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몇 날 며칠 돌아오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분실물을 모아놓은 곳이 있다면, 그곳에서 잃어버린 남편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을까? 갈 만한 곳을 다 수소문해도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경찰에다 실종신고를 하고 마음을 비운 채 기다린다. 마음은 그렇게 쉬 비워질 수 있는 걸까?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상처받기 마련이다. “상처받는다. 고로 존재한다. 상처를 준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낱말놀이를 하고 있나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남편에게 어떤 치명적인 상처를 준 건 아닐까? 나는 슬픈가? 아니 나는 무섭다. 이런 식의 상실감은 처음 느끼는 감각이다. 내 불안한 마음의 틈 사이로 어디선가 낯선 벌레 한 마리가 출몰한다. 문득 나는 이 벌레가 사라진 남편일까 봐 겁이 난다.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카프카의 ‘그레고르 잠자’보다 훨씬 고색창연한 ‘마르셀 프루스트’ 벌레, 하지만 나는 해로운 바퀴벌레를 없애려는 본능에 사로잡혀 그놈과 사투를 벌인다. 이 역시 남편의 실종을 잊으려는 행동의 일환이리라. 살충제를 잔뜩 뿌리니 뒤집혀 버둥거리는 놈을 화장실에 흘려보내고 뭔가 할 일을 했다는 안도감과 어쩌면 그놈이 바퀴벌레가 아니라 해충을 잡아먹는 인간 편에서의 선한 곤충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함께 엄습한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은 ‘분별 망상’이란 게 이런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분별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분별하고 선택하며 살아간다. 나의 선택, 나의 사랑, 내 남편 프루스트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열흘이 지난 후 남편은 관광객을 잔뜩 실은 대형 유람선 안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 아예 잊어버렸다. 말로만 듣던 기억상실, 그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어떻게 무슨 이유로 그는 집을 떠나서 유람선을 탄 것일까? 유람선이 마치 그의 집이었던 것처럼 몇 날 며칠 머물다가 쓰러진 채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문득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같이 본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떠올랐다. 여운이 긴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도 울면서 계속 앉아있는 옆자리의 내게 손수건을 내밀던 모르는 남자가 영화 속의 피아니스트와 닮았다는 생각이 스쳐 지났던, 처음 그를 본 순간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잊히지 않는 영화 속의 독백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이 배에서 태어났어. 그리고 나는 여기서 행복했어. 무한하지 않은 건반을 치며. 피아노 건반은 시작과 끝이 있지. 88개의 유한한 건반을 가지고 우리는 무한한 음악을 연주해. 내가 두려운 건 보이지 않는 세상의 끝이야. 배 밖의 세상은 끝이 없는 무한한 건반이지. 그건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육지는 내겐 너무 큰 배, 너무 아름다운 여인, 너무 긴 여행이고, 너무 강한 향수,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난 절대 이 배에서 내릴 수 없어. 꼭 필요하다면 내 삶에서 내리겠어.”
어쩌면 내 남편 프루스트는 먼 전생이던가 어느 낯선 혹성의 시공간에서, 영화 속의 그 배에서 태어나 버려진 뒤 한 번도 배 안을 떠나지 않고 살다가 세상을 떠난 그 피아니스트가 아니었을까? 그러던 잠시 나와 함께 살다가 배 안으로 돌아갔던 건 아닐까?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폐허가 된 배 안에 남아 피아노도 없이 허공에 피아노 건반을 치는 대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던 나의 연인 마르셀 프루스트,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 현기증이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서 더욱 사랑한다던, 네스프레소 캡슐 안에 저장된 시간들도 그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당신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요?” 그래서 내가 답한다. 당신은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화가이며 나의 남편이라고. 그는 내가 하라는 대로 내가 했듯이 캔버스에 밑칠을 한다. 낯선 빨간색, 낯선 노란색, 낯선 파란색, 낯선 초록색, 낯선 내 남편 프루스트, 그리고 제일 낯선 나-
나는 남편이 칠한 캔버스 위에 남편이 그리던 그림 비슷하게 흉내를 낸다. 추상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화가가 아니라 해도 그 곁에서 매일 구경만 해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추상화를 그릴 수 있다. 추상화의 아버지 ‘바실리 칸딘스키’는 1910년 어느 날 우연히 거꾸로 놓인 그림을 보고. 점과 선과 면과 구도, 색채만으로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태어난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현대미술의 혁명이었다. 처음 추상화를 그린 사람은 얼마나 용감한 것일까? 누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는 모든 시작은 아름답고 용감한 일이다.
남편의 그림은 칸딘스키보다는 몬드리안에 가깝다. 경쾌하고 질서정연하고 철학적이다. ‘피에트 몬드리안’은 나무를 그리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나가다가 절대적이고 추상적인 현대적 풍경을 그려냈다. 아름다운 형식과 질서의 세계, 때로 세상이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는 내 마음의 풍경을 구상이 아닌 추상으로 그려본다. 하긴 어릴 적 나는 그림을 그리길 좋아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에 처음 선을 긋는 일이 늘 두려웠다. 막상 계속 그리다 보면 행복해지는 그림 그리기,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리는 어른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그린 완성된 그림 위에 내 남편 프루스트는 아이처럼 신이 나서 ‘마르셀 프루스트’라고 쓴다.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한 일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들으며 번역도 밑칠도 아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더욱 아닌, 오전 열 시 혹은 오후 두 시경 네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아무 생각 없이 남편의 그림을 바라보거나 요즘 심취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섬세한 망으로 짜인 문장들을 읽는 일이다. 무책임한 산책자, 그처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음악을 듣고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돈을 버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만 한, 또한 뭔가 해내거나 이루려는 욕심 또한 없는, 그러면서 환한 마음과 평온을 유지하는 사람, 어쩌면 어릴 적 내 꿈은 그런 것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빨리 늙고 싶었다. 읽어도 읽어도 밑도 끝도 없는 책,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만난 뒤부터, 그 방대한 책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새로 번역하고 싶은 열망으로 나는 시간이 지나가는 숨소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 평화롭게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내 운명의 암시일지도 모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이 아닌 내 남편 ‘마르셀 프루스트’의 그림을 번역하라는.
언제까지 내가 남편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누구일까? 이 그림이 ‘무슈 프루스트’가 아니라 ‘마담 프루스트’가 그렸다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내년에는 전시가 열릴 예정이고, 내가 그린 그림과 남편이 예전에 그린 그림들을 나란히 걸을 것이다.
내 남편 프루스트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요?”
그래서 나는 답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대작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소설가라고.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펼쳐준다.
내 남편 프루스트는 생애 처음으로 그 책을 읽기 시작한다.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