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나 조각 작품에서 제우스 신은 흔히 수염 난 중장년 남성으로, 아폴로 신은 청년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헤르메스는 때로는 청년으로, 때로는 중년 남성으로 그려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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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그라니에, 『스미른 주피터』, 1680년. 대리석. 234 × 105 × 80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upiter_Smyrna_Louvre_Ma13.jpg#/media/File:Jupiter_Smyrna_Louvre_Ma13.jpg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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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벨베데레』 중 일부, 120~140년. 대리석, 높이 224 cm. 바티칸 미술관, 로마. |
그런데 성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나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한 신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사랑의 신 에로스Eros입니다.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Cupid 혹은 아모르Amor라고 부르죠. 에로스는 어머니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있을 때는 아이로, 아내인 프시케Psyche와 있을 때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에로스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더 있습니다. 천사처럼 날개가 있다는 거죠. 날개를 천사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분이 많겠지만, 그리스 신화에도 날개가 가끔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무사 혹은 뮤즈Muse는 일반적으로 날개가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런데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가 그린 『헤시오도스와 뮤즈Hésiode et la Muse』1891에는 날개 달린 뮤즈가 등장합니다. 승리의 여신, 니케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날개가 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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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프 모로, 『헤시오도스와 뮤즈』, 1891년. 나무에 유화, 59 × 35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그러나 올림포스의 신 중 날개 달린 신은 에로스가 유일합니다. 아래 니콜라 앙드레 몽시오Nicolas-André Monsiau, 1754~1837의 『올림포스의 열두 신Les douze Olympiens』18세기 후반에서 누가 에로스인지 한 번 찾아보세요. 너무 쉬워서 문제랄 것도 없죠? 올림포스의 열두 신으로는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를 꼽습니다. 몽시오의 그림에는 이 열두 신 외에 에로스와 하데스, 해스티아가 포함돼 있습니다. 제목은 열두 신인데 열다섯 신이 등장하는 거죠. 중앙의 제우스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아폴로, 헤르메스, 아르테미스, 포세이돈, 에로스, 아프로디테, 아레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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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앙드레 몽시오, 『올림포스의 열두 신』, 18세기 후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Olympians.jpg#/media/%ED%8C%8C%EC%9D%BC:Olympians.jpg 제공. |
열다섯 신 중 에로스에게만 날개가 있죠? 아프로디테와 함께 있으니 당연히 어린아이의 모습이고요. 에로스의 모습을 보고 ‘어, 아기 천사 푸토putto와 똑같이 생겼잖아!’라고 생각한 분도 계실 겁니다. 맞습니다. 푸토의 어원이 아모레토amoretto, 즉 사랑을 뜻하는 ‘아모르amor’이니까요. ‘아모르’가 에로스의 다른 이름이라는 건 앞에서도 말씀드렸죠? 에로스가 예술가들의 손을 거쳐 푸토로 변형된 겁니다. 그래서 푸토도 에로스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화살을 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푸토는 라파엘로1483~1520의 『시스티나 성모Madonna di San Sisto』1513~1514에 등장하는 푸티putti: 푸토의 복수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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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 성모』 중 일부. |
그런데 에로스가 프시케와 함께 있을 때는 소년이나 청년으로 바뀝니다. 당연한 일이겠죠? 사랑하고 결혼하려면 신체적 성숙함도 필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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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카노바, 『큐피드와 프시케』, 1794년. 석회.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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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제라르, 『큐피드와 프시케』, 1798년. 캔버스에 유화, 186 × 132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여러 면에서 에로스를 변모시킨다는 점에서 프시케와의 사랑은 에로스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그런데 에로스를 변화시킨 프시케와의 사랑 이야기는 어디에 수록돼 있을까요?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기원후 17/18의 『변신 이야기라틴어: Metamorphōseōn librī』기원후 8에 들어 있을까요? 아닙니다. 오비디우스가 아니라 아풀레이우스Lucius Apuleius Madaurensis, 124~170 이후의 『변신 이야기라틴어: Metamorphōseōn librī』창작 연도 불확실 4, 5, 6권에 실려 있습니다. 아풀레이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변신 이야기』의 다른 이름인 『황금 당나귀라틴어: Asinus aureus』로 번역돼 있습니다. 마술을 시험하다 당나귀로 변신한 주인공 루키우스가 들려주는 모험담이기 때문이죠. 『황금 당나귀』는 인류 최초의 소설로 손꼽히는 후보 작품 중 하나입니다. 사실, 어떤 작품이 인류 최초의 소설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무라사키 시키부일본어: 紫式部, 973~1014 혹은 1025년경의 『겐지 이야기일본어: 源氏物語』1000~1012를 세계 최초의 소설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고, 『황금 당나귀』를 최초의 소설로 간주하기도 하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황금 당나귀』가 원본이 완전하게 보전된 유일한 라틴어 이야기이자 당나귀를 서술자로 내세운 세계 최초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프시케와 에로스의 신화를 한번 간단하게 살펴볼까요? 어느 왕국의 공주인 프시케는 뛰어난 미모로 사람들의 숭배를 받는 바람에 아프로디테의 미움을 삽니다. 여신은 아들인 에로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와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사랑의 화살을 프시케에게 쏘라고 명하죠. 그런데 프시케를 본 에로스가 그만 첫눈에 반하고 맙니다. 에로스가 어머니의 명령을 어긴 첫 번째 사건입니다. 프시케의 부모는 두 언니와 달리 결혼은커녕 구혼자도 없는 프시케 때문에 아폴로 신전에 가서 신탁을 구합니다. 그런데 용처럼 생긴 괴물이 프시케의 남편이고, 산꼭대기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탁이 나옵니다. 프시케의 가족은 그녀를 산에 데려다 놓고 장례식 같은 결혼식을 올린 다음 떠나 버리죠. 그러나 서풍인 제피로스가 그녀를 숲속의 아름다운 궁전으로 인도합니다. 이곳에서 프시케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호사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남편은 밤이 되면 찾아와 프시케와 지내다 날이 밝기 전에 떠났고, 방에 불을 켜지 못하게 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시케는 임신하게 됐고, 남편을 졸라 언니들을 궁전으로 초대했습니다. 두 언니는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동생을 보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남편의 정체를 확인해 보라고 프시케의 마음에 공포와 의심을 심어줍니다. 그날 밤 프시케는 잠든 남편의 얼굴에 등불을 비춰서 실체를 확인하고요. 그런데 등잔에서 뜨거운 기름방울이 떨어지는 바람에 에로스가 잠에서 깨어나고 말죠. 화상을 입은 에로스는 배신감에 분노하며 프시케를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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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니코 코르비, 『큐피드와 프시케』, 1784년. 캔버스에 유화, 172 × 121 cm. 예르미타시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https://gallerix.org/album/Hermitage-6/pic/glrx-890493774 제공. |
다른 신화였다면 프시케는 신의 뜻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죽음이나 변신이라는 처벌을 받았을 겁니다. 대신 프시케는 궁전과 남편을 잃습니다. 사랑에 빠진 프시케에게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벌일 수 있죠. 여기까지가 전반부에 해당한다면, 아프로디테가 내준 네 가지 과제를 프시케가 완수한 후 에로스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후반부라 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는 아프로디테의 분노를 풀기 위해 여신의 신전에서 일하기로 합니다. 여신이 프시케에게 부여한 첫 번째 과업은 뒤섞여 쌓여있는 곡식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다행히 개미들이 나타나 무사히 과업을 완수할 수 있게 도와주죠. 황금 양털을 가져오는 두 번째 과업은 갈대의 도움으로 마치고요. 세 번째 과업에서는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의 도움으로 높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떠 올 수 있었죠. 마지막 과업으로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서 페르세포네를 만나 아름다움을 조금 얻어 병에 담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프시케는 탑의 도움으로 지하 세계로 내려가서 페르세포네로부터 아름다움을 얻어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조금 싱겁겠죠? 반전이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들어 있는 상자를 들고 돌아오던 프시케는 절대 열지 말라는 페르세포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처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상자를 열어보고 맙니다. 호기심보다는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겠죠. 남편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호기심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해놓고도 또다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프시케를 보면, 호기심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판도라의 신화대로 설명하자면, 여성들이 호기심 많은 판도라의 후손이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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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황금 상자를 여는 프시케』, 1903년. 캔버스에 유화, 117 × 74 cm, 개인 소장. https://en.m.wikipedia.org/wiki/File:Psyche-Waterhouse.jpg 제공. |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죽음 같이 깊은 잠이었습니다. 아름다워지려면 잠을 많이 자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프시케는 길에서 잠이 들고, 이때 어머니의 집에 갇혀 화상을 치료했던 에로스가 날아와 프시케를 잠에서 깨웁니다. 에로스의 두 번째 반항이죠. 에로스는 잠을 거둬 상자 안에 집어넣은 다음 프시케와 함께 제우스에게 가서 아프로디테를 설득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침내 제우스의 중재로 아프로디테도 에로스와 프시케의 결혼을 승낙하게 됩니다. 프시케는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먹고 불사의 신이 되고요. 이렇게 신이나 다른 초자연적인 힘의 도움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무대 기법, 여기서는 소설 기법을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부릅니다. 사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 전체가 이 기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죠. 프시케가 아프로디테의 네 가지 과업을 완수할 때 혼자 힘으로 해결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우리나라의 민화 「콩쥐팥쥐전」에서 콩쥐를 도와주는 두꺼비나 새들, 동화 「신데렐라」에서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요정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좋은 예가 될 겁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계 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뜻입니다. 실제 연극 무대에서 신이 기중기와 같은 기계를 타고 공중에서 나타나 사건을 해결해 줬다고 합니다.
이 신화에는 특이하게도 선택의 순간이 두 군데 있습니다. 먼저, 프시케는 언니들이 다녀간 후 치열하게 고민했을 겁니다. ‘불을 켜서 남편이 괴물인지 아닌지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남편의 말에 따라 남편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말이죠. 이 선택 역시 세멜레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남편의 말을 믿자니 불안하고, 정체를 확인하자니 결과가 두렵죠. 남편의 말을 믿었다가 남편이 진짜 괴물인 경우, 언니들의 경고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임신 중인 아이까지 언젠가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있습니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실체를 확인한다면 남편이 진짜 괴물이라는 무서운 진실과 대면할 수 있고요. 남편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프시케가 이전처럼 살 수 있을까요? 괴물 남편이 제공하는 풍요로운 삶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남편을 떠날 것인지 또다시 선택해야 할 상황에 놓이게 되겠죠. 두 번째 선택의 순간은 아름다움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 것인지, 말 것인지 프시케가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상자를 그대로 덮어서 아프로디테에게 가져다주자니 도대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고, 상자를 열어보자니 열지 말라고 한 페르세포네의 경고가 두려웠을 겁니다. 상자 뚜껑을 덮어둘close 것인지, 아니면 열disclose 것인지 고민스러운 이 선택 역시 프시케의 첫 번째 선택과 마찬가지로 어느 쪽을 택해도 불만스러운 딜레마입니다.
프시케의 두 딜레마 역시 세멜레가 처했던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프시케의 딜레마도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의 남편은 괴물이건 아니건 아폴로의 신탁으로 정해졌고, 프시케의 아버지로부터도 인정받은 존재죠. 신과 아버지, 남편은 가부장제 사회의 삼위일체라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국 신의 권위에 대한 저항입니다. 에로스가 신이라는 사실을 프시케가 아직 모르는 상태라 해도 말이죠. 두 번째 선택에서는 권위에 대한 복종 대 저항의 대립 구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상자를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여신 페르세포네의 경고를 프시케가 따르지 않았으니까요. 권위에 대한 복종 대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 대결 구도를 세부화하면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귀결됩니다. ‘남편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욕구를 따를 것인가?’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욕구를 따를 것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을 알고 싶은 지적 욕구를 자유롭게 추구할 것인가?’로 바꿀 수 있고, ‘환한 불빛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려 하지 말라!’는 에로스의 명령과 ‘상자를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페르세포네의 경고는 지적 호기심에 대한 규제에 해당하니까요. 권위에 대한 복종 대 권위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결 구도가 포괄적인 범주라면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는 이 포괄적인 대범주에 속한 하위 범주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첫 번째 하위 범주에 지금까지 다룬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세멜레, 프시케의 신화가 포함되고요. 앞으로 다른 신화들을 살펴보면서 이 하위 범주에 속한 신화의 수를 늘릴 예정입니다. ‘개인 대 사회’의 딜레마와 ‘언론의 자유 대 검열’의 딜레마도 마찬가지죠. 이 딜레마들 역시 ‘체제 순응 대 저항’이라는 큰 범주의 하부 범주입니다.
프시케의 신화에 대해서도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먼저, 딜레마라는 관점을 충실하게 따르자면, ‘체제 순응 대 저항’의 대립 구도와 연관해서, 프시케의 신화는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할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 경고하는 신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가 네 가지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은 신들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처벌로 간주할 수 있죠. 또한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딜레마라는 관점에서 프시케의 신화는 규제를 어기고 지적 호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어떤 불행한 결과가 생기는지 경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딜레마의 관점에서 나온 이런 해석은 이 연재 글에서 계속 반복될 겁니다.
딜레마의 관점 외에 프시케의 신화를 읽는 또 다른 관점으로는 우화allegory가 있습니다. 프시케의 신화를 일종의 우화로 간주하는 거죠. 첫 번째는, 신비주의의 맥락에서 프시케의 신화를 영혼의 부활에 대한 우화로, 혹은 인간의 영혼이 정화 과정을 통해 영원성 혹은 불멸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우화로 해석하는 겁니다. 신비주의神秘主義; mysticism란 “일반적으로 신이나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다양한 실천과 경험을 통해서 인간이 새롭게 거듭나는 것”「위키피디아」을 의미합니다. 프시케는 호기심으로 인해서 에로스와 그가 제공하는 안락한 생활을 모두 잃지만, 아프로디테가 부과한 네 가지 과업이라는 역경을 헤쳐 나가며 영혼을 정화한 후 에로스의 사랑을 되찾고 함께 올림포스로 올라가 영원한 생명불멸성을 획득합니다. 프시케가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서 불멸의 존재로 부활하는 거죠. 마치 땅 위를 기어다니던 애벌레가 번데기 상태로 ‘죽어 있다가’ 날개 달린 아름다운 존재로 부활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불멸의 신이 된 프시케는 흔히 나비의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저 위의 안토니오 카노바Antonio Canova, 1757~1822의 조각 작품, 『큐피드와 프시케Cupid and Psyche』1794에서도, 아래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William-Adolphe Bouguereau, 1825~1905의 『프시케의 승천Le ravissement de Psyché』1895에서도 프시케는 나비 날개를 달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프시케의 납치The abduction of Psyche』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어 단어 ‘ravissement’에는 ‘납치’뿐만 아니라 ‘황홀,’ ‘천국으로 인도되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에로스가 프시케를 데리고 올림포스로 올라가는 신화 내용을 참조하면 이 그림의 제목은 『프시케의 납치』보다는 『프시케의 승천』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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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프시케의 승천』, 1895년. 캔버스에 유화, 209 × 120 cm. 개인 소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sycheabduct.jpg#/media/File:Psycheabduct.jpg 제공. |
나비의 날개는 인간의 영혼이 불멸성으로 비상하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프시케는 인간이 영혼의 비상을 통해 어떻게 필멸의 존재에서 불멸의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프시케의 신화는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 수 있고, 살고 싶은 인간의 믿음과 희망을 담은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의 신화처럼 재생 혹은 부활의 주제를 다룬 그리스 신화가 또 있을까요? 그럼요. 페르세포네 신화가 프시케 신화의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페르세포네는 지하 세계의 왕인 하데스에게 납치돼서 어머니 데메테르 여신과 헤어지게 됩니다.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서 온 세상을 헤매 다니죠. 결국, 제우스의 중재로 페르세포네는 일 년 중 반은 지하 세계에, 나머지 반은 지상으로 올라와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페르세포네의 부활은 자자손손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죠. 이 신화는 하강지하 세계로의 납치-탐색-상승재생 혹은 부활이라는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프시케의 신화 역시 하강호기심으로 인한 에로스 상실-탐색네 가지 과업-상승올림포스로 올라가서 영원한 생명/불멸성 획득의 구조를 반복하고 있고요. 그런데 이 구조가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그것은 이 신비주의 서사 구조가 기독교에서도 반복되기 때문일 겁니다. 프시케의 자리에 아담과 이브를 집어넣어서 이 서사 구조를 살짝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아담과 이브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fall 타락fall의 죄를 범한 다음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합니다. 죄 많은 인간의 영혼은 속죄와 구도의 정화 과정을 통해 신과 결합함으로써 구원받고요. 하강-탐색-상승의 세 단계가 타락-속죄-구원의 세 단계로 반복됩니다. 타락 서사와 구원 서사가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에서 비슷하게 작용하는 거죠. 그러니 프시케의 신화는 기독교의 맥락에서 보면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했다 구원받는 인간 영혼에 대한 우화가 됩니다.
이런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담긴 신비주의 서사 구조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향연Sympósion』기원전 385년~기원전 370년에는 유명한 두 가지 사랑론論이 실려 있습니다. 하나는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6년~기원전 386년의 사랑론이고, 다른 하나는 소크라테스기원전 470년~기원전 399년의 사랑론입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는 이 두 사랑론을 보여주는 철학적 우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남성, 여성, 남성과 여성이 합체된 헤르마프로디투스Hermaphroditus, 세 가지 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뛰어난 힘과 능력을 갖춘 인간이 신들을 공격하자 제우스는 인간의 몸을 반으로 나눠 버립니다. 반쪽이 된 인간은 잃어버린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매고요.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렇게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해지려는 욕망을 ‘에로스’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기원에 대한 이 신화에서도 하강-탐색-상승의 세 단계가 반쪽으로 나뉘기-반쪽 찾기-온전해지기의 세 단계로 반복됩니다. 온갖 시련을 감내하다 마침내 잃어버린 반쪽 에로스를 되찾는 프시케의 여정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우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사랑론에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사랑론보다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훨씬 더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 에로스라는 존재를 빌려 설명하죠.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황금 당나귀』나 다른 신화 작품과 달리 신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중간 존재인 ‘다이몬정령; daimon’으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아들이 아니라 풍요의 신, 포로스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의 아들로 상정됩니다. 그러니 에로스에게는 어머니로 인한 태생적 결핍이 있습니다. 앞에서 에로스가 항상 어린아이나 소년으로 묘사된다고 말씀드렸었죠? 결핍은 미성숙과 연관되고, 그림이나 조각에서 어린아이나 소년으로 묘사되는 에로스의 모습은 에로스의 결핍과 미성숙을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결핍이 있는 에로스는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영원불멸하는 것을 끝없이 열망하고 욕망하죠. 이렇게 선goodness과 미beauty, 진truth, 불멸성immortality을 욕망하는 것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에로스’라고 부릅니다. 다이몬 ‘에로스’의 이름을 빌려와서 ‘에로스’ 개념을 설명하는 거죠. 인간과 신의 중간 존재인 에로스는 인간과 신을 연결해 주는 중개자 역할을 합니다. 사실 신들은 욕망도 없고 사랑도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죠. 모든 것이 충족되는 신들에게는 결핍이 없으니까요. 신들은 사랑의 주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신들은 인간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중간자인 에로스를 통하면 인간과 신이 연결될 수 있습니다. 지극히 단순하게 표현하면, 사랑을 하면 된다는 겁니다. 필멸의 인간도 사랑을 하게 되면 신처럼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가 프시케를 인도해서 올림포스로 올라가 신성을 부여하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프시케’는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에로스의 인도로 육체적인 것과 가변의 것, 아름답지 않은 것,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 영원한 것을 욕망할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죠. 올림포스의 다른 신에게는 없는 날개가 에로스에게만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이끌고 신성으로 비상할 수 있게 이끌어야 하기 때문일 겁니다. 소크라테스의 사랑론에서도 신비주의의 하강-탐색-상승의 세 단계는 결여가 있는 필멸의 존재-에로스-불멸성 획득의 세 단계로 반복됩니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시작된 프시케의 사랑이 남편 에로스를 향한 정신적 사랑으로 승화되는 여정을 보여준 프시케의 신화는 인간의 영혼이 에로스를 통해 불멸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대한 우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과정이 아름답고 좋은 대상과 결합해서 아름답고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짝을 만나 서로에게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아름다운 자식을 낳는다고 해서 불멸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법률이나 아름다운 예술작품 같은 영혼의 소산을 만들어내는 것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죠. 그렇다 해도 사랑을 통해 인간의 영혼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사랑론은 사랑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시인도, 그 어떤 철학자도 사랑의 역할을 이렇게까지 높은 경지로 올려놓지는 못했으니까요.
영혼의 불멸성이라는 주제와 연관해서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신화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에로스는 어머니 아프로디테 여신의 뜻을 두 번 거역합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가 경쟁자로 여기며 싫어하는 프시케에게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빠졌고, 두 번째는 어머니의 집에서 탈출해서 프시케에게 날아가 그녀를 돕습니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온갖 시련 끝에 결혼에 이르는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1597과 연관됩니다. 물론 에로스와 프시케의 사랑은 해피엔딩이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죠. 그렇다 해도, 두 이야기 모두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쓰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성 확립에 사랑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죠. 사랑을 통해 순종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줄리엣이 독립적인 여성으로 변모하고 로미오가 로렌스 신부의 지도에서 벗어나 자립한 것처럼, 프시케 역시 용감하게 역경을 헤쳐 나가는 주체적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에로스도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하는 개별적인 존재로 자리 잡으니까요. 로미오와 줄리엣, 에로스와 프시케 모두 ‘유년기에서 성인기’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어린아이로 묘사되던 에로스가 프시케와 함께 있을 때는 소년이나 청년으로 묘사되는 것은 에로스의 정신적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그러니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를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청소년기의 사랑에 대한 우화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위의 여러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를 읽어냅니다. 그는 「세 상자의 주제The Theme of Three Caskets」에서 셋 중 하나를 고르는 상황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를 들어,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1596~1598에서 바사니오Bassanio는 세 상자 중 포오샤Portia의 초상이 들어있는 상자를 선택해야 하고, 『리어왕King Lear』1606에서 리어는 세 딸 중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가장 지극하게 표현한 딸을 골라 왕국을 나눠주려 합니다. 파리스 역시 세 여신,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 중 황금사과를 차지할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선택해야 하고요. 동화 「신데렐라」에서 왕자는 세 자매 중 누가 유리구두의 주인인지 찾아내야 하고, 에로스는 세 자매 중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죠. 프로이트는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 모든 상황을 세 여자 중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으로 해석합니다. 프로이트가 관심을 가진 것은 왜 선택의 대상이 항상 세 번째 여자인가라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세 번째 여자가 모두 침묵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세 명으로 이루어진 운명의 여신 중에서 침묵을 지키는 여신이 바로 죽음의 여신입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에서도 죽음과의 연관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우선, 용처럼 생긴 괴물이 프시케의 남편이라는 신탁을 들은 가족은 마치 ‘장례식’을 치르듯 프시케의 결혼식을 치릅니다. 또한 프시케가 페르세포네를 찾아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것도, 페르세포네가 준 상자를 열어본 후 ‘죽음’ 같은 잠에 빠지는 것도 다 죽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신화를 비롯해 셋 중 하나를 선택하는 주제를 다룬 신화나 민화, 희곡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내리는 선택이 죽음으로 귀결되고, 죽음의 필연성을 거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프로이트의 글은 신화 속 선택의 문제가 얼마나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똑같이 프시케의 신화 속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선택과 죽음의 연관성을 지적하고 이 연관관계를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라는 무의식의 작동 기제로 설명한다면, 저는 이 글에서 선택에 들어 있는 딜레마의 구도에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제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서 더 찾아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신화 속 선택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룬 글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당연히 앞으로도 수많은 새로운 관점이 나오겠죠. 신화 속 선택의 문제에 대해 새로운 답을 찾는 작업에 여러분도 동참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아래 질문에 대한 답부터 찾아봐야겠죠? 딜레마를 해결할 답을 찾는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해석과 여러 다른 해석을 능가할 참신하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니까요. 여러분이 프시케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불을 켜서 남편의 실체를 확인하시겠어요? 아니면 모르는 채로 안락한 삶을 유지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