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회가 끝나고 사인회가 이어졌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 데다 대화 위주의 행사도 아니어서 자리가 일찍 끝날 줄 알았다.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오디오 북 출판을 알리는 행사였다. 나는 후반부에 시 두 편만 읽으면 되는 찬조 출연자였다. 그런데 내 시집을 들고 온 독자들이 제법 있었다. ‘서울에 사는 나무’를 주제로 책을 펴낸 저자, 그 책을 음성으로 ‘새로 쓴’ 연극배우, 이를 기획한 출판사 관계자 등 행사 주역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행사장이 거의 다 비어갈 즈음, 중년여성 한 분이 내 시집을 내밀며 잠깐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긴한 얘깃거리가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일단 성함을 묻고 서명을 하는 사이, 옆에 앉은 여성분이 말문을 열었다. “이년 전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습니다. 그 슬픔을 선생님 시를 필사하면서 견뎌냈습니다. 이제 많이 좋아졌습니다.”
순간, 난감했다. 무슨 말로 답을 해야 하나. 무슨 말이든 해드려야 할 텐데. 하지만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상처가 아물어 가신다니 다행이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제 시를 읽고 큰 위로를 받으셨다니 감사하다는 말은 더더욱 나오지 않았다. 내 시를 필사하며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미’ 앞에서 정작 그 시를 쓴 작자가 공감이나 위로, 격려나 응원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다니 무참할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어머니, 발표된 시는 시인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시는 그 시를 읽는 독자의 것입니다. 시인은 절반만 쓰는 것이고요, 나머지 절반은 독자가 완성시키는 겁니다. 제 모자란 시를 어머니께서 완성하신 겁니다. 깊이 읽기는 반드시 쓰기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제 그만 읽으시고 쓰세요. 어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보세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소설 쓰는 친구가 어디엔가 쓴 이야기인데, 병원에 입원한 젊은 환자가 졸시 「화전」을 벽에 붙여놓고 고통을 견뎌냈다는 것이다. 화전민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르는 나무를 의인화한 것으로 자기희생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짧은 시였다. 그때만 해도 시가 갖고 있는 위로의 기능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지난 세기 후반이었으니 시에는 사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사회적·정치적 역할이 있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시인과 시, 시와 독자 사이의 경계는 선명하지 않다. 쓰기의 과정이 그렇듯이 읽기도 쉽게 포착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세계다.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또 매번 그런 것도 아니지만 시인이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시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쓴 시도 독자와 만나면서 의도가 어긋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든 읽기는 오독이라는 표현은 말장난이 아니다. 한 편의 시가 하나의 의미만 전달한다면 그것은 시일 수 없다. 단어 하나, 슬로건 한 줄도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듯이 한 편의 시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 마련이다. 좋은 시란 오독 가능성이 큰 시다.
오디오 북 낭독회에서 특별한 독자를 만나고 난 후, 쓰기와 읽기 사이에 가로놓인 딜레마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시인의 의도와 독자의 해석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오류가 상시적인 것이라면 시인의 권한이나 역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미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에게 지나친 특권이 주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의미의 유일한 생산자로서의 시인은 근대의 유물이다. 시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독자의 수동적 태도 또한 하루빨리 떨쳐버려야 할 낡은 유산이다.
지난 봄 세월호 5주기를 앞두고 시 읽기의 새로운 가능성과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 한 분이 교회에서 졸시 「오래된 기도」를 인용하며 간증하는 영상을 접하고 시를 쓴 당사자로서 많은 생각이 오갔다. 녹화영상은 지난 연말에 유튜브에 올라갔는데 나는 뒤늦게 지난 4월에야 보게 됐다. 영상에서 ‘창현 엄마’ 최순화씨는 ‘아들을 잃은 어미가 살아가는 법’을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었다. 교회의 혁신을 바라는 창현 엄마의 목소리는 웬만한 목사의 설교보다 진정성이 있었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하늘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고개를 들면 어제와 다른 하늘이 나타난다는 구절은 그대로 한 편의 빼어난 시였다. 창현 엄마 최순화씨는 국가와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독자에서 시인으로 넘어가 있었다.
시인의 유형은 여러 가지다. 시보다 앞서 가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시를 따라가는 시인, 시와 함께 가는 시인도 있다. 자기가 읽고 싶은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지나치게 독자를 의식하는 시인도 있다.
지금 내가 바라마지 않는 시인은 ‘시를 쓰게 만드는 시를 쓰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읽기를 쓰기로 전환하는 독자가 늘어나기를 바란다. 읽기는 사적 영역에서 위로를 받게 하지만 쓰기는 위로의 차원을 넘어서게 한다. 읽기에서 쓰기로 넘어가면 자기 삶을 쓰는 창조적 주체이자 지금과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회적·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재차 강조하지만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시는 전적으로 그 시를 읽어내는 독자의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읽어서 시를 자기화했다면 그 독자는 쓰게 된다. 자기 문장을 쓰게 될 때까지, 새로운 미래가 보일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자.
★ 본 기고글은 경향신문에 연재된 칼럼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