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뭘 먹을까?’로 시작해서 ‘무슨 옷을 입을까?’ ‘어느 길로 가야 덜 막힐까?’ ‘점심은 또 뭘 먹지?’ ‘저녁에는 누구를 만날까?’ ‘어떤 TV 프로그램을 볼까?’ 같은 작은 문제부터 인생행로를 바꿀 수 있는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뭔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을 것인가? 찍어 먹을 것인가?’ 같은 문제야 금세 해결할 수 있죠. 하나를 선택할 때 포기하는 것이 그리 크지 않으니까요. 선택에 걸려 있는 것stake이 크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선뜻 하나를 고르기 난감하죠. 하나를 선택할 때 잃을 수 있는 것이 많아질 수 있으니까요. 이도 저도 못 하고 고민하는 이런 상황을 딜레마라고 합니다. 딜레마dilemma란 “선택해야 할 길은 두 가지 중 하나로 정해져 있는데, 그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곤란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동시에 다른 한쪽은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둘 다 선택하거나 둘 다 포기할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위키백과」을 가리킵니다. 아래 풍자만화 속의 정치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이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무서운 경비견을 피해 담장을 올라가면 성난 남자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남자를 피해 담장에서 내려오면 개가 공격해 올 테니까요. 그래도 다행히 개가 목줄에 묶여 있어서 글래드스톤에게는 도망갈 길이 남아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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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에 빠진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톤을 그린 만화」, 『세인트 스티븐스 리뷰』, 1886년 5월 29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_Dilemma_(BM_1945,0109.26).jpg#/media/File:A_Dilemma_(BM_1945,0109.26).jpg 제공. |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큰 딜레마는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일 겁니다. 자기 목숨이 걸린 선택보다 더 중요한 선택은 없을 테니까요. 난감한 선택의 상황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대사는 아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햄릿』, 3막 1장)라는 햄릿의 독백일 겁니다. 햄릿의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안 돼서 “장례식 음식이…… 결혼 잔칫상에” 오른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빛의 속도로 재혼합니다. 형이 죽자마자 재빨리 덴마크 왕의 자리를 차지한 삼촌과 말이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유령은 삼촌에게 독살당했다며 복수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삼촌의 첩자 노릇을 하는 친구들도 믿을 수 없고, 어머니처럼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연인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햄릿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아내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더 고상한가.
죽음은 잠드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잠들면 모두 끝난다.
번뇌도, 육체가 받는 온갖 고통도
잠들면 꿈도 꾸겠지. 아, 그게 문제다.
이 육체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그 죽음의 잠을 자며 어떤 꿈을 꿀 것인지
생각하면 망설여진다. 그 때문에
비참한 삶을 지루하게 살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참겠는가? 시간의 채찍과 조롱을.
폭군의 횡포와 거만한 자의 멸시와
버림받은 사랑의 아픔을, 재판의 지연을,
관리들의 오만함을, 참을성 있는 사람들이 비열한
사람들로부터 받는 모욕을.
한 자루의 단검으로 찌르기만 하면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그 누가 참겠는가.
힘든 삶의 무게에 땀 흘리며 신음하면서도,
사후死後의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면,
나그네 한번 가서 돌아온 일 없는
미지의 나라가 우리의 결심을 흐리게 하고,
그 미지의 나라로 날아가기보다는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참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사리분별은 늘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렇게 결단력의 본래 색깔은
사색의 창백한 색조에 물들어 흐릿해지고 만다.
대단히 중요한 계획도
이 때문에
가던 방향이 어긋나 버리고
실천의 힘을 잃게 된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3막 1장.
살자니 견뎌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고통스럽고, 죽자니 미지의 사후 세계가 두렵습니다. 햄릿의 첫 번째 딜레마죠. 그래도 “그렇게 사리분별은 늘 우리를 겁쟁이로 만들고, 그렇게 결단력의 본래 색깔은 사색의 창백한 색조에 물들어 흐릿해지고 만다”라는 독백 후반부를 보면 햄릿이 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어렵지만 사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거죠. 첫 번째 딜레마에서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두 번째 딜레마가 남아 있습니다. 살기로 작정하고 나니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떠오릅니다. “잔인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아내는 것이 더 고상한지, 아니면 고난의 물결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이를 물리치는 것이 더 고상한지” 알 수가 없는 거죠. 햄릿의 독백을 읽다 보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독일어: Der Wanderer über dem Nebelmeer』1818가 떠오릅니다. 남자의 뒷모습에서 딜레마에 빠진 햄릿의 모습이 보이지 않나요?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도 묻어두고, 어머니의 재혼도 받아들이고, 친구들의 배신도 무심하게 넘기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아버지가 삼촌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삼촌에게 복수하는 것이 나은지 아직 결정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햄릿의 독백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보다는 ‘참을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참으면 원수를 갚아달라는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삼촌을 죽여서 복수하면 국가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죠.
햄릿의 딜레마는 가족으로서 느끼는 개인적인 의무 대 국가에 대한 공적인 의무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 속 안티고네가 직면했던 딜레마입니다.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함으로써 가족의 도리를 다할 것인가? 아니면 국법에 따라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방치할 것인가?’라는 안티고네의 딜레마는 ‘가족 윤리학 대 국가 윤리학’ ‘사적 이익 대 국가적 이익’ 혹은 ‘개인 대 사회’ 등의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만 이런 딜레마에 처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똑같은 딜레마에 처한 주인공이 여럿 있습니다. 적과 사랑에 빠진 아리아드네와 메데이아의 상황도 안티고네와 똑같은 딜레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여성 모두 사랑을 따르면 조국을 배신해야 하고, 조국을 따르면 사랑을 버려야 하니까요. 두 사람의 딜레마는 ‘사랑이라는 개인의 행복 추구가 우선인가? 아니면 국가적 이익이라는 공적 가치가 더 중요한가?’라는 갈등 구조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 사람씩 살펴보도록 하죠.
딜레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리스 신화로 넘어왔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주인공이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고, 판도라는 상자를 엽니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하고, 미다스는 아폴로에게 손대는 것마다 금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파리스는 세 여신 중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고르고, 테이레시아스는 남자로 돌아가기 위해 뱀을 지팡이로 내리칩니다. 이 모든 신화에는 드러나건 드러나지 않건 선택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택 중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인 딜레마도 있고, 딜레마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폴로에게 소원을 말하는 미다스나 세 여신 중 하나를 고르는 파리스가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다자택일이니까요. 그러나 상자를 연 판도라의 선택이나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기로 한 안티고네의 선택, 적국의 왕자인 테세우스를 돕기로 한 아리아드네의 선택이나 아폴로와 판의 악기 연주 대결에서 판을 편들기로 한 미다스의 선택, 뱀을 내리쳐서 남성으로 되돌아가기로 한 테이레시아스의 선택은 딜레마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선택은 해피 엔딩으로, 또 어떤 선택은 비극적인 결말로 끝납니다. 사실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한 방법으로 딜레마 상황에서 양자택일하지 말고 결정을 미루면 되지 않을까요? 결정을 미루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햄릿입니다. 햄릿은 ‘참을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결정을 미루다, 독이 발린 칼에 자신이 찔린 사실을 알고 나서야 복수를 감행하죠. 결국에는 자신도, 어머니도 죽고 맙니다.
이 시리즈의 목적은 그리스 신화에서 딜레마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대립 구조로 설명해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티고네 신화에서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으면 가족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고, 오빠의 시체를 매장하면 국법을 어겨 사형당하게 된다’라는 딜레마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개인적 도덕 대 공적 의무’의 대립 구도로 해석하는 거죠. 그러려면 먼저 그리스 신화에서 선택의 순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의 순간이 신화에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는 겁니다. 세 여신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선택해야 하는 파리스의 신화는 예외고요. 대개는 신화의 주인공이 선택의 상황에 빠져 있는 건지 고민을 하긴 한 건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이라면 당연히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리스 신화 텍스트에는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매끄럽게 서사가 진행되어서 신화 속 주인공이 딜레마에 처했는지 중대한 선택이 이루어졌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헤시오도스그리스어: Hēsíodos, 기원전 8세기~기원전 7세기경의 『노동과 나날고대 그리스어: 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기원전 7세기에는 판도라의 신화가 들어 있습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미끼가 완성됐을 때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그녀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발 빠른 전령신은 선물을 전달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고, 곧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인간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말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피메테우스는 선물을 덥석 받고 나서야
그 말을 떠올렸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인간 종족이
불행도, 힘든 일도, 운명의 여신들이 인간에게 주는 병이나 고통도 없이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불행한 사람은 빨리 늙는 법이다.)
그러나 그 여인이 큰 항아리의 뚜껑을 손으로 열자
인류에게 슬픔을 가져올 온갖 불행이 빠져나와 흩어졌다.
깨트릴 수 없는 항아리 안에는 희망만 남아 있었다.
그것은 항아리 뚜껑 가장자리 밑에 붙어서 밖으로 날아가질 못했다.
그 여인은 먼저 뚜껑으로 항아리를 덮었다.
모든 것이 아이기스 방패를 지니고 다니며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의 계획이었다.
― 헤시오도스, 『노동과 나날』, 103~120행.
판도라가 항아리의 뚜껑을 열기 전에 고민했다는 흔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 신화에 선택의 순간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래 그림에 판도라의 망설임이 더 실감 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신화를 읽으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화 속에서 결정의 순간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동시에 신화의 주인공들 앞에 놓인 선택이 왜 딜레마인지도 알아야 하고요. 자신이 어떤 딜레마에 빠져 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햄릿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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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알마-타데마, 『판도라』, 1881년. 수채화. 개인 소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wrence_Alma-Tadema_10.jpeg#/media/File:Lawrence_Alma-Tadema_10.jpeg 제공. |
그런데 판도라와 안티고네가 똑같은 딜레마에 빠졌을까요? 그리스 신화 속 딜레마가 모두 같은 대립 구도로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안티고네와 아리아드네의 딜레마는 ‘사적 이익 대 공적 의무’의 대립 구조로 볼 수 있죠. 판도라의 딜레마는 다른 범주에 속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딜레마의 첫 번째 범주가 ‘사적 이익 대 공적 의무’의 갈등이라면 딜레마의 두 번째 범주는 ‘지식 추구 대 규제’의 갈등입니다. 판도라의 신화가 보여주는 것은 ‘지적 호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규제에 순응할 것인가?’의 갈등이죠. 이 두 번째 범주의 딜레마로 해석할 수 있는 신화도 여럿 있습니다. 제우스의 진짜 모습을 알고 싶었던 세멜레도, 남편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던 프시케도 모두 판도라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이죠. 세 사람 모두 호기심과 규제 사이에서 갈등하다 호기심을 충족하기로 선택한 후 비극적인 상황에 빠집니다. 어디 이 세 신화의 주인공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규제를 어기고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다가 불행해지는 주인공이 여럿 있습니다. 물론 비극적 종말을 피하면서 지적 호기심도 충족하는 영리한 주인공도 있고요. 이 모든 주인공은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정해 놓은 규제에 순응할 것인지’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 사람씩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딜레마의 세 번째 범주는 ‘표현의 자유 대 검열’의 갈등입니다. 아폴로와 판이 악기 연주 대결을 벌일 때, 미다스는 판의 연주가 더 뛰어났다고 평합니다. 이에 분노한 아폴로는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바꿔 버리죠. 신들에게 맞섰다가 처벌당한 신화가 어디 이것뿐일까요? 아폴로에게 도전한 마르시아스도, 아테나 여신에게 도전한 아라크네도 신에게 대적한 죄로 끔찍한 형벌을 당합니다. 이런 신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내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려니 처벌이 두렵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자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딜레마에서 표현의 자유를 선택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표현의 자유 대 검열’의 딜레마에 처한 신화의 주인공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한 사람씩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 신화 속 딜레마를 ‘개인 대 사회’의 딜레마,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딜레마, ‘표현의 자유 대 검열’의 세 범주로 분류해 봤습니다. 혹시 딜레마의 또 다른 범주를 찾게 되면 추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은 이 세 범주에 속하는 신화를 하나씩 살펴볼 예정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들어 있는 신화는 많지만, 딜레마로 간주할 수 있는 선택 상황에 관한 신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조사하다 보면 그 수가 더 늘어날지 모르죠. 현재 목표는 20개 정도의 신화를 읽고 딜레마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세 가지 형태의 대립 구조 중 하나로 설명해 보는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 딜레마에 처한 주인공의 입장이 돼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도 해보고요. ‘내가 프로메테우스라면,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줄까?’ ‘내가 판도라라면, 상자를 열 것인가?’ ‘내가 안티고네라면 오빠의 시체를 매장할까?’ ‘내가 미다스라면 판의 편을 들까?’ ‘내가 아리아드네라면 테세우스를 도울까?’라고 상상해 보는 거죠. ‘그리스 신화 다시 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작업은 결국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들이 빠졌던 딜레마는 21세기 현재의 우리가 처해 있는 딜레마니까요. 그리스 신화 속 딜레마가 지금은 모두 해결돼서 사라졌을까요? 그럴 리가요. 더 복잡하고 심각한 상태로 남아 있죠. ‘사적 이익 대 공적 의무’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남아 있고,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딜레마는 현재에 오히려 더 큰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인공 지능 기술이나 유전 공학 기술, GMO 기술 개발을 무제한으로 허용할 것인지 아니면 규제가 필요한지, 규제는 어느 정도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대 검열’의 딜레마는 어떻고요.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들이 겪었던 검열의 문제는 바로 지금, 이곳에서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 신화를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빠졌던 딜레마를 살펴보는 것이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 치부하진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누가 알겠어요? 저와 같이 ‘신화 다시 쓰기’를 하면서 신화의 주인공들이 고민했고,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여러분 스스로 찾아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