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프루스트
영문으로 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느닷없이 보낸 이후 그녀와 다시 연락이 끊겼다. 주소가 없이 보낸 터라 나는 답장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삼촌과 숙모가 난생처음으로 유럽 크루즈 여행을 갔다가 선박 충돌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식이 없던 두 분들로부터 나는 작은 아파트 한 채와 한 오 년은 그림만 그리며 먹고 놀 수 있는 만큼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매니저 일을 맡아 하던 와인바를, 주인인 선배가 이민을 가는 차에 인수하여 이름을 ‘카페 프루스트’로 바꾸었다. 쉬는 날인 매주 월요일은 밤에 자는 시간이 아까워 꼬박 새워 그림을 그리곤 했다. 하지만 다음날 잃어버린 햇빛은 또 어떡하란 말인가? 우리는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일까? 낮과 밤을, 자유와 안정을.
새로 나온 고흐 영화를 보았다. 고흐는 노란색을 사랑했다. 나도 노란색을 사랑한다. 고흐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그림이다.” “나는 늘 화가였다.” 정신병원의 의사는 묻는다. “그림으로 돈도 못 벌면서 당신은 자신을 왜 화가라고 생각하는가?” 고흐는 답한다,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왜 그림을 그리는가?”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 “나는 나와 영원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미래 세대와 소통하는 화가인 나는 세상을 잘못 타고났다.” 나 역시 미래 세대와 소통하며 그들이 나를 잊히지 않는 소중한 예술가로 여겨주길 바란다. 이건 현실도피가 아니라 그리 큰 운이 따라주지 않은 대단한 예술가의 생존법이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자신을 죽이지 않기. 몇 번이라도 부활하기. 이 지구가 살아남을 때까지. 영화 속에서 고흐가 머물렀던 정신병원 안 병실의 벽은 노란색으로 칠해져있고 보라색으로 “나는 제 정신이다.”라고 씌어 있었다. 나 역시 불멸을 친구로 삼지만, 그럼에도 제정신이다. 그렇게 고독한 과대망상의 밤에 나는 불쑥 그녀가 그리웠다.
정말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어느 대기업 건물의 크리스마스파티에서였다. 아는 친구 소개로 파티에서 음식과 와인을 조달해 서빙하던 중 목이 깊이 파인 긴 검은 드레스를 입고 플루트를 연주하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내 눈을 의심했지만 그녀가 틀림없었다. 파티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나는 그녀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에 에워싸여 있었고, 어느새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 그곳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내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했을 때 그녀는 마치 헤어진 혈육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주 특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여자가 두 명 있었다. 하나는 검은 옷을 입은 그녀이고 하얀 옷을 입은 또 다른 그녀였다. 그녀는 늘 검은 옷을 입었고 또 다른 그녀는 늘 하얀 옷을 입었다. 알고 보니 하얀 옷을 입은 여자는 기업 대표의 아내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검은색과 흰색의 드레스를 입었고, 신기하게도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하얀 옷을 입은 여자는 늘 음악회가 끝나자마자 자릴 떴다. 검은 옷을 입는 그녀는 늦게까지 남았다가 대표라는 남자와 또 다른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음악회장을 떠났다. 그녀는 내게 오래 말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어느 봄날 그녀가 카페 프루스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와인 한 병을 시켜 마시며 아무 말도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페 프루스트’, 제목이 좋네.”
그녀와 마주 앉자 지나간 세월의 시간들이 마구 거꾸로 흐르며 아직도 그녀에 대한 감정의 맥박이 되살아나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게 갖게 된 관심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물감처럼 유효기간 없이 평생 가는 것도, 비교적 긴 유효기간을 지닌 약품도, 물휴지처럼 꺼내자마자 물기가 마르고 마는 짧은 유효기간을 지닌 사물도 있듯이, 사람에 관한 관심도 그렇다. 아마도 그녀에게 향하는 나의 눈물 나는 관심은 영원히 마르지 않을 그런 사물의 영혼 비슷한 거였을까? 그녀가 말했다. “나 사랑하는 사람 있어.” 그래서 내가 물었다. “누군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그 이상은 묻지도 않고 답하지도 않았다. 나는 또다시 내 앞에 나타난 그녀가 그 옛날과 똑같이 곁에 있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이 먼 창밖 풍경만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다. 그렇게 그녀는 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참 뒤 길에서 꼬마 소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녀와 마주쳤다. 그 뒤로 아주 가끔 그녀는 카페 프루스트를 찾아왔다. “딸아이는 잘 있어?” 그러면 “응. 매일매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라고 있어.” 했다. “아이 아버지는?” 하고 물으면 그녀는 또 먼 창밖을 바라보며 그냥 하얗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 노래 하나만 불러도 돼?” 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녀는 반주도 없이 뜬금없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기보다는 랩이거나 중얼거림 같은 거였다. “나는 아무 신경도 안 써요. 아무 걱정 안 해요. 나는 백만장자랑 결혼할 거예요. 그 사람이 죽어도 난 슬퍼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되니까요.” 처음 들어보는 이 뜬금없는 노래는 『어머니』라는 제목의 어느 다큐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라고 했다.
그 뒤로 또 오랫동안 그녀를 만날 수 없었고 또 우연히 어디선가 부딪치고 또 연락이 끊겼다가 SNS시대에 다시 만나 소식을 주고받았다.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세상에는 심심한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없어졌다. 외롭지 않다는 환영, 행복하다는 환영을 주는 기계도 머지않아 시판되리라. 도대체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 스마트폰이 되리라는 상상을 해보기나 했을까? 우주에 가봤자 아무것도 없고, 스마트 폰이 목성이며 수성이며 금성이고 달이며 우리 의식과 무의식의 바다라는 걸. 스마트폰 안에 한 사람의 잃어버린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그녀는 가끔 페이스북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올렸다. 나는 그녀의 그림을 좋아했다. 나처럼 척박하게 살아온 사람의 그림은 미친 듯이 환한데, 겉보기에 평탄한 유년 시절을 지낸 그녀의 그림은 왜 그렇게 슬프고 우울하고 무섭고 음울했을까? 누가 유년을 행복하다 하는가? 그 시간들에 내가 겪은 불행은 지금보다 훨씬 깊고 넓은 지평이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겨울날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과 귤이 가득 담긴 쟁반, 그런 평화로움의 기억이다. 아마도 프루스트는 그런 걸 썼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페이스북에 가끔 올리는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는 쫓기는 이미지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세 남자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길에 서 있고 한 여자가 맨발로 길 위를 뛰어가고 있다. 혹은 철조망에 갇힌 원숭이가 철조망 사이로 손을 내밀고 파란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그림을 볼 때마다 언젠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나 미행당하고 있어.” 하던 그녀의 마르고 수심 가득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의 딸아이가 매일매일 무섭게 자라는 식물처럼 숙녀가 될 때까지 우리는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 살았다. 그녀를 못 잊는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나의 강박관념이었을 뿐,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뭐 그러면서 생이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카페 프루스트는 그렇게 지나가는 생의 속도를 잊으려는 사람들로 조용히 북적였다.
나는 가끔 어느 날 저녁처럼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영안실에서의 시간이라니. 문득 어디선가 읽은, 죽은 이들의 사진은 ‘가슴 설레는 현존’이라는 인상적인 말이 생각난다. 죽은 사람은 사진 속에서 영원히 늙지 않기에. 사진 속에서 특유의 하얀 표정으로 웃고 있는 그녀도 그럴 것이다. 아니 그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가 살아있는 날까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할 것이다. 텅 빈 영안실의 상주로 앉아있는 그녀를 딱 빼닮은 딸아이를 보고 내가 말했다. “엄마 친구인 나는 널 잘 안단다.” 그녀는 “엄마가 아저씨 얘기 많이 했어요. 참 좋은 사람이라고요.” 했다. “아버지는?” 하고 물으니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지도 않고 답도 없어요.” 했다. “아버지가 누군지는 아니?” 하니까 그녀가 제 엄마의 하얀 표정과 똑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난 적은 있어?” 하니까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 안 해도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딸아이는 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갑자기 발견된 암 증세가 심해지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투병을 하고 있던 병실에 단 한 번 왔다 갔다는 말을 엄마로부터 들었다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의 환상일 것이다. 내가 카페 프루스트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의 환상을 가끔 보았듯이. 나는 알 수 없는 복수심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유기했다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그 누구에 대한 복수심, 나는 그를 만나 묻고 싶었다. 묻는 내용도 중요하지 않았다. 텅 빈 빈소에 나타나지도 않는 그자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문득 이런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즉, 어떻게도 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 해보고자 하여 붙들 수 없는 생각을 더듬으며 아까부터 주작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무심결에 듣고 있었던 것이다. - 『라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