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3연으로 된 시인데 2연까지 따라 읽는 동안, 끝에 가서 ‘놀라운 반전’이 있으리라 짐작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철수와 영희라는 낯익은 이름에다 바둑이까지 환기시키는 도입부는 영락없는 동시童詩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시는 아이들 소꿉놀이가 아니라 노후의 일상을 포착한 ‘성인 문학’이다.
시는 과거다. 발표된 모든 시는 과거에 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좋은 시는 독자에 의해 지금 여기에 되살아나 독자의 미래로 열린다. 모든 좋은 시의 시제時制는 미래형이다.
이 시는 동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차용한 리얼리즘 문학이다. 철수는 치매 초입이고, 창식이는 독거노인일 터. 시에 어린이나 청장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주목을 요한다.
800만명이 넘는 베이비붐 세대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전후세대는 콩나물 교실에서 ‘철수야 놀자, 영희야 놀자’를 따라 읽으며 산업역군으로 성장했지만 평생 놀 수가 없었다. 철수와 영희는 먹고살기 위해, 먹여 살리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MZ세대만 신인류가 아니다. 노인 또한 엄연한 신인류다. 철수와 영희의 칠십 평생도 그랬지만 이들에게 갑자기 닥친 노후는 전례가 없는 삶이다. 참조할 만한 역할 모델도 없다. 게다가 절반이 넘는 노인들이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
‘늙지 않은않는 늙은이’들이 속수무책으로 100세 시대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초고령사회가 노인들만의 블랙홀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철수와 영희가 잘 놀 수 있어야 모든 세대가 행복해질 수 있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