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맡아보는 풀 냄새였다. 예초기 엔진 소리가 거슬렸지만 바람결에 실려 오는 풀 내음은 온몸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들 녀석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역겹다며 코를 틀어막는 것이었다.
풀 냄새뿐이랴. 나는 한여름 매미 소리를 ‘자연의 음악’이라 반기는데 딸아이는 지독한 ‘소음 공해’로 받아들인다. 부모와 자녀 사이가 갈수록 아득해진다.
세대 차이를 넘어 세대간 단절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천지자연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는데, 기호嗜好나 취향 차원에서 나타나는 세대간 간극의 크기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이같은 사태가 정희성의 시 「민지의 꽃」에서는 역전된다. 강원도 산골로 귀농한 제자를 찾아가는 은퇴 교사가 제자의 딸 앞에서 ‘학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손녀나 다름없는 ‘민지’가 어엿한 선생님이다.
흔한 데다 쓸모가 없다는 이유로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 하지만 어린 민지는 잡초를 인격체로 대한다. 민지가 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평생 언어를 다뤄온 시인에겐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처럼 여겨졌을 테다.
말이 말다울 때 말은 ‘천지와 귀신’을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말에 ‘때’가 묻으면 말은 인간과 천지자연 사이를 갈라놓는다. ‘때 묻은 말’은 인간과 사회, 인간과 인간 자신 사이에도 금이 가게 만든다.
‘민지’가 산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지의 ‘꽃’은 우리 유전자 안에 다 있다. 우리가 물을 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원초적 감성을 되찾는다면, 말이 말다워지고 세대와 세대, 인간과 천지자연이 다시 손을 잡을 것이다.
★ 이 글은 농민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하에 게재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