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만 셋에다 막내로 자란 나는 어릴 적 혼자 잘 노는 아이였다. 내가 좋아했던 물건은 장난감 총이나 칼이 아니라 누나들이 갖고 놀던, 생활의 때가 결코 묻지 않을 예쁜 소꿉장난 그릇과 인형 들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에서 이름을 딴 비현실적인 느낌의 남자아이 인형 ‘노미’, 그 얼굴이 며칠 전 넷플렉스 다큐에서 본 프랭크 시나트라의 젊은 시절 얼굴과 너무 닮아 깜짝 놀랐다. 하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인형들은 다 외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인형을 다른 분의 아이에게 선물로 준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까. 기억 속의 인형 ‘노미’가 프랭크 시나트라를 닮았다는 생각은 나를 어린 시절의 그리운 공간으로 데려간다. 다락방 속의 아마존 나비 액자들과 오래된 책들과 우표 수집책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우표를 모으고, 사랑하고, 우표의 나라들을 꿈꾸고, 그 꿈들로 인해 유년의 불행을 극복했다. 누구의 유년인들 불행하지 않으랴. 동시에 행복하지 않으랴. 연쇄살인범의 유년은 그저 불행하기만 했을 것이다.
가을의 냄새가 아주 조금씩 퍼져가는 늦여름, 나는 이때가 제일 좋다. 개학이 가까워지는 8월 말 저녁 무렵이면 대청마루에 앉아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며 포도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새까만 포도의 단맛은 너무 달아서 도리어 슬펐다. 어른이 아닌 어린이에게도 허무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가을의 무르익은 허무가 느껴지기 전의 ‘날씨 애피타이저’ 같은, 매미들이 온 목소리를 다해 생명의, 아니, 죽음의 오케스트라를 합창하는 그런 습하지 않은 약간의 더위가 남아있는 이럴 때면 제목이 좋아 옆구리에 끼고 다녔던 번역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다시 도전하고 싶어진다. 그 책은 내 젊은 날의 땀과 눈물이 얼룩진 베개처럼 우울한 슬픔의 얼룩이 배어있다. 결국 「스완네 집 쪽으로」 그 앞부분을 좀 읽고 말았던, 그 뒤로도 같은 부분을 다시 읽고 또다시 읽다가 덮어버리고 말았던, 어쩌면 그 책은 문학을 꿈이거나 도피거나 취미로 삼았던 젊음들에게 늘 미완의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책은 지금은 세상 떠난 셋째 누나가 좋아하던 책이었다. 누나는 내가 남자아이 같지 않아서 나를 좋아했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군인이던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는 늘 지방에 머무르셨고, 나는 늘 누나들과 함께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딸만 셋인 네 형제 중 막내로, 아들이라도 나는 일상의 밥벌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존재였다. 누나들은 다 의사가 되었거나 공무원이 되어 밥벌이를 제대로 하는 능력 있는 여성들이 되었고, 아무도 내게 하기 싫은 밥벌이를 하라고 핀잔주는 가족이 없었다. 바깥세상에서도 나는 늘 여자들과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했다. 여자 친구들이 내 주변엔 남자보다 더 많았다. 왜 그런지를 스스로 알게 될 때까지 나는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또래의 다른 남자아이들과 나는 늘 달랐고, 섬세하고 우울했다. 『In Search of Lost Time』, 그 책을 내게 가장 처음 알려준 사람은 중학교 시절의 영어 선생님이었다. 어쩌면 내 첫사랑은 그 책의 존재를 내게 가르쳐준 선천적인 반백의 머리를 휘날리며 기분 좋게 껄껄 웃던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무척 미인이던 미술 선생님에게 빠져있을 때, 내 온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은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아직도 그 책은 끝까지 읽지 않을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으며 전 세계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우리의 삶이 그 잃어버린 시간들로 인해 빛나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 바로 그 잃어버린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커가면서 내가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처음 안 건 셋째 누나였다. 오래전에 내가 혼자 좋아했거나 그쪽에서 나도 모르게 혼자 나를 마음에 두었거나 아니면 서로 마음에 있으면서 내색도 못 했거나 아니면 미친 듯 사랑한다고 믿었으나 뒤로는 얼굴조차 마주치기 싫거나 잠시 스치듯 함께 했던 짧은 시간들마저 아까운 생각이 들거나 참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우리는 늙어간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이라는 허송세월에 관해 쓰고 있다고 한 해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딱 맞는 말이다. 젊음이라는, 사랑이라는 허송세월, 인생이라는 허송세월, 그게 바로 우리가 살아온 잃어버린 시간의 정체이니까. “한 생 안 난 셈 쳐라.” 하신 어느 스님의 말씀도 같이 떠오른다. 어느 영화 속의 주제가 「스피크 로우Speak Low」, “사랑은 순금이고 시간은 도둑이야.” 그런 노랫말도 같이 떠오른다.
기억 속의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때 그 시간의 내 감정의 기하학은 너무도 확실하고 섬세한 기억으로 남는다. 피가 나지 않는 아픔, 무엇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도 무너져 내렸던가? 오직 그 무너짐의 가파른 각도와 직선과 곡선과 모서리들의 날카로운 기억들만 남아 있다. 도대체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슨 그림을 그린 걸까? 처절한 넝마 같은 젊은 날의 어떤 상처 기억 사랑, 정확한 워딩이 불가능한, 그리고 지금 어쩌면 그보다 절실한 건 한 알의 비타민 C, 한 알의 프로바이오틱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는 그런 비타민 종류의 이름인지도. 그것들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는 평상심의 상태, 나는 차라리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나이 들면서 내가 가장 아끼는 건 얼굴도 목도 손도 아닌 발이다. 아무 말 없이 좋은 대우도 받지 못하며 세상 어디로든 우리를 늘 데려다준 발의 고마움, 나이 들어야 알아지는 것들이다. 그런 식으로 순위를 다시 정해야 할 우리들 인생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한다. 실은 정작 프루스트보다는 헤르만 헤세를 많이 읽은 것 같다. 그 중 어느 산문에서인가 이런 구절이 오래 남았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친구와 포도주를 마시며 한가로운 한 때를 보내고, 이 오묘한 삶에 관해 악의 없는 잡담을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시시하고 욕심낼 필요도 없는 삶의 작은 디테일의 아름다움과 추함과 권태의 축적, 바로 그 삶의 허송세월에 관한 오마주를 소설로 쓴 게 바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다. 제대로 읽지도 않은 그 책은 내 스무 살의 불안과 연결되어있다. 그때는 내 앞에 놓인 무한한 듯 보이는 시간에 대한 불안이었다면 지금의 불안은 시간의 낭비에 대한 불안이다. 젊음이 허가받은 시간 낭비의 시기라면 나이 들면서는 알면서도 낭비하게 되는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다. 하지만 삶의 시간들을 오래 걸으려면 마음을 쉬어야 한다. 오래전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소소한 선물,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 가치를 알게 되는 때가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리라.
셋째 누나는 예쁘다기보다는 한 번 보면 잊히지 않는 독특한 이목구비를 지니고 있었고, 특히 목소리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낮고 아늑하고 사람을 안심시키는 목소리. 나는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을 누나 외에는 만나 본 적이 없다. 누나는 의대 인턴 과정을 밟을 무렵,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선물을 받았다. 공부하느라 연애 한 번 못해 본 그녀가 남자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곤 가족들에게 받은 게 전부였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선물은 어김없이 도착했다. 다양한 종류의 외국산 초콜릿부터 세상의 모든 음악이 담긴 CD들과 세상의 모든 책들이 도착했다. 누나의 마음은 모르겠지만 정작 그 선물을 기다린 건 나였다. 누나가 세상 떠난 지 어언 이십 년 만에, 모르는 사람이 보낸 오래된 CD 전집을 풀어 한곡 한곡 들어본다.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곡들의 집대성이다. 이십 년 만의 선물 확인, 참 오래 걸렸다. 그는 누구이며 살아있을까? 누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선물은 한동안 어김없이 도착했다. 그 선물 중에 헤세가 그린 그림들이 삽입되어 있는 독일어판 『화가 헤세』와 불어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끼어 있었다. 누나의 부재는 오래도록 나를 슬프게 했다. 헤세의 산문에서처럼 와인을 마시며 이 세상 악의 없는 잡담을 두런두런 나눌 수 있었을 상대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셋째 누나가 유독 생각나는 늦여름, 초가을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