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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그게 진짜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은 최후의 종교, 최후의 국가, 맨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이념”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내가 그랬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듯이. 사랑하다가 죽어도 좋았으니까, 친구들이 나를 개츠비라고 부르는 게 나는 좋았다. 대학 시절, 과는 달랐지만 어디서나 빛나던 그녀가 엄청난 부잣집 아들과 열애 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매일 편지를 썼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쳐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어느 날은 가방 안에 가득 든 내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쓱 내밀고 가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 시절에는 드문 이름 마리, 과학도인 그녀를 숭배했고, 편지 속에서 ‘나의 마리’라고 쓰곤 했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마리 퀴리’처럼 되라고 지어준 이름이었다. 진실로 그녀는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마리 퀴리’였다. 친구 녀석들은 그녀가 마리가 아니라 데이지라고 놀려댔다. 영문학을 공부하던 우리 과 친구들은 개츠비가 사랑한 여인은 마리가 아니라 데이지라고, 언제나 되어야 윤희나 경아 같은, 그렇게 좀 정상적인 상대와 사랑을 할 거냐고 놀렸다.
어느 눈 오는 겨울, 나는 학교 앞의 카페에서 그녀가 혼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다가가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가만히 앉아 우는 그녀의 모습을 숨도 쉬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얼마나 되었을까? 어쩌면 10분이었거나 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우리는 근처 선술집에 나란히 앉아 소주 두 병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연인처럼 어깨를 감싸고 학교 앞의 여관에 들어갔을 때, 나는 새벽이 올 때까지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울의 제법 큰 개인 병원의 수간호사였고, 아버지는 병원장이었다. 병원장의 아내가 우울증이 심해서 쩍하면 자살을 시도하다가 세 번째 자살 시도에 성공했고, 병원장은 평소에 참해 보이던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부유한 환경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그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문제가 많다는 걸, 아버지가 어머니를 불행하게 한다는 걸 알았다. 심한 의처증이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자기 딸이 아니라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딸에게 냉정하게 굴기 일쑤였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그녀는 아버지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냉정하다가도 갖은 선물을 다 사주는 다정함을 보였다. 어쩌면 그런 성장 과정 때문에 그녀의 성격 형성에 문제가 생긴 건지도 몰랐다. 그녀는 쇼핑을 좋아했다. 백화점에 가서 옷 몇 벌을 사면 엄청난 액수가 되곤 했고, 그녀의 지갑은 마를 날이 없었다. 쇼핑을 질리도록 한 뒤 집에 돌아가면, 밤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당신, 마리가 내 딸인 줄 안다고 생각해? 어머니는 늘 똑같은 질문에 언제나 묵묵부답이었고,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카페에서 울고 있던 그녀는 아버지 때문도 아니고 어머니 때문도 아니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버지가 친아버지가 아니라 해도 심지어는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자신만의 길을 화려하게 걸어갈 수 있으면 그뿐이었다. 그녀가 울고 있던 건 부잣집 아들인 남자 친구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격 이상이라는 소문과 전처가 자살했다는 둥, 갖은 나쁜 소문이 그 집에 다 들어간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날 오후, 사랑해 마지않던 남자 친구가 결별을 선언했다. 그날 첫눈이 내렸고, 그날은 그녀와 내가 사귀기 시작한 날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였다. 전처 중 한 사람은 사고로 또 한 사람은 병으로 죽었다. 두 전처 사이에 자식이 넷이 있었고, 그것도 다 아들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꽤 돈을 잘 버는 인쇄업자였고, 아들 다섯을 둔 걸 행복으로 느끼는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꿈은 아내가 더 이상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배가 다른 자식들 사이에 얼마나 큰 알력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아버지의 유난한 편애 때문에 의붓형들의 질투로 나는 매일 사는 게 버거웠다. 자신이 매일매일 부활하는 예수 같다고 느끼기도 했다.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었고,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단다.” 매일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교회에 다니다가 어머니를 만났고, 어머니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착한, 하지만 아이가 넷이나 되는 남자의 끊임없는 구애에 굴복해 결혼했다. 나는 철이 들면서 집으로부터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미국이거나 독일이거나, 그 어디라도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야겠다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굳게 마음먹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위대한 개츠비』를 원문으로 읽기도 했다. 개츠비라는 식물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서 자랐다. 최후의 종교, 최후의 국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을 이념, 나의 사랑…… 친구들이 하나둘 입대하기 시작했고, 나는 붉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록색맹으로 분류되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군 면제가 되었다. 나의 사랑 마리가 나를 택한 건 오직 그 이유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유학을 떠나기로 약속한 우리는 매일 만나 영어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우리는 똑같이 푸르디푸른 꿈과 더불어 집으로부터 도망친다는 목적으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의 결사대였고, 난생처음 외국 땅을 밟았다. 생각과는 얼마나 다른 많은 일들이 벌어질지 조금도 모르는 채.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남들이 빨간색으로 부르는 게 내게는 초록색으로 보인다는 걸 처음 알게 된 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화가가 될 수 없겠구나.” 그날 이후 나는 화가가 되는 꿈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진짜 화가가 될까 봐 늘 걱정하셨다. 다른 아들들과 확연히 다르게 공부를 잘했으므로 아버지의 나에 대한 기대도 컸다. 게다가 화가라는 직업은, 그 시절 많은 사람들처럼, 아버지에게는 직업이 아니었으므로. 하지만 담임 선생님은 내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지도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의 독창적인 색깔은 그가 색맹이거나 색약이었기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거였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의 말을 듣지 마라. 너의 판단에 의한 너만의 길을 가라.
인간 세계에서 색맹으로 분류되는 일이 동물 세계로 가면 색맹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게다가 다른 특수 동물과 비교했을 때 인간은 모두 색맹일 수도 있다. 나는 아들이 자라면서 색맹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동시에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아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색맹의 연대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귀가 들리지 않는 부부가 자식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섭섭함을 느끼는 것처럼.
나의 사랑, 내가 그녀를 떠난 건지 그녀가 나를 떠난 건지는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