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집안의 낡고 오래된 물건들 중 그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쓰레기들을 매일 집으로 끌어들였다. 결혼 초엔 그냥 알뜰하고 검소한 성격이라고 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머지않아 집은 가득 차기 시작했고 아무리 말려도 아내는 매일 뭔가 새로운 물건을 주워 가지고 들어왔다. 헌옷, 액세서리, 중고 레코드판, 헌책들, 헌 가구들, 이상하게도 나는 그녀가 가지고 들어오는 물건들에 넌덜머리를 내기는커녕, 슬며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그런 그녀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한 거다.
나는 소설가다. 프루스트를 존경하고 지겨워하고 혐오하고 사랑하는, 프루스트처럼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하루 종일 글을 쓰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기도 하는 내게 아내는 딱 맞는 물건을 주워다 줬다. “딱 당신 의자야. 누가 이런 의자를 버리는지 이해가 안 가.” 나는 그 의자를 보자마자 어디서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언젠가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이며 건축가이기도 한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의 전시에서 ‘프루스트 의자’라는 작품을 본 기억이 났다. 왜 그런 제목이 붙여졌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의자가 꼭 갖고 싶었다. 언젠가 오래전 파리 여행 중 친구 따라 구경 간 앤티크 경매에서 진짜 프루스트의 의자를 본적이 있다. 프루스트는 주로 침대에서 생활하고 글을 썼기 때문에 의자는 침대의 부속기관 같은 거라며, 침대에서 있던 시간들을 빼고는 그 『유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던 귀한 의자라고 했다. 그 의자가 사고 싶었으나 너무 비싸서 사지 못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의자의 영상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아내가 주워온 프루스트 의자는 진짜 프루스트가 사용했던 의자가 아니라, 디자이너 멘디니가 정통 바로크 양식의 의자에 새로운 패턴을 그려 넣어 만든 작품 ‘프루스트 의자’의 카피 같았다. 정보를 클릭하니 “더 이상 창조는 불가능하다.”는 멘디니의 철학을 담은 작품으로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것을 변형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했다. 1978년에 처음 발표된 ‘프루스트 의자’는 갖가지 패턴으로 변형되어 전 세계에 팔려나갔다. 아내가 주워온 의자는 오래전 전시에서 보았던 의자에 비해 디테일이 조악했다. 어쨌든 나는 그 의자가 맘에 들었고, 의자가 우리집에 도착한 날부터 멍때림을 제대로 시작했다. 그건 거의 설렘의 연장선에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그 의자에 앉으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침대 속에서 빨리 걸어 나와 그 의자에 앉고 싶어졌다. 의자는 나로 하여금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게 했다. 도대체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을 기쁘고 고맙게 누리는 연습에 우리는 왜 늘 실패하는 것일까? 있을 때 잘하자. 나의 시간에게. 프루스트적으로.
어릴 적 엄마를 따라 어느 화가의 집에 간 적이 있다. 화가의 집 문이 열리자마자 유화 기름 냄새가 훅 끼쳐왔고, 넒은 거실이 다 작업실이어서 소파를 제외하면 온통 그림들과 붓과 물감들의 향연이었다. 그녀는 뱀을 주로 그리고 있었다. 뱀들이 캔버스에서 춤을 추고 실제 뱀 몇 마리가 투명 아크릴 통 안에 있었던 것도 같다. 그녀가 아버지의 연인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독한 말을 하려고 갔다가 화가 아줌마의 ― 그 호칭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 기에 눌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왔다. 독한 말은커녕 존경과 칭찬의 말만 늘어놓았고 우리 아들이 장래 화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나는 그림이라면 정말 인연이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엔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사물을 비슷하게 그려야하는 나이에 이르러 나는 그림과 결별했다. 사물을 닮게 그리는 일은 마치 달에 가는 것처럼 먼 일이었다. 닮게 그리려고 할수록 그림은 실물에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사물을 닮게 그리는 일이야말로 사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어머니는 화가가 꿈인 그림 잘 그리는 아들 핑계를 대고 그 집에 들어섰고, 화가는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알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화가는 냄새가 향긋한 모과차를 손수 끓여 내왔다. 나는 그 후 모과차를 좋아하게 되었다. 왜 생강차나 대추차가 아닌 모과차의 기억인가? 엄마와 화가가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중 나는 혼자 슬쩍 다른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엔 큰 책장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 한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어쩌면 제목이란 그 존재의 모든 것이다. 그 책의 이름이 어린 내 맘에 꽂혔고,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이후 그 책을 읽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래서 내 잃어버린 시간들은 책 속이 아닌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와 낯선 곳으로 여행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화가는 내게 열심히 그리라는 격려의 말과 함께 뱀 한 마리가 그려진 작은 판화 한 점을 돌돌 말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선물로 받은 그 뱀 그림은 아직도 내 방 벽에 걸려있다.
언제부턴가 아내는 내가 자신을 뱀처럼 휘감아 질식시킬 것 같다는 이유로 방을 따로 쓰자 했다. 혼자 잠드는 일은 유년시절의 달콤 살벌한 고독을 일깨워주었다. 아내가 주워온 프루스트 의자가 내방에 자리를 잡았을 때, 나는 전시회에서 본 멘디니의 환상적인 의자가 떠올랐고, 내 방의 의자가 짝퉁이라도 좋았으며 동시에 어린 시절 화가의 집 서재에서 얼핏 보았던 묘하게 생긴 의자가 바로 그 의자라는 기억을 끄집어냈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그 의자는 훗날 전시에서 본 디자이너 멘디니의 진품 ‘프루스트 의자’였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나중에 보니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전 와인을 딸 때마다 쓰던 와인따개도 멘디니의 작품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난 후 어머니는 그 와인따개를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고, 나는 와인을 마실 때 마다 어린 시절의 알록달록하고 환상적인 그 와인따개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