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켜니 인생을 풍경이라 생각하며, 빨리 뛰는 마라톤 선수가 아니라 천천히 걷는 산책자로 살고 싶다고 누군가 말한다. 언젠가 남편이 한 말 같다. 멋진 말이라 생각하며 채널을 돌리니 내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연미복을 입은 것 같은 펭귄들이 떼를 지어 걸어간다. 고난의 행군 같다. 나는 펭귄을 좋아한다. 펭귄은 일부일처제다. 어쩌다 오래 떨어지게 되어도 제짝을 알아보고, 피치 못해 헤어져도 애써 자기 짝을 다시 찾는다. 인간보다 훨씬 낫다. 어릴 때 이산가족 찾기 장면을 보면 대개 남편들은 재혼을 하고 아내들은 홀로 자식을 키우며 늙어간 경우가 많았다. 옛날 사람들이라 그랬을까? 꿈속 같은 남극의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먹을 것을 갖고 돌아온 어미가 굶주린 제 새끼를 알아보려고 초조하게 두리번거린다. 나도 따라 초조해진다. 오늘따라 전화도 없이 남편이 들어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엄습해온다. 그와의 삶은 평안하고 행복했다. 아주 오랜만의 평화였다. 문득 어릴 적 공중목욕탕에서 어머니가 등을 밀어주던 기억이 난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이제 아무도 때를 밀지 않는 세상에서, 예전에 엄마가 그랬듯 누군가의 때를 밀어주고 싶다. 갑자기 지독하게 외롭다. 하루는 늘 장엄하게 사라진다. 당신에게도 그렇겠지. 당신은 그랬었지. 메일 전쟁에서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라고. 누가 전쟁 같은 사랑이라 노래하는가? 내게 사랑은 영원히 평온한 감정이었으면 좋겠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지루하지 않은, 상대의 말이 혹은 나의 말이 서로에게 나침반으로 설정되는 그런 관계.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말이다.
나는 늘 외딴 시골학교의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남편은 음악을 가르치고 나는 미술을 가르치는 꿈을 꾸곤 했다. 꿈속에서 배경은 늘 빈 교실과 비어있는 칠판이었다.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어느 영화에서 본 부탄의 산골짜기 학교가 떠오른다. 56명이 학생 수의 전부인 세상에서 가장 외진 부탄의 산골짜기 학교 아이들은 자동차가 뭔지를 모른다. 자동차가 뭔지를 모르는 아이들은 복 받은 아이들이 아닐까? 나는 성공한 사람의 정의와 그가 소유한 비싼 자동차 값이 비례하는 세상이 싫다. 아무리 성공해도 자동차를 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고기가 필요하면 랜덤으로 올가미를 던져 야크를 잡아 도축하는데, 그날이 마을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는 날이다. 하필 목동이 가장 아끼는 야크가 올가미에 걸려 도축되는 날, 마을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야크가 이생이든 다음 생이든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구슬프게 노래한다. 야크는 낮에 이 산 저 산 돌아다니다 해가 지면 꼭 집으로 돌아오는, 고기와 우유와 가죽과 똥까지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티벳이나 부탄인의 가족이다. 똥은 말려서 추운 겨울의 연료로 쓴다. 가족, 하고 부르니 또 눈물이 날 것 같다. 나의 가족은 남편뿐이다. 가끔 어릴 적의 고독이 살아 돌아와 남편이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곤 했다. 유효기간, 내가 늘 두려워하던 남편과 나의 사랑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은 만 년으로 하자.” 왕가위의 영화 대사를 보면서 ‘만 년’이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이라고 적어두었었다. 그렇다면 내 목숨의 유효기간은? 거칠어진 손에 바르려고 거의 다 쓴 핸드크림 튜브를 짜다보면 쥐어짜면 짤수록 나온다. 샴푸도 화장품도 염색약도, 어쩌면 우리의 목숨도 그랬으면 좋겠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루종일 켜놓은 라디오에서 사십 마리의 소가 도살장에서 탈출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나머지는 다 잡히고, 마지막 한 마리는 끝까지 도주했다. 문득 그 끝까지 도주한 소 한 마리와 남편의 얼굴이 겹친다. 사는 건 참 모지다. 우리의 입속에 들어가는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이 이렇게 모진 도축 과정을 통해 일용할 식량이 되는 거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과 식물, 낙타·캥거루·야크·소·개·닭, 인간이 악마라면 평생의 노동도 고기도 가죽도 털도 뿔도 똥도 다 내주는 너희들은 다 천사다. 영원히 쓸데없을 생각들 사이로 스마트폰이 울려온다. “스마트폰은 무섭다. 느닷없이 걸려오니까.” 이 문장도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은 듯 낯익다, 환청이다. 스마트폰이 울리는 게 아니라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과연 기다리던 남편의 메시지다.
“당신에게 미안해. 나는 참 못난 놈이야. 내가 버린 그녀와 함께 지구를 떠나. 나의 죄의식은 도저히 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병이야. 내가 당신과 함께 그녀를 버렸을 때 나는 행복할 줄 알았어. 너무 집착이 강한 그녀로부터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아니었어.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어. 중국 신화에서 신선들이 벌을 받는 방법은 일 년에 마흔아홉 번 벼락을 맞는 거래. 나는 그렇게 벼락을 매일 마흔아홉 번씩 맞았어. 머리 자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가진 거라곤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나를 먹여주고 사랑해준 그녀를 배신하다니. 나 같은 놈은 벌써 지구를 떠났어야 했어. 그 길에 그녀가 동참해준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지. 우리가 죽어서 별이 된다면 언젠가 명왕성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었던, 태양계의 족보에서 누락된 지 오랜 ‘왜소행성 134340’이 되겠지. 하늘을 올려 봐도 당신 눈에 뜨이지 않게 꼭꼭 숨어 있을게. 너무 미안해서 할 말도 없지만 당신만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라.”
남편의 편지는 여기에서 끝이 났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옳을까? 남편과 사장언니가 함께 떠났다. 내가 빼앗아 온 사람을 도로 찾아간 셈이다. 그들이 수없이 내게 암시한 기호들을 나는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던 거다.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자신이 가진 것은 소중한지 모르고 그저 없는 것에만 열중하니까. 하긴 내가 남편을 사장언니 미용실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괴로워서 떠나겠다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떠나고 싶은 곳이 어디든 같이 가요. 내가 지켜줄게요.” 그러던 그가 나를 버리고 그녀와 함께 갔다. 둘이서 동반 자살을 하거나, 외계로 여행을 떠나거나 인도의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 ‘죽음 호텔’에 머무르며 죽음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많은 인도인들은 심각하게 오염된 갠지스 강가에서 죽기를 희망한다. 다큐 프로그램에서 보니 강가의 ‘죽음 호텔’에서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삼십 년을 기다리는 노인도 있다. 그곳에 너무 일찍 간 거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안다면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단어는 없어질지 모른다. ‘왜소행성 134340’이 된 명왕성처럼. 죽음의 상술이 바라나시 갠지스강가처럼 발달한 곳도 없다. 사장언니는 와인 한 잔이 들어가면 늘 갠지스강에 가서 죽고 싶다 했다. 그 더러운 강물에서 죽는 게 뭐가 좋냐 물으면, 더러운 곳에 몸을 담그면 죄가 다 사해져 깨끗해져서 죽을 것 같다 했다.
그녀는 길고 긴 넷플릭스 중국드라마를 보는 걸 좋아했다. 나에게도 적극 추천해서 보기 시작한 그 드라마는 세 번의 삶 동안 한 사람을 다시 만나 사랑하는 내용으로 대사는 주로 이런 식이다. “우리가 만난 지 칠만 년이 흘렀구나.” 그런 대사를 들을 때마다 나 역시 아무 걱정이 없어지고 마음이 너무 평화로웠다. 칠만 년이라니, 칠천 년도 칠백 년도 칠십 년도 칠 년도 긴데, 나와 남편이 함께 했던 세월이 칠 년도 안 되는데, 어쩌면 그들은 드라마처럼 세 번의 삶 동안 세 번을 다시 만나 몇 십만 년을 이어온 인연은 아니었을까? 거기에 주제넘게 내가 끼어든 기분이다. 문득 이런 말씀이 귓전에 들려온다. “인연은 그냥 흘러가게 두어라.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러고 보니 사장언니를 처음 만난 것도 남편을 처음 만난 것도 칠만 년 전인 것 같다.
남편의 카톡 메시지를 다 읽고 나니 사장언니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그들은 같이 앉아서 내게 편지를 쓰는 걸까?
“미안하고 사랑해. 나를 가장 이해해주는 사람은 늘 너라고 생각해왔어. 내가 너에게 복수를 한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 내가 지구를 떠나는 길에 동행하고 싶던 건 너였어. 하지만 넌 사는 동안 많은 즐거움이 남아있을 선택받은 사람이지. 나와 그에게는 이생이 너무 길어. 우리 몫까지 길게 살아주길 바라. 나는 나의 애인, 너의 남편과 함께할 때 가장 행복했어. 이유는 알 수 없어. 내게 한때 편안함과 행복을 준 그와 함께 떠난다. 너에게 용서를 바라지는 않을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너에게 남긴다. 넌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난 영원히 네 편이야. 사랑해.”
떠나는 두 사람으로부터 사랑고백을 들으며 나는 정말 슬펐다. 그들이 떠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다 잘 살 수는 없었을까? 그 긴 골목길을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걸까? 나는 커다란 우산을 쓰고 우리 세 사람이 길을 건너는 환상을 본다. 비는 내리고 우리 셋은 완벽하다. 하나는 작고 둘은 모자라고 셋은 완벽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미용실 ‘프루스트 헤어’에 빨간 머리 그녀가 들어선다. “하이, 하와유Hi, How are you?” “무슨 걱정 있어요?” 맑고 쩡쩡한 그 목소리가 내 음성을 듣듯 친근하다. 오늘은 염색하기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