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자넷
오! 자넷. 그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던 사람에게서 치명적이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할 때, 원래부터 입만 열면 거짓말인 진심 없는 존재가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실망스러운 낯선 존재로 변해버렸다고. 마음 바이러스 같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그녀의 뇌 속으로 들어가 진심을 가장한 시늉뿐인 괴물로 변해버렸다고. 천사였던 그녀가 다 부서진 괴물 로봇의 삐걱거리는 소음을 철컥거리며 나를 실망시켜도 원래부터 부서진 괴물 로봇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망가진 거다. 누가 그녀를 그렇게 망가뜨린 걸까? 진심이라곤 한 조각도 없는, 그럼에도 진심 덩어리로 느끼게 하는 에이아이AI를 닮은 인간.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인간이 망가지지 않은 건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니 감히 망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자넷의 진심 시늉에 관해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을 속속들이 다 이해하는 것만 같았던 사람. 이 세상에 누가 누구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이해할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책을 읽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레이트 개츠비』를 읽었다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한 그녀는 사실 『위대한 개츠비』의 첫 장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책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고백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이 이야길 해주고 싶었다는 그녀의 눈에 잠시 물기가 돌았다. 그런 고백이 왜 필요했던 걸까? 당신의 눈에 감돈 물기는 진짜였던 것이냐. 어쩌면 그녀가 우체국에서 일을 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걸 믿을 수 없었다.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한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은 하지 않아도 좋은 인생의 경험 중 하나이다. 적어도 어머니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자넷의 거짓말은 심각했다. 거짓말을 고백하는 것도 다 거짓말처럼 들렸다. 나는 갑자기 거짓말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내가 해준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는 한국말을 하기 싫어하는 내가 “딜리셔스?” 하고 물으면 늘 “딜리셔스.” 하며 끄덕이던 사람, 나보다 더 사랑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천사 같은 얼굴로 입만 열면 거짓말을 했던 거라는 걸 어느 날 알게 된 슬픈 기억을 가진 사람과 만나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술 한 잔하고 싶어진다.
문득 1990년대 영화 「M. 버터플라이」가 생각난다. 주인공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녀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고, 심지어 그에게서 기밀을 빼내기 위한 스파이였다. 당연히 사랑 따위 있었을 리가 없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고 단 한 순간도 진심 따윈 없었던 거다. 나는 그 영화를 다시 보았다. 다시 본 영화의 결말은 조금쯤 다르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들이 서로 너무 강렬하게 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사랑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정반대의 결론에 잠시 도달했다. 하지만 잠시일 뿐, 다시 쓸쓸한 결말이 현실과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그 영화가 실제에 기반한 영화라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심 따위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그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는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쓸쓸한 기분에 젖어 한없이 거리를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버스에 붙은 화장품 광고판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을 의심하며 멀어져가는 그녀를 따라 버스를 쫓아간다. 버스 속의 그녀가 달린다. 갑자기 광고판 속의 그녀가 실물이 되어 버스에서 뛰어내린다. 다음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녀의 주위로 모여든다. 그녀가 죽었다. 나는 그렇게 마음속에서 그녀를 지운다.
나, 자넷
나의 어머니는 히틀러 팬이었다. 히틀러의 초상을 어설픈 솜씨로 그려 거실 벽이 걸어놓았고 ‘마인 캄프Mein Kampf, 나의 투쟁’을 외우다시피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화가 나거나 야단을 칠 때 나는 히스토리 채널에서 보았던 히틀러의, 듣는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듯한 광적인 연설이 떠올랐다. 절대 잊히지 않는 그의 팔의 각도와 연설할 때의 그 악마적 열정이 내 안에서 분노로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 앞에서 수용소의 유태인처럼 떨고 있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독일계 유태인이었고, 아버지의 공포에 질린 모습은 내게 우울한 초상으로 남아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버지를 집에서 쫓아냈고 그 뒤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남편과 결혼해 살면서 히틀러를 존경해 마지않는 남편의 모습을 볼 때 나는 히틀러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악마들의 연대는 다음 세대의 마음속에서 계속된다. 어머니는 내가 성적이 떨어지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 이를테면 말을 더듬거나 어머니에게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예외 없이 히틀러의 악마적 연설을 떠올리게 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혼나지 않으려고 아주 어릴 적부터 거짓말을 했다. 내 거짓말의 역사는 그러므로 유년의 기억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학교에 가서도 나는 거짓말을 했다. 친구를 사귈 때도 거짓말을 했다. 나는 부유한 아버지와 지적인 어머니 사이의 아무 걱정 없는 아이인 척했다. 나는 가끔 마음이 이유도 없이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히스토리 채널에서 본 히틀러의 연설이 떠올랐다. 텔레비전의 음향 소리를 들리지 않게 다 죽인 뒤에도 그의 입놀림과 손짓 몸짓은 소리 없는 총성으로 느껴졌다. 히틀러의 판토마임이 떠오르면서 나는 갑자기 픽하고 쓰러지곤 했는데 사실 그 쓰러짐조차 거짓말이었고, 쓰러지고 나서야 어머니는 내게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슬픔과 고독의 원인과 결과였으며 자신이 쫓아내긴 했지만 진짜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대체 대상이었다. 거짓말은 나의 생존 방법이었고 언제부턴가 나는 나의 거짓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어차피 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상상에 빠져들었다.
아니 상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히틀러를 숭배하는 남편은 언젠가부터 나의 거짓말을 눈치 채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남편은 우리 딸 미아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망상에 빠졌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아니 나도 잘 모르겠다. 하도 거짓말을 하다 보니 어느 게 진실인지 나조차 의심스럽다. 남편의 아이가 아니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어느 게 진실인지 더욱 헛갈리게 했고, 딸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는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이혼했고 나는 우체국에 취직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체국에 취직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트빌리지의 어느 화가의 집 파티에 친구 따라갔다가 영문학을 전공하는, 핏츠제럴드의 『그레이트 개츠비』를 좋아한다는 한국 남자를 만났고 그 책을 읽었냐길래 으레 그렇듯 읽었다고 답했고 그때부터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호감을 느낀 건 내가 우체국 직원이라는 것과 『위대한 개츠비』를 좋아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사실 나는 피츠제럴드가 누군지 개츠비가 누군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와 나는 사랑에 빠져들었고, 하긴 나는 사랑이 무언지도 모른다. 그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인가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 따위 없어도 괜찮았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내가 하나를 주면 두 개를 주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다 세 개를 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나는 그를 더 사랑할 것이고 네 개 다섯 개 열 개를 주는 사람이 앞에 나타나면 당연히 더 많이 주는 쪽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한다.
남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는 관심 없다. 내가 한동안 사랑했다고 생각한 한국 남자의 순수와 열정은 잠시 내게 수학적인 사랑의 개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그는 무슨 독심술을 쓰는 것처럼 돈이나 물건이 아닌 마음이라는 추상명사 속으로 나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가 하는 문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얘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많았지만, 나는 수준이 높은 것처럼 느껴지는 문학인지 뭔지 그런 것들의 향기에 한동안 가스라이팅 당한 건지도 모른다.
외로웠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전남편이 롤스로이스 차를 몰고 우리 아파트 현관 앞에 나타났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맨해튼의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와 미아를 데리러 왔다는 재결합의 제안을 들었을 때 자동차와 아파트가 문학인지 뭔지를 이겼다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