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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유럽 여행을 떠나면서 집에 남아 있을 아내에게 「고별사: 슬픔을 금하며A Valediction: Forbidding Mourning」1611라는 시를 써서 바칩니다. 제목 그대로 한동안 떨어져 지내야 하는 아내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연애시입니다.
고별사: 슬픔을 금하며
─ 존 던
덕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죽어가며
자신의 영혼에게 가자고 속삭이고,
그러는 동안 슬퍼하던 친구들은
이제 운명하나보다, 혹은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며 아무 소리도 내지 맙시다.
홍수 같은 눈물도, 폭풍 같은 한숨도 일으키지 맙시다.
속인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지구의 움직임은 재난과 두려움을 가져오고,
사람들은 그것이 뭘 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판단하죠.
하지만 천체의 떨림은
훨씬 더 크지만 해가 없습니다.
달 아래 우둔한 연인들의 사랑은
본질이 감각이라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별하면 사랑을 이루고 있던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는 매우 정련된 사랑으로
이별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서로의 마음을 믿으니
눈과 입술과 손을 보지 못한다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두 영혼은 하나이기 때문에
비록 내가 떠나더라도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어납니다.
공기처럼 얇게 편 금박처럼.
우리의 영혼이 설사 둘이라 해도,
그 둘은 뻣뻣한 컴퍼스의 두 다리가 둘인 것처럼 둘입니다.
고정된 다리인 당신의 영혼은 움직일 기색이 전혀 없지만,
다른 다리가 움직이려 하면 그제야 반응하죠.
당신의 다리는 중심에 있지만,
다른 다리가 먼 곳을 배회할 때는,
함께 몸을 기울이며 귀를 기울이다가,
다른 다리가 돌아오면, 똑바로 섭니다.
당신은 내게 이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다리처럼 항상 비스듬히 달려야 하는 운명.
당신의 꿋꿋함 덕에 나는 똑바로 원을 그리고,
출발했던 곳에서 끝맺음할 수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속인들의 우둔한 사랑”과 시인과 연인의 “정련된” 사랑이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속인들의 우둔한 사랑”은 “감각”을 본질로 하는 육체적인 사랑이죠. 그래서 속인들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과 입술과 손을 보지 못한다고 염려”합니다. 결국에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게 되죠. 반대로 시인과 연인은 “이별이 무엇인지 모른 채 서로의 마음을 믿는” 사랑을 합니다. 두 사람은 “얇게 편 금박”이나 “컴퍼스의 두 다리”처럼 영혼으로 연결돼 있죠. 이 두 비유는 사랑에 대한 최고의 은유로 꼽히기도 합니다. 속인들의 사랑이 육체적인 사랑이라면, 시인과 연인의 사랑은 영혼으로 결합한 정신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꿋꿋한” 믿음이 있으니 이 두 사람은 “눈과 입술과 손을 보지 못한다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 두 연인과 달리 “눈과 입술과 손이 보이지 않아서 염려”하다가 비극적인 이별을 맞이한 대표적인 연인들로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를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는 베르길리우스의 농경시, 『게오르기카Georgica/ Georgics』기원전 29년경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라틴어: Metamorphōseōn librī』기원후 8년, 플라톤의 『향연Symposium』기원전 385~370년경 등 여러 텍스트에 등장합니다. 에우리디케의 죽음에 대해서는 텍스트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게오르기카』에서는 에우리디케가 양봉과 축산업, 낙농업의 신인 아리스타이오스의 구애를 거부하고 도망치다 독사에게 물려 죽지만, 『변신 이야기』에서는 에우리디케가 물의 요정들naiads과 숲속을 배회하다 독사에게 물려 죽습니다. 어쨌든 에우리디케가 뱀에게 물려 죽은 것은 같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던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찾아 지하 세계로 내려가서 “정식으로 매장 의식을 받은 사람들의 실체 없는 혼들, 즉 환영의 무리”를 지나갑니다. 이 장면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한 곡이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1787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1762 중 「행복한 정령들의 춤Dance of the Blessed Spirits」입니다. (정령들의 춤이 궁금하신 분은 여기를 눌러 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oou2ywIbRxc 정령들 앞에 왜 ‘행복한’이라는 단어가 붙었을까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니 글루크의 오페라에서는 저승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낙원인 엘리시움으로 그려져 있더군요. 이곳에는 영웅이나 덕망 있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 들어온 정령들은 축복받은 행복한 정령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의 망령을 다스리는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오르페우스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동해서 그에게 에우리디케를 데려가게 합니다. 단, 조건이 있었습니다.
지하의 여왕과 명계를 다스리는 그녀의 남편은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에우리디케를 불렀다.
방금 들어온 망령들 사이에 서 있던
그녀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천천히 걸어왔다.
트라키아의 시인,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다시 돌려받으면서
아베르누스의 계곡을 올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절대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만약 뒤돌아보면 그가 받은 선물은
취소될 예정이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0권.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가파르고 어두침침한데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는 길을 따라 정적 속에서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지하 세계를 빠져나오는 두 사람을 그린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는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Jean-Baptiste Camille Corot, 1796~1875의 『지하 세계로부터 에우리디케를 이끌고 나오는 오르페우스Orphée ramenant Eurydice des enfers』1861입니다.
|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지하 세계로부터 에우리디케를 이끌고 나오는 오르페우스』, 1861년. 캔버스에 유화, 112.3 × 137.1 cm. 휴스턴 미술관, 휴스턴. https://en.m.wikipedia.org/wiki/File:Jean-Baptiste-Camille_Corot_-_Orph%C3%A9e.jpg 제공. |
그런데 그림이 뭔가 이상하죠? 우선, 저승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길을 오비디우스는 어둡고 가파른 오르막길이라고 했는데 그림에서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평지의 풀밭을 걷고 있습니다. 또한 지하 세계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길에 저렇게 아름다운 숲이 있을까요? 오르페우스가 향하고 있는 저승 입구는 아베르누스라는 화산호火山湖인데 저렇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있다는 겁니다. 에우리디케의 손목을 잡고 있으면 오르페우스가 굳이 그녀를 보기 위해 뒤돌아볼 필요가 없을 겁니다. ‘손목을 잡는 것’은 ‘보는 것’만큼 확실하게 그녀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니까요.
지표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걱정도 되고, 빨리 보고도 싶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는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하 세계로 떨어지고요. 불쌍한 오르페우스는 양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으려 하지만 잡힌 것은 허공뿐이었죠. 글루크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오르페오가 뒤돌아본 이유를 사실적이고 희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아, 이름이 왜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냐고요? 오페라 대본이 이탈리아어로 쓰였기 때문에 주인공들 이름이 이탈리아어식이라 그렇습니다. 이 오페라에서 오르페오는 하데스가 제시한 조건을 지키기 위해 저승을 빠져나오는 동안 에우리디체의 손을 잡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오르페오에게서 아무런 설명을 듣지 못한 에우리디체는 그의 행동에 섭섭함을 느끼고요. 오르페오가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한 에우리디체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오르페오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오르페오는 뒤를 돌아보고, 결국 에우리디체는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죠. 이때 오르페오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가 「에우리디체 없이 어떻게 할까?Che farò senza Euridice」입니다. (음악이 궁금하면 여기를 눌러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2BjCvWvg0So. 소프라노가 오르페오 역을 맡은 것이 이상하죠? 글루크가 이 오페라를 작곡했을 당시 오르페오 역은 카스트라토가 맡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르페오의 음역이 너무 높아서 테너가 오르페오 역을 맡기 어렵답니다. 지금은 소프라노나 남성이지만 여성처럼 높은 음역을 내는 카운터테너가 오르페오 역을 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 캐서린 아델라이데 스파크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캔버스에 유화, 84 × 74 cm. 울버햄프턴 미술관, 울버햄프턴. https://www.wolverhamptonart.org.uk/collections/getrecord/WAGMU_W486 제공. |
『변신 이야기』에서는 에우리디케를 잃은 오르페우스가 여자들과의 사랑을 멀리하는 대신 어린 소년이나 청년들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글루크의 오페라는 여러 신화 텍스트와 달리 해피엔딩입니다. 인어공주가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서 공기 방울로 사라지는 안데르센 원작과 달리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인어공주와 왕자가 사랑에 빠져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올리며 끝나는 것과 비슷하죠. 오르페오는 저승에서 에우리디체를 만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파이드로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죽을 용기도 없는 겁쟁이라고 오르페우스를 비난합니다. 오르페우스에 대한 파이드로스결국은 플라톤의 비난을 글루크가 알고 있었을까요? 오르페오가 죽으려는 순간 사랑의 신 에로스가 나타나 그를 말립니다. 에로스는 오르페오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보상으로 에우리디체를 지상으로 돌려보내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재회합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 역시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해석들부터 살펴볼까요?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가는 조건으로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아베르누스의 계곡을 올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절대 몸을 돌려 뒤돌아봐서는 안 된다”라고 명합니다. 하데스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오르페우스는 의심과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서서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두려움과 하데스의 약속에 대한 신뢰 부족으로 인해 이런 행동을 한 거겠죠. 그래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의심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심하지 말라. 무조건 믿고 따르라!’ 많이 들어본 말이죠? 또한 오르페우스 신화는 조급함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하데스의 조건을 상기하면서 조금만 더 느긋하게 참았으면 에우리디케를 영원히 못 만나는 일은 없었겠죠. 오르페우스의 신화는 인간의 오만함húbris에 대한 경고로도 읽힙니다. 오르페우스가 인간의 한계를 잊고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죄를 범했으니까요.
오르페우스의 신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는 이 신화가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절대성 혹은 불가역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저승까지 찾아가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마음을 움직여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허락을 받아냅니다. 그래도 에우리디케는 끝내 저승 밖으로 나오진 못합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는 인간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을 보여줍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가 나타내는 의미는 오르페우스의 딜레마에서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에서 먼저 선택의 순간을 찾아봐야겠죠? 그 순간은 당연히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기로 결심한 순간입니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뒤돌아보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몸을 돌려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바라볼 것인가?’ 고민했을 겁니다. 뒤돌아보면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볼 수도 있고 (오페라에서처럼) 그녀의 투정도 잠재울 수 있겠지만 하데스의 명령을 어기게 되겠죠. 뒤돌아보지 않으면 하데스의 명은 따르는 대신 에우리디체가 정말로 뒤따라오고 있는지 계속 궁금하고 불안했을 겁니다. ‘앞만 볼 것인가? 아니면 뒤돌아볼 것인가?’라는 이 선택의 상황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딜레마입니다.
오르페우스의 딜레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대립 구도 중 먼저 정신과 육체의 대립 구도에 대해 살펴볼까요? ‘앞만 볼 것인가? 뒤돌아볼 것인가?’를 살짝 변형해 보면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에우리디케의 존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내 눈으로 에우리디케의 존재를 확인할 것인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딜레마는 다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것인가?’로 이어지고요. 그러니 ‘앞만 볼 것인가? 뒤돌아볼 것인가?’라는 오르페우스의 딜레마에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대립 구도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관념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보이는 것은 몸의 세계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혼 혹은 정신의 세계입니다. ‘앞만 볼 것인가? 뒤돌아볼 것인가?’라는 오르페우스의 딜레마는 ‘보이지 않는 영혼 혹은 정신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육체를 믿을 것인가?’가 되는 거죠. ‘앞만 보는 것과 뒤돌아보는 것’의 대립 구도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다시 ‘영혼/정신과 몸/육체’의 대립 구도로 이어지는 겁니다.
‘영혼과 몸정신과 육체’의 대립 구도는 사실 다른 용어로 계속해서 대체될 수 있습니다. 영혼의 세계는 비물질적이고 불변하는 본질로, 이성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입니다. 반면에 몸은 물질적이고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이자 감각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고요. 영혼과 몸, 관념과 물질, 이성과 감각, 본질과 현상, 불변성과 가변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조는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로 구분한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가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1967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이항 대립 구조에는 이 두 영역을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둘 중 하나를 우월하거나 더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혼을 육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육체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거죠. 몸은 영혼의 부차적이거나 파생적인 요소로 간주하고요. 육체보다 영혼을 중시하는 이항 대립 구도 속의 위계질서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에서도 발견됩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명령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존재를 믿으라는 명령이고, 하데스의 명령을 어긴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와 헤어지게 된 것은 영혼/정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처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신들 역시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물론 변신을 통해 인간이나 동물처럼 몸을 지닌 형상으로 육화肉化, incarnation하기도 하지만 신들은 육체를 지닌 물질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신을 믿고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 역시 보이지 않는 에우리디케의 존재를 믿는 것처럼 영혼/정신을 믿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이 글 첫머리에서 살펴본 존 던의 시 역시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영혼이 더 우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요. 시인은 감각을 토대로 한 육체적인 사랑을 “우둔한 연인들”의 사랑으로, 영혼이 결합한 자신들의 정신적인 사랑을 “정련된” 사랑으로 분류합니다. 시 속의 화자처럼 에우리디케와 몸은 떨어져 있어도 영혼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오르페우스에게도 있었다면 에우리디케와 다시 헤어져야 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이런 의미에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는 보이지 않는 영혼/정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우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신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영혼/정신의 존재를 무조건 믿으라는 거죠.
영혼/정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혹은 강요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시작해서 이데아와 현실을 신과 인간으로 대체한 중세를 거쳐 정신마음과 물질신체이 별개의 실체라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dualism에 이르러 정점에 이릅니다. 그런데 정신과 육체가 칼로 무 자르듯이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돼 있을까요? 데카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가 있습니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Phénoménologie de la perception』1945에서 몸이 주체의 경험과 세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지각을 통해 세계를 구성하고 이해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몸을 사유의 주체로 재정립합니다. 정신에 비해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으로 취급당하던 몸을 지각하는 몸이자 의식하는 몸으로 승격한 거죠. 메를로퐁티의 ‘몸의 철학’은 정신 우위의 철학 전통에서 벗어나 신체가 중심인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정신과 육체라는 대립 구도로 길게 살펴봤습니다. 그래도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신화를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읽어내는 것임을 잊지 않으셨죠? 이미 앞에서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라는 범주로 여섯 신화프로메테우스, 판도라, 세멜레, 프시케, 이카로스, 파에톤를 살펴본 데다가, 앞으로 악타이온, 오이디푸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의 신화를 이 대립 구도의 관점에서 계속 읽을 예정이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의 대립 구도라는 새로운 양념을 살짝 집어넣어 봤습니다. 권위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대립 구도가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의 하부 범주라는 것도 잊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하데스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뒤돌아보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몸을 돌려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바라볼 것인가?’라는 오르페우스의 딜레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번째 대립 구도는 방금 말씀드린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입니다.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지상으로 돌려보내면서 오르페우스에게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에우리디케가 저승으로 되돌아가느냐 마느냐가 걸린 명령이죠. 이 명령을 어긴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영영 헤어지는 벌을 받습니다. 롯의 아내 역시 천사들의 지시를 어기고 뒤를 돌아봤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하는 벌을 받습니다. 신의 명령은 사소한 것이건, 중대한 것이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거죠.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신으로 대변되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고,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권위에 대한 복종 대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 대결 구도를 세부화하면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귀결됩니다. ‘몸을 돌려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바라보고 싶다’라는 바람은 ‘에우리디케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사실을 알고 싶다’라는 바람이죠. “절대 몸을 돌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라는 하데스의 명령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지적 호기심에 대한 규제고요. ‘뒤돌아보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입니다. 피터 브룩스Peter Brooks, 1938~ 는 『육체와 예술Body Work: Objects of Desire in Modern Narrative』1993에서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시각은 모든 인식론적 탐구를 대표하는 감각이다. 시각은 감각 중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진리로 이끄는 매개체이며, 현실을 조사 파악하는 데 가장 알맞은 감각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의미에서 ‘본다’라는 말은 ‘안다’와 동일시된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연관관계는 앞글들에서 여러 번 다뤘지만, 복습 차원에서, 그리고 예습 차원에서 한 번 더 살펴보겠습니다.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신화는 직, 간접적으로 ‘보는 것’과 연관돼 있습니다. 판도라와 세멜레, 프시케, 오르페우스, 악타이온, 페르세우스 신화는 ‘보는 것’과 직접적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판도라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고자’ 했고, 세멜레는 제우스의 진짜 모습을 ‘보고자’ 했죠. 프시케 역시 남편의 진짜 모습을 ‘보고자’ 했고요.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가 잘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보고자’ 했고 악타이온은 우연히 벌거벗은 아르테미스를 ‘보게’ 됐죠.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를 이용해서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자’ 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와 이카로스, 파에톤, 오이디푸스, 오디세우스의 신화는 ‘보는 것’과 간접적으로 연관돼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에게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줌으로써 어둠을 밝혀 더 잘 ‘보게’ 해줬고, 이카로스와 파에톤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더 잘 ‘보고자’ 했죠.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진실을 ‘보고자’ 했고,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몸을 결박한 채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보려고’ 했습니다. 여기서 따옴표 안의 ‘보다’를 모두 ‘알다’로 바꿔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보고자 하는 욕망’이 곧 ‘알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그런데 신들로 대변되는 권위와 체제는 항상 ‘보고자 하는 욕망’을 규제하려고 합니다. ‘보는 것/시선’이 금지되는 거죠. ‘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는 사람은 처벌받고요. ‘보고자’ 했던 위에 언급된 열한 명의 신화 속 인물 중 페르세우스와 오디세우스를 제외하고 (직접적인 의미에서건, 간접적인 의미에서건) ‘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 때문에 모두 불행을 겪습니다. ‘금지된 시선’ 중 세멜레와 오르페우스, 악타이온과 페르세우스의 시선은 죽음에 연관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멜레와 악타이온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죄로 목숨을 잃었고, 오르페우스는 시선 때문에 에우리디체를 두 번째로 죽게 만들고요.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얼굴을 본 것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지만 청동 방패 덕분에 살 수 있었죠. 이렇게 치명적인 처벌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보는 것’ 혹은 ‘아는 것’을 규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글들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가장 큰 이유는 현상status quo을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일 겁니다. 새로운 지식은 변화를 불러오고, 이런 변화는 기존에 확립된 질서 체제를 흔들거나 때로는 무너뜨리기도 하죠. 지식의 전복적인 힘에 대한 이런 두려움이 강력한 처벌 수단을 동반한 규제로 나타납니다. ‘아는 것/지식’에 대한 금지는 여러 그리스 신화에서 ‘보는 것/시선’에 대한 금지의 형태로 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뒤를 돌아볼 것인가? 앞만 볼 것인가?’라는 오르페우스의 선택은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 추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오르페우스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시겠어요? 아니면 체제가 요구하는 대로 묵묵히 앞만 보시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