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은 이야기와 이미지를 결합하고, 그것을 책이라는 물체에 담아 대중에게 전달하는 예술이다. 회화사에 축적된 기법과 출판 산업을 토대로 전개되어 온 문학 전통을 함께 계승하고, 다른 한편 어린이 교육의 역사와 보조를 맞추면서 발전해 온 장르이다. 그것은 문학, 일러스트레이션, 타이포그래피, 책 디자인 모두를 포함하며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제작체, 유통체, 향유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협업 예술이다. 대중의 수요를 기반으로 생산 유통되며, 개인 혹은 공공으로 소유하고 향유하는 방식을 두루 개발해 왔다는 점에서 대중예술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한국의 그림책 시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열리고, 2010년 즈음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만희네 집』이 출간되어 지금까지 쇄를 거듭하면서 출판시장에서 겪은 부침은 한국 그림책의 성장과 변화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 과정을 짧게라도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림책 시장의 출현은 학교의 오래된 주입식 교육에 대한 전사회적인 반성을 배경으로 하였다. 학교 교육을 보완하거나 예비하기 위한 가정과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부모와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이들 스스로 책을 찾아 읽도록 가르치려고 애썼다. 마침 작은 도서관들이 여기저기 생기고, 그런 중에 어린이 전문 도서관도 꽤 많이 설립되었다. 독서지도사와 그림책활동가들이 출현하고, 그림책을 포함하여 어린이책 정보를 수집하고 보급하는 단체들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이에 맞추어 많은 출판사가 그림책 출판에 나서고, 새로운 시각을 갖춘 젊은 작가들도 대거 출현하였다. 그림책 시장의 호황은 이런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함께 이룩한 것이었다.
그러면 2010년대에 들어와 그림책 시장이 급격히 활기를 잃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크게 보아, 그림책 시장의 이런 상황이 이미 오래 전부터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출판 시장 전체의 추세를 뒤늦게나마 따라가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 시장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전체 출판 시장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미디어, 특히 영상매체의 지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사람들이 문자에서 영상으로 언어생활의 중심을 옮겨가는 가운데, 특히 어린이들은 문자언어를 충분히 익히기도 전에 영상언어에 길들여지고 있다. TV 화면도 모자라 게임 화면의 속도와 화려함이 없으면 그들의 눈을 집중시키기 어렵게 되었다. 영상언어의 영향력은 오락이나 특정 예술 영역에만, 그리고 아동기나 청소년기와 같은 생애의 특정 시기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림책은 이런 영상언어에 밀려 쓸려가 버리고 말 것인가?
그림책 시장이 침체되어 가는 반면에, 그림책 독자층에는 주목할 만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독자층이 어린이에 머물지 않고 청소년, 어른, 노인으로까지 점차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부터 부모들은 아이들을 그림책의 세계로 이끄는 안내자로서 함께해 왔지만, 갈수록 많은 어른들이 안내자라기보다 동반자로서 그림책의 길을 함께해 가는 추세이다.
강연을 하러 다니면서 나는 가끔 ‘나에게 그림책이란?’이라는 질문으로 부모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한 문장으로 정리된 답변들은 이런 것들이다. “그림책은 내 안의 어린 나를 찾아 주는 것이다.” “그림책은 아이와의 소통이다.” “그림책은 휴식이다.” “그림책은 희로애락이다.” “그림책은 추억이고 기억이다.” “그림책은 선물이다.” “그림책은 후회다.” “그림책은 작품수집이다.” “그림책은 내 마음속의 어린이이다.” “그림책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이다.” “그림책은 상처 치유제이다.” “그림책은 자신과 사회를 바꾸는 힘이다.” “그림책은 오래 잊혀진 꿈이다.” “그림책은 세상을 보는 창문이다.” .......
이렇게 어른들은 그림책에서 경험한 감동을 나름의 방식으로 포현해 낸다. 그들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도 과거의 어린이성을 마음 한켠에 품으며 자랐고, 그림책을 접하면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되새긴다. 그들은 아이들과 더불어, 또는 아이 없이 혼자서라도, 그림책을 읽으며 어린이성의 가치에 침잠한다. 정의, 희망, 사랑, 생명과 같은 긍정적인 힘을 얻고, 나름 나름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감동은 반드시 복잡한 지식과 화려한 영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는 궁극적으로 어른도 어린이도 다르지 않다.
그림책이 어른들의 노동의 시야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어린이성’을 담고 있는 한,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까지 독자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책을 포함한 어린이책이 오랜 동안 타부시해 왔던 주제들, 이를테면 전쟁과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 인종과 민족, 환경, 성 등으로 주제 영역을 넓히고, 그에 맞추어 그림의 미감과 책의 형식도 다양하게 바꾸어 가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반드시 창조적인 것이어야만 하고, 또 창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과 글이 결합되고, 장면과 장면을 이어가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북돋는 그림책은 작가들의 창조성을 자극하는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요즘에는 출판을 넘어서 음악, 낭독, 연극, 영화 등과 그림책을 결합하는 시도들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림책에 창조성이 강화될 때 독자층을 어른들로 계속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 독자들의 경우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그림책은 혼자 읽기도 하지만, 여럿이 함께 읽으면 낭독자의 호흡과 표정을 따라가며 글과 그림의 변주를 더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그림책이 하나의 예술로 인식되면서 여럿이 함께하는 방식도 단순한 읽어주기에서 원화를 감상하는 전시, 공연예술과 결합한 연극이나 콘서트 등으로 확장되었다. 이런 측면은 기적의도서관 같은 어린이 전문 도서관이 생기면서 활발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서관은 전시나 공연에 공간 시설의 한계가 있고, 기존의 미술관이나 공연장은 여전히 그림책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
2012년부터 그림책 작가, 출판사 기획자, 도서관 운영자, 미술평론가, 공공예술가, 그림책 활동가들이 모여 새로운 그림책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들이 꾼 꿈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그림책 속 상상의 공간을 물리적 공간 안에 꺼내 놓으면 어떻게 될까? 건물의 방 한 칸에 글과 이미지를 결합시켜 이야기 공간을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그런 방 여러 칸을 통로로 연결해 보면 또 어떨까? 방이 아니라면 1층에서 5층까지 오르내리는 계단에, 아니면 마당에, 동네 골목에, 숲속 오솔길에…… 이렇게 만들어지는 그림책 공간은 기존의 전시장이나 공연장과는 많이 다른 새로운 공간이 될 것이다. 글과 그림, 그리고 그것을 변환한 영상이미지 뿐만 아니라 음악, 낭독과 같은 소리, 몸짓이나 기계작동 등이 다양하게 결합된 공간이 될 것이다.
그곳은 그림책이 확장된 공간으로서, 즐거운 공간, 이야기로서의 공간, 상상력을 북돋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금 엉뚱할지 모르지만, 어떤 공간에서는 수행자들처럼 침묵하고 기도하며 책 읽는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어떤 공간에서는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간수가 넣어주는 빵과 그림책을 먹고 보면서 한동안을 보낼 수도 있다. 어쩌면 아이들은 역시, 작은 왕국의 시가지 미니어처에 파묻혀 왕과 왕자, 공주 역할을 경험하는 공간이나, 그림책을 옆에 낀 채 어린 고양이와 강아지, 토끼를 관찰하고 돌보는 공간에 더 정신을 빼앗길지 모른다. 새로운 그림책 공간은 다양한 상상을 자유롭고 풍성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렇듯 새로운 그림책 공간을 꿈꾸는 과정에서 여기 군포를 만났다. 시민, 지자체, 전문기획단이 모여 함께 진행해 온 그동안의 실험들은 새로운 그림책 문화의 단초를 열었다. 다양한 주체가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어린이들이 공동체 경험을 공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그림책 문화의 전진 기지가 될 새로운 그림책 공간의 건설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로운 그림책 공간은 기본적으로 박물관의 형식과 정신을 취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도서관은 책의 수집, 열람을 위주로 하는 공간이다. 미술관은 책 대신 그림, 조각 등의 예술품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서관과 차이가 있다. 요즈음 도서관과 미술관 역시 향유자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 참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지만, 그 인적, 물적 토대와 기본 기능에서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그림책 공간은 대항해시대에 탄생한 박물관의 경험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당시 박물관은 탐험가들이 미지의 세계에서 발견한 새로운 동물, 식물, 유물들을 전시하고 경험하는 상상력의 공간이었다. 그림책 박물관은 그림뿐 아니라, 그림책과 관련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끌어와 연결시키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그림책을 향해, 그리고 어린이성을 향해 온갖 촉각을 열어두어야 한다.(*)
★ 2017년 9월 22일, 순천기적의도서관에서 〈제3회 순천 어린이 문화포럼 - 어린이·도서관·책〉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글은 포럼에서 발표된 글을 필자(권윤덕 작가)가 수정·보완한 것으로 주최측의 동의하에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