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머니를 만난 건 비행기 안이었다. 일등석에 타고 있는 어머니가 이코노미석에 탄 동행을 찾으러 오다가 얼핏 나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얼굴의 기억이 흐릿했지만 텔레비전에서 본 얼굴이 틀림없었다. 물론 어머니는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 펭귄도 먼 길에서 돌아와 새끼를 알아보지 않던가? 냄새로 새끼를 알아보는 동물들도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서 먼 옛날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두드리던 북소리가 들렸다. 숨이 가빠졌고 나는 어머니가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내 기억 속에 저장된 향수 냄새의 기억은 낯익었다. 아주 어린 아기 때 맡았던 엄마 냄새. 그렇게 어머니는 날 자주 안아주지 못할 만큼 바빴고 젖 냄새를 감추려는 듯 짙게 향수를 뿌리고 다녔을 것이다. ‘화이트 린넨’, ‘플레져’, 아니면 ‘이터니티’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건 자넷의 화장대 위에 놓여있던 향수들이었다. 나는 문득 온몸이 가려운 걸 느끼며, 정신이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의 느낌을 느꼈다. 키가 유난히 큰 승무원이 달려와 나를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하는 소프라노의 높은 목소리가 거슬리면서 어렴풋하게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의사가 있으시면 와 주기 바랍니다. 급한 환자가 계십니다.” 누군가 내 곁으로 와 청진기를 갖다 댔다. 그리고 나는 정신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서 깼을 때는 승무원이 그 높은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다시 “괜찮으세요?” 하며 물 한 잔을 갖다주었다.
괜찮으세요? Are you OK? 도대체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그 말이다. 진심 없는 염려, 자넷의 상습적 거짓말, 진심을 담은 듯한 진심 없는 눈빛, 도대체 이해하는 척 진심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관심조차 없는 그저 척. 그녀들은 왜 그렇게 무엇 때문에 척만 하는 것인가? 나는 잘 모르는, 아니 세상에서 제일 알 수 없는 여성의 한 부류에 어머니를 넣어두었다. 도대체 제 어미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다른 여자를 어떻게 알 것인가? 무슨 쇼크라 했는데 그리 심각한 건 아니라 했다. 화이트 린넨, 플레져, 이터니티— 그 향수들을 뿌리는 여자는 나를 슬프게 한다. 아니 모든 향수 냄새는 나를 슬프게 한다. 세상의 모든 냄새는 다 가짜다. 나는 왜 모든 냄새, 모든 아름다움을 의심하게 되었는가? 문득 읽지 않고 사둔 어느 소설의 첫 구절을 읽는 기분이었다. 조용한 여자, 신비로운 여자. 나는 말이 없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미소 복제품 그림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난 그림이다. 아버지는 늘 그 그림을 좋아했다. 어릴 적 나는 그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무서운 미소가 있을까? 나는 무섭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미소가. 그중에서도 언젠가 내가 사랑한 여자들의 미소가. 그 미소들은 세상 어디에나, 흐드러진 꽃들처럼, 향수 향기처럼 널려 있는 것이다. 그 향기를 맡는 순간 우리는 덫에 걸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하지만 이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다. 덫에 걸려 피 흘리는 여자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의 덫이며 인간의 인간에 의한 덫이다. 덫에 걸린 가련한 동물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비닐에 칭칭 감겨 죽어가는 해저 동물들, 인간이 즐겨 먹는 고급 중국 음식 속의 지느러미가 다 잘려져 나가 서서히 죽어가는 거대 상어들, 야생동물을 길러 간이나 심장에 빨대를 꽂고 들이마시는, 인류의 조상인 살아있는 원숭이의 골 속을 파먹는, 세상 모든 동물의 기생충인 인간의 종은 끔찍하다.
비행기 안의 간이침대에 누워있는데 어디선가 다시 낯익은 향수 냄새가 풍겨왔으며 여지없이 어머니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먼 옛날의 어느 아프리카 부족이 두드리는 북소리가 내 가슴 속에서 들려왔다. 나를 찾으러 왔는지 모른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 그녀는 일등석 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목이 말라왔고, 물을 몇 잔이나 마셨는데도 계속 목이 말랐다. 반수면 상태에서 나는 엄마 펭귄이 못 알아본 불행한 새끼 펭귄으로 북극 어디선가 헤매는 중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기 전에는 아무도 그가 행복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행복이라는 게 자신 말고 누가 평가한다는 말인가? 그는 ‘행복 불감증’이라는 용어도 만들었다.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상태, 내가 그랬다. 즐거움을 느끼기는커녕 늘 불안했고, 그때는 몰랐지만 요새 말로 어린이 우울증, 일종의 공황증세였을지 모른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두려움, 혼자 됨의 공포, 아버지는 늘 내게 다정했지만 차가운 어머니에 대한 짝사랑은 생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어릴 적, 길가에 버려진 강아지를 아버지를 졸라 데리고 오던 날. 자다가도 두려움에 경기를 앓던 새끼 강아지, 너는 무엇이 그리도 무서웠던가? 그렇게 두려움에 떨던 강아지는 자라 옆집 암컷을 따라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느 영화에서인지, 내 기억 깊숙이 자리한 누군가의 생애인지 한 소녀의 실루엣이 얼핏 떠오른다. 구십 세도 한참 넘은 어느 할머니가 흰머리를 휘날리며 바이올린을 켠다. 얼마나 사납게 켜는지 줄이 다 끊어질 것만 같다. 어린 시절 그녀는 길가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살아가던 집시 가족의 일원이었다. 어느 저녁 갑자기 독일 군인들이 와서 어머니와 아버지, 소녀와 어린 동생을 끌고 가 기차에 태웠다. 소문으로 들은 그 무서운 기차임이 분명했다. 짐짝보다 못한 인간 짐짝들이 마구마구 쌓여가 숨 쉴 틈조차 없어져 갔다. 그들은 유대인이거나 집시거나 공산주의자거나 정치범이거나 육체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장애인들이거나, 위대한 독일 국민에게 해가 된다는 이유로 분류된 인간들이었다. 그들 가족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소녀는 나치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게 되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광경이 펼쳐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소녀는 건물 2층에서 나치 장교들이 총으로 유대인을 쏴 맞추는 걸 보며 공포에 떨었다. 소녀는 배고픔과 추위와 공포에 떨면서, 쉬지 말고 연주하라고 재촉하는 어느 나치 장교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이올린을 쉬지 않고 켰다. 자신이 무슨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소녀가 연주하는 것은 이미 음악이 아니었고 제단에 바쳐진 목숨값이었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어른이 되어 바이올린을 다시는 손에 잡지 않은 그녀에게 바이올린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사물이 아니라 꿈속에서도 만지기 싫은 비극적인 사물로 여겨졌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자기 자신이 마치 그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억울한 영혼들에 빙의 된 느낌이었다. 이후 그녀는 다시는 바이올린을 켜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르쳐준 유일한 추억의 흔적인 바이올린을 남은 물론 자기 자신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바이올린이라는 물건을 뇌리 속에서 지워버렸다. 어느 날 손녀딸이 찾아낸 창고 깊숙이 숨겨진 기억의 바이올린을 보며, 어린 시절 수용소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소녀와 어느새 구십이 된 노인의 화해의 순간, 그 연주 실황을 유튜브에서 보았을 때 나는 나의 모든 상실의 슬픔이 다 어리광이라는 걸 알았다.
모나리자, 나의 어머니, 내 아버지는 그 덫에 걸렸었다. 그리고 머리까지 우수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이길 길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이기는 일이 절대 아닌 것이다. 어디서부터 돌아오는지 문득 기억이 나지 않는 채, 이십 분 뒤 그 비극의 주인공 이름을 딴 J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들려왔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닮은 나의 어머니는 또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