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전화벨이 울린다. ‘이다’의 전화다. 우리는 서로 서툰 영어로 이야기한다. 어떻게 지내는지, 책방 운영은 여전한지, 한국말 실력은 늘고 있는지, 빤한 이야기를 나눈 뒤 언제 한번 책방에 들르겠다는 그녀의 말과 함께 통화가 끊긴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은 ‘보고 싶다’ 뭐 그런 느낌의 말이었다.
아내는 책방 의자에 정물처럼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뒤쪽으로 주문한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다. 코로나 시대를 핑계로 아내는 매일 무언가를 주문한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나는 주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가 주문한 물건들 속에서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중에 한 종류가 음반이다. 샀던 걸 또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제대로 듣지 않은 음반은 얼마나 많은 것일까? 읽지도 않은 책들은 얼마나 많이 쌓여있는 것일까?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후보연인들만 수두룩하게 모아놓은 가짜 바람둥이가 생각난다. 진짜 바람둥이는 헌책과 헌 음반들을 싫증날 때까지 실컷 읽고 듣다가 남을 줘버리는 사람일 것 같다. 내가 준 책과 음반 잘 보관하고 남에게 주지 말라는 부탁까지 덧붙이며. 아내와 나는 부딪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밤하늘을 유영하는 두 개의 혹성이다.
오늘따라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금요일 오후 다섯 시, 아내와 나는 책방 문을 닫고 근처의 음식점에 들어가 말없이 저녁을 먹는다.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는 아내는 짜조, 분짜 등과 쌀국수 한 그릇을 주문한다. 말없이 우리는 음식을 입에 넣고 씹는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말이 없어진 걸까?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눈물 나게 아내를 사랑한 기억은 없지만, 우리는 같은 영화를 좋아하고 같은 책을 좋아하며 별것 아닌 일에도 자주 웃는 일이 많았다. 지금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말없이 조용히 움직이며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식으로 변한 건 정확히는 우리 사이의 소중한 딸아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부터다. 나는 나의 슬픔이 아내의 슬픔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세월이 흘러 점점 일상으로 복귀하는 나에 비해 아내는 아직도 낯선 혹성에 체류 중이다. 주문한 물건들 중에는 아이의 장난감이나 예쁜 스웨터나 원피스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럴 때 나는 못 본 척 책장을 정리한다. 새로 나온 책들로 바꾸고 오래된 책들도 뺄 건 빼고 놔둘 건 놓아두는 등 매일 다시 정리한다.
식사를 하면서 말이 없는 가족은 참 외롭다. 따뜻한 말을 나누며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 사이로 ‘이다’의 얼굴이 겹친다. 이럴 때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다시 ‘이다’의 전화다. 우리는 또 서툰 영어로 이야기한다. ‘이다’는 문득 책방에 들렀더니 문이 닫혀있다고 말한다. 나는 튀어가서 책방 문을 열고 싶지만 아내와 식사중이라고 말한다. ‘이다’는 다음에 또 들르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고 싶지 않다. 그녀와 서툰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감자를 곁들인 독일 음식이나 스위스 음식 같은 걸 먹고 싶다. 아내와 나누던 모국어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낯선 혹성의 말 없는 말로 대화한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식의 대화가 아내와 나 사이의 자연스러운 소통법으로 자리 잡은 게 슬프기도 하고 편하기도 하다.
아내와 내가 가끔 말이 없이도 기분 좋게 머무르는 곳은 홈디자인을 파는 가게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즈음, 왠지 따뜻함이 밀려오는 가게 안에 들어가면 한동안 아내와 나는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이 된다. 멋진 커튼과 포근한 목욕가운과 파스텔 색조의 수건들과 와인잔들, 어쩌면 아내에게는 책방이 아니라 홈디자인 가게를 운영하는 게 어울릴 것도 같다. 나는 그 안을 어슬렁거리며 혼자 다시 와서 살 생각으로 ‘이다’에게 선물로 줄 와인잔을 아이쇼핑한다. 아내는 향수와 세일 품목인 거울과 모래시계를 구경한다. 아내는 모래시계를 좋아해서 수집한다. 나도 모래시계를 좋아한다. 길쭉하거나 둥글거나 작거나 키가 크거나 투명한 색이거나 반투명의 은은한 파스텔 색조의 모래시계들, 모래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숫자시계가 가리키는 시간보다 포근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왠지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다.
아내가 잔뜩 고른 물건들을 계산하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산다는 건 돈을 버는 것이다. 산다는 건 그 돈을 쓰는 것이다. 빚이 많다거나 죽을 때 돈이 많이 남는다는 것은 산수를 제대로 못하는 탓이다. 요즘의 아내가 살아가는 낙은 물건을 사는 것이다. 책을 팔아서는 감당 못할 정도의 쇼핑을 하는 것 같다. 문득 나는 이혼하고 싶어진다. 세상 떠난 딸아이의 아픈 기억만 아니라면 지금이 딱 이혼할 시간인 것 같다. 이곳을 떠나 ‘이다’와 함께 독일의 조용한 시골에서 책방을 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다. 작고 분위기 있는 복층의 책방에 독일어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거나 ‘되찾은 시간’이라는 제목의 간판을 달고, 근처의 작은 스케이트장에서 ‘이다’가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내 첫사랑 그녀가 얼음 위에서 새처럼 나는 모습이 ‘이다’의 모습에 겹친다.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본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의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생물과 서로 교감할 수 있다. 심지어 정붙이면 문어와도 교감할 수 있다. 학명이 옥토포스 벌가리스Octopus vulgaris인 문어참문어, 왜문어는 고양이나 개와 비슷한, 지능이 가장 높은 연체동물이다.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교감하지 못하고 늘 마음이 밖으로 도는 주인공은 거대한 바다에 잠수를 하면서 문어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문어처럼 생각하고 문어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문어는 인지력의 3분의 2가 바깥쪽 팔의 뇌에서 나온다. 문어가 그의 가슴에 탁 달라붙어 휘감으며 스킨십을 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제각각 움직이는 이천 개의 빨판을 지닌 여덟 개의 팔은 마치 천수관음상을 연상시킨다. 일본 춘화에 나오는 문어의 성적 판타지도 연상시킨다. 온몸을 휘감고 열린 곳마다 가득 채우는 문어의 팔과 손들, 나는 문어처럼 ‘이다’를 사랑하고 싶다.
얼굴이 서구적이면서 동양적으로 보이는 ‘이다’는 사실 혼혈로 일곱 살에 입양되어 미국으로 갔다가 독일계 제약회사의 이사인 양부모를 따라 독일로 이주했다. 베를린의 스케이트장에서 얼음을 지치고 있던, 내 첫사랑을 닮은 ‘이다’는 지금의 ‘이다’와 같은 사람일까? 그 장면이 현실인지 꿈인지도 사실은 불분명하다. 물건을 양손에 잔뜩 들고 가게를 나오며 나는 아내에게 이혼하자고 말한다. 아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 앞에서 걷는다. 이혼하자는 나의 말은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나 보다. 아니 나는 결코 이혼하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다음 순간 아내가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우리 이혼해요.” 이 장면은 늘 내가 두려워하던 그 풍경이다. “우리 헤어져요.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영어로 하면 더 실감 나는 그 말 “I don't love you anymore.”
내 이름은 ‘이다’. 한국이름은 ‘김이다’. 한국이름과 독일이름이 똑같다. 우리 부모는 내 이름을 왜 ‘이다’로 지었을까? 내가 한국에 온 건 엄마를 찾기 위해서였다. 내게 따뜻함의 기억을 심어준 우리 엄마. 나는 엄마가 떠준 목도리와 스웨터를 입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가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었다. 어릴 적 동네 학교 운동장에 얼음이 얼면 나는 쌍둥이 언니 ‘이레’와 함께 얼음을 지쳤다. 우리는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을 할 정도로 얼음을 잘 지치는 쌍둥이 자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셨고, 엄마는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 “이다야. 이다음에 너를 꼭 찾아갈게.” 했다. 그 말에 섞인 슬픔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잠시 헤어지는 거야. 절대 이게 끝이 아니야.”
한국어를 배운다는 핑계로 서울에 와서 나는 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 헤맸다. 내가 서촌의 작은 동네들을 헤맨 것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 책방’이라는 서점에 들어서자 나는 왠지 그곳이 낯설지 않았고, 내가 살던 집이 이 근처였다는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책방주인과 프루스트를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와 잃어버린 시간에 관해 하염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는 내가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페이지처럼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문득 이렇게 묻고 싶었다. 혹시 당신과 내가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 언젠가의 시간 속에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많은 세월이 우리 곁을 그냥 스쳐 지나가고, 나는 지금 여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는 중은 아닌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