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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고디바Godiva라는 초콜릿 이름을 아실 겁니다. 이 초콜릿 이름은 코번트리 영주의 아내였던 고다이바 부인Lady Godiva, 990년경~1067년경; 고디바의 영국식 발음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코번트리 지역의 전설에 의하면 고다이바 부인은 남편의 무리한 세금 징수로 백성들이 고통받자, 남편에게 세금을 감면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영주는 부인에게 “벌거벗은 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조롱하죠. 고심하던 고다이바는 영주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부인이 마을을 돌 때 창문을 닫고 밖을 내다보지 않기로 합니다. 부인이 긴 머리로만 몸을 가린 채 마을을 지나갈 때 딱 한 사람, 재단사 토마스가 이 약속을 어기고 창틈으로 밖을 내다봤습니다. ‘엿보기 좋아하는 사람 혹은 관음증 환자’를 의미하는 ‘peeping Tom’은 이 재단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톰이 무사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눈이 멀었다고도 하고, 죽음을 맞았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토마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훔쳐본 죄로 죽은 최초의 인간은 아닙니다. 토마스보다 훨씬 더 오래전, 벌거벗은 여성혹은 여신의 몸을 (엿)본 죄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악타이온입니다.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의 신화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등 여러 신화 텍스트에 나옵니다. 그런데 오비디우스는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전부터 악타이온에게 닥친 비극의 원인이 순전히 “우연chance”이자 “실수”이며 “운명”임을 강조합니다. (인용문은 이안 존스턴Ian Johnston이 영어로 번역한 『변신 이야기』를 제가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ian.johnston@viu.ca 제공.)
악타이온의 이마에 이상한 뿔이 났고...
그의 사냥개들은 주인의 피로 배를 채웠다.
하지만 그것을 잘 들여다보면
우연이 그 원인일 뿐
그가 어떤 나쁜 행동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님을 알 것이다.
실수하는 것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르테미스 여신이
평소와 같이 개울에서 목욕하고 있는 동안,
이건 또 어찌 된 일인가, 길을 잃은
악타이온이 사냥을 접고
숲속을 헤매다 그곳에 도착했다.
운명이 그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그가 샘물이 솟아나는 동굴에 들어가자,
님프들은 모두 알몸이었지만 남자를 보자마자
가슴을 두드리며 갑작스러운 비명으로
온 숲을 채우며 아르테미스에게 달려와
여신을 에워싸며 감쌌다.
그러나 여신의 키가 더 컸기 때문에
그들 위로 머리와 어깨가 드러났다.
옷을 입지 않은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였기 때문에,
맞은편에서 쏟아지는 햇빛이나
진홍빛 여명에 물든 구름처럼
아르테미스의 얼굴이 홍조를 띠었다.
여신은 동행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몸을 옆으로 돌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화살을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신 물이 있었다.
여신은 물을 몇 번 떠서 악타이온의 얼굴에 뿌렸고,
그의 머리카락에 복수의 물방울을 튀기면서
그에게 닥칠 재앙을 예고하는 말을 덧붙였다.
“이제 나의 알몸을 봤다고 떠벌릴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3권. 강조는 이미선.
오비디우스는 사냥하던 악타이온이 숲속에서 길을 잃고 “우연히” 동굴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고대 그리스 시인 칼리마쿠스Callimachus, 기원전 310~기원전 240는 『찬가Hymn』에서 벌거벗은 아르테미스의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악타이온이 고개를 돌리기는커녕 여신의 매혹적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고 썼습니다. 악타이온의 시선에 의도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거죠. 피터 브룩스Peter Brooks, 1938~ 의 『육체와 예술Body Work: Objects of Desire in Modern Narrative』1993에는 악타이온이 “목욕하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보다 잘 보기 위해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브룩스가 어떤 신화 텍스트를 참조했는지 밝히진 않았지만, 이 구절은 악타이온의 시선이 완전히 의도적인 행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래 두 그림에는 아르테미스가 목욕하고 있을 때 악타이온이 나타나는 장면이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프란체스코 알바니Francesco Albani, 1578~1660가 그린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Diana and Acteon』1639이고, 두 번째 그림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77/88/90~1576의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Diana and Acteon』1556~1569입니다.
첫 번째 그림이 신화 텍스트를 더 충실하게 묘사한 것 같죠? 적어도 첫 번째 그림에는 동굴과 동굴 속을 흐르는 개울이 그려져 있으니까요. 두 번째 그림에는 동굴 대신 아치 형태의 석조 사원 유적지가 그려진 데다, 아르테미스와 여섯 님프가 목욕하기에는 개울물이 너무 적고 얕아 보입니다. 원전에 대한 충실도로만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원전과 그림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알몸을 본 악타이온에게 분노한 아르테미스는 악타이온을 수사슴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악타이온의 사냥개들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추적해서 물어 죽이고요. 아래 티치아노의 그림에는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하는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변신 이야기』에는 아르테미스가 악타이온에게 물을 뿌린 것으로 나오는데, 이 그림에서는 아르테미스가 동굴 밖에서 활을 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 티치아노 베첼리오, 『악타이온의 죽음』, 1559~1575년. 캔버스에 유화, 178.8 × 197.8 cm. 영국 국립 미술관, 런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ctaeon.jpg#/media/File:Actaeon.jpg 제공. |
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이 사냥개들에게 쫓기다 물려 죽는 상황을 발터 부르게르트Walter Burkert, 1931~2015는 『호모 네칸스: 고대 희랍 희생 제의와 신화의 해석Homo Necans: Interpretationen Altgriechischer Opferriten und Mythen』1972에서 “사냥꾼이 사냥감이 됐다”라고 표현합니다. 쫓던 자가 쫓기는 상황이 되는 반전이 일어난 겁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죠. 오비디우스의 서술대로 하자면, 목욕하고 있는 여신의 알몸을 그저 ‘우연히’ 본 것 말고는 나쁜 행위를 전혀 하지 않은 악타이온이 왜 이렇게 가혹한 처벌을 받은 걸까요? 악타이온의 신화를 다룬 작품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외에도 여러 버전이 있다 보니 악타이온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가에 대해서는 신화 버전에 따라 다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Diodorus Siculus, 기원전 1세기는 『역사총서Bibliotheca historica』기원전 1세기에서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모습을 본 다음 여신과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적었고, 에우리피데스Euripides, 기원전 약 480년 이전~기원전 406년는 『바쿠스 여신도들Bacchae』기원전 405년에서 악타이온이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보다 자신이 더 훌륭한 사냥꾼이라고 자랑했다고 썼습니다. 여신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거죠. 인간이 주제를 모르고 여신과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여신보다 사냥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떠벌렸으니 그리스 신화 체계에서 처벌받지 않으면 오히려 더 이상할 겁니다. 이것만으로도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사기 충분한데, 가이우스 율리우스 히기누스Gaius Julius Hyginus, 기원전 64년경~서기 17년경의 『이야기 모음집Fabulae』에 의하면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본 악타이온이 여신을 성폭행하려 했답니다. 최악의 불경죄죠. 이 세 신화 버전에서 악타이온이 혹독하게 처벌당한 이유를 찾으면 한마디로 오만함húbris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악타이온의 신화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죠.
반면에,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서 피력한 것처럼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다면 다른 해석이 나올 겁니다. 아르테미스의 반응이 “공정하다고 하기에는 심해 보일 수” 있죠. 멀쩡하게 길 가다가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을 봤다는 이유로 악타이온이 난데없이 끔찍한 봉변을 당했으니까요. 이 경우 악타이온의 신화는 악의 없는 순수한 행동도 때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아르테미스 여신과 님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신화의 의미가 달라질 겁니다.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쪽은 악타이온이 아니라 여신과 님프들이니까요. 악타이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신은 아마도 아래 그림처럼 평온하게 목욕을 마쳤을 겁니다.
| 프랑수아 부셰, 『목욕하고 나오는 아르테미스』, 1742년. 캔버스에 유화, 73 × 57 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사실 여성들은 이런 훔쳐보기voyeurism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술 발달로 신화시대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태의 훔쳐보기의 위험이 존재합니다. 훔쳐보기의 (잠재적인) 피해자가 아르테미스 여신이었으니 그나마 처벌이라는 형태로 훔쳐보기에 대응할 수 있었지만, 대개는 이런 대응이 불가능하죠. 아르테미스는 사냥과 야생동물, 숲과 달을 관장하는 여신이자 출산과 양육을 돌보고 어린아이들, 특히 소녀들을 보호하는 여신입니다. 처녀 신으로서, 그리고 여성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존재라 할 수 있는 어린 소녀들인 님프의 보호자로서, 아르테미스 여신의 관점에서 보면 악타이온의 신화는 불순한 의도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시선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여성의 몸을 훔쳐보지 말라. 그러면 악타이온처럼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제 해석은 그렇게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습니다.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여성 혐오적인 그리스 신화가 여성을 변호하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할 리 없죠. 오비디우스만 해도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알몸을 본 것이 순전히 “우연”이라며 열심히 ‘쉴드’를 쳐주잖아요. 훔쳐보기의 가능성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취약성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나라의 전래 동화 「나무꾼과 선녀」가 떠오릅니다. 몇 년 전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강연에서 강사 선생님이 이 동화를 성범죄의 한 예로 들더군요. 이 강연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나무꾼과 선녀」 속에 그렇게 많은 범죄가 들어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습니다.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훔쳐 결혼을 강요한 행위는 약취, 유인죄, 감금죄, 절도죄에 해당하고, 선녀의 목욕 장면을 훔쳐본 행위는 성폭력 범죄라고 합니다.
산속을 배회하다 동굴 속 개울에서 목욕하고 있는 여성들을 우연히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설사 그들 중 여신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해도 말이죠. 눈을 더 크게 뜨고 목욕하고 있는 여성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시겠어요? 아니면 재빨리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시겠어요? 악타이온도 같은 문제로 고민했을 겁니다. 악타이온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선택의 순간이죠. 길게 고민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겁니다. 곧바로 님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허둥지둥 여신에게 달려가서 여신의 몸을 가리려 했으니까요. 이 선택 역시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낯선 여성의 벌거벗은 몸을 계속 보자니 예의와 품위에 어긋나는 행동이고, 고개를 돌리자니 계속 보고 싶죠. 더구나 대상이 여신이라면 계속 바라보는 것은 신에게 불경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신의 벗은 몸을 보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악타이온의 딜레마 역시 앞의 다른 신화들과 같은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악타이온의 딜레마도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권위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눈앞의 여성이 여신이라는 사실을 악타이온이 알았건 몰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여신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아르테미스는 지혜와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와 화덕과 가정의 수호신인 헤스티아와 더불어 3대 처녀신 중 하나죠. 인간이 여신의 알몸을 본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사 악타이온의 신화에 아르테미스 여신의 몸을 봐서는 안 된다는 직접적인 명령이 들어있지 않더라도 이미 규제가 존재하는 거죠. 그러니 고개를 돌려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외면하는 것은 신의 권위에 대한 인정이고,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은 신의 권위를 훼손하는 중대한 위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글에서도 반복적으로 말씀드렸듯이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입니다. ‘여신의 몸을 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신의 몸으로 대변되는 지식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여신의 몸을 볼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의 대결 구도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몸을 보고/알고 싶은 욕구를 따를 것인가? 외면함으로써 호기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됩니다.
악타이온의 신화를 지적 탐구와 규제라는 대립 구도로 파악하게 되면 지식과 연관된 여러 의미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먼저, 오비디우스의 주장대로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벌거벗은 몸을 본 것이 순전히 우연이었다면, 악타이온의 신화는 지식이나 진실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 있습니다. 세멜레의 신화에 대한 앞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진실이나 진리는 흔히 벌거벗은 여성의 몸으로 비유되니까요. 진실이나 지식을 우연히 발견하면 규제받지 않을까요? 설사 우연에 의한 것이더라도 새로운 지식과 진리의 발견은 철저하게 통제되죠. 이것은 악타이온이 당한 사슴으로의 변신과 죽음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악타이온의 신화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알아내려 하지 말라. 설사 우연히 찾아냈다 해도 새로운 것을 발견해서 기존의 질서 체계를 무너뜨리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쯤 ‘새로운 지식이 기존의 질서 체계를 무너뜨린다고? 어떻게?’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새로운 지식의 전복적인 가능성을 보여주는 가장 쉬운 예로는 과학혁명을 들 수 있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독교적 우주관을 무너뜨리고 근대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됐고,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인간을 이성의 주체로, 의식의 주체로 확립해 온 오랜 서구 철학 전통을 뒤집어 버립니다.
지적 탐구와 규제라는 대립 구도의 관점에서 악타이온의 신화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는 이 신화가 완전한 진실을 인식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진실/진리는 흔히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진리의 여신’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어도 ‘진리의 (남)신’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을 겁니다. 진리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알레테이아Aletheia 여신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베리타스Veritas 여신으로 구현됩니다. 그런데 이 진리/진실은 어떤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혹은 완전한 진실을 나타낼 때 ‘적나라한 진실’이라거나 ‘베일을 벗은 진실’이라고 표현을 쓰죠.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은 완전한 진실/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여신과 진실 모두 ‘벌거벗었다’라는 유사성similarity으로 연결되니까요. 그런데 악타이온은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순간, 즉 완전한 진실을 마주한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에 의해 사슴으로 변신하고 곧 사냥개들에게 물려 죽게 됩니다. 진실을 조우하는 시간이 변신과 죽음의 시간인 거죠. 악타이온의 변신과 죽음은 완전한 진실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 혹은 도달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라 할 수 있습니다. 악타이온의 신화는 살아서는 절대 진실을 직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세멜레의 신화와 메두사의 신화 역시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세멜레는 남편이 제우스 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최고신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죠.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들인 구름과 비, 번개, 천둥, 낙뢰落雷를 든 제우스의 모습을 본 순간 세멜레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타죽고 맙니다. 흉측하고 무시무시한 메두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해 버리고요. 진실을 마주한 순간 죽거나 돌이 되는 거죠. 돌로 변하는 것은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변형된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만 진실을 조우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서는 절대 진실을 직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멜레의 신화, 메두사의 신화, 악타이온의 신화는 모두 완전한 지식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 혹은 도달 불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악타이온의 신화를 지적 탐구와 규제라는 대립 구도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도 찾아낼 의미가 더 남아 있습니다. 악타이온의 신화에 대해서 할 말이 참 많죠? 악타이온의 신화는 지식 대상의 통제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남녀 관계에서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일종의 추격chase으로 비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일방적인 열망의 경우에는 열망하는 사람은 쫓아가고 열망의 대상은 쫓기는 상태가 되는 거죠. 아폴로가 도망가는 다프네를 쫓아 질주하는 모습이 이런 상태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겁니다. 이 상황은 사냥에서 사냥꾼the hunter이 사냥감the hunted/prey을 쫓아 달려가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리스 신화 속 남녀 관계에서는 대개 남성이 사냥꾼의 역할을, 여성이 사냥감의 역할을 맡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예외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신화에서는 물의 요정 살마키스가 사냥꾼이고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쫓기는 신세죠. 신들의 도움으로 살마키스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 결합해서 말 그대로 한 몸을 이뤄서 양성을 갖춘 존재가 됩니다.
|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로와 다프네』, 1622~1625년. 대리석, 243 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 『잠자는 헤르마프로디토스』, 제작 연도 미상. 대리석. 국립 마시모 궁전 박물관, 로마. |
그런데 남녀 관계의 역할을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로 표현한 것은 은유지만, 악타이온의 신화에서는 쫓는 사람인 악타이온이 실제 사냥꾼입니다.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 여신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고 기술된 텍스트도 있습니다. 악타이온과 아르테미스 여신은 처음에는 사냥꾼인 악타이온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쫓는 전형적인 남녀 관계를 따릅니다. 그런데 이 관계에 역전이 일어납니다. 마치 사슴으로 변신한 악타이온이 “자기 사냥개들에게 쫓겨 달아나듯이,” 아르테미스는 악타이온을 자신의 상징 중 하나인 사슴으로 변신시켜 버립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이 되는” 반전이 일어난 거죠. 아르테미스가 사냥꾼이 되고 악타이온이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당연히 아르테미스의 힘과 권위가 악타이온보다 더 막강하니까요. 이런 힘의 역전 상황을 진실/지식/기술의 탐구자인 인간과 탐구 대상인 진실/지식/기술의 관계에 대입해 볼까요? 진실과 지식, 기술은 모두 ‘앎’의 다른 말이니 같이 묶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진실/지식/기술을 발견하는 과정은 베일에 가려진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에 비유됩니다.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처럼 진실/지식/기술 탐구자는 진실/지식/기술을 쫓는 거죠. 그런데 진실/지식/기술이 발견된 후 이 관계가 역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탐구 대상이었던 진실/지식/기술이 탐구자의 통제를 벗어나서 탐구자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선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마침내 베일에 싸여 있던 진실이 드러나고, 그 진실은 몸을 돌려 오이디푸스에게 반격을 가합니다. 찾고 있던 범인이 바로 오이디푸스였으니까요. 진실의 공격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죠. 진실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았다는 사실까지 드러내면서 오이디푸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합니다.
이런 진실의 역습이 오이디푸스에게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굳센 규제의 장막을 뚫고 진리/진실/지식/기술을 찾아내는 탐구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현대에는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정보 통신 기술ICT, 유전자 조작 같은 생명 공학 기술, 나노 기술, 원자력 기술 같은 에너지 기술, 우주 탐사선 기술 같은 우주 기술 분야에서 엄청난 과학 기술 발전을 이뤄냈죠. 그런데 이제는 인간이 이 기술들로부터 역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인간 복제나 유전자 조작 기술로 윤리적 논란이 초래됐고, 정보 통신 기술 발달로 개인 정보 유출 등 사생활 침해 문제가 불거졌고요. 이뿐인가요? 환경 문제와 일자리 감소, 양극화 심화, 기술 오용, 과도한 기술 의존, 예측 불가능성 등 수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죠. 이런 문제들에 쫓기고 있는 인류의 모습이나 수십 마리의 사냥개에게 에워싸여 발버둥 치는 악타이온의 모습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진실/지식/기술을 발견하는 과정을 베일에 가려진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에 비유하고, 진실/지식/기술의 역습을 이야기하다 보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인간과 진실/지식/기술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냥꾼과 사냥감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인간은 탐험가로서, 발견자로서, 그리고 개발자로서 자연을 탐험하고, 발견하고, 개발해 왔죠. 자연/대지를 여성/어머니로,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해 가는 과정을 여성의 몸을 정복하는 과정으로 표현하면서요. 자연의 탐험가/발견자/정복자 자리는 당연히 남성으로 상정됐죠. 그런데 아폴로가 끝내 붙잡히지 않았던 다프네를 붙잡은 것으로 착각했던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정복했다며 승리를 구가한 순간 자연은 기후 위기라는 무기를 들고 인류에게 역습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인류는 폭염이라는 사냥개들에게 물어뜯기고 있습니다. 인류가 이 사냥개들의 공격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목욕하는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볼 것인가? 아니면 외면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선택의 문제에 굉장히 심각하고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죠? 어디 이뿐이겠어요? 악타이온의 신화에 대해서는 무궁무진하게 논의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악타이온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호기심을 참고 외면하시겠어요? 아니면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시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