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부터 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엔 늘 좋은 일이 있었다. 서준환·김경주형과의 인터뷰를 의뢰받은 건 일주일 전이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덥석 수락해버렸다. 서준환형, 김경주형에 대한 알 수 없는 부채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속 희곡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궁금했다. 성급하게 대답을 해버렸고 곧 후회했다. 인터뷰 전날 밤,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누군가’를 원망했었다. 비가 왔으므로, 그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비로 젖은 길을 따라 내려갔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고양이 세수’란 카페는 김경주형의 아지트다. 나는 형을 아주 좋아하므로 그 카페 역시 좋아하고 있었다. 그곳 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작고 야윈 그의 등은 그의 하얀 노트북과 함께 하나의 풍경이었다. 나는 이따금 쑥스러워서 모른 척 그 풍경을 지나쳤고, 가끔은 안부와 근황을 나눴다.
오후 2시. 카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그들의 희곡집을 뒤적이면서 그들이 오지 않거나 아주 천천히 오기를 바랐다. 동시에 어서 그들이 함께 나타나 내 앞에 앉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오후 2시 8분. 자다 일어난 머리로, 작고 마른 얼굴에 둥글고 큰 눈을 달고 김경주형이, 먼저, 나타났다. 형은 능숙한 손길로 카페 난로에 불을 붙였다. 마치 주인처럼, 그 옆에 앉아서 우리는 말없이, 때로는 수다스럽게, 그를, 기다렸다. 시켜놓은 커피가 조금씩 식어갈 무렵, 그러니까 오후 2시 12분. 고집 세 보이는 얼굴에 날카로운 눈빛을 달고, 가죽 점퍼를 걸친 서준환형이 들어왔다.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거나, 인사를 했다. 익숙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무슨 주제가처럼. 우리는 조금 더 구석진 자리에 모여 앉았다. 결국 인터뷰 주선자인 김민정 시인이 오기 전, 이야기가 시작되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 마치 이 자리가 마치 우연처럼. 정확히 오후 2시 32분 0초와 60초 사이의 일이다.
유희경│그냥, 편하게 대화하시면 될 것 같아요. 책이 참 제때 나왔잖아요. 왜 제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앞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서준환│나는 웹진 <웅진 뿔>에서 장편을 연재하기로 했어. 그리고 내년에는 소설책 두 권이 출간될 예정이야. 그게 끝나면 내년에는 장막극 두 편을 쓰려고. 생각해놓은 게 있거든. 발표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결정이 안 됐지만. 다시 ‘드라마톨로지 시리즈’에 실어도 좋고. 아무튼, 지금 당장 발등의 불은 장편 연재지.
유희경│약력에 있네요. 곧 출간될 작품이 ‘여럿’ 있다, 라고요. (웃음) 경주형은 어떻게 지내요? 형이 우리나라 ‘문학인’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 아닐까? 가끔 보면 몸이 하나가 아닌 거 같아. 오늘은 머리에 까치집까지 짓고 오셨구만. (웃음)
김경주│늦잠을 자서. (웃음) 지금은 희곡집이 나와서 움직이려 하고 있어. 공연을 해야 의미가 있기 때문에. 썼으니까 공간을 가지고 움직이는 작업을 해야지. 가깝게는 다음 달 초에 이음아트라는 서점에서 낭독회가 있어. 그리고 내년 ‘혜화동1번지 동인 페스티벌’(‘혜화동1번지’는 ‘대학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보기 드문 연출가 동인 집단으로 1년에 한두 차례 혜화동1번지 동인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에 「블랙박스」를 공연해보려고 추진 중이야. 책은 다섯 권 정도 나올 예정이야. 일단, 2주 후에 시집이 나올 예정이고, 버트런드 러셀B. Russell 책을 포함해서 번역한 게 두 권, 그리고 <시사IN>에 연재한 원고를 출간 예정이야.
유희경│정말이지, 글 쓰는 사람으로 두 분의 정력적인 활동과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나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죠. 그런데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은, 희곡집을 읽고 공연을 올리겠다고 연락을 해온 곳은 없는가, 였거든요.
김경주│사실 그건 조금 단계적인 건데, 처음에는 책이 언론에 노출이 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연극계에서 징후를 발견해야 하고 문학계에서는 문학적인 가치를 인정해줘서, 대중적으로 다가가야 하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미디어·언론 쪽에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주는데, 문학계나 연극계에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 같네. (웃음) 그래서 나름 노력을 하고 있고. 아무래도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겠지.
유희경│물론. 그렇죠. 희곡은 공연으로 완성되는 거니까. 그런데 문인들이 희곡을 쓰는 것에 대한 연출가들의 반응은 어때요? 긍정적이에요?
서준환│사실은 되게 하고 싶은 이야기야. 우리는 희곡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고, 그 애정으로 쓰고 있는 건데, 연극 쪽 반응은, 내 경험을 빌리자면 사실, 그리 호의적이지 않아. 문학하는 사람들이 연극에 기웃거리거나 희곡을 쓰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 그런데 이 기회에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건 우리는 문학으로 시작했지만, 희곡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고 문학 장르에서 도외시되는 상황을 가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의미에서 연극인들의 절대적 우군이지, 절대 연극인들의 영역을 침해하거나 희곡을 함부로 다루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야. 물론 장정일 선배가 이 책 프롤로그에서 말했듯이, 문학하는 사람들도 희곡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와서 그 사이 칸막이를 없애야지. 더 넓은 지점을 생각한다면 연극과 문학도 지금처럼 완전히 갈라져 있는 상태보다 조금은 서로 융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김경주│같은 맥락의 정서를 공유한 상태에서 우리가 움직인 거야. 우리의 취지는 희곡이란 장르를 살리자는 데 있거든. 연극을 살리자, 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 큰 의미일 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고. 기본적으론 희곡을 바탕으로 한국 문학과 연극의 장르 간 경계를 없애보자는 취지였어. 아직 연극인들은 다른 장르의 사람들이 연극에 대해 우호적으로 표현할 때 그저 관심 정도라고 생각하지, 그에 대한 오래된 짝사랑들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아. ‘드라마톨로지 시리즈’에 참여한 사람이나, 참여할 사람들 중 연극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없어. 기본적으로 희곡에 대해 순정이나 짝사랑을 기본적으로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 거지.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는 게 우리의 소박한 취지라고 보면 돼.
유희경│그 ‘짝사랑’은 문학 활동 전인 거죠? 희곡을 쓰기 시작했던 때 얘기를 해주세요. 처절할수록 좋아요. 읽는 사람들에겐 힘이 될 테니까.
서준환│나의 경우는 그렇지. 문학하겠다는 생각을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사이에 했었는데, 당시 소설을 보니 재미가 없더라고. (웃음) 그런데 희곡은 재미있었어. 희곡을 쓰고 싶어서 연극원에 들어간 거고, 계속해왔지. 근데 희곡은 신춘문예 같은 몇 개 공모로 데뷔하는 것 말고는 작가로 활동할 길이 별로 없는 거야. 소설은 참 많고 가깝고. 그래서 정말 본의 아니게 소설을 먼저 쓰게 된 거지, 애초부터 관심은 희곡에 있었어. 지금도 순정은 희곡에 닿아 있고. 결국 다 같은 문학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김경주│어렸을 때 주변에 연극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추리닝 바람(‘추리닝 바람’은 김경주형이 이끌고 있는 다문화 집단의 이름이기도 하다)에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알게 됐지. 실제로 나는 공연보다는 만들어져가는 연극을 더 많이 본 것 같아. 정작 공연에는 초청받아본 적이 없었어. 폐교에 모여서 만들고 연습하는 걸 보면서 ‘뭐 이런 몹쓸 인간들이 있나’ 생각했거든. (웃음) 사실, 그들의 헤게모니적인 열정들이 부러웠어. 뭔가를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것 자체가 20대의 내가 갈구하고 있던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그 친구들이 내가 혼자서 끼적거리는 것을 알게 된 덕분에 한 편을 올렸는데, 너무 큰 희열을 느꼈어. 이거 재미있다! 그래서 희곡을 열심히 읽었지. 읽다 보니 희곡이 굉장히 시적이다라고 생각했었던 거야. 그래서 희곡 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 그러면 시 공부도 될 거야. 그런 생각으로 극작가로 데뷔하기 위해서 열심히 준비했지. 나는 촌놈이어서 ‘입봉’ 방법이 신춘문예밖에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열심히 응모했는데, 내는 족족 떨어지는 거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희곡을 보내면서 시를 함께 보냈는데 덜컥 시가 된 거지. 서울로 올라와 살게 됐을 때 사실, 시보다도 나는 연극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었어. 이전에도 서울에 잠깐 올라오면 네 편씩 보고 내려갔으니까. 그런데 정작 서울에 올라와서 6, 7년 가까이 희곡을 썼는데도 올릴 기회는 없었어. 내가 하고 싶은 실험극 형태의 것을 올릴 기회가 없었던 거야. 대학로가 이미 리얼리즘 풍토로 변해가고 있었으니까. 정말 우연치 않게 혜화동1번지 동인인 박정석 연출가를 만난 덕분에 연극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지만.
유희경│결국은 희곡을 썼는데, 공연할 기회가 없었단 소리네. 부정적이기도 하고. 판이 작은 건가? 아까 얘기했던 부정적 시각도 한몫하는 거겠죠? 그런데 외국의 경우는 시, 소설 쓰는 사람이 희곡을 쓰는 경우도 많잖아요?
서준환│정말 오랫동안 생각해온 부분인데, 외국의 경우에는 문학의 시작을 희곡으로 하지. 그에 대한 이해가 있은 다음에 시도 소설도 쓰는 거야. 그래서 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거 아닐까. 심지어 철학자들도 희곡을 쓰니까. 그런데 한국의 경우에는 아마도, 희곡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모호하고 번거롭게 여겨오지 않았나 싶어. 그래서 문자에 중점을 두고 근대 문학이 수용되고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과정에서 그런 의식이 굳어져버린 게 아닌가 생각해.
유희경│저는 비교적 최근까지 대학로에서 활동을 했으니까, 대학로 분위기를 말하자면, 대학로에서는 작가가 없다, 희곡이 없다고 많이들 얘기해요. 물론 여기서 희곡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리얼리즘적 사건에 기반을 둔 것이거나 뮤지컬 같은 거죠. 반면 부조리극이나 실험극 등의 영역은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아요.
서준환│글쎄. 이번에 우리가 이런 책을 낸 데에는 대놓고 이야기는 안 했지만,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어. 요즘 대학로의 공연 작품들이 대부분 번안극이거나 뮤지컬 경향인 것 같아. 사실 이런 것이 연극이란 장르를 더 어렵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창작극을 좀 활성화해보자, 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였지. 하지만 그런 전반적 상황은 텍스트나 작가의 내적인 문제뿐은 아닌 것 같아. 연극이 문학과는 달리 돈 한 푼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예술은 아니니까. 덕분에 작가 정신을 너무 앞세운 연극의 경우에는 조금 도외시하는 경향들이 생겨나고, 조금 더 재미난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는 연극 쪽으로 편향되게 된 것이 아닐까. 극작가들의 작가 정신을 질타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야. 연극계 전반이 안고 있는 복합적인 문제인 거지.
김경주│물론 연극이라는 게 돈 없이 할 수 없는 장르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나는 어떤 예술이든 간에 이 예술을 질료화 상태에서 형상화하는 데 필요한 자본이 안 들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다들 문자 예술이 펜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책 한 권을 쓰는 데에도, 무수한 책이 필요한 거잖아. 그 정도의 책 구입비에 해당하는 금액을 연극 한 편 올리는 데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해.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야. 50만 원, 백만 원이면 되는 거야. 그 정도면 공연 올릴 수 있거든. 물론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달리 말하면 그런 건 어떤 알리바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제공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자면, 연극보다 더 비대중적 장르인 마임가나 무용가, 그쪽 평론가 이런 사람들은 버틸 수 없을 텐데, 아직도 열심히 활동하거든. 사실 연극은, 어떻게 보면 대중 친화적인 장르잖아. 나는 그런 측면에 대놓고 반감을 많이 표현했었어. 내가 책의 에필로그에 쓴 것처럼 다양한 상황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 리얼리즘 풍토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연극인들뿐 아니라 문단도 마찬가지지만, 조금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 연극이 어렵다 할 게 아니라, 내부에서의 극복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지. 유럽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에서 하는 공연들을 다 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거든.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들이 돈이 있어서 공연을 올리는 게 아니라는 거야. 기본적으로 희곡을 문학이나 다른 장르의 베이스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희곡을 살리기 위해 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거지. 그런데, 올해 아비뇽 페스티벌 공연 중에 40개 정도가 낭독회, 퍼포먼스였어. 우리나라에선 사실 낭독회나 실험극들 또는 그런 노력들이 거의 없잖아.
유희경│사실, 저는 책이 나왔을 때 이번 희곡집은 ‘문학적 희곡들’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시인과 소설가들의 희곡집이라서 이런 생각을 한 거 같아요. 또 ‘아까 연극을 살리자, 라기보다는 희곡을 살리자라는 말’도 그렇고요. 그런데 형들 얘기를 듣다 보니까 그게 아니네요. 이른바, 말이 좀 이상하지만, ‘무대를 위한 희곡들’이라는 거죠?
김경주│백 퍼센트지. 희곡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공간을 쓰는 작업이잖아. 그 공간을 거세할 수 없어. 희곡은 공간에 시간까지 부여하는 작업들이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내재적인 문학적 희곡을 쓰더라도 공간을 쓰는 작업이기 때문에 연극적일 수밖에 없는 거지. 글이 쓰이고 ‘어떤 연극을 위한’이란 말이 붙었을 때는 이미 공간 자체가 연출가가 되는 거야.
서준환│문학과 희곡의 변별점이 희곡은 무엇보다 공간에의 접근이고 탐구라는 점이야. 이를 통해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거든. 이 장르는 공간에 대한 탐구이며, 거기서부터 성립하고 시작한다는 거지.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연극하는 사람들이 문학하는 사람들의 연극, 희곡에 대한 관심을 부정적으로 보는 측면에는 작가들에겐 무대에 대한 고민, 공간에 대한 고민이 전무한 상태에서 재미난 문학적 줄거리를 가지고 연극에 접근하려 한다는 시각이 들어 있어. 그런데 희곡 안에 그게 해결되어 있지 않으면 희곡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는 거지. 희곡은 이미 그 안에 상연에 대한 꿈을 잉태하고 있는 거야. 그걸 접고 문자 예술만을 강조한다면 희곡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지.
유희경│그러니까 공간에 대한 인식이 희곡적 상상력의 근간이라는 거네요. 공간에 대한 상상력은 모든 글쓰기의 기본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희곡이 문학의 출발점이라는 준환형 말의 근거가 되기도 하겠네요.
김경주│부연하자면, 글쓰기를 할 때, 희곡 공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희곡은 입체적 상상력을 요구하기 때문이야. 흔히들 글을 쓸 때 생기기 쉬운 결점인데 글에 구멍들이 많이 생긴다는 것은 시간성에 과하게 밀접해 있기 때문이거든. 희곡을 쓴다는 것은 공간에 대한 인식이 들어야 해. ‘상연의 꿈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리고 굉장히, 그 쓰기 자체가 입체적이라는 말이지. 희곡은 대단히 탄탄한 플롯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시적인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거든. 이야기를 지우거나, 대단히 다양하게 형상화하는 과정으로의 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 그런 것을 쓴다는 것은 고급한 글쓰기로 갈 수 있고 탄탄한 글쓰기로 갈 수 있는 기본 공부가 될 수 있다는 거야. 문창과나 문단이 주도하는 글쓰기에 대한 공부 과정과 장르적 고민 중에서 희곡 쓰기가 지나치게 도외시되고 있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문제점이 있지 않나 이런 생각도 들고.
유희경│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희곡 읽기를 하지 않는 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 그러니까 독자건, 글 쓰는 사람이건, 모두 희곡은 익숙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희곡 읽는 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잖아. 읽다 보면 모든 캐릭터가 다 내 안에 있고, 모든 무대가 다 내 안에 있는데 말이에요.
서준환│나도 그게 수수께끼야. 소설이 더 읽기 어렵지 않나. 글자도 많고. (웃음) 학생들에게 소설과 비교해서 읽혀보면 희곡을 너무 읽기 어려워해. 셰익스피어처럼 그렇게 재미난, 격정적인 인물로 가득하고, 파란만장한 줄거리가 용솟음치는 이런 희곡도 어려워하기만 하더라고. 아마도 산문으로 쓴 것에 대해서는 이런 인식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흔히 문학 언어는 우리가 쓰는 일상어들과는 조금 개별화된 어떤 다른 차원의 언어 영역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능적인 차원에서 일상어로 환원시키는 것 같아. 그런데 희곡은 이걸 대화로 자르고 행간을 집어넣고 공간이 들어 있고 공간에 대한 상상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러니까 어려운 거지. 그래서 희곡 읽기는 조금 더 적극적인 참여 방식이 필요하잖아. 사실은 소설도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일상어 차원으로 환원시켜놓고 정보 처리 차원에서 언어를 받아들이니까 쉽다는 오해를 하는 것뿐이지.
유희경│산문 독서는 프로세스화되어 있는 데 반해 희곡 독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완전’ 동감합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독서에 비해 유독, 희곡 읽기는 시작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익숙해진 지금도 먼저 손이 가는 책은 아니거든요.
김경주│논문을 처음 쓰는 사람들이 갖는 공포는 형식에 대한 거야. 각주를 어떻게 달아야 하나, 논문을 어떻게 발제를 해야 하나. 결국 ‘프로세스’에 대한 무지로부터 ‘공포’가 시작되는 거지. 사람들이 희곡을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이거랑 비슷한 거야. 일종의 ‘형식을 읽는 작업’에 강박이 있는 거지. 이를테면 소설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니까 개연성을 못 잡아도 그냥 갈 수 있고 자신에게 여유로워. 시를 읽을 때는 시란 것은 원래 어려운 거지, 라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그 형식에 대한 강박 없이 그냥 읽을 수 있어. 어려워도 그 길이가 짧기 때문에 그냥 갈 수 있는 거야. 그런데 희곡이란 건 형이 말했던 대로 굉장히 능동적인 독서가 필요해. 달리 말하면 느린 독서를 해야 하는 거야. 느린 독서를 제공하면서 그 형식에 대한 강박이 있기 때문에 읽는 거 자체가 익숙하지 않고 어색한 거야. 그건 많이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유희경│이야기가 많이 무거워졌네요. 좀 가볍게 가야겠다. 희곡을 읽다 보니 준환형 희곡에서는 뷔히너G. Büchner나 하이너 뮐러H. Muller가, 경주형 희곡에서는 베케트S. Beckett나 마테를링크M. Maeterlinck가 떠올랐어요.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시작을 보니 영향받은 작가가 좀 있을 것도 같은데요, 좋아하는 희곡작가가 누구예요?
서준환│나는 부조리극 계열을 좋아해. 부조리극에서 희곡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거든. 읽다 보면 문학적 상상력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돼. 취향은 경주씨랑 비슷한 것 같아. 다만 난 조금 더 고전적인데, 입센H. Ibsen이나 스트린드베리J. Strindberg에 늘 끌린다는 면에서 그래. 물론 가장 좋아하는 극작가들은 베케트, 이오네스코E. Ionesco, 아라발F. Arrabal, 콜테스B. Koltès 같은 사람들이야. 핀터H. Pinter나 가오싱젠高行健의 희곡들도 많이 읽었고. 그런데 이 작품을 쓸 때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은 장 주네Jean Genet의 「발코니」였어.
김경주│나도 뭐, 아라발이나 하이너 뮐러, 콜테스 들… 사실 나 같은 경우는 하나의 상황을 만드는 작업을 대단히 매력적으로 생각해. 늘 어떤 상황에서 출발하는 희곡들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 같은 맥락에서 형이 말한 이오네스코나 베케트도 좋아하고. 이번 희곡을 썼을 때는 블랑쇼M. Blanchot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내 생각에 희곡이라는 것은 사실, 언어극이건 무언극이건 간에 말들 뒤에 숨어 있는 자들의 상황이야. 그 상황들이 살아 있는 희곡들을 좋아해. 리얼리즘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런 희곡이나 연극을 볼 때마다 저런 식의 직접적인 말들을 하기 위해 연극적인 공간과 상황이 꼭 필요했을까. 차라리 스틸이나 영상이 낫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
유희경│그런 입장에는 동의해요. 그런데 왜 부조리적 상황이고 부조리극이죠? 사실 부조리는 어떤 의미에선 역행인데, 요즘 사람들은 이야기의 순행적 기능을 거의 일방적으로 선호하잖아요. 그래서 대학로에서도 피하고.
서준환│현실적 층위에서 말한다면, 희곡을 공간의 언어라고 볼 때 그 공간을 우리 현실로 보여줄 수 있는 언어의 층위에서는 아무리 사실적으로 다룬다 한들 이게 우리의 현실이구나 하는 전율감이나 경악 같은 것의 전달이 힘들기 때문이지. 전율이나 경악이 전달되기보다는 외려 다른 측면에서 포섭되고 소화되어버리거든.
유희경│사실은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처지가 더 사실 혹은 진실이다 뭐 그런 뜻인가요?
서준환│그렇지. 사실이라는 것은 머리로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전율이나 경악 같은 감정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이원화해서 말하자면 기능화된 언어의 차원에서 포섭 가능한 것이 되어버리지만, 포섭되지 않는 언어의 영역이 더 사실에 가깝고 우리가 사는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나는 부조리극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던 것 같아. 또 상상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참 재미있게 와 닿기도 하고. 이게 우리의 삶이고 현실인데 이런 걸 이렇게 비틀어서, 현실이라는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상황에 갇혀 있는 인간을 보여주니까. 상황이 구체적인 것이 공간인데, 그 공간에서 말하고 행동하고 진짜 살아 숨쉬는 언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앞으로도 그런 식의 상상력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요청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
김경주│사실 부조리라는 단어… 우리는 필요도 없는 거거든. 리얼리티라는 건 재연이 아니고,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런 표현을 하나 썼던 것 같은데, 이를테면 ‘그림자라는 것은 우리 육체 속에 감춰진 것’이라고 표현한다면 이건 사실적 표현에 가깝지만, ‘그림자 속에 감춰진 육신’이라고 말했을 때는 전혀 다른 ‘사실’로부터 출발할 수 있는 이야기가 형성될 수 있는 거잖아. 어떻게 보면 입체적 상상력이라는 건, 우리에게 패턴화되어 있고 관성화되어 있는 것들을 주어진 시간 안에 그 한계적 상황과 싸우고 있는 언어들로 표현하는 거지. 편집이 불가능하고 스틸로 보여주기에는 너무 짧은 또 줄거리로 더럽히고 싶지 않은, 이 한계적인 상황이 입체적으로 또 화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그게 연극이라고 생각하거든.
유희경│이거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이걸 어떻게 정리하라고. (웃음) 본 주제인 이번 희곡 얘기로 넘어갈게요.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라는 제목은 어떻게 나온 거예요? 참 특이한 제목인 거 같아요. 딱 봐선 모르겠는데, 왠지 느낌이 오는 것 같은 거. 작품 내용으로만 보면 ‘숭어/송어 마스크 레플리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녜요?
서준환│그건 원래 1969년 프랭크 자파F. V. Zappa가 프로듀싱하고 괴짜 밴드 ‘캡틴 비프하트 앤드 히즈 매직 밴드Captain Beefheart & His Magic Band’가 발표한 앨범 <Trout Mask Replica>의 번안 제목이야. 근데 ‘트라웃Trout’이면 송어인데 번역 표기를 한국에서는 전부 숭어라고 해놓은 거야. 슈베르트 가곡도 송언데 사람들이 전부 숭어라고 표기하더라고. 재밌어서 저 제목으로 반드시 어떤 작품을 반드시 써야겠다고 생각했었지. 희곡은 아니었는데, 공교로운 것은 그런 의식 같은 것은 없는데,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라는 단어에 내가 생각하는 연극의 원형이 들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마스크Mask’는 가면이고 ‘레플리카Replica’는 복제·복사란 뜻이잖아. 작품 속, 이야기의 흐름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결국은 이중성과 묶일 수 있잖아. 아르토도 항상 현실이냐 비현실이냐, 허구냐 하는 연극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거든. 의미 있는 맥락에서는 그렇게 연결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 <Trout Mask Replica>이란 앨범 들어보면 완전 엉망진창이야. 코드도 안 맞고. 약간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키치 밴드지. 근데 그 사람들에게는 당시 그런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 로큰롤의 완제품들이 지향하는 가치와 미학을 망가뜨리는, 이른바 컬트 의식 속에서 자기모멸적이고 자해 공갈에 가까운 하위문화로 록을 망가뜨려보는 앨범을 내놓고 저항을 하는 괴짜들. 그 앨범 제목에서 따온 거지.
유희경│「블랙박스」는요? 사실 난 이 희곡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물론 경주형을 통해서. (웃음) 말 그대로 블랙박스를 개봉한 기분이랄까.
김경주│내가 여행을 많이 다녔잖아. 국내 문인들 중에서 내가 제일 많이 비행기를 탔지 않았나 싶은데? 5백여 개 도시를 다녔으니까, 계산은 안 해봤지만 엄청난 시간이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탈 때가 많았어. 싼 비행기를 타니까. 근데 프로펠러는 항공업체에서는 없애는 비행기야. 위험하거든. 프로펠러로 새가 들어갈 수도 있고, 특히 저지대를 날아가니까. 타보면 마치 조종사가 없는 거 같아. 마치 관제탑에서 원격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 (웃음) 비행기는 블랙박스가 늘 있잖아. 그런데 작은 비행기들은 블랙박스가 없대. 보험 처리가 안 되니까. 블랙박스를 두지 않는 거지. 블랙박스는 추락을 겪어야지만 알 수 있는 진실이잖아. 우리 삶 속에는 그런 것이 많다고 생각했어. 그냥 비행기 타고 있는데 추락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되게 공포스럽잖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을 때 인간이 느끼는 경험이랄까?
유희경│난 그 장면에서 베케트를 생각했어요. 주인공들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이 두 사람을 연상시키지만 특히 그 신발 장면에서는요.
김경주│그런 느낌도 있는 거지. 극장 같은 데 가면 좀 편하게 하려고 신발 벗잖아. 비행기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발을 벗지. 그런데 어느 순간, 이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신발을 막 신고 싶거든. 그 신발이 무슨 효과를 주겠어. 이 비행기가 목적도 없는 거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추락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구름 속으로 들어가 한 시간 동안 겪는 인간의 심리며 인간이 겪는 상황 이런 거를 이미지적으로 표현해본 거야. 블랙박스를 들어본 사람들은 추락한 비행기들의 블랙박스들은 들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아비규환인 거지.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대. 그걸 들을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별소릴 다 하겠지. 비명만 지르겠어. 희곡 뒤에 모리스 블랑쇼, 미셀 슈나이더Michel Schneider, 글렌 굴드Glenn Gould의 말들을 차용 왜곡했다고 주석을 달았잖아. 주인공들이 글렌 굴드가 피아노 치면서 하는 말들도 막 하고 그런 것을 막 써버렸지.
유희경│그렇구나. 아무튼, 두 분의 희곡 스타일이 참 다르고 또 같더라고요. 준환이형 희곡은 구조와 짜임에 있어서 물 하나 샐 틈 없다고 생각했고, 반면 경주형 희곡은 완전 구멍 그 자체로 읽혔어요. 근데 그게 연극이라는 넓은 의미로 건너가면 결국 같은 거거든요. 어쨌든 두 사람의 의도 밖으로 연출되기는 어려운 거니까. 각자의 희곡들은 어떻게 쓰셨어요?
서준환│그런 면에서는 경주씨 희곡이 더 연극적인 것 같아. 나는 강의할 때도 소설과 대비시켜 희곡을 유도하는 편이거든. 희곡은 구멍이고, 여백이고 침묵이야. 각색 수업을 할 때도 학생들한테 가장 먼저 과제로 내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인데, 소설이지만 굉장히 희곡적인 요소가 많아. 희곡적 요소라 함은 여백과 침묵이거든. 소설은 작가가 다 할 수 있어.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상상력으로, 시공간의 제약도 없이 그게 소설의 묘미지. 희곡은 절대 그럴 수가 없어. 철저하게 지킬 선, 지키지 않을 선을 딱딱 지키지.
김경주│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베케트를 되게 많이 의식했는데 욕심을 부려서, 고도를 허공에 올리고 싶었어. 기내라는 현대적 공간에서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보지 않은 남자와 일주일에 몇 번씩 비행기를 타는 남자의 베케트적인 상황을 이야기로 풀어주고 싶었어.
유희경│저도 그런 편인데 형 희곡에도 ‘사이’ ‘정적’이 많더라고요.
김경주│어느 순간부터 당연히 ‘사이’라고 들어왔을 때 여백을 집어넣으려고 했던 강박들이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나는 지문이나 사이를 열어놔. 마지막에 퇴장일 경우도 암전 후 퇴장이 아니라 퇴장이 되기 직전 영점 영영 몇 퍼센트의 순간을 굉장히 긴 지문으로 다섯 장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것들이 내가 희곡에서 써볼 수 있는 재미고 시적인 순간이라고도 생각해. 베케트는 그런 것을 거세한 거지. 하지만 내가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부조리극의 형식은 베케트적 언어와 언어 사이의 층위가 아니라 그 속에서 시와 희곡의 조인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지. 시와 희곡의 공통분모와 시적인 느낌들을 연극적 구성에서 사이랄지 지문이랄지 정적이랄지 그런 곳에서 찾아내고 싶어. 그런 것이 내 놀이의 방식인 거지.
서준환│그렇지. 희곡이나 연극을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무대에서 자유롭게 노는 거라고 하고 싶네. 여기서 방점은 무대에 있는 거고. 그 다음이 놀이지. 공간놀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냥 노는 거지.
유희경│연극을 영문 표기로 하면 플레이play고 플레이는 논다라는 뜻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가. 나는 두 사람 희곡을 보면서 참 많이 웃었거든요. 놀이란 게 웃음을 배제할 수는 없는 거죠.
서준환│제일 반가운 얘기네. 유머는 연극의 가장 매력적이고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해. 동참하고 대화하고. 그래서 문학이 대환데, 연극은 대화의 정수인 거 같아. 참여의 핵심. 연극은 참여니까. 혼자 누군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하는 거잖아. 작가도 참여하고 배우도 참여하고, 심지어 보고 나서 사람들마저 참여하면서 다 체험한 것이 다른 거고. 문학은 텍스트가 책이지만, 연극은 텍스트가 그 순간의 시간적 체험인 거야. 그 체험을 가장 기름지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이 웃음이라고 생각해. 하이너 뮐러는 너무 처연하지. 처절하고. 그럴 상황일 수밖에 없고. 베케트도 웃음이 있지만 건조하고 메마르잖아. 장난을 쳐보고 싶었는데, 거기서 웃음이 유발되었다면 나한테는 중요한 거지. 공연의 과정이 참여와 대화의 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웃음은 내가 말을 걸었을 때 응답하는 형식이야.
유희경│그럼, 희곡 안에서 웃음의 역할이랄까, 혹은 발생하는 지점이 뭘까요?
김경주│한국 사회에선 유머가 없잖아. 사회뿐 아니라, 예술 전반이 가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큰 문제는 경직이라고 생각하는데, 경직이라는 건 꼭 비장르를 내세우거나 희극미를 내세운다고 생기는 게 아닌 것 같아. 나는 유머가 발생되는 지점은 긴장이 확보된 다음이라고 생각해. 내가 생각하는 고급 유머는 긴장적 상황이 숨겨져 있는 거야. 그것을 건축학적으로 이미지적으로 가지고 있느냐는 희곡 쓰기에 굉장히 중요한 지점인 것 같아. 나는 그가 이 희곡을 쓸 때 주인공들이 다 웃음을 참고 있으면서 뱉는 상황을 생각하고 썼기 때문에, 나는 유머를 개입시켰다고 생각했어. 주성치를 좋아하는데, 희극적 상황에서 비극적으로 표현하거나 비극적 상황에서 희극적 상황을 만들잖아. 웃음은 희비극 사이 형용할 수 없는 질량이거든.
서준환│나 자신도 그렇고 희곡을 공부한다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자면,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라고 하겠어. 난 그 상상력이 참 재미있어. 사실, 웃음이 나오는 거는 반대급부가 또 있는 거야. 그 상상력의 바탕에 현실을 전도시키고 말장난에서도 재미난 전도 같은 게 있거든. 문학이 말의 전도라고 나는 생각해. 말의 전도에서 유머가 생겨나는 거거든. 말을 전도시키거나 뒤집을 때 웃음이 나오는 거고. 그런 거니까. 그런 식의 상상력이나 감각이 참 재미난 거고 연극에서 빠질 수 없는 지점인 같아.
김경주│특히 희곡을 쓰면서 웃음을 배치한다는 건 청중을 굉장히 의식한다는 거지. 연극이 지루해지는 순간, 작가는 죽을 듯 괴롭잖아. 유머를 받아들이는 속도는 굉장히 빠르거든. 기억의 속도보다 빨라. 센스가 있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오거든. 그 시간을 알고 있다는, 시간의 체험을 알고 있다는 거거든. 그것이 많이 탑재된 순간, 청중들은 내 작품을 내 희곡이 비극의 형식이든 희극의 형식이든 간에 못 지나갈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갖는 거야. 그게 중요한 것 같아.
유희경│희곡집이 출간되면서 이것저것 바람이 많을 것 같아요. 이번 희곡집의 핵심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희곡은 특히 이번같이 앤솔러지 성격을 띨 경우에는, 그 의미 영역(주제)의 경계가 열려 있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공통분모라는 게 형성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게다가 부조리극이니 오해의 여지도 조금 있을 것 같고요.
서준환│이번 네 명이 묶였을 때 느낀 건데, 비슷한 작가들을 묶어보자는 의도는 없었고 문학하는 사람 중에 희곡을 쓰고 싶은 사람들과 책을 내보자는 거였는데도, 묶은 다음에 보니 공교롭게 성향이 비슷하더라고. 장정일 선배도 슬쩍 언급하다가 말았는데, 비슷한 공유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아.
유희경│장정일 선생님이 쓰신 프롤로그 말씀이죠? “이번 작품들의 공통된 특성을 거론할 수 있겠지만” “비밀입니다”라고 적은 부분요. 나도 그 부분을 읽고 궁금했어요. 사실은 내가 찾아야 하는 건데, 어쩐지 오답을 말할까 봐 겁나더라고요. 그 답이 뭔가요?
서준환│사석에서 이야기했는데, 부조리극에 대한, 반리얼리즘에 대한,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보여주거나 긴장미 속에서 유머를 보여주는 것이 포인트인 거 같아. 내가 보기에도 공유된 지점들이 의식되거나 계획 안에 있거나 그렇지 않겠지만. 2집, 3집이 나오면 다를지 몰라도.
유희경│형 희곡은요? 연출가도 연출가지만, 우선은 책이 나왔으니까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요. 사실 이 질문은 희곡의 의도, 목적에 대한 질문이 되기도 하겠네요.
서준환│아까 웃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코미디로 읽었으면 좋겠어. 나는 장소로부터 출발했거든. 섹스숍에서의 남자들의 환영을 이용해 가지고 장난을 치고 변태적 쾌락을 만족시키는 그런 장소. 환상이 발생하는 지점이고 환상 안에서 어떤 놀이도 다 가능하지. 자아를 망가뜨리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고정적인 자아가 없다는 식으로 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고. 특정한 어떤 기억으로 어느 개인에게 전유되지 않고 고정되지도 않는 자아의 놀이, 이렇게 넘어가니까. 연극이 난 그런 거라고 생각하거든. 연극이 재미있는 게 자아를 늘 해체해. 난 그게 참 재미있어. 거기서 다성악도 생겨나고 합창도 생겨나거든. 글을 써서 한바탕 놀아보자. 그게 재미난 거고 그게 난장이고 그런 거 같아.
유희경│아까 이야기하셨지만, 경주형에게는 지문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데요. 상당히 독특했거든요. 무대 지문이라기보다는 관객-배우들의 심리 지문 같았어요. 어떻게 보면 금기를 깬 건데. 상당히 카메라적 시선이랄까 영화적이기도 하고.
김경주│이번 희곡에는 여러 가지 양식적 실험들이 있어. 예를 들면 ‘때’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시놉시스를 주는 것처럼 썼거든. 지문에서도 시각적 요소를 많이 강조하고 있어. 그런 거는 영상을 생각해서라기보다는 지문 같은 경우, 내가 텍스트에도 밝혔지만, 다른 항 지문만 빼가지고 묶었을 때 그것만으로도 연극을 만들어도 될 수 있게 만들고 싶었어. 희곡이라는 걸 쓸 때는 여러 가지를 열어놓겠다는 차원인 거지. 시각적 측면을 많이 활용한 것도 내가 미디어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거든.
유희경│이번에는 아주 유치한 질문 하나 할게요. 둘 다 쓴 희곡을 연극으로 올려봤잖아요. 아마 두 사람 공연을 다 본 사람은 국내에 나밖에 없을걸? (웃음) 희곡이 공연될 때 제일 짜릿한 순간이 언제예요? 그게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인 거 같은데…
서준환│거의 공통적인 거 아닐까. 자기가 공들여 쓴 대사를 현실의 인물이 발성해서 그 대사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때, 사람들이 움직이는 순간, 육화된 순간에 짜릿하지.
김경주│같은 맥락인데, 사람들이 희곡을 쓸 때 대화를 쓰잖아. 지문 같은 경우는 다른 식으로 환원이 되니까. 근데 가장 기대하는 지점은 내가 쓴 대화에 목소리를 입힐 때의 느낌일 거야. 소리에 대한 질감. 어떤 배우의 목소리를 입힐 때 내 대화가 다르게 느껴질 때는 지점에 대한 희열. 연극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거야.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서 배우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옷을 입힐 때 그 느낌이 묘한 느낌이 들 때가 좋아.
유희경│나는 공연이 끝나고 박수를 받을 때가 제일 좋던데. (웃음)
김경주│매력적이지.
서준환│그건 내 몫이 아닌 거니까.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연극에서 희곡이 시작이고, 그런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데, 현대로 오면서는 예전과 같이 작가나 희곡의 예술이 아니라, 다 같이 여러 사람이 다 동참해서 어우러지는 거라고 생각해. 희곡작가는 그 주권을 반납해야지. 이게 전부 내가 창조한 상상력의 장이기는 하지만, 내 주권을 행사할 수는 없는 거야. 함께하는 거니까.
유희경│농담을 다큐로 받으시는군요. (웃음) 시간이 벌써 많이 지났어요. 원래 한 시간 정도 예상한 건데.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네. 연극에 있어서 앞으로의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게 있으면 간단하게 말해주세요.
서준환│나는 일단 희곡도 쓰고 싶어. 그쪽으로 마음이 달려가고 있지만, 중간에 걸려 있는 소설을 끝내고 어느 매듭이 지나면, 희곡에 더 전력투구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까. 앞에서 말했던 장막 두 편을 텍스트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연을 하는 데 더 힘을 쏟을까 해. 장막 두 편은 소재가 구체적으로 잡혀 있는데, 장막 두 편을 내년에 다 쓰겠다 하는 것이 지금 목표지. 연극에 조금 더 전향적으로 다가가겠다, 정도.
김경주│나는 대학로를 메이저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 생각에서 내 용기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하거든. 연극을 하고 싶고,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희곡을 쓰는 게 대학로에 올리기 위한 거란 생각을 예전부터 가져본 적이 없어. 작년에도 열두 편에 가까운 실험극들을 연출하면서, 그게 아무리 어떤 형태든 했는데, 나는 이런 운동들을 앞으로 계속하고 싶어. 연출도 하고 시극도 쓰면서. 내 궁극의 욕심은 한국에 시극 극장을 갖는 거야. 다양한 형태의 극이 올라가는 것들, 부조리극도 포함되고 무언극도 포함되고. 내가 정말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되면 시극 전문 극장을 가지고 싶어. 시극이라는 장르가 마치 대학교 혹은 학예회 때 시 몇 편으로 만드는 퍼포먼스가 아니야. 사실 고대에는 굉장히 넓은 장르였고 많은 것들을 포함하는 거였지. 지금 와서 작은 소극장 문화들이 자리 잡았지만,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은 시적인 느낌의 극들을 가지고 가는 극장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 형태는 관계가 없어. 그런 맥락에서 계속하고 있는 운동의 일환이지. 이런 어떤 것들을 궁극적 목표로, 물론 희곡 쓰는 것도 즐겁지만, 계속해서 작은 어떤 움직임들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 이런 어떤 것들을 하려는 후배들도 있을 테고. 중요한 건 재능이나 구조 이런 것보다는 용기가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유희경│진짜 끝인데, 희곡이 문학의 원류라고 하셨으니까 ‘풋’들에게 희곡의 묘미에 대해 말해주세요. 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하면 그야말로 아무도 설득할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김경주│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희곡작가의 희곡을 꼭 한 번 필사해보라고 권해. 희곡은 한번 옮겨 써보는 것이 그 사람의 구어의 실감이라고 해야 하나? 굉장히 직접적으로 목격하게 되는 것 같아. 조사랄지 말미랄지 그런 걸 느끼게 되는 것 같아. 한 편이라도 네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대로 옮겨보라고 권하지. 나한테는 그런 게 시너지가 된 것 같아.
서준환│희곡을 써보겠다는 친구와, 시와 소설에 더 관심이 가는 친구 이렇게 나눠서 말하고 싶은데, 희곡을 써보겠다는 친구들에게는 연극을 많이 보면서 무대에 친숙해지고 무대를 잘 알아서 이게 공간의 예술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설이 시간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의 예술이라면 희곡은 시간을 공간에 녹여 다져 넣고 공간을 요리하는 예술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고. 또 시나 소설에만 관심 있는 친구들에게는 희곡에 관심을 가지면 시와 소설을 습작해보는 데 보탬이 되고 기본기를 다져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게다가 소설 같은 경우에는 대사를 써야 하는데, 대사를 쓰기 어렵다고 하거든. 희곡의 습작 과정에는 그 공부가 많이 돼.
김경주│무엇보다 연극을 많이 봐야지.
좌담은 이렇게 끝났다. 녹음기를 끄려고 하는데 갑자기, 김경주 시인이 두 사람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녹음기를 꺼두는 척 그들의 이야기를 녹음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김경주│형을 처음 봤을 때 제 에필로그에도 형 얘기를 무례하게 쓴 건데, 나는 그 상황이 너무 좋았어요. 연극으로 만날 수 있는 중에 그 어떤 인연이 내게 용기를 준 계기라고 해야 하나. 제가 형에게 굉장히 고마웠던 건, 아르토 이야기를 하고 불문과 이야기를 해줬을 때예요. 그 얘기를 듣고 이런 용기가 되게 중요한 용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되게 오랫동안. 그래서 내겐 이 작업이 되게 큰 거야.
서준환│나도 경주씨만큼 가슴 설레고 그런 상황이었고, 뭐라고 할까 아주 기분 좋은 기억이었어요. 경주씨가 쭈뼛거리면서 전화를 받았을 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만나자 하는 이야기에 응하기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희곡이니 연극이니 하니까 흔쾌히 응했고. 둘이 만났는데 계속 얘기한 거니까 거기 에필로그에 쓴 거처럼 둘이 그런 데 대한 열의가 일치하고, 그래서 아주 좋았지 진짜.
서준환│책이 나왔을 때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생긴 건 용기지.
김경주│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용기라는 말을 내뱉었을 때, 서준환형의 날카로운 눈도, 김경주형의 사슴 눈도 극도로 그리고 이상하게 반짝거렸다. 참 오랜만이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그런 눈빛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다. 나는 그 앞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커피잔이 달그락거렸다. 그리고 와플의 일부가 무너졌다. 그제야, 강렬하게 지나간 시간을 느꼈다. 우리가 악수를 했던가. 아니면 손을 흔들었던가. 나는 막 물에서 나온 사람처럼 함께했던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이상하게, 육신처럼 마음이 젖어 있었다. 많이. 문득, 희곡이 쓰고 싶어졌다. 내가 새로 쓸 희곡에 나오는 남자는 키가 크다. 작기도 하다. 말이 많고, 아예 없다. 그는 고아이고 가난하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 때, 비는 그쳤고,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이상하게,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팠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서준환 | 2001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수족관」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집 『너는 달의 기억』이 있고, 그밖에 곧 출간될 작품집들이 여럿 있다.
김경주 |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해 문단에 나왔고,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 작품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현재 무경계 문화펄프 연구소 ‘추리닝 바람’을 운영하며 다양한 실험극(무언극, 시극 등)을 기획, 연출하고 있다. 시집으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가 있고, 산문집 『PASSPORT』, 『펄프키드』 등이 있다. 제28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유희경 | 희곡 「별을 가두다」가 서울국제공연예술제와 한국연출가협회에서 주는 신작희곡페스티벌(2007)에,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극단 ‘독’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