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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재단과 조선일보의 야합
2024년 3월 5일자 조선일보에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 시리즈」 1회가 나왔다. 이 기사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전태일 재단이 조선일보 창간 104주년을 기념해 공동으로 기획기사를 내보낸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10회에 걸쳐 나갈 계획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이 기사가 나오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전태일 재단 한석호 사무총장이 작성한 사무국 주간회의 자료에 한 줄짜리로 이 내용이 언급이 되어 회의에 참석한 인원들이 처음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회의 참석자들은 전태일 재단이 조선일보와 공동으로 기획한 사실이 없으니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이라는 앞머리 제목을 뺄 것을 의결했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을 통해 조선일보에 공문을 보내도록 요청했다. 아울러 전태일 재단 사무처 직원이 밤늦게 조선일보 관계자와 통화를 해 기사 송고를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조선일보에서는 거절하고 다음날부터 기사가 나갔다.
이 일은 한석호 사무총장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에 대해 대외적으로는 전태일 재단이 조선일보와 야합했다는 비난이 쇄도했고, 대내적으로는 한석호 사무총장에 대한 징계 요구가 빗발쳤다. 한석호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내부 구성원과 외부의 빗발치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은 소신을 가지고 벌인 일이라며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최종인, 전순옥 등이 비호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84년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한 세대들이 청계피복노조 복구 40주년 행사를 앞당겨 개최하기로 하고 3월 24일 전태일 동상 앞에서 모였다. 청계노조 복구세대는 50~70대에 이르는 나이로 저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이번 일처럼 전태일 정신을 훼손하고 청계피복 노동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에 분연히 나선 것이다.
이날 이들 청계피복노조 복구 40주년 기념식 참석자 일동은 이번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야합 사태에 책임이 있는 한석호 사무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입장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다음날 열리는 전태일 재단 이사회에 참가해 입장문을 전달하고 한석호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한석호는 3월 25일 열린 전태일 재단 이사회에서 퇴진요구에 버티다 결국 자진사퇴하는 형식으로 물러났다. 한석호는 3월 26일 물러나면서 매우 긴 소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소명서에서 “전태일과 함께 평화시장 어린 여공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감옥에도 갔고 아내와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봉제업에 복귀해 큰돈을 벌다가 어느 날 불현듯 이렇게 계속 돈 벌면 전태일 친구로서 전태일 이름에 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업을 접은 전태일 친구 최종인은 살아생전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며 기뻐했습니다”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종인은 노동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간 적이 없다. 그는 어머니와 수많은 후배들이 청계노조 탄압에 맞서 투쟁하다 감옥 가는 동안 노동운동을 접고 사용주의 길로 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불현듯 전태일 이름에 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업을 접었다는 표현은 너무 심한 신파조 아부였다.
최종인은 이사회에서 거수표결로 사퇴처리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고 SNS에 소감을 올렸다. 전순옥 재단이사는 한석호를 보호해야 한다며 가장 큰 목소리를 냈다.
노동자를 살리기 위해 몸 바친 전태일,
노동자를 죽이는 전태일 재단
어쨌든 이것으로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야합 사태는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하고 후임 사무총장도 내정했다. 그런데 얼마 후 한석호는 자신은 사무총장직을 사퇴한 것이지 전태일 재단 직원을 사퇴한 것이 아니라면서 출근하겠다고 선언했다. 출근투쟁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한석호는 전태일 재단을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겠다고 나섰다. 한석호는 자신의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삼기 위해 「얼룩소」alookso라는 매체에 자신의 입장을 올려 논란을 키웠다.
한석호는 출근투쟁을 하면서 뜬금없이 이덕우 이사장의 동반 사퇴를 주장했다. 최종인, 전순옥은 한석호의 주장에 따라 이덕우 이사장의 사퇴를 압박했다. 그들이 한석호의 주장에 동조하는 명분은 이덕우 이사장이 사퇴를 해야 한석호가 조용해진다는 것이었다. 한석호의 출근투쟁을 이유삼아 자신들의 말을 잘 안 듣는 이덕우 이사장을 내쫓는 기회로 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이덕우 이사장은 이들의 사퇴 요구가 부당하고 절차적으로도 옳지 않아 거부했다. 이덕우 이사장이 거부하자 최종인 씨는 전매특허와도 같은 그의 장점인 모욕적인 언어 폭력을 가하면서 사퇴를 압박했다. 최종인은 재단의 이사도 아니기 때문에 사적으로 만나서 사퇴 압박을 한 것이다.
이들은 남상헌, 권영길, 천영세 등 재단 고문단까지 동원해 사퇴 압박을 가했다.
이덕우 이사장이 거부하자 이들은 이덕우 이사장이 추천한 사무총장 내정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무총장 내정자는 철도노조 출신인데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으로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가 철도노조 재직 시절 여동생으로부터 돈 요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자 여동생이 철도노조 게시판에 성폭행을 당했다는 허위사실을 올려 곤란을 겪을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개인의 문제로 조직에 누가 될 염려가 있어서 일단 사퇴하고 법적으로 사실을 밝혀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원직에 복직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여동생이 문제 삼은 내용은 허위로 밝혀져 무죄판결을 받아 끝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최종인, 전순옥 등은 이것을 문제 삼아 사무총장 내정자와 이덕우 이사장을 한데 묶어 사퇴를 압박했다고 한다.
이들의 압박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자 사무총장 내정자는 자칫 자신의 가정이 파괴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퇴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덕우 이사장도 결국 동반 사퇴를 하게 되었다.
한석호는 6월 20일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선을 넘는 술잔”을 기울이며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이날 한석호를 응원하며 초청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노동·시민 단체의 유명한 권력자들이 많았다.
“회한과 안타까움에 슬픔을 묻고 청계를 떠납니다.”
이번 사태를 겪고 나서 나는 지난 50년 동안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붙들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진짜로 그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미련 없이 그 이름을 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1980년대 복구세대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그들은 전순옥, 최종인이 사무총장 내정자의 불행했던 과거사를 끄집어내어 가짜뉴스를 만들어내고 마치 성폭행에 관계가 있는 듯 몰아가는 것에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선배들의 이런 비열한 행동에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서 ‘아름다운 청우회’ 카카오톡방을 집단적으로 탈퇴하고 청계를 떠나기로 결의했다.
청계노조 복구세대의 입장문 일부를 옮긴다.
청계를 떠나는 1980-1990년대 복구세대의 입장
- 회한과 안타까움에 슬픔을 묻고 청계를 떠납니다 -
우리들은 80년대 청계피복노조를 복구하고 90년대까지 끈질기게 싸워 합법성을 쟁취한 당사자입니다. 청계노조 30년 역사에서 근 20년간 청계노조의 맥을 잇고, 전태일 정신을 실천하는 데 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청계 역사 전체의 3/2를 차지하는 비중이었고, 전태일 운동에서도 50년 중 30년간을 담당해왔지만, 그동안 명예나 물질 등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젊음을 바쳐 야만의 세월을 비굴하지 않게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와 긍지로 만족하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한테 작년에 전태일 동상 철거라는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전태일 동상은 우리에게는 우리의 젊음과 분노와 슬픔과 환희와 승리 그리고 전태일 동지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런 동상을 철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젊은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에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것은 아니다.”라며 철거 반대에 나선 것입니다.
뒤이어 올봄에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황당했습니다. 전태일 재단-조선일보 공동기획의 조선일보 창간 기념 기사입니다. 이것은 극우 자본권력과의 야합으로 전태일 정신을 대놓고 팔아먹는 행위였습니다. 전태일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전태일 재단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황당한 사태는 한석호 사무총장의 독단적인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한석호 사무총장의 독단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이에 동조 묵인 방조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전태일 재단 운영을 전태일 정신에 반하게 운영해 왔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중략)
한석호의 이런 추태는 재단 내 최종인, 전순옥 씨 등의 동조에 힘을 얻어 기세등등했습니다. (중략)
우리는 선배들의 이런 행동에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지금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를 한석호와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이런 비열한 방법으로 내치려 하는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든든하게 여겼던 선배들의 모습이란 말인가! 너무도 서글프고 우리 스스로가 초라해져서 한동안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최루탄 터지는 거리에서 경찰과 맞서 싸울 때나 경찰에 잡혀가 두들겨 맞을 때에도 이처럼 슬프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오히려 단단해졌습니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금도가 있는 법입니다. 더구나 전태일 이름을 내세워서 하는 일인데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선배들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울러 전태일 재단도 자정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우리는 청계재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청계!
그 이름은 우리의 피 끓는 청춘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우리의 절망과 희망과 환희와 승리였습니다.
그 이름은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자부와 긍지를 심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은 야만의 시대를 당당하게 건너게 해 준 우리의 역사였습니다. 아, 그 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추억이요 고향이었습니다.
그런 청계를 이제 우리는 회한과 슬픔을 가슴에 묻고 떠납니다. (중략)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청계를 떠나지만 우리가 끝까지 떠날 수 없는 것은 전태일 동지의 마지막 그 말입니다.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 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해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 있는 전태일 재단을 간구하며 전태일 재단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2024년 7월 20일
청계피복노동조합 80-90년대 복구세대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