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으로 그리스 신화를 읽었을 때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자유 교양 읽기라는 고전 읽기 경시대회가 있었는데 읽어야 할 책 중 하나가 그리스 신화였습니다. 이 경시대회는 고전을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토론하는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책 내용에 관한 문제를 풀어서 최고 득점자를 뽑는 방식이었죠. 학교 공부의 연장이라 할 수 있었지만, 이 경시대회 덕분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같은 역사책을 완독하고 그리스 신화도 접할 수 있었으니 제게는 아주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때 읽은 그리스 신화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신화가 페르세포네 신화와 파에톤의 신화였습니다. 지하 세계의 신인 하데스에게 납치당한 페르세포네가 땅 위로 올라와 어머니 데메테르와 함께 지내는 반년은 봄과 여름이 되고, 남편인 하데스와 지하 세계에서 보내는 반년은 가을과 겨울이 된다는 페르세포네의 신화는 사계절의 변화가 지구의 공전으로 생겨난다는 과학적인 설명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태양신을 대신해 태양 마차를 몰다가 너무 높게 나는 바람에 얼음으로 뒤덮인 극지방이 생겨났고, 너무 낮게 나는 바람에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부가 까매졌다는 파에톤의 신화 역시 진짜처럼 느껴졌습니다. 피부색이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진화의 산물이라거나, 멜라닌 색소와 연관돼 있다거나, 혹은 인종이 정치, 사회적인 허구적 개념일 뿐이라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게 됐죠. 이 두 신화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그리스 신화 수업 시간에 과학과 문학을 비교할 때면 이 두 신화를 예로 들곤 합니다.
오늘은 이 두 신화 중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가 들어 있는 파에톤의 신화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파에톤은 태양신과 오케아니스인 클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태양신은 작품에 따라 헬리오스가 되기도 하고, 아폴로가 되기도 합니다.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서기 17/18년의 『변신 이야기』8세기에서는 파에톤이 아폴로의 아들로 나옵니다. 파에톤은 제우스와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가 집안을 자랑하자 자신도 아폴로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가 망신만 당하죠. 그 후 어머니에게서 친부가 아폴로라는 것을 확인한 파에톤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고구려 2대 왕인 유리왕이 동명성왕을 찾아가고,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가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가는 것과 비슷하죠. 유리왕은 동명성왕이 남긴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 아래에서 찾고, 테세우스는 아이게우스가 섬돌 아래 숨겨 놓은 칼과 신발을 찾아서 그것으로 자신이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파에톤의 신화에는 살짝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자신이 아들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다른 아들들과 달리 파에톤은 아폴로에게 자신의 아버지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의 진짜 자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도록 제게 증거를 보여주세요.
제 마음에서 의심을 지워 주세요.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아폴로는 자신이 친부라는 증거로 파에톤의 소원을 무엇이건 들어준다고 스튁스 강에 맹세합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신화가 하나 있죠? 제우스 역시 세멜레의 소원이 무엇이건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스튁스강에 대고 맹세한 걸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조차 스튁스강에 대고 약속한 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스튁스강에 한 맹세는 절대 깨뜨릴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스튁스강에 대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폴로는 파에톤의 소원을 들어줘야만 하죠. 그런데 문제는 파에톤이 아폴로가 모는 태양의 마차를 몰고 싶어 한다는 겁니다. 아폴로는 천마天馬가 끄는 마차를 모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올림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조차 그 일을 할 수 없다며 파에톤을 설득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파에톤.
네 힘이나 나이에 맞지 않는 거창한 선물을
요청한 것이다. 너는 필멸의 운명인데,
네가 바라는 것은 필멸의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잘 모르기 때문에, 너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천상의 신들에게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이보다 귀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네가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네게 주겠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이걸 다른 말로 바꿔 볼까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넌 모를 거다. 쉽고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왜 사서 고생하려는 거니? 그냥 쉬운 길로 가거라. 그게 현명한 거야.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 법이다.’ 변화를 싫어하는 어른들이 새로운 걸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죠. 여러분 자신이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갖 회유와 경고에도 파에톤이 고집을 꺾지 않자, 아폴로는 결국 아들에게 태양 마차를 몰게 하며 훈계를 늘어놓습니다.
하늘과 땅에 열기를 똑같이 주려면
마차를 너무 낮게 몰아서도 안 되고,
하늘 높이 몰아서도 안 된다.
너무 높이 날면 하늘의 지붕을 태울 것이고,
너무 낮게 날면 땅을 태울 것이다.
가장 안전한 길은 중간을 지나가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아폴로의 훈계도 이미 많이 들어본 거죠? 크레테 섬에서 탈출하기 전에 다이달로스가 아들 이카로스에게 당부하던 말의 복사판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중간 부분에서만 날도록 해라.
너무 낮게 날면, 수증기로
날개가 무거워질 거야. 너무 높게 날면.
날개가 불에 탈 것이고. 그러니 중간에서 날거라.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이카로스 신화와 파에톤 신화는 너무 닮아서 쌍둥이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태양 마차를 몰고 하늘로 날아오른 파에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쉽게 예측할 수 있죠. 파에톤은 호기롭게 마부석에 자리를 잡고 마차를 몰기 시작하지만, 아폴로가 탈 때보다 마차가 가벼워진 데 놀란 네 마리의 천마는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합니다. 아래 벤저민 그린Benjamin Green, 1739~1798의 동판화 『파에톤Phaeton』1776에는 이런 말들을 제어하려고 힘껏 고삐를 당기는 파에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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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그린, 『파에톤』, 1776년. 종이에 메조틴트, 36.7 × 57.2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90687 제공. |
그런데 그게 어디 파에톤 뜻대로 쉽게 되나요? 말들은 너무 높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너무 낮게 날기도 했죠. 말들이 너무 높게 날 때는 대지가 추위에 떨었고, 너무 낮게 날 때는 대지가 불타버렸습니다. 아프리카는 사막으로 변했고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피부는 까맣게 타버렸고요. 강물과 바다도 모두 말라버릴 지경이 됐죠. 결국, 제우스가 개입해서 마차에 벼락을 던졌고, 벼락 맞은 파에톤은 마차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아래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의 『아폴로의 전차The Chariot of Apollo』1907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른 말들을 끌어 내리려 애쓰는 파에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르동은 부드럽고 화사한 색채로 자연, 신화, 종교의 주제를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그린 상징주의 화가입니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상상력으로 그려낸 세계를 중시해서 성경과 신화, 중세, 민족미술에 관심을 기울였죠. 르동은 파에톤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30점 이상 그렸습니다. 위에 있는 르동의 그림이 파에톤의 추락 전 모습이라면, 아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h, 1649~1686의 『파에톤의 추락The Fall of Phaethon』1636-1638에는 제우스의 벼락을 맞고 마차에서 떨어지는 파에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두 그림만 봐도 상징주의 회화와 네덜란드 르네상스 회화의 차이점이 살짝 느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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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파에톤의 추락』, 1636~1638년. 캔버스에 유화, 197 × 180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La_ca%C3%ADda_de_Faet%C3%B3n_(Jan_Carel_van_Eyck).jpg 제공. |
태양을 마차로 표현하는 것은 지금은 진부한 은유가 됐지만 처음에는 상당히 창의적이고 기발한 은유였을 겁니다. 아침에 동쪽에서 뜬 다음 하루 종일 열심히 움직여서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당시로서는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마차로 표현한 것일 테니까요. 부지런히 움직이는 태양과 달리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달을 마차로 표현한 작품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동요 『반달』에서 반달을 쪽배에 비유하긴 했죠.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신처럼 마차를 모는 또 다른 신이 있습니다. 바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입니다. 아폴로의 말이 천마라면, 포세이돈은 해마海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1845~1915은 아래 『넵튠의 말들Neptune’s Horses』1892에서 로마 신화 속 바다의 신인 넵튠이 해마 전차를 모는 모습을 역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넵튠 분수에서도 해마 조각을 볼 수 있지만, 이 조각상에서는 넵튠과 해마 모두 쉬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래 그림에서는 빠르게 밀려오는 파도의 모습이 해마 마차를 몰고 질주하는 넵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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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크레인, 『넵튠의 말들』, 1892년. 캔버스에 유화, 86 × 215 cm. 노이에 피나코테크, 뮌헨. |
넵튠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휘몰아치듯 내달리는 해마들의 모습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과 닮았습니다. 마음껏 질주하면서도 적절하게 자제하면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는 바이올린 주자의 모습이 해마 같거든요. 동영상 속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넵튠처럼 보이지 않나요? (https://www.youtube.com/watch?v=XD5WLw2IY7w 음악이 궁금한 분은 여기를 눌러 보세요.) 반면에, 파에톤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는 천마의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4악장 벌레스크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벌레스크burlesque’는 문학에서 ‘익살극’이나 ‘해학극’을 의미하지만 때로 ‘광시狂詩’라고도 번역됩니다. 이 악장을 들으면 ‘미쳤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겁니다. (여기를 눌러 음악을 들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1ZvV-dN0ufE)
아폴로나 넵튠이 마차를 몰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파에톤에게 일어난 비극은 하늘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라 할 수 있죠. 그런데 자동차 중에 파에톤이 있더군요. 이 자동차를 볼 때마다 왜 자동차 이름이 파에톤일까 궁금했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에 유행했던 스포츠형 개방형 마차 이름이 파에톤이더군요. 파에톤이 몰았던 태양 마차가 뚜껑이 안 달린 마차의 원조라는 거죠. 그런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한다 해도,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한 선구적인 인물로 파에톤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차를 탈 때마다 그의 비극적 죽음이 떠오르지 않을까요? 저만 그럴지 모릅니다. 파에톤 못지않게 이해하기 힘든 자동차 이름으로 크레시다가 있습니다. 크레시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도 등장하고,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1602에도 등장하는 트로이 사제의 딸로, 트로이 왕자인 트로일러스와 사랑에 빠져서 변치 않을 사랑을 맹세합니다. 그 후 그리스군에 투항한 아버지를 따라 그리스 진영으로 옮겨가게 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금세 그리스 전사인 디오메데스와 연인이 됩니다. 크레시다를 찾아 칼카스의 군막에 잠입한 트로일러스는 두 사람의 밀회를 목격하게 되고요. 왜 자동차에 변심의 아이콘인 크레시다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이것도 제게는 미스터리입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파에톤 신화와 이카로스 신화는 등장인물만 다를 뿐 기본 플롯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카로스 신화에 대한 해석을 파에톤 신화에 그대로 적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사실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두 신화는 해석자에게 오히려 부담스럽습니다. 같은 해석을 반복해야 하니까요. “어떤 구름이라도 그 뒤쪽은 은빛으로 빛난다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라는 속담처럼 이런 상황에도 장점은 있죠. 앞으로 주인공이 하늘을 날다가 떨어져 죽는 신화를 읽게 되면 금세 이카로스와 파에톤을 떠올리며 같은 범주로 해석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파에톤의 신화는 에티오피아인들의 피부가 검은 이유가 무엇이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과 얼어붙은 불모의 땅이 왜 세상에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에 대한 고대 그리스식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 과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허구적인 서사를 통해 풀어보려 한 거죠.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없지만, 로도스의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of Rhodes, 기원전 3세기경의 『아그로나우티카Argonautica』 같은 작품에서는 파에톤의 여동생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포플러나무로 변했고, 그들이 흘린 눈물은 호박으로 변한 것으로 나옵니다. 포플러나무의 기원과 에리다누스 강에 호박이 많은 이유를 파에톤 신화로 설명한 거죠.
두 번째로는 파에톤 신화를 지나친 야망에 대한 경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폴로가 파에톤에게 “마차를 너무 낮게 몰아서도 안 되고, 하늘 높이 몰아서도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높게 하늘을 날기도 하고, 너무 낮게 날기도 했으니까요. 물론 “하늘에 도달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높이” 날아오른 이카로스와 달리, 파에톤은 자기 의지로 너무 높게, 너무 낮게 난 것은 아닙니다. 말이 말을 안 들었을 뿐이죠. 그렇다 해도 너무 높거나 낮지 않게, ‘중간’을 지나가지 못하고 추락한 파에톤의 신화는 중용을 지키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비극에 대한 우화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용에 연관해서 마차 하면 떠오르는 철학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Phaedrus』기원전 370년경에서 인간의 영혼을 한 사람의 마부와 두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쌍두마차에 비유합니다. 오른쪽 말이 명예와 절제, 겸손을 사랑하는 좋은 말이라면, 왼쪽 말은 방종하고 오만한 나쁜 말이죠. 오른쪽 말은 마부의 통제에 잘 따르지만, 왼쪽 말은 채찍질에도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뜁니다. 오른쪽 말은 절도와 품위를 지키는 의지를, 왼쪽 말은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을 상징합니다. 마차를 모는 마부는 무엇이 좋은지 분별하는 이성을 가리키고요. 욕망은 이성의 통제를 거부하죠. 이성이 쾌락을 좇는 욕망에 굴복하면 욕망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됩니다. 천마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말들에게 끌려다니는 파에톤의 모습은 욕망을 통제하지 못하는 이성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파에톤의 신화를 플라톤의 이성에 대한 알레고리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플라톤의 이성론과 파에톤 신화에 등장하는 말의 수가 다르긴 합니다.
다음으로, 파에톤의 신화는 신에게 도전했다가 처벌받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파에톤이 어떤 점에서 신에게 도전했는지 불분명하다고요? 태양 전차를 몰겠다는 파에톤의 소원 자체가 휴브리스, 즉 신에 대해 오만의 죄를 범한 겁니다. 이것은 파에톤의 마음을 돌리려 애쓰며 아폴로가 한 말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는 필멸의 운명인데, 네가 바라는 것은 필멸의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잘 모르기 때문에, 너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고 있다. 그것은 천상의 신들에게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신들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감히 인간이 해보겠다고 바라는 것 자체가 오만함이자 교만함인 거죠. 제우스가 불길에 사로잡힌 온 우주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파에톤을 벼락으로 내리친 것은 사실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처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파에톤 신화는 이카로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카로스 신화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나는 것’은 ‘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보는 것’은 다시 ‘아는 것’으로 이어지죠. 아폴로의 태양 마차를 몰고 싶은 파에톤의 욕망은 결국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에톤 신화에 대한 이런 여러 해석을 토대로 이제는 이 신화에 들어 있는 선택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죠. 파에톤은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는 아버지 아폴로 신의 말을 듣고 태양 마차를 몰고 싶다는 소원을 말합니다. 수많은 소원 중 하나를 선택한 거죠. 그런데 아폴로는 다른 소원으로 바꾸라며 파에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부터 파에톤은 ‘아폴로가 원하는 대로 태양 마차 모는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아폴로의 뜻을 어기고 태양 마차를 몰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하늘을 날고 있던 이카로스가 ‘아버지처럼 하늘과 바다의 중간 부분을 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 곁을 떠나 더 높이 날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순간적으로 선택해야 했다면, 파에톤에게는 하늘을 날기 전에 태양 마차를 몰 것인지, 포기할지 고민할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태양 마차를 포기하면 안전한 대신 모험을 즐길 수 없고, 태양 마차를 몰면 모험을 즐기는 대신 위험에 빠질 수 있고 힘들어질 겁니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태양 마차를 몰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태양 마차를 몰 것인가?’라는 파에톤의 딜레마에서는 먼저, 신에 대한 복종 대 신에 대한 도전이라는 대립 구도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신의 영역을 넘보지 않고 짐승의 영역으로 타락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를 지키며 사는 것은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고, 인간인 파에톤이 올림포스의 신들도 할 수 없는 태양 마차를 몰겠다고 나서는 것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죠. 이 대립 구도는 다시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집니다. 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은 체제에 순응하는 것을 의미하고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니까요. 이 대립 구도는 최종적으로 자유로운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이어집니다. ‘나는 것’은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는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태양 마차를 몰고 싶은 욕망’은 ‘자유롭게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태양 마차를 몰고자 하는 욕망 자체를 금기시하고, 태양 마차를 몰더라도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중간을 지나가라’는 아폴로의 훈계는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는 규제를 상징하죠. 파에톤의 선택도 결국에는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충족할 것인가?’ 아니면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를 따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러분이 파에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태양 마차 모는 것을 포기하고 안전한 삶을 사시겠어요? 아니면 떨어져 죽는 한이 있어도 태양 마차를 몰아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