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떠나거나 죽도록 외로울 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배가 침몰하거나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은 더더욱 흔치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친구일 수도 있고 스승이나 동지, 후배, 제자일 수도 있다. 가족이나 연인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있느냐, 있다면 몇명이나 있느냐일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는 의자가 세개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 둘은 친구를 위해, 셋은 손님들을 위해. 세 의자는 각각 자기성찰, 우애, 환대를 은유한다.
의자는 누구에게나 필요하지만 하나만 있거나 너무 많아도 탈이 난다. 가장 중요한 의자는 ‘나를 위한 의자’일 것이다. 그런데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의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친구나 이방인을 위한 의자가 늘어나는 것 같지도 않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친구를 위한 의자를 소중히 여기고 낯선 사람을 위한 의자 또한 존귀하게 여긴다. 우리의 삶은 의자 세개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온전해진다.
함석헌의 시가 설정한 상황은 일상적이지 않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이닥치는 비상사태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람’을 찾도록 한다. 우리는 그 사람 덕택에 자기 자신으로, 원래의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다.
나에게만 ‘그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의자가 세개 있는 삶이 좋은 삶이고, 서로에게 ‘그 사람’이 될 수 있는 관계가 최고의 관계일 것이다. 나에게 지금 의자가 몇개 있는지,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편안하고 튼튼한 의자인지 살펴볼 일이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