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이 밝아오는 새 아침, 우리는 기대와 설렘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했다. 우리의 가장 큰 바람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앞으로 그림책이 어떻게 바뀌어갈지, 거기에 무엇을 새롭게 담아가야 할지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고민은 이후에도 새로운 책을 구상할 때마다 반복되어 왔다. 이 고민의 중심에는 출판시장 문제와 함께 어린이 문제가 있었다. 출판 시장의 사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도서관에 오는 어린이 수가 줄고, 부모가 그림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줄어들고, 반대로 그림책 말고도 어린이가 즐길 수 있는 미디어는 많아졌다. 과연 어린이란 어떤 존재이고, 그림책은 어떻게 변해가야 하는가? 오늘 이야기는 그동안의 생각을 정리하고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위한 것이다.
나에게 어린이란 무엇이었을까? 나는 아들 만희에게 보여줄 그림책을 찾다가 직접 그림책을 만들었고, 1995년 첫 책으로 『만희네 집』길벗어린이, 1995을 출간하였다. 만희는 전통 가옥구조가 남아있는 1960~70년대 ‘양옥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와 함께 살았다. 그 책은 유치원에서 돌아와 밤에 잠들기까지 만희를 따라다니면서 집안 여기저기를 보여준다. 사회변혁을 꿈꾸며 시작했던 시민미술운동 단체를 정리하고 나서 새로 시작한 일이 바로 이런 그림책 일이었다. 사회에서 시선을 돌려 어린이와 일상에 주목한 셈이다. 그렇다고 어린이나 일상이나, 사회 변화와 무관할 수 있는가? 어린이에게 고유한 성질, 즉 ‘어린이성’이란 것이 절대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일까?
사회 변화는 내 그림책의 소재, 주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98년, 나의 두 번째 그림책 『엄마, 난 이 옷이 좋아요』길벗어린이, 1998가 출간되었다. 당시는 이른바 IMF 사태로 말미암아 사회 경기가 극도로 침체되고, 가족이 흔들리고 해체되는 모습이 나타나던 때였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새 책의 한 장면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겨울 밤, 엄마와 아빠, 남매로 구성된 한 가족이 따듯한 아파트 방 안에서 이불 위에 뒹굴며 노는 장면이다. 나도 모르게 그런 가족 구성을 행복한 가정, 정상적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형제자매 없는 외톨이가 다반사이고, 심지어 부모와 함께 살지 못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장면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많이 목격한 조손 가정의 확산이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
2000년에 출간한 『글자벌레 시리즈 (총 3권)』2011년 『만희네 글자벌레』로 묶여서 재출간는 상하 위계질서가 없는, 평등한 친구 관계로만 이루어진 세상을 상상하며 작업하였다. 이어서 엄마와 함께 사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책을 잇달아 출간하였다. 『시리동동 거미동동』 『고양이는 나만 따라 해』『나무도장』 모두 노동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여자 아이가 성장해 가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만큼 가족의 무게를 아이에게서 덜어내고 싶었다. 어린이는 어떤 환경이든, 환경과 조응하며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바탕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었다.
어린이가 사회 변화와 함께 변화해 간다는 사실은 어린이다운 성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회 변화에도 불구하고 줄곧 유지되는 어린이성에 놀이와 성장 두 가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린이는 성장하는 힘을 내부에 가지고 있다. 밥 먹고 놀고 잠을 자는 동안 끊임없이 세포가 분열하고 몸이 자란다. 신체 비례가 4등신에서 5등신, 6등신으로 달라지고, 눈・코・입 사이가 점점 벌어지고, 통통하던 볼도 점차 들어간다. 호기심으로 세상을 마주하면서 생각도 깊어진다. 매일 매일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눈으로, 귀로, 손으로, 머리로 느끼고 반응한다. 누가 설명하고 가르치기 전에 형태로, 색으로, 냄새로, 소리로 먼저 느끼는 것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마주쳤던 엄마의 눈동자가 어느 날 크게 흔들릴 때, 그걸 보며 아이들은 공포에 휩싸이고 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아이들은 몸과 마음을 성장시켜 간다.
어린이에게서 성장은 놀이와 함께 이루어진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살던 마을에는 큰 냇물이 있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둑이 무너질까, 높은 곳에 있는 학교로 모두 피난 가라는 방송이 나왔다.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이 학교 강당에 모여 짐 보따리를 베고 누워 잠도 자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며 함께 지냈다.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어른들은 정말로 둑이 터지면 어쩌나 걱정이 컸겠지만, 우리는 불어난 물에 떠내려오는 온갖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부터 재미있는 일이었다. 다음날 일기에 나는, 비가 그치고 둑도 무너지지 않아 서운하다고 썼다. 다음 날, 일기장 검사를 하신 선생님이 ‘서운하다’는 말에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긋고 돌려주시면서 핀잔을 주셨다.
아이들과 주말농장에 가보면 재미있는 일이 있다. 어른들이 채소를 잘 가꾸어 거두어들이는 데 관심이 있다면, 아이들은 채소 잎을 갉아먹는 벌레와 개미에 더 관심이 많다. 풀을 뽑으라 하면 뽑는 건 잠시뿐, 어느 풀이 더 센지 풀잎을 걸어 끊는 놀이에 곧 집중한다. 어른들이 노동의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는 반면, 어린이들은 놀이의 시각으로 사물에 접근한다. 이 차이는 거의 일관되어 있다. 어른들은 그 차이를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로 보고 아이들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어른들이 모르는, 또는 잃어버린 새로운 세계이다. 어쩌면 노동의 시각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일지 모른다. 새롭다고는 하지만 어른들 누구나 거쳤고, 그걸 통해 성장했던 그런 세계이다. 놀이야말로 어린이성의 핵심이고, 보물처럼 소중한 성장 과정이다.
어린이라는 단어는 어른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말이다. 20세기를 ‘어린이의 세기’라고 할 만큼 지난 백년간 사람들은 어린이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모든 어린이는 학교로 보내졌고, 나중에는 유치원, 어린이집에까지 보내졌다. 한동안 방과 후 가정에서의 교육도 함께 강조되더니, 언제부턴가 그것도 학원과 학교가 떠맡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어린이는 매 시기마다 배워야 할 지식・정보에 파묻혀 살아야 했고, 그런 과정에서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의 위계질서가 유지되었다. 어린이는 부족한 것투성이라서 억지로라도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존재였고, 미래를 짊어지고 나가야 할 희망 같은 것이기도 했다. 어린이를 더 똑똑하고 더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온갖 기법이 개발되고 유행하였다. ‘어린이를 위하여’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르치고 먹이려 했고, 또 ‘어린이를 위하여’ 항상 억압하고 통제하였다. ‘어린이의 세기’라고 하지만, 실상은 어린이가 주체가 아니라 어른이 주체인 시대였다.
20세기 말부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철저한 위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어린이가 많아졌고, 부모도 아이들을 통제하기 버거워졌다. 더 이상 거리에서 마주치는 노인들에도 그다지 공손하게 대하지 않는다. 친구들하고도 몰려다니며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일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학교나 가정보다, 그리고 동네 골목보다 TV와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에 푹 빠져 생활한다. 이런 미디어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배우고 즐긴다. 친구와도 이런 미디어를 통한 교제가 대세를 이룬다. 어쩌면 아이들은 이제 제대로 된 자신들의 놀이터를 발견했는지 모른다.
닐 포스트만이라는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자언어에서 영상언어로 미디어 중심이 이동하면 어린이는 소멸할 것이다.” (혼다 마스코 지음, 『20세기는 어린이를 어떻게 보았는가』, 구수진 옮김, 한립토이북, 2002.) 어린이가 소멸한다는 것은 기존의 어린이성에 변화가 생긴다는 말이다. 영상언어를 주로 체득한 어린이는 사고의 구조가 달라지고, 행동 양식과 성장 과정도 바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른은 새로운 영상언어의 습득과 활용에 어린이를 앞서기 어렵고, 따라서 어린이는 더 이상 어른의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일 수 없게 된다. 이제 억압과 통제는 어른이 어린이를 대하는 효과적인 방식이 아니게 되었다.
어린이가 어린이인 이상, 그들은 여전히 성장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본래 놀이를 즐기고 놀이를 통해 성장해 온 종족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들이 더 이상 어른의 일방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바꿔 말해 어른과 더불어 살고, 그 과정을 통해 성장해 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의 어엿한 구성원이며, 나아가 시민사회의 일원이다. 가족과 학교라는 제도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시민사회 역시 변화한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지만, 그것이 가족과 학교보다 큰 울타리라는 점에서 좀 더 근본적이고 안정적인 귀속처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린이는 키 작은 시민인 것이다.
시민으로서의 어린이라는 시각은 어린이 역시 시민사회의 한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각 주체들은 책임과 권리를 나누어 가지고 시민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한다. 시민사회는 자유와 평등, 인권과 민주 등의 가치가 지배하는 곳이다.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거리에서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책임을 부여받고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그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공동체 의식을 강화할 뿐 아니라, 남루한 차림으로 리어카를 끄는 거리의 노인을 향해서도 동료 시민으로서의 애정과 배려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럴 수 있기 위해서는 노동, 환경, 인종, 정치, 경제 등 우리 사회 각 방면의 갈등 상황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제 어른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서 내려와 어린이와 함께 가는 안내자, 조력자, 동반자의 위치를 자임해야 한다.
(계속)
★ 2017년 9월 22일,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제3회 순천 어린이 문화포럼 - 어린이·도서관·책〉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글은 포럼에서 발표된 글을 필자(권윤덕 작가)가 수정·보완한 것으로 주최측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