된 전국농민연합<sup>National Farmers</sup>&rsquo;<sup> Union</sup>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먹거리를 스스로 길러본 초등학교 어린이의 93%가 식습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책에 소개한 지역공동체 먹거리 프로젝트에 참여한 성인들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캐피털 그로스<sup>Capital Growth<span style="color: #ff0000"><b>*</b></span></sup>가 런던에서 세력을 얻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캐피털 그로스는 채소를 기르고 싶어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적당한〕 공간을 찾은 다음,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참가〕서명을 받아 집단을 키워나간다는 간단한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프로젝트들이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 모두가 지난 30년 동안 &lsquo;나-나-나&rsquo; 사고에 젖어온 우리 문화에서 너무나 부족했던 사회적 결속력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로컬푸드를〕 시작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현장의 이야기들과 함께 지역공동체 할당텃밭<sup>Allotment<span style="color: #ff0000"><b>**</b></span></sup>으로부터 농민장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먹거리 프로젝트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팁과 참고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본격적인 실천 가이드로서, 지역의 자급성과 우리 먹거리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달성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많은 다른 이들처럼 나 역시 한때는 석유가 결코 고갈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끔찍하게도 내가 사는 동안 우리는 세계 석유 부존량의 절반을 써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석유정점이 오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때는 없을는지도 모른다. 온실가스 농도 상승으로 인해 지구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지금, 앞으로 올 세대에게 세상을 더 좋은 상태로 남겨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무척이나 좋은 출발점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2009년 5월, 런던푸드 의장 로지 보이콧<sup>Rosie Boycott</su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span> 런던 푸드링크, 런던 시장인 보리스 존슨<sup>Boris Johnson</sup>, 빅로터리<sup>Big Lottery</sup>의 로컬푸드 기금이 함께 하는 도시텃밭 프로젝트이다. ― 역자<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영국에서 역사적으로 발전해온 도시텃밭으로, 지자체가 시민들에게 할당해주는 텃밭 ― 역자</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1_%EC%9A%B0%EB%A6%AC%EA%B0%80%20%EC%82%AC%EB%8A%94%20%EA%B3%B3%EC%97%90%EC%84%9C%20%EB%A1%9C%EC%BB%AC%ED%91%B8%EB%93%9C%20%EC%94%A8%20%EB%BF%8C%EB%A6%AC%EA%B8%B0/%EA%B7%B8%EB%A6%BC1_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right">롭 홉킨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더 복원력 있던 과거로부터의 메아리</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의 농업체계와 먹거리체계 전부가 값싼 화석연료의 이용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심지어 그것들을 현명하게 아껴쓰지도 않고 있다. 우리는 단기적인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악무도한 소비주의에 따라 그것들을 탕진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한때 우리 문화를 지탱해주었던 지역화된 체계들은 파괴되고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_ 데일 앨런 파이퍼<sup>Dale Allen Pfeiffer</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음 쪽의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다. 1897년 &lsquo;브리스톨 상업용 텃밭지기 연합<sup>Bristol and District Market Gardeners Association</sup>&rsquo;의 연례회의 때 촬영된 것으로, 37명의 남자들이 일요일에 입는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브리스톨 어딘가에서 포즈를 취한 것이다. 이들은 헤어스타일에 있어 환상적인 다양성을 과시하며 똑똑하고 훌륭했던 당시 이 모임 회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브리스톨 시 안팎에 다수의 상업용 텃밭<sup>market garden</sup>을 관리했으며,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오늘날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생산성 높은 경관을 만들어냈다. 한때 이들이 일했던 장소들은 지금은 분명히 당근이나 양배추가 아닌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뒤덮였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1_%EC%9A%B0%EB%A6%AC%EA%B0%80%20%EC%82%AC%EB%8A%94%20%EA%B3%B3%EC%97%90%EC%84%9C%20%EB%A1%9C%EC%BB%AC%ED%91%B8%EB%93%9C%20%EC%94%A8%20%EB%BF%8C%EB%A6%AC%EA%B8%B0/%EA%B7%B8%EB%A6%BC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먹거리라는 것이 자신이 사는 곳 근처에서 자신과 모종의 관계를 가진 누군가가 기른 것을 스스로 요리하는 것이라는 사고가 천천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파괴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였으며, 1960년대와 70년대에 가속화되었다. 슈퍼마켓의 부상 그리고 원하는 먹거리를 세계 어느 곳으로부터도 얻을 수 있다는 현혹적인 사고와 결합된 새로운 보조금과 국제무역협정은, 주변에서 재배되는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에서 재배되는 먹거리를 사는 것이 더 싸고 쉬워졌다는 뒤틀린 현실을 의미했다. 〔많은〕 농민과 경작자들이 퇴출되었고 그들의 땅은 더 큰 농장에 흡수되었다. 과수원들은 뿌리가 뽑혔고, 우리 삶은 가공식품들로 점철되었으며, 우리 허리 굵기는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풍요의 환상에는 대가가 따랐다. 우리가 역사의 재활용 쓰레기통 속으로 내다버린 복잡하고, 고도로 숙련되었으며, 적응력 있고 특정 장소에 특화된 체계를 해체하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하지만 사라진 것을 재건하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기간이 걸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먹거리보장과 먹거리취약성 사이에서</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30년대 동안 영국의 먹거리자급률<sup>food self-sufficiency</sup>은 급감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무렵에는 무척이나 취약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먹거리보장<sup>food security</sup>을 달성하려는 노력들이 서둘러 도입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노력들과 &lsquo;승전을 위한 경작<sup>Dig for Victory</sup>&rsquo; 운동 덕분에 농업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되었다(아직도 어떤 이들은 이때를 영국 농업의 황금기로 생각한다). 경작되지 않고 있던 토지들을 모두 생산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햄스테드 벌판<sup>Hamstead Heath</sup>, 버킹엄궁 주변의 꽃밭, 목초지와 초원이 긴급히 징발되어 기아를 방지하려는 국가적인 노력에 동원되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이 되자 국가 식단의 10%가 할당텃밭이나 가정집 뒷마당의 텃밭에서 충당되기에 이르렀고, 농업투입물은 크게 증가했다. 영양학자들은 이때보다 영국민이 더 건강했던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 동안 영국의 먹거리자급률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1980년대를 정점으로 하락했다. 과일 육종에 그토록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토양과 기후에 적합한 수많은 사과 품종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이는 무척 혼란스러운 일인 동시에 난감한 일이기도 하다. 전 국가적인 과일나무 심기 혁명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춘 나라가 있다면 바로 우리나라〔영국〕일 것이다. 그리고 엄청나게 다양한 우리의 토종 사과와 함께 그와 관련된 노래, 조리법, 이야기, 축제들로 이루어진 풍요로운 문화를 재발견하는 일은 우리 먹거리보장을 재구축하는 것만큼이나 이로운 일이다. 미클머스 레드<sup>Michaelmas Red</sup>, 골든 노블<sup>Golden Noble</sup>, 립스턴 피핀<sup>Ribston Pippin</sup>, 엘리슨스 오렌지<sup>Ellison&rsquo;s Orange</sup>, 피트마스턴 파인애플<sup>Pitmaston Pineapple</sup> 등의 사과 품종들에 다시 친숙해지는 일은 우리를 장소, 문화, 역사에 더 깊이 뿌리내리게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양성, 내구성, 복원력을 갖춘 우리 먹거리체계가 이렇게 파괴되는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났다. 데번<sup>Devon</sup> 주의 사우스햄스<sup>South Hams</sup>에서 내가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1950년대에는 대부분의 집이 채소 텃밭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약 3분의 1은 뒷마당에서 닭을 길렀다. 모든 식사가 신선한 식재료를 사용해서 준비되었다. 우유, 과일, 고기, 기타 먹거리들이 지역 농민이나 상인에 의해 가정으로 배달되었다. 소비되는 먹거리의 대다수가 지역에서 왔는데, 이는 집단적인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순전히 실용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1마일 밖에 완벽한 사과가 자라고 있는데 왜 뉴질랜드에서 사과를 수입해야 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비록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lsquo;푸드마일&rsquo;이 아닌 &lsquo;푸드피트<sup>food feet</sup>&rsquo;의 체계였고 제대로 작동했다. 오늘날 자신들이 다니는 시내 중심가에 도축장이 있는 것을 감내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현대적 맥락에 서 체계를 재설계하는 데 필요한 많은 것을 &lsquo;로컬푸드 문화&rsquo;라는 사고로부터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이익은 무척 클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Defra는 먹거리보장에 관한 이야기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Defra는 먹거리와 관련해서 &lsquo;복원력resilience&rsquo;이라는 말을 쓰는데, 국가생산량을 늘리는 것이나 지역시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이 먹거리를 공급받는 장소들을 가능한 다양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공급기반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공급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위험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나나를 4개 나라보다는 8개 나라로부터 수입하는 것이 덜 위험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바뀌고 있다. 최근 국무조정실<sup>Cabinet Office</sup>이 먹거리보장에 관해 펴낸 토론용 문서는, 기후변화로 인한 문제들을 염두에 둔다면 &ldquo;기존의 먹거리 생산패턴이 저탄소를 기반으로 하고 자원의 제약이 더욱 심해진 미래에는 적합하지 않다&rdquo;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 책은 &lsquo;저탄소를 기반으로 하고 자원의 제약이 더욱 심해진 미래에 적합한 먹거리 패턴&rsquo;이 실제로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을지 그리고 현재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제시하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왜 변화가 불가피한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가 스스로를 먹이는 방법에 관해 현재와 같은 모델로 수렴하도록 하는 요소는 세 가지인데, 그 수렴 속도는 무척이나 빠르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석유정점 문제이다. 본질적으로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지만, 우리는 항상 풍부한 석유를 적당한 비용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무모한 확신을 가진 채 석유를 계속 사용해왔다. 우리는 이 놀라운 자원을 항상 이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사회기반시설, 생활패턴, 경제모델을 건설해왔지만, 석유 공급을 원활하게 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의 석유 소비 속도는 신규 석</p> <p style="text-align: justify">유 발견 속도의 4배에 달하며, 점점 더 많은 석유 생산국이 생산정점을 지나고 있다. 석유정점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값싼 석유의 시대(1859년~현재)라 부를 수 있는 시기 동안 우리의 경제적 성공, 개인적 행복 및 자신감의 정도는 우리의 석유 소비 수준과 직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석유 의존도가 취약성의 정도와 동일시되는 시기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먹거리체계와 관련해서 그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요소인 기후변화 문제는 영국이 자국의 탄소 배출량 수준을 역사상 유례없이 긴급하게 줄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가장 최근의 과학 연구는 세계가 기후학자들이 예측한 &lsquo;임계치&rsquo; 중 일부에 이미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NASA의 제임스 한센<sup>James Hansen</sup>은 세계기후의 임계치가 실제로는 350ppm(대기 중에 축적된 이산화탄소의 농도, 부피 기준이며 100만분의 1단위)2이지만 우리가 이미 387ppm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350ppm이라는 목표를 폐기할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요한 의문은, 우리가 잠자리에 들 때 그날 배출한 탄소의 양이 격리한(어떤 식으로든 고정시킨) 탄소의 양을 넘어설 때 세계가 어떤 모습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는 먹거리 전략가 중 일부가 이에 관한 토론에 참여하고 있다. 먹거리와 농업을 &lsquo;탄소 친화적<sup>carbon positive</sup>&rsquo;으로 만드는 일은, 가장 최소한으로 이야기해도 유기농뿐만 아니라(질소비료 사용에 따르는 탄소 배출량은 엄청나며 전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다) 더욱 지역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는 생산성 높은 나무 등 다년생 작물을 더 많이 사용하게 할 것이며, 필연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게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 요소는 현재 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경제불황 문제로서, 흔히 &lsquo;신용경색&rsquo;으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정직하게 생각한다면,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사고 자체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 경제의 성과를 매년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더 많은 물건을 구매하며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으로 측정한다면, 우리는 곧 세계가 유한한 자원이며 &lsquo;멀리 떨어진 곳&rsquo;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경제불황은 에너지정점에 의해 촉발된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불황과는 다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동안의 경제성장은 내년에는 생산성이 늘어나고 값싼 에너지가 더 많아질 것이므로 경제활동이 올해보다 더 증가할 것이라는 가정에 의해 가능했다. 〔하지만〕 값싼 에너지의 시대가 이미 저물었다는 인식이 더욱 커짐에 따라, 성장이라는 개념은 이제 점점 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성장에는 사회적, 환경적, 개인적으로 엄청난 비용이 수반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소비 증가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마지막 해는 1961년이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더 현실적인 예측을 설계하는 데 더 빨리 착수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좋다. 더 지역적이고 다양한 먹거리체계는 하룻밤 만에 이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설계, 미래예측, 자금 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전환운동의 역할</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전환운동은 석유정점과 기후변화에 대한 지역공동체의 대응을 고무하고, 그 대응에 촉매 역할을 하며 지원하는 것이다(<a href="http://www.transitionnetwork.org">www.transitionnetwork.org</a>를 참조하라). 전환운동 집단은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서로 연결된 문제들에 대해 긍정적이고도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어 대응하고자 한다. 이는 지역공동체가 값싼 석유 〔시대〕 너머의 삶이 어떤 모습일지 모색하고 그 실현방안들을 설계하며 가장 효과적으로 그것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도록 촉매 역할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긍정적이고 재미있으며 매력적이다. 전환운동은 사람들의 인식을 높이고 로컬푸드 모임을 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지역화폐를 만들고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공동체를 위해 &lsquo;대안&rsquo;을 개발하게 하는 데 이르기까지 범위를 넓히고 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석유 시대의 종말을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많은 것들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180개가 넘는 공식 전환운동 집단이 있으며,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단도 수천 개에 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일본, 뉴질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나라에 전환운동 집단이 있다. 소읍<sup>town</sup>, 도시, 섬, 마을에서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2개의 지자체(서미싯과 레스터셔)가 전환운동 집단의 성장을 지원할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lsquo;전환 훈련<sup>Transition training</sup>&rsquo;이 이 집단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기업들이 자신의 활동에 복원력이라는 사고를 아로새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게 돕는 전환 컨설턴트도 있다. BBC 라디오 연속극 〈아처 가의 사람들<sup>The Archers</sup>〉에 나오는 에임브리지<sup>Ambridge</sup>는 전환마을이다. 에너지 및 기후변화 장관<sup>Minister for Energy and Climate Change</sup>인 에드 밀밴드<sup>Ed Miliband</sup>는 최근 런던에서 열린 환경청<sup>Environment Agency</sup> 컨퍼런스에서 전환운동 집단이 &ldquo;절대적으로 필요하다&rdquo;고 이야기했다. 전환운동 집단이 탐색을 시작하는 최초 영역 중의 하나가 먹거리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가장 직접적인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하고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시작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두 가지 중요한 단서</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현재 시점에서 전환운동 집단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의 전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향후 20년 동안의 진로에 대한 성공적인 방향 제시는 국제&middot;국가&middot;광역&middot;지역의 수준에서의 활동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지역의 수준에서는 엄청난 폭의 다양한 조직들이 필요할 것인데, 그중 다수는 이 책에서 제시한 이정표를 따를 것이다. 이러한 조직의 다양성은 폴 호켄<sup>Paul Hawken</sup>이 《축복받은 불안<sup>Blessed Unrest</sup>》(한국어판 《축복받은 불안》, 에이지21, 2009)에서 지구 면역체계의 개입으로 묘사한 것인데, 이 책은 그러한 다양성을 찬양하는 것이지 전환운동을 만병통치약으로 홍보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lsquo;즐거운 면책조항&rsquo;은 전환운동이 제대로 작동할지 여부를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진화하고 있다. 다양한 범위의 지역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전환 과정을 시험해보고 있으며, 그들의 경험은 〔전환운동〕 모델의 수정을 위한 지속적인 자양분이 된다. 나는 전환운동을 지금 세계에서 진행 중인 가장 중요한 사회연구 프로젝트의 하나로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긍정적인 경로를 설계하는 시기적절하고 긴급하며 역사적인 과정, 특히 먹거리와 관련된 것에 일원으로 참여하라는 초청장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전환으로 부르든 말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서론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탐진 핑커턴</strong>(Tamzin Pinkerton) <br /> 대학에서 사회인류학과 인권을 공부했다. 데번으로 이주한 후부터 최초의 전환집단인 토트네스 전환집단의 초기 프로젝트 중 몇 개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개인의 건강과 환경의 건강 사이의 균형을 찾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유기농 로컬푸드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 책은 지역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먹거리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익힐 것인가에 대해 그녀 자신이 해온 모색의 일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롭 홉킨스</strong>(Rob Hopkins) <br /> 여러 해 동안 퍼머컬처 강사로 일했다. 성장 중에 있는 전환운동 네트워크를 공동으로 창립했으며, 베스트셀러인 《전환운동 핸드북(The Transition Handbook)》을 저술했다. 현재 그는 석유정점과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복원력 있는 지역공동체들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로비와 전국적인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2009년 6월 그는 풀뿌리 운동가에게 수여되는 옵저버 윤리상(Observer Ethical Award for Grassroots Campaigner)을 수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충남발전연구원</strong>(농촌&middot;농업연구부, 충남농어업6차산업화센터)<br /> 충남발전연구원은 지역 및 도시계획, 환경․생태, 농업과 농촌, 관광, 지역경제, 공공디자인 분야 등 다양한 행정수요 변화에 적절한 대처방안을 연구하여 충청남도의 발전과 도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1995년 6월 충청남도와 16개 시․군이 공동 출연하여 설립한 종합정책연구기관이다. 실사구시 정신에 입각하여 &lsquo;자율과 연대 그리고 열정으로 도민과 함께 하는 열린 연구원&rsquo;을 지향한다.<br /> 농촌&middot;농업연구부는 2011년 1월 출범한 충남발전연구원의 연구부서로, 충남 농어촌․농어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무하고 지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연구분야는 농어촌 지역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 도 및 시군 농정발전과제 연구, 농림수산식품 및 농산어촌 관련 정책 연구, 지역순환형 농식품체계 연구, 농산어촌 지역산업 활성화 연구 등이다.<br /> 충남농어업6차산업화센터는 농어업의 가공․유통․판매 등 융복합 관리를 통해 농어업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고 나아가 농어촌 지역 경제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2011년 7월 출범한 충남발전연구원의 부설기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5 오전 10:01:00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89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0_%EB%A3%A8%EC%9D%B4%20%EB%B3%B4%EB%82%98%ED%8C%8C%EB%A5%B4%ED%8A%B8%EC%9D%98%20%EB%B8%8C%EB%A4%BC%EB%A9%94%EB%A5%B4%2018%EC%9D%BC/%EB%A3%A8%EC%9D%B4%20%EB%B3%B4%EB%82%98%ED%8C%8C%EB%A5%B4%ED%8A%B8%EC%9D%98%20%EB%B8%8C%EB%A4%BC%EB%A9%94%EB%A5%B4%2018%EC%9D%BC_%ED%91%9C%EC%A7%80s.jpg" /><br /> <br /> <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2판에 부치는 마르크스의 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일찍 죽음을 맞이한 내 친구 요제프 바이데마이어는 1852년 1월 1일부터 뉴욕에서 정치주간지를 발간할 예정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관한 글을 그 주간지에 실을 것을 제안했고, 나는 2월 중순까지 &lsquo;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rsquo;이라는 제목으로 매주 기사를 보내주었다. 그러는 와중에 바이데마이어의 정치주간지 발간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신 1852년 봄부터 월간&nbsp; 『혁명(Die Revolution)』지를 발간했다. 그리고 그 창간호에&nbsp;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게재했다. 당시 이 글의 사본 수백 부가 독일에서 유통되고 있었지만 정상적인 서적판매 경로를 통해서는 아니었다. 이 책의 판매를 제안 받은, 겉보기에 매우 급진적으로 행동하던 서적판매상은 이처럼 &ldquo;시대에 역행하는 주장&rdquo;을 담은 글 내용에 도덕적으로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의 사실로부터 이 책은 사건의 직접적 압력하에서 쓰여 졌으며 그것의 사료도 1852년 2월을 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책의 재판을 내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서적판매상의 요청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독일에 있는 친구들에게서 긴급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 졌으며,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저서들 가운데에서 단지 두 종류만 언급할 가치가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小)나폴레옹』과 프루동의 『쿠데타』가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빅토르 위고는 쿠데타 책임자에 대해 단지 매섭고 재치 넘친 독설을 퍼붓는 데에 그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서는 사건 자체가 마치 청천벽력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그는 쿠데타에서 오직 한 개인의 폭력적 행위만을 보았을 뿐이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독창적 권력의 출현이 루이 보나파르트 개인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위고는 그를 소(小)나폴레옹이 아니라 대(大)나폴레옹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프루동은 자신의 입장에서 쿠데타를 선행하는 역사발전의 결과로 묘사하려 한다. 하지만, 쿠데타에 대한 그의 역사적 서술은 부지불식간에 쿠데타 영웅에 대한 역사적 변명이 되었다. 그럼으로써 프루동은 소위 &lsquo;객관적&rsquo; 역사가들과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프랑스에서의 &lsquo;계급투쟁&rsquo;이 어떻게 기괴하고 평범한 한 인간으로 하여금 영웅으로 행세할 수 있는 그러한 조건과 관계들을 만들어 내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개정한다면 그 독특한 색조를 상실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단지 초판의 오자를 수정하고 현재로서는 더 이상 이해하기 어려운 암시적 표현들을 삭제하는 데 그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황제의 망토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마침내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 동상은 방돔광장 전승기념탑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 날 것&rdquo;이라고 본문에서 내린 결론은 이미 증명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샤라 대령은 1815년의 워털루 전투를 다룬 그의 책에서 나폴레옹 숭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시작으로, 특히 최근 수년 동안, 프랑스인의 저술들은 역사적 연구, 비판, 그리고 풍자와 위트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나폴레옹의 전설을 종식시켰다. 프랑스 외부에서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대중신앙과의 급격한 결별, 다른 말로 표현하다면 이 거대한 정신혁명에 대해 별로 주목하지도 않았고 이해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나는 내 책이 현재, 특히 독일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른바 &lsquo;케사르주의&rsquo;라는 교과서적 단어를 없애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와 같이 피상적으로 역사적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사태의 핵심, 곧 고대 로마에서의 계급투쟁은 소수 특권계층의 범위 안에서 부유한 자유인과 가난한 자유인 사이에 벌어졌던 반면, 인구 가운데 거대한 생산대중이었던 노예들은 이와 같은 투쟁에서 단지 수동적 발판을 형성하는데 지나지 않았음을 망각하는 것이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는 사회를 희생시킨 대가로 살았고 근대사회는 프롤레타리아를 제물로 하여 살아가고 있다는 시스몽디의 중대한 언급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고대와 근대의 계급투쟁의 물적&middot;경제적 조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타난 정치가들도 마찬가지로 공통점이 없다. 이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제사장 사무엘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right"><br /> 1869년 6월23일 런던에서<br /> 칼 마르크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54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0_%EB%A3%A8%EC%9D%B4%20%EB%B3%B4%EB%82%98%ED%8C%8C%EB%A5%B4%ED%8A%B8%EC%9D%98%20%EB%B8%8C%EB%A4%BC%EB%A9%94%EB%A5%B4%2018%EC%9D%BC/%EB%A7%88%EB%A5%B4%ED%81%AC%EC%8A%A4.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은 어디선가 세계사에서 막대한 중요성을 지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은 반복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소극(笑劉)으로 끝난다는 사실 말이다. 당통에 대해서는 꼬씨디에르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루이 블랑이, 1793~1795년의 산악당(Montagne) 에 대해서는 1848~1851년의 산악당이 그러하며, 삼촌에 대해서는 조카가 그러하다. 그리고 같은 모습이 브뤼메르 18 일의 재판(再版)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하에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현 세대가 그들 자신들 그리고 만물을 혁명화하고 이제까지 존재한 적이 없는 무엇인가를 창출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때, 정확하게 그와 같은 혁명적 위기의 시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도록 과거의 유령을 주술로 초조하게 불러내며 그들로부터 이름과 구호와 의상을 빌려 와 세계사의 새로운 모습을 이처럼 유서 깊은 분장과 빌려 온 용어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래서 루터는 사도 바울로 가장했으며 1789년부터 1814년에 이르는 혁명은 로마공화정과 로마제정의 의상을 번갈아가며 봄에 걸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1848년 혁명은 어떤 때는 1789년 혁명의 전통을, 또 다른 때는 1793년부터 1795년에 이르는 혁명적 전통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언어를 매우는 중인 초보자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먼저 변역하여 표현하지만 일단 새 언어의 정신에 동화되어 그 언어로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될 때면 그는 새 언어를 사용하는 데 모국어를 떠올림이 없이 언어 그 자체에서 표현방법을 발견하고 그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모국어를 잊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사의 유령들을 이처럼 주술로 불러내는 일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금방 어떤 현저한 차이가 드러난다. 구 프랑스 혁명의 당파들과 대중들뿐만 아니라 주역이었던 까미유 데물랭, 당통,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나폴레옹 등은 로마인의 의상을 입고, 로마인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자기들 시대의 임무, 곧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봉건제로부터 해방하고 새롭게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최초의 주역들은 봉건제의 토대를 산산조각 내고 봉건적 기초 위에서 성장한 봉건지배세력을 쓸어냈다. 또 다른 주역들은 처음으로 자유경쟁이 발전할 수 있고 분할한 토지소유를 이용할 수 있으며, 국민의 무한한 산업생산력을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을 프랑스 국내에 조성했다. 그라고 프랑스 국경 너머의 유럽대륙 전역에서 봉건제도들을 일소 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에 부르주아 사회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로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대륙 전체에 적절한 최신의 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새로운 사회구성체가 확립되자, 태고적 거인들은 자취를 감췄고, 그들과 함께 부활했던 고대 로마의 흔적인 브루투스 가문, 그라쿠스 형제, 푸블리쿨라, 호민관, 원로원 의원, 그리고 케사르 자신이 즉시 사라졌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9"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20_%EB%A3%A8%EC%9D%B4%20%EB%B3%B4%EB%82%98%ED%8C%8C%EB%A5%B4%ED%8A%B8%EC%9D%98%20%EB%B8%8C%EB%A4%BC%EB%A9%94%EB%A5%B4%2018%EC%9D%BC/%EB%B8%8C%EB%A4%BC%EB%A9%94%EB%A5%B4%2018%EC%9D%B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부르주아 사회는 냉정한 자기현실 속에서 세이, 꾸쟁, 르와이에꼴라르, 방샤맹 꽁스땅, 기조와 같은 자신의 진정한 해석자와 대변인들을 배출했다. 부르주아 사회의 실질적 사령관들이 계산대 뒤에 자리 잡았고 돼지머리를 닮은 루이 18세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 우두머리였다. 부의 생산과 평화적 경쟁에 완전히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사회는 로마시대로부터 온 유령들이 그들 사회의 요람을 지키고 있음을 더 이상 알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부르주아 사회가 아무리 비영웅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부르주아 사회 또한 스스로를 탄생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영웅주의와 희생과 테러, 그리고 내란과 인민들 간의 전투를 겪었다. 그리고 로마공화정의 고전적이며 엄격한 전통 안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투사들은 그들의 이상과 기법과 자기기만을 발견해냈고, 이것들은 자신들의 투쟁의 내용에서 드러나는 부르주아적 한계를 은폐하고 그들의 열정을 위대한 역사적 비극의 높은 차원에서 유지하기 위해 필요로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한 세기 이전, 또 다른 발전의 단계에서 크롬웰과 영국 국민들은 그들의 부르주아 혁명을 위해 구약성서로부터 그 어법과 열정과 환상을 빌려 왔다. 그리고 혁명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다시 말해서 영국이 부르주아 사회로의 전환을 달성했을 때 로크는 하바꾹(Habakkuk)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므로 이와 같은 여러 혁명에서 죽은지를 깨어나게 하는 일은 과거의 투쟁을 단순히 흉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투쟁에 영광을 부여하는 목적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또한 현실적 해결책에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상 속에서 그러한 임무를 위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과거의 유령으로 하여금 주변을 다시 배회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정신을 재발견하기 위한 목적에 봉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848년부터 1851년의 시기에는 자신을 늙은 바이이로 가장한, 노란 장갑을 낀 공화주의자 마라스트로부터 평범함에 더해 거부감마저 불러일으키는 자신의 모습을 나폴레옹의 철제 데드마스크 아래 감춘 한 명의 모험가에 이르기까지 오직 구 혁명의 유령만이 배회했다. 혁명을 통해 스스로에게 가속화된 통력을 부여했다고 상상했던 전체 인민은 갑자기 이미 사라져버린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퇴보에 대한 어떤 의혹도 불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옛 시절이 다시 도래하기 시작했으며, 오랫동안 골동품 연구가의 박식함의 주제로만 남아 있던 과거의 연대기들과 여러 명칭, 그리고 법령, 또한 이미 오래 전에 썩어 없어진 것으로 여겨졌던 법률의 앞잡이들이 마찬가지로 다시 소생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랑스 국민들은 고대 파라오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에티오피아의 광산에서 금을 개느라 해야 했던 고된 노동에 대해 날마다 탄식하는 환상에 젖어 있는 런던 정신병원의 미치광이 영국인 같은 느낌을 갖는다. 지하 감옥에 갇힌 미치광이의 머리 위에는 희미한 등불이 매달려 있고, 등 뒤에는 긴 채찍을 든 노예감독이 도사리고 있으며, 감옥 입구에는 야만적인 이방인 용병들이 엉켜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강제 노역자들뿐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ldquo;고대의 파라오에게 금을 만들어주려고 자유롭게 태어난 영국인인 내가 이 고생을 하다니&rdquo;라고 그 미치광이 영국인은 한숨지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ldquo;보나파르트 가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우리가 이런 고역을 치르다니&rdquo;라고 비통해 한다. 그 영국인은 그가 제정신로 돌아왔을 때도 금을 캐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제거할 수 없었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들의 혁명에 관여하고 있는 한 12월 10일의 선거가 증명해 준 바와 같이, 나폴레옹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혁명의 위험에서 벗어나 이집트의 고기냄비 곁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으며 그러한 갈망에 대한 답변이 1851 년 12윌 2일의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과거의 나폴레옹에 대한 하나의 희화(戱畵)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19세기 중반에 반드시 출현하도록 희화화 된 옛 나폴레옹자선을 갖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세기의 사회혁명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미래에서만 영감을 받는다. 과거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미신을 벗어 버리고서야 비로소 19세기의 사회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 이전의 혁명은 자신의 혁명적 내용에 눈을 감기 위해 지나가버린 세계사의 추억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혁명은 자신만의 고유한 내용을 얻기 위해 죽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시신을 묻어버리도록 해야 한다. 과거 혁명에서는 언어, 곧 형식이 내용을 압도했다면, 19세기의 혁명에서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848년 2월 혁명은 기습공격이며 구(舊) 사회에 대한 불의의 일격이었다. 그리고 프랑스 인민은 이러한 예기치 못한 공격을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니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행위로 선언했다 12월 2일에, 2월 혁명은 카드놀이 사기꾼의 속임수에 의해 사라졌다. 타도되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군주정이 아니라 수백 년의 투쟁을 통해 군주정으로부터 가까스로 획득한 자유주의적 권리였다. 사회가 새로운 내용을 스스로 획득하는 대신, 국가가 단지 그것의 낡은 형태로, 즉 군도(軍刀)와 승려의 모자만이 뻔뻔스럽게 지배하는 상태로 복귀한 것으로 여겨진다. 1848년 2월의 기습공격에 대해 1851년 12월은 이처럼 분별없는 행위로 답했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져 버리는 법.</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칼 마르크스</strong><br />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지역이었던 트리에에서 출생한 마르크스는 본래 아카데미에서의 일반적인 삶의 길을 의도했으나, 뜻하지 않은 일들로 인해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그는 밀려들어간 현실과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삶을 살게 된다. 1844년과 1845년을 거치면서 정치경제학 이론에 토대를 둔 계급투쟁의 구도를 사유의 중심에 놓게 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에 이어 역사와 사회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인간의 진정한 자유에 관한 일반이론으로 수렴시킨다.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집필하면서 혁명 속으로 뛰어든 그는 혁명 활동을 벌이면서도 끊임없이 혁명을 반성하고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다. 1850년대 이후에는 혁명적인 정치활동에서 멀어졌으나 정치경제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867년에는 『자본』 1권을 출간하였다. 그의 사상은 진정한 근대인으로서의 교양과 계급적 당파성에 바탕을 두고 인간과 세계를 역사적 이성주의의 입장에서 파악한 성과이다. 특히 그가 추구하였던 인간의 진정한 자유는 근대적 인간의 삶에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지배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진 것이었다.</p>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최형익</strong><br />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현대정치이론과 한국정치론을 주로 강의하고 있으며, 주요 학술적 관심 분야는 민주주의와 사회계급, 그리고 정치권력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저서로 『마르크스의 정치이론』(1999), 『고전 다시 읽기』(2007), 『실질적 민주주의』(2009) 등이, 역서로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아담 쉐보르스키, 1995), 『기로에 선 자본주의』(앤서니 기든스 외, 2000), 『제3의 길과 그 비판자들』(앤서니 기든스, 2002), 『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2011) 등이, 주요논문으로 「입헌독재론」(2008), 「사회양극화와 젠더민주주의」(2009),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나타난 전통과 혁명」(2010), 「계급투쟁과 보통선거제의 정치적 동학」(2011) 등이 있다. <a href="mailto:ryancooler@gmail.com">ryancooler@gmail.com</a>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4 오후 2:14:00강준만의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B%A7%A4%EB%A7%A4%EC%B6%98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br /> 왜 &lsquo;매춘&rsquo;이 아니라 &lsquo;매매춘&rsquo;인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국 매매춘의 역사 현장을 산책하기 위해 가져야 할 첫째 자세는 왜 &lsquo;매춘&rsquo;이 아니라 &lsquo;매매춘&rsquo;이라고 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6년 10월 14일 한국교회여성연합회는 &lsquo;매춘 문제와 여성운동&rsquo;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여 기지촌 여성들의 현장 증언, 제주도의 기생 관광 실태와 매춘 여성 인권유린 현장, 동남아 성매매와 여성 인권유린 현실의 심각성을 부각했다. 이 세미나에서 우리나라 성매매 반대 운동 사상 처음으로 매춘에 대한 개념 정의가 이루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세미나에 참석한 손덕수와 이미경은 종래의 &lsquo;매춘<sup>賣春</sup>&rsquo;이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손덕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ldquo;매춘은 몸을 파는 사람과 몸을 사는 사람이 있을 때 성립하므로 &lsquo;賣春婦&rsquo;와 &lsquo;買春夫&rsquo;가 똑같이 문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매춘을 매매춘<sup>賣買春</sup>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rdquo;라고 하며 용어의 적확한 사용을 촉구했다. 이미경도 &lsquo;사는&rsquo; 남자 쪽을 강조하며 &lsquo;매매춘<sup>賣買春</sup>&rsquo; 혹은 &lsquo;매춘<sup>買春</sup>&rsquo;으로 쓰기를 주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후 &lsquo;매춘&rsquo; 대신에 &lsquo;매매춘&rsquo;이란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 글에서도 &lsquo;매매춘&rsquo;이란 용어를 쓰기로 한다. 그러나 인용 문헌에 &lsquo;매춘&rsquo;으로 나와 있는 것은 그대로 표기하였음을 밝혀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매매춘은 문화권별로 성性 문화가 어떠한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뉴욕 주립대의 부부 교수인 번 벌로<sup>Vern Bullough</sup>와 보니 벌로<sup>Bonnie Bullough</sup>는 《매춘의 역사》(1987)에서 &ldquo;매춘이란 명확히 성관계, 여성의 처녀성, 여성의 간통 등에 대한 종교적 견해나 철학적 가설과 결부되어 있다&rdquo;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여성의 처녀성이 찬양되고, 여성의 간통이 처벌되는 사회에서는 아마도 제도화된 매춘이 성행할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매춘은 또 결혼의 패턴에도 관계가 있으며 여성들이 결혼을 어렵지만 매우 가치 있는 일로 생각하는 경우, 아마도 매춘 발생률이 높아질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진술은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lsquo;매매춘 공화국&rsquo;이 된 이유를 시사해준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 또는 신축성이야말로 한국 성<sup>性</sup> 문화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오랜 기간 외국 군대를 주둔시킨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 가세해 그런 결과를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매매춘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고대 그리스 사서에 매춘부의 존재가 처음 등장했는데 매춘을 뜻하는 영어 &lsquo;prostitution&rsquo;도 이때 비롯됐다. 어원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lsquo;앞&rsquo;을 뜻하는 &lsquo;pro&rsquo;와 &lsquo;서 있다&rsquo;는 뜻인 &lsquo;stitution&rsquo;이 합쳐진 것으로 문 앞에서 남성을 유혹하는 행위를 뜻한다는 풀이가 우세하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매춘부들에게 구분되는 옷을 입혔고 세금도 부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고대 히브리 사회에서는 외국 여자에게만 매춘을 인정한다는 법률을 제정하기도 했다. 집단을 이룬 &lsquo;매음굴&rsquo;이 등장한 것은 중세 유럽 때부터였다. 이곳은 중요한 세원으로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하다 종교개혁으로 철퇴를 맞았지만, 이는 곧 다른 형태로 부활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매매춘의 기원은 본문에서 다루기로 하자. 그런데 기원을 찾다보면 매매춘과 간통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매매춘은 돈을 매개로, 간통은 사랑을 매개로 한다는 차이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lsquo;대중화&rsquo;된 간통은 그런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 책 끝에 &lt;간통의 역사: 한국은 어떻게 &lsquo;간통의 천국&rsquo;이 되었는가?&gt;라는 비교적 짧은 글을 부록으로 게재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매매춘의 역사를 심도 있게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나의 &lsquo;한국 사회문화사 시리즈&rsquo; 가운데 《죄의식과 희생양: 대한민국 반공의 역사》(김환표와 공저, 개마고원, 2004),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커피와 다방의 사회사》(오두진과 공저, 인물과사상사, 2005), 《축구는 한국이다: 한국축구 124년사, 1882~2006》(인물과사상사, 2006년),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말죽거리에서 타워팰리스까지》(인물과사상사, 2006), 《입시전쟁 잔혹사: 학벌과 밥줄을 건 한판 승부》(인물과사상사, 2009), 《어머니 수난사》(인물과사상사, 2009), 《전화의 역사: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인물과사상사, 2009),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 한국 실업의 역사》(개마고원, 2010), 《룸살롱 공화국: 부패와 향락, 패거리의 요새 밀실접대 65년의 기록》(인물과사상사, 2011), 《담배의 사회문화사: 정부 권력과 담배 회사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인물과사상사, 2011)에 이은 열한 권째 책이다. 한국 사회의 모든 것들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내 뜻에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독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4월<br /> 강준만 올림</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span><span style="font-size: x-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계집애 고운 것은 <br /> 갈보로 간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개화기 이전의 매매춘</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시대에 가무를 담당하던 유녀를 매매춘의 효시로 보지만, 일치된 의견은 없다. 삼국시대부터냐 조선 시대부터냐 하는 논쟁이 있는데, 이는 매매춘의 제도화에 관한 논쟁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매매춘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그것이 제도로 정착해 널리 성행했는가는 기록과 자료의 부족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록을 중심으로 보자면, 고려 시대 때 중국에서 관기 제도가 수입되면서 기녀라는 명칭이 붙었고 조선 시대에는 기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 기생은 관기와 민기, 약방기생과 상방기생 등을 통칭하는 말로 매매춘을 본업으로 한다기보다는 궁중의 약 제조나 가무를 맡아보던 사람들인데 후에 사대부나 군인들을 상대하는 위안부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태종 때 창기를 모두 없애자는 주장에 대해 일부 관리들이 &ldquo;창기를 없앤다면 관리들이 여염집 담을 넘게 돼 훌륭한 인재들이 벌을 받게 될 것&rdquo;이라며 반대했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 조정은 세종 때 부산포&middot;염포&middot;제포 등 삼포<sup>三浦</sup>에 왜인 거주 지역을 허용했는데, 이들이 조선 여자와 매매춘을 하는 것에 대해선 강력히 대응하였다. 응징은 어떠했던가? 이규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ldquo;왜인의 머리채를 노끈으로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 그러고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활을 당겨 그 노끈을 잘라 땅에 떨어지게 하곤 했다. 한국판 윌리엄 텔이었다 할 수 있다. 이런저런 분노가 결집하여 삼포의 왜란<sup>倭亂</sup>이 일어났음은 알려진 사실이다.&rdquo; 이후에도 일본인을 상대로 한 매매춘은 계속되었는데, 정조 때의 《대전통편》은 왜인에게 뇌물을 받고 여인을 유인한 자는 참형에 처하고, 매춘한 여인은 장형<sup>杖刑</sup> 1백과 유배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매매춘한 일본인은 강제 추방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50" height="37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A%B7%B8%EB%A6%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신경숙은 논문 &lt;조선 후기 여악<sup>女樂</sup>과 섹슈얼리티&gt;를 통해 &ldquo;조선 시대에는 일반 기녀들뿐 아니라 국가의 공식 의례와 각종 연회에서 음악과 가무를 담당했던 여악이나 관기<sup>官妓</sup>도 지배층을 위한 성적 봉사 임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rdquo;라며 &ldquo;조선 후기 여악이 관의 영향에서 벗어나 민간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여악의 경영자로 나선 기부<sup>妓夫</sup>, 남성 가객, 좌상객<sup>座上客</sup> 등 이른바 &lsquo;여악 매니저&rsquo;들에 의해 여악이나 관기의 성적 도구화가 더 심해지게 됐다&rdquo;라고 주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 후기 들어서는 서울과 평양 등지에 갈보라고 불리는 직업 매춘부들이 소규모 유곽을 이루었지만, 홍등가가 본격 등장한 것은 구한말 일본 군대가 진주한 1904년께부터였다. 사정이 그런 만큼, 한국 매매춘의 역사를 탐구해보는 이 책은 개화기에서부터 출발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매매춘 제도화엔 17세기 이래 공창<sup>公娼</sup>제도를 택해온 일본의 영향이 컸다. 개항(1876년) 이후 일본의 매매춘 제도는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해 조선 전역으로 확산했다. 《독립신문》은 일본인들의 성매매 업소에 드나드는 조선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독립신문》 1896년 7월 11일자는 &ldquo;음녀들이 각처에 많이 있어 빈부를 막론하고 어리석은 사나이들을 유인하여 돈들을 빼앗으며&hellip;&hellip; 무뢰한 배들이 남의 계집아이들을 사다가 오입을 가르친다니 이런 일은 경무청에서 마땅히 엄금할 일이더라&rdquo;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청일전쟁(1894년)&middot;러일전쟁(1904년)을 거쳐 일본인들의 침투가 가속화되면서 성적 향락 문화는 일반 대중의 삶까지 파고들었다. 매춘 여성을 격리하고, 등록하여 허가를 받게 하며, 세금을 걷고 위생검사를 하게 된 것은 1900년대 중반부터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904년 경무사 신태휴는 매춘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서울 남부 시동<sup>詩洞</sup>에 상화실<sup>賞花室</sup>이라는 매매춘 지역을 만들고 그 외에서의 영업은 못하게 하는 훈령을 내렸다. 내국인들이 드나드는 집은 &lsquo;상화가<sup>賞花家</sup>&rsquo;,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집은 &lsquo;매음가<sup>賣淫家</sup>&rsquo;라는 문패를 달게 했다. 인천 화개동 등 여러 곳에도 집창촌이 형성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홍성철은 &ldquo;당시 일본으로부터 배일적인 인물로 분류됐던 신태휴가 성매매 여성 집단 거주지를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은 그만큼 성매매 여성의 증가와 성병 문제, 성매매에 따른 사회적 폐해, 성폭력 등으로 말미암은 풍기문란이 심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rdquo;라고 분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04년 무렵에는 &ldquo;전답 좋은 것은 철로<sup>鐵路</sup>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rdquo;는 속요(&lt;신아리랑타령&gt;)가 떠돌 정도였다. 갈보<sup>蝎甫</sup>의 &lsquo;갈<sup>蝎</sup>&rsquo;은 중국 말에서 온 것으로 밤에 나와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취충(臭蟲, 빈대)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욕치고는 끔찍한 욕이었다. 그럼에도 갈보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일패, 이패, 삼패</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권희영은 &lt;호기심 어린 타자: 20세기 초 한국에서의 매춘부 검진&gt;이란 논문을 통해 1904년 인천에서 처음 시작된 매춘부들의 위생 검진에 주목했다. 권희영은 &ldquo;정치가, 군인, 사회운동가 등이 모두 부국강병을 시대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매춘부 치료가 하나의 시대적 요청으로 여겨지게 됐다&rdquo;라며 &ldquo;이 과정에서 당시 &lsquo;매춘부&rsquo;는 남성의 불안감과 죄책감까지 함께 떠안은 채 가차 없이 그 명예를 짓밟혔다&rdquo;라고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06년부터 모든 주요 도시에서 매음세를 징수하는 동시에 매춘부에 대한 위생 검사가 시행되었다. 1909년의 보도로는 창기 숫자가 서울에서만 2,500을 헤아렸다. 1900년대부터 약 광고가 범람한 가운데 1910년 이후에는 성병 치료제 광고가 제일 흔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에 성병 검사에 대한 매춘부들의 저항은 필사적이었다. 성병 검사가 남자 의사에 의해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검사를 피하려고 영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검사 대상에 오르지 않는 기생으로 전업하거나, 지방에 내려가거나, 심지어는 아편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당국은 포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저항에 대응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40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A%B7%B8%EB%A6%BC3.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08년 6월에는 매춘부의 가부(假夫: 기둥서방)나 포주들에게 &lsquo;경성유녀조합&rsquo;을 조직하게 해 성병 검사 위반자에 대한 경찰 개입을 강화했고, 1908년 9월에는 경시청령으로 &lsquo;기생단속령&rsquo;과 &lsquo;창기단속령&rsquo;을 발표해 매매춘 관행의 공창화를 구체화했다. 그렇다면 기생은 무엇이고 창기는 무엇일까? 기생은 매춘할 수 없고 객석에서 무용과 음곡을 할 수 있었던 반면, 창기는 매춘만 할 수 있게 한 구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즈음부터 기생을 일패<sup>一牌</sup>, 이패<sup>二牌</sup>, 삼패<sup>三牌</sup>로 나누는 분류법도 쓰였다. 일패는 양반층의 잔치에 참여해 흥을 돋우는 예전 뜻 그대로의 기생을 뜻했다. 이패는 기생 출신으로 은밀히 몸을 파는 은근자<sup>殷勤者</sup> 또는 은군자<sup>隱君子</sup>인데, 이때의 &lsquo;군자&rsquo;는 도둑을 양상군자<sup>梁上君子</sup>로 부르는 것과 같은 반어적 용법이다. 사람들은 보통 &lsquo;은근짜&rsquo;라고 불렀다. 삼패는 성매매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을 뜻했다. 전통 기생은 이패와 삼패가 기생으로 불리는 것에 분노했으며, 기생만 쓸 수 있는 홍양산을 삼패가 쓰고 다니자 경무청에 항의하는 한편 양산에 기<sup>妓</sup> 자를 금색으로 새겨 붙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일제 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생은 그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으로도 분류되었다. 일패는 값이 가장 비싼 양분<sup>洋粉</sup>을 썼기에 양분기생, 이패는 값이 중간인 왜분<sup>倭粉</sup>을 썼기에 왜분기생, 삼패는 값이 가장 싼 국산품인 연분<sup>鉛粉</sup>을 썼기에 연분기생으로 불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산 연분(납분)은 그 부작용이 매우 심각했다. 이 연분을 많이 쓰는 여인들은 얼굴이 푸르게 부어오르고, 잇몸이 검어지고, 구토가 나고, 관절이나 뇌세포까지 손상되는 납독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납독으로 미친 사람도 생겨났고, 기생의 사생아들도 눈이 멀었다든지 관절이 굳었다는 사례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런 심각한 부작용을 알면서도 연분을 썼으니!</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599" height="32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A%B7%B8%EB%A6%BC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908년 10월 1일 통감부는 기생․창기․기둥서방 등 468명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 단속령에 관한 설명회를 열었다. 통감부는 이들에게 스스로 조합을 결성케 해 성병 검사는 물론 화대 조정에 협조하게 하였다. 새로운 규약은 화대를 한 시간에 80전으로 정했다. 기존에는 시간 여하에 관계없이 1회 4~5원으로 되어 있었는데, 고객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므로 시간당 요금을 정해야 일반인들이 더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또 기생과 창기의 연령 하한을 당시 조선의 결혼 가능 연령을 근거로 만 15세로 정하였는데, 이는 일본 국내 공창의 연령 하한인 18세보다 세 살이나 낮고 일본인 거류지의 일본인 창기의 연령보다 낮은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야마시다는 &ldquo;일본은 통감부 설치와 동시에 조선인 매음부의 공창화 그리고 일본식 공창화를 추진하였으며 그것은 거류지의 공창화와는 대조적으로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조선 공창제도의 특징은 일본 국내 또는 거류지에서 풍기 단속을 위해 유곽을 설치한 것과는 달리 시내에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매음업을 공허하면서 매음부의 성병 검사를 중심으로 공창화를 실시한 점이다&rdquo;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 전반에 매매음을 스며들게 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성 의식 확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공창제도 확립 과정에서 매음부의 성병 검사가 일관되게 중시된 것은 일본 군대의 강병책에 그 배경이 있었으며 그 실질적인 의미는 매음부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적 도구의 &lsquo;안전성&rsquo;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매춘을 알선하는 소굴</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1900년대의 공연 예술은 자주 매매춘 논란에 휘말려 들곤 했다. 특히 개신교인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황성신문》 1909년 6월 3일자를 보면, 개신교 신도 수십 명이 공연 중인 연흥사 앞 건물에서 소리 높여 찬송가를 부름으로써 공연을 방해하였다. 경찰도 풍기 단속을 이유로 곧잘 통제를 가하곤 했다. 경찰 당국은 입장객이 40명 미만이면 공연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만들어 시행했는데, 1909년 8월 1일 그러한 규칙에 따라 실제로 극장 문을 열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연극장 내 풍기 문란이 심한 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이승원은 &ldquo;연극장에는 부랑패류들과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범람했다. 연극장을 찾는 목적도 일차적으로는 연극을 구경하는 데 있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lsquo;부인석의 갈보 구경도 실컷&rsquo;하려는 꿍심을 감추지 않았다&rdquo;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신문 보도에 의하면 1909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매춘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2,500명 정도였다. 이들의 주요 활동 장소가 연극장이었다. 공권력은 사복 경찰을 연극장에 비밀리에 투입하여 매춘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승원은 &ldquo;문명개화를 위해 설립한 근대적인 신식 극장들이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로 변해갔다.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등 근대식 극장은 취군 나팔 소리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유인하였고, 이 때문에 도시는 좀더 소란스러워졌다&rdquo;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사람들은 극장의 취군 나팔 소리에서 탕아들의 방탕한 화류계 생활을 연상했다. 이 때문에 신문들은 극장에서 공공연히 거래되는 &lsquo;매춘&rsquo;에 대해서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hellip;&hellip; 기생들의 판소리 또한 계몽가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기생의 노랫소리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기생방에서 세월을 낭비하는 청년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rdquo;</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4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9_%EB%A7%A4%EB%A7%A4%EC%B6%98%20%ED%95%9C%EA%B5%AD%EC%9D%84%20%EB%B2%97%EA%B8%B0%EB%8B%A4/%EA%B7%B8%EB%A6%BC5.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울 기생이 급증한 데에는 1909년 관기 제도의 폐지가 미친 영향이 컸다. 먹고살 길이 없어진 지방 기생들은 앞다투어 서울로 상경하였고, 적극적으로 영업함으로써 수요를 창출하고자 하였다. 철도 덕분에 지역 간 이동이 자유로워졌고 기생의 법도가 무너진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과거엔 양반만 상대할 수 있었던 기생을 돈만 있으면 누구나 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그간의 신분제를 뛰어넘는 한풀이 수단으로 기생 수요가 폭증하였다. 또한 신흥 기생 고객은 기생의 법도를 모르는 자들이라, 기생의 공급도 마구잡이로 이루어졌다. 이런 수요-공급의 상승효과로 기생이 급증하였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임종국은 이 시대의 전반적인 풍기문란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조장한 것이라며 &ldquo;일제의 침략은 칼과 코란이 아니라 칼과 여자로 수행되었다&rdquo;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로 &ldquo;첫째는 구한말 집권층의 정치적 불만의 토출구로써, 둘째는 유산 계층의 탕재로 민족자본의 형성을 저해하기 위해서, 셋째는 청년층의 민족의식을 주색으로 마비시키기 위해서&rdquo; 등을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화류계의 친일화 공작</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 강점 후, 특히 3․1운동 이후 일제의 친일파 보호&middot;육성 공작은 치밀하게 전개돼 심지어 화류계까지 친일화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요정은 조선 엘리트들의 주요 사교&middot;담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공작 내용은 첫째, 경성 시내의 기생 전부를 시내 각서에 불러 엄중히 훈계한다. 둘째, 윤치호가 회장인 교풍회와 제휴하여 시내 각 권번의 역원과 경찰 간부 모임을 열어 불령한 음모를 방지하도록 협의한다. 셋째, 새로이 권번을 허가하여 기생을 친일화 하도록 노력한다. 넷째, 내선<sup>內鮮</sup> 화류계의 융화를 촉진한다 등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경기도 경찰부장을 지냈던 지바<sup>千葉了</sup>는 &ldquo;1919년 9월 우리가 처음 경성에 왔을 당시의 화류계는 &hellip;&hellip; 기생 800명 모두 살아 있는 독립격문<sup>獨立檄文</sup>이었다&rdquo;며 그런 공작을 펼친 결과 &ldquo;음모의 소굴로 음부<sup>陰府</sup>나 다름없었던 화류계가 지금은 내선일여<sup>內鮮一如</sup>를 구가하는 봄날의 꽃동산이 되었다&rdquo;라고 자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3․1운동으로 크게 고무된 기생들은 대학생이 요정에 가면 지금이 어느 때인데 독립할 생각은 않고 유흥이냐고 타이르면서 함께 놀기를 거절하기도 했다. 또 가난한 청년 학생에게 학자금까지 제공하면서 독립투사가 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일제의 공작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생은 원래 요릿집에서 숙박할 수 없었지만 이후 요릿집에 상시 고용돼 성을 팔기도 했다. 1926년 《개벽》은 &ldquo;과거의 기생은 귀족적이더니 현재의 기생은 평민적이다. 과거에는 비록 천한 직업이었지만 염치와 예의를 챙겼는데, 이제는 금전만을 숭배한다&rdquo;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는 그런 공작 차원에서 성매매 산업을 육성했다. 미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시카고트리뷴》(1919년 12월 26일)은 &ldquo;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바로 인종차별적인 윤락가를 만든 것&rdquo;이라며 &ldquo;일본인들이 조선에 악의 시스템을 전달했다&rdquo;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ldquo;조선 자체에는 이러한 악의 거리가 없었다&rdquo;면서 &ldquo;이러한 윤락가는 조선인 남녀의 성적 타락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도입한 것&rdquo;이라고 했다.<br /> <br /> &nbsp;<br /> (머리말,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강준만<br /> </strong>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와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한 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한겨레》를 비롯한 각종 신문, 잡지, 언론 매체에 시사 평론을 기고했고, 인문∙사회∙정치∙문화에 관한 입지전적인 책을 펴냈다. 그가 평생의 작업으로 꿈꾸는 &lsquo;한국 생활사&rsquo;는 축구, 전화, 바캉스, 도박, 선물, 성형, 목욕, 입시 등 분야를 망라한 흥미로운 40여 가지 주제에 천착해오고 있으며 계속해서 단행본으로 출간될 계획이다.<br /> 주요 저서로는 《한국 현대사 산책》(전 23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 10권), 《미국사 산책》(전 17권), 《강남, 낯선 대한민국의 자화상》, 《이건희 시대》, 《한국인 코드》, 《한국 대중매체사》, 《현대 정치의 겉과 속》, 《입시전쟁잔혹사》, 《어머니 수난사》, 《특별한 나라 대한민국》, 《룸살롱 공화국》, 《강남 좌파》,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 《자동차와 민주주의》 외 다수가 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3 오후 4:43:00《230》당신이 토론에서 이기고 싶다면<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9"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0/230_%ED%86%A0%EB%A1%A0%EC%9D%98%EB%B2%95%EC%B9%99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2010년 6월 18일</strong><br /> <strong>쇼펜하우어의 <span style="font-size: large">『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span>(원앤원북스, 2003)을 읽다</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유명한 철학가의 주저 목록에도 없는 이런 류의 책은 위서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헌책방에서 자주 보았던 이 책은 진짜 쇼펜하우어가 쓴 책이다. 그는 유고로 발견될 이 미발표 원고를 1830~1831년쯤에 썼다. 이 작은 논문은 『토론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육필 유고에서』라는 제목으로 1864년에 처음 빛을 보았고, 1991년 이탈리아어판 쇼펜하우어 전집의 편찬 책임자에 의해 편역되어 그해 이탈리아에서 15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성욱의 이 판본 외에, 김재혁이 번역한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도 있다. 두 판본은 각기 장단점을 갖고 있으나, 여기서는 지적하지 않으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은 논리학<sup>Logic</sup>와 토론술<sup>Dialektik</sup>을 동의어로 사용했지만, 쇼펜하우어는 두 개념을 새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논리학은 &lsquo;선험적&rsquo;이면서 &lsquo;이성의 방식&rsquo;을 따르지만, 토론술은 대부분 &lsquo;경험적&rsquo;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고독하게 사고하는 형식인 반면, 후자는 항상 하나의 대상을 놓고 두 사람이 경합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바로 그 때문에 토론에는 순수한 이성이 아닌, 각자의 &lsquo;인격&rsquo;이 개입된다. 정리하면 이렇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37"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0/230_%EB%85%BC%EC%9F%81%EC%97%90%EC%84%9C%20%EC%9D%B4%EA%B8%B0%EB%8A%94_%ED%91%9C%EC%A7%80(1).jpg" />내 생각 같아서는 &lsquo;논리학&rsquo;(이 낱말은 그리스어의 &lsquo;숙고하다, 계산하다&rsquo;와 &lsquo;말과 이성&rsquo;―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에서 왔다)은 &lsquo;사고의 법칙, 즉 이성의 행동방식에 관한 학문&rsquo;으로, 그리고 &lsquo;토론술&rsquo;(이 낱말은 그리스어의 &lsquo;담화하다&rsquo;라는 말에서 왔다. 모든 담화는 사실이나 의견을 전달한다. 즉 담화는 사실적<sup>史實的</sup>이거나 혹은 숙고적이다)은 &lsquo;논쟁하는 기술&rsquo;(이 낱말은 현대적 의미로 쓴 것이다)로 정의하고 싶다.(김재혁 역, 120~121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진리를 추구하는 논리학과 달리, &ldquo;토론술의 원래 목적은 논쟁에서 이기는 것&rdquo;(최성욱 역, 134쪽)을 목표로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몇몇 대목을 보면, 쇼펜하우어 자신이 대단한 논쟁가였던 모양이다. 그는 토론 당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논쟁의 요령을 일반화하여 그것을 사용하거나, 그것으로 상대방의 요령을 물리치는 데 긴요하게 쓰일 수 있도록 이 책을 썼는데, 토론의 요령을 일반화하는 데는 쇼펜하우어 자신의 체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보면 토론에서 이길 수 있을까? 도움이 되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특별히 여기서는 38가지 방법 가운데, 쇼펜하우어가 &ldquo;실제로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으면, 다른 기술은 모두 쓸모가 없다&rdquo;라고&nbsp;강조한 &lsquo;동기부여를 통한 호소&rsquo;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이 기술을 &ldquo;비록 상대의 견해가 타당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을 상대에게 줄 수 있다면, 그는 실수로 뜨거운 쇳덩어리를 잡았을 때처럼, 얼른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게 될 것이다&rdquo;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든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어떤 부자가 증기기관이 많은 사람들이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영국의 기계생산 방식의 우수성을 옹호할 경우, 우리는 얼마 후에는 마차도 증기기관으로 대체될 것이고, 그러면 그의 목장에 있는 수많은 말들의 값도 폭락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켜 주고, 그가 어떻게 나오는지 살펴보면 된다.(최성욱 역, 22~23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기술의 요점은 상대가 내세운 주장이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속한 직업이나 종파의 공동 이익에 배치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암시해 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 요령에 &lsquo;유용성을 통한 논증법&rsquo;이라는 명칭을 붙였는데, 이 방법이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 결코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지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옳은 논리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논리가 자신의 이익을 훼손한다면, 인간은 언제라도 자신의 이성(&lsquo;옳은 논리&rsquo;)을 취소하고 욕망을 택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300" height="38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30/%EC%87%BC%ED%8E%9C%ED%95%98%EC%9A%B0%EC%96%B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용사는 &lsquo;뻔뻔함&rsquo;이다. 기만과 억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수 있어야만 토론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요령에 따라 토론에서 이겨봤자, 그것은 그 &lsquo;순간의 착시&rsquo;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에는, 전자 기록 매체가 없었다.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유용한 요령으로 한순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방송과 인터넷 등 전자 기록 매체가 예전의 기록을 무한히 되풀이 재생할 수 있는 이 시대에, &lsquo;뻔뻔함&rsquo;은 오히려 놀림감이 되기에 알맞다(이 책을 통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겠다는 사람은, 반드시 이 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의 장점은 최성욱이 &lsquo;옮긴이의 말&rsquo;에 잘 지적해 놓았듯이, &ldquo;&lsquo;토론술&rsquo;이라는 테마를 통해 인간 본성의 문제점에 대해 함께 성찰&rdquo;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인용된 &lsquo;유용성을 통한 논증법&rsquo;은 아주 좋은 일례였다. 여기에 또 한 사례를 덧붙이자면, 쇼펜하우어는 토론의 최후 수단으로 등장하는 &lsquo;인신공격&rsquo;을, 기막히고도 절묘하게 인간 본성과 관련짓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간에게 있어서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으며, 이 허영심에 상처가 나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은 없다. (바로 여기서 &ldquo;명예가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rdquo;라는 격언이 나왔다. 이런 허영심의 충족은 주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성취된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지만, 주로 지력과 연관해서 생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문제는 이 지력이 논쟁 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론에서 진 사람은 비록 그가 부당하게 진 것이 아니라고 해도, 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기술을 꺼내게 된다.(최성욱 역, 116~117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간의 허영심과 분노는 모두 &lsquo;너 아는 게 많아(너 머리 좋아)/ 너 아는 게 없어(너 머리 나빠)&rsquo;에서 비롯한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지 못하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으로 인신공격을 꺼내 든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논쟁에서 이기고 싶은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38가지 기술은 모르더라도, 이 한 가지만은 꼭 알고 논쟁에 임해야 한다. 교사와 깡패는 &lsquo;사람을 때린다&rsquo;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교사는 &lsquo;가르치기&rsquo; 위해서 때리고, 깡패는 상대를 &lsquo;병신으로 만들기&rsquo; 위해서 때리는 게 다르다. 논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사람은 상대를 가르치려는 태도를 버리고, 깡패가 되어야 한다. 그만한 힘이 없거나 그게 싫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토피카』에서 했다는 충고를 따르는 게 현명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무나 상대로 닥치는 대로 논쟁을 벌이지 말고, 자신이 아는 사람으로서 결코 불합리한 것을 내세우지 않고 만약 그럴 경우 스스로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충분한 분별력을 지닌 사람들과만 논쟁을 하라. 그리고 권위적인 명령이 아니라 근거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우리가 내세우는 근거에 귀를 기울이고 또 거기에 동의할 수 있을 만큼 분별력을 지닌 사람과 논쟁을 하라. 그리고 끝으로 진리를 높이 평가하고 비록 논쟁의 적수의 입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정당한 근거라면 거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 또 진실이 상대방 측에 있으면 자기 의견의 부당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과 논쟁을 하라.(김재혁 역, 114~115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직후, 쇼펜하우어는 &ldquo;이렇게 보면 100명 중에서 논쟁을 할 가치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다는 결론이 나온다&rdquo;라고 덧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23 오후 1:55:00《229》고려에는 고려장이 없었다<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7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후가자와 시치로의 <span style="font-size: large">「나라야마부시考」</span>를 읽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며칠 전 후가자와 시치로의 「나라야마부시考」(<a target="blank" href="http://nabeeya.net/Life/detail_view.aspx?CD_MENU=45&amp;SUB_CD_MENU=45&amp;ID_CONTENT=7224"><span style="color: #333399">《227》아쿠타가와 류노스케 外 4인의 『손수건 外』</span></a>)를 읽고, 이른바 &lsquo;고려장<sup>高麗葬</sup>&rsquo;이라고 불리는 풍습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몇 국어사전은 이것을 &ldquo;늙은이를 산 채로 광중<sup>壙中</sup>에 두었다가 죽으면 그곳에 매장하였다는 고구려 때의 풍속&rdquo;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2007~2008년 사이, 어느 신문에 자신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lsquo;추억 속 내 영화&rsquo;라는 글을 연재했던 한 원로 문학 평론가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이 동명의 소설을 갖고 만든 영화 &lt;나라야마 부시코&gt;(1983)를 보고 나서 &ldquo;고구려 때 늙고 쇠한 사람을 산속 구덩이에 넣었다가 죽은 후에 장사지냈다는 일을 가리킨다고 사전에 적혀 있다&rdquo;라고 감상문의 허두를 뗐을 때, 그는 국어사전의 풀이를 모범적으로 되풀이 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많은 역사학자들은 고려장이 고려는 물론이고 고구려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고려 때 고려장이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자료나 유물&middot;유적은 현재까지 발견된 것이 없으며, 어쩌다 시골 촌로들에 의해 옛날에 고려장을 했던 곳이라는 장소가 전해오고 있지만 고려장과는 관계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이 허무맹랑한 고려장을 역사적 사실인 듯이 믿게 된 데에는, 고려장 설화가 &lsquo;전래 동화&rsquo; 내지 민담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채 각종 동화책과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고려에는 고려장이 없었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고려장에 얽힌 설화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ⅰ) 옛날에 늙고 병든 아버지를 그의 아들이 지게에 지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노인을 산에 버리고 돌아올 때는 지게도 함께 버려야 하는데, 마침 같이 데리고 간 어린 아들(손자)이 그런 관례도 모르고 지게를 걸머지고 따라왔다. 아버지가 &ldquo;지게는 그대로 놔두어라&rdquo;라고 역정을 내자, 어린 아들은 &ldquo;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로 져다 버려야지요&rdquo;라고 대꾸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발길을 돌려 늙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고 와 돌아가실 때까지 잘 모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ⅱ) 옛날 고려시대에 연로한 어머니를 둔 효심 깊은 아들이 있었다. 나이 칠십이 되면 나랏법대로 고려장을 지내야 했으나, 아들은 어머니를 산속에 몰래 숨겨 놓고 매일 밥을 날랐다. 그런 가운데 아들로부터 나라에 큰 우환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나라를 구할 비방을 알려준다. 아들은 그것을 왕에게 고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왕은 그제서야 고려장이 나쁜 풍습이라는 것을 알고 고려장을 폐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539"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9/%EA%B3%A0%EB%A0%A4%EC%9E%A5.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유사<sup>有史</sup> 이래 고려장이 한반도에서 법제화된 풍습인 양 여겨지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던 두 설화가, 실제로는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 ⅰ)은 중국의 『효자전<sup>孝子傳</sup>』에 실려 있는 「원곡<sup>原穀</sup> 이야기」가 원전이다. 또 ⅱ)는 『고려대장경<sup>高麗大藏經</sup>』에 수록되어 있는 「기로국<sup>棄老國</sup> 이야기」의 변용으로, &lsquo;노인을 버리는 나라&rsquo;라는 뜻을 가진 기로국 이야기는 원래 『잡보장경<sup>雜寶藏經</sup>』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설법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삼국시대 이래로, 한반도에서 고려장이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문헌은 도서관에 널려 있다. 먼저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⑤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고려』(한길사, 1999)에 나오는 「&lsquo;고려장&rsquo; 풍속은 허구이다」를 보자. 예시된 설화 가운데 ⅰ)을 전문 인용해 놓기도 한 지은이는 &ldquo;이 이야기는 『논어』와 『효경』을 널리 가르치면서 효도를 장려하려고 만든 이야기이지 결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다. 효를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던 고려사회에 이러한 악습이 있었을 리가 없다&rdquo;(296쪽)라고 잘라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이보다 앞서 쓴 『한국사 이야기①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한길사, 1998)에서, 이미 고려는 &ldquo;국자감<sup>國子監</sup>과 같은 공공 교육기관만이 아니라 사학<sup>私學</sup>이 발전하여 여염집에서도 『논어』와 『효경』 등의 유교 경전을 배우고 익혔다&rdquo;(270쪽), &ldquo;유교 가르침에 충실한 사람이나 효제<sup>孝悌</sup>로 소문난 사람을 추천&rdquo;(275쪽)하여 이들에게 일정한 벼슬을 주었다고 쓰고 있다. 고려 왕조가 &ldquo;전국에 걸쳐 효자&middot;열녀를 찾아내 마을에 정려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rdquo;해 주고 이들에게 &ldquo;벼슬과 재물을 내려 효와 절개를 장려&rdquo;했던 이유는, 윤리적 측면도 있었지만 중앙집권화 된 국가의 통치술이기도 했다. &ldquo;무릇 나라를 다스리려면 먼저 근본에 힘써야 한다. 근본에 힘쓸 때 효보다 나은 것이 없다. 가문에서 효자가 나오면 반드시 충신이 일어나게 마련이다&rdquo;(이상 276쪽)라고 했던 성종의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려는 유교적인 원리를 국가 통치 체제로 삼았지만 내면은 불교 국가였다. 그렇다면 유교가 고려장을 허용할 리 없었던 것과 달리, 불교는 그것을 허락했을까? 불교와 효의 관계를 살피면 금방 답이 나온다. 불교의 교리를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지만, 불교가 강조하는 &lsquo;자비<sup>慈悲</sup>&rsquo;와 &lsquo;연기설<sup>緣起說</sup>&rsquo;은 결코 고려장을 좌시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의 고통을 함께 슬퍼하면서 무차별적인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치는 불교가 고려장을 용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연기설은 모든 생명의 바탕이 하나에서 나왔으며, 서로가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하므로 자신의 근원인 부모를 유기한다거나 핍박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교의 부모 공경 사상은 석가모니의 입을 빌린 여러 경전에 나온다. &lsquo;행복의 길&rsquo;로 가고자 하면 &ldquo;첫째로 부모를 잘 섬기고 처자를 잘 보살펴라.&rdquo;(『길상경<sup>吉祥經</sup>』), &ldquo;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죄를 면치 못한다.&rdquo;(『범망경<sup>梵網經</sup>』), &ldquo;누구나 극락세계에 양생하고자 하면 먼저 부모를 봉양하여 사장<sup>師長</sup>을 봉사<sup>奉事</sup>하고 자비심으로써 살생하지 말 것이며 십선업<sup>十善業</sup>을 닦으라.&rdquo;(『관무량수경<sup>觀無量壽經</sup>』), &ldquo;부모를 봉양하고 순종하며 불도를 행하라.&rdquo;(『불설사천왕경<sup>佛說四天王經</sup>』), &ldquo;아버지가 베푸신 은혜가 높아 태산과 같고 어머니가 베푸신 은혜가 깊어 바다 속과 같다.&rdquo;(『대승본생심지관경<sup>大乘本生心觀經</sup>』) 등등.</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부모은중경<sup>父母恩重經</sup>』은 부모의 은혜 열 가지를 나누어 말하면서 부모의 은혜가 망극하므로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수미산을 백 번 천 번 돌아 살가죽이 터져 뼈가 드러나고 닳아서 골수가 보이더라도 보답할 수 없다고 하였고, 흉년을 당하여 어버이를 위해 그 몸의 살을 오려내고 뼈를 갈아서 티끌같이 하기를 백천 겁<sup>劫</sup>이 지나도록 하더라도 오히려 부모의 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어버이를 위하여 잘 드는 칼로 자기의 염통을 오려내어 피가 흘러 땅을 적시고 고통을 사양하지 않기를 백천 겁을 지나도록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부모은중경』은 말한다.(이상은 다시 언급될 김민한의 책에서 인용함).</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원 1세기경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불교는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와 백제에, 6세기 초에는 신라에 전파됐다. 불교를 받아들인 삼국이 유교와 함께 불교의 규범을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는 마땅한 증거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정한 세속오계<sup>世俗五戒</sup>로 충분히 입증된다. 화랑이 지켜야할 다섯 가지 계율 가운데 &lsquo;부모에 효도를 다할 것&rsquo;을 당부한 두 번째 계율 사친이효<sup>事親以孝</sup>는, 불교의 부모 공경이 한 국가의 통치 원리에 스며든 경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동시에 그것은 유교의 규범이기도 하다). 사정은 고구려와 백제도 다르지 않았으니, 삼국시대의 후대인 고려 시대에 와서 부모 공경 사상이 갑자기 뒤집혔을 리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사 상식 바로잡기』(책과함께, 2007)를 쓴 박은봉은 같은 책 46~54쪽에 실린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다?」라는 충실한 소논문을 통해,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 아닌데도 고려장이라 불리게 된 까닭을 추적한다. 지은이는 글머리에 &ldquo;부모가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징역 1년, 상이 끝나기 전에 상복을 벗는 자는 징역 3년, 초상을 숨기고 치르지 않는 자는 귀양 보낸다&rdquo;라는 『고려사』의 법규를 들고 나서, &ldquo;유교와 불교가 이미 뿌리내려 효와 예 같은 윤리가 중시되던 고려 사회에서 부모를 산 채로 내다 버리는 장례 풍습이 발붙일 자리는 전혀 없었다&rdquo;라고 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고려장은 일제 식민통치 유산</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50" height="352"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9/%ED%95%9C%EA%B5%AD%EC%82%AC%EC%83%81%EC%8B%9D%EB%B0%94%EB%A1%9C%EC%9E%A1%EA%B8%B0_%EC%9C%A0%ED%85%8C.jpg" />한국인들이 고려장을 사실인 양 두루 믿게 된 것은 일제시대부터다. 박은봉은 &ldquo;삼국시대 이후로 조선시대까지 나온 역사책, 지리서, 수많은 문집들 어디에서도 노인을 산 채로 버리는 고려장 얘기는 찾아볼 수 없&rdquo;다면서, 일제시대에 들어 일반인들에게 고려장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일본인에 의해 수집&middot;편찬된 동화책의 역할이 크다고 말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한국인이 글로 확인할 수 있는 고려장 이야기는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사를 지낸 미와 다마키의 『전설의 조선』에 실린 「불효식자<sup>不孝息子</sup>」가 최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그보다 40여 년 전인 1882년, 미국인 그리피스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에 고려장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있기는 하다. 거기서 그리피스는 조선왕조가 전래된 두 가지 악습을 철폐했다면서 고려장<sup>Ko-rai-chang</sup>과 인제<sup>In-chei, 人祭</sup>를 들고 있다. 그는 같은 책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풍습과 산신이나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두 가지 악습이 조선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성행되었다면서, &ldquo;자비를 표방하는 불교의식으로도 이들을 폐하지 못했다&rdquo;고 썼다. 하지만 한국을 두 번이나 짧게 다녀갔던 그는, 고려장과 인신제사에 대한 지식을 일본 측 자료에 의거했으며, 시종일관 일본의 입장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고려장이나 인제에 관한 판단은 그것이 법제화되어 있었느냐, 아니냐를 구분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 없는 언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와 다마키의 『전설의 조선』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 192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이다. 여기에 실린 25편의 전설과 민담은 이후 다른 동화집에 그대로나 약간 변형된 채 재수록되면서 우리나라 전래동화집의 원형이 되고 전범이 되었다. 그 가운데 「어머니를 버린 남자」가 바로 고려장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동화집』을 편찬한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는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필요한 학교 교과서 편찬과 각종 교육 관련 발간물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때문에 『조선동화집』의 편찬 동기와 의도를 식민통치와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심은, 같은 시기에 같은 주제를 다룬 손진태의 『조선민담집』이나 박영만의 『조선전래동화집』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지은이의 연구에 따르면, 손진태는 고려장 이야기를 싣되 제목을 「기로전설」이라고 하고 있으며, 박영만이 채록한 75편의 전래동화 중에는 고려장 이야기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은 해방 6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전래동화의 원전이 되었다. 현재 시판되고 있는 전래동화집 중에 고려장 이야기는 거의가 『조선동화집』의 고려장 이야기를 답습한 것이다. 「노인을 버리는 지게」라는 제목으로 어린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기로설화는, 효도를 가르친다는 원래의 목적과 달리, 고려장이 마치 고려 때 실제 있었던 것처럼 선전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게다가 현재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지은이가 이 책을 쓰면서 했던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3학년 『읽기』 교과서의 「소년과 어머니」,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의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에 실려 있는 삽화(어머니를 업고 고려장을 하러 가는 아들의 모습)는 고려장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확고히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박은봉이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이다?」에서 강조한 것은, 고려장에 대한 역사적 오해가 &ldquo;설화가 사실로 혼동되어 굳어진 것&rdquo;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중요하게 떠오른 문제는, 동화의 무거운 역할이다. 내 세대는 도덕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lsquo;네덜란드 소년&rsquo;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제방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한 한스라는 소년이 어른들에게 알릴 틈이 없이 점점 커지는 구멍을 자신의 손가락과 팔뚝으로 막은 끝에 나라를 구하고 죽었다나, 기절했다나 하는 이야기 말이다. 요즘엔 그 이야기가 네덜란드 사람들조차 모르는 허구라는 게 밝혀졌다지만, 이런저런 신문 칼럼에서는 여전히 사실로 취급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5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9/%ED%95%9C%EB%B0%98%EB%8F%84%EC%97%90%EA%B3%A0%EB%A0%A4%EC%9E%A5.jpg" />김민한의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세종출판사, 2009)는 이 주제의 결정판이다. 지은이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교육제도와 효사상을 세세히 소개하고, 거기에 여러 학자들이 내어 놓은 효와 관련된 고려의 법제를 요약해서 보탰다. 고려시대에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고려사』 별전은 17명의 효자에 관한 기록까지 남기고 있다. 대부분의 고려장 이야기는 고려장을 치르는 나이를 70세로 잡고 있는데, 고려에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ldquo;70살 이상의 부모 봉양문제를 법률로 엄격히 규정&rdquo;(72쪽)하고 있어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린다는 풍습이란 아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은이는 &ldquo;특히 불효죄不孝罪를 엄격하게 처벌한 것이라든가 70살 이상의 부모 봉양은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하여 부모에 대한 효덕<sup>孝德</sup>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이조시대보다 더 비중을 크게 두었다고 볼 수 있다&rdquo;(74쪽)면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동화집 속에 &ldquo;&lsquo;고려장 이야기&rsquo;가 들어 있는 것은 일제식민정책으로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풍속을 말살하고 우리가 얼마 전까지 야만족이었음을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것&rdquo;(71쪽)이라는 역사가들의 의견에 동조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박은봉과 김민한은 고려시대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lsquo;고려장&rsquo;이라는 말이 후세에 생겨난 원인으로 두보의 시 「곡강<sup>曲江</sup>」 가운데 나오는 &ldquo;인생칠십고래희<sup>人生七十古來稀</sup>&rdquo;라는 일 절을 꼽는다. 이 구절은 &ldquo;사람이 칠십까지 살기는 예부터 드문 일&rdquo;이라는 뜻인데, 마지막에 나오는 &lsquo;고래희&rsquo;가 &lsquo;고래장<sup>古來葬</sup>&rsquo;이란 말장난으로 바뀌었다(그러면 &ldquo;사람이 칠십이면 예부터 장사를 치루었다&rdquo;는 뜻이 된다). 그리고 말장난 삼아 바뀐 고래장이 고려시대의 장례 풍습인 양 둔갑한 것이 고려장이다. 김민한은 여기에 두 가지 설을 더하고 있다. 하나는 인도의 기로국에서 행해졌다는 &lsquo;기로장<sup>棄老葬</sup>&rsquo;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기로국 이야기」가 『고려대장경』에 수록되어 있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고려장으로 불리게 되었을 가능성이다(기로국은 인도에 실존했던 나라이기 보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위해 지어낸 가상의 나라라고 보는 게 맞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풍자를 위해『걸리버 여행기』의 몇 나라를 지어 낸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ldquo;우리는 기로 설화로 왜 이런 소설을 못 썼을까&rdquo;</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제껏 살펴본 바에 따르면, 고려장의 원판이 고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사 이래 즉, 한반도에서 농경이 정착되고 중앙집권국가가 탄생한 이래, &lsquo;살아있는 노인을 내버리는 장사 풍습&rsquo;은 우리나라에 없었다. 효친 경로사상이 가장 꽃피던 고려시대에 고려장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어떤 국내 사료나 유적으로도 증빙된 바 없다. 하므로 고려장을 역사적 사실인 양 수용하거나, &lsquo;신판 고려장&rsquo;이니 &lsquo;현대판 고려장&rsquo;이니 하고 함부로 비유를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의 지은이가 주장한 것처럼 &ldquo;&lsquo;고려장&rsquo;이란 말은 고려와는 관계없는&rdquo; 말이므로 &ldquo;&lsquo;기로장&rsquo;으로 고쳐 부르기를 제안&rdquo;(76쪽)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나라산<sup>楢山</sup>&rsquo;의 &lsquo;노래<sup>節</sup>&rsquo;에 대한 &lsquo;이야기<sup>考</sup>&rsquo;라는 정도의 뜻을 가진 「나라야마부시考」는 일본 전래의 &lsquo;기로 설화&rsquo;를 소재한 작품이다. 뛰어난 인류학적 보고서로도 손색이 없는 이 작품을 읽고 나면, &lsquo;고려장은 일제 식민통치의 조작물이다&rsquo;라는 조건 반사적인 반박을 하기 이전에, 왜 우리는 유사 이전의 어느 지역에나 있었던 기로 설화를 가지고 &lsquo;이만한 소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을까?&rsquo;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무척 우울하게 만든다.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은 일본인이 우리에게 붙여 놓은 &lsquo;조선적인 것(후진적인 것)&rsquo;이라는 딱지에 즉자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시작한다. <strong>고려장이라는 용어가 잘못된 것은 맞지만, 고려장은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라면서, 유사 이전에 한반도에 실재했을 게 분명한 기로 풍습마저 부인하는 피해의식 구조가 「나라야마부시考」와 같은&nbsp;소재를 쓰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라야마부시考」는 성산<sup>聖山</sup>을 숭배하는 민속 신앙과 불교의 교리 가운데 하나인 해탈<sup>解脫</sup>(육근청정<sup>六根淸淨</sup>) 사상이 기로 설화와 접맥되어 있는 데다가, 부자와 빈자 사이의 습속 차이마저 가미되어 있어 풍부한 독법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기로 풍습이 생겨난 인류학적 진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로 풍습은 생산력이 보잘것없던 시대에, 노동력을 잃은 노인을 추방함으로써 가정과 공동체의 존속과 안위를 보장할 수 있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에서 그 원리는 아흔아홉 살의 여주인공 오린의 &lsquo;치아<sup>齒牙</sup> 모티브&rsquo;로 강조되고 있다. 그녀의 성한 치아는 동네 사람들의 비난거리이자 가족의 수치다. 오린은 하나도 상하지 않은 자신의 튼튼한 치아가 부끄러워서 남이 보지 않을 때마다 조약돌로 자신의 이를 쪼아댄다. 오린은 상처를 한 장남이 어렵사리 과부를&nbsp;새 아내로 얻자, 신바람이 나서&nbsp;돌절구 모서리에 냅다 이를 부딪쳐 성한 이빨을 부러뜨린다. 한 사람의 가족이 느는 만큼,&nbsp;한 사람의 입은 덜어야 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에는 굉장히 많은 민요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 다음의 민요 역시 노동력을 잃은 &lsquo;노인의 입<sup>口</sup>을 더는 것으로, 후세의 식량을 아낀다&rsquo;는 기아 풍습의 기본 원리와 닿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콩을 먹자면 물에 식혀라.[불혀라]<br /> 아빠는 소경, 앞을 못 본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저 노래에서 아빠는 노인 일반을 가리키며, 노인은 반드시 소경을 의미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눈이 어두워 앞을 못 볼 수는 있지만, 귀는 밝다. 하므로 늙은이보다 더 배가 고픈 젊은이들이 늙은이에게 들키지 않게 콩을 먹으려면, 생으로 먹거나 볶아 먹기보다 물에 불려 먹는 게 좋다. 그러면 콩을 씹을 때, 바작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살아있는 노인을 내다 버리는 기로 풍습 혹은 기로 설화는 인도&middot;중국&middot;일본&middot;몽골&middot;시베리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유럽과 중동 지방에도 비슷한 예가 발견된다. 서양의 민담이나 전설에는 젊은 길손 앞에 늙은이가 나타나 도움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지혜를 제공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 늙은이들은 상징적으로 천사나 신의 심부름꾼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사실적으로 해석하면 집에서 쫓겨나거나 버려진 노인들로 봐야 한다. 하지만 이 풍습은 기근&middot;전쟁&middot;천재지변 등의 위기 상황에만 한시적으로 적용되었지, 유사 이래 법제화된 경우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법이란 농경이 정착되고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야 생기는 것이다. 정착된 농경 생활은 앞서 말한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서는 기아의 필요를 대폭 줄여 주었고, 중앙집권화는 피통치자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lsquo;문화&rsquo;를 통치의 원리로 삼게 된다. 하므로 유사 이래 기로 풍습이 굳건히 유지되기는 어렵다. 여기에 농경이 정착되면 될수록, 노인들의 지혜와 상식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사항 또한 덧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나라야마부시考」의 오린이 마을의 누구보다 더 많은 송어를 잡는 데는, 노인의&nbsp;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비결이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친 김에 기로 풍습이 궁금하여 집에 있는 몇 권의 인류학 서적을 뒤적여 보았다. 그러나 어떤 책에도 기로 풍습 내지 기로 설화라는 항목이나 색인 자체가 없다. 그것들과 가장 흡사한 게 &lsquo;영아 살해&rsquo;인데, 노인과 유아라는 정확히 반대되는 연령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기로 풍습과 영아 살해는 똑같이 노동 능력이 없는 입을 줄여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기로 풍습은 남녀를 가리지 않지만 영아 살해는 여아<sup>女兒</sup>가 대상이다. 여아는 고대 사회의 중요한 생산 수단이자 생존에 필요한 전쟁에 소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고려장은 고려 아니라 오늘날 생긴 신풍속</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반도에 고려장은 없었다』를 쓴 김민한은 &lsquo;신판 고려장&rsquo;이니 &lsquo;현대판 고려장&rsquo;이니 하는 잘못된 용법을 쓰는 신문&middot;영화&middot;텔레비전&middot;문학 작품을 안타까워하면서 그 예로&nbsp;백용운의 단편소설 「고려장」만 달랑 들어 놓았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백용운의 창작집 『고려장』(범우사, 1977)을 찾아, 1972년에 발표되었다던 표제작을 읽어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는 감원 돌풍(600명!)에 휩싸인 어느 회사를 무대로, 가장 나이가 많은 사원부터 &lsquo;목을 자르는&rsquo; 처사에 분개한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ldquo;하긴 옛날 고려 때는 자기 친부모들을 늙으면 땅속에 산 채로 묻어 죽였다는 얘기가 있지요. 그러나 현대에 와서 그 제도가 부활되는 셈이군.&rdquo;(247쪽), &ldquo;옛날엔 자기를 낳은 부모들도 늙으면 지게에 져다 생매장을 했다는데&hellip;&hellip; 지금 역시 우리 현실이 그때처럼 긴박한 것이다. 늙고 쓸모없는 폐물들이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남아 돌아가는 엘리트들의 진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이 남아돌아가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년이 가까운 잉여인간들은 그 정년까지 기다리게 할 여유가 없어 목을 잘라 생매장을 하는 것이다.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려장 시대로 전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rdquo;(259쪽) 그러면서 &lsquo;새로운 고려장&rsquo;의 특성을 이렇게 지적한다. &ldquo;그런데 말이지, <strong>이번 고려장이 우리 같은 늙은 축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달린 가족들까지 고려장하는 거란 말입니다.</strong>&rdquo;(266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읽고 있는 전상국의 단편집 『우상의 눈물』(민음사, 2005, 3판)에도 「고려장」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둘째아들이 망령든 70세 모친을 한겨울 길거리에 유기하는 이 소설을 보면, 고려장이 고려시대의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날 생긴 신풍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뉴스를 통해, 관광지에 버려진 치매 노인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들리는 것을 보면 그렇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21 오전 10:48:00김종명의 ‘의료 보험 절대로 들지 마라’<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8_%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는 글┃<br /> 보험회사의 속내, <br /> 그리고 새로운 선택</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99%는 불안하다. 5대 민생고라 불리는 교육, 육아, 주택, 의료, 노후 문제로 다들 만성적인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5대 불안 요인 중에서 의료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이 의료비를 전부 해결해주지 못하다 보니 가족이 큰 병에 걸리면 가정 경제가 휘청거리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자가 알아서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들 암보험, 각종 질병보험, 실손 보험을 하나씩 들어놓는다. 보험에 가입해 놓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보험회사는 국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현재 가구당 1년에 민간 의료보험비로 지출하는 돈이 무려 240만 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민간 의료보험은 절대 당신의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보험에 들어 두면 심리적으로 위안이 될지는 모르지만 현실에서 부닥치는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보험 상품의 구성과 보험회사의 속내를 알고 나면 민간 보험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일이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암보험은 민간 의료보험을 대표하는 상품이다. 평생에 걸쳐 셋 중 한 명은 암에 걸린다고 하니 누구나 암보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암에 걸리면 수천만 원을 보장해준다고 하고, 보험료도 저렴한 편이다. 젊은 사람의 경우 보험료가 2~4만 원 정도다.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담되지 않는 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저렴하게 &lsquo;보이는&rsquo; 보험료의 이면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어 있다. 암보험으로 보험회사는 상상을 초월하는 이익을 보고 있다. &lsquo;저렴한&rsquo; 보험료 중 보험회사의 몫은 절반 이상이다. 가입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40% 내외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암보험 상품의 지급률을 계산해보고 깜짝 놀랐다. 보험회사가 너무 많이 챙겨먹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험 가입자 중에 매달 꼬박꼬박 내는 보험료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다. 암에 걸리면 보장을 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돌아오는 혜택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보험회사는 또 다른 상품을 만들어낸다. 병에 걸리면 보장을 받고, 보장받지 못할 때는 낸 보험료를 고스란히 되돌려준다는 &lsquo;만기환급형&rsquo; 상품이다. 그런데 만기환급형은 순수보장형보다 훨씬 나쁜 보험이다. 나중에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가입자를 두 번 등쳐먹는다. 이에 대해 본문에서 자세하게 분석을 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의료비로 쓴 돈을 모두 보상해주는 실손형 의료보험(흔히 실비 보험이라 한다)을 보자. 지난해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실비보험료가 세 번 갱신 만에 3배로 껑충 뛰었다. 실비보험은 3년마다 매번 갱신해야 하고 갱신 시마다 매번 보험료가 인상된다. 그런데 그 인상폭이 매우 가파르다. 40세 남성이 평균 수명인 78세까지 보장받으려면 12번을 갱신해야 한다. 세 번 갱신 만에 3배가 올랐다면, 12번 갱신하면 이론적으로 81배가 된다. 연령이 증가할수록 보험료는 급격히 증가하는데, 노후가 되면 은퇴 시점이라 소득이 없다. 소득이 없으니 비싼 보험료를 납부할 수 없어 해약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처럼 보험은 가입자가 정작 필요로 할 때 외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 의료보험은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 이제 건강보험마저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 그간 정부는 국민건강보험보다는 민간의료보험에 집중하는 정책을 구사해왔다. 민간 의료보험 중에서도 실손형 의료보험은 국민건강보험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이 높아지면, 실손형 의료보험은 위축된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국민건강보험이 위축될수록 민간 의료보험은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한미 FTA는 민간 의료보험을 한층 도약시켜줄 것으로 보험회사는 기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간 의료보험이 활개를 치고, 국민건강보험이 제 역할을 못하게 될 경우, 우리의 미래는 너무도 끔찍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의료시스템은 미국을 닮아 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미 우리 국민들은 미국식 의료시스템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잘 알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 중 전 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유일한 국가다. 실제로 미국에서 맹장 수술을 받으려면 수술비가 1~2천만 원에 달한다. 이것은 결코 괴담이 아니다. 가구당 민간 의료보험료는 1만 3,375달러다. 전 국민의 15%가 보험이 없다. 파산자 중 62%가 비싼 의료비 때문에 파산한다고 한다. 의료비는 가장 많이 쓰고 있는데도 미국인의 건강수준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문다. 미국이 천문학적 의료비를 쓸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병원과 보험이 환자의 생명보다는 영리를 추구하도록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식 의료제도는 우리가 절대로 가서는 안 될 모델인데도, 어찌된 일인지 권력자들은 미국식 의료제도를 도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민간 의료보험은 절대로 우리의 의료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없다. 오히려 이중의 부담만 안겨준다. 건강보험이 보장해주지 못하는 의료비를 떠안으면서 동시에 민간 의료보험까지 부담해야 하니 말이다. 입원한 노인 환자의 진료비 중 78%를 자식이 부담한다고 한다. 의료비는 대부분 65세 이상에서 발생하는데, 그 나이가 되면 실비보험에 가입할 수도 없고 소득도 없다. 젊은 세대는 자녀와 자신의 민간 의료보험료를 부담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모의 의료비까지 부담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국민의 의료 불안을 해결하는 길은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의료비를 해결하는 것이다.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이 해결해준다면 젊은 세대는 부모의 의료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으며, 실비보험과 같은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할 필요도 없다. 그만큼 지출이 줄게 되므로 가계의 실질소득은 증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민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원을 확충해야 한다. 재원을 확충하려면 국민과 사업주, 국가가 보험료를 더 내야 한다. 보험료를 올리자는 데 선뜻 동의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건강보험의 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건강보험료를 올려 건강보험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보험의 재원은 국민과 사업주, 그리고 국가가 대략 55:30:15 정도로 부담한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보험료의 절반을 사업주가 부담해준다. 국민건강보험의 재정을 1만 원 늘리면, 1만 원만큼 본인부담이 줄어든다. 대신에 건강보험료로 1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이때 1만 원을 다 낼 필요가 없다. 국민은 건강보험료로 5,500원만 내면 된다. 나머지는 사업주와 국가가 부담한다. 그러니 건강보험의 재정을 늘리는 것이 국민에게 유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민간 의료보험은 전적으로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더욱이 민간 의료보험료로 낸 1만 원 중에 가입자에게 돌아오는 몫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건강보험은 관리비가 3%밖에 되지 않아 확충된 재정이 모두 국민에게 되돌아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보험은 가장이 가입해 있으면, 온가족이 피부양자로 등록되어 혜택을 본다. 반면 민간 의료보험은 개별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보험회사는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이나 노인층은 아예 받아주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보험이 더 유리한 것은 소득에 정률로 부과하므로, 소득이 많으면 많은 만큼, 적으면 적은 만큼 부담한다. 급여 혜택은 필요한 만큼 받는다. 건강보험은 민간 보험처럼 폭리를 취하지도 않고, 횡포를 부리지도 않는다. 사람의 건강에 등급을 매기지도 않는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나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은 국민건강보험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국민건강보험의 재원 구조가 가진 문제가 없진 않다. 바로 보험료 부과의 형평성이다. 직장가입자의 건강보험료를 근로소득에만 부과하는 허점을 악용하여 종합소득이 많은 사람이 직장가입자로 편입하여 보험료를 일반 직장인보다 적게 내기도 한다. 또 지역가입자의 경우 소득에 비해 보험료 부담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이런 문제점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수 정치권은 무상의료를 하게 되면 최소 30조에서 54조가 소요되며, 이는 국민에게 엄청난 세금과 건강보험료 폭탄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론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주로 전해주는 바람에 건강보험 보장을 늘리면 큰일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한마디로 사기다. 그들이 이처럼 허위 주장을 하는 이유는 건강보험의 보장을 늘리는 데 반대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보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업주의 부담을 늘려야 한다. 그러니 친재벌 친기업을 표방하는 정부가 반대할 수밖에 없다. 또 국가의 부담도 늘어나는데, 소위 신자유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모피아 관료들이 강력히 반대한다. 복지는 국가가 아닌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보험으로 모든&nbsp; 병원비를 해결하게 되면, 민간 의료보험이 필요 없게 되어 삼성생명과 같은 보험회사들의 매출이 줄어든다. 민간 보험회사를 소유하고 있는 재벌이 정부와 의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임에 틀림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간 보험이냐, 국민건강보험이냐. 미래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업과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택하는가,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정당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그동안 필자가 함께 해온 단체가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고, 대부분 그때 쓴 글을 일부 교정한 것임을 밝힌다. 지금은 함께하지 못하게 된 진보신당 건강위원회 동지들, 그리고 지금 함께하고 있는 &lsquo;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rsquo; 활동가들, &lsquo;내가만드는복지국가&rsquo;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부족한 내 글에 대해 날카로운 조언과 교정을 해준 후배 은상준 박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여러 달 동안 책 쓰는 일에만 매달리느라 함께하지 못한 가족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br /> 당신의 불안,<br /> 보험 가입으로<br /> 해결되지 않는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00"><strong>암보험에 드느니 <br /> 로또를 사라</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큰 병에 걸리면 여러 가지로 살기가 힘들어진다. 몸 아픈 것도 서러운데 막대한 의료비까지 감당해야 하니 말이다. 국민건강보험이라는 제도가 있지만 아쉽게도 국민건강보험만으로는 불안하다. 현재 국민건강보험은 의료비의 60% 정도를 보장해주고 있다. 나머지 40%는 각자 감당해야 한다. 입원을 하면 동네 의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을 때보다 의료비가 훨씬 더 나온다. 그런데 입원에 대한 보장률은 55% 정도에 불과하다. 가족이 중병에라도 걸리면 기둥뿌리 한 개 정도 안 뽑힐 집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다 보니 많은 국민이 암보험이니 실비보험이니 하는 민간 의료보험에 의지한다. 특히 암은 치료비가 수백에서 수천만 원이 필요한 질병이다. 암에 걸리면 중산층이 하루아침에 빈곤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은 암으로 가장 많이 사망한다. 사망자 3명에 1명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암은 의료비 부담이 엄청나고, 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아 보험 상품을 사려는 사람도 많다. 민간 보험회사 입장에서 암보험은 돈이 되는 시장이다. 민간 보험회사가 암보험 상품을 우후죽순처럼 내놓고, 또 암보험이 불티나게 팔리는 데는 이런 까닭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암보험은 1980년대 이후 우리나라 민간 의료보험을 대표하는 보험 상품이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2010년 현재 우리 국민의 절반이 넘는 56%가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많은 국민이 의료비 불안을 덜기 위해 암보험에 가입했지만, 내가 내는 보험료가 적당한지, 실제로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지 제대로 따져보는 목소리는 없다. 암보험 가입자는 보험회사가 손해 본다는 이유로 보험료를 인상해도 &lsquo;보험료가 또 올랐네&rsquo; 하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내는 보험료가 적당한지 따져보고 싶어도 보험회사마다 보험료도 다르고 혜택도 달라 비교하기가 어렵다. 보험 계약 때 받은 두꺼운 보험 약관은 쳐다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적당한 보험료가 얼마인지 알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구성이 워낙 복잡하여 보험 상품을 전문적으로 설계하는 보험계리사가 아니면 웬만한 전문가들도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떤 보험 상품의 보험료가 제대로 책정되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민간 의료보험 상품의 보험료가 적정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내가 낸 보험료에서 나중에 얼마를 돌려받을 수 있는지를 알면 된다. 이를 지급률이라고 한다. 지급률은 보험회사가 보험료로 받은 돈에서 가입자에게 되돌려 주는 비율을 나타낸다. 예로 보험회사가 보험료로 1억을 거두어 이 중 5천만 원이 보험료로 지급되었다면, 지급률은 50%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아쉽게도 대부분의 민간 의료보험 지급률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암보험은 예외다. 암보험은 상품 구성이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다. 내가 암에 걸릴 확률과 납부하고 있는 보험료를 안다면, 간단히 계산할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암보험 지급률 = (암에 걸릴 확률 &times; 암에 걸렸을 때 받을 보험금) &divide; 납부한 보험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서 모르는 것은 암에 걸릴 확률이다. 이 확률만 알 수 있으면 내가 가입한 암보험 상품의 지급률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첨 확률이 미리 정해져 있는 로또 복권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이 로또 복권을 한 장 산다고 하자. 당신이 당첨될 확률은 얼마일까. 당신이 구입한 1,000원짜리 로또 복권의 당첨금은 얼마일까. 로또의 원리상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이다. 이론적으로 814만 장(81.4억 원어치)의 로또를 사면 1등부터 5등까지 모두 당첨될 수 있다. 로또 당첨금은 전체 판매액의 50%이다. 이는 법적으로 정해져 있다. 1등은 당첨금의 75%(전체 판매액의 37.5%)를 가져간다.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 81억 원을 쓰면 1등, 2등, 3등에 모두 당첨되겠지만, 전체 당첨금은 40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당첨금 40억 원으로 다시 로또를 산다고 치자. 당첨금은 40억 원의 50%이므로, 20억 원이다. 이를 무한히 반복하면 당신에게는 한 푼도 남지 않는다. 이것이 로또와 같은 복권의 일반적 원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계산법을 이용하면 암보험의 지급률, 즉 나의 기대수익률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암보험 상품의 보험료가 적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 정부는 매년 암 발생률, 즉 우리나라 인구 전체에서 매년 암 환자가 새로 얼마나 생기는지에 대한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전에 진보신당의 건강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암 발생 등록 자료를 이용하여 각 보험사 암보험 상품의 지급률을 계산해본 적이 있다. 그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암보험으로 1만 원을 내면 기껏 3~4천 원 정도를 가입자에게 돌려주어 지급률이 30~4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믿기가 어려웠다. 보험회사는 개별 상품의 지급률을 공개하진 않지만, 보험회사 전체 지급률을 대략 65~80% 정도로 발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사실이라면, 민간 보험회사들이 암보험으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암보험 상품의 지급률이 로또 복권 지급률보다 못한 것이다. 카지노 슬롯머신보다도 낮다. 카지노 슬롯머신의 경우 전체 배당금이 최소 75%가 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의료비 불안을 해결하고자 믿고 가입한 보험이 사행성 게임의 기대치보다 못하다니!</p> <p style="text-align: justify">암보험 지급률은 국민건강보험과 확연하게 비교된다. 국민건강보험에 보험료 1만 원을 내면 1만 6,800원이 돌아온다. 국민건강보험의 지급률은 무려 168%인 것이다. 2008년에 우리 국민은 건강보험료로 15조 5천억 원을 내고 26조 5천억 원의 혜택을 받았다. 암보험 지급률보다 무려 4배나 높은 수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17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8_%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ED%91%9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제 국민건강보험에 비해 지급률이 형편없이 낮고 로또나 카지노 슬롯머신과 같은 사행성 게임보다도 못한 민간 의료보험의 실상을 낱낱이 밝혀보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00"><b>암보험, 1만 원 내면 <br /> 4천 원 돌려준다</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 홈쇼핑이나 라디오 광고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L생명보험사의 암보험 상품이 하나 있다. 이 보험 상품의 실제 예측 지급률을 분석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암보험 상품에 만 40세 남성 1,000명이 동시에 10년 동안 가입한다고 가정해보자. 40세 남성이 납부하는 월 보험료는 1만 6,200원이다. 보험회사는 가입자가 보험기간 안에 암에 걸리면 4,000만 원을 보험금으로 지급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 보험회사가 1,000명의 가입자로부터 거둬들이는 총 보험료 수입은 다음과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보험료 수입 = 1,000명 &times; 16,200원 &times; 12개월 &times; 10년 = 19억 4,400만 원</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제 보험회사가 얼마를 보험금으로 지급할지를 알면 된다. 이 암보험은 암 진단 시 치료비 명목으로 4,000만 원을 지급해준다. 1,000명 중에 10년 동안 몇 명이 암에 걸리게 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 알 수 있는 통계자료는 세 가지가 있다. 국립암센터의 암등록 자료, 암발생률 자료, 보험회사의 자체 통계자료인 암발생률 자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암등록 자료를 기준으로 하면, 40세 남성 1,000명 중 10년 동안 19.1명에서 암이 발생한다. 발생률 자료를 적용하면 23.9명, 보험회사 자료를 적용하면 26.4명에서 암이 발생한다(앞에서 암 지급률은 첫 번째인 암등록 자료를 이용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암등록 자료대로 1,000명 중 19.1명에게서 10년 동안 암이 발생한다고 하자. 이제 보험회사가 보험금으로 얼마를 지급할지를 예상할 수 있다. 보험회사는 19.1명에게 4,000만 원씩 보험금을 지급하게 될 것이다. 보험회사가 10년간 지급해야 할 총 보험료는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지급보험금 =&nbsp; 19.1명 &times; 4,000만 원 = 7억 6,400만 원</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암보험의 지급률은 다음과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급률 = 7억 6,400만 원/19억 4,400만원 = 39.3%</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즉, 보험회사는 거둬들인 보험료의 39.3%를 지급한다. 나머지는 모두 보험회사의 몫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더 낮다. 보험회사는 모든 암에 대해 4,000만 원을 지급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암으로 진단이 확정되지 않는 이상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암환자가 아니다. 말기암으로 진단받아 치료를 하지 않는 경우 조직검사를 굳이 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의사는 암으로 등록을 해주지만 보험사는 암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진단이 &lsquo;확정&rsquo;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암 중에서도 갑상선암이나 기타 피부암 등은 10%인 400만 원만 보장해준다. 갑상선암과 기타 피부암은 이 연령대에서 발생되는 암의 15% 정도를 차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첫 2년 동안에는 50%만 지급해준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이를 감안하면 지급률은 30%대 중반으로 떨어진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1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8_%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ED%91%9C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억의 보험료 수입 중에 7억 정도만 가입자에게 보험금으로 돌려주고 12억은 고스란히 보험회사가 가져간다.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더불어 남은 몫으로 투자를 하여 투자수익까지 추가로 챙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암등록 자료 외에 암발생률 자료와 보험회사의 자료로 계산하면 지급률은 각각 49%, 54%로 조금 높아진다. 여기서도 앞의 각종 단서조항을 감안하면 대략 40%, 45% 정도로 줄어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분석한 보험 상품이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지급률이 이처럼 낮게 나온 것이 아니다. 암보험 상품은 현재 많은 보험사가 판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암보험 상품 지급률을 간단히 계산할 수 있는데, 다른 보험 상품의 지급률을 분석해 보아도 한결같이 30~40%, 높아봐야 40% 후반에 불과하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45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8_%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ED%91%9C3.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서 암보험 상품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암보험의 원리는 마치 도박과 같다. 도박의 원리는 당첨 확률은 낮추는 대신 당첨 시 배당금을 높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암보험 역시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40대 성인이 암에 걸릴 확률은 사실 매우 낮다. 10년 동안 1,000명 중 19명, 많게 봐야 24명 정도가 암에 걸린다. 나머지 980여 명은 보험료만 부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거나 암 진단을 받은 당사자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 보니 &lsquo;암 진단 시 4천만 원 보장&rsquo;이라는 광고 문구에 쉽게 현혹된다.&nbsp; 더욱이 한 달에 1만 6,000원 정도라면 기꺼이 부담할 만하다고 여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험사는 가입자들이 암에 걸릴 확률을 전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암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과도하게 이익을 챙겨가고 있다. 암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와 같은 셈법으로 간단히 계산해보시라.</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2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8_%EC%9D%98%EB%A3%8C%EB%B3%B4%ED%97%98%20%EC%A0%88%EB%8C%80%EB%A1%9C%20%EB%93%A4%EC%A7%80%20%EB%A7%88%EB%9D%BC/%EB%B0%95%EC%8A%A4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는 글,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김종명<br /> </strong>대학 의학과를 졸업하고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정책관리학을 공부했다. 현재 가정의학과 의사로 지방 공공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br /> 국민 건강의 향상을 위해서는 의료 기술만이 아니라 의료 정책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 진보신당 건강위원장으로 활동한 데 이어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운영위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위원,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의료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br /> 특히 건강보험의 보장성이 낮아 많은 국민들이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현실에서 암보험, 실손보험과 같은 민간 의료보험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밝혀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복지 국가로 가기 위해서는 민간 보험이 아닌 건강보험 하나로 모든 의료비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20 오전 10:31:00‘스틸라이프’ 20회 (최종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94"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20%ED%9A%8C/20%ED%9A%8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골동품점 &lsquo;메리 포핀스&rsquo; 4</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가게에 홀로 앉아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어요. 이런 구절이 들려오네요.</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몸의 장애는 한눈에 보인다. 하지만 마음의 장애는 첫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 번 두 번 자꾸 만날수록 마음의 장애는 천천히 드러난다. 상대의 마음의 장애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의 손을 더욱 세게 꼭 잡을 것인지. 그냥 그 손을 놓을 것인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끝까지 함께 가지 않을 거면 그냥 지금 손 놓아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요. 문제는 우리 모두 타인을 포용하는 자기 그릇의 크기를 모르는 데 있을지도 모르죠. 남편을 포용하는 제 그릇이 너무 작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러니 제가 수녀생활을 제대로 못 한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남편의 병은 알고 보니 가장 가까운 사람이 소중한 걸 모르는 병이었어요. 멀리 있는 사람이,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운, 그런 병이랄까요.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지 열흘째네요. 무슨 일이 난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가끔 하루나 이틀, 집에 돌아오지 않은 적은 있지만 이번엔 좀 기네요. 사라진 옛 아내를 찾아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까요?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 저는 이제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무도 오지 않는 나른한 오후의 시간을 지나 누군가 가게에 들어와서 고색창연하게 늙어가는 기타를 어루만지며 얼마냐고 묻네요. 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기타를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비매품이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나이가 짐작 가지 않는 손님은 그 기타가 언젠가 자신이 연주하던 기타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이 많이 불행하다고 느낀 그 순간부터 소리가 나지 않더래요. 기타를 치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기타를 치지 않아도 살아지더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저도 말했죠. 수녀가 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아 수녀가 되었는데, 수녀가 되고 보니 수녀복만 벗으면 살 것 같아 세상으로 나왔다고요. 그런데 골동품가게에 이렇게 앉아 골동품처럼 낡아가는 시간들이 수녀 시절의 고독했던 시간들과 다름없이 느껴진다고요. 고도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늦게 만난 하나밖에 없는 남편도 열흘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선한 두 눈동자 사이의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정말 선한 웃음을 지었어요. 수녀복을 벗고 처음 세상에 나와 동해안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제 옆에 앉았던 사람이 남편이 아니라 이 사람이었다 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이 순간 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손님은 마치 피치 못한 사정으로 오래전에 헤어져 다시 만나지 못한 애인을 만난 듯 감개무량한 얼굴로 기타를 어루만졌어요. 제가 가끔 먼지를 털어주는 탓에 기타는 고색창연하게 빛이 났어요. 손님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기타는 정말 거짓말처럼 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손님의 선한 눈동자에 눈물이 어렸어요. 저는 주인이 돌아왔으니 기타를 그냥 가져가시라 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손님은 한사코 두 손을 내저으며 돈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돌아갔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 손님은 다음날 적지 않은 돈을 들고 와 기타를 가져갔어요. 그리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가게에 들렀어요. 어떤 날은 기타를 들고 와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죠.</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말 놀랍게도 그는 제가 좋아하는 &lsquo;밥 딜런&rsquo;의 &lsquo;one more cup of coffee&rsquo;를 들려줬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한 번 두 번 세 번, 자꾸만 그 노래를 들려달라고 졸랐어요. 선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몇 번이고 그 노래를 들려주네요.</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Verdana">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br /> One more cup of coffee 'fore I go<br /> To the valley below</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스틸라이프 끝)<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4-18 오전 10:46:00《228》미시마 유키오 外 4인의 『난릉왕 外』를 읽다<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5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미시마 유키오 外 4인</strong></span><strong>의</strong></span> <br /> <span style="margin-left: 30pt"><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난릉왕 外』</span></span></strong></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삼성미술문화재단, 1987, 세계명단편선15, 일본어권Ⅱ)를 읽다</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일본어권Ⅱ&rsquo;로 묶인 이 책에도 &lsquo;일본어권Ⅰ&rsquo;(<a target="blank" href="http://nabeeya.net/Life/detail_view.aspx?CD_MENU=45&amp;SUB_CD_MENU=45&amp;ID_CONTENT=7224"><span style="color: #333399">《277》 류노스케 外 4인의 『손수건 外』</span></a>)과 같이 다섯 편의 작품이 묶여 있다. 표제작인 미시마 유키오의 「난릉왕<sup>蘭陵王</sup>」을 비롯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 이노우에 야스시의 「투우」, 엔도 슈사쿠의 「백인」, 구로이치 센지의 「이층집 이웃사람」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 말고는 모두 처음 읽는 작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번 작품집에서 흥미롭게 읽은 것은 이노우에 야스시의 「투우」와 엔도 슈사쿠의 「백인<sup>白い人</sup>」이다.</strong> 일반적인 단편 분량의 배나 되는 두 작품은 1950년과 1955년에 차례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참고로 &lsquo;일본어권Ⅰ&rsquo;에 실려있는 오바 미나코의 「세 마리의 게」도 1968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백인」과 「세 마리의 게」는 프랑스와 미국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최인호가 「깊고 푸른 밤」에서 한국 소설의 공간을 미국으로 넓혀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던 것이 1982년이니, 이에 비하면 일본의 이런 시도는 한참 일찍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노우에 야스시와 엔도 슈사쿠는 기질이 정반대인 작가다. 야스시의 경우 내가 읽어 본 작품은 『빙벽』(평화출판사, 1980)이 유일하고, 슈사쿠의 작품은 『빙벽』과 『모래꽃』(고려원, 1995)&middot;『바다와 독약』(가톨릭출판사, 2001)을 읽어 봤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lsquo;원점회귀형&rsquo; 작가 엔도 슈사쿠,<br /> &lsquo;발전형&rsquo;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가톨릭 신자인 엔도 슈사쿠는 어느 작품에서나 신자의 입장에서 신과 죄의식의 문제를 파고들었다. 반면 이노우에 야스시는 역사물에서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주제들로 이야기꾼의 솜씨를 뽐냈다. 그의 대표작인 『돈(둔)황<sup>敦煌</sup>』은 돈황 석굴의 신비를, 『풍도<sup>風濤</sup>』는 몽고의 고려 침략을 다루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우리나라에 여러 역본이 나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일찍이 작가를 &lsquo;원점회귀형&rsquo;과 &lsquo;발전형&rsquo;이라는 두 가지 기질로 나누었다. 문학 작품은 작가의 심리적 외상<sup>trauma</sup> 주변을 맴도는 것이라는 심리학적 설명에 기댄 원점회귀형은, 강박처럼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원점회귀형 작가의 이런 고투에 우리는 &lsquo;깊어진다&rsquo;는 형용을 바치는바, 그의 모든 작품은 한 가지 주제의 변주이기 십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글쓰기를 직업으로 여기는 태도가 두드러지는 발전형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성장해 가는 작가로, 자기 연민 따위를 돌보는 법이라고는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자아를 보살피거나 뒤돌아보기보다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통해 자아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라든가 역사의 빛을 맞이하고자 앞으로 나아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엔도 슈사쿠의 「백인」은 그의 여느 작품이 그랬듯이, 원죄<sup>原罪</sup>에 일그러진 인간의 자유의지가 끝 간 데를 탐구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여기서 얀센파 책을 읽으며 지냈다. 유년 시대부터 나를 형성한 이 사상을 다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인간은 원죄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다는 점뿐이었다. 인간은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으로 떨어져버린다. 어떠한 덕행이나 의지도 우리 인간을 순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은 없다. 얀센파의 이 사고방식이야말로 정말로 나의 인간관을 뒷받침하는 것이다.</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3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8/%EC%97%94%EB%8F%84%20%EC%8A%88%EC%82%AC%EC%BF%A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원죄에 일그러진 인간의 자유의지만큼 처치 곤란한 것은 없다. 작중의 주인공을 작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ldquo;아무리 발버둥쳐도 악의 심연&rdquo;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것을 작가는 얀선파<sup>Jansen派</sup> 교리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그런데 「백인」 뒤에 붙어 있는 짤막한 작품해설에는, 자못 진기한 작가의 약력 사항이 있어 흥미를 끈다. 게이오 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작가가 프랑스 유학을 가서 연구한 것은 사드였다. 이 작품 가운데는 그 흔적이 남아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문화라든가 기독교라든가 휴머니즘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오늘의 상황이다. 나찌에 한해서만 그런 것은 아닐 게다. 연합군이든 문명인이든 황색인이든 인간은 모두 그런 것이다. 오늘 학살당하는 자는, 내일은 학살하는 자, 고문을 하는 자로 바뀐다. 내일이란 리용 시민이 이를 갈며 미처 도망가지 못한 독일인과. 동족을 배신하며 나찌에 협력한 자들에게 복수를 하는 날이다. 마르끼 드 사드는 기막힌 말을 하고 있다. <br /> &ldquo;&hellip;&hellip;이리하여 인간의 피는 붉게 물들고 그 눈은 고문의 쾌락으로 빛나며&hellip;&hellip;&rdquo;</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대목의 흥미란 다름 아니라, 작가의 원죄론이 가톨릭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사드로부터 나온 것인가 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점회귀형이 천재형 작가들의 습속이라면, 발전형은 기업형 작가랄까? 「투우」의 말미에 붙은 작품해설에는 이노우에 야스시에 대한 이런 평가가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작가 이노우에 야스시는 일본문단에서 특이한 위치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의 독창성은 바로 그 발판이 되어 있다. 그것은 전후 일본문학계에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의 새로운 유형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이 작가 이전의 소설은 사소설에 독점되어 있다시피 한 서정과 대중 문학에 맡겨졌던 이야기 중심의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종합하여 새로운 소설의 유형을 만들어 낸 사람이 이 작가라고, 일본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의 많은 걸작을 낸 그는 이 특성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뚜렷한 발자취를 일본문단에 남겨 놓은 현역 원로작가 중의 하나이다.</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41" height="42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8/%EC%9D%B4%EB%85%B8%EC%9A%B0%EC%97%90%20%EC%95%BC%EC%8A%A4%EC%8B%9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위의 해설 가운데 눈여겨볼 사항은 &lsquo;사소설과 대중 문학의 종합&rsquo;이기보다는, &ldquo;다양한 주제&rdquo;다. 일본 전래의 소싸움 대회라는 독특한 소재를 빌어 전후 일본의 수상쩍은 활력(자본가의 득세)의 단면을 드러낸 「투우」는 등산을 소재로 한 『빙벽』과 함께, 작가의 기업가적 주제 편력을 입증한 작품이다.&nbsp;<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16 오후 3:48:00딘 베이커의 ‘가장 최근의 미국사 1980~2011’<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82" height="84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A%B0%80%EC%9E%A5%EC%B5%9C%EA%B7%BC%EC%9D%98%EB%AF%B8%EA%B5%AD%EC%82%AC_%ED%91%9C%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어판 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6년 초 내가 이 책의 초판을 탈고했을 때 미국 경제는 대체로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일자리도 꽤 늘어났고 실업률도 감소하고 있었다. 2000&sim;2002년 사이 바닥까지 폭락했던 주식시장은 거의 회복되어 주가는 다시 최고치로 상승하는 듯했다. 미국인들의 주택 구입이 증가하면서 주택 소유 비율도 최고로 높아졌다. 주택 가격이 유래 없이 상승했다는 사실 역시 다들 경제 회복의 청신호라고 여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는 모두가 다 아는 바지만, 당시 일부에서는 2006년의 주택 가격 상승이 좋은 소식이 아니라고 경고했다. 당시 미국의 주택 가격은 주택 시장의 수요공급 법칙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거품에 의해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품은 불과 몇 해 전 주식시장에 나타나 기록적인 주가수익률을 주도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거품은 반드시 꺼지기 마련이다. 주택 시장의 거품 붕괴가 미국 경제와 금융 분야에 엄청난 파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주택 시장 거품은 과도한 주택 건설을 초래했다. 주택 시장의 거품이 최고 수준에 다다랐던 2005년 당시 주택 건설 부문이 미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퍼센트가 넘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주택 시장 거품이 붕괴된 2009년 말 2퍼센트 밑으로 하락했다. 이는 6천억 달러가 넘는 연간 생산액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소비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는데, 주택 가격이 정점을 찍었던 2006년에서 2011년 말 사이에 주택 시장 거품으로 불어났던 7조 달러 이상의 자산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품으로 자산 가치가 올라갈 당시 미국의 저축률은 크게 감소했다. 하지만 수천만 명의 주택 소유자들이 자기 주택의 자산 가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2009년 상반기 들어 저축률이 회복되기 시작해 평균 수준을 넘어섰다. 이러한 저축률 증가는 연간 4천억 달러 이상의 가계 소비지출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경기를 위축시킨 또 다른 원인에는 주택 시장 거품 형성 직후 불어난 상업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있었다. 이 역시 2008년 가을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다. 또한 경기침체로 세입이 부족해진 주정부와 지방정부는 긴축재정과 증세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전체적으로 연간 수요 감소폭은 1조 2천 억 달러에서 1조 3천억 달러 선이었는데, 이는 미국 GDP의 8퍼센트가 넘는 액수였다. 이 같은 수요 감소는 대공황 이후 가장 가파른 감소세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택 시장 거품을 인지하고 있던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품 붕괴는 완전히 예측 가능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다수 경제학자들과 정책결정자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택 시장 거품 붕괴는 주요 금융기관의 도산으로 이어져 금융위기를 가져왔으며 거의 모든 금융기관의 생존을 위협했다. 주택 시장 거품 붕괴와 함께 금융위기가 발생할 것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주택은 가장 부채가 많이 딸린 자산이기 마련이다. 보통 주택을 구매할 때는 주택 가격의 10&sim;20퍼센트를 계약금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주택 시장 거품이 한창일 당시 주택 구매자들은 계약금도 없이, 대부분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이용해 거품이 낀 가격의 집을 구매했다. 주택 가격이 떨어지고 주택담보대출의 이자율은 높아진다면 수많은 주택 소유자들이 채무를 감당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은행들이 자격이 되지 않는 많은 신청자에게 주택담보대출을 해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그렇다고 나아질 건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주택담보대출을 해준 은행들 자신조차 부채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은 금융권의 위험 요소를 가중시켰다. 특히 증권거래위원회는 투자은행에 대한 부채 상한선을 완화하여 이들이 상업은행에 적용되는 기준보다 세 배 이상 높은 비율의 부채를 도입할 수 있도록 해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부시 행정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의회에 긴급 구제책을 요청했다. 미국 시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구제책은 추진되었다.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가 지급보증을 하고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지급한 수조 달러의 저리 대출금을 비롯한 긴급 구제책 덕분에 많은 은행들이 수월하게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009년 2/4분기 무렵에는 몇몇 대형 은행들이 다시 건실한 이윤 실적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기업 이윤에서 금융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은 경기침체 이전에 기록했던 최고 수준을 상회하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금융 분야는 회복세를 보였지만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2010년 미국의 실업률은 10퍼센트를 넘어섰는데, 대공황 이후 미국이 두 자릿수 실업률을 보인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다. 이 수치가 더욱 심각한 것은, 과거에 비해 노동 인구의 평균연령이 높아진데다 전형적으로 실업률이 낮은 연령대에 노동 인구가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2017년경까지는 정상 수준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미 수백만 명이 주택을 압류당했고, 계속해서 매년 1백만 명이 압류로 주택을 잃고 있다. 게다가 1천 2백만 명 이상의 주택 소유자들이 주택 가치보다 더 많은 부채를 끌어안고 있다. 또한 엄청난 수의 베이비붐 세대가 현재 축적해놓은 재산이 거의 없는 상태로 은퇴를 앞두고 있다. 이들이 가진 주택의 자산 가치는 주택 시장 거품 붕괴와 함께 사라졌고, 퇴직계좌의 한정된 자산 역시 시장의 침체와 함께 급락했다. 더욱이 미국 정부가 경기침체에서 비롯된 재정 악화를 만회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기에 사회보장제도와 노인의료보험 혜택이 축소되는 위험을 떠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민 다수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놀랍게도 이러한 파탄을 초래한 당사자들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이 상황을 피해나가는 듯하다. 월가의 은행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는 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주택 시장 거품을 인지하지 못했던, 혹은 거품이 그토록 위험한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관했던 정책결정자들 대부분은 여전히 높은 직위에 있다. 또한 8조 달러에 이르는 주택 시장 거품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경제학자들이 아직도 경제학 담론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경제 최강국 자리를 보전할 수 없게 된 세계정세에 미국이 적응해나가는 데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딘 베이커</p> <h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역사를 기술하는 일은 저자에게 끊임없는 판단을 요구한다. 여러 가지 사건 가운데서 저자는 어떤 일들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엮어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저자는 역사적 설명들의 정확성에 대한 자신의 평가에 기초해 그 사건들이 실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판단을 내려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연히 나 역시 이 책을 저술하면서 이러한 결정들을 내렸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지난 사반세기 동안 미국 역사를 관통했던 주요 흐름을 가장 정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레이건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걸어왔던 노선을 바꿔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과 같은 복지 수준을 달성하기 위해 대다수 국민에게 적정 수준의 생활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적 지원 장치를 구축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지원을 위한 정부 정책에는 최저생계비 보장과 의료보험, 그리고 기타 기초생활지원 제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경제 전반의 생산력 증대를 통하여 노동자 대다수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시장을 형성하는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반전되기 시작했다. 레이건 정부는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한 정부 정책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철폐했다. 또한 미국의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시장 구조를 바꿔나갔다. 그 결과 1980년 이후 미국이 누린 막대한 생산이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그 혜택을 거의 체감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은 유럽의 복지국가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들이 추구했던 노선과 크게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복지국가의 원리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 끊임없긴 하지만 미국 밖의 여러 국가에서는 생산성 증가에 따른 이익을 고르게 분배하는 제도적 장치들이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이 주제 외에도 여러 가지를 함께 다루고 있다. 기본적인 주제는 각 장의 첫머리에 정리하고 뒤에 구체적인 내용을 기술하였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이 책이 그러한 판단의 자유를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p> <h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 방향 전환<br /> ―미국의 이탈</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1년 11월, 140개국 대표들은 기후 변화에 관한 국제연합 규약의 교토의정서에 서명했다. 이는 전 세계 과학자들이 가장 큰 환경위협으로 지목한 지구온난화에 대처하기 위한 세계적 노력의 첫걸음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협정에는 유럽연합 전체 회원국과 일본, 러시아, 중국, 캐나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했다. 하지만 의정서 서명 명단에서 미국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일찍이 교토의정서 협의 과정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은 참관만 할 뿐 이 협정을 위한 대화에는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른 나라들이 중대한 환경재앙에 대처하는 것을 미국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것이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의 미국이었다면 이러한 노선 차이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냉전 시대 우방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방들은 주요 국제 사안에 대해 미국의 결정을 따랐으며 미국은 우방 내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였다면 지구온난화처럼 세계적으로 중대한 사안을 미국 정부만 외면하는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교토의정서와 지구온난화 문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는 1980년 이후 미국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과 얼마나 다른 길을 걸어왔는지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온난화뿐 아니라 여러 사안에서 미국은 전통적 우방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미국이 2차 대전 이후의 동맹국들과 결별을 선언하는 신호탄이었다. 프랑스와 독일, 캐나다 등의 주요 동맹국들이 이때 미국에 등을 돌렸다. 남반구 국가와 무역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부시 정부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경제력이 큰 두 국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반대에 부딪혔다. 또한 전범 처벌부터 조세피난처 규제까지 수많은 국제조약들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고 있지만 미국은 참여를 꺼리고 있다. 미국은 2005년 현재 세계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전통적 우방들과 다른 노선을 고수하며 점점 국제적 사안에서 고립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미국과 여타 선진국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미국 이외 선진국들의 자기주장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소련에 대한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유럽 국가들은 점차 강해져가는 유럽연합의 영향력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한편으로 이러한 의견 불일치는 미국이 예전처럼 국제적 사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하기도 한다. 2005년의 미국 정부는 주요한 국제적 사안들에 관해 우방들과 어느 정도 의견 일치를 이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25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의 국제적 지위 변동은 변화된 미국의 국내 상황을 반영한다. 미국은 항상 유럽이나 일본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개발과 성장을 이뤄왔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과 여타 선진국 간의 차이는 여러 면에서 1980년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대공황 이후 미국은 유럽의 평균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다르지 않은 복지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미국은 퇴직금제도를 거의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또한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을 위한 실업수당제도와 최빈가구에 기초생계비를 지원하는 소득보장제도를 운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당시 미국은 복지국가 건설에 필요한 지출 규모를 더욱 늘려가고 있었다. 1980년에서 멀지 않은 과거였던 1960년대에는 노년층까지 의료보험의 혜택 범위를 확장시킨 노인의료보험<sup>Medicare</sup>과 전 연령대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장제도<sup>Medicaid</sup>가 중요한 사회보장제도로 확립되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여타 선진국처럼 미국에서도 온 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고 보았다. 또한 1960년대부터 시작된 헤드 스타트 제도<sup>Head Start program</sup>는, 저소득 계층 아동만을 대상으로 실시되기는 했지만, 육아와 유아 교육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크게 확장시켰다. 1980년까지만 해도 점차 더 많은 계층이 이러한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후 미국이 맞이한 사반세기는 이러한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복지가 증진된 부문도 일부 있었지만 이 시기에 시행된 공공정책 다수는 복지 혜택의 확대를 제한했고 심지어 기존 복지제도를 철회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정부의 사회복지제도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여러 부문에서 소득분포 상위층에 유리한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25년간 미국에서는 고소득 가구에 대한 세율 인하와 저소득 가구에 대한 정부 혜택 축소를 요구하는 정치 운동들이 몇 차례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변화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지만, 사실 이는 정부 정책의 광범위한 변환 중 일부에 불과했다. 이 시기 미국 정부의 정책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어렵게 하고 고소득층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기조 변화는 무역 정책, 노사 관계 조정, 핵심 산업의 탈규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나타났다. 시장의 소득 분배에 대한 기본 원칙의 변화가 미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조세나 이주 정책의 변화가 초래한 결과보다 훨씬 컸다. 1980년의 미국과 2005년의 미국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 원칙의 변화를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기본 원칙의 변화와 기울어지는 균형</b></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 이후 미국은 경제 정책 전반에서 변화를 보였는데, 모든 정책이 세전수입을 상향재분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무역 정책, 이민 정책, 노사 관계 조정 원칙, 거시경제 정책, 주요 산업에 대한 탈규제, 최저임금 등에 걸쳐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정부가 실행한 각 부문의 정책은 중저소득층 노동자의 교섭력을 약화시켰고, 자연스레 고소득층의 상대적 여건을 강화시켰다. 연이어 등장한 새 정책들은 엄청난 규모의 소득 상향재분배로 귀결되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 내 상위 5퍼센트의 부유층에게 돌아간 국민소득은 3분의 1이 넘게 증가했다.<strong><sup>1</sup></strong> 반면 소득분포 하위 20퍼센트의 인구가 차지한 소득은 4분의 1 이상 감소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정책들은 (소득의 상향재분배가 아니라) 경제 효율성 제고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실제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일단 이 기간 동안 정부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경제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1980년까지의 GDP 평균 증가율은 3.7퍼센트였던 반면, 그 이후로는 연평균 3.1퍼센트 증가에 그쳤다.<strong><sup>2</sup></strong> 단위시간당 생산량 증가분으로 측정할 수 있는 생산성 증가 역시 둔화되어 1980년과 2005년 사이의 기간 동안 연평균 생산성 향상률은 2.1퍼센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2차 대전 종결시점부터 1980년까지의 평균 생산성 향상률인 2.4퍼센트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strong><sup>3</sup></strong> 이 기간에 시행된 새 경제 정책이 아니었다면 경제가 그보다 더 악화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기간 동안 미국이 경제 전반에 있어서 그 전보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소득을 하향재분배할 수 있었던 정책들이 외면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미국의 무역과 이민 정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고임금 직업군은 국제적 경쟁으로부터 많은 보호를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이 기간 동안 소득의 상향재분배를 이끈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이 장 뒤편의 보론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약하자면, 이 시기 동안 미국 정부는 임금 소득을 상위 계층에 편중시키는 일련의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 압력을 가한 여러 정책들의 예측 가능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소득 하위 4분의 3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여러 종류의 사회안전망을 해체했으며 이들을 가중되는 국제 경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는 흔히 경제 효율성 제고라는 명목으로 정당화되었지만 고소득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안전망 앞에서는 경제 효율성을 향한 추진력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같은 편향적 조치는 안전망을 상실한 노동자의 소득이 안전망이 유지되고 있는 노동자에게 재분배되는 결과를 낳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결과 1980년부터 2005년까지 25년 동안 대다수 미국 국민은 경제적으로 크게 불안정해졌으며,<strong><sup>4</sup></strong> 이는 미국 국민의 생활과 정치적 태도에 영향을 미쳤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불안정성의 증대가 시장 활동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로서 나타났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C%A3%BC%EC%84%9D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미국과 기타 선진국: 1980년과 2005년</b></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득의 상향재분배와 정부의 재분배 정책 축소는 미국과 여타 선진국들과의 차이를 벌려나갔는데 이는 갖가지 지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미국만이 이 시기에 소득 상향재분배 정책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sup>Margaret Thatcher</sup> 총리를 비롯해 다른 여러 나라의 정치지도자들 역시 소득의 상향재분배 정책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밖에서는 이러한 기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았다. 그 결과 미국 내의 소득 상향재분배와 그로 인한 효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임금 불균형 양상</b></p> <p style="text-align: justify">표 1-1은 지난 25년간 미국과 기타 선진국의 임금 불균형에 대한 단순 측정치다. 이 표는 정규직 노동자 중 임금분포 백분위 10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임금 대비 임금분포 백분위 90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임금 비율을 보여준다. 임금분포 백분위 90의 노동자는 임금분포 최상층에 가까우며 전체 노동자의 90퍼센트보다 많은 임금을 받고 오직 그보다 상위인 10퍼센트의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이와 반대로 임금분포 백분위 10의 노동자는 임금분포 최하층에 가까우며 전체 노동자의 10퍼센트보다 많은 임금을 받고 90퍼센트의 노동자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따라서 이 수치는 한 국가의 임금 불평등 정도를 요약해 보여주는 유용한 척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를 보면, 1980&sim;1984년 동안 미국은 목록에 오른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임금분포를 보여주고 있다. 3.9대 1이라는 비율은 임금분포 백분위 90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백분위 10에 해당하는 임금의 노동자보다 3.9배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1980년 임금분포 백분위 10의 노동자가 시간당 7달러의 임금을 받을 때 백분위 90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그 3.9배인 27.3달러 이상을 받는다는 말이다. 미국 다음으로 높은 수치를 보인 국가는 3.5를 기록한 오스트리아다. 그리고 대부분 국가는 3에서 1 사이의 수치를 기록했으며 미국 외 기타 국가의 평균치는 2.7대 1로 나타났다.<strong><sup>5</sup></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585" height="4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D%91%9C1-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후 다른 선진국의 임금 불평등지수는 거의 변하지 않은 반면 1980년대 초에 가장 불평등한 임금분포를 보였던 미국의 임금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2001년 조사에 따르면 임금분포 백분위 90의 노동자와 백분위 10 노동자의 임금 격차는 4.6대 1로 증가했다. 2001년에 임금분포 백분위 10의 노동자가 연간 1만 달러를 벌었다면 백분위 90의 노동자는 4만 6천 달러를 번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심화된 미국의 임금 불평등 경향은 다른 선진국과 미국의 격차를 더욱 벌려 놓았다. 대부분 국가는 평균 0.1 정도의 수치 상승을 보여 이렇다 할 임금 불평등 경향의 변화가 없었다. 뉴질랜드나 영국 같은 국가에서는 임금 불평등지수가 상당히 증가했지만 여타 국가에서는 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프랑스나 일본에서는 그 수치가 소폭 감소하기도 했다. 해당 기간 동안 미국만큼 크게 임금 불평등이 심화된 나라는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 1-1에 나타난 수치만으로는 미국과 기타 선진국의 임금 불평등 정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부족함이 있다. 실제로 백분위 90보다 더 높은 임금분포에 속하는 미국 노동자의 임금은 표에 나타난 수치보다 훨씬 급격하게 증가했다. 1979년과 2003년 사이에 임금분포 백분위 95에 해당하는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은 31.1퍼센트 상승한 반면, 임금분포 백분위 90 노동자의 임금은 27.2퍼센트 상승했다.<sup><strong>6</strong></sup> 임금분포 최상층의 임금 상승분을 비교해볼 수 있는 다른 국가들의 통계자료가 없긴 하지만, 미국의 자료를 미루어볼 때 보다 광범위한 측정을 바탕으로 임금 불평등지수를 산출한다면 이 시기 동안 미국과 여타 선진국 사이의 임금 불평등 정도의 격차는 훨씬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C%A3%BC%EC%84%9D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노동조합 조직률</b></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른 선진국에 비해 미국의 노동조합(이하 노조)은 항상 힘이 훨씬 약한 편이었으나 1980년부터 2005년 사이에는 노조 교섭력의 차이가 더 크게 벌어졌다. 다른 선진국에서 노조는 노동자 대다수의 의견을 대표하며 경제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동안 다른 국가의 정부도 노조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미국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거둔 나라는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581" height="2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D%91%9C2-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표 1-2는 단체교섭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을 각 나라별로 정리해놓은 것이다.<sup><strong>7</strong></sup> 이 표에서 1980년의 미국은 노동자의 단체교섭협약 적용률에 있어 최하위 일본보다 단 1퍼센트포인트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 20년이 지난 2000년에는 거의 절반 수준인 14퍼센트로 감소했다. 이에 비해 대부분 국가들의 수치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노동자의 단체교섭협약 적용률이 상승하기도 했다. (예외적으로 뉴질랜드와 영국에서는 단체교섭협약 적용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2000년 들어 미국은 일본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거의 변화를 보이지 않은 기타 선진국의 평균 수치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미국의 단체교섭협약 적용률이 극심하게 감소한 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 다른 국가와 달리 미국 내 노동자 다수는 어떠한 사유도 없이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lsquo;임의고용<sup>employment at will</sup>&rsquo; 계약을 맺고 있다.<strong><sup>8</sup></strong> 이와 달리 공공 부문 노동자와 노조협약의 적용을 받는 민간 부문 노동자는 정당한 사유에 의해서만 해고를 통보 받는다. 민간 부문 노동자의 노조 조직률이 전체 노동자 노조 조직률에 비해 크게 줄어들면서 임의고용 노동자의 비율은 노조 조직률의 감소세보다 더 큰 폭으로 증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에는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노조협약 적용률이 엇비슷해서 민간 부문 노동자의 4분의 1가량이 노조협약의 적용을 받았다. 하지만 2004년에 민간 부문에서 노조협약을 적용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9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strong><sup>9</sup></strong> 이 기간 동안 공공 부문에서 노조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의 비율은 18퍼센트를 약간 넘는 수준으로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었지만, 임의 해고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노동자의 비율은 1980년 약 39퍼센트에서 2005년 25퍼센트로 줄어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부분의 고용주는 노동자를 임의로 해고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대체하기 힘든 전문기술을 가진 노동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는 고용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언제라도 해고당할 수 있다는 위험 속에서 지내는데 이는 노동자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커다란 요인이다. 특히, 대개의 경우 고용주에 의해 의료보험이 제공되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노조협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민간 부문 노동자는 고용주의 심기를 건드리면 가족을 부양할 직장과 의료보험을 동시에 잃게 된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웬만해선 이 정도의 불안정성을 겪을 일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7_%EA%B0%80%EC%9E%A5%20%EC%B5%9C%EA%B7%BC%EC%9D%98%20%EB%AF%B8%EA%B5%AD%EC%82%AC/%EC%A3%BC%EC%84%9D3.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딘 베이커</strong> Dean Baker (1958~ )<br /> 미시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워싱턴 경제정책연구소<sup>Economic Policy Institute</sup> 선임연구원을 역임한 후 경제정책연구센터<sup>Center for Economic and Policy Research</sup>를 공동 창립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온라인판에 매주 경제 논평을 게재(1996~2006)하는 등 전문가뿐 아니라 비전문가를 위한 글을 각종 언론에 기고하고, 방송 출연과 미 의회 위원회 출석을 통해서도 자주 발언하고 있다. 진보적인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그의 저서들은 언론에 자주 인용된다. 《보수적 복지국가―부자를 더 부유하게 하는 정부<sup>The Conservative Nanny State: How the Wealthy Use the Government to Stay Rich and Get Richer(2006)</sup>》, 《사회보장제도―조작된 위기<sup>Social Security: The Phony Crisis</sup>(1999, 마크 와이스브롯 공저)》, 《가격 바로잡기―소비자물가지수에 대한 논쟁<sup>Getting Prices Right: The Debate over the Consumer Price Index</sup>(1998년 초이스도서상 수상작)》, 《세계화와 진보적 경제 정책<sup>Globalization and Progressive Economic Policy</sup>(1998, 제럴드 엡스타인․로버트 폴린 공저, 한국어판: 백영현 옮김, 《강요된 신화》, 새물결, 2000)》을 비롯해 책을 여러 권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최성근</strong><br />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아시아나항공에서 근무했다. 지금은 어학원 강사로 활동하면서 책과 방송 프로그램을 번역하고 있다. 옮긴 책에 《C.S. 루이스 천국에 가다》 《프로가 알려주는 DSLR 잘 찍는 비결 3》 《시간쇼핑》 《하나님학》 등이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16 오전 10:37:00《227》류노스케 外 4인의 『손수건 外』를 읽다<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4일<br /> <span style="font-size: small">아쿠타가와 류노스케 外 4인</span>의 <br /> <span style="margin-lef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size: large">『손수건 外』</span></span>(삼성미술문화재단, 1987, 세계명단편선14, 일본어권Ⅰ)를 읽다</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열다섯 권이나 되는 이 선집이 나왔던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책을 사 모을 때였다. 하지만 이 선집을 다 읽은 기억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일본어권Ⅰ&rsquo;로 묶인 이 책에는 표제작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손수건」을 비롯해,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이즈의 무희」, 후가자와 시치로 「나라야마부시考」,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 오바 미나코의 「세 마리의 게」가 실려 있다. 이 가운데서 「이즈의 무희」만 오래전에 다른 선집에서 읽은 적이 있고 나머지는 처음 읽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15"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7/%EC%95%84%EC%BF%A0%ED%83%80%EA%B0%80%EC%99%80%20%EB%A5%98%EB%85%B8%EC%8A%A4%EC%BC%80_s.jpg" />&lsquo;작품을 선정&rsquo;의 말을 보면, 이 선집의 일본어권 작품은 소설가 이호철이 맡았나 보다. 다른 사항은 모르겠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허다한 작품 가운데 「손수건」을 든 것은 뜻밖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 하나를 선정하면서 「손수건」을 꺼내놓을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었던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선집 『월식』(하늘연못, 2005)에는 당연히 없고, 궁금해서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낸 몇 권의 선집에도 없다. 『지옥변』(시공사, 2011)&middot;『라쇼몽』(문예출판사, 2008)&middot;『거미줄』(현대문학, 2006)&middot;『아쿠타가와 작품선』(범우사, 2000)이 그것들인데, 제이앤씨에서 출간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 1』(2009)에 유일하게 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두 권짜리 전집에 든 것이니, 대표성이 없다고 할 밖에.</p> <p style="text-align: justify">「손수건」의 선정은 무척 의외였지만, 읽고 나서 곰곰이 되새겨보니 수긍이 간다. 일본인들은 세계 어느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신들만의 &lsquo;일본적 양식&rsquo;과 &lsquo;혼&rsquo;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예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사도<sup>武士道</sup>다. 그런데 아쿠타가와는 무사도 연구가로 유명한 니토베 이나조를 모델로 한 이 작품에서, 무사도가 일본 고유의 양식이거나 혼이기는커녕, 어느 문명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연기술일 뿐이라고 논평한다. 아래는 이 작품을 선정한 이호철의 해설이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39" height="34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7/%EB%AC%B4%EC%82%AC%EB%8F%8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독교 신자이며 무사도 연구가로서 유명한 니토베 박사의 무사도 고취를 비판한 소설인 「손수건」은, 이미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뿌리박혀서 인습으로 되어 있는 사상을 유연한, 자유적인 입장에서 비평한 것으로 우리는 문명 비평가로서의 아쿠타가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대정<sup>大正</sup> 시대의 자유정신, 회의주의가 문학 작품 속에서 이러한 사상 비판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은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다.</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작품 해설의 마지막 단락인 위 대목의 아쿠타가와에 대한 평가는, 늘 작가의 이름과 붙어 다니는 아쿠타가와 최대의 대표작 「라쇼몽」의 회의주의와 일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참고로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의 역본이 나와 있는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는, 한때 할리우드 서부극이 한국의 어린 영화광들에게 미국 개척 시대의 &lsquo;건맨&rsquo;을 향한 판타지를 품게 했듯이, 미국 사람들에게 사무라이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 주었다. 짐 자무시의 &lt;고스트 독<sup>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sup>&gt;(1999)이 그런 경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손수건 外』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죽은 자의 사치」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남녀 대학생이 의과대학의 해부용 시체 창고에서, 시체 옮기는 일을 하게 된다. 「죽은 자의 사치」는 죽음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허약성을 드러낸다. 먼저 삼십 년 동안 시체실을 지킨 관리인의 말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64"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7/%EC%A3%BD%EC%9D%80%20%EC%9E%90%EC%9D%98%20%EC%82%AC%EC%B9%98_%EC%98%A4%EC%97%94%20%EA%B2%90%EC%9E%90%EB%B6%80%EB%A1%9C.jpg"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첫 아이를 낳았을 땐 신기한 느낌이 들더구만.&rdquo; 하고 관리인이 말했다. &ldquo;날마다 죽은 사람을 수십 명씩 보며 돌아다니고 그중 새것을 수용하고 하는 게 내 일이거든. 그런 내가 새 인간을 하나 낳는다는 게 이상하더란 말야. 헛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나는 시체를 늘 보며 지내기 때문에 온갖 일이 헛되다는 걸 잘 알지, 아이가 병이 나도 의사한테 가지 않았어. 그리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으니 난 가끔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단 말야.&rdquo;</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관리인과 달리, 낙태에 필요한 수술 비용을 벌기 위해 시체실을 찾아왔던 여학생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지금 말에요, 난 애기를 유산시키지 않고 낳을 생각을 하던 참예요. 그 알콜 욕조 속의 시체들을 보고 있으면 말예요. 어쩐지, 애기는 죽더라도 한번 태어나서 뚜렷한 피부를 가져보고 죽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rdquo;</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은 인간으로부터 의식을 빼앗아 물질로 환원시킨다. 아직 새내기 작가였던 오에 겐자부로는 이 작품을 통해 &lsquo;의식으로부터 물질&rsquo;로의 환원 과정 속에 감금된 인간 조건을 거듭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몇 종의 역본이 나와 있는 『개인적 체험』은 이 시기를 결산하는 작품인데, 이 장편 소설의 주인공 &lsquo;버드&rsquo;가 보여준 심리 변화는 「죽은 자의 사치」에 나오는 여학생의 심리 변화에 포개어진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13 오후 3:13:00후미코의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6_%EB%AC%B4%EC%97%87%EC%9D%B4%20%EB%82%98%EB%A5%BC%20%EC%9D%B4%EB%A0%87%EA%B2%8C%20%EB%A7%8C%EB%93%A4%EC%97%88%EB%8A%94%EA%B0%80/%EB%AC%B4%EC%97%87%EC%9D%B4_%EB%82%98%EB%A5%BC_%EC%9D%B4%EB%A0%87%EA%B2%8C_%EB%A7%8C%EB%93%A4%EC%97%88%EB%8A%94%EA%B0%80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br /> 잊을 수 없는 그림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잊을 수 없는 1926년 7월 27일 ─ 가네코 후미코의 차가워진 몸이 도치기 현<sup>栃木縣</sup> 우쓰노미야<sup>宇都宮</sup> 형무소 도치기 지소의 차가운 감방의 창가에서 발견되었다. 후미코는 그 전날인 26일 새벽, 스물셋의 한여름에 이 세상과 영원한 결별을 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후 31일 새벽, 그녀의 어머니와 후세<sup>布施</sup> 변호사, 우마시마<sup>馬島</sup> 의사의 입회하에 우리 일행 십 수 명은 도치기 초<sup>町</sup> 외곽의 갓센바 묘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후미코의 사체 발굴에 나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각 3시 ─ 달 밝은 새벽 ─ 촉촉이 내린 밤이슬이 갓센바 묘지 일대의 잡초 위에 창백하게 빛나고 주변의 논밭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글자 그대로 죽음의 묘지, 일행의 발소리만이 이상한 긴장과 울분에 휩싸여 있는 묘지 깊숙이 들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 나서 ─ 몇 송이의 국화만 놓인 묘소를 찾아 우리는 땅을 4척 팠다. 습기에 부풀어 오르고 부패한 후미코의 사체, 불어버린 얼굴, 두텁게 돌출한 입술, 손가락, 손을 대면 피부가 그냥 벗겨져버리는 부패한 몸&hellip;&hellip;. 그렇게 하여 이색적인 얼굴과 짧게 자른 머리의 특징이 없으면 후미코라고 알아보지 못할 만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무참한 후미코를 ─ 낡은 천과 톱밥에 파묻힌 관 속의 후미코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부패한 몸 특유의 악취가 심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관을 짐차에 싣고 죽을힘을 다해 20리 떨어진 화장장까지 밀고 가니 새벽녘,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지는 5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렇게 1931년 ─ 후미코가 스스로 세상을 뜬 지 5주년이 되는, 그달 7월이 왔다. 그리고 이 7월에 후미코가 체포되어 이치가야<sup>市ヶ谷</sup>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4년간 쓴 수기, 후미코의 전 생애를 이야기한 수기가 책으로 만들어져 이 세상에 나온다. 후미코는 이 수기를 다 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ldquo;이 수기는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여(만약 그런 맹세가 있다면&hellip;&hellip;) 나 자신의 어떤 거짓도 없는 생활 사실의 고백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전 생활의 폭로이자 말살입니다. 저주받은 나 자신의 생활의 마지막 기록이며 이 세상을 하직하는 유품입니다. 아무 재산도 없는 나의 유일한 선물로 이를 택하<sup>宅下</sup>[수형자가 소지품이나 영치물 등을 친족에게 인도하는 것]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후미코 사후 5년 만에 이 세상에 책이 나오게 된 것은 후미코 생전의 복역 4년간의 숙원이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후미코는 멀리 가버렸고 그 모습조차 희미하나 인간 후미코, 이 세상에 태어나 스물세 살의 청춘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가버린 후미코, 성격적으로도 커다란 의문을 남기고 간 후미코, 그 후미코를 전 사회는 결코 잊지 않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정말 후미코는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이 수기는 스스로 그 질문에 상세하게 답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자신을 거짓 없이 대담하고 솔직하게 백일하에 드러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후미코는 생전에 조금 감정적이긴 해도 말도 잘하고 웃기도 잘했는데 조선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를 내어 울곤 했다. 그리고 박열<sup>朴烈</sup>이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며 막으려 해도 너무나 비참하고 불행했던 자신의 생활을 끝까지 말하곤 했다. 감정적인 후미코!</p> <p style="text-align: justify">일 하나를 하기 시작하면 식사도 거르며 몰두했지만 단지 인생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기대도 갖지 않고 오히려 절망하며 그 절망의 바닥에서 쓴웃음 짓던 후미코 ─ 생활력과 의지가 강하고 악바리이면서도 너무나 눈물이 많고 적나라하게 자신을 해방시킨 인간 후미코 ─ 등등&hellip;&hellip; 후미코에 관해 하고 싶은 얘기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수기에서 인간 후미코가 자신의 펜으로 충분히 다 썼으리라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잡소리를 덧붙이는 것은 그만두고,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p> <p style="text-align: right">1931년 7월 <br /> 후미코의 사후 5주년을 맞아 <br /> 구리하라 가즈오<sup>栗原一男</sup></p> <br /> <h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수기를 시작하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이쇼<sup>大正</sup> 12년[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갑자기 제국의 도시 도쿄를 안고 있는 간토 지방이 땅 밑에서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집들이 우지직 신음을 내며 뒤틀리고 무너지고 사람들은 그 집에 깔려 생매장당했다. 겨우 살아난 자들도 미친개처럼 울부짖으며 헤매고 있었다. 이렇게 한순간에 문명의 낙원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진<sup>餘震</sup>이 계속되다 격진<sup>激震</sup>이 찾아온다. 대화산의 분화처럼 적란운이 하늘을 뒤덮고 회오리를 일으키며 올라간다. 그리고 도시는 결국 사방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검은 연기에 갇혀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격동, 불안 그리고 결국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소동이 벌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우리가 저 도시의 경비를 맡고 있는 자들의 명령으로 경찰에 연행된 것은.</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말할 자유가 내게는 없다. 나는 그저 그 뒤 얼마 있다가 도쿄지방재판소의 예심법정에 불려 나가 취조를 받았다는 것밖에 말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수에게 이끌려 예심법정의 문을 열자 거기에는 이미 법관 한 명이 서기를 데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보더니 교도관이 나를 위해 피고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준비할 때까지 나는 쓰고 있던 죄수모를 손에 들고 방 입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판사는 그것을 냉정한 눈으로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윽고 내가 피고석에 앉자 판사는 잠시 내 뱃속까지 꿰뚫어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br /> &ldquo;당신이 가네코 후미코인가요.&rdquo; <br />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는 좀 부드러운 태도로 <br /> &ldquo;나는 당신 담당 예심판사 다테마쓰<sup>立松</sup>입니다.&rdquo;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br /> &ldquo;그런가요. 살살 좀 부탁드립니다.&rdquo; 하고 나도 미소로 대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판에 박힌 예심 심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판에 박힌 심문 사이에도 판사는 앞으로의 취조상의 중요한 단서를 잡은 듯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때의 대화를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그것이 이후의 내 수기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해줄 것 같아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판사가 시작한다. <br /> &ldquo;먼저 당신의 본적은?&rdquo; <br /> &ldquo;야마나시 현<sup>山梨縣</sup> 히가시야마나시 군<sup>東山梨郡</sup> 스와 촌<sup>諏訪村</sup>입니다.&rdquo; <br /> &ldquo;기차로 가면 어느 역에서 내리지?&rdquo; <br /> &ldquo;엔잔<sup>塩山</sup>이 가장 가깝습니다.&rdquo; <br /> &ldquo;음, 엔잔?&rdquo; 하며 판사는 고개를 들어 &ldquo;그럼 당신 마을은 오후지 촌<sup>大藤村</sup> 쪽이 아닌가. 실은 나도 오후지 촌을 잘 알지. 그곳에 아는 엽사가 있어 겨울에는 자주 사냥하러 갔거든&hellip;&hellip;.&rdquo; <br /> 나는 그 오후지 촌을 알지 못했다. <br /> &ldquo;아, 그렇게 말씀하셔도 잘 몰라요. 사실 그곳 스와 촌은 제 원적지이기는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그곳에서는 2년밖에 산 적이 없어서요.&rdquo; <br /> &ldquo;음. 당신은 원적지에서 태어난 게 아닌가.&rdquo; <br /> &ldquo;네 .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rdquo; <br /> &ldquo;그렇군. 그러면 당신의 양친은 이름이 어떻게 되고 ,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rdquo; <br /> 이미 대체적인 것을 경찰의 조서로 알고 있는 판사가 일부러 이를 들으려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내심 고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나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br /> &ldquo;좀 복잡하긴 한데, 호적상으로는 아버지 가네코 토미타로<sup>金子富太郎</sup>., 어머니 요시<sup>よし</sup>로 되어 있지만, 사실 그분들은 어머니의 부모, 즉 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입니다.&rdquo; <br /> 판사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물었다. <br /> 나는 대답했다. <br /> &ldquo;글쎄요, 아버지는 사에키 후미카즈<sup>佐伯文一</sup>라 하며 아마 시즈오카 현<sup>靜岡縣</sup>의 하마마쓰<sup>濱松</sup>에 살고 있을 것이고, 어머니는 가네코 도쿠노<sup>金子とくの</sup>라 하며 자세한 소식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친정 근처에 있을 겁니다. 호적상으로 저와의 관계는 어머니는 언니, 아버지는 형부로 되어 있습니다&hellip;.&rdquo; <br /> &ldquo;잠깐만.&rdquo; 판사는 말을 막았다. &ldquo;좀 이상한 게 어머니가 언니가 되어 있는 것은 알겠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와 성이 다른 것도 이상하고, 더욱이 남남이 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hellip;.&rdquo;<span style="color: #ff6600"><sup><strong>*</strong></sup></span><br /> (<span style="color: #ff6600"><strong>*</strong></span>1889년에 제정된 메이지 민법은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의 호적에 입적하므로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도록 되어 있었다. 현재의 일본 민법은 결혼한 뒤 남편이나 아내의 성 중 하나로 통일하도록 되어 있다.)<br /> &ldquo;그렇습니다.&rdquo; 어두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ldquo;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옛날에 헤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여동생, 즉 제 이모가 아버지의 후처가 되어 현재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rdquo; <br /> &ldquo;흠, 그렇군. 뭔가 사연이 있었군.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진 것은 언제쯤인가.&rdquo; <br /> &ldquo;벌써 13년이나 전의 옛날 일입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것은 제가 아마 일곱 살 때일 겁니다.&rdquo; <br /> &ldquo;그리고? 그때 당신은 어떻게 되었지?&rdquo; <br /> &ldquo;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살았습니다.&rdquo; <br /> &ldquo;음, 그리고 그 뒤에는 어머니 혼자 부양해온 거군.&rdquo; <br /> &ldquo;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헤어진 뒤 얼마 안 있어 어머니와도 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거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세를 진 적이 없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대답했을 때 나는 나의 지금까지의 모든 경력, 모든 경험을 내 가슴속에 확 펼쳐놓은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눈을 적셨다. 그것을 보았는지 어쨌는지 판사는 좀 동정하듯이 &ldquo;꽤 고생을 하고 살았구먼. 그럼 그 부분은 나중에 천천히 듣기로 하고.&rdquo;라고 말하며 서기의 테이블 앞에 놓여 있던 서류를 자신의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가며 본 건의 심문으로 들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것은 여기에 쓸 수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그후 판사는 나에게 나의 과거의 경력에 대해 뭔가 써서 내라고 했다. 법률에는 피고에게 불리한 것만 아니라 유리한 것도 자주 물어야 한다는 조문이 있다고는 하는데, 잘 쓰지도 않는 조문을 따른 것은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일[대역 사건(박열 사건)]을 저지른 데에는 필시 그 이유가 나의 처지 속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신문기자 같은 흥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명령받은 대로 나의 일대기를 썼고 그것이 이 수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수기가 재판에 얼마나 참고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재판도 끝난 지금 판사는 이 수기가 필요 없을 것이므로 나는 판사에게 부탁하여 이 수기를 인도받기로 했고 이것을 나의 동지에게 보낸다. 그 하나의 이유는 나를 좀 더 깊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고, 또 다른 이유는 동지가 보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을 책으로 출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로서는 누구보다도 이 세상의 부모들이 이것을 읽어주었으면 한다. 아니, 부모들뿐 아니라 사회를 좋게 하고자 하는 교육가, 정치가, 사회사상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읽어주면 좋겠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334" height="5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6_%EB%AC%B4%EC%97%87%EC%9D%B4%20%EB%82%98%EB%A5%BC%20%EC%9D%B4%EB%A0%87%EA%B2%8C%20%EB%A7%8C%EB%93%A4%EC%97%88%EB%8A%94%EA%B0%80/%EB%B0%95%EC%97%B4%EA%B3%BC%20%ED%9B%84%EB%AF%B8%EC%BD%94.JPG" /></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 나 자신의 일을 찾아!</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실제로 그즈음 나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희망에 불탔던 나는 고학을 하여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왔다. 하지만 나는 지금 확실히 알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그러나 그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마 이것은 하쓰요 상을 알게 되면서 하쓰요 상이 내게 읽게 해준 책들의 감화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하쓰요 상 그 자신의 성격이나 일상생활에 자극을 받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나는 그즈음 그것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요, 확실히 우리 앞에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rdquo; 하고 정이 진지하게 내 말에 찬성했다. 우리는 그래서 지금까지 없었던 진지함으로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생각이 났다. 오늘밤 미토시로 초<sup>美土代町</sup>의 청년회관에서 &lsquo;사회주의 강연회&rsquo;가 열린다는 것을.</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서 하쓰요 상을 꾀어 같이 강연회에 갔다. 거리는 이미 눈으로 새하얬다. 이 무렵부터 나는 사회라는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옅은 베일에 싸여 있던 세상의 모습이 점점 확실히 보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공부도 할 수 없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부유한 자가 더욱더 부유해지고 권력 있는 자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또 사회주의가 설명하는 바에도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실제로 나는 결코 사회주의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는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사회의 변혁을 구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바가 진실로 민중의 복지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lsquo;민중을 위하여&rsquo;라고 하며 사회주의는 동란을 일으키리라. 민중은 자신들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생사를 같이 하리라. 그리하여 사회에 하나의 변혁이 도래했을 때 아아, 그때 과연 민중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times;&times;[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권력을 대신하여 다른 권력을 가져오는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쓰요 상은 그런 사람들의 운동을 경멸하였다. 적어도 냉랭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ldquo;나는 인간 사회에 대해 그와 같은 이상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우선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마음이 맞는 생활을 한다. 그것이 가장 가능성이 있고 그리고 가장 의의 있는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rdquo;고 하쓰요 상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것을 우리 친구 중의 한 명은 도피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하쓰요 상과 마찬가지로 이미 이렇게 된 사회를 만인이 행복하게 되는 사회로 변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특별히 이렇다 할 이상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또 하나 하쓰요 상과 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사회에 이상을 갖지 않는다 해도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 자신의 진정한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성취될지의 여부는 우리가 신경쓸 바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것이 진정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것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진정한 생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그것을 하고 싶다. 그것을 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이 바로 우리와 하나가 된다. 멀리 저편의 이상적인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수기를 시작하며 전문, 본문 &lsquo;일! 나 자신의 일을 찾아!&rsquo; 편 일부)</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4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6_%EB%AC%B4%EC%97%87%EC%9D%B4%20%EB%82%98%EB%A5%BC%20%EC%9D%B4%EB%A0%87%EA%B2%8C%20%EB%A7%8C%EB%93%A4%EC%97%88%EB%8A%94%EA%B0%80/%EA%B0%80%EB%84%A4%EC%BD%94%20%ED%9B%84%EB%AF%B8%EC%BD%94%EB%8A%94%20%EB%88%84%EA%B5%AC%EC%9D%B8%EA%B0%80.jpg" /></p> <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정애영</strong><br />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일본 도쿄도립대학에서 일본 근대사를 전공하였다. 저서로는 『일본 우익의 어제와 오늘』(공저), 역서로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오쓰카 히사오』, 『미국회람실기 미국편』 등이 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 <p>&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13 오전 10:50:00아렌트의 ‘이해의 에세이 1930~1954’<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5_%EC%9D%B4%ED%95%B4%EC%9D%98%20%EC%97%90%EC%84%B8%EC%9D%B4/%EC%9D%B4%ED%95%B4%EC%9D%98%20%EC%97%90%EC%84%B8%EC%9D%B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역자 서문</span>&nbsp;</strong></span><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이해의 에세이 1930~1954》는 한나 아렌트<sup>Hannah Arendt</sup>가 뉴스쿨<sup>The New School</sup> 재직 당시 제자였으며 현재 뉴스쿨의 한나 아렌트 연구소 소장인 제롬 콘<sup>Jerome Kohn</sup>이 주로 아렌트의 초기 글들을 모아 편집한 《Essays in Understanding 1930~1954》(Harcourt Brace &amp; Company) 제2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1994년에 출간된 초판과 2005년 출간된 재판 사이에 내용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단 몇 편의 에세이에서 일부 단락을 삭제하거나 수정한 정도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sup>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sup>》이란 대작을 출간하기에 앞서 다양한 방식으로 출판한 40편의 에세이와 1편의 대담 자료가 담겨 있다. 제롬 콘은 이 책을 편집하면서 여기에 어떠한 에세이를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에피소드를 밝히고 있다. 편집자도 강조하고 있듯이, 초기 에세이에 담긴 아렌트의 사유 편린들은 후기 저작에서 구체화되고 그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단편적인 이 글들은 1954년 이후 아렌트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1장 〈무엇이 남는가: 언어가 남는다〉는 1964년 아렌트와 귄터 가우스<sup>Gunter Gaus</sup>의 TV 대담을 실고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아렌트는 자서전적 성격을 띤 저서와 에세이를 출간했으나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 그녀는 대담 자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제롬 콘은 이를 통해 아렌트가 왜 철학적, 신학적 사유에서 정치적 사유에 관심을 옮기게 됐는가를 이 글에 소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롬 콘은 1930년에서 1954년 사이에 발표된 40편의 에세이들을 연대기 순으로 편집했다. 책의 전반부에 소개된 에세이 6편은 아렌트가 1933년 파리로 망명하기 전까지 독일에서 출간한 에세이들이다. 그리고 1944년에 발표한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재평가〉와 〈히틀러의 식탁 좌담에 대한 고찰〉이란 에세이까지 22편의 에세이는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기 직전까지 집필한 원고들이다. 그리고 이후 게재된 12편의 에세이는 아렌트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이후 집필한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에세이들은 아렌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직접적인 연계성이 없는 것같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가 《과거와 미래 사이<sup>Between Past and Future</sup>》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음악의 모음곡같이 책에서 총체성보다는 통일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제별로 넓게 분류하면 몇 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즉 전체주의와 그 유산, 정치와 종교의 관계, 철학의 흐름에 대한 해석, 문학과 정치의 관계, 미국의 대외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아울러 11편의 서평이 실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듯 외형적으로 주제의 일관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에세이들을 연결시키는 외올실은 바로 &lsquo;정치적 사유&rsquo;라고 할 수 있다. 역자들은 아렌트가 이 에세이들에서 정치 행위에 대한 관심 또는 정치적 사유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후의 저작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공동으로 번역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나아렌트학회 회원들은 2007년 초반부터 매달 정기 강독회를 가지면서 아렌트의 초기 저작인 《이해의 에세이》에 담긴 내용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때늦은 감이 있으나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이 4인 공동 번역으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자들은 《이해의 에세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용어 표기와 표현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 보니 번역 작업을 기획한대로 진행하지 못했고 마무리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공동 번역의 결점을 최소화하고자 홍원표 교수가 원고를 전체적으로 검토하기는 하였으나 혹시 있을 번역상의 오류나 부주의는 물론 4인의 공동 책임이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질정과 격려를 바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귀중한 책을 번역하는 동안 많은 분들의 비판적 지원과 격려가 있었다. 번역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한나 아렌트학회 동료들의 애정 어린 조언과 격려는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이 성공적으로 출판될 수 있도록 연구 활동비와 토론을 위한 장소 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과 고옥 스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어려운 출판 사정에도 불구하고 아렌트 사상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이 책의 출판을 추진해 주신 텍스트의 김용필 사장님께 고마움을 표한다. 또한 이 책의 출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헌신적으로 노력한 박선화 전임 편집장, 그리고 거친 원고를 꼼꼼하게 검토하여 좋은 책이 되도록 세심하게 편집을 진행한 김경미 편집장께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무쪼록 이 책이 한나 아렌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독자들에 게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2월 공동 역자 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img alt="" width="600" height="6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5_%EC%9D%B4%ED%95%B4%EC%9D%98%20%EC%97%90%EC%84%B8%EC%9D%B4/%ED%95%9C%EB%82%98%20%EC%95%84%EB%A0%8C%ED%8A%B8.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right">제롬 콘<sup>Jerome Kohn</su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br /> 나에게 글쓰기란 이해를 추구하는 방법이며,<br /> 이해 과정의 일부분입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t;무엇이 남는가? 언어가 남는다<sup>What Remains? The Language Remains</sup>&gt;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dquo;흥미로운 시대에 산다는 것은 저주이다&rdquo;. 이는 한나 아렌트<sup>Hannah Arendt</sup>가 너무나 짧았던 생애 가운데 마지막 8년여 동안 당시의 국내 재앙이나 국제 위기를 논할 때 자주 인용하던 고대 중국의 속담이다. 마치 그 속담의 아이러니한 의미가 명백하다는 듯이, 그녀는 어떤 설명을 요구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빈정대는 투로 혹은 생각에 잠겨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간사<sup>human affairs</sup>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헌신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담 자체에서뿐만 아니라 그 속담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들으면 역설적인 그 무엇에 어렵지 않게 감동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학자, 예술가, 작가, 지성인, 저명인사,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읽는 다른 많은 독자들을 고무시켜 왔던 열정으로 &ldquo;이 무시무시한 세기&rdquo;의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녀의 작품은 &ldquo;가장 어두운 시대&rdquo; 상황 속에서도 &ldquo;이 결코 아름답지 않은 세계&rdquo;의 고통에 대해 감정적이지 않고 얼버무리지도 않으며 당당히 맞선다. 앞에서 인용한 문구는 그녀의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중국 속담은 매우 사려 깊고 개인적인 한 여성을 떠올리게 하며, 심지어 그녀를 상징하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나 아렌트(1906~1975년)는 정치 철학의 주장과 근거를 연구하면서도 정치 철학자라는 직함을 대부분 거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기란 쉽지 않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녀 저작의 사회학적, 역사적 측면을 강조했고, 또 다른 평론가들은 문학적이고 시적인 특징을 강조했으며, 그녀를 정치학자라고 불렀다. 정치학자는 그녀가 수년 동안 받아들였던 직함이다. 이후에 그녀가 명성을 얻고 자신의 행보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았을 때, 그녀는 넓은 의미로 그것을 정치 &ldquo;이론&rdquo; 혹은 정치적 &ldquo;사고&rdquo;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변화를 원하는 자유주의자이자 안정을 원하는 보수주의자로서 정당하게 환영받았고, 과거에 대한 비현실적인 열망을 품은 사람 혹은 유토피아적 혁명가라고 혹평을 받았다. 사람들은 아렌트에게 이러한 식으로 특징을 부여하고 있지만, 이러한 다양한 특성들은 (그리고 훨씬 더 미묘한 예들을 제시할 수 있지만) 이들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특성들은 전통적 학문 분야나 정치적 범주를 바탕으로 아렌트의 판단을 이해하려는 불편부당한 독자의 진심 어린 당혹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원래 아렌트가 개인적으로 정치 영역에 끌리지는 않았다는 것, 초기에는 물론 아마도 지금도 아닐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녀는 정치 행위에 대한 뛰어나고 성숙한 자신의 이해는 정치 행위를 &ldquo;외부에서 살펴보았다&rdquo;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녀는 이해의 활동, 끝없고 순환적인 정신 활동에 저항하지 못한 채 이끌렸고, 그녀에게 그 활동의 원칙적 중요성은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 활동 자체에 있음을 의심할 수는 없다. 확실히 그녀는 풍부한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분류를 시도했고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으며 전통적 정치사상의 낡은 범주를 변화시켰다. 그러한 것들은 결과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입증됐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지 않은 한 사상가를 발견한다는 게 뜻밖이라고 하더라도, 이해에 있어서 아렌트의 부단한 모험은 자신에게는 삶 자체와 마찬가지로 다만 &ldquo;도구적&rdquo;일 뿐이었다. 이해의 활동이 아렌트가 살았던 세계와의 화해의 척도를 그녀 자신에게 제공했음을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이해의 문제를 아렌트적인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녀는 고마워하고 &lsquo;편안함&rsquo;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이해한 것을 양도하기를 원했다거나 양도할 수 있다고 믿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렌트에게 순전히 난센스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사유<sup>thinking</sup>―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해<sup>understanding</sup>―란 고독하고 사적인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었다.<strong><sup>1</sup></strong> 아렌트는 지금까지 언급되었고 앞으로도 언급될 모범적인 삶을 이끌었다. 아렌트가 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세계에 밝힌 빛은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 세기 초반에 안정적이고 비종교적인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매우 총명했고, 풍부한 교육을 받았으며, 자신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현한 유서 깊은 귀중한 문화의 상속인이었다. 1920 년대에 발생한 근본적으로 정반대의 성격을 띠는 다음 두 사건은 그녀의 사고와 성격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사건은 학생 시절 그녀의 초기 교제였다. 그것은 실존 철학의 선봉에 있는 두 명의 위대한 사상가, 즉 마르틴 하이데거<sup>Martin Heidegger</sup>와 카를 야스퍼스<sup>Karl Jaspers</sup>와의 평생 애착 관계로 발전한다. 두 번째 사건은 독일에서 국가 사회주의 운동이 강화된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에게 철학적 혁명은 내적 전환이었다. 그것은 내성적이고 심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유 능력이 이전 세기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세계의 체계적인 합리화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녀는 소위 &ldquo;철학적 충격&rdquo;, 즉 단순한 호기심과는 매우 구분되는 실존에 대한 순수한 경이감을 경험한 바 있다. 강렬한 자기반성,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의 사유는 그러한 충격에서 나타났다. 그녀에게 이것은 진정한 철학하기의 보증서가 되었다. 이처럼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사고 내용에 덧붙여, 비가시적이고 무형적인 내적 정신 영역이 아렌트에게 열렸다. 그녀는 사실상 고독하게 이 영역에 머무를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유 활동과 대비되는 운동은 식별 가능한 외부 세계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이 운동의 근본적인 의도는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시민 결사<sup>civil association</sup>의 구조와 제도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정치적 혁명 운동의 성장을 &ldquo;현실의 충격&rdquo;이라고 언급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는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세계로부터 &lsquo;빠져나와&rsquo;<strong><sup>2</sup></strong> 사유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녀는 아직 젊었고, 독일을 떠나 예전처럼 자유주의 국가에서 자신들의 학문 분야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던 &lsquo;전문&rsquo; 지식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지성인 공동체의 일부 사람들이 나치의 팽창주의적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하거나, 혹은 그러한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려 하지 않는 안이한 태도에 질겁했다. 아렌트는 정치적 흐름에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든 휩쓸리도록 내버려 두는 지성인들의 성향을 불신했고, 이러한 불신은 평생 유지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는 한때 자신은 &ldquo;타고난&rdquo; 작가가 아니라고 말했다.<strong><sup>3</sup></strong> 이는 그녀가 &ldquo;인생 초기, 즉 유년기부터 작가나 예술가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rdquo;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ldquo;이 세기의 특별한 사건들&rdquo;인 재난으로 &ldquo;우연히&rdquo; 작가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의 문제와 무관하게 전체주의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해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 대격변 중에 있던 인류<sup>a world</sup>는 현상 세계<sup>the world</sup>로부터 이탈함으로써 이루어진 아렌트의 정신 활동에 불가피하게 영향 을 미쳤다.<strong><sup>4</sup></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가 훗날 말했듯이,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sup>Adolf Hitler</sup>가 실제로 권력을 잡기 이전에도 세계에서 &ldquo;독일 유대주의의 비운&rdquo;, 자신에게 속한 역사와 문화(《라헬 파른하겐<sup>Rahel Varnhagen</sup>》, 제17장 참조), 즉 그 &ldquo;독특한 현상&rdquo;의 종말을 인식했다. 따라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유대 민족을 괴롭혔던 여러 형태의 반유대주의와는 다른 중요한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유대 민족은 이 반유대주의를 견뎌내며 생존해 왔다. (이후에 아렌트는 유럽 유대인의 엄청난 파멸이 나치 전체주의와 더 오래된 박해 형태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요소라는 사실과 반유대주의가 단지 포괄적인 인종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 정치사상의 독창성은 그녀가 새롭고 전례가 없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 이전의 그녀의 성찰적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던 그러한 일상 세계에서 현재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정치적인 것은 정치인이 통치하고, 권력을 이용하며, 목표를 결정하고, 목표의 성취 수단을 형성하고 이행하는 과업을 진행시키는 &ldquo;정치&rdquo; 영역으로서 실재<sup>reality</sup>가 되었을 뿐 아니라, 좋건 나쁘건 새로움이 발생할 수 있고, 생각할 자유를 포함한 인간적 자유의 조건들과 비자유의 조건들이 형성될 수 있는 영역으로서 실재가 되었다. 이러저러한 면에서 정치적 실재는 이후, 특히 그녀가 그러한 이해의 조건으로서 반성적 정신 활동에 관심을 돌린 만년에도 이해를 위한 모든 시도를 인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렌트는 한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ldquo;문학 형식으로 에세이는 정치적 사건이라는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사유의 훈련과 &hellip;&hellip; 자연적인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rdquo;. 아렌트는 《과거와 미래 사이<sup>Between Past and Future</sup>》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의 통일성은 &ldquo;전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음악의 모음곡 에서 보이는 동일하거나 연관되는 어조로 기술되는 일련의 악장들의 통일성이다&rdquo;. 이러한 말들은 부분적으로 아렌트의 다른 저서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체주의의 기원<sup>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sup>》,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sup>Men in Dark Times</sup>》, 《공화국의 위기<sup>Crises of the Republic</sup>》가 그러하다. 그리고 앞의 책들보다 정도가 덜한 《인간의 조건<sup>The Human Condition</sup>》, 《혁명론<sup>On Revolution</sup>》, 《정신의 삶<sup>The Life of the Mind</sup>》<strong><sup>5</sup></strong>은 학술지에 출판되거나 공개 강의에서 소개한 초고의 에세이와 강연 원고로 구성한―엮어서 구성된―저서들이다. 이 책의 내용은 한 꼭지를 제외하고 아렌트가 1930년부터 1954년까지 집필한 에세이와 강연 원고 가운데 출판되지 않았거나 기존의 책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녀가 출판하기로 기획했던 것이 아니다. 글의 내용은 그녀의 것이지만 책의 구조를 그녀가 구상하지는 않았다. 이 책의 구성은 대부분 연대기적인 것이고, 그 일차적인 목적은 그녀 생애 가운데 24세부터 48세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아렌트의 전 세계적인 위상과 더불어, 실제로 그녀가 쓴 거의 모든 글들은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관심거리이다. 그녀는 20년 이상 학문적 관심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그녀 저작에 관해 비판적인 해설가들은―(기대되는) 그녀의 정확한 구분 및 판단뿐 아니라 그녀가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조화하는가에 관한―확연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저술해 왔던 것의 다양성과 양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계속 증대되고 있다. 아렌트를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주로 사상가로서 그녀의 독창성에 기인하고, 적게는 그녀가 현대의 독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고전적이고 유럽적인 자료에서 자양분을 공급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렌트는 저작에서 풍기는 열정적이고 독립적이며 시적인 특징, 특히 우리 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이 어떤 역사적 선례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 덕택에 창조력이 가장 풍부하고 주목받지 않을 수 없는 20세기 사상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국의 정치 이론가 마거릿 캐노번<sup>Margaret Canovan</sup>은 《한나 아렌트: 아렌트 정치사상의 재해석<sup>Hannah Arendt: A Reinterpretation of Her Political Thought</sup>》에서 논쟁을 피하는 예리하고 차별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캐노번은 오해를 살 정도로 단순하게 자신의 연구 목적을 &ldquo;아렌트의 정치사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설명하는 것&rdquo;이라고 말한다. 아렌트가 생각했던 &ldquo;전체주의의 요소들&rdquo;―아주 자세하게 설명한 일련의 전반적인 현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그 근거로 드러날 때 그녀의 정치사상이 총괄적으로 두각을 나타낸다는 캐노번의 명제는 특별히 주목을 끈다. 캐노번은 아렌트의 구분과 판단이 필연적으로 동의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정부 형태로서 전체주의가 등장한 조건들에 대한 그녀의 분석과 관련하여 고찰할 때 그녀의 구분과 판단이 일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조건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원인이 아니며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아렌트가 즐겨 표현했듯이) 아주 간결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위기이다. 그것은 우리의 난관으로 구성된 우리의 위기이다. 이 때문에 아렌트 사상은 과거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의미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6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5_%EC%9D%B4%ED%95%B4%EC%9D%98%20%EC%97%90%EC%84%B8%EC%9D%B4/%EC%A3%BC%EC%84%9D1_2.jpg" /></p> <p style="text-align: center"><br /> (&hellip;중략&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성 해방에 대하여</span><sup>1</sup></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성 해방은 어느 정도는 현실화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직업이 여성에게 개방되었고, 여성들은 투표할 권리와 공직에 출마한 권리를 포함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남성들과 같은 권리를 향유한다. 이러한 엄청난 진일보와 대조적으로 여성에게 부과된 제약들―특히, 생계를 꾸릴 권리와 재산을 취득할 권리는 여전히 남편의 동의에 달려있는 결혼 문제에 있어서―은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전 시대의 &ldquo;합당하지 않은&rdquo; 잔재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해방은 원칙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해도 형식적이다. 비록 오늘날 여성들이 남성들과 법적으로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성들은 사회에서 동등하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여성들의 불평등은 많은 경우 여성들이 남성보다 상당히 낮은 임금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만일 여성들이―사회적 가치에 맞게―동일한 임금 수준으로 일한다면 직장을 잃을 뿐이다. 이것은 확실히 반동적인 현상인데, 여성의 독립은 최소한 당분간 남성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이기 때문이다. 소위 의료계나 법조계 종사자 같은 상층의 전문직 종사자들만이 평등을 위해 평등을 부분적으로 포기해야 하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으로부터 면제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이러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여성 운동 덕분에 그 특권을 누린다고 해도, 이러한 전문직은 수 적으로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 일하는 여성은 경제적 현실이며, 이에 발맞추어 여성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앞으로 나아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직업을 가진 여성의 평균적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하다. 법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적은 보수를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직업과 양립하지 않는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배경에서 주어진 일들을 계속해야만 한다. 이들은 직장 일에 더해 가족을 돌봐야 하고 아이들을 양육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의 자유는 가정에서 일종의 노예화나 가족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ldquo;현대 여성의 문제&rdquo;는 알리스 륄레-게르슈텔<sup>Alice Ruhle-Gerstel</sup>이 쓴 책의 출발점을 구성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특유의 방식으로 그들의 상황을 다루고자 하는 여러 방식들을 기술한다. 모성이라는 생물학적 요소는 벌거벗은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는 정확한 통찰에서 더 나아가, 그녀가 개인적 심리에 근거한 방법, 모든 인간의 성취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최초의 과잉 보상의 결과라는 포괄적 주장을 따르는 데에 이른다. 주어진 개인의 역사뿐 아니라 전체 계급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 이론은 전형적인 과잉 보상을 인식하고 심지어 그 모형을 식별하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모형들―가정주부, 공주, 극악무도한 여자, 인정 많은 사람, 유치한 사람, 유능한 사람, 영리한 사람, 심한 압박을 받는 사람―에 대한 기술은 이 책의 최고의 장점이자 가장 독창적인 공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자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이중적 복합성으로 본다. 먼저, 그녀 자신의 사회적 계급과 별개로, 가정주부로서 여성은 남성 고용주의 재산 없는 고용인이 되는데, 특히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 환경에 살 때 그러하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조차 아니며 독립적인 유급 노동자도 아니다. 둘째, 일하는 여성으로서 여성은 대개 급여를 받는 노동자이다. 이러한 조건들의 모순은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될 때 특히 명백하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여성들은 정치 영역으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그곳은 여전히 남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 운동은 정치 영역으로 넘어갈 때마다 통합되고 획일적인 전체로서만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목표들을 제외하고) 구체적 목표를 표출하는 데 있어서 결코 성공한 적이 없다. 여성들의 정당을 창립하려는 헛된 시도는 운동의 문제를 매우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 문제는 젊은이 운동의 문제와 유사한데, 이 운동은 오직 젊은이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여성을 위한 여성 운동은 똑같이 추상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륄레-게르슈텔에 따르면, 여성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명확히 이해한다면 그(노동) 영역에서의 평등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노동 계급 대중과 연대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정치적 공동 작업은 위에서 약술된 사회적 상황에 근거를 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권고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은 모두 문제를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가정주부는 그녀의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을 때만 재산 없는 고용인이 된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상황에 들어가게 된다(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ldquo;처음으로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상황이 그녀에게 명확해진다&rdquo;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석은 이혼의 경우를 포함해서, 대부분 여성은 그녀가 속하는 사회적 단위에 여전히 묶여 있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고용주에 대한 고용인의 종속과 동일시함은 지나치게 개인에 맞추어진 프롤레타리아 정의로부터 계속 진행된다. 개인이 분석 단위가 되어서는 안 되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공주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경우건 부르주아 가정주부가 노예처럼 취급받는 경우건 상관없이, 프롤레타리아건 부르주아건 오히려 가족이 분석 단위가 되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장황한 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교훈적이고 고무적이다. 이 책의 결론 &ldquo;여성성의 대차대조표&rdquo;는 다소 무미건조한 파토스로 제출되었다. 게다가 단 155개의 대상을 포함한 연구 표본들이 전부인 그녀의 연구의 주요 논거는 저자가 끌어내려 한 광범위한 주제를 뒷받침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녀의 일반화를 정당화하기에는 흔히 통계학의 사회학적, 지리학적 범주의 폭이 협소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5_%EC%9D%B4%ED%95%B4%EC%9D%98%20%EC%97%90%EC%84%B8%EC%9D%B4/%EC%A3%BC%EC%84%9D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역자 서문, 서론 일부, 본문 &lsquo;여성 해방에 대하여&rsquo; 편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한나 아렌트</strong>(Hannah Arendt, 1906~1975)&nbsp; <br /> 한나 아렌트는 흔히 정치 철학자로 불리지만, 그처럼 명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 스스로도 철학은 &ldquo;단독자인 인간&rdquo;에 관심을 갖는다며 그러한 호칭을 거부했고, 권력의 속성과 정치, 권위, 전체주의, 자유, 폭력, 악 등 다양한 개념에 대해 정치 철학은 물론, 사회학, 역사학에 근거해 연구하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학적, 시적 감수성마저 지녔다. 아렌트는 현대 정치사상계 나아가 현대 철학계의 거물, 자이언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홍원표 <br /> </strong>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고전적 합리주의의 현대적 해석: 스트라우스, 보에글린, 아렌트를 중심으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현대 정치 철학의 지형: 언저리에서의 사유》와 《아렌트: 정치의 존재이유는 자유다》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렌트의 《혁명론》, 《정신 의삶 1-사유》,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정치적 책임과 용서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이해〉, 〈칼 야스퍼스와 한나 아렌트의 대화〉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임경석</strong> <br /> 한양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튀빙엔 대학에서 2004년, &lt;이론과 실천의 상보적 의미에서 본 마르크스의 해방적 비판<sup>Marx&rsquo; emanzipatorische Kritik im Sinne einer Komple&shy;mentaritat von Theorie und Praxis</sup>&gt;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과 《촛불,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공동 저술했고, &lt;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남긴 지적 유산의 전승역사&gt;, &lt;세계화 시대의 정의&gt;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김도연</strong> <br />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철학과 학사 과정을 마치고 동국대학교에서 &lt;한나 아렌트에 있어서 정 치적 사고와 정치적 판단&gt;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진정한 삶의 양식을 찾아서: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 《철학을 만나면 즐겁다》(공저) 등이 있으며 《한나 아렌트의 정치이론과 정치철학》을 번역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lt;아렌트의 정치적 판단의 이론과 그 의의&gt;, &lt;현대성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과 그 극복방안의 모색&gt;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김희정 </strong><br />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 정치학과에서 &lt;한나 아렌트의 &lsquo;자유&rsquo; 개 념과 페미니즘&gt;으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발표 논문으로는 &lt;한나 아렌트의 공적 영역과 페미니즘&gt;이 있으며, 한국정치사상학회에서 &lt;아렌트의 정치 행위와 페미니즘&gt;, &lt;여성과 관용: 배려와 확장된 사유를 중심으로&gt;, &lt;대중과 순응, 민주주의의 후퇴&gt;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12 오후 1:32:00브얌 부부의 ‘버려진 자들의 영웅’<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ED%91%9C%EC%A7%80.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저는 아주 특별한 이 책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 대해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역사는 역동적인 무대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 나가기 위해, 더더욱 공정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 싸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선각자, 정치 사상가, 활동가 들이 싸움에 큰 영향을 주고 적극적으로 동참했죠. 이런 정치가와 활동가 들 중에는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모든 걸 다 뒤집어엎으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무대는 때로는 시로,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정치적 회합으로, 때로는 저항으로, 때로는 노래로, 때로는 모두가 꾸는 꿈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아니에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역사적 무대는 이른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언론 매체, 미래 없는 정치가, 모든 사람들을 이익만을 추구하게끔 몰아가는 세계 경제 시스템에 의해 망쳐졌습니다. 지금 세상은 쇼핑센터로 가득 찼잖아요.</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역사는 이어지고 있고 싸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사실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어떤 한 사회의 몸뚱이를 보여 주는 책이에요. 그 몸뚱이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고, 현재의 여러 목소리를 담고 있고, 또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요. 이 책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몸뚱이 속으로 들어가 핏줄도 보고 신체 기관들도 볼 수 있어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거죠.</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더 이상 역사적 무대는 없어요.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도 않을 거예요. 이목을 끄는 사람도 없어요. 대신에 세대를 뛰어넘고,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공감하고 인내하는 생생한 소통의 경험이 시장보다 오래 살아남길 바랄 따름이에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세상이 이와 같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죠. 이 책이 바로 그런 이야기예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이야기가 나오게 힘쓴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해요.</p> <p style="text-align: right">2010년 7월 26일<br /> 프랑스 타냉주에서<br /> 존 버거</p>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13(1).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14(2).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15(1).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16(1).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EB%B2%84%EB%A0%A4%EC%A7%84%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_17(1).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의 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것은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보이지 않는, 혹은 보지 못했던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독특하고도 이름다운 인도의 그림책 『버려진 자들의 영웅』을 처음 대하는 독자들이 받는 첫인상은 아마도 &lsquo;낯설음&rsquo;일 것입니다. 세계사 시간을 통해 간디나 네루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책의 주인공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라는 인물의 잘 외워지지 않는 이름부터가 낯설 것이고, 게다가 서양의 그림책이나 만화책만 보아 온 탓에 아무런 구획도 없이 펼쳐진 특이하고 이국적인 그림 역시 우리들 눈에 잘 다가오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이 책과 멀어지려는 여러분께, 그럼에도 저는 잠시 이 책에서 30분만 눈을 떼지 말고 일단 읽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장담하건대 그리한다면, 여러분은 필시 마술처럼 한걸음씩 활짝 열린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차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일생을 이 차별에 맞서 싸웠던 한 위대한 인간에 관한 서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길게 이어져 온 것이지만, 인간사의 비극은 어쩌면 모두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차별은 한마디로 인간성에 가해지는 공격이자 모욕입니다. 어떤 개인 또는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다르다고 하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든 무언가를 독점하려는 소유욕에서 비롯된 것이든, 거기서 생겨난 차별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당하는 사람의 삶에 상처를 입힐 뿐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망가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법이나 제도에 의한 차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차별의식입니다. 사회 환경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모습을 바꾸어 가며 지속되는 법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와 다른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살아 있는 몸뚱이와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로 그 속에 아로새겨진 상처와 만나는 것일 수도 있기에 저는 늘 습관처럼 낯선 여행 앞에서 주저하곤 합니다. &lsquo;카스트&rsquo;라는 인도의 고약한 신분 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하여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lsquo;달리트&rsquo; 사람들의 이야기는 표현하기 힘든 아픔을 느끼게 합니다. 다가와서도 안 되고 다가가서도 안 되는, 손을 내서도 안 되고 손을 건네서도 안 되는 &lsquo;불가촉(Untouchable)&rsquo;의 존재가 무서운 맹수나 더러운 무엇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 첫 장 &lsquo;물&rsquo;에 나오는,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목이 말라도 우물에 갈 수 없는 달리트 아이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라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심한 갈증을 느껴야 했습니다. 이 목마름의 이유는, 생각해 보건대 이것이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lsquo;예비&rsquo;나 &lsquo;잉여&rsquo;로 구분되고, 커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언제라도 쓰다 버려질 수 있는 한국사회 이야기 말이지요. 우연히 읽게 된 이 낯선 선물이 지금 무척 고맙습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홍세화</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6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4_%EB%B2%84%EB%A0%A4%EC%A7%84%20%EC%9E%90%EB%93%A4%EC%9D%98%20%EC%98%81%EC%9B%85/6.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서문, 추천의 글, 본문 &lsquo;얼마전&rsquo; 편 전문)<br /> <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그림 &middot; 두르가바이 브얌, 수바시 브얌<br /> </strong>인도의 전설적인 예술가 장가르 싱 시얌의 제자로, 곤드족 전통 예술인 파르단 곤드 예술을 이어 가고 있다. 두르가바이는 어린이 그림책 『나무들의 밤 생활The Night of the Trees』로 2008년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수바시는 빼어난 조각가이며 여러 매체와 그림 작업을 했다. 『버려진 자들의 영웅』은 이 부부가 함께 작업한 첫 책이다. 기존 만화의 박스를 거부하고 &lsquo;디그나&rsquo;라는 구불구불한 경계선을 활용한 독창적인 그림으로 세계적으로 호평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글 &middot; 스리비드야 나타라잔</strong><br /> 인도 첸나이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캐나다의 킹스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영어와 글쓰기를 가르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인도의 사회 문제를 다룬 『양파도 마늘도 아닌 것No Onions Nor Garlic』과 『춤 안 추기Undoing Dance』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글 &middot; S. 아난드</strong><br /> 언론사 기자 생활을 하다 2003년 나바야나 출판사를 설립하고 인문&middot;학술서, 시집을 출판하고 있다. 첫 책으로 암베드카르의 자서전 출판했을 만큼 암베드카르의 반(反) 카스트 정책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 『버려진 자들의 영웅』의 글을 쓰고 디자인을 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정성원</strong><br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어린이, 소설, 인문 기획 편집 번역 일을 하면서 즐겁게 책을 만들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아기양 울리의 저녁 산책』『피터의 안경』 『백다섯 명의 오케스트라』 『지렁이가 맛있어!』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공역) 등이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10 오전 10:30:00이지누의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img alt="" width="600" height="75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3_%EB%A7%88%EC%9D%8C%EA%B3%BC%20%EC%A7%9D%ED%95%98%EC%A7%80%20%EB%A7%88%EB%9D%BC%20%EC%9E%90%EC%B9%AB%20%EA%B7%B8%EC%97%90%EA%B2%8C%20%EC%86%8D%EC%9C%BC%EB%A6%AC%EB%8B%88/%EB%A7%88%EC%9D%8C%EA%B3%BC%EC%A7%9D%ED%95%98%EC%A7%80%EB%A7%88%EB%9D%B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글</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름다운 남도에서 움튼 시대정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몇 해 전 여름, 천운당<sup>天運堂</sup> 상원대종사<sup>尙遠大宗師</sup>의 다비식이 치러진 두륜산 대흥사에 다녀왔다. 연화대는 일주문 곁에 마련되었고 영결식은 절마당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장에서 연화대까지는 겨우 300미터 남짓한 거리여서 식이 끝나자마자 만장 행렬이 이어진 듯 만 듯, 순식간에 연화대는 불길에 휩싸였다. 해거름이 가까워오자 불길이 사그라지는 연화대 주위에는 대여섯 스님들의 독송 소리만 텅 빈 하늘에 울려 퍼졌다. 모든 생각을 그친 채 망연히 연화대 주변을 오가던 나는 퍼뜩 놀라 걸음을 멈췄다. 일주문에서 부도전<sup>浮屠殿</sup>으로 이어지는 길섶에 듬성듬성 치자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폐사가 된 원주 거돈사에 머물며 선교일치<sup>禪敎一致</sup>를 주장했던 원공국사<sup>圓空國師</sup> 지종(930~1018)은 수행할 당시 담복 향기 말고는 맡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 또한 치자꽃 향기를 흠씬 들이마시려고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며 코를 들이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 시간 남짓, 짙은 치자꽃 향기에 취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공부방으로 돌아왔다. 먼 길이었지만 꽃향기 덕분인지 몸은 가벼웠고 마음마저 경쾌해질 만큼 행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라남도에 다녀올 때면 몸과 마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행복한 순간들로 충만해지곤 했다. 걸음을 나눴던 장소가 온전한 절집이거나 피폐한 폐사지여도 상관없는 일이다. 드문 경우지만 그 장소가 아름답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깃들어 살았던 사람들조차 아름답지 않았던 곳은 없다. 이 책에 실린 아홉 군데의 폐사지들 거의가 그렇다. 스스로 빼어난 풍광을 뽐내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가슴 아플 정도로 피폐한 모습인 곳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디라도 그곳에 깃들었던 스님들까지 아름답지 않은 곳은 없다. 그들이 남긴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지극히 아름다워 되뇌며 흉내 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더구나 자연이 아름다운 곳에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스님들까지 함께 머문 곳들도 있었으니, 그런 곳에 다녀온 날이면 벅찬 가슴을 달래기가 만만찮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중 선종<sup>禪宗</sup>을 태동시킨 구산선문<sup>九山禪門</sup>의 사찰들이 폐사지로 남지 않고 온전한 절집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가지산문<sup>迦智山門</sup>인 장흥 보림사와 동리산문<sup>桐裡山門</sup>인 곡성 태안사가 전라남도에 소재한 구산선문 사찰이다. 두 곳 모두 1980년대와 1990년대 들어 중창불사를 일으켜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이는 강원도나 충청도의 구산선문 사찰들이 폐사지가 되어버린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기에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라남도는 나말여초에 구산선문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지역으로 이곳의 완도 청해진을 통해 선종불교가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선종과 교종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회통하려는 결사<sup>結社</sup>운동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리산 오대사의 수정결사<sup>水精結社</sup>와 널리 알려진 조계산 수선사<sup>修禪社</sup>의 정혜결사<sup>定慧結社</sup>, 그리고 강진 만덕산의 백련결사<sup>白蓮結社</sup>가 그것이다. 물론 세 곳 모두 같은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혜결사는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주창한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사운동이 모두 전라남도 땅에서 이루어졌거나 꽃을 피웠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때 유불을 가리지 않고 결사에 참가한 고려의 유자<sup>儒者</sup>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선비이자 정치가들이었다. 이들은 수선사나 백련사에 입사하기는 했으나 개경과는 멀리 떨어진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실제로 사찰에서 수행을 하는 적극적인 참여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태동된 또 하나의 흐름이 고려 전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거사불교<sup>居士佛敎</sup>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후기에는 두륜산 대흥사를 중심으로 불유동원<sup>佛儒同原</sup>의 사상들이 확산되기 시작하는 독특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전라남도가 중앙정부와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가능했던 일로 유자들의 유배가 잦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대흥사를 중심으로 수행을 하던 스님들은 선종보다는 교종에 뜻을 두고 있었다. 당시 스님들은 하안거와 동안거 시기에도 참선에 들지 않고 안거를 하며 화엄 강의를 90일 동안 이어가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같이 화엄 수행에 매진하던 스님들과 유배 온 유자들은 서로 사상을 교섭하는가 하면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스님들이 유가의 경전에 매료되는가 하면 유자들 중 불가에 귀의하는 이들도 생겨나곤 했다. 이는 당시 지식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라남도 특히 해남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변화는 전라남도가 한반도에 새로운 사상을 전개하는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말여초에 완도를 중심으로 선종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기존의 교종과는 다른 새로운 사상을 진작시켰는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불교 자체로서 선교 양종<sup>兩宗</sup>의 회통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또 조선 후기에는 대흥사를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을 구분하지 않고 둘 다를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유교와의 교류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기존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신선한 계기가 되었다. 전라남도의 폐사지를 거닐며 되새겨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신선한 시대정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도가 이렇듯 긴 세월 동안 시대정신이 움튼 특별한 곳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지역민들의 호방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리적인 조건이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남도는 불교문화가 활발히 꽃을 피우던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앙정부인 경주와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고려의 개경, 조선의 한양과도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제 사정거리 안에 단 한 차례도 있지 않았다. 물론 그 때문에 경제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낙후되었지만 오히려 사상은 분방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불교사상은 물론 불교미술 또한 여타 지역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기존 질서와는 다른 불교문화는 우리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단비와도 같은 존재다. 그렇기에 남도는 아름답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봄,<br /> 무빙재<sup>無憑齋</sup>에서 이지누</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진도 금골산 토굴터</strong></span><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pan><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귀양살이 선비의 쓸쓸한 암자순례</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6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3_%EB%A7%88%EC%9D%8C%EA%B3%BC%20%EC%A7%9D%ED%95%98%EC%A7%80%20%EB%A7%88%EB%9D%BC%20%EC%9E%90%EC%B9%AB%20%EA%B7%B8%EC%97%90%EA%B2%8C%20%EC%86%8D%EC%9C%BC%EB%A6%AC%EB%8B%88/%EA%B7%B8%EB%A6%BC1_1.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새벽 하늘에 피어난 하얀 꽃</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남도로 가는 길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어느 순간부터 남도는 &lsquo;공사중&rsquo;이었다. 뻥 뚫린 고속도로 덕분에 진도에 다다르는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음의 시간만큼은 줄지 않았다. 여전히 멀기만 한 그곳, 진도의 금골산에 오르기 위해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빼곡하게 쏟아지던 눈을 맞으며 진도의 겨울을 걸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황홀한 노을에 취해 짙은 구름이 노을의 끝자락을 삼킬 때까지 한덩이 바위라도 된 양 자리를 지켰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들썩이는 엉덩이와 드잡이라도 하듯 실랑이를 벌이며 봄을 기다렸다. 논틀밭틀에 가득 피었을 보랏빛 자운영이 빚어내는 황홀한 정경을 떠올리며 말이다. 막 배동 선 청보리가 일렁거리는 모습도 눈에 밟혔다. 결국 아지랑이가 남기<sup>嵐氣</sup>처럼 대지를 뒤덮은 날, 목포를 지나 강진 언저리로 달려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길섶부터 산기슭까지 보리밭은 흔해 빠졌다. 때마침 한더미의 바람이 배동이 서기 시작한 보리를 희롱하며 지나가자 묘한 소리가 뒤따랐다. 귀 기울여 들으니 저희들끼리 서로 몸을 부딪는 소리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몸짓이나 동작을 머금고 있지 않던가. 보리밭도 마찬가지다. 보리밭에서 소리가 날 때마다 신기루가 펼쳐지는 것같이 황홀했다. 청보리가 은빛 물결을 이루었다가 금세 푸른 물결이 되곤 했다. 그 아름다운 정경은 나 자신이 수년 동안 두타행을 이어오는 순례자라는 사실도 잊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보리밭에 취한 것도 잠시, 넋을 잃은 돌장승이 된 것처럼 논틀에 우뚝 서버렸다. 발걸음이 돌덩이처럼 천근만근이 되어 도무지 뗄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은 청보리와 바람의 유희가 자아내는 고혹적인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필이면 보리밭을 거니는 내 앞의 논두둑에 지천으로 피어난 보랏빛 자운영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참 아름다웠다. 그것 말고 눈앞에 펼쳐졌던 정경을 달리 표현할 문장력이 내게는 없다. 더구나 그 정경은 다른 미사여구로 치장할 필요조차 없이 빼어났다. 이미 지나칠 만큼 아름다운데 그 이상 형용할 무엇이 더 필요할까. 군더더기 같은 감상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 또한 무슨 소용일까. 무량한 햇살은 산하대지에 맑게 부서지고&nbsp; 투박한 자태로 유혹하는 자운영 그리고 갖은 몸짓으로 일렁대는 청보리가 펼쳐지지 않았는가. 그때 알았다. 옛사람들이 툭하면 &lsquo;풍경에 취한다&rsquo;고 했던 까닭을 말이다. 그토록 흠씬 남도의 봄에 젖어버렸는데 어찌 절터로 향하는 걸음을 서붓서붓 뗄 수 있었겠는가. 그저 논두둑을 미친 듯이 쏘다녔을 뿐, 흥에 겨운 걸음을 절터가 있는 진도를 향해 성큼 옮기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필적 고의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지만 기어코 진도를 코앞에 두고 하룻밤을 묵고 말았으니, 만행<sup>卍行</sup>이 더디고 더딘 만행<sup>漫行</sup>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만행<sup>卍行</sup>이 만행<sup>漫行</sup>이며, 만행<sup>漫行</sup> 또한 만행<sup>卍行</sup>이다. 내 안의 부처를 찾아가는 길에 서두를 일이 무엇이겠는가. 운이 따라 내가 부처를 이루어 법어를 한다면, 오늘 마주한 아름다운 남도의 봄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불보살들과 신장들까지 전각에서 걸어 나오지는 않을까. 꽃길을 걷다가 저마다 마음에 맞는 양지뜸에 우뚝 서거나 큰 바위로 들어가 머물면서, 산하대지와 들판을 바라보는 석불상이나 마애불상이 되지는 않을까. 터무니없는 허튼 생각이 끝모르고 이어질 만큼 아름다운 남도가 앞에 펼쳐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튿날, 머뭇거린 만큼 서둘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헤치고 금골산 정상에 오르자 굼뜬 태양이 그때서야 먼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바다에서 불어온 거친 바람이 하늘의 먼지를 씻어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늘이 맑아질수록 새벽노을은 더욱 붉게 타올랐다가 일순간에 스러졌다. 그날 모질게 불어대던 바람을 정상에서 돌계단을 따라 내려간 굴속에서 피했다. 산 정상부는 온통 바위투성이었고 군데군데 움푹하게 파여서 크고 작은 자연굴을 만들어놓은 기묘한 모습이다. 내가 머물렀던 굴은 깊숙하지 않고 움푹하게 파인 정도일 뿐이어서 굴이라고 하기에도 마땅찮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곳에도 바위에 잇대어 전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흔적이라고는 겨우 바닥에 뚫린 둥근 구멍 하나가 전부다. 짐작컨대 흔히 생각하는 금당<sup>金堂</sup>과 같이 버젓한 전각이 아니라 비바람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움막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9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3_%EB%A7%88%EC%9D%8C%EA%B3%BC%20%EC%A7%9D%ED%95%98%EC%A7%80%20%EB%A7%88%EB%9D%BC%20%EC%9E%90%EC%B9%AB%20%EA%B7%B8%EC%97%90%EA%B2%8C%20%EC%86%8D%EC%9C%BC%EB%A6%AC%EB%8B%88/%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옹색한 그곳에는 나만 바람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처님 한 분이 바위에 덩그마니 새겨진 채, 바다에서 곧추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바람을 피하고 있었다. 소금기를 잔뜩 머금은 해풍은 거칠었지만 차갑지는 않았다. 부처님이 새겨진 바위 벽에 부딪치고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내게로 다가올 때쯤에는 오히려 훈훈하기까지 했다. 그 바람을 맞으며 무작정 앉아 있었다. 비록 야트막한 산이지만 수직에 가까운 경사여서 저 아래는 까마득하게 보이고 고개를 돌리면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왔으니, 그 어느 곳에 또 이런 자리가 있을까 싶어 쉽사리 움직이지도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하루를 노닐다가 떠나온 그곳으로 다시 가는 지금은 늦가을이다. 여전히 새벽이슬조차 마르지 않은 시간, 진도 읍내는 짙은 안개에 잠겨 있고 밤새 차창에 내려앉은 안개는 호된 추위에 시달려 꽁꽁 얼어 있었다.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 치러진 진도씻김굿의 탁월한 전승자였던 무형문화재 제72호 고<sup>故</sup> 박병천 선생의 장례식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때문일까. 내 마음 또한 차창처럼 얼어붙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박 선생의 구성지면서도 기품 넘치던 소리와 북춤은 이제 더 이상 듣고 볼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컸다. 종일 장례 행렬을 뒤따르며 처연해졌던 마음은 밤이 지났음에도 추슬러지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해장국 국물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으며 김밥 두 줄까지 챙겨서 산으로 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안개 자욱한 길을 달려 금골산 아래에 다다르자 곧추 선 바위 벽이 앞에 있어야 하건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 아래는 안개가 더욱 짙어 아예 산을 삼켜버린 것 같았다. 더구나 먹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짙은 어둠마저 더하니 어디가 어디인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었다. 저어하며 선뜻 산으로 들어서기를 머뭇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마주 보이는 첨찰산의 능선이 벌건 새벽노을로 달아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산길에 들어섰다. 길은 온통 감장 물감을 풀어놓은 듯, 멀고 가까운 것은 물론 높고 낮은 것조차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엉금엉금, 10분이나 걸었을까. 큰 굽이를 돌아서다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삼키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순간 가슴은 헐떡거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벅차오르는 가슴에 환하게 열려버린 동공은 닫히지 않았고 마치 상고대를 뒤집어쓴 한 그루 깡마른 나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푸른 기운 짙은 새벽하늘에 붉다 못해 하얗게 타버린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탐스러운 백련<sup>白蓮</sup>이나 덩치 큰 모란보다도 더 큰 송이로 피어 있는 그것은, 보름달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등 뒤로는 붉은 새벽노을이 타오르고 눈앞에는 둥근 보름달이 하얗게 비추고 있으니, 수미산의 새벽이 이랬을까, 무릉도원의 새벽이 이럴까. 난데없이 맞닥뜨린 환희로운 정경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절로 마음이 흔연해 나도 모르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순간 감사하다는 마음이 불끈 치솟았다. 부처님, 그가 아니었다면 어찌 순례자의 발길이 이 시간, 이곳에 닿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지는 못했다. 하얀 달을 바라보고 있자면 등 뒤의 새벽노을이 궁금하고, 그곳으로 고개 돌리면 하얀 함박꽃처럼 피어 있는 달이 이내 기울고 말 것 같아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들어가는 글,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1"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3_%EB%A7%88%EC%9D%8C%EA%B3%BC%20%EC%A7%9D%ED%95%98%EC%A7%80%20%EB%A7%88%EB%9D%BC%20%EC%9E%90%EC%B9%AB%20%EA%B7%B8%EC%97%90%EA%B2%8C%20%EC%86%8D%EC%9C%BC%EB%A6%AC%EB%8B%88/%ED%95%84%EC%9E%90%EC%82%AC%EC%A7%84.jpg" />이지누<br /> </strong>한국 문화를 섬세한 눈으로 톺아보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발간된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추만호)에 사진작업을 했다. 그리고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지금껏 큰 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 오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인 《디새집》(열림원)의 편집인으로써 창간을 주도했다. 그 후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나라 안 폐사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산재한 마애불의 기록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br /> 불교문화 외에 민통선 지역이나 비무장지대 그리고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기록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순정한 민초들에 대한 작업도 이어 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샘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잃어버린 풍경 1.2》(호미), 《이지누의 집 이야기》(삼인), 《관독일기》(호미) 들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09 오전 11:13:00《226》허경진의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를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8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_226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3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허경진의 <span style="color: #000080">『넓고 아득한 우주에 <span style="font-size: large">큰 사람</span>이 산다』</span>(웅진북스, 2002)를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우리 조상들이 어렸을 때 한자로 지은 시를 뽑아 싣고, 거기에 짤막한 설명을 덧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선비들이 어릴 때 지은 한시&rsquo;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만들면서 편역자가 가장 고심했던 것은 &ldquo;몇 살까지를 어린아이로 볼 것인가?&rdquo;였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열다섯 살이면 관례를 치르고 시집 장가도 갔다. 다산 정약용은 열 살 이전에 지은 글들만 모아서 문집을 냈고, 아홉 살에 요절한 조갑동 또한 그때까지 지은 시들을 모아 유고집을 냈다. 이처럼 뛰어난 아이들은 열두어 살부터 생원 진사시에 응시해 합격했으며, 공자가 &ldquo;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rdquo;고 했던 나이에 벌써 문과에 급제하기도 했다. 열 살이 지나 지은 시들은 너무 많아, 편역자는 열 살 이전에 지은 시로 한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의 선비들은 편지와 일기를 모두 한자로 썼으니, 시도 한자로 지었다. 아이들의 한자 습득은 다섯 살 때 『천자문』으로 시작해서, 『추구』&middot;『동몽선습』&middot;『소학』을 차례대로 배우며 시와 문장을 짓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서 『천자문』이 글자를 배우기 위한 교재였다면, &lsquo;뽑아서 엮었다&rsquo;는 뜻의 『추구<sup>推句</sup>』는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기 위해 엮은 책이다. 오언<sup>五言</sup>으로 이루어진 두 구절 또는 네 구절로 된 대구<sup>對句</sup>를 모아 놓은 이 책은, 외워서 정서를 함양하고 사고력을 발달시킬 뿐만 아니라 대구를 통해 저절로 시 짓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_226_%EC%B6%94%EA%B5%A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테면,</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東西日月門 南北鴻雁路<br /> 동과 서는 해와 달의 문이요,<br /> 남과 북은 기러기의 길이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같은 구절을 외우면 동서남북의 방위와 아울러 한시 작법의 기본 원리인 대구를 익힐 수 있다. 오언으로 된 위의 두 구절 가운데, 1절의 &lsquo;동서&rsquo;와 2절의 &lsquo;남북&rsquo;, 1절의 &lsquo;일월&rsquo;과 2절의 &lsquo;홍안&rsquo;, 1절의 &lsquo;문&rsquo;과 2절의 &lsquo;로&rsquo;는 짝이다. 이런 오언 문장을 외워두면 적당할 때 그대로 외워서 쓰거나, 필요에 따라 몇 글자를 바꾸어 자신의 시로 삼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 그러면 실습. 다섯 살 난 김시습이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이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궁궐로 불렀다. 지신사<sup>知申事</sup> 박이창이 시 한 구절을 던졌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br />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소나무 위에서 춤추는 듯하구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일절을 완성시키는 원칙은, 이미 말한 것처럼 앞서 나온 단어들의 짝을 일일이 맞추는 것이다. 김시습이 곧바로 읊은 대구는 이렇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城主之德 黃龍翻碧海之中 <br /> 임금님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에서 뒤척이는 것 같네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2" align="right" width="192"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_226_%EA%B9%80%EC%8B%9C%EC%8A%B5.jpg" /></span>김시습은 말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인 두 살 때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추구』의 일종인 『초구<sup>抄句</sup>』를 익혔다. 그런 연마가 있었기에 &lsquo;동자&rsquo;와 &lsquo;성주&rsquo;, &lsquo;학&rsquo;과 &lsquo;덕&rsquo;, &lsquo;백학&rsquo;과 &lsquo;황룡&rsquo;, &lsquo;청송&rsquo;과 &lsquo;벽해&rsquo; 같은 명사뿐만 아니라, &lsquo;춤추다&rsquo;와 &lsquo;뒤척이다&rsquo; 같은 동사와 &lsquo;위&rsquo;와 &lsquo;속&rsquo;이라는 부사까지 완벽하게 짝을 맞출 수 있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한시 작법의 기본적인 원리인 대구의 비밀을 알고 나면, 직제학<sup>直提學</sup> 김천령이 어릴 때 보여준 시재<sup>詩才</sup>도 이해할 수 있다. 어린 김천령이 할아버지의 무릎에 안겨 있는데, 손님이 시 한 구절을 짓고서, 할아버지에게 대구를 채우라고 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雲收天際高輪月<br /> 구름 걷힌 하늘가에 둥근 달이 높은데,</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할아버지가 얼른 답하지 못하자, 천령이 할아버지 어깨를 두드리며 &ldquo;할아버지! 왜 이렇게 짓지 않으세요?&rdquo;라고 졸랐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風定江心一葉舟<br /> 바람 멈춘 강 가운데 조각배 하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구름&rsquo;과 &lsquo;바람&rsquo;, &lsquo;거두다&rsquo;와 &lsquo;멈추다&rsquo;, &lsquo;하늘&rsquo;과 &lsquo;강&rsquo;, &lsquo;가&rsquo;와 &lsquo;가운데&rsquo;, &lsquo;고륜&rsquo;과 &lsquo;일엽&rsquo;, &lsquo;달&rsquo;과 &lsquo;배&rsquo;가 모두 짝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이름난 선비들이 어렸을 때 지은 시들을 소개한다는 단순한 목적보다 더 큰 포부를 갖고서 이 책을 엮었다. 부모가 아이에게 시제(첫 구절)를 주고 아이가 대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짐은 물론, 아이 스스로 적절한 대구를 찾으며 우주나 사회 질서를 관찰하고 깨달을 수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09 오전 10:20:00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2_%EB%AC%B4%EC%97%87%EC%9D%84%20%EC%84%A0%ED%83%9D%ED%95%A0%20%EA%B2%83%EC%9D%B8%EA%B0%80/212_%EB%AC%B4%EC%97%87%EC%9D%84%EC%84%A0%ED%83%9D%ED%95%A0%EA%B2%83%EC%9D%B8%EA%B0%80_%ED%91%9C%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작하며</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는 왜 <br /> 자유주의를 <br /> 경계해야 <br /> 하는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한국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지만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란 식의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거죠.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자유주의 혹은 합리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이종태</b> 이제 2012년으로 &lsquo;전 국민 성공 시대&rsquo;를 구호로 내걸고 집권했던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끝납니다. 저는 요즘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 나왔던 어떤 청년이 자꾸 떠오릅니다. 그 청년, 집안이 어려운데 몇 년째 취업도 못하고 구직 활동만 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죠. &ldquo;살려 주이소.&rdquo;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요즘 궁금해집니다. 그 청년은 지난 4년 동안의 이명박 정부와 한국 사회, 그리고 자신의 당시 선택을 지금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고 청년 실업 문제 역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경제 성장률이 3퍼센트 남짓한 것을 보면 이른바 파이도 그렇게 커진 게 아니죠. 말하자면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병폐들을 전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시점에서 장하준, 정승일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두 분은 지난 2005년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대담집을 냈죠. 그 책에서 노무현 정부를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다각도로 비판했습니다.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의 전통적 교리였던 &lsquo;재벌 해체&rsquo;에 대해서도 &lsquo;국제 투기 자본의 논리에 놀아나 우리 경제를 점점 더 수렁에 빠뜨릴 것&rsquo;이라고 주장했고요. 심지어 극악한 독재자인 데다가 한국 경제를 망쳤고 지금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받아들여지는 박정희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했습니다. 또 당시 분위기에서는 뜬금없어 보였던 복지국가를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제시했죠. 이는 어떻게 보면 지난 민주 정부와 민주화 세력의 사회관 역사관 경제관에 대한 총체적 비판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컨대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우파 시장주의 정책으로 우리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는데 지난 4년이 어땠나요? 지금도 예전과 동일하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폈다고 평가하시나요? 사실 &lsquo;안티 이명박&rsquo;으로 뭉친 야권에서는 요즘 &lsquo;노무현 복고주의&rsquo;라 일컬어도 무리가 아닌, 상당히 강력한 흐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요즘 여야에서 발표하고 있는 경제 정책은 어떻게 판단하시는지요? 오늘은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면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자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각 주제들에 대해서는 세부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갈 테니 여기서는 개괄적인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개인적인 소회도 좋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0"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2_%EB%AC%B4%EC%97%87%EC%9D%84%20%EC%84%A0%ED%83%9D%ED%95%A0%20%EA%B2%83%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EC%9E%A5%ED%95%98%EC%A4%80.jpg" />장하준</b> 2005년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우리는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대로 가다 보면 양극화와 경제 기반의 와해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부분은 2007년 말 이명박 정부의 집권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 생각해요. 빈부 격차와 실업을 견디지 못한 국민이 결국 이명박 후보에게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2002년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lsquo;원조 신자유주의자&rsquo;였어요. 대규모 감세와 공기업 민영화 등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변혁을 감행하려 했거나 감행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2008년 가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분위기가 급속히 바뀌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 온 시장주의 개혁에 대해 국민이 문제점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게 2010년 6월 지방 선거에서 야권의 압승으로 폭발한 것 같아요. 그해 10월 서울에 왔다가 복지가 다음 대선의 화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2005년에 복지국가를 거론할 때만 해도 &lsquo;미친 거 아니야?&rsquo;란 말을 많이 들었거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2005년 당시 우리는 노무현 정부는 진보가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당시 보수 쪽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lsquo;좌파&rsquo;이자 &lsquo;종북 빨갱이&rsquo;라고 했지요. 그러나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 노무현 정부의 재벌 및 금융 시장 개혁 등은 좌파는커녕 신자유주의적인 보수 개혁에 가까웠습니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어 온 재벌 개혁은 돈 많고 권력 가진 자들을 때린다는 측면에서 민주화 운동 같은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노동자와 국민을 위한 게 아니라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장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다</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04"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2_%EB%AC%B4%EC%97%87%EC%9D%84%20%EC%84%A0%ED%83%9D%ED%95%A0%20%EA%B2%83%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EC%9D%B4%EC%A2%85%ED%83%9C.jpg" />이종태</b> 두 분은 재벌 혹은 그룹이라 하는 기업집단을 두고 대략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기업집단의 대표 사례는 삼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건희라는 재벌 총수가 &lsquo;삼성&rsquo;이라는 이름 아래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물산 같은 개별 기업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이런 기업들은 금융 지원이나 기술 개발 등을 통해 서로 도우며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건희 가문은 삼성그룹의 실소유주가 아니에요. 그룹 산하 기업들의 주식을 모두 모았을 때 그중 이건희 가문의 소유는 3퍼센트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재산인 것처럼 계열사 전체를 지배합니다. 이른바 소유와 지배의 불일치라는 건데, 이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불법 행위도 수없이 폭로된 바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장하는 &lsquo;재벌 개혁&rsquo; 또는 &lsquo;재벌 해체&rsquo;는 결국 기업집단에서 개별 기업들을 떼어 내자는 겁니다. 개별 기업들 간의 상호 협력도 금지하고요. 그런데 두 분은 재벌, 즉 기업집단에서 분리된 기업은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의 노리개로 전락해 노동자와 국민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김대중 정부가 이른바 4대 개혁이라 해서 금융 개혁, 재벌 개혁, 공공 부문 개혁, 노동 시장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면서 공기업 민영화와 노동 시장 유연화는 약간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금융 개혁과 재벌 개혁은 그대로 추진했죠. 노동 운동 쪽은 노동 시장 유연화나 공기업 민영화는 그간 신자유주의라고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만 재벌이나 금융 문제 등에는 제대로 된 관점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재벌 개혁이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노동자 시민들에게 이로운 개혁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테니 여기서는 일단 접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정책들을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니까 경제학계의 민주화 운동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로부터 비판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벌의 앞잡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국가사회주의자, 즉 &lsquo;나치 아니냐?&rsquo;는 말까지 나왔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농담 비슷하게 아주 재미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북한 지원이나 양극화, 사회적 약자 배려를 말하면 &lsquo;좌파&rsquo;라 하고, 파병과 FTA 등을 말하면 진보 진영에서 &lsquo;신자유주의&rsquo;라 하니, 그럼 우리는 &lsquo;좌파 신자유주의&rsquo;란 말이냐고 한 겁니다. 물론 자신이 처한 모순적인 상황을 농반진반으로 비꼬아 말한 거지만 어쨌거나 굉장히 정확한 규정이라고 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저는 농담이 아니었다고 봐요. 노 전 대통령이 학자는 아니었지만 사물을 통찰하는 직관력은 보통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딱 잘라 정리할 수 있는 거죠.</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한국에는 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나쁘지만 자유주의는 좋은 것이란 식의 인식이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거죠. 앞으로 많이 거론하겠지만, 이른바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신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그냥 자유주의 혹은 합리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자, 사회적 자유주의자라는 말도 하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볼 때 그분들의 주장은 대부분 한국의 노동자, 시민이 아니라 국내외 금융 자본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민주화 세력이 집권하더라도 이런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고 그 경우 우리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점이 이 책을 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주의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둘러싸고 혼선이 빚어지는 이유는 미국 지식인 사회와 정계의 어법 때문이에요. 유럽에서 사민주의, 즉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정책들을 미국인들은 &lsquo;리버럴(liberal)&rsquo;이라고 해요. 자유주의란 뜻이죠. 미국은 사회주의(socialism)라는 용어의 이미지가 워낙 좋지 않아 사회민주주의 정책마저도 그냥 애매하게 리버럴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 때문에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에서도 자유주의와 진보를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사용하는 어법은 좀 더 정확해요. 리버럴은 18~19세기 지주나 봉건 귀족 같은 특권 계급이 지배하던 이른바 앙시앵 레짐을 깨고 시장주의 질서를 형성하자고 했던 흐름을 가리키는 겁니다. 진보, 즉 사회주의 또는 사민주의는 이런 리버럴들이 만든 질서마저 바꾸자고 주장하는 세력이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이종태</b> 그런 사민주의 정책의 핵심이 복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두 분은 『쾌도난마 한국경제』에서 이미 한국의 사회적, 경제적 대안 차원에서 복지국가를 내세운 바 있어요. 아주 이른 시기에 말이죠.</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그때 우리가 말한 복지는 단순히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 생계나 잇게 해 주자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물론 그런 기초생활 보장도 포함하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기업의 혁신과 산업 구조 고도화를 위해서도 복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제시한 것이죠. 그런데도 당시에는 &lsquo;미쳤다&rsquo;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최근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인과 정치인이 복지를 말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7"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2_%EB%AC%B4%EC%97%87%EC%9D%84%20%EC%84%A0%ED%83%9D%ED%95%A0%20%EA%B2%83%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EC%A0%95%EC%8A%B9%EC%9D%BC.jpg" />정승일</b> 사실 한국의 복지국가 담론을 본격화했다고 할 수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결성에도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책을 읽은 사회복지 운동가들이 경제학 쪽에서 복지국가로 접근했던 우리 같은 일군의 연구자들을 찾아와 뭔가 만들자고 해서 결성된 것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거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각설하고 아무튼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lsquo;생뚱맞게 뭔 복지국가냐&rsquo; 했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이후 분위기가 달라지더군요. 이명박 정부, 사실 처음에는 &lsquo;100퍼센트 신자유주의 광고 모델&rsquo; 같았잖아요.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한 노무현 정부도 감세를 하긴 했지만 그 규모가 크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미국 공화당의 레이건이나 영국 보수당의 대처를 흉내라도 내듯이 그들의 정책을 그대로 수용했고 엄청난 규모의 감세도 단행했습니다. 그 반동으로 복지국가 논의가 시민 사회에 확산된 감이 있어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의 민주주의 혁명이 본격화된 것처럼 말이에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이명박 정부가 전선을 명확하게 해 준 거죠. 신자유주의라는 것이 시민들의 생활을 그리 윤택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게 극명하게 드러난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hellip;중략&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이제는 정말<br /> 불판을 갈아야 할 때다</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이종태</b> 다시 주제를 바꾸겠습니다. 2012년은 대선 등 권력 구조 개편이 이루어지는 해입니다. 또 현재 야권은 &lsquo;안티 이명박&rsquo;으로 뭉치는 중이고 정권 교체의 가능성도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떨까요? 만약 야권이 집권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경제 민주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이명박 정부에 시민들이 잔뜩 분노한 상태이고, 그에 따른 사회적 대립도 격렬하게 진행 중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분노와 대립의 본질이 묻힐 위험이 커요. 제가 보기에는 지금의 여야가 내놓는 대안들도 사실은 상당 부분 신자유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는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기본적으로 모두 신자유주의 노선을 추진해 온 게 사실이에요. 시민들이 이런 측면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lsquo;안티 이명박&rsquo;이 노무현 시대로 회귀함을 의미한다면 정말 허무한 일 아닐까요? 더욱이 안티 이명박 진영이 죽은 박정희에 매달려 있는 것도 문제예요. 최근 그분들이 쓴 책을 보니까 &lsquo;모든 문제는 박정희 때문&rsquo;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박정희는 30년 전에 죽었고 그동안 세상이 몇 차례나 바뀌었습니다. 그런데도 책임을 죽은 박정희에게 계속 전가한다면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물론 그 나름의 시대적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보를 양보해도 그때가 태평성대는 아니었어요.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이유가 뭡니까? 지금 와서 그 시대를 미화하는 건 곤란합니다. 심지어 &lsquo;노무현 FTA는 좋은 FTA이고, 이명박 FTA는 나쁜 FTA&rsquo;라고 하는 분까지 있더군요. 노 전 대통령의 정책으로 다시 돌아가 예전에 확실히 하지 못했던 종부세나 재벌 개혁을 완수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환상을 조장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보 정권을 창출했다 하더라도 다시 실망해 그다음에는 또 우파 신자유주의에 표를 던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아요. 이런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주장이고 이 책의 목적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노회찬 통합진보당 공동 대변인이 예전에 &lsquo;이제 불판을 갈자&rsquo;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저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파 신자유주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좌파 신자유주의로 가면서 이를 경제 민주화로 포장하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이젠 정말 불판을 갈아야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이종태</b> 저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신자유주의가 지구적 대세였어요. 그러니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대세를 거스르긴 힘들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노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맞아요. 『쾌도난마 한국경제』가 나왔던 2005년 즈음에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lsquo;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한국 혼자 신자유주의를 안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스템으로 들어갔고, 또 잘 굴러가고 있는데&hellip;.&rsquo; 그러나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는 실제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판갈이가 필요한 시기가 온 거죠.</p> <p style="text-align: justify"><b>이종태</b> 더욱이 금융 위기가 터진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최근 들어서는 오히려 금융 불안이 더 심화되는 것 같은 국면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지금이 전 세계가 새로운 시스템을 모색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환기라는 게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 중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 상황이라는 거죠. 지금부터 계속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화하다 보면 나치 같은 정치 세력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유럽에서도 나치까지는 아니지만 극우 민족주의 정당들이 득세해 시민들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10년 앞을 내다보고 <br /> 99퍼센트가 나서자!</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이종태</b> 그런 면에서 보자면 &lsquo;월스트리트 점령&rsquo;이나 &lsquo;런던 증권거래소 점령&rsquo; 운동처럼 신자유주의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대중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다행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곳이 미국과 영국이었어요. 그런데 시민들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대공황 때보다 피해 규모가 훨씬 컸지만 당시와 달리 현재는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들도 최소한의 복지 제도는 실시하고 있으니 당장 굶어야 하는 상황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금융 위기 초기에는 각국 정부가 나름대로 신속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케인스 책을 꺼내 먼지를 털어 내고 경기 부양을 하다 보니 2009~2010년쯤에는 다행히 회복기로 들어가나 싶을 정도였죠. 그런데 다시 경제 위기가 불거지면서 시민들이 시스템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이번 금융 위기의 주범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미국 월스트리트 등에 있는 탐욕스러운 금융 자본이었어요. 이런 금융 자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어떤 비리를 저질러 금융 위기를 촉발했는지도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상세히 알려졌고요. 그럼에도 각국 정부는 국민의 세금을 퍼부어 금융 기관들을 구해 주었고, 심지어 책임자들에게 법률적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정부 지원금을 받은 금융 기관들이 CEO와 직원들에게 무려 수십억 달러를 보너스로 지급해 시민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죠.</p> <p style="text-align: justify"><b>장하준</b> 게다가 금융 기관들은 자기네가 받은 구제 금융 때문에 재정 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정부에 국가 신용 등급을 떨어뜨리겠다고 위협하며 복지 지출을 깎으라고 했어요. 시민들이 이런 부당한 시스템의 심장부에 있는 자들에게 책임을 묻기로 한 것이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아큐파이(occupy)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에 &lsquo;런던증권거래소 점령&rsquo; 시위대에게 강연을 했어요. 어떤 분들은 점령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반(反)자본주의자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대다수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이념적으로 상당히 느슨한 집단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부터 시작해서 &lsquo;나도 금융인이지만 바꿔야 할 게 많다&rsquo;는 사람까지 구성원들이 다양하더군요.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런던 외곽의 세인트폴 성당 앞에서 강연을 했는데, 질문을 30개 정도 받았어요. 그러다 보면 질문자들 성향을 대충 알 수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 참석자 중 20~30퍼센트는 반자본주의적이지만 나머지는 개혁론자들이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인 만큼 노선이 불명확하고 조직도 느슨합니다. 그래서 아큐파이 운동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분들도 있어요. 맞아요. 아큐파이 운동만으로 뭔가를 이루기는 힘들겠지요. 그러나 주류 언론이 복지 때문에 금융 위기가 터졌다며 여론을 호도하고, 그게 대중에게 먹히는 상황에서 젊은이들이 뛰쳐나와 &lsquo;꼭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rsquo;라고 하는 분위기를 계속 살리고 있다는 점은 높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이종태</b> 저도 &lsquo;아큐파이 월스트리트&rsquo; 운동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참 재미있는 게 이 친구들의 목적 자체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예요. 심지어는 인터넷 투표로 목표를 정하더군요. 그 목록을 보고 저는 조금 실망했을 정도로 반자본주의 성향이 별로 강하지 않아요. 표가 많이 나온 목표를 보면 &lsquo;그램 리치 블라일리법 폐지&rsquo;, 금융 범죄자 처벌, 기업의 선거 자금 지원 금지, 공정 과세, 로비 규제 등이었는데 정말 온건하지 않습니까? 이색적인 주장으로는 대마초 단속 중단이 있더군요. (모두 웃음)</p> <p style="text-align: justify"><b>정승일</b> 지금까지 장하준 교수나 스티글리츠 등 세계적 영향력을 지닌 학자들이 학문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적 경제 질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나 대중적인 차원에서는 큰 공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죠. 그런데 아큐파이 운동을 보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실감하고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하는 것 같아 매우 반갑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은 1970년대에 싹을 틔웠고 1980년대에 만개해 무려 30년 동안 세계를 강고하게 지배해 왔습니다. 심지어 이 시스템은 한국에서 보듯이 정신적으로 보수파뿐 아니라 개혁적 지식인들까지 포섭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따라서 한국에 바람직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이후 10년을 보고 새로운 힘을 결집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이종태</b>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lsquo;지금은 세계적인 과도기다. 과도기의 역사는 어느 쪽으로 진행될지 모른다. 그러나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려면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인 99퍼센트의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99퍼센트를 위해 지금부터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rsquo; 그러면 이미 화제가 런던과 뉴욕의 아큐파이 운동으로 흘러갔으니, 세계 경제에서 시작해 한국 경제로 논의를 좁혀 가는 식으로 분석하고, 그다음 두 분의 대안을 듣는 순서로 진행하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시작하며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장하준</strong><br /> 경제학과를 나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 이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2003년 신고전파 경제학의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2005년 경제학의 지평을 넓힌 경제학자에게 주는 레온티예프 상을 최연소로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경제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주요 저서로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공저) 『개혁의 덫』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정승일</strong><br /> 대학에서&nbsp;물리학과를 다니다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9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훔볼트 대학 사회과학부에서 석사 학위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정치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베를린사회과학연구소와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금융경제연구소,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등에 근무했으며, 현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Crisis and Restructuring in East Asia』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종태</strong><br /> 영문학과를 나온 뒤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매일신문』에 입사, 경제부와 사회부를 거쳤으며, 2001년엔 &lsquo;한국전 직후 민간인 학살&rsquo; 관련 기사로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2000년 3월 진보적 시사 종합지인 월간 『말』로 직장을 옮겨 편집장을 지내고,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거쳐 현재 『시사IN』에서 경제‧국제팀장을 맡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는 『쾌도난마 한국경제』(공저) 『국가의 역할』(공역)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공역)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공저) 『역동적 복지국가의 길』(공저) 등이 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06 오전 10:37:00《225》윤광준의 『소리의 황홀』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6_%EC%86%8C%EB%A6%AC%EC%9D%98%ED%99%A9%ED%99%80%20%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1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윤광준의</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span style="color: #ff0000"><span style="font-size: large">『소리의 황홀』</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효형출판, 2001)을 읽다</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나오자마자 재까닥 샀었다. 작가 생활 15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집필실이라는 것을 만들어 집에서 그곳으로 출퇴근을 할 때였다. 7평도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550만 원이나 되는 인테리어 비용을 쏟아 붓고서 줄창 음악만 들었으니, 아예 음악 감상실이었다. 집에는 매킨토시 MC6900&middot;코플랜드 CTA401&middot;유니즌 리서치 SIMPLY TOW 등속의 앰프와 와디아23 CD플레이어, 그리고 JBL 4425&middot;플로악 Tablette 50 Signature&middot;AR 2ax 따위의 허다한 스피커가 넘쳐 났으나, 고르고 고른 것은 막상 아담했다. 피셔250 TX 앰프와 토렌스 TCD 2000 CD플레이어를 연결하고, 천장에 보스 121 스피커를 달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어두컴컴한 카페에 앉아 있다가 멀리서 반짝이는 커피 추출기의 붉은 램프를 보고 오디오인 줄 알고 황급히 구경을 하러 달려갔던 얼빠진 사람인 데다가, 영화를 보다가 화면에 오디오가 비치면 갑자기 두 눈의 룩스<sup>lux</sup>가 밝아지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허진호 감독의 &lt;봄날은 간다&gt;를 어떻게 감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직업 음향 기술자인 상우가 어떤 음향기기를 사용하는지에만 신경이 곤두섰다. 직업 음향 기술자가 소니나 티악 같은 일제 음향기기를 쓰면, 국제영화제에 나가서 비웃음을 당하거나 &lsquo;테크니컬 감점&rsquo;을 당할 텐데&hellip;&hellip; 아, 그런데 무려 나그라<sup>NAGRA</sup>가 아닌가. 소품의 완성도까지 돌보는 우리들은 이제 &lsquo;촌놈&rsquo;이 아니다! 혼자 뿌듯했던 이 기분은 오직 오디오파일<sup>audiophile, 오디오애호가</sup>들만이 알아줄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86" height="35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6_%EB%B4%84%EB%82%A0%EC%9D%80%20%EA%B0%84%EB%8B%A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사람에게 『소리의 황홀』 같은 책은, 대학생들을 온통 &lsquo;빨갱이&rsquo;로 물들였다는 80년대 이념 서적보다 더 무섭다. 그래서 나는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쓰다듬으며 보던 이 책을, 집필실에 놀러 온 선배에게 선뜻 건네주고 말았다. 마크 레빈슨&middot;제프 롤랜드&middot;패스&middot;골드문트&hellip;&hellip; 다른 사람에게 저 보석 같은 이름을 가진 역병을 몰래 옮기고 저 혼자 살아남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은 내가 자주 들리는 구립도서관의 음악 관계 서가를 기웃거릴 때마다 나를 손짓해 불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디오파일을 일컬어 &lsquo;재생기기를 통해 득음&rsquo;의 경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음악 감상의 대부분을 재생 수단(LP&middot;CD, 라디오 등)에 의지한 사람들에게, 현장의 감동을 내 집에서 재현해보려는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뿐 아니라, 어떤 오디오파일의 궁극은 연주회장의 원음을 복원하는 게 아니라, 보다 특화된 자신만의 소리를 찾는 데로 향한다. 말하자면 오디오파일은, 원음 재현을 목표로 삼는 리얼리스트와 자신만의 이상적인 음을 추구하는 모더니스트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쯤에서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는 지은이의 &lsquo;주체사상&rsquo;에 귀 기울여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오디오는 음악과 기기, 인간 세 축으로 이루어진다. 음악성이 빠진 오디오는 공허하다. 오디오적인 섬세함이 빠진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나는 진정한 주체다. 오디오란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운드의 완성을 통해 음악의 도취를 이끌어내는 작업이다. 결국 인간의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의 취향과 고뇌가 얽혀 있는 오디오는 그 이면에 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rdquo;</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음악 애호가나 음악 관련 종사자들이 죄다 오디오파일의 선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도 재즈 평론가 김진묵의 예가 나오듯이, &lsquo;리얼리스트냐, 모더니스트냐?&rsquo;라는 논란 자체를 거부하면서 그저 소리만 나면 됐지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단지 오디오파일이 아니다 뿐, 음악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하등 뒤지지 않는 이 신념범들 또한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기계보다는 오로지 CD나 LP에만 혈안이 된 레코드 컬렉터. 이들은 &lsquo;세상은 넓고 모을 디스크는 많다&rsquo;는 확신으로 사방 벽은 물론이고 집안 전체를 CD나 LP로 발 디딜 틈 없이 만든다. 둘은, 음악을 들으려면 실제 연주의 감동을 느끼는 것이 최고라는 라이브파<sup>live派</sup>. 이들은 LP든 CD든 오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lsquo;통조림에 든 음식&rsquo;과 같이 취급하면서, 억만금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보다 실황 연주가 주는 감동이 훨씬 크다고 강조한다. 이 두 부류는 오디오파일만큼 돈이 들지 않는 것 같지만, &lsquo;마니아&rsquo;의 경지에 들면 오십보백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85" height="25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6_%ED%86%A0%EB%A0%8C%EC%8A%A4%20TCD%202000_gr.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오디오 취미가 천하의 역병인 것은 지은이의 말처럼 &ldquo;들인 돈만큼 정확하게 소리를 들려준다&rdquo;는 데에 큰 원인이 있겠지만, 오디오 취미만큼 &lsquo;디드로 효과<sup>diderot effect</sup>&rsquo;를 강요하는 것이 또 없기 때문이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는 어느 날 친구에게서 서재용 가운을 선물 받았다. 그가 그것을 걸치자 집안의 모든 풍경이 새 가운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책상과 책장, 커튼 등을 차례로 바꾸다가 결국은 멀쩡했던 온 방 전체를 바꾸고 말았다. 이 책에도 좋은 CD플레이어가 나왔다는 오디오 숍의 전화를 받고 와디아를 샀던 지은이가, 새 CD플레이어의 뛰어난 수준을 기존의 앰프와 스피커의 성능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프 롤랜드를 넘본 경험담을 적고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은 오디오파일이 매번 당하는 사소한 시험에 지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에는 여러 바보가 있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바보는 &lsquo;남한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rsquo;이다. 모두 대학교를 나왔는데 나는 왜 고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을까, 누구는 돈 많은 부모가 있는데 내게는 왜 그런 부모가 없을까, 나는 왜 장동건이나 고소영만큼 잘생기지 못했을까&hellip;&hellip; 남에게 있지만 나에게 없는 것을 부러워하는 삶은, 단연코 불행한 삶이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해도 행복하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쓴 지은이의 직업이 부러웠다. 본업은 사진이지만 오디오 평론을 겸하고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고가의 최신 오디오가 리뷰어용으로 들락날락한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건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생업인 사람의 독서가 즐겁지 않듯이, 의무적으로 시청기<sup>試聽錄</sup>를 써야만 하는 그 일 역시 고역일 게 분명하다.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운 것은 오디오 평론가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가 거금을 들여 오디오 편력을 할 수 있었던, 내게 없는 재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지은이도 부자는 아니었다. 오디오를 통해 인생을 배웠다는 그에 따르면 &ldquo;&lsquo;절실하게 필요할 땐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있을 땐 그 필요가 절실해지지 않는&rsquo; 쌍곡선의 비애가 바로 삶&rdquo;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ldquo;인간에게 유보시킬 행복은 없다.&rdquo; 때문에 그는, 행복을 향한 열정은 &ldquo;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당장 충족시키고자 할 때 힘을 갖는다&rdquo;며 먼저 저지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때문에 더 열심히 살게 된다면서!<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05 오전 11:48:00다케시의 ‘간디의 물음’<img alt="" width="600" height="85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1_%EA%B0%84%EB%94%94%EC%9D%98%20%EB%AC%BC%EC%9D%8C/%EA%B0%84%EB%94%94%EC%9D%98%EB%AC%BC%EC%9D%8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30pt"><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br /> 그 순간, 역사가 움직였다</span></strong></span></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b>소금을 만들러 가자</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의 인생은 &lsquo;조국 인도의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친 인생&rsquo;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첫머리에서 언급했던 &lsquo;소금 행진&rsquo;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때마침 그 시절 인도에서는 자와할랄 네루<sup>Javaharlal Nehru, 1889~1964</sup>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sup>Subhas Chandra Bose, 1897~1945</sup> 같은 젊은 리더들이 등장하고 독립을 향한 기운이 높아가고 있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29년 말에 인도 국민회의파<sup>Indian National Congress</sup>의 전국대회가 열렸고,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는 결의안이 제출되었습니다. 모두들 &ldquo;자, 이젠 승부다. 드디어 영국과 투쟁을 개시하자!&rdquo;라며 전례 없던 독립 의지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간디가 &ldquo;나는 해안까지 걸어가서 소금을 만들어야겠다&rdquo;는 말을 꺼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도대체 소금과 독립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rsquo;하고 어쩌면 뜬금없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네루를 비롯한 인도의 독립 지도자들도 간디의 느닷없는 엇박자에 맥이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ldquo;저기 간디 씨, 잠깐만요. 그런 거 말고도 더 할 게 많이 있어요&rdquo;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야말로 간디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60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1_%EA%B0%84%EB%94%94%EC%9D%98%20%EB%AC%BC%EC%9D%8C/%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독립, 독립&rdquo; 하고 다들 말은 쉽게 하지만, 그렇다면 식민지 지배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으며 독립을 쟁취하는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는, 민중들로서는 그리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lsquo;소금&rsquo;이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금은 없으면 살 수 없는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게다가 소금은 자연이 내리는 혜택이고 어느 누구의 독점적인 소유물일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사람들은 그 소금을 영국인에게 독점당하는 바람에 비싼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구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도 모순되고 억울한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말하는 다소 까다롭고 어려운 이론은 모를지라도, 이렇게 소금이라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lsquo;소금을 내 손으로 만든다&rsquo;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부조리함을 민중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일반 민중들에게는 아주 이해하기 쉬운 &lsquo;상징&rsquo;이었던 셈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수십만 명의 민중들이 참가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도의 독립운동은 일부 엘리트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까지 참여해서 싸우는 거대한 운동<sup>movement</sup>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소금 행진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것은 &lsquo;걷기&rsquo;라는 행위입니다. 간디가 최소한의 물건만 지닌 채, 초라한 모습으로 홀로 걸어서 소금을 만들러 떠나는 광경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간디는 행동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민중의 가슴속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신앙심에 호소하여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도 독립을 향한 발걸음은 1885년에 인도 국민회의파가 탄생했을 즈음에 시작해서 1947년까지 길고 긴 여정을 걸어왔는데, 인도의 독립운동에 항상 걸림돌이 되었던 것은 자국 내 종교 간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하고 정체되기도 하는 등 몇 번이나 실패를 반복하게 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광대한 인도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고 또 여러 언어가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감정도 없는 한낱 바위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대립이었습니다. 힌두교 내부만 보더라도 지역이나 신분 등에 따라 다양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영국은 그런 인도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고 인도의 내부 분열을 부채질해서 독립을 이룰 수 없도록 교묘한 전략을 취해왔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lsquo;분할 통치&rsquo;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인도 내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첨예해졌습니다. 근대 이전의 인도 사회에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모두에게 성자숭배 등 서로 연결 고리가 있었고 이슬람 의례 속에서도 힌두적 요소를 많이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지금도 일상생활 차원에서는 그러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융합적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사회 내에서도 힌두적인 카스트의 요소가 존재해서 양자가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영국은 국세<sup>國勢</sup>를 조사할 때 사람들에게 스스로 직접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를 하나씩 선택하도록 해서, 분리되지 않는 양자의 애매모호한 영역을 배제해나갔습니다. 이는 서양적 &lsquo;종교&rsquo; 개념이 비<sup>非</sup>서양 세계에 도입될 즈음에 일어난 현상으로, 일본에서도 신도<sup>神道</sup>와 불교 사이에 유사한 문제가 벌어졌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인도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를 하나씩 고르라는 선택 행위에서 당혹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대체로 &lsquo;힌두&rsquo;라는 용어가 인더스 강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무슬림들이 붙인 타칭<sup>他稱</sup>이며, 당시에는 자기 자신이 &lsquo;힌두&rsquo;라는 자의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힌두&rsquo;를 &lsquo;힌두이즘<sup>Hinduism</sup>&rsquo;이라는 하나의 종교로 체계화한 것은, 사실 영국의 오리엔탈리스트<sup>Orientalist</sup>, 동양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인도의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적 실천보다는 《베다<sup>Veda</sup>》 같은 옛 전적에 힌두의 본질이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고전들을 열심히 수집하고 그 고전들의 체계를 세워서 &lsquo;힌두교&rsquo;라는 종교를 구축해나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근대 이전의 힌두교는 체계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오히려 &lsquo;장(공간)&rsquo;으로 존재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데, 광대한 인도에서는 각지의 의례 체계도 달랐고 신앙하는 신들도 다양했습니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도 그 신앙 양식은 크게 변화하고 있어서 지극히 다양한 신앙들이 느슨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전개되어 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영국의 동양학자들은 힌두를 시간적&middot;공간적으로 모두 하나의 고정된 종교 체계로 통합하고, 그런 관념에서 인도 사회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려 했습니다. 요컨대 이론적으로만 따지는 책상물림이었던 셈입니다. 사회 실태에 입각해서 힌두를 인식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힌두라는 관념을 고전을 통해서 체계화하고 난 뒤에 그 체계를 현실에 투영시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양한 장면에서 &lsquo;진정한 힌두의 전통이란 무엇인가?&rsquo;라는 명제를 놓고 인도 사회 내부에서 갈등과 대립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인도에서는 어느 한 인간이 체계가 잡힌 하나의 종교를 신앙하는 형태 그 자체가 새로운 현상이었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신앙의 차이를 둘러싸고 폭력적인 대립을 일으키는 사태는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양자의 대립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특정한 사회 환경 내에서 집단적 문제가 발생했던 그런 성질의 것이었고 &lsquo;힌두교&rsquo; 대 &lsquo;이슬람교&rsquo;와 같은 큰 종교적인 대립은 없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lsquo;힌두교&rsquo; 대 &lsquo;이슬람교&rsquo;라는 대립이 확대된 것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난 이후로, 이것이 차츰 인도의 분단이라는 심각한 사태로까지 발전해나갔습니다. 이는 실제로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할 때에는 이슬람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지금도 이 두 나라는 대립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종교를 중시하는 간디에게 이러한 양자의 대립은 인도가 떠안은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lsquo;종교 대립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그러나 종교적 행위를 통해 사람들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rsquo; 소금 행진에 대한 간디의 안목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금을 만들기 위해서 한결같이 &lsquo;길을 걷는&rsquo; 행위에는 힌두교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특정 종교의 교의나 심벌을 사용하지 않고,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종교 행위야말로 &lsquo;길을 걷는다&rsquo;는 &lsquo;행<sup>行</sup>&rsquo;이었던 것입니다. 종교적 대립을 초월해서 종교 행위를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간디가 목표로 했던 보편적 경지였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지배의 착취 구조를 겉으로 드러내어 정치적으로 민중을 자각시키는 것에도 성공했습니다. 간디는 탁월한 종교가였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이는 21세기의 정치를 고찰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b>물레를 돌려라</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의 특징적인 모습을 또 하나 든다면, &lsquo;차르카<sup>charkha</sup>&rsquo;라는 실 잣는 물레를 돌리는 사회적 운동을 시작했던 일일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여러 사진 중에서도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차르카를 돌리는 사진이 특히 유명한데, &lsquo;간디&rsquo; 하면 바로 이 모습을 연상하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래 인도에서 제면製綿업은 중요한 산업이었고, 18세기까지 영국은 인도에서 수제手製 면포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국 직물 공업이 활발해지자, 원료인 면사만 인도에서 싼값에 구입해 들여와서는 기계로 직조해 완성된 면 제품을 인도에 강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도의 제면 산업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간디는 영국산 면 제품 불매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산 양복이며 직물들을 불태우며 &ldquo;우리 모두 함께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직접 천을 짜자&rdquo;고 호소하면서 스스로도 물레를 돌렸습니다. &ldquo;우리는 우리나라에서 면화를 기른다. 그런데도 왜 굳이 영국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천을 구입해서 나라의 부富를 유출시키는가? 내가 입을 옷은 내가 만들면 되지 않겠는가!&rdquo; 그런 논리입니다. 이 면포 자급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21년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근대를 역행하는 &lsquo;기계에서 손으로&rsquo;라는 이치를 역설했습니다. 그가 비판했던 것은 영국의 산업계뿐만 아니라, 기계에 의존하는 근대 사회 그 자체였습니다. 기계에 의존하고 점점 더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는, 인간이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사회라고 비판했던 것입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인도의 조상)는 치명적인 경쟁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계속 이어왔습니다. 관행에 따라 대가를 받습니다. 우리가 기계 같은 물건을 발명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계와 같은 번거로운 것에 휘말리게 되면 인간은 노예로 변하고, 자신의 도덕을 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조상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들은 깊이 고민했고 우리는 내 손과 발로 가능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손과 발을 쓰는 일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며, 바로 그것에 건강이 있는 뜻입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힌두 스와라지》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가 기계 자체를 부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애당초 &lsquo;물레&rsquo;도 기계이고, 모든 기계를 부정한다는 것은 근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1_%EA%B0%84%EB%94%94%EC%9D%98%20%EB%AC%BC%EC%9D%8C/%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학생들에게 &ldquo;선생님은 기계에 대해서 전부 다 비판적이십니까?&rdquo;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ldquo;나는 기계가 아니라 기계에 대한 광신에 반대하는 것입니다&rdquo;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컨대 모든 것을 기계에 의존하고 모든 욕망을 기계의 발전을 통해 실현하려는 &lsquo;광신&rsquo;에 대해서, 간디는 날카로운 비판의 창끝을 겨누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물레 돌리는 작업을 중시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레를 돌리는 것은 원래 여성의 작업이지만, 남성인 간디가 솔선해서 나섰기 때문에, 모두가 그를 본받아 마침내 수많은 가정에서 &lsquo;탈카닥 탈카닥&rsquo; 물레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곳에도 역시 종교적인 &lsquo;수행&rsquo;의 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물레를 돌리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지만, 그 단순 작업에 열중하는 동안에 못된 사념<sup>邪念</sup>이 걷히고 마음은 무심<sup>無心</sup>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물레 돌리기를 매일 빠뜨릴 수 없는 하루 일과로 삼았습니다. 그는 원탁회의에 출석하기 위해서 런던을 방문했을 때에도 빠듯한 일정에 수면 시간도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물레를 돌렸습니다. 간디에게 물레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lsquo;수행&rsquo;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수작업과 기계 작업은 효율과 속도 면에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대등하게 맞설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숙연한 행위가 근대 산업구조에 반격을 가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lsquo;소금 행진&rsquo;과 마찬가지로 서양의 지배에 저항하는 &lsquo;상징&rsquo;이 되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가 품고 있던 의문 가운데 &lsquo;근대의 속도&rsquo;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그는 &ldquo;철도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rdquo;라는 말을 꺼내기도 했고 &ldquo;선한 것은 달팽이처럼 나아가는 것입니다&rdquo;라는 말도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근대 산업사회에 의문을 표시했고,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이상적 모습에서 가치를 찾아냈습니다. 그중에서 그가 주목했던 것은 1년에 약 넉 달이나 되는 &lsquo;농한기&rsquo;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 역시 인도 생활을 경험했지만, 인도의 더운 계절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워서, 한낮에는 나무 그늘에서 한가롭게 쉬거나 방 안 통풍이 잘 되는 곳(내 경우에는 천장에 달린 선풍기 밑)에서 수다를 떨거나 책을 읽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런 여유 있고 느긋한 시간은, 가혹한 자연 조건이 인간에게 부여한 일종의 은혜라고 몇 번이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분망한 생활을 보내고 있노라면, 그 시절 한가로웠던 시간이 그립게 느껴지는 동시에 허둥지둥 지내는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초라하고 궁상맞은 생활인지를 느끼게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이런 &lsquo;농한기&rsquo;에 조용히 물레를 돌릴 것을 권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처마 밑이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lsquo;탈카닥 탈카닥&rsquo; 물레를 돌리면서 차츰 무심 속으로 빠져듭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lsquo;근대의 속도&rsquo;에서 떨어져나오는 시간의 흐름을 중시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 속에서 진정한 &lsquo;아힘사<sup>不殺生, Ahimsa</sup>&rsquo;이며 &lsquo;샨티<sup>Santih, 평화, 마음의 평온</sup>&rsquo;의 움이 싹튼다고 말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아가 물레를 돌리는 행위는 빈곤에 허덕이는 계층에게는 경제적인 수입을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특히 농촌 여성들에게 물레는 매우 중요한 현금 수입을 확보해주는 수단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시 말해 &lsquo;차르카&rsquo;라는 존재는,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운동의 상징인 동시에 수단이기도 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디는 이처럼 친숙하면서도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는 행위 속에서 현실적인 정치․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고 더 나아가서는 심원한 사상을 온 세상으로 넓혀서 사람들에게 진리에 눈을 뜰 것을 호소하려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제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나카지마 다케시 中島岳志<br /> </strong>1975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외국어대학교와 교토 대학 대학원 아시아․아프리카 지역 연구 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홋카이도 대학 공공정책대학원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남아시아 지역 연구, 근대 정치사상사를 주요 전공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매년 아사히신문이 정치․경제․국제관계 분야에서 수준 높은 저서에 수여하는 오사라기지로상과 마이니치신문이 주관하여 인문학 서적으로서 작품성 있는 도서에 수여하는 아시아태평양상을 함께 수상한 《나카무라야의 보스》와 《힌두 내셔널리즘》 《인도의 시대》 《내셔널리즘과 종교》 《아사히 헤이고의 울결》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목</strong><br /> 동서양의 고전, 근현대사 등 주로 문학, 역사, 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소년의 눈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을 읽는다》 《국가와 희생》 《교양, 모든 것의 시작》 《선이란 무엇인가》 《미녀란 무엇인가》 《국경을 넘는 방법》 《수집이야기》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05 오전 10:01:00첸리췬의 ‘망각을 거부하라’<img alt="" width="600" height="8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0_%EB%A7%9D%EA%B0%81%EC%9D%84%20%EA%B1%B0%EB%B6%80%ED%95%98%EB%9D%BC/%EB%A7%9D%EA%B0%81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의 독자들에게</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난 2008년 중국 홍콩에서 출판된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될 수 있게 되어 나는 너무 감격스럽고 기쁘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했던 역사는 중국에서도 은폐된 부분이긴 하지만,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더 생소한 것이기에 배경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필요하리라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57년은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예사롭지 않은 한 해였다. 중국은 그 이전에, 1949~53년 국민경제 회복기와 1954~56년 사회주의 개조기를 겪었고 또 그 사이 &lsquo;항미원조&rsquo;<sup>抗美援朝</sup> 전쟁<sup>[한국전쟁]</sup>을 치르면서 이미 &lsquo;사회주의 사회&rsquo;의 기본 골격을 갖추었지만, 수많은 모순들이 드러나 중국 사회에 쌓이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의 스탈린주의 비판에서 시작된 국제적 규모의 사회주의 개혁운동, 특히 1956년 폴란드&middot;헝가리 사건<sup>[반소련 민중운동]</sup>은 모두 중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리하여 &ldquo;사회주의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rdquo;란 첨예한 문제가 제기되었고, 정권을 잡고 있던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민주당파, 지식인, 청년학생들은 모두 이에 대해서 각자의 반응을 내보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련공산당 20차 대표대회 개최에 대해서, 마오쩌둥은 이것이 소련의 영향을 벗어나 국제 공산주의의 영도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는 중국 내에서 자신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경제발전의 길을 가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아울러 &lsquo;백화제방, 백가쟁명&rsquo;<sup>百花齊放百家爭鳴</sup>이라는 과학 및 문화 발전 방침<sup>[쌍백 방침]</sup>을 제기하는 한편, &ldquo;반<sup>反</sup>관료주의, 반종파주의, 반주관주의&rdquo;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풍운동을 전개시켜, 각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이 당의 기풍을 정돈하는 것을 돕도록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후의 역사 발전은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을 발동시킨 목적이 중국공산당 집정 지위와 자신의 절대적 영도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음을 드러내 주게 된다. 마오쩌둥은 당과 그 자신의 통치를 위협하는 것이 민주당파와 &lsquo;우파&rsquo; 지식인, 당내 반대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풍운동을 빌려 당내 관료와 반대파에게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우파를 폭로함으로써, 그의 웅대한 포부를 실현시키는 데 있어 장애물들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데 용이하도록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지만 마오쩌둥의 진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은 오히려, 마오쩌둥 본인을 포함한 중국공산당의 거듭되는 동원하에서 &lsquo;자신의 견해를 맘껏 표명하자는 주장&rsquo;<sup>大鳴大放</sup>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장기간 축적된 사회모순이 폭발한 것으로서, 정당에 대한 감독권과 언론의 자유, 비평 및 건의의 권리를 행사한 군중성을 띤 민주운동이라 할 수 있었다. 제기된 주된 요구사항은 헌법이 부여한 민주권리를 전적으로 이행하여, &lsquo;헌법에 따른 통치&rsquo;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과 공산당 지도하에서 각 민주당파의 연합집정을 전적으로 실행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당파와 지식인이 자신의 주장에 소리를 높인 것과 동시에,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 캠퍼스에서도 학생민주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57년 5월 19일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lsquo;민주의 벽&rsquo;(즉 학교 담장에 의견서를 붙여 민주에 관한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였다)을 만들게 된 것을 발단으로 신속하게 전국의 수많은 대학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이를 칭하여 &lsquo;5&middot;19민주운동&rsquo;이라 하였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의의가 있었다. 하나는 &ldquo;청년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사상해방을 쟁취한&rdquo; 계몽운동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ldquo;아래에서 위로의 사회주의 민주정치운동을 확대시켰다&rdquo;는 것이다. 이 운동은 사상운동이자 정치운동으로서, 이 두 방면은 모두 40년 전 베이징대학을 발원지로 한 &lsquo;5&middot;4&rsquo;신문화운동과 학생운동의 &lsquo;계몽&rsquo;과 &lsquo;민주&rsquo; 정신의 자각적 발양인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1957년 중국 대학생들 역시 시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받았던 교육 덕분에 당시 중국 대학생 대부분은 사회주의의 신봉자라고 할 수 있었는데, 당시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소련공산당의 영향으로 인해, 대학생들의 관심과 사고는 온통 사회주의 자체의 개조와 변혁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5&middot;19운동을 &lsquo;사회주의 민주운동&rsquo;이라고도 칭한다. 1957년 학생운동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운동의 대표자인 린시링<sup>林希翎</sup>이 그 유명한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제기했던 &ldquo;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rdquo;라는 구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2"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0_%EB%A7%9D%EA%B0%81%EC%9D%84%20%EA%B1%B0%EB%B6%80%ED%95%98%EB%9D%BC/%EA%B7%B8%EB%A6%BC2.JPG" />강연 중에 린시링은 자신이 이해하는 &lsquo;진정한 사회주의&rsquo;를 언급하였다. 첫째는 &lsquo;사회주의 공유제&rsquo;를 지켜 내는 것이고 둘째는 &lsquo;사회주의 민주&rsquo;를 지켜 내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캠퍼스 내 &lsquo;우파&rsquo;들의 공통된 인식에 다름없었다. 그들은 당시 중국에 생산수단 점유, 분배 및 인간 관계에 있어 특권이 만들어 낸 불평등이 나타났고, 새로운 특권계급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거나 혹은 이미 형성되어서 사회주의 공유제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던 민주&middot;법제&middot;인권을 위반하는 현상은 중국 사회주의가 &ldquo;봉건 기초에서 만들어진 사회주의로서, 비전형적인 사회주의&rdquo;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고 보았다. 때문에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베이징대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대자보에서 그들은 &ldquo;&lsquo;사회주의 공업화&rsquo;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lsquo;사회주의 민주화&rsquo;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rdquo;, &ldquo;민주광장 자유연단 위에 출현한 것은 바로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발전해 온 이러한 민주로서, 끼워 맞추기 식의 소련 형식도 아니고, 서구에서 사들여 온 형식은 더더욱 아닌, 오늘날 중국 사회주의 토양에서 자라난 민주제도이며, 우리는 그것을 공고히 하여 점차적으로 전국 규모로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요구이자 우리의 목적이다&rdquo;라고 분명히 제기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지만 사회주의 민주를 요구하고 특권계급을 반대하는 일들은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영도집단에게 있어 모두 다 일당 전제체제와 통치 지위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은 소위 &ldquo;우파가 미쳐 날뛰며 공격한다&rdquo;라고 하면서 &ldquo;반당&middot;반사회주의&rdquo;라는 죄명을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바로 돌변해서 &ldquo;말하는 자는 죄가 없다&rdquo;라고 했던 자신들의 약속을 저버리고는 반<sup>反</sup>우파운동을 발동하여 이를 잔혹하게 진압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서 언급한 사회주의 변혁 요구를 제기한 모든 민주인사와 지식인, 학생청년들은 모두 체포되고, 급기야 총살되었으며, 이들의 호소에 응하여 의견을 제기하였던 노동자&middot;농민&middot;중고등학생을 포함한 훨씬 더 많은 보통 사람들도 모두 &lsquo;우파&rsquo;, &lsquo;중간 또는 우파분자&rsquo;, &lsquo;반사회주의분자&rsquo;가 되어 각기 다른 정도의 박해를 받았다. 1980년대 관방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에 &lsquo;우파&rsquo;는 55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ldquo;110만 명에 달하는 각종 우파와 60만 명의 반사회주의분자, &lsquo;우파언론&rsquo;이 만들어 낸 10만에 달하는 각종 &lsquo;분자&rsquo;&rdquo;들을 합하여 180만 명의 우파분자들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lsquo;모자&rsquo;를 쓰지 않고서(정식 죄명이 가해지지 않은 채) 처벌을 받은 자들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딩수<sup>丁抒</sup>, 『반우파운동 중에 백팔십만 개의 &lsquo;딱지&rsquo;<sup>[낙인]</sup>가』). 모든 &lsquo;우파&rsquo; 또는 &lsquo;반사회주의자&rsquo;는 1979년을 전후로 모두 &ldquo;잘못이 바로잡아졌지만&rdquo;, 덩샤오핑이 여전히 반우파운동의 필요성을 긍정하고 이를 고수하는 바람에 린시링을 포함한 십여 명의 &lsquo;우파&rsquo;의 경우 &lsquo;개정&rsquo;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으로써 반우파운동의 정당성을 보여 주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러한 박대와 조롱은 지금까지도 중국 대륙에서 여전히 반우파운동을 연구 및 담론의 금기구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이 &lsquo;망각을 거부하라&rsquo;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만 출판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57년, 마오쩌둥은 먼저 정풍운동을 이용해 민주당파와 지식인들을 연합시켜 당내 관료에 타격을 입혔고, 또 반우파운동을 빌려 당내 관료를 연합시킴으로써 민주당파와 지식인, 청년학생 가운데 &lsquo;우파&rsquo;를 타도하였다. 1958년 초에 이르러서는, 다시 반우파운동의 여세를 몰아 역으로 소위 &lsquo;당내 우경보수세력&rsquo;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절대적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은 국가와 사회에 대해 그 어떠한 제한과 감독을 받지 않는 중국공산당의 절대 권력일 뿐 아니라, 당과 국가에 대해서도 제한과 감독을 전혀 받지 않는 개인으로서의 절대 권력이다. 이로써 그는 고도로 집중된 일당독재의 &lsquo;사회주의 강권체제&rsquo;를 건립하게 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8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10_%EB%A7%9D%EA%B0%81%EC%9D%84%20%EA%B1%B0%EB%B6%80%ED%95%98%EB%9D%BC/%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강권체제의 건립은 물론 하나의 과정으로서, 1957년 이후에 주로 반우파운동을 통해서 결국 완전한 체제를 확립, 형성시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또 이를 &lsquo;5&middot;7체제&rsquo;라고 칭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체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일원화된 당 영도체제로서 마오쩌둥의 말을 빌리면 바로 &ldquo;하나의 핵심만 있을 수 있다&rdquo;는 것이다. 즉 전국은 당을 핵심으로 한다. 구체적으로는 각급, 각 부문의 당 제1서기를 핵심으로서 드러내지만, 결국엔 당 중앙 주석 즉 마오쩌둥 본인을 핵심으로 하는 것으로 집중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군대와 여론에 대한 당의 절대적 통제가 이뤄졌는데, 이것은 강권통치의 양대 기둥이었다. &lsquo;당지휘창&rsquo;<sup>黨指揮槍[당이 군대를 지휘한다]</sup>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또 &lsquo;여론일률&rsquo;<sup>與論一律</sup>의 원칙을 제기하였는데, 이는 군사독재를 고수하면서, 인민의 언론&middot;출판&middot;집회&middot;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사상과 문화를 전면적으로 통제하며 독재를 행하는 것이었다. 셋째, 강권체제를 사회 최기층으로까지 구체화시켜 모든 사람을 고정된 &lsquo;단위&rsquo; 속에 편입시키고, 농민조차도 인민공사&middot;생산대에 포함시켜 당과 국가를 대표하는 단위조직이 그 구성원에 대해 삶에서부터 사상&middot;행동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통제를 가하는 동시에, 또 모든 단위는 가정 출신과 정치적 표현(관건이 되는 것은 당의 절대 영도에 복종하는가 여부)에 따라서 군중들을 &lsquo;좌파&rsquo;와 &lsquo;중간파&rsquo;, &lsquo;우파&rsquo;로 구분하여 사실상 새로운 등급제도를 건립하였다. 바로 이러한 등급사회의 구조 속에서 이익집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었던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중요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렇게 장기간 체제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또 반우파운동을 치국<sup>治國</sup>의 모델로까지 발전시킨다. 즉 쉼 없이 대규모 군중운동을 발동시키고, 계급투쟁과 국가 건설을 진행시키며, 군중독재를 실행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1958년 대약진, 인민공사운동, 1959년 반우경기회주의자 운동이 생겨났고, 또 이로 인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대기근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1962년에 또다시 &ldquo;날이면 날마다 달이면 달마다 계급투쟁을 이야기하자&rdquo;<sup>階級鬪爭月月講, 天天講</sup>를 시작으로 1964~65년 사청운동<sup>[四淸; 정치, 경제, 조직, 이념을 개끗이 하자]</sup>과 문화비판운동으로까지 발전시켜 1966년 시작된 문화혁명에 이르러는 &ldquo;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정치 조건하에서 부단한 혁명을 통해서&rdquo; &ldquo;프롤레타리아계급 전면 독재정치&rdquo;를 실행하려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 간략한 역사회고를 보면, 중화인민공화국 역사발전의 고리 속에서 1957년 반우파운동이 중요한 환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반우파운동은 앞으로는 1949년 이래 일련의 정치&middot;사상&middot;문화운동을 계승한다. 여기에는 가오라오<sup>高饒</sup>사건을 비롯하여 반후펑<sup>反胡風</sup>과 반혁명분자 숙청운동이 포함된다. 뒤로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의 대기근, 1966년부터 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 1989년 6&middot;4대살육<sup>[톈안먼사건]</sup>이 모두 역사적으로 관계가 있다. 또한 반우파운동의 영향은 심원하고도 광범위해서 정치&middot;경제&middot;사회&middot;법률&middot;사상&middot;문화&middot;과학&middot;기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반우파운동과 3년 대기근, 문화대혁명과 6&middot;4대살육이 중국 대륙에서는 모두 잊기를 강요당하는 역사의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반우파운동이 바로 매듭을 풀고 단추를 푸는 결정적 지점이기에 역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957년이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는 &ldquo;어떤 일을 할 때는 핵심을 틀어쥐어야 한다&rdquo;<sup>綱擧而目張</sup>라는 말이 있는데, 1957년이라는 벼리를 틀어쥐면, 중화인민공화국 전 역사가 한꺼번에 들려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 한국의 많은 연구자들이 중국의 1949년 이후 역사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1957년 이 시기 역사가 깊이 파고들 가장 좋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1957년 역사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중국 현실에 대한 수많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상술했듯이, 지금 중국 사회체제의 기본 구조는 바로 1957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연구자들은 1957년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는 내가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957년 중국 대학생의 사고와 활동은 중국 학생운동사와 현대사상문화사에 있어 중요한 한 페이지일 뿐 아니라, 중국 사회주의 사상사&middot;운동사에 있어서는 더욱더 중요한 한 페이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몇몇 나의 한국 친구들은 중국 사회주의 경험에 관심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중국은 사회주의 경험과 교훈에 대해 과학적으로 총괄해 봐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내가 강조한 것은 중국 사회주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단순히 사회주의 국가이론과 실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마땅히 1957년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일으켰던 &lsquo;사회주의 민주운동&rsquo;과 같은 민간 사회주의 사조와 실천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중요한 문제로서, 그것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 대한 역사적 관찰과 연구가 비단 관방적&middot;주류적&middot;정통적 &lsquo;정사&rsquo;에만 국한되어, 민간적&middot;비주류적&middot;비정통적 &lsquo;야사&rsquo;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에서 이 책의 진정한 의도는 1957년 캠퍼스 민주운동과 그 전후시말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1956년부터 1966년 사이 중국 민간사조사를 쓰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간사조는 대체로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사조의 이단성이고, 둘째는 그 전파 방식의 민간성이다. 셋째는 그 작가들이 모두 서로 다른 정도로 박해를 받았고, 더구나 생명까지 잃었다는 것이다. 넷째는 그 사상의 성과가 강제로 잊혀졌다는 것이다. 이 또한 그것이 지닌 가치로서, 여기에는 진정한 중국 민족의 심장과 영혼이 담겨져 있다. 루쉰<sup>魯迅</sup>은 일찍이 &ldquo;중국인을 논하려면 겉치장에 속지 말고, 그의 근골과 중추를 보아야 한다&rdquo;, &ldquo;예부터 우리에겐 전심전력을 다하는 사람, 죽기살기로 밀어붙이는 사람, 백성을 위해 탄원하는 사람, 진리를 구하려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었다&rdquo;, 다만 그들은 &ldquo;늘 박해받고 말살되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dquo;라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ldquo;근골과 중추&rdquo;는 지금의 중국 사회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그들도 똑같이 &ldquo;박해받고 말살된다&rdquo;. 그런데도 아직까지 수많은 중국 관찰자의 시야 속에는 들어오지 못한 듯하다. 때문에, 루쉰의 또 다른 깨우침도 매우 중요해진다. 루쉰은 중국 사회를 관찰하려면, &ldquo;장원<sup>壯元</sup> 재상<sup>宰相</sup>의 문장&rdquo;만 보아서는 안 되고, &ldquo;아래를 내려다보아야 한다&rdquo;, 밑바닥층, 민간사회에서 묵묵히 분투하는 자, 희생자를 보아야 한다&rdquo;고 하였다(「중국인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는가?」). 나는 이러한 깨우침이 중국에 관심을 갖는 한국 친구들에게도 적용되리라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책이 한국 친구들이 중국의 역사와 현실, 특히 중국의 민간사상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한&middot;중 양국 지식계와 사상계, 학술계 더 나아가 일반인들 간의 심적 교류를 촉진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이 책의 역자들과 이 책을 위한 글을 써준 백승욱 선생과 유세종 선생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p> <p style="text-align: right">베이징에서, 첸리췬</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반우파운동의 전조</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1956~57년 중국의 농촌, 공장, 학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에서 토론하려는 것은 상당히 큰 주제이다. 그러나 1957년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구하는 데 토대가 될 것이다. 중국 사회의 기층인 공장&middot;농촌학교, 그 속에서 생활하는 노동자&middot;농민&middot;청년학생&middot;지식인들의 동향은 모든 중국문제를 관찰&middot;연구하는 데 기초가 된다. 여기서 하려는 토론은 그 의미가 매우 클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방법론적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사회학적 과제이다. 문학연구자인 내가 이를 심화 연구하는 데에는 분명 어려움이 있다. 거기에다가 1차 조사 자료도 부족하고, 가지고 있는 제한된 텍스트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과 진일보한 연구를 끌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1) 농촌</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br /> &ldquo;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다&rdquo;</b></p> <p style="text-align: justify">1956년 하반기와 1957년 초, 중국 기자 두 명이 당시 중국의 농촌마을과 몇 개의 공장에 대해 세밀한 조사를 했다. 그들은 조사 중에 드러났던 문제들을 중국공산당 중앙에 상소했지만, 오히려 이것으로 인해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우파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당시의 역사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들이 주목했던 중국 농촌&middot;공장 상황과 그들의 생각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시대의 격막<sup>膈膜</sup>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고 신중하게 회고록에 써넣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56년 7월, 신화사<sup>新華社</sup> 기자 다이황<sup>戴煌</sup>이 혹서<sup>酷暑</sup>를 무릅쓰고 그를 낳고 길러 준 고향 쑤베이<sup>蘇北</sup> 푸닝현<sup>阜寧縣</sup> 남쪽 30리 밖의 거우둔진<sup>溝墩</sup>을 찾았다. 1948년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 잠시 지나쳤던 고향을 7년이 지나서야 &lsquo;해방 전사&rsquo;의 신분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는 흥분하였고, 한껏 기대를 했다. 하지만 장거리 버스를 내려, 어린 시절 알았던 거리와 골목들을 돌아보고 나서는 낙담하고 말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ldquo;집들은 쇠락해 온전치 않았고, 길들은 울퉁불퉁했다. 1947년 5월, 우리는 국민당 군대가 불법으로 점거했던 그 시기에 보았던 허물어진 돌 보루와 녹슨 철근을 제거했다. 어떤 것은 마치도 &lsquo;진귀한 역사문물&rsquo;처럼 아직도 그대로 강가와 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hellip;&hellip; 온갖 고초를 당한 이 작은 마을의 모습은 정월대보름날 집에서 빚은 원소<sup>元宵</sup>도 먹지 못하고 허둥지둥 떠날 때의 나처럼 이렇다 할 변모가 거의 없었다. 중&middot;고등학교와 사범대학은 부서진 채로 있었고, 쓸 만한 상점이나 음식점도 거의 없었다.&rdquo; <br /> &ldquo;고향 마을 친지들의 삶을 보면서 마음은 더 떨려 왔다. 손목시계, 자전거, 라디오 등 자신의 피땀이 가득 찬 많은 물건들을 조금도 향유하질 못했다. 물론 &lsquo;능력의 부족함을 개탄&rsquo;하면서. 닭을 기르는 사람이 계란을 먹지 못하고 돼지를 사육하는 사람이 돼지고기를 못 먹는 것처럼, 면화를 심은 농부가 일 년에 몇 폭도 안 되는 천을 살 표가 없는 것처럼, 또 땅콩과 콩을 심은 사람이 매월 겨우 몇 량의 기름밖에 얻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지 못했고 몸을 가릴 의복조차 없었으며 불치의 병이 아니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hellip;&hellip;&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많은 고향 사람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해방 후 짧은 몇 년 사이에, 이곳의 일부 공산당원 간부들이 &lsquo;신 악덕 지주&rsquo;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마을을 통제하는 사람은 바로 다이황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버스와 항구를 장악하고는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협박해 억지로 타게 했다. 그의 동생과 함께 여러 차례 다른 민간 배를 탄 승객들에게 행패를 부려 기슭에 내리게 하거나 선주를 물속에 처넣었다. 1954년 그는 세 칸의 큰 집을 지었는데, 모든 기와와 벽돌은 다른 집에서 가져왔고 사람들을 무노임으로 부려먹었다. 일을 하던 농민이 점심을 먹고 일을 하자고 요구했다가 사람들 앞에서 두드려 맞아 정신을 잃었다. 그의 장인과 손아래 처남까지 합세해 무고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는 권력의 힘으로 끊임없이 &ldquo;여자를 찾아다녔고&rdquo;, 현역 군인의 아내와 여성 간부까지 그의 &lsquo;탐문&rsquo; 대상이 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감히 이것을 고발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이황이 주변 마을에 이런 &lsquo;신 악덕 지주&rsquo;가 얼마나 되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이웃 마을 간부들은 이삼 년 전만 해도 늘 이리 빌리고 저리 빌려 생활하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농업합작사<sup>農業合作社[중국의 지역협동조합]</sup> 이후 갑자기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lsquo;금산 은산&rsquo;을 파내어 비단 옷을 두르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 크고 화려한 집들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뒤에서 몰래 쥐새끼들! 니들이 매월 받는 돈이 20여 위안인데 이렇게 흥청망청 쓰는 돈이 어디에서 난 것이냐, 우리 백성들에게서 뜯어 가는 게 아니고 뭐냐고 욕했고, 고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많아져 갔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백리가 넘는 마을에서 왔는데 그 고발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ldquo;뿌리가 뒤얽혀, 서로 뒤를 봐주는 이런 악질 간부들은 어디에나 있고, 또 절대로 &lsquo;개별&rsquo;적이지 않다&rdquo;고 했다. 또 이런 악인은 모두 상부의 보호를 받았는데, 어떤 농민은 이것을 콩나물 잔새우 볶음요리, 썰매꼬챙이가 서로 뒤얽혀서 풀 수 없는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는 &ldquo;공산당 상층은 민주를 말하고, 중간은 반<sup>半</sup>민주를 말하고, 아래는 비민주를 말한다&rdquo;, &ldquo;마오 주석은 위대하지만, 하층은 너무 어둡다!&rdquo;, &ldquo;중앙정부의 법이 미치지 못하니, 언제나 머리를 들 수 있을까!&rdquo;, &ldquo;과거 선통<sup>宣統</sup> 황제, 베이양 군벌<sup>北洋軍閥</sup>, 국민당, 일제 강도와 매국노의 통제 아래에서 소와 말이 되어 몇십 년을 살았는데, 지금은 그저 공산당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할 수밖에!&rdquo;, &ldquo;이 개자식들이 어디 공산당이란 말이냐? 그야말로 국민당이 부활한 것이지!!!&rdquo;&hellip;&hellip;라는 원망의 소리가 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층 농민들의 이런 소리들을 들은 다이황의 마음은 매우 복잡했다. 1956년 중국 농민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을 신임하고 있었고, 또 공산당 영도에 여전히 희망을 걸면서 &ldquo;국민당이 부활하는&rdquo;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농민과 기층 간부 사이의 모순이 이미 아주 첨예한 지경에 이르렀고, 중국 농민 고유의 억압에 대한 참을성 때문에 잠시 동안은 폭발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배태하고 있는 위기는 이 충성스런 공산당원을 아주 초조하게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그는 한 농민이 막다른 길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불안해졌다. 그는 급히 이 상황을 구<sup>區</sup>위원회 서기와 구장<sup>區長</sup>에게 알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그 사람이 자살한 것은 부부 싸움 때문이라고 했고, 어떤 사람은 쥐새끼가 그의 새 솜두루마기를 물어뜯어 놓아서 자살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또 한 명의 농민이 자살하게 되었다. 다이황은 현<sup>縣</sup>위원회와 지역위원회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현과 지역에서 공작조<sup>工作組</sup>가 파견되어 왔다. 대량의 사실 앞에서, 향<sup>鄕</sup>과 구<sup>區</sup> 단위가 그 &lsquo;신 악덕 지주&rsquo;의 당적을 박탈하기로 결정했지만, 현<sup>縣</sup>에서는 오히려 기일을 늦추고 비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ldquo;지역 부자들과 한패가 되어 지방의 우수한 간부와 당원을 공격한다&rdquo;면서 다이황을 고발하는 익명의 편지(나중에 이 익명의 편지가 구장의 지시로 그 &lsquo;신 악덕 지주&rsquo;가 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를 신화사로 보냈다. 신화사 상층간부 또한 의심하지 않고, 역으로 다이황을 조사하였으며, 지역위원회 공작조는 심지어 그의 활동을 조사하려고 하였다. &lsquo;신 악덕 지주&rsquo;는 곧바로 자신을 고발한 당원과 열성분자에게 보복을 가했다. 군중을 지지한 구위원회 위원이자 공안특파원이었던 사람 역시 전출되어 갔다. 고향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이황에게 편지를 써서, &ldquo;권세 있는 공산당원이 설마 정말 일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있단 말인가? 만약에 우리가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면 바로 체포되었을 거야. 부도덕한 간부들이 죄를 저질렀는데도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다니, 저렇게 계속 권세를 부려도 되는 건가&rdquo;라고 분개하며 되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을 사람들의 질문에 다이황은 더 깊이 사유하며, 마오쩌둥과 당 중앙에 직접 상소해 앞에서 말한 상황을 알리기로 결정하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을 하게 되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이 편지에서 제가 중요하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lsquo;현재의 관료통치와 특권계급의 유무&rsquo;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 몇 가지 현상이 이런 의문을 갖게 했고, 올 여름 여러 도시와 농촌을 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제 생각이 확연하고 명확해졌습니다. 즉 특권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전국적인 통일계급이 되진 않았지만, 이 계급의 태아가 지금 현재 전국 각지에서 만들어지고 확대되고 있습니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이황은 편지에서 또 이렇게 제기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국가 간부(특히 중급 이상의 국가 간부)의 생활수준 재고와 함께 반드시 농민들의 생활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rdquo;<br /> &ldquo;농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열쇠는 당연히 생산력의 발전입니다. 농업생산의 발전의 토대하에서 국가 공무원과 노동자&middot;농민계급의 생활상에서의 이런 차별은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rdquo;<br /> &ldquo;맑스&middot;레닌주의 정치경제학은 늘 국민 수입의 물질적 분배를 정확하게 분석해 왔습니다. 몇 년 전, 사람들은 인구의 몇 퍼센트가 지주이고 부농이며, 그들이 매년 농업 수확량의 몇십 퍼센트를 강점했다고 했습니다. 농업 인구의 90% 이상이 토지가 없거나 아주 소량의 땅을 가지고 있는 빈농들이며 매년 평균 &lsquo;몇 알&rsquo;의 양식을 얻어 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감히 매년 전국에서 얼마의 쌀과 과일, 어육과 닭오리를 생산하는지, 전국 인구의 5%도 안 되는 공산당원 국가 간부가 그 중 얼마를 소비하는지, 또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수많은 농민들이 또 얼마나 그것을 소비하는지 통계분석하지 못합니다.&rdquo;<br /> &ldquo;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산해진미를 음미하고 있을 때 수천 수만의 이재민들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rdquo;<br /> &ldquo;건설사업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개인의 명예와 상급기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인민의 피땀을 먼지처럼 대합니다. 많은 건설 일정이 분명 단기간에 완성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하지 않고 기간 내에 완성하라고 명령합니다. 사고가 백출하고, 끊임없이 재공사를 하는데도 완공된 후의 품질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다치게 했는지, 얼마나 많은 국가 재산을 낭비했는지 모릅니다!&rdquo;</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결론은 이러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과거 전쟁 시기, 우리는 인민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자원했고, 기꺼이 나라를 위해 죽을 때까지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hellip;&hellip; 인민의 불만이 날마다 증가하고 널리 퍼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또 보편성을 가진 결함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고, 경각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이황의 이 &lsquo;만언서&rsquo;<sup>萬言書</sup>(실제로는 미완성 원고로, 반우파운동 중 그는 이를 주동적으로 제출했다)는 50여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읽어도, 농촌의 초가집에서 자라 공화국 건립을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운 노전사의 신념과 자신을 키워 준 인민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또 그가 했던 당시의, 혹은 이후의 중국문제에 대한 관찰과 우려(쌍백운동<sup>[백화제방, 백가쟁명]</sup> 시기 그는 이것을 한마디로 &ldquo;전당과 전국에 가장 엄중하고 가장 위험한 폐해가 바로 &lsquo;신화화와 특권&rsquo;&rdquo;이라고 개괄했었다)는 불행스럽게도 모두 사실이 되어 버렸다. 1957년 중국에서 그는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는 &lsquo;우파&rsquo;의 확증이 되어 버렸다. 「신화사는 반당분자 다이황의 반당 발언을 고발한다」는 전보에서는 &ldquo;그가 말하는 &lsquo;특권계층&rsquo;은 중국공산당원과 국가기관 간부에 대한 모함&rdquo;이라고 발표했으며, 그가 부르짖었던 &ldquo;우리나라 농민은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럽다&rdquo;는 말은 &ldquo;당과 국가에 대한 악독한 공격&rdquo;이라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장쑤<sup>江蘇</sup> 『신화일보』는 「&lsquo;다이칭톈&rsquo; 환향기」<sup>戴天還鄕記</sup>라는 글을 발표해, 거우둔진의 &lsquo;신 악덕 지주&rsquo;를 아주 좋은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다이황이 &lsquo;적&rsquo;이 되어 버린 이상, &lsquo;적&rsquo;이 반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lsquo;좋은 사람&rsquo;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후 이 &lsquo;아주 좋은 사람&rsquo;의 폭위 아래에 있는 그 지역 농민들의 운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사회의 모든 고난은 마지막에는 모두 농민들이 묵묵히 감당해 내었다. <br /> 지금은 아직 구체적인 통계수치가 없어 다이황의 판단을 증명하지 못한다. 다이황이 1957년 10월에 쓴 「자아비판」에 따르면, &ldquo;특권계급의 태아&rdquo;가 되었던 &ldquo;농촌의 악덕 간부의 숫자는 대략 10% 내지 20%라고 했다. 대략 30만에서 60만이 넘는 숫자로, 그들은 살인방화 외에도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렀다&rdquo;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국의 독자들에게,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첸리췬(錢理群)<br /> </strong>1939년 중국 충칭 출생. 베이징대학에서 직접 반우파운동을 겪었고, 3년 대기근과 문화대혁명도 직접 경험하였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구이저우 안순시에 하방되어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978년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대학 중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26여 년 동안 교육&middot;연구&middot;학술활동을 하였다. &lsquo;중고등학교 교과서사건&rsquo;으로 명예퇴직을 권고당한 이후 현재는 베이징 근교에서 집필과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적인 루쉰 전문가로도 유명한 그는 『영혼의 탐색』, 『루쉰과 만나다』, 『저우쭤런 전기』, 『풍부한 고통:돈키호테와 햄릿, 동으로 이동하다』, 『1948:천지현황』, 『정신 연옥:중국현대문학 &lsquo;5&middot;4&rsquo;에서 항일전쟁의 역사』, 『마오쩌뚱시대와 포스트 마오저뚱시대:또 하나의 역사서사』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길정행<br /> </strong>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전문번역에 종사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착한 사람, 예로센코』,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슬픔』, 『구린내 나는 아홉번째 놈』, 『매의 노래』(공역)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신동순</strong><br /> 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숙명여대 중문학부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 문화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지은 책으로 『在&ldquo;說&rdquo;與&ldquo;不說&rdquo;之間―上海淪陷區雜誌&lt;萬象&gt;硏究』(中國傳媒大學出版社), 옮긴 책으로 『숨겨진 서사』(공역), 『21세기 중국의 문화지도』(공역), 『중국현대통속문학사』(상?하, 공역)가 있고, 논문으로 「중국대중문화기호 &lsquo;공을기&rsquo;의 생산과 소비」, 「&lt;웰컴투동막골&gt;과 &lt;鬼子來了&gt; 속의 문화헤게모니 양상」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안영은</strong><br /> 중문학과 중국현대문학 전공. 현재 한국외대, 상지대에서 중국어와 현대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중국 대중문화의 경전화 현상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논문으로 「&lsquo;홍색경전&rsquo;의 재조 의의 탐색」, 「&lsquo;훼이훼이주의&rsquo;의 &lsquo;반문화&rsquo; 경향 탐색」, 「두 가지 방식의 지청기억의 재현」, 「중국 팝아트의 생성과 발전」, 「추이지앤 록음악의 문화위치와 문화실천」, 「소수민족 민간전설 &lt;劉三姐&gt;, 대형 실경공연 &lt;印象 劉三姐&gt;로 부활하다」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04 오전 10:10:00여치헌의 ‘인디언 마을 공화국’<img alt="" width="600" height="88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9_%EC%9D%B8%EB%94%94%EC%96%B8%20%EB%A7%88%EC%9D%84%20%EA%B3%B5%ED%99%94%EA%B5%AD/%EC%9D%B8%EB%94%94%EC%96%B8%EB%A7%88%EC%9D%84%EA%B3%B5%ED%99%94%EA%B5%AD_%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책머리에 |</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30년대의 미국 남부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앨라배마 주에 살던 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려 했다고 누명을 쓴다. 그런데 흑인을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을 집단 폭행하던 게 당시의 분위기다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변론을 맡겠다는 변호사가 없자 법원에서는 한 백인 변호사에게 국선 변호를 의뢰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건을 맡은 백인 변호사의 아들딸은 아버지가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혼란스러워하는 딸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ldquo;변호사라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치는(affects me perso-nally) 사건을 맡게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rdquo;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무고한 흑인이 백인의 모함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는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돌이켜보면, 변호사 자신의 삶에까지 영향을 준 사건이 내게도 있었다. 변호사로서 처리한 일이라 자세하게 얘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공간과 시간의 거리를 무색케 할 만큼 한눈에 알아본 혈육의 이끌림 그리고 부자의 정(情)을 비트는 인간의 셈속, 사건이 종결되기까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때가 십여 년 전인데 이 과정에서 &lsquo;인디언&rsquo;을 만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건이 끝나고 나서도 왜 그런지 계속해서 인디언이 내 곁을 맴돌았다. 무엇이 나를 글쓰기로 이끌었는지 그 이유를 단언하긴 어렵지만, 아마도 인디언에 관해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위로요 치유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인디언 처녀와 한국인 청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을 썼다. 두 사람은 대학에서 인디언 역사 강의를 같이 들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인디언 부족의 역사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래서 잠시 소설쓰기를 미루고 인디언 부족이 걸어온 길을 좇았는데, 어쩌다 보니 소설의 진도는 안 나가고 계속해서 인디언 사회에만 매달리고 말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자처하는 미국이 인디언을 살육하고 그들의 땅을 강탈한 사실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rsquo;는 인디언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먼저 품었던 의문이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런 궁금증도 생겼다. 인디언 부족들이 연합해서 미국 정부에 대항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디언은 국가를 만들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안 만든 것일까? 여기에 대한 고민은 이 책 1장과 2장에 풀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과적으로 보면, 힘에서 밀린 인디언 부족들은 정든 고향에서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쫓겨나게 된다. 19세기에 자행된 강제 이주로 인해 인디언들은 보호구역에서 살아야 했다. 지금은 절반 이상의 인디언이 미국의 도시지역에 거주하는데, 이들을 도시 인디언(urban indian)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제 이주와 보호구역에 관해서는 3장에서 다루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전역에는 약 310개의 인디언 보호구역이 있다. 관광지나 유적지 정도의 보호구역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규모가 크다. 100만 에이커가 넘는 보호구역만도 12개나 된다. 애리조나, 유타, 뉴멕시코 주에 걸쳐 있는 나바호(Navajo) 보호구역은 약 1500만 에이커로 가장 넓은데, 한국과 비교하면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합한 면적이고 유럽과 견주면 벨기에․덴마크․네덜란드보다 크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들 보호구역에서 인디언 부족은 주(州)와는 별개의 의회, 행정부, 사법부 조직을 갖고 독립적으로 부족민들을 통치한다. 물론 인디언 부족도 미합중국의 구성원이므로 연방정부의 관여를 받는데, 둘 사이는 주와 연방정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미국에는 연방 주권, 주 주권, 부족 주권(tribal sovereignty)이라는 세 가지 형태의 주권이 존재하는데, 여기에 관해서는 7장에서 설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이 부족 주권을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19세기 후반 미국 정부는 인디언 부족을 말살하고 인디언을 미국인으로 바꾸려는 동화정책을 인디언 사회에 강요했다. 19세기 이래로 미국 정부가 부족사회에 실시한 교육․종교․토지 제도는 모두 동화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나왔다. 이 제도들은 4장, 5장, 6장에서 각각 다루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미국 정부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인디언은 사라지지 않았다. 끝까지 살아남은 인디언이 지금은 보호구역과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부족사회와 미국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 맹목적인 이윤 추구의 산업사회와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서 인디언 사회가 직면한 과제는 무엇인지 등 20세기 초반 이후의 인디언 역사는, 이다음에 별도의 단행본으로 다룰 예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는 20세기 초반까지의 인디언 사회를 주로 살펴보았다. 그러다 보니 부족사회가 마치 원시 공산사회인 것처럼 비쳐질까 염려된다. 인디언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변화는 논외로 하더라도, 생산력이라는 기준으로 사회의 발전 단계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서구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본래의 인디언 사회는 먹고살기에 급급한 생계경제가 아니었다. 구성원들이 고루 먹고살 만큼 일하면서 잉여생산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사회였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공적(公的)인 것에 바탕을 둔 한계선을 사회 곳곳에 설정하는 품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에 지금의 세상은 고삐 풀린 금융자본과 무한증식의 산업기술이 사실상 조종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약탈과 약자의 고통으로 돌아가는 이 세계를 어떻게 하면 구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해답이 인디언 사회에 존재할지 모른다. 연합․연방의 조직 원리와 결합한 소국 분할(小國分割)의 지혜를 인디언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국가가 아닌 사회이면서도 국가에 버금가는 주권을 가진 &lsquo;인디언 마을 공화국&rsquo;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주목해야 할 정치 사회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몇 년 전, 미국 남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그 여정에서 나바호족과 푸에블로족 할머니 몇 분을 만났는데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우리네 할머니들과 꼭 닮았다. 그 어르신들을 뵈면서 문득, 인디언의 길에 끌리는 이유를 알 듯했다. &lsquo;너무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닐까?&rsquo;라는 시구(詩句)에 마음이 가는 건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누구나 인생이라는 순례를 떠난다. 그 길에서 나는 인디언을 만났고, 때로는 인디언 사회라는 순막(巡幕)에서 머물기도 했다. 순례란&nbsp; 자기 혀를 다스리는 것이라고 했다. 씨앗처럼 말을 심고 침묵 속에서 씨앗이 자라나게 하라는 인디언 어르신의 가르침도 있다. 그렇게 바라보면서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인디언 이야기를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 그러질 못했다. 그 경솔함을 덜고자 나름으로 애를 썼지만, 여전히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온 책, 《인디언 마을 공화국》을 이제는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내려놓는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6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9_%EC%9D%B8%EB%94%94%EC%96%B8%20%EB%A7%88%EC%9D%84%20%EA%B3%B5%ED%99%94%EA%B5%AD/%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pan></strong><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최초의 아메리칸은 <br /> 누구인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인디언은 최초의 아메리칸일까</b></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은 건국 당시에 국호(國號)를 정하는 문제로 고심했다. 미합중국이라는 이름으로는 편리한 형용사 형태를 만들지 못해서다. 기껏해야 United Statesian이나 American 정도인데, United Statesian은 왠지 어색하고 American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다른 나라를 생각하면 마땅찮다. 컬럼비아(Columbia), 애팔래치아(Appalachia), 프리도니아(Freedonia) 등의 명칭을 검토했지만 대부분 마뜩찮아서 결국엔 미합중국이라는 기존 이름을 유지했다. 미국이 아메리카라는 문구를 선점하자, 미국인과 &lsquo;아메리칸&rsquo;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그로부터 &lsquo;아메리칸&rsquo;은 미국의 전유물로 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치권력이 있는 사회 중에는 국가가 있는 사회도 있고, 국가가 없는 사회도 있다. 인디언 부족은 비강제적인 정치권력을 가진 &lsquo;국가 없는 사회&rsquo;다. 그러나 서구 열강에 의한 정복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력이 있는 사회란 &lsquo;국가 있는 사회&rsquo;만을 가리키는 추세로 변했다. 국가 있는 사회를 전제로 한 정치적 개념이 모든 사회를 재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lsquo;아메리칸&rsquo;이라는 용어 역시 인디언 부족과 같은 󰡐국가 없는 사회󰡑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철저한 서구 중심의 개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측면에서는, 인디언(indian)이라는 단어 자체가 &lsquo;국가 있는 사회&rsquo;의 발명품이다. 북아메리카 선주민은 원래 라코타, 체로키, 나바호 부족과 같이 특정 부족의 부족민이었을 뿐, 인디언으로 불리지는 않았다. 인디언이라는 단어는 이들 부족 모두를 아우르는 명칭이 필요했던 유럽인이 고안해낸 용어였다. 인디언은 스페인어, indios의 영역(英譯)으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땅에 도착했을 때 그곳을 인디아(India)로 오인하여 선주민을 indios라고 불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더 나아가 인디언이라는 용어는 선주민에 대한 멸칭(蔑稱)이며 이들을 인디언으로 부르는 건 실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디언이라는 단어 대신에 북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것은 다소 과장된 지적이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은 1960년대에 인디언 사무국(BIA, Bureau of Indian Affairs)이 즐겨 사용하면서 통용된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연방정부의 정책적 필요에서 나온 단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상당수 부족민은 이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이라고 불리길 원한다. 나바호 부족의 어느 선지자는 자신들을 &lsquo;하느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un gente que vive en dios)&rsquo;으로 믿었던 선주민에게서 영향을 받은 콜럼버스가 en dios를 indios로 바꾸어 부른 데서 인디언이란 말이 유래했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도 선주민은 자신을 특정 부족의 부족민으로 먼저 인식한다. &lsquo;인디언&rsquo;으로 인식하는 건 그 다음 차례고, 미국 시민이라는 생각은 세 번째다.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을 예로 들어보면, 사실 부족민은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의 땅에서 그 주민으로 태어난 것이지, 유럽인이 만들어낸 인디언이라는 &lsquo;상상 속 공동체&rsquo;의 일원으로 출생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체로키 부족과 나바호 부족은 언어가 전혀 다르다. 공통의 혈연이나 조상을 갖는 것도 아니다. 사는 지역 역시 엄청 떨어져 있어 부족민 사이에 교류도 별로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긴 해도 어쨌든 이들 부족민은 자신을 인디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부족사회에서도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북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는 여러 부족을 포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로즈버드 수우 인디언 부족(Rosebud Sioux Indian Tribe)과 같이, 부족 명칭에 공식적으로 인디언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nbsp; 산타페 인디언 학교(Santa Fe Indian School)에서 보듯 생활 전반에서 인디언은 빈번하게 등장하는 용어가 되었다. 연방정부 역시 법령의 제목을 정할 때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디언 시민권법(Indian Citizenship Act)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대목에서 부족민이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디언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물론이고 상당수 역사학자조차 인디언 부족을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여기지 않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라는 용어가 통용되던 20세기는 이미 미합중국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출현하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다시 말하자면,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불릴 만한 부족민이 살았던 18세기 이전에는 인디언이란 없었고 오로지 체로키 부족이나 나바호 부족과 같은 개별 부족의 부족민만 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초의 아메리칸이 누구인가라는 논의 역시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라는 도그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때문에 국가 있는 사회나 국가 형성 중의 사회만이 사실상 최초의 아메리칸 후보로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다. 물론 18세기 말에 이로쿼이 연합이나 테쿰세 등이 주창한 인디언 부족연합 운동이 있었으나, 국가 있는 사회에 필적할 만한 정치 공동체로 나아가진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약 나바호 부족이나 체로키 부족도 미국처럼 국가를 만들었다면, 이들 인디언이 거뜬히 최초의 아메리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을까. 미국의 경우와 한번 비교해보자. 2,000명 남짓, 타운을 중심으로 생활했던 미국인은 필요에 의해 주(州)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진통 끝에 주를 합친 합주국(合州國)을 탄생시켰다. 반면에 인디언은 몇몇의 부족연합을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다. 그 대가로 인디언 부족은 미합중국에 강제로 편입되어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국가보다 오래된 사회</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공동체의 구성원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인디언도 적잖은 세월이 흐른 지금은 구체적인 부족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통계국의 2000년 조사를 참조하면, 미국 땅에 사는 인디언은 전체 미국인의 1퍼센트에 조금 못 미치는 250만 명가량 된다. 이 중에서 반 이상, 아니 3분의 2에 육박하는 인디언이 도시에 거주하는 이른바 도시 인디언(urban indian)이다. 도시 인디언은 &lsquo;인디언&rsquo;이라는 일반적 특징에다 &lsquo;도시&rsquo; 거주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결합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바호&middot;체로키&middot;수우 인디언 등 500개가 넘는 부족에다 도시 인디언이라는 사정까지 감안하면, 부족사회의 스펙트럼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은 각기 다른 부족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어 인디언으로 부른다. 공통된 것 못지않게 다른 것이 많은 여러 부족을 인디언이라는 이름으로 결속시키는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인디언의 정체성을 살펴보는 작업은 인디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에서 출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외형적으로 인디언은 각 부족 구성원의 양적 결합이다. 쉽게 말해 부족민이 곧 인디언이라는 얘기다. 부족사회가 누군가를 부족민으로 인정하면 그 사람은 동시에 인디언도 된다. 미국에 사는 한 사람이 캘리포니아 주의 주민이면서 미국 국민인 것과 같은 원리다. 부족민의 지위 결정에 관한 권한은 원칙적으로 부족 정부가 갖고 있다. 몇 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부족민 여부를 결정하지만, 대개는 혈통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인디언 혈통이 2분의 1 이상 또는 8분의 1 이상일 것을 요건으로 삼는 부족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족은 4분의 1 이상의 혈통을 요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혈통 기준을 둘러싸고 미국 정부와 인디언 부족은 종종 충돌한다. 혈통 기준을 느슨하게 하면 인디언 숫자가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인디언 사회가 더 확대된다. 그래서 연방정부는 인디언 혈통 기준을 강화하려고 한다. 반면에 연방정부의 의도대로 혈통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수 세기 후에 인디언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혈통 기준을 4분의 1로 고수한다 하더라도 다른 인종과 혼인을 계속하다 보면 갈수록 혈통 비율은 낮아질 것이고 종래에는 4분의 1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마저 드물게 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사실 혈통 기준은 인디언의 정체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체로키․나바호 등 부족의 혈통이란 개별 부족민 사이의 핏줄을 따지는 것이지, 인디언으로 불리는 전체 부족을 아우르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따라서 인디언의 정체성은 혈통이 아니라 정치적인 요소에서 찾아야 한다. 서로 다른 부족 이름을 가진 별개의 부족을 인디언이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하는, 질적 결합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동력이 바로 인디언의 정체성이다. 그 정체성은 정적으로는 &lsquo;인디언다움(in-dianness)&rsquo;으로 나타나고, 동적으로는 &lsquo;범(汎)인디언주의(Pan-Indian-ism)&rsquo;로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른 환경에서 생활해오던 각 부족은 유럽인이 이주해온 다음부터는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게 되었다. 미국 건국 이후 시작된 서부 정복으로 땅과 마을, 가족까지 잃는 고통을 함께 겪으며 상실의 상처가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발전했다. 미국 정부의 강압 정책에 맞서 부족 공동체와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은 다른 부족에 대한 공감으로 이어졌다. 이런 공통의 정서인 &lsquo;인디언다움&rsquo;이 &lsquo;범인디언주의&rsquo;와 결합하면서 인디언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범인디언주의는 미합중국 체제에 사실상 편입된 각 부족이 구체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문제를 부족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움직임의 정치적 표현이다. 이런 현실적인 요구에 대처하는 한편으로 부족 전체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 비전을 수립하는 일도 범인디언주의의 몫이다. 범인디언주의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유행했던 인디언 기숙학교(boarding school)의 영향으로 싹을 틔웠다. 20세기 중반부터는 파우와우(powwow)라는 부족연합 축제를 통해 내실을 키워나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60년대 이후로 여러 인디언 단체가 꾸려지면서 범인디언주의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범인디언주의에 영향을 받은 활동가는 부족 경제 개선, 부족 토지 보존, 미국과 체결한 조약의 이행, 인디언의 권리 확보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런데 이들의 투쟁은 인디언 개개인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인디언 부족의 정치적 권리와 문화적 차이를 미국 정부가 인정하라는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인디언 운동을 편견 철폐와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경제적 시위 정도로 진행하려는 비인디언(Non-Indian) 활동가와 달리, 인디언이 원했던 것은 자치(自治, autonomy)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7장에서 더 다루겠지만, 인디언 사이에서도 부족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두고 해법이 갈린다. 어떤 모습을 지향하든 인디언 부족연합은 기존 국가와는 본질이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전쟁을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한 가장 야만적인 폭정은 핵발전소의 건설이다. 핵발전소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가동되고 있는 순간마저도 정기적이고 일상적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유해한 방사성 입자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국가가 자행하는 폭력이 어디 이뿐이랴. 얼마나 분통이 터졌으면 크로포트킨이 이렇게 한탄했을까. &ldquo;실제로는 촌락 공동체가 자연적으로 사라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hellip;&hellip; 국가는 예외 없이 촌락공동체를 파괴했다.&rdquo; 물론 국가도 할 말은 많을 것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여기서 상론할 건 아니지만, 이 점만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부분의 국가는 자신이 통치하고자 하는 사회보다 젊다. 토크빌 역시 &ldquo;왕국을 세우고 공화국을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촌락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것&rdquo;이라고 적었다. 촌락은 거친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요소는 입법자가 쉽사리 틀 지을 수 없는 것이라고 얘기했다. 천방지축 날뛰는 새파란 국가 속에 경륜 깊은 사회가 버티고 있지 않다면, 커다란 대가를 치르고 얻은 촌락의 자치는 최고 권력이 휘두르는 칼에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토박이 주민이 대를 이어 살아온 사회에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 한, 국민을 위한다는 국가의 어떤 시도도 결국엔 공염불로 끝나고 말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권력의 분산이라고 해서 국가가 인위적으로 기획한 지방자치단체에 권한을 위임하는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국가보다 오래된 사회로부터 배워야 한다. 장소에 뿌리박은 토착(土着)의 삶에 대한 존중, 공적(公的)인 것에 바탕을 둔 한계선의 설정, 세상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關係)적 사고에서 우러나오는 절제, 이것이 바로 인디언 부족연합의 비전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이걸 보아라, 새로운 것이다.&rdquo;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전 옛 시대에 이미 있던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촌락인 마을을 지켜야 한다. 국가보다 먼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머리에,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여치헌</strong><br />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검사와 변호사로 근무했다. 강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법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로 일한다. <br /> 토착의 삶이 위협받는 현실은 북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와 한국 사회 어디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여러 곳의 토착민 사회가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4-02 오후 2:30:00《224》메리의 『모래의 제국』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4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0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로버트 W. 메리의</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span style="font-size: large">『모래의 제국』</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김영사, 2005)을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1년 9.11테러를 당한 직후, 미국에서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lsquo;제국 논쟁&rsquo;이 기승을 부렸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 하버드대 교수가 2003년 1월 &lt;뉴욕타임스&gt;에 쓴 어느 기고문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대변해준다. 그는 거기서 &ldquo;제국 이외에 어떤 단어가 현재 미국을 그토록 잘 표현해 낼 수 있겠는가?&rdquo;라며 &lsquo;미국이 제국&rsquo;임을 반어적으로 확정했다. 이때 미국의 우익, 특히 극단적인 우익인 네오콘은 신이 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9.11이 뒤늦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지구상의 유일한 초강국으로 미국이 &lsquo;세계 경찰&rsquo;이라는 짐을 져야 한다는 정세 조성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연이어 소비에트가 해체된 1990년부터 생겨났다. 하지만 지금의 미국인들은 아무도 2003년 당시와 같은 장밋빛 제국 논쟁을 하지 않는다. 2007~2010년 사이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는, 9.11을 기점으로 하면 겨우 6년, 소비에트가 무너진 때로 소급하더라도 채 20년이 되지 않아 제국의 위신을 뿌리째 망가트렸다. 전 세계인들은 오늘도 미국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그 이유는 미국이 국제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던 때와는 정반대다. 전 세계인은 초강대국인 &lsquo;미국의 독선&rsquo;이 아니라, 자신의 안녕을 위해 &lsquo;미국의 파산&rsquo;을 관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로버트 W. 메리의 『모래의 제국』은 조지 W. 부시와 네오콘 일당의 &lsquo;제국의 꿈&rsquo;이 아직 사그라지기 전인 2005년, 골수 공화당 지지자의 펜 끝에서 나온 제국 비판서이다. 지은이는 부시와 네오콘이 지향하는 제국주의가 미국인들이 수호해온 전통적 가치와 어긋난다고 말한다. 제국주의가 ⅰ) 역사철학적으로나 ⅱ) 외교 정책적으로나 미국이 추구해 온 가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ⅰ) 서구의 역사철학 내지 문명론은 크게 진보론과 순환론으로 구분된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게서 나온 진보론은 &ldquo;정치체제와 법제도가 인간성과 도덕성도 바꿀 수 있다는 가장 강력한 주장&rdquo;(J.B. 베리)에 의해 추동되며, 진보의 끝에 유토피아가 성취된다. 프랑스에서 발원한 진보론은 그 후 온갖 계파로 퍼져 나가,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가와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를 낳았다. 하지만 변형이 어떻든 간에, 진보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진보론이 &lsquo;유럽중심주의<sup>Eurocentrism</sup>'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진보론은 암암리에 유럽문화를 보편적인 문화로 전제하고 비유럽문화권은 유럽문화를 본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은근히 견지하고 있다. [&hellip;]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모든 문화는 각각 자기가 설정한 가치의 눈금과 프리즘 그리고 자신이 속한 종교적&middot;인종적 편견을 바탕에 깔고 다른 문화와 문명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lsquo;만일 유럽중심적인 진보론이 여타 문화&middot;문명과 충돌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rsquo;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유럽인들은 진보론이 서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인류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해왔다. 만일 이 가치와 여타 문화&middot;문명이 충돌한다면 진보론의 보편성이란 것도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닌가? 혹시 진보론은 사회과학이라는 포장지에 싸인 서구우월주의 또는 오만함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프랑스 사상가들이 발명한 진보론을 영불해협 건너편의 영국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의 지성인들은, 사회제도 개혁을 통해 인간 본성을 개혁하고 평화와 행복이 가득한 유토피아를 구가할 수 있다는 프랑스인들의 논지를 &lsquo;위험한 생각&rsquo; 또는 &lsquo;난센스&rsquo;로 간주했다. 존 로크나 에드먼드 버크 같은 영국의 사상가들은, 같은 나라의 역사가 J.B. 베리가 &ldquo;영국인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제도와 안정에서 구원을 찾고 변화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는다&rdquo;라고 했던 것처럼, 프랑스 지식인들이 인간 본성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 없이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인간의 선함에 대한 낙관론&rsquo;을 거부한 영국인들의 생각은 미국 &lsquo;건국의 아버지들&rsquo;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lsquo;역사의 진보&rsquo;같은 프랑스의 지적 풍조에 대해서 거의 몰랐던 200여 년 전 미국 지식인들은, 관념적인 진보론 대신 극히 현실적인 전제 아래 정치를 운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보론의 반대편에 순환론이 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로 대표되는 이들의 역사철학은, ① 세계에는 유럽 문명 이외의 여러 문명권이 있으며(슈펭글러에게는 8개, 토인비에게는 21개), ② 모든 문명은 흥&middot;망&middot;성&middot;쇠를 피할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사람은 역사 진보론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으며, 특히 토인비는 역사가 어느 하나의 문명으로 수렴되는 &lsquo;진보의 환상&rsquo;을 거부했다. 그는 서구문명 또한 지구상에 명멸했던 수많은 문명 중의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ldquo;단 하나의 역사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그 역사의 지류가 되거나 모래 속에 흩어져버린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개념&rdquo;이라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이 책의 첫머리에 개진된 진보론과 순환론이라는 역사철학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 편의 문서를 명확하게 정리한다. 세 편의 문서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1989)&middot;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1993)&middot;토머스 프리드먼의 『렉서스와 올리브나무』(1999)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80"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4_%EC%97%AD%EC%82%AC%EC%9D%98%EC%A2%85%EB%A7%90.jpg"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역사의 종말』은 진보론에 입각하여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는 완료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논문은 자유민주주의의 결정체이자 수호자인 미국이 최종적인 승리자며, 세계는 미국의 전리물(?)이 될 것이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는 듯하다. 당연히 미국인들은 이 문서를 열렬히 환호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문명의 충돌』은 후쿠야마의 선배격이랄 수 있는 우파 이념가가 순환론의 입장에서 『역사의 종말』을 반박하고자 한 문서다. 새뮤얼 헌팅턴은 후쿠야마와 달리 서구의 쇠퇴와 냉전 종식 이후 더욱 다극화&middot;다원화되는 세계상을 그린다. 슈펭글러와 토인비의 비전을 공유하는 그는 서구 문명의 보편성을 부정하며, 비서구 사회가 근대화될 때 &ldquo;필연적으로 서구화될 것이라는 세계화 진영의 주장을 거부&rdquo;한다. 오히려 근대화는 비서구문명을 강화시키면서 서구의 상대적인 힘을 감소시킨다고 말하는 그는 &ldquo;기본적으로 세계는 점점 근대화되면서 덜 서구화되고 있다&rdquo;라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160"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4_%EB%A0%89%EC%84%9C%EC%8A%A4%EC%99%80%EC%98%AC%EB%A6%AC%EB%B8%8C%EB%82%98%EB%AC%B4_s.jpg" />진보론과 순환론 논쟁에 뛰어들어, 진보론을 다시 한번 널리 퍼뜨린 문서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다. 이 책에서 프리드먼은 &lsquo;3개의 민주적 엔진&rsquo;이 세계화를 진행시킨다면서, 기술의 민주화&middot;금융의 민주화&middot;정보의 민주화를 들었다. 제목과 달리 매우 공격적이고 극우적인 이 책은, 미국이 세계화의 주역인 동시에 심판관이 되어야 한다면서 &ldquo;미국이 국제사회의 헤게모니를 쥐지 못하면 아메리카 온라인도 없다&rdquo;, &ldquo;보이지 않는 손도 보이지 않는 주먹이 없으면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rdquo;라고 말한다. 프리드먼에 대한 지은이의 반박은 이렇다(후쿠야마를 포함시켜도 무리가 없음).</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리드먼은 인간의 본성과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경제와 물질 상위에 존재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정신은 프리드먼이 주장하는 대로 무엇을 먹고, 입고, 구매하고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회에서 인간이 물질 또는 돈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을 &lsquo;인간성 파괴&rsquo;로 간주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간 내부에는 돈과 물질을 초월한 강력한 정신적 동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정신적 동기는 종교적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과 한 다발로 묶여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많은 비서구문화권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 이와 같은 정신적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러나 프리드먼은 이와 같은 인간성을 &lsquo;별것 아닌 것&rsquo; 또는 &lsquo;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rsquo;으로 간주한다. 돈이나 물질에 의해 얼마든지 변형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프리드먼이 역사 진보론에 빠져 있음을 입증한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인간본성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한 그 가설 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겉보기에 프리드먼은 각국의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책 제목의 &lsquo;올리브나무&rsquo;가 각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로 하는 얘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전세계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핵심 메시지가 &ldquo;미국 사람들처럼 되시오&rdquo;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찬양하는 미국의 다인종문화와 함께 말이다. 결국 프리드먼도 역사 진보론이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점에 봉착한다. 다름 아닌 유럽중심주의다. 게다가 프리드먼은 그보다 더 심한 미국중심주의를 금과옥조처럼 껴안고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은이는 역사철학적으로 볼 때, 미국은 진보론적 사유와 거리가 멀며, 역사나 인간에 대한 비낙관적인 사유가 미국의 외교 정책에 아로새겨져 있다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ⅱ) 미국이 건국 이래로 고립주의를 선택해 왔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여기에도 어폐가 없지는 않다. &lsquo;미국 고립주의&rsquo;를 강조하게 되면,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벌인 스페인과의 전쟁이나 멕시코와의 국경 전쟁을 은폐하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미국의 정치나 외교에서 &lsquo;팽창주의/ 국제주의/ 개입주의&rsquo;에 맞선 고립주의는 강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다음과 같은 4가지 계열을 가지고 있다. ① 미국의 힘이 모든 인류를 위해 전세계에 행사되어야 한다는 관점에 기초한 <strong>자유주의적 또는 인도주의적 개입주의</strong> ② 미국은 순수하나 세계는 퇴락했으니 미국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악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strong>보수적 고립주의</strong> ③ 세계는 순수하나 미국은 그렇지 않으므로 미국의 세계진출은 악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strong>자유주의적 고립주의</strong> ④ 미국은 중대한 국익과 서구문명의 이익을 위해서만 세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strong>보수적 개입주의</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어도어 루스벨트처럼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했던 제⑤의 노선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의 외교정책은 항상 보수적 고립주의(②)가 우세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미국이 오래 망설였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보수적 개입주의(④)로 전향했을 때, &ldquo;첫 사상자는 보수적 고립주의였다&rdquo;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 막대한 &lsquo;백인의 짐<sup>White Man's Burden</sup>&rsquo;을 지게 된 미국은, 자유주의적 또는 인도주의적 개입주의(①)를 선택하도록 내몰렸다. 예컨대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전형적인 보수적 개입주의가 가미된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은 예상 밖에도 자유주의적 고립주의(③)를 출현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까닭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의 자유주의적 개입이 명분을 잃고, 미국이 &ldquo;세계의 순수하고 힘없는 곳에 독을 뿌리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rdquo;로 내몰렸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줄곧 추구한 것은, 미국은 중대한 국익과 서구문명의 이익을 위해서만 세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확신에 기초한 보수적 개입주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보수적 개입주의는 현실정치와 세력균형 외교를 높이 평가했고, 이에 따른 정책의 목표는 오로지 미국의 국익과 서방세계의 보호였다. 이러한 신념은 1941년부터 89년까지 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어 왔고, 당시 미국은 세계를 지배하는 단극체계를 꿈꾸지 않았다. 미국은 패권적 야망 없이, 오로지 소련 지상군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고, 전세계에서 서방세계의 이익을 수호하며, 전략적 요충지에서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보수적 개입주의에는 미국을 소말리아나 발칸으로 이끌었던 인도주의적 가치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 50여 년에 걸쳐 보수적 개입주의를 고안하고 발전시킨 이들은 미국이 현안, 즉 소련 공산주의와의 싸움에만 군사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외의 야망(그것이 비아프라의 기근을 해소하는 것이든,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든 간에)을 갖는 것은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방해가 될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lsquo;있는 그대로&rsquo; 바라보는 것이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1990년, 동구권과 소비에트가 패망하는 것에 고무되고, 또 미 국무부 정책실 차장 출신이자 네오콘 말류였던 후쿠야마의 사이비 논문에 &lsquo;뽐뿌질&rsquo;을 당한 미국은 &ldquo;외교의 1차 과제는 &lsquo;있는 그대로&rsquo;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rdquo;라는 원리를 망각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금 미국 외교의 현실인식은 착시 현상을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지금 미국 외교의 코 위에 &lsquo;진보론&rsquo;이라는 색안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당면과제는 어떻게 이 역사 진보론의 색안경을 걷어내느냐 하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미국이 쓰고 있는 저 &lsquo;색안경&rsquo;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2005년, 재임에 성공한 부시 2세의 취임사 가운데 &ldquo;전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킨다는 궁극적인 목표로 민주주의의 성장을 추구하고 지원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rdquo;이라는 말이 그것을 잘 웅변해 주며, 그것의 우리나라 식 메아리는 &ldquo;이라크 전쟁은 원래 정의로운 전쟁이었다&rdquo;라는 복거일의 개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부시 2세를 &ldquo;역사 순환론 대<sup>對</sup> 진보론 논쟁에 뒤늦게 뛰어든 지각생&rdquo;으로 보면서, &lsquo;세계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전파&rsquo;하겠다는 그의 신념을 &lsquo;선교사적 민주주의&rsquo; 내지 &lsquo;선교사적 외교&rsquo; 혹은 &lsquo;인도주의적 제국주의&rsquo;라고 비난한다. &ldquo;냉전적 멘털리티를 갖고 있는 주변 참모들과 아랍에 민주주의를 이식한다는 네오콘의 엉터리 주장에 넘어간 부시 대통령은 9.11 이후 미국을 대재앙으로 끌고 들어갔다&rdquo;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부시행정부는 네오콘의 이데올로기를 떠받들고 있는 역사 진보론에 현혹돼, 이라크전이라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역사 진보론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제도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이며 문화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 미국은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된 역사 진보에 남다른 사명이 있는 국가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이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부시가 벌인 두 나라와의 전쟁은 이제 개가를 해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미국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이 전쟁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심기는커녕, 두 나라와 전세계에 이슬람근본주의를 산종하는 것으로 마칠 가능성이 크다(미국은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미국의 패전으로 끝난 게 아닌가?). 지은이의 더 신랄한 비난을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현재 부시 대통령은 이슬람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만으로 이슬람권 한복판에 수십만의 미군을 주둔시켜 놓았다. 그는 이슬람 한복판에 꽂아놓은 성조기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른다. 그가 취한 조치로 인해 미국은 지금 역사상 아마겟돈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위험한 상태다. 부시는 자유의 확산과 민주주의 전파라는 정치적 희망에 근거해 미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네오콘을 비롯해 미국 지식인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역사의 종말, 자유의 확산, 민주주의 이식 같은 일련의 관념은 한결같이 어설픈 현실감각에 기초한 희망사항에 불과한 것들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9.11 이후 미국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 외교정책과, 역사 진보론이라는 환상에 빠져들었다. 전통적인 외교정책인 보수적 개입주의와 반관념론적 현실주의 역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심겠다며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 미국의 오판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열정에 취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과 달리, 아랍민족주의와 현실세계에서의 부와 권력을 추구했던 사담 후세인은 전혀 성격이 다르며, 때문에 미국이 필요한 원활한 원유수급과 알카에다에 대한 정보를 놓고 후세인과 거래를 계속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ldquo;야망을 가진 독재자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rdquo;이지는 않으며, 앞으로 미국은 &ldquo;독재자=세계평화 위협&rdquo;이라는 공식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국가를 향해 &lsquo;악의 축<sup>Axis of Evil</sup>&rsquo;이라는 낙인을 찍는 데서 출발한 정책이 &ldquo;자칫 세계평화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rdquo;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네오콘들이 &ldquo;동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야망을 무조건 억눌러야 한다&rdquo;고 주장하고, 또 &ldquo;내부 정치구조와 인권문제를 들춰 중국을 공격&rdquo;하고 있지만, 중국 문제가 미국과 서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보수적 개입주의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는 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한다고 고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가장 미국적인 보수주의 신념에 투철한 지은이는 이 책 제9장에서 네오콘을 &lsquo;그때그때 말이 다른&rsquo; 기회주의자들, 기본적인 철학이 없는 자들로 간주하며, &lsquo;이념과 도덕&rsquo;에 매몰되어 미국의 국익을 전혀 계산하지 못한다고 공박한다(그는 이 책 말미에 실린 옮긴이와의 대담에서, &ldquo;공화당은 2008년 대통령선거에서 실패&rdquo;할 것이며 &ldquo;네오콘은 2009년 이후 거의 사멸단계&rdquo;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견했고, 그렇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지은이의 보수적 실용주의자로서의 면목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한 대목을 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미국이 전파하고자 하는 민주주의가 중동에서 반드시 미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절차에 의해 이슬람근본주의에 기초한 반미정권이 수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동에 &lsquo;자유&rsquo;를 전파하는 것은 오히려 미국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확률이 높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 대목은 해석하기에 따라 지은이를 야비한 인물로 여기게 만든다. 하지만 저 대목은 &ldquo;미국은 전 지구적인 패권에 대한 야망을 갖지 말아야 한다&rdquo;라거나, &ldquo;세계화의 적은 세계화다&rdquo;라고 말하는 지은이의 다른 육성과 어울려, 제국이라는 과부하를 힘겨워 하는 미국의 &lsquo;출구전략&rsquo;으로 해석할 여지도 준다. &lsquo;사상누각<sup>砂上樓閣</sup>&rsquo;이라는 뜻과도 통하는 이 책의 원제 &lsquo;Sand of Empire'를 생각하면 더욱 그런 심증을 굳히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4-02 오후 1:45:00《223》복거일의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를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0"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3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7일</span><br /> <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복거일의 </span></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반도에 드리운 </span></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중국의 그림자</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문학과지성사, 2009)를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ldquo;빠르게 늘어나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점점 자주 그리고 깊이 침해되는 현상&rdquo;을 다룬다. 지은이는 중국의 영향력에 한국의 주권이 침해되는 현상을 &lsquo;핀란드화<sup>Finlandization</sup>'라는 모델로 설명하고 있다. 핀란드화란 강대국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가 강한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이웃에게 점차 자국의 이익을 양보하게 되는 과정으로, 20세기에 핀란드가 러시아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주권의 손상을 입으면서 생존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용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러시아와 핀란드의 경우처럼 두 나라의 힘이 차이 나게 비대칭적일 때, 강대국은 &lsquo;지배적 정책&rsquo;을 고르고 약소국은 &lsquo;묵종적 정책&rsquo;을 택하게 된다. 묵종적 정책은 &lsquo;적응적 묵종&rsquo;이라는 다른 말로도 불리는데,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적응적 묵종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 첫째는 &lsquo;양보&rsquo;. 이 전략은 약소국의 양보가 강대국의 비용-편익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즉 약소국의 양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안이 압박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보다 크다면 강대국은 압박을 멈추고 현상을 유지할 것이다. 또한 이 전략은 작은 양보를 통해, 더 큰 양보를 미리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한다. 두 번째는 &lsquo;대항&rsquo;. 이 전략은 자신의 역량을 길러서 강대국에 대한 양보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적 대항력&middot;군사적 대항력&middot;시민적 대항력을 기르고 배합해야 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적응적 묵종의 전략적 개념은 &lsquo;양보&rsquo;와 &lsquo;대항력&rsquo;이다. 약소국의 전략은 간단하니, 비대칭적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양보를 되도록 적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물론 대항력을 한껏 키워야 한다. 양보의 크기와 대항력의 크기는 역비례한다. 우리에게 열린 합리적 선택은 중국에 대해 적응적 묵종을 하되, 협상력을 한껏 키워서, 공동의 이익을 나누는 데서 너무 밀리지 않는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약소국의 강대국에 대한 전략적으로는 꼬투리 잡을 것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지은이가 왜 새삼 대한민국의 핀란드화를 걱정하고, 유독 한반도에 드리울 중국의 영향력만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을 이렇게 마쳤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와 강대국 사이에 존재하는 비대칭적 관계는 우리 시민들에겐 성찰하기 괴로운 주제다. 그래서 외면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나 어떤 사회도 외면에 바탕을 두고 앞날을 설계할 수는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은이는 미국의 정치학자 월터 래커의 말을 빌려, 핀란드화에 따른 적응적 묵종이 불러오는 가장 나쁜 것은 &ldquo;사회의 도덕적 변질&rdquo;이라고 말한다. 약소국은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힘센 이웃이 신뢰하는 후보만을 고위 공직에 선출하거나, 언론을 검열하는 &lsquo;국내 조정&rsquo;을 쉬지 않고 행한다. 그러면서 국가의 구성원 전체가 현실 도피와 위선이라는 도덕적 타락에 빠진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지은이는 중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한껏 우려하고 있지만, 한국은 그보다 미국에 의한 핀란드화를 먼저 겪었고, 현재도 그것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회의 도덕적 변질이 &lsquo;핀란드화/적응적 묵종&rsquo;의 가장 나쁜 폐해라면, 대한민국의 미국화<sup>Americanize</sup>만큼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킨 것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중요한 국가 정책이 미국의 이익과 합치해야 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는 관행이지만, 국익을 위해 일을 해야 할 정치가나 고위 공직자들이 미국 정치인과 줄을 대기 위해 안달을 하거나, 아예 미국의 이익을 위한 &lsquo;제5열&rsquo;이 되는 것조차 불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오래된 대한민국의 미국화 때문에 도덕이 아니라 영혼까지 파먹힌 자는 &ldquo;이라크 전쟁은 원래 정의로운 전쟁이었다&rdquo;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지은이 같은 사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전쟁 때 남한을 도왔다는 것을 제외하고, 지은이가 대한민국의 미국화를 묵살하거나 핀란드화로 인정하지 않는 까닭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다. &ldquo;미국은 역사상 제국주의적 특질을 가장 적게 보인 제국&rdquo;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미국이 행사한 제국주의는 제국주의 가운데서도 &ldquo;가장 선량&rdquo;하며 &ldquo;비공격적 특질&rdquo;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21세기의 초강대국이 예약되어 있는 중국은, 냉전 종식 이후에 선의의 제국주의 역할을 떠맡은 미국과 달리, 유사 이후로 줄곧 제국주의를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증거로 중국이 &ldquo;자신을 &lsquo;천하<sup>天下</sup>라고 부르는 관행&rdquo;을 꼽고 있다. 지은이의 이런 오해는, 곧 다른 독후감을 통해 반박하겠지만, 여기서는 이런 질문을 제출해 둔다. 백인도 아닌 것이, 도대체 한국인들은 왜 백인들이나 느끼는 황화<sup>黃禍</sup> 수위의 혐중<sup>嫌中</sup> 감정을 지니게 된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래지 않아 닥칠 &ldquo;중국의 제국주의는 미국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일방적이고 압제적이고 공격적일 것이다&rdquo;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중국을 &ldquo;가장 나쁜 형태의 제국주의&rdquo; 국가로 만드는 동력으로, 변질된 공산당과 극단적인 중화 민족주의 사이의 제휴와 악순환을 든다. 현재의 중국 공산당은 이미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정당성을 잃은 압제적 일당<sup>一黨</sup>은 &ldquo;자신의 잃어버린 정당성을 민족주의를 통해서 되찾으려&rdquo; 한다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앞으로 경제가 발전해서 자유에 대한 중국 시민들의 열망이 커지면, 공산당 정권은 민족주의를 더욱 부추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일리 있는 말이다. 게다가 지은이도 어디에 썼듯이,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나기까지 &lsquo;백년국치<sup>百年國恥</sup>&rsquo;를 당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들은, 다가올 굴기와 함께 지금까지 억압됐던 중화 민족주의를 한껏 과시하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일시적인 현상 때문에 중국이 다른 어느 제국주의보다 더 나쁜 제국주의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3_%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인들의 혐중은 두 가지 원천이 있다. 하나는 한국인들이 500여 년 동안 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해왔다는 게 원인이다. 그런 중국이 서양은 물론이고 한국인이 멸시해 왔던 일본에마저 굴욕을 당하고, 중국을 모범으로 삼았던 자신마저 나라를 잃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반동형성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생긴 혐중 감정을 한마디로 정리하라면 &lsquo;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rsquo;랄까. 다른 하나는 지은이가 대한민국의 미국화를 핀란드화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연관된다.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도왔기 때문에 통일을 놓치게 되었다는 것. 그런데 나는 이 두 가지 원천 가운데 전자는 중국의 굴기로, 후자는 1992년에 맺은 수교로 말끔히 해소되었다고 본다. 전 세계의 전문가들뿐 아니라, 미국의 전략가들마저 중국이 미국을 대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한국전쟁에 대한 원한으로 중국과의 수교를 반대했던 대중(시민) 운동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혐중 감정이 팽배해 있으면서도, 한국인들이 한중수교를 아무 반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수수께끼다. 그 이유는 첫째, 미국화된 것은 외양이었을 뿐 내면은 한 번도 중화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인들의 정신과 습속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lsquo;공자 왈, 맹자 왈&rsquo;이었지 프로테스탄트 윤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둘째, 복거일이 부정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국화에 대한, 반도인의 본능적이고 현명한 균형 잡기가 한중수교를 내심 반겼던 것이 아닐까? 이 두 가지는 워낙 주관적인 것이라서, 수수께끼의 정답은 못 된다. 그렇지만 복거일이 내놓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비현실적으로 우호적이고 낙관적이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반감이 워낙 거세다는 사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비현실적 인식은 건전하다고 할 수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말인즉, 반미감정이 중국에 대한 비현실적 우호 의식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어조나 강세의 차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앞서 든, 미국화에 대한 한국인의 균형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하므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lsquo;반미감정이 중국에 대한 비현실적 우호 의식으로 전환&rsquo;됐다는 지은이의 주장이 아니라, 과연 한국에 &lsquo;반미&rsquo; 감정이란 게 있느냐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복거일은 중국에 의한 대한민국의 핀란드화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혈맹이 굳건히 유지되어야 한다면서, &ldquo;점점 거세지는 한국의 반미주의&rdquo;. &ldquo;친북 세력의 조직적 반미운동&rdquo;을 비난한다. 그러나 반미에도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그 가운데, 종교적 이유로 벌어지는 이슬람권 국가에서의 반미나 남미의 몇몇 나라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반미가 가장 처치 곤란한 경우다. 반면 한국에서 벌어지는 반미는 종교와는 아무 상관 없고, 이데올로기적인 반미는 운동권 내의 자주파(NL)에 한정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반미는 &lsquo;사건에서 기인하는 반미&rsquo;로 이벤트적인 성격이 짙다. &lsquo;효순․미선 사건&rsquo;이라든지, 미군 병사의 탈선 범행이, 미국이라면 &lsquo;껌벅&rsquo; 죽는, 전 세계에서 가장 미국화 된 한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이런 이벤트적인 반미는 미국 정부의 성의 있는 대처만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들로, 복거일이 말하는 조직적인 &lsquo;반미주의&rsquo;나 &lsquo;반미운동&rsquo;과는 거리가 멀다. 과장하자면, 한국인에게는 프랑스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미국을 조소하는 만큼의 반미 의식조차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솔직히 말해, 세계 10위권에 바싹 다가붙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미국의 덕을 크게 봤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오늘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베트남과 이라크 파병과 같은 예서 보았듯이, 남의 &lsquo;똥꼬&rsquo;를 빠는 데는 구린내가 난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꿀과 같았다. 그런데 꿀을 제공하던 자에게서 꿀은커녕 구린내만 더 심하게 풍긴다면 어떻게 할 텐가? 미국의 퇴락과 중국의 굴기는 금세기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복거일은 &lsquo;자, 다음!&rsquo;이라고 외쳐야 옳다.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는 복거일이 여태껏 자신만만하게 외쳐왔던 경제 일변도의 실용주의 노선과 모순된다. 게다가 그는 일제의 조선 통치를 근대화와 경제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찬양하는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들린아침, 2003)를 쓰기도 했던 성장 제일주의자가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 시인 신혜정은, 한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면서 이렇게 썼다. &ldquo;미8군에 들어가 본 자와/ 그렇지 못한 자&rdquo;(「평화의 눈 2」 중에서). 당신이 아무리 출세했다 하더라도, 미8군 영내 출입증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이런 것도 다 &lsquo;대한민국의 미국화&rsquo;의 부산물이다. <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30 오후 3:20:00‘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img alt="" width="600" height="8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7_%EC%A0%95%EC%97%AC%EC%9A%B8%EC%9D%98%20%EC%86%8C%EC%84%A4%EC%9D%BD%EB%8A%94%20%EC%8B%9C%EA%B0%84/%EC%A0%95%EC%97%AC%EC%9A%B8%EC%9D%98%EC%86%8C%EC%84%A4%EC%9D%BD%EB%8A%94%EC%8B%9C%EA%B0%84_%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저자의 말</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감성의 체온을 높여주는,<br /> 소설 &lsquo;함께&rsquo; 읽기</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생은 축제와 같다. 어떤 이는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오고, 어떤 이는 장사를 하러 오지만, 최상의 사람들은 관객으로 온다. &mdash; 피타고라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잘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잘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진 않다. 망각은 우선 뼈아픈 상실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가끔 형편없는 내 기억력에 절망할 때도 있다. 오래전에 사서 밑줄까지 좍좍 그어가며 읽은 책을 또 한 번 &lsquo;처음인 양&rsquo; 설레는 맘으로 구입했을 때다. 그리하여 내 책장에는 두 권씩, 심지어 세 권씩 꽂혀 있는 똑같은 책들이 적지 않다. 책을 읽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책을 샀다는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글픈 기억의 풍화 작용이 반드시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특히 내가 두 번 세 번 처음인 양 구입한 책들이 명불허전의 고전일 경우, 은근히 그 망각의 효과(?)를 즐길 때도 있다. 허겁지겁 각종 필요를 핑계로 새 책을 구입하지만, 결국 내 기억의 창고에서 &lsquo;마음속 헌책방&rsquo;을 발견하게 되고, 빛바랜 헌 책에 끼적인 옛 메모를 바라보며 행복한 &lsquo;기억의 시차&rsquo;를 경험하는 것이다. 아, 그 옛날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때로는 기특하고 때로는 한심해지는 이 경험은 &lsquo;과거의 나&rsquo;와 &lsquo;현재의 나&rsquo;가 뜻하지 않게 분리되는 순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학 속 캐릭터들은 &lsquo;독서의 시차&rsquo;를 통해 매번 다른 기억의 풍경을 토해낸다. 사춘기에 만난 베르테르와 30대에 다시 만난 베르테르가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다가오기도 하고, 어린 시절 그토록 &lsquo;나쁜 놈&rsquo;으로 보였던 후크 선장이나 메피스토펠레스가 지금은 한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로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과 회상을 반복하던 문학 속 캐릭터들은 기억의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면서 훨씬 풍요롭고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이러한 독서의 시차야말로 고전 읽기의 묘미다. 그토록 열심히 읽었던 것을 그토록 깡그리 잊어버리다니.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lsquo;또다시 되돌아온 고전&rsquo;은 더욱 아련한 매혹을 뿜어낸다. 워낙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현듯 찾아온 회상의 기쁨은 더욱 커지는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다 보면 어느새 &lsquo;잃어버린 기억 속 캐릭터&rsquo;와 &lsquo;다시 찾은 고전 속 캐릭터&rsquo;는 흥미로운 수다의 향연을 펼치기 시작한다. 고전 속 인물들은 내 안에서 서로 아무 때나 교신하여 자기들끼리 흥겨운 의미의 네트워크를 빚어내곤 한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딜레마에 빠져 있을 때, 그 옛날 기억의 냉동 창고 저 아래쪽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주인공들의 얼어붙은 삶이 내 안에서 천천히 해동 모드에 진입한다. 그들은 천천히 얼어붙은 의미의 육체를 녹여내며 자기들끼리 분주하게 내 인생의 종합 검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그렇게 내 삶을 숙주로 삼아 아름다운 의미의 세포 분열을 시작한다. 때로는 문학 속 캐릭터가 살았던 &lsquo;대단한 삶&rsquo;에 비해 내 삶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금세 지나간다. 아픔 뒤에 남는 것은 그들 삶의 &lsquo;관객&rsquo;이 될 수 있는, 행복한 관조자의 조용한 기쁨이다. 그들의 삶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lsquo;관객&rsquo;만이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 있다. 그들의 삶은 우리, 관객들의 감동의 도가니 속에서만, &lsquo;고정된 해석&rsquo;의 암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토양 위로 부활할 수 있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기에, 그 모든 야단법석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 있기에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이 수많은 관객들 중에서도 조금 수다스러운(?) 편에 속하는 나는, 내 마음속에서 틈날 때마다 비밀 미팅을 진행 중인 고전 속 캐릭터들의 커플매니저가 되어보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소설 속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객의 은밀한 기쁨을 극대화하기 위한 소중한 미팅 장소가 되어주었다. 이 글을 웹진 &lt;나비&gt;에 연재하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로미오와 트리스탄이 만나 밤새 술잔을 기울였고, 지킬 박사와 도리언 그레이가 만나 서로의 치부를 은밀하게 훔쳐보았으며, 오페라의 유령 에릭과 폭풍의 언덕 주인 히스클리프가 만나 서로의 닮은 미소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고, &lsquo;위대한 개츠비&rsquo;와 &lsquo;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rsquo;를 타고 가던 블랑시가 만나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수줍게 고백하기도 했다. 누군가 &lsquo;당신은 왜 그렇게 옛이야기라면 껌뻑 죽는가&rsquo;라고 묻는다면, 나는 신이 나서 그 사람과 밤새도록 수다를 떨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한 가지 이유만 대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옛이야기를 읽으면 내 힘으로는 살아낼 수 없는 그 모든 &lsquo;타인의 삶&rsquo;이 내 마음의 체온을 매번 1℃씩 높여준다고. 타인의 이야기를 늘 품에 안고 타인의 삶을 늘 공기처럼 호흡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면, &lsquo;세상의 체온&rsquo; 또한 아무도 모르게 슬며시 높아지지 않을까. 소설은 혼자 읽어도 좋다. 하지만 누군가의 따스한 &lsquo;낭독의 목소리&rsquo;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누군가가 서로 많이 닮은 캐릭터들을 오지랖 넓게 &lsquo;중매&rsquo;까지 해준다면, 이 세상의 체온은 더 빨리, 더 신명나게 높아지지 않을까. 이 수많은 소설들을 여러분과 &lsquo;함께&rsquo; 읽는 동안,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덜 외롭고, 덜 아프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right">따스한 봄 햇살이 쏟아지는 내 오랜 창가에서, 정여울</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color: #993366"><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데미안』<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nbsp;&nbsp;&nbsp;vs.<br /> 『호밀밭의 파수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멘토, <br /> 지상에 없는 구원을 찾아서</b></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rdquo;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mdash; 『데미안』</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막연한 그리움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기는 한데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그 비밀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미칠 듯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을 시작하기만 하면 생각과는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내 곁의 모든 사람들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내 말을 들어줄 단 한 사람의 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속속들이 읽어줄 독심술의 귀재는 없을까. 내 마음을 읽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내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은 없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난 아직 어른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필요하다. 마법에 걸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으면 하는 날도 있고, 영원히 어른 따위는 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게다가 따분하고 골치 아픈 어른들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면,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영원히 아이 상태에 머무른다면, 그것 또한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저기서 아무 생각 없이 뛰놀고 있는 저 조무래기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평생 살 수 없는 일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생각하면 문제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따위가 아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가 없는가 따위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그 자체가 문제다. 저기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갈고 닦아온 삶의 기반이 있다. 저들처럼만 따라 하면 문제없을 것이다.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한 채 이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모범 시민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부모님의 유전자를 그대로 빼다 박은 자식이 아닌 것 같다. 내 형제들은 모두 저렇게 말쑥하고 얌전하기만 한데, 나 혼자만 저들과 다른 돌연변이가 아닐까. 도대체 금방이라도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이 숨막힘, 이 답답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7_%EC%A0%95%EC%97%AC%EC%9A%B8%EC%9D%98%20%EC%86%8C%EC%84%A4%EC%9D%BD%EB%8A%94%20%EC%8B%9C%EA%B0%84/%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사춘기를 돌이켜보면, 나는 저렇듯 불안하기 그지없는 감정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하루하루를 거뜬히 보냈던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완전한 아이도 완전한 어른도 아니었을 때 나 또한 저런 고민들을 하며, 금방이라도 낭떠러지에서 추락할 것만 같은 기분을 신기하게도 &lsquo;정상&rsquo;처럼 여기며, 어른들은 &lsquo;질풍노도의 시기&rsquo;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그 시기를 거쳐왔다. 나도 모르게 어른이 되었는데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 손으로 번 첫 번째 화폐를 만져보았을 때도, 아직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저런 고민들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기억나지 않는 그 순간부터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너무 쉽게, 저 고민을 미처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내게 문득 떠오른 두 작품은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성장소설의 대표 선수들이지만, 성장소설이라는 규범적인 레테르가 너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이 두 작품들은 언제 읽어도 새롭고 묵직한 화두를 던져준다. 『데미안』과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일 수 있는, 그 미칠 듯한 시간을 각자 다른 힘으로 버텨낸 소년들의 이야기다. 나무들의 사춘기인 6월에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 함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오솔길을 산책하고 싶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을, &lsquo;친구&rsquo;로 만들어주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다. 꾸며낸 이야기들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무의미와 혼란, 착란과 꿈의 맛이 난다. 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hellip;&hellip;) 누구든 출생의 잔재, 시원<sup>始原</sup>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라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향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mdash; 『데미안』</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무도 나를 <br /> 모른다</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갑자기 나는 이 방에서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이제부터 끔찍한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사람들도 더러 있을 줄 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일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인간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겠다.&mdash; 『데미안』</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아무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rsquo;는 항변은 곧 누군가 내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하는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은 아무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읽어줄 타인을 찾는다. 이제 막 영혼의 사춘기에 접어든 싱클레어와 홀든은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을 꿈꾸기 시작한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에게 느끼는 조건 없는 어여쁨이 아닌, 첫사랑에게 느끼는 이성적 호기심도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 나 스스로가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제대로 읽힐 수 있는, 난해하고 신비로운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p> <p style="text-align: justify">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비행 청소년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어른들 말이라면 곧 죽어도 듣지 않을 것만 같은 괴짜 소년 홀든 콜필드. 홀든은 어른들의 &lsquo;관심&rsquo;이라는 포장지로 위장된 &lsquo;지배&rsquo;의 욕망을 견딜 수 없다. 걸핏하면 낙제를 거듭하던 홀든이 퇴학을 앞두고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어른 행세를 할 때, 어른들은 예외 없이 그에게 나이를 묻는다. 너 몇 살이니? 이런 질문 안에는 나이로 인간을 판단하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택시에서도 호텔에서도 술집에서도, 홀든은 번번이 숨길 수 없는 앳된 얼굴 때문에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어른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한다. 그에게 섣불리 충고를 하려는 어른들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홀든은 &lsquo;나이&rsquo;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짜증을 버럭 낸다. 내가 몇 살이든,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애송이가 아니야.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그 판단은 틀렸다고. 자신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도 아니면서 어린 소년이라면 일단 통제부터 하려는 어른들의 습관이 홀든을 골치 아프게 만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른들의 온몸에 달린 감시카메라의 사각지대에 살고 싶은 욕망.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하고 살아야 한다는 시선의 네트워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부모님이 일생을 바쳐 가꾸어온 행복의 정원을 사랑하지만, 그 평화의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 일탈의 본능. 내가 괴로울 때 달려가면 언제든지 안아줄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 굴복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미묘한 반항심. 이제 갓 열 살에서 열한 살로 넘어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마음에는 벌써부터 그런 불온하지만 정상적인 성숙의 조짐이 시작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교양의 향취가 물씬 느껴지고 예술의 향기가 곳곳에 가득한 집안에서 자라난 싱클레어는 이제 막 &lsquo;부모님의 세계&rsquo; 바깥에 존재하는 어둡고 은밀하고 잔혹한 세계가 뿜어내는 위험한 매혹에 눈을 뜬다. 부모님이 걸어왔고, 자신이 걸어가야만 할 올바르고 단정한 길 바깥에 서 있는 존재들. 악당과 탕아와 요부, 폭력과 죽음과 유혹이 가득한 바깥 세상은 이제 막 부모님이 물려주신 영혼의 태반에서 떨어져 나온 싱클레어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한다. 조무래기들의 소꿉장난과 골목대장 놀이에는 흥미가 딱 끊긴,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싱클레어의 마음속에서는 &lsquo;악&rsquo;과 싸우기보다 &lsquo;악&rsquo;에 흠뻑 탐닉하고 싶은 유혹과 부모님에 대한 죄의식이 팽팽한 내전을 벌이기 시작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hellip;&hellip;)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hellip;&hellip;)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hellip;&hellip;)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암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hellip;&hellip;) 그리고 가장 기이했던 것은, 그 경계가 서로 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 세계는 얼마나 가까이 함께 있었는지! 예를 들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기도 때 거실 출입문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펴진 앞치마 위에 올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함께 노래 부르는데, 그럴 때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 우리들, 밝음과 올바름에 속했다. 그 후 곧바로 부엌에서 혹은 장작을 쌓아둔 광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들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아낙네들과 싸움을 벌일 때 그녀는 딴 사람이었다. 다른 세계에 속했다. 비밀에 에워싸여 있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랬다. 나 자신이 가장 심하게 그랬다. &mdash; 『데미안』</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이제 그런 가르침은 <br /> 됐어!</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카인이 고귀한 인간이고, 아벨이 비겁자라구! 카인의 표적이 표창이라구! 그건 어처구니없는 얘기였다. 신성 모독이고 극악 무도였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디 가버리신 거야? &mdash; 『데미안』</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성서에서 내가 예수님 다음으로 좋아한 사람은 무덤 속에 살면서 돌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 살아가는 미친 사람이다. 그 가련한 사람이 열두 제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 (&hellip;&hellip;) 난 예수님이 유다를 지옥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천 달러라도 걸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천 달러를 가지고 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다른 제자들이었다면 누구라도 유다를 지옥으로 보냈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 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싱클레어와 홀든은 모두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났다. 특히 원조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교양과 예절과 학문과 예술의 향취가 물씬 나는 집안에서 아무런 정신적 결핍 없이 살아왔고, 홀든 또한 눈에 띄는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처음부터 문제아였던 것은 아니었으며 유난히 작문을 잘하는 감수성 여린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삶 전체를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싱클레어에게는 사악한 불량배 크로머가 나타나 돈을 요구하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홀든이 더없이 사랑했던 남동생 앨리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평화롭고 그지없었던 어린 시절의 마지막 페이지가 그렇게 처참하게 끝나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lsquo;부모님의 세계&rsquo;와 &lsquo;나의 세계&rsquo;, 그리고 &lsquo;평화로운 가정&rsquo;과 &lsquo;험난한 세상&rsquo; 사이의 경계가 홍해처럼 선명하게 갈라지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결코 나의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소외감을 느끼고, 평화로운 집 밖으로만 나가면 언제든 쉽게 폭력과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불량배에게 매일 협박을 당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극심한 대인기피 증세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전혀 알지 못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래, 나도 부모님이 전혀 모르는 나만의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말 모르겠냐고, 내가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지를. 홀든은 앨리의 죽음 이후 점점 약에 의존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미처 동생의 죽음을 마음 놓고 슬퍼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그렇게 아프게 &lsquo;부모님의 세계&rsquo;와 &lsquo;나만의 세계&rsquo; 사이의 분리를, &lsquo;가정&rsquo;과 &lsquo;바깥 세상&rsquo; 사이의 칼날 같은 경계를 경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이럴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친구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수직적인 충고보다는, &lsquo;나도 너처럼 힘들고 아파&rsquo;라는 뉘앙스로 다가오는 친구의 수평적인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크로머의 교활한 협박과 끈질긴 감시에 지칠 대로 지친 싱클레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혼자 끌어안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싱클레어에게 다가온 친구는 바로 데미안이었다. 지나치게 어른스러워서 도저히 동년배로 보이지 않는 데미안. 학생이라기보다는 수도원의 구도자 같은 느낌을 주는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내면을 응시하게 도와준다. 넌 지금 누군가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너 자신을 지배할 힘을 내주었기 때문이라고. 너의 약점을 상대방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약점을 이용하는 상대방은 결코 너를 지배할 자격이 없는 악당이라고. 그 두려움을 네가 먼저 떨쳐버려야만 한다고. 그게 안 된다면 그 녀석을 아예 때려죽여버리라고. 만약 네가 그 녀석을 죽일 거라면 나도 널 도울 거라고.</p> <p style="text-align: justify">심약한 모범생이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강력한 메시지에 전율을 느끼고,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내가 크로머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영원히 그의 노예가 될 수도 있겠구나. 어머니 앞에서 고해를 한다면 언제든 나를 구해주시겠지만, 결코 어머니의 치마폭에 숨어버리기는 싫은데. 그런데 이 사람, 데미안은 누굴까. 내가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 마음의 비밀을 속속들이 읽어버리다니.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구나. 말하지 않아도 내 표정을 읽어내는 이 친구가 있다면, 나는 더 이상 크로머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p> <p style="text-align: justify">드디어 데미안의 도움으로 크로머의 감시체제에서 벗어난 싱클레어. 그는 이제야 데미안의 사고방식이 보통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데미안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의심한다. 그는 단지 의심할 뿐 아니라 공인된 진리의 허점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그 진리가 발딛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주춧돌을 기어코 부숴버리고 만다. 싱클레어에게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바로 카인과 아벨에 대한 데미안의 독특한 해석이었다. 데미안에 따르면 카인은 결코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카인이 받은 형벌은 그가 &lsquo;우월한 인간&rsquo;이기 때문에 견뎌야 했던 뭇사람들의 질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lsquo;아벨의 세계&rsquo;가 약속하는 따스하고 선량하고 수동적인 세계를 믿어왔던 싱클레어는 &lsquo;카인의 세계&rsquo;가 유혹하는 추악하고 잔혹하며 폭력적인 세계의 매력에 깊이 빨려든다. 데미안은 악마의 유혹과 천사의 미소를 모두 가진 야누스적 존재였던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 하나를 쳐 죽였어. 그것이 정말 형제였는 지 그거야 의심할 여지가 있지. 정말 형제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국 모든 인간이 형제잖니. 그러니까 어떤 강한 사람이 어떤 약한 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그건 영웅적 행위였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사람들이 이제 잔뜩 겁이 난 거야. 그들은 몹시 탄식을 했지. 그런데 &ldquo;왜 너희들도 그 사람을 그냥 쳐 죽이지 않는 거지&rdquo;라고 누가 물으면 그들은 &ldquo;우리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죠&rdquo;라고 말하지 않고 &ldquo;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표적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느님이 그에게 그려준 겁니다!&rdquo;라고 말했지. 대략 그런 식으로 그 사기는 이루어졌을 게 틀림없어. &mdash; 『데미안』</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내 안의 상처를 <br /> 투시하는 용기</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말로 자신의 운명 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자, 그에게는 그때부터는 자기 비슷한 사람이 없어. 완전히 홀로 서 있지. 주위에는 오직 차가운 우주뿐이지.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쨌든 난 제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수첩을 뒤지면서 그날 밤을 같이 보내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단 세 명밖에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부끄럽지만, 어린 시절 나는 선생님의 &lsquo;가르침&rsquo;보다도 선생님의 &lsquo;사랑&rsquo;에만 목말라 하던 아이였다. 조금 못 가르치는(?) 선생님이어도 좋으니, 나는 선생님이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서 나를 콕 집어내어 한 번이라도 더 바라봐주기를 기대했다. 지식은 자습으로도 얻을 수 있었지만, 사랑은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배우든 그 내용보다는 선생님의 칭찬이 중요했고, 칭찬받지 못한 선생님의 과목은 성적이 늘 불안했다. 그 수많은 아이들 중에 나만을 좀 더 오래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심각한 공주병은 대학교에 가서 비로소 치유(?)되었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곧 세계 그 자체였던 학창 시절을 지나자 나의 극심한 칭찬 중독증은 저절로 해소되었다. 매일매일 새롭고 신기한 세상을 향한 맹렬한 짝사랑에 빠져, 선생님의 사랑과 칭찬을 향한 목마름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렸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말 내가 멘토를 원하게 된 것은, 여전히 불완전한 사회인이 되고 나서였다. 그토록 많은 선생님들께 셀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지만, 그 모든 스승님들로부터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지식을 흡수했지만, 여전히 목말랐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스승에 대한 갈증은 더욱 절실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문학 작품을 접할 때 주인공들이 직접적인 사제 관계를 맺지 않아도, 그들의 관계를 지속하는 동력을 &lsquo;스승과 제자&rsquo; 사이의 친밀감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교과서나 자기 계발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그 무엇을, 반드시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배우고 싶어 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100권의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도 맞바꿀 수 없는 경우가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느낀 감동과 충격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이 사람의 가르침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절대적인 믿음. 살아 있는 데미안의 존재가 곧 우주의 진리를 압축한 거대한 책처럼 다가오는 순간들. 데미안은 존재 자체가 놀라운, 그의 모든 행동이 하나하나 위대한 가르침으로 다가오는 &lsquo;구루 Guru&rsquo;*였다. 그에게서 배우는 것은 세상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지혜였을 것이다. &lsquo;아벨&rsquo;의 무력한 순수를 닮은 연약한 모범생 싱클레어를,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마에서 &lsquo;카인&rsquo;의 표적을 느끼는 비범한 청년으로 만들어버린 이가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두렵다. 그는 데미안을 사랑하는 만큼, 데미안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마 위에 찍힌 카인의 표적을 느끼는 순간부터 싱클레어는 이미 데미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샴쌍둥이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이 도대체 누구와 자신의 고민을 나눠야 할지 몰라 괴로워하고 있었다면,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자신의 유일한 멘토가 누군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데미안에게 너무 큰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정신적 지배권 안에 속해 있을 것 같은 예감. 데미안이 걸어가는 길은 불길하고 위험한 징조로 가득해 보이고, 데미안과 함께하는 순간 &lsquo;부모님이 약속하는 평화로운 세계&rsquo;, 즉 시민적 안전과 질서의 세계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6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7_%EC%A0%95%EC%97%AC%EC%9A%B8%EC%9D%98%20%EC%86%8C%EC%84%A4%EC%9D%BD%EB%8A%94%20%EC%8B%9C%EA%B0%84/%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싱클레어는 깨닫는다. 데미안이야말로 크로머보다 더 강력한 적임을. 데미안이야말로 아벨을 때려죽이고 흉물스러운 표적을 이마에 찍히고도 굴하지 않을 무서운 &lsquo;카인&rsquo;이었음을. 싱클레어는 아직 아벨이기도 하고 카인이기도 한 자신을 발견한다. 싱클레어는 대책 없는 순수와 수동성을 무기로 삼는 나약한 아벨이기도 하면서, 아버지가 창조한 세계를 증오하는, 언제 자신의 비범함을 발각당할지 몰라 자신의 표적을 숨기기에 바쁜, 숨은 카인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이 다다라야 하는, 그러나 다다를 수 없는 미묘한 이상이자 섬뜩한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토록 데미안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지만 자신이 진정 찾는 것은 데미안일 수밖에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매개자를 통해 데미안으로 가는 길을 우회적으로 깨닫게 된다. 싱클레어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기꺼이 &lsquo;학교 밖의 스승&rsquo;이 되어준 피스토리우스는 문사철文史哲은 물론 예술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걸출한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개척하는 능력, 사랑과 신앙의 새로운 상징을 창조하는 능력, 단지 지식의 습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운명과 우주 자체를 투시하는 직관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미안에게는 있지만 피스토리우스에게는 없는 것을 깨닫기 위해, 싱클레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스승은 데미안이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불현듯 나타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피스토리우스가 &lsquo;도서관&rsquo; 속의 지식을 가르쳐주었다면, 데미안은 오직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는 &lsquo;길 위의 지식&rsquo;을 가르쳐준다. 운명을 긍정하고 운명의 장단에 맞추어 인생이라는 춤을 출 수 있는 힘. 더불어 때로는 운명과 대결할 수 있는 힘까지도.</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피스토리우스는 너무도 편안하게 이미 존재하는 것 속에 머물렀다. (&hellip;&hellip;) 그의 사랑은 이미 지구가 보았던 형상들에 매여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새로운 것은 새롭고도 달라야 한다는 것, 새 땅에서 솟아야지 수집되거나 도서관에서 길러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의 직분은 어쩌면, 나에게 해주었듯이, 인간이 그 자신에게로 이르도록 돕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들어보지 못한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것, 그것은 그의 직분이 아니었다. (&hellip;&hellip;) 새로운 신들을 원한다는 것은 틀렸다. 세계에다 그 무엇인가를 주겠다는 것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각성된 인간에게는 한 가지 의무 이외에는 아무런, 아무런,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어디로 가든 마찬가지였다. &mdash; 『데미안』</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매일 이별해야 <br /> 만날 수 있는 것들</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가면서 계속 울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울었다. 지독하게 외롭고, 우울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류가 멸종하고,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상당한 재능을 지닌 어린아이 하나만 남는다면, 이 아이는 사물들의 전체 과정을 다시 찾아낼 거야. 그 애가 신이 되어 수호신, 낙원, 계율과 금기, 신약과 구약, 모든 것이 다시 만들어질 수 있을 거야. &mdash; 『데미안』</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어른이 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이 조금만 늦어져도 캥거루족 소리를 듣기 쉽고, 자식에 대한 애프터서비스가 조금만 길어져도 헬리콥터 맘 소리를 듣기 쉬워졌다. 부모로부터의 경제적&middot;정신적 독립은 예나 지금이나 성인의 징표인 것 같다. &lsquo;엄마 품에만 있으면 이렇게 편한데 굳이 힘들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가&rsquo;라는 어리광과 &lsquo;엄마 곁에서만 탈출한다면 만사 오케이, 곧바로 어른이 될 것 같다&rsquo;라는 극단적인 환상. 이 모두가 사춘기의 전형적인 고민들이다. 싱클레어와 홀든은 부모로부터 되도록 빨리 독립하려는 유형의 소년들이다. 싱클레어는 교양과 신앙으로 무장한 모범적인 부모님으로부터, 홀든은 동생의 죽음 이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모님으로부터 하루바삐 독립하고 싶어 한다. 싱클레어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평생 자신이 가꿔온 신념의 울타리를 지키는 보수주의자이고, 홀든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유능한 가장이긴 하지만 왠지 정서적 공감대를 찾기는 어려운,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아버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싱클레어가 데미안 되기, 혹은 카인 되기를 통해 다소 극단적인 방식으로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났다면, 홀든의 기숙사 탈출과 뉴욕 탐험의 종착역은 엉뚱하게도 &lsquo;집&rsquo;이었다. 홀든은 모든 연락망을 검색해 &lsquo;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조금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rsquo; 상대를 찾지만, 사람들에게 전화를 할수록 더 짙은 외로움을 느낀다. 비상금도 다 떨어지고, 녹록지 않은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도 사라져갈 때쯤, 홀든이 학교도 집도 아닌 어딘가 머나먼 곳으로 떠나려는 결심을 굳히기 직전, 그에게 떠오른 것은 막내 여동생 피비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모님께는 너무 송구스러워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지만, 사랑스러운 피비의 얼굴만은 꼭 보고 싶은 홀든. 그는 자신의 집에 몰래 잠입하는 기이한 모험 끝에 마침내 피비를 만난다. 부모님의 눈을 피해 어렵게 만난 피비는 오빠에 대한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이제 갓 열 살이 된 피비는 귀신같이 오빠의 퇴학 사실을 눈치채고는 걱정이 태산 같다. 또 퇴학을 당하다니. 이번에는 아빠가 오빠를 죽이고 말 거라며 노심초사한다. 도대체 오빠는 뭘 원하느냐고, 왜 걸핏하면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냐고 다그치는 피비에게 홀든은 자신의 꿈을 이야기해준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명장면, 피비에게 홀든이 자신의 꿈을 묘사하는 대목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넘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mdash; 『호밀밭의 파수꾼』</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피비는 빈털터리가 되어 자신을 몰래 찾아온 오빠의 괴상한 고백을 열심히 들어주지만, 아빠가 오빠를 죽일 것만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소녀가 소중히 간직했던 크리스마스 용돈을 오빠의 손에 쥐여주며 작별을 고하자 홀든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여동생의 품에 안겨 엉엉 운다. 홀든은 모든 것을 다 잃을 위기의 구렁텅이로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그토록 필요로 했던 것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을, 자신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음을. 내 이야기를 언제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내가 정말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 할지라도 나를 비웃지 않고 조용히 응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여동생 피비와 앤톨리니 선생님, 홀든의 첫사랑 제인, 홀든의 친형 D.B까지도. 내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을 이미 다 가지고 있었는데, 다만 자신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p> <p style="text-align: justify">홀든은 단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지만, 현재 스코어 진정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오히려 열 살배기 여동생 피비가 아닐까. 언제 절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는 홀든 자신이고, 든든한 호밀밭의 파수꾼은 막냇동생 피비였다. 내가 가장 지켜주고 싶었던 소중한 대상이, 거꾸로 나를 지키고 있는 수호천사였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가 진정 지켜줘야 할 존재가 무엇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 그리고 나를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걸까. 지금은 오히려 어린 동생이 자기보다 훨씬 커다란 오빠를, 온 힘을 다해 붙들고 있다. 홀든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의 말, 1장 일부)</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0" height="238" src="http://nabeeya.net/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A%B3%A0%EC%A0%84%EC%BA%90%EB%A6%AD%ED%84%B0%EC%97%B4%EC%A0%84/%EC%A0%95%EC%97%AC%EC%9A%B8%EC%86%8C%EA%B0%9C4.jpg" />정여울</strong><br /> 독문과를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한겨레신문』에 &lsquo;정여울의 청소년 인문학&rsquo; 코너를 연재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정여울의 문학멘토링』, 『시네필 다이어리 1․ 2』, 『소통』, 『미디어 아라크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95~1919』가 있다. <br /> &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9 오전 11:06:00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8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6_%EA%B8%B0%EC%97%85%EC%9D%B4%20%EB%90%9C%20%EA%B5%AD%EA%B0%80/%EA%B8%B0%EC%97%85%EC%9D%80%20%EB%88%84%EA%B5%AC%EC%9D%98%20%EA%B2%83%EC%9D%B8%EA%B0%80_%ED%91%9C%EC%A7%80_.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방대 나와 노동하는 수미에게</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기 지도가 있다. <br /> 어서 지옥을 떠나, <br /> 자유의 땅으로 가라.</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하나의 깃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크게 세 가닥의 실로 짜여 있다. 하나의 실은 &lsquo;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rsquo; 하는 &lsquo;물음&rsquo;이다.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뽑듯이, 또는 국립대학의 총장을 학교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종업원들이 뽑으면 안 되는가? 다른 실은 &lsquo;대답&rsquo;이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 에 대한 답은 되는 경우도 있고 안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동네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식당 사장을 선거로 뽑자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이런 사정은 순수한 개인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인 기업이란 기업주의 사적 소유 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회사라면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최종적으로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해 &lsquo;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rsquo;라는 법 조항을 상법에 신설하자는 주장에까지 나아간다. 세 번째 실은 어떤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노동자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하는 &lsquo;근거&rsquo;들이다. 나는 다시 이 근거를 부정적인 근거와 긍정적인 근거로 나누어, 먼저 주식회사만의 고유성으로부터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노동자 경영권의 소극적 근거로서 제시한 뒤에, 기업 공동체의 이념으로부터 노동자 경영권을 위한 적극적 근거를 이끌어내려 하였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근거, 이 세 가지 실로 천을 짜면서 맨 마지막에 새겨 넣은 말은 이것이다. - <strong>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누가 쓰지 말라 해도 어떻게든 이 책을 썼겠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3년 전 이맘 때 내가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소위원회의 위원장 직책을 맡은 것이었다. 전문(前文)과 본문(本文)으로 이루어진 강령에서 본문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초한 문서를 강령소위에서 다듬은 것이었으나 전문은 당의 이념을 담은 지극히 철학적인 문서로서 그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나는 그 일에 최선을 다했고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강령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시급하게 보완해야 할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강령이 &ldquo;오직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만 인간의 자유와 참된 만남의 공동체가 가능하다&rdquo;고 선언하면서도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구호가 몽상적인 헛구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자본주의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인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강령을 처음 기초할 때, 강령제정에 참여했던 나를 포함해서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 있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으니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당 차원의 토론도 실천도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당의 생존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으로 날밤을 새다가 당의 대표를 지냈던 사람들이 당을 버리고 떠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하지만 당의 깃발을 만든 사람으로서 당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없었던 나는, 내가 기초한 강령의 한계를 스스로 뛰어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한국사회의 왜곡된 재벌경제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절박하게 느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극소수의 특권층을 위해 작동하는 재벌경제체제를 해체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철학자가 자기와 직접 상관도 없는 주식회사의 경영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은 학문적 월권이나 일탈이 아닌가? 혹시라도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까 하여, 대답 대신 서준식 선생의 『옥중서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원래 철학이라는 학문의 특징은 그것이 현존의 사회질서 속에 특정한 분야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지만, 요컨대 경제학이 현존질서 속에서 경제현상이라는 대상을 차지하고 정치학이 정치분야를 갖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철학은 현존 사회질서 속에 그 귀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철학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현존 질서 속의 일부가 아니라 그 현존질서 전체, 즉 그 &lsquo;통째&rsquo;이다. 따라서 다른 분야의 학문이 자칫하면 현존질서 전체를 주어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과 달리 철학은 현존질서 전체가 과연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를 정면에서 문제 삼게 되며, 때로는 잘못된 현존질서 속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과 대등한 처지에서 대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을 &lsquo;세계관의 학문&rsquo;이라 부르는 이유이고, 철학이 다른 학문분야들의 &lsquo;통괄자&rsquo;로서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이유이며, 그리고 나아가서는 역사 속에서 철학이 많은 박해를 받아온 이유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철학은 언제나 세계 전체 또는 존재 전체를 생각하는 보편적 학문이다. 당연히 철학이 탐구해야 할 그 전체 속에는 경제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하는 주식회사 역시 하나의 존재자로서 철학적 성찰의 대상일 수 있다. 그런데 철학자라면, 경제․경영학자나 법학자와 달리, 주식회사를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성찰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이나 경영학자들은 경제적 효율성의 측면에서 주식회사의 가장 이상적인 경영 방식을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법학자들이라면 주식회사에 관계하는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법적 권리의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주식회사법의 정당성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법학자들은 주식회사의 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식회사의 법적 권리균형의 측면에 대해서 치열한 성찰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문제되는 한에서만 주식회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반해 철학자는 무엇을 보든 존재(存在)에서 무(無)에 걸쳐 있는 삶의 전체 지평으로부터 그것의 존재 의미와 진리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주식회사를 성찰하는 경우에도 철학은 그것의 경제적 측면과 법적 측면은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등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측면을 두루 살펴, 삶의 총체성으로부터 그것의 의미와 진리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주식회사 역시 이처럼 철학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그 의미와 진리가 비판적으로 되물어지는 한에서만, 삶의 총체성의 지평 속에서 제 자리를 잡을 수도 있고 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서준식 선생의 표현에 기대어 말하자면 철학은 주식회사를 위해서도 그 존재의 본래적 진리를 드러내고 그 나아갈 &ldquo;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rdquo;고 또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식회사는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자 존재의 진리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lsquo;언어가 존재의 집&rsquo;이라 말한 것에 맞서, 주식회사야말로 &lsquo;존재의 집&rsquo;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이다. 노동자가 존재하는 장소는 회사이다. 그리고 모든 회사들 가운데서 가장 지배적인 회사가 주식회사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식회사의 존재의 진리를 묻는 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의 진리를 묻는 것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하여 이 책에서 철학자인 내가 주식회사의 본질을 물었으나, 나는 이 문제가 나처럼 보잘것없는 학자에겐 버거운 과제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다른 훌륭한 학자들이 묻지 않았던 까닭에 할 수 없이 이 물음을 물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허술하고 빈 구석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러 해 동안 준비를 하고, 지난겨울 집중적으로 책을 쓰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구하려 애쓰기는 했으나, 내 말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러므로 경영권은 그 자체로서는 누구의 것도 아니므로 노동자들에게 위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말을 꺼내면,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흘려듣거나 아니면 마치 지동설을 처음 듣는 중세의 신학자들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가운데서 꼭 한 번 내 생각을 듣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질문하고 반론을 펴면서 장시간 토론해준 경제학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배재대학교의 김진국 교수이다. 지난여름 그와의 토론 후 나는 이제 내 생각을 책으로 옮겨도 좋겠다는 확신을 얻었다. 회사법의 전문가인 전남대 법대 정영진 교수는 원고를 읽고 친절하게 자문해주었다. 『삼성을 생각한다』의 김용철 변호사와는 책을 쓰기 전부터 생각을 나누었고 책을 쓰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원고를 보내 자문을 청했는데 그 분의 호의적 관심과 흔쾌한 동의가 내겐 대단히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강화도의 박진화 화백은 노동자 경영권을 두고 기업인들과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역시 내겐 확신을 굳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학생 대안포럼〉과 진보신당 학생위원회의 〈적록포럼〉에 초청받아 노동자 경영권을 주제로 강연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대학생들의 적극적 관심과 날카로운 질문이 내 생각을 갈고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노동자들과는 이 주제를 두고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지난해 봄 진보신당의 진로를 둘러싼 토론회에 초대 받아 갔을 때 나는 간략하게나마 노동자 경영권에 대해 말을 꺼냈다. 뒷풀이 자리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해고되어 힘겨운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 이경수 대림자동차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이 왜 그런 얘기를 지금까지 아무도 한 사람이 없었느냐고 물으면서 팸플릿 형태라도 좋으니 빨리 책으로 내달라고 부탁했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열 명의 학자보다 한 사람의 노동자의 격려가 내겐 더 큰 힘이었다. 그 부탁에 응답하여 처음엔 팸플릿처럼 짧고 읽기 쉬운 책을 쓰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책은 점점 더 길어지고 나는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이 책을 한참 쓰고 있던 어느 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 문득 또 다른 내가 나에게 물었다. &lsquo;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책인데 중학교 졸업한 노동자도 이해할 수 있게 쓰고 있어?&rsquo; 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또 다른 나에게 대답했다. &lsquo;요즘은 노동자들도 태반이 대학 나온 사람들이야!&rsquo; 또 다른 나는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흐른 뒤에 내가 덧붙였다. &lsquo;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누구나 곱씹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겠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은 없다. 자본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이다.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 설정한 첫 번째 기준은 빈틈없는 철저함이었다. 철저성의 원칙이 대중성과 충돌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현장의 노동자들이 이 책을 한 번 읽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두 번 세 번 다시 곱씹어 읽으면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극히 단순한 말이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 그러므로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하듯이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된다. 이 쉽고 단순한 주장에 대해 근거를 알고 싶은 사람은 이제 본문을 보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도서출판 꾸리에의 강경미 대표와 문부식 선생께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금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분들 같은 친구들을 새로 만날 수 있으니, 늙어가는 것도 마냥 서운한 일만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 2. 29. <br /> 김상봉</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1</span></strong></span></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br /> <span style="font-size: larger">바</span>보 같은 <br /> 물</span><span style="font-size: larg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음</span></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right: 30pt"><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4세는 &lsquo;짐이 국가다&rsquo;라고 했다. 이는 한갓 허세가 아니라 왕권신수설이라는 제법 심오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확고한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의 농담이라 치부하지만, 그 시대에는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혁명에 의해 국가가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font-size: small"><b>물음의 <br /> 시작</b></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strong> 내가 혼자서 이런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은 1987년 남의 나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국은 6월항쟁으로 군부독재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독재가 무너지고 나면 머지않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가 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내가 생각해도 분명한 일이었다. 누구의 노예도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는 것은 사람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다. 하지만 세상엔 다른 사람을 노예로 삼아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자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억압에 대한 저항과 자유를 위한 투쟁도 끝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억압의 주체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므로 저항과 투쟁의 표적 또한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를테면 동학농민전쟁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기본적으로 왕조시대에 봉건왕조와 양반계급이 백성을 억압하는 것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그 저항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라가 통째로 제국주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 일어난 3.1운동은 민족적 저항이었다. 해방이 된 뒤 4.19에서 부․마(1979년 부산&middot;마산 민중항쟁)와 광주(1980년 광주민중혁명)를 거쳐 87년 6월항쟁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우리는 다시 국가권력을 찬탈한 독재자들에 저항해 싸워야 했던가? 그렇게 이어져 온 저항과 항쟁의 역사는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니, 생각하면 할수록 자랑스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유구한 억압과 저항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군부 독재자들이 물러간 자리에 자본가들이 왕 노릇 하는 것을 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87년 당시에 내가 무슨 점쟁이처럼 그 이후 일어날 일을 예상한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후 한국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든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참된 자유가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그 당시 내가 아무리 학문이 얕고 생각이 짧다 하더라도 불 보듯이 명확한 일이었다. 다만 독재타도가 선결문제가 되어 있었을 뿐, 이미 안으로는 산업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밖으로는 나라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 돌아가는 상황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에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것이 보편적이고 절박한 문제라 해서 아무나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생각하거나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분야에 따라 엄연히 전문가들이 있고 원칙적으로 그 전문가들이 해당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란 다른 무엇보다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이름이요, 그런 만큼 자본주의를 극복할 길을 찾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또 그 극복의 방안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경청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나는 학창시절부터 나의 본업인 철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도 틈틈이 경제학은 물론 다른 사회과학자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려 애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의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인정하고 다만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그 체제 자체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가장 좋은 경제체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고 어떻게 청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나는 자본주의의 비판과 극복을 위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서 시작해 왜 멸망할 수밖에 없는지 그 필연성을 설명하는 데 마르크스만큼 &lsquo;과학적으로&rsquo; 이로정연하게 설명한 사람은 예전에도 없었고, 적어도 내가 아는 한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내가 마르크스-엥겔스와 그 후예들이 자본주의 극복의 길을 어떻게 제시하는지를 살펴보기 시작한 뒤에 나는 갈수록 당혹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제시하는 이상은 너무 높은데 반해 그 이상에 이르는 길은 너무 모호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즉 개인이 분업에 복종하는 예속적 상태가 사라지고 이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대립도 사라진 후에; 노동이 삶을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으뜸가는 삶의 욕구가 된 후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성장하고, 조합적 부의 모든 원천이 흘러넘치고 난 후에-그때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상의 실현가능성을 의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이런 이상을 싫다 하겠는가? 비록 완전히 실현될 수 없다 하더라도 조금이나마 저 이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을 위해 내 모든 삶을 다 바쳐도 좋겠다는 것은 또래 젊은이들과 함께 내가 품었던 소망이기도 했다. 문제는 꿈 그 자체가 아니라 꿈을 실현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예적 예속을 철폐할 수 있으며, 또 노동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삶의 욕망이 되고 그런 까닭에 개인들의 모든 가능성이 최고도로 발휘되어 결과적으로 생산력도 발전하고 더 이상 결핍이 없어 각자는 능력에 따라 일하면 되고 그러면서도 필요한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그런 사회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잘 알려진 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물음에 대해 &ldquo;사적 소유의 철폐&rdquo;가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문구에 한 마디를 더 붙여 &lsquo;생산수단의&rsquo; 사적 소유의 철폐라고 말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왜곡 없이 표현하게 될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ldquo;5. 국가 자본 및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하여 신용을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 6. 운송수단을 국가 수중으로 집중. 7.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 및 생산도구의 증대. 공동계획에 의한 토지의 개간 및 개량&rdquo;등을 생산수단 사회화의 주된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계획경제야말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노동해방의 길이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나는 단지 생산수단이 &lsquo;국유화&rsquo;된다 해서 노동자들이 해방되리라는 추론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기업을 소유하고, 국가가 임명한 관료가 공장을 관리하고 경영한다 해서 노동자가 억압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국가의 권력을 독점한 자가 자본을 소유한 자에 비해 더 선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보자면 생산 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든 자본가가 소유하든 노동자가 공장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국가가 &ldquo;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rdquo;가 아니라 &ldquo;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rdquo;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선량한 독재의 주체라고 가정하고 말한다. 어쩌면 국가권력을 장악한 레닌이나 스탈린은 자기 자신을 해방된 프롤레타리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스탈린적 독재의 객체일 뿐인 노동자라면?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그런 독재의 희생자인 농민이라면? 아무리 선량한 독재라 하더라도 그 독재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노동자는 주인이 바뀌었을 뿐 예속된 노예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독재 아래 있는 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라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타인의 후견과 보살핌 아래 있는 사람을 자유인이라 할 수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직 소련이 붕괴되기 전이었던 시절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쁘띠부르주아적 소아병이라고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우에도 내 자유를 그들이 말하는 독재에 헌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자본에 의한 인간의 예속이 명백한 악이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한 인간의 예속 역시 어떤 방식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악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박정희의 독재가 나쁘다면 김일성의 독재도 나쁜 것이다. 나는 그 둘 사이에 대단한 차이라도 있는 듯이 장광설을 늘어놓는 친구들을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둘 다 나쁘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건만, 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또 할 수 있는지 누구에게도 대답을 듣지 못했고 나 스스로 그 대답을 찾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왜 노동자들이 사장을 뽑으면 안 되는가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노동자의 자유와 주체성은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 하지만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어떤 노동자도 &lsquo;홀로주체&rsquo;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의 자유로운 자기형성은 동료 노동자와의 만남 속에서 생산활동의 &lsquo;서로주체&rsquo;가 되어 그것을 공동으로 결정하고 형성하는 활동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공장이나 기업 내에서 이처럼 노동자 공동의 자기결정이 일상화된다면, 기업은 임금노예들의 강제노동수용소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도 같은 자유 시민들의 삶의 공동체에 가까워지게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거대화되고 전문화된 기업 내에서 모든 일을 모든 노동자들이 때마다 토론해서 같이 결정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공상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모든 공화국들이 그렇게 하듯이 기업도 전문경영인 사장을 적절한 임기를 두고 노동자들이 선출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가 노동자들의 신임을 얻으면 계속 사장 노릇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사장이 물러나지 않으려면 노동자들의 뜻을 따라야 할 것이므로, 이렇게 되면 우리는 비록 간접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의 공동의 의지에 따라 회사가 운영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장은 아테네 같은 폴리스가 되고 노동자는 그 폴리스의 주권자인 자유로운 시민이 될 것이다. 공장이나 기업이 그런 폴리스 또는 그런 공화국이 되면 안 되는 까닭이라도 있는가? 이것이 막연하나마 20여 년 전 내가 품었던 두서없는 생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기업이 된 <br /> 국가</b></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더 진척시킬 수 없었다. 주관적으로 보자면 아직 내가 그 생각을 끝까지 이끌고 갈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설령 이런 생각들이 성숙해 어떤 열매를 맺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그런 생각이 무슨 대단한 반향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진 산업국가들은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도 달성하지 못한 처지에 경제의 민주화를 생각하기엔 너무 이른 시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20여 년 한국도 세계도 변했다. 그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오래전 함석헌이 말했듯이 오늘날 국가가 더도 덜도 아니고 기업국가가 되었다는 데 있다. 기업국가란-링컨의 유명한 말에 빗대어 표현하자면-기업을 위한, 기업에 의한, 기업의 국가를 의미한다.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의 국가가 아니라, 기업을 위해 존재하며, 기업에 의해 통제되고 조종되며, 그런 까닭에 기업의 이윤추구의 수단이 되어버린 국가가 바로 기업국가이다. 그 결과 점점 더 기업을 닮고 기업에 동화되어 이윽고 그 자체로서 기업이 되어버린 국가가 바로 기업국가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그런 기업국가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변화는 나라 안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모르는 사이 다시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기업이야말로 어차피 사장을 선거로 뽑는 단체가 아니므로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정신에 투철한 학자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경제제도와 자유민주주의가 동전의 앞뒷면처럼 공속한다고 믿지만 이는 가엾은 자기기만이다. 특히 한국처럼 사회적 관계에서도 봉건적인 주종관계가 다 청산되지 못한 나라에서 기업은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이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부하직원도 퇴근하지 못하는 조직, 주인이 화장실을 가지 않는다고 머슴도 화장실을 가지 못하는 조직이 재벌 기업이다. 그리고 그 많은 기업집단의 지배권을 2대, 3대를 이어 자식에게 세습하는 집단이 재벌 기업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와 김일성, 김정일의 권력세습을 합친 것이 바로 이 나라 재벌의 행태인 것이다. 거기 무슨 민주주의의 정신이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까닭에 국가가 통째로 기업국가가 되어버리면 나라 안의 모든 공동체들 역시 민주주의가 질식하고 독재와 권위주의가 지배하게 되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 총장을 교수를 비롯한 대학 구성원들이 선출하는 것은 87년 민주화의 중요한 성과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라가 민주화된 만큼 나라 안의 크고 작은 공동체들 역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즈음 우리는 나라가 기업국가화 되면서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국립대학의 총장직선제를 폐지할 것을 압박하는 것이 이즈음의 상황이다. 그 까닭은 대학도 기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왜 그래야 하는가? 왜 국가가 기업이 되어야 하며, 왜 국가 내의 모든 조직과 기관이 기업을 닮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 까닭은 국가의 목적이 기업의 목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업의 목적이 이윤추구이듯, 국가 역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 내의 다른 모든 공동체들도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은 조직이 있다면, 그것은 무위도식하는 조직, 국가와 사회에 폐를 끼치는 조직이라는 것이 이즈음의 이데올로기이다. 국가가 기업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이처럼 경제적 이익의 추구가 국가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치의 원리와 경제의 원리는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는 자유의 이념에 기초하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필연성의 원리에 매여 있고, 하나는 정의를 추구하지만 다른 하나는 이익을 추구하며, 하나가 공공성의 원리라면 다른 하나는 사사로운 개별성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국가경영의 원리와 기업경영의 원리 역시 같은 것일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업이 아무리 많은 사람을 상대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것은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가 설령 어떤 기업을 운영하더라도 그것은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적 복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국가가 기업화되면서 국가와 기업의 이런 구별이 사라지고, 아예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추구하는 이윤이 우리 모두를 위한 이윤일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굳이 나쁘다 말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은 결코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는 이익만이 자본주의적 기업이 추구하는 이윤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플라톤의 철학과 베토벤의 음악을 자기 지갑이나 금고 속에 독점할 수 없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공공적 존재자이자 보편적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자기 지갑이나 금고에 넣을 수 있는 것, 자기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 오직 그렇게 사사로운 것만이 기업이 추구하는 이익이다. 그러므로 국가가 기업의 이윤추구의 도구가 되어버리면, 우리의 삶에서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의 집은 사적 이윤이라는 염산이 섞인 빗물에 침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되면 너와 나의 인격적 만남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한 경쟁과 다툼 속에서 찢어지고 우리는 서로 고립되며, 결국에는 경제적으로도 가난해진다. 왜냐하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까닭은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마지막 한 사람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경제적 양극화란 국가가 기업이 될 때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말,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92"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6_%EA%B8%B0%EC%97%85%EC%9D%B4%20%EB%90%9C%20%EA%B5%AD%EA%B0%80/%EA%B8%B0%EC%97%85%EC%9D%80%20%EB%88%84%EA%B5%AC%EC%9D%98%20%EA%B2%83%EC%9D%B8%EA%B0%80_%ED%95%84%EC%9E%90.jpg" />김상봉</strong><br /> &lsquo;만남&rsquo;의 철학자는 &lsquo;길&rsquo; 위에서 쉬는 법이 없다. 80년대 초반 을지로 야학에서 어린 노동자들과 추운 밤을 보낸 시절부터, 독일로 건너가 칸트에 대한 논문을 끝내고 돌아온 뒤 지금까지 진정한 만남의 공동체를 향한 그의 열정은 계속되고 있다.<br /> 한때는 &lsquo;거리의 철학자&rsquo;가 그의 이름이었다. 막막한 길 위에서 7년 동안 다섯 권의 철학책을 썼고,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lt;학벌없는사회&gt;의 산파가 되었다. 그의 철학의 핵심어는 &lsquo;서로주체성&rsquo;이며, 외부로부터 이식된 근대를 거부하여 주체성의 새로운 지평을 독자적으로 개척했던 &lsquo;미완의 함석헌&rsquo;은 그의 일생의 숙제이다. 이런 그에게 자본권력과의 싸움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유학 당시 매일매일 빼곡이 써내려간 작은 공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br /> &ldquo;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rdquo; &lt;철학의 연습을 위한 짧은 메모들&gt;(1987. 11. 23)<br /> 6월항쟁을 &lsquo;성공한 항쟁&rsquo;이라 말하는 언설의 이면에는 그 뒤 이어졌던 7․8월 노동자 대투쟁의 기억이 배제되곤 했다. 그 결과 &lsquo;민주정부 10년&rsquo;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기업지배국가의 완성으로 이어지는 슬픈 역설이 탄생했던 것이다. 오늘의 금융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지배원리는 주식회사이며, 자본의 소유권을 당연시하고 전횡을 방치하는 한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남겨질 수밖에 없다. &lsquo;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rsquo;라는 물음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인간의 자유가 자본에 영구히 종속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lsquo;다른 민주주의&rsquo;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안내한다.<br /> 『호모 에티쿠스』, 『나르시스의 꿈』,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학벌사회』, 『만남』, 『굿바이 삼성』, 『다음 국가를 말하다』 등 다수의 책을 펴냈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8 오전 10:01:00이오덕·김용철의 ‘하느님 물건을 파는 참새’<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4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C%B0%B8%EC%83%88_%ED%91%9C%EC%A7%80.jpg" /><br /> <br /> <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가난뱅이 노점장수 참새는 하느님이 준 물건을 판다. 참새가 파는 하느님 물건은 이슬과 풀잎, 나팔꽃과 향긋한 바람, 하늘의 구름조각, 빛, 희망, 평화, 기쁨과 노래, 웃음과 아가의 마음 같은 것들이다. 한참 팔고 난 노점장수 참새들은 이제 거저 준다. 어른과 아이에게, 강아지, 송아지, 고양이에게도 마구 나누어 준다. 참새가 파는 하느님의 물건을 사기도 하고 거저 받기도 한 세상은 행복과 평화가 넘쳐난다. 이오덕 선생이 남긴 유고 시에 김용철 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이오덕 선생은 이런 하느님의 물건을 우리가 좋아하고 가꿔야 이 세계에 희망이 있다고 시를 통해 말하는 듯하다. -나비</span><hr />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2.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3.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5.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6(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7.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8.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9.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3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A%B7%B8%EB%A6%BC10.jpg" /><br /> <br /> <br /> (본문 일부)</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8"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8_%ED%95%98%EB%8A%90%EB%8B%98%20%EB%AC%BC%EA%B1%B4%EC%9D%84%20%ED%8C%8C%EB%8A%94%20%EC%B0%B8%EC%83%88/%EC%9E%91%EA%B0%80%20%EC%82%AC%EC%A7%84_%EC%9D%B4%EC%98%A4%EB%8D%95.jpg" />시 | 이오덕</strong><br /> 1925년 경상북도 청송에서 태어났습니다. 1943년 영덕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초등교원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middot;교장을 지냈습니다. 1954년 &lt;소년세계&gt;에 동시 &lsquo;진달래&rsquo;를 처음 발표하였고, 이후 1966년 《별들의 합창》, 1969년 《탱자나무 울타리》 같은 동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한국일보〉에 수필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br /> 1983년 교사들을 모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고, 퇴임 후에는 우리말연구소를 만들어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습니다. 지식인은 물론 일반인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던 번역 말투와 일본 말투의 잔재를 지적하고, 이를 걸러내기 위해 1992년 《우리글 바로쓰기》와 1995년 《우리문장 바로쓰기》를 집필하였습니다.<br /> 교육현장에서 쓰는 &lsquo;글짓기&rsquo;라는 용어를 &lsquo;글쓰기&rsquo;로 고쳐 쓸 것을 주장하였고, 어린이들이 쓰는 말과 글 자체를 뛰어난 문학작품이라 여겨 1979년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1978년 《일하는 아이들》 같은 10여 권에 이르는 어린 제자들의 문집을 출판했습니다. 아동문학의 진로와 관련하여 1977년 출판한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기존 아동문학을 &lsquo;겨레의 운명이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유아독존의 심리 세계만을 희롱하여 이국적인 것, 환상적인 것, 탐미적인 것, 혹은 감각적인 기교만을 존중하는 경향&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아이들의 건강한 시 정신을 옹호했습니다.<br /> 《민주교육으로 가는 길》,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 《어머니들에게 드리는 글》, 《교사와 학부모님께 드리는 글》, 《이오덕 유고시집》, 《삶과 믿음의 교실》,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같은 5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습니다. <br /> 한국아동문학상(1976), 단재상(1988),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상(1999), 은관문화훈장(2002)을 받았습니다. 2003년 8월 25일 충북 충주시 무너미 마을 고든박골에서 돌아가셨습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그림 | 김용철</strong><br /> 1960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양구 웅진리 고향에서 별자리 공부를 하며, 소양강 기슭의 아름다운 둘레 길을 걸어 산골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며 아이들에게 재밌고 감동 있는 그림을 그릴 궁리를 하며 삽니다. 《훨훨 간다》,《낮에 나온 반달》,《길 아저씨 손 아저씨》,《흰 사슴을 타고 간 여행》 같은 많은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7 오후 2:31:00‘스틸라이프’ 19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64"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9%ED%9A%8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9.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골동품점 &lsquo;메리 포핀스&rsquo; 3</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커피가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군요. 커피 한 잔을 뽑아서 소리가 나지 않는 첼로 곁에 놓인 골동의자에 앉아보아요. 문득 밥 딜런의 &lsquo;one more cup of coffee&rsquo;가 듣고 싶어져요. 수녀시절 저는 혼자 그 노래를 즐겨 들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제 남편이 된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이 다 우울증 환자였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좋았던 이유는 마음이 건강하기 때문이랬어요. 정말 저는 우울증이 뭔지 몰라요. 심심한 것조차 재밌는 걸요. 움직이지 않는 골동품 사이를 걸어 다니며 저는 사물들에게 말을 걸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리가 나지 않는 첼로나 오래된 고장 난 라디오에게 다가가 마법이 풀리기를 기도하지요. 그럼 정말 안 들리던 라디오가 조그만 신음소리를 내기도 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영화에선가 들었던 대사 한마디가 갑자기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듯 아프게 떠올라요. 시간을 낭비한 죄, 그래요. 제가 수녀생활을 했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이 시간 낭비는 아니었을까요? 결국 제게 어울리지도 않는 수녀생활을 끝내고 그 사람과 함께했던 그 아득한 시간들이 시간 낭비였을까요? 아니, 제 온 생애가 다 시간 낭비는 아닐는지요. 우리의 삶이 낭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쯤일지 궁금해져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저와 결혼을 한 뒤에도 남편의 아내 찾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가끔 남편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출장 가는 거라고 핑계를 대곤 했지만, 누군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는 눈치였어요. 모르는 척하는 제 마음은 황량한 바람이 부는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죠. 어쩌면 남편은 그녀들의 우울증을 사랑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네요. 그는 세상사는 일이 너무 힘들다, 회사 다니기 싫다, 그렇게 매일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집에 돌아와 그냥 당신을 의지하며 같이 가게나 돌보면 안 되겠느냐 물었어요. &ldquo;쉬고 싶다.&rdquo; 남편의 지친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쩌겠어요? 우리는 할 수 없이 24시간 붙어있게 되었어요. 차라리 풀빵을 굽는 게 나았을 거예요. 한 사람은 반죽을 하고 한 사람은 틀에 넣어 풀빵을 굽고, 서로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하루 종일 골동품 속에 파묻혀 손님을 기다렸어요. 이상하게도 그와 같이 있는 날은 손님이 더 없었어요. 가끔 한 사람도 오지 않는 날도 있었죠. 마치 대학 시절 보았던 연극 속의 &lsquo;고도&rsquo;를 기다리는 기분이었어요. 언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처는 전염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남편은 저를 사랑하고 의지했지만 제게 평화를 주지는 못했어요. 혼자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둘이 함께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그렇게 힘이 들까요? 남편의 한숨 소리가 가게의 적막을 뚫고 고장 난 라디오의 신음처럼 들리곤 했어요. 하나의 고독에서 하나의 고독을 빼면 우리 둘 중 하나라도 고독하지 않아야 되죠. 하지만 하나의 고독에 다른 하나의 고독을 곱하는 격이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심한 우울증을 앓았다는 제 남편의 아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져요. 그녀가 행복해야 남편의 우울증도 나을 것 같아서요. 저는 수녀생활과 결혼생활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그렇고말고요. 남편의 한숨 소리는 점점 더 커졌어요. 어느 날부터 그는 가게에 나오지 않기 시작했어요.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지며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졌죠.</p> <p style="text-align: justify">친구가 한다는 다단계 사업에 관심을 가지더니 아예 푹 빠져버렸어요. 골동품도 많은 판에 그는 수많은 물건들을 사들였어요. 비누, 세제, 화장품, 치약, 각종 건강식품, 일단 본인이 쓰기 시작해야 남들도 쓰는 거라더군요. 하도 조르는지라 우리는 가게 문을 닫고 다단계 사업 설명회장에 가서 앉아 있곤 했어요. 저는 문득 이것이 일종의 종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선 믿어야만 다단계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거거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남편의 문제점은 처음엔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 외로운 남자처럼 보여서 그 외로움을 덜어주는 일이 행복하기도 했죠. 하지만 남편의 문제점은 조금씩 조금씩, 라디오의 채널을 돌릴 때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커져가고 있었어요.<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3-27 오후 1:24:00데노라의 ‘아도르노 그 이후’<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5_%EC%95%84%EB%8F%84%EB%A5%B4%EB%85%B8%20%EA%B7%B8%20%EC%9D%B4%ED%9B%84/%EC%95%84%EB%8F%84%EB%A5%B4%EB%85%B8%EA%B7%B8%EC%9D%B4%ED%9B%84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성 인벤션<br /> &bull; 책을 펴내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80년대 초, 지금은 작고한 저명한 미국 사회학자의 대중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처음 인사를 한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분은 정중하게 나의 학문적 열망의 대상에 대해 물어보셨다. 나는 아도르노의 사회음악적인 작업에 대한 관심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다(나의 학부 졸업논문은『신음악의 철학』〔DeNora, 1986a를 볼 것〕에 대한 것이었으며 나는 아도르노의 가장 열렬한 신봉자 가운데 한 사람임을 자처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서 아도르노를 끝내고 나면 무엇을 할 건가요? 하긴, 아도르노를 끝내기는 할 건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말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엽, 샌디에이고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교(UCSD) 사회학과 철학박사과정 2년차를 지나면서 나는 아도르노를 끝냈다. 아니, 당시에는 그렇게 여겼다. 언어사회학&middot;민속방법론&middot;행위이론을 강조했던 커리큘럼에 보조를 맞추고, 하워드 베커(Howard Becker)의『예술계』(Art Worlds, 1982)를 읽던 나에게 음악과 의식, 음악과 지배의 연결고리에 대한 물음은 &lsquo;불가능한&rsquo; 것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런 물음들이 별로 흥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형성 중인 명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음악적 정체성과 가치의 물음에 힘쓰기 시작했다. 딱 들어맞는 사례로 18세기 말엽 빈의 베토벤과 그의 음악세계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때 아도르노는 저 멀리 동떨어져 있는 듯했으며 더군다나 경험적으로 의심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음악제도의 역사에 몰두함에 따라 아도르노의 책과 저술만이 아니라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열심히 읽던, 그의 작업에 대한 다른 사람의 다양한 연구는 점점 더 책꽂이 구석으로 멀찌감치 밀려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음악사회학자로 일하면서 다시 아도르노로 돌아오기까지는 20년도 더 걸렸다. 그리고 이제는 지지자나 반대자의 역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다. 사회음악적인 화젯거리를 둘러싼 아도르노의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 사이에서 &lsquo;주제&rsquo;와 &lsquo;대(對)주제&rsquo;의 상호유희를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흥미롭다. 이와 같은 인벤션(invention)을 염두에 둘 때 비로소 독자는 이 책이 음악에 대한 아도르노의 작업을 논구하면서, 그와 더불어 현행 음악사회학 및 같은 계열의 영역에서 아도르노가 받아온 비판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7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5_%EC%95%84%EB%8F%84%EB%A5%B4%EB%85%B8%20%EA%B7%B8%20%EC%9D%B4%ED%9B%84/%EA%B7%B8%EB%A6%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도르노의 탄생 100주년(2003년 9월 11일)에 즈음하여 출간된 이 책은 아도르노에 기반을 두고 그를 현실에 입각한 방식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몇몇 지점을 조명해줄 것이다. 아도르노의 음악과 관련한 모든 저작과 그에 대한 비판을 두루 섭렵하면서, 나는 아도르노의 사회음악적인 작업이 그 단초에서부터 의심할 바 없이 얼마나 뛰어난지 제언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것을 완성된 시스템으로 간주할 경우 얻을 것이 얼마나 없는지 제언할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아도르노는 일평생 자신의 작업을 객관화 비판에 쏟아부었다. 그런 만큼 아도르노의 작업 일체를 변화시키거나 고치는 것이, 불가능한 정전(正典)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그 대신 우리는 더 나아간 발전에 도움이 되는 통찰을 위해서 그의 저술을 고찰하도록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도르노가『음악사회학 입문』을 출간한 지 40년이 되었으나, 그동안 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은 무성했다. 아도르노 특유의 음악사회학을 겨냥한 비평은 가지각색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의 진지함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없고 그가 제기했던 물음의 심오함을 의심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이유에서 아도르노는 여전히 시금석 같은 인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목표는 아도르노를 행위지향적이고 현실에 입각한 음악사회학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음악사회학을 위한 일종의 프로그램(나의 견해와 이 분야의 접근방식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될 것이라 기대한다. 특히 아도르노가 내놓은 의제의 핵심을 이룬 논제들을 경험적 연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식으로 논의하는 데 목표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을 &lsquo;아도르노 그 이후&rsquo;(After Adorno)라고 지었다. 여기에 담긴 이중의 의미를 음미하기를 바라건대, 그것은 아도르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물론이요(음악의 구조&middot;청취양태&middot;인식&middot;통제〔control〕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사를 음악사회학이 새롭게 다시 주목함으로써 쇄신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와 동시에 아도르노의 원래 방법과 이론화 수준을 넘어 (그 곁에 나란히 서서?) 경험적 연구를 일구어낸다는 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1장은 아도르노의 사회음악적인 작업에 대한 전략적으로 간추린 요약이다. 이는 결국 사회학자들에 의해 아도르노가 비판을 받아온 핵심 주제들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제2장은 음악의 사회학과 신(新)음악학을 재검토하면서 그것들 각각이 (사회학에서) 음악과 (음악학에서) 사회에 대해 갖는 개념구상을 비판한다. 거기서부터 음악적 사건(Musical Event)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 현실에 입각한 행위지향적인 조사연구의 프로그램을 서술한다. 이 프로그램은 아도르노의 관심사를 일반성의 &lsquo;올바른&rsquo; 수준에서, 즉 특정화되어 상론될 수 있는 음악실천과 관련된 수준에서 확립한다고 사료된다. 이런 초점은 미시적 수준의 분석을 함께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논증하건대, 이들 관심사를 행위의 수준에서 조명함으로써 전통적인 거시사회학의 관심사에 도움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2장에서 윤곽을 그린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3장부터 제5장까지는 아도르노의 여러 가지 주제를 논구한다. 의식 및 인식과 음악의 관계(제3장), 주관성과 감정(제4장), 그리고 이들 주제를 한데 아우르는 질서 짓기(ordering)와 사회적 통제라는 관념(제5장)이 그것이다. 제6장 막바지에는 경험적으로 고안된 음악사회학이 아도르노의 원래 관심사와 양립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실제로 문화이론일 수 있는 정당한 논거가 다 나왔기를 바란다. 인간의 행위수행과의 관계 속에서 문화(음악)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식별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말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73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5_%EC%95%84%EB%8F%84%EB%A5%B4%EB%85%B8%20%EA%B7%B8%20%EC%9D%B4%ED%9B%84/%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신봉자에 맞서 옹호된 아도르노?</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도르노는 20세기 전반부 동안 음악이 지닌 힘을 이론화하기 위해서<br /> 여느 학자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ldquo;아도르노를 그저 지독한 엘리트<br /> 비관주의자라고 일축하기보다는 활용하려고 한다면&rdquo; 아도르노가 제기한 문제는<br /> 논구될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에 대한 가장 근사한 존경의 표시는<br /> 그의 작업을 &lsquo;활용&rsquo;하는 데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서론─문제는 음악이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음악은 힘이 있다. 또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 문화와 시대를 가로질러 음악은 설득&middot;치료&middot;퇴폐, 그 밖의 다른 여러 형태의 변화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결합의 배후에 놓인 생각은 바로 음악이 의식에, 몸에, 감정에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과 합되어 있는 또 다른 생각은, 음악이 할 수 있는 바로 그 무엇 때문에 음악은 규제와 통제를 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구음악의 역사는 음악의 여러 힘을 징집하려는 시도와 질책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어 있다. 음악의 가장 흥미로운 힘은 가사나 오페라 대본과 뚜렷이 구별되는, 음이 지닌 속성이 그 중심에 있다. 종교음악 영역은 수많은 사례를 내놓는다. 기원후 800년경 샤를마뉴의 성가 개혁, 즉 교회음악을&ldquo;개정하고 숙청하고 바로잡아 개혁&rdquo;(Hoppin, 1978, 50쪽)하라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8세의 요구, 16세기 말엽 (정교한 폴리포니와 반대되는) 평이한 찬송가 부르기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요구, 그리고 얼마 후에 종교음악의 목표가&ldquo;회중을 불러모아 조직하는 것&rdquo;이라는 J. S. 바흐의 공식 견해 등은 잘 알려진 몇 가지 사례이다. 정치영역에서 음악은 그것이 갖는 효과로 인해 동원되거나 금지되어왔다.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기리는 교향곡을 의뢰받은 쇼스타코비치(이후 데카당스 음악을 작곡했다고 그가 받은 질책), 나치 독일의 무조음악 배척, 국가 연주를 둘러싼 대소동(섹스 피스톨스의「갓 세이브 더 퀸」과 지미 헨드릭스 버전의 미국 국가「성조기」), 이 모든 것은 음악이 충동질하여 여론 및(또는) 전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의 증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적인 관점에서 음악을 살펴보기 위해 시야를 넓히면 훨씬 더 극적인 사례들이 나타난다. 사례를 하나 들자면, 서방 미디어에서 보도된 대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거의 모든 형태의 음악이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음악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세계가 공유하는 한 가지 것이 있을 진대, 그것은 음악이 감당할 법한 그 무엇에 대한 인정, 때로는 그에 대한 두려움이렷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음악&middot;도덕성&middot;교육에 대한 논쟁은 아카데미 안팎에서 활발히 계속되고 있다. 이른바 모차르트 이펙트에 관한 논의, 헤비메탈이 젊은이에게 끼치는 효과에 대한 우려, 즉 수많은 음악 스타일의 파괴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가 있으며, 심지어 영국 자동차협회가 후원한, 음악이 주행안전에 끼치는 효과에 대한 연구도 있다. 어떤 경우엔 이들 논의에서 등장하는 음악이 음악 외적인 관심사의 희생양, 아니면 만만한 수비수(守備手)로 실려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음악이 신봉자나 후원자들의 문화를 비판하는 수단으로서 비판을 받을 때처럼), 음악의 음악적 속성이 힘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던져버리는 것은 성급하다. 음악이 효과를 갖는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에게 상식이다. 우리가 이를 알고 있는 이유는 이런 효과를 경험했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끼친 음악의 효과 때문에 우리는 음악을 찾기도 하고 피하기도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 말할 것 없이 문제는 음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사회이론 안에서 음악의 힘이라는 관념에 관심을 기울인 전통이 있었다. 그 전통은 적어도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플라톤의『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러고 보니 수호자들로서는 여기 어딘가에, 즉 음악에다 위병소를 지어야만 할 것 같네. &hellip;&hellip;그렇다면 처음에 말했듯 아이들이 놀이를 함에 있어서 음악을 통해 법과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네.(Plato, 1966, 72쪽)</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유명한 구절에서 분명히 전해지는 것은 사회질서가 미적인 질서, 의례적인 질서, 도덕적인 질서에 의해 조장되며(궁극적으로는 이런 질서들과 뒤엉켜 있으며) 결국엔 이런 질서가 의례와 여러 예술에 의해 보강된다는 생각이다. 이렇게 사회질서의 토대를 개념화하는 방도는 19세기 동안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 그 유산은 비록 음악의 역할이 간과된 저작이기는 하지만 (종교생활의-옮긴이) 원초적 형태에 대한 뒤르켐의 강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Durkheim, 1915)</p> <p style="text-align: justify">20세기에 기계적 재생산, 방송매체, 오락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음악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사유할 필요가 더욱더 강화되었으리라 예상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시몽 이후의 사회철학 안에서 음악의 중요성은 시들해졌다. 20세기에 사회학자와 사회이론가 들이 음악에 관여할 때에는, 음악의 사회적 힘이라는 논제에 손대지 않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 대신 음악은 사회구조를 &lsquo;반영&rsquo;하거나 사회구조와 평행관계에 있는 매체로서 훨씬 막연하게 정립되었다. 베버&middot;딜타이&middot;지멜&middot;소로킨과 같은 여러 다양한 이론가에게 특징적인, 본디 형식주의적인 패러다임은 도덕적 태도와 음악의 연결고리에 대한 좀더 공공연한 관심사를 실로 중성화시켰다(그들의 저작에 대한 논의는 Etzkorn, 1973 Zolberg, 1990 곳곳; Martin, 1995, 75~167쪽을 볼 것).</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이러한 중성화와 더불어 아주 다른 질문 공세가 이루어졌다. 즉 사회음악적인 연구의 관심사는 음악이 무엇을 &lsquo;야기했는가&rsquo;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무엇이 음악을 야기했는가 하는 관심으로 달라졌다. 이런 추세와 연관해 음악사회학(music sociology)은 음악의 사회학(sociology of music)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언어상의 미묘한 차이 안에서 음악과 사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사회 속의 음악(music in society)과 사회로서의 음악(music as society)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물음 가운데 몇몇이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그렇지 않았더라면 풍요로웠을 (현실에 입각한) 초점인 &lsquo;예술계&rsquo;와 &lsquo;문화의 생산&rsquo;이라는 접근방식(Peterson, 1978 Becker, 1982 DeNora, 1995)에서조차 음악의 효과에 대한 물음은 계속 답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과적으로 음악의 사회학 안에서 음악매체는 은근히 강등되었으며, 그 지위는 능동적인 구성요인 혹은 생명을 불어넣는 힘에서 생명이 없는 산물(설명되어야 할 대상)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같이 강등됨에 따라 음악은 20세기 동안 전문적인 학문의 논제가 되었으며, 학문의 사안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주체의 정열은 빠져나가버렸다. 오늘날 음악에 대한 일상적인 반응과 전문적인 설명 사이에 깊이 갈라진 틈은 정상이기도 하고 또 용납되기도 한 듯 보이게 되었을 정도이다. 최근 몇 년 새 (다음에서 서술되는) 변화의 징후가 있었으며 음악에 대한 학제적인 연구는 음악을 시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왔다. 이를테면 &lsquo;행위 중인&rsquo; 음악(music in action)을 향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5_%EC%95%84%EB%8F%84%EB%A5%B4%EB%85%B8%20%EA%B7%B8%20%EC%9D%B4%ED%9B%84/%EA%B7%B8%EB%A6%BC3.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도르노의 등장</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맥락 안에서부터 우리는 아도르노와 그의 사회음악적인 프로젝트 특유의 독특한 성질을 음미할 수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작곡가로서의 부차적 경력, 지리적이고 문화적인 추방과 이주, 비판적인 동료 이론가들과의 협력관계 등) 정녕 아도르노는 20세기 전반부 동안 음악이 지닌 힘을 이론화하기 위해 여느 학자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그의 저작과 방법이 여러 가지 흠잡힐 데가 있을 수 있음에도-아도르노를&ldquo;음악의 사회학의 아버지&rdquo;(Shepherd, 2001, 605쪽)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음악에 정통했던 아도르노에게 음악은 추상적으로 고찰될 논제가 아니었다. 음악은 그것을 성립시킨 사회적 힘들의 견지에서 고찰되든가 아니면 음악의 구조적 속성들의 견지에서 고찰할 논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음악은 살아 있는 역동적인 매체였다. 그리고 정녕 아도르노는 음악과 얽혀 있는 자신의 입각점에서부터 철학과 사회학 작업을 시작했음에 틀림없다. 다음 장들에서 서술되겠지만, 아도르노는 음악으로써 사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또한 자신의 사유를 다 바쳐서, 좋든 나쁘든 간에 음악이 의식을 변형시킬 방도를 궁리했다. 그리하여 다음의 사실을 시작부터 깨닫는 것이 절실하다. 아도르노에게 사회음악적인 탐구는 대단히 폭넓은 질문 범위(철학과 지식사회학, 의식의 문화사, 사회적 응집&middot;지배&middot;복종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던 어떤 관점에 열쇠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음악에 대한 아도르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업을 이처럼 훨씬 더 폭넓은 관심사 안에 깃들이게 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부정변증법의 이념</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도르노는 더없이 심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저작은 20세기의 파국적인 사건, 즉 파시즘, 제노사이드(민족 대량학살-옮긴이), 테러, 대량 파괴의 발발로 치닫고 말았던 이성의 실패를 탐구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는 의식의 변형이라고 지각됐던 것, 즉 권위주의적인 통치양식을 조장했던 것을 이해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아도르노의 프로젝트는 철학적으로는 이성비판과 더불어 시작하며, 사회학적으로는 의식과 그 조건에 대한 문화심리 연구와 더불어 끝을 맺는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아도르노의 작업을 이루는 이 두 가지 구성요소는 좀더 폭넓고 학제적인 프로젝트의 일부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도르노의 이성비판은 물질적 실재(material reality)가 그것을 서술하는 데 이용가능한 관념&middot;개념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생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실재라는 말로 아도르노가 의미한 것은 자연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경험의 특수성이기도 하다. 실재는 낱말&middot;치수&middot;개념&middot;범주에 의해서는 충분히 논구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잘해야 실재의 근사치로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념이나 현상의 이미지로 이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아도르노는 유물론자이자 실제적인 것(the actual)의 철학자였으며, 이는 그의 생애를 통틀어 변함이 없었다. 그의 작업은 관념과 물질적 실재 사이의 괴리를 눈에 띄게 강조했다. 이 간극 안에서 관념은 유용할 뿐더러 실은 &lsquo;효용&rsquo;까지 있을 수 있지만, 결코 영원히 &lsquo;참&rsquo;이거라거나 온전히 &lsquo;참&rsquo;이라고는 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도르노가 보기에 관념과 실재를 같다고 생각하는 것과 연관된 위험은 심상치 않았다. 첫째, 이와 같은 연관은 이성이 순응적이 되게 했으며 둘째, 이성에게서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성찰을 빼앗았다. 셋째, 이성 안에 권위주의의 경향이 똬리를 틀고 앉았는데, 이런 경향은 이성을 실재에 부응하도록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실재를 이성의 미리 디자인된 그릇에 꼭 맞추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런 위험은 근대의 상품 교환과 그것의 문화적 상관물, 즉 &lsquo;재화&rsquo;로서의 가치라는 생각 때문에 더 심해졌다. 급기야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이성의 성격이 변하고 말았다. 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로 팽창되었는가 하면 현실에 대한 과소 평가로 이어지게 되었다. 과학을 칭송하는 경향과, 아무런 물음 없이 과학의 기치 아래 조달되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경향은 이러한 팽창의 탁월한 예가 되었다. 그런 까닭에 실재와 이성의 비동일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현대철학의 과제였다. 이런 과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비평이었으며, 부정변증법의 이념을 통해서 진척되어야 할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middot;마르크스와 달리 아도르노는 실재에 &lsquo;대한&rsquo; 긍정적인 지식에 공헌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아도르노는 어떠한 형태의 종합도 모색하지 않았다. 그 종합이 실재에 대한 이상적인 편성(編成)의 견지에서 정립되든 아니면 결국 유토피아적인, 따라서 긍정적인 상태가 되고 마는 역사철학으로서 정립되든 간에 아도르노는 어떠한 형태의 종합도 모색하지 않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아도르노는 차이와 모순을 조명하고자 했다. 즉 잔여적인 것,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무의미(non-sense), 요컨대 사고의 기존 범주 안에 꼭 &lsquo;맞아&rsquo;떨어지지 않는 것을 조명하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도르노는 사고를 정련(精鍊)시키고자 했다. 이런 과제는 이번에는 이성을 유예된 재인(recognition)2)의 한 형태로 재배치하도록, 다시 말해 이성과 실재 사이의 끊임없는 비(非)재인의 계기로 재배치하도록 방향을 맞추었다. 이 비재인의 계기는 이번에는 한결 더 큰 복잡성을 드러낼 수단을 마련했다. &ldquo;전체는 비진리다&rdquo;라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아포리즘은 이런 주장을 압축적으로 잘 요약해준다. 부정변증법의 이념은 이성이 자기비판에 종사하는 과제를 수행하라는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물론 그의 작업에 스며들어 있는 이성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존중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 이념은 궁극적 으로 지식의 겸손에 대한 것이요, 지식이 지닌 불가분 사회적인 -따라서 도덕적인- 성격에 대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식에 대한 관심사는 아도르노의 사상 세계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그의 사상 세계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아도르노가 이야기하는 &lsquo;이성의 객관화하는 경향&rsquo;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다음 두 절에서 서술되듯이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객관화, 활동의 한 형태로서의 객관화를 이해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아도르노가 현대 세계에서 지식의 형태로서의 과학과 예술, 양자의 강등된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의 견해를 맥락화할 수 있다. 하나같이 아도르노의 철학적 단초를 눈에 띄게 강조하는 이런 논제는 결국엔 사회학적 관점이 아도르노의 작업의 고갱이라고 여길 법한 것에 착수하기 위한 포석을 마련해준다. 그의 작업의 고갱이란, ①객관화와 관계해 초점을 문화기구들이 담당하는 역할에 맞추는 것, ②그의 철학에 포함된 무의식 이론, ③두 번째 특성과 관계된 것으로 미적인 구조와 의식의 양식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한 관심사를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객관화란 무엇인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객관화하는 심성(mentality)은 변증법적 사유에서 떠나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 대신 그것은 인간의 관념(개념)과 물질적 실재 사이의 동일성을 실재가 자명하게 보이도록 -그런 까닭에 교섭될 수 없게끔 보이도록-정립했다. 다음을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도르노가 볼 적에 객관화는 활동(프락시스)이었으며 개개의 습성3)을 통해서 이 일을 달성한 것은 바로 주체였다. 따라서 아도르노는 주체가 그 자신의 인식적인 소외에 공모한다고 보았다. 이런 공모관계의 문화적 기초야말로 사회학자 아도르노가 탐구하고자 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와 동시에 객관화는 인식적 폭력이었다(이런 의미에서 아도르노의 초점은 담론 및 그것이 지닌 총체적 힘에 대한 포스트구조주의의 관심사와 부분적으로 겹친다). 왜냐하면 객관화하는 심성이 하나의 습성으로 확립되기에 이르렀을 때, 실재의 본성에 대한 미리 주어진 가정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을 삭제하려는 충동은 또한 틀에 박힌 일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그런 충동은 물질적 실재를 지각하고 반응하는 암묵적인 실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일치에 대한 지각에서 멀리 떠나간, 이러한 객관화하는 의식 형태가 어김없이 으레 보수적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객관화하는 의식 형태는 (물질적 실재에 의해 범주를 끊임없이 따져 묻는 것과 반대되는) 일반 범주의 재인(따라서 재생산)에 방향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체로서 객관화하는 의식 형태는 세계에 대한 총칭적인(generic) 방향제시를 포괄했다. 이를 테면 사람들의 계급 및 범주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에 의해서, 그리고 개인을 범주의 일례로 다룸으로써 특징지어졌다. 그것은 또한 일반 유형으로서의 사물(물질적 환경의 측면)의 본성에 대한 가정, 즉 작용할 경우 사물에 대한 가장 가깝고 친밀한 경험을 철폐하는 가정을 수반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도르노가 보기에 이는 탈인간화된 의식이었을 뿐만 아니라(그것은 결국엔 사고의 일반 범주를 확장시킬 특정한 차이를 살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외면적으로 강요된 통치 관계에 순종하는 고분고분한 의식이었다. 이와 같은 의식이 관념과 물질적 실재 사이에 만든 동일화에서 안정적인(신뢰할 만한) 물질세계와 사회세계에 대한 믿음,『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빌리자면 &lsquo;그저 존재하는 것&rsquo;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도르노가 이따금씩 &lsquo;존재론적 이데올로기&rsquo;(Adorno, 1981, 62쪽)라고 일컫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종의 습성으로서의 존재론적 이데올로기를 특징짓는 것은 확실성에 대한 취향이다. 이는 아도르노가 보기엔 그 자체가 해이(解弛)한 인식적 기능작용의 한 징후였다. 그리고 이런 습성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곳, 현지의 수준에서, 행위자가 일반 개념을 강화하는(일반 개념과 동일시하는) 한에서 &lsquo;합리적인&rsquo; 행정감독(administration)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때 행위자는 &lsquo;지금 여기&rsquo;를 &lsquo;그때 거기&rsquo;의 견지에서, 즉 (행위자가) 하기로 되어 있다고들 하는 바로 그것의 관념에 꼭 &lsquo;맞추어&rsquo; 이해하려고 자신의 경험이나 행위의 특수성을 저 일반 개념에 따라 본뜬다. 활동으로서의 객관화(어떻게 행위자가 일반을 특수에다 꼭 &lsquo;맞추고&rsquo; 그럼으로써 특수에게 폭행을 가함과 동시에 통치 권력과 나란히 정렬하는지)를 실지로 예시하기 위해서, 아도르노의 관점이 비슷한 관심을 갖는 또 다른 갈래의 사회학-실재가 하나의 객관적 사실로 생산되기에 이르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지 고찰해볼 만하다. 예컨대 이런 논제를 다룬 민속방법론(ethnomethodology)의 관점을 살펴보자.<br /> <br /> <br /> (책을 펴내며,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티아 데노라(Tia DeNora)</strong><br />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영국 엑세터 대학 음악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같은 대학 사회철학연구소 소장으로 왕성한 조사연구와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사회학자로서 자리매김한 그녀는 특히 사회생활에서 음악의 사용과 힘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한다. 지금은 음악과 정신건강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과학기술사회학 분야도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베토벤 천재 만들기』 외에 Music in Everyday Life, Music-in-Action: Selected Essays in Sonic Ecology, The Cambridge Companion to Recorded Music(공저), Oxford Sound Studies Handbook(공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정우진(鄭友眞)</strong><br /> 미학을 전공하고 「언어로서의 음악과 아도르노의 베토벤 해석」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림대ㆍ서울대ㆍ건국대 등에서 미학ㆍ예술철학ㆍ예술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한국미학회 산하 &lsquo;예술과사회&rsquo; 분과와 음악미학 분과에서 활동하며, 음악이 상호매체의 미학으로 발전하고 문화정치와 만나는 지점에 관해 연구를 진척시키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해링턴(Austin Harrington)의『예술과 사회이론: 사회학적 미학의 입장들』(근간)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예술&middot;기술&middot;마술: 아도르노와 백남준의 만남」「언어&middot;비판&middot;화해의 유토피아」「아도르노의 음악적 철학과 베토벤의 철학적 음악」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6 오후 2:21:00《222》미에코의 『젖과 알』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57"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2_%EC%A0%96%EA%B3%BC%EC%95%8C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6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가와카미 미에코의</span></strong></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젖과 알』</span></span></strong></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문학수첩, 2008)을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에는 표제작인 중편과 콩트를 연상시키는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70"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2_%EC%A0%96%EA%B3%BC%EC%95%8C_%EC%9E%91%EA%B0%80(2).jpg" />「당신들의 연애는 빈사<sup>瀕死</sup>」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방확대수술을 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언니와 조카가 사흘 동안 도쿄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 머무르러 온다. 수술을 하려는 언니의 현재 직업은 호스티스로, 연말이면 마흔이 된다. 조카를 낳자마자 곧바로 이혼을 했던 언니는 해보지 않은 일이 없는데, 본업으로만은 생활을 꾸릴 수가 없어서 저녁에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이제는 호스티스가 직업이 되었다. 언니와 함께 온 조카는 딸인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조카는 반년 전부터 말을 하지 않고, 필담으로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언니는 동생에게 유방확대수술에 대한 각종 정보를 늘어놓고, 말을 하지 않는 조카의 노트에는 생리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래서 작품의 제목도&nbsp;「젖과 알」인데, 젖은 &lsquo;유방&rsquo;을, 알은 &lsquo;난자&rsquo;를 뜻한다. 마흔을 바라보는 말라깽이 여자가 가로늦게 유방확대수술을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거기에는 대책 없는 노년에 대한 불안이 서려 있으며, 남자(남편)에게 버려졌다는 박탈감이 도사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카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 역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버려졌다는 유기불안 때문이다. 조카는 이렇게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 나는 가슴을 부풀리는 게 싫다. 귀찮아서 싫다. 그런데 엄마는 부풀리고 싶어서 전화로 유방확대수술 이야기를 한다. 병원 사람과 이야기한다. 무슨 이야길 하는지 몰래 다가가서 들었다. 아이를 낳은 후부터요, 라는 늘 하는 대사에 모유를 먹여서요를 덧붙였다. 매일매일매일매일 전화한다. 매일 바보다. 내게 먹여서 없어진 모유가 있던 곳에 다른 것을 넣어서라도 그걸 부풀리고 싶은 걸까. 낳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으면 차라리 안 낳았으면 좋았잖아. 엄마의 인생은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좋았잖아. 모두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을. 난자와 정자. 그걸 맞추려는 짓을 안 하면 되는 거잖아.</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더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언니는 자신의 불행을 조카 탓으로 돌린 모양이고(&ldquo;검어. 내 유방은 검고 커. 알아. 내가 예쁘지 않다는 건 [&hellip;] 나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이렇게까진 아니었어.&rdquo;), 언니가 전화로 유방확대수술을 열심히 문의하는 것을 보면서 조카는 극심한 유기불안을 느꼈다. 아마 조카는 이렇게 생각한 듯하다. &lsquo;유방확대수술&rarr;재혼&rarr;버려짐&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언어를 거부하는 조카의 방어기제 속에는, 고단한 상징질서(사회)로부터의 도피심리도 함께 섞여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 태어나면 끝이다. 살아서 계속 밥을 먹고, 돈을 벌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만으로도 고달픈 일이다. 엄마를 보면 매일 죽도록 일하고도 매일이 힘들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싫은데 그 속에서도 다른 몸을 꺼내다니,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런 일이 정말로 멋지고 근사한 일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서 그렇게 판단한 것일까? 혼자서 이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몹시 우울해졌으므로, 나로서는 좋은 일이 아닌 게 확실하다. 게다가 생리를 한다는 것은 수정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곧 임신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이런 식으로 먹고 생각하는 인간이 늘어난다는 것인데, 그 생각을 하면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나는 절대 아이 같은 건 낳지 않을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튿날, 언니는 도쿄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면서 저녁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집에서 기다리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온 언니는 10년 동안 만나지 않았던 남편을 만나고 왔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300" height="45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2_%EC%A0%96%EA%B3%BC%EC%95%8C_%EC%9D%BC%EB%B3%B8%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제 술에 취한 언니가 조카에게 말을 &lsquo;말을 하라&rsquo;고, &lsquo;왜 말을 하지 않느냐&rsquo;고 윽박지르는 것은 소설의 정석이다. 조카는 이모가 내버리려고 냉장고에서 꺼내 놓은 유통기한 지난 계란을 양손에 쥐고, 제 머리를 치면 말한다. 언니까지 가세한 이 장면은 가슴이 찡한데, 부화되지 못한 계란은 수정되지 못한 난자의 다른 모습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방확대수술에 집착했던 언니나 대화를 거부했던 조카는 모두 사회나 가장의 보호 없이 맨살로 내던져 있다. 그런 사정은 이 작품의 화자인 &lsquo;나(여동생/이모)&rsquo;의 처지마저 암시해 준다. 화자는 도쿄에 온 지 5~6년째이지만 대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작품의 초입에 &ldquo;생각하면 할수록 오사카의 모녀는 성가시고, 무겁게 덮쳐 온다&rdquo;던 화자 역시, 두 모녀와는 다른 무엇엔가 들려 있는 것이다. <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26 오전 10:26:00《221》구티에레즈의 『욥기―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0" height="20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1_%EC%9A%A5%EA%B8%B0_2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4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br /> </strong></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욥기―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느님의 말씀』</strong></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눔사, 1989)을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느님이 악마에게 신실한 욥을 자랑하자, 악마가 &lsquo;당신이 뭘 주니까 따르는 거지, 그걸 다 빼앗아 보라. 그러면 그자가 당신을 욕할 것이다&rsquo;라고 토를 달았다. 발끈한 하느님이 &lsquo;그러면 네가 마음대로 한번 해봐라. 그러면 내가 뭘 베풀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다&rsquo;라고 욥을 악마의 손에 부쳤다. 욥은 하느님과 악마 사이의 내기에 걸려,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러나 그는 악마의 예상과 달리, 하느님을 욕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이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절친 세 명이 멀리서 찾아온다. 엘리바즈&middot;빌닷&middot;소바르가 그들이다. 이들은 욥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번민에 빠트린다. 세 친구는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욥에게 &lsquo;자신도 모르는 죄를 찾아보라&rsquo;고 권한다. 욥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느님이 이런 재앙을 내릴 리가 없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의 세 친구가 믿는 것은 &lsquo;인과응보론&rsquo;으로, 그것은 「욥기」가 쓰여질 당시 가장 유력한 교리였다. 아마 그것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가장 오래되고 광범위한 종교적 사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해방신학의 창시자이자 대표적 이론가인 구티에레즈는 기독교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인과응보론적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것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잘못된 접합을 비판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것은 광대한 소유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편리하고도 구미에 맞는 교리였으며, 이러한 소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체념과 죄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교리다. 교회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교계의 특정한 경향은 풍요로움을 정직과 근면함에 대한 보상으로 간주하고 가난을 죄 많고 게으른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간주하는 윤리적 교리에 계속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다른 한편, 모두 알고 있듯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역사적으로 이 교리의 편리함을 사용했었다. 처음에는 가끔 사용했지만, 요즈음에는 보다 미묘한 형태로 사용한다. 교리를 이렇게 교묘히 다루는 것은 가르침에 대한 모든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점을 계속해서 중요하다고 왜곡시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필연적으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윤리를 발생시킨다.(71~72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0"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1_%EA%B5%AC%EC%8A%A4%ED%83%80%EB%B3%B4.jpg" />우리는 저 교리를 세속적으로 완성시켰을 뿐 아니라, 지상에서의 물질적 성공이 곧 구원의 징표(은총)라는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접선을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이 막스 베버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구티에레즈는 기독교에 만연한 인과응보론을 &lsquo;우상숭배의 미묘한 형식&rsquo;이라고 본다. &lsquo;하느님을 믿으면 복(잘살게) 받는다&rsquo;거나, &lsquo;현세에서의 성공이 하느님의 은총(구원)을 미리 입증해 준다거나&rsquo;라는 것은 모두 물신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 친구와 욥은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했는데, 욥이 자신의 결백을 확신하면 할수록 세 친구의 신앙은 흔들렸다. 욥의 확신은 그들이 여태껏 믿어온 바로 그 인과응보론적인 신앙과 합치되지 않았다. 만일 그의 삶이 올바른 것이었다면, 가난과 질병은 왜 그를 덮쳤는가? 욥은 하느님이 부당하다는 것만 알 뿐,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세 친구나 마찬가지로 욥 또한 인과응보론이라는 교리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의 번뇌는 가중되었다. 욥이 친구들에게 하소연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런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네.<br /> 자네들이 한다는 위로는 기껏해야 괴로움을 줄 뿐,<br /> 그 헛된 말은 끝도 없는가?<br /> 자네들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br /> 자네들이 내 처지에 있다면<br /> 나도 분명히 자네들과 같은 말을 했을 것이네.(16:2~5)</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의 친구들이 현세적인 인과응보 교리를 계속 주장함에 따라 욥은 똑같은 논리로 반박을 하게 된다. 즉 자신의 경우는 제쳐 두고, 왜 사악한 사람이 번창하는가를 물은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도 그 생각만 하면, 미칠 것 같네.<br /> 몸에 소름이 다 끼치네.<br /> 악한 자들이 더 오래 살며<br /> 늙을수록 더 건강하니 어찌 된 일인가?<br /> 자식들이 든든히 자리를 잡고<br /> 후손들이 잘 사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지 않는가?<br /> 그들의 집은 태평무사하여 두려워할 일이 없고<br /> 하느님에게 매를 맞는 일도 없지 않는가?(21:6~9)</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들은] 일생 행복하게 지내다가<br /> 고요히 지하로 내려가더군.<br /> 기껏 하느님께 한다는 소리가<br /> &ldquo;우리 앞에서 비키시오.<br /> 당신의 가르침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소.<br /> 전능하신 분이 다 무엇인데 그를 섬기며<br /> 무엇 먹을 것이 있겠다고 그에게 빌랴!&rdquo;<br /> 이런 악인의 등불이 자주 꺼지던가?<br /> 재난이 그에게 떨어지던가?<br /> 하느님께서 진노하시어 벌을 내리시던가?(21:13~15, 17)</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참 맞는 말이다. 인과응보론대로라면, 욥이 저처럼 고난을 당하는 이유도 다 자신이 모르는 죄가 있어서이고, 이명박 장로의 재산이 380여 억이나 되었던 까닭도 결코 BBK 따위가 아닌, 우리가 모르는 선행을 그득히 쌓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 친구는 자신들이 욥에게 했던 똑같은 논리로 욥이 역공을 하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이 세 친구의 인과응보론을 반박하는 이 대목에서부터 「욥기」는 성서에 되풀이되어온 &lsquo;무고한 자의 고난&rsquo;이라는 주제에서, &lsquo;가난한 자를 억압하는 자들에 대한 고소&rsquo;라는 또 하나의 흔한 전통으로 돌아간다. 이제 욥은 자신의 고난을 잊고,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권력자와 부자들을 공박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악한 자들은 지계표[땅의 경계표식]를 멋대로 옮기고<br /> 남의 양떼를 몰아다가 제 것인 양 길러도 좋고<br /> 고아들의 나귀를 끌어가고<br /> 과부의 소를 저당 잡아도 되는가.<br /> 가난한 사람들을 길에서 밀쳐내니<br /> 흙에 묻혀 사는 천더기들은 아예 숨어야 하는가.<br /> 들나귀처럼 일거리를 찾아 나가는 모습을 보게.<br /> 행여나 자식들에게 줄 양식이라도 있을까 하여<br /> 광야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저 모양을 보게.<br /> 악당들의 밭에서 무엇을 좀 거두어 보고<br /> 악인의 포도밭에서 남은 것을 줍는 가련한 신세.<br />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밤을 새우고<br /> 덮을 것도 없이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몸,<br /> 산에서 쏟아지는 폭우에 흠뻑 젖었어도<br /> 숨을 곳도 없어 바위에나 매달리는 불쌍한 저 모습을 보게.<br /> 아비 없는 자식을 젖가슴에서 떼어내고<br /> 빈민의 젖먹이를 저당 잡아도 괜찮은가.<br /> 걸칠 옷도 없이 알몸으로 나들이를 해야 하고<br /> 빈창자를 움켜잡고 남의 곡식단을 날라야 하는 신세,<br /> 악인들의 돌담 사이에서 기름을 자며<br /> 포도 짜는 술틀을 밟으면서 목은 타오르고<br /> 죽어가는 자의 신음 소리와<br /> 얻어맞아 숨이 넘어갈 듯 외치는 소리가 도시마다 사무치는데<br /> 하느님은 그들의 호소를 들은 체도 아니 하시네.<br /> 악인은 떳떳한 생활을 꺼려하여<br /> 밝은 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br /> 그 길을 따라 살려고도 않는 자들,<br /> 해만 지면 살인자들이 활개를 치며<br /> 빈민과 가난한 자들을 죽이려 찾아다니고<br /> 밤만 되면 도둑이 판을 치는 세상.(24:2~14)</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구티에레즈는 이때 욥의 울부짖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욥기」 자체를 권력과 부를 독점한 라틴아메리카의 특권층에 대한 항의로 독해하고 있는 지은이는, 욥을 &lsquo;무고한 고통'을 겪고 있는 존재론적인 개인이 아니라,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lsquo;민중&rsquo;으로 간주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욥기서를 이렇게 읽으면서 나는 라틴아메리카의 상황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가난한 자―말하자면 다수의 민중들―가 고통받는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에 나의 주의를 집중시킬 것이다. [&hellip;] 욥이 스스로 열정적으로 주장했던 결백은 강요된 고통과 죽음의 상황 한가운데서 억압받는 무고한 신앙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이라는 상황 또한 염두에 두려고 노력했다.(22~23쪽)</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521"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1_%ED%95%B4%EB%B0%A9%EC%8B%A0%ED%95%99_%EC%9D%B4%EB%AF%B8%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이 무고한 자의 고통을 양산하는 권력자와 부자들을 비난하자, 소바르가 맞장구를 치며 부자와 권력자들의 사악한 짓거리를 길게 나열한다. 그러면서 예의 인과응보론을 되풀이하며 끝낸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br /> 긁어모은 재산에 얽매여 꼼짝없이 망한다네.<br /> 남아날 것 없이 마구 집어삼키고<br /> 어찌 자기의 영화가 오래가리라고 믿겠는가?(20:20~21)</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 뒤를 이은 엘리바즈 역시 소바르가 나열한 부자들의 악행을 욥에게 적용하기를 시도하면서, 다시 한번 인과응보론에 따라 욥의 회개를 촉구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자네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많아<br /> 이루 다 셀 수 없지 않은가?<br /> 한 피 받은 동기의 재산을 마구 빼앗고<br /> 헐벗은 이의 옷을 벗기며<br /> 기진맥진한 사람에게 물 한 모금 주지 아니하고<br /> 굶어 죽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더니,<br /> 주먹이 세다고 하여 땅을 차지하고는<br /> 세도가 있다고 하여 그 차지한 땅에서 거들먹거리며 <br /> 과부를 알몸으로 쫓아내고<br /> 고아들의 팔을 꺾더니 (22:4~9)</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자 욥은 인과응보론을 밑자리에 깐 엘리바즈에 맞서 이렇게 대답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 빈민들,<br /> 의지할 데 없는 고아를 내가 건져 주지 않았던가?<br /> 숨을 거두며 하는 마지막 축복은 모두 나에게 쏠렸고<br /> 과부의 서러움은 나에게서 기쁨으로 바뀌었네.<br /> 정의가 나의 옷이었으며,<br /> 공평이 나의 두루마기요, 나의 면류관이었는데&hellip;<br /> 나는 소경에게는 눈이었고<br /> 절뚝발이에게는 다리였었지.<br /> 거지들은 나를 아버지로 여겼으며<br /> 낯선 사람들도 나에게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네.(29:12~17)</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욥은 &ldquo;가난한 사람을 모독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모욕함이다&rdquo;(잠언 17:5)라고 번번이 강조하는 성서의 전통을 따라, 가난한 이를 보살폈다.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덧붙인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의무는 가난한 자들이(마치 현세적인 인과응보의 교리가 암암리에 선언하듯이) 하느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친구라는 것을 뜻한다. 궁핍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107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과응보론에 맞서 자신의 성실함을 고집했던 욥은 세 친구로부터 아무런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난데없이 엘리후라는 논쟁자가 나타난다. 세 친구들이 인과응보론에 기대어 욥을 위로하고 설득하려고 했다면, 욥과 아무런 면식이 없는데다가 젊은 혈기를 지닌 이 논쟁자는 욥을 가르치고 심판하기 위해 왔다. 그는 인과응보론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위대성과 완벽성을 거론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이 모를 뿐,<br />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길은 이런 길도 저런 길도 있다오.(33:14)</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엘리후의 등장은 「욥기」를 또 다른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엘리후에게 공박을 당한 욥은, 불에 기름을 붓듯이 더욱 도전적이 되어 인간과 논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직접 토론하기를 원하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 욥 사이의 대면이 이루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06"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1_%ED%95%B4%EB%B0%A9%EC%8B%A0%ED%95%99.jpg" />구티에레즈의 「욥기」 해석은 두 개로 압축된다. 하나.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기를 불사하는 욥의 도전적인 태도로부터 민중의 저항할 권리를 본다. &ldquo;성서에서 불평은 희망을 제거시키지 않&rdquo;(217쪽)듯이, &ldquo;부당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불평하고 저항할 권리&rdquo;(222쪽)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 인과응보론은 인간이 &ldquo;자신을 하느님 품에 던지는 대신 하느님을 손아귀에 쥐려고&rdquo;(168쪽) 만든 인간중심적이고 편의적인 교리일 뿐,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다. 이 대목이 내가 갑작스럽게 중단한 예의 「욥기」의 &lsquo;또 다른 차원&rsquo;일 텐데, 매우 신학적인 논의라 여기서는 두 개의 인용만 남겨둔다. ①&ldquo;하느님의 자유, 은혜, 창조적인 사랑과 하느님을 가두려는 인과응보의 교리 사이에는 대립이 존재한다.&rdquo;(193~194쪽). ②&ldquo;인과응보의 교리는 타당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 행동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조차도 보상과 징벌이라는 편협한 도식에 짜 맞추어질 때 왜곡된다.&rdquo;(212쪽) 여기 내가 생각한 것을 덧붙이자면, 「욥기」에서 인과응보적 사유는 원래 악마의 것으로 나타난다. 악마는 그것을 통해 &lsquo;하느님의 자유&rsquo;를 구속하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욥에게 내려진 고난이, 그 시대에 누구나가 사로잡혀 있었던 인과응보론을 극복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고 본다. 구티에레즈에게 「욥기」는 인과응보의 교리의 벗어나기 위한 텍스트이며, 그런 욥의 노력이 오늘의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희망의 진로를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 「욥기」는 원래 시였다는 데에서 착안해 지은이는 운문으로 편집된 「욥기」를 사용했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22 오후 4:08:00한낱 외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40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3_%EA%B0%80%EC%9E%A5%20%EC%9D%B8%EA%B6%8C%EC%A0%81%EC%9D%B8,%20%EA%B0%80%EC%9E%A5%20%EA%B5%90%EC%9C%A1%EC%A0%81%EC%9D%B8/%ED%91%9C%EC%A7%80_%EA%B0%80%EC%9E%A5%20%EC%9D%B8%EA%B6%8C%EC%A0%81%EC%9D%B8,%20%EA%B0%80%EC%9E%A5%20%EA%B5%90%EC%9C%A1%EC%A0%81%EC%9D%B8.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책을 펴내며</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어떻게든 진보 교육감 발목을 잡으려는 보수 진영의 공격은 처절하고 야비하고 집요하다. 물론 진보 진영도 힘을 내어 이에 맞서고 있다. 그런데, 저들만큼 절실해 보이지는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교육운동을 이끌고 있는 전교조의 태도는 시종일관 미지근한 것 같다. 실지로 인권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교조 교사들의 태도가 여느 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학생인권 도입을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lsquo;그러지 않아도 아이들 다루기가 힘든데 인권을 악용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느냐&rsquo;고 하소연하거나 &lsquo;학생인권만 중요하고 교사인권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냐&rsquo;고 따지는 이들이 제법 많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우리 교육운동 진영의 &lsquo;인권 수준&rsquo;이다. &lsquo;대의적 민주주의&rsquo;가 어느 정도 구현되고, 합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이념과 열정을 상실한 교육운동의 초라한 모습이 &lsquo;인권&rsquo;을 만나면서 드러났다. 전교조 교사들조차 인권을 학생지도 매뉴얼로 받아들이거나, 마음 좋은 어른들이 주는 선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연한 일이다. 교육운동 진영에서 &lsquo;학생인권&rsquo;이란 말을 꽤 오래 전부터 써 오긴 했지만, 그에 대하여 절실하게 고민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전교조 교사들 역시 인권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조차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인권에 대해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어느 날 인권이 교문 안으로 들어왔다. &lsquo;뜻밖의 선물&rsquo;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면 좋은 것인지 잘 모른다. 정체를 모르니 불안하다. 언론에서는 그것이 몹쓸 것이라고 난리를 친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일단 창고에 넣어 두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인권을 조금 먼저 만난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다. 왜 학교에 인권을 들여야 하는지, 학교에 들어온 인권이 학생들의 삶을, 교사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낼 수 있는지, 인권이 우리를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 것인지 말을 해 보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에 《오늘의 교육》에서 멍석을 깔아 주어 인권운동활동가, 교사 몇 명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붙었다. 각자 서 있는 자리도 다르고, 보는 지점도 다르고, 글을 풀어내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 인권 없이는 교육도 없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3월<br /> 저자들을 대신하여 박복선</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3_%EA%B0%80%EC%9E%A5%20%EC%9D%B8%EA%B6%8C%EC%A0%81%EC%9D%B8,%20%EA%B0%80%EC%9E%A5%20%EA%B5%90%EC%9C%A1%EC%A0%81%EC%9D%B8/%EA%B7%B8%EB%A6%BC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혼란을 통한 성숙</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체벌 금지 이후, <br /> 학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엎드려 뻗쳐 5초 시켰다고 교사 징계 반발&rdquo;<br /> &ldquo;휴대폰 압수한 교사 폭행 사실 뒤늦게 밝혀져&rdquo;</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2010년 11월, 서울시교육청이 &lsquo;체벌 전면 금지 조치&rsquo;를 내린 후 언론은 연일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기사로 도배했다. 대부분 기사의 논조는 체벌 금지 이후 무서울 것이 없어진 아이들이 교사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정당한 지도도 우습게 보고 대들다가 폭행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참 재밌는 논리다. 정말 학생들이 교사를 우습게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폭행까지 할 상황에 이를까? 그 전에 교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다. 교사가 뭔가 학생이 무시할 수 없는 강압적인 조치를 하고 그에 대한 반발로 폭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폭행 사건은 뭔가 갈등이 증폭돼 힘이 아니면 그 갈등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일어난다. 그래서, 폭행을 일으킨 문제의 원인이 중요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폭력 문제를 접할 때는 그 원인을 들어 보고, &lsquo;그런 상황이라면 나 같아도 한 대 쳤을 것 같다&rsquo;며 공감하거나 &lsquo;아무리 그렇더라도 폭력은 안 된다&rsquo;라고 하는 식의 평가를 내린다. 그런데 학생의 폭력 사건에 대해서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지 않는다. 오직 &lsquo;학생&rsquo;에 의한 &lsquo;교사&rsquo; 폭행이라는 사실만이 부각된다. 마치 파업이 일어날 때 파업의 원인이 아니라 파업 자체만을 문제 삼는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벌 금지 이전 &lsquo;교사의 지도&rsquo; vs &lsquo;학생의 반항&rsquo;이라는 갈등의 끝은 체벌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었다. 즉, 말로 훈계하다가 안 들으면 &ldquo;너 나와&rdquo;라고 하거나 &ldquo;우선 맞자&rdquo; 하고 때린 후에 &ldquo;너의 잘못을 알겠니?&rdquo; 하고 물었다. 그런데 폭력이 금지되자 다른 결말이 목도되는 것이다. 이전과 똑같이 체벌을 하다가 &lsquo;징계&rsquo;를 당한다든지, 아니면 폭력의 주체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바뀐다든지&hellip;&hellip;. 즉 지금 언론을 도배하는 상황은 그렇게 새로운 상황이 아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는, 아니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길러 낸 아이들의 모습일 뿐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3_%EA%B0%80%EC%9E%A5%20%EC%9D%B8%EA%B6%8C%EC%A0%81%EC%9D%B8,%20%EA%B0%80%EC%9E%A5%20%EA%B5%90%EC%9C%A1%EC%A0%81%EC%9D%B8/%EA%B7%B8%EB%A6%BC2.jpg" /></p> <br /> 서울시교육청의 체벌 금지 조치 이후 학교 안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정책이 시도된 지 1년 남짓 된 상황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조심스럽기도 하고, 학교 안에서 눈에 띌 정도의 변화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지금처럼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되어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어떤 변화가 눈에 보일 정도로 진전된 상태라면 이미 또 다른 질서가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그 질서에 의해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다. 일종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상황이 사실은 더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이다.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체벌 금지는 고교 선택제나 일제고사처럼 어떤 제도가 들어온 것이라기보다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았던 어떤 뿌리를 건든 사건이다. 그 뿌리의 흔들림이 학교 구성원에게 어떤 흔들림을 주었는가? 이것이 눈에 보이는 사실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lsquo;혼란&rsquo;은 그 자체로 의미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lsquo;혼란&rsquo; 자체가 나쁘냐 좋냐가 아니라 그 혼란의 &lsquo;내용&rsquo;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흔들렸는가? 흔들린 척하고 있는가? 흔들렸다면 어느 정도, 어느 부분에서 흔들렸는가? 흔들리지 않았다면 왜 안 흔들렸는가? 흔들릴 부분이 흔들렸는가? 아님 엉뚱한 것이 흔들렸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문제들에 대해 체벌 금지 이후 우리 학교 안에서 있었던 몇 가지 상징적 사건들을 분석하여 살펴보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증가했다?</strong><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례1]</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교사는 원래 체벌을 하지 않지만 체벌 금지에 대해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말로 지도를 하다가 안 될 때 결국 학생의 기를 꺾을 수 있는 것이 체벌인데 교사의 마지막 수단을 없앴다는 괘씸함 때문이다. S교사는 체벌 금지 조치에 대해 겉으로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ldquo;대안이 뭐야, 대안을 만들어 놓고 체벌 금지를 시켜야지. 교사 말을 끝까지 안 들으면 어쩌라는 거야. 애들한테 상처 주는 거 싫어서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는 손바닥 몇 대 때리고 말았는데 이제 학생부에 넘겨야지 뭐&rdquo;라고 말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교사가 들어가는 반에 결석이 잦은 학생이 한 명 있다. 어렸을 적 부모가 이혼하고 아버지와 사는데 아버지는 아이에게 관심이 많으나 이혼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아이의 부적절한 요구까지 무조건 들어준다. 그러다 아이가 맘대로 하면 폭력을 썼다. 아이는 엄마에 대한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정서적으로 10세 나이에 머물러 있다. S교사의 수업 시간 원칙은 &lsquo;눈에 띄게 자지 않는다&rsquo;이다. 즉 자더라도 앉아서 턱을 괴고 안 자는 듯한 자세로 자라는 것이다. 그래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모멸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태도에 엄격한 S교사의 시간에 그 학생은 룰을 지키지 않았다. 몇 번의 지도 후 성찰 교실에 보냈으나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고 성찰 교실 상담교사는 정신과 치료를 아버지에게 권고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교사는 수업의 룰을 지키지 않는 그 아이를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는 교실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수업에 들어와서 또 수업의 룰을 어기게 된다. 교사는 이 사건을 징계위원회에 올리고 이 학생은 출석 정지 10일이라는 엄한 벌을 받게 된다. 그 출석 정지 기간 동안 학생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서 다른 학교의 집단 폭행 사건에 연루되고 경찰을 통해서 그 사실을 학교가 알게 된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례 2]</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교사는 나름 학교생활을 열정적으로 하는 젊은 교사이다. 학생들과도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담임으로서 학급에서 학생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엄격한 편이다. 특히 핸드폰을 하다 걸리거나 학생이 거짓말을 하는 경우 참지 못한다. 올해 남자 반을 맡게 된 L교사는 천적과도 같은 학생을 만나게 된다. 중학교 때부터 말썽쟁이로 소문이 나서 다른 지역의 학교로 전학을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이 학생은 L교사의 그런 규칙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즐겨 할 뿐 아니라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드러나도 교사에게 사과하기보다는 오히려 교사의 사소한 약점을 공격하는 행동을 하였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자 교사 지도 불응을 이유로 그 학생을 선도위원회에 올리게 된다. 그런데 학생부 교사들은 L교사가 젊은 여교사라 학생들을 잘 못 다룬다며 교사의 무능을 탓하고 선도위원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학부모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그 어머니는 사건의 책임을 교사에게 물었다. L교사는 지금 휴직 여부를 고민하는 상태이다.</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례 3]</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머니하고만 살고 있는 K는 복학생이다.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고 복학생이라는 이유로 다른 친구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며 지배하기도 한다. 평소에 위가 좋지 않았던 K는 배가 너무 아파서 교사 화장실에 뛰어 들어갔다가 자기가 늘 사용하던 칸이 잠겨 있자 막 두들기며 안에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한다. 그 안에 있던 나이든 교사는 놀래서 나와 교사 화장실을 당당히 사용하려는 K를 야단치게 되고 K는 &ldquo;아이 씨x, 화장실 한번 쓴 거 가지고 왜 그래!&rdquo; 하며 소리를 질렀다. 교무실에 끌려와서도 건성으로 잘못했다고 하고 집에 가 버리자, 그 교사는 &ldquo;내가 명퇴를 하든지, 저 자식을 징계위원회에 올려 잘라 버리든지 해야 한다&rdquo;며 분개했다.&nbsp;</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위 사례에서 언급된 학생들은 언론에서 교사를 폭행했다며 보도한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학교와 상황에 따라 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날 뿐이다. 지금까지 징계위원회는 학교 폭력, 절도, 흡연 등 주로 큰 사안이 있을 때만 열렸는데 체벌 금지가 된 이후 교사의 지도에 불응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에 올라오는 일이 빈번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 사례들은 체벌이 지금까지 무엇을 가려 왔는지 보여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번째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체벌은 이미 배움으로부터 도주한 아이들의 수업 태도를 강제하는 역할을 해 왔다. 공부할 의지가 없어도 듣고 있는 자세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잠을 청해도 몸은 책을 보고 있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이고 자야 했다. 왜 그 아이가 배움으로부터 도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원인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체벌 금지가 된 이후 성찰 교실이 만들어졌고, 상담 교사를 통해 그 아이의 상황이 드러나게 되었다. 불우한 개인사가 그의 잘못을 모두 용서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줄 모르는 존재들이 그런 상처를 왜 폭력으로 표현하는지는 짚어 봐야 할 지점이다. 흔히 상처가 큰 사람의 공격성은 자신보다 약자인 사람을 향하기 마련이다. 왕따 같은 학교 폭력이 그러하다. 학교 폭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최근의 보고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주먹을 휘두른 가해자라는 것이 드러난 사실이라면, 고된 비정규직 노동을 하느라 자식을 돌보지 못하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터진 후에도 부모들은 자식 걱정보다도 피해자 배상 문제 때문에 한숨을 쉬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어찌 보면 소위 말하는 문제아들의 문제 행동은 이 사회의 비정상성을 보여 주는 문제적 징후이다. 냉혹한 자본주의사회가 인간을 어떻게 몰아가고 있는지, 특히 사회의 폭력을 여과할 장치가 없는 존재들에게 어떤 식으로 내면화되고 표출되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인권이 문제 학생들의 문제 행동에 날개를 달아 준 게 아니라 그동안 음성적으로 해 오던 것을 이제는 교사 앞에서도 감히 대놓고 하는 것일 뿐이다. 음성적인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그간 폭력으로 감춰졌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에 학교와 사회가 어떤 성찰을 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이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폭력의 이면에 숨겨진 문제가 더 심각한데도 학생에 의한 교사 폭행에만 분노하는 이유는 &lsquo;폭력&rsquo; 그 자체인가? 아니면 감히 &lsquo;교사&rsquo;에게 폭력을 쓴다는 사실인가?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날로 심해지는 중산층의 몰락 속에서 이혼 가정이 증가하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방치되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나 이 아이들의 상처를 방치한 채 입시 경쟁에만 올인하게 만드는 사회와 학교 아닌가. 그리고 그들이 아이들의 내면에 만들어 내는 폭력성이라는 괴물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교육을 포기하는 교사가 늘고 있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벌 금지 이후 학생들의 문제 행동이 늘어나고 교사들이 지도를 포기하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다고들 한다. 이것을 정확히 다시 말하면 그전에는 학생들이 체벌하는 교사의 눈앞에서는 문제 행동을 안 했는데, 체벌 금지 조치 후 그런 조심성이 사라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의 교사의 교육력 부재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끝까지 지도를 저항하는 부분은 두발, 복장, 핸드폰 등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부분이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사생활 영역에 대해서는 교사들이 지도를 안 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렇다면 그 외의 다른 문제, 교사-학생에게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금품 갈취, 절도, 흡연 등의 문제는 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한 학생이 보이는 문제 행동의 깊숙한 뿌리가 교사 개인을 통해 치유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는 체벌을 통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괜찮은 척했기에 교사가 해결할 수 있는 일처럼 비쳐졌다. 그런데 감춰져 있던 것을 걷어 내고 드러나게 하여 그 문제의 원인을 파고들수록 교사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지금까지는 교육 활동의 걸림돌이었던 학생들의 정서적 결핍, 학습의 결핍 등이 체벌이라는 폭력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체벌 금지로 인해 더 이상 &lsquo;문제&rsquo;를 개인의 책임이나 훈육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문제적 상황을 드러내고 제대로 된 원인을 찾아내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다만 지금의 학교 시스템으로는 그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요원하기에 현장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복지 안정망이 구축되어야 하고, 학교교육에서는 입시 경쟁이 줄어들어야 한다. 이런 장기적인 문제 해결책이 너무 먼 얘기라면 당장 교육적 조처에 대한 학교의 권한이라도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권고를 받더라도 학부모에게 이를 강제할 권한이 학교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성의 있는 학부모를 만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으나 학부모와 연락이 안 되거나 문제 학생이 그 이후로 학교에 안 나와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최소한 그 학생이 학교에 안 나왔을 때 찾아갈 수 있는 사회복지사가 학교에 필요하다. 상담사, 사회복지사, 의사 등 여러 전문가들의 협업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교사가 지도를 기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교사 혼자 힘으로 그 아이를 끌어안거나 징계를 통해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문제 행동의 뿌리에 근접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학생인권 이후 교사가 교육적 지도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 참견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대해 교육의 이름으로 간섭하는 일을 멈추고 교사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교사 개인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구조적인 해결책을 역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학생인권은 학생을 둘러싼 학교 구조의 문제, 더 나아가 이 사회 구조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여전히 남는 교사 권력의 문제</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장․단기적 처방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여전히 교사의 권력은 문제로 남게 된다. 첫 번째 사례에서 치료 후에 그 학생이 수업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그 아이에게는 수업의 룰을 완화시켜서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그 아이가 그 수업의 룰을 지킬 때까지 계속 수업에서 배제할 것인지 고민하여 결정하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은 교사 혼자 내려야 하는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내리는 것인지 그 둘 외의 다른 전문가와 함께 내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교사에게 전권이 있었기 때문에 교사의 기준에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룰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매년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룰이 바뀌었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시간 시간마다 룰이 바뀌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배려나 공동체의 규칙을 익히기보다는 힘에 의해 장악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유를 몰래몰래 향유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익혀 왔다. 첫 번째 사례에서 학생이 출석 정지를 당했던 10일 동안 다른 학생들은 무엇을 학습했을까? &lsquo;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와는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까? 나도 저 친구처럼 정말 듣기 싫은 수업 시간이 있는데 그때 수업을 듣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rsquo;를 배웠을까? 아니면 &lsquo;저 선생님에게 개기면 학교도 못 오는구나. 하고 싶어도 딴 선생 시간에 해야겠다&rsquo;를 배웠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벌 금지로 교권이 흔들렸다고 하지만, 사실 그 교권은 권력이었다. 체벌은 교사의 지도 - 학생의 반항이라는 갈등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첫 번째 사례의 교사는 자신의 수업의 룰을 보호하기 위해 학생에게 과도한 징계 처분을 내렸다. 출석 정지는 학교 폭력을 저질렀을 때와 같은 경우 내려지는 매우 무거운 벌이다. 즉 체벌이 금지되어도 교사의 권한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예이다. 지금까지는 교사의 권력을 체벌을 통해 보여 주었으나 이제는 징계의 경중으로 교사의 권력을 보여 주게 된 것이다. 징계든 체벌이든 힘으로 문제 행동을 억압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이라면 학생들이 학습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상황에서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사례의 학생 역시 힘에 의한 학교의 지도에 단련된 학생이다. 학교 아니 가정에서조차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주었던 어른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이미 전학을 경험한 학생은 어른들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좋든 나쁘든 모든 교사는 꼰대일 뿐이고, 그들이 어떻게 힘을 구사하는지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선생님의 엄포 따위가 두려울 리가 없다. 만만한 담임교사가 자신에게 엄포를 놓는 모습이 두려울 리가 없는 것이다. 학부모 역시 교사들의 이러한 반응에 지쳐 있을 확률이 높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식을 학교조차 포기하고 내쳐 버리면 더 망가질 거라는 벼랑 끝 불안감은 교사를 공격하는 형태로 표현되었을 수 있다. 힘에 의한 학생 통제가 계속될 때 교사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 번째 사례의 학생 역시 그 학생이 저지른 가장 큰 죄는 교사 화장실을 당당하게 쓰려고 한 점이다. 좀 부가된다면 화장실을 두드린 정도가 되겠으나 평소에 장이 안 좋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학생의 불손함이 교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수는 있으나 문제의 핵심이 학생의 불손함인가? 비위생적인 학생 화장실의 모습인가? 만약 이 일로 교사가 그 학생이 전학 가기를 원한다면 첫 번째 사례를 볼 때 가능할 수 있다. 다만 복학생이었던 그 학생이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한다면 그 학생은 어떤 인간으로 성장할 것인가? 첫 번째 사례를 보면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에도 그 학생은 폭력 사건에 연루되었다. 학교의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잘라 낸다고 하지만, 그 잘라 낸 싹들은 더 큰 폭탄이 되어 이 사회와 학교를 공격할지도 모른다. 약자를 유괴하여 성적으로 학대하고 죽이는 최근의 사이코패스적인 범죄의 양상은 우리 사회가 어떤 괴물을 키워 내고 있는지 보여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학생들이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면 그 규칙은 함께 정해야 한다. 그 룰은 누구나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고, 누구나 지킬 만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까지 그 룰은 만드는 것도 교사고, 실시하는 것도 교사고, 지키지 않았을 때 벌칙을 주는 것도 교사였다.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력을 교사가 독점하고 있기에 룰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규칙 위반 행위가 아니라 교사에게 반항하는 행위였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권은 그 룰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그 룰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것인가? 방식에 있어서도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가? 그 룰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벌 금지의 시초는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과도한 폭력으로부터 1차적으로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격적으로 체벌 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저항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체벌 금지는 학교 권력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고, 모든 권한을 독점한 채 자의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교사의 전문성이라고 포장해 왔던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승자 독식의 구조가 변화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3_%EA%B0%80%EC%9E%A5%20%EC%9D%B8%EA%B6%8C%EC%A0%81%EC%9D%B8,%20%EA%B0%80%EC%9E%A5%20%EA%B5%90%EC%9C%A1%EC%A0%81%EC%9D%B8/%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 아이들에게 학교는 얼마나 의미 있는 공간인가? 의미 없는 공부, 청년 실업과 등록금 문제로 드러나는 학력 자본의 불확실성, 이에 대한 불안과 공포, 무한 경쟁에서 자포자기한 무력감들, 무력감에 빠지느니 말썽이라도 일으켜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hellip;&hellip;. 이 모든 불행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자살하거나 학교 밖으로 나가 차라리 괴물이 되기를 선택하기보다는 그런 내면을 학교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그것은 문제를 해결할 열쇠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 아닌가? 학생들이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학교라는 공간의 교육력이 확장되는 폭은 상상의 범위를 초월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학생들의 이러한 내면이 표면화되는 것이 혼란이라면 체벌 금지와 학생인권 정책은 학교에 혼란을 주고 있다. 아니 혼란을 주어야 한다. 이 혼란으로 약자에게 냉혹하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사회 전체에 혼란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이 혼란은 교사들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이 약육강식의 냉혹한 세상에 저항하는 아이들을 억압하는 존재가 될 것인가? 새로운 변화의 길을 모색하는 도반이 될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을 펴내며,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한낱 </strong><br /> 인권교육센터 &lsquo;들&rsquo;,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겉보기와 달리 한없이 소심하고, 겁이 많다. 굵직하고 대범한 행동은 못 하지만, 앞으로도 얇고-가늘고-길게 인권운동을 하고 싶다. &lsquo;권위주의 속의 카나리아&rsquo;인 청소년들과 줄곧 시간을 보내서인지 &lsquo;꼰대 바이러스&rsquo;에 특히 취약하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내 삶의 키워드로 생태를 정착시켜 보려 꼼지락거리는 중.</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최형규</strong> <br />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그저 평범한 선생 노릇에 지쳐 가던 중에 만난 &lsquo;학생인권&rsquo;이 지친 삶에 새로운 활력이 되고 있고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과 함께 다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조영선</strong><br /> 서울 경인고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아이들을 억압하면서 벌어먹는 것이 죄스러워 학생인권에 관심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교사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사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정용주</strong><br /> 서울 백석초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렇다고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완성된 무엇을 만들어 인정받기보다 시도하고 그러다가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임동헌</strong><br /> 전문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통신을 공부하고 있다. 전문계 고등학생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폭력적인 편견과 오해로 인해 꺾이고 잘려 나간 아이들의 자존감을 살려 보고자 소박한 움직임을 하고 있다.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에서 활동하며 노동자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실천을 함께할 동지들을 찾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형빈</strong><br />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된 학교를 사직하고 서울시교육청 교육감 정책보좌관으로 일하며 혁신학교와 학생인권 정책을 담당했다. 2012년 3월 1일 자로 공립교사 발령을 받았으나, 3월 2일 교육과학기술부의 임용 취소 조치로 하루 만에 해직되었다.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빛난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다시 학생들을 빛나게 하는 교사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갖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혁규</strong><br /> 청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학교가 좀 더 인간적이고 즐거운 공간으로 탈바꿈되며, 그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행복하게 만나기를 소망하며 교실과 학교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질적 연구 방법을 이용하여 수업과 학교 현상을 연구하고 있으며, 학습공동체를 통해서 단위 학교를 변화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교과 교육 현장의 질적 연구》,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 《문화와 교육》(공저)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9월 11일 이후의 감시》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정희</strong><br /> 중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친다. 학교는 싫지만 아이들이 좋다. 삶에 지쳐 아픈 아이들의 손을 잡고 다독거릴 때, 내게 전해지는 그 마음들이 학교를 때려치우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에게 괜찮은 어른 친구가 되고 싶다. 그래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고자 노력, 하고 있다. 엄청.</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수광</strong><br /> 이우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산다. 내용적으로는 &lsquo;인간적인 학교&rsquo;, 운영 형식적으로는 &lsquo;자치 학교&rsquo; 만들기에 관심이 많다. 이런 생각을 제도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경기도교육청 혁신학교추진위원으로 활동한다. 그간 여럿이 함께 쓴 책으로 《교육개혁은 왜 매번 실패하는가》, 《굿바이 사교육》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오혜원</strong><br /> 경기도에서 영어 교사를 하고 있다. 요즘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하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유를 가지고 삶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을 충만하게 즐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오동석</strong><br /> 평화의 생태계 안에서 인권의 대지 위에 민주주의를 쌓고 그 토대 위에 입헌주의와 법치주의를 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헌법 연구자이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제정자문위원회에 참여한 이후 학생인권에 터 잡아 학교에서 민주주의 짓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br /> &nbsp;<br /> <strong>배경내</strong><br /> 인권교육센터 &lsquo;들&rsquo;,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 공동집행위원장. 인권을 만나고 삶이 충만해졌다. 인권과 교육의 만남, 인권과 청소년의 만남이 주로 내가 영감을 받고 나를 달뜨게도 하는 주제이다. 인권교육센터 &lsquo;들&rsquo;에서 주로 둥지를 틀고 있고, 최근에는 학생인권조례 제정 일에 발품을 팔러 다닌다. 쓴 책으로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춘다》가 있고, 함께 쓴 책은 《대한민국 1%》, 《뚝딱뚝딱 인권짓기》,&nbsp; 《인권, 교문을 넘다》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박복선</strong><br />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되면서 선생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복직한 학교를 나온 것도 그 덕분이다. 우리교육에서 편집장을 했고, 하자센터에서 부센터장을 했고, 지금은 성미산학교에서 교장을 하고 있다. 경계를 넘나드는 재미로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공현</strong><br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청소년 언론 《오답승리의희망》 편집진. 고등학교 때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당사자로서 시작해서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코가 꿰어서 계속하고 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교육공동체 벗이 생산한 저작물은 &lt;정보공유 라이선스 2.0 : 영리 금지&middot;개작 금지&gt;를 따릅니다.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면 교육공동체 벗과 협의해야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2 오전 11:01:00해슬럼의 ‘E. H. 카 평전’<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7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4_E_H_%EC%B9%B4%20%ED%8F%89%EC%A0%84/EH%EC%B9%B4%ED%8F%89%EC%A0%84_%ED%91%9C%EC%A7%80_60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세상 만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실제로 직접 증명할 수는 없지만 감지할 수 있는 사물의 신성한 규율이 있단다. &hellip;&hellip; 섭리에 대한 믿음은 모든 믿음의 최종적인 귀결이자 실체일진대, 이 점에 관해 나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color: #333300">- 랑케가 아들에게(1873년)</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빛이 강렬한 곳에도 짙은 그림자는 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color: #333300">- 괴테, 〈괴츠 폰 베를리힝겐〉 1막</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위대한 사람들의 미숙함은 보통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것이다. 냉소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천재들이 보통 사람보다 일상생활을 더 잘 꾸려 나가지도 않으며 때로는 자기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만족해 한다. 냉소적 성향을 가진 사람만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 또는 대단치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심적으로 언제나 천재들의 편에 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며 다소 위안을 얻는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E. H. 카, 〈러시아인들의 양면〉, 《포트나이틀리 리뷰》</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E. H. 카라는 이름은 도발적인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 덕분에 역사 교사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친숙할 것이다. 또 소비에트 역사 전공자들에게는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이어지는 러시아혁명을 다룬 14권이라는 결코 만만치 않은 저작의 지은이로 기억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에 매혹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그는 《낭만의 망명객들》을 통해 알렉산드르 게르첸과 그의 동료들을 우아하게 묘사한 작가였다. 그런가 하면 정치학자들에게 《20년간의 위기, 1919~1939》(The Twenty Years&rsquo; Crisis, 1919~1939)는 여전히 고전이다. 오랜 시간을 외교관으로, 그다음에는 《타임스》의 논쟁적인 부편집인으로 영국에 봉사하였다. 가족들에게 그는 언제나 &ldquo;연구밖에 모르는 학자&rdquo;였고 친구와 동료들에게는 그냥 &lsquo;테드&rsquo;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에게 카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자 접근하기 어려운 인물, 인간이라기보다는 반신(또는 악마)과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이유들 탓에 그에게는 찬사뿐 아니라 비난도 쏟아졌다. 이런 인물을 두고 어느 누구도 무관심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던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를 존경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당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그토록 용감하고 단호하게 발언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많은 적군을 만들기 마련이었다.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던 맥스 이스트먼(Max Eastman)은 그를 &ldquo;혁명적 폭력이라는 대안적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하고 조용한 심성을 지닌 부르주아&rdquo;로 묘사했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ldquo;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를 결코 숨기지 않았고, 극단주의자들이 어리석고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경우에도 &hellip;&hellip; 그들을 끝까지 두둔했다&rdquo;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몇몇 뛰어난 동료들은 카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전학자 모제스 핀리(Moses Finley)는 &ldquo;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절제된 지성의 소유자&rdquo;라고 썼다. 휴 시턴-왓슨(Hugh Seton-Watson)에게 카는 언제나 &ldquo;존경과 감사의 대상&rdquo;이었다. 한때 공산주의자였지만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미국인 버트램 울프(Bertram Wolfe)는 그를 변증론자로 비난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ldquo;학자다운 모습과 성실함, 자료를 다루는 완벽함 때문에 존경할 수밖에 없다&rdquo;고 고백했다. 부당한 비난의 대상이든 존경의 대상이든, 그는 그 시대에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남겨서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E. H. 카에 대한 평전이 필요한 까닭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카를 1973년부터 알고 지냈다. 그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측면에서 비타협적이었고 고립적이었다. 친절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소한 뉴스에도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충실했지만, 경우에 따라 무뚝뚝하고 눈앞의 일과 관계없는 질문에는 대답하기를 싫어했고 친밀함을 드러내는 이에게 싫증을 내기도 하는, 한마디로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암으로 투병 중이던 마지막 순간에는 과거보다 약한 면을 보여 주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E. H. 카에 대한 연구는 애초에 순전히 지적인 평전로 방향을 잡았지만 불가피하게 다른 무언가로 옮아가고 말았다. 이사야 벌린은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이런 생각은 뒷날 두말할 나위 없는 진실로 드러났다. 카가 좋아하는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니콜라이 베르자에프(Nikolay Berdyayev)는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다. &ldquo;학자를 개성과 무관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모든 뛰어난 학자는 뛰어난 개성의 산물이다. 바로 그러한 개성의 깊이로부터 그 인물이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설명할 수 있다.&rdquo; 여기에 우리는 그 인물이 살아온 시대가 부여한 중요한 역할을 첨가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카는 전기 작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엄청난 양의 출판물 말고는, 1925년부터 1960년까지 쓴 비망록과(그 이후 기록들의 행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얼마 되지 않은 육필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런 형편은 카의 삶을 백지 상태에서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완성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인생 여러 단계에서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쓰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도움을 준 사람들뿐 아니라 실제 전혀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이 결과물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를 두려워하고 싫어했던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여기에 인용된 카의 기록과 관련하여 버밍엄대학 문서보관소에서 그 원본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 편지와 비망록 사본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나머지 기록들은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것들이다. 증거 자료를 찾을 수 없을 때 나는 카에게 직접 듣거나 아니면 그의 직계가족한테서 정보를 얻었다. 자료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내용은 자료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기억이 고정된 정보 보관소가 아니라 끊임없는 재창조의 과정이라는 점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hellip;)</p> <br /> <p style="text-align: right">케임브리지대학 코퍼스크리스티칼리지에서<br /> 2000년 4월 조너선 해슬럼</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br /> 소심하지만 뛰어난 학생</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빅토리아시대의 중산층 가정</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 Carr, 애칭은 &lsquo;테드&rsquo;)는 1892년 6월 28일 화요일, 빠르게 팽창하고 있던 런던 북쪽 근교의 어퍼홀러웨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제시(Elizabeth Jessie, 결혼 전 성은 핼릿)이고 아버지는 프랜시스 파커 카(Francis Parker Carr)이다. 그날은 습도가 매우 높은 날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심한 천둥 번개가 그날 저녁부터 목요일 이른 아침까지 계속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치적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북부 아일랜드의 얼스터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William Gladstone)은 《타임스》가 분명한 어조로 &ldquo;국가에 대한 뻔뻔스러운 협잡이자 기만&rdquo;이라고 비난하고 있던 아일랜드 자치법에 집착하고 있었다. 글래드스턴은 의회를 해산하고 하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확보하기 위해 총선을 요구했다. 빅토리아시대(1837~1901)에 형성된 나라 안의 정치적 합의는 아일랜드 문제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다른 문제들도 떠오르고 있었다. 비록 여전히 세계의 은행이긴 했지만 더 이상 세계의 공장은 아닌 영국은 당시 국부의 분배를 압박하며 조직되고 있던 노동계급을 상대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징후들이 커다란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인들에게 글래드스턴은 누가 봐도 성공적인 사회질서를 해체해 나가면서 약간 모호하지만 심술궂게 이런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질서의 기초는 최대한의 자본 축적을 보장하기 위해 짜여졌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의기양양하게 &ldquo;투자 정신과 시대의 부&rdquo;를 찬양했고, 전 세계적으로 &ldquo;인류의 새로운 활동 덕분에 많든 적든 혜택을 입지 않은&rdquo; 나라는 찾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소득은 이제 지출보다 저축으로 쌓여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자본 총액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카의 가족은 &ldquo;부유하지만, 존경할 만하며, 근면한 부르주아지&rdquo;를 대표할 만한 전형적인 사람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0"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4_E_H_%EC%B9%B4%20%ED%8F%89%EC%A0%84/EH%EC%B9%B4.jpg" />카의 가계는 스칸디나비아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게 거의 확실하다. 가족의 성은 잔목(殘木) 또는 습지를 뜻하는 중세 영어 &lsquo;커&rsquo;(kerr)에서 유래했고, 이 단어는 다시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크헤르<sup>kjarr,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로, 로마제국 황제에 비견될 수 있다</sup>에서 나왔다. 바이킹 정착자들은 노르만을 정복하기 수백 년 전에 잉글랜드 북동부의 광범위한 지역을 식민지화했다. 우리가 테드의 조상을 만나게 되는 때가 바로 중세 후반기이다. 조지 카(George Carr)는 상인이었고 1450년에는 행정관을 지냈으며 뉴캐슬의 8선 시장이기도 하였다. 조지 카의 가족은 15세기와 16세기에 모험 상인으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 내전<sup>1640~1646, 의회를 무시하고 실정을 거듭한 찰스 1세에 대해 항거한 의회파와 그를 지지한 왕당파 간의 싸움. 청교도혁명이라고도 한다. 카의 선조들은 이 내전에서 왕당파 쪽에 섰다</sup>에서 패한 진영에 서는 바람에 사회적 지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왕정복고 이후인 1693년에 태어난 매슈 카(Mathew Carr)는 선덜랜드에서 신분이 낮은 닻 제작자로 생계를 이어 갔다. 그 뒤 가문의 한 분파는 요크셔를 거쳐 남쪽으로 이주하였으며, 18세기 말 무렵이 되면 가죽 닦는 비누 생산자에서 검정 구두약 생산업자로 변신한 테드의 증조부가 런던 북쪽 교외의 바네트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로버트가 1819년에 하이게이트에서 태어난다. 그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테드의 아버지 프랜시스 파커는 가장 가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랜시스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는 &ldquo;케임브리지의 최우수 학생 후보군에 속할 정도로 집안에서 매우 똑똑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hellip;&hellip; 꽤 유명한 체스 기사&rdquo;였다. 프랜시스의 생업인 필기용 잉크 판매는 빅토리아시대에 중산계급 가정을 충분히 부양할 만큼 안정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커다란 부를 축척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야망이 없었다. 실제로 테드가 태어난 어퍼홀러웨이 글래드스뮈어가 62번지의 집은 지금도 여전하듯이 당시 그 지역의 전형적 형태인 아담한 반독립 가옥이었다. 테드의 부모는 임신 중에 새로 지은 그 집으로 이사했는데 당시 길 맞은편의 대부분 지역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교사와 은퇴한 목사, 사무원, 타자수, 언론인, 양말 장수 등 도시 근교에서 안락한 삶을 이루고 있는 다른 이웃들의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공간만 허락되면 입주 하인을 고용할 수 있었다. 어퍼홀러웨이는 하이게이트보다 사회적 위계에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햄스테드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햄스테드를 넘어서면 핀칠리와 북쪽의 헨던 같은 마을을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이 펼쳐진다. 가족은 &ldquo;전형적인 중산계층이었고 완전히 빅토리아적&rdquo;이었다고 카는 회상했다. &ldquo;내 기억에 우리 가족은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카가 태어난 가정은 그야말로 안정적이고 정상적이었지만 단 한 가지 결정적으로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다. 카의 집에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이모(제시의 언니) 노처녀 아멜리아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굶주린 사랑을 카에게 집중함으로써 해소하려고 했다. 그녀는 카가 나중에 &ldquo;저 빅토리아시대의 공포, 의존적 친척&rdquo;이라고 생생하게 회고한 사람이다. 1895년 6월 24일 남동생 프레드릭이 태어났을 때 제시의 건강은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이 기회를 틈타 자기 욕심에 어린 테드를 낚아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를 제지할 정도로 단호하지 못했기에, 제시가 건강을 회복할 무렵에 이르러서야 카의 부모는 아멜리아의 욕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미숙한 세 살 때 어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갑작스럽게 멀어짐으로써 동생들이 태어날 때마다 흔히 아이들이 겪는 문제가 그에게는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한참 뒤에 테드는 불행한 어린 시절에 겪은 충격을 회상하곤 했다. 이렇게 고백한 적도 있다. &ldquo;그래요.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만, 나는 혼자 외롭게 성장했기 때문에 감정 상태가 언제나 약간 삐딱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동생과 여동생은 테드가 세 형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외로운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부모한테 느낀 소외감의 정도는 그가 말년에 《후즈후인명사전》에 등재되었을 때, 부모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테드가 노년에 접어들었을 때, 친구(타마라 도이처)가 &ldquo;고아 같다&rdquo;는 말을 건네자 그는 지체 없이 공감하였다. &ldquo;그 말이 나한테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부모한테서 받는 것들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게 마련이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소심한 아이 카는 내면에 &lsquo;외로움과 냉정함&rsquo;을 지니고 성장하였다. 그는 사랑 받기를 무척 갈망했지만 동시에 감정의 상당 부분을 억제하는 것도 배웠다. 겉으로 드러나는 자제력 때문에 그는 불가피하게 또래 집단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그는 그러한 감정들을 글로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친구와 가족들이 카의 행동 방식을 보고 그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려면 여러 해가 걸릴 수밖에 없었다. 거르지 않은 감정을 그대로 분출하는 것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였다. 그는 뒷날 이렇게 고백했다. &ldquo;나는 배멀미 때문에 고생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첨예하고 격렬하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는 심적 배멀미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아멜리아가 테드를 학대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녀는 야망이 없는 아버지와 허약한 어머니가 베풀지 못한 삶의 방향감각을 제시하였다. 동시에 테드의 라틴어 학습과 관련된 학교 과제를 지나치리만큼 많이 도움으로써 해를 끼치기도 했다. 그렇지만 테드는 이러한 공부를 통해 통제되지 않은 맹렬한 감정의 바다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를 얻게 되었다. 1900년 1월 22일에 출생한 &lsquo;아이크&rsquo;라는 별칭을 가진 여동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늘 아멜리아 이모는 숙제를 시키기 위해 오빠를 자기 방으로 서둘러 끌고 갔다고 회상했다. 그러한 관계는 풍성한 결과를 낳았고 남동생과 여동생은 테드의 남다른 관심을 부러워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모 아멜리아가 테드를 아무리 사랑했다 할지라도 그녀가 테드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테드의 가정과 관련하여 또 하나 색다른 점은 그가 공동체 안에서 고립된 가족 출신이라는 점이다. 카는 &ldquo;나는 40~50명 친척들만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사회에서 &hellip;&hellip; 성장했다&rdquo;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이 점은 뒷날 도스토옙스키 전기를 쓰는 과정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ldquo;어린 시절에 함께 놀 친구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스토옙스키의 인생과 작품 모두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방 세 칸짜리 집에서 여섯 형제자매와 더불어 성장한 사람이 고립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얘기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가족은 분명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사회적 활동이 없었고 모든 활동과 반응은 외향적이 아니라 내성적이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생 둘이 더 태어남에 따라 리스데일에서 멀지 않은 노스혼시의 크라우치힐에 있는 더 넓은 주택으로 이사를 갔지만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카의 친척들은 보통 일요일 점심때 하이게이트 근처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프랜시스의 형) 랠프 카의 훨씬 넓은 집에 모였다. 나머지 사회생활 역시 가족 중심적이었고, 그 결과 삼촌 알프레드를 제외하고 친척 모두가 가족 경영에 참여하였다. 사소하지만 주목할 만한 현상이 나타났다. 카의 친척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유머를 만들어 함께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점은 그들과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게 된 이들의 생활을 다소 곤란하게 만들었다. 테드는 자신이 어렸을 때, &ldquo;우리 가족은 다른 사람들은 재미없어 하는 것에 웃곤 하였기 때문에 &lsquo;비틀린 유머 감각&rsquo;을 가졌다고 비난받았다&rdquo;라고 회상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머천트테일러스스쿨</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테드의 성장 환경은 폭이 좁았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다른 세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테드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그의 학교생활에 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키가 아주 크고 말랐으며 지적이고 통찰력이 있었다고 한다. 눈이 근시였고 친척들 대부분의 특징인 주먹코를 다소 닮은 코를 가지고 있었던 테드는 내성적이었고, 반사회적이라기보다는 과묵하고 놀이기구보다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 아이였다. 사랑보다는 곧바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이였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재치로 자기보다 영리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293"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4_E_H_%EC%B9%B4%20%ED%8F%89%EC%A0%84/%EC%97%AD%EC%82%AC%EB%9E%80%EB%AC%B4%EC%97%87%EC%9D%B8%EA%B0%8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빅토리아시대의 전형적인 가치 가운데 하나인 절약이 몸에 밴 부모는 카의 중등 교육비를 들이지 않았다. 테드는 1905년 머천트테일러스스쿨(Merchant Taylor School)의 장학금을 확보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런던 중심부 차터하우스 광장으로 옮겨 와 왕실 가족이 세운 웅장한 빅토리아풍의 고딕 양식 건물에 입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크로우치힐의 집에서 그는 북부철도 열차가 내뿜는 증기와 유황 냄새를 맡으며 앨더스게이트<sup>Aldersgate, 런던으로 들어가는 성문 가운데 하나로 17세기 초반에 건설되었다</sup>와 소매치기, 그 밖에 크고 작은 범죄로 악명이 높은 도시로 통학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머천트테일러스스쿨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런던에서 통학할 수 있는 근교의 공립학교들에게 학생들을 빼앗기자 약간의 위기를 느꼈지만, 카에게는 더 나은 선택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올바른 선택이었다. 교장 존 나린(John Narin)은 연구교수로 있던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 학부 과정의 고전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스물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인 1900년에 이 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눈에 띄는 실수를 저질렀다. 경험이 부족한 나린은 그때까지 머천트테일러스의 고전 분야 최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던 옥스퍼드대학의 세인트존스칼리지와 심각하게 충돌하였다. 교장이던 그가 1902년부터 1911년까지 화해를 거부했기 때문에 고전 분야의 최우수 학생이면서 세인트존스칼리지로 진학 예정이던 대부분의 학생 대표는 다른 곳으로 진학해야 했다. 또 1914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이사회의 감사 보고서는 수업 시간이 너무 짧고 숙제는 너무 많으며 다수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수만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의 고전 분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나린이 교장으로 부임했을 때 최신 교과목들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그가 오고 나서 다소나마 진전을 이룩해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ldquo;공립학교 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은 부모를 둔 중산계급의 소년들에게 중등교육과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입학 기회&rdquo;를 제공하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학교는 테드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는 세계였다. 학생들은 풀 먹인 하얀 이튼칼라 교복을 입었다. 4학년이 되면 중산모도 쓸 수 있어서 실제 그렇게 하기도 하였으며 여름에는 맥고모자를 쓰기도 하였다. 엄격한 규율이 있었지만 이 학교는 의심할 바 없이 비범한 개성의 장이기도 하였다. 학교의 단체 사진에서 학생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동작을 취하고 있는 장면은 그런 학풍을 잘 보여 준다. 게다가 기발함은 교사로서 으뜸으로 갖추어야 하는 요건은 아니더라도 차선쯤은 되었다. 차터하우스 광장에서 몇몇 교사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거만했지만, 그들은 대개 유능할 뿐 아니라 친근하다는 명성을 유지하였다. 고전을 가르치는 유능한 교사 콘웨이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한 학생은 콘웨이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무너져 버리는 럭비 스크럼을 발견한 첫 수업을 이렇게 회상했다. &ldquo;콘웨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여전히 학생들이 서로에게 공을 던지고 있었기에 교사 주위를 감싸고 있어야 하는 존경의 영역이 침해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기분이 몹시 상했고 학생들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rdquo; 고전 분야의 또 다른 교사였던 뱀스필드는 키가 크고 짙은 머리에 잘생긴 남자 교사였다. 그는 언제나 낡은 검정 코트와 갈색 코르덴조끼를 입었으며 널리 존경을 받고 있었다. 뱀스필드는 테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의 아름다움을 학생들에게 소개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적으로 자신만만했던 테드는 자주 &ldquo;학급에서 일등을 차지하였고&rdquo; &ldquo;교과과정상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과학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과목에서도&rdquo; 잘할 수 있다는 능력을 &ldquo;결코 의심하지 않았다.&rdquo; 1906년 첫 학년을 마치면서 그는 수학과 신학 우등상 그리고 모범상을 들고 집으로 갔다. 실제로 이후 경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처음에는 수학과 성경에서 가장 높은 학업 성취도를 보였다. 게다가 드물긴 하지만 그는 아흔 나이에 이르러서도 성경을 인용하는 데 놀라운 소질을 드러냈다. 물론 저학년 학생이 치러야 할 개인적인 대가도 있었다. &ldquo;학급에서 언제나 일등을 차지하는 학생들은 동급생들한테 인기가 없었다.&rdquo; 게다가 테드는 멍청한 학생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통학에는 몇 가지 장점도 있었다. 고학년 학생들은 주변의 동행자들을 모방하는 경향이 있어서 학교 가는 길에 아침 신문을 읽었다. 그 당시 주변 세계에 대해 우경화되어 가던 경제.정치 제국의 중심지를 학습함으로써 정치에 대한 생각도 향상되었다. 테드는 동료 학생들과 달리 자유당을 지지했다. 반면 테드의 아버지는 1895년과 1900년에 치른 선거에서 보수당을 지지했다. 그런데 &ldquo;열렬한 자유무역 옹호자&rdquo;이던 그는 보수당이 독일과 미국의 격렬한 경쟁에 직면하여 산업보호 정책으로 전환하자 테드와 더불어 자유무역을 확신하고 있던 자유당으로 전향하였다. 실제로 테드는 아버지의 &ldquo;자유무역의 장점에 대한 논리적 설명과 &lsquo;관세 개혁론자들&rsquo;의 불합리한 오류의 분쇄&rdquo;를 &ldquo;합리적 주장의 과정에 대한 최초의 통찰&rdquo; 기회였다고 회상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06년 총선에서 거둔 자유당의 승리는 테드에게 &ldquo;첫 정치적 기억&rdquo;이었다. 그는 로이드 조지의 사회개혁안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변하지 않고 &ldquo;로이드 조지의 집권 기간 내내 자유당을 확고하게 지지했다&rdquo;는 사실은 뜻밖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테드의 친구들 가운데 &ldquo;열에 아홉은 정통 보수당 가정 출신이고 그들은 로이드 조지를 악마의 화신이라고 여겼다&rdquo;는 점이 그를 힘들게 했다. 테드에게 로이드 조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변치 않는 영웅이었다. 학교에서 자유당은 &ldquo;무시될 만큼 극소수&rdquo;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은 그 무렵 이미 깊숙이 스며든 고립감을 더욱 강화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말 일부,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조너선 해슬럼 Jonathan Haslam</strong><br />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부 교수. 영국 학술원 회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에서 E. H. 카의 지도를 받고 버밍엄대학에서 소비에트의 외교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예일대학, 하버드대학, 스탠퍼드대학, 프린스턴대학 고등연구원 등의 초청으로 다년간 미국에서 연구하고 강의했다. 현재 냉전 시대의 국제관계와 유럽 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br /> 지은 책으로 Russia&rsquo;s Cold War, 1917~1989(2011), The Nixon Administration and the Death of Allende&rsquo;s Chile(2005), No Virtue Like Necessity(2002), The Soviet Union and the Threat From the East, 1933~1941(1992), The Soviet Union and the Politics of Nuclear Weapons in Europe, 1969~1987(1989), The Soviet Union and the Struggle for Collective Security in Europe, 1933~39(1984), Soviet Foreign Policy, 1930~33(1983)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원용</strong><br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소비에트 집권 초기 고등교육기관의 개혁〉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네프기(1921~1928) 학생집단의 생활양식: 노동자 예비학부를 중심으로〉, 〈&lsquo;신체문화&rsquo;에서 &lsquo;선수 양성공장&rsquo;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체육정책 변화&gt;, 〈10월혁명의 영상독해: 에이젠슈테인의 &lsquo;10월&rsquo;을 중심으로〉, 〈스탈린 체제 일상사 연구의 현황과 쟁점〉 등의 논문을 통해 1920년대 러시아 사회를 영화와 여가활동 등 문화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연구와 1930년대 스탈린 시기의 일상사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1920~30년대 미국과 소련의 상호 이미지에 관한 연구에서 시작하여 냉전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연구하고 있다.<br /> 함께 지은 책으로 《역사가들》(2011), 《19세기 동북아 4개국의 도서분쟁과 해양경계》(2008) 등이 있고, 《10월 혁명: 볼셰비키 혁명의 기억과 형성》(2008)을 우리말로 옮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21 오전 10:15:00《220》쉐디드의 『욥의 아내』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28"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0_%EC%9A%A5%EC%9D%98%20%EC%95%84%EB%82%B4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3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앙드레 쉐디드의 </strong></span></span><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욥의 아내』</span></strong></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열림원, 1997,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10)<span style="font-size: small">를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욥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인기 높은 성경 속의 문제 인물이다. 특히 실존주의자들에게 욥은, 단지 세상에 내던져졌다는 이유만으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욥의 아내』를 쓴 앙드레 쉐디드에게는 욥보다 그의 아내가 더 문제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기」의 주인공인 욥은 신과 악마 사이의 내기에 걸려 자식과 재산을 모두 잃는다. 신이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온 악마에게 &ldquo;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rdquo;고 자랑하자, 악마가 &ldquo;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rdquo;라며,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유는 &ldquo;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러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rdquo;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신은 &ldquo;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rdquo;라며 악마의 내기에 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욥기」를 골격으로 삼지만, 작가는 욥이 아닌 욥의 아내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욥기」 속에서 욥의 아내는 매우 불경하게 묘사된다. 일곱 아들과 세 명의 딸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그와 함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욥이 기와 조각으로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난 악창을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는 &ldquo;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rdquo;라고 악담을 한다. 하나님을 악담했던 때문인지, 「욥기」에 단 한 번 등장했던 아내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엄청난 고난을 당하고서도 욥은 하나님을 욕할 줄 몰랐다. 그 결과 「욥기」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ldquo;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1만 4천과 약대 6천과 소 1천 겨리와 암나귀 1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그가 첫 딸을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1백4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4대를 보았고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rdquo;</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434"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20_%EC%9A%A5%EA%B8%B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아마 작가는 저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했던 듯하다. &lsquo;아니, 그렇다면 하나님을 욕했던 아내는 어떻게 되었나? 새 아들과 딸을 낳은 여인은 악담을 했던 그 아내였을까, 아니면 새 아내일까?&rsquo; 확실히 저 대목에서 성경은 명료하지 못하다. 우선 &ldquo;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rdquo;라고 응대했던 욥부터 아내를 참았을 것 같지 않으니, 두 사람이 백년해로 했을 법하지 않다. 그러므로 욥은 본처와 이혼하고, 새 아내를 맞은 것일까? 「욥기」는 아내에 대한 언급을 극구 피하는 방법으로 이 사항을 처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신화나 경전에 소홀하게 취급된 인물이나 일화를 잡아채어, 거기에 새로운 조명과 전복적인 해석을 부여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애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대표적인 예가 남성중심의 &lsquo;신데렐라 콤플렉스&rsquo;를 부추겨 왔던 &lsquo;동화 새로 쓰기&rsquo;다. 작가는 똑같은 방법을 원용하여, 불경하고 소홀히 취급된 욥의 아내를 복원한다. 성서 속에서 이름이 박탈되었던 욥의 아내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이름이 없지만,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는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lsquo;신에 대한 불경&rsquo;을 늘어놓았다는 것을&nbsp;구태여 부인하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욥기」를 보면, 마치 아내가 남편과 함께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불행 때문에 하나님을 욕한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작중의 아내는 남편이 불행을 겪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을 때부터, &lsquo;믿음&rsquo;에 대한 의심을 품었다. &ldquo;신에게 한탄해볼까? 그녀는 여전히 신의 언어를 모른다. 열렬히 신을 경배하는 이들이 신에게 바치는 언어를&rdquo;이라는 아내의 혼잣말은, &lsquo;신의 언어&rsquo;를 남성 가부장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여성은 그 언어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암시해 준다. 즉 욥의 아내는 신과 남편을 같은 통속으로 보면서, 남편의 종교를 남성 가부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의 아내는 신에 대한 큰 믿음이 없다. 그녀가 믿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 속에서 그녀는, 신의 느닷없는 시험으로부터 남편을 지키고 친구들의 조롱으로부터 남편을 옹호하는 강건하고 사려 깊은 여성이 된다. 그녀에게 이름이 없는 이유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ldquo;그녀는 욥의 아내였었고, 욥의 아내였고, 욥의 아내이고, 욥의 아내일 것이다. 그녀는 다른 이름이 없다. 그녀는 어떤 다른 이름도 원치 않는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 이 작품에 대한 내 최초의 독후감은 『독서일기』 4권에 실려 있는데, 거기서는 불신앙자가 아닌, 신앙자가 빠지는 &lsquo;죄&rsquo;를 경고하기 위한 경종으로 욥의 사례를 들고 있다. 이런 해석은 정통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욥의 아내』 말미에는 「욥기」의 전문이 실려 있다. 독후감에 나오는 「욥기」는 모두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19 오전 10:46:00임석재의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91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2_%EA%B8%B0%EA%B3%84%EA%B0%80%20%EB%90%9C%20%EB%AA%B8%EA%B3%BC%20%ED%98%84%EB%8C%80%20%EA%B1%B4%EC%B6%95%EC%9D%98%20%ED%83%84%EC%83%9D/%EB%AA%B8%EA%B3%BC%ED%98%84%EB%8C%80%EA%B1%B4%EC%B6%95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u><strong>최신 융합 이론인 몸 이론</strong></u></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새롭게 연구하기 시작한 &lsquo;몸과 건축&rsquo;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몸과 건축이라는 주제는 말 그대로 몸 이론과 건축을 연계시켜 연구하는 것이다. 연계의 방향은 물론 양 방향이다. 몸 이론을 활용해서 건축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하고 반대로 건축을 통해 몸 이론의 범위를 넓히거나 몸 이론에서 애매했던 부분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둘을 굳이 구별할 필요 없이 &lsquo;이론&rsquo;이라는 큰 우산 아래 몸과 건축이 하나로 만나서 새로운 가지를 하나 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학문 경향인 융합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양에서는 1980~1990년대 초반에 이 주제가 잠시 유행한 적이 있다. 푸코와 메를로퐁티의 영향이 컸다. 당시 푸코는 저작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의 섬뜩한 비판 이론의 많은 부분은 몸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작 중에 직접적으로 몸을 거론한 것도 상당 부분 된다. 몸 이론으로 환산할 수 있거나 이와 일정한 연관성이 있는 것까지 합하면 그의 저작 대부분은 결국 몸에 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lsquo;현대 문명이 인간의 몸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구속해서 물질주의를 이루었는가&rsquo;라는 한 가지 명제로 좁혀질 수 있을 정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푸코의 여파가 커지면서 그의 정신적 스승 가운데 한 명인 메를로퐁티에 대한 관심도 함께 일어났다. 푸코의 정신적 스승은 여러 명일 수 있는데 몸 이론과 관련해서는 단연 메를로퐁티가 제일 앞에 설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몸을 단순한 단백질 물질 덩어리나 정신의 조종을 받는 기계로 정의한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 정신과 물질이 한 곳에서 만나는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한 철학자였다. 이런 정의를 처음 내린 사람이 메를로퐁티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이 명제를 한 권 이상의 책으로 정밀하게 정리해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시킨 것은 분명 메를로퐁티가 처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두 사람을 통해 몸이 철학적 사유와 이론의 대상이 되면서 몸 이론은 그 대상과 범위를 빠른 속도로 넓혀갔다. 몸을 물질 덩어리로 보고 이것을 최일선에서 직접 만지는 의학이 들어왔고 인간의 몸이 서로 부대끼며 만들어낸 사회 구조의 작동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사회학도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보기 시작하자 학문과 문화 분야 가운데 몸 이론과 연관성을 갖지 않는 장르가 없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고, 결국 인류의 문명과 문화라는 것이 사람이 몸을 사용해서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lsquo;철학-의학-사회학&rsquo;의 삼각 체제를 기본 토대로 삼아 인류학과 경제학이 들어왔고 시각 예술의 여러 장르도 들어왔다. 문학은 그 자체가 인간 몸의 관찰 기록이라 할 정도로 몸 이론의 거대한 보고가 되었다. 세부적으로 보면 프랑스대혁명, 마르크스의 자본론,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사회 등 이전부터 여러 학문 분야에서 다루어오던 흥미로운 단골 주제들이 몸 이론으로 재해석하기에 아주 적합한 대상이 되었다. 과학사도 그 가운데 하나여서 몸 역사의 관점에서 재정리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u><strong>몸과 건축 시리즈를 시작하며</strong></u></p> <p style="text-align: justify">몸 이론을 초점으로 삼아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융합하기 시작한 이런 새로운 경향은 분명 1980~1990년대 서양 학계가 남긴 중요한 업적임이 틀림없다. &lsquo;몸과 건축&rsquo;이라는 주제도 이런 흐름의 하나로 나타났다. 세부적 경향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푸코와 메를로퐁티의 반성철학을 건축에 적용시킨 새로운 연구, 인체와 고전주의 오더 양식을 대응시키는 전통적 이론의 재고찰, 장식 이론을 도입한 새로운 건축 상징 이론 등이 대표적 내용이다. 그 결과 서너 권 정도의 주요 서적이 출판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를 끝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lsquo;몸과 건축&rsquo;이라는 주제는 소리 없이 시들해졌다. 이후 몸 이론 자체가 인문사회학, 의학, 과학, 예슬 사이의 연관성을 높여가며 지속적으로 번창한 것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아마도 건축계 자체에서 이론 연구가 쇠퇴한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하는 정치 경제 흐름의 직격탄을 맞아 건축계는 전 세계적으로 자본으로 급격히 종속되었으며 바야흐로 이론 실종 시대가 오고야 말았다. 건축 자체의 고유 이론도 소멸해가는 마당에 융합을 통한 다른 이론과의 연계 연구는 힘들어지게 되었다. 혹은 건축 이론가들이 자기 분야 안에 강하게 갇히는 경향이 심한 것도 이 주제가 시들해진 다른 원인일 수 있다. 건축은 우리가 살아가는 주변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포괄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다른 학문과 연계시키기 시작하면 비단 몸 이론뿐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와도 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럴 경우 자칫 건축 이론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져 모호하고 산만해질 수 있다. 건축과 철학을 연계시키려는 시도가 대부분 실패로 끝나버리는 것이 좋은 예이며 &lsquo;몸과 건축&rsquo;도 이것과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에서는 몸과 건축 연구가 지금까지 전무했다. 건축계에서 이론 연구를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lsquo;몸과 건축&rsquo;이라는 주제에 대해 얘기를 꺼내면 머리를 갸웃거리며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몸 이론 자체에 대해서도 그랬다. 한국에서도 최근 몸 이론이 급속히 성장하는 것을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론 연구에 조금이라도 소질이 있는 건축 이론가거나 아니면 공부의 범위를 조금이라도 넓혀본 건축 이론가라면 &lsquo;몸&rsquo;이라는 한 음절짜리 단어 하나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것이 건축과 연계․융합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을 수 있으며, 그 포괄성과 다양함이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면서 온몸이 떨리는 학문적 의욕이 솟구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몸과 건축은 왜 이처럼 연계․융합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것일까. 둘은 학문의 대상으로 이론화되기 이전부터 기본적으로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건축은 몸의 생존 조건을 결정하는 세 가지 기본 조건인 &lsquo;의식주&rsquo;의 한 부분이다. 스킨을 기준으로 하면 &lsquo;피부-옷-건축&rsquo;의 세 단계가 성립되는데 역시 그 가운데 한 부분을 이룬다. 그만큼 몸과 밀착된 분야라는 뜻이다. 다른 증거도 많다. 몸이 정신과 육신의 결합체인 것처럼 건물도 정신적 가치와 구조체의 결합체다. 이는 인문사회학이나 의학처럼 인간의 몸에서 정신이나 육신 한쪽만 다루는 대부분의 학문 분야보다 훨씬 유리한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사회학은 사고와 언어라는 추상적 매개로 정신적 측면만 다룬다. 사실 철학에서 발전시켜가는 몸 이론을 공부해보면 기존의 철학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상만 존재니 사유니 하는 것에서 몸으로 바뀐 것뿐이다. 그만큼 인간 몸에 대해서 반쪽밖에 보지 못한다. 반면 의학은 끌, 정, 톱, 드라이버, 각종 호스와 모터와 전기 장치 등 온갖 기계를 동원해서 육신만 다룬다. 수술대에 마련한 도구를 보면 사실 집 지을 때 쓰는 도구나 카센터에서 자동차 고칠 때 사용하는 도구와 별 차이가 없다. 그만큼 인간의 몸에 대해 나머지 반쪽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축은 다르다. 건축의 물리적 속성으로만 치면 의학 못지않게 철저히 물질적이다. 하지만 그리스 신전이나 고딕 성당에서 보듯 건물은 그 자체가 그리스 신화나 기독교와 동의어일 정도로 정신적 가치 또한 막대하다. 이런 점에서 몸에 제일 근접한 매개이자 학문이다. 신학과 종교와 철학과 똑같이 정신적 가치를 가정한 뒤 육신과 똑같은 물리적 결과물로 이것을 구현해내는 분야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몸은 건물과 같은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부터 몸을 모델로 삼았으며 건물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은 몸을 바라보는 그것과 같은 것이다. 몸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고스란히 건물에 스며들어 반영된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은 몸 이론을 적용하기에 가장 좋은 분야다. &lsquo;몸과 건축&rsquo;이라는 주제는 실로 그 끝을 상정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포괄적이며 파생 내용이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보았을 때 서양에서 이 주제가 몇 년 잠시 반짝하고 사라진 점도 이해가 가지 않을뿐더러 하물며 이 주제 자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우리나라 건축 이론계의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같은 배경 아래 나는 &lsquo;몸과 건축&rsquo;이라는 시리즈를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삼아 그 첫 권을 출간한다. 이 주제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은 앞서 강조했듯이 실로 무궁무진하다. 혼자서도 20여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다. 나와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세한다면 그 확장 가능성은 가늠하기 힘들다. 물론 세상은 나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수용에 한계가 왔다고 판단하는 순간 이 주제에 대한 내 연구는 적당한 선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나 여건이 허락되는 한 중요한 주제부터 차례대로 출간할 계획을 품고 그동안 몸 이론에 대한 기초 공부를 해왔으며 그 첫 권으로 『기계가 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을 내놓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strong><u>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 현대 문명</u></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현대 건축의 최대 주주라 할 기계론이 몸과 건축에 스며들어 우리의 일상생활, 즉 현대 문명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 것이다. 원래 인간의 몸은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매우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전일적 존재다. 신체 하나에 국한하더라도 모든 장기와 기관이 상호 긴밀하게 작용하는 &lsquo;유기성&rsquo;이 인체 작동의 핵심적 특징이다. 여기에 정신과 정서, 감성과 감정이 함께 작용한다. &lsquo;몸 따로, 마음 따로&rsquo;가 아니라 몸과 마음은 서로 영향을 끼치며 함께 작동한다. 외부로 확장하면 복합성은 더욱 커진다. 기후와 풍토, 산하와 지형, 물과 공기, 먹는 음식과 주변에서 보고 듣는 것 등과 밀접히 연관되어 이런 것들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주 천체와도 맞닿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몸의 이런 복합성을 본능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격과 자존감의 요체다. 이런 수많은 요소가 매우 복합적으로 작동한 뒤 그 최종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lsquo;한 사람의 인격체로서의 나&rsquo;이며 그 한가운데에 우리의 몸이 있다. 자존감은 내 인격이 올바로 정의되고 존중될 때 얻어지고 지켜진다. 이는 곧 내 몸을 본능에 충실하게 복합적으로 정의하고 존중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내 몸은 나만의 수많은 경험과 기억, 삶과 상징, 환경과 배경, 가계와 족보 등이 얽히고설키며 어우러진 종합적 존재의 장이다. 나만의 세계이자 우주다. 이런 복합성의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지금 사람이라고 인격과 자존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명이 사람의 몸을 이렇게 복합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 문명이 인간의 몸을 정의하고 대하는 시각은 극단적 기계론이며 부위론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학교, 회사, 사회 등 나를 둘러싼 상위 조직은 내게 오로지 점수와 실적만 요구한다. 효율만이 절대 선이며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내 모든 것은 철저하게 부위별로 조각나서 기계적으로 훈련되고 다루어진다. 학교에서 내 존재는 과목별로 나눈 점수와 등급에 의해 그 무게와 의미가 정해진다. 회사에서는 실적과 고과 점수이며 이런 시각은 그대로 사회와 국가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존재 가치는 사회에 끼치는 금전적 기여에 따라 정해진다. 돈을 까먹으면 해악적 요소요, 돈을 벌어줘야 바람직한 시민이 된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른바 &lsquo;생산 유발 효과&rsquo;로 환산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것은 철저하게 숫자로 계량화된 뒤 그 숫자의 크기에 따라 줄 세우기가 일어난다. 그 줄에서 몇 번째에 서 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가치와 존재감, 심지어 인격까지 결정된다. 이런 계량화는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가족관계에서도 절대적 법칙으로 굳어져간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계량화된 숫자로 평가한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은 만족할 만한 숫자뿐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점수와 명문대 입학만을 바라고 자식은 거꾸로 부모에게 물질적 뒷바라지만을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대 문명의 현실이다. 가족 사이의 관계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학교와 회사와 사회에서는 계량화된 실적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이를 만족시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부위별로 조각낸 뒤 한두 부위만을 선택해서 기계적으로 집중 훈련한다. 이른바 &lsquo;선택과 집중&rsquo;이라는 개념인데 이 개념 자체야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계량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숫자로 표시되는 실적을 올릴 목적으로 인간의 몸에 적용시키는 순간 엄청난 폐해를 낳게 된다. 유기적이고 전일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의 몸이 망가지게 되며 그에 따라 정신과 정서, 마음과 감정도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현대 문명이 겪는 거대한 정신 불안 증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이미 수도 없이 나와 있다. 얼마 전까지는 주로 정치․경제․사회 등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경쟁 체제와 물질적 탐욕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이는 주로 진단에 해당된다. 최근에는 처방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으며 요즘 치유 계통의 심리학과 예술학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현상이다. 나는 여기에 몸 이론에 의한 분석과 해석을 더하고 싶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과 폐해는 인간의 몸을 매우 잘못된 시각으로 정의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기계론과 부위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축도 몸을 둘러싸고 벌어진 현대 문명의 패착과 횡포와 고스란히 맥을 같이한다. 사람이 몸을 바라보는 시각은 자기가 사는 집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으며 이것을 모으면 한 사회의 건축 현상이 된다. 우리가 우리 몸을 기계 부품처럼 대하는 시각은 건물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울 등 대도시에서 요즘 새로 짓는 건물은 고층 아파트와 대형 상업 시설이 99퍼센트를 차지한다. 중소 규모의 차분하고 예술성 있는 작품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감성을 보듬어주고 편히 쉬며 사색하고 산책할 만한 건물은 정말 찾기 힘들게 되었다. 집부터 이런 본유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이며 집 밖에 나오면 돈을 쓰는 순간에만 인간으로 대접받는 거대 상업 공간이 도시를 온통 점령해가고 있다. 이는 모두 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이다. 기계론과 부위론의 거대한 음모가 남긴 폐해의 구체적 증거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u>기계화된 몸과 현대 건축의 탄생</u></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이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이 사람의 몸을 기계 부품으로 정의하고 그에 따라 실적 제일주의를 다그치게 된 과정을 추적한다. 그리고 현대 건축 역시 그 끝에 탄생한 하부구조의 하나일 뿐이라는 결론 아래 &lsquo;현대 건축의 탄생&rsquo;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다빈치와 데카르트 등 몸 기계론을 주창하고 개척한 일차적 인물과 그들의 이론을 찾아냈으며 이것이 현대 문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했다. 건축은 이런 추적에서 직접적 관계를 갖는 유용한 매개다. 우리의 일상을 관장하는 주변 환경을 물리적 구조체라는 &lsquo;구체적 물건&rsquo;으로 만들어 구성해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건물은 이론으로 제시된 추상적 내용을 구체화해서 실제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데 유리한 매개다. 이는 &lsquo;건물은 사람이 몸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rsquo;라는 &lsquo;몸과 건축&rsquo; 이론의 일반 명제와 다르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따라 &lsquo;다빈치-데카르트-건축&rsquo;의 삼각 축을 뼈대로 기계론과 부위론이 현대 문명을 형성하고 장악해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다빈치는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본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명이며 이를 건축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이런 몸 기계론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서 사상적 뒷받침을 마련했다. 여기에 절대 공간과 순수 물질이라는 개념을 더해서 몸 기계론이 일상생활로 퍼지고 궁극적으로 현대 문명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절대 공간과 순수 물질이란, 한마디로 인간을 둘러싼 자연-인공 환경 전반에서 주관적이고 상징적이며 자의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공간을 순수 과학의 공식이나 숫자처럼 객관화되고 계량화된 상태로 정리하겠다는 개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계몽주의에 들어와서 페로와 렌 등 일련의 경험주의․과학주의 건축가들이 등장해서 &lsquo;공간 비우기&rsquo;를 통해 데카르트의 주장을 건물에 적용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다. 이렇게 비워진 공간은 이후 19세기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를 거치며 대형화되면서 &lsquo;텅 빈 거대 공간&rsquo;으로 확장된다. 공간이 면적으로 환산되는 순간이며 면적은 다시 재화와 동의어가 되었다. 19세기 만국박람회는 이런 &lsquo;텅 빈 거대 공간&rsquo;의 발전을 이끈 국제적 행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끝에 나온 것이 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의 건물 모델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철근 콘크리트 모델을, 미스 반데어로에는 철골 모델을 각각 완성한 장본인이다. 두 모델을 합하면 20세기 건물의 99퍼센트를 차지한다. 그만큼 두 사람의 중요성과 위치는 절대적이며 20세기 건축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두 사람의 건축은 다빈치에서 시작해서 400여 년을 이어론 기계론과 부위론의 산물이다. 물론 두 사람의 작품 자체는 일정한 예술성을 확보하며 수준 높은 고급 예술작품의 반열에 올라 있다. 이들이 타계한 지도 40년이 넘어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이들의 작품은 바야흐로 전통 시대의 고전 걸작처럼 되어가고 있다. 아울러 20세기를 이어온 수많은 건축가와 사조의 예술작품은 대부분 두 사람의 건축 모델을 배경으로 삼는다. 한마디로 두 사람이 없었으면 20세기 건축은 없었다고 할 정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사람의 절대적 영향력은 고급 예술로서의 건축 작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 조형 환경 역시 99퍼센트 두 사람의 건축 모델로 구성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들의 모델이 기계론과 부위론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것이 수준 높은 예술적 통제를 받지 못하고 일상 환경으로 내려올 경우 기계론과 부위론의 폐해가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흔히 &lsquo;무표정하고 삭막한 회색 상자&rsquo;로 통칭되는 현대 대도시의 비인간적 속성은 여기에서 나온다. 여기에 후기 자본주의가 시작된 1990년대 이후에는 대형 상업 공간의 문제가 가세한다. 기계론과 부위론이 결국 물질주의를 이루기 위해 나왔기 때문에 이 두 이론의 부산물인 두 사람의 건물 모델 역시 자본의 집적을 돕는 상업 공간으로 귀결되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르코르뷔지에와 미스 반데어로에는 20세기 현대 건축을 완성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이들의 건축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어왔다. 내 서재에만도 르코르뷔지에에 대한 단행본은 40여 권, 미스 반데어로에에 대한 것은 20여 권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의 건축을 몸 이론의 관점에서 해석한 연구는 이 책이 전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앞의 연구들이 대부분 두 사람의 건축을 찬양하는 쪽이었던 반면 몸 이론으로 해석하면 그 반대도 가능해진다. 기계론과 부위론의 부산물로서 현대 문명이 겪는 폐해에 대한 건축적 주범이라는 비판적 내용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새로운 점으로 제시하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u><strong>인문건축의 지속적 연구를 선언하며</strong></u></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몸과 건축&rsquo; 시리즈는 앞으로 전개될 나의 인문건축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이번 책이 내가 펴낸 43번째 책이다. 그동안의 저술 작업에 대한 이런저런 평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부족한 점에 대한 지적도 있겠지만 긍정적 내용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건축을 공사 현장에서 직접 건물을 짓던 토건 분야에서 끌어내 예술과 인문학 분야로 가져온 점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건축도 대중적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감사드려야 할 과찬임이 틀림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내 연구와 저술 작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lsquo;학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고민&rsquo;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에서는 전문 학술서보다 대중적 책을 더 원한다. 전문 학술 이론은 논문으로 좁혀지고 단행본은 전문적 내용을 대중을 상대로 쉽게 풀어주는 이원화된 흐름이 굳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나는 학자로서의 포부가 있기 때문에 대중적 책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전문 학술 연구도 논문보다는 단행본이 더 잘 맞고 꼭 필요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나에 대한 평가가 학자와 대중 저술가의 양 극단을 오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혹자는 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사람이라고도 한다. 둘은 굳이 구별할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론도 격언처럼 새기고 있다. 학자가 나이가 들고 학문이 깊어지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면 어려운 전문 학술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쉽고 친절하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무도 잘 알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 시작한 &lsquo;몸과 건축&rsquo; 시리즈에는 저술과 연구를 둘러싼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학술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싶은 바람을 담고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기여를 함과 동시에 대중에게도 건축을 읽고 나아가 건축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몸과 건축 시리즈가 포함된 인문건축이라는 연구 방향은 나의 50대를 관통하는 주도적 내용이 될 것이다. 몸과 건축 이외에도 건축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를 준비 중에 있으며 차례로 선보일 것이다. 계속해서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기대해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날로 척박해져가는 출판 환경 속에서도 졸고를 정성껏 출간해주신 인물과사상사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하는 두 딸과 애들 엄마에게도 늘 그렇듯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요즘은 두 딸을 앉혀놓고 아버지가 하는 작업을 이해시킨답시고 내 자랑을 늘어놓곤 하는데 지루해하지 않고 신기한 척 감탄과 맞장구를 쳐주는 두 딸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책을 통해 사람은 실적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격체로 소중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내 자신에게도 스스로 고마움을 느껴본다.</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large"><b>제의</b></span><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몸을 통해 건축이 태어나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u><strong>몸의 영원성과 합일성</strong></u></p> <p style="text-align: justify">건축의 탄생 배경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다. 몸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 문명, 특히 서양 고대 문명은 인간이 자신의 몸을 고찰한 내용과 매우 흡사한 궤적을 그리며 진행되었으며, 건축도 그 가운데 하나다. 건축은 몸의 물리적 보호라는 기능을 통해 몸과 직접 부딪히는 장르이기 때문에 더욱 비슷했다. 건축의 성립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lsquo;내 몸 하나 누일 거처를 확보하는 것&rsquo;이 되기 때문이다.<sup>■1-1</sup> 고대의 몸 개념 가운데 건축의 탄생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주제로 가장 먼저 &lsquo;제의&rsquo;를 들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2_%EA%B8%B0%EA%B3%84%EA%B0%80%20%EB%90%9C%20%EB%AA%B8%EA%B3%BC%20%ED%98%84%EB%8C%80%20%EA%B1%B4%EC%B6%95%EC%9D%98%20%ED%83%84%EC%83%9D/1-1_600.jpg" /><br /> <br /> 제의(祭儀, ritual)는 &lsquo;제례 의식&rsquo;의 준말이다. 제례는 권력자의 장․제례가, 의식은 대자연의 신에 올리던 경배 형식이 각각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 둘을 합하면 &lsquo;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으로 극복하려던 대응 형식&rsquo;이 된다. 이는 죽음의 문제를 인간의 기술력으로 해결하려는 서양 특유의 합리주의가 탄생(기원전 5세기 경)하기 이전의 대표적인 문명 형식이자 세계관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의에 담긴 몸의 의미는 영원과 합일이었다. 두 개념은 같이 작동했다. 영원이란, 몸을 사망과 함께 소멸하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생물학적 죽음이 인간의 완전 소멸이 아니라 단순히 이 생의 육신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영원한 존재를 담보해주는 생명의 장이 필요한데, 영원성을 갖는 몸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종교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내세 사상이나 미라가 가장 널리 알려진 예인데, 사상적으로 풀어 말하면 몸을 정신과 하나로 합해진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합일이라는 개념이다. 육신과 정신의 합일 개념은 &lsquo;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rsquo;로 이어지는 현대 철학의 핵심적 몸 개념이기도 한데, 그 뿌리는 원시-고대의 제의까지 올라갈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시-고대 시대에 몸의 합일 개념은 이들 현대 철학자의 주장처럼 정밀한 사상 체계를 갖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주술적 성격을 띠면서 제의라는 포괄적 문명 형식에 포함된 원초적 본능에 가까웠다. 혹은 이론으로 체계화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자 확신이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 철학자들이 어려운 사상 체계로 주장한 합일적 몸 개념도 합리주의와 기계문명이 깨뜨려 떼어놓은 육신과 정신의 통합 상태를 원시-고대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고대인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하던 개념을 후대의 말과 논리로 체계적으로 설명해서 복원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시-고대의 &lsquo;몸 합일&rsquo;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존을 위해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었다. 자연에 투쟁적으로 맞서보기도 하고 경건하게 의탁도 해보는 등 온몸을 다해 자연 속에서 생존 거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인간의 몸은 정신과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합리주의가 더해진 그리스 윤리학에서는 이것을 &lsquo;지덕체를 두루 갖춘 균형 잡힌 인간&rsquo;이라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통로는 종합 감각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이었다. 굳이 기계적 관측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자연의 변화와 운행 원리를 온 감각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면서 느끼는 희열과 쾌락은 이런 능력을 깨끗이 잃어버린 현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종합적으로 얘기해서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매개로 자연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은 상상 못할 정도로 포괄적이었고 다양했다. 몸의 온갖 감각적 기능이 펄떡거리며 살아 있고 역설적으로 기댈 것이라곤 몸밖에 없던 아득한 옛 시절에 몸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많았다. 바로 이 대목에 신화가 개입한다. 현대적 기록 기술이 없던 시절, 이런 내용을 사실에 가장 가깝게 기록하는 것이 신화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을 지금은 대부분 허구나 미신으로 간주하고 잘해야 비유적 표현으로 해석하지만, 의외로 신화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었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여전히 신화가 허풍이라면 이것을 좀 더 사실에 가깝게 다듬은 것이 고대 서사물인데, 호메로스<sup>Homeros</sup>의 『오디세이아』나 『일리아스』가 대표적인 예다. 『일리아스』의 끝에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식을 거행하는 부분을 보면 바람이 잘 안 불어 화장 장작이 타오르지 않자 북풍과 서풍에 제물을 약속하며 바람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마침내 바람이 불어 장작이 타올라서 장례를 무사히 치르게 된다. 고대 서사물에 매우 흔하게 등장하는 &lsquo;바람과 비와 구름을 부르는&rsquo; 이런 장면은 단순히 고대의 미신이나 과장으로만 볼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과학적 장비 대신 온 감각과 예측 능력을 집중해서 인간의 몸으로 일기를 예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읽어내는 이런 능력은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비와 바람을 불러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의 기능적 목적만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저 멀리서 혹은 저 높은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몰려오는 자연의 흐름과 변화를 내 몸의 신경과 감각으로 느껴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실로 찬란하고 황홀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인간에게 존재감을 확보해주는 가장 기본적 조건이자 원초적 단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같은 배경을 생각하면 몸은 생각의 조종과 명령을 받는 단백질과 무기물 덩어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명령하며 행하는 살아 있는 주체다. 흔히 몸을 물질적 대상인 육신으로 한정 짓는데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몸은 육신과 정신이 하나로 합해진, 존재의 본질 그 자체다. 육신과 정신은 존재를 유지하고 행하는 과정에서 굳이 서열이나 앞뒤 관계를 가릴 필요가 없는 한 덩어리다. 육신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작동하는 대표적 예가 본능적 감각인데, 이런 감각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다. 이 같은 몸의 본래 의미는 원시-고대 시대에 제의를 통해 &lsquo;합일적 몸&rsquo; 개념으로 정립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합일적 몸&rsquo;을 좀 더 확장하고 다듬으면 전일론(全一論, holism)이 된다. 몸은 세상 만물 가운데 전일적으로 존재하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다. 전일론은 단순히 정신과 육체의 합일뿐 아니라 몸을 이루는 각 부위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머리와 몸통과 사지, 내장과 근육과 뼈대, 이목구비 등 신체의 각 기관은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서 하나의 거대한 전일적 존재 상태를 이룬다. 얼굴도 하나의 작은 몸이요,<sup>■1-2</sup> 손도 하나의 작은 몸이며, 발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장 기관의 관계와 상태는 손과 발과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2_%EA%B8%B0%EA%B3%84%EA%B0%80%20%EB%90%9C%20%EB%AA%B8%EA%B3%BC%20%ED%98%84%EB%8C%80%20%EA%B1%B4%EC%B6%95%EC%9D%98%20%ED%83%84%EC%83%9D/1-2_600.jpg" /><br /> <br /> 이런 상태에서는 정신이 육신의 지배를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은 현대인에게도 흔히 일어나는데 현대 문명에서는 이런 경우를 절제력이 부족하고 문명화가 덜 된 부정적 상태, 심지어 위험하거나 정신 질환 상태로까지 몬다. 정신이 육신의 지배를 받는 상태가 생산 효율과 실적 향상이라는 현대 문명의 미덕에는 분명 위험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에는 이렇게 본능의 조종을 받는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소득을 올리지 못하게 되고 결국 무책임하고 무능력하며 쓸모없는 인간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진실은 이와 반대다. 현대인은 본능을 억압당하며 원초적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이전에 없던 수많은 병적 중독증에 시달리며 신음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 문명은 기계가 이런 본능을 대신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몸은 생산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본능은 쓰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퇴화할뿐더러 기계문명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한 뒤에는 억압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생산성 향상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현대적 모범생은 이런 원초적 본능을 최대한 억제하고 다소곳이 생산성 향상에 매진해서 더 많은 실적을 내는 인간상으로 굳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u><strong>이집트 미술에 나타난 몸의 영원성</strong></u></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음에 대응하거나 자연과 교감하는 문제는 원시-고대 문명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제의에는 당시 문명을 지탱하던 다양한 요소가 들어 있다. 종교적 초월을 바라는 주술을 기본 배경으로 하며 여기에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인 놀이 기능까지 가졌다. 종교와 놀이는 축제로 합해져 형식화되었다. 신화가 탄생하고 신화를 섬기던 장 역시 제의였다. 심리학에서는 제의의 본질을 현대인이 잃어버린 인간의 중요한 능력인 &lsquo;감탄&rsquo;으로 좁혀서 보기도 한다. 관심과 활동의 범위를 나 또는 내 가족 등 개인사에 국한하지 않고 대자연과 전 우주를 상대하며 느끼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lsquo;웃음&rsquo;으로 좀 더 좁히기도 한다. 우리 현대인은 과연 하루에 몇 번이나 웃는가. 원시-고대에는 하루에 몇 번 웃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임석재<br /> </strong>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1호 교수로 학과를 창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공은 건축 역사와 이론, 비평 등이며 이외에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폭넓은 주제로 현실 문제에 대한 문명 비판도 병행하고 있다. 연구와 집필에 머물지 않고 그동안 공부하면서 쌓은 내용을 실제 설계 작품에 응용할 준비도 하고 있다.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현재까지 4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으며, 대표 저서로는 『추상과 감흥』, 『미니멀리즘과 상대주의 공간』, 『건축, 우리의 자화상』, 『서양건축사』(전 5권), 『서울, 골목길 풍경』, 『교양으로 읽는 건축』,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 『계단, 문명을 오르다』, 『한국의 간이역』,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전 2권), 『우리 건축 서양 건축 함께 읽기』, 『임석재의 생태건축』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19 오전 10:01:00카곰의 ‘나체의 역사’<img alt="" width="600" height="82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B%82%98%EC%B2%B4%EC%9D%98%EC%97%AD%EC%82%AC_%ED%91%9C%EC%A7%80.jpg"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서문</strong></span><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바라트의 거울</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에게 네이키드와 누드는 <br /> (사전 편찬자들은 옷이나 보호물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동의어로 분류하지만) <br /> 사랑과 거짓, 진리와 예술만큼 확연히 다른 것이다. <br /> ―로버트 그레이브스<sup>Robert Graves</sup>, <br /> 「네이키드와 누드<sup>The Naked And the Nude</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렇게 한번 해보라. 책을 덮고 당장 옷을 벗어라. 만약 지금 욕실에서 이 책을 읽으려 했다면 괜찮겠지만 하필 서점에 있거나 버스나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면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큰 문제인지, 왜 책 한 쪽을 미처 다 읽지도 못하고 체포되어야 하는지 이제 이 책에서 알아보자. 우선 신발을 벗어던졌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네이키드가 될지 누드가 될지 정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 영어는 고대 앵글로색슨족과 중세 노르만족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단어와 사고방식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녹아 있다. 네이키드<sup>naked</sup>라는 단어는 앵글로색슨 게르만어파에서, 누드<sup>nude</sup>라는 단어는 노르만계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영어는 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정교하게도 두 단어로 나타내는데 의미가 각기 다르다. 누드는 옷을 입지 않고 고의로 시선을 끄는 것을 말하며 네이키드는 단순히 옷을 입지 않은 &lsquo;순수한&rsquo; 상태를 의미한다. 누드는 예술 활동에서, 네이키드는 욕실에서 일어난다. 네이키드는 자연 그대로의 날것을, 누드는 이상적인 것을 뜻한다. 미술 비평가 존 버거는 이렇게 썼다. &ldquo;네이키드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누드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혼자서는 인식하지 못한다. 네이키드가 누드가 되려면 누군가에 의해 하나의 대상으로 보여야 한다.&rdquo; 더 나아가 &ldquo;누드는 결코 옷을 벗고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누드는 옷의 일종이다&rdquo;라고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다. 서점에서 누군가가 벌거벗고 서 있는데 애써 그에게 가서 네이키드인지 누드인지 물어볼 사람이 있겠는가. 이 책에서 나는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처럼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할 것이다. 의미상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책이 번역될 때 발생할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또 책 전체에서 한 단어만 계속 쓰면 읽기가 지겨워질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로 나체 상태가 불러일으키는 많은 특수한 문제들에 집중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체에 대해 왜 그렇게 당황하는가? 나체는 왜 사람들을 그렇게 흥분시키는가? 왜 어떤 종교는 나체를 비난하고 또 어떤 종교는 권하는가? 나체 시위로 무언가 보람 있는 것을 이룰 수 있는가? 젖꼭지를 가린 재닛 잭슨의 가슴이 겨우 눈 깜짝할 동안 노출됐다는 이유로 CBS에 55만 달러의 벌금을 매기는 나라에서 어떻게 음경 연기자들이 자신의 생식기를 주무르는 공연을 할 수 있는가? 경찰은 옷을 입은 것처럼 보디페인팅한 알몸의 여자와 누드 슈트를 입은 여자 중누구를 체포할까? 그리고 &lsquo;네이키드 셰프&rsquo;가 옷을 벗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점들을 비롯해 나체에 대한 수많은 의문이 드는 이유는, 설사 나체가 타고난 몸 상태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모순된 사고, 느낌, 행위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어떤 때는 비극적인, 어떤 때는 감동적이고 기묘한 역사를 남겼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다채로운 내력도 일종의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웃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종에게 푹 빠져서 몸을 보여주고, 보면서 끝없이 황홀해하는 종이 있다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더 관대한 사람들은 나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다른 동물과 우리를 구별 짓는 속성, 즉 자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 최고<sup>最古</sup>의 종교인 자이나교의 전설은 나체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잘 설명해준다. 어느 날 자이나교 창시자의 아들인 바라트 황제가 목욕 후에 거울로 자신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신이 몸을 가진 존재라는 깨달음은 우리 자의식의 핵심이며, 그것이 우리가 몸을 가꾸고 옷을 입는 데 많은 돈과 노력을 들이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몸과 외모를 인식하는 방식이 자아와 세상을 인식하는 데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종교와 나체</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체를 찬양하는 데 있어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어떤 민족과도 다르다.<br /> 그들에게 나체는 수치스럽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이 아니었다.<br /> 오히려 투명하게 보는 것(그리스의 종교적 체험의 한 측면)과 운동경기의<br /> 관점(승리와 명예를 축하하는 일을 최고의 목표로 보는 것-옮긴이)에 관련한<br />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었다. <br /> ―마리오 페르니올라<sup>Mario Perniola</sup> <br /> 「화려한 의복과 적나라한 진실<sup>The Glorious Garment and the Naked Truth</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나체에 대한 종교적 관점에서 시작한다. 심리학이 출현하기 전 자신과 자신의 몸에 대한 인간의 관심을 높이고 구체화한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부분의 종교가 일상적이고 극히 사적인 공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영역에서 종교 지도자나 신도들의 나체 상태를 용인하지 않을 것 같고, 나체로 참여하는 종교 활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초기 종교의 우상들이 빌렌도르프와 몰타의 &lsquo;비너스&rsquo;처럼 나체 여성의 모습이고 그리스와 인도에서 나중에 발생한 종교 역시 종종 남성의 나체 형상을 숭배했다. 남자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 나체주의자들의 강력한 무기이며, 유대교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 카드몬은 몸에 만물을 품고 있는 거인의 형상이다. 인도 자이나교에서 우주는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며, 평화롭게 앉거나 서 있는 남자 나체상들은 깨달음을 얻은 스물네 명의 창시자들을 표현한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진리는 역설의 옷을 입고 있다는 말이 있다. 종교도 진리를 추구하면서 인간의 형상에서 풍부한 근거를 얻었다. 몸은, 한편으로는 신의 창조물로서 기독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lsquo;하느님의 형상대로&rsquo; 만들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몸 사이의 상호작용과 매개물을 통해 생겨나는 한, 몸은 고통과 고통의 원인이 발생하는 곳이다. 몸이 신전도 되고 감옥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종교에서 발견되는 몸에 대한 양면적인 태도의 근원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양면성을 인정하지만 첫 두 장에서는 여러 종교가 몸에 대한 수치심과 혐오감을 가르쳐온 역사는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여러 전통에서 나체가 어떤 식으로 숭고한 정신적 목표에 이용됐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몸과 나체에 대한 사고방식의 역사보다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측면, 다시 말하면 나체가 사람들을 일깨우고 힘을 부여하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실제로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종교 단체와 개인들이 정신 수행 중에 옷을 벗으라고 권한 사실은 거의 알려진 적이 없으니 놀라울 것이다. 특히 가장 뜻밖인 것은 고대든 현재든 기독교와 나체의 관계다. 2003년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lt;나체의 순례자<sup>The Naked Pilgrim</sup>&gt;에서 미술 비평가인 브라이언 슈얼은 에스파냐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기독교의 성지-옮긴이)로 순례를 떠났다. 한때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그 순례 동안 눈물이 날 만큼 감동했고 스스로 그런 사실에 몹시 놀랐다. 그는 피니스테레에서 옷을 벗어 태우고 바다에 뛰어드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그 여행을 마무리했다.</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치와 나체</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웰링턴 공은 매일 나폴레옹의 벗은 모습을 보았다. <br /> 살아생전에 적이었던 나폴레옹의 완벽한 근육질 가슴은, 시간이 지날수록 <br /> 노화되어 가는 웰링턴 공 자신의 피부만큼 익숙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br /> 안토니오 카노바가 만든 나폴레옹 1세의 나체 거상이 <br /> 오늘날까지 하이드파크 코너에 있는 <br /> 앱슬리하우스의 나선형 계단에 서 있다. <br />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그 장군의 집 말이다.<br /> ―조너선 존스<sup>Jonathan Jones</sup>, 「아직도 그대로<sup>Hanging in There</sup>」,<br /> 『가디언<sup>The Guardian</sup>』, 2006년3월11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체에 대해서 우리는 상반되고 역설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에서 나체는 수치스러움, 억제해야 할 욕망을 나타내기도 하고 순수함, 수치를 모르는 상태, 심지어 육체의 거부를 뜻하기도 한다. 반면 정치에서 나체는 강력한 힘과 권위, 혹은 취약성과 노예 상태를 상징한다. 이런 상반된 의미들 때문에 우리가 나체에 대해서 모순적이고 복잡한 반응을 보이게 되며, 나체가 예술과 철학 탐구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 서양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데는 두 가지 요인, 즉 고대 이교도 전통과 중동의 유대교 전통이 작용했다. 유대교 문화에서는 나체가 주로 가난과 노예 상태와 연관되었다. 부자와 권력자들은 부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옷을 입고 장신구를 걸쳤지만 매춘부, 노예, 광인들은 벌거벗었다. 이와 달리 그리스인들은 나체를 이상형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에 정치가들이 자신을 신과 비슷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나체 조각상을 새겼다. 기독교 전통이 이런 고대 이교와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으니 기독교가 나체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언뜻 당연해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체에 대한 모순적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정치 영역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들은 무장한 리무진과 경호원이라는 보호 &lsquo;의상&rsquo;이 필요한 반면,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옷을 벗겠다는 협박만으로 정부나 기업에 몸값을 요구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은 옷을 벗으면 공격받기 쉽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강해진다. 정치적 시위에 나체가 자주 이용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시위자들은 몸을 노출해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도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현 상태에 도전하며, 두렵지 않으며 숨길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명분에 힘을 싣는다. 동시에 인간의 취약성과 약점도 드러낸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9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3장과 4장은 나체의 이런 복합적인 의미가 시위에 어떻게 이용되는지,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나체를 이용하면서 나체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나체와 정치의 연관성은 나체 조각상으로 지위와 권력을 표현한 것을 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는 성서에서 군사력이 곧 승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를 바탕으로 다비드 조각상이 제작되면서 1,000년이 넘도록 예술 작품에서 나체를 표현하지 못하게 했던 기독교적 죄의식의 굴레를 벗겨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럽에서 고대 이후 제작된 최초의 남성 나체 조각상은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상인데, 헤르메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전령으로서 날개 달린 샌들, 날개 달린 모자 등이 상징으로 쓰인다-옮긴이)를 연상시키는 부츠와 모자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조각상은 15세기 중반 피렌체의 메디치가 대저택 안뜰에서 공개되어 세상이 떠들썩하게 메디치가의 승리와 대담함을 과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60여 년 뒤인 17세기 초, 미켈란젤로도 다비드상을 조각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한 나체였으며 높이가 5.2미터나 되었다. 이는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져, 고대 이후 공공장소에 전시된 최초의 남성 나체 조각상이 되었다. 피렌체가 사방에서 강한 나라들의 위협을 받고 있던 당시 그 조각상은 피렌체 사람들에게 타고난 힘과 승리의 잠재력을 든든하게 전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세기 초 나폴레옹이 베네치아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노바에게 의뢰한 자신의 나체 조각상은 패전과 동시에 웰링턴의 것이 되었다. 처칠이라면 아무리 세계대전이 종전했다고 해도 결코 히틀러의 나체상을 집에 가져다 놓지 않았겠지만, 웰링턴은 자신이 무찌른 적의 나체상을 아무렇지 않게 집에 두었다. 150년 뒤 1967년 잉글랜드의 궁내 검열관은 연극 &lt;윌슨부인의 일기<sup>Mrs Wilson&rsquo;s Diary</sup> &gt;에서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의 나체상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이렇듯 관습, 법, 사고방식은 시대, 지역, 계급, 미학으로 짜인 복잡한 거미줄에 엮여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대중문화와 나체</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현대 소비문화의 속성이 충분히 알려져 있고 그것에 대한 냉소까지 존재하는 지금도 <br /> 사람들은 몸이 얼핏 보이기만 해도, 아니 나체라는 말만 꺼내도 분위기만 맞으면 <br /> 낄낄거리거나 화를 낸다. 나체는 중요한 몸인 동시에 평범한 몸이다. <br /> 그래서 포르노 산업의 주재료인 동시에 학교 체육 시간의 장애물이다. <br /> 나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 규칙, 관습에는 모순, 복합성, 부인이 가득하다&hellip;&hellip;.<br /> ―루스 바칸<sup>Ruth Barcan</sup>, 『나체: 문화적 해부<sup>Nudity: A Cultural Anatomy</sup>』</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3.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바칸이 말한 모순 덕분에 나체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렌즈가 된다. 잉글랜드 도싯 주의 체른 애바스에는 9미터나 되는 성기에 키가 55미터인 남자의 모습이 수백 년 동안 건재해 있다. 반면, 2007년 미국의 한 출판사는 아주 작게 그려진 남자 나체 조각상의 그림조차 책에 싣지 않겠다고 했다. 논란을 일으킨 이 그림은 독일에서 가장 잘 팔리는 어린이 책 작가 로트라우트 수잔네 베르너의 것으로, 조각상은 미술관 내부를 그린 삽화의 배경에 놓여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 두 장에서는 서양 대중문화에서 이런 모순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그리고 나체라는 개념이 &lsquo;실제로 벗은 몸&rsquo;을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지 설명하려 했다. 제이미 올리버는 네이키드 셰프로 유명해졌지만 한 번도 옷을 벗은 적이 없다. 또 1960년대에 무대에서 나체 혁명을 일으킨 뮤지컬 &lt;헤어<sup>Hair</sup>&gt;의 나체 장면은 20초도 채 되지 않았고, 나체를 소재로 한 영화 &lt;풀 몬티<sup>The Full Monty</sup> (벌거벗은 몸이라는 뜻-옮긴이)&gt;에서도 나체가 등장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심지어 &lt;풀 몬티 완전 노출<sup>The Full Monty Fully Exposed</sup>&gt;이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DVD도 진짜 &lsquo;풀 몬티&rsquo;를 보여주지는 않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7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조직화된 사회운동으로서 나체주의는 1960년대 이후 쇠퇴하고 있지만 대중들은 나체를 더 많이 용인하고 즐기게 되었다. 덕분에 설치 미술가 스펜서 튜닉은 나체로 사진과 영화를 찍을 수천 명의 지원자를 쉽게 구했으며 자선단체들은 기금 모금용 나체 달력 제작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다. 나체에 대한 수치심은 나체가 본질적으로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나체가 우리 모두 똑같은 인류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는 것을 인식하며 점차 사라지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5.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지역의 차이는 있지만 유럽,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일부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는 다양한 나체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번지점프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거나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요가 수업을 받고, 마술 제의에 참여하고, &lsquo;나체의 밤&rsquo;에 수영장에 가고, 영화관에 가고, 온천욕을 하거나 알몸 보디페인팅을 할 수 있다. 프랑스 남부 카프닥드의 &lsquo;나체 도시&rsquo;에서 휴가를 보내고, 뉴욕이나 에든버러 사설 클럽에서 나체로 목욕하거나 나체로 외식하고, 베를린이나 뮌헨의 중심가에서 나체로 일광욕을 하고, 런던에서 &lsquo;알몸&rsquo; 디스코텍에 놀러 가고, 네덜란드 체육관에서 알몸으로 운동하고, 뉴질랜드에서 나체로 돌아다니거나 알몸으로 독일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갈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체로 이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나체가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적절하지 않은 때에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옷을 벗으면 벌금을 내거나 감옥에 가야 한다. 몸 내부를 보여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몸의 외부에 관한 한 아직 그런 자유가 없다. 1,800만 명 이상이 관람한 군터 폰 하겐스의 &lsquo;인체의 신비&rsquo;전은 실제 인간의 몸을 사용했는데 합성수지 주입 보존법을 실행하기 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몸을 &lsquo;벗겨냄&rsquo;으로써 나체의 개념을 확대했다. 또한 자기공명영상 MRI과 같은 수많은 의학 기술 덕분에 신체 내부는 더욱 쉽게 볼 수 있지만 신체 외부를 노출하는 것은 여전히 법적, 도덕적 제한 대상이다. 혼란스럽다고? 그럴 만하다. 이 책이 그 혼란을 정리해주지는 않겠지만, 이 책을 통해서 혼란을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1_%EB%82%98%EC%B2%B4%EC%9D%98%20%EC%97%AD%EC%82%AC/%EA%B7%B8%EB%A6%BC6.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필립 카곰 Philip Carr-Gomm<br /> </strong>작가이자 심리학자인 필립 카곰은 1945년 런던에서 태어나 웨스트민스터 스쿨을 졸업한 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20여 년 동안 나체주의, 자이나교, 드루이드교와 현대 마법 종교 위카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베스트셀러『드루이드교의 기본<sup>The Elements of the Druid Tradition</sup>』을 비롯해 『드루이드의 길<sup>The Druid Way</sup>』,『영국 마법의 역사<sup>The Book of English Magic</sup>』등 총 14권의 책을 냈다. 현재 영국 서식스 주에 살며 심리치료사 및 몬테소리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br /> 카곰은 2001년 여름에 연구를 위해 찾은 영국 최초의 자연주의 리조트에서 우연히 옷을 전부 벗게 되었다. &lsquo;온갖 걱정과 근심의 무게를 더한 듯한&rsquo; 옷을 벗고 나니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나체가 되는 기쁨을 알게 된 뒤 나체의 역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누드모델을 서고 인도로 순례 여행을 떠나기도 하면서 나체 현상을 조사했다.<br /> 『나체의 역사』는 다양한 문화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정치적, 대중적인 나체 활동을 상세하게 분석해, 인간의 나체가 하나의 육체적인 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임을 명쾌하게 논증한다.<br /> 블로그 <a href="http://philipcarrgomm.wordpress.com">http://philipcarrgomm.wordpress.com</a><br /> 홈페이지 <a href="http://philipcarrgomm.druidry.org">http://philipcarrgomm.druidry.org</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정주연</strong><br />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작『책과 집』을 비롯해 잭 런던의『밑바닥 사람들』『버닝 데이라이트』, 루이스 메넌드의『메타피지컬 클럽』, 제임스 트레필의『산꼭대기의 과학가들』등을 우리말로 옮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16 오전 11:36:00[에세이] 미래를 먹는 인간 | 도은 외<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1" height="867"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C%97%86%EB%8A%94%20%EA%B2%83%EC%9D%B4%20%EB%A7%8E%EC%95%84%EC%84%9C%20%EC%9E%90%EC%9C%A0%EB%A1%9C%EC%9A%B4/018%EC%97%86%EB%8A%94%EA%B2%83%EC%9D%B4%EB%A7%8E%EC%95%84%EC%84%9C%EC%9E%90%EC%9C%A0%EB%A1%9C%EC%9A%B4_60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무작정 시골 땅으로 돌아가 15년째 살고 있는&nbsp;&lsquo;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rsquo;들의 이야기. 낭만적인 전원이야기가 아니다. &ldquo;개개인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lsquo;현대문명&rsquo;과 &lsquo;자본주의&rsquo;라는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rdquo;는 저자는, 과학기술 시대를 살면서 그들 식대로 고민하고 걸어간 길의 흔적들을 보여준다. &lsquo;농사짓기&rsquo;, &lsquo;학교에서 벗어나기&rsquo;, &lsquo;병원에 덜 의존하기&rsquo;, &lsquo;자발적 가난뱅이가 되어 없이 살기를 실천해보기&rsquo;&hellip;.&nbsp;세 모녀가 겪어내고 살아낸 변화와 고투의 기록 앞에서, 여전히 의존적인 내 삶이 한없이 겸손해진다.&nbsp; - 나비<hr />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땅 앞에 겸손해진 이유</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농촌에서 태어난 내가 도시로 갔던 것은 순전히 나 혼자만의 선택이었을까? 내가 태어난 1960년대와 학교를 다닌 1970년대 1980년대를 생각해본다. &lsquo;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rsquo; 우리는 &lsquo;조국 근대화&rsquo;와 &lsquo;산업화&rsquo;라는 박정희 식의 위대한(!) 국가 프로젝트를 철저히 수행해야만 하는 무수한 톱니바퀴들 같은 존재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젊고 능력이 있으면 고향을 떠나 도시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버는 것이 당시에는 거의 유일한 &lsquo;성공&rsquo;의 기준이었다. 다른 대안을 들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반란을 모의하려 해도 혁명을 하려 해도 도시에 가야 했다. 시골에서 태어난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개발, 출세, 성장 귀신이 쓰여서 도시로 가는 물결에 휩쓸렸고, 나도 그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농촌은 우리가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었다. 그래야 이농한 노동력들이 값싼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lsquo;근대 국가 건설의 역군&rsquo;으로 불철주야 일해서 대한민국을 부유하게 할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지 않겠는가. 그게 시대 흐름이었고 근대화와 산업화란 것은 그런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금이라도 도시에 나가 살 능력이 있고 학교 공부를 잘하면 너도나도 고향을 떠났고, 떠나고 있다. 남아 있으면 못난 바보 취급한다. 농촌은 도시를 위해서 끝까지 착취당해야 하는 식민지일 뿐이다. 인간이든 땅이든 식량이든 모두 그렇다. 자기가 태어난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기도 전에, 마치 새벽녘에 남루한 사내가 창녀촌을 서둘러 벗어나듯이 우리는 시골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쩌다 시골에 올 때는 땅 투기꾼이라는 기둥서방 혹은 부재지주라는 포주가 되어 거들먹거리며 나타나곤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상급 학교 진학 때문에 도시로 갔던 내 경우를 떠올려본다. 고등학교 이후부터 내 삶은 어느 시기까지 시대 분위기를 그대로 따라갔던 삶이었다. 분명한 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태어난 땅은 떠나고 잊어버리면 되는 곳이었다. 나는 도시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두둑한 보수가 보장되는 성공한 사람이 되면 그만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혹시 이런 암시를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최고 교육을 받고 무엇이 되건 간에 성공만 하면 되고, 그 성공은 너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 맘껏 쓰면 된다고. 네가 받았던 교육을 네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위해서 쓸 필요는 없다고, 고향에 자선을 좀 베푸는 거야 좋은 일이겠지만 너의 출세는 너의 안위를 위해 쓰라는 암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나는 도시에서 성공하지 못했고 으스댈만한 출세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퍽 안도가 되는 일이다. 독자 중에 못 믿겠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 삶에서 그나마 자랑스레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성공하지 못했고 물질적 욕심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만약 도시에서 성공했더라면 나 역시 시골에 꼭 농사짓겠다고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내 삶에서 아주 귀한 깨달음을 놓쳤을 터였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나도 아직 젊음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땅에 깃들어 살겠다고 한 결정은 참으로 잘한 일 같다. 그러니까 이 체제 속에서 한 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아주 귀한 약이 된 것이다. 그것은 내가 &lsquo;할 수 없이&rsquo; 겸손해져서 이 지구에 해를 덜 끼치게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귀한 장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시에 간 나는 가난한 집에 손 벌릴 수 없는 자가 겪어야 하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밟으며 청춘을 보냈다. 운 좋게 주어지던 장학금들, 과외 아르바이트 일들, 임시직일들로 생활비를 벌면서 대학을 졸업했고 기숙사, 자취방, 더부살이, 반지하방, 옥탑방, 지상의 방 한 칸, 낯선 외국 대학 기숙사 등으로 옮겨 다니다 보니 30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넉넉하게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기죽지 않고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아마 젊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름답던 청춘의 힘이 내게도 있었다. 또 당시에는 지금처럼 극성스런 배금주의가 지배적이지 않은 분위기였고, 이상을 가진 좋은 이들과 친구하며 살았던 것도 내게 영향을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어느 날 인생의 쓴맛을 꿀꺽 삼킨 상태로 시골로 왔다. 이리저리 고민하고 결정했다기보다는 막무가내였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삶의 터를 도시에서 시골로 옮기려 할 때면 누구나 여러 가지 고민과 준비를 하기 마련이다. 돈은 어떻게 벌 것인가, 어떤 생활수준을 유지할 것인가,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요모조모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뭔가를 준비할 여유도 없었고 누구랑 상의하고 말 것도 없었다. 인생의 큰 전환기였는데 아이들 빼고는 가진 게 없다 보니 머리가 텅 빈 바보처럼 스스럼없었다. 그때는 아직 &lsquo;귀농&rsquo;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50"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C%97%86%EB%8A%94%20%EA%B2%83%EC%9D%B4%20%EB%A7%8E%EC%95%84%EC%84%9C%20%EC%9E%90%EC%9C%A0%EB%A1%9C%EC%9A%B4/%EA%B7%B8%EB%A6%BC1.JPG" /><br /> <br /> 처음 내가 어린 자식과 짐을 푼 곳은 농사짓는 공동체였다. 태어나서 자란 고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골이라서 기뻤다. 찢어진 비닐이 펄럭여도 농약으로 오염된 땅이어도 무엇인가를 심고 가꾸고 기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조건 좋았다. 당시의 내게 기뻐할 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도리어 신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곳에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둘째를 낳았다. 고맙게도 시골 살면서 많은 분들의 넘치는 도움을 받았다. 정말 감사한다. 힘든 시기마다 세 모녀가 어떻게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매 시기마다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준 그분들 덕택이다. 그 뒤로 지금까지 다섯 번 정도 이사를 다녔다. 전부 작은 시골 마을들인데, 아는 분의 호의로 거저 빌린 임시 거처도 있었고 약간의 돈을 주고 빌린 허름한 농가들도 있었다, 집주인이 빚 때문에 야반도주한 후 수년 동안 방치된 폐가를 무료로 빌려서 고쳐 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늘 주머니가 가벼웠기에 고생은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다고 여겼다. 돈쓰고 소비하는 식의 생활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런 욕망 자체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책을 맘껏 사보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많았고, 도시에서 열리는 좋은 음악 공연 같은 것들을 가끔씩 그리워하긴 했다. 그럴 때는 문화적 사치이고 허영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어찌 보면 고립되고 폐쇄적인 삶이었다. TV도 없었고, 신문도 안 보고, 라디오조차 안 듣고, 영화 같은 것은 정말이지 전혀 보지 않았다. 인터넷 같은 것도 당시의 내겐 먼 나라의 일이었다. 세상일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시기였다고나 할까. 오직 땅과 아이들, 농사짓고 살아가기, 이런 것들만이 내 관심사였다. 이 땅이 내게 허락하는 것이 무엇이고 거절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걸 배우고 싶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쩌다 너무 고독해져서 우울함이 치밀고 올라오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는 애꿎은 어린 아이들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려댔다. (정말 부끄럽다!) 신경질이 가라앉으면 죄책감으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나는 왜 살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해답 없는 고민을 했더랬다.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을 하거나 좋은 책을 찾아 읽으며 위로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운이 좋았는지 어딜 가든 집 주변에 푸성귀를 기를 만한 너른 텃밭이 있었고 오밀조밀한 산과 들이 있었다. 어린 자식들과 손잡고 시골길과 산길을 걷거나 텃밭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 평화롭고 행복했다. 산길을 걸으며 내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들을 아이들과 큰소리로 함께 부르며 웃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대담하게 꽤 큰 밭을 빌려서 온갖 농작물들을 조금씩 심어보는 재미도 누렸다. 덩달아 내 안에서도 신경질과 두려움과 우울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세월과 함께 조금씩 걸러져 나갔다. 이런 걸 두고 요새 유행하는 &lsquo;치유&rsquo;라고 하나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들도 자랐다. 세 모녀가 아옹다옹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아이들은 무럭무럭 쑥쑥! 나는 흰 머리가 하나, 둘, 셋, 넷, 우수수! 그렇게 세월은 강물처럼 무심히 흘러갔고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실력도 조금씩 늘어갔다.<br /> &nbsp;</p> <p><hr />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미래를 먹는 인간</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팀 플래너리란 고생물학자는 이 지구에서 멸종한 동물들을 연구하는 학자이다. 그는 인간을 &lsquo;미래를 먹는 존재(Future Eaters)&rsquo;라고 불렀다. 인류가 환경의 일부로 살아가기보다 환경을 지배하면서 중요한 자원의 기반을 잠식해가는 존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도 이런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우리 인류는 풍요로운 생명의 나무에서 다른 생명의 존재들과 어느 시기까지는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 깔깔대며 사랑도 하고 서로의 몸에서 이도 잡아주고 말이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기 발밑의 나뭇가지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무슨 이익이 있었나 보다. 그러자 너도나도 자기의 발밑 가지를 자르더니 곧 남이 앉아있는 가지까지 자르려고 덤벼들었다. 이것은 순식간에 유행이 되어 버렸고, 이제 사람들은 이 일에 너무나도 열중하고 있다. 많은 가지가 잘려 나갔고 누군가는 아래로 떨어졌다. 저 아래의 캄캄한 허공을 얼핏 본 몇몇이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대다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시끄럽게 왜 소리치고 난리야? 남들 다 하잖아!</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70"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C%97%86%EB%8A%94%20%EA%B2%83%EC%9D%B4%20%EB%A7%8E%EC%95%84%EC%84%9C%20%EC%9E%90%EC%9C%A0%EB%A1%9C%EC%9A%B4/%EA%B7%B8%EB%A6%BC2.jpg" /><br /> <br /> 미래를 먹는 습관은 현대 인간의 거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 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걸 두고 &lsquo;대중의 패닉 상태&rsquo;라고 하는 것일까? 자기 혼자만 소외될까 봐 두려워서 옆 사람이 누구든 그 행동을 미친 듯 따라하는 군중의 맹목적인 모방행위 말이다. 네가 가면 나도 가고, 네가 다이어트하면 나도 하고, 지금 유행이라면 한 달 전에 산 휴대폰도 과감히 쓰레기통에 처넣는다. 우린 너무 고독하거든. &lsquo;소속감&rsquo;을 느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거야. 소비든 폭력이든 생태계 파괴든 상관없어.</p> <p style="text-align: justify">미래를 먹어버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 후손이 살 공간과 자연을 앞질러 파괴해버린다는 뜻이다. 자손을 남기고 번식하고 그 사슬이 이어지도록 애쓴다는 생명의 법칙에도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자살골을 넣으러 가고 있으면서도 환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시에 나가 살면서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 살면서도 내 안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느낌이 늘 존재했다. 비록 농사를 지으며 개인적인 치유와 작은 만족을 얻고는 있으나 세상이 갈수록 파괴되고 있다는 절박한 느낌을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이다. 나 개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암울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괴로워서 그냥 잊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는 애써 시를 읽는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br /> 사물(事物)과 사물의 생리와<br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br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br />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right: 20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도 바로 보고 싶다. 사물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이 지구의 생리와 한도와 명석함을 제대로 알고 싶다. 특히 인간의 우매함을 똑바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뭔가를 해야 한다면 그걸 열심히 한 다음에 스스럼없이 미래를 후손에게 남겨주고 싶다. 나도 살다가 죽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미래를 먹어치우지 않고 죽을 수가 있을지, 후손에게 남겨줄 수 있는 미래가 있을지, 정말 고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여간 우리는 땅으로 돌아왔고,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도은<br /> </strong>대학에서&nbsp;철학을 공부하고 방송 구성작가와 대안학교 교사로 일 했으나, 손에 흙 묻히고 농사짓는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 손에까지 흙을 묻히려고 애쓰는 중년 아줌마다. 학교에 안 가는 두 아이와 산골에서 지지고 볶는 삶을 살면서 흰머리와 함께 비로소 철이 들어가고 있다. 자연이 훼손되는 걸 무척 아파하지만, 그래도 살면서 탐구해볼 거리들이 많아 인생에 대해 두근두근 호기심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여연</strong><br /> 학교 안 가고 엄마와 토닥대며 농사일을 해내고 있는 씩씩한 첫째 딸. 클래식 기타 치는 일에 푹 빠져 지냈던 청소년기를 지나 지금은 자기 인생의 길찾기를 하고 있는 열아홉 살 청년이다. 음악, 미술, 과학 분야의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뭐든 배우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하고픈 일도 많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소박한 삶과 분주한 도시의 삶, 모두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하연</strong><br /> 학교를 안 다녀서 자기 인생이 꼬였다고 구시렁댈 때도 있지만, 그래서 인생이 느긋하게 피어나고 있다고 싱글벙글할 때가 더 많은 열다섯 살 둘째 딸. 가족들과 깡촌에 처박혀 있음에도 원하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다고 떵떵거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가출하는 곳은 매번 마을 뒷산. 자기가 거느린 식솔들(강아지, 고양이들, 병아리들)이 먹어대는 양식이 엄청남을 깨닫고 작년부터 긴 물장화 신고 가족 손모내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자연관찰, 동식물 키우기를 비롯해 갖가지 것들에 관심을 쏟고 있다.&nbsp;<br /> <br /> &nbsp;</p>에세이편집자2012-03-16 오전 10:01:00《219》김영섭의 『오디오의 유산』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width="184"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9_%EC%98%A4%EB%94%94%EC%98%A4%EC%9D%98%20%EC%9C%A0%EC%82%B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6월 1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김영섭의 </span></strong></span><span style="color: #800000"><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오디오의 유산』</span></span></strong></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을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동화책과 장난감은 아이들 차지다. 그런 것들은 어른이 되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 하지만 어른들에게도 동화책과 장난감이 필요하다. 오디오 잡지, 자동차 잡지, 카메라 잡지 등이 바로 어른들의 동화책이고 장난감이다. 아이에게도 그렇듯이, 어른들에게 동화책과 장난감은 싱싱한 꿈을 솟아나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169" height="238"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9_%ED%97%88%EC%A0%9C%EC%9D%98%20%EB%AA%85%EB%B0%98%20%EC%82%B0%EC%B1%85_ss.jpg" />김영섭의 『오디오의 유산』(한길사, 2008)은 출간된 순간부터 내 동화책이고 장난감이 되었다. 이 책 이전에는, 허제의 『허제의 명반산책 1001』(가람기획, 2001)이 그 역할을 했다. 허제의 책은 내가 클래식에 입문하던 마흔 살 때에 입수하여, 근 8여 년 동안, 닳도록 들춰보았던 책이다. 매일 새 음반을 사 들고 집에 돌아와 음악을 들으며 그 책을 넘겨보았다. &lsquo;이 음반은 언제 잡아 올 수 있을까?&rsquo; 하면서 말이다. 보통 클래식 입문자들이나 음반 수집가들은 안동림의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1991)을 참고서로 삼지만, 일단 그 책은 동화책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화책은 그림이 많고, 읽을 게 적어야 한다. 뿐 아니라, 그림 옆에 적혀진 글을 읽지 않더라도 감흥이 줄지 않아야 하고, 무엇인가 상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뜻에서 『오디오의 유산』은 최고의 동화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많은 글이 인쇄되어 있지만, 나는 그걸 관심 갖고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아예 동화책이 되고자 가로와 세로가 3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판형으로 만들어졌고, 매 쪽마다 훌륭한 사진이 가득 실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에 실려 있는 오디오는 모두 지은이가 현재 가지고 있거나, 한 번씩 사용해 보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허제의 명반산책 1001』처럼 &lsquo;분발해야겠다!&rsquo;라는 각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한순간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지만, 그런 전투욕은 좀체 생겨나지 않았다. 여기 나오는 명기들은 어느 것 하나 내가 만만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우선은 가격 면에서 그랬다. 그리고 함부로 쓸 수 있는 몇 천만 원의 돈을 가지고 있더라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평생 알현하지 못할 옛 기기도 많다. 그걸 갖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막 속에 우물이 있다.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명기들 속에, 나도 사 본 게 있고, 써 본 것이 있다. 이 책 313쪽에 나오는 엠파이어598 턴테이블이 그것이다. 이 제품은 1997년쯤, 대구의 건들바위 근처에 있는 오디오점에서 50만 원에 샀다. 집에 오디오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놀러 오면, 나는 꼭 이 쪽을 펼쳐서 보여 주는데, 찾기 좋으라고 아예 포스트잇을 붙여 놓았다. 이마저 없었다면, 이 동화책은 얼마나 잔혹했겠는가?</p> <p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526" height="34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9_%EC%97%A0%ED%8C%8C%EC%9D%B4%EC%96%B4598_gray.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언젠가 취미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나는 취미의 본질을 &lsquo;공공연한 이중생활'이라고 보았다. 흔히 우리나라에서 이중생활이라면 기혼자의 불륜을 꼽는데, 실은 취미야말로 어느 것보다 악질적인 이중생활이다. 불륜과 취미가 다른 것은 전자가 남에게 들키지 않게 은밀히 행하는 것이라면, 취미는 아예 드러내 놓고 한다는 것. 아주 뻔뻔스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륜이 항상 누군가에 대한 도덕적인 죄책감을 지는 반면, 취미에 빠진 자들은 언제나 결백을 주장한다. 딴은 &lsquo;나는 적어도 다른 여자(남자)를 만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디오나 음악 취미의 경우, &lsquo;나의 취미는 술이나 도박처럼, 건강을 해치거나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나쁜 취미와는 다르다'는 자부심마저 더해져 더욱 당당하게 군다. 그럴 뿐 아니라, 이 투명한 이중생활자들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자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핍박받는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들의 동호회는 결속력이 높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공연한 이중생활에 남편(아내)을 빼앗긴 배우자는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거기에 더하여 남편(아내)의 공공연한 이중생활을 잘 보필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마저 하게 된다. 스스로를 이해심이 모자란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오디오나 음악과 같은 공공연한 이중생활에 빠진 남편(아내)을 바라보는 배우자의 심정은 거의 지옥이다. 배우자를 꼬드겨 낸 상대가 사람이라면 머리채라도 잡아 뜯겠는데, 이놈은 실체가 없는 &lsquo;취미&rsquo;라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경우, 취미는 그 사람의 상처이기도 하다. &lsquo;나 말야, 어릴 적에, 전축이 있는 옆집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어. 그런데 우리 집은 가난했거든&hellip;&rsquo; 혹은 &lsquo;음악이 너무 듣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거든&hellip;&rsquo;. 어떤 사람의 취미가 그 사람의 상처나 결핍과 연관되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취미를 미워하기 어렵다. 취미 삼아 살인을 저질렀던 유영철 정도면 결코 용서할 수 없지만, 그 지경이 아니고서는 오히려 이해하고자 노력하거나 최소한 면죄하거나 방기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둑이든 등산이든 낚시든, 취미는 외설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디오나 음악취미는 열거한 취미보다 더 외설스럽다. 바둑을 제외한 등산이나 낚시는 그나마 저 외설스러운 이중생활을 밖에서 한다. 무형의 애인이 집 밖에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오디오와 음악 취미는 무형의 애인을 아예 집 안에 들여 놓는다는 것. 이만큼 뻔뻔하고 외설스러운 세계도 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공연한 이중생활은 배우자를 안심시키면서, 자신만의 &lsquo;사적 연애'를 맛보기 위한, 자유의 행사이다. 그래서 한 번씩 동행은 하되, 배우자가 그걸 같이 하자고 넘보면, 이중생활로서의 취미는 열기가 식는다. 때문에 오디오나 음악 감상에 미친 사람들은, 좌우 스피커와 삼각 꼭지를 이루는 청취실 복판에 아예 단 하나의 의자만을 놓아둔다. &lsquo;내 의자는 왜 없어?&rsquo;라고 묻는 &lsquo;배우자-타인&rsquo;에게 그가 내놓는 답변은 안 들어도 뻔하다. &lsquo;최적의 음질을 들을 수 있는 스위트스폿<sup>sweet spot</sup>은 한 점밖에 없거든.&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녀 관계가 위계적이어서 아내는 남편의 취미에 무력하기 일쑤지만, 남편은 아내의 취미를 단속한다. 워낙 부부관계가 평등하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불안감 내지 독점욕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미는 물론이고, 아내가 종교를 갖는 걸 극구 방해하는 남편도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책의 지은이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오디오 애호가들의 시청실에서 억대에 가까운 소리를 귀동냥해 보았다. 거기서 들을 때는 흥감하지만, 그 체험은 여행과 똑같다. 우리는 아무리 좋은 곳에 갔더라도 집에 돌아와서는 &lsquo;우리 집이 최고다!&rsquo;라고 말하지 않는가? 몇 시간 전에 지은이의 집에서 음악을 듣고 왔는데도, 나는 내 오디오의 소리가 더 좋더라(동화책에 푹 빠졌다가도 금방 현실로 돌아오는 아이들의 능력은 마술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그런 마술적인 능력이 없다면, 아이들은 모두 정신분열을 앓을 것이다. 어른은 아이가 자란 것에 불과하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15 오전 10:31:00최인기 ‘가난의 시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9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_%ED%91%9C%EC%A7%80_6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글</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가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직도 &lsquo;가난&rsquo;이라는 말은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노랗게 부황 뜬 얼굴로 자기 몸 하나 지탱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기아 상태에 내몰린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인지 이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가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이제 주변에서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빈곤과 기아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줄었다 해도, 한국 사회가 누구나 먹고 살 걱정 없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인가? 한창 젊은 대학생들은 미래를 향한 힘찬 희망을 가슴 속에 품기보다 등록금 마련에 전전긍긍해야 한다. 수많은 직장인들도 항상 퇴직과 해고의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국이 세계에서 음주량 1위라는 통계 수치는 어쩌면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일상의 고단함을 뜻하는 지도 모른다. 가난은 행복해야 할 결혼마저도 미루게 하고, 꿈꾸던 미래도 포기하게 한다. 그러니 출산율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당연히 고령화된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도 막을 수 없다.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가난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가장의 비극이나, 가난과 빈곤을 둘러싼 엽기적인 사건들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거리에서는 노점상들이 생계 발판인 손수레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철거된 집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커멓게 그을린 용산참사 현장을 바라보며 왜 그 사람들이 망루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지, 왜 철거민들이 죽음도 불사한 투쟁 방식 외에는 달리 선택할 방법은 없었는지 다시 묻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난의 시대》는 이런 현실을 보면서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에서 쓰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도시빈민들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빈민해방을 위한 또 하나의 발판을 찾고 싶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2009년 용산참사 직후 &lsquo;노동자 역사 한내&rsquo; 측의 요청으로 쓰기 시작했다. 시대별로 도시빈민운동의 주동력이었던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이 과정 속에서 사라져간 열사들의 희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려고 했다. 그 후에 인터넷 언론매체인 《참세상》에 약 1년간 &lsquo;도시빈민운동사&rsquo;라는 제목으로 다시 연재를 했다. 각 시기별 빈곤의 실질적 원인이기도 한 비정규직 문제, 주택과 부동산 문제 등 각 정부의 정책들과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던 복지정책에 대해서도 추가로 살펴봤다. 그리고 그동안 정리한 자료를 다시 모아 빈민운동의 평가와 전망 부분을 추가해 책으로 엮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도시빈민들의 생활상과 자신의 삶과 처지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저항해왔는지 담고 있다. 도시빈민들의 저항의 이면에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실천이 함께 맞물려 있다. 따라서 도시빈민 활동가들의 모습과 그들이 실제로 현장에 어떠한 영향을 줬는지 살펴보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사회에서 도시빈민운동은 철거민운동과 노점상운동으로 크게 나뉘면서 몇 가지 흐름으로 전개됐다. 먼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연세대학교 빈민문제연구소와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로 대표되는 종교를 매개로 한 빈민운동과 지역주민운동이 등장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철거가 시작되기 전후 세입자들의 주거권, 또는 생존권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철거민운동이 여기에 합류했다. 얼마 전 용산참사를 둘러싼 투쟁, 상계동 철거투쟁, 더 거슬러 올라가 경기도 광주의 투쟁은 대표적인 철거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노점상들은 그들의 마지막 생계 수단인 손수레에 대한 단속과 과태료 부과에 항의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1990년대를 거쳐 최근까지 도시빈민운동의 한축을 이루며 성장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홈리스가 새로 등장했고, 빈민당사자 조직과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연대 단위들과 반(反)빈곤운동 등이 생겼다. 도시빈민운동과 반빈곤운동은 용산참사를 겪으면서 대외적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그 대응은 여전히 미흡했다. 또한 현재 빈민운동 단체들은 내부적으로 분화를 겪으면서 심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빈민운동은 그래왔던 것처럼 지속될 것이다. 이 책이 앞으로의 도시빈민운동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책은 필자가 1995년 전국노점상총연합, 전국빈민연합, 최근 민주노점상전국연합과 빈민해방실천연대에서 활동했던 것들이 바탕이 됐기에 도시빈민운동이 분화되는 과정들을 필자가 경험한 만큼만 서술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다. 또한 최근 들어 새로운 반빈곤운동과 빈민운동이 성장하면서 범위가 더욱 다양화되고 있기에 그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용어를 다소 혼재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도시빈민운동과 반빈곤운동의 정의와 향후 전망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글을 모아 책으로 내게 된 이유는 한국 사회의 반빈곤운동의 흐름을 한 권에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빈민운동, 반빈곤운동의 현실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반성과 평가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 작업을 하면서 필자가 이러한 글을 쓸 자격과 역량이 되는지 주저할 때도 많았다. 필자의 경험만 고집하며, 자료의 오류와 부족함을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러나 모든 미래는 과거의 성찰을 바탕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단순히 가난의 모습을 시대순으로 정리하거나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보려는 의도가 더 컸다. 무엇보다도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는지 되돌아볼 기회를 찾고 싶어 좀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빈곤의 그림자는 언제든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으며, 가난의 끝은 다시 올라올 수 없는 절망의 터널이다. 하지만 자포자기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청 앞에서 한미 FTA 반대 농성을 하는 사람들, 그 밑 지하도에서 장애인차별철폐를 주장하며 장기 농성을 하는 장애인들, 비정규직에 맞서 고립된 망루를 지키는 노동자들, 대전교도소에서 겨울을 맞이할 전철연 남경남 의장 동지와 용산참사로 구속된 사람들, 길거리 모든 노점상과 개발 지역의 철거민들, 이 사회 곳곳에서 헌신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도시빈민 활동가들이 떠오른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빈민운동은 이 사회의 총체적 변화와 함께 전개될 때만 진정으로 희생하신 분들, 특히 단속과 철거에 맞서 돌아가신 많은 열사들의 죽음에 보답하는 것이라는 말도 꼭 덧붙이고 싶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2월<br /> 최인기</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br /> 극심한 사회변동 속 빈민의 등장</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까지</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right: 10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제강점기에는 일상생활의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이들의 삶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빈민은 언제부터 있었는가?</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강점기에는 일상생활 유지에 필요한 생활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의 생활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연명하기에도 벅찼으며, 간신히 생계를 이어나가는 수준이었다. 수입의 거의 대부분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지출됐고, 이중 70% 이상을 식비로 지출한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질병에 노출되기가 쉬웠고 당연히 의료비도 감당하기가 힘들었으며,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빈민은 자신의 생계를 겨우 유지할 수 있는 &lsquo;세민&rsquo;, 생계가 매우 곤란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lsquo;궁민&rsquo;, 또는 &lsquo;부랑자&rsquo;나 &lsquo;걸인&rsquo; 등 다분히 추상적으로 분류됐다. 1920년대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월 수입이 20원 이하인 경우를 빈민으로 간주했는데, 이와 같은 기준을 조선에 적용한다면 당시 조선인 대부분은 빈민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1930년 조선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lsquo;소작농&rsquo;의 연간 수입은 205원, &lsquo;세농&rsquo;은 140원이었다. 당시 소작농 가구가 약 150만 가구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곡창지대인 전라도 농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민의 범주에 포함됐을 것이고, 조선인 절대 다수는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서울의 빈민은 어땠을까? 당시 경성부 사회과의 조사에 따르면, 1936년 11월 서울에 거주하는 조선인 실업자와 세궁민은 10만 5,000여 명이었다. 조사에서 빠진 사람들과 걸인을 합하면 적어도 11만 명이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인구가 60만 명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6명 가운데 1명꼴로 빈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일제강점기의 도시빈민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lsquo;토막민&rsquo;이다. 이들은 농촌과 도시의 빈민들로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으며 하천이나 제방, 산기슭, 다리 밑과 같은 곳에 거주했다. 굴을 파서 그 위에 멍석을 깔고 주위에 짚을 펴서 만든 곳에 거주했던 것이다. 토막민이 근대적 빈민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1920년대 초였다. 그리고 토막민이라는 용어는 그들의 두드러지는 외양을 이루는 주거 상태에서 연유했다. 공공재산 또는 사유재산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의미하는 &lsquo;무단 점거&rsquo;라는 말로 이들의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불법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오늘날의 무허가 정착지 주민과 유사한 개념으로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할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927년에 서울의 토막민은 3,000여 명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38년 1만 6,600여 명, 가뭄피해가 컸던 1939년 이후에는 2만 911명으로 늘어났고, 1940년 말에는 약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10년 사이에 10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토막민의 대부분은 일용노동자나 삯짐을 져서 근근이 생활했다. 1938년 말 조선총독부가 서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64명의 토막민 가운데 직업이 있는 사람은 938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82%가 일용노동자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일용노동자의 1년 평균 실업일수가 140일이었으므로 토막민 가운데 대부분은 1년에 절반 이상을 일정한 수입 없이 살아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안정된 수입 없이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침략 전쟁기 일용노동자들에게 강제저축이 강요되고, 각종 &lsquo;국방헌금&rsquo; 등이 강제로 징수된 점 등을 감안한다면 도시빈민의 삶은 굉장히 열악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으로 살펴 볼 대상은 화전민이다. 화전민은 일제의 조선 농촌에서 수탈적 농업정책이 진행되면서 출현했다. 자작농 겸 소작인이었던 소지주는 남의 집 행랑 칸을 빌어 농사하는 막실 소작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다 힘든 생활고를 견뎌내기 어려워 결국 산속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화전민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화전민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산불이 번질 우려와 죄를 짓고 도피처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lsquo;화전금지정책&rsquo;을 실시해 자신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다. 당시 화전민들은 대체로 북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았으며, 산림에 불을 지르고 그곳을 경작해서 감자, 보리, 조,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조선후기에 파악된 화전민은 도합 235결이었으며 1928년에는 9,806호로 전체 5만 4,134명으로 집계되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화전민의 식생활도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장해뒀던 곡식은 초봄이면 바닥이 났기에 초봄이 지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일대의 화전지대를 답사하고 〈고해순례〉를 쓴 최용환 씨는 화전민의 집을 보고 다음과 같이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양지바른 산비탈에는 거의 빈틈없이 연접된 화전이 있고 물 흐르는 좁은 골짜기 마다 &lsquo;틀거리&rsquo;의 집이 있으니 그는 산에서 나무를 베어온 채 별로 다듬지도 않고 네 귀를 맞추어 덧놓고 덧놓아 기둥도 일없이 지은 집이다. 그 틀거리 사이에 바람을 막기 위하여 흙을 엷게 바르고 한편에 들고나는 문이 있으니 이것이 곧 순화전민들이 일시 우거하는 안식처라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방안에 온돌은 있으나 방과 부엌에 바람벽도 없이 화통했고 어느 해에나 창호지를 했는지 더럽다 못하여 검고 절어서 방안에서 햇빛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이 되었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촌에서 쫓겨난 화전민들은 척박한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간섭받지 않은 채 살아갔다. 심지어 조선총독부의 &lsquo;화전금지정책&rsquo;을 위반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잡혀가도 감옥에서 먹여주고 입혀주기 때문에 오히려 화전을 경작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기에, 형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빈민에는 토막민, 화전민 외에도 근대적 규모와 시설을 갖춘 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던 공장 노동자들도 포함됐다. 이들 역시 1930년대 중반 한 달 수입이 16~17원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가족 수가 4~5명인 경우 최소 27원은 있어야 한 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공장 노동자도 빈민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이른바 &lsquo;노동빈민&rsquo;도 상당수였다. 이 사람들은 도시의 잉여 노동력으로 대규모 공사현장에 투입되어 노동빈민으로 활용됐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557" height="3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3.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농촌에서는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빈농층이 늘어났으며 조선 민중의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됐다. 월 수입액을 기준으로 당시 빈민을 규정하면, 일제강점기의 3대 빈민층이던 농촌의 광범위한 빈농층, 도시의 토막민, 화전민은 물론이고 다수의 공장 노동자를 포함한 노동빈민까지 범위가 확대된다. 이 사람들은 일본에서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전쟁에 휘말려 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전쟁노동력으로 동원되면서 조선민중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노동력 수탈의 피해자가 됐다. 뿐만 아니라 가혹한 노동조건과 군사적 노동통제 하에서 살아남더라도, 광복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빈민들은 다시 실업과 폭등하는 물가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날그날의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노점상은 어떻게 형성됐는가?</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노점상은 오래된 상거래 행위로 그 형성 시기를 정확히 가늠하기가 어렵다. 조선 시대 이전부터 저소득층인 천민이나 상민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방편이자 경제활동의 기초 단위로 노점상을 해왔다고 알려진다. 조선 초기에는 중앙 정부에 그 지방의 특산물과 농&middot;어물, 공산품들을 상납하면서 지방의 특정 상품은 발전했지만 타지방과의 상품 교류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따라서 각 지방은 한정된 물품만을 마을 장터에서 유통했으며, 특정 품목은 지방마다 가격이나 가치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다 조선 중기 이후 마을 장터에서 여러 지방의 특산물, 농작물, 약간의 공산품이 활발하게 유통되기 시작했고, 점차 도시가 발달하면서 장터도 함께 발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 중기 이후에는 중앙정부가 각종 세금을 쌀로만 부과하면서 지방의 특산물을 손쉽게 얻을 수 없었다. 그러자 중앙정부는 직접 또는 지방관청을 통해 지방 특산물을 구입했다. 그러면서 유통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생겨났고 국가에서 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해주면서, 독점권을 바탕으로 자본이 형성됐다. 이러한 잉여자본을 통해 그동안 특정한 지방에 국한되던 상품들이 여러 지방으로 유통됐다. 또한 교통이 발달하면서 이전보다 더 폭넓게 상품들이 유통되는 환경이 마련됐다. 이를 계기로 독점자본이 생겼고, 이것은 전국에 유통망을 확보하면서 사재기를 통해 더욱더 큰 이익을 얻으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양반과 상민의 계급이 붕괴하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독점자본은 더욱 확대됐다. 천민이나 상민들의 생존을 위한 방편과 기초적인 유통 상거래 행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화된 시장은 전국에 유통망을 가진 독점자본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점상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자신의 육체노동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중추적인 유통기능을 담당했던 &lsquo;보부상&rsquo;과 상업을 본업으로 삼고 특정 장터에서 물건을 팔던 &lsquo;상인(현재의 대리점 형태)&rsquo;들이 있었다. 또한 상업을 본업으로 하지는 않고, 소작농을 겸하며 물건을 팔던 노점상들이 있다. 조선 시대부터 노점상은 소작농이나 저소득 상인, 천민들의 생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지금의 노점상들도 과거의 보부상이나 소작농을 겸하던 조선 중후기 노점상들의 명맥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강점기에 계급이 파괴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유통시장에는 세계 곳곳의 문물들이 유입되는 복합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1930년대 노점상 및 행상의 수는 약 11만 3,000여 명으로 전체 상업 인구의 23.8%를 차지했다. 이를 다시 남녀별로 구분해보면 남성은 물품 판매업주, 노점행상 등의 순서로 구성되는 데 반해, 여성은 접객업과 노점이나 행상이 상업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선의 상업 인구는 접객업과 노점행상 및 군소 상점주가 절반 이상이다. 시장 역시 일정 기간을 정해 열리는 5일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5일장은 주로 대도시보다는 지방 중소도시에서 형성됐는데, 일정 기간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활동 반경은 더욱 넓어졌고 더 크게 활동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강점기의 소작농, 농업노예, 극빈 계층들은 도시로 유입되면서 난전과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노점 거리가 형성됐던 곳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장소로 기능했다. 마을의 시장이나 장터는 민중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하는 토론장이자 진정한 삶의 현장이었다. 시장과 노점 거리가 형성된 곳에서는 세간의 정보가 유통되고 집회가 벌어지면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거나 전국적인 시위나 항일투쟁이 시작되기도 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1944 조선구호령11을 제정했다. 조선구호령의 적용 대상은 65세 이상의 노쇠자와 13세 이하의 유아, 임산부, 불구, 폐질, 질병, 상병 기타 정신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노동에 지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급여 내용에는 생활부조, 의료부조, 조산부조, 생업부조 등이 있으며, 구호는 신청주의, 자산조사 규정, 거택보호 등을 원칙으로 했다. 조선구호령은 형식적으로 빈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근대적 의미의 공공부조제도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실제로는 안정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지배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해방과 한국전쟁이 낳은 도시빈민</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민중의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는 더욱 심해졌고, 항일투쟁가들을 탄압하던 경찰과 관료들은 친일을 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 나아가 자본가들은 해방 이후에도 더욱 당당하게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하며 부를 축적해갔다. 또한 해방 후 바로 벌어진 한국전쟁은 민중의 많은 부분을 앗아갔다. 해방 직후 90만 명이던 서울의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나, 한국전쟁 직전 170만 명에 이르면서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9.1%에 달했다. 북한 주민들 가운데 64만여 명이 월남하기도 했다. 또한 250만여 명으로 추정되던, 귀환한 재외동포의 상당수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농촌에 연고가 없는 일부 재외동포들은 월남민 대다수와 함께 도시로 유입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시에 새로운 거처와 일자리를 찾는 인구는 폭증했지만 일본과의 교역이 단절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지역&middot;산업 간 분업체계는 거의 와해됐다. 게다가 물자수급의 불균형 문제까지 겹치면서 극심한 실업난과 식량난을 겪었다. 따라서 도시로 몰려든 다수의 해외동포와 월남민 들은 안정된 일자리와 거주지를 구하지 못한 채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했다. 전쟁으로 총 주택의 30%가 파괴되는 등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는 빈민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그 결과 도시빈민들은 시가지 안팎의 유휴지에 미군들이 쓰고 남은 각종 건자재를 이용해서 판잣집을 짓고 노점상이나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막집과 화전민과는 달리 &lsquo;판잣집&rsquo;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8.15해방 이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피난민들이 임시 거주지로 사용하려고 미군들이 진주시 가지고 들어온 나왕, 미송 등의 목재조각과 루핑, 깡통, 등을 이용해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생겼다고 추측할 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토막민이 도시빈민의 원형을 이뤘다면,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도시에 유입인구가 증가하면서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판자촌이 확산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피난민까지 겹쳐 국공유지나 사유지를 막론하고 무허가 주택이 마구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이는 판잣집, 천막집, 방공호, 토굴 등으로 불리며, 정부의 묵인과 방조 아래 들어섰다. 1955년 영등포의 삼구시장에서 화재가 나면서 도시 미관을 저해하고 무허가라는 이유로, 1955년 5월 7일부터 9월까지 무허가 판잣집의 철거가 시작됐다. 1966년에 들어 최초로 실시한 전수조사에서 밝혀진 무허가 건물의 총수는 13만 6,650동이지만, 실수는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판자촌은 시 외곽의 산허리를 중심으로 하천변에는 끈질기게 늘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전쟁 이후 노점상들의 유통구조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미군부대의 물품들이 시장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황폐했던 유통구조에서 미군부대의 물품은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로 급부상했고 이것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노점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부산의 국제시장과 청계천 주변 이태원, 용산전자상가 등의 전신도 바로 이것이다. 전쟁 중에 피난민으로 살아가는 데 노점만한 것이 없었다.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거나 노점상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때부터 노점상들은 극히 한정된 자원 가운데 자신만의 독특한 물품을 개발해 경쟁력을 높여갔으며, 저렴한 가격으로 서민들의 구매욕을 자극하기도 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5.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전쟁 이후 1955년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65달러에 불과할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절대적 빈곤 상태에 처해 있었다. 당시 도시빈민들은 극심한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궁핍한 상태로 전락했고, 전통사회의 신분과 계층구조가 무너지며 사회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이행국면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빈곤한 상황에서 탈출해 중간층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이것은 이후에 나타난 도시빈민들과 분명히 구분되는 점이다. 한편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미군정에서 해오던 3년간의 구호사업이 월남한 피난민과 국내거주 빈민에 대한 식량과 의료 및 주택 공급에 치중됐다. 미군정은 1945년 미군법령 18호에 의해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를 보건후생부로 변경하고 사변재해의 구제와 기아의 방지, 최소한의 서민생계 유지, 보건위생 및 치료, 응급주택 공급 등에 중점을 둔 정책을 펼쳤으나 획기적인 사업을 추진하거나 장기적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1948년에 정부를 수립하고 남한 정부는 보건후생부와 노동부를 통합했고, 이를 사회부로 명명하기도 했다. 또한 제헌헌법 19조에서 &lsquo;노령, 질병 기타노동 능력 상실로 생활유지의 능력이 없는 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rsquo;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적 부조19와 관련된 정책은 주로 외국의 민간 원조단체가 주축이 되어 보육원, 양로원과 같은 수용보호시설을 세우는 등 미국식 사회사업이었을 뿐 새로운 공적 부조 제도는 생기지 않았다.20 한편 노동복지 분야에서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그리고 노동위원회법 제정이 추진됐고, 1953년에는 이것들이 공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법들은 유명무실했고, 실제로 거의 적용되지도 않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200_%EA%B0%80%EB%82%9C%EC%9D%98%20%EC%8B%9C%EB%8C%80/%EA%B7%B8%EB%A6%BC6.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들어가는 글,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필자 소개<br /> 최인기</b><br /> 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온 빈민활동가.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 주변과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87년부터 보석 세공 공장에서 일하며 부조리한 사회문제에 관심을 두게 됐고, 노동자와 활동가를 병행하며 살아왔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20년 넘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 차별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노점 단속과 철거문제에 관심이 많다. 1995년부터 빈곤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고 &lsquo;전국노점상연합&rsquo;에서 활동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1999년부터 2009년까지 &lsquo;전국빈민연합&rsquo;의 사무처장을 맡으며 노점 단속 현장뿐 아니라 주택과 상권의 철거 지역에서도 활동했다. 지금은 &lsquo;빈민해방실천연대&rsquo; 집행위원장, &lsquo;민주노점상전국연합&rsquo; 사무처장으로 일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15 오전 10:01:00굴드의 ‘여덟 마리 새끼 돼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C%97%AC%EB%8D%9F%EB%A7%88%EB%A6%AC%EC%83%88%EB%81%BC%EB%8F%BC%EC%A7%80_60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어느 황홀하지 않은 저녁</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 문화에서 타히티 섬은 매혹의 전형이자, 사실상 동의어다. 최고의 매력 요인이라면 아마도 리틀록 출신의 포부시 간호사겠지만, 남태평양이라는 무대도 &lsquo;어느 황홀한 저녁&rsquo;에 크게 기여를 했다(오페라계 최고의 돈 조반니로 꼽히던 몸으로서 황송하게시리 브로드웨이에 왕림해주신 에치오 핀차 역시 멋들어진 정경을 전혀 망치지 않았다). [1949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남태평양〉에서 남자 주인공 에밀 드 베크 역을 에치오 핀차가, 여자 주인공 넬리 포부시 역을 메리 마틴이 맡았다.-옮긴이]</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설의 몇몇 측면은 수정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가령 요즘도 많은 관광객이 반드시 들르는 비너스 곶의 이름은 타히티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붙여진 게 아니고, 1769년에 금성의 태양면 이동을 측정하기 위해 그 장소에 기기를 설치했던 쿡 선장과 천문학을 기리는 뜻이다. 찰스 다윈도 1835년 11월에 비글호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이름과 장소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hellip;&hellip;우리는 새로운 나라가 던져주는 첫인상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뭍에 상륙했다. 그 이름도 매력적인 타히티였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이 비너스 곶이라는 기억할 만한 장소에 운집하여 싱글벙글 유쾌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하려 기다리고 있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렇지만 다윈은 타히티 여인들에 열광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일반적인 남성들의 의견과 입장을 달리했다. &ldquo;나는 이곳 여자들의 외모에 몹시 실망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남자들보다 훨씬 뒤떨어진다.&rdquo; 다윈은 무엇보다도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에 반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특히나 한 가지 꼴사나운 유행이 거의 모든 이에게 퍼져 있다. 머리카락을 정수리 꼭대기부터 동그란 형태로 깎아서, 아니 차라리 민다고 해야 할 정도로 바싹 잘라서 가장자리만 고리 모양으로 남기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사람들에게 습관을 바꾸라고 죽 설득해왔지만, 이것은 유행이며, 파리에서처럼 타히티에서도 그 말 한마디면 대답은 충분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윈의 평가는 예외적인 편으로, 널리 공유되는 입장은 아니었다. 찰스 로턴 때문에 참으로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된 블라이 함장[1789년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1935년작 〈바운티호의 반란〉에서 배우 찰스 로턴이 블라이 함장 역을 맡았는데, 영화에서는 함장의 횡포가 반란의 원인으로 그려졌다.?옮긴이]은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면에서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분명했겠지만, 그래도 위대한 뱃사람이었으며 다른 평범한 영국 선장들의 성향과 견주어서 특별히 더 독재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바운티호에서 일어난 유명한 반란 사건이 함장의 선상 정책 때문이었다고들 하지만, 반란 주모자인 플레처 크리스천이 타히티와 그곳 여인들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던 점도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타히티는 그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lsquo;그림엽서처럼 완벽한 천국&rsquo;이라는 표현은 보통 그 옆 무레아 섬의 몫이다. 내가 판단하기로는(나는 얼마 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처음 여행했다) 타당한 일이다. 타히티에서 북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무레아는 사화산 섬으로, 치솟은 분화구 테두리가 이후의 침식으로 깊게 갈라져서 깔쭉깔쭉한 봉우리들과 늘어진 주름들을 만들어냈다. 타히티에서 무레아를 보면, 특히 아예 섬에 딸린 당연한 부속인 듯한 구름에 푹 감싸인 모습을 보면, 무레아야말로 신비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가장 걸맞은 섬이라는 생각이 든다. 찰스 다윈도 타히티에 머물던 어느 날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 무레아의 마력을 제 몫만큼 받아 안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내가 오른 지점에서, 저 멀리 에이메오(무레아의 옛 이름) 섬이 잘 내다보였다&hellip;&hellip;. 우뚝 솟은 거친 봉우리들에 흰 구름이 묵직하게 올라앉아서, 마치 에이메오 섬은 푸른 바다에 뜬 섬 같고 그 봉우리들은 푸른 하늘에 뜬 섬 같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름답고 신비로운 인상은 후에도 지속되었음이 분명하다. 오스카 해머스타인은 〈남태평양〉에 등장하는 세상 밖 낙원 발리 하이 섬을 그릴 때 무레아를 모델로 삼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발리 하이는 속삭이네<br /> 바닷바람에 실린 그 목소리,<br /> &ldquo;이곳은 당신의 특별한 섬,<br /> 내게로 오세요, 내게로!&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A%B7%B8%EB%A6%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뉘라서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고작 몇 프랑과 40분의 페리 승선으로 만나볼 수 있을 때라면? 그래서 나와 내 아들 이선은 요전의 여행 중에 무레아를 방문했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이라면, 발리 하이의 꾐에 넘어간 손님이 우리만은 아니었으며 개중에는 무해하다고 할 수 없는 손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 낙원에서 벌어졌던 집단살해를,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을 대학살을, 단 한 세대 만에 마무리된 대참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모르는 까닭은 이것이 사람이 사람을 죽인 사건이 아니라 달팽이가 달팽이를 죽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종은 도덕적으로 무고하구나 하며 지레 안도의 한숨을 내쉬진 말길 바란다. 달팽이가 달팽이를 죽이긴 했지만 죽음의 대리인을 수입한 것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좋은 의도에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지만, 사실 그것은 쉽게 피할 수도 있었을 비극적 오해로 인한 행위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양의 섬들은 진화를 위한 위대한 자연의 실험실들이다. 섬은 우리에게 생물의 변화에 관한 아이디어를 무수히 주었고, 갈라파고스핀치부터 하와이의 파리까지 고전적 예제들을 무수히 제공했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데다가 접근이 까다롭고 포식자나 경쟁자가 곧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이 풍요로운 안식처에 어찌어찌 다다른 생물들에게는 기회가 폭발적으로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령 갈라파고스핀치들은 적응방산(適應放散)을 통해 다양한 생태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대륙에서라면 보통 여러 과의 새들이 채웠음직한 생태적 지위들을 메웠다. 어떤 종은 크고 작은 씨앗을 먹고, 어떤 종은 딱따구리처럼 행동하며, 어떤 종은 선인장 가시를 써서 틈새에 숨은 곤충을 뽑아낸다. 다윈은 그 유명한 체류 기간 동안 이 새들의 겉모습에 감쪽같이 속았기 때문에 이들을 여러 집단으로 분류했다. 나중에 런던에서 어느 조류 전문가가 다윈의 수집품들을 점검하여 폭넓은 다양성의 기저에 갈라파고스핀치 특유의 해부학적 특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윈은 진짜 사정과 의미를 알아차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육상 달팽이는 가장 좋은 사례이자 가장 깊이 연구된 사례에 속하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하다. 극소수의 달팽이들이 (자연적 뗏목이나 새 발에 묻은 진흙 같은 기묘한 이동 수단을 통해서, 혹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을 때는 허리케인을 틈타서) 기나긴 바다 여행에 운을 걸었다. 운이 좋아 이주에 성공한 녀석들 앞에는 무수한 조각으로 갈가리 나뉜 (군도라는) 광활한 세상이 펼쳐졌는데, 각각의 조각이 머물러 살 만했고 결국에는 진화적 방산을 낳을 만했다. 게다가 달팽이는 거주 영역이 좁기로는 따를 자가 없는 데다가 자웅동체이기 때문에, 최초 인구가 아무리 적어도(극단적으로 줄이라면 한 마리라도) 쉽게 독립된 개체군을 형성할 수 있고 결국에는 새로운 종이 될 수 있다. 섬에 떨어진 쥐 한 마리는 (임신한 암컷이 아닌 한) 한때의 기억으로 덧없이 사라지고 말겠지만, 섬에 떨어진 달팽이 한 마리는 거대하고 약동적인 개체군의 조상이 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태평양 화산섬들은 어디보다 유망한 장소다. 최대한의 고립에 (해안부터 화산 정상까지 실로 광범위한) 생태적 다양성이 결합된 곳이기 때문이다. 섬은 보통 상당히 대칭적인 모양의 화산 하나로 이루어진다. 화산 옆면은 쩍쩍 갈라져, 분화구 가장자리에서 바다까지 내달리는 계곡들이 줄줄이 파여 있다. 달팽이들은 대부분 습한 곳을 선호하기 때문에 계곡 바닥에는 살지만 그 사이 등성이에는 살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런 일반적인 지리 분포 역시 진화의 가마솥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요인이다. 계곡 하나하나가 별개의 주머니인 셈이라 섬 안에서도 더욱더 고립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양의 섬들 중 최고의 다양성을 자랑하는 곳에서는 번식력이 몹시 좋은 달팽이 종류가 계곡마다 별개의 종으로 진화하여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태평양 섬 달팽이들의 폭넓은 방산 현상은 진화의 영광이고, 다윈을 좇아 이 직업에 들어선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즐거움과 지식의 원천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약간의 질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달팽이 연구에 경력을 바쳐왔는데, 내가 탐구한 대서양 산호섬의 달팽이들, 즉 버뮤다제도의 푀칠로조니테스<sup>Poecilozonites</sup> 속과 바하마 제도의 체리온<sup>Cerion</sup> 속은 다양성이 한결 덜하기 때문이다.) 다윈이 연구한 갈라파고스제도는 전형적인 사례로, 불리물리데<sup>Bulimulidae</sup> 과에 속하는 달팽이 고유종이 60여 종 남짓 서식한다. 더 유명한 사례로는 고립 정도가 더 심한 중앙 태평양 섬들에서 발견된 두 가지 대규모 방산 현상이 있다. 하와이 섬들에 퍼진 아카티넬리데<sup>Achatinellidae</sup> 과의 수백 종, 그리고 타히티와 무레아와 기타 이웃 섬들에 퍼진 파르툴라 속의 백여 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태평양 화산섬 달팽이들은 진화 이론의 역사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중요하고 오래된 한 가지 논쟁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생물 변화의 원인이라는 굵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보다 걸맞은 동물은 없는 듯하다. 문제를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다. 진화에서 환경의 역할은 무엇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생물들은 달라진 조건에 맞추기 위해 제 형태를 바꾸는가? 만일 그렇다면, 환경은 개체가 생애 중에 획득한 형질을 물려주는 라마르크식 과정을 통해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아니면 무작위적인 변이의 스펙트럼 중 자연선택으로 적자를 골라내는 다윈식 적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이한 두 적응 이론(라마르크식 대 다윈식)에 대항하여, 어떤 식으로든 형태가 환경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일은 없다고 단언한 진화학자들도 있었다. 물론 어처구니없게 부적응적인 개체들은 죽겠지만, 변이가 만약 드물게 등장하는 데다가 한 방향으로만 벌어지는 사건이고 대부분의 대안들이 주변 환경에 충분히 어울리는 것이라면, 적응을 하더라도 개체군들 사이에 차이가 빚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선택에 의한) 외적 형태 변화보다는(드문 돌연변이에 따른) &lsquo;내적 요인들&rsquo;이 진화적 변화 형성에 더 압도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주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문제를 시험해볼 생물로 태평양 화산섬 달팽이보다 나은 대상이 있겠는가? 계곡마다 서로 다른 개체군이 산다면 얼마나 멋진 자연적 실험이 되겠는지 생각해보라. 계곡들은 대개 환경이 거의 같을 텐데, 그럼에도 근연 관계가 먼 달팽이들의 서식지가 되었다니. 만약에 적응 현상이 압도적이고 기후가 모종의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진화를 빚어낸다면, 떨어져 있지만 조건이 비슷한 계곡들에 사는 여러 달팽이는 공통의 조건에 적응하여 진화했으므로 닮은 점이 몹시 많을 것이다. 반대로 &lsquo;내적 요인들&rsquo;이 압도적이라면, 개체군들에게서 형태와 환경의 상관관계를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으로 중요한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존 T. 굴릭(1832~1923)이었다. 하와이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의 아들이었던 굴릭은 1872년에서 1905년 사이에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여 포문을 열었다. 굴릭은 성인이 된 후에는 대체로 중국과 일본에서 살며 선교 활동을 했지만, 부모의 교구에 살던 젊은 시절에 하와이의 아카티넬리데 달팽이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수집해두었다. 굴릭은</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내적 요인들&rsquo;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자연선택에 의한 통제는 물론 어떤 형태의 환경적 영향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달팽이 껍데기의 형태와 계곡의 지역 환경 사이에서 아무런 상관관계도 발견하지 못했다. 식생과 습도와 온도가 명백히 같은 장소들인데, 달팽이들의 껍데기 모양은 그보다 더 다를 수 없다 싶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굴릭은 19세기 말의 지배적 사조였던 결정론에 강하게 반대하면서(주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달팽이 껍데기에서 드러난 예측 불가능성을 일반화할 때 전반적으로 역사의 우연성을 옹호할 수밖에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옹호 대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동일한 환경에서 서로 다른 형태들이 생겨난다는) 내 주장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오늘날 흔히 이야기되는 가정, 즉 생물의 변화가 환경 변화에 의해 속속들이 통제되며 그에 따라 인간의 진보도 외부적 운명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가정은 분명 사실에 위배된다. (1905년에 작성된 굴릭의 유명한 논문 「종의 진화와 기질의 진화」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가 1969년에 쓴 박사 논문에서 위 문장을 인용했을 때는 (확고한 적응주의자의 입장에서) 굴릭을 비아냥거리는 뜻이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굴릭의 말이 틀렸다는 생각에 예전만큼 확신이 없다. 개인적이고 종교적인 동기가 과학에 끼어들어선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사람들은 이따금 잘못되거나 비논리적인 근거에서 정확한 답을 끌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역사의 우연성과(생명 일반의 역사에서나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에서나) 인간의 자유의지는(신학적 의미라기보다 실제적 의미에서) 과연 얽혀 있는 개념들이고, 동일한 환경에서 눈에 띄게 다른 해답들을 만들어낸 &lsquo;실험&rsquo;은 이런 개념들을 지지하는 좋은 증거일 만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든 굴릭이 그런 결론을 내리자 다윈주의자들의 항의가 폭풍처럼 몰아닥쳤다. 엄격한 적응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이었던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는 응수하기를, 굴릭이 &lsquo;동일한&rsquo; 환경이라고 여긴 것이 인간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 달팽이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했다(타당성 없는 말도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우리에게 동일한 조건으로 보인다고 해서 이 육상 연체동물처럼 작고 섬세한 생물들에게도 동일하게 보이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다. 그들의 필요에 관해서&hellip;&hellip; 우리는 실상 너무나 무지하다. 다양한 식물 종의 정확한 비중, 다채로운 곤충들과 새들 각각의 수, 결정적인 시기에 햇빛이나 바람에 얼마나 노출되는가 하는 미묘한 특징, 그 밖의 미세한 차이들이 우리에게는 결코 손에 잡을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이 수수한 생물들에게는 대단한 의미가 있을지 모르며 나아가 적응이 필요할 만큼 충분히 큰 차이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크기나 형태나 색깔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미세한 적응이 생겨날지도 모르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06년, 헨리 에드워드 크램프턴(1875~1956)은 굴릭의 모노그래프를 읽은 뒤 이 실랑이에 가담하기로 결심했고 이후 50년의 경력을 타히티와 무레아와 주변 섬들의 파르툴라 달팽이에 관한 방대한 연구에 바쳤다. 크램프턴은 그 전까지 실험발생학과 자연선택 분야에서 탁월한 작업을 해왔다. 그런 전력 때문에 적응주의 쪽으로 살짝 기우는 입장이었으나, 보장할 만한 증거가 있다면 월리스의 환경형성설보다 굴릭의 &lsquo;내적 요인들&rsquo;을 기꺼이 지지하겠다는 열린 태도를 취했다. 크램프턴은 태평양으로 열두 번 탐사를 갔고, 방대한 모노그래프를 세 편 발표했다. 달팽이 진화에 관한 한 역사상 최고의 업적일 이 논문들을 뭉뚱그려 &lsquo;파르툴라 속의 변이, 분포, 진화에 관한 연구&rsquo;라고 부른다(타히티 편은 1917년에, 다른 섬들 편은 1925년에, 무레아 편은 1932년에 나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반세기의 노고를 한 문장으로 줄여 말하자면, 크램프턴은 굴릭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하는 입장이 되었다. 크램프턴은 주변 환경에서 파르툴라의 형태와 색을 예측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전혀 찾지 못했다. 동일한 기후 조건에서 때에 따라 상이한 해법들이 등장하는 듯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5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A%B7%B8%EB%A6%BC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크램프턴은 인접한 계곡에 사는 달팽이들 간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세 가지 주요 원인 탓이라고 해석했고(고립, 돌연변이(그의 용어로는 &lsquo;선천적 요인들&rsquo;),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 개중 다윈이 선호한 메커니즘에는 미미한 역할만 맡겼다. 크램프턴이 보기에 첫째 요인인 고립은 실제 원인이라기보다 경향성을 유도하는 전제 조건이었다. 지리적 분리가 직접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고, 독립적인 개체군들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속성이 퍼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셋째 요인인 자연선택은 대체로 부정적인 힘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뭔가 다른 메커니즘에 의해 새로운 속성이 생겨나며, 자연선택은 그 속성이 쓸모가 없을 때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적 변화의 원천은 다른 곳에 있어야 한다. 미국 생물학자들 가운데 멘델 연구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편에 속했던 크램프턴은 둘째 요인인 돌연변이, 즉 선천적 요인들에 의해 &ldquo;내부적으로 생성된&rdquo; 변화야말로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어떤 환경에서든 제대로 작동하는 해부학적 형태는 수백 가지쯤 가능할 것이다. 특정 계곡의 특정 개체군이 띤 형태와 색은 고립된 집단 속에서 어쩌다 비적응적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퍼짐으로써 빚어진 우연한 결과이기 쉬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계곡들 간의 차이가 정말 그런 식으로 생겼다면, 그것은 대체로 비적응적인 현상이다. 물론 각 지역의 종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제거되지 않아야겠지만(이런 부정적인 의미에서 적자(適者)여야 하겠지만), 각각의 독특한 속성은 무수히 많은 대안 중 하나일 뿐이고, 고립된 집단에서는 자연선택이 아니라 우연한 돌연변이에 의해서 어떤 독특한 해답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크램프턴은 타히티의 파르툴라를 이야기할 때 선택보다 돌연변이에 무게를 두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환경의 역할은 서식 범위에 한계를 짓거나 특정 개체들이 제거되게 하는 것이고, 개체들의 특질은 다른 선천적 요인들에 의해서 결정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무레아의 파르툴라에 관한 크램프턴의 위대한 모노그래프(1932)가 나온 지도 벌써 6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의 작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확실히 내게는 선입견이 있다. (나 같은) 달팽이 연구자들은 크램프턴을 수호성인으로 받들어도 무방하니까. 그래도 나는 크램프턴의 파르툴라 연구를 진화생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볼 만한 이유가 세 가지쯤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접한 계곡의 달팽이들이 보이는 형태와 색의 미세한 차이가 비적응적 현상이라는 그의 논점은 맞는 말일 것이다. 크램프턴의 바로 다음 세대에서 진화생물학이 엄격한 적응주의를 굳게 믿는 쪽으로 기울었기에, 그의 업적은 일시적이나마 폄하되었다. 그러나 한층 다원적인 오늘날의 풍토에서 위대한 세 편의 모노그래프는 새로이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크램프턴은 순수한 헌신과 노력으로 엄청난 노동을 해낸 것만으로도 최고의 경의를, 경외에 가까운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 나는 무레아를 딱 하루 렌터카로 돌아보았을 뿐이다. 그늘을 벗어나거나 길을 이탈하는 모험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열사병으로 쓰러지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크램프턴은 열두 차례 탐사를 떠나서 매번 몇 달씩 묵었고, 당시는 비행기나 렌터카가 아니라 배와 말의 시대였다(뚜벅이가 되어야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과학적 글은 &lsquo;객관적&rsquo;이어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한껏 절제미를 발휘한 문장에서, 크램프턴은 작업 환경에 관해 단 한마디 스치듯 적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폴리네시아 같은 지역에서 현장 작업을 할 때는 열대지방에 흔한 문제들을 겪게 마련이다&hellip;&hellip;. 증기선은 주요 항구들만 오가므로 그곳에서 이웃 섬으로 더 들어가려면 커터선, 포경선, 카누 등을 써야 한다&hellip;&hellip;. 말을 확보할 수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계곡 탐사는, 거의 예외라곤 없이 오직 도보로만 가능하다. 가로질러야 하는 곳의 경사가 너무 급하고 건너야 하는 개울은 너무 깊으며 파르툴라가 서식하는 빽빽한 숲이나 덤불 속에 길이라고는 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크램프턴은 그럼에도 연구를 계속하게 만드는 보상적인 즐거움에 관해서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그런 작업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활동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경험은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이 모노그래프는 아름다운 섬들이나 그곳의 재미난 거주자들에 관해 묘사하기에 적합한 지면이 아니다. 그저 밤낮으로 힘들게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해야 했으나, 사이사이 대단히 즐거운 시간이 있었다고만 말해두겠다. 특히 타히티 섬은 달리 비견할 곳이 없을 만큼 아름다우며, 그곳 부족장들과 가족들은 아낌없이 우리를 환대했다. 당시에 우리는 특전을 누린 셈이었다. 이제라도 사의를 표할 수 있어서 기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수집은 노고의 시작일 뿐이었다. 크램프턴은 이후 오랜 시간을 들여 달팽이들을 측정하여 통계를 계산했고(타히티 모노그래프를 쓸 때는 8만 개쯤, 무레아 작업에서는 무려 11만 6천 개쯤), 더욱이 (당시로 보더라도) 믿기 힘든 일인데, 그 모두를 혼자서 손수 했다! (컴퓨터도 소형 계산기도 없었다. 크램프턴이 &lsquo;계산 기계&rsquo;라고 말한 것은 연속 빼기로 나눗셈을 수행하고 단순 연산 하나에 몇 분씩 철걱대던 구식 기계 장치를 가리킨다.) 그는 또 한 번 줄여서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직접 측정을 하고 세세하게 분류하는 일은 모두 필자 본인이 담당했다. 그러므로 인적 계수는 전 연구를 통틀어 일정하다고 할 수 있다&hellip;&hellip;. 표준편차는 소수점 여덟 자리까지 계산했다&hellip;&hellip;. 이런 작업에 직접 종사해본 사람만이 이런 정량분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를 짐작할 것이다&hellip;&hellip;. 2주에서 8주씩 걸린 수학적 고역으로 얻는 것이라고는 이 숫자들, 그리고 더불어 적힌 문장 한 줄이 전부였다&hellip;&hellip;. 그렇지만 최종 결과를 내려면 이 기법을 적용할 수밖에 없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용성의 기준에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과학은 모두 누적적이다. 누구도 처음 한 번에 모든 것을 제대로 해낼 수는 없다. 크램프턴의 모노그래프들이 과거의 노력과 발상을 담은 기념비에 지나지 않았다면, 그래도 존경받아 마땅하기야 했겠지만, 그것은 차라리 인간 고생물학 분야의 한 표본이라고 불러야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모노그래프들은 후속적인 개정과 연장을 가능케 한 귀중한 보고였다. 나는 이 점을 더없이 개인적인 방식으로 실감했다. 크램프턴이 &lsquo;수학적 고역&rsquo;의 세월을 통해 생산한 표들을 내가 적어도 세 편의 기술 논문에서 가져다 썼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결정적인 면을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보자. 크램프턴은 타히티와 무레아와 근처 섬들에서 파르툴라가 &lsquo;당시 시점에&rsquo; 보였던 지리 분포와 변이를 기록하는 데 50년을 보냈다. 이 작업은 순간의 포착으로서 대단히 중요하고 영구한 가치가 있다. 크램프턴의 반세기는 파르툴라의 미래 역사에 비하면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었다. 크램프턴은 &lsquo;미래 작업의 기준선을 긋기 위해서&rsquo; 평생을 헌신한 것이다. 파르툴라는 향후에도 계속 빠르게 진화할 테니, 크램프턴의 기준선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중간 정차역이 될 것이었다. 과학자라면 모름지기 이런 관점에서 그의 헌신을 바라보리라. 현재의 인상보다 미래의 변화가 훨씬 가치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400" height="59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A%B7%B8%EB%A6%BC3.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A%B7%B8%EB%A6%BC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크램프턴의 계획은 결실을 맺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래 보였다. 다음 세대에 이르러, 세계 최고의 달팽이 생물학자 세 명이 전적으로 크램프턴의 작업에 기초하여 파르툴라 연구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노팅엄 대학의 브라이언 클라크, 버지니아 대학의 짐 머리,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의 마이크 존슨이 그들이다. 그들은 다양한 조합으로 공동 저술을 하며 196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숱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들은 셋 모두가 가장 좋아한 섬인 무레아를 주된 대상으로 삼아 크램프턴의 결과를 다듬었고, 크램프턴에게는 없었던 수학적 과정이나(요즘은 컴퓨터로 계산한다) 유전학 기법을 적용하여 그것을 대단히 세련되게 만들었다. 1980년에 머리와 클라크는 「무레아 섬의 파르툴라 속 : 진행형의 종 분화」라는 중요한 논문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맺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무레아 분류군의 진화 역사는 아직 정확하게 재구성되지 못했지만, 이미 이들은 최초의 종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어떤 양상으로 벌어졌는지를 유례없이 자세하게 보여주었으며 흥미롭고도 역설적인 사실들도 몇 가지 보여주었다. 그들은 종 분화의 박물관이자 실험실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더라도 어쩌고 했던 번스의 한탄[스코틀랜드 시인 로버트 번스의 시 「생쥐에게」에는 &lsquo;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생각해봐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rsquo;라는 절이 나온다.?옮긴이]에 달팽이도 더해주자. 아무리 대단한 기대도 인간의 허영의 불꽃에 휩싸이면 순식간에 죽고 만다. 1980년의 저 대담한 발언 이래로 고작 10여 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무레아는 이제 파르툴라의 활발한 종 분화를 연구하기에 알맞은 실험실이 못 된다. 무레아는 능묘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시도한 것이 줄줄이 더 큰 문제를 낳아 사태가 침소봉대된 경우에 대한 비유들을 떠올려보자. 무레아에서 파르툴라가 전멸한 사연을 이해하려면 그런 그림을 상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라든가, 어느 동요에서 파리를 삼킨 할머니를 생각해보자. (할머니는 그 파리를 잡으려고 거미를 삼켰고, 거미를 잡으려고 새를 삼켰고, 새를 잡으려고 고양이를 삼켰고&hellip;&hellip; 이렇게 동물계의 큰 덩치들까지 올라간다. 삼킨 내역을 죄다 늘어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행마다 자꾸 길어지지만, 마지막 행은 놀라우리만치 짧다. &lsquo;옛날 옛날에 말을 삼킨 할머니가 있었는데요, 할머니는 결국 죽고 말았어요.&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파르툴라 속 달팽이들은 죽은 식물에 자라는 균류를 먹고 산다. 농업에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파르툴라가 토착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사소하나마 딱 하나 있긴 한데, 그마저도 전적으로 긍정적이다. 여인들이 그 껍데기를 꿴 레이를 만들어서 관광객에게 파는 것이다. 한편, 고립된 섬에 새로 도입된 동물들은 토착 생물들과 농업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때가 많다. 예컨대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끼들이 그랬고, 가장 위험한 생물을 하나 들라면 뉴질랜드에 가서 수많은 모아 종 새들을 싹 쓸어버린 인간이 그랬다. 무레아에서도 새로 도입된 달팽이들이 구슬픈 파멸의 연쇄를 개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해한 파르툴라와는 대조적으로, 아카티나<sup>Achatina</sup> 속에 속하는 아프리카 나무 달팽이는 거의 언제나 참담한 재앙이나 다름없다. 우선, 녀석들은 거대하다(달팽이 기준에서). 둘째, 녀석들은 살아 있는 식물을 해치우는 대식가로, 농작물 종들도 먹어치운다. 아직도 사람들이 일부러 녀석들을 도입하곤 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사람들은 아카티나를 식용으로 키운다. 듣자 하니 녀석들은 수분 함량이 높아서 개체당 고기 무게가 많이 나간단다.) 아카티나가 인도태평양 지역에 처음 수입된 것은 1803년이었다. 레위니옹의 주지사가 장본인으로, 그는 자신의 숙녀 친구가 달팽이 수프를 계속 즐길 수 있게 마다가스카르에서 녀석들을 들여왔다. 아카티나는 주지사의 정원을 탈출하여 온 섬을 쑥대밭으로 만든 끝에 1847년에 인도까지 도달했다. 1930년대에는 남태평양 섬들로 퍼지기 시작했는데, 대개 사람들이 식용으로 일부러 도입한 경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카티나 풀리카<sup>Achatina fulica</sup>는 1967년에 타히티에 도착하여 곧 주변 섬들로 퍼졌다. 1970년대 중반에는 특히 무레아에서 녀석들이 심하게 기승을 부리며 사람의 거주지까지 침범했다. 한 농부가 자기 집 벽에서 손수레 두 대 분량의 달팽이를 떼어냈다는 기록도 있다. 뭔가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하지만 que faire(어떻게 하나)? 프랑스령 섬사람들은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이 시도한 해결책은 파리를 잡으려고 말을 삼킨 할머니 이야기처럼 원래 문제보다 더 큰 난리를 일으키고 말았다. 생물학적 통제는 원칙적으로는 좋은 생각이다. 독성 화학약품보다야 자연의 포식자가 낫다. 하지만 포식자는, 특히 외래의 장소 및 생태계에서 데려온 것일 경우에는 도입을 시도하게 만든 애초의 생물들보다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새 포식자가 문제의 동물만을 잡아먹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녀석들이 무해하거나 유용한 다른 생물들을 더 좋아하면 어쩌겠는가? 특히 녀석들이 (자연적 포식자가 없던 상태라 방어 체계를 진화시키지 못해서 취약할 때가 많은) 고유종들을 공격하면 어쩌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생물학적 통제를 시도할 때는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번 노랫말을 빌려 표현하되 파리 삼킨 할머니보다는 최근의 작품을 골라보자면, &lsquo;사람들은 언제나 깨닫게 될까?&rsquo;[미국 포크송 가수 피트 시거의 1960년대 노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중 한 소절.-옮긴이] 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동물들의 판테온 맨 꼭대기에는 오이글란디나<sup>Euglandina</sup> 달팽이가 있다. 플로리다산으로 &lsquo;킬러&rsquo; 달팽이나 &lsquo;늑대&rsquo; 달팽이라고도 불리는 녀석이다. 오이글란디나는 뛰어난 효율과 먹성으로 다른 달팽이들을 먹는다. 녀석은 다른 달팽이의 점액 흔적을 감지하여 추적함으로써, 사냥감이 간 길을 뒤따라가서 잽싸게 잡아먹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 보니 오이글란디나는 다른 달팽이들에 대한 생물학적 통제 도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그렇지만 몇몇 모호한 성공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도리어 종종 의도치 않은 참혹한 부작용을 낳았다. 오이글란디나가 사람들이 정한 적을 내버려둔 채 다른 무해한 희생자들에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편견을 용서하기 바란다. 하지만 나는 오이글란디나의 소행을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달리 도리가 없다(생물학자는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해 상당히 감정적이 되는 법이다). 나는 박사 논문을 포함하여 경력 초반의 적잖은 세월 동안 푀칠로조니테스라는 놀라운 버뮤다 달팽이를 연구했다. (연체동물계에서 다윈의 갈라파고스핀치 격인 이 달팽이는 큰달팽이 중에서는 유일하게 버뮤다 섬까지 다다른 녀석들이다. 이 속은 20여 종으로 방산하여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자랑했다. 특히 화석 기록이 풍부하지만, 내가 연구를 시작한 1963년만 해도 버뮤다에 적어도 세 종이 번성하고 있었다.) 오이글란디나는 1958년에 버뮤다제도에 도입되었다. 원래 식용으로 수입되었으나 정원을 벗어나 섬 전체로 퍼져 해충이 되어버린 오탈라<sup>Otala</sup> 속 달팽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무레아의 아카티나와 파르툴라와 같은 이야기다). 내 생각에 오이글란디나는 오탈라의 개체 수를 손톱만큼도 줄이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녀석들은 고유종인 푀칠로조니테스를 끝장냈다. 예전에는 섬 전역에서 푀칠로조니테스를 수천 마리씩 찾아볼 수 있었으나, 내가 녀석들의 유전학을 조사하고 싶어 하는 어느 학생을 위해 개체군들의 서식지를 찾아주려고 1973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살아 있는 녀석을 한 마리도 찾지 못했다. (작년에 개중 가장 작고 꼭꼭 숨어 사는 한 종을 찾아내긴 했지만 내 연구의 주 대상이던 커다란 푀칠로조니테스 베르무덴시스<sup>Poecilozonites bermudensis</sup>는 멸종한 듯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니 나는 짐 머리와 브라이언 클라크와 마이크 존슨의 고통을 공감한다. 1960년대 중반부터 무레아 섬 파르툴라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온 그들은, 자기들의 마지막 논문 몇 편이 녀석들의 최후 자취가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이글란디나는 1977년 3월 16일에 무레아에 도입되었다. 이는 프랑스 농촌경제국과 농업경영연구과의 공식적 조언과 승인을 받은 일이었다. 다른 곳들에서 도입이 실패와 폐허만을 낳았다는 정보가 이미 널리 퍼진 실정이었는데도 말이다. 오이글란디나는 아카티나를 무시한 채 파르툴라를 상대로 대공습을 개시했다. 히틀러의 군대보다 더 철저하고 신속하며 효율적인 공습이었다. 내 동료들이 이 재난을 지적한 글을 처음 쓴 1984년에(참고 문헌을 보라) 오이글란디나는 무레아 섬의 일곱 파르툴라 종 가운데 하나를 이미 소탕했고, 매년 1.2킬로미터의 속도로 섬에 퍼지고 있었다. 무레아 섬의 최대 폭이 12킬로미터쯤이니 그런 속도라면 공간이 바닥나는 건 금방이었다. 내 동료들은 1986년이면 파르툴라가 완전히 사라지고 없으리라는 음울한 예측을 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대로 맞히는 게 오히려 싫은 일도 있는 법이다. 1988년에 짐, 브라이언, 마이크는 간결하고 최종적인 제목을 단 글 「무레아 섬에서 파르툴라의 멸종」을 발표했다. 파르툴라는 사라졌다. 내 동료들은 그 전에 일곱 종 가운데 여섯 종을 가까스로 수집해두었고, 현재 여러 나라의 동물원이나 생물학 연구 기지에서 인공번식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쩌면 어느 날 파르툴라가 무레아에 재도입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오이글란디나를 제거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뿌리 깊게 이식된 것은 물리적인 것이든 감정적인 것이든 근절하기 어렵다. 메리 마틴이 자기 머릿속에서 한 남자를 씻어내려 노력했으나 가망 없는 일임을 깨달았듯이.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는 희망이 남아 있지만, 대체 어떻게 해야 나쁜 녀석들을 다시 가둘 수 있단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무레아는 사람들 꿈속의 발리 하이지만, 파르툴라의 삶은 전혀 황홀하지 않은 저녁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밤이 내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레아만(그리고 버뮤다까지만) 희생되었다 해도 충분히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오이글란디나는 그 옆의 더 넓은 타히티 섬에도 빠르게 번지고 있으며, 파르툴라는 이제 겨우 두 계곡에서만 살고 있다. 오아후 섬에서는 파르툴라보다 더 다양한 아카티넬리데들이 다 사라졌다(혹은 거의 그럴 지경이다). 이유는 다른 섬들과 같았다고 봐도 좋다. 호놀룰루 시의 확산도 도움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였다. 갈라파고스제도에서는 불리물리데 종이 절반 넘게 멸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멸종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진화생물학자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감정이 차올라서 합리적 사고와 글쓰기를 익사시킨다. 남들이 다 말한 것, 대단히 유창하게 표현되었으나 효과는 미미했던 말들 외에 달리 무엇을 말하겠는가? 좋은 논증들조차 클리셰가 되어버렸다. 8월의 캔자스에 넘치는 옥수수처럼 진부하고, 블루베리 파이처럼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나는 통상적이지 않은 탄원을 하나 해볼까 한다. 보통의 논증을 역으로 뒤집은 주장을. 역발상은 때로 사고의 물꼬를 새롭게 트는 건전한 효과가 있다. 내가 영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알았던 한 친구는 아주 탁월한 토론자였는데, &lsquo;군주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rsquo;라는 케케묵고 진부한 주제에 대해 찬성 쪽 변호를 맡게 되었다. 여왕의 판공비, 혹은 민주주의 시대에 왕권은 부정적인 상징이라는 둥 흔한 논점을 꺼내놓는 대신 그 친구는 군주제가 군주와 그 가족에게 부당하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정상적인 사생활을 영위할 가능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데이트를 하건 맥주를 마시건, 오, 이런 일은 없었으면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트림을 하건, 다음 날 가십 잡지에 머리기사로 실리고야 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르툴라의 멸종은 파르툴라에게 부당한 일이다. 이것이 통상적인 논증이고, 또한 제일로 중요한 논점이라는 데 나도 이의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인간 중심적인 생태학도 필요한 법이다. 인간에게는 달팽이보다 인간이 더 와 닿게 마련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그리고 모든 도덕적 문제의 기준은 인간이어야 적법하다는 윤리학적 이유에서. 도덕적 문제란 인간의 관심사지 자연의 관심사는 아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하련다. 우리는 헨리 에드워드 크램프턴을 위해서라도 무레아 섬의 파르툴라 문제를 애달파해야 한다. 오이글란디나와 인간의 어리석음이 크램프턴 평생의 헌신을 망가뜨렸으니까. 크램프턴은 하늘에서 소풍을 즐기는 운송 수단 따위는 없던 시절에 태평양 섬들을 열두 번이나 방문했다. 위험한 낭떠러지를 따라 강렬한 열대의 열기 속에서 두 다리로 계곡을 오르내렸다. 달팽이들의 크기를 잰 뒤 컴퓨터 없이 수치를 줄줄이 합산하는 일에 몇 달씩 매달렸고, 그것은 실로 최악의 과학적 노역이었다. 그 결과 그는 파르툴라에 관한 위대한 모노그래프 세 편을 발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일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크램프턴은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연구의 진화 과정 중 한 순간을 박제해두겠다는 생각에서 논문을 쓴 게 아니었다. 그가 평생을 애쓴 까닭은 미래의 진화 연구에 기준선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파르툴라는 자연의 진화 실험실이었고, 크램프턴은 자신이 극도의 세심함과 정밀함으로 좋은 출발점을 닦아둔다면 향후에 남들이 파르툴라의 미래를 추적함으로써 연구를 더 진전시키고 진화에 관해 더 많이 알아내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모든 수고를 기울였다. 한 인간의 지적 헌신보다 더 고상한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모든 현장 생물학자가 맞닥뜨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그리스신화에서 영웅 오디세우스를 공격했던 바다 괴물들.-옮긴이], 즉 이따금 닥쳐오는 위험과 꾸준히 이어지는 지루함을 뚫고 평생 끈질기게 버틴 것보다 고상한 일이 또 어디 있는가? 크램프턴의 업적은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심지어 조롱받기에 이르렀다. 고매했으나 사라지고 만 그의 목표들에 대해 묵념을.</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인간이 자연과의 감정적 연대를 계발하지 않고는 생물 종들과 환경을 구하는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리란 것을 잘 안다.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그저 추상적 의미에서 높이 평가할 뿐인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다른 작업들도 계속해나가자. 영화, 책, 텔레비전 프로그램, 동물원, 공동체마다 작은 생태 보전 지구를 가꾸는 노력, 초등학교 수업, 박물관 전시, 심지어 (여러분이 나를 그곳에서 만날 일은 절대 없겠지만) 새벽 6시에 만나는 야생 조류 관찰 모임도.</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노력을 이어가고 확장하자. 우리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뼛속 깊이 직접 체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자연을 위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남태평양〉에서 에밀 드 베크로 분했던 에치오 핀차를 다시금 떠올리며, 자연을 여성으로 묘사한 전통적인 표현을 받아들여보자(그런 관습이 기분 나쁘다면, 자연을 남성으로 상상하여 &lsquo;멋진 사내와 사랑에 빠졌다네&rsquo;라고 노래해도 좋다). 이 가사는 비록 신선미가 부족할지언정(그리고 핀차는 메리 마틴을 격찬하는 것일 뿐 나처럼 그 대상을 자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지만), 감성적 분위기만큼은 흠 잡을 데가 없으며 닳아빠진 마음의 소유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의 눈에서든 눈물을 자아낼 만하다. 최고 베이스 가수의 목소리가, 으뜸음을 벗어나 높이 솟아오르는 대목을 떠올려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그녀를 찾아냈다면, 절대로 놓아주지 마요.<br /> 그녀를 찾아냈다면, 절대로 다시는 놓아주지 마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10"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9_%EC%97%AC%EB%8D%9F%20%EB%A7%88%EB%A6%AC%20%EC%83%88%EB%81%BC%20%EB%8F%BC%EC%A7%80/%EC%8A%A4%ED%8B%B0%EB%B8%90%20%EC%A0%9C%EC%9D%B4%20%EA%B5%B4%EB%93%9C.jpg"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strong>, 1941~2002<br /> 고생물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 1941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1963년에 안티오크 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했고, 1967년에 컬럼비아 대학에서 고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부터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2002년 작고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 지질학 및 동물학 교수로 재직했다. 말년에는 뉴욕 대학에 교환 교수로 있으면서 생물학과 진화론을 강의하기도 했다.<br /> 굴드가 역설한 진화 이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동료 나일스 엘드리지와 함께 발표한 &lsquo;단속평형설&rsquo;이다. 이는 진화가 점진적이지만은 않으며 갑작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전통적 다윈주의 관점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평생 역설했다. 그리고 생명이 복잡성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생명의 역사에서 &lsquo;우연&rsquo;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신의 수많은 저작들을 통해 일생을 바쳐 강조했다.<br /> 굴드의 저술 활동은 왕성하고 전방위적이었다. 전체 22권의 저서와 101편의 서평과 497편의 과학 논문과 300여 편의 자연학 에세이를 남긴데다 그 글들의 소재는 언어, 문학, 음악, 건축, 심지어 스포츠(특히 야구)를 넘나든다. 한편 굴드는 &lsquo;과학의 대중화 운동&rsquo;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과학을 사회로부터 분리된 절대적이고 균일한 것이 아닌,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그에 따른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는 급진적인 성향의 과학자들이 모여 결성한 &lsquo;민중을 위한 과학<sup>Science for the people</sup>&rsquo;에 참여했으며, 진보적인 생물학자들의 비영리 단체인 &lsquo;책임 있는 유전학을 위한 회의<sup>Council for Responsible Genetics</sup>&rsquo;에서는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고생물학회와 진화학회, 미국과학진흥회 회장을 역임하고, 40개 이상의 여러 학술상과 메달을 비롯해 4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br /> 굴드의 주요 저작으로는 『개체발생과 계통발생<sup>Ontogeny and Phylogeny</sup>』, 『다윈 이후<sup>Ever Since Darwin</sup>』, 『판다의 엄지<sup>The Panda&rsquo;s Thumb</sup>』(전미도서상 수상), 『인간에 대한 오해<sup>The Mismeasure of Man</sup>』(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sup>Wonderful Life</sup>』(과학도서상 수상)를 비롯해 『플라밍고의 미소<sup>The Flamingo&rsquo;s Smile</sup>』,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sup>Bully for Brontosaurus</sup>』,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sup>Time&rsquo;s Arrow, Time&rsquo;s Cycle</sup>』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명남</strong><br />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환경대학원에서 환경 정책을 공부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일했고, 현재 전업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울 수 없는 흔적』, 『지상 최대의 쇼』,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프랜시스 크릭』, 『신기한 수학 나라의 알렉스』, 『시크릿 하우스』, 『몸에 갇힌 사람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물리와 함께하는 50일』, 『자연자본주의』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14 오전 10:59:00‘스틸라이프’ 18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77"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8%ED%9A%8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8_6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골동품점 &lsquo;메리 포핀스&rsquo; </span><span style="font-family: Arial"><span style="text-align: justify">2</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도 그 사람의 아내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는 기차를 타고 처음에 그렇게 만났듯이 캔 커피를 마시며 서울로 돌아와 기약도 없이 헤어졌어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 저는 뜻밖의 골동품가게 메리 포핀스를 운영하게 되었답니다. 생각처럼 골동품가게를 운영하는 건 쉽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날도 있기 마련이거든요. 사십 평 남짓한 공간에 많을 때는 하루에 한 스무 명도 들어오곤 하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들어와서는 이것저것 묻고는 그냥 가버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요. 실은 단골손님들 몇이 제 생계를 도와주는 격이죠. 골동품가게에 하루 종일 앉아있는 건 도를 닦는 거 하고도 많이 비슷해요. 하긴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루 종일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 앉아있다 보면 저 자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이 가게를 시작했을 때, 별의별 물건들이 다 있는 가운데 저는 우선 이 물건들의 존재를 다 기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별을 헤거나 양의 숫자를 세는 것처럼 물건은 많았지요. 그중에는 중국이나 네팔, 티베트 등지에서 들여온 부처상들도 많았어요. 예수나 마리아상만 훌륭한 줄 알았는데 부처상들도 들여다볼수록 아름답더라고요. 저는 종교 역시 인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집안이 가톨릭을 믿지 않았더라면 저는 스님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듯 부부의 연도 이루지 못한 연인들의 인연도 그저 하룻밤을 스쳐 지나간 손님과 몸 파는 여인과의 인연도 다 인연이지요. 어쩌면 이 세상 모든 인연들을 우리는 소중하게 가꿔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의 짧은 찰나라 할지라도 인연 닿은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기, 그게 바로 제 만남의 법칙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수녀복을 벗고 세상으로 나와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그 사람과의 만남이 바로 그랬어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의 아내를 찾아다녔고, 남녀를 떠나 같은 인간의 종으로서 우리는 거의 99% 소통이 가능했어요. 어쩌면 그게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한참 뒤에 들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의 전화번호 하나 받지 않았다는 생각이 저를 슬프게 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말 기적처럼 우리가 다시 만난 건 기차역에서 헤어지고 난 삼 년 후였어요. 유난히 가게에 손님이 많이 들어오던 어느 봄날, 그 사람이 커다란 첼로를 들고 우리 가게 안에 들어섰어요. 저는 그 순간 제 눈을 의심했어요. 다신 만나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그 사람은 수줍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한 번쯤 꼭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어요. 들고 온 첼로는 사연이 깊은 물건인데 이제는 악기가 아니라 소리가 나지 않는 그저 골동품이라 미련을 버리고 싶은 마음에 팔아버리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그 첼로는 우리 가게의 제일 좋은 자리에 놓이게 되었던 거죠. 첼로를 놓고 간 뒤 그 사람은 종종 가게에 들려 이런저런 물건들을 사곤 했어요. 오래된 중국산 램프, 이런저런 모양들의 골동 의자, 손바닥에 놓일 만큼 조그만 부처상들, 그에게는 누군가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은 물건들 중 그리 비싸지 않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고르는 심미안이 있었어요. 저는 그 사람의 그 심미안을 사랑했지요. 제 생애 가장 좋은 때, 그때가 제 인생의 화양연화였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비 오는 날 그 사람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와 조그만 부처상을 하나 사더니 그걸 제게 선물로 주더라고요. 당신이 수녀였다는 걸 잘 알지만 이 세상에는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연이 따로 있으니 그게 바로 당신과 나의 인연인 것 같다며, 아무리 찾아도 없는 아내는 이미 자신과 빗겨간 인연이라 말하더군요.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그날, 그 사람은 제게 장미꽃 한 송이도 없이 손바닥에도 놓이는 조그만 부처상을 제 손에 쥐여 주며 &lsquo;결혼하자&rsquo; 하고 말했어요.<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3-13 오후 1:30:00서경식의 ‘디아스포라의 눈’<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8_%EB%94%94%EC%95%84%EC%8A%A4%ED%8F%AC%EB%9D%BC%EC%9D%98%20%EB%88%88/%EB%94%94%EC%95%84%EC%8A%A4%ED%8F%AC%EB%9D%BC%EC%9D%98%20%EB%88%88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t;한겨레&gt;에 칼럼 연재를 시작한 지 어언 7년이 지나가고 있다. 2005년 5월 &lsquo;심야통신&rsquo;으로 시작해 2007년 5월부터 2011년 8월까지는 &lsquo;디아스포라의 눈&rsquo;으로 타이틀이 바뀌었고, 그 뒤 다시 &lsquo;일본통신&rsquo;으로 지금까지 글을 계속 쓰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길게 이어온 연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들 칼럼 중에서 &lsquo;심야통신&rsquo;은 이미 2007년에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으로 출간됐다. 그 뒤를 잇는 이 책은 2007년부터 4년 동안 쓴 &lsquo;디아스포라의 눈&rsquo;을 한 권으로 엮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디아스포라&rsquo;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꽤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산(離散)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대에는 좀 더 폭넓게,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와 같은 재일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그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언제나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이다. 당연히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즐겁지 않다. 하지만 디이스포라에겐 이점도 있다. 그것은 머조리티(다수․주류)에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국가 시대에 머조리티란 &lsquo;국민&rsquo;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는 &lsquo;국민&rsquo;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에 수록한 칼럼은 그런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과거 4년간 한국, 일본, 세계의 사상(事象)을 응시하며 쓴 것이다. &lsquo;심야통신&rsquo;은 2007년 일본에서 번역 간행됐다.(『밤의 시대에 말해야 할 것(夜の時代に語るべきこと)』, 마이니치신문사) 그 서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이 일련의 글들에서 내가 다룬 화제는 다양하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장을 들자면 그것은 &lsquo;국민주의&rsquo;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얘기하는 &lsquo;국민주의&rsquo;란 사람들을 &lsquo;국민&rsquo;과 &lsquo;비국민&rsquo;으로 분할하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부당한 차별에는 무관심한 듯 처신하면서 자신은 &lsquo;국민&rsquo;으로서 국가의 비호―그것은 또한 구속이기도 하다―를 받는 걸 당연시하고 의심하지 않는 심성을 가리킨다. &lsquo;국민주의&rsquo;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머조리티의 내면 깊숙이 침투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는 그대로 이 책에도 해당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간다면 그것은 자신이 &lsquo;국민&rsquo;이라는 걸 의심해본 적 없는 독자들에게 &lsquo;디아스포라의 눈&rsquo;으로 &lsquo;다른 관점&rsquo;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사를 &lsquo;다른 관점&rsquo;으로 본다는 것은 한 개인이나 사회가 건전함을 유지해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로서 이 책이 그런 역할을 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성공회대 객원교수로 한국에 체류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었다. 그때 나는 타자로서의 &lsquo;조국&rsquo;, 그리고 &lsquo;조국&rsquo;의 타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슬퍼하거나 한탄해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다시 다수의 &lsquo;국민&rsquo;들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애매한 혈연공동체적 정서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공공적인 연계로서의 &lsquo;조국&rsquo;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계속해감으로써 새로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나에게는 바람직한 &lsquo;조국&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2년간의 한국 체류 후반기부터 쓰기 시작해 일본에 돌아온 뒤 지금까지 계속 써온 것들이다. 조국의 사람들에게 이토록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볼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나는 항상 조국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거기서부터 대화를 발전시켜 함께 새로운 조국을, 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2008년 3월 말, 나는 「내가 만나고픈 이런 조국」이라는 제목의 글을 한 편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2018년 4월 초의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에 내렸다. (&hellip;&hellip;) 5년 전에 탄생한 현 정부는 에너지 정책의 극적인 전환을 호소해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hellip;&hellip;) 한국 정부는 에너지 절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그 결과 남은 에너지는 북한에 원조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hellip;&hellip;) 10년 전에 50퍼센트를 넘었던 비정규직 비율은 한때 70퍼센트 가까이 올라갔으나 새 정부의 정책 덕에 30퍼센트까지 내려갔다. (&hellip;&hellip;) 징병제에서 지원병제로의 전환을 실행에 옮긴 정부는 장기적으로는 군대를 폐지해서 국경 경비나 재해 구조를 목적으로 한 경찰부대로 대체할 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hellip;&hellip;) 재작년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이 마침내 폐지되고 형법상의 간통죄도 철폐됐다. (&hellip;&hellip;) 정주 외국인 노동자나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코리안 디아스포라 들도 이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다.(이 책, 243~246쪽)</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건 다름 아닌, 4년 전에 내가 꾼 꿈이다. 이 꿈은 이명박 정권하에서 크게 멀어진 듯했지만 지금의 정세를 보건대 다시 조금은 근접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역사란 참으로 &lsquo;예측 못 할&rsquo; 만큼 역동적이다.(이 책, 55쪽) 쉽게 꿈을 포기하지 말고 겸허한 마음으로 매일매일을 살아가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일본의 상황은 상당히 암담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사회는 착착 우경화가 진행돼왔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정적 측면이 전면적으로 불거진 데다 리먼 쇼크(2008년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세계 금융 위기)까지 가세해 사회적 격차(양극화)가 극대화됐다.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은 집회와 시위라는 사회 활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아키하바라의 무차별 살인 사건과 같은 범죄의 형태로 분출되었다.(이 책, 67쪽) 마침내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그간 장기 집권했던 보수당 대신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지만 이 정권은 국민의 기대를 모조리 배신하면서 무참한 환멸만 안겨주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해 3월 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을 천 년에 한 번 일어난다는 대지진과 쓰나미가 덮쳤고, 그다음 날 후쿠시마현에 있는 도쿄전력 제1원자력발전소에서 수소 폭발이 일어났다. 그 뒤 원자로 노심 용융(멜트다운)이라는 중대 사태가 벌어졌다. 지난해 말 일본 정부는 &lsquo;냉온 정지 상태&rsquo;를 회복했으며 사고가 수습됐다고 발표했으나 현실은 여전히 수습과는 거리가 멀다. 수만 명이 고향을 박탈당한 채 지금도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계기로 일본의 정치 시스템이 전반적인 기능 부전 상태에 빠진 가운데 신자유주의적인 경쟁 원리를 강조하며 우익적인 주장을 늘어놓는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널리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에서 내가 거듭 경고한 대로 마침내 일본 사회는 파시즘 쪽으로 더욱 기울어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1년간 쓴 글에는 원전 사고와 관련된 것이 많은데, 그만큼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중대한 위기에서 한국 사람들이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는 어쩌다 일본에서 일어났지만 원전 의존율이 프랑스 다음가는 &lsquo;원전대국&rsquo;인 한국에서도 같은 사고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방사능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몇 세대에 걸쳐 계속 건강과 생활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에서는 원자력 마피아의 이익을 대표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가 올해 말로 끝난다. 한국 국민은 원전 의존에서 탈피해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미래로 방향을 틀 수 있을지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산업계의 뜻을 받들어 원전 재가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들의 반격이 이제부터 본격화될 것이다. 일본 국민은 지금 자국의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시기를 맞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두 민족이 서로 상대방의 고뇌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고뇌를 안겨주는 자들(국가권력, 기업, 어용학자, 어용 미디어 등)에 대한 분노를 공유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들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디아스포라의 이 절실한 물음이 한일 두 나라 국민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설사 가닿을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할 순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번역자는 &lt;한겨레&gt; 한승동 논설위원이다. 한 위원은 2005년 이래 지금까지 죽 내가 써온 칼럼을 번역해주고 있다. 이 책 편집은 한겨레출판 임윤희 씨가 맡아주었다.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솜씨 좋게 정리하고 적절한 삽화까지 찾아 넣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건 임씨의 열의 덕분이다. 두 사람 모두 나와 &lsquo;조국&rsquo; 사람들의 대화를 매개해주는 은인이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br /> 2012년 2월 도쿄에서<br /> 서경식</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억의 싸움은 계속된다</span></span></strong></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b>파시즘 전야의 <br /> 목소리들</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요즘 한국 사회는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걸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바쁜 일상에 쫓기면서도 때때로 한국의 벗이나 지인 들과 메일을 주고 받는다. 요사이 내게 메일을 보내준 많은 사람들이 본래 용건과는 별도로 이런 글들을 써 보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전 여러 가지로 마음이 아프고 힘든 5월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고 있습니다.&rdquo; &ldquo;이대로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려면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어야 하는 걸까요?&rdquo; &ldquo;아시겠지만, 한국은 정말 최악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벌어지고 사람들은 당황하고 분노하면서도 익숙해져간다고 해야 할까요. 무력감과 냉소와 분열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rdquo; &ldquo;한국은 소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숨죽이고 헐떡이며 사는 곳 (&hellip;&hellip;) 무슨 희망을 바라고 저문 날 황혼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는지&hellip;&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글을 쓴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는 사이도 아니고 나이도 성별도 각기 다르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사회의 현상에 대한 &lsquo;탄식&rsquo;과 &lsquo;낙담&rsquo;과 &lsquo;분노&rsquo;의 마음을 끝없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일본에 있는 나는 벗들에게 뭔가 명확한 답장을 쓸 처지도 못 된다. 그저 답답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최악&rsquo;이라면 일본의 상황도 최악이다. 2009년 6월 18일치 &lt;아사히신문&gt;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ldquo;지하철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사람을 향해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lsquo;그대는 일본인이오, 한국인이오?&rsquo; 그 남자는 &lsquo;조선 사람이오&rsquo; 하고 화난 소리로 받았다.&rdquo; 그해 5월 31일 도쿄에서 영주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달라고 요구하는 집회에 약 200명이 항의하기 위해 몰려들었을 때의 상황이다. 그들은 &ldquo;특권을 계속 요구하는 재일 한국인을 조선반도로 쫓아 보내라!&rdquo;고 증오를 드러내며 외쳐댔다고 한다. 이런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는 단체 가운데 하나가 &lsquo;행동하는 보수&rsquo;를 자임하는 &lsquo;자이니치(在日) 특권 허용 반대 시민모임&rsquo;이다. 2006년 말에 발족해 현재 6000명 가까운 회원을 모았다고 한다. &lsquo;재일 특권&rsquo;이란 &lsquo;재일외국인의 특권&rsquo;의 줄임말일 게다. 그들은 재일외국인이 일본인 이상의 특권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이 말하는 &lsquo;재일 특권&rsquo; 중에서 대표적인 게 &lsquo;정주(定住) 외국인 지방참정권&rsquo;이다. 특권이기는커녕 너무 약소하다 할 만큼 기본적인 인권인데도 일본에선 아직 인정해주지 않고 있다. 지금 일본의 민주당도 이 안건에 대한 당내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물론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도 &lsquo;행동하는 보수&rsquo;의 잠재적 동조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일본 사회에서 결코 고립돼 있는 세력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의 표적은 재일조선인만이 아니다. 마닐라의 빈곤 지역에서 태어난 필리핀 사람 알란 칼데론 씨는 1993년에 일본에 왔고, 최근 12년 동안 산업폐기물 처리 회사에서 일해왔다. 착실한 사람으로, 직장에서의 신뢰도 돈독하다. 역시 일본에 온 필리핀인 사라 씨와 결혼해 장녀 노리코도 얻었다. 이들 일가는 외국인으로 등록하고 주민세도 냈다. 노리코가 소학교 5학년이 돼 정식 체류허가 신청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단 2006년 7월 사라 씨가 불법체류 혐의로 체포당했다. 칼데론 부부는 이미 10여 년간 일본에서 착실히 생활해왔고, 일본에서 태어난 딸은 일본어밖에 할 줄 모르고 일본 사회밖에 모른다. 그런 일가에게 특별 체류허가를 내주라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2009년 4월 두 사람을 강제출국시켜버렸다. 딸은 학교에 계속 다니기 위해 일본에 남았고 일가는 이산가족이 됐다. 칼데론 일가의 집 주변과 딸 노리코가 다니는 중학교 앞으로 몰려간 &lsquo;행동하는 보수&rsquo;들은 &ldquo;범죄자 일가를 내쫓아라!&rdquo; 하고 외쳐댔다. 눈 감고 귀 막고 싶을 만큼 야만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노리코는 얼마나 두렵고 슬펐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리먼 브라더스 파산 쇼크 이후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요소들이 전 세계에서 한꺼번에 분출했다. 이런 크로테스크한 폭력은 지금 온 세상에서 횡행하고 있다. 거액을 노린 투자회사나 은행 경영자들을 향해야 할 정당한 분노는 참으로 간단하게도 &lsquo;직장마저 빼앗긴 외국인&rsquo;들에 대한 분노로 바꿔치기돼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정규직이나 외국인 노동자 해고가 줄을 잇고 있다. 취직난도 심각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익명의 헐뜯기 차원에 머물던 울분이 이젠 &lsquo;행동하는 보수&rsquo;라는 형태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탤런트 출신 지사가 인기인이 돼 마치 &lsquo;서민의 대변자&rsquo;처럼 영웅시되는 모습도 내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건 일본의 리버럴파나 진보파 언론인․지식인에게 위기감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도리어 노동운동의 결집력과 투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lsquo;행동하는 보수&rsquo;에 쏠리는 젊은이들의 심정에 이해를 표하거나, 내셔널리즘과의 공동 투쟁도 필요하다는 따위의 말을 꺼내놓기 시작한 이들도 있다. 이런 정경은 바로 교과서에 나오는 &lsquo;파시즘 전야&rsquo;가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일본보다 훨씬 높은 한국에서는 상황이 일본보다 한층 더 심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탄식하고 분노하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고민하는 소리는 앞서 소개한 벗들의 메일처럼 한국에선 꽤 폭넓게, 그리고 분명히 들려오고 있다. 여기 일본에선 그런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이 &lsquo;최악&rsquo;일까. 메일을 보내준 벗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답장 삼아 보낸다. 이 위험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서로 사는 곳은 다를지라도 여러분의 탄식과 분노는 바로 나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sub>2009년 7월 3일</su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원전 폐기물<br /> &lsquo;10만 년 보관&rsquo;의 의미</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후쿠시마 원전은 아직 복구될 기미조차 없다. 아직도 폭발과 방사능 대량 분출 위험이 사라지지 않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필적하는 대형 사고다. 아니 사태는 아직 제어 불가능 상태로 진행 중이므로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대재앙이 될 게 분명하다. 여진도 계속되고 있다. 진원지에서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도쿄에서도 시시때때로 건물이 삐걱댈 정도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원자로와 건물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기거나 또다시 쓰나미가 덮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다. 흡사 땅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불의 용〔火龍〕이 무슨 명확한 의도를 갖고 집요하게 날뛰는 형국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쿄전력은 4월 17일 당면한 위기를 모면하기까지 6개월 내지 9개월이 걸린다는 &lsquo;공정표(工程表)&rsquo;를 발표했지만, 아마도 도쿄전력이나 일본 정부까지 포함해서 이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이 공정표대로 일이 진행된다 해도 아직 원자로 폐지로 가는 긴 도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뒤 다시 수십 년이라는 불안한 세월을 우리는 누출되는 방사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체르노빌은 사고 발생 뒤 25년이 지났지만 현장에 아직도 방사능 위험이 남아 있고 그 관리를 위해 막대한 돈과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 아무것도 산출하는 것이 없는, 그야말로 시니컬한 비용이다. 후쿠시마도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게 확실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식민 지배와 전쟁 시대 뒤에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기에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평온한 나날이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마음 한편에 이대로 인생 마지막까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하는 소시민적 바람이 있었던 걸 부인하지 않겠다. 지하에서 날뛰는 불의 용은 그런 내게 통렬한 경고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 사태로 사물에 대한 적도가 크게 흔들렸다. 특히 시간 척도가. 지금 확실한 것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후쿠시마 사태가 해결되는 걸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예순 살이지만 내 학생들, 동료의 아이들과 같은 젊은 세대도 앞으로 계속 이 불안과 우울의 세월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시간 척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며칠 전 파트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절전을 위해 조명을 낮춘 상점가를 걸어 작은 영화관에 도착하니 아직 상영 시작 1시간 전인데도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 영화는 &lt;영원한 봉인(Into eternity)&gt;이라는 2010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이다. 한국에서도 개봉됐을까? 부디 많은 분들이 한번 보시기를 권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약 240킬로미터 떨어진 올킬루오토라는 섬에 거대한 지하 시설이 건설되고 있다. 방사성 폐기물을 지하 500미터에 있는 18억 년 전의 안정된 지층에 저장해서 인체에 해가 없어지는 10만 년 뒤까지 보관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lsquo;온칼로(핀란드어로 &lsquo;숨겨진 장소&rsquo;라는 뜻) 프로젝트&rsquo;라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전은 &lsquo;화장실 없는 아파트&rsquo;라고들 한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특수 유리로 고정해 스테인리스 용기에 밀폐해서 30년에서 50년에 걸쳐 식힌 뒤 지하 수백 미터에 묻게 돼 있는데 일본에서는 아직 최종처리장 건설 장소조차 정하지 못했다. 폐기물 처리에 대한 아무런 전망도 세우지 못한 채 원전을 가동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도 사정이 어슷비슷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10만 년이 도대체 어떤 시간인가. 지난 100년 동안에만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큰 재해와 기후 변동의 영향도 받게 될 것이다. 그런 변화를 견뎌내고 10만 년 동안 계속 보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도대체 10만 년 뒤에 인류가 존재하기나 할까. 미래의 인간이 다시 파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ldquo;위험해. 파지 마!&rdquo;라는 경고 메시지를 어떻게 10만 년 뒤의 인류에게 전할 수 있을까. 10만 년 전이라면 네안데르탈인 시대다.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은커녕 이집트 피라미드나 나스카의 거대한 지상그림 메시지조차 제대로 해독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런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시니컬한 삶이다. 인간은 어찌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에 손을 대고 만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방사능은 맛이나 냄새가 없어서 감지할 수도 없다. 따라서 방사능 공포는 &lsquo;아프다&rsquo;거나 &lsquo;뜨겁다&rsquo;는 직접적 감각으로는 알아챌 방도가 없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상상력을 차단한다고 해서 방사능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미카엘 마센(Michael Madsen) 감독의 영상은 처절하도록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뼈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동반한다. 그것은 10만 년이라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후쿠시마 사태가 진행 중임에도, 미디어 여론조사에서는 원전을 &lsquo;폐지 또는 감축&rsquo;하기보다 &lsquo;증설 또는 유지&rsquo;해야 한다는 응답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다. 지방선거에서도 원전 추진파 또는 용인파 지사들이 잇따라 당선됐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부와 전력회사의 선전에 세뇌당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것도 한 요인이겠지만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高村薰)의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내 생각에 더 가깝다. &ldquo;후쿠시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괴로워서 그런 게 아닐까. 겪어본 적 없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언제 끝날지 전망조차 보이지 않는 현실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애써 눈을 돌리려 하고 있다.&rdquo;(&lt;도쿄신문&gt;, 2011년 4월 14일)</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은 약하고 어리석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눈앞의 편의나 이익만을 보고 생각을 멈춘다. 전쟁이나 학살의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우행과 만행을 반복한다. 인간은 스스로 이 약함과 어리석음을 이겨낼 수 있을까. <sub>2011년 5월 6일</su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말,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서경식 徐京植</strong><br /> <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208" height="295"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8_%EB%94%94%EC%95%84%EC%8A%A4%ED%8F%AC%EB%9D%BC%EC%9D%98%20%EB%88%88/%EC%84%9C%EA%B2%BD%EC%8B%9D_295.jpg" />1951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이다.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청양군의 농민으로, 1920년대에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어린 아들, 즉 서경식의 부친을 불러들였다. 서경식은 일본 패전 6년 뒤 일본에서 태어났다. <br /> 1965년에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3년 후 승(勝)과 준식(俊植) 두 형은 모국으로 유학 갔으나, 군사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1971년 &lsquo;학원간첩단사건&rsquo;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 형들은 잔혹한 고문을 받으며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한 1980년대 말까지 긴 세월을 옥중에서 보냈다. 부모님은 자식들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셨다.<br /> 1969년 와세다대학 불문학과에 입학한 서경식은 형들의 구명운동을 벌이면서 1980년대 전반부터 발표할 데 없는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첫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1991년에 일본에서 출간되었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995년에는 『소년의 눈물: 어느 재일조선인의 독서 편력』으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았다.<br /> 1990년대 초부터 여러 대학에서 재일조선인과 역사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해왔고, 2000년부터는 도쿄경제대학 교수로 &lsquo;인권과 마이너리티&rsquo;라는 강좌를 맡고 있다.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 입장에서 &lsquo;국민주의&rsquo;를 비판하는 것,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그의 강의를 관통하는 일관된 메시지이다. 또한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걸친 문필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의 글에서는 식민 지배와 전쟁 등 가혹한 진실을 응시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려는 지향성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간 성공회대 객원교수로 한국에 체류했는데, 이때 한국인들과 교류한 체험은 그의 사색과 문필 활동에 더 많은 과제를 안겨주었다.<br /> 2005년 5월부터 2년간 &lt;한겨레&gt;에 &lsquo;심야통신&rsquo;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고, 2007년 5월부터 2011년 8월까지는 &lsquo;디아스포라의 눈&rsquo;으로, 그 후엔 &lsquo;일본통신&rsquo;으로 타이틀을 바꿔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다. 이들 칼럼 가운데 &lsquo;심야통신&rsquo;을 묶어 『시대를 건너는 법』(한겨레출판)을 출간했고, &lsquo;디아스포라의 눈&rsquo;을 엮은 것이 이 책이다.<br /> 서경식의 글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소수자, 군사정권 시대의 정치범 가족, 소수자 문제를 가르치는 교육자라는 세 가지 아이덴티티로 규정할 수 있다. 이런 시선으로 한국과 세계의 사상(事象)을 응시하는 그의 문장은 자신이 머조리티(다수&middot;주류)의 일원임을 의심해본 적 없는 많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시야를 제공해줄 것이다. <br /> 그의 또 다른 주요 저작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고뇌의 원근법』 『언어의 감옥에서』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한승동 韓承東</strong><br /> 195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다녔다. &lt;한겨레&gt;가 창간된 1988년부터 현재까지 &lt;한겨레&gt;에서 기자로 활동해왔다. 3년간 도쿄 특파원을 지냈고, 국제부장과 문화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대한민국 걷어차기』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우익에 눈먼 미국』 『부시의 정신분석』 『시대를 건너는 법』 『나의 서양음악 순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13 오전 11:21:00《218》기요시의 『독서와 인생』을 읽다<div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6"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8_%EB%8F%85%EC%84%9C%EC%99%80%20%EC%9D%B8%EC%83%9D.jpg"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9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미키 기요시의</strong></span> </span><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독서와 인생』</span></strong></span></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범우사, 2011, 2판, 범우문고 242)을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범우사에서 나오는 월간 &lt;책과 인생&gt;을 꽤 오랫동안 받아 보았다. 『독서일기』를 거기서 낸 연으로 출판사가 보내준 것이다. 미키 기요시의 『독서와 인생』은 그때 받아본 잡지에 분재된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연재물만큼은 꼬박꼬박 챙겨 읽었다. 그런데 오늘 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의 판권란에 &lsquo;초판 2007년&rsquo;이라는 출간 연도를 보니, 그때서야 분재를 마치고 단행본이 나왔나 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의 이름과 약력은 차츰 잊혔지만, 그때 읽은 몇 대목은 철학책을 읽는 데 큰 향도가 되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철학에서 요구되는 것은 &lsquo;사색의 근원성<sup>根源性</sup>&rsquo;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철학자의 저서는 수많은 아류<sup>亞流</sup>가 쓴 것보다 본질적으로 알기 쉽다. 사색의 근원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은 그 언저리의 책보다 알기 쉽다. 일반적으로 고전이 되는 것에는 &lsquo;천재적인 단순성&rsquo;과 같은 것이 있다. 해설서보다 원전<sup>原典</sup>이 결국 이해하기 쉽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경험하는 일이다. 따라서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사색의 근원성이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확실히 생각하고 쓴 것은 이해하기 쉽다.(128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전을 읽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또한 항상 원전을 읽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해설서나 참고서를 읽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전을 중심으로 그것에 의존해야 한다. 원전은 언제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책이다. 예컨대 플라톤이나 칸트와 관련해 천 가지 문헌을 읽어도 원전을 읽지 않으면, 그것을 되풀이해 읽지 않으면 깊이 근본적으로 배울 수 없다. 제삼자가 쓴 해설서보다 원전이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한층 더 이해하기 쉽다. 많은 참고서를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원전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 결국 그것을 파악하는 지름길이다. 게다가 원전은 종종 해설서보다 짧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원전을 읽는 것은 독서를 단순화하는 데 필요한 방법이다. [&hellip;] 책이 남이 읽어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읽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 스스로 읽을 필요성이 원전의 경우에는 절대적이다. [&hellip;] 사람은 언제나 원천<sup>源泉</sup>에서 퍼 올려야 한다. 원천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하다. 원전을 읽음으로써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장 많이 읽을 수 있다.(147~148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두 대목은, 나에게 해설서를 모으는 버릇을 없애 주었고, 원전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62"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8_%EB%AF%B8%ED%82%A4%20%EA%B8%B0%EC%9A%94%EC%8B%9C(1).jpg" />1897년에 태어난 지은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를 읽고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졸업 후, 니시다 기타로가 있는 교토대학 문과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ldquo;[도쿄] 제일고등학교를 나와 교토의 문과에 진학하는 학생은 없었다. 내가 처음이었다.&rdquo;(15쪽)</p> <p style="text-align: justify">교토대학을 졸업한 지은이는 몇 개 대학에서 1년 동안 강사를 하다가, 1922년에 독일 유학을 떠난다. 하이델베르크에 자리 잡은 첫해에 그는 하인리히 리케르트를 사사하며 역사철학을 연구했다(지은이는 철학에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자신을 철학으로 이끌어 준 니시다 기타로의 『선의 연구』와 함께, 리케르트의 『문화과학과 자연과학』을 애써 권하고 있다. 『독서와 인생』이 1942년에 출간된 옛 책이라, 여기 나오는 책들은 철학사에서 소멸된 것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쉽게 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다음, 마르부르크로 옮겨가 하이데거로부터 배웠다. 지은이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 &ldquo;나 자신은 하이데거 교수님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rdquo;(79쪽)고 말하는 데, 귀국 이후의 진로는 오히려 하이데거를 떠나 마르크스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미키 기요시는 일본 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하고 반전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감옥에서 죽었다). 지은이는 이 책 곳곳에서, 하이데거 철학이 유행하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그 당시 이들의 정신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던 횔덜린을 비롯해 니체, 키에르케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을 깊이 공감하며 탐독하게 된 것은,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겨가서 하이데거 교수님 밑에서 배우게 되면서부터였다. 하이데거 교수님의 철학은 그런 &lsquo;전후 불안&rsquo;의 표현이었다.(74~75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무렵의 독일은 완전히 정신적으로 불안한 시기였다. 횔덜린이 유행하는가 싶더니 한편으로 간디 등이 환영받고 있었다. [&hellip;] 하이데거 교수님의 철학 자체도 이런 불안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교수님의 철학은 니체, 키에르케고르, 횔덜린 등이 유행하는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고, 여기에 그 철학이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끈 이유가 있었다.(84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용한 두 대목 말고도 비슷한 구절이 더 있지만, 『독서와 인생』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과 그 뒤를 따른 일본에서 왜 &lsquo;불안의 철학&rsquo;이 유행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분석이 없다. 지은이 자신의 독서 편력과 독서법, 그리고 철학에 대한 일반인의 궁금증에 간략히 답하고자 했던 이 책에는, 그런 자리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래의 대목은 짧고 우회적이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고 있지 않은가?</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마르부르크 시절 이래 내가 경험한 이른바 불안의 철학이나 불안의 문학이 몇 해 뒤에는 일본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몇 년 뒤에 유행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프랑스나 독일에서처럼 하나의 요소, 즉 마르크시즘의 유행이 앞서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순서다.(92~93쪽)</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불안의 철학이 유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어야 한다&rsquo;는 위의 명제가 뜻하는 바는, 불안의 철학이 마르크스주의의 반정립<sup>antithese</sup>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lsquo;바이마르 독일&rsquo;은 물론이고 유럽과 일본의 부르주아들은 &lsquo;마르크스만 아니면 무엇이라도!&rsquo;라는 심정으로 미키 기요시가 말하는 &lsquo;불안의 철학&rsquo;을 받아들였고, 불안의 철학이 열어 놓은 뒷문으로 구세주인 양 들어 온 것이 바로 나치즘(독일)․파시즘(이탈리아)․군국주의(일본)였다는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이다. 나는 다양한 책을 읽지만, &lsquo;독서&rsquo;에 대한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내 &lsquo;밥줄&rsquo; 가운데 한 가닥이 독후감을 쓰는 일이라서 기신기신 이걸 쓰고는 있지만, 내가 제일 경멸하는 독자는 &lsquo;독후감 따위를 모아 놓은 책&rsquo;을 읽는 독자다. 이를테면 내가 쓴 『독서일기』 류 같은 책. 그런 내게 독서에 관한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해 보라면 바로 이 책, 『독서와 인생』을 권하고 싶다. 독자들이 지은이의 독서론을 직접 만나보라고 더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이 얇고 값싼(3,900원) 책에는 진정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지침이 적혀 있다. 약점이라면 워낙 오래된 책이라, 여기에 언급된 많은 책이 유물이거나 고서라는 것. 하지만 원래 이 책은 장모가 쓴 『독서일기』류의 &lsquo;독후감 모음집&rsquo;이 아닌데다가, 바로 거기서 우리는 책과 사상의 시대적 한계나 소멸성에 대해 생각할 기회와, 더더욱 책을 정선해서 읽어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12 오전 10:15:00슈미트의 ‘근대회화의 혁명’<img alt="" width="600" height="87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7_%EA%B7%BC%EB%8C%80%ED%9A%8C%ED%99%94%EC%9D%98%20%ED%98%81%EB%AA%85/%EA%B7%BC%EB%8C%80%ED%9A%8C%ED%99%94%EC%9D%98%ED%98%81%EB%AA%85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책머리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10회의 강연은 1955년 1월 초순부터 3월 중순까지, 매주 월요일 오후 7시부터 7시 15분까지 바젤 방송국(Radio Basel)에서 방송된 것이다. 이 조그만 강연을 책으로 읽었으면 하는, 수많은 청취자들의 희망이 반드시 나에 대한 호의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극도로 간략하게 해야 하는 시간적 압박 때문에 이 글을 듣는 문장보다는 읽는 문장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고려했어야 할 예비지식 없는 청취자들에게는, 어쩌면 너무 지나친 부담을 주고 말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인쇄에 부침에 있어, 본문은 라디오 방송의 성격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아무런 손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인상파와 현대 사이의 수많은 중요 작가들, 더구나 미술상의 여러 경향이 모두 빠져 있다는 것이 이유있는 (따라서 변호할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일어난 미술상의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 완전을 기한다는 것은 본시 이 소책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방송할 때는 때때로 규정된 시간의 제약을 받았기에 원고에서 여기저기 몇군데 삭제한 부분을 여기서는 모두 되살려넣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와 그 작품의 선택은, 가급적이면 많이, 바젤 미술관에서 이미 발행한 원색판 카드(그림)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경제적인 요구 때문에 크게 제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끝으로 이 강연을 나에게 제안하고 수행시켜준 바젤 방송국과 이 책의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1955년, 초판에 부쳐<br /> 게오르크 슈미트</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1 근대회화(모던아트)의 탄생</strong></span><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오노레 도미에</strong></span><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onore Daumier, 1808~79</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8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7_%EA%B7%BC%EB%8C%80%ED%9A%8C%ED%99%94%EC%9D%98%20%ED%98%81%EB%AA%85/%EC%98%A4%EB%85%B8%EB%A0%88%20%EB%8F%84%EB%AF%B8%EC%97%9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19세기 중엽부터 어려워진 그림</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분! 1회에 15분씩 10회에 걸쳐, 그러니까 모두 2시간 30분에 걸쳐서 화가 열 사람의 작품 열점을 골라 차례로 한점씩 감상하기로 합시다. 이들 열 사람이 말하는 언어에 모두 익숙한 분에게는 이로써도 충분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에게는 그 수가 너무 적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열 사람의 화가들은 제각기 다른 언어, 다른 문법을 통해, 즉 색채와 형태에 대한 별개의 법칙을 가진 조형언어를 통해 말하며, &lsquo;아름다움&rsquo;이란 것에 대해서도 별개의 관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감상자 역시 거듭 다른 감상태도로 익혀야 하며, 미(美)의 감각에 대해서도 별개의 표준을 적용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가 노리는 목표도 이 점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조형에서 조형으로, 화가에서 화가로 변화하는 미술의 언어를 해독하는 데 익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들 열점의 작품 가운데 처음 것은 비교적 이해하기 쉬워 보입니다만, 나중 것에 이르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뭔가 특별한 두뇌의 곡예라도 필요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테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얼핏 보아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미술작품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곧바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전력을 기울여 이야기해보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림을 감상해가는 과정에서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뜻하는 바는, 이 열점의 그림을 통해 이들 열 사람의 예술가를 가급적 완전하게 소개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열점의 그림은 저마다 그것을 그렸던 열 사람의 화가에게는 매우 특징적입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본질의 일정한 측면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들의 예술 발전의 일정한 시기에 대해서만 특징적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와 동시에, 이 열점의 그림 하나하나는(이는 우리가 앞으로 그림을 보아가는 데 있어 결정적인 것입니다만) 일반적인 회화발전사의 일정한 단계에 있어서도 특색있는 것들입니다. 열점의 그림은 그러한 의도를 갖고 선정한 것이기 때문에 각각의 그림은 지난 100년간 회화의 가장 중요한 발전단계에서 가치있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 기간 동안 예술언어에서 일어난 한 걸음 한 걸음의 변화를 그림에서 그림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개 1850년경부터 유럽의 회화는 일반대중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는 석판화가로서는 19세기의 가장 인기있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화가로서는―「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는 1850년에 나타났습니다―그때까지의 관습을 무너뜨리는 첫발을 내디딘 사람입니다. 이어 1870년경에는 인상파 화가들이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1890년경에는 표현파가, 1910년경에는 입체파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나타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여기에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이들의 전진은 하나같이 미술적 표현의 새로운 세계를 온통 혁명적으로 정복하는 것이면서도, 그것은 일종의 유기적인 성장의 논리를 갖고 앞선 단계에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열 사람의 화가는 각자 모두 그들 자신으로서는 가장 필요한 일을, 가장 개인적인 필연성을 실행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고찰해볼 때, 이 100여년 동안 일어난 사실이 꼭 그대로, 극히 의미있게, 회화의 발전사 전체 속에 얽혀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네 단계로 나눠본 회화의 역사</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세 초기 이래 회화의 역사를 간단히 훑어본다면,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14세기 초까지의 중세 초기. 이 시기의 그림은 아직 원근법에 의한 공간묘사도, 빛과 그림자에 의한 신체성 묘사도, 자연의 물질성 묘사도 알지 못한 채, 필경 해부학적으로 정확한 신체를 요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생각건대 당시의 화가들도 그것을 바랐을 테고, 또 그럴 능력이 없던 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필요로 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차안(此岸)적인 현실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피안(彼岸)적인 현실을 그리려 했기 때문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14세기 초에서 15~16세기로 접어드는 중세 후기, 즉 조또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로부터 라파엘로(Raffaello)까지. 이 시기의 그림은 바야흐로 차안적인, 눈에 보이는, 측정할 수 있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의 묘사를 목표로 했고, 그러기 위해 공간적, 신체적, 물질적인 영상(illusion)과 해부학적, 색채적인 정확성을 묘사하는 수단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발견한 것이지요. 재발견이라 함은 이 모두가 고전적인 고대 그리스&middot;로마시대에 이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가 &lsquo;재생&rsquo;, 즉 &lsquo;르네상스&rsquo;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 &lsquo;자연주의적&rsquo;이랄 수 있는 그림은 인간 생활의 다른 면?철학, 과학, 기술 따위?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자연을 합리적으로 지배하려 했던 시기의 필연적 표현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개 1500년대 중반경에 셋째 단계로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의 인식과 묘사였습니다만, 이 시기의 사람들은 마침내 모든 자연인식은 결국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에 달려 있다는 것, 그렇기에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두고 말하자면 우리가 보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물의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즉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라 단지 공기원근법적으로 상대적인 공간을, 촉각적인 물질성이 아니라 단지 가상적인 물질성을, 절대적인 대상색(對象色)이 아니라 오직 상대적인 현상색(現象色)을 보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띠찌아노(Tiziano)의 원숙기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색조의 회화가 나타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하여 이 발전의 최후에 나타난 사람이 다름아닌 도미에입니다.색조의 회화는 회화적으로 풀어헤쳐진 화풍으로서, 거기에는 화가의 개성적인 필적이 뚜렷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묘사된 대상의 물질성―재질성이라고도 함―대신에 필촉의 물질성이 나타납니다. 빛은 이미 사물 위에 있지 않고 사물 사이에 있습니다. 그동안 수차에 걸쳐 르네상스의 완전한 자연주의로 복귀하려는 반동이 나타났지만, 이런 방식의 그림이 인상파 초반까지 계속되어왔습니다.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대화가들은 거의 모두가 이 색조의 화풍에 의한 화가들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만년의 띠찌아노, 루벤스(P. P. Rubens), 프란스 할스(Frans Hals), 벨라스께스(D. Velazquez), 렘브란트(Rembrandt), 와또(J. A. Watteau), 샤르댕(J. B. S. Chardin), 고야(F. Goya), 꼬로(J. B. C. Corot), 도미에, 꾸르베(G. Courbet), 초기의 마네(E. Manet) 등이 그러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뽈레옹 시대에 나타났던, 자연주의로 복귀하려는 최후의 반동인 &lsquo;고전주의&rsquo;(앵그르 J. A. D. Ingres, 1780년 출생) 이후에 주목할 만한 전환이 나타납니다. 조또부터 라파엘로까지 하나하나 쌓아올려졌던 자연주의적인 대상묘사의 여섯가지 요소가 다시 하나하나 허물어져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섯가지 요소란 물질성의 영상, 신체성의 영상, 공간성의 영상, 묘형의 세부, 해부학적인 정확성, 대상의 색채입니다. 이 양상이 직접 넷째 단계로 이어지고, 우리는 지금 그 흐름 속에 서 있는 셈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연주의적인 그림에서 이탈해감에 따라, 자연주의 이전의 미술의 미가 열광적으로 재발견되어왔던 것(지금도 그러하지만)은 명백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주의에 대한 능력과 예술적인 능력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는 거기서 단지 불완전한 능력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연주의로부터의 이탈은 과학 이전의 자연인식으로 역행하는 데 따른 현상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사물의 가시적인 현상을 넘어, 사물 속에 숨어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비(非)가시적인 여러 힘을 추구해온 근대의 자연과학에 평행하는 현상입니다. 완전히 자연주의적인 자연묘사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미술의 본래적인 과제로 여겨지고 또 그 최고봉인 양 생각되지만, 참으로 창조적인 미술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이렇다 할 정신적 노력 없이 여느 미술학교에서도 배울 수 있는 한갓 기술적인 예기(藝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기이하게도 때를 같이하여 사진술이 발명되었고, 그 때문에 미술가들은 더욱이 자연을 충실히 묘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수백년에 걸친 미술가의 주요 과제였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미술가들은 차츰 그의 과제를 전과는 반대로, 자연을 개인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찾았습니다. 그래서 예술적인 표현수단이 한 걸음 한 걸음 독립했고, 예술 외적인 필요에 봉사하는 시녀에서 스스로 자유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화가는 스스로 이 과정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4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7_%EA%B7%BC%EB%8C%80%ED%9A%8C%ED%99%94%EC%9D%98%20%ED%98%81%EB%AA%85/%EB%8F%84%EB%AF%B8%EC%97%90%20%EC%82%AC%EC%A7%8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분위기 묘사를 강조한 도미에</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 갈림길에서, 이들 열명의 화가 중 첫번째 사람인 오노레 도미에는 아주 독자적인 입장에 서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만년의 렘브란트나 고야 등을 상기한다면, 이 「돈 끼호떼와 산초 빤사」도 그 미술상의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별반 새로운 게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도미에의 선구자, 이를테면 고전파의 앵그르를 상기해본다면 어떨까요. 앵그르에게는 홀바인(H. Holbein)이나 라파엘로 같은 화가가 최고의 모범이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분위기 없는 앵그르의 선(線)원근법적 공간묘사에 비해 도미에의 공간은 빛과 공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역광을 담뿍 받으며, 균형이 맞지 않는 두 말 탄 사나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죽마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그의 애마 로신안떼를 타고 있는 기고만장의 돈 끼호떼와, 다리 짧은 당나귀 등에 버티고 앉은 땅딸보 산초 빤사입니다. 그 두 사람 뒤편의 돌산 골짜기도 빛을 머금은 공간(대기) 속에 용해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화법은 우리가 공기원근법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입니다. 즉 그려진 디테일이 전경에서 후경으로 점차 불명확해지는 반면, 공기의 명도는 전경에서 후경으로 높아집니다. 그런데 분위기와 역광의 효과는 신체성의 영상을 약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도미에에게 빛은 이미 신체를 조각적으로 나타내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빛은 사물 사이에 작용하는 하나의 독립된 자연력이 되어 그 어디든 물체의 표면에 부딪혀 빛납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은 손에 잡힐 듯한 신체성이 아니라 한갓 현상으로서, 아니 하나의 환상과도 같이 우리 눈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분위기의 톤(tone)을 노리는 그림은 다시 물질성의 영상을 버리고 반대로 착색의 물질성을 강조하게 됩니다. 이 그림에서 보듯 도미에는 이미 털가죽과 의복, 피부, 암석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넓적하고 두툼한 필촉으로 디테일이 무시된 채 칠해져 있습니다. 앵그르가 젊은 화가들을 비난했던 대로 아무렇게나 칠해져 있습니다. 자연의 갖가지 물질이 온통 색채라는 하나의 물질 속에 이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필촉이야말로 도미에의 위대한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필적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포르마시옹의 미술적&middot;인간적 의미</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그 색채―백마의 흰색, 산초 빤사가 걸친 망토의 붉은색 등―는 절대적인 대상색이 아니라 상대적인 현상색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밝은 곳에서만 그 흰색은 희고, 붉은색은 붉게 보이며, 어스름 속에서는 흰색은 푸른 회색으로, 붉은색은 갈색으로 보입니다. 명암법의 그림이나 외광파(外光派, Pleinairisme)의 그림을 색조의 화풍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모든 것을 앵그르나 홀바인의 눈으로 보고, 그것을 미술의 표준으로 삼아 도미에를 본다면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표준에 맞는 공간도 신체도 재질도 색채도 없고 더욱이 묘형은 난잡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도미에를 가령 만년의 렘브란트를 척도로 해서 볼 때, 자연주의적으로는 소극적인 것이 모두 예술적으로는 적극적인 것이 됩니다. 환상적인 빛에 싸인 신체도, 환상적인 빛으로 가득 찬 공간도, 개성적인 힘찬 필촉도.</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온 것 외에 아직 까다로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즉 돈 끼호떼나 그가 타고 있는 말의 모습이 모두 기묘하게 해부학상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이르면 도미에는 그때까지의 어느 누구도, 가장 대담한 렘브란트나 고야까지 훨씬 능가합니다. 만일 이 그림을 보고 웃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그의 희화(戱畵) 계열에 넣어도 무방하겠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희화를 볼 때는 해부학상의 과장이나 오류를 무시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요구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도미에의 유화에서 그 해부학상의 데포르마시옹(D&rsquo;eformation, 사물의 원래 형태를 뒤틀리게 함)을 보고 웃어넘기기엔 그의 그림이 너무도 진지한 면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고전적인 미술법칙을 이만큼 통렬히 타파했다는 점에서, 도미에의 실로 진지한 예술적 의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뒤틀린 형체를 &lsquo;아름답다&rsquo;고 볼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표현력에 찬 것으로, 각별히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하겠지요. 여기서 진실이라 함은 물론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입니다. 도미에는 권력자의 횡포에 항거하여 약자의 생명을 지키려고 익살스러운 전투에 나선 기사로서의 체험을 그 스스로 갖고 있습니다. 그가 그린 돈 끼호떼, 그 윤곽의 웅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해부학상의 데포르마시옹이 지닌 미술적?인간적 의미를 파악한 셈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던아트(근대회화)를 이해함에 있어 최대의 난관 가운데 하나를 돌파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미에로부터 나온 한 갈래 길이 반 고흐(V. van Gogh)로 이어지고, 그후의 수많은 화가들에게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한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해부학적으로 잘못됨 없이 그려진 말이 모두 미술작품으로서의 생명이 길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부학적으로 뒤틀리게 그려진 말이라고 해서 모두 생명이 긴 것은 아닙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에서 우리가 형태적인 면에서 알게 된 것―자연에 의거하지 않는 형태의, 미술상의 고유한 가치―을 다음번에는 색채적인 면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미에의 색조의 회화로부터 씨슬레(A. Sisley)의 회화로 나아갈 때, 즉 인상파의 눈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우고자 할 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머리에,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게오르크 슈미트(Georg Schmidt, 1896~1965)</strong><br /> 스위스 바젤 출생. 바젤 대학에서 역사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1년부터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면서 미술비평 활동을 했다. 1939년 바젤 미술관장에 취임하여 1961년까지 이 미술관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이끌었다. 1958년부터 1965년 사망할 때까지 뮌헨 조형미술아카데미 교수로 재직하면서 근대회화에 관한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옮긴이 김윤수(金潤洙)</strong><br /> 1936년생. 미술평론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하고 서울대 강사, 이화여대와 영남대 교수, 창작과비평사의 사장 및 대표이사, 민예총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계간 『창작과비평』을 비롯해 미술전문지에 많은 미술평론을 발표했으며, 저서로 『한국현대회화사』(1975)가 있고, 번역서로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1984), 허버트 리드의 『현대회화의 역사』(1991)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9 오후 2:09:00전홍석의 ‘문명 담론을 말하다’<img alt="" width="600" height="88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6_%EB%AC%B8%EB%AA%85%20%EB%8B%B4%EB%A1%A0%EC%9D%84%20%EB%A7%90%ED%95%98%EB%8B%A4/%EB%AC%B8%EB%AA%85%20%EB%8B%B4%EB%A1%A0%EC%9D%84%20%EB%A7%90%ED%95%98%EB%8B%A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총론</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구와 일본의 제국주의적 세계 지배 야욕의 시대가 끝난 2차 세계대전(1939&sim;1945) 이후에도 인류 사회는 군사와 경제 강대국을 중심으로 동서 이념적 대립을 겪었고 산업&middot;기술이라는 기준에 따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분류되어 갈등을 경험해왔다. 20세기 말 냉전 종식 이후에는 미국의 유일 지배 체제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수사학 아래 다양한 국가론적&middot;문명론적 대응과 모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과정에서 폭로된 미국 중심의 서구화론, 즉 월가 표준을 세계 표준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세계화 담론의 파산으로 치닫고 있다. 이 일련의 미국발 금융위기(2008년)와 함께 찾아온 유럽발 재정위기(2009년)는 세계경제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 여진과 불안은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다. 또한 서구중심주의의 세계사적 철수 단계인 세계화의 패퇴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중심의 새로운 &lsquo;아시아태평양 시대&rsquo;를 촉진시키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20세기 후반 급변하는 시대에 인류는 세기적 전환기를 준비하면서 기술전자공학시대(Z. Brzezinski, 1980), 후기산업사회(D. Bell, 1980), 초산업사회(A. Toffler, 1980), 정보화시대(J. Naisbitts, 1982), 탈근대사회(Kurth, 1992), 후기자본주의사회(P. Drucker, 1992) 등 변화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 시점은 &lsquo;정보혁명&rsquo;의 와중에 있다는 사실 말고도, 경제,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서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그야말로 시대의 전환기임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ldquo;앨빈 토플러<sup>Alvin Toffler</sup>는 정치제도, 생활양식, 문화적 욕구, 사회의 조직 원리, 국가 간의 관계 등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rdquo;. 또한 최근 저명한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sup>Jeremy Rifkin</sup>은 문명의 명멸 원인을 공감<sup>empathy</sup>의 물결과 엔트로피<sup>entropy</sup>의 상호관계 속에서 찾으면서 21세기에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혁명과 더불어 &lsquo;분산 자본주의&rsquo;가 인도하는 &lsquo;3차 산업혁명&rsquo;이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같이 각 분야에서 전반적으로 재구성을 요하는 새천년 21세기는 대변혁을 예고함은 물론 이미 실현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대변혁은 탈냉전기 국제정치질서에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현대 국제정치는 과거의 냉전적 세계정치질서가 와해되고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로 인한 군사적 대립이 종식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에 발맞춰 학계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국제 질서와 세계체제는 무엇에 기초하여 형성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모색이 한창 시도되고 있다. 특히나 몰타체제로 대변되는 탈냉전 시대의 개막과 함께 기존의 국제관계 이론인 현실주의나 다원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lsquo;문명 패러다임<sup>civilizational paradigm</sup>&rsquo;이 등장하여 &lsquo;문명&rsquo;이라는 새로운 분석 단위가 제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문명 패러다임&rsquo;의 문제를 제기한 학자 중 대표적 인물은 미국의 석학 헌팅턴<sup>Samuel P. Huntington</sup>이다. 특정 시대에 공유하는 &lsquo;패러다임&rsquo;으로 사회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할 수밖에 없다는 토머스 쿤<sup>Thomas S. Kuhn</sup>의 주장처럼 헌팅턴의 문명 패러다임은 갑자기 도래한 냉전의 종언을 예측하지 못했던 국제정치학상의 방법론적 반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lsquo;패러다임&rsquo;이란 지적한 바와 같이 쿤으로부터 차용된 개념으로 통상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로 이해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패러다임<sup>paradigm</sup>&rsquo;의 어원은 그리스어 &lsquo;파라데이그마<sup>paradeigma</sup>&rsquo;다. 플라톤<sup>Platon</sup>의 《대화편》에 의하면 파라데이그마는 참된 인식으로서 바른 실천적 삶에 사용될 본이나 기준 또는 표준을 의미했다. 그러나 현대적인 &lsquo;패러다임&rsquo; 개념은 주지하다시피 토머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sup>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up>》(1962)에서 획기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쿤은 과학에서 기본이 되는 이론과 법칙들, 기본적인 법칙을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는 표준적인 방법, 도구적인 기술, 형이상학적인 원리, 이론의 선택, 평가, 비판과 관련된 원리 등의 총체를 &lsquo;패러다임&rsquo;이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토머스 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갖는 애매함과 오해의 소지를 해소하기 위해 1970년판 〈후기〉에서 재차 패러다임을,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를 지칭하는 개념 또는 이 같은 총체 중의 한 구성 요소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인 수수께끼 풀이에 사용되는 모델과 실례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명확히 정의했다. 이 &lsquo;패러다임&rsquo; 개념의 특징은 과학의 변화 모델을 설명하는 데 있다. 쿤은 과학 변동 단계를 지배적인 패러다임 안정기(정상 과학기), 선패러다임기(비정상성의 폭발과 위기) 그리고 과학혁명기로 구분했다. 쿤의 패러다임은 이후 과학철학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문, 사회과학 등에서도 널리 원용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하튼 이 &lsquo;패러다임&rsquo; 개념은 문명과 연결되어 현대의 대표적인 문명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종래의 슈펭글러<sup>O. Spengler</sup>, 토인비<sup>A. Toynbee</sup> 등이 문명을 세계 역사에 적용시킨 경우는 있었지만 헌팅턴처럼 정치학자가 문화와 문명을 통해 국제정치나 세계체제를 설명하려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뚜웨이밍<sup>杜維明</sup>은 이 사실과 관련하여 헌팅턴 이론이 발현시킨 긍정적인 면을, 즉 &ldquo;정치학자로서 또한 냉전을 배경으로 헌팅턴이 이 문제(문명충돌론)를 제기한 이후 문명 대화의 문제는 학술과 종교의 영역에서 지식계 전체로 확대되었고 심지어 국제정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rdquo;고 인정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헌팅턴은 탈냉전 이후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 변수는 &lsquo;문명&rsquo;임을 천명했다. &ldquo;1980년대 말 공산세계가 무너지면서 냉전체제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rdquo; 그런가 하면 &ldquo;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rdquo;라고 미래 세계를 예측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lsquo;문명충돌론&rsquo;은 냉전 종결 이후 &ldquo;붉은 위협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슬람은 존재하고 있다&rdquo;는 식으로 미국 국민에게 강력한 적에 대한 이미지를 형상화시킴으로써 폭발적인 효과를 누렸다. 2001년 9&middot;11 뉴욕 테러 사건의 발발 당시 정작 헌팅턴 자신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테러는 &lsquo;문명 대 야만&rsquo;의 충돌이지 문명 사이의 충돌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헌팅턴의 이론은 이 테러사건과 그에 따른 아프가니스탄&middot;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연이은 보복 전쟁으로 인해 국내외 대중 매체에 광범위하게 회자되면서 더욱 높은 관심을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헌팅턴의 이론은 사실 탈냉전 직후 풍미했던 탈역사론에 대한 비판적 회의와 문제 제기에서 출발한다. 헌팅턴의 사고 반대편에는 &ldquo;자유주의가 드디어 역사의 짐들이었던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청산했기 때문에 역사는 그의 종착역에 도달했다&rdquo;고 보았던 후쿠야마<sup>Francis Fukuyama</sup>류의 &lsquo;역사종말론&rsquo;이 존재한다. 20세기 제3세계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제1세계에서는 정치적 혁명 대신에 과학과 기술의 혁명만을 논하고 있었다. 탈역사의 주장들은 과학과 기술 이외의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후쿠야마의 탈역사는 미국인의 실용주의와 청교도적 전통의 세계 지배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이테크 시대 팍스 아메리카나<sup>Pax Americana</sup>의 세계 재편을 뒷받침하는 정치철학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서구 문명이 보편적 역사상을 바탕으로 인도하는 세계가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안정을 성취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였다는 사실이 쉽게 부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최근 복수론의 강세로 문명이 긍정적 의미에서 인류 사회의 보편적 진보 상태를 기술하는 용어로 전환되고 있는 것도 주로 서구에 의한 주체적 자각의 산물이다. 근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최첨단 기술의 비호 아래 지역성을 극복하고 더 넓은 시장을 찾아나서는 확장주의적 본질에 따라 상호 연계성으로서의 지구촌화의 길을 열어놓았다. 이렇듯 오늘날 현대 첨단 문명은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물질적 부를 생산한 결과이고 인간의 이기심에 호소한 시장경제는 물질문명의 이기를 창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장치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대 과학기술정보사회가 세계적 차원에서 일구어 놓은 경이로운 물질적 풍요는 물론이고 산업사회주의와의 치열한 투쟁에서 &lsquo;자유민주주의&rsquo;의 최종적 승리를 확인하는 결정적인 논거들 중 하나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점에서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소멸과 소련의 붕괴 등 일련의 공산권의 몰락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의미 부여와 반성을 촉진시켰다. 실제로 당시 좌파의 비관론자들이나 우파의 낙관론자들 모두 &lsquo;역사의 종말&rsquo;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동기와 관심은 전혀 달랐다. 비관론자들은 세기말적인 절망과 회의 속에서 역사를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거나 아예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lsquo;역사의 끝&rsquo;을 주장했다. 그에 반해 낙관론자들은 서구 자본주의가 마침내 지속적인 승리 상태에 있다고 판단함으로써 &lsquo;역사의 끝&rsquo;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낙관론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후쿠야마다. 그는 북미, 서유럽, 일본은 탈역사 단계에 진입했지만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한 제3세계는 아직도 역사의 단계에서 헤매고 있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김명섭은 20세기 말 탈냉전의 상황에서 폭발한 이 현대 문명 담론과 관련하여 &ldquo;문명이라는 분석 단위는 국가라는 분석 단위가 포괄하기에 너무 큰 문제를 다루는 데 적합하고 국가라는 단위로 분석하기에 너무 작은 문화적 문제를 다루는 데도 유용하다&rdquo;라고 평가한다. 나아가 그는 탈냉전 국제정치학에서 문명 패러다임이 등장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ldquo;첫째, 냉전체제의 주요한 구성 부분이었던 이데올로기적 갈등 구조가 와해된 이후 보다 긴 역사성을 가진 과거의 갈등 구조가 새로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둘째, 냉전 종식 이후 전통적인 세력권의 경계를 둘러싼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것은 냉전 시대를 통해 과거 삼국동맹<sup>Triple Alliance</sup>과 삼국협상<sup>Triple Entente</sup>의 경쟁적 구도 하에서 강압적 흡수의 대상이었던 비서구적 공간들이 없어진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셋째, 비록 냉전체제가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이미 냉전 구조에 의한 국제 체제로의 편입이 진행된 비서구적 지역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전통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지역공간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했다. 넷째, 냉전 시기 서유럽에서는 이미 베스트팔렌적 관점의 영토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1951), 유럽경제공동체<sup>EEC</sup>, 유럽공동체, 유럽연합 등이 구현되면서 공통된 문명적 토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초국가적 주체가 출현했다. 다섯째, 냉전체제 하에서 어쩌면 냉전체제를 이용해서 동아시아는 눈부신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고 동아시아에 대한 활발한 담론이 전개되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문명교류학의 개척자 정수일은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가 종결되면서 문명 패러다임, 즉 문명에 의한 새로운 대안과 해법의 모색이 화두로 부상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ldquo;인류가 각종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추구해오던 정치적&middot;경제적&middot;군사적&middot;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이나 방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의 종식을 계기로 그 효용에 대하여 회의론이 제기되자 대안으로 정신적 및 물질적 보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문명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lsquo;문명 패러다임&rsquo;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단하려는 학구적 탐색이 여러모로 시도되어 마침내 현대적 문명 담론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지하다시피 근대 문명 담론은 문명 자체의 탄생, 성장, 멸망, 이동에 관한 것으로서 대부분 정형화된 구조를 띠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lsquo;현대 문명 담론&rsquo;은 갈등적이고 대립적인 국가, 민족,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등의 굴레에서 벗어나 탈냉전의 시대 상황에 신축성 있게 대응할 수 있는 분석 단위, 즉 공분모적 복합체인 &lsquo;문명&rsquo;에서 해법을 강구하고 있다. 이미 논급한 바와 같이 특히 탈냉전기 국제정치질서가 와해되고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에서 기인한 군사적 대립이 종식된 상황에서 새천년 21세기의 국제관계와 세계체제를 &lsquo;문명 패러다임&rsquo;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논의가 화두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여러 국내외 학자들의 지적대로 기존의 국가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보완적 패러다임으로서의 적실성과 유용성은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탈냉전 시대의 &lsquo;서구 중심적 신제국주의&rsquo; 내지는 &lsquo;오리엔탈리즘<sup>Orientalism</sup>적 서구패권주의&rsquo; 성향이 짙게 깔려 있다. 동시에 세계 문화와 문명 체계의 이해 면에서도 &lsquo;동&rsquo;과 &lsquo;서&rsquo;로 갈라놓고 대결 의식만을 고취하는 지극히 이분법적인 사고가 내장되어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현대 문명 패러다임의 치명적인 오류를 극복하고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sup>Occidentalism</sup>식의 편협주의와 일방주의에서 탈피한, 균형을 갖춘 문명관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왜곡되고 그릇된 이론과 관념이 비판&middot;수정되지 않고 우리의 의식을 붙잡는 한 인류 공영을 위한 올곧은 이념이나 역사, 문명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현대 문명 담론의 발화에 기본적으로 내재된 단&middot;복수적 문명 패러다임의 서구 중심적 패권주의 성향을 극복하고 참된 문명관을 모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탈냉전기 인류의 미래와 역사를 &lsquo;문명&rsquo;이라는 새로운 분석 단위로 해석하고자 한 대표적 인 두 학자 후쿠야마와 헌팅턴을 단수적<sup>singular</sup> 문명론과 복수적<sup>plural</sup> 문명론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하고 오류를 지적할 것이다. 이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동서 학자들의 여러 문명에 관한 &lsquo;담론&rsquo;을 분석하고 이를 생태지향주의 차원에서 융&middot;통합하여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기 위한 것이다. 즉 &lsquo;문명생태주의 담론&rsquo;이라는 시각에서 인류의 생존 지속과 공영 그리고 보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문명관을 안출하기 위함이다. 최종적으로는 생태문명의 확립과 그에 따른 핵심 규범 및 운용 요칙들을 도출하는 데서 결실을 맺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아가 이 생명생태학적 문명관을 토대로 강권적이고 독점적인 문명헤게모니주의를 소멸시키고 세계 문명의 평등 관계를 회복시키는 현대 문명 담론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는 현재 세계 문명은 상호 교호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미래 문명 역시 이를 토대로 발전할 것이라는 명제를 관철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서구문명중심주의와 문화제국주의가 구획해놓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현대 문명은 역사상 세계 인류가 함께 만들었다는 &lsquo;인류운명공동체의식&rsquo;을 각성시키려 한다. 이것은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담보하기 위해 동서 모두가 합심해 노력해야 한다는 &lsquo;보편적 인류애&rsquo;의 선행 조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단하는 현대 문명 담론의 공론은 시공간상 인류의 문명을 유기적으로 통합해 설명할 수 있는 상호 주체적 평등 관계를 기초로 한 &lsquo;세계주의 시각&rsquo;으로 종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21세기 시대정신은 인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타자와 공존하는 생태적이고 전일적인 문명관, 즉 &lsquo;생태문명&rsquo;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정치생태학의 기초를 닦은 문순홍은 생태 비평을 논할 때 &lsquo;생태 패러다임&rsquo;보다는 &lsquo;생태 담론&rsquo;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본래 &lsquo;담론<sup>discourse</sup>&rsquo;에 관한 이론은 소쉬르<sup>F. de Saussure</sup>의 언어학에서 시작되었다. 소쉬르는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능기<sup>signifier</sup>와 소기<sup>signified</sup>의 관계로 이해된 기호들<sup>sign</sup>을 연구했다. 이후 이 담론 이론은 푸코<sup>Michel Foucault</sup>, 라클라우<sup>E. Laclau</sup>, 무페<sup>C. Mouffe</sup> 등을 통해 사회과학의 영역에 도입되었고 언어 이론에서 국가와 정치권력에 대한 분석에까지 쓰임이 확장되었다. 그래서 담론은 문장보다 큰 단위의 언어군으로 정의되는가 하면, 푸코에게서는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하는 담론적 형성 혹은 이데올로기적 덩어리를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거시적 개념틀로 정의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lsquo;담론&rsquo;이란 상호 작용하고 공명하는 맥락을 전제로 한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체 글 역시 세계 문명의 이해와 문명들 간의 관계 분석에서 상호 연결망에 역점을 두는 생태학적&middot;유기체적 방법을 따른다는 점에서 &lsquo;문명생태주의 담론&rsquo;이라는 명칭과 입장을 취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생태문명과 관련하여 인류의 미래 문명을 조망한다는 점에서 제러미 리프킨의 &lsquo;생물권 정치론&rsquo;이 주목된다. 이미 앞서 언급했다시피 리프킨은 &lsquo;공감&rsquo;을 인간 이해의 새로운 워드로 내세운다. 그는 최근 생물학계의 연구 결과, 곧 거울신경세포<sup>Mirror Neurons</sup>라는 &lsquo;공감 뉴런&rsquo; 이론에 기초하여 인간을 적대적 경쟁보다는 유대를 가장 고차원적 욕구로 지향하는 존재로 재규정한다. 더욱이 생물학적 구조에 내장된 이 공감 성향은 &ldquo;우리의 인간성을 완성하게 해주는 실패 방지용 메커니즘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류를 하나의 대가족으로 묶어주는 기회다&rdquo;라고 말한다. 이처럼 리프킨은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공감적 연대감이 수많은 사람들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어줌으로써 범인류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접착제로 기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통념상 과거의 지정학은 환경이 만인이 만인과 싸우는 거대한 전장이라는 가정 위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리프킨의 입장에서 볼 때 &lsquo;생물권 정치<sup>biosphere politics</sup>&rsquo;는 지구가 상호 의존적 관계로 맺어진 살아 있는 유기체이며 우리는 공동체를 보살핌으로써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리프킨은 현재 인류의 환경 문제와 경제 침체 등도 20세기 지정학적 권력 투쟁에서 21세기 생물권 정치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lsquo;분산 에너지 체제&rsquo;가 구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생물권 정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ldquo;새로운 분산 에너지 시대에 통치 제도는 그들이 관리하는 생태계의 작용을 닮아갈 것이다. 서식지가 생태계 안에서 기능하듯, 그리고 생태계가 서로 연관된 그물망에 있는 생물권 안에서 기능하듯, 통치 제도는 다른 통치 제도나 전체 통치 제도로 통합되는 관계의 협력적 네트워크 안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 새로운 복합 정치 기구는 그것이 몸담고 있는 생물권과 마찬가지로 상호 의존적이고 호혜적으로 작동한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류의 현재와 미래 세계에 대한 리프킨의 지적 통찰력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lsquo;생태철학&rsquo;은 21세기의 보편적 가치인 다원성과 타자성을 포용하는 생태학적 보편 문명의 도래를 예고한다. 사실 개별 분과 과학이 주로 지식을 전달한다면 철학은 지혜를 제공해준다. &lsquo;지식&rsquo;이 물질과 사회에 대처하는 정보나 방법 등을 여러 방면에서 제시해준다면 &lsquo;지혜&rsquo;는 인간의 가치 취사, 노력 방향 등을 일깨워준다. 생태지향주의는 이 지혜 영역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 지혜는 상호 연관적 세계에서 나의 완성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한다. 나의 완성은 이제 나 중심, 인간 중심, 특정 문명 중심에서 벗어나 우리 중심, 자연 중심, 세계 문명 중심이라는 일체 생명적 평등성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이제라도 생명과 생태의 인문사회학을 구성하여 우리 삶의 생명소로 율동하는 생명의 네트워크, 즉 인류를 하나로 묶는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소외된 인권이나 민족이 없이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가시적인 문명의 합일점을 도출해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점에서 문명생태주의 비평은 지배 이데올로기적 문명강권주의의 내부에 깊이 침투하여 거침없는 비판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방대한 다층의 이분법적 문명 차별 구조를 소멸시키는 파괴적인 힘으로 작동할 것이다. 생태 지향적 문명관은 서구중심주의, 중화주의 등 문명패권주의에 대한 단호한 부정과 저항이다. 여기서는 그 단서를 세계주의 시각의 생태와 문명의 융합 차원에서 모색해보고자 한다. 이 노력은 문명의 독점과 충돌이라는 냉엄한 현실과의 대결 속에서 세계 문명권의 화해와 공존을 담보하는 생명생태중심적 문명관으로 결집될 것이다. 이 의미에서 박이문은 &ldquo;우리는 아직도 문명의 진보에 대한 희망, 즉 비참한 경제적 빈곤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참을 수 없는 사회적 억압에서 보다 더 큰 해방, 인간들 간의 박애적 평등과 인류와 자연 간의 조화로운 공존과 친애 등으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막연하게나마 꿈꾸어 왔던 유토피아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 갈 수 있다는 진보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러한 이상을 위해 희망을 걸고 한결 더 노력할 수 있다&rdquo;고 피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태학적 시각에서 볼 때 타자가 우리의 세계관을 통해 관찰되듯이 우리 역시 타자의 시각 속에 존재한다. 그야말로 정체성은 &lsquo;자아&rsquo;와 &lsquo;타자&rsquo;의 상호 투영과 의존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다. 종래 이분법적 서구 근대성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이성과 비이성, 진보와 정체, 문명과 야만, 서양과 동양, 계몽과 미개 등으로 양분하여 이 양자도식 중 하나를 택일해야 한다는 단선적 진보사관을 강요해왔다. 이에 반해서 미래의 생태문명은 지금까지 주체로서의 이성, 정신, 인간, 서양 등의 요소에 의해 분석과 제어의 대상으로 치부되어 그동안 그로 인해 억눌려왔던 감성, 육체, 자연, 동양에 대해 평등 관계로서의 생명과 마음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중심에 대한 주변의 대등한 다중심적 복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 열림과 소통의 생태지향주의는 이성에 의한 비합리성 지배,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식민자에 의한 피식민자 지배, 백인에 의한 유색인 지배, 중심 문화에 의한 주변문화 지배라는 일체의 이분법적 강제를 해체하도록 독려한다. 이 사상은 우리가 염원하는 참 자유세계의 지평을 열어줄 것이며 강권에 저항하고 평화와 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인류의 자유주의 혁명가의 행로를 밝혀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제1부 〈현대 문명 담론의 이해〉와 제2부 〈문명강권주의 비판〉이라는 두 주제로 구성되었다. 제1부와 제2부의 내용을 각 장별로 간략히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장 〈총론〉에 이어 제1부 2장 〈동서 문화&middot;문명의 개념과 그 전개〉는 현대 문명 담론의 개념적 이해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다. 일반적으로 현대를 가리켜 &lsquo;문화&rsquo;와 &lsquo;문명&rsquo;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특히 오늘날 세계화 논의와 교차하여 문화와 연결된 &lsquo;문명&rsquo;을 통해 탈냉전기 시대정신과 위기를 읽고 그 상황에 신축성 있게 대응하고자 하는 문명 담론이 21세기 새로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이 장은 여기에 발맞춰 현대 문명 담론의 개념적 이해와 그 창조적 발전의 토대 구축을 위해 문화와 문명의 어원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양자의 서양적 기초와 현대적 진화를 재조명함으로써 미래 지향적인 &lsquo;문명학&rsquo;의 초석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구의 문화<sup>Culture</sup>와 문명<sup>Civilization</sup>의 의미 구성체는 17&sim;18세기 근대 계몽주의 시기 &lsquo;시민 계층&rsquo;과 &lsquo;시민사회&rsquo;의 운명과 함께 형성되었다. &lsquo;문명&rsquo; 개념이 영국과 프랑스 시민 계층의 사회적 운명을 반영한 것이라면 &lsquo;문화&rsquo; 개념은 독일 시민 계층의 운명을 담고 있다. 독일 지식인들이 문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계몽주의적 문명에 대해 문화적 비판을 가하고 문명을 타자화하면서 이 양자의 적대적 분열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lsquo;문명&rsquo; 개념은 문명 생태학적 관계망<sup>network</sup>을 규정하는 &lsquo;세계주의적 시각&rsquo;으로서 또는 인류 문명의 진정한 공존을 위한 탈중심화의 현대적 문명 개념으로서 지속적으로 재탄생되고 있다. 아울러 &lsquo;문명 간의 공존&rsquo;이라는 현재적 의미로 탈바꿈되어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인신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본 장에서는 문화와 문명의 서구적 개념사를 비롯해서 이 두 단어를 둘러싸고 전개된 서구의 복잡한 개념 논쟁을 검토함과 동시에 두 단어의 번역과 도입 시 벌어졌던 서구적 논쟁과 얽혀 있는 동양적 의미 전개를 분석했다. 그럼으로써 현대 여러 동서문명 담론의 심층적 이해를 제고시켜 현재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lsquo;문화학&rsquo; 연구의 결손을 보완하는 &lsquo;문명학&rsquo; 정립의 가능성을 공론화하고자 했다. &lsquo;문화학&rsquo;의 활성화는 필연적으로 상보적 관계에 있는 &lsquo;문명학&rsquo; 연구와 병행되어야만 그 함의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폭넓은 지평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장 〈서구 패권적 현대 문명 패러다임 비판과 그 대안 모색〉에서는 후쿠야마의 단수적 문명전파론과 헌팅턴의 복수적 문명충돌론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20세기 후반 탈냉전기 국제정치질서가 와해되고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그에서 기인한 군사적 대립이 종식된 상황에서 새천년 21세기의 국제관계와 세계체제를 &lsquo;문명&rsquo;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lsquo;문명 패러다임&rsquo;이 제시되었다. 이 논의가 기점이 되어 인류 미래의 해법을 공분모적 복합체인 &lsquo;문명&rsquo;에서 강구하려는 여러 형태의 현대적인 &lsquo;문명 담론&rsquo;이 폭발된 것이다. 3장에서는 여기에 부응하여 현대 문명 담론의 원형적 발제라고 할 수 있는 문명 패러다임을 단&middot;복수적 문명론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두 학자의 이론, 즉 후쿠야마의 단수적 문명전파론과 헌팅턴의 복수적 문명충돌론을 중심으로 현대 문명 담론의 이해와 전망을 시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념사로 볼 때 &lsquo;문명&rsquo;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단수적<sup>singular</sup> 의미의 문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수적<sup>plural</sup> 의미의 문명이다. 현대 서구에서는 동서 냉전의 종결과 함께 주로 두 방향에서 미래의 전망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현대 문명 담론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후쿠야마의 단수적 &lsquo;역사의 종말&rsquo;과 헌팅턴의 복수적 &lsquo;문명의 충돌&rsquo;에 대한 논의다. 그러나 이 문명론적 미래 전망에는 탈냉전 시대의 &lsquo;서구 중심적 패권주의&rsquo;가 내장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양자에는 세계 문명을 &lsquo;동&rsquo;과 &lsquo;서&rsquo;의 분열 구도로 구획하여 서구의 이익을 조장하는 마니교적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장은 이러한 단&middot;복수적 문명 패러다임의 치명적인 결점을 극복하고 문명 담론으로서의 본래적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 일환으로서 후쿠야마의 문명전파론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lsquo;세계화&rsquo;라는 문맥 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리고 분석과 비판 과정에서 발전적이고 체계적인 현대 문명 담론의 학문적 토대를 기초하고 참된 문명관의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했다. 진정한 의미의 &lsquo;문명 담론&rsquo;은 관점의 탈중심화 속에서 &lsquo;모두가 누리는 행복&rsquo;이라는 인류문명공동체의 진지한 염원을 담아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4장 〈세계화와 문명〉은 세계화 차원에서 비판적 문명학을 정식화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세계화는 일련의 서구의 세계 지배 전략인 문명화, 근대화와 함께 서구보편주의에 착근되어 있다. 서구제국주의와 연계된 세계화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문명사적 시각에서 세계화의 원초적 동인인 &lsquo;자본주의적 근대성&rsquo;의 역사 궤적을 추적해야 한다. 이 연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제반 개념군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계체제의 기원과 해독을 읽어내고 논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로부터 유전된 현대 문명 담론의 여러 부정적 함의들을 읽어내고 그 역사 역기능적인 요소들을 제거시킬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장에서는 선행적으로 &lsquo;문명&rsquo;과 관련된 강권 이데올로기로서 서구보편주의의 역사적 유래와 전개 양상을 분석하고 본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서구 중심적 세계 이해와 관련된 서구제국주의의 여러 형태와 논거의 일단을 논파하고 문명론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비판적 현대 문명학 건립의 초석을 마련하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lsquo;문화학&rsquo; 연구는 근대적 문화<sup>Culture</sup> 개념을 전제로 문화학을 세계적 근대성, 즉 &lsquo;세계화&rsquo;와 접목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볼 때 문명 담론으로서의 현대 &lsquo;문명학&rsquo; 정립 역시 근대적 문명<sup>Civilization</sup> 개념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lsquo;근대성&rsquo;과 접맥된 세계화 차원에서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근대적 문명 개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문명 복수적 측면에서 인간 삶의 양식에 대한 미시적 차원의 문화를 포괄하는, 이른바 거시적 차원의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다. 다른 하나는 문명의 단수적 측면에서 야만과 상반되는 &lsquo;진보&rsquo;, &lsquo;발전&rsquo;, &lsquo;도덕&rsquo;의 의미다. 이 관점이 바로 타 문명의 가치와 특수성을 야만시하는 일방적인 서구의 단선적 진보사관으로 이어져 &lsquo;서구보편주의&rsquo; 혹은 &lsquo;서구중심주의&rsquo;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서구의 팽창은 근대성과 결부되어 단일적 서구 계몽주의 이성의 고도의 획일화된 문화적 기획 속에 자리한다. 이른바 서구 헤게모니의 변형체인 문명화, 근대화, 세계화는 계몽주의 기획의 연장인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범주 안에서 구술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세기 문명단수론의 끝자락에는 부정적 세계화 측면에서 &lsquo;신자유주의&rsquo;가 자리한다. 최근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정치프로젝트의 결과이자 구성 요소로 파악되며 기득권 이익의 극대화라는 신자유주의적 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추진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일련의 서구보편주의가 조장한 현대 문명의 제반 모순성들을 감안할 때 그 극복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먼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문명의 단수적 의미에 대한 복수적 의미의 자성적 비판과 교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논단은 총체적 의미의 문명 개념을 활성화시키는 연구 작업과 관련된다. 문명의 진보적 범주가 단수적 측면에서 특권 문명의 권익을 수호하는 단선적 진보사관의 모체가 되었다면 총체적 의미의 범주는 복수적 측면에서 세계 문명의 평등 관계를 독려하는 학적 토대를 이룬다. 이 총체적 관점은 문명의 다원주의를 옹호하여 독점주의를 지양하고 문명 간의 차이를 상이한 문화소에 의한 것으로 인지케 한다. 또한 문명의 주체가 결국 인간을 최소 단위로 한다고 했을 때 현대 문명의 여러 폐단 역시 인간에 의한 극복을 상정해볼 수 있다. 이 방안은 시민 문화의 이상체로서 시대정신을 구현하고 주변적 사유를 실천하는 현재적 의미의 &lsquo;문명인&rsquo;의 재탄생을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1부의 마지막 부분인 5장 〈현대 문명의 생태학적 전환〉은 현대 문명 담론을 생태학적 세계화 차원에서 체계화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아울러 단&middot;복수론의 궁극적 지평의 융합으로서 메타 이론적 학문 토대를 기초함은 물론 최종적으로는 인간과 자연, 중심과 주변, 서구와 비서구 등의 이분화적 갈등 구도를 파기하고 생태학적 관계성 회복을 전제하는 생태문명의 정립을 목표로 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생태학적 위기는 단순한 물리적인 환경의 파괴를 넘어 더 많은 함의를 지닌다. 금세기 생태학적 진단은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에 연원한 현대 문명의 여러 폐단들에 대한 뼈아픈 반성을 수렴하는 것이다. 생태문명의 건설은 생태 회복과 관리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 문화 양식의 혁신과 관련된다. 또한 여기에는 세계화를 촉발시킨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근대성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서양과 동양이라는 제 존재의 관계망들을 파편화함으로써 현대 문명의 위기를 초래한 진원지로 지적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타자와의 관계성을 배제하는 이원적 근대성은 단수적 문명의 진보 신념으로 이어진다. 서구의 문명 개념에 내포된 &lsquo;진보 대 야만&rsquo;의 구획 의식은 단선적 진보사관에 연원한 서구보편주의의 세계적 동질화 과정의 근저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구 문명의 패권을 강제하는 강권주의 논리가 함의되어 있다. 현재의 서구문명강권주의가 근대성의 닫힘과 두절의 이항 대립 의식에 근거한다면 무엇보다도 상호 주체적 연결 고리를 인정하는 생태 지향적 근대성으로서의 열림과 소통의 인식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복수적 근대성에 기초한 범인류 중심의 생태학적 관계망을 담보하는 &lsquo;세계주의 시각&rsquo;의 전일적 문명관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염원하는 새로운 문명관은 인권과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일체의 강권에 대한 저항과 해체다. 아울러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세계인이 합심해 노력해야 한다는 상호 주체적 평등 관계를 기초로 한 범인류 중심의 유기체적인 세계주의 문명관의 각성과 구축이다. 이처럼 생태학적 문명관은 문명 자체나 문명 사이의 상호 관계에 관한 어떤 규범적 패러다임을 설정하는 토대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강조컨대 현대 문명의 내핵인 근대주의가 공존 이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생공영의 이념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중심주의적 근대주의 문화를 비판하고 청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주객 이분법의 타파 및 주체와 객체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 이른바 대자연이 최고의 주체라는 자연중심주의로 회귀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 속의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의 주체성을 소유하며 따라서 삼라만상이 존재의 가치와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lsquo;자연 중심의 다주체적 공생주의 자연관&rsquo;이라 할 수 있다. 이 자연관을 문명론으로 치환해볼 때 &lsquo;세계 문명 중심의 다문명적 공존주의 문명관&rsquo; 건설의 토대로 활용할 수 있다. 생태와 문명의 교차점에는 세계 문명의 소통으로서의 &lsquo;생태문명&rsquo;이 자리한다. 자연 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전회는 특정한 패권 문명 중심에서 세계 문명 중심으로의 인식 전환과 함께 그동안 주체와 중심의 그늘에 가려져 억눌리고 소외당했던 객체와 주변의 복권을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서구의 이분법적 차별 구도는 근대성과 접맥된 세계화 이론에 깊이 착근되어 있다. 현재의 세계 문명은 &lsquo;세계성 대 지역성&rsquo; 내지는 &lsquo;근대성 대 전통성&rsquo;이 대립하면서 서로 거대한 압력을 행사하는 각축장이 되고 있다. 이것은 단수적 보편 문명의 세계적 일체화와 복수적 개별 문명의 자기정체성 강화의 문제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세계화와 관련된 현대 문명 담론의 최대 관건은 단&middot;복수적 문명론의 역사순기능적인 면을 동시에 구현시킬 수 있는 문명보편주의와 문명다원주의의 화해와 회통에 있다. 즉 현재와 미래의 세계는 단일의 보편 문명과 고유한 특징을 지닌 복수의 개별 문명들이 중층적으로 공존한다고 보고 &lsquo;문명다원주의를 전제로 한 보편 문명에의 지향&rsquo;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또한 &lsquo;보편 문명&rsquo;이 태생적으로 서구제국주의와 접맥된다는 점에서 다원성과 타자성을 감내하는 생명관적 자애로운 보편주의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 장에서는 이 명제들의 충족 논거로서 생태문명의 핵심 규범과 운용 요칙들을 각각 제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2부의 첫 부분인 6장 〈현대 문명강권주의 비판 담론〉은 반서구중심주의를 중심으로 집필된 글이다. &lsquo;서구중심주의<sup>Eurocentrism</sup>(West-centrism)&rsquo;란 동과 서라는 본질적인 분열 구도 속에서 동양을 타자로 하여 서양의 타고난 우월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을 말한다. 근대 유럽의 사상적 기반이 된 18세기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서구중심주의의 이면에는 계몽기에 비교적 정형화된 &lsquo;문명&rsquo; 개념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문명 개념에는 서구화나 근대화의 특징이 함유되어 있다. 서구로 대표되는 제도와 가치가 보편성을 띠면서 &lsquo;세계화&rsquo;는 점차 서구화나 근대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구인들은 세계를 유럽의 &lsquo;문명인&rsquo;과 나머지 세계의 &lsquo;야만인&rsquo;으로 구분하는 세계문명에 대한 차별 의식을 강화시켜왔다. 이로 볼 때 서구중심주의는 근대 영역의 신화적 재구성임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전개된 서구중심주의는 서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다. &lsquo;서구예외주의&rsquo;는 서구 문명이 특수적이고 예외적이라는 주장으로서 서구 문명의 독특성, 자생성, 항구성을 핵심 명제로 한다. 즉 서구를 제외한 세계 어디에서도 그처럼 합리적이고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문명은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lsquo;오리엔탈리즘&rsquo;에는 동양이라는 타아를 뒤떨어지고 열등한 존재라고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우월한 서양적 자아의 고정적인 심상이 깔려 있다. 이 양자는 동시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서구예외주의가 근대 초 서구인들이 서구 문명에 대해 구성한 자화상이라면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인들이 서구라는 거울을 통해 왜곡되게 구성한 비서구 문명의 상을 지칭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6장은 이처럼 부당한 이데올로기로 세계를 동과 서로 양분하여 중심 문명의 패권을 강제하는 서구문명강권주의의 탈중심적 해체를 목표로 기획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명패권주의 통제와 문명독점주의 행태에 저항하는 &lsquo;세계주의 시각&rsquo;의 여러 동서 자유주의 담론들을 검토해보았다. 결국 현대 문명 담론은 생태철학이 투영되거나 그와 밀접한 관계에서 진행되며 현재 인류의 문명은 역사상 세계 인류가 교호 속에서 함께 만들었다는 &lsquo;인류운명공동체의식&rsquo;을 각성시킨다. 아울러 그 공론은 생명과 인권,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타자와 소통하는 보편적 인류애의 생태학적 문명관, 즉 상호 주체적 평등 관계를 기초로 한 문명 공존의 &lsquo;생태문명 담론&rsquo;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7장 〈주쳰즈<sup>朱謙之</sup>문화철학의 현대 문명 담론적 현재성〉은 서구 패권적 문명 패러다임에 대한 동양의 대안 담론으로서의 가능성을 주제로 작성된 것이다. 이 글은 대표적인 현대 문명 담론으로 일컬어지는 문명 패러다임의 서구 중심적 패권주의 성향 극복과 참된 문명관의 모색을 위한 동양의 문화철학적 차원의 시도다. 현대 문명 담론의 최대 관건은 단일문명론과 복수문명론의 화해와 회통에 있다. 현재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는 현재와 미래의 세계는 단일의 보편 문명과 고유한 특징을 지닌 복수의 개별 문명들이 중층적으로 공존한다고 보고 &lsquo;문명다원주의를 전제로 한 보편 문명에의 지향&rsquo;으로 귀결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관련하여 주쳰즈의 문화철학은 그 안에 내장된 문화의 복수론적 다원주의 유형과 그 표현 형식으로서의 역사 진화 법칙, 그리고 미래의 보편 문명으로 구상된 예술 문화의 치밀한 운용을 통해 문명다원주의와 보편문명론 간의 상충점을 회통시킴으로써 양자의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구현시키는 논리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나아가 단&middot;복수론에 기초한 후쿠야마의 단일 중심적 문명전파론이나 헌팅턴의 복수 중심적 문명충돌론의 서구 패권적 성향 역시 예술 문화의 구도 속에서 극복될 수 있다. 또한 각 문화 유형의 유기적인 조합 관계나 예술 문화의 특성과 작용으로 볼 때 주쳰즈의 문화철학은 문명 간의 생태적 관계를 존중하는 생명 중심의 문화생태학적 원리를 함유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쳰즈에게서 문화란 생명을 가진 유기체로 파악되며 그 자체가 창조와 진화의 속성을 갖는다. 더욱이 문화의 이상향으로 제시된 예술 문화는 생명성, 예술성, 전체성, 조화성, 평화성, 대동성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각 문화 유형의 보편적 이념 속에 편재하여 생명소로 작용하고 향유된다. 이런 의미에서 주쳰즈의 문화철학은 서구 문명 패러다임의 대안 담론으로서 범인류 중심의 유기체적인 세계주의 문명관, 즉&lsquo;문명생태주의 담론&rsquo;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각 문명의 본질적&middot;역사적 유형을 분석해내고 문명 간의 상호 교호 법칙들을 통찰해내는 &lsquo;문명 유형 철학&rsquo; 내지 &lsquo;문명 교류 철학&rsquo;으로 자리매김하는 현대 문명 담론으로서의 현재성을 지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8장 〈중국 이학이 근대 프랑스 계몽주의에 미친 영향과 그 문화철학적 의미〉는 프랑스 데카르트 학파의 좌파 벨<sup>Pierre Bayle</sup>과 우파 말브랑슈<sup>Nicolas de Malebranche</sup>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이 장은 &lsquo;서구중심주의&rsquo;에 대한 문화철학적 극복과 대안 모색이라는 차원에서 중국의 &lsquo;송유 이학&rsquo;이 17&sim;18세기 근대 유럽 &lsquo;계몽주의&rsquo; 형성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다. 구체적으로 수용자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 학파, 즉 좌파인 회의론적 진보주의자 벨과 우파인 호교론적 보수주의자 말브랑슈의 중국 형상을 중심으로 살핀다. 이들은 데카르트 철학 자체가 안고 있는 &lsquo;혁명성&rsquo;과 &lsquo;보수성&rsquo;에 근거하여 이학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비종교적 이성주의 문명에 대해 각기 다른 입장과 태도를 취했다. 벨이 찬동 입장에서 중국 문명을 이성 세계의 전범으로 파악해 유럽의 수구 문화 비판과 혁신을 위한 강력한 사상적 원군으로 삼았다면, 말브랑슈는 반대 입장에서 중국 문명을 위협적인 이단 세계로 규정하여 유럽의 신성 문화 수호를 위한 비판과 공격의 대상으로 여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벨과 말브랑슈의 논의와 해석은 계시신학과 무관한 중국의 자연 이성관을 적극 부각시켜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에게 진보적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그것은 프랑스의 백과전서파에게 반향을 일으켜 프랑스의 무신론, 유물론, 혁명철학으로 화하여 종교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전제 정치를 타도하는 프랑스 정치혁명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끝으로 제2부의 마지막 부분인 9장 〈조선조 주자학의 한국 유학적 전개 양상〉은 동아시아 문화강권주의라 할 수 있는 국제 이데올로기 중화주의<sup>Sinocentrism</sup>(또는 Chinese ethnocentrism)에 대한 한국 유학적 해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비판적 문화유산의 발굴이라는 차원에서 한국적 인성론을 통한 한중 문화의 공유성과 평화 공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장에서는 조선조 주자학&mdash;&lsquo;이기심성론&rsquo;의 한국 유학적 전개 양상을 주자의 &lsquo;이동<sup>理同</sup>&rsquo;, 율곡의 &lsquo;이통<sup>理通</sup>&rsquo;, 낙학의 &lsquo;성동<sup>性同</sup>&rsquo;, 북학파의 &lsquo;인물균론<sup>人物均論</sup>&rsquo;으로 연결되는 한국 유학의 독특한 사상사적 체계를 중심으로 논했다. 이 과정에서 율곡의 이통기국론과 호락논쟁의 관계와 그 투영, &lsquo;인물성동이논쟁&rsquo;으로 인한 낙론계의 사상 성립, 낙학과 북학의 사상적 계기, 그리고 한국 근대화로 이어지는 한국 사상사의 철학적 토대와 흐름을 이해하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북학파의 보편동일시적 화이일론<sup>華夷一論</sup>으로 귀결되는 조선의 이기심성론은 주자 성리학의 한국적 발전임과 동시에 주자학에 내재된 &lsquo;화이차별주의&rsquo; 성향의 극복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글의 전체적 논지는 어떤 면에서는 &lsquo;한족<sup>漢族</sup>중심주의&rsquo;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주자학을 한국적 상황으로 융해하여 결국에는 동아시아 중세 국제 이데올로기 화이론<sup>華夷論</sup>적 성향을 탈색시켜 인류 보편적 사상으로 재구성하는 한국 사상사의 자생성을 읽어내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과 다른 주자학의 한국 사상사적 발전 양상은 문화의 신진대사인 외부 세계와의 끝없는 대등적 조응을 지향하며 현대에 와서도 한중 문화 교류의 공유성과 평화 공존 의식에 대한 문명 담론 차원의 중요한 전통적 문명 공존의 전범을 제공해준다. 이를테면 한국 이기심성론의 이통적 소통성과 화이일론은 문화강권주의에 대한 억제와 저항의 현대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이 과거의 전통 시대에는 특권적 중심 문화를 향한 소외된 주변 문화의 결손된 권리 찾기였다면, 이제 그것은 생명의 존엄성에 입각한 우리는 하나라는 상호 동일성의 &lsquo;평화공존의식&rsquo;이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전홍석</strong><br /> 2006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으로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중국 최고의 원로학자 멍페이위안<sup>蒙培元</sup> 교수 지도 아래 동서 철학 교류사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 중국 톈진외국어대학교 객좌교수, 중한무궁화국제교육원<sup>中國天津FESCO外企留學有限公司天津市外企人才培訓學校</sup>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이상적인 한중교육문화교류와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평소의 학문적 신념을 실천했다. 현재는 정수일 소장의 한국문명교류연구소와 동국대 황태연 교수가 이끄는 패치워크문명 연구모임에 참여하면서 저역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동국대, 조선대, 한세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의 관심 분야는 현대 문명학 구축이라는 큰 범주 속에서 21세기 문화와 문명이 국제질서와 세계체제에 어떤 의미를 갖고 그것이 어떻게 기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특히 향후 기독교 문명권과 유교 문명권이 조형해나갈 세계구도 및 그 역학관계에 관한 다양한 문명(문화) 철학적 접근은 평생에 걸쳐 탐구하고 싶은 지속적인 연구 방향이다. 저서로는&nbsp; 『주겸지 문화철학 연구』, 『조선후기 북학파의 대중관 이해』가 있으며, 역서에는 『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 『문화철학』, 『중국 유가문화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철학적 성찰』, 『중한관계사: 근대편』, 『중한관계사: 현대편』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8 오후 2:01:00《217》김호경의 『바울』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33"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7_%EB%B0%94%EC%9A%B8%20%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7일</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김호경의 </span></strong></span><span style="color: #330000"><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바울』</span></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살림, 2009, 살림지식총서 377)을 읽다</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바울의 출생 시기는 대략 예수와 비슷하며, 예수가 죽은 후 2~3년이 지난 32~33년 정도에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62~64년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유대 문화는 헬라화(그리스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정통적 유대세계와 이방세계를 오가며 자랐던 바울은 &lsquo;헬라적 사고를 하는 바리새파 율법학자&rsquo;로 훈련받았다. 그가 훗날 &lsquo;이방인의 사도&rsquo;가 된 데에는 두 세계에 속했던 이런 성장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기는 하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했던 바울의 특이점은 뭐니뭐니해도, 예수의 종교개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수가 초대교회를 시작했을 때, 예수는 여러 유대교의 종파 가운데 한 &lsquo;묵시적 소종파&rsquo;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그런 이유로는 동족으로부터 박해받을 까닭이 전혀 없었다. 문제는 &ldquo;유대인들 역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테두리 안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전하는 것과 자신이 전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대교의 박해가 시작되었다.&rdquo; 반율법적(반유대교적)이었던 예수는 자신의 보속을 통해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약속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예수의 복음은 유대적 정결법을 비롯한 율법의 허위를 폭로하며 유대인들의 믿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보여준 행위와 선포된 말씀은 매우 도발적이었으며 유대인들의 거룩함을 보증해 주지 않았다. 예수는 그들과 같은 듯 보이지만 확실히 다른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름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 유대인에게 한정된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로 확장시킨 것이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므로 바리새파 율법을 착실하게 배웠던 율법학자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열성적으로 박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lt;사도행전&gt;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눈이 멀게 되고, 그 상태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고 회심을 한다. 소위 이것을 &lsquo;바울의 회심&rsquo;이라고 부르는데, 이 회심은 &ldquo;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맞물려 있다. 이전의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박해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바울은 종종 &lsquo;사울이라고 불리던 바울&rsquo;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의 원래 이름 사울은 &lsquo;가장 높은 자&rsquo;라는 뜻인 반면, 바울은 &lsquo;가장 낮은 자&rsquo;라는 뜻이다. 자신의 이름을 바꾼 행위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되곤 하는데, 거기에는 음미해야 할 다른 사항도 있다. 유대 이름 사울이 헬라어로는 사울로스<sup>Saulos</sup>로 발음되는데, 헬라어 사울로스는 매춘부의 이완되고 방탕한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의태어다. 바울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ldquo;이방세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유대적 이름을 바꾼 바울의 인식의 변화&rdquo;와 맞물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초기교회는 오늘날의 기독교 교파만큼이나 다양했는데,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다. 12사도들 역시 비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적 율법의 준수를 요구하는 편이었다. 예수와 함께 있었고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12사도는 그들의 특별한 지위로 초대교회의 중심적 역할을 했는데, 한 번도 예수를 보지 못했던 바울에게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방인에게 유대적 율법을 얼마만큼 준수하게 할 것인가, 또 그리스도교를 이방인에게 어느 정도까지 개방할 것인가는 초대교회의 민감한 문제였다. 그 흔적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lsquo;집사&rsquo;라는 직분이다. 집사는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행하는 일들을, 이방인 신자에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울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유대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히브리파 그리스도인들을 &lsquo;거짓 형제&rsquo;라고 부르며, 오로지 &lsquo;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rsquo;을 그리스도교의 핵심으로 내세운다. &lsquo;칭의론/의인론&rsquo;으로 불리게 될 이것은, 바울의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차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squo;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rsquo;은] 단지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lsquo;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rsquo;은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차별을 비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자 안에서 할례 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였다. 할례와 율법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정결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의인과 죄인을 끊임없이 나누었다. [&hellip;]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공동체 내에서 이런 구분과 차별을 철저히 부정한다. [&hellip;] 바울은 예수가 이미 폐하여 버린 인간 사이의 오래된 장벽을 다시 세우는 인간의 지난한 노력을 비난하며,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게 한다. &lsquo;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rsquo;은, 복음의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빠질 수 있는 일상적인 악의 고리에서 믿음의 본질을 찾게 하는 것이다.</span></span></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08 오전 10:21:00올리비에의 ‘나는 사고 싶지 않을 권리가 있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5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5_%EB%82%98%EB%8A%94%20%EC%82%AC%EA%B3%A0%20%EC%8B%B6%EC%A7%80%20%EC%95%8A%EC%9D%84%20%EA%B6%8C%EB%A6%AC%EA%B0%80%20%EC%9E%88%EB%8B%A4/%EB%82%98%EB%8A%94%EC%82%AC%EA%B3%A0%EC%8B%B6%EC%A7%80%EC%95%8A%EC%9D%84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말을 받아치는 재주가 있었으면 좋겠다. 필요한 순간에 바로 망설이지 않고 할 말을 하고, 더듬지 않고 꼭 들어맞는 말을 찾아낼 수 있다면, 차분하게, 적절하게, 재치 있게 상대의 말문을 막아 입을 닥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런 일을 아주 잘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난 아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얼굴이 빨개져 짜증을 내고 토라진다. 십 분 뒤, 한 시간 뒤, 심지어 이튿날이 돼서야 끝내주는 대답이 갑자기 저절로 떠오른다. 언제나 너무 늦다. 멍청이, 덜떨어진 자식, 모자란 놈, 웃음거리라는 생각이 들 때, 상황을 다시 그려보며 대담하고 강한 내 모습을 상상하고, 멋진 역할을 맡아 대사를 다시 써보는 일밖에 할 수 없을 때, 후회만 남아 있을 때에야 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목욕물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꼭 어렸을 때 같다. 벌써 오래 전 일이다. 열대지방에서 살 때는 샤워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건 나의 사치였다. 그 정도로 언제나 너무 더웠던 것이다. 씻고 나면 더 덥고, 수도꼭지를 잠그자마자 땀범벅이 돼버리기는 했지만, 적어도 하루에 다섯 번은 샤워를 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기 살 때, 그러니까 본토에서는 어렸을 적에 일요일 아침이면 목욕물을 받아서, 바구니 깊숙이 넣고는 잊어버린 사과 껍질처럼 피부가 쭈글쭈글해 질 때까지 욕조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 속에서 상상을 했다. 비누 거품은 빙산이 되었고, 내 무릎은 화산섬으로 변했으며, 성기는 네스 호의 괴물이 되어 이따금씩 수면 위로 코를 내밀었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엄지와 검지로 코를 막으며 잠수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기도 했다. 머리를 물속에 넣고 있으려다가 욕조 안에서 익사할 수도 있을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때처럼 오늘 아침 내 몸은 발만 빼고 거의 다 물에 잠겨 있다. 발은 차가운 타일벽에 기대놓아야 한다. 욕조 속에 담그기에는 이제 다리가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다.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이 식기 시작하면 발가락으로 수도꼭지를 조절해서 더운물을 틀 수 있으니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얼굴 중에서 코와 눈만 물 밖으로 나와 있다. 내 숨은 진공상태로 나온 우주 비행사의 숨처럼 내 안에서 울린다. 또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면서,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는 세상이란 것은 먼 데서 들리면서도 뚜렷한 바깥 소음과 좀더 가까이서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로 간추려졌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별것도 아닌 것. 삶.</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렇게 마음 가는대로 생각할 시간을 갖는 것도 오랜만이다. 뇌는 미친 듯이 빨리 움직이고, 생각은 수도 없이 겹쳐지고, 예전 일과 요즘 일이 정신 없이 뒤섞인다. 어떤 영화도, 어떤 책도 이걸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 지금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마요트의 영상을 본다. 어린 시절의 느낌이 나를 간질이고, 지난 몇 주 동안 있었던 일들이 연달아 지나가고, 오늘 아침 아빠에게 해 줬어야 할 말이 다이빙대 끝에 앉듯 내 혀끝에 올라앉는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곧 할리우드식 아침식사 장면을 상상해 볼 참이었기 때문이다. 내 맥빠지는 어휘, 확신 없는 목소리, 기름지고 여드름 난 피부를 윌 스미스의 건방진 자신감과 바꿔서 말이다. 아빠가 할 말이 없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을 때 대꾸했어야 할 말은 이번에도 너무 늦게 떠오르겠지.</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아니, 대체 뭐가 되려고 이러냐, 위고? 널 어쩌면 좋겠냐? 말 해 봐라, 좀 들어보자! 앞으로 뭘 하고 싶냐?&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무것도 아닌 말 같지만, 아빠가 부모님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로 이 말을 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걱정과 분노, 도발, 경멸, 실망과 애정이 뒤섞인 목소리 말이다.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잡탕인 셈이다. 아빠가 얼마나 쿨하고 나한테 신경을 쓰는지를 보여주는 말과 말투이다. 또 내가 배은망덕한 아들이기는 하지만 언젠가 어른이 되면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게 될 거라고 귀띔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빠의 질문은 아무 대답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죄책감, 의혹, 분노, 실망이라는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누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윌 스미스 빼고 아무도 없다. 그 사람한테야 대사를 써주는 시나리오 작가 사단이 있으니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말을 받아치는 재주라는 건 결국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싸움을 하거나 잠에서 막 깨어나도 머리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다. 진짜 삶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삶에서 우리는 항상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지금 여기 목욕물 속에서 두 시간이나 지나서야 아빠한테 대답할 거리를 찾으려 하는 나처럼, 지난 다섯 해의 필름을 다시 돌려 보고 있는 나처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세상의 끝</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요트에 있을 때, 나는 그곳이 싫었다. 그 섬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떠나온 뒤에야 그곳이 나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쪽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한다. 거의 모두가 그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엄마 아빠가 그곳에서 2년 내지 4년간 살게 됐다고 알렸을 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엄마 아빠가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여동생 리디에게, 우리가 늘 취침등 대신으로 쓰던 조명 지구본을 짚어 거기가 어디인지 보여준 게 기억난다.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사이의 아주 작은 점이었다. 인터넷에서 몇 가지 추가 정보를 찾았다. 마요트, 프랑스령 해외 공동체, 인구 16만 명 남짓, 면적 373㎢, 프티트 테르와 그랑드 테르라는 두 섬으로 구성, 세계 최대 규모의 산호초 군락으로 둘러싸여 있음. 내가 찾아낸 몇 안 되는 사이트에는 종려나무와 바오밥나무, 짙은 밤색 모래사장, 이국적인 꽃, 색색의 물고기 수백 종과 바다거북 사진들뿐이었다. 지상낙원이었다. 일곱 달 후 열네 시간 비행 끝에 파만지 공항에 도착해서 보게 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기술적 결함 때문에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서 대기한 여덟 시간과, 비행기 창을 통해 저 멀리 열기에 흔들리는 스모그밖에 알아볼 수 없던 카이로에 임시 기착한 시간을 빼고도 장장 열네 시간.</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요트까지 직항 편이 없어 우리는 레위니옹을 경유했다. 그 후로 4년간 여러 차례 방학을 통해 잘 알게 될 섬이었지만, 그날은 겨우 기후를 접할 기회밖에 없었다. 비행기에서 밀폐형 통로를 지나 바로 공항으로 갔기 때문에, 바다와 대륙을 수없이 지났어도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전 세계 공항들을 잇는 냉방된 공기밖에 맡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밤에 파만지 공항의 주기장에 발을 내디뎠을 때 충격은 대단했다. 노천 사우나로 갑자기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열기 때문에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는 기분인 데다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습기 때문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밤이 깊어 공항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는 이 끝없는 여행으로 멍해 있었다. 리디는 당시 여덟 살이었고, 나는 엄마 아빠와 함께 공항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승객 행렬을 따라가는 동안 그 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직원들은 세관 창구까지의 길을 표시해 주는 회중전등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불러 대는 소리가 들려와 보니 사람들이 철책 뒤에 모여 도착하는 가족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 사촌, 동료 혹은 이웃으로, 대개 섬의 원주민인 마오레족이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어서 비행기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가족 단위 승객들로 만석이었다.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오는 공무원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해외 파견 근무자를 줄여 &lsquo;파견자&rsquo;, 혹은 마오레족이 백인을 가리키는 대로 &lsquo;와중구&rsquo;라고도 한다. 단수형으로는 &lsquo;음중구&rsquo;, 비행기에서 나오면서부터 4년 동안 나도 음중구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쿵쿵거리며 여권 검사대로 향하는 이 소란스러운 무리에 섞여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오랜 시간 비행 끝에 열대지방에 다다르고 보니, 휴가지에 막 도착한 것 같았다. 사실은 개학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 세계가 뒤엎어지고, 내 인생이 뒤흔들린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다음 시간에 대해서는 급박한 느낌만 남아 있다. 마요트에서 보낸 세월을 통해 알게 된 모든 것에 해당되는 느낌이기도 하다. 모든 게 빨리 움직이는 소란스러운 섬.</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요트를 &lsquo;묘사&rsquo;할 수도,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을 수도 없고, 내가 그곳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할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여러 가지 인상, 뒤죽박죽된 모습, 대체로 상반된 느낌, 도무지 서로 연결하기 힘든 일화들만이 남아 있다. 난 거기서 단지 잠시 머무는 사람, 자기 자신, 과거, 버릇, 편견과 확신에 겨워 그 섬의 찰나적인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lsquo;음중구&rsquo;였을 따름이다. 무거운 과거와 강요된 미래가 한데 뒤섞여 있는 가운데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현재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관을 통과해 짐을 찾고 보니 엄마 아빠의 친구인 알린 아줌마와 장-마르크 아저씨 부부가 마중 나와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빨리, 빨리!&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사람이 서둘러 인사하며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마지막 배를 안 놓치려면 빨리 움직여야 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린 아줌마와 장-마르크 아저씨는 우리 엄마 아빠처럼 중학교 교사이다. 아줌마는 프랑스어, 아저씨는 미술을 가르친다. 엄마 아빠하고는 베튄에서 같은 학교에 근무하며 알게 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은 곧이어 해외 영토 전문가가 되었다. 정확히 얼마 동안인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여러 해 동안 과들루프에 있었고, 마요트에 온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그런 다음에는 퇴직 때까지 레위니옹에 정착했다가 꿈에 그리던 집을 사서 본토로 돌아갈 계획이었다(벌써 진행 중이다). 열대지방에서의 모험을 해 보라고 부모님을 설득한 것도 두 사람이었다. 그전까지 엄마 아빠는 파드칼레 지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경험밖에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짐을 자동차 트렁크 안에 집어넣고, 넷이서 모두 뒷좌석에 올라탔다. 알린 아줌마가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창문 내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장-마르크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우리에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에어컨이 고장 났거든. 마요트에선 모든 게 고장 나지. 곧 익숙해질 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미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땀범벅이었고, 티셔츠는 걸레처럼 쥐어짜기 좋은 꼴로 피부에 들러붙어 있었다. 공항에서 멀어지는 동안 열린 차창으로 들이치는 무더운 공기는 달짝지근한 향을 풍겨 메스꺼울 지경이었다. 알린 아줌마는 차를 빨리 몰았고, 자주 경적을 울렸다. 우리가 지나는 길에는 가로등이 없었지만, 헤드라이트가 도중에 보행자 무리를 비춰 주었다. 사방에 사람, 소음, 목소리 천지였다. 리디는 좌석에 앉자마자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침내, 차가 커브를 돌면서 갑자기 나타난 달 덕분에, 우리가 해안을 따라 달리고 있음을 알았다. 매년 고래들이 산호초로 둘러싸인 얕은 바다인 초호 속에서 번식을 하러 오고, 돌고래를 수십 마리씩 보게 되는 일도 흔하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이런 정보에 매달려서라도 이 섬에서 살고 싶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려고 헛되이 애를 썼다. 바티스트와 니코를 비롯해 이제 전부 나에게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내 친구들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이 섬에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장-마르크 아저씨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했지만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아저씨는 마요트에 대한 모든 것을 10분 안에 다 얘기해 주려는 것 같았고, 그런 열의는 경고로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다 왔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린 아줌마가 경적을 울려 대며 서둘러 부두 끝을 향해 차를 몰고 있을 때 아저씨가 말했다. 그곳에는 고물이 열린 커다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키가 큰 마오레족 해운회사 직원이 너무 늦었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알린 아줌마는 그것을 무시하고 계속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마오레족이 커다랗게 손짓을 하기 시작하자 장-마르크 아저씨가 아줌마에게 멈추라고 했다. 그러더니 차에서 내려 그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무렴, 들어갈 수 있죠. 보세요, 자리도 충분하네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저씨가 마침내 말했다. 그런 다음 알린 아줌마 쪽을 돌아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자! 저쪽, 측면으로!&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오레족은 체념하고는 알린 아줌마가 차를 몰게 내버려 두었다. 바퀴가 배 뒤쪽 승강판으로 기어오르는 순간 차체 아래쪽이 거칠게 덜컹거렸다. 그러더니 차는 단번에 다른 차 두 대 사이에 바싹 붙어 자리 잡았다. 곧이어, 휘파람 같은 긴 소리가 배의 출발을 알렸다. 우리가 방금 넘어온 경사면이 차 바로 뒤에서 들어 올려지더니 배가 둔탁한 엔진 소리와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간발의 차이였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프티트 테르에서 잘 뻔했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린 아줌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프티트 테르에서 그랑드 테르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내 불안을 부추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혼란스럽고, 모든 것으로부터,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배 중심부에는 승용차, 소형 트럭, 스쿠터가 즐비했고, 우리는 승객으로 가득한 통로 쪽으로 올라갔다. 곳곳에 천으로 된 가방, 바나나 송이, 당시에는 이름을 알지 못했던 식물 다발 같은 짐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마무주에 도착한다. 주도 말이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장-마르크 아저씨가 설명해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 멀리, 뱃머리가 가리키는 쪽에 불빛 몇 개가 보였다. 그러나 주도의 규모를 짐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랑드 테르는 그저 푸른 밤하늘 위로 모습을 드러낸 어두컴컴한 덩어리에 불과했다. 불빛이 띄엄띄엄해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비행기를 타고 마다가스카르 상공을 지날 때에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광대하고 황량한 땅덩이들과 희미한 불빛으로 표시된, 점점이 흩어진 도시들이 불과 몇 군데 보일 뿐. 밤에 상공에서 보면 크리스마스 트리와 흡사한 유럽과는 완전히 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위의 많은 승객들은 스웨터나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뭍에서보다야 선선하기는 했어도, 그래도 역시 내 눈에는 너무 더워 보였다. 리디는 내 옆에 달라붙어 젊고 늙은 마오레족 여자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이 머리부터 발까지 잡힌 원색 원피스인 전통 의상을 입고, 얼굴에는 마른 진흙을 얇게 바른 여자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미용팩이었다. 다른 여자들은 본토식 복장이었고, 남자들은 대개 천으로 된 셔츠와 바지를 입고, 대부분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다들 시마오레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프랑스어가 섬의 공식어이자 학교에서 사용되는 언어이기는 했지만, 일상에서는 단연 시마오레어가 가장 많이 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마침내 도착했고, 이번에는 알린 아줌마 차가 가장 먼저 뭍에 내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무주의 거리들은 파만지에서 자우지로 가는 길에 지나온 거리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바글거렸지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오후 다섯 시만 되면 해가 저무는 열대의 밤에 익숙하지 않았다. 프랑스 본토와 도시에서만 자라서 더 그랬을 것이다. 도시의 불빛이 밤을 위협하는 곳 말이다. 마요트에서는 주도 한복판이라 해도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 내가 결코 경험해 보지 못한 어둠이 찾아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살 집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집이 비지 않아서, 열흘 동안 마무주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lsquo;바오밥, 냉방 완비, 탁 트인 초호 쪽 전망.&rsquo; 게스트하우스의 인터넷 사이트 광고 문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장-마르크 아저씨와 알린 아줌마는 길 떠난 지 5분 만에 우리를 이 작고 하얀 집 앞에 내려주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암흑뿐이었다. 그렇지만 말소리가 들렸고, 라디오에서는 최대 볼륨으로 음악이 흘러나왔으며, 염소 울음소리와 아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오밥 게스트하우스 주인인 50대의 마르송 씨 부부가 우리를 맞아 방까지 안내해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피곤하시겠어요, 비행기가 연착했으니.&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피곤하다, 적절한 말이었다. 하지만 세 시간 후에도 나는, 들어올 때 나를 엄습한 냉방 중인 방 안의 상대적인 서늘함에 익숙해진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착하고서 바로 샤워를 했다. 욕실에는 냉방 시설은 없었지만, 천장 가까이 벽에 나란히 뚫린 정사각형 구멍 두 개로 &lsquo;통풍이 되었다&rsquo;. 그 틈으로 바로 옆에서 나는 이웃들의 소리, 음악, 내게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언어가 들려왔다&hellip;&hellip;. 본토를 떠나오기 전, 열대지방 곤충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나는 파드칼레에 살 때부터 거미나 메뚜기를 끔찍하게 싫어한 터라, 마요트에 도착할 때 &lsquo;벌레들&rsquo;이 꽤나 걱정스러웠음을 고백해야겠다. 마요트에는 &lsquo;스콜로&rsquo;라 불리는 왕지네만 빼고는 위험한 곤충이 없다는 사실을 리디와 함께 어느 안내서에서 읽었는데도 말이다. 이 까만 지네의 일종은 아주 작거나 15센티미터 정도 길이인데, 물려도 죽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고통스럽다고 한다. 샤워 부스 안으로 한 발을 넣는데 갑자기 벽 위쪽에 뚫린 구멍 중 하나에서 재빨리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시선을 끌었다. 내 새끼손가락만 한 더듬이 두 개와 엄지손가락 크기의 통통하고 붉은 몸통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자 &lsquo;괴물&rsquo;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나는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번개처럼 샤워를 했다. 벌레가 나와 함께 씻고 싶어할 경우에 대비해 시선은 환기구에 고정한 채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여동생과 방 하나를 같이 쓰게 되었다. 방은 문을 통해 부모님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에는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리디는 벌써 침대에 누웠지만 아직 잠들어 있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우리 여기서 잘 지낼 수 있을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꽃무늬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데 리디가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엄마가 잘 자라는 인사를 하러 들어왔다. 엄마가 우리 둘에게 입을 맞춰 주자 리디가 이번에는 엄마에게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럼, 당연하지, 우리 아가. 내일이면 다 잘될 거란다&hellip;&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엄마가 불을 끄고 나가자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nbsp; 곧이어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같은 소리가 두 번 연달아 들렸는데, 혀를 차는 소리 같았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혀 차는 소리가 다시 두 번 들려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무슨 소리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리디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나도 몰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속삭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나는 침대 머리맡 스탠드를 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곧바로 벌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벽과 천장을 눈으로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불을 끄니 혀 차는 소리가 곧바로 다시 시작되었다. 똑딱&hellip;&hellip; 똑딱&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오빠 옆으로 가도 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리디가 묻더니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리디는 내게 바짝 기댔다. 열두 살인 내가 볼 때 동생은 너무나 작고 가냘파서 한순간 내가 크고 강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뿐, 어둠 속에서 작게 혀 차는 소리가 새로이 들려오자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몇 분이 지나자 리디가 잠들었음을 알아차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리는 멈췄지만, 나는 몇 시간이 지나서야 불안하게 잠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침대에 누워 있자니 심장은 너무 빨리 뛰었고, 귀는 아직도 비행기 엔진 소음으로 윙윙거렸다. 며칠 전부터 먹고 있던 경구용 소아마비 백신 때문에 구역질도 났다. 나는 에어컨이 규칙적으로 웅웅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창문 바로 아래인 듯 아주 가까운 곳에서 여전히 말소리가 들려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려웠다. 무엇이? 멀리 왔다는 사실, 미지의 것, 이 지방의 어둠, 소리, 냄새, 무섭도록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벌레들&hellip;&hellip;. 나는 &lsquo;낯설었다&rsquo;. 난생 처음으로 이 단어의 뜻이 온전히 이해되었다. 나는 내 집에서 멀리, 너무 느닷없이 멀리 떠나와 있었고, 4년간 새롭게 &lsquo;내 집&rsquo;이 될 곳에 와 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의 끝에 와 있는 것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랬다. 거긴 바로 세상의 끝이었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65"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5_%EB%82%98%EB%8A%94%20%EC%82%AC%EA%B3%A0%20%EC%8B%B6%EC%A7%80%20%EC%95%8A%EC%9D%84%20%EA%B6%8C%EB%A6%AC%EA%B0%80%20%EC%9E%88%EB%8B%A4/%EC%A0%80%EC%9E%90%20%EC%82%AC%EC%A7%84.jpg" />미카엘 올리비에</strong><br /> 1968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초&middot;중&middot;고등학교 시절에 피아노와 합창을 공부했다. 그 후 영화 학교에 다녔고 텔레비전 방송 제작 관련 일에 몇 년간 종사했다. 스물다섯 살 부터는 글 쓰는 데만 전력하기 시작하여, 텔레비전과 영화 시나리오 작가, 다큐멘터리 작가로도 일했다. 지은 책으로 『뚱보, 내 인생』『나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었다』『이덴』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윤예니</strong><br />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루앙대학교에서 문화 프로젝트 기획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 문학을 프랑스어로, 프랑스 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7 오전 10:01:00마고쉬의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595" height="9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영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br /> 내 손의 검은 쉬지 않으리라<br /> 영국의 아름답고 푸른 대지 위에 <br /> 예루살렘을 세울 때까지.</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윌리엄 블레이크</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국민의 경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hellip;&hellip; 저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sup>美</sup>나 선<sup>善</sup>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토미 더글러스, 1982년의 대화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저는 목사들이 보통 나랏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나랏일에 적극 참여하였기에 민중들이 그 말을 기쁘게 따랐던 한 분을 저는 기억합니다. 따라서 제가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들과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칼을 빼어 들지 않는다면, 저는 그 분의 이름을 내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저는 이 선거구 주민들을 섬기는 데 저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토미 더글러스, 1933년 11월 4일 첫 후보 지명 연설에서</span></p> <br /> <div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54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jpg" /></div>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br /> An Immigrant Twice Over<br /> 두 나라를 오간 <br /> 어린 시절</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토미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노동 계급 가족 속에서 자라났다. 엄격한 영국의 계급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토미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어려서부터 몸이 작고 무릎 부상에 이은 골수염으로 오래 고생했지만, 캐나다에 이민 가서 우연히 무료로 수술을 받는 기회를 잡은 덕에 무사히 회복된다. 아버지가 군대에 소집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토미 더글러스는 일을 해서 적은 돈이나마 벌어 살림에 보태는 생활을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위니펙의 차가운 바람이 마치 화물 기차가 지나가듯 골목 구석구석 불어 들고 있고, 어린 토미 더글러스는 작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코트가 좀 더 두껍고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썰매를 타기는 했지만 불편하다. 바람은 매섭고, 썰매는 얼음 바닥에 바짝 붙어 서 울퉁불퉁한 길에서 오는 충격이 그대로 척추와 아픈 무릎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 전혀 불만이 없다. 오히려 매일 아침 자신을 썰매에 싣고 얼어붙은 길을 따라 400미터가량 떨어진 학교까지 아무 불평 없이 데려다 주는 참을성 많은 두 친구가 무척 고맙고 존경스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릎의 통증은 토미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 밖의 거의 모든 것은 새로웠다. 토미는 태어난 후 첫 몇 해 동안 스코틀랜드의 폴커크에서 친가 식구들과 함께 살았는데, 토미는 주물 공장에서 일해 온 노동자 계급 대가족의 장손이었다. 토미가 일곱 살이 채 되기 전, 그의 가족은 짐을 싸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캐나다의 신개척지인 위니펙으로 이사했다. 때는 1911년이었고, 세상은 오늘날과 아주 많이 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토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작고 약했는데, 여섯 살에 심한 폐렴을 앓고 난 뒤에는 더 허약해졌다. 그 직후 토미는 바위에 걸려 넘어져서 오른쪽 무릎을 다쳤는데, 그 다친 무릎 때문에 평생 고생했다. 염증이 뼈에까지 퍼져서 골수염이 생겼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다리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병원에 낼 돈은 없었다. 대신 긴 프록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의사가 집으로 왔다. 부엌이 수술실이었고, 조금 전에 가족이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던 식탁이 수술대가 되었다. 클로로포름을 묻힌 거즈 마스크로 어린 토미를 마취한 뒤, 어머니, 할머니, 이웃집 아주머니가 수술을 보조했다. 의사는 무릎 바로 위의 피부를 절개해서 감염된 대퇴골을 노출시켰고, 칼로 감염 부위를 긁어냈다. 의사가 집을 떠나자마자 봉합 부위가 벌어지면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지혈이 될 때까지 가족들은 마음을 졸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더글러스 가족은 이미 불안정한 상태였다. 토미의 아버지 톰 더글러스는 신세계의 유혹에 이끌려 그 가능성을 알아보려고 먼저 캐나다로 가서 위니펙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가 정착을 하면 나머지 가족도 그에게 갈 예정이었다. 그 여정은 토미가 무릎을 다치는 바람에 연기되었고, 두 차례 수술을 더 받고 목발을 짚으며 집과 학교를 오가는 생활을 한 끝에 마침내 1911년 초봄이 되자 다리는 다 나은 듯했다. 토미는 여동생 애니, 그리고 또 한 명의 여동생 이소벨을 임신한 엄마와 함께 글래스고 항에서 배를 타고 혹한 속에서 유빙을 피해 가며 17일 동안 북대서양을 항해했다. 그러고는 낡아빠진 대륙 횡단 열차를 5일 동안 탔는데, 객차 한쪽 끝에는 후덥지근하고 음식 냄새 풍기는 부엌이 딸려 있었다. 객차는 돈을 벌기 위해 광대하고 쓸쓸한 땅이라 불리는 캐나다의 서부로 가는 이민자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니펙에는 더글러스 가족 같은 이민자들이 유럽 각지로부터 몰려들고 있었고, 이들은 수많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들이 주로 정착하는 노스 엔드 지역은 마치 바벨탑 같았다. 톰 더글러스는 글래드스턴 가에 집을 빌렸는데, 그 거리는 톰 더글러스의 아버지, 즉 토미의 할아버지가 존경하던 영국의 전 수상 윌리엄 글래드스턴<sup><strong>1</strong></sup>의 이름을 딴 것이었고, 그곳은 공교롭게도 포인트 더글러스라 불렸다. 그 구역에 영국으로부터 이민 온 가정은 더글러스 일가 말고는 한 집밖에 없었지만, 그런 사실이 골목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톰 더글러스는 그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는 토미에게 말하고는 했다. &ldquo;너는 크라브첸코<strong><sup>2</sup></strong> 아이와 놀잖니. 그건 참 멋진 일이란다. 원래 세상이 그래야 하는 거야. 나는 옆집 사는 가족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하지만 너희들은 함께 자라고, 함께 힘을 합해 일하게 될 것이고, 함께 세상을 만들어 나갈 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C%A3%BC%EC%84%9D1,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아나벨라 가의 유명한 홍등가로부터 단 한 블록 떨어져 있었던 글래드스턴 가의 작은 집은 화장실이 따로 떨어져 있었고, 마당에 있는 펌프로 물을 끌어올려 썼는데, 자그마한 몸집에 쾌활한 토미의 어머니는 항상 토미를 격려했고, 안락한 가정을 꾸몄으며, 집세에 보태기 위해 하숙을 쳤다. 토미는 노퀘이 가에 있는 작은 학교에 다니면서 다리가 괜찮을 때에는 축구를 하고는 했다. 그는 위니펙의 자유가 좋았다. 그는 친구들과 레드 강과 아시니보인 강의 강둑을 따라 방해받지 않고 놀 수 있었는데, 이는 대부분의 땅이 사유화되어서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의 염증이 재발해 그 뒤로 몇 년 동안 대부분 목발에 의지해 지내야 했고, 아동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몇 차례 수술을 더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불행한 시기에 이웃집 아이들이 토미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는 평생 열 살 때 겨울에 친구들이 보인 친절을 생생하게 떠올리고는 했다. 그는 막 병원으로부터 퇴원해서, 목발을 짚어야만 걸을 수가 있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길에 눈과 얼음이 쌓이면 학교에 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토미의 집에 차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텐데, 그 동네에 자가용을 가질 정도로 여유 있는 집은 한 집밖에 없었다. 토미는 훗날 &ldquo;그 차는 경이로운 존재였고, 우리는 주인의 허락을 받아 그 차를 구경하고 만져 볼 수도 있었다.&rdquo;고 회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날 아침,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토미가 동네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출신 친구들이 썰매를 가지고 서 있었다. &ldquo;그들은 어머니에게 저를 매일 썰매에 태워 등하교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rdquo;라고 토미는 회상했다.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순수한 우정과 선의로 그 일을 해 주었다. &ldquo;그들은 영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그들을 다고스<sup><strong>3</strong></sup>, 외국인놈들, 보헝크스<strong><sup>4</sup></strong>라고 불렀지만, 같은 이민자 가정의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고 손을 내민 것은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을 겁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C%A3%BC%EC%84%9D3,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인종차별이나 그 어떤 종류의 차별도 싫어한 토미 더글러스의 신념은 어려서부터 두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 있었지만, 그런 신념은 위니펙의 그 추운 겨울날 이후 더욱 견고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 얼마 뒤 그는 평생 이어진 큰 교훈을 하나 더 얻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토미의 가정 형편은 무척 어려웠다. 스코틀랜드 폴커크의 주물 공장에서는 괜찮은 임금을 받으며 일했던 아버지가 캐나다 위니펙의 벌컨 주물 공장에서는 1주일에 3일만 일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토미가 입원할 때마다 더글러스 가족의 가계에 큰 부담이 되었다. 당시 캐나다에는 공공 의료보험이나 그 밖의 복리후생 제도가 없었다. 토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한 병동에 입원해 있었고, 당시의 일반적인 치료를 받았다. 전문의도 없었고, 일류 의료진은 더욱 없었다. 의사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지만, 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리를 절단해야 할지 여부를 두고 가족이 고심하고 있던 바로 그때,&nbsp; R.H. 스미스 박사라는 한 유명한 정형외과 전문의가 의과대학생들을 거느리고 토미가 있는 병동으로 회진을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스미스 박사는 토미의 침상 옆에 멈춰 서서, 몸이 아프고 집에 가고 싶을 텐데도 쾌활함을 잃지 않고 있는 토미와 몇 마디 농담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 차트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는 실패로 돌아간 시술과 연이은 수술 기록, 그리고 암담한 예후를 살펴보았다. 그는 이 소년의 사례에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토미의 부모가 왔을 때, 스미스 박사는 그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는 토미의 다리를 살릴 수도 있는 실험적인 수술을 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결과 무릎 관절은 영구적으로 강직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토미의 부모는 학생들이 교육 목적으로 수술을 참관하는 데 동의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몇 차례 수술 끝에 그는 제 다리를 고쳐 냈습니다.&rdquo; 훗날 토미는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수술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다. 어른이 되어 토미 더글러스는, 수술 상처가 아문 뒤에 그 유명한 외과 의사가 학생들을 거느리고 와서 다리를 감은 붕대를 풀고 수술 결과를 확인하던 당시 상황을 즐겨 말했다. 스미스 박사는 토미의 다리를 만지고 누르며 상태를 살펴보고는 어느 정도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감탄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ldquo;하지만 이 아이가 앞으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깝네요.&rdquo;라고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어린 소년은 &ldquo;어, 선생님, 저 무릎 굽힐 수 있는데요!&rdquo;라고 소리치고는 실제로 무릎을 굽혀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토미는 다시 무릎을 다쳐 고통받게 되었지만, 당시 스미스 박사의 수술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토미 더글러스는 그 후 30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공을 차고, 권투를 할 수 있었고, 정치 유세의 강행군도 감당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ldquo;당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제가 운 좋게 받을 수 있었던 그런 시술이 그 병동의 모든 아이에게도 제공되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의과대학생들에게 좋은 사례로 쓰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말이죠.&rdquo;라고 회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자신을 구해 준 의사에게 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ldquo;운 좋게 그 의사가 무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았다면 저는 다리를 잃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어떤 소년의 다리나 생명도 일류 외과 의사를 모셔 올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료 서비스에는 가격표가 붙어서는 안 되며, 누구나 개인의 경제력에 관계없이 필요한 의료 서비스는 무엇이든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국가 의료보장 제도의 도입이라는 결과를 가져올 씨앗이, 장차 서스캐처원의 주지사가 되고 캐나다에서 &ldquo;메디케어<strong><sup>5</sup></strong>의 아버지&rdquo;로 불리게 될 이 소년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C%A3%BC%EC%84%9D5.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토머스 클레멘트 더글러스(토미 더글러스의 본명)는 보어 전쟁에서 막 제대하고 온 톰 더글러스와 글래스고로 이주해 온 하일랜드 지역 사람의 딸인 앤 클레멘트의 세 자녀 중 첫째로 1904년 10월 20일에 스코틀랜드 폴커크에서 태어났다. 토미 더글러스의 탄생은 토미의 아버지 톰과 토미의 할아버지 토머스가 화해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할아버지 토머스는 단호한 성격에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원칙주의자였고, 지역에서는 열정적인 웅변가로 알려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할아버지 토머스는 평생을 자유당 지지자로 살아왔고, 한 정치 집회에서 윌리엄 글래드스턴을 소개했던 사실을 평생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의 아들 톰은 남아프리카로부터 전쟁의 공포와 부당함에 넌덜머리가 나서 돌아왔고, 그러고 얼마 뒤,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주의 정당인 노동당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집에서 내쫓았고, 그들은 일 년이 넘도록 왕래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어린 토미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기쁜 마음에 더는 거리를 둘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누군가가 톰의 집 문을 두드렸는데 문 앞에는 할아버지 토머스 더글러스가 &ldquo;아이를 보러&rdquo; 와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뒤 몇 년 사이에 그 노인의 다른 일곱 아들들도 노동당을 지지하게 되었고, 결국 그도 지지 정당을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1944년에 북아메리카의 첫 사회주의 정부의 수반이 될 토미 더글러스는 자연스럽게 그런 정치적인 성향을 물려받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글래스고와 에든버러 중간쯤의 폴커크 인근에는 1297년에 윌리엄 월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과 영국 군이 격전을 벌인 전적지가 있다. 주변의 광산에서 생산된 석탄을 연료로 그 지역에 발달한 철강 산업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 웰링턴 장군이 사용한 대포를 생산했다. 더글러스 집안의 남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주물 공장에서 일해 왔다. 우애가 깊은 대가족이었고, 첫 손자이자 몸이 약했던 어린 토미는 특히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는 노동자였지만 폴커크의 기준으로 봤을 때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할 수가 있었고, 토미는 건강 문제만 빼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글러스 가족은 언덕 아래에 있는 할아버지 소유의 두 채의 돌집에서 살았다. 토미가 태어났을 당시에 그 집은 초가지붕을 얹은 집이었고, 후에 그 초가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벽난로로 난방을 했다. 가족들은 책을 많이 읽었고, 정치와 종교, 철학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는 했다. 토미처럼 영리하고 주의 깊으면서, 건강으로 인한 한계에 도전하고는 했던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에게는 꽤 고무적인 환경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할아버지 더글러스는 철공소 일꾼으로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과 넓은 어깨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주말에는 그림을 그렸다. 글래드스턴을 소개하기도 했던 할아버지는 그의 초상화도 그렸다. 또한 널리 인정받는 아마추어 웅변가였다는 사실이 손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랑받는 민족 시인인 로버트 번스<strong><sup>6</sup></strong>의 시를 수백 편이나 암송했다. 토미는 할아버지를 &ldquo;내가 들어 본 가운데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 중 한 분&rdquo;이었다고 기억했다. 토미의 첫 기억은 화롯가에서 〈섄터의 탬〉<strong><sup>7</sup></strong>을 비롯한 번스의 유명한 시들을 암송하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있는 장면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린 토미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와 민족주의, 평등주의, 번스의 종교적인 열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의 어린 시절 영웅은 13세기에 잉글랜드에 맞서 싸웠던 스코틀랜드의 왕인 로버트 브루스<strong><sup>8</sup></strong>였다. 여러 해가 지나 첫 선거에서 패한 뒤에 토미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로버트가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것은 여섯 번이나 패배를 경험한 이후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3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4_%EB%98%90%EB%8B%A4%EB%A5%B8%EC%82%AC%ED%9A%8C%EB%8A%94%20%EA%B0%80%EB%8A%A5%ED%95%98%EB%8B%A4/%EC%A3%BC%EC%84%9D6,7,8.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의 아버지는 체격이 크고 건장한 사내였는데, 그럼에도 폴커크 집의 작은 정원에서 장미를 기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교회의 목사와 다툰 뒤로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는 장로교인을 부자와 자유당원과 한통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당을 &ldquo;모사꾼이자 위선자&rdquo;이며 노동자의 친구가 아니라고 했고, 토미 역시 같은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열세 살 때 공부를 그만두고 일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가족 중에서 지지 정당을 처음으로 바꾼 것처럼, 자신의 아들은 주물 공장의 일꾼이 아닌 길을 가기 원했다. 그는 아들이 제대로 교육받기를 원했고, 대영제국의 엄격한 계급 제도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랐다. 그는 &ldquo;식민지&rdquo;로 이주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더글러스 가족이 캐나다에서 살기 시작한 지 3년도 채 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영국의 재향 군인이었던 톰은 소집되어 의무 부대에 배치되었다. 남은 가족들은 돈을 벌 사람도 없이 캐나다에 남기보다는 프리토리아 호를 타고 유보트가 오가는 바다를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건너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열 살 먹은 소년에게 그 여행은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들은 글래스고에서 어머니의 부모인 클레멘트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의 외할아버지인 앤드루 클레멘트는 생협 시장에 물건을 나르는 트럭 운전수였고 생협운동을 강하게 지지했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그의 손자는 서스캐처원에서 그 운동에 앞장서게 될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가 장차 아마추어 권투 선수가 될 조짐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나타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의 여느 소년과 마찬가지로 그도 약한 아이를 못살게 구는 아이들과 맞서야 했다. 스코틀랜드 스트리트 스쿨에 등교한 첫 날, 그는 당시 캐나다의 학생들이 보통 입는 대로 끈이 달린 헐거운 반바지와 작고 납작한 모자를 쓰고 집을 나섰다. 그가 거리 모퉁이를 지나 거친 불량배들의 영역에 들어서자 커다란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ldquo;이봐, 캐나다 자식!&rdquo; 아이들이 소리쳤고, 그중 한 명이 그의 모자를 채 갔다. 토미는 작았지만, 몇 년 동안 병원을 드나들면서 통증에는 이골이 나 있었고,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조디 싱클레어라는 덩치 큰 아이가 그에게 뛰어 보라고 했지만, 토미는 거절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뛰지 않으면 친다.&rdquo; 조디가 말했다. 그러나 토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코피가 터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도 즉시 조디에게 반격했지만, 덩치 큰 아이의 싸움 상대가 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방과 후에 토미는 조디와 그의 패거리를 찾아 나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뒤, 토미는 결투를 신청했다. &ldquo;아직 맛을 덜 보았으면 내가 매운 맛을 보여 주지. 준비 됐냐?&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때로는 허세와 근성이 효과를 보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를 두들겨 패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대신에 조디 싱클레어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ldquo;그만하면 됐어, 캐나다 자식.&rdquo;이라고 말하며 그는 깨끗하게 물러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더는 토미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는 없었고, 토미와 조디는 친구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리가 건강해지고 통증이 사라지자 토미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는 공부에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립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잘 따랐고, 할아버지의 배달 일과 말 돌보는 일을 여러 시간씩 도왔다. 시간이 날 때면 교회에 가고는 했는데, 그것은 특별히 신앙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목사들의 멋진 설교를 듣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는 친구 톰 캠벨과 함께 일요일 오후에 글래스고 그린까지 가서 사회주의자들과 가두 연설가들이 기성 사회에 대한 비판을 연달아 쏟아 내는 것을 즐겨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그 자신은 순한 소년이었다. &ldquo;제 주위에는 반항해야 할 만한 사람이 없었거든요.&rdquo; 그는 회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쟁 시기에는 아버지도 안 계셨기 때문에 돈이 궁했고, 토미는 여러 가지 잡일을 해서 학비를 벌었다. 그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은 선원이 되어서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어렸다. 벌이가 가장 좋았던 일은 이발소에서 면도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뻣뻣한 구레나룻에 비누를 바르는 일이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주중 저녁 시간과 토요일 종일 일해서 주급 6실링과 팁을 벌었다. 그는 호감이 가는 소년이었고, 팁을 잘 받았다. 크리스마스에는 주급 외에도 2파운드나 더 벌었는데, 13세 소년에게는 큰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다음 해 여름, 그는 한 코르크 공장에서 주급 30실링을 받는 일자리를 구했다. 공장 주인은 토미를 좋게 보아서 주급이 3파운드인 사무직으로 승진시켰는데, 그 액수는 그의 아버지가 철공소 노동자로 받는 것보다도 컸다! 토미는 그 공장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가을이 되었어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와서 그 사실을 알고는 노발대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전쟁은 거의 끝나 가고 있었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1919년의 첫 날에 막 14세가 된 토미의 가족은 다시 한 번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캐나다에 영구적으로 정착할 것이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span style="color: #808000">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토미 더글러스는 누구인가?|</b></span></p> <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Tommy Douglas 1904&sim;1986<br /> 토미가 열여덟 살에 캐나다 매니토바 주의 아마추어 권투 라이트급 챔피언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렸을 때 늘 병약했으며, 골수염으로 다리를 잘라 내기 직전까지 가야 했던 토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미는 한 의사의 도움으로 다리를 살릴 수 있었고, 그 이후로 자신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러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무상 의료에 대한 꿈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935년 하원의원이 되어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토미는 목회 활동을 했는데, 그때 대공황과 에스테반 항쟁, 리자이나 항쟁을 겪으면서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 참지 못하고 파업을 하였지만 폭력적 진압 앞에 무너져 버린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비참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던 토미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1944년 선거에서 토미가 속해 있던 사회주의 정당인 CCF가 집권을 하면서 토미는 서스캐처원 주지사가 되었고, 이때부터 다양한 공영 기업들을 만들어 서스캐처원의 경제 자립도를 높이고,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 수 있게 하였으며, 많은 주민이 무상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결국 1962년, 의사들의 대대적인 파업 공세에도 불구하고 서스캐처원 주에서 전면적인 무상 의료를 이루어 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72년에는 캐나다 모든 주에 무상 의료가 도입되었다. 토미 더글러스는 2004년 캐나다 방송협회 CBC가 전국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lsquo;가장 위대한 캐나다 사람&rsquo;으로 뽑힌, 캐나다 사람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정치인이다.</span></span></p> <br /> <p>&nbsp;</p> <hr />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해제</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토미 더글러스와 캐나다 메디케어는 <br /> 지금 한국 사회에 무엇을 말하는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right">우석균 | &lsquo;건강과 대안&rsquo; 부대표</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과 그의 삶은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이 대중적으로 조금이나마 알려지게 된 계기는 영화 《식코》였을 것이다. 이 영화에는 마이클 무어 감독이 캐나다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답은 바로 토미 더글러스다.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이스하키 선수 웨인 그레츠키나 팝 가수 셀린 디온보다도 더 존경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건강과 대안&rsquo;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무상 의료 도입 과정을 공부하다 캐나다에서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하는 과정에 상당히 특이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토미 더글러스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졌다. 캐나다의 무상 의료 도입 과정에서 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과 그가 속했던 CCF와 신민당이라는 정당의 역할은 핵심적이었다. 영화 《식코》의 장면이 과장은 아니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토미 더글러스는 찾아볼수록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토미 더글러스의 연설을 바탕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마우스랜드》의 도입부에서, 《24》라는 미국 드라마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키퍼 서덜랜드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이야기했듯이 토미 더글러스는 빼어난 연설가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관심은 이 책을 옮긴 김주연 선생님과 함께 토미 더글러스 전기의 여러 판본을 읽어 보고 번역까지 해 보자는 구상으로까지 이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은 삶의 이력 자체가 극적이고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삶이 캐나다 무상 의료의 도입과 나아가 캐나다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진보 정치의 역사라는 점에서 지금 여기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것이 이 책을 한국 사회에 소개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 더글러스라는 인물의 개인사는 캐나다의 역사라는 배경 위에서 볼 때, 특히 이민자들의 역사, 캐나다 진보 정치의 역사와 함께 볼 때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그리고 캐나다 무상 의료의 도입 과정, 캐나다 진보 운동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약간의 설명, 캐나다 및 전 세계의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한 설명은 토미 더글러스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동시에, 지금 한국 사회에서 한창 논의되고 있는 무상 복지를 제대로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7. 토미 더글러스와 오늘의 한국</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 더글러스의 삶은 경제 위기의 시기에 과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토미는 1930년대 캐나다의 대공황으로 가장 타격을 심하게 입은 지역에, 이웃을 돕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소박한 꿈을 품은 젊은 목사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배고프고 굶주려 옷도 못 입는 가족들이었고 몸이 아파도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웃들이었다. 또, 기아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다 파업을 하였지만 결국 구속과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만 겪었던 노동자들이 토미의 주위에 있었다. 그가 목사직을 그만두고 사회운동과 정치로 뛰어든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1930년대의 대공황에 비견되는 세계 경제 위기가 우리들의 목전에 다가와 있다. 이러한 시기에 토미 더글러스는 우리에게 과연 진정으로 이웃을 돕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물음은 오늘날 진보 정치를 자처하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가 지도부로 있던 CCF 그리고 신민당은 2011년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소수당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토미는 진보 정치의 길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전후 사회적 분위기의 급진화라는 기회가 왔을 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캐나다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말 그대로 기적을 창조해 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 더글러스는 자유당 또는 보수당으로 오라는 제의를 숱하게 받았고 또 그의 정치적 동지들 중에는 거대 정당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보 정치를 일생 동안 버리지 않았고 바로 그러한 진보 정당의 존재 때문에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과 가장 긴 영토를 공유하는 나라인 캐나다에서 사회복지 제도의 정착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양대 정당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았으며 원칙을 관철시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소수로 남아 싸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AFTA가 도입된 뒤 의료 민간화가 이루어지고 복지 제도가 축소되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사실상 FTA 체제 아래서 복지 제도의 새로운 도입은 매우 어렵다. FTA가 투자자의 권리장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자유무역협정이 기업에게 국가와 맞먹는 권한을 제도적으로 부여하고 또 무역 보복이라는 막강한 권한으로 재산권을 어떠한 권리보다도 더 우위에 놓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오는 헌법 1조를 부정하고 모든 권력을 자본에 귀속시키는 것이 자유무역협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다른 쪽으로는 복지 제도의 강화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FTA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한미 FTA가 존재하는 한, 결코 한국에서 복지 제도의 강화나 민주주의의 전진을 이루어 낼 수는 없다. FTA를 우회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미 FTA 때문에 복지 제도의 추진을 애초에 포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한미 FTA는 자율적 개방, 즉 자율적 민간화와 결합되었을 때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낸다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낸 보고서에서도 이미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FTA 시대에는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는 자발적 민간화 시도를 막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일단 이루어진 민간화는 다시 되돌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복지 제도의 강화, 즉 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강화를 두려움 없이 추진하는 것이 한미 FTA 시대에는 더욱 중요하다. 한미 FTA와 복지 제도의 강화가 충돌한다면 그것은 한미 FTA 폐기의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토미 더글러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과연 어떻게 진보적 사회 정책, 무상 복지 제도를 이루어 낼지 묻고 있다. 그는 서스캐처원의 의사들하고만 싸운 것이 아니라 사실 북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의사와 병원협회, 기득권층과 싸웠다. 그는 일부 타협을 하기는 했지만, 무상 의료 제도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정면으로 돌파하였고 양보를 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 한국에서도 이와 거의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무상 복지와 그 핵심 과제인 무상 의료에 대해 보수층의 집중적인 포화가 가해지고 있다.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이나 &lsquo;획일적 진료&rsquo; &lsquo;빨갱이 의료&rsquo; 같은 시대착오적인 논리가 등장하고 보수 언론과 보수 여당, 의사협회나 그 외 전문직 지식인들이 거의 총동원되다시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할 때 의사들이 찬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나라에서 의사들의 파업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의약 분업을 사회주의라고 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의사들의 파업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우리는 무상 의료, 무상 복지에 대한 수많은 거짓말에 부딪치고 있다. 무상 의료는 돈이 많이 들어서 나라가 망하고 월급의 반을 내야 한다는 협박이 벌써부터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무상 의료나 그에 가까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이미 국민 소득 1만 달러도 못되는 시절에 무상 의료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당장 무상 의료를 시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무상 의료를 시행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물어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우선 무상 의료를 시행하면 부자들과 기업이 세금을 더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상 의료를 하는 나라들은 소득에 따른 누진세를 시행하고 기업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더 지도록 하여 세금을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이 내게 한다. 무상 복지와 무상 의료는 사회 정의라는 원칙에 입각한 조세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복지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기 위해서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더 내라고 할 수는 없다. 정부가 쓸데없는 토건 사업이나 국방 사업에서 돈을 줄이고 또 부자들과 돈이 많은 기업들에게서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한다. 한국에서 무상 의료가 지금까지 시행되지 않은 이유는 부자들과 기업들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을 회피하려고 악선전만 하고 실현 가능한 복지 제도를 도입하지 않아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상 의료는 바로 평등한 사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것이 사회적으로 현실이 되면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lsquo;말이 많아지기&rsquo; 시작한다. 돈이 없는 사람이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거나, 노동자라도 노후 보장은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말이 많아진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때문에 &lsquo;하나의 요구를 들어주면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rsquo;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기업과 보수적인 정권들은 무상 의료는 절대로 안 되며 나라가 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망하는 것은 그들이지 나라가 아니다. 이 때문에 무상 의료와 무상 복지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진보 정당들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진보 정당들이 집권했을 때 무상 의료가 도입되었고 또한 진보 정당이 장기집권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무상 의료가 한번 도입되고 나서 다시 후퇴한 나라는 쿠데타로 민주주의가 완전히 파괴된 칠레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다수의 노동자와 대중의 권리 의식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하는 보수 정당들과 보수 언론들에게 &lsquo;무상 의료&rsquo;는 무서운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상 복지 제도나 무상 의료가 실현되면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 노후 보장을 빌미로 돈을 못 버는 자본들이 생기게 된다. 당장 대형 병원들이 지금처럼 떼돈 벌기가 쉽지 않게 된다. 무상 의료 제도는 당연히 대형 병원을 반대한다. 또 무상 복지 제도가 도입되고 사회복지 제도가 갖추어지면 사람들이 민간 의료보험이나 노후 연금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기업을 운영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사실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보험 회사들이 더 이상 민간 보험을 팔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모든 재벌 기업은 보험 회사를 한 개 이상 가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보수적 정권이나 정당, 그들을 대변하는 언론, 시민들의 평등 의식이 커질까 봐 두려워하는 재벌들, 사람들의 건강으로 장사를 해서 폭리를 취하고 있는 대형 병원이나 보험 회사, 제약 회사들을 제외하고는 무상 의료를 시행해서 손해 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오히려 모든 노동자와 서민이 의료비 걱정 없이 살 수 있고 치료비 때문에 차별받지 않으며 살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무상 의료와 무상 복지를 실현할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저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나 선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nbsp;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rdquo; 이 책의 맨 앞에 나오는 토미 더글러스의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요즘 &lsquo;정의&rsquo;와 &lsquo;공정 사회&rsquo;를 이야기하는 많은 정치인을 본다. 그러나 한 사회에서 배를 곯고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치료받지 못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가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무상 급식과 무상 의료는 바로 이러한 정의를 위한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도 점심은 굶지 않게 하자는 것, 아무리 돈이 없어도 최소한 아픈 사람은 치료받게 하자는 것, 어떤 집안에 태어났어도 교육받게 하자는 것, 그것이 무상 급식이고 무상 의료이며 무상 교육이다. 사실 이러한 것 없이 한 사회의 정의와 공정함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한 사회가 야만적인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인 무상 의료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토미 더글러스 자신도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해 &ldquo;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rdquo;라고 회상했을 정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장 기본적인 가치, 인간의 생명과 건강이 돈이나 이윤보다 중요하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싸워 왔다.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한국의 종로와 광화문을 메웠던 1987년과 2008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거리와 광장으로 나와야 했고, 칠레의 아옌데에서 쿠바의 체 게바라, 그리고 토미 더글러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과 목숨을 바쳐야 했다. 오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상 의료로 가는 길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고, 또한 앞으로도 쉽지 않은 길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고, 모두가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ldquo;법이 그냥 통과되어 무상 의료 제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rdquo;고 토미 더글러스는 이야기한다. 사람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과정과 투쟁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무상 의료를 하고 있는 다른 많은 나라도 반대 세력의 온갖 악선전과 탄압에 맞서 길게는 100년, 적어도 50년에 걸친 투쟁 끝에 무상 의료를 이루어 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노동자와 서민도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파업을 통해 &lsquo;전 국민 건강보험&rsquo;을 이루어 낸 역사를 갖고 있다. 이제 또 한 발자국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서스캐처원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루어 냈듯이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그 힘은 분명 있을 것이다. (무상 의료 제도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lsquo;건강과 대안&rsquo; 홈페이지 참조.)</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장 전문, 해제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데이브 마고쉬 Dave Margoshes</strong><br />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리자이나에 살고 있다. 마고쉬는 기자와 신문 편집자로 20년 이상 일했고, 여러 해 동안 언론학 강의를 했다. 그는 여전히 자유기고가로 글을 쓰며 《웨스턴 리빙》에 칼럼을 연재하고 《더 밴쿠버 선》에 서스캐처원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전하고 있다. 소설집 《탐색하는 우리(We Who Seek)》로 1996년 프레리 파이어 단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되고 스티븐 리콕 상을 받았다. 또한, 그롤리에 출판사가 출간한 중학교 교재 《디스커버 캐나다》 시리즈의 서스캐처원 주 단원을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주연</strong><br /> 가정의학과 전문의이며, 노숙자 진료소 &lsquo;희망진료센터&rsquo;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현재,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 연구공동체 &lsquo;건강과 대안&rsquo;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건강권과 의료 접근권에 관심을 가지고 《권력의 병리학》 《대학주식회사》 《NGO를 위한 건강권 매뉴얼》 등을 번역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해제<br /> 우석균<br /> </strong>가정의학과 전문의로 보건의료정책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서울에서 의원을 운영하며,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과 &lsquo;건강과 대안&rsquo; 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자문위원, 2008년 촛불항쟁 당시 광우병 전문가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6 오전 11:08:00박노자의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5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3_%EB%8B%B9%EC%8B%A0%EC%9D%84%20%EC%9C%84%ED%95%9C%20%EA%B5%AD%EA%B0%80%EB%8A%94%20%EC%97%86%EB%8B%A4/%EB%8B%B9%EC%8B%A0%EC%9D%84%EC%9C%84%ED%95%9C%EA%B5%AD%EA%B0%80%EB%8A%94%EC%97%86%EB%8B%A4_%ED%91%9C%EC%A7%80_60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머리말</strong><br />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국가의 실체를 직시한다</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lsquo;국가주의&rsquo;라는 말은, 요즘 보수 사이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없다. 국가보다는 다국적화된 거대 자본 위주의 시장적 사회&middot;경제 질서, 즉 신자유주의가 보수들의 이념이 되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좌우간 &lsquo;멸사봉공&rsquo;, &lsquo;애국애족&rsquo; 류의 표현은 이제 &lsquo;조국 근대화&rsquo; 프로젝트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 같다. &lsquo;조국 근대화&rsquo; 시절 국가주의의 화신처럼 보이는 박근혜가 한때에 최고 인기를 누리는 정치인이었지만, &lsquo;성공적&rsquo;인 사업가인 안철수가 그녀에게 성공적으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제 &lsquo;국가관&rsquo;보다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는 &lsquo;능력&rsquo;이 훨씬 더 큰 &lsquo;매력 포인트&rsquo;가 된 모양이다. 박정희나 이순신은 여전히 세인들의 머릿속에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지만, 요즘에는 &lsquo;국가 권력자&rsquo;나 &lsquo;국가에 충성을 다한 장수&rsquo;보다는 &lsquo;효율적인 경영인&rsquo;으로 더 부각되는 것 같다. 확실히 공업화 초기와 같은 모습의 국가주의는 점차 박물관 진열대의 유물이 돼가는 느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lsquo;국가&rsquo;라는, 근대가 만들어낸 유사종교의 주박(呪縛)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lsquo;주의&rsquo;까지는 붙이지 않지만, 국가는 여전히 우리 시좌(視座)의 맨 중심에 놓여 있다. 국내에서 국가 최고 통치자 선거(대선)와 국가 입법부 선거(총선) 등이 한꺼번에 있는 2012년, &lsquo;진보&rsquo;까지도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지 않은가? 정권이 극우에서 자유주의 우파로 넘어가든, 혹은 계속 극우의 차지가 되든, 민중의 삶과 연결된 경제&middot;사회 정책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외환위기 이후 15년 동안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lsquo;국가의 지도자&rsquo;와 국정을 움직일 &lsquo;국회의원&rsquo;이 누가 되는가는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서구의 경험으로 본다면 공산당 등 급진 진보가 입각(入閣)하거나 조각(組閣)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 성격이 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꼭 민중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국정이 흘러가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1996~1998년 이탈리아는 공산당 후계 정당 중의 하나인 좌파민주당(PDS)이 참여하고, 그 좌파민주당보다 더 급진적인 또 하나의 공산당 후계 정당인 재건공산당(PRC)이 지지한 좌파&middot;중도 연립내각이 통치했는데, 이들이 주로 한 일은 결국 2011년 경제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의 민생경제를 파괴한 원인이 된 유로존 합류를 위해 각종 신자유주의적 준비 작업(예산 삭감과 적자 폭 감소 등)을 하는 것이었다. 이미 개혁주의로 흘러가긴 했지만, 주로 조직 노동자를 지지기반으로 삼는 공산당이 국정에 적극 참여한다 해도 자본주의 국가는 그 생리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산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아닌 민주통합당 같은 자유주의 우파의 &lsquo;국정 주도권&rsquo; 획득에 일희일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노조가 비정규직 조직화 사업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영세업자나 청년과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지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개혁의 전제조건이 될 &lsquo;민중운동&rsquo; 조직화와 위력화 차원에서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풀뿌리 민중의 조직화 같은 &lsquo;하찮은&rsquo; 이야기보다 &lsquo;거대&rsquo; 전국 정치판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들린다. 국가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기에 이렇게 되는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기본적으로 &lsquo;우리&rsquo; 국가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국적(또는 미국 국적)의 약탈적 자본과 이들이 &lsquo;자유무역&rsquo;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생계파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길 원한다. 문제는, 노무현 정권이 입안&middot;추진하고 이명박 정권이 비준&middot;발효한 한미FTA의 사례에서 보듯이, 극우냐 자유주의 우파냐의 구별 없이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주류 정치세력은 하나 같이 바로 신자유주의적인 &lsquo;자유무역&rsquo;의 장려에 &lsquo;국가&rsquo;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가에 &lsquo;시장으로부터의 보호&rsquo;를 주문하고 싶지만, 국가야말로 시장주의적 민생파괴의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지배계급의 &lsquo;사무총국&rsquo;과 같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보면 이는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는 시장, 즉 대자본의 고도의 도구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이상, 자본의 도구가 될 집권 정치인들이 어느 정당 출신이냐보다는, 자본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힘인 민중운동의 발전 상태가 어떤지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lsquo;국가&rsquo;의 주술에 걸려 있는 사람들에게 이를 설명하기란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가주의는 갔지만, &lsquo;조국 근대화 프로젝트&rsquo;의 시대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인 병영국가는 어디 가지 않았다. 고문이 없어지고 형량이 줄어들었을 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민중적 교파의 신도를 위시한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가고 평생 이등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병영사회의 규칙은 그대로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주 쉽게 망각된다. 군사주의 선전이 한국 자본과 함께 고도로 발전(?)되어서 그런 것인가? 이제 &lsquo;멸사봉공&rsquo; 이야기를 듣기는 쉽지 않겠지만, 인터넷 포털 뉴스를 볼 때마다 군 복무 중인 인기 연예인이 군복을 입은 모습으로 &ldquo;대한 건아답게 군 생활을 잘한다&rdquo;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이 밝은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군 복무는 &lsquo;남자의 당연한 의무&rsquo;가 된다. &lsquo;군복을 입은 인기 얼짱&rsquo; 덕분에 군의 의무적인 살인 교육이 &lsquo;쿨하게&rsquo;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신을 유순하게 만드는 그 살인 교육의 &lsquo;효율성&rsquo;을, 이 사회의 실질적인 주인인 자본도 이제 탐낸다. 회사마다 직원들을 해병대 캠프에 보내거나 군대식 극기훈련을 시키는 게 인기 있는 &lsquo;사기 진작 방법&rsquo;으로 통한다. 다수가 군에 갔다 오거나 적어도 군대와 별반 다를 게 없는 &lsquo;합숙 교육&rsquo;을 받아본 사회에서, &lsquo;군기&rsquo;는 사회의 주된 문화적 코드가 되어버린다. 회식 자리에서 상사의 구령에 따라 일제히 일어나 &ldquo;위하여!&rdquo;, &ldquo;건배!&rdquo;를 큰 소리로 외쳐대는 월급쟁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삶에 스며든 군대의 살기를 그대로 발견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광경을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lsquo;국가&rsquo;에 주박되어 있는 정도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일사불란한 의례적 행동까지 국가에 대한 거의 무의식적으로 의식화됐다 싶은 믿음과 군사주의는 이미 우리 속살에 배인 일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일상은 보통 반성적 고찰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각의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lsquo;민주화&rsquo;된 국가는 내부적으로 폭력을 훨씬 덜 쓰게 되는 만큼 외부적으로도 과거의 권위주의적 국가에 비해서 훨씬 덜 호전적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시각이야말로 &lsquo;국가에의 주박&rsquo;의 극치라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소외된 &lsquo;타자&rsquo;에 대한 국가의 내부적 억압기구(경찰 등)의 태도는 여전히 극도로 폭력적이다. 단, 구미권에서는 주요 폭력의 표적이 되는 소외되는 타자의 자리에 &lsquo;토박이 노동자&rsquo; 대신 인종적 혹은 문화적으로 다른 이민자 등이 들어선 것뿐이다. 물론 쌍용자동차 투쟁의 폭력적 진압이나 용산 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국내에서는 여전히 &lsquo;토박이 노동자&rsquo;도 &lsquo;대들기&rsquo;만 하면 크게 얻어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의 본산쯤 되는 미국이 냉전 종식 이후 감행한 모든 침략(소말리아, 세르비아, 이라크, 아프간 등)을 생각해보면 자본주의적 국가의 틀 안에서 제도적 민주주의가 군사주의와 얼마나 호환성이 좋은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최근 미군의 침략 현장마다 공범 내지 종범으로 열심히 나서고 있다. 민주화가 다 됐다지만, 전 세계에서 수감된 병역거부자의 약 90%가 매년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다. 진정한 민주주의, 즉 노동자의 일터 관리까지 포함하는 직접적인 민주주의가 실행되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부르주아적 &lsquo;제도민주주의&rsquo; 또는 &lsquo;의회민주주의&rsquo;가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믿음은 유해한 허상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국가의 실체와 함께 국가폭력의 실체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무엇보다 그 폭력이 여태까지 어떻게 합리화되고 낭만화되어왔는가 하는 &lsquo;과정&rsquo;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불교부터 기독교까지 애당초 평화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세계종교들이 어떻게 해서 군사주의와 결탁하게 됐는지, 《일리아드》부터 영화 &lt;람보&gt;나 &lt;300&gt;까지 군사적 폭력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낭만화되어왔는지, &lsquo;폭력적 남성성&rsquo;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고정화되어왔는지도 이 책의 주된 초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국가폭력과의 투쟁이 세계사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조감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가폭력과의 투쟁은 결국 계급사회와의 투쟁, 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한 투쟁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총체적인 반계급&middot;반자본 투쟁의 과정에서도 특별히 국가폭력과의 투쟁에 중점을 두고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명백하다. 현재의 교육제도나 매체 등이 갖는 특성 때문에 다수에게 대대적으로 계급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수많은 도시, &lsquo;적&rsquo;을 포로로 잡아 학대하거나 그 시체 위에 오줌을 싸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는 미군을 보면 의분을 느낄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본능적으로 전쟁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 다수가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만이 전쟁의 종식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 사회의 이념지도는 다소 바뀔 수 있을지 모른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다수의 생각은 하나의 물리력이 되니, 이와 같은 세계관의 변화가 결국 사회&middot;정치적인 진보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2월 박노자</p> <p style="text-align: center">&nbsp;<img width="300" height="218"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3_%EB%8B%B9%EC%8B%A0%EC%9D%84%20%EC%9C%84%ED%95%9C%20%EA%B5%AD%EA%B0%80%EB%8A%94%20%EC%97%86%EB%8B%A4/%ED%86%A0%EB%81%BC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국가는<br /> 무엇인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국가는 누구의 편인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과거에 비하면 &lsquo;성역 없는 시대&rsquo;, &lsquo;비판의 시대&rsquo;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우리의 비판적 사고의 폭이 넓어졌다. 1990년대 이후 계속된 제도적 민주화에 힘입은 바 크다. 정부는 능히 비판해도 종교세력, 특히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기독교(개신교)를 비판하기는 어려운 게 과거의 사정이었다. 하지만 소망교회 출신의 대통령이 인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 덕분인지, 예수보다 황금의 신인 맘몬을 더 숭배해서인지, 특유의 배타주의로 어쩌면 북조선을 능가하는 폐쇄성과 권력 세습을 보여서인지 한국 주류 교회에 대해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1980년대는, 활동가 중 감옥에 가느라고 군대에 가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운동권마저도 &lsquo;군대에 갔다 와야 남자가 된다&rsquo;는 식의 통념에 대해 이렇다 할 만한 담론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사이의 선후배 관계나 남녀 관계 형태가 어쩌면 군사주의 문화의 영향을 꽤 받았다고 비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제는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군사문화에 대한 지탄이야말로 사회운동의 통념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1980년대에 &lsquo;민족&rsquo;과 &lsquo;애국&rsquo;은 좌우를 불문하고 신성시되는 영역이었지만, 노무현 정권 이후로는 &lsquo;단일민족&rsquo;과 같은 언사를 정부에서마저도 더 이상 거의 쓰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lsquo;국사&rsquo;와 같이 &lsquo;민족&rsquo;을 제외하고서는 그 본령의 의미를 상실할 것 같은 일부의 &lsquo;내재적으로 민족주의적인&rsquo; 학문만 빼면 &lsquo;탈(脫)민족&rsquo;은 거의 주류인 듯하다. 종교도 군대도 민족도 다 상대화된 이 시대에, 우리 비판 정신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도 여전히 관습적으로, 별다른 비판적 검토 없이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예컨대 개별 정부, 즉 한반도 남반부에 실재하고 있는 구체적인 국가인 남한 정부까지는 우리가 쉽게 비판적으로 해부한다. 친일파 등 국내 기득권 세력과 미국 등 외세가 결탁해서 이루어진 남한의 건국 과정이나 반공 규율사회라는 과거의 특징부터, 재벌의 해결사처럼 행동하면서 재분배에는 매우 무능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반(反)민중적 성격까지 모두 어렵지 않게 비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남한 정부에 대해서 우리는 &lsquo;국가폭력&rsquo;이라는 용어를 자주 쓴다. 해방 직후의 1946년 10월 민중투쟁의 진압이나 제주도, 여수, 순천에서의 저항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에서부터 최근의 용산 참사까지, 국가폭력은 말 그대로 남한의 역사를 관통하는 주된 코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국가폭력을 비판함과 동시에, 우리는 통상적으로 국가에 너무나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우리가 강력하게 요구만 하면 국가가 비정규직 양산을 정지시킬 것이고, 반값 등록금 실천부터 시작해서 기초적인 복지망을 구축, 확대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일면으로 십분 이해될 수도 있는 태도다. 국가는 결국 우리 모두가 내는 세금을 관리하는 기관들의 총칭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납세자가 연대해서 이 기관에 세금의 합리적인 이용을 요구해 그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역설적이게도 국가는 우리에게 &lsquo;국가폭력&rsquo;의 주체로 보이는 동시에 시장의 폭력성을 잠재울 사회정책을 실시할 &lsquo;선의&rsquo;의 주체로 보이기도 한다. 국가폭력의 규모가 다 밝혀진 이 시대에 근대적 경제 발전에 있어서의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케임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 류의 &lsquo;제도학파&rsquo; 저서들이 잘 팔려 사회적인 공감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국가의 폭력성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사회&middot;경제의 &lsquo;합리적인 조절자&rsquo;로서의 국가에 가장 큰 희망을 거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시절의 국가 경영 경험에 대해서 지금도 비판적 성찰보다 자화자찬을 더 많이 하는 유시민, 문재인 류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렇다는 것이야 놀랄 일도 없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에 합류한 노회찬, 심상정 같은 사민주의 우파 정치인들까지도 현존의 국가를 &lsquo;복지국가&rsquo;로 개조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ldquo;밉고 미워도 다시 한번&rdquo; 국가의 힘에 기대보자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국가는 합리적 조절자인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국가는 정말 사회의 계급 갈등에 중립적인 &lsquo;합리적 조절자&rsquo;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국가폭력이란, 국가의 본질과 꼭 연결돼 있지는 않은 &lsquo;공권력의 남용&rsquo; 정도인가? &lsquo;시민&rsquo;의 견제에 순치된 국가는 정말 &lsquo;복지사무소&rsquo;와 같은 순기능만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답을 하기 전에 일단 두 가지의 단서를 달아야겠다. 첫째, 민중의 여론과 압력에 밀리는 상황에서, 국가나 국가 산하의 지역자치단체 등은 당연하게도 민심 수습 차원으로 가끔 옳고 좋은 일도 할 수 있다. 서울에서의 학교 무상급식이나 학생인권조례, 체벌금지 등이 최근의 사례가 되겠지만,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의 복지국가 건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새로운 장기 주기(周期)의 시작 단계였으므로, 성장률이 높아 이윤 마진도 비교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살려 경제발전에 추가적 탄력을 주고, 파시즘 패배 이후에 전례 없이 높아진 노동자들의 투쟁적 계급의식을 무마시켜 체제에 대한 지지를 확대하려는 차원에서, 그 당시 국가의 노동자 복지에 대한 투자는 거의 불가피하게 보일 정도로 당연했다. 물론, 동기와 과정이 어떻든 간에 복지국가 건설의 과정에서 유럽 노동자들이 역사상 최초로 몇 주에 걸친 여름휴가부터 자녀의 대학 무상교육 수혜까지 맛볼 수 있게 된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둘째, 꼭 계급적 인식의 고양과 투쟁의 성과가 아니더라도, 어떤 특별한 역사적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는 (비록 민중에 매우 불리한 방식일지라도)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남한의 권위주의적 정권이 (비록 1970년대 말까지 앞서 갔던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극을 받아 불가피하게 &lsquo;북한 따라잡기&rsquo;를 한 측면이 확연하지만) 특정 산업 부문의 집중투자를 통해 공업화라는 역사적인 과제를 단기간에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단, 분배를 거의 전제하지 않아 극도로 불균형하고 착취적인 세계 최장의 노동 시간과 세계 최고 강도의 살인적 노동에 기반한 성장이, 남한을 &lsquo;중진국&rsquo;으로 만드는 동시에 결국 다수의 남한 민중을 영구히 불행한 피해자로 만든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본다면 &lsquo;국가 주도의 공업화&rsquo;라는 말은 분명히 성립된다. 그렇다면 국가란 광범위한 의미의 &lsquo;진보&rsquo;에 보탬을 줄 수 있단 이야기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에서 남한과 같은 &lsquo;성공 사례&rsquo;를 가지고 국가의 역할을 논하는 것은 다소 무의미해 보인다. 1960~1970년대라는 기간만 집중적으로 봐도 남한과 대만 등 일부 &lsquo;성공 사례&rsquo; 이외에는 너무나 많은 실패의 사례가 보이기 때문이다. 남한은 개발독재였다면, 최고지배자 모부투 세세 세코(Mobutu Sese Seko, 통치 1965~1997)가 가진 (50억 달러 정도의) 스위스 은행 계좌만 성장(?)하고 나라는 여전히 자원 공급만 가능한 빈국으로 남은 자이르(콩코민주공화국의 전 이름)와 같은 &lsquo;반(反)개발 독재&rsquo;의 사례도 있다. 칠레의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통치 1974~1989)는 박정희와 정치적 성향이 너무나 흡사한 초강경 반공주의, 백색테러의 화신이었다. 하지만 칠레 경제는 남한과 달리 1973년 쿠데타 이후로 발전이 아닌 퇴보를 거듭해 1977년의 산업 생산량은 1968년의 수준에 불과했다. 1980년, 실업률 25%의 칠레는 발전이 아닌 대중적 빈곤, 대량 생계형 이민, 급격한 생산력 퇴화의 나라였다. 실제로 세계적 차원에서 본다면 1960~1970년대에 개발에 성공한 자본주의적 개도국보다 비참한 실패의 경우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문제는, 개별적인 &lsquo;성공&rsquo;과 &lsquo;실패&rsquo;를 넘어 자본주의적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논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논리를 발견하자면 좋든 싫든 불가피하게 국가의 계급적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지배계급의 사무총국</b></p> <p style="text-align: justify">본격적인 사회혁명을 거쳐 구(舊)지배층이 해체된 일부 사회를 예외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국가의 주요 기구들은 대부분 권력을 행사하여 한 사회 지배구조의 골간을 이루기에 해당 사회의 지배계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을 수 없다. 필리핀이나 중남미처럼 지주의 자녀들이 장교나 고급관료가 되어 국가를 지주계급에 유익한 방향으로 통치하든, 권위주의 시대의 남한처럼 일제시대의 관료 출신과 해방 이후 육사&middot;서울대&middot;미국제 박사 출신들이 새로운 국가고위층의 골격을 이루어 재벌과 부동산 부자 위주의 경제적 질서를 잡아주든, 넓은 의미에서 지배계급과 국가를 운영하는 고급관료 엘리트는 꼭 쌍두마차처럼 보인다. 전두환 시대에 벌어진 &lsquo;국제그룹&rsquo;의 몰락과 해체 등 군사독재시대의 일부 괴담(?)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가 가끔 개별 재산가 등 일부 지배층 구성원에게 무자비한 사정의 칼날을 들이댈 수 있지만, 크게 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lsquo;사무총국&rsquo; 성격을 띤다. 특정 상황에서 개별적인 지배자의 이해관계를 거스를 수 있어도, 즉 지배계급으로부터 전술적이고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장받아도, 보다 총체적인 의미에서는 지배계급의 계급으로서의 이득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다. 개도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2008년 세계공황 시작 이후, 국채를 남발해 국가재정의 장기적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한이 있더라도 은행에 &lsquo;구제 금융&rsquo;을 마구 퍼부었던 구미권 국가들의 &lsquo;위기 극복&rsquo; 행위를 보면, 국가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lsquo;비(非)우량 주택담보 대출&rsquo;을 잘못 받았다가 집을 날리고 길거리에 내몰리는 수백만 명의 피지배층 미국인들은 국가로부터 그 어떤 특별 지원을 받지 못해도, 월(Wall)가는 늘 국가에 충분히 기댈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5위 은행재벌인 골드만삭스는 국가의 지원으로 위기의 2008년을 무난히 지나 2009년에 기록적인 130억 달러의 순소득을 올렸다. 빈민의 위기는 국가와 결탁된 재벌에게는 기회일 뿐이다. 국가의 근본적인 계급적 성격을 염두에 두면, 이는 예외라기보다는 &lsquo;당연지사&rsquo;에 가깝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가의 생산력 개발에의 &lsquo;성패&rsquo;는 대체로 국가가 대표하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1960~1970년대의 남한처럼 북한과의 경쟁에서 그렇지 않아도 명분이 전혀 없는 정치군인과 약탈적 재벌의 지배 블록이 수출 주도의 산업개발 없이는 완패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 일단 지배계급의 이해관철 차원에서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 초고속 개발이 이루어진다. 반대로 칠레나 자이르처럼 기존의 지배층이 외부로부터 그 어떤 특수한 위협도 받지 않은 채 자원의 채굴과 수출만으로 충분히 호의호식하며 자신들의 스위스 은행계좌를 살찌울 수 있다면, 개발이 아닌 &lsquo;반개발&rsquo; 정권이 세워진다. 이윤 마진이 아직 두터운 경제적 주기의 초기에 총(總)구매력 제고 차원에서 복지정책이 실시되는 것과 이 주기의 말기인 금융화된 경제체제에서 금융자본가의 이윤을 높이기 위해 복지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것은 사실 전혀 모순이 아니다. 양쪽의 경우 모두 유럽 지배층이 국가를 통해서 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국가를 &lsquo;합리적인 조절자&rsquo;로 생각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음의 극치인 셈이다. 계급국가는 합리적이지 않으며 합리적일 수도 없다. 예컨대 지금의 남한처럼 모국어 이해마저도 잘 안 되는 서너 살짜리의 유아들까지 혀 수술을 받아가면서 &lsquo;영어 유치원&rsquo;에서 &lsquo;원어민&rsquo;에게서 영어를 배워야 할 정도로 전국적인 &lsquo;영어 광풍&rsquo;을 일으키는 것은 합리성이 아니고 그 반대다. 영어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 다수가 영어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그저 다수에 대한 가혹 행위이자 엄청난 규모의 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영어 능력을 그 주된 문화자본으로 삼고 있는 남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서 &lsquo;영어 광풍&rsquo;은 너무나 필요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야 영어를 무기로 삼는 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합리화하고 세습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lsquo;영어 마을&rsquo;을 대대적으로 짓는 등 &lsquo;영어 광풍&rsquo;을 열심히 부추기고 있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과연 &lsquo;중립적&rsquo;이고 &lsquo;합리적&rsquo;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가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lsquo;집행기구&rsquo;인 만큼 국가의 폭력도 철저하게 계급적이다. 국가폭력의 계급성은 여러 차원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예컨대 징병제 상비군이 체제에 복종할 줄 아는 유순한 노동자를 양성하는가 하면, 전시 상황에서는 대다수가 중산계층 출신인 장교들의 생존율이 하층민 출신의 졸병들보다 훨씬 높다. 외국 노동자에 대한 극우파 테러리스트의 폭력이나 기업주의 폭력 등에 경찰은 &lsquo;솜방망이 대응&rsquo;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급진 운동이나 노동운동 등 조금이라도 &lsquo;반체제적&rsquo; 냄새가 나는 운동에 대해서는 툭하면 탄압적 태도로 맞선다. 노동자 파업에 초강경 대응하는 남한 경찰은, 의사나 약사 등 중산층의 집단적인 의사표현에는 절대로 폭력적 대응을 하지 않는다. 사실, 국가폭력의 현장에서야말로 계급 구별의 선이 확연히 드러난다. 계급 관계라는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진정한 현실은, 국가가 폭력 내지 살인을 하는 &lsquo;비정상적인&rsquo; 위기 상황에서 노골화되고 만다. 그러한 입장에서 보면 국가적 살인에 대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계급적 성격, 계급 사이의 역학 관계에 대한 연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말, 1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92"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3_%EB%8B%B9%EC%8B%A0%EC%9D%84%20%EC%9C%84%ED%95%9C%20%EA%B5%AD%EA%B0%80%EB%8A%94%20%EC%97%86%EB%8B%A4/%EA%B8%80%EC%93%B4%EC%9D%B4_%EB%B0%95%EB%85%B8%EC%9E%90.jpg" />박노자</strong><br />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한국학 교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러시아 이름은 &lsquo;블라디미르 티호노프&rsquo;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조선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스승인 미하일 박 교수의 성을 따르고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의 &lsquo;노자(露子)&rsquo;라는 이름을 지어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한다.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전근대성을 맹렬히 비판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날카로운 칼럼들을 지속적으로 써왔으며, 역사학자로서 탈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보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당신들의 대한민국 1,2』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하얀 가면의 제국』 『우승열패의 신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5 오전 11:13:00《216》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6_%EB%82%98%EB%AC%B4%EB%93%A4%20%EB%B9%84%ED%83%88%EC%97%90%20%EC%84%9C%EB%8B%A4%20%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5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황순원의 </strong></span></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무들 비탈에 서다』</span></strong></span></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를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무들 비탈에 서다』(문학사상사, 1995, 2판)는 황순원의 초기 장편과 후기 장편 사이에 끼어 있는 작품으로,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접점 삼아, 역사적 현실과 밀착해 있었던 초기는 개인적(실존적) 현실로 관심을 돌리는 후기로 넘어간다고 한다. 1960년 1~7월 사이, &lt;사상계&gt;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연재가 끝나고 단행본이 나올 때, 말미가 대폭 수정되었다. 문학사상사본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해설을 쓴 김병익은 해설에 딸린 주1)에서, 말미가 대폭 수정된 연유를 이렇게 적었다: &ldquo;&lt;사상계&gt;의 연재 시에는 주인공 현태의 자살로 끝났으나 책으로 출판될 때는 자살마저 포기할 극도의 무기력 상태임에도, 계향이의 자살 방조로 무기형의 검사 구형을 받는다는 것으로 끝냄으로써 일말의 희망을 열어 놓았다. 이 개작은 4.19 이후의 어떤 가능성의 기대에 그가 침윤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1&middot;2부로 구성된 이 작품의 1부는, 휴전협정을 앞둔 어름의 중동부전선에서 시작한다. 대학을 다니다가 학도병으로 출전한 동호&middot;현태&middot;윤구는 학도병 출신이라는 동질감 하나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전투 중에는 서로를 보살폈고, 전투가 소강일 때는 함께 술을 마시거나 여자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현태와 윤구가 스스럼없이 하는 &lsquo;색시집&rsquo; 출입이 동호에게는 고역이었다. 그에게는 대학교에서 사귄 숙이라는 애인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 년 전, 동호가 입대하기 전날 밤, 해운대 호텔에서 밤을 지새웠다: &ldquo;새벽녘에 잠이 들 때까지 수없이 되풀이된 이 억제가 얼마만 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어쩐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는 숙이의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네는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신의 짐승 같은 욕망을 억누르고 그녀의 순결을 지켜줌으로써 그녀를 &lsquo;영원히 자기 것&rsquo;으로 할 수 있다는 이 &lsquo;마초적&rsquo;인 시나리오. 작가는 동호의 입을 통해 &ldquo;어째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한 방에 나란히 누워 자면서 그 행위를 불순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말인가&rdquo;라고 묻는데, 불순한 것은 성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성 윤리가 그렇게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문제를 파고들 경황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전후에 나온 대개의 한국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 또한 &lsquo;실존&rsquo;이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인민군에게 부모가 몰살당했던 목사의 아들 선우 이등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ldquo;하나님이란 있는 것두 아니구 없는 것두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있기두 하구 없기두 한 것이다, 있다구 믿는 사람에겐 있구 없다구 생각하는 사람에겐 없는 거다, 누구나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자유가 있다, 모든 게 사람에게 달렸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지배하는 건 아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있게도, 동호가 말했던 그 &lsquo;불순한 행위&rsquo;를 맴돈다. 그는 숙에 대한 자신의 순수했던 사랑에 반복해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한편으로는 현태가 소개해준 술집 작부 옥주(최명애)에게 빠져든다. 이제 동호는 숙에게서 온 편지뭉치를 몽땅 불태우며 &ldquo;좀 더 홀가분한 기분이 되구 싶어. 좀 더 홀가분한 기분이 되구 싶단 말야&rdquo;라고 되뇌게 된다. 옥주의 말처럼, 사랑이란 다 &ldquo;말라빠진&rdquo; 것이며, 남아있는 것은 지워져 가는 &ldquo;몸뚱이&rdquo;뿐이다. 이제 동호에게는, 불시에 그녀를 만나러 나간 날, 다른 남자와 뒹굴고 있는 두 남녀를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일만 남았다. 언젠가 현태가 말했던 것처럼 &ldquo;어른이 되기란 그렇게 힘든 법&rdquo;이기도 하지만, 동호의 문제는 이런 것이다. 숙의 순결을 지켜줌으로써 그녀를 영원히 자기 것&rsquo;으로 할 수 있다는 마초적 시나리오가, 옥주와 함께하는 짐승 같은 욕망의 구역에서도 고스란히 작동했다는 것. 두 민간인을 살해하고 동호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1부는 끝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는 전쟁이 끝난 1957년, 서울의 귀거래 다방을 근거지로 한 &lsquo;토요회&rsquo; 이야기다. 회원은 현태&middot;윤구&middot;석기인데, 현태와 윤구는 전우고, 새로 등장한 석기는 현태와 중학교 동기다. 전쟁터에서는 고작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고, 술 마시고, 여자를 껴안는 실존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데 반해, 일상적인 도시는 주인공들에게 더 많은 실존의 기회를 주는 듯해 보인다. 작가는 현태의 입을 빌려, 전쟁터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맡겨진 무한한 실존을 &ldquo;자유가 너무 많은 데서 오는 과잉상태가 아니구 자기에게 주어진 자율을 처리하지 못해서 생기는 과잉상태&rdquo;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누리는 무한대의 실존은 술을 마시고 연애를 하는 게 고작이다. 명령에 따라 적을 죽이는 일은, 구직<sup>求職</sup>이나 성공이 대신한달까? 2부에서도 많은 일화는 성에 집중된다. 현태는 윤구의 애인인 미란을 잡아채어 임신을 시키고, 낙태수술의 후유증으로 죽게 만든다. 또 옛 애인의 전우를 찾아온 동호의 애인 숙을 성폭행해서 역시 임신을 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태는 미국 유학에 필요한 수속을 모두 마치고 출국을 며칠 앞둔 날, 석기를 불구로 만든 건달들을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고 단골 술집을 찾는다. 거기서 주인에게 매를 맞고 &ldquo;죽구 싶어요&rdquo;라고 말하는 어린 작부 계향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단도를 건네주며 자살을 부추긴다. 충분히 &lsquo;행위로의 이행&rsquo;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이 일로 말미암아, 현태는 자살방조와 교사죄로 무기징역을 구형받는다. 검사의 공소 사실을 일일이 시인하는 그의 모습에서 카뮈가 창조한 뫼르소를 연상하게도 되지만, 온갖 위악을 행했던 현태는 이런 류의 인물로는 한국 문학의 계보에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야 할 주인공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ldquo;취미&rdquo; 또는 &ldquo;외로운 거야&rdquo;라는 말버릇으로 정당화하는 현태는, 전후에 나온 대개의 한국 소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설익은 실존주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하지만 중첩된 1부 31쪽과 2부 140쪽의 일화는, 현태의 위악이 결코 박래품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원산지 표시다. 전쟁은 어른이 되지 못한 그들을 &lsquo;피해자&rsquo;로만 놔두지 않았고, &lsquo;가해자&rsquo;로도 만들었다. 현태는 이렇게 말한다: &ldquo;다시 한번 전쟁터에 서보구 싶어. 그러구선 죽음과 맞선 순간순간에 잃어버린 나 자신을 도루 찾구 싶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재선의 『우리문학은 어디에서 왔는가』(소설문학사, 1986)는 아이들이 등장해서 &ldquo;자아와 선&middot;악의 발견 및 성<sup>性</sup>과 죽음의 현실에 대한 돌연한 인지<sup>認知</sup>&rdquo;를 내용으로 삼는 이야기를 &lsquo;이니시에이션 스토리<sup>initiation story</sup>' 혹은 신참 소설<sup>新參小說</sup>이라고 일컫는다면서 &ldquo;&lsquo;이니시에이션 소설&rsquo; 또는 신참 소설이란 이런 주인공이 미숙&middot;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과 사회적인 조정의 성숙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치르는 통과 제의적 소설&rdquo;이라고 부연한다. 이런 소설이 확장된 것이 발전 소설 또는 교양 소설<sup>Bildungsroman</sup>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면서 지은이는 우리 현대 소설에서 신참 소설의 기본 전범으로 황순원의 「소나기」를 비롯한 그가 쓴 일련의 단편 소설을 꼽고 있다. 그러면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어떨까? 내가 읽은 황순원의 장편은 모두 신참 소설이라 할 만하다. 그 가운데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경우, 주인공들은 &ldquo;미숙․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rdquo;을 이루기는 하지만, &ldquo;사회적인 조정의 성숙 단계&rdquo;로 진입하지는 못한다. 까닭은 현태가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① 주인공이 &lsquo;죽음&rsquo;에 이르거나(무기징역형), ② 그들을 받아줄 성숙한 사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자의 향방을 따라간 한국 문학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후자의 향방은 &lsquo;성숙한 사회&rsquo;와의 조화가 아니라, 자신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쪽으로 나갔다. 전 12권짜리 문학과지성사판 &lsquo;황순원 전집&rsquo; 가운데 첫 회분 두 권이 나왔던 1980년 즈음부터, 한국의 &lsquo;아이들&rsquo;은 현대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의 계몽(미숙&middot;무지 및 순진의 유년 상태로부터 악의 발견, 생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자아 발견)을, 자신이 설계한 사회 건설과 직결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이다. 올해 초 『일월』을 다시 읽으면서, 황순원의 장편을 발표된 순서대로 모두 읽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초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이 어중간한 시기의 작품을 두 번째로 읽게 된 이유는, 헌책방에서 발견한 문학사상사본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표지에 쓰여 있는 아래와 같은 글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squo;수난을 통해 구원&rsquo;으로 이르는 <br /> 사도 바울적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 <br />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br /> 황순원 문학의 창조적 정력이 <br /> 절정으로 표출되던<br /> 40대 중반기의 대표작이다. <br /> 6․25를 다룬 최초의 본격 장편!</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중에서도 &ldquo;사도 바울적 진실&rdquo;이란 문구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유는, 몇 달 전에 읽고 아직도 독후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김곰치의 장편소설 『빛』(산지니, 2008)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빛』은 근래 읽은 소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지만, 이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바울에 대한 해석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그래서 바울에 대해서 좀 더 알고나 쓰자고, 쉬엄쉬엄 바울에 대한 책을 모으고 있는 도중에, &ldquo;사도 바울적 진실&rdquo;이란 문구를 보게 된 것이다. 문학사상사는 저 문구를 이 작품에 해설에서 뽑아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숙은] 애인의 자살과 자기를 범한 남자의 파멸을 보았고, 그 파탄들이 전쟁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리고 그녀 자신이 그 피해자들과 같은 열에 서 있음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lsquo;수난을 통해 구원으로&rsquo;의 사도 바울적 진실을 작가는 이 여인에게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입영 전날, 해운대 호텔방에서, 동호의 욕망과 손길을 끝내 다독인 것은, 그에게 책임 의식과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던 숙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강간한 현태를 용서하고(수긍하고), 무기징역을 살게 될지도 모르는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사도 바울적 회심(진실)에 해당한다는 말인가?<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05 오전 10:27:00《215》체호프의 『숲귀신』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240"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5_%EC%88%B2%EA%B7%80%EC%8B%A0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4일<br /> <span style="font-size: small">안톤 빠블로비치 체호프의</span> </span><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숲귀신』</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을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숲귀신』(애플리즘, 2010)은 체호프가 29세 때 쓴 첫 번째 장막이다. 작품이 발표된 그 해에 공연이 되었으나,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이후 체호프는 자신의 생전에 출판과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작품의 옮긴이는, 2010년 &lsquo;안톤 체호프 탄생 150주년 기념공연&rsquo;을 위해 이 작품을 번역하고 연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야기가 벌어지는 무대는 자작나무 숲으로 뒤덮인 모스크바 외곽의 한 별장이다. 등장인물의 한켠(①)은 퇴임교수 알렉산드로의 가족이고, 다른 한켠(②)은 지방의 지주(졸부)들이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①<br /> 알렉산드로 세례브라꼬프/ 퇴임 교수<br /> 옐레나/ 그의 아내. 27세<br /> 쏘냐/ 교수와 전처 사이의 딸. 20세<br /> 마리아/ 전처의 모친<br /> 이고르/ 전처의 오빠. 47세</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②<br /> 졸뚜힌/ 엄청난 부자 청년. 20대 중반<br /> 율라/ 그의 여동생. 18세<br /> 이반/ 지주<br /> 효도르/ 지주의 아들. 35세<br /> 흐루쇼프/ 지주이자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 일명 &lsquo;숲귀신&rsquo;<br /> 쟈진/ 망한 지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같은 작가의 「바냐 아저씨」를 읽은 독자라면, 『숲귀신』의 인물 구성 ①이 「바냐 아저씨」의 인물 구성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29세 때 쓴 『숲귀신』과 37세에 쓴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대응표를 만들면 아래와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알렉산드로 세례브라꼬프 &rarr; 세레브랴꼬프 알렉산드르 블라지미로비치/ 퇴임 교수<br /> 옐레나 &rarr; 옐레나/ 그의 아내. 27세<br /> 쏘냐 &rarr; 소피야/ 교수와 전처 사이의 딸<br /> 마리아 &rarr; 마리야/ 전처의 모친<br /> 이고르 &rarr; 이반/ 전처의 오빠. 47세</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같은 것은,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나 이력만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애증과 갈등마저 같다. 두 작품에 나오는 퇴임교수(세례브라꼬프)는 아무런 학문적 업적이 없는 머저리인 데다가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현재 자신에게 혹한 미모의 젊은 여성과 재혼한 상태이면서도, 전처의 재산과 전처 가족들의 경제적 뒷바라지에 의지하고 있다. 전처의 장모와 처남이 재혼한 사위/매부를 뒷바라지하는 것은, 죽은 딸/여동생이 남긴 딸(쏘냐 혹은 소피야)을 돌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교수에 대한 턱없는 존숭<sup>尊崇</sup>과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머저리에다 이기적이기까지 한 퇴임교수는 전처가 딸의 몫으로 남겨준 유산을 팔아 핀란드로 이주하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숲귀신』의 등장인물 ②는 「바냐 아저씨」로 옮겨오면서 매우 단출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흐루쇼프 &rarr; 아스뜨로프 미하일 리보비치/ 의사<br /> 그 외의 모든 인물들 &rarr; 쩰레긴 일랴 일리치/ 몰락한 지주</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두 작품은 인물 구성이나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애증과 갈등만 아니라, 대사마저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세례브라꼬프 : 평생 학문에 몸바치고, 서재와 강의실만 알고 살았고 훌륭한 학우들과 지냈어. 그런데 갑자기 정신 차려보니 왜 이런 무덤에 와 있지? 매일같이 시시하고 저질인 사람들과 같이 시시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hellip;&hellip;.<br /> 난 살고 싶어. 원하는 걸 이루고 싶어. 유명해져서 떠들썩하게 칭찬도 받고 싶어. 그런데 여긴 마치 귀양살이하는 것 같아. 끊임없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남의 성공을 볼라치면 질투가 나고, 죽음의 사자가 매일 밤 찾아오면 도망 다녀야 하고! 정말 못 견디겠어, 참을 수가 없어&hellip;&hellip;. 왜 여기는 내가 늙는 것조차 용서해 주지 않는 거야!(『숲귀신』, 37~38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세례브라꼬프 : 평생 학문을 위해 일했어. 서재, 강의실, 훌륭한 동료들에게 익숙해 왔지. 그런데 갑자기,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묘지 같은 곳에 뚝 떨어져, 매일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나고 쓸데없는 이야기나 듣고 있다니&hellip;&hellip;. 나는 살고 싶어, 나는 성공을 사랑하고 명성과 떠들썩한 걸 사랑해. 하지만 여기는 유형지 같아. 매 순간 과거를 그리워하고, 남들의 성공만 지켜보고, 죽음을 두려워해&hellip;&hellip;. 그럴 순 없어! 견딜 수 없다고! 게다가 여기서는 내가 늙었다는 걸 봐주려 하지 않거든!(『벚꽃 동산』, 열린책들, 2004, 144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다르다. 『숲귀신』은 미혼 남녀의 짝짓기(쏘냐+흐루쇼프, 율라+효도르)가 중요한 모티브인 반면, 「바냐 아저씨」는 퇴임교수와 처남의 &lsquo;영지(쏘냐의 유산)&rsquo; 갈등이 극을 이끌어 간다. 또 『숲귀신』을 특별하게 하는 옐레나의 가출과 일명 &lsquo;숲귀신&rsquo;으로 불리우는 흐루쇼프가 「바냐 아저씨」에는 없는 대신, 「바냐 아저씨」에는 체호프를 체호프이게 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슬픔이 극대화되어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3-02 오전 10:55:00시위자들의 ‘점령하라’<img alt="" width="600" height="8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1_%EC%A0%90%EB%A0%B9%ED%95%98%EB%9D%BC/%EC%A0%90%EB%A0%B9%ED%95%98%EB%9D%BC_%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사_ 서울의 시위자들</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프니까 점령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빚이 2천만 원이에요. 1년 더 다니면 3천만 원이 되는데, 이 돈을 내고 왜 대학을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rdquo;- 서강대 학생 <br /> &ldquo;하숙집 방값을 못 내서 빚이 500만 원이에요. 학자금 빚도 1,500만 원 있어요. 3분의 1은 장학금을 받는데도 이 정도예요.&rdquo;- 성균관대 학생</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들의 고민 앞에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이들은 소위 명문대생이다. 그러나 졸업을 해서 높은 연봉을 받게 되면 빚은 금방 갚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위로할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의 20대 고용률은 60%가 채 안 된다. 10명 중 4명은 실업 상태란 뜻이다. 이들에게 약속된 미래 같은 것은 없다는 뜻이다. 대기업 취업에 성공해서 근사한 연봉을 받지 않는 한, 이 빚을 갚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대기업 취업이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설사 대기업에 취직한다고 하더라도,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에서처럼 언제든지 정리해고 당할 수 있고, 50대가 되면 명예퇴직의 압력을 받게 된다. 중소기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재벌은 중소기업의 아이디어를 돈의 힘으로 가져가거나, 불공정한 하청계약을 무기로 중소기업의 살길을 막아버린다. 재벌이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만든 유령의 하청기업은 비정규직 형태로 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대기업만 고집하지 말라는 말 앞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디 나가서 장사라도 하라고? 골목시장마저 이마트, 홈플러스 등으로 대표되는 재벌의 유통업체가 장악하고 있는 마당이다. 20년 역사에, 수많은 소비자에게 사랑받는, 그 동네의 터줏대감 같던 빵집마저 대기업의 공세에 문을 닫는 지경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니 머리 좀 좋다는 학생이라면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겠다고 고시나 공무원 시험공부에 매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한편에선, 삼성의 이재용처럼 재벌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마어마한 부를 대물림 받는다. 심지어 이를 위해 아버지 이건희는 아무 부끄러움 없이 온갖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다. 사법 권력은 공범으로 나서고, 거대 언론은 입을 다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20대는 이러한 고통을 사회적으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고통이 크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래서 아마도 그 어떤 나라의 청년들보다 절박히 노력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절박함 탓에 고통을 소리 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한경쟁에 떠밀려 고통을 말할 틈조차 없는 이들에겐 좌절과 불안만이 떠돈다. 한마디로 답이 없는 사회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lsquo;닥치고 정치&rsquo;할 수 없는 사람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저항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졸업하기도 전에 빚더미로 등이 휘는 대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lsquo;닥치고 정치&rsquo;가 왜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빚을 걱정하는 그들에게, 끊임없는 경쟁에 시달리며 꿈다운 꿈조차 꿀 수 없는 그들에게 정치란 배부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막무가내 개발에 맞서 투쟁을 하다가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진 용산참사가 벌어졌고, 재능교육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500일이 넘게 투쟁했지만, 사회는 그야말로 닥치고 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은 77일간의 공장점거 투쟁을 벌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모든 문제가 사회가 1대 99의 구조로 전락하면서 발생한 문제다. 1%에 의한 수탈이요, 1%와의 계급투쟁이다. 필수라는 대학 교육을 위해 빚을 내고, 전셋돈 올려줄 걱정에서 해방되기 위해 빚을 내야 하는 게 99%의 삶이다. 여기에 노동 시장의 유연화라는 구호 아래 비정규직은 늘어가고,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몫은 점점 줄어들고, 해고도 그만큼 자유로워졌다. 평생 빚을 갚고자, 해고되지 않고자,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정치와 저항은 어려운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Occupy 월스트리트, Occupy 여의도</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와중에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소식을 들었다. 이 운동은 가해자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했고, 월스트리트라는 공간을 점령함으로써 숨어 있던 &lsquo;금융자본&rsquo;을 우리 눈앞으로 체포해왔다. 그것은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지 꼭 10년이 지난 2011년 9월의 일이었다. 9.11 테러가 2000년대의 10년을 규정했다면, 월스트리트 시위는 앞으로의 10년을 규정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몹시 흥분했고, 1%의 탐욕스러운 수탈이 한국의 청년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지 함께 말하고 싶었다. 우리는 망설이지 않았고, 2011년 12월 10일 Occupy국제공동행동의 날에 맞추어&lsquo;아프니까 점령이다. Occupy 여의도&rsquo;의 이름으로 한국증권거래소 앞을 점령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에서의 점령운동에도 나름의 작은 역사가 있다. 2008년 촛불부터, 쌍용자동차의 공장 점거, 월스트리트 시위대에 연대의 메시지를 보낸 김진숙 민주노총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점령이 있었다. 점령은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수평적으로 끌어모으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점령의 장소에서 우리는 1%가 장악한 세계를 벗어나 우리 99%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금융자본주의의 심장을 점령한다는 것은 기존 세계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의 태아가 자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그들의 이야기, 곧 우리의 이야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일까? 월스트리트 시위대가 직접 쓴 『점령하라』는 우리의 저항과 닮아 있었다. 월스트리트 시위대를 위해 피자를 주문해주는 미국의 트위터리언들은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피자를 전해준 경기도 구로의 시민과 닮았다. 주코티 공원에 텐트와 플래카드를 설치하지 못하게 막아서고, 행진하는 시위대를 연행하는 미국의 경찰은 네 차례에 걸쳐 텐트를 철거하고 비닐조차 덮지 못하게 막아섰던 한국의 구청, 경찰과 닮았다. 미국 대학생들의 학자금 대출 탕감 요구는 여의도를 점령한 학생들의 등록금 폐지와 학자금 대출 탕감 요구와 닮았다. 월스트리트 시위를 지지하는 미국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대를 표명했던 것처럼, 해고에 맞서 싸우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과 재능교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여의도 점령지에서 연대 시위를 벌였다. 1%가 국경을 넘나들며 99%를 수탈하듯이, 우리 99%도 국경을 넘어 같은 고통에 맞서 싸우며 연대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이 어째서 싸우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싸워왔는지 알기 위해, 언론이나 지식인의 입을 쳐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들은 1%에 맞서 싸우는 그 정신 그대로, 이 책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99%의 입으로 직접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여의도를 점령하는 우리, 한국에서 팍팍한 삶을 전투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침 2012년 봄에는 미국의 대선과 한국의 총선이 같이 있다. 그래서 2012년 정치를 점령하자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투표가 점령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거만을 점령한다면, 우리의 점령은 투표함을 개봉하는 순간 끝나버린다. 우리가 점령해야 할 것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1%만의 고장 난 자본주의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민주주의이며 진정한 99%의 정치다. 우리는 전 세계의 99%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2월 <br /> 서울에서 점령운동을 펼치는 &lsquo;대학생사람연대&rsquo; 소속 시위자가 <br /> 연대의 마음으로 씀<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1_%EC%A0%90%EB%A0%B9%ED%95%98%EB%9D%BC/%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시작된 후 처음 몇 달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2011년 9월 17일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책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총 60여 명이 작업에 참여했다. 학생, 교수, 작가, 예술가,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여자, 남자, 유색인, 백인, 청년 및 장년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이 조사와 글쓰기, 삽화, 편집에 참여했다. 이 책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공식적인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책을 만든 대부분의 사람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 모두 점령운동의 지지자라는 것은 분명히 밝혀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대한 책을 쓰자는 아이디어는 월스트리트 60번지에서 열린 교육 활동그룹 회의에서 처음 나왔다. 많은 사람이 책 출간 계획에 관심을 보였지만 경계를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이른 기획이라고 느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책을 기획한 사람들이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과 같은 수평적인 운동에서 공식적인 대표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책이 점령운동의 &ldquo;공식 성명서&rdquo;로 소개되거나 받아들여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교육 활동그룹의 다음 회의에서는 출판에 반대하는 쪽으로 투표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책 출간을 지지한 사람들은 따로 모임을 만들어 독자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독자적인 모임 내에서도 책의 지향점에 대해 서로 다른 목소리가 드러났다. 책이 점령운동의 다양한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점령운동이 초기에 거둔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분석이어야 한다, 미래의 점령운동에 지침이 되는 안내서여야 한다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점령운동 스스로 메시지를 드러내도록 책을 써야 한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점령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수십 차례가 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우리가 이 책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lsquo;인사이드 스토리&rsquo;라고 부르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과 그 밖의 다른 관심 있는 사람들을 월스트리트 60번지에서 열린 편집 회의에 초청했고,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환영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을 만드는 동안 우리는 손 신호와 같이 점령운동에서 사용해온 의사결정 방식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점령운동이 제시한 모델을 언제나 고수할 수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모임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과 마찬가지로 아직 성장하는 중인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직접 민주주의의 원칙, 합의에 따른 의사결정, 그리고 투명성이라는 기본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했다는 것만은 말해두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종 원고를 넘긴 2011년 12월 초,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미래는 여러 면에서 여전히 불투명하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ldquo;우리는 99%다&rdquo;라는 구호로 시작한 월스트리트 시위가 50년 전에 있었던 민권운동 이래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진보운동의 씨앗을 심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 역사적인 운동의 시작을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다.</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8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1_%EC%A0%90%EB%A0%B9%ED%95%98%EB%9D%BC/%ED%91%9C1.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작</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타흐리르 광장을 재현하고 싶은가?<br /> - 애드버스터(Adbusters)의 촉구, 2011년 7월 13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월스트리트 시위는 작년에 거의 모든 대륙에서 벌어졌던 전(全) 지구적 저항 운동의 하나로 일어난 점령운동이다. 물론 나라마다 정부의 성격이 다르고 요구 사항도 다르지만, 모두 족쇄 풀린 글로벌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표현한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2011년 초부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수많은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튀니지의 반정부 시위는 2010년 12월 17일, 채소 노점상이었던 스물여섯 살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med Bouazizi)가 경찰이 돈을 뜯어내려 자꾸 자신의 물건을 강탈하고, 여덟 명이나 되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좌절해 자신의 몸에 불을 질러 분신한 사건이 일어나며 시작되었다. 부아지지의 사진과 동영상이 페이스북을 통해 퍼졌고 이에 분노한 튀니지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Ben Ali) 대통령이 축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튀니지의 뒤를 이어, 알제리, 레바논, 요르단, 모리타니, 오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시위가 이어졌다. 이집트의 첫 거리시위는 1월 25일 시작되었는데, 1월 31일에 벌써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수도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웠다. 겨울 날씨치고 따뜻했던 덕분에 광장에는 만 개가 넘는 텐트가 자리를 잡았고, 말뚝에 비닐이나 천을 덮은 천막도 세워졌다. 광장에는 나이, 사상, 배경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 많은 사람이 &lsquo;텐트도시&rsquo;가 되어버린 타흐리르 광장을 찾아와 시위대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다양한 성격의 위원회도 구성되었는데, 치안 위원회, 쓰레기 처리 위원회, 의료봉사 위원회 등이 만들어졌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시위자들은&lsquo;화가의 코너&rsquo;를 만들어 플래카드와 배너를 제작해서 야외에 전시했고, 시인들은 임시 무대에서 시 낭송회를 열었다. 야외 결혼식이 열리기도 했다. 다양한 위원회와 야외 행사는 후에 유럽과 미국에서 있을 점령운동의 좋은 모범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월 14일, 위스콘신 주 매디슨에 있는 주의회청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거대한 저항의 물결이 일었다. 시위는 곧 근처의 대학교와 주변 도시인 밀워키, 그린베이,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로 번져갔다. 위스콘신 주의회청사 시위는 공무원의 단체 교섭권을 제한하는 법에 반대해서 일어난 것인데, 몇몇 시위자는 이집트의 국기를 흔들었다. 2월 20일 이집트의 노조 지도자 카말 아바스(Kamal Abbas)는 위스콘신의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카말 아바스는 &ldquo;여러분이 우리를 지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여러분을 지지합니다.&rdquo;라고 동영상에서 밝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름이 되자 사하라 사막 이남, 남미, 아시아, 유럽에까지 시위가 퍼져나갔다. 이 모든 시위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언론 활동그룹의 일원인 세니아(Senia)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칠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났던 시위가 라틴계 사람들에게 &ldquo;매우 깊은 영감&rdquo;을 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1년에 일어난 여러 시위 중에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조직하고 전략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스페인의 &ldquo;분노하는 사람들(Los Indignados)&rdquo;이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1_%EC%A0%90%EB%A0%B9%ED%95%98%EB%9D%BC/%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스페인에서 일어난 5월 15일(May 15) 운동, 다른 말로 15M 운동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조직되었다. 60여 개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자들은 각 도시의 대표적인 광장에 야영캠프를 세웠다. 그래서 광장을 점거한 사람들을 &ldquo;야영자들(Las Acampadas)&rdquo;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의 공영방송사는 650만에서 800만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해, 복지예산 축소, 20%까지 치솟은 실업률, 기업의 탐욕으로 생긴 폐해에 반대하여 시위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분노하는 사람들&rsquo;은 총회와 활동그룹을 만들고 합의를 통해 의사결정을 했다. 이후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은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자들보다 &lsquo;분노하는 사람들&rsquo;의 조직을 더 많이 따르게 되었다. 윌리 오스터웨일(Willie Osterweil)은 뉴욕 총회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 이전에 있었던 블룸버그마을(Bloombergville) 운동에 참여했고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6월에 스페인의 점령시위 현장을 방문했는데, 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ldquo;점령캠프는 정보교환, 시위, 혁명 활동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lsquo;분노하는 사람들&rsquo;은 공동주방을 만들어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환경, 군사, 여성인권 등의 사안을 다루는 코너를 만들어 회의와 토론회를 열었다. 나는 그곳에서 함께 일하면서 자원을 공유하고 함께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목격했다. 그들은 점령캠프를 혁명 구호들이 적힌 플래카드로 가득 채웠고 어디를 가든지 헝겊 배너, 구호가 적힌 종이 상자, 낙서 등을 잊지 않고 남겨두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윌리에게 스페인 시위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는 &ldquo;스페인에서 새로운 절실함을 느꼈다.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깨달았다.&rdquo;라고 썼다. 이어서 그는 &ldquo;점령캠프는 정말 마법 같은 분위기였지만, 완전히 엉성하게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형세였다. 테이프, 줄, 방수포, 천, 천막을 받치는 기둥, 테이프로 고정된 대나무 막대 세 개를 덮은 비닐이 캠프를 이루고 있었다. 태풍이 분다면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터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약에 세계 곳곳에서 아주 많은 사람이 가세한다면, 이 캠프가 오히려 태풍이 되어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지 않을까?&rdquo;라고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윌리는 스페인의 점령캠프에 있는 동안 &lsquo;분노하는 사람들&rsquo;과 친분을 쌓았고, 뉴욕에서 다른 운동가들과 점령운동을 계획할 때 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얻었다. &ldquo;스페인에서 얻은 경험은 블룸버그마을 운동, 뉴욕 총회 그리고 궁극적으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계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rdquo;고 윌리는 설명했다. 윌리와 &lsquo;분노하는 사람들&rsquo;의 교류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시위를 계획하는 이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고 생각과 전략을 나누고 협력했는지 잘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 세계에서 일어난 시위의 또 다른 공통점은 시위대가 그 지역의 상징적인 장소를 점령해 그곳에 자신들이 살고 싶어하는 모습의 작은 사회를 만들려 시도했다는 것이다. 바로 모든 구성원의 의식주를 함께 책임지는 사회였다. 점령캠프는 시위자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가족애를 느끼게 해주는 장소였으며, 서로 의견을 나누고 언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몇몇 나라에서 부당하게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검열하긴 했지만, 많은 시위자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운동을 잘 조직하여 빠른 시간에 대규모의 사람을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 이는 2011년 전 세계적으로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이면서, 나아가 사람들이 비(非)계급적 구조와 &lsquo;수평적&rsquo; 의사 결정 방식을 선호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구조와 방식은 전통적인 지배구조가 아니라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윌리는 스페인에서 돌아와 &lsquo;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뉴욕 시민들의 모임(New Yorkers Against Budget Cuts, 이하 예산삭감반대모임)&rsquo;과 국제사회주의기구(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등의 운동단체와 함께 블룸버그 시장이 입안한 예산 삭감안을 반대하는 점거시위를 조직했다. 물론 스페인의 점거에 비할 수 없는, 훨씬 소박한 규모의 시위였다. 3주 동안 진행된 이 점거운동은 블룸버그 시장의 이름을 따 블룸버그마을 운동이라고 불렸다. 블룸버그 시장의 예산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4천 명의 공립학교 교사들이 해고되고 20개의 소방서가 폐쇄될 터였다. 6월 16일부터 약 50여 명의 시위자가 시청 근처의 브로드웨이와 파크 스트리트의 모퉁이를 점거했다. 6월이라 날씨가 따뜻해 텐트까지는 필요 없었고, 침낭이면 밤을 보내기에 충분했다. 지역 공무원 노조와 교원 노조에서 음식을 제공했고, 조그만 도서관이 만들어졌으며, 뉴욕시립대학교 교수들이 토론회를 진행했다. 점거는 시의회에서 수정안이 통과된 6월 29일 이후에도 며칠 동안 더 지속되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중에 뉴욕 총회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한결같이 점거와 회의를 함께하는 과정에서 강한 공동체 의식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ldquo;블룸버그마을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매우 강한 동지 관계가 생겼습니다. 야영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잠을 자지 않고 서로를 보살폈습니다.&rdquo;라고 뉴욕시립대 바룩대학의 교수이며 노동운동가인 예순여덟의 재키 디살보(Jackie DiSalvo)가 말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 둘째 주에 합류한 스물일곱 살 제즈 볼드(Jez Bold)는 여태껏 정치 운동이나 시위를 피해왔었는데, &ldquo;정치 활동을 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아이디어가 놀라웠습니다.&rdquo;라고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즈는 덧붙여서 시위대에 연대의식이 형성되는 것은 전형적이지 않은 시위의 형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ldquo;전통적인 시위나 데모와는 전혀 다릅니다. 전통적 의미의 집회와도 다르죠. 모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밤을 새우기로 결정했고 밤을 새우는 데 필요한 준비를 했어요.&rdquo; 제즈는 블룸버그마을 시위대가 자발적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간이 도서관을 만들고 토론회를 기획했다고 전한다. 심지어 블룸버그마을 오페라도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이 점령지를 앞마당 같은 분위기로 만들었다고 제즈는 말한다. &ldquo;뉴욕에 있는 아파트에는 어디나 현관 계단참에 앞마당 같은 공간이 있잖아요. 그런 공간에서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아파트에서 나와 현관 계단참에 모여 이웃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어울리는 것이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제즈는 &lsquo;블룸버그마을 13인&rsquo;의 구속도 목격했다. 열세 명의 시위자가 시의회의 예산안 투표를 막고자 서로의 몸을 묶고 시청 로비에서 시위를 벌였다. &ldquo;열세 명이 둥그렇게 앉아 서로의 팔을 케이블 타이로 묶고 시위 중이었습니다. 경찰이 들어와서 해산하라고 명령했지만 거부했어요. 경찰이 케이블 타이를 끊으면 새로 타이를 꺼내 다시 묶었죠. 결국 경찰이 한 사람씩 뒷문으로 끌어냈습니다.&rdquo; 열세 명 전부 구속되었고 다음 날 시의회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대규모 예산 삭감안이 통과된 것을 알고 모두 실망했지만, 시의회가 블룸버그 시장의 예산안을 수정해서 해고 계획 대부분과 소방서 폐쇄 계획을 백지화했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hellip;</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산삭감반대모임이 블룸버그마을 운동을 마무리 지을 무렵, 밴쿠버에 있는 친환경, 반(反)소비 잡지인 애드버스터가 7월 13일 사람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글을 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br /> 타흐리르 광장을 재현하고 싶은가? <br /> 9월 17일 맨해튼 남쪽으로 달려가서 텐트를 치고 키친을 <br /> 만들고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쳐서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애드버스터의 웹사이트 하단에 있는 블로그 난에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과 스페인의 점령투쟁을 따르라고 촉구하는 글이 실렸다. 애드버스터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상상했던 것은 2만 명의 사람들이 월스트리트에 모여 한두 달 동안 한 가지의 명확한 요구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요구 사항이 분명하지 않다고 맹비난을 받은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이 단 한 가지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자는 제안으로 촉발되었으니 재밌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ldquo;국회의원들을 좌지우지하는 돈의 힘을 막고자, 대통령특별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요구한다.&rdquo; 이것이 애드버스터가 제안한 한 가지의 명확한 요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애드버스터는 월스트리트 점령이라는 운동의 이름을 만들고 임무와 날짜를 제시했다. 그리고 이집트와 스페인의 예를 따르라는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애드버스터의 참여는 거기까지였다. 윌리 오스터웨일에 따르면,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대한 애드버스터의 실질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ldquo;애드버스터는 근사한 두어 개의 포스터 이미지와 아이디어만을 제공했을 뿐, 일은 여기 뉴욕에 있는 사람들이 다 했습니다.&rdquo;라고 말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9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1_%EC%A0%90%EB%A0%B9%ED%95%98%EB%9D%BC/%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3.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재키 디살보는 &ldquo;예산삭감반대모임 사람들은 애드버스터의 제안에 처음에는 매우 회의적이었어요. 하지만 일단 관심을 두고 추이를 살피기로 했지요.&rdquo;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블룸버그마을 운동에서는 총회가 중앙조직이고 의사 결정 기관이므로, 예산삭감반대모임은 약식 총회를 열어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다. 첫 총회는 8월 2일 볼링그린 공원의 끝에 있는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 앞에서 열렸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총회에 참여한 경험이 없어서 회의가 집회로 변질해버렸다. 심지어 발표가 끝나자 월스트리트로 행진하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총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점점 인내심을 잃어갔고, 운동가로 활동하는 조지아 상그리(Georgia Sangri)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ldquo;이것은 총회가 아니에요.&rdquo;라고 소리를 지르고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황소 동상의 반대쪽으로 가서 총회의 형식에 따라 토론하자고 제안했다. 첫 약식 총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애드버스터의 제안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대통령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라는 요구는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맨해튼 남쪽의 배터리 공원 내에 있는 아일랜드기아 기념관(Irish Hunger Memorial)에서 다시 모임을 갖기로 하고 첫 약식 총회를 끝냈다. 일주일 후 8월 9일에 열린 두 번째 총회에서는 민주적으로 진행되는 총회의 방식을 집중적으로 교육했고, 세 번째부터는 매주 한 번 맨해튼 알파벳 시티의 톰킨스 스퀘어 공원에서 총회가 열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8월과 9월 초에 열린 총회의 주요 안건은 9월 17일로 잡힌 대규모 반(反)월스트리트 시위를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이를 대비하여 음식위원회(보급품을 위해 1천 달러를 모금했다), 학생위원회, 홍보위원회, 인터넷 활동그룹, 문화예술위원회, 전술위원회 등의 새로운 조직도 구성했다. 몇몇 시위 조직자들은 시위의 효과에 대해서 회의적이었지만, 어쨌든 시위의 규모가 커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드버스터가 제안한 9월 17일 시위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알려지면서, &ldquo;처음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조차 누군가 시위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rdquo;라고 재키는 말했다. 초창기 총회에서도 &ldquo;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월스트리트로 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rdquo;는 우려의 소리가 나왔고 이러한 우려를 최소화하고자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하지만 총회가 시위의 안전에만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만약 9월 17일 시위가 실패로 끝나면, 여름 동안 블룸버그마을 운동을 통해 생겨났던 동력이 힘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홍보위원회는 9월 17일 시위가 실패하더라도 총회를 지속적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사람을 모으는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문화예술위원회는 문화예술 행사를 통해 정치를 변화시키고자 9월 17일에 맞춰 월스트리트에서 &lsquo;뉴욕흥겨움거래소&rsquo;<sup>New York Fun Exchange, 뉴욕증권거래소(New York Stock Exchange)를 비틀어 이름 붙인 것이다.</sup> 축제를 개최하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디데이가 다가오면서 전술위원회는 점점 할 일이 많아졌다. 홍보위원회는 사람을 모으고, 문화예술위원회는 상상력을 발휘하고, 전술위원회는 9월 17일 총회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9월 초순에는 점령 장소로 공원이나 월스트리트가 가능한지 예행연습을 시행했다. 톰킨스 스퀘어 공원의 경우, 저녁에 문을 닫고 나면 경찰들이 남은 사람들을 쫓아냈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월스트리트의 경우, 문화예술위원회가 9월 1일에 점거를 시도했는데, 경찰이 활동가 12명을 에워싸고 그중 9명을 연행해버렸다. 일련의 시행연습을 통해 9월 17일 시위에서 &ldquo;경찰이 매우 강력하게 시위대를 진압할 것&rdquo;임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총회를 한 장소에서 한 번만 갖고, 주말 내내(9월 17일은 토요일이었다) 계속 장소를 옮겨가며 총회를 여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전술위원회는 남쪽 맨해튼에 있는, 최소한 2천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을 샅샅이 찾았다. 시 소유 공원뿐 아니라 민간 소유의 공원까지 전부 뒤졌다. 상징적인 이유에서 월스트리트와 멀지 않아야 했고, 경찰이 진압을 시작하면 도망갈 수 있도록 출구가 많은 곳이어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후보지 여덟 곳이 정해졌고, 그중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가 가장 유력했다. 그런데 당일 정오경 경찰이 체이스 맨해튼 플라자를 물샐틈없이 바리케이드로 봉쇄해서 총회를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술위원회는 그때까지 비밀에 부쳤던 후보지를 신속하게 답사했고 주코티 공원에서 그날 총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시위 기획자들은 오후 2시 30분에 &ldquo;믿을 만한 동료 기획자들&rdquo;에게 집결 장소 후보지의 위치가 그려진 전단을 나눠주었고, 3시에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의 첫 번째 공식 총회가 주코티 공원에서 개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추천사, 머리말,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시위자(Writers for 99%)</strong><br /> 2011년 타임(TIME)지는 올해의 인물로 &lsquo;시위자&rsquo;를 선정했다. 중동을 휩쓴 시위가 유럽과 미국 등으로 확산하며 국제 정치를 다시 짰다며, 시위에 몸담은 사람들, 바로 &lsquo;시위자&rsquo;들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이 책의 지은이는 바로 그 시위자들이다.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을 이끄는 실무 그룹에서 운동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60여 명의 공동작업을 거쳐 이 책이 탄생했다. 학생, 교수, 작가, 예술가, 노동자, 전문직 종사자, 여자, 남자, 유색인, 백인, 젊은이, 노인 등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조사, 저술, 삽화, 편집에 참여했다. 필진 모두는 월스트리트 점령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며, 자신들을 &lsquo;99%를 위해 글 쓰는 사람들(Writers for 99%)&rsquo;이라고 불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임명주</strong><br />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상무관실에서 근무했으며, 프랑스 농식품진흥공사(SOPEXA)의 한국 대표로 재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3-02 오전 10:01:00김슬기의 ‘딸기 한 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1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EB%94%B8%EA%B8%B0%20%ED%95%9C%20%EC%95%8C_%ED%91%9C%EC%A7%80_6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떨어진 딸기 한 알. 생쥐는 고민 끝에 딸기 얹은 빵을 만들기로 한다. 앞치마를 두르고 밀가루를 그릇에 덜어 내는데 &ldquo;아이쿠!&rdquo; 밀가루를 너무 많이 쏟았다. &ldquo;괜찮아, 괜찮아! 다 방법이 있지!&rdquo; 생쥐는 오리와 함께 더 커다란 그릇을 가져와 밀가루를 담는다. 너무 많은 밀가루에 우유와 달걀이 모자란다. 생쥐는 원숭이와 함께 달걀과 우유를 가져와 문제를 해결한다. 이번엔 베이킹파우더가 너무 많다. 생쥐와 양은 밀가루를 더 갖다 넣는다. 커다란 거품기는 곰이 가져온다. 너무 커진 반죽이 오븐에 들어가지 않자 이번엔 커다란 오븐이 있는 코끼리네 집으로 모두 같이 간다. &ldquo;괜찮아, 괜찮아! 다 방법이 있지!&rdquo;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서로를 다독이며 해결해가는 생쥐와 친구들은 드디어 완성한 커다란 딸기빵으로 함께 행복해진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회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 신인작가 공모전 당선작. 앤서니 브라운은 이 책 추천사에서 &ldquo;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하며, 각 동물의 특징이 그림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rdquo;고 부연한다. 그는 또 &ldquo;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의 흐름이 아주 자연스럽다&rdquo;며 &ldquo;단지 이야기를 나타내는 그림이 아니라, 이야기에 더 많은 내용을 더해 주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이야말로 진짜 그림책&rdquo;이라고 극찬했다. 리놀튬 판화로 제작돼 섬세하고 따듯한 느낌이 든다. -편집자</span></p> <h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01%EB%94%B8%EA%B8%B0%EB%B3%B8%EB%AC%B8_%ED%8E%98%EC%9D%B4%EC%A7%80_04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01%EB%94%B8%EA%B8%B0%EB%B3%B8%EB%AC%B8_%ED%8E%98%EC%9D%B4%EC%A7%80_05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01%EB%94%B8%EA%B8%B0%EB%B3%B8%EB%AC%B8_%ED%8E%98%EC%9D%B4%EC%A7%80_06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01%EB%94%B8%EA%B8%B0%EB%B3%B8%EB%AC%B8_%ED%8E%98%EC%9D%B4%EC%A7%80_07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2_%EB%94%B8%EA%B8%B0%20%ED%95%9C%20%EC%95%8C/01%EB%94%B8%EA%B8%B0%EB%B3%B8%EB%AC%B8_%ED%8E%98%EC%9D%B4%EC%A7%80_08_600.jpg" /><br /> <br /> <br /> (본문 일부)<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작가 소개<br /> 글&middot;그림 김슬기</strong><br /> 대학에서&nbsp;도예를 전공하고, 일본에 있는 DIC컬러디자인스쿨에서 컬러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딸기 한 알이 재료를 모으고 커다란 빵을 만든 시작이 된 것처럼, 그림을 좋아하는 작은 열망이 이야기와 그림을 모아 그림책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 힘이 들때면 &ldquo;괜찮아, 괜찮아! 다 방법이 있지!&rdquo;라고 마음을 다독이면서 말이지요. 커다란 빵을 함께 먹으며 동물 친구들 모두가 행복했던 것처럼, 이 그림책을 보는 모든 어린 친구들에게 기분 좋은 따뜻함이 전해지길 바랍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9 오전 10:01:00정주진의 ‘평화학자와 함께 읽는 지도 밖 이야기’<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0_%ED%8F%89%ED%99%94%ED%95%99%EC%9E%90%EC%99%80%20%ED%95%A8%EA%BB%98%20%EC%9D%BD%EB%8A%94%20%EC%A7%80%EB%8F%84%20%EB%B0%96%20%EC%9D%B4%EC%95%BC%EA%B8%B0/%ED%8F%89%ED%99%94%ED%95%99%EC%9E%90%EC%99%80%ED%95%A8%EA%BB%98%EC%9D%BD%EB%8A%94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책을 펴내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한국 밖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다. 내가 바깥세상 일에 관심이 많은 이유를 꼽자면 세 가지 정도로 추려진다. 첫째로 평화연구자이자 평화교육자로서의 관심이다. 지구촌 전체에서 일어나는 일, 특히 문제가 되는 일들을 알아야 그 문제들의 평화적인 해결을 고민하고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참고도 할 수 있다. 즉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관심이다. 둘째로 지구촌 곳곳에 사는 사람들과 친구로 또는 아는 사람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관심이다. 지구촌 어느 한 곳에서 일이 생기면 그곳에 있는 사람이 생각나고 그래서 관심 있게 뉴스를 보게 된다. 때로는 그곳에 있는 사람이 이메일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공유하기도 한다. 셋째로 세계시민으로서의 관심이다. 이것은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인데 지구촌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세계시민으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특별히 국제 뉴스를 보면서 한국에 사는 세계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인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현저히 높아졌다. 이것은 한국 사람들이 정치, 경제, 문화, 체육, 구호 개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구촌 곳곳의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 성장과 함께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한국 밖의 세상을 보고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 사람들이 다양한 지구촌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다. 거기에 더해 최근에는 &lsquo;한류&rsquo;라는 문화적 현상 덕분에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아쉬운 것은 &lsquo;한류&rsquo;라는 새로운 현상을 접하면서도 지구촌 전체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관심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가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더 바란다. 또한 여전히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촌의 일에 관심을 두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한국에 이익이 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촌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면 당연히 국제 뉴스를 봐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이 가장 소홀히 다루는 분야 중 하나가 국제 뉴스다. 방송이나 신문은 시청자들 또는 독자들이 한국 밖의 세상일에 별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국제 뉴스를 많이 다루지 않는다. 또 다룬다고 해도 아주 간략하게 일어난 일만을 사실 중심으로 보도한다. 그래서 뉴스를 봐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 사건 뒤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언론이 국제 뉴스를 다루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지구촌에 사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고 다른 하나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한국과 관련이 있을 때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배경이나 사건의 전개 과정을 생략하고 주로 현재의 상황만 보도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친절하지 않은 보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위에서 얘기한 나의 관심사와 고민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다. 또한 독자들에게 지구촌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해보도록 권하기 위해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구촌 사람들과의 접촉과 교류가 많아진 것 외에도 한국 경제의 규모가 커지면서 지구촌 구성원으로서 한국 사람들의 책임도 커졌다. 이제는 단지 한국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 어떤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한국에 관심을 가져주기만을 바라고 그것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으로서 지구촌 전체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때로는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지구촌 일에 대한 정보를 얻고 관심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국제 뉴스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제 뉴스를 다루는 한국 언론의 방식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독자들에게 깊고 넓은 정보를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 공백을 메워보자는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또 다른 이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여덟 가지 지구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드넓은 지구촌의 상황을 살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쓴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이야기 안에 많은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각 이야기는 모두 한 꼭지의 국제 뉴스에서 시작된다. 나는 몇 줄에 불과한 그 한 꼭지의 뉴스 속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찾아내는 작업을 했다. 각 장의 처음에 소개된 뉴스는 뒤에 이어지는 많은 이야기의 배경이나 시작 역할을 할 뿐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이런 방식 때문에 이야기의 제목은 하나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개의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어서 제목이 얘기하는 주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단지 여덟 가지가 아닌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십 가지의 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지구촌 전체가 각각의 문제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했으며 지금도 직접적, 간접적으로 관련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지구촌의 문제를 이해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직접적으로 원인을 제공하거나 비밀리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나라들이 대부분 미국을 포함한 몇몇 강대국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들 강대국의 비윤리적이고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비난하는 것이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촌의 모습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비록 몇몇 강대국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갈 수는 있지만 지구촌에 있는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서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다. 이제는 강대국들에게 적극 협조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과거 강대국들이 했던 비윤리적인 일들을 따라 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책임 문제도 예전과는 다르다. 오늘날에는 국적에 따라 자동적으로 개인의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때문에 어느 나라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느냐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 국적에 상관없이 자기 이익만 좇는 사람들은 지구촌의 문제에 원인을 제공하고, 보편적인 인류애와 평화에 대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결국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국적을 따지지 않고 세계시민으로서 함께 노력해야 지구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을 통해 내가 전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이 책을 쓰면서 특별히 염두에 둔 독자 집단은 청소년, 청년, 전업 주부다. 염두에 두었다는 얘기는 그들만을 위해 책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에 비해 국내외 소식을 챙겨볼 여유가 없는 그들까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뜻이다. 이유는 내가 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입시 경쟁 때문에, 청년들은 취업 준비 때문에, 그리고 전업 주부들은 육아와 살림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세상의 소식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고 소외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닌 집단이다. 청소년과 청년은 지식의 토대를 쌓고 역량을 계발해 바람직한 미래 사회를 만들어갈 사람들이다. 그런데 입시와 취업 준비 때문에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자신의 꿈을 생각해볼 기회를 잃고 있다. 나는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세계시민으로서 지구촌 다른 곳의 사람들과 삶을 공유하고 기쁨과 고민도 함께 나눌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란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 보고 직업도 고민해 보기를 바란다. 전업 주부는 한 가정 안에서 육아, 살림, 가족 관계에만 집중함으로써 다방면으로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경제 및 사회 활동을 통해 한국과 지구촌의 바람직한 변화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집단이다. 나는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자신과 지구촌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한국 사회는 물론 지구촌의 변화에 기여할 방법을 모색해 보길 바란다. 물론 청소년, 청년, 전업 주부 외에도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 속에서 다양한 분석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얻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지구촌을 변화시키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여덟 가지 지구촌 이야기는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관심에 따라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하나 하나가 지구촌 전체와 연결돼 있고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로 믿었기 때문에 선정했다. &lt;천연자원의 저주&gt;는 단순히 천연자원이 풍부한 곳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지구촌 전체의 경제 활동과 관계돼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lt;세계 식량 위기는 천재일까, 인재일까?&gt;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재라고 단정하지만 인재라고 볼 수도 있는 세계 식품 가격의 인상이 지구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치명적인 영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lt;달콤한, 그러나 쌉싸름한 초콜릿&gt;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동 노동 문제는 물론 코코아 생산과 관련된 전쟁, 공정무역, 불공정한 세계 경제 구조 등의 문제도 다루고 있다. &lt;인도적 군사개입&gt;은 2011년 가장 중요한 세계 뉴스 중 하나인 국제사회의 리비아 군사 개입을 다루고 있다. 다른 역사적인 사례들을 통해 인도적 목적의 군사 개입이 가지고 있는 이론적 타당성과 현실적 한계를 설명한다. &lt;뿌리째 뽑힌 사람들&gt;은 세계 난민에 대한 이야기로 난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특별히 여성 난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lt;관광객이 다 써버린 전기&gt;는 여행, 특히 개발도상국으로의 여행이 그곳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여행자들이 고민해봐야 할 문제들을 다뤘다. &lt;이상한 나라 아프리카&gt;는 한국 사회에 만연돼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되고 부정적인 인식의 근본원인과 그 영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lt;9.11 테러 10년, 아프간 전쟁 10년&gt;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충격이었던 9.11 테러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프간 전쟁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또한 아프간 전쟁이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지구촌 곳곳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소개한다. 마지막 장인 &lt;평화학이 들려준 폭력 이야기&gt;는 끝맺는 말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장들과는 다르다. 이 장은 왜 평화연구자, 그리고 평화학이 폭력을 자세히 다루는지, 그리고 여덟 개의 이야기를 왜 폭력 이야기라고 하는지를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앞의 여덟 가지 이야기를 좀 더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마지막 장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글쓴이로서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좋은 공부 자료로 사용하길 바란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덟 가지 이야기와 그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은 지구촌 사람들의 삶을 넓고 깊게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게 해준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책의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관련된 다른 국제 뉴스들도 찾아본다면 지적 호기심도 충족시키고 지구촌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가족, 학교, 직장, 마을 내에서 작은 공부 모임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공부 모임을 위해 각 장의 끝에는 토론을 위한 질문을 몇 개씩 첨부했다. 물론 그 질문들은 공부 모임 진행자를 돕기 위한 시범 질문들에 불과하며 얼마든지 다른 질문을 만들어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 있다. 책의 맨 끝에는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교사나 공부 모임 진행자를 위한 몇 가지 조언도 첨부했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1월&nbsp;정주진</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천연자원의 저주</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천연자원은 하늘의 축복이다. 노력 없이 얻어진 천연자원을 수출하면 새로운 산업을 개발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고 풍요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천연자원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천연자원은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그런데 그 저주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탐욕스럽고 무관심한 사람들 때문에 생겼다.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묵인하고 나아가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지구촌에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불행을 외면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그런 저주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4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0_%ED%8F%89%ED%99%94%ED%95%99%EC%9E%90%EC%99%80%20%ED%95%A8%EA%BB%98%20%EC%9D%BD%EB%8A%94%20%EC%A7%80%EB%8F%84%20%EB%B0%96%20%EC%9D%B4%EC%95%BC%EA%B8%B0/16p%20%EC%9D%B4%EB%AF%B8%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국제 골칫거리가 된 소말리아 해적</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2월 22일 인도양에 면해 있는 소말리아 해역에서 네 명의 미국인들이 해적들에 의해 납치된 후 4일 만에 살해됐다. 모두 50~60대인 두 쌍의 부부는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던 중이었다. 미국 해군이 구출 작전을 폈지만 군인들이 배에 오르기 직전 해적들은 네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구출 작전 중 두 명의 해적도 목숨을 잃었다. 이들이 살해된 이틀 후 한 덴마크 가족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납치됐다. 부부와 아이들 세 명으로 된 이 가족 역시 두 명의 선원과 함께 요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던 중이었다. 소말리아 해적이 두 요트를 납치한 것은 물론 몸값을 노렸기 때문이다. 요트 세계 일주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스런 여행이기 때문에 해적들이 이들을 납치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주로 대형 화물선이나 어선을 납치하던 소말리아 해적들이 소규모 요트를 납치하는 것은 최근에야 생긴 일이다. 해적들이 목표물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몇 년 사이에 소말리아 해적은 국제적인 골칫거리로 급부상했다. 이들은 주로 인도양에 면한 소말리아 동쪽 해역과 아덴만(Gulf of Aden)에 면한 소말리아 북쪽에서 활동한다. 예멘과 소말리아 사이에 위치한 아덴만은 세계 무역선의 20%가 드나드는 곳이다. 선박들은 아덴만을 거쳐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후 거기서 다시 지중해로, 그리고 대서양으로 항해한다. 이 항로는 인도양을 거쳐 대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다. 선박들이 많으니 해적들에게는 최고의 활동 장소다. 이곳을 지나는 한국 선박들도 해적의 공격을 받곤 한다. 2006년 이래 7건의 한국 배와 선원 납치 사건이 발생했고 수십 일에서 거의 200일에 가까운 오랜 협상 끝에 막대한 몸값을 주고 풀려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들어 소말리아 해적들의 공격과 납치는 대폭 증가했다. 1991년 해적 행위에 대한 모니터링이 시작된 이래 3개월 동안의 수치로는 최고를 기록했다. 2011년 1월~3월 사이 전 세계적으로 142건의 해적 공격이 있었는데 그중 97건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발생했다. 2010년 1월~3월 사이에 35건이 소말리아 해역에서 발생했던 것에 비하면 약 2.8배나 증가한 수치다. 2011년 1월~3월 사이 전 세계에서 납치된 선박이 18척인데 그중 소말리아 해역에서 납치된 배가 15척이나 됐다. 2011년 3월 말 현재 소말리아 해적들은 28척의 배와 596명의 선원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말리아 해적들은 대형 선박을 납치하고 전 세계 기업 및 정부와 몸값 흥정을 하기에 부족함 없는 조직과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크게 세 집단으로 구성돼 있다. 한 집단은 전직 어부들로 이들은 바다를 잘 알기 때문에 해적 집단의 두뇌 역할을 한다. 둘째는 전직 무장대원들로 전면에 나서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역할을 한다. 셋째는 기술 전문가 집단으로 이들은 첨단 기능을 갖춘 컴퓨터, 위성전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중화기 등을 다루는 역할을 한다. 해적들은 로켓포와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이 기거하는 모선에서 쾌속선을 띄워 목표 선박에 접근한다. 그리곤 로프와 사다리를 이용해 선박에 오른 후 배를 장악하고 선원들을 인질로 삼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해적들은 몸값을 받을 때까지 인질들을 비교적 잘 보살핀다. 잘 짜진 조직과 장비를 갖춘 해적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엄청나다. 2010년 소말리아 해적들은 몸값을 받아 총 2억 3,800만 달러(한화로 2,6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이것은 2008년의 3,000만 달러(한화로 330억 원)보다 약 8배, 2009년의 1억 5,000만 달러(한화로 1,650억 원) 보다 1.5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런 천문학적인 수입 때문에 해적질은 소말리아에서 갈수록 번창하는 사업이 되고 있다. 아덴만에 면한 소말리아의 푼틀랜드 지역에는 돈을 번 해적들이 소유한 호화로운 집과 외제차가 늘고 해적이 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최근 해적들은 외국 정부들이 전함을 파견해 소말리아 해역의 경비를 강화하자 인도양 멀리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있는 추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불법이 난무하는 소말리아 해역</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말리아에 해적들이 늘어나고 해적질이 하나의 사업으로 번창하고 있는 일차적인 이유는 1991년 이후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소말리아 내전 때문이다. 정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돼 있고 사람들의 생활은 궁핍하기 짝이 없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직업도 구할 수 없는 젊은이들은 해적을 좋은 직업 중 하나로 생각한다. 그러나 해적을 만들어낸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말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해안을 가지고 있다. 인도양에 면한 2,000킬로미터와 아덴만에 면한 1,300킬로미터를 합친 총 3,300킬로미터의 해안은 미국 서부의 해안보다도 길다. 소말리아 바다는 특이한 열대 생태 지역이다. 어류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산호초, 바다 포유동물, 바다거북 등 다양한 해양 생물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이 긴 해안과 바다는 만성적인 식량난과 만연된 빈곤으로 힘들게 생활하는 소말리아 사람들에게는 보물과 같다. 1980년대 초 소말리아는 풍부한 수자원을 개발해 만성적인 식량 부족을 해결할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잦은 자연재해로 농업 개발의 어려움을 겪던 소말리아는 어선과 장비만 투자하면 되는 어업 개발이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소말리아는 이탈리아, 이라크와 공동 어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고 덴마크, 독일, 일본, 스웨덴, 영국, 그리고 유엔개발기구(UNDP)로부터 어업 개발 자금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소말리아 정부가 어업 개발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고 어부들과 일반 국민이 그 혜택을 보기도 전에 소말리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1991년 내전이 시작된 이후 소말리아는 정부, 공공 서비스, 사회기반시설 등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런 혼란 상황을 틈타 외국 선박들이 소말리아 해역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제법을 무시한 채 불법 어업으로 수자원을 약탈하고 독성 폐기물을 투기해 바다를 오염시켰다. 이로 인해 소말리아의 긴 해안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바뀌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외국 선박들이 소말리아 해역에 버린 원유 찌꺼기 때문에 1990년대 초 이미 소말리아 해안에서는 타르 덩어리가 발견되곤 했다. 불법으로 버려진 원유 찌꺼기는 해마다 3만 3천 톤에 달했다. 외국 선박들은 또한 하수구 오물을 가져와 싼값에 소말리아 선박에 넘기고 소말리아 선박은 그것을 가까운 해상에 버리곤 했다. 사실 소말리아 해역에 독성 폐기물을 버리는 일은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됐는데 내전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자 더 심해졌다. 외국 선박들이 소말리아로 가져와서 버린 쓰레기에는 방사능 폐기물, 납, 카드뮴, 수은, 산업 폐기물, 병원 쓰레기 등 온갖 독성 성분과 비위생적인 물질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런 쓰레기 불법 투기는 주로 유럽 국가의 폐기물 업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들은 자국에서 위생적으로 처리하려면 1톤당 250달러(한화로 27만 5천 원)이 드는 독성 폐기물을 소말리아 해역에서 1톤당 단돈 2.5달러(한화로 2,750원)에 처리했다. 이런 쓰레기의 지속적인 투기로 소말리아의 해양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자원이 오염됐다. 2004년 12월에는 쓰나미로 인해 버려진 독성 폐기물 통들이 소말리아 해안으로 밀려와 해안가 주민들 사이에 호흡기와 피부 질환이 발생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20년 동안 소말리아 해역은 비교적 안전하게 불법 어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져 급기야 &ldquo;국제 무료입장 구역&rdquo;으로 불리게 됐다. 1991년 이후 내전으로 소말리아가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자 수자원이 풍부한 소말리아 해역으로 세계의 어선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가까운 유럽의 어선은 물론 일본, 대만, 한국, 중국 등 아시아 어선들도 포함돼 있다. 전 세계 어선들이 소말리아 해상에서의 불법 어업으로 얻는 수익은 매년 3억 달러(한화로 3,300억 원)에 달한다. 이것은 내전과 잦은 자연재해로 수십 년 동안 굶주림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소말리아 사람들의 생활고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다. 유엔은 2005년~2006년 현장 조사를 한 후 소말리아 해역에서 잡은 생선에 대한 거래 정지를 제안했다. 그러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 회원국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자국 어선들의 불법 어업을 잘 알고 있는 정부들이 이 제안을 외면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해적들은 소말리아 해역에서 불법으로 이뤄지는 쓰레기 투기와 어업을 해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핑계로 삼고 있다. 사실 일부는 이런 문제를 계기로 해적에 합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1990년대 초 내전이 시작되자 소말리아 해역은 갑자기 참치, 고등어, 상어, 가재 등 온갖 생선들을 갖춘 세계의 슈퍼마켓이 됐다. 첨단 장비를 갖춘 대형 외국 어선들이 몰려 와 불법 어획을 했고 소말리아 어부들은 오히려 자기 바다에서 밀려났다. 소규모 배와 그물로 생선을 잡던 소말리아 어부들은 외국의 대규모 어선과 경쟁할 수 없었다. 대형 외국 어선들이 작은 소말리아 어선들을 위협해 쫓아내고 그물을 잘라버리는 일도 자주 발생했다. 소말리아 어부들은 스스로 바다를 지키기 위해 해양감시대를 조직했는데 이 감시대가 결국 해적의 시초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다에서 쫓겨난 어부들은 물론이고 오랜 내전으로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총은 얻기 쉬우며, 싸우는 기술밖에 없는 젊은이들도 해적에 합류했다. 처음엔 생존을 위해 해적이 됐지만 해적질이 수익을 내는 사업이 되자 이들은 해적질을 미래를 위한 삶의 희망으로 삼게 됐다. 이들 모두가 핑계로 삼는 것이 소말리아 해역에서의 불법 쓰레기 투기와 어업이다. 해적들은 국제사회가 불법 어선과 쓰레기 투기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자신들의 애원은 외면하더니 이제는 해적질이 불법이라고 얘기한다며 비웃는다. 이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반성하지도 해결하지도 않는 국제사회가 소말리아 해역을 지키려다가 해적이 된 자신들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의 해적 행위는 불법 어업 감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2009년에 일어난 소말리아 해적 공격 중 약 6.5%만이 어선에 대한 공격이었다. 어선이 화물선에 비해 규모도 작고 납치하기 쉬운 것을 생각하면 뜻밖에 낮은 수치다. 해적들이 어선을 노리지 않는 것은 몸값이 적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목표로 삼는 것은 주로 몸값을 많이 받아낼 수 있는 대형 국제 화물선이다. 오히려 해적들은 불법 어업을 조장하기도 한다. 불법 어선은 편법을 통해 부패한 지역 관리로부터 어업 허가를 받고 지방 관리와 결탁한 해적들이 불법 어선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해적이 늘면서 소말리아 어부들은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해적 감시와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외국 정부들이 전함을 파견해 오히려 소말리아 어선을 감시하고 위협하는 적반하장의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어부들은 외국 전함들이 소말리아 어선과 상선을 해적 취급해 검문하고 공중 촬영까지 한다고 항의한다. 힘 있는 나라들은 전함까지 파견해 남의 나라 해상에서 자국 화물선은 물론 불법 어업을 하는 어선까지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소말리아 어부들을 지켜줄 수 있는 힘 있는 정부는 없다. 이들이 수자원이 풍부한 넓은 바다가 아니라 작은 해안을 가진 나라에서 어부가 되었다면 살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검은 금의 저주</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1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다국적 정유회사인 쉘(Shell)의 임원들이 국회의원들의 깐깐한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환경단체들, 쉘의 임원들, 국회의원들이 둘러앉은 원탁회의에서는 원유 채굴지를 오염시킨 쉘이 오염 지역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된 곳은 나이지리아의 니제르 델타(Niger Delta) 지역이었다. 이곳에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노후한 시설, 그리고 지역 주민들의 도둑질과 고의적인 채굴 방해 등으로 원유 파이프가 새는 바람에 주변이 오염되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쉘은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지역 주민들의 고의적인 방해로 발생한 오염까지 자신들이 책임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쉘이 나이지리아에서 수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열악한 환경에서도 뒤처리를 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환경단체들은 쉘이 법적 배상액을 줄이기 위해 책임을 축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아프리카에 위치한 나이지리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다. 또한 세계에서 여섯째로 원유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다. 원유는 나이지리아 수출량 중 90% 이상을 차지한다. 나이지리아는 원래 농업에 의존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1957년 원유가 발견된 이후 원유는 최대의 외화 수입원이 됐고 나이지리아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lsquo;검은 금&rsquo;이라 불리는 원유는 나이지리아의 가난, 실업, 부패를 해결하지 못했고 특별히 원유 채굴 지역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이지리아의 남부에 위치해 있는 니제르 델타 지역은 아프리카 최대의 늪지대로 원유와 가스 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곳에 사는 3천만 명 이상의 주민들은 수십 년 동안 세상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고통을 겪어 왔다. 이 모두가 원유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직접 고통을 준 것은 나이지리아 정부의 보호 속에서 별다른 법적 규제를 받지 않고 원유를 채굴해온 초국적기업 형태의 원유 회사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유 누출, 폐기물 투기, 가스 연소(나이지리아에서는 원유에서 가스를 분리하지 않고 폐기물로 태워버린다)는 니제르 델타에서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다. 이런 일이 수십 년간 계속되면서 이 지역의 토양, 물, 공기가 모두 오염됐다. 특별히 빈번하게 발생하는 원유 누출 사고는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의 생계와 건강을 위협해 왔다. 특히 어업과 농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니제르 델타 지역에는 3,1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이중 60% 이상은 자연환경에 의존해 생계를 해결한다. 그러나 농지와 바다의 오염으로 농작물 수확과 어획량이 감소해 많은 사람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오염은 농기구와 어업 도구도 망친다. 오염 때문에 주민들의 건강도 악화됐다. 오염된 물을 먹고, 그 물로 밥을 짓고 세수를 하며, 기름과 독성 물질로 오염된 생선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유 누출에 대한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았지만 일 년에 최소 수백 건의 누출 사건이 발생한다. 유엔개발기구(UNDP)의 통계에 의하면 1976년~2001년 사이에 약 6,800건의 원유 누출이 있었다. 이것은 일 년에 260건 이상의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어떤 경우에는 수년간 누출이 계속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2천 곳 이상이 오염돼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누출 사고와 오염지역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0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0_%ED%8F%89%ED%99%94%ED%95%99%EC%9E%90%EC%99%80%20%ED%95%A8%EA%BB%98%20%EC%9D%BD%EB%8A%94%20%EC%A7%80%EB%8F%84%20%EB%B0%96%20%EC%9D%B4%EC%95%BC%EA%B8%B0/24p%20%EC%9D%B4%EB%AF%B8%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2010년 초까지 알려진 세계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는 1989년 3월 알래스카에서 발생한 엑슨 발데즈(Exxon Valdez) 원유 탱크 사고였다. 그런데 2010년 4월 미국 멕시코 만에서 발생한 BP사의 해저 원유 파이프 사고가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엑슨 발데즈 사고에서 유출된 기름은 1천만 갤런이었는데 BP 사고 유출량은 그것의 17배인 1억 7천만 갤런이었다. BP 사고의 피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엑슨 발데즈 사고로 인해 파괴된 생태계도 아직까지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2007년 일어났던 한국의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는 유출량으로 볼 때 엑슨 발데즈 사고의 4분의 1 수준이었다. 그런데 니제르 델타에서는 거의 40년 동안 매해 엑슨 발데즈 사고와 맞먹는 원유 유출 사고가 있었다. 대충만 계산해도 그 규모와 오염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1년에는 니제르 델타의 오그보도라는 곳에서 대규모 원유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오염 지역 청소는 수개월간 지연됐고 그 후에도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2년이 지난 2003년에도 원유 찌꺼기가 땅과 바다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주민들은 고기잡이와 사냥을 할 수 없었다. 배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보통 배상을 받으려면 주민들은 무장집단이나 일부 주민들이 일으킨 고의적인 사고가 아니라 원유 회사의 관리에 문제가 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온갖 기술 정보를 이용해 책임을 회피하는 원유 회사들과 대항할 힘이 없어 결국 배상조차 받지 못한다. 2007년 5월에는 오고니 부족이 사는 키라 카이 마을을 지나는 원유 수송 파이프에서 원유가 새어나왔다. 농작물과 근처 호수의 물고기가 모두 몰살당했다. 현장을 조사한 쉘의 담당자는 파이프가 부식돼 세 개의 구멍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쉘은 파이프를 조이고 당시에 흘러나온 기름 대부분을 제거했다. 그러나 쉘의 조치는 거기서 끝났다. 그 후에 흘러나온 기름을 청소하지도 않았고 주민들에게 배상하지도 않았다. 국제단체들이 항의하자 쉘은 원유 누출이 주민들의 고의적인 방해로 발생했기 때문에 배상을 할 수 없다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배상과 기름 제거를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한테는 그런 변경된 입장과 결정조차 알리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쉐브론(Chevron), 쉘(Shell), 아기프(Agip), 모빌(Mobil) 등 세계적인 회사들이 니제르 델타에서 원유를 채굴해 왔다. 이들 서구 기업들은 나이지리아 정부와 결탁해 주로 소수 부족인 지역 주민들을 멸시하고 억압해 왔다. 그중 가장 많이 원유를 채굴해온 쉘은 거의 모든 악행에 관여했다. 원유 유출은 파이프의 마모, 시설의 열악한 관리, 직원의 실수, 고의적 파괴, 도둑질 등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발생한다. 특별히 파이프의 고의적 파괴와 도둑이 생겨나게 된 이유는 주민들을 희생시키고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원유 회사들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십 년 동안 원유 채굴이 이뤄졌지만 주민들은 혜택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환경오염과 생계 위협에 시달리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급진적인 무장세력이 출현하게 됐다. 이들은 원유 채굴 시설을 공격하고 원유 회사의 경비원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채굴지의 노동자들을 납치한 후 몸값을 요구하는 일이 한 해에 수백 건씩 발생하면서 니제르 델타 지역은 납치로도 악명을 떨치게 됐다. 수십 년간 계속된 지역 주민 탄압도 무장세력을 출현시키는 데 일조했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원유 채굴과 관련해 지역 주민들을 계속 억압해 왔고 때로 원유 회사들의 요청을 받아 주민들을 공격하고 살해하기도 했다. 특별히 1990년대 오고니(Ogoni) 부족과 이조(Ijaw) 부족이 조직적인 저항을 하자 나이지리아 정부는 이들에게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행, 체포, 살인을 자행했다. 원유 채굴 산업은 주민들에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 놓았다. 지금도 니제르 델타의 힘없는 주민들은 오염된 땅, 물, 공기 속에서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b>피 냄새를 품은 노트북과 핸드폰</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4월 21일 미국 12개 대학의 학생들이 캘리포니아에 모였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이하 콩고) 동부에서 생산되는 &lsquo;분쟁 광물&rsquo;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분쟁 광물의 세계적 거래를 막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대학생들은 분쟁 광물의 거래를 막음으로써 콩고 동부 지역의 마을과 주민들이 평화를 되찾고 광물자원의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자 했다. 일주일 동안 진행된 회의에서 대학생들은 특별히 소비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짐했다. 이들은 &lsquo;분쟁 광물&rsquo; 사용을 중지하도록 전자제품 회사들에 압력을 넣기로 했다. 또한 자신들의 학교에도 분쟁 광물을 사용하지 않은 전자제품을 구매하도록 요구하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콩고에서는 2011년 4월부터 발효된 미국의 분쟁 광물 사용 규제법이 콩고의 광산업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부 사람들은 규제법이 엄격하게 적용되면 분쟁의 주역인 무장집단이 아니라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광산업계와 전자업계가 법을 준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법이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부정적 의견도 번져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학생들이 말하는 &lsquo;분쟁 광물&rsquo;은 콩고 동부에서 채굴되고 거래되는 원광들로서 이 원광들을 제련하면 주석(tin), 탄탈룸(tantalum), 텅스텐(tungsten)이 생산된다. 이 광물들은 3T로 불리며 금과 함께 이동전화, 노트북 컴퓨터, MP3 플레이어, 비디오 게임기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원자재가 된다. 세계 주석의 40%, 그리고 탄탈룸의 60%가 전자기기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콩고 동부는 3T의 원광이 생산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노트북 컴퓨터와 이동전화에 콩고 동부에서 채굴된 광물에서 나온 원자재가 포함돼 있다는 얘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콩고 동부에서는 원광의 불법 거래와 수익을 둘러싸고 여러 무장집단과 군인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이들의 폭력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이렇게 무력 분쟁과 주민들의 희생을 야기하는 콩고의 &lsquo;분쟁 광물&rsquo;을 전자회사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법은 2011년 4월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됐고 법에 따라 미국의 전자회사들은 제품에 사용된 광물의 원산지를 공개해야 한다. 즉 분쟁 광물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동안 HP, 델(Dell), 인텔(Intel), 애플(Apple)과 같은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들과 광물 무역업자들은 콩고 동부의 분쟁 상황을 잘 알면서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광물을 쓰지 않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자업계는 미국 의회의 법률 통과를 막기 위해 한 달에 2백만 달러(한화로 22억 원)을 들이며 로비를 했다. 법이 통과됐지만 전자업계와 광산업계는 이 법의 규제를 따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실행 완화를 주장하고 있다. 콩고 정부 또한 광산업계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을 펴내며,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필자 소개<br /> 정주진</b><br /> 캐나다 워털루 대학에서 평화갈등연구 디플로마를, 미국 이스턴 메너나이트 대학에서 갈등해결학 석사를 했다.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에서 평화학 박사 학위를 받아 국내 첫 평화학 박사가 됐다. 자유 연구자 및 교육자로서 평화갈등연구라는 학문 영역에 토대를 두고 갈등해결과 피스빌딩(peacebuilding)을 연구, 교육, 실천하고 있다. 평화교육과 갈등해결 전문가로 자문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학에서 평화와 갈등해결 과목들을 강의하고 있다. 평화문화의 확산과 평화적 갈등해결의 실행을 위해 학교,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과 꾸준히 협력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갈등해결과 한국사회』(2010)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공공갈등 해결』(2010)이 있다. <a href="mailto:jujinchung@hanmail.net">jujinchung@hanmail.net</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8 오전 10:01:00《214》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35"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4_%EB%B2%9A%EA%BD%83%20%EB%8F%99%EC%82%B0_%ED%91%9C%EC%A7%80.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2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안톤 빠블로비치 체호프의</strong></span> </span><span style="color: #339966"><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벚꽃 동산』</span></strong></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을 읽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흔히 체호프의 작품은 기승전결이 불분명하고 사건이 없다고 하지만 『벚꽃 동산』만큼은 분명한 전제가 주어진 작품이다. 즉 6년 만에 파리에서 귀국한 류보비 부인에게, 영지 차압공고가 날아든 것이다(『벚꽃 동산』, 열린책들, 203쪽). 이렇듯 전제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전통적인 기승전결을 결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문제 제시에 따른 일사불란한 해결 노력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류보비의 가족들은 벚꽃 동산이 경매에 부쳐진 현실을 외면하고, 동산을 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충고를 무시한다(202~203쪽, 204쪽). 그래서 여러 차례 해결방법을 제시했던 로빠힌은 &ldquo;당신들처럼 경솔하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은 처음 봤&rdquo;(219쪽)다고 힐난하게 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품을 읽는 우리는 현실 대응 능력이 없는 몰락한 지주 계급의 무력한 한숨을 듣게 되며, 몰락해가는 자신들의 처지를 지나간 영화<sup>榮華</sup>의 기억으로 막으려고 하는 모순적인 행태를 연이어 보게 된다. 그중에서 특히 동산이 경매에 부쳐진 날 막연한 낙관과 기대 속에서 벌어지는 연회는 무기력과 모순의 절정이다(3막 전체).</p> <p style="text-align: justify">『벚꽃 동산』을 읽으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모티프는 &lsquo;책&rsquo;과 관련한 것들이다. 이 작품 속에서 책과 연관된 모티브는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많아서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lsquo;벚꽃 동산&rsquo;을 뺄지언정 이 모티브를 빼면 작품이 성립되지 않을 정도다. 막이 열리자마자 우리는 인상적인 지문을 볼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전히 &lsquo;어린이 방&rsquo;이라 불리는 방. 문 하나는 아냐의 방으로 통한다. 곧 해가 뜨려는 새벽. 이미 벚꽃이 핀 5월이지만 동산에는 아침 서리가 내렸고, 춥다. 창문틀은 닫혀 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촛불을 든 두냐샤와 책을 든 로빠힌이 들어온다.(193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독자/관객이 『벚꽃 동산』에서 처음 보게 되는 인물과 행동은, (촛불을 든 하녀 두냐샤를 제외한) 책을 든 로빠힌이다. 그런데 로빠힌이 누군가? 벚꽃 동산을 소유한 지주댁(류보비家)에서 대대로 봉사했던 농노의 자식으로 &ldquo;매나 맞고 배우지도 못한&rdquo;(245쪽), &ldquo;배운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다가, 글씨마저도 돼지가 쓴 듯 엉망&rdquo;(221쪽)인 사람이다. 그런데도 로빠힌은 늘 책을 껴안고 산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꼬마 농부&hellip;&hellip;. 사실 아버지는 농부였어. 그런데 나는 이렇게 노란 조끼에 노란 구두를 신고 있으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를 한 격이지&hellip;&hellip;. 정말 돈이 많은 부자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농부는 농부거든&hellip;&hellip;. (책장을 넘긴다) 책을 읽어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 읽다가 잠이나 들지.&rdquo;(194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버지는 류보비가의 농노였으나 상인으로 자수성가한 로빠힌에게 책은, 계급 사회를 엄격히 구획하는 진입 장벽이다. 책으로 상징되는 귀족 계급(지배 계급)은 몰락 중이지만 로빠힌에게는 그들 세계에 대한 향수가 있다. 종내는 벚꽃 동산을 차지하게 될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에게 없는 &lsquo;문화 자본&rsquo;일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에 대한 강박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성격이다. 등장인물 각자가 어떤 식으로 책의 세계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류보비: 오, 나의 책장(202쪽)&nbsp; <br /> 가예프: 이 동산은 백과사전에도 실려 있다고.(203쪽)<br /> 이 책장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니?(204쪽)<br /> 나는 이 책장 앞에서 연설을 했어.(211쪽)<br /> 뜨로피모프: 아마도 나는 언제나 대학생일 겁니다.(209쪽)<br /> [러시아의 인텔리들은]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을뿐더러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224쪽)<br /> 에삐호도프: 나는 성숙한 사람이라서 여러 가지 훌륭한 책들을 읽고 있지만&hellip;(215쪽)<br /> 당신은 버클리를 읽어 봤나요?(216쪽)<br /> 삐시치끄: 니체&hellip;&hellip;철학자&hellip;&hellip;그 위대하고 유명하다며&hellip;&hellip;대단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사람.(232쪽)</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예는 차고도 넘는다. 로빠힌은 농노의 자식이었던 주제에 &ldquo;오필리아여, 수도원으로 가시죠&rdquo;(227쪽) 같은 어울리지 않는 비유를 쓰고, 무도회에 온 역장은 연회장에서 톨스토이를 낭독한다(239쪽). 또 부랑자들은 네끄라소프의 시를 읊는다(226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책&middot;책장&middot;시&middot;대학생 등은 모두 책의 세계를 이루는 계열체로, 류보비가로 대변되는 구세대(신분사회, 귀족사회)의 몰락과 책의 세계의 무력함은 『벚꽃 동산』에서 서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야를 잠시 작품 밖으로 넓혀보자. 안정된(억압적인) 세계는 항상 안정된(절대적인) &lsquo;책의 세계&rsquo;를 가진다. 서양 중세와 성서, 같은 시기의 동아시아 유교 경전은, 그 시대의 안정과 질서를 상징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지식인도 응분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한 세계가 다른 세계로 이행할 때, 제일 먼저 흔들리는 것은 그 시대를 유지해 주었던 참조서<sup>reference</sup>다. 『벚꽃 동산』은 그런 참조서에 의지했던 전통적 지식인이 새로운 사회 변동에 대처하지 못하고 &lsquo;살처분&rsquo;되는 만화경을 보여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정은 이랬지만, 류보비 가족에게 책은 그들 계급을 지켜주는 최후의 신부<sup>神符</sup>다. 동산이 매각되고 여행길에 오르기 직전, 막내딸 아냐의 대사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 그 신부에 다시 한 번 그들의 미래를 의탁한다. &ldquo;[&hellip;] 나는 시험 준비를 해서 학교에 입학하겠어요. 그런 다음 일을 해서 엄마를 돕겠어요. 엄마, 우리 함께 여러 가지 책을 읽도록 해요&hellip;&hellip;. 그럴 거죠? (엄마의 손에 입 맞춘다) 가을밤이면 우리 책을 읽어요. 많은 책을 읽고 나면,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거예요.&rdquo;(253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냐의 공상적인 해결 방법은, 나이 먹은 만년 대학생 뜨로피모프에게서 반복된다. 그는 &ldquo;인류는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면서 진보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류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언젠가는 익숙하고 분명해질 겁니다. 그러니 오직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찾는 사람을 정성을 다해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러시아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너무도 적습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인텔리들은 아무것도 탐구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또 그럴 능력조차 없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인텔리입네 하면서 하인들이나 농부들을 짐승 대하듯 함부로 대하고, 책도 제대로 읽지 않을뿐더러 공부도 하지 않습니다&rdquo;(224쪽)라고, 식자처럼 말하지만, 행동은 혀를 따라가지 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서 말했던 것처럼 자수성가한 로빠힌에게 책은 자신의 재력에 더해야 할 문화 자본이다. 또 신흥 자본가를 꿈꾸는 또 한 사람의 야망가인 몰락 지주 삐시치끄에게 역시 책은 성공의 기술을 가르치는 처세서에 불과하다. 니체를 위대하고 대단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추워 올린 다음, 그는 이렇게 덧붙였지 않은가? &ldquo;[그런] 사람이 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지. 위조지폐를 만들 수도 있다고.&rdquo;(232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체호프는 &lsquo;책의 세계&rsquo;를 구세대의 상징 삼아, 그 시대가 당면했던 농노제 해체(1861년)의 혼란상을 보여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피르스: 불행이 있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부엉이가 울고, 사모바르도 끊임없이 덜커덩대고.<br /> 가예프: 불행이라니?<br /> 피르스: 농노 해방 말입니다.(226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모든 작가의 작품이 다 그렇듯이, 체호프의 『벚꽃 동산』 또한 &lsquo;책의 세계&rsquo;의 붕괴라는 모티브 하나만으로 저 주제를 다 감당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살펴야 할 모티브는 커다란 사회 변혁 앞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는, 등장인물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지의 관리인인 에삐호도프는 3년째 &ldquo;알아들을 수 없는 말&rdquo;을 하는 &ldquo;스물둘의 불행&rdquo;(195쪽)으로 불리며, 뜨로피모프는 &ldquo;언제나 대학생&rdquo;(209쪽)일 것이라고 호언한다. 또 가정교사 샤를로따는 신분증도 없고 나이도 모르는 고아(214쪽)로 &ldquo;나는 누굴까, 대체 왜 살고 있는 거지. 알 수 없는 일&rdquo;(216쪽)이라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들보다 한층 재미있는 인물들은 하인 야샤와 하녀 두냐샤다. 야샤는 하인의 신분을 잊고(198쪽), 어머니를 부정하며(209쪽), 무식하고 예의 없는 조국을 비난하며 파리로 데려다 줄 것을 요구한다(240, 252쪽). 또 항상 두통을 호소하는 하녀 두냐샤는 자신을 섬세하고 고상한 귀족이라고 여기며(217쪽), &ldquo;연약한 숙녀&rdquo;(241쪽)라는 도취에 빠져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층 계급의 도립 현상과 함께, 한때 지배 계층이었던 류보비 가족의 퇴행도 눈에 띈다. 특히 이 작품의 첫 지문에 나오는 &ldquo;여전히 &lsquo;어린이 방&rsquo;이라 불리는 방&rdquo;(196쪽)이란 지문은, 류보비가의 퇴행을 가리키는 중요한 상징이다. &ldquo;여기 앉아 있는 게 정말 나일까?&rdquo;(201쪽)라고 말하는 류보비는 &ldquo;이제 나는 어린애가 된 거야&rdquo;(196쪽)라고 선언하며, 그 퇴행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동산을 배회하는 죽은 &lsquo;어머니의 환영&rsquo;을 보게 만든다(207쪽).</p> <p style="text-align: justify">류보비의 오빠인 가예프는 아예 &ldquo;나는 80년대 사람이다&rdquo;(212쪽)라고 유세하며, 옛 추억에 푹 빠져 사는 인물이며, 몰락한 지주인 삐시치끄는 류보비가 먹어야 할 약을 삼킨다(205쪽).</p> <p style="text-align: justify">네끄라소프의 시를 읽는 부랑자들처럼, 온갖 사물이 뒤죽박죽된 실상은 영하 3도에 피어난 벚꽃(195쪽), 두 시간이나 연착한 기차(196쪽), 호도를 먹는 개(196) 등의 초자연적이고 풍자적인 일상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다가 &ldquo;자유의 몸이 되는 걸 원치&rdquo; 않았으며 &ldquo;농부들은 나리에게 의지하고, 나리들은 농노에게 의지했&rdquo;(222쪽)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농노해방을 &ldquo;불행&rdquo;(226쪽)이라고 말하는 피르스까지 더하면, 정체성 혼란은 책의 세계의 붕괴보다 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신분과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세계는 기존의 온갖 경계와 정체성을 흐릿하게 하고 뒤섞는다. 이런 세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마저 무너진다. 이 작품은 많은 비밀을 품고 있지만, 최고의 불가사의는 253쪽에 나오는 &lsquo;아기의 울음&rsquo;이다. 물론 그 가련한 아기의 울음은 정체불명의 샤를로따가 복화술로 재현한 것이지만, 혼란 그 자체인 신생 러시아에 대한 암시가 아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표면적으로 보면, 류보비 가족이 동산을 구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류보비가는 아주 노회한 수단을 보여주었다. 수양딸 바랴를 로빠힌에게 시집보내려는 책략이 그것이다. 아냐(198쪽)&middot;가예프(206쪽)&middot;류보비(221, 235쪽)는 번갈아 가며, 바랴를 로빠힌에게 억지로 밀어붙인다. 바랴는 결코 로빠힌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족들이 그녀를 로빠힌에게 밀어붙일 때마다 바랴는 수동적이 된다. 하지만 로빠힌은 바랴를 선택하지 않았다. 수녀원에 들어가는 게 소망인 바랴는 류보비와 아냐가 파리로 떠날 때 혼자 고향에 남아 가정부로 연명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벚꽃 동산』을 비롯한 체호프의 모든 희곡은 딱히 누구를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체호프보다 4년 먼저 출생하여 근대 사실주의 극의 기초를 놓았다는 입센의 작품과 달리,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체호프의 희곡이야말로, &lsquo;주인공 없는 일상&rsquo;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장 사실주의에 충실한 작품이자, 가장 현대적인 극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로빠힌은 러시아 역사의 아이러니,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 대한 기막힌 은유다. 농노가 귀족의 장원을 차지하고 새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러시아 혁명이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돌아 농노의 자식이었던 로빠힌은 상업 자본가가 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팔렸던 장원(러시아)은 이제 자본주의 시장의 것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27 오후 12:55:00길리건의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4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9_%EC%99%9C%20%EC%96%B4%EB%96%A4%20%EC%A0%95%EC%B9%98%EC%9D%B8%EC%9D%80/%EC%99%9C%EC%96%B4%EB%96%A4%EC%A0%95%EC%B9%98%EC%9D%B8%EC%9D%80_%ED%91%9C%EC%A7%80.jpg" />&nbsp;</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사</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왜 <span style="font-size: large">보수</span>가 집권하면<br /> <span style="font-size: large">살인과 자살</span>이 늘어나는가</span></span></strong></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에서 폭력의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한 정신의학자가 통계를 분석하다 수수께끼에 빠졌다. 그가 분석한 자료는 1900년부터 미국 정부가 매년 공식적으로 펴낸 살인율과 자살률 통계였다. 수많은 연구를 해 온 저명학자였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 앞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첫째, 1900년부터 2007년 사이의 공식 통계에서 왜 살인율과 자살률이 함께 늘어나거나 함께 줄어드는 것으로 나오는가? 살인과 자살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단 말인가? 정신적&middot;심리적 문제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과, 범죄적 동기로 타인을 죽이는 살인이 어떻게 같은 추세로 설명될 수 있는가? 둘째, 190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왜 살인율과 자살률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시기와 감소하는 시기가 번갈아 나타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통계 수치를 연도별 그래프로 만들어보았더니 이 기간 동안 세 번의 산봉우리와 세 번의 골짜기 형태가 나타났다. 기존의 설명 방식으로 도저히 이 문제들을 만족스럽게 풀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정신의학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급증하는 세 번의 시기가 모두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이 학자는 살인과 자살을 합해서 이 현상을 &lsquo;폭력 치사lethal violence&rsqu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또한 폭력 치사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세 번의 시기가 민주당 대통령의 집권 시기와 겹친다는 점도 확인했다. 더 자세히 조사해보니 미국 전체의 폭력 치사가 공화당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늘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고점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하면 폭력 치사가 줄기 시작해서 임기 말년쯤에 최저점에 도달하였다. 1900년 당시 미국에서 살인율과 자살률을 합한 폭력 치사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15.6명이었다. 그때부터 2007년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기간에 공화당 대통령들이 총 59년을 집권했는데 공화당 집권 기간을 통틀어 1900년과 비교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증가분이 19.9명으로 나타났다. 민주당 대통령들이 집권한 48년 동안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의 순누적 감소분이 18.3명으로 나타났다.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두 정당이 집권했을 때의 폭력 치사로 인한 사망률은 민주당 때가 공화당 때보다 10만 명당 38.2명 적었다. &ldquo;오늘날 미국 인구 수준으로 나타내자면 이 수치는 민주당 정부 때 공화당 정부 때보다 폭력 치사로 죽는 사람이 약 11만 4,600명 적음을 뜻한다.&rdquo;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에는 살인과 자살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났고,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에는 살인과 자살이 훨씬 덜 발생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발견에 스스로 놀란 정신의학자는 이 결과가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지 여러 방면으로 대조 검토해보았다. 특정 정당 대통령의 집권과 자살률&middot;살인율 사이에 단순한 상관 관계가 아니라 명확한 인과 관계가 성립하려면 공화당과 민주당이 취한 서로 다른 정책들이 사람들의 행동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공황이나 세계대전 등 일반적인 정권 교체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분석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통계를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어떤 다른 요인들을 고려해보더라도, 공화당-민주당 집권 시기와 자살률&middot;살인율의 변동 간에는 인과 관계가 성립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인과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은 말 그대로 &lsquo;세기의 질문&rsquo;이 아닐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침내 정신의학자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은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기 쉬운 정책이다. 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찬미하는 문화를 숭상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middot;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때, 특히 해고를 당했을 때, 극도의 수치심과 모욕감을 경험한다. 이런 식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는 폭력 치사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폭력 치사는 타인에게도(타살), 또 자신에게도(자살) 일어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즉, 어떤 정당이 내세우는 정책의 방향이 여러 형태의 사회&middot;경제적 스트레스와 불평등을 조장하고 그 결과 실업률, 수치심, 모욕감이 높아지면 그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폭력 치사 발생률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결과가 나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정신의학자는 의사답게 이 문제를 담배와 폐암의 관계에 비유한다. &ldquo;흡연이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사실이 밝혀졌듯이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하면 자살률과 살인율이 올라간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적포도주를 적당히 마시면 장수에 도움이 되듯이 민주당이 백악관을 차지하면 폭력 치사 발생률이 떨어진다.&rdquo; 그러므로 살인과 자살이라는 폭력 치사에 관한 한 공화당은 &lsquo;위험 요인&rsquo;이고 민주당은 &lsquo;보호 요인&rsquo;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정치적 민주주의에만 신경을 썼지 사회적 민주주의는 간과한 탓에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있는 모든 나라들 중에서 인구 대비 살인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연구를 내놓은 정신의학자는 폭력의 문제를 연구해 온 뉴욕대의 제임스 길리건 교수다. 그가 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에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가 상세히 나와 있다. 정신의학 문제를 연구하다 우연히 정치적 결론을 내리게 된 길리건은 폐암을 치료하는 의사만큼이나 양심적이고 초연하게 결론을 내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나는 폭력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으로서 관심을 두었던 통계 수치를 들여다보면서 이 여행을 시작했다. &hellip;&hellip; 나는 자살률과 살인율이 동시에 올라가고 내려간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20세기를 통틀어 분포 양상을 보면 산봉우리도 있고 골짜기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 비율들이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간 시기도 있고 &lsquo;정상&rsquo;으로 여겨질 수준으로 내려간 시기도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이 봉우리와 골짜기가 대통령 선거 주기와 일치함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말 그대로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hellip;&hellip; 이 책에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부표와도 같다. 이 부표들은 바닷길의 종착점이 낙심한 개인이나 살인자의 가슴이 아니라 백악관과 두 주류 정당의 상이한 경제 정책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다른 정치인들보다 더 위험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들이 나쁜 사람이거나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는 정책이 죽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이렇게까지 정치적 결론이 명쾌한 비정치적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이렇게까지 사회적 함의가 분명한 정신의학서를 읽은 적이 없었다. 에밀 뒤르켐의 고전 《자살론》이 21세기 버전으로 환생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우리 독자들에게도 더 없이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던져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책의 앞부분에서 길리건 교수가 인용한 미국의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의 말 속에 그 답이 있다. &ldquo;역사를 분석할 때 너무 깊숙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역사의 인과 관계는 흔히 단순한 데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right">조효제(성공회대 교수)</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죽음과 정치</span></strong></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의 미스터리</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살인에 관한 수수께끼를 소개한다는 점에서 한 편의 살인 미스터리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lsquo;자기 살인&rsquo;, 곧 자살까지도 망라하여 살인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연작 미스터리다. 내가 풀려고 하는 일련의 미스터리극은 곧바로 해명되지 않은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한다. 첫째, 우리는 보통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과 아주 다르다고(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르다) 생각하는데 어째서 살인율과 자살률은 같이 올라가고 같이 내려가는 경향이 있는(실제로 그렇다) 것일까? 두 번째 수수께끼는 미국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 동안에 어째서 미국 국민의 살인율과 자살률이 어떤 때는 갑절 이상으로 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신의학 전공자로서 나는 임상의 신분으로 감옥에서 살인범을 접했고 자살 충동과 싸우는 죄수와 일반 환자도 접했다. 내가 던진 질문은 &lsquo;누가 그것을 했나?&rsquo;가 아니었다. 혹은 자살의 경우 누가 그런 유혹에 약하고 누가 그런 시도를 하는가가 아니었다(그런 수수께끼는 이미 풀렸다). 내가 던진 질문은 &lsquo;어째서?&rsquo;였다. 나는 또 살인율과 자살률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절에 요청을 받아 매사추세츠 주의 여러 교도소에서 폭력 확산 문제와 씨름한 적이 있다. 그 경험을 통해서 나는 폭력이라는 전염병은 다스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또 다른 유형의 전염병을 발견할 마음의 준비는 전혀 안 되어 있었다. 폭력의 원인과 예방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미국과 전 세계에서 1년 단위로 보고되던 자살률과 살인율을 오래 전부터 추적했다. 그러면서 이 비율이 어떤 시기에는 확 올라갔다가 또 어떤 시기에는 동시에 극적으로 확 내려감을 알아차렸다. 미국에서는 1900년부터 해마다 자살률과 살인율의 통계를 낸다. 나는 자살률과 살인율이 함께 오르내리는 경향이 있다는 데 주목했다. 그것은 한쪽을 끌어올리는 어떤 원인이 다른 쪽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다. 나는 봉우리와 골짜기로 이루어지는 변화 양상에도 주목했다. 1900년부터 2007년(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온 마지막 해)까지 한 세기가 넘는 기간의 자살률과 살인율을 추적</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면서 나는 이 폭력 치사 수치가 갑작스럽게 장기적이고 큰 규모로 증가하고 감소하는 것을 세 번 보았다. 한번 꼭대기에 도달하면 그 다음에는 동시에 극적으로 하락하는 추세가 반복되었다. 증가세와 감소세가 모두 가파르고 일관되어서 (다시 말해 예외적으로 높거나 낮은 범위를 몇 년이나 몇십 년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한동안 꾸준히 이어지다가 들쭉날쭉 오르내리기를 거듭하기에) 이 사망률을 그래프로 그리면 중간중간에 골짜기가 박힌 산봉우리나 능선을 옆에서 바라본 모습처럼 보인다. 산정과 계곡의 차이가 어찌나 뚜렷한지 산꼭대기의 높이가 골짜기의 높이를 두 배 넘게 웃돌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는 것이 좀 더 &lsquo;정상&rsquo;에 가까운 일반적 비율로 돌아가는 시기가 사이사이에 끼어든 폭력 치사 전염병을 드러내는 지도라는 확신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아무런 낌새도 못 채고 몇 년을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모두 대통령 선거 주기와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자살률과 살인율은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힌 후에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기 시작했고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동안에도 줄곧 전염병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증가세는 취임 첫 해나 임기 초반 몇 해 안에 시작되어서 마지막 해나 임기 종반 몇 해 동안 절정에 달했다. 이 추세는 민주당 후보가 당선된 다음에야 비로소 반전되어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락세는 새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첫 한두 해 안에 시작되었고 민주당 대통령이 백악관을 차지한 마지막 해나 후반기에 자살률과 살인율이 대체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런 연간 변화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더니 세 가지 경우 모두, 다시 말해 자살, 타살, 둘의 종합(자살률과 타살률을 합산한 수치)에서 모두 정당과 폭력 치사 발생률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연관성이 드러났다. 자살과 타살은 공화당이 백악관에 있을 때 늘어났고 민주당이 백악관에 있을 때 줄어들었으며 그 규모와 일관성은 우연의 탓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lsquo;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rsquo;였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만무하다. 폭력 치사 발생률을 끌어올리고 끌어내리는 것이 단지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의 정치적 꼬리표일 리는 없다. 정당과 폭력 치사 사이에 우연적 상관 관계가 아니라 인과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두 당의 정책과 성과가 다르기 때문일 수밖에 없고 그런 차이가 사람들의 행동에 끼치는 영향에 있을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차이가 정말로 있고 그런 차이가 폭력 치사 발생률에 끼치는 영향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자살률과 살인율은 어째서 같이 움직이는 것일까? 두 수치가 나란히 오르내리는 그런 통계는 폭력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집는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슬픈 사람 아니면 미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사람은 정신과 상담실이나 병원에서 주로 보는 환자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보통 범죄자로 여겨지고 나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가 아니라 처벌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며 그런 사람은 정신병원이나 개인 상담실이 아니라 주로 감옥에서 볼 수 있다. 자살 행동과 살인 행동의 원인도 개인 안에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는 자기 목숨을 끊는 사람은 우울증 병력이 있거나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기질이 있으려니, 아주 심한 정신적 충격이나 말기 암 같은 신체 질환에 시달리던 사람이려니 여긴다. 반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인륜을 저버린 괴물로, 문제아로, 범죄자로, &lsquo;못된 종자&rsquo;로, 아니면 그저 &lsquo;악질&rsquo;로 여긴다. 자살과 살인은 나란히 움직이며 둘 다 대통령 선거 주기와 관련이 있음을 통계가 엄연히 보여주고, 이런 자료는 공무원과 노련한 역학자(疫學者)와 미국 공중위생국 산하 국립보건통계원에서 일하는 통계학자가 작성한 것이지만 자살과 살인을 누가, 왜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대부분의 고정 관념을 재고하지 않으면 이런 통계는 좀처럼 믿기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이 문제는 사실 간단하지 않고 의문은 깊어진다. 우연의 탓일 가능성이 아무리 낮다 하더라도 상관성이 인과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미식 축구의 패자를 뽑는 슈퍼볼에서 AFC(아메리칸 풋볼 컨퍼런스) 소속 팀이 이기면 주식 가격이 떨어지고 NFC(내셔널 풋볼 컨퍼런스) 소속 팀이 이기면 주식 가격이 치솟는다던 실없는 주장을 기억하는가? 그런데 41년 중에서 33년이 그랬으니 맞을 확률이 자그마치 80퍼센트다! 이런 예로도 알 수 있듯이 상관 관계는 둘을 연결하는 그럴듯한 인과 메커니즘 없이 그저 무의미한 우연의 일치에서 비롯할 때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니면 상관 관계는 두 현상과 연결된 제3의 변수 때문에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심장마비 발생률이 한 사회의 전화기 보유율과 상관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이 심장마비와 전화기 보유라는 두 변수가 그 사회의 경제 발전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며, 그 변수가 실제로 심장마비를 증가시키기는 하지만(수명이 늘어나면 인구 중 더 많은 비율이 심장마비에 걸리기 쉬운 연령대에 들어간다든가, 걷기보다는 자가용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운동을 덜 하게 된다든가, 동물성 지방과 콜레스테롤 섭취가 늘어난다든가 등등 여러 인과 메커니즘을 통해서), 단순히 전화기를 사는 것만으로도 심장마비에 걸린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인과 메커니즘은 가설조차 제기된 적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정당과 폭력 치사 발생률 사이의 상관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내가 풀려고 나선 것이 바로 이 수수께끼다.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인 정신의학자로서 나는 정치적 사건들이 아니라 사람들의 개인적 삶에서 일어나는 파란만장한 일들 속에서 정신적 고통이나 성격 장애의 원인을 찾아내는 치료 전문가로 훈련받았고 주로 그런 쪽에서 경험을 쌓았다. 문학작품 독자로서 나는 영국의 문호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남긴 이런 말도 잘 안다. &ldquo;사람의 심장이 견뎌낼 수 있는 그 모든 아픔 중에서 법과 왕이 일으키거나 고칠 수 있는 아픔은 참으로 적구나.&rdquo; 그렇지만 법과 왕이 사람의 심장을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몰아가거나 반대쪽으로도 똑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내 눈앞에 뻔히 있었다. 정권을 잡은 정당과 폭력 치사의 상관 관계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어내자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의 차이가 더 많은 사람을 자살이나 살인으로 몰아가거나 혹은 거꾸로 폭력 치사의 발생을 줄이는 인과 메커니즘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1장 &lsquo;삶과 죽음의 문제&rsquo;에서 나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작성한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이 통계 자료가 보여주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살인율과 자살률의 증감 (2)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비전염병 수준으로 내려가는 세 번의 시기 (3)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간 시기와 공화당 정부의 상관 관계,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으로 내려간 시기와 민주당 정부의 상관 관계 (4) 자살률과 살인율의 연간 변화는 공화당이 집권한 59년 동안 (1900년을 기준년으로 잡았을 때) 순누적 증가세를 보였고 민주당이 집권한 48년 동안 같은 크기로 하락세를 보였다는 사실. (여기서 &lsquo;순누적&rsquo; 증가치나 감소치는 두 당이 집권한 기간에 일어난 연간 증가분과 감소분의 총계를 말한다.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전해에 비해 폭력 치사 발생률이 올라가거나 내려간 해는 모두 107년이었다. 공화당은 59년 동안 집권했고 민주당은 48년 동안 집권했다. 가령 미국의 폭력 치사 발생률은 1900년에는 10만 명당 15.6명이었고 1901년에는 17명이어서 1.4명이 늘었다. 1902년에는 이것이 15.7명으로 감소해서 1.3명이 줄었으니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1901년과 1902년 2년 동안 순누적 증가치는 0.1명이다[다시 말해서 1.4명 빼기 1.3명, 혹은 달리 표현하면 15.7명 빼기 15.6명]. 107년이라는 기간을 통틀어서 공화당이 정권을 잡은 59년 동안 폭력 치사의 순누적 증가치는 인구 10만 명당 19.9명이었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48년 동안 순누적 감소치는 이것과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18.3명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통계 수치를 따져보고 나서 나는 특정 시기에 집권한 정당이 아니라 어떤 중대하고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수치를 왜곡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가령 조사 대상 시기를 대공황까지로 끊는다든지, 2차 세계대전까지로 끊는다든지, 아니면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잡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통계 수치를 이렇게도 잘라보고 저렇게도 썰어보았지만, 폭력 치사 발생률이 오직 공화당 정부 때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오직 민주당 정부 때만 전염병 수준 밑으로 내려간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시기를 좁혀 잡았는데도 공화당 집권기에는 자살률과 살인율이 연간 변화 누적치에서 모두 순증가세를 보였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순감소세를 보였다. 정당과 폭력 치사 발생률이 안정된 상관 관계를 보이고 내가 그것을 논박하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남은 질문은 이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느냐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고 어째서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날까? 의사로서 내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생사의 문제였지 정치가 아니었으며, 정치 주체에 연결된 우연한 발견을 통해 정치를 들여다보는 시도 또한 어디까지나 무엇이 이런 죽음을 낳고 어떻게 하면 아까운 목숨을 살릴 수 있을지를 알아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장 &lsquo;자살과 살인의 진짜 범인, 불평등&rsquo;에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폭력 치사 발생률의 변화와 상관 관계가 있는 변화가 대통령이 어느 정당으로 바뀌었느냐 하는 변화가 아닌 다른 사회 환경 차원에서도 일어났는가? 다시 말해서 실업의 비율과 지속성이나 경기 침체와 불황의 빈도, 강도, 지속성에서 비롯되는 변화나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에서 비롯되는 변화 같은 것이 폭력 치사 발생률의 변화와 상관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경제적 척도에서 비롯된 변화를 사람이 스스로 죽거나 남을 죽이려는 욕구를 높이거나 낮추는 인과 메커니즘의 하나로 볼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3장 &lsquo;보수는 경제에 강하고, 진보는 경제에 약한가?&rsquo;에서 나는 탐구 범위를 넓혀 어느 당이 정권을 잡았느냐에 따라 2장에서 확인한 경제 여건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는지를 묻는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새로운 수수께끼를 낳는 역설과 마주친다. 어째서 번영과 경제 성장을 이루는 정당이라 내세우고, 치안을 지키고 &lsquo;법질서&rsquo;를 세우는 정당임을 자처하면서 범죄와 마약과 &lsquo;전쟁&rsquo;을 벌이는 정당이 더 높은 폭력 치사 발생률, 빈곤율, 실업률, 경기 침체율과 관련이 깊단 말인가? 그리고 한 정당이 미국 국민에게 주는 경제적 부담과 고통이 다른 정당보다 일관되게 더 높고 한 정당이 이루어내는 번영과 경제적 안정 수준이 다른 정당보다 일관되게 더 낮은데, 그래서 경제를 일으키기보다는 경제를 망치는데 어째서 그 정당이 계속해서 선거에서 이기고 유력한 정당으로 건재한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4장 &lsquo;수치심이 사람을 죽인다&rsquo;에서 나는 수수께끼의 핵심으로 파고든다. 그것은 남을 죽이려는 공격적 충동을 일으키는 감정, 자살처럼 그 충동을 도로 자신에게 겨누게끔 몰아가는 감정의 힘이 무엇인가다.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에서 나는 수치심을 폭력의 근본 원인으로, 폭력적 행동의 (충분 동인은 아니지만) 필요 동인으로 짚어낸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5장 &lsquo;실직이 늘면 수치심이 커진다&rsquo;에서 나는 실업, 상대적 빈곤, 사회・경제적 지위의 갑작스러운 상실이 수치심의 정도를 높이는 것으로 보이는지를 묻는다. 만약 높인다면 그것은 정치・경제적 사건과 개인의 행위 사이의 틈새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재정적으로 파산한 사람이 목숨을 끊기 쉽다는 것을 주변에서 접하는 일화 차원에서는 알고 있어도, 우리는 이런 비극적 사례들을 일종의 폭력이라는 전염병으로 여기는 것은 아직도 주저한다. 경제 규모가 커지면 가만 있어도 그 혜택이 저소득층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간다고 보는 &lsquo;낙수 효과&rsquo; 이론을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픈 사람이나 미친 사람과 악랄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에게 모두 영향을 끼치는 폭력의 낙수 효과 이론이라는 것도 있을 법하지 않은가?</p> <p style="text-align: justify">6장 &lsquo;보수 정당 지지자와 진보 정당 지지자&rsquo;에서는 숨을 고른다. 한 인구 집단(미국 국민)이 세월과 함께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살피기보다 서로 다른 인구 집단들(공화당 지지자가 많은 이른바 적색 주들 대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이른바 청색 주들)이 똑같은 시기에 어떻게 달랐는지를 2000년과 2004년 두 해에 걸쳐서 알아본다. 그렇게 해서 이 두 가지 유형의 주들이 문화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파헤치고 공화당 투표자와 민주당 투표자의 성향이 어떻게 다른지도 파헤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7장 &lsquo;정치가 삶과 죽음을 가른다&rsquo;에서 나는 왜 폭력 치사 발생률이 공화당 정부 때는 올라가고 민주당 정부 때는 내려가는지에 관한 수수께끼를 푸는 한편, 이렇게 규명한 수수께끼가 우리가 정치, 경제, 폭력을 생각하는 방식에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나오는 자료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통계 분석을 예일 대학 통계역학과의 라니 드사이와 함께 맡아준 나의 오랜 연구 동료 밴디 리 박사에게 깊이 감사한다. 또 밴디 리 박사와 그의 정신의학과 동료인 브루스 웩슬러 박사가 편집과 관련하여 내게 값진 조언을 해준 데 고마움을 느낀다. 존 톰슨과 나의 아내 캐롤도 편집과 관련하여 아주 유익한 조언을 해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삶과 죽음의 문제</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종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공화당이 집권하면 죽음의 전염병이 번진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1900년부터 1912년까지 20세기의 처음 13년 동안 미국 대통령은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였다. 1913년에는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집권하여 1920년까지 8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나타내는 그림 1.1의 그래프를 보면 선이 시작되는 1900년의 폭력 치사 발생률(자살률과 살인율의 합산)은 인구 10만 명당 15.6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 치사 발생률은 &lsquo;연령 보정&rsquo; 수치임을 밝혀 둔다. 살인은 청년층에서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자살은 노년층에서 가장 높게 나타나는 등 사망률이 나이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으므로 다양한 연령 집단의 인구 비율을 고르게 유지한다는 뜻이다. 연령 보정을 해서 한 인구 안의 연령 분포를 일정하게 유지해야만 그 인구 안에서 자살률이나 살인율이 유난히 높은 연령 집단 비율의 증감에 따라 사망률이 인위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미국 경제 통계를 낼 때 인플레이션을 고려하여 달러 가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출생 사망 통계를 낼 때도 연령 보정이 중요하다. 이것은 그래프에 나타난 사망 통계가 가령 2차 세계대전 이후의 &lsquo;베이비붐&rsquo; 현상에 따른 인위적 파생물이나 부수 효과가 아님을 뜻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64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9_%EC%99%9C%20%EC%96%B4%EB%96%A4%20%EC%A0%95%EC%B9%98%EC%9D%B8%EC%9D%80/%EB%8F%84%ED%91%9C_600__.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림으로 돌아가서, 그래프의 선은 1900년의 15.6명으로 시작해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줄기차게 올라가다가 1907년의 (금융) 공황 이후 껑충 뛰고 1908년과 1911년 즈음이면 10만 명당 폭력 치사 발생률이 22.6명으로 정점에 이른다. 출발 지점인 1900년보다 50퍼센트 높다. 그래서 우리는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1900년에서 1912년 사이에 폭력 치사가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급증했음을 본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폭력 치사가 그림에서 1명 늘어나는 것은 지금 3억에 육박하는 미국 인구 중 3천 명이 더 죽는다는 뜻이다. 결국 1900년부터 1912년까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5.6명에서 21.9명으로 6.3명이 늘었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자면 해마다 약 18,900명이 폭력 치사로 더 죽는다는 소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13년 3월 우드로 윌슨이 집권하면서 취임 첫해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계속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이듬해인 1914년에는 23.3명으로 늘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가파른 감소세를 보여서 그가 대통령으로 있던 나머지 6년 동안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잠깐 참전하기 한참 전 시기, 참전한 시기, 참전한 이후 시기를 망라하여) 해마다 꾸준히 떨어졌고 결국 윌슨이 마지막으로 한 해를 꼬박 대통령으로 재임한 1920년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7.4명으로 바닥을 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공화당 대통령들이 재임한 시기는 폭력 치사가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경향과 연관이 있었고 민주당 대통령으로 바뀌면 이런 추세가 역전되고 전염병 수준 아래로 내려가는 현상이 나타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역전된 추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 12년 동안 공화당 대통령들(워런 하딩Warren Harding,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이 백악관을 차지했고 그림 1.1이 보여주듯이 폭력 치사 발생률은 하딩 정부 첫해부터 다시 전염병 수준으로 급증해서 공화당이 백악관을 차지한 12년 동안 줄곧 &lsquo;(전염병) 능선&rsquo;에 머물렀고 공화당 집권 3년째인 1923년부터는 거의 매년 올라갔다. 가파른 상승세는 계속 이어져서 공화당이 마지막으로 한 해를 꼬박 집권한 1932년에는 10만 명당 폭력 치사 발생률이 26.5명으로 정점에 올랐다. 이 상승세가 대공황이 시작된 1930년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의 윌슨이 집권한 마지막 해에 17.4명이었던 폭력 치사 발생률은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상승하여 1929년이면 벌써 22.3명이나 되었다. 폭력 치사 발생률은 대공황이라는 최악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더 높이, 더욱 가파르게 올라가서 결국 26.5명을 기록했다. 윌슨이 마지막으로 재임했던 해보다 인구 10만 명당 폭력 치사 발생률이 무려 9.1명이나 올라간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오늘날 인구로 따졌을 때 해마다 자살자와 피살자가 27,300명씩 늘어나는 것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공화당 후보가 192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폭력 치사는 또 다시 전염병 수준으로 급증했고 공화당 정권이 민주당 정권으로 바뀌기 전 마지막 해였던 1932년까지 계속해서 불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당은 20년 동안 장기 집권에 들어간다.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루스벨트의 후임으로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백악관을 지켰다. 민주당은 케네디(John F. Kennedy)와 존슨(Lyndon Johnson)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60년대까지 치면 실제로는 1933년부터 1968년까지 36년 중에서 28년 동안 집권했다. 이 기간 동안 공화당 대통령은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백악관을 차지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뿐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원이었지만 그는 재임하는 동안 폭력 치사 발생률이 올라가지 않은 유일한 공화당 대통령이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동안 폭력 치사 발생률은 그 전의 민주당 정부 때와 같은 수준을 유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품은 수수께끼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가장 놀라운 점은 루스벨트의 당선 이후 시작된 20년이, 또는 심지어 36년이 가장 긴 &lsquo;골짜기&rsquo;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오랫동안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 아래를 꾸준히 밑돈 시기였다.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루스벨트가 취임 첫해인 1933년에 공화당으로부터 물려받은 폭력 치사 발생률은 26.5명이었지만, 그 뒤로 갑자기 뚝 떨어지며 거의 중단 없는 감소세를 이어가기 시작해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 마지막 해였던 1941년에는 전염병 수준의 기준치인 19명보다 낮은 18.8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1942년부터 1967년까지 꼬박 사반세기 동안 그 수치는 두 번 다시 18명 수준을 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전염병&rsquo;이라는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쓰기 위해서 나는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폭력 치사 발생률의 평균값과 중간값을 모두 계산했는데 각각 19.4명과 20명이었다. 나는 &lsquo;전염병&rsquo;이라는 용어를 유난히 높은 사망률, 다시 말해서 이 평균값이나 중간값을 웃도는 사망률을 가리키는 데 쓴다. 그래서 내가 전염병이라고 말할 때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4명이나 20명에서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최고치였던 26.5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 비전염병 수준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11명에서 19.4명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명을 한참 웃돌았고 내가 &lsquo;정상&rsquo;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은 19.4명을 한참 밑돌았다. 그래서 &lsquo;능선&rsquo;과 &lsquo;골짜기&rsquo;를 대충 가르는 기준선을 19.4명으로 보든 20명으로 보든 큰 차이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리하자면, 윌슨 이전의 세 공화당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 이전의 세 공화당 대통령이 재직하는 동안 폭력 치사 발생률은 전염병 수준에 이르렀다. 윌슨과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는 전염병을 끝냈다. 후임 민주당 대통령들은 폭력 치사 발생률을 전염병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숫자 자체는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10만 명당 사망률이 가령 매년 18명에서 19명으로 늘어난 것도, 심지어 15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난 것도 그저 매년 1명이나 5명이 늘어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의 미국 인구 3억 명을 놓고 생각하면 숫자가 1 커지는 것은 폭력 치사로 죽는 사람이 해마다 3천 명씩 늘어난다는 뜻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쌍둥이 빌딩 테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와 얼추 비슷하며 그 3천 명의 죽음이 역사를 바꾸어 미국이 아직도 끝내지 못한 두 번의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점에서 이 숫자는 절대로 사소하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까지 우리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일어난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 중에서 처음 두 번을 살펴보았다. 두 번 모두 공화당 대통령 때 시작되어서 민주당 대통령 때 끝났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첫 번째 전염병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임기 중반에 시작되어(루스벨트의 임기 첫해 폭력 치사 발생률은 15.6명이었고 임기 마지막 해에는 21.9명이었다)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1913년에 끝났다(윌슨의 임기 마지막 해 폭력 치사 발생률은 17.4명까지 내려갔다). 1921년부터 다시 공화당 대통령들이 정권을 잡은 12년 동안 사망률은 해마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 1932년에 26.5명으로 사상 최고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경신했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 이 높은 사망률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1944년에는 15명까지 줄어들었고 큰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대체로 그렇지만(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잠깐 오름세를 보였다가(그것도 전염병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 다시 내림세로 돌아서서 트루먼의 재임 마지막 두 해인 1951년과 1952년까지는 1944년의 15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폭력 치사 발생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마지막 두 차례 임기 내내 전염병 수준을 밑돌았고 트루먼,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정부에 들어가서도 줄곧 전염병 수준을 밑돌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1969년 존슨이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으로 바뀌면서 폭력 치사 발생률은 20세기 들어 세 번째로 전염병 성층권을 향해 다시 빠르게 치솟았다. 사망률은 닉슨 정부 첫해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취임 2년째를 맞은 1970년에는 19.9명으로 전염병의 &lsquo;바닥&rsquo; 수준으로 올라섰고 그 뒤로도 해마다 올라가서 1975년에는 23.2명을 기록했다. 민주당의 지미 카터(Jimmy Carter)가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한 4년 동안 21.9명에서 22.9명으로 전염병 수준을 유지했고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과 아버지 조지 부시(George Bush)가 대통령으로 재직한 1981년부터 1992년까지도 19.9명에서 22.4명으로 여전히 전염병 수준을 유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3년 공화당 출신의 전임자 부시로부터 21.7명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물려받으며 빌 클린턴(Bill Clinton)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폭력 치사 발생률은 가파르고 일관되게 내림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그가 임기 4년의 대통령으로 재선된 첫해인 1997년에는 18.3명으로 전염병 수준 밑으로 떨어졌고 임기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16명으로 떨어졌다. 그 전까지 공화당은 1969년부터 1993년까지 24년 중에서 20년을 집권했다. 20세기에 들어와 세 번째로 1970년부터 1997년까지 장장 28년이나 계속되었던 폭력 치사 전염병을 끝낸 것은 연임에 성공한 클린턴 대통령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화당의 아들 조지 부시가 클린턴의 뒤를 이어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자 클린턴 재임기에 일어났던 폭력 치사 발생률의 급감세가 갑자기 끝나고 사망률은 오름세로 돌아섰다. 비교 자료가 있는 마지막 해인 2007년 현재 폭력 치사 발생률은 17.2명에 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그림 1.1의 그래프가 보여주듯이 20세기에 세 번의 폭력 치사 전염병이 일어났는데 모두 공화당 정부 때 시작되었고 민주당 정부 때 끝났다. 매년 꾸준한 내림세를 보였어도 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그래도 민주당 정부는 1918년과 1941년과 1997년에 이 전염병을 모두 종식시켰다. 전염병은 1904년부터 1917년까지, 1921년부터 1940년까지, 1970년부터 1996년까지 전부 합쳐 61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고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을 밑도는 &lsquo;골짜기&rsquo; 범위에 머물러 있었던 1918~1920년, 1941~1969년, 1997~2007년의 세 시기는 모두 민주당 정부 때(1918년, 1941년, 1997년) 시작되었고 전부 합쳐 43년 동안 지속되었다. 세 번의 비전염병 기간 중에서 처음 두 번은 공화당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끝났다. 지금의 비전염병 기간이 아들 부시의 재임 마지막 해인 2008년에 끝났을지 여부는 2007년 이후의 비교 자료가 아직 없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속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아는 것은 클린턴 때 해마다 이어지던 자살률과 살인율의 내림세가 아들 부시가 집권하자마자 갑자기 끝나고 오름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의 폭력 치사 발생률은 1941년이 끝나갈 무렵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에도 계속해서 떨어졌지만 하락세는 그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기에, 공화당 집권 말년인 1932년에 26.5명이던 것이 1941년에는 18.8명으로 떨어져서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이미 전염병 수준 밑으로 내려갔다. (자살과 살인을 망라한) 폭력 치사 발생률은 전쟁 기간에도 계속 떨어져서 전쟁이 극에 달했던 1944년에는 15명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 뒤로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전후 14년(1951~1964년) 동안은 14.3명에서 15.9명으로 대략 비슷하거나 그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따라서 루스벨트가 전임 공화당 대통령들한테서 물려받은 전염병 수준의 폭력 치사가 끝난 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었다. 폭력 치사 발생률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비전염병 수준으로 내려갔다. 뿐만 아니라 전쟁 때문에 전후에 폭력 치사가 대규모로 혹은 지속적으로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종전 직후인 1945년과 1946년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6.9명까지 올라가면서 잠깐 오름세를 보였지만(그래도 전염병 수준을 한참 밑돌았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여 트루먼 재임 말년인 1951~1952년에는 15.3명과 15.2명으로 내려가면서 전쟁 기간에 나타난 가장 낮은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로도 12년 동안 똑같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1957년에는 사상 최저 수치인 14.3명을 기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젠하워 집권기를 제외하고 공화당이 집권한 모든 시기에 폭력 치사 발생률이 이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수준보다 크게 올라가거나 아니면 기존의 전염병 범위 안에 머물렀다. 1900년부터 등장한 11명의 다른 공화당 대통령과 달리 아이젠하워의 집권기(1953~1960년)만큼은 이렇게 예외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화당 대통령 때만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간다는 전반적 추세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아이젠하워 정부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은 15명 안팎으로 전임 트루먼 정부 말년 때와 대체로 같은 수준을 유지했고 막판에는 트루먼 때보다 약간(0.1명) 올라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케네디가 재임한 3년과 존슨이 취임한 첫해에 살인과 자살을 망라한 사망률은 15.1명과 15.9명 사이였다. 그 뒤로 존슨이 재임한 나머지 3년 동안 폭력 치사 발생률이 전염병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계속 올라가서 존슨의 재임 말년인 1968년에는 1941년 이후 처음으로 18명까지 올라갔다. 공화당의 백악관 입성과 폭력 치사 발생률 사이의 수수께끼 같은 연관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오름세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존슨 재임기의 폭력 치사 발생률은 가장 높았을 때도 1970년부터 1996년까지 공화당이 지배한 27년보다는 여전히 낮았다는 사실이다. 비교적 비폭력적이었던 36년간의 민주당 정권이 끝난 뒤로 찾아든 27년간의 공화당 정권은 중단 없는 폭력의 전염병 기간으로 기록된 시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68년 선거는 20세기의 선거 지형도를 바꾼 중요한 선거였다. 여기에 견줄 만한 선거는 12년 동안 공화당 정권으로 이어졌고 대공황과 20세기 최고의 폭력 치사 발생률로 정점에 이르렀던 1920년 선거와 36년 동안의 이른바 뉴딜 의제(간판은 공화당을 달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뉴딜 의제에는 적극 찬동했다) 시기로 이어진 1932년 선거 정도다. 1968년은 민권 운동의 성과에 반발하는 백인의 불만과 인종적 편견을 파고든 공화당의 &lsquo;남부 전략&rsquo;으로 남북 전쟁 당시 남군으로 싸웠던 남부 11개 주와 2개 경계 주(켄터키, 오클라호마)가 정치 성향과 투표 성향에서 &lsquo;묻지마 민주당&rsquo;에서 &lsquo;묻지마 공화당&rsquo; 성향으로 돌변한 해였다. 이 선거를 계기로 공화당은 이후 24년 중 20년 동안 백악관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따라온 것이 1970년부터 1996년까지 27년 동안 지속된, 지난 107년의 역사에서 가장 긴 전염병 수준의 폭력 치사였다. 닉슨이 재임한 6년 동안 자살률과 살인율은 꾸준히 늘어나 취임 이듬해에 19.9명으로 전염병의 문턱을 넘어섰고, 후임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Gerald Ford)가 취임한 첫해에는 23.2명까지 올라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7년 포드한테서 정권을 되찾은 민주당의 카터는 20세기가 낳은 민주당 대통령 7명 가운데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염병 수준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전염병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카터가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살률과 살인율은 그가 재임하는 동안 기본적으로 어느 쪽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아서 두 비율 모두 닉슨과 포드 때의 전염병 수준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렇지만 카터 정부가 폭력 치사 발생률을 전염병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은 강조할 필요가 있다(민주당 대통령은 아무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카터는 다만 자신이 물려받은 전염병을 비전염병으로 반전시키지 못한 유일한 민주당 대통령이었다. 카터 재임기에 전염병이 이어진 것은 카터가 백악관에 4년밖에 없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20세기 후반의 클린턴도 그렇지만) 카터의 모든 전임 민주당 대통령들은 공화당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전염병을 취임 초반에 반전시키기 시작했고 그 뒤로 일관되게 폭력 치사 발생률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카터 다음에 온 두 명의 공화당 대통령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두 사람의 재임기 12년 동안(1981~1992년)에는 폭력 치사 발생률이 19.9명과 22.4명 사이에서 오르내리기를 거듭했지만 전염병 수준이나 능선 수준 밑으로는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서 말했다시피 클린턴은 1997년에 정권을 잡았을 때 전임 대통령 부시로부터 21.7명의 폭력 치사 발생률을 물려받았다. 그 비율은 클린턴 취임 첫해에 매년 가파른 내림세를 보이더니 그가 대통령으로 재선된 1997년에는 마침내 전염병 수준 이하인 19명으로 떨어졌다. 다시 말해서 4년 동안 꾸준한 하락세가 이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공화당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염병 수준의 폭력이 끝났다. 그 뒤로도 사망률은 계속 내려가서 클린턴의 재임 마지막 해인 2000년에는 16명까지 떨어졌다. 아들 부시가 2001년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이 극적인 하락세가 갑자기 중단되고 방향을 바꾸더니 느리게 요동치면서 상승세로 돌아섰다. 확실한 통계 자료가 2007년까지밖에 없으므로 우리는 아들 부시의 집권기가 미국의 폭력 치사 발생률에 끼친 영향을 완전히 알기는 어렵다. 지금으로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2007년에 폭력 치사 발생률이 16명에서 17.2명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수치는 클린턴의 재임 말년에 비해 폭력으로 죽는 사람이 연간 3,600명 늘어났다는 말이다. 부시의 기록과 클린턴의 기록을 비교했을 때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만일 폭력 치사 발생률이 2000년 이후로도 과거 클린턴 때와 같은 추세로 계속해서 떨어졌더라면 2007년의 인구 10만 명당 살인율은 부시가 보여준 것처럼 6.8명으로 올라가지 않고 2.9명으로 내려갔을 것이고 2007년의 자살률도 10.4명으로 늘어나지 않고 8.9명으로 줄어들었으리라는 사실이다. 이런 계산을 하는 이유는 이런 변화가 꼭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두 대통령 정권에서 일어난 사망률의 변화 양상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젠하워와 카터에 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폭력 치사 발생률이 비전염병 수준에서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는 일은 공화당 정부에서만 일어나고 전염병 수준에서 비전염병 수준으로 회복되는 일은 민주당 정부에서만 일어난다는 좀 더 일반적인 추세에서 두 사람 다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화당 대통령이 선출된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시작되려면 공화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 민주당 대통령이 있다고 해서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반드시 종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이 종식되려면 민주당 대통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리하면, 공화당 대통령과 민주당 대통령 집권기의 전반적인 폭력 치사 발생률 차이는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즉 우연의 역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그 연관성은 역사적 격변(대공황, 2차 세계대전)과 개인적 차이(아이젠하워, 카터)를 압도할 만큼 강하다. 그래서 수수께끼가 생긴다. 어째서 폭력 치사 발생률은 공화당 정부 때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민주당 정부 때만 비전염병 수준 내지 &lsquo;정상&rsquo; 수준으로 내려가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똑같은 통계 자료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자살률과 살인율 모두 민주당 정부 때도 공화당 정부 때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들쭉날쭉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공화당 정부 때 골짜기에서 정상으로 치닫는 가파른 상승세가 나타나고 민주당 정부 때 정상에서 골짜기로 내리닫는 가파른 하락세가 나타남을 이미 확인했듯이 한 해와 그 다음 해 사이에 폭력 치사 발생률이 오르고 또 오를 때 큰 폭으로 오르는 경향은 민주당보다 공화당 때 더 자주 나타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폭력 치사 발생률이 떨어지고 또 떨어질 때 큰 폭으로 떨어지는 경향은 공화당보다 민주당 때 더 자주 나타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각 정당 집권기에 일어난 폭력 치사의 연간 증가분과 감소분을 합산했더니 공화당 대통령 집권기는 1900년부터 2007년까지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에서 14.5명의 순누적 증가세를 보였다. 민주당은 정반대로 1913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하는 동안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에서 13.3명의 순누적 감소세를 보였다. 마찬가지로 공화당 정부 때는 살인율에서 5.4명의 순누적 증가세를 보였고 민주당은 5명의 순누적 감소세를 보였다. 그래서 공화당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 총증가분은 19.9명(14.5명 더하기 5.4명)이고 민주당 때의 폭력 치사 발생률 총감소분은 18.3명(13.3명 더하기 5명)이었다. 집권당과 자살률, 살인율, (살인과 자살을 합친) 총 폭력 치사의 이런 연관성이 단순히 우연에서 비롯되었을 확률은 1,000분의 1도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추천사, 머리말,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제임스 길리건 James Gilligan</strong><br /> 1966년부터 2000년까지 34년간 하버드대 의대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뉴욕대 정신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수십 년간 폭력 행동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폭력 예방책을 연구해 온 폭력 문제의 권위자이다. <br /> 하버드대 법정신의학 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매사추세츠 주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91년 하버드 대학에서 &lsquo;폭력의 뿌리&rsquo;라는 주제로 강의한 뒤 그 내용을 정리해 《폭력: 국가 전염병에 관한 성찰》로 펴냈다. 이 책은 폭력의 심리적, 사회적 원인을 분석한 문제작으로 꼽히며 지금까지도 폭력 연구에서 교과서적 저작으로 널리 읽히고 있다. 2000년에 클린턴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소년범죄예방위원회를 총괄했으며, 2005년에는 국제연합(UN) 총회에서 발표된 아동 폭력에 관한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br /> 2011년에 발표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는 길리건 교수가 평생을 바친 폭력 연구의 핵심이 담긴 폭발성 강한 저작이다. 정신분석을 공부한 정신의학자로서 수많은 임상 경험을 쌓은 저자는 자살과 살인이라는 치명적 폭력의 급격한 변화 원인을 추적한 끝에 문제의 중심에 대통령과 정당이 있음을 밝혀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희재</strong><br /> 대학에서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독문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영국 SOAS(아시아프리카대학) 방문학자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 『번역의 탄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소유의 종말』, 『문명의 충돌』, 『새벽에서 황혼까지』, 『마음의 진보』, 『마음의 진화』, 『번역사 오디세이』, 『몰입의 즐거움』, 『리오리엔트』, 『히틀러』, 『예고된 붕괴』 등이 있다. <a href="mailto:musil516@gmail.com">musil516@gmail.com</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7 오전 10:01:00윌킨슨·피킷의 ‘평등이 답이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8_%ED%8F%89%EB%93%B1%EC%9D%B4%20%EB%8B%B5%EC%9D%B4%EB%8B%A4/%ED%8F%89%EB%93%B1-%ED%91%9C%EC%A7%80%EC%9E%85%EC%B2%B4_600.jpg" /><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며</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불평등은 사회를 좀먹는다</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업적을 과대평가하는 것처럼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마술 같은 방법이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을 제시하려고 이 책을 쓰지 않았다. 이 책을 쓰는 데, 저자 두 사람의 연구 기간을 합해 50년이라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 연구는 사회 계층에 따라 &lsquo;건강 불평등&rsquo;이 발생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왜 사회 계층이 낮을수록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일까? 왜 빈곤층이 중산층보다, 중산층이 상류층보다 건강하지 못한 걸까? 우리의 연구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공부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로 전염병이나 감염증의 원인과 변화를 연구하는] 역학<sup>疫學</sup>이라는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질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추적하는 데 이 역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의 사람들이 특정 질병을 더 자주 앓는 이유, 혹은 다른 계층이나 집단이 그 질병을 덜 앓는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또 특정 질병이 점점 더 널리 퍼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도 역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역학적 방법은 건강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쓸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의학에서는 어떤 처방이 듣고, 어떤 처방이 듣지 않는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해 이를 토대로 처방을 내리는 최근 경향을 &lsquo;근거 중심 의학<sup>Evidence-based Medicine</sup>&rsquo;이라고 부른다. 이를 본떠 이 책을 &lsquo;근거 중심 정치학<sup>Evidence-based Politics</sup>&rsquo;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설명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대학과 연구 기관이 제시한 연구 결과를 받아들였다. 재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객관적이고 관찰 가능한 결과를 도출한 뒤,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권위 있는 과학 저널에 발표된 연구 결과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고 이 연구에 추측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연구 결과에는 늘 연구자의 해석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해석이 아닌 특정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이후의 연구 결과에 따라 처음의 이론과 추측은 수정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밟아 온 길로 독자들을 인도할 것이다. 핵심 증거만을 표지판으로 삼을 것이며, 막다른 골목이나 잘못된 우회로는 배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택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모든 현대인의 삶의 질을 한꺼번에 더 나아지게 할 방법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판단을 돕기 위해] 우리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거를 제시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불평등이 사회를 좀먹는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진국 사이의 불평등 차이는 눈에 띌 만큼 커 보이지 않는다. 저자 중 한 명은 애초에 선진국별 불평등 효과를 연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연구를 이끈 동기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드러난 지금,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많은 발견은 치밀한 판단에 따라 드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운에 따르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이제야 이런 내용을 발표하는 까닭은 근거 자료들이 최근에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별 소득과 소득 분포, 그리고 국가별 건강과 사회문제를 보여 주는 자료는 최근 들어서야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우리 아닌 누구라도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등장한 자료 덕분에 다른 연구자들 역시 각 사회가 어떻게 다른지 분석할 수 있게 됐고, 한 가지 요인이 다른 요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알게 됐으며, 이론을 좀 더 엄밀하게 검증할 수 있게 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발견은 사회과학보다 자연과학이 더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한다. 자연 현상 이론은 사회 현상 이론보다 덜 논쟁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역사도 조금만 살펴보면 수많은 개인적 투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연과학 논쟁은 이론에 대한 작은 의견 차이에서부터 시작해 평생 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그러나 보통 이런 자연과학 논쟁에는 전문가만 참여한다. 일반인이 입자물리학에 대해 자신만의 확고한 견해를 갖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일반인일지라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회에 대한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론이다. 그러니 그 이론을 실제 우리 자신에 대한 자각이나 사회의 자의식으로 여기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면서 세포나 원자를 설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회과학자들은 수많은 개인들의 의견과 이해관계에 맞서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847년 헝가리의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sup>Ignaz Semmelweiss</sup>는 의사들이 산모의 출산을 돕기 전에 손만 씻어도 산욕열<sup>産褥熱</sup>로 인한 사망률이 극적으로 낮아질 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자기 주변의 동료 의사들부터 설득해야 했다. 제멜바이스의 진정한 싸움은 최초의 연구와 발견이 아니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벌어졌다. 제멜바이스는 동료 의사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자살하고 말았다. 당시 의사들 대부분은 제멜바이스의 발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스퇴르<sup>Louis Pasteur</sup>와 리스터<sup>Joseph Lister</sup>가 [전염병이 세균이나 다른 미생물 때문에 생긴다는] 미생물 병인론<sup>germ theory of disease</sup>을 세워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우고 나서야 의사들은 생각을 바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비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사회가 물질적 성공과는 별개로 사회적 실패 때문에 점점 더 많은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우려를 더하려는 듯 경기 침체와 고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침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초판에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인 호평이 쏟아졌다. 이는 우리 사이에 변화를 향한 폭넓은 욕구와 우리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증보판(2010년)을 내면서 초판을 조금 손보았다. 초판에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자세한 통계 출처, 방법, 결과 같은 자료를 원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뺐지만 증보판에는 그 자료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추가했다.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13장은 새로 구성하고 보완했다. 또한 무엇이 사회를 과거보다 훨씬 더, 혹은 덜 평등하게 하였는가에 대한 논의를 확대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정치적 태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정책이 올바른 기술적 해법을 찾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본다. 사회를 평등하게 하는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여러 정책 중 하나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기발한 해결책보다는 더 큰 평등의 혜택을 인식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우리가 옳다면 여기에 제시된 이론과 증거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상당히 개선시킬 방법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방법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여기에 제시한 이론들은 쓸모없을 것이다.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만큼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우리가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이 대중의 마음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퀄러티 트러스트<sup>The Equality Trust</sup>〉(378쪽 참조)라는 비영리 재단을 설립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일종의 증언들을 널리 알리고 이 [고난의] 숲에서 모두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경제성장이 정답이던 시대는 끝났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류는 물질적&middot;기술적 진보의 정점에 서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근심에 싸여 있고, 쉽게 우울해하고,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바라볼지 근심하고, 친구와의 관계를 확신할 수 없고,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한 채 소비만을 일삼는다. 참으로 이상하다. 우리는 편안한 사회적 관계와 정서적 만족 대신 과식이나 과소비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리고 지나친 음주, 향정신성 약물 및 불법 약물의 유혹에 빠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류 역사에서 전례 없는 부와 풍요를 이룩했는데도 왜 이렇게 정서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일까? 우리는 때때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지만 현실은 그것조차 어렵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스트레스와 정서적 소모에 맞서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전투 말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의 삶은 물질적인 호화로움과 사치로 가득 차서 지구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의 〈하우드 연구소<sup>Harwood Institute for Public Innovation</sup>〉가 〈머크 재단<sup>Merck Family Founcation</sup>〉의 위탁을 받아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ldquo;물질주의&rdquo; 때문에 자신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 『균형을 찾아서<sup>Yearning for Balance</sup>』라는 보고서는 미국인을 대상으로 전국적인 설문 조사를 벌였는데, 미국인들이 &ldquo;부와 물질적 소득에 대해 매우 이중적인 감정&rdquo;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lsquo;탐욕과 과잉에서 가치와 공동체, 그리고 가족을 중시하는 삶으로 가기를&rsquo; 원했다. 사람들은 다른 미국인들이 이런 소중한 것들을 공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lsquo;점점 더 개인화되고, 이기적이며, 무책임해지고&rsquo; 있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고립감을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보고서는 정작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이러한 쟁점을 토론하면 &lsquo;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기뻐했다&rsquo;고 적고 있다. 우리는 공동의 목적을 가진 타인과 유대하기보다는 사회적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고 홀로 비판하며 물질 소비에 탐닉한다. 동시에 이러한 문제는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타인과의 관계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치가들은 더 이상 이런 쟁점을 다루지 않고 우리들에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비전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투표를 하면서도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더 나은 사회를 생각하기보다 이미 주어진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 더 나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분투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선진국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사회적으로는 실패하고 있다. 이 대조되는 두 현상은 중요한 이정표다. 삶의 질을 실제로 개선하고자 한다면 관심의 초점을 물질적인 지표와 경제성장에서 사회 전체의 심리적&middot;사회적 복지로 옮겨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주로 개인적인 치료나 처방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기 십상이다. 정작 중요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패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롭고 강력한 비전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정치도 우리 모두의 삶도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투표 대상, 정치가에게 요구하는 내용까지 바꿀 힘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의 수준이 물질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줄 것이다. 소득 격차의 정도는 우리가 타인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부모, 종교, 가치, 교육, 형벌 제도가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의 정도가 우리 모두의 심리적 복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증명할 것이다. 어떤 연구는 사랑으로 보살피는 존재가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아이의 몸무게 변화를 조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사망률과 소득 분포를 통해 성인의 사회적 필요를 보여 주고 사회가 그 욕구를 어떻게 채워 줄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금융 위기는 2008년 말부터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치인들은&nbsp; 금융 위기 한참 전부터 공동체 해체나 반사회적 행동의 증가를 근거로 이 사회를 &ldquo;붕괴된 사회<sup>broken society</sup>&rdquo;라고 불렀다. 현재의 금융 위기로 우리는 붕괴된 경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가 무너진 원인은 때때로 가난한 사람 탓이라고 말한다. 경제가 무너진 원인은 대부분 부자 탓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신뢰를 받아 온 금융기관 책임자들은 더 큰 보수와 보너스를 위해 위험을 마다하지 않았고 얄팍한 투기 거품<sup>speculative bubble</sup>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허약한 경제를 만들었다. 붕괴된 사회와 붕괴된 경제 모두 불평등 증가에 원인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려는 진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경제성장이 가져다주지 못한 것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성장이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물질적 생활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에는 물질이 풍부한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유한 국가는 이제 배를 채우고, 깨끗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더 이상 최우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진국 시민들은 어떻게 더 먹을까가 아닌, 어떻게 덜 먹을까를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뚱뚱한 시대에 살고 있다. 진보의 동력이던 경제성장은 많은 선진국에서 이미 그 임무를 마쳤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평안과 행복이 증대하던 시대도 끝났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사회가 더 부유해질수록 스트레스와 우울증 및 각종 사회문제가 장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긴 역사의 여정 막바지에 다다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지나온 여행의 과정은 그림 1-1에서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저마다 다른 경제 발전 단계에 있는 국가들의 국민 총소득(GNI)과 기대 수명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 준다. 가난한 국가에서는 경제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기대 수명이 빠르게 증가하지만 중진국 수준에 다다르면 그 증가 속도가 감소한다. 삶의 질이 향상되고 국가들이 더 부유해지면 경제성장과 기대 수명 간의 상관관계는 약해진다. 결국 그 상관관계는 사라지고 우상향하던 곡선은 수평을 그리게 된다. 이는 선진국이 더 부유해진다고 해서 기대 수명이 더 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현상은 선진 30여 개 국가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으며 들어맞는 사례는 그림 1-1의 맨 오른쪽에서 찾을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8_%ED%8F%89%EB%93%B1%EC%9D%B4%20%EB%8B%B5%EC%9D%B4%EB%8B%A4/%ED%8F%89%EB%93%B1%EC%9D%B4%EB%8B%B5%EB%8B%88%EB%8B%A41-1_60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그림 1-1에서 곡선이 완만해지다가 결국 평평해지는 이유는 기대 수명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풍요로운 국가에서도 시간이 갈수록 건강 상태는 크게 개선된다. 달라진 것은 건강 상태의 개선이 평균적인 삶의 질 향상으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0년이 지날 때마다 선진국의 기대 수명은 2년에서 3년씩 증가한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성장과 관계없이 일어난다. 따라서 미국은 그리스나 뉴질랜드보다 거의 두 배나 더 부유하지만 그 나라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림 1-1의 곡선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곡선 자체가 상향 이동한다. 같은 소득일 때라도 기대 수명은 더 늘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를 보면 국가들이 부유해질수록 평균적인 삶의 질이 건강에 공헌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든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과 장수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또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건강의 관계가 평평해지듯, 경제성장과 행복의 관계도 그렇게 된다. 건강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느끼는 행복 역시 경제성장 초기에는 증가하지만 점차 수평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학자 리처드 레이어드<sup>Richard Layard</sup>가 행복에 관해 쓴 책에서 이미 이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각국의 행복 정도는 그 국가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받는다. 어떤 사회에서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실패를 인정하는 게 되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치게 자기만족적이며 뻔뻔한 게 된다. 국가별 행복을 조사하는 데는 이러한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그림 1-2는 이른바 &lsquo;행복 곡선&rsquo;이 부유한 국가에서 기대 수명과 마찬가지로 평평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경우 모두 중요한 차이는 경제성장 초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그보다 훨씬 부유한 사람들이 전체 인구의 행복에 기여하는 비중은 줄어든다. 그림에서는 행복과 기대 수명이 모두 일인당 국민소득 약 2만 5천 달러에서 평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몇몇 자료는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소득 수준이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 거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유한 국가들이 더 부유해지더라도 행복 수준이 증가하지 않는다는 증거는 그림 1-2처럼 어느 한 시점에서 다른 국가들과 비교한 결과만으로 내려진 결론은 아니다. 일본, 미국, 영국과 같은 국가에서는 충분히 오랜 기간 동안 행복이 변화하는 정도를 살펴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국가가 부유해질수록 행복이 증가하는지 여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관찰한 결과, 실질 소득이 두 배 증가한 경우에도 행복 수준은 증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lsquo;경제적 사회보장 정도<sup>measure of economic welfare</sup>&rsquo;나 &lsquo;실질적인 진보 지수<sup>genuine progress indicator</sup>&rsquo;처럼, 교통 정체나 환경오염 같은 비용을 제거한 뒤의 순혜택을 측정하는 지수를 사용하는 연구자들도 같은 유형을 발견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1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8_%ED%8F%89%EB%93%B1%EC%9D%B4%20%EB%8B%B5%EC%9D%B4%EB%8B%A4/%ED%8F%89%EB%93%B1%EC%9D%B4%EB%8B%B5%EC%9D%B4%EB%8B%A4%201-2_60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이나 행복, 아니면 복지를 나타내는 다른 어떤 지수를 사용하더라도 같은 결과를 얻는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경제성장이 인간의 복지에 여전히, 아주 중요하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삶의 질이 개선될수록 기대 수명과 같은 객관적인 지수는 물론 행복과 같은 주관적인 지수도 증가했다. 그러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섬에 따라 소득의 추가 상승은 점점 덜 중요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예측 가능한 사실이다.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될수록, 이미 가지고 있던 것에 빵이나 자동차를 더 추가한다 해도 인간의 복지는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이 최고다. 그러나 배고픔이 해결된 뒤에 주어지는 더 많은 빵은 사람을 특별히 더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빵이 썩어 귀찮아질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랫동안 경제성장을 해 온 국가들은 조만간 필연적으로 &lsquo;수확 체감&rsquo;<sup>diminishing return, 데이비드 리카도가 주장한 것으로 일정 농지에서 작업하는 노동자 수가 증가할수록 일인당 수확량이 줄어든다는 이론</sup>하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며 추가 소득이 건강, 행복, 복지에 미치는 영향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미 몇몇 선진국에서는 150여 년간 지속적으로 평균 수입이 증가해 왔으며 추가적인 부가 이전처럼 그리 큰 혜택을 가져오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의 사망 원인이 점점 다양해지는 경향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국가가 부유해지면 가장 먼저 감소하는 것이 가난병이다. 전염성이 매우 큰 질병인 결핵, 콜레라, 홍역은 아주 가난한 나라에서는 여전히 널리 퍼져 있지만 사망 원인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전염병이 사라져 가면서 퇴행성 심장 질환이나 암 같은 부자병들이 그 빈자리를 메꾸고 있다. 가난병은 주로 어린이가 걸리고 한창 나이에 생명을 앗아 가지만, 부자병들은 삶의 후반기에 일어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림 1-1과 그림 1-2에서 곡선이 평평해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국가들이 물질적 삶의 질의 정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즉, 경제가 더 성장한다고 해도 그 성장이 가져다주는 혜택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부자병이라고 불리던 것은 부유한 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 되었다. 과거에 심장병, 발작, 비만 등은 부유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심장병은 실업가의 질병으로 여겨졌고 뚱뚱하면 부자, 깡마르면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부터 점점 더 많은 선진국에서 이러한 통념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부자들에게 흔하던 질병은 그 방향을 바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지구온난화와 성장의 한계</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부유한 국가들이 경제성장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혜택의 끝에 도달함과 동시에 인류는 지구온난화와 성장의 자연환경적 한계를 인식해야 했다. 기후변화와 해수면 상승을 막기 위해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사실은 현재의 소비 수준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특히 가난한 나라, 개발도상국의 삶의 질이 높아질수록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의 15장에서는 우리가 소개한 시각이 지구온난화 감소 정책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사회 내, 사회 간 소득 격차</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인간의 실질적 삶의 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하는 첫 세대다. 경제성장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가장 강력한 실마리는 우리가 사회 내 소득 격차와 사회 간 소득격차에 매우 다르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4장에서부터 12장에 걸쳐 우리는 건강과 폭력, 정신 질환, 십대 출산, 교육 실패와 같은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사회 내에서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따라서 소득과 삶의 질이 올라가면 이러한 문제도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를 비교해 보면 이러한 사회문제들이 한 사회의 평균 소득과 별 관계가 없거나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을 예로 들어 보자. 그림 1-1에서처럼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간의 기대 수명을 비교하지 않고 가장 부유한 국가만을 살펴보자. 그림 1-3은 부유한 국가만을 보여 준다. 몇몇 국가들은 기대 수명이 낮아도 다른 국가보다 두 배나 더 부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국가 중 어디라도 그 사회 &ldquo;내부&rdquo;의 사망률은 소득과 매우 밀접하고도 체계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림 1-4는 미국 내에서의 사망률과 소득 수준의 관계를 보여 준다. 그림은 해당 지역의 전형적인 가구 소득에 따라 우편번호를 분류해 소득별 주민들의 사망률을 나타낸 것이다. 그림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부유한 우편번호 지역에 사는데 낮은 사망률을, 왼편에 있는 가난한 지역 사람들은 높은 사망률을 보인다. 미국 자료를 이용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거의 모든 사회에서 발견된다. 모든 사회에서 소득이 높을수록 사망률은 낮아진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님을 기억하라. 그림 1-4가 놀라운 것은 사회 내에서 건강을 나타내는 그래프의 기울기가 매우 정연하고 규칙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울기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8_%ED%8F%89%EB%93%B1%EC%9D%B4%20%EB%8B%B5%EC%9D%B4%EB%8B%A4/%ED%8F%89%EB%93%B1%EC%9D%B4%EB%8B%B5%EC%9D%B4%EB%8B%A41-3_600(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3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8_%ED%8F%89%EB%93%B1%EC%9D%B4%20%EB%8B%B5%EC%9D%B4%EB%8B%A4/%ED%8F%89%EB%93%B1%EC%9D%B4%EB%8B%B5%EC%9D%B4%EB%8B%A41-4_60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각 사회 안에서 건강과 행복은 사람들의 수입과 관련이 있다. 부유한 사람은 같은 사회에 속한 가난한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다. 그러나 부유한 사회를 비교해 보면, 한 사회 사람들이 다른 사회 사람들보다 평균적으로 두 배 더 부유하다고 해도 건강과 행복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로 다른 국가 간의 평균 수입이나 삶의 질 차이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같은 국가 내의 수입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는 모순 말이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는 부유한 국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수준을 실질 소득 수준이나 삶의 질이 아니라 사회 내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문제가 생긴다는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평균 수준이 아니라 자기가 남들보다 나으냐 그렇지 못하냐는 데 있다. 즉, 사회 내 서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설명은 그림 1-4에서 볼 수 있는 건강의 사회적 기울기가 상대적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건강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사람으로부터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 내는 사회 이동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건강한 사람은 사회적 사다리의 위쪽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사다리의 아래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설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장에서는 사회 내에서 소득 격차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더 평등한 사회와 덜 평등한 사회가 건강이나 사회문제에 있어 전반적으로 동등한 수준의 부담을 안고 있을까?</p> <br /> (들어가며, 1장 전문)<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리처드 윌킨슨 Richard Wilkinson</strong><br /> 건강의 사회 결정 요인에 대한 국제 연구로 널리 알려졌다. 영국 노팅엄 의과대학에서 지역사회 의학을, 런던 정경대에서 경제사를 공부했다. 노팅엄 대학 사회역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8년 은퇴했다. 지금은 노팅엄 의과대학과 런던 대학(UCL)의 명예교수, 요크 대학의 방문 교수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 『평등해야 건강하다』, 『건강 불평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케이트 피킷 Kate Pickett</strong><br /> 케이트 피킷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형질 인류학을, 코넬 대학에서 영양학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역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요크 대학 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lt;국립 건강 연구 재단<sup>National Institute for Health</sup>&gt;에 소속돼 있다. 리처드 윌킨슨과 함께 설립한 &lt;이퀄러티 트러스트<sup>Equality Trust</sup>&gt;의 재단 이사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전재웅</strong> <br />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국제 대학원에서 국제 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시카고 대학에서 인류학 석사과정을 거쳐 현재는 동 대학원 사학과에서 한국 현대사와 미국-동아시아 관계사를 중심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4 오전 10:01:00로징의 ‘북극곰’<img alt="" width="600" height="60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EB%B6%81%EA%B7%B9%EA%B3%B0_%ED%91%9C%EC%A7%80.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6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08%20copy.jpg"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작가의 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북극 탐험은 1983년 2월의 어느 늦은 오후 위니펙(Winnipeg, 캐나다 매니토바<sup>Manitoba</sup> 주의 도시) 도서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몇 시간 전에 저는 몬트리올에서 출발한 버스에서 막 내린 상태였습니다. 서쪽에 있는 유콘(Yukon, 캐나다 북서부의 준주)에 가기 전날 밤은 매니토바의 수도에서 하룻밤을 보낼 작정이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서관에 있는 캐나다 북부 지도를 들여다보면서 앞으로의 여행을 기대하는 참에 어떤 이누이트 청년이 말을 걸어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북쪽으로 가시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제가 머리를 끄덕이자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북극에서의 겨울 경험은 대부분 추위를 좋아하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그걸 배우려고 레졸루트 만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처칠로 가는 북부행 기차를 타는 걸로도 충분하니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청년은 허드슨 만 해안가에 있는 지점을 가리켰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거기 가서도 추위가 견딜 만하다면 그 다음에 갈 곳이라곤 남극밖에 없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호기심이 발동해서 청년의 조언대로 다음날 아침 처칠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북쪽 수림대를 따라 펼쳐진 밀밭을 지나 서른여섯 시간의 기차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런 눈 폭풍으로 마을은 얼음 사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저는 껍질 속에 숨어든 거북이처럼 파카 점퍼 속에 몸을 웅크리고 등에는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마을에서 유일하게 문을 연 호텔로 걸어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에 대한 사전 경험이 전혀 없었던 탓에 이틀 동안은 헛수고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북극광을 보았는데도 사진을 찍을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추위 때문에 필름이 얼고 모든 카메라가 다 작동을 멈추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있는 가족과 통화했지만 그 편안한 목소리도 제가 느낀 실망과 좌절감을 덜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도망치듯 떠나는 순간까지도 처칠 지역과 극북 지역이 언젠가 제2의 고향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 초가 되기 전에는 처칠 지역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캐나다 유일의 북극 항구로 수확물을 선적하던 대초원의 밀 농부들이나, 북쪽 종착역까지 황량한 철로를 깔았던 캐나다국립철도의 인부들 정도만 아는 곳이었지요. 위니펙에서 1천 127킬로미터 떨어진 이 마을은 북위 58도 44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같은 위도에 있는 도시로는 스웨덴의 스톡홀름과 노르웨이의 오슬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항공기를 타고 마을을 내려다보면 북극을 둘러싼 툰드라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이 마을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20여 년 동안 처칠 지역은 북극곰, 북극광, 대규모의 철새 이동, 고래 떼, 그리고 해마다 피어나는 화려한 색상의 야생화로 대변되는 생태 관광과 야생동물 연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과학자, 사진작가, 촬영 팀을 포함해서 수천 명이 이 마을로 몰려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으로 처칠을 방문한 그 다음해부터 5년 동안 북극광의 황홀했던 자태가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고, 다시 그것을 사진에 담으려고 1988년 처칠로 돌아갔습니다. 실제로 북극광의 장엄한 현상을 볼 수 있는 가장 멋진 시기였기 때문에 열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제가 관심을 보일만한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흰기러기 떼의 이동이나 해빙 붕괴, 흰돌고래, 야생화 등&hellip;&hellip;. 물론 북극곰도 그중 하나였습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6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09%20copy.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극북 지역을 처음 방문한 이후 저는 취미 생활로 즐기던 초보 사진가에서 전문 사진가로 진화했습니다. 사진작가의 삶이란 현장에서 보내는 몇 시간 동안 완벽한 절망감과 완벽한 환희의 순간을 모두 경험하는 것입니다. 텐트 속에 앉아 폭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거나 고장 난 장비와 씨름하는 일, 또는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서 헤매는 경험 등은 사진작가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하지요. 하지만 새끼 곰과 다정하게 있는 어미 북극곰을 발견하거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배경으로 새하얀 순백의 세상을 향해 걸어가는 북극곰의 모습을 포착하는 순간은 그 숱한 절망의 시간을 보상해 주고도 남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야생에서 사진을 찍는 데는 250분의 1초 정도가 걸립니다. 하지만 적절한 빛과 제대로 장비를 갖춘 상태에서 정확한 장소와 정확한 시간을 만나려면 몇 주가 아니라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사진작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경험이 풍부한 가이드와 야생동물 전문가, 그리고 인내심 덕분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여 년 동안 되도록 자주 처칠 지역을 방문했고, 최근에는 마을의 남동쪽에 있는 와푸스크 국립공원에 사는 북극곰을 주로 찍었습니다. 또한 더 북쪽으로 가서 빅토리아 섬에 사는 여우와 사향소를 촬영했고, 코럴 하버와 이글루리크 지역의 바다코끼리, 서머셋 섬 근처의 흰돌고래, 배핀 섬 근처의 일각고래를 찍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북쪽의 호수 지역에서 헤엄을 치는 북극곰을 처음으로 본 다음부터 저의 주된 관심사는 북극곰이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유럽의 북극권에 자리한 군도인 스발바르 지역에 사는 북극곰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북극 어느 곳에 있든지 북극곰을 마주칠 때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경외감에 빠져듭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곰 바이러스는 감기와 비슷합니다. 단순한 존경심을 포함해서 다양한 증상을 보이지요. 그중에 특히 지속되는 증상은 모든 북극 지역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광활한 풍경은 당신의 마음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지요. 이 소박한 대지는 내재된 풍요로움으로 당신의 감각을 일깨워 줍니다. 머리 위로는 학두루미, 아비새 그리고 기러기 떼가 잊을 수 없는 소리로 노래하며 날아갑니다. 때로는 끈질긴 모기 떼가 잉잉거리는 소리로 북극의 청명한 대기를 가득 채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은 우리가 존중해야 할 땅입니다.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면적도 넓고 강력한 힘도 있지만, 사실 이 북극지역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기후 변화와 석유, 광물 채취, 그리고 포획과 남용 때문에 섬세한 균형으로 상호 연결된 생태계에 조금씩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이 북극곰을 보호하고 그 대체 불가능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의 활동을 후원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영감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0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11%20copy.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와푸스크 국립공원 소개</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와푸스크 국립공원<sup>Wapusk National Park</sup>의 &lsquo;와푸스크&rsquo;는 원주민인 크리 족의 말로 &lsquo;흰곰&rsquo;입니다. 즉 북극곰 공원이라는 뜻입니다. 본격적으로 노베르트의 장엄한 사진들을 보기 전에 북극곰과 그들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6년에 설립된 와푸스크 국립공원은 허드슨-제임스 만 저지대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캐나다의 국립공원 중 하나입니다. 공원 부지로 선정된 지역은 생태학적인 다양성과 철새와 텃새들, 그리고 북극곰의 서식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캐나다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의미심장한 곳입니다. 캐나다의 다른 모든 국립공원과 마찬가지로 와푸스크 공원은 후손들을 위해 땅과 생태계를 보호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즐기고 공유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와푸스크 공원은 허드슨 만의 서쪽 해안가에서 시작하는데, 고대로부터 형성된 해안가 언덕과 저지대를 가로질러 끝없이 펼쳐진 호수와 이탄지(토탄이 퇴적하여 이루어진 땅)의 개울을 거쳐, 타이가(북반구의 냉대 기후 지역에 나타나는 침엽수림) 지역이 툰드라와 맞닿은 가문비나무 숲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이 북극권의 남쪽 끝이자 바로 북극곰으로 상징되는 지역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얼음과 기후, 해류와 조류, 서식지와 생존을 위한 생태계의 이동 등 복잡한 이유로 인해 북극곰은 자연스럽게 와푸스크 국립공원으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북극곰은 해빙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허드슨 만의 얼음은 해마다 완전히 녹기 때문에 곰들은 육지로 올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얼음이 붕괴되면서 만에서의 해류는 남쪽으로 흐르고 허드슨 만에 사는 북극곰의 대부분이 그곳에 남게 됩니다. 육지에서는 곰들이 다시 만이 얼기를 기다리면서 해안가 근처에 머무릅니다. 하지만 새끼를 밴 암컷들에게는 다른 목적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와푸스크 공원의 중심부와 서부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그곳에는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적당한 장소가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한겨울이 되면 사냥을 하기 위해 암컷들은 새끼들을 데리고 해빙 위로 이동해서 허드슨 만으로 갈 것입니다. 그때까지 암컷들은 와푸스크 국립공원에서 새끼를 낳고 기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와푸스크 공원에 북극곰의 서식지가 집중되는 이유는 마땅한 은신처가 많기 때문입니다. 북극곰은 눈 속보다는 땅속에 굴을 파는데 적당한 부지를 찾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위에 눈이 쌓여 있어서 보온이 잘 되어야 하고, 굴을 확장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암반이나 다른 장애물도 없어야 하며 또한 지붕이 무너지지 않도록 잘 지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장을 멈춘 전나무 숲의 가장자리는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연못과 시냇물이 이탄지로 흘러 나가서 물이 스미지 않기 때문입니다. 토탄 습지의 둑은 높이가 몇 미터나 되며 거의 수직입니다. 지표면에 가까운 전나무의 뿌리 덩어리는 굴의 안전한 지붕이 되어 줍니다. 나무 등걸과 줄기, 그리고 남동쪽을 향해 있는 둑에는 눈이 단단하게 많이 쌓입니다. 다시 말해 북극곰의 굴로 최적의 장소가 되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생태학적 균형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북극곰의 서식지가 개발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막고 곰들이 불필요한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합니다. 또한 우리의 임무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에서 아름다운 동물들을 볼 기회를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장소를 공개하고 전 세계에서 오는 방문자를 안내하는 역할도 합니다. 이 책은 북극곰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와푸스크 국립공원과 그 밖의 장소에 대해 살짝 들여다보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캠프벨 엘리어트(Campbell Elliott, 와푸스크 국립공원 총괄감독)</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0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14%20copy.jpg" /></p>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북극곰의 은신처</span></strong></span>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침엽수와 하얀 눈이 번갈아 나오면서 마치 녹색과 흰색의 조각으로 짜여진 퀼트 같은 시골 풍경이 저 아래로 빠르게 지나갑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는 수목 한계선을 지나 구불구불한 개울을 따라가다가 바람이 없는 쪽에 거대한 눈 더미를 발견했습니다. 북극곰의 은신처로 아주 이상적인 곳이지요. 헬리콥터 조종사가 바로 아래에서 북극곰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가파르게 하강 회전을 할 때에는 갑자기 아침에 먹었던 음식물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울 근처의 가장 키 큰 나무들 바로 위를 날면서 우리는 곰 자국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저기 있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캐나다야생동물서비스<sup>Canadian Wildlife Service</sup> 소속 과학자인 데니스 안드리아섹이 외치는 소리를 이어폰으로 들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암컷이 굴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어요! 저것 좀 보세요. 새끼 곰도 있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헬기를 오른쪽으로 기울이자 북극곰이 새끼를 낳아 기르는 은신처가 겨우 보입니다. 북극곰의 은신처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북극곰의 은신처를 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라고 맙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26%20copy.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몇 년 동안 저는 모리스 스펜스와 마이크 스펜스 형제, 그들의 친구인 알렌 오만의 도움을 받아 북극곰 가족을 찾아다녔습니다. 스펜스 형제는 와푸스크 국립공원의 끝에 자리한 유명한 &lsquo;와치 로지<sup>Wat'chee Lodge</sup>&rsquo;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지역을 방문하는 여행자, 사진가, 영화 팀을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공원의 막대한 규모와 북극곰이 얼마나 잘 숨는지를 고려해 보면 이들의 은신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리스에게 북극곰을 찾는 비결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특별한 비결은 없어요. 여기는 모두 부족의 땅이지요. 여기서 배운 모든 것은 다 아버지와 다른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게 배운 거예요. 구름을 보면 날씨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어요. 얼음 색깔이나 쌓인 눈을 봐도 알 수 있답니다. 눈과 마음을 열고 은신처를 찾는 북극곰 어미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와푸스크의 암컷 북극곰은 새끼가 태어나기를 고대하면서 땅속에 새 은신처를 파거나 이전에 여러 세대가 사용해 온 기존의 은신처로 들어갑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암컷들은 안락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적당히 쌓여 있는 눈 더미를 찾아 나섭니다. 주로 1.2미터 높이에 2&times;3미터 정도의 공간 한 개를 파지만 두세 개를 파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지붕의 두께는 쌓인 눈을 통해서 공기가 통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얇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두께는 너무나 얇아서 한번은 동료 사진작가가 넘어졌을 때 지붕이 무너진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그 친구의 다리가 빠진 곳은 곰이 없는 여분의 공간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누이트 족이 이글루비쿠스라고 부르는 굴 안에서 어미 곰은 지난겨울에 축적한 지방을 소비하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겨울잠 속에 출산을 기다립니다. 새끼들은 11월과 12월 사이에 태어납니다. 어미 곰은 보통 한 마리나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아 전형적인 북극곰 가족을 이룹니다. 가끔은 세 마리를 낳는 경우도 있습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1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20%20copy.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곰은 막 태어날 당시에는 다람쥐보다 더 작으며 몸무게는 1킬로그램 정도입니다.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갓 태어난 새끼 곰은 얇은 솜털로 뒤덮여 있는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미발달 상태의 새끼 곰은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합니다.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외부의 온도가 아무리 낮게 내려가도 굴 내부는 영하를 웃도는 기온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굴을 덮은 눈이 보온 역할을 해 주고 어미의 몸에서 나오는 체온이&nbsp; 내부를 덥혀 주기 때문입니다. 새끼 곰은 태어나서 처음 3주 동안은 얼어붙은 땅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미의 넓적다리 위에 웅크리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시기의 새끼 곰은 연약한 존재이기는 하나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있어서 어미의 두터운 털을 헤치고 젖꼭지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북극곰은 지방 농도가 40퍼센트가량 되는 진한 젖을 만들기 때문에 새끼 곰이 빨리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고지방 식사를 한 달가량 하고 나면 새끼들은 기어 다니기 시작합니다. 6주 정도가 지나면 눈을 완전히 뜨고, 10주가 되면 무게가 11킬로그램에 이르고 몸의 균형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굴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 것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가 되면 낮이 점점 길어지고 따뜻해져 어미 곰은 밖으로 기어 나와 기지개를 켭니다. 어미 곰의 털은 굴속에서 수개월을 지난 터라 흙이 많이 묻어 있고 얼음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혼자 몇 번 밖에 나갔다 온 후에 어미 곰은 별로 따라나서고 싶지 않은 새끼들을 유인하여, 곰의 일생 중에 처음이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계절을 보낼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새끼 곰들이 어미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지만 곧 눈 위에서 장난을 치기 시작합니다. 새끼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서 점점 강하게 자라며 신체 조정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6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P027%20copy.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에는 새끼들이 굴 근처에서만 놉니다. 위험에 처하거나 갑자기 날씨가 나빠질 경우에는 재빨리 굴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겨울 환경에 순응하는 것은 북극에서 사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입니다. 새끼들 역시 겨울 환경에 빨리 적응하면 할수록 생존할 가능성도 더 높아집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번은 깊이 파인 토굴에서 5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 판 눈으로 된 굴을 발견했습니다. 그 토굴의 입구에는 곰 가족의 입김 때문에 발생하는 서리가 보였습니다. 모리스는 3개월이 지난 후에 어미 곰이 기존의 오래된 굴에 싫증이 나서 깨끗하고 밝은 주거 공간을 찾았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어미 곰은 주변 경관이 잘 보이는 남향의 긴 적설 언덕을 발견하고 그 한가운데에 새로운 굴을 파기 시작했을 겁니다. 어미의 긴발톱 자국이 굴 주변에 여기저기 찍혀 있고 쌍둥이 새끼 곰의 작은 발자국도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2주 후에 어미와 새끼 곰은 허드슨 만으로 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이누이트 족은 그 여정을 &lsquo;아틱톡(ah-tik-tok, 바다로 가는 여행자들)&rsquo;이라고 부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에서 봄을 만끽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새로운 북극곰 가족의 등장을 지켜보는 게 아닐까요?</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의 말, 1장 전문)</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30"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7_%EB%B6%81%EA%B7%B9%EA%B3%B0/%EB%85%B8%EB%B2%A0%EB%A5%B4%ED%8A%B8%20%EB%A1%9C%EC%A7%95.jpg" />노베르트 로징<br /> </strong>독일 출신의 야생사진가 노베르트 로징은 1988년부터 캐나다, 매니토바 주의 처칠 지역을 자주 여행하였으며 이 지역에서 &lsquo;북극곰 아저씨<sup>Mr. Polar Bear</sup>&rsquo;라고 불립니다. 처음 북극 지역을 방문할 때부터 북극곰과 북극곰이 살고 있는 환경에 한결 같은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과 아프리카의 국립공원과 자연보호 대상 지역에서 헌신적인 사진 작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br /> 유럽 전역과 북미 지역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비롯한 여러 잡지와 책에 활발하게 기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포토어워드인 트리렌베르크 슈퍼서킷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본서의 커버 사진은 「내셔널지오그래픽」 100대 야생사진 특별호의 커버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순영<br /> </strong>1970년 강릉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nbsp;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졸업한&nbsp;뒤 여러 기업체에서 해외업무를 담당했습니다. 2009년 도서출판 북극곰을 설립하여 환경과 영혼의 치유를 주제로 일련의 책들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으며, 번역가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서인 노베르트 로징의 『북극곰』 외에 곧 린다 굿맨의 『당신의 별자리』와 마르타 알테스의 『안돼!』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선보일 예정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3 오후 12:09:00《213》이강백의 『황색여관』을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38"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3_%ED%99%A9%EC%83%89%EC%97%AC%EA%B4%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21일</span></strong><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강백의 </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color: #996600"><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황색여관』</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을 읽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강백의 『황색여관』(범우사, 2007)을 다시 읽었다. 만약 누군가 &lsquo;러브모텔&rsquo;을 개장한다면, 이 상호로는 당최 손님이 꾀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작중의 &lsquo;황색여관&rsquo;은 어떤 경쟁자도 없는 &ldquo;허허벌판 가운데&rdquo;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담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lsquo;숲 속의 집&rsquo;은 &lsquo;죽음의 집<sup>antidom</sup>'을 상징한다. 폐쇄된 공간으로 설정되는 그곳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들은 폭력과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사후<sup>死後</sup> 세계를 경험한다.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lt;조용한 가족&gt;이 바로 전형적인 &lsquo;죽음의 집&rsquo;이다. 그 반대편에 평화의 장소이며 깊은 사색의 장소이자 어머니의 품과 일체 되는 안전한 장소로서의 &lsquo;생명의 집<sup>dom</sup>&rsquo;이 있다. 시골의 외딴 집이긴 하지만 이정향 감독의 &lt;집으로&gt;는 &lt;조용한 가족&gt;과 달리 추억과 재생을 안겨주는 &lsquo;생명의 집&rsquo;이다. 이제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듯이, 황사 바람 날리는 황야에 서 있는 황색여관은 &lsquo;숲 속의 집&rsquo;의 변용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막이 열리면 여관의 주인이 자신의 거처인 지하실의 뚜껑을 열고 조심스레 고개를 내민 채 &ldquo;거기&hellip; 산 사람 없소?&rdquo; 하고 말한다. 하지만 어젯밤 1층과 2층 객실에 가득했던 투숙객들은 밤새껏 싸움질을 하곤 죽었다. 여관 도처에 즐비한 시체를 보며 황색여관의 주인장은 &ldquo;좆같이 조용하군&rdquo;이라고 내뱉는다. 극 중의 여관 주인은 이 욕을 아주 버릇처럼 하는데, 이 대목은 가부장적이고도 폭력적인 이 세계의 질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거라서 재미있다. 간밤의 투숙객들이 모두 죽었으니 이제 그와 그의 아내가 해야 할 일은 죽은 자들의 돈지갑과 귀금속을 챙기는 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인 부부가 전날 밤의 살육극을 정리하는 중에, 가방을 싼 처제와 주방장이 나타나 여관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파업인가? 주인 부부는 언젠가 여관을 물려준다는 약속을 미끼로 처제의 월급을 한 번도 주지 않았고, 주방장에겐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었다. 하지만 처제와 주방장은 살육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떠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여관 운영에 차질이 생긴 주인 부부는 처제에게 내기를 건다. 오늘 밤 처제가 투숙객의 싸움을 말려서 &ldquo;손님 열 명만 살리면 이 여관을 당장 준다, 줘!&rdquo; 처제는 그건 불가능하다며, 점점 숫자를 낮춘다. 다섯 명&hellip;세 명&hellip;한 명! 이 도박은 원래 소돔과 고모라를 두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맺었던 의로운 &lsquo;열 사람&rsquo;에 대한 명백한 은유다. 여기서 우리 현실의 축소판인 황색여관이 곧 소돔과 고모라이며 &lsquo;죽음의 집&rsquo;이라는 것은 더욱 명확해진다. 하지만 극의 중심이 되어야 할 내기는 어딘가로 실종했다. 처제의 역할이 미미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집과 바깥(자연)은 혼연일체의 공간이었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집과 바깥은 철저히 구분된다. 바깥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이 판치는 공적인 전장<sup>戰場</sup>이 되고, 바깥의 세계가 그토록 야수적인 만큼 자본주의 사회의 가내 공간은 사적인 휴식과 친밀함의 성소가 된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휴식과 친밀함의 공간인 집안이 생산기지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을 선취해 보여준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바깥이 힘겨웠던 그레고르는 잠자는 집안에서 위로를 구하고자 했으나, 가족과 집은 그것을 거부한다. 영화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lt;조용한 가족&gt;의 집은 자본주의의 생산기지가 되면서 &lsquo;죽음의 집&rsquo;이 되었고, &lt;집으로&gt;는 그렇지 않았기에 &lsquo;생명의 집&rsquo;이 되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532"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3_%EC%A1%B0%EC%9A%A9%ED%95%9C%20%EA%B0%80%EC%A1%B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내기를 한 첫날, 처제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2층에 투숙했던 공직 은퇴자․변호사․사업가와 1층의 배선공․배관공․외판원은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모두 죽었다. 극은 첫 막의 아침 풍경을 되풀이하고, 주인 부부는 전리물을 거둔다. 주방장은 어제 아침처럼 처제에게 여관을 떠나자고 재촉하지만, 그녀는 &ldquo;오늘은 꼭 살릴 거&rdquo;라며 떠나길 거부한다. 실망한 주방장은 어깨를 떨어트리며 주방으로 돌아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말미에 실린 해설은 여관을 떠나지 않는 처제로부터 희망을 발견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물론 &ldquo;오늘은 꼭 살&rdquo;리고 말 거라고 결심하는 처제의 가녀린 존재는, 형부가 버릇처럼 내뱉는 저 쌍욕과 같이 남성적 원리에 의해 움직여지는 살육의 세계와는 대척에 있다. 그렇지만 그녀가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황색여관은 단순한 &lsquo;집&rsquo;이 아니라, 자본이 발생하는 &lsquo;기지&rsquo;(여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처제와 주방장은 문을 나서면 황사만 날리는 황야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다시 말해 처제와 주방장이 이용하고픈 것은 임금투쟁에 필요한 도덕적 명분의 축적일 뿐, 애써 살육을 막거나 떠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게다가 여관은 언젠가는 그들의 수중에 떨어질 유산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이중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가 무대 지문에 쓴 &lsquo;가축사육장&rsquo;이란 표현처럼 오늘의 집들은 자주 모욕받는다. 앞서 &lsquo;생명의 집&rsquo;과 &lsquo;죽음의 집&rsquo;을 거론했지만 그 구분은 케케묵은 민담이나 신화에서만 가능하다. 이제 집은 그 어떤 평화도 사색도 모성적 가치도 간직하고 있지 않다. 집이 자본의 축적과 생산의 전초기지라는 사실은, 사회면을 장식하는 가족 이기주의나 님비<sup>NIMBY</sup>현상이 잘 드러내 준다. 아주 흥미롭게도, 신화 시절부터 위대한 인간들은 &lsquo;생명의 집&rsquo;과 &lsquo;죽음의 집&rsquo;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아닌 방랑(여행)을 택하곤 했다(그것의 현대적인 용어가 노마드<sup>Nomad</sup>다). 하지만 『황색여관』을 보라. 잠시 황야를 헤매었다는 뜻에서 여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분명 방랑자이지만, 그들은 그저 2층으로 오르거나 자기 자리를 빼앗으려는 욕망의 &lsquo;짝패&rsquo;를 떨어트리기 위해서만 숨을 쉰다. 모든 길은 어김없이 황색여관으로 모이고, 승리하는 것은 지하실에 똬리를 튼 죽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집의 이상은 &lsquo;스위트 홈<sup>Sweet Home</sup>&rsquo;이다. 그런데 집이 생산의 전초 기지가 되면, 스위트 홈이 될 리 없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lsquo;재택근무&rsquo;가 바람직한 것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칫 &lsquo;트로이의 목마&rsquo;가 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스위트 홈과 생산의 전초 기지가 합해지면, 당신은 어디에 숨을 텐가?</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23 오전 10:57:00‘스틸라이프’ 17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00"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7%ED%9A%8C/17%ED%9A%8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골동품점 &lsquo;메리 포핀스&rsquo;</span> </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medium">1</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참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지요. 제가 골동품 가게를 하리라고는 예전엔 상상도 할 수가 없었어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저는 어릴 적부터 수녀가 되는 게 꿈이었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집안엔 고고한 순교자의 피가 흐른다고 말씀하시던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떠오르네요. 우리 가게에 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정말 없는 거 빼곤 다 있답니다. 오래돼 소리가 나지 않는 기타, 아무리 달래보아도 침묵을 지키는 첼로, 옛날 옛적 어느 먼 나라의 황실에 있었을법한 고색창연한 라디오, 물론 소리는 나지 않는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한 건 우리 가게에 있는 물건은 고장 난 것일수록 기품이 있다는 겁니다. 소리 나지 않는 첼로만 해도 예전엔 엄청난 가격에 팔리던 몇백 년 묵은 것이라 해요. 모습은 멀쩡한데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물건들은 인테리어 소품으로 팔려나가기도 하죠. 십 년 전 여행을 왔다가 우연히 골동품가게에 들린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파리로 떠난 친구로부터 제 딴에는 꽤 큰 액수의 돈을 주고 이 가게를 맡았어요. &lsquo;메리 포핀스&rsquo;는 친구가 운영하기 훨씬 전 원래부터 이 골동품 가게의 이름이었어요. 신기하게도 짧은 시간이지만 수녀 생활을 잠시 했던 제 별명이 &lsquo;메리 포핀스&rsquo;였답니다. 그래서 이 가게를 맡는 걸 주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지팡이를 휘두르기만 해도 발아래 신비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마술사, 하긴 제 꿈도 마술사였어요. 이 가문 세상에 비를 고루고루 내리게 해서 배고픈 사람도 아픈 사람도 없는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게 제 오랜 꿈이었죠. 수녀가 되어서 그런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까 했는데, 어림도 없는 일이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수녀복을 벗고 바람 불고 비 오는 세상으로 나오니 갈 곳이 없더군요. 피붙이라고는 딸랑 오빠 하나밖에 없는데 그 집에 가기가 망설여졌어요. 왜냐면 오빠는 제가 수녀 되는 걸 누구보다도 말리던 사람이었거든요. 일단 바다를 보고 싶던 저는 동해안으로 가는 기차를 탔어요. 그때 제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 사람이 바로 훗날 제 남편이 된 사람이랍니다. 그는 대기업에 근무하던 건실한 회사원이었어요. 제 옆자리에 앉은 그는 제가 내미는 캔커피를 받아들며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이 지구 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며 집 나간 아내를 찾으러 휴직계를 내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말했어요. 별일 없다면 동행해주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말한 건 그가 아니라 제 안의 목소리였어요. 그렇게 우린 한 달 남짓 전국을 여행하며 쏘다녔어요. 아무리 다녀도 그 사람의 아내는 찾을 수 없었어요. 우리는 해가 뜨면 그 사람의 아내를 찾으러 다녔고 그 핑계로 이 땅의 풍광 좋다는 산과 강과 계곡과 바다들을 죄다 돌아다녔어요. 제 생애 가장 좋은 날들이었죠.</p> <p style="text-align: justify">밤이 되면 찜질방에 고단한 몸을 뉘었어요. 그 사람과 저는 누가 볼 새라 멀찌감치 떨어져 누워 있곤 했어요. 대한민국의 찜질방처럼 신기한 공간이 또 있을까요? 남녀 구분 없이 다 함께 따뜻하고 커다란 공간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곳, 찜질방은 오갈 곳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값싼 은신처가 되어주기도 하지요.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커져가는 코 고는 소리들의 합창은 여름의 막바지에 귀가 떨어지도록 시끄럽게 울며 죽어가는 매미들의 합창 같아요. 가끔은 새벽에 새로운 사람이 손님처럼 들어오기도 하죠. 주위를 둘러보고는 불안한 몸짓으로 자기 자리를 찾아 몸을 뉘는 사람에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발가벗고 있어도 당신은 누구냐고 묻지 않는 목욕탕이나 수영장처럼 정말 만인이 평등한 곳, 그곳 또한 찜질방이에요. 머리가 긴 여자들이 잠이 오지 않는지 가운을 입고 넓은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연옥을 닮았어요. 제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귀신들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누워서 바라보는 일은 슬퍼요. 마치 저 자신도 그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에 이르니까요. 황토방, 수정방, 산소방 등등 신기한 이름의 방들은 뜨끈뜨끈한 게 마치 저승세계의 퓨전 같아요. 대청마루는 바닥은 뜨거운데 위풍이 너무 세서 잠이 오지 않아 저도 귀신처럼 흐느적거리며 따뜻한 수정방으로 들어갔어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아줌마들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누워있자니 쪄 죽을 것 같았어요. 이런 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때 저와 동행한 지금의 남편은 위풍이 센 대청마루 구석에 몸을 구부리고 누워 인기척도 없더라고요. 찜질방에서 지낸 그때 불면의 기억들은 제게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해주었죠. &ldquo;우리네 삶은 누구에게나 한대가 아니면 열대이다. 우리 맘에 딱 맞는 쾌적한 온도의 삶은 없다&rdquo;라고요.<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2-23 오전 10:02:00레식의 ‘아이디어의 미래’<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7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6_%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20%EB%AF%B8%EB%9E%98/%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EB%AF%B8%EB%9E%98%20%ED%91%9C%EC%A7%80_60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누가 혁신을 가로막는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20여 년 전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처음 본 순간 느꼈던 감동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록 까만 화면에 하얀 글씨가 나열된 것에 불과했지만 분명 그건 새로운 세상과의 연결이었다. 그 새로운 세상이 날 가슴 뛰게 만들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는 데에 있었다. 이미 잘 다듬어진 콘텐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친절한 안내인도 없었다. 단지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와 나와 똑같은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나의 PC통신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몇 년 후 인터넷이 도래하자 새로운 세상은 PC통신의 울타리마저 넘어 무한히 확대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록 밴드 &lsquo;그레이트풀 데드&rsquo;의 작사자이자 전자프런티어재단<sup>EFF</sup>의 설립자인 존 페리 발로<sup>John Perry Barlow</sup>는 1996년에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선언문<sup>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Cyberspace</sup>」을 발표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본떠 작성된 총 16절의 위 선언문은 &ldquo;인터넷은 국가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모든 문제는 황금률에 근거한 사회계약에 따라 구성원들이 스스로 해결할 것&rdquo;이라며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와 존 페리 발로는 지구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분명 공통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 벅찼던 나의 감동과 당돌한 그의 자신감은 모두 한 가지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lsquo;자유&rsquo;다. 계획되어 있지 않고 예정되어 있지 않은 불확실성과 현실의 물리적, 경제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가능성이 만들어 내는 자유. 얽히고설킨 전깃줄의 연결망과 컴퓨터 코드가 가져다 준 자유는 빠르게 그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자유와 가능성의 땅 인터넷은 그토록 거침없어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2000 년, 로런스 레식 교수는 첫 번째 저서 『코드<sup>Code and Other Laws of Cyberspace</sup>』에서 현실의 법(Law)과 함께 또 하나의 법 (Code)이 되어 버린 컴퓨터 코드가 인터넷을 다시 억압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자유를 구현한 코드가 오히려 사이버스페이스를 현실세계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공간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존 페리 발로가 자신감에 차 독립을 외친 지 겨우 4년 만의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이디어의 미래<sup>The Future of Idea: the fate of the commons in a connected world</sup>』는 레식 교수의 두 번째 저서이다. 이 책은 인터넷의 가치와 자유가 손상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저서와 같은 맥락이지만, 전작과 달리 이를 창의성과 혁신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문화와 산업에서의 창의성과 혁신의 의미, 가능성, 그리고 위기를 &lsquo;커먼스<sup>commons</sup>&rsquo;, &lsquo;콘트라스트<sup>contrast</sup>&rsquo;, 그리고 &lsquo;컨트롤<sup>control</sup>&rsquo;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차례로 풀어 나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유재라고 번역될 수 있는 &lsquo;commons&rsquo;는 &lsquo;자유&rsquo;에 관한 이야기이다. 공유재는 모든 구성원이 다른 사람의 허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공유재는 인터넷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외적이긴 하지만 오랜 역사 동안 이미 현실 세계에도 존재하는 것들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공공도로, 공원 등이 이런 공유재에 속한다. 하지만 초기의 인터넷만큼 공유재가 큰 역할을 한 경우는 없다. 공유재가 의미를 갖는 것은 자유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가 가져다주는 가치와 혁신이다. 레식 교수는 인터넷에서의 공유재란 무엇이고, 그것이 가져다 준 가치와 혁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우리가 공유재에 대해 갖고 있는 무지와 오해가 무엇이었는지를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귀한 계기가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키워드인 &lsquo;contrast&rsquo;는 현실 공간과 인터넷 공간의 대조이다. 현실 공간에서 느끼지 못한 자유를 왜 인터넷에서 느낄 수 있었는지, 현실 공간을 지배하던 제약이 인터넷의 등장으로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경쾌하게 들려준다.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한 혁신과 우리 삶의 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며 설명한다. 자유와 공유재가 만들어 내었던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가능성과 희망의 이야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레식 교수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 번째 키워드인 &lsquo;control&rsquo;이다. 3부는 옛것이 새것을 어떻게 통제하고 억압하기 시작했는지에 관한 우울한 사례들이다. 레식이 강조했던 법(law)과 또 하나의 법(code)이 인터넷의 공유재와 자유를 어떻게 변질시키고 있는지 보여 준다. 2부에서 들려준 혁신들이 하나하나 무너지고 공유재와 자유가 줄어드는, 불과 몇 년 동안의 역사는 절망적이다 못해 드라마틱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실 그의 첫 번째 저서가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사이버스페이스의 이상적인 자유에 대해 무한한 희망과 기대를 품고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코드』는 많은 이들에게 너무 비관적인 내용으로 비쳤다. 충분히 극복 가능한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다는 반론도 있었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에 출간한 두 번째 저서 『아이디어의 미래』에서 레식 교수는 우울한 소감을 던진다. 상황은 자기가 걱정했던 것보다 더 악화되었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출간된 지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레식의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하다. 레식 교수의 예언이 적중한 지금에 와서야 『아이디어의 미래』는 오늘날 더 적합한 이야기가 된 것이다. 10년이면 아날로그 시대에서도 강산이 한 번 바뀌는 긴 시간이다. 그러니 급박하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서는 더 말할 나위 없는 엄청 긴 시간일 수밖에 없다. 감수를 위해 이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10년 전의 이야기가 과연 어느 정도 현실감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이 책은 오히려 지금 더 유효하다. 레식 교수의 뛰어난 통찰과 신념 덕분에 『아이디어의 미래』는 최근에 나온 그 어느 책보다 더 생생하고 치열한 현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10년이 지난 세상은 여전히 그가 말한 대로 현재진행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얼마 전 포털사이트 이용자가 다섯 살 난 귀여운 딸이 인기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어정쩡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촬영하여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법정 공방을 벌이게 됐다. 인터넷 시대에 다양한 창의성의 발현과 문화가 다시 억압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 업계 사람들이 모여 공정이용 일반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 그와 같은 사례에서도 만약 노래를 너무 잘 부르게 되면 권리자의 시장이 침해될 수 있으므로 공정이용으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반대에 부딪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코미디 같은 상황도 바로 최근의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리바다는 2002년에 시작된 형사기소를 필두로 민사와 형사 양쪽에서 숱한 소송을 수년 동안 겪었는데 음악지문인식 필터링과 워터마크 등 저작권 보호를 위한 기술 조치를 탑재한 다섯 번째 버전마저 허용된 파일에 한해 전송을 허락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P2P의 본질을 잃고 평범한 유료 음악 판매 사이트가 되어 버렸다. E2E 원칙이 가장 잘 구현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혁신적인 정보 검색 배포 기술이 기존의 권리 체계와 산업 시스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몰락해 버린 냅스터 사례의 재현이었다. 지금도 P2P는 여전히 불법의 온상으로 특별한 감시와 제재의 대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레식 교수가 개탄한 저작권 보호 기간의 연장을 위한 미키마우스법은 우리에게도 현실이 되었다. 창작자의 인센티브를 고취시켜 주기 위한 한시적인 권리라는 본질을 무색하게 하는 사후 70년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한EU FTA와 한미 FTA에 포함되었고, 이에 따라 이미 저작권법이 개정되었다. 최근에는 한미 FTA의 이행을 위한 개정안에 일시적 저장도 복제로 본다는 규정이 포함되면서 모든 온라인상의 이용 행위가 권리자의 통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유롭고 공개된 프로토콜을 기초로 중립성과 개방성이 본질로 인식되었던 인터넷이 점차 네트워크 소유자들의 관리와 통제가 현실화되면서 네트워크 공유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 계속 진행중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망중립성 논의가 치열하게 전개된 바 있으나, 망중립성이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망중립성이 논의되어야 하는지 그 자체에 대해서도 제대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 못하다. 논의 결과를 듣다 보면 중립성과 개방성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보다는 오히려 네트워크 소유자들에게 효율적인 망 관리 권한을 어디까지 허용해 줄 것인지가 논의의 초점이 된 듯하여 당황스럽기만 하다. 레식 교수는 그나마 공유재로서의 스펙트럼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국내에서는 스마트폰의 와이파이 접속마저도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쳤던 점을 생각해 보면 공유재로서의 스펙트럼은 요원하기만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폰이 어렵사리 도입된 2009년 11월, 당시 한 고등학생이 만든 애플리케이션인 &lsquo;서울버스&rsquo;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해프닝은 이 책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다. 당시 서울시와 경기도는 그 지역을 운행하는 버스에 GPS를 장치하여 시민들이 찾는 해당 버스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려주는 서비스를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고 있었는데, 서울버스 앱은 그 홈페이지의 내용을 가져와 아이폰에서 편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실 버스의 현재 위치가 필요한 것은 길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서울시와 경기도의 시스템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었고 오히려 무료로 배포된 &lsquo;서울버스&rsquo;가 그 시스템의 잠재력을 멋지게 실현시켜 준 셈이다. 그러나 경기도가 보인 반응은 &lsquo;서울버스&rsquo;의 서비스 중단과 제작자에 대한 법적 위협이었다. 자신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임의로 데이터를 가져갔으니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였다는 주장이다. 비록 이용자들의 반발로 서비스는 그대로 유지되긴 하였지만 이 사건은 자유와 공유재가 가능하게 한 혁신을 기득권과 &lsquo;무지&rsquo;가 어떻게 억압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모든 상황은 레식 교수가 간파했던 것과 같이 위에서 강요하는 변화를 통해 인터넷이 만들어 내는 자유와 공유재가 사라지는 상황이 현재의 우리에게도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10년이 지났음에도 레식 교수의 통찰은 그대로 유효하고 그가 보여 주었던 암울한 변화의 예견은 많은 곳에서 현실이 되어 가고 있으며, 오히려 그 강도를 더하고 있다. 이 책이 너무나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아이디어의 미래』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주는 깨달음은 우리의 &lsquo;망각&rsquo;이다. 우리는 치열한 현재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지금은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지만 과거의 패러다임을 뒤엎었던 수많은 전환들, 지금은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 전환 때문에 가능했던 눈부신 진보와 귀중한 가치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점차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혁신을 어느 순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가능하게 한 본질을 폄하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존의 지적재산권 체계가 흔들리고 권리자의 사업 모델이 삐걱거리는 혼란스러움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적재산권이 이용 통제가 아닌 재창작의 인센티브를 위해 탄생했고, 그것도 재창작에 필요한 공유재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최소한도에서 어렵게 인정된 것이라는 사실, 지금의 혼란이 넘쳐나는 새로운 창의력과 적극적인 문화 향유의 에너지를 아날로그 시대의 구 체계가 제대로 소화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존의 산업에 대한 충격과 통제되지 않은 상황의 불안함에만 집착한 나머지 지금의 모든 혁신을 탄생시킨 인터넷을 만든 것은 네트워크 소유자들의 강력한 통제가 아니라 공개된 프로토콜, 그러한 프로토콜을 발판으로 작동하는 자유로운 소프트웨어들이라는 사실, 통제되지 않은 유연성과 적응성이 새로운 산업과 창의적인 사업가들을 탄생시켰고 자유로운 공유재들이 혁신의 비용을 낮추며 공정한 경쟁을 통해 이 사회에 이로운 혁신이 계속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망각은 옛것이 새것을 억압하는 비합리적인 상황을 합리적인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혁신의 본질을 제거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중립적이고 현실적인 개선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이러한 혁신의 원천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거나 따져 보지 못한 사람들이 공공정책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 혁신의 원천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혁신의 원천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레식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나오는 &ldquo;혁신은 옛 체제에서 번창을 구가한 모든 이들의 적이다. 그러나 새 체제에서 번창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겨우 미지근한 지지만 받을 뿐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신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rdquo;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혁신을 지지해 줄 사람들마저 혁신을 지키는 데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을 안타깝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불확실하거나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는 지지자들이 아니라 그 혁신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혁신을 제거하는 데 동조하고 있는 혁신의 수혜자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레식 교수를 알게 된 지 벌써 7년이 다되어 간다. CCL<sup>Creative Commons License</sup>의 한국 버전을 만들어 정식으로 론칭했던 2005 년 3월 21일이 그를 처음 만난 날이다. 그 이후에 많은 교류가 있었고 지금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그 어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나의 멘토이자 스승이다. 그는 내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인터넷의 자유와 열림의 가치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려 주었고 진정한 혁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그 때문에 지적재산권이든 인터넷 거버넌스든 모 아니면 도 식의 무지한 극단에 빠지는 실수를 하지 않고 나름대로 균형을 유지하는 현명함을 얻을 수 있었다. 그냥 큰 고민 없이 평범한 법률가로서의 역할로 살아갔었을 내가 혁신을 증명하기 위해 작지만 또 하나의 진지한 삶을 경쾌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레식 교수의 이야기는 언제나 명확하다. 스티브 잡스의 키노트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그의 강연에서도 그랬고, 개인적인 대화에서도 그랬고, 그의 모든 책에서도 늘 그랬다. 그는 결코 애매하거나 어렵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도 깔끔한 비유와 적절한 재구성으로 명쾌하게 전달한다. 언제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그의 논리는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처음에는 그의 이런 명확함이 비상한 머리와 풍부한 지식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진정성과 끊임없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진정성은 그 어느 논리보다도 설득력 있고 명확하다. 놀라운 통찰은 문득 얻어진 것 같지만 끊임없는 고심이 가져온 선물이다. 이 두 가지는 모든 지식을 뛰어넘으며 어떤 학습 과정보다 우수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동안 자유와 공유재를 바탕으로 문화적, 산업적으로 놀라운 혁신을 만들어 나가는 진정한 혁신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통찰을 확인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겨우 20대 중반을 갓 넘긴 매력적인 프랑스 청년 실뱅 짐머(Sylvain Zimmer)가 2004년에 만든 음악 유통 사이트인 자멘도(jamendo.com)는 보유하고 있는 31만 곡이 넘는 멋진 음악들을 누구든지 무상으로 자유롭게 감상하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도록 CCL을 적용하고 있다. 그 대신 인디 뮤지션들에게 자신들의 음악을 알리고 팬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한편 호텔이나 매장의 배경 음악, 영화의 삽입곡 등 영리 이용은 따로 대가를 받고 라이선스를 주고 그 수입을 뮤지션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심지어는 누구나 남이 편집한 내용을 고칠 수 있는 극단의 자유가 기존의 유명 백과사전을 밀어내고 세계 최고의 온라인 백과사전을 만들어 낸 위키피디아(wikipedia.org)의 기적과 같은 성공 사례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다. 위키피디아를 만들어 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여를 공유재로 남기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서로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혁신가들임이 틀림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많은 디자이너들의 다양한 일러스트와 디지털 콘텐츠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신 이를 이용한 실물 제품의 판매나 개별 프로젝트를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는 일본의 로프트워크, 모든 기사를 자유롭게 복제할 수 있도록 하여 인지도를 높이고 권리를 관리하는 비용을 줄이는 대신 광고 등의 수입을 얻는 온라인 매체인 블로터닷넷(bloter.net), 거의 대부분의 수업 내용과 자료를 공개하여 전 세계 배움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학교 인지도를 올리고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는 MIT의 오픈코스웨어(ocw.mit. edu), 각자 자신들의 악기 연주나 아카펠라를 올리면서 자유로운 복제와 변경을 허용함으로써 끝없는 재창작과 리믹스를 통한 창의성을 주고받는 시시믹스터(ccmixter.org) 등도 그러한 혁신가들이 만들어 낸 공유재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들이 만들어 낸 혁신을 보면서 자유와 공유재에 대한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거센 억압과 무관심에 시달리지만 이들이 꾸준히 만들어 온 혁신은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혁신의 원천이 무엇인지 기억하게 해 준다. 레식 교수도 이 책에서 줄곧 암울한 변화를 계속 이야기하지만 역시 희망을 놓지 않는다. 현 상황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혁신의 구조를 벗어나 또다시 통제의 구조를 수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고 애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책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레식 교수의 말대로 과연 무엇이 최선인지 심각하게 고심해 볼 수 있는 계기기 되기를 바란다. 지적재산권이 중요하다고 해서 더 많이 보호될수록 좋은 것인지, 통제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더 많은 통제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가 미덕처럼 알고 있는 다다익선이 어떤 경우에는 선이 아니라 악이 될 수 있다는 간단한 가정을 고심해 보자. 지적재산권 전문가이든 네트워크 전문가이든, 아니면 그냥 문외한이든 간에 지금 누리고 있는 혁신이 소중하다면, 그 혁신이 어디서 왔는지 진정성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창의성과 혁신은 어마어마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과 혁신은 자유로운 사고와 용기 있는 실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다. 그것이 창의성과 혁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결정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ldquo;아이디어의 미래&rdquo;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p> <p style="text-align: right">윤종수 판사<br /> CC코리아설립자</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프리<sup>Free</sup></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데이비스 구겐하임은 재능 있는 영화감독으로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일부는 상업적인 작품이고 일부는 비영리 목적의 영화다. 특히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다큐멘터리에 대한 열정이 강하다.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첫해<sup>The First Year</sup>」다. 공립학교 교사들의 부임 첫 해를 다뤘다. 다시 말해 공립 교육의 「후프 드림스」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감독은 반드시 &lsquo;저작권 해결&rsquo;을 해야 한다. 저작권이 유효한 소설을 영화로 만들려면 저작권 소유자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오프닝 크레딧(영화가 시작할 때 제목과 제작진의 이름을 나열하는 부분)에 노래를 삽입하려면 그 노래를 만든 작곡가나 가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일들은 저작권법에 따라 창의적인 과정에 부과되는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제한이다. 그런 제도가 없으면 구겐하임 같은 감독의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영화에 우연히 등장하는 소품들은 어떨까? 영화 속 한 장면에 나오는 기숙사 방 벽에 붙은 포스터, &lsquo;담배 피우는 남자&rsquo;가 들고 있는 코카콜라 캔, 배경의 트럭에 그려진 광고 등도 역시 창작물이다. 이런 것들을 영화에 등장시킬 때도 허가를 받아야 할까? 구겐하임은 &ldquo;10년 전만 해도 우연히 삽입되는 창작물의 경우 일반인들이 알아볼 때만&rdquo; 저작권이 문제가 됐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ldquo;이제는 어떤 창작물이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알아보면 사용 허가를 받고 저작권을 구입해야 한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이나 가구, 조각품을 영화에 사용하기 전에 저작권부터 해결해야 한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구겐하임은 이렇게 표현한다. &ldquo;영화를 찍기 전에 사용할 모든 소품의 목록을 만들어 변호사에게 보내는 직원 여럿을 고용해야 한다.&rdquo; 변호사들이 목록을 검토한 뒤 사용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알려 준다. &ldquo;창작물의 원작을 찾지 못하면 사용할 수 없다.&rdquo; 원작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허가가 거부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변호사들이 어떤 소품이 사용 가능한지를 결정한다. 영화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주체가 변호사라는 얘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변호사들이 이런 통제권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통제를 하지 않으면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법 체제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SF영화 「12 몽키즈」는 개봉 28일 만에 법정으로부터 상영 금지 명령을 받았다. 한 예술가가 영화에 나오는 의자 하나가 자신이 디자인한 작품의 스케치와 비슷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배트맨 3: 포에버」도 개봉되지 못할 뻔했다. 배트맨이 모는 차 배트모빌이 한 정원을 통과하는데 그 정원을 원래 설계한 사람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개봉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998년 에는 「데블스 애드버킷」의 개봉이 이틀 지연됐다. 한 조각가가 자기 작품이 배경에 사용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가 빈발하자 변호사들은 자신들이 감독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게 됐다. 그들은 영화 제작사에게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법적인 문제라는 점을 확신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통제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한다. 비용 면에서만이 아니다. 구겐하임은 이렇게 말한다. &ldquo;내 경우는 창의성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hellip;&hellip; 감독으로서 내가 만들어 내려고 했던 세계가 완전히 밋밋해진다. 당연히 들어가야 할 요소들이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hellip;&hellip; 하나의 세계를 구상하고 창작해서 그 세계로 관객들을 데려가는 것이 내 일이다. 제작사가 감독인 내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작품에서 특정 라이프스타일을 즐기고, 거실 벽에 특정 미술품을 걸어 놓고, 특정한 일을 하는 등장인물을 설정한다면 그것들은 내가 표현하려는 비전에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젠 그것을 사용하려면 왜 반드시 넣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을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건 잘못된 일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영화 제작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영화감독이 어떤 문제로 골치를 썩이든 간에 그 문제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다만 내가 구겐하임의 사례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이 책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훨씬 더 근본적인 의문, 즉 &ldquo;그처럼 터무니없고 극단적인 규칙이 만들어지는 이유가 뭘까?&rdquo; 하는 문제의 핵심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왜 창작의 과정에 혁신이나 창의성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한 규칙이 끼어들어 발목을 잡아야 하나? 그것은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예술 전체, 예술만이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혁신적인 일 전부에 해당되는 문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법학 교수 제시카 리트먼에 따르면 저작권법은 일반인들이 &ldquo;그런 법이 있을 수 있어? 말도 안 되지.&rdquo;라는 반응을 보일 만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런 법은 실제로 존재하며, 일반인들이 정확히 봤듯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사고방식이 우리를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었을까? 고등교육을 받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변호사가 남자 대학생 동아리 파티에 관한 영화의 배경 장면에 포함되는 포스터 한 장의 사용권을 협의하러 돌아다녀야 하고, 사전촬영 허락을 받지 않은 광고판을 장면에서 삭제하라고 편집자에게 황급히 지시해야 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법률 세계를 만들었길래 잘나가는 영화감독이 감독 지망생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게 됐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열여덟 살 난 감독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ldquo;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하지만&hellip;&hellip;&rdquo; 그런 다음 그에게 자기 영화에 넣을 수 없는 모든 것의 긴 목록을 얘기해 주겠다. 왜 넣을 수 없느냐고? 법적으로 촬영을 허가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가 받으려면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 (자유라고? 자유는 이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서 친구 두 명과 영화를 만드는 건 전적으로 자유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 시대는 논란이 되는 아이디어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아이디어에 의해 규정된다. 한 시대의 특징은 아무런 변론이 필요 없는 확실한 것에 따라 결정된다. 권력은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다시 말해 정신 나간 사람만이 의심하는 아이디어에서 나온다. &lsquo;당연시 되는 것&rsquo;을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이면 정신이 온전하다고들 말한다. &ldquo;모두가 아는 것&rdquo;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 때문에 때로는 사회가 잘 굴러가지 않고 정지하게 된다. 의문을 갖고 따지는 데 드는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런 시비가 없는 아이디어가 그대로 수용되지만 그것이 사회의 역동성에 제동을 건다. 이런 시대에는 모두가 진실로 믿는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의심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의 우리 시대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수세대 만에 가장 중요한 기술 혁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기술, 그에 따른 문화 혁명은 현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혁신을 자극한다. 그런데도 이런 번영(다시 말해 &lsquo;자산&rsquo;)의 핵심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우리를 헛갈리게 만든다. 이 혼동으로 우리는 그 환경을 바꾸게 된다. 그러면 번영 자체가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번영을 이끄는 힘이 무엇인지 안다고 믿고, 실제 번영의 성격을 무시한 채 인터넷 혁명의 규칙을 바꾼다. 이런 변화는 결국 혁명의 종말을 부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주장은 이처럼 얇은 책에 담기에는 너무 큰 담론일지 모른다. 따라서 독자들이 이 책을 계속 읽도록 하기 위해 좀 더 간명하게 요지를 설명해 보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lsquo;인터넷&rsquo;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아니다. &lsquo;인터넷&rsquo;은 그 성격이 바뀔지언정 영구히 우리 곁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또 앞에서 말한 혁명의 종말을 내가 입증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변수가 너무 많을뿐더러 아직 끝나지 않은 일도 너무 많고, 설득력 있는 예측을 하는 데 필요한 쓸 만한 데이터가 너무도 적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우리 문화의 맹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해악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인터넷 혁명과 이 혁명이 이끌어 내는 창의성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부분의 역할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심지어 누구의 손에 의해 제거되더라도 알아채지 못한다. 그 효과가 얼마나 큰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종말을 경계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맹점은 혁신의 환경을 해친다. 인터넷 기업가들의 혁신만이 아니라, 더 넓게는 저자와 예술가의 혁신도 포함된다. (하지만 인터넷 기업이 내가 의도하는 바의 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 맹점은 인터넷 자체에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능력을 해치게 된다. 이런 잠재력은 원래의 인터넷에서는 실현됐지만 그 인터넷 자체가 변하면서 점점 약해져 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변화를 막으려는 싸움은 좌파와 우파 간, 또는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전통적인 투쟁이 아니다. &lsquo;자산 &rsquo;의 범위에 관한 규정에 의문을 갖는 것은 자산 그 자체에 의문을 갖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나는 열렬한 시장주의자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의 합당한 범위 안에만 국한된다. 나는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자산이 수행하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역할을 의심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상업성과 비상업성 간의 갈등에 관한 글이 아니다. 내가 옹호하는 혁신은 상업과 비상업 부문 전부에 공히 적용된다. 그 혁신을 옹호하기 위해 내가 끌어다 대는 논지는 좌파만큼이나 우파와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문제가 되는 진정한 투쟁은 옛것과 새것의 싸움이다. 이 책은 애초에 새것을 위해 만들어진 환경이 옛것을 보호하는 환경으로 둔갑하고 있다는 데 대한 비판이다. 법원, 의회, 그리고 원래의 인터넷을 만든 바로 그 프로그래머들이 그런 둔갑을 앞장서서 지휘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옛것과 새것의 싸움. 결코 새로운 투쟁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혁신은 옛 체제에서 번창을 구가한 모든 이들의 적이다. 새 체제에서 번창할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겨우 미지근한 지지만 받을 뿐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두려움 때문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경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것을 신뢰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금도 마찬가지다. 옛 체제에서 번창한 사람들은 인터넷이 두려운 존재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대처할까? 이 책은 바로 이 문제를 짚는다. 새 체제에서 번성을 구가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 새 체제를 앞장서서 옹호하지 않는다. 이 책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분연히 일어설 의도가 있는지 묻는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결코 일어설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b>&middot;&middot;&middot;</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미래가 놓여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갈 수 있었지만 외면해 온 길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묘사하기가 쉽다. 인터넷에다가 최첨단 TV를 섞은 뒤 간단한 쇼핑 방법을 추가하는 것으로 대충 설명할 수 있다. 현재와 별 다름 없는 미래다. 아메리칸온라인<sup>AOL</sup>이 바로 그런 미래를 꿈꾼다. 아직은 AOL의 시각을 수용할 수 없지만 타임워너의 AOL 합병을 보는 가장 냉소적인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사용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규모 네트워크를 콘텐츠에 대한 거의 완벽한 통제를 보장하는 체제로 만드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콘텐츠는 절대 다수에게 동시에 &lsquo;뿌려지지&rsquo; 않는다.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사용자를 정확히 겨냥하는 광고로 포장돼 제공된다. 그러나 그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일방통행일 뿐이다. 반응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창의성을 불어넣는 자유는 지금처럼 제한될 게 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속박은 지금 존재하는 경제에 가해지는 제한이 아니다. 제조나 유통에 막대한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제한은 법이 만들어 내는 불필요한 부담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지적재산권과 그 외에 정부가 보장하는 특권을 말한다. 초기 인터넷이 규정한 &lsquo;다수 대 다수&rsquo;의 소통에 대한 보장은 쇼핑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수단, 제공되는 것 가운데 선택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수단으로 대체된다. 거기서 제공되는 것은 현재의 집중화된 유통 시스템에 맞아 떨어진다. 쉽게 장악되고, 쉽게 영향을 받고, 쉽게 호객 행위에 넘어가는 대중을 중독시키는 초고속 케이블 TV를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가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은 미래는 그려 내기가 훨씬 어렵다. 그 이유는 인터넷의 전제 자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터넷의 최초 프로토콜을 만든 설계자들은 조부모가 손자와 대화하는 데 컴퓨터를 사용하는 세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들은 어떤 노래든 30초 내로 내려받을 수 있는 기술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월드와이드웹<sup>WWW</sup>은 매사추세츠 공대<sup>MIT</sup>에서 연구하던 몇몇 컴퓨터 과학자들의 꿈나라였다. 지금은 미국 서부 워싱턴 주에 있는 내 컴퓨터가 나의 책 구입을 추적해 내가 좋아할 만한 작가를 추천해 준다. 이렇게 인터넷이 고객의 취향까지 추정해 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런 미래에도 우리가 상당히 현실성 있게 그릴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 요소들은 비용이 더욱 낮아져 창의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무너진 결과의 산물이다. 가장 큰 변화는 유통 비용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제작 비용의 변화 역시 중요하다. 제작과 유통의 비용 둘 다의 변화는 디지털화의 산물이다.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기술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현실을 만들어 내고 복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변화는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창작 분야부터 보자. 특히 법이 창의성을 &lsquo;저작권&rsquo;으로 규제하려고 시도하기 오래전의 오프라인부터 시작해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헌법이 처음 제정되던 시절에는 기본적으로 창의성이 규제되지 않았다. 11장에서 논하듯이 저작권법은 사실상 출판업자들에게만 적용됐다. 그 범위도 지도, 도표, 책에 국한됐다. 뒤집어 말하자면 창의적 삶의 다른 부분은 전부 무료였다. 음악은 변호사의 승인 없이도 대중 앞에서 연주될 수 있었다. 소설이 저작권 등록을 했더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희곡화할 수 있었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각색될 수도 있었다. 창의적 행위 자체가 무엇인가를 취해서 조금씩 조금씩 새로운 것으로 수정해 나가는 행위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공공재<sup>public domain</sup>는 폭도 넓고 깊이도 깊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작품도 바로 그 즈음 영국 출판사의 지배를 벗어났다.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작품의 저작권이 미국에서는 보호받을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창의적 행위에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사회 규범 때문에 그런 창조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성별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주어지지는 않았던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정신은 &lsquo;이야기하기&rsquo;였다. 사회는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의해 규정됐다. 누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결정하는 데 있어서 법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유복해서 글을 깨친 늙은이는 책을 통해 트리폴리 만에서 해적과의 싸움에 대해 안다. 그 노인은 마을 광장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다. 현지 극단이 술집에서 손님들을 위해 그 싸움을 극화한다. 인기가 높아지면 그 극단은 다음 마을로 자리를 옮겨 다시 공연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고 그 당시가 지금보다 &lsquo;훨씬 더 창의적이었다.&rsquo;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양도 질도 아니다. &lsquo;전성기&rsquo;를 상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창의적 행위에 가해지는 제한의 성격에 관한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 과거에는 기술적인 제한이 분명히 있었고 그런 제한이 중요했다. 그러나 특정 주제에 관해 가해지는 제한을 제외하면 법률은 누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취해 개작하는 데 대해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다. 이런 창조적 행위는 자유로웠다. 적어도 법의 지배는 받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1990년대 말로 가 보자. 그 당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은 어땠나? 디지털 기술은 작품 창작에 드는 비용을 크게 줄였다. 영화 제작 비용은 10년 전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음악이나 다른 디지털 예술의 제작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생이 음악 시간에 &lsquo;음악 처리 장치&rsquo;를 이용해 교향곡을 작곡해 그것을 곧바로 들을 수 있었다. 그 10년 전 그 비용이 얼마였을지 상상해 보라. 작곡 기법을 교육하고 재생 장치를 구입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었다. 디지털도구는 새로운 무엇을 창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의 지평을 크게 넓혀 주었다. &lsquo;완전히 새로운 것&rsquo;이 가능할 때만 그것을 창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애플 컴퓨터가 &lsquo;소비자&rsquo;에게 단지 소비만 하지 말고 더 많은 일을 해보라고 촉구하는 광고를 자세히 들여다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내려받아라, 섞어라, 구워라.<sup>Pip, mix, burn,</sup><br /> 애플이 말한다.<sup>Apple instructs.</sup><br /> 어차피 그건 당신의 음악이니까.<sup>After all, it&rsquo;s your music.</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50" height="1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6_%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20%EB%AF%B8%EB%9E%98/%EC%A3%BC%EC%84%9D1.jpg" />물론 애플은 컴퓨터를 팔려고 그런 광고를 냈다.<sup><b>1</b></sup> 하지만 그 광고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깊이 흐르는 이상적인 정신을 건드린다. 애플이 판매하는 기술(물론 다른 회사도 판다.)은 인류 사회의 시초부터 수많은 세대를 거치며 해 온 것을 우리 세대가 우리 문화로 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에서 어떤 것을 선택한 뒤 &lsquo;내려받고&rsquo;<sup>베낀다는 뜻</sup>, &lsquo;섞고&rsquo;<sup>원하는 대로 고치라는 뜻</sup>, &lsquo;굽는&rsquo;<sup>다른 사람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는 뜻</sup> 행위를 말한다. 이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하다. 디지털 기술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창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보통 사람들이 음악의 &lsquo;소비&rsquo;<sup>수동적으로 듣기만 한다는 뜻</sup>에서 단독으로, 또 집단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데 참여하는 삶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음악만이 아니라 영화, 예술, 상업 행위도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이 능력은 디지털 기술이 나오기 전부터 있었다. 랩 음악은 다른 사람의 음악을 &lsquo;차용해&rsquo;<sup>음악 중 일부를 추려서 베낀다는 뜻</sup> 거기다가 가사나 다른 음악을 &lsquo;섞고&rsquo;, 그렇게 만든 음악을 음반이나 테이프로 &lsquo;구워&rsquo; 다른 사람들에게 파는 형태였다. 재즈도 한 세대 전에는 마찬가지였다. 음악만 그런 게 아니지만 특히 음악은 늘 이전의 것을 기초로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런 창의성을 문화와 경제의 광범위한 부분으로 확장할 잠재력을 확보했다. 기술은 한 세대 전체에게 무엇인가를 창조할 수 있게 해 주고, 그 창의성을 인터넷의 하부 구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해 준다. 개작한 영화, 새로운 형태의 음악, 디지털 예술,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하기와 글짓기, 그리고 시, 비평, 정치적 행동주의가 거기서 생산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예술을 통해 자유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사실 예술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묘사하는 미래는 창의성의 어떤 다른 영역만큼이나 경제에도 중요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혁신이 창의성과는 다르고, 창의성이 경제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인터넷 네트워크는 창의성의 모든 형태를 가능케 해 준다. 자유로운 문화의 미래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경제적 혁신의 모든 영역에 열려 있게 해 주고, 이런 창의성을 가로막는 벽을 가능한 한 낮게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이미 이런 잠재력을 보고 있다. 수많은 기업들이 인터넷의 개방되고 중립적인 기반을 이용해 개인이 상호 교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이메일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지금 상호 접촉을 유지해 주는 메시지 대부분은 개인이나 그룹간의 실시간 대화다. 배우자들이나 친구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하며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해 항시 연락할 수 있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라도 토론할 수 있는 그룹이 쉽게 만들어진다. 이제는 상호 교류의 가장 큰 장애물은 서로 동시에 소통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제는 그 조건마저 제거됨으로써 공공 토론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당신들이 지금 하는 토론에 나는 오늘 밤에 내 의견을 달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그 다음 날에 참여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기술은 점점 더 진보한다. 수많은 사람이 이 인터넷의 공유 기반을 이용해 더 나은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 여기서 거액의 비용이 낭비될 수도 있지만 진정으로 뛰어난 몇몇 혁신이 이런 실험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어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엄마가 자기 손목시계를 건드리면 아들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가 엄마의 손길처럼 아들의 손목을 부드럽게 눌러 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 함께 음악을 들으며 곡과 곡 사이에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 두 사람이 지금 당장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알려 주는 기술, 지역 사회가 가상으로 구성된 배심의 심의를 통해 당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기술도 개발될 수 있다. 사실 이런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그 잠재력은 무한하다. 그리고 기술이 인간성을 망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기술의 잠재력은 우리의 삶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어 주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50" height="47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6_%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20%EB%AF%B8%EB%9E%98/%EC%A3%BC%EC%84%9D2.jpg" />그러나 누구나 &lsquo;내려받고, 섞고, 구울&rsquo; 수 있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그에 대항하는 운동도 맹렬한 기세로 일어나고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 애플의 &lsquo;내려받아라, 섞어라, 구워라&rsquo;라는 슬로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을지 모른다. 그러나 콘텐츠 산업에 종사하는 변호사들에게 그것은 대역죄에 해당한다. 저작권법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들에게는 &lsquo;나의 CD&rsquo;에 담긴 음악은 바로 &lsquo;나의 음악&rsquo;이라는 생각 자체가 터무니없다. &ldquo;라이선스 문안을 읽어 보라.&rdquo;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sup><b>2</b></sup> &ldquo;법전을 읽어 보라.&rdquo;고 그들은 강조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디오에서 듣든 CD를 사든 대형 식당에서 그 노래를 듣는 데 추가 요금을 지불하든, 그 노래가 주제곡으로 나오는 영화 입장권을 사든 간에 그런 음악은 &lsquo;나의 음악&rsquo;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주변에 만연한 문화다. 내려받거나 섞거나, 특히 구울 &lsquo;권한&rsquo;은 없다. 변호사들은 그런 행위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면 얻을 수도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업계의 관대한 허가를 나의 권리로 혼동해선 안 된다. 변호사들은 우리 문화의 이런 부분은 소수의 소유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저작권법은 그런 권한을 만들어 낼 의도가 결코 아니었지만 결국은 저작권법이 그렇게 만들어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갈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증거가 애플이다. 음악을 &lsquo;내려받고, 섞고, 굽는&rsquo; 용도로 애플이 파는 바로 그 기계가 일반 사용자들이 할리우드 영화를 &lsquo;내려받고, 섞고, 굽는&rsquo; 행위가 불가능하도록 프로그램화돼 있기 때문이다. 디즈니 영화를 &lsquo;내려받고, 섞고, 구으려&rsquo; 하면 콘텐츠가 베껴지는 게 아니라 컴퓨터가 망가진다. 소프트웨어, 다시 말해 코드가 이 콘텐츠를 보호하고, 애플 컴퓨터가 이 코드를 보호한다. 음악은 나의 것일지 몰라도 영화는 내가 소유할 수 없다. 영화는 제작사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베끼고 섞고 구울 수 있다. 그런 권한과 그 권한을 뒷받침하는 법이 창의성을 억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싸움은 훨씬 넓은 전투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영화를 관장하는 저작권법이 서서히 모든 종류의 콘텐츠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변화는 창의성의 모든 면에 영향을 준다. 상업적인 활동뿐 아니라 비상업적 활동, 예술뿐 아니라 과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과 영화만이 아니라 경제 성장과 일자리에도 파장이 미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우리 미래의 큰 부분을 좌우하게 된다. 사람들은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늘 &lsquo;자유롭다&rsquo;라고 말하겠지만 그 &lsquo;자유&rsquo;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지금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하나의 이상에 관한 투쟁이다. 어떤 규칙이 혁신의 자유에 적용돼야 하느냐는 문제다. 나는 그것을 &lsquo;도덕적 문제&rsquo;라고 부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너무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인상을 줄지 모른다. 어쩌면 정치적 문제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일상적인 정치의 부조리에 권태를 느끼고 무시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정치적 문제라고 하면 별로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차라리 이것을 헌법상의 문제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에 관한 문제며, 이런 가치가 달라지도록 허용할지 말지 여부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과연 자유로운 사회가 될 것인가? 그리고 자유로운 사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질문에 답하려면 그 질문을 적합한 맥락에 놓고 고찰해야 한다. 음악이나 혁신 같은 특정 부문의 갈등에서 한 발 물러나 더욱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자원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 모호하고 개괄적인 의미에서 자원이 어떻게 관리되는가? 누가 어떤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고 누가 정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사회에는 자유로운 자원이 있고 통제받는 자원이 있다. 자유로운 자원은 누구나 취할 수 있다. 통제받는 자원은 사용하기 전에 누군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자유 자원이다.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취해 사용할 수 있다. 뉴저지 주 프린스턴 머서 가 112번지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마지막 집은 통제 자원이다.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면 프린스턴 고등연구소<sup>Institute for Advanced Study</sup>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수세기 동안 가장 격렬한 정치적 논쟁은 &lsquo;자원 관리에 어떤 시스템이 가장 효과적이냐?&rsquo;를 두고 벌어졌다. 국가일까, 시장일까? 냉전은 바로 이런 싸움이었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동방은 정부가 자원을 할당하고 규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시장을 채택한 서방은 시장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다시 말해 국가와 시장의 투쟁이었다. 결국 &lsquo;어떤 시스템이 가장 효과적이냐?&rsquo;가 문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싸움은 끝났다. 대부분의 경우는 시장이 승리했다. 물론 예외도 있고 반대자도 여전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20세기를 거치면서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은 바로 국가보다 민간 관리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언제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는 정부보다 시장이 낫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널드 코즈가 말했듯이 시장에 어떤 부정적인 문제가 있든 간에 정부의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세기다. 따라서 질문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lsquo;정부나 시장 중 어떤 시스템이 독점적인 권한을 갖고 주어진 자원을 관리해야 하느냐?&rsquo;가 아니다. &lsquo;시장이냐, 국가냐?&rsquo;가 아니라 &lsquo;어떤 자원이든 그 자원이 통제되어야 하느냐,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느냐?&rsquo;가 우리가 당면한 문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50" height="24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6_%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20%EB%AF%B8%EB%9E%98/%EC%A3%BC%EC%84%9D3.jpg" />우리 문화는 통제와 관리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어떤 자원이 &lsquo;자유롭다<sup>free</sup>&rsquo;고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즉시 가격이 무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lsquo;free&rsquo;는 훨씬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프리 소프트웨어 재단<sup>FSF</sup>의 설립자로 현시대의 철학자인 리처드 스톨먼은 &ldquo;공짜 맥주라는 뜻에서의 &lsquo;free&rsquo;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에서 말하는 &lsquo;free&rsquo;를 뜻한다.&rdquo;고 말했다.<sup><b>3</b></sup> 하나의 자원이 &lsquo;free&rsquo;라면 &lsquo;누구로부터도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이 사용할 수 있을 때&rsquo; 또는 &lsquo;필요한 허가가 공평하게 주어질 때&rsquo;를 말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우리 세대에 던져진 질문은 시장과 국가 중 어느 쪽이 자원을 관리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원이 자유로워야 하느냐는 것이 돼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새로운 질문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질문을 무시하도록 세뇌당해 왔을 뿐이다. 자유 자원은 항상 혁신, 창의성, 민주주의의 중심이 돼 왔다. 도로는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자유 자원이며, 그 주변에 자리 잡은 공장이나 회사들에 부가가치를 부여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도 내가 말하는 의미에서 자유 자원으로, 뉴욕 시의 가치를 높여 준다. 재즈 음악가는 인기 있는 노래의 코드 배열을 자유롭게 차용해 새로운 증흑곡을 만든다. 그 곡이 인기를 얻으면 다른 사람들이 또 사용하게 된다.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하는 과학자들은 케플러와 뉴튼이 개발했고 아인슈타인이 수정한 상대성 이론을 자유롭게 활용한다. 발명가 미치 케이퍼는 비지칼크<sup>VisiCalc</sup>라는 스프레드시트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IBM PC를 위한 첫 킬러 애플리케이션<sup>killer application</sup>(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제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완전히 재편할 정 도로 인기를 누리는 상품이나 서비스)인 로터스 1-2-3을 개발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정부든 개인이든 다른 누군가의 독점적 통제권 밖에 있는 자원의 가용성이 과학과 예술의 발전에 초석이 됐다. 앞으로도 발전의 핵심이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우리의 집단 사고방식의 근저에는 자유 자원이 열등하다는 직감이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사용에 제한이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다. 또 그라우초 막스미국 코미디언 영화배우가 말했듯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우리가 원해서는 안 된다는 그릇된 생각이다. 예일 대학교 교수 캐럴 로즈는 이렇게 말했다. &ldquo;대개 사람들은 우리 세계가 가장 잘 관리되려면 세계 전체가 개인 소유자에게 분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rdquo; 따라서 세계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빨리 모든 자원을 개인 소유자들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로 이것이 내가 서두에서 말한 바로 그 &lsquo;당연시 되는&rsquo; 아이디어다. 통제가 좋은 것이며, 따라서 더 많은 통제가 더 낫다는 발상이다. 또 자원을 개인 소유자들에게 분배해야 발전이 이뤄진다는 생각이다. 더 많이 분배할 수록 우리의 미래는 더욱 번창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예외이거나 불완전하며, 이타주의나 부주의, 또는 공산주의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자유 자원은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컨대 소련은 표현의 자유도, 공짜 맥주의 나라도 아니었다. 내가 말하는 자유 자원은 이타주의의 산물도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lsquo;공짜&rsquo;도 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늘에서 떨어지는 횡재란 없다는 얘기다. 자원을 생산하려면 돈을 들여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자원이 어떻게 생산되느냐는 그 자원에 대한 사용권이 어떻게 부여되느냐와는 상관이 없다. 생산은 소비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대다수 상품의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규칙이 &lsquo;가지려면 돈을 내라.&rsquo;는 방식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자원도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디오에서 듣는 음악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그 음악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소비한다. 우리가 차를 타고 가는 도로는 어떤가? 비록 통행료를 내지만 그 돈은 도로 사용료와는 무관하다. 또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들을 때는 연구를 담당한 학자에게 한 푼도 지불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 역시 자원이다. 생산하려면 돈이 드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자원에 대한 사용을 편의점에서 껌을 구입하는 것과는 달리 취급한다. 이런 자원을 사용하는 데는 선불을 할 필요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때로는 후불도 필요 없이 완전히 무료다. 반드시 요금을 지불해야 할 때도 가격이 공평하거나 사용자와는 무관하게 책정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껌 구입은 완벽하게 통제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도로, 역사, 그리고 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합리적으로 &lsquo;자유로워야&rsquo;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논지는 언제 어디서나 혁신과 창의성에는 자유 자원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자유 자원이 없으면 창의성은 죽고 만다. 따라서 특히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는 핵심 질문이 &lsquo;자원을 통제하는 주체가 정부냐, 시장이냐?&rsquo;가 아니라 &lsquo;자원이 과연 통제가 돼야 하느냐?&rsquo;는 것이 돼야 마땅하다. 통제가 가능하다고 해서 반드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정당화의 책임이 통제 시스템을 방어하려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50" height="4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6_%EC%95%84%EC%9D%B4%EB%94%94%EC%96%B4%EC%9D%98%20%EB%AF%B8%EB%9E%98/%EC%A3%BC%EC%84%9D4.jpg" />이런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간단한 해법은 없다.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많은 경우 자원이 생산되고 지속되려면 통제가 돼야 한다. 내 집과 내 차의 사용은 내가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은 내 책상을 마음대로 뒤질 수 없다. 마이크로소프트는 &lsquo;소스 코드<sup>source code</sup>&rsquo;<sup><b>4</b></sup>의 사용을 제한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할리우드는 영화 관람료를 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런 자산이나 &lsquo;내 것&rsquo;이라고 불리는 자원 사용에 대해 통제권이 없다면 &lsquo;내 것&rsquo;을 포함해 이런 자원들을 생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사용이 자유로워야 할 자원도 많다. 정부를 비판할 권리는 통제될 수 없고, 통제돼서도 안 되는 자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새로 확보한 데이터로 검증하는 데 아인슈타인 유산 관리 단체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자원은 통제되기보다는 자유롭게 놔둬야 가치가 생긴다. 성숙한 사회는 그런 자원을 공적, 사적 통제를 받지 않도록 보호함으로써 그 가치를 실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이 교훈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런 학습의 좋은 기회가 인터넷이다. 인터넷만큼 자유 자원이 혁신과 창의성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없다. 혁신이 일어나려면 통제가 필요하며, 통제가 많을수록 혁신도 많아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간단하고 직접적인 반론을 제공하는 것이 인터넷이다. 이 책에서 내가 보여 주듯이 인터넷의 본질은 자원을 자유롭게 놔둔다는 것이다. 인터넷은 세계 대부분에 자유의 힘을 가장 잘 보여 주고 있다. 그 혜택이 보존되도록 하려면 우리는 그 교훈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인터넷이 자유의 위대한 가치를 우리에게 다시 가르쳐 주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인터넷은 그 자유를 도로 빼앗아가는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 자유 자원이 만들어 내는 힘을 이제 우리가 겨우 인지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인터넷의 구조에서 일어나는 법적, 기술적 변화가 오히려 그 힘을 빼앗아 가고 있다. 통제를 지지하는 편견과, 통제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제도가 인터넷의 구조 변화를 승인하고 있다. 그 변화는 통제를 재확립해서 인터넷과 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변화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독자 여러분을 설득하기에는 나 자신이 역부족이다. 그래서 목표를 훨씬 낮게 잡았다. 단지 어느 정도의 통제는 늘 바람직하다는, 이 &lsquo;당연시 돼 버린&rsquo; 아이디어의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게 내 목표다. 나는 여러분이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서 통제가 최선인지 아닌지 고심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입증할 데이터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입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그 역사를 세 단계로 나눠 보여 주고자 한다. 1부에서는 내가 말하는 &lsquo;자유&rsquo;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그 개념을 &lsquo;공유재&rsquo;와 결부시킨 뒤 인터넷의 자원이 공유되는 세 가지 맥락을 소개하겠다. 이 공유재는 인터넷이 창출하는 혁신과 깊이 연관돼 있다. 어떻게 연관돼 있는지 보여주는 게 내 목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에서는 &lsquo;현실 공간&rsquo;에서 나타나는 혁신과 창의성의 환경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 공간은 인터넷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고는 있지만 직접 인터넷과 연결돼 있지는 않다. 바로 그 공간에서 우리는 음반을 만들고, 책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 이 공간은 인터넷 같은 공유재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현실 공간에서 이뤄지는 생산은 인터넷처럼 &lsquo;자유&rsquo;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감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창의성에는 제한이 필수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창의성의 이런 맥락도 인터넷에 의해 달라지고 있다. 2부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예를 제시하겠다. 이 예들은 현실 공간의 창의성에 가해지는 제한 중 많은 부분이 인터넷의 원래 법적 구조에 의해 제거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제한은 과거에는 정당화됐을지 몰라도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통하지 않았다. 마지막 3부의 논지는 인터넷의 환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자유로운 창의성의 환경을 처음 만들어 낸 법적, 기술적 구조의 특징들이 지금 와서 변하고 있다. 그 특징들은 인터넷이 애초에 제거한 바로 그 장벽을 다시 쌓아 간다. 그러나 이 장벽은 현실 공간의 경제에서와 달리 정당성을 갖지 못한다. 제한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기 때문에 생겼을 뿐이다. 내가 앞으로 논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제한을 다시 만들려고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힘이 막강한 기성 이익집단들은 이런 제한을 이용해 인터넷이 촉발하는 경쟁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옛것이 새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인터넷을 뜯어고치고 있다는 얘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들어가는 글,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로런스 레식 Lawrence Lessig</strong><br /> 1961년생 로런스 &lsquo;래리(Larry)' 레식은 법학자이며, 저작권법 확대 금지와 무선주파수 스펙트럼 공유를 주장하는 사회 운동가다. 시카고 로스쿨과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현재 스탠퍼드 대학교 로스쿨 교수이며, 대학 내에 인터넷사회연구소(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을 설립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워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예일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후 대법원과 리처드 포스너 판사 아래서 법조계 경력을 쌓았다. 인터넷 공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법률적 문제들을 고민하기 위해 설립된 &rsquo;전자프론티어재단(EFF)&lsquo; 위원으로 활동했고, &rsquo;크리에이티브 커먼스(CC)&lsquo;를 설립하여 저작권법 개선과 올바른 인식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픈 소스 운동을 전개하여 &rsquo;프리소프트웨어재단(FSF)'에서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았으며, &lsquo;미국과학진흥회(AAAS)' 위원으로도 선정되었다. &rsquo;자유문화(free culture)&lsquo;라는 개념을 전개하며 인터넷 시대 저작권 범위의 확대를 비판하고 스펙트럼 공유재를 주창했다. 전작 『코드: 사이버공간의 법이론』(1999)에서 레식 교수는 인터넷에 대한 컴퓨터 코드들이 현행법 코드처럼 작동하면서 많은 제약이 생길 거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적중하고 있다. 레식 교수는 『아이디어의 미래』에서 저작권과 공익 모두를 위한 대안을 제시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원기</strong><br />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중앙일보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 한국 판 창간 멤버이며, 뉴욕 주재원을 거쳐 현재 편집위원이다. 옮긴 책으로 제러미 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 에릭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 등이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2 오전 10:58:00한정우의 ‘서른, 법과 맞짱뜨다’<img alt="" width="600" height="81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C%84%9C%EB%A5%B8,%EB%B2%95%EA%B3%BC%EB%A7%9E%EC%A7%B1%EB%9C%A8%EB%8B%A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br /> 귀한 후배 &lsquo;서른&rsquo;에게</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른이나 먹었는데 책 표지 넘기자마자 느닷없이 후배 취급을 당한다고 기분 나빠할 사람 없길 바란다. 마흔을 넘고 보니 지나간 서른 때의 추억과 안타까움으로 그대를 서른 때의 소중한 나로 잠시 대하고자 한다. 때문에 칭찬, 형식보단 진심 어린 충고와 실질을 더 우선해서 알려주겠다. &lsquo;나&rsquo;를 보호하는 싸움의 기술, 뭐 이런 거랄까.<br /> 법은 종종 책임, 판단의 기준, 상식으로 비교되기도 하고 심지어 &lsquo;생활&rsquo;이라고도 표현될 정도로 사람과 밀접해 있다. 이런 법이 사람들에게 왜 필요한지, 특히 서른 즈음에 왜 그 기초가 확립되어야 하는지부터 먼저 설명하는 게 내 임무일 것이다. 나한텐 좀 부담스러운 일이다. 첫인상에 잘 보여야 그대에게 선택될 것이고,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렇다고 자극적인 제목이나 프롤로그로 화장발만 살리는 글을 쓰진 않았다. 맨얼굴인 내용이 더 예쁘다. 밝은 데 가져가서 잘 살펴보길 바란다. 귀한 사람과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는 마음으로 썼다고 나름 자부한다. 그동안 쏟아져 나온 많은 법률 실용서들을 봐서 알겠지만 서두가 다 비슷하다. &ldquo;우리는 법을 떠나 살 수 없으므로&hellip;&hellip; 기본적인 법 지식은 알아둘 필요가 있는데&hellip;&hellip; 쉽게 쓴다&hellip;&hellip;.&rdquo; 소재와 내용이 비슷해서 그런지 틀리진 않다. 그런데 그런 식의 상투적 서언을 여기서도 달고 싶지는 않다. <br /> 나는 서른이 막연히 두려워하는 각종 생활법률을 찾아 도장 깨기 하듯 맞짱 한번 떠보려 한다. 앞장은 그대가 선다. 뒷일은 내가 맡는다. 물론 법이란 게 맞짱 떠서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다. 무작정 덤비면 나라도 피똥 싼다. 흥분하고 적대적으로 대하면 무조건 지는 거고, 이기기보다는 서로 페어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하라. 이성을 가지고 상대방과 한번 어울리고 놀아본다는 생각을 하란 말이다. 그래야 맞짱이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법과 친해진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법은 그대 생각보다 그릇이 크다. 코피 터지더라도 웃어주고 어깨동무도 해보라. 영화에서도 봤겠지만 그게 더 멋있다. 더 좋은 건 그 다음부터는 법이 그대를 보호해준다는 점이다. 아주 든든하게.<br /> 법같이 그릇 큰 분들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해야 한다. 이분들의 배려가 없었으면 이 책을 못 썼을 것이다. 오성환, 정영훈, 고경철, 우현욱, 황대오, 그리고 건강한 서른이 되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김태성, 손준호, 신서영, 안준홍, 한정원, 다들 고맙고 감사합니다.&nbsp;</p>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겨울 천안(天安,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에서<br /> 한정우</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Chapter.2 초보 직장인들, 어깨를 펴라!</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퇴직금을<br /> 월급에 포함시켜 지급한다는데</strong></span></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5년차 봉제기술자인 28살 여성 C씨. 3년 전부터 스무 명이 넘는 의류 가공업체에서 정규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등산 인구의 폭발적 증가로 몇 년 전부터 등산복 생산량이 연 90% 이상씩 증가했다. 매년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 생산량에 비해 직원의 추가 채용은 없었고, C씨와 직원들은 자연히 야근과 휴일근무를 밥 먹듯 했다. 하지만 사장은 직원들의 임금을 8%씩만 올려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회사의 늘어난 이익과 제공된 근로에 비하면 약소했지만 직원들은 유례없던 호황이 지속되자 다음에는 적어도 10% 이상의 연봉 인상이 있을 거라 기대하며 참았다. 현재까지 주문받은 것만 따져도 전년 대비 70% 이상의 매출이 증가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발표된 사장의 임금 인상률은 13%. 그러나 거기에 덧붙인 사장의 조건에 직원들은 떡 벌어졌던 입을 금세 닫아야 했다. 입술을 깨무는 직원도 있었지만 아무도 사장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그간의 퇴직금은 중간정산을 하고, 앞으로 월급에 퇴직금을 포함시킨다는데?</strong>&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직원 노동력을 착취하던 사장이 이젠 임금까지 착취하려나 보다. 월급을 조삼모사 식으로 편법 인상한 뒤, 퇴직금마저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퇴직금을 포함하게 되면 연봉이 오르지 않아도 자연히 10% 정도 월급이 많아진다. 그것은 월급의 인상이 아니라 직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퇴직금이다. 사장은 퇴직금과는 별도로 10% 이상의 연봉 인상을 해주어야 할 시점에 불과 3%의 연봉 인상만을 해놓고 13% 급여 인상이라는 생색을 내며 퇴직금까지 회피해볼 요량이다. 조금만 계산해보면 삼척동자도 빤히 보이는 부당함이지만 사장과 대등한 관계에 있지 못한 직원들은 아무도 이의를 못 내민다. 입만 내밀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장한테 이의, 하지 마라. 직원 모두가 단합해서 하는 게 아니면 총대 매지 않아도 된다. 괜히 회사생활 고로와진다. 그냥 사장이 퇴직금 포함해 월급 주도록 놔둬라. 지 손해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사장의 편법, 그거 못된 짓이라서 법원이 인정 안 한다. 퇴직금을 포함한 1년 연봉을 13으로 나누어 매월 지급하는 회사, 많다. 퇴직금도 미리 타고 월급도 많이 필요한 직원들의 편의를 봐주려는 선의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임금 인상률의 물타기나 퇴직금 지급의 회피를 위해 그런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월급에 포함시켜 지급한 퇴직금, 퇴직금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C씨는 퇴직할 때 별도로 퇴직금을 청구할 수 있다. 중간정산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퇴직금은 최종 퇴직 시에 발생하는 금원이기 때문이다. 최종 퇴직 시에야 발생하는 권리를 근로자로 하여금 사전 포기하게 하는 것은 근로기준법에 위배되어 무효라는 법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매월 급여명세표에 &lsquo;퇴직금&rsquo; 명목을 넣어 지급하던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계속적인 근로 중에 받은 금액은 그 명목을 아무리 &lsquo;퇴직금&rsquo;이라 호칭하더라도 퇴직금의 효력을 가질 수 없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퇴직금은 근로기준법에 따라 최종 퇴직 시점에 발생하는 것이고, 근로자가 사전에 포기할 수 없도록 강행규정화되어 있다. 당사자들 간에 사용하는 명목은 중요하지 않다. 법률적 성격과 효과가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치 살아 있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것을 &lsquo;상속&rsquo;이라 세간에서 호칭하더라도 그것을 상속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상속이라는 것은 피상속인이 사망해야 비로소 효과가 발생하는 법적 제도다. 생전에 지급할 수 없는 것이고, 생전에 포기할 수도 없다. 상속과 증여가 각기 다른 성격과 법적 효력을 가지는 것과 같이 퇴직금과 임금은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성격과 법적 효력을 갖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그럼 월급에 포함된 돈은 어떻게 되는 건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존에는 고용주에게 다시 반환할 필요가 없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그런데 이를 악용해 이중으로 퇴직금과 퇴직금 상당의 부당 이익을 추가로 취하려는 근로자가 많아지자 최근 대법관들조차도 사안에 따라 견해와 판단을 달리하고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실질적인 근로관계와 내용이 어떠했는지가 나중에 밝혀지는 경우가 많아 현재로서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만, 쉽고 간단히 말한다면 누구에게 정당성이 결여되었느냐, 불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이냐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C씨의 경우와 같이 월급에 포함된 퇴직금은 사실상 인상받을 것으로 기대되었던 임금이다. 결과적으로 사장의 불순한 의도 하에 직원들의 불이익이 되는 그 돈은 퇴직금이 아닌 근로의 대가로 지급된 임금으로 보아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반대로, &lsquo;실질적인&rsquo; 퇴직금 분할 약정을 했음에도 퇴직 시 별도의 퇴직금을 청구한다면, 고용주가 법률상 원인 없이 근로자에게 퇴직금 명목의 금액을 지급한 것이 된다. 그 금액만큼 고용주는 손해를 입는 것이고 근로자는 이익을 얻은 셈이어서 이 경우에는 고용주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본다. 괜히 근로기준법 좀 안다고 퇴직금을 이중으로 받으려는 꼼수 부리다 소송당하고 나쁜 놈 될 수 있다. 양심적으로 쿨하게 나가라.</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야근과 휴일근무를 밥 먹듯,<br /> 나를 기계로 아나?</strong></span></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터미네이터. 좀 오래된 영화 제목이지만 오랜 기간 시리즈로도 나왔으니 서른의 세대도 잘 알고 있을 캐릭터라 생각된다. 파괴자, 종결자란 의미가 있지만 영화적으로는 주어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몸 바쳐 움직이는 기계의 모습이다.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서른의 근로자 중에는 상당수의 터미네이터가 섞여 있다. 물론 야근과 휴일근무가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회사와 직원의 존립에 있어 필요악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번이 퇴근시간이 늦어지면 기계로 취급당하는 느낌이 들기 마련. 자신의 취미, 성격, 성향, 생활과는 무관하게 회사가 나를 옥죈다는 느낌이 물밀 듯 밀려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슬슬 열 받는 얘기지만 자, 진정하자. 앞서 야근과 휴일근무는 어떤 근로자에게는 필요악인 경우도 있다고 했다. &lsquo;노동과 대가&rsquo;라는 존엄하고도 차원 높은 맞짱 상대와 관련한 논쟁이기도 해 함부로 다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대가가 주어지지 않거나 근로자를 해치는 지속적 야근이나 휴일근무는 매우 부당한 것이다. 근로자의 입장에서 권리 찾기나 권리 실현, 그리고 약간의 &lsquo;피해의식&rsquo;을 무기 삼아 여기서 잠깐 대들어보는 전략을 써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야근과 휴일근무를 밥 먹듯 하고 있지만 그 수당을 못 받고 있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밥은 먹고 다니냐?&rdquo; 영화 &lt;살인의 추억&gt;에 나오는 송강호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늦게까지 일했다면 늦게까지 일한 만큼의 밥은 먹어야 한다. 그래야 영양실조 안 걸린다. 현행법상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이를 초과한 근무는 연장근무로 보고 통상임금에 해당하는 초과수당을 받을 수 있다. 특별히 밤 10시부터 새벽 6시 사이의 야간근로와 휴일의 근로에 대해서는 통상임금의 100분의 50을 가산한 수당을 지급받는다. 사장이 순순히 내놓지 않고 오히려 으름장을 놓으면 회사가 소재한 고용노동부 지청에 진정을 넣는다. 그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벌금 물기 전에 근로자에게 빨리 수당을 지급하라고 고용노동부가 으름장 놔준다.</p> <img alt="" width="600" height="46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C%9D%B4%EB%AF%B8%EC%A7%801_600.jpg" /> <p style="text-align: justify">근로자를 기계 취급하는 사장님들 중 기계한테 밥 안 주는 분들 의외로 많다. 기계가 무슨 놈의 밥이냐며 아주 가끔 기름칠만 해준다. 기계는 돌아가야 하니까. 한국 직장인들의 근로시간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길다. 풍요롭게 살지 못한 시간이 더 많아서인지 모르지만 장시간의 노동을 관행으로 여길 정도다. 그런데 그게 삶의 질을 낮추고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 이젠 사장님들도 알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사장이 야간근무 안 시켰다고 잡아떼는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임금과 관련한 진정을 넣을 때는 시간외 근로를 했다는 출근대장이나 업무일지 등 증명서류를 제출하는 것이 좋다. 소규모 사업장이나 체계가 잡히지 않은 회사여서 그런 서류가 없는 경우라면 함께 야근을 했던 동료의 진술서, 초과근무 사실이 증명되는 업무 성과물 등을 제출한다. 이도 저도 구하기 어려우면 출퇴근 장면이 찍힌 CCTV 동영상이라도 구해 제출한다. 대가를 지급하지 않은 야근과 휴일근무가 지속된다면 근거를 남겨놓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고로, 야근이나 휴일근무 수당 역시 임금채권이므로 3년의 소멸시효가 적용된다. 기간 내에 청구하지 않으면 청구권이 상실될 수도 있다. 오래된 밥, 상해서 먹기 어려운 것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수당은 받지만 너무 벅찬 추가근무가 괴롭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제한할 수 있다. 휴게시간을 제외하고 1주간의 근로시간은 40시간이다. 근로기준법은 이를 초과하는 연장근무를 1주에 12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것도 일방적인 근로 요구가 아닌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한 연장이어야 한다. 만약 이 제한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일을 부려먹으려면 고용노동부 장관의 인가와 근로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인가가 나지 않는다. 사장이 근로시간의 제한사항을 순순히 지키지 않으면 이 역시 회사가 소재한 고용노동부 지청에 진정을 넣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근로시간을 준수한 뒤 가방을 챙겨 그대를 터미네이터로 여기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하고 퇴근한다.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ldquo;I&rsquo;ll be back!&rdquo;</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딴 나라 이야기,<br /> 법정휴가와 최저임금</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법정휴가라 함은 근로기준법상의 휴일을 말한다. 회사의 단체협약 등에서 정하는 약정휴가와는 다르다. 근로기준법상의 기본적 휴일에 더해 기업이나 해당 업종의 기념일, 업무의 특수성 등을 고려해 추가로 협약하기 때문에 보통은 약정휴가가 근로기준법상의 휴가보다 많다. &lsquo;법정휴가&rsquo;, &lsquo;근로기준법상의 휴가&rsquo; 등의 단어는 모두에게 생소하지 않다. 다만, 그것을 누리는 경험에 대해서는 생소한 사람이 더 많다. 아예 그림의 떡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월차 유급휴가는 폐지한다. 회사는 1년간 80% 이상 출근한 직원에게 15일의 연차를 주어야 한다. 계속하여 근로한 기간이 1년 미만인 직원에게 1개월 개근 시 1일의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3년 이상 계속하여 근로한 직원에게는 15일의 유급휴가에 최초 1년을 초과하는 계속근로연수 매 2년에 대하여 1일을 가산한 유급휴가를 주어야 한다. 연차는 25일을 한도로 한다. 회사는 직원이 청구한 시기에 휴가를 주어야 한다. 그 휴가 기간에 대하여서는 취업규칙 등에서 정하는 통상임금 또는 평균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 근로기준법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 기준보다 불리하게 협약하거나 근로 계약을 하면 무효로 처리한다는 강행규정으로 실행되고 있는 현행법이다. 근로자의 권리가 보호되는 방향으로 자주 개정되고 있지만 여전히 괴리감이 느껴지는 딴 나라 이야기, 남의 나라 제도처럼 여기는 사람이 더 많다. 그만큼 공기업, 대기업, 중견 기업 등과 중소기업, 개인사업장 등의 구조적 업무환경의 격차가 극심하다는 얘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저임금제도 마찬가지다. 매년 최저임금을 정하고자 하는 협상은 그 자체가 무척이나 산통을 겪는 일이다. 저임금 근로자의 생계비, 물가인상 전망치 등을 반영해 현실화해야 하는 문제와 더불어, 최저임금을 과도하게 인상하면 영세 기업의 경영난이 가중된다는 진퇴양난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현상은 그만큼 어렵게 결과가 도출되더라도 현장에 적용하는 일 역시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최저임금에 대한 현수막을 전국적으로 내걸고 홈페이지 첫 화면에 고정해 공시하고 있는 등 그 준수를 홍보하고 있지만, 직업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최저임금보다 못한 금액을 받으면서 열악하게 일하고 있다. 산 넘어 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회사가 연차수당을 포함시켜 연봉 계약을 하고서는 연차 사용을 제한하는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간이 배 밖으로 나온 회사다. 직원을 근로에 옥죄기 위해 애당초 연차 사용을 제한하려고 그런 연봉 계약을 체결하는 회사, 많다. 연봉 계약과 연차 사용은 별개의 문제다. 연차를 사용하지 않은 대가가 이미 연봉에 포함되어 있다며 연차 사용을 제한한다면,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연차수당은 연차를 사용하지 않은 시점이나 그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연봉 계약에 미리 포함시켜 연봉으로 이미 지급했더라도 연차수당이라 볼 수 없다. 그대의 연차휴가 사용권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직원이 나 하나뿐이고, 근무 시작할 때 이미 최저임금액보다 낮은 금액의 임금합의서를 작성해주었는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합의서는 무효다. 사장이 그대와 합의(?)해 최저임금액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한다고 정하더라도 최저임금제도라는 강행규정에 위반되는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런 임금은 최저임금액으로 합의된 것으로 간주되어 사장에게 최저임금액을 청구할 수 있다. 최저임금은 1인 이상 근로자를 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된다. 상용근로자뿐만 아니라 임시근로자나 일용근로자, 시간제근로자 등 모든 근로자에게 적용된다. 18세 미만의 연소근로자에게는 취업 기간이 6개월이 될 때까지 시간급 최저 금액의 90%를 지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대가 최저임금을 요구해도 사장이 바위처럼 꿈쩍 않는다면, 여전히 그대를 어리숙하게 보고 있단 얘기다. 사업장 관할 지방노동관서 근로감독과에 신고하는 성숙함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최저임금보다 적은 임금을 지급한 사용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사업하면서 직원 부리기 어려운 사장님들 많다. 회사가 어려워 많은 돈 주기 어려운 거 안다. 하지만 최저임금제도는 다름 아닌 근로자의 최소한의 생계 보호를 위해 정해진 최저임금의 지급을 강제하는 제도다. 이제 우리나라도 최소한의 생계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성숙한 의식이 모두에게 필요한 시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B%8F%84%EB%B9%84%EB%9D%BC_60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Chapter4. 세입자로 살더라도 똑똑하고 당당하게!</strong></span></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color: #8080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담보설정된 집,<br /> 세 얻기 갈등되네</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집주인이 되었든 세입자가 되었든 우리의 재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부동산 자금이다. 또한 집에 대한 소유욕은 우리에겐 강박관념과 같을 정도다. 집의 바닥을 빚더미로 깔더라도 세입자는 소형 아파트의 주인이라도 되길 소망한다. 소형 아파트의 집주인이 된 뒤에는 보다 넓은 집으로 옮기는 꿈을 꾼다. 어쨌든 아껴 모은 전세보증금은 그런 꿈을 실현하는 데 큰 밑천이 되는데 실수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조기에 접는 사람들이 있다. 담보설정이 되어 있는 집에 잘못 세를 들었다가 그 밑천마저 날려버리는 사람들이다. 집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정서와 행복을 위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공간이자 재산이므로 전세나 반전세 거래 시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지역정보지를 통해 직거래를 선호한다. 복비가 안 나가니까.</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신문 광고나 집주인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계약하지 않는 사람, 즉 직거래에 항상 성공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상관없다. 그러나 광고에는 부동산 자체의 결함은 나오지 않는다. 복사 기술이 발달되어 사실과 다르게 고쳐서 다시 복사해 등기부등본을 제시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보여주는 등기부만을 믿으면 안 된다. 직접 등기부등본을 떼 확인하거나 열람하는 것이 좋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등기부를 교부받아 권리와 순위 보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약간은 알더라도 권리 분석이 쉬운 근저당 외에 가등기, 가압류, 가처분 같은 복잡한 권리가 뒤섞여 있는 부동산이라면 복비를 좀 쓰더라도 부동산 공인중개사의 도움을 받기를 권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원하는 새 아파트 단지에는 담보설정 안 된 전셋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담보설정이 되어 있다고 무조건 기피 대상이 되진 않는다. 담보설정이 되어 있더라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음에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안정형 담보설정이 있고, 반대로 리스크형 담보설정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안정형 담보란, 아파트 시세와 담보설정 액수의 차이가 전세보증금보다 훨씬 상회하는 경우다. 이런 아파트는 아파트의 시세가 다소 하락하거나 아파트 경매 시 유찰되는 경우를 대비할 수 있다. 등기부상에 설정된 담보란 일반적으로 근저당권을 말한다. 이 근저당권은 설정 당시의 실제 채무액보다 20% 정도 높여 채권최고액이라는 것을 등기한다. 예를 들어, 은행에서 1억 원의 대출을 받았지만 이를 담보하기 위해 설정하는 근저당권 채권최고액은 1억 2,000만 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설정된 근저당권은 대체로 채무가 모두 변제되는 때에야 말소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채무자가 중간에 일부를 변제했어도 변제내역을 별도로 변경 등기하지 않는 이상 채권최고액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1억 원의 대출을 받은 뒤 얼마 되지 않아 5,000만 원이나 갚았어도 그 변제내역을 등기부에 반영하지 않는 이상 여전히 등기부등본에는 채권최고액이 1억 2,000만 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면 이와 같이 등기부상의 채권최고액과 자신의 실제 채무액은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집주인들이 많다. 이미 대부분의 대출을 갚은 상태이니 전세 들어와도 안전하다는 주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 역시 안정형 담보에 속한다. 그러나 집주인의 말에만 의존하지 말고 은행 등과 같은 근저당권자에게 반드시 확인하자. 채무변제내역 확인서를 교부받아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주인의 말처럼 1억 원의 대출 중 5,000만 원이 이미 변제된 것이라면 등기부상의 근저당권 채권최고액을 5,000만 원 또는 그 금액의 20% 정도 높은 6,000만 원으로 변경 등기할 것을 요구한다. 이렇게 담보설정 금액이 줄어들면 전세보증금 반환의 안정성이 높아진다. 변경 등기하는 일, 어렵지 않고 돈 얼마 안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리스크형 담보란, 아파트 시세와 담보설정 액수의 차이가 전세보증금보다 훨씬 하회하거나 거의 일치하는 경우다. 하회하는 경우는 세입자들이 대부분 기피 대상임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다. 때문에 일치하는 경우를 안정형으로 판단하고 전세 계약을 하는 경우가 더 애매하고 위험하다. 아파트 시세의 하락이나 경매 유찰의 경우를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당장 자신의 전세보증금액만 떨어지면 담보설정된 집이라도 꺼림칙하지 않게 들어가는 것이다. 집이 마음에 쏙 든 경우 특히 그런 실수를 많이 한다. 세계 경기와 국내 부동산 경기의 유동성이 심한 시기이고 경매 시에 한 번 정도의 무효는 기본이므로 아파트 시세와 담보설정 액수의 차이가 전세보증금과 일치한다고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전세보증금을 받으면 근저당권을 말소해주겠다는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조건의 전셋집, 많다. 설정된 근저당권이 꺼림칙해 전세 얻는 일을 고민하면 집주인은 이런 제안을 종종하곤 한다. 그러나 보증금만 챙기고 근저당권 말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분쟁으로 비화되는 사례 역시 많다. 세입자로서는 집주인의 불이행을 탓할 수는 있을지라도 근저당권자에게 그 말소를 요구할 수는 없어 난감한 상황에 이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3자 대면 하에 3자 거래를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세입자와 집주인, 근저당권자가 모두 모여 세입자의 전세보증금을 근저당권자에게 채무 변제금으로 직접 지급하기로 계약하고, 근저당권자 역시 세입자로부터 채권을 변제받는 대신, 즉시 근저당권을 말소해주는 것으로 합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주인이나 근저당권자가 근저당권 말소를 지연하더라도 세입자가 근저당권자를 상대로 직접 근저당권 말소를 구할 청구권이 생긴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향후 딴소리를 예방하기 위해 계약서나 특약으로 구체적이고도 명백하게 써야 한다. 애매한 문구를 사용하진 말자. 가능하다면 3자 본인 외에 대리인의 계약은 기피하고, 계약 현장을 목격할 입회인을 두는 것도 좋다. 근저당권을 말소했다는 집주인이나 근저당권자의 통보만 믿지 말고 등기부등본을 직접 떼서 말소등기가 된 것을 확인해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C%A3%BC%EC%84%9D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집수리 못 해주겠다며<br /> 펄쩍 뛰는 집주인, 이걸 확?!</strong></span></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늦가을에 중랑구의 한 소형 아파트를 반전세 얻어 살고 있는 30살 D씨. 그에게는 12월에 딸을 출산할 예정인 아내가 있다. 신혼 기간 2년 동안 아내와 단칸방 전세에 살았지만 아기가 생기고 아내의 산후조리를 위해 보다 편리한 주거공간이 필요했던 D씨는 다소 무리를 하여 직장 근처의 소형 아파트를 얻은 것이다. 임대를 주로 하는 소형 아파트 단지였다. 방 한 칸과 거실이 이어지는 구조의 소형 아파트였지만 욕실이 붙어 있었고 무엇보다 집주인이 방과 이어진 베란다를 최근 확장해 다른 집에 비해 방이 매우 넓어졌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D씨는 사랑스러운 딸을 안고 그 방에서 뒹굴며 행복해하는 상상을 하며 딸의 출산일인 겨울을 고대했다. 그러나 막상 겨울이 되자 D씨는 방문을 굳게 닫고 막 태어난 자신의 어린 딸과 함께 거실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같은 구조의 다른 임대 물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집주인이 방과 이어진 베란다를 확장한 것이지만, 베란다와 방을 잇는 샷시만을 철거하고 베란다 부분을 메웠을 뿐, 확장된 바닥에는 난방 시설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베란다를 확장하면 단창인 베란다 창을 단열이 되는 이중창으로 교환해야 하는데도 집주인은 돈을 덜 들이기 위해 기존의 얇은 베란다 단창을 그대로 놔두고 간단한 확장공사만 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D씨 집의 방은 그야말로 바람만 불지 않을 뿐, 냉장고 속과 다를 것이 없었다. 도저히 방에 들어가 기거할 수조차 없었다. 집주인에게 수차례 대책 마련을 요구했지만 사람마다 추위를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이라며 봄까지 견뎌보란다. D씨는 아기와 산후조리를 하는 아내를 위해 거실로 들어오는 한기를 막아야 했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일러를 마구 돌렸다. 그랬더니 한 달 도시가스 비용이 30만 원이 넘게 나왔다. 무엇보다도 거실과 방의 기온 차 때문에 거실과 방을 잇는 부분에 결로 현상이 생기고 그 부분의 벽지에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아기와 함께 행복한 겨울을 고대했던 D씨는 아기에게 매우 미안해하며 두 달이나 넘게 남은 봄을 애타게 기다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1월 어느 새벽, 너무 추워 잠에서 깨어났다. 아내도 잠을 설치고 있다. 오늘 새벽 최저 기온은 영하 17도란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여관방에서라도 겨울을 나야겠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계약을 해지한다. 집주인은 집을 세입자에게 임대하고 임대 계약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 D씨의 경우와 같이 당연한 기후조건의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베란다의 부실 확장공사를 하여 주거생활에 안전의 위협을 느낄 정도라면 베란다의 창을 단열 이중창으로 교환하거나 확장된 부분에 난방시설을 하는 등의 수선을 해주어야 하고 D씨는 이를 요구할 수 있다. 집주인이 이에 불응하고 있으니 D씨는 임대 기간이 남아 있더라도 임대차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집주인이 계약해지를 인정하지도 않고 순순히 보증금을 내줄 것 같지 않다. 추운 겨울에 이사를 가기에도 부담스럽다. 베란다 부실공사만 아니라면 이 집이 마음에 드는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단 D씨의 자금으로 베란다 창을 단열 이중창으로 교환한다. 그리고 그 비용을 집주인에게 청구한다. 법적으로 그 청구권, 있다. 임대차 계약에 있어서 집주인은 셋집을 계약 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 셋집에 파손 또는 장해가 생긴 경우 세입자가 별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고칠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것이어서 세입자의 사용, 수익을 방해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집주인은 수선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수선하지 않았을 때 세입자가 계약에 의해 정해진 목적에 따라 사용, 수익할 수 없는 상태로 될 정도의 것이라면 집주인은 수선의무를 부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9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C%9D%B4%EB%AF%B8%EC%A7%802_6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베란다 창을 이중창으로 교환했다. 이제 방에서 기거할 만하다. 하지만 집주인은 임대차 계약서 특약사항에 &ldquo;현 상태의 임대차 계약이며 수선이 필요하게 되면 세입자가 수선하며 사용한다&rdquo;라는 조항이 들어 있다며 책임 없음을 주장한다.</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집주인의 수선의무는 임대차 계약서의 특약에 의해 면제하거나 세입자의 부담으로 돌릴 수 있다. 여러 채의 임대아파트를 운영하는 임대사업자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잔머리는 잘 굴린다. 베란다를 부실로 공사해놓고는 그런 특약을 은근슬쩍 넣어 의무와 비용을 세입자에게 돌리는 악덕 임대사업자들, 많다. 그러나 뛰는 집주인 위에 나는 세입자 있는 법.</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법원은 그러한 특약에서 수선의무의 범위를 구체적이고도 분명히 정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특약에 의해 집주인이 수선의무를 면하거나 세입자가 수선의무를 부담하게 되는 범위는 통상 생길 수 있는 파손의 수선 등 소규모의 수선에 한한다고 제한한다. 대파손의 수리, 건물의 주요 구성 부분에 대한 대수선, 기본적 설비 부분의 교체 등과 같은 대규모의 수선에 대해서는 여전히 집주인이 수선의무를 부담한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약 집주인이 대법원의 입장마저 인정하지 않고 이중창 교환 비용을 순순히 못 주겠다고 하면 D씨는 추운 겨울이 가기 전에 빨리 가압류 신청을 하여 집주인의 거실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고급 카펫부터 압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5_%EC%84%9C%EB%A5%B8,%20%EB%B2%95%EA%B3%BC%20%EB%A7%9E%EC%A7%B1%EB%9C%A8%EB%8B%A4/%EC%A3%BC%EC%84%9D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프롤로그 전문, 2장&middot;4장 일부)<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한정우</strong><br /> 15년 가까이 변호사 사무실과 로펌에서 법률실장으로 근무했다. 소액사건부터 국내 상장기업 M&amp;A 관련 소송에 이르기까지 수천 건의 소송과 각종 상담, 합의, 계약에 관여했다. 한국도로공사 인재개발원에서 민사소송실무 강의를 맡았고, SBS &lt;뉴스추적&gt;에 출연,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대의원회 의장, 선거관리위원직을 맡고 방학 때면 국정감사 대정부 질의에 관해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리걸 마인드, 즉 법률적 감각의 조기 형성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저자는 &ldquo;보다 젊을 때부터 철저한 리걸 마인드를 형성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배우고 익히게 되는 것이 또한 리걸 마인드여서 서른 때의 일시적인 학습보다는 평생학습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rdquo;고 강조한다. 저서로 《변호사가 절대 알려주지 않는 31가지 진실》 《억울한 의료사고, 제대로 대처하는 법》 《세 번만 읽어도 좋은 변호사를 골라 승소하는 법》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1 오전 10:57:00그릴로의 ‘진실을 말하는 광대’<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9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4_%EC%A7%84%EC%8B%A4%EC%9D%84%20%EB%A7%90%ED%95%98%EB%8A%94%20%EA%B4%91%EB%8C%80/%EC%A7%84%EC%8B%A4%EC%9D%84%EB%A7%90%ED%95%98%EB%8A%94%EA%B4%91%EB%8C%80_%ED%91%9C%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전투에서 싸웠다는 것은 꽤 멋진 경험이다. 지든 이기든 시도해보았다는 감각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곁을 스치는 쓰레기 같은 현실을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큼 치욕스러운 삶은 없다. 그 자괴감은 우리 몸 안의 에너지와 영혼을 몽땅 빼앗아 간다. 그리고 점차 녹색으로, 회색으로, 검은색으로, 어두운 현실 속의 미디어처럼 우리 심장을 암흑의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한다. 눈 감은 현실로 말미암은 자괴감은 종종 우리가 누려야 할 뜨거운 삶의 과정들을 건너뛰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TV 뉴스에 덧칠이 시작되면, 그 거대한 무엇인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이웃들에게 총을 겨누게 하고 가족을 분열시키며, 아무 이해 상관도 없는 불특정 대중을 향해 돌을 던지라고 우리를 내부로부터 부추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지경이 되지 않으려면 전투가 필요하다. 전투해야 한다면 당연히 이기는 편이 좋다. 그리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상대의 움직임을 1분, 1초라도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시하고 집중하는 것,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시민의 전투적 자세이자 의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최근 몇 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의 명장 패튼 장군보다 더 많은 전투에서 싸워왔다. 어쩌면 패튼 장군의 전투는 나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다. 그는 오직 동쪽으로 행군하며 나치들만을 상대하면 되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상황은 좀 더 복잡하다. 무수한 적은 엉켜진 실타래처럼 단단히 뭉쳐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고, 현실은 또다시 이것들과 섞여 어느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베페 그릴로<sup>Beppe&nbsp; Grillo</su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변화와 기적의 정치를 갈망하라</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01 국회 청소의 날!</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범죄자인 세자르 프레비티 국방장관은 2007년 7월, 국회로부터 해고당하기 바로 직전에 스스로 사임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부정부패에 탈세까지 저지른 프레비티의 충실한 하수인인 24명의 국회의원이 아직 국회에 남아 있다. 국회 내부의 뇌물 수수자들을 쓸어내기 위한 나의 전투는 2005년 6월 7일부터 시작되었는데 나는 블로그에 이 범죄자들의 이름과 각 죄목에 해당하는 판결을 낱낱이 적어놓았다. 과연 독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델 우트리 상원의원? 기민당DC의 프리제리오 당 서기관? 비토와 스가르비가 범죄자라고? 유죄 판결을 받았었다고? TV 토크쇼에 나와서 아양을 떨어대던 그 기자들도? 물론 투표용지의 후보자 이름 옆에는 당연히 이런 진실들은 쓰여 있지 않다. 단지 그들의 출신 정당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24명의 범법자 중 자그마치 10명이 포르짜 이탈리아<sup>Forza Italia(실비오 베를루스코니에 의해 설립된 진보적 보수주의의 기독교 민주당.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우파 정당)</sup> 출신이다. 투표용지의 이름 옆에 적힌 포르짜 이탈리아라는 표기는 그들 모두가 범법자라는 증거나 매한가지이다. &lsquo;포르짜 이탈리아&rsquo;, 바로 그 빌어먹을 자유의 상징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개혁을 원하는 시민의 서명을 모아 이러한 진실을 유럽연합의 바로조 위원장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에 동참한 시민의 서명은 단 며칠 만에 14,000명에 달하였다. 나는 서명과 함께 숨길 수 없는 진실의 기록을 CD에 담아 바로 바로조에게 보냈고, 직접 그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 밑의 직원을 통하여 매우 의례적인 답변, 언급할 가치도 없는 그저 쓸모없는 종이 나부랭이에 불과한 판에 박힌 대답만을 보내왔을 따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럽연합의 힘을 빌려서라도 이탈리아의 부정부패를 개선해 보고자 했던 내 방법은 실패로 돌아갔다.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국내 일간지의 지면을 장식하기를 바라며 블로그에 범죄자들의 이름과 그들의 죄목을 기록했다. 기록들은 전부 사실이었기에 모두에게 알려져야만 했고, 신문은 당연히 이 진실에 주목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내 예상은 또다시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느 일간지도 이 진실을 뉴스로 다루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이탈리아 언론 자유의 현주소를 새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신문을 통해 우리가 알고 싶은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문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정보만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선택도 존재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다시 방법을 바꾸어 국제적인 신문사들의 문을 두드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굳게 잠겨 있던 국제신문사의 문은 두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48.275유로에 부가가치세를 더한 비용으로 마침내 열리게 되었다. 2005년 11월 22일, &lt;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sup>International Herald Tribune</sup>&gt;에 마침내 진실이 공개되었다(지면에 광고 형식으로 한 페이지가 할당되어, 전과기록이 있는 국회의원의 명단이 공개됐는데 신문에 그들 개개인의 상세한 전과 기록은 게재되지 않았지만, 대신 상세한 내용이 쓰여 있는 베페 그릴로 블로그의 인터넷 주소가 올라갔다). 외신들은 처음에 이 사실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언급한 전과자들이 금품수수와 관련해 징역형을 선고받자, 영국의 BBC 월드 서비스 방송국 같은 곳에서는 위의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인도의 간디 평화 재단으로부터 축하 편지가 도착했는데, 편지에는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문제를 겪었었기에 모든 인도신문을 대신해 축하를 보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인도 역시 한때 범죄자들이 기존 정치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정치판에 입성했지만, 그들 중 11명은 이미 국회로부터 추방되었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거나 한 외신의 보도 이후 모든 이탈리아 신문들은 여론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국회 내의 범죄자에 관한 기사를 써야만 했다. 몇몇 의원들은 소송하겠다며 직접 위협을 해오기도 했고, 또 몇몇은 TV와 라디오, 신문기자들에게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말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낱 코미디언이 높으신 국회의원 나리를 심판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으며{범죄자들은 코미디언을 심판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안 된다고?}, 정치와 정의, 사법부는 서로 그 개념을 혼동해서도 안 되고{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범법자 판결을 받은 국회의원들의 실제 죄는 &lsquo;우스꽝스러운 코미디언이 고발한 것처럼 그렇게 크지는 않다.&rsquo;라는 기사를 쓰라고 위협했다. 실제로 정치가이자 언론인인 포미치노는 직접 내게 전화해 나의 블로그에 언급된 부정부패라는 것이, 언급된 것처럼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며 아주 사소한 수준이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였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일련의 사건이 있었던 다음 해인 2006년에는 이탈리아의 총선거가 있었다. 나는 이 선거에 새로운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국회 과반수의 좌석을 차지하고 있던 극우파들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선거법이 등장해 앞을 가로막았다. 극우파들 자신도 이 법을 &lsquo;돼지 똥&rsquo;이라고 정의한, 바로 그 법 말이다. 이 새롭게 등장한 거지 같은 법은 1993년에 만들어진 선거운동 관련법 및 시민에 의한 직선제를 취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블로그에 선거 후보자들의 범죄 기록을 적는 동안 국민을 보호해야 할 공무원들이 오히려 국민에게서 투표권을 빼앗아 갈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2006년 선거에서 이 범죄자들은 각 당의 당 서기관들에 의해 재선됐다(비례대표제와 비슷한 방식의 선출방식). 그 결과 마르코 트라발리오(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인종차별의 역사≫ ≪불알 월드컵≫ ≪바나나공화국≫ 등 20여 권의 책을 썼다)에 의해 정의된 &lsquo;정직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rsquo;인 범죄자들이 국회 내부에 셀 수 없을 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크고 작은 범죄자들과 그 공범자들의 수는 무려 82명에 달했다. 이는 이탈리아 범죄의 온상지 나폴리 스캄피아 지역의 주요 범죄자 수보다도 높은 숫자이다. 이 &lsquo;정직한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rsquo;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국회에서 가장 애용하는 방법은 바로 변호사 나리들을 고용하는 것이다. 이들은 범법자들을 위해 법을 바꾸고 실력을 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작자들이다. 국회 정화를 목표로 전투를 시작한 지 2년이 지날 무렵, 나는 좀 더 강력한 방법을 통해 전투를 발전시키기로 마음먹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국회 내부의 범법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로 갔고 드디어 2007년 9월 8일, &lsquo;V-day&rsquo; 전투<strong>*</strong>가 시작됐다. 이날 하루 동안 우리는 50,000명의 서명을 모아 국회 정화를 위한 법률을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세 가지 방향에서 국회 정화를 위해 새로운 내용의 법률을 요구했는데, 첫째로 범법자의 국회의원직 불가, 둘째로 정당 비서관에 의해 추가 선출될 수 있는 의원 수를 두 명으로 제한, 마지막으로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시민의 직접 투표제였다. 나는 이런 의지를 담은 항소를 유럽연합에 제출했고, 국회 위원장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개인적으로는 이 요구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혀왔다. 대법원에서도 법은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존재한다는 성명을 냈고 나는 이런 내용을 담은 이메일을 모든 국회의원에게 보냈다. 메일에 대한 답장은 무려 200통이 넘었다. 대부분은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답변이었다. 심지어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경제팀 최측근인 스카욜라 조차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서한을 보내주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망의 9월 8일, &lsquo;V-day&rsquo; 전투가 있었던 후 이제 많은 이탈리아의 국민과 시민은 새로운 진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모두를 위한 국회 정화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범법자는 법적인 처벌 외에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그 범죄에 대한 죄과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탈리아에는 범법자 말고도 다른 수백만의 정직한 국민이 존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4_%EC%A7%84%EC%8B%A4%EC%9D%84%20%EB%A7%90%ED%95%98%EB%8A%94%20%EA%B4%91%EB%8C%80/01%20%EC%9D%B8%EC%82%AC%EC%9D%B4%EB%93%9C.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02 시대착오적인 삽질, 고속열차 개발</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성탄 연휴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2005년 12월 5일, 경찰이 발 디 수사 계곡<strong>*</strong>의 베나우스에 있는 시민의 집결지를 공격했다. 경찰의 거룩한 곤봉질은 여자들과 남자들, 신부들, 시장과 시의 몇몇 관료들 위로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공격을 당한 이들은 그들의 삶의 터전인 발 디 수사 계곡을 &lsquo;세계화&rsquo;라는 이름으로 망가트리려고 하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던 사람들이었다. 증언에 의하면 한밤중에 기동경찰들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별안간 들이닥쳐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들은 국무장관이던 피사누의 졸개들과 이탈리아 프리메이슨 P2의 구성원인 모쥐, 리치오 젤리(기업가로 이탈리아 프리메이슨의 존경받는 거장으로 불린다. 금융 스캔들에도 관련이 있는 강력한 우파 지지자)를 따르는 무리와 아르코레 주의 정신적 미숙아들에 의해 사주를 받은 자들이었다. 지역 주민은 평온하게 폴렌타(이탈리아식 옥수수죽)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쉬고 있다가 느닷없이 공격을 받았다. 국무장관 피사누는 &lsquo;목적을 위해서라면 마피아와 함께 공생해야 한다&rsquo;라는 망언을 일삼는 작자로 전에 교통부장관 루나르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그런 말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래서 루나르디는 어떤 대가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수사 계곡에 터널을 만들고자 했고, 그 프로젝트는 그의 정치적 공약인 동시에 최고 목표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계곡에 터널 하나 뚫는 데 무려 12억 유로! 이것만으로도 매우 비싼 구멍임이 틀림없지만, 실제 드는 비용은 무려 30억 유로에 육박한다. 게다가 이 터널의 완공시점은 15년에서 20년 후로 그때가 되면 터널 따위는 이미 필요하지 않은 시점이다. 물론 지금 당장 개통된다고 해도 그 지역에 터널이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이고 비경제적인 쓸모없는 개발 사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미 베페 준티, 수사 계곡의 프란체스코 수사회, NO TAV<strong>*</strong>운동원, 밀라노 공대의 마르코 폰티, 발디 수사 지역 시장들의 공식 대변인 바르바라 데베르나르디, 콘도베의 시장, 볼로냐의 잡지 &lt;물레방아<sup>Mulino</sup>&gt;, 시타프 협회 등의 언론 및 관계자들과 함께 터널이 불필요한 증거들과 수많은 증언, 그리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데이터를 블로그에 올리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반대 캠페인들은 썩어빠진 정당에 의해 그들과 유착된 건설 회사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사장되고 말았다. 그리고 사회민주당<sup>PSDI</sup>은 좀 더 다른 속셈으로 그들과 영합했는데, 만약 토리노 시장 키암파리노가 망치질을 할 수 있었다면 피에몬테 주 주지사인 브레소와 사회민주당의 파시노는 그의 망치 밑의 못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리스본에서 보내진 신선한 모차렐라 치즈가 10여 시간이면 토리노의 포르타 누오바 역을 지나 키에브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얼마나 피에몬테 주를 위한 근사한 프로젝트인가? 이 얼마나 무서운 지역이기주의의 참모습인가? 철도국장 엘리오 카타니아{너무도 뛰어난 그의 관리 능력으로 이탈리아 철도국은 수백만 유로의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도 물론 이 고속 열차 프로젝트에 열광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생활하는 이탈리아의 장거리 출퇴근 자들은 운행시간을 만성적으로 어기는 더럽고 냄새나는 열차를 타고 다닌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산자락 계곡의 주민 세금 중에서 몇억만 유로에 해당하는 자금으로 새로운 기차를 사겠다는 공약을 그들에게 내세웠다. 그러면서 사탕발림으로 발 디 수사 계곡의 일반인에서 시장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주민에 대해 열차 우선 이용 권리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누구나 그렇듯이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속셈이 다른 법이다. 결과는 역시 &lsquo;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식&rsquo;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철도 본연이 지닌 운송수단으로서의 실질적인 목적은 사라졌고 환경오염과 부채, 수많은 문제점만이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침내, 2005년 12월 7일 토리노에서 고속열차 반대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유모차에 어린아이까지 대동한 가족들을 포함, 10여만 명의 사람들이 얼음장 같은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뜨거운 포도주를 함께 나누며 집회에 참석했다. 나 역시 반대 집회에 동행했는데, 그 자리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정치인이라고는 누구 하나 보이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규모 반대 집회의 효과가 있었던지 프로디 정부는 마치 고속철도 계획을 수정한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교묘하게 포장을 바꾼 것일 뿐 내용은 이전과 비교하면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그저 시민을 향해 몽둥이찜질 대신 약간의 안정제를 투여하는 것으로 방법을 약간 바꿨다고나 할까. &ldquo;고속열차를 만들 것이다. 만들 것이다. 그렇다.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야만 한다. 국민이여 눈을 감아라. 그리고 오직 나의 눈만을 바라보라.&rdquo; 프로디는 마법을 거는 거대한 뱀과 같다. 하지만 계곡의 주민은 몽둥이찜질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지덕지해야만 하는 걸까.</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실제로 모다네와 토리노 사이를 운행하는 열차는 겨우 38%의 이용률을 보일 뿐이다. 토리노와 리오네를 연결하는 열차는 이용자의 감소로 말미암아 폐선 됐다. 또한, 열차를 이용해 운송하는 물류의 양도 해마다 줄고 있다. 그런데도 새로운 터널공사에 드는 비용을 모두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 유럽연합의 지원금은 고작 10% 남짓에 불과할 뿐으로 우리의 세금으로 거의 모든 개발비용을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비용적인 문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바로 터널공사가 진행되는 산에 석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루 500여 대의 트럭이 석면이 함유된 잔해들을 싣고서 이 계곡의 도로를 20년 동안 질주할 것이다. 이 고속열차의 경제성을 따져보면 한 해에 4천만 톤의 물류가 이송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루에 350대의 열차에 해당하며 이는 다시 시속 150km/h 물류 열차나 아니면 시속 300km/h의 승객을 태운 열차가 4분마다 한 번씩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열차 이용자와 물류 양의 감소로 수요는 줄었는데, 본전을 뽑기 위해서 열차는 쉬지 않고 끊임없이 달려야만 한다. 그 사이 이미 석면에 의한 환경오염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계곡 주변을 말이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명확한 증거 앞에서 마침내 여러 정당과 언론 매체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제 이 계곡의 터널공사는 이탈리아가 군국주의 국가를 전면에 표방하고 다시 나서지 않는 한 결코 진행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곧 새로운 타협안이 도착할 것이다. 정치가들은 늘 그렇듯이 또 새로운 뭔가를 대안으로 얘기할 것이고, 이미 뭔가를 했다고 우길 것이다. 또한, 기업들은 우리도 모르는 어떤 일에 사용했다고 수천만 유로의 금액을 새롭게 청구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사 계곡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새로운 변화를 시사한다. 이전에는 결코 이런 변혁을 가져온 일이 없었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그리고 이번 일들이 진행된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반성하고 되짚어 봐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는 정부가 국민의 의사 수렴 과정 없이 제멋대로 결정을 내리고 지역 행정에 대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정부의 계획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인증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국민에게 설명과 동의를 얻지 못한 국가 결정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냄새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4_%EC%A7%84%EC%8B%A4%EC%9D%84%20%EB%A7%90%ED%95%98%EB%8A%94%20%EA%B4%91%EB%8C%80/02%20%EC%9D%B8%EC%82%AC%EC%9D%B4%EB%93%9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03 푸른 황금의 유혹, 수도 민영화</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1992년에 식생활 용수 사업의 민영화<strong>*</strong>를 법으로 제정한 갈리법<sup>Legge Galli</sup>(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새로운 수자원의 개발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생존을 위해 누구나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물이 기이하게도 상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 덕분에 공기업과 사기업을 합한 통합 자본을 가진 92개의 회사가 생겨났다. 이 회사들은 두 가지의 거룩한 목표를 지니고 탄생했는데, 하나는 물장사를 이용한 엄청난 수익의 창출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잘 주는 새로운 일자리의 창출이다. 이 새로운 회사의 안락의자는 선거에서 낙선한 하원의원들이 차지했고, 그 자리는 낙선의원들에게 세상에 다시없는 지상 낙원이 되어 주었다. 경영진에게는 고액의 연봉과 역시 고액의 주식배당금, 스톡옵션이 제공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 세계에는 이 푸른 황금, 바로 물이 없어서 죽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30,000명이나 된다. 물은 생명이며, 생명을 팔고 사는 행위는 매우 부도덕하지만, 불행히도 수자원 매매에는 엄청난 수익이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로마에 상수원을 공급하는 물 기업 아체아<sup>ACEA</sup>가 2006년에 30%의 수익 성장률을 보였다고 한다. 수익? 대체 어떤 수익? 생명 줄을 팔고 산 대가로 얻어진 수익? 하지만 누구도 이에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은 묵묵히 돈을 내고 정치가들은 잘한다고 손뼉을 친다. 2006년 한 해 동안 이탈리아에서 물을 이용해 얻은 매출은 무려 50억 유로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공짜 빗물이 거액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실로 새로운 가나의 혼인식(신약 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으로 물이 포두주로 바뀐다)이 아닐 수 없다. 단지 이번에는 포도주 대신 돈으로 바뀌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래의 전쟁은 석유가 아닌 물 때문에 싸우게 될 것이다.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당장 실험해보라. 아주 간단하다. 물 대신 1리터의 원유를 마셔보면 될 테니까. 전 세계 약 10억 명의 사람들은 마실 물이 부족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 해마다 2백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죽어간다. 이것이 비단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증거가 부족한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탈리아 역시 일부 지방에서는 식수공급 부족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 기후 변화는 이제 직접적으로 우리의 생활용수 공급을 감소시키고 있다. 하지만 반비례해서 이에 대한 우리의 대책은 더 형편없어졌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낡고 구멍이 숭숭 뚫린 수도관을 가진 나라이다. 에밀리아 로마냐 주에서는 해마다 30%의 생활용수가 누수 되고 있고, 남부 풀리아 지방의 누수는 50%에 달한다. 거기에 강, 급류, 시냇물 등 모든 물길에서 오염이 증가하고 있다. 정화시설을 갖추지 않은 채 흘려버린 공업용수는 강으로, 바다로, 무단 배출되고 오염된 매연이 공기 중으로 대책 없이 퍼져 나가도 누구 하나 통제하는 이가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아주 많은 병의 물을 사서 마신다. 유럽 인들이 연평균 일 인당 약 80리터의 생수를 소비하는 것에 비해, 이탈리아 사람은 배가 넘는 170리터의 생수를 소비한다. 유럽에서만 보자면 생수 소비량 1위를 기록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로 야기되는 또 다른 불명예스러운 1위가 있는데, 먹자마자 바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물병의 개수이다. 한 해에 이탈리아에서 버려지는 가연성 플라스틱 물병의 개수는 약 50억 개, 이 물병들은 소각되며 발암물질인 다이옥신을 내뿜는다. 그리고 다이옥신은 사정없이 우리의 폐 속으로 밀려 들어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은 이제 정치적으로 변하여 각 정당의 주요 정치 공약 안건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오염된 물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이 갈증을 없애려면 더 비싼 물을 사 마셔야만 한다. 비싼 물은 관리가 더 필요하고, 따라서 점점 더 사유화되어간다. 풀리아 지역의 주 정부 대표 니키 벤돌라는 환경단체 리스본 그룹의 회장인 리카르도 페트렐라를 풀리아 지역의 상수도 본부 담당자로 임명하였다. 페트렐라는 매우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유럽 최고의 수자원 분야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겨우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하였다. 상수도 사업과 관련된 기업의 로비가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블로그를 통해 사회 운동을 하면서 물과 관련된 문제들과 자주 직면했다. 2005년 나폴리 공연에는 알렉스 자노텔리(세계 평화 운동 및 정의 사회 구현 운동 관련 재단의 설립자) 신부와 동석했는데 그는 내가 아는 인물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함께 수자원 민영화에 대해 강한 반대와 항의를 계속했다. 그러나 캄파냐 지역 ATO2(영토관리부처) 산하 136개 지방 자치단체에 대한 우리의 수도세 인하 요구는 정부의 명령에 의해 중단되었다. 캄파냐 주지사로 바쏠리노(생활쓰레기 및 공업 쓰레기, 불법폐기물 등 환경을 오염시킨 책임을 물어 후에 재판에 기소되었다)가 있던 그 엿 같은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바쏠리노는 바로 나폴리안 르네상스(나폴리의 쓰레기 스캔들에 의해 많은 정치인과 마피아들이 기소된 사건을 말한다)의 주인공이자, 쓰레기 바다의 주인공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수자원은 공공의 자원이다. 당연히 시민에 의해서 운영되어야만 한다. 시민은 자신들이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민영화와는 다른 의미이다. 수자원은 특정 개인에게 위탁되어서는 안 된다. 수자원의 민영화로 말미암아 일반 시민이 얻은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얻은 거라고는 폭탄 수준의 엄청난 수도요금 고지서뿐이다. 그렇다고 공급되는 물의 질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수자원의 민영화는 그저 정당과 정부, 그리고 특정 개인의 사욕이 뒤섞여 튀겨진 냄새 나는 기름 덩어리에 불과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구의 한쪽은 목이 말라서 죽어가고 있는데 다른 한쪽은 물이 넘쳐난다. 연간 한 잔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140리터의 물이 사용되며, 청바지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11,000리터가, 자동차를 위해서는 400,000리터의 물이 사용된다. 물이 없다면 전 세계의 모든 생산 활동은 중지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물은 미래의 비즈니스다. 전 세계가 수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저 낭만으로 분수대에 동전을 던져 넣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지구의 모든 물은 돈을 내는 자만이 마실 수 있게 허용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끔찍한 세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4_%EC%A7%84%EC%8B%A4%EC%9D%84%20%EB%A7%90%ED%95%98%EB%8A%94%20%EA%B4%91%EB%8C%80/03%20%EC%9D%B8%EC%82%AC%EC%9D%B4%EB%93%9C.jpg" /></p> <br /> <br /> (서문, 1장 일부)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227" height="295"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4_%EC%A7%84%EC%8B%A4%EC%9D%84%20%EB%A7%90%ED%95%98%EB%8A%94%20%EA%B4%91%EB%8C%80/%EB%B2%A0%ED%8E%98%20%EA%B7%B8%EB%A6%B4%EB%A1%9C.jpg" />베페 그릴로 Beppe Grillo</strong> <br /> 1948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의 리구리아에서 태어났다. 전공은 회계학이지만 오디션에 참가해 코미디언으로 데뷔, 1986년에 자신의 이름을 딴 &lsquo;그릴로 메트로' 쇼의 주인공이 되면서 코미디계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이듬해 TV에서 당시 이탈리아 총리 크락시를 조롱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퇴출당하고, 이 사건은 그의 삶의 행보를 보다 적극적으로&nbsp;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1993년, TV에 잠시 출연할 기회를 얻지만 무려 1,600만 명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보이면서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정권에 의해 다시 방송 출연이 금지되었다. 이후 그는 방송 복귀를 스스로 거부하고 블로그 활동과 SNS, 매년 100회가 넘는 국내외 공연을 통해서만 대중과 만나고 있다. 세상의 부패와 거짓을 향해 거침없는 독설과 조롱을 퍼붓는 공연에는 매회 수만 명의 관객이 참여해 뜨거운 신뢰와 지지를 보낸다. 뉴스위크, 타임, BBC 방송 등의 각국의 매체들이 앞 다투어 그의 활동을 톱뉴스로 다루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몇 년 전&nbsp; MBC 국제시사프로그램 'W'가 &lt;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gt;이라는 기획으로 그의 행보를 깊이 있게 다루면서 국내에도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사상 유례가 없는 무려 200만 명의 시민을 집결시킨 분노의 상징 'V 데이'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부터 인터넷과 SNS를 통해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nbsp; '파이브스타&rsquo; 운동을 펼쳐가고 있는데 이 운동으로 그는 2010년 &lt;타임&gt;지 선정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임지영</strong><br /> 한국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졸업 후 현재&nbsp; Teatro Flaiano in Rome에서 전속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 시 프레스 센터에서 통역을 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20 오후 1:30:00《212》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다<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2_%EC%98%9B%EB%82%A0%20%EC%98%9B%EC%A0%81%EC%97%90%20%ED%9B%A0%EC%9D%B4%EC%96%B4%20%ED%9B%A0%EC%9D%B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18일<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최인훈의 <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size: large">『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span></span>를 읽다</span></span></strong></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최인훈의 희곡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문학과지성사, 1992 재판)에는 총 7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장르 간의 칸막이 현상이 뚜렷한 한국 문단에서 소설가 최인훈은 완성도 높은 희곡을 쓴 드문 작가로 손꼽을 수 있다. 최인훈 희곡은 두 가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다. ⅰ) 모든 작품이 설화나 동화로부터 빌어 왔다는 것 ⅱ) 현대 연극에서는 거의 사멸화한 운문을 종종 도입하거나, 주관과 서정을 강조한다는 것. 그래서 그의 희곡은 시극<sup>詩劇</sup>으로 불리기도 하며, &lsquo;읽는 희곡<sup>Lesedrama</sup>&rsquo;으로 폄하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제작인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앞서 말한 두 가지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이 작품에 모티브를 제공한 &lsquo;아기장수 설화&rsquo;는 전국적으로 많은 이본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은 이렇게 요약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① 평민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난다.<br /> ②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방안을 날아다니고 말을 한다.<br /> ③ 아이가 자라서 역적이 되리라고 생각한 부모가 아이를 돌로 눌러 죽인다.<br /> ④ 용마가 울면서 용소에 빠져 죽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어보면, 최인훈의 작품이 아기장수 설화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설화가 역사 이전에 그치듯이 설화에서 취채한 최인훈의 작품 역시 아기장수의 탄생 이후를 그리지 않는다. 많은 평자들은 &ldquo;서사적 이야기는 미처 시작도 못된 시점에서 이야기는 끝&rdquo;(이미원)나고 마는, 이 작품의 결말을 지적하면서, 이 작품의 시극적인 특징을 부각한다. 즉 아기장수의 탄생이 영웅의 승리나 민중 구제라는 본격적인 서사로 진행되지 않고, 부모들의 심리적 갈등으로 국한된 탓에, 갈등의 논리적 해결을 추구하는 극장르의 요건에 미달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갈등의 외면화를 거부하고, 갈등의 주체들이 논리적 해결(의 극한 정점인 절정)로 치달아가는 대신, 상반된 감정을 순간적으로 통합하는 너무나 시극적인 결말인 &lsquo;비극적 황홀&rsquo;로 마감된다. 아이는 자신을 죽인 아버지에게 진달래 꽃묶음을 주고, 세 식구는 용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하면서, 아이의 죽음을 은연중에 강제하였을 마을 사람들에게 꽃을 던진다. 즉 용서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기장수의 &lsquo;부활-승천&rsquo;을 보여줌으로써 간신히 설화와 결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래도 이 작품은 설화에 머무를 뿐 역사로 나가지 않는 듯해 보인다. 그래서 언뜻 보면, 압제자나 좋아할 &lsquo;심리적 화해(=비극적 황홀)&rsquo;를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98~99쪽에 나오는 개똥어멈과 노파의 대화는, 백성이 원님보다 더 높아야 함을 분명히 하면서, 백성이 곧 하늘임을 강조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에 나오는 남편의 &lsquo;말더듬&rsquo;은 여러 가지 재미난 해석을 낳았는데, 누구는 남편의 말더듬이 갈등과 행동이 모자란 시극의 약점을 보완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ldquo;바, 바, 바람 소리야&rdquo;, &ldquo;다, 다, 다, 다, 다람쥐&rdquo;, &ldquo;구, 구, 구, 구, 구름 -&rdquo;, &ldquo;새, 새, 새, 새가 - 지, 지, 지나가는 거야&rdquo;는, &ldquo;바람소리야&rdquo;, &ldquo;다람쥐&rdquo;, &ldquo;구름&rdquo;, &ldquo;새가 지나가는 거야&rdquo;가 내지 못하는 시각적 효과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lsquo;다람쥐&rsquo;라고 하기보다는, &ldquo;다, 다, 다, 다, 다람쥐&rdquo;라고 말할 때, 관객의 뇌리 속에는 &lsquo;다람쥐&rsquo;가 지나가는 것과 같은 선명한 영상을 그리게 된다. 또 그 말더듬은 과거가 아니라 &lsquo;지금 막&rsquo; 지나가는 듯한 바람&middot;다람쥐&middot;구름&middot;새가 되어 남편의 불안과 공포를 생생히 전달해 준단다.(손필영)</p> <p style="text-align: justify">남편의 말더듬은 여백이 너무 많은 시극의 약점을 보완해 줄 뿐 아니라, 또 다른 상징도 갖고 있다. 우선 많은 평자들은, 이 말더듬을 권력자의 폭정과 연관시킨다. 작품 외적으로 보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발표된 1976년은 월남패망(1975) 이후 더욱 강화된 박정희 독재와 상관된다. 남편의 말더듬은 재갈 물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다. 또 작품 내적으로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가렴주구와 관련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래 이 작품 속에서 말을 더듬는 것은 남편이다. 그런데 도적의 죽음에 놀란 84쪽과 아이의 특이성을 재확인한 106쪽에서는, 느닷없이 아내가 말을 더듬는다. 이 일화는 말더듬이 신체적 장애가 아니라 심리적 장애라는 의학적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말더듬과 억압을 연결 짓게 해준다. 말더듬은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호소며, 이 작품의 주요 주인공인 아버지를 신빙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보통 말더듬은 웃음과 조롱의 대상이지만,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말 더듬는 자에 대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까닭은 말더듬 자체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피지배자의 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므로 자기 자식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가 달변이었다면, 이 작품은 아예 다른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뭐니뭐니해도 남편의 말더듬은, 아기장수 설화를 과거로부터 떼어내는 효과를 자아낸다. 원래 설화란 구수하게 잘 전달되도록 다듬어지고 또 다듬어진 구전 장르다. 그런데 말더듬이 설화의 장점인 구전성을 방해함으로써, 아기장수 설화를 과거의 맥락에서 떼어내 현재인 듯 드러낸다. 과거의 설화를 현재화하기 위해 말더듬이라는 &lsquo;낯설게 하기&rsquo;가 필요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의미가 상반된 여러 개의 쌍이 긴장을 조성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가장 희망적인 봄에 사람들은 기근에 시달리며, 아기는 생명의 상징인 씨앗조에 눌려 죽는다. 뿐 아니라 아이는 자신에게 생명을 준 부모에 의해 죽으며, 도적이 되었던 노파의 아이는 효수되어서야 &ldquo;춥지도&rdquo;, &ldquo;덥지도&rdquo;, &ldquo;목이 마르지도&rdquo;, &ldquo;배고프지도 않고 보채지도 않는 착한 내 새끼&rdquo;가 된다. 또 장차 장수가 될 범상한 인물이라서 미리 제거된 아이와, 늘 &ldquo;마루 끝에 앉아서 그렇게 숨차&rdquo;하던 별 볼 일 없는 &ldquo;해소기침쟁이&rdquo;에 불과했던 노파의 아이도 한 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형식상으로 남편의 말더듬과, 아내나 노파의 반복되는 노래는 서로를 보완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의 모티브였던 &lsquo;아기장수 설화&rsquo;는 민중들의 패배주의와 보신을 드러내는 텍스트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반인륜적인 설정을 통해, 당대의 권력이나 질서가 얼마만큼 억압적이었나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자주 &lsquo;희생양 제의&rsquo;와 연관 지워 설명되어 왔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의 모티브가 되어준 아기장수 설화와 예수의 생애는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lsquo;절대자의 하강 &rarr; 난세에서의 짧은 생애 &rarr; 순교 &rarr; 승천&rsquo;이란 예수의 일생과 아기장수 설화는 같으며, 그들의 죽음이 억눌린 사람들의 미래를 위한 희망으로 전도되는 것 또한 흡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가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군중들은 손쉬운 해결책으로 희생양을 찾으며, 희생양은 사회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된다. 다시 말해 대개의 희생양 텍스트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순기능으로 포장된다.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인류가 이제껏 호도해 왔던, 사회 순기능으로서의 희생양 텍스트를 전복한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자의 무죄성을 통해 사회의 폭력적 질서를 도리어 폭로하는 게 &lsquo;예수 사건&rsquo;이다.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 나오는 아기장수가 희생양에게 가해진 폭력을 정당화하는지, 아니면 박해의 폭력성을 드러내는지는 더 자세히 분석해보아야겠지만, 예수의 경우와는 다른 데가 많다. 참고로 이 작품이 외국에서 공연되었을 때의 제목은 「대속자<sup>Redeemer</sup>」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div>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20 오전 10:16:00남태현의 ‘영어 계급사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4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3_%EC%98%81%EC%96%B4%20%EA%B3%84%EA%B8%89%EC%82%AC%ED%9A%8C/%EC%98%81%EC%96%B4%EA%B3%84%EA%B8%89%EC%82%AC%ED%9A%8C_%ED%91%9C%EC%A7%80.jpg" /></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말</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는 왜 영어에 목을 맬까?</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아이들이 영어만 잘할 수 있다면</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2010년 여름, 저는 9년 만에 고국을 찾았습니다. 여름이 오기 몇 달 전부터 달라져 있을 고향과 친구, 가족들을 볼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처음 한국에 가는 두 아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은 공항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옛날에 학교로 가던 버스 노선도 다 사라지고,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요금을 내며 버스를 타더군요. 지하철 창문에 광고가 뜨고 거리의 아파트들은 그새 두세 배는 키가 자랐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겉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것도 잠시, 저희 내외는 한국 어린아이들에게서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애초에 저희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하며 바랐던 것은 우리 아이들이 한국말을 많이 배웠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아이는 그나마 혼자 노는 시간이 많았고 집에서 저희와 말을 많이 한 덕에 능숙하게 한국말을 구사합니다. 하지만 둘째아이와 셋째아이는 연년생이어서 둘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레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더군요. 텔레비전을 보고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의 말을 따라하며 노는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통역해서 놀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서로 영어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는 한국어로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아이들이 한국에 가서 한국 친구를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한국어를 많이 배우지는 못할지라도 한국말을 하는 또래 아이들과 친숙하게 되면 자연히 한국말도 늘겠지 하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곧 저희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놀이터에서 만난 또래 아이들이 영어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외국어 학교를 다닌다고 하더군요. 놀란 것은 저희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빠, 한국 애들이 영어를 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들뿐이 아니더군요. 제 친구의 아이들 중에서도 영어로 대화하는 애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외국에서 태어난 아이도 있고, 어릴 때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희 애들이 여기서 친구들과 놀며 한국말을 배우리라는 기대는 물거품이 됐죠. 아이들이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희가 미국에서 한국 가정을 방문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저희 애들이 놀기에는 편했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로서는 충격이었습니다. 한국 애들인데 한국에서 한국말을 안 한다니. 여러 사정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만 참 어색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에 있으면서 자녀 교육을 위해 한국에서 오는 분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에게서 하나같이 듣는 이야기는 한국에서 영어공부 시킬 돈이면 미국에 오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의 교육이 경쟁적이고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는 반증이죠. 그분들의 말씀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신문으로 보는 한국의 교육 현실은 멀리서 봐도 너무나 힘들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 한국 사회의 영어에 대한 집착은 도저히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내와 딸과 함께 대학로를 찾았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거리구경을 하고 있는데 유치원 학생들이 보였습니다. 소풍이나 견학을 나온 듯했습니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뭔가 이상해 보였습니다. 선생님 대부분이 백인이었고, 아이들 모두 영어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보니 강남의 무슨 영어 유치원이더군요. 속으로 &lsquo;아, 이게 말로만 듣던 영어 유치원이구나&rsquo; 싶었습니다. 씁쓸했습니다. 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영어 학원이고, 영어공부를 시키는 것이 모든 부모의 지대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리고 영어 능력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많은 것(심지어 가족의 행복과 유대까지)을 포기할 것 같은 기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러한 현상이 한국만의, 그리고 요새만의 현상은 아닙니다. 18~19세기 유럽 귀족층 사이에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것이 대유행이었습니다. 러시아, 프러시아(나중에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 심지어 미국에서도 귀족-특권층들은 주로 프랑스어로 대화를 했습니다. 프러시아의 유명한 황제인 프레데리크대제<sup>Frederick the Great</sup>도 모국어인 독일어는 하인들에게나 예외적으로 썼습니다. 러시아도 사정이 다르지 않아 모국어로 쓴 소설은 대부분 하류로 취급받았고, 귀족들은 아예 자녀들에게 러시아어를 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프랑스어와 함께 프랑스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전통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상이 크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한자는 늘 지배계급의 문자였습니다. 18세기 조선의 천재라고 알려진 박지원이 1780년 중국을 여행하며 쓴 《열하일기》를 읽어보면 그때까지도 (한글 창제가 1443년입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은 글을 써서 중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었죠. 우리 현대사를 보더라도 미군정 시기와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출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문과 유학을 정치, 사회적 질서의 근간으로 삼고 있던 조선 시대도 아니고 해방과 전쟁 통에 미군의 지배를 받던 때도 아닌 지금의 한국에서 영어라는 목표를 좇는 사람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또 성공적인 영어의 학습 없이는 통상적인 의미의 출세가 극히 힘들어졌다는 것은 앞서의 사례들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대입-취업-승진을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영어가 얼마만큼 중요할까요? 대답이 너무 빤하긴 하지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에서 학벌의 중요성은 (슬프게도) 보통 어린아이들도 이미 다 알고 있는 평범한 &lsquo;사실&rsquo;입니다. 그리고 고급 학벌의 획득을 위해서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점수가 중요합니다. 수능은 보통 500점 만점이고 그 중 영어는 50문제로 100점이 배정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영어가 주요 과목일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치러졌던 학력고사는 340점 만점에 영어가 60점이었죠. 그때도 영어는 늘 학생들의 큰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하지만 영어의 비중은 그때에 비해 더 커졌습니다. 학력고사 체제에서 총점의 17.5%를 차지하던 것이 수능이 도입되고 나서는 20%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2.5%라는 것이 수치상으로는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단 1~2점에 당락이 좌우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가볍게 볼 수치가 아닙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취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요 기업이나 기관의 입사에서 영어 시험을 안 보는 곳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영어를 평가하는 방법으로는 표준화된 시험이 많이 사용되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오랫동안 쓰인 것이 토익입니다. 토익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소통에 중점을 두는 평가로 미국의 교육평가서비스<sup>Educational Testing Service: ETS</sup>라는 기관에 의해 개발되었고 세계 많은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2008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1,000대 기업 취업 시 토익과 같은 영어 표준 시험을 요구하는 기업의 수는 절반이 넘었고 이 중 절반 정도가 토익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점수도 꽤 높더군요. 예를 들어 2008년 기준으로 삼성증권이나 한국증권선물거래소는 900점 이상을, 호텔신라나 제일기획에서는 860점 이상을, LG나 포스코 등에서는 800점 이상을 요구했습니다. 국가 주요 임무를 관장하게 될 5급 공무원 시험의 영어 시험도 토익 등 민간 영어 시험으로 이미 대체되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대기업에서는 경쟁적으로 영어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 요새는 영어 말하기 시험인 오픽<sup>Oral Proficiency Interview-computer: OPIc</sup>이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국의 국제언어테스팅<sup>Language Testing International</sup>이라는 회사에서 공급하고 있는 이 시험은 삼성에서 쓰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졌는데요, 이미 대기업 신입사원 채용에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삼성, LG, 포스코, 두산, SK, 한화, 롯데, STX, CJ, 신세계, 한국석유공사 등 국내 500여 개 대기업에서 필수로 쓰이고 있고 한국석유공사, 한국가스공사 등 공기업도 예외는 아닙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취직을 한다고 끝이 아닙니다. 앞선 2008년 조사에 따르면 500여 개 대기업 중 절반 이상이 토익을 인사고과에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토익은 승진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지만 그 외 직원 배치나, 해외 파견자 선발 등에도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오픽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인사 담당자에 따르면, &ldquo;CJ에서는 2007년부터 승진 체계에 오픽만을 적용하여 반영하고 있습니다. 과장, 부장의 경우 오픽 성적이 없으면 승진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모든 직원들이 2년에 한 번씩 오픽 성적 제출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노력해야&rdquo; 한다고 합니다. 한술 더 떠서 한화그룹은 오는 2013년부터 임원 승진시험 시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을 반영하기로 했습니다. 뛰어난 영어구사 능력이 없다면 사회에서 대입-취업-승진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성공은 무척이나 힘들어 보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정이 이러하니 너도나도 영어공부에 목매는 것이 어찌 보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또한 이상한 것이 과열된 영어공부 현상을 보면서 망국병이라고 불러도 별로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들 문제는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입니다. 무엇인가 심각한 문제가 있고 다들 그걸 아는데 아무도 고치지는 못한다, 좀 말이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문제를 풀기 힘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누구나 뻔히 알고 있는 문제를 풀지 못하는 이상한 상황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의문을 푸는 데는 특별한, 돈이 많이 드는 조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모두 다 아는 사실을 이리저리 다르게 퍼즐을 맞추고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이 이 책의 주된 조사 방법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결론은 우리의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라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꼬드겨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그 사기말입니다. 이러한 사기가 이처럼 크게 성공하고 있는 까닭은 다들 이것이 사기인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육의 문제가 아닌데 교육의 문제로 접근하니 영어 망국병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어 망국병은 결국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영어로 갈라진 계급 간의 갈등인 것입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우리의 영어 문제는 영어를 비롯해 많은 것을 누리는 계급과 그러지 못하는 계급 간의 긴장,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따라가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즉 믿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영어 계급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죠.</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 결론은 저의 결론일 뿐입니다. 이에 공감하건, 불편해하건, 화를 내건, 반대를 하건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다만 자그마한 저의 바람은 우리 사회의 그 수많은 영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이 책으로 인해 조금 그 시점을 달리하게 되고, 조금 더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게 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이 나오기까지 가족들의 사랑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딸의 굳건한 신뢰와 두 아들의 유쾌한 재잘거림이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의 첫 독자인 아내의 지원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p> <br /> <p style="text-align: right">2012년 1월 집 뒤뜰에서</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3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3_%EC%98%81%EC%96%B4%20%EA%B3%84%EA%B8%89%EC%82%AC%ED%9A%8C/%EB%8F%84%EB%B9%84%EB%9D%BC%20%EC%9D%B4%EB%AF%B8%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9장</strong></span><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영어망국병,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영어 투자, 심각하고도 슬픈 사회적 낭비</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영어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턱없이 비싼 대가를 영어공부에 지불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개개인이 판단해서 이 영어 기차에서 내리기에는 사회적 강요가 너무 거셉니다. 포경수술도 그 이유에 대해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다한다며 따라하는 마당에 하물며 사회적 지위와밀접하게 관련된 영어를 무시하기 쉽겠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필요합니다. 미국의 경제적, 정치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성 또한 우리가 쏟아 붓는 비용에 비춰서 봐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 사회가 그렇도록 영어에 투자하고 얻은 사회적 소득은 초라합니다. 공부하는 영어 자체가 입시, 취직 등으로 이어지는 경쟁의 한 도구일 뿐 정작 소통을 위한 영어를 염두에 두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니 힘들게 연마한 영어를 바람직하게 쓰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한국인의 영어 사용을 조사한 한 조사를 보면 &ldquo;최근 1년 동안 초보적인 인사말을 제외하고 문장 단위로 영어를 말하거나 글로 쓰거나 영어 문서를 읽은 경우는 얼마나 되는지 물어본 결과, 조사 대상자의 20.3%가 &lsquo;없다&rsquo;고 대답했고&hellip;&hellip; 최근 1년 동안 일을 하면서 외국인과 영어로 말하며 의사소통을 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질문에도 &lsquo;없다&rsquo;(37.8%)가 가장 많았으며&hellip;&hellip; 영어를 사용해야 할 경우가 주로 어떤 영역이냐는 질문에는 &lsquo;인터넷 로그인할 때, 이메일 주소 적을 때 말고는 그럴 일이 없다&rsquo;는 응답이 40.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rdquo; 심각하고도 슬픈 사회적 낭비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을 간단하게나마 논해보고자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한국사회, 영어 집착 병적인 수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개인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우리의 영어에 대한 집착은 병적인 수준입니다. 이성적 판단으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에는 중독 증세가 너무나 심합니다. 너도나도 영어에 목숨을 걸고 공부하는 영어 망국병에 찌들어 있는 것이죠. 더욱 슬픈 것은 우리 사회의 영어 망국병이 단순한 병이 아니라 일종의 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슬픈 사기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듯이 영어라는 것이 열심히 공부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영어가 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그 &lsquo;열심히&rsquo;라는 것의 정도나 타고난 언어의 재능 면에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그러한 투자나 재능은 누구나 쉽게 갖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게 될 듯 보일까요? 열심히 했다가 실패한 사람은 티브이나 라디오에 나와서 자신의 실패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영어공부를 하다 좌절한 개그맨이나 가수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영어공부를 하다 좌절에 빠진 학생이 광고에 등장하지도 않죠. 선생님도 실패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주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대중매체나 광고, 주변의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음으로 해서 마치 열심히만 하면 다 성공할 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이 착각과 자신의 늘지 않는 영어실력 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그렇게 사기 행각이 먹혀들기 시작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단 사람들에게 먹혀들기 시작한 사기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영어 교육의 광풍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하면 다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표어가 여전히 설득력을 갖는 우리의 문화도 한몫했겠죠.) 수많은 돈이 영어 사교육으로 쓰이고, 이 시험 저 시험 준비하고 등록하느라 돈을 써야 합니다. 점점 더 어린 학생들이 영어 학원을 들락거리고 심지어는 한국어를 배우는 것마저 뒷전으로 밀리기도 합니다. 어린 학생뿐 아닙니다. 깊고 창의적인 사고를 요하는 대학 공부도 영어로 하고, 중년의 회사원들도 영어 말하기 시험을 봐야 하는 이상한 상황도 발생합니다. 우리 사회가 영어에 미쳐 있는 만큼, 더 정확히 말해 우리 사회가 영어에 미친 듯이 돈을 쓰고 있는 만큼 한쪽에서는 엄청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영어 교재, 영어 학원, 시험 회사를 포함한 영어산업은 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외국의 자본이 들어오고 외국의 학교가 한국에서 문을 엽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들이 걱정 대신 자랑거리가 되는 듯합니다. 사기가 큰 돈벌이가 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영어 망국병은 우리 사회의 계급 문제</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누구누구가 토플 만점, 토익 만점을 받았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더 나은 점수를 꿈꿉니다. 그리고 이는 남보다 더 유명한 학교로 입학하는 것, 남보다 더 큰 회사로 취직하는 것, 남보다 더 빠른 승진의 꿈으로 이어집니다. 한마디로 남들보다 더 높은 사회적 지위로 가는 열차를 타고 싶은 것이지요. 텔레비전 연속극에 나오는 재벌가의 자녀를 보나 미국에서 온 상사들을 보나 광고 한 편으로 수억 원을 버는 젊은이들을 보아도 유창한 영어는 상류층의 상징이 된 듯합니다. 또 실제로 주변 상류층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이 모여 사는 모습을 간접적으로라도 보게 되면 그들이 자녀의 영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보통 이상이고, 그래서인지 그들이 구사하는 영어는 확실히 다릅니다. 상류층에서는 영어가 생활의 일부인 것이죠. 영어를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창한 영어 없이는 성공은 점점 더 힘들어 보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영어를 합니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상류층에 더 늦기 전에 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사기가 숨어 있습니다. 상류층은 가만히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끼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영어가 실제로 현실적인 이익과 직결되고 상징적인 의미로도 중요한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따라오는 만큼 그들의 영어는 점점 더 세련되어집니다. 가만히 앉아서 자신들의 특화된 장점을 포기할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상류층 대학생들이 미국으로 연수며 유학을 떠납니다. 사람들이 따라갑니다. 상류층에선 고등학교부터 아예 미국으로 보냅니다. 사람들이 따라합니다. 중학교, 초등학교 유학에 원정 출산까지 사람들이 따라하면 할수록 상류층에서는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점점 더 비싼 교육으로 대응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있을 만큼 따라해보지만 대부분 적당한 선에서 멈추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랑이가 찢어집니다. 상류층이 웃으면서 구사할 영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면서 공부합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경쟁인 것입니다. 사기의 완성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보죠.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됐다고 상상해보죠. 돈 수억 원을 들인 상류층이나 공립학교를 나온 노동자의 자녀도 다 완벽한 영어를 하게 됐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럼 우리 사회의 영어 광기는 사라질까요? 갑자기 우리는 영어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어린 학생들은 웃으며 공을 차고 대학생들은 자기 전공에 몰두하게 될까요? 물론 영어 광기는 사라질 테죠. 영어에 대한 광기는 사라지지만 광기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영어가 외국인과의 소통보다는 신분 상승의 도구로서의 역할이 더 크고 한국에서 엘리트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큰 이상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한다면 영어가 가진 계급적인 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계급 간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영어가 그 역할을 못한다면 다른 무엇인가가 대체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이키 운동화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할 때도 있었습니다. 모두 다 나이키 운동화를 신게 되면서 그 상징적 가치는 없어졌죠. 아무도 그 흔한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고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소지품에서 계급의 차이를 구분하고, 으스대고, 부러워하는 일이 멈춰졌나요? 아니죠. 나이키 운동화가 가졌던 상징성은 외제차, 명품 가방으로 옮겨졌을 뿐, 그에 대한 욕망과 가진 자와 가질 수 없는 자의 구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영어가 그 계급적 역할을 못하게 된다면 상류층은 자연스레 그 시대에 맞는 대체물을 찾겠지요. 중국어가 될 수도 있고, 러시아어가 될 수도 있고, 유대교 경전이 될 수도 있고, 태국의 무술인 무에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영어 망국병은 영어 망국병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대신 영어 망국병은 우리 사회의 계급 문제인 것이죠. 계급 간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분 상승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욕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현재 한국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점점 더 악화되어 영어 망국병이라는 증세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영어의 문제는 개인이나 한 집단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죠.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까지 영어 교육에 대한 갖가지 토론과 다양한 정부 정책이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영어 몰입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공교육으로 영어 사교육을 흡수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물론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습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증상을 없애려는 시도는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 없는 법입니다. 이제까지의 정부 정책이 계속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이 놀랍지 않은 이유입니다. 이제라도 정부는 문제가 아닌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들어가는 말 전문, 9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남태현</strong><br /> 젊은 날의 대부분을 서울의 한 섬에서 살았습니다. 결혼 후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캔자스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워싱턴D.C 근교에 있는 솔즈베리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시위와 억압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고,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큰 웃음소리로 유명하며, 문무를 겸비하고자 노력 중인 세 아이의 아빠입니다. 미국에서 영어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는데,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의 영어 문제를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영어 망국병이 창궐하고 있죠. 그러나 영어 망국병은 병이 아니라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기가 이토록 크게 성공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모두가 이것이 사기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망국병은 결국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의 문제이자 영어로 갈라진 계급 간의 갈등인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이미 영어 계급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17 오전 10:30:00《211》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읽다<div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31"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1_%EB%8C%80%EB%A8%B8%EB%A6%AC%20%EC%97%AC%EA%B0%80%EC%88%98.jpg" />&nbsp;</div>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5월 17일</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이오네스코의 </strong></span><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대머리 여가수』</strong></span></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를 읽다</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1938(사르트르, 『구토』), 1942(카뮈, 『시지프의 신화』), 1950(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 1953(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1961(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1969년(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부조리 연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대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카뮈의 『시지프의 신화』는 부조리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이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목적 없는 존재며,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늘 부조화할 수밖에 없는데다가, 누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없는 단독자다. 삶의 동기를 찾는 일의 어려움, 환경과의 부조화, 타인과의 소통 불가능성은 역설적으로 무한한 자유를 가진 &lsquo;나에 대한 실감<sup>實感&rsquo;</sup>을 부추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의 저 책은, &lsquo;실존은 본질에 앞선다&rsquo;는 사르트르의 실존철학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하지만 카뮈는 &lsquo;촌놈&rsquo;이라서 실존주의자는 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조리라는 현대적 개념을 창안한 카뮈나, 세계 속에 내팽개쳐진 &lsquo;목적 없는 실존&rsquo;을 발견한&nbsp; 사르트르는 서로 경쟁의식을 갖고 몇 편씩의 희곡을 썼다. 그들의 작품에는 부조리한 상황과 실존적인 자유 속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동시에, 그 속에서 실존을 확보하려는 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발견한 의식에 걸맞는 형식을 만들지는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84"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1_%EB%B6%80%EC%A1%B0%EB%A6%AC%EA%B7%B9_%EB%A7%88%ED%8B%B4%20%EC%97%90%EC%8A%AC%EB%A6%B0.jpg" />삶의 무의미성, 모든 이상의 끊임없는 가치저하, 의지의 원초적인 순수성에 필연적으로 소외당하는 것 등의 비슷한 감정은 장 지로두, 아누이, 살라크루, 사르트르, 카뮈 같은 극작가들의 작품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작가들과 부조리극 작가들은 근본적인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이런 작가들은 인간 존재의 불합리함에 대한 느낌을 매우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구성된 논증의 형태로 표현한다. 이와는 달리 부조리극에서는 인간존재의 무의미성, 이성적 직관형식의 불충분함에 대한 의식을 합리적 근거나 논증적 사고를 의식적으로 포기하면서 표현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사르트르나 카뮈는 옛 형식으로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고 있으나 부조리극 작가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그들은 전하려는 근본경험과 표현형식을 조화시키려고 한다. (철학적 관점이 아니라) 예술적 관점에서 볼 때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적 인식들은 그들이 쓴 드라마에서보다 부조리극에서 더 타당하게 표현되고 있다. (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한길사, 2005, 37쪽)</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사르트르와 카뮈는 부조리 연극을 거론할 때 명예로운 서두를 장식하기는 하지만, &lsquo;새로운 인식을 전통적인 형식&rsquo;에 담으려고 했던 탓에, 부조리 극작가로 지칭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조리 연극보다, 부조리를 철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더 뛰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용과 형식이 일치한 부조리 연극을 최초로 선보인 사람은 이오네스코다. <strong>그의 첫 작품인 「대머리 여가수」는 향후 부조리극이 보여주게 될 특징이 모두 나타나 있다.</strong> ⅰ) 설명 가능한 줄거리의 부재 ⅱ) 언어에 대한 불신 ⅲ)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묘사되지 않음 ⅳ) 주제의 모호성이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경천동지할 작품 속에서 스미스 부부가 알고 있는 한 가족의 이름은 부부&middot;자녀&middot;조부를 통틀어 바비 와트슨이다(그들의 직업도 모두 외판원). 그리고 작중의 한 부부는 서로가 부부인 줄도 모른다. 또 자신이 왜 이 드라마에 등장했는지 모르면서,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소방수를 보라! 극의 말미를 보면, 연극은 아무런 절정이나 해결 없이, 똑같은 장면이 되풀이될 것이 암시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조리 극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비슷하다. 조금 과장하자면, 작가의 이름만 가린다면 이오네스코의 작품이 베케트의 작품으로 읽힐 수 있고, 베케트의 작품이 이오네스코의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들의 공통점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은, 두 사람 모두 희비극이라는 양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고전 연극은 인간의 순수한 감정에 다가가기 위해서 장르를 엄격히 구분했지만, 이오네스코와 베케트는 인간 심리의 복잡성과 유동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장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즉 삶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사람은 &lsquo;쓴웃음&rsquo;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 인식의 결과가, 희비극으로 나타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머리 여가수」가 초연되고 난 10여 년 동안, 서구의 연극계는 &lsquo;부조리극&rsquo;이 범람했다. 이 연극 사조의 주요 작가들이 주로 파리에서 활동한 불어권 작가들인 때문에, &lsquo;파리파<sup>派</sup>&rsquo;라는 지역적인 이름이 따라붙기도 했지만, 부조리극은 차츰 여러 나라로 퍼져나가 숱한 동조 세력을 만들었다. 핀터(영국)&middot;올비(미국)&middot;아라발(스페인)이 여기 속한다. 현재는 정색하고 부조리 희곡을 쓰는 작가나 그 시절의 작품이 왕성히 공연되지 않기 때문에, &lsquo;50년대&rsquo;의 연극 운동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이처럼 연극 사조로서의 부조리극은 사멸한 듯이 보이지만, 부조리극적인 요소는 여전히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1966년에 발표된 박조열의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나, 1982년 중국어로 발표된 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이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80">사족1. 이오네스코&middot;베케트 등의 연극이 전위연극&middot;반연극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lsquo;부조리극&rsquo;이란 정식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마틴 에슬린의 책 제목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책 『부조리극』에서, 언어보다 행동(이미지)에, 해결보다 질문에, 이성보다는 본능에 몰두하는 것이 부조리극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몇몇 대목 말고는 별로 신빙할 게 없다. 지은이가 부조리극의 외연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바람에, 부조리극은 두루뭉실한 &lsquo;현대극&rsquo; 일반이 되고 말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80">사족2. 부조리극을 개척한 공로로 노벨문학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베케트가 아니라 이오네스코였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루마니아는 &lsquo;세계문학계&rsquo;에 변변한 마일리지<sup>mileage</sup>를 쌓아 놓지 못했다. 반면 베케트가 태어난 아일랜드는 어떠했던가? 오스카 와일드, W.B.예이츠, 버나드 쇼, 제임스 조이스&hellip; 그들이 누적 점수를 쌓아 놓지 않았다면, 베케트가 이오네스코를 제치는 일은 어림없었을 것이다.</span></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16 오후 1:03:00이택광 외 ‘웃기는 레볼루션’<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2_%EC%9B%83%EA%B8%B0%EB%8A%94%20%EB%A0%88%EB%B3%BC%EB%A3%A8%EC%85%98/%EC%9B%83%EA%B8%B0%EB%8A%94%EB%A0%88%EB%B3%BC%EB%A3%A8%EC%85%98_%ED%91%9C%EC%A7%80.jpg" /></p> <br />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2_%EC%9B%83%EA%B8%B0%EB%8A%94%20%EB%A0%88%EB%B3%BC%EB%A3%A8%EC%85%98/%EC%9B%83%EA%B8%B0%EB%8A%94%EB%A0%88%EB%B3%BC%EB%A3%A8%EC%85%98%201%EC%9E%A5%20%EB%8F%84%EB%B9%84%EB%9D%BC.jpg" /><br />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1. 대중문화와 사회</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중문화가 특정 사회의 가치 체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물론 과거 같으면 이 관계를 &lsquo;거울 작용&rsquo;처럼 생각해서, 대중문화가 사회라는 객관성을 &lsquo;반영&rsquo;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렇게 단순하게 대중문화와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감한 논리는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는 어떻게 사회의 가치 체계와 관계를 맺는 것일까?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를 통해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문화비평의 논리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문화 형식이다. 대중문화는 &lsquo;새로운 것&rsquo;을 담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대중문화는 대중의 호불호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원하는 것에 부합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 대중문화의 원리이다. 좀 더 복잡하게 설명한다면, 대중문화는 쾌락 원칙에 충실하다. 쾌락 원칙이라는 것은 즐거움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원리이다. 모든 사람들은 즐거우면 계속하고 그렇지 않으면 빨리 그만두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쾌락 원칙은 불쾌한 욕망을 제거해 버리는 기준 노릇을 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대중문화는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자본주의 문화 산업의 논리에 따라 생산되는 대중문화는 이런 쾌락 원칙을 형식 논리로 체현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취향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쾌락 원칙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즐거움을 지속시킨다는 뜻이다. 쾌락 원칙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서 특정 사회는 좋거나 나쁜 것을 판가름하는 윤리적 가치 체계를 만든다. 가치 체계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메타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윤리라는 것은 불변하기보다 욕망의 구조와 필연적으로 연동한다. 특정 사회가 원하는 것에 맞춰서 변화하는 것이 윤리적 가치 체계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맥락에서 대중문화를 분석한다는 것은 특정 사회의 가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그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가치 체계가 어떻게 만들어져서 지탱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대중문화 분석을 통해 특정 사회를 파고들어 가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는 그냥 대중을 위한 문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문화 형식은 대중의 욕망 구조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 논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글은 《무한도전》이라는 TV 프로그램의 분석을 통해 한국 사회의 가치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한도전》과 같은 작은 형식의 논리를 통해 좀 더 커다란 구조의 원리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과 이른바 &lsquo;예능&rsquo;이라고 불리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논리를 통해,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lsquo;시대정신&rsquo;을 알아보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시대정신이라는 것은 언제나 개별 형식에서 자신의 근거를 발현시키는 법이다. 물론 이런 시대정신은 실제적이라기보다, 일종의 관념으로서 개체의 실천 활동에서 주체화의 기제로서 작동하기 마련이다. &lsquo;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rsquo;에 대한 하나의 대책을 시대정신이라고 불리는 관념 체계가 제시하는 것이고, 구성원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관념 체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달리 말한다면, 《무한도전》의 형식 논리가 어떻게 시대정신과 접속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시대정신이라고 표상할 수 있는 대타자<sup>Other</sup>를 구성하는 욕망의 작동 원리를 알아보는 것이다. 결국 이 작업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주체화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그 위기와 대응을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lsquo;《무한도전》이란 무엇인가?&rsquo;라는 질문은 유효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 질문은 곧 《무한도전》이라는 형식의 논리와 연동하는 대중의 욕망에 대한 궁금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2. 《무한도전》의 내적 논리</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무한도전》을 &lt;1박 2일&gt;과 비교해서 훨씬 &lsquo;인간적인 프로그램&rsquo;으로 정의하는 경향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런 비교는 두 프로그램을 이끄는 유재석과 강호동이라는 진행자 캐릭터에 대한 대립 구도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한다.<sup>&lt;무한도전&middot;1박 2일 두 PD 상반되는 취향과 연출&gt; (<a href="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461517.html)">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461517.html)</a></sup> 그러나 두 프로그램에 대한 다른 평가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결론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의 취향과 연출로 인해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말 이상을 이끌어 낼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PD의 취향과 연출,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진행자의 개성이 합쳐진 결과 다른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는 말은 솔직히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 사실 모든 문화 형식의 변별성이 이를 통해 설명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 형식은 &lsquo;문화 아닌 것&rsquo;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문화적이지 않은 것을 매개하는 것이 개별 주체의 활동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무한도전》과 &lt;1박 2일&gt;이 PD의 취향과 연출에 따라 다른 논리를 체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무한도전》과 &lt;1박 2일&gt;이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프로그램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교 평가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분명히 &lt;1박 2일&gt;은 《무한도전》과 유사한 프로그램이고, 이런 까닭에 둘은 자연스럽게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비평의 시각에서 본다면, 두 프로그램은 굳이 분리시킬 필요가 없다. 원칙적으로 같은 형식 논리를 드러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별 형식의 차이는 있지만, 형식 논리를 놓고 본다면 두 프로그램은 같은 가치 체계를 구현하고 있다. 그 가치 체계는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lsquo;경쟁&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이나 &lt;1박 2일&gt;이나 보여 주는 것은 경쟁의 논리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형을 거치긴 했지만, 두 프로그램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경쟁을 통해 구성원들의 승패를 좌우하는 게임의 법칙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두 프로그램은 공통적으로 &lsquo;고통의 스펙터클&rsquo;을 보여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다가 자기 계발의 금욕주의를 보여 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변화를 보인다. 롤랑 바르트<sup>Roland Barthes</sup>의 정의에 따르자면, 레슬링에서 복싱으로 성격을 바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전파를 탔을 때, 《무한도전》은 말 그대로 &lsquo;궁상스러운 바보들이 벌이는 무모한 도전&rsquo;이라는 내용에 충실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양산할 수밖에 없는 잉여 노동의 판타지를 적절하게 자극하는 &lsquo;도전들&rsquo;이 프로그램의 재미를 만들어 냈다. 여기에서 잉여 노동의 판타지라는 것은 자본의 효율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잉여 노동력의 주체에게 즐거움을 주는 상상적 이미지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상상적 이미지는 이상적 자아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꿈의 상태를 만들어 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의 &lsquo;바보들&rsquo;은 이상적 자아에서 자아 이상으로 이동한 주체에게 과거의 이미지를 다시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무한도전》이 재현하는 희화화한 캐릭터들은 여전히 이상적 자아에 빠져 있는 미숙한 존재들이다. 이를 통해서 시청자들은 자아 이상과 자신의 괴리에서 상실감을 경험하던 현실을 위무 받을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맥락에서 잉여 노동력에게 부여된 &lsquo;무한한 시간&rsquo;이라는 요소는 초기 《무한도전》을 밀고 갔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 시간은 무의미한 되풀이의 시간이다. 의미를 생산하는 반복이 아니라,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일상의 형식을 보여 주는 것이 《무한도전》이다. 이런 권태의 구조에서도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은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 시청자는 생활인이라는 일상의 참여자에서 &lsquo;관조자&rsquo;라는 선험적 자리로 순간 이동하면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근대적 구경꾼으로 거듭 태어난다. 시시껄렁한 놀이를 반복함으로써 시간을 죽이면서 &lsquo;고용&rsquo;을 기다리는 주체에게 《무한도전》에 등장하는 바보들은 자기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위무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잉여 노동을 표현하는 《무한도전》이 자신보다 모자라는 이들의 향연이라는 점에서 잉여 노동력의 주체는 자기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욕망의 투사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대상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일종의 공감이 여기에서 발생하는데, 《무한도전》에서 희화화된 인물 성격은 현실의 모순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lsquo;무식한 출연자들&rsquo;보다 더 나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켜 준다. 말하자면, 유사-충족감을 《무한도전》이 제공하는 셈이다. 물론 《무한도전》을 보는 시청자들이 진정으로 이들을 무식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멀쩡한 &lsquo;연예인들&rsquo;이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퍼포먼스를 보면서, 사회적 규범의 압박을 잠시 비켜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3. 《무한도전》과 잉여 노동의 현실</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문제는 《무한도전》에서 재현하고 있는 잉여 노동의 현실이다. 잉여 노동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한 노동이다. 일을 하지 않는 고용주의 생활 수단까지 생산하는 일을 노동자가 잉여 노동을 통해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한도전》은 이런 잉여 노동의 현실에 대한 &lsquo;허구적 진실&rsquo;을 말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각자의 몫을 나눠 가진 것처럼 보이는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lsquo;공동체&rsquo;는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날마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돌려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한때 유행했던 KBS 《개그콘서트》의 &lt;마빡이&gt;처럼, 《무한도전》은 &lsquo;놀이&rsquo;를 통해 현실을 지배하는 &lsquo;철의 규율&rsquo;을 드러낸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lt;1박 2일&gt;의 복불복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비친다. &lt;1박 2일&gt;이 악동들의 장난처럼 보인다면, 《무한도전》은 세상의 진리에 눈감은 &lsquo;바보들의 배&rsquo;를 연상시킨다. 이 바보들의 배가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보들의 배에 대한 미셸 푸코<sup>Michel Foucault</sup>의 정의에 따르자면, 《무한도전》이라는 &lsquo;허구&rsquo;를 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적 실체가 엄연히 존재한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바보들의 배가 광인이라는 과잉의 존재들을 처리하기 위한 방책으로 등장한 것처럼, 《무한도전》 역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과잉의 존재들을 위해 고안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배에 승선한 출연자들이나 시청자들이 결코 &lsquo;병든 영혼&rsquo;을 가진 것은 아니다. 광인의 영혼은 결코 미치지 않았다. 이처럼 때늦은 21세기형 우신예찬을 《무한도전》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것은 결국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미치지 않은 &lsquo;합리적 광기&rsquo;이다.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lsquo;미친 합리성<sup>mad rationality</sup> &rsquo;을 뒤집어 놓은 판본처럼 보인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lsquo;미친 짓&rsquo;을 함으로써, 그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lsquo;자신들도 미쳤다는&rsquo; 미친 합리성의 혐의를 벗을 수 있다. 《무한도전》을 보는 우리 모두는 미치지 않았다. 광기라는 잉여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우리는 셈할 수 있는 삶의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배제와 포섭이라는 합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설명을 획득한다. 이렇게 공인된 합의를 통해 《무한도전》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에 출몰했던 바보들의 배처럼, 배제이면서 동시에 포섭의 전략을 드러낸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분리시켜서 바보들의 배에 태움으로써, 바보가 아닌 &lsquo;정상인들&rsquo;은 스펙터클을 얻을 수 있다. 정박한 바보들의 배를 구경하러 군중들이 몰려들었으니,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 한국의 시청자들도 TV 앞에 앉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의미에서 《무한도전》이 드러내는 &lsquo;합리적 광기&rsquo;는 흥미로운 문제의식을 던진다. 도대체 이런 광기는 무엇인가? 광인은 자신의 광기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광인의 영혼은 미치지 않았다고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영화 《헐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해방된 욕망은 그 해방을 즐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을 &lsquo;해방된 욕망&rsquo;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들은 그 해방된 욕망을 가장할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lsquo;미션&rsquo;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미션이 끝나면 또 다른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제임슨 본드처럼 미션을 무사히 마친 뒤에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다음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수 있게 해 주는 &lsquo;시청률&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이 폭로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처럼 이어질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노동 현실이다. 출연자들은 결코 일사불란하게 미션을 수행할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 미션 기계를 고장 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lsquo;방송 분량&rsquo;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논리는 &lsquo;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rsquo;을 암시한다. 칼 마르크스<sup>Karl Marx</sup>는 《자본<sup>Das Kapitla</sup>》에서 이렇게 말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자본이 잉여 노동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사회의 일부 사람들이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노동자는 ― 자유롭든 자유롭지 않든 ― 자신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 시간을 부가적으로 제공하여, 생산 수단의 소유자를 위한 생활 수단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hellip;&hellip;) 그런데 생산물의 교환 가치보다 사용 가치가 더 큰 중요성을 띠는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는 잉여 노동이 어느 정도 욕망의 크기에 따라 제한을 받는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잉여 노동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도 생산 그 자체의 성격에서 생겨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러므로 고대에도 교환 가치를 그 독립된 화폐 형태로 획득[즉 금&middot;은을 생산]하는 경우에는 놀랄 만한 과도 노동이 나타났다. 이런 경우에는 폭력적인 살인적 노동이 과도 노동의 공공연한 형태였다.<sup><b>칼 마르크스, 《자본 I-1》, 강신준 역, 도서출판 길, 2008년, 335쪽.</b></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자본주의 이전에도 잉여 노동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서 마르크스가 지적하는 것은 교환 가치를 &ldquo;독립된 화폐 형태로 획득&rdquo;하는 경우에 과도 노동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화폐 형태로 환원되는 교환 가치에 대한 욕망이 과도 노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잉여 노동에 대한 욕망은 생산의 성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렇게 잉여 노동은 화폐를 더욱 많이 획득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렇게 잉여 노동의 시간을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가 아니라 자본가의 권한이다. 자본가는 노동일을 무한히 늘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정의를 오늘날에는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전일화 이후에 이제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자본가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인화와 자기 관리라는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마저 자본가의 욕망을 가진 주체로 만들어 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은 어쨌든, 정해진 방송 분량을 &lsquo;생산&rsquo;해야 한다. 빨리 마친다고 해서 노동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한도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잉여 노동이다. &lt;1박 2일&gt;은 복불복이라는 경쟁적 구도를 도입해서 미션의 성격을 &lsquo;승자독식&rsquo;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로 무장한다. 시청자들은 이를 보면서 웃지만, 네모난 화면이 보여 주는 그 가상이 실제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의 정치성은 이렇게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출몰한다. 《무한도전》이나 &lt;1박 2일&gt;은 놀이와 게임으로 잉여 노동의 현실을 치환한다. 이 과정에서 삶은 유사 서바이벌 게임처럼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무한도전》뿐만 아니라, 최근 흥행하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우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lsquo;살아남기&rsquo;이다. 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잘 보여 주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을 살아남도록 &lsquo;선택&rsquo;해 주는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시청률을 좌지우지하는 시청자들이다. 이 시청자들은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로 TV 앞에 앉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본 축적을 위해 필수적인 교환의 관계가 여기에서 성립한다. 물론 이 교환의 관계는 실제적인 화폐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계가 상징적이기 때문에 《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더욱 의미심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은 실제로 화폐라는 매개 형식의 상징성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폐는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매개 형식이라는 것이 게오르크 지멜<sup>Georg Simmel</sup> 같은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하면 화폐는 인간 존재와 관련해서 폐기할 수 없는 언어와 같은 상징체계로 판명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실제적인 화폐 거래가 소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무한도전》이 보여 주는 것은 잉여 노동을 그만둘 수 없는 현실이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권한으로 잉여 노동 시간이 좌지우지된다고 했지만, 지금 현실에서 보면 그렇게 맞아 들어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오히려 오늘날은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잉여 노동 시간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확실히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가 빚어낸 &lsquo;자기 계발&rsquo; 또는 &lsquo;자기 관리&rsquo;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축적 체제를 잉여 노동에 대한 갈망을 중심으로 재정의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부르주아적 주체로 거듭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적 공동체에 대한 하나의 알레고리인 《무한도전》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역할이다. 주어진 몫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프로그램을 &lsquo;진행&rsquo;하는 것이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 또한 현실의 논리를 닮아 있다. 이들에게 미션은 곧 퍼포먼스이면서 또한 &lsquo;도전&rsquo;의 결과를 끊임없이 지연시켜서 프로그램을 완성해야 하는 &lsquo;노동&rsquo;이다. 그러나 이 노동은 마르크스가 전제했을 물질적 노동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무한도전》은 비물질적 노동의 시대에 잔류하고 있는 물질적 노동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4. 《무한도전》과 한국 사회</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예능 프로그램 따위는 현실의 문제와 관계없다는 생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무한도전》과 같은 프로그램에 대한 &lsquo;진지한&rsquo; 논의는 단순한 사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지적 허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 형식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면, &lsquo;지금 여기&rsquo;라는 삶의 터전에서 발생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엄연히 &lsquo;문화&rsquo;라는 것은 자연적이기보다는 인간적 활동의 산물이다. 여기에서 &lsquo;인간&rsquo;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에 따라서 다양한 이론적 설명들이 나올 수 있지만, 특정한 문화 형식을 현실의 논리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현상이나 징후로 본다는 점에서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주의적 관점에서 형식은 결국 내용의 논리라고 정의 할 수 있다. 문화 형식이 보여 주는 그 &lsquo;내용의 논리&rsquo;는 결코 총체적인 방식으로 주체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주체도 그 내용에 포함되어 있는 작용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주의처럼 경험을 초월한 완전한 &lsquo;백지 상태&rsquo;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문화 형식은 인식의 오염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확실히 문화 형식에 대한 분석에 적대적인 한국 사회의 분위기는 이런 경험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험주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지성주의를 떠받치는 유력한 논리 구조를 형성하는데, 한국 사회는 이런 철학의 이데올로기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lsquo;동네&rsquo;라는 생각이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므로 《무한도전》을 자본주의의 축적 체제나 욕망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것은 사소한 작업이라기보다 중요한 개입이다. 모든 문화 형식은 언어, 더 나아가서 코드라고 부르는 기호의 약속 체계에 따라 만들어지고 지속된다. 이것을 구조주의 기호학이 정의하는 것처럼 의미화 또는 상징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고, 라캉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것처럼 &lsquo;판타지의 발명&rsquo;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특정한 문화 형식이 대중의 지지를 획득하는 과정은 일정한 &lsquo;선험적 체계&rsquo;의 작용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약속의 체계에서 작동하는 논리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문화비평 행위에 내재한 목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한도전》에 대한 대중의 관심, 그리고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잉여의 욕망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광인들에게 그랬듯이, 정상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기 때문에 추방해 버린 것들이다. 이렇게 추방된 것들을 스펙터클로 만들어서 귀환시키는 &lsquo;멀쩡한 바보들&rsquo;이 바로 《무한도전》의 광대들이다. 이렇게 과거의 것은 언제나 현재성으로 귀환한다. 《무한도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극성은 도전에 실패한 자들, 또는 일시적으로 성공했지만, 언제 닥쳐올지 모를 그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위무의 판타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한도전》에 대한 문화비평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lsquo;뒷담화&rsquo;가 아니라, 이 형식의 논리를 지속시키는 집단적 욕망에 대한 이론적 개입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통해 문화 형식은 정상성의 재현으로 셈해지지 않는 잉여의 자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우리는 현실을 구성하는 자본의 작용과 정치적 헤게모니의 충돌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nbsp;<br /> &nbsp;<br /> <br />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이택광</strong><br /> 문화비평가. 경희대학교 대학원 영미문화전공 교수. 1999년 《씨네21》을 통해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 미술, 영화, 대중문화 전반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등을 펴냈다.&nbsp;<br /> &nbsp;<br /> <strong>김봉석</strong><br /> 영화평론가. 《씨네21》, 《한겨레》에서 기자로, 《브뤼트》에서 편집장으로 일했다. 영화, 만화, 장르소설 등 대중문화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권경우</strong><br /> 문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대학문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대학문화의 생성과 탈주》(공저),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운동》, 《아이돌》(공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정덕현</strong><br /> 대중문화평론가. 대중문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읽어 내는 작업들을 진행하는 중이다. 대중문화 블로그 &lsquo;더키앙 <a href="http://www.thekian.net">http://www.thekian.net</a>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에세이집 《대한민국 남자들의 숨은 마흔 찾기》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황진미</strong><br /> 원래는 의사로, 진단검사의학 전문의다. 2002년 《씨네21》을 통해 영화평론가로 데뷔, 현재 《한겨레》, 《한겨레21》, 《시사저널》 등 여러 매체에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저로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 《의학과 문학》, 《올드보이 백서》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김종갑</strong><br /> 건국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문화철학에 관심이 많고 몸문화연구소 소장이다. 《타자로서의 몸, 몸의 공동체》, 《근대적 몸과 탈근대적 증상》, 《그로테스크의 몸》(공저), 《내 몸을 찾습니다》(공저)를 비롯해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김소연</strong><br /> 영상예술학과 박사과정 졸업, 연세대학교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실재의 죽음》, 《환상의 지도》 등의 저서와 《삐딱하게 보기》,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등의 역서가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반이정</strong><br />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IN》, 《씨네 21》 등에 미술평론과 시평을 고정 연재한다. 교통방송, 교육방송의 미술 패널로 출연했다. 서울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 출강 중이며, 자전거 7대를 소장한 자전거마니아다. 《새빨간 미술의 고백》을 비롯해 여러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거처는 <a href="http://www.dogstylist.com">www.dogstylist.com</a>이다.&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정여울</strong><br /> 독문학을 전공했고,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영화와 드라마,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공저), 《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 《시네필 다이어리 1, 2》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이재원</strong><br />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통번역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텍스트 언어학, 기호학 그리고 수사학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16 오전 10:01:00구병모의 ‘방주로 오세요’<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1_%EB%B0%A9%EC%A3%BC%EB%A1%9C%20%EC%98%A4%EC%84%B8%EC%9A%94/%EB%B0%A9%EC%A3%BC%EB%A1%9C%20%EC%98%A4%EC%84%B8%EC%9A%94_%ED%91%9C%EC%A7%8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락치의 조건</span></span></strong></p> <br /> <br /> <br /> &ldquo;일 학년 C반 이마노. 육 교시 끝나고 학생회실로 오세요.&rdquo;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되고서 스피커는 침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무리 짚어봐도 자신이 누군가에게 호출당할 일이 없다. 입학 정원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소위 &lsquo;지상의 아이들&rsquo; 가운데 수석으로 들어왔다거나, 그 반대로 누군가가 입학을 포기한 자리에 보결로 턱걸이했다면 눈에 띌 법도 했지만 합격자 가운데 마노는 루비와 나란히 꼭 중간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 넓은 학교 안에 학생회실은 어디 붙어 있나.</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반의 정원은 25명, 각 학년의 반은 A부터 Z까지 총 26개. 반 구별은 출결 관리에나 쓰이는 것으로 별 의미가 없고, 학생들은 120개 이상의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정규 과목과 선택 과목 수업을 들었다. 한 학년의 정원 650명 중 10퍼센트인 65명이 지상 출신 전형자들이었는데 올해 비율은 여자 36명, 남자 29명이었다. 쌍둥이가 동시에 이곳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처음 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확률적으로도 드물다는 사실 외에는 특이 사항이 그다지 없었다. 입학식이 끝난 지 이틀째일 뿐인데 누가 왜 부르는 걸까?</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기숙생들은 적응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입학식 1개월 전부터 방주시로 이주를 마치고 각종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높이까지 올라오는 데에 쓰이는 초대형 엘리베이터 전용 건물부터 압도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동시대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서 제도나 문물은 지상에 있을 때와 형식 및 외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상에는 없는 예측 불허의 첨단 시스템이나 문명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본적인 데서 기능이 더 발전되고 규모가 커지거나 조금 더 세련되거나 옵션이 붙었다. 마노와 루비같이 이미 한번 와본 적 있는 아이들은 어지간히 웅장하고 화려한 정도로는 놀라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도 옛날엔 몰랐다가(혹은 모르는 척했다가) 지금 와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 절대 다수가 보유한 상상을 초월하는 부였는데, 이것은 그 자체가 특징이자 다른 모든 특징들의 이유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적응해야 할 진짜 대상은 이곳이 자랑하는 절대적인 높이였다. 체감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수치의 높이가 이곳 사물들에 공연히 신비성을 부여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규모 때문에, 지상에도 분명 있을 법한 것이 단지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고급스러워 보였다. 공들여 만든 도시의 요소요소는 각각 한 편의 완결성을 가진 작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돔과 안전거리를 유지하도록 이곳 건물들은 최대 30층이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어서 각 건물의 높이가 심리적 부담을 안겨줄 만큼은 못 되었다. 다만 장소가 주는 일종의 착시 현상으로, 딛고 선 발아래로 뻗어 있는 1200미터에 대한 상상이 단조로운 수직과 수평을 무한 확장하여 무수한 입방체를 확대 재생산했다. 지상에서 온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 시각 자극에 저마다의 더듬이를 최대한 활성화시키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바닥에는 공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모자람 없는 침전물이 깔려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노도 속이 울렁거렸다. 옛날에 3박 4일간 머무른 곳이었음에도, 처음 와보는 것처럼 또는 자기가 못 올 데를 온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너무 오랜만이거나 그사이 도시가 더욱 찬란해졌거나 일&nbsp; 텐데,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사막에 던져놓아도 선인장이나 낙타 수준의 적응력을 자랑할 루비 같은 아이 한둘을 제외하고는, 합격생들 가운데 대부분이 마노와 같았다. 입학 한 달 전부터 합격생들을 불러 모아 적응 훈련을 시키는 이유는 바로 이 높이였다. 문명에 대한 적응 또는 오심(惡心)에의 적응.</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개월 전.</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란히 합격 통지를 받은 마노와 루비는 짐을 꾸리고 있었다. 소위 &lsquo;지상의 아이들&rsquo;은 옛날 교감이 약속했던 대로 학비를 면제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등록금과 수업료만이었고, 방주고에서만 사용하는 전용 전자 교재 대금과 교복을 비롯해서 다달이 드는 기숙사 비용은 일시불로 완납해야 하기에 드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엄마 아빠는 입학 준비로 적금 하나와 보험 두 개를 해약한 날, 두 남매의 휴대전화에 월 사용 한도가 정해진 포인트 결제 기능을 입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친구들 사귀면 먹는 거나 사복이나 해서 로데오 거리에 들락거릴 일이 있겠지. 아껴 써. 이번 달 사용 한도에 못 미치면 다음 달로 이월되게 조정해놓았으니까, 안 쓰고 모아놨다가 정말 필요한 데다 몰아 써도 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루비가 열여섯 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개인 식별 정보가 저장된 투명한 홀로그램이 화면에 떠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게 거기 올라가서도 되나?&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전 지구에서 다 돼. 사막이나 밀림, 극지방은 빼고. 휴대전화 잃어버리면 바로 연락해, 홀로그램 정보를 변경해야 하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숙사 비용 다음으로 고가는 교복 대금이었다. 지상의 아이들은 방주시에 전원 입주한 뒤 지도 교사의 인솔에 따라 단체로 교복을 맞추게 되어 있었다. 방주고의 교복 투피스는 지상에서 유통되지 않는 특별 원단으로 제작된다고 했다. 자주 세탁하기에 기본 2장을 구비해야 하는 드레스 셔츠만 해도 유기농 60수 트윌 면에 앞가슴의 장식 자수는 수작업이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고가라면 디자이너의 이름값이라고 남매는 짐작하며, 적어도 이걸 입고 졸업할 때까지는 더 이상 키가 자라면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그게 앞으로 너희들의 일상이 될 거라고―아니 되어야 한다고 했다. 새 생활로의 부화는 그렇게 감가상각비의 계산에서 시작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곳에 처음 올라온 날, 지상에서 온 합격생들은 &lsquo;데칼로그관&rsquo;이라는 이름이 붙은 12층짜리 기숙사 건물에 들어섰다. 시차도 없는데 장거리 비행이라도 마친 듯, 모두가 각자의 트렁크를 끌고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로비에 집합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체 규율이 생명인 기숙사라는 장소를 생각해볼 때 더없이 어울리는 숙소 이름이었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을 복제한 경건하고 역동적인 그림이 로비 벽면에서 아이들을 맞이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내용의 그림 속 인물들은 엄숙하거나 겁에 질린 표정이었고 아이들은 공연히 위축되었다. 그때 사감 교사 대표가 앞으로 나와서 입실 요령을 설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합격증 확인 받으셨고 지문 등록 다 하셨지요? 지금부터 설명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그 무거운 트렁크들 갖고 쩔쩔매는데, 방에 못 들어가요. 여기 주목! 우리가 지금 모여 있는 일 층은 보시다시피 기숙사 로비예요. 관리실하고 사감실 있고, 자세한 구조랑 시설들은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보시면 이 층부터 육 층까지 여학생들 방입니다. 칠 층은 식당하고 매점이나 세탁실, 운동 센터 같은 편의 시설 있고요, 팔 층부터 십이 층까지 남학생들 방입니다. 사감 선생님들 따라 각각 줄 맞춰서 가세요. 남학생들은 동쪽 엘리베이터 두 개, 여학생들은 서쪽 엘리베이터 두 개. 문 옆 인식기에 자기 지문을 대지 않고 그냥 타면, 탄 사람 머릿수하고 인식한 지문 개수하고 맞지 않아서 문이 안 닫힙니다. 남학생 쪽 엘리베이터는 이 층부터 육 층까지 안 서요. 여학생 쪽 엘리베이터는 칠 층 위로는 못 올라갑니다. 잘 알아두셔야 해요. 남자가 서쪽 엘리베이터에 몰래 올라타봤자, 지문으로 신분을 확인하니까 문이 안 닫힌단 말예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각 층에 방은 열네 개씩 있고요, 같은 학년 둘이서 한 방을 씁니다. 이, 삼 학년 선배들하고는 식사 시간이나 휴게실,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게 되겠죠. 자기 학년 중에 기숙사 쓰는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얼굴들을 오늘내일 사이로 싹 다 익혀놓는 게 좋아요. 그러고서 기숙사 생활 중에 모르는 얼굴이다, 처음 본다, 이런 사람하고 마주치면 아, 이 사람은 선배구나. 그냥 바로 꾸벅 인사하세요. 여기 인사한다고 생뚱맞게 쳐다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기분 좋게 받아줍니다. 게다가 지금 다들 타향살이 떠나온 사람들이잖아요. 적은 인원이 이 초호화 시설 안에 살아가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이좋게 지내지 않으면 힘들어요. 어쨌든 같은 층에서도 홀수로 남은 사람은 방을 혼자 쓰기도 하고, 남는 방들은 간혹 방에 보수 문제가 생겼을 때 옮겨 가는 예비용으로 쓰입니다. 아시겠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부터 여학생들은 이쪽 여자 사감 선생님 따라 이동하시면 됩니다. 각 방문 앞에 자기 이름 적혀 있는 데로 들어가면 돼요. 누가 자기 룸메이트인지 가보면 바로 알 거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루비가 손을 들었다. 루비는 조금 전에 자기 휴대전화를 꺼내느라고 트렁크를 여닫다가 다쳐서 손가락에 밴드에이드를 감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선생님, 조금 전에 엄지손가락을 다친 사람은 어떻게 하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양손을 다 다쳤나요? 양쪽 엄지 지문을 등록했을 텐데.&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네. 오른손만인데요. 엘리베이터 탈 때는 어느 쪽을 대나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오른손 왼손 어느 쪽이든 양손 등록만 했으면 상관이 없어요. 간혹 양쪽 엄지가 다 다친 사람은 사감 선생님한테 따로 말해서 둘째손가락을 등록하면 됩니다. 열 손가락 다 다친 사람들은 별도 인식 장치를 대여해주니까, 다친 사람 있으면 지금 손들고 말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루비 외에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신입생들은 남녀로 갈려 각각 2열 종대로 서서 사감을 따라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짐을 풀자마자 아이들은 같은 방을 쓰는 친구와 눈인사 외에는 나눌 시간이 없었다. 즉시 옷장에 들어 있는 지정된 추리닝을 입었다. 단체 추리닝이라니 얼마나 끔찍한 옷일까 루비는 생각했으나, 프랑스 어느 대학에서 왔다는 의상학과 교수가 디자인한 거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실물을 보자 원단의 질은 기본이고 몸에 밀착되어 이루는 라인이나 파스텔 톤의 색깔이 생각만큼 혐오스럽지 않게 느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각자 휴대전화를 갖고 식당에 모여 기숙사 생활의 규칙을 들었고, 지시에 따라 휴대전화에 다운받은 학교 어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켜서 학교 시설물 안내를 보고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학교 부지 전체를 둘러싸면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으로 기다란 타원이 그려지는데, 그 안에 고등학교 말고도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함께 있었다. 타원의 총넓이는 약 560제곱미터. 도시의 총면적이 39.5제곱킬로미터라는 점에 비추어 학교 부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다. 부속 유치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 이중 고등학교에만 지상의 아이들이 올 수 있었는데 앞으로 10년 안팎 성과를 보아 &lsquo;지상의 아이들&rsquo; 전형을 중학교까지 확대할 거라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밖에 히스기야 관(체육관), 호산나 관(대강당), 오병이어 당(식당)을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이 있는 르호보암 관(학생회관), 특별활동이나 특별수업 및 우수한 인재들의 개인 연구실들로 이용되는 아디엘 관(스터디센터), 방주시 중앙도서관의 규모에 못지않은 교내 도서관인 코헬레트 관과 어린이 전용 도서관. 그리고 중학교 건물에 이웃한 이곳 기숙사. 앞으로 특별 수업이나 연구 용도의 스터디센터가 두어 채 정도 더 지어질 거라고 한다. 그 밖에 &lsquo;마라나타 길&rsquo; &lsquo;누룩의 길&rsquo; &lsquo;겨자씨의 길&rsquo; 등 성경에서 이름을 딴 각종 산책로와 공터 등에 아름다운 조경이 갖추어져 있다. 필요한 모든 문화가 다 갖추어져서 기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차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저녁 시간이었다. 기숙사에서의 첫번째 식사로 저녁 메뉴는 소 안심 스테이크 반쪽과 시금치 퓌레를 중심으로 하여, 공동의 식탁에는 올리브유에 발사믹 식초를 첨가한 소스를 찍어 먹는 빵들과 오리엔탈 드레싱 샐러드가 놓여 있었고, 후식으로는 에푸아스 치즈 한 조각과 얼 그레이 티가 나왔다. 아이들은 각 방에 딸려 있는 욕실에서 교대로 목욕을 마치고 점호를 받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양 벽에 붙은 두 개의 침대에 나눠 눕고서야 마노는 같은 방을 쓰는 배두인이라는 친구와 제대로 인사를 할 시간이 생겼지만, 그 녀석은 가만 보면 혼자서 뜻 모를 진언 같은 걸 중얼거리는 일이 많아서 되도록 신경 쓰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두인이는 불경을 한 구절씩 읽고 외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두인이 이런 철저한 미션스쿨에 입학이 허가된 것은 우수한 성적 외에도 &lsquo;우리는 만인에 대해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rsquo;를 광고하기 위함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간밤에 잠 못 이룬 후유증을 얼굴에 주렁주렁 달고 식당에 모였다. 아침은 일본식으로, 채소와 된장을 넣고 끓인 조우스이라는 죽에 굴을 넣은 것과 작은 꽁치구이 한 마리, 매실 조림과 낫토 등 네 가지 반찬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양식&middot;한식&middot;일식&middot;중식 전문가들이 학생들의 두뇌 회전과 시간별 신체 상태를 고려한 최적의 식단을 구성한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맛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뒤숭숭한 기분으로 마친 아침 식사 후 인솔 교사를 따라 히스기야 관으로 단체 이동했다. 로데오 거리에서도 최고급 원단과 섬세한 바느질로 손꼽히는 부티크에서 디자이너와 어시스턴트 두 명이 출장을 나와 아이들의 교복 사이즈를 재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교복 맞추기가 끝난 뒤 아이들은 학교 시설 곳곳을 안내받으며 각 건물의 상세한 역사 안내와 이용 교육을 받았다. 코헬레트 관을 둘러본 뒤에는 사감 대표의 안내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좀더 폭넓은 공부와 수준 높은 연구를 위해 방주시 중앙도서관으로 가서 대출증을 등록하기 원하는 사람은 따로 앞에 모이기 바랍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방송에 따라 앞에 모인 이들은 65명 가운데 갑작스러운 맹장염 때문에 에녹중앙병원으로 실려간 한 명을 제외한 모두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린 시절 3박 4일간 스쳐 갔을 때 마노는 외부인이며 구경꾼이었다. 이번엔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 이곳 시민의 품위와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지상의 합격생들은 오리엔테이션 기간 동안 방주시 곳곳을 거의 하루에 한 곳씩 들러서 그곳을 이용하는 요령, 이용 자격, 일상생활의 관습이나 물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아이들은 가끔 자신들이 도시라는 인체를 정밀 해부 실습하는 중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때로, 원시인이나 다른 행성의 아이들이 지구 문명 세계로 와 철저하게 교육받는 듯한 모욕감까지 느꼈다. 아니, 뭐 이런 사소한 것까지? 우리가 이거 처음 보는 줄 아나 봐. 이런 것쯤은 지상에도 다 있거든요! 이런 불평도 얼굴에 드러났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그 어떤 날도 심리상담 날처럼 의아하고 수상쩍지는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도 방송 안내에 따라 아디엘 관 7층에 있는 심리상담연구실로 옮겨 간 아이들은, 중학교 시절의 한 뼘짜리 보건실만 한 상담실을 생각하고 갔다가 문밖에서 저마다 주춤거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상담실이라면 보통 전공과 담당 교과목이 따로 있는 교사가 겸직 발령을 받아서 그 자리가 대개 비어 있는 방이었으며, 때로는 보건실과 함께 교사들의 뒷담화 장소로 쓰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특별 지도 대상자인 문제아들이 두들겨 맞거나, 교무실 구석 여유 공간이 모자라 끌려온 몇몇 아이들이 단체로 기합을 받는 일은 있어도 진정한 상담이 이루어지는 곳은 아니었다. 때문에 당최 상담실에서 연구는 무슨 얼어 죽을 연구를 한다는 건지, 코웃음 치면서 따라간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지금 온 심리상담연구실은 7층 절반을 차지할 만큼 컸다. 방의 크기와 연구 효율 및 성과와의 정확한 상관관계는 증명된 바 없지만, 그 안에서 형식적인 상담 이상의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만은 짐작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들어오는 순서 상관없이 하나씩 자리 잡아 앉으세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흰 가운을 입은 심리상담연구실의 담당 교사가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lsquo;실험심리학 박사&rsquo;라는 직책과 이름이 두 줄로 적힌 명찰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깨끗하고 빳빳한 가운과 연구실에 비치된 기자재들이 주는 전문적인 분위기에 조금씩 호기심이 생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각자 자리에 앉으시면 투명한 책상 아래로 모니터가 보일 겁니다. 오른쪽에는 헤드폰이 걸려 있고요. 이 헤드폰을 먼저 씁니다. 아니 거기, 지금 말고요. 지금은 설명 먼저 듣고, 제가 쓰라고 하면 쓰세요. 헤드폰을 쓴 다음에 먼저 화면에 나타나는 지시대로 자기 합격 번호하고 이름을 입력하세요. 그다음 화면이 넘어가면 헤드폰에서는 음악이 나올 거고요, 화면에서는&hellip;&hellip; 다들 한 번쯤은 이름 들어봤을 거예요. 로르샤흐 검사하고 착시 그림 같은 거, 뫼비우스의 띠를 응용한 에셔M. Escher의 그림들. 다 본 적 있지요? 그런 그림들이 계속해서 나올 거예요. 그걸 그냥 집중해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헤드폰 상단 안쪽에 부착된 뇌파 감지기가 여러분의 현재 상태와 정신적 피로도를 비롯한 심리 전체를 해석하고 그 결과를 저한테 전송해줄 거예요. 그림 보고 음악 들으면서 뭐 애써 이것저것 생각하려고 용쓰지 않아도 되고 그냥 멍하니 보면 그만입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조금씩 잠이 올 텐데 그대로 의자에 기대서 눈 붙여버려요. 여러분이 잠들면 수면 상태에서&hellip;&hellip; 뭐라고 설명해야 다들 쉽게 알아들으려나. 보통 꿈으로 많이 나타나는 무의식 가운데 어떤 것들, 자기가 원하는 것, 기억, 이런 것들이 산출 및 종합 분석돼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지요? 한마디로 오늘 이 시간 면대면 상담은 없습니다. 이게 다예요. 그럼 질문 있는 사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박사는 아이들 속에서 올라온 손을 보고 고갯짓했다. 마노는 자기 옆자리에 앉은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야생 들쥐한테 뜯어 먹히다 만 듯 아무렇게나 들쭉날쭉하게 친 짧은 머리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표정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는데, 입을 열자 목소리로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러니까 저희들 개개인의 욕망인지 기억인지를 무작위로 캐내 가지고 상담 자료로 쓰겠다는 얘기 같은데요. 사람을 직접 만나보고 얘기해봐야 그 사람이 뭘 생각하는구나 어떤 사람이구나 아는 거지, 상담의 주요 요소인 라포르 형성을 배제하고 이런 식으로 굳이 기계 장치를 써가면서 전원의 심리를 체크하는 게&hellip;&hellip; 효율적이긴 하겠지만 썩 유쾌한 방법은 아니잖아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몇 초 사이 마노는 이상한 눈치를 챘다. 티나지 않게 애쓰지만 분명 동요하다가 곧 제자리를 잡는 박사의 눈동자와, 3시 방향 벽에 붙어 서 있던 사감 대표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무언가를 끼적거리는 모습이 묘하게 관련 있어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노는 &lsquo;너 찍혔어, 인마&rsquo;라는 뜻으로 다시 옆자리를 돌아보았는데, 그 아이는 그런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박사는 사감 대표와 오묘한 눈빛을 교환하고서 대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 그래요.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뭔가 시험받는 듯해서 유쾌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 한번 생각해볼까요. 지금 질문한 학생은 설탕이 달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맛을 보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러면 불이 뜨겁다는 걸 어떻게 알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야 만져보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몇 도나 되는지 알아보려면 살가죽이 다 벗어질 때까지 만져봐도 모자라겠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hellip;&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렇게 인간이 감각만으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건 정확한 데이터를 얻는 데 실패할 확률도 높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불이 몇 도나 되는지를 알아보려면, 꼭 온도를 재는 도구가 필요해요. 사람은 도구를 만들지만 도구는 사람 생활을 지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요. 인간 본연의 감수성과 정서를 존중하는 우리 철학적 관습 때문에 처음에는 익숙지 않겠지만, 믿고 맡겨주시면 반드시 정확하고 공정한 데이터를 얻어 활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말해둘 것은 이 데이터가 여러분에게 어떤 불이익을 주는 용도로 쓰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또 여러분의 데이터를 옆자리 친구도 알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한다는 거예요. 여러분을 가르치고 관리해야 하는 선생님들은 물론 필요에 따라 이 데이터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학생에게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도움을 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의 담임 선생님조차도 이 데이터를 열람하기 위해서는 세 단계의 보안과 합당성에 대한 검토를 거칠 것입니다. 이후에도 선생님이 이 데이터를 외부로 복사하거나 유출하는 일이 절대로 있을 수 없도록 감독 관리에 만전을 기할 거고요. 마지막으로, 그런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지만 이 데이터를 토대로 하기는 하되 검사에서 미처 발견되지 않은 개개인의 특성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학기 중에 면대면 개별 상담은 꾸준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금은 원하는 대답이 되었는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질문자는 썩 만족스러운 눈치는 아닌 듯했지만, 박사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꼭 확실한 조치와 반성을 기대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행위 자체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듯, 다른 말 없이 이어지는 지시대로 헤드폰을 머리에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노도 헤드폰을 쓰면서 상대가 눈치 못 채게 곁눈질했다. 잠깐 드러난 옆얼굴은 뜻밖에도 작고 지나치게 하얘서 헤모글로빈이 부족해 보였다. 곧바로 턱을 괴었기 때문에 얼굴이 가려졌지만, 마노는 스쳐 지나가듯이 본 속눈썹이 무척 길다고 느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화면에 합격 번호를 입력하고 &lsquo;다음&rsquo;을 터치하자, 인적사항 관리에 대한 안내문에 동의하는 과정을 거친 뒤 첫번째 그림이 나왔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졸음이 모래 폭풍처럼 덮쳐오기 시작했다. 박사가 잠을 억지로 참을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마노는 그대로 졸음에 몸을 맡겼고, 다른 아이들도 정도는 조금씩 다르지만 사정은 비슷해 보였다. 긴장을 이완시켜 수면을 유도하는 나른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유사(流沙)같은 잠에 빠져드는데, 꿈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에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노가 이 도시로 다시 올 마음을 먹게 한 그 아이.</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저는 여기 사람이에요.&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아이를 언젠가는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공부에 결정적인 추진력이 된 건 사실이었다. 루비는 마노가 불가능해 보이는 방주시 입성에 난데없이 열의를 보이자, 동생이 하는 걸 자신이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며 따라 도전했다. 그러니까 두 아이를 방주시로 끌어올린 건 이름도 모르는 시나이 광장의 아이였다. 마노의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그 아이가 자신들과 동갑이거나 많아야 한두 살쯤 더 먹었을 터였는데, 이름 석 자 없더라도 39.5제곱킬로미터라는 제한된 범위와 열일곱에서 스물 사이 연령대의 여자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활용하여 이러한 사람 찾는다고 한마디만 올리면 당장 찾는 것도 시간문제겠지만 그래서는 큰 의미가 없었고, 별로 좋은 일을 계기로 만난 것도 아닌 만큼 만천하에 알리는 일은 그 아이와의 추억을 훼손시키는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노는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은색 펜던트를 추리닝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 어느덧 꽤 깊이 잠들었다. 감은 눈앞에는 그때의 일이 연속 스틸처럼 떠올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광장에서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그때까지도 단추에 걸려 하늘거리던 머리카락 한 뭉치. 마노가 멍하니 셔츠를 부여잡고 선 모습을 보다가 옷을 빼앗으며 루비가 하던 말.</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내놔봐, 답답해가지고.&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여행지에서 얻는 물건과 인연에는 무언가 특별한 뜻이 있거나 그것 자체가 미래에 대한 일종의 예지라는 미신적이고 낭만적인 믿음이 있었던 루비는, 머리카락을 둥글게 말아 이리저리 꼬더니 리본 모양으로 매듭을 지어 놓았다. 머리카락으로 장식을 만들었다는 데서 비롯되는 원초적이면서 불가항력인 섬뜩함을 그 부드러운 모양이 잊게 했다. 루비는 마침 광장 가판대에서 사온 은색 펜던트 안에 그걸 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아니, 그렇게까진 안 바랐는데. 이런 것도 있어서.&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노는 이름 모를 소녀가 준 레몬색 레이스 달린 손수건을 흔들어 보였다. 피를 찬물로 곧바로 지우지 못해서 힘주어 세탁했음에도 손수건에는 희미하게 얼룩이 남아 있었다. 루비는 마노의 목에 펜던트를 걸어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엄마가 우리더러 다시 방주시로 입성하라고 그런 건 진심일 거고, 혹시 알아, 이걸 부적으로 삼아두면 언젠가 다시 그 아이를 만날지도 모르지. 너 딱 보면 내가 모를 것 같아? 그 아이 보고 그냥 한눈에 뻑갔으면서. 굳이 그걸 뒤쫓아가서 뭐라고 말했는지 나한테도 결국 안 가르쳐주냐. 퍽도 좋을 때다, 순진해빠져서는.&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본문 &lsquo;프락치의 조건&rsquo; 편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strong><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78"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1_%EB%B0%A9%EC%A3%BC%EB%A1%9C%20%EC%98%A4%EC%84%B8%EC%9A%94/%EA%B5%AC%EB%B3%91%EB%AA%A8_210.jpg" /><strong>구병모</strong><br /> 2009년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nbsp; 장편소설 『위저드 베이커리』 『아가미』 『방주로 오세요』, 소설집 『고의는 아니지만』이 있다.</p>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15 오후 12:18:00클라인크넥트의 ‘세계를 팔아버린 남자’<img alt="" width="600" height="8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0_%EC%84%B8%EA%B3%84%EB%A5%BC%20%ED%8C%94%EC%95%84%EB%B2%84%EB%A6%B0%20%EB%82%A8%EC%9E%90/%EC%84%B8%EA%B3%84%EB%A5%BC%ED%8C%94%EC%95%84%EB%B2%84%EB%A6%B0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chapter1</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잊혀 버린 뿌리</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strong>새 대통령의 고향</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딕슨 시 전체가 한껏 숨을 죽인 것 같았다. 시민 수천 명이 도시 중심부의 연단 앞에 모여 있었다. 지역 상인, 사료 가게 점원, 곡물 창고에서 나오는 가루를 뒤집어쓴 건장한 남자들, 록 강 하류 쪽에 있는 철강 공장에서 일하는 땀투성이 노동자들이 눈에 띄었다. 시골에서 픽업트럭에 몸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큰 탑같이 생긴 곡물 창고와 옥수수 밭을 지나고 딕슨 시 사방에 끝도 없이 뻗어 있는 아담한 농가들까지 지나고 나서야 시내로 통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세계의 중요한 사건과는 거리가 먼 지방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고향 사람인 헤너핀 애버뉴의 더치 레이건(더치는 레이건의 아버지가 갓난아이인 아들이 뚱뚱한 &lsquo;네덜란드 사람&rsquo; 같다며 붙여 준 별명이다. ― 옮긴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하는 축제를 구경할 기회를 놓칠 사람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치가 194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고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나서서 레이건에 대한 기억을 늘어놓았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lsquo;레이건 사촌&rsquo;이라고 적힌 작은 현수막을 목에 건 사람도 몇 십 명 있었다. 노점상들은 군중 사이를 헤쳐 가며 네덜란드식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사과 파이를 팔았다. 노인들은 그 위대한 사람과 우연히 마주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로웰 공원에서 인명 구조원을 하던 시절에 레이건이 록 강의 급류에 휘말린 사람들을 휙 낚아채서 구했다는 이야기에서, 1941년에 딕슨 극장에서 자기가 출연한 영화 &lt;국제 비행대대<sup>International Squadron</sup>&gt;가 특별 개봉했을 때 젊은 희극배우였던 밥 호프를 비롯해 할리우드 명사들을 대거 대동하고 왔다는 이야기를 거쳐, 1950년에 또 다른 영화의 특별 개봉 때 찾아와서 흰색 팔로미노 말을 타고 걸리나 애버뉴에서 행진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300" height="4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80_%EC%84%B8%EA%B3%84%EB%A5%BC%20%ED%8C%94%EC%95%84%EB%B2%84%EB%A6%B0%20%EB%82%A8%EC%9E%90/%EB%8F%84%EB%84%90%EB%93%9C%20%EB%A0%88%EC%9D%B4%EA%B1%B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딕슨 사람들은 훨씬 더 거대한 무대에서 레이건의 승리를 축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딕슨고등학교 밴드가 횃불을 치켜든 채 로널드 레이건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은 다리를 건너 행진하고 축하객 수천 명이 컨트리앤드웨스턴 밴드와 트웰브벨스 청소년 합창단의 가락에 맞춰 춤추고 난 뒤 대단원의 막이 올랐다. 1980년 11월의 첫 번째 화요일 저녁 7시 15분에 NBC방송 앵커가 확성기를 통해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이 예상된다고 발표했다. 군중이 환성을 질러 대는 가운데 록 강 상공이 불꽃으로 덮이고 공화당과 민주당 당사에서는 공짜 맥주가 넘쳐 나기 시작했다. 『딕슨이브닝텔레그래프<sup>Dixon Evening Telegraph</sup>』는 재빨리 호외를 발행했다. 훗날 이 신문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레이건의 승리를 머리기사로 다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말을 타고 헤너핀 애버뉴를 달그락달그락 활보하는 카우보이 두 명의 익살맞은 행동 때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두운 11월의 하늘을 수놓는 불꽃에 윤곽만 비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오는 초라한 말의 안장에는 사람은 없고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ldquo;카터는 안장에서 내려와라.&rdquo; 이런 글귀가 눈에 띄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만 해도 딕슨 사람들이 왜 카터한테 적개심을 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급등하는 인플레이션과 석유파동, 머나먼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벌어지는 사태 등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전 10년이 딕슨에 나쁜 시절은 아니었다.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고향에 붙박이로 산 조지아 주 플레인스<sup>Plains</sup>의 땅콩 농사꾼인 카터가 오히려 &lsquo;인민주의자&rsquo;인 척하는 후임자보다 보통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다. 관습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농업지대인 중서부의 대부분 지역에서 1970년대에 다시 번영의 기미가 보였다. 인구 유출 속도가 줄어들고 농업과 제조업이 새로운 소생 징후를 나타냈다. 딕슨도 이 좋은 시절을 누렸다.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딕슨의 가구 소득 중앙값은 1970년대에 9퍼센트 늘었고, 제조업 고용 노동인구의 비율도 18퍼센트에서 26퍼센트로 상승했다. 딕슨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제조업 일자리를 구하는 것만이 번듯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딕슨 인근인 스털링<sup>Sterling</sup>에 있는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 사는 지역 최대의 고용주로서 이 시절에 분주하게 돌아갔다. 직원이 5000명이었다. 대학 졸업장을 가진 사람의 수도 뚜렷하게 늘어났다. 소크밸리커뮤니티칼리지에서 딸 수 있는 준학사가 아니라 학사 학위가 있는 사람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역 농민들은 아마 불평이 없었을 것이다. 1960년대의 힘든 시기를 지난 뒤, 무역 장벽이 완화되고 소련이 미국산 곡물 수입에 의존하게 되자 1970년대에는 농가 소득과 상품 가격에 호황이 찾아왔다. 연방 정부와 은행들이 좋은 조건으로 신용을 제공하면서 농지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81년 1월에 유가증권을 제외한 토지, 가축, 기계, 가정용 가구, 곡물 등 농민들의 실물 자산 평가액은 1조 500억 달러로 그보다 10년 전의 3020억 달러에 비해 크게 늘었다. 딕슨 주변의 농촌에서는 땅 투기와 곡물 수확으로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가축을 팔아 버렸다. 돼지와 소들이 농촌 풍경에서 사라지기 시작했고, 엄청나게 넓은 옥수수 밭과 콩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해마다 가을이면 트럭이 옥수수와 콩을 싣고 미시시피 강에서 대기하는 바지선으로 달려갔다. 자작농의 성공은 딕슨 상인들의 성공이기도 했다. 대다수 상인들이 사료와 비료&middot;농기구&middot;식품&middot;직물을 취급하는데, 다시 번영을 구가하는 농민들이 이런 상품을 게걸스레 사들였기 때문이다. 상업 지구 한가운데서 가파른 언덕바지로 바뀌다가 딕슨의 유명한 아치를 지나 록 강으로 곤두박질치는 걸리나 애버뉴는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딕슨 주변은 보수적인 지역이었고, 현지인들로서는 지역 출신 탕아가 내놓는 경제 만병통치약의 효능을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 탕아는 오만한 연방 정부가 미국이 소생하는 길을 막고 있다고 설파하는 중이었다. 멀리 떨어진 워싱턴의 관료들을 본능적으로 불신하던 농민들은 &lsquo;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연방 정부의 농업 정책&rsquo;을 일신하겠다는 레이건의 약속에 환호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레이건이 자기네 같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희생시키는 환경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lsquo;복지 수급자 여왕&rsquo;(조작이나 편법을 통해 과도한 사회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196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선정적인 기사가 등장했는데, 1976년에 레이건이 대선 경선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한 뒤로 민주당 복지 정책의 허점을 까발리는 표어가 되었다. ― 옮긴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은 열심히 일하는 딕슨 사람들에게 더없이 공정한 조치로 보였다. 물론 이것이 딕슨을 레이건 진영으로 몰고 가 레이건이 5755표를 얻은 반면, 카터는 1445표만 얻게 한 유일한 쟁점은 아니다. 동향 출신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흥분도 작용했다. 또 관광객이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도 지역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딕슨이브닝텔레그래프』의 호외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 외곽의 고속도로는 이제 &lsquo;아무 데로도 통하지 않는 길&rsquo;이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쓰나미처럼 닥친 불황</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점은 레이건은 결코 제퍼슨 스미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lt;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gt;에서 지미 스튜어트<sup>Jimmy Stewart</sup>가 분한 사람 말이다. 레이건은 특권 집단에 매수된 워싱턴에서 대중을 대변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레이건은 오래전부터 특권 집단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를 정치권으로 이끈 이가 바로 영화사 MCA의 거물, 제너럴일렉트릭의 중역, 미국 남부 선벨트 지대의 백만장자 들이었다. 스미스 씨와 비슷한, 레이건의 대중적인 페르소나는 정치 연극의 교묘한 소품이었을 뿐이다. 건전한 소도시 딕슨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배경일 뿐이었다. 딕슨의 성실한 사람들이 왜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레이건 당선 축하연이 끝나고 바로 다음 날 아침 해가 밝기도 전에 그런 징후가 나타났는데도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장 확실한 징후는 레이건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이건은 당선한 날 밤에 낸시를 옆에 세워 둔 채 딕슨의 지지에 감사하다며 전화를 걸었다. 다음 날에는 지역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개선장군으로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당연히 곧 레이건이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귀향 행진을 위한 계획이 조용히 준비되었다. 도시 유지들이 그동안 레이건이 얼마나 자주, 언제 딕슨을 찾았는지 헤아려 봤다면 아마 그렇게 낙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80년 일리노이 주 예비 경선 선거운동을 하면서 도시를 찾기 전 15년 동안 레이건은 딱 한 번 이 도시를 방문했다. 1976년에 제럴드 포드를 상대로 예비 경선을 치르면서 자기가 소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하려고 방문한 것이다. 그 전에 몇 번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기회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저 유명한 1941년의 출현은 레이건이 &lt;국제 비행대대&gt;를 통해 B급 배우에서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믿은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중역들의 아이디어였다. 그들은 레이건의 명성을 높이려고 루엘라 파슨스<sup>Louella Parsons</sup>와 귀향 축제에 동행하도록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파슨스도 딕슨 출신이고 공교롭게도 할리우드에서 가장 유력한 가십 칼럼니스트였다. 레이건은 1950년에도 같은 이유로 딕슨을 찾았다. 유니버설 영화사의 홍보 담당자는 고향 방문이 영화 &lt;루이자<sup>Louisa</sup>&gt;를 홍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1980년에 딕슨에서 신임 대통령의 귀향 행진을 보려면 그의 정치적 이익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딕슨 사람들은 레이건이 당선한 직후 환호의 시기에만 그를 보지 못한 게 아니다. 임기 첫해, 두 번째 해, 세 번째 해까지 레이건의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마침내 딕슨을 찾은 1984년에는 재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카터가 워싱턴에서 떠나기를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던 몇 주 동안 레이건 부부는 캘리포니아에서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거가 끝나고 며칠 뒤 레이건은 부자 동네인 벨에어<sup>Bel Air</sup>의 교회에서 청중의 환호에 화답하고 비벌리윌셔<sup>Beverly Wilshire</sup> 호텔에서 며칠 동안 업무를 수행했다. 벨에어는 대통령 부처가 정말 고향으로 생각하는 동네였다. 훗날 워싱턴을 떠난 뒤에 백만장자들로부터 이곳의 저택을 은퇴 생활의 터전으로 선물 받았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도서관 터도 이곳에 골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로 냉대를 받은 것은 딕슨고등학교의 밴드인 마칭듀크다. 레이건의 취임식 행사에서 행진하는 20개 고등학교 밴드에 낄 거라고 생각한 학교 측은 새 제복을 주문하고 곡조에 맞춰서 연습을 시작했다. 그런데 취임식을 한 달 앞두고 마칭듀크는 초청 대상이 아니라는 연락이 왔다. 취임식 준비위원회에서 취임식을 매끄러운 방송 행사로 치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일류 고등학교 밴드, 즉 번쩍거리는 장비와 제복을 갖춘 돈 많은 학교 밴드만 부른다는 것이었다. &ldquo;우리는 텔레비전 방송에만 초점을 맞춥니다.&rdquo; 준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이던 홍보 담당자 로버트 그레이의 말이다. &ldquo;방송에 실제로 잘 나올 만한지를 기준으로 뽑았습니다.&rdquo; 이런 냉대가 널리 알려지면서 준비위원회가 방침을 바꿔 마칭듀크를 포함시켰지만, 이 일화를 접한 일부 딕슨 사람들은 쓴 입맛을 다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씁쓸한 입맛은 더 고약해질 것이었다. 레이건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성공 가도를 달릴 것이라고 기대한 딕슨 시는 얼마 있다 레이건 재정 정책의 따끔한 맛을 보게 되었다. 레이건이 정부 규모를 축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국내 지출에서 극적인 삭감을 진두지휘했고, 그 효과가 일리노이의 고향을 곧바로 타격했다. 이게 다 대대적인 국방비 증강과 기업 및 개인 소득세 감면 비용을 메우기 위한 조치였다. 첫 번째 예산 삭감으로 저소득층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sup>Medicaid</sup>, 연방 세입 교부, 교육비 등의 지원에서 일리노이 주가 받는 액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삭감이 딕슨 시 문턱을 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번째 희생양은 시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고용하고 있던 주립 정신장애 아동 보호시설인 딕슨발달장애센터<sup>Dixon Developmental Center</sup>였다. 주 예산이 삭감되니까 센터는 1983년에 문을 닫았고, 1200명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다. 주 정부에서 예산 삭감이 또 진행되면서 딕슨 교육청에도 위기가 닥쳤다. 1985년에 운영자금이 부족해진 학교들은 스포츠 프로그램을 폐지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선수로 있던 축구부?레이건 취임식에서 연주한 고등학교 밴드&middot;농구부&middot;육상부 들이 모두 대공황 시절에도 살아남은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는데, 레이건 대통령이 만들어 낸 궁핍 재정 상황에서 사치품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레이건과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헬렌 로턴<sup>Helen Lawton</sup>은 돈을 마련해 주거나 기금 모금을 위해 이름을 빌릴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레이건이 답장을 보냈다. &ldquo;딕슨 학교들이 직면한 문제는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연방 차원에서 해 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rdquo; 레이건은 나중에 다시 편지를 보내 봉사단체인 딕슨키와니스클럽<sup>Dixon Kiwanis Club</sup>에서 돈을 기부한 덕에 로턴의 손자가 학교신문을 계속 펴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 기쁘다고 했다. &ldquo;민간 부문이 개입해서 도움을 주는 걸 보면 언제나 기쁘답니다.&rdquo; 1985년에 유권자들이 재산세 인상을 승인하고 나서 스포츠 프로그램들은 살아났지만, 딕슨의 학교들은 오늘날까지도 재정 안정화를 위해 분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딕슨 주민들에게 더욱 가혹한 벌을 내린 것은 대공황 이래 가장 급격하게 밀어닥친 불황이었다. 레이건이 밀어붙인 정책의 직접적인 부산물이었다.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통화 고삐를 급격하게 조여서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이 &lsquo;통화주의&rsquo;(정부가 경제활동에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가장 중요한 수단이 통화정책이라고 보며 시장 기능을 중시해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하고 화폐가치의 안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이론이다. ― 옮긴이)를 완전히 받아들인 첫 조치였다. 이 경제 교리는 레이건을 파죽지세로 권좌에 올려놓은 보수 혁명의 일부였다. 신임 대통령은 통화주의 실험을 지지했다. 이 실험이 기업 도산과 대량 실업, 딕슨 같은 지역사회의 구조적 붕괴를 대가로 치르면서 인플레이션을 잡는 방식이었는데도 말이다. 연준의 긴축 통화 정책은 레이건의 적자 지출과 더불어 금리 급등을 낳았고 외환 대비 달러 가치를 한껏 높여 놓았다. 해외 기업들과 저가 경쟁을 하느라 기운이 빠져 있던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거의 하룻밤 새에 달러 가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시장에서 한층 더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황은 쓰나미처럼 딕슨을 덮쳤다. 지역 최대의 고용주로 록 강 북쪽 기슭에 우뚝 서 있던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1980년대에 자금 출혈에 시달렸다. 값싼 수입 철강과 경쟁할 힘이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까, 회장인 피터 딜런<sup>Peter Dillon</sup>은 철물점에 들어설 때마다 자기 할아버지가 세운 회사가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한 현실에 맞닥뜨렸다. 1984년에 회장이 어떤 기자한테 말했다. &ldquo;철물점에 쌓여 있는 나사를 볼 때마다 그게 거의 전부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건 우리 자유에 대한 위협입니다.&rdquo;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딜런이 파악한 것처럼 &lsquo;우리 제조업 기반이 영영 사라지게 될&rsquo; 판이었다. 레이건은 미국 중공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가 대규모 제철 회사를 위해 구상하는 지원책은 조세를 감면하고 공해와 사업장 안전에 관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또 마지못해 철강 수입 제한을 시도하면서 자신을 추종하는 자유시장 근본주의자들을 저버렸다. 그러나 이런 시도도 기껏해야 철강 산업에 잠시 숨 쉴 틈을 주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레이건은 미국 중공업을 부활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로 추진한 정책은 중공업의 쇠퇴를 재촉했을 뿐이다. 1982년에 미국 제철 회사들은 설비의 40퍼센트를 가동하고 있었고, 이 부문에서 30만 명이 실업 상태였다. 전국 곳곳에서 속속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피츠버그, 버펄로, 시카고 사우스사이드<sup>South Side</sup> 등 여러 도시에 광대한 부동산과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생겨났다. 대형 제철 업체들은 높은 노동비용과 공해 방지 및 보건 안전 규제를 준수하는 비용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했다. 철강 산업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 기업들은 해외 경쟁자들에 비해 공장 현대화가 뒤진 상태였다. 효율적인 생산을 못 하고 특수강 시장에서 경쟁하지도 못했다. 다른 중공업과 마찬가지로 미국 철강의 구세주는 임금 양보나 규제 완화가 아니라 혁신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제철 회사들이 1970년대 말부터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투자에 쏟아부을 자본이 없었다. 게다가 미국 철강 생산이 살아남을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은행들로부터 냉대를 당하고 있었다. 자본을 입수할 수 있는 기업들은 흔히 단기 수익성이 더 좋은, 별 관련 없는 사업에 자본을 투자했다. 대표적인 사례인 유에스스틸<sup>U. S. Steel</sup>은 1980년대 초반에 마라톤오일<sup>Marathon Oil Company</sup>을 64억 달러에 인수하느라 현금 보유분을 탕진해 버렸다. 당시 철강 생산이 회사 사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도 안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직 정부만 대형 제철 회사들이 생산 능력 확대에 투자하도록 채무보증을 비롯한 유인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런 지원의 선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1800년대에 연방 정부는 철로가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뻗어 나가도록 하는 데 자금의 상당 부분을 제공했다. 항공 산업이 생겨나는 과정에서도 정부의 후한 지원이 큰 구실을 했다. 훗날 국제 항공 여행을 지배한 보잉747도 이런 과정을 통해 제작되었다. 일본의 경제산업성이 유망한 기술에 대한 직접 투자를 돕지 않았다면 아마 전후 일본의 경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레이건 정부 후반기에도 이런 교훈을 새롭게 배웠다. 정부 보조금을 받는 하이테크 컨소시엄인 세마테크의 연구 성과로 미국이 반도체 제조 부분에서 선두 자리를 탈환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컨소시엄의 본부가 있는 텍사스 주 오스틴의 경제는 면모를 일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2년에 철강 수입 제한 조치를 내린 레이건은 유럽 정부들이 직접적인 자본 제공을 비롯한 공공 보조금을 통해 부당하게 자국 제철 회사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 조치를 정당화했다. 이런 발견은 정부 보조금이 미국 중공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도 효과적일 수 있다는 명백한 깨달음으로 이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레이건과 그의 참모들은 산업 정책이라는 관념 자체를 위장된 사회주의라며 무시했다. 그 대신 조세 정책과 규제 완화를 통해 합병, 투기, 물리적 실체는 없이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회사인 페이퍼 컴퍼니 등을 지원했다. 이런 식으로 생겨난 사업체들이 월가에는 큰돈을 안겨 주었지만, 미국 산업의 미래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레이건 정책의 두 얼굴</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방향을 약속하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레이건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야 했다. 그런 길 중 하나가 산업 투자를 장려하는 정부의 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만약 레이건이 이런 구실을 인정했다면, 자신이 한때 고향이라고 자부한 지역의 최대 고용주를 살렸을 것이다. 빌 클린턴은 두 번째 임기가 막바지로 향할 때쯤 정부가 철강 산업을 지원하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1999년의 철강부문긴급대출보증법<sup>Emergency Steel Loan Guarantee Act</sup>에 따르면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생산 설비 현대화를 위해 1억 7000만 달러의 정부 보증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원은 때늦은 조치였다. 그때 회사는 벌써 직원이 1400명으로 줄고 현금 보유고가 바닥 난 상태였고, 정부가 보증한 1억 7000만 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15퍼센트의 대출을 지원하겠다는 은행이 없었다. 2001년에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중개인들이 이 회사의 고철 선적을 거부한 것이다. 고철을 녹여서 철로 만드는, 새로 시작한 전도유망한 &lsquo;고철 재생&rsquo; 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는 120년 역사를 뒤로하고 문을 닫았고, 지역 경제 전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소매업, 각급 학교, 부동산 시장, 보건 의료 시설, 그 밖에 지역의 경제 부문이 큰 타격을 입었다. 스털링 시장 테드 애건<sup>Ted Aggen</sup>은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 이렇게 말했다. &ldquo;우리는 앞으로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느낄 겁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문제는 노스웨스턴스틸앤드와이어만이 아니었다. 딕슨 지역의 많은 사업체가 문을 닫거나 노동자들을 대거 내보냈다. 1982년, 지역의 목수노동조합은 조합 소속 건설 노동자 216명 중 160명이 실직 상태라고 보고했고, 딕슨 변두리에 위치한 론스타산업<sup>Lone Star Industries</sup>의 시멘트 공장에서는 전체 직원 135명 중 3분의 2를 정리 해고했다.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대통령의 모든 정책은 아니라도 많은 정책을 계속 지지한 반면, 실업자 중 상당수는 대통령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않는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ldquo;레이건은 자기가 어디 출신인지 잊어 버렸습니다.&rdquo; 딕슨의 트럭운송노동조합<sup>Teamsters</sup> 교섭 담당자인 래리 설리번<sup>Larry Sullivan</sup>은 1984년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ldquo;최근에 내가 교섭한 단체협약 스무 건 가운데 겨우 세 건만 임금 인상을 확정했어요. 나머지는 현상 유지나 임시 삭감이죠.&rdquo; 실직 중인 목수 로렌스 랠리<sup>Lawrence Lally</sup>는 대다수 딕슨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ldquo;그 사람은 절대 내 친구가 아닙니다. 레이건은 이 주변에 어느 누구한테도 해 준 일이 없어요. 그건 내가 장담합니다. 게다가 백악관보다 오히려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요.&rdquo; 랠리가 레이건을 두고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딕슨의 유권자 가운데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레이건 혁명을 지지한 사람들은 가족농이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레이건을 좋게 기억한다. 그렇지만 레이건의 정책에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가장 큰 사람도 이들이다. 1980년대에 농민들은 대공황 이래 최악의 위기에 맞닥뜨렸고, 레이건은 상황을 악화하기만 했다. 레이건은 지지층의 핵심을 이루는 미국 농촌의 기반인 가족농을 구제하기 위해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는커녕 가족농 수십만 명을 재정적 파탄으로 몰고 가는 한편 카길이나 몬산토 같은 거대 농산업체에 부를 안겨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 초반에 세계적인 불황이 닥치면서 농산물 수요의 기세가 꺾였다. 연준의 긴축 통화 정책이 만들어 낸 달러 강세 때문에 미국 농산물은 해외시장의 가격경쟁에서 밀려났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뒤 카터가 소련에 대한 곡물 수송 금지령을 내리고 나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농산품 가격과 농가 소득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심각한 타격은 1970년대의 투기 열풍 속에 많은 농민들이 쌓아 놓은 막대한 부채가 갑자기 걸림돌이 된 것이었다. 1970년대에 대출을 장려한 연방 기관인 농촌주택청<sup>Farmers Home Administration</sup>이 1980년대에는 죽음의 신으로 변신해서 담보권을 행사하고 농민들의 땅을 압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문제에 대한 레이건의 해법은 뻔한 것이었다. 연방 정부의 농업 진흥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농산업의 자유기업 체제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이런 해법이야말로 가족농을 구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ldquo;신뢰를 잃은 프로그램을 고수하고 정부의 통제를 늘리는 데서 우리 농업 문제의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우리나라 농업 전체가 다시 자기 발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rdquo; 1985년에 레이건이 농가 정책에 관한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보다 더 솔직하지 않은 말은 없었다. 당시 정부가 농가 보조금을 대폭 인상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혜택을 받을 주인공은 소농민이 아니라 대지주와 거대 기업농이었다. 1985년 농장법이 통과되면서 이런 속임수를 썼는데, 이 법의 목표는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 만큼 상품 가격을 낮춰서 농업 수출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당시 옥수수의 재배 비용이 25킬로그램당 평균 3.25달러였는데 1986년 중순의 판매가는 1달러였다. 농민들은 연방의 &lsquo;차액 보상 제도&rsquo;로 손실을 보상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농장법은 미국 농민들의 경쟁력을 개선하는 데 비참할 정도로 실패했다. 미국의 세계 밀 시장 점유율은 1981~1982년의 44퍼센트에서 26퍼센트까지 떨어졌다가 1988~1989년에 37퍼센트로 반등했다. 통밀은 54퍼센트에서 39퍼센트로 떨어졌다가 다시 52퍼센트로 올라섰다. 무엇보다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차액 보상 제도가 대농장에는 유익한 보조금이 될 만했지만 중간 규모 가족농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간 규모 가족농 중 기록적으로 많은 수의 농가가 부채를 갚지 못했다. 미국은행협회는 1985~1989년만 해도 40만이 넘는 미국 농가가 땅을 잃었다고 보고했다. 이런 와중에도 연방의 농장 지원 프로그램은 1984년 73억 2000만 달러에서 기록적으로 증가해 1986년에는 258억 달러였다. 그해 연방 예산 적자의 15퍼센트에 달한 액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 정책을 실패라고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레이건에게 정말로 중요한 유권자 집단인 농산업체에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곡물과 가축 가격의 침체는 카길과 콘티넨털그레인<sup>Continental Grain</sup> 같은 곡물 거래 기업들에게는 뜻밖의 횡재였다. 사실상 원재료를 싼값에 사들였기 때문이다. 곡물 거래 기업을 비롯한 대규모 농산업체들은 이 시기에 이윤이 폭증했다. 식품 가공업과 도매업은 198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산업의 반열에 올라섰다. 11년 동안 자기자본이익률이 평균 18.4퍼센트로 의료 산업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거대 농산업체들은 낮은 상품 가격의 혜택을 소비자들과 공유하지 않고 고스란히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1980년에서 1989년 사이에 농민에게 지불하는 가격은 40퍼센트 떨어진 반면, 소비자 식품 가격은 36퍼센트 올랐다. 미국이 한창 농업 위기를 겪는 가운데 당시 세계 최대의 농산업체였던 카길은 1986년 이윤이 4억 900만 달러로 66퍼센트까지 늘어났다. 12년 만에 최고의 세전 이윤을 기록한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판매량이 저조할 때의 기록이다. 보조금 258억 달러가 농산업체의 복지 기금 노릇을 한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강 산업같이 위기에 빠진 산업의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지만, 농산업체의 배를 불리지 않고 가족농을 구제할 합리적인 제안들은 있었다. 아이오와 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 톰 하킨<sup>Tom Harkin</sup>과 아칸소 주 출신 연방 하원의원 빌 알렉산더<sup>Bill Alexander</sup>가 1985년에 제출한 농장법 안이 그 예다. 농산품의 최저가를 설정해서 소규모 생산자에게도 공정한 대가를 보장해 주는 내용이었다. 일정한 토지를 생산에서 제외해 토양을 보호하는 내용도 있었다. 농업 지역 출신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이 법안을 지지했지만, 백악관의 거센 반대와 랠스턴퓨리나나 전국식품가공협회<sup>National Food Processors Association</sup> 같은 농산업체들의 강력한 로비에 부딪혔다. 도시 출신 민주당 의원들이 반대한 것도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식료품 값이 올라갈까 봐 염려했다. 하킨은 소비자물가가 4퍼센트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정도는 도시 노동자의 최저임금이 올라간 뒤 나타나는 물가 인상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이 법안도 납세자들의 보조금이 필요했겠지만, 그 돈은 대기업이 아니라 소농민들에게 갔을 것이다. 레이건이 하킨의 법안을 지지했다면, 자기 고향을 둘러싼 가족농들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이 법안은 분명히 입법화되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에 제조업과 농업이라는 가장 중요한 두 부문이 급속하게 쇠퇴하면서 딕슨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업체들이 도시의 상업 지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농기구 업체 네 곳 중 세 곳이 문을 닫았다. 학교에 등록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지방 교육청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 전 50년 동안 빈곤 지역을 돕기 위해 촘촘하게 짠 안전망은 레이건의 예산 삭감 때문에 대부분 넝마 조각이 되어 버렸다. 주거 보조, 저소득층 지원 식품 교환권, 저소득층 법률 지원 등이 모두 최소한만 남았다. 레이건 정부의 예산은 농촌 경제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존재하던 일련의 프로그램을 대폭 삭감해 버렸다. 1981년에서 1987년 사이에 미국 농무부의 농촌주택청에서 후원하는 농촌 발전 프로그램이 69퍼센트 삭감되어 16억 7000만 달러에서 4억 9000만 달러로 줄었다. 또 농촌을 대상으로 한 기업 및 산업 대출과 지역사회 시설 대출은 85퍼센트나 줄어들었다. 제조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직업 재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자금은 거의 남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쓰려고 인터뷰한 딕슨 사람들 가운데 레이건이 옛날에 자기가 살던 동네를 구제하기 위해 막후에서라도 어떤 일을 했다고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1990년대 초 어느 민간단체가 딕슨극장을 개수하는 데 쓸 기금을 주州에서 받기 위해 41만 달러 모금 운동을 벌였을 때 전 대통령 레이건은 1000달러를 기부했다. 1984년에는 도시가 쇠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쓰는 사업가들이 내고장유산재단<sup>Hometown Heritage Foundation</sup>을 설립하고, 리<sup>Lee</sup> 카운티에 직원을 1000명 이상 고용하는 사업체를 유치하는 사람에게 줄 상금 1만 달러를 내걸었다. 레이건은 과거에 딕슨의 학교 돕기를 거부한 것처럼, 이 재단의 명예 회장은 맡았지만 사업체를 끌어들이는 데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재단 이사 밥 해밀턴<sup>Bob Hamilton</sup>은 이렇게 설명했다. &ldquo;그 사람은 기업을 유치하는 데 자기 이름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자리를 맡았습니다.&rdquo; 어떤 이는 모름지기 대통령이라면 나라 전체를 보살펴야지 한 지역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공정성이 레이건에게는 당찮은 말이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의 평론가한테 전화해서 버디 엡슨<sup>Buddy Ebsen</sup>(1960년대에 CBS TV에서 방영된 시트콤 &lt;비벌리 힐빌리스<sup>The Beverly Hillbillies</sup>&gt;로 유명한 성격파 배우 ― 옮긴이)을 좀 도와 달라고 말하고, 불가리에서 빌린 비싼 보석을 걸치면서 좋아하는 부인을 두었으며, 정유 산업의 규제를 풀어 준 뒤 정유 회사 중역들이 백악관의 생활공간을 다시 꾸미게 한 대통령이다. 이런 사람이 자기 고향에 약간 혜택을 주도록 전화하는 문제에 대해 갑자기 투철한 윤리 의식에 사로잡혔다는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불안한 미래</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레이건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20년 동안 그의 고향이 부흥하는 일은 없었다. 1990년대는 번영의 시대였지만, 딕슨 같은 곳은 잔치에 끼지 못했다. 렉서스를 모는 투자은행가들이 딕슨의 스타벅스에서 라떼를 홀짝이는 일은 없다. 딕슨에는 스타벅스나 렉서스 대리점이 없기 때문이다. 렉서스를 사고 싶은 사람은 록퍼드까지 한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딕슨의 인도는 자갈과 19세기 가로등의 모조품으로 장식되지 않았다. 도심 재개발의 징후도 없고 호숫가 산책로나 반짝거리는 유리 지붕으로 덮인 상가가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걸리나 애버뉴에 소매상도 많지 않다. 주 정부나 카운티 정부 청사와 특징 없는 업무용 건물 서너 동, 아무도 찾지 않는 것 같은 선술집들뿐이다. 의류나 식품을 사려면 2005년에 딕슨 시 외곽에 생긴 월마트로 가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에서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지난 20년 동안 들렸다. 월가에서는 100만 달러를 보너스로 준다느니 실리콘밸리에서 인터넷 관련 기업 백만장자들이 속출한다느니 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런 부가 딕슨에는 전혀 흘러들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딕슨 시의 가구 소득 중앙값은 1970년대에 높아지다가 1979년에서 1999년 사이에 실제로 9.1퍼센트 떨어졌다. 1999년은 주식시장이 붕괴하기 직전으로 미국의 호황이 정점에 달했다. 이런 수치는 부유층이 정말로 더 부자가 된 대도시 권역의 풍요로운 지역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딕슨에서 동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시카고 교외 윌메트<sup>Wilmette</sup>에서는 같은 기간에 가구 소득 중앙값이 29퍼센트 높아졌다. 1999년 달러 가치 기준으로 9만 4789달러에서 12만 2515달러로 오른 것이다. 미국 전체가 딕슨보다는 윌메트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을 들여다보면 딕슨이 오히려 나라 전체보다 사정이 좋았다. 같은 기간에 전국 가구의 소득 중앙값은 19퍼센트 떨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딕슨은 규제가 완화된 상업, 학살당한 노동조합, 절망적인 상태의 공공 부문, 민영화, 기업합병, 임시 노동의 증가 등 레이건 시대의 비참한 특징을 두루 보여 준다. 미국 경제계의 거센 약탈로부터 정부가 한때는 딕슨을 보호해 주었지만, 이 도시의 운명은 이제 시장의 변덕스러운 놀음에 휘둘린다. 규제 완화 덕분에 통신 회사들이 저개발 지역에는 서비스를 공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딕슨에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가 들어간 것은 윌메트보다 한참 뒤의 일이다. 요즘은 자동차 없이는 딕슨을 찾아가거나 딕슨에서 외지로 나갈 수가 없다. 여객 철도 노선이 아예 없었고, 수익성 없는 버스 노선은 버스 회사에 대한 규제 완화 덕분에 대부분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딕슨에서 마지막으로 버스를 운영한 그레이하운드 사는 2001년에 터미널을 폐쇄하고 도시를 떠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8년에 대형 보험사인 유에스에프앤드지<sup>USF&amp;G</sup>에서 시내에 사무실을 열고 걸리나 애버뉴의 상업 지구 한가운데에 2층짜리 업무용 벽돌 건물을 짓기로 하자, 딕슨 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했다. 꼴사나운 콘크리트 주차장이 정면에 붙어 있는 우중충한 정방형 건물은 길 건너편에 있는 유서 깊은 딕슨극장의 보자르 양식 정면이나 근처에 있는 19세기 건축인 리 카운티 청사와 통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유에스에프앤드지의 신축 건물은 활력의 징후였다. 회사에서 그 건물을 방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이건이 톡톡히 기여한 합병 열풍은 1998년에 딕슨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세인트폴<sup>St. Paul</sup> 보험회사는 유에스에프앤드지를 인수하면서 수천 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고 수익성 없는 보험 계정을 해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세인트폴은 곧바로 딕슨 사무실을 폐쇄했다. 도시 한가운데에 텅 빈 업무용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대 분위기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징후도 있다. 보험회사 건물 1층을 쓰는 인력 파견 회사는 미국 산업 경제의 파편을 쪼아 먹으면서 돈을 버는 회사다. 지역의 제조업체는 노동조합 소속이 아닌 저임금 노동자가 필요할 때 임시인력서비스사를 찾는다. 복지 혜택을 주지 않아도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바로 내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땅을 일구거나 철강을 생산하면서 존엄성을 누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임시인력서비스사에서 나눠 주는 비정규직이라도 얻으려고 넙죽 허리를 굽힌다. 아무 날이나 임시인력서비스사의 창문을 들여다보라. 남자와 여자 들이 책상에 멍하니 앉아 다음에 얻을 최저임금 일자리를 소개하는 직업훈련 비디오를 보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임시인력서비스사를 이용하는 회사 중 하나인 레이오백<sup>Rayovac</sup>은 2003년에 딕슨 외곽의 88번 주간<sup>州間</sup> 고속도로 변에 2000만 달러를 들여 공장을 세운 건전지 제조사다. 레이오백은 오랫동안 근거지로 삼은 위스콘신 주 매디슨을 포기했다. 노동조합에 소속된 생산직 노동자들을 내치고 딕슨에서 노동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채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노동자들의 평균 시급이 13.50달러였는데, 딕슨에서는 8.50달러에도 일할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일리노이 주는 당시 미국 3위의 건전지 제조업체를 끌어들이기 위해 기반 시설 공사를 비롯한 410만 달러 상당의 혜택을 제안했다. 일리노이 주는 레이오백이 가명으로 공장을 짓는 것까지 허용해 주었다. 그 결과 위스콘신의 지방 공무원과 주 공무원, 레이오백의 직원 들은 공장이 실제로 이전할 때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딕슨 사람들은 새 공장이 생긴다는 소식에 한껏 들떴다. 특히 직원용 운동 시설과 휴게실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이 건전지 회사는 옛날에 딕슨에 있던 고임금 사업장이 전혀 아니다. 회사는 연중 300명만 고용하며 계절적 고용 수요를 임시인력서비스사를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에스에프앤드지의 예전 건물 2층에는 딕슨상공회의소가 있다. 상공회의소장 짐 톰프슨<sup>Jim Thompson</sup>은 언제나 활짝 웃는 호감형 인물이다. 도시에 닥친 재난에 대해 말할 때도 &ldquo;입에 쓴 약이지만 삼켜야 한다&rdquo;며 파안대소한다. 톰프슨의 아버지는 로널드 레이건과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로 레이건이 영화배우 시절에 가끔 고향을 찾으면 환영 행사를 조직한 인사 중 하나다. 톰프슨의 책상 바로 옆의 벽면은 미국 제40대 대통령의 온갖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그러나 톰프슨은 딕슨에서 제일 유명한 아들에 대한 추억이 도시에 경제 부흥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톰프슨이 하는 일은 기업과 고소득 일자리를 이 지역에 유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 졸업장이나 시장성이 있는 기술을 가진 노동자가 부족한 탓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이전을 고려하는 기업들은 문제 해결 능력과 컴퓨터 관련 지식을 갖춘 노동력이 있는지부터 묻는다. 톰프슨이 이렇게 말했다. &ldquo;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지역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이런 일자리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양질의 교육을 받은 노동력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겁니다. &hellip;&hellip; 로봇 공학이 도입되고 자동화된 공장 라인이 들어서는 걸 봤습니다. 몇 년 뒤에 우리가 이런 일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상황은 밝지 않다. 딕슨의 교육 기회는 미국의 다른 특권 지역을 따라잡지 못하는 형편이다. 딕슨의 성인 인구 중 학사 이상 학위를 가진 사람의 비율은 1970년대에 9퍼센트에서 12퍼센트로 높아졌지만, 그러고는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2000년에는 12.7퍼센트만 대학을 졸업했다. 사실상 20년 전과 같은 비율인 셈이다. 부유층 교외인 윌메트는 역시 상황이 훨씬 좋다. 대학 교육을 받은 성인의 비율이 1980년 54퍼센트에서 2000년 73퍼센트로 높아졌다. 최근 몇 년 동안 딕슨고등학교 졸업생 가운데 평균 25퍼센트만 4년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인 것으로 밝혀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딕슨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계경제에서 경쟁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더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레이건 시대 이후 공공 부문을 무시하는 전통 때문에 이런 일에 쓸 수 있는 기금이 부족하다. 1980년대에 딕슨의 각급 학교에 대한 주와 연방의 지원은, 인플레이션율을 조정한 수치로 23퍼센트 감소했다. 1990년대에 약간 늘어났지만, 2004년에도 여전히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한 해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지방 세입까지 포함한 학교에 대한 전체 지출은 어느 정도 늘었다. 하지만 딕슨 시 교육감 로버트 브라운의 말에 따르면, 이런 증가액은 대부분 급여와 복지 혜택․건물과 설비의 유지 보수․특수교육에 대한 새로운 요구에 투입되었다. 그의 말로는 지난 15년 동안 일반 교육 프로그램은 사실상 전혀 확대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라운은 로널드 레이건에 관해 부정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학교에 관한 인터뷰에 응했다. 그만큼 레이건은 브라운이 일하는 지역사회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딕슨 어린이들의 미래에 대한 투자가 부족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데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컴퓨터 부족에 따른 체계 부실, 불충분한 과학실, AP 코스<sup>advanced-placement course</sup>(수학 능력이 뛰어난 고등학생이 대학 수업을 미리 듣고 학점을 딸 수 있는 제도 ― 옮긴이)의 부족 등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다. 2003년 경제 위기의 여파와 아직도 싸우고 있는 딕슨 시로서는 과학실 신설 같은 사치는 생각도 할 수 없다. 경제 위기 때 공무원들은 학교 행사에 돈을 받게 했고, 수업 정원을 늘려서 프로그램 삭감에 대응했다.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도입이나 교직원 확충은 논외의 문제다. 이런 사실이 함축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딕슨의 학교와 어린이 들이 계속 뒤처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ldquo;우리는 세계경제에 속해 있습니다.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해요. 교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도구도 더 필요하고요. 외부 자원을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받는 돈으로는 경쟁할 수 없어요.&rdquo; 브라운이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 교육을 개선하기 위한 레이건의 계획은 민영화였다. 학부모에게 사립학교 수업료에 대한 세금을 공제해 주면, 공립학교가 경쟁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개선할 것이라는 식이었다. 이 안은 지난 20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보수주의자들을 집결시키는 구호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의 대통령을 가르친 학교 체제의 교육감인 브라운은 민영화가 답이 아니라고 말했다. &ldquo;그러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생기죠. 학교를 민영화하면 잘사는 아이들이 좋은 학교에 가게 됩니다. 좋은 학교는 특수교육 문제라든가, 결손가정이나 저소득층 문제를 참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결국 한쪽에는 가진 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못 가진 자들이 있게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운영하려고 하면 파국만 생길 게 뻔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학교와 고용 기반의 미래에 관한 불안감이 감도는 가운데 딕슨의 지도자들은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찬사를 통해 성장한 지역 산업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부자 사업가들의 기부금으로 마련한 레이건 기념물들이 곳곳에서 방문객을 맞이한다. 컴퍼트인호텔에는 인명 구조원 차림을 한 젊은 레이건의 모습이 담긴 큰 사진이 수영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레이건은 백악관을 떠난 뒤 딱 한 번 딕슨을 찾았지만, 사람들은 그가 남긴 자취를 소중히 돌본다. (레이건은 1960년대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딕슨에 총 네 번 방문했다.) 로웰 공원, 공립 도서관, 시청, 고등학교, 강변 등에 레이건을 기념하는 표지판이 있다. 냉전 시대의 낙서와 녹슨 철조망까지 고스란히 갖춘 으스스한 베를린장벽 복제품도 시내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옆에는 레이건이 남긴 불후의 말이 담긴 표지판이 있다. &ldquo;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벽을 허물어 버리시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록 강에서 남쪽으로 완만히 이어지는 매력적인 길로 식민지 시대 빅토리아풍 주택이 즐비한 헤너핀 애버뉴는 2002년에 레이건 길로 헌정되었다. 그 길 옆에 있는 다른 집들은 대부분 칠을 새로 하거나 지붕을 새로 얹는 정도였는데, 레이건이 소년 시절을 보낸 수수한 목조 주택 816번지는 정성 들여 수리되었다. 바로 이웃한 지구에는 작은 공원 한가운데에 레이건의 동상이 앉아 있다. 북쪽으로 네 구역 위에는 레이건이 다니던 사우스사이드초등학교<sup>South Side School</sup>가 딕슨역사관<sup>Dixon Historic Center</sup>으로 호화롭게 개조되어 있다. 밤나무 목재로 된 문짝과 계단 등이 완벽하게 복원되었고, 레이건의 옛 교실을 꾸미기 위해 오래된 가구를 모아 놓았다. 콩 모양의 젤리 과자로 만든 대통령 초상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계단통에는 기퍼 모습의 동상들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간 재력가들은 레이건의 유산을 기념하려고 소년 시절 집과 역사관에만 1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돈을 낸 사람들은 윤리적 문제로 추궁받는 전형적인 사업가들이다. 레이건의 이미지에 마냥 행복하게 바짝 엎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레이건 옛집 바로 옆에 있는 동상은 아처 대니얼스 미들랜드의 회장을 지낸 드웨인 O. 안드레이어스<sup>Dwayne O. Andreas</sup>가 기부한 것이다. 거대 농산업체인 이 회사는 1998년에 안드레이어스의 아들과 다른 중역 한 명이 연방 법원에서 가격 조작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부패 관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머지 중 대부분을 기부한 노먼 윔스<sup>Norman Wymbs</sup>는 플로리다의 부유한 사업가로 레이건의 이미지를 드높이는 데 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윔스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레이건을 성인처럼 떠받드는 전기 두 권을 쓰기도 했는데, 출간하기 전에 원고를 레이건에게 검토하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방 정부가 레이건의 소년 시절 집을 매입해 국가 유적지로 운영하도록 하는 법안에 서명한 2002년에는 윔스가 공공 신탁에 어느 정도나 열의를 보이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2006년 현재 이 집을 관리하는 직원은 자원봉사자들뿐이며 웹 사이트도 없고, 겨울에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국가 유적지로 만들었으면 전문가들이 영구적으로 운영했을 테고, 나이가 지긋한 윔스가 세상을 떠난 뒤 집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오랫동안 로널드 레이건 가옥 재단<sup>Ronald Reagan Home Foundation</sup> 회장을 맡고 있던 윔스는 42만 달러에 부동산을 매입하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자기와 다른 기부자들이 그때까지 쏟아부은 500만 달러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ldquo;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이루어진 일에 관해 말하는 겁니다. &hellip;&hellip; 딕슨 시의 모든 사람이 이 집에 이런저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 사람들에게 연방 정부에 모든 걸 넘겨주겠다는 모욕적인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rdquo; 정부 제안을 거절하는 구실치고 이렇게 그럴듯한 말도 없다. 언뜻 보기에 기부자들이 옛집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은 소규모 사설 재단보다는 미국 내무부가 더 장기적으로 믿음직스럽게 수행할 수 있다. 윔스는 자기가 쏟아부은 금액을 정부가 납세자들의 돈으로 갚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발끈한 게 분명하다. 레이건이 살아 있었다면 아마 윔스가 보여 준 개인적 부에 대한 관심과 정부에 대한 경멸을 자랑스러워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록 강 위로 솟은 언덕들 사이에 자리 잡은 조용한 시골구석인 딕슨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쾌적한 동네다. 매년 봄이면 걸리나 애버뉴 양쪽 가장자리에 튤립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사람들은 한창때의 로널드 레이건을 연상시키는 온기를 뿜어 댄다. 그러나 시내 중심가에서까지 섬뜩한 침묵이 감돈다.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방문객은 이런 동네에 의미와 활력이 있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때 철강과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영스타운이나 플린트처럼 딕슨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마약 판매 구역을 놓고 살인을 일삼지도 않고, 쓰레기통에서 아기가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저 한때 미국 중서부 소도시들의 특징이던 활기와 산업을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과거의 흔적이다. 웅장한 리 카운티 청사와 딕슨극장, 반듯한 빅토리아풍 저택, 강변에 늘어선 벽돌 공장들까지 다 고대인들의 자취처럼 보인다. 과거에 이곳에 살았지만 지금은 폐허를 통해서만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마야나 수메르의 자취 말이다. 그들의 장대한 문명을 덮쳐 버린 사회가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 모텔, 월마트, 비닐 외장재로 된 조립주택 등이 이어진 값싼 풍경을 이루면서 바야흐로 도시 가장자리에 퍼져 나가고 있다. 조금 더 나가 보면 더 아름다운 경치가 손짓을 한다. 시골 풍경은 50년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외딴 농가와 큰 탑 모양의 곡물 창고 들이 광대한 농업의 지평선 한가운데에 여전히 보초처럼 우뚝 서 있다. 그러나 이 농가들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환상은 무너져 내린다. 페인트가 벗어지고 창문에는 비닐이 씌워 있다. 대부분 빈집이고, 그나마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도 농사와는 무관하다. 농가 주변의 광대한 토지 수천만 제곱미터는 머나먼 곳에 있는 거대 농산업체 소유다. 젊은 레이건을 품었던 딕슨은 이제 사라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윌리엄 클라인크넥트 William Kleinknecht</strong><br /> 『뉴어크스타레저<sup>Newarks Star-Ledger</sup>』의 전문 기자. 『뉴욕데일리뉴스<sup>New York Daily News</sup>』의 범죄란을 담당하기도 했다. AP통신과 미국직업언론인협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미국저널리즘평론<sup>American Journalism Review</sup>』, 『미국법률저널<sup>National Law Journal</sup>』, 『보스턴피닉스<sup>Boston Phoenix</sup>』 등에도 기고한 바 있다. 저서로는 『새로운 소수인종 폭력단: 미국 조직범죄의 변모<sup>New Ethnic Mobs: The Changing Face of Organized Crime in America</sup>』가 있으며 뉴저지 주 글렌록에서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유강은</strong><br /> 국제 문제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 『The Left 1848~2000』, 『미국민중사』,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두뇌를 팝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기로에 선 미국』 등이 있다. <a href="mailto:libromio@jinbo.net">libromio@jinbo.net</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14 오후 4:21:00피터 싱어 외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들’<img alt="" width="600" height="88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9_%EB%8F%99%EB%AC%BC%EA%B3%BC%20%EC%9D%B8%EA%B0%84%EC%9D%B4%20%EA%B3%B5%EC%A1%B4%ED%95%B4%EC%95%BC%20%ED%95%98%EB%8A%94/%EB%8F%99%EB%AC%BC%EA%B3%BC%EC%9D%B8%EA%B0%84%EC%9D%B4%EA%B3%B5%EC%A1%B4%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년 동안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right"><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피터 싱어</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20년 전에 같은 제목으로 출간된 책과는 매우 다르다. 20년 전에 펴낸 책에서 우리는 1960년대에 영국에서 조심스럽게 태동한 현대 동물운동 1세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사냥개를 동원한 사냥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한 &lsquo;잔인한 사냥을 반대하는 모임&rsquo; 회원들의 방해 공작은 동물 학대에 맞서 싸우는 새롭고 급진적인 접근법의 신호탄이었다. 이들은 여우 냄새를 없애고자 화학물질을 이용하거나 사냥개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기 위해 가짜 냄새를 퍼뜨렸다. 1963년에는 &lsquo;모임&rsquo;의 보수적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사냥방해협회가 출범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에는 사냥개를 동원한 사냥 행위를 중단시키는 일이 협회의 유일한 목표였다. 하지만 사냥방해협회가 창립된 지 1년 만에 루스 해리슨<sup>R. Harrison</sup>의 《동물 기계<sup>Animal Machines</sup>》가 출간되었다. 처음으로 영국 대중이 공장식 축산의 존재에 눈뜬 것이다. 해리슨은 이러한 축산 시스템에서는 이익이 나는 한 동물 학대를 인정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동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달걀 생산자의 수익성을 높이려면 산란계 한 마리 한 마리의 생산성을 높이기보다는 닭장에 닭을 더 많이 욱여넣는 쪽이 효과적이다. 따라서 수익성의 추구는 대규모의 학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낙농업자 피터 로버츠P. Roberts는 영국의 주요 동물복지단체에 공장식 축산 문제를 다루어달라고 설득했으나 단체들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1967년에 &lsquo;세계 가축에 대한 연민(Compassion in World Farming, CIWF)&rsquo;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국제조직으로 발전하여 유럽의 가축 복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학이 동물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다. 옥스퍼드 대학원생 3인방 로슬린드 고들로비치<sup>R. Godlovitch</sup>, 스탠리 고들로비치<sup>S. Godlovitch</sup>, 존 해리스<sup>J. Harris</sup>가 펴낸 《동물, 인간, 도덕<sup>Animals, Men and Morals</sup>》은 철학자가 동물 처우의 윤리를 논의한 최초의 현대적 작업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뉴욕 서평<sup>The New York Review of Books</sup>》에 〈동물 해방<sup>Animal Liberation</sup>〉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서평을 기고했다. 내가 쓴 같은 이름의 단행본이 출간되었으며, 뒤이어 여러 철학자가 나름의 윤리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재스퍼<sup>J. Jasper</sup>와 도러시 넬킨<sup>D. Nelkin</sup>은 《동물 권리의 십자군 : 도덕적 저항의 성장<sup>The Animal Rights Crusade : The Growth of a Moral Protest</sup>》에서 &ldquo;철학자들은 1970년대 후반 동물권리운동의 산파 역할을 했다&rdquo;고(1992 : 90)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적절한 비유다. 철학자들이 동물권리운동을 낳지는 않았지만 수월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왔으니 말이다. 동물권리운동이 사산되지 않은 것이 이들 철학자 덕분인지 모를 일이다. 동물권리운동이 탄생하는 현장에 있던 리처드 라이더<sup>R. Ryder</sup>는 이 책 6장에서 하필 이 시기에 동물권리운동이 시작된 이유를 나름대로 제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0년에는 동물의 윤리적 지위를 주제로 한 문헌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16년 뒤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는 조금 늘었다. 찰스 메이글(Charles Magel 1989)은 이 주제를 다룬 문헌의 포괄적인 서지 목록을 작성했다. 1970년대 초반에 94건에 지나지 않던 목록은 서지 작업이 끝나던 1988년에 240건으로 늘었다. 지금은 수천 건에 이를 것이다. 논쟁이 벌어진 지역 또한 서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동물과 윤리학에 대한 주요 저작들은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를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여러 나라의 학자, 저술가, 운동가가 글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 출간된 이번 책은 동물운동의 현재 모습을 보여준다. 동물운동은 지난 20년 동안 성장하고 성숙했다. 따라서 초판에 실린 톰 리건<sup>T. Regan</sup>, 스티븐 클라크<sup>S. Clark</sup>, 메리 미즐리<sup>M. Midgley</sup> 등 유명 사상가의 글을 재수록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 글들은 선집 형태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필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더 완전하게 설명한 단행본을 내놓았으니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 판에서는 신세대 사상가와 운동가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개정 없이 재수록한 글은 동물의 고통을 판단하는 과학적 근거를 논의한 메리언 S. 도킨스<sup>Marian S. Dawkins</sup>의 글뿐이다. 축사, 실험실, 동물원에서 동물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설명하는 세 편의 글은 초판 내용을 개정하여 실었다. 나머지 열네 편은 개정판에 처음 소개되는 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의 구성은 예전과 그대로다. 우선, 운동의 배경이 되는 개념을 설명한다. 윤리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려면 두 가지 물음을 구분하는 것이 유용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번째 물음은 &lsquo;종차별&rsquo; 개념에 대한 것이다. 지금이야 &lsquo;종차별&rsquo;이 웬만한 사전에는 다 수록되어 있지만 35년 전만 해도 단어 자체가 없었다. (리처드 라이더가 동물실험에 대한 소책자에서 이 단어를 처음 만들어냈다.) 종차별은 한마디로 어떤 존재가 &lsquo;호모사피엔스&rsquo;라는 종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우선권을 부여하는 일이 정당한가의 문제다. 즉, 첫 번째 물음은 &lsquo;종차별 자체를 옹호할 수 있는가&rsquo;다. 두 번째 물음은 종차별을 옹호할 수 없다면, 인간 아닌 동물이 당하는 일보다 인간이 당하는 일에 더 큰 도덕적 의의를 부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또 다른 특징이 인간에게 있느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종 자체가 어떤 종을 다른 종보다 도덕적으로 더 중요시할 이유가 된다&rsquo;는 견해는 종종 상식으로 통하지만 이를 옹호하는 논증이 제시된 적은 거의 없다. 종차별 자체를 옹호하는 듯한 사람들도 알고 보면 두 번째 물음에 답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lsquo;인간의 이익을 더 중요시할 권리를 부여하는 도덕적으로 유관한 차이가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 사이에 존재한다&rsquo;는 주장 말이다. 종차별 자체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우선적으로 돌보아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는 것처럼 우리 종의 구성원을 다른 종의 구성원보다 중요시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 입장을 옹호하는 이들은 가족과 종 사이에 놓인 명백한 범주들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조류학과 진화론의 권위자 루이스 페트리노비치<sup>L. Petrinovich</sup>는 《다윈주의적 지배<sup>Darwinian Dominion</sup>》에서 생물학적 이유로 특정 범주가 도덕규범으로 전환된다고 주장한다. 페트리노비치는 &ldquo;자녀, 친족, 이웃, 종&rdquo;(1999 : 29)을 그러한 범주로 지목한다. &lsquo;가족&rsquo;과 &lsquo;친구&rsquo;라는 좁은 범주와 &lsquo;종&rsquo;이라는 넓은 범주에 대해 그의 주장이 성립한다면 그 중간에 있는 범주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해야 한다. &lsquo;인종&rsquo; 말이다. 하지만 인종 구성원의 이익을 다른 인종 구성원의 이익보다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인종주의자가 아닌) 대부분 사람들이 발끈할 것이다. 페트리노비치의 주장에서 인종이 도덕적으로 유관한 범주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면 종도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버드 대학 철학과의 로버트 노직<sup>R. Nozick</sup>은 1983년에 쓴 글에서, &ldquo;종〔특히 호모사피엔스 종〕 소속 여부의 도덕적 중요성을 규명하는 이론&rdquo;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아무도 그런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런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직이 이렇게 주장할 당시에도 동물의 도덕적 지위-이는 종 소속 여부의 도덕적 중요성과 직결된다-는 철학자에게나 공장식 축산과 동물실험에 불현듯 우려를 느낀 대중에게나 중요한 문제로 자리 잡았다. 그리하여 지난 20년 동안 수많은 철학자가 호모사피엔스 종 소속 여부의 도덕적 중요성을 규명하는 이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종 소속 여부가 왜 도덕적으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만족스럽게 설명한 이론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노직의 주장은 다른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철학자들이 종 소속 여부의 도덕적 중요성에 대해 설득력 있는 이론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이론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의심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종 자체가 도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면, 종 범주와 우연히 일치하는 특징 중에 인간 아닌 동물이 열등하다는 견해를 정당화하는 것이 있는가? 도덕성이 사회계약에 토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 아닌 동물이 호혜적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열등하다고 주장한다. &lsquo;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나도 너를 해치지 않겠다&rsquo;는 계약에서 윤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은 이런 계약을 맺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동물에게 직접적인 의무를 지지 않는다. 윤리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의 난점은 어린아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대에도 직접적인 의무를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수천 년 동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할 방사성 폐기물을 수명이 150년밖에 안 되는 용기에 넣어 아무 호수에나 빠뜨리는 것은 비윤리적 행위인가 아닌가? 만일 비윤리적 행위라면, 호혜성은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에게 특별한 도덕적 의의를 부여하는 특징으로 추론 능력, 자기 인식, 정의감, 언어, 자율성 등 여러 가지가 제시되었다. 이들 기준이 겉보기에는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문제는 이러한 특징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이러한 사람을 인간 아닌 동물과 같은 도덕 범주에 넣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데이비드 드그라지아<sup>D. Degrazia</sup>의 인격 논증에서 보듯 인간 아닌 동물 중 적어도 일부는 인지 능력이 매우 발달했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은 인간 자체에 더 큰 도덕적 의의를 부여하기보다는 대다수 인간과 일부 인간 아닌 동물에게 일부 인간과 대다수 인간 아닌 동물보다 큰 도덕적 의의를 부여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물운동을 비꼬는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결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그 의미를 오해한다. 따라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종차별을 거부한다는 것이 의미하지 &lsquo;않는&rsquo; 바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종차별을 거부한다는 것은 동물이 인간과 똑같은 권리를 모조리 누린다는 뜻이 아니다. 종차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 종의 구성원과 다른 종의 구성원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할 때, 인간 아닌 동물에게 투표권이나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살짜리 아기에게 이러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살짜리 아기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이익-밥을 먹는 것, 따뜻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 사랑받는 것-까지 무시하지는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성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일부 인간 이외의 동물에게는 훨씬 적은 피해를 주거나 심지어 전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내가 소 떼를 뉴저지 주 경계 안에 가두어두더라도 소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다. 소는 풀이 무성하고 송아지나 이웃 소와 접촉할 수 있고 사나운 날씨를 피할 곳만 있으면 만족한다. 뉴저지는 이 모두를 갖춘 곳이다. 뉴욕 5번가를 거닐거나 로키산맥을 등반하거나 베네치아에서 곤돌라를 타고 싶다는 욕망이 소에게는 없다.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는 있다. 따라서 가족과 친구가 있고 뉴어크와 트렌턴의 멋진 풍광을 보며 지내더라도 뉴저지에 갇혀 사는 일은 이들에게 고문일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lsquo;정상적인 성숙한 인간에게 해당하는 이익은 인간 아닌 동물에게 해당하는 이익과 다른 경우가 많다&rsquo;는 교훈을 얻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물의 처우 문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의학 연구를 위해 정상적인 성인을 공원에서 무작위로 납치하여 치명적인 과학실험을 수행하기로 했다고 해보자. 머지않아 모든 성인은 납치될까봐 두려워 공원을 찾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공포-그와 더불어 공원을 찾는 즐거움의 상실-는 실험 자체의 고통과 별개로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게 된다. 하지만 똑같은 실험을 인간 아닌 동물에게 수행하며 실제 실험에서 행하는 통증의 세기까지 비슷하게 하더라도 동물은 인간보다 고통을 덜 느낄 것이다. 동물은 인간이 느끼는 예기 불안<sup>anticipatory dread</sup>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실험을 꼭 해야 할 경우, 정상적인 성인 인간 대신 인간 아닌 동물을 실험하는 데는 이익의 동등한 고려 원칙에 따른 나름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방금 든 예에서 정상적인 성인은 정신 능력이 인간 아닌 동물보다 뛰어난 탓에 더 큰 고통을 겪었다. 반면에 인간 아닌 동물이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더 큰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야생동물을 나중에 놓아줄 생각으로 사로잡을 경우, 우리는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없음을 동물에게 알려줄 수 없다. 인간의 의도와 상관없이 동물은 사로잡히는 것 자체에 극심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도덕적 의의를 따지기가 더 까다롭다. 전통적인 유대교, 그리스도교 윤리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신성시하지만 나머지 존재의 생명은 신성시하지 않는다. 내가 《실천윤리학<sup>Practical Ethics</sup>》과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sup>Rethinking Life and Death</sup>》에서 자세히 논증했듯, 종<sup>種</sup>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잘못이라고 판단한다면 그 정도의 정신 수준을 갖춘 개나 고양이의 생명을 빼앗는 일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잘못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뇌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어린아이의 생명을 (적어도 부모의 동의하에) 빼앗는 일은 잘못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전 세계 주요 병원의 중환자실에서는 이런 어린아이들이 &lsquo;죽음을 허락받고&rsquo; 있지 않은가. &lsquo;죽음을 허락받는&rsquo; 어린아이는 죽임을 당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맞는다. 사실 살아날 가망이 없는 인간 아닌 동물의 숨통을 과감하게 끊는 것이야말로 동물이 인간보다 더 나은 처우를 받는 유일한 경우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생명을 빼앗는 일이 왜 잘못되었는가에 대해 새로운 접근법을 취해야 한다.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한 존재가 속한 종보다는 그 존재의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더라도 정상적인 성인의 정신 능력을 지닌 존재를 죽이는 것이 이러한 정신 능력을 갖추지 못한-또한 한 번도 갖춘 적이 없는-존재를 죽이는 일보다 더 심각한 해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를테면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으로 정상적인 인간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람들의 희망과 계획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슬픔을 느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세계무역센터의 높다란 사무실에 있는 투자은행에 취직하여 기쁨에 들떠 있던 젊은 여인을 생각한다. 아파트 계약금을 저축하여 드디어 소꿉동무와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던 점원도 떠오른다. 물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도 헤아려본다. 과거와 미래(가능성)의 개념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는 이러한 희망과 계획을 품을 수 없다. 인간 아닌 동물도 가까이 지내던 존재를 잃고 슬퍼할 수야 있겠지만, 정신 능력이 다르면 슬픔의 본질 또한 달라진다. 이러한 경우 정신 능력의 차이는 유의미하며 (따라서) 어떤 죽음이 다른 죽음보다 더 비극적이라는 생각은 인간 종을 더 중시하는 편견이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종차별을 거부하는 일은 모든 생명의 가치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익과 동물의 이익은-그 이익이 어떤 이익이든-똑같이 중요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이익과 인간의 이익이 비슷할 경우-이를테면 신체적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러한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제한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펼 뿐이다. 단지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무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부 &lsquo;동물운동의 이론적 토대&rsquo;는 동물의 처우에 대한 종차별적이지 않은 접근법을 가장 명쾌하게 옹호하는 윤리적 주장인 공리주의 논증으로 시작한다. 개버릭 매스니<sup>G. Matheny</sup>는 명확하고 간결하게 논점을 제시하고 반론을 반박한 다음, &lsquo;이익의 동등한 고려 원칙&rsquo;의 훨씬 소극적 형태를 받아들일 경우에도 동물을 인간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하는 타당한 윤리적 근거가 있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메리언 S. 도킨스는 동물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매스니의-또는 (거의) 모든-주장에 깔린 필수 전제에 대해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과학자들은 이 글에서 동물이 무엇을 느끼는지, 얼마나 고통을 겪는지 실마리를 얻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데이비드 드그라지아는 &lsquo;인격&rsquo; 개념을 인간 종 이외의 범주로 확대한다. 종 경계를 뛰어넘어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특징을 탐구하는 문헌이 늘고 있으며, 드그라지아의 글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사상 흐름은 인간 아닌 동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사를 판단할 때도 적용된다. 이를테면 불치병을 갖고 태어난 신생아나 식물인간 환자의 경우가 그러하다. 하지만 드그라지아는 인격이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유일한 특징이 아니며 그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결론 내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올라 카발리에리<sup>P. Cavalieri</sup>는 철학 논쟁의 주요한 순간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역사적 관점에서 동물 논쟁을 조망한다. 카발리에리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하여 17세기 유럽을 거쳐 마지막으로 최근 50년을 살펴본다. 그는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인간 중심적 접근법과 현대 영어권 철학자들의 평등주의적 접근법을 대조하며, 심오한 형이상학의 가면 뒤에 천박한 이기주의가 숨어 있음을 폭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폴 월더<sup>P. Waldau</sup>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대우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토대인 주요 종교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월더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커다란 도덕적 차이가 존재하는지에 대해 종교마다 다른 견해를 제시하지만 일상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행위들은 생각만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 &lsquo;동물의 비참한 현실&rsquo;은 초판에 실린 글 세 편을 개정하여 재수록하고 새로운 글을 두 편 넣었다. 2부에서는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분야 중 실험실, 축사, 동물원, 서식처 등 네 곳을 서술한다. 이에 따라 크리스마스 선물로 팔린 뒤 다 자라면 버려지는 강아지와 고양이, 위협과 처벌을 당하며 묘기를 배우는 서커스 동물, 투우나 여우 사냥 같은 잔인한 스포츠 등 많은 분야가 누락되었다. 하지만 책에서 다루는 네 가지 분야는 각각 나름의 의의가 있다. 현대 동물운동에서 지난 30년 동안 펼친 캠페인들은 대부분 실험동물과 가축 위주였다. 유럽에서는 처음부터 이 두 분야를 겨냥했으며 부족하나마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리처드 라이더의 글은 동물실험 분야에서 진전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학대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클레어 드루스<sup>C. Druce</sup>와 필립 림베리<sup>P. Lymbery</sup>는 유럽연합이 가축 사육 방식을 개혁한 과정을 설명한다. 유럽의 개혁은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 그 이유는 미국의 동물운동이 최근까지도 실험동물 문제에 거의 전적으로 치중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짐 메이슨<sup>J. Mason</sup>과 메리 피넬리<sup>M. Finelli</sup>는 기업형 농업<sup>agribusiness</sup>이 동물을 거대한 생산 기계의 한갓 부속품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산업적 농업이 처음 시작되어 가장 발전한 곳은 미국이지만 이제는 전 세계에서 산업적 농업을 실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데일 제이미슨<sup>D. Jamieson</sup>이 제기한 동물원 문제는 윤리적 논증을 통해 변화를 일으키기가 좀 더 쉬워 보인다. 동물원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닌 까닭이다. 50년 전만 해도 동물을 우리에 가둔 채 전시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이제는 사람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동물원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되는 돼지, 닭, 송아지 고기는 계속 사 먹을 테지만 말이다). 동물원 중에는 사육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곳도 있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제이미슨은 동물원이 사육 여건을 개선했다고 해서 과연 그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를 마무리하는 데일 피터슨<sup>D. Peterson</sup>의 글은 이 책을 읽은 사람 중에서 육식을 하는 사람들조차 옹호하기 힘든 관행을 소재로 삼았다. 이 글을 실은 이유는 단지 독자를 충격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종차별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침팬지, 보노보, 고릴라는 인간과 같은 종에 속하지 않는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종 소속 여부가 도덕적으로 중요하다면, 이들 대형 유인원을 식량으로 취급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반면에 종 경계를 뛰어넘어 인간 아닌 대형 유인원에게 도덕적 중요성을 부여한다면, 대형 유인원을 먹는 것과 돼지나 소를 먹는 것 사이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까?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의 도덕적 격차는 넘지 못할 만큼 커 보인다. 하지만 대형 유인원을 알아갈수록 이들이 유전적, 행동적, 인지적 의미에서뿐 아니라 도덕적 의미에서도 징검다리 종이라는 증거가 속속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부 &lsquo;동물운동은 이렇게!&rsquo;에 실린 글은 모두 새로 수록되었으며, 맨 뒤 글을 쓴 헨리 스피라<sup>H. Spira</sup>를 제외하면 필자들은 초판 출간 당시 (너무 어렸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던 탓에) 동물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3부에서 설명하는 동물운동의 전략은 사람들을 완전 채식주의자로 변화시키는 일부터 시민 불복종까지, 양계장에 침입하여 닭을 구출하는 일부터 신문사에 정중한 편지를 보내는 일까지 다양하다. 새로운 운동가가 배출되고 동물의 처우를 변화시킬 아이디어가 속출하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현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초판과 달리 필자가 모두 영어 사용 국가 출신은 아니라는 점 또한 흐뭇한 일이다. 1980년대에는 동물의 고통을 막기 위한 투쟁 모델을 찾으려면 대부분 영국이나 미국을 참고했겠지만, 이제는 오스트리아와 스웨덴 같은 유럽 나라에도 눈을 돌릴 수 있다. 이들 나라는 (일부 분야에서) 동물을 위한 점진적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lsquo;진정으로 윤리적이고 비<sup>非</sup>종차별적 사회에서 동물을 대우하는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rsquo;라는 분명한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 이 책에서는 동물을 위해 폭력을 써도 좋다는 견해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동물운동은 감각 능력이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폭력에 단연코 반대하며, 여기에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도 포함된다. 참가자 수가 수백만 명을 헤아리는 동물운동 규모에 비하면 폭력 사건은 극히 드물다. 종종 &lsquo;생명 존중 운동&rsquo;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미국의 낙태 반대 운동보다도 훨씬 평화적이다(낙태 반대 운동에서는 일부 회원이 낙태 시술 의사를 살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위협한 적이 없지는 않으며 실제로 신체를 공격한 일도 있다. 물론 언론은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족족 대서특필한다. 언론이 &lsquo;동물 권리 테러리스트&rsquo;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면 동물운동 전체가 금세 이런 오명을 뒤집어쓴다. 영국의 자유주의 신문 《가디언<sup>The Guardian</sup>》은 한 사설에서 동물운동이 실험에 미친 영향을 논의하며 &lsquo;알 카에다 테러리스트&rsquo;를 들먹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기적으로는 폭력과 협박을 동원하여 (동물 학대를 방지한다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협박을 이용한 캠페인을 통해 케임브리지 대학 영장류 연구소 건립을 막아내고 옥스퍼드 대학 동물실험실 신축 계획을 좌절시킨 일이 있다. 하지만 이런 수단을 쓰면 동물운동의 윤리적 토대에 흠집이 난다. 민주 사회에서 변화를 이루는 수단은 협박이 아니라 교육과 설득이어야 한다. 정치적 목표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위험한 선례가 된다(엄밀히 말하자면, 위험한 선례를 따르는 것일 테지만). 낙태 시술 병원에 화염병을 던지고 의사를 살해한 극단적 낙태 반대 운동가들이 동물운동가 못지않은 신념의 소유자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네는 폭력과 협박을 써도 괜찮다면서 똑같은 방법을 다른 집단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면 민주적 원칙이라 말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적 과정을 저해하는 요인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대응한다면 시민사회의 토대를 지켜낼 수 있다. 간디와 마틴 루서 킹은 정당한 대의의 신념을 표현하는 데 시민 불복종이 효과적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펠레 스트린드룬드<sup>P. Strindlund</sup>, 박미연, 마르틴 발루크<sup>M. Balluch</sup>가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듯) 폭력을 쓰지 않고 공개적으로 법을 어기는 사람들은 어두운 곳에서 은밀하게 공격을 벌이고 설득보다는 두려움을 이용하여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자들보다 더 많은 존경과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고통을 줄이고 싶다면, 또한 근절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싶다면, 비폭력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은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참고문헌</p> <p style="text-align: justify">Jasper, James, and Nelkin, Dorothy(1992) The Animal Rights Crusade : The Growth of a Moral Protest, New York : Free Press.<br /> Magel, Charles(1989) Keyguide to Information Sources in Animal Rights, Jefferson, N.C. : McFarland.<br /> Nozick, Robert(1983) &ldquo;About Mammals and People&rdquo;, New York Times Book Review, November 27, p. 11.<br /> Petrinovich, Lewis(1999) Darwinian Dominion : Animal Welfare and Human Interests, Cambridge, MA : MIT Press.</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머리말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strong>피터 싱어 Peter Singer</strong><br /> 프린스턴 대학 인간가치센터 생명윤리학 분야 아이라 W. 드캠프 석좌교수이자 멜버른 대학 응용철학&middot;공공윤리학센터 명예교수이다. 1975년에 《동물 해방<sup>Animal Liberation</sup>》이 출간된 뒤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 밖에 《민주주의와 불복종<sup>Democracy and Disobedience</sup>》 《실천윤리학<sup>Practical Ethics</sup>》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sup>How Are We to Live?</sup>》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한다<sup>Rethinking Life and Death</sup>》 《세계화의 윤리<sup>One World</sup>》 《시간을 헤치고<sup>Pushing Time Away</sup>》 《선과 악의 대통령<sup>The President of Good and Evil</sup>》 등을 썼다. 《윤리학 길잡이<sup>A Companion to Ethics</sup>》(1991) 《생명윤리학<sup>A Companion to Bioethics</sup>》(헬가 커스와 공동 편집, 1999) 《이야기의 도덕 : 문학을 통해 본 윤리<sup>The Moral of the Story : An Anthology of Ethics Through Literature</sup>》 (레나타 싱어와 공동 편집, 2005) 《생명윤리학 선집<sup>Bioethics : An Anthology</sup>》(헬가 커스와 공동 편집, 2006)을 펴내기도 했다. 현재 국제동물권리협회와 &lsquo;대형 유인원 프로젝트&rsquo; 회장을 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맷 볼 Matt Ball</strong><br /> 1991년 미국에서 설립되어 동물보호에 앞장서는 비건아웃리치<sup>Vegan Outreach</sup>의 공동 창립자다. 공학을 전공했고, 비건아웃리치에 몸담기 전에는 미국 에너지부 지구변화 연구 장학생을 지내고 피츠버그 대학 생물학과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일리노이 대학에서 &lsquo;동물해방학생회&rsquo; 회장을 지내다 아내 앤 그린을 만났다. 볼 부부는 현재 피츠버그에 살고 있으며 딸 앨런은 비건아웃리치 대학생 프로그램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마르틴 발루크 Martin Balluch</strong><br />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으며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과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2년 동안 연구원과 교수를 지냈다. 1985년에 동물권리운동에 뛰어들어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학계를 떠나 오스트리아 동물권리운동에 투신했다. 1999년에 오스트리아 완전채식주의자협회를 공동 창립했으며 2002년 이래로 오스트리아 공장식축산반대연합 회장을 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파올라 카발리에리 Paola Cavalieri</strong><br /> 이탈리아 밀라노에 살고 있으며 국제적 철학 학술지 《에티카 앤드 아니말리<sup>Etica &amp; Animali</sup>》 편집자다. 《동물을 묻다<sup>The Animal Question</sup>》를 썼으며 《대형 유인원 프로젝트<sup>The Great Ape Project</sup>》를 피터 싱어와 함께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메리언 스탬프 도킨스 Marian Stamp Dawkins</strong><br /> 옥스퍼드 대학 동물행동학 교수이며 서머빌 칼리지 생물과학 연구원이다. 《동물의 고통 : 동물 복지의 과학<sup>Animal Suffering : The Science of Animal Welfare</sup>》 《동물의 관점 : 동물의 의식을 탐구하다<sup>Through Our Eyes Only :&nbsp;The Search for Animal Consciousness</sup>》 《동물 행동을 파헤치다<sup>Unravelling Animal Behaviour</sup>》를 썼으며 《동물행동학 입문<sup>An Introduction to Animal Behaviour</sup>》을 오브리 매닝과 함께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캐런 돈 Karen Dawn</strong><br />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잡지사와 ABC 방송 〈7 : 30 리포트〉에서 조사와 집필을 담당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와 《가디언》에 글을 기고했으며, 스티브 베스트와 앤서니 노첼라가 편집한 《테러리스트인가 자유 투사인가<sup>Terrorists or Freedom Fighters</sup>》에 필자로 참여했다. 돈이 운영하는 매체 감시 웹사이트 DawnWatch.com은 동물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언론에 내보낼 수 있도록 운동가들을 지원한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 KPFK 라디오 〈워치독<sup>Watchdog</sup>〉 시리즈의 진행과 제작을 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 드그라지아 David DeGrazia</strong><br /> 워싱턴 DC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동물에게 진지한 관심을 : 정신활동과 도덕적 지위<sup>Taking Animals Seriously : Mental Life and Moral Status</sup>》 《동물 권리 첫걸음<sup>Animal Rights : A Very Short Introduction</sup>》 《인간 정체성과 생명 윤리<sup>Human Identity and Bioethics</sup>》를 썼다. 《생명 의학 윤리<sup>Biomedical Ethics</sup>》 제4판 이후부터 토머스 마페스와 함께 편집했다. 드그라지아의 논문은 《철학과 공공문제<sup>Philosophy and Public Affairs</sup>》 《생명윤리학<sup>Bioethics</sup>》 《헤이스팅스센터 리포트<sup>The Hastings Center Report</sup>》 등의 학술지에 실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클레어 드루스 Clare Druce</strong><br /> 1970년대 초에 산란계의 밀집 사육에 반대하여 &lsquo;닭 해방&rsquo;이라는 단체(지금은 &lsquo;가축복지연합&rsquo;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공동 창립했다. 그 뒤로 동물을 속박하고 학대하는 축산 관행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2004년에 출간된 《미니의 꿈<sup>Minny&rsquo;s Dream</sup>》은 닭장에 갇힌 닭들의 비참한 실태를 고발하는 어린이용 모험 소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메리 피넬리 Mary Finelli</strong><br /> 동물학 학위를 받았으며 가축 보호 관련 자문을 제공한다. 1986년 이래 여러 동물보호단체와 함께 일했으며, 2001년에 주간 뉴스 소식지 《가축 감시<sup>Farmed Animal Watch</sup>》를 창간하여 2004년까지 글을 기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브루스 프리드리히 Bruce Friedrich</strong> <br /> 1996년에 동물의 윤리적 처우를 위한 모임<sup>PETA</sup>에 합류했으며 채식주의 및 가축 관련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PETA에 참여하기 전에는 노숙자 쉼터와 워싱턴 최대의 무료 급식소를 운영했다. 프리드리히는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20년 넘게 몸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일 제이미슨 Dale Jamieson</strong><br /> 뉴욕 대학 환경학 및 철학 교수이며 《도덕의 진보 : 인간, 동물, 자연에 대한 평론<sup>Morality&rsquo;s Progress : Essays on Humans, Other Animals, and the Rest of Nature</sup>》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필립 림베리 Philip Lymbery</strong><br /> 유럽의 대표적 국제동물보호단체인 &lsquo;세계 가축에 대한 연민<sup>CIWF</sup>&rsquo;에 10년 동안 몸담았다. 이 단체의 캠페인 부장을 지내던 중 유럽가축연합<sup>ECFA</sup>을 창립하여 운영했다. 2년 동안 국제 동물 복지 및 캠페인에 자문으로 활동했으며 지금은 세계동물보호협회<sup>WSPA</sup>&nbsp; 대외 부장을 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짐 메이슨 Jim Mason</strong><br /> 미주리 주에 있는 가족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장식 축산 : 기업형 농업은 가족 농장과 환경,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sup>Animal Factories : What Agribusiness is Doing to the Family Farm, the Environment, and Your Health</sup>》를 피터 싱어와 함께 썼다. 《부자연스러운 질서<sup>An Unnatural Order</sup>》는 인간을 동물과 자연의 우위에 놓는 지배적 세계관의 뿌리를 탐구한 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개버릭 매스니 Gaverick Matheny</strong><br /> 메릴랜드 대학에서 농업자원경제학을 연구하고 있다. 육류 대체품을 개발하는 비영리 연구단체 뉴하비스트(<a href="http://www.New-Harvest.org">www.New-Harvest.org</a>) 소장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박미연 Miyun Park</strong><br /> 워싱턴에서 미국 휴메인 소사이어티 &lsquo;가축 및 지속 가능한 농업&rsquo;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전에는 &lsquo;죽임에서 연민으로<sup>COK</sup>&rsquo; 대표로서 가축을 비참한 현실에서 구출하고 도살장과 재래시장, 공장식 축사의 실태를 조사했다. 박미연의 활약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코스모걸》 등의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었으며, KBS 〈한민족 리포트〉의 &lsquo;양계장 습격 사건 : 워싱턴 박미연&rsquo; 편(<a href="http://www.youtube.com/watch?v=Kk5667p7C4s―옮긴이">http://www.youtube.com/watch?v=Kk5667p7C4s―옮긴이</a>)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일 피터슨 Dale Peterson</strong><br /> 《유인원을 먹는다는 것<sup>Eating Apes</sup>》 《침팬지 여행<sup>Chimpanzee Travels</sup>》 《홍수와 방주<sup>The Deluge and the Ark</sup>》 《스토리빌 <sup>USA Storyville, USA</sup>》 등을 썼다. 《악마적 남성 : 유인원과 인간 폭력의 기원<sup>Demonic Males : Apes and the Origins of Human Violence</sup>》을 리처드 랭엄과 함께 썼으며 《캘리번의 환영<sup>幻影</sup> : 침팬지와 인간에 대하여<sup>Visions of Caliban : On Chimpanzees and People</sup>》를 제인 구달과 함께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리처드 D. 라이더 Richard D. Ryder</strong><br /> 케임브리지 대학과 뉴욕 컬럼비아 대학 동물실험실에서 실험심리학을 연구하다 1960년대에 동물권리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1975년에 출간된 그의 책 《과학의 희생자<sup>Victims of Science</sup>》는 1986년에 영국과 유럽연합이 동물실험에 대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라이더는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 위원회의 위원장을 여러 차례 지냈다. 그가 1970년에 만들어낸 신조어 &lsquo;종차별<sup>speciesism</sup>&rsquo;은 여러 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헨리 스피라 Henry Spira </strong>(1927~1998) <br /> 상선 선원, 기자, 민권운동가, 노동조합 개혁가,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동물보호 캠페인을 펼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펠레 스트린드룬드 Pelle Strindlund</strong><br /> 스웨덴의 운동가이자 작가다. 《동물 권리와 사회주의》, 《우호적 저항 : 단호하고도 부드러운 그리스도교적 비폭력》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폴 월더 Paul Waldau</strong><br /> 터프츠 수의과 대학 동물 공공정책연구소 소장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 캘리포니아 법학대학원에서 법학 박사학위, 스탠퍼드 대학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종차별의 유령 : 동물에 대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견해<sup>The Specter of Speciesism : Buddhist and Christian Views of Animals</sup>》를 썼으며 하버드, 예일, 보스턴 법학대학원에서 동물법을 강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노승영</strong><br />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인지과학 협동과정을 수료했다. 환경운동에 몸담았으며 &lsquo;내가 깨끗해질수록 세상이 더러워진다&rsquo;고 생각한다. 번역한 책으로는 《스핀닥터, 민주주의를 전복하는 기업권력의 언론플레이》 《이단의 경제학》 《세상의 종말에서 살아남는 법》 《기적을 좇는 의료 풍경, 임상시험》 《일》 《그린 베이비》 《컨슈머 키드》 등이 있다. 홈페이지 <a href="http://www.socoop.net">http://www.socoop.net</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13 오전 11:24:00《210》2010년 5월 16일<div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0_%EB%A6%AC%EB%82%98%20%ED%91%9C%EC%A7%80.jpg"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6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강영숙의 『리나』(랜덤하우스, 2006)를 읽다. - 이 작품은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진 열여섯 살짜리 탈북 소녀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두 명의 부모와 남동생을 포함한 스물두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중국을 가로질러 제3국으로 향한다. 중국은 북한과 동맹국인 때문에, 국내에서의 탈북 망명을 한사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middot;몽골&middot;베트남&middot;라오스&middot;버마&middot;인도&middot;부탄&middot;네팔 등의 나라로 밀입국 한 다음, 그곳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망명 신청을 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그 과정은 중국 공안과 불법체류자를 신고해서 포상을 받으려는 중국인의 눈을 피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불안정한 지위는 온갖 종류의 범죄와 인권 유린에 속수무책이다. 실제로 작중의 탈북자들은 중국 서쪽 국경을 넘은 직후(혹은 중국 서쪽에 위치한 중국의 자치구인지도 모르겠다), 그곳의 화학약품공장 공장장의 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리나를 포함한 네 명의 탈북자는 그에게 잡혀 강제 노동과 함께 몸을 빼앗기게 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24"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0_%EC%98%81%ED%99%94%20%ED%81%AC%EB%A1%9C%EC%8B%B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정부는 탈북자를 남한의 체제 우위를 선전하려는 용도로만 접근했지, 탈북자를 미래의 한국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때문에 남한 정부는 북한 정권의 고위층이나 엘리트층의 탈북이나 망명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떨면서, 몇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른다는 평범한 북한주민의 탈북 사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이중성을 보인다. 이름난 지식인들도 북한 주민의 대량 탈북에 대해서는 정부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우창&middot;문광훈의 『세 개의 동그라미 : 마음&middot;이데아&middot;지각』(한길사, 2008)은 그야말로 마지못해 언급하는 것처럼, 탈북자 문제를 화제로 삼는다(이 대담집의 출간연도는 2008년이나, 실제 대담은 『리나』가 문예지에 분재되고 있을 무렵인 2006년 6~10월 사이에 이루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김우창 : [&hellip;] 뉴욕타임스에 나온 거 보니까 3,000불이면 북한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부패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자신이 없는 나라일 수밖에 없어요.<br /> 문광훈 : 탈북하는 데 돈이 얼마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 보도될 정도라면, 그것은 이미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퍼져 있다는 거 아니에요?<br /> 김우창 : 아는 사람이 배를 타고 북한 쪽을 넘겨다 보고 오는 관광을 한 모양이에요. 여러 가지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광경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처럼 꽉 막힌 것은 아닌 거 같아요. <br /> 문광훈 : 얼마 전에 보았는데, 지금 탈북하는 아이들 가운데는 아홉 살 때 누나와 압록강 쪽으로 탈북하여 밖에서 잠자고 구걸로 연명하면서 중국 내륙을 횡단하여 베트남이나 태국까지 가는 경우도 있더군요. 무려 4, 5년 혹은 6, 7년이나 걸쳐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그것도 걸어서 말이지요. 보통 문제가 아니던데요.(650~651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짧은 대화이지만, 탈북자에 대한 김우창의 관심은, 탈북 사태에 대한 외교적․정책적 해결책이나 한국에서의 수용 방식을 고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탈북자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그저 북한이 부패했다는 것, 완벽히 통제된 사회는 아니라는 것에 머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시 『리나』다. 이 소설의 흥미롭고도 특별난 점은, 스물두 명의 탈북자가 떠나온 나라는 &lsquo;북한&rsquo;으로 지칭되지 않으며, 리나 일행이 가고자 하는 대한민국 역시 &lsquo;P국&rsquo;으로 기호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리둥절함은 남한과 북한에 그치지 않고, 작중에 나오는 모든 국가와 도시에 적용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난 이 국경의 동쪽 아래에 있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어요. 내가 태어난 나라와 같은 말을 쓰지만 때깔이 전혀 다르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알려진 P국으로 가려고 했죠, 국경을 넘어서 이 나라에 들어 왔어요. 처음엔 이 나라의 서쪽으로, 다시 동남쪽으로 그리고 다시 출발한 동북쪽으로 갔어요. 도대체 난 얼마나 걸었을까요? 내가 몇 살처럼 보여요? 공단이 무너졌어요. 무너졌는데도 사람들은 거기에 집을 짓고 벽을 올리고 줄 끊어진 전화기를 갖다 놓았어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려고 했죠. 이 국경 너머에 있다는 북쪽나라로 가보고 싶어요.(344~355쪽)</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보기는 분명, 리나가 북한을 탈출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남한으로 가고자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면 저렇게 명시적인데도 불구하고, 지은이가 구태여 국명을 지워서 얻고자 하는 효과란 또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이 소설의 크기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후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탈북자이면서도 독자들로 하여금 &lsquo;탈북&rsquo;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지은이가 이 작품에 나오는 국가명을 죄다 지워버렸을 뿐 아니라, 탈북자로 여겨지는 모든 등장인물로부터 &lsquo;북한말&rsquo;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깨끗이 지워 버린 이유도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두 표준말을 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지은이는, 아래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한 걸음 비켜날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color: #666699"><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61"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10_%EB%8B%AC%EC%9D%B4%EB%96%B4%EB%8B%A4_238.JPG"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lsquo;언어&rsquo;이다. 황석영 소설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서 북한에 대한 많은 공부도 하고 또한 직접 북한에 가서 많은 체험도 하셨겠지만, 가장 중요한 언어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고정 관념 같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br /> 장담하건대, 여기에 나오는 북한 언어들의 90퍼센트는 북한에서 과거에나, 현재에나 사용한 적도 사용하지도 않은 이상한 단어들과 사투리였다. (한겨레학교 아이들, 『달이 떴다』, 이매진, 2008, 191쪽)</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강영숙의 『리나』가 발표된 다음 해, 황석영도 열일곱 살 먹은 여주인공을 내세운 『바리데기』(창비, 2007)라는 탈북자 이야기를 썼다. 아직 읽어 보지 않은 황석영의 저 소설은 북한말과 사투리를 그대로 썼던 모양인데, 북한에서 내려온 청소년 독자의 평에 따르면 괜한 수고였나 보다(한겨레학교는 북한 이탈 청소년들의 남한 적응을 위해 세워진 학교. 『달이 떴다』는 그곳 학생들의 문집).</p> <p style="text-align: justify">고유명 지우기와 표준어 사용을 통해 지은이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그것은, 남한과 북한이 다르지 않다는 것. 예를 들어 북한이라고 가정되는 곳에서의 리나의 삶은 이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리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탄광 지역 노동자인 부모 밑에서 큰딸로 자랐다. 리나는 학교가 끝나면 유소년 직업훈련센터에 나가 밤늦게까지 단순한 기계 부품을 조립했다. 잠이 오고 지겨워지면 나사를 코밑에 들이대고 &ldquo;죽어, 죽어&rdquo;라고 말하고 발밑으로 한 개씩 집어던졌다.(9~10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런데 저런 삶의 양태는, 즉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삶은, 남한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아닐까? 더 나은 삶을 위해 탈북을 한 리나 일행이나, 돈벌이를 위해 중국 국경과 대륙을 떠도는 남한 출신의 &lsquo;프로듀서 김&rsquo;과 &lsquo;선교사 장&rsquo;은 데칼코마니처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의 고유명 지우기가 낳은 더 큰 효과는, 중국이라는 중심부의 자연스러운 등장이다. 고유명을 지우면 지울수록 중국은 더 커지는 반면(중국이라는 국가명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중국과 국경을 맞댄 나라들은 왜소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고유명이 나오지 않더라도 독자들은 &lsquo;경제자유구역&rsquo;이 중국인 줄 알며, 그곳에서 노동력을 파는 사람들이 동남아시아 주변에서 온 일용 노동자라는 것을 안다. 지은이는 그들에게 &ldquo;제3세계 눈물 공연단&rdquo;(266쪽)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리나&rsquo;라는 도회적이고 외래 풍의 이름은, 도무지 북한 소녀의 이름 같지 않다. 그렇게 간주할 때, 이 소설은 &lsquo;탈북 소녀&rsquo;의 이야기가 아닌, &lsquo;탈남 소녀&rsquo;의 이야기가(도) 될 수 있다. 통일이 되든, 안 되든, 남한과 북한도 &lsquo;제3세계 눈물 공연단&rsquo;의 일원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어두운 미래일까? 아니면, 이미 현재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족이다. 북한 출신 학생의 『바리데기』에 대한 두 번째 불만은 아래와 같은데, 이 불만은 『리나』에 대한 나의 불만을 대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구조나 내용 전개를 볼 때 내용이 너무 뻔하게 전개된다는 점이다. 책의 첫 부분은 그나마 진실성이 보이고, 또 탈북자로서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될 수 있었는데, 중간 부분부터는 솔직히 말해 큰 공감이 가지 않았다. 중국에서 마사지하고, 배 타고 영국에 가고, 또 영국에서 좋은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 손자와 결혼하는 등 소설의 내용이 너무 영화적인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다.(192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모든 사건의 중심에 &lsquo;(여성)육체의 교환&rsquo;이 자리하는 전개는, 좀 뻔했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13 오전 10:42:00뮌클러의 ‘새로운 전쟁’<img alt="" width="600" height="85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8_%EC%83%88%EB%A1%9C%EC%9A%B4%20%EC%A0%84%EC%9F%81/%EC%83%88%EB%A1%9C%EC%9A%B4%EC%A0%84%EC%9F%81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어판 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전쟁의 변화에 대한 나의 관찰은 이 책이 독일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여러 방식으로 확증되었다. 물론 그 말이 &lsquo;낡은&rsquo; 전쟁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008년 여름, 그루지아 군대가 빼앗긴 자국의 영토 일부를 다시 그들의 통제 아래 두려고 했을 때, 그에 대한 대응으로서 러시아 군대가 그루지아를 침공한 것은 오히려 국가 간 전쟁이라는 전쟁의 고전적 유형에 해당했다. 그러나 일단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을 제외하고 보면, 이 전쟁은 지난 10여 년 동안에 일어난 유일한 고전적 형태의 전쟁이다. 이라크전쟁은 국가 간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개입세력의 신속한 승리 후에 내전으로 변했다. 이 내전은 여러 해를 끌면서 과거의 통상적인 전쟁보다 사회경제 질서에 더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라크 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고전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이 전쟁은 이라크 전투부대의 형식적 패배로 끝날 수 없었다. 이 전쟁에는 휴전 상태도 없었고 평화협상도 없었다. 이라크 국가가 그냥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국의 정치와 군사는 일시적으로 큰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서구의 군사력에 맞선 이라크가 보유한 가장 위험한 무기였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이라크인의 저항은 게릴라전과 테러리즘의 혼합 형태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저항은 서구의 군사력에 정규 이라크 군대가 이전에 끼쳤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끼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상의 상태로 무장한 미국의 군사력과 그 밑의 국가군의 군사력 차이는 지난 몇십 년 동안 너무 커져서 대부분의 국가들의 경우, 그들이 행여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하고자 해도 정규부대로, 그리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맞서는 것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파르티잔전쟁이나 테러 공격과 같은 관습적이지 않은 투쟁 방식을 택한다면, 저항은 효과적일 수 있다. 이 책에서 고전적 전쟁의 유형으로서, 그리고 &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반대 모델로서 묘사된 대칭적 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지난 몇 해 동안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남한과 북한 간의 특별한 대치 상태가 지배하고 있는 한반도에서는 상황이 다른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대칭적 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한반도는 북한이 군사력 외의 다른 힘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도 또한 대칭적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줄어드는 보편적 경향의 예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럽과 미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관해 집중적인 토론이 이루어졌다. &lsquo;새로운 전쟁&rsquo;이 정말 그토록 새로운지, 또는 그 속에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전쟁의 요소들, 어쩌면 유럽 내의 전쟁에서보다는 식민전쟁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 요소들, 그리고 제국주의적 팽창의 시기에 전면화한 요소들이 오히려 드러나지는 않는지.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다루지 않는다. 추측컨대 대칭적 전쟁의 시대가 오히려 세계사적으로 예외이다. 대칭적 전쟁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를 취하는 영토국가 시스템이 형성된 곳에서만 나타났다. 우리는 또 전쟁의 대칭성이 동일 문화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우세한 것과 결합되어 있다고, 그리고 문화 간의 전쟁에서는 그 반대로 비대칭적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정치적ㆍ군사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전사들의 에토스와 전사들을 전쟁법적으로 구속하는 형식들과도 관련되는 문제이다. 전사들이 같은 문화에 속해 있고 대체로 같은 무기를 가지고 싸우며 비교 가능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으면, 그때에 서로 맞서 싸우는 전사들은 전투에서 모든 것을 허용하지 않는 데에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다. 대칭적 대결의 조건 속에서 충돌 당사자들은 전쟁의 규격화, 즉 전쟁 수행의 규칙에 관심을 가진다. 전쟁을 시작하고 종료하는 형식적 행위들과 전쟁포로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 등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비대칭적 조건 속에서 상황은 반대가 된다. 내가 나를 제한하는 것, 그것은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을 중지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쟁포로에 대한 고문의 금지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또한 적을 스스로 제한하도록 유도한다고 확신하지 않는다면, 자기제한을 스스로 부과하려는 경향은 약해진다. 그러므로 비대칭적 전쟁은 대칭적 전쟁보다 폭력의 강도 면에서는 약하지만 더 잔혹하고 끔찍하며, 무엇보다도 훨씬 더 오래 지속된다. &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지속 기간은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이다. 비대칭적 전쟁은 결과적으로 사회 구조에 훨씬 더 깊이 파고들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대칭적 전쟁보다 사회경제적으로 더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비대칭성은 새로운 전쟁의 &lsquo;한 가지&rsquo; 특징일 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전쟁의 경제화이다. 전쟁의 경제화의 주역으로서 한 쪽에서는 군벌들이,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버섯처럼 땅에서 솟아난, 민간경제 방식으로 조직된 군사 서비스 공급업자들이 등장했다. 양자의 특징은 전쟁이 경제적으로 유익할 수 있고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 지출보다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군사적 폭력의 사용과 공급을 경제적 자원(돈벌이의 수단)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나는 군벌과 관련하여 이 사실을 이 책에서 자세히 묘사했다. 그러나 이른바 민간군사회사<sup>Private Military Companies, PMCs</sup>는 이 책에서 덜 조명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논리에 순종하는 민간군사회사는 돈을 탐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권력에도 욕심을 내는 군벌들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 사이에 당연히 하이브리드가 등장했다. 훌륭하게 네트워크를 형성한 폭력집단의 지도자들은 전쟁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유럽에서 아프리카에 있는 반란집단들을 조종하고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명령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낡은 전쟁&rsquo;이 군대와 민간인을 구분했다면, &lsquo;새로운 전쟁&rsquo;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전쟁참가자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새로운 유형의 전쟁참가자들은 보통 과거의 전쟁참가자 유형들의 혼합과 결합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특징은 반전 가능성이다. 즉 드러나는 곳에서 그들은 민간인이지만, 가능한 곳에서 그들은 전사이다. 이것이 &lsquo;새로운 전쟁&rsquo;에 구속력 있는 규칙들을 부과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고, 또한 그 규칙들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세 번째 핵심적인 특징도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나는 전쟁의 탈군사화라고 일컬었다. 고전적 전쟁은 군대의 업무였다. 군대는 제복, 조직, 고유의 행위규범을 통해 시민사회로부터 구분되었다. 군대는 정상적인 경우에 정치, 즉 국가의 지휘권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정치적 행위논리와 경제적 행위논리는 &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폭력 행위자들 속에서 서로 결합된다. 폭력은 이제 매우 드문 경우에만 적의 군사적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사용되고, 우리의 의지를 적에게 강제하기 위해 사용된다. 민간인은 오히려 전제적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민간인은 어떤 경우에는 추방당하고, 다른 경우에는 노예노동을 강요받는다. 또 다른 경우에 민간인은 군벌들의 정치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점경인물<sup>staffage</sup>이 된다. &lsquo;새로운 전쟁&rsquo;에서 전쟁폭력은 일상적인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된다. 전쟁과 평화의 경계는 물론, 전쟁과 범죄의 경계도 흐려지기 시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새로운 전쟁&rsquo;이라는 개념은, 이 책에서 나도 그렇게 사용했지만, 어디까지나 베버적 의미의 이념형을 가리키는 것이지,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명칭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개념을 통해 오히려 비대칭성이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다른 경우에는 이 개념을 통해 경제화라는 특징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새로운 전쟁 이론은 전쟁의 어떤 전개 방향을 묘사하지만, 모든 개별 전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개별 전쟁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전혀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몇몇 논평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했다. 그들이 반론의 근거를 찾았다고 생각한 이유는 몇몇 전쟁에서 &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많은 특징들이 덜 뚜렷했고 몇몇 전쟁에서는 심지어 대칭성의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lsquo;새로운 전쟁&rsquo; 이론은 반대 사례의 발견을 통해 반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이론이 &lsquo;모든&rsquo; 전쟁이 &lsquo;새로운 전쟁&rsquo;의 유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이론은 사태 전개의 지배적인 경향이 그렇다고 주장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관찰은 독일어 초판이 출간된 이후로 여러 번 확인되었다.</p> <p style="text-align: right"><br /> 2011년 7월 베를린에서<br /> 헤어프리트 뮌클러</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정치적 공론이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지만, 전쟁은 지난 수십 년 간 단계적으로 그 양태를 바꾸어왔다. 냉전 시나리오 전체의 특징이었던 고전적인 국가 간 전쟁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모델이 된 듯하다. 국가가 실질적인 전쟁독점자의 지위에서 물러나고, 국가의 자리에는 점점 더 많이 전쟁을 지속적인 활동영역으로 삼는 유사 국가 행위자와 부분적으로는 심지어, 지역군벌이나 파르티잔에서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용병회사와 국제적인 테러조직망에 이르는, 사적인 행위자마저 들어선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전쟁 수행 비용을 직접 지불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달하는 전쟁사업가들이다. 그들은 부유한 개인이나 국가 또는 이민자 집단에게서 재정적 지원을 받거나,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천공권과 시추권을 팔고, 마약밀매나 인신매매를 하며, 인질들의 몸값을 갈취한다. 그리고 그들은 난민촌을 통제하고 있거나, 최소한 난민촌에 대한 접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가 지원해주는 물품으로부터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전쟁 당사자들이 자원을 어떻게 구하든지 간에 이 새로운 전쟁들에서 전쟁 재정의 조달 문제는 고전적인 국가 간 전쟁에서와 달리 언제나 전쟁 수행 자체의 중요한 측면이다. 재정 조달 방식의 변화는 새로운 전쟁이 끝날 기미도 없이 수십 년&nbsp; 동안 지속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새로운 전쟁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의 경제적 토대에 주목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어지는 본문에서 전쟁과 폭력의 경제적인 측면에 주목할 때에도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족적-문화적 긴장과 점차 커져가는 종교적 신념 역시 새로운 전쟁들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만약 종족적 대립이나 종교적 대립이 없었다면, 지난 십여 년 동안 발칸반도에서 일어난 전쟁과 코카서스 지역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다르게 전개되었거나 애초에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가치체계<sup>Ideologeme</sup>는 지지와 헌신을 동원하는 자원이며, 최근의 전쟁 당사자들은 이러한 가치체계에 더욱 강하게 의존했다. 이 같은 현상은 예전의 많은 전쟁들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던, 전쟁과 같은 무력행사의 동기와 그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들이 오늘날에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것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 사회혁명적 이데올로기들이 특히 그러하다. 만약 우리가 반복적으로 들어온 것처럼 가난과 궁핍이 정말 전쟁의 주요 원인이라면, 이 사회혁명적 이데올로기들에 더 큰 중요성이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전쟁에서 부의 불공정한 분배가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군사적 충돌이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전쟁사업가들이 한 지역에 둥지를 틀고 부존자원을 착취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해당 지역에 절망적인 가난이 찾아올 가능성이 더욱 커지며, 따라서 전쟁이 끝나더라도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회복될 희망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전쟁들의 독특한 경제는 전쟁의 장기적 지속과 결합하여 소모되고 황폐해진 지역들을 포괄적인 외부의 원조 없이는 자립할 수 없도록 만든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7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8_%EC%83%88%EB%A1%9C%EC%9A%B4%20%EC%A0%84%EC%9F%81/49%20%EC%9D%B4%EB%AF%B8%EC%A7%8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갈등의 원인과 폭력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나는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열려 있는 개념인 &lsquo;새로운 전쟁들&rsquo;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 나는 새로운 전쟁들이 실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니며, 심지어 여러 가지 관점에서 매우 오래된 것의 귀환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과거의 전쟁 수행 형태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새로운 전쟁들의 특징과 특별한 점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우선 새로운 전쟁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전쟁에 대한 생각에 여전히 각인되어 있는, 고전적인 국가 간의 전쟁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새로운 전쟁이 일정한 측면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전쟁 수행 조직의 국유화 시작 이전으로 회귀된 것처럼 묘사될 수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전쟁이 국유화하기 전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상황과의 유사점을 밝히는 데 적합한 방법이다. 당시에는 국가가 아직 전쟁의 독점자로 등장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국가가 더는 전쟁의 독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삼십년전쟁의 상황은 새로운 전쟁들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흡사하다. 삼십년전쟁에 특징적인 것은 사적인 부와 개인적 권력의 추구(발렌슈타인, 에른스트 만스펠트, 크리스티안 폰 브라운슈바익), 이웃한 강대국 정치인들의 팽창 추구(리셸리외, 베틀렌 가보), 특정 가치들을 보호하기 위한 개입(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권력, 영향력, 지배적 지위를 둘러싼 내부투쟁(팔츠의 프리드리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등으로 구성된 혼합물이었다. 또한 종교적 신조의 결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과 베트남, 이라크와 이란,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사이에서 치러진 것 같은 고전적인 국가 간 전쟁의 몇몇 사례들을 제외한다면, 우리 시대 대부분의 커다란 전쟁들에서 가치와 이익, 국가적, 유사 국가적 행위자와 개인적 행위자들로 구성된 유사한 조합을 관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폭력 사용의 지속적 중지에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은, 그래서 평화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익집단이 많다는 사실이다. 수단 남부에서 대호수 지역과 콩고를 지나 앙골라에 이르는 사하라 이남 지역의 전쟁들,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관련된 전쟁들, 코카서스 전 지역에서 일어난 무장분쟁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한 체첸 전쟁, 1980년대 초반 이래 계속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들은 모두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국가 간 전쟁들보다는 삼십년전쟁과 훨씬 더 유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역사적인 비교는 새로운 전쟁들의 특별함을 분명히 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전개를 추적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이미 언급한 군사력의 탈국가화 또는 민영화이다. 이것은 새로운 전쟁들에서 전쟁의 직접적인 수행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경량의 무기들을 어디에서나 염가에 구할 수 있으며 그것들의 사용법을 익히는 데에도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쟁 수행 비용이 낮아진 것은 군사력의 비대칭화라는 새로운 전쟁들에 특징적인 두 번째 전개와 관련이 있다. 통상적으로 동등하지 않은 적수가 맞서 싸우는 상황인 것이다. 더는 외부로 드러나는 전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는 일도 드물고, 대규모 전투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군사력이 서로 충돌하여 소비되지 않고 비축되었다가 민간인들에게 사용된다. 이런 비대칭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전에 군사전략의 하위 전술적 요소였던 폭력 사용의 특정 형태들이 비대칭화 과정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 전략의 차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 이후에 전개된 파르티잔전쟁과 특별히 테러리즘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전쟁들에 전형적인 세 번째 경향, 즉 한때 군사 시스템의 일부였던 폭력 형태들의 점진적인 자립화 또는 자율화를 언급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정규군은 전쟁 발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렸고, 이 통제력의 상당 부분이 전쟁을 동등한 행위자들 사이의 대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폭력행위자의 손에 넘어갔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상황에서 대규모로 조직된 폭력에 대한 종합적 표현이라는 전쟁 개념을 유지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2) 전쟁의 국가 독점이 끝나면서 실제로 전쟁은 자신의 윤곽선을 잃어버렸다. 전쟁의 폭력과 조직범죄는 점점 더 중첩되어 나타나고, 정치적 요구들을 내세우는 대규모 범죄 조직들과, 약탈과 불법 물품의 교역으로 부양되는 과거 군대의 잔존 세력이나 군벌 지도자의 무장 추종세력을 구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lsquo;전쟁&rsquo;은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개념이 되었다. 위와 같은 현상에 전쟁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폭력 사태의 악화를 조장하는 것일까? 아니면 기존의 국가 간 전쟁 모델을 고수하면서 폭력 사용의 국가하위적 형태들에 전쟁의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전쟁 현상의 새로운 전개들에 눈을 감는 것일까?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국제 테러리즘의 최근 형태들과의 대결에서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을 얻었다. 늦어도 2001년 9월 11일 이후로는 무엇이 전쟁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되지 않아야 하는지가 학문 내적 질문에 그치지 않고 세계 정치적 중요성을 가지는 결정이 되었다.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찾는 일에 기여하고자 한다.</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새로운 전쟁, 무엇이 새로운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오래된 제국들과 새로운 전쟁들</b></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10~20년 동안 길게나 짧게 우리의 이목을 끌었던 대부분의 전쟁들은 지난 세기의 초반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분할했던 제국들의 주변부와 분할 단면에서 벌어졌다. 그래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관계된 발칸반도상에서의 전쟁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20세기 초까지 서로 충돌했고 크고 작은 전쟁의 결과로 그들의 세력 범위를 늘 다시 바꾸었던 바로 그곳에서 가장 격렬했고 또 오래 지속되었다. 옛 소비에트 연방의 남부, 즉 코카서스와 그 접경 지역에서 활활 타오른 무장분쟁과 전쟁들도 유사하다. 이 전쟁들도 본질적으로 그런 지역들에 관계된다. 그 지역들은 18세기 이래 팽창하는 차르 제국과 움츠러드는 오스만 제국이 서로 패권을 두고 다투었던 곳이며, 러시아인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서도 그곳 주민들을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는 데에 일시적으로밖에 성공하지 못한 곳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오스만 제국이 최종적으로 멸망하면서 단지 발칸반도와 코카서스에서만 분쟁과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랍 지역에도 수많은 분쟁들이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팔레스타인 분쟁은 오래 전부터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프가니스탄도 유사하다. 19세기에 아프가니스탄은 이곳으로 향하는 러시아 차르 제국과 인디아 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 제국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었고 그 기능을 20세기까지 지속해왔다. 1970년대 말에 소비에트 연방이 자신의 영향권을 힌두쿠시 산맥 너머로 확장하고, 세계의 에너지 저장고인 아랍 지역과 중국에 맞서는 잠재적 동맹국으로서 의미가 있는 인도 사이에 전략적 도약대를 확보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내의 근대화 세력과 전통주의 세력 사이의 대립을 이용하려 했을 때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20년 이상 지속되다가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국가조직을 붕괴시키고서야 끝났다. 1980년대에 미국은 반 소련 성향의 무장 게릴라 조직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소련의 간접적인 적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물러난 후에 그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관심이 약해지자 그 자리에 파키스탄이 들어섰다. 파키스탄의 군사정부는 카불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인도와의 대규모 전쟁에 전략적으로 필요한 후방을 확보하기를 원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의 이런 관심 역시 예전에 영국인들이 지배하던 공간이 깨어지면서 생겨난 갈등, 즉 언제나 다시 양국 간의 전쟁을 통해서 해결되곤 하는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 상태에서 비롯했다. 1940년대 후반에 대영 제국의 &lsquo;파산재산&rsquo;에서 생겨난 이 두 적대 국가들은 특히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측이 모두 인정하는 국경선을 확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일부는 인도에, 일부는 파키스탄에 (또 부분적으로는 중국에도) 속하는 이 지방은 오늘날까지도 끊임없는 갈등의 온상으로 남아 있다. 접근이 어려운 이 지방의 산악 지역에는 작은전쟁, 곧 파르티잔과 민병들의 전쟁이 수십 년 동안 둥지를 틀고 앉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소말리아를 넘어 기니나 시에라리온에 이르는 동남아시아와 사하라 이남의 검은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전쟁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유럽의 식민세력이 지배했던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때 국가들 사이의 충돌을 유발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에 그어진 국경선이기보다는 정치적 영향력과 사회경제적 노선의 채택을 둘러싼 내부의 분쟁이다. 여기에서 종족적 갈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기원은 부분적으로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갈등을 식민세력들은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용해왔다. 이 종족적 갈등 외에 또한 드물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차이들이다. 종족적 갈등과 종교적&middot;문화적 차이는 종종 수십 년 이상 지속되는 충돌의 과정에서 권력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다툼들로 뒤덮이며, 결국 그 둘 중에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단순한 계기인지 거의 알 수 없게 된다. 또한 전쟁 행위자들이 추종자를 모집하고 지지를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적 자원으로서 그 차이들을 기꺼이 착취한다. 심지어 보스니아처럼 다문화, 다종족 공동체들의 공존이 수십 년 동안 문제없이 이어져온 곳에서도 공공연히 폭력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종족적이고 종교적인 구분선이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단층선이 된다. 요컨대, 종족적이고 종교적인 대립은 대부분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갈등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새로운 전쟁들은 개인적인 권력 추구, 이데올로기적 확신, 종족적&middot;문화적 대립, 탐욕과 부패로 이루어진 꿰뚫어 보기 어려운 혼합물에 의해 그 불씨가 유지되며, 불명확한 목적과 목표를 위해 빈번히 수행된다. 상이한 동기와 원인들의 이런 혼합이 특별히 새로운 전쟁들을 끝내고 안정적인 평화 상태를 구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일어난 전쟁의 지리적 분포와 밀도를 보면,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처럼 안정적인 국가 건설이 이루어진 곳에서 지속적 평화의 지대가 발전해온 반면, 다른 어느 곳보다 대제국이 붕괴한 지역에서 전쟁이 풍토병이 되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곳에서도 물론 국가들이 생겨났고 그 국가들이 곧바로 UN이라는 세계기구에서 한 자리씩을 차지했지만, 그 국가들은 그저 수만 많았을 뿐 모두 연약했고 거의 독립적이지 못했다. 이 지역에서는 유럽에서와 유사하게 강한 국가성의 등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제3세계나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주변부에서 진행된 수많은 국가 건설 과정들이 좌절되었다는 사실에 이제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실패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서 국가기구로의 접근통로를 개인적 치부의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사명과 의무로 여기는 건전하고 청렴한 정치 엘리트들이 없다는 점이 언급되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지역에서 국가권력의 &lsquo;나포&rsquo;가 실행되고, 이제 국가권력은 권력의 확대나 부의 증대에 봉사한다. 통상 이 두 가지는 어렵지 않게 서로 연결된다. 새로운 전쟁들의 원인과 그것의 종식 가능성에 관한 토론에서 언제나 다시 들을 수 있는 널리 유포된 생각과 달리, 가난은 결코 그 자체로 폭력 상승의 위험과 전쟁의 임박한 개시를 초래하지 않는다. 비참한 궁핍과 엄청난 부의 공존은 기껏해야 한 사회 안의 갈등이 공개적인 내전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예측력 있는 지표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전들이 짧고 격렬한 무력 충돌 후에 끝나지 않고 오래 지속되는 초국가적 전쟁으로 커질 가능성은, 다툼의 대상이 되는 지역에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고 추측될수록 그만큼 더 커진다. 이 지하자원을 비상시에 무력으로라도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자원을 해외시장에 판매하여 부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적인 부는 확정적인 가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전쟁의 원인이다. 사회 내부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데에 기여하는 또 다른 요인은 지불 능력이 있는 이민자 공동체의 등장이다. 이 공동체들은 각각 자신들의 이익과 충성심에 따라 하나 또는 다수의 교전 집단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의 지구력을 높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전쟁들의 출현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함께 작용한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진정한 원인이나 결정적 원인으로 지목될 수 없다. 따라서 제국주의 이론의 현대적 변형, 신식민주의 이론들, 종족적 차이나 종교적 대립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은 단일인과적 명제들은 모두 역부족이다. 그러나 평화협정을 종종 가망 없는 기획으로 만들어버리는 상이한 동기들과 원인들의 불가해한 조합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전쟁들에서 국가들이 아니라 유사 국가적 행위자들이 서로 맞서 싸운다는 사실의 직접적인 귀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국가건설전쟁인가, 국가붕괴전쟁인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전쟁들이 국가의 붕괴로부터 성장해 국가의 붕괴 속에서 끝난다는 명제는 분명히 반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 명제가 처음부터 지나치게 비관주의적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국가 건설 과정을 동반했고, 그 과정을 때로 중단시키기도 했지만 결국엔 촉진시킨 것처럼, 적어도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새로운 전쟁들이 국가건설전쟁이 될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을 이 명제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비를 원칙적으로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보편적인 권력들의 붕괴에서 비롯한 유럽에서의 국가 건설 과정이 결코 직선적이지 않았으며 한두 세대 안에 완료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그러나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국가건설전쟁과 제3세계 또는 제1세계와 제2세계의 주변부에서 일어난 국가붕괴전쟁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미국의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이 국가건설전쟁이라는 것에는 추가 설명이 필요 없다). 전자가 마치 병원과 같은 환경에서, 즉 &lsquo;외부의&rsquo; 커다란 영향 없이 진행된 반면에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로 태어나서 여전히 불안정한 국가들을 붕괴시키는 우리 시대의 전쟁들은 오히려 외부의 지속적인 정치적 개입에 종속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그 전쟁들은 국가경제의 발전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세계경제적 교환체계 속에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지하자원, 석유와 광석, 다이아몬드와 귀금속 형태의 국가 재산이 자립적 경제 발전에 대체로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재산의 획득과 분배를 둘러싼 충돌들을 강화시켜왔다. 그러므로 오늘날 다수의 실패한 국가들이 좌절한 것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충분히 통합되지 못한 사회들의 부족중심주의 탓만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강한 국가성이 부재한 곳에 파괴적 영향을 끼쳐온 경제적 지구화의 물결 탓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냉전 시대에 동서 양 진영에 의해 이루어진 개입들은 국가의 공고화에 최소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군사자문관을 파견하고 무기와 장비들을 보급함으로써 국가 건설을 가속화하고 이미 시작된 국가의 침식은 멈추려는 서방 국가들과 한때의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노력은 거의 항상 재난으로 끝났다. 최근 30년 동안의 아프리카 정치 발전에 관해 탁월한 식견을 지닌 폴란드 저널리스트 리샤드 카푸친스키<sup>Ryszard Kapuscinski</sup>는 그 사실을 소련이 지원한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sup>Mengistu</sup> 군사정부의 예를 들어 이렇게 묘사했다. &ldquo;멩기스투는 모스크바의 도움으로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군대를 만들었다. 그 군대는 40만 명의 병사를 보유했고 미사일과 화학무기도 갖추었다. (&hellip;&hellip;) 그들의 사령관이 달아났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장한 이 거대한 군대는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졌다. (&hellip;&hellip;) 멩기스투의 병사들은 탱크, 미사일 발사기, 비행기, 대포를 버려두고 모두 각자의 힘으로 걷거나 노새 또는 버스를 타고 고향과 집으로 돌아갔다. 에티오피아를 횡단하다보면 수많은 마을과 도시에서 젊고 건장한 청년들이 집 앞에 할 일 없이 앉아 있거나, 길을 따라 즐비하게 서 있는 허름한 술집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1991년 여름 단 하루 만에 무너진 멩기스투 장군의 위대한 군대 병사들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전쟁들이 국가건설전쟁이기보다는 국가붕괴전쟁이라는 추측은 최근 OECD 국가들에서도 국가의 조정 및 통합 능력의 발전이 그 정점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심지어 이 국가들에게조차 국가의 운영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목적에 맞게 적절한 비용을 들여 통제하는 일이 어려워지고 1970년대 중반 이래로 국가의 통제 기능과 보장 기능이 지속적으로 후퇴하고 있다면, 비슷한 작용과 도전이 개발도상국들의 훨씬 취약하고 무능한 국가기구를 압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개발도상국의 엘리트들이 아직 세습적인 권력 및 충성 유지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지배 방식은 대부분 공공연한 부패와 국가 자산의 약탈로 변했다. 가신들에게 혜택과 교부금을 베풀어 그들을 붙잡아두어야 할 필요성과, 그 일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원재료를 판매하고 채굴권을 이양하거나 불법 물품을 거래할 가능성은 곧바로 이렇게 들어오는 수입의 더 많은 부분을 자신의 위험수당으로 떼어놓고 서유럽이나 미국에 있는 은행계좌에 묻어두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많은 나라들이 힘들게 발전시켜온, 국가성과 그에 걸맞는 정치 엘리트의 에토스, 국가에 충성하는 공무원의 싹들이 짧은 시간 안에 파괴되었다. 고래의 부족중심주의와 탈근대적 지구화 사이에서 국가 건설의 싹들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서 말 그대로 짓이겨졌다. 근대 초의 유럽 국가들과 달리 제3세계 국가들은 국가성을 발전시키고 필요한 저항력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태의 전개를 더 극적으로 만든 것은 전통적 부족중심주의와 지구화의 새로운 형태라는 두 요소가, 그것이 국가 건설을 가로막고 그 싹을 파괴한 것과 동일한 정도로, 내전의 발발을 용이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서 내전의 지속에도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근대 초기에 유럽의 경제생활은 상당 부분 자급자족적인 농업경제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런 조건하에서 전쟁은 발발했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사라졌다. 땅이 망가졌고 농토가 황폐해졌으며 비축식량이 약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 전쟁들은 그림자 지구화의 통로들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경제와 연결되며, 전쟁의 지속적인 수행을 위해 필요한 자원들을 끌어들인다. 이 사실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평화를 더욱 성공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라도 우선 투입될 수 있는 모든 자원들이 완전히 소진되도록 이 전쟁들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전략이론가 에드워드 러트웍<sup>Edward Luttwak</sup>의 제안이 헛된 것임을 신속하게 보여주었다. 전쟁 중에 늘어나는 자원의 소비를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서방 국가들과 UN의 일시적인 통상금지 정책은 거의 모든 경우에 실패했다. 전쟁을 계속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의 확보에 전쟁 당사자들이 거의 언제나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공통점이나 전략적 이해관계를 지닌 정권의 지원을 받는 전통적 방식으로, 또는 그림자 지구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이용하여 그들은 자원 확보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새로운 전쟁들의 거의 4분의 1이 10년 이상 지속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앙골라에서는 30년 동안, 수단에서는 최소 20년, 그리고 소말리아에서는 15년 이상 전쟁이 계속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2002년 시점에서] 이제야 비로소 실질적으로 끝난다고 하더라도, 24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며, 동아나톨리아와 스리랑카에서의 전쟁 역시 그 기간이 20년에 근접한다. 지원 세력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림자 지구화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이민자 공동체들도 이 그림자 지구화에 속한다. 그들은 자금을 보내고, 온갖 종류의 거래를 성사시키며, 전쟁에 참여할 지원자를 모집하고, 부상당하고 지친 병사들을 받아줌으로써 전쟁에 가담한 어느 한 편을 지원한다. 이때, 거의 모든 새로운 전쟁들에 동반하여, 이웃한 국가의 영토 또는 UN의 보호 아래 전쟁이 발발한 곳에 세워지는 난민수용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난민수용소는 결코 &lsquo;전쟁의 쓰레기더미&rsquo;만은 아니다. 그곳은 국제기구들의 인도적 지원이 부분적으로 전쟁의 지속적 수행을 위한 자원으로 변환되는 보급기지이고 예비군 부대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8_%EC%83%88%EB%A1%9C%EC%9A%B4%20%EC%A0%84%EC%9F%81/30%20%EC%9D%B4%EB%AF%B8%EC%A7%80.jpg" /></p> <br /> <br /> (서문, 1장 일부)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헤어프리트 뮌클러 Herfried Mu&quot;nkler</strong><br /> 현재 독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학자 가운데 한 명이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정치학, 독문학, 철학을 공부했고, 1981년에 마키아벨리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1987년에 유럽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론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 1992년부터 베를린 훔볼트대학 사회과학대학의 정치이론과 사상사 강좌를 맡고 있으며,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학술원의 회원이자 새롭게 편집되고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마키아벨리』,『국가의 이름으로』,『전쟁에 관하여』,『새로운 걸프전쟁』,『전쟁의 변화』,『제국들』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공진성</strong><br />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현대 정치철학의 해석학적 전환에 관한 논문으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베를린 훔볼트대학에서 스피노자의 정치사상에 관한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조선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셸던 월린의『정치와 비전』(제1권, 2007)을 강정인 교수와 함께 한국어로 옮겼고, 존 로크의 『관용에 관한 편지』를 라틴어에서 한국어로 옮겼다. 책세상 비타악티바 시리즈『폭력』과『테러』를 썼으며,『서양 고대ㆍ중세 정치사상사』를 함께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9 오후 2:38:00《209》2010년 5월 15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1"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9_%ED%8C%8C%EC%8B%9C%EC%A6%98%20%EC%84%B8%EA%B7%A0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5일</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샤엔의 『파시즘 세균』(지만지, 2008, 지만지 고전 선집 112)을 읽다. - 근대 중국의 시작은 1911년의 신해혁명<sup>辛亥革命</sup>으로부터 시작한다. 신해혁명으로 중국은 268년 동안의 만주족 통치(청나라)와 기원전 221년 진시황부터 2133년간 지속되었던 황제 통치를 동시에 무너뜨리고 공화국(중화민국)을 선포했다. 신해혁명의 중요성은, 혁명의 도화선이 된 10월 10일의 우창봉기를 중화인민공화국이 &lsquo;신해혁명 기념일&rsquo;로, 또 타이완에서는 &lsquo;쌍십절<sup>雙十節</sup>&rsquo;로 동시에 기념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신해혁명과 공화국 수립은 그러나 청나라를 패망시켰을 뿐, 황제 제도의 잔재와 군벌들의 각축 시대를 열었으며, 외세의 영토 분할[租借]과 경제적 침탈 앞에 무기력했다. 그래서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혁명이 다시 요구됐고, 그런 열망이 터져 나온 게 1919년의 베이징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5.4운동<sup>五四運動</sup>이다. 같은 해에 일어났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라고도 하고 또 조선의 3.1운동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는 5.4운동은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는 한편 근대사&middot;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연 대중 정치운동으로 평가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91" height="33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9_54%EC%9A%B4%EB%8F%99.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5.4운동은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중국의 현대 연극도 당연 5.4운동 전후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문학인들과 지도적인 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주도된 그 시기의 연극 운동은 ⅰ) 중국 전통 연극과 결별하고 ⅱ) 일본의 중국 유학생들이 일본의 &lsquo;신파극&rsquo;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lsquo;신극[화극<sup>話劇</sup>]&rsquo;을 좀 더 리얼리즘 원칙에 부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시기를 &lsquo;신극 운동&rsquo;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운동의 기원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일본의 신파극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서구화를 가장 앞서 받아들인 나라고, 그것의 가공할 만한 결과를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의 승부가 보여준다. 다시 말해 여타의 모든 분야가 그랬듯이 연극 분야에서의 서구화 역시 일본이 앞장섰는데, 청일전쟁 때 서구화를 숭상하던 일본의 청년들이 서양 현대극 형식을 들여와 군대의 사기를 북돋았던 연극이 바로 &lsquo;지사극<sup>志士劇</sup>&rsquo;이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며 직업화된 게 바로 신파극이다. 이는 1906년을 전후로 크게 유행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06년 12월, 중국의 일본 유학생들이 뒤마 피스의 소설을 각색한 &lt;춘희&gt;를 도쿄에서 공연한다. 일본 신파극의 연출 기법을 채택했던 이 연극을 시작으로, 중국 현대 연극은 중국 전통의 구극(경극)과 결별하게 되고 신극 시대를 연다. 이 기원이 당대의 중국 현대 연극의 형식을 규정하는데, 여기엔 부연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중국 현대 연극이 서구 리얼리즘 연극과 조우하기 위해, 반드시 일본 신파극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그것이다. 중국의 서구화가 시기적으로 일본에 뒤지긴 했지만, 일본만이 서구 사조의 유입에 유일한 창구는 아니다. 샤옌과 궈모뤄를 비롯한 많은 극작가들이 일본 유학을 거친 건 맞지만, 1922년에는 미국에서 연극 공부를 마치고 상하이로 귀국한 텐한 같은 작가도 벌써 생겨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본을 경유한 서양 화극의 영향에 덧보태야 하는 중국 현대 연극의 또 다른 기원은, 중국이 처한 당대의 상황이다. 제국주의와 반근대적인 봉건 유습에 찌들어 있는 중국의 낙후한 상황은 지식인과 학생들로 하여금 구국을 자신의 책무로 여기게 했으며, 어떤 일을 하던 구국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기원은 앞서의 기원이 형식과 연관되었던 것과 달리, 내용과 연관되는 것으로 &ldquo;&lsquo;신극&rsquo;이 왜 초창기부터 사회 개혁의 뜻을 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이유&rdquo;(마썬, 『현대 중국 연극』,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2006, 27쪽)를 설명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국 현대 연극이 국가 만들기에 했던 기여는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나남, 2003)에서 주장했던, 근대 국가 만들기에 문학(소설)이 했던 역할과 같다. 문학처럼 연극 또한 새로 형성되는 시민계급에게 지적&middot;도덕적 발견을 실어 나르며, &lsquo;언문일치&rsquo;와 &lsquo;공감&rsquo;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계층을 하나로 묶어, 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애국 계몽을 통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고 봉건적 유습을 철폐하려는 노력 가운데 나왔던 중국 현대 연극은 &lsquo;표준어(베이징어)&rsquo; 사용을 통해 국가의 구성원을 하나로 묶고, 근대화를 효율적으로 이루는 데 필요한 초석을 놓고자 했다. 1930년부터 1949년까지 기라성같은 중국 현대 극작가들이 활동하게 된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는데, 여기에는 꼭 알아두어야 사항이 하나 더 있다. 같은 시기 한국&middot;중국&middot;일본 3국에서 나온 극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중국 극작가의 수와 작품의 월등한 질에 누구나 놀라게 된다. 그 저력은 원나라 때부터 자기 이름으로 희곡을 쓰고 발표했던 중국 희곡의 유구한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00년 절강성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샤옌은 일본에서 공학을 공부하는 중에 중국공산당에 참가하게 되고 진보 성향의 문학 단체에서 일하게 된다. 고리끼의 『어머니』를 번역하고 소련 영화 이론을 소개하는 등의 활동하던 그는 최초의 장막극 「새금화」(1935)와 자신의 대표작 「상해의 처마 밑」(1937)을 발표하면서, 차오위와 함께 당대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로 손꼽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시즘 세균」(1942)은, 극작상으로는 「상해의 처마 밑」이 보여 주었던 &lsquo;인물의 전형화&rsquo; 수법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내용적으로는 &lsquo;정치 제1, 예술 제2&rsquo;라는 공산당의 지도를 따르고 있다. 예술가들이 공산당의 지도를 선선히 받아들이게 된 바탕에는 급박했던 당대의 중국 현실 탓도 있지만, 무엇이든지 &lsquo;중국 안에 중국의 기원&rsquo;이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은 이것 또한 중국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lsquo;문장으로 도를 구한다&rsquo;는 오래된 문이재도<sup>文以載道</sup>의 목적론적인 문학 사상이 중국 전통 속에 있었고, 그런 한문 문화권의 문학관이 공산당의 지도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 5막으로 이루어진 「파시즘 세균」은 철저하게 막 개념을 장소의 이동과 일치시킨 작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막 도쿄 교외. 위스푸의 셋집(1931년 9월)<br /> 2막 상하이 프랑스 조계. 위스푸의 집(1937년 8월)<br /> 3막 홍콩 자오안타오의 거실(1941년 12월)<br /> 4막 홍콩. 위스푸의 집(1941년 12월 하순)<br /> 5막 구이린 기슭. 자오안타오의 피난지(1942년 2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시간과 장소의 변화를 동반한 이 연극 작품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상황 앞에서 시시각각 변해가는 인물들의 변화를 그린다. 1막부터 4막까지 줄곧 순수 과학 연구에 매진하면서 정치를 기피했던 위스푸는 5막에 가서 자신의 태도를 바꾼다. 반면 그의 친구인 자오안타오와 대위법적인 자리바꿈을 하는 인물이다. 위스푸와 달리 늘 정치를 앞세웠던 그는 2막에서 퇴락한 군벌이자 은행가의 딸 첸친셴과 결혼을 하는데, 그는 그것을 기점으로 전시의 혼란을 틈타 돈놀이와 희귀재 장사에 몰두한다. 자오안타이와 함께 위스푸를 비난했던 친정이 역시 5막에 가서는 약삭빠른 장사꾼으로 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혼란기를 틈탄 기회주의적인 인물의 묘사가 흥미를 돋우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정치와 순수 과학 사이의 대립이다. 그 갈등은 29, 47, 64, 65~66쪽 등에 흩어져 있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4막 125~127쪽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샤옌은 첸위의 입을 빌려 &ldquo;전염병과 전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rdquo;면서, &ldquo;장티푸스를 박멸하려면 파시즘을 박멸해야 한다&rdquo;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첸위 : 아시다시피 지금 세계적으로 가장 무서운 세균이 발견되었어요.<br /> 위스푸 : (놀라며) 뭐라고?<br /> 첸위 : 금년 6월부터 현재까지 동유럽과 소련 및 독일 전선에서 이미 천만 명이 죽었는데, 사실상 이 병은 벌써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전파되어&hellip;<br /> 위스푸 : (영문을 모르는 듯) 무슨 병인데?<br /> 첸위 : 이 세균을 퍼뜨리는 건 쥐도 아니고 이나 벼룩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바로 우리 자신, 바로 인류라는 거죠. 그 세균은 인간의 뇌막 표피 속에 기생하는데, 장티푸스균보다 훨씬 작아서, 60배짜리 현미경으로도 보이지 않고 배양할 방법도 없다고 합니다. 그건 일종의&hellip; 추상적인 세균인 거죠. <br /> 위스푸 : 웃기는 소리야. 자네 허튼소리 하는군.<br /> 첸위 :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이 세균의 이름은 파시즘이라고 하는데, 번역하자면 &lsquo;파쇼주의&rsquo;라고 하죠. 이 세균으로 인해서 퍼지고 있는 전염병이 바로 파시즘 침략 전쟁이라는 겁니다&hellip;.<br /> 위스푸 : (웃으며) 음. 꽤 똑똑하군. 이런 얘기들, 어디서 생각해 낸 건가?<br /> 첸위 :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어제저녁 방공호 안이 굉장히 추웠는데, 전 상의를 서우전에게 주고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깨달았죠. 방공호 안에서 북적대는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노인들과 어린아이들, 이 사람들은 모두 파시즘 세균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는 병자들이라는 사실을요&hellip;.<br /> 위스푸 : (일어나서 걸으며) 음. 아주 말 잘했네, 아주 똑똑해 하지만 이런 세균은 의사가 박멸할 수 있는 게 아닐세.</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용된 대목에서 첸위는 정치(전쟁)와 위스푸가 몰두하고 있는 순수과학(세균 연구)이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위스푸의 &lsquo;전문가 지상주의&rsquo;를 공박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친구들이 자신의 신념을 모두 상실한 5막에 가서, 위스푸는 자신의 과학지상주의를 버리게 되고(161~162쪽), 이제는 입장이 바뀐 친구를 공박한다(166쪽). 그러면서 연구소가 아닌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기로 결심한다(168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1938~1939년 사이에 쓰여진 B.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앞서, 과학이 결코 정치&middot;사회와 같은 주변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또 J.P.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에서 지식인이란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던바, 샤옌은 &lsquo;전문가주의&rsquo;에 빠진 지식인의 한계에 대해 사르트르보다 훨씬 앞서 고민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80">사족. 본문 가운데, 샤옌이 활동했던 시절의 중국 연극을 가리켜 &ldquo;당대의 중국 현대 연극&rdquo;이라는 어색한 표현을 딱 한 차례 쓰고 있다. 까닭은 2011년의 &ldquo;당대의 중국 현대 연극&rdquo;은 따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시점의 &ldquo;당대의 중국 현대 연극&rdquo;은, 탈서양<font color="#000000">&middot;</font>전통 회귀다. 많은 점에서 오늘의 중국 현대 연극은, 샤옌이 활동했던 시절의 중국 현대 연극과 다르다. 그 단적인 예가 프랑스 망명으로 단절되고만 가오싱젠의 연극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내에 번역된 가오싱젠의 여러 작품집과, 거기에 붙어있는 그의 연극론을 보면 된다.</span><br /> &nbsp;</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09 오전 11:43:00유발-데이비스의 ‘젠더와 민족’<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8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7_%EC%A0%A0%EB%8D%94%EC%99%80%20%EB%AF%BC%EC%A1%B1/%EC%A0%A0%EB%8D%94%EC%99%80%EB%AF%BC%EC%A1%B1_%ED%91%9C%EC%A7%80_60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수년간 젠더와 민족을 연구하면서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해왔던 작업들의 정점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처음의 계기는 이스라엘의 젠더 관계와 이 젠더 관계가 시오니즘 정착 기획, 이스라엘-아랍 갈등과 관계 맺고 있는 방식을 연구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젠더 구분과 민족 구분을 연구했는데, 남동부 런던 지역에 이어 이후에는 유럽을 비롯한 기타 여러 정착민 사회들을 검토했다. 이 여정 초기에 특히 중요했던 이정표가 1984년 내가 조직했던 &lt;여성과 국민 재생산&gt;<sup>Women and National Reproduction</sup>이라는 국제 워크숍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계 각처에서 온 &lsquo;중요한 타자들&rsquo;과 함께 &lsquo;집단체의 잉태/전달자&rsquo;<sup>bearers of collectivities</sup>(Yuval-Davis, 1980)로서의 여성에 대한 나의 생각을 나눌 기회를 가졌으며, 마침내 이때 『여성-민족 -국가』(Yuval-Davis and Anthias, 1989)가 출간되었다. 지금의 이 책 『젠더와 민족』이 출간되기 직전 중요한 이정표가 하나 더 등장했다. 1996년 6월 그리니치 대학이 &lt;여성, 시민권, 그리고 차이&gt;<sup>Women, Citizenship and Difference</sup>를 주제로 주최한 대규모 회의에서 역시, 우리는 이 연구의 장을 통해 이룬 의식과 통찰의 성장을 세상에 알렸다(이 회의에 기초한 『페미니스트 리뷰』 <sup>Feminist Review</sup>의 1997년 9월 특집호 및 나와 프니나 베르브너가 공동 편집한 제드북스사의 발행물을 참조할 것). 당시는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새롭고도 시급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아주 많이 등장하던 때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에서 이미 분명히 밝혔듯, 나의 여정은 개인적인 여행도 있었지만, 짧게든 길게든 함께 해준 많은 동료들이 없었다면, 전위<sup>displacement</sup>, 이동<sup>shifting</sup>, (&lsquo;다시 뿌리내리기&rsquo;<sup>rerooting</sup>가 아닌) &lsquo;닻 내림&rsquo;<sup>anchoring</sup>이 가능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이름을 모두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캄신 공동체<sup>Khamsin collective</sup>의 회원들, 특히 아비샤이 에를리히, 나와 함께 젠더 및 민족 구분 기획과 몇 권의 저서를 위해 일했던 친구이자 동료인 플로야 앤시어스, 그리고 이 책의 다양한 개념과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여러 면에서 없었으면 안 되었을 그 밖의 친구들과 동료들을 말하고 싶다. 이들 가운데 몇몇을 알파벳순으로 꼽아 본다면, 마사 애켈스버그, 앨리슨 애시터, 질리언 보텀리, 아브타 브라, 스티븐 캐슬즈, 암리타 차치, 신시아 코번, 필 코언, 클라라 코널리, 신시아 인로, 로버트 파인, 마리엠 헬리-루카스, 데니즈 칸디요티, 헬마 루츠, 헬렌 미코샤, 맥신 몰리누, 에프라임 님니, 루스 피어슨, 진디 페트먼, 애니 피자클레아, 앤 피닉스, 슐라 라몬, 노라 라첼, 폴라 레이먼, 이스라엘 샤하크, 맥스 실버먼, 일레인 운테할터, 지나 바르가스, 피터 워터먼, 프니나 베르브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와 함께 『정착하지 않는 정착민 사회』(Stasiulis and Yuval-Davis, 1995)를 작업했고, 현재 이 책의 본문이 손질되지 않은 상태일 때 검토해 준 다이바 스타시울리스에게 특별히 고마움을 전한다. 유용했던 그녀의 많은 비평들은 이 시리즈의 편집자인 브라이언 터너와 세이지출판사의 편집자인 캐런 필립스와 키렌 쇼만의 비평과 더불어 이 책을 굉장히 많이 향상시켜 주었다. 또한 그리니치 대학의 젠더와 민족 연구전공생들과 1994년에 헤이그 사회연구학회에서 잠시 가르쳤던 젠더와 민족 강좌 학생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나는 이들과 함께 강의를 목적으로 이 책의 여러 초고들을 이용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들은 자신들이 있는 위치에서 얻은 경험과 통찰을 고맙게도 나와 나누어 주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쓰고 있는 방식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아직 마무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지만, 1991년 런던정치경제 대학교의 모리스 긴즈버그 연구원으로 있던 몇 달을 포함해, 1992년 헤이그사회과학 대학교의 방문 연구원 기간, 그리고 1933~1936년 그리니치 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서 (인자하신 마이크 켈리 학장 밑에서) 매주 있는 강의 시간에서 나를 제외해 준 학기 면제 덕분에 내게 숨 쉴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이들 대학에 많은 신세를 졌다. 하지만 글이 &lsquo;막힐 때&rsquo;마다 가장 많은 영감을 떠오르게 해준 것은 노퍽<sup>Norfolk</sup> 헤이즈브러<sup>happisburgh</sup>의 &lsquo;로마니&rsquo; 마을에서 밀려오는 바다의 파도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아마 처음으로 하는 말일 텐데, 항상 나를 위해서 그 자리에 있어 준 알라인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굴에게도 감사한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살펴주었지만 나의 영어가 결코 그가 바라던 기준에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관된 한 권의 책으로 저술되었기는 하지만 이 책의 여러 장들은 별도의 논문으로 다음과 같이 부분 출판되기도 했다. &ldquo;Gender and Nation&rdquo;,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 16 no. 4, 1993, pp. 621~632; &ldquo;Women and the Biological Reproduction of &lsquo;the Nation&rsquo;&rdquo;, Women&rsquo;s Studies International Forum vol. 19 issue 1-2, 1996, pp. 17~24; &ldquo;Women, Citizenship and Difference&rdquo;, Feminist Review vol. 57 no. 1, Autumn 1997; &ldquo;Women, Ethnicity and Environment&rdquo;, Feminism and Psychology vol. 4 no. 1, 1994, pp. 179~198.</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 | 젠더와 국가의 이론 정립</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만일 여성이 어머니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민족은 죽음의 길에 접어들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민족의 어머니들, 즉 여성 모두가 우리 투쟁의 거목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이 책은 젠더 관계와 젠더 관계가 국가 기획과 그 과정에 미친, 혹은 그로부터 받은 영향에 관한 글이다. 이 책의 주안점은 여성<sup>women</sup>의 위치<sup>position</sup>와 위치설정<sup>positioning</sup>에 있다. 그러나 남성<sup>men</sup>과 남성성<sup>masculinity</sup> 역시 이에 못지않게 이 책의 중심에 있다. 나의 사회학 스승인 히브리 대학교의 에릭 코헨<sup>Eric Cohen</sup>이 항상 말했듯이, &ldquo;남성을 논하지 않고 여성을 논한다는 것은 한 손으로 손뼉을 치는 것과 같다&rdquo;. 나는 지난 몇 년간 연구를 하면서 내가 배운 것의 상당 부분을 거부해 왔지만 이 말씀의 정서에는 여전히 동의한다. &lsquo;여성성&rsquo;<sup>womanhood</sup>은 관계성의 범주이며 그와 같이 이해하고 분석해야 한다. 더욱이 민족성<sup>nationhood</sup>의 구성물들이 대개 &lsquo;남성성&rsquo;<sup>manhood</sup>과 &lsquo;여성성&rsquo; 모두의 특정 개념들과 관련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인식론적 뼈대는 지식이 상황적이며(Haraway, 1990), 한 가지 입장에서 나오는 지식은 &lsquo;완성&rsquo;되지 못한다(Hill-Collins, 1990)는 인식에 기반한다. 이 책을 쓰기 전이나 쓰는 동안 다양한 입장의 학자와 활동가들이 쓴 여러 책과 논문을 읽었지만, 나 역시 나만의 입장이 있기에 이 책의 관점은 어쩔 수 없이 내가 자리한 특정한 위치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여러 이론적 요점들을 설명할 때에 내가 선택한 구체적 사례들이 상당 부분 내가 살아 온 (주로 이스라엘과 영국의) 사회에서 발생한 사건들이나 (서문에서 언급한) 나의 절친한 동료들과 친구들의 사례에 근거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lsquo;완성되지 않았다&rsquo;고 해서 &lsquo;유효하지 않다&rsquo;는 것은 아니라는 믿음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이 책을 써 보겠다는 용기를 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족 및 민족주의 이론화에 헤게모니를 지닌 대부분의 작업들은(예컨대 Gellner, 1983; Hobsbawm, 1990; Kedourie, 1993; Smith, 1986; 1995), 가끔 여성들이 쓴 저작까지도(예컨대 Greenfeld, 1992와 같은), 젠더 관계를 무관한 것으로 외면했다. 민족주의 학자들의 주요 학파인 &lsquo;원초론자들&rsquo;은(Geertz, 1963; Shils, 1957; Van den Berghe, 1981) 민족이라는 친족 관계가 &lsquo;자동적&rsquo;으로 확장된,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지금까지도 민족주의 관련 문헌들은 민족의 &lsquo;생산&rsquo;, 혹은 &lsquo;재생산&rsquo;의 문제들을 논할 때 주로 여성들보다 국가 관료들이나 지식인들과 관련하여 말했다. 아민(Amin, 1978)과 주바이다(Zubaida, 1989)의 분석과 같은 유물론적 연구들은 (민족뿐만 아니라) 국가의 이데올로기와 경계를 설정하고 재생산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국가 관료와 기타 국가 장치들을 중요시했다. 한 시민사회가 민족적으로 분열되는 이유는, 이 사회에 헤게모니를 쥔 민족 정신이 있고 그 본질을 국가가 좌우하고 있는데, 집단체에 따라 이 국가에 대한 접근이 차별받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니스트 겔너(Gellner, 1983)나 앤서니 스미스(Smith, 1986)와 같은 기타 민족주의 및 지식사회학 이론가들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특히 억압받는 집단체들의 이데올로기 생산과 재생산을 중시했던 지식인들을 강조했다. 이들은 헤게모니 지식인 계급에서 배제되고 국가 장치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lsquo;집단기억&rsquo;을 &lsquo;재발견&rsquo;하고, 대중들의 구술 전통과 언어를 문서 형태로 변형하여, 먼 신화 혹은 역사의 과거 속에 &lsquo;민족의 황금기&rsquo;의 초상을 그렸다. 이들의 이러한 재구성은 민족주의 열망들에 기반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 책이 검토하는 것은 관료제나 지식인(뿐만)이 아니라 여성이 생물학적&middot;문화적&middot;상징적으로 민족을 재생산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대체로 민족주의 현상의 다양한 이론화 작업 속에 &lsquo;은폐&rsquo;됐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캐럴 페이트먼(Pateman, 1988)과 레베카 그랜트(Grant, 1991)는 여기에 적절할 설명을 내놓는다. 페이트먼은 폭넓은 영향력으로 서구 사회 및 정치 질서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의 기반을 다져 온 고전 이론인 &lsquo;사회계약론&rsquo;을 연구하였다. 이 이론은 시민사회를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나눈다. 여성(과 가족)은 사적인 영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치와 무관하게 보인다. 페이트먼과 그 밖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모델의 가정 자체의 타당성과 공/사 구분에 반발했다. 페이트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적 영역 없이는 공적 영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최초계약의 의미도 둘 없이는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둘은 한 이야기의 상호 의존적인 절반들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유는 가부장적 권리에 달려 있다. (Pateman, 1988: 4)</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민족주의와 민족이 주로 공적인 정치 영역의 부분으로 논의되면서, 공적 영역의 장에서 여성이 배제되고 또한 그 결과 공적 영역의 담론에서 여성이 배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페이트먼에 뒤이어 레베카 그랜트는 여성의 위치가 적합한 정치 영역 밖에 있었던 이유에 대해 흥미롭게 설명한다(Grant, 1991).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홉스와 루소 이론의 기반은 모두 가상의 자연 상태에서 질서 정연한 사회로의 이동을 그리는데, 이는 오로지 태생적으로 남성적인 성격이라 가정된 것의 측면에서만―(홉스가 말한) 남성의 공격적 성격과 (루소가 말한) 남성의 이성 능력의 측면에서만―존재하는 것이다. 여성은 이 과정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사회적 영역에서 배제되고 &lsquo;자연&rsquo;에 가까운 존재로 남게 된다. 이후의 이론들은 이러한 가정을 주어진 그대로 따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족주의 이론들이 젠더를 도외시했지만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으니 바로 발리바르(Balibar, 1990a)와 차테르지(Chatterjee, 1990), 그리고 모스(Mosse, 1985)다. 이들의 통찰에 영향을 주고 이를 양성한 이들은 젠더 영역에서 작업해 온 소규모이나 성장 중인 페미니스트 학자들(예컨대 Enloe, 1989; Jayawardena, 1986; Kandiyoti, 1991a; Parker 외, 1992; Pateman, 1988; Yuval-Davis, 1980; 1993; Yuval-Davis and Anthias, 1989)의 모임이었다. 그럼에도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의 『민족주의』<sup>Nationalism</sup>(Hutchinson and Smith, 1994)에서 편저자들은 민족주의와 젠더 관계를 연관시킨 이 책의 유일한 인용구를 마지막 장인 「민족주의를 넘어」<sup>&ldquo;Beyond Nationalism&rdquo;</sup>에 실었다. (『여성-민족-국가』<sup>Woman-Nation-State</sup>의 서론에서 가져온) 이 인용구는 다음과 같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성은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민족을 재생산하며 그 가치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여성이 국가라는 각축장에 들어옴으로써 민족성의 내용과 경계, 그리고 민족 자체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 (Hutchinson and Smith, 1994: 287)</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물론 여성들이 그저 국가라는 각축장에 &lsquo;들어오기&rsquo;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국민의 구성과 재생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주의 관련 분석 담론에 이들을 분명하게 포함시킨 것은 매우 최근의, 그것도 부분적인 노력이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목표는 이러한 민족과 민족주의의 젠더적 이해를 위한 분석적인 기획을 도모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 젠더 관계가 몇 가지 주요한 차원의 민족주의 기획에 중대하게 기여한 바를 체계적으로 점검할 것인데, 여기에는 국민 재생산, 민족 문화, 그리고 민족 시민권과 아울러 민족 갈등과 전쟁이 포함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민족주의 기획은 &lsquo;민족국가&rsquo;와 극명하게 구분되며, 민족의 경계가 실제로 소위 &lsquo;민족국가&rsquo;들의 경계들과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lsquo;민족&rsquo; 구성원권이 하위국가적, 초국가적, 교차국가적일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분명해지겠지만 나의 분석은 해체주의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끼워졌다 떨어져 나가는 &lsquo;자유로이 떠도는 기표들&rsquo;로 구성되는, 동시대 시민들의 극단적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성(Wexler, 1990)을 거부한다. 반면 사회적․경제적 권력 관계의 결정적인 중요성과,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범주화든 이를 포함하고 교차하는 사회적 분할들을 나는 강조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할들의 형태는 이들이 다른 사회 관계들이나 사회 행동들과 연계된 방식에 따라 유기적이고 경험적이며 재현적이다(Anthias, 1991; Brah, 1992). 이들은 서로 다른 형태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상이한 존재론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Anthias and Yuval-Davis, 1983; 1992).</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나는 아무 문제의식 없이 우리 모두가 &lsquo;포스트모던 시대&rsquo;에 살고 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모두가 &lsquo;근대&rsquo;를 거쳤다는 무비판적 가정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 과정이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구 중심적인 가정이다(보다 자세한 논의는 3장을 볼 것). 더욱이 라탄시도 시인하듯, &lsquo;포스트모던한 구도&rsquo;(Rattansi, 1994: 16~17)를 짜는 가운데 라탄시를 비롯한 학자들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으로 주장해 왔던 다양한 모습들이 사실 다른 형태의 사회에서도 존재해 왔다. 그는 &lsquo;주체&rsquo;와 &lsquo;사회적인 것&rsquo;들의 중심성과 본질성을 모두 해체하고, &lsquo;주체성&rsquo;과 &lsquo;사회성&rsquo;을 규명하는 구성적 특징으로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분석하며, (그리고 이야말로 어떤 사회, 어떤 시기에 대해서든, 어떤 페미니즘 분석에서든 초석이 될 것인데) &ldquo;섹슈얼리티와 성적 차이에 대한 질문들과의 교류&rdquo;를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두―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장했다시피―훌륭한 사회학적 분석이라면 언제나 당연한 것들이다. 더욱이 근본주의 종교 운동이 남반구뿐만 아니라 북반구 전 지역에서 증가하고 있는 시기에 동시대 사회를 거대서사가 종료된 사회로 묘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반면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사회의 거대서사가 최고의 헤게모니를 자연화한 경우에도 이들 사회에서 상이하게 자리 잡은 구성원들을 동질적으로 통합하면서 통제한 적이 전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관찰들을 고려할 때, 이 책의 기획의도는 젠더 담론과 민족 담론이 서로 교차하고 서로에 의해 구성되는 다양한 방식을 토론하고 분석하기 위한 틀을 소개하는 데 있다. 이에 착수하기에 앞서, 이 장의 다음 두 단원에서 각각의 담론을 개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lsquo;젠더&rsquo; 논의의 초점은 &lsquo;성&rsquo;과 &lsquo;젠더&rsquo; 개념들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lsquo;여성&rsquo;의 범주를 둘러싼 이론적 논쟁들에 있다. 이러한 논쟁들의 이해는 여성성과 남성성 개념이 민족주의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방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주의 기획들과 그 과정들에 남녀 관계가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들을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민족&rsquo; 개념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운동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제도들과 관련하여 분석해야 한다. 민족은 상황적으로 저마다 특정한 역사의 순간에 놓이는데, 민족을 구성하는 민족주의 담론은 유동적이고 헤게모니 경쟁 속에 있는 상이한 집단들을 통해 촉발된다. 이들의 젠더화된 특징은 오직 이러한 맥락화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두 단원에 뒤이어 이 장의 마지막 단원은 이 책의 다음 장들에서 검토하게 될 젠더와 민족이 교차하는 지점들의 주요한 차원들을 개괄하면서, 여성의 보다 &lsquo;자연화&rsquo;된 역할인 생물학적 국민 재생산자 개념에서 출발하여, 민족의 문화적 구성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살펴보고, 국민의 자격으로서의 시민 구성이 시민권의 권리와 의무를 통해 젠더화되는 방식까지 아우를 것이다. 끝에서 두번째 장에서는 군사와 전쟁의 젠더화된 성격을 살펴본다. 이 책은 페미니즘과 민족주의의 복합적인 관계의 검토와 함께 결론을 맺으면서, 정체성 정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여성들 간의 민족적 차이 및 기타 형태의 차이들을 설명하는 횡단의 정치를 페미니즘 정치 모델로 지향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여성과 젠더 관계 분석</b></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페미니즘 문헌들이 방대하고 다양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대략 세 가지 주요한 질문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질문은 페미니스트들의 공통된 관심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시도로 &ldquo;왜/어떻게 여성들은 억압받는가?&rdquo;이다. 여성과 남성의 권력차를 결정하는 구성원리에 대한 연구가 있어 왔다. &lsquo;가부장제&rsquo; 관련 이론들(Eisenstein, 1979; Walby, 1990), 또는 성/젠더 체계(Rubin, 1975) 내지 &lsquo;젠더 체제&rsquo;(Connell, 1987)―이렇게 부르는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다―관련 이론들은 그 시작부터 페미니즘 이론의 중심에 있었다. 공/사 영역 혹은 자연/문명이라는 사회 영역의 이분법적 구성체들은 이러한 분석의 중심이 되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번째 질문은 남성과 여성 간의 차이의 존재론적 토대와 관련된 질문으로 &ldquo;이러한 차이는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가, 사회학적으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둘의 조합에 의해서인가?&rdquo;이다. 이 문제에 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lsquo;성과 젠더 논쟁&rsquo;(Assiter, 1996; Butler, 1990; Delphy, 1993; Hood-Williams, 1996; Oakley, 1985)이라 알려졌다. &lsquo;여성&rsquo;과 &lsquo;남성&rsquo; 범주의 경계와 기초에 관한 질문들은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분석틀이 등장함에 따라 보다 문제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번째 질문은 대체로 민족 중심적이고 서구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단순하기까지 한 일부 초기 페미니즘 문헌의 관점들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 이는 여성들 안에서의 차이, 남성들 안에서의 차이, 그리고 이들이 젠더 관계의 일반 개념들에 미친 영향들에 관한 문제다. 이 질문을 처음 던진 것은 대개 흑인이나 소수인종 여성들이었고(hooks, 1981), 그 다음에 이 질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해체주의 페미니즘에 포함되었다(Barrett, 1987).</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장의 지면과 범위의 한계를 고려한다면, 이 세 질문들에 대한 모든 논쟁을 체계적으로 검토할 엄두도 낼 수 없다. 그러나 이 책에 제기된 문제들에 관한 어떤 논의든 위 질문들에 대한 특정 입장들을 내포하거나 그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으므로 여기서 간략하게라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성의 억압에 대한 설명은 상당 부분 남성들과는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의 이들의 위치에 관한 것들이었다. 여기에 공/사 그리고 자연/문명의 영역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이 있어 왔다. 많은 페미니즘 문헌이 여성은 &ldquo;역사로부터 은폐되어 왔다&rdquo;(Rowbotham, 1973)는 사실을 지적하고 반대하면서도, 남성이 공적 영역에 위치하고 여성이 사적 영역에 위치한다는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민권에 대한 4장에서는 공/사 영역의 이분법과 이것이 여성이 시민으로서 자리 잡는 것과 관련된 방식의 몇 가지 문제점을 논의할 것이다. 이러한 구분이 특히 젠더적이고 인종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허구적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을 자유와 권리로부터 배제시키는 데 종종 사용되었다(Philips, 1993: 63)는 주장도 논의할 것이다. 아울러 지금까지의 주장은 공과 사의 경계선이 식민 이후 민족들의 시민사회 구성을 분석하는 데 전혀 적절하지 않은 도구였다는 것과 젠더 관계의 비서구 중심적 분석에서는 이와 같은 공과 사의 경계를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Chatterjee, 1990).</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공/사의 이분법은 페미니즘을 비롯한 사회과학 문헌에서 여성을 남성의 정반대 극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이분법들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 밖에 자연/문명의 구분도 있다.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는 &lsquo;문명&rsquo;화된 공적 정치 영역에서 여성을 배제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문화에서나 남성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가치가 덜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도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sup>Simone de Beauvoir</sup>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간/남성<sup>man</sup>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는 이유는 생명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류를 지배하는 것은 출산하는 성이 아닌 살해하는 성이다. (Harding, 1986: 148에서 인용)</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셰리 오트너는 좀더 일반적으로 남성이 &lsquo;문화&rsquo;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여성은 &lsquo;자연&rsquo;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음을 주장했다(Ortner, 1974). 이는 아이를 잉태한다는 점에서 여성은 새로운 &lsquo;것들&rsquo;<sup>things</sup>을 자연적으로 창조하고, 반면 남성은 자유롭게/강제적으로 문화적 창조를 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또한 결과적으로 가정의 영역에 보다 한정되어 &lsquo;전前사회적&rsquo; 존재인 아이를 양육한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자신의 문화적 생산물을 물질계보다 우위에 두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문화의 목표는 자연을 통제하고/하거나 초월하는 데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등한 상징적 위치에 그치고 만다. 헨리에타 무어는 구데일(Goodale, 1980)을 좇아 여성들의 상징적 폄하와 여성과 &lsquo;자연&rsquo;의 연관성을 강조하면서 오염의 개념을 덧붙인다(Moore, 1988). 여성들이 월경기나 출산 후에 피를 흘릴 때 종종 &lsquo;오염시키는&rsquo; 존재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이런 일반화된 개념들이 여성의 위치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지적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상이한 사회들의 다양성을 동질화하고 폐기해 버린다. 또한 &lsquo;문화&rsquo;보다 &lsquo;자연&rsquo;이 열등하다는 서양 문화의 특정 가치들이 보편적이며 모든 사회가 이를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가정한다. 끝으로 하나 더 짚어 본다면, 이들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가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 갈등이나, 지배, 저항,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회 변화의 개념들을 정의해 버리는 것 같다. 더욱이 여성의 종속에 대한 보편적이고 &lsquo;근원적&rsquo;인 이유에 대한 연구로 인해 젠더 관계가 다양한 사회에서 구성된 역사적 특수성과 그 재생산 방식을 주목하지 못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듯 여성의 신분을 일반화하는 개념들에 대한 비판 역시 &lsquo;가부장제&rsquo; 개념과 관련이 있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가부장제를 폭넓게 이용하면서 여성을 하위에 두려는 자치 체제를 설명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0년대와 1980년대 페미니즘 정치학은 인문, 사회, 급진, 그리고 이중체계 페미니즘 등의 개별 학파로 깔끔하게 구분되어 있었다(Walby, 1990). 이러한 사상 학파들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여성 억압의 &lsquo;그&rsquo; 명분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법인가, 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자신의 특권을 움켜쥐고 있는 남성들인가―하는 문제에 모여 있었다. 또한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간의 &lsquo;불행한 결혼&rsquo;에 대한 논의나 가부장적 억압을 계급 착취와 관련하여 이론화해야 한다는 논의도 많았다(Hartmann, 1981).</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가부장제&rsquo; 개념은 그 자체가 매우 문제적이다. &lsquo;파테르&rsquo;pater, 즉 아버지의 지배가 전통적으로 어린 남성들에게도 적용되어 왔고 여성에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 종종 인정받고는 있지만, 이 점이 이 용어를 일반화해서 이렇게 페미니즘에 사용하는 데 이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대개 아니었다. 실비아 월비의 연구(Walby, 1990)에서처럼(1989년에 나온 Sociology 특별호도 참고하라), 이러한 용례는 고용, 가정, 생산, 문화, 섹슈얼리티, 폭력 그리고 국가와 같은 상이한 형식들에 따라 차별화되면서 이론적으로 보다 정교한 모델로 발전했지만, 이때도 여전히 마찬가지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부장제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 혹은 지리적 지역에 놓이면, 이런 일반화된 사용 규칙의 예외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예컨대, 캐럴 페이트먼의 논의에서 가부장제는 특히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 시기와 관련이 있다(Pateman, 1988). 그녀에 따르면 근대 자유국가에서 체제는 가부장제로부터 남성단체<sup>fraternity</sup> 체제로 바뀐다. 가부장제에서는 아버지가(혹은 아버지 상으로서 왕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지배하는 반면, 남성단체 체제에서는 남성이 그들의 여성을 사적 영역에서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면서 공적&middot;정치적 영역 안에서는 자기들만의 평등한 사회질서 계약에 동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면 밸런타인 모가담(Moghadam, 1994)은 인구학자 존 콜드웰<sup>John Caldwel</sup>을 따라 가부장제를 특정 지리적 지대의 위치에 놓았으니 바로 &lsquo;가부장제 벨트&rsquo;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을 지나 인도아대륙[남아시아 지역]의 북부 평원과 중국 농촌지역까지 펼쳐져 있다. 이러한 &lsquo;고전적 가부장제&rsquo;(Kandiyoti, 1988)의 &lsquo;벨트&rsquo;에서 가부장적 확대 가족은 중심 사회단위가 되어, 연장자 남성이 다른 모든 이들을 지배하며 가족의 명예는 여성들의 통제된 &lsquo;정숙&rsquo;과 밀접하게 연결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부장제를 특정한 사회 제도, 역사적 시기 혹은 지리적 지역에 국한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상이한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식의 사회 관계를 차별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 해도, 분석도구로는 여전히 너무 조잡하다. 일례로, 이러한 방식은 대부분의 사회에서 몇몇 여성들은 다른 여성들뿐 아니라 일부 남성들까지도 지배할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참작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의 억압이 다른 형태의 사회적 억압과 사회적 분할들과 서로 맞물려 있고 또한 이들에 의해 여성억압이 명료해지는 구체적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도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른 글에서 플로야 앤시어스와 나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유형의 사회체제로부터 자율적인 별도의 사회체제라는 개념을 반대한 바 있다(Anthias and Yuval-Davis, 1992: 106~109). 오히려 우리는 여성의 억압이 사회적 권력과 물적 자원의 분배와 관련된 사회 관계 특유의 필요조건이었다고 주장했다. 젠더, 인종, 계급은 이들이 비록 각기 다른 존재론적 기반과 별도의 담론을 지녔다 해도, 구체적인 사회 관계 속에 서로 맞물려 있으며 함께 논의될 때 더 명확히 설명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부가 개념으로 볼 수는 없으며 어느 것도 추상적으로 우선시할 수 없다. 아브타 브라가 제안했듯(Brah, 1992: 144) 억압들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가부장제를 이론화하면서―가부장제는 정립된 이론들을 통해 더욱 정교해졌지만(Ramazanoglu, 1989; Walby, 1990)―젠더 관계는 최소한 암묵적으로는 생물학적 성차에 따른 필연적 결과로 축소되고 고립되고 말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가부장제 개념이 시사하는 바와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젠더 관계 결정에 단순히 수동적인 수용자도 비참여자만도 아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은 똑같은 방식, 똑같은 정도로, 심지어는 특정 시기의 똑같은 사회 안에서조차도 모든 여성들이 억압받고/받거나 종속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차와 생물학적 재생산의 구조에 관계하고 그 주변에서 재현 형식을 정립하는 헤게모니 성 담론과 그 실천이 상이한 사회 안에 그리고 이들 사회에서의 상이한 위치에 따라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게일 루빈은 이를 &lsquo;성/젠더 체계&rsquo;라 했다(Rubin, 1975). 로버트 코넬은 12년 후[이 글에서는 2000년, 즉 21세기가 되었을 때]에 관한 글에서 이와 유사한 자신의 개념인 &lsquo;젠더 체제&rsquo;와 자연화된 생물학적 &lsquo;성&rsquo;을 분리했다(Connell, 1987). 현재 성/젠더 논쟁의 상황을 보면, 두 개념 모두에 작별을 고하고(Hood-Williams, 1996), 오로지 차이 개념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녀 차이의 고정성 문제는 이러한 차이에 존재론적 근거를 둔 페미니즘 논쟁의 중심이었다. 시작 당시부터 페미니즘 정치는 성과 젠더의 차별화에 의존해 왔다. 노동, 권력, 성품의 성 구분은 생물학적인 것(&lsquo;성&rsquo;)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lsquo;젠더&rsquo;)이라는 주장을 통해 다양한 학파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성평등을 지향하며 변화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ldquo;사회와 가족, 그리고/또는 담론 안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에 대한 이들의 해석을 설명하고 정리하는 중심 범주&rdquo;(Gatens, 1991: 139)로서, 생물학적 환원론의 위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크리스틴 델피는 마거릿 미드<sup>Margaret Mead</sup>의 작업과 성역할에 대한 파슨스주의 이론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앤 오클리<sup>Ann Oakley</sup>의 『성, 젠더, 사회』<sup>Sex, Gender and Society, 1985</sup>에 이르는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성과 젠더에 대한 논쟁의 전개 과정을 개괄했다(Delphy, 1993). 노동의 분업, 남녀 간의 심리 차이는 점진적으로 탈자연화했고, 문화적 변수가 중요해졌다. 그러나 델피에 따르면, 이들의 저서 중 어느 것도 그리고 그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의 저서 중 어떤 것도 젠더가 자연적 성 이분법에 기초한다는 가정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아울러 주디스 버틀러는, &lsquo;성&rsquo;이 &lsquo;자연&rsquo;에 의해 구성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lsquo;젠더&rsquo;가 &lsquo;문화&rsquo;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이해할 때, &ldquo;생물학이 아닌 문화가 운명이 된다&rdquo;고 했다(Butler, 1990: 8).</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매우 중요한 점이므로 문화에 관한 장(3장)에서 보다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론적 차이가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델피와 버틀러 모두 &lsquo;젠더가 성에 선행함&rsquo;을 지적하고, 노동(델피)과 의미(버틀러)의 사회적 분할이라는 문화적 구성이 성차가 자연적이고 전<sup>前</sup>사회적인 것으로 구성(되고 사용)되게 하는 수단임을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위 &lsquo;객관적&rsquo;이고 &lsquo;과학적&rsquo;이라는 실험들이 특정 인간이 남/여성인지를 결정하는 Y염색체의 존재 혹은 부재를 밝히려 했고, 보다 최근에는 혹자들이 지닌 경험적 양가성의 관점에서 (1991년 굿펠로<sup>Goodfellow</sup>와 그의 연구팀이 분리해 낸 SRY 염색체[Sex-Determining Region Y, 성 결정 유전자]와 같은) 특정 유전자를 찾았다. 그러나 후드-윌리엄스<sup>Hood-Williams</sup>가 지적하듯, 이런 특정 기획은 동어 반복이자 순환 논리를 지닌다. 즉, 과학자들은 &ldquo;이들을 유전학적으로 확인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남성/인간<sup>man</sup>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한다&rdquo;. 미셸 푸코(Foucault, 1980a)와 토머스 래커(Laqueur, 1990)가 지적했듯, 역사적으로―그리고 이에 따라 문화적으로―분명했던 것은 단지 모든 인간을 남성 혹은 여성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플로야 앤시어스와 내가 주장했듯(Anthias and Yuval-Davis, 1983: 66), 성차나 생식의 그 어떤 필연적인 &lsquo;자연적&rsquo; 사회효과는 없으며, 생산이 계급의 물질적 토대가 되는 것과는 달리, 성차나 생물학적 재생산이 젠더의 물질적 토대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사회적 재생산 관계에서 페미니즘 유물론을 발견해 보고자 하는 분석들을 통해 우리는 유물론 기획을 다른 대상에게 중첩시키면서 그 준거 개념들을 부적절하게 재생산해 냈음을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젠더는 &lsquo;실제&rsquo; 사회적 남녀 차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젠더는 이들의 사회적 역할들이 인종 및 민족 집합체에서 이들이 갖는 경제적 위치나 구성원권과는 정반대로, 이들의 성차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정의되는 일단의 주체들과 관련된 담론의 양식이다. 성차 역시 담론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담론을 통해 일단의 사회적 주체들은 상이한 성적/생물학적 구성물을 지닌다고 정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lsquo;젠더&rsquo;와 &lsquo;성&rsquo; 모두 담론 양식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다만 그 사안이 다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성&rsquo;과 &lsquo;젠더&rsquo; 모두에 대해 이들이 담론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는 주장과 비자연적이고 비본질주의적 성격을 갖는다는 주장으로 인해 성과 젠더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러나 비영어권 국가에서 페미니즘 정치에 관여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곳 페미니스트들의 최우선적인 그리고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그 지역 언어로 &lsquo;젠더&rsquo;에 해당하는 단어를 &lsquo;발명&rsquo;해 내는 것임을 알 것이다. &lsquo;성&rsquo; 담론과 &lsquo;젠더&rsquo; 담론을 구분하지 않는 한, 생물학은 그 사회의 도덕 및 정치 담론에서 운명으로 구성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경계의 희석을 거부할 수 있다. 모이라 게이튼스는 성과 젠더의 비본질주의적 이론 접근은 다음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전혀 반론이나 의심 없이 몸과 심리 모두 출생 이후 수동적인 백지<sup>tabula rasa</sup>의 상태라고 가정한다. 즉 젠더 이론가들에게 어느 성이든 정신은 중립적이고 수동적 존재이며 다양한 사회적 &lsquo;학습 내용&rsquo;이 새겨지는 백지 상태다.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몸은 이러한 각인들의 수동적 매개체다. (Gatens, 1991: 140)</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에서 지름길로 직진하면 &lsquo;정치적 공정성&rsquo;에 이르게 된다. 젊은이들을 사회화하고 어른을 &lsquo;재교육&rsquo;하는 올바른 사회 환경 조건을 제공하는 데 적절한 &lsquo;스키너 박스&rsquo;가 구성될 수만 있다면 모든 남성과 여성은 평등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모두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이튼스는 이런 종류의 사고에 대해 이들이 환경론적인가 본질주의적인가로 귀결되는 단순화된 이분법적 사회이론에 근거한다고 비판하며, 적어도 몸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고 지적한다. 몸은 언제나 성<sup>性</sup>이 있는 몸이기 때문에 동일한 행위라도 그것을 남성이 수행하는가 여성이 수행하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개인적․사회적 중요성을 지닐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아는 언제나 상황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나 해러웨이(Haraway, 1990)의 &lsquo;상황적 지식&rsquo; 등의 개념을 따르고 있는 게이튼스의 마지막 주장은 젠더 관계를 분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ldquo;자아는 언제나 상황적이다&rdquo;라는 주장의 중요성은 젠더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관계의 분석과 관련이 있다. 몸의 상황은 생물학적이든 담론적이든 오로지 성차와 관련하여 구성되지는 않으며 자아의 상황이 오로지―혹은 언제나 일차적으로―몸에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게이튼스나 그녀와 같은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에게 성차가 중요한 것은 이들이 중산층 서구 중심 정신분석이론, 특히 라캉의 시선(Lacan, 1982)으로 사회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 민족, &lsquo;인종&rsquo;과 국가와 같은 거시적 사회 구분도 특수한 신체 &lsquo;유형&rsquo;이나 연령, 능력과 같은 보다 주체적인 몸과 관련된 차이들만큼이나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하다. 여아 혹은 남아가 자신과 다른 이들에 접근하지 않는 한, 거울 보기로는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체의 정체성은 항상 이 모든 차원에 따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상황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아이들의 사회를 예로 본다면, 타자성은 그것이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오로지 성에 국한하고/하거나 성을 이분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와 같은 다른 차이들을 모두 억압해 버린다면 &lsquo;여성&rsquo;이란 범주는 단일화된 범주로 파악될 수 있다. 1970년대 백인 중산층 &lsquo;의식화 집단&rsquo;인 페미니스트들이 모든 여성의 조건은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참여자들이 &lsquo;발견&rsquo;하는 데 목표를 두었던 상황처럼 말이다(Yuval-Davis, 1984).</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스들이 질문해 왔던 것은, 만일 여성들이 서로 다르다면, 어느 정도까지 &lsquo;여성&rsquo;이라는 용어가 의미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데니즈 라일리는 &lsquo;여성&rsquo;을 변동하는 정체성으로 보고 &ldquo;&lsquo;여성&rsquo; 범주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구성되며, 언제나 스스로 변화하는 다른 범주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rdquo;고 주장했다(Riley, 1987: 35). 그러나 엘리자베스 위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정체성을 결여했다고 차이가 무한증식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차이의 범주들이 역사적으로 생산되는 우세한 구조를 지닌 범주들에 의해 명료히 설명되는 동안, 오히려 이 차이들이 대체되고 탈자연화한다는 뜻이다. (Weed, 1989: xix)</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따라서 이런 역사적 지배구조들은 어떤 차이들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적절하게 여겨지는지, 어떤 것들이 아닌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스펠먼이 주장했듯, 여성들 간의 유사성은 이들의 차이의 맥락 안에 존재하며, &ldquo;이러한 차이들이 유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hellip;&hellip;이 논쟁의 모든 참여자들에게 동일한 시간이 주어진 것도 아니고 동일한 권위가 부여된 것도 아니다&rdquo;(Spelman, 1988: 159).</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여성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관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상이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들에게 공통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어떻게 페미니즘을 이 모두를 떠안을 수 있는 정치 운동으로 구성할 것인가에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6장)은 이 문제를 터놓고 다뤄 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족 및 국가 집단체에 대한 구성원권이 여성마다 다르다는 점은 여성들 사이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차이이며 이것이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들이 대개 그렇듯, 집단체 구성원권 역시 지배구조 안에서 이해하고 다른 사회관계들을 통해 규명해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 집단체 안에 속한, 또는 소속 집단체가 서로 다른, 여성 대 여성의 지위과 권력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집단체 구성원권으로부터 (암리타 치하치히<sup>Amrita Chhachhi</sup>의 1991년 용어를 사용하자면) &lsquo;강요된 정체성&rsquo;을 구성하도록 할 수도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는 정체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lsquo;자유로이 떠도는 기호&rsquo;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Wexler, 1990). 특정 역사적 환경에서의 국민과 국가의 관계는 이러한 구성물들에 중심 역할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니라 유발-데이비스 Yuval-Davis, Nira&nbsp;</strong> <br /> 이스트런던 대학교 이민&middot;난민&middot;소속 연구소(The Research Centre on Migration, Refugees and Belonging) 소장 니라 유발-데이비스는, 이스라엘 반체제 학자로 런던 소재 국제연구단체인 &lsquo;분쟁지역 여성들의 네트워크&rsquo;(Women in Conflict Zones Network)와 &lsquo;근본주의에 반대하는 여성들&rsquo;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또한 국제사면위원회, 유엔개발계획, 유엔여성폭력보고위원회와 같은 여러 국제기구에서 자문위원 및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br /> 함께 지은 책으로는 『여성-민족-국가』(Woman-Nation-State, 1989), 『인종차별화 경계선』(Racialized Boundaries, 1992), 『정착하지 않는 정착민 사회』(Unsettling Settler Societies: Articulations of Gender, Race, Ethnicity and Class, 1995), 『여성, 시민권, 차이』(Women, Citizenship &amp; Difference, 1999), 『근본주의의 경고 신호』(Warning Signs of Fundamentalisms, 2004), 『소속의 상황 정치』(The Situated Politics of Belonging, 2006) 등이 있고, 최근 『소속 정치: 구역 간 논쟁』(The Politics of Belonging: Intersectional Contestations, 2011)이 출간되었다. 그녀의 저서들은 유럽과 이스라엘, 그 밖의 정착민 사회에서의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근본주의, 시민권, 정체성, 소속, 젠더 관계와 관련한 이론 및 경험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혜란&nbsp;</strong><br />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동국대와 건국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흑설공주 이야기』, 『황금요정 이야기』, 『플롯 찾아 읽기』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7 오후 1:14:00모랭의 ‘복잡성 사고 입문’<img width="600" height="889"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6_%EB%B3%B5%EC%9E%A1%EC%84%B1%20%EC%82%AC%EA%B3%A0%20%EC%9E%85%EB%AC%B8/%EB%B3%B5%EC%9E%A1%EC%84%B1%EC%82%AC%EA%B3%A0%EC%9E%85%EB%AC%B8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는 사유의 모호함과 난해함을 없애고 실재의 질서와 명료함을 추구하며, 실재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힐 것을 당당히 요구한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처한 곤란함과 불명료함, 즉 간단히 정의하는 것과 분명하게 이름 붙이는 것, 우리의 생각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사람들은 흔히 과학적 인식이란 현상의 단순한 질서를 밝혀내기 위해 현상의 명백한 복잡성을 제거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식을 단순화하는 방식이 그 지식이 고려하는 현실이나 현상을 제대로 표현하기보다는 손상시킨다면, 현실이나 현상을 해명하기보다는 오히려 맹목으로 몰아넣는다면,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단순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떻게 복잡성을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이 문제는 매개 고리 없이는 제기될 수 없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며 인식론적인 고귀한 유산이 없기에 스스로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대로 복잡성이라는 단어에는 불명료성, 불확실성, 무질서가 내포되어 의미론 차원의 커다란 결함이 있다. 일단 복잡성을 정의한다 해도 그 무엇도 해명해줄 수 없다. 하나의 중심 단어로 요약될 수 없고, 하나의 법칙으로 귀착될 수 없으며, 하나의 단순한 생각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복잡하다. 다시 말해 복잡한 것은 복잡성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없으며, 복잡성의 법칙으로 귀착될 수도 없고, 복잡성이라는 생각으로 환원될 수 없다. 복잡성은 단순한 방식으로 정의될 수 없을뿐더러 단순성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없다. <b>복잡성은 문제를 제기하는 단어이지 문제를 해결하는 단어가 아니다.</b></p> <p style="text-align: justify">복잡성 사고의 필요성을 이 서문에서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단순화하는 사유의 한계와 불충분함, 결함 등이 드러나고 우리가 복잡한 것의 도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드러나면서 복잡성 사고는 점차 필요해진다. 그다음으로 서로 다른 복잡성이 존재하는지, 이 복잡성을 복잡성들의 복잡성으로 묶을 수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복잡성의 도전에 대응할 사유의 방식을 살펴봐야 한다. 이제 실재를 통제하고 제어하려는 단순성 사고라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실재와 교섭하고 대화하고 협상하는 사유를 훈련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복잡성 사고를 단념하게 하는 두 가지 환상을 제거해야 한다. 첫 번째 환상은 복잡성이 단순성을 제거한다고 믿는 것이다. 복잡성은 물론 단순화하는 사유가 물러나면 나타나지만, 인식의 질서를 포착&middot;판별하며 분명하게 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통합한다. 단순화하는 사유는 실재의 복잡성을 분해하는 데 반해, 복잡성 사고는 단순화하는 사유의 방법을 가능한 한 통합한다. 그렇지만 복잡성 사고는 절단하고 환원하고 일차원적으로 만드는 단순화의 맹목적인 결과를 거부한다. 이 단순화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실재를 자신이 반영한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환상은 복잡성과 완전성을 혼동하는 것이다. 분명 복잡성 사고는 분리하는 사고가 끊어놓은 학제 간 영역의 마디를 고찰하겠다는 야심이 있다. 분리하는 사고는 단순화 사고의 중대한 특징 중 하나이다. 분리하는 사고는 분리한 것을 따로따로 다루며, 연결하고 통합하고 경합하는 모든 것을 은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복잡성 사고는 다차원적 지식을 열망한다. 하지만 복잡성 사고는 처음부터 복잡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복잡성의 공리 중 하나는 이론에서조차 전지성(全知性)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복잡성 사고는 &lsquo;전체는 비(非)진리이다&rsquo;는 아도르노의 말을 모토로 삼는다. 복잡성 사고는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의 원칙을 인정한다. 하지만 개체 간의 관계도 인정한다. 우리의 사유는 이 개체를 당연히 구별해야겠지만 서로 분리해선 안 된다. 파스칼은 &ldquo;모든 사물은 무엇인가에 의해 야기되면서 무엇인가를 야기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도와주고, 간접적이면서 직접적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상이한 것을 연결하는 자연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 관계가 모든 사물을 유지하고 있다&rdquo;고 정확히 가정했다. 마찬가지로 복잡성 사고는 단편적이지도 세분화되지도 환원되지도 않는 지식에 대한 열망과, 모든 지식은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다는 인식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긴장에 고무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긴장이 내 삶 전체를 고무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살아오는 동안 나는 결코 체념에 빠져 분할된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연구 대상을 그것의 맥락과 선례, 변화에서 분리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다차원적인 사유를 열망했다. 그리고 결코 내적 모순을 제거할 수 없었다. 나는 적대적인 심오한 진리를 적대적이면서 상보적인 것으로 여겼다. 나는 결코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억지로 축소하고 싶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초기에 쓴 책에서부터 복잡성에 직면했다. 이 복잡성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보이는 내 연구들의 공통분모였다. 하지만 복잡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말이 되어서야 복잡성은 정보 이론, 사이버네틱(원래는 조타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명체나 기계의 제어와 통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재 &lsquo;제어학&rsquo;이 번역어로 제시되고 있다―옮긴이), 시스템 이론, 자기조직 개념 등에 실려 내 연필 끝으로, 내 컴퓨터 자판 위로 왔다. 복잡성이라는 단어는 복잡함, 불명료함이라는 평범한 의미를 제거했고, 질서와 무질서, 조직을 연결하고, 조직 안에서는 일자(一者)를 다수와 연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상보적이면서 적대적인 방식으로 작동했다. 또 무리를 이루어 상호작용하면서 복잡성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고 확대되고 갈래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가 다루는 주제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이동했다. 복잡성은 경험주의적, 논리적, 합리적인 것들의 관계라는, 이른바 &lsquo;고르디아스의 매듭&rsquo;을 묶는 거대 개념이 되었다. 이 과정은 1970년에 시작된 《방법》의 준비 작업과 일치한다. 내 책 《잃어버린 패러다임》(1973)에서 복잡한 조직, 심지어 최고도로 복잡한 조직은 공공연하게 중심 기획이 되었다. 복잡성의 논리적 문제는 1974년에 발행된 논문인 〈복잡함의 너머, 복잡성〉의 주제가 되었다. 《방법》은 사실 복잡성의 방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양한 텍스트1를 정리해서 엮은 이 책은 복잡성이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입문서이다. 만일 복잡성이 세계를 여는 열쇠가 아니라 맞서야 하는 도전이라면, 복잡성 사고는 도전을 피하거나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찾아내고 심지어 뛰어넘도록 도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에드가 모랭</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맹목적 지성</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의식화</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물리학적,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세계에 관한 상상을 초월하는 지식을 얻었다. 과학 덕분에 경험적이며 논리적인 검증법이 점점 더 폭넓게 확산됐다. 이성의 빛은 신화와 암흑을 정신의 최하층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에도 도처에서 오류와 무지, 맹목은 우리의 지식 증대와 더불어 커져갔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급진적인 의식화가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1. 오류의 심층 원인은 사실이나 논리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처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는 방식에 있다.<br /> 2. 과학 자체의 발전과 관련해 새로운 무지가 나타났다.<br /> 3. 이성의 오용과 관련된 새로운 맹목이 생겨났다.<br /> 4. 인류가 초래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은 맹목적인 지식과 이를 통제하지 못하는 진보, 말하자면 핵무기&middot;질서 조작&middot;생태계 훼손 등과 연관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러한 오류와 무지, 맹목, 위험은 공히 실재의 복잡성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인식을 조직화하는 분절적인 방식에서 기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지식의 조직화 문제</b></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지식은 의미 있는 자료 선택을 통해 생겨나며 의미 없는 자료는 거부된다. 나누고 묶고 위계화하며 중심화하는 논리 작용은 사실 사유 또는 <strong>패러다임</strong>을 조직화하는 초(超)논리 원칙, 즉 사물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지배하지만,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하는 불가사의한 원칙에 따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찬가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이행하는 불명확한 순간에, 이 두 학설은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원칙을 결정하는 데서 처음으로 대립했다. 천동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세계상을 설명하지 못하는 자료는 의미 없다고 거부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지동설을 수용하기 위해 오히려 그 자료를 근거로 삼았다. 지동설은 별자리 같은 과거의 학설과 동일한 구성요소를 포함했으며 종종 옛날 계산 방식도 이용했다. 하지만 세계에 대한 모든 사고방식은 변해야 했다. 기존 중심이었던 지구가 이제는 주변 요소로 밀려나고, 반대로 주변 요소였던 태양이 중심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우리 시대의 인류-사회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예컨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집단수용소인 굴락(Goulag) 말이다. <b>사실상</b> 그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해도 굴락은 소련이 사회주의를 건설하던 초기, 자본주의에 포위된 어려운 상황의 산물로 이차적이고 일시적인 부정적 현상이었다. 따라서 굴락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스템의 변두리로 여겨졌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굴락을 전체주의적 본질을 드러내는 사회주의 시스템의 중심핵으로 간주했다. 중심화, 위계화, 분리 및 동일시화가 작동함에 따라 사람들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시스템의 통찰이 굴락 때문에 전적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예를 통해 우리는 &lsquo;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rsquo; 같은 현상을 사유하는 일이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의 편견, &lsquo;열정&rsquo;, 이해관계가 생각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라는 개념과 집단수용소라는 개념이 서로 이질적으로 여겨져 분리되는 <b>선험적</b> 분리와 마찬가지로, &lsquo;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rsquo;이라는 개념을 굴락으로 환원하는 <b>선험적</b> 동일시도 피해야 한다. 즉 일차원적이고 추상적인 통찰을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인식을 절단하고 실재를 왜곡하는 패러다임의 성격과 결과를 우선 알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지식의 병리학, 맹목적 지성</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b>분리, 환원, 추상화</b> 원칙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이 원칙들은 내가 &lsquo;단순화 패러다임&rsquo;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데카르트는 마음(ego cogitans)과 물질(res extensa), 즉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면서, 그리고 &lsquo;명석판명한&rsquo; 생각, 즉 그 자체로 분리된 사유를 진리의 원칙으로 삼으면서 서구의 중심 패러다임을 공식화했다. 17세기 이래로 서구사상의 모험을 통제해온 이 패러다임은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성찰의 거대한 진보를 이끌었으며, 그 해악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드러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음과 물질의 분리는 과학적 인식과 철학적 성찰의 소통을 저해하면서 마침내 과학의 자기 인식 및 성찰, 심지어 자기 이해 가능성마저 박탈해버렸다. 게다가 이러한 분리 원칙은 과학 지식의 커다란 세 영역, 즉 물리학, 생물학, 인문학을 극단적으로 분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분리를 개선하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단순화, 즉 복잡한 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는 것, 예컨대 생물학적인 것을 물리학적인 것으로, 인문학적인 것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초(hyper)전문화는 현실의 복잡한 망을 찢고 조각내야 했으며, 실재의 추상적인 분할을 실재 그 자체라고 믿게 해야 했다. 또 과학적 인식의 전통적 이상에 따르면 현상의 명백한 복잡성 이면에 있는 완벽한 절대 질서를 발견해야 했다. 이 완벽한 절대 질서는 우주와 같은 불멸하는 기계의 규칙을 정하는데, 이 기계는 목적과 시스템에 따라 다양한 극소 요소(원자들)로 결합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한 지식, 더불어 지식의 정확성과 작동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척도와 계산에 기인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수학적 처리와 형식화는, 수량화된 실체를 지배하는 공식과 방정식만을 유일한 현실로 고려하여 존재와 존재자를 분해해버렸다. 마지막으로 단순화하는 사유는 하나와 다수의 결합〔하나이자 여럿, 여럿이자 하나(unitas multiplex)〕을 이해할 수 없었다. 또는 다양성을 무력화하면서 추상적으로 결합했다. 혹은 반대로 통일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양성을 그저 늘어놓기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맹목적 지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맹목적 지성은 조화와 통일성을 파괴하고, 주위의 모든 대상을 분리한다. 그리고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분리 불가능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현실들은 분해되어 있다. 이 중요한 현실은 분과 학문을 가르는 경계를 가로지른다. 인문학의 분과 학문에서는 더 이상 인간이라는 개념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맹목적인 현학자들은 인간이란 실존적으로 허황된 환영 같은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매체들이 수준 낮은 우민화를 조장하는 반면, 대학은 수준 높은 우민화를 장려한다. 지배적인 방법론은 몽매함을 양산한다. 왜냐하면 분리된 지식 요소들은 더 이상 결합되지 못하고 우리는 해당 요소들을 자신의 흔적으로 간직하거나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인식의 놀랄 만한 변화에 접근했다. 인식이란 이제 더 이상 인간 정신이 성찰하고 논의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점차 국가와 같은 익명의 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정보와 관련된 기억 속에서 흔적으로만 남겨지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 대대적이고 경이로우며 새로운 무지에 학자들은 무관심하다. 자신들의 발견 결과를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않는 학자들은 자신이 수행하는 연구의 의미와 성격을 지적인 측면에서조차 통제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의 문제는, 무지한 전문가들을 양산해내는 과학적 몽매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독점했다고 주장하는 아둔한 교리들, 예컨대 알튀세르 식 마르크스주의에 따르자면 자유경제 관료주의에도 있다. 그리고 마치 진리가 열쇠만 있으면 열 수 있는 금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인 양 모든 문을 다 열 수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한심한 만능열쇠 같은 몇몇 핵심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로 문제다. 그리고 입증되지 않은 일반 지식은 편협한 과학만능주의와 다르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행히도 일차원적이고 절단적인 사고방식은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속에서 가혹한 대가를 치른다. 즉 절단은 살을 자르고, 피를 쏟게 하고, 고통을 일으킨다. 인류-사회 현실의 복잡성을 수용하지 못하면, 개인이라는 극소 차원과 인류가 생존하는 지구 전체라는 극대 차원 속에서 무한한 비극에 이르고, 우리는 극한의 비극으로 끌려간다. 사람들은 정치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이원론적인 것이 &lsquo;되어야 한다&rsquo;고 말한다. 맹목적인 충동을 이용하는 조작 정치를 구상한다면, 그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 전략을 세우려면 복잡한 인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전략은 불분명하고 우연한 것, 상호작용과 반작용의 다양한 움직임과 함께 혹은 그것들에 반해 작동하면서 추진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복잡성 사고의 필요성</b></p> <p style="text-align: justify">복잡성이란 무엇인가? 복잡성은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된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망, 즉 함께 짜인 <b>복합체</b>(complexus)이다. 또한 복잡성은 실제로 우리의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사건, 행동, 상호작용, 반작용, 결정, 돌발적인 것 등으로 구성된 하나의 망이다. 그렇다면 복잡성은 뒤죽박죽, 뒤얽힘, 무질서, 모호함, 불분명함 등 온갖 불안정한 특성들과 함께 제시된다. 바로 여기에서 무질서를 몰아내면서 질서를 잡고, 불확실한 것을 몰아낼 확실한 지식이 필요해진다. 즉 질서 있고 확실한 요소를 선택하고, 모호한 것을 제거해 명확하게 만들고, 구별하며 위계화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명료함을 추구하는 작업은 복합체의 다른 특성들을 제거하는 순간 맹목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복잡성은 과학에서 쫓겨났던 방법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세계의 완전무결한 절대 질서,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결정론, 유일한 절대 법칙에 대한 복종,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된 구성(원자)을 밝혀내는 데 전념했던 물리학의 발전은 결국 실재의 복잡성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 속에서 파괴와 무질서의 출현 원칙, 예컨대 &lsquo;열역학 제2법칙&rsquo;을 발견했다. 그다음에 물리적&middot;논리적 단순성이 있으리라고 예측된 곳에서 미시물리학의 극단적 복잡성을 발견했다. 소립자는 근원적인 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아마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의 경계일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로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 분해하는 동시에 조직화하는 하나의 과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삶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자율성을 생산해내는 극단적으로 복잡한 자기환경조직 현상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인류-사회적 현상은 자연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낸, 덜 복잡하고 명료한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인류-사회적 복잡성을 파기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그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복잡성 사고가 어려운 이유는, 이 사유는 다양한 현상들이 서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상태(상호작용-반작용하는 끝없는 움직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흐리멍덩한 것, 불확실한 것, 모순된 것 등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험을 위해 몇몇 개념 도구와 원칙을 고안해낼 수 있다. 그리고 명백히 드러나야 할 새로운 복잡성 패러다임의 양상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미 졸저 《방법》의 제1, 2권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몇몇 개념 도구를 언급했다. 예를 들면 분리&middot;환원&middot;일차원화의 패러다임을 분리하지 않으면서 구별해주고 동일시하거나 환원하지 않으면서 결합하는 구별&middot;결합의 패러다임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 패러다임은 &lt;b&gt;실제의&lt;/b&gt; 한계(모순의 문제)와 <b>원칙</b>의 한계(형식주의의 한계)를 고려하면서, 이 전통적인 논리를 통합하는 대화적이고 트랜스논리적인(translogique) 원칙을 포함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높은 차원의 추상적 통일성(전체론)과 낮은 차원의 추상적 통일성(환원주의)을 피하는 &lsquo;<b>하나이자 여럿, 여럿이자 하나</b>&rsquo;라는 원칙이 숨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여기서 내가 끌어내려 애썼던 복잡성 사고의 &lsquo;명령들&rsquo;을 열거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사유의 무능을 민감하게 여기고, 절단하는 사유는 필히 절단하는 행동에 이른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즉 사유의 현대적 병리학을 인식케 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유의 오래된 병리학은 사유가 창조해낸 신화와 신들에게 독립적인 삶을 부여해주었다. 정신의 근대 병리학은 실재의 복잡성을 보지 못하게 한 초(hyper)단순화 속에 있다. 반면 사유의 병리학은 이상주의 안에 있다. 이러한 이상주의 안에서 사유는 스스로 해석해야 하는 현실을 은폐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병은 교조주의와 독단주의로, 이는 이론을 이론 자체에 가두고 이론을 경직시킨다. 이성의 병리학은 합리화이다. 합리화는 정합적이긴 하지만 부분적이고 일방적인 사상의 시스템 속에 실재를 감금해버려, 실재의 일부가 비합리적임을, 또 합리성은 비합리적인 것과 대화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여전히 복잡성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카를 포퍼(Karl Popper), 토머스 쿤(Thomas Kuhn),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 폴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사이의 인식론적 논쟁에서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맹목은 우리네 야만성의 일부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사상의 야만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 정신의 선사시대에 살고 있다. 오직 복잡성 사고만이 우리 지식의 문명화를 도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nbsp;1장 전문)&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에드가 모랭 Edgar Morin, 1921~</strong><br /> 현대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문명비평가이다. 세계 여러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명예 연구부장인 모랭은 자연과학&middot;인문과학&middot;사회과학을 종횡하는 포괄적인 사유를 통해 오늘날의 학문과 사회의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오래전부터 문화 실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구했으며, 그 관심은 《시대정신》(1960), 《오를레앙의 소문》(1969) 등에 잘 집약되었다.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중 1977년 1권을 펴낸 뒤 2004년 6권에 이른 《방법》 시리즈〔《자연의 자연》(1977), 《삶의 삶》(1980), 《지식의 지식》(1986), 《생각들》(1991), 《인간성의 인간성》(2001), 《윤리》(2004)〕가 대표작이다. 그 밖에 《복잡성의 지성》(1999),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2007), 《나의 철학자들》(2011)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신지은<br /> </strong>사회학을 전공하고, 파리 5대학에서 〈현대의 산책자. 고독과 함께하기의 경계에서 방랑하는 인간〉으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관심 분야는 일상생활의 사회학, 문화 사회학 등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6 오후 2:10:00《208》2010년 5월 14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8_%EC%B9%BC%EB%A6%AC%EA%B5%B4%EB%9D%BC%20%ED%91%9C%EC%A7%80(1).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4일</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알베르 카뮈의 『칼리굴라 &middot; 오해』(책세상, 1999, 알베르 카뮈 전집 12)를 읽다. - 이 책에 대한 최초의 독후감을 쓴 것은 2000년 1월 5일로, 그것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5권 43~44쪽에 실려 있다. 이후로 나는 『칼리굴라』를 세 번 정도 더 읽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칼리굴라는 기원 12년에 출생하여 37~41년까지 재위에 있었던 로마의 황제다. 본명은 가이우스였으나 어렸을 때부터 군화를 자주 신어 &lsquo;칼리굴라(작은 군화)&rsquo;라는 별칭으로 불렸고, 그게 이름이 됐다. 김화영 번역 『칼리굴라․오해』의 말미에 붙어 있는 로제 키요의 해설에 따르면 카뮈는 칼리굴라를 &ldquo;추남&rdquo;에다가 &ldquo;종잡을 수 없는 행동&rdquo;(272쪽)을 한 인물로 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5년에 초간 되어 아직껏 이탈리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다는 인드로 몬타넬리의 『로마제국사』(까치, 1998)는,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ldquo;칼리굴라는 이미 용감하고 유능한 군인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켄투리아회에 자신의 권력을 반환함으로써 민주정치를 추진하였다.&rdquo;(282~283쪽) 그러나 뇌의 질병(혹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난 다음부터는, 본래 운동선수 같은 체격을 상실하고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는 등의 여성적인 행동을 하였으며, 악명 높은 기행을 연출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카뮈의 『칼리굴라』는 그가 누이동생 드루실라와 금지된 사랑을 했다는 역사를 바탕으로, 드루실라가 죽자 칼리굴라가 &lsquo;모든 인간은 죽는다&rsquo;는 절대적인 &lsquo;부조리&rsquo;를 인식하게 됐다는 설정을 보탠다. 근친상간이 당대에 얼마만큼 횡행했는지, 아니면 희소했는지, 우리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카뮈는 그의 산문집인 『결혼』의 어느 쪽에 &ldquo;이탈리아가 근친상간의 땅이라는 사실, 아니 적어도 - 사실은 더 의미심장한 점이기도 하지만 - 겉으로 털어놓고 고백하는 근친상간의 땅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이제 뜻밖의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서 불멸로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rdquo;라고 썼다. 또 앞서 말한 인드로 몬타넬리의 책도 그 점을 껄끄러워한 바, 칼리굴라와 드루실라의 관계에 대해 쓰면서 &ldquo;시간이 갈수록 그는 이집트 문명에 관심을 집중하여 그곳의 풍속을 로마에 소개하려고 하였다. [&hellip;] 그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이집트를 모방하려고 하였으며, 자신의 여동생들을 애인으로 삼기도 하였다&rdquo;(283쪽)라고 썼다. 근친상간은 이집트에서 온 풍습이란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374"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8_%EC%B9%B4%EB%AE%88.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어디에선가 &lsquo;신분이 미천한 사람이 미치는 것은 아무런 해가 없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이 미치는 것은 위험하다&rsquo;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책이나 영화를 통해 로마 황제의 &lsquo;살아있는 신&rsquo;과 같은 위력을 듣고 보았던 독자는 『칼리굴라』를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저 말을 &lsquo;신분이 미천한 사람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은 아무런 해가 없지만, 신분이 높은 사람이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다&rsquo;라는 말로 변주하고 싶어질 것이다. &lsquo;지상의 신&rsquo;이 &lsquo;인간은 모두 죽는다&rsquo;는 절대적인 부조리를 인식하고, 저 역시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정녕 세상은 한껏 위태로워지지 않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rsquo;을 뜻하는 무소불위<sup>無所不爲</sup>의 권력자들이 삶의 어느 순간, 어떤 계기에 의해 &lsquo;인간은 모두 죽는다&rsquo;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지, 또 그런 깨달음이 권력자의 통치술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는 참 궁금한 사항이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종교에 귀의했고(아우구스투스 &middot; 양무제), 대부분은 열락으로 죽음에 적대했으며(네로), 누구는 아주 현실적으로 불사약을 찾으러 다녔다(진시황). 『칼리굴라』 2막 5장을 보면, 칼리굴라가 무키우스의 처를 겁탈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장면을 보면 부조리 인식과 죽음의 탈출구로서, 에로티시즘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대목은 오히려 육욕이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 하잘 것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아가 에로티시즘을 능멸하기 위해 덧붙여진 장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이 작품에는 신성모독적 언사와 행위가 자주 묘사되는데(1막 11장 43~44쪽, 3막 1장 전체와 2장 95~96쪽), 칼리굴라는 죽음의 문제를 종교가 아닌 철학적 고민과 실천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그를 희극적으로 만든 철학적 실천이야말로 칼리굴라를 문제적 인물로 만든다. 과연 플라톤의 철인왕은 가능한 것인가? 1막이 오르면, 드루실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칼리굴라가 행방불명된 채 &ldquo;오랫동안 궁전을 비&rdquo;웠다(29쪽)는 정보가 제시된다. 그러다가 불시에 나타난 그는 측근인 헬리콘에게 &ldquo;말하기 어렵고, 감당하기 무거운 진리&rdquo;를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헬리콘: 그럼 그 진리라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폐하?<br /> 칼리굴라: (얼굴을 돌리며, 특징이 없는 목소리로) 인간들은 죽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br /> 헬리콘: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글쎄요, 폐하. 그건 얼마든지 타협이 가능한 진리군요. 주위 사람들을 보세요. 그 진리 때문에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br /> 칼리굴라: (갑자기 흥분된 말투로) 그렇다면 그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이야. 나는, 모두가 진리 속에서 살기를 바라는 거야! 그리고 마침 나는, 그들이 진리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야. 헬리콘, 난 그들에게 모자라는 것이 뭔지 알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인식 능력이야. 그래서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있는 선생이 필요한 거야.<br /> 헬리콘: 이런 말씀 드린다고 언짢게 여기진 마십시오. 폐하. 하지만 폐하께선 우선 좀 쉬셔야겠습니다. <br /> 칼리굴라: (의자에 앉으며, 부드럽게) 그건 못 해, 헬리콘. 이제부터 그건 절대 못 하게 되었어.<br /> (30~31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부조리를 인식하게 된 칼리굴라는, 부조리를 인식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lsquo;부조리의 화신&rsquo;이 된 그는 &lsquo;부조리의 계몽군주&rsquo;, 즉 자신의 권력을 수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부조리를 교육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부조리를 교육하겠다면서 측근의 귀족을 괴롭히면 괴롭힐수록, 돌아오는 것은 아부거나 반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칼리굴라가 깨달았다는 &lsquo;진리 내용&rsquo;과 그의 교육방법이 설득력 없다는 것을 느낀다. &lsquo;모든 인간은 죽는다&rsquo;는 게 뭐 그리 대수인가? 그리고 그게 어떻게 삶보다 중요한 진리가 될 수 있는가? 칼리굴라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스물아홉이 된 그를 &lsquo;어린아이&rsquo; 취급하는 것이고, 작중에서 그는 그렇게 취급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헬리콘: 케소니아, 폐하는 이상주의자예요.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다시 말해서 그분은 아직 뭘 모르시는 거죠.(33쪽) [하략]</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케소니아: (일어서며) 그 사람은 어린애였어.(34쪽) [하략]</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케소니아: [&hellip;] 다만 당신의 병이 어서 낫기를 바랄 뿐이에요. 당신은 아직 어린애예요.(144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칼리굴라가 &lsquo;어린애&rsquo;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칼리굴라와 친구면서 시인인 스키피오가 원로들로부터 어린애 취급을 받는 27쪽으로 보강되는데, 두 사람은 젊고, 문학을 좋아한다. 그런데 문학을 좋아하는 것은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는 표지이기도 하다(26쪽).</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모든 인간은 죽는다&rsquo;란 칼리굴라의 깨달음이 너무 평범한 것 같지만,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 갑작스럽고 압도적인 &lsquo;낯섦&rsquo;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부조리로 화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뭇 장삼이사가 이미 알고 있으며 백과사전에 자세한 사항이라고 해서, 개개인에게 닥친 부조리가 쓰잘 데 없거나,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요는 칼리굴라가 우리는 모르는 어떤 특별난 부조리를 인식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부조리를 인식한 이후의 칼리굴라, 또는 폭정(칼리굴라)과 부조리에 당면한 인간은 &lsquo;무엇을 할 수 있는가?&rsquo;가 카뮈의 문제의식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막이 시작되면, 칼리굴라의 전횡이 3년째 지속되고 있다는 정보가 주어지고, 죽음 앞에 몸부림치는 그의 악행이 여러모로 묘사된다. 3막은 칼리굴라가 자신의 논리에 지친 모습을 보여주며, &ldquo;휴식&rdquo;(112쪽)을 원한다. 4막은 폭정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서의 귀족들의 반란이 준비되고, 칼리굴라 역시 그가 마음껏 행사하는 &lsquo;자유&rsquo;의 바탕을 의심스러워하면서, 죽음을 수락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77" height="42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8_%EC%B9%B4%EB%AE%88%20%ED%8A%B9%EB%B3%84%ED%8C%90.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칼리굴라(폭정) 또는 부조리에 당면한 인간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칼리굴라를 에워싼 인물들의 반응을 살피면 된다. 실제 역사 속에서 칼리굴라의 네 번째 부인이었던 케소니아는 &lsquo;사랑&rsquo;을 부조리의 해결책으로 내세우고, 시인이면서 칼리굴라의 친구인 스키피오는 칼리굴라의 폭정을 방관하면서 그의 부조리 인식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 이 인물은 이 작품의 자매작이자 후속작인 『계엄령』 속에서 &lsquo;나다&rsquo;로 변주되는데, 이들은 니힐리스트라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노예 출신 광대인 헬리콘(22, 125쪽)은 점증해가는 칼리굴라의 악행을 참는 귀족들을 가리켜 &ldquo;고통도 맛본 적 없고 위험도 무릅써 본 적 없는&rdquo; 탐욕스러운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한다(125쪽). 헬리콘의 입장은 칼리굴라가 &ldquo;내가 제일 감탄하고 있는 게 바로 너희들의 인내야&rdquo;(70쪽)라고 귀족들을 비웃었던 것과 같은 입장으로, 그는 군주가 폭정을 가하는 상황에서 귀족이나 민중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는 &lsquo;반항&rsquo;이라는 것을 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들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케레아다. 『로마제국사』에 따르면 친위대장이었던 &lsquo;카시우스 카이레아&rsquo;가 분명한 이 인물은, 카뮈의 작품 속에서, 칼리굴라의 폭정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의 &lsquo;철학&rsquo;을 위험하게 여긴 유일한 인물이다(105쪽). 아래는 그의 대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이는 우리들 마음속의 가장 깊은 부분을 위협하고 있는 거요. 아마도 제국에서 한 사람이 무한권력을 쥐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부정할 정도로 그 권력을 무제한으로 행사하는 경우는 처음이죠. 이것이 바로 그의 소름 끼치는 일면이고, 내가 물리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거예요. 목숨을 잃는 다는 것쯤은 대수로운 게 아니오. [&hellip;] 그러나 이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우리의 존재 이유가 소멸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참을 수 없는 거요. (54~55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행동에 나서려는 것은 야심 때문이 아니라 이성적인 공포 때문이오. 저 비인간적인 정열에 대한 공포 말이오. 그 비인간적 열정에 비겨보면 내 목숨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오. (56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작품은 카뮈의 또 다른 희곡인 『계엄령』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한다. 『칼리굴라』의 한 대목에서 칼리굴라는 &ldquo;요컨대, 내가 페스트의 역할을 대신하자는 거지&rdquo;(131쪽)라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내뱉는다. 그런데 소설 『페스트』를 고스란히 희곡으로 각색한 『계엄령』에서 카뮈는 억압받는 민중이 칼리굴라와 같은 폭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단 한 마디로 보여준다. 의인화된 독재자인 페스트의 여비서는, 페스트에 저항하는 의사 디에고에게 이렇게 권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비서: 작은 비밀을 하나 가르쳐 주죠&hellip;&hellip;. 당신 말이 맞아요. 그 사람[페스트]의 수법은 그야말로 탁월해요. 그렇지만 그 완벽한 기계에도 한 가지 결함은 있어요.<br /> 디에고: 그게 무슨 말이오?<br /> 여비서: 한 가지 결함이 있다니까 그러네.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사람의 인간이 공포를 극복하고 반항하기만 해도 기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기계가 아주 멈춰 버린다는 말은 아녜요. 그럴 리 없죠. 하지만 아무튼 삐걱거리기 시작해요. 때로는 아주 마비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요.(『정의의 사람들 &middot; 계엄령』, 책세상, 2000, 알베르 카뮈 전집 13, 240~241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단 한 사람이라도 공포를 극복하고 반항하기만 하면, 폭정이라는 기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이 주제야말로, 카뮈가 &lsquo;개인적인 반항&rsquo;이었던 부조리 시대를 마치고, 연대를 발견한 저항 시대로 가는 머릿돌이다. 카뮈는 &lsquo;부조리에서 저항으로!&rsquo;라는 자기 변화 가능성을 『칼리굴라』의 마지막 장면에 암시해 놓았다. 『칼리굴라』는 거울로 깨트리며 칼리굴라가 외치는 두 마디 말로 끝난다. &ldquo;역사로 돌아가는 거다, 칼리굴라, 역사로.&rdquo;, &ldquo;나는 아직 살아 있다!&rdquo;(151쪽)<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06 오전 11:02:00라이너트의 ‘부자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한가’<p style="text-align: justify">&nbsp;<img alt="" width="600" height="88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5_%EB%B6%80%EC%9E%90%EB%82%98%EB%9D%BC/185_%EB%B6%80%EC%9E%90%EB%82%98%EB%9D%BC_%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어판 서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소개되어 매우 기쁘다. 이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한국을 이 책의 골자를 이루는 기술과 혁신을 토대로 한 국가 전략을 따른 나라로 본다. 오늘날의 위기에서 관찰되는 아시아적 예외 현상이라는 것도 당연히 바로 이런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마지막 부분을 집필하면서(2006년 12월 말엽) 나는 맨 끝 페이지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예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우선 중요한 금융 위기의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으며, 케인스주의가 전 세계적이고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고안되어야 하는 시점이다. 현재 세계 경제 질서의 중심인 &lsquo;자유 무역&rsquo;은 1930년대에 금본위제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이 케인스주의의 실행을 늦춘 것처럼 앞으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예견의 첫 부분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서구는 2008년 개인 금융 부문에서 대규모 금융 위기를 겪었다. 이 서문을 쓰고 있는 2011년 11월 현재까지도 계속 전개되고 있는 재정 위기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은 이 위기의 해결책의 일환으로 각국 정부가 채무를 떠맡은 탓이었다. 그러나 이 예견의 두 번째 부분, 즉 케인스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다시 실행되리라는 예견은 비록 2008년에 일찌감치 거론된 바 있기는 하지만 화려한 말에 그쳤을 뿐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과 유럽연합에서 주로 보게 되는 것은 케인스주의의 정반대 현상이다. 정치적 본능은 생산과 수요와 고용을 계속 유지하려는 케인스주의가 아니라 예산 삭감이나 국가 수요의 축소 등과 같은 통화주의 쪽으로 쏠렸던 것이다. 유럽과 미국은 이제 1998년의 아시아 금융 위기 초반에 실시된 것과 같은 유의 정책을 경험하고 있다. 그 정책은 은행을 구하기 위해 산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직관적으로 반응한다. 당시 서구는 아시아 위기를 &lsquo;아시아적 가치&rsquo;와 &lsquo;연줄 자본주의&rsquo; 탓으로 돌리며 희생양으로 삼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이 유럽적이고 미국적인 가치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이먼 민스키가 표현하듯이 희생양을 찾는 것은 &ldquo;악당을 원하는 정치인들의 필요를 만족시킬지는 몰라도 &hellip; 그런 이론은 문제 해결에는 유용한 지침이 되지 못한다.&rdquo; 유럽은 최근의 재정 위기 발생을 그리스 인들의 &lsquo;무책임성&rsquo; 탓으로 돌릴 뿐 무자격자에게 무책임하게 돈을 빌려 준 은행들의 책임은 전혀 묻지 않았다. 심지어 무책임하게도 그리스 정부의 재정 현황이 공개된 기록에 드러나지 않도록 채무의 은폐를 도와주기까지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예견의 세 번째 부분에 관해서는 아직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다. 즉 세계 경제 질서의 핵심으로서 자유 무역을 없앨 필요라는 부분 말이다. 유로화는 새로운 버전의 금본위제라는 것이 드러났다. 유럽 국가들이 예전에 그랬듯이 잦은 환율 조정을 통한 문제 해결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lsquo;무책임한&rsquo; 국가들은 자국 화폐를 평가절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여 두 가지 유익한 효과가 생겼다. a) 그들의 경제가 다시 국제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고, b) 그와 동시에 으레 각국 통화로 발행되었던 국가의 채무 가치는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공적 채무가 많았지만 그것은 모두 리라로 표시된 채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금까지 &lsquo;자유 무역&rsquo;은 살아남았으며 &lsquo;무역 전쟁&rsquo; 대신에 &lsquo;환율 전쟁&rsquo;이 벌어지고 있다. 환율 전쟁은 거대한 투기 활동과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비해 무역 전쟁은 주로 고용과 실물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까지 이런 경제 전략이 피해를 입힌 곳은 주로 유럽의 주변부였다. 그리스 인들의 시위 사태는 많이 보도되지만 (또 다른 유럽 주변부 국가인) 라트비아의 경제적 곤란은 전반적으로 간과되었다. 라트비아는 이른바 &lsquo;내부적 평가절하(internal devaluation)&rsquo;로 인해 실질 임금이 30퍼센트가량 낮아졌다. 실업과 낮은 생활수준 때문에 사람들은 고국을 떠나도록 내몰렸으며, 인구는 20퍼센트가량 감소하여 2000년 이후 238만 명이던 인구가 190만 명으로 줄었다. 라트비아의 출생률 통계에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문화의 단면이 드러난다. 1987년 라트비아의 신생아 수는 4만 2000명이었지만 2010년에는 1만 8000명에 불과하다. 라트비아는 경제적 쇠락의 전형적인 순서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탈산업화(1990년대), 두 번째는 탈농업화(농업의 사망), 세 번째는 인구 감소라는 순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탈산업화와 실질 임금의 감소 추세가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은 이 책의 표 14에서 설명된 제3세계 주변부였다. 그 표에서 예로 드는 곳은 페루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일한 메커니즘이 예전의 제2세계, 즉 과거의 공산 국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책에서는 몽골을 예로 들었지만, 실질 임금의 저하와 국내총생산(GDP) 대비 실질 임금의 감소와 같은 변화는 러시아에서도 일어났다. 제조업과 생산 일반의 역할을 간과하는 결함 있는 경제 이론에 의해 창출된 위기는 이제 마지막으로 제1세계의 핵심 그 자체인 미국과 유럽연합에도 타격을 가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에서는 1980년경 시작된 기술과 혁신에 바탕을 둔 아일랜드의 전략을 높이 평가한다. 아일랜드의 성공은 정말로 놀라웠다. 1986년에서 1996년까지 아일랜드의 성장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인 2.4퍼센트에 비해 그 두 배 이상인 5.1퍼센트였고, 1996년에는 정부 예산 결손이 사실상 0이었다. 그러나 그런 다음 아일랜드의 경제는 건설 투기에 몰두했고, 그 투기는 곧 거품처럼 터져 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아일랜드 정부는 그 나라의 대표적 은행인 앵글로 아이리시뱅크와 아일랜드 전국건축협회에 구제 금융을 해 주는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의 일반 정부 재정 적자가 2010년에는 전례 없는 32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렇지만 아일랜드 식 기술 전략의 성공에 대한 내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전략은 자격을 갖춘 이민자들이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일하기 위해 돌아오는 &lsquo;인재 유입&rsquo;이라는 보기 드문 현상도 창출했다. 이제 이런 현상들은 모두 뒤집혔으나 산업 전략의 실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아일랜드가 몰락한 것은 거품 투기에 몰두하였고, 해체되어 마땅한 은행들에게 구제 금융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와 스웨덴도 몇 년 전에 같은 일을 겪은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시점에서 서구(유럽과 미국)가 여전히 냉전 논의의 잔재, 좌파와 우파 간의 공허한 의례적 투쟁과 워싱턴 컨센서스의 이데올로기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은 나 같은 유럽 인들이 보기에는 슬픈 일이다. 정치적 양극단은 저마다 경제적 동력의 부족을 정부나 대기업의 책임으로 돌리며, 유럽과 미국 모두에서 금융 부문이 조종간을 쥐고 있다. 서구에서 &lsquo;자유 시장&rsquo;에 대한 믿음은 밀항자와 함께, 원치 않는 손님과 함께 왔다. 자유 시장에서는 금융 부문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돈을 찍어 내고, 그 돈을 (서브프라임 대부 업체 같은) 대출 받을 자격이 없는 개인과 (그리스 같은) 국가들에게 빌려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또 그런 불이행된 채무를 갚을 의무를 실물 경제를 담당하는 납세자들에게 떠넘길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면 &lsquo;자유 시장&rsquo;은 금융 부문이 실물 경제의 암묵적인 보장을 받으면서 폰지 사기(Ponzi schem)를 만들어 내도록 허용해 주는 시스템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금융 부문은 보통 실물 경제를 버텨 주는 중요한 보조 장치(케인스 식 표현법에 따르면 &lsquo;시점時點 간의 가교bridge in time&rsquo;)로 작용하나 여기서는 실물 경제의 구매력에 기생하는 기생충이 되었다. 은행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실질 임금을 계속 낮추어야 했던 그리스는 일찌감치 이런 현상이 나타난 사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산과 기술보다 무역과 금융 변수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서구 경제에는 점점 더 파괴적인 영향이 미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중국, 인도, 한국, 그 밖에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특징인 생산 부문에 실용적으로 집중하는 태도는 서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유럽과 미국의 현행 금융 부문은 꼬리가 몸통, 다시 말해 실물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격이다. 그 결과는 유럽과 미국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서구에 대한 수출 비중이 큰 아시아 경제에도 피해를 입힌다. 이 전망은 정말로 모두가 지는 상황을 예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시아를 서구와 미국이 겪는 난국에 빠지지 않게 막아 준 것이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설명 하나는 경제 사상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아시아적 예외주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37년 요제프 슘페터는 자신의 저서 『경제 발전론(The 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의 일본어판 서문을 쓰면서 매우 흥미로운 논점을 제시했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인 견해이면서도 슘페터는 자신이 보는 경제적 동력의 이해가 카를 마르크스의 것과 얼마나 비슷한지 일본인 독자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두 사람은 모두 &ldquo;획득 가능한 모든 균형을 그 스스로 와해시키곤 하는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 힘의 근원&rdquo;을 찾고 있었는데, 이 힘이란 기업가 정신과 기술 변화이다. 슘페터는 이자에 관한 마르크스와 자신의 이론이 유사하다고 언급한다. 마르크스에게는 상수인 자본은 어떤 잉여 가치도 산출하지 못하며, 슘페터에게는 완전 균형하에서의 이자율은 0이 된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혁신이 없는 곳에서 투자-정의상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 것-는 화폐의 구매력 저하로 축적된 자금을 통해 조달 가능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과 동아시아의 경제 전략은 정치적 좌파와 우파가 운 좋게 결합함으로써, 즉 마르크스를 잘 아는 지식인들과 슘페터적 동력을 이해하는 기업가들의 결합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 덕분에 동아시아는 가난에 특화하는 전략을 추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것은 &lsquo;기러기 편대형 전략(flying geese strategy)&rsquo;, 즉 순차적인 경제적 등급 상승의 전략으로 이 지역 전체에 확산되었다.(이 책의 4장에서 설명된다.) 멀리 있는 외부자의 눈으로 보면 좌파와 우파 간의 이 행운의 융합(동력에 대한 마르크스와 슘페터적 이해의 융합)은 그 이후 내내 아시아 무대를 지배해 왔으며, 탁월한 결과를 산출해 냈다. 더군다나 여기에 이런 노선의 아시아적 사고방식으로 지금도 대만에서 살아남아 있는 1920년대 중국의 손문 사상이 가세했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잘못된 정치 노선과 첨예하게 대비된다. 미국은 좌파와 우파 간의 비건설적 대립에 의해 지배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좌파와 우파는 모두 정태적인 리카도적 세계관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금융 부문을 분석의 단위로 포함시키지 못하는 리카도의 오류도 그런 세계관의 일부이다. 이 점이 누락됨으로써 현재의 실물 경제는 그로 인한 파괴적인 영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제국은 그들 자신의 선전을 믿기 시작할 때 힘을 잃는다. 영국에서 1817년 이후 신봉된 리카도의 무역 이론은 영국이 제조업에서의 실질적인 독점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였다. 100년 뒤 세계화의 첫 물결이 지나간 뒤 영국의 농업과 산업은 자유 무역에 의해,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바로 그 이론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것이 미국의 역사와 함께 반복되고 있다. 자유 무역을 자동적으로 경제적 조화를 만들어 내는 기계로 잘못 제시하는 바로 그 리카도 식 무역 이론이 미국 경제까지도 심각하게 약화시킨 것이다. 미국에서의 실질 임금은 1970년대 초반에 비해 증가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잔인한 방식이며, 아마 그런 대접을 받아도 마땅하겠지만, 서구가 해외 식민지에게 적용했던 선전 이론(식민지에서는 혁신과 산업화의 필요가 없다는 이론)이 부머랭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그다음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1820년대 어떤 미국 정치가의 말을 빌리자면) 서구 국가들이 원래는 수출할 목적으로만 만들어 냈던 경제 이론을 스스로 믿기 시작할 때 서구의 헤게모니 상실이 일어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중국과 아시아의 새로운 경제 권력은 새로운 딜레마를 만들어 낸다. 세 번째 예견으로 돌아가 보면, 오래된 관세는 현재의 &lsquo;환율 전쟁&rsquo;보다는 세계 경제를 와해시킬 가능성이 덜하다. (국가의 생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같은 목적에서 만들어졌지만 &lsquo;두 가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rsquo;은 상이한 부수적 효과를 낳는다. 통화 전쟁은 거대한 투기 이득을 유도하지만 관세는 생산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케인스가 1933년에 쓴 중요 논문인 &ldquo;자족 국가론(National Self-sufficiency)&rdquo;에서 주장했듯이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제품이 더 많은 부분 가내 공업적인 것이 되어야 하며, 금융 역시 국가적 성격을 가져야 함을 인정하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이 문자 그대로의 아우타르키(autarky, 경제적 자급자족)나 자족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케인스가 뜻하는 바는 1945년에서 1973년까지 세계를 지배해 온 지극히 성공적인 세계 발전 모델로 돌아가자는 것이며, 세계가 번영하려면 제조업과 선진 서비스 부문이 모든 국가에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전망을 가리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중국어판 서문에서 말했듯이 &ldquo;처음 들으면 비논리적이라 여기겠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임금과 고용율이 하락하는 상황에서는 그런 나라의 보호주의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것이 사실 중국에게 장기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의 산업 시스템을 어느 정도 보호하는 것은 장래 중국 제품의 해외 시장 규모를 유지해 주는 안전판이 될 것이다.&rdquo; 같은 말이 한국에도 적용된다. 주요 해외 시장에서의 구매력 감소는 아시아에게 장기적 이익이 되지 못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의 재정 위기가 낳은 참담한 결과는 경제에 대한 질적 이해에 근거한 이론적 전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직접적인 결과이다. 경험의 과학으로서 경제학에 대한 이해, 수학보다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한 경제학 이해가 바로 그것이다. 이 유럽 대륙적 전통, 좌파의 마르크스에서 우파의 슘페터에 이르는 전통에서 재정 위기는 자본주의의 정상적 면모이다. 이런 유형의 이론은 기술의 역할에 대한 이해도 포함하는 것이므로, 유럽 대륙적 유형은 불균등한 경제 발전도 설명할 수 있다. 이런 경험에 기반을 둔 경제 이론(이 책이 집필된 전통에 속하는)이 한국에서는 현재 서구에서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말</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구상에서 부국과 빈국 사이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크며, 어떤 측정 방식을 따르더라도 그 격차는 대부분 계속 더 벌어지고 있다. 1970년 이후 &lsquo;발전의 10년&rsquo;이 세 번 지나는 동안 대규모 경제 이전(economic transfer)이 이루어졌고 수조 달러어치의 &lsquo;개발 원조&rsquo;를 쏟아부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암울하기만 하고 오히려 더 나빠진 곳도 많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은 하루 2달러 미만의 생계비로 살고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는 실질 임금이 1970년대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1750년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와 가장 가난한 나라의 소득 격차가 2 대 1 정도였다고 추산되지만 이후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경제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경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이런 결과를 낳은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려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현재의 주류 경제 사상을 대중화하려는 시도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오히려 이 책은 현재 시행되는 정책이 경제학의 정통이 아님을 밝히고, 경제학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실험실인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오랜 전통을 되살려 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빈곤으로 인해 지불해야 하는 인적 비용은 엄청나다. 영아 및 아동 사망률, 예방할 수 있는 질병과 낮은 기대 수명으로 인한 인명 손실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끔찍한 수치이다. 부국은 내전이나 희소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분쟁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별로 겪지 않을 수 있다. 또 환경 악화로 인한 영향도 어쩌면 빈곤층이 가장 크게 느낄지 모른다. 빈곤 사회에서는 환경 악화에 의한 악순환이 쉽게 형성되는데, 인구 증가로 인해 늘어나는 수요를 채우려면 오로지 자연을 더 심하게 수탈하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래 세계의 경제 질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철두철미하게 현실에서 보이는 것과 정반대 상황을 &lsquo;증명&rsquo;하는 주류 경제 이론에 입각해 움직이고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세계 자유 무역은 부국과 빈국 사이의 임금 격차를 없앤다고 한다. 인간이 시장의 &lsquo;자연적 힘&rsquo;에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즉 자유방임의 원리를 따르기만 한다면 진보와 경제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30년대의 불황을 예견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1926년에 이미 『자유방임의 종말(The End of Laissez-Faire)』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세계 경제가 마침내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리라는, 거의 메시아주의나 마찬가지인 황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레나토 루지에로(Renato Ruggiero)는 &ldquo;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를 균등하게 해 줄 국경 없는 경제의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rdquo;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토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에는 이런 믿음이 자리 잡고 있으며, 1990년대 초반 이후 워싱턴 기관(Washington Institutes)<sup>●</sup>들은 대부분의 빈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매우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관리해 왔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드러난 결과는 극히 한심한 수준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제3세계의 현실과 루지에로 및 워싱턴 기관들이 품었던 환상 사이에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새로운 세계 질서를 예견한 이들이 조화를 예견한 곳에서 우리는 기근과 전쟁, 악화되는 환경 문제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한 번 현실을 서서히 재인식하는 중이다. 1992년 미국의 철학자이자 외교 문제 전문가로서 자유 민주주의의 신봉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냉전의 종식이 곧 &lsquo;역사의 종말&rsquo;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2006년 『기로에 선 미국: 네오콘 이후(After the Neocons: America at the crossroads)』에서 예전의 견해를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네오콘에 대한 그의 현재 견해에 따른다면, 신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장기적인 제도 구축과 개혁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독재 정권이 교체되기만 하면 곧바로 사회가 어떤 곳으로 복귀하는 기본 조건(default condition)<sup>●●</sup>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5_%EB%B6%80%EC%9E%90%EB%82%98%EB%9D%BC/%EC%A3%BC%EC%84%9D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나는 경제에 관해 대비되는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 성장과 복지가 장기간에 걸쳐 특정 형태의 경제 구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시장 개입만 없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본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경제 성장을 이해하는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세계의 시대정신은 1992년에서 2006년 사이 후쿠야마의 견해와 비슷한 학습 곡선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는 이전에도 비슷하게 조화로운 경제 이론과 참혹한 경제 현실 사이의 충격적인 차이를 경험한 바 있으며, 그런 경험에서 배울 것은 많다. 우리는 경제적 조화를 신에 의해서건 수학적인 것에 의해서건 이미 예정된 자동적인 결과로 보는 이론에서 벗어나, 조화로운 경제는 의식적인 정책의 산물이라는 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 계몽주의의 위대한 투사인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1759년 1월 15일과 16일에 볼테르는 신작 소설 『캉디드(Candid)』의 사본을 몰래 파리, 암스테르담, 런던, 브뤼셀로 부치고 있었다. 사본이 유럽 서적 거래의 주요 중심지에 일단 도착하고 나면 미리 정한 날짜에 서유럽 전역에서 한꺼번에 발표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비밀 작전을 펴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책이 불법으로 복제되어 자기 몫의 수입이 새어나가기 전에 최대한 많은 부수를 판매할 방법을 찾은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이 제기하는 사상의 위험성을 당국이 알아차리고 탄압하러 나서기 전에 최대한 많은 독자에게 혁명적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유럽 전역의 경찰은 『캉디드』의 사본을 압수하고 새 책을 인쇄하고 있던 기계를 때려 부쉈다. 또 바티칸은 볼테르의 저작을 금서 목록에 올렸다. 하지만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이 얇은 책은 18세기 출판계의 최대 사건이 되었고, 정치와 교회가 연합한 절대 권력이 아무리 기를 쓰고 막으려 해도 어쩌지 못하는 지적 쓰나미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볼테르의 소설은 세상 경험을 쌓기 위해 (썩 내키지는 않지만) 집을 나선 젊은 캉디드를 따라간다. 캉디드는 자신에게 &lsquo;형이상학적-신학적-우주론적-기호학&rsquo;을 가르쳤던 철학자 팡글로스의 말처럼 세상이 &lsquo;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rsquo;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캉디드가 맞닥뜨린 것은 빈곤과 약탈을 일삼는 군대, 종교 박해, 지진, 난파 등이 벌어지는 살벌한 세상이었고, 사랑스러운 연인 퀴네공드가 군인들에게 수없이 강간당한 뒤 칼로 난자당한 채 노예로 팔려 나가는 세상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팡글로스는 줄곧 이 세계가 &lsquo;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rsquo;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마침내 젊은 캉디드는 자문하게 된다. &lsquo;이것이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것이라면 다른 세상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단 말인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캉디드』를 통해 볼테르는 유럽을 팡글로스 교수와 같은 지적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볼테르는 섭리든 신앙이든 신이든 시장이든 간에 외적 힘에만 변화와 전환을 일으킬 능력이 있다고 보는, 팔짱 낀 채 구경만 하는 낙관적 결정론을 공격했던 것이다. 경제학의 정통성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의 많은 수가 이와 비슷하게 지독한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의 팡글로스적 경제 이론은 머리꼭대기에서 발끝까지 천문학이나 물리학에서 가져온 억지스러운 가정과 은유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이론은 현재의 주류 이론 스타일에 미리 짜 맞춘 듯한 조화로운 우주를 그리고 있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일부에서 되살려 내려고 애쓰는 대안은 현실이 경제 발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고 보는 견해를 토대로 하여 밑에서부터 쌓아 올린 것이다. 발전은 번영을 가로막는 &lsquo;장애물 제거하기&rsquo;가 아니라 지금까지 늘 그랬던 대로, 즉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정책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팡글로스적 논리의 등록상표 하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이성적 사고방식이나 상식과는 모순되는 식으로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워싱턴 기관들은 제3세계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진 가난한 주민들이 극적인 과정을 거쳐 대규모로 탈출하는 사태를 두고 &lsquo;모두를 위한 최선책&rsquo;이라고 주장한다. 외국에서 일거리를 찾은 그들이 실업 상태로 남아 있는 친척들에게 송금을 하여 가난한 고국의 임금 수지를 균형 잡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수한 이주민들이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인구 과잉 지역을 빠져나와 부가 과잉인 지역으로 넘어가고 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수는 죽는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도 뒤에 남은 친척들이 꼼짝없이 굶어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새로 정착한 나라에서 착취와 적대감을 견뎌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팡글로스 식의 사고에 들어 있는 또 다른 특징은 그 모델, 즉 &lsquo;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 최선의 세계&rsquo;를 창조하는 모델의 핵심 가정이 과연 타당한지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상된 결과와 상충되는 견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현실이 걸러지는 것이다. 또 지금처럼 현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눈에 거슬리게 되면 핵심 모델 밖에서 설명을 찾곤 한다. 빈곤을 인종이나 문화, 지리적 여건의 결과로 설명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여 정통 경제학 이외의 모든 것에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팡글로스적 경제 모델은 완벽하다는 것이 전제이므로, 그것이 실패한다면 반드시 경제학 외부에 있는 요소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볼테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세계가 완벽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세상을 개선하려고 적극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권력을 쥔 자들이 전력을 다해 탄압하려 애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진보와 같은 과업을 성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민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만도 어마어마한 노력과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 계몽주의와 유럽 전역에서 싹튼 상업 사회가 이룬 개혁은 이와 같은 『캉디드』의 정신으로부터 막대한 은혜를 입었다. 공간의 광활함과 발전의 변칙성을 깨닫기 시작한 21세기에 들어서는 세계가 인류의 변덕을 감당해 낼 만큼 완벽하게 설계된 게 아니라는 볼테르의 통찰이 그만큼 더 명백해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와 정치가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자유방임을 실천하고 (대체로 &lsquo;이성적&rsquo;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개개인의 본능을 가장 기본적인 제재 이외의 그 어떤 개입 없이 자유롭게 상호 작용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세계는 완벽해질 것이라며 죽은 신학자들처럼 확신에 찬 어조로 권위적으로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사법 시스템과 같이 사회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제도마저도 민영화해야 하며, 사회를 &lsquo;시장&rsquo;이라는 섭리의 조화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이 가정하는 완벽한 보험 시장이 사법 시스템을 민영화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그 어떤 불운으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자연 상태의 사회는 조화롭지 않다. 우주의 법칙이란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늘 사회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며, 그 법칙에 따름으로써 항상 조화를 이루리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lsquo;시장&rsquo;에 대한 믿음은 때때로 섭리에 대한 믿음이나 늘 존재하는 신의 선함에 대한 믿음과 구별하기가 힘들다. 어떤 사람은 우주가 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현대의 규정처럼 특이하고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것을 위해 맞춤 재단되어야 하는지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lsquo;자연법&rsquo;이 국가의 부강을 좌우한다는 환상을 떨쳐 버려야만 어떤 정책이 어떻게 하여 과거에 효과가 있었고, 어떻게 하면 그런 성공이 미래에 또다시 정책으로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캉디드』를 쓴 이후 볼테르의 주 공격 대상에는 경제학자들도 포함되는데, 그들은 경제 사상사에서 (민주주의가 &lsquo;인민의 지배&rsquo;를 의미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lsquo;자연의 지배&rsquo;를 일컫는) 중농주의자(Physiocrats)로 알려진 집단이다.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은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의 계보를 국부(國富)는 오로지 농업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던 중농주의자들에게까지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농주의자들이 경제 정책을 맡은 기간은 그리 길지 않으며, 그 기간에 시행된 정책마저도 식량 부족과 빈곤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프랑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프랑스의 볼테르와 디드로에서부터 이탈리아의 아베 갈리아니(Abb?Galiani)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흄(David Hume)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유럽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은 대부분 중농주의에 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더군다나 중농주의의 고향이라 할 프랑스에서마저 당시 경제학계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베스트셀러는 반(反)중농주의자가 쓴 책이었다. 또 영국에는 중농주의 사조가 상륙하지도 못했다. 볼테르가 중농주의를 상대하여 벌인 싸움을 우리가 연구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비슷한 이론을 관찰해서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론은 비슷한 상황에서는 비슷한 결과에 이른다. 오늘날의 식량 주권 운동은 사람의 먹을 권리와 자유 무역의 원리 사이에 이따금 갈등이 생길 수 있음을 인정한다. 1774년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는 동안 프랑스의 반중농주의자 시몽 링게(Simon Linguet)가 바로 이 같은 논의를 제기했다. 당시의 현실 정책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반중농주의자였지만 요즘의 경제학 교과서에는 그런 사실조차 거론하지 않는다. 지금의 경제학사는 현실 경제 정책에서 실제로 통용된 것만이 아니라 볼테르의 전문 분야인 철학 같은 인접 학문에서 일어난 일과도 심하게 괴리된 채 존재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상이한 경제학적 견해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실질적으로 세계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는 현재의 주류 이론을 왜 무너뜨려야 하는지 보여 주고자 한다. 1817년에 나온 영국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의 무역 이론은 세계의 경제 질서를 세우는 요체가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자유 무역이 사람들을 더 빈곤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한데도 서구의 정부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게 자기 이론을 내세우고 있으며, 자유 무역을 받아들이면 그 대가로 원조를 더 많이 하겠다고 나선다. 그리하여 원조를 더 많이 원하는 사람들의 선한 의도가 실제로 정책이 집행될 때는 현재 통용되는 정통 경제학의 어리석음을 은폐하도록 작용한다. 세계 자유 무역이라는 도그마는 비현실적이고 범죄적인 데다가 부패하기까지 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이상주의와 관대함을 내세워 행동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주류 경제 이론의 기저에 깔린 문제들을 이해하고, 대안이 되는 방법을 되살리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출발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1장에서는 경제 이론에 상이한 유형이 존재한다는 것과, &lsquo;고매한 이론(high theory)&rsquo;의 화려한 화법과 실제 현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극을 경제 정책의 관점에서 설명할 것이다. 2장은 중농주의자에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거쳐 오늘날의 일반적인 경제학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전통처럼 확립된 이론에 대해 입안자들의 견해가 발전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런 전통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덜 추상적인 경제학의 &lsquo;다른 전통(Other Canon)&rsquo;과 대비되는데, 이 다른 전통은 역사적으로 보면 빈곤하던 현재의 부국들이 부유해지는 과정에서 지침을 제공한 이론이었다. 1485년의 영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마셜 플랜까지 나아간 과정이 바로 그런 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장에서는 성공적인 발전의 핵심은 &lsquo;비교 우위&rsquo;와 &lsquo;자유 무역&rsquo;이 아니라 계몽주의 경제학자들이 모방이라 부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의 모방이란 대등해지거나 더 우월해지기 위한 모방을 뜻한다. 강 건너편의 부족이 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면 이쪽 편 부족은 석기 시대 때 누렸던 상대적 우위를 고수하든가, 아니면 이웃 부족을 모방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인다. 리카도가 나오기 전에는 모방이 최선의 발전 전략이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리카도의 무역 이론이 역사에 끼친 가장 중요한 기여는 바로 최초로 식민주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모방 전략이 현재의 부유한 모든 국가가 꼭 거쳤던 단계였다는 생각은 모조리 잊어버렸으며, 모방에 필요한 핵심 도구도 불법이 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불균등 경제 발전 이론을 세우기 위해 경제 정책의 역사, 즉 과거에는 어떤 정책이 성공적인 발전을 창출했는지에 대한 지식을 활용할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이런 정책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여기지 않는다. 오늘날의 무역 이론에서는 그 대신에 이론의 기본 전제로 이미 경제적 조화를 가정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유 무역을 지지하는 훌륭한 논증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리카도의 이론은 그런 훌륭한 이론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4장에서 주장하려는 내용이다. 생산 경제학을 더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세계화를 지지하는 최고의 논리는 빈국이 세계 경제 무대에 너무 빨리 진입하지 못하게 막는 논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리카도의 이론은 여러 정황상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근거 위에서 옳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치적 좌파와 우파 모두 리카도의 이론을 여러 관점에서 깊이 신봉하였고, 그를 비판하면 문제아로 취급했다. 정치적 우파는 자본주의 및 일상적이고 제약 없는 국제 무역이라는 리카도의 이론이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것을 입증하려 든다. 자유 무역이 이롭다는 증거는 경제학자들이 노동 가치설이라 부르는 것, 즉 가치의 원천은 오로지 인간의 노동뿐이라는 견해에 근거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 또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노동 가치설은 오늘날 세계의 빈부를 설명하기보다는 19세기 산업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데 더 적절한 이론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폴란드의 수학자 스타니슬라브 울람(Stanislaw Ulam)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1949년에 자유 무역이 세계 임금을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음을 이론화한) 노벨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에게 보편적으로 참이지만 명백하지 않은 개념을 경제학에서 지적할 수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새뮤얼슨은 이에 대해 &lsquo;비교 우위설&rsquo;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두 나라는 각각 상대적 생산가가 똑같지 않다는 전제 위에서 자유 무역에 참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양쪽 모두 이익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자유 무역의 철학적 기반을 공격하다 보면 좌우 양쪽에서 공격받을 뿐 아니라 경제학이 &lsquo;엄밀 과학(hard science)&rsquo;이라는 주장에도 흠집을 내게 된다. 이 책은 경제학이 자연 과학이 아니며, 앞으로도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보는 전통을 되살려 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5장에서는 오늘날 여러 빈국에서 발전과 진보의 정반대 현상, 즉 퇴보와 원시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런 원시화를 초래하는 메커니즘은 몽골, 르완다, 페루의 사례에서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강을 사이에 둔 두 부족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단지 몇 십 년 전만 해도 석기 시대에서 벗어나 청동기 시대로 들어가야만 생활수준이 더 높아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논리가 통용되었다. 설사 자기 부족이 선도하는 부족만큼 진보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비효율적이더라도 제조업 분야가 있는 것이 제조업 없이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논리는 베를린 장벽과 함께 파묻혀 버렸고, 그에 따라 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실질 임금이 추락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6장에서는 최근 주류 경제학이 빈곤 문제에 대해 내놓은 해법을 논의할 것이다. 치유책을 찾으려면 경제 발전에서 핵심적인 면들을 부수적 효과나 징후에 그치는 것들과 구별해야 한다. 최근 경제학의 이런 핵심 은유와 전제, 공리를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꺼림으로써 경제학자들은 최근에 &lsquo;훈제 청어(red herring)&rsquo;<sup>●</sup> 한 두름에 정신이 팔린 꼴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생산 영역에서 핵심 쟁점 이외의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실패한 경제를 책임졌던 바로 그들이 지금 경제 재건을 위한 이념적 지도자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는 도시 재건을 하겠다고 하면서 훈족의 왕 아틸라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5_%EB%B6%80%EC%9E%90%EB%82%98%EB%9D%BC/%EC%A3%BC%EC%84%9D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7장에서는 발전의 역사적 과정을 알고 있으면 논리 정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해로운 정책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국은 빈국에게 자유 무역을 강요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제3세계로부터는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면서 자국 농민들에게는 보조금을 지급한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불공정한 관행을 시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그러나 18세기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농업 관세에 대한 철폐는 식민주의의 무기고에서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 온 무기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행이 아무리 불공정하게 보이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팡글로스의 덫, 즉 완벽한 자유 무역과 자유방임을 시행한다면 경제적 조화라는 환상이 실현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현재 세계무역기구가 쓰는 논리에 따르면 남반구 국가들이 가난한 것은 북반구가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여 주려는 세상은 굶주리는 남반구가 북반구에 식량을 팔 수 있게 내버려 두기만 한다고 부자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빈국을 부유하게 만들려면 직접적이고 단순한 온정만으로는 안 된다.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낳을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뒤떨어진 농업을 보면 그곳의 농업을 더 효율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을 돕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농업을 개선하려면 제조업을 개선하는 식의 우회로를 통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500년간 쌓인 사료도 흄의 이런 통찰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계몽주의 경제학은 한 국가에서 각기 다른 경제 부문들 간의 최적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중시했지만 현재는 거의 완전히 잊힌 주제가 되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제1세계 사람들이 음식을 덜 먹는다고 해서 제3세계 사람들이 먹을 식량이 많아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1세계가 농업을 그만둔다고 해서 제3세계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기근은 본질적으로 식량 공급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구매력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책에서는 제3세계가 제조업과 서비스 부문을 보호하도록 허용하는 동안에 제1세계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는 (그러면서도 잉여 농산물을 세계 시장에 덤핑으로 내놓지 못하게 금지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500년 넘게 행한 성공적인 발전 정책과 부합하는 유일한 정책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고작 50년 전만 해도 아무 문제 없이 채택하던 부국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집단적으로 망각했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의 빈곤 문제에 대처하는 우리의 반응은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더라도 빈곤의 뿌리 깊은 원인을 없애기보다는 징후에 대한 처방에 그치고 있다. 7장에서는 밀레니엄 개발 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 MDGs)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 안에는 하루 생계비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인구 비율을 절반으로 줄인다거나, 교육과 환경에 관한 것은 물론 질병과 영아 사망률을 낮추는 것과 같은 가치 있는 목표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밀레니엄 목표라든가 &ldquo;빈곤을 과거사로 돌리자.&rdquo;는 캠페인 같은 것들이 진정으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근본 구조를 바꾼다기보다는 빈곤의 고통을 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임시변통의 경제학 쪽으로 심하게 치우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접근은 아무리 고귀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할지라도 민주주의와 발전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부국이 계속 빈국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불구적 복지 식민주의를 만들어 낼 뿐이다. 그렇다고 원조를 통해 고통을 완화시키는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빈국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들 힘으로 부유해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 무역의 옹호자들도 흔히 자기들 정책에 대해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만 그들의 말과 내 주장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나는 세계의 빈곤층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원조가 아니라 개발이며, 결국에는 은폐된 식민주의라는 형태를 띠는 수동적인 이전(移轉)이 아니라 세계의 빈곤층에게 도움이 되는 발전이라야 한다고 주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론에 해당하는 8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중간 소득 국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궁리하는데, 그런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삶에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삶의 즐거움에 대한 목표와 요구를 가지고 있다. 이론과 경제 정책이라는 점에서 보면 중간 소득 국가를 만들어 내는 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실행되었던 무역과 발전의 관행으로 되돌아가는 것 이상의 급진적인 정책이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해체된 국제무역기구(International Trade Organi-zation, ITO)가 1948년 하바나 헌장(Havana Charter)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자유 무역이라는 목표를 인류의 복지와 직접 관련된 다른 목표의 하위에 두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이 말을 걸고자 하는 독자는 세 부류가 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독자는 동료 경제학자들이다. 이 책의 주된 이론적 목표는 오늘날 채택하고 있는 일반적인 국제 무역 이론을 발전 수준이 매우 다양한 국가들에게 적용하기에 부적절한 이유와, 또 그 이론이 어떻게 빈국을 전면적으로 원시화해 버릴 수 있는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 책은 진화론 혹은 슘페터 경제학을 이론의 기반으로 하고, 과거와 현재의 역사학파와 제도학파들에게서 가져온 요소들을 추가했다. 요즘 요제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 1883~1950)의 경제학이 유행하고 있다. 이 책은 슘페터가 당대의 영국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1790)와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에 비해 대륙의 경제학자들을 끊임없이 편애하던 태도를 충실히 따를 것이다. 우리는 슘페터가 지극히 추상적인 리카도의 이론 체계에 대해 내린 결론을 기억해야 한다. &ldquo;그것은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완벽한 이론이지만 전혀 상식적이지 못하다.&rdquo;라는 결론 말이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경제학자 케인스와 슘페터가 그랬듯이 이 책은 애덤 스미스 이전의, 이른바 중상주의라는 경제 이론의 원리에 크게 기대고 있다. 전문 경제학자들에게 구미가 당길 만한 자료는 책 뒤의 부록에 실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독자는 이런 주제에 배경 지식이 없는 이들로, 그들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어떤 내용인지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 책을 통해 신성불가침의 요소를 벗겨 낼 경제학 용어에는 부국들이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 동안 국가와 지배 엘리트들을 내세워 역동적인 산업과 서비스업을 설립하고 보조금을 주어 보호했기 때문에 부유해졌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그들은 모두 당시에 가장 번영하는 나라를 모방했으며, 그런 나라의 생산 구조를 기술 변화가 집중되고 있는 분야에 적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지대(地代)를 창출했고, 그 지대가 확산되어 자본가들에게는 더 높은 수익이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에게는 더 높은 임금이라는 형태로, 국가에게는 더 높은 세금이라는 형태로 돌아갔던 것이다. 골자를 말하자면 식민주의란 이런 식의 효과가 식민지에서는 일어날 수 없게 막으려는 시스템이다. 빈국들은 다음의 세 가지 특징 가운데 하나 이상의 활동에 특화하게 된다. a) 수확 체증보다는 수확 체감의 법칙에 종속되는 활동 b) 교육의 잠재력이 없거나 아니면 c) 교육에 따른 결실이 그 지역의 부를 창출하지 못하고 제품 가격이 낮아지는 형태로 부국의 고객들에게 넘어 가는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발전이라 부르는 것은 본질적으로 지식과 기술에 바탕을 둔 지대로서, 발전 단계가 심하게 차이 나는 국가 간에 자유 무역이 시행되면 그 지대는 줄어들지 않고 더 심화된다. 이런 식으로 하여 몇몇 국가는 부를 특화하는 데 비해 그 외 다른 나라들은 비교 우위에 따라 빈곤을 특화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두 부류의 독자들은 부국과 빈국의 주된 차이는 바로 부국들이 모두 자유 무역이 없었던 단계를 지나왔다는 것, 부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나서야 자유 무역이 바람직한 거래 형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의 모든 선진국이 거친 필수적인 단계, 즉 빈국에 대해 부국의 경제 구조를 모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지금은 불법이 되어 버린 것이 문제이다. 시장은 지구 온난화와 환경 악화로 인해 불거진 문제를 마술처럼 지워 버리지 못하며, 이는 빈곤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빈국의 정부가 자국 국민의 이익을 지키도록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확신 있고 단호한 태도를 가진 부국의 대중뿐이다. 이것은 자유 무역의 정통 이론이 말하는 합리성이라든가, &lsquo;좀 더 공정한&rsquo; 세계 무역 시스템이라는 도덕률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지금과 같은 여건에서는 공정 무역이 극단적인 빈곤 문제를 전혀 손대지 않고 방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자국 정부가 빈국의 국내 문제에 불법적으로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 깊게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농업 관세를 줄이자고 선동하느니 이렇게 하는 것이 차라리 세계의 최빈국들을 도와줄 수 있을 성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세 번째 독자는 빈국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앞으로 나올 내용이 빈부를 창출하는 메커니즘, 빈국에서 극단적인 빈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논의하는 이론 틀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빈국에게 지금 허용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한 정책 추진의 자율성을 확보해 나가기 위한 정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지보다는 유럽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위대한 설계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무엇을 권장할 것인지를 보여 주고자 노력했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얻었으면 한다. 미국과 유럽이 번영한 원인을 알고 싶다면, 기억력 나쁜 그 후손들의 조언은 듣지 말고 번영을 일구어 낸 이들의 정책을 연구하라는 것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는 말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에릭 라이너트 Erik S. Reinert</strong><br />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스위스 장크트갈렌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서 MBA를, 코넬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 아일랜드, 핀란드 등에서 회사를 경영하였으며,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제3세계의 발전 문제를 조언하였다. 세계 47개국에서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라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살았던 다양한 경험은 현실로서의 경제학을 쌓아 가는 데 밑바탕이 되었는데, 이 책에는 그런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학계로 돌아온 라이너트는 현재 에스토니아 탈린 공과대학교에서 발전 전략 담당 교수로 있으며, 노르웨이에서 설립된 &lsquo;다른 전통 재단(the other canon foundation)&rsquo;을 이끌고 있다. 라이너트는 이 책으로 2008년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대안 이론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는 뮈르달 상을 수상하였다. 이 책은 현재 14개 나라에 출간되었거나 출간할 예정이다. 개발 경제학 논문집 &ldquo;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and Inequality: An Alternative Perspective&rdquo;(2004, 편저자), &ldquo;The Origins of Develop-ment Economics, How Schools of Economic Thought have Addressed Development&rdquo;(2005, 공편자)를 발표하였다.<br /> &nbsp;<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병화</strong><br /> 대학과 대학원에서 고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하였다. 꼭 읽고 싶은 책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마음에서 번역을 시작하였고, 그렇게 하여 나온 책이 『증언: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회상록』,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세기말 비엔나』, 『트리스탄 코드: 바그너와 철학』, 『신화와 전설』, 『파리, 모더니티』,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나머지는 소음이다』 등이 있다. 같은 생각을 가진 번역자들과 함께 번역 기획 모임 &lsquo;사이에&rsquo;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3 오전 11:14:00《207》2010년 5월 13일<div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7_%EA%B7%B8%EB%95%8C%20%ED%94%84%EB%A6%AC%EB%93%9C%EB%A6%AC%ED%9E%88%EA%B0%80%20%EC%9E%88%EC%97%88%EB%8B%A4_%ED%91%9C%EC%A7%80.jpg"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3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스 페터 리히터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두레, 1979)를 읽다. - &lsquo;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rsquo;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소년의 눈물』(돌베개, 2004)을 읽었다. 이 책은, 지은이가 초등학교에서 대학 시절까지 읽었던 책과 독서 체험을 중심으로 쓴 열두 편의 에세이를 싣고 있다. 한스 페터 리히터의 『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에 관한 소개는 이 책의 두 번째 꼭지에 나온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때 프리드리히가 있었다』는 나이 서른을 넘긴 뒤 죽마고우 중 중학교에서 사회과목을 가르치는 여교사 친구가 권유해 읽었다. &lsquo;프리드리히&rsquo;라는 이름의 유대인 친구를 둔 독일 소년이 나치스의 발흥과 더불어 어른들의 광적인 배외주의<sup>拜外主義</sup>에 차츰 마음을 빼앗긴다. 이 독일소년의 양친은 양식 있고 인정 많은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프리드리히 일가가 받는 수난에 대해서는 속수무책, 무력하기만 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방공호 안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탓에 결국 프리드리히가 죽고 만다는 얘기다. 모든 아동문학 작품들이 반드시 행복한 결말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자들에게 모종의 희망적인 위안거리를 마련해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런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엄격한 작품이다. 아동용 책이라고 해서 건성으로 읽을 수도 없었다. 책의 말미에 유대인들의 생활습관이나 유대교의 관례에 관해 적절하고도 자세한 주를 달아둘 만큼 적이 진지했다.</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위&nbsp;대목을 읽고, 저 책을 헌책방에서 사놓았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쌓아 놓은 외국소설 더미 밑에서, &lsquo;2008. 4. 23.&rsquo;이라는 구입 날짜가 적힌 이 책을 찾아냈다. 서경식이 요약한 줄거리에 약간의 세부 사항을 더 얹어보자. 1925년, 쾰른의 어느 임대 주택 2층에는 남편이 실업자인 독일인 부부가 살았고, 3층에는 남편이 우체국 공무원인 유대인 부부가 살았다. 그 해에 두 부부는 일주일 차이로 외아들을 낳았다. 이 소설의 화자는 독일 부부의 외아들인 &lsquo;나&rsquo;인데, 그와 3층에 사는 유대인 부부의 외아들인 프리드리히는 어려서부터 서로의 집안을 오가며 놀았고, 장난감을 공유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7_%EC%98%81%ED%99%94%20%EC%A4%84%EB%AC%B4%EB%8A%AC%20%ED%8C%8C%EC%9E%90%EB%A7%88%EB%A5%BC%20%EC%9E%85%EC%9D%80%20%EC%86%8C%EB%85%8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같은 건물의 위․아래에 살면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나와 슈나이더는 함께 초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때는 1919년에 결성된 나치스가 반민주&middot;반공산&middot;반유대주의를 내걸고 한창 당을 재건하던 때였다. 나치와 반유대주의자로부터 손가락질받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프리드리히의 가족은 여전히 독일 시민으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온은 1933년, 히틀러가 제국 수상에 취임하면서부터 노골적인 유대인 배척과 탄압으로 돌변한다. 한국어판의 부록에는, 서경식이 일본어판을 보고 칭찬했던 &ldquo;유대인들의 생활습관이나 유대교의 관례에 관해 적절하고도 자세한 주&rdquo;와 더불어, 나치가 공포한 유대인에 관한 법률 고시 및 명령이 굉장히 길고 자세한 연표로 정리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이 소설과 연관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1933년 4월 1일</strong> 유대인 상점 및 영업소 1일 보이코트 실행.<br /> <strong>4월 7일</strong> 아리아 인종(인도-게르만 인종)이 아닌 공무원 해임. (참전자는 제외)<br /> <strong>4월 28일</strong> 아리아 혈통이 아닌 어린이의 신규입학을 제한.<br /> <strong>9월 15일</strong> 독일인 또는 같은 혈통의 국민에게만 &lsquo;제국시민권&rsquo;을 부여. 유대인은 독일인 혈통의 국민과 결혼할 수 없으며, 유대인은 45세 미만의 독일인을 가사 노동자로 고용할 수 없음(뉘른베르크 법).<br /> <strong>8월 17일</strong> 유대인은 1939년 1월 1일부터 오로지 유대인의 성<sup>姓</sup>만을 쓸 수 있고, 독일식의 이름을 가진 자는 &lsquo;이스라엘&rsquo; 또는 &lsquo;사라&rsquo;라고 이름에 덧붙여 쓰게 함.<br /> <strong>11월 9일</strong> 9일부터 10일까지 &lsquo;포그롬&rsquo; 시작. 이 사건을 &lsquo;제국 백야 사건&rsquo;이라고 부름.<br /> <strong>11월 12일</strong> 유대인에게 상점 및 수공업 경영 금지. 유대인에게 극장, 유흥업소, 음악회, 전시회 입장을 금지.<br /> <strong>1941년 9월 1일</strong> 유대인에게 &lsquo;유대인의 별&rsquo; 착용 의무화. 경찰의 사전허가 없이 거주구역 이탈을 금지. <br /> <strong>10월 14일</strong> 독일에서 유대인 강제추방 개시.</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원래의 연표에서 추려본 위의 법률 고시 및 명령은, 이 소설의 줄거리와 같다. 지은이는 나치가 유대인에게 실행한 법률 고시 및&nbsp; 명령을 따라서 작품의 플롯을 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리드리히 가족이 직장&middot;학교&middot;주거에서 차츰 쫓겨나는 것과 달리, 나의 아버지는 히틀러의 집권과 함께 실직상태를 면하게 되고 살림도 피게 된다. 지은이는 나의 부모들이 프리드리히 가족의 곤경을 안타까워만 할 뿐 반유대주의에 아무런 항거도 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나치에 공조하거나 침묵했던 독일 시민의 유죄성을 캐묻고 있다. 1961년에 출간된 이 소설의 제사<sup>題詞</sup>는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33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때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br /> 오늘날 저 멀리엔 흑인들이,<br /> 그리고 여기에는 학생들이 있다. <br /> 내일은 백인들이, 기독교도들이, <br /> 또는 관료들이 있게 될는지 알 수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2-03 오전 10:30:00오레스케스·콘웨이의 ‘의혹을 팝니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4_%EC%9D%98%ED%98%B9%EC%9D%84%20%ED%8C%9D%EB%8B%88%EB%8B%A4/%EC%9D%98%ED%98%B9%EC%9D%84%ED%8C%9D%EB%8B%88%EB%8B%A4_%ED%91%9C%EC%A7%80.jpg" />&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 세대는 화석 연료 연소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꾸준히 증가시킴으로써<br /> &hellip;&hellip; 지구적 차원의 대기 구성을 바꾸고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right: 4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_ 린든 존슨<br /> 1965년 의회 특별 교서</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미국인들의 문제는 앞서 열린 회의의 속기록을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right: 4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_ 애들라이 스티븐슨</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spa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 줌의 과학자들이 진실을 가리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벤[&lsquo;벤저민&rsquo;의 애칭. ─ 옮긴이] 샌터<sup>Ben Santer</sup>는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다. 철두철미하게 중용인 인물이다. 키나 몸집도 중간이고, 기질도 온건하며, 정치적 신조도 중도이다. 또한 매우 점잖다. 부드러운 말씨에 자기를 거의 내세우지 않는다.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sup>Lawrence Livermore National Laboratory</sup>에 있는 그의 아무 장식 없는 작은 사무실을 보면 회계사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다른 사람들과 한 방에 몰려 있으면 샌터가 있는지도 모르기 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샌터는 회계사가 아니며,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하나이다. 1998년 맥아더 &lsquo;천재&rsquo;상[정식 명칭은 &lsquo;맥아더재단 특별 연구비<sup>MacArthur Fellowship</sup>&rsquo;이며 천재들만 받는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미국인과 미국 거주인 가운데 선발하여 50만 달러를 지원하며, 과거의 특정한 업적에 대해 수여하는 상이 아니라 독창적인 지적 능력을 가진 이에게 그 능력을 발휘하라고 별다른 조건 없이 지원하는 상이다. ─ 옮긴이]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일하는 미국 에너지부로부터도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지구 온난화를 야기한 인적 요인을 입증하는 데 누구보다도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대학원 연구 시절 이래로 샌터는 지구의 기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인간 활동이 기후를 변화시킨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lsquo;그렇다&rsquo;는 것을 보여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는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 모델분석비교프로젝트<sup>Model Diagnosis and Intercomparison Project</sup>(MDIP)에서 일하는 대기과학자이다. 이 거대한 국제 프로젝트는 세계 각지로부터 기후 모델 결과를 수집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배포하고, 실제 데이터 및 다른 모델과 비교하는 일을 한다. 지난 20년 동안 샌터와 동료들은 우리가 사는 행성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온실가스가 원인일 때 예상되는 결과대로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의 연구는 &lsquo;지문 검색&rsquo;이라고 불린다. 자연적인 기후 변화는 온실가스가 야기하는 온난화와는 다른 양상과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기의 두 부분과 관련된다. 따뜻한 담요처럼 지구 표면을 감싸고 있는 대류권과, 바로 위의 더 얇고 찬 부분인 성층권이 그것이다. 물리학에서 가르쳐주는 바에 따르면, 기후 변화 회의론자들이 계속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지구 온난화가 태양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대류권과 성층권 둘 다 온도가 올라가야 한다. 대기권 바깥에서 열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난화가 지구 표면에서 방출되어 대부분 대류권 아래쪽에 몰리는 온실가스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면, 대류권의 온도는 올라가도 성층권은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와 동료들은 대류권의 온도는 올라가고 성층권의 온도는 내려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사실 이 두 층 사이의 경계는 일정 부분 온도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현재 경계선이 상향 이동 중이다. 다시 말해, 대기권의 구조 전체가 바뀌고 있다. 태양이 범인이라고 하면, 이런 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런 사실은 우리가 현재 기후에서 목격하는 변화가 자연의 작용이 아님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류권과 성층권을 구분하는 문제는 &lsquo;매사추세츠 주 등 대對 환경보호청<sup>Massachusetts et al. v. the EPA</sup>&rsquo; 사건의 연방대법원 공판에서 거론되었다. 연방 정부가 대기청정법<sup>Clean Air Act</sup>에 따라 이산화탄소를 오염 물질로 규제하지 않은 데 대해 12개 주가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었다. 앤터닌 스캘리아<sup>Antonine Scalia</sup> 대법관은 대기청정법에는 환경보호청의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대법관 또한 과학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느 순간 대류권을 성층권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매사추세츠 주 측 변호사가 대꾸했다. &ldquo;존경하는 판사님, 성층권이 아니라 대류권입니다.&rdquo; 대법관이 대답했다. &ldquo;성층권이든 뭐든 말입니다. 내가 앞서 나는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래서 내가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루고 싶지 않은 겁니다.&hellip;&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우리 모두는 좋든 싫든 간에 지구 온난화 문제를 다뤄야 하며,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이런 결론에 저항해왔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메시지만이 아니라 이것을 전달하는 사람까지 공격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처음에 지구 기후가 따뜻해지고 있으며 인간 활동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는 증거를 설명하기 시작한 이래, 사람들은 이 데이터에 의문을 제기하고, 증거를 의심했으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설명하는 과학자들을 공격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심하게 ─ 또는 가장 부당하게 ─ 공격을 당한 이가 바로 벤 샌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sup>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sup>(IPCC)는 기후 문제에 관한 세계 최고 권위의 기관이다. 1988년에 세계기상기구<sup>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sup>와 유엔환경계획<sup>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sup>에 의해 설립된 이 위원회는 지구 온난화에 관한 초기의 경고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화석 연료가 연소될 때 나오는 온실가스가 증가하면서 기후 변화가 야기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1965년에 이에 대해 린든 존슨<sup>Lyndon Johnson</sup>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대부분은 이런 변화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과학자들은 미래가 어쩌면 코앞에 와 있다고 걱정하기 시작했고, 몇몇 독립적 연구자들은 기후 변화가 실제로 이미 진행 중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후 변화의 증거를 평가하고, 독립적 연구자들의 말이 옳다면 어떤 영향이 나타날지를 검토하기 위해 위원회가 만들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5년,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는 인간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이 이제 &lsquo;식별 가능하다.&rsquo;고 선언했다. 위원회는 몇몇 개인 연구자들이 아니라 기후학자 집단 전체였다. 그런데 그들은 기후 변화가 진행 중임을 어떻게 알았으며, 우리 인간이 변화의 원인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중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에서 발표한 2차 평가 보고서인 『기후 변화 1995: 기후 변화의 과학<sup>Climate Change 1995: The Science of Climate Change</sup>』에 실려 있다. 보고서 8장인 「기후 변화 탐지와 원인 파악<sup>Detection of Climate Change and Attribution of Causes</sup>」에서는 지구 온난화가 실제로 온실가스에 의해 야기된다는 증거를 요약해 보여준다. 이 장의 필자가 벤 샌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는 과학자로서 나무랄 데 없는 자격을 두루 갖춘 인물이었고 전에는 어떤 종류의 의심도 받아본 적이 없었지만, 바야흐로 워싱턴DC의 어느 싱크 탱크와 연결된 일군의 물리학자들이 그가 보고서를 조작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과학 연구의 확실성을 실제보다 부풀렸다는 것이었다. 이 물리학자들은 샌터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의 견해를 말살해버리는 &lsquo;과학 청소[&lsquo;인종 청소&rsquo;에 빗댄 표현이다. ─ 옮긴이]&rsquo;를 벌이고 있다고 비난하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온실 논쟁 계속되다<sup>Greenhouse Debate Continued</sup>」나 「서류 조작<sup>Doctoring the Documents</sup>」 같은 제목을 단 보고서가 『에너지 데일리<sup>Energy Daily</sup>』와 『인베스터스 비즈니스 데일리<sup>Investor&rsquo;s Business Daily</sup>』 등의 저널에 발표되었다. 그들은 국회 의원들과 에너지부 관리들, 과학 저널 편집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비난을 만천하에 퍼뜨렸다. 또 에너지부의 지인들에게 샌터를 해고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기명 칼럼이 가장 주목을 끌고 널리 선전된 사례이다. 칼럼의 필자는 샌터가 &ldquo;정책 결정권자들과 대중을 기만하기 위해&rdquo; 의심스러운 변경을 가했다고 비난했다. 샌터가 보고서에 변경을 가하긴 했지만 그건 누구를 기만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동료 과학자들의 코멘트를 참조해서 수정을 했을 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과학 논문과 보고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면밀한 검토를 받아야 한다. 이른바 &lsquo;동료 평가&rsquo;란 것이다. 과학 저자들은 검토자의 코멘트와 비평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발견될 수 있는 오류를 수정할 것을 요구 받는다. 이런 것은 과학 연구의 기본적인 윤리이다. 동료 평가를 거치기 전까지는 어떤 주장도 타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잠재적인 타당성조차 가질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료 평가는 또한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분명하게 다듬는 데 도움을 주며,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에는 이례적으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동료 평가 과정이 존재한다. 과학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참가국 정부 대표들도 참여한다. 사실적인 오류를 파악해서 수정하는 것과 더불어 모든 판단과 해석을 적절하게 증명하고 뒷받침하며 모든 이해 당사자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이다. 저자들은 검토 코멘트에 따라 수정을 가하거나, 아니면 이런 코멘트가 타당하지 않거나 부적절하거나 명백한 오류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샌터는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쳤다. 동료 평가에 따라 수정을 가한 것이다.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마땅히 할 일을 했다. 과학이 요구하는 바에 따랐을 뿐이다. 샌터는 훌륭한 과학자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은 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는 『월스트리트 저널』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다. 미국지구변화연구프로그램<sup>U.S. Global Change Research Program</sup> 소장을 비롯하여 모두 저명한 과학자인 29명의 공저자들이 서명한 편지였다. 미국기상학회<sup>American Meteorological Society</sup>는 샌터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그에 대한 공격이 아무 근거도 없는 것임을 확인해주었다.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의 설립자이자 의장인 베르트 볼린<sup>Bert Bolin</sup>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직접 편지를 보내 샌터의 설명을 확인하면서 그에 대한 비난에는 조금의 증거도 없으며, 비난하는 사람들은 자신이나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 임원, 사실 확인에 관여한 과학자들과 접촉한 적도 없다고 꼬집었다. 볼린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이 &ldquo;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의 절차 규정을 찾아보려고 조금의 노력만 기울였다면&rdquo; 규칙을 위반하거나 절차를 어긴 일이 전혀 없고 아무 잘못도 없었음을 금방 알아냈을 것이다. 나중에 전문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 회원국 중 어느 나라도 이의 제기에 동의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월스트리트 저널』은 샌터와 볼린이 보낸 편지의 일부만을 게재했고, 2주일 뒤에는 비난하는 이들에게 또다시 헐뜯을 기회를 주었다.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의 보고서가 &ldquo;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경되었다.&rdquo;고 주장하는 편지를 게재해준 것이다. 악의적인 비난은 굳어졌고, 산업계 단체들과 친기업적인 신문과 잡지, 싱크 탱크 들은 이런 비난을 널리 퍼뜨렸다. 지금도 인터넷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구글에서 &lsquo;Santer IPCC&rsquo;라고 검색하면,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 보고서 전문은 고사하고 문제가 된 해당 장이 아니라 1995년의 비난을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다양한 사이트만 주르륵 나온다. 한 사이트에서는 심지어 샌터가 &ldquo;정치적 정책에 맞도록 데이터를 수정한&rdquo; 사실을 인정했다고 (그릇된) 주장을 펼친다. 마치 미국 정부에 기후 정책이 있어서 그에 맞게끔 데이터를 수정한 것처럼 말이다. (미국 정부는 1995년에 기후 정책이 없었고, 지금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신의 과학적 평판과 정직성을 옹호하는 한편,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한 샌터에게 이 과정은 쓰라린 경험이었다. (결국 부인과는 헤어졌다.) 평상시에는 온화한 이 남자는 요즘 당시 사건만 떠올리면 분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어떤 과학자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서 과학자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를 비난한 사람들은 왜 사실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그들은 자신들의 비난이 근거가 없음이 밝혀진 뒤에도 비난을 멈추지 않았을까? 물론 그 답은 그들이 사실을 찾아내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에 맞서 싸우는 데 관심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로부터 몇 년 뒤, 샌터는 조간신문을 읽다가 한 기사에 눈길이 쏠렸다. 담배와 암을 연결시키는 과학적 증거를 불신하게 만들기 위해 담배 산업에서 조직한 프로그램에 몇몇 과학자들이 참여한 적이 있다는 기사였다.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ldquo;논쟁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rdquo;이 이 프로그램의 골자였다. 담배와 암의 인과 관계에 관한 의혹이 존재하는 한, 담배 산업은 소송과 규제를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샌터는 기사 속 이야기가 섬뜩하리만치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샌터의 생각이 옳았다. 그런데 그가 눈치채지 못한 점이 있었다. 전술만 같은 게 아니라 사람들도 똑같았던 것이다. 자신을 공격한 지도자들은 은퇴한 물리학자 두 명이었다. 둘 다 이름이 프레드였다. 프레더릭(프레드) 사이츠<sup>Frederick Seitz</sup>와 S.(시그프리드) 프레드 싱어<sup>S. (Siegfrid) Fred Singer</sup>가 그 주인공이다. 사이츠는 2차 세계 대전 중에 원자 폭탄 제조에 힘을 보태면서 명성을 얻게 된 고체물리학자였다. 나중에는 미국국립과학학술원<sup>U.S. National Academy of Sciences</sup> 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물리학자 싱어는 실상 로켓과학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지구 관측 위성 개발에서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고, 미국 기상위성청[National Weather Satellite Service. 현재는 미국 해양대기청 산하 미국 환경위성자료정보처<sup>National Environmental Satellite Data and Information Service.</sup> ─ 옮긴이] 초대 청장과 레이건 정부의 교통부 수석 과학자문위원으로 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사람 모두 극단적인 매파로서 과거에는 소련의 위협이 매우 심각하며 최첨단 무기로 미국을 지켜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믿었다. 또 둘 다 로널드 레이건의 전략 방위 구상<sup>Strategic Defense Initiative</sup>(일명 &lsquo;스타 워스<sup>Star Wars</sup>&rsquo;)을 옹호하기 위해 설립된 워싱턴DC의 보수적인 싱크 탱크 조지 C. 마셜 연구소<sup>George C. Marshall Institute</sup>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예전에 담배 산업을 위해 일한 적이 있었다. 흡연과 사망의 연관 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증거에 의혹을 던지는 데 조력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9년부터 1985년까지 프레드 사이츠는 R. J. 레이놀즈 토바코<sup>R. J. Reynolds Tobacco Company</sup>를 위해 연구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했다. 이 프로그램은 법정에서 &lsquo;제품&rsquo;을 방어하는 데 활용할 증거를 만들어내고 전문가를 양성하는 생물의학 연구를 위해 세계 각지의 과학자들에게 총 4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1990년대 중반에 프레드 싱어는 간접흡연의 건강상 위험을 둘러싸고 미국 환경보호청을 공격하는 주요한 보고서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그로부터 몇 년 전에, 미국 공중위생국장은 간접흡연이 흡연자의 건강뿐만 아니라 흡연에 노출되는 다른 사람에게도 유해하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싱어는 이런 연구 결과를 비판하면서, 이 연구는 조작된 것이며 우리 삶의 모든 면을 정부가 샅샅이 통제하려는 정치적 의제에 따라 환경보호청의 과학 심사(전국 각지의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수행한 것이었다.)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환경보호청을 비판하는 싱어의 보고서는 담배산업협회<sup>Tobacco Institute</sup>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 연구소<sup>Alexis de Tocque-ville Institution</sup>가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담배 소송 중에 공개된 수백만 쪽에 달하는 문서를 살펴보면 이런 연관성이 입증된다. 문서를 살펴보면, 과학자들이 흡연과 건강 위험의 연관성에 관해 의혹의 씨앗을 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법률가들과 소수의 학자들을 빼고는 거의 연구하지 않은 이 문서들을 보면 또한 지구 온난화뿐만 아니라 석면, 간접흡연, 산성비, 오존 홀 등 환경과 보건에 관련된 여러 문제들에 동일한 전략이 적용되었음이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을 &lsquo;담배 전략&rsquo;이라고 해두자. 이 전략의 공격 목표는 과학이었고, 따라서 산업계 변호사들과 홍보 전문가들의 지도에 따라 기꺼이 소총을 겨냥하고 방아쇠를 당길 태세가 되어 있는 과학자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우리가 이 책을 쓰면서 찾아낸 수많은 문서 가운데는 『나쁜 과학: 자료책<sup>Bad Science: A Resource Book</sup>』이라는 책도 있다. 사실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인 이 책에는 과학을 훼손하는 데 성공한 전략의 풍부한 사례들이 담겨 있으며, 또한 싱크 탱크나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부정적인 논평을 제때에 해줄 수 있는 과학적 식견을 갖춘 자격 있는 전문가들의 목록도 들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각각의 사례마다 프레드 싱어와 프레드 사이츠를 비롯한 한 줌의 과학자들은 우파 싱크 탱크 및 민간 기업과 세력을 규합하여 현대의 수많은 쟁점에 관한 과학적 증거에 이의를 제기했다. 초창기에 이런 노력에 필요한 돈은 대부분 담배 산업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우파 재단과 싱크 탱크, 화석 연료 산업이 돈줄 노릇을 했다. 그들은 흡연과 암 발병 사이의 연관성이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학자들이 스타 워스의 위험성과 한계에 관해 잘못 알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산성비는 화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고, 오존 홀도 마찬가지라고 우겼다. 게다가 환경보호청이 간접흡연을 둘러싼 과학을 조작했다고 비난했다. 가장 최근에는 ─ 근 20년에 걸쳐 점점 늘어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 지구 온난화라는 현실을 부정했다. 처음에는 지구 온난화 같은 현상은 없다고 주장했고, 그 다음에는 자연적인 변화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결국에는 설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인간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적응하면 되니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모든 사례마다 그들은 과학적 합의의 존재를 꾸준히 부정했다. 자기들이 이 합의에 동의하지 않는 극소수여도 상관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 한 줌의 사람들이 별 영향을 못 미쳤겠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냉전 시기 무기 개발 프로그램에서 행한 연구 덕분에 이 사람들은 유명세를 떨치고 워싱턴DC에서 대단히 존중 받았으며, 백악관으로 통하는 권력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1989년에 사이츠와, 역시 이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자 로버트 재스트로<sup>Robert Jastrow</sup>와 윌리엄 니런버그<sup>William Nierenberg</sup>는 지구 온난화의 증거에 의문을 던지는 보고서를 집필했다. 세 사람은 곧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 부시[아버지 부시] 행정부를 상대로 브리핑을 했다. 각료담당실의 한 관리는 보고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ldquo;모두들 보고서를 읽었고,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부시 행정부만이 아니었다. 대중 매체도 마찬가지였다.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뉴스위크』 등을 비롯한 수많은 미디어는 시종일관 이런 주장이 마치 과학 논쟁의 &lsquo;한쪽 편&rsquo;인 것처럼 보도해주었다. 그러면 블로거에서부터 미국 상원 의원까지, 심지어 미국 대통령과 부통령까지 마치 첩첩산중에서 메아리가 울려 퍼지듯이 이런 주장을 거듭해서 되풀이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언론인들과 대중은 이것이 현직 과학 연구자들이 과학의 장에서 벌이는 과학 논쟁이 아니라 담배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양상의 일부인 허위 정보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lsquo;담배 전략&rsquo;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학과 과학자들을 공격하고,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하고 커다란 문제에 관해 우리를 혼란시키기 위해 &lsquo;담배 전략&rsquo;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감스럽게도 벤 샌터의 이야기는 유별난 사례가 아니다. 성층권 오존 감소에 관한 과학적 증거가 쌓일 무렵, 프레드 싱어는 셔우드 롤런드<sup>Sherwood Rowland</sup>에 대한 공격에 착수했다. 롤런드는 미국과학진흥협회<sup>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sup> 회장이자 노벨상 수상자로 특정 화학 물질, 즉 염화불화탄소(CFCs. 일명 프레온 가스)가 성층권 오존을 파괴할 수 있음을 처음 깨달은 과학자였다. 지구 온난화를 최초로 연구한 과학자 중 한 명인 로저 리벨<sup>Roger Revelle</sup>이 &ldquo;지구 온난화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rdquo;는 싱어의 주장에 대해 저스틴 랭커스터<sup>Justin Lancaster</sup>라는 이름의 대학원생이 실상을 정확히 밝히려고 했을 때, 그는 명예 훼손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 비용이 없었던 랭커스터는 법원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의 개인적 삶과 직업적 삶 모두 갈가리 찢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레드 사이츠와 프레드 싱어는 이런 활동에 관여한 가장 유명하고 끈질긴 과학자이다. 윌리엄 니런버그와 로버트 재스트로 역시 물리학자였다. 니런버그는 유명한 스크립스해양연구소<sup>Scripps Institution of Oceanography</sup> 전前 소장이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인수위원으로서 행정부의 중요 직책에 과학자들을 발탁하는 데 조력했다. 사이츠와 마찬가지로 니런버그도 원자 폭탄 개발에 힘을 보탰고, 나중에는 몇몇 냉전 무기 개발 프로그램과 연구에 관여했다. 재스트로는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성공적인 대중 저술가, 나사(NASA. 미국 항공우주국)의 고다드우주연구소<sup>Goddard Institute for Space Studies</sup> 소장으로서 오랫동안 미국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에 관여했다. 이 사람들은 환경이나 보건 문제에 특별한 전문 지식이 없었지만 권력과 영향력은 확실히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이츠와 싱어, 니런버그와 재스트로는 모두 과학 행정 고위직에 있으면서 제독과 장성,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 심지어 대통령과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또한 언론과 광범위하게 접촉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언론에서 자기들 견해를 다뤄주는지, 또 안 다뤄줄 때에는 언론을 어떻게 압박하는지를 잘 알았다. 이 사람들은 과학자 자격을 활용해서 권위자 행세를 했고, 권위를 활용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과학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년 넘는 시간 동안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끼어드는 갖가지 쟁점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독창적인 과학적 연구를 하지 않았다. 한때는 이름난 연구자였을지 몰라도,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에 관심을 기울일 무렵이면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와 명성을 공격하는 데만 치중했다. 사이츠나 니런버그, 재스트로나 싱어가 내놓은 주장 가운데 어느 것 하나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모든 쟁점에서 틀렸다. 흡연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사망을 초래하고, 오염은 산성비를 유발하며, 화산은 오존 홀의 원인이 아니다. 해수면이 높아지고 빙하가 녹는 것은 화석 연료 연소에서 생겨나는 대기 중 온실가스의 효과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오랫동안 언론에서는 이 사람들의 말을 전문가의 논평으로 인용했으며, 정치인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런 주장에 기대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한때 이 사람들을 &lsquo;내 과학자들&rsquo;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인터넷과 라디오 토크쇼, 심지어 미국 하원 의원들조차도 여전히 그들의 견해와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연 세계의 진리를 밝히는 데 전념하는 과학자들이 왜 자기 동료들의 연구에 대해 거짓 설명을 할까? 왜 아무 근거도 없이 비난을 퍼뜨릴까? 자신들의 주장이 틀렸음이 밝혀진 뒤에도 왜 주장을 정정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왜 언론은 그들의 주장이 오류임이 차례차례로 밝혀진 뒤에도 계속해서 그들의 말을 인용하는 걸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펼쳐 보이려고 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수많은 쟁점들에 관해 혼란을 퍼뜨리고 과학적 증거에 맞서 싸운 일군의 과학자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지금도 계속되는 어떤 양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에 맞서 싸우고 의혹을 팔아먹는 행태에 관한 이야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의심이 우리의 상품이다</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979년 5월 9일, 한 무리의 담배 산업 중역들이 중요한 새 프로그램에 관해 듣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처음으로 담배 광고(&ldquo;카멜을 살 수 있다면 1마일이라도 걷겠어&rdquo;)를 하는 등 선구적인 마케팅으로 유명한 R. J. 레이놀즈의 전 회장 콜린 H. 스토크스<sup>Colin H. Stokes</sup>가 초청한 자리였다. 몇 년 뒤 레이놀즈는 조 카멜<sup>Joe Camel</sup>이라는 광고 캐릭터로 아이들을 유혹한 혐의(연방통상위원회<sup>Federal Trade Commission</sup>는 이 캐릭터를 미키 마우스와 비교했다.)로 연방법 위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게 되지만, 당시 모인 중역들은 제품이나 마케팅에 관해 들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의 주제는 과학이었다. 그날 저녁의 스타는 스토크스가 아니라 프레더릭 사이츠라는 이름의 나이가 지긋한 대머리 안경잡이 물리학자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이츠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유명 과학자였다. 원자 폭탄 제작에 관여한 신동이었던 사이츠는 미국 과학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두루 역임했다. 1950년대에는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과학 고문으로 일했고, 1960년대에는 국립과학학술원 원장을 지냈으며, 1970년대에는 미국 최고의 생물의학 연구 기관인 록펠러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79년 당시 막 퇴직한 상태였던 사이츠는 마지막 일, 즉 R. J. 레이놀즈를 대신해서 운영할 새 프로그램에 관해 말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 미국 주요 대학, 병원, 연구 기관에 생물의학 연구 지원금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 프로그램의 중심은 미국인의 주요 사망 원인인 암, 심장병, 폐기종, 당뇨병 등 퇴행성 질환이었고, 프로젝트의 규모는 대단했다. 향후 6년에 걸쳐 4500만 달러가 지출될 예정이었다. 하버드를 비롯해 코네티컷,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펜실베이니아, 워싱턴 등의 대학과 슬론케터링연구소<sup>Sloan-Kettering Institute</sup>, 그리고 당연하게도 록펠러대학교 등이 연구 기금 수혜자였다. 기본적인 지원금은 6년 동안 매년 50만 달러였다. 당시만 해도 과학 연구 지원금으로는 대단한 액수였다. 이 프로그램은 만성 퇴행성 질병, 기초 면역학, &lsquo;생활 습관&rsquo;이 질병에 미치는 효과 등의 분야에서 각기 다른 26개의 연구 프로그램과 &lsquo;RJR 연구 장학금<sup>RJR Research Scholarship</sup>&rsquo; 수혜자인 젊은 연구자 6명을 지원할 예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이츠가 맡은 역할은 연구비를 지원할 프로젝트를 선별하고, 연구를 지도&middot;감독하고, 진행 과정을 R. J. 레이놀즈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 선별 기준을 정하기 위해 사이츠는 저명한 동료 둘의 도움을 구했다. 제임스 A. 섀넌<sup>James A. Shannon</sup>과 매클린 매카티<sup>Maclyn McCarty</sup>가 그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섀넌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항말라리아제인 아타브린<sup>Atabrine</sup> 사용을 제창한 의사였다. 아타브린은 효과가 있었지만 불쾌감을 일으키는 부작용도 있었다. 섀넌은 구역질 같은 부작용 없이 약을 복용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남태평양 전역의 수백만 병사들에게 약을 처방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수천 명을 질병과 죽음에서 구했다. 나중에 섀넌은 195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국립보건원<sup>National Institutes of Health(NIH)</sup> 원장을 지내면서 대학과 병원 연구자들에게 연구 지원금을 제공할 수 있도록 의회를 설득함으로써 조직을 변화시켰다. 그 전에는 국립보건원 기금을 내부에서만 사용했고, 따라서 미국의 병원과 대학은 생물의학 연구에 지원 받을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다. 섀넌의 외부 지원 프로그램은 큰 인기와 성공을 거두었고, 성장을 거듭했다. 마침내 이 프로그램은 오늘날 국립보건원의 중핵을 이루는 거대한 연구 지원 시스템을 낳았고, 그 덕분에 미국은 생물의학 연구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섀넌은 노벨상이나 국가 과학 훈장, 또는 흔히 생물학 분야에서 제2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래스커상<sup>Lasker Award</sup> 등을 받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매클린 매카티 역시 엄청나게 성공적인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해독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sup>James Watson</sup>과 프랜시스 크릭<sup>Francis Crick</sup>에 대해 들어본 사람은 많겠지만, 왓슨과 크릭이 DNA에 세포의 유전 정보가 담겨 있음을 입증한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인 첫걸음을 내딛은 것은 그로부터 10년 전인 1944년의 일로 록펠러대학교의 세균학자 오스월드 에이버리<sup>Oswald Avery</sup>와 매클린 매카티, 콜린 매클라우드<sup>Colin MacLeod</sup>가 그 주인공이었다. 세 사람은 폐렴 박테리아 실험을 통해 악성 DNA를 주사하면 양성 박테리아가 악성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DNA를 변경함으로써 유기체의 형질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지만 1940년대만 해도 혁명적인 생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에이버리가 자신의 발견을 널리 알리지 않는 과묵한 사람이었던 탓인지, 아니면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곧바로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없는 발견은 관심을 끌지 못했던 탓인지 간에, 에이버리와 매카티, 매클라우드의 실험은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세 사람 모두 과학계에서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두었고, 매카티는 1994년에 래스커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9년에는 확실히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섀넌과 매카티가 사이츠를 도와 연구 기금 신청서를 선별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을 때, 주류와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프로젝트, 유별나거나 색다른 개인, 연방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lsquo;성장기&rsquo;의 젊은 연구자 등에 주목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지원을 받은 한 연구는 스트레스와 치료약, (사카린 같은) 식품 첨가제가 면역 체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었다. 또 다른 연구는 &ldquo;우울증 환자 가족의 감정 구조와 면역 체계 &hellip;&hellip; 상태&rdquo; 사이의 연관 관계를 탐구했다. 세 번째 연구는 &ldquo;환자의 심리적 태도가 질병의 추이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rdquo;를 주제로 삼았다. 각종 연구 프로젝트는 동맥경화증의 유전적&middot;식습관적 요인, 바이러스의 암 유발 가능성, 약물 대사와 약물 상호 작용의 세부적인 내용 등을 탐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과학자 두 명이 사이츠의 개인적인 관심을 사로잡았다. 폐의 자연적 방어 기전을 연구하던 UCLA 교수 마틴 J. 클라인<sup>Martin J. Cline</sup>은 이식 유전자 기관을 최초로 만들어내기 일보직전이었다. 또 한 명인 스탠리 B. 프루지너<sup>Stanley B. Prusiner</sup>는 광우병을 유발하는 접힌 구조의 단백질인 프리온을 발견했다. 훗날 프루지너는 이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선정된 연구는 모두 정당한 과학적 질문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신체 질병에서 감정과 스트레스가 하는 역할 같이 주류 의학에서 무시해온 주제였다. 연구자들은 모두 해당 기관에서 신임을 받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하는 연구 중 일부는 선구적인 내용이었다. 그런데 과연 과학을 향상시키는 것만이 목표였을까? 꼭 그렇지는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R. J. 레이놀즈의 여러 문서에 사이츠가 진행한 프로그램의 목표에 관한 논의가 담겨 있다. 일부 문서에는 연구 지원이 &ldquo;시민 사회의 성원으로서 기업의 의무&rdquo;라고 서술되어 있다. 다른 문서에서는 &ldquo;담배 제품의 탓으로 여겨지는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공헌하겠다.&rdquo;는 회사의 포부를 거론한다. 또 다른 문서에서는 과학에 기대어 담배에 대한 비난을 반박함으로써 산업계가 &ldquo;정부에서 징벌적인 세금을 부과하면서 내세우는 구실을 물리칠&rdquo; 수 있음을 지적한다. (1978년에 흡연자들은 미국과 해외에서 15억 달러 이상을 담배 소비세로 지불했다. 이렇게 세금이 오른 데에는 담배의 유해성에 관한 과학적 증거가 속속 나온 사실이 일부 작용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앞서 말한 5월 9일에 스토크스가 자문단에게 강조하고 수많은 업계 문서에서 되풀이된 주된 목표는 &ldquo;담배 산업에 대한 공격에 맞서 방어하는 데 유용하며, 과학적 근거가 확실한 방대한 데이터&rdquo;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 과학자들은 업계의 재정 지원을 거절했지만, 다른 이들은 받아들였다. 아마 과학을 연구할 수 있는 한 누가 돈을 대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어떤 주주들이 왜 (응용과학이 아닌) 기초 과학을 지원하는 데 기업 자금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ldquo;담배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공격에 대항하여 산업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지원이기 때문에 충분히 정당하다.&rdquo;는 답변을 들었을 것이다. 과학에 맞서 과학으로 싸우는 게 목표였다. 아니면 적어도 기존 과학의 결함과 불확실성을 내세우거나 주요한 사건으로부터 딴 데로 관심을 돌리는 데 활용할 수 있는 과학 연구를 내세워서 과학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오른손에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몰래 왼손을 쓰는 마술사처럼, 담배 산업은 관심 전환용 연구를 지원할 속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R. J. 레이놀즈의 내부 법률 고문의 검토를 거치고 국제자문단<sup>International Advisory Board</sup>을 상대로 한 발표에서 스토크스는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담배가 폐암, 동맥경화, 일산화탄소 중독 등과 연관성이 있다는 비난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ldquo;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이런 주장들에 대해 레이놀즈를 비롯한 담배 제조업체들은 객관적인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rdquo; 담배 유해론이 전혀 증명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연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스토크스는 계속해서 주장을 펼친다. &ldquo;사실 폐암, 폐기종, 심혈관 질환 등 담배 탓으로 돌려지는 만성 퇴행성 질환의 원인이나 진행 과정에 관해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거의 없다.&rdquo; 흡연에 대한 비판의 대다수는 &ldquo;불완전한&rdquo; 연구에 근거한 것이거나 &ldquo;의심스러운 방법이나 가설과 그릇된 해석에 의존한 것이었다.&rdquo; 새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데이터와 가설,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고, &ldquo;담배를 변호하는 든든한 과학적인 데이터와 견해&rdquo;를 발전시키게 될 터였다. 무엇보다도 증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흡연으로 인해 개인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수많은 법률 소송이 제기되었지만, 담배 업계는 과학자들을 전문가 증인으로 동원하여 흡연과 암의 연관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증언하는 식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있었다. &ldquo;담배 탓으로 돌려지는 만성 퇴행성 질환&rdquo;의 다른 &ldquo;원인이나 진행 과정&rdquo;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를 논의함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과학자 자신의 연구일 경우에는 증언이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합리적인 의심을 제시할 수 있으며, 이런 일을 하는 데 실제 과학자보다 더 나은 전문가가 누가 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과거에 이런 전략이 통했기 때문에, 장래에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스토크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ldquo;우호적인 과학적 증언 덕분에, 어떤 원고도 흡연이 폐암이나 심혈관 질환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소송에서 담배 회사로부터 한 푼도 받지 못했다. 1954년 이래 117건의 소송이 제기되었는데도 말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중에는 사정이 바뀌지만 1979년에는 맞는 말이었다. 1950년대 이래 과학자들은 담배와 암의 연관 관계를 확신하고 있었지만(많은 과학자들은 그전부터 확신했다.) 단 한 명도 담배 업계로부터 한 푼도 받아 내지 못했다. 레이놀즈에서 지원하는 모든 프로젝트는 흡연 이외의 질병 유발 요인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을 잠재력이 있었다. 가령 프루지너의 연구에서는 외부 요인과 무관한 질병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사이츠의 설명에 따르면, 프리온은 &ldquo;동종의 단백질을 과잉 생산해서 &hellip;&hellip; 세포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넓힐&rdquo; 수 있었다. &ldquo;특정 유전자들이 &hellip;&hellip; 세포 분열을 과도하게 하여 암으로 이어지도록 자극 받을 수 있는 방식&rdquo;으로 말이다. 암은 단순히 세포가 과격해진 현상일 수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인의 연구는 세포의 자연적 방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암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암이 단지 이런 방어 기능의 (자연적인) 부전 현상이라는 의미였다. 많은 연구들이 스트레스나 유전 형질 등 질병의 다른 원인을 탐구했다. 물론 전적으로 정당한 주제였지만, 담배 산업의 핵심 문제 ─ 담배가 사람을 죽인다는 압도적인 증거 ─ 로부터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는 데 기여할 수도 있었다. 담배가 암을 유발한다는 것은 사실이었고, 담배 업계는 이 점을 알았다. 따라서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리게 만드는 방도를 찾았다. 실제로 담배 업계에서 처음으로 과학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과학을 활용하기 시작한 1950년대 초부터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50년대 초반은 사실에 대항하는 현대의 싸움이 시작된 때이다. 잠시 1953년으로 돌아가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론 전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2"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4_%EC%9D%98%ED%98%B9%EC%9D%84%20%ED%8C%9D%EB%8B%88%EB%8B%A4/%EC%A0%80%EC%9E%90_%EB%82%98%EC%98%A4%EB%AF%B8_%EC%98%A4%EB%A0%88%EC%8A%A4%EC%BC%80%EC%8A%A4.jpg" />나오미 오레스케스 Naomi Oreskes</strong> <br />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과학사 교수. 1990년에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지질학 및 과학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94년에 미국국립과학재단<sup>National Science Foundation</sup>에서 &lsquo;젊은과학자상<sup>Young Investigator Award</sup>&rsquo;을 수상했다. 미국 환경보호청과 국립과학학술원의 자문을 역임했으며, 지구 과학과 지구 온난화 등의 환경 이슈를 연구하고 있다.&nbsp;&nbsp;2004년 『사이언스』에 발표되어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lt;상아탑을 넘어서<sup>Beyond the Ivory Tower: The Scientific Consensus on Climate Change</sup>&gt;는 지구 온난화 부정론에 맞선 싸움에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었으며, 앨 고어의 『불편한 진실』 등에 인용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Plate Tectonics(2003년), The Rejection of Continental Drift(1999년)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에릭 M. 콘웨이 Erik M. Conway </strong><br />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제트추진연구소의 역사학자. 주요 저서로는 Atmospheric Science at NASA: A History(2008년), Realizing the Dream of Flight(2006년)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유강은</strong><br />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고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에서 활동하였다. 현재는 국제 문제를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다. 역서로는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2011년), 『두뇌를 팝니다』(2010년),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2010년), 『팔레스타인 현대사』(2009년), 『보이지 않는 사람들』(2009년), 『The Left 1848~2000』(2008년), 『미국민중사 1, 2』(2006년)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2 오전 10:57:00데블린의 ‘해티는 못 말려!’<p><img alt="" width="600" height="76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ED%95%B4%ED%8B%B0%EB%8A%94%EB%AA%BB%EB%A7%90%EB%A0%A4_%ED%91%9C%EC%A7%8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1_600.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2.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3.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2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5.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6.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2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7.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107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8.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9.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10(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3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3_%ED%95%B4%ED%8B%B0%EB%8A%94%20%EB%AA%BB%EB%A7%90%EB%A0%A4/11.jpg" /><br /> <br /> <br /> (본문 일부)<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작가 소개<br /> 글 &middot; 제인 데블린(Jane Devlin)</strong><br /> 제인 데블린은 해로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리즈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제인 데블린은 런던에서 여러 해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어요. 해티는 제인 데블린의 첫 그림책이에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그림 &middot; 조 버거(Joe Berger)</strong><br /> 조 버거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신문 만화가와 삽화가로 일하고 있지만 허블 버블, 이기와 나, 부릉과 같은 그림책도 쓰고 있어요. 조 버거의 첫 그림책은 브리짓 피짓이에요. 지금은 아내와 세 딸과 함께 브리스톨에 살고 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호정</strong><br /> UCLA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 어린이 도서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유아영어교육 지침서인 『원투쓰리, 수학이 재밌어지는 영어』를 출간하였으며, 『대신 사과하는 로봇』, 『내 손을 잡아』, 『동물들의 장보기』 등 다수의 번역서를 출간하였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2-01 오전 10:34:00박완서의 ‘부처님 근처’<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7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EB%B6%80%EC%B2%98%EB%8B%98%EA%B7%BC%EC%B2%98-%ED%91%9C%EC%A7%80_600.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삼킨 죽음은 여전히 내 내부의 한가운데 가로걸려 체증처럼, 신경통처럼 내 일상을 훼방 놓았다. 나는 여전히 사는 게 재미없고 시시하고 따분하고 이가 들끓는 누더기처럼 지긋지긋해 벗어던질 수 있는 거라면 벗어던져 흠뻑 방망이질을 해주고 싶었다.</span></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239" height="18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noname01.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x-large"><span><font face="맑은 고딕"><strong>부처님</strong></font></span></span><span style="font-size: large"><font face="맑은 고딕"><span><strong> 근처</strong></span></font></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hellip;중략&hellip;<span id="1327983333902S" style="display: none">&nbsp;</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다정하고 오붓한 한 식구들이었다. 남자 둘, 여자 둘의.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두 남자 식구가 차례차례로 죽어갔다.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그리고 그 끔찍한 사상(死相)으로 이십여 년 동안이나 여자들은 얽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6‧25가 터지고 한동안 오빠는 꽤나 신이 나 보였다. 오빠는 그전부터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심심찮게 말썽을 일으켜오던 터라 신 날 만도 했을 테고, 그런 오빠 때문에 적잖이 속을 썩이던 아버지도 때가 때이니만큼 내버려두려는 눈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오빠는 바깥출입을 뚝 끊고 안방에 누워 담배만 온종일 뻐끔뻐끔 피고, 수염이 무성하게 자라도 깎을 체도 안 했다. 누가 찾아와도 없다고 따돌리지는 않고 만나긴 만나는데 뭔가 상대방을 몹시 불쾌하게 해서 보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날로 심해지는 폭격에서보다 오빠의 이런 태도에서 더 위급한 폭발물 같은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늘 찾아오던 오빠의 &lsquo;동무&rsquo;가 총잡이를 앞세우고 찾아왔다. 마당에 마주 선 채 웅얼웅얼 대화가 오고갔다. 조용한, 거의 졸립도록 권태로운 말의 주고받음이었다. 별안간 오빠가 &ldquo;못 해&rdquo; 하고 악을 썼다. 상대방이 &ldquo;못해? 죽인대도.&rdquo; &ldquo;죽어도 싫다니까.&rdquo; 목숨은 어처구니없이 조급하게 흥정된 모양이다. 총잡이가 정말 총을 쐈다. 한 방도 아닌 여러 방을, 가슴과 목과 얼굴과 이마에.</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은 갔다. 우리 식구는, 나는 얼마나 소름 끼치게 참혹하고 추악한 죽음을 목도하고 처리해야 했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이 망가진 상체의 살점과 뇌수와 응고된 선혈을 주워 모으며 우리 식구는 모질게도 악 한마디 안 썼다. 그런 죽음, 반동으로서의 죽음은 당시의 상황으론 극히 떳떳치 못한 욕된 죽음이었으니 곳을 하고 아우성을 칠 계제가 못 됐다. 믿을 만한 인부를 사 쉬쉬 감쪽같이 뒤처리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마치 새끼를 낳고는 탯덩이를 집어삼키고, 구정물까지 싹싹 핥아먹는 짐승처럼 앙큼하고 태연하게 한 죽음을 꼴깍 삼킨 것이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47" height="63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EB%B3%B8%EB%AC%B8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후 아버지가 조금씩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빨갱이라면 이를 갈아도 시원찮을 그분이 그때 한자리하고 있는 친구를 찾아가 구질구질 아첨을 떠는 눈치더니, 일을 봐준다고 쫓아다니고 어이없게도 숨어 들어앉은 친구의 자제를 밀고까지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승승장구할 때도 아닌 패세가 분명할 시기에 이 무슨 망령인지.</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이 바뀌고 아버지는 원한을 산 사람들의 고발로 잡혀갔다. 1&middot;4후퇴를 며칠 안 남기고 용케도 풀려나온 아버지는 전신이 매 맞은 자국과 동상으로 푸릇푸릇 짓무르고 해지고 퉁퉁 부운 채 썩은 냄새를 심하게 풍기는 송장이었다. 그래도 그 끔찍한 몰골로 목숨은 붙어 있어 우리를 피난도 못 가게 서울에 묶어놓았다가, 1&middot;4후퇴 후의 텅 빈 서울에서 돌아가셨다. 그것은 오빠의 죽음보다 더 끔찍한, 차마 눈 뜨곤 볼 수 없는 죽음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도 감쪽같이 처리했다. 아아, 우리는 이미 그런 일에 능숙해져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의 서울에선 알리려야 알릴 만한 곳도 없었지만, 서울이 수복되고 나자 빨갱이로서 매 맞아 죽은 아버지의 죽음은 욕되고 수치스런 것이었기 때문에 가까운 친척에게까지 그 일을 속이자고 어머니와 나는 공모했다. 공모를 더욱 빈틈없이 하기 위해 우리는 이사까지 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난리 통엔 죽은 이도 많았지만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없어진 이도 많았으므로 나의 아버지와 오빠도 일가친척에게 없어진 이로 알려졌다. 그것은 실로 일거양득이었다. 행방불명이란 생과 사에 똑같이 반반씩의 확률이 있으므로 우리 모녀의 불행도 남의 눈에 반쯤은 줄어서 비쳐졌을 게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해서 우리 모녀는 앙큼하게도 두 죽음을, 두 무서운 사상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꼴깍 삼켜버렸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우리는 제사도 안 지냈다. 그들은 행방불명이니까.<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180" height="1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noname0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철자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우리는 사자(死者)를 삼킨 것이다. 은밀히, 음험하게. 어머니와 교외의 조그만 집에 살면서, 나는 밥벌이를 다녀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둑어둑해지는 저녁나절 집에 돌아올 때, 앞서가는 젊은 남자의 뒤통수가 잘생기고 걸음걸이가 근사했다고 치자. 그 무렵의 나는 그런 일로도 감미로운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릴 수 있는 그런 나이였다. 그러나 나는 무서웠다. 앞서가는 사람이 행여 돌아다볼까 봐, 돌아다보는 그의 얼굴이 꼭 피투성이의 무너져 내린 살덩이일 것 같아 나는 무서웠다. 나는 지독스런 혐오감으로 몸을 떨며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내 처녀시절,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는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보냈다. 무서운 게, 무서워하며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너도 결혼을 해야지. 처자식만 알 착실한 남자하고. 어느 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그 말에 대번에 동의했다. 처자식만 아는 착실한 남자라는 말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처자식의 먹이를 벌어들이는 것 외에는 자기가 속한 사회에 섣불리 참여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남자, 그런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 남자가 좋고말고. 그리고 나는 왠지 그런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오빠와 아버지에게 복수라도 하는 기분이었고, 무엇보다도 사는 일에 지쳐 있기도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그런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애를 낳고 또 낳고 또 낳았다. 애에 대한 내 욕심은 채워질 줄 몰랐다. 알 게 뭐람. 언제 또 어떤 시대의 횡포가, 광기가 검은 총구가 되어 내 아이의 가슴을 향해 겨누어질지 알게 뭐람. 뭘 믿고 아이를 둘만 낳을까. 셋도 적지. 넷도 적고말고. 다섯 여섯&hellip;&hellip; 나는 몸서리를 치면서 자꾸 아이를 낳았다. 남편이 참다못해 불임수술을 할 때까지 내 출산은 계속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자식만 아는 남편, 많은 아이들. 그래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는 게 매가리가 없고 시들시들하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고 넌더리가 났다. 사는 즐거움, 나는 흥미를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마치 망가진 용수철처럼 매가리가 없이 풀려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싱싱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서움증조차도 처녓적 같은 싱싱함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5" height="6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EB%B3%B8%EB%AC%B80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이제 망령이 어두운 골목길에 피투성이의 유령이 되어 나타날까 봐 무서워하는 대신 유령도 못 되고 어느 구석에 꽉 처박혀 있는 망령을 지지리도 못난 것으로 얕잡고 있기까지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망령이 처박혀 있는 곳이었다. 나는 그들이 있는 곳을 명치 근처에서 체증을 위식하듯 내 내부의 한가운데서 늘 의식해야만 했다. 그 느낌은 아주 고약했다. 어머니와 함께 두 죽음을 꼴깍 삼켰을 당시의 그 뭉클하기도 하고, 뭔가가 철썩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뒤틀리게 메슥거리기도 하던 그 고약한 느낌은 아무리 날이 지나도 희미해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업자득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삼켰으니까. 나는 망령들을 내 내부에 가뒀으니까. 나의 망령들은 언젠가는 토해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이 되어 내 내부의 한가운데에 가로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차 나는 더 묘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망령을 가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가 망령에게 갇힌 꼴이라는 것을. 나는 망령에게 갇힘으로써 온갖 사는 즐거움, 세상 아름다움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당하고 있다는 것을.</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늘 두 죽음을 억울하고 원통한 것으로 생각해왔는데 그 생각조차 바뀌어갔다. 정말로 억울한 것은 죽은 그들이 아니라 그 죽음을 목도해야 했던 나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 나이에,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가장 반짝거리고 향기로운 시기에 그런 것을, 그 끔찍한 것을 보았다니, 그리고 그것을 소리도 없이 삼켜야 했다니! 정말이지 정말이지 억울한 것은 그들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킨 죽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낯선 길모퉁이 초상집에서 들리는 곡성에도 황홀해져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대기가 일쑤였다. 저들은 목이 쉬도록 곡을 함으로써, 엄살을 떪으로써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리라. 나에겐 곡성이 마치 자유의 노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문 일부)<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77"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2_%EB%B6%80%EC%B2%98%EB%8B%98%20%EA%B7%BC%EC%B2%98/%EC%9E%91%EA%B0%80_%EB%B0%95%EC%99%84%EC%84%9C.jpg" />박완서</strong><br />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마흔 살이던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뒤 『휘청거리는 오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등의 장편소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의 소설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못 가 본 길이 아름답다』 등의 산문집을 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황순원문학상(2001) 등을 수상하였다. 등단 41주년을 맞은 지난 2011년 담낭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그림 &middot; 조문현</strong><br />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예술학을 전공하였다. 개인전 7회와 뉴욕햄튼 아트페어, 서울국제 아트살롱전, 광주 아트페어, 한중교류전, 한일교류전 등을 비롯하여 단체․초대전에 150여 회 참여하였다.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대한민국 한국화 대전과 무등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10년 광주광역시 문화예술상 허백련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국미협, 전통과 형상회, 전업작가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광주 무등산 아래 우리문화미술연구소에서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연구하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31 오후 1:44:00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7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 헤겔과 아이티</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pan></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여는 말</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과 아이티」는 추리소설처럼 쓴 글이다. 이 소개말을 건너뛰고 본문을 곧장 읽어도 좋다. 이 글의 구성과 결말을 이미 아는 독자를 위해 새로 쓴(후기로도 읽힐 수 있는) 이 소개말은 글의 배후에 있는 발견의 과정과 글이 처음 수용될 때의 충격을 기술한다. 이 소개말은 「헤겔과 아이티」가 쓰이기까지 수년간의 연구를 추적하고, 각주에 압축된 자료에 살을 붙여 그 학문적 함의를 더 수월하게 확인하도록 하며, 실세계의 정치적 함의를 지닌, 현재 진행 중인 지적 논쟁들 안에 글을 위치시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우연한 기획</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헤겔이나 아이티에 관해 글을 쓸 작정이 아니었다. 1990년대에 나는 다른 기획에 매달려 있었다. 냉전 시대의 종결과 더불어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에 걸쳐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 경제법칙과 시장 합리성에 대한 호소는 온갖 종류의 실용정책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적법화의 주문<sup>呪文</sup>이었다. 그런 물신적 숭배 대상인 이 실체 없는 환영<sup>幻影</sup>, &lsquo;경제&rsquo;란 도대체 무엇인가? 언제, 왜 발견되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손을 고려할 때 더욱 당혹스런 질문이겠지만,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여기서 당연히 애덤 스미스<sup>Adam Smith</sup>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철학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확립된 맥락을 살피려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단히 놀라웠던 점은 19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정치경제학 이론이 유럽 전역에 얼마나 커다란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것이었다. 두 세대가 지나고 마르크스가 경제학을 공부할 즈음에 경제학은 &lsquo;음울한 학문<sup>dismal science</sup>&rsquo;[&lsquo;음울한 학문&rsquo;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sup>Thomas Carlyle</sup>이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부족 사태를 예견한 맬서스<sup>T. R. Malthus</sup>의 이론을 접하고 나서 경제학을 가리켜 썼던 표현이다-옮긴이]으로 지칭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학에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가 거의 없다. 비록 몇 가지 기본적 경제용어가 일상적 사고의 중심에 자리 잡기는 했지만(수요와 공급, 이윤 동기, 경쟁 등), 경제가 도대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오늘날의 일반 대중에게 여전히 불가해한 문제다. 그러한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사제집단 같은 전문가들의 소관인 것이다. 재미로 경제학 저널을 읽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1776년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sup>Wealth of Nations</sup>』이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이 보인 엄청난 흥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의 초기 저작은 이러한 연구에 유용했다.<sup>1</sup> 예나 시기의 저작은 헤겔이 1803년에 읽은 『국부론』의 영향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다.<sup>2</sup> 제조업에서의 기만적으로 단순한 혁신, 즉 분업이 몰고 온 급진적 변화의 효과를 기술한 스미스의 글은 헤겔의 철학자적 관심을 사로잡았다. 핀의 제조라는 평범한 경우를 예로 들면서, 스미스는 작은 단위로 일을 전문화한 생산의 분화는 노동자의 생산성과 소비자의 필요 양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인간 상호의존성의 범위와 정도를 엄청나게 증대시킨다고 주장했다.<sup>3</sup> 헤겔은 반복적이고 분절된 노동 행위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끔찍한 영향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핀이 세상에 쌓여가는 광경을 떠올리며, 그에 매료되는 한편 두려움도 느꼈을 것이다. 헤겔은 &ldquo;필요의 체계&rdquo;로서의 이 새로운 경제가 집단적 삶의 형식을 바꿔놓을 힘을 지녔다는 점을 인식했다.<sup>4</sup> 그의 묘사는 극적이었다. &ldquo;자연의 힘들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으로 움직이며, 야수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이고 엄격한 길들이기와 제어를 필요로 하는&rdquo; &ldquo;상호의존성의 괴물 같은 체계&rdquo;를 &ldquo;필요와 노동&rdquo;은 창조해낸다.<sup>5</sup> 1805~1806년에 이르러 헤겔은 국가에게 이 야생의 게걸스러운 짐승을 길들이는 권력<sup>Gewalt</sup>으로 나서주기를 요청하는 정체<sup>政體</sup> 철학의 기초로서 &lsquo;부르주아&rsquo; 또는 &lsquo;시민&rsquo; 사회<sup>die burgerliche Gesellschaft</sup>라는 전통적 개념 대신 그 새로운 경제를 사용하고 있었다.<sup>6</sup> 헤겔에 의한 시민사회 개념의 경제적 재구상은 &lsquo;획기적<sup>epoch-making</sup>&rsquo;이라는 평을 받아왔다.<sup>7</su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C%A3%BC%EC%84%9D1.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부르주아 사회</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은 지금 우리가 근대성이라고 부르는 사회적 삶에 일어난 파열을 날카롭게 관찰한 사람이었다. 예나 시기의 강의 노트는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로 가득하다. 그의 평생에 걸친 기획은 그러한 변화를 철학적 의미의 견지에서 이해하는 것이었다. 헤겔의 철학 체계는 추상적 차원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예나에서 그의 초기 강의를 들은 어느 학생은 &ldquo;강의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도대체가 무슨 문제를 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rdquo;고 말했다.)<sup>8</sup> 그러나 헤겔의 글은 나처럼 유물론적 성향을 지닌 이론가들이 특별히 좋아할 만한 종류의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세부사항으로 가득하다. 핀 제조, 커피 마시기, 구빈원, 남성용 프록코트, 타래송곳(코크스크루), 양초 심지 절단기 등등. 헤겔의 개념적 어휘 가운데 가장 추상적인 용어조차 일상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예나 시기의 글을 보면 헤겔의 핵심 용어인 &lsquo;대상화<sup>objectification</sup>&rsquo;(외화<sup>Entausserung</sup>)는 그 지시대상이 일상적인 인간 노동이며, &lsquo;부정<sup>negation</sup>&rsquo;은 소비의 욕망을 가리키는 헤겔의 용어이고, 자연적 필수불가결함에 대립되는 역사적으로 창조된 필요는 패션의 사회적 모방으로써 예시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B%B3%B8%EB%AC%B8%20%EC%9D%B4%EB%AF%B8%EC%A7%80%20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필요의 체계는 서로에 대해 알지도, 신경 쓰지도 않는 낯선 이들 사이의 사회적 연계다. 소비자들의 &ldquo;물릴 줄 모르는 욕망&rdquo;과 &ldquo;영국인이 &lsquo;안락함<sup>comfort</sup>&rsquo;이라 부르는 것&rdquo;의 &ldquo;끝 모르는 무한한 생산&rdquo;이 결합하여 식별할 수 있는 어떤 한계도 없는 &ldquo;사물의 운동&rdquo;을 생산한다.<sup>9</sup> 사실 헤겔이 묘사한 것은 유럽 식민주의 체제의 탈영토화된 세계시장이며, 그는 이것을 묘사한 첫번째 철학자다.<sup>10</sup> 이 우연적이고 맹목적인 의존성은 이제 시민적<sup>civic</sup> 휴머니즘의 전통에서 그랬던 것처럼 통치의 법에 대한 일치된 동의의 기초를 제공하는, 공적 시민으로서의 재산 보유자들 사이의 계약 관계를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애덤 스미스가 이해하는 바의 정치경제학에 의해 창조된 사회인데, 이는 분명 여전히 도시적인 또는 &lsquo;부르주아적인<sup>burgerliche</sup>&rsquo; 사회지만 식민지 무역이라는 근대적 현실에 의해 변형된 사회이다. 신흥 상인계급<sup>Handelsstand</sup>은 원거리 무역업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이익은 (토머스 홉스<sup>Thomas Hobbes</sup>가 이해한 것처럼) 자신의 재산을 굳게 지키는 데 있다기보다 재산의 &lsquo;소외<sup>Entfremdung</sup>&rsquo;의 조건, 즉 사고팔 권리를 굳게 지키는 데 있다. 헤겔은 교환되는 물품은 가치가 동일한 반면 그 역설적인 사회적 결과는 <strong>불</strong>평등이라는 점, &ldquo;거대한 부와 거대한 빈곤의 대조&rdquo;라는 점을 인식한다.<sup>11</sup> 통상 교역은 지속적으로 자기재생산적인 인간관계의 망, &ldquo;근대적 의미의 &lsquo;사회&rsquo;&rdquo;를 창조한다.<sup>12</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로운 사회는 민족 집단<sup>ethnic group</sup>이나 혈연에 기초한 씨족<sup>Stamm</sup>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 방식으로 이해된 &lsquo;Volk(민족)&rsquo;의 해체다.<sup>13</sup> 낡은 의미의 시민사회와 비교할 때 부르주아 사회는 비애국적이며, 무역에 있어 민족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려는 충동에 지배된다. 통상에는 국경이 없다. 통상의 자리는 바로 바다다. 엄밀히 말해 경제와 민족은 양립 불가능하다.(애덤 스미스는 식민경제가 국체<sup>national polity</sup>를 왜곡시킨다고 보았다.)<sup>14</sup> 경제는 무한히 팽창하는 성질이 있는 반면 민족은 제약을 가하며 경계를 지운다. 헤겔은 어떤 다른 형식의 상호의존성으로서 정체<sup>政體</sup>─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윤리적 교정책을 제공하고, 그리하여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양 측면이 상호대립을 통해 서로를 가능케 하도록 만드는 정체─를 도입함으로써, 부르주아/시투아이엥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한 개인을 생산하는, 사회의 힘과 국가의 힘 사이의 이 대립을 궁극적으로 해소한다.<sup>15</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애덤 스미스를 읽으면서 헤겔은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 전통, 그것도 그 가장 신성한 토대인 자연 상태에 도전하는 사회 묘사를 발견했다. 역사적 불변항과는 거리가 멀고 자연법 이론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그것은 인간의 상호의존성에 관한 역사적으로 특정한 설명이다. 홉스에서 로크<sup>John Locke</sup>와 루소<sup>Jean Jacques Rousseau</sup>에 이르는 계약론이 자연적 자유를 지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사회적ㆍ계약적 합의를 이루는 조건을 결정하는 존재로서 철학적 사변의 출발점으로 정립한 반면, 헤겔의 근대적 주체는 상품 교환으로 인해 <strong>이미</strong> 사회적 의존의 망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헤겔은 경제에서 국가로 나아가는가? 리델<sup>Manfred Riedel</sup>은 국가가 새로운 사회를 무제한성에서 구해내고 통제를 주장하기 위한 데우스엑스마키나<sup>deus ex machina</sup>[라틴어로 &lsquo;기계장치의 신<sup>神</sup>&rsquo;을 의미하며, 극에서 갑자기 출현하여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고 결말을 이끌어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옮긴이]로 등장한다고만 말한다.<sup>16</sup> 사태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C%A3%BC%EC%84%9D2.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ldquo;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rdquo;</strong><sup>17</sup></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은 예나 시기의 다양한 강의에서 새로운 사회를 묘사하는 가운데 &lsquo;교환을 통한 인정<sup>Anerkanntsein im Tausch</sup>&rsquo;으로서의 &lsquo;상호인정&rsquo;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lsquo;주인&rsquo;과 &lsquo;노예&rsquo;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sup>18</sup> 독자는 모든 해당 텍스트에서 이 주제가 필요의 체계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튀어나온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질문은 불가피하다. 주인과 노예 관계와 새로운 세계 경제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 전문가들의 견해를 따를 때 헤겔이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호소한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헤겔이 노예제를 프랑스 혁명의 국내적 측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알레고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가 동시적으로 진행하는 상품 거래에 대한 논의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8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200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1805~1806년의 예나 시기 텍스트에서 헤겔은 (핀의 제조, 교환에 있어 물품의 이동, 노동자의 비인간화 등) 경제적 주제들과, 주인과 노예의, 그리고 &ldquo;상호인정&rdquo;이 &ldquo;극단적 형태로&rdquo; 나타나는 &ldquo;생사를 건 투쟁&rdquo;의 정치적 주제들(텍스트의 여백에 그는 &ldquo;폭력, 지배와 종속&rdquo;이라고 적어놓았다) 사이를 연이어 빠르게 이동한다.<sup>19</sup> 개념상으로는, 자신의 예속 상태를 뒤엎고 법치국가를 확립하는 노예들의 혁명적 투쟁이 헤겔의 분석을 무한히 팽창하는 식민경제에서 떼어내, 그가 자유의 실현으로 규정하는 세계사의 차원으로 이동시키는 이론적 중심점<sup>hinge</sup>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론적 해결은 바로 그 순간 아이티에서 실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연관은 명백해 보이는데, 너무도 명백하여 증명의 부담이 다른 주장을 펼치고자 하는 쪽에 지워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 해석은 헤겔과 더불어 &ldquo;철학은 당대의 이론이 된다&rdquo;는 리터<sup>Joachim Ritter</sup>의 널리 수용되는 명제<sup>20</sup>를 뒷받침한다. 또한 그것은 리델을 성가시게 했던 문제, 즉 국가를 데우스엑스마키나로 도입하는 것의 분명한 자의성을 제거해준다. 평등한 자들 사이의 상호인정은 노예제의 모순들로부터 논리적 필연성을 띠고 출현하는데, 그 모순들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노예들이 &ldquo;자유 아니면 죽음을!&rdquo;이라는 기치 아래 &lsquo;인정 투쟁&rsquo;을 벌이며 노예제에 맞서 싸움으로써 역사의 능동적 행위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마당에<sup>21</sup> 인간 노예를 법적으로 &lsquo;물품<sup>things</sup>&rsquo;으로서 거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세기 동안의 역사적 망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헤겔과 아이티」를 집필하는 동기가 된 수수께끼였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서 그물망처럼 얽힌 모든 관련 증거들로 나를 이끌었는데, 이 증거들로 인해 초점이 아이티 쪽으로 이동했음은 물론 더 큰 폭으로는 학문의 문제, 즉 오랜 시간에 걸친 연구대상의 구성이 어떻게 사태를 조명하는 만큼이나 감출 수도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이동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헤겔과 아이티」는 연관에 관한 글, 침묵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역사적 현상을 연결하는 &lsquo;과<sup>and</sup>&rsquo;에 관한 글이다. 이 연구 과정에서 나를 추동한 것, 그리고 실은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학문이 우리의 상상력에 가하는 한계에 대한 점차 분명해지는 의식이었다. 헤겔이라 불리는 현상과 아이티라 불리는 현상은 (신문과 잡지가 명확히 기록하고 있듯이) 그 시작 시점에는 서로에게 스며들 만큼 연관되어 있었지만 전수의 역사를 거치면서 서로 분리되었다. 이 지점에서 서구중심주의라는 유령을 들먹이기는 물론 쉽다. 하지만 그것은 서구중심주의 자체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이티가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끌어들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사적 해석에 있어서의 변화는 한 사람의 발명품이 아니다. 서로 무관한 학자들이 서로의 연구를 바탕으로 성과를 축적해가는 것이다. 헤겔 학자들은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하여 제시했는데, 그런 철두철미함 덕분에 허술한 연구에서라면 슬쩍 가려졌을 지식의 공백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 공백은 공식 서사의 이면에 있는 또다른 서사의 편린들을 드러낸다. 그 다른 서사의 일부분들을 하나로 맞춰보려고 노력하는 중에 나는 다양한 분과학문에 속한 일군의 저자를 발견했는데, 그들의 학문적 성과는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롭고 독창적인 연구에 속한다. 아이티 혁명은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으로서 다양한 담론의 교차지점에 존재한다. 제임스<sup>C. L. R. James</sup>의 『검은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산도밍고 혁명<sup>The Black Jacobins: Toussaint L&rsquo;Ouverture and the San Domingo Revolution</sup>』(1938)[한국어판: 『블랙 자코뱅: 투생 루베르튀르와 아이티혁명』 (필맥 2007)], 에릭 윌리엄스<sup>Eric Williams</sup>의 『자본주의와 노예제<sup>Capitalism and Slavery</sup>』(1944), 데이비드 브라이언 데이비스David Brion Davis의 『혁명의 시대(1770~1823)의 노예제 문제<sup>The Problem of Slavery in the Age of Revolution, 1770-1823</sup>』(1975), 로빈 블랙번<sup>Robin Blackburn</sup>의 『식민지 노예제의 전복: 1776년에서 1848년까지<sup>The Overthrow of Colonial Slavery, 1776~1848</sup>』(1988), 폴 길로이<sup>Paul Gilroy</sup>의 『검은 대서양: 근대성과 이중의식<sup>The Black Atlantic: Modernity and Double Consciousness</sup>』(1992) 등의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조운 데이언의 『아이티, 역사, 신들<sup>Haiti, History and the Gods</sup>』, 시빌 피셔의 『부인된 근대성: 혁명의 시대의 아이티와 노예 문화<sup>Modernity Disavowed: Haiti and the Cultures of Slaves in The Age of Revolution</sup>』, 피터 라인보<sup>Peter Linebaugh</sup>와 마커스 레디커의 『다두<sup>多頭</sup>의 히드라─선원, 노예, 평민과 혁명기 대서양 연안의 숨은 역사<sup>The Many-Headed Hydra: Sailors, Slaves, Commoners, and the Hidden History of the Revolutionary Atlantic</sup>』[한국어판: 『히드라─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갈무리 2008)], 미셸 롤프 트루이요의 『과거를 침묵시키기: 권력과 역사의 생산<sup>Silencing the Past: Power and the Production of History</sup>』, 그리고 데이비드 제거스<sup>David P. Geggus</sup>의 많은 논문을 읽고 나서, 아이티를 문명사에서 완전히 주변적인 존재, &ldquo;다른 사회들과의 문화적 공통성을 결여한&rdquo; &ldquo;외딴 나라&rdquo;<sup>22</sup>로 치부하는 능변가 새뮤얼 헌팅턴<sup>Samuel Huntington</sup>의 시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과 아이티」는 의미의 전통적 위계를 벗어나는 지식상의 변화를 옹호한다. 이 글은 사실이란 고정된 의미를 지닌 데이터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계속해서 놀라게 할 수 있는 연결 통로로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상상력을 얽매지 말고 오히려 불어넣어야 한다. 사실이 선행 결정된, 권위 있는 명제에 대한 증명으로 열거되는 가운데 확고한 지식이라는 허구에 포섭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사실은 더 많은 진실을 드러낼 수 있다. 학문적 논쟁의 의미는 지적 세력권<sup>turf</sup>의 관념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집단적 학문에는 하나의 정치가 있다. 그 목적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공공영역─역사의 승자가 지식을 독점적으로 지배한 결과 결정적 경계들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곳─을 위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C%A3%BC%EC%84%9D3.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헤겔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이 중요한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이 실제로 생도맹그<sup>Saint-Domingue</sup>[아이티 혁명이 일어난 히스파니올라<sup>Hispaniola</sup> 섬의 별칭. 산도밍고<sup>San Domingo</sup>, 산토도밍고<sup>Santo Domingo</sup> 역시 같은 섬을 가리킨다-옮긴이]의 사건에 고무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공은 피에르 프랑클랭 타바레스<sup>Pierre-Franklin Tavares</sup>에게 돌아가야 한다. 1990년대 초 타바레스는 독일보다 프랑스 쪽 자료에, 그리고 그 자신의 건실한 직관에 의존하면서 일련의 짤막한 사변적 논문을 써나갔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폈다. 헤겔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노예제라는 당대의 문제에 &ldquo;사로잡혀&rdquo; 있었다. 우리는 노예제에 대한 비판이 고대인의 의상<sup>衣裳</sup>으로 위장되어 있을 때조차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레날 신부<sup>Abbe Raynal</sup>[1713~1796. 계몽주의시대 프랑스의 저술가이자 신부로서 정식 이름은 기욤 토마 프랑수아 레날<sup>Guillaume Thomas Francois Raynal</sup>-옮긴이]가 쓴 인도 제국<sup>諸國</sup>의 역사[흔히 『두 인도의 역사』로 약칭되는 『두 인도 내 유럽인의 정착과 상업에 관한 철학ㆍ정치사』를 지칭하며 이 책은 후에 「헤겔과 아이티」의 각주에서 정식으로 언급된다. 여기서 &lsquo;두 인도&rsquo;(les deux Indes)는 동인도와 서인도를 통칭한다-옮긴이]를 읽은 청년 헤겔은 겉으로 표현했던 것보다 카리브해 연안의 노예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헤겔은 평생 &ldquo;레날주의자&rdquo;로 살았다.<sup>23</sup></p> <p style="text-align: justify">「헤겔과 아이티」 출간 이후 닉 네스비트<sup>Nick Nesbitt</sup>는 헤겔의 원숙기 저작 『법철학』을 생도맹그 노예의 관점에서 읽기 시작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이 &ldquo;진보적&rdquo; 텍스트는 좀더 &ldquo;소심한&rdquo; 『정신현상학』의 추상적 개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ldquo;노예가 반란을 일으킬 권리에 대한 해명과 급진적 분석&rdquo;을 통해 &ldquo;아이티 혁명에 대한 최초의 위대한 분석&rdquo;을 제공한다는 것이다.<sup>24</sup> 우리로서는 강조점이 다를 수 있고 세부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여하튼 타바레스와 네스비트는 각기 다른 텍스트에 주목하면서 [헤겔과 아이티의] 연관이 자명하다는 데 대해 일치된 견해를 보인다.<sup>25</sup> 아이티 학자들의 경우, 내가 2005년 포르토프랭스에서 「헤겔과 아이티」를 발표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이미 그들은 타바레스의 논문들에 관해 알고 있었다.)<sup>26</sup></p> <p style="text-align: justify">타바레스의 사변이 더 널리 논의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며, 나 자신의 연구에서 그의 논문들을 그토록 뒤늦게 발견한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인 이 학자를 너무 성급하게 구미<sup>歐美</sup> 학계 패권의 희생자로 간주하기 전에(프랑스 시민인 타바레스는 파리에서 수학했고, 그런가 하면 헤겔 기성학계는 내 연구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헤겔의 아이티뿐 아니라 아이티의 헤겔, 다시 말해 헤겔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아프리카계 카리브인들의 헤겔 수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네스비트는 이 유산을 에메 세제르<sup>Aime Cesaire</sup>의 연구 작업을 통해 추적한 바 있다.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세제르의 개념 &lsquo;네그리튀드<sup>negritude</sup>&rsquo;는 &ldquo;종속과 노예화라는 공통 경험&rdquo;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인 디아스포라의 자기 이해를 지칭하는데, 거기서 아이티 혁명에서의 노예의 자기 해방은 &ldquo;상징적인&rdquo; 것으로 간주된다.<sup>27</sup> 개인적으로 세제르는 이폴리트<sup>Jean Hyppolite</sup>가 새롭게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1941)을 발견하고 흥분에 휩싸였던 젊은 날을 상기하며 네스비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ldquo;『정신현상학』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는 레오폴드 상고르<sup>Leopold Senghor</sup>에게 그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지. &lsquo;레오폴드, 헤겔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게. 보편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특수자에 몰입해야 한다!&rsquo;&rdquo;<sup>28</sup> 헤겔을 읽는 참으로 생산적이고 &lsquo;보편적인&rsquo; 경험은 전체적이고 전체화하는 체계의 요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이 최대한 구체적으로 예시된 변증법적 사유와 조우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해방을 통해 얻어짐을 세제르는 이해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일 헤겔 [사유의] 원천이 문제되는 것의 전부라면 그 결과는 현재의 학문적 구조 안에 편입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 경우 그것은 영향의 원천으로서나 또는 맥락에 대한 설명으로서 헤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저 유명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의미에 본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철학적 학문의 역사는 서구의 사상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서 식민지 경험을 배제해온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다. 어느 철학 교수가 내게 솔직히 말했듯, &ldquo;만약 헤겔이 아이티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고 해도 그 사실 때문에 내가 헤겔을 가르치는 방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rdquo; 물론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정당화될 만한 뛰어난 진술이지만, 내가 아이티 <strong>없는</strong> 헤겔은 생각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헤겔과 아이티를] 잇는 접속어 &lsquo;과<sup>and</sup>&rsquo;를 강조하는 가운데 뒤흔들어놓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관점이다. 자유에 관한 근대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이티의 역사에 대한 무지 속에 연구를 진행하기에 제대로 나아가질 못한다. 역사적 맥락이 근대 철학에 스며드는 것, 이것이 진정 그 스스로 의식하고 있던 헤겔의 근대주의적<sup>modernist</sup> 의도였다. 그러나 그 역도 참이다. 역사와 진리 사이의 필연적 상호연관에 대한 그 자신의 강조로 인해 헤겔 철학은 우리가 헤겔이라 부르는 지시대상이 역사적으로 인식되어온 방식에 연루된 억압들과 분리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4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C%A3%BC%EC%84%9D4.jpg" /></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헤겔의 침묵</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한 가지 경고<sup>caveat</sup>는 고려할 만하다. 만약 헤겔이 (유럽의 독서 대중 전체가 그랬듯) 아이티에 대해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면 왜 그의 글에는 더 명백한 논의가 없는가? 네스비트는 [아이티에 대한 헤겔의] 언급이 당대인이면 누구나 알아들을 만큼 충분히 노골적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언급들이 수세기 동안 체계적으로 간과되었다는 사실은 후대 학자들이 책임질 일만은 아니다. 아이티 혁명에 대한 사실상의 침묵에 헤겔 자신은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타바레스는 이 점을 꼬집어 언급하면서 헤겔의 침묵이 프리메이슨과의 연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주장한다. 자크 동트<sup>Jacques d&rsquo;Hondt</sup>의 연구를 참조하면서 그는 &ldquo;증거자료와 정보의 출처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해 모르는 척하거나 침묵을 지키는&rdquo; 헤겔의 경향은, 그가 살던 혁명의 시대에는 특히나 정치적 감시 아래 놓였던 비밀결사의 조직원들에게 전형적이었음을 논변한다.<sup>29</sup> 자크 동트는 이러한 연계가 헤겔에 대한 비의적 독해를 전반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sup>30</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치적 은밀함과 공적인 투명함, 계몽적 이성과 은둔자적인 신비주의, 근대주의와 영원한 앎에 대한 모순적 욕망을 결합한 프리메이슨이 당대인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의심할 수 없다. 프리메이슨은 헤겔과 아이티의 이야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요소로서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는 보르도 항, 생도맹그의 농장, 노예제 철폐를 주장하는 영국의 저술가들, 파리에서 『미네르바』에 기사를 보내는 저널리스트들, 독일의 출판업자들을 서로 연결해준다.31) 헤겔은 이 거대한 소통망의 일부였으며, 거기에 가르베, 아르헨홀츠<sup>Johann Wilhelm von Archenholz</sup>, 레인스포드<sup>Marcus Rainsford</sup>, 코타<sup>Johann Friedrich Cotta</sup>, 욀스너<sup>Konrad Engelbert Oelsner</sup> 등이 가담해 있음을 알고 있었다.(이 인물들은 모두 「헤겔과 아이티」에 등장한다.) 우리는 헤겔의 초기 정신철학의 정치와 잡지 『미네르바』에 대한 독서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잡지는 프리메이슨 정신에 입각하여 지롱드 세계시민주의<sup>Girondin cosmopolitanism</sup>를 옹호하는데, 후자는 혁명적 이상의 국제적 확산에 진력하되 투생 루베르튀르의 공화국은 명시적으로 수용하는 반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혁명적 공포의 &ldquo;추상적 부정&rdquo;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욀스너는 파리에서 『미네르바』에 보낸 「역사적 서신<sup>Historical Letters</sup>」에서 파리 자코뱅 당원들을 &ldquo;식인종<sup>Menschenfleischfresser</sup>&rdquo;이라고 비난했다. 욀스너는 자코뱅 당원들이 &ldquo;가장 문명화된 민족을 가장 야만적인 상태로&rdquo; 몰아넣을 수 있는 &ldquo;난폭한 민주주의&rdquo;를 열망한다고 한탄했다.<sup>32</sup> 이와 정반대의 역사적 운동을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레인스포드였으며, 그 역시 『미네르바』 프리메이슨 조직망의 일부였다. 자코뱅 프랑스의 &ldquo;암살자와 처형자들&rdquo;이 &ldquo;위대하고 품위 있는 민족&rdquo;을 &ldquo;원시시대의 야만적 상태&rdquo;로 돌아가게 만드는 동안, 세계는 &ldquo;검은 공화국&rdquo;에서 자신의 처지를 떨치고 일어난 &ldquo;흑인들이 가장 악독한 노예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하여&rdquo; 노예제의 야만적 상태를 뒤로한 채 &ldquo;일거에 사회관계를 구성하고 법률을 제정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모습&rdquo;을 보았다.<sup>33</sup>(유럽인들은 자신의 근대성이 지닌 야만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후대의 비난에서 이 세계시민주의자들은 자유롭다.)<sup>34</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빌 피셔는 헤겔이 노예 반란군 <strong>앞에서</strong>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를 중단함으로써 (그의 당대인들을 포함한) 『정신현상학』 독자들로 하여금 &ldquo;개략적 이행의 빈 곳을 채우도록&rdquo; 유도하며 이 때문에 지난 세월 동안 &ldquo;헤겔 연구에서 가장 큰 이견들 가운데 일부&rdquo;가 생겨났다고 말하는데<sup>35</sup> 이는 옳은 말이다. 침묵은 추측을 유발하는 힘이 있으며, 문제되는 인물이 권위를 의심할 수 없는 헤겔이기에 우리는 이 침묵에 저자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고 서둘러 추정하게 된다.<sup>36</sup> 그러나 가장 간단한 답이 가장 적절한 답인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나 시절 헤겔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정신현상학』을 완성했을 때 그는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고 삶은 엉망이었다. 최근에 테리 핀커드<sup>Terry Pinkard</sup>가 펴낸 전기에서는 헤겔의 실존적 궁핍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ldquo;돈도 없었고, 돈이 되는 그럴싸한 직업도 없었으며, 아이가 하나 딸려 있었는데 그 아이를 낳은 여성은 최근에 그녀를 버린 어떤 자[헤겔의 집주인!]의 아내였으니, 헤겔은 이제 완전히, 철저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rdquo;<sup>37</sup> 이런 사람이 자신의 첫번째 주요 저작에서 아이티를 명시적으로 언급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언급은 당시 독일 당국도, 또한 얼마 전 발생한 투생 루베르튀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그리고 마침 그때 헤겔의 도시를 침공한 나폴레옹<sup>Napoleon Bonaparte</sup>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철학으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파악하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내걸었던 야심찬 철학자는 스스로 나서 체포당하지는 않을 터였다.<sup>38</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나에 들어온 프랑스 병사들은 헤겔이 묵던 집을 들쑤셔놓았다. &ldquo;악당들이 내 문서를 복권처럼 어질러놓았음이 틀림없네.&rdquo;39) 예나를 떠나기 위해 헤겔은 친구들이 마련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일자리를 받아들여 밤베르크로 이주했고, 거기서 친<sup>親</sup>나폴레옹 성향의 정치 일간지 『밤베르크 신문<sup>Bamberger Zeitung</sup>』을 편집했다.<sup>40</sup> 이처럼 헤겔의 침묵에는 정치적 파장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폴레옹의 승리가 몰고 온 영향, 이주와 개인적 기반 상실에 따르는 위험까지 다양하고 아주 일상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분실된 증거─1803년작 『인륜성의 체계』 마지막 부분에서 삭제된 &ldquo;역사에 불과한 것<sup>mere history</sup>&rdquo;,<sup>41</sup> 1803~1804년의 예나 체계에 빠져 있는 마지막 단편 제22번의 마지막 페이지(들)<sup>42</sup>─의 운명, 그리고 헤겔 사후 그의 저작물을 공식 선별한 편집인들의 동기<sup>43</sup>가 당연히 궁금하다. 그러나 헤겔과 아이티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0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1_%ED%97%A4%EA%B2%94,%20%EC%95%84%EC%9D%B4%ED%8B%B0,%20%EB%B3%B4%ED%8E%B8%EC%82%AC/%EC%A3%BC%EC%84%9D5.jpg" /></p> <br /> (서문 전문)<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수전 벅모스 Susan Buck-Morss</strong><br />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수전 벅모스는 독일 비판철학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문가이다. 1977년에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중심으로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서 『부정 변증법의 기원: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벤야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The Origin of Negative Dialectics: Theodor W. Adorno, Walter Benjamin and the Frankfurt Institute』를 펴냈고, 1989년에는 벤야민이 남긴 미완의 대작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정교하게 읽고 재구성한 역작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The Dialectics of Seeing: Walter Benjamin and the Arcades Project』를 발표했다. 또한 2002년에는 20세기 &lsquo;대중 유토피아&rsquo;의 등장과 쇠퇴를 그린 『꿈의 세계와 파국: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Dreamworld and Catastrophe: The Passing of Mass Utopia in East and West』을 펴냈고, 2003년에는 9.11 테러를 화두로 공격적인 세계화 정책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비판이론을 담은 『지난 테러를 생각한다: 이슬람교와 좌파 비판이론Thinking Past Terror: Islamism and Critical Theory on the Left』을 출간했다. 현재 코넬 대학 정부학과 교수로 있으며, 정치철학과 사회이론, 세계화와 이슬람주의, 시각문화 등을 가르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성호</strong><br />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뉴욕주립대학-버팔로SUNY-Buffalo에서 로렌스D. H. Lawrence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소설, 문화이론, 비평을 강의하고 있으며 비평동인지 『크리티카』의 편집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 리얼리즘 및 모더니즘 소설,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 세계시민주의, 한국문학 등에 관한 글을 썼고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30 오후 6:01:00《206》2010년 5월 12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6_%EB%B2%A0%EC%A6%88%EB%AC%B4%EC%95%84%20%ED%91%9C%EC%A7%80.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2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비르지니 데팡트의 『베즈 무아』(책세상, 2002, mephisto 03)를 읽다. - 2부 27장과 에필로그 격의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은, 1부의 마지막 장인 13장이 될 때까지는 나딘과 마뉘의 이야기가 병렬로 전개된다. 홀수 장은 나딘, 짝수 장은 마뉘의 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딘은 창녀다. 몸이 좀 뚱뚱한 편이라서 그런지 손님을 가릴 처지가 아닌 모양인데다가, 그녀 자신이 마조히스트 역할을 즐기기도 한다. 현재 그녀는 혼자서 집세를 낼 능력이 없어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브린이라는 여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 나딘은 프랑시스라는 남자에 빠져 있는데, 그는 마약과 관련된 범죄자다. 나딘의 취미는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뉘는 수간이 나오는 하드코어 포르노에 출연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몸집이 작은 마뉘의 취미는 온종일 군것질을 하는 것과 바에서 남자들을 낚는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8장에서 한 여자 친구에 의해 &ldquo;맨날 어려운 애들을 도와주고, 둘도 없이 인정이 많은&rdquo; 여자로 묘사된다). 파리에서 살고 있는 나딘과 마뉘의 나이는 확실히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추정된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288" height="47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6_%EB%B2%A0%EC%A6%88%EB%AC%B4%EC%95%84%20%ED%91%9C%EC%A7%80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나딘은 며칠 동안 소식이 없던 프랑시스로부터 살인을 저질렀다는 전화를 받고, 그가 있는 파리 근교의 호텔을 찾아 나선다(5장). 한편 마뉘는 동네의 섹스 파트너였던 게 분명한 &lsquo;카멜&rsquo;이 살해당하고 또 다른 남자 친구인 라두앙을 같은 동네의 범죄 조직이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2․4장). &lsquo;카멜&rsquo;은 알제리나 모로코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은어로, 마뉘가 사는 동네가 파리의 빈민 구역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덧붙여, 여기서 &lsquo;섹스 파트너&rsquo;가 뜻하는 것은, 섹스와 생활비(용돈)를 함께 제공하는 남자 친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뉘는 앞서 말했던 여자 친구와 함께 센 강변을 산책하던 중에 세 명의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때 함께 있었던 여자 친구는 성폭행범들의 차에 치여 죽고, 마뉘 혼자 도망친다(8장). 한편 나딘은 프랑시스에게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lsquo;출장 섹스&rsquo;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함께 집세를 내는 세브린이 자신의 위스키를 허락 없이 마셨다고 잔소리를 하자, 나딘은 그녀를 목 졸라 죽인다(9장). 실제로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살인범이었다는 소문이 세브린의 귀에 들어가는 것이 나딘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폭행범들로부터 용케 도망쳐 온 마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또 다른 섹스 파트너인 라킴의 집으로 가서, 그가 몰래 숨겨둔 금고와 권총을 훔쳐 온다. 그녀는 그 총을 가지고 라두앙의 얼굴에 황산을 부은 일당 가운데 한 명이자, 한때 자신의 섹스 파트너이기도 했던 무스타파를 쏘아 죽인다. 그리고 카멜을 살해했을 것으로 보이는 보석 담당자를 찾아가 그도 죽인다(10장).</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딘은 기차를 타고 프랑시스가 있는 파리 근교의 호텔에 가서 그를 만난다. 그런데 프랑시스는 나딘을 만난 직후 호텔 앞 약국에 마약 성분이 있는 약을 사러 갔다가, 그를 수상한 사람으로 오인한 약국 주인에게 총을 맞고 죽는다. 나딘은 물을 사러 나왔다가, 프랑시스가 약국에서 뒷걸음질 쳐 나오다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을 본 뒤, 영문도 모른 채 역으로 도망친다(11장). 한편 마뉘는 엄마가 새로운 애인과 여행을 가는 바람에 비어있는 파리 근교의 집을 찾아온다(12장). 초면인 나딘과 마뉘는 역에서 만나 친구가 되고, 마뉘 엄마의 자동차를 타고 브레타뉴로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난다(13장). 포르노 비디오 광이었던 나딘이 마뉘를 기억해 내고, 또 마뉘가 자신을 알아본 나딘과 곧 의기투합하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이 1부의 요약이다. 이미 몇 명이 죽는 것을 보았지만, 2부에서는 얼마나 많이 죽는지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이 연출한 &lt;델마와 루이스<sup>Thelma&amp;Louise</sup>&gt;(1991)처럼, 여성 버디<sup>buddy</sup>물인 동시에 여로 형식의 소설이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의 영화가 온전히 페미니즘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보다는 펑크 문화에 더 강력하게 밀착되어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6_%EB%8D%B8%EB%A7%88%EC%99%80%20%EB%A3%A8%EC%9D%B4%EC%8A%A4%20%EC%8A%A4%ED%8B%B8%EC%BB%B72_%EC%9C%A0%ED%85%8C.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막 이 작품을 읽은 나는 펑크 문화를 설명할 언어나, 펑크 문화를 이 작품과 연관하여 설명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못하다. 그래서 길지만, 옮긴이가 쓴 후기 가운데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이 작품은 펑크 세대의 작품이다. 1970년대 중반 석유 파동 이후 유럽 경제는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다. 경제적 난항은 사회적 변동을 가져왔다. 실업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이에 따라 불만과 절망의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게 되었다. &lsquo;미래는 없다<sup>No Future</sup>&rsquo;는 기치를 앞세우고 일어난 이 운동은, 일종의 &lsquo;굵고 짧게&rsquo;라는 인생관을 제시한다. 미래가 없으므로 인생에서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누리고 일찍이 사라지자는 경향이다. 특히 대중음악 영역에서는 1970년대 말부터 영국의&nbsp;록 그룹인 크래시, 섹스 피스톨즈 등을 선두로 펑크 록 유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너바나에게까지 맥을 잇는 펑크록은 현대 서구 사회의 절망감이 창출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원제 Baise-moi는 영어로 옮기면 Rape-me가 된다. 이는 너바나의 세계적인 히트곡의 타이틀이기도 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비르지니 데팡트의 『베즈 무아』 역시 이러한 펑크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두 주인공 나딘과 마뉘, 썩은 하층 사회에서 전전하던 두 사람은 쾌락을 즉각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는 욕구(마약, 알코올, 섹스)를 함께 나눈다. 그들에게 내일이란 없으며, 단지 지금 이 순간을 불살라버리는 일만이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총만 가지고 닥치는 대로 쾌락을 즐긴다. 여기에는 감정도 없고 터부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ldquo;오늘날, 1970년대와는 반대로 성적 환상은 순수성을 잃었다. 그 속에는 노여움이 섞여 있다.&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딘은 이 소설 어디에서 &ldquo;손에 어울리는 것, 그것은 총과 술병, 그리고 좆이다&rdquo;고 말한다. 두 명의 여주인공은 실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시고 또 아낌없이 총알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이 소설의 도발성은 여성 갱스터<sup>gangster</sup>의 출현에 있는 게 아니다. 그것만큼 현실적이지 않은 게 없기 때문이다. 하므로 무엇보다 도발적인 것은, 여성의 &lsquo;포르노적 욕망&rsquo;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나딘이 &ldquo;브뉴엘과 고다르의 비디오테이프 사이에서&rdquo; 포르노 테이프를 찾아내는, 그 한 장면으로 요약된다. 그 장면은 브뉴엘과 고다르 사이에 있고 싶은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데, 브뉴엘은 성을 통해 가부장화 된 부르주아 세계의 위선을 드러냈고, 고다르는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을 통해 똑같은 일을 했다. 여성 갱스터보다 더 큰 비중으로 독자를 압박하는 두 여주인공의 포르노적 욕망이야말로 &lsquo;가부장화 된 부르주아 세계에 대한 낯선 형식의 폭로&rsquo;가 아닌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딘과 마뉘가 파티마와 타레크 남매와 만나게 되는 17장 이후, 특히 두 여주인공이 건축가의 집을 털러 갔던 25장은 &lsquo;참 만화 같은&rsquo; 이 작품에 돌연 광채를 부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80"><span>사족. 이 소설은 작가 자신과 포르노 영화배우인 코랄리 트린 티의 공동 연출로 영화화됐다. 2000년 여름, 개봉된 지 이틀 만에 프랑스 최고 행정법원으로부터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행정법원에 불복하는 상영 투쟁 끝에, 영화는 2001년 여름 &lsquo;18세 미만 관람 불가&rsquo;라는 조건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인터넷을 통해 영화의 몇 장면을 사진으로 봤는데, 영화는 전혀 보고 싶지 않다. 25장이 돌연 빛낸 광채는 아무래도 영화에서 볼 수 없을 것이다.</span></span></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30 오전 11:28:00‘스틸라이프’ 16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353"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6%ED%9A%8C/16%ED%9A%8C.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첼로 12 (최종회)</span></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울로 돌아온 뒤 저는 떠나간 아내가 무척 그리웠어요. 사랑이 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착각이죠. 사랑은 내게 따뜻한 밥을 해주는 사람이어요. 적어도 제게는요. 물론 거꾸로 생각하면 따뜻한 밥을 마련할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겠죠.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이 그렇게 겸허하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밥이 해결되는 순간 금세 다른 욕망이 차오르는 게 인간이죠. 어쨌든 저는 아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내가 끓여주던 시금칫국이 너무 그리웠고요. 어느 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먹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lsquo;떠나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법&rsquo;이라는 문구가 떠오르더군요. 더 이상 뚱뚱하지 않은, 옛사랑 그녀가 들려준 말이라는 생각이 어슴푸레 들었어요. 우습지만 저는 포도를 발가락마다 끼워 넣고 출근을 했어요. 그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더군요. 제일 듣고 싶은 건 그 아무도 아닌 아내의 쓸쓸한 첼로 소리였어요. 도대체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자기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 모르는 채 우리는 온 삶을 낭비하죠. 제가 보고 싶은 딱 한 사람은 바로 제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난 아내였어요. 섹스보다 중요한 건 사랑이 묻어있는 스킨십이에요.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서로 껴안고 누워있는 시간, 어쩌면 섹스 후의 평화로운 스킨십이야말로 제가 꿈꾸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든 저는 미국에서 돌아온 몇 달 뒤 캄보디아 출장의 기회를 얻었어요. 정말 가보고 싶은 곳이었어요.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한 &lt;화양연화&gt;라는 영화는 제 청춘 시절에 본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어요. 뚱뚱한 내 사랑 그녀가 떠난 뒤 혼자 본 영화였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캄보디아의 거대한 앙코르와트 유적지에 쓸쓸히 서 있는 &lsquo;양조위&rsquo;의 모습이었지요. 마치 제 모습 같았어요. 어슴푸레한 기억을 지니고 그 마지막 장면에 관해 컴퓨터에 클릭을 해보니 누군가 이렇게 썼더군요. 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자막에는 이렇게 씌어있더래요. &ldquo;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씨엠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수영장이 아름다운 호텔에 짐을 풀었어요. 크메르 왕국의 영화로움을 재현해 놓은 듯 아름다운 호텔이었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lsquo;히틀러&rsquo;와 &lsquo;폴 팟&rsquo;이에요. 그 아름다운 크메르 왕국을 킬링필드로 만든 폴 팟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어요. 중학교 이상 학력을 지닌 사람은 닥치는 대로 데려다가 비닐봉지로 얼굴을 씌워 숨통을 막아 죽인 장본인이 바로 폴 팟이에요. 전국에 의사가 7명 남아 환자를 치료할 수도 없었다더군요. 어쩌면 제가 전생에 앙코르와트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벽돌을 나른 크메르인이었는지 모르죠. 아- 앙코르와트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저는 대충 일을 마치고 해질 무렵 앙코르 톰에 올라 일몰을 바라보았어요.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제가 마치 영화 속의 왕조위가 된 기분이었어요. 아쉬운 기분을 뒤로하고 앙코르와트를 내려와 야시장엘 갔어요. 왠지 제 발길을 끄는 골동 가게 안으로 들어섰는데, 정말 놀랍게도 아내와 너무 닮은 여인이 오래된 첼로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고 있었어요. 하지만 분명 아내는 아니었어요. 저는 이 세상에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꿈이었을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아내가 첼로를 켜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첼로를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고 있던 아내를 닮은 여인은 그 첼로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서툰 영어로 말하더군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연주를 하려 해도 소리가 나지 않더래요. 어쩌다가 캄보디아까지 흘러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더군요. 저는 직감으로 알았어요. 그 소리 나지 않는 첼로는 틀림없이 뚱뚱한 내 사랑 그녀의 첼로였어요. 아니 제 첫사랑 선생님이 커다란 트럭같이 생긴 택시에서 들고 내리던 바로 그 첼로였어요. 얼마냐고 물었더니 달러로 천 불을 달라더군요. 원래는 무지하게 비싼 첼로인데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에 싸게 주는 거라 하더라고요. 저는 두말 않고 그 첼로를 샀어요. 돌아와 거실에 두고 저는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요. 저 첼로를 소리 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제 아내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왜 우리는 늘 한 발자국 늦는 걸까요? 저는 지나간 날들을 생각했어요. 오래도록 닦지 않아 먼지 낀 창틀을 통해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텔레비전을 켜니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가 들려왔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1-30 오전 10:37:00데일리의 ‘우리 서로 사랑할 때에’<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4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ED%91%9C%EC%A7%80_600(1).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1.jpg" /><br /> <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4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2.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세상 모든 일에는 &lsquo;시작하는 때&rsquo;와<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4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3.JPG" /></p> <p style="text-align: center">&lsquo;마무리 하는 때&rsquo;가 있습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4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4.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예쁜 아기와 귀여운 송아지가 태어날 때가 있고<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4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5.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언젠가 나이가 들어 하늘나라로 갈 때가 있지요.<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39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6.jpg" /></p> <p style="text-align: center">봄에는 땀 흘리며 씨앗을 뿌리고<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39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7.jpg" /></p> <p style="text-align: center">가을에는 즐거이 노래하며 열매를 거두지요.<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1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8.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앗아야 할 때가 있고<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21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9.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서로를 위해 정성껏 치료해 주어야 할 때가 있어요.<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1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10.jpg" /></p> <p style="text-align: center">낡은 집을 허물어야 할 때가 있고<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600" height="21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11.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새 집을 지어야 할 때가 있지요.<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hellip;중략&hellip;)<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0_%EC%9A%B0%EB%A6%AC%20%EC%84%9C%EB%A1%9C%20%EC%82%AC%EB%9E%91%ED%95%A0%20%EB%95%8C%EC%97%90/%EC%9A%B0%EB%A6%AC%EC%84%9C%EB%A1%9C%EC%82%AC%EB%9E%91%ED%95%A0%EB%95%8C_end(1).jpg" /></p> <p style="text-align: center">이렇게&hellip;&hellip; 세상 모든 일에는<br /> &lsquo;시작할 때&rsquo;와 &lsquo;마무리할 때&rsquo;가 있답니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 작은 씨앗 하나가<br /> 지금 당장은 볼품없고 연약해 보일지 몰라도,<br /> 멋지고 늠름한 나무로 자라나면<br /> 맛있고 싱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문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글&middot;그림 쥬드 데일리 <br /> </strong>아일랜드의 신데렐라 이야기인 『작고 파란 슬리퍼』를 비롯하여 『태양의 선물』, 『코끼리의 베개』등 많은 어린이책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어요. 이 책들은 대부분 훌륭한 그림책에 수여하는 상을 받았답니다. 지금은 화가이자 작가인 남편과 함께 남아프리카에서 행복하게 지내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노경실</strong><br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난 &lsquo;강아지&rsquo; 띠입니다.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으며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누나의 까만 십자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오목렌즈』가 당선되었습니다. 그동안 『상계동 아이들』, 『복실이네 가족사진』, 『동화책을 먹은 바둑이』 등 많은 동화책을 발표했으며, 요즘에는 『철수는 철수다』, 『열일곱, 울지 마!』 등 청소년소설도 열심히 쓰고 있어요. 그리고 『애니의 노래』, 『지구가 100명의 마을이라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조지아 오키프, 하늘을 그린 화가』 같은 좋은 외국책들을 찾아내어 우리말로 옮기는 일도 하고 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27 오전 11:10:00김성희 외 ‘떠날 수 없는 사람들’<img alt="" width="600" height="8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EB%96%A0%EB%82%A0%EC%88%98%EC%97%86%EB%8A%94%EC%82%AC%EB%9E%8C%EB%93%A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용산참사</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그 후<br /> 변한 것은 <span style="font-size: x-large">아무것도</span> 없었습니다</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취재를 하러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용산참사로 여섯 명이 돌아가셨는데 변하지 않는 현실이 어깨를 짓눌렀습니다. 두려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또 다시 마주해야 할 절망을 과연 우리가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지&hellip;&hellip;, 철거민 안으로 들어가 그이들 목소리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을지&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용산참사가 일어난 뒤에도 전혀 바뀌지 않는 잔인한 강제철거의 현실을 꼭 이야기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철거 지역에 갔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들 너무나 외롭고 힘겹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몇 년째 천막생활을 하면서 용역깡패한테 맞아 머리가 터지고 성추행을 당해도, 경찰과 정부는 도움은 못 줄 망정 용역을 두둔하고 철거민들에게는 벌금을 때립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나라가 가입해 있는 유엔에서 &lsquo;세계인권선언(1948년)&rsquo;을 선포했습니다. 유엔에 가입한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의, 식, 주를 포함해 가족의 건강과 행복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거민들이 주거권 보장을 주장하는 건 마땅한 권리이고, 지방자치단체와 국가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용역깡패가 휘두르는 살인적인 폭력을 모른 체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용산참사로 평범한 사람들이 여섯이나 목숨을 잃었는데 정부는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금을 내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면서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철거민들을 떼쟁이로 매도하고 폭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변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도 신문과 방송에서는 철거민 문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lsquo;가해자&rsquo;들이 바라는 대로 철거민 문제는 사람들 기억에서 점점 더 빠르게 잊혀 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 제2, 제3의 용산참사가 일어날까 두렵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철거지역에서 싸우고 있는 분들은 대부분 여성입니다. 용역깡패는 이분들 머리채를 휘어잡고, 얼굴을 때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댑니다. 내 어머니 같은 분들이 겪는 고초를 보면 &lsquo;차라리 이사를 가시지&hellip;&hellip;.&rsquo;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철거민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철거민들을 만나면서 그 절망에 함께 힘겨워하기도 하고 그분들 특유의 강인함에 오히려 우리가 힘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곳에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인사를 하셨습니다. 고생 많다고 밥 먹고 가라며 따뜻한 밥을 챙겨 주시던 투박한 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외롭고 힘겹게 싸우고 있는 철거민들에게 힘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철거민들을 &lsquo;돈 몇 푼 뜯어내려고 하는 떼쟁이&rsquo;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입자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당연한 권리를 바라는 것임을 모두가 알게 되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하루빨리 철거민을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이 보호받는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월이 흘러흘러 다음 세대가 이 책을 읽었을 때 &ldquo;이런 무지막지한 일이 있었다니, 지금은 정말 좋아졌네.&rdquo;라고 말하는 세상이.</p> <p style="text-align: right"><br /> 2012년 1월<br /> 김성희, 김수박, 김홍모, 심흥아, 유승아, 이경석</p> <p><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23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2.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3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4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5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6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7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8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79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0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1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2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3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4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5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6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7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8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89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0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1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2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3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4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5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6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7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6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8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6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99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100_600(1).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101_600.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1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9_%EB%96%A0%EB%82%A0%20%EC%88%98%20%EC%97%86%EB%8A%94%20%EC%82%AC%EB%9E%8C%EB%93%A4/102_600.jpg" /><br /> <br /> <br /> (여는 글, &lsquo;그 길 옆에&rsquo; 편 전문)<br /> <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김성희</strong><br /> 대학 신문에 만평을 실은 것을 계기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전문사 과정을 밟으면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어린이 교양 잡지 『고래가 그랬어』에 &lsquo;뚝딱뚝딱 인권짓기&rsquo;를 6회 연재했고, &lt;컬처뉴스&gt;에 &lsquo;김성희의 페이지&rsquo;를 연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몹쓸년』이 있고, 만화집 『내가 살던 용산』에 참여했다. 이 밖에 『인생지혜사전』, 『유쾌한 유머』, 『꿈꾸라』, 『나를 이겨라』 등에 그림을 그렸다.<br /> &nbsp;<br /> <strong>김수박</strong><br /> 건축 디자인을 전공했다. 대학 신문에 시사만화를 연재하면서 만화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오늘까지만 사랑해』, 『아날로그맨』, 『사람의 곳으로부터』, 『내가 살던 용산』(공저) 등이 있다.<br /> &nbsp;<br /> <strong>김홍모</strong><br />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2003년 인터넷한겨레에 &lsquo;김홍모의 시가 펀치&rsquo; 연재를 시작으로, 지은 책 『내가 살던 용산』(공저), 『두근두근 탐험대』, 『사격장 아이들』 등이 있다. 현재 헤이리 예술 마을에서 &lt;뜬금없이 만화방&gt;을 운영하며 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며 바쁘게 살고 있다.<br /> &nbsp;<br /> <strong>심흥아</strong><br /> 지은 책으로 『우리, 선화』가 있으며 &lt;인터넷한겨레 훅&gt;에 &lsquo;카페 그램&rsquo;을, &lt;세상을 두드리는 사람&gt;에 &lsquo;다 아는 이야기&rsquo;를 연재하고 있다.</p> <p><strong>유승하</strong><br /> 대학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재미난 생각들을 그림책과 만화책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새싹만화상(신한은행 주최)을 받기도 했다. 만든 책으로는 『나운규』, 『아기오리 열두 마리는 너무 많아!』, 『아빠하고 나하고』, 『개와 고양이』 등 다수가 있다.</p> <p><strong>이경석</strong><br />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만화 &lsquo;을식이는 재수 없어&rsquo;를, 어린이 과학 잡지 『과학쟁이』에 만화 &lsquo;장독대 sf&rsquo;를 연재하고 있다. 만화 『속주패왕전』, 『전원교향곡』 등을 쓰고 그렸고, 어린이 책 『오메 돈 벌자고?』, 『형제가 간다』, 『안녕, 외계인』, 『서울 샌님 정약전과 바다 탐험대』, 『그래서 이런 지명이 생겼대요』, 『동물원이 좋아?』 등에 그림을 그렸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20 오전 10:54:00김성오의 ‘몬드라곤의 기적’<img alt="" width="600" height="8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8_%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책머리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1992년 9월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처음 번역해서 세상에 내놓았을 때, 나는 20대 후반의 야심만만하고 활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조직 활동과 집필이 생활의 전부였다. 낮에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조합원들을 교육하러 다녔고, 밤에는 새벽까지 글을 쓰는 바쁜 나날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협동조합주의자가 되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주의자가 되기 전, 그러니까 이 책을 만나기 전 1984년부터 90년까지 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며 실천하고 있었다. 노동야학과 위장취업, 노조 조직화와 사상투쟁으로 점철되었던 7년 내내 눈빛은 살기를 띠었고 체지방률은 제로에 수렴했다. 그즈음 내 또래의 선배, 후배, 친구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사실 앞으로 닥칠 전국적인 봉기에 대비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민중봉기가 먼저 일어난 곳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 동유럽의 &lsquo;동지국&rsquo;들이었다. 마오의 나라 중국 또한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북한의 경제난은 심화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련의 붕괴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 황당하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마음속 깊이 사모하고 있었다. 남자는 매일 그 여자를 생각하며 연애편지를 썼다. 하지만 소중한 이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조차 죄스러워 매일 새로 쓴 편지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7년쯤 지나, 남자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꿈에도 그리던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ldquo;실은, 난 여자 옷을 입고 다닌 남자다.&rdquo; 남자가 느꼈을 기막힘이 그때의 황당함과 비교될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 말 공장 활동을 접고 몇 개월간 앓아누웠다.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한 상태였다. 명상과 절, 독서와 등산으로 소일하며 짧지 않았던 20대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즈음 이남곡 선배로부터 몬드라곤 협동조합 이야기를 처음 듣고, 그와 관련된 책을 10여 권 얻었다. 세 권은 영어책이었고 나머지는 일어책이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윌리엄 화이트와 캐서린 화이트 부부가 쓴 Making Mondragon이라는 책으로, 바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의 원서이다. 번역은 약 1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사이 건강은 회복되었고 눈빛도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1992년, 나는 &lsquo;자본주의의 부정의와 사회주의의 비효율을 넘어선 정의와 효율의 통일&rsquo;이라고 책의 부제를 붙였다(복간본은 시대 변화를 감안해 &lsquo;해고 없는 기업이 만든 세상&rsquo;으로 부제를 바꾸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이 출간되고 일곱 해쯤 지나 미국 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한 뛰어난 사회학자 윌리엄 화이트 교수가 별세하셨다. 몬드라곤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내겐 큰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lsquo;10년에 한 번은 이 책을 개정해야 하는데, 누가 하지?&rsquo; 아니나 다를까, 2000년쯤부터 협동조합 종사자들이나 연구자들은 이 책의 후속판을 내야 한다고 나를 압박해왔다. 하지만 윌리엄 화이트 교수가 작고하신 마당에 그 일은 감히 진행하기 힘든 작업이었다. 시간도 없었지만 내 실력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이 출간되고 20여 년이 흘렀지만 나는 실천적인 면에서나 학문적인 면에서나 아직 한참 미숙성한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장운동에서는 성공보다 실패를 훨씬 더 많이 겪었고, 총기는 더욱 희미해지고 독서량은 줄었으며, 글쓰기는 더욱 낯설어졌다. 더욱이 2002년부터는 협동조합 현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협동조합주의자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최근 들어 나는 이 일을 더 미루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고 &lsquo;무모한 용기&rsquo;를 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2년 당시 나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었다. 몬드라곤을 통해 뭔가 다른 희망을 찾도록 돕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몬드라곤은 그때와 달리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아니면 제3의 무엇이냐 하는 거대 담론의 측면보다는 우리에게 좀 더 구체적이고 생활에 밀착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데 영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일자리 문제, 고용 문제이다. 더 나아가 몬드라곤의 경험은 우리에게 기존 &lsquo;성장 패러다임&rsquo;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을 찾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느낌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국민은 바야흐로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보편적 복지국가에 맞는 성장 패러다임을 새로이 마련하는 일이다. 『몬드라곤의 기적』 5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겠지만, 우리가 선택해야 할 성장은 &lsquo;행복한 고용, 질 좋은 고용을 위한 성장&rsquo;이라고 생각한다. 몬드라곤은 기업 차원에서 이런 성장 전략을 가장 명료하게 실천하고 있는 사례다. 나는 주로 이 문제에 집중하면서 『몬드라곤의 기적』을 구상했고,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한 글자 한 글자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독수리 타법에 의존해―나는 아직도 컴퓨터 한글 자판을 다 익히지 못했다―&lsquo;무모한 글쓰기&rsquo;를 감행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역사비평사의 처음 제안은, 옛날에 나왔다가 절판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의 번역을 다듬고 그 안의 「역자 보론: 진보운동의 새로운 방식과 한국 사회의 미래」 비중을 크게 늘려(보론이 아닌 본문의 한 꼭지로 구성) 변화된 상황과 발전된 논의를 반영한 새로운 책을 한 권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제안에 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윌리엄 화이트 교수의 마지막 저서이고 그 자체로 너무나 완벽한 연구보고서인 데다, 감히 나 따위가 손댈 수 없는 역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정 제안을 했다. 기존의 책을 용어나 어법만 현실에 맞게 약간 손봐서 복간하고, 1992년 이후 20여 년간 진행된 몬드라곤의 경험과 그것이 한국에서 가지는 의미 등을 새로 정리하여 다른 한 권으로 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 권은 번역서(『몬드라곤에서 배우자』), 또 한 권은 집필서(『몬드라곤의 기적』)라는 독특한 2부작의 조합이 만들어졌다. 내 제안을 기꺼이 받아준 역사비평사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그리고 돌아가신 윌리엄 화이트 교수께는 나의 무례함에 대해 마음속 깊이 사죄드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다시 읽으면서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큰 감동을 받았다. 1940년대 초부터 시작된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과 초기 설립자들의 희생과 열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들이 눈앞에 닥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온 긴 과정에서 노동자생산협동조합의 원칙, 즉 자본 주도가 아닌 노동 주도의 기업 운영 원칙을 견지하기 위해 지새웠을 불면의 밤들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점점 거칠어지는 시장 환경 속에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시장의 승자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원칙도 지켜야 했던 이중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년 전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이미 읽어본 독자들은 이번에 다시 한번 3부와 4부를 다시 한 번 정독해주길 바란다. 만약 몬드라곤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몬드라곤의 기적』 1부와 2부를 먼저 읽은 뒤에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읽어볼 것을 권한다. 혹은 2011년 3월에 방영된 &lt;KBS 스페셜&gt;의 &lsquo;몬드라곤의 기적&rsquo;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먼저 감상하고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읽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 프로그램은 내가 화이트 교수의 책을 번역하기 전 참고했던 1980년대 초반 영국 BBC 제작 영상물보다(한살림에서 김민기 씨의 목소리로 더빙했다) 화질이나 내용 모두에서 한 단계 진전된 작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몬드라곤의 기적』 1~3부에서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현황과 조직구조, 최근 20여 년간의 진화 과정, 그리고 몬드라곤 협동조합의 원칙을 살펴보았다. 이 부분은 주로 몬드라곤 그룹이 공식 발표한 자료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발표된 연구논문들을 참고했다. 특히 1998년부터 매년 공개된 「애뉴얼 리포트」와 홈페이지에 밝힌 그들의 공식 입장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원칙 부분에서는 국제협동조합연맹이 발표한 몇몇 보고서들도 참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의 기적』 4부에서는 몬드라곤의 미래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했다. 특히 4부 11장에서는 몬드라곤과 현대자동차를 비교하면서 몬드라곤을 우리 옆으로 가까이 당겨놓으려 시도했다. 기업지배구조와 고용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노동운동가들에게 참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부 12장에서는 몬드라곤의 미래를 염려하며 몬드라곤 사람들에게 두 가지 제안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의 기적』 5부와 6부야말로 내가 무모한 글쓰기를 결심하게 된 계기였음을 밝힌다. 5부에서는 몬드라곤의 경험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성장 패러다임을 시사하는지 살펴보았다. 기업 활동의 최종 목표는 수익 확대인가, 아니면 고용 확대인가? &lsquo;자본의 도구적 종속적 성격&rsquo;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런 문제들을 살피면서 성장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전환을 강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6부에서는 한국에서 1990년대 이후 겪은 경험과 현황을 간략하게 짚어보고 독자들께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이 제안은 내가 협동조합주의자로서 남은 인생을 바치고자 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 변화, 그리고 고용 문제 해결과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마지막으로, 이 책을 쓰면서 마음에 품었던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나의 진화론적 관점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기업지배구조는 기업의 오랜 역사 동안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다. 나는 협동조합주의자이지만 협동조합 형태가 전 사회에 단 하나의 기업지배구조로 자리 잡는 일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협동조합은 기업지배구조의 여러 형태 중 하나이고, 그 자체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기업과 관련된 당사자들, 즉 경영자, 노동자, 소비자, 우리 모두의 의지이다.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기업지배구조 진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형태가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선호 또한 바뀔 것이다. 진화의 종착점 같은 건 없다. 단지 자본수익률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대주주 중심의 기업지배구조와 공기업 형태의 기업지배구조에 더해, 협동조합 형태의 기업지배구조가 선택지의 하나로 자리 매김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럴 경우 진화는 한층 역동적인 과정이 될 것이고, 협동조합 인자가 진화의 우성인자인지 열성인자인지에 대한 판단은 지금보다 훨씬 공정해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 한 번도 원고를 채근하지 않고 내게 편안한 집필 기회를 준 역사비평사 식구들께 감사드린다. 자료 찾기와 영어 번역을 도와준 친구 김소강, 후배 박노근 광운대 교수, 한국의 다양한 자료들과 프랑스어 자료를 찾아준 김신양, 장종익 씨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1년 10월, 김성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br /> 몬드라곤의 현황과 조직구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몬드라곤이란 무엇인가</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몬드라곤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에 위치한 도시 자체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 1940년대부터 주임신부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의 주도로 시작된 노동자생산협동조합운동을 일컫기도 한다. 몬드라곤은 1956년 가스난로와 가스취사도구를 만들었던 첫 번째 협동조합 &lsquo;울고&rsquo;가 설립된 이후 1960~1980년대를 거치면서 거대한 협동조합으로 성장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0년 현재 몬드라곤은 약 260개 회사가 금융, 제조업, 유통, 지식 등 4개 부문을 포괄하는 하나의 기업 집단으로 조직되어 있다. 한국으로 따지면 일종의 재벌 기업이라 할 수 있는데, 단지 그 주인이 특정 가문이 아니라 회사에서 직접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몬드라곤은 노동자들이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자를 선임하며 경영 전체를 관리&middot;감독하는 체제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업의 전체 자산은 우리 돈으로 환산할 때 약 53조 원, 제조업과 유통업 부문의 2010년 한 해 매출은 대략 22조 원 정도 규모이다. 약 8만 4,000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3만 5,000여 명이 출자금을 낸 노동자 조합원, 즉 주주들이고 나머지는 점차 조합원으로 전환되고 있는 비조합원 노동자들이다. 해외에 80여 개에 가까운 생산공장을 갖추고 있으며, 제조업 매출의 약 60%는 수출을 통해 올린 해외 매출이다. 제조업에서 핵심 사업은 가정용품의 생산&middot;판매로, &lsquo;파고르&rsquo;라는 브랜드가 널리 알려져 있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남아메리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파고르 브랜드의 냉장고나 세탁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은 삼성이나 엘지 등 워낙 세계적인 가전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진출하지 못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몬드라곤에 소속된 유통 부문의 핵심 기업 &lsquo;에로스키&rsquo;는 소비자협동조합이며, 스페인과 프랑스에 약 2,100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홈플러스나 이마트 정도의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금융 부문의 핵심 기업인 &lsquo;노동인민금고&rsquo;는 스페인에서 5위권 안에 드는 대형 은행으로, 전국에 420여 개의 지점을 갖고 있다. 이 밖에도 몬드라곤에는 공학부&middot;경영학부&middot;인문학부를 포괄하는 몬드라곤대학교가 있고, 바스크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연구소들이 소속되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모든 일을 지난 55년 동안 평범한 노동자 조합원들이 이뤄냈다. 이 책의 전사前史격인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1940년대부터 1980년대 말까지 몬드라곤의 초기 형성 과정과 정착 과정을, 이 책은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변화를 다룬다.</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01 <br /> 1992년 이후의 주요한 변화</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협동조합의 통합 : 민주와 집중, 분산과 효율의 문제</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1941~1990년까지 몬드라곤의 역사를 다룬 『몬드라곤에서 배우자』</b></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전사前史격인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는 미국에서 1988년에 초판, 1991년에 증보&middot;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 책에서 화이트 부부(Whyte William Foote &amp; Whyte Kathleen King)는 호세 마리아 아리스멘디아리에타 신부가 몬드라곤에 도착한 1941년부터 시작하여 1956년 첫 번째 협동조합 울고의 탄생, 노동인민금고와 사회보장협동조합 라군-아로의 설립, 그리고 기술연구소와 학교 설립까지 다루고, 이후 1980년대 전반의 극심한 불황기에 몬드라곤이 그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갔는지에 대해 썼다. 화이트 부부가 처음 집필할 당시의 다소 불명료했던 몬드라곤 전체의 변화에 대해서는 개정판에서 보강했다. 하지만 그 책의 개정판이 출간되는 시점부터 몬드라곤의 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몬드라곤의 통합 작업</b></p> <p style="text-align: justify">변화는 몬드라곤 협동조합을 명명하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명칭이 바로 &lsquo;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Mondragn Corperacin Cooperativa, 약칭 MCC)&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까지 몬드라곤은 120여 개가 넘는 개별 협동조합들의 느슨한 연합체였는데, 노동인민금고와 &lsquo;연합협정&rsquo;―이 협정은 일정한 구속력을 갖고 있었다―을 맺은 여러 제조업협동조합들이 활동했다. 연합협정에는 개별 협동조합이 지켜야 할 협동조합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었고, 노동인민금고는 이를 지키지 않으면 거래를 끊는 방식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어두고 있었다. 제조업협동조합 외에 이를 지원하는 사회보장협동조합 라군-아로, 기술연구소, 기술학교 등 지원적 성격의 협동조합, 그리고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군-아로는 몬드라곤 노동자 조합원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사회보장 시스템으로, 협동조합의 노동자 조합원들이 노동자도 자영업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스페인의 국가적 사회보장 시스템에서 불이익을 받게 되자 스스로 만든 조합이다. 라군-아로는 의료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의 기능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조업협동조합과 노동인민금고, 사회보장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 그리고 기타 지원 협동조합 전체를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은 없었다. 이들이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편제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986년 들어 이들 전체를 묶는 &lsquo;협동조합 의회(MONDRAGON Congress)&rsquo;라는 대의기구가 출범했다. 그 산하에는 상임위원회(Standing Comitee)와 총이사회(General Council)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통합 명칭을 &lsquo;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rsquo;라고 붙였는데, 이 명칭은 1991년부터 2006년까지 15년 동안 통용되었다. 1991년이 되어서야 이들은 비로소 이름을 갖고 하나의 통합된 조직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름은 2006년 몬드라곤의 첫 번째 협동조합 울고 설립 50주년을 맞이했을 때 다시 한 차례 바뀐다. 현재 이들이 사용하는 통합 명칭은 그냥 &lsquo;몬드라곤(MONDRAGON)&rsquo;이다. 이 이름을 채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세월이 흘러 2세대 조합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몬드라곤의 노동자 조합원들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작용했고, 또 다른 하나는 몬드라곤 바깥의 많은 사람이 그저 몬드라곤이라고 부르는 데 더 익숙하다는 점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8_%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8_%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91년 이후 몬드라곤은 통합 명칭과 통합 조직을 갖추는 데서 더 나아가 소속 협동조합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통합했다. 노동인민금고와 라군-아로를 중심으로 한 금융 그룹, 파고르 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 그룹, 에로스키 소비자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유통 그룹, 그리고 기술연구소와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연구&middot;교육 그룹 등 4개의 그룹이다. 제조업 그룹은 업종별로 7개(2003년부터는 8개) 소그룹으로 편재되었다. 이 조직체계는 2006년 이름이 바뀌는 것과 함께 다시 한번 변화되었다. 즉 4개의 그룹은 금융 부문, 제조업 부문, 유통 부문, 지식 부문으로 명칭이 재편되었다. 제조업 부문은 기존 8개 소그룹에서 12개 소부문으로 세분화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이 통합 경영체계를 갖춘 것은 1986년에서 1992년까지 진행된 유럽의 경제통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세계화의 과속 진전에 대응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몬드라곤은 1990년에도 제조업 부문 생산량의 30%가량을 해외에 판매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스페인 내수 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70%였다. 유럽 시장이 통합되면서 관세장벽이 철폐됨에 따라 스페인 내수 시장에서 유럽의 초국적 기업들과 관세 프리미엄이 없는 진검승부를 펼쳐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몬드라곤 사람들은 기업 내부 혹은 협동조합 간 연대에서 &lsquo;효율과 집중&rsquo;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통합 작업을 위한 토론은 1년이 채 걸리지 않아 1991년 &lsquo;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MCC)&rsquo;의 형성으로 결론이 났다. 짧은 기간이지만 몬드라곤 사람들은 이 같은 변화의 방향에 대체로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 파고르의 이사장 헤수스 헤라스티는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는 유럽 통합과 개척자들(협동조합 설립자들)의 은퇴라는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위기 국면과도 겹치고 있다. (&hellip;)<br /> 새로운 틀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과 함께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은 바로 제품일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파고르 협동조합의 경영자 중 한 사람은 몬드라곤의 통합을 가능케 한 추동력이 &lsquo;성숙한 조직에서의 예측 가능한 발전 단계&rsquo;라고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협동조합들은 협동조합으로서 효과적으로 일할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할 의지 부족에 직면했다. 노동자 참여에 의한 전통적 방식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고 젊은 세대는 다른 곳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여하려고 한다. 개인주의가 더 성행하고,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줄고 있으며, 더 많은 보수만 원하고 있다. 그들은 더 크고 더 능력 있게 보이도록 이미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이런 능력을 갖기 위해 얼마나 더 커져야 할지 알 수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통합은 몬드라곤에 몇 가지 중요한 이점을 제공했다. 일단 몬드라곤의 모든 협동조합과 기업이 통일된 상표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통일된 상표는 몬드라곤 전체의 경쟁력을 강화시켰고 인적자원과 기술자원을 비롯하여 모든 자원을 효과적으로 배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개별 협동조합들은 일정한 독립성과 함께 통합의 이점도 공유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민주와 집중, 분산과 효율이라는 오래된 논쟁, 그 속의 몬드라곤</b></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러한 통합 경영체계를 만든 몬드라곤은 협동조합을 비롯한 모든 조직과 단체의 진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lsquo;해묵은&rsquo;, 하지만 &lsquo;결코 사라질 수 없는&rsquo; 영원한 논쟁 주제와 본격적으로 맞부딪쳤다. 바로 민주와 집중, 분산과 효율의 문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은 산업혁명 시기에 탄생한 뒤로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학교 역할을 담당해왔다. 1800년대 중반 로치데일 소비자협동조합이 영국에서 시작된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까지 미국이나 유럽에서조차 여성이 남성과 똑같이 동등한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던 곳은 혁명적인 노동조합을 제외하곤 협동조합이 유일했다. 당시 노동조합에 여성 노동자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협동조합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관이었다.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모두 평등한 주체로 인정되었고, 협동조합은 &lsquo;1인 1표&rsquo; 원칙에 기반한 민주적 원리로 운영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의 권력은 조합원들에게 평등하게 분산되어 있었다. 이들은 경영자를 선출하고 매년, 매분기 협동조합의 사업 실적을 보고받는다. 협동조합 경영에서 발생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조합원들의 판단에 맡겨진다. 물론 조합원들에 의해 선출된 경영자가 권한을 남용하여 과도한 결정권을 휘둘렀던 사례가 과거에 많이 존재했고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사례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으로 경영자는 3~4년에 한 번씩 재선출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뿐 아니라 모든 협동조합운동에서 조합의 규모가 커지고 동일한 종류의 협동조합들이 각 지역에서 많이 생겨날 경우, 이들 간에 연합체가 만들어지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세계경제에서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자본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협동조합 간의 연대와 연합은 협동조합의 시장 영향력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 간의 연합은 대개 동일한 종류의 협동조합들에서 먼저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농협중앙회, 신협중앙회, 새마을금고연합회, 생협연합회 등은 전국 어디를 가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동일 종류 협동조합 연합이다. 이렇게 동일 종류 협동조합의 연합체가 만들어져 사업적 측면의 연대가 이루어질 경우에는 언제나 민주와 집중, 분산과 효율이라는 논쟁 주제에 부딪치게 된다. 연합이 이루어지기 전에 개별 협동조합원들이 갖고 있던 결정권은 연합체가 구성된 후 약화되는 경향을 띤다. 연합기구로 권력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일반적인 데다, 개별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은 이 권력 기회에서 하찮은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연합기구의 사람들은 협동조합 전체의 &lsquo;효율&rsquo;을 위해 이런 현상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하고, 심지어 자신들에게 집중되는 권력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협동조합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조직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일 종류의 협동조합 간 연합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들 간에도 연대와 연합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서는 2001년 처음 &lsquo;한국협동조합협의회&rsquo;가 만들어졌는데, 1년에 한 번씩 각 협동조합의 중앙회장들이 만나고 있다. 유럽에는 전국적인 협동조합 연대기구가 복수로 존재하기도 하는데, 이탈리아의 경우 정치적 성향에 따라 좌, 우, 중도적 성격의 협동조합 연합기구가 있다. 북유럽에서는 협동조합의 전국 연합기구들이 &lsquo;협동조합 블록&rsquo;을 형성하여 기존 협동조합의 발전과 신규 협동조합의 촉진을 도모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 간 연대와 연합은 사업적 측면보다 협동조합운동의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 세계 협동조합의 연합기구로는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운동에서 벌어지는 연대&middot;연합의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간 연대는 서로 다른 종류의 협동조합들을 하나의 사업체로 묶은 매우 특이한 모습을 띠고 있다. 몬드라곤은 일반적인 협동조합 연합체라기보다는 오히려 &lsquo;기업 집단&rsquo;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몬드라곤의 상임위원회와 총이사회는 기업 집단의 전략기획 부서 또는 사장단 회의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경영 정보의 취득과 처리 능력에서 개별 협동조합의 경영진이나 조합원들에 비해 훨씬 앞서 있다. 1998년 몬드라곤의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인 파고르의 경영진은 &lsquo;몬드라곤 협동조합 복합체(MCC)&rsquo; 경영진에게 보낸 네 가지 우려 사항 중의 하나로 권력이 최고위층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현재진행형의 사례, 몬드라곤</b></p> <p style="text-align: justify">1980년대까지 &lsquo;민주와 분산&rsquo;의 원칙에 충실한 몬드라곤을 접했던 외부인들에게 1990년대 이후의 변화는 몬드라곤을 훌륭한 협동조합에서 &lsquo;그렇고 그런&rsquo; 기업 집단으로 타락시킨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1992년 『몬드라곤에서 배우자』가 출간된 이후 몬드라곤에 열광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몬드라곤의 변화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과 많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와 집중, 분산과 효율에 관한 오래된 논쟁은 1992년 이후 몬드라곤의 변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좀 더 차원 높은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듯하다. 협동조합은 시장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운동으로 존립할 수 없다. 하지만 존립 자체가 협동조합의 목표는 아니며 존립시키는 과정에서 협동조합 본연의 원칙이나 이상을 잃어버리고 평범한 기업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협동조합은 자신을 존립시킴으로써 주변에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하고,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경영 모델을 재생산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1956년 첫 번째 협동조합 울고가 설립된 이래 몬드라곤 사람들이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했던 숱한 고민들은 &lsquo;몬드라곤 경험&rsquo;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어디까지를 반드시 고수해야 할 원칙으로 설정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그들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우리는 몬드라곤의 경험을 완성된 본보기나 지고지순의 사례로 받아들여서는 결코 안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lsquo;현재진행형의 사례&rsquo;로 몬드라곤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지가 초점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3366ff"><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몬드라곤의 글로벌화</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해외 고용 비중의 확대</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통합 다음으로 몬드라곤에서 일어난 두 번째 큰 변화는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라고 할 수 있다. &lt;그림 1-1&gt;에서 보듯 1989년에는 제조업 전체 매출의 약 25%가 해외 매출이었는데, 2009년에는 비중이 60%로 늘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3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8_%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EA%B7%B8%EB%9E%98%ED%94%841_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고용의 측면에서도 해외 고용의 비중이 점점 확대되었다. 2009년에는 현재 몬드라곤 전체 고용의 약 19%인 16,000여 명이 해외 고용 형태였다. 전체 고용 중 39.4%는 바스크 지역에, 41.6%는 바스크 이외의 스페인 지역에 존재했다. 해외 고용의 비중은 바스크 지역 고용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고 있다. 이런 수치로만 본다면 몬드라곤은 이미 글로벌화된 초국적 기업 집단의 성격을 갖고 있다. 해외 고용의 비중은 2010년 현재 18개국 77개의 생산설비 및 공장과 9개 해외 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 숫자이다. 해외 생산설비는 2000년 이후 매년 평균 4~5개씩 늘어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되었다. 1998년 몬드라곤의 한 핵심 경영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스페인은 막 유럽공동체에 가입할 참이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들어오는 제품들에 강력한 관세를 부과하고 있었는데, 반대로 스페인에서 유럽으로 나가는 제품들에는 관세가 없었다. 몇 년 후 관세는 없어졌다. 나는 관세가 사라지고 모든 나라의 제품이 스페인에 들어오게 된 것이 1986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지난 몇 년간 가장 중요한 경제적 변화는 각국 경제의 세계화 과정일 것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세계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단계는 생산설비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든 생산라인과 제품을 완전히 혁신했다. 두 번째 단계는 더욱 공격적으로 전개했는데,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확대하는 것이었다. (&hellip;) 우리는 세계화에 대응하기로 결정했지만, 당시 해외 사업에 대한 경험은 매우 일천한 수준이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몬드라곤 글로벌화의 두 가지 방향</b></p> <p style="text-align: justify">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1990년 이후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협동조합 간의 국제적 연대이고, 다른 하나는 비협동조합 기업으로의 확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자의 경우 몬드라곤은 유럽 시장이 통합되고 세계화가 급진전되는 환경에서 사이올란 교육협동조합을 통해 협동조합적인 기업 경영의 원칙을 조합원들과 경영진에게 교육시키고, 훈련된 인력을 국제통으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국제협동조합연맹을 비롯한 전 세계 협동조합 연합기구들과 연대 활동을 강화해나갔다. 이 과정은 전통적인 협동조합운동 원칙과 아무런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자이다. 몬드라곤은 1980년대 불황을 경험한 후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리하여 1990년부터 외부에 대한 협력 투자를 본격화해 인수&middot;합병뿐 아니라 합작회사 설립 및 R&amp;D(research and development)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합작회사와 몬드라곤이 독점적으로 소유한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은 이제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고용 확대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7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8_%EB%AA%AC%EB%93%9C%EB%9D%BC%EA%B3%A4%EC%9D%98%20%EA%B8%B0%EC%A0%81/%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3.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66ff"><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 가지는 확실하다. 만일 내가 아르헨티나나 중국, 모로코나 그 밖의 다른 곳에 있게 된다면 아랍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는 점. 또 남미나 중국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제품을 아직 사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 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게 열려 있는 중국에서 그들이 물건을 어떻게 구매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아르헨티나에서 반드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할 사명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의 프로젝트가 더욱더 발전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lsquo;머리&rsquo;는 여기에 있지만 &lsquo;발&rsquo;은 &lsquo;몸&rsquo;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992년 이후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는 주식회사 형태의 합작회사와 다양한 형태의 자회사 설립, 기업의 인수&middot;합병 등을 공격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몬드라곤의 주요 해외 생산설비가 있는 러시아, 멕시코, 중국, 브라질을 비롯한 동유럽과 인도, 동남아시아 등에서는 몬드라곤과 같은 협동조합 법인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곳에 몬드라곤이 투자한 생산설비들이 주식회사나 사기업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스페인 내 바스크 이외의 지역에서도 이런 종류의 합작과 주식회사 형태의 자회사들이 설립되었다. 특히 유통 부문의 자회사들은 상당수가 비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결과 몬드라곤에 소속된 260여 개 회사 가운데 대략 절반만 협동조합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2007년 몬드라곤의 유통 부문 핵심 기업인 에로스키의 조합원 총회에서는 수년 내에 자회사 모두를 협동조합 법인으로 바꾸고 비조합원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전환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실행된다 해도 30% 이상의 기업들은 여전히 협동조합이 아닌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글로벌화 전략에서 나타나는 문제점</b></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이 경우 어떤 문제들이 제기될 것인가? 가장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몬드라곤의 글로벌화를 &lsquo;다국적기업 행태를 동반한 저임금 노동력 착취&rsquo;로 본다. 그들은 이를 논증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를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번째 사례는 몬드라곤 제조업 부문의 오래된 협동조합인 코프레시와 관련 있다. 코프레시는 1963년에 설립된 전자부품 제조 회사인데, 미국 수출을 늘리기 위해 1980년대 후반 멕시코 공장을 지었다. 또한 2000년대 들어 미국으로 수출하는 물량의 상당 부분은 중국 공장에서 생산된다. 멕시코 공장의 노동자들은 스페인에 있는 코프레시 노동자 조합원들 평균 급여의 1/5을, 중국 노동자들은 대략 1/15을 받는다. 물론 멕시코나 중국의 몬드라곤 노동자들이 현지의 다른 회사 노동자들보다 급여가 낮지는 않지만, 이는 몬드라곤의 심각한 급여 불균형이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사례는 2004년 6월 몬드라곤 제조업 부문의 핵심 기업인 파고르 전자가 프랑스의 가전기업 브란트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파고르는 브란트를 인수한 후 원가절감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리옹과 또 한 지역의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했다. 이 과정에서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리옹의 노동자들은 몬드라곤이 기업을 인수&middot;합병하고 합병된 기업을 하청계열화하는 것과 자신들을 하청노동자로 전락시키는 것이 다른 다국적기업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방송은 이들의 투쟁 과정을 그린 &lt;파고르 사람들과 브란트 사람들&gt;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내보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작품은 파고르 전자의 평화롭고 안정된 협동조합 조합원 노동자들과 고용 불안에 떠는 브란트의 임금노동자들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2008년 &lsquo;아미엥 국제영화제&rsquo; 2등상을 수상했다. 어떤 사람들은 몬드라곤의 이러한 기업 인수 과정을 지켜보면서 몬드라곤의 발전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을 이류 노동자로 전락시키는 &lsquo;경제적 인종주의&rsquo;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보통의 다국적기업이 대주주들을 위해 하청 자회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몬드라곤 역시 스페인 바스크 지역 노동자 조합원들을 위해 다른 지역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적극적인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는 몬드라곤이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 것이다. 스페인의 노동자 조합원들과 멕시코, 중국의 노동자들, 그리고 브란트의 노동자들이 비슷한 급여 수준을 책정받고 동일한 복지 혜택을 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단 말인가? 협동조합의 창시자 로버트 오언이 살아 돌아와서 다국적 방적 공장 &lsquo;글로벌 뉴라나크&rsquo;를 만든다 해도 실현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몬드라곤은 세계화 과정에 반대하면서 스페인의 &lsquo;바스크 둥지&rsquo;에 머물러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럴 경우 과연 몬드라곤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문제는 4부 &lsquo;몬드라곤의 미래&rsquo;에서 좀 더 자세히 논의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책머리에,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김성오</strong><br /> 7년간 노동야학과 노동 현장을 돌며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했다. 1990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한동안 법륜 스님이 운영하는 절에서 기거하며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를 번역하고 협동조합주의자가 되었다. 성공회대학교에서 5년간 협동조합을 강의하고 각종 협동조합 설립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5년간 &lsquo;노동자기업인수지원센터&rsquo;의 대표로 일하며 부도 기업의 노동자 인수를 자문했다. 현재는 (재)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주)아이알씨 조사연구소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nbsp;&nbsp;<br /> &nbsp;<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9 오후 3:22:00《205》2010년 5월 11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5_%ED%95%98%EB%85%80%EB%93%A4_%ED%91%9C%EC%A7%80.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1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장 주네의 『하녀들』(예니, 2000)은 1933년 노르망디와 브레타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중소도시 뉴망에서 일어난, 파팽 자매의 엽기적 모녀 살인 사건에서 취채<!--StartFragment--><sup><span style="font-family: 바탕">取採</span></sup>한 희곡이다. 여성의 범죄가 드물었던 시절에, 하녀로 일하던 두 자매가 &lsquo;어머니&rsquo;처럼 따르던 여주인과 그녀의 장성한 딸을 폭행&middot;난자했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맨손으로 두 모녀의 눈을 뽑아낸 사건은 당시의 정치 불안과 맞물려 큰 충격을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팽 자매의 모녀 살인 사건은 보기 드문 여성에 의한 &lsquo;연쇄 살해&rsquo;라는 점에서도 특별나지만, &ldquo;자신들이 박해당했다&rdquo;는 주장과 &ldquo;나는 여주인의 피부를 갖고 싶었어요&rdquo;라는 어니 크리스틴 (『하녀들』의 쏠랑쥬)의 말이 사건을 계급적 복수라는 지위로 승격하고, 크리스틴과 동생 레아(『하녀들』의 끌레르)의 동성애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정신분석의 놀라운 예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후 프랑스 지식계를 평정한 사람은 실존주의의 거두 J.P. 사르트르다. 그는 세 명의 절친한 친구와 시기를 나누어가며 논전을 벌였다. 메를로 퐁티, 알베르 까뮈, 레이몽 아롱. 그만큼 사르트르가 타협 없는 원칙주의자(마르크시스트)였기도 하지만, 그가 당대 지식계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외에도 사르트르는 라캉이 크게 부딪힌 적이 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한 번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신분석을 부르주아들의 위로물이거나 방어막으로 보았다. 한편 라캉은 그때 막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던 때로, 그가 쓴 최초의 논문 가운데 두 편은 파팽 자매 사건과 또 다른 여성 살인자인 에매에 관한 글이다. 라캉은 파팽 자매에 관한 글을 먼저 발표했는데, 그는 두 자매의 예로부터, 그 유명한 &lsquo;거울 단계&rsquo;라는 용어의 이론적 실례를 보았다. 모녀 살인 사건이 있기까지 두 자매는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상계의 분신들이었으나, 모녀 살해가 계기가 되어 동일시의 거울을 깨고 각자의 주체성을 찾게 해주었다고 분석했다. 사건 후 크리스틴은 단식 상태에서 자살을 맞이했고, 레아는 평생 &lsquo;귀머거리와 벙어리&rsquo;로 살았다. 갑작스러운 분리가 두 사람에게 혼란과 상실감을 주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사르트르는 존 휴스턴 감독이 찍은 프로이트의 전기 영화 각본을 쓰기는 했지만, 주관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그의 이론은 프로이트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고, 라캉 역시 프로이트의 추종자로 여겨 그를 &ldquo;부르주아 계급의 공모자&rdquo;로 비난한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주재하던 &lt;현대&gt;지에 정신과 의사 르 기앙의 글을 싣는데, 그 글은 라캉이 주장한 것처럼 모녀 살해 사건을 &ldquo;서로에게서 분리되려는 필사적인 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체성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rdquo;으로 읽었다. 그는 입주 하녀들의 자살이나 자살 기도, 정신 병원 수용의 통계 수치가 다른 범주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 하녀에게 살해당하거나 부상당한 수많은 주인들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파팽 자매의 모녀 살해는 계급적 요인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분석하려고 애썼다. 르 기앙은 크리스틴의 자살조차도 노동 생활의 끝없는 되풀이를 피하고자 하는 비참한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91"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5_%EC%9E%A5%EC%A3%BC%EB%84%A4.jpg" />주네는 『하녀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ldquo;자신은 하녀들의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rdquo;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그런 언급과 별개로, 이 작품엔 하층 계급의 상류 계급에 대한 동경과 원한이 명백히 나타나 있다. &ldquo;언니도 알잖아. 모든 물건이 우릴 저버려.&rdquo;(88쪽), &ldquo;물건들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다.&rdquo;(88쪽), &ldquo;물건들은 우리를 배반해. 물건들은 악착같이 우리를 고발해, 마치 우리가 무슨 큰 죄인이나 되듯이 말야. 하마터면 마담한테 다 들킬 뻔했어. 전화가 우리를 배반했고, 그다음엔 우리 입술이 우리를 배반했어.&rdquo;(88쪽), &ldquo;물건들이 하나하나 우릴 고발하는 걸 보면서 난 무서워졌어.&rdquo;(89쪽)</p> <p style="text-align: justify">끌레르가 사물에 대해서 느끼는 두려움은 마르크스가 말했던 생산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의 두려움에 다름 아니다. 마담이 자신의 사치품을 하나하나 두 자매에게 선물할 때, 쑥스러워하고 죄스러워하는 두 자매의 모습은 사물로부터 소외된 두 자매의 심정을 부각해준다. &ldquo;어머. 정말로 이걸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rdquo;(74쪽), &ldquo;전 도저히 못 입겠어요. 너무 아름다워요.&rdquo; 마담으로부터 사치스런 의상을 선물 받은 두 자매는 &ldquo;마담은 아름다워요!&rdquo;(이상 75쪽)라는 말로 물건으로부터 거리를 두며, 오히려 그것을 마음껏 소유할 수 있는 주인을 찬미한다. 그럴 수밖에. &ldquo;모두가 마담 거였지&rdquo;(95쪽)라는 구절도 기억해 두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역본의 번역자인 오세곤은 하녀들의 혁명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으로 기존 질서에 대한 동경과 현실적 지주가 없는 환상에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두 자매의 연극을 통한 &lsquo;탈영토 전략&rsquo;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노예가 주인에게 승리한다는 익숙한 변증법을 상기시킨다. 마담은 두 자매가 연극을 하던 중인 것도 모르는 채 자신은 상상력이 지나친 게 탈이나 하급계층은 &ldquo;상상력이 없으니까&rdquo;(66쪽)라고 단정한다. 또 쏠랑쥬가 끌레르에게 절을 하며 &ldquo;네, 마담&rdquo;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ldquo;너희들은 농담 같은 거 모르는 줄 알았는데&rdquo;(76쪽)라고 조롱한다. 하지만 현실을 극장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은, 결국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언뜻 보면 끌레르의 죽음이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 같지만 두 가지 사항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쏠랑쥬가 이 집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끌레르는 그것을 단호히 뿌리친다. 현재의 영토를 탈영토 한다는 것은, 또 탈주란 것은, 여기로부터의 도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를 바꾼다는 의미다. 그런 의미에서 끌레르의 도피 거부는 그들의 죽음을 결코 패배로 물들이는 것이 아니다. 둘째, 끌레르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의 긴 대사 가운데 한 구절은, 이미 마담을 적대시하지도 동경하지도 않는다. &ldquo;하지만 난 마담을 동정해요. 마담의 창백함과 마담의 비단 같은 피부를 동정하고, 마담의 조그만 두 귀와 마담의 가냘픈 두 손목을 동정해요.&rdquo;(99쪽) 이 구절은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제작하면서 두뇌와 육체를 발달시켰던 노예가 언젠가는 주인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노예의 변증법을 되풀이한 거나 같다.</p> <div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520" height="38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5_%ED%95%98%EB%85%80%EB%93%A4_%EC%97%B0%EA%B7%B9.JPG" /></div>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주네의 작품만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본 희곡 대사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대사는 다음과 같다: &ldquo;쏠랑쥬는 경찰의 호위 속에 커다란 계단을 내려간다. 모두들 발코니로 나와서 검은 옷의 속죄자들과 함께 걸어가는 쏠랑쥬를 보시오. 낮 열두 시. 쏠랑쥬는 9파운드나 되는 횃불을 들고 있다. 쏠랑쥬 옆에는 사형집행인이 따르고 있다. 사형집행인은 쏠랑쥬의 귀에 대고 사랑을 속삭인다. 사형집행인이 나를 호위하는 거야, 끌레르. 사형집행인이 나와 동행한단 말야. (웃는다) 끌레르가 마지막 길을 갈 때 모였던 동네 모든 하녀들과 모든 하인들이 줄을 지어 쏠랑쥬를 호위한다. 모두 왕관과 꽃다발과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hellip;] 그들은 모두 그들의 왕관을 쓰고 있다.&rdquo;(99~100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용된 끌레르의 기나긴 독백은, 연극 대사가 고양될 때, 산문이 곧바로 운문이 되는 경우를 보여준다. 주네가 명석한 무아지경(!) 속에서 썼을 게 분명한 이 구절은, &lsquo;비극적 황홀&rsquo;을 보여준다. 상반된 감정을 통합하는 비극적 황홀이 이 작품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세력의 연대로 드러난다. 사형집행인과 사형수, 이 극단적인 적대자들이 서로 연대를 말한다. 숱한 하녀와 하인들이 왕관을 쓰고 동료(하녀)가 죽는 날을 축제의 날로 바꾸는 것은, 그들에게 맡겨진 비탄을 승리로 바꾸는 비극적 황홀이다(내가 생략했지만, 인용된 대사의 마지막에 나오는 &ldquo;경찰만이 날 이해해요. 경찰도 버림받은 사람과 같은 세계에 속해요.&rdquo;라는 구절 역시 그러한데, 할리우드나 홍콩 영화는 경찰과 범죄자들 사이의 &lsquo;비극적 황홀&rsquo;을 너무나 얄밉게 상업화한다. 퀜틴 타란티노의 &lt;저수지의 개들&gt;이나 맥조휘&middot;유위강의 &lt;무간도&gt;가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녀들이 벌이는 연극은 그들이 &ldquo;치욕&rdquo;(90쪽)을 의식화하는 교육 과정이며, &ldquo;온 세상에 대고 우리 얘길 하는&rdquo;(94쪽) 투쟁의 수단이다. 현실성을 띠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두 하녀의 연극은 폐쇄적인 놀이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는 옮긴이의 해석은, &lsquo;대낮에 횃불을 든&rsquo; 쏠랑쥬의 열망을, 또 이 연극의 마지막에 단 한 번 열리는 발코니 장면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짧은 글에서는 더 말하지 못했지만, 하녀들의 혁명이 무산되고 만 것은, 그들이 행한 &lsquo;연극놀이&rsquo;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실패는, 피지배자의 욕망이 지배자의 욕망과 같았기 때문이다. 혁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배자와 다른 꿈을 꿔야 한다. 다른 욕망을 바라야 하고,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두 자매는 마담이 욕망하는 것들을 따라 욕망하기만 하면, 모든 차이(계급적&middot;신분적)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다. 예컨대, 당신이 오랫동안 &lsquo;명품 계&rsquo;를 부은 끝에 비싼 코트나 백을 걸칠 때, 진짜 부자들은 일부러 꾀죄죄한 옷차림을 하거나 어느 촌구석에서 발견한 &lsquo;망태기&rsquo;를 들고 나온다(이런 걸, &lsquo;과시적 비소비&rsquo;라고 부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마담은 하녀들이 본받고자 하는 욕망을 간단히 팽개친다. 마담은 자신의 것을 모두 하녀들에게 주고, 하녀들이 &lsquo;죽었다, 깨도&rsquo; 따라하지 못할 순애보의 주인공이 된다. 두 자매는 그제야 자신들의 패착을 깨닫게 되고, 죽음을 선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 큰따옴표 뒤에 쪽수가 표시된 것은 『하녀들』의 것이고, 쪽수 없는 큰따옴표는 모두 레이첼 에드워드&middot;키스 리더의 『잔혹과 매혹』(이제이북스, 2005)에서 인용한 것이다.<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19 오후 1:39:00김경주의 ‘밀어’<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570" height="84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B%B0%80%EC%96%B4%EC%BB%A4%EB%B2%84.jpg" /></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3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C%84%9C1.jpg" /></p> <p><br /> <br /> <br /> <strong>밀어密語</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색色과 충蟲은 계절의 물후物候&deg;이다. 계절은 색을 가지고 가장 먼저 몸을 바꾸고 충들은 가장 먼저 새로운 계절풍의 기후 위에 내려앉는다. 계절이 바뀌면 인간도 인체 내의 색을 함께 바꾼다. 내장과 비장의 색을 바꾸고 눈동자는 충들의 눈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계절을 만난다. 고통은 예외 없이 경이롭게 배치된다. 저녁이 되면 처마가 연해지고 사람의 눈이 연해지고 세상의 풍문이 모두 산간으로 돌아가지만 고통은 안정이 되지 않는다. 몸은 선대로부터 우리의 피까지 장구하게 이어진 산문을 풀기 위해, 무너져가는 고대의 담벼락에 써진 언어들을 해독하려 애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파촉문자巴蜀文字&deg;처럼 해독되지 않는다. 고고학은 고통의 흔적을 다른 흔적으로 지우고 살아남은 문명이다. 로마의 시인은 고문을 살피며 &lsquo;통일되지 못한 문자들&rsquo;에게서 새로운 전망을 찾아보려 하고 에트루리아어&deg; 같은 고어의 깊은 체내로 들어가 자신의 필체의 흔적을 그곳에서 찾아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시인의 문명은 육체를 문자로 부화시키려는 욕망이나 허심이 아니다. 시인의 문명은 고통이 존재하는 육체 속에서만 지어진다. 언어가 홀로 설 수 있는 육체. 시는 그러한 육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명이다.</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2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C%A3%BC%EC%84%9D1_25.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인은 육체 속에 존재하는 흉가凶家를 자신의 시라고 여기기도 하고, 시인은 사랑을 마치고 육체가 추고 있는 춤은 모두 흉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간절기間節期가 되면 눈은 육체의 소문을 내보내기 시작한다고. 우리 자신의 육체로부터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육체로, 어쩌면 우리의 육체가 흉가가 되지 않기 위해 하나의 춤이 필요한지 모른다고, 우리의 육체가 춤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흉가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해가 짧고 때가 춥고 만물이 스스로를 거두고 감추는 춘분春分의 저녁으로 가서 우리들의 진술은 번복된다고. 하나의 진술 속에 한기寒氣가 생기고 뜨거운 수기手記를 낳고 그곳에 자신의 태궁胎宮을 마련한다. 작은 눈금들이 생기는 명칭은 시라고 불러야 하며 육체보다 이름이 먼저 순환되는 주야晝夜를 우리들의 밀어密語라고 부른다.</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3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자정을 통과하는 낮은 지상의 어떤 시계에서도 측량이 되지 않는다. 늦은 밤에 시작된 시작詩作은 새벽에 날아가는 인체人體가 된다. 그의 언어들은 하늘의 물을 기록하는 시간이 된다. 종천終天이란 오행이 하늘을 다 운행하는 운기학설의 순환지를 말한다. 땅속에서 발견된 수천 년 된 어느 토용土俑은 항아리를 안고 있었다. 항아리 속의 물은 다 말랐다. 하지만 항아리는 아직 금이 가지 않았다. 고대엔 그 항아리 속으로 물 한 방울이 자연적으로 떨어지는 데 1주야가 걸렸지만 이제는 천 개의 물방울 같은 밀어密語가 필요하다. 항아리를 들고 나타난 그 토용은 바람에 눈을 떴지만 온량溫涼을 식별할 수 없다. 육체가 모두 흙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족에게는 그 흙에 피를 돌게 하는 몰골법沒骨法&deg;이 생길 것이다. 시인은 흙을 굽는 마음으로 그 언어를 주관해야 한다. 언어의 육기&deg;를 토용의 몸과 항아리에게 흘려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젖처럼.</p> <p><br /> <strong>식蝕&deg;, 『몽계필담』&deg;</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몽계필담』에는 철이 되지 않았는데 기후가 먼저 온 것을 &lsquo;태과&rsquo;라고 하며 철이 이미 되었는데 기후가 아직 이르지 않는 것을 &lsquo;불급&rsquo;이라 전한다. 태과와 불급의 사이엔 간절기가 머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간절기가 되면 인체 속엔 새로운 생물의 성장이 시작된다. 새로운 부호들이 몸속에서 떠오른다. 한 계절이 한 계절을 밀어낼 때 몸속의 소음은 나른하고 따스한 누란&deg;이 되기도 한다. 오후의 햇볕에 어제의 강우량이 사라지듯, 비밀로 가득한 자신의 삶을 어느 날 문득, 그림자 속을 채우고 있는 강우량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간절기는 통증처럼 밀려와 몸에 쌓인다. 몸속의 한랭전선은 아직 잊지 못한 누군가에게로 끊임없이 월남중이다. 궐음사천厥陰司天을 만나기도 하고 태양사천太陽司天을 만나기도 한다. 인체는 몸속의 이 절기節氣에 해당하는 풍향을 바꿀 수는 있어도 쉽게 그 풍향의 견해를 역사에 제출할 수 없다. &lsquo;자신의 탄생을 자각한 이야기&rsquo;가, 그 이야기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문하며 이야기의 &lsquo;겹&rsquo;을 이룬다. 세계는 스스로의 음악 속에서 수만 개의 식蝕을 거치며 음악의 세계사&deg;가 되어간다.</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2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C%A3%BC%EC%84%9D2_27.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체는 스스로가 무덤이 될 순 없을까? 신들의 육체는 저 자신이 인간의 무덤이 되기 위해서 수많은 몽상을 해왔다. 동화 속에서 신비하게 무덤을 통과하는 무수한 생물들처럼, 고통을 통과하는 이 동화가 우리의 삶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내 육체에서 일어나는 이질異質들을, 일식日蝕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당신을 보고 나서 생겨버린, 내 눈의 일식이란 여러 번 &lsquo;해가 숨어서&rsquo; 육체 속에 싸라기눈이 날리고 우수수 들오리들이 날아간다.</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3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2.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삶은 역병疫病이다. 우리는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가? 해석학解釋學이라는 단어는 &lsquo;신들의 사신使神&rsquo;에 해당하는 헤르메스&deg;에서 유래한다. 신에게 어떤 전갈도 받은 적이 없지만 헤르메스는 자신의 영토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신들의 소식을 전한다. 한스게오르크 가다머&deg;는 고통의 한계에 대해 언급하며 &lsquo;해석&rsquo;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라고 한다. 헤르메스가 그랬듯이, 고통은 부지런히 자신의 영토를 돌아다니며 소식을 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고통은 바실리스크 도마뱀처럼 노른자 없는 달걀을 낳기도 하고, 발 없는 도마뱀처럼 독한 침을 흘리기도 한다. 이 몸뚱이를 다 지나가면 눈이 멀 것 같다고, 고통에 가득 찬 사람들은 주머니 속에서 동전을 꺼내 연못의 아기천사들이 품고 있는 동그릇 속으로&mdash;도랑에 비친 무지개를 동전으로 건져 올리듯&mdash;던지기도 한다. 베누스 패&deg;나 괴테의 『서동시집』에 등장하는 부적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다. 상고시대나 선사시대처럼 사냥한 짐승의 발톱이나 깃털을 아끼는 책 속에 넣어두어야 할까? 적을 살해하고 그 신체의 일부를 몸에 장식해야 고통이 사라질 것인가? 침상 아래 아파신상을 모셔두어야 하는 것일까? 부활절의 횃불이 문지기를 통해 언제 내 방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금식기가 끝난 날의 일기처럼, 말오줌나무 덤불을 헤치고 나와 어제 산 칼을 잃어버릴까봐 조급해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황망하다. 중국의 문자를 발명했다고 전해지는 고대의 창힐은 네 개의 눈으로 세상을 관측했다고 하는데 눈이 어찌나 밝은지 그의 눈은 귀신의 세계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3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3.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병명倂明이라 불리던 그의 눈은 고통을 볼 수 있었는가? 그러나 고통은 산술이 아니므로, 노발리스&deg;의 언어를 빌리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이 눈을 뜨고 있든 눈을 감고 있듯 항상 같은 형상이라는 것을 안다. 단지 항해의 설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선의 눈알을 먹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지켜온 시의 역사는 지느러미가 안내한 눈동자들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와 자연의 그 혼묘한 수의 세계로 편입시킬 수 없는 것이 여기 내 육체에 진동하므로, 내 뺨은 수치심으로 붉어지고 있다고, 뺨은 일식日蝕을 한다. 새로운 산술법처럼. 언어가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그토록 연유되었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수치심이 되어간다고. 악몽惡夢이란 그저 통증을 길들이는 육체의 다양한 사변들에 불과하다고. 그것을 우리는 천둥신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할 수 없다고.</p> <p><br /> <img alt="" width="600" height="3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C%A3%BC%EC%84%9D4_29.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고통의 생명력은 역설적이게도 산술법을 포기하고 그것의 조언을 부정할 때, 더이상 숟가락을 훔쳐간 도둑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듯이 생겨난다. 고통의 산모産母들은 우리들의 언어 속 여기저기 부락을 만들어 모여 살고 있다. 고통은 조금씩 실족되어가는 언어 안에 자리한다. 시인은 그 언어의 별자리를 자신의 육체 속에서 더듬어 찾는다. 시인의 말은 금지된 곳을 떠돈다. 그 언어를 내 문지방 앞에 놓고 본다. 그곳에 엎드려 차가운 뺨을 대어본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쓸개 빠진 놈처럼.</p> <p><br /> (序Ⅰ 전문)</p> <p><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183"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7_%EB%B0%80%EC%96%B4/%EA%B9%80%EA%B2%BD%EC%A3%BC.jpg" />김경주<br /> </strong>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 &lt;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gt;를 올리며 극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몇 년간 다양한 이름으로 여러 지면을 통해 야설작가와 유령작가로 글쓰기를 해왔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 『패스포트』, 공동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분홍주의보』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p> <p><strong>사진&nbsp;&middot; 전소연<br /> </strong>『가만히 거닐다』 저자. &lt;시차적응&gt; &lt;빛의 유목&gt; &lt;Passport Project No.1 앨리스 증후군&gt; &lt;흰고래의 등&gt; 등의 사진전을 열었다.</p> <p><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8 오전 11:48:00메도즈의 ‘성장의 한계’<img alt="" width="600" height="84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6_%EC%84%B1%EC%9E%A5%EC%9D%98%20%ED%95%9C%EA%B3%84/%EC%84%B1%EC%9E%A5%EC%9D%98%ED%95%9C%EA%B3%8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저자 서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배경</b></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한계: 30주년 개정판』은 초판이 나온 지 30년을 기념해서 세 번째로 출간된 책이다. 초판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개정판은 1992년, 『성장의 한계, 그 이후(Beyond the Limits)』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개정판에서 우리는 『성장의 한계』 초판에서 예측했던 지구 전체의 개발 시나리오들이 이후 20년 동안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해 논의했다. 이번에 또다시 발간되는 30주년 개정판은 우리가 처음에 분석한 내용들 가운데 핵심 부분을 다시 한 번 조명하고 지난 30년 동안 축적된 관련 데이터들과 지식들을 두루 훑어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한계』를 발간하는 프로젝트는 1970년에서 1972년까지 MIT 슬로안 경영대학 산하 시스템 역학 그룹에서 진행되었다. 우리 프로젝트 모임은 세계 인구와 실물 경제의 성장을 낳은 장기적인 원인과 그 결과를 분석하기 위해 시스템 역학 이론과 컴퓨터 모델링 기법을 사용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시행되고 있는 정책들은 우리를 지속 가능한 미래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붕괴시킬 것인가? 모두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인간 경제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나?</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전 세계의 뛰어난 사업가, 정부 인사, 과학자들로 구성된 비공식 국제단체인 로마클럽의 위임을 받아 이런 문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연구 기금은 독일의 폭스바겐 재단이 제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MIT 교수였던 데니스 L. 메도즈는 2년 동안 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작업팀을 꾸리고 그들을 지휘했다. 당시 연구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60" height="25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6_%EC%84%B1%EC%9E%A5%EC%9D%98%20%ED%95%9C%EA%B3%84/%ED%91%9C_12p.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성장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와 이론들을 통합하기 위해 구축한 &lsquo;월드 3&rsquo;라는 컴퓨터 모형이었다. 우리는 이 모형을 이용해서 내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세계가 성장하는 여러 가지 가상 시나리오들을 개발할 수 있었다. 『성장의 한계』 초판에서는 월드 3를 이용해서 1900년에서 2100년까지 2세기 동안 세계가 성장하는 12가지 서로 다른 시나리오들을 보여주고 분석했다. 개정판 『성장의 한계, 그 이후』에서는 월드 3 모형을 약간 새롭게 보완해서 14가지 성장 시나리오를 제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한계』는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모두 30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성장의 한계, 그 이후』도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간되었고 대학 교재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1972년: 성장의 한계</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성장의 한계』에서 지구 생태계를 제약하는 요소들(자원 이용과 배기가스 방출과 관련해서)이 21세기 지구의 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성장의 한계』는 인류가 이러한 제약 요소들과 싸우느라 많은 자본과 인력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며 따라서 21세기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인류의 평균적 삶의 질이 저하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경고했다. 우리는 그 책에서 어떤 자원이 모자라거나 어떤 형태의 배기가스 방출 때문에 지구의 성장이 멈출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해서 말하지 않았다. 세상을 구성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인구-경제-환경 체계를 대상으로 과학적으로 그렇게까지 세밀한 예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성장의 한계』에서 인간의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자연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을 수치화한 것. 이 책 부록 2의 마티스 베커나겔의 생태발자국 참조―옮긴이)이 지구의 수용력을 초과할 정도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기술과 문화, 제도의 변화를 통해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매우 근본적인 사회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성장의 한계』는 지구가 비록 현재 매우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지만 우리가 일찌감치 예방조치를 취한다면, 지구 전체 생태계가 한계에 다다르거나 그것을 초과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재앙을 얼마든지 줄여나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며 앞날에 대해서 낙관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성장의 한계』에서 월드 3가 제시한 12가지 가상 시나리오를 보면 인구 증가와 천연자원의 사용이 다양한 한계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잘 드러난다. 실제로 성장의 한계는 매우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고갈 가능한 천연자원이나 산업과 농업에서 방출되는 배기가스를 흡수할 수 있는 지구의 한정된 수용력과 같은 지구의 물질적 한계에 초점을 맞춰 분석했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 12가지 가상 시나리오들을 월드 3 컴퓨터 모형을 통해 모두 분석한 결과, 21세기 어느 시점에 이르면 지구의 물질적 성장이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무언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려 그다음 날부터 바로 그 영향을 실감하게 되는 상황과 같은 뜻밖에 닥친 한계들에 대해서는 내다보지 않았다. 우리가 분석한 가상 시나리오들에 따르면 인구가 증가하고 물질 자본이 확대되면서 여러 가지 제약 요소들의 상호 작용으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서 인류는 점점 더 많은 자본을 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용되는 자본이 점점 늘어나고 마침내 세계는 더 이상 산업 성장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산업이 쇠퇴하면 사회는 식량이나 서비스, 여러 소비 분야와 같은 경제 영역에서도 더 이상 성장을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영역들이 성장을 멈춘다면 인구 성장 또한 멈추고 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종말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인구가 감소하고 인류의 행복이 퇴보하는 전 세계의 통제 불가능한 와해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 월드 3 모형이 보여주는 시나리오들은 다양한 원인들 때문에 발생하는 그러한 붕괴 현상들을 그린다. 성장의 종말은 또한 지구의 수용력에 인간의 생태발자국을 서서히 순응시켜나가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현재의 정책들에 중요한 변화를 준다면 월드 3 모형은 장기간에 걸쳐 상대적으로 높은 인류의 복지 수준을 구가하면서 성장의 종말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나아가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성장의 종말</b></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종말이 어떤 형태를 띠건 1972년에 그것은 매우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았다. 『성장의 한계』에 나온 월드 3의 모든 가상 시나리오들은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이 2000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그중 가장 비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시나리오에서는 물질적 생활 수준이 2015년까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장의 한계』는 성장이 멈추는 시점을 책이 나오고 거의 50년이 지난 뒤로 설정했다. 그 기간은 전 세계 차원에서 기존의 정책들을 숙고하고 선택해서 수정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인 것처럼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성장의 한계』를 쓰면서 인류가 찬찬히 숙고하고 행동한다면 사회는 붕괴의 가능성을 줄이는 올바른 조치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붕괴는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아니다. 지구의 자연계가 지탱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까지 인구와 경제가 급격하게 쇠퇴한다면 그 뒤를 이어 곧바로 인류 보건 정책의 파탄과 사회 갈등, 생태계 파괴, 총체적인 불평등이 수반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생태발자국이 급속도로 줄어들기 위해서는 사망률이 급격하게 늘고 소비가 급격하게 감소해야 한다. 우리가 적절한 정책을 선택하고 조치를 취한다면 그런 급격한 쇠퇴는 피할 수 있다. 지구에 대한 인간의 요구를 줄이려는 세심한 노력이 있다면 자원의 지나친 약탈 행위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출생률과 소비율을 지속 가능한 수준으로 낮추며 더욱 공평하게 물질을 분배한다면 생태발자국도 점점 줄여나갈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이 반드시 지구를 붕괴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붕괴는 오직 지구의 한정된 자원들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져서 지나친 성장이 일어난 탓에 지구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을 때만 발생한다. 1972년에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은 여전히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 이하인 것 같았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여러 가지 선택 방안들을 검토하는 동안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1972년에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1992년: 성장의 한계, 그 이후</b></p> <p style="text-align: justify">1992년, 우리는 『성장의 한계』 초판을 내고 20년이 지난 뒤 최초의 연구 결과를 새롭게 따져보는 작업을 했고 그 결과 『성장의 한계, 그 이후』라는 개정판이 나왔다. 그 책에서는 1970년과 1990년 사이에 전 세계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연구하고 그 결과로 『성장의 한계』 초판과 월드 3 컴퓨터 모형을 새롭게 수정, 보완했다. 『성장의 한계, 그 이후』도 『성장의 한계』가 전하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1992년, 우리는 20년 전에 이미 내렸던 결론이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1992년에 낸 개정판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인류가 이미 지구의 수용 능력 한계를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너무도 중요해서 우리는 그것을 책 제목에 반영하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90년대 초반에 벌써 인류가 지속 불가능한 영역으로 한 발짝 더 깊숙이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열대 우림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남벌되고 있었다. 곡물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인구 증가를 따라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를 걱정하기도 하고 최근에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는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구 환경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한 증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우리는 1990년대 초에 이미 어떤 현명한 조치로도 인류가 지구의 한계를 벗어나는 현상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었다. 세계를 지속 가능한 영역으로 다시 &lsquo;되돌리는&rsquo; 것이 이제 중요한 당면 과제가 된 것이다. 하지만 『성장의 한계, 그 이후』도 여전히 우리의 앞날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이 책은 수많은 가상 시나리오들을 통해서 지구 전체를 생각하는 현명한 정책과 기술과 제도의 변화, 정치적 목표, 그리고 개개인의 꿈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인간 사회가 한계를 넘어선 지나친 성장의 피해를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의 한계, 그 이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계환경개발정상회의가 열리던 해인 1992년에 발간되었다. 정상회의의 개최는 지구촌이 마침내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리우에서 정한 목표들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2002년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리우+10 회의는 1992년 리우 때보다 훨씬 못한 결론을 도출했다. 회의에 참석한 나라마다 자신들의 편협한 국가, 기업,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느라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경제 분쟁 속에 빠져들면서 거의 절름발이 회의가 되고 말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1970&sim;2000년: 생태발자국의 증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30년 동안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 많이 있었다. 세계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인간의 생태발자국에 대응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했다. 소비자들은 구매 습관을 바꾸었고 새로운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다국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어떤 지역에서는 식량, 에너지, 산업 생산력 증가가 인구 증가를 훨씬 초과했다. 그런 지역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전보다 훨씬 부유해졌다. 인구 증가율은 늘어나는 소득 수준과 반대로 줄어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1970년보다 환경 문제들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 국가의 환경 문제를 총괄하는 정부 부처가 생겼으며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환경 교육은 흔한 일이 되었다. 선진국의 공장 굴뚝이나 배관 시설을 통해 방출되는 대부분의 공해 물질도 줄어들었다. 선두 기업들은 서로 앞다투어 환경 효율성을 점점 더 높이는 생산 방식을 도입하는 데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긍정적인 변화 덕분에 1990년대 들어 지구의 한계 초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지구의 한계 초과와 관련된 기본 데이터와 개념마저 부족한 탓에 그 문제를 논의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한계 초과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만들어―이를테면, 생태발자국의 증가와 국내총생산(GDP)의 증가를 비교하는 것과 같은―성장의 한계라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인 토론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세계 사회는 브룬트란트 위원회가 지속 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새로 만들어낸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31" height="7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6_%EC%84%B1%EC%9E%A5%EC%9D%98%20%ED%95%9C%EA%B3%84/%EC%84%B1%EC%9E%A5%EC%9D%98_%ED%95%9C%EA%B3%84(%ED%91%9C_1-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성장의 한계, 그 이후』에서 지구가 수용 한계를 초과했다고 주장했던 내용을 입증하는 데이터들이 많이 나왔다. 전 세계 1인당 곡물 생산량이 최고점에 이른 때가 1980년대 중반이다. 바닷물고기 수확이 크게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재해와 관련한 비용은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담수와 화석 연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자원의 배분과 그에 따른 갈등 해소 문제가 긴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 과학자들과 기상 데이터가 모두 지구의 기온이 다양한 인간 활동 때문에 바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고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은 여전히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고 있다. 많은 곳에서 벌써 꾸준히 경제가 하락하는 양상이 보인다. 전체 세계 인구의 12퍼센트를 차지하는 54개 나라가 1990년부터 2001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인당 국내총생산이 계속해서 하락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지난 10년 동안 지구의 수용 한계를 넘어선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새로운 어휘들과 수치 데이터들이 많이 양산되었다. 예를 들면, 마티스 베커나겔과 그의 동료들은 인간의 생태발자국을 측정해서 그것을 지구의 &lsquo;수용 능력&rsquo;과 비교했다. 그들은 생태발자국을 인간에게 자원(곡물, 사료, 목재, 물고기, 도시로 수용된 토지)을 제공하고 지구촌이 배출하는 배기가스(이산화탄소)를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면적이라고 정의했다. 베커나겔은 현재 지구의 사용 가능한 면적을 비교했을 때 인간의 자원 사용량은 지구의 수용 능력보다 20퍼센트 초과된 상태라고 결론지었다([그림 P-1]). 이렇게 볼 때 지구는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지속 가능한 수준에 있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61" height="53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6_%EC%84%B1%EC%9E%A5%EC%9D%98%20%ED%95%9C%EA%B3%84/%EC%84%B1%EC%9E%A5%EC%9D%98_%ED%95%9C%EA%B3%84(p-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생태발자국은 기술과 제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인간이 이미 지속 불가능한 영역에 진입한 지금까지도 상황이 이렇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은 매우 부족하다. 현재의 추세를 역전시켜 장기적으로 인간의 생태발자국을 지구의 수용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아래로 끌어내릴 수 있도록, 개인의 가치관과 공공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치적 지지를 마련하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b></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가 당면한 도전은 이제 막 시작일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 수준은 증가시키면서 동시에 인간 전체의 생태발자국을 줄여야 한다. 기술의 진보도 이루어야 하고 인간 개개인의 생각도 바뀌어야 하며 더 장기적인 계획도 짜야 한다. 또 정치적 경계를 넘어서 서로가 더 존중하고 보살피고 나누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만들어지려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고 해도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오늘날 정치 집단들 가운데 자신들의 생태발자국은 줄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줄 수 있는 프로그램에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는 집단은 없다. 부유한 강대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 사이에 전 세계의 생태발자국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우리는 1972년보다 지구의 앞날에 대해서 훨씬 더 비관적이다. 사람들이 지난 30년 동안 지구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서 무익한 논쟁만 일삼으며, 선의를 표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사실이다. 우리는 또다시 30년을 그처럼 허둥지둥 허비할 수 없다. 지구의 수용 성장의 한계를 초과해 끊임없이 지구를 훼손함으로써 21세기 동안 지구가 붕괴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바꿔야 할 것이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다나(도넬라) H. 메도즈가 2001년 초 세상을 뜨기 전에 그이가 그렇게 원했던 『성장의 한계』 &lsquo;30주년 개정판&rsquo;을 완성시키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 세 사람의 저자들이 저마다 바라는 희망과 기대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나는 줄곧 낙관주의자였다. 그녀는 인간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갖고 신뢰를 보냈다. 인간의 손에 올바른 정보만 쥐어준다면 그들은 결국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인도주의적 해결 방법, 즉 지구 전체 생태계의 위기를 구해낼 수 있는 정책들을 도출해낼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종말의 위기로 치달을 것이므로) 평생을 바쳐 연구에 몰두했다. 다나는 이러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다 바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요르겐은 좀 냉소적이다. 그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소비, 고용, 재산 증식과 같은 단기적인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인간은 파국의 신호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더라도 그것을 무시하다가 결국에는 시간을 놓치고 만다. 요르겐은 유감스럽게도 지구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멋진 세상을 인간 스스로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데니스는 그 중간에 있다. 그는 적절한 조치들만 취해진다면 지구 붕괴라는 최악의 가능성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세계가 결국 어느 정도 지속 가능한 미래를 택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이미 도래한 지구의 심각한 위기들을 겪어야 하므로 뒤늦게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뒤늦은 조치로 얻어진 결과들은 좀 더 일찍 조치를 취했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구의 아름다운 생태계가 이곳저곳 많이 파괴될 것은 뻔한 일이다. 소중한 정치적, 경제적 기회들을 수없이 많이 잃고 말 것이며, 사회는 점점 군국주의화하고 엄청난 불평등이 지속되면서 갈등도 널리 확산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세 사람의 생각을 지구의 미래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전망으로 엮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 뜻을 같이한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변화는 『성장의 한계, 그 이후』의 마지막 장에 나온 다나의 글을 약간 손질하여 이 책에 &lsquo;무엇을 할 것인가&rsquo;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우리는 그 글에서, 우리가 앞장서 그러한 방법을 알리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언젠가는 세상 사람들이, 인간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동반자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올바른 길을 찾아갈 것이라는 점을 전하고자 했다. 너무 늦기 전에 인류가 그렇게 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성장의 한계』는 맞았는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줄곧 우리에게 &ldquo;『성장의 한계』가 예견한 것이 맞았나요?&rdquo;라고 묻는다. 하지만 그러한 질문은 신문, 방송과 같은 언론매체들이 쓰는 언어이지 우리가 쓰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연구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래상을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2100년까지 일어날 수 있는 인류 사회의 가상 시나리오들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일을 교훈 삼아 되돌아보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1972년 3월, 워싱턴 D.C.의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출판사에서 『성장의 한계』 초판이 얇은 보급판으로 나온 이후 세상에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나?</p> <p style="text-align: justify">맨 처음 많은 기업가들과 정치가들, 제3세계 옹호자들, 그리고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lsquo;성장의 한계&rsquo;라는 생각에 대해서 크게 격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 생태계의 한계라는 개념이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실제로 물질적 성장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여러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택하는 정책들의 성공 여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역사는 인류 사회가 현명하고 통찰력 있는 이타적 조치들을 취하면서 그러한 한계들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조치들은 대개 단기적으로 보면 사회의 기득권 세력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72년 이후로 자원 사용과 배기가스 배출이 제약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많은 위기가 도래했다. 그러한 상황은 언론매체들을 흥분시키고 대중의 관심을 끌고 정치인들의 생각을 새롭게 환기시켰다. 주요 산유국들이 석유 생산을 줄이고, 성층권의 오존층이 엷어지고, 지구의 기온이 올라갔다. 기아가 끊임없이 확산되고, 유독 폐기물을 버릴 장소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고, 지하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점점 더 깊이 땅을 파야 하고, 수많은 생물 종들이 사라지고, 많은 숲이 사라졌다. 이러한 것들은 수많은 중요한 연구와 국제회의, 국제 협정들을 낳게 만든 여러 문제들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물질적 성장을 제한하는 요소들이 21세기 전 세계 정책 영역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리의 결론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그것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월드 3 모형이 추산해낸 시나리오들이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놀랄 정도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있다. 2000년의 세계 인구는 1972년에 월드 3 모형을 돌려서 예측했던 인구수(1972년 39억에서 2000년 60억으로 증가)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더 나아가 그 시나리오에서 예측한 세계 식량 생산량(1972년 18억 톤에서 2000년 30억 톤으로)의 증가도 거의 그대로 적중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측이 실제와 맞아 떨어졌다고 해서 우리가 구축한 예측 모형이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월드 3 모형이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따라서 월드 3 모형의 가정과 우리가 내린 결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결론들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컴퓨터에서 월드 3 모형을 돌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지구 붕괴 가능성에 대해서 말한 중요한 언급들은 월드 3 모형이 그려낸 곡선 도표만 무조건 믿고 일방적으로 해석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구의 세 가지 명백하고 일관되며 공통적인 특징, 즉 언젠가 고갈될 자원의 한계와 그에 반하는 끊임없는 성장 추구, 그리고 다가오는 한계에 대한 사회의 대응 지체 때문에 발생하는 역학적인 행동 양식들을 이해하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다. 그런 특징들이 지배하는 시스템은 어떤 경우라도 자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무너져 내리기 쉽다. 월드 3 모형의 가장 중요한 가정은 한계, 성장, 지체를 만들어내는 인과 관계의 메커니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현실 세계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면 세상이 『성장의 한계』에서 말한 시나리오의 주요 특징들과 일맥상통하는 길을 따라서 서서히 발전해나갈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이 책은 왜 또 필요한가?</b></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이 앞서 나온 두 권의 책과 기본적으로 똑같은 논지를 유지하고 있다면 굳이 다시 발간할 까닭이 있을까? 우리가 이 책을 낸 가장 큰 이유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드러난 모든 자료들과 사례들을 이용해서 1972년에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싶어서이다. 또한 앞서 낸 책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갱신된 자료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성장의 한계, 그 이후』는 지금도 여전히 미래에 대한 유용한 관점들을 주지만 1990년까지의 데이터들만 수록돼 있으므로 21세기를 사는 교사들에게는 데이터의 신뢰성이 의심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책을 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바로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middot;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지구의 한계를 초과한 상태에 있으며 그에 따른 피해와 고통도 크지만, 현명한 정책을 시행한다면 그것을 크게 줄일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middot; 우리는 21세기에 인류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반박하는 데이터와 분석을 제공하고자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middot; 우리는 세계 시민들의 행동과 선택이 장기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생각하게 하고, 지구의 수용 한계를 초과함으로써 발생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치적 지원 활동을 촉구하고자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middot; 우리는 신세대 독자와 학생, 연구자들이 월드 3 컴퓨터 모형을 다시 주목하게 하고자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middot; 우리는 성장의 원인과 결과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 1972년 이후로 어떤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시나리오와 예측</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21세기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위해 이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래의 모습이 어떤 특정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의 범위를 보여주려 할 뿐이다. 말하자면 21세기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에 대한 10가지 서로 다른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배우고 되새겨서 각자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이 일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현재 통용되는 데이터와 논리들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의 지식이 미래에 대한 비현실적인 판단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사실은 믿는다. 현재 나타난 사실들은 앞으로 미래에도 계속해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맹목적인 기대가 이미 타당하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바라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만 잘못된, 유용한 것 같지만 쓸모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우리의 분석이 지구촌 시민들이 미래에 그들의 삶에 중요한 구실을 할 지구의 물질적 한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더 많은 사실을 깨닫고 진지하게 성찰하게 만든다면 그것으로 자기 할 바를 다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세 권의 책과 지속 가능한 체계로의 전환</b></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은 지속 가능한 개발을 이루기 위한 투쟁에서 아주 미약한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쓴 책의 지나온 경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장의 한계』와 『성장의 한계, 그 이후』는 수백만 부가 팔렸다. 첫 번째 책은 전 세계에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두 번째 책은 그 논쟁을 가열시켰다. 환경 운동이 초창기일 때 여러 가지 환경 문제들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과 우려를 높인 것이다. 『성장의 한계』를 읽은 많은 학생들이 환경과 지속 가능한 개발과 관련한 문제들을 연구하기 시작하고 그 일을 자신들의 새로운 직업으로 삼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모두 유익한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우리 책은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다. 우리가 『성장의 한계』와 『성장의 한계, 그 이후』를 쓴 중요한 목표는 지구 생태계가 이제 한계를 초과했다는 것에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성장 추구를 모든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lsquo;성장의 한계&rsquo;라는 용어를 매우 폭넓게 썼다. 하지만 그 용어는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면서 오늘날 일상에서 매우 단순하게 쓰인다. 대다수 비평가들은 우리가 화석 연료나 어떤 일부 자원들이 곧 고갈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한계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사실 그 용어에는 좀 더 미묘한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는 현재 시행되는 정책들이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예상하고 대처하는 데 무기력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결국 지구 전체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 경제는 중요한 한계선을 넘어서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 초과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우리는 앞서 발간한 두 권의 책에서 이런 우려를 명쾌하게 전달하지 못했다. &lsquo;한계를 초과했다&rsquo;라는 개념을 공식적인 논쟁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하는 데 실패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30년 동안 자유무역이라는 개념을 줄기차게 밀어붙인 (대개 경제학자들로 구성된) 집단들과 우리의 현재 모습을 비교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자신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을 일반인들도 알아듣기 쉽게 만들 줄 알았다. 그들은 자유무역을 위해 싸우는 수많은 정치인들에게 확신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도 또한 자유무역 정책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 것처럼 개인이나 지역에 따라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를 때마다 자유무역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충성도가 매우 광범위하게 떨어져 나가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또 자유무역이라는 목표를 채택함으로써 발생하는 전체 손익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들도 많다. 우리가 보기에 21세기에는 생태계의 한계 초과라는 개념이 자유무역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개념이 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인의 관심과 주의를 끌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멀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틈새를 채우기 위한 새로운 시도 가운데 하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현재의 생태계 한계 초과와 붕괴</b></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 복지가 최저 한계를 넘어서 점차 퇴보하는 현상은 사회가 앞날을 잘 대비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이를테면 원유 매장량이 점점 감소하고 강이나 바다에서 잡는 물고기가 점점 줄어들고 열대 우림의 목재들을 점점 구하기 어려워질 때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을 때 이러한 자원들이 고갈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번영은 길을 잃고 말 것이다. 게다가 생태계가 지속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자원의 기반마저 무너져 내리고 파괴된다면 문제는 더욱 악화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 생태계가 한계를 넘어서 붕괴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생생한 사례가 실제로 21세기가 시작되는 무렵에 발생했다. 전 세계 주식 시장에 불어닥친 &lsquo;닷컴 거품&rsquo;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이 현상은 비록 물질자원계가 아니라 금융계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 책이 얘기하고자 하는 관심의 초점을 잘 보여준다. 거기서 점점 고갈되는 자원은 투자자의 신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면 1992년부터 2000년 3월까지 주가는 놀랄 정도로 크게 상승했다. 뒤돌아보건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치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 뒤로 주가는 2003년 3월 바닥을 칠 때까지 3년 동안 내리 하락했다. 그러고 나서 (적어도 이 책을 쓰던 무렵, 2004년 1월까지는) 서서히 다시 시세를 회복하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들이 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배기가스를 한계 이상으로 방출했을 때와 달리 주가는 오랫동안 상승을 계속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고충을 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주가 지수가 새롭게 최고치를 경신할 때마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지금 돌이켜보면 1998년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보이는데 심지어 주가가 지속 불가능한 영역에 도달한 뒤에도 주식 투자 열기는 끊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이 비로소 주가에 &lsquo;거품&rsquo;―적정 한도를 초과했다는 그들 세계의 말―이 끼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주식 시장이 최고점에 이르고도 몇 년이 지나 이미 붕괴의 길로 들어선 뒤였다. 주식 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자 아무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3년 동안 끊임없이 주가가 폭락하자 과연 그것이 끝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투자자들의 주식 시장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감스럽게도 세계는 지나친 자원 수탈과 배기가스 방출 탓에 닷컴 거품 현상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한계 초과와 붕괴를 겪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기간은 닷컴 거품 때보다 훨씬 더 길 것이다. 지구 생태계가 지속 불가능한 영역으로 이동하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지향하고 지지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닷컴 거품 때 겪어서 알고 있다.) 생태계의 붕괴는 모든 사람이 놀랄 정도로 급작스럽게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몇 년 동안 지속되면 붕괴 전의 상태를 이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이 점점 더 명백해질 것이다. 또다시 더 몇 년 동안 퇴보를 거듭하고 나면 아무도 그 끝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이제 언젠가 다시 에너지를 풍족하게 쓰고 강과 바다에서 싱싱한 물고기를 마음껏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앞날을 위한 계획</b></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때 성장의 한계는 먼 미래의 얘기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우리 눈앞에 있다. 한때 생태계 붕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막연하고 가정에 근거한 학술적 개념이지만 공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선 결과가 분명하게 밝혀지려면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더 걸릴 것이며 그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으려면 다시 10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예상하는 21세기의 첫 10년은 30년 전 『성장의 한계』에서 예상했던 시나리오처럼 여전히 성장의 시대일 것이다. 따라서 1970년에서 2010년까지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우리를 비평하는 사람들의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 뒤로 1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기는 미정이지만 우리는 『성장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개정판을 또 낼 작정이다. 그때쯤이면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한계를 넘어선 실체를 검증할 수 있는 충분한 데이터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예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거기에 나타난 데이터를 가지고 인간의 기술과 시장이 지구 생태계의 한계를 인간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이 상승시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인구 증가율의 감소와 경제 쇠퇴는 코앞에 닥칠 것이다. 세계는 성장을 위해 또 수십 년을 준비할 것이다. 우리가 다음 책을 내놓을 때까지 여러분은 이제 인간의 생태발자국이 늘어난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이 이 책에서 그러한 노력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기반을 찾기를 바란다.</p> <p style="text-align: right"><br /> 2004년 1월<br /> 데니스 L. 메도즈, 미국 뉴햄프셔 더램<br /> 요르겐 랜더스, 노르웨이 오슬로</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1장</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br /> </span><span style="font-size: large">한계를 초과한 생태계</span></strong>&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미래는 더 이상 없다. (&hellip;&hellip;) 인간이 두뇌와 기회를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다면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행동한다면 미래는 여전히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될 수 있다.<br /> ―아우렐리오 페체이, 1981년</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계 초과란 뜻하지 않게 갑자기 너무 멀리 가거나 한계를 넘어간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날마다 한계 초과를 경험한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을 잃기 십상이다. 샤워기로 몸을 씻을 때 모르고 갑자기 너무 뜨거운 물을 틀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빙판길에서는 차가 멈춤 신호를 보고도 서지 못하고 미끄러져 정지선을 넘어갈 수 있다. 파티에 가서 자기 몸이 견뎌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술을 마실 수도 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숙취로 머리가 부서질 듯이 아플 것이다. 건설사들은 실제 수요보다 더 많은 콘도들을 지어 원가보다 싸게 팔고 결국에는 파산할 수도 있는 어리석은 짓을 수시로 한다. 바다에 어선을 너무 많이 띄우면 다음에 다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힌다. 이것은 물고기의 씨를 말리는 약탈 행위이다. 결국 나중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어 배들을 항만에서 그냥 썩히고 있을 수밖에 없다. 화학 회사들은 대기권 상층부에서 안전하게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염소 화합 물질들을 대기로 배출했다. 이제 오존층은 앞으로 성층권의 염소 농도가 낮아지지 않는 한 수십 년에 걸쳐서 계속 파괴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인이든 지구든 그 규모에 상관없이 그것의 지속 가능한 한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원인은 늘 세 가지이다. 첫째 원인은 성장, 가속, 급격한 변화이다. 둘째 원인은 어떤 한계나 장벽 형태로 나타난다. 시스템은 그것을 넘어서는 순간 더 이상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셋째 원인은 시스템이 적정 한계를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 생각과 행동이 지체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원인은 어떤 시스템이든 반드시 그 자체의 적정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계를 벗어난다는 현상은 똑같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형태는 거의 무한대로 매우 다양하다. 한계를 벗어나게 만드는 첫 번째 원인인 급격한 변화는 석유 사용의 증가와 같이 물질의 변화일 수 있다. 또 그것은 관리 대상이 되는 사람 수의 증가와 같이 집단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소비 욕구가 끊임없이 상승하는 것과 같이 심리의 변화일 수도 있다. 그 밖에 금융이나 정치, 생물학적 변화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원인인 한계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을 띤다. 한정된 공간이나 시간 또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물리적, 생물학적, 정치적, 심리적 한계와 같이 어떤 시스템의 고유한 특성들이 그 시스템에 한계를 지울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 번째 원인인 지체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지체는 무관심, 잘못된 데이터, 정보의 지체, 뒤늦은 대응, 괜한 트집만 잡고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관료주의, 시스템 대응 방식에 대한 거짓 이론들 때문에 생긴다. 또 지체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지만 그 효과가 빨리 퍼지는 것을 가로막는 기존의 타성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운전자가 빙판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자기 차가 얼마나 멀리까지 미끄러지는지 알지 못할 때 지체가 발생한다. 건설업자들은 현재의 건설 경기만을 볼 줄 알지 앞으로 2~3년 뒤에 그것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선의 선주들은 현재 잡는 물고기의 양에만 만족할 줄 알지 앞으로 물고기의 번식률이 얼마나 되고 또 얼마나 많이 잡힐지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화학 물질들은 그것들이 사용된 장소에서 생태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지점으로 이동하는 데 여러 해가 걸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계를 벗어나는 대부분의 사례들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 많은 종류의 한계들은 그 범위를 벗어나더라도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위험할 것 같다고 느끼면 그런 행위를 피하거나 그 결과를 최소화할 줄 안다. 예컨대 사람들은 샤워기를 틀기 전에 손으로 먼저 수온을 잰다. 때로는 한계를 초과해서 피해를 입은 경우 재빠르게 그것을 고치기도 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전날 밤 술집에서 과음을 한 뒤에는 보통 다음 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가끔 한계를 벗어났을 때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재앙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전 세계 인구 증가와 실물 경제의 성장 때문에 인간들은 바로 이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이 책 전반에 걸쳐 세계 인구와 경제가 지구의 수용 능력을 초과해서 성장하게 된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온 힘을 쏟을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문제들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관련 데이터들이 모두 완전하거나 충실한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 사이에 합의를 이룬 과학적 방법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물며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그들 사이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에게는 인간의 지구에 대한 수요와 그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구의 수용 능력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용어가 필요하다. 생태발자국은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용어는 마티스 베커나겔과 그의 동료들이 1997년 지구 회의(Earth Council)에서 위탁받은 연구를 수행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베커나겔은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천연자원을 제공하고 그들이 버리는 폐기물들을 흡수하기 위해 필요한 토지 면적을 계산했다.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나중에 베커나겔이 사용한 용어와 계량적 접근 방법을 채택해서 반년마다 《살아 있는 지구 보고서(Living Planet Report)》를 통해 150개가 넘는 나라의 생태발자국 데이터를 발표한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말부터 지구의 인간들은 해마다 지구가 그 해에 재생산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사용해왔다. 달리 말하면 지구 전체의 생태발자국은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 결론을 입증할 수 있는 많은 자료들이 있다. 나중에 3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한계 초과는 매우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전에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이제 인류는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들이 지구 전체의 규모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다양한 문제들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그런 위험을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 자세, 문화 규범, 습성, 제도 들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피해를 입을 경우 그것을 복구하는 데 대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그 결과가 반드시 대재앙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 생태계의 한계 초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일종의 붕괴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방향 전환과 보완, 주의 깊게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인간 사회와 그것을 지탱해주는 지구에 적용하고 검토하려고 한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방향을 전환할 수 있으며 그것이 세계 모든 사람들을 바람직하고 지속 가능하며 풍족한 미래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적절한 방향 전환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구의 붕괴는 자명하다는 사실도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붕괴는 오늘날 생존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발생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필자 소개<br /> 도넬라 H. 메도즈</b><br /> 미국의 환경과학을 선도한 과학자이자 저술가, 시스템 분석가로 2001년 갑작스레 사망했다. 당시 다트머스 대학 환경 연구 분야 객원 교수를 역임 중이었다. 1968년 하버드 대학에서 생물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시스템 공학의 창시자인 MIT의 제이 포레스터 교수 밑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1972년부터 다트머스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전국에 배급되는 중앙 일간지에「지구 시민(The Global Citizen)」이라는 주간 칼럼을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시스템 공학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1990년 월터 페인 과학 교육상을, 2001년 사망한 후에는 보존법칙재단이 수여하는 환경 분야 대상을 받았다. 로마클럽 미국 협회는 그녀의 업적을 기려서 &lsquo;도넬라 메도즈의 지속 가능한 지구 행동상&rsquo;을 제정하고 해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한 개인에게 상을 주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데니스 L. 메도즈</b><br /> 현재 뉴햄프셔 대학의 시스템 관리학 명예 교수이며 정책사회과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이 책의 주 저자 도넬라 H. 메도즈의 남편이다.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MIT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경영학과 공학, 사회과학을 주로 가르치며 다수의 혁신적이고 복잡한 전략 게임을 개발했고, 전 세계 50개가 넘는 나라에서 강연했다. MIT, 다트머스 대학에서 대학연구소장을 역임하고 국제시스템공학협회와 국제시뮬레이션게임협회 회장직을 수행했으며,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정부, 기업, 비영리 단체들을 자문했다. 또 전 세계의 시스템 공학, 공공 정책, 지속 가능한 개발과 관련된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식 네트워크 집단인 벌로톤그룹을 공동 설립하기도 했다. 2009년에 일본국제상을 받은 것을 비롯, 많은 상을 수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요르겐 랜더스</b><br /> 미래학 분야의 노르웨이 학자이며 정책 분석가로서 현실 문제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1973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에서 1989년까지 노르웨이 경영대학원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동 대학의 기후 전략 과정 교수로 있으며 주로 기후 문제, 시나리오 계획, 시스템 공학 분야에서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업들을 대상으로 기후 변화와 지구 온난화에 대응한 지속 가능한 개발과 관련한 강의를 많이 했으며, 2005년과 2006년에는 노르웨이 배기가스 감축 위원회를 이끌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역자 소개</b><br /> <b>김병순</b><br />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대기업을 다니다 현재는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달팽이 안단테』, 『다이 트라잉』, 『선을 위한 힘』,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탐욕의 종말』, 『그라민은행 이야기』, 『월드체인징』(공역), 『생명은 끝이 없는 길을 간다』, 『여우처럼 걸어라』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7 오후 3:33:00이루리의 ‘북극곰 코다 호’<img alt="" width="600" height="7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C%BB%A4%EB%B2%84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사</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행동하는 사랑의 위대함</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북극곰 코다 첫 번째 이야기, 까만 코』의 작가 이루리와 『눈 오는 날&ndash;장서리 내린 날』의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만나 아름다운 그림책 『북극곰 코다 두 번째 이야기, 호』를 만들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창작동화였던 『북극곰 코다 첫 번째 이야기, 까만 코』에서 작가 이루리는 위기에 처한 엄마 곰과 아기 곰이 사랑과 지혜로 서로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훈훈한 감동을 선물했습니다. 아마도 아기 곰이 엄마 곰의 까만 코를 가려 주는 장면은 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오래오래 남아 있을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창작동화인 『북극곰 코다 두 번째 이야기, 호』에서는 북극곰이 아닌 사냥꾼 보바가 위기에 처합니다. 그런데 위기에 처한 보바를 구해 주는 건 다름 아닌 아기 곰 코다입니다. 아기 곰이 무슨 힘으로 사냥꾼을 구해 주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엄마 곰한테 배운 따뜻한 입김이었습니다. 아기 곰 코다가 사냥꾼 보바의 얼굴에 따뜻한 입김을 &lsquo;호&rsquo; 하고 불어 주는 장면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사냥꾼 보바는 북극곰을 해치려고 했는데 아기 곰 코다는 오히려 보바를 구해 주었으니 말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가 이루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아주 분명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lsquo;엄마의 까만 코를 가려 주는 아기 곰 코다&rsquo;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lsquo;사냥꾼의 얼굴에 입김을 불어 주는 아기 곰 코다&rsquo;입니다. 그런데 엄마의 까만 코를 가려주는 아기 곰 코다의 행동과 사냥꾼 보바의 얼굴에 입김을 불어 주는 아기 곰 코다의 행동에는 &lsquo;사랑&rsquo;이라는 분명하고도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 이루리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힘은 바로 행동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북극곰 코다』 연작을 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꽤나 복잡합니다. 환경문제도 생각해야 하고 북극곰도 걱정이 됩니다. 무엇보다 어린 자녀들의 마음에 자칫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진 않을까 염려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북극곰 코다 이야기가 참 쉽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엄마의 코를 가려 주며 사랑한다고 말할 겁니다. 또한 엄마의 얼굴에 입김을 &lsquo;호&rsquo; 불어 주며 사랑한다고 말할 겁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눈 오는 날&ndash;장서리 내린 날』의 작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도 작가 이루리가 전하려는 사랑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였기에 국경과 대륙을 넘어 아름다운 작업을 함께 진행했을 겁니다. 베르토시는 『북극곰 코다 두 번째 이야기, 호』에서도 여전히 자연과 호흡하는 표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눈 덮인 북극이라는 배경의 한계를 놀라운 색채감으로 자연스럽게 뛰어넘었습니다. 또한 사실적 묘사와 동화적 묘사를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이야기가 지닌 극적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이루리와 엠마누엘레 베르토시가 함께 만들어 가는 『북극곰 코다』 연작 그림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들이 함께 만드는 그림책은 자연을 살리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며, 그 방법은 사랑의 실천뿐임을 감동으로 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작업이 더 행복한 지구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소설가 이순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br /> <img alt="" width="600" height="4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B%B3%B8%EB%AC%B8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0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B%B3%B8%EB%AC%B8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02.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B%B3%B8%EB%AC%B8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03.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B%B3%B8%EB%AC%B8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0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B%B3%B8%EB%AC%B8_%EB%B6%81%EA%B7%B9%EA%B3%B0%EC%BD%94%EB%8B%A42_%ED%98%B8_05.jpg" /><br /> <br /> (추천사 전문, 본문 일부)<br /> <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82"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A%B8%80_%EC%9D%B4%EB%A3%A8%EB%A6%AC_%EC%BA%90%EB%A6%AC%EC%BB%A4%EC%B3%90(1).jpg" />글 &middot; 이루리</strong><br />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공부한 뒤 논술강의와 번역 및 창작활동을 했습니다. 1998년 한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독서지도사 양성과정을 강의하면서 동화의 매력에 빠져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는 첫 창작동화 『북극곰 코다 첫 번째 이야기, 까만 코』를 발표하였습니다. 『북극곰 코다 첫 번째 이야기, 까만 코』는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되었으며, 2011년에는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이스라엘과 터키로 수출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번역서로는 『지구를 구한 꿈틀이사우루스』, 『마법사의 제자』 등이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82"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5_%EB%B6%81%EA%B7%B9%EA%B3%B0%20%EC%BD%94%EB%8B%A4%20%ED%98%B8/%EA%B7%B8%EB%A6%BC_%EB%B2%A0%EB%A5%B4%ED%86%A0%EC%8B%9C(1).jpg" />그림 &middot;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Emanuele Bertossi</strong><br /> 엠마누엘레 베르토시는 1970년 이탈리아 북동쪽 끝에 있는 프리울리 주 트리비냐노 우디네제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2011년 프리울리 베네치아 줄리아 세계민속축제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 대상, 2009년 파도바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2003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2000년 보르다노 내셔널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 심사위원 대상, 1999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1998년 보르다노 내셔널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 프리울리 언어 부문 대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습니다. 국내에는 2011년 10월, 『눈 오는 날』이 출간되어 독특한 그림과 아름다운 이야기로 많은 언론사와 비평가로부터 호평과 찬사를 받았으며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6 오후 4:03:00《204》2010년 5월 10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280"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4_%EB%B8%8C%EB%A0%88%ED%9E%88%ED%8A%B8_%EC%A0%95%EC%A7%80%EC%9A%A9.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0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희원의 『브레히트 초기시 연구』(예문, 1989)와 권정우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열림원, 2003, 이 작품을 읽는다 002)를 읽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정지용이 문학 연구자의 이론이나 비평 속에 함께 묶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두 권의 책을 헌책방에서 함께 사온 독자의 독후감에서는 무엇이나 가능하다(이희원의 책은 이 책이 발간되었을 무렵에 처음 읽었으나, 중학교 시절부터 모은 책을 모두 헌책방으로 넘겼던 마흔 어느 때에 버린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레히트(1898~1956)와 정지용(1902~1950)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살았지만 괄호 속의 생몰 연대를 보면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제국주의 국가에서 성장해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거쳐 마르크시스트가 되었고, 정지용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의 지식인으로 살다가 독립 이후에는 민족 간에 벌어진 좌&middot;우 이념 전쟁 속에서 죽었으니, 두 사람이 살았던 &lsquo;동시대&rsquo;란 그저 숫자놀음일 뿐인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37" height="351"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4_%EB%B8%8C%EB%A0%88%ED%9E%88%ED%8A%B8(1).JPG" />이희원은 김나지움(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잡지에 작품을 기고하던 때부터 첫 시집인 『가정기도서』가 출간된 1913~1927년까지를 브레히트의 초기 시로 본다. 우리나라에 브레히트의 시작품이 처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김광규가 번역한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1985)이 출간되면서다. 거기서 브레히트가 보여준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전체주의 독재자들에 대한 속 시원한 풍자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처럼 빈약한 비유와 평범한 어휘로 그것이 가능하다니! 하지만 브레히트의 초기 시는 무척 심심할뿐더러,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빌헬름 황제를 찬양하기까지 한다. 까닭은 &ldquo;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rdquo;(123쪽)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 이전에는 신흥 중산계층의 아들답게 &lsquo;빌헬름적 이데올로기&rsquo;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도덕&middot;신&middot;황제를 삼위일체로 하여, 게르만 민족주의&middot;애국주의를 추구했던 것이 빌헬름적 이데올로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기는 하지만 브레히트의 초기 시에는, 그가 192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천착하게 될 브레히트적 특성이 이미 나타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적 서정시에 대한 거부다. 서정시는 보통 시를 쓰는 시인이 &lsquo;서정적 무아경&rsquo;에 빠져 자신과 세계를 통합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때 시작품은 시인의 편에서 독자에게 작용하는 &lsquo;진리의 표현양식&rsquo;이다. 서정시의 어조와 서정시가 거두고자 하는 효과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레히트는 전통적 서정시가 강조하는 위와 같은 &lsquo;서정적 정조&rsquo;를 포기했다. 오히려 그는 시를 쓰는 서정적 정조와 혼연일체가 되기보다 거리를 유지하고자 했고, 서정적 자아와 세계(대상) 사이의 섣부른 융화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런 접근을 통해, 시를 읽혀지는 것에 만족하는 &lsquo;텍스트<sup>Text</sup>&rsquo;가 아닌, 독자와 상호소통하는 &lsquo;워크<sup>Work</sup>&rsquo;로 만들고자 했다. 이런 시작법은 그를 20세기 연극의 혁신자로 만들어 주었던 서사극 정신과 동일한데, 그에게 예술은 &lsquo;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토론과 비판의 발판을 확보하고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rsquo;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작에 임한 서정적 자아에 몰입하는 것을 차단하고, 대상과의 융화가 아닌 간격을 구하기 위해 그가 쓴 시작 기법은, ⅰ) 일상어 사용 ⅱ) 은유를 기피 ⅲ) 관용어 차용 ⅳ) 낯설게 하기 위한 외국어 사용 등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극히 친숙한 일상어나 관용어, 아울러 낯선 인공적 언어를 토대로 &lsquo;뒤집어 보기&rsquo;와 &lsquo;낯설게 하기&rsquo; 효과를 얻자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브레히트가 실험했고 또 이 책의 지은이가 강조하는 &lsquo;새로운 서정시&rsquo;는 브레히트 개인의 고안물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다. &lsquo;나와 세계&rsquo;를 아우르는 전통적 서정시는 자아의 도저한 자립성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자아와 세계가 별 무리 없이 융합될 수 있었던 전통 시대(고전주의)의 산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브레히트가 처음으로 시를 쓰던 당시] 내면성이 외부세계에 반영되거나, 혹은 이 내성 자체가 대상으로 다루어지는 장르로서의 시민적<font color="#000000">&middot;</font>개인주의적 서정시는 역사적으로 이미 몰락했거나 몰락해 가고 있는 주체의 서정시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서정시에서는 자연을 자아 속으로 침잠시킴으로써 외부세계에 주체를 투영시키는 것이 가능했던 반면, 브레히트 초기 시에서는 주체가 스스로를 소멸시킬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독점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사회가 상품적 성격에 물들고 자율적<font color="#000000">&middot;</font>개인적 이데올로기가 동요됨으로써 시민적 개인이 자신의 역사적 한계에 부닥치게 된 데에 있다.(25~26쪽)</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한편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스물두 살 적에(1923), 자신의 첫 작품으로 알려진 「향수」를 썼던 정지용에게 &lsquo;서정적 자아&rsquo;는 어떤 것이었을까? 아쉽게도 권정우의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는, 서정시인과 서정적 자아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조망하는 책이 아니다. 하지만 지은이가 새롭게, 의욕적으로 구분했던 정지용 시의 세 시기 동안, 시인은 한 번도 서정적 자아를 포기하지 않았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7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4_%EC%A0%95%EC%A7%80%EC%9A%A9%20%EB%AC%B8%ED%95%99%EA%B4%80.jpg" /><br /> <br /> 여러 동시와 민요풍의 시를 비롯해 「향수」를 썼던 초기에 정지용이 애용했던 이항대립 구조는 서정적 자아의 우세를 보여준다. 또 「유리창 1」&middot;「난초」와 종교시를 포함하여 『정지용 시집』이 나온 1935년 무렵까지의 중기에도 시인은 이미지즘의 &lsquo;객관적 상관물&rsquo;을 통해 감정적이고 주관성이 강한 서정적 자아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여전히 그의 시는 이항대립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의 시를 지배하는 목소리는 서정적 자아였다. 마지막으로 『정지용 시집』 이후를 일컫는 후기에 와서는 동양 고전을 통한 신성과 세속의 또 다른 이항대립을 구축했으나, 자아는 끝내 동양 고전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ldquo;정지용의 시 세계에서 이항대립은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방법&rdquo;(117쪽)이었다면서, &ldquo;이분법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면 세계를 보는 데 있어 서정적 자아의 주관이 개입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rdquo;(69쪽)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시대라고는 하지만, 브레히트가 살았던 20세기는 독점자본주의와 산업화가 첨단을 걷던 곳이었던 데 반해, 정지용이 살았던 곳은 아직 전통적인 농본사회였다. 정지용은 아직 서정적 자아가 가능했던 시대에 살고 있었던 데다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에 살았다. 그러므로 주체라고 바꾸어 불러도 좋을 시인의 서정적 자아는 폐기될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을 읽는다』에는 정지용의 여러 시들과 함께, 지은이가 정지용의 시를 비교&middot;해설하기 위해 전문 인용된 도연명&middot;굴원&middot;유종원&middot;『시경』&middot;두보의 시들이 나온다. 그런데 정지용의 시는 그 시들이 씌여진 시대의 철자법과 표현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중국의 시들은 현재의 철자법과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다. 비교를 위해, 사례를 옮겨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①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br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br />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것도 없는<br /> 사철 발벗은 안해가<br />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② 초가 지어 마을에 살고 있으니<br /> 수레의 시끄러운 소리 들리지 않는다.<br /> 그대여 어찌해 그럴 수 있는가.<br />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졌으니 그럴 수밖에<br /> 동쪽 담밑에서 국화를 꺽다가<br /> 문득 남쪽 산을 바라본다.<br /> 산 경치는 저녁때가 한껏 아름답고<br /> 새들은 줄지어 돌아간다.<br /> 이런 속에 참다운 진리가 있으니<br /> 말로 표현하려 해도 이미 할 말을 잊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①은 정지용의 「향수」 가운데 넷째 연이고, ②는 도연명의 「음주시<sup>飮酒詩</sup>」 가운데 제5수다. 천 년도 넘는 중국 시는 저렇게 읽기가 쉬운데, 백 년도 채 되지 않은 우리나라 시는 원본을 살린다는 빌미로 천 년 전의 중국 시보다 더 읽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또 정지용 시에 한자로 나오는 &lsquo;전설&rsquo;이 원본 그대로라면, 도연명의 시 가운데 나오는 &lsquo;남쪽 산&rsquo;은 왜 &lsquo;南山&rsquo;이 아니고 &lsquo;산 경치&rsquo;는 왜 &lsquo;山氣&rsquo;가 아닌가? 정지용이 살아 있다 하더라도, 한자나 옛 철자와 표현을 고스란히 고집할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잘못은 &ldquo;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이나 작품세계를 설명해주는 문학 연구자도 필요한데 지금까지는 이런 연구자가 흔치 않다&rdquo;(35쪽)라고 쓴 지은이의 철저하지 못한 신념이 아니라, 원칙을 바로 세우지 못한 이 총서의 기획위원들이다.<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16 오후 2:35:00촘스키의 ‘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img alt="" width="600" height="88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EC%B4%98%EC%8A%A4%ED%82%A4,%EB%A0%88%EB%B0%94%EB%85%B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아이린 겐지어<br /> 아사프 크푸리<br /> 파와즈 트라불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처음 이 책을 기획한 의도는 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2006년 5월에 8일 동안 레바논을 방문한 기록을 책으로 엮어내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촘스키의 강의록과 인터뷰 자료를 모으고, 캐롤이 찍은 사진과 함께 여행 내내 동행했던 아이린 겐지어, 아사프 크푸리, 파와즈 트라불시의 글도 넣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6년 5월과 6월 사이에 책을 구성하게 될 내용들을 수집하고 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내분이 일고는 있었지만 이삼 주 동안 레바논은 비교적 조용하게 중동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들끓거나 억눌려 있는 아랍 분쟁 지역의 일부라는 현실을 레바논이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라크에서의 살육은 극심했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으며, 서방과 이란 사이의 교착 상태가 이 지역 전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2006년 6월 28일에 가자 지구<sup>Gaza Strip</sup> 공격을 재개했고, 7월 12일에는 레바논에 침공을 감행해 34일간이나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6년 7월 말과 8월, 레바논판 &lsquo;충격과 공포&rsquo; 작전은 날이면 날마다 신문 1면을 장식했지만, 이 기사들의 상당수는 이 전쟁을 그 근방에서 일고 있는 분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인 양 다루었다. 서방 언론들은 중동 분쟁과, 그 분쟁이 레바논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하자고 서로 약속이나 한 듯했다. 헤즈볼라(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교전단체이자 정당조직)만이 &lsquo;무분별한 도발&rsquo;의 주범으로 비난받았고, 이스라엘의 잔혹한 공격은 적절하지 못한 경우조차도 계속해서 정당하다고 평가되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이라크와의 관계, 그리고 아랍 지역과 나머지 세계의 관계를 다루는 기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작전은 결국 이스라엘군이 미국 정부의 지원과 허가를 받아 무력으로 레바논을 압제하에 몰아넣으려 한 것이었지만, 이런 일에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거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레바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이 책에 대한 우리의 기획 의도도 바뀌었다. 노엄 촘스키의 강의, 인터뷰, 그리고 에세이는 중동 분쟁에 대한 국제적 관점과 그 근본적인 원인을 조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 장에 실은 파와즈 트라불시의 글은 서방세계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하여, 변화의 목적은 국제적인 억압 관계를 흐리려는 데 있음을 밝혔다. 이 글은 중동지역 전반에 걸쳐 일고 있는 분쟁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며, 레바논은 그 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사프 크푸리는 노엄 촘스키와 캐롤 촘스키의 레바논 여정을 기록으로 옮겼고,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사이드 하산 나스랄라와의 만남도 글로 옮겼다. 아이린 겐지어는 1982년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난민 캠프와 키암 수용소를 방문한 소감과 함께 키암 지역을 비롯해 레바논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캐롤 촘스키의 사진은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폐허가 되기 바로 몇 달 전의 레바논 모습을 담고 있어 전쟁일기 편에 실린 폐허 현장 사진들과 대조되는 장면들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6년 여름에 자행된 폭격과 파괴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넣었다. 하나디 살만, 라샤 살티, 모나 엘 파라, 라일라 엘 하다드가 쓴 전쟁일기다. 하나디 살만과 라샤 살티는 2006년 7월에서 8월까지, 34일 내내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에 남아 있었다. 모나 엘 파라와 라일라 엘 하다드는 2006년 여름에 레바논과 가자에서 동시에 일어난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들려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니퍼 뢰벤슈타인의 글은 전쟁이 끝나 남부 레바논 사람들이 폐허로 변한 집을 재건하는 동안에도 팔레스타인인<sup>人</sup>의 목을 죄던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미르나 므네임네흐는 LBC 텔레비전 마르셀 가넴의 노엄 촘스키 인터뷰를 글로 옮겼고, 뉴욕 구겐하임 재단의 베른하르트 게이에르가 그 원고를 번역했다. 제니퍼 뢰벤슈타인은 인터뷰 원고의 편집을 도왔고, 하나디 살만의 일기를 발췌해 편집했다. 아사프 크푸리는 모나 엘 파라와 라일라 엘 하다드의 일기를 발췌해 편집했으며 파와즈 트라불시의 아랍어 원문을 번역했다. 브렛 클락과 먼슬리 리뷰 출판사 편집부는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을 총괄적으로 감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세 사람은 캐롤 촘스키의 사진(2006년 5월)과 하나디 살만의 사진(2006년 7&sim;8월) 중에 책에 실을 사진을 선정하고, 중동사 연표를 만들었다.</p> <p style="text-align: right">2007년 2월</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EC%A4%91%EB%8F%99%EC%A7%80%EB%8F%84.jpg"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촘스키 부부의 베이루트 방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아사프 크푸리</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006년 5월 8일, 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8일간 머무를 예정으로 베이루트에 도착했다. 촘스키의 여러 레바논 친구들은 그의 레바논 방문을 오랫동안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노엄 촘스키는 거의 40년이나 팔레스타인인과 중동지역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왔고, 그들에 관한 글을 쓰고 그들을 옹호하는 일을 공개적으로 해왔으며, 그의 말에 따르면 &ldquo;앞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한&rdquo;은 지금과 같은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베이루트 시민들은 노엄 촘스키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의 베이루트 방문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sup>American University in Beirut: AUB</sup>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촘스키는 5월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연이어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강의했고, 8일간의 일정 중 나머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방문하는 데 바쳤다. 작가이자 정치운동가이며 촘스키의 오랜 친구인 파와즈 트라불시가 나와 함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의를 제외한 모든 일정을 계획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가 베이루트를 방문한 시기는 레바논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다시 폭력이 일던 때였다. 근래 서방 언론이 다뤘던 레바논 관련 기사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2005년 2월 14일, 레바논 전<sup>前</sup> 총리 라피크 하리리가 암살된 일일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2005년 봄에 베이루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로 인해 2005년 4월 말에 시리아군이 레바논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1976년 레바논 내전을 빌미로 시리아군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 29년 만의 일이었다. 하리리 총리 암살 사건은 아직도 유엔<sup>UN</sup> 조사위원회에서 조사 중이다. 하리리는 에밀 라후드 레바논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2007년 11월까지 3년 더 연장하려는 움직임에 강하게 반대했다. 시리아 정부는 라후드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레바논 국회의원을 협박하고 미리 심어놓은 친시리아계 의원을 동원하여 헌법까지 개정했다. 그에 대한 반발로 하리리 총리는 2004년 10월 총리직에서 물러나 점점 더 투쟁적이 되어가던 반<sup>反</sup>시리아 진영에 합류했다. 당시 반시리아 진영의 수장은 왈리드 줌블라트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5년 봄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는 고압적인 시리아의 간섭에 오랫동안 참아온 레바논인들이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게다가 거의 400억 달러에 달하는 국가 부채를 짊어지고 장기적인 경기 침체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레바논 경제상황도 한몫 거들었다. 이 부채 규모는 레바논 국내총생산<sup>GDP</sup>의 180퍼센트를 웃도는 수치로, 세계 최고 수준의 부채율이었다. 레바논 국민들이 시위를 통해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은 변화였다. 총인구가 400만 명도 안 되는 나라에서 시민 50만 명(2005년 3월 8일)과 군인 75만 명(2005년 3월 14일)이 시위에 나섰다는 것은 국민이 변화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보여준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정치 엘리트들은 분열되었다. 레바논의 외부 위협 요인이 무엇이냐를 놓고 서로 시각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헤즈볼라가 앞장선 3월 8일 시위의 주도자들은 주요 위협 요인이 이스라엘의 침략과 더불어 중동의 정치적 지도를 다시 그리려는 고삐 풀린 미국의 중동재편정책이라고 했다. 하지만 3월 14일 시위를 주도했던 왈리드 줌블라트와 라피크 하리리 동맹 세력은 이스라엘의 위협을 비롯한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레바논 내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계속되는 시리아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리아는 친시리아계 정치인들과 첩보기관을 동원하고, 29년 동안이나 레바논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레바논을 마음대로 주물러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5년 봄 이후로 정치적 동맹 판세도 급속히 변모했다. 하지만 동맹관계가 다소 변했어도, 두 연대는 여전히 주요 양대 진영으로 정치권 내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전 군사령관 미셸 아운이 이끄는 자유애국운동이 3&middot;14 연대에서 3&middot;8 연대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공산당과 몇몇 다른 동맹 집단으로 이루어진 초당적 좌파는 압도적이었던 양 진영의 시위로 그늘에 가려지는 듯도 했지만, 이후 더욱 강경한 자세를 취하면서 헤즈볼라와 3&middot;8 연대에 가세했다. 하지만 이 연대로 완전히 흡수되지는 않았고, 그중 일부는 아예 이탈하여 3&middot;14 연대로 들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노엄 촘스키와 부인 캐롤이 레바논을 방문한 때는 이런 정치적 상황이 전개된 직후였다. 파와즈 트라불시는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연과 더불어 여러 일정을 준비했다. 촘스키 부부는 베이루트 외곽에 있는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를 방문하고, 레바논과 이스라엘 접경지역을 둘러보았으며, 레바논 남부 키암 마을에 있는 전<sup>前</sup> 이스라엘 감옥이자 고문장을 찾았다. 헤즈볼라 지도자(3&middot;8 연대), 국회의원 왈리드 줌블라트와 변호사 치블리 말라트(3&middot;14 연대), 그리고 공산당 지도자와 만나 긴 대화도 나누었다. 레바논 아메리칸 대학교에서는 파와즈 트라불시의 사회로 &lsquo;1948년 팔레스타인&rsquo;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고, &lsquo;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무력 충돌의 역사와 시오니즘<sup>Zionism</sup>&rsquo;이라는 주제로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레바논 국내외 신문과 방송 인터뷰에도 10여 차례 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는 운집한 청중들과 함께한 두 번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강연 후에, 베이루트에 있는 대형 극장 마스라알마디나에서의 세 번째 강연도 성황리에 마쳤다. 진보 성향의 문화협회 &lsquo;알 리카(&lsquo;조우&rsquo;라는 의미)&rsquo;가 주관한 이 강연은 가산 이사 회장의 소개로 시작되었고, 파와즈 트라불시가 사회를 맡았다. 촘스키는 &lsquo;임박한 위기, 위협과 기회<sup>Imminent Crises: Threats and Opportunities</sup>&rsquo;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미국이 중동문제에 너무 깊이 개입하여 현재 이런 위기상황들이 초래되었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계획된 일정 못지않게 뜻깊었던 일은 촘스키를 따뜻하게 환영해주었던 수많은 레바논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거리나 호텔 로비에서,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이나 강연이 끝난 후에 마주친 사람들과의 만남도 소중했고, 강연장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애쓰는 사람들을 보다 못해 자리를 더 늘린 회합도 뜻깊었다. 그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이는 없었다. 사브라 샤틸라에서는 간이건물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인 약사를 만났고, 팔레스타인 노동운동 지도자와 전 레바논 각료도 만났다. 어떤 남자는 막 구입한 듯 깨끗한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sup>Failed States</sup>》를 들고 나와 사인을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만남이 이어졌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8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EC%9D%B4%EC%8A%A4%EB%9D%BC%EC%97%98%EC%A7%80%EB%8F%84.jpg" /><br /> <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상 깊었던 순간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5월 8일에서 16일까지, 촘스키 부부의 여정에는 파와즈 트라불시, 아이린 겐지어와 더불어 나도 동행했다. 기자들과 다큐멘터리 취재 팀도 각자 사정대로 우리를 따랐다. 아래는 우리의 방문 기록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을 모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1일, 사브라 샤틸라 난민 캠프</b></p> <p style="text-align: justify">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 나즈데<sup>Najdeh</sup>가 운영하는 직업훈련센터에는 대졸 자원봉사자가 둘 있었다. 영국인 젊은이와 팔레스타인인 젊은이로, 10대 청소년들에게 컴퓨터와 인터넷 이용법을 가르쳤다. 영국인 젊은이는 이곳에서 1년간의 자원봉사를 마쳐서 곧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인 봉사자는 레바논에 있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아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촘스키와 그 팔레스타인인 젊은이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다. 촘스키는 그의 대학 학비를 누가 냈느냐고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젊은이는 대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제사업기구<sup>UN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sup>에서 냈습니다.&rdquo;<br /> &ldquo;난민 캠프 밖에서 직업을 찾아보았나요?&rdquo;<br /> &ldquo;찾아보았지만, 구하지 못했습니다.&rdquo;<br /> &ldquo;왜 일자리를 주지 않는 거죠?&rdquo;<br /> &ldquo;레바논인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죠.&rdquo;<br /> &ldquo;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rdquo;<br /> &ldquo;레바논을 떠나고 싶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엷은 미소를 띠며 젊은이가 덧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에드워드 사이드(1935&sim;2003,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 석학으로, 미국 콜롬비아 대학교수로 재직.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통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함께 살기 원했으며, 재외국 팔레스타인의회 의원으로도 활동)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난민 캠프에는 커다란 철문이 달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600평 남짓한 빈 땅이 있었다.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랑헤 민병대(친이스라엘 성향의 기독교도 민병대)를 침투시켜 캠프를 포위한 후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을 때 희생된 이들이 묻힌 장소였다. 잔디로 덮인 평평한 땅에는 군데군데 두세 개씩 봉긋이 올라온 작은 흙무더기가 보였다. 우리는 대문에 위아래로 길게 난 쇠창살 사이로 묘지를 들여다보았다. 바깥벽에는 색 바랜 커다란 포스터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희생된 이들의 사진이었다. 이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팔레스타인 노인 문지기가 문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꽃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묘지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미국 사람이면 문을 열어줄 수 없다고 대꾸했다. 내가 나서서 이 사람들은 미국인이 맞지만 좋은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몇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촘스키를 가리키며, 특히 이 사람은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가장 열심히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일러주었다. 노인은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이라도 하듯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일어서서 문을 열어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1일, 베이루트 헤즈볼라 본부</b></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삼엄하게 요새화된 헤즈볼라 본부에서 헤즈볼라 지도자 사이드 하산 나스랄라를 만났다. 헤즈볼라는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고 레바논 국회와 평의회에 의석을 갖고 있다. 1990년대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활동으로 얻은 성과였다. 그렇지만 콘돌리자 라이스, 데이비드 웰치, 엘리엇 아브람스, 제프리 펠트만 등 미국 정부 관료들은 다른 레바논 정치가와 고위인사들을 방문하면서도 나스랄라만은 제외했고, 여전히 헤즈볼라를 테러 단체로 취급했다. 촘스키와 헤즈볼라 지도자의 만남은 저명한 미국인이자 가장 유명한 반체제 인사인 촘스키가 레바논과 중동지역에서 헤즈볼라의 역할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더불어 나스랄라와 함께 나눈 이야기도 그만큼이나 의미가 컸다. 나스랄라는 미국 정부의 엠바고(보도금지 정책)를 깨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한 말을 촘스키가 그대로 인용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촘스키에게 악의적인 선전만 일삼는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헤즈볼라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대답으로, 촘스키는 국민 여론이 정부 정책과는 다른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가 내놓는 정책과 미국 내 여론에서 나올 수 있는 정책을 달리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워싱턴 정부 관료들은 소수의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며,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두 당 대표가 결국 서로 같은 시각을 보인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기업의 이해관계를 따라가는 정치가들보다 미국의 대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헤즈볼라에 요구하는 무장해제를 비롯하여 나스랄라는 촘스키와 다양한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스랄라는 레바논 남부를 지키기 위해서는 헤즈볼라의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이 문제는 단지 헤즈볼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레바논 국민 전체를 위한 일이라고 했다. 그 만남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과 텔레비전 취재진을 향해 촘스키는 &ldquo;나는 헤즈볼라가 잠재적인 공격에 대한 억제책으로 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주장을 할 만한 근거는 무척 많습니다&rdquo; 하고 말했다. 우익보수 집단들이 두고두고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낼 소지가 충분한 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2일, 베이루트의 마스라알마디나 극장</b></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의 강연이 끝난 후 가슴이 뻐근하도록 감격적인 일이 있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촘스키에게 다가와서는 &ldquo;저는 킨다입니다&rdquo; 하고 말한 순간이었다. 킨다는 촘스키의 책 《해적과 제왕<sup>Pirates and Emperors</sup>》을 들고 있었다. 킨다가 일곱 살 때 썼던 편지가 실려 있는 책이었다. 킨다는 1986년 4월, 미국의 폭격으로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있던 자기 집이 파괴된 후에 그 편지를 썼다. 그 사건은 민간인 60명에서 1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분명한 테러 공격이었다. 저널리스트 도널드 네프는 당시 상황을 꼬집어 &ldquo;동네 불량배(레이건 행정부)가 꼬마(카다피 정권)에게 싸움을 건 꼴&rdquo;이었다고 절묘하게 표현했다. 킨다는 촘스키에게 자기 책에 사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킨다의 어머니도 그 자리에 있었다. 촘스키는 캐롤을 불러 두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킨다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레이건 대통령 아저씨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대통령 아저씨는 왜 하나뿐인 우리 언니 라파와 내 친구 라샤와 내 아기인형 딸기를 죽였나요? 라샤는 아홉 살밖에 안 됐어요. 우리 아빠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서 아저씨가 우리를 전부 죽이려 한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리고 카다피 대통령 아저씨가 우리를 아빠 집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해서 카다피 아저씨도 죽이려 한다는 게 맞나요?<br /> 제 이름은 킨다예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리비아 폭격과 1986년 4월에 벌어진 일의 여파를 보도했던 ABC 통신원 찰스 글래스는 폭격으로 무너진 킨다의 집 잔해 더미 속에서 킨다의 편지를 발견했다. 글래스는 미국 교육을 받은 킨다의 가족이 레바논으로 이사한 후에도 계속해서 방문하고 연락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5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EB%A0%88%EB%B0%94%EB%85%BC%EC%A7%80%EB%8F%84.jpg" /><br /> <br /> <br /> <b>5월 13일, 레바논 남부 키암</b></p> <p style="text-align: justify">화창한 봄 날씨에 우리는 키암으로 가기 위해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을 따라 난 좁은 길을 달렸다. 길에는 드문드문 가시철망 울타리가 쳐 있었다. 이스라엘 국경 마을 메툴라를 지날 때는 거주민들이 집 안에서 일하는 모습이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집들이 언덕 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고, 감시탑 꼭대기에는 이스라엘 국기가 꽂혀 있었다. 갈릴리에서 가장 고지대인 그곳은 깊은 계곡이 이어지고, 개울이 굽이쳐 흘렀으며, 5월의 짙푸른 들판이 장관이었다. 키암에서 멀리 셰바팜스와 헤르몬 산 쪽으로 향하는 골짜기 너머의 풍경도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부 레바논 헤즈볼라 지도자 셰이크 나빌 카우크가 키암에 있는 전<sup>前</sup> 이스라엘 감옥이자 고문장 터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과 텔레비전 취재진도 와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우크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촘스키에게 다가가 포옹하더니 양쪽 볼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수용소 마당 한가운데에는 히브리 글자가 새겨진 녹슬고 고장 난 군용 트럭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2000년 5월, 이스라엘 군대가 떠나면서 버리고 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장면이 사진기자와 카메라맨의 렌즈에 포착되었지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목을 빼고 지켜보는 존재가 또 있었다. 눈부시게 환한 하늘 위로 보일 듯 말 듯 날고 있는 무인정찰기 한 대.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국경지역을 주기적으로 정찰하면서 레바논 민병대와 팔레스타인 민병대의 움직임을 감시한다는 말을 이미 들었다. (다음 날, 베이루트의 모든 주요 일간지 1면에는 키암 수용소 감방을 살펴보는 촘스키와 카우크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이삼일 후, 흥분한 블로거들이 이렇게 주장하고 나섰다. &ldquo;노엄 촘스키는 지하드를 찬양한다.&rdquo; &ldquo;촘스키를 미국으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된다.&rdquo; 그리고 전형적인 보수우익 집단의 &lsquo;촘스키 죽이기&rsquo; 식 악담이 줄을 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3일, 레바논 남부 나바티예</b></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는 남부 레바논 문화위원회의 &lsquo;공개 토론회&rsquo;에 참석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분명 우호진영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화위원회는 세속주의(secularism, 인간 활동이나 정치적인 의사결정이 종교적 믿음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의) 좌파 활동가들이 모인 단체다. 오랫동안 문화위원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하비브 사덱은 레바논에서 진보적인 대의를 위해 활동해온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4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_(p2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촘스키를 소개하기 위해 나선 하비브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오늘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hellip;&hellip; 저명한 현대 언어학자이자, 현 시대 최고의 진보 사상가이며, 좌파 국제주의자의 상징인 촘스키를 우리 모두 환영합시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청중들의 열띤 박수 소리로 하비브는 한참이나 말을 이을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노엄 촘스키는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나서는 사람이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아까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또한 진정한 지식인이란 압제국의 거대한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박수 소리로 또다시 연설이 중단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비브 사덱의 말과 뒤이어 나온 연설자들의 말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귀를 쫑긋 세워야만 했다. 계속해서 의자 움직이는 소리나 박수 소리 같은 소음이 계속된 데다가 음향 시스템도 불안정했다. 100여 명의 나바티예 주민이, 나이 든 사람은 양복을 차려입고 젊은이들은 색색깔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와서 촘스키의 말을 듣고 직접 질문도 하고 싶어 작은 회관으로 모여들었다. 회관 바깥 정원에도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열린 창과 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없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멀찌감치 물러서서 찍찍거리는 스피커를 통해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엄 촘스키와의 토론회는 다소 소란스럽고 열광적인 모임으로 변했고, 한 시간 정도 만에 짧게 끝났다. 모임이 끝날 무렵 멋지게 차려 입은 70대 노인 하비브 사덱이 내게 다가와 시간이 너무 짧아 촘스키와 더 오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4일, 베이루트</b></p> <p style="text-align: justify">레바논 공산당에서도 촘스키와 대화를 나누고자 호텔로 대표자를 보내왔다. 오랫동안 노동계 지도자로 활동한 공산당 지도위원회 위원 모리스 나라가 찾아왔다. 영어와 아랍어 통역을 위해 함께 온 젊은 공산당원은 정부 각료 밑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기자들이 나타나 면담 장면을 찍어댔다. 그때마다 통역을 맡은 당원은 카메라에 찍히지 않으려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공산당 대표자와 촘스키가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리는 날이면 자기의 정치적 정체성이 드러나 상관의 심기를 건드릴 게 뻔했다. 젊은 당원이 뒤로 물러날 때마다 파와즈와 내가 임시변통으로 대신 통역을 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며칠 전인 5월 9일, 우리는 촘스키에게 5월 10일 일정이 변경되었음을 알렸다. 공산당, 노동단체, 그리고 몇몇 동맹 당들이 정부의 법률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 법안에는 노동자들에게 불이익을 안기는 새로운 노동계약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위는 5월 10일로 예정되었고, 도시 중심부의 교통이 마비될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베이루트 시내는 피하기로 했다. 촘스키는 우리도 시위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촘스키는 5월 10일에 있었던 시위와 그 여파에 대해 빠짐없이 알고 싶어 했다. 이와 관련하여 촘스키는 모리스 나라 의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공산당과 노동단체 이외에 또 어떤 당이 시위에 참여했는가? 시위의 규모는? 이 시위가 정부에게 법률 초안을 수정하도록 압박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정부가 초안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후속대책은 무엇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촘스키를 초대하거나 만나고 싶어 했지만 아쉽더라도 그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시아파 최고 성직자 아야톨라 무함마드 후세인 파들랄라의 초대도 거절했다. 이제 서방에서는 거의 잊힌 사건이지만, 1985년에 미국 CIA가 파들랄라를 암살하려고 서베이루트의 인구밀집지역에서 자동차 폭탄 테러를 자행했다. 당시 파들랄라는 위험을 면했지만 그 테러로 무고한 시민 80명이 죽고 부상자도 200명 이상 발생했다. 그때 촘스키가 미국 정부를 비난한 것을 파들랄라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른 초대도 거절했다. 시리아 정부 고위관료가 촘스키에게 다마스쿠스(시리아의 수도)를 방문해달라고 했지만 그런 초대에 응하기에는 시기가 적절하지 않았다. 바로 그날, 시리아 정부는 작가이자 민주주의 운동가인 미셸 킬로를 체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5월 15일, 무크타라</b></p> <p style="text-align: justify">슈프 산악지대를 따라 한참을 운전해 간 후에 우리는 해발 900미터가 넘는 무크타라에 도착했다. 도중에 데이르엘카마르 마을과 베이트에딘 마을 두 곳을 잠시 들렀다. 오스만 제국이나 그 이전 시대에 세워진 옛 주택과 석상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크타라는 줌블라트 가문이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다. 이 고장 저택의 전형적인 형태로 지어져 천장이 높고 아치가 있으며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이 달린 줌블라트 저택은 초록이 우거진 계곡을 내려다보며 장엄하게 우뚝 서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왈리드 줌블라트가 대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유능한 변호사이며 지금은 레바논 대통령 후보로 나선 치블리 말라트가 함께 있었다. 줌블라트와 말라트는 모두 친정부파 &lsquo;3&middot;14 연대&rsquo;에 속하며, 줌블라트는 레바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 중 한 명이었다. 우리는 호화로운 오찬을 함께했고 식사 후에는 긴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줌블라트는 시리아 정권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술회했다. 1977년 자신의 아버지 카말 줌블라트가 암살된 것을 비롯해 1970년대 이후 시리아 정부 명령으로 자행된 수많은 암살 사건을 열거했다. 우리는 레바논과 이 지역의 미래에 대해 두 사람으로부터 건설적인 제안을 듣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곤란한 점이 있어 그 논의의 초점은 자꾸만 흐려졌다. 말라트는 어떻게 하면 레바논 정당들이 현재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지 촘스키의 조언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레바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자신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고 현명하게 대답했으며, 레바논 내부 문제에 외부인을 개입시키는 것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촘스키 부부가 8일간 레바논을 방문한 것은 여러 중요한 연계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베이루트에서 촘스키를 맞은 사람들에게는 희망과 이성이 담긴 미국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그것은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이라크와 중동에서 더 많은 폭력과 파괴를 불러오는 워싱턴 관료들의 끊임없는 선언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촘스키 자신에게도, 몇십 년 동안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지역과 사람들을 직접 둘러보고 경험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이 방문이 뜻깊었다. 특히 중동지역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여서 더욱 특별했던 방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4_%EC%B4%98%EC%8A%A4%ED%82%A4,%20%EA%B3%A0%EB%87%8C%EC%9D%98%20%EB%95%85%20%EB%A0%88%EB%B0%94%EB%85%BC%EC%97%90%20%EC%84%9C%EB%8B%A4/1%EC%9E%A5%20%EC%A3%BC%EC%84%9D.jpg" /><br /> <br /> <br /> (서문,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br /> </strong>미국 MIT대학 언어․철학과 명예교수이자 인스티튜트 프로페서(Institute Professor: 독립된 학문기관으로 인정되는 교수)이며,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으로 활약한 언어학자이자 철학자다. 어릴 때부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그는 언어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1960년대부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했다. 세계 민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다국적 거대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지배권력의 선전에 맞서 사람들에게 지적인 자기방어법을 제공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제시한다. 1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캐롤 촘스키Carol Chomsky</strong><br /> 노엄 촘스키의 부인. 촘스키의 강연 여행 로드 매니저로도 활동한다.&nbsp; 2006년 5월의 레바논 여행에도 동행했고, 그때 캐롤이 찍은 사진 일부가 이 책에 실렸다.<br /> &nbsp;<br /> <strong>모나 엘 파라Mona el-Farra</strong><br /> 가자 지구 자발리아 난민 캠프에 있는 알 아우다 병원의 의사이자 공동 설립자다. 현재 모나는 건강 상담사, 지역사회 조직 전문가, 인권운동가로 일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라일라 엘 하다드Laila el-Haddad</strong><br /> 저널리스트라는 직업 때문에 여행을 자주 한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남편 야신이 일하는 미국과 부모가 살고 있는 가자를 오가며 지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이린 겐지어Irene L. Gendzier</strong><br /> 미국의 중동 정책에 관한 글을 쓴다. 현재 보스턴 대학의 정치학과 역사학 교수다. 대표적인 저서는 다음과 같다. 《지뢰밭에서의 기록 : 1945~1958년, 미국의 레바논과 중동 외교정책》(국내 미출간). 포크R. Falk, 리프턴R. J. Lifton과 공동 편집한 《전쟁이라는 범죄 : 이라크》(국내 미출간).</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사프 크푸리Assaf Kfoury</strong><br /> 수학자, 컴퓨터공학자, 그리고 정치운동가다. 베이루트와 카이로에서 성장한 아랍계 미국인으로 중동을 자주 방문한다. 현재 보스턴 대학의 컴퓨터공학 교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제니퍼 뢰벤슈타인Jennifer Loewenstein</strong><br /> 위스콘신매디슨 대학의 중동 연구 프로그램 부국장. 가자 지구, 예루살렘, 베이루트에서 거주하며 일을 했고, 중동과 관련하여 광범위한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하나디 살만Hanady Salman</strong><br /> 레바논 일간지 《아스 사피르》 편집장. 1968년에 베이루트에서 태어났고, 내전으로 레바논을 떠났던 1981년부터 1986년까지는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97년 조지타운 대학에서 아랍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라샤 살티Rasha Salti</strong><br /> 독립 큐레이터이자 프리랜서 작가다. 판화 작가이기도 하며, 2000년에 뉴욕 뉴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인문학 석사를 받았다. 라샤의 에세이, 기고문, 편년사는 아랍어와 영어로 이집트의 《알 아람 위클리》, 레바논의 《자와야》,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 계간 리포트》, 알제리의 《나크드》, 미국의 《중동연구 및 정보 프로젝트》와 《비둔》 같은 잡지에 실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파와즈 트라불시Fawwaz Traboulsi</strong><br /> 역사학자, 저널리스트, 그리고 오랫동안 정치운동가로도 활동했다. 현재 베이루트에 있는 레바논 아메리칸 대학에서 정치학과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어로 나온 그의 가장 최근 저서는 《레바논의 역사》(국내 미출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강주헌</strong><br /> 대학에서 불어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브장송 대학에서 수학했다. 불어 전공자로서 영어권 학자인 촘스키를 연구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으며, 지적 자유와 거침없는 삶을 추구하는 열린 정신의 소유자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는 한편 &lsquo;펍헙 번역 그룹&rsquo;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1, 2》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문명의 붕괴》 《슬럼독 밀리어네어》 《월든》 등 100여 권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유자화</strong><br /> 전문 번역가. 현재 초등학교 보건교사로도 일하면서 건강과 의학을 비롯하여 심리학, 철학, 과학,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옮긴 책으로 《단순한 삶》 《욕망의 아내》 《나쁜 생각》 《감춰진 생물들의 치명적 사생활》 《어머니를 돌보며》 《건강, 음식, 질병에 관한 오해와 진실》 《비행기의 역사》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3 오전 11:25:00제임스홀의 ‘왼쪽-오른쪽의 서양미술사’<img alt="" width="600" height="9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3_%EC%99%BC%EC%AA%BD%20%EC%98%A4%EB%A5%B8%EC%AA%BD%EC%9D%98%20%EC%84%9C%EC%96%91%EB%AF%B8%EC%88%A0%EC%82%AC/%EC%99%BC%EC%AA%BD-%EC%98%A4%EB%A5%B8%EC%AA%BD%EC%9D%98_%EC%84%9C%EC%96%91%EB%AF%B8%EC%88%A0%EC%82%AC_%ED%91%9C1(1).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내 아버지가 가발을 오른손으로 벗어야 하는지 왼손으로 벗어야 하는지보다 <br />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문제로 가장 위대한 왕국들이 쪼개졌으며, <br /> 그 왕국들을 지배하는 군주들의 머리 위 왕관이 뒤흔들렸다. <br /> -로렌스 스턴, 『트리스트럼 샌디』(1758)</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생식기 부위에조차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br /> 실제로 발견되는 것처럼 왼쪽 고환이 항상 더 크다. <br /> (또한) 왼쪽 눈은 오른쪽 눈보다 사물을 더 날카롭게 본다고들 한다. <br /> -요한 요아힘 빙켈만, 『고대예술사』(1764)</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lsquo;몸&rsquo;이라고 하는 주제에 관한 책, 전시, 영화, 라이브 퍼포먼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렇다고 이전에 &lsquo;몸&rsquo;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지난 세기의 일부 이론가와 추상미술가들은 인간 형상을 제거하거나 초월했다고 주장했다), 정신분석학과 현상학, 그리고 젠더 문제와 최근의 인종 문제가 격렬하게 뒤섞이면서, 이에 자극받아 &lsquo;몸&rsquo;에 관한 오랜 금기들을 깨뜨릴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접근법들이 등장한 까닭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론과 실제의 공백은 메워지지 않고 있으며 오감, 특히 촉각과 시각이 되살아나 반격을 가하고 있다. 이는 1960년대에 &lsquo;일상&rsquo;생활을 무대 중심에 두고자 했던 &lsquo;아래로부터의 역사&rsquo;, 즉 아랫도리로부터의 역사, 살갗 아래로부터의 역사라 불리는 것의 파생물이다. 반농담조로 이제는 &lsquo;절단된 몸이 적어도 하나는 나와야&rsquo; 모범적인 문학작품이 된다고들 한다. &lsquo;불온하다&rsquo;는 말이 예술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여겨지며, 끔찍할 만큼 고백적인 예술형식들이 대유행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lsquo;몸&rsquo;을 인문학 속에 서둘러 위치지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몸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거의 완전히 무시되는 바람에 오히려 부각되었다. 바로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다. 이 구분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모두 왼손잡이거나 오른손잡이고, 그에 상응해 눈과 발의 경우도 보통 어느 한쪽이 &lsquo;우위성을 갖&rsquo;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적으로는 좌뇌와 우뇌가 아주 다른 기능을 하기 때문이며, 정치&middot;사회&middot;문화적으로는 어느 사회에나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나름의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던 데는 세 가지 주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우리 시대의 창조산업<sup>creative industries</sup>(문화산업)이 상상력을 수직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즉 높음과 낮음을 구분하게 하는 메타포에 기초한 까닭이다. &lsquo;저급한&rsquo; 문화적 형식과 표현들을 예찬하고, (저급한 것을 흡수해서든 억압해서든) 저급한 것과 관계를 맺는 &lsquo;고급&rsquo; 문화의 아이콘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왼쪽과 오른쪽의 문제(이것이 우리의 상상력을 수평적으로, 좌우로 움직이게 한다)를 이해시키기가 더욱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신분석학 또한 이러한 &lsquo;수직적&rsquo; 사고를 부추긴다. 잠재의식은 아래에 놓여 있는 무언가를 암시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고고학의 발굴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옆으로 가로지르며 작업하기보다는 다른 층을 파내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그의 유명한 긴 의자에 누운 환자들을 내려다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환자 중 한 사람인 &lsquo;늑대 사나이&rsquo;는 프로이트가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ldquo;정신분석학자는 유적지의 고고학자처럼 제일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값진 보물을 찾을 때까지 환자 정신의 층들을 파헤쳐야 합니다.&rdquo; 하지만 넓이 또한 깊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오른쪽 구분에 대한 관심을 가로막는 현대 문화의 또 다른 측면은 바로 전체주의적인 성향이다. 현대의 문화형식들은 흔히 관람자/독자/청취자를 그 경험에 &lsquo;잠기게 하고&rsquo; &lsquo;둘러싸고&rsquo; 싶어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 경험이 &lsquo;대담하고&rsquo; &lsquo;깜짝 놀랄 만하고&rsquo; &lsquo;최첨단&rsquo;일 것이라 기대한다. 전후<sup>戰後</sup> 미국 추상회화의 주요 옹호자인 클레멘트 그린버그조차 모든 현대 회화는 &lsquo;즉각성<sup>at-onceness</sup>&rsquo;을 가져야 하며 한눈에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좀더 최근에는 한 아이비리그 교수가 다음과 같이 극단적이지만 전형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ldquo;위대한 예술이 작동하는 방식은 끔찍하다. 당신은 미술관에 대한 숨죽인 숭배에 속아 넘어가 명작은 고상한 것이고 마음을 달래주는 마술적이고 현혹적인 환영<sup>vision</sup>이라고 믿을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들은 폭력배다. 무자비하고 교활한 명화들은 당신에게 헤드락을 걸어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뜨린 다음 당신의 현실감각을 즉각 재조정한다.&rdquo; 여기에 미묘한 차이나 전희<sup>前戱</sup>, 차이생성<sup>differentiation</sup> 또는 부드럽게 말하기나 돌려 말하기의 여지는 많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언급이 거의 전무했던 마지막 이유는 문화적 개념이나 도구로서 왼쪽-오른쪽이 지극히 평범하고 한계가 있으며 한물갔다는 억측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도 쉽게 오른쪽=선, 왼쪽=악이라는 방정식으로 요약되어버린다. 현대의 이러한 환원주의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유산이며, 무엇보다 19세기 러시아 신비사상가 블라바츠키 부인<sup>Madame Blavatsky</sup>이 주창한 신지학의 유산일 것이다. 신지학에서 &lsquo;왼쪽&rsquo;은 모든 악과 흑마술의 원천이며 &lsquo;오른쪽&rsquo;은 모든 선의 원천이다. 프로이트의 추종자인 빌헬름 슈테켈<sup>Wilhem Stekel</sup>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프로이트도 왼쪽과 오른쪽에 대해서는 블라바츠키 부인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그저 몇 마디 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문화적 개념이나 도구로서 별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좀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념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도식적인 결론에 이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에르츠<sup>Robert Hertz</sup>(1881~1915)의 『오른손의 우위성: 종교적인 양극성 연구<sup>The Pre-eminence the Right Hand: A Study in Religious Polarity</sup>』는 왼쪽-오른쪽 상징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는 평을 받는다. 이 책은 1909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되었지만 1960년 영어로 번역되어 재출간되면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 책은 이 문제에 관한 인류학적&middot;과학적 관심을 급격히 고조시켰고 이러한 관심은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에르츠는 저명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뛰어난 제자였다. 그는 오른손을 언제나 우위에 두고 왼손을 악마적으로 보는, 왼쪽과 오른쪽의 이원성이 모든 문화에 존재함을 보여주려 했다. 마오리족이 오른쪽은 &lsquo;삶의 (그리고 힘의) 측면&rsquo;인 반면 왼쪽은 &lsquo;죽음의 (그리고 나약함의) 측면&rsquo;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교도 역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에 나오는 선한 도둑과 최후의 심판 장면에 나오는 구원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두고, 악한 도둑과 저주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왼쪽에 둔다. 이와 동일한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이 대부분의 언어에서 나타난다. 왼쪽에 상응하는 말은 부정적이고 불길한 의미가 있다. 에르츠의 결론은 계시에 가깝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따라서 인간 세상의 이편에서 저편에 이르기까지 숭배자들이 그들의 신을 만나는 신성한 장소, 악마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저주받은 곳, 증인석과 왕좌, 전쟁터와 직조공들의 평화로운 작업실, 이 모든 곳에서 한 가지 불변의 법칙이 두 손의 기능을 지배한다. (강조 필자)</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뒤르켐의 조카 마르셀 모스가 에르츠의 글이 왼쪽의 &lsquo;불순함&rsquo;과 &lsquo;인간의 어두운 면&rsquo;에 관한 단 하나의 연구서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에르츠가 진행한 연구의 많은 부분이 영국박물관에서 이루어졌고 영국도서관에 보관되었는데, 그 가운데 현장연구에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1818년에 출간된 한 독일 사전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오른손은 &lsquo;여전히 선과 아름다움을, 왼손은 악과 추함을 떠올리게 한다&rsquo;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자신의 패러다임과 상충하는 한 가지 예를 드는데, 이를 &lsquo;발전의 부차적인 소산&rsquo; 또는 법칙을 시험하는 예외로 간단히 처리하고 만다. 그 예는 평화를 사랑하는 서부 뉴멕시코의 아메리카 원주민 주니족이었다. 주니족에게 몸의 양쪽은 형제 신이다. 왼쪽이 형으로 &lsquo;사려 깊고 현명하며 올바른 판단력을 가진 신&rsquo;이고 오른쪽은 &lsquo;성급하고 충동적이며 행동에 어울리는 신&rsquo;이다. 영어로 처음 번역되었을 때 에르츠의 글에는 적절하게 &lsquo;죽음과 오른손&rsquo;이라는 침울한 제목이 붙었고, 그의 지나치게 단호한 결론은 대체로 지지를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주제에 관한 가장 정교하고 광범위하면서 명쾌한 연구서인 정신분석학자 크리스 맥매너스<sup>Chris McManus</sup>의 『오른손, 왼손: 뇌, 신체, 원자, 문화에서의 불균형의 기원<sup>Right Hand, Left Hand: The Origins of Asymmetry in Brains, Bodies, Atoms and Cultures</sup>』(2002)은 비록 그가 제시하는 풍부한 증거가 항상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lsquo;어떤 대륙, 역사의 어떤 시기 또는 어떤 문화를 보더라도 오른쪽과 왼쪽은 상징적 연상관념을 가지며 항상 오른쪽은 좋고 왼쪽은 나쁘다.&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은 현대의 국제정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맥매너스가 그렇게 하고 있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흔히 &lsquo;좌파&rsquo;는 환영받고 &lsquo;우파&rsquo;는 맹렬히 비난받는다. 실제로 이 주제와 관련해서 권위를 자랑하는 어느 책에서는 &lsquo;왼쪽&rsquo;이 &lsquo;정치적 양극성의 주추와도 같은 말&rsquo;이며 정치적 오른쪽에는 &lsquo;사악함<sup>sinister</sup>&rsquo;이라는 함의가 있다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다른 최근의 중요한 연구서인 피에르 미셸 베르트랑<sup>Pierre-Michel Bertrand</sup>의 『왼손잡이의 역사<sup>Histoire des Gauchers</sup>』(2001)는 왼손잡이와 왼쪽에 대해 서구인들이 보인 태도의 역사를 다룬다. 베르트랑은 중세가 왼손잡이들의 황금시대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주로 단 하나의 증거, 즉 왼손잡이의 비율이 16퍼센트로 유난히 높았던 요크셔 워럼 퍼시의 중세 공동묘지에서 나온 여든 구의 골격에 대한 분석을 근거로 삼는다. 그렇지만 그는 이 책의 대부분에서 전후<sup>戰後</sup>에 와서야 왼쪽을 꺼리는 편견이 바뀌었다고 암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모든 연구들에 거듭 의지하면서 크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에 깔려 있는 근본적으로 블라바츠키적인 사고방식에는 큰 결함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왼손/왼쪽숭배에 관한 역사적 텍스트를 편집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관련 구절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어물쩍 넘어가거나 또는 그 구절들이 그 반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은 시각 이미지나 미학에서도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가 처음 왼쪽과 오른쪽의 구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 샤를 드 톨네이<sup>Charles de Tolnay</sup>의 다섯 권짜리 『미켈란젤로』(1947~60)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현대 미켈란젤로 연구의 초석이지만, 모호한 신플라톤주의와 니체 이론,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의 상징에 지극히 평범하게 접근한다는 점에서 아쉽다. 예를 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묘사한 그림에서 그리스도 두 손의 방향이 다른 것(오른손은 위를 가리키고 왼손은 아래를 가리킨다)이 &lsquo;선한 오른쪽과 악한 왼쪽&rsquo;이라는 전통적인 믿음을 나타낸다고 암시한 점이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톨네이는 미켈란젤로의 다른 많은 작품에서 죽었거나 죽어가는 그리스도가 그랬던 것처럼 이 이미지에서도 그리스도가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해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는 전통적으로 오른쪽을 보거나 얼굴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급진적인 혁신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발상을 끌어내어 아주 대담하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서술한 톨네이의 자신감에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왼손잡이로 태어났으나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는 법을 익혔다는 소문을 염두에 둘 때 더 그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부터 나는 왼쪽과 오른쪽에 대한 언급들에 계속해서 주목했고, 놀랍게도 중세시대와 르네상스시대에는 왼쪽-오른쪽 상징이 사회의 모든 부문에 스며든, 다용도로 쓰이는 중요하고 교묘한 표현장치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쓴 시와 자신의 시적인 묘비명(지금까지는 완전히 잘못 이해되었다)에서 이러한 상징을 이용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심지어 &lsquo;왼손잡이&rsquo;의 영적이고 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찬양했다. 이것이 왼손잡이들을 정중히 예찬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sup>Lorenzo de&rsquo; Medici</sup>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뒤에 알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부터 아빌라의 성 테레사까지 많은 신비주의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왼손은 그의 현현<sup>顯現</sup>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경이로운 증거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한 가지 목적은 서양문화에서의 다양한 왼쪽-오른쪽 구분을 보여주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구분들이 왼쪽에 대해 적대적인 것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 보여주는 것이다. 성서와 관련해서 이 주제에 관해 논평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lsquo;오른쪽=선, 왼쪽=악&rsquo;으로 보는 『신약성서』로부터 몇 가지를 선택해 인용함으로써 길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구약성서』가 제공하는 훨씬 더 풍부하고 좀더 미묘한 수확물들을 놓쳐버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1969년 선구적인 연구를 발표한 우르줄라 다이트마링<sup>Ursula Deitmaring</sup>이었다. 하지만 왼쪽-오른쪽 구분에 대해 좀더 섬세하게 읽어봐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귀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녀의 글이 인용된 적도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세시대에 신비주의자들과 기사도적인 사랑〔고도로 형식화된 연애예법을 포함하며 서구사회에서의 사고와 감정을 개혁할 정도의 영향력을 지녔다. 여성과 연인과의 관계는 봉건사회에서의 주종관계 그대로이며, 본질적으로 귀족적인 이 연애는 비밀을 절대적인 조건으로 하고 겸양&middot;예의&middot;밀통&middot;사랑의 종교를 특징으로 한다〕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재평가되면서 왼쪽은 &lsquo;심장이 있는&rsquo; 쪽, 다시 말해 가장 강렬하고 진정한 감정이 깃드는 쪽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구약성서』의 관련 구절들이 이러한 재평가를 뒷받침해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에 왼쪽은 무의식과 잠재의식의 영역, 그리고 규제받지 않는 상상력의 영역이 되었다. 왼쪽-오른쪽 상징은 분명 서구문화에서 대단히 중요하고도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은 심히 과소평가되고 오해받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오른쪽 상징은 르네상스시대에 &lsquo;생생한&rsquo; 쟁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문화 엘리트들이 전통적인 오른쪽의 우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른바 &lsquo;문명화 과정&rsquo;의 일부다. 시각예술에서 왼쪽-오른쪽의 이분법은 내면화되었고 그 영향이 개인의 얼굴과 몸에 나타나 근본적인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그 이래 왼쪽-오른쪽 상징은 창작의 아주 중요한 촉매가 되었다. 서로 다르지만 동일하게 타당한 경험과 이런 경험에 대한 반응을 표현하기 위해 왼쪽-오른쪽 상징이 점점 더 많이 이용되었는데, 이때 몸의 왼쪽은 흔히 어떤 감정적인 장애를 의미했다. 인간애, 시간의 경과, 여성 같은 것을 의미하는 왼쪽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부여받았다. 이는 현대적인 의식과 자기극화<sup>self-dramatization</sup>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심리적인 구분이 주로 왼쪽이 보여주는 자연주의 때문에 전통적으로 찬사를 받아온 많은 작품들에서 발견된다. 레오나르도의 &lt;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도&gt;는 분명하게 왼쪽을 향한 하체와 발로 인해 대칭이 깨져 있으며, 한 점을 제외한 레오나르도의 모든 초상화들에서 모델들은 왼쪽을 향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lsquo;왼쪽으로의 선회&rsquo;는 서양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혁명 가운데 하나이며, 고전고대에 그러한 양상의 전조가 보이지만 사실상 지금에야 주목받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티치아노,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화가들의 일부 작품은 왼쪽과 오른쪽의 다양한 상징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왼쪽-오른쪽 상징이 서양미술의 &lsquo;잃어버린 열쇠&rsquo;라고 믿는 이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나는 제의<sup>祭儀</sup>와 공연예술(특히 춤)뿐 아니라 문학, 신학, 인류학, 과학의 폭넓은 자료에 의지했다. 넓게는 문화사에 기초했지만, 초점은 시각예술에 맞추었다. 왜냐하면 시각예술이야말로 왼쪽-오른쪽 상징에 가장 중요하고 딱 들어맞는 분야이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좀더 설명이 필요하다. 물론 인간 형상이나 인공의 사물이 등장하는 시각예술 작품 대부분이 필연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왼쪽-오른쪽을 구분한다는 점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창세기」에서는 이브가 &lsquo;그 열매를 따먹고, 함께 있던 남편에게도 주어서 그가 그것을 먹었다&rsquo;고 하면 되지만, 시각미술가들은 사과를 딴 이브의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그리고 이브는 아담과 나무와 뱀 사이에서 어디에 있는지를 선택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오른쪽 구분이 유의미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이브가 사과를 딸 때 어느 손을 사용했는지와 관련해서는 화가들 사이에 일관성이 거의 없지만, 아담과 함께 있을 때 이브가 어느 쪽에 있느냐와 관련해서는 훨씬 더 일관성이 있다. 남편과 아내의 전통적인 관습대로 이브는 대개 아담의 왼쪽에 서 있다. 이는 이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할 때도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책에서 관습과 의미 있는 관습파괴를 확인하는 것으로 작업을 한정하고자 했다. 그래서 서양문화에서의 &lsquo;왼쪽으로의 선회&rsquo;를 다루면서 화가들과 후원자들이 실제로 이러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주로 특정 화가들의 작품들과 이와 관련이 있는 이용가능한 텍스트들에 초점을 맞추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천 년 이상을 아우르는 문화사는 도구서 사용하기에 어떤 면에서는 무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변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쟁점, 텍스트, 이미지에 중점을 두면서 부당하게 무시당해온 주제에 관한 입문서를 쓰고자 했다. 이 책이 반성과 연구를 한층 더 촉발한다면 그것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왼쪽과 오른쪽의 서양미술사』는 다섯 개의 부로 나뉜다. 각 부는 주제와 관련된 장들로 구성되며, 장들은 대체로 연대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일부 장들은 특정한 미술가나 역사적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다른 장들에서는 좀더 배경이 되는 내용들을 다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1부 「우향우」에서는 &lsquo;오른쪽=선, 왼쪽=악&rsquo;을 뒷받침하는 몇몇 고전들과 성서 속 왼쪽-오른쪽 관습과, 오른손의 우위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간략히 다룬다. 「문장<sup>紋章</sup> 이미지」에서는 현대 이전에 이미지 대부분이 어떻게 문장학적으로 배열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이미지들에서는 보는 사람보다는 예술작품 속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이 정해지고, 오른쪽이 특권적인 위상을 갖는다. 「만만한 상대」에서는 인간 몸의 왼쪽이 약한 쪽이고 악마, 질병, 죽음 등 나쁜 것은 보통 왼쪽에서 유래한다는 믿음이 어떻게 육체적&middot;성적 공격을 보여주는 이미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심히 복잡하게 만드는지를 상세히 살핀다. 「해와 달」에서는 오른쪽 눈은 해의 영역이고 왼쪽 눈은 달의 영역이라는 점성술의 믿음에서 영향을 받아 초상화 속 모델의 오른쪽을 환하게 밝히는 경향이 생겼음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2부 「왼쪽과 오른쪽의 경쟁」에서는 르네상스시대부터 왼쪽-오른쪽 상징이 극명한 도덕적 선택을 묘사하는 이미지들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왔는지를 살펴본다. 「어두워진 눈」에서는 그림자를 드리우든 다른 어떤 수단을 써서든, 왼쪽 또는 오른쪽 눈을 가리는 것이 어떻게 그 인물의 정신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3부 「왼쪽과 오른쪽의 균형」에서는 르네상스시대와 바로크시대의 화가들이 왼쪽과 오른쪽 사이에 역학적인 균형을 이루어낸 다양한 방식을 다룬다. 「헤라클레스의 선택」에서는 왼쪽으로 돌 것인지 오른쪽으로 돌 것인지에 헤라클레스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보여주며, 이 주제에 관한 그림들의 인기가 그 &lsquo;선택&rsquo;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나왔음을 입증한다. 「두 개의 눈」에서는 모델이 왼쪽 입으로만 웃고 있고, 정신성과 세속성 사이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 유명한 초상화들을 살핀다.「렘브란트의 눈」에서는 렘브란트의 후기 자화상들에서 왼쪽-오른쪽 상징이 근본적으로 다른 측면에서 탐구되고 있으며, 이것이 독특하게 구성된 켄우드 자화상(1661, 런던 켄우드하우스 소장)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4부 「좌향좌」에서는 르네상스시대부터 유럽문화에서 &lsquo;왼쪽으로의 선회&rsquo;가 일어나 몸의 왼쪽이 인정받고 무대 중심에 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는 미술가들이 그리스도 현현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왼쪽으로 몸을 숙인 모습을 왼쪽 방향에서 묘사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기사도적인 사랑」에서는 중세 신비주의, 기사도적인 사랑, 그리고 춤에 그 기원을 둔 왼손과 왼쪽에 대한 미학적 숭배를 다룬다. 여기서 중요한 인물은 로렌초 데 메디치다. 「섬세한 아름다움」에서는 이러한 왼쪽숭배가 어떻게 시각예술과 빙켈만의 미에 대한 이론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레오나르도와 사랑의 눈길」에서는 &lsquo;왼쪽을 향&rsquo;하고 있는 레오나르도의 초상화 속 인물들을 살피고, 그것이 그들에게 매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랑의 포로들」에서는 페트라르카가 말하는 왼쪽 다리를 &lsquo;저는&rsquo; 현대적인 연인 개념에 대한 다양한 시각적 표현과 더불어, 이러한 관념적인 마비가 그들의 사랑을 실현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본다. 「러브로크스」에서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긴 머리카락 한 뭉치를 왼쪽 어깨 너머로 풍성하게 늘어뜨린 귀족들의 머리 모양을 살핀다. 이 &lsquo;러브로크스&rsquo;는 가장 과시적인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명예직 왼손잡이들」에서는 전쟁보다는 사랑의 정치학에 근거를 둔, 왼손잡이 궁수들이 등장하는 미켈란젤로의 세 작품에 초점을 맞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5부 「왼쪽과 오른쪽의 재평가」에서는 19, 20세기의 예술과 문화에서 왼쪽-오른쪽 상징이 맞이한 운명을 다룬다. 일반적으로 상징의 예술적 중요성은 계몽주의가 종교와 점성술을 공격하면서 줄어들었다. 18세기 후반에 숭고미를 보여주는 풍경화가 하나의 장르로 부상한 된 점 또한 중요하다. 이는 관람자와 묘사된 자연 사이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왼쪽-오른쪽 구분의 역할을 약화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일부 위대한 예술가들은 왼쪽-오른쪽 구분이 자신의 작품을 엄청난 원시적 에너지로 가득 채워줄 수 있는 혁명적인 도구라 생각하고 이를 되살려낸다. 「&lsquo;영원히 오류를 범하도록&rsquo;」에서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가 왼쪽-오른쪽 상징을 풍경화에 재도입함으로써 풍경을 다시 신성하게 만들어 부분적으로 관람자를 소외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세기 후반에 양쪽 뇌의 서로 다른 기능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퍼지고 &lsquo;해방된&rsquo; 왼손이 우위를 점하는 주술과 악마숭배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왼쪽과 오른쪽의 상징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왼쪽과 오른쪽에 관련된 새로운 정치적 용어들 역시 그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피카소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는 그가 &lt;아비뇽의 아가씨들&gt; 같은 가장 야심찬 초기 회화에서 왼손잡이의 체제전복적인 개념을 이용하고 있음을 살펴본다. 「현대의 원시주의」에서는 어떻게 왼손이 무의식과 연관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토마티슴 미술의 상징과 도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여왕 폐하 만세」에서는 미국 사진작가 애니 리보비츠의 최근 영국 여왕 초상사진들의 조명과 분위기가 어떻게 왼쪽과 오른쪽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에 영향을 받았는지를 살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3333"><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대와 그 이후</span></span></strong></span></span><span style="color: #808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span><span style="color: #3333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부 우향우</span></span></span></strong></span></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br /> 맥주저장고 피하기: </span></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왼쪽-오른쪽의 관습들</span></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외부로부터의 어떤 영향력이 (어떤 논의에 대해) 속살거리는 <br /> (그) 소리를 내 귀에 가져오는 것 같다. &hellip;&hellip; 이 논의가 정당하면 <br /> 그 소리는 오른쪽에 머무는 것 같고&hellip;&hellip; <br /> 악이 이야기될 때는 그 소리가 왼쪽 귀에 머문다. <br /> &mdash;지롤라모 카르다노, 『내 인생에 관한 책』(16세기 중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 자신에 대해 특정한 공간관계에 있는 나의 왼쪽에서 어두운 공간을 보았다. <br /> 거기서 사암으로 된 수많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br />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희미한 기억이 내게 <br /> 그것이 맥주저장고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말해주었다.<br /> &mdash;지크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1909)</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첫 장에서는 오른쪽의 우위를 주장하는 왼쪽과 오른쪽에 관한 일반적인 관습의 역사를 아주 간략하게 살핀다. 결혼반지를 왼손에 끼는 로마의 관습처럼 왼손이 우위에 있었던 고대의 일부 중요한 반례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lsquo;예외들&rsquo;은 이어지는 장들에서 적당한 시점에 논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오른손의 우위를 주장하는 과학적이고 인류학적인 주요한 설명들을 개략적으로 살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문화에서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왼쪽-오른쪽을 구분하지만 이를 처음 체계화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형이상학』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간결하면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미친 한 가지 설명을 제시했다. 그는 피타고라스의 철학에서 유래한 서로 대립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피타고라스 학파는 수가 우주의 주요한 구성요소이자 모든 우주적 질서와 조화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그들에게 10은 이상적인 수여서, 달이 행성이라고 주장하며 열 개의 천체가 있다고 했다. 그들의 철학은 또한 이원론적이어서 모든 것이 일련의 대립쌍으로 쪼개질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의 철학은 다음 열 개의 &lsquo;반의어&rsquo; 목록으로 요약되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15" height="33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3_%EC%99%BC%EC%AA%BD%20%EC%98%A4%EB%A5%B8%EC%AA%BD%EC%9D%98%20%EC%84%9C%EC%96%91%EB%AF%B8%EC%88%A0%EC%82%AC/%ED%91%9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목록에서 오른쪽과 왼쪽은 수와 명백한 관련이 없는 첫 번째 &lsquo;반의어&rsquo;다. 여성, 곡선, 어둠과 나란히 놓인 왼쪽이 숭고하거나 초월적인 방식으로 &lsquo;무한&rsquo;하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움에서 &lsquo;무한&rsquo;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놀랍게도 피타고라스 학파의 목록에는 두 개의 전형적인 반의어인 위(&lsquo;오른쪽&rsquo; 항목)와 아래(&lsquo;왼쪽&rsquo; 항목)가 누락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은 위와 아래를 그의 가장 유명한 왼쪽-오른쪽 구분(곧 이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는 아마 반의어의 개수를 마술적인 수인 10에 맞추려고 이 쌍을 빼버렸을 것이다. &lsquo;아래&rsquo;가 추가된 순간 우리는 이미 사실상 프로이트가 말한 악마적인 맥주저장고의 영역에 들어선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오른쪽 구분은 그리스 문화에, 특히 인간학에 스며들었다. 그리스 의사들은 자궁 속에서 남자는 오른쪽에, 여자는 왼쪽에 놓이며 오른쪽 고환에서 나온 정자가 아들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이다 엘리스 부인은 『수정의 핵심<sup>Essentials of Conception</sup>』(1891)에서 여전히 &lsquo;아들 또는 딸을 좌우하는 건 여성이며, 고환에 고무밴드를 두르는 건 쓸데없는 일이다&rsquo;고 주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발생에 관하여』에서 해부를 통해 얻은 지식에 근거하여 첫 번째 이론을 반박했고, 동물의 오른쪽 또는 왼쪽 고환을 제거해도 새끼의 성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두 번째 이론을 반박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글 전체를 놓고 보면 오른쪽과 왼쪽에 관한 이렇게 분명한 시각은 단지 일시적인 입장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의 시각을 철회하면서 이전 사람들의 이론에 대한 논의를 끝맺는다. 그는 인간 몸의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따뜻하고 그 피는 더 순수하며 영혼은 더, 수분은 덜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오른쪽 고환에서 만들어진 정액 또한 더 뜨거울 것이다. 정액이 뜨거우면 더 기름지고 따라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더 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대부분 오른쪽의 우위를 옹호한다. 따라서 동물과 인간은 오른쪽부터 운동을 시작한다. &lsquo;모든 동물은 활동할 때 자연스럽게 오른쪽 팔다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rsquo;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양이 같은 동물은 개체에 따라 통조림에서 먹이를 꺼낼 때 각자 선호하는 앞발이 있기는 하지만 왼쪽 앞발을 사용하는 경우도 대략 반쯤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닷가재의 사례만을 가지고 이런 유의 주장에 대응한다. 하지만 사실 바닷가재의 오른쪽 집게발이 더 큰가 왼쪽 집게발이 더 큰가 하는 것은 우연의 문제일 뿐이고 그것들이 기형적이고 열등한 종이라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리스토텔레스는 심지어 하늘이 우월한 동물 종<sup>種</sup>이며 따라서 하늘에 오른쪽과 왼쪽이 있다고 믿었다. 해가 떠오르는 밝고 따뜻한 영역인 동쪽은 하늘의 오른쪽이고 어둡고 추운 서쪽은 왼쪽이다. 그래서 오른쪽은 왼쪽보다 자연스럽고 근본적으로 더 우월하며 인간(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lsquo;인간&rsquo;이란 남성을 의미한다)은 모든 생명들 가운데 &lsquo;가장 오른쪽&rsquo;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내장인 심장이 가슴 왼쪽에 있다는 사실은 이 이론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예외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심장은 &lsquo;왼쪽의 냉기에 균형을 맞추&rsquo;기 위해 가슴 왼쪽에 있을 뿐이며, 그렇다 해도 심장의 우심실이 여전히 더 크고 뜨거우며 그래서 오른쪽의 온도를 더 높게 유지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세에 이 이론들은 문장<sup>紋章</sup>에 동물을 묘사하는 방식의 근거가 되었다. 사자왕 리처드가 통치하던 1195년경에 도입된 영국의 &lsquo;세 마리 사자&rsquo;처럼 문장에서는 보통 한 마리 또는 몇 마리의 동물들이 수직기둥처럼 서서 오른발을 들어 올리고 있으며, 대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늑대를 진정시킬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lsquo;&ldquo;늑대 수도사, 나는 그대가 믿음을 서약해주기를 바라노라.&rdquo; &hellip;&hellip;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가 이 서약을 받기 위해 손을 앞으로 내밀자 늑대는 앞발을 들어 올려 성 프란체스코의 손에 조심히 내놓음으로써 최고의 신의를 표했다.&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슷한 이유로 그리스도교도의 성유물함〔성인의 유체나 의복 또는 소지품을 담아두는 상자로, 성인숭배의 표상이다〕에 담겨 있는 것은 거의 오른팔 내지 오른손이다(대개 축복의 손짓을 하고 있다). 이 주제를 다룬 한 권위 있는 책에서는 팔이 담긴 중세의 성유물함 스물여덟 개 가운데 두 개에만 왼팔이 담겨 있다고 언급했다. 이 두 개의 왼팔을 왼손잡이 성인들의 것으로 생각한다면(왼손잡이의 비율은 평균 7퍼센트로 알려져 있다) 두 개라는 수치가 그리 부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성인들의 왼팔과 왼손은 대개 버려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몸 내부에 대한 이 이론은 몸의 외모, 특징, 그리고 &lsquo;성향<sup>orientation</sup>&rsquo;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클라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sup>Claudius Ptolemaeus</sup>(100~178경)는 점성술에 관한 유명한 논문 「테트라비블로스<sup>Tetrabiblos</sup>」를 썼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이 논문에서 해가 뜨는 동쪽과 몸의 오른쪽을 나란히 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동쪽의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더 용기 있고 더 솔직하게 행동하는데 이는 태양, 즉 동방, 주행성<sup>晝行性</sup>, 남성, 오른쪽의 본성에 따르기 때문이다(그리고 몸의 오른쪽 부위가 가장 강한 동물들에게서 이러한 성향이 발견된다). 이것이 저 동쪽 사람들이 더 용감한 이유다. 하지만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더 연약하고 여성적이며 은밀하다. 왜냐하면 서쪽은 달인데, 달은 항상 합〔두 개 이상의 천체가 겹쳐 보이는 현상〕 이후 서쪽에서 먼저 떠올라 모습을 보이고 여성적인 분위기, 야행성, 왼쪽을 나타내기 때문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전통적으로 『황금당나귀<sup>The Golden Ass</sup>』로 유명한 로마의 작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sup>Lucius Apuleius</sup>가 쓴 것으로 여겨지는 작자미상의 책 『관상서<sup>Book of Physiognomy</sup>』(4세기 후반)는 훨씬 더 엄밀하다. &lsquo;아풀레이우스&rsquo;는 남성과 여성의 관상에 대해 말해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어떤 몸에서든, 그게 눈이든 손이든 젖가슴이든 고환이든 발이든 오른쪽 부위가 더 크다면&hellip;&hellip; 이 모든 징후는 남성적인 유형을 말해준다. 왼쪽 부위가 더 크다면 여성적인 유형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남성들은 대부분 오른쪽 고환이 왼쪽보다 약간 더 크고 더 높이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말 그대로 완벽한 남성은 오른쪽, 여성은 왼쪽이어야 한다는 이러한 비대칭적인 이상형은 해부학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른손잡이는 몸 오른쪽의 근육, 특히 오른팔 근육이 더 발달하는 듯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비슷한 생물학적 원칙이 이브의 창조에서도 작동한다. 유대인들의 비전<sup>秘典</sup>인 &lsquo;카발라<sup>Cabala</sup>&rsquo;에서 이브는 아담의 왼쪽 갈비뼈로 만들어져 아담의 왼쪽을 상징한다. 밀턴의 『실낙원』(1667/74)에서 갈비뼈는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다. 그리고 밀턴은 왼쪽을 나타내는 영어화된 라틴어 단어 &lsquo;불길한<sup>sinister</sup>&rsquo;〔혹은 사악한〕을 써서 그 으스스한 연관성을 이용한다. 금지된 과일을 맛본 직후에 아담은 다음과 같이 이브를 묘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핼쑥한 나한테서 나온 <br /> 원래 구부러진&mdash;보는 바와 같이<br /> 불길한 쪽으로 더 구부러진&mdash;갈비뼈.<br /> &mdash;『실낙원』 10권 884쪽 6행</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른손잡이가 타고나는 것이라고 믿은 반면 플라톤은 『법률』에서 &lsquo;유모나 어머니들의 어리석음&rsquo;으로 인해 왼손이 &lsquo;절룩거린다&rsquo;고 비난하며 오른손잡이가 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은 양손잡이를 이상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플라톤은 왼손을 전적으로 적대시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국가』에서 내세<sup>來世</sup>와 관련해서 큰 영향력을 미친 견해를 제시하면서 일반적인 왼쪽-오른쪽 구분에 의지했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그들이 받은 판결에 따라 두 집단으로 나눈다. 선한 사람들은 앞쪽에 그들이 받은 심판의 징표를 지닌 채 오른쪽 위로 이동하지만 부정한 사람들은 등에 징표를 지닌 채 왼쪽 아래로 이동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세시대에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는 왼손으로 바퀴를 밀어내리고 오른손으로 밀어올린다. 그리고 비슷한 구분이 그리스도교의 &lsquo;심판의 날&rsquo;에 다시 나타난다. 이 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왼쪽으로 떨어지고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코란』에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오른쪽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은 왼쪽에 있다. 불교에서 열반의 길은 둘로 나뉜다. &lsquo;왼쪽 길은 피하고 오른쪽 길을 따른다.&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식적인 자리 배치도 비슷한 양상을 따른다. 가장 명예로운 손님은 왕이나 주인의 오른쪽에 앉는다. 주인의 왼쪽에 앉는다는 것은 때로 정치적인 모욕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체계가 충격적인 효과를 위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에 관한 훌륭한 예는 말더듬이 노트커르<sup>Notker the Stammerer</sup>〔840경~912, 베네딕트회 수도사이자 음악가, 시인, 작가〕의 『샤를마뉴의 행적』(829~36)에서 볼 수 있다. 샤를마뉴는 오랜 군사작전을 마친 후에 갈리아로 돌아온다. 그의 &lsquo;천하무적 오른손&rsquo;은 그에게 큰 승리들을 가져다주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소년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을 초대해서 시와 산문을 보여달라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중산층 가문과 아주 가난한 집 출신의 소년들은 세심히 지식을 닦은 샤를마뉴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들을 가져왔다. 하지만 귀족 부모를 둔 아이들은 보잘것없고 우둔하기 짝이 없는 작품을 내놓았다. 그러자 샤를마뉴는 영원한 심판〔최후의 심판〕의 공정성을 본보기로 삼아 훌륭한 작품을 내놓은 소년들을 오른쪽에 두고 그들에게 말했다. &ldquo;나의 아이들아, 고맙구나. 너희들은 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었다&hellip;&hellip;.&rdquo;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왼쪽에 있는 아이들을 향해 매섭게 고개를 돌리고서 그들의 양심을 꿰뚫을 듯이 노려보면서 경멸에 찬 목소리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ldquo;하지만 너희 어린 귀족들, 향락적이고 멋이나 부리는 내 지도자들의 아들들은&hellip;&hellip; 내 명령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구나.&rdquo; 이렇게 말하고 샤를마뉴는 위엄 넘치는 머리를 돌려 하늘을 향해 정복당한 적 없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소리로 맹세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아무도, 심지어 샤를마뉴조차 결코 왼쪽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lsquo;야영지를 출발해서 그날의 행진을 시작하던 샤를마뉴는 갑자기 엄청나게 눈부신 빛을 발하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떨어지는 유성을 보았다.&rsquo; 이로 인해 샤를마뉴의 말이 넘어졌다. 고대인의 지혜를 배우는 일에 열심이던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상서로운 조짐(즉 새나 혜성)은 오른쪽에서 나타나거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반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은 왼쪽에서 나타나거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로마제국 사람들은 이러한 관습을 따랐고 그리스도교도들도 이를 채택했다. 그래서 유성이 그의 앞을 가로질러 왼쪽에 불시착하자 샤를마뉴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직후에 죽었다. 분명 그는 오른손을 가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lsquo;상서롭게&rsquo; 움직여 십자가를 그었으리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왼쪽-오른쪽 구분은 언어에도 나타난다. 전 세계 대부분 언어에서 왼쪽을 나타내는 말은 부정적이고 상서롭지 못한 의미를 갖는다(&lsquo;불길한<sup>sinister</sup>&rsquo;이나 &lsquo;서투른<sup>gauche</sup>&rsquo; 등).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를 포함하는 인도유럽어는 기원전 3000년 무렵에 사용된 &lsquo;인도-유럽 조어<sup>祖語</sup>〔모든 인도 유럽어의 조상인 것으로 여겨지는 고대어〕&rsquo;로 거슬러 올라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언어에는 오른쪽을 의미하는 데크스(시)<sup>deks(i)</sup> 또는 데크시노스<sup>deksinos</sup>라는 말은 있지만(이는 고대 그리스어의 데크시오스<sup>deksios</sup>와 그리 멀지 않다), 왼쪽에 해당하는 말은 없다. 그 말이 금기시되었고 각 방언들에서 완곡하게 표현되면서 부분적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나의 단어로서 왼쪽은 오른쪽보다 덜 안정적이다. 이것이 많은 언어들에서 왼쪽에 해당하는 단어는 몇 개씩 있지만(라틴어는 sinister, laevus, scaevus, 이탈리아어는 sinistro, mancino, 에스파냐어는 izquierdo, zurdo, siniestro), 오른쪽의 경우는 하나의 기본 단어가 오랫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이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인도유럽어에서 오른쪽과 남쪽에 해당하는 말은 사실상 바꿔서 쓸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북반구 사람들이 예배를 올릴 때 동쪽을 보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낮 동안 태양이 그들의 오른쪽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태양숭배는 대개 오른쪽숭배와, 그리고 오른쪽과 밀접하게 연관된 남쪽 및 동쪽숭배와 결합된다. 반대로 왼쪽은 더 추운 서쪽 및 북쪽과 연관되는 경향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은 서쪽 끝에서부터 들어가고 제단은 동쪽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의 오른쪽, 즉 남쪽에서 태양이 빛난다. 시신은 심판의 날에 무덤에서 일어나 앉아 하느님과 마주할 수 있도록 발을 동쪽으로 향한 채로 매장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반대로 어둠의 왕자인 악마는 서쪽, 그리고 때로는 북쪽에 산다고 믿었다. 초기 교회에서 유아가 아닌 이가 세례를 받을 때 개종자는 서쪽을 향해 &ldquo;사탄아, 나는 너를 버리노라&rdquo;고 말해야 했다. 또 밀라노에서는 서쪽으로 침을 뱉어야 했다. 영국 시인 존 던<sup>John Donne</sup>이 1613년경에 쓴 한 결혼식 노래에서 행복한 한 쌍에 대한 축복은 불길하게 끝난다. 던은 다른 작품에서는 오른쪽과 동쪽, 왼쪽과 서쪽을 나란히 두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결코 늙거나, 죄가 완전히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네<br /> 서쪽을 향해 빛나는 이 눈으로 인해, 북쪽을 향한 이 심장으로 인해.</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왼발로 건물에 들어서는 것에 대한 편견은 이러한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다. &lsquo;하인<sup>footman</sup>&rsquo;이라는 말은 로마인들이 현관문 옆에 배치한 노예에서 유래한다. 이 노예가 하는 일은 손님과 방문객들이 문을 들어설 때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왼발로 문을 들어서는 것을 상서롭지 못한 행동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성계단<sup>Scala Sancta</sup>〔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 때 예루살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가기 위해 오른 계단으로 4세기에 성 헬레나가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을 오를 때도 이러한 규약이 지켜졌고, 오늘날 그리스정교 교회에 들어갈 때도 지켜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새뮤얼 존슨<sup>Samuel Johnson</sup>(1709~84)은 왼발을 먼저 딛으며 집으로 들어서는 일이 결코 없었다. &lsquo;그것은 집안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오기&rsquo; 때문이었다. 한편 존슨의 동시대인인 체스터필드 경은 1760년대에 그의 대자<sup>代子</sup>에게 쓴 편지에서 자세와 몸가짐을 고쳐 오른발을 앞에 두라고 충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너는 오른발을 어떻게 할지 물을 것이다. 최근에는 예전보다 더 오른쪽으로 향하게 하고 있느냐? 왼발을 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되도록 좋은 인상을 주고 싶을 때 너의 왼쪽을 보여주는 건 아주 곤란할 테니까. 그게 네 행동거지의 불길한<sup>sinister</sup>〔&lsquo;sinister&rsquo;에는 &lsquo;왼쪽&rsquo;이라는 의미도 있다〕 징조임은 말할 것도 없지(난 네가 말장난을 좋아한다는 걸 안단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오른손과 오른쪽의 우위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현자인 토머스 칼라일<sup>Thomas Carlyle</sup>(1795~1881)은 오른손잡이가 &lsquo;아마도 전투에서 등장했을 텐데, 가장 중요하게는 왼손으로 심장 부위를 보호하고 방패를 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rsquo;라고 추측했다. 이러한 설명은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방패는 오른손잡이가 인간의 규범이 되고 훨씬 뒤에야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왼손잡이가 오른손잡이와 싸우는 경우보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와 싸우는 경우가 드물 것이므로, 육박전에서는 왼손잡이가 유리할지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칼라일은 1860년대에 아마도 파킨슨병 때문에 오른손이 부자유스러워진 후 사람들이 잘 쓰는 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세 사람 (한 사람은 왼손잡이, 두 사람은 오른손잡이)이 첼시 제방을 따라 풀 베는 모습을 본 후 또 다른 이론을 내놓았다. 왼손잡이 한 사람을 포함한 세 사람이 함께 풀 베는 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게 불가능함을 지켜본 그는 가장 간단한 형태의 불가능성을 목격했다. &lsquo;오른손이 우위성을 갖지 않았다면 그러한 불가능성이 인류 전체에 만연했을 것이다.&rsquo; 특히 큰 낫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가지고 여럿이 하는 활동에서는 일정 수준의 일관성과 균일성이 바람직하다는 게 칼라일의 견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분화의 요소는 확실히 효율성을 높여주는 것 같다. 한쪽 손으로 흰개미를 잡는 침팬지들은 그렇지 않은 침팬지들보다 36퍼센트를 더 잡는다. 일반적으로 기관들의 효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내적으로 비대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의 장기는 비대칭적으로 분포하며 혈액은 나선운동을 하며 흐른다. 이는 분자 수준에도 적용된다. 설탕분자는 편광을 오른쪽으로 회전시키는 반면, 아미노산은 왼쪽으로 회전시킨다. 가장 극적인, 그리고 가장 직관에 반하는 현대의 발견은 인간 뇌의 좌반구가 우반구와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몸 오른쪽 부위의 운동을 통제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뇌는 대체로 인간의 두개골 형태와 일치하는 식으로, 즉 앞뒤가 아니라 (코의 선을 기준으로) 좌우로 대칭적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뇌는 주로 앞부분, 중간부분, 뒷부분으로 나뉘어졌는데, 앞부분은 이마 바로 뒤였다. 가장 최근에 이러한 견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한 것은 19세기 초에 기본원리가 마련된 골상학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골상학자들은 뇌 기능이 국부적이며, 두개골의 표면이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뇌 활동의 종류에 따라 형성되고 특징지어진다고 주장했다. 다양한 뇌 기능들이 발달함에 따라 이들 기능을 맡는 &lsquo;융기&rsquo;들이 만들어지며, 마사지를 통해 이런 융기를 발달시킬 수도 있다. 19세기 중반에 마흔두 개에 달하는 기능들이 확인되었고, 일부 골상학자들은 정치적 소속을 결정하는 것과 같은 일을 담당하는 융기가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어떤 골상학자는 두개골에 관해 &lsquo;작은 언덕마다 혀가 하나씩 있다&rsquo;고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골상학에서 뇌의 좌반구는 정확히 우반구의 거울 이미지다. 머리에는 최대 여든네 개에 이르는 &lsquo;융기&rsquo;가 있을 수 있고, 좌우반구의 뒤쪽에는 &lsquo;파괴성&rsquo; &lsquo;비밀스러움&rsquo; &lsquo;반항&rsquo; &lsquo;성욕&rsquo; 같은 나쁜 융기들이 있다. 이러한 좌우반구의 대칭 때문에 골상학 논문들에는 대체로 옆얼굴을 보여주는 삽화가 들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860년대에 프랑스인 외과의사인 폴 브로카<sup>Paul Broca</sup>가 언어 문제를 가지고 있고 몸의 오른쪽이 마비된 환자들의 뇌를 연구했다. 그 결과 뇌의 좌반구가 언어 기능을 담당하며 몸 오른쪽의 운동을 통제한다고 결론지으면서 골상학적 합의는 깨지기 시작했다. 그의 환자들이 사망한 후에 뇌를 분석한 결과 좌반구에 손상이 있음이 밝혀졌다. 브로카의 발견으로 원래 1836년에 마르크 다<sup>Marc Dax</sup>가 몽펠리에에서 열린 의학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이 1865년에 출간되었다. 이 논문의 결론은 브로카의 결론과 비슷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골상학에 대해 읽은 다는 1800년 머리에 부상을 입어 단어들을 간신히 기억하는 기병장교에게 정확히 어디에 부상을 입었는지 물었다. 부상 부위는 정수리 왼쪽이었다. 이후에 다는 좌뇌의 손상과 언어 상실이 유사하게 결합된 더 많은 환자들을 보았다. 다의 논문은 그즈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다가 30년 뒤에야 그의 아들의 노력 덕분에 출간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 연구는 이 결과들을 뒷받침해왔으며 또한 뇌 좌우반구의 다른 기능들을 상세하게 밝혀냈다. 좌반구는 일반적으로 언어를 처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말하기, 읽기, 쓰기, 맞춤법이 포함된다. 어떤 이들은 언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lsquo;민첩성&rsquo;과 &lsquo;속도&rsquo;가 오른손으로 전달되고, 그래서 오른손을 더 움직일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우반구는 &lsquo;시각 이미지와 3차원 공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고도로 병행적이고 통합적인 분석&rsquo;을 포함한 &lsquo;비언어적인&rsquo; 일들을 수행한다고 여겨진다. 우반구는 또한 감각 지각을 처리하고 언어와 관련해서 감정, 강조, 은유, 유머를 담당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것은 골상학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비록 이러한 통찰들이 궁극적으로는 골상학의 뇌 기능 분화에 대한 주장에서 나왔지만 말이다. 19세기 후반에 대단히 많이 제작된, 도자기로 만든 골상학적 반신상들은 이러한 생각에 부응하려는 성의 없는 시도로 보인다. 가장 성공적인 것은 미국인인 파울러 형제가 만든 것으로, 오늘날에도 고물상과 골동품상에서 볼 수 있다. 그것들에는 신고전주의의 대리석 반신상처럼 한결같이 흰 유약이 발라져 있지만 그 위에 검은색 텍스트가 새겨져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심히 비대칭적으로 머리 오른쪽보다 왼쪽에 훨씬 더 많은 텍스트가 새겨져 있는 것을 하나 가지고 있다. 왼쪽에는 모든 뇌 기능이 낱낱이 새겨져 있어서 다양한 말들이 빽빽한 숲을 이룬다. 예를 들어 왼쪽 눈 근처에서는 &lsquo;언어 기억&rsquo; &lsquo;언어 표현&rsquo; &lsquo;언어&rsquo; &lsquo;추정&rsquo; &lsquo;계산&rsquo; &lsquo;체계&rsquo; &lsquo;청결&rsquo; &lsquo;색&rsquo; &lsquo;무게&rsquo; &lsquo;크기&rsquo; &lsquo;형태&rsquo; 같은 말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른쪽은 좀더 요약되어 대문자로 새겨진 텍스트들이 훨씬 더 드문드문 덮여 있다. 예를들어 &lsquo;도덕적 판단과 종교적 감정&rsquo; &lsquo;분류&rsquo; &lsquo;직관, 추론, 반성, 능력&rsquo; 등이 있다. 오른쪽 눈에는 아무 단어도 없다. 이는 시각적으로, 좌반구는 컴퓨터같이 실로 극히 분주하게 언어를 처리하는 쪽이고 오른쪽은 좀더 느긋하게 개념화와 일반화를 담당한다는 인상을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경우 이렇게 뇌 좌우반구의 다양한 기능들을 밝히다보면 오른손의 &lsquo;우위&rsquo;에 한층 더 신빙성이 실리곤 한다. 오른손을 통제하는,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계산을 할 줄 아는 좌반구는 흔히 &lsquo;우세한&rsquo; 반구로 여겨진 반면 우반구는 그보다 덜 정교한 것으로 여겨졌다. 1961년에 한 신경학자는 우반구는 단지 &lsquo;흔적&rsquo;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것은 왜 인류의 90퍼센트 정도가 오른손잡이인지, 또는 왜 뇌의 좌반구에서 언어 및 수학 능력이 더 발달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을 주지 못한다. 뇌의 좌반구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의 언어능력으로 퇴행하지만, 상당수는 남아 있는 우반구로 다시 어른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우반구는 언어를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오른손잡이의 5퍼센트, 왼손잡이의 30퍼센트의 언어능력을 뇌의 우반구에서 담당한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인간의 몸과 뇌가 &lsquo;분업&rsquo;을 하고 어느 정도 이원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이러한 분화의 창의적 이용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론,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제임스 홀 James Hall<br /> </strong>프리랜서 예술비평가이자 예술사가다. 『가디언』의 예술비평가로 활동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조각의 세계: 르네상스부터 현재까지 조각의 위상 변화』(1999), 『미켈란젤로, 인체의 재발명』(2005), 『미켈란젤로와 마시는 한 잔의 커피』(2006)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영선<br /> </strong>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수료했다. 현재 출판 기획 및 번역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미스터리 심리학』,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 『괴짜사회학』, 『러브, 섹스, 그리고 비극』, 『세상의 모든 영화』, 『재즈: 자유로운 영혼의 울림』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2 오후 3:01:00《203》2010년 5월 9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5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3_%EB%8B%B9%ED%86%B5%EC%9D%98%20%EC%A3%BD%EC%9D%8C_%ED%91%9C%EC%A7%80(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9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4세에 요절한 G. 뷔히너는 나폴레옹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813년 독일 헤센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나,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고전 작품들에 심취했던 그는 계몽주의 철학가들의 글을 탐독하면서 문학과 정치에 눈떴다. 그는 인권협회를 조직하고 혁명을 충동하는 선전물을 쓴 죄명으로 망명객이 되었고, 『당통의 죽음』(예니, 2003)은 도피 생활 중에 집필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통의 죽음』을 읽은 독자는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첫째,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와 공포정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죽었다. 둘째, 혁명이란 아무런 원칙도 없는 파괴의 연속이며, 인간적인 혁명이란 없다. 두 개의 의문을 풀기 전에,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시아출판사, 2004)에 실린 프랑스 혁명 편을 참조하여,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치달아간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9"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3_%ED%98%81%EB%AA%85%EC%9D%98%20%EC%97%AD%EC%82%AC.jpg"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연도만 외우기 쉬울 뿐,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다. 대개 프랑스 혁명의 발단으로 7월 14일에 일어난 바스티유 함락을 꼽지만, 실은 그해 여름보다 이른, 2년 반 전에 이미 혁명이 시작되었다. 왕실의 재정 적자와 산더미 같은 국가 채무는 새로운 조세 체제를 필요로 했고, 이것을 처리하기 위한 모임이 성직자(제1신분), 귀족(제2신분)으로 이루어진 명사회(성직자&middot;대귀족&middot;소수 부르주아로 구성된 의회)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명사회는 새로운 세금 제도를 만드는 일에 자신들도 참여하기를 원하는 제3계급의 요구에 부딪혔다. 제3계급의 삼부회 소집 요구는 일순 프랑스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때 삼부회 소집을 요구한 애국주의자들은 절대 왕정이 자유와 시민의 재산권을 위협하는 전제적이고 압제적인 지배 체제라고 비난했다. 반면, 절대주의 옹호자들은 그들이 특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국민 대다수를 위한 개혁을 고의로 방해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고 정당한 왕정 대신 자기도취에 빠진 귀족들의 지배를 획책하고 있다고 맞섰다. 결국 삼부회는 바스티유 함락이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소집됐고, 그것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랑스 혁명은 프랑스의 절대왕권이 붕괴된 프랑스 내적 사건이지만, 모든 혁명에는 전사<sup>前史</sup>가 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1649년에 있었던 영국혁명과 1689년의 영국 명예혁명, 그리고 1776년 미국혁명(독립전쟁)의 영향과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활약이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스티유 함락이 벌어진 1789년에서부터 루이 16세를 처형시킨 1793년까지, 프랑스엔 온갖 정파가 들끓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정파는 다음의 세 개다. ⅰ) 왕정을 유지하려는 왕정파 ⅱ) 공화정을 세우려는 공화파 ⅲ) 영국식의 입헌군주국을 세우려는 사람들. 하지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루이 16세에 대한 처형은 프랑스 혁명을 극본 없는 사태로 몰아갔다. 우선 그 사건으로 프랑스는 유럽 각국의 적이 되었다. 국내의 왕당파들은 외국군의 개입을 요구했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왕국은 거기에 부응했다. 외부의 위협은 당연히도 더 많은 공안을 필요로 했고, 혁명은 자기 내부에서 과격파가 온건파를 처형하는 방식으로 가열됐다. 어쩌면 공포정치는 프랑스 혁명이 국내 정치의 범위를 벗어나면서 생긴 돌발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통이 과연 로베스피에르의 독재와 공포정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 인사였는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을 수 있다. 판단을 내리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그가 공포정치의 발단이 된 1793년의 &lsquo;9월 처형&rsquo;을 앞서 지휘한 사람이며, 자코뱅 당내의 과격파인 에베르파가 처형되자, 그때야 비로소 혁명이 과격화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당통의 죽음』이 발표된 1835년 이후, 많은 독일의 보수 비평가들은 뷔히너를 자기편에 끌어넣으려고 시도했다. 즉 『당통의 죽음』은 혁명의 불가능성과 혁명의 폭력성을 휴머니즘의 시각에서 파헤친 작품이라는 식이다. 독일의 보수 비평가들은 그런 독해를 통해 &lsquo;세계에 대한 인식 가능성&rsquo;을 부정하고, 인간은 동류(또는 민중)에 의한 혁명이 아니라, &lsquo;기적&rsquo; 혹은 &lsquo;지도자&rsquo;를 통해서만 시대의 혼돈과 절망으로부터 구원된다는 교설을 정당화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220" height="43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3_%EA%B2%8C%EC%98%A4%EB%A5%B4%ED%81%AC%20%EB%A3%A8%EC%B9%B4%EC%B9%98.jpg" />이런 해석을 반박한 사람이 게오르크 루카치다. 그는 파시즘에 의해 왜곡된 뷔히너를 바로 보기 위한 에세이에서, 뷔히너가 불굴의 혁명가였음을 주지시키면서 이 작품의 역설적인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당통의 죽음』은 로베스피에르와 당통 간에 이루어지는 모종의 갈등으로 시작된다. 즉 로베스피에르는 &ldquo;사회혁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rdquo;다(64~65쪽)는 편이고 당통은 거기에 대해 &ldquo;난 이제 싫증났어. 무얼 위해 우리 인간이 서로 싸워야 하나?&rdquo;(79쪽)라며 물러앉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루카치는 이 갈등을 분석해 보이면서, 당통이 혁명으로부터 물러서고자 하는 이유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ldquo;그는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을 뿐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은 그의 목표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rdquo;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봉건제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목표가 있었다(49, 50쪽). 이와 같은 루카치의 해석에 따르면,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아니라 혁명의 완수를 가로막거나 목표에서 이탈한 사람으로, 혁명을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한정했던 사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극 구성상으로 2막의 마지막 장인 7장에 나오는 국민공회에서의 로베스피에르와 생 쥐스트의 연설(102~107쪽), 3막의 마지막 장인 10장에서 시민들이 당통을 비난하는 장면, 그리고 이 연극의 최종 막인 4막의 끝이 &ldquo;국왕 폐하 만세!&rdquo;라는 시대착오적인 희화로 끝나는 것은, 루카치의 해석에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희곡을 원작으로 폴란드의 감독 안제이 바이다가 만든 영화가 &lt;당통&gt;(1983)이다. 이 영화는 당통이 처형된 뒤 생 쥐스트가 로베스피에르에게 달려와서 &ldquo;프랑스의 독재자가 되어주길 바라오&rdquo;라는 말하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마침 잠자리에 누워 있던 로베스피에르는 가발을 벗고 있었는데, 대머리에 가까운 모습이 마치 레닌 같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64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3_%EC%98%81%ED%99%94%20%EB%8B%B9%ED%86%B5.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것이 감독의 의중이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로베스피에르의 모습이 마치 레닌과 같았다는 나의 착각에는, 그렇게 착각할 만한 역사적 맥락이 있다. 1794년 7월 테미도르 반동으로 혁명이 좌절되고 나서부터 로베스피에르는 피에 굶주린 짐승으로 묘사됐고, 러시아 혁명이 중앙정부에 장악된 뒤부터 레닌을 로베스피에르를 동일시하는 공식이 만들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권력욕에 찬 냉혈한이라는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에 레닌이 조합된 이후, 우리는 두 가지 한계에 구속되었다. 모든 이상주의적인 정치 운동(혁명)의 끝은 공포 정치를 부르며 그것의 논리적 결말은 강제수용소라는 것이 그 하나고, 모든 정치 운동은 민주주의적 제도와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머지 하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후하지 않다. 프랑스 혁명이 프랑스에서 계급적 특권 사회의 권력 체제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형식상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개인들의 사회를 세운 건 인정되지만, 사회의 계층적 구조는 별로 변화시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민의 동의를 통한 정치권력의 합법화와 시민들의 참정권 요구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이다. 이 글 가운데 『당통의 죽음』에 관한 기술은,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의 실제 비평』(까치, 1987)에 실린 뷔히너에 관한 에세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오늘의 평가가 기술된 이 글의 마지막 문단은, 페터 벤데가 엮은 『혁명의 역사』를 참조했다.<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12 오전 11:20:00헤밍웨이의 ‘태양은 다시 뜬다’<img alt="" width="600" height="94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2_%ED%83%9C%EC%96%91%EC%9D%80%20%EB%8B%A4%EC%8B%9C%20%EB%9C%AC%EB%8B%A4/%ED%83%9C%EC%96%91%EC%9D%80%20%EB%8B%A4%EC%8B%9C%20%EB%9C%AC%EB%8B%A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그대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이니.&rdquo;<br /> ― 거트루드 스타인(저자와의 대화 중에서)</span></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99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건만, 땅은 영원히 그대로다.<br /> 태양은 다시 뜨고 다시 지며, 뜬 곳으로 서둘러 돌아간다.<br /> 바람은 남으로 갔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빙빙 돌고 돌아 그 가던 길로 돌아온다.<br />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넘치지 않으며, 강물이 비롯된 곳으로 돌아간다.&rdquo;<br /> ― 전도서(1:4-1:7)</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로버트 콘은 한때 프린스턴 대학의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었다. 내가 권투 타이틀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다고 생각진 마시기 바란다. 하지만 콘에겐 그게 퍽 중요했다. 그는 권투를 좋아한 게 아니었다. 싫어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권투를 괴로워하면서도 철저히 배운 건, 프린스턴에서 유대인 취급을 당하면서 느낀 열등감과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을 업신여기는 자는 누구든 때려눕힐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게 어느 정도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수줍음을 많이 타고 아주 친절해서, 체육관 밖에서는 절대 싸우지 않는 그였지만 말이다. 그는 스파이더 켈리의 수제자였다. 스파이더 켈리는 배우러 온 청년 모두를 페더급 선수처럼 싸우도록 가르쳤다. 체중이 105파운드건 205파운드건 상관없었다. 그래도 콘에겐 그게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정말 빨랐다. 그가 워낙 뛰어나서 스파이더 켈리는 신속히 그를 강한 상대와 맞붙였고, 결국 콘의 코를 영영 주저앉혀버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콘은 권투를 더 싫어하게 되었지만, 이 일로 그는 묘한 뿌듯함 같은 걸 맛보게 되었고, 코는 전보다 낮아진 게 확실히 나아 보였다. 프린스턴 졸업반 때, 그는 책을 너무 많이 봐서 안경을 쓰게 되었다. 나는 그의 동기생 중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가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솔직하면서 단순한 사람들, 특히 살아온 얘기들이 착착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로버트 콘이 미들급 복싱 챔피언이었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늘 품고 있었다. 얼굴은 말발굽에 깔려서 혹은 어머니가 매우 놀라거나 뭘 잘못 봐서, 아니면 어릴 때 무엇에 세게 부딪쳐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누굴 시켜서 스파이더 켈리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스파이더 켈리는 콘을 기억하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콘이 어떻게 됐는지 자주 궁금해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로버트 콘의 아버지 쪽은 부유한 유대인 집안으로 뉴욕에서 손꼽혔고, 어머니 쪽은 유서 깊은 유대인 집안 중 하나였다. 프린스턴 진학을 준비하던 군사학교에서 그는 미식축구팀의 뛰어난 엔드<span style="color: #993300"><sup>1</sup></span>였고, 그에게 인종을 의식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린스턴에 가기 전까지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걸, 그래서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청년이었고, 그래서 상처를 받았다. 그는 권투에서 위안을 찾았고, 자의식으로 아파하고 코가 낮아진 채로 프린스턴을 졸업했으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첫 여자와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 5년 동안에 아이는 셋이 되었고, 아버지가 남겨준 5만 달러는 거의 탕진됐다. 남은 유산은 다 어머니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부유한 아내와는 가정불화가 만성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아내를 버리기로 마음먹자마자, 아내가 그를 버리고 어느 세밀화가와 떠나버렸다. 그는 그녀에게서 남편을 박탈하는 게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아 몇 달 동안 떠날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차였기에, 그녀의 일탈은 아주 건강한 충격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혼 절차가 끝나자 로버트 콘은 태평양 연안으로 갔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어쩌다 문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5만 달러 중 약간이 아직 남아 있던 터라 어느새 한 예술 평론지를 후원하게 되었다. 평론지는 캘리포니아 카멜에서 창간되었다가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에서 폐간되었다. 처음엔 재정후원자로만 여겨졌고 그저 자문위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이 실리던 콘은, 그 무렵 유일한 편집자가 되어 있었다. 잡지는 그의 돈으로 굴러갔고, 그는 편집자로서의 권한이 마음에 들었다. 잡지 운영비가 너무 부담스러워져 잡지를 포기해야 했던 건 그로선 애석한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그 무렵 그는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잡지와 함께 뜨고 싶어 하던 여자에게서 꼼짝도 못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의지가 워낙 강했기에, 콘은 꽉 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 여자는 잡지가 뜰 가망이 없어 보이자 콘에게 정나미가 좀 떨어졌지만, 아직 이용할 만한 게 남아 있는 한 그거라도 붙드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는, 유럽으로 가자고 거기서 콘은 글을 쓰면 된다고 다그쳤다. 둘은 유럽으로 왔고, 여자가 교육을 받았었던 그곳에서 3년을 머물렀다. 이 3년 중에 첫 1년은 여행만 다녔고, 나머지 2년은 파리에서 지냈다. 파리에서 로버트 콘은 친구 둘을 사귀었다. 브래덕스와 나였는데, 브래덕스는 문인 친구였고 나는 테니스 친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를 꽉 잡은 여자, 프란시스는 두 해가 저물어갈 무렵 자신의 외모가 시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버트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무심한 소유와 착취에서, 그를 남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결의로 바뀌었다. 이 무렵 로버트의 어머니는 그의 용돈을 월 300달러 정도로 정해두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로버트 콘은 2년 반 동안 딴 여자에게 한눈판 적이 없었다. 그는 유럽에 와서 사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미국에 있는 게 나았다는 것과 글쓰기를 발견했다는 점만 아니면 꽤 행복했다. 그는 소설을 하나 썼는데, 많이 모자라긴 해도 나중에 평론가들이 말한 것만큼 아주 형편없는 소설은 아니었다. 그는 책을 많이 읽고, 브리지 놀이를 하고, 테니스를 치고, 가까운 체육관에서 권투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그에 대한 프란시스의 태도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우리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고 난 어느 밤이었다. 우리는 라브뉘에서 저녁을 먹고서 카페 드 베르사유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 우리는 커피 다음에 &lsquo;핀&rsquo;<span style="color: #993300"><sup>2</sup></span>을 몇 잔 마셨고, 나는 가봐야겠다고 했다. 콘은 우리 둘이서 어딘가로 주말여행을 가자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도시를 벗어나 실컷 걸어보고 싶어 했다. 나는 스트라스부르로 날아가서 생토딜<span style="color: #993300"><sup>3</sup></span>까지, 아니면 알자스 지방 다른 어디까지 걸어보자고 했다. &ldquo;스트라스부르에 시내 안내를 해줄 만한 아가씨가 있거든.&rdquo; 내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테이블 밑으로 누가 발길질을 했다. 나는 어쩌다 차인 줄 알고 이어서 말했다. &ldquo;2년 동안 거기 살아서 웬만한 건 다 알지. 대단한 여자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테이블 밑으로 다시 발길질이 있었고, 로버트의 여자 프란시스를 보니 턱이 들린 채 낯빛이 굳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뭐, 꼭 스트라스부르일 것도 없지.&rdquo; 나는 말했다. &ldquo;브뤼주나 아르덴 고원 같은 데도 있으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콘은 안도하는 것 같았다. 발길질은 더 없었다.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콘은 신문을 하나 사야겠다며 길모퉁이까지만 함께 가자고 했다. &ldquo;에이, 참.&rdquo; 콘이 말했다. &ldquo;스트라스부르에 사는 아가씨 얘긴 뭐하러 했어? 프란시스 얼굴 봤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니, 뭐하러? 내가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미국 여자를 아는 거랑 프란시스랑 무슨 상관이야?&rdquo;<br /> &ldquo;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떤 여자든 안 돼. 하여튼 난 못 가.&rdquo;<br /> &ldquo;바보 같은 소리.&rdquo;<br /> &ldquo;넌 프란시스를 몰라. 어떤 여자든 절대 안 돼. 프란시스 표정 못 봤어?&rdquo;<br /> &ldquo;뭐, 그럼 상리스에 가든지.&rdquo;<br /> &ldquo;불쾌해하지 말고.&rdquo; <br /> &ldquo;불쾌해하는 게 아니야. 상리스는 좋은 곳이고, 그랑세르 호텔에 묵으면서 숲길이나 많이 걷다가 돌아오면 돼.&rdquo;<br /> &ldquo;좋아, 그건 괜찮겠어.&rdquo; <br /> &ldquo;그럼, 내일 코트에서 보자구.&rdquo; 내가 말했다.<br /> &ldquo;잘 가, 제이크.&rdquo; 그는 인사를 하고서 카페 쪽으로 돌아섰다. <br /> &ldquo;신문 산다며.&rdquo; 내가 말했다.<br /> &ldquo;그렇지.&rdquo; 그는 나와 함께 길모퉁이의 가판대로 갔다. &ldquo;불쾌한 거 아니지, 제이크?&rdquo; 그가 신문을 손에 들고 돌아서며 말했다.<br /> &ldquo;아니, 내가 왜?&rdquo;<br /> &ldquo;그럼, 테니스장에서 봐.&rdquo; 그가 말했다. 나는 신문을 들고 카페로 돌아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꽤 좋아했고, 그는 그녀 때문에 꽤나 딱하게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2_%ED%83%9C%EC%96%91%EC%9D%80%20%EB%8B%A4%EC%8B%9C%20%EB%9C%AC%EB%8B%A4/%EA%B0%81%EC%A3%BC1.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2</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해 겨울에 로버트 콘은 자신이 쓴 소설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소설을 꽤 괜찮은 출판사에서 받아들였다. 나는 그가 떠나는 문제로 지독하게 다투었다고 들었는데, 그 바람에 프란시스는 그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뉴욕에서 여러 여자가 그에게 친절히 대해주었고, 돌아왔을 때 그는 사뭇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미국에 열광했고, 더는 그리 순진하지도 그리 친절하지도 않았다. 출판사에서 그의 소설을 꽤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좀 우쭐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여러 여자가 작정하고서 친절하게 굴었고, 그래서 그의 시야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4년 동안 그의 시야는 오로지 아내에게만 국한돼 있었다. 그리고 근 3년 동안, 그는 프란시스 너머를 전혀 보지 못했다. 분명히 그는 그때까지 사랑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끔찍했던 대학 시절로부터 회복되어가던 중에 결혼했고, 자신이 첫 아내에게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회복되어가던 중에 프란시스에게 꽉 잡혔다. 그는 아직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자기가 여자들에게 꽤 매력이 있음을, 또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게 순전히 기적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울리기 썩 좋지는 않을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다. 더구나 그는 뉴욕에서 친척들과 판돈이 상당히 큰 브리지 놀이를 하다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돈을 걸었는데, 카드를 잘 잡아서 수백 달러를 따게 되었다. 덕분에 자신의 브리지 실력을 너무 자만하게 된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브리지로만 먹고살아도 되겠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한 가지. 그는 W. H. 허드슨의 책을 읽고 있었다. 문제 될 게 있겠나 싶지만, 콘은 『자줏빛 나라』를 읽고 또 읽었다.<span style="color: #993300"><sup>4</sup></span> 『자줏빛 나라』는 나이가 꽤 들어서 읽게 되면 아주 해로운 책이다. 지극히 낭만적인 이국땅에서 벌어지는 완벽한 영국 신사의 화려하고 호색적인 상상의 모험들, 그리고 그곳의 풍경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는 이야기다. 34세인 남자가 그 책을 인생의 가이드북으로 삼는다는 건, 프랑스 수도원을 갓 나온 동년의 남자가 보다 실용적인 앨저<span style="color: #993300"><sup>5</sup></span>의 책들을 완비하고서 곧장 월스트리트로 진출하는 것만큼이나 안전할 것이다. 콘은 『자줏빛 나라』를 〈R. G. 던 보고서〉<span style="color: #993300"><sup>6</sup></span>이기라도 한 듯, 단어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에겐 미심쩍은 데가 좀 있긴 해도 전반적으로 견실한 책이었던 것이다. 그 정도면 그를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느 날 그가 내 사무실로 찾아올 때까지 그가 그 정도로 들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어이, 로버트.&rdquo; 내가 말했다. &ldquo;날 격려해주러 오셨나?&rdquo;<br /> &ldquo;제이크, 남미 가지 않을래?&rdquo; 그가 물었다.<br /> &ldquo;아니.&rdquo;<br /> &ldquo;왜?&rdquo;<br /> &ldquo;글쎄. 가고 싶은 적이 없었어. 돈이 너무 들잖아. 남미 사람이야 파리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고.&rdquo;<br /> &ldquo;그 사람들은 진짜 남미인이 아니야.&rdquo;<br /> &ldquo;내가 보기엔 너무 진짜 같은데.&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임항(臨港) 열차<span style="color: #993300"><sup>7</sup></span>를 잡아 일주일 치 기사를 부쳐야 했는데, 기사를 아직 반밖에 못 쓴 상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혹시 추문 아는 것 없어?&rdquo; 내가 물었다.<br /> &ldquo;없어.&rdquo;<br /> &ldquo;지체 높으신 친척 중에 이혼하시는 분도 없고?&rdquo;<br /> &ldquo;없다니까. 이봐, 제이크. 내가 경비를 다 대면 나하고 남미에 가주겠어?&rdquo;<br /> &ldquo;왜 나야?&rdquo;<br /> &ldquo;스페인어 할 줄 알잖아. 둘이 가면 더 재밌을 테고.&rdquo;<br /> &ldquo;안 가.&rdquo; 내가 말했다. &ldquo;난 이 도시가 좋고, 여름이면 스페인에 가잖아.&rdquo;<br /> &ldquo;난 평생 그런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구.&rdquo; 콘이 말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ldquo;나이 더 먹으면 엄두도 못 내.&rdquo;<br /> &ldquo;바보 같은 소리.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돈 많잖아.&rdquo;<br /> &ldquo;알아. 하지만 그럴 마음이 쉽게 나는 게 아니야.&rdquo;<br /> &ldquo;기운 내. 어떤 나라든 영화에서 보는 거랑 똑같아.&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좀 미안하기도 했다. 그는 서운하게 받아들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내 인생은 너무 빨리 흘러가는데, 진짜로 사는 게 아니다 싶으니 못 견디겠어.&rdquo;<br /> &ldquo;인생을 여한 없이 사는 사람은 투우사밖에 없지.&rdquo;<br /> &ldquo;난 투우사에게 관심 없어. 그건 비정상적인 삶이야. 난 남미 오지에 가고 싶어. 멋진 여행이 될 거야.&rdquo;<br /> &ldquo;영국령 동아프리카로 사냥을 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rdquo;<br /> &ldquo;아니, 그럴 맘 없어.&rdquo;<br /> &ldquo;거기라면 함께 갈 텐데.&rdquo;<br /> &ldquo;아니, 거긴 관심 없다니까.&rdquo;<br /> &ldquo;그곳에 관한 책을 안 봐서 그래. 눈부시게 아름다운 흑인 공주들과 연애하는 얘기로 꽉 찬 책을 하나 읽어보라구.&rdquo;<br /> &ldquo;난 남미에 가고 싶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에겐 유대인답게 완고한 구석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밑에 가서 한잔하지.&rdquo;<br /> &ldquo;일 안 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음.&rdquo; 우리는 계단을 이용해 1층에 있는 카페로 갔다. 나는 그게 찾아오는 친구를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일단 한잔하고 나서 &ldquo;자, 난 돌아가서 전보를 좀 보내야겠네&rdquo;라고만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게 직업윤리의 대단히 중요한 부분인 신문 업계에서는, 그런 우아한 출구를 찾아내는 게 아주 중요하다. 아무튼, 우리는 아래층의 바로 가서 위스키소다를 한 잔씩 했다. 콘은 벽면에 진열된 술병들을 바라봤다. &ldquo;여기 좋은데.&rdquo; 그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술 많지.&rdquo; 나는 말했다.<br /> &ldquo;이봐, 제이크.&rdquo; 그는 바 쪽으로 몸을 숙였다. &ldquo;인생이 마구 흘러가는데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 느껴본 적 없어? 벌써 거의 반평생을 살아버렸다는 건 실감해?&rdquo;<br /> &ldquo;음, 어쩌다 한 번씩.&rdquo;<br /> &ldquo;앞으로 35년쯤 뒤면 죽을 거라는 것도 알아?&rdquo;<br /> &ldquo;아무렴, 로버트.&rdquo; 나는 말했다. &ldquo;아무렴.&rdquo;<br /> &ldquo;농담이 아니야.&rdquo;<br /> &ldquo;난 그런 걱정은 안 해.&rdquo; 내가 말했다.<br /> &ldquo;해야 해.&rdquo;<br /> &ldquo;이래저래 걱정할 것 많아. 걱정할 만큼 해봤고.&rdquo;<br /> &ldquo;아무튼, 난 남미에 가고 싶어.&rdquo;<br /> &ldquo;이봐, 로버트. 다른 나라에 간다고 달라질 것 없어. 나도 다 해봤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닌다고 자기한테서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무 소용없어.&rdquo;<br /> &ldquo;하지만 남미엔 안 가봤잖아.&rdquo;<br /> &ldquo;그놈의 남미! 지금 네 기분으론 거기 가봤자 똑같을 거야. 여긴 좋은 도시야. 파리에서 네 인생을 살아보는 게 어때?&rdquo;<br /> &ldquo;파리는 지긋지긋해. 쿼터<span style="color: #993300"><sup>8</sup></span>도 지긋지긋하고.&rdquo;<br /> &ldquo;쿼터에서 떨어져 지내. 혼자 슬슬 다니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라구.&rdquo;<br /> &ldquo;나한텐 아무 일도 안 일어나. 한번은 밤새 혼자 걸었는데, 자전거 탄 경찰이 불러 세우더니 신분증 보자고 한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안 나더군.&rdquo;<br /> &ldquo;밤 풍경이 좋지 않던?&rdquo;<br /> &ldquo;난 파리 안 좋아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시 그랬다. 딱하기도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남미가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는 것과 파리를 안 좋아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완고함에 바로 부닥치게 되니 말이다. 첫 번째 생각은 책에서 얻은 것이고, 내 생각엔 두 번째도 책에서 나온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자, 난 올라가서 전보를 좀 보내야겠어.&rdquo;<br /> &ldquo;정말 가야 해?&rdquo;<br /> &ldquo;음, 전보 처리할 게 좀 있어서.&rdquo;<br /> &ldquo;나도 올라가서 사무실에 앉아 있어도 될까?&rdquo;<br /> &ldquo;뭐, 그러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외실(外室)에 앉아 신문을 봤고, 편집인과 발행인과 나는 두 시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그다음 나는 카본지를 정리하여 서명란에 스탬프를 찍은 뒤에 큰 마닐라지 봉투 몇 개에 넣고는, 벨로 사환 아이를 불러 생라자르 역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외실로 가보니 로버트 콘은 큰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그는 두 팔로 팔베개를 한 채 자고 있었다.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사무실을 닫고 어서 나가버리고 싶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ldquo;난 못 해.&rdquo; 그 말과 함께 그는 팔 사이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ldquo;난 못 해. 뭐라고 해도 난 못 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로버트.&rdquo; 나는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소를 띠며 눈을 껌뻑였다.<br /> &ldquo;방금 내 소리가 컸나?&rdquo;<br /> &ldquo;약간. 하지만 분명치 않았어.&rdquo;<br /> &ldquo;휴우, 끔찍한 꿈이었어!&rdquo;<br /> &ldquo;타자기 소리에 잠들었어?&rdquo;<br /> &ldquo;그랬나 봐. 간밤에 한숨도 못 잤거든.&rdquo;<br /> &ldquo;무슨 일로?&rdquo;<br /> &ldquo;얘기하느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눈에 선했다. 나는 친구들의 침실 풍경을 상상해보곤 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우리는 카페 나폴리탱으로 가서 &lsquo;아페리티프&rsquo;<span style="color: #993300"><sup>9</sup></span>를 한잔 마시며 대로의 저녁 인파를 구경하기로 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2_%ED%83%9C%EC%96%91%EC%9D%80%20%EB%8B%A4%EC%8B%9C%20%EB%9C%AC%EB%8B%A4/%EA%B0%81%EC%A3%BC2.jpg" /><br /> <br /> (1, 2장 전문)<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6"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2_%ED%83%9C%EC%96%91%EC%9D%80%20%EB%8B%A4%EC%8B%9C%20%EB%9C%AC%EB%8B%A4/%ED%97%A4%EB%B0%8D%EC%9B%A8%EC%9D%B4%20%EC%9D%B4%EB%AF%B8%EC%A7%80.jpg" />어네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1899~1961)</strong><br /> 미국의 작가, 저널리스트.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20세기 소설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생전에 7권의 장편소설과, 단편집 6권, 논픽션 2권을 남겼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사후에도 장편소설 3권과 단편집 4권, 논픽션 3권이 발간되었다.<br /> 1899년 시카고 교외의 부촌인 오크파크에서 태어난 그는,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대학 진학 대신 신문기자 생활을 택한다. 신문사 생활을 짧게 마치고 1차대전에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참전했다가 이탈리아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는다. 귀국 후 다시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21년, 해외특파원이 되어 파리로 건너간다.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영미권의 대표적 문인들로부터 문학수업을 받은 그는 첫 장편 『태양은 다시 뜬다』(1926)로 큰 성공을 거두며 &lsquo;로스트 제너레이션&rsquo;과 독특한 문체를 대표하는 유명 작가가 된다. 파리 시절 이후로는 주로 플로리다와 쿠바에서 생활하며 『무기여 잘 있거라』(192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0), 『노인과 바다』(1952) 등의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간다. 쿠바 생활을 접고 아이다호 주 케첨에서 지내다 1961년, 오랜 심신의 고통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한중</strong><br /> 역서에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숨 쉬러 나가다』, 웬델 베리의 『온 삶을 먹다』,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1 오후 1:30:00박필우의 ‘나한전 문살에 넋을 놓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598" height="84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EB%82%98%ED%95%9C%EC%A0%84%EB%AC%B8%EC%82%B4(%EC%95%9E%ED%91%9C%EC%A7%80).jpg"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릿말</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사람들은 무료하거나, 저자거리 생활에 힘들어 할 때 여행을 떠난다. 산을 찾기도 하고, 넓은 바다를 보며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는 시간여행을 한다는 것이며, 역사가 내게 던지는 교훈과 우리의 문화재가 주는 진실에 사색하고 사고하며 나를 찾아 가는 살짝 틀어진 답사여행을 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내 방식대로 걷고 웃고 춤춘다.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며, 미술사가도 아니다. 전문가들의 노력이 담긴 수많은 책을 찾아 읽고 그 속의 지식들을 내 것으로 소화시키려 애를 쓴다. 지식의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유통과정을 거쳐 지식과 감성을 적당히 버무린 소매점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셈이다. 답사지에 서면 고증을 일삼지 않으려 애쓰는 여행객일 뿐이다. 그리고 문화재 내면의 고통과 절박한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하층민들의 피와 땀을 기억해내며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감탄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지적 사치에 길들여지길 거부하며, 어쩌면 진실은 불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좁은 가슴을 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미래의 기억&rsquo;이 바로 꿈이며 소망이라면, 그 꿈의 종착지는 결국 답사의 궁극적 목표와 같다. 그 목표는 착하고 정의롭게 살기 위함이며, 그러면서도 가슴은 따뜻하게, 짧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만큼은 아닌 이 세상을 알뜰하게 살아가다 행복하고, 즐겁게 죽어가고 싶은 욕심이다. 결국 답사 여행이란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보약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0년 넘게 우리의 옛것을 찾아다닌 결과물을 조심스럽게 내놓게 되었다. 두렵기도 하고 가슴 설레기도 한다. 미천한 글을 선뜻 선택해 주신 서해문집 관계자 분들께 참 감사드리며, 이 책이 나올 수 있게 용기를 주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송찬섭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올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궁서'">사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용문사</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img alt="" width="600" height="4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15_%EC%9A%A9%EB%AC%B8%EC%82%AC%EB%8C%80%EC%9B%85%EC%A0%84.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등용의 꿈</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경남 남해에는 보물 같은 문화가 오랜 역사와 함께 맥을 이어 오고 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용문사를 꼽는다. 내 고향에 자리한 신라 대찰의 이름과 같기 때문이지만 학창시절 미술학도의 꿈을 안고 스케치를 하기 위해 찾던 단골 장소였기 때문에 &lsquo;용문사&rsquo;라는 이름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남해를 찾을 때마다 아련한 추억을 안고 오르는 용문사일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용문사<sup>龍門寺</sup>, 이무기가 등용의 꿈을 안고 드는 곳이다. 나 같은 장돌뱅이가 불심<sup>佛心</sup>의 세상에 들기 위해 마음을 비운 척하며 달려드는 곳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형으로 보자면 기세 좋은 산세 아래 용문사가 안착하고 있는 곳이 바로 호구산<sup>虎丘山</sup>이다. 용문사는 포근히 감싸고 있는 호구산 가운데 불심 가득히 똬리를 틀어 호랑이 뱃살 아래 용호상박의 장엄함을 연출하고 있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산 가운데 수줍은 여인처럼 낭창히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며, 건물 하나하나가 절묘한 산지가람으로 배치되어 있다. 모습은 그렇게 보일지라도 가히 천지<sup>天地</sup>의 기가 모여 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의 기지였으며, 조선 수군들의 주둔지였다니 호국의 기지로서도 그 역할을 다했음을 미루어 짐작한다. 오목하게 들어간 좁은 입구 탓에 천연의 요새가 되어 용과 호랑이의 기세가 그곳을 지탱했던 것은 아닐까? 용문사엔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치열하게 싸운 당시의 유품들이 남아 있다. 또한 용문사는 유난히 민간신앙과 많이 접목되어 전북 고창 선운사와 더불어 지장사찰로 유명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용문사에 이르는 길은 계곡을 따라 호젓하게 오를 수 있어 참 좋다. 그렇게 오르면 오른편 언덕에 부도밭이 나온다. 사실 나는 부도밭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해남 미황사 부도밭과 이곳 용문사 부도밭을 좋아한다. 이름 모를 고승들의 무덤을 왜 좋아할까? 여전히 의문이지만 굳이 따져 보자면 적막한 가운데서 선<sup>善</sup>을 생각하는 여유가 생겨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13_%EC%9A%A9%EB%AC%B8%EC%82%AC%EB%B6%80%EB%8F%84%EB%B0%AD.jpg" /><br /> <br /> 용문사 부도밭에 서면 자연과 역사가 주는 겸허함과 세월의 무거운 화두를 가볍게 덜어 내며 사색에 잠길 수 있어 참 좋다. 사실 꽉 찬 절집의 공간은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는 완전한 세상을 표현하고 있다. 후불탱화가 그렇고, 내부 공간 표현이 그렇고, 단청이 그렇듯 장엄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은 곳이 바로 부도밭이다. 동양화처럼 비어 있어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멀리 부도밭이 보일 때쯤 마음은 그리움에 설레고 내쉬는 공기는 달게 느껴진다. 늦은 오전 아무도 없는 공간을 홀로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나만의 유려한 자유를 꿈꿀 수 있다는 뜻이며, 어떠한 고독도 내 안에서 녹여 내고, 또 드러내 놓아도 거리낌 없는 해방감을 맛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고독한 대상을 만나면 나 또한 고독해지듯이 이끼 머금은 부도를 손끝 감촉으로 느끼다 보면, 한동안 적적했던 시간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사색에 잠긴다. 어떤 고승의 무덤일까? 어떤 삶을 살다가 훌쩍 떠나 버린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부도밭에 다다를 때면 수목 우거진 주위 공간에 내딛는 걸음걸음 설렘이 가득하다. 재잘거림도 없는 천년 고찰을 찾는 마음 때문일까? 애써 설렘을 털어 내자 유난히 작은 부도가 눈에 띈다. 연꽃 봉우리가 채 피기도 전에 연잎이 아래로 내려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데 파릇한 이끼가 군데군데 쌓여 있다. 갈라진 속 상처를 감추려는 자연과 부도의 노력이다. 어린 시절 보드라운 생살에 난 상처를 엄마에게 들킬까 두려워 감추기 급급하던 시절의 내 마음과 닮아 있다. 그러나 사실은 화강석이 이끼라는 균에 의해 병들어 가는 중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13_%EC%9A%A9%EB%AC%B8%EC%82%AC%EB%B6%80%EB%8F%84%EC%96%BC%EA%B5%B4%EC%A1%B0%EA%B0%81.jpg" /><br /> <br /> 팔각 원당형 부도 아랫돌엔 각각의 표정을 한 얼굴들이 있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나를 보며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이던 누님의 얼굴도 있다. 내가 유난히 용문사 부도밭을 찾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애써 털어 내고 부처님 세상으로 드는 일주문을 지나 다리를 건넌다. 사악한 마음을 내려놓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들어서라 하지만 사천왕상 앞에 서니 주눅이 드는 것은 여전히 마음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탓이다. 잡신을 밝고 있는 다른 사천왕상과는 달리 양반을 밟고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양반의 수탈과 핍박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는지, 아니면 탐관오리의 폭정에 굴하지 않는 민초들 삶의 분노를 대신 표현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양반 계층의 기존 사회적 통념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표정이 재밌고, 조성될 당시 장인의 해학이 더 재밌으니 그 마음을 빌어 합장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천왕상을 지나자 대웅전이 적당한 간격과 공간을 두고 두 팔을 활짝 벌려 반긴다. 하늘에서 막 착지한 듯 경쾌한 모습, 정면 세 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귀마루 끝선이 하늘을 향해 살짝 들려 가장 이상적인 경지에서 딱 멈춰 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따라 움직이면 파란 하늘로 향하게 되며, 더불어 내 마음은 청량한 기운으로 가득 찬다. 대웅전 앞마당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넓이를 두고 동&middot;서로 탐진당과 적묵당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훨씬 편하게 해 준다. 또 대웅전 공포에 조각된 용머리는 어느 절집보다 커서 힘이 실려 있으며, 옆에서 바라보면 섬세한 조각과 단청이 조화롭게 트림하고 있다. 공포에 새겨진 용두는 이런 장돌뱅이를 고통만이 가득 차 있는 차안<sup>此岸</sup>의 세상에서 행복이 충만한 서방정토, 즉 피안<sup>彼岸</sup>의 세상으로 이끌어 주는 지혜를 담아내고 있다. 고개 숙여 불심에 기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러니 용문사 대웅전이 바로 반야용선이다. 반야는 지혜를 일컫는 말이지만 우리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쓸어 주고 보듬어 준다. 지금이야 사라진 풍속이지만 우리가 죽어서 타고 가는 상여가 바로 반야용선이라고 생각하면 생의 겸허함을 또 한 번 느끼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웅전 속 부처님 품으로 가까이 든다. 하늘에는 꽃비가 내리고 극락조가 춤을 추고, 작은 세상의 소품들로 큰 세상을 표현하며 부처님의 세상은 이러이러하다며 조용히 전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 사색에 잠기고 참회하고 반성하는 공간에서 경의와 부러움에 찬 눈으로 올려다보니 시선이 마음을 급하게 잡아끈다. 지긋이 굽어보는 부처님의 눈매에 기대어 작은 소망 하나 내려놓고 슬며시 일어서 합장하고 뒷걸음질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 대웅전 불단에 참 보물이 하나 들어 있지만 나는 볼 수 없다. 바로 조선 인조 때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상례에 정통했던 촌은 유희경<span style="color: #ff6600"><sup>●</sup></span> 선생의 《촌은집》 책판이다.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흘러왔는지 알 수 없으나 최근에 남해군에서 해설을 덧붙여 번역본을 내놓았다. 남해의 아우님을 통해 한 권 귀하게 구할 수 있어 탐독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촌은 유희경 하면 빠트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 바로 부안의 기생 이매창이다. 매창<sup>梅窓</sup>은 호며, 계유년 태생이므로 계생<sup>癸生</sup>이라고 불렸다. 매창은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40대 중반의 유희경을 만나 사랑을 나눴다. 유희경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당시<sup>唐詩</sup>에 능통했던 박순<sup>朴淳</sup>으로부터 시<sup>詩</sup>를 배웠다. 매창과 유희경은 당대에 서로가 잘 알려진 인물이라 전부터 끌림이 있었다. 이후 해후를 하고 시<sup>詩</sup>로 화답을 나누었으니 마음이 통하고 몸도 통하는 것이 이치다. 2년이라는 꿈 같은 세월이 흐르고 회자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다. 유희경이 서울로 간 사이 임진왜란이 터진 것이다. 유희경은 비록 천민 출신이지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고 있던 터라 매창을 만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시를 지어 주고받는다. 이때 유희경이 매창을 향해 지은 시가 《촌은집》에 기록되어 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6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EA%B0%81%EC%A3%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얼마 전 부안 지역 답사에서 매창의 시비<sup>詩碑</sup>가 있는 상소산 서림공원을 찾아 그를 그리워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굳이 꼽자면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의 삼대 여류시인이다. 아마 매창이 기생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로는 어머니가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사연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의 생은 태생적 한계에서부터 가냘프고 한스럽고 애절하고 서글프다. 그의 시는 힘없이 가느다란 울림이자, 자신의 처지에 지친 한계를 담고 있으며, 가슴에 맺힌 그리움의 대명사처럼 절망에 지친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말은 못 하였어도 너무나 그리워 <br /> 하룻밤 어둠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br /> 소첩의 마음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br /> 이 헐거워진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유희경이 서울로 올라간 후 왜란이 발발해 의병 활동을 하고 있을 때 매창이 지은 시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워 밤을 하얗게 보내다 생긴 흰 머리칼, 메마른 손가락에 사랑의 정표 가락지가 헐렁해진 만큼이나 힘겹게 보냈을 매창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았다. 원망과 애정 어린 투정, 이토록 절절한데 뭐하시느라 여적인가, 빨리 돌아와 그리워 지친 마음과 몸을 보듬어 주길 간절히 원하는 여인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봄날이 추워 겨울옷을 꿰매고<br /> 사창에는 햇살이 비치는구나 <br />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기니 <br /> 옥루가 바늘과 실을 적시는구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매창의 시 &lt;자한<sup>自恨</sup>&gt;이다. 그리워 흐르는 눈물로 바느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서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전란이 끝난 후에도 유희경은 매창을 찾지 않았다. 1607년 매창을 15년 동안 독수공방시킨 후 다시 부안을 찾은 유희경은 이미 환갑이 되어 버렸다. 매창의 나이 서른다섯, 기생의 신분에도 수절한 매창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지만 독수공방시킨 유희경의 심사는 또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유희경은 얼마를 머물다 매창의 곁을 떠나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3년 후 서른여덟의 나이로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촌은집》에 실린 매창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지은 유희경의 시를 읊으며 마무리하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trong>임정자의 옥진<span style="color: #ff6600"><sup>●</sup></span>을 애도한 시에 차운함</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맑은 눈동자에 하얀 이빨 푸른 눈썹을 가진 아가씨가<br /> 홀연히 뜬구름을 좆아 아득히 사라졌네.<br /> 비록 고운 넋은 폐읍으로 돌아갔지만<br /> 누가 옥골을 고향에다 묻어 줄까?<br /> 타지에서 죽어 새로 조문하는 이도 없고<br /> 다만 경대에는 지난날 향기만 남았네.<br /> 정미년 연간에 다행히 서로 만났었지만<br /> 슬픔의 눈물 견딜 수 없어 옷깃을 흠뻑 적시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B%82%98%ED%95%9C%EC%A0%84%20%EB%AC%B8%EC%82%B4%EC%97%90%20%EB%84%8B%EC%9D%84%20%EB%86%93%EB%8B%A4/%EA%B0%81%EC%A3%BC2.jpg" /><br /> <br /> 대웅전 뒤뜰의 녹녹한 습기가 한가함을 더하고 십우도를 감상하는 발걸음이 여유롭다. 양반들이 즐겨 했다는 사군자 그림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천왕문 사천왕에 밟혀 있는 양반상과 대비시키며 미소 짓고, 순수한 이기적 동기에서 세속적인 욕망만을 추구해 왔던 저급한 인간으로서 지장보살께 사죄드렸다. 혹여 지옥의 문턱에서 만나면 할 말은 있어야 하니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후 맑은 바람이 가슴을 스치고 나는 심하게 한가해진다. 보배로운 땅의 행복한 하루해가 그렇게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 울던 아이도, 심하게 불던 바람도 잠에 든다는데 바로 오늘을 마감해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문득 벗과 함께 하는 한잔 술이 그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1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박필우</strong><br /> 뒤늦게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깨닫고 몸소 답사를 즐기며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유배지에서 유배객을 만나다』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10 오후 4:22:00이병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20%EC%84%B8%EC%83%8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A%B2%83%EC%9D%B4%EB%8B%A4/%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며</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다시, 도스또예프스끼</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도스또예프스끼, 그는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이자 인간의 정신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파헤친 잔인한 천재지만 우리 집 구석의 책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켜켜이 먼지 쌓인 낡은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이 우리 곁에서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작품이 너무 방대하고 어려워서, 주인공들의 사변이 치명적으로 길고 지루해서, 문장이 극단적으로 상징적이고 복잡해서&hellip;&hellip; 웬만한 독서광들도 그의 작품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책장 구석에 무의미한 장식물로 방치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어떻게 하면 구석에 처박혀 있는 그 이름을 환생시킬 수 있을까. 이 작업을 시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독자들을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 작품, 예술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책을 읽으면서 책장 안에 유폐한 낯선 이름을 다시 불러보시라. 도스또예프스끼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은 채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본래적 영혼을 깨우는 일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자. 온몸으로 그의 육체와 정신을 느껴보자. 딱딱한 껍데기 안에 갇혀 있는 영혼의 부드러운 속살과 거기서 풍기는 비릿한 살 내음, 따뜻함, 아직 살아 있음을 알리는 양심의 두근거림, 비정한 세상을 쳐다보는 눈망울의 떨림 그리고 눈물, &lsquo;나&rsquo;를 통째로 뒤흔드는 고요한 반전과 전복을 경험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 살았다. 내가 아니라 도스또예프스끼가 서울 뒷골목 술집에서 보드까에 취해 술주정을 했고, 아주대 연구실에서 밤새 책과 씨름을 했다. 혹한의 겨울날 도스또예프스끼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날 때 나도 그 마차 안에 있었다. 그가 모스끄바에서 뿌쉬낀에 관한 연설을 하던 날, 나는 청중 사이에 앉아 손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박수 치며 환호했다. &ldquo;브라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우라!&rdquo;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나는 그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위대한 작가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 책을 쓰면서 나는 100여 년 전에 기록된 언어에 우리 시대의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다. 동시대인들이 묘사한 현장에 직접 가보고, 역사적 기록들을 확인하면서 거기에 현대적인 감각과 의식을 부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이런 작업이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러시아의 저명한 문예학자 D. 리하초프의 말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작품의 역사적 현장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느 글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ldquo;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들은 진실의 감각을 미리 계산해놓고 있다. 만일 독자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을 알지 못하면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많지만 거기서 다루지 않은 자료를 처음 우리말로 소개한 점도 이 책의 새로움이다. 특히 도스또예프스끼의 실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한 자료들을 많이 다루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단 생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뻬쩨르부르그에서의 생활, 스따라야 루사와 도스또예프스끼 등에 관한 자료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을 쓰면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리 마음속에 부활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떠난 지 130년이 된 러시아 작가의 영혼의 편력 속에서 우리가 부둥켜안고 가야 할 &lsquo;최후의 말&rsquo;은 어떤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리에게 던진 절박한 질문은 무엇일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이런 질문에 골똘히 빠져 있을 때, 뻬쩨르부르그 뒷골목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한 건물 기둥의 낙서가 떠올랐다. &lsquo;뜨이 랍!&rsquo; 러시아어로 &lsquo;너는 노예다!&rsquo;라는 말이다. 내가 노예라니, 우리 모두가 노예라니! 그럼 대체 누가 주인이란 말인가. 이 낙서는 치기 어린 젊은이가 남긴 공허한 관념일 수도 있고, 도시의 부랑자가 자신의 불만을 표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말이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의 메시지를 되새기는 지금, 이 말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불현듯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인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았던가. 그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욕과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 마르멜라도프는 어떤가. 그는 자신의 무능과 불행을 견디지 못하고 딸을 창녀로 전락시키고 술의 노예가 된 사람이다. 『백치』의 예빤친 장군은 부귀영화를 위해 권력에 목을 매달았다. 그러고 보니 도스또예프스끼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노예들이었다. 자기 삶의 주인이었던 인물들은 기껏해야 『죄와 벌』의 소냐, 『백치』의 미쉬낀 공작,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알료샤 정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스꼴리니꼬프는 『죄와 벌』의 에필로그에서 &ldquo;아! 이제 모든 것이 변해야 되지 않을까?&rdquo;라고 독백한다. 이 말은 그가 길고도 험한 노예의 삶을 마감하고 새로운 삶의 주인으로 태어나 내뱉은 첫번째 &lsquo;말&rsquo;이다. 그리고 이 독백은 그의 마지막 &lsquo;말&rsquo;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는 이것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최후의 말이라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스끄바, 뻬쩨르부르그, 옴스끄, 스따라야 루사&hellip;&hellip;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 나선 여정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물질과 기계문명의 장막에 둘러싸인 나는 온종일 욕망의 과잉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우리는 고골의 표현대로 일상을 사는 &lsquo;죽은 혼들&rsquo;이 아닐까. 무기력하다. 아나키.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해 조용히 외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나는 노예다!&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빠, 왜 저 사람들은 <br /> </span><span style="color: #008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불쌍한 말을 죽인 거예요!</span></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모스끄바 유년 시절(1821~1837)</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모스끄바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다. 지하철 도스또예프스끼 역에서 내려 역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이곳에 도스또예프스끼 생가가 있다. 현재 도스또예프스끼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은 19세기 당시, 제법 규모가 큰 병원의 부속 건물이었다. 모스끄바 마린스끼 빈민구제 병원이다. 생가 옆에는 병원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데, 현재 이곳은 모스끄바 의학아카데미 산하 결핵 과학실험연구소 외과병동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병원에 딸린 부속 건물에서 태어난 것일까. 그의 아버지가 이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였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생가는 전차가 다니는 한적한 길에 있다. 건물은 낡고 볼품없다. 러시아가 낳은 위대한 작가의 생가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창틀은 낡아 여기저기 부서지고 페인트칠한 벽들도 벗겨져 흉물스러웠다. 유학 시절 와보고 10여 년 만에 다시 찾았건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이곳을 보고 무슨 창고 건물로 착각했을 정도이다. 문화유적을 잘 보존하기로 유명한 러시아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방인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확인할 것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에 있는 박물관은 월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는 화요일도 개방하지 않았고, 다른 평일에도 방문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나도 몇 번 헛걸음을 했다. 생가 입구에는 다음과 같이 개방 시간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현판이 걸려 있다.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매달 마지막 날은 휴관, 수요일, 금요일은 오후 2시에서 7시까지, 목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오전 11시에서 오후 6시까지 개관.<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20%EC%84%B8%EC%83%8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A%B2%83%EC%9D%B4%EB%8B%A4/16_%EB%8F%99%EC%83%8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생가 앞 병원 정원에는 커다란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있다. 조각가 S. 메르꿀로프의 1918년작이다. 동상은 처음에 모스끄바 중심가에 위치한 쯔베뜨노이 불바르(가로수길)에 서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은 이곳으로 옮겨와 있다. 동상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선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전신을 형상화했다. 모더니즘의 의상을 입은 잔인한 천재의 모습이다. 상체의 일부를 드러낸 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린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 세계의 비극을 고통스럽게 응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스끄바에는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두 개 있는데, 다른 하나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있다. 이 동상은 현대 조각가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러시아에는 도스또예프스끼 동상이 여럿 있다. 그가 작품 활동을 했던 뻬쩨르부르그, 감옥살이를 했던 시베리아 도시 옴스끄, 말년에 가족과 자주 머물렀던 스따라야 루사에도 동상이 세워져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는 1821년 봄부터 모스끄바 마린스끼 병원에서 근무했다. 병원은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의 후원으로 1806년에 개원했다. 그녀는 황제 빠벨 1세의 아내로 남편이 죽고 홀로된 처지였다. 빠벨 1세는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미하일로프스끼 성에서 살해되었는데, 이곳은 후일 도스또예프스끼가 다니던 공병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병원은 사생아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는 모스끄바 보육원에 속한 시설이었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가 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해 10월 30일,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났다. 표도르는 둘째로 태어났는데, 위로 한 살 터울인 형 미하일이 있고, 아래로 여러 동생들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부유하지 않았다. 부모는 조상이 귀족 가문이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중산층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의사 집안의 경제적 수준 또한 여유 있는 편이 아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는 모스끄바 남쪽에 위치한 뚤라 시 근처에 작은 영지를 구입했지만,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도 신통치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의 부모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어머니는 종교적 심성이 남달랐다. 매주 일요일과 축일이면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의무적으로 병원에 딸린 교회에 갔으며, 저녁기도에 참석했다.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온순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엄한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자란 도스또예프스끼 형제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피난처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평생 어머니를 천사처럼 기억했던 것도 이런 환경과 무관치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비해 아버지는 성격이 매우 급하고 거칠었다. 그는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자식들은 아버지 앞에서 기를 펴지 못했고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동생 안드레이(1825~1897)의 회상에 따르면 &ldquo;아버지는 매우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엄격하고 참을성이 없었으며 게다가 대단히 성을 잘 냈다&rdquo;. 하지만 그는 자식들에게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 미하일과 표도르에게 직접 라틴어를 가르쳤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도 각별하여 당시 모스끄바에 있는 공립중학교를 마다하고 보다 교육 여건이 좋은 사립학교에 두 형제를 입학시켰다. 표도르가 L. 체르마끄 기숙학교에 입학한 것은 1834년이다. 그는 약 3년간 이 학교를 다녔다. 기숙학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집에서 남동쪽으로 4.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바야 바스만나야 거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현재 체르마끄 기숙학교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 이 학교는 경영난으로 1840년대 말에 문을 닫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르마끄 기숙학교는 훌륭한 교육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학교 선생들도 수준급이었다. 특히 교장이자 소유자였던 체르마끄는 학생들을 끔찍이 보살폈다. 기숙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표도르는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다. 시인이자 역사가인 N. 까람진의 『러시아 제국사』는 그가 반복해서 읽었던 책들 중 하나이다. 동생 안드레이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표도르는 러시아 천재 시인 A. 뿌쉬낀에 푹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형과 함께 부모님 앞에서 뿌쉬낀의 시를 자주 암송했다. 동생은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뿌쉬낀의 시 한 편을 회상하고 있다. 뿌쉬낀이 1822년에 쓴 「현명한 올레그에 대한 노래」라는 시다. 이 작품은 고대 러시아의 지도자 올레그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길이가 긴 시지만 그중 마지막 부분을 짧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올레그는 자신의 준마<sup>駿馬</sup>가 죽은 장소에서 죽음을 예감하며 다음과 같이 속삭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독한 친구여, 고이 잠들라<br /> 너의 옛 주인은 홀로 남았다<br /> 그러니 다가올 내 장례식 날에<br /> 도끼에 찍혀 억새풀을 붉게 물들이지도<br /> 더운 피로 내 시체를 적시지도 못하겠구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 바로 여기에 내 죽음이 숨어 있었구나!<br /> 아, 바로 이 뼈가 내 목숨을 위협하는구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표도르는 러시아 작가 중에서 뿌쉬낀과 N. 고골을 존경했지만 이 시기에 고골을 열심히 읽었다는 기록은 없다. 모스끄바 시절 표도르는 낭만적 기질이 강했다. 그는 아직 러시아 현실에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표도르가 러시아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참혹한 러시아의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일까. 고골에 대한 기억은 뻬쩨르부르그 시절에야 등장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표도르는 사교적이지 못했다. 아버지가 엄격한 탓도 있었지만 자신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 탓이기도 했다. 잘 지내다가도 주위의 농담에 불같이 화를 내곤 했다. 자기 확신이 매우 강했으며 말투가 비교적 과격한 편이었다. 이런 성격은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소심하고 내성적이던 어린 소년의 마음에는 인간의 비극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천재적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생가의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겁게 가라앉은 실내 분위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칙칙한 조명과 실내장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어두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도스또예프스끼의 출생을 알리는 기록이었다. 19세기 당시의 것이 그대로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로 말하면 호적부의 원본인 셈이다. 이 기록은 태어난 아이의 세례를 집전한 마린스끼 병원 부속 베드로 바울 교회의 호적부다. 이 호적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빈민병원 부속 베드로 바울 교회, 1821년 10월 30일, 빈민병원 관사에서 아기 탄생, 군의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들 표도르임. 신부 바실리 이린이 기도를 올리고 부제<sup>副祭</sup>게라심 이바노프가 입회했다. 11월 4일 세례를 베풀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4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20%EC%84%B8%EC%83%8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A%B2%83%EC%9D%B4%EB%8B%A4/24_%EA%B1%B0%EC%8B%A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0월 30일은 러시아 구력이다. 러시아는 17세기 후반 뾰뜨르 1세가 율리우스력 사용을 결정한 이후 1918년 1월까지 구력을 사용했다. 이것이 신력, 즉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것은 1918년 2월부터였다. 1918년 2월 1일은 신력에 따라 2월 14일로 고시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태어난 10월 30일도 신력에 따르면 11월 11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은 동생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가 남긴 회상기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많은 도스또예프스끼 연구자들이 작가의 유년 시절을 언급하면서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표도르도 말년에 자신의 유년 시절을 돌아보는 단편적인 글을 남겼지만 동생의 회상기처럼 상세하지는 않다. 안드레이는 표도르보다 네 살 아래로 유년 시절을 형과 함께 보냈다. 그는 후일 뻬뜨라셰프스끼 서클 회원들이 체포될 때 경찰의 실수로 연행되어 뻬뜨로빠블로프스끼 요새 감옥에 13일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안드레이는 회상기를 1875년에 쓰기 시작해서 1896년에 마쳤다. 이 회상기가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0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는 회상기에서 자신의 가족이 살았던 집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기록을 현재 보존되어 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생가와 비교하면서 살펴보니 훨씬 더 생생하게 그 모습이 그려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와 동생들이 태어난 시기에 아버지가 살고 있던 집은 (&hellip;&hellip;) 모스끄바 마린스끼 병원의 오른쪽에 있는 독립가옥으로 3층짜리 석조 건물 중 1층이었다. 요즘 관사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방에 비해 옛날의 관사 방은 훨씬 검소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미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당시 네댓 명의 자식이 있었던 아버지는 영관<sup>領官</sup>급이면서도 현관방과 부엌을 빼고 방이 두 개밖에 없는 집에 살고 있었다. 추위를 막을 수 없는 현관 입구에는 여느 집처럼 (깨끗한 정원으로 난) 창이 하나뿐인 현관방이 있었다. 그 안쪽에는 천장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널빤지 칸막이가 쳐진 어둠침침한 아이들 방이 있었다. 다시 그 안쪽에는 거실이 있었는데, 두 개의 창문이 길 쪽으로 나 있고 세 개의 창문은 깨끗한 정원을 향해 나 있는 꽤 넓은 방이었다. 그다음은 길 쪽으로 난 창이 달린 응접실인데, 부모님의 밝은 침실은 널빤지 칸막이로 그 응접실과 구분되어 있었다. 이것이 집의 전부이다! 뒷날 가족이 늘었을 때, 그때는 이미 30년대였는데, 이 집에 뒤쪽 정원으로 난 창문이 세 개 달린 방을 하나 더 들였다. 그래서 전에 없던 어두컴컴한 출구가 또하나 생겼다. 부엌은 꽤 큰 편으로 추운 현관과 통해 있었다. 부엌에는 커다란 러시아 벽난로가 있고 그 옆으로 천장에서 가까운 곳에 잠자리가 있었다. 아궁이 같은 것도 없었다! 그때는 화로 없이도 맛있고 근사한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 추운 현관에는 2층으로 이어진 계단 밑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살던 집의 구석구석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집의 모양은 극히 검소했다. 아이들 방이 딸린 현관방은 짙은 진주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거실은 밝은 카나리아빛이고, 응접실은 거기에 딸린 침실과 함께 짙은 코발트색이었다. 그 당시 벽지는 사용하지 않았다. (&hellip;&hellip;) 가구도 매우 간단했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도 카드놀이를 하지 않았지만 거실에는 (창문 사이에) 카드놀이용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hellip;&hellip;) 그리고 거실 가운데 식탁과 밝은색으로 니스칠한 자작나무 의자가 대여섯 개 있었다. 여기에 녹색 염소가죽으로 만든 부드러운 쿠션을 놓았다. (&hellip;&hellip;) 응접실에는 소파, 몇 개의 안락의자, 어머니가 쓰시던 화장대, 부인용 옷장, 책장이 있었다. 침실에는 부모님의 침대, 세면대, 어머니의 옷을 넣어둔 두 개의 커다란 트렁크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hellip;&hellip;) 창을 가리는 두꺼운 커튼이나 문가의 휘장은 당연히 없었다. 창에 는 아무 장식도 없는 흰색 옥양목 커튼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크지 않은 집에서 식구들이 각자의 방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도스또예프스끼 생가를 둘러보니 안드레이가 묘사해놓은 그대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 낡은 생가를 이 기록에 나와 있는 대로 복원한 것이 분명하다. 거실은 생가에서 가장 큰 방인데, 길 쪽으로 두 개의 창문이, 병원 정원 쪽으로 세 개의 창문이 나 있다. 창문에는 어여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햇빛은 비교적 잘 들어오는 편이어서 실내는 화사했다. 군데군데 테이블과 긴 소파가 놓여 있고, 소파 앞에는 카드놀이를 했다는 흔적을 남겨놓기도 했다. 병원 정원 쪽으로 나 있는 창문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은 쇠창살이 쳐 있는데, 그 너머로 아름드리 떡갈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왼쪽으로 병원 올라가는 길이 보였다. 병원 현관은 2층으로, 정면에는 계단이 있고 계단 양쪽으로 경사로가 나 있다. 이 정원 모습이 옛날 그대로라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형과 함께 이곳에서 산책을 하며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4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20%EC%84%B8%EC%83%8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A%B2%83%EC%9D%B4%EB%8B%A4/25_%EC%9D%91%EC%A0%91%EC%8B%A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방을 지나면 응접실로 사용한 진한 코발트색 방이 나온다. 코발트색이 너무 진해 약간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어두운 색으로 응접실을 칠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무튼 거실과 비교하면 작은 방인 이곳에는 작은 탁자 주위에 긴 소파와 의자들이 있었다. 바로 옆은 칸막이로 막은 침실이다. 이 탁자에서 도스또예프스끼 형제가 책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탁자 옆으로 책을 꽂아놓은 책장이 있다. 100여 년이 지난 책들인가. 모두가 낡고 두꺼운 커버를 씌운 것들이다.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즐겨 읽던 까람진, 뿌쉬낀 등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전부였다. 정말 단출하고 소박한 살림이 아닌가. 러시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문학박물관, 작가의 생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단순한 곳은 처음이다. 이곳에 직접 와보니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살림이 넉넉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침실의 성화<sup>聖畵</sup>를 제외하고는 하다못해 그 흔한 장식용 그림 한 점 없었다. 침대도 볼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니 짙은 코발트색 응접실이 가정 형편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귀족들이라면 절대 그런 누추한 색으로 응접실을 치장하지 않았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세기 유명한 러시아 작가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다. 뿌쉬낀, 레르몬또프,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등이 그렇다. 큰 귀족 집안 출신이 아니더라도 많은 작가들은 성공해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가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해야만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부유한 생활을 누려보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 하나는 가난이다. 그의 첫 작품 제목이 &lsquo;가난한 사람들&rsquo; 아니던가. 가난이라는 테마는 이후에도 줄곧 작품의 중심이 되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생가에 직접 와서 느낀 것이지만 이는 그의 출생,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이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려서부터 물질적 부라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였다. 웅장한 저택과 잘 다듬어진 정원, 화려한 응접실과 편안한 침실, 실크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한 부인들, 주인을 따르는 여러 명의 시종들, 황금색으로 칠한 사륜마차, 여름밤을 유혹하는 낭만적인 야회, 입맛을 다시게 하는 진기한 요리들, 향수, 고급 포도주와 보드까. 이런 디테일을 도스또예프스끼 작품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점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똘스또이와 자주 비교된다. 똘스또이가 러시아 최고의 귀족 집안 출신인 반면 그는 평범한 잡계급, 지금으로 말하면 쁘띠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다. 똘스또이 소설을 읽어보면 귀족 생활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귀족 생활을 그린 그의 섬세한 필치는 매우 자연스럽고 전형적이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렇지 않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귀족 생활을 묘사하는 장면도 흔치 않지만, 그것도 자세히 읽어보면 부자연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끼 소설에 나오는 귀족들은 몰락했거나 갑자기 출세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편소설『백치』의 예빤친 장군이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인물이다. 소설 앞부분에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예빤친 장군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장군이 사는 거대한 저택을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묘사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예빤친 장군은 리쩨이나야 거리에서 스빠스 쁘레오브라제니야 사원 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자기 소유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집의 6분의 5는 남에게 세를 놓고 있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큰 집 말고도 예빤친 장군은 사도바야 거리에 큰 집을 또 한 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역시 많은 수입을 거두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생가 안에는 두 개의 전시홀이 별도로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를 기념하는 유물들을 전시하거나 작은 규모의 행사를 치르기 위한 장소이다. 작은 홀 전면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다. M. 빠노프(1836~1894)가 1880년 6월 9일 자신의 작업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도스또예프스끼는 뿌쉬낀 동상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모스끄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빠노프는 모스끄바에서 활동한 유명한 사진가였다. 특히 인물 사진을 잘 찍었는데,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I. 끄람스꼬이는 1881년 『예술잡지』3월호에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빠노프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400" height="645"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1_%EC%95%84%EB%A6%84%EB%8B%A4%EC%9B%80%EC%9D%B4%20%EC%84%B8%EC%83%8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A%B2%83%EC%9D%B4%EB%8B%A4/30_%EB%8F%84%EC%8A%A4%EB%98%90%EC%98%88%ED%94%84%EC%8A%A4%EB%81%BC(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개인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 사진 중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든다. 사진 속의 도스또예프스끼가 이상하게 내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초상화나 인물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눈이다. 화가나 사진작가가 제일 표현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인물의 눈에 담긴 심리 상태이다. 사람이나 기계 앞에 선 모델은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어색함으로 어쩔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빠노프가 포착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시선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고 자연스럽다. 마치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는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사진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죽기 반년 전에 찍은 것이다. 마지막 대작『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채 완성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바로 전날 수많은 청중 앞에서 뿌쉬낀에 대해 연설했다. 작가의 말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열광적인 환호를 받자 그도 극도로 흥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진기 앞에 섰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의 흥분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사진기 앞에 앉아 있다. 위대한 작가이자, 간질 환자, 순교자, 죽음에 직면한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 내 앞에 도스또예프스끼가 있다. 그의 눈이 살아 움직인다. 이쪽에서 보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저쪽에서 보면 냉정한 시선이 서슬 퍼렇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눈은 맑고 깊다. 이 세상의 고통, 치욕, 불행, 절망, 파멸을 모두 목격한 눈이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안내를 하던 박물관 관리인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내 눈물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겠는가. 세상 어떤 인간이 그 앞에서 떳떳할 수 있단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스또예프스끼 박물관에서 놓치지 말고 꼭 봐야 할 것이 또하나 있다. 그의 친필 서명과 평소 사용하던 펜촉이다. 친필 서명은 복사본으로 1881년 도스또예프스끼의 장례식 행렬에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기념으로 나누어준 것이다. 친필 서명 위에 뾰족한 펜촉이 달린 나무펜대가 놓여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필적은 매우 독특하다. 아주 명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사롭지 않은 힘이 느껴진다. 서명을 마무리하는 장식체가 현란하다. 펜촉은 공중에서 한 바퀴, 다시 내려오면서 급하게 꺾인다. 병적으로 예민했던 작가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동생 안드레이는 회상기에서 가족의 일상사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마치 하루 일과를 시간에 따라 적어놓은 것 같은 이 기록은 당시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 집에서는 하루하루가 정해진 질서에 따라 똑같이 지나갔다. 아침에는 일찌감치 6시에 일어났다. 아버지는 7시에 벌써 병원에 출근했다. 집에서는 &lsquo;병원&rsquo;을 &lsquo;병실&rsquo;이라고 불렀다. 이 시간에 방을 청소하고 겨울이면 벽난로를 피웠다. 9시가 되면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와 곧 시내에 있는 단골 환자들한테 왕진을 갔다. 우리는 이것을 &lsquo;개업의사 일&rsquo;이라고 불렀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동안 우리 아이들은 공부를 했다. 그리고 후일 두 형은 기숙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는 늘 12시경에 귀가했는데 우리는 오후 1시에 점심식사를 했다. (&hellip;&hellip;) 오후 4시에 차를 마셨고, 그것이 끝나면 아버지는 다시 한번 병원으로 회진을 하러 갔다. 저녁에는 돼지기름을 쓰는 두 개의 초가 켜진 응접실에서 지냈다. 내 기억에는 당시 스테아린으로 만든 초가 없었다. 양초는 오직 손님이 왔을 때나 가족 경축일에만 켰다. 우리 집에는 램프도 없었다. (&hellip;&hellip;) 정확히 밤 8시가 되면 으레 저녁밥이 마련된다. 식사가 끝나면 우리 아이들은 성상 앞에 서서 기도를 드린 다음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잠을 자러 갔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은 모스끄바에 거주하는 여느 중산층 가족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생활했다. 형제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면 모스끄바 근교에 위치한 아버지 소유의 영지에서 여름 한철을 나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미하일과 표도르 형제는 자연을 벗하며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표도르는 이곳, 다로보예 영지의 아름다운 브리꼬보 숲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후일 작가가 되어 소설『악령』속에서 어릴 적 경험과 기억을 생생하게 재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년 시절 표도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1837년 2월 27일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미 1836년 가을부터 병석에 누워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버지는 백방으로 아내를 구해보려 했지만 의사인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도스또예프스끼 가족의 해체를 가져왔다. 아버지는 다 큰 두 아들을 뻬쩨르부르그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고 다른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시골 영지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해는 미하일과 표도르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 뿌쉬낀이 죽은 해이기도 하다. 뿌쉬낀은 같은 해 1월 29일, 결투에서 입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뻬쩨르부르그에서 사망했다. 뿌쉬낀이 죽었다는 소식을 도스또예프스끼 형제가 접한 것은 어머니의 장례가 끝난 후였다. 시인이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다. 동생의 회상에 따르면 미하일과 표도르는 뿌쉬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다고 한다. 그들은 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M. 레르몬또프의 시를 어디선가 입수해서 낭송하기도 했다. 동생은 이 장면을 생생하게 진술했는데, 그가 기억하는 시 구절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인은 가고 운명은 다했다!<br /> 우리나라의 파르나스는 텅 비었다.<br /> 뿌쉬낀 죽다. 뿌쉬낀 돌아가다.<br /> 영원히 우리를 버렸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북쪽 나라여, 북쪽 나라여, 너의 천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br /> 네 기적의 가수는 지금 어디에?<br /> 우리의 기쁨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br /> 우리의 뿌쉬낀은 지금 어디에? 그는 없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 그렇다. 왕성한 마음을 지닌<br /> 시인은 지상의 삶에 등을 돌렸다!<br /> 시인은 구름 위로 올라갔다<br /> 전에 살던 세계로 가버렸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형 미하일과 표도르는 1837년 4월 아버지를 따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때 모스끄바를 떠나 평생을 모스끄바 밖에서 살았다. 그가 다시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일 때문이었고,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모스끄바를 잊지 않고 그리워했다. 슬라브주의자들은 모스끄바를 정신적 고향으로 여겼다. 도스또예프스끼도 슬라브주의자로서 모스끄바를 러시아 정신의 부활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반평생을 살았던 뻬쩨르부르그는 서구주의자의 본거지였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세운 인공 도시, 뻬쩨르부르그에서 살면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도시를 기괴하게 표현했다. 그에게 서구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문명은 러시아 정신을 파괴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지나지 않았다. 작가의 말년 대작들이 대부분 모스끄바에서 발행된 잡지에 발표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버지와 두 아들은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도중 뜨베리 현의 한 역참에 잠시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표도르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건장한 체격의 전령 한 사람이 커다란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마부는 주먹을 맞으면서 반사적으로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이런 광경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표도르는 &ldquo;이 혐오스러운 광경은 일생 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령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 속에 존재하는 저열하고 잔인한 성격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rdquo;고 술회했다. 이 장면은 나중에 『죄와 벌』에서 문학적으로 재현되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세 차례 꿈을 꾸는데, 그 첫번째 꿈의 내용이 그것이다. 꿈속에서 미꼴까는 죽어가는 말을 잔혹하게 채찍질한다. 그 장면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라스꼴리니꼬프는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일곱 살이었던 그는 어느 축제일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다. 흐리고 답답한 날이었고, 장소는 완전히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대로였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을은 꿈에서 본 것보다 훨씬 평평했다. 작은 마을은 손바닥을 펴놓은 듯 사방으로 트여 있었고, 주위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 없었다. 멀리 지평선 가까이 숲이 거뭇하게 보일 뿐이었다. 마을 경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큰 선술집이 있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산책하며 지나갈 때마다 아주 불쾌한 인상과 심지어 공포감마저 느끼곤 했다.<br /> (&hellip;&hellip;)<br /> 선술집에서 (&hellip;&hellip;) 술 취한 덩치 큰 농부들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br /> &ldquo;타, 전부들, 타!&rdquo;<br /> 아직 젊고 뚱뚱하며 목에 살집이 많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은 한 농부가 소리쳤다.<br /> &ldquo;다들 데려다주지, 타!&rdquo;<br /> 하지만 바로 웃음소리와 야유가 흘러나왔다.<br /> &ldquo;이런 쓸모없는 말이 데려다준다고!&rdquo;<br /> &ldquo;이봐, 미꼴까, 제정신이야? 이런 암말을 짐수레에 매다니!&rdquo;<br /> &ldquo;이보게들! 이 적갈색 말은 앞으로 20년은 버틸 거야.&rdquo;<br /> &ldquo;타, 모두들 데려다줄 테니!&rdquo;<br /> 미꼴까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제일 먼저 수레에 뛰어올라, 고삐를 쥐고 마부석에 섰다.<br /> (&hellip;&hellip;)<br /> 여윈 말은 온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당겼지만 겨우 한 걸음 한 걸음 종종걸음만 떼면서, 세 사람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채찍 때문에 신음 소리를 내고 몸을 웅크렸다. 수레에 탄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지만, 미꼴까는 불같이 화를 내며 암말에게 더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 그러면 꼭 그 말이 내달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br /> (&hellip;&hellip;)<br /> &ldquo;이런 죽일 놈 같으니!&rdquo;<br /> 미꼴까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는 채찍을 버리고 몸을 숙여 수레 바닥에서 길고 두툼한 수레 채를 꺼내 양손으로 그 끝을 잡고서 힘껏 적갈색 말 위로 쳐들었다. (&hellip;&hellip;) 미꼴까는 온 힘을 다해 수레 채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hellip;&hellip;) 미꼴까는 다시 한번 수레 채로 불쌍하고 여윈 말의 등짝을 갈겨댔다. 말은 엉덩이를 감추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수레를 끌어보려고 이리저리 뛰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사방에 서 여섯 사람이 채찍질을 했고, 수레 채는 사정없이 두 번, 세 번 또다시 정확하게 네 번 말 등 위에 떨어졌다. 미꼴까는 말을 한 번에 죽이지 못한 것이 분해 광기에 사로잡혔다.<br /> (&hellip;&hellip;)<br /> 미꼴까는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수레 채를 버리고 다시 몸을 굽혀 쇠 지렛대를 꺼냈다.<br /> &ldquo;모두 조심해!&rdquo;라고 그는 소리치고, 있는 힘껏 불쌍한 말을 쇠 지렛대로 내리쳤다. 타격이 가해지자 암말은 비틀거리면서 주저앉았다가, 다시 마차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쇠 지렛대가 또다시 말 등을 내리치는 바람에 마치 네 다리가 꺾인 듯이 땅에 고꾸라졌다.<br /> &ldquo;뒈져라!&rdquo;<br /> 미꼴까는 이렇게 외치면서 미친 듯 수레 위에서 날뛰었다. 취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몇 명의 청년들도 닥치는 대로 채찍이고, 몽둥이고, 수레 채 따위를 집어 들고는 숨이 넘어가는 암말에게 달려들었다. 미꼴까는 옆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쇠 지렛대로 말 등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여윈 말은 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숨을 괴롭게 몰아쉬다가 죽고 말았다.<br /> (&hellip;&hellip;)<br /> &ldquo;아빠, 왜 저 사람들은&hellip;&hellip; 불쌍한 말을&hellip;&hellip; 죽인 거예요!&rdquo;<br /> 소년은 흐느끼면서 숨이 막혔고 찢어질 듯한 가슴에서 이렇게 외마디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br /> &ldquo;술 취한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하는 거야.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어서 가자!&rdquo;<br /> 아버지는 말했다. 그는 아버지 손을 붙잡았지만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숨을 돌리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잠에서 깨어났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건장한 체격의 전령이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던 광경을 목격한 기억이 미꼴까와 야윈 말이 등장하는 꿈속 이야기로 바뀌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보듯이 도스또예프스끼가 본 광경은 정말 끔찍했다. 그는 이 장면을 잊지 않고 20여 년이 지난 후 작품 속에 그 참혹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꿈은 라스꼴리니꼬프가 도끼로 노파를 무참히 살해하는 사건을 암시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이미 자신의 행위가 불러올 비극적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꿈은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암시하는 최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폭력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주제 중 하나이다. 사디즘을 성적 쾌락에만 한정하지 않고,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으로 이해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사디즘이라고 이해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죄와 벌』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살인, 폭력, 고문, 경멸, 학대(아동학대), 전쟁 등 약자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주 다루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본문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 <br /> 이병훈</strong><br /> 노어노문학을 전공하고, 모스끄바 국립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아주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강의교수로 재직중이며, 같은 대학 의대에서 &lsquo;문학과 의학&rsquo;을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백야의 뻬쩨르부르그에서』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미하일 불가꼬프의 『젊은 의사의 수기 ․ 모르핀』, 벨린스끼 문학비평선 『전형성, 파토스, 현실성』(공역) 등이 있다.<br /> <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09 오후 1:45:00《202》2010년 5월 8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2_%EC%B9%A8%EC%9D%B4%EA%B3%A0%EC%9D%B8%EB%8B%A4.jpg" /><br /> </span></p> <p><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8일</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문학과지성사, 2007)를 읽다. -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약간 공상적으로 씌어진 「프라이데이터리코더」를 말고는 모두 대학을 각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이십 대 여주인공의 이야기다. &lsquo;88만원 세대&rsquo;의 대표적인 표징은 임시직 혹은 비정규직인데, 이 창작집의 주인공들 역시 학원 강사나(「침이 고인다」․「자오선을 지나갈 때」) 과외 교사다(「기도」). 「기도」의 여주인공이 말한다. &ldquo;한번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lsquo;대한민국 사교육 무너지면 우리 다 죽는다&rsquo;고 농담한 적이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학원 강사나 과외 교사로 연명하면서 죽지 않고 용케 목숨을 부지한 주인공들의 그다음 임무는, 서울 하늘 아래 방 한 칸을 구하는 것이다. 열악한 주거 공간은 임시직 혹은 비정규직과 함께 88만원 세대의 또 다른 표징이다. 대부분 지방에서 올라온 김애란의 주인공들은 반 지하방(「도도한 생활」), 4인용 독서실(「자오선을 지나갈 때」), 신림동 고시원(「기도」)에 닥치는 대로 서식한다. 오빠나 막내와 함께 욕실이 있는 원룸에 살거나(「성탄특선」․「기도」), 혼자 13평형 원룸에서 사는 경우는(「침이 고인다」) 성공한 축에 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먹고 거주할 데를 확보한 청춘은 짝짓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성탄절에 만난 청춘남녀는 끝내 여관방을 얻지 못하고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성탄특선」). 과연 이들은 계속해서 연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을까? 모르긴 해도 &lsquo;연애&middot;결혼&middot;출산&rsquo;을 모두 포기해 버리는 대열에 끼이기 십상이다. 이 작품을 읽다 보니, 이십 대 때 읽었던 마레크 플라스코의 『제8요일』(평민사, 1978)이 떠오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88만원 세대의 등장은, 구조조정 당하고 명예퇴직 당하는 &lsquo;아버지의 몰락&rsquo;과 상관있다. 엄마의 강한 생존욕을 보여주는 「도도한 생활」과 「칼자국」에서처럼, 김애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이 애초부터 번듯한 관직이나 기업에 속한 적이 없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읽고 싶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 스치듯이 언급된 &lsquo;IMF&rsquo;는,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세시켰다. 같은 작품에서 막내딸에게 재수를 제안한 것은 &lsquo;엄마&rsquo;였는데, 그것은 그 집안의 경제를 엄마가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기도」나 「네모난 자리들」에서도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거나, 엄마의 비중이 아버지보다 크다. 이런 설정은 공상의 섬나라가 나오는 「프라이데이터리코더」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lsquo;아이&rsquo;의 아버지는 결혼을 한 뒤 몇 달 안 돼 죽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450" height="35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2_%EA%B9%80%EC%95%A0%EB%9E%80%20%EC%9E%91%EA%B0%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가진 직업이나 방도 변변찮고, 연애도 잘 안 되는 김애란의 주인공이 유일하게 가진 것은 &lsquo;배려&rsquo;다. 「침이 고인다」의 여주인공은 아무런 거처가 없는 대학교의 후배에게 자신의 13평 원룸에서 지낼 것을 허락하고, 「기도」의 여주인공은 설문을 하러 온 50대 남자에게 성심껏 대답을 하면서 &ldquo;나 스스로 누군가를 편하게 해줘야 한다는 오래된 배려심이랄까, 그런 습관에 쫓기는 기분이다&rdquo;라고 생각한다. 「네모난 자리들」도 그랬다. 여주인공이 최두식이라는 선배에게 반한 것은, 학교 앞 대로변의 허름한 건물에 살았던 그가 늘 배고파 보였던데다가, 실연마저 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 배려는 오래가지 않는 일시적인데다가, 타산적이기까지 하다. 「침이 고인다」의 여주인공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후배에게 자신이 일하는 학원의 논술 첨삭일을 알선해 주고, 집세와 공과금을 반씩 부담시킨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고 나자, &ldquo;어서, 고독해지고 싶다&rdquo;는 욕망에 휩싸여, 후배를 내쫓는다. 「네모난 자리들」의 최두식이 말했듯이 &ldquo;마음만큼 형편없는 게 또 있을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침이 고인다』의 주인공들, 또는 김애란의 세계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lsquo;낱낱의 반 지하방&rsquo;을 연상시킨다. 낱낱의 반 지하방으로 존재하는 이 단자<sup>單子</sup>들은, 연대나 저항을 꿈꾸지 않는다. 독서실의 자기 책상 앞에 점점 더 강한 각오의 포스트잇을 써 붙이는 이들의 타자에 대한 배려는 실낱같고 변덕스러우며, 환대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자는 억척스러운 본능을 지닌 엄마다. 「프라이데이터리코더」에서 그 엄마는 &ldquo;화재가 난 여관방에서 벌거벗은 사내&rdquo;와 함께 죽지만, 곧 추락한 비행기의 &lsquo;블랙박스&rsquo;가 되어 돌아온다. 이 블랙박스야말로 주인공들이나 작가가 연대나 저항 대신 선택한 &lsquo;억척스러운 본능&rsquo;이 아닌가?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아이는 두려움에 침을 삼키게 되지만, 그런 시대일수록, 엄마의 귀환보다 불길한 징후도 또 없다.</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09 오전 10:22:00장주식의 ‘논어의 발견’<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95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60_%EB%85%BC%EC%96%B4%EC%9D%98%20%EB%B0%9C%EA%B2%AC/%EB%85%BC%EC%96%B4%EC%9D%98%EB%B0%9C%EA%B2%AC_%ED%91%9C%EC%A7%80_%EC%B5%9C%EC%A2%85.jpg" /><br /> <br /> <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관에 대한 두 개의 얼굴</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일관<sup>一貫</sup>이란 &lsquo;하나로 꿰뚫었다&rsquo;는 공자<sup>孔子</sup>의 말, 일이관지<sup>一以貫之</sup>를 줄인 말이다. 『논어<sup>論語</sup>』에서 공자는 일이관지를 두 번 말한다. 모두 제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나오는 말인데, 증삼<sup>曾參</sup>과 자공<sup>子貢</sup>이다. 증삼은 증자<sup>曾子</sup>로 불리며, 뒷날 중국 유학의 도통을 잇는 인물로 추앙을 받는다. 그는 공자의 적통을 잇는 사람으로서, 3000명에 이른다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우뚝 선 인물이 되었다. 자공은 뛰어난 언변과 당시의 임금들도 부러워한 엄청난 재물을 가진 사람이었다. 공자가 죽은 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모든 제자들이 떠난 뒤에도 자공은 홀로 남아 3년 더 스승의 무덤을 지켰다. 자공은 공자보다 31세 연하, 증삼은 46세 연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공자는 똑같은 말을 두 제자에게 하고 있다. 『논어』에는 중복되는 구절이 여럿 있지만, 이 &lsquo;일이관지&rsquo;만큼 뚜렷한 구분을 보여주는 구절은 없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알 수 있다. 먼저 공자와 증삼의 대화를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어느 날 공자가 증삼에게 말했다.<br /> &ldquo;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단다.&rdquo;<br /> &ldquo;예!&rdquo;<br /> 증삼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스승의 뜻을 곧바로 알아들은 것이다. 그러나 같이 있던 증삼의 제자들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자가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떠나자 제자들이 얼른 증삼에게 물었다. <br /> &ldquo;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로 꿰뚫다니요?&rdquo;<br /> &ldquo;흠, 스승님의 도는 &lsquo;충서<sup>忠恕</sup>&rsquo;, 그 하나라는 것이다.&rdquo; <br /> 증삼의 말을 듣고서야 제자들은 겨우, 아! 하고 깨달았다. (『논어』, 이인 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충서&rsquo;라는 개념 하나로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말했다는 증삼의 설명이다. 송<sup>宋</sup>나라 주희<sup>(朱熹, 1130~1200)</sup>는 이 구절에 주목하여 자신의 체용론<sup>體用論</sup>을 만든다. 충<sup>忠</sup>은 나의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이므로 뿌리, 곧 체<sup>體</sup>가 되고 서<sup>恕</sup>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이므로 쓰임, 곧 용<sup>用</sup>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충은 천도<sup>天道</sup>이며 서는 인도<sup>人道</sup>고, 충은 천하의 근본이고 서는 천하에 쓰이는 도라는 구분도 나왔다. 그러나 이러한 정주학<sup>程朱學</sup>의 체용론은 『논어』라는 책의 참뜻 해석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런지 다음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어느 한가로운 날이다. 두 사람은 연못가에 앉아 묵묵히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br /> &ldquo;사야, 너는 내가 많이 배우고 기억하여 아는 사람이라고 여기느냐?&rdquo;<br /> &ldquo;예.&rdquo;<br /> 자공은 선뜻 대답해놓고 스승을 바라보았는데 공자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공자의 웃음에 약간 의문이 든 자공이 다시 물었다.<br /> &ldquo;아닙니까?&rdquo;<br /> 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br /> &ldquo;아니다. 나는 하나로 꿰뚫어서 아는 사람이다.&rdquo;<br /> &ldquo;예&hellip;&hellip;,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rdquo;<br /> 다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나뭇잎이 떨어져 희미하게 동심원을 그리는 물살을 바라보았다. 자공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고 꼭 묻고 싶었던 말을 했다. <br /> &ldquo;스승님, 제가 평생 동안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말을 한마디 해주십시오.&rdquo;<br /> 공자는 자공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br /> &ldquo;그것은.&rdquo;<br /> 공자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br /> &ldquo;아마도 서<sup>恕</sup>일 것이다.&rdquo;<br /> &ldquo;좀 더 설명해주십시오.&rdquo;<br /> &ldquo;네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는 뜻이다.&rdquo;<br /> &ldquo;예&hellip;&hellip;.&rdquo;<br /> 자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갖고 다니는 죽간에 &lsquo;서&rsquo;란 글자를 새겼다. (『논어』 위령공 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자, 어떤가? 자공과의 대화에선 &lsquo;충&rsquo;이라는 낱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지 &lsquo;서&rsquo;만 있을 뿐이다. 자공과의 대화에선 충이 없으므로 체용론을 만들 건더기가 없다. 또 하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화의 모습이다. 두 개의 대화에서 어느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질까. 증삼은 공자보다 46세 연하였다. 공자가 73세에 죽었으므로 공자가 죽을 때 증삼의 나이는 겨우 27세였다. 27세밖에 안 된 증삼이 제자들을 거느린 하나의 학단을 만들 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증삼은 공자가 말년에 말한 공문십철에도 끼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어린 제자가 자신의 제자를 거느리고, 공자의 가장 핵심적인 발언을 듣는 위치라는 것이 믿어지는가? 바로 여기서 날조의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도 증삼과 공자의 대화는 자공과 공자의 대화를 짜깁기하고, 충이란 말을 끼워 넣어 만들어낸 픽션일 것이다. 그럼 무슨 의도로 공자의 말을 날조했을까. 공자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증삼을 적통 계승자로 만들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싶다. 그러나 그 날조는 너무나 허술하다. 바로 같은 책, 『논어』의 다른 편에서 날조의 증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개의 대화에 나온 &lsquo;일관&rsquo;은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증삼의 일관은 수량화되어 있다. 충서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공자의 사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공의 일관은 세상사를 하나로 꿰뚫어보는 통찰로서의 일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로, 여기서 고전 읽기의 맛이 생긴다. 후대의 왜곡과 날조의 숲을 헤치고, 원래의 본뜻을 찾아가는 맛. 『논어』도 마찬가지다. 증자로부터 비롯되는 충효의 정치이데올로기, 정주학으로 대표되는 형이상학의 관념철학으로 덧칠된 『논어』 읽기를 하지 말고 공자의 진의를 찾아가는 &lsquo;공자학&rsquo;으로 읽어보자는 뜻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서 『논어』를 읽었고,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들과 연결시키면서 읽는 재미를 가져오려 했다. 새롭게 보기․낯설게 보기가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것을 동의한다면, 이 세상엔 아직 발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right">2011년 12월<br /> 장주식</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둘째 마당</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르면 가난이 없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균무빈의 세계</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자공과 공자는 이런 대화를 또 나눈다. 역시 엄청난 재력가답게 자공은 재물과 관련한 질문을 공자에게 자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자공이 물었다.<br /> &ldquo;만약 널리 베풀어 수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어진 사람(仁者)이라 할 수 있을까요?&rdquo;<br /> 공자가 대답했다.<br /> &ldquo;어찌 어질다뿐이겠느냐? 반드시 성인<sup>聖人</sup>이라 불러야 하겠지. 요임금이나 순임금 같은 이도 그것을 걱정으로 삼았다. 무릇 인자는 자기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우고, 자기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남이 도달하게 해준다. 아주 가까운 곳으로부터 비유를 찾는 것이 인을 행하는 방법이라 할 만하다.&rdquo; <br /> <span style="color: #808080">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有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span><span style="color: #808080"> 「6-28」</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자공은 재물이 많았지만 교만하지 않았으며, 공자 학단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재물을 내놓았다. 그래서 자공은 그렇게 물었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베풀어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떠냐고. &lsquo;인자&rsquo;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자공은 무첨<sup>無瞻</sup>, 무교<sup>無驕</sup>에 제중<sup>濟衆</sup>까지 욕심을 내고 있었다. 아니, 자공은 자신감이 있었다. 재물 정도야 아낌없이 내놓을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자공은 지난번 무첨무교에서 기대했던 칭찬을 듣지 못하여, 이번엔 과연 어떤 대답을 들을지 잔뜩 긴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런! 공자의 대답은 천만뜻밖이었다. 어찌 인자일 뿐이겠느냐?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마어마한 반응이었다. 자공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대답이었다. 요순임금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라니! 요순이 누군가.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 백성들이 임금의 이름을 알 필요가 없었던 시대의 임금들이 아닌가? 그들이 이르지 못하여 그것을 병통으로 여긴 경지라면, 자공으로선 언감생심, 바라보지도 못할 곳이 아닌가. 결국 공자는 자공의 말을 인정하지 않은 셈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언젠가 스승 공자가 자공은 군자의 반열에도 이르지 못한 그릇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자공은 군자보다도 한참 등급이 높은 인자의 반열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성인은 인자도 이르기 어려운 위치지 않은가. 이에 자공은 몹시 궁금했다. &lsquo;제중&rsquo;이 성인의 일이라면, 자공 스스로는 제중할 마음이 있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자공의 궁금증에 대하여 공자는 곧바로 대답을 알려줬다. 먼저 가까운 곳으로부터 어짊을 베풀어나가라고 말이다. 내가 서고 싶은 곳에 남을 세워주고 내가 도달하고 싶은 곳에 남을 도달시켜주라는 말이다. 아마도 자공에게서 그 부분이 다소 미약함을 공자는 보고 있었던 듯하다. 널리 수많은 사람을 구하려 하지 말고 가까운 이웃부터 돌보라는 지극히 평범한 이치를 재확인하고 있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과연 제중에 이르는 길은 없는 것인가? 있었다. 공자는 그 길을 이렇게 제시한다. 아주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방법을 제시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br /> &ldquo;흉년이 들어서 쓸 재물이 부족하면 어찌하면 좋을까요?&rdquo;<br /> 유약이 대답했다.<br /> &ldquo;왜 철법<sup>徹法</sup>을 쓰지 않으십니까?&rdquo;<br /> &ldquo;둘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철법을 쓰겠습니까?&rdquo;<br /> 유약이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br /> &ldquo;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굶주릴 것이며, 백성이 굶주리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겠습니까?&rdquo;<br /> <span style="color: #808080">哀公問於有若曰, 年饑用不足, 如之何? 有若對曰, .徹乎? 曰, 二, 吾猶不足, 如之何其徹也, 對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百姓不足, 君孰與足?</span><span style="color: #808080"> 「12-9」</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애공은 노나라의 임금이었다. 유약은 공자의 제자로서 당시에 벼슬을 살고 있었다. 염구나 자로나 유약이나 재아 같은 많은 제자들이 제후나 대부들에게 가서 벼슬을 살았는데, 제자들이 펴는 정책 대부분이 공자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화에서 유약이 제시하는 철법은 공자의 가르침에 다름없다. 철법이란, 1/10의 세법을 말한다. 직접 농사를 지은 농민이 충분한 수확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세법이었다. 당시에 애공은 이 철법을 쓰지 않고 2/10를 세로 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lsquo;둘도 오히려 부족하다&rsquo;고 말했던 것이다. 애공은 흉년이 들어서 세가 적게 걷히므로 더욱 많이 곧, 셋이나 넷을 걷고 싶어서 유약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유약은 세를 낮출 것을 권했다. 흉년이 들수록 나누라는 것이다. 그리해야 모두가 가난을 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에 유약이 덧붙이는 구절이 통쾌하지 않은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한 유약의 논리는 바로 공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공자가 살던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던 계씨<sup>季氏</sup>에게서 벼슬을 살던 염유<sup>冉有</sup>와의 긴 대화다. 좀 길지만 전문을 인용해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계씨가 장차 전유<sup>顓臾</sup> 땅을 정벌하려 했다. 이에 염유와 계로가 공자를 뵙고 말했다.<br /> &ldquo;계씨가 곧 전유 땅을 치려고 합니다.&rdquo;<br /> 공자가 말했다.<br /> &ldquo;구<sup>(求, 염유의 이름)</sup>야, 그것은 너의 허물이 아니냐? 전유는 옛날에 선왕께서 동몽산<sup>東蒙山</sup>의 제주<sup>祭主</sup>로 삼았다. 또 나라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사직을 지키는 신하와 같다.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느냐?&rdquo; <br /> 염유가 대답했다.<br /> &ldquo;계씨가 치려고 하는 것이지, 우리 두 사람(염유와 계로)은 모두 원하지 않습니다.&rdquo;<br /> 공자가 말했다.<br /> &ldquo;구야, 옛말에 이르기를 &lsquo;있는 힘을 다하여 벼슬을 살다가 능력이 모자라면 그만둬야 한다&rsquo;고 했다. 군주가 위태로운데도 바로잡지 않고 넘어지려 하는데도 부축해주지 않으면 장차 너희 같은 벼슬아치를 무엇에 쓰겠느냐?&rdquo;<br /> 공자가 잠시 말을 멈췄는데도 염유와 계로가 묵묵히 있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br /> &ldquo;또한 구야, 너의 말이 잘못되었다. 호랑이와 코뿔소가 우리에서 뛰어나오고 거북의 등껍질과 귀한 옥이 궤 속에서 깨지면 그건 누구 잘못이겠느냐? 그것을 지키는 자들의 잘못이 아니냐?&rdquo;<br /> 염유가 말했다.<br /> &ldquo;지금 전유는 견고하고 또 비<sup>(費, 계씨의 수도)</sup> 땅에 가까워서 지금 얻어두지 않으면 후세에 자손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rdquo;<br /> 공자가 말했다.<br /> &ldquo;구야, 군자는 그것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마치 아닌 척 돌려서 변명하는 말을 미워하느니라.&rdquo;<br /> 염유가 부끄러운 낯빛으로 무료하게 앉아 있으니 공자가 다시 말했다.<br /> &ldquo;내가 들은 말이 있다. &lsquo;나라와 큰 집안을 소유한 자는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며, 가난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rsquo;고 했다. 무릇 고르게 하면 가난은 없고, 조화롭게 하면 적지 않고, 편안하게 하면 무너지지 않는다.&rdquo;<br /> 공자는 말을 멈추고 두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br /> &ldquo;이와 같은 까닭에 먼 곳 사람(전유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sup>文德</sup>을 닦아서 스스로 오게 해야 하고, 오면 편안하게 해줘야 한다. 지금 유와 구, 너희 둘은 계씨를 돕는 자리에 있으면서 먼 곳 사람들이 오게 하지 못하고, 나라가 분열되고 부서지는데도 지키지 못하면서도 나라 안에서 창과 방패를 움직일 것을 꾀하고 있구나. 나는 두렵다. 계손씨의 근심이 전유에 있지 않고 자기 집 담장 안에 있을 것이.&rdquo;<br /> <span style="color: #808080">季氏將伐.臾, .有季路見於孔子曰, 季氏將有事於.臾, 孔子曰, 求, 無乃爾是過與. 夫.臾, 昔者, 先王, 以爲東蒙主, 且在邦域之中矣, 是社稷之臣也, 何以伐爲. .有曰, 夫子欲之, 吾二臣者, 皆不欲也. 孔子曰, 求, 周任有言曰, 陳力就列, 不能者止, 危而不持, 顚而不扶, 則將焉用彼相矣. 且爾言, 過矣. 虎.出於., 龜玉毁於.中, 是誰之過與? .有曰, 今夫.臾, 固而近於費, 今不取, 後世必爲子孫憂. 孔子曰, 求, 君子, 疾夫舍曰欲之, 而必爲之辭. 丘也聞, 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夫如是故, 遠人不服, 則脩文德而來之, 旣來之, 則安之, 今由與求也, 相夫子, 遠人不服而不能來也, 邦分崩離析而不能守也, 而謨動干戈於邦內, 吾恐季孫之憂, 不在.臾而在蕭墻之內也. 「16-1」</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전쟁의 시대였다. 일정한 땅을 차지한 제후들은 서로 남의 땅과 남의 백성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패자<sup>覇者</sup>가 되고 싶어 했다. 염구가 벼슬살이 했던 계씨는 노나라의 정권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남의 땅과 남의 백성을 탐낸 인물이다. 이 대화에서 공자는 제자인 염구와 자로에게 정치를 하는 기본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정치란, 무력에 기대서 하는 것이 아니며, 균<sup>均</sup>과 화<sup>和</sup>와 안<sup>安</sup>이라는 것이다. 균은 재물이요, 화는 정신문화다. 재물을 고르게 갖는다면 빈부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이 없으니 정신문화 또한 조화롭게 발달할 것이며, 이미 재물이 고르고 문화가 조화롭다면, 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해할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조화와 편안함을 갖고 오는 출발점이 바로 재물을 고르게 하는 일이다. 그것을 공자는 &lsquo;균무빈<sup>均無貧</sup>&rsquo; 곧, &lsquo;고르게 하면 가난이 없다&rsquo;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단표누항&rsquo;의 세계는 개인이 가난에 얽매이지 않는 자세다. 타고난 본성이 그러하든 후천적으로 깊고 넓은 수양을 쌓아 그렇게 되었든 가난을 뜬구름처럼 여긴다는 것은 마음의 자유를 얻는 좋은 길임에 틀림이 없다. 공자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거친 밥을 먹고 물 한 사발 들이켠 뒤 팔을 베고 누웠으되, 즐거움이 그 속에 있구나.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겐 뜬구름과 같다.<br /> <span style="color: #808080">子曰, 飯.食飮水, 曲肱而寢之, 樂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7-15」</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러나 결코 모든 사람이 이렇게 될 순 없다. 사람의 일반적인 욕심은 부유하고 싶고 귀하고 싶기 때문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행복지수도 비례하여 높아지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를 봐도 그렇다. 오히려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행복감은 더 낮은 경우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총생산이 늘어날수록 빈부의 격차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난할 때는 견디기가 쉽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했을 때는 서글퍼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단표누항의 세계는 일반적일 수가 없으며 누구나 행복한 세계일 수는 없다. 공자는 안회의 &lsquo;단표누항&rsquo;의 세계를 높이 보되, 한 발 더 나아간다. 그것이 바로 &lsquo;균무빈&rsquo;이다. 고르면 가난이 없다는 것. 한 가족, 한 동네, 한 나라일지라도 그들 경제의 총량을 구성원들이 고르게 나눠 갖는다면, 가난할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lsquo;고르다&rsquo;면 상대적 박탈감이 존재할 수가 없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른바 &lsquo;보편적 복지&rsquo;를 2500여 년 전에 공자는 주장했다. 결국 공자는 현실에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삶의 철학자였다. 모든 사람이 타고난 생을 영예롭게 누리다 떠날 수 있기를 바랐던 &lsquo;인정<sup>仁政</sup>&rsquo;의 정치가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자는 한 개인으로서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며 인생을 자유롭게 살다가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기엔 주변의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눈에 보였으리라. 인자는 수많은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다. 공자의 그런 생각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논어』에 나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margin-right: 20pt"><br /> 장저<sup>長沮</sup>, 걸익<sup>桀溺</sup>이 짝을 이뤄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그들 곁을 지나가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물어 오도록 했다. 자로가 달려가 묻자 장저가 나루터는 가르쳐주지 않고 엉뚱하게 물었다.<br /> &ldquo;저기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분은 누군가요?&rdquo;<br /> &ldquo;공구<sup>孔丘</sup>라고 합니다.&rdquo;<br /> &ldquo;노나라 사람 공구 말인가요?&rdquo;<br /> &ldquo;그렇습니다.&rdquo;<br /> 그러자 장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br /> &ldquo;그분은 나루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 것이오.&rdquo;<br />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자로는 그 옆에 있던 걸익에게 물었다.<br /> &ldquo;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좀 가르쳐주십시오.&rdquo;<br /> 자로의 물음에 걸익도 엉뚱하게 이렇게 되물었다.<br /> &ldquo;당신은 누군가요?&rdquo;<br /> &ldquo;저는 중유<sup>仲由</sup>라고 합니다.&rdquo;<br /> &ldquo;노나라 사람인 공구의 제자인가요?&rdquo;<br /> &ldquo;그렇습니다.&rdquo;<br /> 자로의 대답에 걸익은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br /> &ldquo;물이 이리저리 도도하게 흐르듯 천하가 어지러운데, 누구와 더불어 변역을 시킬 수 있을까?&rdquo;<br /> 혼잣말로 노래하듯이 이렇게 뇌까리더니 자로를 돌아보고 <br /> &ldquo;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느니, 차라리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소?&rdquo;<br /> 하고는 자로의 대답도 들으려 하지 않고 괭이로 흙을 긁어 밭의 씨앗을 덮었다. 자로는 잠깐 묵묵히 섰다가 수레로 되돌아가서 공자에게 말했다. 자로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공자는 한참 동안 서글픈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공자는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br /> &ldquo;나는 사람이라 날짐승이나 길짐승과는 무리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의 무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살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도 애써 변역시키려 들지 않으리라.&rdquo;<br /> <span style="color: #808080">長沮, 桀溺, .而耕. 孔子過之, 使子路問津焉. 長沮曰, 夫執輿者, 爲誰. 子路曰, 爲孔丘. 曰是魯孔丘與. 曰是也. 曰是知津矣. 問於桀溺, 桀溺曰, 子爲誰. 曰爲仲由. 曰是魯孔丘之徒與. 對曰然. 曰滔滔者天下皆是也. 而誰以易之. 且而與其從.人之士也, 豈若從.世之士哉. .而不輟. 子路行, 以告. 夫子憮然曰,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18-6」</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장저와 걸익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은사<sup>隱士</sup>들이다.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훌쩍 벗어나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공자는 단표누항의 안회를 높이 쳤듯이 그런 은사들도 높게 보았다. 공자도 왜 은사의 삶이 부럽지 않았겠는가? 한때 공자는 자로에게 &ldquo;뗏목을 타고 저 멀리 바다로 두둥실 떠나가고 싶다&rdquo;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러나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 자로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lsquo;나는 사람들 속에 살겠다&rsquo;라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공자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탐구의 결과 가운데 하나로, 경제적인 방면에서는 &lsquo;균무빈의 세계&rsquo;가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강조한다. &ldquo;나누면 가난이 없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즘 대학등록금을 반값으로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울시에서는 초중고생의 전면 무상급식의 가부를 놓고 주민투표를 하여 수십억 원의 예산을 낭비했다. 이 문제들의 해결은 공자의 말을 들어보면 의외로 쉽다. 과연 우리의 부는 편중되어 있는가? 고른가? 대답은 참 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2부 &lsquo;균무빈의 세계&rsquo; 편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장주식<br /> </strong>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책읽기를 좋아하고 글도 쓰며 산다. 서울살이 20년을 정리하고 여주로 내려온 뒤, 몇몇 사람들과 함께 고전을 읽는 재미를 붙였다. &lsquo;논어 읽기&rsquo;는 그 가운데 하나다. 지금까지 세상에 펴낸 책으로는 동화 『그리운 매화향기』, 『토끼 청설모 까치』, 『바랑골 왕코와 백석이』, 그림책 『강아지똥 할아버지』, 소설 『순간들』, 옛이야기 『오줌에 잠긴 산』, 『토끼전』, 교육 산문집『하호아이들은 왜 학교가 좋을까』등이 있다. <br /> &nbsp;</p>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p>&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05 오후 1:38:00《201》2010년 5월 7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89"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1_%EB%A1%9C%EC%A6%88%EB%A9%94%EB%A5%B4%EC%86%94%EB%A1%AC,%20%EB%8C%80%EA%B1%B4%EC%B6%95%EC%82%AC%EC%86%94%EB%84%A4%EC%A6%882.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7일</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헨릭 입센의 『로즈메르솔롬』(예니, 2002)과 『대건축사 솔네즈』(예니, 2002)를 읽다. - 두 작품을 처음 읽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대사의 어조와 지문, 눈여겨 두어야 할 일화나 소품이 지뢰밭처럼 조심스러운 여느 희곡 읽기와 같이, 이 책에도 연필로 많은 밑줄과 표식을 을 해 놓았다. 그런데 아무런 필기가 되어 있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며 읽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다. 이 두 작품을 읽고 어디엔가 독후감을 써 놓았다면, 이번 독후감은 두 번째로 쓰는 것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로즈메르솔롬』과 『대건축사 솔네즈』는 각기 1886년과 1892년에 쓰여진 입센의 말년작이다. 이 작품들은 입센의 전성기(중기)이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회문제극 시기에 나온 네 작품과는 색깔이 상당히 다르다. 네 작품은 『사회의 지주』(1887)․『인형의 집』(1879)․『유령』(1881)․『민중의 적』(1882)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들은 사회 고발적 성격이 강한 리얼리즘 극이다. 그런데 입센은 말년으로 가면서 인간 내면의 갈등에 집중하고 기법적으로도 상징주의에 기울었다.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작품이 『들오리』(1884)라고 하는데, 나는 이 작품을 읽지 못했다. (『로즈메르솔롬』과 『대건축사 솔네즈』를 출간한 예니의 &lsquo;헨릭 입센 희곡전집&rsquo;에 예고는 되어 있으나,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이 작품은 번역본을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한 작품 가운데 가장 읽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로즈메리솔롬<sup>Rosmersholm</sup>&rsquo;의 &lsquo;솔롬<sup>sholm</sup>&rsquo;은 저택을 뜻하는 장<sup>莊</sup>이나 가문<sup>家門</sup>인듯 하니, 『로즈메르솔롬』은 &lsquo;로즈메리 장&rsquo; 내지 &lsquo;로즈메리 가문&rsquo;쯤 된다. 작품의 주인공은 요한 로즈메르로, 로즈메르솔롬의 주인인 그는 한때 보수주의에 동조하는 목사였으나, 지금은 정치 운동과 목사직에서 손을 떼고 은거하고 있는 상태다. 그가 공적 생활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 것은, 아내의 자살 때문이다. 비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데 대한 절망감과, 남편 옆에 붙어 있는 젊은 처녀 레베카에 대한 질투로 장원 앞에 있는 다리에서 떨어져 죽었다. 비타가 살아 있을 때,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자신들의 관계를 &lsquo;우정&rsquo;이라고 포장했으나, 그것은 아내는 물론이고 두 사람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비타가 죽고 나서도, 두 사람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기만을 계속하는데, 이는 죽은 비타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적 생활에서 손을 뗀 로즈메르에게 손위 처남이자 보수주의자인 크롤이 찾아와, 사회진보당(사회주의자) 세력을 누르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사회진보당 진영에서도 간절히 그의 지지를 요청한다. 로즈메르는 각기 찾아온 처남과 사회진보당을 지지하는 신문의 발행인인 모르텐스가드와 대화를 하는 중에, 자신이 목사직만이 아니라 신앙마저 버렸다는 것을 고백(선언)하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수주의자인 크롤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여기에 굳이 적을 필요가 있을까? 그것보다 재미있는 것은, 사회진보당의 대표격으로 로즈메르를 만나러 왔던 모르텐스가드의 반응이다. 애초에 그가 로즈메르를 찾아와 지지를 구하게 된 속내는 &ldquo;독실한 기독교도를 얻게 되면 언제든지 저희의 도덕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고 동조자를 포섭할 기회가 더 많아&rdquo;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즈메르가 선뜻 사회진보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나서면서 &ldquo;난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외다. 기독교니 원리니 하는 것과 인연을 끊은 지 오래되었어요. 그건 나와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rdquo;라고 말하자 곧바로 태도가 바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모르텐스가드 : [&hellip;] 만약 목사님께서 교회와 손을 끊으신 걸 발설을 하시게 되면 애초부터 스스로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마십니다. <br /> 로즈메르 : 그렇게 생각하십니까?<br /> 모르텐스가드 : 예, 절 믿으십시오. 여하튼 그렇게 되시면 이 지역에선 대의명분을 위해 그다지 많은 일을 하실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저희 쪽에서도 목사님과 같은 사상을 지니신 분들을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저의가 요구하는 건 기독교 사상입니다. &hellip; 이를테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존경하는 기독교 원리라 할까요. 저희 쪽에서 보면 그건 필요악이죠. 그러니 대중의 관심을 저버리는 발설은 하지 않는 게 좋으실 것 같습니다. <br /> 로즈메르 : 알겠습니다. 내 변절을 누설하기라도 하면 나와는 관계를 끊을 셈인가 보군요. <br /> 모르텐스가드 : (머리를 저으며) 그런 모험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로즈메르와 레베카는 그들을 공적으로 삼은 보수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양편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비타가 떨어져 죽은 다리에서 자살을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의 자유를 빼앗고 자살에 이르게 한 것은 후미진 해안마을의 관습과 전통 탓이 아니다. 자신들의 사랑을 떳떳이 선언하지 못했던 기만과, 서둘러 삶을 기피하고 &ldquo;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게 아니&rdquo;라는 오도된 세계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런데, 이 오도된 세계관은 영웅의 표지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에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관습과 전통을 가리키는 &lsquo;백모단(비합법적인 자경단)&rsquo;, &lsquo;이상한 법&rsquo;, &lsquo;유령&rsquo;, &lsquo;원죄&rsquo;, &lsquo;벽에 걸린 초상화&rsquo; 등의 모티브와 상징이 가득하다. 특히 노르웨이 서부 해변 도시의 오랜 명문가인 로즈메르 가의 장원은, 자유로운 인간의 생기를 빼앗아 가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문학이나 영화 속에서 &lsquo;오래된 저택&rsquo;은 항상 &lsquo;죽음의 집&rsquo;을 뜻한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68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1_%ED%97%A8%EB%A6%AD%20%EC%9E%85%EC%84%BC.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건축사 솔네즈』에서, 입센은 『로즈메르솔롬』의 주제를 되풀이한다. 한때는 높은 첨탑(교회)을 설계하는 건축사로 이름을 떨친 솔네즈는 장인 집의 화재가 원인이 되어 두 아이가 죽음을 당하자, 신앙을 잃고 더 이상 교회를 짓지 않는다. 대신 평온하고 안락한 &lsquo;지상의 집(일반 주택)&rsquo;만 지었다. 그러다가 만년에 이르러 창조력이 고갈되고 젊은 건축가들이 도전해 오자, 최후의 첨탑을 짓게 되고 &lsquo;공중&rsquo;에 자신의 거처를 만들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로즈메르솔롬』이 전통과 관습을 자살이라는 극한 선택으로 극복하려고 했던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마지막으로 건설한 첨탑 꼭대기에서 떨어져 죽는 솔네즈 역시, 자신의 자유 의지로서 노쇠와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에 도전하고자 했던 일종의 프로테메우스적 영웅이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유럽 연극계와 당대 유럽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사회문제극 시기를 거쳐 입센이 도달했던 종착점에는, 오직 &lsquo;자유&rsquo;라고 쓰인 깃발만이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05 오전 11:18:00더글러스의 ‘마우스랜드’<img alt="" width="600" height="81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D%91%9C%EC%A7%80(%EC%95%9E%EB%A9%B4).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사</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마우스랜드&rsquo;Mouseland 이야기를 아십니까? 비록 6분짜리 픽션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볼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마우스랜드&rsquo;에는 생쥐들이 모여 사는 나라인데, 그들도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5년마다(영국 의회를 기초 체제로 하는 캐나다는 의원내각제이다. 토미 더글러스는 이에 빗대 연설에서 4년마다 의원을 뽑는 선거를 언급했는데, 이 책에서는 한국 정치체제를 빗대기 위해 5년마다 통치자를 뽑는 선거로 고쳤다-편집자 주)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뽑은 지도자는 생쥐가 아니라 매번 고양이였습니다. 삶이 피폐해져도 여전히 생쥐들은 색깔만 다른 고양이를 뽑았습니다. 마치 우리 역사에서처럼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생쥐가 외쳤습니다. 이제부터는 생쥐 가운데서 지도자를 뽑아보자고. 그런데 생쥐들은 이를 환영하기는커녕 그 생쥐를 &lsquo;빨갱이&rsquo;라며 도리어 감옥에 처넣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이야기는 캐나다 정치인 토미 더글러스가 1962년 캐나다 의회에서 연설한 내용입니다. 그는 1904년생인 스코트랜드 출신으로 캐나다로 이민 와서 목사 활동을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1919년 위니펙 노동자들이 총파업 투쟁을 벌였는데 경찰이 총과 몽둥이로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 다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돼 골수염에 걸려 수술을 받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캐나다의 공공의료정책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계 진출을 결심하게 되었고, 1944년 캐나다 지방정부의 수상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가 꿈꾸었던 공중의료정책 또한 캐나다에서 실현되어 지금은 전세계가 부러워할 정도의 훌륭한 제도로 자리잡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글러스가 &lsquo;마우스랜드&rsquo;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투표를 통해 권력을 교체해도 일반 국민들의 삶은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태평양 건너 먼 나라의 50년이나 된 이야기임에도 마치 우리 현실을 꿰뚫어 보고 있기라도 하듯 족집게처럼 집어내고 있습니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는 서민들보다는 정치인, 재벌 등 기득권 집단만을 대변한 채 대다수 국민들의 삶을 돌보지 않습니다. 더글러스가 실시한 공중의료정책처럼 국민을 위한 정책을 만들 수 있는 정치체제로 바꾸려면 고양이가 아닌 생쥐를 뽑아야 합니다. 물론 고양이를 뽑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 한국적 상황이 존재했지만 이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 상황 또한 도래했습니다. 매번 다가올 선거 때마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 생각하지 말고 진정 누가 국민을 대변하는지 곰곰 고민해야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분, &lsquo;빨갱이&rsquo;라고 기득 권력이 매도한데도 당신의 생각은 절대 잡힐 수 없으니, &lt;나꼼수&gt;의 말처럼 절대 쫄지마십시오. 정말 이번엔 바꿀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의 저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img alt="" width="600" height="5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OK-3.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OK-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OK-5.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OK-6(1).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OK-7.JPG" /><br /> <br /> (추천사, 본문 일부)</p> <p>&nbsp;&nbsp;</p> <p style="text-align: center"><object height="315" width="420"> <param value="http://www.youtube.com/v/VdZeW9vG1xg?version=3&amp;hl=ko_KR" name="movie" /> <param value="true" name="allowFullScreen" /> <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embed src="http://www.youtube.com/v/VdZeW9vG1xg?version=3&amp;hl=ko_KR" height="315" width="420"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embed></object>&nbsp;</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46"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8_%EB%A7%88%EC%9A%B0%EC%8A%A4%EB%9E%9C%EB%93%9C/%ED%86%A0%EB%AF%B8%EB%8D%94%EA%B8%80%EB%9F%AC%EC%8A%A4.jpg" />글 &middot; 토미 더글러스 Thomas Clement Douglas</strong><br /> 1904년 스코틀랜드 팔커크에서 태어났다. 1910년 그의 가족들은 캐나다로 이주해 위니펙에 정착하였다. 어렸을 때 다리를 다쳐 골수염에 걸렸지만 그의 병을 연구과제로 삼고 싶어 하는 의사 덕분에 치료받을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더글러스가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공공의료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4년 더글러스는 브랜든대학에 입학했으며 여기서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br /> 그 후 그는 서스캐처원 주 웨이번의 칼바리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대공황 와중에 웨이번에서 사회주의적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CCF에 가입하게 되었다. 1935년 연방선거에서는 캐나다 의원으로 선출되었다.<br /> 특히 1944년 선거에서는 그의 CCF당이 53석 가운데 47석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서스캐처원 주의 수상이 되었다. 이는 캐나다에서뿐 아니라 북미 지역에서 최초의 민주사회주의 정부였다. 그는 재임 기간 중 정부 소유의 발전 회사, 최초의 공공자동차 보험회사를 세웠으며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의 노조를 허용하였고 모든 시민에게 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정책을 펼쳤다.<br /> 더글러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정책은 공중의료정책에 관한 것이었다. 1961년 도입된 포괄적 의료보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의사들의 파업을 불렀다. 이 정책은 우드로우 로이드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1958년 선출된 캐나다 수상 존 디펜베이커는 다른 지방정부에서도 이 정책을 선택할 경우 50퍼센트의 연방정부 보조를 지원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1964년에는 대법원이 이러한 서스캐처원 주의 공중의료정책을 국가 전체로 확대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1966년부터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각각 절반씩 비용을 부담하는 공중의료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br /> 그는 2004년 CBS(캐나디언 방송 회사)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가장 위대한 캐나다인으로 선정되었다. 사회주의 정치인으로서 서스캐처원 주의 수상으로 1944년부터 1961년까지 재임하였으며, 1961년부터는 신민주당의 당수로서 1971년까지 활동하였다.<br /> <br /> <strong>그림 &middot; 한주리</strong><br />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였다. 현재는 서울 어느 조용한 동네에서 아이들과 함께 동심을 그리고 있다. <a href="mailto:jurru@naver.com">jurru@naver.com</a><br /> &nbsp;</p>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04 오전 11:21:00로텐버그의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img alt="" width="600" height="8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7_%EC%83%9D%EA%B0%81%ED%95%98%EB%8A%94%20%EA%B2%83%EC%9D%B4%20%EC%99%9C%20%EA%B3%A0%ED%86%B5%EC%8A%A4%EB%9F%AC%EC%9A%B4%EA%B0%80%EC%9A%94/%EC%83%9D%EA%B0%81%ED%95%98%EB%8A%94%EA%B2%83%EC%9D%B4%EC%99%9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옮긴이의 글</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철학과 삶이 하나 되는 길을 보았다</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철학책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회가 없었고, 대학 1학년 때 들은 철학 개론은 철학에 대한 관심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렸다. 강사가 한 학기 내내 《니코마코스 윤리학》 얘기만 해 댔던 것이다. 이후 아주 가끔씩 철학책을 읽게 되기는 했지만 철학이 내 삶의 고민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때문에 삶의 고민과 관련해서는 영성 서적이나 명상 등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는 철학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철학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우리가 삶에서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며,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영성 서적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책은 비엔나 서클로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방법론이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 줌으로써, 비록 지금은 과학이 모든 학문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lsquo;진리&rsquo;를 찾고자 하는 철학의 일부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왜 모든 박사가 ph.d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번역하며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이 언어에서 드러나는 서양과 한국 간의 사고방식 차이이다. 영어 truth는 한국어로 &lsquo;진리&rsquo;와 &lsquo;진실&rsquo;의 두 가지로 번역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lsquo;진리&rsquo;라는 말은 주로 종교나 영성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lsquo;진실&rsquo;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서양에서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진리를 찾는 프로젝트라는 데 합의가 이루어져 있고 그 결과물이 사회에 큰 파급 효과를 끼치지만, 한국에서는 진리는 학문, 특히 서양 학문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종교나 수행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간주되어 철학과 현실이 별개로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서양에서 철학자들이 차지하는 위상과 한국에서의 위상이 사뭇 다르며, 서양에서는 철학자들이 대학 교육 개편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힘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누가 어떤 의식 상태에서 하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이는 특히 &lsquo;모든 생명은 하나다.&rsquo; 같은 궁극적인 진리 수준에 속하는 말일 경우 특히나 더 그렇다. 네스가 이야기하는 심층생태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네스는 생태문제를 영적 성장의 기회로 삼자고 이야기한다(물론 그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lsquo;모든 생명이 하나&rsquo;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를 분리되었다고 인식하는 것 때문에 생태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므로, 이런 분리 의식을 극복해 나가는 것(그는 이것을 &lsquo;자아실현&rsquo;이라 부른다.)이 생태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과연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두 철학자 간의 문답을 통해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이 지닌 또 다른 가치는, 이런 추상적인 얘기를 하는 철학자가 과연 현실에서 어떻게 그것을 실천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첫째, 네스는 &lsquo;사실&rsquo; 같은 추상적인 논리 구조에서 벗어나 현실을 다양하게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둘째, 네스는 비폭력 저항과 비폭력적 의사소통을 이야기한다. 상대가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 상대를 공격하거나 회피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뚜렷이 밝히는 일을 끈기 있게 계속하여 상대가 다른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것이다.(물론 상대를 개종시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은 생태문제와 관련된 실제 예를 통해 그가 이런 원칙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는지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네스는 행동에는 선택이 필수적이므로, 자신의 내면 깊숙이 내려가 자신만의 느낌을 찾으라고 이야기한다. 만약 확실한 느낌이 떠오르지 않을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며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고(그는 이럴 때 생각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지만 그것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가능하면 기존에 형성된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결단을 내리라고 이야기한다. 넷째, 네스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려면 그 수단이 단순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소박한 삶을 통한 마음의 풍요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네스가 자신의 삶에서 이런 사항들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네스가 가진 인간적인 약점과 그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와 시행착오들을 비교적 솔직하게 보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말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돕는 한편 책의 재미도 더해 주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실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때문에 한 번에 쭉 읽어 내려가기보다는 조금씩 내용을 곱씹어 가며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실제로 이 책의 번역은 참으로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몇 번을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겨우 이해가 되는 구절이 너무나 많았다. 부디 독자 여러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끝으로 긴 번역 과정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고 원고를 함께 다듬어 주신 낮은산 식구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 또한 철학용어와 관련하여 조언을 해 주신 강신주 선생님과 노르웨이어 발음과 관련해서 도움을 주신 Ian Shidon Kim 님께도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right">2011년 12월 박준식</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7_%EC%83%9D%EA%B0%81%ED%95%98%EB%8A%94%20%EA%B2%83%EC%9D%B4%20%EC%99%9C%20%EA%B3%A0%ED%86%B5%EC%8A%A4%EB%9F%AC%EC%9A%B4%EA%B0%80%EC%9A%94/%EC%9D%B4%EB%AF%B8%EC%A7%801.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color: #333333"><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span></strong></span></span></span><span style="color: #3333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trong>CHILDHOOD AND THE DISTANCE</strong><br /> </span></span><span style="color: #808080"><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거리두기를 시작한 어린 시절</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흐릿하지만 핵심적인 주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온전히 혼자일 때 가장 자기 자신에 가깝다고 느끼는 조숙하고 호기심 많은 소년이라는 이미지에 대해 아르네 네스가 평생에 걸쳐 집착하고 경도하게 된 뿌리를 찾아보기로 하자. 어떻게 학문 중에 가장 실용성이 떨어지고 추상적이며 답을 찾기가 불가능해 보이고 저주라도 걸린 듯 발전이 없는 철학을 천직으로 택하게 되는 걸까? 물론 산중에 있으면 땅의 경계도 생각의 한계도 사라지므로, 자신만의 시선으로 장엄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왜곡시키지는 않게 된다. 봉우리들이 각각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돌멩이들도 서로 달라 보이는데 그것이 어린 소년이 눈에 띄는 대로 돌멩이를 모아야만 하는 까닭이다. 어린 시절 아르네는 자연의 다양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그 다양성에서 혼란한 인간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순수성을 발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르네 네스는 노르웨이의 부유한 베르겐 가의 네 아이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가족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르네가 태어난 지 채 일 년이 못 되어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크리스티네는 어린 아르네를 돌보기 위해 보모를 고용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늘 껄끄러웠고 어린 아르네는 어머니의 수다와 과장스런 감정 표현에 대해 점점 강한 반감을 키워 갔다. 이때부터 거리두기가 시작되었고, 소년 아르네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보다 사물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훗날 비엔나에서 정신분석을 받을 때 아르네는 자신이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과연 어디에서 아버지를 찾으려 했을까? 홀로 있을 때의 편안함에서? 아니면 형들의 조언에서? 대부분은 위에서 조용히 미소 짓는 산, 바로 거기 머무를 때였다. 오르려는 이를 손짓해 부르기는 하지만 결코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금방이라도 가 닿을 듯싶지만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산. 이제 우리는 아르네가 철학을 시작하고 음악을 배우며 등반을 익히고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면에서 그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주 작은 것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 꽤 인상 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연 속의 아주 작은 것들에 금세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씀하셨죠. 밖에 나가 작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에 끌렸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화학을 예로 들면, 제가 소년일 때는 어떤 용액 한두 방울이 다른 용액에 떨어졌을 때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습니다. 그 후 책에서 다른 실험들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면 그 방울들을 떠올렸지요. 색깔 따위 말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 용액 방울들 속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용액 방울들 속이라! 제가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용액이 퍼져 나가며, 색깔이 없는 두 용액이어도 함께 어울리면서 환상적인 모양으로 확산되고는 했습니다!<br />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제가 다섯 살 때 우스타우세에 갔습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거기서 저는 자유에 대해 말을 하지 않고서도 그 개념을 이해했습니다. 그곳에는 경계선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어디라도 갈 수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아무런 제한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 산 할링스카르베를 처음 봤을 때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누가 거기에 데려갔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어머니입니다. 아버지는 이 산에 오두막 같은 것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에서 처음으로 스키를 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 오두막이 아직 여기 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니요. 없어졌습니다. 아주 작은 오두막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두 형과 함께 갔고, 거기에는 저와 무척 재밌게 지냈던 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불었고, 그들이 저를 이렇게 세워 놓고서는 바람에 날리는지 보았습니다. 물론 그때 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지요.<br /> 제가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아이디어를 산에서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생명체, 광물, 돌과 관련하여 어떤 가치를 알아보는 방법을 익히게 된 것은 바로 여기입니다. 돌이 중요했습니다. &hellip;&hellip; 돌을 모으는 것 말입니다. 저는 많은 돌을 원했습니다. 크기가 작으면서 양은 많아야 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양<sup>quantity</sup> 말인가요? 아니면 질<sup>quality</sup> 말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수량에서 감명을 받았습니다. 작은 돌로 이루어진 아주 긴 행렬을 원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각각의 돌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다양체<sup>manifold</sup>, 말하자면 다양성, 무한한 다양성에서 한 지점을 찾으려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각각의 돌이 모두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점에 감명을 받았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맞습니다. 모두 다릅니다.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왜 작은 것들이 감명을 줍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다행히도 그러한 심리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훗날 지식인이 되는 사람들은 종종 아주 작은 세세한 것들에 집착하고는 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주 큰 것들을 경험할 때처럼 강렬하게 아주 작은 것들을 경험하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와 같은 강도로요? 아니면 더 강하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저에게는 더 강합니다. 아주 작은 것은 늘 매혹적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은 건조함을 비롯한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여기 창밖에 있는 이 용담<sup>Gentiana nivalis</sup>이 고산지대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산용담<sup>Arctic gentian</sup> 말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올해는 건조해서 이 꽃이 무척 작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꽃이 폈을 때조차 2센티미터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엄청난 감명을 줍니다. 그 작음 말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철학의 오래된 주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별, 우주처럼 큰 세계가 있는 반면, 한없이 작은 세계들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큰 세계에서만큼이나 작은 세계에서도 풍부한 복잡성과 다양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br /> 제 개인사 한 가지도 분명 이 아주 작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형들과 누나가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저는 자신이 작고 홀로 남겨진 존재라고 느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파스칼은 인류가 소우주와 대우주라는 두 개의 무한 사이에 있다고 썼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맞습니다. 저에게 소우주는 어린 시절의 한 가지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세 살 때, 보모를 빼앗겨 버렸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보모와 파리</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빼앗겨 버렸다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한숨) 이름이 미나였지요. 음, 상황이 어떠했냐면, 저는 전혀 예상치 못하게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hellip;&hellip; 어머니가 여섯째를 가지게 되다니 말이지요! 제가 태어난 것은 기쁜 일이 아니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여섯째라고요? 그렇지만 두 형과 누나 한 분밖에 없으시잖아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다른 둘은 이미 죽었지요. 그들은 두세 살 때 죽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렇군요. 그때 어머니는 몇 살이셨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마흔 살이었습니다. 더 많았을 수도 있고요. 어머니는 불만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데다 이 여섯째 아이를 가지게 되자, 두 형제에 대한 걱정이 늘었습니다. 좀 거칠었거든요. 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으로 미나를 이미 고용해 놓았지요. 미나가 저를 사랑하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온갖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소원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형의 말에 따르면 제가 욕조에서 목욕을 하려면 파리가 적어도 한 마리는 있어야 했답니다. 살아 있는 파리인지 죽은 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미나가 파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한겨울에는 당연히 안 그랬겠지만요&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파리가 선생님에게 있어야 했습니까, 아니면 방 안에 있어야 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물속에 있어야 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물속에 죽은 채로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긴 거기서 살아 있을 수는 없었겠네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오래 살아 있지 못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럼 보모한테 파리를 죽여 달라고 하신 겁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죽이거나 산 채로 잡아서 물속에 넣었습니다. 죽이지 않고 물속에 넣었더라도, 저절로 죽었을 테지요. 그리고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때 미나는 이미 쉰 살이 넘었습니다. 파리를 잡으려고 여기저기 올라가는 것을 보면 감동적이었지요.<br /> 또한 저는 병을 모으고, 한 병에서 다른 병으로 물을 옮겨 담으면 얼마나 높이 차오르는지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넓은 병에서는 물이 거의 안 보이게 되고, 길쭉한 병에서는 꼭대기까지 차게 되지요. 아이들이 어떻게 액체량의 보존 개념을 이해하게 되는가를 연구한 피아제에 따르면 아이들은 보통 길쭉한 병들을 선호합니다&hellip;&hellip;.<br /> 우리 가족이 누르하임순으로 가는 도중에 하르당에르 피오르 기차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기차에 탈 때 어머니는 여행 가방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우리 식구가 다섯 명이라 여행 가방이 많았는데 그래도 가방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지요. &hellip;&hellip; &ldquo;이게 뭐예요&rdquo;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나가 말했습니다. &ldquo;아르네의 병들이에요. 얘한테는 병들이 있어야 되거든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길쭉한 병들이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온갖 종류가 다 있었습니다. 그 차이가 중요했죠. 피아제는 아이들이 길쭉한 병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다양한 종류의 병들이 여행 가방 가득 있어야 했습니다. &ldquo;아르네한테는 병들이 있어야 해요.&rdquo;라는 미나의 설명은 거의 자연법칙에 가까웠습니다. 병들을 놔두고 올 수는 없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필요한 것은 늘 가졌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 이상이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항상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가 엄청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나가 떠나기 전까지는 진짜로 그랬지요. 제 소원은 모두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이 제 곁에 한 명 있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지만 선생님이 세 살 때 미나는 떠났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미나가 저를 너무 버릇없게 만든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저를 완전히 응석받이로 만들고 있었지요. 그래서 미나는 해고됐습니다.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해고 사유 가운데 하나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 뒤로 저에게 미나를 대신하는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두 형과 다른 일이 있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가진 특별한 소원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고, 저는 그런 어머니에게 질려 버렸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머니에 대항하는 껍질</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럼, 그때 아버지는 어땠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버지는 제가 한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자 어머니는 함께 독일로 가셨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원에 계셨습니다. 갓난아이였던 저에게는 미나가 어머니 같았습니다. 미나가 저에게 우유를 줬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훗날 비엔나에서 정신분석을 받으며 두세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기억해 내려고 해 봤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어머니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의와 저는 그 이유를 찾아내야만 했습니다. 물론 그게 제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지요. 어머니는 재능이 있었고 배우가 될 수도 있었지만 실패한 뒤로는 자포자기했습니다. 극작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머니는 짧은 희곡을 한 편 썼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실제로 가족 구성원 중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희곡의 출판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br /> 나중에 어머니에 대한 제 부정적인 태도는 어머니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집중되게 되었고, 저는 곧 허풍이 심하고 감정적 히스테리가 심하던 어머니가 연기를 하는 경우가 많으며 전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 무렵 선생님은 감정에 저항하고 계셨던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저는 감정에 엄청나게 저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매를 맞을 때면 어머니는 보통 저를 이 층으로 데려가거나 소파로 끌고 갔기에, &lsquo;이제 매 맞겠구나.&rsquo;라고 느낌이 올 때면 스스로 계단을 올라가 이층으로 가서는 소파에 엎드려 제 운명을 기다렸습니다. 매를 맞기 전이나 도중 혹은 그 뒤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어머니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꾸짖으면 저는 그저 냉랭해졌고 오랫동안 어머니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고, 저는 어머니에게 저항함으로써 제가 어머니에 대해 힘이 있다는 느낌을 조금은 가지게 되었습니다. 훗날 이 체험으로 인해 저는 공평함에 엄청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객관성을 중시하면서 관료적 방식 혹은 과학적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습니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lsquo;관료적&rsquo;과 &lsquo;과학적&rsquo;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시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글쎄요, 학교에서 에세이를 써야 했을 때, 글들이 관료적인 스타일로 나오더군요. 무슨 얘기를 하든 간에 은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것은 바로 어머니를 닮지 않으려는 저의 바람에 기인합니다. &hellip;&hellip; 전 어머니와 반대가 되어야 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감정에 저항하는 태도 자체가 감정적이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 네, 정말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거리두기를 할 수 있습니다. &hellip;&hellip; 저는 어머니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고, 고통도 그렇게 떨어뜨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매 맞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자라면서 이런 거리두기를 갈망하셨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저는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프로이트식 용어로 말하자면 성격무장 12이라는 것을 발전시켰습니다. 즉, 일종의 장갑 혹은 껍질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내면 깊숙한 곳, 껍질의 한참 아래가 제가 있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느 정도 뚫고 들어올 수는 있지만 갈수록 점점 더 뚫고 들어가기 힘들어지므로 아무도 완전히 껍질 내부로 들어올 수는 없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렇다면 지금도 다른 사람이 그 내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나가 사라졌을 때 경험한 사랑의 상실은 제 발달을 억제시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또 다른 상실을 겪을까 봐 자신을 방어하고는 했습니다. 아무도 완전히 내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애정 결핍 때문에 미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세 살 때 벌써 한 사람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끼셨군요. 그 뒤로는 없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더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사람을 잃어버리고 나면, 주위에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길 없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니까요. 큰형 랑나르에게 이런 따뜻함이 조금 있었지만, 그는 제가 여덟 살 때 미국으로 가 버렸습니다. 그는 떨림은 없지만 달래는 듯 꽤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가졌고, 스피노자의 월광 소나타 제2악장 같은 아주 로맨틱한 곡들도 피아노로 연주했습니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스피노자가 아니라 베토벤이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물론입니다. 아시겠지만, 이러한 거리두기가 과학적 명료함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자가 되려면 객관성이 필요하고, 이렇게 일로매진하면 정교한 작업들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고통과 불편함을 잘 견딜 수 있게 되면, 모든 감정을 표출하기만 하면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이보다 더 큰 힘과 통찰력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은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일을 쉽게 해내는 일종의 기술을 얻게 된다고 믿고 계신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람들이 저와 함께 살면서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일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지금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아니면 어렸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늘 그렇습니다. 저는 흔한 말로 &ldquo;멀리 떨어져&rdquo;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저와 성별이 다른 사람들은 &ldquo;당신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요. 도대체 어디 있나요&rdquo;라거나 &ldquo;뭐가 문제예요&rdquo;라고 불평을 늘어놓고는 합니다. 저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오슬로에서 비엔나로 갈 때 탔던 기차는 아주 느렸고, 저는 자리에 앉아 가면서 완전히 혼자일 수 있었습니다. 작은 칸막이방에 여덟 명이 있었지만, 저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은 전혀 의식하지 않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늘 무언가를 쓰고 계시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쓰든지 아니면 그냥 생각만 하든지 둘 중 하나이지요. 한번은 이런 적도 있습니다. 저는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ldquo;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마세요.&rdquo;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여자분을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분은 제 눈이 완전히 멍한 상태였던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지요. 심지어 지금도 제 아내 킷 파이는 &ldquo;당신은 저를 제대로 보지 않아요.&rdquo;라며 불평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정말 그렇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분명 저는 자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집중력을 가져다줍니다. 저는 상상에 빠져듭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시적인 상상은 아닙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와 정확성</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전혀 시적이지 않다고요? 시적인 것과 상상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갑자기 그런 구분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제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그랬듯이 저는 모든 종류의 감상에 저항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감상벽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느낌, 음, 강한 느낌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감상벽은 안 됩니다. 대부분의 시는 감상적입니다. 말 자체를 중시하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늘 말을 넘어서고 싶어 하셨군요&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물론입니다. 입센의 작품을 공부하고 있을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인 안드레아스 빈스네스는 그 극에서 실제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해 제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그는 &ldquo;이제 아르네가 읽어 봐라.&rdquo; 하고 나서는 항상 그 즉시 저를 멈추게 하고는 했습니다. 감정을 실어 읽는 일이 저에게는 불가능했으니까요. 저는 어떤 것도 연기하듯 읽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 안 좋았지요. 연기하듯 읽는 부분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니까요. 저는 말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입센의 작품 가운데, 선생님이 그 말을 넘어서고 싶다고 느꼈던 작품이 있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브랑》. 브랑은 주인공 이름입니다. 브랑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삶이 반드시 무언가를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브랑에게는 그것이 신에 대한 찬양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아니지만요.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삶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살 만한 가치가 없을 테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삶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모든 종류의 삶이 다 그렇습니까, 아니면 인간의 삶만 그렇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인간의 삶만 그렇습니다.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과 그냥 사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hellip;&hellip; 따라서 저는 이것을 동물에게 적용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성취를 증명해 줄 대상을 찾아다니며 늘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셨습니까? 특정 목표들을 바라보며 &ldquo;써야만 해. 읽어야만 해.&rdquo;라고 말씀하십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늘 그러지는 않습니다. 꿈꾸는 것도 나름의 역할을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꿈꾸는 것으로 충분하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꿈꿀 수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학생 때는 꿈꾸기에 저항했습니다. 전제와 결론 사이의 연결고리를 꿈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제가 책에서 읽은 철학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꿈꿨습니다. 그 다음 날 그 일부를 적어 보았을 때 그 결론이 전제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요. 끔찍한 발견이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지금 온갖 주제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읽으며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시는 거 맞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저는 11살 때 형 아링과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링과 함께 있으려면 그가 공부 중일 때 아주 조용히 있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책을 뒤적이는 것이 자연스러웠지요. 당시 봤던 책은 도표나 곡선 말고는 그림이 전혀 없는 그런 책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이 저에게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외국어로 써졌든 관료적인 문체로 써졌든 문제될 것이 전혀 없었지요. 제 노르웨이 스승인 철학자 빈스네스는 저에게 &lsquo;양호&rsquo;보다 나은 평점을 한 번도 주지 않았습니다. &lsquo;양호&rsquo;는 괜찮다는 정도이지 특별히 높은 평점은 아니었지요. 저는 아주 훌륭한 논증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는 언어에도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맞춤법은 너무 구식이었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아링의 경제학 책들을 읽고 계셨던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지금 제 손에는 선생님이 16살 때 사셨던 네 권짜리 경제학 교과서가 들려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하셨던 것으로, 페이지 여백에는 청춘의 느낌이 묻어나는 필체로 써진 조그만 메모들이 있는데, &lsquo;경제학이란 무엇인가&rsquo;라고 적고 그에 관한 여러 사람들의 관점을 정리한 작은 메모지도 있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hellip;&hellip; 제1권은 549페이지짜리 책입니다. 다른 권들도 그와 같지요. 그런데 오직 제1권만이 가치론, 맑스, 사회주의 같은 완전히 추상적인 주제를 조심스럽지만 다소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제 정치적 견해에 꽤 영향을 줬지요. 그런데도 저는 개의치 않고 제1권에 점점 더 많이 집중했습니다. 거기에 철학자들의 저술이 인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렇다면, 그것이 시작이었나요? 선생님은 경제학의 가치론에서 출발한 뒤에, 철학이 해 볼 만한 진짜 영역일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 다음으로 저는 회프딩의 이 책 《현대 철학의 역사》를 샀습니다. 그 두 권짜리 책이 제가 가장 좋아했던 것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철학사 책이지요. 1894년 덴마크어로 출판된 것입니다. 물론 덴마크어인 줄 모르고 실수로 산 것이지요. 거기서 스피노자를 발견했습니다. 적어도 그의 철학은 삶 자체에 대해 제대로 의문을 던졌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페이지 여백에 &lsquo;신의 무한한 속성들에 관한 스피노자의 가르침에 집중하라.&rsquo;라는 글씨가 밝은 녹색 잉크로 휘갈겨져 있네요. 당시에 벌써 무한한 다양성에 관한 내용을 골라내고 있었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유툰하이멘 산악 지대에서 한 노르웨이 대법원 판사가 스피노자에 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학교에서는 라틴어에 전혀 관심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로 책을 쓴 스피노자에 흥분하게 되었지요. 그러고 나서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소년 시절에 구했습니다. &hellip;&hellip; 그 책의 어떤 판본을 입수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스피노자가 쓴 라틴어는 키케로에 비해 무척이나 간단합니다. 키케로는 우리 어머니 같습니다. 항상 과장되게 말하고 속임수를 쓰고는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은 늘 화려한 문체나 어법을 수상쩍게 여기시는군요. 결국 고등학교 때 철학을 향한 정처 없는 여행길에 오르겠다는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철학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중이었고, 결국 철학이야말로 선생님이 가장 추구하고 싶은 것이었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음악적 환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 무렵 선생님에게 음악은 어떤 것이었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글쎄요. 14~16살 때 저는 아링 베스테르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방과 후 거기 가서는, 종일 그와 함께 지내는 일이 무척이나 잦았습니다. 제가 피아니스트가 되어야 할지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했고요. 저는 몇 시간씩 그의 연주를 들었고, 그가 다른 학생들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저는 비평할 때 무자비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음악에 드러나는 감정과 느낌을 비판하는 면에서는 어떠셨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어찌된 일인지 그런 면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관대했습니다. 누구나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서정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서정적인 면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졌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실제로도 그러십니다. 결국 선생님은 추상적인 것을 선호하시지만, 음악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음을 발견한 셈이로군요. 여전히 언어보다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쉽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음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의미의 충만함은 언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과장된 표현은 거의 성공하지 못합니다. 물론 쇼팽의 음악을 우스꽝스럽게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지만요. 장대한 리타르단도&hellip;&hellip; 환상적인 리타르단도. 화려한 문체나 어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에도 위험이 좀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바흐의 음악에서 좀 더 완벽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감정 표현에 기반을 둔 음악에 비해 바흐의 음악 구조가 더 명확하기 때문이지요. 브람스가 과장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늘 화려한 기교의 연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리스트의 협주곡을 시작할 때 저는 엄청난 기쁨을 가지고 첫 부분을 연주합니다. 니체처럼 일종의 초인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지요. &hellip;&hellip; 거대증 혹은 일종의 과대망상증 같은 것인데, 음악에서는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에게 이런 것을 허용했다가 곧 이렇게 말하고는 하지요. &ldquo;이건 그다지 좋지 않군. 깊이가 없어. 어떤 점에서는 혐오스럽기까지 하군. 하지만 오 하느님! 이건 멋지군. 너무 매혹적이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십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니요. 결코 아닙니다. 노르웨이의 제 음악 선생으로부터 전문적인 비평 감각을 익혔기 때문에 그러지 못합니다. 저는 최고 수준의 학생들을 비판하고는 했지요. 또한 제가 바라는 연주 수준에 비해 제 연주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삶의 큰 기쁨 하나를 잃어버렸으니까요. 그냥 아마추어로 연주하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런 기쁨을 아주 일찍 잃어버렸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아흔 살에도 매일 몇 시간씩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생님의 형 랑나르처럼, 선생님도 다시금 그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형처럼은 말고요. 저는 형이 큰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을 꽤 오랫동안 봐 왔습니다. 제가 아주 조그만 소년이었을 때 그 피아노 아래에 앉아, 의미가 완전히 충만해짐을 느꼈지요. 그로 인해 언어에 대한 저의 불신은 더 강해졌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에게는 의미가 완전한 것이 중요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리고 순수해야 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 하고, 모호한 점도 없어야 합니다. 정확해야 하고요. 음악적 사고는 대체로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피아노 선생의 학생들을 비판할 때 저는 &ldquo;이 부분이 매끄럽지 않았어요.&rdquo;라고 종종 말하고는 했습니다. 원래의 진행에서 확연하게 다른 식으로 연주를 해 나갈 때, 그 다름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 능숙하게 처리해야만 매끄럽게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음정에 어떤 변화라도 생기면, 무척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지요. 반면, 시인 같았던 제 선생 베스테르는 음악에서 색깔을 보았지요. 그는 화음을 시각화할 수 있었습니다. &hellip;&hellip; &ldquo;이건&rdquo; 그는 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했습니다. &ldquo;하하. 이상하군. 여기 말이야, 파랗고 노랗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은 그런 식으로 듣지 못했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노력은 했지요. 저는 그의 색깔 이야기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hellip;&hellip; 아주 인상적이었죠. 여기저기 조금씩 바꾸기만 해도 수백 가지 색깔이 나타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장기였고, 제 전문 분야는 구조였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은 괴테가 모든 예술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철학이 음악의 수준에 도달하기를 열망하십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물론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항상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실망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시도는 해 보았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당시 저는 과학철학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무언가를 좀 먹어야 할 것 같군요&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초기 산행 : 친구와 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등반이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저는 아주 큰 집의 부엌에서 태어났는데, 정원이 집보다 훨씬 더 컸지요. 오슬로 교외의 홀멘콜렌이란 곳으로 스키 점프로 유명합니다. 정원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곳의 4분의 3은 완전 야생의 자연으로,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질서 없이 어우러져 마치 작은 숲 같았습니다.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은 나무에 기어오르기 시작해서 그 다음에는 보다 큰 나무에, 마침내 큰 전나무와 가문비나무에도 기어올랐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정원 한쪽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아래에 도로가 있어서 나무 위에서 아래쪽의 사람들에게 전나무 방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큰 스키 행사가 있을 때면 수천 명의 사람이 지나가고는 했습니다. 물론 저는 힘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지요. 음, 적어도 무언가를 아래로 던질 수는 있었으니까요. 위에 있으면서 거기서 보고 조망하는 느낌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저는 금세 장비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가지를 쓰면 좋을지, 어떤 가지는 안 될지를 판단해야 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렇다면 자연에서 골라낸 무언가는 벌써 장비에 해당되는 것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이미 장비입니다. 위로 갈수록 점점 더 가늘어지는 나무의 꼭대기에 얼마나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그 장비를 쓰는 방법은 기술이고요.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이것이 제 등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밖에 없는 좋은 친구였던 할프단과 함께 론다네 근처에 있는 그 친구 가족의 오두막에 갔을 때였습니다. 작은 개울 위로 협곡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는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할프단과 저는 개울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지요&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몇 살 때였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13살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산 하나에 처음으로 올랐습니다. 전문적인 등반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산과 등반을 연결시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말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것이 왜 중요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글쎄요. 그 위대함&hellip;&hellip; 단순히 크기만이 아니라 그 모양, 그 형태의 위용이랄까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이 스미우바리엔 산(1916미터)은 공격적이지 않으면서도 강하다는 느낌을 주는 아주 넓은 봉우리입니다. 어떤 종류의 공격성도 없지요. 폭이 너무 넓어서 정상 쪽으로 다가가도 그 폭은 서서히 좁아집니다. 할링스카르베 산의 주변부처럼 자애롭지요. 그래서 제 등반은 곧 산에 대한 일종의 숭배를 수반하게 되었습니다. 한 봉우리에 거의 다 올랐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그 너머에 다른 산들이 계속 솟아올라 있었고, 그래서 점차 우리는 모든 산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당시에는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했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물론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나가 아니라 모두 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정상에 도달하는 것 말입니다. 그 얼마 뒤 제가 스무 살이나 그보다 좀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정상에 오르기에는 날씨가 최악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몇 미터는 네 발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매우 중대한 일인 양 말이죠. 여기서 수량의 문제가 다시 나옵니다. 우리는 각 산의 수를 세고, 또한 등반해야 할 거리와 전체 이동거리, 산의 높이 등을 계산해 가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산의 정상에 오르고자 노력했으니까요. 등반해야 할 거리를 계산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마루와 이어진 첫 번째 산의 높이가 2000미터라면, 다음번 산은 300미터밖에 안 될지도 모릅니다. 약간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산에 대한 우리의 숭배였습니다. 따라서 산에서 친구와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지만 실제로 사진을 찍기는 하셨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산 사진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에 사람은 안 나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사람이 없다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당연히 없습니다. 제 친구가 산을 가리고 있으면, 그는 비켜야만 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산은 신성하니까요&hellip;&hellip; 산은 신성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 사진들로 산의 무언가를 포착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진에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 그런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닙니다. 그것은 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의 사진을 찍을 수는 없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렇죠. 하지만 무엇을 볼지 결정할 때라 해도, 거기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것은 선생님이니까요. 사진을 찍는 선생님 자신 말이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가급적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산으로서 산을 경험하고자 노력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산처럼 되어야 하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등반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도 이렇게 생각하셨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처음으로 올랐던 봉우리에 제가 가지기를 원했던 그 모든 자질과 속성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봉우리도 어느 정도는 그랬고요. 아주 뾰족하고 폭이 좁은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봉우리들은 중량감이 있어야 하고,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용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단단히 제자리에 있어야만 하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음. 할링스카르베 산은 빵덩어리처럼 보입니다. 맞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맞습니다, 당신에게는. 저에게는 그보다는 고원에서 솟아오르는 큰 흰긴수염고래 같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무척이나 노르웨이적인 특별한 모양의 산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동감입니다. 산의 모양은 그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이 여기 처음 온 다섯 살 때 그것을 느꼈다고 생각하십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모르겠습니다. 저는 산이 실제로는 땅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닿아 있다고 알았던 것 같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산들은 할링스카르베 산만큼 하늘과 넓게 닿아 있지 않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산은 좋은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대체물 같은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산이 아버지의 대체물이라는 것은 훗날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된 사실 같군요. 그것은 선생님이 본래 잘 원하지 않던 방식, 즉 산을 의인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하지만 산은 일종의 보호자였습니다. 고요하고 독립적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러 주면서, 무엇이 가치 있는지 저에게 보여 줬지요&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hellip;&hellip; 사진에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곧장 전문적인 등반을 시작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13살 때 우리는 어려운 코스에 도전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높이가 5미터도 안 되는 절벽들이 있던 조그만 개울이 기억나는군요. 하지만 15살이 되자 큰 산에서 진짜 등반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탄력성이 전혀 없는 10미터짜리 화재탈출용 로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장비였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부츠가 있었지요. 우리는 곧장 노르웨이에서 가장 높은 산맥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고,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관광객용 산장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주 멋진 사람들이었고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절했지요. 제 절친한 친구와 저는 당시 하고 있던 일에 진심으로 푹 빠져 있었고, 그래서 거기 살고 있던 산사람들에게 깊은 존경과 사랑을 느꼈지요. 물론 그 사람들은 등반할 생각을 결코 하지 않았지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왜 그랬죠?</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등반은 노르웨이에서 산사람들의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등반이란 사냥할 때면 어쩔 수 없이 이따금씩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가 그러한 등반에 미쳐 있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산을 보고 있기 위해, 심지어 잠이 드는 동안에도 산을 볼 수 있도록 텐트에 작은 구멍들을 뚫기도 했지요. 그 구멍들은 닫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밤새 꽁꽁 얼어붙고 말았지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아주 작은 구멍들이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13~20제곱센티미터 정도 넓이의 구멍이었습니다. 제가 저지른 엄청 멍청한 짓들 가운데 최고였지요. 끔찍한 생활이었습니다. &hellip;&hellip; 나중에는 산행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지만요. 산행<sup>mountaineering</sup>이 등반<sup>climbing</sup>보다 더 나은 말입니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산에 대한 우리의 숭배 방식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진 것은 산 자체였으니까요. 열여섯 열일곱 살 때 저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높은 산 106개에 올랐고, 친구는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2년 뒤에는 요양원에 들어갔고, 10년 뒤에는 세상을 떠났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할프단이 유일하게 친한 친구였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아주 친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그의 병이 선생님께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영향이 훨씬 더 컸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압도적인 정도는 아니었지요. 여기서 다시 한 번 거리두기가 나옵니다. 저는 요양원에 있는 그 친구를 만나러 가지 않았습니다. 오슬로에서 고작 1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지요. 그를 방문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한 번도 가지 않았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요양원에서 잠시 나왔을 때는 만났습니다. 그는 사업을 좀 하다가 세상을 떠났지요. 저는 그를 정말로 끔찍하게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위한 일을 충분히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 특징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를 아주 많이 생각했지만 뭘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생각은 하지만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던 것들이 등반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 글쎄요, 제가 읽었던 철학자들은 등반에 필요한 인내심이 거의 없었습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 했던 신비주의자들은 빼고요. 하지만 제가 경험한 하나됨 속에서 전 산과는 대조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예를 들어&hellip;&hellip; 변함없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변함없음. 평등한 마음. 산은 뽐내거나 거만해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눈사태나 낙석을 보내지요. 그냥 이렇게 말하면서요. &ldquo;나를 좋아한다면 결코 낙석에 맞지 않을 거예요. 어디에 가지 말아야 할지, 언제 폭풍이 몰려올지를 배워서 알게 될 테니까요.&rdquo; 산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위험에 빠지는 거라고 저는 평생 생각해 왔습니다. 산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산 전체와 교감할 수 있습니다. 폭풍우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살아남을 것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운이 작용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순히 산에 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에서 죽는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운이 작용할 여지는 많습니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적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산에 올라가서 산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ldquo;여기는 극한의 장소로군. 거칠어. 흥분되는군. 늘 변화무쌍해. 뾰족하군. 아주 끝장이야. 전혀 고요하지 않군.&rdquo; 하지만 선생님은 거기서 변함없음을 발견하시는군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하지만 결코 같지는 않습니다. 산에서 똑같아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사람들은 스스로 발견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그들은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하지요. 저는 거친 장소가 필요했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하지만 고요하고 거친 장소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곳에는 갈등이 없고, 이른바 위험은 있지만 다툼도 없습니다. 반면, 다른 인간들과 함께 있으면 늘 약간의 부조화가 있기 마련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사람들로부터의 도피였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사람들로부터 무척 자주 도피했다고 생각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다시 편안해진 적이 있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과 자연 속에 있을 때에도 일정하게 거리두기를 해야 했죠. 예를 들어&hellip;&hellip; 야생 지역 안에서는 그렇게까지 친밀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데이비드</strong>&nbsp; 개개인과 바깥 세계 사이의 친밀함조차 그렇습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아르네</strong>&nbsp; 아, 네, 자연과의 친밀함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말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친밀함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망쳐질지도 모릅니다.<br /> 저는 늘 우정에 대해 냉담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냉담했지요. 하지만 우정의 규칙들은 저에게 무척이나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우정의 규칙들을 어기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거의 없었지요. 우정의 규칙들은 산에서 맞닥뜨리는 그 무엇보다도 항상 더 무서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7_%EC%83%9D%EA%B0%81%ED%95%98%EB%8A%94%20%EA%B2%83%EC%9D%B4%20%EC%99%9C%20%EA%B3%A0%ED%86%B5%EC%8A%A4%EB%9F%AC%EC%9A%B4%EA%B0%80%EC%9A%94/%EC%9D%B4%EB%AF%B8%EC%A7%802.jpg" /><br /> <br /> <br /> (옮긴이의 말, 본문 1장 전문)<br /> <br /> ※ 참고<br /> <strong>아르네 네스</strong> Arne Dekke Eide N&aelig;ss. 1912~2009<br /> &lsquo;심층생태론&rsquo;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아르네 네스는 20세기 철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르웨이의 철학자이자 산악인이다. 1937년 이래 2000미터 고지의 트베르가스타인이라는 곳에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자신만의 학문 세계를 넓혀 갔지만, 때로는 세상에 나와 자신이 생각한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던 행동가이기도 하다. 아르네 네스는 27살의 나이에 오슬로 대학교 최연소 정교수가 되었으며, 1962년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접한 뒤, 인류와 지구가 직면하게 된 생태 위기를 상아탑 안에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판단 아래, 종신이 보장된 교수직을 내놓고 생태운동에 뛰어들었다. 1970년에는 댐 건설을 막기 위해 암벽에 자신을 묶어 저항운동을 펼치는 등 간디의 비폭력주의와 직접행동을 직접 실천하며 살았다. 젊은 시절에는 논리학, 정신분석학, 과학에 매료됐고, 서른 살 이후에는 자아 탐구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lsquo;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나다.&rsquo;라는 자신의 명제에 답하기 위해 평생에 걸친 연구를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데이비드 로텐버그</strong> David Rothenberg<br /> 뉴저지 공대 인문학부 조교수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보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슬로 대학교에 여러 해 동안 머물며 아르네 네스와 함께 《Ecology, Community and Lifestyle》의 영문판 번역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작곡가이자 재즈 클라리넷 주자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준식<br /> </strong>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받았다. 이후 미시건 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몇 년간 공부했다. 지금은 프리랜서 연구자 및 번역자로 일하며 삶에 관한 고민을 이어 가고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2-01-03 오후 1:30:00‘스틸라이프’ 15회<p><img alt="" width="600" height="853"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5%ED%9A%8C/15%20%EC%9D%B4%EB%AF%B8%EC%A7%80.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첼로 11</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는 마치 손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사라진 그 사람이 서 있기라도 한 듯 허공의 한 점에 시선을 박고 말을 이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 사람은 그냥 거짓말처럼 수증기가 증발하듯 그렇게 사라졌어. 한 두 시간 그렇게 기다리다가 나는 무슨 일이 났다는 생각이 들었지. 경찰을 불러 샅샅이 다 찾아보았지만 그는 없었어.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도넛을 한 상자 들고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어. 어느 날 나는 퇴근을 한 뒤 일하던 사무실 근처를 서성이다가 어느 조용한 모퉁이에 숨어 있는 신비한 가게에 들어섰어. 타로카드와 신비로운 색깔을 띤 돌들을 파는 가게였어. 금박을 두른 오래된 책들에서 나는 책 냄새와 향냄새가 뒤섞여 그 조그만 가게 안은 아주 묘한 분위기를 발하고 있었어.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중세의 점성술에 관한 책을 뒤적이다가 어떤 페이지에 눈이 멈췄어. &lsquo;떠나간 사람을 돌아오게 하는 법&rsquo;이라는 구절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거야. 그 페이지에는 &lsquo;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고 걸을 것&rsquo;이라 씌어 있었어. 그 후 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어. 발가락 사이에 포도를 끼워 넣고 걷는 버릇이.</p> <p style="text-align: justify">포도를 발가락 사이에 끼고 걷는 일은 쉽지 않았어. 어쨌든 그러던 어느 날부터 나는 도넛을 먹지 않게 되었어. 먹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났어. 그리고는 점점 체중이 줄었지. 하지만 포도를 끼워 넣고 아무리 걸어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어.</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시간이 흘러 첼로와 도넛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나는 첼로를 켜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아니 첼로를 판 다음부터 내 마음은 굉장히 홀가분해졌어.</p> <p style="text-align: justify">운이 좋아 규모는 크지 않아도 탄탄한 미국회사에 취직을 했고, 나는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행복했어. 그렇게 살면서 순간순간 네 생각이 났어. 결혼은 했을까? 행복하겠지? 뭐 그런 식으로 말이야. 이렇게 널 갑자기 만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도 모르는 새 철이 콱 들어버린 낯선 그녀를 바라보며 저는 할 말을 잃었어요.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녀도 저도 그때 그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 사이엔 공유할 아무것도 없었어요. 엉뚱하게도 저는 그녀의 오래된 첼로의 향방이 궁금해졌어요. 그녀 자신보다 그녀의 첼로를 더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 수 있는 일이죠.</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랑이 가도 사물의 기억은 남는 거니까요. 문득 그 옛날 음악 선생님의 첼로가 떠올랐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던 날부터 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녀가 연주하던 첼로를 그리워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월이 흘러 거짓말처럼 우연히 부딪힌, 나이 든 그녀가 들고 있던 그 낯익은 첼로도 떠올랐어요. 그 첼로가 뚱뚱한 내 사랑 그녀의 첼로가 틀림없었다는 기억은 제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죠. 아내가 켜던 첼로 소리도 떠올랐어요. 그 외롭고 스산하던 아내의 첼로 소리는 늘 뚱뚱한 그녀를 생각나게 했어요. 하지만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 오래된 그리움의 끝에서 만난 그녀는 내 사랑 뚱뚱한 그녀가 아니었어요.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음률을 연주하던 나만의 그리운 사람도 아니었고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랑이란 참 우스워요. 기억 속의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일 때 우리는 허무해지지만, 동시에 참 홀가분해지죠. 그녀로부터 자유로워진 기분, 이제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출발신호 같은 거랄까요. 그녀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뒤 우리는 헤어졌어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죠, 이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요.<br /> <br /> &nbsp;</p> <div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div>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2-01-02 오후 1:04:00《200》2010년 5월 5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35"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0_%EB%82%B4%20%EC%A7%80%ED%95%98%EC%8B%A4%EC%9D%98%20%EC%95%A0%EC%99%84%EB%8F%99%EB%AC%BC.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5월 5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김나정의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문학과지성사, 2009)을 읽다. - 보통 창작집의 제목은 그 책에 묶인 작품 가운데 한 작품을 골라 표제로 삼는다. 그런데 아홉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의 경우, 표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이 없다. 작가가 낱개로 발표된 작품을 취합한 창작집에, 창작집에는 없는 별도의 제목을 내세우는 일에는 두 가지 의도가 있다. 하나는, 그간의 창작이 하나의 기획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을 넌지시 혹은 명료히 밝히기 위해서. 둘은, 별도의 제목을 통해 개별적으로 발표된 작품에 사후적인 전체성을 부여하거나 그러한 효과를 얻는 것.</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든 창작집이 그렇듯이, 여기 실린 아홉 편의 작품 역시 일정 기간 동안, 불시에 들어온 청탁에 충실히 응한 결과다. 하지만 작가는 앞서 제시했던 두 가지 의도 가운데, 첫 번째 사항을 의식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많은 작품이 &lsquo;환대&rsquo;라는 일관된 주제를 파고들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등단작인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에서 &lsquo;소녀&rsquo;는 여인숙 주인이 주워 온 아이고, 「이것은 개가 아니다」의 &lsquo;개&rsquo; 또한 백수나 마찬가지인 형이 주워 온 개다. 괄호를 뜻하는 약물이 곧 제목인 「&lt;&lt;&nbsp; &gt;&gt;」에서는, 재개발 지역에 마지막까지 남은 구멍가게의 아들(&lsquo;괄호&rsquo;)이 한겨울에 길거리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lsquo;여자&rsquo;(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를 업고 와서 지하실에 눕혔고, 「주관식 생존문제」의 열한 살 난 &lsquo;배철&rsquo;은 두 번 파양 당하고, 세 번째 입양 부모를 만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에 열거된 소녀&middot;개&middot;여자&middot;배철은 차례대로, 여인숙 주인의 성 노리개이자 무급 사환으로 착취당하고, 또다시 길거리에 버려지고, 강간을 당하고 살해되며, 세 번째 입양 부모로부터 파양 당한다. 까닭은 이들이 방문객이 아닌, &lsquo;낯선 이(타자)&rsquo;이기 때문이다. 방문객과 낯선 이를 구별하는 가장 큰 표식은 초대장의 유무다. 방문객은 초대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거주자의 환영을 받는다. 하지만 낯선 이가 가진 특징은 초대장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낯선 이는 거주자로부터 오물이나 악마(범죄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말하자면 소녀&middot;개&middot;여자&middot;배철은 &lsquo;초대받지 않은 손님&rsquo;이다. 나의 거주지를 침입한 그들은 나의 식량과 시간을 빼앗으며, 나의 정체성과 세계의 온전성에 균열을 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낯선 이 또는 초대 받은 손님이야말로 그들을 맞이한 자들의 환대 능력을 시험하는 천사가 아닌가?: &ldquo;낯선 자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알지 못하는 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rdquo;(「히브리서」 13:2)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은, 나를 개방하는 것과 상관되고, 세계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수락하는 것과 상관된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무한이라는 초월적인 비밀의 한쪽 귀퉁이를 만나게 되고, 맛보게 되고, 품게 된다. 그것은 은총이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46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200_%EB%8F%84%EA%B7%B8%EB%B9%8C.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비틀즈의 다섯 번째 멤버」의 여인숙 주인, 「이것은 개가 아니다」의 형, 「&lt;&lt;&nbsp; &gt;&gt;」의 괄호, 「주관식 생존문제」의 세 번째 입양부모는, 낯선 이를 환대하는 법을 몰랐다. 그들은 낯선 이로 다가온 소녀&middot;개&middot;여자&middot;배철을 &lsquo;애완동물&rsquo;로 여겼는데, 동물이란 &lsquo;얼굴을 가진 존재&rsquo; 다시 말해 나와 대등한 타자가 아니다. 그들은 &lsquo;애완&rsquo; 될 때, 겨우 환대를 받지만, 사전적으로 &lsquo;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rsquo;을 가리키는 애완<sup>愛玩</sup>이, 인간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차가운 환대에 지나지 않는다. 「&lt;&lt;&nbsp; &gt;&gt;」에서 괄호는 길에서 업어온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자를 그야말로 지하실에 감금하거니와, 꼭 지하실에 감금하지 않았더라도 소녀&middot;개&middot;배철은 모두 &lsquo;내 지하실의 애완동물&rsquo;이다. 바로 이런 뜻에서 『내 지하실의 애완동물』이란 제목은, 앞서 말했던 작가의 두 가지 의도를 잘 충족시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환대라는 주제가 지방의 항구 도시나 서울의 재개발 지역보다 더 큰 공간으로 심화&middot;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 작품이 「하멜른」이다. 조그마한 시골 읍내(?)로 중국인 가족이 들어와 중국 식당(중국집)을 열지만, 읍내 사람들은 &ldquo;쥐 고기를 다져 만두소를 채운다&rdquo;는 소문으로 중국집을 문 닫게 하고, 어느 겨울에는 저수지의 살얼음이 깨어져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중국 아이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한다. 이 작품은, 환대라는 주제가 얼마나 오늘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얼핏 보여준다. (왜 &lsquo;얼핏&rsquo;인가 하면, 중국인 가족의 일화는 작품의 첫머리에만 잠시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이 일화는, 이 작품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이다) 세계화와 다민족&middot;다문화 시대에, 환대는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윤리의 시험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의 마지막 날을 그리고 있는 「너희들」, 현실의 고단함으로 인해 지구의 종말을 고대하게 된 「우리 동네 꽃도령」, &lsquo;행운의 편지&rsquo;를 패러디하여 불특정 다수의 독자(?)를 저주하는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바둑이도?」, 어린 남동생이 유괴당하여 피살되자 모든 여자를 유괴범으로 의심하게 「구」는, 환대가 무너진 세계의 끔찍한 살의<sup>殺意</sup>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환대가 없는 세계는 차라리 어서 끝장나기를 바라야 하는 세계며, 그 세계에서는 모든 타인이 죽기를 고대하거나, 살인을 저지른 악인으로 보인다.<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2-01-02 오전 11:24:00《199》2010년 5월 4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9_%EB%B0%94%EB%8B%A4%EC%99%80%20%EB%8F%85%EC%95%BD.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4일</span></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엔도 슈사쿠의 『바다와 독약』(가톨릭출판사, 2001)을 읽다. - 옮긴이는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1958년에 발표되어 신쵸사 문학상과 마이니치이 출판 문화상을 수상한 이 작품이 &ldquo;아직 번역 소개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다. 왜냐하면, 엔도 슈사쿠의 문학사<sup>文學史</sup>에 있어서 『침묵』과 『깊은 강』만큼 문제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기 때문이다&rdquo;라고 썼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 작품은 네 명의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묶은 『춘금초/ 갓 쓰고 박치기도 제멋/ 바다와 독약/ 타인의 얼굴』(한길사, 1981, 한길세계문학6 &middot; 일본문학선1&rsquo;)에 실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규슈<sup>九州</sup> 대학 의학부에서 실제로 행해진 미군 포로의 생체해부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작중 설명에 따르면, 규수의 F시에 소재한 F대학의 의학부가 같은 F시에 주둔하고 있는 서부군의 위탁을 받아 실시한 미군포로 생체해부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 혈액에 어느 정도의 생리 식염수를 주임하면 죽는가.<br /> 2. 어느 정도의 공기를 혈관에 주입하면 죽는가. <br /> 3. 양쪽 폐를 어느 정도 절단해 내면 죽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작중에 따르면, 생체해부에 참여하고 말고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이 실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그 일이 &ldquo;사람을 산 채로 죽&rdquo;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알았고, &ldquo;평생 괴로워할&rdquo;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것을 &ldquo;운명&rdquo;으로 치부하거나, 어차피 &ldquo;서부군에서는 총살형으로 결정&rdquo;난 포로라는 합리화와 &ldquo;그 포로 덕에 몇 천 명의 결핵 환자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죽인 게 아니고 살린 거야&rdquo;라는 도착된 논리로 실험에 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들이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저버리고, 금지된 생체 실험에 뛰어들게 된 배경은 따로 있다. 미군 포로 생체 실험을 하기 직전, F대학의 의학부 부장인 오오스기 교수가 뇌일혈로 죽었다. 그러자 제1외과 과장인 하시모토 교수와 제2외과의 부장인 곤도 교수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하시모토는 입원중인 오오스기의 친척인 다베 부인을 수술대에서 죽게 만든다. 오오스기의 문하생인 내과계 교수들의 표를 얻기 위해, 무리하게 수술을 감행하다가 더 살 수 있는 환자를 죽인 것이다. 신망이 떨어진 하시모토는 서부군의 위세를 빌려 자신을 압박하는 곤도에게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곤도측이 참여하고 있는 생체 실험에 자진해서 합세하게 된다. 하시모토가 과장으로 있는 제1외과에 속한 조교수와 연구원들은, 교수 임명권을 쥐고 있는 그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하고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81"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9_%ED%95%98%EC%96%80%EA%B1%B0%ED%83%91(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의과 대학이나 종합병원이 거대한 &lsquo;권력 암투&rsquo;의 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방의 인기를 모았던 &lt;종합병원&gt;이나 &lt;하얀거탑&gt; 같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익히 보았다. 그런 뜻에서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인물들이 생체 해부라는 반인륜적 범죄로 치달아가는 이야기 전개는 그리 낯선 게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에는 생체 해부에 참여하는 두 명의 연구원이 나온다. 동기생인 스구로와 도다가 그들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스구로와 달리 의사의 아들이면서 대학의 교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도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함께 생체해부에 참여했던 동료와 자신의 돌아보며 &ldquo;벌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이나 사회의 벌일 뿐, 자신의 양심은 아냐&rdquo;라면서, 타락한 자신의 양심을 위무한다. 다시 말해, &lsquo;누가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외부에서 오는 처벌이 아니라면, 양심 따위는 아무 상관없다&rsquo;라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는 루스 베네딕트의 논란 많은 『국화와 칼』이 지적했던 사항으로, 그 책은 &lsquo;내면의 죄의식을 모르는 대신, 외향적인 수치&rsquo;에 민감한 게 일본 문화의 특성이라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는, 루스 베네딕트의 &lsquo;죄의식 없는 일본인관&rsquo;에 상당히 근접한다. 이 책 앞머리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 보면, 엔도 슈사쿠가 했다는 이런 말이 인용되어 있다: &ldquo;나는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고, 기독교의 전통도 문화도 역사도 전혀 없는 일본에서 태어났습니다. &lsquo;신<sup>神</sup>(唯一神)&rsquo;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본인은 죄의식에 대해서도 기독교와 상반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인에게 죄의식이 없다고는 결코 단정하지 않지만, 죄에 대한 반응은 기독교를 믿고 있는 서구인과 우리 일본인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rdquo; 엔도 슈사쿠는 죄의식 없는 일본 문화를, 일본에 없는 &lsquo;원죄 의식&rsquo; 탓으로 여긴다. 이 독후감에서 생략된 도다의 청소년기는,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도 알지 못하는 &lsquo;범죄 성향(원죄)&rsquo;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을 수긍하고, 되풀이 내면화 하면 죄의식이 되는 데, 애초부터 그것(원죄 의식)이 없는 문화에서는 체면치례가 되고 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ldquo;내 머리는 아사이나 도다처럼 대학에 남을 머리가 아냐&rdquo;라고 체념하면서 &ldquo;산 속 요양원 같은 데서 결핵의로 일하면 그것으로 족하다&rdquo;고 자족해온 스구로는, 거절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왜 생체해부에 참여했을까? 먼저 &ldquo;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세상사인 것이다&rdquo;라는 순응적인 운명론을 들 수 있다. 그리고 &ldquo;평범이 첫째가는 행복&rdquo;이라는 소시민적 행복론도 원인이 된다(이 작품이 발표된 몇 년 뒤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의 참관기에서 &lsquo;악의 평범성&rsquo;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하지만 엔도 슈사쿠가 가장 두려워한 대죄는 &ldquo;나로서는 신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rdquo;라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이 태도에 비하면, F대학 외과 의사들을 생체해부로 내몰았던 내부 상황은 물론, 앞의 두 태도마저, 얼마든지 용서될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도대체, &lsquo;바다&rsquo;는 무엇이고, &lsquo;독약&rsquo;은 또 무엇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렵지만, 미모의 여의사가 범죄를 탐닉하는 『모래꽃』(고려원, 1995)은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도다의 청소년기를 연장한 작품으로, 작가의 원죄관을 되풀이한 작품이다.&nbsp;</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2-29 오후 3:16:00백남호의 ‘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 이야기’<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8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_%ED%91%9C%EC%A7%80.jpg"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세상 주인공들 이야기 들어 볼래요</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일하는 엄마 아빠들을 제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만들었어요. 이 책을 만들면서 그동안 만났던 몇몇 분들이 떠오르네요. 저는 그동안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늘 1톤짜리 용달차에 짐을 꽉꽉 실어 올리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다녔죠. 파주에 있다가 결혼을 해서 서울 고척동으로 이사를 오고, 거기에서 두 해쯤 살다가 다시 고향 시골집으로 집을 옮겼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삿짐 옮겨 주시는 아저씨 옆에 앉아 차를 타고 갈 때, 그 아저씨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아저씨가 젊었을 적에는 일을 마친 뒤에 꼭 바나나를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가셨대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집에 있는 가족에게 바나나를 사 가는 아저씨의 젊은 모습을 그려보면서, 나는 집에 돌아갈 때 손에 무엇을 들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짜장면 배달을 하시는 분은 배달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부심이 가장 커요.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죠. 제가 기억하는 짜장면 집에는 나이가 많고 배달 일을 오래 하신 아저씨가 계셨어요. 그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주방에서 요리 일을 도왔어요. 틈틈이 주방장에게 요리를 배우면서 배달을 한 거죠. 나중에 짜장면 집을 차릴 거라고 했어요. 힘든 배달 일을 하면서 더 큰 꿈을 가지고 배우는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p> <p style="text-align: justify">회사에서 쫓겨났다가 긴 싸움 끝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게 된 아줌마들을 축하하는 행사에 찾아간 적이 있어요. 오랫동안 싸워 오신 아줌마들 모습은 우리 엄마, 친구 엄마, 옆집 아줌마 모습이었죠. 투쟁이란 단어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었어요. 도대체 회사가 저 아줌마들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오랜 시간 싸워 왔을까 하고 저는 생각했죠. 오랜 싸움 끝에 집으로, 가족한테로 마음 편히 돌아가는 아줌마들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만들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은 것은 우리 둘레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를 그린다는 것이었어요.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늘 조연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 주인공인 분들의 이야기입니다.</p> <p style="text-align: right">백남호</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80"><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사</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땀 흘리며 일하는 우리 엄마 아빠를 만나 보세요</span></strong></span></span><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주와 왕자. 동화, 만화, 드라마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주인공입니다. 왕의 아들이나 딸이 펼쳐 가는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상상할 수 있는 힘과 꿈을 키워 주지요. 그런데 왕자나 공주 이야기만 넘쳐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데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1세기인 지금 왕자나 공주로 태어날 가능성은 바닷가의 숱한 모래 가운데 한 알 정도로 작습니다. 요즘에는 왕이나 여왕 대신 그 자리를 부자가 차지하기도 합니다. &lsquo;부자 아빠&rsquo;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부자를 부러워하는 세상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자기를 낳고 길러준 엄마와 아빠에게 실망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이 책은 소중합니다. 너무 늦었다는 아쉬움마저 듭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나오는 엄마 아빠는 왕도 왕비도 아닙니다. 부자도 아닙니다. 미용사인 엄마, 문구점을 하거나 떡볶이를 파는 아빠를 비롯해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어른들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 생각해 보세요. 만일 미용사 엄마가 없다면, 문구점 아빠가 없다면, 아침마다 우유를 집 앞에 놓거나 배고플 때 짜장면 배달하는 아빠가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과 김치는 어디서 나오는가요? 쌀과 배추 농사를 짓는 아빠와 엄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용품이나 입고 있는 옷, 살고 있는 집 모두 마찬가지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왕이나 여왕은 없어도 되지요. 실제로 대다수 나라에 없어요. 부자 또한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학용품과 옷 만드는 공장의 노동자는, 쌀과 배추 농사짓는 농민은,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땀 흘리며 일하는 우리 모두의 엄마와 아빠는 정말이지 없으면 안 될 분들이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그 엄마와 아빠에게 어느 공주나 왕자보다 귀하고 예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아름다운 분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그 메마른 가슴을 이 책은 단비처럼 촉촉이 적셔 줄 게 틀림없습니다.</p> <br /> <p style="text-align: right">손석춘 언론인</p>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12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B%AF%B8%EC%9A%A9%EC%82%AC%EC%95%BC).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13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B%AF%B8%EC%9A%A9%EC%82%AC%EC%95%BC).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14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B%AF%B8%EC%9A%A9%EC%82%AC%EC%95%BC).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15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B%AF%B8%EC%9A%A9%EC%82%AC%EC%95%BC).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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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22p(%EC%9A%B0%EB%A6%AC%EC%95%84%EB%B9%A0%EB%8A%94%EB%96%A1%EB%B3%B6%EC%9D%B4%EB%A5%BC%ED%8C%94%EC%95%8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23p(%EC%9A%B0%EB%A6%AC%EC%95%84%EB%B9%A0%EB%8A%94%EB%96%A1%EB%B3%B6%EC%9D%B4%EB%A5%BC%ED%8C%94%EC%95%8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72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A%B3%B5%EC%9E%A5%EC%97%90%EC%84%9C%EC%9D%BC%ED%95%B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73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A%B3%B5%EC%9E%A5%EC%97%90%EC%84%9C%EC%9D%BC%ED%95%B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8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74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A%B3%B5%EC%9E%A5%EC%97%90%EC%84%9C%EC%9D%BC%ED%95%B4).JPG"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75p(%EC%9A%B0%EB%A6%AC%EC%97%84%EB%A7%88%EB%8A%94%EA%B3%B5%EC%9E%A5%EC%97%90%EC%84%9C%EC%9D%BC%ED%95%B4).JPG" /><br /> (머리말 전문, 본문 일부)<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작가&nbsp;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09" height="15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6_%EC%9D%BC%ED%95%98%EB%8A%94%20%EC%9A%B0%EB%A6%AC%20%EC%97%84%EB%A7%88%20%EC%95%84%EB%B9%A0%20%EC%9D%B4%EC%95%BC%EA%B8%B0/%EC%A0%80%EC%9E%90%20%EC%9D%B4%EB%AF%B8%EC%A7%80_155.jpg" />백남호</strong><br /> 경기도 가평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서 만화를 공부했습니다. 생태적 가치와 대안 교육을 지향하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가평에서 따뜻한 사람 이야기와 생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린 책으로는 『야, 미역 좀 봐!』 『소금이 온다』 『파브르 곤충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9 오후 12:30:00건틀릿의 ‘커넥팅’<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5_%EC%BB%A4%EB%84%A5%ED%8C%85/%EC%BB%A4%EB%84%A5%ED%8C%85%ED%91%9C%EC%A7%80.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Chapter 1 </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웹 2.0 시대, 창조하고 소통하라</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그려 보고자 한다. 바라기는, 이 책이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이 지닌 힘에 관해 이야깃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날 창조성이 날마다 꽃을 피우는 곳이 바로 그곳일 테니. 사람들은 오랜 세월 무언가를 만들어 왔고 만들기에 담긴 뜻을 생각해 왔다. 만들기 그리고 창조를 통한 연결, 곧 &lsquo;커넥팅&rsquo;이 지닌 힘은 온라인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일상의 온갖 활동으로 뻗어 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부터 내가 펼치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앞뒤가 분명하게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시대의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의 중세 대성당에 대한 논평이 내가 유튜브 동영상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하면, 독자들은 선뜻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 19세기 사회주의자이자 태피스트리 제작자인 윌리엄 모리스가 120년 전에 웹 2.0 일반과, 무엇보다도 위키피디아에 담긴 만들기와 나누기 정신의 청사진을 그렸다고 하면 여러분은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가톨릭 성직자였던 급진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40년 전에 인간의 행복에 꼭 필요한 조건을 설명했는데, 그것은 오늘날 경제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연구와도 꼭 들어맞는다. 우리는 그것을 뜨개질, 게릴라 가드닝, 창조적인 소셜네트워크(SNS)와 관련지어 살펴볼 텐데, 그 순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자수를 &lsquo;저항의 무기&rsquo;라 일컬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 로지카 파커와 뜨개질하는 사람들, 배지 만드는 사람들, 여러 블로거들을 두루 만나 볼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어떻게 경이로움과 힘, 가능성을 주는지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영문 원서의 제목이 바로 &lsquo;만들기는 커넥팅이다&rsquo;(Making is Connecting)이다. 무척 간단한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이들을 생각하면서 만들기와 커넥팅, 이 두 가지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lsquo;만들기는 커넥팅이다&rsquo;라는 제목이 의미 있고 훨씬 만족스러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들기가 커넥팅인 이유는 무엇보다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middot;&nbsp;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려면 재료나 아이디어 또는 둘 다를 결합해야 하기 때문이다.<br /> &middot;&nbsp;흔히 창조 활동은 어느 순간 사회적 차원으로 이어지고 우리 또한 다른 이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br /> &middot;&nbsp;무언가를 만들고 그걸 세상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우리가 사회 환경과 물리적 환경에 연결되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7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5_%EC%BB%A4%EB%84%A5%ED%8C%85/%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_%EC%9D%B4%EB%B0%98%20%EC%9D%BC%EB%A6%AC%EC%B9%98.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물론 이런 견해에는 반박이 따르고 예외도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를 펼쳐 가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어쨌거나 위의 세 가지가 나의 기본적인 인식이다. 이 책은 여러 가지를 고민한 끝에 거둔 열매이므로 짧게나마 그 내용을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나는 사회학자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들어와 있는 미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그냥 좋았다. 하지만 15년 전, 아니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에게 익숙한 주요 미디어는 거대 전문 기업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사람들이 기업이 생산한 미디어를 이용하여 무엇을 하는지 연구하자니 조금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꽤 능동적이고 생각이 깊으며 상상력이 돋보이는 활동도 있고 평범한 활동도 있었다. 하지만 창조성을 높이 평가할 만한 활동이 하나도 없었던 까닭은, 그것이 창조적인 작업과 관계가 있더라도 한결같이 &lsquo;다른 사람&rsquo;이 만든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고맙게도 월드와이드웹이 인기가 치솟으며 본질에서부터 주류가 되었다. 웹은 다양성과 상상력의 세상을 활짝 열었고, 평범한 사용자들과 점점 늘어나는 전문가들이 콘텐츠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웹은 미디어를 만들고 더 나아가 미디어를 쉽게 공유하며 다른 이들과 연결되는 기회를 주었다. 웹이 주는 이 기회는 특징과 규모에서 비교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무척 신나는 연구 주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 이렇게 흥미로운 세계는 나 또한 참여할 만한 재미난 곳이었다. 나는 무언가 만드는 것을 늘 좋아해 왔는데, 그렇다고 작품의 관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웹에서 글과 사진과 그림을, 나아가 웹 사이트 자체를 꾸며서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참으로 쉬웠다. 게다가 반응까지 뒤따랐다. 사람들은 내 웹 사이트를 구경하고 친절한 댓글을 남겼으며 자신들의 웹 사이트에 링크를 걸었다. 이로써 나는 만들기가 커넥팅임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셋째, 나는 앞에서 말한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 연구하려 했다. 하지만 사람들한테는 별로 재미난 일이 아닐지도 모르는데, 그저 이야기나 나누면서 내 뜻을 이루자고 &lsquo;인터뷰&rsquo;를 강요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몇 해 동안 &lsquo;창조적인 연구 방법&rsquo;을 발전시켜 보았다. 연구 과정의 하나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만들어 보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은 비디오, 그림, 예쁜 상자 또는 레고 작품 따위를 실제로 만들며 상념에 빠졌다. 만들기 과정은 곰곰이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 경험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기회가 되었다. 이 새로운 경험은 여러 차원에서 사람의 뇌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유도하는 대화에서는 나오기 힘든 통찰력에 이르게 한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라고 했을 때, 이런 장점이 특히 잘 나타났고 효과도 컸다. 구체적인 얘기는 이 책보다 먼저 펴낸 《창조적 탐험》에 모두 담았다. 이렇게 연구를 하면서 생각하기와 만들기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과정임이 내게 분명하게 다가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여러 재료를 만지작거리다가 고르고, 이렇게도 붙여 보고 저렇게도 붙여 보고, 갖고 놀다가 쓸모없는 건 치워 버리면서 작업에 열중해 갔다. 어느새 그것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작품에 가까워졌다. &lsquo;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완성해 가는&rsquo; 게 아니었다. 그것은 발견의 과정이고, 만들기를 통해서 생각을 펼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lsquo;시간&rsquo;을 들여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면서, 사람들은 또렷하게 생각하거나 느낄 기회, 대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어떤 이미지나 실물을 갖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더욱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연결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마지막으로 얘기하려는 것은 어쩌면 앞의 세 가지보다 중요할 듯싶다. 무엇보다 나는 &lsquo;만들기는 커넥팅이다&rsquo;라는 아이디어를 스스로 탐색해 보고 싶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웹 2.0, 함께 가꾸는 텃밭</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누군가가 월드와이드웹을 발명해 냄으로써 창조 활동이 인간의 삶 속에 갑자기 나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웹은 평범한 이들이 쉽게 자기가 만들어 낸 창조성의 열매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이롭고 신나는 문화 공간을 함께 만들게 해준다. 이 과정을 뒷받침한 것이 &lsquo;웹 2.0&rsquo;의 등장이었다. 앞으로 이 책에는 웹 2.0이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깐 &lsquo;웹 2.0&rsquo;이 뜻하는 바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웹 2.0은 그저 하나의 테크놀로지나 비즈니스 모델도 아닐뿐더러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웹의 후속 편도 아니다. 웹 2.0은 곧 고유의 철학이자 방법론을 의미한다. 나는 웹 2.0을 설명할 때, 내가 직접 레고로 만든 뜰과 텃밭을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로 보여 주곤 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중반까지, 웹이 등장한 처음 열 해 남짓 동안 웹 사이트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텃밭과 다를 바 없었다. 예를 들어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웹 사이트가 하나의 밭이라면, 내 웹 사이트(Therory.org.uk)는 딴 곳에 떨어져 있는 밭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 웹 사이트를 만들어 자기가 쓴 시를 올린다면 그 또한 또 다른 밭이 될 것이다. 누구나 웹 사이트들을 방문할 수 있으며, 웹 사이트들은 저마다 정교한 구조 속에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콘텐츠를 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런 웹 사이트들은 기본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으며 울타리로 가로막혀 있다. 물론 이 모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서 &lsquo;잘못된&rsquo; 점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온갖 개인, 크고 작은 집단 또는 조직이 온라인 공간을 꾸며 가는 플랫폼으로 흠잡을 데 없이 기능한다. 바로 이 모델이 우리가 &lsquo;웹 1.0&rsquo;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 웹 2.0은 공동 텃밭과 같다. 저마다 자기 텃밭만 가꾸는 게 아니라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며 작업에 힘을 보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사실 팀 버너스리가 1990년에 월드와이드웹을 개발할 때 품고 있던 의도였다. 그는 웹 탐색이 검색과 읽기에 그치지 않고 쓰기와 편집으로 이어질 거라 상상했다. 따라서 초창기의 웹은 버너스리의 구상과 다른 것이었고, 최근에 와서야 이 발명가의 뜻대로 웹이 꽃을 피운 셈이다. 그러고 보니 1999년에 나온 팀 버너스리의 책 《월드와이드웹》(한국경제신문사, 2001)을 읽었을 때가 또렷하게 떠오른다. 읽기&middot;쓰기 모델에 관해 읽었을 때, 나는 아이디어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현실성이 없고 어이없다고 느꼈다. 과연 말대로 이루어질까? 나라면 몇 안 되는 방문자들이 시답지 않은 얘기를 쏟아 놓는 꼴을 보겠다고 몇 시간씩 공들여 웹 페이지를 꾸미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그때까지 네트워크의 힘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그때는 다른 이들도 대부분 그랬다. 우리는 &lsquo;저기 밖에 있는&rsquo; 모든 이들을 &lsquo;구경꾼&rsquo;으로 여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온라인 사이트와 온라인 서비스가 이 잠재적 협력자들의 네트워크를 감싸 안을수록 더 힘을 얻게 된다는 생각이 웹 2.0의 핵심이다. &lsquo;웹 1.0&rsquo; 모델이 그저 관객들을 웹 사이트로 끌어오는 방송 채널로 인터넷을 바라보았다면, 웹 2.0은 사용자들이 웹 사이트에서 놀도록 만든다. 유튜브, 이베이, 페이스북, 플리커, 크레이그스리스트, 위키피디아 들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거기에 이바지함으로써 존재하고 가치를 드러낸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이바지할수록 더욱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이 웹 2.0의 핵심이다. 웹 2.0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팀 오릴리는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lsquo;웹 2.0&rsquo;의 수준을 네 단계로 배열했다. 이 네 단계(0~3단계) 구조에서 &lsquo;3단계&rsquo; 응용프로그램은 &lsquo;넷(net)에서 작동하고, 그것이 사람들 또는 응용프로그램들 사이에서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와 결속으로부터 근본적인 힘을 얻을&rsquo; 수 있다. 이에 반해 &lsquo;0단계&rsquo; 응용프로그램은 CD에서도 똑같이 구현되는 프로그램이다. 1단계와 2단계는 0단계와 3단계의 가운데 단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웹에 다가가는 방식으로서 웹 2.0은 온라인 네트워크 구성원들의 집합적 능력을 이용하여 특별히 영향력 있는 자원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웹이라는 영역을 넘어서 생각하면, 웹 2.0을 좀 더 확대해서 적용해 보는 것도 꽤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 사람들의 열정이 모여 이루어지는 집합적인 활동, 그리고 그 부분들의 총합보다 훨씬 훌륭한 무언가가 되는 모든 공동의 활동에 대한 은유로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찰스 리드비터의 《집단 지성이란 무엇인가》(21세기북스, 2009)와 클레이 셔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갤리온, 2008),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 2011) 같은 책은 위키피디아를 본보기로 들고 있다. 위키피디아는 자발적인 협력자와 전문가가 온라인에서 만나 함께 만든 방대한 백과사전이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힘을 보태지 않았다면 위키피디아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짜로, 아무런 대가 없이 힘을 보탠다. 물론 참여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나 위키피디아 항목의 작업 기록 어딘가에 사용자 이름이 오름으로써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은 별개로 하자. 찰스 리드비터와 클레이 셔키는 이어서 백과사전을 만든 위키피디아의 본보기가 다른 모든 분야에도 두루 퍼져 나갈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이때 위키피디아가 의미하는 것은 높은 참여도와 부지런한 협력이다. 하지만 사실 그들이 늘 관심을 두고 있는 건 &lsquo;다른 모든 분야&rsquo;가 아니라 &lsquo;온라인의 다른 모든 분야&rsquo;이다. 위키피디아는 참여도가 무척 높고 부지런한 &lsquo;온라인&rsquo;에서 이루어지는 협력이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은유의 도약은 웹 2.0을 넘어 실생활로 나아가는 데에 있다. 위키피디아로 다른 인터넷 서비스를 해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와 그 복잡한 구조를 해석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우리는 이 책에서 웹 2.0에 열광하는 이들에게 이미 친숙해진 만들기와 공유, 협력이 뜻하는 바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활동과 관련하여 더 넓은 맥락에서, 더 큰 문제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다시 말해 가상의 온라인 사교 활동을 넘어서 현실의 사회문제에도 유효한 것인지 알아본다. 이는 우리가 &lsquo;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rsquo; 문화에서 벗어나 &lsquo;만들고 행동하는&rsquo; 문화에 좀 더 다가가고 있다는 주장 또는 바람으로 이어진다. &lsquo;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rsquo; 태도는 대개 학교에서 주입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반짝거리는 새로운 소비자 문화의 마력과 텔레비전에 의해 굳어진다. &lsquo;만들고 행동하기&rsquo;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슬로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수동성, 능동성, 창조성</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언제부턴가 교육이 학교 제도로 제도화되면서 배움은 교사가 이끌어 가는 과정이 되었다. 교사는 지식 조각들을 어린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넣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교육에 이런 공식만 있어 온 건 아니다. 학생들이 자기만의 눈으로 예술과 시, 과학을 바라볼 수 있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교사도 있고, 또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혁신적 교육 사상이 싹을 틔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학교교육의 틀은 지식을 통째로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뒤 학생들이 그 지식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나중에 시험을 치르는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국은 1988년에 국가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부터 이런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에 따라 7세, 11세, 14세 아동은 시험을 치러야 했고, 16세에는 중등교육 학력평가 시험을, 18세까지는 고등교육 학력평가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영국 전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기록하고 &lsquo;학교 순위&rsquo;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장 잘 도와주는 길은 시험에 대비하여 &lsquo;정답&rsquo;을 학생들에게 꼭꼭 채워 주는 것이 되었다. 교사와 언론인 같은 이들은 안타깝게도 이런 교육 방법의 한계를 몰랐다. 오히려 보수 언론이 드디어 &lsquo;학업 수준&rsquo;을 감독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면서도, 이런 학력평가와 성적 순위를 도입함에 따라 교육이 질이 낮아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학력평가 점수가 점점 높아지기는 했으나, 교육의 질은 갈수록 낮아졌다. 마침내 14세 학생이 치르는 학력평가가 2009년에 사라졌다. 하지만 폐지 목적은 학생들의 짐을 덜어 준다기보다 시험 제도에 필요한 행정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2001~2002년에 &lsquo;낙제 학생 방지법&rsquo;이 발의되고 제정되었다. 법의 명칭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이 법이 시행됨으로써 미국의 학교는 반드시 정기적인 학력평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시험 점수는 높아지는 듯한데 학습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단체가 많아진 것이다. 2010년 오바마 대통령이 제안한 교육제도 개선책은 재정 지원 방식의 중대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만, 정기적인 학력평가에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학력평가는 《뉴욕타임스》가 &lsquo;학생들의 학력평가 결과를 교사들에게 책임 지우려는 정책&rsquo;의 부활이라고 보도했다시피, 교육의 중심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세기는 단연코 &lsquo;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rsquo; 시대였다. 더욱이 후반기로 가면 여가라는 것은 집 안에 틀어박혀 밖에 나가지 않고 오랜 시간 붙박이처럼 같은 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이건 비관적인 시각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이다. 2010년에 미국 사람들은 하루 평균 네 시간 반이 넘도록 텔레비전을 보았다. 이전에도 수십 년 동안 줄곧 그래 왔다. 영국은 하루 네 시간이 조금 안 된다.9 물론 대단한 시간이다. 또 이 시간은 평균값이므로 이보다 적게 보는 사람들에 비해 평균 시간보다 많이 보는 사람들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미디어는 메시지다&rdquo;라는 마셜 맥루언의 유명한 정의는 다채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이 말은 무엇보다도 텔레비전 같은 하나의 미디어가 우리 삶에 들어와서 삶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를 강조하고 있다. 미디어가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건, 미디어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이라기보다는 미디어가 우리 일상을 다시 짜도록 만드는 방식 때문인데, 그 방식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매우 뛰어난 통찰이다. 흔히 우리가 미디어 &lsquo;콘텐츠&rsquo;를 갖고 생각하는 미디어의 &lsquo;영향&rsquo;은 판단하기가 몹시 어렵고 대체로 서로 관련이 없으며 다른 영향력들과 뒤섞여진 채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방송국은 더욱더 재미있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상당한 삶을 소비하게 만든다. 이것을 생각하면 텔레비전이 전반적으로 미친 &lsquo;영향&rsquo;은 확실히 &lsquo;어마어마한&rsquo;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날마다 평균 네 시간씩 텔레비전을 보다니,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과 비교하면 인류가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이 놀라우리만치 크게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텔레비전이 잡동사니로 가득하다거나 사람들이 텔레비전만 보는 바보라는 말은 아니다. 날마다 텔레비전에서 유익하고도 재미난 프로그램을 네 시간씩 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여가를 창조적 또는 사교적으로 잘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지나간 세월에 견주었을 때 인류가 여가를 보내는 방식이 눈에 띄게 달라진 것도 사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에서도 밝혔듯이, 사람들이 여가를 이처럼 수동적으로 보내도록 한몫 거드는 것이 바로 소비자 문화이다. 1940년대에는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그 뒤로도 많은 비평가들이 줄곧 말해 왔듯이, 현대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둔 건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 의지를 억누른 채 억지로 산업의 수레바퀴에 올라타도록 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편리하고도 상큼한 물건들을 마구 쏟아 낸 뒤 우리에게 써 보게 하고 가게에서 구입하면 된다고 살살 꾀었던 것이다. 그 상품들은 행복은 아닐지언정 우리에게 만족을 주었다. 예쁘게 포장된 물건의 유혹에 무감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 새로운 느낌과 반짝거림은 적어도 한순간 고단함을 잊게 해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페티시&rsquo;라는 개념은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페티시는 성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페티시란 특별한 사물에 집착함으로써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극복하는 걸 뜻한다. 마르크스의 경우 페티시는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 가치라는 걸 잊고서 그것이 독립적이고 실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방식을 설명한다. 서로 연관된 이 두 개념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페티시를 보편적이고도 일상적인 방식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것은 소비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기쁨을 얻고, 그런 행위가 어리석거나 무분별하지만 여전히 기쁨을 준다는 걸 알며, 그 기쁨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다시금 잊어버리는 방식이다. 이 두 개념 사이에서 텔레비전과 소비 지상주의는 사람들을 무감각하고 &lsquo;만족스런&rsquo; 몽상에 빠뜨린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그 몽상 속에서는 당연하게도 환경오염을 비롯한 사회문제들이 골치는 아프지만 먼 일로, 무엇보다도 &lsquo;다른 누군가의 문제&rsquo;로 받아들여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좀 더 낙관할 수 있는 이유는 &lsquo;만들고 행동하는&rsquo; 문화에 나날이 참여가 높아지는 현상이다. 이런 태도는 &lsquo;가만히 앉아&rsquo; 있는 수동성을 거부하고, 창조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개인이 성장하는 기회를 좇는다. 2008년 교육평론 저술 《학교가 왜 필요한가?》에서 가이 클랙스턴은 일부 교사들이 &lsquo;가만히 앉아 지시를 받는&rsquo; 학교 문화를 거부하고, 학생들에게 만들고 행동하는 것과 관련한 과제를 내주고 있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함께 어울려 질문을 던지고 서로 다른 탐구 전략을 내세우며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간다. 배움이란 것이 모든 이가 참여하는 쉼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사들도 이를테면 벌을 치거나 악기를 배운다든지 하면서 학습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이런 교실은 칠판에 &lsquo;가장 올바른 답&rsquo;들만 빼곡히 적혀 있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연구와 실험, 나아가 그릇된 실험 결과마저 감싸 안아 주는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 &lsquo;직접&rsquo; 체험하며 배우고 탐구하고 질문하는 태도를 기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디어의 경우도 인터넷에 바탕을 둔 상호작용 쪽으로 분명히 옮겨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시간을 쓰고 관계를 맺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 사람 가운데 적어도 4분의 3이 일상적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고,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상적인 사용자이다. 케이서가족재단은 미국 전역의 젊은이들을 조사한 연구 결과를 2010년에 자료집으로 펴냈다. 이 연구에 따르면, 12~18세 청소년 가운데 74퍼센트가 소셜네트워크 웹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려놓았고, 28퍼센트가 블로그를 개설했으며, 25퍼센트는 비디오를 포스팅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온라인 소셜네트워크는 매우 인기가 높아, 페이스북 같은 곳에 계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다. 해마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온라인 토론에 참여하며 정보와 음악, 사진을 서로 나누고 자신들이 만든 비디오를 업로드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일이 늘어나는 주요 원인은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의견과 자료를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다. 웹 2.0의 인기는 이 대목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이 사용하기 쉬운 온라인 도구의 사용법을 배우고 서로 가르쳐 주며 함께 자료를 만들고 나눔으로써 사람들은 전자 미디어로 무엇을 하고 거기서 무엇을 얻는지가 완전히 달라졌다. 또한 온라인에서 힘을 보태 함께하는 것들의 &lsquo;범위&rsquo;도 놀랄 만큼 다채로워졌다. 한편 학계는 정치 활동이나 언제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 같은 훨씬 &lsquo;진지한&rsquo; 활동에 좀 더 관심을 두는 편이다. 하지만 온라인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과 관련된 커뮤니티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프라인에서는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비롯해 그것과 관련된 클럽, 전시회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잡지 《메이크》가 소개하는, DIY 기법과 기계, 로봇공학과의 연계 작업도 관심을 끌고 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소비하는 물건의 양을 줄이고 다시 사용하거나 재활용하는 등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한다. 이를테면 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공동체가 힘을 모아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찾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웠다. 그리고 곧 살펴보게 되겠지만, 웹은 오프라인 활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 조직의 도구로서 중요한 노릇을 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상에서 창조하라</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만드는 사람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보람을 준다. 앞으로 나는 이 책에서 &lsquo;창조성&rsquo;이란 낱말과 &lsquo;일상의 창조성&rsquo;이란 구절을 아무 거리낌 없이 쓸 것이다. 창조성을 명쾌하고도 단순하게 정의하는 건 즐거우면서도 때로 길이 가로막혀 답답한 일이기도 하다. 이제부터 그 고민을 시작하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해 나가 보도록 하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다른 이들은 &lsquo;창조성&rsquo;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아마도 오늘날 창조성 연구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일 것이다. 그의 연구서 《창의성의 즐거움》(북로드, 2003)은 더없이 창조적인 이들, 그러니까 발명과 창조로 노벨상을 탄 이들을 비롯하여 창조자로 이름을 날린 이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구태의연하기도 하고 엘리트주의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근거만큼은 충분하다. 칙센트미하이는 사회학적으로 창조성에 다가갔는데, 그 방법론은 결코 구태의연하거나 관습적이지 않다. 그것은 창조적 &lsquo;천재&rsquo;라는 고전적 인식을 거부하고 우리가 창조성이라 부르는 것이 몹시 협력적인 환경에서 나오는 것임을 드러낸다. 창조적 결과물은 번갯불이 치듯 찰나에 영감을 얻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두고 물리학, 시, 건축 또는 그 어떤 분야에서든 &lsquo;상징적 영역&rsquo;에 통달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해 온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인, 집단, 조직의 따뜻한 격려가 한몫을 거든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다시 말해 문화와 과학,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창조성이 어떻게 샘솟는지 사회학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데 관심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적어도 내가 이 책에서 정의하는 창조성은 문화 속에서 하나의 상징적 영역을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새 노래, 새 아이디어, 새 기기는 모두 창조성과 관계가 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창조성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인정하고 우러러본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런 관점에 따르면 창조성은 상징적 규칙을 품고 있는 문화, 상징적 영역에 새로움을 보태는 사람 그리고 혁신을 인정하고 입증하는 전문가들의 현장,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체제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따라서 창조적인 개인은 이 세 요소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칙센트미하이의 정리는 창조가 일어나는 특정한 배경과 그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른 주요 인물들에게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부러져 쓰러지는 소리는, 숲속에 그 소리를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기는 수용적인 애호가가 없으면 사라지고 만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렇게 되면 창조성의 기준이 너무 높아진다. 먼저 눈에 띄게 독창적인,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 눈에 띄게 독창적인 것임을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다른 이들은 &lsquo;그저 그런&rsquo; 사람들이어서는 안 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영역의 거물들, 선구적이고 이름난 사상가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삶이 만만치 않은 이유는 어떤 특정 영역에서 이미 유명해진 인물들이 자신의 높은 지위에 연연해 앞길이 훤한 새 인물을 구태여 따뜻하게 맞아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창조성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고, 칙센트미하이는 그 정확한 렌즈로 세상에서 인정받는 중요한 혁신을 낳는 사회 조건을 분석해 냈다. 창조성을 다룬 다른 저자들 또한 칙센트미하이의 정의와 접근법을 따라 &lsquo;더 낮은 수준의&rsquo; 창조성을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ldquo;두드러진 문화적 또는 과학적 혁신은 어떻게 나타나는가?&rdquo;라는 질문에 도움이 되는 렌즈가, 이 책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일상적인 창조성을 연구하는 데에 꼭 들어맞는 렌즈는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마디로 우리는 창조가 얼마든지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우리 가운데 누구든, 예상 밖으로, 하지만 놀랍고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어떤 성취를 두고 그것이 노벨상을 탔기 때문에 &lsquo;창조적&rsquo;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평생 한두 번밖에 이루지 못할 일이라서 창조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창의적인 인간이므로 창조는 오히려 우리가 더 자주 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넓은 의미에서, 창조란 어떤 일을 하는 방법, 우리가 글로 쓰고 만들어 내는 많은 것들, 경영이나 자기표현 그리고 재치나 통찰력 넘치는 말하기에 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일상적인 생각들까지 아우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일상적인 수준까지 내려오면 우리가 창조라 부르는 것의 경계가 조금은 흐릿해진다. 예를 들어 내가 공룡 모양으로 생일 케이크를 만들었다고 하자. 아마도 나는 무언가를 &lsquo;창조&rsquo;한 기분이 들 것이다. 여기에는 독자들도 동의하리라. 하지만 내가 10년 동안 똑같은 공룡 케이크를 만들어 온 생일 케이크 전문가라고 털어놓는다면 독자들은 그것을 창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내 창조성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 이를테면 가게에서 산 장식물로 공룡의 눈과 비늘을 꾸민 것을 독자들은 &lsquo;반칙&rsquo;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인터넷에서 다른 공룡 케이크 사진을 보고 따라한 것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쉽게 집착한다. 하지만 《창조적 탐험》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8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고자 하면 논쟁은 끝이 없다. 어떤 것은 창조적&lsquo;이고&rsquo; 어떤 것은 창조적&lsquo;이지 않다&rsquo;고 하는 주장이 맞선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창조성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이 사람의 본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측면의 하나라는 것이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하지만 창조성을 다룬 연구서의 대부분은 사실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표적인 인물들에게서 다채로운 정의를 이끌어 낸 찰스 럼스덴은 합리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ldquo;내가 연구서에서 본 창조성의 &lsquo;정의&rsquo;는 &hellip;&hellip; 그 창조자들의 독특한 흔적을 품고 있으면서도 어느 만큼 서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이 바로 창조성이라는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중에 3장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 접근법이 안고 있는 문제는 최종생산물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이다. 창조는 &lsquo;과정&rsquo;이고 &lsquo;느낌&rsquo;이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창조는 새로운 터전을 내부에서 닦는 일이 된다. 어디론가 가서 전에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느낌이랄까. 그로부터 다른 이들이 인정해 주는 결실에 다다르는 것이다. 하지만 결실보다 중요한 건 창조 과정 자체이고, 창조성은 내부로부터 가장 잘 입증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는 이 정도로 얘기해 두자. 3장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창조성을 새로이 정의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일상의 창조성이 지니는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 실생활에서 겪는 경험 그리고 오늘날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온라인의 창조성을 모두 다룬다. 하나의 영역과 다른 영역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공예와 DIY 활동이 지니는 가치와 윤리, 이로움에 관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들어봄으로써 오늘날 웹 2.0의 창조성에 관해 배울 수 있으리라. 또 그 반대 방향으로도 통찰을 얻게 되리라. 이를 위해 관련된 이론과 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은 모두 근거가 튼튼하고 현실적이며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이 과정 자체가 특별한 창조 활동의 경험으로 이어져 나간다면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책은 몇몇 기술자, 장인, 블로거, 유튜브 제작자들에 관한 사례연구 모음집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중심 내용이 아니다. 다양한 사례를 만날 곳은 많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나서 거기서 추려 낸 일화를 바탕으로 책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 책은 자서전과 일반론을 한데 엮은 책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을 읽고 싶은 독자들이 있다면 훌륭한 책 두 권을 추천하고 싶다. 이 두 권은 내가 이 책을 탈고했을 즈음 출간되었다. 철학자이자 오토바이 수리공인 매슈 크로퍼드의 《손을 써서 일하기》와 잡지 《메이크》의 편집장인 마크 프런펠더의 《손으로 만든》이 그것이다. 앞의 책은 미국에서 《일하면서 배우기》로 출간되었다. 또 리처드 세넷의 뛰어난 저작 《장인》(21세기북스, 2010)도 함께 추천하고 싶다. 세 권 모두 &lsquo;손으로&rsquo; 무언가를 만드는 일의 소중함과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지혜와 감정을 알려 준다. 또한 우리가 물질세계와 관계를 맺고 그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그 물질세계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도 어느 만큼은 일화가 담겨 있고 자전적인 내용도 조금 들어 있지만, 내가 중요하게 말하고 싶은 건 무언가를 만드는 일의 소중함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우리 스스로 &lsquo;미디어&rsquo; 문화를 만들고 함께 나누는 일을 살펴볼 것이다. 그것은 텔레비전 방송국이나 인쇄기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를 손에 넣는 일이 아니라 저음질 유튜브 동영상, 특이한 블로그, 스스로 만든 웹 사이트 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예나 목공처럼 꼭 &lsquo;손으로&rsquo; 다듬고 빚는 일은 아니지만, 나는 이런 것들 역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과 다를 바 없는 의사소통의 한 형태이자, 더 나아가 거기에 새겨지는 인격과 개성, 고유한 본성을 매개로 우리를 다른 이들과 연결시켜 준다고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나는 수많은 창조 사례를 샅샅이 살펴보지 않는다. 나는 &ldquo;일상의 창조성이 왜 중요한가?&rdquo;라는 좀 더 폭넓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것은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따라서 &lsquo;정치적&rsquo;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내 의도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스스로 &lsquo;비판적&rsquo;이고 &lsquo;정치적&rsquo;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에게 이런 생각을 내비쳤을 때, 학자들은 내가 하는 일을 기껏해야 곁들이 정도로 생각한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학자들이 정부의 방송 규제나 정당 관련 문제를 비롯하여 &lsquo;현실의&rsquo; 문제들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사람들이 날마다 어여쁜 물건이나 재미난 비디오 소품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이런 일들은 즐거운 것이긴 하지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문제와는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굳이 갈래를 짓자면 &lsquo;문화적&rsquo;인 일이다.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시시한 오락물을 보는지 아니면 그 시시한 오락물을 직접 만드는지, 스스로 꽃을 기르거나 장난감 또는 장갑을 만드는지 아니면 슈퍼마켓에서 그것들을 사는지, 직접 노래를 작곡하는지 아니면 남의 노래를 구입하는지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거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만들어진 결과물 하나하나가 퉁명스러운 관찰자의 눈에는 사소해 보일지라도. 어쩌면 독자들도 내가 위에 든 본보기들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 아님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시시한 오락이나 꽃, 장갑, 노래는 마음에서 지워 버린다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기업이 공급하는 물건을 소비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만들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다. 조금 더 확장하자면, 그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온전하고도 새로운 방식에 이르는 길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방법에서 실제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상의 창조라는 생각이 더욱 발전하여 뜻있고 정치적이고 아주 중요한 본보기가 된 사례가 바로 트랜지션 타운 운동이다.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인류가 크게 기대고 있는 석유가 고갈됨에 따라서 앞으로 인류는 참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lsquo;창조적&rsquo;이므로 함께 어울려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 바로 트랜지션 타운 운동이다. 함께 어울려 산다는 생각으로 환경에 해를 끼치거나 다 써서 사라지는 것에 크게 기대지 않는, 새롭고도 유쾌한 삶의 방식을 계획하고 생각을 모으면 인류는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이 운동의 취지이다. 낙관주의와 창조성을 바탕으로 한 이런 생각이 현실로 실현되고 있으며, 지금도 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널리 퍼지는 중이다. 로브 홉킨스의 《트랜지션 입문》, 션 체임벌린의 《트랜지션 발전 과정》 같은 책들과 웹 사이트 <a href="http://www.transitionnetwork.org">http://www.transitionnetwork.org</a>는 트랜지션 타운 운동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트랜지션 타운 운동은 이 책의 생각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훌륭한 본보기이다. 하지만 그다지 &lsquo;정치적&rsquo;인 콘텐츠가 담겨 있지 않은 온라인 비디오나 만들기 사이트, 집에서 벌이는 일상의 이벤트, 전문교육을 받지 않는 이의 예술적 시도, 뜨개질로 올빼미를 뜨고 태양열 발전으로 빛을 내는 전구로 눈을 다는 사소한 노력, 그리고 대량생산된 물건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든 노력 또한 이 책에선 훌륭한 본보기가 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트랜지션 타운 운동의 핵심 낱말 가운데 하나인 &lsquo;복원력&rsquo;과 &lsquo;창조적 역량&rsquo;을 갖추어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첫머리에서 인터넷은 잠깐 뒤로 미루고, 무언가를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철학적&middot;정치적&middot;실용적 해설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2장에서는 빅토리아시대의 장인이자 사상가인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3장에서는 오늘날의 만들기와 DIY 철학, 활동, 동기를 살펴본다. 4장에서는 다시 인터넷으로 돌아가서 온라인 환경에서 &lsquo;만들기는 커넥팅&rsquo;임을 생각해 본다. 그다음으로 일상의 삶에서 사회적 결속과 협력적 프로젝트의 소중함으로 눈길을 돌린다. 5장은 행복을 다룬 오늘날의 연구 작업을 고찰하고, 6장은 다른 이들과 끈끈하게 이어 주는 사회적 접착제인 &lsquo;사회자본&rsquo;을 살펴본다. 7장은 창조적 표현과 변화를 이끌어 내는 도구를 이야기하면서 이반 일리치의 철학을 충분히 살펴볼 것이다. 8장은 웹 2.0에 대한 비판과 옹호에 눈을 돌려, 어떤 주장에는 동의하고 어떤 주장에는 반대하게 되는 이유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9장은 이 모든 논의를 간추려 결론을 내린다. &lsquo;만들기는 커넥팅&rsquo;의 다섯 가지 중심 원리를 정리하고, 미디어, 교육, 노동, 정치와 환경의 관점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밝혀 둘 것이 있다. 본문에서는 웹 사이트 주소인 URL을 쓰지 않았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이야기하면서 굳이 &lsquo;(<a href="http://www.youtube.com)&rsquo;">www.youtube.com)&rsquo;</a>이라고 따로 쓰지 않았다. 검색으로 사이트를 찾아가기가 무척 쉽기 때문이다. 또 내가 프리사이클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독자들이 사는 나라의 프리사이클 사이트일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 스스로 검색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프리사이클 사이트를 찾아가길 바란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는 URL은 표기했다. 예를 들어 <a href="http://www.landshare.net">http://www.landshare.net</a>은 <a href="http://www.landshare.com">http://www.landshare.com</a>과 헷갈리지 않도록 써 두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의 웹 사이트 주소는 <a href="http://www.makingisconnecting.org이다">http://www.makingisconnecting.org</a>이다.&nbsp;<br /> 사이트에는 비디오, 보충 자료, 관련 링크, 그 밖에 정보가 실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alt="" align="left" width="182" height="15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5_%EC%BB%A4%EB%84%A5%ED%8C%85/%EC%A7%80%EC%9D%80%EC%9D%B4_%EC%82%AC%EC%A7%841.jpg" />데이비드 건틀릿 David Gauntlett</strong><br /> 웨스트민스터대학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이자 커뮤니케이션미디어연구소(CAMRI) 공동대표. 뛰어난 연구 업적으로 예술인문연구평의회(AHRC)와 공학과학연구평의회(EPSRC)에서 여러 차례 연구 지원을 받았고, BBC, 레고, 테이트미술관을 비롯한 여러 창조적인 기관과 공동으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미디어와 정체성을 다루는 웹사이트 Theory.org.uk와, 창조성과 시각 미디어를 연구하는 웹사이트 ArtLab.org.uk를 운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움직임의 경험』(Moving Experiences, 1995), 『미디어, 젠더 그리고 아이덴티티』(Media, Gender and Identity, 2002), 『창조적 탐험』(Creative Explorations, 2007) 등이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수영</strong><br /> 진실한 책 한 권이 가진 힘을 믿는 전문번역가이다. 한 권의 책을 옮길 때마다 많은 독자들과 연결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쌓아 나간다. 『조화로운 삶의 지속』, 『사라진 내일』, 『사코와 반제티』, 『새로운 빈곤』, 『황금의 땅, 북극에서 산 30년』,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누가 99%를 터는가』를 우리말로 옮겼고, 이뉴잇 옛이야기를 엮은 『빛을 훔쳐 온 까마귀』를 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8 오전 11:22:00송경동의 ‘꿈꾸는 자 잡혀간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5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4_%EA%BF%88%EA%BE%B8%EB%8A%94%20%EC%9E%90%20%EC%9E%A1%ED%98%80%EA%B0%84%EB%8B%A4/%EC%86%A1%EA%B2%BD%EB%8F%99%20%ED%91%9C%EC%A7%80_600.JPG" /><br /> <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작가의 말을 대신하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여기는 감옥, 나는 나비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유치장 생활도 벌써 6일째. 내내 잠만 잤다. 이틀 전 들어온 세관법 위반 관련 사내도 내내 잠만 잔다. 아직 인사도 못 해봤다. 어제 마지막 쫑파티를 하러 부산에 왔던 희망버스 &lsquo;폐인&rsquo;들은 모두 잘 돌아가셨는지 궁금하다. 구속영장도 떨어졌으니 나도 이제 다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가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나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섞인 기대들도 있었다. 김진숙 씨와 그의 동료들도 크레인에서 내려왔고, 그동안 무지한 검경에 의해 체포 영장 집행과 구속 영장 신청이 이어졌지만 모두 기각됐다. 주체들도 다 나오는데 연대했던 사람들이야, 하는 자연스런 생각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보다 사태의 원인이었던 정리해고 문제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그 부당함이 어느 정도 밝혀졌기에 희망버스 운동을 과도하게 탄압할 명분이 없어졌다는 판단도 있었다. 한진중공업 노사는 부속 내용으로 &lsquo;희망버스 관계자들에 대한 민형사상 고소고발을 취하&rsquo;한다고 합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2011년 11월 15일 오전 11시, 5개월여에 이른 농성과 수배 상태를 접고 공개 기자회견 방식을 통해 밖으로 나섰을 때도 경찰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너무도 평화롭게 서울역으로 이동해 고속열차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고, 우리를 환영해주러 나온 부산 희망버스 분들과 함께 오케이오병원에서 85호 크레인 농성자들과 상봉 후 부산 영도경찰서로 향했다. 그 뻘쭘함이라니.</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평화로울 일을 몇 달 동안 &lsquo;체포&rsquo;하겠다고 벼른 까닭이 뭔지가 의문이었다. (공지영 소설가와 백원담 교수는 부산역에서 우리를 낚아챌지 모른다며 열차 내리는 곳 바로 앞까지 나왔다. 그 따뜻함에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역시 기대는 금물. 검찰은 출두 당일 기자회견 자료까지 들이대며 나와 진보신당 비정규노동실장인 정진우 씨를 잡아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보내주면 다시 희망버스를 타고 쌍용차로 갈 사람들이라고, 문제가 해결이 되었는데도 19일에 희망버스가 오고, 다시 그 자리를 승리대회로 만들 사람들이라고 왜곡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일은 그간 고생했던 크레인 농성자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희망버스 승객들이 수변공원에 모여 마음과 음식을 나누자는, 그야말로 집회도 시위도 아닌 평화로운 사람들이 만나는 마당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난 무엇보다 우리가 나갈 수 없는 까닭이 쌍용자동차로 희망버스 승객들이 가주면 좋겠다는 발언 탓이었다는 게 가슴 아프다. 간 것도 아니고 가자고 한 얘기 정도가 구속 사유가 되는 것도 그렇고, 19명이라는 희생자가 나온 사회적 조문의 장소를 언급했다는 게 무슨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는 것도 웃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등 일부 언론들에서는 아예 대놓고 희망버스는 쌍용으로 가야 한다고 쓰고 있다. 트위터리안들은 한 달여 전부터 도배 수준이다. 이렇게 희망버스 배후들, 기획자들의 폭은 넓어졌다. 더더욱 희망버스에는 수만여 명의 승객들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탑승했기에 누구만이 운전사요, 기획자며, 어떤 이들은 지시와 동원의 대상이었다고 말할 수 없음에도 자꾸 무슨 조직 사건 만들 듯이 있지도 않거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이나 관계를 부풀리고 왜곡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아니면 기획단의 몇몇 &lsquo;깔깔깔&rsquo;들이 맘 좋게 내가 다 조직했고, 지시했고, 동원했으니 &lsquo;독박&rsquo; 쓰겠다고 해서도 안 되는 운동인 것이다. 특히나 한 개인들의 구체적인 혐의에 대해서도 아직 그 법적 논거를 다투지 않은 상태에서 희망버스 전체를 무슨 범죄단체라도 되는 양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그리고 그 참여 여부가 걱정되기에 구속 영장을 발부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인권과 법리조차 망각한 반헌법적 행위인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여튼 이래저래 다시 얼마 동안은 국민 세금을 축내며 부산의 구치소 신세를 져야 하나 보다.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 동안 집이 따로 없었다. 병원이거나 요양지이거나 농성장이거나 수배처이거나&hellip;&hellip;. 이젠 더는 갈 곳이 없어 빵이 거처가 되는가 보다. 뭐 별 특별한 일도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대공분실 세 번 가고, 징역 두 번 살고, 수배 5년 지내다 보니 머리 희끗한 쉰셋이 되어 있더라&rdquo;는 저 &lsquo;김진숙&rsquo;도 있지 않는가. 새도 둥지를 틀지 않는 35미터 철 구조물 위에서 309일을 살다 내려와야 하는 새로운 인류도 있지 않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슬프고 가혹한 일도 &lsquo;승리&rsquo;라고 눈물 콧물 찍찍 흘려야 하는 우리, 가파른 삶들을 생각하면 별 힘든 일도 아니다. 지금도 &lsquo;전쟁 같은 밤일&rsquo;을 치러야 하는 무수한 노동하는 삶들, 최소한의 존재 조건도 얻지 못한 채 &lsquo;비정규직&rsquo;이라는 신종 노예의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900만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 특별히 가혹한 일도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히려 슬픈 것은, 다시 한순간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지나갔고, 그 시간 동안 더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 있었을 많은 순간들을 놓치고 왔다는, 반성과 후회다. 모두의 일이라는 집단논리로 다시 어떤 한 소중하고, 여리고, 오히려 살아 있는 가슴들을 죽인 적은 없었나. 작고 옅고 소박한 참여가 어떤 이에겐 최선임을 함부로 하진 않았나.</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과라는 한 길에 빠져 과정이라는 수만 갈래의 길을 무시하진 않았을까. 왜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양보하거나 나눠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무겁고 어렵게 했을까. 오만가지 안타까웠던 순간들이 아쉽고, 아깝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답답하긴 하지만 갇혀 사는 것도 다르게 생각해보려 한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에 갇혀 있고, 어디에서 자유로운가. 따져보면 눈앞의 현상과는 전혀 다른 진단이 나온다. 내가 아직도 답답한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무지한 철창 몇 가닥 때문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오히려 내 해방터이고, 과분한 수양처이고, 잠깐의 휴식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내가 혹독하게 갇혀 있는 감옥은 &lsquo;나&rsquo;라는 이 지지리도 못난 에고의 감옥이다. &lsquo;너&rsquo;라는 집착의 무덤이다. 현상 앞에서 늘 본질적 물음들을 후퇴시키는 삶의 보수주의이고, 내 안에 도사린 어떤 역사와 진보에 대한 패배의식이다. 결코 깨끗하게 털어내버리지 못하고 음습한 내 영혼이 기숙처로 삼는 이 뿌리 깊은 자본의 문화, 가부장제의 문화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상 내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런 일상의 달콤한 감옥으로부터 내가 탈출을 감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탈을, 다름을, 전복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문 앞에서 내가 나의 탈출을 게으름과 미련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이 일상의 감옥을 부숴야 한다. 내 의식을 꽁꽁 묶어두고 있는 이 무지를, 게으름을, 관습적 틀을, 두려움을 깨부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순해지고 편해진다. 그래서 구속이다, 아니다로 그들이 묶을 수 있는 것은 미안하지만 단 한 가지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히려 이 시간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그들은 내가 더 문화적으로 단련될 수 있는 시간을, 인간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을 내게 주었다. 이미 내 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도 그렇지만, 이런 단순 감옥으로는 묶을 수 없게 벌써 나는 다양한 역사적&middot;사회적&middot;문화적 시공간들 속에 무한히 열려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으로 돌아오자면 여하튼 희망버스가 계속 달리자고 하는 한 난 아마도 계속 이곳에 잡혀 있어야 하나 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다. 희망버스가 첫 마음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무슨 정연한 논리와 정세가 아니라 사람의 뜨거운 마음들로 연료를 채워, 숫자를 떠나 쌍용으로 재능으로 콜트&shy;콜텍으로 현대차 비정규직 현장 등으로 씽씽 달리면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연대가 필요한 곳에 그냥 연대하러 가는데 무엇이 더 필요하냐는 그 간명한 마음들이 살아나면 좋겠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무슨 죄냐고 무슨 잘못된 일이냐고, 그리고 그게 무슨 그리 큰 어려움이냐고&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민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는 99퍼센트의 사회적 자산들이 원래의 사람들 몫으로 나눠지기만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현대 민주주의가 그나마 실험된 게 몇백 년인데 계속 이런 내용적 봉건영주들의 시대를 가만히 놔둘 거냐고&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세상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 아이들에게 더하기, 빼기의 단순 정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얘기할 거냐고 사람들이 마구 얘기하면 좋겠다. 희망버스를 출발시켰던 우리 지역에서만큼은 다시는 조남호 같은 이들이 없게 만들겠다는 지역 희망의 연대운동들이 만개하면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는,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p> <br /> <p style="text-align: right">2011년 겨울<br /> 송경동</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img alt="" width="600"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4_%EA%BF%88%EA%BE%B8%EB%8A%94%20%EC%9E%90%20%EC%9E%A1%ED%98%80%EA%B0%84%EB%8B%A4/%EC%86%A1%EA%B2%BD%EB%8F%99%20%EB%8F%84%EB%B9%84%EB%9D%BC.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3부. 이상한 나라</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span></span></strong></p>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br />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br />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br /> 또 뭐라고 써야 하지<br /> 무슨 말을 할 수 있지</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잘린 손가락과 발들을 위로하면 될까<br /> 강압으로 목과 허리에서 탈출한 디스크 추간판들을 위로하면 될까<br /> 모든 부러진 뼈, 찢어진 눈, 터진 머리, 이완된 근육<br /> 닳아진 무릎, 손상된 폐를 위무하면 될까<br /> 압사, 추락사, 감전사, 질식사, 쇼크사, 심근경색, 유기용제 중독으로<br /> 하루에 여덟 명씩 일수 붓듯 착실하게 죽어간다는<br /> 모든 산재 열사들을 추모하면 될까</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식당아줌마, 중국집배달부, 퀵서비스, 가정노동 <br /> 모든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에게도<br /> 180만 특수고용노동자들에게도<br /> 농업노동자들에 불과한 영세농민들에게도<br /> 산업폐기물이 된 노령인들에게도<br /> 산재보험 적용을 해달라고 간구하면 될까<br /> 산재 민간감시원을, 산재요양 기간과 적용 범위를 좀 더 늘려달라고<br /> 산재 주무 기관을 좀 더 민주화시켜달라고 청원하면 될까</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을 써달라는 얘길 듣고 <br />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앉아 있다<br /> 사무직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br /> 서비스직 노동자들은 산재가 없을까<br /> 전문직 종사자들은 산재가 없을까<br /> 내 아내에게는 내 아이에게는 산재가 없을까<br /> 사랑하는 사이에는 산재가 없을까<br />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br /> 비정규직으로, 실업으로 쫓겨나는 것은 산재 아닐까<br />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은 산재가 아닐까</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의 모든 시도 실상은 산재시다<br /> 내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br /> 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br /> 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br /> 내가 자연을 그리워할 때 그것은<br /> 모든 조화로움으로부터 쫓겨난<br /> 근본적인 산재에 대한 항변이다</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보라, 저 거리에 나온 모든 상품들도<br /> 불구의 몸으로 산재를 앓고 있다<br /> 보라, 저 거리에 선 모든 나무들도<br /> 팔다리 잘리며 산재를 앓고 있다<br /> 보라, 저 들녘 강물의 모든 실핏줄들도<br /> 검은 가래에 막혀 산재를 앓고 있다<br /> 보라, 저 하늘 위에서 내리는 모든 눈도 비도<br /> 산재에 물들어 있고, 보라 <br /> 저 하늘의 오존층도 우리의 폐처럼<br /> 숭숭 구멍 뚫리고 있다</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모든 산재를 보상하라고 <br /> 우리는 말해야 한다<br /> 이 모든 산재를 지속가능한 상태로 되돌리라고<br />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누구에게? 저 자본에게<br /> 우리의 잘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아<br /> 닳아진 무릎뼈와 폐혈관과 혼미해진 정신들을 모아<br /> 배부른 저 자본에게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br /> 이윤이 중심이 아니라 <br /> 건강과 안전과 평화와 연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br /> 가장 악독한 산재, 이 눈먼 자본주의를 추방해야 한다고<br />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인 착취와 소외의 세계화를 막아야 한다고<br />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을 파탄으로 내모는 <br /> 이 불안정한 세계를 근절해야 한다고</span></span></p> <span style="color: #996633"><br /> </span>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br />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br />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br />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br />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br />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br />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br />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br />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br />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들<br /> <br /> </span></span></p> <p style="text-align: right;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996633"><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squo;차별 없는 서울행진단&rsquo;이 구로공단에서 집회를 연다 해서 잠깐 들렀다가 잘 아는 형을 만났다. 오십하나. 대학 중퇴 후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평생 마치코바(영세 공장)와 건설 현장 일용 노동일을 하며 사는 형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엔 못 알아보고 옆 사람하고만 인사를 나눴다. 힐끗 쳐다보는데 자세히 보니 형이었다. 못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게 얼굴이 뇌수술 받고 난 사람 모양으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부채 모양의 시민선전용 선전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도 잘 몰라본 거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니, 형 이게 웬일이에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기가 막혔다. 일용으로 나가 용접일을 하는데 육중한 철구조물인 주차 파렛트가 덮쳐왔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주차 파렛트가 무너지는 것은 처음 봤다고 한다. 다른 게 무너지는 것은 많이 봤다는 말이니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코뼈만 주저앉았다고 한다. 못 피했으면 압사다. 내일 수술인데 좀이 쑤셔 나왔단다. 태어날 때부터 지체 장애인 아이를 숙명처럼 키우며 평생이 고생인 형이다. 운동이 뭐라고 좀 쉬시지, 라는 말이 입 밖까지 나왔다가 들어갔다. 그 마음을 어떻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다행히 산재 처리는 받게 되었다고 한다. 생각하면 큰일인데도 몇 마디 의례적인 인사만 건네고 덤덤히 앉아 함께 집회를 보았다. 십수 년을 보아도 별 달라지지도 않는데 그렇게 우리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 집회를 본다. 도처에 고난뿐인 사람들로 둘러싸여 사는 삶인지라 웬만한 아픔에는 심드렁해지기도 한다. &ldquo;죽진 않았어. 그러면 됐어.&rdquo; 하기도 한다. &ldquo;또 죽었대. 왜 죽었대. 그냥 살지.&rdquo; 하기도 한다. 왜 이렇게 감성마저 메말라져 버리고 말았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한 선배의 권유로 산악회 모임에 처음 가보았다. 치악산이었다. 산 초입부터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스물 초반부터 서른 초반까지 종일 쭈그려 앉아 하는 용접과 배관일을 하며 두 무릎과 허리가 다 망가져 있었다. 산소통과 알곤통과 LPG통과 오비키(목재의 한 단위로 건설 현장에서 쓰인다)와 파이프관과 앵글더미와 철근더미와 7인치 그라인더와 함마드릴과 너무 친하게 지냈던 결과였다. 잔업철야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야리키리(공사 현장 은어로 단축공정을 일컫는다)를 너무 좋아했던 까닭이다. 종일 허리 한번 펴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용접 불빛만 쫓던 결과다. 작년 초엔 두 다리를 무거운 부대자루처럼 질질 끌고 다니다 숙원이었던 무릎 관절 수술을 받던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며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겉은 말짱한 청년인데 근육과 관절은 노쇠해 버린 내 청춘이 서글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상한 대로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니 오른쪽 무릎이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내색할 수 없는 고통이 점점 심해졌다. 푸르른 산도, 화기애애한 관계들도 모두 아득히 멀어져갔다. 빨리 평지가 나오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튼튼하게 서 있는 나무가 부러웠고,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는 나뭇잎새들이 부러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과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산재를 겪다 보면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부러뜨리고 싶지 않다. 그들에겐 인재가 산재일 터다. 식은땀을 흘리며 혼몽하던 밤들이 생각나 맑은 시냇물을 흩트려놓고는 미안해서 빨리 정화되기를 소망해 본다. 못 하나를 박을 때도 정확히 가격해서 몇 번에 박아주고 싶다. 너무 많이 아프지 않게. 철근 하나도 한곳만을 너무 많이 사용해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세상 자본가들은 같은 인간인데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같은 돈을 주고 산 기계는 오히려 무척이나 아끼지만 인간은 마모될 때까지 쓰고 싶어 한다. 안전을 위한 조치보다는 피치 못하게 책임져야 할 산재가 일어나면 그때 보상이나 해주고 끝나길 원한다. 그것이 일상적인 안전유지 비용보다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색을 낸다. 그렇게 생산된 모든 가치가 사유화된다. 모든 걸 가지면서 그들이 지는 책임은 불과 일부분이다. 국회의원들은 그런 조삼모사의 산재보상법을 만들며 생색을 낸다. 똑같은 강도, 도둑놈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라.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산재 아닌 것이 있는지. 모든 실업도 산재다. 모든 파탄 난 사랑의 많은 부분도 산재다. 가정불화의 대부분도 산재다. 독거노인도 거개가 산재다. 모든 교통사고의 주요인도 산재다. 모든 생태위기도 뿌리는 산재다. 이런 사회다 보니 가지지 못한 자들은 축복 어린 아이를 가지면서도 어떤 재난을 떠올린다. 삶 자체가 재난의 연속이다. 모두 무한정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의도된 결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그럼에도 아주 작은 것들만을 요구한다.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라도 최소한의 책임을 다해주기를. 누구라도 명백한 산재에 대해서는 보상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조금은 더 안전하게 착취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아주 소박한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 소박한 부탁마저 번번이 배신당하고 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이 세계 산재노동자 추모의 날이란다. 삼가는 마음을 보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세계 자본주의 추모의 날은 언제나 오는 것일까. 그런 날도 빨리 와서 시 한 편 써보면 참 좋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br /> 1993년 4월 28일 태국의 심슨인형 제조공장에서 188명의 노동자들이 죽은 대형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지 모른다고 평소 공장 문을 닫아두는 바람에 탈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매년 4월 28일을 &lsquo;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rsquo;로 정해 세계 노동자들이 함께 산재 추방을 외치고 있다. 현재 13개국에서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110개국에서 매년 공동행사를 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서문, 3부 1장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송경동</strong><br />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에서 활동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을 냈으며, 제12회 천상병시문학상과 제6회 김진균상, 제29회 신동엽창작상 등을 수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7 오전 11:35:00《198》2010년 5월 2일<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34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8_%ED%97%A4%EB%A1%A4%EB%93%9C%20%ED%95%80%ED%84%B0%20%EC%A0%84%EC%A7%91_210.JPG" /><br /> </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2일</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해롤드 핀터의 초기 세 작품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것 가운데 하나는, &lsquo;잡담&rsquo;이다. 세 작품 모두 연극이 시작되면서 음식에 관한 잡담으로 일관한다. 까닭은 육체적 인간에게 &lsquo;음식&rsquo;이란 세계의 총화나 다름없으며, 때문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타인이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이다. 음식은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을 식탁에 함께 앉게 할 뿐 아니라, 이질적인 문명과 문명을 통하게 만든다. 뿐 아니라, 어느 종교에서든 인간이 신을 만나는 가장 일상적이고 성스러운 순간 또한 신을 화육의 형태(음식)로 만나는 일이다. 우리는 성스러운 음식을 통해 신을 영접하게 되고, 하나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핀터의 등장인물들은 음식을 얘기하면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핀터의 작품에 나오는 음식(밥상머리 화제)은 주인공들을 함께 묶어주지도 않으며, 오히려 주인공들의 소외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방」(『해롤드 핀터 전집&middot;4』, 평민사, 2002)과 「생일파티」(『해롤드 핀터 전집&middot;1』, 평민사, 2002)에 나오는 음식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별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음식을 매개로 여성이 남성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아주 미약한 저항).</p> <p style="text-align: justify">연극 초반에 맛보기로 보여주는 잡담은 항상 음식과 연관되는데, 아내가 음식을 매개로 남편과 대화를 시도할 때, 남성은 항상 &lsquo;딴청[어떤 일을 하는 데 그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나 행동]&rsquo;을 피운다. 「방」과 「생일파티」에서 그 딴청은 &lsquo;신문보기&rsquo;로 정형화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핀터가 보여주는 잡담과 딴청은, 인간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며, 사태의 핵심(혹은 상황의 바로 파악하기)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다. Guido Almansi와 Simon hendererson는 핀터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이런 태도에 &lsquo;존재론적인 잡담&rsquo;이란 명칭을 붙였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lsquo;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으로부터 확인받고자 하는 진지한 목적으로 벌이는 쓸데없는 말장난&rsquo;이 존재론적 잡담이다. 여기엔 말 그대로의 잡담뿐 아니라, 딴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핀터 이전에 잡담과 딴청으로 일관했던 연극 주인공들의 명세를 이미 갖고 있다. 이오네스코 『대머리 여가수』(1949)며,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1952)가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벙어리 웨이터」(『해롤드 핀터 전집&middot;2』, 평민사, 2002)는 음식이 인간 사이에 소통과 관계를 만들고, 소통과 관계를 통해 인간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에 단절을 만들어내는 기막힌 역전을 보여준다. 「벙어리 웨이터」에서는 음식으로 인해 삶이 지속되는 게 아니라, 음식 그 자체로 억압과 불신이 생긴다. 음식이 우리를 불화하게 하는 세계에서는, 품위 있는 삶만 아니라 실존 그 자체가 위협당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460" height="288"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8_%ED%97%A4%EB%A1%A4%EB%93%9C%20%ED%95%80%ED%84%B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핀터는 자신의 등단작인 「방」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ldquo;문 두드리는 아이디어는 게슈타포에서 얻었다.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1953년이나 1954년이었다. 전쟁은 채 10년이 못 걸렸지만, 내 머릿속에는 크게 박혔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핀터는 유대인이다. 핀터의 해석가들은 「생일파티」에 드러난, 낯선 권력의 임재와 압제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다시 말해 제2차세계대전 시 나치에게 겪었던 &lsquo;절멸 체험&rsquo;과 인종박해를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스탠리에게 외삽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일날 정신병원행을 선고받는 아이러니에는 유대의 전통문화도 은밀하게 접맥되어 있다 :</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ⅰ)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4, 5).</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ⅱ) [&hellip;] 이집트 왕의 신하 가운데 두 사람이 이집트 왕에게 미움을 샀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였습니다. 파라오는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그들을 경호대 대장의 집 안에 있는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요셉이 갇혀 있던 감옥이었습니다. 경호대 대장은 요셉에게 두 죄수의 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이집트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가 모두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꿈의 내용이 저마다 달랐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요셉이 그들에게 가 보니 그들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파라오의 신하들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슬퍼 보입니까? 두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지난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무슨 꿈인지 풀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네. 요셉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꿈의 뜻을 풀어 줄 분은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저에게 그 꿈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 그러자 왕에게 포도주를 바치던 사람이 요셉에게 꿈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꿈에 어떤 포도나무를 보았다네. 그 나무에는 가지가 셋 있었는데 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더니, 포도가 열렸다네. 나는 파라오의 잔을 들고 있다가 포도를 짜서 즙을 내어 파라오에게 바쳤다네. 그 이야기를 듣고 요셉이 말했습니다. 그 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지 셋은 삼 일을 뜻합니다. 앞으로 삼 일이 지나기 전에 파라오가 당신을 풀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전에 하던 일을 다시 맡길 것입니다. 당신은 전에 하던 것처럼 다시 파라오에게 포도주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풀려나시게 되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파라오에게 말해서 제가 이 감옥에서 풀려나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히브리 사람들의 땅에서 강제로 이곳에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빵을 바치던 사람은 요셉의 꿈 해몽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꿈을 꾸었다네. 내 머리 위에 빵이 담긴 바구니 세 개가 있는 꿈을 꾸었다네. 가장 위에 있는 바구니에는 파라오에게 바칠 온갖 빵들이 있었다네. 그런데 새들이 내 머리 위에 있는 바구니 속의 음식을 먹었다네. 요셉이 대답했습니다. 그 꿈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세 바구니는 삼 일을 뜻합니다. 앞으로 삼 일이 지나기 전에 파라오가 당신의 머리를 베어 버릴 것입니다. 파라오는 당신의 시체를 장대 위에 매달 것입니다. 그래서 새들이 당신의 시체를 쪼아 먹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 일 뒤는 파라오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파라오는 모든 신하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와 빵을 바치던 신하를 감옥에서 불러냈습니다. 파라오는 포도주를 바치던 신하에게 옛날에 하던 일을 다시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 신하는 다시 파라오의 손에 포도주 잔을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빵을 바치던 신하는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모든 일이 요셉이 말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창세기 20:1-20).</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66"><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ⅲ)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딸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했다.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었다. 달은 자기 어머니에게로 요한의 목을 가져가니라. (마태복음 14:6-11)</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성경』에는 생일이 단 세 번 언급되는데, 보시다시피, 모두 부정적이다. 이는 예수의 생일이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없을 수 없다. 구약은 &ldquo;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rdquo;(전도서 7:2)라고 말하고 있고, 예수도 그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2-26 오후 2:40:00[에세이] 네가 내민 사탕에서는 언제나 담배냄새가 났지! | 안준철<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4" height="743"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B%84%8C%20%EC%95%84%EB%A6%84%EB%8B%A4%EC%9B%8C/%EC%95%88%EC%A4%80%EC%B2%A0_%ED%91%9C%EC%A7%80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 오랜만에 나비가 소개하는 에세이는, 아이들에게 시를 선물하는 안준철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교직생활 20년을 훌쩍 넘겼지만 &lsquo;나는 벌거벗은 진실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가?&rsquo;라며 끊임없이 교사로서의 자기 자질을 묻고 시험하는 안 교사의 교직생활에는 권태도, 무기력도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br /> 안 교사는 말합니다. &lsquo;좋은 교사=무능한 교사&rsquo; 취급 받는 요즘,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ldquo;&lsquo;진실하고 느리게&rsquo;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것&rdquo;이라고. 그리고 쑥스럽게 고백합니다. &ldquo;이제 교사로서 내 꿈은 사랑의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아이들이 &lsquo;사랑의 사람&rsquo;이 되는 것&rdquo;이라고요. 안 교사와 아이들의 &lsquo;사랑 노래&rsquo; 세 편을 함께 나눕니다. - 나비<br /> <img alt="" width="600" height="3" src="/userfiles/ADMIN/image/%EB%B0%942.jpg"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 부족한 아이들과의 사랑</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서러움에 겨워 잠에서 깰 때가 있다. 그리움 같기도 하고 배고픔 같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후회스러움이나 죄의식 같기도 한 일종의 결핍감은 내가 느끼는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찬 새벽 명치끝에서 전해져 오는 서러운 감정만큼 나를 안심시키는 것도 없다. 행복감이나 자기존중감에 사로잡혀 있는 어떤 순간보다도 2%가 부족할 때 나는 내가 안심이 된다. 2%가 부족한 그 순간은 속옷 바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시가 써지는 창조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아내와 놀이 삼아 짓던<br /> 호박 농사 깨 농사 모두 끝나고<br /> 무성하던 잡풀마저 다 스러진 밭두렁에<br /> 지상에서 더는 고울 수 없는<br /> 산구절초 몇 송이<br /> 선연하게 피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알겠다<br /> 저 꽃을 피운 것은 <br /> 햇살도 바람도 아니라는 것을<br /> 꽃을 피운 것은<br /> 무슨 그리움 같은 거<br /> 무슨 배고픔 같은 거</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두운 땅 속에서<br /> 햇살을 그리는 마음이<br /> 바람에 살이 닿고 싶어<br /> 몸을 흔들어 대던 그 마음이<br /> 해마다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졸시, 〈결핍〉 부분</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를 닮아서인지 학교에도 2% 부족한 아이들이 있다. 화초에 물을 주듯이 나름대로 사랑을 쏟아 붓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 방식으로 그 부족한 사랑에 반응하면서도 늘 2%가 부족하다. 초기의 결핍이 너무 컸던 탓이리라.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 역시 2%가 부족하다 보니 다 큰 어른이 되어 볼썽사납게 아이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와 말을 놓고 지내는 두 아이가 있다. 나야 제 선생이니 말을 놓는 것이 당연하지만 언제부턴가 녀석들도 덩달아 말을 놓아 버린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거 이렇게 쓰면 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 잘하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나, 정말 잘하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교사와 학생 사이라기보다는 영락없이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아니, 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고맙고 반갑다. 그만큼 나를 따르고 내게 마음을 주고 있다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물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즐거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아이와 나 사이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학교에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어서 부랴부랴 도서관을 청소하고 있었을 때였다. 마침 두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으로 책을 빌리러 왔다. 반가운 마음에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다 말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누가 오늘 이쁜 짓 좀 할래? 밀걸레로 바닥 좀 닦아 주면 고맙겠는데.&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번 더 똑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말을 못 들었다는 알리바이라도 만들려는 듯 책장에 더욱 눈을 가까이 대고 있거나 서로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얄밉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다시 한번 이렇게 소리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애들아, 오늘 선생님 무지 바쁘거든. 선생님 좀 도와주지 않을래?&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잠시 후, 도서관에 있던 다른 한 아이가 마음을 바꾼 듯 계면쩍은 웃음을 흘리며 책장에서 몸을 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을 때까지도 두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내버려 둘까 하다가 뭔가 아쉽기도 하고 은근히 화가 치밀기도 해서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이렇게 다그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너희들 조금 귀찮다고 그동안 선생님과의 인간관계를 끊겠다 이거지? 좋아 마음대로 해. 지금 밀걸레를 들고 안 올 거면 내일부터 선생님 아는 체도 하지 마.&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말을 해 놓고 내심 이 정도면 되었겠지 싶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으로 뜻밖이었다. 두 아이가 대화를 멈추고 청소 상자 있는 쪽을 향해 가는가 싶었는데 그대로 도서관을 나가 버린 것이었다. 나는 당장 뛰어나가 혼을 내 주고도 싶었지만 선뜻 그럴 만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행동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아니고 그렇게 친하고 허물없이 지내던 아이들이었는데&hellip;&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슬프고 허망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당도해 보니 문을 열어 주는 아내의 안색이 나빠 보였다. 오랜 지병인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내의 건강도 늘 2%가 부족하다. 아내는 파리한 낯빛으로 간신이 입을 떼어 내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여보, 미안해. 나 죽 좀 끓여 줄 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쌀죽을 끓이면서 줄곧 두 아이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나는 평소와는 달리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죽을 끓일 수가 있었다. 약한 불에 다섯 번도 넘게 끓이고 한 번 더 물을 부었다. 그러자 다시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뜨거운 물에 쌀의 몸피가 터지면서 단단하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물과 섞이어 죽이 되는 지루한 여정이 끝이 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문득 이런 깨달음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보석 같은 쌀도 화탕지옥에 다녀와서야 비로소 밥 구실을 할 수 있구나! 그런데 아내는 그 밥조차 소화할 능력이 없어 더 부드럽고 더 짓이겨진 쌀죽을 나에게 요구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두 아이도&hellip;&hellip;.&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학교에는 약한 불에 다섯 번을 끓이고도 한 번 더 물을 부어 부드러운 죽으로 만들어서 먹여야 비로소 소화를 시키는 아이들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소화기능의 문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더욱이 아무리 교사와 인간관계가 좋다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선뜻하겠다고 나서기는 쉽지 않을 터.</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여러 차례 부탁을 했는데도 매정하게 외면하고 도서관을 나가 버린 것은 아이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다만, 2%가 부족한 것일 뿐. 부족한 것을 채워 주기 위해 학교가 있고 교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로 인해 애간장이 다 탄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히 교사의 일이다. 그걸 깜빡 잊곤 하는 것이 탈이지만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나는 두 아이를 만났다. 우린 5분가량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서로 화해의 의미로 손을 잡고 환히 웃었다. 아이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잘못도 있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선생님이 내일부터 아는 체도 하지 말라고 해서 섭섭해서 나갔어요. 그래도 저희가 모른 체 한 건 죄송했어요.&rdquo;그날 우리 사이에 마지막으로 오고간 말은 이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선생님이 너희들 사랑하는 거 알아 몰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알아.&rdquo;&nbsp;<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B%84%8C%20%EC%95%84%EB%A6%84%EB%8B%A4%EC%9B%8C/%EC%95%88%EC%A4%80%EC%B2%A0_2.JPG" /><br /> &nbsp;</p> <hr /> <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네가 내민 사탕에서는 언제나 담배냄새가 났지!</span></strong></span>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br />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가끔 교무실 통로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본다. 무슨 잘못을 했을까? 궁금해서 물어보면 지각을 한 아이도 있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린 아이도 있다. 사람을 얼굴이나 용모만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게 귀엽게 생긴 여학생이 담배를 피우다 걸려 기합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럴 경우, 나는 그 아이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혹시라도 내 표정을 통해 &lsquo;네가 그런 아이란 말이지&rsquo;라는 식의 함의가 담긴 묵언의 메시지가 전달될까 봐서 그러는 것일 게다. 내가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해도 벌을 받고 있는 아이의 처지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하긴 이렇게 노심초사(?)하는 나를 보고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다 걸린 학생을 두고 별 걱정 다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로서도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몇 해 전에 학교를 졸업한 현아는 한 마디로 좀 센 아이였다. 중학교 때 놀 만큼 놀아서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그런 것들이 싱겁게 느껴졌는지 말썽 없이 학교생활을 잘하는 편이었는데, 그러다가도 가끔 한 번씩 일을 저지를 때는 세게 저지르곤 했다. 자기주장도 강하고 고집도 센 편이어서 선생님들도 웬만하면 현아와 충돌을 피하려는 눈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백하자면, 나에게는 은근히 학생들을 못살게 구는 구석이 있다. 특히 공책 정리를 하지 않는 아이들은 내 등쌀에 못 배겨나 결국은 하게 된다. 고집 세기로 유명한 현아도 나한테는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나는 케케묵은 사랑 타령을 했다. 너를 사랑하니까 너를 포기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것이 통하는 곳이 학교였다.&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는 길에 현아를 만났다. 가만 보니 우연한 만남이 아니었다. 현아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아이의 손에는 사탕이 쥐어져 있었다. 물론 그 사탕은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받기만 하는 것이 미안해서 사양하려고 하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주먹으로 마구 내 등짝을 내려치기도 했다. 아이의 폭력(?)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사탕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현아가 내민 사탕에서는 늘 담배 냄새가 났다. 종이를 벗기고 사탕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곤 했다. 그 사탕 종이에서 나던 담배 냄새는 뭐라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역겨운 담배 냄새가 나는 종이를 곧바로 쓰레기통에 버리지 못하고 몇 번 더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아가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고마웠고, 사람에 대한 깊은 정이 있고 예의를 아는 아이를 나도 사랑하고 존중해 주고 싶었다. 역겨운 담배 냄새까지도 말이다. 물론 나는 현아가 담배를 끊기를 바랐다. 건강에도 좋지 않고 학생 신분에도 맞지 않는 일이어서 몇 차례 담배를 끊을 것을 종용하기도 하고 마침 학교에서 운영 중이던 금연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독려도 해 보았지만 그리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담배를 끊지 않는 한 네가 준 사탕을 받을 수 없노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nbsp;&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날 현아는 내게 생일 시를 써 달라고 했다. 생일 시는 내가 담임을 맡은 아이들에게만 써 주었던 터라 현아는 그것이 부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현아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현아에게 생일 시를 써 준다면 다른 아이들도 써 달라고 할 것이 뻔하고, 그것을 거절했을 때의 결과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후에도 현아는 복도에서 나를 기다렸다가 사탕을 쥐여 주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는 녀석의 생일날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에게는 꼭 비밀로 하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점심시간에 급조한 생일 시를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런데 생일 시를 받고 날아갈 듯 기뻐하던 현아의 얼굴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네가 내민 사탕에서는 언제나 담배 냄새가 났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아는 정말 실망했는지 내게 눈을 흘기며 이렇게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좀 예쁘게 써 주지 않고 이게 뭐예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생각해 보면 현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한 아이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대목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공책 정리 안 한다고 늘 못살게 군 선생을 미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탕을 손에 쥐여 주려고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저편에 매복했다가 나를 급습하곤 했던 현아! 그 가슴 따뜻한 제자가 지닌 아름다움의 실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 현아는 흡연 학생이 아닌, 정이 깊고 가슴 따뜻한 제자로 남아 있다.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푸른 종이 같은.&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학생에게 교칙을 적용하여 벌을 주는 것은 불가피할 수도 있다. 어린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서도 적절한 지도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하루 종일 교무실 통로에 꿇어앉히는 것은 심각한 인격 침해임이 분명하다. 법적 절차나 학부모의 동의도 없이 임의로 학습권을 박탈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서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내가 현아에게 배운 것도 바로 그 사랑이다. 받은 사랑을 조금밖에는 돌려주지 못하고 현아를 떠나보낸 것 같아 못내 아쉽고, 그래서 더욱 현아가 보고 싶다. 지금쯤 애기 엄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지금이라도 현아가 원하는 예쁜 시를 써서 전해 주고 싶다. 어떤 시구로도 현아의 아름다운 내면을 표현해 낼 수는 없겠지만.</p> <br /> <h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아이의 싹수가 노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span></span></strong>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오늘도 손님처럼 찾아온 슬픔을 <br /> 아침이 올 때까지&nbsp;&nbsp; <br /> 잘 대접하여 보내 주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졸시, 〈손님〉 중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이 착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끔은 내가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울기도 하니까 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 문제로 마음이 상해서 울 때도 많다. 그때만큼 막막하고 억울하고 슬픈 적도 드물지만, 가끔 나 자신이 싫어지거나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 없을 때 나를 구원한 것은 아이들 때문에 울었던 기억들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고통을 느끼거나 슬퍼 있었을 때만큼은 죄악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손님처럼 가끔 찾아오는 아픔이나 슬픔을 박대할 일만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아이들과 대화를 하다가 종종 눈물을 보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심 쾌재를 부른다. 억지로 울고 싶다고 울어지는 것도 아닌데 때를 맞추어 나오는 눈물이 반가운 것이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아이라도 교사의 눈물에는 약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헌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런 희망마저 없는 경우도 있다. 죄의식이 없는 아이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일만큼 막막한 일이 또 있을까? 너무도 막막해서 울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인마, 너 대신 내가 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흔히 자라나는 아이들을 &lsquo;싹&rsquo;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lsquo;싹수가 노랗다&rsquo;라는 말이 있다. &lsquo;싹수없는 녀석&rsquo;이란 말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lsquo;싹&rsquo;에 관한 비유는 대개가 이렇듯 부정적이다. 학교에서도 &ldquo;싹수가 노란 놈들은 모가지부터 잘라 버려야 해!&rdquo;라는 극단적인 언어 표현을 종종 듣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 아이가 싹수가 노란 것을 어떻게 알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시비를 걸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 궁금한 것이다. 아이의 머리 부분에 노란 싹이 돋아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정말 그런 것을 잘 아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면 그는 상담 전문가가 되면 좋으리라. 암도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가. 아이의 인격적인 결함을 미리 알아서 적절한 조처를 취해 준다면 아이를 위해서나 학교를 위해서나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유감스럽게도 아이의 노란 싹수를 식별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내 앞에 있는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할 때도 많다. 물론 그것은 내 능력의 문제만은 아니다. &lsquo;미숙함&rsquo;은 아이들의 본질이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미숙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싹수가 노랗기 때문에 그런 건지 평범한 눈을 가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니 일단 골고루 물을 줄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아이가 학교를 떠났다. 이른바 &lsquo;사고&rsquo;를 쳐서 전학을 전제로 한 퇴학 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죄명은 금품 갈취였다. 약하고 착해 빠진 급우를 골라 신변 보호를 해 주는 조건으로 정기적으로 돈을 상납받은 것이었다. 나는 두 아이의 담임 자격으로 그들의 잘못을 가리고 벌을 내리는 자리에 함께 있었다. 학생부장 선생님이 두 아이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육하원칙에 따라 낱낱이 이야기할 때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한 아이의 모친께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은 나도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던 참이었다. 아이를 바로잡아 주지 못한 책임감과 함께 이제 막 양심의 눈이 떠진 아이의 손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 아팠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의 모친처럼 드러내 놓고 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고 울음을 삼킨 채 허공으로 눈을 돌리다가 한순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도 속울음을 우는지 눈이 젖어 있었다. 눈물의 삼중주라고나 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만약 퇴학 처분이 내려진다면 이 아이는 어떤 태도를 보일까? 전날 나는 그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만약 학교에서 널 퇴학시키면 네 마음에 학교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이 있을 것 같니?&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조금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 그럼 네가 괴롭혔던 아이들에 대해서는? 그들 중에서 네 이름을 댄 아이들을 찾아내서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니?&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런 마음은 없어요. 그땐 몰라서 그랬지만 지금은 제가 잘못한 거 알고 있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 그래야지. 근데 네가 잘못한 것을 깨달은 게 언제부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선생님이 저 때문에 우셨잖아요. 그때부터&hellip;&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 고맙구나. 한 가지만 부탁하마. 난 널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하지만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래도 학교를 원망하면 안 돼. 네가 잘못한 거니까. 그리고 이제 잘못을 깨달았으니까 된 거고. 무슨 말인지 알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예, 선생님.&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대화가 오간 뒤였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난 아직 아이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으니까. 그가 인격적으로 미숙한 아이인지, 아니면 이미 싹수가 노란 아이인지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겐 없으니까.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그 아이에 대한 눈이 제대로 떠졌다. 그날 저녁 아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급우들에게 사과하고 싶으니 하루만 더 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아이는 급우들에게 울먹이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고, 슬픔이 복받치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동안 나 또한 아이들 몰래 속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 교실 어느 쪽에선가 손이 눈가로 가는 아이가 보였다. 가만 보니 그 아이 말고도 눈알이 벌게진 아이가 서너 명이 더 있었다. 그들 모두 평상시 행동이 썩 좋은 아이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결코 아니었다.&nbsp;</p> <p style="text-align: right">『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에서 전재 (안준철, 교육공동체 벗, 2011)</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7"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4%9C%ED%8F%89%20%EC%97%90%EC%84%B8%EC%9D%B4/%EB%84%8C%20%EC%95%84%EB%A6%84%EB%8B%A4%EC%9B%8C/%EC%95%88%EC%A4%80%EC%B2%A0.JPG" />안준철</strong><br />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 산책하러 나가고 글을 쓰는 일이 주된 일과다. 이런 단순한 일상의 반복을 지루해하지 않는 것이 특기라면 특기다. 그 덕분에 늘 행복에 겨워하다가도 문득 &ldquo;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rdquo; 하고 묻곤 한다. 그 물음은 &ldquo;지금 아이들은 행복한가?&rdquo;라는 물음과 잇대어 있다. 그래도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교직을 선택한 일과 제자들의 생일 때마다 시를 써 준 일이다. 교사로서 별다른 재주가 없어도 한 아이의 고유한 생명에 대한 설렘만 잃지 않는다면 교육의 실패란 없을 거라는 다소 낭만적인 믿음에 아직도 푹 빠져 있다.<br /> <br /> <br /> &nbsp;</p> <br />에세이편집자2011-12-23 오후 5:48:00이주영의 ‘이오덕,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889"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3_%EC%9D%B4%EC%98%A4%EB%8D%95,%20%EC%95%84%EC%9D%B4%EB%93%A4%EC%9D%84%20%EC%82%B4%EB%A0%A4%EC%95%BC%20%ED%95%9C%EB%8B%A4/%EC%9D%B4%EC%98%A4%EB%8D%95%20%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삶</span></span></p>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strong>참교사</strong> 이오덕</span> </span> <p><br /> 교육의 세 주체는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다. 이 가운데 교사가 할 일은 &lsquo;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한테, 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rsquo; 끊임없이 배우며 가르치는 일,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교육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불러온 사람도 교사고, 문제를 해결할 열쇠를 가진 사람도 교사다. 그래서 교사가 갖고 있는 세계관, 인간관, 교육관이 중요하다. 이 모든 관점을 한마디로 &lsquo;교육 사상&rsquo;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교육의 성패를 가름하는 핵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시대 교사 가운데서, 우리가 만날 수 있었던 교사 가운데서 올바른 교육 사상을 갖고 살아간 교사를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오덕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오덕은 우리 시대 교육이 나갈 길을 밝혀 주고, 그 길을 스스로 만들면서 걸어간 참된 교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1925&sim;2003)은 우리 겨레가 나라를 잃고 헤매던 민족 해방 투쟁기 끝 무렵인 1944년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 뒤에는 미군정 시기와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1986년까지 마흔두 해 동안 초, 중등학교에서 교육자로 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48년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자 부산으로 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군북중학교에서 국어 교사와 교감으로 일했다. 그때를 빼놓고는 스무 해 넘게&nbsp; 거의 경상북도 산골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면서 교사로 일했으며, 1971년부터 1986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은 교육 행정가로서 초등학교 교감과 교장으로 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486"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3_%EC%9D%B4%EC%98%A4%EB%8D%95,%20%EC%95%84%EC%9D%B4%EB%93%A4%EC%9D%84%20%EC%82%B4%EB%A0%A4%EC%95%BC%20%ED%95%9C%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37p.JPG" /><br /> <br /> 그러면서 교육 현장의 문제를 직접 겪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곧, 삶 대부분이 우리 현대 교육 역사와 함께한 것이고, 그 변화와 발전에 맞물려 있다. 나아가 우리 현대 교육 이론과 방법을 올바로 바꾸는 데 큰 힘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 시대 교육자로서 뚜렷한 소명 의식을 갖고 교육 현장을 바탕으로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우리 겨레 어린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길을 걸어온 교육자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교육 이론과 사상을 굳게 세웠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해방 뒤 우리 교육 현장에는 &lsquo;새교육&rsquo;이라고 하는 교육이 널리 퍼졌다. 이오덕은 &lsquo;새교육&rsquo;이 미국 경험주의 교육과 민주 교육을 들여온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보이기 위한 행정 구호일 뿐이며, 교육 내용과 방법은 일본 제국이 우리 겨레한테 강제로 주입했던 군국주의 노예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곧 새교육은 우리 겨레와 교사와 어린이를 죽이는 &lsquo;겉치레 교육&rsquo;이며 &lsquo;거짓 교육&rsquo;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lsquo;삶을 가꾸는 교육&rsquo;을 주장하였다. 우리 겨레와 겨레의 희망인 어린이들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서는 &lsquo;삶을 가꾸는 교육&rsquo;을 해야 하며, 아이들 삶을 가꾸는 교육이야말로 &lsquo;참교육&rsquo;이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 교육 사상인 &lsquo;삶을 가꾸는 교육&rsquo;을 담고 있는 &lsquo;참교육&rsquo;이라는 말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교사와 국민들 사이에 교육 민주화와 교육 개혁을 지향하는 새로운 교육 용어로 자리 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3년 이오덕의 &lsquo;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rsquo;에 공감하는 초, 중, 고 현직 교사와 대학 교수, 일반인 들이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89년 교육 민주화와 개혁을 주장하면서 만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도 &lsquo;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rsquo;을 한데 아우른 용어로&nbsp; &lsquo;참교육&rsquo;을 썼다. 1989년 9월 22일, 학부모들이 스스로 교육의 한 주체임을 깨달으면서 교육 민주화와 개혁을 주장하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도 &lsquo;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rsquo;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듯 이오덕이 내세운 &lsquo;참교육&rsquo;이라는 말은, 거기에 동의하는 개인과 단체가 늘어나면서 개념의 폭과 깊이가 달라졌고, 1980년대 뒤로 지금까지 사반세기 동안 우리 교육 역사에 중요한 지표가 되는 교육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이오덕은 한국 어린이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시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55년 동시 작가로 등단해서 초기에는 창작, 중기에는 비평, 후기에는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중 어린이문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일은 어린이문학 비평이다. 1965년부터&nbsp; 2003년까지 마흔 해 가까이 어린이문학 비평에 활발하게 참여하여 어린이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 주었다.</p> <p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436" height="620"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3_%EC%9D%B4%EC%98%A4%EB%8D%95,%20%EC%95%84%EC%9D%B4%EB%93%A4%EC%9D%84%20%EC%82%B4%EB%A0%A4%EC%95%BC%20%ED%95%9C%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40p.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오덕은 20세기 후반 어린이문학사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일으킨 주체이면서 그 대상이다. 냉철한 비판 정신으로 우리 나라 어린이문학 현실을 바로 보고, 이를 바탕으로 어린이문학에 대한 정론을 세우려 애썼다. 이 치열한 비평 활동이 1970년대 이후 어린이문학계에 적잖은 &lsquo;소금과 빛&rsquo;이 되고,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에 큰 힘이 되었다는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1951년 부산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어린이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부산으로 피난 온 어린이문학가들과 교류하였다. 1954년 한국아동문학회를 만들 때 회원으로 참여하였고, 1955년 이원수가 펴내던 &lt;소년 세계&gt;에 동시 &lsquo;진달래&rsquo;로 등단하였다. 그 뒤 이원수와 교류하면서 그이를 어린이문학은 물론 삶에서도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원수는 이오덕 동시집을 출판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글짓기 교육―이론과 실제》 《아동시론》 같은 책은 기획하거나 글을 쓸 때부터 조언과 격려를 하면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이오덕은, 1971년 한국아동문학회가 분열하여 이원수를 중심으로 만든 한국아동문학가협회에서 이사를 맡았다. 그리고 이원수가 적극 권해 어린이문학 평론을 시작하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비평의 초점을 모작과 표절로 잡으면서 당시 어린이문학계에서 고질병이 된 모작과 표절 문제를 겉으로 드러냈다. 1960년대에 발표된 동시 가운데 모작이나 표절작을 골라 비판하면서 참된 문학의 길을 촉구했다. 이는 어린이문학계는 물론 성인문학계와 일반인들까지 어린이문학 문제에 관심을 갖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오덕은 비평 대상이었던 상대 어린이문학가와 단체 들에게 온갖 모함과 비방, 협박을 받게 되었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1년 오랫동안 스승으로 모시던 이원수가 작고한 뒤, 이오덕은 유족(이원수 둘째 딸 이정옥)과 함께 이원수 전집을 펴내고자 원고 정리를 시작하였다. 당시 웅진출판사 &lt;어린이 마을&gt;을 기획하고 있던 윤구병을 통해서 윤석금 사장한테 이원수 전집을 내도록 권하였다. 또 동료 어린이문학인과 화가들 도움을 받아 &lt;이원수 아동문학 전집&gt;을 출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오덕이 아니었다면 이원수가 세상을 떠난 뒤 그렇게 빨리 이원수 문학을 집대성하는 전집을 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전집은 1980년대 이후 어린이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1989년 10월 29일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이원수 문학 정신을 이어 가는 어린이문학 단체를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단체에서 &lsquo;이원수 문학 공부방&rsquo;을 달마다 열었고, &lsquo;이원수 문학의 밤&rsquo;을 비롯해 이원수 추모 행사들을 주관하였다. 기관지로 달마다 &lt;어린이문학&gt;을 펴내고, &lsquo;어린이문학 창작 교실&rsquo;과 &lsquo;어린이문학 작가 교실&rsquo; 강좌를 만들어서 새로운 어린이문학 작가를 찾고 길러 내는 데 힘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89년 무렵부터는 우리 말과 글을 쉽고 바르게 쓰자는 운동에 앞장섰다. 교육과 문학, 언론과 출판, 방송계, 법조계를 비롯해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동안 버릇처럼 써 오던 잘못된 말을 바로잡고 어려운 말과 글을 쉽고 바른 우리 말과 글로 바꾸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오덕이 일으킨 우리 글 바로 쓰기 운동은 말과 글의 민주화를 좇는 문체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교육과 문학으로써 아이들을 참된 우리 겨레 아이들로 올곧게 지키고 키우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평생 초, 중등 교육자의 길을 걸으면서 참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결과를 책으로 펴내서 20세기 후반 한국 교육 현장을 바꾸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어린이문학을 중심으로 어린이 운동을 시작한 방정환과 그 맥을 잇는 이원수 문학관을 발전시키고 폭을 넓혔다. 이오덕의 어린이문학관은 권정생, 임길택 같은 여러 어린이문학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이오덕은 20세기 후반 우리 나라 어린이 교육과 어린이문학, 우리 말과 글 바로 쓰기의 지평을 바꿔 놓았다. 이는 바뀐 것을 좋게 보는 쪽이든 나쁘게 보는 쪽이든 모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오덕의 문학론과 그 영향에 대한 찬반양론은 그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hellip;중략&hellip;)</p>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부 교육</span></span>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 <strong>국어 교육</strong> 바꾸기</span></span>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오덕이 어린이들을 직접 지도한 것 가운데서는 글쓰기 교육, 그중에서도 시 쓰기 교육 성과가 가장 뚜렷하다. 이는 이오덕이 가르친 어린이들 시 모음 《일하는 아이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참꽃 피는 마을》 같은 여러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 쓰기를 비롯해 이오덕이 중요하게 실천한 내용은 곧 국어 교육 모든 영역과 아주 가깝게 맞닿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7차 교육 과정에서는 국어 교육 과정이 &ldquo;21세기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해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 과정을 지향하고 있음&rdquo;<sup>교육인적자원부(2002), 《초등학교 국어 교사용 지도서》, 10쪽</sup>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nbsp; 내용을 &lsquo;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국어 지식, 문학&rsquo;이라는 여섯 가지 영역으로 나누어 놓았다. 제6차까지 &lsquo;말하기&rarr;`듣기&rsquo; 순이었던 것을 제7차에서 &lsquo;듣기&rarr; 말하기&rsquo; 순으로 고쳤는데, 학습자의 언어 발달 단계를 헤아린 것이라고 하였다.<sup>교육인적자원부(2002), 《초등학교 국어 교사용 지도서》, 20~21쪽</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이 연구하고 실천한 교육을 살펴보면 국어 교육 과정에서 나누어 놓은 여섯 가지 영역과 모두 관계가 있다. &lsquo;듣기&rsquo;와 &lsquo;말하기&rsquo; 영역에서는 &lsquo;말하기&rarr; 듣기&rsquo;로 이루어진 웅변이나 동화 구연 형태 교육을 비판하면서 &lsquo;듣기&rarr; 말하기&rsquo;가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하였고, 이를 &lsquo;마주이야기&rsquo;라고 이름 붙였다. &lsquo;읽기&rsquo; 영역에서는 어린이들이 글을 읽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lsquo;쓰기&rsquo; 영역에서도 어린이들이 글쓰기 주체가 되어야 하고, 솔직하고 자세하고 분명하게 자기 삶을 표현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 삶을 가꿀 수 있는 가치 있는 글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lsquo;국어 지식&rsquo;영역에서는 문법 지식을 익히는 것을 넘어서 쉽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우리 말과 우리 말법을 알고 쓰자는 &lsquo;우리 글 바로 쓰기&rsquo; 운동으로 그 테두리를 더욱 넓혀 주었다. 끝으로 &lsquo;문학&rsquo; 영역에서는 스스로 동시와 동화, 수필과 평론을 썼으며, 어린이들 삶을 가꿀 수 있으려면 문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창작해야 할지 연구하고 실천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렇듯 국어 교육을 이루는 여섯 가지 영역에 걸쳐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육 사상 내용과 방법을 마련하였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ign="middle" width="400" height="612"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3_%EC%9D%B4%EC%98%A4%EB%8D%95,%20%EC%95%84%EC%9D%B4%EB%93%A4%EC%9D%84%20%EC%82%B4%EB%A0%A4%EC%95%BC%20%ED%95%9C%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3p.JPG" /></p>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듣기, 말하기 교육―마주이야기</span></strong>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오덕은 사람이 자기 느낌이나 생각이나 주장을 몸짓, 말, 글, 그림, 노래 들로 나타내 보이는 것을 &lsquo;표현&rsquo;이라고 규정하였다.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은 누구든지 그 마음속에 쌓인 생각을 밖으로 나타내어 보이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개인의 사정이나 사회적인 관계에서 그것이 제대로 안 되는 경우가 흔하다. (줄임) 어느 때 어떤 수단으로든지 그것이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면 필경 병이 들고 만다. 모든 표현의 수단을 빼앗기고 표현의 길이 꽉 막혀 버린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sup>이오덕(1990), 《참교육으로 가는 길》, 한길사, 89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처럼 사람이 &lsquo;표현&rsquo;한다는 것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해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들은 온갖 방법과 모습으로 자기표현을 하려고 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말하기와 그리기와 글쓰기 세 가지다. 여기서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일이 말하기인데, 사람은 말로써 가장 자세하고 깊은 생각, 오묘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생각은 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은 가장 널리 쓰는 표현 수단이고, 어려서부터 울음과 몸짓 다음으로 일찍 배운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듣기를 중심으로 처음 말을 배우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듣기보다 말하기에 더 힘을 기울인다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의 몸이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 자라난다면 정신과 혼은 어머니 말을 들으면서 자라난다고 할 수 있다. 갓난아기는 어머니를 비롯해 식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말을 배우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집에서 아이한테 말을 들려주고 아이들이 듣는 것은 가장 오래된 언어 학습 과정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런데 집에서 하는 듣기 중심의 말 교육이 옛날과는 아주 달리 버림받고 있거나 잘못되어 있다.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고향의 말을 들려줄 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을 마주 보지 않고 돌아앉아 텔레비전 화면에 눈이 가 있고, 거기서 들리는 앵무새 같은 말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아이들에게도 그것을 듣게 한다. 그래서 아이들과 부모 사이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졌다. 학교에 들어가면 말하기 교육은 한층 비참하다. 아이들은 1학년에서부터 말하기보다는 글자 쓰기에 온 힘과 정신을 들여야 한다. 공부하는 차례가 듣기&rarr; 말하기&rarr; 읽기&rarr; 쓰기, 이렇게 되어야 할 터인데, 거꾸로 쓰기부터 시작해서는 그만 쓰기로 끝나 버리는 것이 지금의 국어 교육이다. 이 쓰기는 물론 글쓰기가 아니라 글자만 베껴 쓰는 쓰기다.<sup>이오덕(1990), 《참교육으로 가는 길》, 한길사, 97~98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lsquo;읽기 &harr; 쓰기&rsquo; 중심에, 그나마 &lsquo;쓰기&rsquo;도 교과서 내용 받아쓰기나 베껴 쓰기 중심으로 지도하는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처럼 &lsquo;듣기&rarr; 말하기&rsquo; 교육의 중요성 때문에 교사의 말하기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학교 교육에서 아이들이 듣는 것은 주로 교사의 말이다. 그것은 말하기의 본을 보여 주는 일이 된다면서, 교사의 말하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첫째, 교사는 평소 학습 시간이나 그 밖의 기회에 아이들을 상대로 말을 할 때 될 수 있는 대로 알아듣기 쉬운 말을 정확한 발음으로 간명하게 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은 글쓰기의 준비이자 국어 교육의 출발이요, 모든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br /> 둘째,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관료적인 말, 요식적인 말을 안 쓰도록 노력해야 한다. 위압감을 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경박한 유행어, 외래어를 삼가야 하며, 어려운 말이나 유식한 말도 피해야 한다.<br /> 셋째, 될 수 있는 대로 순수한 우리 말을, 아이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생활의 말을 천천히 다정한 음성으로 들려주는 것이 좋다.<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83쪽</su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와 함께 듣기 교육이라면 어린이들이 마음 깊이 감동할 동화다운 동화를 들려주어야 하고, 말하기 교육이라면 모든 아이들이 평소 제 생각을 분명히 말할 수 있도록 온갖 기회에 지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말 잘하기 선수를 기른다고 동화답지도 않은 동화를 억지로 외우고 어색한 몸짓을 익히게 하거나, 자연스러운 말씨가 아니라 노래하듯 연극하듯 동화 구연이나 웅변을 하게 하는 것은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노릇이라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듣기와 말하기 교육 방법으로 &lsquo;마주이야기&rsquo;를&nbsp; 중요하게 여겼고, 《우리 문장 쓰기》에서 중요성을 자세히 짚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편지글체는 마주이야기라지만 한쪽 말만을, 그것도 한쪽에서 계속 말한 것만을 쓴 글의 형태지만, 이런 한쪽 말에서 더 나아가, 주고받는 말을 모두 적는 형식의 글이 당연히 있어야 하고, 실제로 있다. 이런 마주이야기는 소설이나 동화 같은 글에서 흔히 나오고, 또 마주이야기만을 적은 글이 있어, 이것을 문학에서는 희곡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터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이 마주이야기를 하나의 문체로 보지 않고, 문장 표현의 한 가지 기교로만 여겼는데, 이제부터는 훌륭한 하나의 문체로 보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sup>이오덕(1992), 《우리 문장 쓰기》, 한길사, 115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러한 생각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인 아람유치원 원장 박문희가 &lsquo;마주이야기 교육&rsquo;으로 발전시켰고, 마주이야기교육연구소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박문희가 유치원 어린이들과 함께 실천하고 있는 마주이야기를 이오덕은 &lsquo;우리 겨레 교육의 자랑&rsquo;이라고 하였다. 이오덕은 마주이야기 교육이란 어린이들에게 이것을 해라, 저것을 외워라 하면서 끊임없이 아이들을 끌고 다니거나 머릿속에 무엇을 넣어 주려고 하는 교육이 아니라, 그런 잘못된 교육의 해독을 풀어 주는 교육이라고 했다.<sup>박문희(2000), 《마주이야기 시1―침 튀기지 마세요》, 고슴도치, 5쪽</sup> 마주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아이들 편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함으로써, 아이들이 둘레 사람들 말을 잘 알아듣고 자기 생각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잘 말하여 건강한 마음과 몸을 가진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하는 길인 것이다.</p>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읽기 교육―마음을 살찌우는 글 읽기</span></strong> <br /> <p style="text-align: justify">&nbsp;<br /> 읽기는 쓰기와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로, 국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쓰기는 말하기와 함께 &lsquo;표현&rsquo;을 중심으로 하고, 읽기는 듣기와 함께 &lsquo;이해와 해석&rsquo;을 중심으로 한다. 더 폭넓게 말한다면 읽기와 쓰기는 국민 누구나 받아야 하는 의무 교육이고, 모든 교과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특히 읽기 교육은 어린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평생 글과 만나게 하고, 책을 삶의 벗으로 삼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는 교육이다. 이오덕은 &ldquo;책은 억지로 읽힐 것도 아니고, 못 읽도록 금할 것도 아니다. 읽고 싶어 스스로 읽도록 해 주는 것이 교육&rdquo;<sup>이오덕(1997),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청년사, 195쪽</sup>이라면서, 자유로운 독서 환경을 마련해 주고 스스로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책을 읽을 만큼 마음이 안정될 수 없는 환경에, 읽을 시간도 없고, 억지로 읽히고 억지로 독후감을 쓰게 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기를 싫어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교사들도 마찬가지라면서 책 한 권 읽기보다는 공문서 쓰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교육 현실을 비판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책을 읽도록 마음이 안정될 수 없는 환경,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책보다 실제 사무 기술이나 처세 요령 같은 것이 영리한 교사들이 터득해야 할 어쩔 수 없는 목표가 되었다. 책이란 바보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나 읽는 것이고, 돈이 있으면 방 안의 장식물로 꽂아 놓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sup>이오덕(1997),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청년사, 194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렇게 우리 교육 현실이 교사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책을 부지런히 읽어 새로운 교육 사상과 방법을 공부하지 않아도 교사 생활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음을 안타까워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자유교양고전독서대회란 것이 있다. 하도 책을 안 읽으니 이런 것을 강요하는가 모르지만, 참된 독서 습관을 기르는 데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이 근심된다. (줄임) 독서 감상문 쓰기 교육이란 것이 헛된 이름을 내기 좋아하는 이들에 의해 경쟁이 되고, 매스컴과 교육을 사칭하는 어중떠중한 단체들이 동원되어 몹시 비틀어진 모습으로 유행이 되고 있다. (줄임) 책을 읽는 것보다 감상문을 잘 쓰는 것이 목표가 되었으니 주객이 거꾸로 되었다 아니할 수 없다.<sup>이오덕(1997),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청년사, 195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읽기 교육에 대한 이오덕의 생각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 가운데 어린이도서연구회를 손꼽을 수 있다. 1980년에 서울양서협동조합 산하 단체로 만든 어린이 독서 문화 운동 단체로, 이오덕이 쓴 어린이 문학 평론집 《시정신과 유희정신》에서 비롯되었다. 1986년부터 &lt;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gt;와 견줄 수 있는 &lt;마음을 살찌우는 글 읽기&gt;를 달마다 펴냈으며, 1993년부터 &lsquo;동화 읽는 어른&rsquo; 모임을 만들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국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nbsp; 좋은 책을 권하는 학년별 권장 도서 목록을 내고, 책이 귀한 농어촌 섬이나 외딴 마을, 도시에 사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좋은 책 보내기 운동도 펼치고 있다. 이오덕은 처음부터 어린이도서연구회와 함께하였고, 법인 이사와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였다.</p>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쓰기 교육―삶을 가꾸는 글쓰기</span></strong>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국어 교육 과정 가운데 쓰기 교육에는 &lsquo;글씨 쓰기&rsquo;와 &lsquo;글쓰기&rsquo; 둘 다 들어 있다. 이오덕은 글씨 쓰기보다 글쓰기에 집중하였고, 글쓰기 가운데서도 시 쓰기 교육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글씨 쓰기에 대한 생각은 일반론과 별다를 바 없었다. 모든 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치지만 아직도 국민들 대부분이 맞춤법을 정확히 모르고 띄어쓰기를 잘못하고 있는데&nbsp; 결코 한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고<sup>이오덕(1983), 《거꾸로 사는 재미》, 범우사, 226쪽</sup> 비판하거나, 아이들이 알기 쉽게 또박또박 정확하게 써야 하며 아이가 글씨를 모르면 억지로 쓰게 하지 말고 부모나 교사가 아이 말을 받아써야 한다고 주장한 정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에 견주어 글쓰기 교육 영역은 평생에 걸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힘썼다. 이오덕의 교육 사상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실천 방법이 &lsquo;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rsquo;이며, 이를 통해 &lsquo;삶을 가꾸는 교육&rsquo; 곧 &lsquo;참교육&rsquo;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고, 자기 교육 사상을 많은 사람들한테 널리 알릴 수 있었다. 따라서 글쓰기 교육은 이오덕 교육 사상과 실천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글이란 단순히 글자라는 부호를 집합시켜 놓은 것이 아니다. 글은 사람의 생각, 곧 정신을 나타낸다. 글은 곧 길(진리)이다. 그러고 보니 &lsquo;글&rsquo;과 &lsquo;길&rsquo;은 묘하게도 닮았다. 가운데 홀소리 하나가 다를 뿐이다. 글을 가르치는 것은 길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보여 준다고 해도 좋고, 길을 가도록 도와준다고 해도 좋다. 어쨌든 글을 가르치는 사람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32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글쓰기 교육은 곧 사람이 살아가는 옳은 길을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교육자들이 갖추어야 할 밑바탕이라고 하였다. 교육자들이 체육, 음악, 미술을 잘 가르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글 한 편 제대로 못 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경향은 큰 문제라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교육자들이 글 쓰는 일을 두려워해 꺼리고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또 한편으로는 글쓰기를 글 가지고 장난하는 취미쯤으로 알거나, 어른 문학가들이 쓴 문학 작품을 모방하는 꼬마 문학인 같은 손재주를 훈련하거나, 대회에서 상을 타는 데 목적을 두고 삶과는 상관없는 거짓 글 꾸미기 재주만을 가르치는 문제도 심각하다고 하였다. 이런 잘못된 글짓기 교육은 아이들이 자라면서 꼭 해야 하는 생명 표현을 억압하거나 왜곡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생명을 표현하는 방법들 가운데서 말하기와 그리기보다 더 심하게 악용되어 온 것이 글쓰기라고 하였다. 실적을 좇는 교육 행정이 글쓰기를 도구 삼아 순순한 아이들 의식을 마비시키고 세뇌해 왔다는 것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글쓰기는) 아이들의 마음과 삶을 알아 내는 귀중한 수단이다. 그뿐 아니라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키워 가는 가장 효과 있는 교육의 방편이다. 이토록 소중한 교육 수단이 아이들의 생각을 퇴화시키거나 마비시키고, 불성실하거나 거짓스럽게 또는 잔인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키우는 수단으로 떨어져 버렸다.<sup>이오덕(2004),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길, 96~97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렇게 지적하면서, 다음 다섯 가지가 그 원인이라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첫째, 해방 이후 우리 글을 처음 가르치면서 교과서에 아이들의 삶이 담긴 교재를 싣지 않고, 글을 쓸 때도 삶이 없는 문인들의 글만을 본보기로 하여 흉내 내기를 시켰기 때문이다.<br /> 둘째, 행정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관념이나 천박하고 성급한 교훈을 주입하는 수단으로 글짓기를 시켰다는 점이다. 대부분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통 쓰는 글이란 게 공문으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되어 있는 반공 글짓기, 새마을, 애향단 청소, 질서 지키기, 불조심, 세금, 저금 따위다.<br /> 셋째, 교육 행정 관료와 대부분의 교사들은 아이들이 삶을 정직하게 쓴 글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br /> 넷째, 문인들의 창작 이론을 아이들의 글짓기 지도에 적용한 것도 교육을 크게 그르친 원인이 되었다. 아이들이 자기 체험을 쓰는 글과 문인들이 창작하는 글은 그 쓰는 태도에서 아주 다르다. 그런데 우리 교육자들은 글짓기 교육의 이론을 스스로 실천하는 가운데서 세우지 못하고 문인들의 창작 이론에 기대어 아이들을 지도했고, 문인들이 엉뚱하게 교육자들을 지도하는 꼴이 되었다.<br /> 다섯째, 국어 교과서가 이런 흉내 내기 글짓기를 하도록 만들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가운데서 세 가지를 중요하게 짚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글짓기 지도에서 어른 문학가들이 쓴 문학을 흉내 내게 했다는 것이고, 둘은 글짓기 행사가 국가나 사회 정책을 홍보해서 실적을 쌓는 데 쓰였다는 것이고, 셋은 교사들이 아이들 삶을 가꾸기 위한 생명 표현으로서 글쓰기 교육의 길을 찾지 못하고 문인들 창작 이론에 기댔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른이 쓰는 글은 실용문과 비실용문으로 뚜렷하게 나눌 수 있는데, 문학은 비실용문에 드는 글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쓰는 글은 대부분 실용문과 비실용문으로 나누기 어렵다. 이는 마치 아이 행동에서 일(노동)과 놀이(유희)를 나누기 힘든 것과 같다. 곧 아이들은 실용문과 비실용문으로 나뉘기 전 단계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어른이 쓰는 비실용문인 문학 창작 방법을 흉내 내도록 지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하려면 아이들이 &lsquo;쓰고 싶은 마음&rsquo;이 일어나, &lsquo;쓰고 싶은 것&rsquo;을 마음대로 붙잡아 쓸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이 무언가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아이들은 어떤 일에 관심이 쏠리면서 기쁘거나 괴롭거나 답답하거나 그립거나 한 온갖 감정들을 시원스럽게 남에게 털어놓고 싶어 할 터인데, 그런 일을 생생하게 되살려 정직하고 자세하게 쓰도록 하면 된다.<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23쪽</sup> 이것이 글쓰기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 글쓰기 교육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글쓰기 교육이 &ldquo;사물을 바르게 인식하고 보다 풍성한 삶을 영위하는 진실한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교과에서 배운 지식과 현실에서 얻은 체험과 생각들을 종합해서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창조해 나가도록 도와주는 일&rdquo;<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75쪽</sup>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서 이를 위한 글쓰기 교육 목표 일곱 가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솔직한 태도로 쓰게 한다. 이것은 어린이의 순수성과 정직성을 키우기 위함이다.<br /> 둘째, 무엇이든지 쓰고 싶은 것을 자유스럽게 쓰게 한다. 글을 쓰는 어린이 자유의 확보 없이 참된 글이 쓰여질 수 없다.<br /> 셋째, 제 것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한다. 자기 삶을 긍정하고 자기만이 가진 느낌이나 생각을 소중히 여기도록 한다. 어린이의 개성과 창조적 재질은 삶에 대한 자신과 긍지에서 비로소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br /> 넷째, 실제의 삶에서 우러난 살아 있는 느낌과 생각을 쓰게 한다. 교사나 그 밖의 어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거나, 남들의 주장에 동조하기만 하는 태도, 교과서나 그 밖의 책에 나오는 글의 내용을 머리로 익혀 그것을 약삭빠르게 흉내 내는 태도를 글재주라고 훌륭하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도록 한다. 그리하여 실제의 삶에서 우러난 생생한 느낌과 생각을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그러한 느낌과 생각을 쓰는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br /> 다섯째, 자기 자신의 말로, 살아 있는 일상의 말로 쓰게 한다.<br /> 여섯째, 쉽고 아름다운 우리 말을 정확하게 쓰게 한다.<br /> 일곱째, 자기와 남과의 관계,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인식하고,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 판단하며, 그리하여 인간스러운 감정과 올바른 삶의 자세를 몸에 붙이도록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곧 글쓰기 교육이란 &ldquo;어린이의 마음과 삶을 키워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풍부한 인간적 감정을 가지고 바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행동하는 민주적 인간을 기르는 것&rdquo;<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76쪽</sup>이다. 이러한 글쓰기 교육을 이어 가는 단체로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가 손꼽을 만하다. 1983년 만들어져 이오덕의 &lsquo;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rsquo; 사상과 방법을 우리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데 앞장서 왔고, 현재 스무 곳 넘게 지역 모임을 만들어 공부하고 있다. 실천 과정을 회보 &lt;우리 말과 삶을 가꾸는 글쓰기&gt;에 담아서 다달이 펴내고 있으며, 회원들이 학급 글쓰기 교육으로 얻은 성과를 여러 책으로 펴내어 교육 현장에 제공하고 있다.&nbsp;&nbsp;<br /> &nbsp;</p> <div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422" height="620"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3_%EC%9D%B4%EC%98%A4%EB%8D%95,%20%EC%95%84%EC%9D%B4%EB%93%A4%EC%9D%84%20%EC%82%B4%EB%A0%A4%EC%95%BC%20%ED%95%9C%EB%8B%A4/%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42p.JPG" /></div>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문학 교육―어린이를 지키는 문학</span></strong>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문학 교육은 문학 창작과 문학 감상 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이오덕은 문학 창작에서 어른 글쓰기와 어린이 글쓰기를 나누고, 어린이가 어른이 쓴 문학 작품을 흉내 내는 방법으로 문학 창작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쓰는 문학은 어린이를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어린이문학가의 책임이 매우 무겁고, 이런 좋은 문학 작품을 골라 어린이들이 자유롭고 즐겁게 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지도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였다. 첫걸음으로 교사가 어린이문학을 읽고, 어린이들한테 좋은 문학을 읽어 주고 들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부 어린이만을 상대로 하는 문학 교육은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들려는 교육이요, 우등생이나 열등생이나 모든 어린이들을 상대로 하는 글짓기 교육은 인간을 키워 가는 인간의 교육이다. 이 두 가지는 엄연하게 구별이 되어야 하겠다. 특수한 기술을 습득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모든 교과 학습과 생활을 귀결지어 완성시키는 방법이요, 모든 교과의 중핵이 되는 교육, 인간을 인간으로서 키워 가는 교육 그것이 바로 글짓기 교육인 것이다.<sup>이오덕(1965), 《글짓기 교육―이론과 실제》, 아인각, 4쪽</sup></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문학 교육과 글쓰기 교육을 엄격하게 갈라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교육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교육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어른이 쓴 동시를 흉내 내거나 어린이문학가들이 동시 창작하는 방법을 따르도록 지도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서 그 방법 차이가 뚜렷이 드러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이 말하는 &lsquo;글쓰기&rsquo;는 &lsquo;문학&rsquo;이라는 말보다 훨씬 뜻이 넓다. 문학은 어른들이 쓰는 여러 가지 글쓰기 갈래 가운데 한 가지로, 어른들이 쓰는 글에서도 일부분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글쓰기를 어린이의 글쓰기와 어른의 글쓰기로 나누고, 어린이의 글쓰기를 다시 산문 쓰기와 시 쓰기로 나누었다. 어른의 글쓰기는 실용문 쓰기와 비실용문 쓰기로 나누고, 비실용문에 드는 문학을 다시 &lsquo;어른을 위한 문학&rsquo;과 &lsquo;어린이를 위한 문학&rsquo;으로 나누었다. 시도 &lsquo;어른을 위한 시&rsquo;와 &lsquo;어린이를 위한 시&rsquo;로 나누었다. 곧 어린이들이 쓰는 산문이나 시를 어른이 쓰는 어린이문학인 동화나 동시와 뚜렷하게 나누어 놓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어린이는 동화나 동시를 쓸 수 없고, 어린이한테 동화나 동시를 쓰게 해서도 안 된다&rsquo; &lsquo;문학 교육과 글쓰기 교육은 분명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rsquo;는 이오덕의 주장은 그이가 나름대로 세워 놓은 &lsquo;글쓰기 갈래&rsquo;<sup>이오덕(1984),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한길사, 28쪽</sup>를 바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일하는 아이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같은 어린이 시 모음을 보고, &lsquo;자기는 어린이들한테 동시 지도를 하면서 왜 하면 안 된다고 하느냐&rsquo;는 오해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이오덕이 지도한 &lsquo;어린이가 쓴 시&rsquo;도 넓게 보면 문학 창작이 분명하지만 글 갈래표에서 좁은 뜻으로 규정한 &lsquo;동시&rsquo;와 같은 문학 창작은 아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지금까지 &lsquo;어린이 시&rsquo;와 &lsquo;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쓴 시&rsquo;를 나누지 않고 모두 &lsquo;동시&rsquo;라 했다고 비판했다. 이제는 &lsquo;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쓴 시&rsquo;는 &lsquo;동시&rsquo;라 하고, 어린이가 쓴 시는 그냥 &lsquo;시&rsquo;라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어린이는 동화나 동시를 쓸 수 없으며, 그런 어른 문학을 흉내 내게 해서도 안 되며, 어른들이 문학을 창작하는 방법으로 어린이들이 글을 쓰게 지도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때문에 이오덕이 말하는 &lsquo;문학 교육&rsquo;은 사실상 창작이 아니라 &lsquo;어른이 쓴 문학 작품 읽기와 감상&rsquo;으로 제한되어 있고, 이를 위해서 어른이 어린이에게 주기 위해 쓴 어린이문학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하고 있는 것이다. &lsquo;민주, 민족, 인간, 일과 놀이, 생명&rsquo; 교육 사상을 모두 담고 있는 &lsquo;어린이 삶을 가꾸는 교육&rsquo; &lsquo;어린이 삶을 지키는 문학&rsquo;이라는 관점에서 어린이문학을 비평하고 있기 때문에, &lsquo;문학성&rsquo;보다 &lsquo;교훈성&rsquo;을 높이 두고 어린이문학을 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전에 이오덕의 비평 잣대가 되는 &lsquo;삶을 가꾸는 교육&rsquo;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깊이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nbsp;</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나라 아이들 거의 모두가 학교 교실에서 교과서에 실린 동요나 동시로, 또는 겨레의 삶을 외면하는 이야기나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글을 본보기가 되는 틀로 삼아서 아이들이 그것을 따라 쓰도록 하는 교육을 하여 왔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신문이나 잡지에 실려 나왔던 아이들 글이, 백일장이나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탄 아이들의 글이 어떤 글이었던가? 그 몇십 년 동안 단 한 편이라도 감동을 받을 만한 글이 어디서 나왔던가? 이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깊이 잘 생각하면 한국전쟁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총에 맞고 불에 타 죽은 것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 역사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비참하게 하는 일이라고 알아야 한다. 끊임없이 태어난 아이들을 반세기 동안 어떤 틀에 가두어서 똑같은 꼴로 찍어 내면서 그 순진한 마음과 깨끗한 감성을 모조리 짓밟아 죽여 버렸으니 이게 어디 예삿일인가?<sup>이오덕(2002),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소년한길, 70~71쪽</su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처럼 겨레의 삶과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고 업신여기는 어린이문학, 동화와 동시를 비판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아이들이 읽게 되어 있는 책 가운데서 그래도 아이들을 덜 괴롭히는 책, 더러는 아이들이 즐겨 읽게 되는 책이 문학책이고 이야기책이고 동화책이라고 하면서 이런 어린이문학이야말로 우리 아이들을 겨레의 아이가 되게 하는, 가장 귀중한 교육 수단이라고 하였다.<sup>이오덕(2002), 《어린이책 이야기》, 소년한길, 6쪽</su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므로 어린이문학은 마땅히 우리 아이들을 풀어 놓아 주고 아이들 숨통을 틔워 줘야 한다. 아이들이 세상을 올바른 눈으로 보도록 하고, 자연의 소리를 듣게 해야 한다. 사람다운 감정과 생각을 갖고 사람다운 행동을 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부질없이 다른 나라 것을 쳐다보고 부러워하도록 만드는 이야기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야기로 채워진 문학이 아닌지 살펴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어린이들이 읽어서 좋은 어린이책과 그렇지 않은 어린이책을 갈라놓아야 한다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아이들이 읽고 있는 책들을 살펴보면 겉모양부터 눈길을 끌려고 요란하게 꾸며 놓고 그저 얄팍한 재밋거리를 주는 책이 많다고 하였다. 또 기괴한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 놓거나, 어수선한 글로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책이 너무나 많다고 비판하였다. 나아가 깨끗한 우리 말로 된 책, 잘못된 말을 퍼뜨리지 않는 책도 좀처럼 볼 수 없다며, 우리 어린이문학이 올바른 우리 말을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우리 얼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모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이오덕은 어린이들한테 주어야 할 어린이문학 작품의 기준 열 가지를 세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무엇보다도 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생활과 감정과 꿈을 그들의 편이 되어 그릴 것이다.<br /> 둘째, 불행한 아이들에 대해서 단지 그들을 글감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마음으로 진정 그 불행을 해결해 주고 혹은 덜어 주어야겠다는 사람다운 사랑으로 그들을 그려야 한다.<br /> 셋째, 짓밟히고 학대받는 모든 생명에 대한 동정은 서민들의 것이다.<br /> 넷째,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민족 감정의 표현.<br /> 다섯째, 압제에 버티는 정신과 평화주의 사상.<br /> 여섯째, 세련되고 영리하고 약빠른 아이보다 촌스럽고 어리석은 아이들에 대한 이해를 보여 주는 것은 더욱 사람답고 우리 겨레다운 태도다.<br /> 일곱째, 모든 사람다운 생각과 감정을 옹호해야 한다.<br /> 여덟째, 그 밖에 서민들 특유의 생활과 감정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br /> 아홉째, 앞에서 열거한 주제들을 작품으로 잘 형상화해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한다.<br /> 열째, 아이들이 알 수 있는 쉽고 바른 우리 말로 쓴다.<sup>이오덕(2002),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소년한길, 27쪽</su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열 가지 기준 가운데서 가장 논란이 되고 오해를 받는 것이 첫째 항목인데, 바로 &lsquo;일하면서 살아가는 아이들&rsquo;에 대한 것이다. 곧 일하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냐는 것이다. 이오덕이 농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에는 &lsquo;일하는 아이들&rsquo;이 있었고, 도시에서도 집이 가난해 학교에 가지 못하는 &lsquo;일하는 아이들&rsquo;이 있었으나 이제는 없다는 비판이 생겼다.<sup>김이구, &lsquo;아동문학을 보는 시각―일하는 아이들 이후의 길&rsquo;, &lt;아침햇살&gt; 1998년 가을 호</su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에 대해 &lsquo;일하는 아이들은 버려야 할 관념인가&rsquo;<sup>이오덕(2002),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소년한길</sup>라는 글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크게 잘못 보고 하는 비판이라고 하였다. 일하는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되고, 또 그것이 바로 공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lsquo;일하는 아이들&rsquo;이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간답게 자라기 위해 어린이들이 살아야 할 현실이라고 반론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이런 어린이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지켜야 할 태도와 피해야 할 태도로 일곱 가지씩을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t;어린이문학 작가들이 지켜야 할 창작 태도&gt;</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돈과 물질적 겉모양으로 모든 가치가 매겨지는 사회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 질서의 세계를 창조해 보여 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br /> 둘째, 민족과 아동의 현실을 바로 보고 인간적 양심을 가지고 문학을 창조해야 한다.<br /> 셋째, 아동 세계에 침투되어 있는 힘의 숭배 태도를 바로잡고 참된 민주 정신을 심어 주어야 한다.<br /> 넷째,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위안과 희망, 용기를 주어야 할 것이다. 불행한 사람을 함께 손잡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인도적 책임이란 것을 깨닫게 한다.<br /> 다섯째, 거짓스럽고 비뚤어진 것을 그대로 눈감아 버리지 말고 그것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양심과 정의감을 몸에 붙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br /> 여섯째, 꾀부리고 약빠른 처세술이 어린이의 세계에서 경멸되고, 솔직 소박하고 순진한 동심이 옹호되어야 한다.<br /> 일곱째, 열등의식을 불식시켜 주는 적극적인 주제와 내용이 아니라도, 모든 어린이가 실감할 수 있는 참된 세계를 보여 주는 것은 어린이를 문학의 주체로 파악하여 그들의 정신을 충만하게 하여 주는 훌륭한 아동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t;어린이문학 작가들이 피해야 할 창작 태도&gt;&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 우리 민족의 처지에서 당치도 않은 사치한 생활과 감정의 표현.<br /> 둘째, 입신출세식 사고와 생활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린 작품.<br /> 셋째, 현실을 기피한 폐쇄 심리 속에서 그리는 백일몽을 문학적 상상으로 알고 있는 작품.<br /> 넷째, 어른 중심의 취미, 오락 관심을 그린 것, 아동을 완구나 도구로 보는 태도의 작품.<br /> 다섯째, 성인문학을 모방하는 상태에 빠진 것, 내용이 없는 장식 문장으로 된 것, 감각적 기교주의 작품.<br /> 여섯째, 세상 모든 것이 어린이를 위해 있는 것처럼 보여 주는 안이한 사고 위에 이뤄진 작품, 인간의 삶을 왜곡시켜 표현한 것, 리얼리티가 없는 것.<br /> 일곱째, 아동의 생활과 감정을 이탈한 작품을 비호하는 비뚤어진 문학 이론, 아동을 멸시하고 아동과 아동문학에 대한 신념을 동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불성실한 발언.<sup>이오덕(1977), 《시정신과 유희정신》, 창작과비평사, 34~35쪽</su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처럼 이오덕은 어린이문학이 우리 겨레와 어린이 삶을 가꾸고, 나아가 자연 생태계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사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린이문학이 어린이 교육과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이런 관점은, 문학은 오직 문학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과 오랫동안 부딪쳐 온 것이고 앞으로도 이런 충돌은 계속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오덕은 이에 대해 &ldquo;오늘날 우리 나라에는 아동문학을 아주 시시한 문학으로 보고, 또 이 아동문학이 교육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보편화되어&rdquo; 있으며, &ldquo;심지어 아동문학 작품을 쓰는 일부 작가들까지도 아동문학에서 교육성을 생각해서는 안 되며, 아동문학도 문학인 이상 어디까지나 문학의 독자성,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rdquo; &ldquo;즉 문학에서 사상을 배제해야 한다&rdquo;고 주장하는데 &ldquo;이것은 아주 그릇된 생각&rdquo;<sup>이오덕(1984),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백산서당, 145쪽</sup>이라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은 문학가이기 전에 교육자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문학을 교육 수단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어떤 문학이든 그 시대와 역사와 사람의 삶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어린이문학은 어린이 삶에 끼치는 영향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오덕의 어린이문학 정신에 따라 만든 단체로는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가 있다. 1986년부터 이오덕이 이원수 문학 공부방을 꾸리다가 1989년 만든 단체다. 이원수 문학의 밤, 어린이문학 작가 교실을 열면서 많은 어린이문학 작가를 낳았고, 지금까지 계간 &lt;어린이문학&gt;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1부 1장 전문, 2부 2장 일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br /> 이주영</strong><br /> 어린이문화연대 대표.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회장 겸 계간 「어린이문학」 발행인이며 초원봉사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 마포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다 2011년 2월 28일 교장으로 명예 퇴임했다. 춘천교육대학교와 서울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에 서울 문창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오덕 선생님 책을 읽고 찾아가 만나게 되었고, 그 뒤 어린이도서연구회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드는 심부름꾼을 맡아 일했다. 참교육 실천을 위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참여해서 파면되었다가 복직했고,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사장과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교사는 교사다』, 『어린이 책을 읽는 어른』, 『어린이에게 좋은 책을』, 『어린이 책 200선』, 『책 사랑하는 아이 부모가 만든다』(전자책) 들이 있다.<br /> &nbsp;</p>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2 오전 11:51:00캐서디의 ‘시장의 배반’<img alt="" width="600" height="8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2_%EC%8B%9C%EC%9E%A5%EC%9D%98%20%EB%B0%B0%EB%B0%98/%EC%8B%9C%EC%9E%A5%EC%9D%98%EB%B0%B0%EB%B0%98%20%ED%91%9C%EC%A7%80_600(1).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pan></strong></span> <p>&nbsp;</p>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ldquo;어이가 없군. 이곳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다니.&rdquo;</strong><br /> ―클로드 랭,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르노 경위의 대사</span>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노인네는 창백하고 수척해 보였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각료로, 미국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며 보낸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의 말이라면 역대 대통령들도 꼼짝 못하고 예우를 갖추어 경청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 그러니까 2008년 10월 23일 아침에 의회에 출두한 앨런 그린스펀의 모습에서 그런 권위는 찾기 힘들었다. 그린스펀은 이미 2006년 1월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직을 사임한 터였다. 2007년 여름에 서브프라임모기지 증권 시장이 무너지면서 많은 금융 기관들은 헐값에도 팔 수 없는 수백억 달러의 파산 자산을 떠안았다. 하원 정부감독개혁위원회 위원장인 민주당의 헨리 왝스먼이 주재하는 국회 청문회는 TV로 연일 생중계되었고, 월 스트리트의 CEO들, 모기지 업체의 중역, 신용평가 회사 대표, 규제위원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그린스펀이 증인석에 설 차례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왝스먼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책임 지울 사람을 찾고 있었다. 모기지 증권의 주요 보유자였던 월 스트리트의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갑작스레 파산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금융시장은 예기치 않았던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미국 최대 보험 회사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sup>AIG</sup>이 파산 직전에 몰리자, 그린스펀의 뒤를 이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오른 온화한 성품의 벤 버냉키는 850억 달러의 긴급 대출 자금을 이 회사에 수혈하도록 승인했다. 연방규제위원들은 미국의 대형 모기지 은행인 워싱턴뮤추얼을 폐쇄하고 대부분의 지분을 JP모건체이스에 매각했다. 미국 4위 은행인 와코비아는 6위인 웰스파고에 흡수되었다. 다른 금융 기관의 건전성에 대해서도 루머가 돌았다. 그중에는 시티그룹과 모건스탠리, 심지어 골드만삭스까지 끼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사태를 지켜본 미국인들은 지갑을 꽁꽁 닫았다. 자동차, 가구, 옷, 심지어 책까지 팔리지 않았고 경제는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금융 시스템을 다시 안정시기키 위해 벤 버냉키와 재무장관 행크 폴슨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7000억 달러를 빼내 은행 구제 자금으로 쓸 수 있는 권한을 의회로부터 얻어냈다. 당초 계획은 부실화된 모기지 증권을 은행으로부터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10월 중순께 금융공황 사태가 고조되자, 그들은 방침을 바꾸어 2500만 달러를 직접 은행의 자기자본에 투자하는 쪽을 택했다. 이 같은 결정으로 시장은 다소 잠잠해졌지만 사건의 전개 속도가 너무 급박해서 그 의미를 차분히 따져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8년 동안 자유 시장, 감세, 작은 정부의 미덕을 외쳐 왔던 부시 정부는 미국 재무부를 미국 내 모든 대형 은행의 공동 소유자이자 효과적인 보증자로 변모시켜 놓았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시 행정부는 1930년대 이후 최대 규모로 국가 개입의 폭을 늘렸다.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 정부들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린스펀 박사.&rdquo; 왝스먼이 말문을 열었다. &ldquo;귀하는 역사상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최장수 의장이었고, 그 기간 내내 아마 우리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를 가장 앞장서서 지지했던 분일 겁니다. &hellip;&hellip; 귀하는 금융시장의 규제를 자율에 맡기도록 적극 권장했습니다. 귀하께서 했던 발언을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rdquo; 왝스먼은 메모지를 읽었다. &ldquo;&lsquo;연방 규제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시장 규제보다 더 우월한 것은 없다.&rsquo; &lsquo;장외 파생상품 거래에 대한 정부 규제는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rsquo; &lsquo;우리는 공공정책 사례가 이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rsquo;&rdquo; 늘 그렇듯이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를 맨 그린스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주름살은 깊었고 턱은 쳐졌다. 누가 봐도 여든둘 노인 그대로였다. 그린스펀의 발언을 다 읽고 난 왝스먼은 그를 보며 말했다. &ldquo;간단히 묻겠습니다. 귀하가 틀렸습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rdquo; 그린스펀은 대답했다. &ldquo;조직의 이기심, 특히 은행 등의 이기심이 자기자본과 주주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은 내 오판이었습니다. &hellip;&hellip; 문제는 매우 견고한 건축물처럼 보였던 어떤 것, 실제로 시장 경쟁과 자유 시장의 중요한 기둥이 하나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듯이 그것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미 벌어진 사태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왝스먼(그는 미국의 최고 부자 동네인 비버리힐스, 벨에어, 말리부 등이 그의 지역구라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게 매우 친서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은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개인적인 책임을 통감하느냐고 다시 물었다. 그린스펀은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 않았다. 왝스먼은 다시 메모지를 읽기 시작했다. &ldquo;&lsquo;내겐 확실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경제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이 단연 독보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규제도 해봤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했다.&rsquo;&rdquo; 왝스먼은 다시 그린스펀을 보았다. &ldquo;이 말은 귀하가 한 말입니다. 귀하께선 서브프라임모기지 위기를 초래한 무책임한 융자 관행을 막을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경제는 어디라 할 것 없이 총체적으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귀하의 이데올로기가 귀하가 원하지 않았던 결정을 하도록 밀어붙였다고 생각하십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린스펀은 도수 높은 안경을 통해 왝스먼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의 눈초리는 회한에 차 있었지만 자수성가한 뉴요커의 노회한 모습을 감출 수는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nbsp;&nbsp;그린스펀은 대공황 시기에 어퍼맨해튼의 노동자 동네인 워싱턴하이츠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타임스퀘어의 한 스윙 밴드에서 색소폰을 불었고, 얼마 후 생각을 바꾸어 경제학을 공부했다. 당시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그린스펀도 처음에는 실질적으로 정부가 경제를 관리해야 한다는 케인즈의 생각을 받아들였으나, 나중에는 입장을 바꾸어 그의 사상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에 그린스펀은 에인 랜드의 친구이자 추종자가 되었다. 자유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에인 랜드20세기에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읽은 소설 『아틀라스』의 저자는 그린스펀을 가리켜 &lsquo;장의사&rsquo;라고 불렀다. 늘 검은 옷을 입었고 말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 컨설턴트로 성공하여 알코아, JP모건, US스틸 등 많은 대기업에 자문을 해 주었다. 1968년에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자문 역할을 했고, 제럴드 포드 정부에서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1987년에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는 이번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수장이 되어 오랜 세월 동안 자유 시장 경제의 화신으로 맹활약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린스펀은 궁지에 몰렸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다루는 개념적 틀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둘러댔다. &ldquo;생존하려면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요, 결함을 봤습니다. 그 결함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오래가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난감한 것만은 분명합니다.&rdquo; 왝스먼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ldquo;결함을 봤다고요?&rdquo; 그는 다그쳤다. 그린스펀은 고개를 끄덕였다. &ldquo;말하자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정의하는 중요한 기능적 구조라고 생각했던 모델에서 어떤 결함을 찾았다는 말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왝스먼은 다음 날 신문의 머리기사가 될 제목을 끌어낸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ldquo;&lsquo;판단 착오였다.&rsquo; 그린스펀 시인&rdquo;이라고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왝스먼은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ldquo;다시 말해 귀하의 세계관, 귀하의 이데올로기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군요. 그런 것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바로 그것, 그러니까 바로 그 때문에 충격이 큰 겁니다.&rdquo; 그린스펀은 대답했다. &ldquo;그게 신통할 정도로 잘 먹혀 들어갔다는 아주 많은 증거를 가지고 40년 넘게 버텨 왔으니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에서 나는 자유 시장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흥망을 추적할 것이다. 그린스펀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의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정교하고 총체적인 방식이다. 나는 사상사와 금융위기의 설화와 해결책을 하나로 묶어 보려 했다. 최근의 사태는 그것이 전개된 지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런 맥락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1장과 21장에서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신용경색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비슷한 책들과 달리, 여기서는 관련된 기업과 인물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나의 의도는 이런 위기와 관련된 경제의 기본 이론을 파헤쳐 자유 시장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이기심의 합리적 추구가 어떻게 해서 이런 위기를 초래했고 지금도 그 위기를 지속시키고 있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브프라임모기지 시장의 붕괴와 그에 따른 세계 경제의 침체를 하나의 황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린스펀뿐이 아니었다. 2007년 여름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버냉키 의장을 비롯한 많은 분석가들은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지나치게&nbsp;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미국 여러 지역에서 주택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모기지를 갚지 못하는 가구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미국 자본주의의 생명력과 그것이 대변하는 사상을 의심하지 않는 분위기가 대세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번영을 보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부의 간섭을 억제하고 경제를 민간 부문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1970년대 후반에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케인즈와는 반대 입장을 대변하는 보수적인 반동 정부를 출범시켰을 때,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아서 래퍼, 키스 조지프 등 이런 논리를 처음 밀어붙였던 지식인들을 우파의 별종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1990년대에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많은 진보 정치가들까지 이런 우파의 논법을 채택하자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긴 클린턴과 블레어에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대서양 양쪽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보수파가 득세하면서 시장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정치적 체면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의 각국 정부는 복지 프로그램을 폐지했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정부의 감독 아래 있던 산업의 규제를 풀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에서 규제 완화는 카터 행정부가 항공기 노선 제약을 폐지하면서 조심스러운 첫발을 내딛었다. 이 정책은 통신, 미디어, 금융 서비스를 비롯하여 경제 각 분야로 확대되었다. 1999년에 클린턴은 &lsquo;그램리치블라일리법<sup>Gramm-Leach-Bliley Act</sup>&rsquo;금융제도개혁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통합하여 거대한 금융 슈퍼마켓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버드를 대표하던 경영학자 로렌스 서머스는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이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선봉장 역할을 했다. (지금 서머스는 버락 오바마의 최고 경영 자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형 금융사의 로비스트나 기업에서 설립한 워싱턴 연구 기관의 분석가들, 그리고 금융 분야를 대표하는 의원 등, 금융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돈줄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그린스펀이나 서머스 같은 사람들도 월 스트리트가 상당 부분 자율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금융시장은 연봉도 많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로 채워져 누가 먼저 돈을 쓸어 담느냐 하는 투기장으로 변해 갔다. 다른 분야와 달리 금융 산업에서는 어떤 일개 회사가 시장을 궁지에 몰아넣거나 시장가격을 결정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경제학 정설에 의하면 그런 환경에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바꾸어 놓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주장이 어떤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지 않았다면, 보수 반동은 그들이 거두었던 성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시장은 땀 흘린 노동과 개혁과 품질 좋고 값도 알맞은 제품을 공급하는 데 따르는 보답을 해 준다.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거나 질 나쁜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나 노동자에게는 응당한 제제를 가한다. 이런 당근과 채찍의 메커니즘은 자원이 생산적인 용도로 할당되어 공산주의나 봉건주의 같은 효율적인 인센티브 구조가 없는 다른 체제보다 시장경제를 더 효율적이고 역동적으로 작동하도록 보장한다. 이 책 어디를 뒤져도 토지 문제로 되돌아가자거나 소련의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를 재건하자는 주장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시장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하게 되면 이제부터 실체를 밝히려는 세 가지 환상 중의 하나인 &lsquo;조화<sup>harmony</sup>&rsquo;라는 환상에 희생되는 불행을 피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부에서 나는 애덤 스미스부터 앨런 그린스펀까지 훑어 가면서 소위 유토피아 경제학의 실체를 추적할 것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을 비롯한 &lsquo;시카고학파&rsquo;의 주장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일반균형이론<sup>general equilibrium theory</sup>이라는 자유 시장의 정설까지 아울러 설명할 것이다. &lsquo;유토피아 경제학&rsquo;이라는 프리드먼의 브랜드는 그 자체로 유명한 경제학 이론이지만, 그것은 레옹 발라, 빌프레도 파레토, 케네스 애로 같은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수학적 설명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왜 많은 전문 경제학자들이 자유 시장을 존경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도 많은 경제학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일반균형이론이 안정적이고 자정 능력을 가진 메커니즘으로서의 경제학이란 개념을 &lsquo;과학적&rsquo;으로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일반균형이론은 전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유 시장 경제가 튼튼하고 건실한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상은 &lsquo;안정성<sup>stability</sup>&rsquo;이라는 환상일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보수파의 상대적 우위는 대략 1997년에서 2007년까지 지속된 소위 &lsquo;그린스펀 버블 시대&rsquo;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 10년 동안 세 가지 투기 거품이 따로 형성되어 있었다. 기술주, 부동산, 그리고 석유 같은 물리적 상품이었다. 각각의 경우에 투자가들은 단기 차익을 내기 위해 조바심을 냈고 물가는 수직적으로 치솟았다가 금융 붕괴를 맞았다. 10년 전부터 이미 거품은 하나의 이상 조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거품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견해는 쑥 들어갔다. 그린스펀조차도 발뺌하기에 급급하다 한참 후에야 주택 거품의 존재를 인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버블이 시작되면 자유 시장은 더 이상 자원을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할당하는 믿을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자유 시장은 벼락치기 불로소득을 꿈꾸는 사람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전망을 내놓으면서, 개인과 기업이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행동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런 왜곡된 인센티브의 문제점은 금융시장에서 가장 심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 전반의 문제이다. 시장은 유수 기업들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온난화를 야기하고, 건강보험 회사가 아픈 사람들을 보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컴퓨터 제조 회사가 고객들에게 필요없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강매하고, CEO들이 주주들을 희생시켜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도록 부추긴다.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lsquo;시장 실패&rsquo;의 사례이다. 시장 실패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어 결국 제목이 된 개념이다. 시장 실패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건강보험, 첨단기술, 금융 등 경제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월 스트리트 저널》의 편집자에겐 이런 이야기가 흥미 있는 뉴스거리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신문 기사는 논란거리가 될 만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지난 삼사십 년 동안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 모델이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잘 들어맞지 않을 때 시장이 어떻게 기능을 하는지 검토하느라 분주했다. 몇 가지 이유로 시장 실패 경제학은 시장 성공 경제학에 비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lsquo;실패&rsquo;라는 단어가 너무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쨌든 &lsquo;시장 실패 경제학<sup>market failure economics</sup>&rsquo;은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lsquo;정보 경제학<sup>economics of information</sup>&rsquo;도 있고 &lsquo;미비된 시장의 경제학<sup>economics of incomplete markets</sup>&rsquo;도 있지만 &lsquo;시장 실패 경제학&rsquo;은 없다. 최근에는 &lsquo;행동경제학<sup>behavioral economics</sup>&rsquo;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나는 &lsquo;현실 기반 경제학<sup>reality-based economics</sup>&rsquo;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이 용어를 이 책 2부의 제목으로 삼았다. 현실에 기반한 경제학은 유토피아 경제학에 비해 통일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경제는 미로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현실 기반적인 경제학은 다양한 이론을 한꺼번에 다루게 되고, 그 이론들은 제각기 특정한 시장 실패에 적용된다. 이런 이론은 보이지 않는 손만큼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효용성은 더 높다. 미인 콘테스트, 재난에 대한 근시안적 태도, 레몬 시장 같은 내가 개관하려는 개념의 관점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 없이 어떻게 지냈는지 신기해질 정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실에 기반을 둔 경제학의 출현은 그 원천을 두 갈래로 추적할 수 있다. 1960년대 말에 시작된 정통 경제학에서 새로운 세대의 전문가들은 정보 문제, 독점적 권력, 맹목적 집단행동 같은, 자유 시장 모델에 잘 들어맞지 않는 여러 주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험 정신이 남다른 두 명의 심리학자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은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인 호모에코노미쿠스<sup>Homo economicus</sup>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인간이 영리적인 타산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는 사실을 누가 알아냈다 하더라도, 인간은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우리는 무수한 경제 이론의 중심에 있는 수리적 최적화 문제는커녕 경제의 실마리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해 쩔쩔매고 있다. 복잡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종종 주먹구구식 방법이나 본능에 의존하곤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트버스키와 카너먼 등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이론을 경제학에 응용하게 되면, 두 갈래의 사상은 &lsquo;행동경제학&rsquo;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 행동경제학은 경제학의 엄격함과 심리학의 사실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부에서 나는 카너먼과 트버스키에게 한 장을 할애했지만 이 책이 또 하나의 행동경제학 교과서로 오해받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현실 기반적 경제학은 다루는 대상이 훨씬 더 넓지만, 그 대부분은 합리성이란 공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또한 그 역사도 상당히 길다. 현실 기반적 경제학의 발전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동료이자 라이벌인 영국의 아서 피구<sup>Arthur C. Pigou</sup>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많은 경제 현상에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나의 행복에 영향을 주고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준다는 상호 의존성이란 개념이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시장이 종종 놓치는 대목이다. 나는 이런 &lsquo;과잉 효과<sup>spillover</sup>&rsquo;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지구온난화를 통해 설명한 다음, 다른 만연한 시장 실패의 유형을 본격적으로 다룰 것이다. 여기엔 독점력, 전략적 상호작용(게임이론), 숨겨진 정보, 불확실성, 투기적 버블 등이 포함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분야에 공통되는 주제는 시장이 가격 체계를 통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비합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한계 안에서, 또 환경에 따른 제약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한다. 3부 &lsquo;대경색<sup>Great Crunch</sup>&rsquo;에서 나는 이 논지를 더욱 밀고 나가, 1부와 2부에서 전개한 개념적 도구를 사용하여 그런 주장을 금융위기에 적용할 것이다. 돈에 쪼들리는 근로 계층 가계를 위험도가 높은 서브프라임모기지로 끌어들인 모기지 브로커들은 돈이라는 인센티브에 반응했다. 이런 대출을 승인해 준 대출 담당자들이나, 그 대출 상품을 기발한 수법을 써서 모기지증권으로 바꾸어 놓은 투자은행이나, 이 증권을 안전한 투자로 규정한 신용평가 기관의 분석가들이나, 그 증권을 사들인 뮤추얼펀드 매니저들도 모두 돈이라는 인센티브를 갖고 움직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브프라임 붐은 아는 사람만 아는 내용, 불확실성, 숨겨진 정보, 맹목적인 추세 추종, 풍부한 신용 등이 맞물리면서 자본주의의 실패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 모든 것들은 현대 경제의 특징이기 때문에, 서브프라임은 늘 보아 왔던 사업상의 실패였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애써 부인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연방준비제도이사회나 재무부나 패니메이연방주택저당조합나 프레디맥연방주택대부저당공사에 돌리려 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사실상 준정부기관인 대형 모기지 회사이다.(미국 재무부는 그들의 빚을 암묵적으로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저명한 보수주의자이자 &lsquo;법경제학&rsquo;의 개척자인 리처드 포스너는 핵심을 간파했다. 그는 2008년의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ldquo;이 위기는 일차적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최소한의 규제라는 환경에서 민영 회사들이 취한 결정의 결과일 것이다. 우리는 규제가 대폭 완화된 금융 부문이 경제 각 분야를 무력화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잘못된 경제정책이 주범이었다. 그린스펀과 버냉키는 너무 오랜 기간 금리를 지나칠 정도로 낮게 유지하면서 시장이 보내는 물가 신호를 왜곡했고, 예기치 못한 주택 버블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조장했다. 탐욕도 자주 언급되는 요소이다. 우매함은 세 번째이다. (아무리 월 스트리트의 얼간이들이라고 해도 그렇지, 악명 높은 &lsquo;닌자&rsquo; 모기지론처럼 수입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얼토당토한 발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버니 매도프와 그의 수백억 달러의 폰지사기가 폭로되기도 했지만, 범죄 행위 역시 따져 봐야 할 또 하나의 요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부 독자들은 발끈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물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탐욕은 언제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탐욕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자본주의 모델의 &lsquo;원형&rsquo;이다. 우매함 역시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나는 우매함도 여기서는 대수로운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몇 가지 분명한 예외가 있지만 노골적인 착복 행위도 대단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재정적 실책을 저지르고도 수백만 달러의 퇴직 수당을 챙겨 지난 2년 동안 툭하면 신문 1면을 장식하곤 했던 척 프린스나 스탠 오닐이나 존 테인 같은 월 스트리트의 고위 임원들을 무조건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울 수만은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들은 대부분 영리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일해 승진한, 유별난 상상력을 가진 것도 아닌 미국인이며, 교양 있는 바른 생활의 사나이들이었고, 동료들에 비해 성과가 조금 더 좋았고, 대대적인 신용 붐이 일었던 기간 내내 주요 직책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중 몇몇, 어쩌면 대다수가 당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nbsp; 대해 미심쩍은 생각을 가졌겠지만, 그들이 몸담았던 경쟁적인 분위기는 그들에게 자제할 만한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환경은 그들을 더욱 부추겼다. 붐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4년에서 2007년 사이에 은행과 그 밖의 금융회사들은 경이적인 수익을 올렸다. 그들의 주가는 계속 기록을 경신했고 리더들은 언론에서 영웅 대우를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를 들어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시티그룹의 CEO를 맡았던 척 프린스가 2005년에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서브프라임 시장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하자.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프린스의 경쟁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의 결단이 현명하다고 인정하고 그 뒤를 따랐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온 직원을 동원해 시티그룹이 내던진 사업에 벌 떼처럼 달려들었을 것이다. 시티그룹의 단기 수익은 경쟁사와 비교해 열세를 면치 못했을 테고 주가도 하락했을 것이다. 마침 시티그룹의 다른 사업에서 생긴 문제로 이미 궁지에 몰려 있던 프린스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구닥다리 노인네라는 낙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2007년 7월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프린스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이렇게 인정했다. &ldquo;유동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음악이 멈추면 사태는 복잡해질 겁니다.&rdquo; 프린스는 그렇게 운을 뗐다. &ldquo;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일어나서 춤을 춰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습니다.&rdquo; 넉 달 뒤 시티그룹은 악성 기업 부채와 부실 주택 모기지로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발표했다. 프린스는 사퇴했고 그의 평판도 땅에 떨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린스가 맞닥뜨린 딜레마는 게임이론으로 치자면 &lsquo;죄수의 딜레마&rsquo;에 해당한다. 죄수의 딜레마는 경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할 때 집단적 결과가 어떻게 나쁘게 나타나는지 설명해 주는 이론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내 행동을 정해야 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이론은 가능성 있는 결과에 관해 별다른 지침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게임이론이 만들어질 때까지, 경제학자들은 이런 경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목적은 분명하지만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 어떻게 형성되고 존속할 수 있는지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런 행동을 나는 &lsquo;합리적 비합리성<sup>rational irrationality</sup>&rsquo;이라 부르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3부 &lsquo;대경색&rsquo;에서는 합리적 비합리성이 어떻게 주택 버블,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의 성장, 그리고 이어지는 금융 체제의 붕괴를 야기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지난 몇 해 동안 우리가 목격한 현실은 궤도를 벗어난 이상 현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신용 주도적인 호황과 불황의 변동 주기는 수백 년 동안 자본주의 경제를 괴롭혀 온 문제였다. 지난 40년 동안 세계적으로 124건의 체제상의 은행 위기가 있었다.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그런 위기를 겪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는 일본, 노르웨이, 스웨덴, 미국 등 많은 선진국들의 차례였다. 저축-대부 사업이 붕괴하면서 미 의회는 정리신탁공사<sup>Resolution Trust Corporation</sup>를 설립하여 수백 개의 실패한 금융기관을 떠맡았다. 아시아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 등 급속히 성장하는 여러 나라들이 금융 폭탄을 맞고 휘청거렸다. 2007년에서 2008년 사이에 금융 폭발은 다시 미국의 차례가 되었고, 그 한복판에는 대형 은행들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러 해 동안 그린스펀을 비롯한 여러 경제학자들은 비우량주택담보증권<sup>MBS</sup>, 부채담보부증권<sup>CDO</sup>, 신용부도스왑<sup>CDS</sup> 같은 복합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금융상품들이 시스템을 보다 안전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품의 기본 개념은 시장가격을 리스크에 놓고 그것을 떠안을 의지와 능력이 있는 투자가에게 배분함으로써 체제적 위기의 확률을 대폭 줄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험 분산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착오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상품이 거래되는 가격은 금융시장의 움직임이 규칙적인 패턴을 따르고 있으며 또한 시장의 일일 변동폭까지는 아니더라도 전반적인 분배 정도는 예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런 분배를 예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내가 &lsquo;예측 가능성의 착오<sup>illusion of predictability</sup>&rsquo;라고 부르는, 유토피아 경제학의 핵심을 이루는 제3의 착오에 의한 오류이다. 실제로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 시장은 참가자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반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이야기를 나열하고 또 그 이야기를 2009년까지 끌고 오면서, 나는 최근의 사건을 시장 체계의 업적에 관한 오랜 지적 토론과 연관시키려 했다. 지난 10년은 몇 가지 의문에 대한 대답을 위해 고안된 독특한 자연적 실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경제 규제를 완화하고 경제에 엄청난 액수의 저리 자금을 공급할 때, 금융 주도적인 21세기의 경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작동하도록 보장해 주는가? 이 책은 경제 교과서는 아니지만 독자들을 매일 신문의 헤드라인의 이면에 감추어진 사실로 이끌면서 현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법과 경제정책을 만드는 이론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책을 정치와 특정 관심에 관한 전부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책도 분명 일정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의회와 케이블 TV와 신문의 기명 투고란에서 벌어지는 토론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복잡하고 추상적인 관념이 버젓이 존재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자신은 어떤 지적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실용적 인간도, 이미 고인이 된 경제학자들의 노예인 경우가 많다.&rdquo;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sup>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sup>』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ldquo;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권좌에 앉은 미친 사람들이 저지르는 미친 짓도 알고 보면 몇 년 전에 학자들이 끄적거린 내용을 추린 것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rdquo; 케인즈는 화려한 수사에는 소질이 부족했지만 경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소개할 내용이 독자들로 하여금 이전에 모호하게 여겼던 부분을 좀 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내가 들인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이 또한 유토피아 경제학을 역사책에 넘겨 줄 수 있다면, 그 역시 보람이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333333"><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 유토피아 경제학</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내겐 확실한 이데올로기가 있다.<br /> 경제를 꾸려 가는 데 있어서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만이 <br /> 단연 독보적인 방법이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br /> 규제도 해봤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rdquo;</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앨런 그린스펀</span></p>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trong>1&nbsp;&nbsp;&nbsp;&nbsp;&nbsp; 경고에 귀를 닫는<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lsquo;사회적 통념&rsquo;</strong></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5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벤 버냉키는 주택 가격이 오르는 것은 &ldquo;경제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rdquo;이라고 주장했다. 아흐레 뒤에 부시 대통령은 그를 그린스펀의 후계자로 발탁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너무 황당한 사건을 겪으면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반응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뉴올리언스를 할퀴고 간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끔찍한 경로, 이 모든 경우에 대해 당국은 전혀 낌새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고 발뺌했다. 엄밀히 말해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좀 더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분명 어떤 조치라도 취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확고한 지식이 없다고 해서 전혀 모른다고 둘러댈 수는 없다. 1941년에 미국의 일본 전문가들은 대부분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고했었다. 9․11 사태만 해도 알카에다는 전부터 미국을 재차 공격하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고, CIA와 FBI는 혐의자들을 감시 대상에 올려놓고 있었다. 미육군 공병대의 전문가들은 1986년부터 이미 뉴올리언스를 보호하고 있는 제방의 설계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국이 이런 재앙을 피하지 못한 것은 시의적절한 경고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책임자들이 유달리 부패한 것도 아니었고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무지조차도 있을 수 있는 수준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일본이 감히 하와이를 폭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지하드를 외치는 자들이 민간 여객기를 맨해튼의 고층빌딩에 처박는다는, 멕시코 만의 가공할 파도가 쉰 개가 넘는 제방을 동시에 깨뜨릴 수 있다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극단적 사건에 대한 수학적인 정의로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 내에 있는 일은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또 하나의 독자적이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지만 이 역시 경고 없이 닥친 사건은 아니었다. 2002년에 이미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일부 평론가들은 미국 곳곳에서 부동산 가격이 소득에 비해 너무 높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해 가을, 나는 롱아일랜드의 레비타운의 전형적인 한 중산층 마을을 찾아갔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개발 업체인 레빗앤선스<sup>Levitt and Sons</sup>가 800제곱미터의 랜치하우스를 팔려고 내놓았을 때 냉장고와 가스레인지, 세탁기, 기름 보일러, 베네치안 블라인드를 완비한 그 주택의 가격은 7990달러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그 집은 어느 정도 손질을 하긴 했지만 대략 30만 달러를 호가하고 있었다. 이미 2년 전 시세에 비해 50퍼센트나 오른 시세였다. 1951년부터 집안 대대로 부동산을 팔아 왔다는 중개업자 리처드 댈로우는 마을 곳곳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2000년의 나스닥 폭락, 2001년의 경기 침체, 9․11의 여파에도 집값은 끄떡없었다며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ldquo;어느 시점에선 영향을 받을 겁니다. 2000년 여름을 그런 시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얼마 안 가 원 상태로 돌아왔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체로 레비타운에서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은 늘 정해져 있었다. 경찰관, 소방대원, 경비원, 건설 노동자 등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집을 살 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집값 인플레이션 때문에 이들은 레비타운에 집을 장만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댈로우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기는 &ldquo;예나 지금이나 다운페이가 낮은 동네였습니다. 가격이 33만이면, 5퍼센트만 다운페이를 하고 나머지 31만 3500은 모기지로 하면 됩니다. 그러니 점보 모기지를 얻어야 합니다. 레비타운에선 그렇습니다.&rdquo; 타임스퀘어의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뉴요커》에 실을 글의 제목을 뽑았다. &ldquo;다음 붕괴<sup>The Next Crash</sup>.&rdquo; 그리고 댈로우와 부동산 시장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몇몇 금융 분석가들의 말을 인용했다. &ldquo;가격이 너무 올랐지만 아직도 끝은 아니다.&rdquo; HSBC 은행의 미국 담당 수석경제학자 이언 모리스는 그렇게 말했다. &ldquo;두 부부만 사는 조그만 집조차 소득에 비해 값이 너무 비싸다.&rdquo; CLSA 이머징마켓의 투자 전략가인 크리스토퍼 우드의 말은 훨씬 더 과격했다. &ldquo;미국의 주택 시장은 마지막 빅 버블이다. 터지는 순간에는 끔찍할 것이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2003년부터 2006년까지 주택 가격 상승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했다. 2005년 6월 《이코노미스트》는 이렇게 경고했다. &ldquo;주택 가격의 세계적인 상승은 역사상 유례없는 버블이다. 버블이 꺼질 때 당할 경제적 고통에 대비해야 한다.&rdquo; 이 시사 주간지는 미국에서 집세에 대한 주택 가격의 비율이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높다고 지적하면서 어떤 지역에서는 매년 20퍼센트 이상 오르고 있다고 우려를 감추지 않았다. 2000년에 베스트셀러 『터무니없는 과열<sup>Irrational Exuberance</sup>』을 내놓은 예일 대학교의 저명한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는 《배런스<sup>Barron&rsquo;s</sup>》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ldquo;지금의 주택 가격 버블을 보면 1999년의 주식시장 광풍을 보는 것 같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경고들을 흘려들을 수밖에 없었던 한 가지 이유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 때문이었다. 자산 가치가 매년 20 내지 30퍼센트 올라갈 때는, 그런 자산을 소유하거나 팔고 사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들이 새로 찾아낸 재산이 환상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 곡선이 역전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부동산 중개업자와 아파트 전매업자들만이 아니었다. 부동산을 전문으로 하는 경제학자들도 대부분 그들과 같은 의견이었다. 웰즐리 대학의 한 경제학자는 내게 미국의 평균 주택 가격이 1945년 이후 해마다 상승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프레디맥의 수석경제학자인 프랭크 노태프트는 낮은 모기지 금리, 대규모 이주, 적당한 물량의 신축 주택 등 &lsquo;경제적 펀더멘털&rsquo;을 열거하며 이런 요인이 주택 가격이 높게 형성되고 계속 상승하는 현상을 정당화해 준다고 주장했다. &ldquo;단독주택 가격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rdquo; 그는 잘라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택 붐이 이어지자 미국 정부까지 전국 주택 가격의 방향이 오직 위로만 치달릴 것이라는 프랭크 노태프트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2003년 4월, 캘리포니아 주 시미밸리에 있는 레이건 대통령 기념관에서 앨런 그린스펀은 미국에서 부동산 버블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10월, 그린스펀은 부동산은 투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ldquo;집을 팔면 곧바로 어디엔가 이사를 가서 살아야 할 것 아닌가?&rdquo;라고 반문했다. 2005년 6월에 의회에 출두해 증언하는 자리에서 그는 몇몇 지역에 &lsquo;버블&rsquo;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주택 시장은 어디까지나 지역적인 문제라며 전국적 규모의 버블 가능성은 배제했다. 특정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는 것까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린스펀은 &ldquo;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해도 거시경제적으로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을 것&rdquo;이라고 결론지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린스펀이 이런 코멘트를 했을 때는 벤 버냉키가 2002년부터 맡고 있던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이사직을 그만두고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으로 간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 2005년 8월에 버냉키는 부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기 위해 텍사스 주 크로포드로 갔다. 거기서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ldquo;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주택 버블 이야기가 있었습니까?&rdquo; 버냉키는 주택 문제도 논의 대상이었다고 전하며 이렇게 말했다. &ldquo;주택 가격이 상당 부분 매우 단단한 기반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hellip;&hellip; 일자리와 고용 수요도 많고, 소득은 높고 모기지 금리는 낮고,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토지와 주택 부족으로 시달리는 지역이 많습니다.&rdquo; 2005년 10월 15일에 전미실물경제협회<sup>NABE</sup>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버냉키는 주택 가격이 오르는 것은 &ldquo;경제적 기반이 그만큼 탄탄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현상&rdquo;이라고 주장했다. 아흐레 뒤에 부시 대통령은 그를 그린스펀의 후계자로 발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5년 8월 버냉키가 텍사스로 간 뒤 몇 주 지나, 연방준비제도의 열두 개 지역 은행 가운데 하나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이 주최한 연례 경제정책 심포지움은 그린스펀 시대가 가르쳐 주는 교훈에 충실했다. 늘 하던 대로 회의는 와이오밍 주 잭슨홀의 고급 휴양지인 잭슨레이크로지에서 열렸다. 개막 연설은 그때까지 18년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던 그린스펀의 몫이었다. 전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유럽 중앙은행의 장 클로드 트리셰 총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연사들은 연준 의장에게 최고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ldquo;그린스펀이 연방준비제도에서 눈부신 성공을 일구어 낸 의장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rdquo; 프린스턴 대학의 경제학자이자 전 연준 이사였던 앨런 블라인더는 그렇게 말했다. 시카고 대학 부스 경영대학원의 경제학자이자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수석경제학자였던 라구람 라잔은 조금 비판적인 입장이어서 20년 동안의 금융 규제 완화의 결과를 문제 삼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nbsp; 라구람 라잔<sup>Raghuram G. Rajan</sup>은 1963년에 인도 중부의 보팔에서 태어나, 1991년에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시카고 경영대학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3년에 그는 재정 분야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40대 기수로 지목받았다. 그해에 라잔은 IMF의 수석경제학자에 지명되어 2006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라잔을 급진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가 공동으로 저술한 어떤 책은 제목이 『자본가로부터 자본주의 구하기: 속박된 금융시장의 힘을 풀어 부를 창조하고 기회를 넓히자<sup>Saving Capitalism from the Capitalists</sup>』였다. (한국어 판 제목은 『시장경제의 미래』이다.)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 정부에서 일했던 보수파 행동주의자 브루스 바틀릿은 이를 &ldquo;지금까지 쓰인 책 가운데 가장 확실하게 자유 시장을 방어하는 책&rdquo;이라 평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라잔은 역사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규제 완화와 기술적 진보로 은행들은 가계로부터 예금을 받아 다른 개인이나 기업에 빌려주는 핵심 사업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은행들은 주택저당증권<sup>MBS</sup>, 부채담보부증권<sup>CDO</sup>&nbsp;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유가증권 거래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은행은 이런 유가증권의 대부분을 투자가들에게 팔았지만, 일부는 투자를 목적으로 직접 보유하기도 했다. 따라서 관련 시장이 크게 위축될 때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라잔은 이렇게 말했다. &ldquo;이런 시스템은 위험을 분산시켜 경제의 위험자산 규모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보다 더 큰 위험을 떠안게 되는 부담 또한 피할 수 없다. 더욱이 시장과 시장, 시장과 기관의 연계는 보다 뚜렷해졌다. 이런 현상은 시스템이 작은 충격을 다변화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자산 가치의 큰 변동이나 총 유동성의 변화 등, 시스템을 더 큰 체계적인 충격에 노출시킨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라잔은 그 밖에 금융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소에 눈을 돌려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보상을 문제 삼았다. 고위 재무 담당자들은 거의 모두가 사업에서 발생하는 투자 수익과 연동된 보너스를 받는다. 이런 수익은 리스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매니저나 기업이 보다 높은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lsquo;왜곡된 인센티브<sup>perverse incentives</sup>&rsquo;가 있다고 라잔은 지적했다. 특히 확률은 매우 적지만 발생할 경우 끔찍한 결과를 낳는 소위 꼬리 리스크<sup>tail risks</sup>의 경우는 그 영향력이 더욱 막대하다. 그 밖에도 투자가나 거래자가 서로의 전략을 따라하는 소위 쏠림 현상도 안정을 해치는 요소가 된다고 라잔은 말한다. 자산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남들이 사면 따라서 사게 되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를 기반으로 하는 보상과 쏠림 현상이 합쳐지면 &ldquo;매우 불안정한 휘발성 상태가 된다. 군중의 행동으로 자산 가치가 펀더멘털에서 멀어지게 되면, 대규모의 조정 가능성, 정확히 말해 꼬리 손실을 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가능성은 증가한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라잔은 &ldquo;칵테일을 특히 휘발성 상태로 만드는&rdquo; 요소가 한 가지 더 있다고 덧붙이면서 &ldquo;그것은 금융 자유화나 극단적인 시장 친화적 통화정책으로 인해 고금리 기간이 지난 후에 등장하는 저금리&rdquo;라고 지적했다. 저리자금으로 은행, 투자은행, 헤지펀드들은 더 많은 돈을 빌려 더 큰 투자처를 찾게 된다고 라잔은 강조한다. 신용이 원활하게 움직일 때는 도취감이 고조되지만 &lsquo;서든 스톱&rsquo;에 부딪히면 경제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미국 경제가 그런 결과를 용케 피해 왔다고 라잔은 양보하면서도, 1987년의 주식시장 폭락과 2000-2001년의 기술주 붕괴로부터의 반동은 &ldquo;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증권시장에 대한 충격이 아무리 크다 해도 신용 시장에 대한 충격만큼 막대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rdquo;라고 분석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체로 중앙은행 뱅커들은 무대 위로 몰려가 삿대질을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랬다면 라잔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얼마 후에 연방준비제도 부의장에 임명되는 연준 이사 돈 코온은 라잔의 주장을 증권화 론<sup>securitized loan</sup>과 신용부도스왑<sup>credit default swap</sup> 같은 새로운 금융상품의 개발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lsquo;그린스펀 독트린&rsquo;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ldquo;금융기관들이 리스크를 다변화하고, 리스크 프로파일을 보다 정확하게 선택하고, 그들이 떠안는 리스크의 관리를 개선하도록 해 줌으로써, 우리는 기관의 건전성을 높여 왔다.&rdquo; 돈 코온은 그렇게 주장했다. &ldquo;그리고 이런 상품의 개발은 시장 전반에서, 그리고 전국적인 범위에서 저축의 흐름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자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분배하여 성장을 촉진시켰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린스펀 독트린이 금융시장을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돈 코온은 한 발 물러서면서도 &ldquo;그린스펀 의장이 말하는 사적 규제, 즉 민간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율적 행동은 대체로 아주 효과적이다.&rdquo;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정부는 &ldquo;인센티브를 억제하여 사적 규제와 금융 안정을 훼손시키는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rdquo;라고 비판했다. 월 스트리트의 보상 구조에 어떤 종류의 정부 조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라잔의 제안에 대해, 코온은 은행이나 여타 금융기관들이 &ldquo;단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장기 리스크를 담보로 잡거나, 고객들을 위해 그들이 부담하는 리스크의 정도를 애써 축소하거나,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평판에 금이 가게 만드는 것&rdquo; 등은 기관의 고위 간부들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ldquo;결과적으로 나는 보상 문제에 정부의 간섭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시장에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rdquo;라고 고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버드 대학교 총장 로렌스 서머스는 발언권을 얻어 일어나 말했다. &ldquo;이 보고서의 기본 전제는 다소 고루하고 대체로 핵심을 잘못 짚었다.&rdquo; 잠깐 말을 멈춘 서머스는 그린스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 후, 금융 산업의 발전을 민간 항공의 역사에 비유했다. 간혹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예전보다 더 쉽고 안전하게 갈 수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ldquo;내가 보기에 지금까지 추세는 대체로 긍정적이다.&rdquo; 금융시장의 자기 강화적인 나선 구조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이 적법하다고 생각한 탓인지 서머스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ldquo;라구람 라잔 교수의 지적은 대체로 규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은 문제가 많아 보인다. 그의 주장은 여러 나라의 갖가지 잘못된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라잔의 발표에 대한 반응은 이론적인 차원에서조차 규제 완화와 자유 시장이라는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입증해 주었다. 코온은 그린스펀의 오랜 동료이자 조언자로서의 &lsquo;자부심&rsquo;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머스의 경우는 달랐다. 1980년대 하버드대의 소장파 교수로서 서머스는 주식 구매 같은 증권 거래에 대한 세금을 옹호하면서, 월 스트리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판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부가가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야바위 노름이라고 주장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대통령 후보들의 자문까지 맡고 클린턴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역임할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lsquo;사회적 통념<sup>conventional wisdom</sup>&rsquo;을 수호하는 선봉장이 된 것이다. 사회적 통념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만들어 낸 용어로, 정책 논의와 술집에서 흔히 벌어지는 토론의 뼈대가 되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가정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갤브레이스가 1958년의 베스트셀러인 『풍요로운 사회<sup>The Affluent Society</sup>』에서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통념은 어떤 정당이나 신조의 독점물이 아니다. 공화당원이든 민주당원이든,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독실한 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모두가 그런 통념의 핵심적 교의에는 동의한다. &ldquo;사회적 통념은 건전한 학문과 다소 동일시되기 때문에, 그 지위는 실제로 견고하다. 회의주의자는 오래된 것을 버리고 새것을 찾는 바로 그런 경솔한 경향 때문에 실격된다. 건전한 학자라면&hellip;&hellip; 사회적 통념을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다.&rdquo; 갤브레이스는 그렇게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사회적 통념은 어떤 경로를 통해 자리를 잡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18세기 글래스고에서 시작하여 런던과 로잔과 빈과 시카고와 뉴욕과 워싱턴 DC를 관통하는 지적 오디세이를 감행해야 한다. 유토피아 경제학은&nbsp;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유 시장 독트린의 결함에 눈을 돌리기 전에, 우선 그 독트린이 발달한 과정과 그 끈질긴 매력을 살펴보자.&nbsp;<br /> <br /> (서문, 1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존 캐서디 (John Cassidy)</strong><br /> 1963년 출생, 옥스퍼드 대학교와 뉴스쿨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lt;선데이 타임스&gt;, &lt;뉴욕 포스트&gt;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현재 &lt;뉴요커&gt; 경제 담당 기자이며 &lt;뉴욕 리뷰 오브 북스&gt;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닷콘: 인터넷 시대에 미국이 어떻게 정신과 돈을 잃고 있는가?(Dot.con:How America Lost Its Mind and Money in the Internet Era)』가 있다. <br /> 1987년 주가가 빠른 속도로 대폭락한 블랙먼데이에 존 캐서디는 월 스트리트의 비명을 기사화하려고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전혀 예상 밖으로 월 스트리트의 바에 모인 화이트칼라 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날 팔자 일색의 주식 거래량은 사상 최대였고, 수수료를 챙겨 먹고 사는 트레이더들은 가장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날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실상은 눈에 보이는 것과 늘 일치하지만은 않는다는 잊지 못할 교훈을 얻는다.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는 십여 년 전에 죽은 하이먼 민스키의 책이 이베이에서 수백 달러에 거래되었다. 수십 년 전 민스키라는 무명의 경제학자가 경고한 금융 위기가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lsquo;보이지 않는 손&rsquo;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유토피아 경제학은 환상이었던 것이다.<br /> 이처럼 세계 경제의 추진력인 자유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어디서 해답을 찾아야 할까? 경제학자이자 경제 전문 기자로서 존 캐서디는 주류 경제학이 놓친 경제 이론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경제 교과서가 무시했던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목소리, 아서 피구, 만델브로 등의 주장을 살피면서, 독자에게 현실 경제를 다른 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참신한 틀을 제공해 준다. 『시장의 배반(How Markets Fail)』은 미국에서 출간 이후 큰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화제가 되었다. IMF 이후 금융 시장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 독자에게도 큰 통찰력을 전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1 오전 10:35:00안상운의 ‘정보공개란 무엇인가’<p><img alt="" width="600" height="94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1_%EC%A0%95%EB%B3%B4%EA%B3%B5%EA%B0%9C%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EC%A0%95%EB%B3%B4%EA%B3%B5%EA%B0%9C%20%ED%91%9C%EC%A7%80_600.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정보</strong></span>공개의 필요성</span></span></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정부나 기업 등의 비윤리적 행위에 관한 비밀문서를 폭로하는 웹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 <a href="http://www.wikileaks.ch">www.wikileaks.ch</a>)가 세계 각국의 정보공개제도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그동안 아프리카 연안 유독물질 투기 관련 메모, 영국 극우파 정당(BNP) 당원 명부, 쿠바 관타나모 미국 해군기지 수용소의 운영 세칙, 스위스은행 관련 문건 등을 폭로했다. 2010년에는 이라크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가 기자를 포함한 민간인 12명을 사살하는 동영상,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 관련 기밀 문건 수십만 건 등을 공개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나라들은 모두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전문 등이 보여 주듯이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는 겉 다르고 속 다른 행태를 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Julian Paul Assange)는 위키리크스의 존재 이유가 정부의 비밀을 공개하여 국민의 알권리를 보호하고, 국민 스스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키리크스의 폭로 때문에 각국 정부의 밀실주의와 무조건적인 비밀주의가 드러나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 때문에 위키리크스가 전통적인 정보공개제도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고 툭하면 이런저런 사유로 비공개결정이 내려지는 정보공개제도를 이용하기보다 손쉽게 해킹 등의 방법으로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오히려 정보공개제도가 위축될 수도 있다는 우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민의 알권리를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수단인 정보공개제도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행정 감시를 목적으로 하는 정보공개청구에 있어서는 행정에 관한 정보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보공개청구를 통해서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정보가 없는 것은 그 자체가 실정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중립성과 기관의 독립성을 위해 선거관리위원, 감사위원, 방송통신위원 등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활동을 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다(선거관리위원회법 제9조 제1호, 감사원법 제10조,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10조 등). 그런데 이들이 정당에 가입하였는지 또는 정치활동을 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보공개청구가 유용한 방법이 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보공개의 필요성을 말해 주는 또 다른 예로는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를 들 수 있다. 부패한 정치인이나 불법을 저지른 기업인 등에 대한 대통령의 봐주기 식 사면권 행사는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재판 확정 후에 중대한 사정변경이 없는데도 도대체 어떤 사유로 사면복권이라는 특혜를 주느냐는 것이다. 대통령과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사면에 관한 정보공개청구를 해 보면 단지 국무회의 의사록이나 정부 발표문만 덜렁 내놓기 일쑤다. 사면의 사유는 단지 사면권자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환경영향평가나 교통영향평가 등 법적인 서류가 미비한데도 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민주주의를 신장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서 정보공개제도에 대한 이해와 활용이 절실하다.</p> <p><br /> <span style="color: #33330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정보</strong></span>공개란 무엇인가</span></span></span></p> <p><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와 알권리</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헌법 제21조 제1항은 &ldquo;모든 국민은 언론&middot;출판의 자유를 가진다.&rdquo;고 명시하여 언론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한다. 언론의 자유는 전통적으로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로운 표명(발표의 자유)과 그것을 전파할 자유(전달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는 개인이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고 행복을 추구하며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것으로,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국민이 갖는 가장 중요한 기본권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로운 표명은 자유로운 의사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자유로운 의사의 형성은 충분한 정보에의 접근이 보장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한 것이며, 자유로운 의견 표명은 자유로운 수용 또는 접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정보에의 접근, 수집, 처리의 자유, 즉 알권리는 표현의 자유에 당연히 포함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알권리는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인 정보를 취사&middot;선택할 수 있는 권리(소극적 자유)와 의사형성&middot;여론형성에 필요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권리(적극적 자유)를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와 관련하여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B규약) 제19조 제2항은 &ldquo;모든 사람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구두, 서면 또는 인쇄, 예술의 형태 또는 스스로 선택하는 기타의 방법을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며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rdquo;고 천명하고 있다.</p> <p><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제도</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정보공개제도는 헌법상 기본권인 국민의 알권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국민주권주의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장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민의 올바른 정치적 의사형성은 국정에 관한 광범위하면서도 정확한 정보 접근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 정보공개제도는 국민의 정보 접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여 국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 욕구를 충족시키고, 정책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국민의 감시와 비판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부는 국민의 신뢰와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또한 지식정보사회에서 공공기관이 업무수행 과정에서 생산하거나 취득한 정보는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데, 이를 국민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처럼 정보공개제도는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공공기관이 보유&middot;관리하고 있는 정보를 국민의 청구에 의해 공개하거나 중요 정보를 사전에 국민에게 제공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정운영에 대한 국민 참여와 투명성을 제고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의미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는 정보공개법을 통해 국민의 알권리에 관해 필요한 사항을 정하고 있다. 정보공개법은 좁은 의미로는 &lsquo;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2010. 2. 4. 개정 법률 제10012호)&rsquo;을 말하나 넓게는 지방자치단체의 정보공개에 관한 조례를 포함하여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그 밖의 공공단체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 일반을 포함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align="middle" width="420" height="6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1_%EC%A0%95%EB%B3%B4%EA%B3%B5%EA%B0%9C%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39.JPG" /></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나라 정보공개제도의 연혁</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에서 정보공개제도는 1980년대부터 학계에서 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정보공개법 제정 이전에도 행정정보에 관한 알권리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제21조에 의하여 보장받았다. 1991년 청주시는 지방자치단체 중 처음으로 행정정보공개조례를 제정하였고 1994년에는 행정정보공개 운영지침(국무총리훈령 제288호)이 제정&middot;시행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1996년 &lsquo;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rsquo;이 공포되어, 199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후 2004년에는 정보공개청구 건수의 지속적인 증가, 정보공개 확대에 대한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여 정보공개법을 전면 개정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전자적 정보공개의 근거 마련, 행정정보 사전 공표 및 정보목록 작성&middot;비치 의무화, 정보공개 처리기간 단축(15일에서 10일), 추상적인 비공개 요건 삭제, 정보공개위원회의 설치, 민간위원을 과반수 포함한 정보공개심의회 구성 등이다. 이어 2006년에는 공공기관이 정보공개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축소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비공개대상정보의 범위에 관한 세부 기준을 수립&middot;공개하도록 정보공개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기존의 대통령 소속이던 정보공개위원회를 행정안전부장관 소속 기구로 격하시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2007년 5월에는 기존의 정보공개법과 별개로 교육관련기관이 보유&middot;관리하는 정보의 공개의무와 공개에 관해 &lsquo;교육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rsquo;이 제정되어 2008년 5월 25일부터 시행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부는 2004년 전자적 정보공개의 근거가 마련된 이후 국민이 보다 편리하고 신속하게 공공기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했다. 2006년 4월에는 정보공개시스템(<a href="http://www.open.go.kr">www.open.go.kr</a>)을 개통하여 온라인을 통한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제공했다. 이 시스템은 현재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등 정보공개 대상기관의 정보목록 검색, 정보공개청구, 수수료 납부, 공개자료 열람 등을 한 번에 처리해 주는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1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1_%EC%A0%95%EB%B3%B4%EA%B3%B5%EA%B0%9C%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49-2.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국민의 청구가 없더라도 사전에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정부 사이트들이 구축되어 운영되고 있다. 정책연구 용역 정보를 제공하는 프리즘(<a href="http://www.prism.go.kr">www.prism.go.kr</a>), 공공기관의 경영정보를 제공하는 공공기관 알리오(<a href="http://www.alio.go.kr">www.alio.go.kr</a>),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정보를 종합적으로 제공하는 내고장살림(<a href="http://www.laiis.go.kr">www.laiis.go.kr</a>), 지방공기업의 경영정보를 제공하는 클린아이(<a href="http://www.cleaneye.go.kr">www.cleaneye.go.kr</a>), 교육관련기관의 정보를 제공하는 대학알리미(<a href="http://www.academyinfo.go.kr">www.academyinfo.go.kr</a>)와 학교알리미(<a href="http://www.schoolinfo.go.kr">www.schoolinfo.go.kr</a>) 등이 바로 그것이다.</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각국의 정보공개제도</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객관적 정보공개청구권제도로서의 정보공개제도를 처음 만든 나라는 스웨덴이다. 1766년 제정된 &lsquo;출판의 자유에 관한 법률(Freedom of the Press Act)&rsquo;은 그 명칭에서 나타는 바와 같이 출판의 자유를 확립하기 위해 사전검열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공문서 인쇄&middot;배포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공문서 접근권도 보장했다. 핀란드는 1951년에 &lsquo;공문서의 공개성에 관한 법률(The Law on the Public Character of Official Document)&rsquo;을 제정했다. 덴마크는 1950년, 노르웨이는 1970년, 프랑스는 1978년에 각각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49년 제정된 독일기본법(헌법)도 &ldquo;누구든지 말, 글 그리고 그림으로써 자유로이 의사를 표현하고 전파하며,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정보를 얻을 권리를 가진다.&rdquo;고 규정하여(제5조 제1항) 일찍부터 정보공개청구권을 국민의 알권리로 인정했다. 그 후 독일은 2005년 연방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국에서는 1985년에 지방자치(정보접근)법에 의해 지방자치단체에 관한 정보공개제도가 인정되다가 2000년에 정보공개법이 제정되었다. 구 영연방국가인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및 뉴질랜드는 1982년에 각각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1946년 연방행정절차법(Administrative Procedure Act, APA)에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포함했던 미국은 1966년에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을 제정하여 정보공개제도를 전 세계에 널리 보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법은 행정정보에 특별한 이해관계를 갖는 자에 한정하지 않고 누구라도(anyone)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열거된 예외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한 행정정보의 공개를 의무화시켰으며 공개의 거부에 대하여는 법원에 의한 구제를 보장하는 등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은 그 후 각국의 정보공개법의 제정과 그 내용에 큰 영향을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은 정보공개법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세 가지 법을 제정하여 정보자유의 이념을 다시 확대&middot;발전시켰다. 첫째, 국민 각자는 자기에 관하여 정부가 수집한 정보를 알권리가 있으며 그 개인정보를 정부가 함부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프라이버시법(Privacy Act of 1974)을 제정했다. 둘째, 행정부의 문서를 공개할 뿐만 아니라 정책의 결정과정인 모든 회의까지 공개하는 선샤인법, 즉 회의공개법(Government in the Sunshine Act of 1976)을 제정했다. 셋째, 정책결정의 책임 부서에 있는 정치인, 고급공무원, 법관 등의 자산과 수입을 공개하여 국민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결정과 판단에 사적인 작용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부윤리법(Ethics in Government Act of 1978)을 제정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시아에서는 한국이 1996년에 아시아 최초로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 태국은 1997년, 이스라엘은 1998년, 일본은 1999년, 인도와 대만은 2003년에 각각 정보공개법이 제정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남미에서는 콜롬비아가 1985년, 베네수엘라가 1994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시가 1998년에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2000년에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p> <p><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와 정보공표의무</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일반적으로 정보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정에 대한 국민의 참여와 국정운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공기관이 보유&middot;관리하는 정보를 열람하게 하거나 그 사본 또는 복제물을 교부하는 것을 말한다(제1조). 그러므로 좁은 의미의 정보공개제도는 국민의 공개청구권 행사에 따라 행해지는 정보공개청구권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의 정보공개제도는 정부 등 공공기관의 재량에 의해 행해지는 정보제공제도와 국민의 공개청구권을 전제하지 않고 일정한 정보의 공개의무가 부과되는 정보공표의무제도를 포함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정보공개와 정보제공 또는 정보공표는 구별해야 한다. 정보제공 또는 정보공표라는 것은 국가나 공공기관이 일정한 행정목적을 위하여 정보를 선택하고 재량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반면 정보공개는 국민이 정보의 공개를 청구한 경우 정부가 일정한 예외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정보를 공개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정부에게 불리한 정보라 하더라도 공개를 거부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보제공 또는 정보공표의무와 관련하여 현행 정보공개법에서는 국가 등 공공기관은 ① 국민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에 관한 정보 ② 국가의 시책으로 시행하는 공사 등 대규모의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에 관한 정보 ③ 예산집행의 내용과 사업평가 결과 등 행정감시를 위하여 필요한 정보 ④ 그 밖에 공공기관의 장이 정하는 정보에 대하여는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에 규정된 비공개대상정보가 아닌 한 공개의 구체적 범위, 공개의 주기&middot;시기 및 방법 등을 미리 정하여 공표하고, 이에 따라 정기적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한다(제7조 제1항).</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보공개법 시행령은 이를 좀 더 구체화하여 공공기관은 ① 식품&middot;위생, 환경, 복지, 개발사업 등 국민의 생명&middot;신체 및 재산 보호와 관련된 정보 ② 교육&middot;의료&middot;교통&middot;조세&middot;건축&middot;상하수도&middot;전기&middot;통신 등 국민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정보 ③ &lsquo;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rsquo; 제92조의2에 따른 계약관련 정보 ④ &lsquo;지방자치단체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rsquo; 제31조에 따른 수의계약 내역 정보 ⑤ &lsquo;국가재정법&rsquo; 제9조에 따른 재정정보 ⑥ &lsquo;지방재정법&rsquo; 제60조에 따른 재정운용상황에 관한 정보 ⑦ 그 밖에 법령에서 공개, 공표 또는 공시하도록 정한 정보 ⑧ 국회 및 지방의회의 질의 및 그에 대한 답변과 국정감사 및 행정사무 감사 결과에 관한 정보 ⑨ 기관장의 업무추진비에 관한 정보 ⑩ 그 밖에 공공기관의 사무와 관련된 ①~⑨에 준하는 정보를 포함하여 국민에게 알려야 할 필요가 있는 정보를 정보통신망을 이용하거나, 정부간행물의 발간&middot;판매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에게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시행령 제4조 제1항~제2항).<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1_%EC%A0%95%EB%B3%B4%EA%B3%B5%EA%B0%9C%EB%9E%80%20%EB%AC%B4%EC%97%87%EC%9D%B8%EA%B0%80/%EC%9D%B4%EB%AF%B8%EC%A7%80_49-1.JPG" /><br /> <br /> 한편 정보공개법이 아닌 개별 법률에서 적극적으로 정보공표의무를 규정하는 경우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자정부법은 행정기관의 주요 업무는 전자화되어야 하며, 전자적 처리가 가능한 업무는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자적으로 처리되어야 한다(제8조)는 전제에서, 행정기관이 보유&middot;관리하는 행정정보로서 국민생활에 이익이 되는 행정정보는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공개가 제한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터넷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공개되어야 한다(제9조)고 규정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가재정법은 정부로 하여금 예산, 기금, 결산, 국채, 차입금, 국유재산의 현재액 및 통합재정수지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에 관한 중요한 사항을 매년 1회 이상 정보통신매체&middot;인쇄물 등 적당한 방법으로 알기 쉽고 투명하게 공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제9조 제1항).</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비자기본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소비자의 기본적인 권리가 실현될 수 있도록 소비자의 권익과 관련된 주요시책 및 주요결정사항을 소비자에게 알려야 하며(제13조 제1항), 소비자가 물품 등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물품 등의 거래조건&middot;거래방법&middot;품질&middot;안전성 및 환경성 등에 관련되는 사업자의 정보가 소비자에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책을 강구해야 한다(제13조 제2항)고 명시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통계법도 통계작성기관이 통계를 작성한 때에는 원칙적으로 그 결과를 지체 없이 공표해야 한다(제27조 제1항)고 규정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보장기본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국민이 사회보장제도에 관하여 필요로 하는 정보를 관계 법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개하고 또 이를 홍보해야 하며, 사회보장에 관한 정보를 관리하는 체계를 확립하도록 강제하고 있다(제30조).</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lsquo;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rsquo;에 따라 이 법률의 적용을 받는 공공기관은 국가안보상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① 경영목표와 예산 및 운영계획 ② 결산서(재무제표와 그 부속서류를 포함) ③ 임원 및 운영인력 현황 ④ 인건비 예산과 집행 현황 ⑤ 실시된 고객만족도 조사 결과 ⑥ 공기업&middot;준정부기관의 경영실적 평가 결과 ⑦ 정관&middot;사채원부 및 이사회 회의록(다만, 이사회 회의록 중 경영 비밀에 관련된 사항은 제외) ⑧ 감사의 감사보고서 ⑨ 감사원법의 규정에 따라 변상책임 판정, 징계&middot;시정&middot;개선 요구 등을 받거나 &lsquo;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rsquo;의 규정에 따라 시정요구를 받은 경우 그 내용과 그에 대한 공공기관 등의 조치 사항 ⑩ 그 밖에 공공기관의 경영에 관한 중요한 사항으로서 기획재정부장관이 운영위원회의 심의&middot;의결을 거쳐 공시하도록 요청한 사항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하여 공시해야 하고, 사무소에 필요한 서류를 비치해야 한다(제11조 제1항~제2항). 공시된 사항에 대한 열람이나 복사를 요구하는 자에 대하여는 이를 열람하게 하거나 그 사본이나 복제물을 내주어야 한다(제11조 제3항).</p> <p style="text-align: justify">행정절차법도 행정청이 ① 국민생활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사항 ② 많은 국민의 이해가 상충되는 사항 ③ 많은 국민에게 불편이나 부담을 주는 사항 ④ 기타 널리 국민의 의견수렴이 필요한 사항에 대한 정책&middot;제도 및 계획을 수립&middot;시행하거나 변경하고자 하는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를 20일 이상 예고하도록 하고 있다(제46조).</p> <p><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의 쟁점</span></span></strong></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알권리의 한계</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알권리가 타인의 기본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권리도 헌법유보(헌법 제21조 제4항)와 일반적 법률유보(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그래서 개별 법률은 알권리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 제한은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지 않은 범위 내에 그쳐야 한다. 아울러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 등 기본권 제한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하는 기준을 정립해야 하며, 제한에서 오는 이익과 알권리를 침해하는 해악을 비교하여 그 제한의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와 개인정보보호</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법 제17조는 &ldquo;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rdquo;고 규정하여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개인정보보호법이 시행되고 있다. 이 법은 개인정보의 수집&middot;유출&middot;오용&middot;남용으로부터 사생활의 비밀 등을 보호함으로써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개인정보 처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정보공개제도와 개인정보보호제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보공개제도는 국민 누구에게나 국정정보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공정하고 민주적인 국정운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인 반면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의 보호를 위한 기본원칙을 규정함으로써 개인의 권리와 이익 보호를 도모한다. 따라서 정보공개법은 국민 누구에게나 정보를 공개하는 반면 개인정보보호법은 기본적으로 본인에게만 정보를 공개한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정보공개제도는 국정정보 전반의 공개에 관한 절차를 중점적으로 규정하는 반면 개인정보보호법은 개인정보의 보유와 이용&middot;제공의 제한, 안전&middot;정확성의 확보, 개인정보파일의 공시, 개인정보의 본인에의 공개, 개인정보 정정 등을 규정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두 제도는 일정한 정보의 공개를 내포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보공개가 청구된 경우 과연 그 대상정보에 포함된 타인의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하는가, 개인정보보호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보공개제도의 비공개사항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등의 문제에서 두 제도는 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면에서 두 제도를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정보공개법은 &ldquo;당해 정보에 포함되어 있는 이름&middot;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개인정보)&rdquo;는 원칙적으로 비공개대상정보로 규정하고 있다(제9조 제1항 제6호).</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와 관련된 제3자의 권리</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법은 적법절차 규정에서 행정기관이 국민에게 불이익한 행위를 할 경우에는 사전에 고지하고 청문의 기회를 주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에 관한 정보가 공개되는 것에 의하여 불이익을 받을 제3자의 입장에서 사전의 고지와 청문의 기회가 부여되는 것은 헌법상의 권리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3자가 자기의 영업비밀이나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면 정보공개 결정에 대한 제3자 취소심판이나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대한 맹점이 있다. 행정심판이나 행정소송의 제기만으로는 정보공개 결정의 효력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업비밀이나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개인정보 공개를 저지하고자 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후적 취소절차보다는 예방적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제3자에게는 공개되어서는 안 될 정보가 공개되기 전에 의견을 제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정보공개를 허용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그 정보를 사실상 공개하기 전에 행정심판과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사후 권리구제만으로는 권리 보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제3자가 정보의 공개에 반대한다고 하여 공공기관이 반드시 이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3자가 공개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공공기관은 공개청구된 정보가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의 8가지 비공개대상정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에 이를 공개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나라 정보공개법은 공개청구된 공개대상정보의 전부 또는 일부가 제3자와 관련이 있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공공기관은 그 사실을 제3자에게 지체 없이 통지해야 한다(제11조 제3항)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통지를 받은 제3자는 통지받은 날부터 3일 이내에 당해 공공기관에 대하여 자신과 관련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것을 요청할 수 있다(제21조 제1항).</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는 공공기관이 보유&middot;관리하고 있는 정보가 제3자와 관련이 있는 경우 그 정보공개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공공기관이 제3자와의 관계에서 거쳐야 할 절차를 규정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제3자의 비공개요청은 정보공개법상 정보의 비공개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3자의 비공개요청에도 불구하고 공공기관이 공개결정을 하는 때에는 공개결정이유와 공개실시일을 문서로 명시하여 지체 없이 제3자에게 통지해야 하며, 제3자는 당해 공공기관에 문서로 이의신청을 하거나 행정심판 또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제21조 제2항). 이를 역(逆) 정보공개소송이라고 한다. 이 경우 이의신청은 통지를 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해야 하고, 공공기관은 공개결정일과 공개실시일의 사이에 최소한 30일의 간격을 두어야 한다(제21조 제3항).</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와 기록물관리</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공공기관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기본 법률인 &lsquo;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rsquo;은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의 구현과 공공기록물의 안전한 보존 및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공공기록물의 관리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제1조). 즉 정보공개법과 마찬가지로 기록물관리법도 공공기관의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 구현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록물관리법에 따라 모든 공무원은 기록물을 보호&middot;관리할 의무를 가지며(제4조 제1항), 공공기관 및 기록물관리기관의 장은 기록물이 국민에게 공개되어 활용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고(제4조 제2항), 기록물이 전자적으로 생산&middot;관리되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하며 전자적 형태로 생산되지 않은 기록물에 대하여도 전자적으로 관리되도록 노력해야 한다(제6조). 이처럼 정보공개법과 기록물관리법은 상호보완적인 입법목적을 갖고 있다. 기록물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정보공개제도의 효율성이 현저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p> <p><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정보공개와 공무원의 비밀엄수의무</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공무원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엄수해야 할 비밀엄수의 의무를 진다(국가공무원법 제60조). 국가공무원뿐 아니라 지방공무원(지방공무원법 제52조), 외무공무원(외무공무원법 제19조), 국가정보원직원(국가정보원직원법 제17조) 등도 이 의무를 가진다. 공무원이 법령상의 비밀엄수의무를 위반하는 것은 징계사유에 해당될 뿐 아니라 형법상의 외교상기밀누설죄나 공무상비밀누설죄(제127조) 등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비밀엄수의무의 대상이 되는 비밀은 행정기관이 비밀이라고 형식적으로 정한 것에 따르지 않고 비밀로서 실질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즉 그것이 통상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다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성을 가졌는지, 정부나 국민의 이익 또는 행정목적 달성을 위하여 비밀로서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지 등이 객관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공무원법 등 행정기관의 공무원에게 비밀엄수의무를 과하고 있는 규정에 있어서 비밀이란 실질비(實質秘), 즉 공지의 사실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그것을 비밀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에 한정된다고 봐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공무원이 정보공개제도에 따라 정보를 공개한 경우 공무원의 비밀엄수의무에 위반되는가가 문제이다. 공무원이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를 공개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공개결정이 위법한 경우에는 공익상의 재량적 공개가 가능한 경우가 아닌 한 비공개정보는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직무상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또한 공개결정된 정보가 실질비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비밀엄수의무 위반의 문제도 생길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공무원이 정보공개법을 성실히 집행한 과정에서 잘못하여 비공개대상정보를 공개결정한 경우에는 공무원의 비밀엄수의무에 위반되지는 않는다고 봐야 한다. 호주 정보공개법 제92조와 뉴질랜드 정보공개법 제48조는 결과적으로 위법한 공개를 했더라도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공개청구가 인정된다고 믿고 공개를 한 자는 소추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명문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공무원이 청구인과 공모하여 공개청구에 따른 정보공개결정이라는 형태를 가장하여 고의로 실질비를 공개한 것과 같은 경우에는 비밀엄수의무를 위반한 것이 될 것이다.<br /> <br /> (1, 2장 전문)&nbsp;<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안상운</strong><br /> 현 제일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겸 『서울타임스』(<a href="http://www.seoultimes.net">www.seoultimes.net</a>) 발행인. 대통령 소속 정보공개위원회 초대 위원 역임.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언론대학원에서 「언론보도와 인격권 보호에 관한 연구」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음. 저서로는 『NGO&middot;NPO 법률가이드북』, 『명예훼손이란 무엇인가』가 있으며, 『프로듀서를 위한 법률교실』, 『내릴 수 없는 깃발 미얀마』를 공동 집필함. 논문으로는 「언론의 법적 책임과 언론피해구제제도」, 「언론의 명예훼손에 대한 면책사유와 구제제도」, 「형사사건 보도와 인권」, 「반론보도청구권의 법적성질」 등 다수.&nbsp;<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20 오후 12:01:00쿤데라의 ‘농담’<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5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0_%EB%86%8D%EB%8B%B4/%EB%86%8D%EB%8B%B4_%ED%91%9C%EC%A7%80_%EC%9C%A0%ED%85%8C.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color: #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부</span></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br /> </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x-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루</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드비크</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그렇게 고향에 다시 와 있었다. 중앙 광장(어린아이일 때, 소년일 때, 그리고 청년일 때 수없이 지나다녔던)에 서서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다만 지붕들 위로 (투구를 쓴 독일 병사 같은) 망루가 높이 솟아 있는 이 장소가 널따란 연병장을 연상시킨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모라비아가 예전에는 군사상으로 마자르와 터키인들의 침입에 대비한 성채 역할을 했던 사실이 이 도시의 얼굴에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추악한 낙인을 새겨 놓았다는 생각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여러 해 동안 나를 내 고향으로 이끌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 도시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 같았다. 벌써 십오 년 전부터 다른 곳에 살았고, 이곳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친구도 몇 없었던 것이다.(남아 있는 친구도 피하고 싶다.) 어머니도 내가 돌보지 않는 낯선 무덤 속에 묻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다. 내가 무관심이라 불렀던 것은 실은 원한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른 모든 도시에서나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도 좋은 일 나쁜 일 들이 내게 일어났던 것뿐인데. 아무튼 원한이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를 이곳에 오게 한 일, 그 일은 어쨌든 프라하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내 고향에서 그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자 느닷없이 억누를 수 없는 유혹을 느꼈던 것이다. 바로 그 일이 추잡하고 저속한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난날에 대한 어떤 간지러운 감상 탓에 다시 그곳에 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일소에 부칠 수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다시 한 번 조소에 찬 시선으로 그 보기 흉한 광장을 둘러본 뒤, 나는 돌아서서 그날 밤을 위해 예약해 놓은 호텔로 걸음을 옮겼다. 관리인은 &ldquo;삼 층입니다.&rdquo;라고 말하면서 배 모양 나무 열쇠를 내밀었다. 방은 그리 마음을 끄는 곳이 못 되었다. 벽 쪽에 침대가 붙어 있고, 방 한가운데에는 작은 탁자 하나와 달랑 의자 하나, 침대 옆에는 거울이 달린 요란한 마호가니 화장대, 문 옆에는 표면이 다 갈라져 일어난 기막히게 작은 세면대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안마당 쪽으로 나 있고, 호텔 쪽으로 헐벗고 지저분한 뒷면을 드러내보이는 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세면대로 다가갔다. 빨강과 파랑으로 표시된 수도꼭지 두 개가 있었다. 모두 틀어 보았으나 양쪽 다 차가운 물만 나왔다. 탁자를 살펴보니 적어도 술 한 병과 잔 두 개 정도는 충분히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만하면 쓸 만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방에 의자가 하나뿐이라 한 사람밖에 앉을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탁자를 가까이 밀어 놓고 침대 위에 앉아 볼까 했지만 침대는 너무 낮고 탁자는 너무 높았다. 게다가 침대는 내가 앉자 푹 내려앉아 버려서 의자 대신 쓰기에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침대로서 제 구실을 제대로 할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나는 양손을 짚고 침대에 앉아 보았다가 그다음에는 담요와 시트를 버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구두를 신은 발을 들고서 누워 보았다. 매트리스는 내 무게에 아래로 푹 꺼져 버렸고, 마치 해먹이나 좁은 무덤에 누운 것만 같았다. 이 침대에 누구와 함께 눕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햇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커튼에 망연히 시선을 둔 채, 나는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와 여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둘이 하는 말이 모두 잘 들렸다. 그들은 집을 나가 버린 페트르라는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너무 오냐오냐하여 결국 아이를 망쳐 버린 백치 같은 클라라 아주머니에 대하여 말했다. 그리고 열쇠가 열쇠 구멍에서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옆방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그렇다. 한숨 소리까지 다 들려왔던 것이다!) 남자가 이번에는 정말 클라라에게 단단히 한마디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들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나는 일어섰다.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세면대에서 다시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고, 당장에는 정확히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로 호텔을 나섰다. 분명한 것은 단지 호텔 방의 결함 때문에 이번 여행 전체의(상당히 길고 고단한 여행이었다.) 성공을 위태롭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전혀 내키지는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이곳의 한 친구에게 은밀히 부탁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소년 시절에 알았던 얼굴들을 모두 떠올려 보았지만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곧 지워 버렸다. 부탁하는 일이 은밀한 것이다 보니 만나지 못했던 그 긴 세월 위로 애써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싫었다. 그러다가 아마 여기 살고 있을 한 사람이 생각났다. 예전에 내가 바로 이곳에 일자리를 구해 준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 내가 아는 바로는 이번에는 자신이 내게 도움을 줄 기회를 얻으면 아주 기뻐할 것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도덕적이면서 동시에 묘하게 걱정이 많고 불안정한, 기이한 인물이었다. 내가 알기로 오래전에 그의 아내는 그와 이혼을 했는데, 이혼 사유는 오로지 그가 그녀와 아들이 있는 곳만 빼고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산다는 것이었다. 그가 다시 결혼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했다. 그런 상황이면 내 요구가 이뤄지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나는 병원 쪽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병원은 드넓은 정원 여기저기 세워진 여러 건물과 분관 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정문에 달린 수위실로 들어가 탁자에 앉아 있는 수위에게 바이러스 연구실을 대 달라고 했다. 그는 탁자 끝으로 나한테 전화기를 밀어 주면서 &ldquo;02번.&rdquo;이라고 말했다. 나는 02번으로 번호를 돌렸고, 코스트카 박사는 방금 전에 나가서 지금 출구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문 옆 벤치에 앉아서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 병원 가운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를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하고 키가 크고 말랐으며 꾸밈 없이 보기 좋은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바로 그였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마치 정면으로 부딪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좀 언짢은 듯 한 번 보더니 곧 나를 알아보고는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내 느낌에 그는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는 듯했고 나를 대뜸 그렇게 맞아 주어 나는 기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별건 아니지만 한 이틀 걸릴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아직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고 하자 즉각 그는 내가 자기를 제일 먼저 찾아와 주었다며 놀라고 기뻐했다. 사심 없이 단지 그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한 질문(재혼을 했느냐고 쾌활하게 물었다.)이 실은 저급한 계산에서 나온 것인데 진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갑자기 언짢아졌다. 그는 (만족스럽게도) 여전히 혼자라고 말했다. 나는 나눌 이야기가 참 많다고 했다. 그는 자신도 그렇다고 하면서, 그런데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 데다가 저녁에는 버스를 타고 이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지금 한 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ldquo;여기 살지 않아요?&rdquo;라고 놀라서 물었다. 그가 여기 사는 거 맞고 새 건물의 원룸에 사는데 &ldquo;혼자 살기가 힘들다.&rdquo;라고 해서 나는 마음을 놓았다. 코스트카에겐 이십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에 애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교사고 방이 두 개인 집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ldquo;그러면 나중에는 그 집으로 옮겨 갈 건가요?&rdquo;라고 나는 물어보았다. 그는 내가 구해 준 이 일만큼 괜찮은 일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그의 애인이 여기에서 자리를 얻기도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관료 체제가 그렇게 늑장을 부려서 한 남자와 여자가 한곳에 같이 살 수 있도록 일을 신속히 처리해 주지도 못한다고 (진심으로) 비난했다. &ldquo;괜찮아요, 루드비크. 그렇게 견디기 힘든 것만은 아니에요. 왔다 갔다 하자면 돈도 들고 시간도 걸리는 건 분명하지요.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지도 않고, 그래서 자유롭거든요.&rdquo; 그는 온화하고 여유롭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ldquo;당신은, 당신은 왜 그토록 자유가 필요한 거죠?&rdquo; 나는 물었다. &ldquo;그러면 당신은요?&rdquo; 그가 말했다. &ldquo;저는 여자들을 많이 쫓아다니니까요.&rdquo; 나는 대답했다. 그는 &ldquo;나에게 자유가 필요한 것은 여자 때문이 아니에요. 저 스스로를 위해서죠.&rdquo;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ldquo;저기, 제가 가기 전에 잠깐 우리 집에 가시죠.&rdquo;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병원에서 나와 우리는 곧 새 건물들이 모인 곳에 이르렀다. 건물들은 평평하게 고르지도 않은 먼지 날리는 땅(잔디도 인도도 차도도 없는)에 서로 아무런 조화도 이루지 못한 채 나란히 솟아, 저 멀리 펼쳐진 광대한 평원의 경계에서 어떤 서글픈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문으로 들어가 아주 비좁은 층계를 올라갔고(승강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사 층에서 코스트카의 이름이 적힌 곳 앞에 멈추었다. 현관을 지나 방에 들어서 보니 만족스러운 것 이상이었다. 넓고 안락한 소파가 한쪽에 놓여 있고, 그 외에도 작은 탁자 하나에 안락 의자 하나, 커다란 책장, 턴테이블과 라디오가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나는 코스트카에게 방이 아주 근사하다고 하고서 욕실은 어떤지 물어보았다. 내가 보이는 관심에 기분이 좋은 듯 그는 &ldquo;평범해요.&rdquo;라고 말하고는 욕실 문이 난 현관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욕조와 샤워기, 세면대가 달린 자그마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욕실이었다. &ldquo;이렇게 근사한 아파트를 보니까 생각이 나는데, 내일 오후하고 저녁때 뭐 하세요?&rdquo; 하고 내가 물었다.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ldquo;어쩌죠, 내일은 제가 하루 종일 근무하는 날이라서 7시쯤이나 돼야 돌아올 텐데요. 저녁엔 시간이 없으세요?&rdquo;라고 말했다. 나는 답했다. &ldquo;저녁에는 시간이 날 수도 있긴 할 텐데, 그런데 그전에 오후 동안 아파트를 빌려 주실 수는 없겠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놀랐지만 즉시(망설인다고 여겨질까 두려운 듯이) &ldquo;안 되긴요, 얼마든지 쓰세요.&rdquo;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하는지 결코 알려고 하지 않겠다는 듯 덧붙이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ldquo;묵을 곳이 마땅치 않으면 오늘부터라도 여기서 주무시죠. 전 내일 아침이나 돼서야 돌아올 테니까요. 아니, 내일 아침에도 안 올지 몰라요. 바로 병원으로 갈 거거든요.&rdquo; &ldquo;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호텔에 묵고 있어요. 문제는 제 방이 좋지가 못한데 내일 오후에 분위기 좋은 공간이 좀 필요하거든요. 물론 혼자 있으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rdquo;라고 나는 말했다. &ldquo;아, 네, 그렇겠네요.&rdquo; 코스트카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잠시 후 그는 말을 이었다. &ldquo;당신을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rdquo; 그러고는 다시 덧붙였다. &ldquo;물론 그것이 정말 좋은 일이라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그러고 나서 우리는 작은 탁자를 마주하고 앉아(코스트카는 커피를 끓여 왔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소파에 앉아 보니 푹 꺼지지도 않고 삐걱거리지도 않으며 아주 튼튼한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코스트카는 이제 병원으로 가 봐야 한다면서 방의 내밀한 요소들을 서둘러 알려주었다. 욕실 수도꼭지를 잠글 때는 끝까지 돌려야 하고, 따뜻한 물은 보통의 경우와 달리 &lsquo;냉&rsquo;이라고 새겨진 수도꼭지에서 나오며, 턴테이블의 전선을 꽂는 플러그는 소파 아래 있고, 작은 장 속에는 마개를 딴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보드카가 한 병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열쇠가 두 개 달린 고리를 건네주면서 건물 입구 열쇠와 아파트 열쇠를 가르쳐 주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잠자리를 바꿔 가며 정처 없이 살아왔던 탓에 나는 특별히 열쇠를 숭배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열쇠들을 주머니 속에 넣으며 소리없이 커다란 기쁨을 맛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집을 나서며 코스트카는 자신의 아파트가 &ldquo;정말로 아름다운 어떤 것&rdquo;을 내게 가져다주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ldquo;그래요. 이 집 덕분에 아름다운 파괴를 행할 수 있을 겁니다.&rdquo;라고 내가 답하자, 그는 &ldquo;파괴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rdquo;라고 물었다. 속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가 이렇게 묻는 것을 보면서(부드럽게 묻지만 생각은 도전적인 질문) 십오 년 전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없이(좋은 사람지만 좀 우스웠다.) 그가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대답해 주었다. &ldquo;당신이 하느님의 영원한 작업대에서 평화롭게 일하는 일꾼이라는 거 알아요. 파괴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나는 하느님의 견습 석공이 아닌걸요. 게다가 만일 하느님의 석공들이 이 세상에다가 진짜 벽으로 건물을 짓는다 해도 우리의 파괴가 그 건물들에 해를 입히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한데 내가 보기엔 어디 가나 벽은 없고 무대 장치뿐이에요. 무대 장치들을 파괴하는 건 아주 올바른 일이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우리는 지난번에(한 구 년 전쯤이던가) 이야기하다 헤어졌던 바로 그 지점에 다시 와 있었다. 우리의 논쟁은 이번에는 은유적인 성격을 띠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잘 알았고 그래서 다시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서로 그사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서로 다르다고 반복해서 말해야 할 뿐이었다.(나는 코스트카의 이런 다른 점을 좋아했고, 그와 논쟁을 하면, 나는 정말 누구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할 수 있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 관한 내 불확실한 생각을 아주 분명하게 하려고 이렇게 대답했다. &ldquo;지금 말씀하신 건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죠. 하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회의적이신데 벽과 무대 장치를 구별 지어 주는 분명한 근거를 어디서 찾으시죠? 당신이 비웃는 환상이 정말로 단지 환상이기만 한 것일까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나요? 당신이 잘못 생각하는 거라면 어쩌죠? 또 그것이 가치 있는 것들이고, 당신은 그 가치들을 파괴하는 사람이라면요?&rdquo; 그는 이어서 말했다. &ldquo;변질된 가치나 가면이 벗겨진 환상은 똑같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고, 서로 비슷하게 닮아서 그 둘을 혼동하기보다 더 쉬운 건 없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도시 반대쪽 끝에 있는 병원까지 코스트카를 바래다 주면서 나는 주머니 속 열쇠를 가지고 놀기도 했고,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지금 이 신축 구역의 울퉁불퉁한 땅을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진리를 내게 납득시키려고 애쓸 수 있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코스트카는 물론 우리가 내일 저녁 시간 내내 함께하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곧 철학은 접어 두고 일상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렸는데, 그러면서도 다시 한 번 내일 저녁 7시에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집에서 기다릴 것인지 확인했고(그에겐 다른 열쇠가 없었다.) 정말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서 수염이 너무 길어 이발소에 가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코스트카는 &ldquo;마침 잘됐군요. 특별 면도를 하게 해 드리죠!&rdquo;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나는 코스트카의 좋은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한 조그마한 이발소로 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세 거울 앞에 커다란 회전 의자가 하나씩 있었는데, 그중 둘은 이미 남자 둘이 차지하고서 젖힌 얼굴에 거품을 잔뜩 얹고 있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 둘이 그들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코스트카가 그중 한 여자에게 다가가서 무어라고 귓속말을 하자 여자는 면도칼을 수건에 닦더니 이발소 뒤쪽에다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곧 흰 가운을 입은 아가씨가 하나 나오더니 면도를 하다 만 남자를 맡았고, 코스트카가 말을 걸었던 여자는 나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며 빈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코스트카와 나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고, 나는 받침대 구실을 하는 작은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자리를 잡았다. 너무도 여러 해 동안 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앞에 놓인 거울을 피해 눈을 위로 뜨고 석회를 칠한 천장의 얼룩들을 둘러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셔츠 깃 안으로 흰 수건을 접어 넣는 이발사의 손가락이 목에 느껴진 후에도 나는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발사는 한 발짝 물러섰고, 이제 가죽 끈에 면도칼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나는 아주 편안한 무심함으로 가득한 황홀한 부동 상태 속에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면도 크림을 듬뿍 바르는 젖은 손가락들이 내 뺨 위에 느껴지자 기이하고 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게 아무것도 아닌 모르는 여자, 나 또한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이의 낯선 여자가 나를 부드럽게 만지고 있었다. 그다음에 이발사는 솔로 비누를 펴 바르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래도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지가 않고 얼룩들이 박힌 허공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쉬는 사이에도 생각은 멈추지 않는 법이므로) 내가 면도날을 날카롭게 갈아 놓은 여자에게 완전히 내맡겨진 무방비 상태의 희생물이라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내 몸은 허공에 사라지고 오로지 손가락들이 와서 닿는 얼굴만이 인식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감미로운 두 손이 내 머리를 몸통에 갖다 붙이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단지 머리 그 자체로만 여기는 듯 들고 (돌리고, 애무하고) 있으며, 그래서 이제 옆 탁자에서 기다리고 있는 날카로운 면도날이 내 머리의 그 아름다운 자율성을 완성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스르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얼마 후 손길이 멈추고 이발사가 이번에는 정말로 면도칼을 집으려고 물러서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이 순간(생각은 계속 움직이므로) 내 머리의 주인(들어올리는 여인), 나의 다정한 살인자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는 경악했다. 내가 속으로 즐기던 유희가 돌연 기이하게도 현실적인 윤곽을 띠었던 것이다. 내게 몸을 숙이고 있는 거울 속의 여자, 그녀를 아는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그녀는 한 손으로는 내 귓불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얼굴의 비누 거품을 꼼꼼하게 긁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살펴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 그렇게 놀라며 발견했던 그녀의 정체가 조금씩 부서지면서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세면대 위로 몸을 구부리고, 두 손가락으로 면도칼에서 거품 덩어리를 털어 내고는 허리를 다시 펴더니 내 의자를 살짝 돌렸다. 그때 우리 시선이 한순간 마주쳤고, 나는 다시 그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얼굴이 약간 다르긴 했다. 마치 그녀 언니의 얼굴인 듯, 안색이 흐려지고 시든, 약간 홀쭉해진 얼굴. 하지만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오 년 전이 아니던가! 이 세월 동안 시간은 그녀의 진짜 윤곽을 가리는 가면을 새겨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가면에는 구멍이 두 개 있어서, 그 구멍으로 실재하는 그녀의 진짜 두 눈, 내가 예전에 알았던 그대로의 두 눈이 다시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그런데 그 후에 다시 혼선이 생겼다. 다른 손님 하나가 이발소 안으로 들어와 내 뒤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곧 내 이발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여름과 시 외곽에 짓고 있는 수영장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발사는 무어라 대답을 했는데(별 의미 없는 대답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의 말보다는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생소했다. 괄괄하고 무심하고 거의 상스러운 데까지 있는 음성, 완전히 낯선 목소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이제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문지르며 세수를 시키는데 이때 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그녀다, 십오 년 후에 내 얼굴 위에 다시 그녀 손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 그녀가 다시 나를 어루만지고 있다, 다정하게 나를 오래오래 어루만져 주고 있다고(절대 애무가 아니라 지금 세수를 시키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낯선 목소리는 점점 더 수다스러워지는 그 남자의 이야기에 뭐라고 계속 대답을 하긴 했지만, 나는 그 목소리를 믿으려 들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두 손을 믿고만 싶었다. 이 손길을 보면 분명히 그녀라고 나는 한사코 주장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이 손의 감촉에서 나는 진짜 그녀인지, 그녀가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그다음 그녀는 수건을 집어 내 얼굴을 닦았다. 그 수다스러운 손님은 자기가 한 농담에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녀는 웃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마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건네는 말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은 즉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으며,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녀에게 말을 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녀는 내 목에 둘러져 있던 수건을 걷어 냈다. 나는 일어섰다. 상의 안주머니에서 5코루나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우리 시선이 다시 마주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넬 수 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그 남자는 계속 수다를 떨었다.) 그녀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빠르고 사무적인 동작으로 돈을 받는 바람에 나는 갑자기 혼자 만들어 낸 환영을 믿은 정신 나간 사람 같아져 버렸고 그녀에게 단 한 마디조차도 건넬 엄두가 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묘하게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나는 이발소를 나왔다. 내가 아는 것, 그것은 다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었고,&nbsp;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이의 얼굴이 맞는지 머뭇거린다는 것이 참으로 야비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물론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급히 호텔로 가서(가는 길에 맞은편 인도에서 어릴 적 오랜 친구인 야로슬라프, 침발롬이 있는 악단의 단장인 그를 발견했지만, 나는 마치 찌르는 듯한 너무 강렬한 음악을 피하는 것처럼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코스트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ldquo;저, 아까 소개해 준 그 이발사 이름이 루치에 세베트코바 맞나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ldquo;지금은 다른 이름을 쓰지만 그 여자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녀를 아시죠?&rdquo; 코스트카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 &ldquo;아주 오랜, 아주 먼 옛날 일이지요.&rdquo;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조금 더 걷기 위해 호텔을 나섰다.(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제1부 전문)<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20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0_%EB%86%8D%EB%8B%B4/%ED%8E%B8%EC%A7%91%EC%9E%90%20%EC%9D%B8%ED%84%B0%EB%B7%B0_.JPG" /><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2"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50_%EB%86%8D%EB%8B%B4/%EB%B0%80%EB%9E%80%EC%BF%A4%EB%8D%B0%EB%9D%BC_%EC%9E%91%EA%B0%80%EC%9D%B4%EB%AF%B8%EC%A7%80.JPG"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strong><br />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1854년~1928년)의 문하생이었으며,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훗날 음악학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되었다. <br /> 1948년 브르노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후 찰스 대학교의 예술학부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으나, 두 학기 만에 프라하 공연예술 아카데미 영화학부로 옮겼다. 그곳에서 영화 기획과 희곡 창작 강의를 들었으나 1950년, 정치적인 이유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2년 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계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br />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젊은이들처럼 공산당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쿤데라는 1950년, &lsquo;반공산당 활동&rsquo;을 했다는 이유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으나 1956년에 재입당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였다.&nbsp; <br /> 쿤데라는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이후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를 압수당했으며 글을 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당하는 역경을 만났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단 두 권만 고국 체코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다준 작품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프랑스에서 처음 출판되었으며 1989년 공산정권 붕괴 전까지 체코 내 출판 및 외국어판 수입이 금지되었다. 출판 금지 조치 해제 이후에도 쿤데라는 모국에서 이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반대해 왔다가 지난 2006년이 되어서야 체코에서 이 작품을 출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쿤데라의 작품들은 프랑스어판이 그의 &lsquo;정본&rsquo;으로 인정, 번역 출간되고 있으며 프랑스 정착 후에는 프랑스어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br /> 1975년 프랑스 이주 후 르네 대학교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하다가 1980년 파리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땄으며 현재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역자 소개<br /> 방미경</strong><br />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프랑스문학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플로베르』(편역), 뤽 페리의 『미학적 인간』, 쿤데라의 『농담』, 『삶은 다른 곳에』 등이 있으며 논문 「꿈의 거울: 플로베르의 성 앙투안의 유혹」에 관한 연구」, 「움직이는 백과사전 『부바르와 페퀴셰』에 대하여」, 「『마담 보바리』에 나타난 현실과 꿈의 상호 파괴성」, 「침묵을 꿈꾸는 말-베케트의 「몰로이」 연구」, 「죽음을 향한 기다림과 기다림을 채우는 말-「베케트의 말론 죽다」에 대하여」 등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ff0000">-------<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16 오전 11:34:00《197》2010년 5월 1일<div style="text-align: right">&nbsp; <img border="1"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7%ED%9A%8C_%ED%91%9C%EC%A7%80.JPG"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월 1일</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김종은의 『신선한 생선 사나이』(창비, 2005)를 읽다. - 주로 십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의 주인공이 나오는 김종은의 작품은 성장소설의 외양을 취하고 있다. 「프레시 피시맨」&middot;「메모리」&middot;「스물다섯의 그래피티」&middot;「그리운 박중배 아저씨」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지만, 「미확인비행물체」처럼 성장 이전의 유년기를 다룬 작품도 거기에 포함시킬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장소설의 특징을 주인공과 세계와의 갈등과 화해에 겨누어진 굉장히 일직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서사라고 할 수 있다면, 김종은의 작품은 그런 공식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망이라는 불치병으로 자해를 하고 죽거나(「프레시 피시맨」), 현실로부터 자취를 감춘다( 「미확인비행물체」).</p> <p style="text-align: justify">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일직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성장소설의 &lsquo;성장&rsquo;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기원의 부재와 상관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녀석이 대학에 붙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녀석의 어머니가 정작 녀석이 대학생이 된 그 추운 겨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프레시 피시맨」)</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에요. 아버지요? 자살했습니다.(「쎄일즈맨의 하루는」)</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머니는 살해됐다. [&hellip;] 아버지는 그 길로 곧장 자수했다. 아버지의 편지가 끊기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메모리」)</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신경 안 써. 우리 엄마 아빤 정말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상관이 없는거야.&rdquo;(「미확인비행물체」)</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대부분의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 부재하거나,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라는 상징 기표는 겨우 존재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녀석의 아버지는 늘 그랬듯이 그날도 녀석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프레시 피시맨」)</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쌀가마니가 프린트된 그림 아래 &lsquo;우리 농산물 살리기&rsquo;란 글귀가 그것도 궁서체로다가 적힌 셔츠! 그건 농협에 다니는 아버지가 걸레처럼 휙 던져준 것이었다.(「스물다섯의 그래피티」)</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외계인에게 납치됐던 아버지가 삼년 만에 다시 돌아와요. 그 아버지가 사람들을 막 죽이기 시작해요. 헌데 혈육의 정은 있는지 아들은 안 죽여요.&rdquo;(「우주괴물 엑스트로」)</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양치질을 하다가 나는 거품이 묻은 칫솔을 신문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신문을 보고 있던 아버지는 나를 나무랐다.(「그리운 박중배 아저씨」)</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주인공들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ldquo;곁을 지켜주지 못&rdquo;하고, 기껏 직장에서 무료로 나눠준 옷을 &ldquo;걸레처럼&rdquo; 던지거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ldquo;혈육의 정&rdquo;만 간직한 채, &ldquo;신문을 보고&rdquo; 있을 뿐이다. 거론된 작품 속에서 아버지들은 정말이지, 인용된 저 한 줄의 문장에만 등장한다. 이처럼 겨우 존재하는 아버지들은, 그들의 보잘것없는 경제 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그 아버지들은「쎄일즈맨의 하루는」이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ldquo;빚&rdquo; 밖에 남긴 게 없다. 하므로 그 아들들이 &ldquo;왜 우리는 세상 모든 아버지를 미워하게 된 것일까&rdquo;라고 한탄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기 정체성과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은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아버지 대신 의지하는 대상은 친구거나(「프레시 피시맨」&middot;「스물다섯의 그래피티」&middot;「미확인비행물체」), 직장 동료(「쎄일즈맨의 하루는」) 또는 「그리운 박중배 아저씨」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길」의 남자 주인공 우현은 미진으로부터 자신의 상실된 기원 즉 &lsquo;행복이 가득한 집&rsquo;을 보상받고자 하지만, 그가 버림받는 이유도 다 &lsquo;근본&rsquo;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워진 기원에 대한 반대급부로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집착하는 게 &lsquo;기억&rsquo;이다. 그런 뜻에서, 「길」에 나오는 &ldquo;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기억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사람이라 할 수 있겠어?&rdquo;라는 말은, 『신선한 생선 사나이』의 형식과도 연관된다. 「프레시 피시맨」&middot;「스물다섯의 그래피티」&middot;「그리운 박중배 아저씨」&middot;「미확인비행물체」 같은 성공작은 모두 과거 회상을 취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원이 지워진 김종은의 주인공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억과 대면해야 한다. 하지만, 「메모리」에서 보듯이 기억과의 대면은, 파괴적이고 환상적인 &lsquo;자폐&rsquo;에 막히거나 거기서 끝난다. 다섯 쪽 분량에 불과한,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신선한 생선 사나이』 가운데서 광채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주인공의 하루 일과를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된 전화기(&ldquo;신규 메씨지 한 개가 녹음되어 있습니다&rdquo;) &middot; 전철(&ldquo;이번 정차역은 시청, 시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rdquo;) &middot; 버스(&ldquo;카드를 다시 대주세요&rdquo;)의 안내 방송과 교직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 젊은 세대들에게 돌아갈 기원이 없다는 것을 강하게 웅변하고 있다.<br /> &nbsp;</p>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2-15 오후 4:41:00김단비의 ‘찔레 먹고 똥이 뿌지직!’<img alt="" width="600" height="7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C%95%BD%EC%B4%88%EC%9D%B4%EC%95%BC%EA%B8%B0_%ED%91%9C%EC%A7%80.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열두 달 약초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을까?</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옛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방법에는 여섯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먼저 말로 전해 온 이야기를 잘 갈무리하는 방법으로는 받아쓰기(채록), 떠올려 쓰기(기재)가 있고, 여러 사람에게 읽히려고 쓴 방법으로는 다시쓰기(재화), 고쳐쓰기(재창작), 새로쓰기(창작)가 있습니다. (서정오, 『옛이야기되살리기』, 1989) 『찔레 먹고 똥이 뿌지직!』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구두쇠 아버지 덕에 폐병 고친 아들」(10월), 「할머니 마음을 돌려놓은 풀」(9월), 「소 뒷걸음질로 설사병 고친 돌팔이」(12월)는 『본초강목』이라는 중국 의학 책에 실린 이야기를 다시 쓴 것입니다. 「호두 열매 덕에 부자 된 차돌이」(1월)는 『구비문학대계』에 실린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 가운데 봉화군 춘양면, 영덕군 창수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다시 쓴 것입니다. 「여우 덕에 약초 얻은 총각」(11월)은 『익생양술』을 쓴 권혁세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고쳐 쓴 것이며, 그 나머지 이야기들은 『몸에 좋은 산야초』, 『동의보감속약초이용법』, 『약초를찾아떠나는여행』, 『세밀화로보는약용식물』, 『사계절약용식물이용도감』, 『텃밭속에숨은약초』, 『숲과들을접시에담다』, 『약이되는먹을거리』 등을 참고해 새로 쓴 것입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46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C%9D%B4%EB%AF%B8%EC%A7%80_99.JPG" /><br /> <br /> <br /> </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12</span></span></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월</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마늘</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 style="font-size: xx-small"><br /> </span>소 뒷걸음질로 <br /> <span style="color: #993300">설사병</span> 고친 돌팔이</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옛날 옛날 어느 고을에 이름난 의원이 살고 있었어.</p> <p style="text-align: justify">의원에게는 제자가 있었는데,</p> <p style="text-align: justify">심부름도 시키고 약재도 썰게 하면서 의술을 가르쳤지.</p> <p style="text-align: justify">옆집 농부가 그걸 유심히 지켜봐.</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더니 어느 날엔가는 이러는 거야.</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의원님, 저에게도 의술을 가르쳐 주십시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랬더니 의원이 그래.</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이미 제자가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 가르칠 힘이 없어요. 죄송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졸라 봐도 안 돼.</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쯤 되면 포기해야 옳은데, 아무래도 미련이 남아.</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 도둑 공부라도 해야겠다 결심해.</p> <p style="text-align: justify">환자들 치료가 끝난 밤에 의원이 제자에게 의술 공부를 시키고 있었는데,</p> <p style="text-align: justify">농부가 그걸 알게 됐어.</p> <p style="text-align: justify">문 밖에서라도 의술 강의를 몰래 들어 보기로 결심했지.</p> <p style="text-align: justify">몰래몰래 문 앞에까지 간 농부는 귀를 쫑긋 세웠어.</p> <p style="text-align: left"><img alt="" width="133" height="1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C%9E%91%EC%9D%80%20%EB%A7%88%EB%8A%98.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침 의원과 제자는 설사병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스승님, 처한테 물을 좀 데워 달라고 해도 도무지 들어 주질 않습니다. 찬 물을 마시면 설사병이 생긴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긴 설사병은 도대체 어떻게 고쳐야 한단 말입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허허, 그건 자네 마눌님한테 고쳐 달라고 해야지, 내가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얘기를 나누는 거야. 제자의 처가 어지간히 청개구리인가 봐.</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데 아뿔싸, 농부가 이야기를 뚝 잘라 이렇게 들었어.</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설사병은 도대체 어떻게 고쳐야 한단 말입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건 마늘님한테 고쳐 달라고 하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문 밖에서 엿들으니 제대로 안 들릴 밖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부는 무슨 큰 비책이라도 얻은 양 중얼중얼 입속으로 외워.</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옳거니! 한 가지 배웠구나.</p> <p style="text-align: justify">써먹을 일 있을 테니, 잘 외워 둬야지.&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이야.</p> <p style="text-align: justify">농부가 밭에 나가다, 짐 꾸려 길을 나서는 친구를 만난 거야.</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8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C%9D%B4%EB%AF%B8%EC%A7%80_102_103.JPG" /><br /> <br /> &ldquo;자네, 어디 먼 길 가는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친척 어르신이 설사병이 났다 해서 가 보려 하네.</p> <p style="text-align: justify">연세가 있으시니,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어서 말이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설사병? 마침 내가 좋은 수를 알고 있는데, 한번 들어 보려는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하필이면 설사병이라지 뭐야.</p> <p style="text-align: justify">농부는 외운 대로 &ldquo;설사병에는 마늘&rdquo;을 일러 줬어.</p> <p style="text-align: justify">용한 의원이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하니 친구도 좋아라 했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부의 친구는 친척 집에 가자마자 마늘을 가져오라고 해.</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는 다짜고짜 편찮으신 어르신에게 먹였지.</p> <p style="text-align: justify">헌데 이게 웬일이야? 설사병이 덜컥 나아 버렸네?</p> <p style="text-align: justify">참 신기한 일이야.</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문은 금세 퍼졌어.</p> <p style="text-align: justify">하필이면 설사병이 유행하던 때라,</p> <p style="text-align: justify">너도나도 마늘 챙겨 먹고는 다 나아 버렸다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니 소문이 나고 말지, 하늘이 내린 명의가 났다고 말이야.</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문은 퍼지고 퍼져 의원에게까지 전해졌어.</p> <p style="text-align: justify">듣자 하니 용하거든?</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 의원이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던 농부가 어찌 명의가 되었나 궁금해 죽을 지경이야.</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align="right" width="250" height="31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D%81%B0%EB%A7%88%EB%8A%98_250.JPG" />의원은 농부를 찾아갔지.</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나한테 의술 가르쳐 달라고 한 게 엊그제인데,</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설사병 명의가 되시었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농부가 솔직하게 말해.</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다 의원님께 배운 덕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의원이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쳐.</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저는 아무것도 가르쳐 드린 게 없지 않습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실은 제가 도둑공부를 좀 했습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야기를 다 듣고 난 의원이 그래.</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 정도 열정이면 제자로 받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으나, 다음에는 또 어느 대목을 뚝 잘라 들을지 알 수 없으니, 오늘부터라도 당장, 제대로 공부를 시작하시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대로 두었다가는 돌팔이 의사가 사람 잡게 생겼으니 방도가 없지 뭐야.</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늘이 설사병에 좋다는 건, 이렇게 농부의 섣부른 짐작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라지.</p> <p style="text-align: justify">농부는 의원이 제자로 받아 준 덕분에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 됐어.</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는 돌팔이가 아니라 진짜 명의로 오래오래 이름을 떨쳤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 이 이야기는 중국의 『본초강목』이라는 의학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조금 바꾼 거야. 의원과 그 제자가 환자에게 못 받은 치료비를 어떻게 받을까 이야기를 나누는데 의원이 이러거든. &ldquo;이자는 받지 말아라(산료이가이지算了利可以止)&rdquo; 지나가던 농부는 이것을 &ldquo;마늘이 설사를 멈추게 한다(산가이지하리蒜可以止下痢)&rdquo;로 들었대. 중국 발음으로는 &lsquo;산료이가이지&rsquo;와 &lsquo;산가이지하리&rsquo;의 발음이 아주 비슷하거든.</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align="absMiddle" width="78" height="6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EB%A7%88%EB%8A%98%EC%AA%BD.JPG" />마늘</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마늘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길러 먹는 여러해살이풀이야. 4, 5월에 엷은 자줏빛 꽃이 피는데, 원기둥 모양의 꽃줄기가 잎겨드랑이에서 나와. 잎은 어긋나게 나고 끝은 말려 있는 때가 많아. 밑동은 통 모양으로 줄기를 감싸고 있어. 통마늘은 연한 갈색 껍질로 쌓여 있는데 안쪽에 마늘쪽이 대여섯 개 들어 있지. 마늘줄기는 8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식탁에는 마늘이 없으면 안 돼. 양념이나 향신료로 많이 쓰거든. 또 마늘 즙에는 강한 살균 효과가 있어 상처를 소독하는 데 써. 코도 뻥 뚫어 주지. 어깨 결림이나 허리 통증에는 마늘 뜸을 뜨기도 해. 고혈압이나 동맥경화, 편도선염이나 원형탈모증에도 좋고, 방광염이나 만성 변비에도 효과가 있어. 최근에는 일부 암세포에 굉장한 효과를 보여서 항암 치료제로도 쓰여.</p> <p style="text-align: justify">『삼국유사』에도 환웅이 곰에게 쑥과 마늘을 먹여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잖아? 마늘이 없었다면 단군 할아버지가 태어나지도 못했을 테니, 마늘은 우리에게는 큰 은인인 셈이야.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를 짓는 노예들에게 마늘을 먹였다는 이야기도 있어.</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78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9_%EC%B0%94%EB%A0%88%20%EB%A8%B9%EA%B3%A0%20%EB%98%A5%EC%9D%B4%20%EB%BF%8C%EC%A7%80%EC%A7%81/106%EC%AA%BD.JPG" /><br /> <br /> <strong>--------------------------<br /> 작가 소개<br /> 글 김단비</strong><br /> 녹색연합에서 달마다 펴내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기자로 일하는 동안, 머리로만 알던 환경 이야기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지구에 누를 끼치지 않는 생명체가 되자고, 날마다 다짐만 합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그림 안경자<br /> </strong>산 좋고 물 맑은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뒤 어린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식물 세밀화와 생태 그림을 그리고 있답니다. 숨어 있는 곤충이나 작은 풀들을 잘 찾아내서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지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꿈이랍니다.『꽃이랑 소리로 배우는 훈민정음 ㄱㄴㄷ』, 『동물이랑 소리로 배우는 훈민정음 아야어여』, 『대한민국 갯벌 문화 사전』, 『풀이 좋아』, 『세밀화로 그린 보리 어린이 풀 도감』, 『숲과 들을 접시에 담다』, 『애벌레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 『무당벌레가 들려주는 텃밭 이야기』 등에 그림을 그렸습니다.<br /> <span style="color: #ff0000"><br /> <br /> -------<br /> ★</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15 오전 11:34:00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7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8_%EC%82%B6%EC%9D%84%20%EB%B0%94%EA%BE%BC%20%EB%A7%8C%EB%82%A8/%EC%82%B6%EC%9D%84%EB%B0%94%EA%BE%BC%EB%A7%8C%EB%82%A8_%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글을 </span></span></strong><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열며</span><br /> </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맛난 만남</span></span></strong></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그런 만남을 그저 흘려보내놓고 자꾸 딴 데 가서 기웃대며 불운을 탓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黃裳, 1788~1870)이다. 내가 황상을 처음 안 것은 예전 임형택 교수 논문에 잠깐 인용된 「삼근계」란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글이 가슴을 쳤다. 당장 수소문해서 황상의 『치원유고巵園遺稿』 복사본을 손에 넣었다. 앞뒤 맥락을 알고 읽으니 더욱 뭉클했다. 이후 틈날 때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지난 몇 해 동안 황상의 자취를 꼼꼼하게 추적해왔다. 2006년 가을, 주룩주룩 내리던 빗속에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에 있는 일속산방 터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30년 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로 폐교가 된 용운초등학교 터의 뒤편이었다. 덤불은 수십 년 인적이 그친 터라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저수지의 벼랑길을 따라 아슬아슬 위태롭게 찾아간 집터에서 나는 망연해져서 한참을 서성였다. 먼 길에 길동무 삼아 함께 간 아들과 해 뉘엿한 저수지 수면 위로 돌멩이를 빗겨 던지며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했다. 이후 마음 한편에 늘 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황상과 관련이 있는 필첩의 소장자를 물어물어 찾아가 그 생생한 묵흔과 마주했을 때는 감격을 가누지 못했다. 다산과 정학연, 그리고 추사 형제가 황상에게 준 여러 권의 친필첩을 보았다. 필치가 황홀했고, 내용이 눈물겨웠다. 자료가 나올 때마다 문집 내용과 맞춰보니 알 수 없던 여백이 하나둘씩 채워졌다. 다산과 황상의 아름다운 만남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는 일은 내 몫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어찌하겠는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가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와버린 것을.</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산이 황상에게 준 이런저런 당부들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헤어진 지 18년 만에 사제가 감격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의 자취를 찾아 헤매고, 그가 남긴 글을 모아 읽는 동안, 모호하고 뭉뚱그려졌던 풍경들이 점점 또렷한 영상으로 그려졌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황상은 자신의 시문을 모은 『치원유고』란 문집을 남겼다. 또 가까운 벗, 특히 다산의 아들 형제 등과 주고받은 수십 통의 편지를 모은 『치원처사사우왕복급수창록巵園處士師友往復及酬唱錄』이 문집 속에 따로 실려 있다. 이밖에 다산이 평생 동안 황상에게 준 편지와 쪽지글을 모은 『서간첩』과,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그를 위해 써준 몇 종의 친필첩, 그의 도탑고 순수한 마음에 감동하여 다산 사후에 정씨와 황씨 두 집안이 길이 아름다운 우의를 이어가자며 정학연이 써준 『정황계첩丁黃契帖』 등이 따로 전한다. 황상이 스승 다산의 가르침에 따라 조성한 원림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은 유명한 화가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직접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추사의 삼 형제가 황상을 위해 써준 필첩 『치원진완巵園珍玩』도 소중하다. 이렇게 보니 다산과 황상에 관련된 자료가 뜻밖에 적지 않다. 황상의 문집은 지금까지 번역되지 않았고, 그 많은 필첩과 편지글도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살핀 황상의 삶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어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지금의 눈으로가 아닌 당시의 시선에서 볼 때도 그랬다. 이름 없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 멋진 스승과 만나 빚어낸 조화의 선율은 그때도 많은 사람을 열광케 했다. 더벅머리 소년이 스승이 내린 짧은 글 한 편에 고무되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다. 이 책에서는 다산과 황상의 만남을 중심축에 놓고 앞쪽에는 다산의 강진 유배 생활을 배경에 두었다. 뒷부분에서는 정학연 형제 및 추사 형제와의 왕래 자취를 줄거리 위에 세워놓았다. 이를 통해 마치 인드라망처럼 종횡으로 교직된 한 필의 피륙을 짜볼 작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제의 정리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다. 사람들은 아무도 스승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가 없다. 물질적 교환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의 도탑고 질박한 정은 찾아볼 길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한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인터넷 연재의 방식으로 1년간 집필되었다. 매주 40~50매 가량의 원고를 써나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을 통한 독자와의 교감도 전에 해보지 못한 신기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귀한 자료를 제공해주어 이 책의 집필을 가능하게 해준 여러 소장자들께 감사드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문학동네의 강명효 실장과 강지혜 팀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든든한 동행이 되어주었다. 각별히 고마운 뜻을 전한다. 마치고 보니 중간 중간 미진한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어렵사리 찾은 자료를 하나라도 더 소개하려는 욕심이 자꾸 앞섰다. 글이 다소 장황해진 연유다. 쓴 뒤에 새로운 자료가 나와 오류를 바로잡거나 보완한 것도 있다. 때로는 원본 자료의 오독으로 몇 꼭지의 내용을 고쳐야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내 삶에서 그런 만남을 가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를 헤아려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만남을 반복한다. 그토록 좋고 간절했다가 끝에 가서 싸늘한 냉소로 남는 만남도 있고, 시큰둥한 듯 오래가는 은은한 만남도 있다. 나는 이 한 생을 살면서 어떤 만남을 가꾸어가야 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그들은 가고 남은 자취는 덤불 속에 묻히거나 수몰되고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조용히 말하련다. &ldquo;이런 사람이 있었네&rdquo;라고.&nbsp;&nbsp;&nbsp;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초겨울의 문턱 행당서실에서 <br /> 정민 씀<br /> &nbsp;</p> <p><img alt="" width="600" height="17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8_%EC%82%B6%EC%9D%84%20%EB%B0%94%EA%BE%BC%20%EB%A7%8C%EB%82%A8/%EC%9D%B4%EB%AF%B8%EC%A7%801.JPG" /><br /> &nbsp;<br /> &nbsp;</p> <p><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첫</span></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번째 마디</span></span><br /> <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 과골삼천</span></span></strong></p> <p><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를 알아주는 말이 아닐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일흔여섯의 노인은 손에서 공부를 좀체 놓지 않았다. 다리 부러진 돋보기를 코끝에 비스듬히 걸치고 끊임없이 베껴 쓰고, 메모하고, 정리했다. 평생 그렇게 베낀 책이 키를 넘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어르신! 그 연세에 무슨 영화를 보시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하십니까? 이제 그만 쉬셔도 되잖아요. 바람도 좀 쐬시고요. 건강 다치실까 걱정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눈길을 잠깐 주더니 다시 붓방아를 계속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그만두세. 누가 말리겠나, 저 고집을. 황소고집일세, 황소고집! 저 나이에 내년에는 과거에라도 나가실 모양일세. 쯧쯧!</p> <p style="text-align: justify">노인이 붓을 놓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자네들! 거기 앉게. 날 위하는 말인 줄이야 왜 모르겠나만, 그런 말은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닐세. 내 스승이신 다산 선생님께서는 이곳 강진에 귀양 오셔서 스무 해를 계셨네. 그 긴 세월에 날마다 저술에만 몰두하시느라,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지. 열다섯 살 난 내게 &lsquo;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rsquo;는 삼근(三勤)의 가르침을 내리시면서 늘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네. &ldquo;나도 부지런히 노력해서 이를 얻었느니라. 너도 이렇게 하거라.&rdquo; 몸으로 가르치시고, 말씀으로 이르시던 그 가르침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어제 일처럼 눈에 또렷하고 귓가에 쟁쟁하다네.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이 지성스럽고 뼈에 사무치는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그날로 나는 죽은 목숨일세. 자네들 다시는 그런 말 말게.</p> <p style="text-align: justify">삐죽대던 입들이 쑥 들어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황상의 이 말은 『치원유고巵園遺稿』에 실린 「회주 삼로에게 드림與褱州三老」이란 편지에 적힌 한 대목을 대화투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과골삼천(㎪骨三穿)!</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이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두 무릎을 방바닥에 딱 붙이고 공부에만 몰두하다보니 바닥에 닿은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 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복사뼈에 세 번씩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여기서 처음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우리 선생님은 복사뼈에 구멍이 세 번 나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하셨다. 내 복사뼈는 아직도 건재하다. 거기다 여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그래서 이 나이가 되어서도 공부를 그만 둘 수 없다. 그러니 말리지 마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황상은 더도 덜도 말고 이런 사람이었다. 열다섯에 스승과 처음 만난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스승을 모셨다. 잠시의 흔들림도 없었다. 다산의 입장에서 황상 같은 제자는 참 성가신 존재였지 싶다. 무슨 말만 하면 그대로 따랐다. 평생을 지켰다.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스승인들 지나가는 한마디라도 허투루 할 수 있었겠는가?</p> <p><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베끼고 또 베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황상이 예순일곱 살 때 쓴 시가 『치원유고』에 남아 있다. 제목은 「육유 시의 초서를 마치고 감회를 읊다鈔陸詩了詠褱」이다. 황상의 『치원유고』는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2008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다산학단 문헌집성』 9책 자료집을 펴내면서 그중 제5책에 이 책을 처음으로 영인해서 수록했다. 그는 평생 송나라 때 시인 육유(陸游, 1125~1210)의 시를 사숙했다. 이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일흔 가까운 노인이 1천 수가 넘는 육유의 시집을 또박또박 다 베껴 쓴 뒤, 감회를 누를 길 없어 지은 시다.</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봄에는 『장자』를 등초하였고<br /> 가을엔 육유 시를 초록하누나.<br /> 천여 수를 손으로 써서 얻으니<br /> 침침해 눈이 온통 감길 것 같다.<br /> 예전에 20년간 공부할 적엔<br /> 비록 저승 간다 해도 따르려 했네.<br /> 못난 글씨 안목 없음 탄식하시니<br /> 잘못 써서 자주 눈살 찌푸리셨지.<br /> 조심조심 적과 맞선 듯한 뜻으로<br /> 진실되이 조정(朝廷) 의식 치르듯 했네.<br /> 이를 따라 경계로 삼을 만하니<br /> 평소에 바둑 둠은 싫어했다오.<br /> 편집을 다 마쳐야 시름 멎으니<br /> 뜻은 멀고 갈 길은 길기도 하다.<br /> 궁한 선비 썩은 뜻을 혼자 웃는데<br /> 아내는 진사 기약 비웃는구나.<br /> 젊은이는 개미 떼에 깜짝 놀라고<br /> 벗들은 시귀(蓍龜)인가 탄식하였네.<br /> 어떤 이는 쉬라고 권유하면서<br /> 골몰하여 피곤한 일 왜 하느냐고.<br /> 이 또한 깊은 사랑 맺힌 것이라<br /> 허깨비 몸 쇠함도 온통 몰랐지.<br /> 책 모양은 송곳 뚫어 한데 묶어서<br /> 찌를 꽂아 갑부에 포함시키네.<br /> &nbsp; 『치원총서』는 갑부와 을부가 있다.<br /> 파리 대가리만 한 글씨로 애를 쓰노니<br /> 흰머리는 짧아지고 성글어지네.&nbsp;<br /> 갑작스레 무덤으로 돌아간다면<br /> 버섯 지초 나온들 어이하리오.<br /> 한갓되이 눈물은 그치지 않고<br /> 게다가 허리병은 낫기 어려워.<br /> 올곧은 마음으로 나를 막으니<br /> 우직한 몸 누굴 향해 아첨하리오.<br /> 누워 보는 저녁엔 그 맛이 깊고<br /> 읊조리며 거닐 때엔 기쁨 넘친다.<br /> 전생의 학업이 안 끝났기에<br /> 능가로 다시 태어남 소원한다네.</span></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봄 내내 『장자』를 베껴 썼다. 그러고는 여름부터 육유의 시를 베끼기 시작해서 마침내 등서를 마쳤다. 스승 다산은 시를 배우려면 반드시 육유의 시를 섭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붓을 놓으니 눈이 침침해서 잘 떠지지 않는다. 예전 스승을 모시고 공부할 적엔 저승을 함께 가자 해도 따라갈 작정이었다. 베껴 쓰다가 오자라도 내면 선생님은 말없이 이마를 찌푸리셨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아예 내 앞에 무서운 적이 칼을 들고 내 목숨을 노린다는 생각으로 집중했다. 임금 앞에 서서 조정의 의식을 치르는 듯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제 베껴 쓰기를 마쳐 송곳을 꺼내 구멍을 뚫고 표지를 씌워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내는 진사 벼슬 하나도 못 할 거면서 그놈의 공부는 해서 무엇하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젊은 친구들은 내가 쓴 개미같이 작은 글씨를 보고 깜짝 놀란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있는 책을 읽으면 되지 굳이 베낄 맛은 뭐냐며 퉁을 준다. 하지만 초서(?書) 공부는 우리 선생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공부법이다. 그대들은 잘 모른다. 이 공부 방법의 위력을. 누가 뭐라 하든 관 뚜껑에 못이 박힐 때까지 나는 베끼고 또 베낄 것이다. 말려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평생 베낀 책은 총서로 묶었다. 총서는 내용에 따라 갑부(甲部)와 을부(乙部)의 구분을 두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높이를 확인할 때마다 스승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하지만 스승께서는 벌써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나는 지금껏 스승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내 공부는 이승에서 끝날 공부가 아니다. 내세엔 승려로 태어나 승방(僧房)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며 또 한생을 살 것이다.</p> <p><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진심으로 스승을 섬긴 딱 한 사람</span></strong></span></p> <p><br /> 황상!</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다산이 가장 아낀 단 한 사람의 제자다. 다산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했다. 잘하면 속없이 칭찬하고, 못하면 매정스레 나무랐다. 다시 안 볼 것처럼 불벼락을 내렸다. 제자는 그것이 속 깊은 사랑인 줄 알아, 대뜸 잘못을 고쳤다. 더욱 분발하고 노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다산이 강진 18년 유배 기간 동안 키운 제자는 수없이 많았다. 이들 중 끝까지 스승을 진심으로 한결같이 섬긴 제자는 황상 한 사람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대해서는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이 남긴 증언이 있다. 황상이 예순일곱이 되던 1854년, 두릉을 다니러 왔던 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작별이 아쉬워 친필로 써준 글이다. 제목은 「일속산방으로 돌아가는 처사 황치원을 전송하는 서문送黃處士巵園歸一粟山房序」이다. 앞쪽 절반만 읽어본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nbsp;<img alt="" width="598" height="2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8_%EC%82%B6%EC%9D%84%20%EB%B0%94%EA%BE%BC%20%EB%A7%8C%EB%82%A8/%EB%B3%B8%EB%AC%B8%EC%9D%B4%EB%AF%B8%EC%A7%80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돌아가신 아버님께서 강진에 귀양 사신 것이 무릇 18년이다. 학업을 청한 자는 수십 명이었다. 혹은 7~8년 만에 돌아가고, 혹은 3~4년 만에 물러났다. 곁에서 과문(科文)과 팔고문(八股文)을 익힌 자가 있었고, 시와 고문을 섭렵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 문하는 흩어져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유독 황군 제불(帝튩)만은 어렵게 지내시던 초년부터 귀양에서 풀려나 돌아오시던 그날까지 시종일관 법도를 넘어섬 없이 자세에 조금의 차이가 없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배움은 효성과 우애, 충성과 신의를 바탕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김은 옛날의 효자 증자(曾子, 춘추시대의 유학자. 『효경』의 저자라고 전해짐)와 민자건(閔子騫,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는 그의 덕행과 효성을 칭찬하였다)과 같게 되기를 기약했고, 아우와 우애롭기는 복식(卜式, 한나라 때 재상. 농사를 짓다가 조정에 발탁되었다)과 음경(陰慶, 후한 사람. 우애로 이름 높았다)을 기준으로 삼았다. 벗과의 사귐은 거경(巨卿)과 원백(元伯, 범식范式과 장소張쌉의 자. 장소는 죽은 뒤 절친한 벗인 범식의 꿈에 나타나 조문 올 것을 청했다는 고사가 전한다)을 본받았다. 그런 까닭에 시골에서는 모두들 그를 모범으로 삼았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주역』에서 점괘가 변화하는 추이(推移)와 물상의 호체(互體), 『예기』에서 최적부(衰適負, 제사 복식의 형식을 일컫는 말)와 연미(燕尾, 상복 뒤에 제비 꼬리처럼 길게 늘인 것), 나무를 심고 원포(園圃)를 가꾸며 스스로 넉넉하게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 또한 돌아가신 아버님께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깊은 산속에 집을 얽고, 경서를 읽는 여가에 시를 지어 즐거움으로 삼으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매번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기일에는 옷을 단정히 하고 북쪽을 향하여 곡을 했다. 나이가 일흔에 이르러서도 절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천릿길에 발을 감싸고 아버님의 산소를 찾아온 것이 세 차례나 된다. 그 굳센 행실과 도타운 윤리가 어찌 혼탁한 세속에서 쉬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세상을 물러나 번민 없이 사슴과 멧돼지와 더불어 즐겨 노닐었으나, 장차 초목과 함께 썩고 말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span></span></p> <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정학연이 지켜본 황상의 인간됨이 이러했다. 글 앞쪽에서 제자들을 말한 내용 중에 &ldquo;막판에는 창을 들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욕하고 헐뜯으며 등 돌린 자도 있었다&rdquo;라고 적은 대목이 목에 컥 걸린다. &ldquo;부려만 먹고, 이용만 해먹고, 뒷배도 안 봐주고 해준 게 뭐 있느냐&rdquo;며 악을 쓰며 씩씩대는 패악이 눈에 선하다. 다산의 제자들이 다 한결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차차 들여다보겠지만, 다산은 무척 깐깐한 스승이었다. 웬만해선 제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끝까지 묵묵히 견디고, 중간에 딴마음 먹지 않고 그 뜻을 받든 이는 황상 한 사람뿐이었다.<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정민</strong><br /> 무궁무진한 한문학 자료를 탐사하며 살아 있는 유용한 정보를 발굴하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꼼꼼히 읽어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고전문장론과 연암 박지원』을 펴냈다.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연구로 『다산의 재발견』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등이 있다. 또 청언소품에 관심을 가져 『마음을 비우는 지혜』 『내가 사랑하는 삶』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돌 위에 새긴 생각』 『다산어록청상』 『성대중 처세어록』 『죽비소리』 등을 펴냈다. 이 밖에 옛글 속 선인들의 내면을 그린 『책읽는 소리』 『스승의 옥편』 등의 수필집과 한시 속 신선 세계의 환상을 분석한 『초월의 상상』, 문학과 회화 속에 표상된 새의 의미를 찾아 『한시 속의 새, 그림 속의 새』, 조선 후기 차 문화의 모든 것을 담은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를 썼다. 아울러 한시의 아름다움을 탐구한 『한시 미학 산책』과 어린이들을 위한 한시 입문서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사계절에 담긴 한시의 시정을 정리한 『꽃들의 웃음판』등을 썼다.<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 <p>&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14 오전 11:45:00에런라이크의 ‘오! 당신들의 나라’<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7_%EC%98%A4%EB%8B%B9%EC%8B%A0%EB%93%A4%EC%9D%98%EB%82%98%EB%9D%BC/%EB%8B%B9%EC%8B%A0%EB%93%A4%EC%9D%98%EB%82%98%EB%9D%BC_%ED%91%9C%EC%A7%80.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strong><br /> </strong>&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21세기가 시작될 무렵 &lsquo;단결&rsquo;이라는 격정적 물결이 미국을 휩쓸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래 처음으로 미국인들을 하나로 만들 만큼 위협적인 적이 등장했다. 그들은 건물 수위부터 최고 경영자(CEO)까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이겠다고 공언하면서 커터 칼로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렸다.<sup>1)</sup> 지하드 전사들 앞에서 공포에 질린 미국인들은 성조기로 온몸을 감쌌다. 스웨터와 티셔츠, 전사 도안(轉寫 圖案), 옷깃에 꽂는 핀은 물론이고 속옷과 목욕 가운에도 국기를 새겼다. 자동차 범퍼에는 &ldquo;뭉치면 산다.&rdquo;거나 &ldquo;우리는 도망치지 않는다.&rdquo;라는 스티커를 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유하자면 한동안 온천에 묵으면서 살을 뺀 햇병아리 여배우의 몸매처럼 얄팍한 연대감이었다. 그렇지만 재봉 분야 이외에 달리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ldquo;수상한 사람을 보면 일단 신고하라.&rdquo;는 되풀이되는 지시를, &ldquo;뭔가를 보면 뭔가를 말하라.&rdquo;는 뉴욕 교통당국의 수수께끼 같은 명령을 마음에 새겼다. 대통령이 쇼핑을 계속하라고 권하기에 힘닿는 한 열심히 물건을 샀다. 교통안전국(TSA)이 신발과 벨트 속까지 뒤질 때도, 정부가 인신보호법을 무시하고 기본적인 사생활을 침해할 때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lsquo;조국&rsquo;이라거나 &lsquo;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rsquo;라는 관념에 우리를 동조하게끔 만들었던 그 힘은 테러리즘보다 더 강력하고 반역보다 심하게 분열을 초래하는 것에 의해 약화되었다. 1980년대에 시작되어 2000년대에 갑작스레 속도가 빨라진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딛고 선 땅이 흔들리며 미국의 지형이 바뀌었다. 부의 봉우리들은 점점 더 높이 솟아올라 구름을 뚫었고, 빈곤의 골짜기는 더욱 깊이 가라앉아 어둠에 묻혔다. 광활했던 중산층의 고원이 계속 침식돼 절벽에 튀어나온 바위 형상으로 쪼그라들자 추락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은 겁에 질린 채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려 버둥거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것은 인간과 무관한, 지리적 힘에 의한 &lsquo;변화&rsquo;가 아니었다. 부시 행정부가 9.11 대책으로 항공 업계에 20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풀면서도 항공 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 9만 명은 나 몰라라 했던 지난 2001년에 이미 인간이 개입한 냉혹한 손길이 감지되었다. 이어 부시는 또 다시 부의 상향 재분배를 교묘하게 꾀해 부유층의 세금을 깎아 주고, 부자를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금융 지원 등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감축했다. 입으로만 &lsquo;기독교적 가치&rsquo;를 요란스레 떠벌리는 정치 패거리들은 성서의 핵심 가르침을 아예 거꾸로 실행에 옮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결과 2004년에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lsquo;두 개의 미국&rsquo;이 존재한다고 선언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은 &lsquo;두 개&rsquo;가 아니다. 20년 전에는 시장이 상류층과 저소득층, 삭스 백화점과 시어스 백화점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잘게 쪼개졌다. 연이어 밀려온 아웃소싱과 대량 해고의 물결에 떠밀린 중산층은 날로 상승하는 의료비, 연료비, 대학 등록금을 대기 위해 버둥거렸다. 이미 탈산업화에 희생된 전통적인 노동자 계층은 저임금 서비스 직종으로 내몰려 안전모를 벗고 대걸레를 손에 쥐었다. 빚을 갚기 위해 고금리 재대출 담보로 잡힌 집은 성인이 되어서도 독립하지 못한 자녀와 손자들로 북적거렸다. 일터에서는 작업 효율만 강조되고 임금은 오히려 떨어졌다. 의료보험료가 주택 대출금이나 집세보다 더 높아지자 보험을 포기하고 진통제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부자들도 갈라졌다. 이제 백만장자 정도는 부자 축에 끼지도 못한다. 미국 북동부 관광지인 낸터켓 섬의 낡은 여름 별장을 좋아하는 구식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상류층은 고급 주방용품 매장인 윌리엄스-소노마에서 쇼핑하는 그저 그런 부자들과, 다른 사람을 시켜 쇼핑을 하는 초부유층으로 나뉘었다. 초부유층은 쇼핑뿐 아니라 자녀 양육, 계산서 지불, 고용인 관리, 파티 개최도 모두 남의 손을 빌려서 한다. 부의 정점에 선 그들은 로마제국 이래 유례가 없는 사치를 부렸다.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초부유층에 편입된 CEO, 헤지펀드 운영자, 금융인 들은 전용 제트기의 실내장식을 위해 전문가를 고용하고, 맨해튼의 알곤킨 호텔에서 1만 달러짜리 마티니를 마시고, 보드카 오줌을 누는 다비드 얼음 조각상을 세워 놓고 지중해의 사르디니아 섬에서 200만 달러를 들여 생일잔치를 벌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많은 사람들이 의혹을 품듯이, 소수가 막대한 부를 쌓아올리는 현상과 다수가 불안과 절망에 휩싸인 현상 사이에는 연관이 있다. 상류층이 사치를 부리는 데 사용되는 돈은 어딘가에서, 더 정확히는 &lsquo;누군가로부터&rsquo; 나와야만 한다. 미국 내에서 새로운 유전이나 우라늄광이나 금광이 발견된 일도 없거니와 이라크 전쟁으로 이득을 본 것은 군수 계약자와 공급자들뿐인 만큼 그 돈은 다른 미국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자본주의적 혁신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여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서 돈을 쥐어짜는 기술이었다. 노동자의 연금과 혜택을 빼앗아 기업 이익 부풀리기, 사기성이 농후한 대출 상품 팔기, 보험료를 올리는 한편 보험금 지급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가입 거부하기, 노동력을 감축해 주가 띄우기&hellip;. 심지어는 초과근무 수당을 주지 않으려 근무시간 기록을 조작하는 일까지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인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항상 제로섬 게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자본가들은 결코 성자가 아니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잘 살아야 집과 자동차와 식기세척기를 구입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상류층에게 부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lsquo;모두가 함께&rsquo;라는 사회의 기풍이 어느새 &lsquo;가질 수 있을 때 가져라&rsquo;로 변질되었다. 환경이 파괴되고, 기반 시설이 무너지고, 공공 병원이 문을 닫고, 바자회 수입으로 학교를 꾸려 가고, 노동자들이 지쳐 쓰러진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보험료를 올리고, 임금을 깎고, 청구서에는 정체불명의 수수료를 계속 덧붙여라. 뒤에 처진 자들은 악마가 낚아채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빈곤층이 마침내 소비를 중단하고 주택 대출금을 갚지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상류층이 신나게 부를 쌓아 가고 있을 때 나머지 우리는 어디에 있었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갈 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눈앞에 닥친 일에 정신이 쏠린 나머지 우리는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날아드는 청구서를 지불해야 했으며, 일자리를 지켜야 했고, 아이들과도 가끔은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다 겨우 한숨 돌리고 공공 문제에 관심을 돌려 보면 들리는 이야기라고는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는 것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군사 역사상 가장 비합리적인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이라크 전쟁을 보자. 우리를 공격한 것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이슬람 전사들이 주축이 된 무리였으나 미국은 그와 무관한 국가, 당시 중동에서 가장 세속화된 국가를 침공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동상을 쓰러뜨리고 마을을 짓밟는 데 일시적으로 도취된 우리는 &lsquo;우리의 군을 지지하기(Support Our Troops)&rsquo; 위해 모였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군의 어떤 행위를 지지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이라크 전쟁이 2002년 불거진 기업 스캔들<sup>2)</sup>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이론도 있거니와, 혹시 그랬다 쳐도 이번에는 전쟁 자체로부터 눈길을 돌려놓을 것이 필요해졌다. 아부그라이브의 끔찍한 비밀이 폭로되었고 5년 동안 전쟁 비용으로 지출한 돈은 5860억 달러에 달했다. 4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부랑자 국가(pariah nation) 취급을 받게 되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7_%EC%98%A4%EB%8B%B9%EC%8B%A0%EB%93%A4%EC%9D%98%EB%82%98%EB%9D%BC/%EA%B0%81%EC%A3%BC1.JPG" /><br /> <br /> 한편에서는 중학교 생물 수업이나 성교육에나 어울리는 사안들이 중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줄기세포가 대표적인 예다. 이 조그마한 실체와 그보다 몸집이 약간 더 큰 사촌인 배아를 방어하는 데 정치적 경력이 걸려 있는 듯 너나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성 결혼 또한 경제적 약탈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보이는 황당한 쟁점이었다. 한 개인의 결혼이 어째서 다른 사람의 결혼에 위협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동성 커플이 제단 위에서 포옹하는 장면으로부터 대중의 관심을 돌려놓을 다른 쟁점이 부각되지 못해 선거판은 부자 정당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동시에 결혼하지 않은 청년층에게는 기도 및 찬물 샤워와 함께 금욕이 강하게 권장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불법 이민 문제도 초점 흐리기에 즐겨 사용되는 재료다. 불법체류자들은 잔디를 깎고, 사무실을 청소하고, 육류를 포장하고, 가금류를 손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약을 운반하고, 사회보장 혜택을 갈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인 양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사회복지 축소로 높아진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만만한 표적이었다. 20년 전의 우익 선동가들은 사회복지 수혜자들을 꼴 보기 싫은 빈민층의 대표로 놓고 공격했고, 이제는 이민노동자들에게 희생양 역할을 떠안겼다. 두 경우의 전략은 동일하다. 빈곤층의 일부를 따로 지목해 적이란 딱지를 붙여, 경제 특권층에게 향할지도 모를 분노를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다. 이민을 제한하자는 의견에 합당한 근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연금을 빼앗아 가고 수상쩍은 모기지 상품을 우리에게 판 것은 멕시코인들이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눈이 흐려진 데는 2000년대에 유행한 주술적 사고의 영향도 있었다. 욕구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가지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서점의 소설 매장은 수련 중인 어린 마법사 이야기로 뒤덮였다. 페미니즘 대신 공주 판타지를 받아들인 여성들이 화려한 결혼식을 통해 꿈을 실현하려 들면서 젊은 부부들은 미처 자동차 대출을 받기도 전에 파산 상태에 놓였다. 한편 신(神)은 우리의 당면한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해서 존재하므로 &lsquo;원하는 것을 콕 찍어 요구하라&rsquo;는 식의 주술적 종파가 종교 집단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세를 넓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대체 &lsquo;경고 신호&rsquo;가 얼마나 더 울려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될까? 무너진 제방과 물에 잠긴 마을, 텅 빈 식료품 저장실, 통상적인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늘어나야 한단 말인가? 21세기도 10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 눈앞에는 문과 창을 판자로 막은 집들이 줄지어 늘어섰고, 깨진 꿈들이 쓰레기처럼 뒹구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평범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ldquo;이 나라에서는 약탈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 왔다. 약탈 뒤에 남은 것이나마 차지하기 위해 너무 많이 일하고 너무 많이 소비했던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한계에 달했다. &lsquo;미국&rsquo;이라는 아름다운 관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부를 재분배하는 새로운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한쪽엔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고급 주택 단지, 다른 한쪽에는 트레일러 파크와 빈민가 다세대주택이 존재하는 분열이 지속되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어느 한쪽에 속하게 될 때까지 구경만 하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때가 되면 세상이란 단어 앞에는 &lsquo;예전&rsquo;이라는 슬픈 수식어가 붙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우리가 단결을 위한 진정한 기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집단적 열망을 가슴속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고 싶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미국의 잃어버린 영광을, 무질서하게 뻗어 나간 도시와 담장들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 땅이 지녔던 아름다움과 한때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존중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공통으로 직면한 위협이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의 외교정책이 키워 낸 적들뿐 아니라 기후 변화 및 물과 석유 공급 감소라는 전 지구적 과제가 우리를 일깨울 수도 있다. 나아가 우리의 단결과 연대감을 이 지구에 사는 인류 전체로 확산시키려는 자신감도 언젠가는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8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5장<br /> </span></strong></span></span><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암보다<br /> 무서운<br /> 의료 제도</span></strong><br /> <br /> </span></span><br /> <span style="color: #333333"><span><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거대한 내부의 적</span></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머리를 숙이고 백기를 들어라. 제3제국, 일본제국, 소련, 마누엘 노리에가, 사담 후세인을 제압한 미국이 감히 맞설 수 없는 적을 만났다.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그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항복을 알리는 신호음이 곳곳에서 들린다. 저명한 진보 정치학자에게서도 그런 신호음을 들었다. 그가 장황하게 설명한 말을 요약하면, 민간 의료보험 산업의 규모를 감안할 때 단번에 국가 단일 보험 제도<sup>●</sup>로 이행하면 경제 전체에 파괴적인 영향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빈민 구호 활동을 하는 비영리단체를 이끄는 한 시카고 여성에게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민간 산업이 이렇게 커졌는데 어떻게 우리가 캐나다 방식으로 갈 수 있겠냐고 그녀는 반문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1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7_%EC%98%A4%EB%8B%B9%EC%8B%A0%EB%93%A4%EC%9D%98%EB%82%98%EB%9D%BC/%EA%B0%81%EC%A3%BC2.JPG" /><br /> <br /> 그렇다. 미국의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거대한 것은 사실이다. 예산및정책우선순위센터(Center for Budget and Policy Priorities)의 레이턴 쿠에게 받은 자료를 보면 2007년 미국인들이 민영 의료보험료로 지출한 돈은 7760억 달러에 달한다. 또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 거절 업무에만 40만 명을 고용한 대규모 고용주이기도 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때문에 의사들은 보험회사와 싸우기 위해 원무실 인력을 늘린다. 개업의인 아툴 가완디는 『뉴요커』에 &ldquo;병원이 하기에 따라 보험사의 지급 거절 비율을 이를테면 3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출 수 있다. 의사들은 그렇게 해서 돈을 번다.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보험사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rdquo;고 썼다. 그리고 우리는 보험료를 내서 보험사와 의사들 간의 &lsquo;전쟁&rsquo; 비용을 지불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도 민간 의료보험 산업이 새로운 고객을 찾는 데 혈안이 된 것을 보면 아직 충분히 거대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산업과 달리 이 산업은 고객을 &lsquo;거절&rsquo;함으로써 성장한다. 카르티에나 렉서스, 노드스트롬 백화점은 고객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고객의 돈은 반긴다. 그러나 보험회사인 애트나는 그렇지 않다. 병력이 있으면 보험사는 가입을 받아 주지 않는다. 민영 의료보험은 결코 병에 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도 왜 위험 분담을 전제로 한 &lsquo;보험&rsquo;이란 단어를 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건 보험이 아니라 강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자. 미국에서는 의료보험료를 감당할 수 없거나 자격 요건이 안 되어 매년 1만8000명이 사망한다. 9.11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여섯 배에 달하는 수다. 의료보험 상실이 두려워 마음에 맞지 않는 직장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담 후세인은 1만8000명의 미국인을 죽이지 않았다. 소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애국적 분노와 막대한 군비 지출로, 후세인의 경우엔 무장 침공으로 적을 제압했다. 그런데 왜 보험 산업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게 한 가지 계획이 있다. 첫째, 대형 보험사의 위치를 알아낸다. 대단한 첩보 활동은 필요치 않다. 구글이면 충분하다. 둘째, 그 보험사들의 방어 병력을 파악한다. 성난 고객들로부터 본사를 지키기 위해 상당수의 경비원들이 있겠지만 그 정도는 몇 개 여단만 동원하면 제압할 수 있다. 셋째, 보병대 공격에 이어 필요하면 공습도 고려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안 됩니다.&rdquo;라고 말하기 위해 고용된 보험금 지급 거절 인력 40만 명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이들을 위한 계획도 있다. &lsquo;실업&rsquo;이 대안이다. 그렇다고 쩨쩨하게 굴지는 말자. 일반적으로 국가 단일 보험 제도에서는 해고된 이후에도 계속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일자리를 잃은 보험사 임원들에게는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추천하고 싶다. 가정 간병인이 어떨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실제의 적과 가상의 적 양자를 상대로 무수히 싸우는 동안 우리를 지탱해 주었던, 전통을 자랑하는 &lsquo;마초 정신&rsquo;은 어디로 갔는가? 의료보장 문제에서 이미 우리는 적의 정체를 밝혀냈다. 남은 것은 적을 쳐부수는 것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빈곤층에&nbsp; 바가지&nbsp; 씌우기</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의료보험을 둘러싸고 탄식하는 소리가 높아 가기만 한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싼 보험료, 의료보험 혜택 제공을 점점 꺼리는 고용주들, 보험사가 황송하게도 보험금을 지급해 주도록 계약된 의사를 찾는 일의 어려움 등등. 그나마 이건 보험에 가입된 운 좋은 사람들의 얘기다. 그래도 너무 어두운 면만 보지 말고 컵에 물이 아직 절반은 차 있다고 생각하자. 의료 비용과 소득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아픈 게 불법은 아니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분위기가 뚜렷이 변하고 있다. 병원들은 궁핍한 환자로부터 밀린 치료비를 받아내기 위해 점점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당뇨병으로 샴페인-어버너의 칼 병원에 579달러를 빚진 정비공의 사례를 보도했다(보험 가입자 자격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일 때문에 법원 청문회에 출석하지 못해 체포당하자 보석금이 2500달러나 부과되었다. 이처럼 법원 출정일을 지키지 못해 체포당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증가하고 있다(병원들은 이를 &lsquo;신체 압류&rsquo;라는 기발한 명칭으로 부른다). 다시 한 번 컵에 물이 반은 남아 있다고 생각해 본다면, 아직까지는 압류한 신체를 병원이 마음대로 장기이식에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영리 자선단체라는 입장 탓에 그동안 병원은 그나마 관대한 채권자였다. 몇 년 동안 보험 없이 지낸 내 친구 한 명은 평생에 걸쳐 매달 25달러씩 갚기로 병원과 합의했다. 신체를 압류당할 걱정 없이 필요할 경우엔 치료를 받으면서 말이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돈에 눈이 먼 이류 병원들만 경찰을 채권 회수인으로 활용하는 게 아니다. 예일-뉴헤이븐 병원 한 곳에서 3년 동안 받아 낸 체납 채무자에 대한 체포 영장만 65건이다. 만약 채무자가 병원 근무자라면 &lsquo;압류&rsquo; 대상은 신체가 아니라 다른 것이 된다. 예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찾아간 나는 접수계에 근무하는 타와나 마크스를 만났다. 마크스는 자기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서 제공하는 의료보험으로는 치료비가 턱없이 모자랐다. 임금을 고용주인 병원에 압류당한 그녀는 20세기 초반의 컴퍼니 타운<sup>고용 등을 한 기업에 의존하는 도시</sup>을 연상시키는 채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병원들은 관행적으로 비보험 환자에게 보험 환자의 몇 배에 달하는 치료비를 청구해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심화시킨다. 『포트로더데일 선-센티널』은 한 지역 병원이 보험 적용 환자에게는 6783달러인 맹장수술비를 비보험 환자에게 2만9000달러로 청구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LA 타임스』에 따르면, 영리 병원인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 체인에서 비보험 환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2퍼센트인데 반해 수익의 35퍼센트가 그들로부터 나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난한 사람들에게 그처럼 뻔뻔하게 바가지를 씌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형 보험사와 회원제 건강관리 단체 HMO는 병원과 협상해 고객이나 회원들에게 &lsquo;할인&rsquo;을 제공한다. 대신에 병원들은 비보험 환자에게는 마음대로 청구서를 발행한다. 병원 가운 사용료로 50달러를 청구한 사례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61년에 정신과 의사 토마스 사즈는 공식적으로 범죄나 죄악으로 분류된 행동, 예컨대 약물 중독이나 (당시의 기준에서) 성적 이상 행위를 &lsquo;치료 대상&rsquo;으로 보는 관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괴팍한 사즈는 이를 선하고 관대한 추세로 보지 않고 &lsquo;치료 국가(therapeutic state)&rsquo;의 손에 권한이 점차 집중되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의 지적이 지금은 얼마나 생경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범죄를 치료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병을 범죄시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래 건강하고 원기 왕성했던 사람까지 포함해 거의 모든 사람이 의료-수형(受刑) 제도의 손아귀에 붙잡힐 위기에 처해 있다. 이런 일은 진료 기록에 기재될 만큼 중요한 병, 예를 들어 고혈압이나 당뇨병에 걸리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다음 단계로 당신은 직장을 잃고 의료보험을 상실한다. 혹은 수천 명의 프리랜서 작가들처럼(나처럼) 일자리는 있지만 보험 가입자 자격은 잃을지도 모른다(예전엔 프리랜서 작가들도 전국작가연맹을 통해 보험에 가입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보험사가 연맹과의 계약을 거부했다). 새로운 보험사를 찾아보려 하겠지만 어디서도 당신을 고객으로 받아 주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기존 질병이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다 그 병이 악화되거나 새로운 병을 앓게 되면 당신은 &lsquo;자비 부담&rsquo; 환자로 병원을 찾아야 한다. 보험 환자보다 네 배나 많은 치료비를 내야 하는 당신은 지불 기일을 맞추지 못하게 되고, 요즘 병원들이 보이는 약탈적인 채권 회수 행태를 감안할 때 결국 감옥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회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질병과 범죄의 연관성을 주목해 왔으며 두 가지를 모두 일종의 &lsquo;일탈&rsquo;로 분류했다. 질병과 범죄에 적용되는 단어들에는 분명 유사한 면이 있다. &lsquo;기존 질병(preexisting condition)&rsquo;과 &lsquo;전과(prior conviction)&rsquo;가 그렇고, &lsquo;의무 기록(record)&rsquo;과 &lsquo;사건(case)&rsquo;이 그렇다. 예전에 나는 병원 검사에서 잠재적으로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병을 발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의사는 기존 질병에 새로운 병이 덧붙어 의료 기록이 지저분해지면 곤란할 테니 약을 처방하지 않겠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의사가 베푼 그런 조그만 친절을 좋았던 옛날의 일로 회상할 날이 머지않았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애트나나 프루덴셜의 똑똑한 젊은 MBA 출신들은 병의 첫 징후를 보이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간단한 조치를 통해 엄청난 돈과 귀중한 의료 자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을지 모른다. 진단과 입원, 채권 회수 시도 같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병자를 바로 감옥으로 보내는 것이다. 앞으로는 순찰 중인 경관한테 기침이나 얼굴의 부기를 들키지 않도록 전전긍긍해야 할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인 부모님 아래서 자란 내 어머니는 아이가 아픈 기색을 보이면 경멸과 조롱으로 대응하는 분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사태에 대비가 되어 있다. 육체의 질병을 도덕적 실패로 여기게끔 키워졌기 때문에 발진이 생기거나 목이 따끔거리면 형무소에서 복역할 용의가 내 마음 깊은 곳 어디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질병과 고통에는 주위의 다정한 반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물이 절반 차 있는 컵을 보여 드리겠다. 교도소에서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부실하긴 하지만 어쨌든 공짜다). 아동 성추행범, 도끼 살인자, 그리고 보험도 없는 주제에 아픈 뻔뻔한 악당 들에게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333333"><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의료 서비스의 경제학</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 작은 세계를 뒤흔든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 가족의 친구 하나가(로레인이라고 부르겠다) 병원의 집중치료실에 들어가 있으며 간신히 자력으로 숨을 쉬는 위급한 상태라는 얘기였다. 지난 몇 주 동안 &ldquo;몸 상태가 100퍼센트는 아니야.&rdquo;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태에 놓일 징후는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뒤 그녀에게 유방암 4기 진단이 내려졌다. 이미 폐를 포함한 다른 장기로 암이 퍼진 상태라고 했다. 유방암의 &lsquo;단계&rsquo;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유방암에는 5기가 없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로레인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말만 믿고 컨설팅 사업이 순조로운 줄로만 생각했다. 회계원으로 일했던 로레인은 40대 후반의 나이로는 괜찮은 직장을 찾을 수 없어 개인 사업을 했다. 그녀는 뉴스 중독자에 탐욕스런 독자였으며, 가치 있는 일에 뛰어들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였다. 항상 몇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곤 했는데 어느 하나 소홀함 없이 열심히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랬는데 휴대폰 요금과 집세 부담으로 몹시 힘들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몰랐지만 최근에 아파트에서 나와 자기가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중 한 곳에서 제공하는 무료 숙소로 옮겼다고 했다. 그러니 300달러에 가까운 유방 엑스선 촬영 비용이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의료 문제에 관한 논쟁은 로레인 같은 사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유방암처럼 치료비가 많이 드는 &lsquo;재난&rsquo;에 대비해 각 개인이 보험에 가입해 두어야 하고, 유방 촬영 같은 사소한 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돈을 따로 모아 둔 세금 공제 저축 계좌도 갖고 있어야 한다. 의사를 만나고 치료받는 일상적인 문제에 &lsquo;개인적 책임감&rsquo;을 갖는다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큰 곤란을 겪지 않을뿐더러(보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 말은 그렇다) 국가 전체의 의료 지출도 에볼라 열병 근절 같은 보람 있는 과제에 사용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최소한 클린턴 행정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의료 제도의 문제는 바로 우리 의료 소비자들로, 우리가 의료 서비스를 지나치게 소비하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의 자기 부담률 및 그 밖의 현금 지불 경비를 높여서 비용에 대한 자각을 심어 주면 우리가 혈액 검사, MRI(자기공명영상장치), 전립선 검사와 같은 신나는 일들을 자제할 것이라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로레인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소비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불필요한 의료 서비스를 받으며 흥청댄 것이 아니라 4700만 다른 보험 미가입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녀의 문제였다. 처음 멍울을 알아챘을 때 로레인은 인근 병원을 찾아가 연좌 농성이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lsquo;개인적 책임감&rsquo; 탓에 그녀는 남들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의료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는 그 &lsquo;개인적 책임감&rsquo;이라는 게 얼마나 적용되는가? 나도 보험에 가입해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내가 소비하는 의료 서비스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매년 유방 촬영과 자궁암 검사를 하는 건 원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의사가 눈물로 위협하는 바람에 뼈 스캔을 받은 적은 있지만, 대장 내시경 검사실에는 절대 내 발로 걸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뮌하우젠 증후군<sup>병원 치료를 받으려고 계속 몸이 아픈 척하는 이상 상태</sup>을 앓는다면 모를까, 재미삼아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의료 서비스의 경제학과 예컨대 모조 보석의 경제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모조 보석은 우리 소비자들이 수요를 통제한다. 모조 보석에 돈을 펑펑 쓸 수도 있고 눈길조차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의료에서 우리가 어떤 서비스를 소비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문가들이다. 물론 의료 소비자들 또한 운동을 하고, 담배를 끊고, 스카이다이빙을 하거나 상어가 있는 곳에서 수영을 하는 위험한 일을 피하는 등 &lsquo;개인적 책임감&rsquo;을 가져야 할 부분이 있다. 올바르게 먹는 것도 거기에 속한다(올바르게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호하다. 식습관에 대한 충고는 한 달이 멀다 하고 내용이 바뀌니까). 그러나 피를 뽑히고, 유방 촬영을 하느라 가슴이 짓이겨지고, 자궁 경부 세포를 긁어내는 불쾌한 경험의 빈도를 결정하는 것은 의사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약에 의료 소비가 우리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면, 나는 잘 아껴 두었다가 현명하게 사용하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풍수해를 걱정해 집에 보험을 들어도 비와 바람을 통제할 수는 없듯 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사고를 당하거나 중병에 걸렸을 때 어떤 치료를 얼마만큼 받아야 할지에 대한 결정권은 다른 사람이 쥐고 있다. 우리가 보험이라는 형태로 위험을 분담하는 것은 그 위험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야 되니까 착실히 돈을 모으라고 할 수는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 국민 의료보험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로레인의 경우를 냉정하게 살펴보자. 만약 그녀가 일찍 진단을 받았더라면 집중치료실에서 빈곤층 의료보장 기금을 축내지 않고 유방 절제술과 화학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쯤 밖에서 열심히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br /> <br /> (머리말 전문, 제5장 일부)<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br /> </strong>있는 자, 가진 자, 배부른 자에겐 두려운 저격수. 없는 자, 못 가진 자, 배고픈 자에겐 든든한 지원군. 현장에 밀착한 글쓰기,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이 어우러진 개성 넘치는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거느린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사회 운동가다. 1941년 미국 몬태나 주에서 태어났으며 록펠러 대학에서 세포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시 빈민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다가 전업 작가로 나섰다. 20여 권의 책을 썼으며 『뉴욕 타임스』 『타임』 『하퍼스』 『네이션』 등 미국 주요 언론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술 활동과 사회 참여가 조화를 이루는 보기 드문 작가로,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위한 조합 조직 &lsquo;United Professionals&rsquo;의 창설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사회주의 조직인 DSA(Democrtic Socialist of America)의 명예 의장이다. <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전미영<br /> </strong>언론사와 기업에 근무한 뒤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다크 플랜』 『오일 카드』 『자기신뢰』 『사랑받지 못한 어글리』 『숏버스』 『긍정의 배신』 등을 번역했다.<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13 오후 3:03:00요시다 타로의 ‘몰락 선진국 쿠바가 옳았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B%AA%B0%EB%9D%BD%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_%ED%91%9C%EC%A7%80.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한국의 독자들께 |</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경제소국―문화대국, 쿠바 <br /> 왜 몰락선진국인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송제훈 님의 뛰어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 여러분과 이 책의 내용을 나누게 되어 저는 대단히 명예롭고 또 기쁘기도 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일본어판 제목은 &lsquo;몰락선진국―일본이 쿠바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rsquo;입니다. 사실 &lsquo;몰락&rsquo;이라는 과격한 제목은 제가 그냥 쓴 말이 아니라 원조가 있습니다. &ldquo;경제성장을 이루며 에너지를 펑펑 쓰고 살아도 더 이상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더 검소한 생활을 통해서만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 있다&rdquo;고 주장하는 프랑스의 정치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sup>Serge Latouche</sup>의 &lsquo;하강&rsquo;<sup>Decroissance</sup> 개념을 저 나름대로 강조해본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그 후 &lsquo;탈성장&rsquo;이라는, 약간 톤을 약하게 한 제목으로 번역되어 큰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이 책을 쓴 뒤인 2010년 4월에 &lsquo;몰락&rsquo;<sup>descent</sup>이라는 표현을 직접 인용하며 쿠바를 언급한 논문이 에너지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것도 알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옥스퍼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요르크 프리드리히스<sup>Jorg Friedrichs</sup> 교수는 &ldquo;현재의 공업사회가 너덜너덜 무너지고 자유무역도 붕괴하기 시작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은 부드럽게 몰락해야 한다&rdquo;고 주장합니다. 석유는 유한한 자원이며 머지않아 고갈되겠지만, 석탄이나 원자력 그 어느 것도 석유가 했던 것만큼 현대의 공업화 사회나 근대농업을 유지할 힘은 없다고 프리드리히스 교수는 말합니다. 머지않아 세계는 과감하게 변모해,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둔 전통적 생활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프리드리히스 교수는 정치학 전공자답게 포스트 석유 시대의 시나리오를 그리기 위해, 역사적으로 석유의 단절을 경험한 세 나라를 예로 들어 분석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실패 사례로 든 것은, 자국 내에 석탄밖에 없고 대부분의 석유를 소련권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던 탓에 소련 붕괴로 농업 생산이 크게 하락하면서 곤경에 몰린 북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나라도 북한처럼 석유 사용량의 90% 이상을 수입해야 했는데, 다만 그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미국으로부터 경제봉쇄를 당한 뒤 자포자기식으로 타국의 유전을 확보하려고 군사침공을 실시해 결국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바로 1940년대의 일본 제국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지만 세 번째 나라는, 북한과 쏙 빼닮은 상황에 직면하고 게다가 한때 일본처럼 미국의 경제봉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잘 벗어났습니다. 프리드리히스 교수는 쿠바가 &lsquo;부드러운 몰락&rsquo;에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인 연대와 전통적인 지식의 부활에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웬 전통? 이 하이테크 시대에 옛날로 돌아가자고 말하면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 2부 2장에 등장하는 호세 페르난도 마르티레나 박사가 로마시대의 기술을 참고해 친환경 자재<sup>eco-materials</sup>를 개발한 경위를 읽고 나면, 전통의 예지에서 배우는 중요함이 결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쓰기 위해 취재에 나섰을 때 공교롭게도 박사는 니카라과에 출장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메시지만 소개되었습니다만, 2010년 5월 쿠바 방문 때에는 산타클라라의 자택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또 올해 허리케인 재해지인 피나르델리오 주나 오르긴 주를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현지 사무소에서 친환경 자재 개발을 지도하는 박사의 활약상도 여러 이들한테서 듣게 되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적으로 보면 쿠바에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2011년 5월에는 제6차 공산당대회도 열려 시장원리의 도입 등 여러 개혁이 제창되었습니다. 실제 아바나 구시가의 오비스포 대로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흘러넘치고, 전자제품을 비롯한 고급 수입품을 취급하는 점포가 줄지어 있습니다. 한국에도 소개되었던 졸저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 사진으로 실렸던 갈란도 백화점은 이제 없어졌고, 외국인용 화폐인 태환페소<sup>CUC</sup>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쿠바인과 쿠바페소<sup>CUP</sup>밖에 만질 수 없는 보통 사람들과의 격차도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1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A%B0%81%EC%A3%BC0.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지만 지방도시나 농촌 지역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은 제가 지금까지 방문한 아시아의 다른 어떤 개발도상국보다 행복해 보입니다. 아바나에 사는 서민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쿠바에서는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middot;문화가 매우 소중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언제나 통역으로 신세를 지는 미겔바요나 씨에 의하면, 유명한 이솝우화인 &lsquo;개미와 베짱이&rsquo;가 쿠바에서는 &lsquo;개미와 매미&rsquo;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겨울이 되고 먹을 것이 없어진 매미가 식량을 얻기 위해 개미를 찾아가면 &ldquo;내가 땀 흘리며 일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있었지?&rdquo; 같은 심술궂은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매미는 &ldquo;열심히 노래해서 모두를 즐겁고 신명나게 만들어주고 있었지&rdquo;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일밖에 몰랐던 개미는 깊이 반성하며 &ldquo;그렇구나. 이제부터는 함께 춤추며 살자꾸나&rdquo; 했답니다. 그렇게 개미와 매미는 먹을 것을 서로 나누며 즐겁게 겨울을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우화가 최근 일본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는 &ldquo;여름 내내 개미는 열심히 일하고 식량을 저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과로사로 죽었습니다&rdquo; 같은 짓궂은 버전으로 여럿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확실히 어린이들은 우리 어른들 사회의 축소판 같습니다. 암담한 기분이 듭니다만, 어쩌면 여러분들의 한국도 일본과 비슷하지는 않을까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경제성장이 풍요로 직결되는 것도 아니고, 물질의 풍요와 행복은 엄연히 다릅니다. 물질적으로는 궁핍해서 가난하다는 소리를 듣는 쿠바는, 그러나 사람들이 존엄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나라의 모범을 보이며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하나의 힌트가 되고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의 독자들께서도 물질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lsquo;노하우&rsquo;를 이 책에서 찾아내 주신다면, 지은이인 저로서는 더 이상의 기쁨이 없겠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11년 10월<br /> 요시다 타로<br /> <br /> <br /> <img width="600" height="600"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B%8F%84%EB%B9%84%EB%9D%BC_%EC%88%98%EC%A0%95.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One: 세계 유일의 초저공비행 국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태평양과 대서양, <br /> 서로 닮은 두 섬나라의<br /> 기묘한 운명</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squo;언덕 위의 구름&rsquo;에서 &lsquo;벼랑 위의 포뇨&rsquo;로</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dquo;오르막 언덕 위의 파란 하늘에 흰 구름 한 점 빛나고 있다면, 그 속을 바라보고 언덕을 오르는 것이겠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개국 이래 구미 열강을 따라잡으려고 숨 가쁘게 언덕을 올랐던 메이지 일본을 그린 《언덕 위의 구름》<sup>1)</sup>의 타이틀 유래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이 화제를 입에 올렸을 때 들었던 대답에 깜짝 놀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언덕 위의 구름》? 언제 들어본 것 같아. 아, 그거 《벼랑 위의 포뇨》의 표절이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뭐라고 하는 것인가. 요즘 젊은이들의 교양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이들은 시바 료타로의 대표작은 고사하고 러일전쟁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고도성장 이데올로기에 오염돼 있지는 않아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 반경 3미터 이내에 중요한 것은 전부 다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에 나오는 이 단호한 대사는 《언덕 위의 구름》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상극이다.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퇴색해버린 &lsquo;성장&rsquo;이라는 허상을 깨우쳐주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온난화, 학력 저하, 양극화 심화, 의료 서비스 붕괴, 먹거리 위기 등으로 세상은 혼란의 끝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유럽에서는 신자유주의가 몰매를 맞고, 일본에서도 《게 공선》<sup>2)</sup>과 마르크스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도회지를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는 반농반X<sup>半農半X 3)</sup>와 슬로라이프가 젊은층, 특히 젊은 여성에게 인기가 있는데, 오히려 이들이 경기 회복과 경제성장 정책을 주장하는 경제 전문가보다도 이 시대의 본질을 잘 꿰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왜냐하면 이 이상 딱히 더 필요한 것도 없는 세상이고, 이런저런 모델을 바꾸는 데 드는 낭비와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 머니게임도 한계에 달해, 이제는 최대의 낭비라 할 전쟁 말고는 더 수요를 만들어낼 방법이 없는 데까지 몰린 상황이 지금의 꽉 막힌 시대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탈공업 사회, 정보화 사회, 포스트모던 사회 그 무엇으로 부르건, 산업혁명 이래 이 모순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테두리에서 빨리 벗어나 정말 필요한 것만을 사랑으로 서로 나누도록 하자는, 포스트버블 세대에 사는 젊은이들의 직관은 정말로 옳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직감에 따른 저작 가운데 내가 가지고 있는 것만도 꽤 된다. 아사바 미치아키의 《쇼와30년대주의》(2008)의 부제가 &lsquo;더 성장하지 않는 일본&rsquo;이라면, 하시모토 오사무는 《일본의 나아갈 길》(2007)에서 &ldquo;산업혁명 이래의 삶의 방식은 틀렸다. 그 상징인 고층빌딩을 파괴하라. 에도 시대로 돌아가라&rdquo;고 주장한다. 오바타 세키와 가미야 히데키가 함께 쓴 《세계 경제는 이렇게 변한다》(2009)에서 논하는 것도 르네상스로의 회귀이다. &ldquo;사회의 진보는 계량화된 수치로는 표현할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껴 평가해야 하며, 거기서 필요한 것은 풍부한 감성이다. 앞으로는 음악, 미술 등 예술적인 것의 가치가 올라가지 않을까&rdquo; 하고 문화론을 전개한다. 정평이 나 있는 다케다 데츠야 주연의 영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사는 법》(2009)을 떠올린다. 이 제목만큼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도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1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A%B0%81%EC%A3%BC1.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초저공비행 국가 ― 몰락선진국 쿠바에게 배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려가는 것은 좋다. 하지만 문제는 내려가는 방법이다. 로하스<sup>LOHAS 4)</sup>가 동경하는 농촌 생활은 정말로 멋진 일일까. 고도성장 이전의 일본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유기농가에서 살았다. 수도 대신 우물이, 에너지라 하면 숯과 장작이 있었다. 소와 말과 사람의 힘에 의존한 아침부터 밤까지의 중노동, 가부장제와 여성의 낮은 지위,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 마을사회.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는 극소수의 지주뿐이었다. 그러다 2차대전 뒤로는 모두들 마을을 떠나 가전제품에 둘러싸인 근대적인 샐러리맨 생활, 핵가족과 마이 홈을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와서 《3번가의 석양》<sup>5)</sup>의 세계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더구나 썩었다 하더라도 일본은 현대화된 선진국이다. 이미 &lsquo;언덕 위의 구름&rsquo; 속에 들어가 주위도 보이지 않는다. 한 발짝만 헛디뎌도 떨어져 큰 상처를 입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언제 파편을 흩뿌리며 추락할지 모르는 제트기에 근대 문명을 비유하는 사람이 있다. 제트기는 속도를 내 양력을 만들어낸다. 날개도 작다. 때문에 속도를 낮추면 금세 추락한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같은 하강 국면의 시대에서는 격돌의 충격을 잘 비켜가는 &lsquo;몰락선진국&rsquo;이야말로 진정한 선진국이면서 일본의 이후 모델이 되는 것이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갑자기 엔진을 잃어버린 비행기를 상상해보십시오. 그것이야말로 추락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미국의 한 NGO가 만든 《공동체의 힘 : 쿠바는 어떻게 피크오일을 극복했나》<sup>The Power of Community: How Cuba Survived Peak Oil</sup>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경제학자 호르헤 마리오가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련 붕괴 이전의 쿠바는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복지국가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원조를 잃은 데다 미국의 경제봉쇄 강화도 겹쳐 세계 공황에 비길 만한 경제위기에 직면했다.<sup>6)</sup>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이 나라 사람들은 아직 살아 있다. 물론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빈곤국이다. 하지만 제트기와 비교해서 글라이더와 복엽<sup>複葉</sup>비행기는 속도가 덜 나는 대신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 엔진이 멈추고 날개에 구멍이 나도 조종만 잘하면 지평선 위 한계점을 계속 떨어지지 않고 날아간다. 말하자면 초저공비행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1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A%B0%81%EC%A3%BC2.JPG"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small"><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워킹푸어 사회에 등장한 게릴라 전투</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쿠바는 유기농업으로 유명하다. 쿠바의 그러한 도전을 서구 세계에 소개한 이는 미국의 NGO &lsquo;푸드퍼스트&rsquo;<sup>Food First</sup>에서 활동한 피터 로젯 박사인데, 2006년 5월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개최된 유기농업국제회의에서 만난 박사는 이미 미국에서 멕시코로 거주를 옮기고 치아파스에서 농지해방운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왜 멕시코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1995년 1월 1일 북미자유무역협정<sup>NAFTA</sup>이 발효하던 그날, &ldquo;가난한 농민들에게 이것은 사형 선고와 같다&rdquo;며 복면의 게릴라 집단인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sup>EZLN</sup>이 멕시코에서 가장 가난한 치아파스 주에서 무장 봉기했다. 그들은 종래의 좌익 게릴라와는 분명 달랐다. 권력 탈취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생활 향상, 민주화 추진, 신자유주의와 글로벌화에 대해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독특한 게릴라가 출현한 배경을 들여다보면 꽤 흥미롭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멕시코는 유가 하락과 금리 상승으로 570억 달러의 외채를 변제할 수 없게 되는 등 이미 1982년부터 글로벌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국제통화기금<sup>IMF</sup>과 세계은행은 멕시코에 아래와 같은 구조조정을 요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① 민영화 : 국영기업인 전기회사, 국립은행, 국영철도를 민영화하고 일부를 매각.<br /> ② 규제 완화 : 모든 보호관세의 규제 완화와 국영산업의 100% 해외 소유권 인가.<br /> ③ 긴축재정 : 보조금과 서비스의 축소. 특히 농업 보조금 삭감과 농업 지원책의 중단.<br /> ④ 통화 절하 : 국산품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도록(싸게 살 수 있도록) 페소 대 달러 환율 조정.</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정책이 멕시코 국민들에게 큰 희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세계은행은 당시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에게 고통스런 구조개혁을 받아들이도록 국민을 설득할 것을 강요했다. 그 결과는 국내 농업의 괴멸과 양극화 사회의 재현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만 개 이상의 사업체가 도산하고 평균소득은 12%나 떨어져 실질임금이 1980년대의 반토막이 되었다. 1억 명이 조금 넘는 국민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000만 명이 하루 50페소(5달러) 미만밖에 벌지 못하고, 워킹푸어(하루 20페소 미만의 소득자)는 400만 명까지 늘었다. 국내 산업도 붕괴해갔다. 국경 관세가 없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보조금이 붙은 수입 농산물의 대공세로 자국산의 반값에 옥수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국산 가격은 45%씩 떨어져 생산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게 됐다. 멕시코는 옥수수의 원산지이지만 이제 수입량은 전보다 12배나 늘었고, 옥수수 시장의 25% 이상을 외국산이 차지했다. 북미의 옥수수를 수출해 거액의 이익을 올리는 것은 카길<sup>Cargill</sup> 같은 다국적 곡물회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부터 25년이나 전의 이야기다. 미국은 멕시코뿐 아니라 전 세계에 이러한 정책적 개입을 되풀이해왔다. 겉으로 드러나는 외교와 CIA의 배후 공작. 《뉴욕타임스》의 기자 팀 와이너가 쓴 《CIA 비록―그 탄생부터 오늘까지》(2008)는 세계 여러 나라들이 자신의 국가주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CIA가 그러한 노력을 어떻게 깨뜨리려 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쿠바 같은 가난한 나라의 정보기관에조차 농락당하며 고전하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유독 기묘한 나라가 있다. 인용해보자.</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우리는 총리 측근까지도 구슬려서 농림수산성에 상당히 유력한 연줄을 만들어, 통상교섭 때 일본이 어떤 얘기를 할지도 사전에 알 수 있었다. 소고기와 감귤류의 수출 교섭에서도 우리는 일본의 차선책까지 알고 있었다. 일본 대표단이 언제 자리를 뜰지도 물론 알고 있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참 기특하게도 CIA가 애써 첩보 활동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무역 교섭의 패를 다 보여준 것이다. 이러고도 완전히 대등한 동맹국이란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A%B0%81%EC%A3%BC3.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small"><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동서냉전 종언 후의 지정학</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최근 10년은 아무래도 대등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1994년 《미&middot;일 규제개혁 및 경쟁정책 주도권에 근거한 요망서》에 내정 간섭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논픽션 작가 세키오카 히데유키의 《거부할 수 없는 일본 : 미국의 일본 개조가 진행되고 있다》(2004) 등에 의하면 미국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법과 제도의 개정은 주요한 것만 나열해도 이만큼이나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점금지법 개정, 지주회사 해금(1997), NTT의 분리&middot;분할(1997), 건축기준법 개정(1998), 노동자 파견법의 개정과 인재 파견의 자유화(1999), 대규모 소매점포법의 폐지(2000), 건강보험 본인 부담률 30%(2002), 우정사업청 폐지와 일본우정공사 설립(2003), 법과대학원 설치(2004), 일본도로공단 해체와 분할 민영화(2005).</p> <p style="text-align: justify">유토리 교육<sup>ゆとり敎育 7)</sup>, 의료 위기, 주택의 안전에 관한 자치 문제 등의 배경에도 미국의 간섭이 있다. 별안간 생산녹지법의 개정과 택지 평균 과세가 이루어져 도시농업이 파괴된 것도 미국 농산물의 내수 확대 요구에 따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개혁은 앞서 말한 멕시코의 경우와 꼭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개입이 1990년대에야 시작됐는지, 1980년대의 일본은 어떻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위상을 누릴 수 있었는지 하는 의문이다. 후지이 겐키는 《&lsquo;국가 파산&rsquo; 이후의 세계》(2004)에서 그 대답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소련이 붕괴했을 때 그 역사적&middot;경제적 의미를 이해할 만한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hellip;&hellip;) 지금까지도 미국은 일본을 점령하고 있다. 다만 소련이라는 위협이 있을 때 미국의 점령 정책은 느슨했다. 때문에 일본인은 그것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경제성장에 전념할 수 있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련의 붕괴는 쿠바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세키 히로노는 《역사를 배우는 방법에 대해》(1997)에서 시바 료타로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구미 열강이 극동으로 진출하는 가운데 국민을 총동원하여 애써 근대국가를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는 설은 1960년대에 중&middot;소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제창한 로스토<sup>Walt W. Rostow</sup>의 도약이론이나 라이샤워<sup>Edwin Oldfather Reischauer</sup>의 근대화론과 같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도약take off이론은 경제활동의 대부분이 농업인 전통적 사회가 차츰차츰 발전하다가 &lsquo;도약&rsquo;한다는 것으로, 중화학공업이 탄생하고 그 후 서비스업이 중심인 고도 대량소비가 도래하는 사회발전 모델이지만, 이것도 마르크스의 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봉건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라고 하는 발전론의 대항 축으로서 나온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련, 중국, 북한, 베트남, 라오스를 비롯한 거대 사회주의 대륙에 맞서 가장 중요한 곳에 있는 자본주의의 방위선.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 근대화의 모델이자 쇼윈도로서 경제발전을 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예비지식을 머리에 입력한 뒤에 다음의 그림을 보면, 쿠바와 일본이 의외로 공통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는 것이 보인다. 다소 억지로 갖다 붙인 듯한 느낌도 있지만 표1과 같은 대비표도 만들어진다.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것처럼 쿠바도 미사일 위기<sup>8)</sup>라고 하는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렸다. 그래서 쿠바에서는 &lsquo;히로시마&rsquo;를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서방에 소련 세력권이었을 동독의 베를린이라고 하는 구멍이 있었던 것처럼, 동측 세력권이어야 할 쿠바에도 관타나모 기지라고 하는 구멍이 있다. 냉전 시대에는 관타나모 기지의 안쪽에는 미국제의 지뢰가, 바깥쪽에는 소련제의 지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동서냉전의 벽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게 관타나모는 대서양의 군사적 요충지다. 태평양의 요충지가 세상이 다 아는 오키나와인 것처럼 말이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7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D%91%9C1_29p_60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소련은 &lsquo;우리는 산악 게릴라전의 프로이기 때문에 충고하는데, 그만둬!&rsquo;라고 하는 쿠바의 경고를 무시한 채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출병한 뒤부터 막대한 군사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10년 뒤 붕괴하고 말았다. 페레스트로이카를 주장하는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개혁도 추진했다. 설마 저 강대한 나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출병 정도로 이와 같이 빨리 붕괴하리라고는 카스트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소련과 사회주의권 몰락 뒤에도 쿠바는 끄떡없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있고, 에스파냐어가 공통어인 장점을 살려 라틴아메리카 경제권에 편입하고 있는 중이다. 1989년부터 본격화한 금리 자유화, 무역 자유화, 국영기업의 민영화, 규제 완화 및 철폐라고 하는 &lsquo;워싱턴 컨센서스&rsquo;에 대항해서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제창한 연대경제 ALBA<sup>9)</sup>가맹국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 온두라스, 도미니카공화국,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에콰도르, 앤티가바부다로 10여 개국까지 늘었다. 이와 관련, 세키오카 히데유키가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한 오카와 슈메이<sup>10)</sup>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연관돼 떠오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몰락을 생각한 후에는 동서 냉전이라고 하는 시점 외에 피크오일, 즉 석유의 고갈이라고 하는 요인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서구 세계든 동구권이든 근대 문명이 석유자원에 기초해서 발전해온 이상, 석유가 없어지면 마르크스와 로스토의 예상과 달리 공업사회의 뒤에는 농업사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lsquo;몰락사관&rsquo;에 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석유를 낭비하지 않는 풍요로운 몰락! 그러한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2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6_%EB%AA%B0%EB%9D%BD%20%EC%84%A0%EC%A7%84%EA%B5%AD%20%EC%BF%A0%EB%B0%94%EA%B0%80%20%EC%98%B3%EC%95%98%EB%8B%A4/%EA%B0%81%EC%A3%BC4.JPG" /><br /> <br /> (서문, 제1장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요시다 타로<br /> </strong>196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스쿠바대학 자연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지구과학연구과를 중퇴했다. 도쿄 산업노동국 농림수산부를 거쳐 지금은 나가노 현 농업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생태&middot;쿠바 전문 저술가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2004년 출간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200만 도시가 유기채소로 지급 가능한 이유-도시농업 대국 쿠바 리포트》《1,000만 명이 반글로벌리즘으로 자급&middot;자립이 가능한 이유-슬로라이프 대국 쿠바 리포트》《의료천국, 쿠바를 가다》(2011, 파피에)《세계가 쿠바의 고학력에 주목하는 이유》《유기농업이 나라를 바꾸었다》《농업이 문명을 움직인다》(2011, 들녘) 등이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송제훈<br /> </strong>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생태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일본과 쿠바를 방문하며 여러 자료와 사례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바탕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센스 앤 센서빌러티》《오프라 윈프리의 특별한 지혜》 등을 우리 말로 옮겼으며, EBS와 교학사에서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ff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09 오후 3:27:00‘스틸라이프’ 14회<p>&nbsp;<img alt="" width="600" height="480"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4%ED%9A%8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2014.JPG" /></p> <p><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첼로 </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text-align: justify">10</span></span></strong></span></p> <p><br /> 그녀는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채 쌓아두었던 사람처럼 말들을 쏟아냈어요. &ldquo;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의사 삼촌이 공항에서 기다리는 걸 교묘하게 따돌렸어. 그리고는 첼로를 들어준 그 남자가 사는 같은 건물 같은 층에 집을 빌렸어. 이민자들이 사는,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이 있는 아주 초라한 곳이었어. 그곳에는 각 나라 이민자들이 모두 모여 살고 있었어. 베트남 쿠바 멕시코 이란 이라크 필리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냐 짐바부에 수단 콩고 등등. 말로만 듣던 그 많은 나라 사람들과 모여 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어. 하루 종일 싸우는 소리, 애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어. 나는 귀마개를 하고 첼로를 켜곤 했어. 그리고는 하루 종일 그 사람을 기다렸어. 건축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우연히도 도넛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그는 도넛이 가득 든 상자를 들고 내 방문을 두드렸어. 덕분에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도넛만 먹으며 몇 달을 살았어. 부모님이 사라진 나를 울며불며 찾으리라는 게 마음에 늘 걸렸지만 난 병원 냄새를 정말 맡기 싫었어. 또 병원에 가서 신경안정제를 맞고 눈이 게슴츠레 풀려 있을 걸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지. 난 첼로와 도넛만 있으면 살 수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건축가 친구는 도넛만 먹는다는 게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이냐며, 내가 극히 정상이며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곤 했지. 듣고 보니 살이 찌는 것 외에는 나는 극히 정상이었어. 알고 보니 그 친구도 도넛만 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어. 문제는 그가 매일매일 말라간다는 거였어. 한국에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랬어. 얼굴은 미국인이지만 사실 그는 부모가 누군지 모르는 입양아였어. 어머니는 화가이고 아버지는 유태인 목사였다는데, 그들이 이혼을 하는 바람에 그는 또 혼자가 되었지. 그는 어머니를 참 좋아했어.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며 틈만 나면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지. 그 사람도 너처럼 내가 켜는 첼로 소리를 사랑했어. 사실 나는 어릴 적에 음악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 어머니가 못 이룬 꿈을 내게 심은 거였지.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열 살 때부터 첼로를 연주했는데, 난 그리 성공도 못 한 채 비싼 첼로만 들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지. 어쨌든 그렇게 일 년을 살고 보니 가져온 돈이 다 떨어져 버렸어. 그때 첼로를 팔았어. 그 피 같은 돈도 다 떨어져 버리고, 그제야 할 수 없이 서울의 집에다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를 않는 거야. 할 수 없이 의사 삼촌에게 전화를 했어. 참 철없는 내 인생을 어떻게 속죄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rdquo; 그녀의 눈에 눈물이 어렸어요. 어떻게 나를 그리 쉽게 잊을 수 있었느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어요.</p> <p>&ldquo;사업이 기울어가던 참에 아버지는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 빚보증을 선거야. 그 아저씨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고. 운이 나빴지. 하루아침에 쓰러진 아버지는 병원에 누워계시고, 온 집 안에 빨간 딱지가 붙은 장면을 목격한 고생 하나 안 하고 자라 늙은 울 엄마는 아무런 힘이 없었어. 삼촌 덕분에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와 내가 모시고 있어.&rdquo;</p> <p>문득 그녀가 철이 콱 든 어른처럼 보였어요. 그녀의 초라함은 차라리 성숙함이었어요.</p> <p>제가 그럼 그 건축가 친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어요. &ldquo;도넛으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던 그 사람은 점점 말라서 뼈만 남게 되었어. 내가 부모님을 모셔와 그 초라한 이민자아파트에서 지내던 어느 추운 겨울날, 마침 크리스마스가 그 사람의 생일이었어. 조금씩 회복해가는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우리는 디즈니랜드로 여행을 떠났어. 정말 처음 가는 밀월여행이었지. 그 옛날 너랑 같이 가고 싶던 디즈니랜드에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갔어. 우리는 수많은 놀이기구를 타며 정말 즐거웠어. 그런데 놀이 기구 중에 우주선을 타고 뺑뺑 도는 게 있었어. 우리나라의 놀이공원에 있는 청룡열차 같은 건데 훨씬 더 무서웠어. 타자마자 안경이 막 날아가는 거야. 우주 밖으로 아주 멀리 날아가 버린 것 같던 내 안경은 내릴 때 보니 바로 코앞에 있었어. 무서운 것도 그냥 쇼였던 거지. 우주선에서 내린 뒤 그 사람은 잠시 너무 어지럽다며 화장실에 갔어. 그게 그 사람을 마지막 본 날이야.&rdquo;<br /> &nbsp;<br /> <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1-12-09 오전 11:01:00박성옥·후두둑의 ‘도서관에 놀러 온 짱뚱어’<p><img alt="" width="600" height="75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45_%ED%91%9C%EC%A7%80(3).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578" height="7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4p.JPG" /><br /> <br /> <img alt="" width="578" height="72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5p.JPG"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6p.JPG"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7p.JPG" /><br /> <br /> <img alt="" width="106" height="1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0p_s.JPG" /><br /> <br /> <img alt="" width="578"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1p(1).JPG" /><br /> <br />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2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3p.JPG"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4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5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6p.JPG" /><br />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7p.JPG" /><br />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8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19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20p.JPG" /><br /> <br /> <br /> <img alt="" width="578"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21p.JPG" /><br /> <br />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22p.JPG" /><br /> <img alt="" width="580" height="72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23p.JPG" /></p> <p>(작가의 말 &middot; 1장 전문)<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strong><strong><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18"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45_%EB%8F%84%EC%84%9C%EA%B4%80%EC%97%90%20%EB%86%80%EB%9F%AC%20%EC%98%A8%20%EC%A7%B1%EB%9A%B1%EC%96%B4/%EC%9E%91%EA%B0%80%ED%94%84%EB%A1%9C%ED%95%84.JPG" />글&middot;박성옥 <br /> </strong>상처 많은 이 시대 아이들을 따뜻하게 덮어 주고 싶은 동화 작가입니다. 후두둑과 1000마리 짱뚱어 이야기를 동화로 만들기 위해 집과 양평을 오가며 몇 달에 걸쳐 취재했습니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생명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1001사람의 착한 마음을 책으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 책이 보람 있고 애틋합니다. 그밖에 지은 책으로 여러 작가와 함께 쓴 『엄마 신발 신고 뛰기』와 단편집 『내 동생 삐옥이』이 있습니다.</p> <p><strong>후두둑<br /> </strong>경기도 양평 오래된 흙집에서 흙을 빚으며 사는 도예가이자 명상가입니다. 때로는 비처럼, 구름처럼 가볍게 훌쩍 명상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인도, 네팔, 몽골에서 샤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후두둑은 이 책의 주인공이자 1000마리 짱뚱어를 빚은 장본인입니다. 상투 튼 머리, 하얀 수염도 재미있지만 아이들과 흙 놀이할 때는 아이들보다 더 아이들 같은 개구쟁이입니다. &lsquo;후두둑&rsquo;이라는 이름은 떨어지는 빗소리를 따라 지었습니다. 2008년부터 3년간 1000명의 아이들이 짱뚱어들과 놀며 색을 입혀 주었고 후두둑은 그 짱뚱어를 데리고 순천기적의 도서관, 제천기적의 도서관을 비롯해 전국 각지 어린이 도서관, 문화 관련 단체, 전시관 등에서 &lt;1000마리 짱뚱어&gt; 전시회를 했습니다. 후두둑네 집에 놀러 가고 싶은 어린이, 후두둑 사는 모습이 궁금한 친구들을 위해 홈페이지 <a href="http://hrgpiri.co.kr">http://hrgpiri.co.kr</a>가 있습니다.<br /> <br /> <strong>그림&middot;정은영<br /> </strong>이 책에 그림을 그리며, 후두둑이랑 어린이들이랑 흙 피리를 굽고 논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자연 속에서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과 강아지 &lsquo;꼬맹이&rsquo;, 고양이 &lsquo;꼬양이&rsquo;를 보며 좋은 에너지를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을 닮은 따뜻하고 기운찬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br /> 그린 책으로는 『콩닥콩닥 사랑인가요』, 『괜찮아 괜찮아 두려워도 괜찮아』, 『채널고정! 시끌벅적 PD 삼총사가 떴다!』 등이 있습니다.</p>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9933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07 오후 2:52:00송호근의 ‘인민의 탄생’<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889"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D%B8%EB%AF%BC%EC%9D%98%20%ED%83%84%EC%83%9D/%EC%9D%B8%EB%AF%BC%EC%9D%98%ED%83%84%EC%83%9D_%ED%91%9C%EC%A7%80_%EC%9C%A0%ED%85%8C.JPG"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론: 인민, 담론장, 그리고 근대</span></span></strong></p>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회학자의 역사 기행</span></span></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렇게 필자는 여행을 떠났다.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에게 근대는 항상 궁금한 신천지다. 한국의 현대 사회를 결정짓는 무슨 일인가가 그때 일어났고, 나의 조부의 조부가 근세로부터 걸어 나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변화에 휩쓸렸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엿보려고 하는 호기심은 개화기 근대에 관한 수많은 연구들에 의해 그만 또 다른 낭패감으로 변하고 만다. 사료와 사실로 무장한 선수들이 각 영역별, 주제별로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각양각색의 물건을 파는 노점상들이 가득 찬 장시와 같다고 할까. 장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고 먹고 마시고 물건을 흥정하는 것은 즐거운데, 파시 후에 찾아오는 막막함을 감당하기가 어렵다. 온갖 물산이 집하되는 저 장시의 특징을 뭐라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고, 예를 들어 왜 어물전, 건어전은 없는 것인지, 다른 장시에 비해 가격이 싼지 비싼지를 누가 말해 주지도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학자들에게는 조금 불쾌한 말이겠지만, 한말 개화기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선교사들의 여행기, 여러 목적으로 조선에 온 외국인들의 개략적 소개서들이다. &lsquo;은둔의 나라&rsquo;, &lsquo;조용한 아침의 나라&rsquo;, &lsquo;금단의 나라&rsquo;로 묘사되던 조선은 이들에게는 높은 문명을 간직한 채 늙어 가는, 앞으로 닥칠 어두운 운명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단단한 전통의 껍질 속에 안주해 있는 미몽의 나라였다. 한양에서 부산까지 여행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는 덤불이 무성한 산길을 헤치고 논과 밭을 지나 남하했다. 가는 길에 호랑이 은신처를 발견했고 큰 칼을 쓰고 호송되는 죄인의 행렬을 목격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W. Ason Grebst)은 1898년 독립 협회 군중대회가 열렸던 당시 남대문 성곽에 걸린 아이들의 시체를 목격해야 했다. 천연두로 죽은 시체였는데, 한양 도성인들은 그곳에 시체를 걸어 놓으면 마마 귀신이 길을 잃고 다른 곳으로 가 버린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비숍은 남한강 유역을 탐사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엽전으로 바꿀 수도 없었다. 배가 엽전 무게로 가라앉을 위험이 있었다. 이런 풍경들은 사회학자로 하여금 많은 질문들을 유발한다. 도대체 한말 조선에는 육운(陸運) 체계가 어떠했는가? 곡물과 주요 상품 유통 수단은 보부상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그렇다면 조선 후기 도시 형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당시 정치, 행정, 경제의 중심인 한양에는 개화된 사람과 주술 신앙에 젖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는 뜻인데, 유교,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가 뒤섞인 사회에서 일반 서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전염병과 재앙이 닥칠 때 주로 주술 신앙에 매달렸던 조선인은 문명개화의 물결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민중 사학의 성전(聖戰)인 동학 농민 전쟁에서 서울로 진격했던 동학군이 가슴에 붙였던 부적 &lsquo;궁궁을을(弓弓乙乙)&rsquo;은 &lsquo;근대적 민중&rsquo;의 상징인가 아닌가? 비숍의 지적처럼, 근대 경제의 상징인 화폐가 대량 유통되었고, 지방 장시에서 은과 바꿀 수 있었다면 한말 조선 경제는 근대적이었는가 아닌가? 질문이 꼬리를 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근대 국가의 외양을 착실히 갖춰 갔던 대한 제국에 대한 평가도 고종의 개혁 정치의 성격을 둘러싸고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근대성의 기원에 합당하다는 입장과 아니라는 입장은 열띤 논쟁을 거치고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설로 남아 있다. 필자가 이 논쟁에 뛰어들 능력은 없지만, 의문은 제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숍은 남한강변 어느 고을에서 거의 쓰러져 가는 남루한 관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여기 관리들은 이 낯선 이방인에게 통행세를 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통행 허락 여부가 지방관의 자의적 권한에 달려 있었고, 그 관료적 검열 권한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싶어 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 정치는 이런 지방 관아에도 그 여파가 미쳤을까?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피나는 노력이 전국의 행정 체계에 스며들었을까? 대한 제국에 관한 연구들은 대체로 중앙 정치와 한양 중심의 변화에 시선을 집중시켜 근대성의 발화를 입증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로서는 지방의 상황, 지방민의 처지와 인식이 그 개혁에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가 더 궁금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던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 Underwood)는 1888년 북부 지방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평안도 어느 마을에서 도적 떼를 만나 혼쭐이 났다. 마을 한복판에서 그들 일행을 둘러싸고 위협을 가하는 도적들이 무서워 주민들도 공포에 떨었다. 언더우드는 소지한 권총을 발사해 군도를 잠시 물리쳤으며, 군도 우두머리와 모종의 협상을 한 끝에 관아가 있는 인근 마을로 밤새 피신할 수 있었다. 제물포에서는 청군과 일군이 세력을 과시했던 때였으며, 개항장을 통해 양물이 쏟아져 들어왔던 때이고, 갑오개혁이 진행되기 직전의 시기, 말하자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에 문명개화가 화두였던 시절이었다. 언더우드 부부의 신혼여행은 북부 지역에 교회 거점을 구축하고 독실한 신자들을 찾아 책임자로 임명하려는 선교 활동이 목적이었다. 언더우드 부부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원과 지역 정보를 미리 접했을 것이지만, 그들이 방문한 마을에는 예외 없이 독실한 기독교 교인들이 넘쳐 났다. 평안도와 황해도 산간벽지에서 언더우드 부부 일행은 &lsquo;하늘신&rsquo;이 아니 &lsquo;새로운 신&rsquo;을 믿고자 하는 열렬한 신도들과 마주쳤다. 상층 계급은 물론 농민, 노동자, 상인, 부랑자에 이르기까지 상하 신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로 전향하는 것을 감격스럽게 바라봤던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0여 년 전에는 6대 천주교 교구장이었던 리델 주교가 서울의 감옥에 갇힌 채 잔인한 고문으로 죽어 가는 천주교도에게 성은의 축복을 내렸던 그런 조선이었다. 리델 주교는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하층민들이 서양의 낯선 종교에 귀의하며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하는 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공자의 나라에서 그것은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때 향촌에는 농민들에게 유토피아 의식을 심어 주었던 동학이 전파되었으며, 급기야 그것은 유교를 대체한 서민 종교로 농민층에 급속히 파고들었다. 개혁 바람이 몰아치는 중앙 정치와 쇠락 일로에 있던 지방 관아, 문명개화와 접속한 도시와 중세 질서에 여전히 파묻힌 향촌, 동학도와 천주교도, 성리학적 우주관과 수많은 잡신, 외국인들이 진출한 개항장과 여전히 호환(虎患)과 괴질에 시달리는 벽촌 마을, 이런 &lsquo;비동시적인 것들의 동시성&rsquo;이 개화기의 맨얼굴일 터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개화기 연구들에서 이런 맨얼굴을, 개화기의 총체적 그림을 보여 주는 연구는 드물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해 둬야겠다. 역사학 내부에서도 세분화된 전공 영역과 특정 주제에 매달리는 소재주의가 이런 경향을 낳았을 터이고, 오직 사료로 말한다는 역사학계의 준엄한 내규가 조각 그림이라도 정밀하게 보이겠다는 소박한 태도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소재별로 분절된 논문들, 주제별로 구획된 연구들, 그리고 영역 간 담론과 소통의 결핍이다. 경제사는 사회사를, 사회사는 정치사를, 정치사는 문화사를 외면한 채, 오직 한 단면의 진화 과정을 추적하는 것, 때로는 그 소재의 분석에서 얻은 작은 추론을 연장해 개화기 전체를 채색하는 모습이 개화기 연구의 지배적 경향이다. 통사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개화기 변동을 설명하는 거시 명제와 변인들의 정립, 각 분야의 연구를 가로지르는 인과 분석이 아쉽다는 말인데, 그런 유형의 연구는 잘 찾아볼 수 없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동학, 위정척사, 개화 담론이 엇갈리는 가운데, 농민은 수취 체제의 문란과 수령 이서 집단의 가렴주구로 황폐화된다. 유랑민과 화적이 들끓고, 하층민과 노비가 도시로 이주해 고공(雇工)이 된다. 신분 질서는 거의 붕괴된 것으로 묘사되고, 일&middot;청&middot;러의 각축전, 파벌 간 권력 투쟁이 조선의 쇠락을 재촉한다. 이런 파국적 상황을 배경에 깔고 나서 연구자들은 역사 발전의 동력을 건져 내야 한다는 비장한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동학 연구자들은 개화기를 동학난과 농민 전쟁으로 일관하고, 개화당 연구는 그 시대를 문명개화를 논하는 지식인 담론과 사회 운동으로 가득 채운다. 민란과 동학에서 민중 운동이, 개화 담론에서 민족주의가, 독립 협회로부터 자유주의가, 대한 제국에서 근대화 개혁이 발화되어 20세기 근대의 문을 각각 열어젖히는 것처럼 보인다. 체계적 역사 연구에는 계통(系統)과 회통(會統)이 중요하다는 신채호의 가르침을 씨줄과 날줄 삼아 명제를 이끌어 내는 연구자들은 별로 없다. 미시적 연구와 목적론적 연구가 개화기 근대에 관한 한국 사학의 연구 경향을 특징짓는 두 개의 조류다. 그것도 이론과 방법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료의 풍부함과 해석의 깊이, 연구자의 시선과 입장이 문제시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연구 주제와 구성: 근대의 기원과 인민</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제 이 책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세 가지다. (1) 왜 &lsquo;근대의 기원&rsquo;을 인민과 결부시키는가?, (2) 인민을 결박시킨 조선의 통치 체계는 어떤 것이었나?, (3) 인민은 어떤 통로를 통해 그것에서 풀려났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은 &lsquo;인민과 근대&rsquo;, &lsquo;조선의 통치 구조&rsquo;, &lsquo;국문 담론과 공론장&rsquo;으로 각각 개념화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민과 근대</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은 &lsquo;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rsquo;다. 한반도에서 발아된 &lsquo;근대&rsquo;는 &lsquo;근대의 기원&rsquo;을 갖고 있다. 그 근대는 일제 통치하에서 왜곡, 변형되고 해방 공간과 한국 전쟁을 거쳐 1960년대까지 긴 꼬리를 남긴 듯이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1960년대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에서 한말 개화기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 근대는 시간대를 거슬러 조선사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즉, 근대는 조선사의 심층 구조에서 &lsquo;배태된&rsquo; 새로운 실체로서 한말 개화기에 발아했다가 일제 시대를 거쳐 1960년대까지 우리의 생활 양식을 지배했던 역사 변동의 특정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전기, 중세, 근대를 하나의 연장선에서 파악하려는 이 연구의 &lsquo;연속론적 입장&rsquo;은 근대를 중세, 또는 조선 초기와 단절적으로 규정하는 역사학계의 &lsquo;단절론적 관점&rsquo;과 구분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필자는 앞에서 역사학계의 두 가지 경향, 미시적 연구와 목적론적 연구의 한계를 언급했다. 미시적 연구 또는 소재주의는 특정 요인의 발아와 성장에 집착하고, 목적론적 연구는 질적으로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체를 &lsquo;근대 만들기&rsquo;의 관점에서 어떤 하나의 색깔로 채색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모두 부분적 설득력을 인정할 수 있다. 이 연구는 그 두 가지 연구 경향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떨어져 조선사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자 했다. 총체적 조망, 모든 역사가들이 그것을 주문하지만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료 발굴과 해석만으로도 벅찬 역사 연구에 총체적 조망을 주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일이다. 그러나 못할 것도 없다. 조선 사회를 유지했던 기본 골격은 무엇인가? 그 프레임이 주저앉거나 붕괴하면 새로운 시간대가 도래한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조선 사회의 기본 골격(또는 지배 구조, governance structure)이 구축되는 정도로 보면, 점진적 상승 과정(전기), 정점에서의 강화 과정(중기), 하강 과정(후기)으로 그려 볼 수 있겠다. 이 연구가 규명하고자 하는 근대는 하강 과정과 역비례해서 그 경향성이 점차 짙어지는 어떤 속성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기본 골격은 봉건 통치, 그것도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완성을 위한 설계도이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 일본처럼 명치유신 같은 근대 혁명이 발생했더라면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외양이 근대 국가로 전환할 수 있었을 터인데, 조선의 통치 구조는 일본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확고해서 지배 계급을 위시하여 누구도 봉건 국가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국가와 지배 계급이 한 몸이었기에 국가의 붕괴와 함께 지배 계급도 동시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나라가 조선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본 골격, 또는 지배 구조의 하강 과정은 인민 대중에게 비로소 역사와 접속하는 &lsquo;기회의 창&rsquo;을 열어 주었다. 19세기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열렸던 기회의 창을 통하여 인민들은 &lsquo;역사의 객체&rsquo;로부터 &lsquo;역사의 주체&rsquo;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주체라고 해서 민중사관이 강조하듯 역사 발전의 동력을 뿜어냈다는 뜻은 아니다. 지배 구조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인민 대중이 통치 구조로부터 이탈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의미이고, 이것이 다시 지배 구조의 와해를 가속화시켰다. 유교적 통치 구조가 와해되고 균열된 그 시점에서 근대가 발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가들이 얘기하듯 어느 시점에서 근대가 발아되었다고 단정적으로 꼬집어 말하기 어렵다. 특정 소재에 집착한다면 그런 언명이 가능할 것이지만, 통치 구조는 여러 겹─적어도 삼중 구조─으로 되어 있기에 특정 시기에 봉건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근대가 출범했다고 말하는 것은 연속론적 관점에서 보면 논리적 모순이다. 그럼에도, 통치의 삼중 구조가 동시적으로 약화되는 19세기를 전후하여 이런 경향이 짙어졌다는 관찰은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연구는 바로 인민 대중의 역사적 위상 변화에 주목한다. 인민도 역사적 소재의 하나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겠으나, 역사학계의 근대 연구에서 인민에 주목하는 연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역사 동인이자 주체적 행위자로서의 인민은 계약 질서, 보부상과 장시, 상공업, 경영형 부농, 민국 이념, 민족, 실학 등과 같이 역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근대적 요소와는 질적으로 다른 소재이다. 간혹 민중을 전면에 배치하는 민중사학의 과감한 연구들이 있지만, 피지배 계급을 역사의 동력으로 배치해서 정치사, 왕조사 중심의 지배 계급적 시선을 뒤집어 보려는 가치 개입적 의도가 강했다. 민중 개념에는 연구자의 투쟁적 동력이 실리므로, 그것도 목적론적 연구의 혐의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인민 대중이 모두 착취와 억압의 장벽을 뚫고자 했던 능동적 주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은 수동적이고 순종적이었으며, 생계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굴종적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인민 대중에게 어떤 기회의 창이 자연스럽게 열렸는가, 고된 노동과 일상사 가운데 한스럽게 읊조린 판소리 한 자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lsquo;의도하지 않은 결과&rsquo;를 낳았는가, 봉건적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그들에게 어떤 삶의 선택권이 주어졌는가를 우선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인민은 수동적, 능동적 창구를 통해 근대로 나온다. 근대적 요소를 찾고자 하는 &lsquo;내재적 발전론&rsquo;이 이런 인민의 위상 변화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회는 국가 및 지배 계급과 인민 대중으로 구성된다. 서양의 근대는 국가(왕족)와 귀족이라는 전통적 지배층에 대해 서민들로 구성된 시민 사회가 태동할 때 출현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논외로 하고라도, &lsquo;인민의 위상 변화&rsquo;가 질적으로 새로운 시간대를 가져온다는 것은 동양에서도 적용되는 역사적 명제다. &lsquo;시민 사회의 태동&rsquo;은 서양과 동양에서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근대의 출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민유방본(民有邦本)이라는 화려한 명분에도, 조선에서 인민은 오랫동안 통치 대상이자 역사의 객체였을 뿐이다. 수분공역(守分供役)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인민의 존재 이유였다. 지배 구조의 발전이 절정에 이르러 200년 정도 단단하게 유지되던 조선 중기까지 인민은 한 번도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지배 계급이 구축한 유교적 이상 국가의 이념과 통치 구조가 인민들에게 정치적, 문화적 기회의 창을 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대학자 정약용의 실학 체계는 유교적 이상 국가의 완성을 향한 재건축 설계도였는데, 여기에 간헐적으로 보이는 &lsquo;인민의 진출&rsquo;을 부분 허용하는 논리는 결국 지배 구조의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통치 구조가 약화된 틈새에 만들어진 &lsquo;기회의 창&rsquo;을 빠져나온 인민들은 문득 자유로움과 허허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수분공역을 부분적으로 면제받거나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독립하는 것만큼 두렵고 자유로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분 질서의 와해와 도시 형성이 그런 이탈과 자립을 북돋워 주었다. 근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에서 개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전제 조건일 뿐 근대 사회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무엇인가 질적으로 새로운 인민의 특성, 봉건 체제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속성이 발현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자들이 흔히 &lsquo;사회(society)&rsquo;라고 부르는 것, 이해관계로 엮여진 이익 사회(게젤샤프트)의 속성들이 집합적으로 발견되는 시점이 근대다. 그런 새로운 징후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면 앞서 소개한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1900년대 초 한양 시내를 산책하다가 신문을 읽어 주는 노인과 그 주변에서 나라 소식에 잔뜩 호기심을 갖고 경청하던 한 무리의 상인들을 보았다. 비숍은 1894년 한양 시내에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군중, 오랑캐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저항 군중들을 목격했다. 그 행렬 속에서 비숍은 뭔지 모르게 불길한 근대의 징후를 읽어 냈다. 신문 읽어 주는 노인과 듣는 무리, 중세적 외양의 저항 군중, 1898년 독립 협회가 주최한 군중대회에 참여했던 인파는 분명 &lsquo;중세적 인민&rsquo;은 아니었다. 인민의 진화, 인민의 변모와 더불어 근대가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인민이 중세와 완전히 결별한 실체가 아니라 와해 일로에 있지만 봉건적 제도 틀 속에 놓여 있고, 이전 인민들이 남긴 전통의 유산 속에서 살아왔다는 점에서 &lsquo;진화&rsquo;다. 그런 의미에서 개화기 인민은 근세의 끝자락이자 새로운 시간대가 이어지는 지점에 놓인 그런 인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인민을 일단 &lsquo;근대적 인민&rsquo;으로 개념화하고자 하는 역사적 증거는 충분하다. 모든 인민이 다 그랬던 것도 아니고, 시민 사회의 속성을 충분히 갖추지도 않았지만, 봉건 체제로는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질적으로 새로운 조직이 태어난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자발적 결사체(voluntary association)가 그것을 입증한다. 자발적 결사체는 인민들이 자율적으로 모여 사적 이익을 자제하고 공적 명분과 공적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자 할 때 결성하는 조직이다. 조선 시대에 자발적 결사체에 버금가는 조직들이 존재했다. 향촌에 산재했던 동계(洞契), 송계(松契), 학계(學契) 등 촌계류(村契類)가 그것인데, 이들 전통적 계 조직은 사적 이익과 연관된 채 공동체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고, 조선 사회 전체의 보편적 이익과는 연관이 없었다. 그런데 1894년을 전후하여 생겨나기 시작한 자발적 결사체는 조선의 지배 구조와 지배 이념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자율적 조직이고, 사적 이해 관심과는 무관하게 국가적 차원의 공익과 명분에 기여하려는 목적을 향해 진군했다. 이런 조직을 스스로 결성하거나, 자율적 참여가 권장되는 사회는 분명 근대 사회임에 틀림없다. &lsquo;사회&rsquo;라는 근대적 개념이 도입되지도 생겨나지도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자발적 결사체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인민은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주체로서의 인민, 즉 근대적 인민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 책의 주제 &lsquo;근대에 이르는 과정&rsquo;에 관한 연구는 바로 인민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런 단계로 진화했는지를 규명하겠다는 의미이다. &lsquo;진화&rsquo;의 끝에 인민은 비로소 근대로 나왔다. 이 &lsquo;근대적 인민이 탄생하는 과정&rsquo;이 1권의 주제이고, 그 &lsquo;인민이 시민으로 전환하는 과정&rsquo;이 2권(근간)의 주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조선의 통치 구조</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도대체 조선의 인민은 어떤 통치 구조를 통과했는가? 이 질문이 &lsquo;근대에 이르는 과정&rsquo;에 해당한다. 조선은 세계에서 흔치 않을 만큼 통치 구조가 단단한 국가였다. 중국과 일본을 이웃하고 외침을 수차례 받으면서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밀이 그 속에 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lsquo;지식 국가&rsquo;였다. 성리학을 유일한 국가 학문으로 설정하고 모든 것을 성리학적 논리 체계로 구축했다. 성리학은 종교이자 통치 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지식은 종교이고, 종교는 정치였다. 지식, 종교, 정치 간 선순환 구조를 사대부가 관할했다. 왕권은 선순환 사이클을 상징하는 최고의 권력이었지만, 항상 지식 권력을 장악했던 사대부 세력의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했다. 사대부는 성리학의 도통(道統)을 책임졌고, 왕족과 귀족은 권력의 합리성과 정당성인 왕통(王統)을 책임졌다. 일종의 분리 통치 구조였지만, 도통과 왕통은 성리학의 가장 높은 명제인 도덕 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일치했다. 도덕 정치에서는 도통과 왕통의 위계가 인정되지 않는다. 천리(天理), 천도(天道)와의 일치라는 유교 정치에서 왕과 사대부는 분업 관계에 놓여 있다. 인민은 도통과 왕통의 분업 체계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객체이다. 민유방본은 분업 체계의 도덕성을 보완하고 뒷받침하는 가치 체계일 뿐 실제로 민유방본이 본격적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지식, 종교, 정치가 삼위일체를 이뤘다는 뜻에서 이슬람의 칼리프 체제만큼 정종일치(政宗一致)의 정도가 높은 사회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칼리프 체제가 부족으로 갈라진 사회였던 데에 비해, 조선은 지식&middot;종교&middot;정치의 삼위일체를 강력한 관료제적 통제로 구축했으며, 학문적 일체감으로 뭉친 사대부 계급이 그 관료제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점에서 칼리프 체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 지식&middot;종교&middot;정치를 삼위일체로 묶어 주는 것은 궁극적 진리의 근원이자 그 자체 종교인 &lsquo;하늘의 이치(天理)&rsquo;에의 믿음이다. 이런 유교 국가에서 왕은 대사제, 사대부는 중사제, 민호의 가부장은 소사제였다. 비숍 여사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500년 도읍에 종교 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놀랐는데, 사실은 왕궁을 비롯한 십만 민가가 모두 하늘을 섬기는 종교 시설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식&middot;종교&middot;정치의 삼위일체를 관할하는 것은 성리학(性命義理之學)이었고, 그것의 종교적 구현체인 유교였다. 우주를 운영하는 궁극적 진리인 이(理)를 구현하는 가장 적합한 방식을 좇아 사회 집단을 조직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악(惡), 허(虛), 사(邪)를 버리고 미(美), 실(實), 정(正)을 획득하도록 교화하는 것이 도덕 정치의 목표다. 조선은 성리학적 우주관을 &lsquo;거룩한 천개&rsquo;로 하고 이를 실현시키는 세 개의 통치 체제를 가동시켰다. 향촌 지배(정치), 종교, 교육(지식)으로 구성된 삼중 구조가 그것이다. 이 삼중 구조를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es, ISAs)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 삼중 구조가 인민을 어떻게 신분 질서와 직역에 포박시켰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조선사의 핵심이자, 인민 대중의 역사적 위상 변화를 분석하는 데에 필수적인 작업일 터이다. 이 삼중 구조의 통치 효율성은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이었다. 기근, 한발, 천재지변, 외침 같은 급박한 상황이 효율성을 자주 훼손했지만, 그때마다 삼중 구조의 통제력을 복원시켜 유교 국가의 이상을 향해 한 발짝씩 나아갔다. 지식은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었다. 15~16세기에 걸쳐 이뤄진 『성리대전』의 간행은 조선이 조선적 성리학의 골격을 세웠다는 의미이고, 국가 철학의 구심점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조선은 관학을 통해 국가 철학을 전국 향촌에 보급했으며, 사대부의 통치 이념과 학문을 재생산했다. 재지사족들은 향교(鄕校)와 사우(祠宇)를 설립하고, 후기에는 서원(書院)을 건립해서 지식 체계를 가다듬고 전파했다. 향교가 교육 기관이라면 사우는 종교적 의례를 집행하는 기관이다. 유교국가에서 지식생산은 정치와 종교기능을 동시에 갖는다. 그러므로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게 시행된 과거 제도의 기능은 통치의 삼중 구조와 정확히 대응한다. 국가를 위해서는 관료를, 향촌 질서와 가문을 위해서는 종교 집정관을, 지식 생산과 논리 체계의 확립을 위해서는 지식인과 학자를 배출하는 공식 제도였다. 조선은 &lsquo;사(士)&rsquo;와 &lsquo;대부(大夫)&rsquo;의 나라, 학자와 관직 사이에 수시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가 항시적으로 열린 나라였으며, 이들이 중앙과 지방에서 도성민과 향촌민을 성리학적 우주관 내부로 교화시키는 유교적 종교 의례를 동시에 관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민을 단단하게 포박하는 이 삼중 구조가 유지되는 한, 중세는 성공적으로 지속되고 근대는 오지 않는다. 신분 직역을 충실히 수행하는 통치 객체로서 인민의 지위가 전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국지적 민란이 발생하기도 했고, 임꺽정과 장길산 같은 군도가 출몰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탈이었지 인민 대중의 전면적 저항은 아니었다. 서양에서 인민 대중의 지위를 변화시키는 기제들, 예컨대 시장과 상공업의 발전은 관료제적 통제하에서 그 싹을 틔우지 못했다. 시장은 국가에 종속되었으며, 재산을 축적한 신향(新鄕) 세력도 19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전통적인 향권(鄕權)에 맞설 정도가 되었다. 중세적 인민이 근대적 인민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 삼중 구조의 통치 효율성이 쇠락했을 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성리학적 우주관과 조상 숭배를 통치 이념과 결부시킨 &lsquo;종교적 의례&rsquo;, 신분 직역과 부세 의무를 강제하는 &lsquo;향촌 지배&rsquo;, 지배 이념의 도덕과 윤리를 재생산하는 &lsquo;교육&rsquo;, 이 각각의 축이 약화되거나 붕괴된다면 인민은 더 이상 유교 국가에 안주하는 인민이 아닌 것이다.3 후기에 접어들면서 종교, 향촌 질서, 교육 체계의 정당성과 유효성이 점차 쇠락하자 유교적 통제 질서로부터 인민의 &lsquo;자발적 외출&rsquo; 혹은 결박 해제 상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종교로서의 유교가 한계를 드러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현세 종교였다. 죽음을 부르는 천재지변과 전염병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조선 인민들은 정부가 그토록 탄압해 마지않았던 불교와 주술 신앙을 그들의 내면세계로 암암리에 불러들였다. 언더우드 부부, 비숍, 그리고 당시 조선을 여행했던 많은 선교사와 저널리스트들이 흥미롭게 목격했던 것은 남루한 집 안에 곱게 모셔 둔 귀신 단자, 콜레라가 번진 마을 입구에 걸린 고양이 그림, 무엇보다 칼과 요령을 흔들며 작두 위에서 광란의 춤을 추는 무당들과 밤새도록 쿵쾅거려 잠을 설치게 하는 굿판이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 말에 유입된 천주교는 조선 인민의 비어 있는 내세관으로 진격해 들어갔고, 급기야는 유교가 궁극적 진리의 발원자로서 섬겨 마지않은 천리(天理)를 &lsquo;하늘의 주인(天主)&rsquo;으로 대치시켰다. 정신과 마음의 최종 주체로서 유교적 천리가 천주교의 천주로 바뀌자 수많은 개종자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군주와 사대부, 재지 사족의 종교적 권위가 손상됨과 동시에 중앙 정부와 향촌에서는 관료제의 부패가 진전됐다. 정조 사후 중앙을 장악한 세도 정치는 지식과 권력의 선순환 사이클을 망가뜨렸으며, 향촌에서는 구향과 신향 간 치열한 향전이 일어났다. 지식 생산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관학 체계에 대응하는 평민들의 교육 기관인 서당이 번성해서 문자 해독력을 갖춘 인민, 즉 문해인민(文解人民, literate people)을 길러 냈는데, 이것이 국가와 지배 계급의 공식 이데올로기에 대해 달리 사고할 수 있는 비판적 인식 능력을 키워 주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선의 근대는 어떤 주체 세력의 기획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지배 계급은 19세기 후반까지 유교적 이상 국가라는 초기의 목표를 버리지 않았으며, 인민 대중 역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근대적 형태의 어떤 것도 기획하지 못했다. 기획할 능력이 없었다. 다만 지식 국가의 근간인 통제의 삼중 구조가 약화되자 인민 대중은 얼떨결에 낯선 미지의 세계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간대인 것만은 틀림없었으나 그것이 근대인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인민을 포박하는 통치 구조의 전반적 양상과 촘촘히 짜인 지식&middot;종교&middot;정치의 상호 관계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이 책 1부의 과제다.<br /> &nbsp;</p>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국문 담론과 공론장</span></strong> <p><br /> 세계에서 유례없이 단단했던 조선의 통치 체계는 왜 약화되었고, 그래서 왜 인민들의 결박 상태가 이완되었는가? 약화와 이완이 조선 중세의 쇠락에 해당한다면, 인민의 이탈과 도전은 &lsquo;근대의 도래&rsquo;를 암시하는 징후다. 근대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중세적 제도의 모순을 설명하고 그것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lsquo;새로운 요인&rsquo;의 출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수취 제도의 모순에 대한 민중의 반발, 신분 질서의 와해에 따른 봉건적 통제의 약화와 직업 분화, 상공업 발전에 의한 신흥 세력의 부상, 제국 열강의 침략에 대한 민족의식의 각성, 권력 독점에 대한 지식 계층의 반발과 국론 분열, 세도 정치에 의한 경향 분리와 관료제의 부패 등이 그것이다. 중세적 제도의 몰락으로 근대의 출현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lsquo;연속론적&rsquo;이지만, 중세적 &lsquo;발생 기원&rsquo;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lsquo;단절론적&rsquo;이다. 근대는 중세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간대이지만, 중세와 근대가 완전히 단절된 이종(異種)의 것이 아니라 중세적 제도에 이미 근대가 발아하고 있었다는 점, 근대의 기원은 중세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는 점, 그리하여 중세와 근대는 계보학적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중세는 근대의 산모이다. 근대는 중세를 부정하고 태어난 자식이나 부모를 기억하지 못하는 천애의 고아도 사생아도 아니다. 형질 변경이 일어날 수는 있다. 그러나 중세를 버린 채 새로운 근대를 상상할 수는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민 대중을 중세로부터 근대로 날라다 준 비행체는 무엇인가? 인민은 그 강력한 통치 체계에 저항할 어떤 지식도 의지도 배양할 수 없었을 터인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통치 체계의 내벽을 허물도록 만들었는가? 중세가 허용했던 어떤 생활 양식과 제도가 인민 대중으로 하여금 그 &lsquo;의도하지 않은 결과&rsquo;를 낳도록 만들었는가? 근대의 기원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종교(의례), 교육, 향촌 지배라는 세 개의 영역에서 각각의 통치 효율성을 약화시키는 내적 요인들과 내적 모순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음은 앞에서 지적하였다. 그 각종 모순들을 &lsquo;기원&rsquo;으로 설정하고, 그로부터 발생한 새로운 현상을 &lsquo;근대&rsquo;로 개념화하는 일반적 설명 방식에 필자는 조금 회의적이다. 아무리 탁월한 분석이라도 소재주의와 목적론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분야별, 영역별 연구가 대부분 그렇다. 너무나 익숙한,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인과 관계가 등장한다. 설득력이 있지만 부분적이다. 한 분야에서 밝혀진 원인(因)은 다른 분야에서는 문제도 되지 않으며, 한 분야에서 밝혀진 결과도 다른 분야에서는 &lsquo;근대&rsquo;로 등록되지도 않는다. 이를 인민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인민의 얼굴은 실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민족주의에 경도된 인민,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민, 향권에 도전하는 인민, 민란에 가담한 인민, 관료제를 비웃는 인민 등등. 개화기는 실제로 그런 인민들이 혼효되고 병존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혼효된 인민 상(像)에서 근대적 표정을 일일이 가려내는 일이 역사학자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혼효된 인민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 분절된 각 영역사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인과 요인을 찾아내는 것은 사회과학자의 몫이다. 그 인과는 이미 중세적 제도에 배태되어 있던 중추 신경으로서, 어떤 역사적 계기를 통과하면서 인민 대중이 스스로도 예상치 않았던 &lsquo;뜻밖의 결과&rsquo;를 낳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언문(諺文)이고, 언문으로 이뤄진 국문 담론(國文談論)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지하다시피,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시한 것은 성리학 경전의 내용을 백성들에게 보급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였다. 훈민정음은 한자의 발음 기호였다. 한자를 쉽게 읽는 방법을 창안한다면 무지한 백성들도 사서오경의 내용을 쉽게 익힐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훈민정음 창제 후 곧바로 사서오경 언해에 착수한 것은 통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한 정치적 목적에서였다. 그 목적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문자 수단을 갖게 된 인민이 지배 계급과는 다른 인식 공간을 가꿔 가게 될 줄은 세종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훈민정음은 민족어였다. 민족어는 보편 언어인 한문을 보좌했고 또 대립했다. 이 대립 관계 속에서 예기치 않은 씨앗이 싹텄다.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습득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비웃고 냉소하고 때로는 그것을 초월하는 인식 체계를 발아시켰다. 지배 계급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이른바 문헌 공동체가 느슨하게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고, 그 속에 근대의 씨앗이 배태되고 있었다. 인민들만의 국문 담론이 산발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에 노래를 실었고, 한을 풀었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시켰다. 상상적 담론 속에서 개인이 태어났다. 이 상상적 담론들은 유교적 통치 체계를 이루는 세 개의 축에 각각 달라붙어 밑동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중세의 완성을 위한 제도 또는 문물이 중세를 무너뜨리는 힘의 원천으로 기능한 것이다. 이 연구가 인민을 근대로 날라다 준 비행체로 국문 담론에 주목하는 방법론적 이유가 이것이며, 부제를 &lsquo;공론장의 구조 변동&rsquo;으로 붙인 배경이기도 하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공론장의 구조 변동-조선사에서 이런 연구가 가능한가<font id="altools-findtxt" style="background-color: #ffff00; color: #000000; font-size: 120%; font-weight: bold">?</font> 조선사에 부르주아가 없다면, 인민의 진화양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근대라는 먼 미래에 시민이 &lsquo;될&rsquo; 집단이며, 새로운 시간대 속에서 시민이 &lsquo;된&rsquo;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론장(공론장)을 통해 근대로 나왔다. 인민은 진화한다.4 진화의 방향은 &lsquo;통치의 객체&rsquo;로부터 서서히 자리를 옮겨 독자적 주체성을 형성해 가는 쪽으로, 보호받아야 할 갓난아이 혹은 무지의 집단이라는 초기적 성격을 벗어나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극복할 수 있다는 앎과 신념을 획득하는 단계로 점차 나아갔다. 통치 체계를 이루는 세 개의 축을 약화시킨 추동력은 한 가지 공통 요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 특히 조선의 공식 문자인 한자가 아니라 한글 해독 능력을 갖춘 이른바 문해인민이 그것이다. 문해인민은 한자를 쓰는 지배층과 구별하여 한글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공유하는 기록 공동체다. 양반 사족들이 그들의 문자인 한자를 통해 소통하면서 그들의 &lsquo;역사&rsquo;를 써 나갔다면, 문해인민은 언문을 통하여 자신들의 현실을 돌아보고 독자적인 형상들을 만들어 갔다. 언문 독해 능력을 갖춘 문해인민의 존재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조선의 정통 이념에 대한 긍정적 혹은 이단적 시선을 언문 소설, 교리서, 통문(通文) 등을 통해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이다.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마련된다는 것은 의사소통의 장(sphere of communication)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의 장은 개인적 삶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타인과 공유하게 만든다. 하버마스가 개념화한 &lsquo;공론장(public sphere)&rsquo;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으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교환하고 설득할 수 있는 기제, 타인의 낯선 생각을 접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기회가 생긴다는 사실은 사회 변혁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문해인민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언문 소설을 서로 돌려 보고 같은 주제로 담화를 나눔으로써 알게 모르게 동의의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언문은 문해인민들에게 문헌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문자적 수단을 제공했다. 그것은 사대부의 세계관과는 다른 인식 공간이었는데, 그 속에서 &lsquo;새로운 인민&rsquo;은 싹을 틔우고 줄기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인민의 역할과 위상이 달라지는 것을 체제 변동이라 한다면, 체제 변동의 가능성은 바로 세 개의 축이 효율성을 소진하는 시점, 또는 세 개 중 어느 하나의 축이 붕괴되는 시점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언문의 체제 변동적 의미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문의 활용도가 높아지고 문해인민의 규모가 날로 증대함에 따라 언문 담론 또는 국문 담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담론장이 형성되어 세 개의 통치 축을 약화시키기는 효과를 창출했다. 이 중심축의 약화는 관료들의 학정, 현실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제도적 경직성 등이 주요 원인일 것이나,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국문 담론이 지배층의 담론과 경쟁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공식 이념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그런 명제가 성립될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비하면 한문 담론은 지배층의 공식적 담론으로 표현 양식, 의사소통과 전달 기제, 청중을 이미 갖췄다는 점에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에 부합한다. 공론장은 공중(公衆, a public)으로 변한 사적 영역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lsquo;이성의 공적 사용&rsquo;을 활용해 공적 권력에 대항하거나 논쟁을 요구하는 행위로부터 발생한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이 성립하려면 공중, 정보와 상품의 교환 기제, 봉건 권력에 대항하는 비판적 논리와 매체 등을 전제로 한다. 비록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과 재지 사족들은 상소(上疏)와 상언(上言) 제도를 통하여 국사(國事)와 공적 사건에 개입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고, 그들의 붕당적 견해를 취합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기제인 서원과 鄕會(향회)를 배타적으로 운영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미 공중으로서 공론장을 형성했다고 보는 편이 적합하다. 구태여 명칭을 붙인다면 그것은 양반 공론장, 유자(儒者) 공론장, 사족 공론장 등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언문을 사용하는 문해인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언문은 분산적, 산발적, 우연적 담론들로 이뤄졌을 뿐 &lsquo;사족 공론장&rsquo;처럼 의사소통의 기제, 서원, 향회, 사발통문과 같은 전달 매체, 문집, 서책 등을 향유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lsquo;이성의 공적 사용&rsquo;을 무기로 비판적 논리를 만들어 내는 공중으로 변할 통로와 기회가 평민과 천민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히 발화되고 우연히 표현 수단을 얻어 개념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크고 작은 언술 다발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담론이라 불러 마땅하다. 담론은 분산된 진술과 문장의 집합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맥락과 끊임없는 교호 작용을 통하여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실천 개념과 닿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배 담론이 권력을 강화해 가거나 정당성을 잃게 되는 다양한 모습을 포착하게 해 준다. 언문은 한문과 구별되는 사회적 상상을 인민에게 제공한다. 사회적 상상이란 문자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성찰이라고 한다면, 그 새로운 성찰 속에는 지배 권력의 허를 찌르고, 지배 이념의 논리를 뒤집고, 심지어는 지배 체제의 전복까지를 꿈꾸는 혁명적 이상이 싹트고 있었다. 이를 &lsquo;사족 공론장&rsquo;에 대한 &lsquo;평민 담론장(plebeian public sphere)&rsquo;이라 한다면, 이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개념 규정, 즉 저항적, 비판적 지식의 수원지였다. 통치 질서의 내부 균열이 발생하고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국문 담론이 비판적 의식을 증대하면서 세 개의 축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징후가 어느 영역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각 영역에서 형성된 국문 담론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지배 담론과 갈등하고 대립했던 양상과 효과들을 가려내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 통치 체제의 세 개의 축인 종교, 교육, 향촌 지배에 각각 대응하는 국문 담론을 &lsquo;종교적 담론&rsquo;, &lsquo;문예적 담론&rsquo;, &lsquo;정치적 담론&rsquo;으로 개념화하고, 이 각각의 담론이 전개된 역사적 양상과 지배 담론과의 대립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 2부의 핵심 주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조선의 근대는 국문 담론이 한문 담론과, 평민 담론장이 양반 공론장과 각축을 이룰 만큼 성장한 그 단계에서 발현되었다. 종교적 담론, 문예적 담론, 정치적 담론이 지배 담론과 경쟁하면서 통치 체계의 세 개의 축을 내부로부터 서서히 무너뜨렸던 그 순간 말이다. 그때 지식 국가였던 조선은 지식과 정치의 분리 단계로 진입했고, 유교 국가의 틀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정조 이후 순조 시대부터 해체 속도는 매우 빨라졌으며, 그만큼 국가는 내외부의 변화에 대응할 수 없는 경직성의 공간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동학은 정치, 종교, 문예 담론이 결집하면서 폭발한 최대의 도전이었다. 문해인민의 관점에서 보자면 동학은 정치, 종교, 문예 담론에서 발전시킨 언문의 사회적 상상이 창출한 변동의 종합적 기폭제였다. 즉, 동학은 &lsquo;언문 담론장&rsquo;을 &lsquo;평민 공론장&rsquo;으로 확대 발전시키는 중대한 계기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외세의 개입으로 좌초되면서 인민 대중은 곧이어 등장한 지식인 공론장, 즉 개화 관료, 유생, 유학생, 상업 부호들이 주축이 된 지식인 공론장으로 분산,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은 신민, 국민, 동포, 민족 등의 새로운 개념으로 변환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변환이 조선에서 근대의 본격적 전개 과정일 것이다. 지식인들 중 평민 공론장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최초의 사람이 유길준이다. 그가 『서유견문』을 쓰기 전에 『대한문전』이라는 언문 문법서를 먼저 썼던 이유이다. 바로 이 평민 공론장과 그것에 의해 &lsquo;시민으로 전환한 인민&rsquo;에 &lsquo;개화기 근대&rsquo;의 요체가 숨어 있다.&nbsp;&nbsp;<br /> <br /> (서론 전문)<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7"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D%B8%EB%AF%BC%EC%9D%98%20%ED%83%84%EC%83%9D/%EC%A0%80%EC%9E%90%ED%94%84%EB%A1%9C%ED%95%84%EC%82%AC%EC%A7%84.JPG" />송호근<br /> </strong>사회학자. 주요 저서로 1990년대 민주화와 노동문제를 분석한 『한국의 노동정치와 시장』(1991), 『열린 시장, 닫힌 정치』(1994), 『시장과 복지정치』(1997), 『한국의 노동복지』(1996), 『정치 없는 정치 시대』(1999), IMF 초기 외환위기를 맞는 사회학자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또 하나의 기적을 향한 짧은 시련』(1998), 한국의 의료 분쟁과 제도적 모순을 분석한 『의사들도 할 말 있었다』(2001), 노무현정부의 등장배경과 통치양식을 분석한 『한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2003), 『한국,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2006)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04년 7월 이후 현재까지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p>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80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br /> <p>&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06 오후 3:48:00《196》2010년 4월 29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6_%ED%91%9C%EC%A7%80.JPG" /></p> <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4월 29일</span></span></strong></span></p> <p>김서령의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실천문학사, 2007)를 읽다. - 도합 아홉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창작집의 맨 앞에 있는 「고양이와 나」는 이상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lsquo;나&rsquo;는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시나리오를 쓴답시고 영화판을 기웃거렸지만, 점점 불러주는 사람이 없는 백수로 전락한다. 그를 구제해 준 것은, 한때 여배우를 꿈꾸었으나 현재는 케이블 방송의 홈쇼핑 프로그램에서 쇼 호스트를 하고 있는 현재의 아내다. 그녀는 여배우 시절 무명의 설움을 씻어줄 사람으로 나를 선택하고,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력에도 불구하고 2년째 아무런 작품도 쓰지 못했고, 아내 몰래 용돈 벌이 삼아 &lsquo;야설&rsquo;을 쓰며, 옛 애인을 만나고 있다.</p> <p><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25"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6_%EA%B9%80%EC%84%9C%EB%A0%B9%20%EC%9E%91%EA%B0%80_182.JPG" />그는 신혼 초에 길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주워 왔다. 아내는 처음에 고양이를 귀여워했으나,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귀찮아할 뿐 아니라, 내버릴 궁리마저 하고 있다. 나는 아내의 고양이에 대한 푸대접이 자신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현관문을 열어두어도 집을 나가지 않는 고양이처럼, 그 자신도 결코 이 집을 자기 발로 나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닷새 동안 일본 출장을 간다고 나갔던 아내가 방송국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 홀로 묵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모르는 체했던 게 그 증거다.</p> <p>「고양이와 나」와 「날개」의 연관성은 경제력 없고 무기력한 남자가 여자에게 얹혀살고 있는 설정에서 가장 두드러지지만, 그보다는 두 소설이, 공히 &lsquo;이들은 과연 가족이었을까?&rsquo;라는 질문을 자아내기 때문일 것이다.</p> <p>『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는 모두 &lsquo;의사 가족&rsquo;에 관한 이야기로, 창작집에 실린 차례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의 오유리는 부모 없이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열여섯 살 때 독립하게 되는데, 자취방에서 만난 같은 나이의 윤지와 윤지의 남자 친구인 진하와 의사 가족을 이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은 4년 동안 &ldquo;더없이 다정한 남매&rdquo;였다.</p> <p>표제작인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의 주인공 자매에게도 부모는 없다. 언니가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자, 그녀의 여동생(&lsquo;나&rsquo;)을 위로해준 사람은 그녀가 학교에서 사귄 태원의 엄마와 그 가족들이다. 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태원이 엄마의 젖가슴에 얼굴을 댔다. 다보록한 가슴에 코를 묻자 뺨을 묻고 싶어졌고 또 귀를 묻고 싶었다. 나는 자꾸만 파고들었다.</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아이고, 불쌍한 토끼 같으니. 살아봐라, 세상이 다 그렇게 아린 게니라.&rdquo;</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토닥토닥. 태원이 엄마가 내 엉덩이를 두들겼다. 나는 더 깊이 태원이 엄마의 가슴에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어느샌가 태원이 아버지가 아기처럼 기어나와 이불 발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돌아보니 태원이도 방문을 열어놓고 있다. 작은 토끼야, 잘 자. 어두운 방 안에서 태원이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긴 귀에, 분명히 그렇게 들었다.</span></span></p> <p><br /> 「무화과잼 한 숟갈」의 여주인공 역시 결손가정에서 자랐다. 주인공 &lsquo;나&rsquo;는 이혼녀이자 두 살배기 아들을 언니에게 맡긴 채, &ldquo;기억상실&rdquo;을 위해 선택한 호주에서 우연히 만난 동년 한국 여성과 자매가 된다. 또 「연가」의 주인공 &lsquo;리&rsquo;는 카드빚 때문에 필리핀으로 도망와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필리핀 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끝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던 리와 그의 아내 아야 그리고 그들의 예닐곱 살짜리 아들 에밀은 가족이었을까? 이어지는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의 여주인공에게는 딱히 의사 가족이라 할 만한 게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 있지도 않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50" height="38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6_%EA%B0%80%EC%A1%B1%EC%9D%98%20%ED%83%84%EC%83%9D.JPG" /></p> <p><br /> 이제 남은 작품은 「쌍둥이들의 방」, 「역전다방」, 「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이다. 제목 그대로 「역전다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마담 언니, 장 양, 조 양은 친자매들이 아니지만, 생일이면 서로 미역국을 챙겨주는 사이다. 이들에게는 동료애가 가족을 대체하고 있는데, 특히 마담 언니는 결혼도 하지 않은 애인의 병수발을 위해 모든 재산을 바칠 각오다. 조 양이 답답해서 언니를 다그친다. &ldquo;퍼다 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막말로 언니가 그 인간허구 살림을 차렸어, 결혼을 했어?&rdquo;</p> <p>주류가 되지 못한 주변부 인생들의 끈끈한 정은 가족보다 더 나은 의사 가족의 모습을 왕왕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역전다방」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면, 「쌍둥이들의 방」이나 「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은 좀 복잡하고 섬뜩하다. 「쌍둥이들의 방」의 명주는 천만 원을 벌기 위해, 남편의 허락 아래 대리모(씨받이)가 된다.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쌍둥이는 그들의 가족일까 아닐까? 이 작품은 언제부터인가 가족 안에 이미 가족 아닌 것이 들어와 있다는 섬뜩한 &lsquo;시대 선언&rsquo;처럼 보인다. 반면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불륜을 목격하면서 사과와 적포도주에 대한 알레르기를 키워왔던 여주인공이 소설의 끝에 이르러 &ldquo;알레르기 따위는 애초에 없었는지도 몰랐다&rdquo;며, 사과를 베어 물고 포도주를 마시는 「사과와 적포도주가 있는 테이블」은 우리들에게 가족 없이도 살 수 있는 내성을 키우라고 말하는 듯하다.</p>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 <br />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2-05 오전 11:45:00로젠크란츠의 ‘왜 원전을 폐기해야 하는가’<div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ED%91%9C%EC%A7%80.JPG" /><br /> <br /> <br /> &nbsp;</div> <p><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다섯 번째 신화</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원자력은 기후보호를 위해 존재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원전의 수명연장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lsquo;사고위험성&rsquo;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연장된 원전들이 에너지 수급체계의 구조개편에 제동을 걸고, 나아가 전적으로 이런 구조개편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중요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오늘날 전 세계에서 관찰되는 기상이변들과 이를 토대로 밝혀진 과학적 진실은 &lsquo;이제 기후변화는 의심할 수 없는 현실&rsquo;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인류공동체는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를 억제하려고 노력 중이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 절실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후전문가들은 21세기 중반까지 산업국가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지금보다 적어도 80~95퍼센트까지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구가 많고 고속성장 중인 신흥산업국들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들 국가에서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일단 꺾여야 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동결하거나 이전 상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이들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과 같은 신흥산업국들이 화석연료에 의존해온 북반구 산업국의 에너지집약적인 발전 모델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 신흥산업국들은 기존의 산업국에 비해 훨씬 적은 에너지로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원자력 옹호론자들은 원자력기술이 &lsquo;지구온난화&rsquo;라는 위기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거침없이 원자력에너지가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시킬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바로 그것이 미래의 원자력기술이 맡아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원자력기술의 미래 역할(온실가스 배출의 감축 역할)은 기존의 산업국가와 신흥산업국, 개발도상국에서 새롭게 불붙은 원자력의 미래 역할에 관한 논쟁을 해결할 요소라는 것이다. 정체와 몰락의 수십 년을 보낸 원자력기술 옹호론자들이 &lsquo;핵에너지의 부흥기&rsquo;를 독촉하고 희망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바로 이런 원자력의 미래 역할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될 때는 실질적으로 이산화탄소(CO2)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원자력 추종자들이 &lsquo;원자력의 사용이야말로 기후온난화 방지에 절대 불가피하고도 필연적&rsquo;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미 수년 전에 뒤셀도르프(Dusseldorf)의 거대 전력회사인 &lsquo;에온&rsquo;의 회장 불프 베르노타트(Wulf Bernotat)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미래를 위한 에너지 의제에서는 두 개의 목표, 즉 &lsquo;원자력 포기&rsquo;와 &lsquo;이산화탄소 배출의 급격한 감축&rsquo;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다뤄져야 한다. 동시에 두 개의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순도 100퍼센트의 몽상에 불과하다.&rdquo;(Berliner Zeitung, 2005. 12. 3.)</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80.jpg" /><br /> <br /> <br /> 세계 최대 민영전력회사의 회장이 이렇게 말했듯이 &lsquo;원자력을 통한 전력생산&rsquo;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핵심 논거는 대다수 전통적인 에너지 경제권의 사업자들과 마찬가지다. 즉, 이들의 주장은 원자력 활용이 없는 기후보호는 이미 실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자력 로비스트들이 이제껏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든 광고 캠페인의 표제어 역시 &lsquo;사랑받지 못한 기후보호자&rsquo;이다. 이 매혹적인 모티브는 우리에게 한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뒤에는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브룬스뷔텔 원자력발전소가 멀리 있고, 앞으로는 엘베 강둑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천천히 자막이 흐르기 시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 기후보호자는 &lsquo;교토 의정서&rsquo;를 지켜내기 위해 하루 24시간 싸우고 있습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광고내용의 진실을 말하자면, 이 낡은 원자력발전소는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안전관리상의 심각한 결함이 문제로 제기된 가운데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바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처절하게 사투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2007년 여름 이래로 2년 넘게 말이다. 그리고 이 원자력발전소는 그 사이에 단 1킬로와트시(kWh)의 전력도 공급하지 않았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여론은 원자력에너지를 기후보호자로 둔갑시킨 이 선동적인 광고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너지는 광고내용과는 전혀 딴판으로, 전 지구를 뒤져봐도 피부로 느낄 만한 문제해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 세계의 전력수급에서 원자력에너지의 영향력은 향후 10년 동안 급감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09년 가을에 바젤(Basel)의 컨설팅회사인 프로그노스(Prognos AG)에 의해서도 전망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일 연방방사선방호청(Bundesamt fur Strahlenschutz)이 분석을 의뢰한 한 보고서에서, 프로그노스의 미래학자들은 부흥의 취기에 젖은 원자력 경제를 확 깨울 만한 다음과 같은 관측을 내놓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전체의 전력수요를 충당하는 에너지원 가운데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6년 14.8퍼센트에서 2020년 9.1퍼센트로, 2030년에는 7.1퍼센트까지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었다(Prognos AG, 2009).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larger"><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속 가능한 기후보호의 걸림돌이 되는 원자력에너지</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런 소수의 조사결과만으로도 확실해진 게 하나 있다. 원자력에너지는 국제적인 기준에서 기후문제 해결의 일부를 담당할 만큼 큰 규모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 현재 임박해 있는 세계 에너지 체계의 구조개편으로 원자력에너지는 결코 문제해결의 열쇠가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많은 나라들이 에너지 전환(태양, 풍력, 수력, 바이오에너지, 지열 등)을 위해서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에 기초한 에너지 체제를 지향할수록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전환기 시대에 새로운 원자력발전소의 경쟁력이란 없다. 오히려 원자력발전소는 기후문제의 포괄적인 해결에서 걸림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대한 명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불프 베르노타트(Wulf Bernotat)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 전력공급회사 &lsquo;에온&rsquo;이 아주 훌륭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물론 에온이 이를 의도한 것은 아니며, 사태의 전후맥락은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2009년 초에 영국 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관한 청문회를 열었다. 이 청문회에선 영국 정부가 2008년에 발표한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충 전략이 논의되었다. 이 전략은 유럽연합 기준에 부합하도록 자국 내의 전체 전력수급 가운데 생태전력이 차지하는 비율을 일단 3분의 1로 끌어올리고, 지속적으로 이 비율을 높여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서면으로 이루어지는 청문회 절차에서 에온과 전적으로 원자력 의존적인 프랑스의 거대 국영전력회사 엘렉트리시테 드 프랑스(EDF―줄여서 &lsquo;프랑스전력&rsquo;이라고 칭함)가 공문을 보내면서 발언권을 신청하고 들어왔다(UK Department for Business, Innovation and Skills, 2008).</p> <p style="text-align: justify">공문에서 두 회사는 먼저 경보를 울렸다. &lsquo;에온&rsquo;과 &lsquo;프랑스전력&rsquo;은 재생가능 에너지를 끝없이 지원하는 것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만약 끝없이 지원할 경우에는 이 섬나라에 원자력발전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에온의 로비스트들은 사실상 영국 정부에 생태전력 비율을 최대 3분의 1로 제한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이는 보수파인 기민당-자민당 행정부의 계획을 살펴보아도 독일에서는 2020년에 도달이 가능한 수치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프랑스전력&rsquo;은 자신들이 보낸 공문을 통해, 전체 전력수요에서 차지하는 생태전력 비율이 25퍼센트를 넘어가게 되면 계획 중인 원자력발전소의 신축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88.jpg" /><br /> <br /> <br /> 반면 독일에서는 에온과 에온의 소속회사가 소위 불연속적으로 매입되고 있는 풍력과 태양전력과 원자력에너지 사이의 &lsquo;시스템 갈등&rsquo; 자체를 부인한다(전력생산이 일정하지 않은 재생에너지 시스템과 항상 일정한 전력생산이 용이한 원자력 시스템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옮긴이). 이렇게 이중적인 잣대를 대는 동기는 분명하다. 영국에서 원자로 신축을 막게 될 요소들로 인해 독일―2009년 기준으로 이미 전체 전력의 16퍼센트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얻는―에서 원자력발전소 운영회사들의 낡은 원자력발전소 수명연장에 의문이 제기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자력발전소가 경제적인 이유와 안전공학적인 이유에서 크게 요동치는 전력 수요 변동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런 수요 변동은 계속 증가하고 있는 생태전력량에 의해서도 가속될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는 수개월 동안 언제나 최대 출력을 공급한다. 이를 위해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이러한 점 때문에 원자력발전소는 운영업자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오늘날 몇몇 원자력발전소들은 상층 용량 범위 내에서 출력 조절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방식도 원자력발전소의 경제성에는 손실이 된다. 왜냐하면 소위 전력부하에 따라 출력을 조절하는 방식(load follow operation)으로 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들이고 적은 양의 전기를 생산해서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것은 안전에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원자로 출력의 끊임없는 변화는 발전소의 핵심 구성요소들에 기계공학적&middot;열역학적&middot;화학적인 의미에서 추가적인 부담과 손상을 주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문제는 프랑스전력이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 전략에 관한 영국 정부의 청문회에 보낸 공문에서도 확인된다. 유럽형 가압경수로(EPR)의 예를 들면서 프랑스전력의 공문 작성자는 아주 상세하게 &lsquo;왜 생태전력이 영국 전체 전력생산량의 25퍼센트 이상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지&rsquo;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조절의 한계 때문이라고 했다. 유럽형 가압경수로와 같은 초현대적인 원자로조차 재생가능 에너지가 전력수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지 않을 경우에만 생태전력 생산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출력변화 진동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결국 지속 가능성과 기후보호를 겨냥한 전력수급 체계에서 원자력기술과 생태전력 기술은 불가피하게 서로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국의 생태전력 비율은 2010년에도 겨우 몇 퍼센트에 불과해서 지속 가능한 에너지 수급체계와는 한참 멀어져 있다. 하지만 독일의 상황은 매우 다르다. 독일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두 에너지 수급체계가 벌이는 &lsquo;시스템 갈등&rsquo;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이 갈등이 해가 갈수록 첨예해진다. 원자력발전소의 출력조절 능력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력발전소는 앞으로 계속 증가하는 풍력과 태양력에서 생산되는 전력량에 상응하여 전력 네트워크에서의 전력량을 보정하는 기능을 담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현상이 빚어내는 결과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lsquo;전력거래소(EEX)&rsquo;에서 이미 여러 차례 아주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2008년 가을 이래로 점점 더 빈번하게 이 거래소에선 소위 &lsquo;부정가격(negative strompreise)&rsquo;이 등장했다. 다시 말해 전력공급 회사들이 생산한 전기에 대해 자신들이 돈을 지불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얼토당토않은 것처럼 들리는 이런 상황은, 특히 독일에서 강한 바람이 불고 이와 동시에 전력수요가 줄어드는 날(전형적으로 주말 또는 공휴일)에 주로 발생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를 들면 2009년 성탄절 기간이 그랬다. 이때 놀랍게도 11시간 동안이나 전기의 국제시장 가격이 &lsquo;0&rsquo; 아래였다. 다시 말해 전력공급 회사들이 오히려 구매자에게 돈을 주고 전기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무려 11시간이나 지속된 것이다. 1메가와트시(MWh)당 가격이 &lsquo;-120유로&rsquo;로 떨어지자, 전력공급 회사는 오히려 자신들이 생산한 전기에 대해 1메가와트시당 120유로씩 돈을 내고 팔았던 것이다. 12월 26일의 경우, 전력가격은 종일 1메가와트시당 평균 &lsquo;-35유로&rsquo;에서 왔다갔다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전력망과 거래시장에 전기를 제공할 수밖에 없는 거대 발전소 운영자들은 그 기간 동안에 수십만에서 수백만 유로를 날려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전력공급자들이 소위 원자력발전소를 몇 시간 동안이나 가동시키고 그에 따른 비용을 지불하는 것(남아도는 전기를 전력거래 시장에서 마이너스 가격으로 팔게 되는 것―옮긴이)은 무엇 때문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이유는 육중한 원자로 입상들의 출력을 저하시켰다가 몇 시간 후에 다시 상승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지불하면서 전기를 파는 것이 아직까지는 비용이 훨씬 덜 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larger"><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원자력에너지는 <br /> 어떻게 재생가능 에너지의 성장을 방해하는가</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원자력과 재생가능 에너지 사이에는 분명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lsquo;시스템 갈등&rsquo;의 위협이 항상 존재하며,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재생가능 에너지의 전력생산량은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이고, 기상 조건만 맞는다면 재생에너지 생산량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다. 또한 전력공급망에서 생태전력 우선권의 규칙이 유지되는 한, 거대 원자력발전소가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출력을 낮춰 가동하는 경우에는 재생에너지 생산이 점점 빈번해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일에서 2009년 말에 발생한, 거대 전력회사들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았던 성탄절 선물은 그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원자력의 위치를 위협할 정도로 자주 일어날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일 연방정부의 계획에 따르면, 2009년 현재 전체 전력공급량 가운데 16퍼센트를 차지하는 생태전력 비율은 2020년을 기점으로 두 배가 된다. 독일의 &lsquo;재생가능한 에너지연맹(Bundesverband Erneuerbare Energien, BEE)&rsquo;은 심지어 이 비율을 세 배까지 늘릴 수 있다고 내다본다. 카셀(Kassel)에 있는 프라운호퍼연구소(Fraunhofer)의 &lsquo;풍력에너지와 에너지시스템기술연구소(Institut fur Windernergie und Energiesystemtechnik: IWES)&rsquo;는 이런 관측에 기초해 독일의 전력수급 모델을 구성하고 모의실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상시 운영을 전제로 건설된 거대 발전소는 미래의 독일 전력수급 시스템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것으로 전망되었다(Fraunhofer IWES, 2009).</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자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거대 전력회사들이 부득불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로비를 총동원하는 것의 배후에는 바로 이런 전망들이 자리 잡고 있다. 로비의 성과가 빠르게 나타날수록 전력망에는 더 많은 원자력발전소들의 잔류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을 허가해준 독일 연방정부와 이들이 비호한 거대 전력회사 사이에는 이미 심각한 갈등이 예정돼 있으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을 반대하는 것은 단지 &lsquo;사고위험성&rsquo;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연장된 원전들이 에너지 수급체계의 구조개편에 제동을 걸고, 나아가 전적으로 이런 구조개편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중요한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39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124.jpg" /><br /> <br /> <br /> 태양과 우라늄 사이의 &lsquo;시스템 갈등&rsquo;은 이웃 섬나라 영국보다는 독일에서 훨씬 더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갈등이 정치가들에게는 여전히 충분해 보이지 않는 듯하고, 반면에 경제학자들에겐 그렇지 않다. 컨설팅 회사인 프로그노스는 향후 재생가능 에너지의 확산으로 인해 원자력발전소의 출력 저하가 더욱 빈번할 것으로 내다보았다(Prognos AG, 2009).</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연방정부가 설치한&nbsp; &lsquo;환경전문가 자문회의(Sachver-standigenrat fur Umweltfragen: SRU)&rsquo;는 2009년에 발표한 논제 정리 보고서에서 원자력과 재생가능 에너지원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자문기관은 &ldquo;석탄 또는 우라늄을 원료로 삼는 거대 발전소의 유지와 확대는 재생가능 에너지를 최대 전력생산 주체로 확대, 발전시키는 것과 정책적으로 호환되지 않는다&rdquo;고 분명하게 밝혔다. 자문회의는 또 &ldquo;시스템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rdquo;며, 재생가능 에너지 수급체계로 확실하게 가닥을 잡기 위해서라면 &ldquo;두 노선을 동시에 걷는 것이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무의미하다&rdquo;고 덧붙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거대 전력회사들은 이 발표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러한 발표로 인해 원전의 수명연장 논쟁의 부조리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연방정부가 수명연장을 결정하는 즉시 그들은 독일의 전력망에서 집행되는 재생가능 에너지의 법률적 우선권의 철회를 위해 강력한 투쟁도 불사할 것으로 예측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다음의 사실들이 분명해진다. 미래의 에너지 시스템을 두고, 즉 재생가능 에너지와 원자력 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원자력 광고물이 우리에게 거짓으로 꾸며대고 있는 것과 다르게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lsquo;양립과 공존&rsquo;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lsquo;선택과 결단&rsquo;의 문제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거대 에너지 공급회사들이 그 알량한 수사로 우리에게 들이대는 &lsquo;폭넓은 에너지 혼합&rsquo;은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생가능 에너지가 에너지 공급의 전반을 책임지는 시스템에서는 결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런 에너지 수급체계는 2009년 독일 연방정부가 체결한 연정각서에 따라 추구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거대 전력회사들에게도 원자력발전소의 수명연장 가능성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이중 전략은 제대로 실행되기 어렵다. 연방정부는 원으로 사각형을 만들겠다는 것처럼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자연보호기금(WWF)은 &lsquo;2050년까지의 기후보호―모범사례 독일&rsquo;이라는 연구를 통해 어떻게 독일이 장기적으로 에너지정책적 목표와 기후정책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지 조사했다(WWF Deutschland, 2009). 이 연구의 메시지는 간단하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margin-right: 30p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기후보호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모든 에너지 부문들에서 근본적인 구조개편이 이루어지고, 몇몇 부문(전력 부문이 이에 속한다)들이 40년 안에 이산화탄소 배출에서 점차 벗어나는 것으로 가능하다. 여기서 반드시 전제될 것은 정치적인 의지이다. 전통적인 경제의 저항에 부딪치더라도 구조개편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정치적인 의지 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독일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에너지의 생산과 소비 면에서 더 큰 효율성을 달성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관건이다. 이때의 효율성은 산업생산 과정과 교통 부문은 물론이고 건설 분야와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부문들을 아우른다. 중간 단계로 석탄을 천연가스로 전환해야 하고,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이 점점 더 증가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재생가능 에너지가 모든 에너지 수급을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석탄과 천연가스 사용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즉 이산화탄소를 분리수거해서 지표 밑의 지질층에 저장한다는 &lsquo;청정석탄기술(Clean-Coal-Technology)&rsquo;도 효과가 있는 것인지, 언제 어디서 가능한지도 앞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일 연방정부의 &lsquo;환경전문가 자문회의&rsquo;가 밝히는 것처럼, 앞으로 새로운 에너지 시대를 여는 전면적인 구조개편 과정에서 원자력에너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는 단지 대규모의 기저부하 발전소(Base-load Power Station)10)들이 전력 부문에서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을 강력하게 방해할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재앙적인 위험 가능성&rsquo; 외에도 원자력발전에 엄청난 규모의 공학적 능력들이 동원되고, 여기에 재정 수단들도 병행되면서 시스템 개편에 필요한 재정 수단들이 잠식되기 때문에 원자력은 &lsquo;방해기술&rsquo;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그 어떤 기술도 원자력에 견줄 만한 위험성에 처해 있지는 않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심각한 사고 한 번, 혹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 한 번으로도 이 기술의 사회적 수용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민주국가라면 서둘러 원자로의 가동을 중지시켜야 할 것이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EA%B0%81%EC%A3%BC.JPG" /><br /> <br /> <br /> <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size: larger"><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가지 문제 <br /> ― 기후변화와 재앙적인 원전사고</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기후보호 목표를 달성하려면 화석과 핵을 주된 에너지원으로 삼는 현재의 에너지 시스템에서 벗어나 완전히 재생가능 에너지 공급 시스템으로 이행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러한 재생가능 에너지 시스템은 오늘날 알려진 기술들과 지금 당장이라도 상용화될 수 있는 대부분의 기술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하루라도 빨리 시작할수록 나중에 치러야 할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이 이행의 끝에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두 가지의 위험(전 지구적인 기후변화와 재앙적인 원전사고)을 최소화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원자력 옹호론자들이 수없이 떠들어온 소위 &lsquo;효과적인 기후보호냐, 원자력에너지의 포기냐&rsquo;라는 &lsquo;목표 갈등&rsquo;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날조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악마와 사탄 중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짓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의 독일 행정부는 전력생산 부문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2020년까지 1990년 대비 40퍼센트 감축하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만약 원자력발전을 확대함으로써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면, 이것은 독일에 적어도 10기 이상의 원자력발전소들이 새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일부 원자력발전소들은 그 사이에 수명을 다하고 폐쇄될 것이기에 이를 보충하는, 즉 추가적인 원전 건설도 고려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이미 2002년에 연방의회 내에 설립된 &lsquo;앙케트위원회(Enquetekommission)&rsquo;는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를 원자력발전소에만 의지한다고 가정하고 2050년까지의 이산화탄소 감축 시나리오를 도출해 보았다. 과학자들은 2050년까지 적게는 60기에서 많게는 80기까지 새로운 원자력발전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2010년까지 독일에서 운영 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모두 17기라는 사실과 비교해볼 때, 60~80기의 위험성은 상상하고도 남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41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9%9C%20%EC%9B%90%EC%A0%84%EC%9D%84%20%ED%8F%90%EA%B8%B0%ED%95%B4%EC%95%BC%20%ED%95%98%EB%8A%94%EA%B0%80/%EC%9B%90%EC%9E%90%EB%A0%A5_168_600.jpg" /><br /> <br /> <br /> 독일에서만도 사정이 이러할진대, 기후보호라는 명분 아래 전 세계가 원자력이라는 전략을 선택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선택의 결과로 발생할 수 있는, 누구도 원치 않는 미래의 일을 떠올리는 데에는 이제 상상력도 필요하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계기후자문회의인 IPP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가 요구하는 이산화탄소 감축 요구에 부응하며 확연한 기후보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아마도 수천 기의 새로운 원자로가 건설돼야 할 것이다. 전력과 동시에 대재앙의 위험성을 생산하는 나라는 지금처럼 30여 개의 나라만이 아니라 50~60여 개의 국가 또는 그 이상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렇게 되면 수천 기에 이르는 &lsquo;재앙의 화덕&rsquo;들이 지구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분쟁지역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군사적 공격과 아울러 테러리스트들의 새로운 공격목표가 생겨나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최종 핵폐기물처리장 문제와 제어되지 않는 핵무기 확산의 위험은 세계의 모든 지역으로 퍼지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차원으로 도달할 것이다. 이미 빠듯한 우라늄 매장량으로 정말 머지않은 시대에 지극히 위험하고 훨씬 더 치명적인&nbsp; 플루토늄 경제가 지구상에 도래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오늘날 주로 사용되는 경수로들은 빠르게 재처리시설과 고속증식로들로 교체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빈곤 퇴치 대신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정수단이 원자력 기반시설의 확대를 위해 투입되어야 할 것이다.<br /> <br /> (제5장 전문)<br /> <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br /> 게르트 로젠크란츠</strong><br /> 대학에서 금속학을 전공한 뒤 70년대 말에 스투트가르트에 있는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 금속을 연구했고, 1979년에 스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이후 스투트가르트에 있는 호엔하임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신문학을 공부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타케스차이퉁(=매일신문)에서 편집장으로 일했고,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독일의 대표적인 잡지 슈피겔에서 편집자로 일했다. 이후에 남독신문,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디 보헤(=더 위크지), 디 차이트에서 프리랜스 기자로 일했다. 2004년부터 베를린에 있는 &lsquo;독일 환경단체(Deutschen Umwelthilfe)&rsquo;에서 정치&amp;언론 부서를 이끌어가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진희</strong> <br /> 환경, 에너지 기술 분야의 역사와 관련 정책에 대한 과학기술사적 연구와 기술과 여성의 연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현대 과학기술과 삶의 변화》(공저), 《초록눈으로 세상 읽기》(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적 경제 기적》, 《환경의 세기》 등이 있다. <br /> <strong>정계화</strong><br /> 대학에서 유학을 전공하고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정치학을 전공했다. 옮긴 책으로 《빛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책》(공역), 《신화를 쓰는 마라토너 요슈카 피셔》가 있다. <br /> <br /> <span style="color: #cc0000">-------</span><br /> <span style="color: #800000">★</span>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02 오후 3:20:00최규석의 ‘지금은 없는 이야기’<p><img alt="" width="600" height="78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A7%80%EA%B8%88%EC%9D%80_%EC%97%86%EB%8A%94(%EC%95%9E%ED%91%9C%EC%A7%80)_600.JPG" /></p> <p><br /> <br /> <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작가의 말</span></span></strong></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세상은, 불평불만 하지 말고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이야기들로 차고 넘친다. 그래도 예전에는 삶의 고통을 견디는 굳건한 의지, 앙다문 이빨 정도는 허용해줬지만 요즘에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요새 떠도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고통조차 웃으며 견뎌야 한다. 아니 애초에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고통을 고통이라 여기는 부정적 태도를 갖는 순간 우주의 에너지는 당신을 못 보고 지나칠 것이다. 그리고 성공과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은 오직 개인에게 있다. 치즈가 갑자기 사라지면 치즈가 왜 사라졌는지, 누가 갖고 갔는지 고민하지 말고 재빨리 다른 치즈를 찾아 나서야 하고, 아무리 고난을 웃음으로 긍정하며 극복해도 인생이 잘 안 풀린다면 그건 당신의 긍정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체가 불만족해도 웃으며 사는 사람이 있는 세상에서 힘든 내색, 남의 탓은 범죄다. 세상과 타인은 죄가 없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조건, 그러니까 자연 같은 것이다.</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실 수천 년을 반복해 온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맞는 얘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반은 맞다. 도둑질을 해도 담장이 높네 낮네, 금고가 신형이네 구형이네 불평하지 않고 상황을 긍정하며 꾸준히 자기 계발하는 도둑이 더 잘 훔치지 않겠나. 이처럼 긍정적인 태도를 권유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그런 얘기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너무 많아서 당연하게 생각되고, 당연한 것이 되다 보니 다르게 생각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상황에서도 같은 관점으로만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할 때도 있지만 중이 절을 고쳐야 할 때도 있는 게 세상 아닌가.</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물론 다른 말을 하는 얘기들도 많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책들이 수천 년 된 믿음 체계를 전복하리라는 포부로 출간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책들은 대부분 두껍고 복잡해서 써먹어야 할 때 기억이 안 나고, 결정적으로 잘 안 팔린다.</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얻은 단단한 깨달음 하나, 세상은 이야기가 지배한다. 단순한 구조의,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는, 짧은 이야기들. 교훈적인 우화들과 가슴을 적시는 수많은 미담들. 그 이야기들은 너무 쉽게 기억되고 매우 넓게 적용되며 아주 그럴싸해서 끊임없이 세상을 떠돌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들을 바라보는 강력한 관점을 제공한다.</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것이 내가 가끔이지만 꾸준히 우화를 창작하는 이유다. 그러니까 나를 짜증나고 분노하게 만드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대한 복수 같은 거다. 주먹에는 주먹, 이야기에는 이야기, 그런 거다. 그렇다고 해서, 너 따위가 몇 개 되지도 않는 이야기로 수천 년 동안 유통되어 온 이야기들과 맞서려는 것이냐고 책망하지는 마시라. 나도 안 된다는 것 알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이야기들 중 몇 개만이라도 살아남아 다른 많은 우화들처럼 작자 미상의 이야기로 세상에 떠돌다 적절한 상황에 적절하게 쓰이기를, 그리하여 오르지 못할 나무를 찍는 열 번의 도끼질 같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span></p> <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1년 늦은 가을<br /> 최규석<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1.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2.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3.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4.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5.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6.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C%9A%B0%ED%99%94%EC%A7%91-%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8.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28p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29p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30p_600.JPG" /><br /> <img alt="" width="600" height="82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B%B6%88%ED%96%89%ED%95%9C%20%EC%86%8C%EB%85%8431p_600.JPG" /><br /> <br /> <br /> (본문 &lsquo;불행한 소년&rsquo;편 전문)<br /> <br /> </span></p> --------------------------<br /> <strong>필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5"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A7%80%EA%B8%88%EC%9D%80%20%EC%97%86%EB%8A%94%20%EC%9D%B4%EC%95%BC%EA%B8%B0/%EC%B5%9C%EA%B7%9C%EC%84%9D%20%ED%94%84%EB%A1%9C%ED%95%84%20%EA%B7%B8%EB%A6%BC.JPG" />최규석<br /> </strong>1977년 지리산 자락 산골에서 건설노동자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대한민국 원주민』 참고). 전교생 백 명인 초등학교에서 &lsquo;ㄱ&rsquo;과 &lsquo;ㅏ&rsquo;가 붙으면 왜 &ldquo;가&rdquo;가 되는지 고뇌할 무렵 &lsquo;우리 주변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친구들&rsquo;(불우이웃)에게 우호적인 도시 어린이들이 보내준 철 지난 만화잡지를 통해 처음 만화를 접했다. 도시로 전학한 후 만화책을 보유한 친구들 집을 두루 방문하며 만화를 연구했고, 중고등학교에서 만화 좀 그리는 친구로 이름을 알렸다. 고3 초 미술학원 다니던 친구가 술 마시고 학교에 와서 같이 미술학원 다니자고 협박하여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때마침 4년제 대학에 처음 만화학과가 신설되었다. 공부를 잘했던 반장의 &ldquo;너를 위해 생긴 학과다&rdquo;라는 말에 혹해서 만화학과에 진학했으며(반장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던 나와 달리 정작 반장은 그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학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 늘상 만화만 생각하며 가난한 자취생활을 이겨냈다(『습지생태보고서』 참고). 1998년 「솔잎」으로 잡지사 신인만화 공모전 금상 수상하였으나, 논산에서 187번 훈련병 신분으로 건빵 맛의 비밀을 연구하느라 데뷔를 하지 못했다. 제대하면 정식 데뷔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상 줬던 잡지가 폐간되었다. 2002년「콜라맨」으로 권위 있는 공모전에서 대상 수상했으나 연재 제의가 없었다. 2003년「공룡둘리」라는 패러디 단편을 잡지에 게재, 꽤 유명해졌으나 여전히 연재 제의 없었다(2004년 첫 단행본『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펴냄). 2004년 &ldquo;습지생태보고서&rdquo;를 경향신문에 연재하며 처음으로 만화를 그려 고정수입을 얻자, 전업만화가로 살아갈 자신을 얻었다(2005년 『습지생태보고서』펴냄). 30세부터 현재까지 부천에 살면서, &lsquo;만화 안 내는 출판사&rsquo;에서 만화를 내는 뭔가 애매한 만화가로 지내고 있다.<br /> <br /> <br /> <object style="width: 640px; height: 390px"> <param value="http://www.youtube.com/v/xmw94SF34kQ?version=3&amp;feature=player_embedded" name="movie" /> <param value="true" name="allowFullScreen" /> <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embed height="360" width="640" allowfullscreen="true"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www.youtube.com/v/xmw94SF34kQ?version=3&amp;feature=player_embedded" allowscriptaccess="always"></embed></object><br />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2-01 오후 3:15:00《195》2010년 4월 28일<p style="text-align: right"><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195_%ED%91%9C%EC%A7%80.JPG" /></p> <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4</strong></span></span></span><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8</span>일</strong></span></span></p> <p>이후경의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실천문학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6</span>)를 읽다. - 이후경의 소설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이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중&middot;단편 가운데, 죽음을 피해 간 작품은 「낙원장」이 유일하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하겠지만, 이 작품 역시 섹스와 죽음을 한데 묶는 작가의 버릇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쉰을 넘긴 서울댁(엄영순)은 자신의 부정不淨 탓에 남편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간직한 채, 삼십 년 동안 금욕을 했다. 그녀의 남편은 택시 기사였는데, &ldquo;일 나가기 전의 부부관계&rdquo;는 이 세계의 금기였다. 새벽에 방사를 치르고 나간 남편은 윤화를 당했고, 서울댁은 &ldquo;금기의 원칙을 깨고 쾌락을 택한 응보&rdquo;로 금욕을 택한다.</p> <p>「폭설」의 두 주인공은 눈 덮인 해변의 민박집에서 섹스를 탐하고 난 뒤에 동반 자살을 하고, 「모독」의 조양숙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의 집으로 따라가 섹스를 하고 나서 그에게 교살당한다. 그 남자는 연쇄살인범이었다. 또 「바람의 무덤」의 은혜는 서른다섯에 잉태한 아이를 사산하는데, 만삭의 배는 봉분과 중첩된다.</p> <p>「저녁은 어떻게 오는가」의 예련은, 다섯 살 때 자살한 어머니의 시체와 사흘을 함께 보냈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섹스)을 피우는 남편에게 복수를 하고자 남편이 출장 간 틈에 독극물을 삼켰다. 엄마를 깨우기 위해, 아이는 춤을 췄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trong><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무리 불러도 깨지 않는, 낯설고 차가워진 엄마를 깨우기 위해 아이는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창으로는 보랏빛으로 저무는 하늘이 보인다. 아이는 어두워지는 하늘빛에 안도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까치발을 한 채 빙그르르 돌고 있다. 엄마는 발레 동작을 흉내내는 것을 좋아했다.</span></span></strong></p> <p><br /> 그녀에게, 이후의 삶은, &lsquo;죽음의 무도&rsquo;나 같았다. 대학교 시절 그녀는, 걸리는 대로 아무 남자의 품에 안겼고, 임신을 하게 되면, 떠나간 남자를 살해하듯 아이를 지웠다. 그러다가 이십대 후반에 염을 하는 남자와 함께 살다가 헤어졌고, 그때 낳은 딸을 외국에 입양시키기도 했다. 서른넷인 그녀는 &ldquo;시체 안치소&rdquo;와 같은 지하상가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하며 혼자 살고 있는데, 그녀의 액세서리 가게는 어울리지 않게 정육점과 붙어 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trong><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예련이 가져다 놓은 고급 액세서리들은 무심코 정육점에서 한 발을 더 들이민 주부들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어머머, 어쩌면 이런 물건을 고깃집 옆에서 팔아요? 그들은 육중하게 매달린 시뻘건 고깃덩이 옆에서 물에 풀어놓은 핏빛 같은 자주와 보랏빛의 귀걸이나 헤어핀을 샀다.</span></span></strong></p> <p><br /> 위 대목이 보여주는 이미지만큼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액세서리는 유혹하기 위한 장식물이자 섹스의 은유로,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은, 시뻘건 고깃덩이(죽음)와 지척에 있다. 하므로 간혹, 이런 손님이 찾아오는 일도 놀랄 게 아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청년은 조용히 묻는다. 스물아홉 된 발랄한 여자가 좋아할만한 액세서리는 어떤 건가요? 질문이 특이해 예련은 다시 되묻는다. 애인에게 선물하시는 건가요? 그 청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줍게 대답한다. 애인은 아니고, 혼자 좋아했던 선배였어요. 관에 넣어주고 싶어서요. 그의 말은 하도 스스럼없어 &lsquo;관&rsquo;이라는 단어가 실감나지 않는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span></strong></span>&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예련도 잠시 말을 잊고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연다. 좋아했던 분이 세상을 떠나셨나 봐요? 예련의 말에 그는 예련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던 그가, 머뭇거리며 말을 덧붙인다. 거기&hellip;&hellip;거기하고 아주 많이 닮았어요, 그 쪽이 좋아하는 걸로 골라 주세요.</span></strong></span></p> <p><br /> 중편 「과거 순례」에서도 섹스는 불륜과 불임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섹스는 배제와 죄의식을 낳는 불길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집에서 섹스와 죽음이 연관되지 않는 작품은 &lsquo;노동 열사&rsquo;의 남겨진 가족을 다룬 「낮달」뿐이다.</p> <p>섹스의 연장체로서의 죽음이나, 죽음의 극복으로서의 섹스는 종종 존재론에 가 닿지만, 이후경의 작품에서 섹스와 죽음이 연동되는 것은 배우자의 부정이나 배반이 원인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0</span>년대 이후의 여성 소설이 주로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당당하게 내세우면서 불륜을 정치화한 것과 달리, 이후경의 작품은 아직도 남성 가부장의 덫에 걸린 여성의 상처를 다루고 있다. 그것을 작심하고 보여준 작품이 「과거 순례」다. 서윤영은 마흔네 살이 되어서야 &lsquo;현모양처&rsquo; 이데올로기의 이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사정은, 그녀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 나오는 「폭설」과 「모독」에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두 작품에는 스무 살 먹은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그녀들의 주체성을 담지한 사람은 모두 남자다.</p> <p><span style="font-family: Verdana">90</span>년대에 나온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정치화하지 못한(혹은 않는) 특징과 함께, 소외에 대한 해결로서 가족(「낙원장」)과 고향(「모독」)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이후경의 특징이다.</p>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 <p>&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2-01 오전 10:49:00후즈의 ‘열다섯 살의 용기’<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81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EC%97%B4%EB%8B%A4%EC%84%AF%EC%82%B4%EC%9D%98%EC%9A%A9%EA%B8%B0%ED%91%9C%EC%A7%80.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6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22_%EC%97%B4%EB%8B%A4%EC%84%AF%EC%82%B4%EC%9D%98%EC%9A%A9%EA%B8%B0.jpg" /><br /> <br /> <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짐 크로 법과 지긋지긋한 숫자 10</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6600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클로뎃</span></strong></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백인 앞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네 살 무렵에 처음 알았어요. 잡화점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어린 백인 남자애가 내 앞으로 새치기를 했어요. 잠시 후 그 아이보다 조금 큰 아이들이 문으로 들어와 웃기 시작했어요. 나는 아이들이 뭘 보고 그러는지 주위를 둘러봤어요.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더군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린 남자애가 말했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손 좀 줘 봐. 나도 볼래.&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어쩐 일인지 아이들은 내 손을 보고 싶어 했어요.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펴 보였어요. 그랬더니 남자애가 자기 손을 내 손에 대보는 게 아니겠어요. 남자애 손이 내 손에 닿았죠. 나이 먹은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어요. 엄마가 우리를 봤어요. 그다음엔 우리를 빤히 보는 남자애 엄마를 바라봤죠. 이윽고 엄마는 가게 안을 가로질러 오더니 손등으로 내 얼굴을 때렸어요. 나는 눈물을 터뜨렸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엄마가 말했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백인이랑 닿으면 안 되는 거 몰라?&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남자애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어요.</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메리, 당신 말이 맞아요.&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다음부턴 절대로 백인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span></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러분이 클로뎃 콜빈처럼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앨라배마 중부에서 흑인으로 성장했다면 짐 크로 법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을 지배했을 것이다. 흑인 아기와 백인 아기는 서로 다른 병원에서 태어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 분리되어 살아가고, 죽어서는 서로 다른 묘지에 묻혔다. 법률, 간판, 칸막이, 화살표, 조례, 불평등한 기회, 규정, 모욕, 위협, 종종 폭력을 등에 업은 관습이 거미줄처럼 빽빽하고 면밀하게 얽혀 인종을 갈라놓았다. 그리고 인종 분리 정책을 아우르는 전체 체계를&nbsp; 짐 크로 법이라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24_%EB%B0%95%EC%8A%A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짐 크로 법의 목적은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는 것뿐 아니라 흑인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1950년에 앨라배마 주의 수도인 몽고메리 시에 사는 흑인 여성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은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했고, 일자리가 있는 흑인 남성 네 명 가운데 세 명은 잔디를 깎거나 다른 허드렛일에 종사했다. 흑인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백인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흑인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전문직은 흑인 교회 목사나 인종 분리 정책으로 흑인만 다니는 학교 교사뿐이었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1950년대에 몽고메리에서 제일 침례교회 목사로 일했던 랠프 애버내티가 당시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짐 크로 법 때문에 흑인은 백인과 함께 공부하거나, 놀거나, 식사를 하거나, 일하거나, 버스나 기차를 타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지 못했다. 흑인과 백인 시민은 서로 다른 식수대에서 물을 마시고,&nbsp; 서로 다른 화장실을 이용했다.&nbsp; 흑인과 백인은 한 팀에서 운동할 수 없었고,&nbsp; 결혼을 할 수도 없었으며,&nbsp;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할 수도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3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26_%EC%97%B4%EB%8B%A4%EC%84%AF%EC%82%B4%EC%9D%98%EC%9A%A9%EA%B8%B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흑인 시민의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규제하지 않는 인종 분리법도 있었지만, 버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다. 버스에 타는 건 고통이 멈추지 않는 치통에 걸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클로뎃 콜빈의 부모처럼 가정부나 정원 청소부로 일하는 흑인들은 백인 가정에서 날품을 팔고 푼돈을 벌었다. 몽고메리의 집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들은 백인 고용인의 집에 갈 때 버스를 타야 했다. 수많은 흑인 학생들도 어려서부터 환승 정류장과 시간표를 외워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흑인 학생들은 녹색과 황금색 버스들이 칙칙 소리를 내며 버스 정류장으로 들어와 문을 열 때까지 구석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장난치고, 벼락공부를 했다. 흑인들은 대부분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흑인 승객들은 버스를 타며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모든 승객은 앞문으로 탄 뒤 운전사 옆에 있는 요금통에 차비를 넣었다. 하지만 앞쪽의 백인 전용 좌석이 모두 비어 있지 않으면 흑인들은 버스에서 내려 뒷문으로 다시 타야만 했다. 때로는 미처 타지도 못했는데 버스를 몰고 가 버리는 운전사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애틀랜타나 내슈빌, 모빌 같은 남부의 다른 도시들에서는 흑인 승객은 뒷좌석에 앉고, 백인 승객은 앞좌석에 앉았다. 앞뒤 좌석이 모두 차면 가운데 좌석에 섞여 앉았고, 빈 좌석이 없으면 흑인과 백인 승객이 모두 서서 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몽고메리에는 독자적인 규칙과 전통이 있었다. 몽고메리 시내버스는 좌석이 모두 서른여섯 개였다. 앞쪽 네 줄에 열 명이 앉을 수 있었는데, 모두 백인 승객을 위한 자리였다. 매일같이 피곤에 지친 흑인 승객들은 앞쪽에 빈자리가 있어도 서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자리에 못 앉은 승객들로 붐비는 통로에서 짐과 어린아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몸싸움을 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앞쪽&nbsp; 열 좌석 뒤에 앉고 못 앉고는 운전사한테 달려 있었다. 운전사는 승객이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 살피려고 머리 위쪽에 달린 뒷거울을 계속 흘긋거렸다. 백인용 좌석 열 개가 모두 차면 운전사는 버스 중간과 뒤쪽에 앉은 흑인 승객들에게 새로 탄 백인 승객한테 자리를 양보하라고 지시했다. 백인 승객 한 명이 흑인 승객 네 명이 앉은 줄에 앉고 싶어 하면 운전사는 뒷거울을 흘낏 올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거기 모두 일어나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면 흑인 승객 네 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가야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흑인 승객이 나이가 많거나, 임신을 했거나, 환자이거나,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있거나 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또 시내버스 법률이나 조례에 따르면 1900년부터 흑인 승객은 옮겨서 앉을 자리가 없다면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운전사들은 말 한마디로 흑인 승객들의 자리를 옮기는 게 관례가 될 때까지 시내버스 법률을 다짜고짜 무시했다. 운전사는 자신이 일어나라고 말하면 흑인들이 일어날 거라고 기대했고, 흑인들은 실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 빈자리가 없다면 흑인 승객들은 그저 운을 탓해야만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28_%EB%B0%95%EC%8A%A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몽고메리 시티 라인즈 버스 회사는 거친 사람을 운전사로 채용했다. 그리고 몽고메리 시 조례는 버스 운전사에게 경찰권도 부여했다. 버스 운전사들은 고용된 첫날부터 자기의 주요 임무가 버스 운전 말고 짐 크로 법을 강제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운전사들도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빈자리가 뻔히 보이는데도 서 있어야 하는 건 우울하고 화가 치미는 일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빈자리 열 개는 피곤에 지친 흑인 노동자들에게 강박이 되었다. 흑인들 사이에서 숫자 10은 지긋지긋한 숫자였다. 아무도 10과 관련된 물건을 갖지 않으려고 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앨라배마 주립 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조 앤 로빈슨이 쓴 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흑인들은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인종 분리 정책의 야만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흑인 운전사는 없었습니다. 운전사가 흑인 승객들을 &lsquo;검은 젖소&rsquo;나 &lsquo;검은 원숭이&rsquo;라고 부르는 게 다반사였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마틴 루터 킹이 몽고메리 시내버스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동안 몇몇 흑인 승객들이 운전사의 횡포에 맞서기도 했다. 1946년에 저니버 존슨은 버스 운전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lsquo;말대꾸&rsquo;를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저니버 존슨이 소란 행위로 고발되어 벌금을 낸 뒤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바이올라 화이트와 케이티 윙필드가 백인 좌석에 앉았다가 체포되었다. 두 사람도 유죄를 선고받고 벌금을 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5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29_%EC%97%B4%EB%8B%A4%EC%84%AF%EC%82%B4%EC%9D%98%EC%9A%A9%EA%B8%B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1949년 여름, 뉴저지 주에 사는 열여섯 살 소녀 에드위너 존슨과 한 살 아래 남동생 마셜 존슨이 친척을 만나러 몽고메리에 왔다. 몽고메리에 머무는 동안 시내버스를 탄 남매는 백인 남자와 그 아들의 옆자리에 앉았다. 백인 아이가 마셜한테 다른 자리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기분이 잔뜩 상한 마셜은 백인 아이의 명령을 거부했다. 버스 운전사가 존슨 남매에게 뒷자리로 가라고 두 번 명령했지만, 남매는 꼼짝하지 않았다. 어떻게 뉴저지 주와 몽고메리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화가 난 버스 운전사가 경찰관에게 무전기로 연락했고, 경찰관이 다음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남매를 체포했다. 전화를 받은 친척이 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와 벌금을 내고 남매를 유치장에서 꺼냈다. 겁에 질린 존슨 남매는 바로 뉴저지 주로 돌아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더 험악한 경우도 있었다. 엡시 워디라는 여자가 환승역에서 추가 요금을 내지 않겠다고 하자 운전사가 욕을 마구 퍼부어 댔다. 엡시 워디가 추가 요금을 내는 대신 버스에서 내리는 쪽을 택했지만, 운전사는 쫓아와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엡시 워디가 운전사에 맞서 주먹다짐을 하자 운전사는 그녀를 때리면서 침을 뱉었다. 경찰관이 나타나 운전사와 엡시 워디를 떼어 놓은 뒤, 엡시 워디만 소란 행위로 입건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952년에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브룩스라는 남자가 시내버스에 올라 요금통에 동전을 넣고 통로를 따라 뒷자리로 가고 있을 때 벌어졌다. 운전사가 브룩스에게 앞문으로 내렸다가 뒷문으로 다시 타라고 소리를 질렀다. 브룩스는 차라리 걸어가겠다며 차비를 돌려 달라고 했다. 운전사는 브룩스의 요청을 거절했고, 말싸움이 심해지자 경찰관을 불렀다. 잠시 후, 경찰관이 버스에 올라와 브룩스한테 내리라고 했다. 브룩스는 차비를 돌려받기 전까지는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경찰관이 브룩스한테 총을 쐈고, 브룩스는 나중에 총상 때문에 사망했다. 조사관은 경찰관이 브룩스를 쏴 죽인 걸 정당방위로 판결했는데, 브룩스가 체포에 불응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32_%EC%97%B4%EB%8B%A4%EC%84%AF%EC%82%B4%EC%9D%98%EC%9A%A9%EA%B8%B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운전사한테 대든 승객들은 대개 경찰서로 연행되어 벌금을 내고 나온 뒤 치욕적인 경험을 잊으려고 했다. 어떻게 싸울 수 있을까? 백인 판사, 위협적인 경찰관, 무례한 운전사, 시도 때도 없이 죄어드는 관습과 법률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변화는 곧 일어날 것만 같았다. 1954년 5월 17일 월요일,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 위원회 소송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공립 학교에서의 인종 분리 정책을 위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짐 크로 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고, 남부 여러 주에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이 판결 이후 흑인 학생들은 그때까지와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용기를 내어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행동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 학생 가운데 열다섯 살 소녀 클로뎃 콜빈이 있었다. 클로뎃이 다니던 학교에서는 흑인 역사를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가르치고 있었다. 1955년 3월 2일 3시 30분경, 호리호리하고 안경을 낀 고등학교 3학년 클로뎃 콜빈은 친구 몇 명과 함께 하이랜드 가든스 버스에 올라 백인 전용 좌석 뒤의 왼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클로뎃은 무릎 위에 교과서를 올려놓고 파란 원피스의 주름을 편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섯 블록을 지나면 클로뎃은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클로뎃의 삶의 방향을 바꾸고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회 운동을 촉발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a target="_blank" href="http://philliphoose.wordpress.com/"><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44"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7%B4%EB%8B%A4%EC%84%AF%20%EC%82%B4%EC%9D%98%20%EC%9A%A9%EA%B8%B0/%ED%95%84%EB%A6%BD%20%ED%9B%84%EC%A6%88.JPG" /></a>필립 후즈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Phillip Hoose<br /> </strong></span>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에서 태어나 인디애나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에서 산림학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성인을 위한 작품을 썼지만, 딸들과 친해지려고 어린이&middot;청소년책을 쓰기 시작했다.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에세이, 논픽션, 어린이책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활약을 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유명하다. 딸과 함께 쓴 『안녕, 꼬마 개미』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8</span>년 제인 애덤스 어린이 도서상을 수상했다. 『우리 세상이기도 해요! - 세상을 바꾼 아이들』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4</span>년 크리스토퍼 상을 받았고, 『우리도 거기 있었어요! - 미국 역사 속 아이들』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1</span>년 전미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이 책 『열다섯 살의 용기』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년 전미도서상,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년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이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민석<br /> </strong>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뒤 청소년들에게 정의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을 찾아 소개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손도끼』『바람의 딸, 샤바누』『넌 자유롭니?』『내 사랑 옐러』『시타델의 소년』『모스 가족의 용기 있는 선택』『손도끼를 든 아이』『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990000">--------<br />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30 오후 1:27:00《194》2010년 4월 27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287559"><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C%A7%88%EC%8B%9D.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27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척 팔라닉의 『질식』(책세상,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2</span>)을 읽다. - 소설의 제목 <span style="font-family: Verdana">Choke</span>는, 주인공 빅터 맨시니가 벌이는 연기에서 따왔다. 그는 식당에서 음식을 먹다가, 음식물에 기도가 막힌 듯이, 의자에서 버둥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진다. 그러면 식당 손님 가운데 의사자 응급 처치법을 배운 사람이 있어 그를 구해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단조로운 일상에 짜릿한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영웅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기 위해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어머니에 그 아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가 이 짓을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은 누군가를 구해주면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누군가가 구해주면 그 사람이 살아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국의 오래된 풍습이 있다. 이제 그들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내게 편지를 쓸 것이다. 기념일에는 카드를 보내올 것이다. 생일카드를. 생명의 은인이 누가 되든 달라질 건 없다. 그들은 전화를 걸어와 내 기분이 어떤지, 내가 풀이 죽어 있지는 않은지, 혹은 돈이 필요한지 살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빅터 맨시니가 무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00</span>여 회가 넘는 &lsquo;질식&rsquo; 연기 끝에, 상당한 후원자를 모았다. 그는 그 돈으로 정신병원에 있는 예순두 살 먹은 어머니의 치료비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질식 연기를 하는 것은, 꼭 돈 때문만이 아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는 의과대학 이 년 차를 마쳤다.</p> <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 width="387" height="259"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C%B2%99%20%ED%8C%94%EB%9D%BC%EB%8B%89.JPG"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가 질식 연기를 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숱한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인데, 그에게 온갖 강박을 주입한 사람은 정신병원에 있는 그의 어머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커다란 호텔 로비에서 &lt;아름답고 푸른 도나우&gt;가 흐르기 시작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밖으로 뛰어나가야 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야 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만약 병원에서 플라밍고 간호사를 암 병동으로 호출하면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한다. 플라밍고라는 간호사는 없다. 불레이즈 박사를 호출해도 마찬가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커다란 호텔에 왈츠가 나오면 그것은&nbsp; 건물을 속히 비워야 하는&nbsp;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nbsp; 뜻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대부분의 병원에서 플라밍고 간호사는 화재, 블레이즈 박사도 화재, 그린 박사는 자살, 블루 박사는 환자의 죽음을 뜻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들은 진실을 밝히기 싫어서 늘 이런 식으로 말하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브로드웨이의 극장에서 &ldquo;엘비스가 빌딩을 나갔습니다&rdquo;라는 방송은 불이 났다는 뜻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식료품점에서 캐시 씨를 호출하는 것은 무장 경비원을 부르는 신호다. &ldquo;여성복 운송 확인!&rdquo;이라는 방송은 누군가 여성복 매장에서 좀도둑질을 했다는 뜻이다. 어떤 가게에서는 실라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ldquo;실라 씨는 프런트로 와주세요&rdquo;라는 말은 프런트에 좀도둑이 있다는 뜻이다. 캐시 씨나 실라나 플라밍고 간호사는 항상 나쁜 소식을 뜻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엄마는 시동을 끄고 한 손으로는 열두 시 방향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가락을 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면서, 아이에게 자기가 말해준 것들을 전부 외워보게 했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야. 이런 건 알아두면 나중에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rdquo;</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엄마는 다시 손가락을 딱딱 꺾었다. &ldquo;애먼드 실베스트리 씨?&rdquo; 엄마가 말했다. &ldquo;그를 찾는 방송이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rdquo;</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이야기는, 양부모와 살고 있는 초등학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학년생인 빅터 맨시니를 그의 어머니가 납치한 끝에, 경찰 헬리콥터의 추격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스쿨버스 속에서 들려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중에 어렴풋이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히피이거나 대안 문화의 세례를 받았던 &lsquo;꽃의 아이들&rsquo;의 세대다. 그녀가 입고 다닌 &lsquo;문제아<span style="font-family: Verdana">Troublemaker</span>'라는 문구가 씌어진 티셔츠가 암시하고, 또 위의 인용 가운데, 그녀가 아들에게 다그쳤던 &ldquo;더 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rdquo;라거나 &ldquo;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야&rdquo; 같은 가르침은, 그녀의 가치관이 기존의 것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했던 그녀는 몇 차례의 폭행 사건 끝에, 아이의 양육권마저 빼앗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강&middot;성공&middot;성적 매력 등의 미국식 가치에 저항했던 그녀는 납치한 아들과 여행을 하면서 &ldquo;이제 유일하게 남은 경계선은 개념, 소설, 음악, 예술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rdquo;이라고 강조하고, 또 &ldquo;세상을 창조해봐. 네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겠어. 너 자신만의 현실을 창조하는 거야. 너만의 법들도. 엄만 그런 걸 가르쳐주고 싶어&rdquo;라고 강요한다. 그 순간 빅터 맨시니는, 처음으로 &lsquo;질식의 예술&rsquo;을 떠올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실 이 멍청한 아이는 자기 자신, 자신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 한심한 꼬마 녀석은 엄마가 잡혀가서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 다음 식당에서 벌일 일의 계획을 벌써부터 꾸미고 있었다. 그는 모험에 지쳐버렸고, 그의 소중하고, 지루하고, 한심한 인생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이는 이미 안전, 만족과 엄마 중 하나를 선택하고 있었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계속해서 무릎으로 버스를 몰면서 엄마가 아이의 어깨를 꼬옥 움켜쥐고 말했다. &ldquo;점심은 뭘 먹을까?&rdquo;</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이는 어떤 악의도 없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ldquo;콘도그요.&rdquo;</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어머니와 함께 모텔을 전전하는 게 진력났던 빅터 맨시니는, 식당에서의 질식 연기로 납치된 자신의 존재를 식당 손님들에게 알린다. 한 번의 배반으로 어머니를 감옥에 보낸 그는, 현재의 나이인 스물네 살이 되기도 전에 섹스중독자가 된다. 섹스중독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치료 행위의 일부로 씌어진 &lsquo;자서전 쓰기&rsquo;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가히 &lsquo;강박증의 미국&rsquo;에 대한, 희극적인 보고서다(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lsquo;코미디&rsquo;로 분류되어 있다). 공동체보다 자아를 중시하는 미국 문화는 다른 어느 사회보다 온갖 강박증과 중독자를 양산하는데, 공동체를 중시했던 히피들마저 이 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 어느 대형 마트에서 &ldquo;오 번 계산대에 이십오 센트 동전이 필요하다&rdquo;는 방송이 나오면, 그곳에 예쁜 여자가 있으니 모두 와서 보고 가라는 뜻이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29 오후 2:25:00《193》2010년 4월 26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ist9&amp;logNo=10111387088&amp;parentCategoryNo=21&amp;viewDate=&amp;currentPage=1&amp;listtype=0"><img alt="" width="181" height="210" src="http://nabeeya.net/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C%84%B8%EA%B3%84%ED%9D%91%EC%9D%B8%EB%AC%B8%ED%95%99%EC%A0%84%EC%A7%91.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4월 26일</span></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밀턴 멜저의 『랭스턴 휴즈』를 읽으면서 같은 책 속에 언급된 흑인 시인들의 작품을, 마침 갖고 있는 『세계흑인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휘문출판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5</span>)에서 찾아보았다. 거기서 읽은 작품과 『랭스턴 휴즈』 말미에 번역자가 &lsquo;흑인시인 대표시선&rsquo;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놓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고, 짧은 인상기를 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랭스턴 휴즈』에 씌어져 있듯이, 그가 막 시인으로 이름을 떨칠 무렵은, 흑인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못 믿는 것만큼이나 흑인시인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문학에 재능이 있는 흑인들은 백인 문학을 통해서만 문학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생기는 문제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백인 언어에 위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런 교육과 문학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런 모순을 문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사회에서 안정된 신분을 갖고 높은 교육을 받은 흑인일수록, 백인의 생활양식과 문화에 동화되기를 원했다. 먼저 『세계흑인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에 실려 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M</span>. 카알 폴만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Mr. Z</span>」를 읽어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의 어머니의 검은 피부는 죄과의 표시라고 어릴 적부터 배운 그는<br /> 옷을 입을 때나 말할 때 있는 체모體貌를 다 갖추었다.<br /> 장학금으로 일류 학교를 다니었고<br /> 재즈와 흑인 성가는 싫어하고<br /> 매사에 흑인답지 않게 신중하며<br /> 말다툼에서 딜레마에 빠지면<br /> 언제나 단호히 고집을 부리고<br /> 무엇이든 앵글로색슨 적인 것은 모두 택하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역시 식성에 있어서도 그의 습관은 특이하였다.<br /> 쌍스런 돼지고기를 꺼려하고<br /> 포도주, 소오스, 샐러드의 애호가며<br /> 옥수수빵, 고구마, 채소즙은 그의 미각을 잃게 하였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가 키스할 사람을 택하는 데도 조심하였다.<br /> 그의 신부는 어떻게 보면 유대인 티는 없었지만<br /> 그녀의 눈은 늘 푸른색이었다.<br /> 어느 감독교회 목사는 그들을 어울리는 카멜레온이라 하였다.<br /> 국내외 어디서나 좋은 곳에 거주하였고<br /> 그들을 적대하는 장소는 늘 피하였다. <br /> 그의 산뜻한 말투나 검은 살결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의 <br /> 식사 초대는 아예 바라지도 않았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리하여 인종적인 중압의 장애를 안 받은 그는 <br /> 뿌리 없이 무성하는 허공에 뜬 초본草本과도 같았다.<br /> 남의 비위를 거스르는 단 하나의 일도 한 적 없이 죽을 때까지.<br /> 미묘하게 슬퍼하는 그의 미망인은 사망고시자死亡告示者들을<br /> 혹평할 수 있었으리라 - 졸렬한 말씨에 대해<br /> 다음과 같은 어구 변경을 주장하면서<br /> &ldquo;그는 그의 인종의 가장 저명한 사람 중에 한 사람&rdquo;이라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음은, &lsquo;흑인시인 대표시선&rsquo;에 나오는 르로이 존스의 「흑인 부르주아지」(이 시의 제목은, 곧바로 본문과 연결되는 본문의 일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라는 자는 금이빨을 하고 있고 오랜 시간<br /> 의자에 앉아 돈 생각만 하고 있다. <br /> 밀실에다가 하얀 실을 가진 사람 불러들여<br /> 기분을 내기 위한 기분을 샅샅이 음미한다<br /> 링컨(들)에 관한 꿈을 꾸고<br /> 그의 딸년의 머리칼을 쥐어뜯고<br /> 새끼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느라<br /> 열심히 일하며<br /> 레스토랑에서는 예의를 갖추어 이빨을 드러내고<br /> 하기 좋은 말만 지껄이되<br /> 세상사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br /> 그 대신 자기 자신에 대해서<br /> 자신이 흑인임에 대해 증오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교육받은 흑인 중산층은 백인의 일상과 언어를 습득하고자 했다. 그런 끝에 피부색은 어쩔 수 없지만, 영혼만은 백인이 되고자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는 곧 백인의 언어와 문학적 관습을 잘 터득하는 것이었다. 『랭스턴 휴즈』에서 &lsquo;정통적&rsquo;이라고 불린 카운티 컬렌 같은 시인이 그런 경우로 짐작된다. 이런 풍조에 반기를 든 것이 최초의 흑인 시인이 폴 로렌스 던바다. 그는 무식쟁이 흑인의 말투와 재즈의 스윙과 같은 비관습적 운율을 시 속에 도입했고, 랭스턴 휴즈는 그의 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시를 원어로 읽을 수는 없지만, 번역만으로도 랭스턴 휴즈의 구술성이나 파격적인 운율을 느낄 수 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4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D%95%A0%EB%A0%98%EB%A5%B4%EB%84%A4%EC%83%81%EC%8A%A4.JPG" /><br /> <br /> 흑인의 역사와 사회적 정체성을 흑인의 언어로 표현했던 던바류의 시들은 발표되자마자 &lsquo;실험적&rsquo;이라고 평가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흑인 문학의 주류가 되었다. 하지만 랭스턴 휴즈는 물론이고, 1920년대의 흑인 문화운동을 일컫는 &lsquo;할렘 르네상스(<span style="font-family: Verdana">Harlem Renaissance</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7</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5</span>. 대체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0</span>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지구 할렘에서 퍼진 민족적 각성과 흑인예술문화의 부흥을 가리킴)&rsquo;에 참여한 흑인 시인들을, 앞서 나온 흑인 중산층들은 좋아하지 않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시낭송이 끝났을 때] 어떤 흑인병사는 당신은 왜 문법적으로 틀린 말이며 엉터리 영어, 은어를 시어로 쓰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 있는 흑인병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당신의 시는 마치 무식한 흑인이 모든 흑인의 대명사처럼 생각하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랭스턴 휴즈』, 193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흑인 대중이 할렘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새로운 흑인 문학을 반기지 않은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흑인은 당대의 통속 소설이나 만화 속에서 늘 조롱거리의 대상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은 흑인이 저질렀거나 혹은 저질렀다고 전해지는 모든 범죄들을 물고 늘어져 화제를 만들었다. 또 많은 소설이 흑인을 야만적인 모습으로 희화화했고, 영화나 연극 또한 흑인을 광대나 혹은 무능하고 무식한 인물로 정형화했다. 때문에 흑인 중산층은 할렘 르네상스가 쏟아내는 실험적 시들이, 잊고자 하는 자신들의 상처를 헤집어 놓은 것으로 받아들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반응은 일반적인 흑인 대중만 아니라, 당대의 흑인 지식인들과 운동가들에게 더 심했다. 그들은 흑인의 형상이 어떤 모습으로 활자화되는가에 대해 대단히 민감했고, 특히 흑인 비평가들은 흑인의 밝은 면과 성공을 거둔 중산층 흑인의 생활상만 내보여지기를 원했다. 이 대열의 선두엔,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랭스턴 휴즈가 어린 시절부터 흑인 지도자로 존경해 온 듀 보이스 박사가 있었다. 기성의 흑인지식인들이 새로운 흑인 문학에 찬물을 끼얹자, 랭스턴 휴즈는 흑인 문학의 &lsquo;독립선언서&rsquo;나 같은 글을 &lt;네이션&gt;과 &lt;피츠버그 쿠리에&gt;에 기고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흑인청년 예술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무엇인가? 내 생각으로는 문제가 복잡할 게 없다. &lsquo;백인이었으면&rsquo; 하고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굴종하는 예술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자는 것이다. &lsquo;왜 내가 백인이기를 원하는가?&rsquo; 나는 흑인이며, 그것도 위대한 흑인이다&rsquo;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흑인민중들의 열망을 예술로 되돌려놓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래서 나는 니그로 시인이 흑인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시인이 되더라도 &lsquo;흑인적인 것은 싫다&rsquo;라고 말할 때 수치를 느낀다. 또한 나는 흑인화가가 니그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백인들의 화풍을 거역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아카데믹한 수법으로 일몰풍경이나 그리는 것을 볼 때 수치를 느낀다. 예술가는 그의 예술과 관련하여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하고, 그리고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아무런 두려움도 가져서는 안 된다. (상동, 122~123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내 유일한 두려움은 우리 흑인비평가들이 나에게 가한 적대적인 비평 태도가 혹시나 다른 젊은 흑인시인․소설가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 관해 쓰지 못하도록 위협을 주는 게 아닐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한 예술가가 창조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지속성을 갖는 예술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에 기초를 둘 때 이루어진다. 만약 내가 뉴욕사회 중에서도 상류층이 사는 밴더빌이나 굴드, 또는 파크 애비뉴의 사교계에 관해 쓴다면 그것은 확실히 내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지역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흑인생활의 비참한 실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방식대로 써왔다. 적어도 흑인의 3분의 2는 하층계급에 속해 있고 나 역시 그들과 같다. 그런데 어째서 내가 이들에 관해서 쓰면 안 된단 말인가? 상류계급에 관해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상류계급에 관해 쓰게 하라. 나는 이 책에서 내가 흑인생활의 어떠한 측면들을 그려내고자 하는가를 분명히 밝혔다. 내가 흑인생활을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따위의 비판은 어이없는 일이다. 흑인생활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 정당한 비평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본다. 내게는 내가 원하는 흑인생활을 그려낼 권리가 있다. (상동, 124~125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흑인 문학사의 흐름은 결국 할렘 르네상스 기간에 뿌려진, &lsquo;흑인성 회복&rsquo;으로 결말이 났지만, 할렘 르네상스 초기의 새로운 흑인 문학운동은 흑인 엘리트 지식인보다 오히려 백인 독자들과 후원자의 지지를 받았다. 일례로 랭스턴 휴즈의 청년기는 삶과 문학 양면에서 백인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았다(하지만 백인의 지원이 모두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8</span>년에 만났던 돈 많은 백인 미망인 러퍼스 오스굿 메이슨은 거의 &lsquo;검열관&rsquo;처럼 굴면서, 랭스턴이 흑인성에 입각한 저항적 시를 쓰기보다 &lsquo;천진난만한 시&rsquo;를 계속해서 쓰기를 원했다. 백인에게 흑인은 &lsquo;본능적이기만 한 어린애&rsquo;여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흑인성이란 자신의 역사와 사회적 정체성 그리고 자신의 언어를 자각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흑인사는 물론이고, 흑인 문학은 자신에 대한 존중만 아니라, 미국인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을 수긍해야 한다. 미국인이면서 흑인이라는 두 개의 영혼, 두 개의 사고방식, 화해할 길이 없는 두 개의 생존방식. 흑인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연․노동․신앙․국토에 대한 예찬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흑인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에 실려 있는<span style="font-family: Verdana"> D. W.</span> 컨논의 「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는 &lsquo;미국인이기는 하지만 흑인&rsquo;이라는 이중성의 찢어진 틈을 보여준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에게 주어진 오직 마흔 에이커의 토지!<br /> 그리고 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br /> 하늘을 핥는 큰 소나무들,<br /> 그 위에 호두나무와 치솟는 참나무들!<br /> 그리고 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모든 것이 지금 막 끝난 것처럼<br /> 나는 그것들을 다만 소박한 것으로 볼 뿐.<br /> 마흔 에이커의 토지와 노새 그리고 쟁기-<br /> 네 식구에 알맞은 크기의 오두막,<br /> 나의 집 문 앞을 수놓는 화원,<br /> 그리고 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리곤 우물을 깊게 파야겠다<br /> 시원한 물이 넘쳐 흐르게,<br /> 이번엔 교회를 세우고<br /> 다음엔 학교를 지으련다.<br /> 주여, 이런 일들이 보람 있는 일이 못 된다면<br /> 저희들을 곧장 하늘나라로 인도하옵소서,<br /> 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의 나라로.</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dquo;네 식구&rdquo;가 있고, 곧 &ldquo;교회&rdquo;와 &ldquo;학교&rdquo;를 짓는다고는 하지만, 그런 다짐은 신에게 올리는 기도 속에만 있을 뿐, 이 시에는 아무런 사회관계가 없다. 시적 화자의 자유가 가치로 드러나야 할 장소는 원래 사회이지만, 이 시에는 처음부터 사회가 없다. &ldquo;마흔 에이커&rdquo;와 &ldquo;나의 집 문 앞&rdquo;을 벗어나 보지 못한 그는 한번도 부자유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 자유라는 개념을 얻어올 수 있었고, 그것이 &ldquo;영혼&rdquo;의 대체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을까?&nbsp;시의 마지막 행 &ldquo;나의 영혼에 깃들인 자유의 나라로&rdquo;가 확연히 보여주듯이 흑인의 자유는 그것이 꼭 필요한 사회에는 없고, 영혼에서만 가능하다.&nbsp;이런 추상성과 선험성에로의 도피는, 미국인과 흑인이라는 봉합되지 않는 이중적 자아에 짓눌린 흑인 시인의 처지를 드러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랭스턴 휴즈』 속에 &lsquo;정통적&rsquo;인 시인으로 불린 카운티 컬렌에 대한 부연이 있어야 한다. 랭스턴 보다 한 살 아래인 그는 고등학교 시절 이미 명성을 얻었고, 할렘의 시낭송회장에서 랭스턴과 만났을 때는 뉴욕대학교 학생이었다. 밀턴 멜저는 두 사람을 비교하면서 &ldquo;휴즈가 실험적이라면 컬렌은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기질과 스타일 면에서 서로 대조적이었으나 둘의 이름은 이미 새로운 시인들 중에서도 쌍둥이별처럼 함께 빛을 발하고 있었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96</span>쪽)고 쓰고 있다. 그런데 『랭스턴 휴즈』 말미의 &lsquo;흑인시인 대표시선&rsquo;에 실린 그의 시 「어떤 비평에 대하여」를 보면, 실험적 시들이 기성의 흑인 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당했던 만큼, 그 역시 흑인성을 표나게 들고 나온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모양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꼭 그래야 하겠거든 배신자라고 부르거라<br /> 모반을 꾀하고 딴짓을 했다고 외치거라<br /> 이 세상에 대해 모른 체하며 한눈을 팔고<br /> 신성한 약속을 어겼다고 말하거라<br /> 너희들이 떠드는 것과는 유를 달리하는<br /> 내가 부르는 이러한 노래의 창법을<br /> 그 누구도 막지 못할 것이리라</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종이 다르다는 것을 떠들어 슬픔이 줄어드는가<br /> 고통을 읊는 것이 무슨 성스러운 일인가<br /> 슬픔을 노래했자 답답하기만 할 뿐<br /> 아무 말도 안 하느니만 못한 노릇이다<br /> 눈이 먼 양羊들이 언덕마다<br /> 괴상한 것만 찾아 날뛸 적에<br /> 목동인들 어찌 특별히 마음을 쓸 것인가<br /> 오직 검정 양 새끼에 대해서만</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의 시에서 카운티 컬렌은, &lsquo;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흑인의 시&rsquo;가 &ldquo;검정 양&rdquo;(특수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작은 더 많은 &ldquo;눈이 먼 양&rdquo;(보편성)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다시 말해 「어떤 비평에 대하여」만 보면 그가 흑인성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흑인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에 실린 「조그만 사건」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찌기 그 옛날 발티모어에서 차를 타고<br /> 기쁨에 가슴이 넘치고 머리도 넘쳐<br /> 내 보았느니, 한 발티모어 사람이<br /> 나를 오래 정시正視하는 것을.</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때는 내 나이 여덟, 아주 작았었다.<br /> 또 그 역시 별로 크지 않았다<br /> 그래 내 미소를 띠웠더니 그는<br /> 혀를 내밀며 나를 불러 &lsquo;검둥이&rsquo;라 하였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발티모어를 두루 살펴보았네.<br /> 오월서부터 섣달까지<br /> 거기서 내 당한 일 중에는<br /> 내 기억에 남은 것은 그것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시인 자신일 게 분명한 이 시의 시적 화자는, &lsquo;여덟&rsquo; 살 때 발티모어를 여행했던 경험을 털어놓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백인 소년을 향해 &ldquo;미소를 띠웠더니&rdquo; 돌아온 것은 &ldquo;검둥이&rdquo;라는 놀림이었다는 것. 시인은 그때 겪었던 사건을 &lsquo;조그만 사건&rsquo;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여덟 살 때 겪었던 저 사건이 제목처럼 조그맣지 않다는 것은, 가장 마지막 구절 &ldquo;내 기억에 남은 것은 그것뿐&rdquo;이, 아프게 역설하고 있다. 그에게 붙은 정통적이라는 꼬리는 흑인성을 표내거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일 뿐, 흑인으로서의 자각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lsquo;정통적&rsquo;이라고 해서, 펜으로 백인의 비위를 맞추어주는 줏대 없고 비굴한 또 한 명의 &lsquo;엉클 톰&rsquo;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이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들춰 본 김남조의 『그래도 못다 한 말』(상아출판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6</span>)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ldquo;흑인 시집은 그 시정이 처참하고 아픈 맥박으로 숨 가빠 있긴 했지만 시기법<span style="color: #003300"><sub><sup>詩技法</sup></sub></span>은 확실히 뒤떨어져 있었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1</span>쪽) 아마 그 시집이 『세계흑인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일듯한데, 소위 그 시절의 문협 정통파 수준에 비추어, 거기에 실린 흑인 시인들의 시가 뒤떨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http://nabeeya.net/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25 오후 6:06:00프라우언펠더의 ‘내 손 사용법’<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img alt="" width="600" height="86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B%82%B4%20%EC%86%90%20%EC%82%AC%EC%9A%A9%EB%B2%95/%EB%82%B4%EC%86%90%EC%82%AC%EC%9A%A9%EB%B2%95%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 문</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003300"><strong><br /> <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라로통가로 도망치다</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003300"><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실 세상 어디를 가나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는 단 하나, 도망치는 이야기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두의 관심을 사로잡는 유일한 주제는 도망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br /> &mdash;A. C. 벤슨</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2003년 새해 첫 날 아내 칼라와 나는 캘리포니아주 스튜디오시티에 있는 작은 커피숍 안마당에서 각자 공책을 펼쳐놓고 펜을 쥔 채 앉아 있었다. 우리 부부의 연례행사인 신년 계획 세우기를 위한 자리였다. 이럴 때는 보통 행복하고 낙관적이게 마련이다. 전엔 일본어 배우기, 어휘력 늘리기, 요리 실력 쌓기, 책 출간 계약 같은 목표들을 세웠다. 그런데 2003년에는 달랐다. 2001년에 기어이 터져버린 닷컴 거품 붕괴의 여파로 우리는 둘 다 암담한 심정이었다. 내 거래처였던 &lt;인더스트리 스탠더드&gt;라는 잡지는 인터넷 기업을 다루다가 덩달아 문을 닫았고, 글을 기고하던 다른 기술 관련 잡지들도 이미 간판을 내렸거나 오늘내일하는 처지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리랜서 저널리즘 시장이 통째로 구렁텅이에 빠진 형국이었고, 잡지에 글 쓰는 걸 업으로 삼아온 우리 부부도 함께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lt;인더스트리 스탠더드&gt;는 불과 이태 전인 2000년만 하더라도 무려 400쪽에 달하는 지면을 자랑했으며, 높은 단가에도 불구하고 광고가 줄을 서는 잘나가는 주간지였다. (지금도 1년 최다 광고판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기증이 날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던 그 시절엔 잡지의 그 많은 지면을 채울 글이 절실했고 그만큼 높은 보수를 지불했다. 오래된 스톱모션 괴수영화, 왕년의 SF 만화가, 연에 카메라를 부착해서 항공촬영을 하는 플라이캠 애호가들까지, 글의 주제도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굉장한 시절이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담당 편집자가 묻는 질문은 하나뿐이었다. &ldquo;언제까지 써주실 수 있나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2001년에 접어들면서 애초에 지속 불가능한 사업계획을 가지고 시작했던 인터넷 회사 수백 곳(이를테면 코즈모닷컴, 덴닷넷, 펫츠닷컴, 플루닷컴, 웹밴닷컴, 부닷컴, 이토이스닷컴)이 수억 달러를 날려서 투자자들을 기절하게 만들고 나스닥을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그러고 나니 잡지에 광고를 실을 회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400쪽을 내던 &lt;인더스트리 스탠더드&gt;는 64쪽도 간신히 채우는 팸플릿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 잡지가 곧 막다른 골목에 봉착하리라는 건 뼈저리게 명백한 사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해 8월의 어느 날 아침, &lt;인더스트리 스탠더드&gt;의 담당 편집자로부터 다른 채권자들 틈에 끼어 기다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마지막 결재 청구서를 보내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받을 금액의 일부라도 건진 채권자라면 그나마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2억 달러를 날린 잡지는 결국 파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도 우리는 호시절을 누린 거예요.&rdquo; 담당 편집자는 이렇게 말했는데 말인즉슨 맞는 말이었다. 원고료를 받아 아이 학비와 주택담보 대출금을 냈고 아이를 하나 더 키우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으며 조만간 둘째가 생기길 기대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런 상황이 터졌고 큼직한 파이프로 흘러 들어오던 돈이 졸졸 흐르는 수준으로 줄어들자 비로소 현실을 실감하게 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t;인더스트리 스탠더드&gt;의 부고를 접한 후 며칠에 걸쳐 다른 잡지에 전화를 걸어봤다. 다들 똑같은 말을 했다. 원고가 잔뜩 쌓여 있고 글을 의뢰하더라도 예전 같은 고료는 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안락했던 우리의 삶이 폭삭 주저앉는 것 같았다. 일주일에 며칠씩 레스토랑의 음식을 사다 먹고, 하와이로 휴가를 가고, 여덟 달에 한 번꼴로 노트북을 바꾸고,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열대우림 같은 마당을 일주일에 한 번씩 정원사의 손에 맡겼던 생활은 끝났다. 쉴 새 없이 현관을 들락거리던 택배기사와도 이별이었다. 살림의 규모를 대폭 줄여야 했다. 그렇게 한두 달이 흐르면서 일은 꾸준히 줄었고, 인터넷 거품이 조만간 다시 부풀어오를 가능성이 없다는 게 명백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칼라와 커피숍에서 마주앉아 지난 몇 달간 토막난 수입으로 생활하며 만지작거렸던 급진적인 생각들을 진지하게 의논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돈을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아닐까? 앞으로 포기하고 살아야 할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과연 우리가 이런 환경에서, 포장되어 팔리는 오락거리를 사고 테마파크의 놀이기구를 타고 쇼핑센터에서 기분전환을 하고 교통체증에 속수무책으로 갇히고 이메일은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보다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더 나은 방식을 찾아나서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세 가지 목표를 정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trong><span style="color: #003300"><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좀 더 주체적인 인생을 살자.<br /> 2. 도시 생활의 부조리한 무질서를 타파하고, 단순하고 솔직하고 명료한 방법을 모색하자.<br /> 3.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소통하자.</span></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적어놓고 보니 꽤나 근사했지만 이 목표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신년 연휴가 끝나면 새로운 삶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노력은 현실적인 필요와 도시의 지배력 앞에 무릎 꿇을 테고, 결국 카페인을 과다섭취하며 학교와 직장과 운전과 외식의 쳇바퀴를 돌고, 주말이면 어린이 카페에서 열리는 아이들 생일잔치에 불려다니는 기존의 삶으로 고스란히 복귀할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다 누구의 입에서 먼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모든 걸 내버리고 라로통가로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B%82%B4%20%EC%86%90%20%EC%82%AC%EC%9A%A9%EB%B2%95/%EB%83%84%EB%B9%8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로통가는 쿡 제도에 속한, 남태평양의 외딴 섬이다. 양끝의 길이가 10킬로미터에도 채 못 미치며, 크기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약 1/5이다. 1994년에 라로통가에서 일주일을 지냈던 칼라와 나는 사람들의 느긋함과 울창한 열대우림, 그리고 천혜의 아름다움에 매료됐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로통가의 삶은 훨씬 단순했다고, 우리는 회상했다. 사람들은 많은 걸 기대하지 않았고, 그래서 작은 것에도 만족했다. 삶의 초점을 출세에 맞추지 않았고, 자연과 교감하며 음악과 음식과 춤과 수공예품을 나눴다. 눈부신 야생의 자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 아름다운 기후를 지닌 라로통가는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거기에 이국적인 매력까지 더해졌다. 대륙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남태평양 한복판에 에메랄드처럼 박힌 점 하나. 그곳 사람들이 &ldquo;라로 타임&rdquo;이라고 부르는 느긋한 속도에 맞춰 흘러가는 삶.</p> <p style="text-align: justify">여행 작가인 아서 프로머(Arthur Frommer)는 라로통가를 타히티의 무레아와 보라보라에 이어 남태평양에서 세 번째로 아름다운 섬으로 꼽았고, 제임스 미치너(James Michener)는 아름다움과 날씨, 원주민의 친절함 등에서 타히티를 능가한다고 평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리든 커다란 물건을 단 벌거숭이 탕가로아 신의 목상이 보였던 것 역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탕가로아 신은 심지어 꽃 모양의 동전에까지 등장했다. 훨씬 늘쩍지근한 하와이 훌라에 익숙했던 19세기의 한 선교사는 엉덩이를 빠르게 돌리며 선정적인 몸짓을 하는 라로통가의 춤을 &ldquo;단연코 음탕하다.&rdquo;고 묘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로통가에 다녀온 후 우리는 어쩌다 한번씩 농담처럼 그곳에 가서 살자고 얘기하곤 했다. 물론 열대의 섬은 현대인의 몽상에 흔히 등장하는 배경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교통체증이 없고 빵빵대는 자동차 경적소리도 없고 매연을 뿜어대는 사륜구동도 없고 가벼운 접촉사고에 핏대 올리며 싸울 일도 없으며 번잡한 간판과 뚜뚜따따 시끄러운 라디오 토크쇼, 거리의 낙서, 그 밖에 도시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수많은 위해요소가 없는 목가적인 섬에서의 삶을 꿈꾼다. 하지만 대부분은 금세 머릿속에서 환상을 털어낸다.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간다고 쳐도 그다음엔 어떻게 살 건데? 일자리는 찾기 힘들고, 과일 따고 물고기 잡아서 먹고는 산다지만, 아무리 규모를 줄인다고 해도 살 집을 구하고 옷가지와 기타 필요한 것들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2003년 새해 첫 날 칼라와 나는 실제로 라로통가에 가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프리랜서니까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고, 라로통가라면 로스앤젤레스 외곽보다 생활비가 덜 들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이라도 파라다이스 같은 섬에서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아이 봐주는 집에서 아이를 데려와 냉동 마카로니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식탁에 올려놓는 대신 망고와 빵나무 열매를 따고, 농부가 직접 키운 토란과 코코넛을 사고, 물고기를 잡아서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느라 허덕이는 대신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살 수 있을 거야.</p> <p style="text-align: justify">얘기를 할수록 말이 됐다. 나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라로통가에서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인터넷은 있었다. 느리고 비쌌지만, 그래도 그걸로 일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섬 생활에 대한 글을 쓰고, 잘하면 그 글을 엮어서 책으로도 낼 수 있어. 일단 1년쯤 살아보고 괜찮다 싶으면 더 사는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문제는 &ldquo;그럼 언제 떠날까?&rdquo;였다. 서리나가 유치원을 마치는 6월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때면 둘째(4월 1일이 예정일이었다.)도 칠십 일 정도 됐을 테니까. 그렇다면 준비할 시간은 다섯 달뿐이었다. 우리는 라로통가로 떠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집 팔기<br /> 2. 자동차 팔기<br /> 3. 신생아를 섬에 데려가는 것에 대해 소아과 의사와 상담하기<br /> 4. 아기 여권 만들기<br /> 5. 두고 갈 물건들을 포장해서 창고에 보관하기<br /> 6. 앵무새와 토끼 맡아줄 사람 구하기<br /> 7. 서리나의 교육 문제 알아보기<br /> 8. 자동차 보험, 인터넷, 수도, 도시가스, 신문 끊기</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그다음에는 챙겨갈 이삿짐 목록을 적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기 담요<br /> 아기 젖병<br /> 모유 유축기<br /> 자동차 시트<br /> 컴퓨터<br /> 컴퓨터 배터리<br /> 컴퓨터 게임<br /> DVD 플레이어와 DVD<br /> 체온계<br /> 헤어드라이어<br /> 모자<br /> 모기장<br /> 모기 퇴치 스프레이<br /> 고무 젖꼭지<br /> 아기 놀이울<br /> 휴대용 프린터<br /> 휴대용 라디오<br /> 유모차<br /> 자동차나 아기 놀이울에 칠 햇볕 가리개<br /> 선크림(일반용과 유아용)장난감<br /> 우쿨렐레<br /> 비디오카메라<br /> 전압 변환용 플러그<br /> 무전기</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시간이 흐르면서 목록은 점점 늘어났다. 계속 늘어났다. 도저히 더 단순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의 목록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건 차라리 우리가 도망치려던 문명의 이기를 간추린 카탈로그 요약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돌이켜보면 그 목록에는 모기장, 선크림과 함께 파멸의 씨앗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B%82%B4%20%EC%86%90%20%EC%82%AC%EC%9A%A9%EB%B2%95/%EB%83%84%EB%B9%8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쿡 제도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하려는 모험을 이미 시도했던 도시내기들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스물네 살이던 1920년에 남태평양으로 떠난 클리블랜드 출신의 로버트 딘 프리스비(Robert Dean Frisbie)가 쓴 책도 여러 권 읽었다. 프리스비는 몇 해 동안 여러 섬을 전전하다가 &ldquo;소란스러운 문명 세계의 희미한 메아리조차 들려오지 않을 곳&rdquo;에서 살겠다며 쿡 제도 북단의 푸카푸카 섬에 정착했다. 프리스비는 그곳에 교역사무소를 차려놓고 총 열두 권에 이르는 남태평양 전원생활에 대한 회고록과 소설의 첫 책을 집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말년에는 뉴질랜드의 선원이었다가 라로통가의 수도인 아바루아의 잡화점에 일자리를 구한 톰 닐(Tom Neale)과 친구가 되었다. 프리스비처럼 닐도 문명의 소음과 혼란을 벗어나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섬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프리스비(당시 만성호흡기 질환으로 거의 누워만 있었다)는 닐에게 조그만 무인도인 수와로우 섬에 2차대전 때 지어진 초소용 오두막이 있으니 거기서 살아보라고 권했다. 닐은 물고기를 잡고, 닭을 치고, 밤이면 내려와 텃밭을 파헤치는 멧돼지를 사냥했다. 고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섬 생활은 행복했고, 그는 그 섬을 들락날락하며 16년 동안 살았다. 그의 회고록 『혼자만의 섬(An Island to Oneself)』은 수와로우 섬에서의 생활을 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닐과 프리스비의 책들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책을 읽고 나니 얼른 라로통가에 가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두 사람의 삶과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다르다는 건 깨닫지 못했다. 닐과 프리스비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건과 설비를 직접 만들고 수리했지만, 칼라와 나는 라로통가에서도 여전히 필수품과 사치품을 전부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삶의 방식을 바꾼 게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땐 그걸 몰랐다. 섬에 가서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다 보면 우리도 어영부영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다섯 달 동안 목록대로 일을 처리했다. 집을 팔고, 가구를 창고에 맡기고, 자동차를 팔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다. 흥분되는 시간이었고, 다른 얘기는 거의 하지도 않았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 계획과 희망과 두려움을 얘기했다. 친구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가끔은 친구들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 땅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런데 한 가지, 그곳에 간 다음에 뭘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리나는 파도가 밀려와 고인 물웅덩이에서 놀고 둘째가 아기용 그물침대에서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언덕과 해변을 산책하고 야자수 밑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것 외에는 딱히 계획이랄 게 없었다. 어쩌면 아이들의 놀이 계획과 학교와 그 밖에 스트레스를 높이는 온갖 사회적 책임들로 짜여진 정신없는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아무 계획도 없다는 게 매력적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새 출발하는 날이 다가왔다. 친구인 리즈와 크레이그가 마지막 마무리를 도와주러 왔다가 현관에 늘어놓은 엄청난 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큼지막한 여행 가방이 여덟 개, 우리 둘이 하나씩 들고 탈 기내용 가방 두 개, 거기에 유모차와 휴대용 요람과 아기용 자동차 시트. 공항에 가려면 택시를 두 대 불러야 했다. 한 대에는 우리 넷이 탔고, 다른 한 대에는 짐을 실었다. (남태평양에서 사는 내내 이 짐들은 우리를 붙들어 매는 닻이 되었다. 칼라는 신발을 열세 켤레나 챙겨갔지만 정작 하나도 신지 않았다. 라로통가에서 산 2달러짜리 플립플롭을 신거나 아예 맨발로 다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12시간의 비행 끝에 바다 쪽으로 길이 나 있는 라로통가의 작은 공항에 내렸다. 공항이라고 해봐야 활주로 한 줄과 단층 건물 하나가 전부였다. 건물에는 파란색과 흰색으로 &ldquo;쿡 제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dquo;라고 쓴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입국심사대 옆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꽃무늬 셔츠를 입고 우쿨렐레를 치며 우리를 환영했다. 한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솜털 같은 흰 구름이 흘러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흘 동안 이어진 폭풍우를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커다란 밴을 구해서 우리도 타고 기적적으로 짐까지 전부 실은 다음, 집을 구할 때까지 임시로 지낼 리조트의 방갈로로 향했다. 밴에 앉아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본 지 2분이나 채 지났을까. 우리가 품었던 섬에 대한 환상이 말끔히 지워졌다. 창밖에는 유조차와 정유소와 창고가 길게 이어졌고, 중심가는 자동차와 요란한 스쿠터로 길이 꽉 막혀 있었다. 어디를 보나 돌보지 않고 방치해놓은 꼴사나운 풍경이 펼쳐졌다. 녹슨 기름통, 허물어진 콘크리트 담장, 삐쩍 마른 몸에 혀를 빼문 채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들이 눈에 들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전에 왔을 땐 이런 걸 봤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때라고 없지는 않았겠지만 스쳐가는 관광객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겠다고 와보니, 디젤 매연 냄새가 진동하는 밴이 지나는 길엔 창문이 떨어지고 지붕은 썩었으며 문짝 대신 찢어진 커튼만 휘날리는 집들이 즐비했다. 다섯 달 동안의 낭만적인 생각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한 가지 의문이 피어올랐다.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제일 먼저 떠오른 본능적인 생각은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 그대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우리에겐 오픈항공권이 있었고, 그건 마음 내킬 때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이만저만한 망신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없을 터였다. 게다가 계획과 준비에 쏟은 지난 몇 달의 시간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짓이었다. 그대로 돌아갈 경우 우리가 믿게 된 꿈을 포기한다는 뜻이 된다는 게 가장 최악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작은 방갈로 앞에 내렸을 땐 하늘이 짙은 회색빛이었다. 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때맞춰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잠투정이 나서 칭얼대던 서리나는 바람이 휘몰아치는 바닷가에 가자고 보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B%82%B4%20%EC%86%90%20%EC%82%AC%EC%9A%A9%EB%B2%95/%EB%83%84%EB%B9%84.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라로통가에서 사는 게 끔찍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지 우리가 찾으려 했던 것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뭘 찾으려는 건지 우리도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로스앤젤레스 탓으로 돌렸던 우리의 문제들은 고스란히 우리를 따라&nbsp;라로통가 행 비행기에 올랐다. &nbsp;알고 보니,&nbsp; 우리가 문제였다.&nbsp; 그건 지상낙원으로 떠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257" height="266"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B%82%B4%20%EC%86%90%20%EC%82%AC%EC%9A%A9%EB%B2%95/%EB%A7%88%ED%81%AC%ED%94%84%EB%9D%BC%EC%9A%B0%EC%96%B8%ED%8E%A0%EB%8D%94.JPG" />마크 프라우언펠더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Mark Frauenfelder<br /> </strong></span>실리콘밸리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IT </span>전문 칼럼니스트, 블로거, 엔지니어, 디자이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IT </span>버블이 꺼지면서 본격적으로 생태적이고 대안적이면서 즐거운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한 달 조회수 500만 건을 자랑하는 인기 블로그 보잉보잉닷넷(<a target="new" href="http://www.boingboing.net"><span style="font-family: Verdana">boingboing.net</span></a>)의 설립자이자, 전 세계적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DIY </span>운동을 주도하는 잡지 &lt;메이크&gt;의 편집장이다. &lt;마사 스튜어트 쇼&gt;와 &lt;콜버트 리포트&gt; 등에 출연했으며, &lt;뉴욕타임스&gt;와 &lt;파퓰러 사이언스&gt;, &lt;할리우드 리포트&gt;, &lt;<span style="font-family: Verdana">CNN</span>&gt;, &lt;비즈니스<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gt; 등에 글을 썼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DIY</span>를 실천하며 살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강수정<br /> </strong>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토스카나의 태양 아래서』『가짜 논리』『마지막 기회라니?』『길버트 그레이프』『신도 버린 사람들』『베아트릭스 포터의 집』『우리 시대의 화가』『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보르헤스에게 가는 길』『독서일기』『앗 뜨거워』 등이 있다.<br /> <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25 오후 1:34:00론슨의 ‘사이코패스 테스트’<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2%AC%EC%9D%B4%EC%BD%94%ED%8C%A8%EC%8A%A4%20%ED%85%8C%EC%8A%A4%ED%8A%B8/%EC%82%AC%EC%9D%B4%EC%BD%94%ED%8C%A8%EC%8A%A4%ED%85%8C%EC%8A%A4%ED%8A%B8%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01</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잃어버린 퍼즐의 단서</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것은 광기에 대한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의 지극히 흥미로운 이야기는 런던 중심부 불룸스버리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있었던 만남에서 시작된다. &lsquo;카페 코스타&rsquo;라는 이름의 그곳은 신경정신학자들이 특히나 자주 들르던 곳이었는데, 모퉁이만 돌면 바로 런던대학교 신경정신대학원<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University College London Institute of Neurology</span></sup></sub></span>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 저만치서 신경학자 한 사람이 사우스햄튼 대로에 들어서며 나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연락한 데보라 탈미이리라.</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는 거의 모든 시간을 연구실에나 틀어박혀서 지내는 사람처럼 보였다. 결코 카페에서 기자와 수상한 만남을 갖는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의문스런 상황에 빠져 있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혼자가 아니다. 그녀는 키가 크고 면도를 하지 않은 얼굴에 학자 느낌이 풍기는 젊은 사내와 동행하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 둘은 자리에 앉으며, 여자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안녕하세요, 제가 데보라예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존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의 인사에 내가 답했고, 젊은 사내가 연달아 인사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저는 제임스라고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건 그렇고, 가지고 오셨나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데보라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탁자 위로 소포를 건넸다. 나는 소포를 개봉한 뒤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손으로 받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주 멋지군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월, 데보라는 우편으로 이상한 소포를 받았다. 소포는 사물함에 놓인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포에는 스웨덴의 예테보리<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Gothenburg</span></sup></sub></span> 소인이 찍혀있었고, 두텁고 푹신한 포장봉투에는 누군가가 &lsquo;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rsquo;라는 글을 써놓았다. 하지만 소포를 보낸 이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소포에는 고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2</span>쪽에 불과한 책이 한 권 들어있었다. 그나마 그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span>쪽은, 그러니까 한 쪽 건너 한 쪽마다, 아무 내용도 없는 깨끗한 공백이었다. 하지만 종이라든지 그림, 활자와 같은 책의 다른 부분들은 아주 비싼 돈을 들여 제작된 듯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겉표지에는 몸에서 분리된 두 개의 손이 서로를 그리고 있는, 매우 정교하면서 괴기스런 그림이 새겨져있었다. 데보라는 한눈에 그 그림이 모리츠 코넬리스 어셔<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M. C. Escher</span></sup></sub></span>가 제작한 석판화 &lt;그리는 손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Drawing Hands</span></em>&gt;이라는 것을 알아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책의 저자는 &lsquo;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K</span><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e K</span></sup></sub></span>&rsquo;였다. (카프카가 쓴 소설의 주인공인 조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K</span>를 의미하거나, 어쩌면 농담<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ke</span></sup></sub></span>이란 단어의 철자를 뒤바꿔놓은 게 아닐까?) 제목은 『존재, 또는 무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Being or Nothingness</span></em>』였는데, 사르트르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3</span>년에 발표한 『존재와 무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Being and Nothingness</span></em>』를 넌지시 빗댄 것이었다. 판권정보, 도서번호 등이 적힌 페이지는 누군가가 일부러 가위로 깨끗하게 잘라 놓았기에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책 겉면에 붙어있는 스티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dquo;주의!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호프스태터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읽어보기 바랍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rdquo;</span></strong></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데보라는 책을 쭉 훑어보았다. 암호 같은 문장들, 단어들이 오려진 페이지들&hellip; 추측컨대 책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는 퍼즐임이 분명했다. 데보라는 봉투 겉면에 적힌 &lsquo;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rsquo;라는 글을 다시 살펴보았다. 마침 동료 중에 스웨덴을 방문 중이던 이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동료가 이런 소포를 보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포를 보낸 사람이 그 동료일 거라고 믿는 게 그나마 가장 합당한 설명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막상 돌아온 동료에게 묻자, 동료는 소포에 대해선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데보라는 갑자기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하다가 자신 말고도 소포를 받은 이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ldquo;소포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신경학자들인가요?</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렇지는 않아요. 상당수가 신경학자들인 건 맞지만, 그중에는 티벳에 있는 천체물리학자도 있고, 이란에 사는 종교학자도 있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공통점은 하나같이 학자라는 거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함께 있던 제임스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들 모두는 데보라와 똑같은 소포를 받았는데, 예테보리 소인이 찍힌 두꺼운 봉투에 담겨있었고, 봉투에는 마찬가지로 &lsquo;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rsquo;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소포를 받은 이들은 블로그와 인터넷게시판에 모여 책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려고 애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중 누군가는 &lsquo;어쩌면 이 책은 기독교적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rsquo;라는 의견을 올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수수께끼인 &lsquo;내가 돌아오면 더 많은 얘기를 들려주리라!&rsquo;라는 구절만 보더라도 예수의 재림을 뜻하는 게 분명하다. 저자, 어쩌면 저자들은 책 제목을 『존재, 또는 무』로 살짝 바꿔서 사르트르가 쓴 『존재와 무』의 무신론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인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각심리학자인 사라 올레드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이 모든 게 결국에는 특정 종교집단이 꾸며낸 입소문 마케팅이거나 홍보전략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학자들, 지식인들, 과학자들, 철학자들을 얼간이들처럼 보이게 하려는 수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입소문 마케팅이라면 많은 이들이게 책을 보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책이 지나치게 비싼 돈을 들여 제작됐습니다. 이 홍보활동이 미리 계획단계부터 대상자들을 선별해서 그들이 이 의문투성이 책에 대해 온라인에서 떠들어대리라는 점을 애당초 계산에 넣어두었다면 모를까, 입소문 마케팅일 가능성은 희박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은 어쩌면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흥미롭게도 바로 자신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포를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세심하게 선택된 이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뭔가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공통점은 과연 무엇일까? 혹시 모두 이전에 같은 세미나에 참석했던 게 아닐까? 혹시 비밀스런 기업이 그들을 고위직으로 채용하려는 게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굳이 말하자면 맨 먼저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이 채용되는, 그런 프로그램 아닐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소포를 받은 한 호주인의 의견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분명한 사실은 그 퍼즐은 예테보리와 관련된, 매우 영리한 사람이나 조직이 고안해냈고, 영민한 학자들조차 풀지 못할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퍼즐이 풀리지 않는 이유는 애당초 퍼즐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단서가 누락됐거나. 누군가는 이런 의견도 올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편지를 전등에 가깝게 비춰보거나 요오드 연기를 쏘이면, 특수잉크로 쓴 숨겨진 글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숨겨진 글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들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점잖은 학자들이 풀 수 없는 퍼즐이라면, 사립탐정이나 기자처럼 보다 거칠게 사건을 파고들 수 있는 이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지도 몰랐다. 데보라는 주변사람들에게 수소문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끝까지 파헤칠 만한 끈질긴 기자가 누가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몇몇 이름이 거론됐고, 그러던 중 제임스가 나를 추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존 론슨은 어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카페 코스타에서 만나고 싶다는 데보라의 메일을 받은 날, 나는 꽤 심각한 공황발작<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nxiety attack</span></sup></sub></span>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나는 데이브 맥케이<span style="color: #993300"><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Dave Mckay</span></sup></sub></span>라는 남자를 취재하던 중이었다. 그는 &lsquo;지저스 크리스찬스&rsquo;라고 불리는 호주 종교단체를 이끄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수장이었고, 얼마 전부터 생판 모르는 이들에게 한쪽 신장을 기증하고 회원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사실 데이브와 나는 처음에는 꽤나 잘 맞았다. 데이브는 별나긴 했어도 매력적인 사람이었고, 게다가 나는 그에게서 헛소리이긴 해도 재미난 기사거리를 계속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쩌면 일부 회원들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결심하는 이유 가 집단에서 주는 압박감, 특히 데이브가 뿜어내는 위압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데이브가 갑자기 폭발했다. 그는 내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원래 예정돼있던 긴급환자에 대한 신장기증을 즉각 중지해서 환자를 죽게 내버려둘 것이고, 그렇다면 환자의 죽음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메일 보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한편으로는 환자가 대단히 걱정됐지만, 동시에 데이브가 이런 광기어린 메일을 보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쾌재를 불렀다. 좀더 솔직한 속내를 보이자면, 데이브의 반응은 아주 좋은 기사거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나는 한 기자에게 데이브가 사이코패스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했다. (당시 나는 사이코패스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지만 데이브가 한 짓은 사이코패스라야 가능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그 기자는 데이브가 내게 보낸 메일을 기사로 내보냈다. 며칠 후 데이브로부터 한 통의 메일이 왔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를 사이코패스라고 부른 건 나에 대한 명예훼손일세. 이미 법률자문을 받았고, 재판을 하면 아주 유리할 거라는 변호사의 답변을 받았네. 자네가 내게 앙심을 품었다고 해서 내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는 건 아니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데보라가 보낸 메일이 도착한 바로 그날, 내가 엄청난 공황상태에 빠져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내가 생각이 없었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데이브의 메일에 망연자실한 나는 아내 엘레인에게 고백하듯, 아니 하소연하듯 얘기를 꺼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냥 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말하다보니 신이 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떠들어댔을 뿐이라고.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끝장났어. 왜냐고? 데이브 맥케이가 날 고소할 거거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무슨 일이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들 조엘이 방으로 들어오며 소리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왜 다들 소리치고 난리인데?&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내가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단다. 한 남자에게 사이코패스라고 했다가 그를 열받게 했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는 수 없이 내가 설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래서 그 남자가 우리한테 뭘 어쩔 건데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엘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연신 질문을 해댔고, 우리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내가 &ldquo;얘야,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을 거야&rdquo;라고 답변을 하기 전까지. 그 정도의 답변이면 될 줄 알았는데, 조엘에겐 여전히 충분한 답변이 되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 남자가 우리한테 아무 짓도 안 할 거라면 아빠는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건데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냥 그 남자를 화나게 해서 걱정하는 거야. 나 때문에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분노하는 게 별로거든. 그래서 걱정하는 거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거짓말.&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내 말은 전혀 믿지 않는 듯 말을 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빠는 남들이 화나건 말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내가 잘 알아요. 대체 나한테 뭘 숨기는 거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게 전부야. 숨기는 건 없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힘겹게 대답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혹시 그 남자가 우리를 공격하는 거 아냐?&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엘은 다시 걱정을 드러냈고, 나는 좀더 확고한 대답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냐! 천만에! 그럴 리가! 그런 일은 절대 없어!&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설마 우리 가족이 위험한 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여전히 조엘은 내 대답에 만족하지 못했고, 이젠 거의 고함 수준으로 목소리가 커졌다. 나도 더 이상 숨길 게 없다 싶어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조엘, 그가 우릴 공격하지는 않아. 그냥 나를 고소할 거야. 그저 내 돈을 가져갈 거라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맙소사&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조엘이 안심을 한 건지 더 놀란 건지 구분이 안 가게 말을 맺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곧장 나는 데이브에게 사이코패스라고 불러 미안하다는 메일을 보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즉각 답장을 보내왔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고맙네, 존. 자네에 대한 내 생각이 아주 좋게 바뀌었네. 나중에 만나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을 만큼 더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그의 답장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lsquo;내가 또 다시 별것 아닌 일로 걱정했구나&rsquo;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용서(?)에 한숨 돌리고, 읽지 않은 메일을 확인하다가 그제야 데보라 탈미에게서 온 메일을 발견했다. 그녀가 보낸 메일에는 그녀를 비롯해 전 세계 많은 학자들이 우편으로 수상한 소포를 받았다고 적혀있었다. 내 책을 읽은 한 친구가 내가 특이한 추리사건에 흥미를 느낄 만한 언론인이라고 추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사건은 이상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도 흥미로워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이 점을 당신이 꼭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건은 마치 흥미진진한 모험 이야기, 또는 가상현실 게임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체스판의 말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 소포를 내게 보내면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깨어났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해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이 사건을 맡아준다면 좋겠습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카페 코스타에서 데보라는 책장을 넘기며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요점만 말하자면요, 누군가가 아주 의문스런 방식으로 특정 학자들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요. 내가 보기에 이 일은 한 개인이 꾸며낸 일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을 많이 들인 것 같아요. 책에 뭔가 단서가 있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요. 이 책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하지만, 제가 뭔가를 수사하는 데에는 원체 재능이 없어서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렇군요&hellip;&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답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한동안 나는 침묵한 채 심각하게 책을 살펴보았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사건을 맡아보기로 하지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제 나도 이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jonronson.com/index.html"><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1"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2%AC%EC%9D%B4%EC%BD%94%ED%8C%A8%EC%8A%A4%20%ED%85%8C%EC%8A%A4%ED%8A%B8/%EC%A1%B4%EB%A1%A0%EC%8A%A8.JPG" /></a>존 론슨 <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hn Ronson</span><br /> </strong>영국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lt;가이언&gt; &lt;타임아웃&gt; 등에 칼럼을 기고하는 저널리스트이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BC</span>방송국에 여러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lsquo;곤조 저널리즘&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gonzo journalism</span>. 취재대상에 적극 개입,<span style="font-family: Verdana"> 1</span>인칭 시점으로 기사를 서술하는 방식) 스타일로 유명한 논픽션 작가다. 그가 집필한 『그들: 극단론자들과의 위험한 여정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m: Adventures with Extremists</span></em>』과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Men&nbsp;Who Stare at Goats</span></em>』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은 조지 클루니가 제작 및 주연을 맡은 동명의 블록버스트 영화(국내 개봉 제목은 &lt;초(민망한)능력자들&gt;로 만들어졌다. <a target="new" href="http://www.jonronson.com/index.html"><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www.jonronson.com</span></span></a><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 /> </span><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차백만<br /> </strong>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경영컨설팅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한 뒤 안철수연구소, CJ푸드시스템 등에서 전략기획과 신사업개발을 담당했다. 현재 바른번역에 소속돼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는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전략의 제왕』『넷 마피아』가 있다.<br /> <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23 오후 4:33:00박재동의 ‘손바닥 아트’<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ED%91%9C%EC%A7%80.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4%EC%AA%BD.JPG" /><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글</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사람, 꽃, 돌멩이가</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소중해지는 비밀</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0년 전쯤인가? 그냥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마치 손가락 사이로 새 나가는 모래처럼 흘러가버리는 느낌이 들었고,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만화가가 꿈이었던 어느 나이든 분이 긴 세월에 걸쳐 그리고 써온 그림일기가 출판된 것을 보고, &lsquo;아! 나도 그림일기를 써야겠구나&rsquo; 하고선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삶이 개울에서 잡은 미꾸라지처럼 두 손 안에 잡히는 감이 왔다. 그러다가 발전해서 저녁에 한 번에 쓰지 않고 그때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렸다. 그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사물이든, 혹은 내 마음이든 그림일기를 쓰다보니 일기보다 좀더 나아간 &lsquo;꼴&rsquo;을 갖추게 되었고, 2004년쯤부터는 &lsquo;손바닥 그림&rsquo;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런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나는 내친 김에 외연을 넓혀 &lsquo;손바닥 그림 운동&rsquo;이란 것도 하고 싶었다. 초&middot;중&middot;고 12년 동안 미술교육을 받지만 막상 졸업하고 나면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왜 그럴까? 노래는 노래방에서도 부르는데, 왜 미술은 안 그럴까? 내가 원래 미술교사 출신인 까닭도 있고 해서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첫째는 크기였다. 그림 한번 그려보자 싶으면 맨 먼저 도화지 사이즈를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그 도화지를 다 채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림이라고 해서 표준 사이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알아서 정하는 것 아닌가. 손바닥만 한 명함이라면 그럼 만만하지 않나. 한번 그려볼 만하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이중섭도 요만한 담뱃갑에 그리지 않았나. 크기가 줄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림에 대한 접근이 훨씬 쉬어진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다음, 재료에 대한 발상 전환도 일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사인펜이든 연필이든 꼭 붓이 아니어도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소재도 마찬가지다. 땅에 떨어진 나뭇잎을 그려도 되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베껴도 되고, 강아지 한 마리를 그려도 되고. 거기에 메모나 편지를 써도 된다. 그걸 낙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서 한쪽에 사인을 하는 순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 것이 된다. 자신이 소중히 여기기만 하면 낙서라고 생각했던 것도 작품이 되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더구나 사람을 기다릴 때, 지하철을 타고 긴 거리를 갈 때 매우 좋다. 지루하지 않고 그 시간이 빨리 간다. 기다리던 사람이 더 늦게 왔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드는 것이다. 또한 하루하루가 지나가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쌓여 가는 기분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런 작은 낙서 그림을 권하고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거기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lsquo;찌라시 아트&rsquo;다. 나는 어릴 적부터 수집벽이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는 길가에 떨어져 있는 소위 &lsquo;찌라시&rsquo;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버려진 찌라시들도 거기에 의미를 붙이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lsquo;눈물의 바겐세일&rsquo; 같은 벽보나 퀵 서비스 영수증, 대리운전, 아가씨 나오는 술집 광고 전단을 주워서 도화지 삼아 그렸는데 재미가 있었다. 우리 사회 물밑으로 흐르는 욕구와 고통과 기쁨이 담겨 있는 그런 찌라시들이 우리 시대의 진짜 증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찌라시에 그림을 그리면서 천한 것 속에 귀한 것의 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천한 것 안에 있는 역동성, 솔직함, 세상의 진정성 등 엄청난 힘과 기운을 느꼈다.&nbsp;</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 삶이 특별한 것으로만 이뤄진 건 아니다. 또 원래부터 특별한 것이 있지도 않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정서와 가치가 담겨져 있으면, 그림의 소재나 대상에 상관없이 새로운 특별함과 소중함이 만들어진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lsquo;예술의 본질&rsquo;은 그러한 소중함을 &lsquo;혼자 보고 듣고 생각하기가 아까워 나누려 애쓰는 것&rsquo;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 동안 &lsquo;손바닥 아트&rsquo;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수천 점의 그림을 그려왔다. 여기에서 추려낸 작품들을 골라 여러분에게 선보인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손바닥만 한 그림 속에 담겨져 더욱 소중해졌다. 그 소중함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 기쁘겠다.</span></p> <p style="text-align: right"><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011년 10월<br /> 박재동</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66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19%EC%AA%BD.JPG" /><br /> <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뱃살을 빼야 해</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체격이 늘씬하고 멋진 내 친구 지수가 넌 어떻게 몸 관리를 하느냐고 묻길래 &ldquo;적게 먹고 많이 움직인다&rdquo;하였다. 피아노의 귀신 임동창 선생은 &ldquo;저는 공연날은 아무것도 안 먹어요. 먹으면 힘이 떨어지거든요.&rdquo; 그렇다! 뱃속에 소화할 것이 있으면 몸은 그것을 소화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되어 힘이 떨어지는 것이다. 빈속일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적게 먹고는 배고픔의 쾌감을 느껴가며 계속 걷는다. 몸은 가벼워지고 컨디션은 매우 좋아진다. 그때 길가에 중국집 간판이 보인다. 아, 며칠 전에 꼭 먹고 싶었는데 먹지 못한 짜장면이 생각난다. 나는 고민한다. 다음 장면, 더부룩해진 배를 만지며 후회하며 집으로 돌아온다.</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4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42%EC%AA%BD.JPG" /><br /> <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의 해석</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나 같은 전문가는 그림을 늘 잘 그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 무엇이 미숙하고 어디가 부끄러운가를. 그걸 보완할 길은 연습뿐이다. 그래서 항상 스케치를 한다. 그런데도 그림은 늘지 않는다. 하루는 하도 답답하여 기도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하느님! 나는 이렇게 매일 연습을 하는데도 왜 그림이 늘지 않습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랬더니 즉각 답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네 제자들이 너한테 그렇게 물으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느냐?&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계속하라고 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너도 그렇게 해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나는 말없이 계속 그림을 그렸더니 어느 시점부터 그림이 늘기 시작하는데 그 재미가 아주 솔솔해서 마치 아기가 크는 것을 보는 것 같아 두 달 전에 그린 그림이 부끄러울 지경이 되었다. 아무도 뺏어가지 못하는 내 비밀스런 즐거움! 세상에 자기가 조금씩조금씩 발전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러면서 나는 좀더 나은 그림을 바라게 되고 그릴 때마다 내 그림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체크하게 되었다. 어떻게 변해가서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나의 그림! 지금도 나는 미지의 내 그림을 만날 기대에 가득 차 있다.</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74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146%EC%AA%BD.JPG" /><br /> <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체면 때문에</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이가 어중간한 사람들은 어르신이란 말을 듣든가 자리를 양보하면 질색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내가 그렇게 늙어 보인단 말인가 말도 안 돼!&rs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그렇다. 특히 경로석 앞에서는 노인의 반열에 들기 싫어 버틸 때까지 버텨본다. 그러다 도저히 피곤해서 못 견딜 때는 흰머리를 내밀면서 드디어 앉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고는 &lsquo;왜? 나 정도면 노인이잖아!&rsquo; 하고 태도를 바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이가 들든 젊든 다들 서 있는 걸 피곤해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span>대면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 도대체 앉을 필요도 없을 텐데&hellip;, 참 이상한 일이야.</p> <p style="text-align: justify">하긴 나도 언제나 지하철 자리 앞에만 서면 피곤했거든.</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50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190%EC%AA%BD.JPG" /><br /> <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수박 먹고 싶다</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더운 여름날이면 가끔 수박 속에 들어가 파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때로는 그 안에 책상을 갖다놓고 벽을 뜯어 먹으며 일을 하고 싶다.</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149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268%EC%AA%BD.JPG" /><br /> <br /> <span style="color: #006633"><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해로운 게 맛있다</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누군가가 말했다. 몸에 좀 해로운 것이 맛있다고. 튀김 또는 도넛 같은 게 그런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해롭다기보다 튀김은 기름이 너무 많고 도넛은 설탕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조미료 치지 않은 천연식품을 좋아한다. 속이 편해 마땅히 많이 먹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이따금은 약간 해로운, 이런 맛있는 것들도 먹어주는 것을 좋아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떤 때는 도넛, 어떤 때는 초콜릿과 달디단 샌드.</p> <p style="text-align: justify">가끔씩 왕창 먹고 후회하고 배 나오고,</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다 또 먹고&hellip; 또 후회하고&hellip; 또 먹고&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나의 인생&hellip;<br /> <br /> (본문 부분)<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0"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86%90%EB%B0%94%EB%8B%A5%EC%95%84%ED%8A%B8/%EB%B0%95%EC%9E%AC%EB%8F%99%ED%99%94%EB%B0%B1.JPG" />박재동<br /> </strong>경상남도 울주군(현 울산광역시) 범서읍 서사리에서 태어나 물장구 치고 소 먹이면서 자랐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림을 그린다며 방바닥 장판을 송곳으로 모조리 뚫어놓았는데, 아버지는 야단 대신 &ldquo;잘 그렸다&rdquo;는 짧은 심사평을 남겼고, 이때 일은 그의 그림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된다. 열 살 전후 부산으로 이사, 아버지가 차린 만화방에서 실컷 만화를 볼 수 있었고, 이후 대학 때까지 만화를 끼고 살았다. 대학에서 회화를 공부한 뒤 휘문고&middot;중경고 등에서 미술교사로 일했으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8</span>년 &lt;한겨레&gt; 창간 멤버로 참여하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span>년 동안 한 컷짜리 &lsquo;한겨레그림판&rsquo;을 그렸다. 박재동의 만평은 기존의 시사만화의 형식을 과감하게 깬 캐리커처와 말풍선 사용, 직설적이면서도 호쾌한 풍자로 &ldquo;한국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rdquo;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 2</span>』『인생만화』『십시일반』(공저) 등의 책을 펴냈다. 예술이란 특별한 예술가들이 대중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꽃피워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br /> <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22 오전 10:13:00《192》2010년 4월 25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22200"><img width="142"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B%9E%AD%EC%8A%A4%ED%84%B4%ED%9C%B4%EC%A6%88.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25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밀턴 멜저의 『랭스턴 휴즈』(실천문학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4</span>)는 &lsquo;흑인 계관 시인&rsquo; 또는 &lsquo;할렘의 셰익스피어&rsquo;라고 불렸던 랭스턴 휴즈의 평전이다. 랭스턴 이전에는 흑인 시인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분명 인종차별적인 언사일 것이다. 하지만 랭스턴이 미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흑인 시인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랭스턴이 생계의 한 방편으로 미국 전역을 누비며 시낭송회를 열기 이전에는, 시인이라면 금발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백인을 연상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02</span>년 미주리주에서 태어난 랭스턴의 혈통은 복잡하다. 랭스턴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는 각기 유태계 노예 무역상과 스코틀랜드 출신의 양조업자 집안이었다. 이들 집안은 저명한 영국 상원 의원과 시인을 배출하기도 했는데, 증조할아버지가 흑인 하녀에게서 낳은 게 바로 랭스턴의 할아버지다. 랭스턴의 가계가 보여주는 이런 흑백 혼종은, 오랫동안 미국의 정의로 행세해 온 &lsquo;짐 크로우&rsquo;법이 얼마만큼 자가당착적인 것인지를 드러낸다. 단 한 방울이라도 흑인의 피가 섞이면 흑인으로 취급하는 미국의 인종차별법은, 형제가 형제를 박해하는 법이나 마찬가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랭스턴의 아버지였던 제임스 휴즈는 법률가가 되고자 했을 만큼 재능 있는 사람이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 같은 장벽에 부딪힌 흑인들이 나타내는 태도는 보통 두 가지로, 하나는 완전히 절망하여 암울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는 편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의 불길을 태우면서 저항운동으로 나아가는 쪽이다. 혼자 멕시코로 떠나 미국을 완전히 등졌던 제임스 휴즈는 전자의 경우로, 이런 사람은 자신을 억누르는 압제자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검은 피부를 증오하게 된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그는 아들이 대학을 가거나 시를 쓰는 것을 코웃음 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남편이 없는 흑인 여자의 삶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한 발버둥과 병고의 연속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랭스턴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외할머니 메리 랭스턴이었다.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대학을 다닌 최초의 흑인 여성이었던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루이스 레어리로, 그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59</span>년에 있었던 존 브라운 무기고 습격 사건의 흑인 가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 사건은 백인 노예폐지론자였던 존 브라운이 버지니아주의 연방 무기 창고를 털어 흑인을 무장봉기시키려고 했던 사건으로, 루이스 레어리는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 죽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번째 남편이 죽자 메리는 똑같은 대의를 위해 똑같은 위험을 무릅쓴 또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두 번째 남편인 찰스 랭스턴은 노예해방 결사조직의 일원으로 탈주 노예의 탈출을 돕다가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는 허울뿐인 자유만 아니라 흑인의 동등권을 위한 정치투쟁을 계속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0</span>대의 외할머니는 일곱 살 난 손자에게 흑인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손자에게 자신이 구독하고 있는 전국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span style="font-family: Verdana">NAACP</span>)의 기관지인 &lt;크라이시스&gt;를 보게 했다. 외할머니는 협회를 만들고 잡지를 편집하던 듀 보이스 박사를 위대한 흑인으로 존경했고, 랭스턴은 어린 시절부터 &l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의 문제는 인종 간의 문제이다&rdquo;라는 듀 보이스의 문제의식과 마주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개의 문학청년들이 그렇듯이, 랭스턴을 시로 이끈 것도 독서였다. 그는 초등중학교 시절 헨리 롱펠로와 폴 로렌스 던바를 좋아했는데, 흑인노예의 아들이었던 그는 엘리베이터 보이를 하던 스물한 살 때 첫 시집을 냈다. 랭스턴은 흑인 사투리를 그대로 쓰고, 스윙의 음률과 박자를 갖고 있던 그의 시를 좋아했는데, 이런 특성은 훗날 랭스턴의 특징이 된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영어 선생의 지도로 로버트 프로스트․에이미 로웰․칼 샌드버그의 시를 읽었다. 이때의 랭스턴은 그 어떤 시인의 시라도 모방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잡지사에 투고한 시들은 &lsquo;사절&rsquo;이라는 쪽지와 함께 반송되어 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259" height="323"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D%9C%B4%EC%A6%88.JPG"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덟 살의 랭스턴은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못했고, 흑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호텔 수위나 버스차장이 고작이었다. 그때 랭스턴은 아버지가 자신을 대학에 보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멕시코행 기차를 타게 되는데, 기차에서 미시시피 강을 보고 쓴 시가 바로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유명한 「니그로, 강에 대해 말하다」이다. 멕시코에 도착한 랭스턴은 기차 안에서 완성한 이 시를 &lt;크라이시스&gt;에 보냈다. 이 시는 랭스턴의 등단작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 시에서 그가 흑인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고자 쓴 &lsquo;소울<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ul</span>&rsquo;이라는 단어에도 주목을 해야 한다. 물론 이 단어를 랭스턴이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 의해, 소울은 오로지 흑인들만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흑인성의 정수, 흑인의 영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랭스턴은 스물네 살 때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6</span>년 첫 시집인 『피곤의 블루스』를 출간했다. 비평가들은 찬사를 바치며 그를 칼 샌드버그에 비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랭스턴의 첫 번째 시집은 그 혼자만의 노력이 아니라, 당시에 태동하고 있던 할렘 르네상스라는 흑인 문화운동의 지원도 큰 몫을 했다. 검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드러낼 뿐 아니라, 인종적 자부심과 과거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완전한 시민권에 대한 요구와 투쟁이 혼합된 흑인 문화운동이 없었다면, 흑인 계관시인도 할렘의 셰익스피어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블루스나 재즈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한번도 가져본 일이 없지만, 랭스턴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블루스와 재즈를 듣는 일에서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맛보았고, 컬럼비아 대학에 다니던 때에는 흑인 뮤지컬을 관람하느라고 용돈을 탕진했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블루스의 맥박을 감지하고자 했으며, 재즈의 리듬을 언어의 리듬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가 소련에 체류했던 1932년의 일이다. 공산당원이면서 훗날 『한낮의 어둠』으로 유명하게 될 아서 쾨슬러가 &ldquo;왜 당신은 당에 가입하지 않느냐&rdquo;고 묻자, 랭스턴은 &ldquo;러시아에서는 재즈가 공식적으로는 퇴폐적인 자본주의 음악이라고 거부되고&rdquo; 있다면서, &ldquo;혁명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rdquo;이라고 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시는 &ldquo;블루스 음조의 진수&rdquo;를 포착하고 있다거나 &ldquo;언어로 된 재즈&rdquo;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영어의 운율을 모르는 한국 독자들이 번역시로 랭스턴의 특성을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음은 그가 쓴 「빌리 할리데이를 의한 노래」의 한 대목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무엇이<br /> 노래와 슬픔으로 가득한 내 가슴을<br /> 씻어줄 수 있겠는가.<br /> 슬픔의 노래 이외의<br /> 무엇이<br /> 내 가슴을 씻어 줄 수 있겠는가.</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21 오전 10:56:00킵스의 ‘어느 작은 참새의 일대기’<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6%B4%EB%8A%90%20%EC%9E%91%EC%9D%80%20%EC%B0%B8%EC%83%88%EC%9D%98%20%EC%9D%BC%EB%8C%80%EA%B8%B0/%EC%96%B4%EB%8A%90%EC%9E%91%EC%9D%80%EC%B0%B8%EC%83%88%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span></strong></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버림받은 생명</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안개와 비가 늘 오락가락하는 런던답지 않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0</span>년에는 한낮이면 청명한 날씨가 날마다 계속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먼 훗날까지 기억해줄 만큼 역사적으로 유명하게 맑았던 한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0</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일은, 내 기억을 얼마나 믿어줘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맘때치고는 유난히도 쌀쌀한 날씨였으며, 나에게는 무료한 하루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전쟁 같지도 않은 &lsquo;가짜 전쟁(<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Phoney War</span>)&rsquo;<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p><strong>*</strong></sup></span></span>이 계속된 끝에, 유럽 대륙에서 끔찍한 사건들이 줄지어 벌어졌지만, 아직까지도 우리나라만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기하게도 적으로부터 아무런 시달림을 받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혹독한 겨울의 힘겨운 여러 달이 지나가는 동안, 우리들은 내내 얼음이 얼어붙은 길거리를 오가면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폭탄에 대비하여 실시하던 등화관제의 괴이한 정적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리기만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들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일이지만,&nbsp; 평온했던 이 기간은 머지않아 맹렬한 독일의 공습으로 이어질 터였어도,&nbsp; 당시에는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A.R.P.</span> 부대&rsquo;<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p><strong>**</strong></sup></span></span>라는 호칭으로 통했던 &nbsp;우리 민방공 요원들의 의무는&nbsp; 경계를 서며 기다리는 일이 고작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집 근처에 위치한 방공호 초소에서 공습 대피반장으로 고된 하루의 근무를 끝내고 귀가하던 나는, 런던의 교외 지역에 있는 나의 작고 나지막한 집 문간에서, 둥지로부터 밀려났거나 잘못 떨어진 듯싶은 작고도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것은 방금 알에서 깨어난 새처럼 보였는데 지난 몇 시간 사이에 부화한 모양이었고, 털이 하나도 나지 않은 벌거숭이 알몸에 눈도 뜨지를 못했으며, 두 눈알이 방울처럼 튀어나왔는가 하면 이미 목숨이 끊어진 기미가 분명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일 누군가 갓 태어난 아기를 문 앞에 두고 갔다면 당연히 무슨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새를 집어 들고 따뜻한 옷자락으로 감싸고는, 부엌의 난로 가에 가서 앉아서 그것을 살려내려고 몇 시간 동안 정성을 기울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처를 입히지 않으려면 섬세한 솜씨와 대단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지만) 말랑말랑한 부리를 벌리는 데 겨우 성공한 다음, 나는 타고 남은 성냥개비 토막으로 입을 열어 받쳐놓고는, 좁다란 목구멍으로 몇 분에 한 방울씩 미지근한 우유를 떨어트려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반시간이나 공을 들이고 났더니, 새의 몸뚱어리가 아직 상당히 차갑기는 했지만 앙상한 한쪽 날개에서 미약한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먹일 때는 우유에 적신 빵을 자그마하게 떼어 함께 주고는 양털로 안을 댄 작은 푸딩 그릇에 조심스럽게 새를 담아서, 널어놓은 빨래가 잘 마르도록 온수관(溫水管)을 따라 설치한 선반 위에 얹어두었다. 그러고는 밤을 넘기지 못하고 틀림없이 새가 죽으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놀랍게도 이튿날 아침 일찍 나는 빨래 선반에서 새가 계속 미약하게 울어대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것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랗기는 하면서도 행복한 소리였으며, 바늘이 만일 노래를 부를 줄 안다면 아마도 그런 소리를 냈을 듯싶었다. 아직도 사기로 만든 요람에 그대로 들어앉은 자그마한 생명은 온기를 되찾고 말짱한 정신으로 아침밥을 달라고 그렇게 외쳐대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부터 그는 입을 다물 줄 몰랐고, 끊임없이 먹이를 줘야 했기 때문에 나는 새를 사기그릇에 담은 채로 대피반장의 초소로 데리고 갔으며,&nbsp; 그렇게 해서 그는 기나긴 기다림이 계속되는 지루한 시간에&nbsp; 우리들에게 끝없는 기쁨을 제공함으로써&nbsp; 나름대로 그의 조국을 위한 봉사를 시작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39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6%B4%EB%8A%90%20%EC%9E%91%EC%9D%80%20%EC%B0%B8%EC%83%88%EC%9D%98%20%EC%9D%BC%EB%8C%80%EA%B8%B0/008.jpg" /><br /> <br /> 나는 그에게 비맥스<span style="color: #800000"><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p><strong>***</strong></sup></span></span>와 푹 삶은 달걀의 노른자, 넙치 간유 한 방울을 곁들여 우유에 적신 빵을 먹였는데, 조심스럽게 끝을 뾰족이 깎은 성냥개비를 이용하여 음식을 살금살금 목구멍으로 정성껏 밀어 넣어가며 여러 차례에 걸쳐서 조금씩 자주 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동네 아이들은 새에게 먹이라고 송충이와 지렁이를 잡아 성냥갑에 넣고는 파란 끈으로 묶어서 끊임없이 나한테 가져다주었지만 나는 엄격하게 채식 식단만을 고집했으며, 덕택에 그는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기는 해도 귀찮게 자꾸 보채는 아기 새로 성장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흘째로 접어들자 방울처럼 튀어나온 그의 두 눈이 양쪽 모두 중간쯤에서 가느다랗게 째지는 기미를 보이더니, 그는 조금씩 눈을 뜨고는 깃털이 나지 않은 나의 커다란 얼굴과 횃대처럼 내미는 손가락들을 인식했고, 주변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른 새라고는 한 마리도 본 적이 없었던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내가 그를 낳아준 보호자이리라고 받아들이는 눈치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주로 밤에만 자라나는 듯싶었던) 깃털이 그의 작은 몸뚱어리를 덮어가기 시작하여 따끈한 온수관 선반이 이제는 필요하지 않게 되자, 그는 내 베개 위에서 낡은 털장갑 속에 들어가 잠을 잤으며, 동이 트기만 하면 첫 식사를 달라고 나를 깨우기 위해 시끄럽게 짹짹거리면서 내 머리카락을 잡아 뜯고는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물론 그가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구할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당장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날개의 깃털이 자라나는 사이에 비극적인 사실이 드러났으니, 그는 충분히 안전할 만큼의 높이까지 솟아오르거나 마음대로 날아다닐 희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왼쪽 날개는 정상적인 듯했지만 오른쪽은 분명히 불구여서, 처음 나온 깃털이 그의 잔등에서 위를 향해 작은 부채처럼 똑바로 일어선 채로 자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발딱 일어선 깃털은 묘한 효과를 내기도 했는데, 이 부채 날개는 특히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면 지극히 다정한 손짓처럼 파닥이고는 했다. 그는 나를 따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허둥거리며 돌아다니느라고, 햇병아리들이 그러듯이 강종거리며 뛰어다니는 방법을 터득했으며, 그럴 때면 날개가 다리에 도움을 주었다. 왼쪽 발도 역시 시원치가 않아서, 뒤쪽 며느리발톱이 변형되어 오그라진 모양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기 새가 혼자서 먹이를 찾아 먹을 정도가 되자 나는 마룻바닥 구석마다 모이와 우유를 늘어놓고는 그를 작은 방에다 혼자 안전하게 남겨두고 외출해도 괜찮은 형편이 되었다. 그는 곧 내 발자국과 목소리를 알아듣기 시작했고 내가 문을 여는 열쇠 소리까지도 식별해서, 귀가하는 나를 소란스럽게 반겨 맞아주고는 했다. 그의 은밀한 내실로 들어가는 문을 내가 여는 순간에 허둥지둥 날아다니는 그의 분주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내 다리를 타고 올라 무릎을 지나 어깨까지 기어오르고는 신이 나서 재잘거리다가 내 턱 밑으로 파고들거나 목에 늘어진 옷깃을 넘어 윗도리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그의 천국은 내 침대였으며, 나와 함께 솜털 이불 밑으로 파고드는 순간이야말로 그에게는 무한한 황홀경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그의 습성은 평생 변함이 없었는데, 여기에서 나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사실 하나를 밝혀두고 싶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였던 유아기를 벗어나자마자, 그리고 완전히 어른으로 성장하기 오래 전부터, 그는 자신의 쉼터를 항상 청결하게 유지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며, 그에게 둥지 노릇을 하는 장소라면 어디라도 더럽히는 일이 전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양털로 안을 댄 그릇의 꼭대기까지 열심히 기어 올라가서는, 가장자리에 달랑 버티고 앉아서 자그마한 꼬리를 바깥쪽으로 내밀고 배변을 한 다음에 내려가서 다시 잠깐 낮잠을 즐기고는 했다. 내 침대를 취침 장소로 이용할 때도 그는 절대로 자리를 더럽히는 적이 없었고, 침대를 어쩌다가 그에게 놀이터로 제공할 때는 빨기 쉬운 헝겊 조각을 바닥에 깔아주면 그만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짐작하기로는 집안에서 살며 일정한 장소에서 대소변을 보도록 참새를 길들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따지고 보면 어떤 새라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이런 면에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본능을 분명히 타고난 모양이어서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경우가 없었다. 옛말마따나 &ldquo;똑똑한 새는 자기 둥지를 어지럽히지 않는&rdquo; 모양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주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몇 가지 양상을 보면 그는 타고난 본능을 그토록 변함없이 그리고 그토록 빈틈없이 따르면서도 본능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습성 또한 몇 가지를 스스로 습득한 듯싶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를 들면, (나보다 정확한 정보를 지닌 사람이 다른 견해를 내놓는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내가 아는 한 야생의 조류들은 발랑 눕는 법이 없어서, 그런 자세를 취한 새라면 죽은 놈이라고 판단해도 별로 틀림이 없으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나의 어린 새는 걸핏하면 발랑 누워서, 아기나 고양이가 그러듯이, 두 발로 발길질하기를 좋아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균형감각은 누워서도 완벽했으며, (적어도 그가 아주 늙은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그런 점잖지 못한 자세를 나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런 버릇이 그의 날개가 불구였다는 사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상당히 자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는 자주 그런 자세로 누워서, 도대체 그와 함께 살아가는 내가 어떤 종류의 새인지 알고 싶어 죽겠다는 듯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곁눈질해 보기도 했고, 내가 간지럼을 태우려고 하면 작은 발로 내 손가락들을 밀어내며 마주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어렸을 때는 나 이외의 낯선 사람이 혹시 접근하려고 하면 예외 없이 굉장히 민첩한 동작으로 벌떡 일어나 앉고는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우리 둘이서만 있을 때면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그의 심리 상태를 확실하게 보여주었고, 나에 대한 그의 신뢰는 이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가 설거지통에 빠져서 내가 꺼내놓고는 그가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동안 씻기고 몸을 말려줘야만 했던 경우처럼 어쩌다가 불상사가 한 번씩 발생하기는 했어도, 그는 나에게 나쁜 감정을 품은 적이 없었고, 성장해 가는 동안 난처하거나 힘겨운 여러 상황을 당할 때마다, 그는 내가 늘 자신을 구해주는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얼마 안 가서 그는, 내가 야간 근무를 해야 할 때면 바깥에서 밤을 보내야 하고, 돌아온 다음에는 몇 시간 동안이나마 모자라는 잠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자리에 누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당연히 예상하고 감수해야 하는 생활에 그는 익숙해졌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내가 차를 만드는 과정을 대단한 흥미를 느끼며 지켜보고는, 찻숟가락으로 떠서 주는 우유를 배불리 받아먹은 다음 방에서 가장 안전한 구석에 마련해놓은 우리의 아담한 침대로 나를 이끌어 가고는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뒤따라오는지를 확인하려고 조그마한 머리를 옆으로 돌려 동그랗고 빛나는 눈으로 살펴보면서, 이 작디작은 생명체가 부채 날개의 깃털을 펄럭이며 앞장서서 열심히 강종거리고 짹짹거리면서 휴식을 취할 곳으로 나를 이끌고 나아가는 모습은 (월트 디즈니 영화에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장면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우선 옷을 벗게 되는 경우, 그는 베개 위에 앉아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 짜증스럽게 나를 자꾸만 불러대었고, 그런 다음에는 잠자리를 같이해야 할 코끼리처럼 거대한 내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행여 다치지 않도록 몸조심을 하고는, 잠을 자야 할 순간이 닥치면 베개를 타고 쪼르르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와서, 내 얼굴을 재빨리 뛰어넘어, 솜털 이불 밑에서 내 목으로 파고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황홀한 순간이면 언제나 그는 잔걸음으로 강종거리는 대신에 냅다 줄달음질을 치는 듯 보였지만, 물론 그것은 나의 착각일 따름이었다. 잠자리에 든 다음에는 내가 몸을 움직이거나 뒤척일 때마다 그는 극심한 불쾌감을 표현하느라고 몇 차례 쪼아대거나 물기도 했으며, 그러고는 몇 시간 동안 둘이서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고는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어느 친구에게 하룻밤 방을 내주어서 아침에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참새 곁에서 그녀가 자게 되었을 때, 재미있는 사건이 벌어졌다. 작은 새는 그것이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야단법석이 일어났다.</p> <hr /> <div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strong>&lsquo;가짜 전쟁&rsquo;</strong>이란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자 동맹 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는 본격적인 지상전투를 벌이지 않았던 &lsquo;개점 휴업&rsquo; 시기를 말한다. 이 상태는 다음해 5월 독일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침공할 때까지 계속됐다.<br /> <strong>**</strong> <strong>A.R.P.</strong>는 공습에 대한 경계를 맡았던 민간 병력인 Air-Raid Precautions(Service)의 약자다.<br /> <strong>***</strong> <strong>비맥스</strong>(Bemax)는 맥아로 만든 영양제의 상품명으로 비타민B와 철분 따위가 많이 들어 있다.</span></div>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42"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C%96%B4%EB%8A%90%20%EC%9E%91%EC%9D%80%20%EC%B0%B8%EC%83%88%EC%9D%98%20%EC%9D%BC%EB%8C%80%EA%B8%B0/%ED%81%B4%EB%A0%88%EC%96%B4%ED%82%B5%EC%8A%A4.JPG" />클레어 킵스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Clare Kipps, 1890-1976<br /> </strong></span>본명은 루시 헬렌 맥덜린 거들스톤. 본머스의 작은 사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런던의 왕립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뒤 작곡가이며 오르간 연주자인 윌리엄 존 킵스와 결혼했다. 클레어 킵스는 자신의 아이를 두지 못해서, 조카딸과 함께 노후를 보내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6</span>년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6</span>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 『어느 작은 참새의 일대기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ld for a Farthling</span></em>』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3</span>년 출판되자마자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미국, 이탈리아,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 핀란드, 인도 등에서 줄지어 번역판이 나왔다. 일본의 경우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6</span>년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4</span>년에 이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년에 세 번째로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졌다. 다른 작품으로 『클래런스 이야기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Story of Clarence</span></em>』『하찮은 것들의 중요성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ld for a Song</span></em>』『공습 대피반장의 시집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Poems of an Air Raid Warden</span></em>』『티미라는 참새 이야기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immy: The Story of a Sparrow</span></em>』가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안정효<br /> </strong>&lt;코리아 헤럴드&gt; &lt;코리아 타임스&gt; 기자와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의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리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번역 활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0</span>권 가량을 옮겼다. 장편 『전쟁과 도시』(『하얀 전쟁』으로 개제)를 발표하며 작가로 등단하여 『은마는 오지 않는다』『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미늘의 끝』『지압 장군을 찾아서』『가뢰와 뒤쥐』 등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span>여 권의 장편과 작품집, 에세이집을 냈으며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가짜영어사전』『전설의 시대』 등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여 권의 영어&middot;영화 관련 책을 썼다. 최근에는 『글쓰기 만보』를 펴냈다.<br /> <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21 오전 10:32:00김성홍의 ‘길모퉁이 건축’<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6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A%B8%B8%EB%AA%A8%ED%89%81%EC%9D%B4%EA%B1%B4%EC%B6%95%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Prologue</span></strong>&nbsp;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길과 속도</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세상과 만나는 통로</span></strong></span><br /> <br /> 한 인간이 일생 동안 오래 머무르는 곳을 순위로 매긴다면 첫째는 일터, 둘째는 집, 셋째는 길일 것이다. 아침에 일터로 가기 위해,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길이다. 재택근무로 방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대부분은 길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간다. 노점상과 택시운전사는 길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길은 정치공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금은 종로로 걸어나가 백성의 삶을 보듬었다. 죽음의 예식을 치르는 공간도 길이었고, 승리를 축하하는 행렬도 길을 따라 벌어졌다. 지금도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이 가장 먼저 나서는 곳이 길이고, 분노와 항거, 열광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분출되는 곳도 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검은 힘과 주먹의 각축장도 길이다. 영토 싸움은 길을 경계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길은 조화롭고 안정된 곳이 아니라 늘 갈등이 잠복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갈등을 통제하고 억압하면 공포의 도시가 된다. 말끔히 정돈된 옛 사회주의 도시의 이면에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불만이 숨어 있었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45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7%EC%AA%BD.JPG" /><br /> <br /> 또한 길은 상업공간이다.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던 &lt;거상 임상옥&gt;을 본 분들이라면 제 몸보다 몇 배나 큰 짐을 이고 엄동설한에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는 상인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에게 길은 유유자적 거니는 곳이 아니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생존의 현장이었다. 지금도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이 시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길이 만나 거미줄처럼 엮인 연결망이 된다. 중세 유럽의 보부상이 다니던 길은 대륙 내의 상권을 잇는 안전한 도로망이 되었다. 마차가 자주 다니는 길은 포장되었고, 연결망의 거점들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몽골제국도 초원을 질주했던 말의 궤적으로 연결되었다. 칭기즈칸은 이 망을 이용해 제국의 곳곳에 신속하게 전령을 하달했다. 온라인 통신망의 전신<span style="color: #666699"><sub><sup>前身</sup></sub></span>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무엇보다 길은 나와 세계가 만나는 통로다. 집이 도시를 향해 드러나는 곳, 도시와 집이 맞닿는 곳, 무목적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길이다. 비록 말을 건네지는 않더라도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로의 모습, 사고방식, 문화적 암호를 공유한다. 길을 없애면 소통의 공간, 같음과 차이를 느끼는 장소, 기쁨과 분노를 표출하는 마당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길은 땅에 경제적 가치를 부여한다. 길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땅의 값이 결정된다. 실상 서울 같은 초고밀도 도시에서 건축물의 가치는 창의적 형태나 혁신적 기술보다는 땅값에 좌우된다. 심지어 재개발을 기대하는 곳에서는 건축물의 가치는 거의 인정하지 않고 땅값만 계산한다. 「건축법」에서는 필지<span style="color: #666699"><sub><sup>筆地</sup></sub></span>로 나눈 토지를 대지<span style="color: #666699"><sub><sup>垈地</sup></sub></span>라고 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m </span>이상이 도로에 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길이 없는 대지는 눈먼 땅, 즉 맹지<span style="color: #666699"><sub><sup>盲地</sup></sub></span>가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건축가가 대지에 집을 짓고 그 집들이 모여 입체적인 길이 완성된다. 큰 건축이 바로 도시이고, 작은 도시가 곧 건축이다. 도시 건축을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 어떤 길은 걷고 싶은 길이 되고 어떤 길은 황량한 곳이 된다. 그래서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은 개인의 집을 짓는 것과 길을 만드는 것을 하나라고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네 단계의 속도</span></strong></span><br /> <br /> 이 책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개의 작은 이야기를 &lsquo;길-속도-상업건축&rsquo;이라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개의 축으로 엮었다. 바퀴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오래된 이동수단이다. 마찰력을 줄이도록 바퀴와 축을 결합해 만든 수레의 등장은 역사의 일대 혁신이었다. 서양역사가들에 따르면 바퀴는 기원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옹기장이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발견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천<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백 년 전의 도기에는 수레가 그려져 있었고, 중국에서도 이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천 년 전에 수레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수레와 길은 불가분의 관계다. 고대 중국 도시들은 도로 폭을 수레의 대수에 따라 정했고, 동아시아의 다른 도시들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 종로는 수레가 7대 정도 지나갈 수 있는 대로<span style="color: #666699"><sub><sup>大路</sup></sub></span>로 규정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6</span>척<span style="color: #666699"><sub><sup>尺</sup></sub></span>(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48m</span>)의 폭으로 계획했다. 반면에 대로 이면의 뒷골목은 마차를 피해 서민들이 다니는 곳이라 해서 피맛골이라 불렀다. 수레의 이동이 빈번해지자 들길과 언덕길이 도로로 탈바꿈했다. 기동력과 운송력이 높아지자 전쟁의 전략과 전술도 달라졌다. 사람과 상품의 이동과 교류가 촉진되고 도시는 번성했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8" height="50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19%EC%AA%BD.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세기 초 유럽에서 철도가 교통수단이 되자 철도역사<span style="color: #666699"><sub><sup>驛舍</sup></sub></span>는 도시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고, 역 앞 광장은 도시의 현관이 되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뻗어나가고 상점가로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자동차만큼 도시를 흔들어놓은 &lsquo;기계&rsquo;는 아직까지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기존의 도시는 새로운 발명품인 자동차를 수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세기 말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는 도시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외곽의 전원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가 건설되자 교외도시는 포도송이처럼 불어났다. 도시 내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차도와 인도가 분리되고 주차장이 생겼다. 법으로 주차장을 의무적으로 규정하자, 땅값이 비싼 도심에서 주차장은 지하로 내려갔다. 중산층이 떠난 도심에는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이 남았다. 세금이 줄어들고 재정이 악화되자 도심이 더욱 침체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고속도로와 교외도시를 이상적인 모형으로 받아들인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세계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화석에너지가 고갈되는 미래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는 곳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들일 것이라고 한다. 건축물과 운송수단이 타격을 받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화에 의존했던 먹을거리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동차가 도시의 수평적 변화를 촉진시켰다면, 승강기는 수직적 변화의 주역이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57</span>년 최초의 승객용 승강기를 선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승강기는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처럼 상류층을 위한 기호품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계 상자에 불과했던 승강기는 철골기술과 함께 마천루를 현실화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올랐다. 거장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Le Corbusier(1887~1965)</span></sup></sub></span>는 파리의 구도심을 허물고 마천루를 세울 것을 꿈꾸었지만, 대서양 건너편 뉴욕에서 자신의 꿈이 선점되자 맨해튼의 마천루를 격렬히 비판했다. 한편 르 코르뷔지에가 유럽의 역사도시에서 이루지 못한 꿈은 제3세계에서 현실화되었다. 하늘로 마천루가 치솟으면서 지상의 여유로운 땅은 녹지와 공원이 되었다. 산업화 도시에 염증을 느꼈던 사람들은 미래 도시의 대안이라고 반겼다. 하지만 높은 건물 아래의 길은 점차 일상의 삶과 단절되어 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수레, 자동차, 승강기가 기계적 도구라면, 온라인은 보고 만질 수 없는 매체다. 수레나 자동차의 속도와는 차원이 다른 초공간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미래의 도시는 장소를 초월하는 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더 이상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고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진행 중인 모바일 정보혁명을 지켜보면 이러한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다. 심지어 온라인의 발달로 오프라인의 활동이 빈번하고, 길과 장소의 중요성이 오히려 커지기도 한다.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은 가상공간에 만족하지 않고 길에서의 소통을 원하고 반대로 오프라인의 활동이 온라인으로 환원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재진행형인,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대립과 결합은 미래의 우리 도시와 건축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길과 상업건축</span></strong></span><br /> <br /> 상업은 재화와 서비스를 사고파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동네 시장에서 채소와 식료품을 사고파는 것부터, 첨단무기와 비행기를 국제적으로 거래하는 것까지 모두 상업활동이다. 변호사가 법률을 서비스하는 것도,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는 것도 상업활동이다. 상업은 가장 오랜 삶의 수단 중 하나다. 어떤 역사학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span>만 년 전부터 상업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상업화는 도시화와 동의어이며 상업은 자본주의의 요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책에서는 변호사사무실, 건축사사무실, 금융시장처럼 무형적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상업공간보다는 상점과 시장, 백화점과 쇼핑몰, 식당과 커피숍처럼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고 소비하는 좁은 의미의 상업공간에 초점을 두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업건축은 주거건축과 함께 도시 건축의 양대 축을 이루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건축사나 건축이론 양쪽 모두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저급하게 취급되었다. 질펀한 시장바닥에서 고함치며 호객하는 사람들,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싸우는 사람들, 쏜살같이 밥 나르는 &lsquo;밥집 아줌마&rsquo;, 술에 만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장은 결코 고상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상업을 천시한 유교적 전통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상업자본이 우리 도시의 경관을 지배한다. 점차 커지고 있는 복합 상업건축은 동네의 작은 상점건축을 서서히 침몰시키고 있다. 상업과 문화가 충돌하면서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을 때 도시는 활기를 띤다. 과연 우리의 도시에서 상업은 문화를 자극하고 있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섣부른 해답을 내놓기 전에 길-속도-상업건축, 이<span style="font-family: Verdana"> 3</span>개의 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변화의 흔적을 여행하기로 하자. 상업이 발달했던 중세도시는 왜 좁고 꾸불꾸불한지, 성스러운 종교건축과 시장이 어떻게 공존했는지, 아케이드와 백화점은 도시에 어떤 충격을 주었는지, 초대형 쇼핑몰은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살피는 여행이 될 것이다. 그 여행에서 돌아오면 도시에 숨어 있는 관성과 변화의 동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자, 이제 상업과 문화의 충돌과 새로운 도시 건축의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 탐침할 시간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롤로그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4"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000-/%EA%B9%80%EC%84%B1%ED%99%8D2.JPG" />김성홍<br /> </strong>&ldquo;한국 건축의 숨은 힘은 크고 화렿나 것과 작고 소박한 것은 사이, 그리고 다양한 것들의 경계에 있다고 믿는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중간지대의 중간건축이 살아 꿈틀거려야 일상의 삶도 풍성하고 도시 경쟁력도 높아진다고 생각하고 이를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은 사람이다.&rdquo;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6</span>년 미국 워싱턴주립대 풀브라이트 연구교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년 서울시립대학교 기획연구처장․산학협력단장을 지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 부(副)커미셔너를 맡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프랑크푸르트도서전에서는 &lsquo;한독 퍼블릭 스페이스 포럼&rsquo;을 기획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년에는 &lsquo;메가시티 네트워크: 한국현대건축전&rsquo;을 총괄기획하였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Megacity Network: Contemporary Korean Architecture</span>』『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span style="font-family: Verdana">On Asian Streets and Public Space</span>』(공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Future Asian Space, Projecting the Urban Space of New Asia</span>』(공저, 출간예정) 등 도시와 건축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글을 국내외에 발표했다. <a href="http://sonomad.tistory.com" target="new"><span style="color: #333399"><span target="new" style="font-family: Verdana">http://sonomad.tistory.com</span></span></a><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 /> </span>&nbsp;<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18 오전 10:19:00《191》2010년 4월 24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7297"><img width="142"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C%98%A4%EC%85%80%EB%A1%9C%EB%A5%BC%EB%8B%AE%EC%9D%80%EB%82%A8%EC%9E%90.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4월 24일</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데이비드 버스의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청림출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3</span>)를 읽다. - 이 책이 원제는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Dangerous Passion</span>'이고, 위험한 열정이란 다름 아닌 &lsquo;질투&rsquo;를 가리킨다. 질투를 뜻하는 영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jealousy</span>&rsquo;의 어원은 차례대로 그리스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zelos</span>&rsquo;, 라틴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zelosus</span>&rsquo;, 불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jalousie</span>&rsquo; 혹은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jaloux</span>&rsquo;에서 유래했는데, 그리스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zelos</span>&rsquo;는 열정, 따뜻함, 열성 혹은 강한 욕망을 뜻한다. 그런데 불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jalousie</span>&rsquo;는 질투라는 뜻과 함께 &lsquo;발<span style="font-family: Verdana">blind</span>&rsquo;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정신의학자는,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잡고자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jalousie/blind</span>&rsquo; 뒤에서 아내를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질투가 생겨났다고 추론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7297"><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right" width="133" height="195"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EB%82%A8%EC%9E%90%EB%93%A4%EC%97%90%EA%B2%8C.JPG" /></a>지은이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설계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진화심리학에 기초해서 이 책을 썼다. 진화심리학과 질투의 관계를 더 파고들기 전에, 이번 기회에 질투와 시기라는 용어를 확실히 정리해 두자. 시오노 나나미는 『남자들에게』(한길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5</span>) 가운데 어느 글에 이렇게 적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6633"><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질투는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요, 선망은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교리에서 선망은 일곱 대죄에 끼워 넣었으나 질투는 제외한 것을 이해할 만하다. 질투는 동정 못 할 것도 없으나, 선망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질투란 내가 소유한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피해 의식이다. 그러므로 동정의 여지가 있지만, 선망은 남의 것에 대한 탐욕이므로 용서될 수 없다는 게 윗글의 요지다. 이런 해석은 데이비드 버스의 『오셀로를 닮은 남자』에서 고스란히 되풀이 된다(단 시오노 나나미의 &lsquo;선망&rsquo;은 아래의 글에서 &lsquo;시기&rsquo;로 바뀌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6633"><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일부 학자들은 질투라는 개념을 때로 유사한 개념인 시기envy와 혼동하기도 한다. 시기란 라틴어 &lsquo;invidere&rsquo;에서 온 것으로 악의를 가지고 바라본다는 뜻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정의를 보면 시기란 &lsquo;행복, 성공, 명성 등 가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우월함에 대해 불쾌감과 악의를 느끼는 것&rsquo;이라고 나와 있다. 질투와 시기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를 들어보자. 남자는 아름다운 아내를 거느린 다른 남자를 시기할 수 있다. 이 시기심은 자신이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상대 남자를 향한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아내를 소유한 남자가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고 의심한다면 그때 남편은 아내에게 질투를 느낄 것이다. 시기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 대해 느끼는 탐욕, 악의, 나쁜 감정 등을 포함한다. 반면 질투는 자신이 이미 가진 소중한 짝을 경쟁자에게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포함한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앞서 말했듯이 진화심리학자인 지은이는 질투를 신경증이나 미성숙과 같은 성격적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질투를 이성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진화심리학은 그것이 수백만 년에 걸쳐 성공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ldquo;감정적 지혜&rdquo;라고 말한다. 나아가 &ldquo;질투는 우리 조상들의 성공적인 생식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진화적 토대&rdquo;라고까지 말하는 지은이는, 질투는 정상인들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야망&middot;근면성&middot;지능&middot;신뢰성&middot;창의성&middot;쾌활함&middot;유머 감각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6633"><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질투는 미성숙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조상들과 오늘날의 우리가 계속 생존하고 생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감정이다. 예를 들어 질투는 위협적인 언사와 매서운 눈초리로 경쟁자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질투는 경계를 강화하거나 배우자에게 애정 공세를 퍼붓는 등의 전략을 동원하여 한눈을 팔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질투는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배우자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알려서 결국 사랑의 유지라는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한다. 성적 질투는 때로는 파괴적이기도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했던 문제에 대한 성공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배우자 어느 한 쪽의 외도는 다른 쪽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충성심을 떨어뜨리고, 한정된 자원을 다른 경쟁자에게 돌아가도록 만든다. 배우자의 외도는 자원의 분배만 아니라 생식의 기회마저 빼앗아 가며,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위협을 막아내지 못하거나 배신당할 가능성을 줄이지 못하면 부성애나 모성애는 결코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인 이혼은 아이들을 학대의 환경으로 몰아넣는다. 따라서 &ldquo;배우자가 배신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방어 체계가 진화 과정에서 구축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rdquo;<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450" height="347"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0000-/jealousy.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은이는 질투의 진화심리학에 과학적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lsquo;정자 경쟁&rsquo;에 대한 최신 연구를 덧보탠다. 남자의 정자가 여성의 생식기 안에서 고작 하루나 이틀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은 예전의 지식과 달리, 여성의 생식기 안에서 남자의 정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일까지 생존한다. 따라서 한 주 동안 한 여성이 두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출신이 다른 정자들은 난자를 먼저 만나기 위해 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정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①상대방보다 많은 정액을 사출해야 했다. 그래서 인간 남성의 정액량은 신체 무게와 비교했을 때, 일부일처제인 다른 영장류에 비해 두 배나 많아졌다. 그리고 ②인간의 정자는 힘차게 움직이는 꼬리를 가진 돌격형(스피드형)과, 돌돌 말린 꼬리를 가진 가미가제형으로 나뉘었다. 돌격형은 난자를 빨리 만날 수 있도록 개발된 반면, 수영 속도가 느린 가미가제형은 근원이 다른 정자를 감싸 안고 함께 죽는다. 이렇듯, 부피가 커진 정액량과 전투를 담당하는 특수 정자의 등장은, 생명의 기원에 경쟁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질투는 성 전략의 중요한 자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진화심리학의 논리를 고스란히 따르면, 질투를 부르고 부리는 인간의 성적 전략은,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middot;전쟁&middot;기아와 한정된 자원이 발달시킨 생존술이다. 그런데 고대의 압도적인 생존 위협이 가시고, 또 자원이 풍족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질투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왜일까? 환경은 바뀌었는데도 성적 전략만 낡은 습관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대와 정반대의 환경이 &lsquo;패스트푸드&rsquo;와 같은 외도의 가능성을 더욱 높여 놓았기 때문에 사라질 수 없는 걸까?<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17 오전 11:19:00에드먼즈·에이디노의 ‘루소의 개’<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9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3%A8%EC%86%8C%EC%9D%98%20%EA%B0%9C/%EB%A3%A8%EC%86%8C%EC%9D%98%EA%B0%9C%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불안, 그리고 탈출</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 두 사람이 문인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남달랐기에 둘의 분쟁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다툼의 관객 역시 유명인들이었으니, 지금에라도 그 일을 신중하게 검토해볼 만하다.<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조지 버크벡 힐, 『데이비드 흄이 윌리엄 스트라한에게 보낸 편지』(1888)</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66</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일 저녁, 영국해협은 폭풍우가 휘몰아쳐 눅눅하고 추웠다. 달갑지 않던 폭풍으로 항구에 발이 묶여 있던 여객선 한 척이 그날 밤이 되어서야 뒤뚱거리며 출발했다. 프랑스의 칼레에서 영국의 도버로 가는 여객선이었다. 승객 중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주 전 파리에서 처음 만난 영국인 외교관과 스위스인 망명객이 있었다. 망명객은 꼬리가 돌돌말린 갈색의 작은 애완견 쉴탕[영어로는 &lsquo;술탄&rsquo;]과 함께였다. 영국인 외교관은 배 멀미에 시달린 나머지 객실에 머물러 있었다. 망명객은 밤새 갑판에 있었다. 추위로 온몸이 꽁꽁 언 선원들도 그의 강건한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만약 그 여객선이 침몰했다면,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두 명도 영국해협 밑바닥으로 함께 가라앉았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외교관은 데이비드 흄이었다. 귀납법, 인과론, 필연성, 개인의 정체성, 도덕, 유신론 등 흄이 철학에 남긴 업적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르네 데카르트, 임마누엘 칸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등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다. 애덤 스미스의 동시대인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흄은 근대 경제학의 길을 열었으며, 역사편찬 방법 역시 근대화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망명객은 장-자크 루소였다. 루소의 지성과 업적도 누가 더 훌륭하다 말하기 힘들 만큼 대단했다. 루소는 정치학, 문학, 교육학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루소의 자서전 『고백』은 충격적일 만큼 독창적인 작품으로, 이후 비슷한 작품이 수없이 쏟아졌지만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는 화법과 예술적 전개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 교육문제를 다룬 『에밀』은 아동 양육법을 둘러싼 논쟁의 방향과 더불어 아동기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정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저서 『사회계약론』은 세대를 거쳐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루소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감정을 읽고, 사회나 자연과 관계 맺는 방식을 바꿔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배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흄은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비서직을 마치고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파리에서 보낸 26개월의 비서 생활은 그야말로 황홀한 시간이었고, 어쩌면 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산실이었던 파리의 살롱을 주름잡았고, 지적 능력과 품위로 많은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으며,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인품에 대한 찬사로 &lsquo;사람 좋은 데이비드&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 <em>le bon</em> David</span>)라고 불렸으니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흄이 불행에 처한 낯선 이에게 친절을 베푼 이유는 타고난 본성이 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소는 자신의 저서와 팸플릿이 종교계와 정치계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탓에 당시 거주하던 프랑스에서 쫓겨나 조국 스위스로 도피했다. 그러나 결국 그곳에서도 성직자들이 선동한 군중의 돌팔매질을 받고 쫓겨나게 됐다. 루소의 펜 끝에서 나오는 치명적인 파괴력 때문에 이 위험인물을 가까이 두려 하는 곳은 없었다. 흄은 이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3</span>세의 망명객을 위해 영국에 은신처를 마련해줘야 하는 무거운 짐을 떠맡은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동안 루소는 사방에 적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와 스위스 정부가 자신의 자유를 위협하고 해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 루소는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쫓겨 다녀야 했다. 결국 박해 받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며 심지어 명예를 상징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생각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해온, 속세에서 떨어져 살겠다는 결심과 잘 맞았다. 루소는 이런 고독한 삶에서도 우정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우정은 명료해야 했다. 그러니까 루소는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우정을 원했다. 동등한 두 사람 사이에서만 가능하고, 일체의 속박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우정을.</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루소는 지금 아는 사람도 없고, 언어조차 모르는 나라에서 오직 흄에게 의지해야 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전직 하녀로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span>년간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변함없는 동반자 테레즈 르바쇠르는 스위스에 홀로 남겨뒀다. 루소는 르바쇠르를 몹시 아꼈으며, 함께 있지 못할 때면 언제나 간절히 그녀를 찾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다행히 쉴탕이 곁에 있었다. 쉴탕에 대한 루소의 애정은 보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딱 한 번 개를 길러봤던 흄은 이렇게 말했다. &ldquo;그 동물에 대한 루소의 애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며, 감히 말로 표현할 수도 없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성인이 된 루소는 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등 피조물(<span style="font-family: Verdana">second creature</span>)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럽의 궁정에 파리 문화를 전하는 특파원임을 자임했던 프리드리히 그림은 이렇게 말했다. &ldquo;분명하건대 루소는 자신의 평화로운 안식을 방해할 친구와 함께 떠났다.&rdquo; 늘 루소 곁을 지켰던 쉴탕처럼, 끊임없이 루소를 따라다니며 으르렁거리게 될 이 성가신 친구는 세상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으며 언제든 자신을 배신해버릴 믿을 수 없는 곳이라는 루소의 뿌리 깊은 믿음의 계기가 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span>일 정오, 여객선은 도버에 도착했다. 영국 땅을 밟고 선 루소는 흄의 목을 껴안은 채 아무런 말 없이, 눈물범벅된 얼굴로 흄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런던에 도착하자 흄은 형에게 편지를 썼다. &ldquo;서로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며 평생 루소와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rdquo; 그리고 유쾌하게 덧붙였다. &ldquo;우리가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루소나 저나 논쟁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흄은 파리에서 당대의 위대한 지식인들, 뛰어난 살롱 여주인들과 친분을 나눴다. 그러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의 관념, 제도, 문화에 도전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급진적 사상가들 중에서도 루소만큼 급진적인 인물은 없었다. &lsquo;사람 좋은 데이비드&rsquo;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데려온 이 인물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 순수한 영혼</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조물주의 손에서 태어난 순수한 영혼<br /> </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T. S. 엘리엇, 『작은 영혼』(1929)</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바로 나의 탄생이었다.&rdquo; 루소는 『고백』에서 이렇게 말했다. 루소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12</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8</span>일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계공 이자크 루소와 칼뱅교 목사의 딸 쉬잔 베르나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쉬잔은 루소가 태어난 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일 만에 숨을 거뒀다. 이자크는 재혼하기는 했지만 평생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갓 태어난 둘째 아들에게서 쉬잔의 모습을 봤던 이자크는 루소를 안을 때면 언제나 지독한 슬픔을 느꼈다. 아버지가 엄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말을 꺼냈을 때 루소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span>년이 지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ldquo;좋아요. 아버지. 하지만 눈물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을 텐데요.&rdquo;<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89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3%A8%EC%86%8C%EC%9D%98%20%EA%B0%9C/%EB%A3%A8%EC%86%8C(1).JPG" /><br /> <br /> 엄마를 잃은 지독한 상실감, 거기서 비롯된 분노와 애정결핍은 루소의 어린 시절에 큰 정신적 충격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성인이 된 루소가 남을 못 믿고 누구든 언젠가 자신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 믿으면서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망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채 결코 손에 잡히지 않는 행복에 비통해하며 자신의 내면세계에만 몰두한 것도 놀랍지 않다. 루소는 외부세계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가 더 믿음직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루소는 자신을 둘러싼 사실에 대해서는 틀릴 수 있을지언정, &ldquo;내가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틀릴 수 없다&rdquo;고 생각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루소는 건강하지 못했다.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질병이 평생 루소를 괴롭혔는데, 바로 요도의 선천적 기형이었다. 그래서 소변을 볼 때마다 언제나 더디고 힘겨워했으며, 일을 끝내고도 방광이 여전히 반쯤 차 있는 느낌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엄마 없이 자란 루소는 열 살이 되던 해 아버지마저 잃었다. 프랑스인 퇴역 대위와 말다툼을 하던 이자크는 시내에서 칼을 빼들었고, 그 프랑스인은 이자크를 고소했다. 당시 제네바의 법률에 의하면 시내에서 칼을 빼드는 것 자체가 범죄였다. 감옥에 가는 대신 제네바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자크는 루소를 삼촌한테 보냈다. 삼촌은 루소와 자기 아들 베르나르를 시골에 있는 목사에게 보냈고, 둘은 그곳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훗날 루소는 이 시기에 전원 속에서 더 없는 행복을 맛봤다고 회상하며, 자신이 평생 몰두한 주제인 우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ldquo;시골생활의 단순함을 통해 나는 매우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바로 우정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rdquo; 루소는 그곳에서 자신의 성적 기질을 발견하기도 했다. 루소가 말썽을 피울 때면 목사의 여동생이 체벌을 가했는데, 그녀의 손길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던 루소는 일부러 다시 잘못을 저지르곤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네바는 성벽과 산맥으로 둘러쌓인 인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만의 작은 도시국가였다. 주변의 강력한 가톨릭 군주국들이 호시탐탐 위협했지만, 제네바는 이 이중의 보호막 덕택에 칼뱅주의의 색채를 띠는 특유의 문화와 분위기를 간직할 수 있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41</span>년 장 칼뱅이 신의 섭리를 구현하기 위해 교회헌법을 구성하고 작성한 곳도 제네바로서, 루소는 늘 자신을 &lsquo;제네바의 시민&rsquo;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루소의 친구들도 루소에게 편지를 보낼 때마다 &lsquo;위대한 시민에게&rsquo;라고 적었다). 이런 제네바에서의 유년 시절은 루소의 사상, 특히 정치, 민주적 참여, 개인의 책임에 대한 사상적 큰 틀의 바탕이 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28</span>년<span style="font-family: Verdana"> 3</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span>일 일요일, 루소는 세 번째로 가슴 아픈 이별을 겪고 유년기와 확실히 작별하게 된다. 당시 열여섯 살이던 루소는 조각가 도제수업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성벽 밖을 거닐던 루소는 멀리서 성문 닫히는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는다. 이들은 필사적으로 뛰었지만 스무 발자국 정도 남겨 놓고 성문의 다리가 올라가버리고 만다. 벌써 두 번이나 성문을 넘다가 잡힌 적이 있었던 루소는 스승에게 돌아가지 않고 제네바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사촌 베르나르가 먼 길을 떠나는 루소를 위해 작은 칼을 비롯한 물건 몇 가지를 챙겨줬다. 삼촌과 숙모가 베르나르를 통해 물건을 보낸 이유는 말썽만 피우는 조카를 멀리 쫓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루소는 사보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주일 뒤, 루소는 안시에서 자기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여인을 소개받는다. 서른이 채 안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남작부인이 바로 그 여인으로서, 그녀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lsquo;매혹적인 모습&rsquo;의 스위스인이었다. 남작부인은 개신교의 영혼들, 특히 잘생기고 젊은 남자의 육신 안에 자리잡은 영혼을 구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남작부인은 집 없이 떠도는 루소를 돌봐줬고, 둘은<span style="font-family: Verdana"> 5</span>년이 지나기 전에 연인이 됐다. 그 와중에 남작부인은 가톨릭 신부의 충고로 루소를 토리노로 보냈다. 그곳에서 루소는 예비 교리자들을 위한 수도원 시설에 잠시 머물며 가톨릭으로 개종했고(이때의 일화가 상세히 기록된 『고백』에 따르면, 당시 루소는 남성들로부터 원치 않는 성적 관심을 받곤 했다), 수도원을 나온 뒤로는 하인 일을 하게 된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95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3%A8%EC%86%8C%EC%9D%98%20%EA%B0%9C/%EB%B0%94%EB%9E%91%EB%82%A8%EC%9E%91%20%EB%B6%80%EC%9D%B8(1).JPG" /><br /> <br /> 남작부인을 &lsquo;엄마&rsquo;로 부르던 루소, 루소를 &lsquo;아기&rsquo;로 부르던 남작부인의 관계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40</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월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온 루소는&nbsp; 남작부인이 지방 고위관리의 아들인 젊은 청년과 있는 것을 발견한다.&nbsp; 루소는 그 청년을 &ldquo;멀대 같이 키가 크고 창백한 얼굴에,&nbsp; 허우대는 멀쩡하나 멍청하게 생긴 얼굴&rdquo;이라고 묘사했다.&nbsp; 루소에게 이 사건은&nbsp; 또 하나의 배신이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일을 계기로 루소는 리옹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처음 계몽사상가들을 만나게 된다. 계몽사상가란 이성을 통해 합리적 질서를 구축하고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군의 과학자, 예술가, 작가, 정치인 등을 일컫는 말로서 프랑스 계몽주의를 주도한 사람들이다. 당시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던 계몽사상가들은 전통과 권위, 특히 종교적 권위를 신뢰하지 않았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신들이 느슨하지만 국제적으로 통합된 진보의 문화를 일구는 한 축이라고 생각했다. 루소는 &lsquo;마블리 씨&rsquo;로 불리던 리옹의 주임감독관 장 보노의 가정교사로 일했는데, 보노의 두 동생(가브리엘 보노 드 마블리, 에티엔 보노 드 콩디약)도 계몽사상가였다. 이 가족과의 만남을 통해 루소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전문,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0"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3%A8%EC%86%8C%EC%9D%98%20%EA%B0%9C/%EC%97%90%EB%93%9C%EB%A8%BC%EC%A6%88%EC%99%80%20%EC%97%90%EC%9D%B4%EB%94%94%EB%85%B8.JPG" />데이비드 에드먼즈&middot;존 에이디노<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David Edmonds&middot;John Eidinow<br /> </strong></span>각각 옥스퍼드대학교와 곤빌앤카이우스칼리지에서 철학과 법학을 전공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BC</span>에서 시사 다큐멘터리 전문작가와 프로듀서로 만난 두 사람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1</span>년 『비트겐슈타인의 부지깽이: 두 위대한 철학자 사이에 벌어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분간의 논쟁』(한국어판 제목은 『비트겐슈타인은 왜?』)을 발표하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이후 『바비 피셔, 전쟁에 나가다: 소련인들은 역사상 가장 이상한 체스게임에서 어떻게 졌는가?』(<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와 『루소의 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6</span>) 등을 발표하며 &lsquo;위대한 두 인물의 싸움&rsquo;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논픽션 장르를 개척해냈다. 현재 에드먼즈는 개방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동료 철학자 나이젤 와버튼과 함께 &lt;철학의 짜릿함&gt;(<span style="font-family: Verdana">Philosophy Bites</span>)이라는 팟캐스트 연재물(철학자들과의 인터뷰)을 제작해 철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에이디노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BC</span>를 그만둔 뒤 프리랜서 인터뷰 작가이자 컬럼니스트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BC</span>월드서비스와 라디오<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에서 여러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임현경<br /> </strong>학부에서 영어교육을 전공한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연극무대에 섰으며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한 뒤 전문번역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번역가들의 네트워크 &lsquo;컨트라베이스&rsquo;(<a target="new" href="http://www.contrabase.net/"><span style="font-family: Verdana">www.contrabase.net</span></a>)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불안의 늪에서 행복을 꽃피워라』『속도에서 깊이로』『마즐토브』등이 있다.<br /> <br /> <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span></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17 오전 10:57:00‘스틸라이프’ 13회<img width="600" height="758" alt=""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3%ED%9A%8C%ED%83%91%EC%9E%AC.JPG" /><br /> <br /> <br />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첼로 9<br /> </span></strong></span><br /> 미국의 약국은 별의별 게 다 있는 참 편리한 곳이지만, 그 규모가 하도 커서 아는 사람을 만나도 서로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죠. 감기 기운이 있어서 타이레놀이라도 사 먹을까 싶어 들어간 약국 저쪽 구석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한 여자가 허리를 굽히고 물건을 고르고 있는 게 제 눈에 들어왔어요. 저도 모르게 그쪽을 향해 다가가는데, 왠지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어요. 바로 곁에 다가가 보니 그녀가 틀림이 없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우리는 반갑다고 호들갑을 떨며 약국을 나와 한참을 걸었어요. 겨울이지만 하늘은 파랗고 날씨는 정말 너무 좋았죠. 우리나라만 스타벅스니 커피빈이니 하는 커피집이 하도 많아 커피공화국이라 생각했었는데, 뉴욕도 그렇더군요. 아니 이 세상의 도시들이 다 커피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ldquo;우리는 언제 맨 처음으로 커피를 먹었을까? 어른이 되는 징표인양 언젠가 먹기 시작한 커피, 도대체 우리는 왜 매일 커피를 마시는가? 밥 다음으로 자주 먹는 커피는 우리의 고독에 어떻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 걸까? 커피에 중독된 우리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커피, 아이스커피, 식은 커피,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 카페라테, 카푸치노, 모카치노, 모카자바, 콜롬비아 수프레모, 헤이즐넛, 킬리만자로, 탄자니아 등등&hellip;&rdquo; 그녀를 서울도 아닌 뉴욕에서 그렇게 쉽게 우연히 만났다는 충격을 누그러뜨리기라도 하듯 제 머릿속엔 갑자기 커피에 관한 모든 생각들이 떠올랐어요. 길 건너마다 하나씩 있는 커피집이 그날 따라 한참을 걸어도 보이지 않았어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ldquo;저기-&rdquo; 손짓하며 우리가 들어간 곳은 던킨도넛 가게였어요. 갖가지 모양의 도넛을 내려다보며 저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어요. 도넛 속에 제 가버린 사랑이 녹아들어 입에 들어가자마자 스르륵 녹아버리는 것 같았지만, 아무런 맛도 느낄 수가 없었어요. 제 눈물이 섞여 들어간 달고 짠 맛이라고나 할까요? 그녀는 예전처럼 뚱뚱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마른 듯한 몸에 걸친 허름한 검은 스웨터에는 오래된 가난이 묻어 있었죠. 그 부잣집 딸내미의 행색이 그렇게 초라해 보이는 게 낯설고도 가슴 아팠어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도넛과 커피를 마셨어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세월은 이미 그렇게 흘렀고, 제 앞에 앉은 그녀는 이미 기억 속의 &lsquo;내 사랑 뚱뚱한 그녀&rsquo;가 아니었어요. 예전처럼 그녀는 도넛을 게 눈 감추듯 먹지 않았어요. 도넛 한 개를 포크로 사등분하더니 그 중 두 개를 입에 넣어 아주 천천히 씹었어요. 저는 제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리워하던 여자가 바로 앞에 앉은 그녀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모든 사랑은 기적이지만 대부분의 재회는 그저 식은 커피의 맛을 닮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슬픈 시간이었죠. 제가 그리워했던 건 도넛을 눈 깜짝할 새 한 상자씩 먹어치우는 그녀, 뚱뚱하지만 아름답던 그녀, 살이 찔수록 깊은 첼로의 음률을 연주하던 그녀, 이유를 알 수 없는 괴로움에 고통스러워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늠름하기 짝이 없는 초라하지 않은 그녀였어요. 한없이 작아 보이는 그녀가 도넛을 천천히 씹으며 말했어요. &ldquo;그렇게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 나두 네 생각 정말 많이 했어. 병원에서 너를 마지막 본 날 이후 난 부모님의 결정대로 뉴욕 가는 비행기를 탔어. 뉴욕에 사는 삼촌이 존스 홉킨스 병원의 신경정신과 의사여서 나를 그리로 부른 거야. 물론 삼백 살 먹은 비올롱 첼로를 옆자리에 앉히고 말이지. 기내식 식사가 나오는 데 난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어. 승무원에게 도넛 한 개만 가져다줄 수 없느냐고 물었지. 불행히도 그 비행기 안에는 도넛이 한 개도 없었어. 갑자기 배가 고파진 나는 기내식이라도 먹어보려고 애썼지만 갑자기 구토가 나더라고. 그즈음 나는 도넛이 아닌 그 어떤 걸 먹어도 구토가 나서 토하곤 했어. 검사를 해보아도 의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지. 금방 토할 것 같은 배를 움켜쥐고 기내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토했어.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내 뱃속에서는 알 수 없는 노란 물질이 계속 토해져 나왔어. 믿지 못하겠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금을 닮은 어떤 물질이었어. 남들이 놀랄까 봐 나는 얼른 변기를 비우고 제자리로 돌아갔어.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든 나는 뉴욕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잤던가 봐. 드디어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나는 첼로를 들 기운이 하나도 없었어. 비틀거리는 나를 보고는 내 뒤에 앉아 있던 어느 미국인이 첼로를 들어준 거야. 그게 우리들 인연의 시작이었지.&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저는 그녀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그 세월 동안 그녀를 그리워하던&nbsp; 저 자신을 돌이켜보았어요. &lsquo;삶이란 매순간 &nbsp;끊임없이 무너져가는 모래성이다.&rsquo;&nbsp; 문득 누군가 그렇게 썼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1-11-15 오후 1:41:00고골·비야무사의 ‘외투’<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51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9%B8%ED%88%AC/%EC%99%B8%ED%88%AC%ED%91%9C%EC%A7%80.JPG" /><br /> <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1114"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9%B8%ED%88%AC/13p.JPG" /><br /> <br /> 국(局)에&hellip; 그러나 어느 국인지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모든 종류의 국, 연대, 사무실, 한마디로 모든 종류의 관리 계층보다 화를 더 잘 내는 부류도 없다. 요새는 개인도 누구나 자신이 당한 일을 사회 전체가 당한 모욕으로 생각한다. 어느 도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주 최근에 어느 군(郡) 경찰서장이 청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청원서에서 그는 국가의 법령이 무너지고 자신의 성스러운 이름이 쓸데없이 언급되고 있다고 분명하게 진술했다. 그 증거로 그는 방대한 분량의 어떤 낭만적인 작품 한 권을 청원서에 첨부했다. 그 작품에는 십 쪽마다 한 번씩 군 경찰서장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몇 군데에선 만취한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니 온갖 불쾌한 일을 피하기 위해 문제가 되는 국을 그냥 어느 국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그리하여 어느 국에 어떤 관리가 근무하고 있었다. 아주 뛰어난 관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이 약간 얽은 관리는 머리칼이 약간 불그스레하고, 겉보기에도 시력이 별로 좋지 않고, 이마는 약간 벗어진 데다 양 볼에는 주름이 지고, 안색은 치질환자 같았다&hellip; 어쩌겠는가! 페테르부르크의 기후 탓인 것을. 관등에 대해 말하자면(우리나라에서는 맨 먼저 관등부터 밝혀야 하니까), 그는 이른바 만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급 문관이었다. 알다시피 밟혀도 끽소리 한번 못하는 사람들을 짓누르는 칭찬할 만한 습성을 지닌 온갖 작가들이 실컷 조롱하고 실컷 비꼬고 실컷 비아냥대는 바로 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급 문관. 이 관리의 성은 바시마치킨이었다. 명칭만 봐도 이 성은 바시마크<span style="color: #666699"><sub><sup>(러시아어로 바시마크는 단화, 목이 짧은 장화라는 의미―역주)</sup></sub></span>에서 유래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 어느 때에, 어떻게 바시마크에서 유래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심지어 처남까지도 바시마치킨 집안사람들은 모두 장화를 신고 다녔고, 일 년에 세 번 정도만 밑창을 갈았다. 이 관리의 이름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span style="color: #666699"><sub><sup>(러시아인의 성명은 이름, 부칭(父稱), 성으로 이루어진다. 이 경우에 아카키는 이름, 아카키예비치는 부칭인데 이는 아카키의 아들이라는 뜻―역주)</sup></sub></span>였다. 아마 독자에게 이 이름은 좀 이상하고 힘들여 찾아낸 이름처럼 보이겠지만, 단언컨대 결코 어렵게 찾아낸 것이 아니라 도저히 다른 이름을 지어줄 수 없는 상황이 저절로 벌어진 것인데, 사정인즉 이렇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span style="font-family: Verdana"> 3</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3</span>일 밤에 태어났다.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관리의 아내로 아주 착한 부인이었고, 당연히 아기에게 세례를 받게 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 방문 맞은편에 놓인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녀의 오른쪽에는 원로원 과장으로 근무했던 매우 훌륭한 인물인 대부 이반 이바노비치 예로시킨과 구(區) 경찰서장의 아내이자 보기 드물게 덕이 있는 대모 아리나 세묘노브나 벨로브류시코바가 서 있었다. 그들은 산모에게 세 가지 이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도록 했다. 모키 혹은 소시, 아니면 순교자의 이름을 따서 호즈다자트로 이름을 지으라고 했다. 고인이 된 산모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ldquo;싫어요. 이름들이 다 그저 그래요.&rdquo; 그들은 그녀를 만족시키기 위해 달력의 다른 장을 펼쳤다.<span style="color: #666699"><sub><sup>(여기서 말하는 달력은 하루 한 장씩 넘기는 일력으로, 각 장에는 그날에 태어난 성인의 이름이 나오고 그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역주)</sup></sub></span> 이번에는 트리필리, 둘라, 바라하시라는 세 개의 이름이 나왔다. &ldquo;이건 진짜 벌이로군.&rdquo; 늙은 산모가 말했다. &ldquo;무슨 이름이 다 이 모양이람. 정말이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야. 바라다트나 바루흐라면 또 몰라도 트리필리와 바라하시라니.&rdquo; 달력을 또 한 장 넘기자 팝시카히와 바흐티시라는 이름이 나왔다. &ldquo;음, 이제 알겠어요.&rdquo; 늙은 산모가 말했다. &ldquo;아마도 이 아이의 운명인가봐요. 그렇다면 차라리 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게 낫겠어요. 아버지 이름이 아카키였으니 아들 이름도 아카키로 해요.&rdquo; 이렇게 해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란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아이에게 세례를 주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마치 자신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급 문관이 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결국 이 모든 일은 바로 이렇게 일어났던 것이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일이 완전히 불가피하게 일어났고, 아기에게 다른 이름을 지어주기가 도저히 불가능했음을 독자가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언제 어느 때 그가 국에 들어왔고, 누가 그를 임명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국장과 부장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그는 늘 같은 자리와 같은 지위, 그리고 같은 직무에서 변함없이 서류를 필사했다.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은 그가 대머리에 제복을 입고, 이미 관리가 될 준비를 완전히 한 채로 세상에 태어났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다. 경비원들은 그가 지나갈 때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흔한 파리 한 마리가 응접실을 날아가는 양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부장들은 어쩐지 좀 냉정하게 폭군처럼 그를 대했다. 어떤 부계장은 &ldquo;정서해주시오&rdquo;라든가, &ldquo;이건 흥미롭고 좋은 일이오&rdquo;라든가, 아니면 예의를 아는 부서에서 쓰는 뭔가 기분 좋은 말 한마디 없이 그의 코앞에 서류를 불쑥 들이밀곤 했다. 그러면 그는 누가 서류를 갖다놓았는지, 그 사람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그저 서류만 바라보며 일을 맡곤 했다. 그는 서류를 받아서 곧바로 정서하기 시작했다. 젊은 관리들은 사무적인 기지를 맘껏 발휘해 그를 조롱하고 놀려댔으며, 그의 면전에서 그와 일흔 살 먹은 그의 하숙집 여주인에 대해 꾸며낸 여러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들은 노파가 그를 때린다고 말하거나 언제 노파와 결혼하느냐고 물었으며, 그의 머리에 종잇조각을 뿌리면서 눈이 온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마치 자기 앞에 아무도 없다는 듯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젊은 관리들의 놀림은 그의 일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이 모든 짓궂은 언행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서하는 데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다. 단지 농담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하거나 사람들이 팔꿈치를 밀치며 일을 방해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ldquo;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rdquo; 그런데 그의 말과 목소리에는 이상한 무언가가 있었고, 강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최근에 국에 들어온 한 젊은이는 다른 동료들을 따라 그를 조롱하려다 마치 뭔가에 찔리기라도 한 듯 갑자기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그의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고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떤 이상한 힘 때문인지 그는 지금껏 점잖은 사교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알고 지내던 동료들과도 멀어졌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가장 즐거운 순간에, 이마가 벗어진 작달막한 관리가 가슴을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ldquo;날 내버려둬요, 왜 날 모욕하는 거요?&rdquo;라고 말하는 모습이 그 젊은이의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이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말 속에서 &ldquo;나는 당신의 형제요&rdquo;라는 또다른 말이 울렸다. 그러면 이 가엾은 젊은이는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고, 그후 평생 동안 인간에게 비인간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사교계 사람들에게조차, 오 하느님, 사교계에서 고결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에게조차 잔인하고 무례한 면이 얼마나 많이 숨어 있는지를 보면서 여러 번 몸서리를 쳤다&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문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9%B8%ED%88%AC/39p.JPG" /><br /> <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35" height="29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9%B8%ED%88%AC/%EA%B3%A0%EA%B3%A8.JPG"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Гоголь, 1809-52<br /> </strong></span>우크라이나 소로친츠이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고골은 네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졸업 후 열아홉 살 때 페테르부르크로 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29</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V. </span>알로프라는 필명으로 서사시 『한스 큐헬가르텐』을 자비로 출간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실망한 고골은 책을 모두 소각한다. 고골이 작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31</span>년 고향의 신화와 전설, 민담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 『디칸카 부근 마을의 야화』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후 고골은 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학부에서 중세사를 강의하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35</span>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집필활동에 전념하여 「넵스키 거리」「광인 일기」「외투」와 같은 페테르부르크를 소재로 한 단편들을 발표한다. 특히 「외투」는 고골의 단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삶의 목표가 고작 외투인 소시민의 모습과 비인간적인 관료제도를 희비극적으로 그려낸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36</span>년에는 부패한 러시아 관료제와 인간의 속물근성을 풍자한 희곡 『검찰관』을 발표해 호평을 받지만, 보수적인 관리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러시아 농노제도를 풍자한『죽은 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 2</span>』를 집필하지만, 그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span style="font-family: Verdana"> 2</span>권의 원고를 소각하는 등 정신적 혼란에 빠져 지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52</span>년 생을 마감한다. 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라 불리며, 도스토옙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02"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9%B8%ED%88%AC/%EB%B9%84%EC%95%BC%EB%AC%B4%EC%83%A4.JPG" />노에미 비야무사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Noemi Villamuza<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1</span>년 스페인 팔렌시아에서 태어났다.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으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8</span>년부터 바르셀로나에 살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을 그린 『일곱 살 오스카의 비밀』이 스페인 정부가 수여하는 프레미오 나시오날 데 리테라투라 인판틸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 서른 권이 넘는 책에 그림을 그렸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바베트의 만찬』에 그린 일러스트로 훈세다 상을 받았다.<br /> <br /> <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항재<br /> </strong>학부와 대학원에서 노어노문학을 공부하고 「투르게네프의 후기 중단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리키세계문학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을 지내고 현재 단국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의 정치학 : 투르게네프 소설 연구』『러시아 문학의 이해』(공저) 등이 있고 러시아 문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썼다. 옮긴 책으로 미르스키의 『러시아 문학사』,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귀족의 보금자리』『첫사랑』, 부닌의 『아르세니예프의 생애』『숄로호프 단편집』 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15 오전 10:41:00《190》2010년 4월 21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3024928"><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5%84%EA%B7%80.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21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안느-실비 슈프렌거 『아귀』(열림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를 읽다. - 스물일곱 살의 여주인공 클라라는 폭식증이고, 그녀의 동갑내기 애인인 프레데릭은 거식증이다. 이 작품은 이런 이항구조로 가득 차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몸, 언제나 결국엔 몸이다. 나는 끊임없이 몸의 문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도망치고 싶은 욕구와 즐기고 싶은 욕망, 혐오감과 쾌감 사이에서 방황한다. 내가 육체의 부름을 그토록 경계하는 이유는, 내가 그것에 결코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늘 거역할 수 없는 두 개의 힘에 시달린다. 그 하나는 몸을 팔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당의 성체를 마구 집어삼켜 나 자신을 정화하려는 욕구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클라라는 거동조차 불편할 정도로 뚱뚱하다. 그녀의 폭식증은 열두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는데, 모든 폭식증과 거식증이 그렇듯이 원인은 복합적이다. 먼저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없었다는 것(가끔씩 만난 아버지는,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이나 안정을 주지 못했다), 그녀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언니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다섯 살에서 여덟 살 사이에 여러 차례 강간을 당했다는 것(아버지인지도 모른다). 좀 빤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81" height="266"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8A%88%ED%94%84%EB%A0%8C%EA%B1%B0(1).JPG" />&ldquo;내 몸은 여기저기 무수하게 구멍이 뚫린 체이다. 다섯 살 나이에 내 영혼은 사방으로 갈라진 틈을 통해 남김없이 흘러가버렸다. (&hellip;) 내 몸은 움푹 파여 있고 텅 비어 있다. 모든 것이 이토록 빨리 새어나가 버리는 이 몸을 대체 어떻게 채운단 말인가.&rdquo; &ldquo;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나는 너무나도 일찍 나쁜 어른들의 세계로 불려 갔다. (&hellip;)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방황했고, 마구 음식을 먹었고, 그 마구 먹은 음식들을 토해냈다.&rdquo; &ldquo;내가 이렇게 폭식과 구토를 일삼게 된 것도 성기의 그 움직임을 스스로에게 감추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옷장문을 닫아버리기 위해, 시큼한 토사물 속에 내 기억을 희석해버리기 위해&hellip;&rdquo; 같은 고백을 보면, 나열된 원인 가운데 마지막 것이 가장 결정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주인공이 어려서 당했던 강간이 그녀를 폭식증으로 인도했다면, 그것은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처단이면서,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체험에 대한 방어다. 뚱뚱해지면 아무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간의 기억은 몸에 대한 태도만 바꾸어 놓지 않았다. &ldquo;만약 누군가가 나를 강간한다면? 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일일 게다. 애정이나 마음의 고백? 그런 건 이제 다 끝난 일이다&rdquo;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사<a target="_blank" href="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6512052"><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127"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7%90%EB%A1%9C%EC%8A%A4%EC%99%80%20%EA%B0%80%EC%8A%A4%ED%85%8C%EB%A0%88%EC%95%84.JPG" /></a>랑과 성에 대한 전도된 의식마저 남겨놓았다. 그녀는 창녀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의 폭식증은 처음부터 &ldquo;얼룩진 어린 시절&rdquo;에 대한 &ldquo;단죄&rdquo;였고, 창녀가 되고 나서는 그것을 속죄하려는 추가 행동이 따랐다. 그녀는 자신의 손님에게 &ldquo;구타&rdquo;를 요청하곤 했는데, 속죄 요청이기도 했던 그것에는 또 다른 설명도 있을 수 있다. 윌리 파시니의 『에로스와 가스테레아』(동심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6</span>)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뚱뚱한 여자는 몸매가 뚱뚱한데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고마워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남자의 요구에 응하는 경우가 많은데, 심지어는 사람을 속이라면 속이고 어떤 비난이든 감수하라면 감수하며 시시콜콜한 사도마조키스트적 희롱도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hellip;) 여자들에게 접근할 때 아주 예쁜 여자들은 친구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살이 뚱뚱하게 찐 여자를 고르는 데 그런 여자들은 여간해서 거절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다시말해 바로 그것이 &lsquo;뚱보 창녀&rsquo;의 경쟁력이었다고 말하면 너무 비열한 것일까? 거식증이나 폭식증은 &ldquo;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지만 정작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rdquo;거나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내보이는 몸짓 언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오 맙소사, 주님, 제 살로부터 저를 정화시켜주세요. 저의 내면으로부터 씻겨주세요. 이렇게 엎드려 기도합니다. 전 너무나 추해요.</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0033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구원을 찾아 홀로 사막을 헤맨다. 이 사막에서는 죄인 노릇을 하는 것도, 속죄양 노릇을 하는 것도 모두 내 몫이다.</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프레데릭이 갑작스럽게 죽자, 클라라는 그의 골분을 먹는다. 에로티시즘과 식인은 원래 잘 어울리는 공식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클라라가 프레데릭의 골분을 먹어야 될 만큼 설득력 있는 에로티시즘이 느껴지지 않는다. 식상한 소재, 단순한 구성, 자동인형 같은 인물&hellip; 행주를 짜낸 물로 만든 가짜 커피 같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14 오전 11:58:00울렛의 ‘미적분 다이어리’<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9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F%B8%EC%A0%81%EB%B6%84%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더 수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텐데</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60pt; br: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잰더</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nbsp;&nbsp; 자일스 선생님은 어릴 때도 학교가 사는 낙이었을걸. <br /> 12년 만에 졸업한다는 걸 아직도 못마땅하게 여기시잖아.<br /> <strong>버피</strong>&nbsp;&nbsp; 아마 수학 시간에 이렇게 생각하셨을 거야. &lsquo;수학 수업을<br /> 늘려야 해. 그러면 더 수학적인 학교가 될 수 있을 텐데.&rsquo;<br /> ─ 「암흑기The Dark Age」『버피와 뱀파이어Buffy the Vampire Slayer』</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rchimedes</span></sup></sub></span>는 전형적인 수학광이면서 한편으론 여러 가지 실용적인 장치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 일부인 강력한 무기들은 기원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2</span>년 시라쿠사가 로마 장군 마르셀루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Marcellus</span></sup></sub></span>의 포위 공격을 (일시적으로나마) 격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무엇보다 순수 수학,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로마 역사가 플루타르코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Plutarchos</span></sup></sub></span>에 따르면, 수학에 정신이 팔린 아르키메데스를 하인들이 강제로 목욕시키곤 했는데, 목욕 후 아르키메데스는 난로의 잿더미나 기름 발린 자기 몸에다가 기하 도형을 그려댔다고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외곬의 집념은 사실상 그의 몰락을 불러왔다. 결국 마르셀루스 장군은 아르키메데스의 교묘한 방어 무기를 이겨냈고, 로마 병사들은 시라쿠사 시내로 쳐들어왔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흙바닥에 그린 기하 도형을 연구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주변에서 난리가 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lsquo;전리품을 찾던&rsquo; 로마 병사가 아르키메데스에게 다가가 마르셀루스 장군의 막사로 가자고 요구하자, 아르키메데스는 난색을 보이며 기하학 문제를 마저 풀고 싶다고 말했다. &ldquo;제발 부탁이네, 방해하지 말게나.&rdquo; 발끈한 병사는 그 자리에서 아르키메데스를 죽여버렸다. &ldquo;그는 자기 피로 자기 그림의 선을 어지럽히고 말았다.&rdquo;<span style="color: #666699"><sub><sup>(이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역사가 막시무스<span style="font-family: Verdana">Valerius Maximus</span>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들<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Memorable Doings and Sayings</span></em>』에 실려 있다. 그 병사가 아르키메데스를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엇갈리지만, 중세 목판화에는 그의 머리가 둘로 쪼개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마르셀루스 장군은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비록 아르키메데스의 독창력 때문에 시라쿠사 정복이 지체되긴 했지만 장군은 그 독창력을 매우 흠모했다고 한다.)</sup></sub></span><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2" height="42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16p.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수백 년 후 제르맹<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phie Ger&shy;main</span></sup></sub></span>이라는 프랑스 소녀에게 영감을 주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span>세기 말에 그 이야기를 읽은 제르맹은 누군가 기하학 문제에 그렇게까지 빠져들 수 있다면 기하학이란 분명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학문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래서 제르맹은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나무람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이불 밑에서 몰래 수학을 공부했다. 나중에는 남학생으로 변장하고 에콜 폴리테크니크 이공대학에 다녔으며(당시 여자는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31</span>년 유방암으로 죽을 무렵에는 뛰어난 수학자가 되어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b><sup><span id="1321238396534S" style="display: none">&nbsp;</span></sup></sub></span><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b><sup>(제르맹은 &lsquo;제르맹 소수&rsquo;를 창안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르맹 소수에 2를 곱하고 1을 더하면 또 다른 소수를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소수 2에 2를 곱하면 4가 나오고, 여기에 1을 더하면 5라는 또 다른 소수가 나온다.)</sup></sub></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아르키메데스를 죽인 병사는 그다지 영감을 받지 못했다. 어쩌면 아르키메데스 때문에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에 대한 나쁜 기억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수업 시간에 기하학 문제를 풀지 못한 그를 조롱하던 선생님. 뒤에서 낄낄대던 친구들. 억눌린 울분과 불만이 끓어오른 병사가 욱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바람에 아르키메데스는 안타깝게도 일찌감치 생을 마감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순전히 추측일 뿐이지만, 지금 여러분 가운데 찔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르키메데스가 하마터면 미적분을 발명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오늘날 고등학교 미적분의 트라우마는 나이와 성별, 출신 성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다시 강제로 다항식의 부정적분을 구하느니 차라리 자기 목을 조르고 송곳으로 고문당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미적분은 우리가 고등학교를 떠나고 나면 전염병처럼 피해야 하는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미국 드라마 &lt;하우스<em>House</em>&gt;의 한 에피소드 도입부에는 학생들이 AP<span style="color: #666699"><sub><sup>(Advanced Placement : 미국에서 고등학생이 대학 진학 전에 대학 인정 학점을 취득할 수 있는 고급 학습 과정―옮긴이)</sup></sub></span> 미적분 시험을 보던 중 한 남학생이 실신해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가는 장면이 나온다. 남학생이 쓰러진 상황을 전해 들은 하우스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ldquo;미적분이란 게 원래 그렇지 뭐.&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이렇듯 미적분은 악명이 높다. 나도 항상 비수학적인 사람에 속했다. 수학만 보면 벌벌 떨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사실 나는 대학 조기 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반을 교묘히 건너뛴 덕분에 미적분 수업을 아예 피해 갔다. 내가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과학 저술가이다 보니, 고질적 수학 공포증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무척 놀라워한다. 영문학 전공 출신이라며 핑계를 대긴 하지만 여전히 나는 간단한 대수방정식만 봐도 일부러 마음을 다잡지 않는 한 무의식중에 몸서리를 친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나만 이렇게 모순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내 친구 앨리슨에게 미적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고백했다. &ldquo;처음으로 &lsquo;미적분&rsquo;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난 마치 원시인이 되어 달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어. 아무것도 모르겠고 겁도 나고 하니까 무턱대고 화부터 낸 거지. 이 세상에 유령 따윈 없지만 다항식 괴물은 분명히 있어. 그놈은 이빨도 꼭 갈고리처럼 생겨가지고는 한번 물리면 만성 질염을 일으킨다니까, 글쎄.&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대부분 미적분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어렵고 머릿속만 복잡하게 만든다는 평판만 앞세우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미적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은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다. 미적분의 개념 자체는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다. 복잡 다양한 다항식의 여러 미적분 공식 괴물은 세부 사항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미적분은 위치, 온도 따위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동일한 기본 개념을 자동차 운전, 주식시장, 흑사병, 파도타기 등 여러 대상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미적분 교과서가 그렇게 두꺼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미적분은 2가지 기본 개념으로 나뉜다. 하나는 순간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인 미분이다. 이를테면 자동차의 순간적인 위치 변화를 가지고 속도를 알아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수한 미세 조각들을 합쳐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인 적분이다. 가령 자동차의 속도로부터 주행 거리를 계산하는 데 적분을 활용할 수 있다. 나머지는 모두 이 두 주제의 변주일 뿐이다. 미분과 적분은 장도리 머리의 양 끝과 같다. 하나는 못을 뽑는 데 쓰이고 다른 하나는 못을 박는 데 쓰인다. 전자는 뺄셈과 나눗셈이고 후자는 덧셈과 곱셈이다. 각각 서로의 결과물을 원상태로 &lsquo;되돌리는&rsquo; 셈이다. 하지만 모든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장도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엔 드라이버가 최고다. 따라서 미적분은 널따란 수학 도구 창고에 있는 하나의 도구, 특정 종류의 문제에 꼭 맞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span><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여기서 미적분과 관련된 우리말 기본 표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lsquo;적분하다&rsquo;는 &lsquo;적분을 구하다&rsquo;와 같은 뜻인 반면, &lsquo;미분하다&rsquo;는 &lsquo;도함수를 구하다&rsquo;, &lsquo;미분계수(순간 변화율)를 구하다&rsquo;와 같은 뜻이다. &lsquo;미분을 구하다&rsquo;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lsquo;도함수&rsquo;와 &lsquo;미분계수&rsquo;는 실제로 어느 정도 혼용되긴 하나 엄밀히 보자면 뜻이 다르다. 도함수는 함수를 임의의 점에서 미분한 결과(함수)이고, 미분계수는 함수를 특정 점에서 미분한 결과(값)이다. 각 개념의 자세한 뜻은 뒤에 본문에서 다룰 것이다―옮긴이)</span></sup></sub></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내가 이렇게 설명해주자 앨리슨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ldquo;그게 다야? 그런데 왜 수학 선생님들은 그렇게 &lsquo;말하지&rsquo; 않았지?&rdquo;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수학 선생님들도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 귀에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들렸을 뿐이다. 유명한 과학자, 갈릴레이<span style="color: #666699"><sub><sup>Galileo Galilei</sup></sub></span>는 이렇게 말했다. &ldquo;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은 수학 기호로 쓰여 있다.&rdquo; 불행하게도 훈련되지 않은 눈과 귀로 보고 듣기에 그 언어는 고대 산스크리트어와 비슷하다. 수학 선생님들이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낯선 기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에, 기본 산술 외의 그 어떤 정량적 수단도 없이 평생을 헤맨다. 우리는 수표장을 결산할 줄은 알지만 통계, 복리, 확률 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수학 기호를 &lsquo;제대로&rsquo; 이해하고서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휘둘린다. 아는 것이 힘이다. 하지만 무지 상태로 계속 살겠다고 고집한다면 그 힘은 얻을 수 없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기본적인 대수학과 미적분에 대한 이해 부족은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내 친구 리는 고등학교 때 다른 과목은 모두 상위권이었는데 대수학 때문에 고전하다 눈물을 흘렸고, 결국 해양생물학자의 꿈을 접어야 했다. 그녀는 여전히 과학을 사랑하지만, 오늘날까지 수학에 대한 증오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다. &ldquo;그게 내 자존심을 완전히 뭉개버렸고 아직도 속을 거북하게 해. 수학을 전혀 모르진 않지만, 방정식 비슷한 것만 봐도 식은땀이 나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게 된다니까.&rdquo;</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얄궂게도 나는 수학을 혐오하긴 했으나 수학 공부에 성공했다. 적어도 일반적인 평가 기준, 즉 성적으로 볼 때는 그랬다. 기하학과 대수학에서 높은 점수를 받긴 했지만 나는 암기한 공식에 숫자를 집어넣어 착실히 기계적으로 답을 짜냈을 뿐이었다. 그런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현실 세계의 문제를 푸는 데 그게 얼마나 유용한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는 내 무지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있었다. 내 이해 부족이 탄로 나서 내가 사기꾼으로 알려질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살았다(심리학자들은 이를 &lsquo;사기꾼 증후군&rsquo;이라고 부른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나는 죽는 날까지 방정식만 봤다 하면 움찔거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과학 저술가가 되었고 물리학과 사랑에 빠졌다. 수학적인 부분과 그런 건 아니다. 나는 물리학의 다채로운 역사, 인물, 멋진 실험, 큰 생각을 좋아했다. 어느 운명적인 날, 나는 앨런 초도스라는 물리학자에게 &lsquo;왜&rsquo; 모든 물체가 질량과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떨어지느냐고, 흔히 관찰하는 바에 따르면 정반대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건 직관에 반대되는 것 같았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이런 생각은 갈릴레이가 보여준 유명한 실험의 밑바탕이었다. 일반적 조건(대기 중)에서 동전과 깃털을 동시에 떨어뜨리면, 동전이 먼저 땅에 닿는다. 이 현상에 대해 갈릴레이는 중력과는 또 다른 힘(공기 저항)이 깃털의 하강 속도를 늦추는데, 그 까닭은 깃털이 동전보다 표면적이 넓기 때문이라고 추론했다. 진공 상태에서는 공기 저항이 없을 테니 모든 물체의 중력 가속도가 똑같을 것이다. 당시 그는 진공 상태를 만들어낼 기술이 없어서 자기 가설을 검증하지 못했지만, 17세기에 뉴턴<span style="color: #666699"><sub><sup>Isaac Newton</sup></sub></span>은 갈릴레이의 주장에 해당하는 수학 공식을 이끌어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오늘날 진공 기술은 일반화되었고, 동전&middot;깃털 실험은 물리학 시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나도 그런 시범을 직접 봄으로써 물체는 질량과 상관없이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아니, 정말 확인한 걸까? 내가 그 실험을 직접 준비해 수행한 적도 없지 않은가. 그게 일종의 속임수였는지, 실험 장치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앨런은 잠시 생각에 잠겨 수염을 쓰다듬더니,&nbsp; 내가 그 주장을 굳이 믿을 필요는 없다고 일러주었다.&nbsp; 그리고 자기가 방정식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nbsp; 왜 그런지 명백해질 거라고 말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나는 처음에는 앨런의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ldquo;이건 &lsquo;진짜&rsquo; 수학이 아니야. 간단한 대수학일 뿐이라고!&rdquo;라는 앨런의 설득에 넘어갔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칠판에다가 어떻게 해서 방정식 양변의 소문자 m―물체의 질량(지구의 질량인 대문자 M과 구별된다)―이 상쇄되는지를 차근차근 보여주었다. 그건 곧 물체의 질량과 가속도가 무관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나는 수학이 내 삶과 관련되어 있음을 처음 깨달았다. 수학은 무엇보다도 직관에 반하는 물리학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대수학이나 미적분의 도움 없이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방정식의 효력을 보았을 때, 빠져 있는 줄도 몰랐던 마지막 통찰의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마침내 수학에 의미 있는 맥락이 생긴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그래서 나는 숫자와 추상적 기호에 대한 반사적 경계를 조금씩 늦추며, 수학이 &lsquo;현실 세계&rsquo;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마지못해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을 완전히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의 감질나는 맛보기였기에, 나는 수학 혐오 인생 처음으로 그걸 더 배우고 싶어졌다. 책 몇 권<span style="color: #666699"><sub><sup>(맨 처음에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가 하면, 『완전한 바보를 위한 미적분 길잡이』도 약간 벅찰 정도였다. 그 책의 제목을 &lsquo;반똑똑이를 위한 미적분 길잡이&rsquo;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sup></sub></span>과 티칭사의 DVD 시리즈로 무장하고 물리학자 남편의 지원을 받으며 지금껏 놓친 것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일단 미적분을 파고들다 보니, 나는 이 난해해 보이는 개념을 온갖 대상에 적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대상은 자동차 연비, 다이어트와 운동, 경제, 건축에서부터 인구 증가&middot;감소 이론, 디즈니랜드 놀이기구의 역학, 카지노 크랩스 게임의 확률, 주역의 역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사실상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종의 미적분을 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야구 경기에서 외야수는 타자가 친 공이 어디쯤 떨어질지 가늠해야 한다. 외야수가 알든 모르든 그의 뇌는 공의 경로를 계산하며 그에게 신호를 보내 그가 어디로 가야 공을 잡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 과정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은 하나의 미적분 문제다. 어쩌면 두 개일지도.</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오리건 대학의 생물학자 로커리<span style="color: #666699"><sub><sup>Shawn Lockery</sup></sub></span>에 따르면, 하찮은 벌레조차 미적분을 한다고 한다. 로커리는 회충이 먹이를 찾을 때 미각과 후각을 쓰는 방식을 알아냈는데, 회충의 먹이 접근법을 흔히 어른과 아이가 함께하는 &lsquo;핫 앤드 콜드<span style="color: #666699"><sub><sup>hot-and-cold</sup></sub></span>&rsquo; 게임에 비유했다. 이 게임은 어른이 아이에게 &ldquo;뜨거워져(혹은 차가워져)&rdquo;라고 말함으로써 아이가 목적지 쪽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회충 역시 피드백에 반응해 방향을 바꾼다. 단, 회충은 여러 가지 맛의 강도―이 경우엔 염분 농도―가 얼마나 변하는지 계산해 피드백을 얻는다. 미적분 용어로 말하자면, 회충은 미분계수를 구해 어떤 양이 특정 지점에서 순간적으로 얼마나 변하는지 알아낸 다음, 그에 맞게 행동을 조정하는 셈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하물며 벌레도 미적분을 할 줄 아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미적분을 피하려 한다는 게 말이 될까. 내가 보기에, 문맹은 부끄러워하면서 수학맹은 용인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과학자들이 한탄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우리는 좀 더 수학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 수학 천재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수학, 좁게는 미적분이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해해야 하며, 식은땀 흘리지 않고 기초 방정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어쨌든 우리 지성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세기 말의 수학자 스미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William Benjamin Smith</sup></sub></span>는 『무한소 분석<em>Infini&shy;tesimal Analysis</em>』의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ldquo;미적분은 인간의 지력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생각 무기다.&rdquo; 미적분은 무조건 외우고 따라야 하는 틀에 박힌 규칙이라기보다 유기적 독립체에 가깝다. 물리학자들이 문제 푸는 모습을 지켜보면, 여러분은 엄청난 융통성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대로 숫자를 반올림하고 단순화하며 제멋대로 다룬다. 즉, 미적분 틀에 갇혀서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분을 자기 목적에 맞춘다. 주변 세계에서 관찰한 바를 토대로 미적분 문제를 고안하고 푸는 행위는 소설을 쓰거나 교향곡을 작곡하는 행위 못지않게 창의적인 시도다. 따라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간에 그걸 배우고 익히는 최선의 방법은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대학생 시절 나는 수학적 무지를 자랑하려고 &ldquo;영문학 전공. 수학은 &lsquo;네&rsquo;가 해!&rdquo;라고 적힌 티셔츠를 보란 듯이 입고 다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그런 방어적&middot;적대적 태도가 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에겐 새 티셔츠가 있다. 거기 적힌 글은 내 사고방식의 변화를 상징한다. &ldquo;미적분을 깔보면 나한테도 실례야.&rdquo; 아르키메데스도 분명히 자신의 기하 도형을 그렇게 여겼을 것이다. 그에게 수학은 전능하고 영원하며 목숨보다 소중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프롤로그 전문)</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 /> </span><span>--------------------<br /> </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4"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A0%9C%EB%8B%88%ED%8D%BC%20%EC%9A%B8%EB%A0%9B.JPG" />제니퍼 울렛 </strong><span><strong>Jennifer Ouellette<br /> </strong></span>『버피버스의 물리학 The Physics of the Buffyverse』(2007)과 『흑체와 양자 고양이: 물리학사 이야기 Black Bodies and Quantum Cats: Tales from the Annals of Physics』(2006)를 쓴 과학 저술가다. 그녀의 칼럼은 &lt;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gt;, &lt;디스커버 Discover&gt;, &lt;살롱 Salon&gt;, &lt;네이처 Nature&gt;, &lt;뉴 사이언티스트 New Scientist&gt;, &lt;피직스 투데이 Physics Today&gt;, &lt;시머트리 Symmetry&gt;, &lt;피직스 월드 Physics World&gt; 등에 실렸다. 울렛은 〈칵테일파티 피직스 Cocktail Party Physics〉라는 과학&middot;문화 블로그를 운영하는 한편, 〈디스커버리 뉴스 Discovery News〉 블로그에도 물리학 관련 글을 올리고 있다. 2008년 봄에는 샌타바버라 카블리 이론물리학연구소의 전속 기고가로 활동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국립과학원의 과학․문화산업 교류 프로그램 &lt;사이언스 앤드 엔터테인먼트 익스체인지 Science and Entertainment Exchange&gt;의 책임자가 되었다. 유술 검은 띠 보유자이기도 한 울렛은 남편인 칼테크 물리학자 숀 M. 캐럴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다. <br /> </span><a target="new" href="http://www.jenniferouellette-writes.co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www.jenniferouellette-writes.com</span></span></a><a target="new" href="http://www.cocktailpartyphysics.co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www.cocktailpartyphysics.com</span></span></a><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br /> </span><br /> </span><span>--------<br /> </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역자 소개<br /> 박유진 <br /> </strong>아프리카 밀림을 누비는 동물행동학자가 되겠다는 고루한 꿈을 안고 생물학과에 들어갔으나, 툭하면 DNA를 기계에 넣어놓고 몇 시간씩 기다리는 분자생물학이라는 대세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끝에 음악에 빠졌다. 졸업 후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기타를 전공하고, 수년간 좌충우돌하며 지지부진하게 음악 활동을 하던 중, 이건 아니다 싶어 고민하다 번역을 해보기로 결심. 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번역가 모임 바른번역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대중철학서 『아픔』과 『용서』(출간 예정), 『철학의 책』(공역) 등이 있다.<br /> <br /> </span><span><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an style="color: rgb(153,0,0)">★</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span></p>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 /> </span>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14 오전 10:11:00데이비도우의 ‘과잉연결시대’<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A%B3%BC%EC%9E%89%EC%97%B0%EA%B2%B0%EC%8B%9C%EB%8C%80%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게 다 인터넷 때문이야!</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도에 버즈 매코이<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Buzz McCoy</span></sup></sub></span>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매코이는 모건스탠리의 부동산 금융 부문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넘게 이끌어 온 금융 전문가였다. 이코노미스트와 투자가, 관련 전문가들이 꽉 메운 강연장 분위기에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일어나서 부동산 위기를 불러온 원인이 (하필이면!) 인터넷이라고 거리낌 없이 얘기해 대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만들어 낸 속도지상주의의 세계는 차분히 성찰할 시간을 빼앗아 버려 투자가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기회를 먼저 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성급한 투자를 일삼게 하고, 게다가 그런 신중하지 못한 투자에는 눈먼 돈이 몰려든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동안 좌중에는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하지만 내 말이 계속되면서 이내 웃음은 잦아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늘어 갔다. 내 얘기가 끝난 뒤 어떤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는 자기 역시 순간적으로 혹해서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500</span>만 달러 규모의 거래에 말려든 적이 있었노라고 털어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당시 인터넷은 이미 우리 삶에 너무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석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무선으로 문서를 배포하며, 거의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하고, 문서에 전자 서명까지 덧붙여 메일로 보내며, 실제로는 대한 적 없는 개인이나 기관과 온라인으로 계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제도, 감정, 판단, 신뢰도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6</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월, 인터넷의 엄청난 영향력을 보여 주는 일이 발생했다. 표현의 자유라는 가치와 이슬람 급진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사건이 있기 수개월 전 덴마크의 한 신문이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컷짜리 만평을 실었었다. 만평은 분명코 도발적이었다. 무함마드는 불이 붙은 시한폭탄을 터번에 얹은 테러리스트와,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후광이 얼핏 터번 양끝에서 솟아나온 뿔처럼 보이는 형상 등으로 그려졌다. 구름 위에 서 있는 무함마드가 천국에 도착한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들을 맞이하는 컷도 있었다. 많은 신문이 이를 다시 싣지는 않았지만 만평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세상은 들끓어 올랐고, 평화 시위는 곧 폭동으로 변했다. 시리아, 레바논, 이란에 있는 덴마크 대사관은 불길에 휩싸였다. 파키스탄에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만여 명이 덴마크 총리 인형을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고, 최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9</span>명이 숨졌다. 파키스탄의 종교 지도자는 문제의 만평을 그린 만화가 한 명의 머리에 현상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만 달러를 내걸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논란의 불씨를 품고 있던 무함마드 만평이 온라인을 통해 유행성 독감처럼 퍼지고, 급기야는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진 이 사건은 내가 &lsquo;연결과잉<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overconnectivity</span></sup></sub></span>&rsquo;이라 부르는 현상이 극명하게 나타난 사례다. 바로 이 개념이 이 책의 중심 주제다. 연결과잉이란, 어떤 시스템의 내외부에서 연결성이 급격히 높아질 때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키며, 이때 시스템 전체는 아니라 해도 그 일부는 적응 불능 상태에 빠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무함마드 만평 파문 사건에서, 인터넷은 분노와 폭력을 촉발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단 그 만평을 실어 나른 매체로서 기능뿐 아니라 분노에 찬 논평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전파하는 통로로서도 크게 한몫한 셈이 된 것이다. 연결과잉은 때로 폭력을 부른다. 심각한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 회사, 심지어는 한 국가를 파멸의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에게 연결과잉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 생활 속에 만연한 기술 남용 현상을 가리키는 것쯤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다. 실제로 우리는 성가신 신호음과 함께 끊임없이 날아드는 아이폰과 블랙베리폰의 이메일, 문자, 트윗(트위터 메시지) 등이 회의나 식사, 영화 감상을 방해하는 현실을 익히 잘 알고 있다. 사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결과잉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현상이다. 그저 단순한 행동 하나가 사회의 반응에 따라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지에 관해 지금부터 이야기하려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span>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였던 존 던<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hn Donne</span></sup></sub></span>의 유명한 시구가 있다. &ldquo;그 누구이든지 저 혼자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대양의 일부일지니.&rdquo; 그가 이 시를 썼던 무렵은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가 지역적 범위에 국한되던 시대였다. 그가 만약 오늘날 시를 쓴다면 &ldquo;대륙의 한 조각&rdquo;이 아닌 &ldquo;세계의 한 조각&rdquo;이라 하지 않았을까? 과거 지역적 차원에 머물렀던 일이 오늘날에는 글로벌한 규모로 진행된다. 이제 우리는 단지 이웃만이 아닌 전 세계와 더불어 사는 시대를 살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연결은 느슨하고 약할 수 있는가 하면, 긴밀하고 강할 수도 있다. 너무나 약해 대단치 않은 연결도 존재한다. 이웃에 살더라도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낸다면 그들은 서로 매우 약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0</span>킬로미터나 떨어져 사는 두 미국인이 있다고 하자. 그래도 둘은 미국 시민이라는 점에서 연결된 상태다. 물론 대단히 약한 연결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백인 우월주의자 모임에 가입한다면 연결은 좀 더 긴밀해진다. 이들이 백인 우월주의자 전용 웹사이트에서 교류한다면, 연결은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국에 사는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억 명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 대통령 선거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700</span>만 명이 넘게 버락 오바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Barack Obama</span></sup></sub></span>에게 투표했다. 이들 모두는 오바마가 최선의 대통령감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단 한 번의 투표를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결되었지만, 어떤 이들은 선거 유세에 참여하며 한층 더 강하게 결속되기도 했다. 이런 강력한 연결이 오바마를 당선시킨 원동력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 초, 사회학자 윌리엄 오그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William Ogburn</span></sup></sub></span>은 오늘날 유례가 없을 정도로 사회에 스며든 이 상호연결성<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interconnectivity</span></sup></sub></span>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 그는 &lsquo;문화지체<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cultural lag</span></sup></sub></span>&rsquo;라는 개념을 통해 문화의 한 요소와 다른 요소 간의 변화 속도 차이에서 비롯하는 사회적 부조화를 설명했다. 오그번은 신기술을 반대하는 러다이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기술 발전 속도에 맞추어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지적했다. 또한 급격한 진보로 말미암아 사회에 닥칠 격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만 있다면, 기술 발전의 속도를 늦추는 게 더 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결론 내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처음 오그번의 연구 결과를 접했을 때, 나는 그의 생각이 한낱 기우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나 같은 기술 전문가에게 기술의 발전 속도를 늦춘다는 생각은 이단적 사고방식이었다. 게다가 기술로 촉발되는 혁명이라는 개념 역시 내게는 그저 멋지기만 한 생각일 뿐이었다. 그러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말에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무슬림 세계와 덴마크 정치 풍자의 세계가 직접 맞닥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이듬해에는 세계 곳곳에서 끔찍한 폭동이 일어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오그번의 주장이 전혀 엉뚱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0</span>년대에 기술과 사회적 격변 사이의 상호작용을 논한 윌리엄 오그번이 과연 현대사회의 문화지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는 문제다. 이 점은 특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유비쿼터스적인 인터넷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우리에게 그저 그렇기만 한 지체란 더는 없다. 우리의 현실 상황에서 &lsquo;지체&rsquo;란 용어는 이제 그 심각한 실체를 설명해 내기에는 너무나도 점잖은 표현이 되어 버렸다. 오그번이 살던 시대의 변화는 오늘날에 비하면 너무 느렸다. 반면, 인터넷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변화는 그야말로 즉각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인터넷의 영향에 관해 돌이켜 보면서 사회적&middot;경제적 기관들이 자신과 연결된 주변 환경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연결성이 달라지면 기관들은 그런 변화의 이점을 이용할 수 있게 스스로 변혁을 시도한다. 예컨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세기에 공장의 규모가 확대된 것은 철도의 등장으로 더 큰 시장에 접근할 수 있게 된 데서 비롯했다. 오늘날에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그런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연결과잉 환경이 어떻게 작동하며 스스로 유지되는지, 어떻게 예측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사고에 취약해지며, 또 전염되는지 설명하는 데 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연결과잉 현상은 우리 삶의─그리고 지구촌 전체의─많은 분야에서 마치 칼날 위를 걷는 듯한 위태로운 균형을 잡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예기치 못한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은 늘 있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span>세기 초 네덜란드를 사로잡았던 튤립 광기 현상이 한 가지 예다. 튤립 알뿌리(구근)의 가격이 미친 듯이 치솟았지만 금세 거품이 꺼지며 제자리로 추락한 사건이었다. 현재와 당시의 차이라면 오늘날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효과적인 연결 도구인 인터넷과 이 책에 등장하는 괴물 덕에 상호연결성이 극도로 높아졌다는 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0</span>년 전 학문적 실험의 형태로 초라하게 시작된 인터넷은 오늘날 선진 글로벌 사회를 작동시키는 매체가 되었다. 인터넷은 빠르게 퍼져 나간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0</span>만 명 정도였던 인터넷 사용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년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억 명으로 늘어났다. 인터넷은 작용 범위 또한 광범해서 최선진국에서 최빈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터넷은 통신 혁명의 주체로서 싸고, 빠르며, 신뢰도가 높고, 사용 또한 편리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연결과잉 시대에 인터넷에서 비롯한 상호의존성은 여러 문제를 키우고 확산시켜, 보통 시스템에 내재해 있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정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일이 발생한다. 첨단 기술에 대한 법적 대응이 미흡한 저개발 국가를 근거지로 한 신분 도용 범죄자들이 선진국 시민들을 등쳐 먹는다거나, 캘리포니아 주에서 합법적인 포르노물이 이를 불법으로 여기는 테네시 주에서 유포되기도 한다. 영국에서 합법인 인터넷 카지노는 도박이 불법인 미국 텍사스 주에서도 회원을 모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엔 연결성이 강화될수록 문제는 커지기만 한다. 지역적 문제가 국가적 문제로, 국가적 위기가 국제적 위기로 전개된다. 인터넷의 영향으로 모든 형태의 상호연결성이 높아지고 견고해지면서, 사회는 점점 상호의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항상 나은 방향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러한 상호의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부채담보부증권이니 신용부도스와프이니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금융 용어는 몰라도 좋다. 물론 이 모든 것들도 원인이긴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엄청난 금융 재난이 도래한 이유를 온전하게 설명해 낼 수 없다. 나는 우리가 겪은 금융 위기의 근본적 뿌리가 바로 &lsquo;연결과잉&rsquo; 현상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일, 티머시 가이트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Timothy Geithner </span></sup></sub></span>미 재무장관이 의회에 출석해 금융 위기 상황을 요약했다. 과도하게 연결된 은행 시스템이 위기를 &lsquo;증폭&rsquo;시켰다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되자 그 여파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ldquo;그 결과 월스트리트의 위기가 전국의 금융 시장을 강타했고, 이는 사실상 모든 미국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인터넷은 글로벌 경제 위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경제 위기의 원인은 바로 저금리, 규제 완화, 과도한 탐욕 등이다. 인터넷은 촉매 기능을 하며 관련 정보를 매우 빠르게 확산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을 뿐이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인터넷이라는 매우 효율적이고, 신속하며, 저렴하고, 믿을 만한 정보 교환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경제 위기가 그렇게까지 커질 수는 없었을 터다. 위기 상황에 관한 각종 정보가 전 세계적 디지털 신경망을 통해 빛의 속도로 번져 갔다.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지어낸 내용이 경쟁적으로 덧붙여지기까지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걱정만 일삼는 사람이 아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상호작용이 커지고 정보에 대한 접근 기회가 확대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믿어 왔다. 나는 벤처투자업계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년 넘게 일하고 기술 회사의 중역으로 그보다 더 오랫동안 근무해 오면서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다. 또한 실리콘밸리의 다른 많은 낙관주의자들처럼 우리가 점점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여겼다. 즉 우리가 얻는 정보가 많아질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도 늘어날 테고, 그건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이런 상황은 비즈니스에 새로운 효율성을 가져왔고 정부의 투명성에도 이바지하지 않았는가? 또한 저 멀리 개발도상국의 외딴 시골 마을에까지 중요한 정보를 실어 나르며 세상 모든 사람들한테 전에는 없던 새로운 수준의 자유를 안겨 주지 않았는가? 경제적 번영과 일자리를 창출해 내지 않았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0</span>년이 되어 기술주<span style="color: #666699"><sub><sup>株</sup></sub></span> 시장의 붕괴를 지켜보며, 나는 그동안 기술주 가격을 끌어올린 이상 과열 현상의 속도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과열 현상은 주로 온라인 토론 사이트에 올라온 광고나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모아 소문을 퍼뜨리고 주식을 거래하는 데이트레이더들이 주도한 일이었다. 나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곰곰이 자문해 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면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호기심을(의구심까지는 아니라 해도) 품게 되었고, 상호연결성이 급속히 높아지는 데서 빚어지는 의도치 않은 결과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환경이 우리가 오랫동안 의존해 온 정부기관과 경제, 사회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해졌다.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이미 연결과잉 현상이 나타났고, 그 결과 세상의 기존 질서는 상당 부분 무너지고 있었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많은 기업들이 변모하거나 파산을 맞았다. 바위처럼 까딱없을 것만 같았던 금융기관들도 정부에 긴급구제를 요청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부기관들은 각종 세금 제도, 저작권법, 인터넷 도박, 법률 관할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한 국가에서 불법인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합법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사이버공간으로 이전된다면, 이를 다스리는 주체는 누가 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위기가 최악이던 시기에 다시 낙관론을 견지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 점점 민감해지면서 낡은 규칙을 버리고 새로운 규칙에 맞추어 행동하는 모습에 주목했다. 사람들은 오그번이 언급한 문화지체의 간극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행동했다. 그들은 상황을 이끌어 가는 주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채 연결과잉의 영향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터넷 자체가 문제의 일부라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세상이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고, 엄청난 속도로 변하며, 극단으로 치닫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람들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lan Greenspan</span></sup></sub></span>의 오랜 규제 완화 정책과, 금융기업에 대한 정부 차원의 통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 점차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에 닥친 위기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점점 우려했고, 어느 순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IG</span>나 시티그룹 같은, 이른바 &lsquo;대마불사<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too big to fail</span></sup></sub></span>&rsquo;의 금융기관들에서 비롯하는 위험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연결과잉 현상과 인터넷이 그런 기관들의 출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거대 기관들이 만들어 낸 문제와 한판 씨름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내가 속한 업계만 해도 숨 가쁜 기술 변화를 따라잡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아마도 우리는 문화지체 현상을 누그러뜨리거나 더 나아가서는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배운 것인지도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지금까지 우리가 연결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제 이 책의 최종 목적을 밝힐 차례다. 그것은 바로 극단적인 사건의 발생 빈도와 그 여파를 줄임으로써 연결과잉의 영향을 피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나는 정부와 경제적&middot;사회적 기관들의 구조 재편이라는 시각을 통해 정책 수립 방식의 잠재적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우리가 새로운 규칙에 맞춰 행동한다면 현재 우리를 둘러싼 상호연결성의 급격한 증대에서 많은 혜택을 얻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규칙이 가진 힘을 무시한다면 대붕괴&middot;대폭락 사태가 더욱 가속화되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터넷을 빼놓고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에 일어난 세계적 경제 위기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물론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신용 위기는 틀림없이 어느 정도의 불경기를 초래했을 것이다. 인터넷이 미친 영향을 모두 측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인터넷이 현재의 위기를 더욱 치명적으로 키우고 확산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만 전달한 게 아니라 소위 &lsquo;사고 전염&rsquo;도 퍼뜨렸다. 즉, 온라인을 통해 뉴스와 소문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면서 탐욕과 과도한 공포가 유례없는 속도로 번져 갔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카고, 피츠버그 등의 거대 산업도시에 관한 이야기에서 이 책을 쓴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상호연결성 증대가 어떻게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흉년을 일으키고 우리의 사생활을 침해하는지도 살펴볼 생각이다. 다양한 금융 사고와 그 전파 경로 또한 들여다볼 것이다. 특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7</span>년의 주식시장 붕괴와 최근의 심각한 불황,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span>세기에 존 로<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hn Law</span></sup></sub></span>가 저지른 기발한 금융 사기 사건도 다룰 참이다. 존 로의 사기극은 프랑스 왕가를 파산케 하고, 연쇄적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으며, 이후로도 수 세대에 걸쳐 프랑스 경제를 후퇴시킨 사건이었다. 독자들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당연한 내용도 있겠지만 언뜻 수긍하기 쉽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다.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의 독점권과 온라인은행의 성장에 관해서도 짚어 볼 생각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마지막으로 이 책은 자신감 넘치는 낙관주의자였다가 신중한 회의주의자로 변모하고, 다시 낙관주의로 돌아선 나 자신의 여정을 보여 줄 것이다. 어떤 독자는 내가 오늘날의 모든 문제를 통신 프로토콜과 데이터 스위치의 조합에 불과한, 본질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해가 될 게 없는 인터넷의 탓으로 돌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ldquo;이봐요, 경찰 양반, 그게 다 인터넷 때문이라구요!&rdquo; 하는 식의 고자질 말이다. 하지만 비록 인터넷의 영향을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기존의 문제가 불거지게 부채질하고 증폭시킨 주범은 바로 인터넷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도 인터넷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롤로그 전문)<br /> &nbsp;</p> <div style="text-align: center"><!-- Begin: Open Road Player Embed Code --><iframe class="orimPlayerFrame" height="331" marginheight="0" border="0" src="http://access.openroadmedia.com/api/getPlayerFrameSource.php?playerId=orimPid0&amp;size=medium&amp;distribution_id=113&amp;distribution_code=&amp;infoStr=&amp;share_url=&amp;embedver=2_0" frameborder="0" width="400" marginwidth="0" scrolling="no"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border-left: medium none; padding-bottom: 0px; margin: 0px; padding-left: 0px; width: 400px; padding-right: 0px; height: 331px;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padding-top: 0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 (function () { if (window.orimPS == undefined) { window.orimPS = 'initStarted'; var oSc = document.createElement('script'); oSc.type = 'text/javascript'; oSc.src = ('https:' == document.location.protoc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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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ow<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5</span>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던 중 소련의 스푸트니크 위성 발사를 계기로 상대적으로 뒤처져 있던 미국의 과학 기술 수준을 알게 되었고, 공학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캘테크(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하고 스탠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너럴일렉트릭<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GE</span></sup></sub></span>, 휼렛패커드<span style="color: #666699"><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b><sup>HP </sup></sub></span></span>등의 회사를 거쳐 인텔에 입사했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넘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설계와 마케팅을 담당하며 수석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분야 기업의 창업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회사 모어데이비도벤처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Mohr Davidow Ventures</span></sup></sub></span>를 차렸고 지금까지 이사회 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상기업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Virtual Corporation</span></em>』(공저), 『하이테크 마케팅전략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Marketing High Technology</span></em>』(공저), 『전사적 고객서비스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otal Customer Service</span></em>』 등의 책을 펴냈으며 &lt;포브스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Forbes</span></em>&gt;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캘테크, 캘리포니아자연보호재단, 스탠퍼드경제정책연구소의 이사로도 일하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동규 <br /> </strong>학부와 대학원에서 신소재공학과를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매그넘 컨택트시트』『이코노미스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1 </span>세계경제대전망』(공역), 『맥킨지 금융보고서』(공역) 등의 책을 옮겼다. 현재 인트랜스번역원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11 오후 5:04:00《189》2010년 4월 20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217448"><img alt="" width="150" height="207"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A%B0%EB%A6%AC%EC%9D%8D%EB%82%B4.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20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손톤 와일더의 『우리 읍내』(예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9</span>)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01</span>년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3</span>년 사이, 미국 뉴햄프셔 주의 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아주 친절하게도 작가는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막 서두에, 이 작품의 줄거리를 잘 요약해 놓았다: &ldquo;첫째 막이 일상생활이었다면, 이번 막은 사랑과 결혼입니다. 다음에 또 한 막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가 될지 짐작하시겠죠?&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 읍내』의 주인공을 깁스가의 아들 조오지와 웹가의 딸 에밀리로 간주한다면, 이 작품은 조오지와 에밀리의 청소년기(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span>세)&rarr;성년기(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세)&rarr;장년기(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8</span>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조오지와 에밀리의 부모를 중심으로 이 작품의 줄거리를 본다면, 아이를 양육하고(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막)&rarr;혼사를 치르고(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막)&rarr;죽는(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막) 얘기라고 볼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76" height="407"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86%90%ED%86%A4%EC%99%80%EC%9D%BC%EB%8D%94.JPG" />그러나 위의 구분은 작품의 제일 끝에 놓인 에밀리와 조오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봉합된다(에밀리의 죽음은 결혼 뒤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span>년&rsquo;이라고 명기되어 있으나, 조오지의 죽음은 시간을 적시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읍내』의 주인공이 조오지나 에밀리도 아니요, 그들의 부모도 아니라는 말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탄생&rarr;생식&rarr;죽음 또는 생로병사를 자연스럽게 감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인간 조건이다. 이 점에 대해 『클라시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span>―연극』(해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3</span>)을 쓴 노르베르트 아벨스는 &ldquo;일상의 생활 자체가 작품의 주인공이다&rdquo;고 확인해 주고 있으며, 와일더의 창작관과 연관하여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ldquo;와일더는 일상이라는 시문학이 드라마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의 연극은 실험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구체화하는 것, 끝이 반복되는 틀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줄거리라도 비유가 될 수 있으며, 반복되는 사건들도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이 평범한 소도시 마을에 사는 장삼이사들의 비근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근한 일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있으니, 그것은 &lsquo;바쁨(빨리)&rsquo;이다. 막이 열리면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열한 살 먹은 조오 크로웰 2세가 새벽 일찍 신문을 돌리는 장면이 나온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쪽). 그런 다음 우유 배달원 하우이가 등장하고(<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29</span>쪽), 깁스 부인이 조오지와 리베카를, 또 웹 부인이 에밀리와 월리 등교시키기 위해 부산을 떠는 아침 식전 풍경이 묘사된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29</span>쪽). 그러고 나서 깁스 부인과 웹 부인은 곧장 양계와 콩깍지 벗기는 일과 같은 가사에 몰두한다(29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연극이 막 시작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쪽에서부터 두 부인이 가사에 열중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9</span>쪽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된 말이나 행동은 &lsquo;분주함&rsquo;과 &lsquo;바쁨&rsquo;이다. 대사의 순서에 따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3399"><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하우이: 네, 좀 늦었죠? (23쪽)<br /> 웹 부인: 에밀리! 일어나라! 월리! 일곱 시다! (24쪽)<br /> 깁스 부인: (&hellip;) 조오지! 리베카! 학교 늦는다! (25쪽)<br /> 깁스: 빨리 해라! (25쪽)<br /> 깁스 부인: 조오지! 리베카! 학교 늦는다! (25쪽)<br /> 웹 부인: 월리! 에밀리! 학교 늦는다. 월리! 깨끗이 씻어! 아님 내 올라가 씻길 테다!<br /> (25쪽)<br /> 아이들: 첫 종이 났어요. 늦겠어요. 고만 먹을게요. 빨리 가야지. (28쪽)<br /> 웹 부인: 그냥 빨리 걸어, 안 뛰어도 돼. 월리야, 바지 바짝 추켜. 에밀리 어깨 펴고. (29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위에 묘사된 분주하고 바쁜 풍경은 보통 가정에서 늘 벌어지는 일상 풍경이다(저 분주한 풍경 속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7</span>쪽에 나오는 &ldquo;밥을 먹을 땐 책 안 보기로 했잖아&rdquo;라는 웹 부인의 아들에 대한 타박도 첨가되어야 한다). 그런데 저 일상 풍경을 일상으로 보아 넘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 분주함과 바쁨으로 점철된 삶의 최종 결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서 말했듯이 이 연극의 서두는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열한 살 먹은 조오 크로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세와 새벽 한 시에 왕진을 갔다가 이제서야 귀가한 깁스가 짧은 대화를 하게 되는데, 해설자는 그 직후 이렇게 말한다: &ldquo;저 애 얘기를 좀 해볼까요. 쟨 여기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반에서 일등이었죠. 그래 장학생으로 매사추세츠 공대에 들어가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고요. 그때 보스턴 신문에 굉장했었죠. 헌데 막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려는 순간 전쟁이 터져 프랑스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공부가 허사가 된 거죠.&rdquo;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span>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해설이 의미하는 것은, 분주함과 바쁨으로 시종되는 우리 삶의 최종 결과는, 덧없는 죽음이란 뜻이다.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적 삶의 양식과 대비되는 덧없는 죽음을 도드라지게 대비하기 위해 작가는,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적 삶의 양식이 추구하는 목적을 아예 노골적으로 명시해 놓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ⅰ) &ldquo;공장의 기적소리 들린다&rdquo;는 26쪽의 지문과 거기에 대한 설명인 27쪽의 해설자의 말: &ldquo;우리 읍내에도 공장이 하나 있습니다. 들리시죠? 담요 공장인데, 카트라이트 씨네는 저걸로 부자가 된 겁니다.&rdquo; 위의 지문과 설명은 조오지와 리베카가 어머니 깁스 부인의 채근을 받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식탁에 앉았을 때 나온다.</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ⅱ) 식사를 하면서 리베카가, 열한 살 난 리베카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 &ldquo;엄마, 내가 최고루 좋아하는 게 뭐게? 응? 돈이야.&rdquo; (28쪽)</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분주함과 바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기 때문에, 작중 인물들은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nbsp; 단 한 번 아주 명확하게 주인공이 그걸 인식하는 장면이 &nbsp;<span style="font-family: Verdana">88</span>쪽에 있긴 하다.&nbsp; 결혼을 하는 날 아침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span><span style="color: #333399"><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조오지: 난 어른 안 될래요. 왜들 이렇게 서둘러요?<br /> 깁스 부인: 네가 서둘렀지.<br /> 조오지: 글쎄&hellip;<br /> 깁스 부인: 글쎄고 절쎄고 넌 인제 어른이야.<br /> 조오지: 제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저는요&hellip;<br /> 깁스 부인: 얘, 누가 들을라. 그만 해. 정말 창피해 못 살겠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우리 읍내』의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막은 생자와 사자가 반씩 섞여서 이끌어 가는 듯하다가, 사자<span style="color: #666699"><sub><sup>死者</sup></sub></span>들이 주도하는 &lsquo;죽음의 무도<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danse macabre</span></sup></sub></span>&rsquo;로 끝맺는다. 죽음의 무도란 만물을 정복하고 평준화하는 죽음의 힘으로, 죽음의 본질적 개념인 불가피성과 공평함, 즉 모든 사람은 죽게 마련이며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게 아니던가? 그 힘 앞에서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현대인의 일상 원칙은, 다시 한번 타기<span style="color: #666699"><sub><sup>唾棄</sup></sub></span>시 된다. 예컨대 아이를 낳다가 고작 서른세 살로 죽음을 맞이한 에밀리가 무대감독에게 청하여 자신의 열두 번째 생일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이승의 분주함과 바쁨에 질려, 도로 저승으로 데려가 주길 원했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7</span>쪽). 즉 현대적 삶의 양식은 이승이 그리워 돌아온 사자에 의해, 그야말로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타기된다<span style="color: #666699"><sub><sup>(타기: 업신여기거나 아주 더럽게 생각하여 돌아보지 않고 버림)</sup></sub></span>. 그러면서 작가는 &ldquo;성인들이나 시인&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7</span>쪽) 정도나 분주함과 바쁨이라는 일상 너머의 진실, 곧 분주함과 바쁨에 물들지 않은 삶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며, 나아가 죽음의 덧없음마저 직시한다고 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은 현대적 삶의 양식을 앞서 제시한 미국식 일상에 대한 반성으로 보여지기도 하지만, 이 작품이 촉구하는 &lsquo;일상의 행복&rsquo;, &lsquo;인식으로서의 삶&rsquo; 또는 &lsquo;느림의 발견&rsquo; 같은 것은, 딱히 미국식 삶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을 의도하고 있지 않다. 미국식 삶의 구조적인 반성과 비판은, &lsquo;아메리칸 드림&rsquo;의 허구를 낱낱이 밝힌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와서야 정식으로 시도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현대적 삶의 양식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구조적인 층위에서 추구되지 않고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렀음을 확연히 해주는 대목은, 에밀리가 무대감독에게 자신을 도로 사자들의 세계로 데려가 달라는 장면이다. 사자에 눈에 비친 저 정도의 계기만으로 현대적 일상의 구조가 발견되었다고 말하기란, 너무 미미하고 설득력이 없다. 적어도 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재귀를 거부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철학적 근거가 있어야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향수<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nostalgia</span></sup></sub></span>다. 어느 미학자에 따르면, 자신의 과거를 장악하지 못했던 후회 혹은 상실감이 자아내는 것이 바로 향수다. 『우리 읍내』가 우리에게 부추기는 것은, 현대적 삶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이기보다는, &lsquo;죽음의 무도&rsquo;를 추기 전에, 자신의 &lsquo;현재(삶)를 잡아라!<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carpe diem!</span></sup></sub></span>&rsquo;이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10 오전 11:46:00부엘의 ‘퓰리처상 사진’<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7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ED%93%B0%EB%A6%AC%EC%B2%98%EC%83%81%EC%82%AC%EC%A7%84%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한국어판 머리말</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br /> <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포토 저널리즘과 카메라, 솔직하고 대담한 시도</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퓰리처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이 상은 저널리즘과 문학 전반에 걸쳐 수여되는 권위 있는 상으로 우리에게도 낯익은 수상자가 무척 많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8</span>년 미국 신문 &lt;스타&gt;의 기자로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이탈리아 전투에서 다리에 중상을 입기도 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전투의 경험을 살려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6</span>년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자 그는 신문 특파원으로 참전했고, 이때의 경험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했다. 말년에 헤밍웨이는 쿠바에 가서 낚시를 즐기곤 했는데, 이 경험을 토대로 『노인과 바다』를 집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3</span>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또 기억되는 사람은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이 젊은 시절에 겪은 나치 수용소 이야기를 담은 만화 『쥐』의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다. 만화가이자 아트디렉터로 일한 그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이 작품이 퓰리처상을 수상한 후 만화는 &lsquo;그래픽 노블&rsquo;이라 불릴 정도로 위상을 높이게 된다. 이렇게 문학과 만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퓰리처상은 저널리즘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주 대상으로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헝가리 출신 저널리스트 조셉 퓰리처의 유언으로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창설, 주관하는 이 상은 저널리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span>개 부문, 문학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개 부문, 그리고 음악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개 부문에서 그해 가장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추천받아 수여한다. 하지만 이 상을 수상하기는 까다롭다. 문학과 음악 부문 수상자는 꼭 미국 시민이어야 하며, 저널리즘 부문 수상자는 꼭 미국인일 필요는 없으나 미국 신문사에서 활동해야 한다. 즉 영화에서 아카데미상처럼 미국을 위한, 미국에 의한, 미국의 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상의 권위는 미국 안에서만 존재하며 유럽이나 기타 국가에서 주목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퓰리처상 작가는 세계적인 권위를 갖고 그들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유통된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사진전은 다름 아닌 &lt;퓰리처 사진전&gt;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퓰리처상에는 두 개의 사진 부문이 있다. 하나는 특종사진<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eaking News Photography</span></sup></sub></span>으로 신문사진에서 강력한 흡입력을 갖는 돌발적 상황의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사진기자뿐 아니라 일반인의 사진이라도 그 사건의 중요성과 사진적 우수성만 인정된다면 수상 대상이 된다. 두 번째는 특집사진<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Feature Photography</span></sup></sub></span>으로 오랜 기간의 취재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작된 복수의 사진 이야기를 말한다. 이 부분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말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된 장르로 대부분 숙련된 사진기자들에게 수여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0</span>년간의 수많은 수상작들 중에 내게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ldquo;캠퍼스에서의 죽음&rdquo;이라는 제목이 붙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1</span>년 존 필로<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John Filo</span></sup></sub></span>의 작품이다. 오하이오 켄트주립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하던 학생이었던 필로는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어수선한 캠퍼스에 있었다. 캠퍼스에는 이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여 명의 주 방위군이 들어차 있었다. 필로는 카메라를 들고 시위가 열리는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방위군은 시위대에게 해산을 요구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졌다. 최루탄을 쏘던 방위군이 학생들에 의해 언덕까지 후퇴한 후 실탄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필로는 그들이 공포탄을 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총알은 학생들의 몸을 관통했다. 피범벅이 되어 누워 있는 남자를 보고 한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필로는 그 순간 셔터를 눌렀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명의 학생이 부상당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명이 죽었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 8</span>명의 방위 대원이 살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아무도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없다. 필로는 사망한 학생 중 하나인 제프에 대해 &ldquo;그는 과격분자도 주동자도 아니었다. 심지어 정치적 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그는 드럼을 연주하고 머리를 길게 길렀으며 여자 앞에서 수줍음을 많이 탔고 사회 문제들을 걱정했다. 그는 미국의 캄보디아 침략에 분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rdquo;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포크 그룹 &lsquo;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드 영&rsquo;은 이 기만적인 사건을 필로의 사진과 함께 &lt;오하이오&gt;라는 노래에 실어 반전으로 들끓던 청년들에게 날려 보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퓰리처상과 경쟁할 세계적인 사진 상이 있다면 오직 암스테르담에서 매년 열리는 &lsquo;월드프레스포토&rsquo; 정도일 것이다. 월드프레스포토 역시 지난 반세기 동안 사진의 본래 기능인 &lsquo;기록&rsquo;에 무척 충실해왔지만 시대를 반영하듯 저널리즘 사진의 예술화에 경도되어 갔다. 하지만 퓰리처상은 저널리즘의 사실 기록과 전달에 주력했다. 이 같은 성격을 반영하듯 이 책은 퓰리처상 수상작의 담론을 카메라 메커니즘의 발전과 함께 조망하고 있다. 예술 사진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년 전 그대로의 카메라로 찍어도 지금 내보이는 데 전혀 문제가 없지만 기동성, 순발력, 전달 속도 등을 중요시하는 저널리즘에서는 카메라의 발전에 무척 민감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초기 대형카메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 중반의 소형 카메라, 컬러사진과 디지털사진이라는 메커니즘의 발전 단계로 수상작들을 나누고 있다. 사진은 인간이 만들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카메라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솔직하고 대담한 시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년 &lt;마이애미 헤럴드&gt;의 패트릭 페렐이 촬영한 &ldquo;절망에 빠진 사람들: 아이티의 재앙&rdquo;은 이러한 카메라의 기술적 발전이 녹아든 작품이다. 그전까지 사진기자들은 소형 카메라라는 이름이 무색한 플래그십의 묵직하고 거대한 최고급형 디지털카메라 기종들을 사용했다. 카메라의 안전성과 신뢰성과 최고급 화질의 확보가 이유였지만 매우 무겁고 불편하며 사람들 눈에 잘 띈다는 약점이 있었다. 특히나 지진이 난 후로 무정부 상태에 다름 없었던 아이티라면 이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위험에 빠지는 꼴이다. 페렐은 그런 카메라를 포기하고 작고 다양한 기능이 들어 있으면서도 저렴한 캐논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G10</span>을 이용해 작업을 했다. 애초의 목적이 전시가 아닌 신문 보도였기에 화소수는 충분했고 거리를 뛰어다니는 위험한 청년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또한 혁신적으로 발전된 디지털카메라의 장점은 현장에서 빠르게 전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같은 혁신은 인터넷 망을 통해 전 세계가 현장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토 저널리즘의 가능성을 일반인에게까지 확대시켰다. 그리고 페렐과 같은 소형의 디지털카메라는 이제 누구나 소지할 만큼 저렴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실린 사진들이 미국과 미국인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찬찬히 보고 읽는다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세계의 포토 저널리즘이 어떻게 발전하고 어떻게 유통되어 왔는가를 이 책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lsquo;목격&rsquo;할 수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이상엽 (포토 저널리스트)</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56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1961%EB%85%84.JPG" /></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img alt="" width="600" height="53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1973%EB%85%84.JPG" /></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퓰리처상 사진 부문에서 수상하려면 얼마만큼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지,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3</span>년 호치민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P</span>의 사진기자 호르스트 파스와 같은 집에서 살았고 서로 긴밀하게 협력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파스는 아직 &lsquo;전설의&rsquo; 호르스트 파스가 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설이 됐다. 그 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동안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탄 것이다. 나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열정적인지,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지 그때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가 이룬 일 중 우연의 산물은 거의 없다는 것도. 파스가 거둔 성과는 치열한 노력, 철저한 준비, 엄청난 희생의 결과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에는 기자들이 사진기자들을 약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글을 쓰는 사람이 사진을 다루는 사람보다 한 단계 높은 급에 속한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때도 파스가 드물게 재능 있고 지성적일 뿐 아니라 기자로서 진정한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확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년 전에 처음 만났다. 둘 다 우리 시대의 역사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이 일에 뛰어든 젊은이였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 전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던 콩고에서 일하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스는 처음부터 나를 매료시켰다. 그는 언제나 사진을 찍기에 완벽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지방신문에서 파스의 사진을 본 독자들이 그 사건들을 갈등의 진원지에서부터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파스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를 찾아가는 타고난 본능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파스가 늘 완벽한 사진을 얻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그가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정치적&middot;군사적 사건들을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스가 신기할 만큼 적절하게 자리를 잡는 것은 단순한 요행이 아니었다. 파스가 늘 사건이 벌어지는 중심에 가 있는 것은 주위의 상황을 잘 읽기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콩고에서 만나자마자 우리는 친구가 됐고 나는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판단하는 데 파스에게 의지하게 됐다. 파스가 훌륭한 사진기자였던 것은 그가 훌륭한 기자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몇 달 뒤 우리는 둘 다 호치민으로 파견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집에서 살게 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나는 파스가 일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면서도 항상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고 혹은 적어도 최대한 유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놀랐다. 가령 남베트남의 어떤 부대가 치르는 전투에 나갈 예정이라면 파스는 그 부대의 사령관이 얼마나 뛰어난지 미리 확인했다. 형편없는 지휘를 받는 군대와는 전장에 나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트남군 장교가 우수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파스는 작전에 나가기 전에 미리 비공식적으로 둘러보면서 병사들의 라이플총과 장비 상태를 점검했다. 보병들이 무기와 장비에 대해 무심한 경우에는 그것이 그 부대의 지휘 체계가 형편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해 그 부대의 전투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스는 항상 최대한 철저하게 준비했다. 전투 상황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에서 전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도 열심히 궁리했다. 미군이 철수한 뒤 베트남의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해졌던 전쟁 막바지에 파스는 옷 속에 전대를 숨기고 전장에 나갔다. 전대에는 수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심한 부상을 당하거나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면 그 돈으로 헬리콥터의 빈 좌석을 사서 자신과 친구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알기로 파스는 사진을 찍은 뒤 필름이 물에 젖지 않게 하려고 콘돔을 들고 현장에 나간 최초의 사진기자였다. 논바닥의 물이라도 들어가 필름을 못 쓰게 된다면 메콩 삼각주의 논에서 위험한 전투 장면을 촬영하느라 목숨을 건 보람이 없으니까. 또한 전쟁 중인 정치 파벌들을 쉴 새 없이 취재하던 콩고에서도, 내가 알기로 파스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가짜 필름을 들고 다닌 최초의 사진기자였다. 검문소에서 필름을 달라고 요구하면 거부하는 척하면서 가짜 필름을 주고 진짜 필름은 잘 숨겨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파스는 항상 모든 것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신중해야 하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파스는 무모한 기자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위험이 반복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즉 매일 자발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파스에게는 호언장담도, 허풍도 없었다. 파스는 자신이 취재하는 많은 사람들과 달리 자신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면 불필요한 기회는 잡지 말아야 한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3</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2</span>일, 파스는 집에서 자고 있는 나를 아침 일찍 깨우더니 누군가가 금방 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F.</span> 케네디를 저격했다고 말했다. 파스는 호치민의 주 공항인 탄손누트 국제공항에서 교전지로 떠날 헬기에 올라타기 전에 식당의 군 라디오 방송에서 암살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파스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무장헬기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에게 가서 교전지로 가자고 제의해준 것과 호의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베트남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파스는 다음 며칠간 카메라를 집에 두고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일을 쉬었다. 신중하고 치밀했던 파스는 사나흘 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다. 아무도 베트남전쟁에 관심이 없을 시기에 목숨을 걸고 베트남의 전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유일한 것은 젊고 잘생긴 미국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된 사건뿐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이러한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깊은 존경의 마음으로 파스를 떠올리는 이유는, 이 일화들이 이 책에 실린 많은 사진들을 매우 특별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뛰어난 사진은 유난히 운이 좋고 그날따라 특별한 행운이 따라와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날 사진기자가 방문해준 것에 보답하려고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하필이면 사진기자의 라이카나 니콘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히려 좋은 사진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시 출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시 퇴근이라는 안전하고 보장된 생활을 기꺼이 포기하고, 거칠고 위험천만한 장소에서 정상적인 출퇴근 시간도 없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날들 동안 장시간 일할 각오가 된, 비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엄청난 준비와 희생을 하며 힘들게 일한 결과일 때가 훨씬 많다. 사진기자들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종종 그들 본인에게도 불가해한 문제이다. 사진기자들은 왜 안전하고 보장된 삶이 따분한지, 왜 자신이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지, 아니 실제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지조차도 정확히 모른다. 나는 결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왠지 뛰어난 사진기자들을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끌어내고 유혹의 손짓을 보내 모험을 추구하게 하는 힘이 바로 이들이 지닌 재능이 아닌가 싶다. 모험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모험이 궁극적인 지향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볼 때 많은 사진이 책에 나온 사진들과, 퓰리처상을 받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사진들 뒤에 드물게 비범한 재능을 지니고 드물게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진기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특출하다. 이 사진들을 찍은 사람들은 최고의 전문가이며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을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종종 자신의 감정과 신체까지도 희생하는 큰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항상 이례적인 상황을 맞을 준비가 돼 있으며, 그래서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그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모아놓은 사진들을 보다가 나는 사진 자체뿐 아니라 그 사진을 찍은 사람들의 희생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았다. 퓰리처상 수상작을 찍을 정도로 힘들고 위험한 곳에서 사진기자들은 항상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의 표적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공민권 운동이 벌어지던 시절 남부에서 사진기자들은, 진짜 분노의 대상인 뉴욕과 워싱턴 사람들을 공격할 수 없는 화난 폭도들의 완벽한 표적이었다. 교전 지역에서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진기자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서 일을 해야 했고 카메라 때문에 눈에 잘 띄어 맞은편에서 총을 쏘는 군인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훌륭한 책은 우리 시대에 이미지가 지닌 특별한 힘뿐 아니라 이러한 이미지가 우리의 감정과 얼마나 크고 강력하게 연결되는지를 일깨워준다. 이 책의 각 페이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굳이 심사위원들의 이성적인 판단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이 사진들이 진정으로 우리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한다는 데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았다. 이 책은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0</span>년간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모아놓은 것과는 다르다. 헤드라인들을 읽다 보면 순간적으로 그 사건들이 떠오르지만 기껏해야 나와는 상관없는 동떨어진 사건일 뿐이다. 사람들은 &ldquo;아, 그렇지. 그해에 한국 전쟁이 일어났고 그해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지. 그리고 그해에는 제임스 메러디스가 미시시피대학교에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입학했구나&rdquo;라고만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 사진들은 아주 다르다. 감정이 있다. 이 사진들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훨씬 더 큰 힘이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뿐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우리가 그때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를 떠올린다. 우리를 위해 그렇게 특별한 모험을 감행했던 호르스트 파스 같은 뛰어난 사진기자들이 그 시절에 한 일은, 우리를 위해 역사의 얼굴을 포착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 그리고 지금도 그 일을 하는 젊은 사진기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운이다. 그 사진기자들이 바로 그 힘든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데이비드 핼버스탬 (저널리스트, 1964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 수상자)</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img alt="" width="600" height="48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1994%EB%85%84.JPG" /><br /> </span></strong></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img alt="" width="600" height="5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2002%EB%85%84(1).JPG" /><br /> </span></strong></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img alt="" width="600" height="415"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2008%EB%85%84.JPG" /></span></strong></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판 머리말, 서문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43" height="18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3%B0%EB%A6%AC%EC%B2%98%EC%83%81%20%EC%82%AC%EC%A7%84/%ED%95%BC%20%EB%B6%80%EC%97%98.JPG" />핼 부엘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Hal Buell<br /> </strong></span>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의 메딜 언론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통신대<span style="color: #666699"><sub><sup>通信隊</sup></sub></span>의 사진병으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년간 복무한 뒤 &lt;퍼시픽 스타스 앤드 스트라이프스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Pacific Stars and Stripes</span></em>&gt;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6</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P</span><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ssociated Press</span></sup></sub></span>에 들어갔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4</span>년에 사진부장,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8</span>년에 보도사진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0</span>년까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P</span>의 사진국장으로 일했다. 현역에 있는 동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5</span>개국에서 취재활동을 펼쳤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 후반에 일어난 여러 굵직한 취재활동을 펼쳤고, 미국사진기자협회<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National Press Photographers Association</span></sup></sub></span>에서 주는 스프라그상<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prague Award</span></sup></sub></span>을 비롯한 여러 사진 상을 받았다. 아시아에 관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span>권의 아동 도서와 정치 풍차 도서를 출간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사진과 사진보도의 윤리성에 관해 폭넓은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우정<br /> </strong>인문서, 어린이도서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역사를 수놓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0</span>가지』『케네디가의 형제들』『세계위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인의 이야기』『야행성동물』『동물백과』『어류백과』『야성의 부름』『나의 비밀 친구』『말썽꾸러기 모모』『위대한 개혁자』『세계 역사이야기』등이 있다.<br /> &nbsp;<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 <br />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9 오후 1:51:00고미숙의 ‘동의보감’<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7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8F%99%EC%9D%98%EB%B3%B4%EA%B0%90/%EB%8F%99%EC%9D%98%EB%B3%B4%EA%B0%90%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트로 _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하나의 &lsquo;그림&rsquo;과 두 개의 &lsquo;주석&rsquo;</span></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여기 하나의 그림이 있다. 한 사람(남자)이 앉아 있는 측면도가 그것이다. 사지는 없고 몸통만 있는데, 선의 굴곡이나 터치가 상당히 &lsquo;나이브&rsquo;하다. 당연히 미적으로도 좀 거시기하다. 서양 해부도에 나오는 쭉 뻗은 팔등신, 다비드 조각상이나 비너스상이 주는 깔끔한 포스 따위는 찾으려야 찾을 길이 없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등을 타고 흐르는 세 개의 관이 보인다. 등이 저렇게 중요한 곳이었나? 모든 생명체는 &lsquo;뒷면이 먼저 결정되어야 앞면이 결정된다&rsquo;고 하는 생물학적 명제가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폐와 심장, 소장과 대장, 간과 담, 신장과 방광 등의 내장기관이 나뉘어 있다. 장기의 위치와 모양을 표현했다기보다는 구역을 대충 분할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거기다 방광 밑에 곡도(대변이 지나가는 길)와 수도(소변이 지나가는 길)를 표시해 두었다. 더욱 가관인 건 배꼽이다. 해부도에 배꼽이 떡 하니 나오는 것도 황당하지만 거기다 배꼽 주변에 흐르는 저 주름들은 또 뭔가. 주름의 양이 상당한 걸 보면 그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60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8F%99%EC%9D%98%EB%B3%B4%EA%B0%90/%EC%8B%A0%ED%98%95%EC%9E%A5%EB%B6%80%EB%8F%8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바로 『동의보감』의 첫 장 「내경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형장부도」다. 그림으로 시작하는 책이라? 문득 푸코의 『말과 사물』이 떠오른다. 『말과 사물』은 「시녀들」이라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이 그림 역시 구도가 아주 독특하다. 그림 안에서 화가가 시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림의 중앙엔 거울 속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는 왕과 왕비가 있다. 그림의 안과 밖이 중첩되고 화가의 시선과 왕의 시선, 그리고 그 왕을 비추는 거울의 시선이 다중적으로 교차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20"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8F%99%EC%9D%98%EB%B3%B4%EA%B0%90/%EC%8B%9C%EB%85%80%EB%93%A4.JPG" /></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시선들의 중첩과 교차를 설명하면서 『말과 사물』의 향연이 시작된다. 『동의보감』 또한 장장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span>권(번역본은 총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00</span>여 페이지)을 자랑하는 방대한 의서다. 스케일도 엄청날뿐더러 여타 의서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독특한 담론의 질서를 갖추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lsquo;표상의 배치&rsquo;라는 고전주의시대의 에피스테메<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eacute;pist&eacute;m&egrave;</span>, 특정 시대 사회의 인식체계</sup></sub></span>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듯이, 이 「신형장부도」 역시 『동의보감』의 담론적 비전에 대한 서곡에 해당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먼저, 왜 몸통만 있는 것일까? 생명의 핵심은 얼굴과 오장육부에 있기 때문에 사지말단은 굳이 그리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리라. 아, 물론 경락의 유주<span style="color: #666699"><sub><sup>流注, 흐름</sup></sub></span>를 그릴 때는 사지를 포함하여 몸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표현한다. 이 그림은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흐름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과감하게 생략한 것이다. 옆으로 새는 감이 있지만 그래서 사지가 없이 몸통만으로 태어났는데도 &lsquo;오체대만족&rsquo;을 외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에 반해 인체의 모든 것을 세세히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구식 해부도는 그러한 비율을 갖춘 신체만이 정상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키는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 등 뒤에 있는 관들의 행렬은? &ldquo;양생을 위해 기를 수련할 때 정기가 오르내리는 길이다. 척추 맨 아랫부분을 미려관, 중간부분을 녹로관, 맨 윗부분을 옥침관이라 한다. 옥침관은 정신활동을 주관하는 뇌로 연결된다.&rdquo;(신동원, 『조선사람 허준』, 한겨레신문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1</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4</span>쪽) 아하! 그래서 측면도였던 거구나. 옆으로 앉아 있어야 이 세 개의 관을 명확하게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 관들이 주욱 이어지는 꼭대기, 즉 머리 부분엔 &lsquo;수해뇌&rsquo;<span style="color: #666699"><sup><sub>髓海腦</sub></sup></span>, &lsquo;니환궁&rsquo;<span style="color: #666699"><sup><sub>泥丸宮</sub></sup></span>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다. 뇌가 중요한 기관인 건 말할 나위도 없는데, 여기선 그것들이 등을 타고 오르는 관들과 이어져 있다는 데 포인트가 있다. 뇌는 척수의 연장이라는 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내부의 장기들이 구역처럼 느슨하게 표시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서양의 해부도가 형태와 조직을 중심으로 한다면, 여기서는 기운의 흐름과 분포가 더 중요하다. 한의학에서 장부는 장기만이 아니라, 그 기운이 작용하는 특정 &lsquo;구역&rsquo;<span style="color: #666699"><sup><sub><span style="font-family: Verdana">zone</span></sub></sup></span>과 &lsquo;회로&rsquo;를 지칭한다. 경락의 개념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의 정기가 호흡을 통해 드나드는 곳이 바로 단전, 곧 배꼽이다. 배꼽의 주름들은 바로 숨을 쉬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지금 열심히! 단전호흡 중이다. 주름들의 출렁거림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건 시선이다. 미적으로는 좀 머시기하지만 눈동자는 분명 아래를 향하고 있다. 배꼽을 통해 숨이 들고 나는 것을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단학의 최고경전이라고 하는 북창 정렴의 『용호비결』에 나오는 단전호흡의 기본자세 그대로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진실로 마음을 고요히 하고, 머리를 살짝 숙여 아래를 보되, 눈은 콧등을 보고 코는 배꼽 언저리를 대하게 되면, 기운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정렴, 『윤홍식의 용호비결 강의』, 봉황동래, 2009, 70쪽)</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이 그림은 서양의 해부도와는 달리, 살아 숨쉬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처럼 늘 호흡이 가쁜 &lsquo;저질체력&rsquo;이 아니라, 깊이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활발발<span style="color: #666699"><sub><sup>活潑潑</sup></sub></span>한 신체다. 살아 있으려면 신체의 모든 세포는 활동을 해야 한다. 그 활동들은 쉬임없이 접속하고 변이한다. 그것을 표현하자니 그림의 선이 이렇게 터프한 게 아닐지. 또 생명이란 유형의 생리와 무형의 정신이 결합해야만 가능하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오버랩시키려다 보니 그림이 좀 &lsquo;웃기게&rsquo;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옆으로 새면, 이 해학성도 매우 중요한 특이성이다. 서양의 해부도는 정교하고 멋지다. 하지만 그래서 비장하다. 이 비장미에는 인체와 건강에 대한 &lsquo;이데아&rsquo;적 표상이 깔려 있다. 그에 반해 동양의 신체는 유머러스하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8</span>가지의 호상을 지녔다는 부처님 상<span style="color: #666699"><sub><sup>像</sup></sub></span>도 카리스마가 넘친다기보다는 원만하고 태평스럽다. 특히 &lsquo;포대화상&rsquo; 같은 부처님은 천진난만한 표정에 몸매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등신에 가깝다. 이런 안면성과 비율에서 핵심은 정교함이 아니라 변용력이다. 직선으로 각이 서 있으면 멋지긴 하지만 변용이 불가능하다. 너무 잘생겨서 연기가 어려운 꽃미남 스타들처럼. 변용력이란 몸과 외부의 교감이 왕성하다는 뜻이다. 동양의 해부도는 이런 점에 착안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터치가 거칠면서 해학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물론 이 그림은 허준이 독창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을 포함하여 『동의보감』에 수록된 장부의 형상은 이미 전통적인 의서와 양생서에 다 등장했던 것들이다. 허준의 독창성은 이 그림을 서두에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저서가 다른 의서들과는 달리 질병과 치료가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위주로 한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는 데 있다. 생명활동이란 몸 안과 밖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lsquo;생명이 무엇인가?&rsquo;라고 묻는 순간 바로 생명의 외부, 곧 우주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은 몸이면서 곧 우주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span style="color: #666699"><sub><sup>四時</sup></sub></span>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span style="color: #666699"><sub><sup>四肢</sup></sub></span>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span style="color: #666699"><sub><sup>六極</sup></sub></span>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span style="color: #666699"><sub><sup>八節</sup></sub></span>이 있다. 하늘에 구성<span style="color: #666699"><sub><sup>九星</sup></sub></span>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span style="color: #666699"><sub><sup>九竅</sup></sub></span>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span style="color: #666699"><sub><sup>十二時</sup></sub></span>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span style="color: #666699"><sub><sup>二十四氣</sup></sub></span>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5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로<span style="color: #666699"><sub><sup>喜怒</sup></sub></span>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span style="color: #666699"><sub><sup>寒熱</sup></sub></span>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span style="color: #666699"><sub><sup>四大</sup></sub></span>와 오상<span style="color: #666699"><sub><sup>五常</sup></sub></span>을 바탕으로 잠시 형<span style="color: #666699"><sub><sup>形</sup></sub></span>을 빚어 놓은 것이다. (「내경편」, 10쪽)</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신형장부도」 바로 다음에 나오는 손진인의 말이다. 손진인, 이름 손사막<span style="color: #666699"><sub><sup>孫思邈</sup></sub></span>. 당나라 때의 전설적인 명의로 특히 양생술에 뛰어났다. 진인<span style="color: #666699"><sub><sup>眞人</sup></sub></span>이란 &ldquo;천지를 손에 넣고 음양을 파악하며 정기를 호흡하고 홀로 서서 신<span style="color: #666699"><sub><sup>神</sup></sub></span>을 지키며 기육이 한결같&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span>쪽)은 존재다. 한마디로 도가양생술의 최고경지에 이른 인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손진인의 멘트는 「신형장부도」에 담겨 있는 몸과 우주에 대한 간결하고도 아름다운 주석이다. 물론 근대적 에피스테메에 입각해서 보면 황당무계할 것이다. 머리가 둥근 게 하늘을 닮았다고?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는 거랑 팔다리 사지가 있는 게 같은 맥락이라고? 십이경맥과 수혈 같은 건 전문적인 말이니까 넘어간다 치자. 다음 대목은 더 가관이다. 우레와 번개가 있으니 기쁨과 분노가 있고, 비와 이슬이 있으니 눈물과 콧물이, 풀과 금석이 있으니 털과 치아가 있다고? 좋게 말하면 시적 상징이거나 상징적 농담, 정직하게 말하면 헛소리거나 미신처럼 보일 것이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하지만 섣부른 결론은 금물이다. 적어도 동아시아<span style="font-family: Verdana"> 5</span>천 년의 지혜가 그 정도 수준이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언급에 동의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동의한다고 한들 바로 이 원리가 터득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이 언급을 통해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전제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근대적 사유의 배치에선 인간과 자연, 천지의 흐름과 희로애락은 어떤 연관성도 없다. 사람 따로 동물 따로 식물 따로. 계절 따로 공간 따로 인생 따로. 정말 &lsquo;따로주의&rsquo;의 극치다. 실제로 근대주의는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Individualism</span>&rsquo;,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을 때까지 나누는 것을 갈망한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마치 인생의 진리가 발견될 수 있다는 듯이. 하긴 이제는 그것조차도 잊은 듯하다. 처음엔 명석판명한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고매한 뜻이 있었을지 모르나 이젠 그냥 습관적으로 나누고 또 나눌 뿐이다. 이 맹목적 분할에 제동을 걸기 위해선 정말로 강렬한 질문이 필요하다. 정말 그런가? 계절의 변화와 우리의 감정은 어떤 연관성도 없는가? 우리 몸의 구조와 자연의 사물들은 정말 무관한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얼마나? 이런 질문을 던질 수만 있어도 일단은 대성공이다. 이 질문의 힘으로 그 입구까지는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어지는 주단계의 글은 두번째 주석에 해당한다. 주단계<span style="color: #666699"><sub><sup>朱丹溪</sup></sub></span>. 역시 손진인 못지않은 의학사의 &lsquo;레전드&rsquo;에 해당한다. &lsquo;금원사대가&rsquo;<span style="color: #666699"><sub><sup>金元四大家, 금&middot;원시대에 활약한 4명의 의학자를 이름</sup></sub></span>의 하나로 성리학의 이치를 의학으로 변주하여 일가를 이룬 명의다. 중국 남쪽지역 출신이라 &lsquo;남의&rsquo;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ldquo;사람의 형은 긴 것이 짧은 것만 못하고 큰 것이 작은 것만 못하며 살찐 것이 마른 것만 못하다. 사람의 색은 흰 것이 검은 것만 못하고 옅은 것이 짙은 것만 못하며 엷은 것이 두터운 것만 못하다. 더욱이 살찐 사람은 습이 많고 마른 사람은 화<span style="color: #666699"><sub><sup>火</sup></sub></span>가 많으며, 흰 사람은 폐기가 허하고 검은 사람은 신기<span style="color: #666699"><sub><sup>腎氣, 신장의 기운</sup></sub></span>가 넉넉하다.&rdquo;(「내경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쪽) 여기까지는 사람의 몸에 대한 보편적인 원리다. 일단 우리네 통념과는 많이 다르다. 길고 큰 것이 짧고 작은 것만 못하다고? 사실 그렇다. 롱다리는 허리와 신장 기능에 무리를 줄 수 있다. 얼굴색도 무조건 흰 것이 좋은 게 아니다. 폐와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로 미루고 일단 여기까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ldquo;사람마다 형색이 이미 다르면 오장육부 역시 다르기 때문에, 외증<span style="color: #666699"><sub><sup>外症,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sup></sub></span>이 비록 같더라도 치료법은 매우 다르다.&rdquo; 그렇다. 차이와 다양성, 이것이 한의학의 임상적 원칙이다. 지극히 단순한 말이지만 여기에 비춰 보면 현대 임상의학의 성격이 단번에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임상의학은 정상성과 균질성을 추구한다. 모든 신체를 단일한 척도에 따라 구획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의료기술이 발달할수록 내 몸의 특이성은 침묵, 봉쇄되어 버린다. 남는 것은 통계적 수치와 평균뿐.</p> <p style="text-align: justify">요컨대, 손진인의 멘트가 몸의 우주적 비전이라면 주단계의 말은 병증과 치료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이치를 밝힌 것이다. 솔직히 너무 쉽지 않은가? 이보다 더 간결하고 쉬울 순 없다. &ldquo;『동의보감』을 읽으세요&rdquo;라고 하면 지적 수준에 상관없이 한목소리로 하는 대답이 있다. 그 어려운 책을 어떻게? 너무 무섭게 생긴 책이에요! 그걸 우리가 읽어도 되나요? 등등. 두껍다고 다 무서운(?) 건 아니다. 두께는 사실 둘째고, 더 큰 장애는 의학에 대한 마음의 벽이다. 즉, 의학적 앎에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고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다시피 아주 유머러스한 그림 한 장, 그리고 간결하고 평이한 두 거인의 멘트. 이 정도면 그 권위의 벽을 허물기에 충분하지 않은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아무튼 좋다! 하나의 그림과 두 개의 주석, 이 지도를 가지고 우리는 지금부터 아주 역동적인 비전탐구의 길에 나설 것이다. 몸과 우주, 그리고 삶에 대한.</p> <p style="text-align: justify">(인트로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고미숙<br /> </strong>고전평론가.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 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여 년간 지식인공동체 &lsquo;수유+너머&rsquo;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lsquo;삶의 기예&rsquo;를 배웠다. 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lsquo;수유+너머&rsquo;를 떠나 또 다른 공부와 공동체를 실험 중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나비와 전사<sub><sup>: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sup></sub>』『이 영화를 보라』『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8 오후 1:47:00《188》2010년 4월 19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470051"><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82%B4%EB%88%88%EC%97%90%EB%8A%94%EC%95%85%EB%A7%88%EA%B0%80.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19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56611"><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8B%A4%EC%84%AF%EC%A7%B8%EC%95%84%EC%9D%B4.JPG" /></a>루스 렌들의 『내 눈에는 악마가』(황금가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를 읽다. - 『유니스의 비밀』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렌들의 소설이다. 작가는 추리소설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두 편의 소설을 읽고 난 감상은, 추리소설에 대한 혼란이다. 예컨대 두 편의 작품을 &lsquo;세계문학전집&rsquo; 속에 넣으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민음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9</span>, 세계문학전집<span style="font-family: Verdana">27</span>)처럼 &lsquo;평범한&rsquo; 소설로 읽을 수 있다. 루스 렌들의 소설을 &lsquo;특별난&rsquo; 소설로 읽게 만드는 것은, 반어적이 표현이지만, 그녀가 세계의 추리소설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 한다는 에드거 상(미국 추리작가협회)과 골드 대거 상(영국 범죄작가협회)을 받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07" height="15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C%A0%EB%8B%88%EC%8A%A4%EC%9D%98%20%EB%B9%84%EB%B0%80.JPG" />그녀의 출발점은 전형적인 영국 추리소설 스타일의 웩스퍼드 경감 연작물이다. 스무 권에 육박한다는 이 연작물로 성공을 거두었지만, 훗날 작가 자신은 이 연작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루스 랜들은 웩스퍼드 연작물을 쓰는 와중에 비정상적인 인간의 심리를 다룬 범죄소설들을 따로 써왔는데, 이 작품들로 대중의 인기와 함께 앞서 말한 상들을 받았다. 『유니스의 비밀』과 『내 눈에는 악마가』가 바로 반사회적 인격장애<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psychopathy</span></sup></sub></span>를 다룬 그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번역자도 말하고 있듯이 &ldquo;문학 소설 못지않은 상상력과 묘사&rdquo;가 뛰어난 작품들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에 읽은 작품은 『유니스의 비밀』보다, 재미가 떨어진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범죄가 남성들의 것이기 때문에, 늘 볼 수 있는 남성 주인공의 범죄보다 여성 주인공의 희귀한 범죄가 더 관심을 끄는 까닭에서일까?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유니스의 비밀』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지, 결코 이번 작품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병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아서 존슨은, 유니스 만큼 복잡하고 기괴한 인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서의 어머니는 생후 두 달밖에 안 된 그를, 여동생에게 팔았다. 아서는 이후로 한번도 어머니나 아버지를 보지 못한 채, 빅토리아식의 도덕과 관습이 몸에 밴 이모의 손에서 자라났다. 스무 살 후반 무렵에 이모가 죽고 나서 쉰 넘도록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열네 살 때 사환으로 입사했던 회사에 장기근속 중이다. 고작해야 고루한 독신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이십오 년 전과 이십 년 전에 두 명의 소녀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이다. 이십 년 전, 새로 이사 온 전셋집의 지하실에서 여자 마네킹을 발견하고 정기적으로 마네킹의 목을 조르는 의식을 치르지 못했다면, 해소되지 못한 그의 공격본능은 또 다른 여자 희생자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12" height="341"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psycho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 눈에는 악마가』는 히치콕 감독의 &lt;사이코&gt;를 연상시킨다. &lt;사이코&gt;의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공격 본능을 죽은 어머니의 명령으로 치환하듯이, 아서 또한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나, 그의 수호천사 역을 자청했던 이모에 대한 애증으로부터 자신의 공격 본능을 길어 올린다. 모성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강조하는 이런 설정은, 자칫 여성에 대한 가부장 사회의 억압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우려하는 것처럼, 아서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그런 설정에 송두리째 내맡기지 않았다(뭐하러, 그러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작품의 묘미는, 아서의 옆방에 입주한 앤서니가 반사회적 인격장애인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쓰고 있는 논문의 초고를 잠시 훔쳐보자.</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333399"><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 정신병질자는 특징적으로 정서적인 관계 형성을 하지 못한다. 이런 관계를 형성한다면(일시적이고 산발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목적은 자신의 욕망을 직접 만족시키고자 함이다.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애정도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신병질자는 좌절에 대처할 사회적인 방법을 거의 배우지 못한다. 이를 배운 사람들은(예를 들어 &lsquo;극심한&rsquo; 포르노에 몰두하는 것) 잘해야 스스로를 괴기스러운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77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333399"><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의 행동. 아이들과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를 때, 그에게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있기는 있다 해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가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일상적인 일을 완수하지 못했거나 강박적인 행동, 예를 들면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사회의 안녕이라는 문맥 속에서 행해진 행동들이 실패했을 때 가책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br /> (111쪽)</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30pt; br: "><span style="color: #333399"><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hellip;) 정신병질자의 대다수는 자기 자신의 공격성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정상적인 피실험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죄의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여성 그리고 권위자와 관련된 그들의 행동 양식에서 비정신병질자보다는 정신병질자에게서 더 큰 장애 요인이 발견되지만 정신병질자가 죄의식을 더 많이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분석 결과에 의하면 정신병질자의 죄의식은 진정한 후회의 감정이기라기보다는 힘들고 불쾌한 상황에 대한 감정이라고 한다. 정신병질자는 이기적인 형태의 행동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여서 만약 사회적으로 용인될 만한 행동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후자를 선택할 만큼 교활할 수도 있다. (176~177쪽)</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앤서니는 정신병질자(이 책이 번역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에는 &lsquo;반사회적 인격장애인&rsquo;이라는 말이 알려지지 않았던 모양이다)에 관해 이론적으로 알고 있지만, 자기 옆방의 입주자가 그런 사람인 줄은 알아채지 못했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07 오후 1:28:00보르헤스의 ‘픽션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101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94%BD%EC%85%98%EB%93%A4%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lsquo;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rsquo; 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책에 수록된 여덟 편의 단편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덟 번째 작품인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은 탐정 소설이며, 따라서 독자들은 한 범죄가 어떻게 저질러지며 그것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모두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그 범죄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마지막 단락에서야 그것을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외 작품은 환상 소설이다. 그중 하나인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상징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나는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쓴 작가가 아니다. 이 작품의 역사와 내력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잡지 &lt;수르&gt;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9</span>호의 해당 페이지를 참고할 수 있다. 그곳에는 레우키포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Leukippo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원자론의 창시자)</sup></sub></span>와 라스비츠<span style="color: #666699"><sub><sup>(Kurd La&szlig;witz(1848~1910)</sup></sub></span>, 독일의 작가이자 과학자), 루이스 캐럴<span style="color: #666699"><sub><sup>(본명은 찰스 덧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1832~1898), 영국의 작가이자 수학자. 대표작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있다)</sup></sub></span>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다. 「원형의 폐허들」에서는 모든 것이 공상적이다. 그리고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고집하는 운명에서 비현실성이 나타난다. 내가 그의 것으로 밝히는 글들의 목록은 아주 흥미롭지는 않지만, 내가 멋대로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자취를 보여 주는 도표이다&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이미 이러한 책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그것들에 관한 요약, 즉 논평을 제공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그것은 바로 칼라일<span style="color: #666699"><sub><sup>(Thomas Carlyle(1795~1881), 영국의 역사가이자 비평가)</sup></sub></span>이 『의상 철학』에서, 버틀러<span style="color: #666699"><sub><sup>(Joseph Butler(1692~1752), 영국의 성직자)</sup></sub></span>가 『좋은 피난처』에서 쓴 수법이다. 그런 작품들 역시 책이라는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으면서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중언부언한다. 더 분별력이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와 「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의 주석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941년 11월 1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내가 우크바르를 발견한 것은 거울 하나와 어느 백과사전을 연관시킨 덕분이다. 그 거울은 라모스 메히아 지역의 가오나 거리에 있는 어느 별장의 복도 끝을 어지럽게 비추고 있었고, 백과사전은 『영미 백과사전』(뉴욕,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7</span>)이라는 헷갈리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02</span>년 판을 그대로, 하지만 뒤늦게 찍어 낸 것이었다. 사건은 약 오 년 전에 일어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 밤 비오이 카사레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Adolfo Bioy Casares(1914~1999),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와 여러 작품을 공동 저술했으며 그와 함께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sup></sub></span>는 나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고, 우리는 일인칭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광범위한 논쟁을 벌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인칭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왜곡할 수 있고 여러 가지 모순에 개입하기 때문에, 오직 몇 명의 독자들, 즉 극소수의 독자들만이 잔혹하거나 진부한 현실을 읽어 낼 수 있다. 저 멀리 있는 복도 끝에서 거울이 우리를 쫓아다니며 노리고 있었다. 우리는 거울들에 기괴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늦은 밤에는 그런 발견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바로 그때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그에게 그 잊기 힘든 격언의 출처를 물었고, 그는 『영미 백과사전』의 &lsquo;우크바르&rsquo; 항목에 그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대답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별장(가구까지 통째로 빌린)에는 그 백과사전이 한 질 구비되어 있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권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우리는 &lsquo;웁살라&rsquo;에 관한 글을 발견했다. 그리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7</span>권의 첫 페이지에는 우랄 알타이어에 관한 글이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우크바르에 관한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소 당황한 비오이 카사레스는 색인을 뒤졌다. 그는 우크바르라고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철자들을 뒤졌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Ukbar, Ucbar, Ookbar, Oukbahr</span>&hellip;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떠나기 전에 그는 그곳이 이라크 혹은 소아시아에 있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그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사전에 기록되지 않은 나라와 익명의 이교도 지도자는 자신의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비오이가 겸손하게도 즉석에서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측했다. 유스투스 페르테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1785년 설립된 독일의 지도 전문 출판사)</sup></sub></span>의 지리부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그런 노력 역시 헛되었다. 그러자 나의 의심은 더욱 굳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음 날 비오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지금 바로 자기 앞에 백과사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권에 수록된 우크바르에 관한 글이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백과사전에는 그 이교도 지도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의 교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으며, 문학적 관점에서는 아마도 격이 낮아질지 모르나 자기가 인용했던 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lsquo;성교와 거울은 혐오스러운 것이다.&rsquo; 하지만 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고 했다. &ldquo;어느 그노시스 교도에 따르면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의 환영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궤변이다.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rdquo; 나는 비오이에게 진심으로 그 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며칠 후에 그가 그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상세한 지명 색인을 담고 있는 리터<span style="color: #666699"><sub><sup>(Karl Ritter(1779~1859),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와 함께 근대 지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sup></sub></span>의 『지리학』에도 우크바르라는 이름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오이가 가져온 책은 틀림없는 『영미 백과사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권이었다. 거짓 책 표지와 책등에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권에 담겨진 항목이 알파벳 순서(<span style="font-family: Verdana">Tor</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Ups</span>)로 적혀 있었으며, 그것은 별장에 비치된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17</span>페이지가 아니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21</span>페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추가된 네 페이지에는 우크바르에 관한 항목이 담겨 있었지만 그 글은 알파벳 순서상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독자들도 아마 이런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잠시 후 우리는 비오이가 가져온 책과 우리 별장에 있는 책을 비교했고, 그것 이외에는 그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두 책은 (내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판을 재인쇄한 것이었다. 비오이는 그 판본을 수없이 열리는 경매 가운데 한곳에서 샀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우리는 약간의 주의를 기울여 그 글을 읽었다. 놀랄 만한 대목은 아마도 비오이가 기억했던 그 부분뿐이었다. 나머지는 상당히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고, 사전의 일반적인 말투를 그대로 따르고 있었으며, 당연한 일이지만 심지어 약간 지루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우리는 그 엄정한 글의 저변에서 근본적인 모호함을 발견했다. 지형에 관한 부분에 나타난 열네 개의 이름들 중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호라산, 아르메니아, 에르제룸이라는 단지 세 개의 이름뿐이었다. 그마저도 글에는 애매하게 삽입되어 있었다. 역사적인 인물 중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가짜 마법사 스메르디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merdis(기원전 6세기~ ?), 페르시아의 왕자, 왕위 쟁탈에 져서 살해당했다)</sup></sub></span>로,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처럼 언급되어 있었다. 그 글은 우크바르의 국경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 지역의 강과 분화구, 그리고 산맥들에 관한 판단 기준은 매우 불투명했다. 예를 들면 차이 칼둔의 저지대와 악사 삼각주가 서쪽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삼각주의 섬들에서는 야생마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들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18</span>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실린 내용이었다. 역사와 관련된 부분(<span style="font-family: Verdana">920</span>페이지)에서 우리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세기의 종교적 박해로 인해 정교회 신자들이 그 섬들을 피난처로 삼았으며, 거기에는 아직도 오벨리스크들이 남아 있고, 그들이 썼던 돌 거울이 자주 출토된다고 적힌 것을 읽었다. 언어와 문학에 대한 내용은 간략했다. 기억할 만한 특징은 딱 한 가지였다. 그 글은 우크바르 문학이 환상적이며, 전설과 서사시는 현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지 믈레흐나스와 틀뢴이라는 두 환상적인 지역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밝혔다&hellip; 참고 문헌은 이제 와서야 우리가 발견한 네 권의 책을 열거하고 있었지만, 세 번째 책인 실라스 하슬람<span style="color: #666699"><sub><sup>(하슬람은 『미로의 모든 역사』를 출판하기도 했다(저자 주), 가상의 인물, 보르헤스의 조모인 패니 하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역자 주))</sup></sub></span>의 『우크바르라 불리는 지역의 역사』(<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74</span>)만이 버나드 콰리치<span style="color: #666699"><sub><sup>(Bernard Quaritch(1819~1899), 영국의 서적상, 외서와 고문서에 관한 여러 목록을 발행함)</sup></sub></span>서점의 도서 목록에 실려 있을 뿐이었다. 첫 번째 책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41</span>년에 발간된 『소아시아의 우크바르라는 지역에 관한 알기 쉽고 읽을 만한 소견』으로 요하네스 발렌티누스 안드레아<span style="color: #666699"><sub><sup>(Johannes Valentinus Andreae(1568~1654), 독일의 신학자, 드퀸시는 안드레아가 장미 십자회의 기본 서적을 쓴 익명의 작가라고 주장한다)</sup></sub></span>가 쓴 것이었다. 이 사실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삼년 후 내가 뜻하지 않게 그 이름을 드퀸시<span style="color: #666699"><sub><sup>(Thomas De Quincey(1785~1859), 영국의 평론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으로는 자신의 아편 중독 체험을 바탕으로 쓴 『어느 아편 중독자의 일기』가 있다)</sup></sub></span>의 책(『저작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권)에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서 나는 그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span>세기초 &lsquo;장미 십자회&rsquo;라는 상상적 단체에 관해 쓴 독일 신학자이며,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예시한 것을 모방하여 실제로 그런 단체를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 밤 우리는 국립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지리부도, 색인 목록, 지리 학회에서 발행하는 연감, 여행자와 역사가의 비망록 따위를 샅샅이 살폈지만 허사였다. 그 누구도 우크바르에 있었다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비오이가 갖고 있는 백과사전 총 색인에도 그 이름은 나와 있지 않았다. 다음날, 내게 우크바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카를로스 마스트로나르디<span style="color: #666699"><sub><sup>(Carlos Masrtonardi(1909~1976), 아르헨티나의 언론인이며 시인, 프랑스 상징주의 작품을 스페인어로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sup></sub></span>가 코리엔테스 거리와 탈카우아노 거리가 만나는 길 모퉁이의 서점에서 검은색과 금색이 섞인 책등의 『영미 백과사전』 한 질을 발견했다&hellip;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권을 들춰 보았다. 물론 그는 우크바르에 관한 언급을 단 한마디도 찾을 수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남부 철도 회사의 기술자였던 허버트 애시에 관한 몇 안 되는 희미한 기억들은 아드로게 호텔에, 그러니까 인동덩굴 속에 파묻혀 있으며 거울들이 거짓된 깊이를 만들어 낸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많은 영국인들이 그런 것처럼 환상에 시달렸다. 이미 죽어 버렸기에, 살아 있었을 때의 유령 같은 모습조차 온데간데없다. 그는 키가 컸고 늘 무기력한 모습이었으며, 늘어진 네모 모양의 구레나룻은 한때는 붉은빛이었다. 나는 그가 자식이 없는 홀아비였다고 알고 있다. 그는 몇 년마다 한 번 해시계와 떡갈나무 몇 그루를 찾아 (우리에게 보여 준 사진들로 추측해 볼 때) 영국에 가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와, 속마음을 감춘 채 시작했으나 이내 대화조차 필요 없어지는 그런 영국식 우정을 무척 깊이 나누었다.(여기서 첫 번째 부사는 아마도 지나친 것 같다.) 그들은 항상 책과 신문을 서로 돌려 보곤 했다. 또한 늘 말없이 체스라는 전쟁을 벌이곤 했다&hellip; 나는 호텔 복도에서 손에 수학 책을 들고서 순간순간 덧없이 변화하는 하늘의 빛깔을 올려다보던 그를 기억한다. 어느 날 오후 우리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진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진법에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인 셈이다.) 애시는 우연히도 그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진법 표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0</span>진법(<span style="font-family: Verdana">60</span>진법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0</span>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으로 표기한다.) 표로 바꾸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느 노르웨이 사람이 리우그란데두술<span style="color: #666699"><sub><sup>(브라질 남단에 있는 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sup></sub></span>에서 자신에게 그 작업을 의뢰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지 팔 년이 되었지만, 그는 자기가 브라질에 있었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hellip; 우리는 목가적인 전원 생활과, 카팡가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노예나 반노예 상태에 있는 농장 노동자들의 감독이나 십장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과라니나 아프리카에서 유래하지만, 보르헤스가 지적하듯이 브라질을 통해 스페인어로 유입되었다)</sup></sub></span>, 그리고 목동을 의미하는 가우초<span style="color: #666699"><sub><sup>(남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 유역과 우루과이 강, 파라나 강 하류 등의 광대한 목축 지대인 팜파스의 주민 또는 목동. 우루과이의 노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lsquo;우&rsquo;에 강세를 주어 발음한다)</sup></sub></span>라는 단어가 브라질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진법의 기능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7</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월(나와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호텔에 머물지 않고 있었다.) 애시는 동맥 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죽기 며칠 전 그는 브라질에서 온 봉인된 등기 우편물을 하나 받았는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span>절판 크기의 책이었다. 애시는 그 책을 술집에 놓고 갔고, 나는 몇 개월 뒤 그 술집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책장을 대충 넘기며 살펴보던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지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이었는지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나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크바르와 틀뢴과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lsquo;밤 중의 밤&rsquo;<span style="color: #666699"><sub><sup>(『코란』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천국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성스러운 밤, 라마단의 마지막 밤이다)</sup></sub></span>이라는 이슬람의 어느 날 밤에는 천국의 비밀 문들이 활짝 열리고, 항아리에 담긴 물은 평상시의 밤보다 더욱 달콤해진다. 하지만 그런 천국의 문들이 열렸다 할지라도 내가 그날 저녁에 느꼈던 그런 황홀감을 경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책은 영어로 쓰여 있었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1</span>페이지나 되었다. 나는 그 노란색 가죽 장정본 책등에서 날조된 책 표지에도 똑같이 반복되어 있던 단어들, 즉 『틀뢴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 </span>백과사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span>권 &mdash; <span style="font-family: Verdana">Hlaer</span>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Jangr</span>까지』를 보았다. 출간된 장소와 날짜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첫 번째 페이지와 컬러 화보들 중의 하나를 덮고 있는 얇은 반투명지에는 &lsquo;오르비스 테르티우스&rsquo;라는 책 제목과 함께 파란색의 둥근 인장이 찍혀 있었다. 이 년 전 나는 어느 해적판 백과사전에서 존재하지 않는 거짓 국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발견했다. 이제 우연은 보다 정확하고 보다 공들인 무엇인가를 내게 제시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알려지지 않은 행성의 전체 역사를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다룬 자료 일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그 행성의 건축과 카드 패, 소름 끼치는 신화와 그 언어의 속삭임, 그곳의 황제와 바다, 광석과 새와 물고기, 그곳의 수학과 불꽃, 그곳의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쟁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모든 것들이 눈에 띌 정도의 교리적 의도나 패러디적 요소 없이 분명하고 조리 있게 서술되어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전문, 본문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46"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B3%B4%EB%A5%B4%ED%97%A4%EC%8A%A4.JPG"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Jorge Luis Borges<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99</span>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 대신 영국계 외할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놀라운 언어적 재능을 보였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9</span>년 스페인으로 이주, 전위 문예운동인 &lsquo;최후주의&rsquo;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각종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하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1</span>년 비오이 카사레스, 빅토리아 오캄포 등과 함께 문예지 &lt;남쪽&gt;을 창간, 아르헨티나 문단에 새로운 물결을 가져왔다. 한편 아버지의 죽음과 본인의 큰 부상을 겪은 후 보르헤스는 재활과정에서 새로운 형식의 단편소설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픽션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4</span>)과 『알레프』(<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9</span>)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그는 이후 많은 소설집과 시집, 평론집을 발표하며 문학의 본질과 형이상학적 주제들에 천착한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7</span>년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립도서관에서 근무했으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6</span>년 대통령으로 집권한 후안 페론을 비판하다 해고된 그는 페론 정권 붕괴 이후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으로 취임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 아르헨티나 국민문학상(<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6</span>), 세르반테스상(<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0</span>) 등을 수상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7</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8</span>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어린 시절 친구인 엘사 미얀과 결혼하였으나 삼 년 만에 이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6</span>년 개인 비서인 마리아 코다마와 결혼한 뒤 그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span>일 제네바에서 사망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송병선<br /> </strong>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지은 책으로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거미여인의 키스』『콜레라 시대의 사랑』『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모렐의 발명』『천사의 게임』『붐 그리고 포스트붐』『탱고』『꿈을 빌려 드립니다』『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염소의 축제』 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7 오전 9:54:00슈마허의 ‘굿 워크’<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 width="500" height="73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A%B5%BF%EC%9B%8C%ED%81%AC-%EC%95%9E%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추천서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7</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E. F.</span> 슈마허가 사망하자 동료였던 바바라 바르트<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Barbara Ward</span></sup></sub></span>는 슈마허야말로 인류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든 매우 독창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슈마허의 생각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만으로도 매우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리츠 슈마허는 놀랍도록 창조적이고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상투적인 생각이나 행동 양식을 파격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이다. 또한 인종, 나이, 계급, 정치적 입장과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정도로 보편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슈마허의 가장 특별한 점은 사람들을 실천으로 이끄는 비상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을 잘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슈마허가 고안한 &lsquo;중간기술&rsquo;이다. 슈마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2</span>년 인도 정부를 위해 만든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경제개발에서 기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로부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년 뒤 우리는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슈마허와 함께 런던에서 &lt;중간기술개발그룹&gt;을 출범시켰다. 이 연구팀은 가난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욕구와 자원에 적합한 기술, 가령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간단하며, 자본이 적게 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고안된 기술들을 개발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써왔다. 오늘날에는 스무 개가 넘는 유사한 연구팀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운영될 뿐 아니라 유엔을 비롯한 전 세계의 여러 정부와 시민단체들까지도 슈마허의 중간기술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제는 가난한 나라만큼이나 부유한 나라들도 이 기술이 의미가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슈마허와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년간 함께 일하며 우정을 나눴던 시절을 회상해보면 그가 현실의 방향을 바꾸는 일에 한결같이 매진해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아직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span>대였을 때 슈마허는 영국에서 잠시 농장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방안의 국제통화 지불결제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것은 즉각 케인스에 의해 채택되어 영국 정부의 공식제안서가 되었다. 몇 년 뒤 슈마허는 완전고용에 관한 유명한 「비버리지 보고서」에 주요 저자로 참여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영국 국립석탄위원회의 경제자문가로 활동했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0</span>년대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에는 지나친 석유 의존이 갖는 위험과 원자력 의존이 갖는 훨씬 더 심각한 위험에 대해 매우 일찍부터 끊임없이 경고를 보냄으로써 정부 측에서 보자면 종종 달갑지 않은 인물이 되기도 했다. 그 무렵 슈마허는 토양협회<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il Association </span></sup></sub></span>회장과 영국 공동소유기업의 선구자 격인 스콧 배더 공동회사<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cott Bader Commonwealth</span></sup></sub></span>의 국장, 그리고 중간기술그룹<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Intermediate Technology Group</span></sup></sub></span>의 의장을 맡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때부터 슈마허는 기술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가한 충격과 이런 기술을 뒷받침해온 사회구조를 지속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시작으로 기존 경제학과 기술, 그리고 이를 떠받쳐온 가치체제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 착수했다. 하지만 단순히 공격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를 지속가능한 삶으로 이끌 제대로 된 길을 정밀하게 탐색했다.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가 바로 그 결과 나온 지도인 셈인데, 여기에 담긴 철학적 틀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강조한 도덕적 가치에 누구나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굿 워크』는 슈마허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대 중반 미국에서 강연했던 내용을 묶은 책이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 6</span>만 명의 청중이 몰리기도 했던 슈마허의 강연 여정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의 백악관 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책의 세 장은 예전에 쓴 글에 토대를 두고 있으나 &lsquo;좋은 노동&rsquo;이라는 주제와 연관이 깊어 여기에 실리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예전에 출간된 슈마허의 생각을 다시 숙고하거나 확장한 것이다. 노동체제의 중심에는 어떤 가치관,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담겨 있다. 가령 노동을 청교도적 윤리라는 관점에서 보거나 아니면 좀 더 계몽적 관점에서 보아 노동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더 좋다는 식이 우리 시대 사이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상투적인 태도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와 같은 관점은 노동의 유일한 목적이 돈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 내가 아는 한 어떤 종교도 절대로 이렇게 설교하지는 않지만 - 무엇보다도 인간본성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고 천박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은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인간노동의 세 가지 목적에 대한 슈마허의 생각과 상반된다. 슈마허는 인간은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또 자신의 재능과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이들과 협력하기 위해 노동을 한다고 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노동과 인간, 그리고 삶에 대한 슈마허의 해석에 굳이 동의할 의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을 좀 더 잘 음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굿 워크』는 기존의 기술과 가치체제가 정치, 경영, 사회, 경제 분야에 끼친 결과와 함께 슈마허가 말한 노동의 세 가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대안들이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슈마허는 책 전반에 걸쳐 기업경영과 소유권 문제, 중간기술과 같은 여러 대안에 직접 참여했던 경험을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슈마허는 영국 국립석탄위원회, 중간기술개발그룹, 스콧 배더 회사, 토양협회에서뿐만 아니라 인도, 잠비아 등 세계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일하고 경험을 쌓아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 담긴 슈마허의 생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떤 기술을 선택할지는 가난한 나라건 부유한 나라건 상관없이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선택이라는 점이다. 가난한 나라의 경우 대다수 농민들이 노동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면 우선 이들의 필요와 자원에 적합한 중간기술이 확보되어야 한다. 반면 부유한 나라의 경우는 좀 더 작고, 좀 더 자본절약적이며, 천연자원을 좀 더 적게 쓰면서 자연환경에도 난폭하지 않는 그런 기술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 가난한 나라가 인간다운 생활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다. 선진국에 사는 우리 역시 좀 더 온순하고 비폭력적이며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국가와 국가들 간에, 그리고 한 국가 내에서 보다 넓은 차원의 평등으로 가는 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슈마허의 강연원고를 논문형식의 글로 편집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으나 되도록 손대지 않았다. 아마도 슈마허의 강연장에 왔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만 명의 청중은 그때 들었던 내용이 거의 편집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리라 생각된다. 그 결과 독자들은 이 책에서 가난한 나라건 부유한 나라건 현재 똑같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인 누구나 만족스러우며 창조적인 노동을 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유지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했던 슈마허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지 케넌이 언급했듯이, 적어도 우리가 지금까지 찾아낸 방식으로도 이 행성에서의 삶이 충분히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해 모색했고, 두 발로 서서 큰 소리로 대안을 외쳤고,&nbsp; 놀라운 정신력뿐만 아니라 창조적 에너지와 인간성까지도 모두 다 쏟아 부었던&nbsp; 슈마허의 생생한 모습을 독자들이 이 책에서 볼 수 있게 되었음은&nbsp; 실로 다행스러운 결실이라 하겠다.</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조지 맥로비</span><sub><sup><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George Mcrobie</span></sup></sub></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런던의 &lt;타임&gt;지에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ldquo;단테가 지옥의 모습을 그릴 때 노동자들이 공장 조립라인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지겹도록 반복적인 일을 되풀이하는 모습을 넣었더라면 더 실감났을 것이다. 지금의 노동은 개인의 자발성을 파괴하고 두뇌를 썩게 만드는 일인데도 수백만 명의 영국 노동자들이 일생을 그런 노동에 바치고 있다.&rdquo;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사는 예전에 나왔던 유사한 많은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열렬한 부인<span style="color: #666699"><sub><sup>否認</sup></sub></span>도, 고뇌에 찬 동의도,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lsquo;지옥의 모습&rsquo;이나 &lsquo;자발성을 파괴하고, 두뇌를 썩게 만든다&rsquo;와 같은 거칠고 무시무시한 표현에 대해 거짓이자 허풍이라거나 혹은 무책임한 히스테리적인 과장이라거나 아니면, 전복적인 선전문구라는 식의 비난조차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독자들은 기사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탄했겠지요. 그러면서 추측건대 다음 기사로 넘어갔겠지요. 생태주의자들이나 환경 보호주의자들, 또 환경파괴 감시자들조차도 이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약 인간이 만든 어떤 시설물이 수백만 마리의 새나 바다표범, 혹은 아프리카의 보호구역에 사는 야생동물들의 자발성을 파괴하고, 두뇌를 썩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면, 그런 주장은 적어도 심각한 문제로 반박을 받거나 아니면 최소한 사실이라는 시인이라도 나왔을 것입니다. 또 노동자들의 정신이나 두뇌가 아닌 신체가 훼손되었다고 했더라도 상당한 관심을 끌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안전규정을 살피고 조사관을 파견하고 손해배상청구 등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됩니다. 경영자는 노동자에게 위험한 각종 사고를 예방하고 신체적 건강상태를 돌보는 것이 자신의 중요한 의무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두뇌와 정신, 영혼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영국 정부는 최근 스톡홀름학회에 「천연자원: 생존을 위한 동력」이라는 제목의 약식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분명 모든 천연자원 가운데 가장 으뜸은 인간이 지닌 자발성과 상상력, 그리고 지력<span style="color: #666699"><sub><sup>知力</sup></sub></span>입니다. 누구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언제든 얼마든 소위 교육에 돈을 쏟아 부으려고 합니다. 진짜로 생존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자원 가운데 가장 소중한 자원인 인간의 두뇌를 보호하거나 두뇌 개발에 필요한 논의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런 논의는 보고서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동력」에는 미네랄, 에너지, 물과 같은 물질적 자원들은 모두 거론되었지만 자발성, 상상력, 지력과 같은 비물질적 요소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간 삶의 중심에 노동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 관련 학문의 교재에는 모든 이론의 필수적 디딤돌로서 노동에 관한 이론이 담겨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대부분의 에너지를 노동에 쏟고 있을 뿐 아니라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에 돈을 쓰는지, 무엇을 소유하는지, 어디에 투표를 하는지보다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나 성격 형성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노동인데도 수업교재에서 노동에 관한 이론을 찾아내는 것은 사실상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노동자에게 노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논의는 거론조차 되지 않습니다. 나아가 노동이 요구하는 바에 - 그나마도 엄밀히 말하자면 주로 기계의 요구에 지나지 않는데 - 노동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동자들의 욕구에 노동을 맞추는 것이 진짜 중요한 문제라는 점도 거론되는 법이 없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목적이나 목표와 인간의 노동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 단지 생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인류의 모든 가르침은 말합니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는 인간의 노동이 없다면 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ldquo;여러분 각자가 어떤 재능을 받았든지 간에 마치 선한 청지기가 여러 방법으로 신의 은총을 나눠주듯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 쓰시오&rdquo;라는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런 일을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의 세 가지 목적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째는 인간 삶에 꼭 필요하고 유용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둘째는 선한 청지기처럼 신이 주신 재능을 잘 발휘하여 타고난 각자의 재능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셋째는 태생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협력하기 위해서입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세 가지 차원에서의 이런 역할을 통해 노동은 인간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노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ldquo;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 간다&rdquo;라고 말했습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프롤로그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9"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8A%88%EB%A7%88%ED%97%88.JPG" />E. F. 슈마허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77<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1</span>년 독일 본에서 태어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며 궁핍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미국 콜롬비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미래가 보장된 교수직을 버리고 전운이 감돌던 독일로 귀국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4</span>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피신했지만 적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복지정책의기초를 닦았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 제안한 금융제도는 당시 &lsquo;케인즈 플랜&rsquo;에 반영되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0</span>년부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여 년간 영국 국립석탄위원회 자문을 맡으며 재생 불가능한 자원에 기반한 서구문명의 종언을 예고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5</span>년 경제 자문관으로 버마를 방문하면서 &lsquo;불교경제학&rsquo;이라는 새로운 경제철학을 제시했다. 인도에서 처참한 빈곤을 목격하면서는 지역 규모에 알맞으며 사용하기 쉽고 생태적인 &lsquo;중간기술&rsquo; 개념을 창조했다. 이는 기계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질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5</span>년 &lt;중간기술개발그룹&gt;을 발족해 전 세계에 중간기술을 보급하고,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세계를 돌며 자급경제를 지원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3</span>년 첫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mall Is Beautiful</span></em>』를 출간했다. &lsquo;작은 것이 아름답다&rsquo;는 단 한 문장은 시대의 상징이 되어 퍼져나갔다. 주요 저서로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 A Guide for the Perplexed</span></em>』와 『내가 믿는 세상<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 This I Believe</span></em>』이 있다. 『굿 워크』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7</span>년 미 대륙을 횡단하며 펼친 강연을 묶은 것으로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말년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나무의 잠재력을 연구했으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7</span>년 강연 순회 도중 사망하면서 그 연구도 중단됐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박혜영<br /> </strong>인하대 영문과 교수. 영국의 낭만주의 시를 전공했다. 학문적 관심사는 산업혁명기의 영국역사와 문학, 여성, 생태 문제 등이다. 주요 번역서로는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가 있고, &lt;한겨레&gt;, &lt;녹색평론&gt;, &lt;황해문화&gt; 등에 글을 발표하고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4 오전 11:10:00《187》2010년 4월 18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393610"><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A0%80%ED%95%AD%EA%B3%BC%20%EB%B0%98%EC%97%AD%20%EA%B7%B8%EB%A6%AC%EA%B3%A0%20%EC%9E%AC%EC%A6%88.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4월 18일</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에릭 홉스봄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로 평가된다. 하므로 가벼운 역사 에세이로 분류될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영림카디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3</span>)를, 그가 쓴 여러 주저 가운데 위치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다. 이 책은 심혈을 기울여 역작을 쓸 때 부수적으로 생겨난 글감을 알뜰히 챙긴, 그런 종류의 책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요리보다, 어떨 때는 요리를 하고 난 뒤에 남은 여분의 재료로 만든 찌개가 더 맛있을 수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한국어 제목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여 쪽이 넘는 이 책이 마치 <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428572"><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righ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B0%B4%EB%94%94%ED%8A%B8.JPG" /></a>&lsquo;재즈는 저항과 반역의 음악이다&rsquo;라는 기치 아래, 온통 재즈를 말하는 책인 양 오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는 &lsquo;평범하지 않은 사람들<span style="font-family: Verdana">Uncommon People</span>'로, 역사의 변혁이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기계파괴자들&middot;제화공&middot;농민&middot;산적&middot;노동 운동가&middot;전위 예술가&middot;학생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평범하게 태어났으나 평범하게 살기를 거부했던 인물들의 초상을 그리는 것은, 유물론 역사가이면서 &lsquo;아래로부터의 역사&rsquo;, &lsquo;민중의 사회사&rsquo;를 추구했던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였다. 궁금하신 분들은 『원초적 반란』(온누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이나, 『밴디트 - 의적의 역사』(민음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를 보시라.</p> <p style="text-align: justify">본문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여 쪽이 넘지만 재즈와 연관된 것은 말미에 붙은 일곱 편의 글로, 도합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9</span>쪽에 지나지 않는다. 일곱 편의 글 가운데 네 편은 각기 시드니 베셰&middot;카운트 베이시&middot;듀크 엘링턴&middot;빌리 홀리데이에게 바쳐졌고, 나머지 세 편은 재즈에 대한 통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통사 격인 세 편의 글은 음악 평론가로서보다, 일급의 역사가가 어떻게 재즈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는지를 눈여겨보게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홉스봄은 재즈가 소수의 가난한 흑인들과 술에 절은 백인들이 즐긴 별 볼일 없는 음악이었다고 말한다. 지은이가 재즈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0</span>년대, 캔자스시티에서 빅 밴드(핫 재즈, 스윙 재즈)가 꼴을 갖출 무렵, 심하게 말해서 재즈는 아무도 &lsquo;듣는&rsquo;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춤을 추기 좋은 음악이었다. &ldquo;서민계급 출신의 밤의 생활자들이 만들어낸 재즈는 소박한 꿈을 갖고 살아가던 직업 연예인들의 음악&rdquo;으로, 당시의 재즈는 유사 &lsquo;실내악&rsquo;은 물론이고 &lsquo;예술&rsquo;은 더더욱 아니었다. 또 미국 출신 대중음악 비평가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지만, 미국에서 탄생한 재즈와 블루스가 &ldquo;최초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곳&rdquo;도 미국 밖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15"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D%99%89%EC%8A%A4%EB%B4%84.JPG" />미국 백인 사회가 천대한 재즈와 블루스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은 영국이었고, 유럽이 그 뒤를 따랐다. 여기서 지은이는 &ldquo;영국 재즈 청중의 대중적&middot;민중적 성향은 유럽 대륙의 재즈 청중이 안정된 중산층이나 대학에 진학할 정도의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확실히 다른 점&rdquo;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실과 함께 유럽에서는 블루스가 그렇게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도 기억해 놓자. 그러면 영국과 유럽에서 나란히 재즈가 인기를 끈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ldquo;미국의 음악&rdquo;이었기 때문이다. &ldquo;재즈는 그저 이국적이고 원시적이며, 비부르주아적인 음악이어서만이 아니라 현대적인 음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이며, 실제로 재즈 밴드들은 바로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나라에서 배출되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차 대전 직후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유럽의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재즈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항상 현대성을 꼽았다.&rdquo; 재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차 대전에서 유럽을 구원한 나라의 음악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유럽은 두 번에 걸쳐 재즈에 큰 공헌을 했다. 최초의 공헌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재즈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보고 재즈를 극진히 환대한 것이다. 반면 영국에서는 환대와는 다른 융합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영국에서는 재즈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재즈나 블루스와 다른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 때문에 홉스봄은 &ldquo;재즈 애호가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영국 록이 과연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rdquo;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로큰롤의 모태는 재즈보다 블루스이지만, &ldquo;흑인 블루스가 남부 및 몇몇 주와 북부 흑인 게토를 벗어나 일반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재즈 연주자와 재즈 팬들 덕분&rdquo;이었고, 영국이 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처럼 두터운 영국의 재즈 팬은, 훗날 &lsquo;영국의 침공<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itish Invasion</span>&rsquo;의 저력이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l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0</span>년대 미국 대중음악에서는 존속살인이 일어났다. 록이 재즈를 살해한 것이다&rdquo;고 말하면서, 유럽이 재즈에 공헌한 두 번째 사례를 든다. &ldquo;유럽의 재즈 청중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대 미국에서 록의 물결이 재즈를 거의 내몰았을 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연주자들 중 일부는 아예 유럽에 정착하면서 유럽에서 열리는 콘서트와 페스티벌 순회공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rdquo; &l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에는 다양한 이국 취향이 나타났다. 달리 말하면, 재즈는 이전보다 덜 미국적인 것이 되었고 훨씬 국제화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재즈에 있어서 미국의 재즈 대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2</span>년 이후로 프리 재즈가 재즈의 가장 중요한 스타일로 자리 잡게 된 사실 때문인데, 이 프리 재즈의 역사는 유럽에서 일궈낸 중요한 발전과 유럽 연주자들을 빼놓고는 논할 수 없다.&rdquo; 그러나 홉스봄은 꺼져가는 &lsquo;재즈의 불씨&rsquo;를 간직해 준 것에 대해서는 유럽에 감사해 하지만, 재즈를 예술로 격상시킨 끝에 대중과 완전히 격리시킨 프리 재즈를 좋아했을 것 같지는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2355911"><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AF%B8%EC%99%84%EC%9D%98%20%EC%8B%9C%EB%8C%80.JPG" /></a>&ldquo;필자는 열여섯 살 때, 런던 교외의 한 무도장에서 소위 &lsquo;모닝 댄스&rsquo;를 위해 연주하던 엘링턴 밴드의 너무나 당당한 모습에 완전히 마음이 빼앗겼다&rdquo;는 대목이 나오기는 하지만, 주로 재즈 서적에 관한 서평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지은이 자신의 재즈 체험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민음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에 더 자세하다. 그는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그때를 회상하면서, &ldquo;첫사랑을 느낄 만한 열여섯 아니면 열일곱 살 무렵에 나는 이렇게 음악의 계시를 받았다. 내 경우에는 재즈가 첫사랑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왔다. (&hellip;) 지적 유희와 말에 온통 점령당한 나의 삶에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절대적 감성을 심어준 것은 바로 재즈였다&rdquo;라고 고백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자서전과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는 &ldquo;재즈의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성격&rdquo;을 부각하면서, 재즈 초창기에 재즈를 응원하고 퍼뜨린 것은 정치적 좌파였음을 거듭 강조한다. 유물사관에 충실한 그는 영국과 프랑스의 재즈 수용사를 비교하면서, 영국에는 도시 노동계층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재즈가 노동계급의 댄스음악이 되었던 데 비해, 프랑스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인층의 예술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래 좌파와 재즈는 한 통속이었으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빼앗아간 록이 혁명마저 탈취해가고, 비밥과 함께 재즈가 대중적 활기를 잃게 되면서 좌파들은 재즈와 소원해지고 포크송에 열중하게 되었다는 진단도 흥미롭다. 같은 좌파이지만 재즈를 적대시했던 아도르노를 향해 홉스봄은 &ldquo;재즈에 대한 가장 지루한 글&rdquo;을 쓴 사람이라는 일침을 남겼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1-03 오전 11:31:00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1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D%B8%EB%AC%B8%ED%95%99%EC%9D%98%EB%AF%B8%EB%9E%98%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는 글_ &nbsp;</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지금, 인문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문학 교육이 곧 인류의 미래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문학<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humanities</span></sup></sub></span>은 표류하고 있다. 나는 그것이 어디로 떠내려갈지 예견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의 목적은 인문학의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영향을 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의 이런 슬픈 상황은 우리가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중요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확실히, 인문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전문가들은 흥미가 없다. 그리고 인문학을 가르치고 거기서 출판되는 대부분의 내용은 거의 배울 필요도 읽을 필요도 없는 것들이다. 많은 학생들이 대학을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고 많은 부모들이 대학을 돈 낭비라고 여기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하고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인문학을 평가할 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인류<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humanity</span></sup></sub></span>를 위해서 중요하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인문학 교사들과 학생들이 깨닫지 못하지만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은 깊은 어려움에 빠져있다. 고등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며 그 대안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논의된 바가 없다. 이 책의 목적은 인문학 교육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왜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다. 논의를 진행하다보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가 다름 아닌 인류의 미래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squo;인문학&rsquo;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인문학이 경종을 울릴만한 상황이라는 것은 정말로 사실인가? 우선 이런 질문들에 대략적으로 답을 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의 분야와 관련해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를 언급할 수 있다.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에 관한 연구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앞의 네 가지 분야는 대학에서 개별 학과가 담당하는 반면, 문학은 영어나 독일어 같이 각각의 언어군에 따라 다양한 학과들에서 연구한다. 인문학에 속하는 이 여섯 가지 분야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한때는 인문학이 가장 명망 있다고 여겨졌으나,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자연과학이 가장 높은 명성과 경제적인 후원을 누리고 있다. 사회과학은 비교할 만한 특별한 성과는 지적할 수 없지만 &lsquo;과학&rsquo;이라는 반사적 영예를 얻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많은 역사학자들이 자신을 인문학자보다는 사회학자로 보기를 바라며 이것은 다른 &lsquo;인문학&rsquo; 분과의 교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인문학이 처해있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 다른 문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경부터 일어난 것으로 훨씬 심각하다. 그 당시에 갑자기 인문학 박사학위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교직을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에는 주요한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40</span>년대에 가파르게 상승했던 (소위 베이비 붐<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Baby Boom</span></sup></sub></span>이라 불리던) 출산율 증가가 지속되지 않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부터 급증하던 대학의 성장이 갑작스럽게 멈춰 버렸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 이전에는 늘어나는 대학의 숫자와 더불어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훌륭한 대학원생이라면 학위를 마치지 않아도 높은 봉급의 교수직을 제의받았지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대부터는 그런 시절이 지나가면서 새로운 기회도 멈춰 버렸다. 둘째, 교수직과 종신 재임직을 포함한 많은 자리들이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span>년 동안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면서 퇴임으로 인한 공석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 이 두 가지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음에도 대학기관은 충격에 휩싸였고 대학원들은 변화된 상황에 극도로 느리게 대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표적인 예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1</span>년에는 &lsquo;교육발전을 위한 카네기재단<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Carnegie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Teaching</span></sup></sub></span>&rsquo;의 퇴임 회장이 『대학원 교육』이라는 책에서, 대학이 당면한 주된 문제가 앞으로 다가 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대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큼 충분한 수요의 박사학위자들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최근에 &ldquo;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대학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0</span>여 곳을 방문&rdquo;했다고 말하면서, 「증가하는 박사 부족 현상」이라는 장에서 과학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인 수많은 통계자료들을 쑤셔 넣어 놓았다. 그럼에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5</span>년에는 철학 분야에서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0</span>여 명의 박사학위자들이 교직을 구할 수 없었으며 이런 문제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6</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일자 &lt;뉴욕 타임스&gt;(<span style="font-family: Verdana">38</span>면)는 &ldquo;고용과 취업 전망에 대한 미연방 노동 통계청의 예측에 따르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2</span>년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5</span>년까지 (&hellip;) 예술과 인문학 분야의 박사학위자들의 전망은 (&hellip;) 음울하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600</span>명으로 예상되는 졸업생들에 비해 일자리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700</span>개 정도만 가능할 것&rdquo;이라고 전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0</span>퍼센트 이상의 학생들이 자신이 교육받은 분야에서 직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상황은 예술과 인문학 분야에서 특히 심각하다. 왜냐하면 이런 분야의 박사학위는 전통적으로 대학에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역할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가 있는 과학자들은 대체로 보다 더 유리한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 남아도는 박사들을 중고등학교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출산율의 저하는 중고등학교에도 공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런 개혁안은 박사학위가 없는 젊은이들의 취업 기회까지 막아버리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현재의 교육 과정대로 인문학을 가르치는 한, 과연 박사학위자들이 중고등교육의 수준을 정말 높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대부분의 박사들은 비전문가인 십대를 가르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에 따라 당연히 대부분의 인문학 대학원 프로그램들은 과감하게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등하지 않은 많은 대학원들은 한꺼번에 폐기될 위험에 처할 것이고, 많은 교수들은 이전과 다르게 학부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문학 교육도 다시 재고해야 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연과학과 사회과학도 인문학에 대한 이런 면밀한 검토를 통해서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게다가 교육의 문제는 초등교육 또는 그보다 앞선 가정교육과 문화적인 환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만일 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준비를 해서 대학에 들어간다면, 고등교육의 전망 또한 훨씬 밝아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중등학교와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인문학을 다루는 교재들이 엄청나게 늘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쓸모없는 피상적인 교육이 양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분야들 역시 엄청나게 방대하다. 나는 특히 음악에 관심이 있음에도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지금도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다. 사회과학에서 무엇이 불필요하고 무엇이 유익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가급적이면 사회과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것을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 역시 간략하게만 집고 넘어가기에는 정말 중요한 사안이다. 간결함의 미덕도 있기 때문에 나는 언어교육과 창조적인 예술교육은 논의에서 제외시켰다. 이 두 가지는 앞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주요한 분야와는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반면 여섯 가지 분야는 유사한 문제점이 있으며 이것들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 또한 대체로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여섯 가지 분야를 묶어서 &lsquo;인문학&rsquo;이라고 통칭하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플라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Plato, BC 428/427~BC 348/347</span></sup></sub></span>은 이미 오래전에 교육과 관련한 최초의 중요 저작에서 구체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나 역시 큰 틀의 문제에 관심이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사항들과 연결시켜 보려고 노력했고, 플라톤이 했던 것처럼 세부적인 강의 계획안도 제시해보았다. 강의 계획안과 관련해서는 한 학기를 대략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주로 잡았다. 많은 학교에서 한 학기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주보다 길게 구성되는데, 이는 좀 더 많은 것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논의가 추상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례를 제시하고 명칭을 부여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에서 나는 마음가짐을 네 가지로 구분하면서 이런 시도를 했다. 물론 어떤 인물을 특정한 유형으로 구분하지 않고 써내려가는 게 좀 더 편리할 것이다. 어떤 개인을 언급하게 되면 곧바로 반박에 부딪히고 적을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인물을 다뤄야만 유형의 분류가 생생함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물들에 친숙하지 않고, 그래서 낯선 이름들 때문에 종종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혹시 누군가가 이런 점 때문에 괴로움을 느낀다면 정말 유감스럽다. 이런 독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사례들 가운데서 관련 사례를 찾아본다면 이해가 명료해지리라 생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에서는 논의를 진척시키기보다 좀 더 많은 주제를 소개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주제는 각주를 달아 설명하기보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논의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은 하나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전체로 여길 필요가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간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고등교육과 관련한 수많은 문헌들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피했다. 그 대신 반대의견과 대안을 숙고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으며, 내가 주장한 것을 실천해보려고 노력했다. 이전의 저서들에서는 다른 학자들과의 입장 차이를 변호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이 책에서는 비교적 사소한 논쟁 때문에 길을 잃지 않고 한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일관된 관점을 구체화하는 데 집중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같은 이유에서 잘못된 사례들을 지나치게 많이 제시하는 것도 피했다. 이런 사례가 책을 좀 더 흥미롭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마 자신이 겪었던 실패나 실망을 떠올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그런 긴 목록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서로 맞물려있으며, 인문학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문학은 표류하고 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이나 학생들은 배의 방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인문학의 방향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것을 할 것인가?</p> <p style="text-align: justify">몇몇 교수들과 학생들은 게임을 즐기느라 바쁘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게임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게임의 아주 작은 움직임을 분석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아주 능통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당신들의 활동과 논문, 저서, 강의와 연구의 요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상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든가, 지식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는 상투적 주장은 우선순위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방기하게 만든다. 모든 지식이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미국의 낙선한 부통령의 비서의 아버지에 관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수년을 허비하라고 부추겨서도 안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편, 아직도 몇몇 대학의 총장들은 &lsquo;인문주의<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humanistic</span></sup></sub></span>&rsquo;와 &lsquo;인도주의<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humanitarian</span></sup></sub></span>&rsquo;가 마치 동의어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분야의 연구 중 대부분은 분명히 하찮은 것임에도 인문학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느끼는 풍조 또한 만연해 있다. 만약 인문학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신의 관으로 들어가는 열쇠만을 쥐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방향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시대에 위험한 일이다. 이 배가 새로운 여행을 생각하지 않고 오랫동안 정박해 온 것이라면, 방향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중이고 관점이 항상 변해왔다면, 방향에 관한 숙고를 거절하는 것은 재앙을 맞이하는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는 최소한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양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상, 인문학은 인류의 역사와 업적을 다룬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과거의 업적에 몰두해야 하는가? 역사의 대부분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우울하고 부질없는 이야기들, 맹목성과 잔악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이런 비참한 모든 것이 무가치하지는 않으며,&nbsp; 간혹 일어난 승리는 약간의 고통을 보상해준다.&nbsp; 이런 드문 승리의 값진 유산을 받았으면서도&nbsp; 그것을 후대에 전승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nbsp; 우리는 인류의 배신자가 될 수밖에 없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숭배에서 우러나온 경건한 행위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과거 지향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리스 비극이나 렘브란트<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Rembrandt, 1606~1669</span></sup></sub></span>, 또는 모차르트<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span></sup></sub></span>가 젊은이들을 인간답게 하는 데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저 듣기 좋은 헛소리일까? 어쨌든 결국, 나치를 탄생시킨 독일에서는 고전에 관한 연구가&nbsp;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33</span>년 이전부터 이미 한 세기도 넘게 꽃을 피워왔고,&nbsp; 렘브란트와 모차르트는 널리 존경을 받아왔으니 말이다.&nbsp; 비인간적인 유미주의자들은&nbsp; 비인간적인 인문학 교사만큼이나 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가르칠 것인가이다. 만약 교사가 비극 시인들과 렘브란트, 모차르트 등에 생기를 불어넣고 학생들에게 이들의 인간성과 타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접하게 해준다면, 인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기대도 그렇게 지나친 희망은 아닐 것이다. 이런 교육이 설교로, 이런 학문이 의식 고양으로 축소될 수 있을까? 독서의 기술과 번역을 논의하는 장에서 나는 현재 행해지는 대부분의 연구보다 내가 선호하는 이런 접근법이 훨씬 더 학구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또한 나는 위대한 작가나 예술가를 해석자의 관점을 옹호하기 위한 단순한 대변인으로 축소시키는 접근법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대부분의 설교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불손한 습관 때문이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에 생기가 생기는 것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다양성을 끌어안을 때다. 학생들은 대안적인 관점에도 노출되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둘째 이유는 인문학이 이 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 문학과 예술은 다소 어느 정도씩 삶의 목표, 실존의 이유와 인간의 궁극 목적을 다룬다. 이것들에 관한 올바른 해답이 이미 최종적으로 주어져있고 그것이 비판의 여지없이 분명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마 다른 대안을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대안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이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0</span>년 전에 랍비들에 의해 발전했다. 이들은 성서에 계시된 해답을 믿었지만 대항적인 해석도 고려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중세 학자들은 이들의 발자취를 뒤따랐다. 두 경우에서 모두 대안적인 사고는 당시에 문제가 되지 않는 일반 여론에 속한 것들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문제로 삼을 만한 것들이다. 대안에 대한 탐구는 아직도 충분히 멀리까지 나아가지 못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다른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일반 여론에 사로잡혀 다른 경쟁적인 대안과 비교하지도 못한 채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 연구는 정신이 자유롭고 자율적이도록, 다른 대안에도 눈을 열어 운명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획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의 인생 목적이 지닌 문제점과 대면하도록 하는 데 실패한다면,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목표와 목적에 대한 숙고를 폄하하고 더 전문화된 방식을 통해 안전성과 확실성만을 추구한다면, 정작 가장 중요한 관심사들은 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학생들은 다른 대안을 접해보지도 못한 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선택을 맹목적으로 결정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물론, 전문화의 이점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5장에서는 전문화 교육이 자율성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전문화가 얼마나 쉽게 우리를 근시안적이고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파악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날 인문학이 당면한 문제는 예수의 산상수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ermon on the Mount</span></sup></sub></span><span style="color: #666699"><sub><sup>(「마태오 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군중설교. 윤리적 행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이다―옮긴이)</sup></sub></span>에 등장하는 고전적인 정식을 빌려 표현할 수 있다. &ldquo;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면 어디에 있는 무엇으로 그것을 짜게 할 수 있겠느냐?<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If the salt have lost it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span></sup></sub></span>&rdquo;<span style="color: #666699"><sub><sup>(「마태복음」 5장 13절이다―옮긴이)</sup></sub></span> 대부분의 최근 판본들은 킹 제임스 판 성경<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King James Bible</span></sup></sub></span>의 맛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신 영역 성경<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New English Bible</span></sup></sub></span>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ldquo;어떻게 그것의 짠맛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는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How shall its saltness be restored?</span></sup></sub></span>&rdquo;만약 구어체의 느낌을 원했다면, 그리스어 원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좀 더 이치에 맞을 것이다. &ldquo;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그것을 짜게 할 수 있겠는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When the salt becomes insipid, how can one slat it?</span></sup></sub></span>&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맛을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예전에는 좋은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현재를 대가로 과거를 칭송하거나 마치 내가 젊었을 때에는 목적에 대한 숙고가 훨씬 많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예전에 소금이 너무 짰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미각을 잃어버렸거나 늙은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그리고 과거 세대들은 전혀 병들지 않고 건강했다고 믿는 사람들 또한 좀 더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셋째 이유는 비전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엄격한 의미에서, 비전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으며 모든 대학생들을 통찰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visionary</span></sup></sub></span>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야기로 들린다. 하지만 이 문제는 비전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에서 나는 엄격한 의미에서 통찰가와 대안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대비해보았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다양한 독서 방식을 다뤘다. 독서의 기술은 인문학 연구의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제들은 서평과 번역, 편집에 대해 논의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장에서 더 심화될 것이다.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는 다른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에 영향을 주는 독서가들이다. 책에 관심이 생길수록 서평가, 번역가, 편집자에게 더 많이 의존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장에서는 인문학의 한 분야인 종교에 관해 상세하게 다뤘다. 인문학 연구의 핵심이 인류의 위대한 작품들을 보존하고 대안적인 목적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들을 보다 덜 맹목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라면, 비교 종교학은 인문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서나 『법구경<span style="color: #666699"><sub><sup><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Dhammapada</span></em></sup></sub></span>』또는 『도덕경<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道德經,</span><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ao-Teh-Ching</span></em></sup></sub></span>』과 비교할 만한 문학 작품은 아주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대한 회화나 조각 작품, 건축물, 음악 중 많은 것들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탄생했으며, 종교를 떠나서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교 종교학을 가르쳐야 하는지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런 주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한 예로, 한때 상당히 유행했던 개론<span style="color: #666699"><sub><sup>槪論</sup></sub></span> 강의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rvey course</span></sup></sub></span>은 어떤 방식으로든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악평을 떠안고 말았다. 구체적인 실례를 다루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의 텍스트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으로 개론강의를 보완하려고 시도했다. 내가 이런 시도의 사례로 삼은 텍스트는 「창세기<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Genesis</span></sup></sub>」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다음 나는 비전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으며 전문화와 학제 간 연구가 이런 목적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논의해보았다. 마지막 장에서는 다양한 교수법과 강의안, 프로그램, 그리고 학제 간 연구의 중요한 역할에 대해 다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두 여섯 장으로 구분된 이 모든 것들은 단일한 하나의 &lsquo;비전&rsquo;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주요한 조각들이 어떻게 함께 맞물려야 하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비전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세분화해보았다. 예를 들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의 유형 분류는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독서의 다양한 방식들을 논의하기 위한 도입이며, 이것은 종교적인 텍스트와 관련해서 더 확장된 논의로 발전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전을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모든 주장들은 다소 허풍처럼 들리기도 하며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의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 책의 목적은 대안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런 것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표류하고 있으며 방향에 대한 논의가 절실한 시점에 서 있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주장을 했지만, 이것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지 않으며, 교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부정이 없는 긍정은 공허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내가 거부하는 것을 가능한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나의 주장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책은 모든 분별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하나로 일치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인용하는 방식의 글이 받는 비난보다 더 심한 분노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학자의 글들을 인용해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글은 비판 정신을 길러내는 방식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비판 정신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인문학을 가르쳐하는 넷째 이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들어가는 글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a target="_blank" href="http://en.wikipedia.org/wiki/Walter_Kaufmann_(philosopher)"><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41" height="35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B%94%ED%84%B0%EC%B9%B4%EC%9A%B0%ED%94%84%EB%A7%8C2.JPG" /></a>월터 카우프만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Walter A. Kaufmann, 1921-80<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1</span>년 독일의 유대계 가문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3</span>년간 철학을 가르쳤으며 종교철학, 역사철학, 미학 등을 넘나들며 다수의 철학서를 쓰고 번역했다. 또한 니체 전집을 편집하고 번역하면서 니체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51</span>년에 『니체-철학자, 심리학자, 반드리스도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span></em>』를 출간하면서 미국 내에서 니체를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 방식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그는 동시대 미국에서 함께 활동한 한나 아렌트를 &lsquo;저널리스트 유형의 지식인&rsquo;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철학자, 교수, 번역가, 서평가, 편집자, 시인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닌 카우프만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span>여 권의 철학사를 남겼다. 지은 책으로 『종교와 철학 비평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Critique of Religion and Philosophy</span></em>』『셰익스피어에서 실존주의까지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From Shakespeare to Existentialism</span></em>』『이단자의 신념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Faith of a Heretic</span></em>』『비극과 철학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ragedy and Philosophy</span></em>』『죄책감 없는 정의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Without Guilt and Justice</span></em>』 등이 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7</span>년에 첫 출간된 『인문학의 미래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Future fo the Humanities</span></em>』는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인문학의 가치를 잃고 무너져가던 미국 대학의 인문학 풍토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책이다. 카우프만이 쓰고, 번역하고, 편집한 책들은 날카로운 비평정신과 인문학의 미래를 걱정하고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인문학자들과 독자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이은정<br /> </strong>직업이 보장된 전공을 선택해 대학을 마쳤으나, 인문학에 매료되어 다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미학과 문학에 관심을 갖던 중 이방인을 주제로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다.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중핵교과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며, &lsquo;월요일 독서클럽&rsquo;의 회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아버지란 무엇인가』, 『황금 노트북』(공역), 『레닌 재장전』(공역) 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3 오전 10:01:00아난타스와미의 ‘물리학의 최전선’<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C%BC%EB%A6%AC%ED%95%99%EC%9D%98%EC%B5%9C%EC%A0%84%EC%84%A0%ED%91%9C%EC%A7%80.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프롤로그</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년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 성탄절이 지난 화창한 겨울날이었다. 나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천체 물리학자인 사울 펄뮤터<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aul Perlmutter</span></sup></sub></span>를 기다리며 섀턱과 시더의 모퉁이에 있는 카페 밖에 있었다. 교정은 버클리 시의 경계에 불쑥 솟아오른 나무가 우거진 언덕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로렌스 버클리 국립 도서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Lawrence Berkeley National Library</span></sup></sub></span>은 그 언덕에서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0</span>피트(<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5</span>미터) 위에 있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0</span>년대 놀라움 심지어는 불안하기까지 한 반향을 일으킨 실험 결과를 동시에, 하지만 독립적으로 발견한 두 그룹의 천문학자 여러 명이 캘리포니아 대학교 캠퍼스와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우리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는 발견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펄뮤터는 이 중 한 팀의 리더였다. 뒤로 벗겨진 머리 때문에 훤해진 이마와 두꺼운 안경에 강조된 열정적이고 동그랗게 뜬 눈은 우디 앨런(미국의 배우이자 희극 영화 감독―옮긴이)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사실, 펄뮤터는 그들의 발견이 우주론에 위기를 불러왔노라고 시인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초신성에 대한 두 팀의 연구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9</span>년 에드윈 허블<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Edwin Hubble</span></sup></sub></span>이 처음으로 발견한 우주의 팽창이 많은 사람들이 예측했던 것처럼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가속되고 있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마치 미지의 에너지가 중력에 대항해 척력<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repulsive force</span></sup></sub></span>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에너지의 정확한 성질을 확신하지 못하는 우주론자들은 이것을 암흑 에너지<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dark energy</span></sup></sub></span>라고 부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암흑 에너지가 우주의 총 에너지와 물질 중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분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을 차지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암흑 에너지는 우주론자들이 직면한 최근의 가장 어려운 퍼즐로, 수십 년간 이들을 괴롭혀 온 암흑 물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dark matter</span></sup></sub></span>이라는 또 다른 수수께끼에 추가된 난제였다. 은하 질량의 거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0</span>퍼센트는 보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암흑 물질의 중력이 만들어 내는 인력이 없었더라면 은하들은 이미 흩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암흑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펄뮤터는 물리학자들, 그중에서도 우주론자들이 고작 우주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퍼센트만을 설명할 수 있다는 냉혹한 사실을 지적했다. 물질세계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겨우 우주의 작은 일부만을 밝혀 왔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또 다른 수수께끼들이 있다. 질량의 기원은 무엇일까? 빅뱅 이후 물질과 함께 생성되었던 반물질<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ntimatter</span></sup></sub></span>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양자 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는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을 이용해 우리 세계를 설명하는 데 놀라운 성공을 거뒀던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세기 동안, 물리학자들은 겨우 작은 언덕에 올랐을 뿐이다. 펄뮤터가 말한 대로 물리학자들은 이제 정상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막연한 생각만으로 우주의 새로운 이해를 향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초인적인 노력 중 일부에는 양자 역학을 일반 상대성 이론과 조화시켜 양자 중력 이론<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ory of quantum gravity</span></sup></sub></span>을 만드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두 이론이 충돌하는 상황에서―블랙홀이나 빅뱅에서처럼 거대한 중력이 미세한 부피 안에 우겨 넣어지는 경우―이 이론들은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 사실, 이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이론을 하나로 모으려는 가장 야심 찬 시도 중 하나는 끈 이론<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ing theory</span></sup></sub></span>이라고 부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수학 체계다. 끈 이론의 열렬한 신봉자들은 끈 이론이 단지 양자 중력뿐 아니라 만물 이론에 이르러 단지 몇 개의 우아한 방정식만으로 우주의 모든 면을 기술할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한다. 하지만 암흑 에너지의 발견과 끈 이론의 최근 연구에 의해 이론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다. 펄뮤터를 만난 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년이 훌쩍 넘은 어느 겨울날, 나는 물리학에 있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얼마나 심각한 일들이 있어 왔는지를 직접 맛보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월 하순의 오후였다. 샌프란시스코 힐튼 호텔의 컨퍼런스 룸은 미국 과학 발전 협회<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span></sup></sub></span>의 연례 회의로 만원을 이뤘다. 세 명의 물리학자들이 암흑 에너지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들이 물을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질문 중 일부인 &ldquo;왜 우주는 현재와 같은 형태인가&rdquo;, &ldquo;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우주는 미세 조정이 돼야 하는가&rdquo;와 같은 질문과 &ldquo;암흑 에너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rdquo;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암흑 에너지는 단순히 신비로운 것만이 아니었다. 암흑 에너지는 별과 은하들의 생성에 적합한 값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ldquo;왜 암흑 에너지가 존재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암흑 에너지가 왜 그토록 작은가입니다.&rdquo; 스탠퍼드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 펠릭스 블로흐<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Felix Bloch </span></sup></sub></span>교수이자, 끈 이론의 공동 창안자인 레너드 서스킨드<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Leonard Susskind</span></sup></sub></span>는 힐튼 호텔에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시적인 표현으로 말을 이었다. &ldquo;우리가 존재의 칼날 위에 서 있다는 사실, 즉 암흑 에너지가 조금만 컸더라면 우리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 바로 미스터리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까지 끈 이론이 이를 설명할 것이라는 희망, 즉 왜 양성자의 질량이 전자의 질량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0</span>배 가까이 무거운지, 왜 중력은 전자기력보다 약한지, 보다 근본적으로 왜 자연의 기본 상수들은 현재의 값을 갖는지와 같은 다른 난해한 문제의 해답뿐 아니라 암흑 에너지의 값 역시 끈 이론 방정식의 해로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암흑 에너지에 대한 질문은 이런 의문들에 대한 상징적인 질문이다. 물리 법칙은 왜 우리 우주의 수많은 값이 지금의 값을 갖고 있는지 전혀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값들은 생명 유지가 가능한 우주를 생성할 수 있도록 놀랄 만큼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물리학자들을 끝없이 괴롭히는 사실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끈 이론이 원하던 대단원은 그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물리학자들의 경우, 점점 우주의 모든 것을 몇 개의 방정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다. 서스킨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발표 제목은 &ldquo;왜 쥐들은 배를 떠나고 있는가?&rdquo;였다. 하지만 환원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끈 이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완전히 그 반대다. 놀랄만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서스킨드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수학적인 영광 속에서 끈 이론을 포용하고 있다. 현재 끈 이론의 가장 특이한 내용 중 하나는 다중우주<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multiverse</span></sup></sub></span>의 존재다. 다중우주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우리 우주는 가능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sup>개(이보다 많지 않다면)의 우주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이한 시나리오 안에는 왜 암흑 에너지와 다른 기본 상수들이 현재의 값을 갖는가라는 난제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다. 다중우주에서는 암흑 에너지와 기본 상수들이 어떤 값이라도 가질 수 있다. 사실 물리 법칙조차도 우주마다 다를 수 있다(가장 근본적인 물리 법칙은 동일하지만 우리가 느끼게 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차원 물리 법칙은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옮긴이). 우리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미세 조정이나 수정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현재의 값을 갖는 우리 우주가 무작위로 나타날 수 있는, 작지만 유한한 확률이 존재한다. 우주를 지배하는 이 법칙들은 별과 은하, 행성, 그리고 &ldquo;왜 우주는 지금과 같은 모습인가?&rdquo;라고 묻는 물리학자를 포함하는 지적인 생명체를 생성한다.<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a target="_blank" href="http://www.edgeofphysics.com/chapters.html"><img alt="" width="550" height="439"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C%BC%EB%A6%AC%ED%95%99%EC%9D%98%EC%B5%9C%EC%A0%84%EC%84%A0%20%EC%9D%B4%EB%AF%B8%EC%A7%80.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것이 바로 인류 원리<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nthropic principle</span></sup></sub></span>라고 부르는 원리다. 간단히 설명하면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에, 즉 우리 우주가 현재와 달랐다면 우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우주는 현재의 상태라는 것이다.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 아이디어를 책임 회피라고 생각했다. 이 아이디어대로라면 물리학자들은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원리로부터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연사는 서스킨드의 스탠퍼드 동료이자 우주론자인 안드레이 린데<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ndrei Linde</span></sup></sub></span>였다. 그는 20여 년 전 시카고 외곽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span style="font-family: Verdana">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span>, 통칭 페르미 연구소 혹은 페르미 랩<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Fermilab</span></sup></sub></span>이라고도 한다―옮긴이)에서 물리학자들에게 인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겪었던 어려움을 회고했다. 린데는 인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계란 세례를 받을 거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페르미 연구소 사람들이 강연 중간에 세이프웨이(미국의 슈퍼마켓 체인 이름―옮긴이)에 가서 계란을 사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거라고 가정하고, 인류 원리와는 완전히 다른 주제로 강연을 시작했다가 중간에 인류 원리로 주제를 바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끈 이론이 다중우주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인류 원리는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끈 이론 자체는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것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끈 이론의 효과를 고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에 있던 로런스 크라우스<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Lawrence Krauss</span></sup></sub></span>가 그날 오후 세 번째 연사로 나서 반대 의견을 정리했다. &ldquo;나는 여러분이 다중우주가 과학이 되는 이론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론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우주에서 관측하는 많은 것들을 예측하는 진짜 이론은 우리가 실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예측할 뿐 아니라 우리가 실험할 수 없는 많은 것들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우리 대부분이 우리가 실험할 수 없는 것─다중우주의 존재와 같은 것─을 믿는다고 이야기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서스킨드는 이때 크라우스를 뚫어질 듯이 바라봤다. 하지만 세션 말미 서스킨드의 침울한 말투는 그의 비판을 반박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했다. &ldquo;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현재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끈 이론입니다. 끈 이론으로 관측 가능한 과학을 만들 수 있을까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세 연사는 한 가지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ldquo;오직 실험만이 이 막다른 골목을 뚫고 나갈 것이다&rdquo;라는 사실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리학의 위대한 발전은 이론이 실험과 보조를 맞췄을 때 이뤄졌다. 때로 이론이 먼저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87</span>년 빛의 속도는 관측자의 운동과 무관하다는 앨버트 마이컬슨<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Albert Michelson</span></sup></sub></span>과 에드워드 몰리<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Edward Morley</span></sup></sub></span>의 실험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05</span>년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의 수식에 영향을 미쳤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만들었지만, 이 이론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19</span>년의 실험에 의해 일반 상대성 이론의 흥미로운 결과―태양의 중력에 의한 빛의 휘어짐―가 입증된 뒤에야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실험 물리학자들과 이론 물리학자들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00</span>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양자 역학을 만들어 가면서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론과 실험이 공동 연구를 펼쳤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60</span>년대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년대는 두 분야 모두에 풍요로운 때였다. 이때 입자 물리학자들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과 힘을 이론화했고, 실험 물리학자들은 놀라운 정밀도로 이론상의 예측을 검증했다. 하지만 활기찼던 이 상호 작용은 현재 고착 상태에 머물러 있다. 현재로서는 실패로 끝난 힉스 보손(<span style="font-family: Verdana">Higgs boson</span>, 기본 입자들에게 질량을 준다고 생각되는 입자)의 실험과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의 발견으로 이론 물리학자들은 현재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된 상태다. 아이디어는 넘쳐나고 어림짐작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우주론과 입자 물리학의 다음 세대 실험이 이론을 현실에 정박시킬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그 답을 얻기 위한 도전이다. 이 모험은 나를 삶의 터전이었던 런던에서 지구의 먼 곳으로 데려다 주었다. 나는 이론의 늪에 빠진 물리학을 건져 줄 것 같은 최신의 실험을 찾아 불모의 사막에서 폐광의 깊은 굴속으로, 산 정상에서 세계의 바닥까지 여행했다. 내가 만났던 많은 실험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는 쌍둥이 미스터리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미스터리 외에도 반물질, 힉스 보손, 뉴트리노(<span style="font-family: Verdana">neutrino</span>, 중성미자라고도 한다─옮긴이)를 찾고 있는 망원경과 검출기를 보기 위한 여행도 추가되었다. 이들 입자는 우주 곳곳에 스며들어 있지만 검출되지 않는 아원자 입자<span style="color: #666699"><sub><sup><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batomic particle</span></sup></sub></span>들이다. 뉴트리노는 입자와 상호 작용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우주를 통과한다. 그리고 다른 입자들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먼 곳에 있는 우주에 대한 정보를 운반한다. 이 모든 실험은 펄뮤터가 이야기한 은유적인 계단을 만들어 가고 있다. 나의 여행 역시 하나의 은유다.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지식의 최종 한계점, 즉 물리학의 최전선에까지 뻗어 있는 과학자들의 여행에 대한 은유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이야기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윌슨 산에 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인치(<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span>미터) 망원경을 향한 순례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 허블은 우리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그 결과 빅뱅 이론과 현대 우주론에 대한 실험적인 토대가 마련되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인치 망원경은 당대에 망원경 제작에 대한 기술적인 지평을 넓혀 주었지만, 현재 밤하늘을 주사<span style="color: #666699"><sub><sup>走査</sup></sub></span>하고 있는 현대의 망원경은 이미 오래전에 이 망원경의 성능을 앞질렀다. 매일 밤 윌슨 산 천문대는 거대한 돔을 열고 우주의 절반 이상을 살펴보며 빛을 모은다. 때로는 한 번에 광자<span style="font-family: Verdana">photon </span>하나를 관측하기도 한다. 이 빛을 분석하는 장비 역시 강력한데, 무게<span style="font-family: Verdana"> 8.6</span>톤의 분광기는 천문학자들이 믿을 수 없는 정확도로 우주를 한 겹 한 겹 연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반면, 아이스하키 퍽 크기만 한 조그만 실리콘-게르마늄 검출기는 예술 작품 다루듯 다뤄야 할 정도로 굉장히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이 검출기들은 하루하루, 한 주 한 주 끈기 있게 암흑 물질에 대한 미세한 단서를 기다리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실험들은 원시 반물질을 탐사하고, 우주 배경 복사(빅뱅에서 남겨진 복사 에너지) 연구를 위한 실험을 위해 성층권에 떠 있는 거대한 기구에 비하면 왜소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실험 물리학은 세계에서 가장 큰 입자 충돌기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LHC</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Large Hadron Collider</span>, 대형 강입자 충돌기)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LHC</span>에서는 무게가 수천 톤에 이르는 기계들이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정확도로 아원자 입자들의 궤적을 모니터하고 있다. 이 입자들은 각각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00</span>톤의 기차가 시속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0</span>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를 갖고 이동하는 양성자 빔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다. 먼 우주보다 낮은 온도의 초전도 자석은 이 빔들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7</span>킬로미터 길이의 지하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양성자 충돌이라는 가마솥 속에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입자들 중에는 힉스 보손에서부터 여분 차원에 대한 최초의 단서가 되는 암흑 물질에까지 이르는 입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거대한 망원경과 검출기들은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만 작동할 수 있다. 이런 비현실적인 환경은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 속에서 드물게 그 진가가 알려지거나 종종 간과된 채 찬양받지 못할 것이다. 한 자락의 풀잎도 자라지 않는 칠레 안데스 산맥 고지의 아타카마 사막 상공의 차고 마른 공기는 수십 억 년을 이동해 온 별빛이 마지막 단계에서 수증기 같은 일상적인 요소들에 의해 훼손되지 않고 망원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준다(물론 허블 우주 망원경처럼 우주에 세워진 장비들은 빛에 미치는 대기의 유해한 효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수정처럼 맑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는 최첨단 수중 뉴트리노 망원경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러시아 물리학자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참아가며 얼어붙은 호수 위에 캠프를 차리고 수중 장비로 실험을 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구 표면 아래로 내려가는 데에는 이와 유사한 장점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미네소타의 버려진 철광 깊은 곳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00</span>미터 두께의 바위로 무질서한 우주선<span style="font-family: Verdana">cosmic ray</span>으로부터 검출기를 차폐시킨 채 암흑 물질을 쫓고 있다. 드릴과 대형 망치로만 이 광산을 파느라 땀에 흠뻑 젖었던 광부들은 오늘날 그들이 팠던 광산에서 우리 우주의 성질을 해독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남아프리카 내륙의 거대하고 건조한 땅―인적이 끊긴 이 광대한 황무지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장비들보다 빠르게 우주를 크게 훑을 수 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00</span>개의 안테나를 갖춘 세계에서 가장 큰 라디오 망원경의 후보지로 제시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극한의 목적지를 따져 본다면, 평균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가장 건조하며, 가장 고도가 높은 대륙으론 남극 대륙에 비견될 만한 곳이 없다. 이곳은 날카로운 들숨이 폐를 화끈거리게 할 정도로 추운 땅이다. 습기를 머금은 날숨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한순간의 방심으로 눈 덮인 크레바스의 치명적인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주론자들은 얇고 건조하며, 안정적이고 오염되지 않은 대기 때문에 남극 대륙의 고원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지구상의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할 수 없는 정도의 정확도로 우주 배경 복사를 탐사하기 위해 거대한 망원경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남극 대륙의 대기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또 수 킬로미터 두께에 달하는 남극점의 얼음을 뉴트리노 검출기로 바꾸고 있다. 우주에서 가장 발견하기 힘든 입자를 연구하는 데 쓰일 수 있을 만큼, 이처럼 거대하고 투명하며 단단한 물질은 다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얼어붙은 황무지는 우리를 양자 중력의 정확한 이론으로 인도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오늘날 실험 우주론의 핵심인 외딴 곳들에 대한 찬가이다. 칠레의 어두운 밤하늘에 흩어져 있는 은하수든 히말라야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000</span>미터 봉우리들로 세계와 격리되어 있는 티베트 고원의 외딴 구석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계곡이든, 이들은 놀라운 솜씨로 우리를 감탄케 한다. 여러 가지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장소들은 심오한 미니멀리즘을 공유한다. 이곳에는 외부의 간섭도 잡음도 현대 사회의 방해도 없다. 남극 대륙에서 만났던 한 빙하학자는 너무나 극심해서 무시하는 것이 불가능한 눈보라만 마주칠 뿐인 그곳에서, 그가 느꼈던 &ldquo;절대적인 고요&rdquo;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한다면 이런 장소가 우주론에 필요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롤로그 전문)<br /> &nbsp;</p> <div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TED 강연 |&nbsp;<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극단의 천체물리학을 위해 필요한 것</strong></span> | 아닐 아난타스와미</span><br /> <br /> <object height="374" width="526"> <param value="http://video.ted.com/assets/player/swf/EmbedPlayer.swf" name="movie" /> <param value="true" name="allowFullScreen" /> <param value="always" name="allowScriptAccess" /> <param value="transparent" name="wmode" /> <param value="#ffffff" name="bgColor" /> <p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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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ashvars="vu=http://video.ted.com/talk/stream/2010P/Blank/AnilAnanthaswamy_2010P-320k.mp4&amp;su=http://images.ted.com/images/ted/tedindex/embed-posters/AnilAnanthaswamy-2010P.embed_thumbnail.jpg&amp;vw=512&amp;vh=288&amp;ap=0&amp;ti=1129&amp;lang=kor&amp;introDuration=15330&amp;adDuration=4000&amp;postAdDuration=830&amp;adKeys=talk=anil_ananthaswamy;year=2010;theme=peering_into_space;theme=to_boldly_go;event=INK+Conference;tag=Science;tag=Technology;tag=exploration;tag=journalism;tag=universe;&amp;preAdTag=tconf.ted/embed;tile=1;sz=512x288;" wmode="transparen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pluginspac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src="http://video.ted.com/assets/player/swf/EmbedPlayer.swf" bgcolor="#ffffff" allowfullscreen="true" allowscriptaccess="always"></embed></object></div>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아닐 아난타스와미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Anil Ananthaswamy<br /> </strong></span>&ldquo;이 책을 구상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나는 인도의 산맥을 배경으로 하는 물리학과 우주론에 관한 소설을 쓰다가 글이 풀리지 않아 산꼭대기에 있는 천문대로의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다 우연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1</span>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사울 펄뮤터를 만나 우주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꼭대기만이 아니라 광산 깊숙한 곳과 사막 등 극한의 환경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곳에서 물리학, 특히 우주의 기원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글로 쓴다면 어떨까. 그날부터 내 관심은 소설에서 여행기로 바뀌었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년의 시간에 걸쳐 마침내 이 책이 탄생하게 되었다. 누구나 우주를 떠올리면 그 광활함에 압도되어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주를 하나하나 알아가며 일상 속에 갇힌 시야를 넓혀간다면, 우리는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닿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감히 이 책이 인류의 여정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rdquo; 인도 최고 권위의 대학인 인도 공과대학과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전자 공학과 전기&middot;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그 후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으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UC </span>산타크루즈에서 과학 저널리스트 과정을 밟았다. &lt;뉴사이언티스트&gt;의 편집자, &lt;내셔널 지오그래픽 뉴스&gt;의 칼럼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a target="new" href="http://www.edgeofphysics.com"><span style="font-family: Verdana">www.edgeofphysics.com</span></a><span style="font-family: Verdana"><br /> </span><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김연중 <br /> </strong>&ldquo;이 책을 번역하기 전까지 물리학은 숫자에 불과했다. 학생 시절 노트 위에 쉽게 써내려 갔던 그 숫자들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달까.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면서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일상 뒤에 감춰진 물리학의 세계를 탐험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물리학 전공으로 인해 멀어졌던 대중 과학에 대한 관심이 두 번째 번역으로 고취되었으며, 다음에는 내 책을 써야지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rdquo; <span style="font-family: Verdana">KAIST </span>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middot;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초끈 이론을 전공했으며, 현재는 영상 처리 알고리즘과 행복한 가정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번역서로는 『숨겨진 우주』가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1-02 오전 11:29:00구효서의 ‘동주’<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8F%99%EC%A3%BC%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더듬는 말</span></strong></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냄새가 먼저였다. 갈대 바구니. 그걸 열었을 때 확 끼친 것.</p> <p style="text-align: justify">잠시 숨을 멈추었다. 매캐한 안개 같던 냄새가 옅어졌다. 시야가 걷히고 종이뭉치가 보였다. 백상지白上紙. 오래되어 고지藁紙처럼 누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색깔과 탄력을 모조리 잃은 종이뭉치는, 한 덩이 나무토막이었다. 그것을 담고 있던, 오래된 바구니 빛깔과 다르지 않았다. 한 장의 종이를 따로 들어 올리는 것마저 어려웠다. 다른 종이가 붙어 따라 올라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장의 글자들은 희미하고 어지러웠다. 연필로 쓴 글씨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첫 장에 적힌 글은 이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바탕'"><br /> 제기랄. 웃겨. 웃기지 맘. 모모와레逃割れ. 모모와레. 모모와레를 안다. 모모와레를 한다. 하고 싶다. 사람들 웃어. 웃습니다. 싫어. 한자 안 돼. 그린다. 그립니다. 열심히 그림이다. 그래도 모모와레는 합니다. 하고 싶다. 나는 열다섯 살입니다. 텐도 요코. 내 이름. 열다섯 살 모모와 레가 좋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바탕'">사토 상은 마루마게丸髮를 좋아한다. 열세 살 마루마게를 좋아한다. 열세 살 때 그래놓고, 그따위 해놓고, 제기랄, 나를 매우 벗깁니다. 내 젖을 만지고 문다. 작은 젖은 아프다. 사토 상 고추. 그 가지 고추. 크고 꺼멓고 길어. 털. 부엌칼로 싹뚝 잘라서, 싹뚝 싹뚝 그걸 잘라서 싹뚝 싹뚝 죽인다. 사토 상 죽이고 싶다. 열세 살. 나는 만날 아프고 만날 숨이 찬다. 숨이 찼다. 막 찼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바탕'">여기는 타케다武田 아파트アパ―ト. 가타카나가 쉬워. 아파트 가케안돈 懸行燈은 빨갛습니다. 나는 숨고 사토 상 이제 없다. 죽어버려, 사토 상. 가케안돈. 저녁 복도에 사람들 다닌다. 타케다 아파트. 한자 어렵고 가타카나 쉽다. 일본 사람 중국 사람 조선 사람. 아파트에는 백 명도 산다. 지겹다. 싫어, 다. 지금은 일흔일곱 명. 타케다 아파트. 긴 마루 복도. 다야마는 발소리가 크다. 교토제국대학 미친놈. 마루야마 목소리 크다. 구마모토 촌놈. 맨 뒤엔 소리 없다. 그 사람 히라누마. 맨 뒤, 말 없는 사람. 히라누마 성 괜찮은데 이름 짜증 나. 히라누마가 낫지. 낫다. 조선인이다. 그 사람 히라누마. 부르기 힘든 이름. 돈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두번째 종이는 잉크 글씨였다. 선명하고 가지런했다. 내용은 이랬다.</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br /> 글을 늦게 배웠다. 말하는 것처럼 쓰지 못했다. 열다섯 살이었다. 열다섯에 처음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배우고, 조금씩 한자를 익혔다. 말은 그럭저럭 했으나 글은 말처럼 되지 않았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읽고 있으면 바보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저녁에 다다미에 엎드려 종이를 펴고, 연필에 침을 발라 썼다. 저녁 내 써도 종이 한 장 채우기 힘들었다. 오래 엎드려 있으면 허리가 아팠다. 종종 종이에 구멍이 났다. 쓰는 게 아니라 그리는 거였다. 히라가나든 가타카나든 한자든. 말이 글자가 된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 바보 같아도 상관없었다. 열다섯 살이었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그때까지 누구도 나에게 글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글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글을 못 쓰게 윽박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글을 배우지 않았고 그래서 쓰지 못했을 뿐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글자를 알려 하지 않고, 서둘러 피했다. 모르는 건 막막하고 무서웠다. 나는 글자를 모른다&hellip;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글자들이 나를 무시하는 듯해서 내가 먼저 눈을 돌려 글자들을 무시했다. 여기저기서 글자들은 나를 노려봤다. 반사적으로 외면했다. 그때까지 글을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환갑이 넘도록 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의 사정을 나는 잘 안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외면했기 때문이란 것을. 게을러서가 아니라 무서웠기 때문이란 것을.</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나는 훨씬 더 늦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또 하나의 말과 글을 배웠다. 태어나 절로 익힌 입말과 열다섯에 깨친 글말과도 전혀 다른 말과 글. 지금 나는 그 말을 하고 그 글을 쓴다. 새로운 이름도 생겼다. 이타츠 푸리 카. 언어의 비단이란 뜻이다. 과분하다. 마쓰이 쓰네유키松井恒幸 선생님이 지어주셨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글은 계속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쯤에서 먼저 말해두어야겠다. 우선 나에 대해.</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나는 이 글을 한글로 쓴다. 나는 한글을 몰랐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했다. 나는 일본인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6</span>년, 열세 살 때 알았다. 이삼 초쯤 멍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아무렇지도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다. 두 번 눈을 끔뻑거렸을 뿐이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 때와 들었을 때, 그사이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삼 초쯤 멍했고, 눈을 두 번 끔뻑거린 뒤에도, 세상은 그대로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뒤로도 십 년 동안, 나는 이전의 십삼 년처럼 살았다. 넌 조선 사람이야. 낫도를 밥에 비비던 어머니가 그 말을 한 뒤에도 여전히 낫도를 비볐던 것처럼.</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는 데 특별히 불편한 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편한 거라곤 시도 때도 없이 비어져 나오는, 왼손 엄지손톱 가장자리의 거스러미뿐이다. 거스러미. 국적과도 언어와도 상관없는 것. 그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한국어 공부는 스물셋에 시작됐다. 지금은 스물일곱. 사 년 동안 열심히 배웠다. 배워서 쓸 줄 알게 되었다. 히토쓰바시 대학 이연숙 교수의 책을 읽으며 힘을 냈다. 일본에 뒤늦게 왔지만 일본어를 아주 빠르게 익혀 일본 사람보다 더 잘 말하고 쓰는 한국인 학자.</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년 반 동안 한국에 유학했다. 연세대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민속학을 수학했다. 나에게 한국어 욕을 제대로 가르쳐준 동갑내기 태용이 놈, 떡볶이 도사 슬기, 스타크래프트의 제왕 현석이, 소주를 다섯 병이나 처먹는 진석이. 모두 그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이 글을 쓰게 한 것이 위에 인용한 종이뭉치다. 부장품 냄새를 풍기는, 갈대 바구니 속 오래된 종이뭉치.</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글로 써야겠군.&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걸 입수한 사정을 내비치자 일본인 친구 히토시가 말했다. 내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튀어나온 반응치고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은밀했다. 친구의 서늘한 음성이, 정말 글로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순간적으로 먹게 했다. 신주쿠 어느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책 내줄 거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친구에게 물었다. 출판사 교정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노력해볼게. 에이전시를 아니까.&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에이전시라니. 한국에서 출간하라는 얘기였다. 그냥 해본 소리란 걸 그제야 알았다. 언제 한번 보자. 그런 것과 비슷한 말.</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주일 뒤 에이전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계약 의사를 밝혀왔다는 한국 출판사 이름을 알려줬다. 내게서 들은 얘기를 히토시가 시놉시스로 작성해 한국으로 발송했다는 말과 함께. 지나칠 만큼 꼼꼼하고 세세한 시놉시스였다고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고민에 빠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① 일본어로 쓴다. 한국의 누군가가 번역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② 일본어로 쓰는 것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도 전부 내가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③ 직접 한국어로 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라면 기역 자도 읽고 쓰지 못했다. 그러면서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③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일본어는 문제없었다. 당연히 말하고 썼다. 글 쓰는 일도 남에게 특별히 뒤지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다만 내 글이 번역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를 배워 직접 쓴다면 &lsquo;바보&rsquo; 같을 게 분명했다. 일본어로 쓰고 그걸 내가 번역하면 어떨까. 바보 같지는 않겠지. 오래 망설였다. 그리고 결정했다. ③.</p> <p style="text-align: justify">번역할 수 있다면 어찌하여 직접 못 쓸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보스러움을 개의치 않는다면. 더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자고 다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로 쓴다는 건 모든 걸 애당초 한국식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내가 쓰고 내가 번역하는 일일지라도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은 이유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게 나의 계약 조건이었고, 못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게 한국 출판사의 응답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 년이 걸렸다. &nbsp;나는 지금 한글로 이 글을 쓴다.&nbsp; 벅차다. &nbsp;&lsquo;확 끼친&rsquo; 같은 말을 쓰는 내가 신기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어 사전에 나오지 않는 &lsquo;고지藁紙&rsquo;라는 단어를 부득이하게 쓰기도 하지만 &lsquo;가지런했다&rsquo; &lsquo;끔뻑거리다&rsquo; &lsquo;거스러미&rsquo; &lsquo;처먹는&rsquo; 따위의 말을 쓸 때면 나도 모르게 전율한다. 이런 말까지 쓸 줄 알다니!</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여기에 적는 글은 히토시에게 했던 이야기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맥주 세 잔 마실 동안의 짧은 얘기를 부풀리고 있을 뿐이다. 부풀리는 게 아니라면, 히토시에게 술집에서 했던 말이 외려 지나치게 축약되었던 건지도.</p> <p style="text-align: justify">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랬기에 히토시가 그토록 시놉시스를 훌륭하게 쓸 수 있었던 것 아닐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 나는 부풀릴 것도 줄일 것도 없이, 쓰고 있을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도입부에 인용한 글에 대해서도 말해둘 게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엣것은 희미하고 어지러운 연필 글씨, 뒤엣것은 선명하고 가지런한 펜글씨라는 점은 이미 얘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덧붙이자면, 그 두 글은 한 사람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앞엣것은 그녀가 열다섯에 막 글을 배우면서 쓰기 시작한 것이고, 뒤엣것은 중년에 이르러 쓴 글이다. 필기도구와 필체는 물론 종이도 다르다. 텐도 요코, 이타츠 푸리 카. 이름마저 다르지만 둘은 분명 한 사람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연필 글씨와 펜글씨가 번갈아 나온다. 연필 글씨가 본문이고 펜글씨가 각주라면, 각주가 훨씬 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주해본 같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글을 나란히 놓고 보자면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두 글 모두 번역된 데다 한국어 활자로 실리기 때문에 여기에선 구별이 안 된다. 번역은 그런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연필 글씨는 미숙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그리고 획수가 정확치 않은 한자가 드문드문 섞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펜글씨는 전혀 그렇지 않다. 모두 로마자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Tanpe anakne seta ne</span>. 이런 식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가 &lsquo;마흔이 넘은 나이에&rsquo; 새로 배운 언어다. 열다섯의 어린 텐도 요코가 쓴 글은 일본어였기 때문에 내가 번역했다. 중년의 이타츠 푸리 카가 쓴 글은 그럴 수 없었다. 로마자로 쓰인 그녀의 글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몇 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독한 고립어. 아이누어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이누어 연구가가 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내가 한글로 중역重譯할 수밖에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내 글이 한국어로 번역되는 걸&nbsp;원치 않았다.&nbsp; 내가 번역하는 것도&nbsp; 싫었다.&nbsp; 직접&nbsp; 쓰고자&nbsp;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랬으면서, 그녀의 글은 번역했고 번역을 의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의 글들을 번역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이랬다. 번역을 해도 원문은 남는다는 것. 이미 홋카이도 니부타니二風谷 아이누 문화자료관에서 그녀의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 원문이 있어서 오역과 의역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언제든 대조가 가능하니까.</p> <p style="text-align: justify">원문 없는 번역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원문이 소실되고 번역만 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적어도 그녀의 글들은 그리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 이 점이 번역 결정의 부담을 덜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글을 일본어로 쓰고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그리고 원본이 남게 된다면, 남는 원본은 일본어일 수밖에 없다. 내 원본이 일본어로 남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한국어 원본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은 중요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타츠 푸리 카는 마흔이 넘어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 &lsquo;언어의 비단&rsquo;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왜 그녀는 그래야만 했을까. 홋카이도 주민들도 다 일본어를 쓰고, 아이누어는 일상어가 아니며, 보존이 시급한 유물이나 유적 같은 것인데.</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보다 훨씬 이르게 나는 새 언어를 시작했다. 한국어 또한 고립어로 분류되나 엄연히 살아 있는 국가 공용어며 실용어며 일상어다. 캄보디아에서는 한국어 능력시험에 합격하는 것을 로또 당첨에 비유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중요성. 그녀보다 내가 덜 절박하다 하여 그 언어의 중요성이 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사용인구의 많고 적음을 떠나 언어라는 것이 갖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게 무언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어 나는 다소 긴 글을 쓰고자 했는지 모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리고 또 말해야겠다. 다는 아니지만 매우 많은 분량의 글을 그녀는 &lsquo;동주&rsquo;에게 할애하고 있다는 점.</p> <p style="text-align: justify">윤동주尹東柱. 한국 사람 중 이 시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일본인 중에도 윤동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윤동주가 그런 윤동주이기 전에 그녀는 이미 &lsquo;동주&rsquo;를 알고 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녀는 시종 &lsquo;동주&rsquo;라고 썼다. 처음엔 성과 이름 모두 히라가나로 썼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히라누마ひらぬま 돈주どんじう.</p> <p style="text-align: justify">히라누마는 윤동주의 창씨創氏인 &lsquo;평소平沼&rsquo;의 일본식 훈독訓讀이다. 이름을 일본식 음독音讀인 토-쮸-とうちゅう라 하지 않고 한국식 발음에 가까운 &lsquo;돈주&rsquo;라 한 것만 봐도 그녀가 시인의 이름과 표기에 얼마나 민감했는지 알 수 있다. 웬만큼 귀담아듣지 않고는 どんじう라 표기하기 어렵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자가 익숙해지면서 나중에는 東柱로만 썼다. 펜글씨에는 모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Toncu</span>다.</p> <p style="text-align: justify">どんじう든 東柱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Toncu</span>든, 그녀가 알았거나 쓰거나 발음했던 동주는 지금 내가 발음하는 동주와는 달랐을 것이다. 나는 지금 완벽히, &lsquo;동주&rsquo;를 발음하고 쓴다. 동주. 동주.</p>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작가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71" height="40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A%B5%AC%ED%9A%A8%EC%84%9C.JPG" />구효서<br /> </strong>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마디」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4</span>년 한국일보문학상, 「소금가마니」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이효석문학상, 「명두」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6</span>년 황순원문학상, 「시계가 걸렸던 자리」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한무숙문학상, 「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으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허균문학작가상, 『나가사키 파파』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창작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깡통따개가 없는 마을』『도라지꽃 누님』『시계가 걸렸던 자리』『저녁이 아름다운 집』, 장편소설 『전장의 겨울』『슬픈 바다』『늪을 건너는 법』『낯선 여름』『라디오 라디오』『남자의 서쪽』『내 목련 한 그루』『악당 임꺽정』『몌별』『노을』『비밀의 문』『나가사키 파파』,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인생은 깊어간다』, 동화 『부항소녀』 등이 있다.<br /> &nbsp;<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0-31 오후 1:49:00《186》2010년 4월 17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492544"><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D%95%9C%EA%B5%AD%EA%B5%90%ED%9A%8C%EB%8A%94%20%EC%98%88%EC%88%98%EB%A5%BC%20%EB%B0%B0%EB%B0%98%ED%96%88%EB%8B%A4.JPG" /></a>&nbsp;&nbsp;&nbsp;&nbsp; <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2644924"><img alt="" width="142" height="210"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8B%B9%EC%8B%A0%EB%93%A4%EC%9D%98%20%EC%98%88%EC%88%98.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4월 17일</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류상태의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삼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 『당신들의 예수』(삼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를 읽다.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6</span>일, 대광고등학교 교목이었던 류상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span>년 동안 재직했던 대광고등학교 종교 교사를 그만두는 것과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목사 자격도 반납했다. 교목 말고는 아무런 일도 해보지 않은 마흔여덟 살 난 가장으로 하여금 학교를 자진 사직하고,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노점상이 되게 한 이유는 대체 뭘까?</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6" height="323"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A5%98%EC%83%81%ED%83%9C.JPG" />개신 기독교계 학교인 대광고등학교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인 종교교육(예배)을 강요했다. 이 책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문제에 관한 교육부의 방침은, 종교과목을 복수 개설하고, 예배도 원하는 학생만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신정일치 국가가 아닌데다가 다종교 사회이고, 더욱이 현재의 고등학교 입학 방식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배정을 받는 방식이므로 교육부의 방침은 일반인의 상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많은 개신교계 학교 재단은 &ldquo;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rdquo;이라는 성서의 구절을 근거로, 예배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교육의 근간으로 본다. 기독교계 학교의 운영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ldquo;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그렇지, 언젠가 예수 믿고 깨닫게 되면, 우리에게 감사할 거야. 국어, 영어 잘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취직해서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않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 갈 인생이니까 아이들이 아무리 싫어하고 거부해도 강제로라도 예배에 참석시키고 종교교육을 열심히 시켜서 한 명이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해야 한다. 한마디로 하느님이 없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굉장히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개신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런 강제적인 종교교육을 버젓이 일삼아왔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게 &lsquo;강의석 사건&rsquo;이다.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교내 방송을 통해 &ldquo;학생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특정 종교 예식으로서의 예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rdquo;고 선언하고, 학교 홈페이지에는 &ldquo;저는 기독교를 믿지 않습니다&rdquo;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 일이 있고 이틀 뒤, 학교는 선도위원회를 열어 강의석에게 &lsquo;전학 권유&rsquo; 결정을 내리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span style="font-family: Verdana"> 1</span>주일 후 제적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이에 대해 강의석은 &ldquo;종교 자유 문제는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며,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두고 혼자 전학을 간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rdquo;이라고, 부모와 선생의 권유를 물리치고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자 학교는 사건 발생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2</span>일 만에 강의석을 제적시켰고, 강의석은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이때 지은이는 강의석을 제적 처리한 것은 &ldquo;헌법의 정신을 위배&rdquo;한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사람을 만든다는 &ldquo;대광의 설립이념과 목적&rdquo;과도 어긋날뿐더러 &ldquo;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존엄한 사랑과 우주적 구원의 가치를 땅에 떨어뜨려 다시 한 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라는 성명서를 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개신교 신학자들은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기준으로 신자 개개인의 신앙을 구분 지을 때, 배타주의, 포용주의, 다원주의로 나눈다. 원래 근본주의 신앙에서 출발했던 지은이는, 목사 안수를 받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5</span>년 무렵에 중간 단계인 포용주의 입장에 다다랐고, 강의석 사건이 벌어지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8</span>년 전에는 이미 다원주의 신학에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입장을 드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교에서 약간이라도 그런 눈치를 보이면, 학교의 최고 책임자에게 불려 가 경고를 받았다. 지은이는 이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강의석 문제에 개입해서 학교에 부담을 주었다는 이유보다 더 큰 &lsquo;신학적 관점&rsquo;에서의 잘못으로 교목 실장과 교목 직위를 해제당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은이는 강의석 사건이 벌어지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년 전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2</span>년부터 &lsquo;불거토피아&rsquo;라는 인터넷 카페를 운영해 왔다. &ldquo;&lsquo;불&rsquo;로소득을 &lsquo;거&rsquo;부하여 아름다운 세상(유토피아)을 만들어 보자, 아닌 것(불)을 거부(거)하여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라는 뜻에서 만든 이 카페는, 불로소득 거부, 자연보존, 평화통일문제, 종교 간의 상생, 지구촌 평화와 같은 문제를 환기하고 실천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러데 강의석 사건 이후 &lsquo;기독교 의식개혁&rsquo;이라는 또 다른 축이 더해지면서, 이제는 기독교 의식개혁이 이 카페의 중심이 되었다: &ldquo;기독교가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각성에 의해서 기독교가 서서히, 서서히 변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 내적인 각성이 뭐냐 하면 (&hellip;) &lsquo;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네. 우리 기독교 신앙만이 전부라고 느꼈고, 타 종교는 다 사탄이라고 느꼈는데, 그게 아니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절대적이지만, 타 종교도 훌륭할 수 있네&rsquo; 하는 식으로 우선 존경심을 갖는 단계로 가고, 타 종교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도 인정하고, 이렇게 단계적으로 독선과 배타성을 인정해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독선을 완전히 내려놓은 내부적인 의식개혁운동을 통해서 변해야 된다는 거죠.&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0</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80</span>년대에 교세가 수직 상승하던 한국 교회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0</span>년대 들어 하락세로 돌아섰고, 빠른 속도로 교인 수가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보수주의 개신교 진영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lsquo;정치에 몰빵&rsquo;하는 외형적인 확대와 &lsquo;도덕성 회복 운동&rsquo;이라는 내부적 개선을 들고 나왔다. 류상태가 쓴 두 권의 책은, 외형적 방법이 갖는 문제점보다 내부적 방법의 한계와 허구에 대해 번번이 강조하고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ldquo;한국 교회의 도덕성 문제는 표피적인 현상일 뿐이다. 대형 교회 목회자의 재정적 비리나 도덕적 탈선이 개인의 도덕성과 무관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도덕적 긴장에서 해체되도록 만든 보다 깊은 원인을 찾아보면 역시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한국 개신 교단의 도덕적 타락은 대형 교회나 목사 개인의 도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lsquo;불신지옥, 예수천당&rsquo;이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 있다. 쓰나미 발언으로 유명한 금란교회의 김홍도나 &lsquo;빤스 목사&rsquo;로 알려진 전광훈 같은 사람들이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 되지 않는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에게 &lsquo;무조건 따르라&rsquo;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ldquo;독선적인 교리, 그 절대화 된 교리에 의해서 가능&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한 것이다. 즉 &lsquo;하느님이 절대적이니까 이 말을 전하는 목사의 말도 절대적이다&rsquo;는 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ldquo;&lsquo;윤리성을 갖추지 못한 독재자와 윤리성을 갖춘 독재자,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될까? 윤리적이지 못한 독재자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러나 윤리성을 갖춘 독재자라면, 그 독재자는 훨씬 더 오래가면서 두고두고 사람을 잡을 수 있다. &lsquo;오직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rsquo;는 한국 주류 개신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를 그대로 둔 채 한국 교회가 윤리성을 갖출 경우, 사람들은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방해를 받을 수 있다. 학교에서 종교 자유를 주장한 강의석 군을 내친 대광고등학교는 비교적 투명하고 모범적인 학교였다. 그들이 사회의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dquo; &ldquo;기독교 자체가 개혁의 대상임을 깨닫고 문제 해결에 나선 단체도 있기는 하다. 김동호 목사나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개혁실천연대 등이 제도와 윤리 개혁운동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개혁은 껍데기 개혁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갖는 근본적인 문제는 윤리나 제도 이전에 교리 자체가 갖고 있는 폭력성과 정복성에 있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현상을 치료할 수 있는가. (&hellip;) 기독교가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도를 개혁하고 윤리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면, 교리가 갖는 공격성과 문화적 강요는 더욱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진정 기독교의 개혁을 원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갖는 폭력성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리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rdquo;(『당신들의 예수』)</p> <p style="text-align: justify">목사 개인이나 대형 교회의 비리를 자정하겠다는 도덕성 회복 운동만으로는, 단군상 목 자르기, 사찰 &lsquo;땅밟기&rsquo;와 방화, 개신교 학교에서의 예배 강요, 공격적 해외 선교를 없앨 수 없다. 한국 개신 기독교의 부도덕성은 &lsquo;불신지옥, 예수천당&rsquo;이라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에서 나온 것이다. 자칫 &lsquo;종교 전쟁&rsquo;마저 부를 수 있는 한국 개신교의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존재 방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①교회&middot;예식&middot;교리&middot;경전 중심의 제도적 종교 시스템을 소집단&middot;세미나로 바꾸고, ②성서를 읽을 때 &lsquo;성서 축자영감설&rsquo;에 근거하지 않고 역사적 맥락에서 읽으며, ③무엇보다, 모든 종교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lsquo;나 홀로&rsquo; 존재하는 종교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종교를 통해서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신도들이 많을 때, 목사와 교회는 예수의 이름을 빌려 분탕질 칠 &lsquo;빽&rsquo;을 잃게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강의석 사건으로 목사직마저 반납한 지은이는, 기득권자인 목회자들이 주체가 되는 개혁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면서, 진정한 개혁은 그 공동체의 사람들, 즉 교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나서야 한다고 권한다: &ldquo;지금 한국 교계에서는 위임을 받은 담임목사가 사회 범죄에 해당하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도 여전히 위세를 행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파렴치한 범죄 행위를 하고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위세를 부릴 뿐 아니라 &lsquo;주의 종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rsquo;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통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성서적으로 보더라도 목회자는 사도들을 본받아 말씀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사도행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장<span style="font-family: Verdana"> 1</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절 참조). 교회 행정과 재정은 평신도들이 맡아야 하며, 목회자들이 간섭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rdquo;(『당신들의 예수』)</p> <p style="text-align: justify">대광고등학교 교목 시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일 밤을 통성기도와 통곡으로 일관했던 어느 개신교 영성 훈련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지은이는 &ldquo;내가 기독교인이며 목사라는 사실에 절망&rdquo;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ldquo;기독교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rdquo;(『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는 생각으로 그를 인도했다. 예수의 삶이 &lsquo;종교&rsquo;로 둔갑한 게 기독교이니, 기독교는 태생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lsquo;예수의 삶&rsquo;이 종교적인 도그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바로 초대교회였는데도, 한국의 교회 개혁 운동이 &lsquo;초대교회로 돌아가자&rsquo;고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lsquo;개그콘서트&rsquo;나 같게 보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목사와 종교 교사직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아직 기독교를 포기하기에는 일렀고, 가장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강의석 사건으로 목사와 종교 교사직을 내려놓게 되었지만, 교회 개혁운동을 하면서 번민과 갈등은 더 깊어졌다. 갈 곳 없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생활비를 벌게 해준 개혁교회는 &lsquo;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rsquo; 아름다운 교회였으나, 이런 아름다운 교회가 &ldquo;오히려 독선과 배타에 사로잡힌 주류교회에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주류 개신교회들이 살아가는 숙주 역할&rdquo;을 하고 있다는 갈등과, &ldquo;개혁하겠다는 사람들의 정당성이 도전받는 상태에서 개혁은 없다. 기독교 개혁운동 단체는 자신이 가해자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rdquo;는 고민 속에서, 지은이는 자신이 사역하고 있던 개혁교회마저 떠났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년 봄, 지은이는 &ldquo;그토록 소망했던 기독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rdquo;(『당신들의 예수』)</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이다. 강의석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6</span>일간의 단식 끝에, 학교 측으로부터 예배 선택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불상사를 피하고자 강의석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던 학교는, 그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저 사건이 한참일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lsquo;대광고등학교는 이름난 문인들을 많이 낸 학교인데, 왜 모두들 쥐죽은 듯이 있나?&rsquo;<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0-31 오후 1:17:00‘스틸라이프’ 12회<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433" src="/userfiles/ADMIN/image/%EB%AC%B8%ED%95%99%EC%98%A8%EB%9D%BC%EC%9D%B8/%EA%B7%B8%EB%A6%BC%EC%86%8C%EC%84%A4/%EB%84%A4%EB%B2%84%EB%9E%9C%EB%93%9C/%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EC%8A%A4%ED%8B%B8%EB%9D%BC%EC%9D%B4%ED%94%8412%ED%9A%8C%ED%83%91%EC%9E%AC.JPG"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첼로 8<br /> </span></strong></span><br />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엄마를 찾으며 울어대는 딸아이를 부모님께 맡기고 저는 한동안 혼자 지냈어요. 왜 찾지 않았냐고요? 사실 그동안 아내는 수없는 이별의 신호를 제게 보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어쩌면 아내는 이별을 미뤄왔던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딱히 눈에 보이는 잘못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더 사람 잡는 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알죠. 이를테면 꿈속에서 실컷 매를 맞고, 깨보니 아픔은 여전한데 멍 하나 들지 않은 멀쩡한 상태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아내 곁에서 내 마음속의 괴물은 치유되지 못한 채 그저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거죠.</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어떤 일도 아무리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다고 해도, 미루고 또 미루면 영원히 미룬 채로 결국 하지 못하고 마는 법이죠. 그러나 마침내 아내는 매일 생각만 하던 이별을 그날 아침 실행에 옮긴 것뿐이었어요. 별로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이별을 통보받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혼자 있는 시간들이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누군가는 외로워서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아무하고나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하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폭식을 하고, 누군가는 외로워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죠. 모든 중독의 뿌리는 외로움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사랑 뚱뚱한 그녀도 외로워서 도넛을 한 상자씩 먹어치웠던 거였고, 떠나간 아내도 외로워서 첼로를 껴안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어요. 그렇다면 외로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옳은 것일지, 한동안 저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아무 생각 없이 하루 두세 시간씩 걸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혼자서도 둘이서도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우리들의 난제 고독, 그 고독을 관리하는 능력에 따라 사람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는 걸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죠. 그렇게 외로운 날들 속에 해외출장의 기회가 주어졌어요. 행선지는 뉴욕이었죠. 뉴욕은 언제나 가보고 싶던 곳이었어요. 어쩌면 내 사랑 뚱뚱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렜어요. 문득 뉴욕 맨해튼 길거리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대학 동창 놈의 말이 떠올랐어요. 계속 그녀를 따라가 아는 척했더니 그녀는 &ldquo;저를 아세요?&rdquo; 하더라며 동창생 녀석이 혀를 차던 생각이 났어요. 왜 모든 그녀들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걸까? 아니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남자는 적어도 과거를 잊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여자들에게는 면면히 내려오는 유전자 속에 오래된 피해의식이 있어서 아프거나 싫은 기억은 잊어버리는 방어기제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날 때는 여자가 더 집착하는 경우가 많을지도 모르지만, 헤어진 뒤에는 집착한 만큼의 속도로 깨끗이 잊어버리는 쪽도 여자가 아닐는지,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하긴 제게 집착하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어요. 아이를 낳고 산 아내마저도 그렇게 쉽게 제 곁을 떠났으니까요. 어쨌든 뉴욕을 향해 떠나는 비행기 속에서 저는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어요.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근처의 호텔에 짐을 풀고, 자유의 여신상이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이 보이는 공원에 가서 산책을 즐겼어요. 어둑한 황혼에 손에 횃불을 들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아름다웠어요. 문득 뚱뚱한 내 사랑 그녀와 뚱뚱한 자유의 여신상이 제 눈에 겹쳐져 떠올랐어요.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그대는 내일 죽는다. 지금 이 순간 무얼 하고 싶은가?&rdquo; 그렇게 하느님이 묻는다면 서슴없이 도넛을 한 상자씩 먹어치우는 내 사랑 뚱뚱한 그녀를 만나보는 거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죠. 뉴욕에 도착한 며칠 뒤 저는 정말 꿈속에도 그리던 내 사랑 뚱뚱한 그녀를 거짓말처럼 우연히 만났어요. 57가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약국에서였어요.<br /> &nbsp;</p>황주리의 ‘네버랜드 다이어리’편집자2011-10-28 오후 2:39:00《185》2010년 4월 16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397575"><img width="142"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D%94%84%EB%9E%AD%ED%81%B4%EB%A6%B0%EC%9E%90%EC%84%9C%EC%A0%84.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trong><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4월 16일</span></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벤자민 프랭클린의 『프랭클린 자서전 - 덕에 이르는 길』(예림미디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을 읽다. - 원제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Autobiography of Benjamin Franklin</span>』인 이 자서전은 미국 산문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세계의 여러 자서전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고전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네댓 종의 판본이 나와 있다. 예림미디어판에서는 부제로 &lsquo;덕에 이르는 길&rsquo;이라고 떡하니 붙여 놓았는데, 이 부제에 해당하는 원서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enjamin Franklin's The Art of Virtue: His Formula for Successful Living</span>』이라는 제목을 가진 별도의 책이다. 자서전보다 먼저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의 번역본 또한 여러 가지 형태의 편집으로 나와 있는데, 가장 원제에 근접한 『덕의 기술』(<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span>세기북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도 그 가운데 하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1425164"><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142"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B%8D%95%EC%9D%98%EA%B8%B0%EC%88%A0.JPG" /></a>&lsquo;아메리카의 르네상스인&rsquo;이었던 프랭클린은 정치&middot;사회&middot;과학&middot;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한 경력을 과시했다. 특히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그가 전기의 양극과 음극을 발견하고 피뢰침의 원리를 실험한 것이라든지,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아는 바다. 하지만 그가 물려준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유산이라면, 뭐니뭐니해도 &lsquo;자기계발의 의지&rsquo;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서전과 『덕의 기술』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자기계발서의 원형을 제공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랭클린은 자서전 안에, 자신의 자서전이 어서 완성되기를 바라는 두 추종자의 간곡한 서신을 삽입해 놓았다. 아벨 제임스와 벤자민 보간이 쓴 두 편지는, 『프랭클린 자서전』의 &lsquo;자기계발서&rsquo;적 핵심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다음은 아벨 제임스와 벤자민 보간이 따로 보냈던 두 통의 서신이다: &ldquo;귀하가 쓰신 것이 발표되었을 때(저는 꼭 발표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은 그것을 읽고 귀하의 청소년기의 부지런함과 절제를 본받게 될 것입니다. 현존하는 사람들, 아니 현존하는 여러 사람들을 합쳐도 당신만큼 아메리카 청년들에게 젊어서부터 일에 열중하는 근면, 검소, 그리고 절제의 정신을 더욱 크게 고양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합니다.&rdquo; &ldquo;귀하의 자서전은 먼 훗날 위대한 인간 형성에 영향을 줄 것이며, 『덕에 이르는 길』과 함께 개인 성격의 특징들을 향상시키고 결과적으로 공사를 막론하고 모든 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말한 두 가지 작용은 독학의 훌륭한 법칙과 사례를 제시해 줄 것입니다. 학교 교육이나 그 밖의 다른 교육은 언제나 잘못된 방침으로 시행되어 왔으며 열악한 조직으로 잘못된 목표를 추구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사용하신 방법들은 간단하고 목표가 명확합니다. 그뿐 아니라 부모들이나 젊은이들이 인생의 적절한 행로를 판단하여 결정하고 그것에 대한 준비를 갖추는데 필요한 올바른 방법을 갖지 못하고 있을 때 문제의 열쇠는 대체로 개인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의 발견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hellip;) 선생님의 자서전은 자신의 출신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시겠지만 이 점이 한층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어떠한 출신 성분도 행복, 덕행, 또는 위대성에 대해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의 자서전은 두 추종자들의 열화와 같은 희망을 충족시켰다. 이 책은 열중&middot;근면&middot;검소&middot;절제의 미덕과 함께, 성공의 열쇠는 출신 성분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모두들 알다시피,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강조하는 미덕들은, 근 몇 년간 베스트셀러 순위를 독점하며 기승을 부렸던 허다한 자기계발서의 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 크게 다른 게 있다면, 프랭클린은 요즘 나오는 자기계발서의 저자들과 달리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양초와 비누 제조업자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span>번째 아이로 태어난 그는 열 살 때 2년간의 정규교육을 중단하고, 집에서 아버지의 일손을 도왔다. 그리고 열두 살 때부터는 인쇄업을 하던 맏형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이 누대를 이어가며 읽혀 온 것은, 자수성가했던 지은이의 삶이 후광과 같은 설득력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의 자기계발적인 특성은 앞서 말한 열정&middot;근면&middot;독학에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프랭클린과 하느님(종교)과의 관계다. 분명 자서전 서두에는 &ldquo;나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며 부유함과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상당히 행복하게 살았다&rdquo;, &ldquo;나의 행복한 지난 일생이 하나님의 인자하신 가호 덕분이며 그 가호가 내가 사용한 방법마다 성공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겸허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싶다. (&hellip;)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기를 희망한다&rdquo;고 적혀 있지만, 실제의 프랭클린의 삶이나 신념은 하나님의 가호나 은총에 기대지 않았다. &ldquo;겨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span>세가 되었을 때는 성서 자체에 의구심까지 생겼다&rdquo;고 말하는 프랭클린은 자연신교도自然神敎徒였다: &ldquo;무한한 지혜, 자비심, 그리고 능력을 하나님의 속성에서 생각해본다면 이 세상에 악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미덕과 악덕은 구분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hellip;) 나는 어떤 종류의 행위가 성서에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서에서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그런 행위는 모든 환경을 고려한 후에 본디부터 우리에게 해롭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고, 유익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국교도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프랭클린의 아버지는 그에게 꽤 엄격한 종교 교육을 시켰다(&ldquo;나는 장로교회파 신자로서 종교적 교육을 받아왔다&rdquo;). 하지만 프랭클린은 죄를 지으면 현세나 내세에서 반드시 천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영혼이 불멸하는 것은 기독교의 특성이 아니라 &ldquo;모든 종교의 본질&rdquo;이며, &nbsp;&ldquo;모든 종교들 속에서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나는 모든 종파를 존경했다.&rdquo;&nbsp; 또 여든네 살까지 장수했던 그는,&nbsp; 교회의 설교가 &ldquo;선량한 시민을 만든다는 것보다 장로파의 교인을 만드는 것에 있는 것&rdquo; 같다면서,&nbsp; 예순두 살 이후로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br /> <br /> <img width="600" height="345"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D%B8%EC%87%84%EC%A4%91%20%ED%94%84%EB%9E%AD%ED%81%B4%EB%A6%B0.JPG" /><br /> <br /> 하나님의 가호와 은총에 감사했던 자서전 서두와 달리 프랭클린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ldquo;오랫동안 건강을 유지하고 지금도 강건한 체격을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은 절제의 덕이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궁핍한 생활은 하지 않았고 재산도 얼마간 쌓았으며, 여러 가지 지식도 얻고 유용한 시민이 되어 학식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명성을 얻게 된 것은 근면과 절약 덕이다. 국민의 신망을 얻고 영광스러운 나라의 임무까지 맡게 된 것은 오로지 정직과 정 덕분이다. 나는 언제나 평온한 심정이고 타인과의 대화에서 늘 명쾌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친교를 맺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젊은 친구들의 귀한 사랑을 받게 된 데에는 모두가 덕의 종합적인 힘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자손이라면 이것을 본받아서 그와 같은 이점을 얻을 수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rdquo; 이런 자긍심 속에 어디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있으랴?</p> <p style="text-align: justify">예림미디어판 『프랭클린 자서전』에 잘못 붙여진 부제인 &lsquo;덕에 이르는 길&rsquo;, 곧 『덕의 기술』은 프랭클린이 위에서 말했던 &lsquo;덕의 종합적인 힘&rsquo;을 별도로 정리한 책이다. 그는 스스로 &lsquo;덕의 종합적인 힘&rsquo;이라고 부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개조의 덕을 통해,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자서전에 나오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개조가, 『덕의 기술』에서는 한 가지 줄어들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가지 삶의 원칙으로 나온다). 첫째. 그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개조는 입을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어떻게 옷과 음식을 얻을 것인가는 가르쳐 주지는 않으면서 &lsquo;착한 사람이 되라&rsquo;는 식의 훈계를 늘어놓는 기독교와 달리, 밥과 옷을 얻는 수단을 가르쳐 주고자 했다. 둘째. 그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span>개조를 통해 기성 종교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계시 종교와는 다른, &lsquo;덕을 닦는 연합체(결사)&rsquo;를 만들고자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J</span>. 브로노프스키&middot;브루스 매즐리슈가 함께 쓴 『서양의 지적 전통』(홍성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0</span>)에는 프랭클린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칸트&middot;헤겔에 이르는 서양의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 틈에 당당하게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만 보고서는 &lsquo;급&rsquo;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장을 읽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은이들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span>세기의 산업 발흥과 결부된 새로운 인간형, 즉 &ldquo;기술적 숙련에 의해서 인생의 출발점을 내디&rdquo;딘 &ldquo;엔지니어의 새 세대&rdquo;를 뜻한다. 프랭클린은 마흔두 살 때 인쇄업에서 손을 뗐지만, 죽기 두 해 전에 유언을 쓰게 되었을 때 &ldquo;나, 필라델피아의 인쇄업자 벤자민 프랭클린&rdquo;이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또 그의 묘비에는 간단하게 &lsquo;인쇄인 프랭클린<span style="font-family: Verdana">B. Franklin, Printer</span>&rsquo;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자신이 감당한 삶을 어떤 신분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이런 에토스는 ①소박하고 ②어떤 원리도 나의 자유로운 승인에서만 추인되며 ③과학적이고 공리적인 신대륙 고유의 감각을 보여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이지만, 혹시 이 글을 읽고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으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읽지 마시라.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다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 자서전은 독립선언과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757</span>년 무렵에 맥없이 끝난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0-27 오전 11:18:00뢰네베르크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8B%9C%EA%B0%84%EC%9D%84%EB%B9%BC%EC%95%97%EA%B8%B4%EC%82%AC%EB%9E%8C%EB%93%A4%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서문</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당신 몸속 시계는 몇 시인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시계에 대한 이야기다. 돈 주고 사서 손목에 차고 다니거나 벽에 걸어놓는 시계가 아니라, 우리 신체 안에서 똑딱거리는 시계에 관한 이야기다. 체내 시계(<span style="font-family: Verdana">body clock</span>)는 기나긴 진화의 과정에서 뒤늦게 고안된 산물이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포유류에서 단세포생물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체내 시계를 가지고 있다. 체내 시계가 없거나 체내 시계를 거슬러 사는 동물은 일찌감치 잡아먹히든지 굶어 죽게 될 것이다. 이는 체내의 생체 시계(<span style="font-family: Verdana">biological clock</span>)가 지구상 생물들의 삶에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체내 시계를 거스르는 것은 또한 건강을 해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체내 시계에 맞춰 살기가 매우 힘들다. 어떤 사람은 여행길에 올라 단숨에 여러 시간대를 횡단하고, 어떤 사람(산업국가 노동인구의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퍼센트)은 교대 근무를 한다. 시차증으로 고생해본 사람이라면 체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몸에 얼마나 무리를 주는지 알 것이다. 하지만 교대 근무를 하거나 비행기를 타고 여러 시간대를 횡단하지 않는 사람도 만성 시차증에 시달릴 수 있다. 그것을 &lsquo;사회적 시차증(<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cial jetlag</span>)&rsquo;이라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시계에 관한 책이므로 당연히 시간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체내 시계의 시간은 직장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제시간에 기차나 비행기를 타기 위해,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저녁 뉴스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시간(<span style="font-family: Verdana">social time</span>)과는 좀 다르다. 사회적 시간은 인간의 사회생활에 기준이 되는 시간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span>세기에 사회적 시간과 태양을 기준으로 한 현지 시간(<span style="font-family: Verdana">local sun time</span>, 즉 <span style="font-family: Verdana">local time</span>)은 서로 일치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을 때가 정오였다. 수백 년간 이런 식으로 시간이 정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간 규정은 철도가 발명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시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태양을 기준으로 지역마다 시간이 다른 것을 상당히 불편하게 여겼다. 여행자들이 거의 모든 역마다 시계를 새로 맞춰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각국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84</span>년 표준시간대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런던 근처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영도 자오선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span>시간대로 분할한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사회적 시간을 정하기 위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span>시간대 안의 어느 시간대를 활용해도 무방하다. 그 지역민이 동의한다면 말이다(가령 중국은 그렇게 넓은 면적을 포괄하면서도 베이징 시간에 맞춘 단일 시간대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다양한 시간 체계, 즉 태양시(<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n time</span>), 사회적 시간, 개인적인 체내 시간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독자들은 각자의 체내 시계가 만들어내는 개개인의 체내 시간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체내 시간은 몸집, 눈 색깔, 성격처럼 사람마다 다르며 태양시 및 사회적 시간과 연관된다. 우리 각자에게 태양시나 사회적 시간보다 체내 시간이 훨씬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제껏 체내 시계에 별 관심 없이 살아왔다. 우리는 매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span>시간 정도 깨어서 움직이고 생각하다가 &lsquo;수면&rsquo;이라는 &lsquo;무의식&rsquo;과 비슷한 상태로 옮아간다. 이러한 매일의 변화는 아주 당연하게 여겨져서, 그 토대가 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오랫동안 연구 대상으로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동물들은 태양이 뜨고 짐과 더불어 깨어나고 잠들며, 꽃들은 봉오리를 열고 닫고, 플랑크톤은 물기둥 안에서 올라오고 내려간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span>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지구의 하루를 모델링하는 생체 시계가 이 모든 리듬을 조절한다. 그러나 잠과 깸의 교대가 하루 한 번 종잇장 뒤집듯 바뀌는 두 가지 존재 상태만은 아니다. 의식의 이 두 가지 상태는 유전자의 켜짐과 꺼짐, 신체 조직에서 호르몬과 전달물질의 조합이 계속 바뀌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신체 기능에서 진행되는 변화를 반영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수십 년 동안 단세포와 균류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생물을 대상으로 체내 시계의 토대가 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연구해왔다. 연구는 빛, 온도, 영양 같은 환경 요인을 조절할 수 있는 실험실뿐 아니라 공장 같은 실제 세계에서도 진행되었다. 나는 다양한 변수를 측정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루의 시간과 관련한 설문 조사를 하기도 했다.&nbsp;&nbsp;&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hellip;)</p> <p style="text-align: justify">체내 시계를 연구하면 할수록 나는 이런 연구가 우리 모두의 실생활에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점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체내 시계에 대해 공개 강연을 할 때마다 예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아주 일상적이고 당연해 보이는 현상들에 매력을 느끼고 호기심을 보이는 청중을 발견했다. 생체 시계를 이해하면 자신과 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며, 수면 패턴에 대한 선입견이 만들어낸 마음의 짐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가령 아침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시에 가뿐하게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생각하거나, 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시에 도저히 친구들과 외출할 기분(또는 기운)이 나지 않는 자신을 지루한 사람으로 치부하곤 했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에서 나는 체내 시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각 장의 짧은 이야기들은 체내 시계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줄 것이다. 이 책의 각 장은 사례와 해설로 나뉘어 있다. 사례는 다양한 이야기 형식을 취한 학습 소재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례는 약간의 문학성을 띠고 있고, 몇몇 사례는 다큐멘터리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례의 기본이 되는 소재는 학문적으로 정확한 것들이다. 많은 사례에서 나는 허구를 동원했다. 예컨대 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span>세기의 천문학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체내 시계 현상을 발견했는지 구체적인 것을 알지 못한다(그 후 그 현상은 거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50</span>년간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글에 기초하여 그의 생각들을 유추했고, 그의 주변 세계가 어땠을지 상상력을 발휘했다. 몇몇 사례는 최근의 새로운 학문적 발견들에 관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로 하여금 특정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학자들이 어떻게 그런 발견에 이르렀는지 독자들이 더 잘 실감할 수 있도록 그런 사례를 고안했다. 앞에서 말했듯 이런 사례의 많은 부분은 정확히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어떤 부분(가령 학자가 실험실에서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등등)은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하기 위해 픽션으로 처리했다. 등장인물의 이름도 내가 지어냈지만, 필요한 경우 각주에 이름을 밝혀놓았다. 몇몇 사례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나는 모든 사실을 다 밝히지 않음으로써 독자들 스스로 추측하거나, 해설에서 비로소 의문을 풀 수 있도록 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사례를 통해 나는 독자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일깨우고 싶다. 사례를 읽은 뒤 곧장 해설로 넘어가지 말고 사례의 내용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어떤 부분이 이해되지 않는가? 경험상 알고는 있지만,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내용은 어떤 것인가? 각 장의 후반부, 즉 해설에서는 각 사례의 토대가 되는 사실을 다룰 것이다. 부디 독자들의 궁금증이 해결되고, 체내 시계에 대한 지식이 독자들의 삶에 적용되기를 바란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교과서가 아니다. 독자들이 이 책을 그냥 마음 편하게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례를 고안하여 독자들이 최대한 쉽고 흥미롭게 학문적 주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사례를 읽은 후 곰곰이 그 내용을 생각해보라.&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해설은 사례보다는 약간 까다로울 것이다. 해설을 통해 체내 시계가 어떻게 작동하며, 체내 시계가 어떻게 생물학적 기능에 중요한 체내 시간을 만들어내는지 학문적 설명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체내 시간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지 않은 세세한 학술 정보는 생략했다. 역사적 배경도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너무 많은 학자들 이름으로 독자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체내 시계의 생물학을 이해하려면 최소한의 생물학은 이해해야 한다. 나는 생물학적 설명들을 가능하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가려고 노력했다. 체내 시간 시스템이 생물학적 기초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내용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이런 설명들을 자제해왔다. 학자들마저 여전히 체내 시계를 중요시하지 않는 모습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뮌헨 대학 의학부에 출근한 첫날, 나는 인사차 동료 교수들을 방문했다. 그들은 모두 아주 친절한 사람들이었으나, 체내 시계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숨기지 못했다. 한 사람은 &ldquo;그 모든 것은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체내 시계는 기껏해야 아주 민감한 사람들에게나 중요하지 않을까요?&rdquo;라고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생물학적 설명과 함께 체내 시간이 생물학적 현상이며, 시간생물학자들이 분자학적&middot;유전학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체내 시계의 기능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매번 다른 측면에 집중하며 이 책을 여러 번 읽어도 좋을 것이다. 나의 목표는 독자들이 체내 시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으로 무장시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우리 일상에 체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식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을 쓰는 것은 내게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내가 누렸던 즐거움을 독자들도 책을 읽는 가운데 누리기를 바란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흥미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재미있게 읽은 내용은 기억에 절로 들어온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문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329" height="238"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D%8B%B8%EB%A2%B0%EB%84%A4%EB%B2%A0%EB%A5%B4%ED%81%AC.JPG" />틸 뢰네베르크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Till Roenneberg<br /> </strong></span>뮌헨에서 태어나 열일곱 살에 &lsquo;시간생물학계&rsquo; 삼대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위르겐 아쇼프 교수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과학도가 되기로 결심했다. 대학에서 전공으로 물리학과 의학을 택해보았지만, 인간에 대한 끊이지 않는 호기심 때문에 진화&middot;유전&middot;심리&middot;생태를 탐구할 수 있는 생물학으로 전향했다. 뮌헨 대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광생물학&middot;신경생리학&middot;뇌과학을 거쳐 시간생물학으로 복귀해 하버드 대학에서 다년간 연구했다. 현재 뮌헨의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 소속 의학심리 연구소 교수로 재직하면서 인간의 시간유형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유영미<br /> </strong>학부와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뒤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지능적이고 매혹적인 동물들의 생존 게임』『감정사용설명서』『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몸의 행복』『땡전 한 푼 없이 떠난 세계 여행』 등이 있다. 『스파게티에서 발견한 수학의 세계』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1</span>년 과학기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 번역상을 수상했다.<br /> &nbsp;<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0-27 오전 10:59:00바우어의 ‘생추어리 농장’<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92"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83%9D%EC%B6%94%EC%96%B4%EB%A6%AC%EB%86%8D%EC%9E%A5%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들어가며</span></strong></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농장의 문을 활짝 열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뉴욕 주 핑거 레이크 지역 왓킨스 글렌 마을 서쪽으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3</span>번 국도를 따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킬로미터쯤 달리면, 반짝이는 호수와 푸른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나온다.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꺾어 에이큰스 로路로 접어들면, 곧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24</span>만 평에 이르는 슈거 힐 주립공원과 연결된, 양쪽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비포장도로가 보인다. 슈거 힐 주립공원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00</span>년대에 농지로 비워둔 땅이었지만, 1930년대 경제공황기에 농부들이 더 이상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비옥한 표토表土가 침식되거나 씻겨져 나간 것도 한몫했다―뉴욕 주가 그 땅을 다시 사들였고 거기에 나무를 심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그 비포장도로를 따라 방향을 꺾으면 갑자기 숲이 사라지면서, 다양한 크기의 붉은 헛간 여러 채와 하얀 가옥 한 채가 서 있는 드넓은 풀밭이 시야에 들어온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바큇자국이 깊게 팬 길을 따라 입구로 다가가면, 우리가 떠올리는 전형적인 농장의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어렸을 때 불렀던 &ldquo;맥도널드 아저씨에겐 농장이 하나 있었지&rdquo; 노래에 나오는 그런 농장이다. 안에는 여기저기 목초와 건초가 쌓여 있고 건초 묶는 기계와 거름 살포기 따위가, 몇 대는 짚 깔린 헛간에 주차되어 있고 몇 대는 농장 일꾼들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소와 양들이 언덕에서 풀을 뜯는 모습, 헛간 근처에서 돼지들이 코로 흙을 파거나 진흙 구덩이에서 몸을 식히는 모습을 연중 아무 때나 볼 수 있다. 먹이를 쪼거나, 털을 고르거나, 꼬꼬댁거리며 볕을 즐기는 암탉 무리를 수탉들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방금 깎은 잔디와 들꽃의 향기가 공기 중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 농장에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다. 미국의 다른 &lsquo;현대화된&rsquo; 농장들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우선 이 농장은 방문객을 환영한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오두막집이 세 채나 있고, 근처에 &lsquo;사람용 헛간&rsquo;이라 이름 붙인 커다란 건물도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다른 농장들과 확연하게 다른 점은 역시 정문에 세워놓은 표지판이다. &ldquo;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rdquo; 이상이, 내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6</span>년에 공동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혼자만의 작은 아이디어였다가 차차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은, 그리고 미래에 더 큰 운동 본거지로 성장하길 바라는 동물들의 안식처 &lsquo;생추어리 농장&rsquo;으로 가는 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새로운 형태의 농장</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처음에는 그저 &lsquo;공장식 농장 경영&rsquo;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그 피해자, 특히 너무 약하거나 병들어 도살장에서조차 거부하는 가축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생추어리 농장은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여 년간 수천 마리의 동물을 구조하고 데려와 돌봐주었다. 대부분이 병들거나 학대당한 동물, 혹은 방치되어 죽어가는 동물들이었다. 농장주가 더 이상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내다버린 가축들도 있었다.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가 농장을 덮쳤을 때 극적으로 구출된 동물, 도살장에서 도망쳐 나와 헤매다가 구조된 동물도 있었다. 뉴욕 주 이타카에서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2</span>킬로미터 떨어진 전원 지역과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북쪽의 올랜드에 각각 하나씩 위치한 우리 농장에는 그동안 수많은 염소와 돼지, 양과 소, 닭, 칠면조, 거위와 오리, 그리고 가끔씩 당나귀와 토끼가 식구로 들어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추어리 농장은 각 부지마다 헛간 십여 채와 수백만 평의 목초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모든 동물에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span>시간 최고 수준의 보살핌을 제공한다. 평생을 공포와 고립, 고통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동물들이 이곳에 와 난생 처음 건초를 깐 깨끗하고 널찍한 헛간에서 뒹굴고, 난생 처음 영양가 있는 먹이를 먹고, 난생 처음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지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생추어리 농장이 특별한 것은, 그곳에 사는 동물들이 인간의 먹이사슬에서 탈출했다는 것―이들은 더 이상 농장주의 이익을 위해 사료를 먹고 몸집을 불리지 않아도 되고, 체중이나 나이가 차면 팔려가 도축되지 않아도 된다―때문만은 아니다. 생추어리 농장의 동물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헛간을 드나들고 풀밭에서 뛰놀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거의 언제나 볼 수 있는 이런 광경이, 과거에는 미국의 여느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라는 점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오늘날 미국인의 삶이 진짜 농장의 삶과 멀어지긴 했지만, 미국인들 대부분은 아직도 가축 기르기와 농사짓기에 대한 소박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가족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논밭을 일구고 외양간과 들판에서 가축을 돌보면서, 힘겹지만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가는 시골의 정경을 꿈꾸며 살아간다.&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일을 하면서 우리는 학대받은 동물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역할이 큰 그림의 아주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미국에서 식용으로 희생되는 수백억 마리의 가축 중에 우리가 구해낼 수 있는 생명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우리 농장에 들어오는 학대받고 다치고 병든 동물의 숫자를 줄이려면, 줄기를 &lsquo;거슬러 올라가&rsquo; 이러한 잔학 행위의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 생추어리 농장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년 넘게 꾸준히 노력한 끝에, 여러 가축수용장(<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ockyard</span>, 도살장이나 시장으로 가기 전에 가축들을 수용하는 곳―옮긴이)과 도살장이 동물에 대한 잔학 행위로 처벌받았고, 공장식 농장의 가축학대를 금지하는 법안들이 통과됐으며, 축산업계의 학대 관행을 폭로하는 뉴스가 전국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와 함께, 고통받던 가축 수천 마리가 구조돼 평화로운 안식처를 찾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반세기를 지나면서 축산업은 연간 수천억 달러의 수익을 창출하는 거대 산업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식용 가축들은 풀을 뜯거나 햇빛을 받을 수 없는 좁은 실내 공간에서 살아가는데, 일명 &lsquo;집중가축사육시설&rsquo;CAFO, 더 정확히 말하면 공장식 사육시설이다. 왜 &lsquo;공장&rsquo;이라고 하냐면, 마치 수용소와도 같은 거대한 우리에 갇혀, 그 안에서 가축들이 철저히 통제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료와 물 공급, 배설물 처리를 비롯한 모든 사육 과정이 철저히 자동화되어 있다. 수많은 학자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쳐 직접 가축을 사육한 선구자들의 지혜를 본받아 가축을 욕구와 감정과 희망을 가진 개체로 대하는 대신, 공장식 농장은 이들을 마치 자동차 부품 같은 생산라인의 일부로 취급한다. 소와 돼지, 양, 닭, 오리, 칠면조 할 것 없이 수백 마리에서 수천 마리의 가축이 좁은 케이지나 크레이트(나무나 쇠, 플라스틱으로 된 틀구조의 상자―옮긴이), 몸을 움직일 공간도 없이 꽉 들어찬 축사에 갇혀 지낸다. 그곳에서 최단 시간에 몸집을 최대로 불리도록, 혹은 도축되기 전까지 우유를 최대한 많이 생산하고 새끼를 최대한 많이 낳도록, 항생제가 잔뜩 투여된 사료를 공급받는다. 가장 잘 팔리는 부위―식용 닭의 가슴 부위나 돼지의 뒷다리 부위―는 인위적으로 크기를 너무 키워서, 이제 가축들이 걷는 건 고사하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그 와중에 수백만 마리가 굶거나 불구가 되고 또 버려지기도 한다. 대부분은 성체成體로 다 자라기 전에 죽는다. 이것이 매년 미국에서 식용으로 길러지고 도축되는 수십억 마리의 가축이 처한 현실이다. 이들의 삶은 고통과 고립,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단 한 번의 따뜻함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죽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루 종일 학대받고 괴롭힘당하는 공장식 농장의 가축들은, 생추어리 농장에서는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동물적 습성을 표출할 기회조차 박탈당한다. 나는 이 책에서 공장식 농장의 본질을 설명하고,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 동물을 보는 왜곡된 시각을 공장식 농장이 얼마나 잘 대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째서 정상적인 가축 사육에 대한 모독이 되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물론 인간은 몇 만 년 전 농업이 생겨난 이래 식량과 옷을 얻기 위해,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목적으로 가축을 기르고 도살해왔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인류의 거의 대부분이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생활을 해왔다. 그때는 다들 곡식이나 고기가 어떻게 해서 식탁에 오르는지 알고 먹었고, 땅 그리고 가축과 교류하며 소와 돼지, 양, 염소, 닭과 아주 가까이에서(때로는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공장식 농장 문제와 더불어 나는 생추어리 농장의 식구로 들어온 아주 흥미로운 동물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일부 독자에게는 가축을 &lsquo;인격체&rsquo;로 취급하는 것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각자의 성격과 취향이 있으며 각각의 가치와 욕구를 지닌 가족 같은 존재라는 인식은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닭이나 소, 양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소나 닭을 떼나 무리로 &lsquo;통칭&rsquo;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닭은 얌전한데 어떤 닭은 활발하고, 어떤 칠면조는 숫기가 없는 반면 또 어떤 칠면조는 허세를 곧잘 부린다고 이야기하면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는 산업화된 축산업에 적잖이 물들어, 더 이상 동물을 하나의 살아 있는 개체로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이 동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연적인 삶도 인정할 리 만무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지난 두 세대에 걸친 축산업계의 산업화로 큰 어려움을 겪은 또 다른 무리는 다름 아닌 축산농가들이었다. 우선, 농장 노동이 공장 노동으로 바뀌었다. 그렇잖아도 부담에 시달리던 농가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새로운 경제학적 구도를 따라야 했고, 그러다가 도산하는 농가도 점점 많아졌다. 가족농장들이 인간과 가축 모두를 쓰고 버리는 상품 취급하는 시스템에 대항해 제대로 가축을 기르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도 무기력한 슬픔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축산업계와 미국의 소비문화에 일어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현 시스템에서 엄청난 제약을 감내하며 버티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오늘날 축산업계가 처한 현실을 설명하고 축산업과 식품산업 시스템이 변화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을 읽다보면 소화하기 힘들고 때로 마음을 너무 무겁게 하는 내용도 나올 것이다. 공장식 농장의 현실을 일단 알게 되면, 그 현실이 너무 끔찍하고 버거워 등을 돌리고 싶어질 것이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가축들이 당하는 끔찍한 폭력의 실상을 아예 처음부터 몰랐더라면 하고 바랄 때가 많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동물과 사람에게 가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학대를 수없이 목격했고 업계 종사자들에게 협박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나쁜 현실은 우리가 외면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똑바로 직시했을 때,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바로 이것이, 그동안 내가 온갖 끔찍한 일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점점 나아질 거라 낙관하는 이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상적인 세상이라면 생추어리 농장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곳에는 공장식 농장도 가축수용장도 없을 테고, 소나 돼지나 닭들이 학대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축들은 따스한 볕과 산들바람을 즐기고 흙바닥을 마음껏 파헤치면서, 주어진 삶을 한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타자에게 감수성과 측은지심을 발휘할 무한한 능력을 가진 동시에, 타자의 감정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차가움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무관심과 잔인함으로 대하면 세상에 무관심과 잔인함이 퍼지고, 우리가 이해심과 따뜻함을 가지고 살아갈수록 세상에도 이해심과 따뜻함이 퍼져나간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이 책은 희망의 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호프라는 돼지가 주인공인 책이고, 힐다라는 양이 주인공인 책이다. 수소 오피와 암탉 마멀레이드가 주인공이고, 지난 수십 년간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모든 특별한 동물들이 주인공인 책이다. 그들은 우리 농장의 대문을 열고 들어와 그들의 회복력과 활기, 개성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켰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학대받는 동물을 다 구할 수는 없다. 대신 우리는 생추어리 농장에 들어온 모든 동물이 각각 다른 동물 수백만, 아니 수십억 마리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우리는 그들과의 관계, 그리고 지구상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동물과의 관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생추어리 농장의 대문과 우리의 마음을 동물들에게 활짝 열어준 것처럼, 여러분도 마음을 열고 그것이 이끄는 대로 한번 따라가보기 바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장&nbsp; </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랭커스터로 가는 길</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농장에서는 자명종 시계가 필요 없다. 수탉들이 알아서 깨워주기 때문이다. 보통은 동이 트기 한참 전에, 마치 &ldquo;나 여기 있어!&rdquo;라고 외치듯 힘차게 하루를 반긴다. 동이 트면 농장 직원들은, 부지마다 열댓 채가 넘는 헛간을 일일이 돌며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 안에 있는 동물들에게 한 마리도 빠짐없이 아침밥과 물을 챙겨주면, 잠시 후 진료팀이 회진을 돌며 건강을 체크한다. 처방 치료 중인 동물에게는 주사를 놓거나 약을 먹이고, 다른 동물들은 붕대와 부목을 교체해주거나 정맥주사가 제대로 들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상처에 거즈를 새로 대준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8</span>시에는 청소 담당팀이 작업을 시작한다. 헛간을 돌며 오래된 짚을 모아 비료 살포기에 갖다 버리면, 나중에 살포기를 돌려 그 짚을 목초지에 뿌린다. 얼마 후 해가 중천에 뜨면 이제 본격적인 농장의 일과가 시작된다. 고장난 트랙터가 있으면 손보고, 경첩이 헐거워져 떨어져나간 헛간 문을 다시 달고, 사료나 울타리를 주문하고, 가을에는 건초도 자른다. 바깥 우리를 돌며 아픈 동물은 없는지 일일이 확인도 한다.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동물들―겁에 질려 있거나, 병이 있거나, 너무 늙었거나, 부상을 당했거나 아니면 병에서 회복 중인 동물들―은 따로 한 마리씩 살펴본다. 한쪽 우리의 풀이 듬성듬성해지면, 지름대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양과 소, 염소들을 다른 우리로 이동시킨다. 그러면 양과 소들은 신이 나서 풀을 뜯기 시작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시경부터 오후까지는 학생 단체 방문객과 가족 단위의 손님, 개인 방문객들이 찾아와 동물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낸다. 오후가 되면, 다른 농장에 학대받는 동물이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문의하거나 구조된 동물을 데려가달라고 요청하는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다. 보호소 직원들이 농장 관리 일을 하는 동안, 사무실 직원들은 동물보호 관련 법률 제정안을 작성하고, 교육과 홍보용 자료를 만들고, 그 와중에 전국적으로 벌일 동물보호 캠페인까지 기획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해가 질 무렵이면 동물들이 헛간으로 들어와 새로 깐 지푸라기 요에 몸을 누인다. 다 들어온 것을 확인하면 직원이 문단속을 한다. 덩치 큰 동물들의 거처는, 왓킨스 글렌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한 마당으로 통하는 쪽문을 항상 열어둔다. 날이 따뜻하면 소와 양, 돼지들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게 헛간의 큰 문들도 열어둔다. 가금류는 해가 지면 포식동물로부터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에, 닭이나 칠면조들이 지내는 곳은 문을 항상 닫아둔다. 여름에는 해가 늦게, 거의<span style="font-family: Verdana"> 9</span>시가 지나야 진다. 그런 날이면, 기온이 떨어져 선선해질 때쯤 소나 돼지들이 나무 그늘에 모여들어 몸을 식힌다. 어떤 날은 아예 다 같이 밖에서 자다가 새벽에 수탉이 울면 함께 깨어나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들어가며 전문,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a target="_blank" href="http://www.genebaur.com/blogengine.net/"><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355" height="238"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A7%84%EB%B0%94%EC%9A%B0%EC%96%B4.JPG" /></a>진 바우어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Gene Baur<br /> </strong></span>뉴욕 주 북부에 본부를 둔 비영리조직 &lsquo;생추어리 농장&rsquo;의 회장이자 공동 설립자이다. 북미 최대 규모의 가축 구조 및 보호 네트워크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생추어리 농장은, 동물학대를 방지하는 획기적인 법률 개정이 이루어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의 동물보호운동을 21세기형 운동으로 진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진 바우어는 &lsquo;우리 시대의 성 프란체스코&rsquo;로도 불린다. 바우어는 미국의 연방의회 및 주의회에서 여러 차례 동물학대 실태에 대한 증언을 했고, 공장식 축산업의 폭력적 실상을 알리기 위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BC</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NBC</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CBS</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CNN </span>등의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lt;뉴욕 타임스&gt; &lt;워싱턴 포스트&gt; &lt;<span style="font-family: Verdana">USA </span>투데이&gt; &lt;월스트리트 저널&gt; 같은 전국 발행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뉴욕 주 왓킨스 글렌에 거주하고 있다.<br /> <a target="new" href="http://www.farmsanctuary.org"><span style="font-family: Verdana">www.farmsanctuary.org</span></a><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허형은<br /> </strong>학부에서 한국사학을 공부한 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범죄의 해부학』『맛있는 글쓰기의 길잡이』『미국 최고의 교수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자신감』『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8</span>: 테이블 위의 카드』『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1</span>: 빛나는 청산가리』『꿈을 꾸는 구두장이』『헤드 크러셔』『죽음의 닥터』『모란의 사랑』 등이 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0-26 오전 10:46:00이스털리의 ‘세계의 절반 구하기’<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881"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84%B8%EA%B3%84%EC%9D%98%EC%A0%88%EB%B0%98%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span></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NAP<strong>S</strong>HOT<br /> </span><img alt="" width="600" height="2" src="/userfiles/ADMIN/image/%EB%B0%946(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아마레치</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시골로 차를 몰고 가고 있다. 맞은편으로 여인들과 소녀들이 끝도 없이 줄을 지어 도시로 걸어간다. 이들의 나이는 아홉 살에서 쉰 아홉 살까지 다양하다. 제각기 땔감을 져서 허리가 거의 꺾일 지경이다. 등에 진 무거운 짐은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노예 감독이 노예들을 몰아서 가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들은 아디스아바바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유칼립투스 수풀이 있는 곳에서부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황폐한 지역을 지나 땔감을 이고 왔다. 여성들은 도심의 시장에 나무를 가져가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달러에 팔 생각이다. 무거운 땔감을 아디스아바바로 가져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기에, 이것이 그들에게는 하루 수입의 전부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후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BBC </span>뉴스의 웹 페이지에서 땔감 수집업자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살의 소녀 아마레치<span style="font-family: Verdana">Amaretch</span>는 유칼립투스 가지와 잎을 줍기 위해 새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시에 일어나 도시로의 고통스럽고 머나먼 여정을 시작한다. &lsquo;아름다운 자&rsquo;라는 뜻의 아마레치는 네 아이 중 막내이다. 그는 말한다. &ldquo;저는 평생 나무나 이고 다니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너무 가난해서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우리들은 모두 엄마 아빠가 우리를 위해 먹을거리를 살 수 있도록 나무를 지지요. 전 그냥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돈 버는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면 좋겠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서구의 텔레비전 카메라맨들은 에티오피아의 가난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처음으로 알고 나서 호텔에 돌아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들은 상황에 걸맞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중요하겠는가? 나는 이 책을 아마레치와 그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세계의 수백만 아동들에게 바친다.<br /> <br /> <img alt="" width="600" height="2" src="/userfiles/ADMIN/image/%EB%B0%946(1).jpg" /></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제1장</span></strong></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계획가와 탐색가</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4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백인의 의무를 져라 <br /> 오래 참으면서,&nbsp; <br /> 공포의 위협을 은폐하고<br /> 그리고 자존심의 표출을 확인하라 <br /> 단순한 공개 연설을 통해,<br /> 수백 번이나 명백하게 주장되었던,<br /> 다른 이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br /> 그리고 다른 이의 몫을 얻기 위해</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4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백인의 의무를 져라<br /> 평화를 위한 잔인한 전쟁을<br /> 기근의 입을 가득 채워라<br /> 그리고 질병이 그치라고 명하라</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40pt; br: "><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__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 1899년</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든 브라운<span style="font-family: Verdana">Gordon Brown </span>현(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현직 총리였으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옮긴이) 영국 총리는 재무부 장관 시절, 전 세계 빈민의 두 가지 비극 중 하나에 대해서 웅변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월에 그는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을 미처 예방하지 못해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는 비극적 현실에 대해 동정 어린 연설을 했다. 그는 대외 원조를 두 배로 늘리고, 세계의 빈민층을 위한 마셜 플랜<span style="font-family: Verdana">Marshall Plan</span>을 세웠으며, 국제 금융 기금(<span style="font-family: Verdana">IFF</span>: 국제 금융 시장에서 공여국들의 지원 공약에 기초한 채권을 발행하여 이를 원조 자금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옮긴이)을 창설할 것을 촉구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IFF</span>는 향후 원조를 위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억 달러 이상의 금액을 오늘날의 빈민 구제를 위해 차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언급하며 희망을 제시했다. 말라리아로 인한 치사율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약품의 가격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회분에 불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어린이들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는 모기장은<span style="font-family: Verdana"> 4</span>달러에 불과하다. 초보 엄마들에게 단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달러씩을 지급하면 향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간 약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만 건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할 수 있다. 아마레치와 같은 어린이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도록 가족들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원조 프로그램은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고든 브라운은 세계 빈민에 대한 또 다른 비극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는 서구 세계가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span>년간 대외 원조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00</span>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말라리아 치사율을 절반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에 불과한 약품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 세계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00</span>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가난한 가정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00</span>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0</span>만 건의 어린이 사망을 예방할 수 있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달러를 초보 엄마들에게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서구 세계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00</span>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아마레치는 여전히 나무를 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선의의 동정심을 가지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비극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span>일, 미국과 영국 경제는 해리 포터 시리즈 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00</span>만 부를 기다리고 있던 독자들에게 단 하루 만에 배달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도서 판매상들은 소비자들이 이 책을 사 가기 무섭게 서가를 새 책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아마존과 반스앤드노블<span style="font-family: Verdana">Barnes &amp; Noble </span>인터넷 서점은 예약 받은 책들을 소비자의 집으로 직접 배송했다. 물론 해리 포터를 위한 마셜 플랜이나 나이 어린 마법사들에 대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IFF</span>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국제 사회가 부유한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오락거리를 전달하는 데 이와 같이 고도로 효율적인 방법을 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가난한 어린이들에게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품도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바로 이 두 번째 비극에 관한 책이다. 선각자, 유명 인사, 대통령, 재무부 장관, 관료, 심지어 군 관계자도 첫 번째 비극에 대해서 연설한다. 그들의 동정심과 수고는 존경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비극을 말하는 사람은 훨씬 적다. 많은 사람들이 빈민을 돕고자 하는 선의와 동정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러한 두 번째 비극이 발생하는 것은 마치 스크루지가 이 두 번째 비극에 대해 지적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빈민을 도우려는 서구의 거창한 계획의 힘을 믿는 많은 독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계획들을 믿고 싶지만, 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를 뽑기 위한 추기경들의 교황 선거 회의에 어쩌다 걸려든 죄 많은 무신론자처럼 느낄 때가 있다. 빈민 구제를 위한 대계획<span style="font-family: Verdana">Big Plan</span>에 대해 무수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황에서, 마치 추기경들이 대중 가수 마돈나의 차기 교황 임명 소식을 듣게 된 것처럼 나는 이러한 계획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나 자신과 나에 동조하는 많은 사람들은 빈민에 대한 원조를 포기하지 않고, 원조가 이들에게 도달하는지를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만일 부국들이 첫 번째 비극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전을 이루길 원한다면, 우선 두 번째 비극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빈곤 해결에 대한 열기는 이상주의, 높은 기대치, 결과에 대한 실망, 냉소적 반발과 같은 과거의 흐름을 반복할 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번째 비극은 세계 빈곤 문제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지원이 잘못된 접근 방법을 취한 데에서 기인한다. 이 책 역시 대외 원조를 개혁하고 빈민을 부유하게 하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기 위한 올바른 대계획을 결국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보다 더 똑똑한 수많은 사람들이 50년간 수많은 여러 다른 계획들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을 때,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계획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획기적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신은 안심해도 된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았다. 올바른 계획을 가진 것에 대해 야단하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대외 원조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어온 것의 한 증상일 뿐이다. 올바른 계획이란 계획을 하지 않는 것인데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계획가의 실패와 탐색가의 성공</span></strong></span><br /> <br /> 대외 원조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계획가라고 부르고, 대안적인 접근 방식의 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을 탐색가라고 해보자. 부유하고 건강한 어린이들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구하기는 쉬워도, 죽어가는 빈민 어린이들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품을 공급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짧은 해답은 이것이다. 『해리 포터』는 탐색가가 공급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품은 계획가가 공급하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것이 모든 것을 『해리 포터』를 생산하고 분배한 자유 시장에 넘겨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세계의 극빈층 인구는 자신들의 절박한 필요를 채우려고 시장 내의 탐색가에게 동기를 부여할 만한 돈이 없다. 그러나 시장에서 탐색가의 정신은 대외 원조에 대한 건설적 접근에 대한 지침이 될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대외 원조에서 계획가들은 선한 의도를 표방하지만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탐색가들은 일이 되는 것을 찾아서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계획가들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탐색가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수용한다. 계획가들은 무엇을 공급할지를 결정하지만, 탐색가들은 무엇이 필요한지 발견해낸다. 계획가들은 전 지구적 차원의 청사진을 상황에 적용하려 들지만, 탐색가들은 지역적 환경에 스스로 적응한다. 최상위에 속하는 계획가들은 밑바닥 계층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지만, 탐색가들은 밑바닥의 현실을 발견해낸다. 계획가들은 계획에 포함된 사람들이 실제로 필요한 것을 얻었는지에 대한 반응을 듣게 되는 법이 없지만, 탐색가들은 소비자가 만족하였는지를 알아낸다. 새로운 원조 열기에도 말라리아에 감염된 어린이에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품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해서 고든 브라운 총리가 이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까?</p> <p style="text-align: justify">계획가는 그가 이미 가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가난을 기술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문제로 보고 그가 가진 해법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탐색가는 사전에 이에 대한 해답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대신 가난이란 정치적&middot;역사적&middot;제도적&middot;기술적 요인이 복잡하게 뒤엉킨 산물이라는 것을 믿는다. 탐색가는 시행착오를 겪은 실험을 통해서만 개별적인 문제의 해답을 구할 것을 희망한다. 계획가는 외부자도 가난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는다. 탐색가는 내부자만이 문제 해결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대부분의 해결 방법은 내부에서 자생된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컬럼비아대학교 교수이자 유엔 밀레니엄프로젝트(<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Millennium Project</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6</span>년에 미래학자, 사업가, 정책 결정권자, 학자 등이 모여 만든 세계적인 독립 싱크탱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0</span>년 유엔이 채택한 인류 공동의 발전을 위한 협력의 일환으로 &ldquo;절대 빈곤&rdquo; 퇴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옮긴이)의 국장이었던 제프리 삭스<span style="font-family: Verdana">Jeffrey Sachs</span>는 구변이 좋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 늘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지적인 해결책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제프리 삭스는 세계의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 대계획을 제안한다. 이에는 토지의 산출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질소 고정 뿌리혹 나무에서부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AIDS </span>치료를 위한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 보건 계획가들에게 실시간 자료를 공급하기 위해 특별 고안된 휴대 전화, 빗물 재활용 시스템, 배터리 충전소, 말라리아 감염 어린이에 대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 상당의 약품 지급 등─총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49</span>개 개입안─이 포함되어 있다. 삭스 교수는 서구 세계에 비서구 세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도록 촉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나 안타깝게도 그가 내놓은 실행 전략은 그다지 건설적이지 않다. 삭스 교수와 밀레니엄프로젝트에 따르면 유엔 사무총장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개 유엔 기구와, 유엔 국가 조사 팀, 세계은행<span style="font-family: Verdana">World Bank</span>, 국제통화기금<span style="font-family: Verdana">IMF</span>과 그 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30</span>개 부국의 원조 단체 직원들을 총지휘하면서 이 계획을 운영해야 한다. 이 계획은 빈곤 퇴치를 위해 계속되어온 서구의 계획 중 가장 최근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계획가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품을 공급하는 것과 동시에 나머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48</span>건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면서 주의가 크게 분산된다. 그들은 각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말라리아에 감염되었는지, 그리고 수많은 보건소에 얼마나 많은 약품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충분한 지역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약품을 그곳으로 가져갈 요원들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지역의 보건 업무 종사자들은 급료가 적고 일에 대한 성취동기도 낮다. 많은 원조 기관들이 보건 시스템과 말라리아에 대한 여러 가지 개입을 하고 있지만, 지역 보건소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센트짜리 약이 떨어져도, 혹은 이 약이 죽어가는 어린이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있지 않아도, 누구에게 또 무엇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해당 지역에 사는 부모들은 약이 그들에게 도착했는지에 대해 계획가와 소통할 방법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탐색가들은 성취동기 면에서 더 나은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고,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한 가지 물건에 돈을 지불하고자 하는 의지가 크면 그 물건을 저가에 살 수 있다. 탐색가는 이것이 소비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시장은 해리 포터 최신작을 광적으로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span>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span>일에 책을 쥐어준 도서 소매업자, 도매업자, 출판사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이 도서 판매업자, 도매업자, 출판업자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재고가 떨어지지 않도록 유지할 경우 이에 따르는 인센티브가 있다. 수많은 어린이 도서 작가들은 많은 독자를 끌어모아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복지 수당을 받고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싱글맘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J. K. </span>롤링<span style="font-family: Verdana">J. K. Rowling</span>은 악에 승리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대 마법사의 이야기로 히트를 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대열에 끼게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탐색가들은 거대한 계획에 집중하기보다 특정한 임무─가령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약품을 공급하는 업무─의 수행 방법을 고안할 수 있다. 그들은 특정한 한 가지 임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빈민들에게 수익성이 높은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높은 수익을 성취하는 데 적절한 보상을 받는지,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지 시험해볼 수 있다. 우리는 탐색가가 이미 실질적인 혜택을 창출한 경우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 지구적 빈곤 문제에는 참여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외 원조는 주로 계획가들이 주도해왔기 때문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계획가들은 빈곤 퇴치라는 위대한 사업을 약속하는 일에 대해서는 웅변을 잘 한다. 계획가들이 싫어하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세계에 빈곤의 비극을 가중시켰다는 사실이다. 빈민들은 그들의 가난에 대한 전 세계의 무관심 때문에 죽어간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보살핀다고 했던 자들의 비효율적인 노력으로도 죽어간 것이다. 이러한 비극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계획가들의 선의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통감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장 부분)</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img border="2"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265" height="40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C%8C%EB%A6%AC%EC%97%84%20%EC%9D%B4%EC%8A%A4%ED%84%B8%EB%A6%AC.JPG" />윌리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R.</span> 이스털리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William R. Easterly<br /> </strong></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6</span>년간 세계은행에서 일한 개발경제학자로, 현재 뉴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95</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MIT</span>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1</span>년까지 세계은행에서 선임 경제자문위원으로 일했으며, 지구개발센터<span style="font-family: Verdana">Center of Global Development</span>와 국제경제연구소<span style="font-family: Verdana">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span>의 수석 연구원을 역임했다. 그는 오랫동안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러시아 등 수많은 개발 도상국과 이행기 경제 지역에서 연구했으며, &lt;뉴욕타임스&gt; &lt;워싱턴포스트&gt; &lt;월스트리트 저널&gt; &lt;파이낸셜 타임스&gt; &lt;포브스&gt; &lt;포린 폴리시&gt; 등에 기고해왔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년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년 &lt;포린 폴리시&gt; 선정 세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0</span>대 지식인으로 꼽힌 바 있다. 이스털리는 『빈곤의 종말』 저자인 제프리 삭스와 논쟁하면서&nbsp; 서구의 메시아적인 대외 원조과 과거 수치스러웠던 식민주의적 오만의 재탕이라고 비판하였고,&nbsp; 탐색가들이 주도하는 상향식 경제 개발이 계획가들이 주도하는 하향식 거대 원조보다&nbsp; 훨씬 효과적으로 빈곤을 퇴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nbsp; 저서로는 『성장, 그 새빨간 거짓말』(<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이 있고, 공저서로&nbsp;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What Works in Development?</span></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nbsp;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Reinventing Foreign Aid</span></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 등이 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황규득<br /> </strong>남아프리카공화국 프레토리아대학교에서 국제 관계 및 아프리카 정치․경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객원 교수, 외교안보연구원 겸임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학부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들여다보기』(<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10</span>), 『대통령제와 정치적 메커니즘』(<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 『한국의 대개도국 외교』(<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9</span>), 『갈등과 통합의 국제 정치』(<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 『<a href="mailto:정치@영화">정치@영화</a>: 영화 속에서 본 정치』(<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8</span>), 『아프리카의 역사와 정치․경제』(<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7</span>) 등의 공저서가 있으며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에 관한 많은 논문을 썼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0-25 오후 2:22:00《184》2010년 4월 15일<p style="text-align: right"><a target="_blank" href="http://www.yes24.com/24/goods/3494115"><img width="143" height="210"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C%97%90%EC%BF%A0%EC%9A%B0%EC%8A%A4.JPG" /></a></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color: #800080"><span style="font-size: medium"><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4월 15일</strong></span></span></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피터 셰퍼는 우리나라에 상당히 알려진 극작가이다. 그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많지만, 특히 『에쿠우스』(범우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1</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7</span>재판)는 남자 배우가 스타가 되는 등용문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대 에쿠우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대 에쿠우스&hellip;&hellip;&rsquo;하는 남자 배우들의 계보가 있을 정도다(정확하게는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대 알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대 알런&hellip;&hellip;&rsquo;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필적하는 여자 배우들의 계보를 굳이 찾자면 존 필미어의 『신의 아그네스』(예니, 1987)에서 탄생한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대 아그네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대 아그네스&hellip;&hellip;&rsquo; 정도일까?</p> <p style="text-align: justify"><img border="2" hspace="6" vspace="6" align="left" width="256" height="323" alt=""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B%8F%85%EC%84%9C%EC%9D%BC%EA%B8%B0/20110729/%ED%94%BC%ED%84%B0%EC%85%B0%ED%8D%BC.JPG" />밀로스 포만 감독의 &lt;아마데우스&gt;의 원작이 셰퍼의 것이듯이, 그는 숱한 화제작과 흥행작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셰퍼에 대한 평가도 극에서 극을 치닫는다. 이를테면 그에 대한 평가는, 한 사람의 기술 속에서도 크게 엇갈리곤 한다: ⅰ) &ldquo;피터 쉐퍼는 탁월한 극장적 상상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믿을 만한 사상가는 되지 못한다. 쉐퍼는 끊임없이 신과 믿음에 대한 관심을 그의 희곡들에서 표명했으나 현재까지 극작가로서의 능력은 주로 휘황한 무대적 언어의 창출에서 찾아진다.&rdquo; ⅱ) &ldquo;극작가로서 누구보다 대중적 명성을 얻었으면서도 단순한 상업극작가로 주저앉지 않고 진지한 작가군에 포함되는 사람이 곧 피터 쉐퍼이다.&rdquo; (정진수, 『영미 희곡의 세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5</span>). 한 사람이 쓴 글인데도 ⅰ)에서는 극장적 상상력은 뛰어나지만 사상은 빈곤한 작가로, ⅱ)에서는 대중 작가인데도 진지한 작가군에 속한다고 달리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역설이지만, 셰퍼가 악평을 받은 원인은 &lsquo;잘 만들어진 극<span style="font-family: Verdana">well-made play</span>&rsquo;에 있다. 정해진 주제(목표)가 뚜렷하고, 주제 성취를 향해 &lsquo;발단&rarr;전개&rarr;갈등&rarr;절정&rarr;해결'이 빈틈없이 진행되는 플롯에 &lsquo;잘 만들어진 극&rsquo;이라는 평가가 따르는데, 그 말에는 칭찬보다 조롱기가 더 섞여 있다. 거기엔 &lsquo;대박&rsquo; 난 작품을 어떻게 해서라도 흠잡고 싶은 평자들의 질투도 없지 않지만, 실제로 &lsquo;잘 만들어진 극&rsquo;의 대부분이, 선과 악의 극한 대결, 강한 욕망에 맞서는 강력한 방해자(장애물), 분명한 원인과 동기, 의혹과 음모가 밝혀지는 과정이 이끌어내는 단계적인 흥분(점층되는 긴장), 일점 의혹 없는 해결을 공식으로 삼는다. &lsquo;잘 만들어진 극&rsquo;의 비판자들은 그런 작품을 &lsquo;모범적&rsquo;으로 간주할 뿐 아니라, &lsquo;상업적&rsquo;이고 &lsquo;대중의 요구에 부응&rsquo; 작품으로 의심하는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면 셰퍼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앞의 책에 인용된 어느 글에서 &ldquo;나의 희망은 항상 무대 위에 일종의 &lsquo;총체연극&rsquo;을 실현하는 것이다. 언어만이 아니라 의식儀式과 마임과 가면과 주술呪術이 있는 (&hellip;) 그런 연극은 극작가의 연극이자 동시에 연출가의 연극이요, 무언극 예술가의 연극이요, 음악가의 연극이요, 또 당연히 배우의 연극이다&rdquo;고 말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위의 말을 염두에 두고 『에쿠우스』를 읽으면 좋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4</span>년과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75</span>년, 런던과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 셰퍼의 이름을 널리 알린 『에쿠우스』는 이 분야에 하나의 공식을 세운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 분야의 공식이란, 먼저 초엽기적인 사건이 있고, 거기에 탐정이 아닌 정신분석의가 투입되는 것이다. 『에쿠우스』는 대중성(초엽기)과 현대의 지성(정신분석)을 섞어 상업적 성공을 이룬 전형을 제시한 작품으로, 훗날 필미어가 『신의 아그네스』에서 똑같은 공식을 되풀이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에쿠우스』의 알런이 말굽파개로 여섯 마리의 말의 눈을 찌르고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에게 인도되는 것이나, 『신의 아그네스』에서 사생아를 낳은 뒤 태아를 죽여 쓰레기통에 방치한 아그네스 수녀가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에게 인도되는 것은 같은 공식을 띈다. 또 법의 대리인 혹은 합리주의의 화신인 두 명의 의사가, 정신병자를 돌보면서 자신의 역할에 혼란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정체성과 인생관을 되돌아본다는 것도 그렇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두 작품의 흥행 요소를 좀 더 간추려 보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①엽기적 사건에 ②섹스와 ③독신瀆神을 함께 버무리는 것이다. 『에쿠우스』에 나타나는 예수나 성상聖像은 가학적인 사디스트의 모습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그의 도래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한 소년에게 에로티시즘의 빛을 던지고자 하강한 것처럼 느껴진다. 『신의 아그네스』 역시 마리아의 처녀수태를 아그네스라는 평범한 수녀가 되풀이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와 예수 탄생의 기적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줄거리 요약과 분석은 생략하고,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만 간단하게 말해 보겠다. 먼저 『에쿠우스』의 중요한 주인공인 다이사트는 확고한 신의 대리자, 다시 말해 진리의 담지자로 등장하지만, 극의 경과와 함께 그의 회의는 짙어지고 그의 권위와 같은 &lsquo;황금빛 가면&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34</span>쪽)은 떨어지고 만다. 이렇듯 사건을 조사하도록 위임받은 사람이 혼돈에 빠지고 마는 것은, 굉장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전 문학 속에서 화자는 확실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화자는 이야기의 진위나 진실을 보증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대인이 처한 혼란과 회의를 나타내는 인물이 되었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대중문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에쿠우스』의 사건은 일면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바로 &lsquo;눈&rsquo;이다. 즉, 알런이 말굽파개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여섯 마리의 말을 죽였다면, 수수께끼가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신화와 상징 의례 속에서 눈은 &lsquo;지혜&rsquo;나 &lsquo;태양&rsquo;과 동일하며, &lsquo;신&rsquo;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신이란 &lsquo;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비추는 존재&rsquo;였다. 또 눈은 &lsquo;성기&rsquo;와 연관된다. &ldquo;오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제거한 것이 근친상간에 대한 벌로 자신의 성기를 거세한 것을 상징한다&rdquo;(임철규, 『눈의 역사 눈의 미학』, 한길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04</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1</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72</span>쪽)는 프로이트의 유명한 해석도, 알고 보면 많은 고대 자료가 &lsquo;눈과 성기&rsquo;의 상동성을 밝혀 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대인들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신의 양면성이 성기의 실제성과 같다고 여겼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런은 말의 &lsquo;눈&rsquo;을 파냈지만, 그보다 먼저 거세된 아이다. 거세를 성기에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알런에게 행해진 굉장히 다양한 거세의 양태를 볼 수 있다. 우선은 열일곱 살이나 되는 나이에 &ldquo;자기 이름 석 자를 쓸 줄&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50</span>쪽) 모른다는 것. 그걸 &lsquo;사회적 거세&rsquo;라고 하면 어떨까?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는 것 역시, 시각적 쾌락의 거세라는 점에서 성적 쾌락의 거세와 동일하다. 아버지와 완고한 반자본주의 투쟁 방식과 어머니의 종교적 강제 또한 알런을 긴장시키는 심리적 거세에 해당한다. 알런의 어머니는 사건 후에 다이사트를 찾아와 악마라고 말한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5</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136</span>쪽). 이런 것을 보면, 알런의 어머니 도라는 아들에게 균형 잡힌 종교교육을 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도라의 광신과 남편이 &ldquo;종교는 민중의 아편&rdquo;이라고 말하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2</span>쪽은 동전의 양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자식이 부모의 성교를 처음 목격하는 것을 &lsquo;원초경&rsquo;이라고 한다. 원초경을 목격한 자식에게 부모가 그들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해 주느냐에 따라, 또는 원초경을 목격한 아이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아이가 성을 바라보는 태도는 달라진다고 한다. 딱히 원초경이라곤 할 수 없지만, 『에쿠우스』에서 아버지 프랑크가 도색영화관에서 자식을 맞닥뜨렸을 때가, 알런의 원초경에 가깝다. 알런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킨 자신의 치부를 변명하지 않고 좀 더 당당히 아들에게 자신의 행위를 설명했더라면 어땠을까?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경은 앞서 말한 것처럼 &lsquo;자식이 부모의 성교를 처음 목격&rsquo;하는 행위이지만, 자식 편에서 우연히 부모의 성생활을 목격해버린 원초경이 아니라, 부모 편에서 우연히 자식의 성행위(혹은 성에 눈뜨는 징후)를 눈치채버린 원초경을 상정해 보면 또 어떨까? 예를 들어 사춘기 아이가 자신의 수음 장면을 부모나 어른들에게 처음 들키는 것은 역시 원초경이 아닐까? 그것에 대한 주위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수음을 들켜버린 아이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형성하게 된다고 판단되는 장면이 『에쿠우스』에는 있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81</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84</span>쪽). 알런의 아버지는 자신이 우연히 목격한 것을 잘 처리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이런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태도가 알런에겐 심리적 강박이 되었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알런이 말에게 쉽게 빠지게 되는 이유는, <span style="font-family: Verdana">6</span>세 때 처음 본 말과 기수의 당당함에 매혹되었기 때문이지만, 부모와 좋은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런은 자신을 &ldquo;고아&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79</span>쪽)로 여기는 것이며 퇴원을 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151</span>쪽). 알런은 &ldquo;새 아빠를 원&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45</span>쪽)했던 것이다(그런데 이 &lsquo;새 아빠&rsquo;에 대해서는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최소한 알런은 두 부모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느꼈고, 진정한 가족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span>세 때 처음 조우한 말은, 가정을 탈출할 수 있는 성적 몽상을 제공했다. 사방이 막혀버린 위선적이고 폐쇄적인 가정 속에서, 말과 성적 흥분과 종교가 합체해 버린 것이다.(<span style="font-family: Verdana">76</span>쪽)</p> <p style="text-align: justify">기독교의 신은 아주 자주 &lsquo;본다&rsquo;는 동사와 연관되는데, 이 작품에는 &ldquo;신이 보고 계시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80</span>쪽), &ldquo;내가 너를 보고 있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112</span>쪽)는 말이 자주 나온다. 신은 언제 어디에나 편재하면서, 우리를 감시한다. 이것은 중세의 기독교사회가 무너진 다음에도 여전히 서구 사회를 작동하는 원리다. 이와 연관하여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문예출판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8</span>)에 나오는 일절을 읽어 보자: &ldquo;종교 개혁은 인간에 대한 교회의 지배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래의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대체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구나 종래의 형식에 의한 종교의 지배는 매우 느슨하여 실제 생활에서 별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경우 거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이 새로운 형식은 가정생활 일체와 공적인 생활 전반에 걸쳐 어디까지나 엄격하고도 진지한 규율을 요구해 왔던 것이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39</span>쪽)</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용한 대목에서 베버는 &ldquo;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러한 캘빈주의라는 지배 형식이 개인에 대한 교회의 통제 형식 가운데 가장 참아 내기 힘든 것&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40</span>쪽)이라고 쓴다. 베버는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은, 형식(가톨릭의 복잡한 성례를 떠올려 보라) 또는 대리자(교황과 신부들)를 통한 신과의 만남이 아니라, 나의 내면성 속에서 신과 내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로 대면하는 형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종교 개혁은 탈주술화를 완수하는 동시에, 인간 개개인의 내면에 신을 아로새겨 놓는 역설적인 개혁이었다는 것이다. 좀 더 요약하자면, 종교개혁이 신도들에게 자유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반대로 베버는, 종교개혁이 더 촘촘한 종교적 규율을 낳았다는 것이다. 아래는 『에쿠우스』의 한 대목이다.</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66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다이사트&nbsp;&nbsp; (&hellip;) 그대의 신 여호와는 질투심이 강한 신이니라. 그리고 너를 보고 있다.<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신은 너를 영원토록 보고 계시다. 알런. 신이 보고 계시다! 너를 보고 계시다.</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66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알런&nbsp;&nbsp;&nbsp;&nbsp;&nbsp;&nbsp; &nbsp;(공포에 사로잡혀) 눈! 새하얀 눈이 바짝 뜨고! 불길 같은 눈초리가- 온다! 온다!<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 신이 보고 계시다.<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hellip;)<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부드럽게) 에쿠우스&hellip; 고귀한 에쿠우스&hellip; 성실하고 참된&hellip; 신의 종&hellip; 그대-<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 신은- 이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알런. 너제트의 두 눈알을 찌른다).&nbsp;<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hellip;)</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20pt; br: "><span style="color: #006600"><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알런&nbsp;&nbsp;&nbsp;&nbsp;&nbsp;&nbsp; &nbsp;나를 찾아내 봐! &hellip;찾아내! &hellip;찾아내 보라구! 나를 죽여라!&hellip; 죽여 줘! &hellip; <br />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185~187쪽)</span></strong></span></p> <br /> <p style="text-align: justify">알런과 그의 어머니가 바라보는 눈은 바로 그런 내면화된 청교도적인 눈이고(알런의 아버지에겐 &lsquo;노동자의 규율&rsquo;이겠고),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ldquo;이 사건의 밑에 종교가 도사리고 있습니다&rd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84</span>쪽)라고 한 말도 옳다. 기독교의 죄의식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탐욕이나 분노 보다는 성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니, 『에쿠우스』 해석에는 더욱 그럴듯하다. 그러므로 알런과 알런의 초자아를 중계할 부모의 역할이 부재했다는 것, 또 알런 스스로 초자아와 잘 지내지 못했던 것도 맞지만(<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0</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23</span>쪽), 알런의 광기는 신의 독재적인 눈, 시각적 폭력을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도록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족이다. 서구의 눈(시선)은 모두 폭력을 내포한다. 그래서 시선은 &lsquo;지옥&rsquo;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런 눈은 또 어떤가? 존 스튜어트 밀은 어려서부터 고전을 읽으면서, 온갖 주제별로 책을 편집하는 게 취미였다: &ldquo;아버지는 이 유익한 취미를 내가 즐기는 것을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쓴 것을 보자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이것은 참 잘하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누구를 꺼릴 것도 없었고, 또 누가 날카로운 비판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여 식은땀을 흘릴 필요도 없었다.&rdquo;(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 서광사,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3</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span>쪽) 여기서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 아니다. 밀의 아버지가 밀에게 보낸 시선은 폭력이 아니라 자긍심과 안정성을 불어넣어주는 시선이고, 미래에 학자가 될 아들에게 일찌감치 정체성을 부여해준 그런 시선이었다.<br /> <br /> --------------------<br /> <strong>필자 소개</strong><br /> <img hspace="6" alt="" vspace="6" align="left" width="150" height="225" src="/userfiles/ADMIN/image/%EB%8B%A4%EB%8B%A4%EB%8B%A4%20%EC%B9%BC%EB%9F%BC/%EC%9E%A5%EC%A0%95%EC%9D%BC%EC%86%8C%EA%B0%9C.jpg" /><strong>장정일</strong><br /> 시인, 극작가, 소설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84</span>년 &lt;언어의 세계&gt;에 「강정 간다」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4</span>편의 시를 발표한 이래로,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를 해왔다.<br /> <br /> &nbsp;</p>장정일의 ‘독서일기’편집자2011-10-25 오후 1:21:00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p style="text-align: justify"><img alt="" width="600" height="967"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C%9D%B8%EC%A2%85%EC%A3%BC%EC%9D%98%EB%8A%94%EB%B3%B8%EC%84%B1%EC%9D%B8%EA%B0%80%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large"><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머리말</span></strong></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center"><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중요하지만 대개 분명히 생각하기를 꺼려하는 주제.<br /> </span></p> <p style="text-align: right"><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애슐리 몬태규, 『인류의 가장 위험한 신화: 인종주의라는 궤변』(1954)</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인종주의(<span style="font-family: Verdana">racism</span>)는 무엇이고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남는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쉽고 간단하고 명료한 답을 원하는 독자들에겐 이 책이 실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종주의는 범위가 넓고 복잡하고 논쟁적인 이슈다. 인종주의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명료한 답이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짧고 협소하게 정의를 했다가는 잘못 나가기 쉽다. 맥락에 따라 짧고 간명한 정의가 불가결할 때도 있지만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광범위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이런 짧은 책에서조차 인종주의를 다루려면 상대적으로 복잡한 접근이 필요하다. 간결하고 대중적인 책이라 해서 지나치게 단순화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주의는 여러 가지 차원을 지닌 현상이지만, 정치적 스펙트럼에서는 형식적이고 상투적인 사고에 매여 왔다. 정치 활동가들은 자기네 지지기반을 움직이기 위해 인종주의를 너무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었다.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정치학자들이나 역사가들도 그런 단순화의 유혹에 굴복하기 쉽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연구를 하고 책을 쓰면서 인종주의 논쟁이 경솔하게 정의되거나 치밀하지 못하게 일반화되거나, 분석이 부실해지지 않게 하는 데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보기에 인종주의에 대한 그동안의 학문적인 논쟁이나 대중적인 토론은 단순히 인종주의와 인종주의 아닌 것, 인종주의자(<span style="font-family: Verdana">racist</span>)와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가르는 데에만 치중해왔다. 과장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인종주의에 대해 사람들 깊이 이해할 수 없도록 방해해온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것이다. 인종주의를 간명하게 정의한 뒤 누가 &lsquo;진짜&rsquo; 인종주의자이고, 누가 아닌지를 &lsquo;빨리&rsquo;, &lsquo;확실히&rsquo; 가려내는 데에만 모두 몰두해왔다는 점 말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 후반부에서 나는 인종주의의 다양한 정의에 대해 토론할 것이다. 그중에는 재앙이다 싶을 만큼 혼란스러운 것도 있고, 수많은 반(反)인종주의자들에게 인기 있는 공식 즉 &lsquo;편견+권력=인종주의&rsquo;라는 명제에 맞지 않는 정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또한 관습적인 인종주의 발상이, 그 유용성이 사라진 뒤에도 살아남아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할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책은 아주 간단한 소개서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깊이 있는 이해를 맛볼 수 있게 해주려 애썼다. 이 책이 인종주의에 대한 기존 소개서들과 다른 점은 또 있다. 대부분의 개괄서는 주로 반유대주의나 반아일랜드 정서를 인종주의의 중요한 측면으로 다룬다. 이 책은 인종주의가 백인 문화나 백인 개개인들의 전유물이라는 전제를 탈피해, 계급과 젠더를 비롯한 수많은 분류와 연결돼 있음을 인식시켜줄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이 책에서 나는 우리가 직면해야 할 고통스럽고 야만적인 현실을 모두 다루지는 않았다. 인종주의자들의 행위 때문에 희생된 것이 분명한 사람만 해도 수백만 명에 이른다. 인종주의라는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고 상처를 입히는 짓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종주의를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lsquo;인종&rsquo;이라는 개념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생물학의 영역에서조차 광범위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나치즘이 패망한 뒤 수많은 민족국가들은 법률적, 정치적, 교육적 수단을 동원해 인종주의와 싸웠다. 어떤 나라들은 &lsquo;포지티브 액션&rsquo;, &lsquo;어퍼머티브 액션&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p><strong>1</strong></sup></span> 등의 프로그램을 도입해 과거의 인종차별로 말미암은 피해를 중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조치가 역풍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에 반대하는 이들도 인종주의적인 목적을 드러내놓고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포지티브 액션 혹은 어퍼머티브 액션이 역(逆)인종주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지만.</p> <p style="text-align: justify">참 혼란스러운 일이다.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을 받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행위나 의도가 애국심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혹은 인종이 아닌 민족문화나 민족(부족)과 관련된 문제일 뿐이라고 우긴다.<sup><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strong></sup> &ldquo;그런 기준으로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종주의자&rdquo;라는 주장을 덧붙이기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일반적인 &lsquo;편견&rsquo;과 이른바 인종주의라는 것의 차이를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인류는 언제나 무리를 지어 살아왔고, 이런 집합성은 보편적인 특성에 해당한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언어나 영토, 혹은 다른 표지들을 이용해 소속 집단의 경계를 표시하는 습성이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외부인, 이방인을 가려낸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프랑스 철학자 피에르-앙드레 타기에프(<span style="font-family: Verdana">Pierre-Andr&eacute; Taguieff</span>)는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현상을 &lsquo;헤테로포비아(<span style="font-family: Verdana">heterophobia</span>)&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sup><strong>3</strong></sup></span>라 불렀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부인이나 낯선 이들을 꺼려할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역사적&middot;인류학적 증거들을 살펴보면 이방인이 늘 적대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속성 중에는 적대감이나 편견만 있는 게 아니다. 감정이입, 호기심, 관용, 대화, 협력 같은 것들도 그 못지않게 자주 발현되는 인간의 속성이다. 외부 사람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두려움과 미움을 받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낯선 이들을 우러러보거나 성적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종종 겪는 일이지만, 이중적인 감정으로 외부인들을 바라보거나 부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인종은 현대적인 개념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에서는 그 비슷한 것을 찾아보기도 힘들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인종이라는 주제는 정말 지뢰밭 같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인종과 인종주의에 관한 문제들을 둘러싼 이런 혼란들과 비생산적으로 양극화된 견해를 넘어 독자들이 보다 명료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p> <div style="text-align: justify">&nbsp;</div> <hr />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 affirmative action</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진학&middot;취업 등에서 혜택을 주는 조치.</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2. race</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는 통상 &lsquo;인종&rsquo;을 가리킨다. ethnic은 &lsquo;부족&rsquo;, &lsquo;민족&rsquo; 등 여러 의미로 쓰이는데, 인류학&middot;민족지학(民族誌學)적 관점에서 부족&middot;소수민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될 때가 많다. nation은 근대 국민국가&middot;민족국가의 국민&middot;민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책의 저자는 태생적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lsquo;인종 집단&rsquo;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미국 내 흑인과 같이 통칭 &lsquo;소수인종&rsquo;으로 불리는 집단을 지칭할 때 &lsquo;racial group&rsquo; 대신 &lsquo;ethnic group&rsquo;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래서 책 속의 &lsquo;ethnic&rsquo;이라는 용어는 문맥에 따라 &lsquo;부족&rsquo;, &lsquo;민족&rsquo;, &lsquo;소수집단&rsquo; 등으로 각기 다르게 옮겼다.</span></p>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3. heterophobia</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는 보통 자신과 다른 성별의 사람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는 &lsquo;이성(異性) 혐오증&rsquo;을 뜻하나, 여기서는 이방인&middot;외부인 혐오증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span></p> <hr /> <p style="text-align: justify">(머리말 전문)</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br /> <strong>저자 소개<br /> 알리 라탄시 </strong><span style="font-family: Verdana"><strong>Ali Rattansi<br /> </strong></span>맨체스터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런던 시티대학교 사회학과 방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인종주의, 근대성, 정체성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Racism, Modernity and Identity</span></em>』(공저), 『&lsquo;인종&rsquo;, 문화, 차이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Race', Culture and Difference</span></em>』(공저), 『인종주의와 반인종주의: 불평등, 기회, 정책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Inequalities, Opportunities and Policies</span></em>』(공저), 『마르크스와 노동의 분리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Marx and the Division of Labour</span></em>』, 『포스트모더니즘과 사회 <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Postmodernism and Society</span></em>』(공저) 등의 책을 펴냈다.<br /> <br /> --------<br /> <strong>역자 소개<br /> 구정은<br /> </strong>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문화일보를 거쳐 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천 가지 얼굴의 이슬람, 나의 이슬람』『세계의 신화』 등의 책을 번역했다.<br /> <br /> <span style="color: rgb(153,0,0)">--------<br /> ★</span>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br /> &nbsp;</p>신간 제1장 공개편집자2011-10-24 오후 2:44:00게이건의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p style="text-align: justify"><img width="600" height="873"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F%B8%EA%B5%AD%EC%97%90%EC%84%9C%20%ED%83%9C%EC%96%B4%EB%82%9C%20%EA%B2%8C%20%EC%9E%98%EB%AA%BB%EC%9D%B4%EC%95%BC/%EB%AF%B8%EA%B5%AD%EC%97%90%EC%84%9C%ED%83%9C%EC%96%B4%EB%82%9C%EA%B2%8C%ED%91%9C%EC%A7%80.JPG" /><br /> <br /> <br /> <br /> <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1&nbsp;</span></strong></span><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nbsp;</span><span style="font-size: large"><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우리는 유럽을 너무 모른다</span></span></strong></p> <p style="text-align: justify"><br />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7</span>년 <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월, 유럽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개월 동안 지낸 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lsquo;이런, 가구를 전부 어디다 치웠더라?&rsquo;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내가 변변한 가구 하나 사 놓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사무실 한가운데에 러닝머신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누군가(아마 나였을 것 같지만) 밖에 내놓으려다 깜빡 잊은 듯했다. 주인이 야반도주한 양 사무실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오랫동안 비워 놓았는데도 예상외로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놀랍기까지 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내가 유럽으로 떠나기 전 잘 알고 지내던 한 변호사는 이렇게 물었다. &ldquo;두 달이나 유럽에 간다고? 사무실은 어떡하고?&rdquo; 다른 변호사도 물었다. &ldquo;여행 잘해. 그건 그렇고 사무실은 어떻게 할 참이야?&rdquo; 또 다른 변호사 역시 물었다. &ldquo;사무실 문을 아주 닫아 버리는 거 아니야?&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나도 몰라, 모르겠어, 모르겠단 말이야.&rdquo;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것뿐이었다. 기일이 잡힌 재판, 날아온 출석요구서가 여러 건 있었다. 쌓아 놓으면 발목이나 무릎, 아니 어깨 정도까지 올라올 서류에 치이며 하루하루를 숨 가쁘게 살아가던 중이었다. 두 달 동안 유럽에 간다고? 이렇게 할 일이 태산인데 어떻게? 일단 유럽에 간다는 생각을 접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변호사 친구 한 명이 전화에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뒤늦게 밤중에 확인해 보니 이런 말이었다. &ldquo;용기를 내서 휴가 다녀와.&rdquo; 그 친구와는 흉금을 털어놓는 친밀한 사이여서 얼마든지 일을 맡기고 휴가를 갈 수도 있었다. &ldquo;알았어, 그러지 뭐.&rdquo;라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며칠 후 꽉 채운 두 달 동안 사무실을 비우고 유럽에 갔다 올 작정이라고 했더니 그 역시 대뜸 &ldquo;사무실은 어떡하고?&rdquo;라고 물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변호사가 두 달이나 일을 쉰다는 것은 일반인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년을 통째로 쉬는 것과 맞먹는다. 업무의 성격상 사무실을 두 달 비운다는 것은 리처드 버턴(<span style="font-family: Verdana">Richard Burton</span>)이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탐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회과학자가 두 달 동안 연구한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ldquo;두 달 동안 뭘 연구할 수 있겠어?&rdquo; 그러나 변호사는 유럽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두 달이면 충분했다. 아니 너무 긴 시간이었다. 아닌 말로 하룻밤 꼬박 새워서 보고서를 대충 만든 다음 제출해 버리면 그만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 말은 농담이다. 유럽을 너무 만만하게 본다고 오해할까 봐 다시 말하지만 지금 한 말은 농담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당시 나는 유럽에 가기가 무척 겁이 났다. 왜냐고? 첫째, 나는 파리에 가는 게 정말 싫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둘째, 나는 어디에 가서 혼자 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파리 같은 도시에 가서 혼자 지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짓는 것, 즉 집에서 가끔 듣는 예수회 설교 테이프에서 말하는 죽을죄를 짓는 일이다. 그 테이프에서 설교자는 혼자 있을 때, 달리 말해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을 때 사람은 죄를 짓게 된다고 강조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게 따지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대 시절 파리를 여행했을 때 나는 줄곧 죄를 지으며 돌아다녔던 셈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때 나는 어느 누구와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무작정 돌아다녔다. 아는 유럽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ldquo;오, 파리라고? 거기 굉장히 멋진 곳 아냐?&rdquo; 맞다. 멋진 곳이다. 하지만 이틀 동안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내 봐라. 나중에는 참다 못해 온갖 욕 같은 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여러 해 동안 사무실에 파리 시내를 찍은 대형 사진을 한 장 걸어놓았다. 루브르 박물관 쪽으로 향하면서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포드 자동차의 모델 <span style="font-family: Verdana">T</span>를 중심으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27</span>년의 파리 시내 풍경이 담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80</span>도 광각의 흑백 파노라마 사진이었다. 트럭운전사노동조합의 조합원 등 나를 찾아온 고객들은 그 사진과 옆에 걸린 파리 시내 지하철 노선도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가끔 &ldquo;이야, 이거 대단한데. 파리를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rdquo;라고 물어보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하! 매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사실 그 사진은 혹시 유럽에 갈 일이 생기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벙어리처럼 지내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를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서 걸어 놓았다.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불쌍했던 대학교 친구 짐이 생각난다. 짐은 대학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학년 여름 『레츠고 유럽(<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Let&rsquo;s go Europe</span></em>)』 책 한 권 달랑 들고 유럽 일주 배낭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이 심해졌고 급기야 음식을 먹는 것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중단했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돌아다닐 기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간신히 보스턴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해 비행기 표 살 돈을 부쳐 달라고 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어머니는 &ldquo;아니, 얘야. 이게 웬일이니!&rdquo;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짐은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span>~<span style="font-family: Verdana">3</span>주 만에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말문이 쉬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어느 날 밤 잠자리에서 머리맡에 있던 『천로역정(<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The Pilgrim&rsquo;s Progress</span></em>)』을 우연히 펼쳐 들었다. 첫 페이지에서 &lsquo;전도자&rsquo;가 &lsquo;크리스천&rsquo;에게 다가와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전율을 느꼈다. 우리 조상은 자유를 찾기 위해 순례자로서 이 땅에 오지 않았나? 그런데 그 후손인 나는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구나. 최근에 휴가를 즐긴 게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가면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지?</p> <p style="text-align: justify">내 생각은 마구 뻗어나갔다. 그렇다. 여기 미국 땅에서도 나는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유럽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닌가? 마음이 차츰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최근 몇 년 동안 나는 &lt;뉴욕 타임스(<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New York Times</span></em>)&gt;에서 가장 &lsquo;정치적인&rsquo; 지면은 일요판의 여행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ldquo;유럽에 관한 진짜 뉴스가 담겨 있습니다.&rdquo;라고 그들이 홍보하듯. 신문을 읽을 때면 유럽의 심각한 실업 문제, 사회민주주의의 붕괴 등에 관한 소식이 실린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면을 훑어본 다음 곧바로 여행면을 펼친다. 거기서는 앞면에는 감히 싣지 못하는 기사, 즉 유럽은 점점 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고 있다는 진짜 뉴스를 볼 수 있다. &lt;뉴욕 타임스&gt;의 &lsquo;진지한&rsquo; 지면들이 애써 눈감고 있는 사실, 유럽이 미국을 앞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행면은 나지막한 소리로 웅얼거린다.<br /> <br /> <img width="600" height="393" alt="" src="/userfiles/ADMIN/image/%EC%8B%A0%EA%B0%84%EC%A0%9C1%EC%9E%A5%EA%B3%B5%EA%B0%9C/0810--/%EB%AF%B8%EA%B5%AD%EC%97%90%EC%84%9C%20%ED%83%9C%EC%96%B4%EB%82%9C%20%EA%B2%8C%20%EC%9E%98%EB%AA%BB%EC%9D%B4%EC%95%BC/%ED%95%9C%EC%82%B4%EC%9D%B4%EB%9D%BC%EB%8F%84%EC%A0%8A%EC%9D%84%EB%95%8C.JPG" /><br /> <br /> 여행면을 즐겨 읽다 보면 한 번쯤은 살아 보고 싶은 유럽의 도시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B</span>&rsquo;로 시작되는 도시라면 바르셀로나, 브뤼셀, 볼로냐, 그리고 브루게가 있다. 그럼 미국에는 어떤 도시가 있더라. 아, 볼티모어, 배턴루지, 베이온이 있지. 그런데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B</span>&rsquo;로 시작되는 이들 도시에 사는 하층 계급의 청소년들에게 &l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B</span>&rsquo;라는 글자는 곧 &lsquo;총알&rsquo;(<span style="font-family: Verdana">bullet</span>)을 상징한다. 그곳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8</span>세에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0</span>세 된 아이들은 대부분 총격전이 일상이 된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너무 미국을 깎아내리는 것인가?&nbsp; 그다음 글자 <span style="font-family: Verdana">C</span>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D</span>로 가 보자.&nbsp; 유럽에는 코펜하겐과 도빌이 있고,&nbsp; 미국에는 클리블랜드와 디트로이트가 있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nbsp;E</span>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F</span>로 시작하는 도시는 뭐가 있더라?</p>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식으로 쭉 가다 보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Z</span>에 이르게 된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Z</span>? 어떤 도시가 생각나는가? 혹시 취리히(<span style="font-family: Verdana">Zurich</span>)가 떠오르지 않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nbsp;</p> <p style="text-align: justify"><span style="font-size: medium"><strong><span style="text-align: justify; font-family: '맑은 고딕'">취리히에서 맛본 평등과 풍요</span><br /> </strong></span><br /> 솔직히 말하자면 취리히를 방문한 게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993</span>년 나는 격동기의 모스크바에 들렀다. 왜 갔느냐고? 음, 공산주의가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건 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세계 역사의 일대 사건이니까. 약간 늦기는 했지만 직접 가서 그 현장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갔다. 그러나 사실은 그 무렵 나는 누군가와 관계가 붕괴되는 일을 겪었고, 우울한 기분에 잠겨 있던 차에 미즈(<span style="font-family: Verdana">Ms</span>.) <span style="font-family: Verdana">O</span>를 만나 모스크바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다. 나는 여자를 만나려고 모스크바에 갔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모스크바까지 가는 비행시간이 무척 길었기에 시차 적응도 겸해서 중간 기착지에서 하루 쉬기로 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공산주의가 무너졌듯 나도 무너져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취리히에 간 것은 아니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서유럽에 들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막연히 취리히는 지루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진정한 목적지는 모스크바였고, 그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취리히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잠깐 쉴 작정이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미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O</span>는 아마 웃을 테지. &ldquo;취리히라니! 돈이라도 맡겨 놓았나 보군요.&rdquo;&nbsp;모스크바처럼 보드카에 디프테리아균을 타 마실 것 같은 도시에서 산다면&nbsp;취리히를 비웃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nbsp;대체 취리히에서 무슨 스릴을 맛볼 수 있겠는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러나 막상 거리를 돌아다니자 숨이 턱 막혔다. 세상에나!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부유한 도시, 단순히 부유한 게 아니라 우아하고 세련되게 부유한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지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사이에 유럽이 이처럼 많이 변하다니!&nbsp;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span>년 동안 <span style="font-family: Verdana">GDP</span>가 꾸준히 성장한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봤다!&nbsp; 밀라노에서 스톡홀름에 이르는 유럽의 숱한 도시가&nbsp; 미국의 잘 사는 도시를 바짝 뒤쫓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nbsp; 노르웨이 같은 몇몇 나라의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인당 <span style="font-family: Verdana">GDP</span>는&nbsp; 이미 미국을 앞질렀음을 실감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이 위에 숫자로 표현된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span>인당 <span style="font-family: Verdana">GDP</span>가 아니다. 누구나 골고루 잘 산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세계에서 잘 산다고 꼽히는 나라들은 대체로 좌파 성향이 강하다. 이 말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lsquo;돈&rsquo;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오래된 도시 쾰른에서는 곳곳에서 그 이름 그대로 향수(<span style="font-family: Verdana">cologne</span>) 냄새가 났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제일 괜찮다는 도시라 해도 공원에 오줌 냄새가 진동을 한다.</p> <p style="text-align: justify">몇 가지 더 비교를 해 보자. 먼저 빈곤 노인 문제를 따져 보면, 미국의 경우 노인 인구 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4.7</span>퍼센트가 가난에 시달린다. 하지만 스웨덴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7.7</span>퍼센트, 독일은 <span style="font-family: Verdana">10.1</span>퍼센트(대부분 구동독 지역)에 불과하다. 빈곤 아동 문제는 또 어떤가? 미국의 경우 전체 아동 중 <span style="font-family: Verdana">21.9</span>퍼센트가 빈곤 아동으로 분류되는 데 반해 독일은 그 비율이 <span style="font-family: Verdana">9.0</span>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이 역시 대부분 구동독 지역의 아동이다). 그래프와 표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미국과 유럽을 서로 비교해 보라. 보고, 만지고, 냄새도 맡아 보라. 사회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유럽의 경우 어디를 가든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게 내가 숨이 턱 막힌 이유였다. 평등하고 풍요로운 나라여서 보고 맛보고 만질 게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마음껏 돌아다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다. 또 질서 정연했다. 가난한 사람들로 인한 무질서가 눈곱만큼도 없는, 그런 완벽한 질서를 엿볼 수 있었다. 뭐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 잔, 아침에 먹는 시리얼 한 사발조차 완벽했다. 심지어 제자리를 벗어난 것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야 미국도 이렇게 될 수 있을까?</p> <p style="text-align: justify">물론 미국도 노력하면 안 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빈곤층이 많아서 무질서를 없애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 무질서 때문에 유럽처럼 모든 게 완벽할 수 없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취리히에서는 가능한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ldquo;이봐, 취리히는 원래부터 살기 좋은 도시잖아?&rdquo; 물론 그렇다. 하지만 취리히 말고도 코펜하겐, 뤼베크 등 유럽에는 살기 좋은 도시가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 오후 취리히 시내를 한 블록 두 블록 거닐며 부티크, 카페, 향수 전문점, 글로벌 은행과 제비꽃이 만발한 강둑 등을 둘러보았다. 모두 나름대로 완벽했다. 빈곤하지 않으면 도시 전체가 마치 미술관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곤층이 상대적으로 적은 선진국에서는 사적 영역에서 흘러넘친 행복(<span style="font-family: Verdana">well-being</span>)이 공적 영역으로 흘러들고, 그 결과 누구나 봉봉사탕을 맛보듯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종일 봉봉사탕만 먹고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날 늦게 향수 전문점과 부티크 사이에 있는 온통 하얀색과 노란색 페인트로 칠한 아주 작은 서점에 들어갔다. 그 안의 책들도 하얀색과 노란색뿐이어서 책 자체가 무언가 패션을 말하는 듯했다. 점원이 나왔다. &lt;엘르(<em><span style="font-family: Verdana">Elle</span></em>)&gt;에서 막 튀어나온듯 하얀색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었다. 오, 뭐라고 말 좀 붙여 봐!(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 저, 저, 혹시, 영어로 된 책이 이, 있나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ldquo;아, 죄송합니다만 여기에는 독일어로 된 철학책밖에 없어요.&rdquo;</p> <p style="text-align: justify">그렇군. 아무렴, 그렇지. 비틀거리듯 책방 밖으로 나오는데, 쇼펜하우어가 내 등 뒤에서 연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다.</p> <p style="text-align: justify">아,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