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이 오지 않아 정말 오랜만에 꼬박 새워보기로 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눈부신지도 몰랐던 젊은 날, 가는 밤이 아쉬워 꼬박 새우기 일쑤였던 그 밤들을 기억하면서 말이죠. 밤을 꼬박 새운다는 건 영원히 죽기 싫은 기분과도 통하는 게 아닐까?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희미한 아픔이 살짝 뇌리를 스쳐갑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가슴이 아닌 두뇌로 아프기 시작했을까? 늙지 않는다는 건 애써 열정을 유지하는 일, 늙음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겠지요. 늘 두려움과 불안과 열정이 함께했던 삶의 오르막 계단에 서서 내려가는 계단 쪽을 바라봅니다. 늙는다는 건 싸우기 싫어지는 것이고, 도전을 포기하고 편안함 쪽으로 키를 돌리는 거라지만 그런 느낌은 아직은 내게 편안하지 않습니다.
이 밤을 꼬박 새우며 엉뚱하게도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본 공작새의 탈출을 떠올립니다. 공작새는 왜 어디로 탈출한 걸까? 그리고 지금쯤 어디까지 간 걸까? 멀리 있는 것들의 거리를 재는 방법에 도플러효과를 이용한다고 하죠. 도플러효과란 기차가 관찰자에게 다가올 때 기차의 기적소리가 높게 들리다가 멀어지면서 기차의 기적소리도 낮아지는 것,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높게 들리다가 지나가면 소리도 낮아지는 현상이라네요. 몸속을 들여다보는 의학적 검사에도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지요. 하나의 별과 또 하나의 별이 어느 정도 속도로 멀어져 가는지를, 도플러효과를 사용해 별의 크기를 측정한대요. 멀리 있는 별은 어둡게 보여요. 공작새도 희미하게 보이네요. 멀리 있나 봅니다.
잠이 오지 않은 김에 꿈속에서인지 현실에서인지 꼭 찾고 싶은 물건을 떠올려 봅니다. 집안이 보물섬으로 느껴지는 때는 유년 시절과 노년 시절이겠지요. 나는 그 양쪽의 기분을 다 지닌 채, 잊고 있었던 물건들을 찾기로 합니다. 문득 “나는 찾는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린 시절부터 청소년기까지 오랜 세월 모았던 우표 앨범 속에서 나는 단 한 장의 우표를 찾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달에 착륙한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달 착륙 우표를 며칠 전 꿈속에서 한참을 찾았습니다. 분명 가장 아끼는 우표 중의 하나였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문득 머릿속에서 “나는 찾는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나는 기다린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바뀝니다.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오래된 우표앨범 속에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찾아보려 합니다. 끝없이 내 안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 찾는 중입니다. 내 마음속의 보물섬,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약간 두께가 느껴지는, 우표를 살짝 기울이면 색깔이 다르게 보이는 이중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1969년에 발행된 입체 우표, 그게 어느 나라 우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름다운 우표들은 현실에서는 너무 먼, 이를테면 파라과이, 예멘, 사우디아라비아, 콜롬비아 같은 낯선 나라들의 우표들이었어요. 그 낯선 나라들에 가보고 싶다는 건 살고 싶다는 희망 같은 거였어요. 지금처럼 자살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절이었죠. 말하자면 우표는 어린 내게 희망 같은 거였답니다. 우주복을 입은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에 착륙하는 푸른색의 환상적인 우표가 머릿속을 맴돌면서, 닐 암스트롱이 갑자기 화려하게 날개를 편 공작새의 이미지로 변하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을 찾는 걸까? 달 착륙 기념우표를? 공작새를? 어쩌면 당신을? 며칠 전엔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에 갔었습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맞는 말 중 가장 맞는 말의 하나입니다. 참을 수 없는 오열이 먹먹한 슬픔으로, 그 슬픔이 삭아 허망한 쓸쓸함으로 남은 떠나간 사람의 자리, 누군가 완전히 잊힌다는 건 그를 애도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진다는 것이겠지요.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가 묻힌 가족묘 앞에서 그저 향이나 피우고 술이나 한잔 올릴 뿐, 아니 담배를 사랑하시던 아버지 무덤 앞에 담배 하나 불붙여놓기도 합니다. 마치 생전의 아버지가 피우시는 듯 담배는 연기를 뿜으며 작아집니다. 문득 할 말이 아무것도 없어지네요. 그저 인생이라는 게 결국 할 말이 없는 거라는 걸 다시 깨닫는 순간, 나와 아버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먼 곳에 모셔다 놓고 일 년에 한 번 오는 게 고작인 걸까? 죽은 자와 산 자의 거리를 재는 일, 다시 한 번 도플러효과가 생각납니다. 공작새, 사라진 공작새가 되었다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생각한 적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 이제는 거리가 너무 멀어져 먼 별처럼 캄캄합니다. 잊혀져가나 봅니다. 나마저 사라지면 아버지는 어디로 가나?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들로 초여름 한낮의 태양이 저물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란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존재겠지요. 돈이나 다름없는 그 비싼 물감을 캔버스에 바르며, 먼저 간 춥고 배고팠던 화가 선배들의 애절한 마음을 느껴봅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 비싼 물감을 어떻게 캔버스에 칠할 수 있을까? 예술가란 미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외계인을 닮은 존재일지 모릅니다. 그렇게 완성되었거나 완성되지 않은 캔버스들은 내 어린 날의 우표앨범처럼 차곡차곡 창고 속에 쌓여갑니다. 잠 안 오는 밤, 나는 문득 언젠가 내가 그렸던 작은 그림 하나를 보고 싶어집니다. 창고 속을 아무리 뒤져도 그 작은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문득 컴퓨터를 뒤져 그림 목록을 찾다가 나는 그 그림을 당신에게 팔았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문득 찾는다는 일과 기다린다는 일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이상한 경험을 하는 기분입니다.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밤, 참 오랜만의 불면입니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어느 시인의 시가 떠오르면서, 생각해보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면이었다는 엉뚱한 표제가 덩달아 떠오릅니다.
문득 뉴턴의 공식 하나가 생각나네요. “정지해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있으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공식을 찾기라도 하듯, 머릿속에 저장된 나의 그림 이미지들이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하나씩 둘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 지켜봅니다. 나는 사랑하는 별 하나를 정해놓고, 밤하늘을 볼 때마다 그 별이 같은 별이기를 기도합니다. 그 별이 흘러가는 속도로, 나만의 고유한 속도로 흐르고 싶다 생각하면서요. 며칠 전 미술관에서 보았던 안톤 비도클의 영상 한편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부활의 장소로서의 박물관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그려낸 참 아름다운 영상이었어요. 그중 이런 구절이 생각나네요. “박물관은 조상 숭배의 마지막 유물이다. 단지 복수를 하려는 사람만이 박물관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다. 진정한 종교는 조상 숭배다. 박물관은 사랑을 통해 불멸을 이끌어낸다.” 「모두를 위한 불멸」이라는 제목의 영상, 나는 그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루 종일 되뇌었습니다. 모두를 위한 불멸, 너와 나를 위한 불멸, 불멸, 오직 불멸만이 내가 추구하는 하나의 명제였던 것도 같습니다.
아버지의 무덤에 노란 해바라기 조화를 가득 사서 꽂아놓고 돌아서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해바라기는 불멸이란다.” 오래전 독일 뮌헨에 있는 노이에 피나코텍The Neue Pinakothek이라는 미술관에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러 갔었습니다. 고흐의 노란 해바라기 그림이 내게 난생처음으로 불멸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빵 한조각과 싸구려 압생트를 마시며 그 비싼 물감을 캔버스에 미친 듯 발랐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옵니다. 물감은 왜 밥보다 빵보다 비싼 걸까? 그 비싼 물감을 바른 수많은 그림들을 남기고 수많은 화가들이 눈을 감습니다. 그들이 남긴 그림은 쓰레기가 되기도 하고, 싸구려 풍물시장의 곰팡이 나는 벽 뒤에서 굴러다니기도 하고, 운이 좋다면 박물관에 소장되거나 경매에서 셀 수도 없이 고가에 팔리기도 합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건 아주 어렵습니다.
나는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이 검색의 시대에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무명의 화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싶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인정받지 못해 세상의 짐이 되거나, 어쩌면 화가인 자신과는 무관하게도 고가의 명품으로 변하는 예술품이란 참 알 수 없는 외계생물 같습니다. 실연의 고통으로 기억을 잃은 사람이 정작 사랑했던 그 사람을 몰라보는 이율배반의 사랑처럼요. 수십 년 탐사를 한다면서 정작 보통 사람들은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먼 달이나 화성 같기도 합니다. 그동안 내가 그려온 건 영원한 시간과 끝없는 공간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아니 불멸을 향한 열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밤에 찾으려던 당신이 소장하고 있는 나의 작은 그림은 그 시절 내가 찾아 헤맨 그 불멸의 한 조각일지 모릅니다. 당신이 그 그림을 옆구리에 끼고 빛나는 표정으로 갤러리를 나서던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그 시절 헤어진 남편은 카지노 딜러이던 연인과 함께 등과 가슴에 불멸이라고 한문과 영어로 문신을 새겼답니다. 과연 먼 세상의 끝에서 불멸할 것은 무엇일까? 카지노도 불멸일까? 그 시절 나의 고독을 달래준 건 영어로 들려오는 라디오 클래식 채널 디제이의 낮은 목소리였답니다. 거리 구석구석 어디나 24시간 열려있는 한인 슈퍼마켓, 밤새 들리는 사이렌 소리, 불면의 밤과 함께한 생쥐들의 부스럭거림, 그 쥐를 잡으려고 끈끈이 쥐덫을 놓았던 밤의 후회, 왜냐면 쥐덫에 걸린 쥐가 찍찍거리며 죽을 때까지 쥐덫을 끌고 다녔으니까요. 일단 가두었다가 멀리 풀어주는 쥐덫이 더 나을지, 참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 시절, 나는 그곳에 왜 그리 오래 있었을까? 한번 짐을 풀면 그리 쉽게 짐을 싸지 못하는 집착과 미련 때문이었을까?
극장을 나서는데, 영화 한 편 보는 사이 몇십 년이 흘러간, 딱 그런 기분입니다. 나는 책을 쪼개서 들고 다니는 습관이 있습니다. 나머지 부분을 어디 두었는지 몰라서 결론을 모르고 끝내버린 소설들이 내 기억 속의 털실뭉치가 되어 뇌 속에 엉켜있습니다. 어쩌면 소설의 결말은 나보고 내라고 숨어버린 책의 나머지 조각들. 퍼즐을 맞추듯 나머지 책의 부분을 찾기를 포기하고 나는 두뇌 속을 뒤지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그래요 습관, 그것이 우리의 삶을 메우는 내용의 시작이지요. 문득 도리스 레싱의 단편집 「사랑의 습관」이라는 제목이 떠오릅니다. 내용은 아물거리는데 그 제목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는 습관으로 이 고단한 생을 버텨온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습관이 아니라면 그렇게 가치 없는 사랑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개를 사랑한 기억에는 늘 미안함이 따를 뿐, 후회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습관, 그것은 우리가 버리지 못할 삶의 끈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절, 공기의 흐름이 정지한 듯 나른한 여름날 오후, 빈센트 반 고흐가 죽으면서 말했다는 ‘슬픔은 끝이 없다.sadness never ends.’라는 문구를 되새기며, 문득 영어로 들려주는 클래식 라디오 디제이의 낮은 목소리가 그즈음 딱 두 번 들은 당신의 목소리에 겹쳐지기도 했답니다. “나는 의사입니다. 당신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얼마인가요? 이 그림을 사고 싶습니다.” 이게 당신으로부터 들은 목소리의 전부인데 말이죠. 당신은 그 나른한 여름날에 수줍은 얼굴로 행운을 빈다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도 당신의 행운을 빈다고 말하며 당신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날 나는 소호에 있는 안젤리카 극장에서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보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마술을 하는 뚱뚱한 여주인공이 마치 나 자신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외로움은 참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낯선 당신보다 남편이었던 사람이 더 낯설게 느껴졌던 그 여름밤, 내 그림을 옆구리에 끼고 한참은 이 그림으로 인해 행복할 거 같다는 당신의 말과, 당신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있다면 참 좋겠다는 그렇게 엉뚱한 생각에 위로를 받았다면 믿으실까요? 참 오래전의 기억입니다. 병원 주소가 적힌 명함을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본 적도 있었답니다. 세상 곳곳에 널려있던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 명함 속의 번호를 돌리고 싶던 날들도 내 외로운 날들의 영혼의 착각이라 혼자 웃기도 했고요. 그런 상상 속의 당신이 나를 보러온다니 참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나는 당신의 환자여도 좋고, 내가 당신의 한국어 여행 가이드여도 좋고, 옛 친구여도 좋고, 헤어진 연인이라도 좋고, 친구의 남편이라도 좋은, 그저 반가운 사람일 뿐이랍니다. 문득 엉뚱하게도 이런 문구가 다시 떠오릅니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이 사랑이라면, 지금 죽어도 괜찮다.”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