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속담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몽골 속담이라는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리처드 바크Richard David Bach, 1936~ 의 소설,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1970에서는 이 속담이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로 살짝 변형되어 나옵니다. 이 책은 원대한 꿈과 이상을 향해 끝없이 도전할 때 진정한 자유와 삶의 의미에 이를 수 있다며, 우리에게 ‘더 높이 날라’고 권합니다. 도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책과 달리 ‘너무 높게도, 낮게도 날지 말라’며 안전하게 중간을 날라고 당부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인용문은 이안 존스턴Ian Johnston이 영어로 번역한 『변신 이야기』를 제가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ian.johnston@viu.ca 제공.)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도록 해라.
너무 낮게 날면, 수증기로
날개가 무거워질 거야. 너무 높게 날면.
날개가 불에 탈 것이고. 그러니 중간에서 날거라.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누가 한 말인지 아시겠죠? 다이달로스가 아들 이카로스에게 한 말입니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신화는 여러 작품에 등장하지만,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기원후 17/18의 『변신 이야기라틴어: Metamorphōseōn librī』기원후 8, 8권 183~235행에 가장 길게 등장합니다. 아테네의 뛰어난 장인이었던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를 위해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미로를 만들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미노스를 벌하기 위해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를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습니다. 미노타우로스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머리와 하반신은 황소인 괴물입니다. 미노스는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미로를 만들게 하죠. 미로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보면 샬럿 브론테Charlotte Brontë, 1816~1855의 『제인 에어Jane Eyre』1847에 나오는 다락방에 갇힌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서 기형적인 외모 때문에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오페라의 유령이 생각납니다. 미로에 갇혀 있던 미노타우로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은 테세우스에게 살해당하죠. 아리아드네에게 미로를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준 것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미로를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미노스의 의도 때문이었는지,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크레타섬에 갇혀 지내게 됩니다. 『변신 이야기』에는 다이달로스가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바다에 막혀 갈 수 없었다”라고만 나와 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미노스도 막을 수 없는 하늘을 통해 크레타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으로 날개를 만듭니다. 비록 신화 속 발명품이긴 하지만 인간이 만든 최초의 날개 아닐까요?
날개를 달고 있는 중년 남자와 소년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이나 조각 작품이 있으면 작품 속 두 사람이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일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어른 천사와 소년 천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죠. 그렇지만 두 사람이 천사일 경우에는 머리 뒤에 거의 항상 후광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처럼 후광이 없으면 두 사람을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라고 단정해도 틀릴 위험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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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소코로프,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묶어주는 다이달로스』, 1777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
그림에서처럼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에게 날개를 달아 주며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라”고 당부합니다. 드디어 두 사람은 하늘로 날아오르고 다이달로스가 앞장서서 이카로스를 이끌어 주죠. 그런데 날기에 자신감이 붙은 이카로스가 아버지의 지시를 듣지 않고 단독 비행을 시작합니다.
…이때쯤
온갖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카로스는 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길잡이인 아버지 곁을 떠나,
하늘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가 맹렬한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자, 날개를 고정해 놓은
향기 나는 밀랍이 물러지더니 녹아내렸다.
그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맨팔을 퍼드덕거렸지만,
노 역할을 하는 날개가 없었기 때문에 공기를 포착해서 날아오를 수가 없었다.
그의 입은 아버지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지만,
그의 외침은 하늘빛 푸른 바다에 파묻혀 버렸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아래 메리 조제프 블롱델Merry-Joseph Blondel, 1781~1853의 천장 벽화, 『태양의 신프랑스어: Le Soleil』 혹은 『이카로스의 추락』프랑스어: La chute d'Icare』1819에는 상부에 태양의 신 아폴로가 태양 전차를 몰고 가는 모습이, 하부에는 이카로스가 추락하는 장면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습니다.
블롱델의 그림이 이카로스가 죽는 순간을 보여준다면, 아래 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Herbert James Draper, 1863~1920의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The Lament for Icarus』에서는 이카로스가 죽고 난 후 요정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그림은 몇 년 전 우리나라 소마 미술관에서 개최한 「영국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누드」2018에 다녀간 적이 있습니다. 미술관 건물 외벽에 엄청나게 크게 확대된 전시회 팸플릿이 걸려 있었는데 팸플릿 바탕 그림이 바로 『이카로스를 위한 탄식』이었습니다.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는 이 그림이 전시돼 있지 않아 직접 보지 못했는데, 서울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죠.
그런데 이 그림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않으셨나요? 『변신 이야기』 원문대로라면 이카로스의 날개에서 깃털이 다 떨어져 나가고 없어야 할 텐데, 그림 속 날개라면 충분히 날 수 있을 만큼 깃털이 무성하게 남아 있습니다. 드레이퍼가 풍성한 깃털의 사실적인 세부 묘사를 통해 화가로서의 뛰어난 기량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추측해 봅니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이카로스의 신화는 흔히 지나친 야망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해석됩니다. 이카로스가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라”는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무시하고 “하늘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높이” 날아오르다 바다에 떨어져 죽었으니까요.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라”는 다이달로스의 당부에서 ‘하늘’과 ‘땅’은 ‘지나침’과 ‘모자람’을 의미하고 ‘중간’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중용’을 나타내는 은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서 이카로스의 신화는 중용을 지키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비극에 대한 우화가 됩니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면, 이카로스의 신화는 신에 대한 도전을 금지하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카로스가 보여준 ‘지나친 야망’은 ‘자만’ ‘오만’ 혹은 ‘교만’ 등과 동의어라 할 수 있죠. 이런 단어들을 망라하는 그리스어가 ‘휴브리스húbris’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휴브리스’가 ‘신에 대한 죄’를 나타냈습니다. ‘휴브리스’를 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자기 기술이나 자질이 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신보다 더 예뻐’라거나 ‘내 자수 실력이 아테나보다 더 뛰어나’라는 식으로 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거죠. 누가 이런 예에 해당할까요? 아이티오피아의 왕비 카시오페이아는 자신과 딸 안드로메다의 미모가 물의 신 네레우스의 딸인 님프 네레이드보다 더 뛰어나다고 자랑합니다. 니오베는 자기 자식은 열네 명일곱 아들과 일곱 딸이지만, 여신 레토에게는 둘아폴로와 아르테미스밖에 없다고 뽐내죠. 아라크네는 자신의 베 짜기와 자수 솜씨가 아테나 여신보다 뛰어나다며 아테나 여신에게 도전하고요. 이런 예들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휴브리스’를 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거의 예외 없이, 가차 없이, 처벌받습니다. 카시오페이아의 왕국 전체가 홍수와 바다 괴물에 의해 초토화되고 안드로메다는 바다 괴물의 제물로 바쳐지죠. 아테나 여신은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신시켜 버리고요. 반인반수지만 흔히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마르시아스는 아폴로와 연주 시합을 벌인 후 살가죽을 모두 벗겨내는 처벌을 받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남성, 여성, 남성과 여성이 합체돼 있던 인간은 신들에게 도전한 후 제우스에 의해 몸이 반으로 나뉘고요. 니오베의 경우는 더 끔찍합니다. 열네 명의 자식이 아폴로와 아르테미스의 화살에 맞아 몰살당하죠.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는 니오베의 방이 있습니다. 이 방에서는 열네 명의 자식이 죽는 모습과 황망해하는 니오베의 모습을 조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베토벤 7번 교향곡 2악장의 첫 부분을 들을 때면 항상 니오베가 떠오릅니다. 장송곡 풍의 느린 멜로디가 조금씩 고조되다 팀파니가 가세하는데, ‘쿵, 쿵, 쿵’ 팀파니 소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을 보며 니오베가 가슴을 치는 소리로 들립니다. (음악이 궁금한 분은 https://youtu.be/m5efeRxYMKI?si=hdpOAiEjt_DwIj_U을 눌러서 앞부분 4분가량을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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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오베의 방, 1583년 발굴.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
그런데 이카로스는 어떨까요? 단순히 하늘을 높이 난 것을 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요? 『변신 이야기』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카로스는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라”는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무시하고 “하늘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높이 날아” 오릅니다. ‘하늘’은 신들이 사는 곳이죠. 이렇게 ‘하늘’로 ‘신의 영역’을 나타내는 것은 환유입니다. 은유가 유사성similarity을 토대로 ‘A’ 대신 ‘B’로 대체하는 비유법이라면, 환유는 ‘A’를 인접성contiguity을 토대로 자연스럽게 연상association되는 ‘B’로 바꾸는 비유법입니다. 예를 들면, ‘이게 백악관의 뜻이야’라는 말은 ‘미국 대통령의 뜻이야’라는 뜻이죠. 미국 대통령이 사는 곳이 백악관이니까요.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사이에 존재하는 인접성을 토대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대체된 거죠. 마찬가지로, ‘신의 영역’이 ‘하늘’로 대체된 것은 환유입니다. ‘하늘’이 ‘신의 영역’이라면, ‘땅여기서는 바다’은 ‘동물의 영역’을, 그리고 ‘중간 부분’은 ‘인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신들의 영역인 하늘을 넘보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자 죄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회가 확립해 놓은 질서 체계를 무너뜨리는 행동이죠.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에서 세상은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이 중 가장 높은 곳인 하늘에는 신들이, 땅에는 동물이, 중간 지대에는 인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관이 인간에게 부여한 “도덕”과 “지혜”는 신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짐승과 같은 상태로 타락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지키며 사는 겁니다. 「도정일의 신화 읽기: 근친상간, 양성兩性 존재, 그리고 괴물」1997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인간계는 신들의 세계와 동물 세계 사이의 ‘중간 거리’에 위치한다…신들의 세계가 하나의 극단이라면 동물계는 또 하나의 극단이다. 인간은 이들 두 극단과 일정 자질을 나눠 갖지만 그러나 두 극단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존재이고, 따라서 그가 거처하는 곳은 상계도 하계도 아닌 중간 지대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한계limit’이며 이 한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고 ‘지혜’이다. 도덕은 극단의 회피이며 이 극단 회피의 능력이 지혜이다. 인간이 중간 존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신들의 세계를 넘보거나 아래로 내려가 동물계에 빠지는 것은 존재의 문법을 어기는 중대한 ‘위반’이다. 위로 신들의 세계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은 ‘오만hubris’이고 동물계로 하강하는 것은 ‘타락’이다. 신들은 이 두 가지 위반의 어느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위반은 처벌되고 그 처벌은 ‘중간을 날라’는 아비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무시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날개가 녹아서 떨어져 죽은 이카로스의 경우처럼, 종종 죽음의 형태로 찾아온다.
― 도정일, 「도정일의 신화 읽기: 근친상간, 양성兩性 존재, 그리고 괴물」, 1998년
이카로스의 신화를 신에 대한 도전을 경고하는 이야기로 보는 두 번째 해석을 조금 더 확대하면, 이카로스의 신화는 체제에 도전하다 좌절당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계를 지키며 살라’는 질서 원칙은 ‘사회가 정해 놓은 위계질서를 따르라’라는 지배 논리로 이어집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인간-동물의 삼분화된 질서 체계는 이후 신-교회-인간, 왕-귀족-평민과 같은 사회구조로 대체됩니다. 피라미드식 삼단 구조는 변하지 않은 채로요. 이런 질서 체계에서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신분제도를 무시하는 행동은 용납될 수 없죠. 이카로스의 비상은 권위와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나타내는 은유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카로스의 도전은 실패했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확고하게 확립된 사회 질서 체계가 어디 그렇게 쉽게 무너지나요? 수많은 이카로스의 비상에도 체제의 지배 논리는 여전히 무심하게, 꿋꿋하게, 건재함을 과시하죠. 이것이 피터르 브뤼헐 1세Pieter Brueghel de Oude, 1526/1530~1569가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Landscape with the Fall of Icarus』1560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래 그림에서 숨은그림찾기를 한번 해보세요. 이카로스는 어디에 있을까요? 평화로운 목가풍 풍경에서 이카로스의 대담한 비상은 바다에 단 한 번의 첨벙 자국을 낸 후 깃털만 남긴 채 파도에 파묻혀 버립니다. “흔들리는 낚싯대를 들고 물고기를 낚기 위해 몸을 숙인 남자”도,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선 목동”도, “쟁기에 시선이 쏠린 농부”도 이카로스가 물에 빠진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아니, 봤어도 무시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래도 농부는…쟁기질을 계속했다’라는 플랑드르 속담이 생겨났겠죠. 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내 일을 할 뿐이야’라는 공감 제로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 그림은 “원하면 도전하라. 너의 도전은 파도의 포말처럼 흔적도 없이 스러지고 말 테니”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이카로스 신화는 지식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것’과 ‘지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이 글 서두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속담을 말씀드렸죠? 이 속담에서는 ‘나는 것’과 ‘보는 것’이 직결돼 있습니다. ‘나는 것’과 ‘보는 것’의 연관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로 ‘조감도’鳥瞰圖; bird’s-eye view를 들 수 있습니다. 새건, 비행기건, 드론이건, 아니면 인공위성이건, 오로지 나는 경우에만 “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땅의 기복”「위키백과」을 그릴 (혹은 볼) 수 있으니까요. ‘나는 것’은 ‘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여러 앞글에서 살펴봤듯이 ‘보는 것’은 다시 ‘아는 것’으로 이어지죠. ‘나는 것’과 ‘보는 것,’ 그리고 ‘아는 것’을 연결하면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라는 속담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많이 안다’가 됩니다. 그러니 더 높은 곳으로 날고자 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꿈도, 이카로스의 야망도, 모두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카로스 신화에 대한 이런 여러 해석을 토대로 이제는 이 신화에 들어 있는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죠. 사실 『변신 이야기』 텍스트에서 이카로스가 고민해서 뭔가를 선택했다는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때쯤, 이카로스는 나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길잡이인 아버지 곁을 떠나, 하늘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높이 날아올랐다”라고만 적혀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카로스가 ‘아버지처럼 하늘과 바다의 중간 부분을 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곁을 떠나 더 높이 날 것인가?’라고 고민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란히 날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를 수 있지만 지루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모험은 즐길 수 있지만 위험해집니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죠.
‘하늘과 바다의 중간 부분을 날 것인가?’ 아니면 ‘하늘 높이 날 것인가?’라는 이카로스의 딜레마에서는 먼저, 신에 대한 복종 대 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대립 구도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바다의 중간 부분을 나는 것’은 신의 영역을 넘보거나 짐승 수준으로 타락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지키며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신의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니까요. 이 대립 구도는 다시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지고요.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사회의 위계질서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고 신에게 도전하는 것은 체제 유지 논리를 무시하는 것이죠. 다음 순서는 다들 예상하고 계시듯, 자유로운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나는 것’은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다시 ‘아는 것’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은 ‘자유롭게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하죠. 반대로 ‘하늘과 바다의 중간 부분만 날라’는 다이달로스의 당부는 지적 호기심에 대한 통제로 작용하고요. 그러니 이카로스의 선택도 결국에는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것인가?’ 아니면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이 이카로스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처럼 최대한 높이 나시겠어요? 아니면 다이달로스의 조언대로 높지도, 낮지도 않게 가운데로 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