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이야기라틴어: Metamorphōseōn librī』기원후 8를 쓴 오비디우스Publius Ovidius Naso, 기원전 43~기원후 17/18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기원전 63~서기 14 시절에 살았던 로마의 시인입니다. 로마의 국가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d』기원전 29~기원전 19를 쓴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 기원전 70~기원전 19보다 조금 후배죠. 그런데 이 두 로마 시인은 어떤 언어로 이 신화들을 썼을까요?
1. 이탈리아어
2. 그리스어
3. 라틴어
4. 영어
로마의 시인들이니 당연히 이탈리아어로 쓰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답은 3번 라틴어입니다.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 시절에는 현재와 같은 이탈리아어가 존재하지 않았답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가 토스카나 방언으로 『신곡이탈리아어: Divina Commedia』1321을 쓴 이후 피렌체 방언을 토대로 이탈리아 표준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 이전의 작품들은 라틴어로 쓰였죠. 라틴어는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Latium 사람들이 쓰던 언어였습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정복하면서 라틴어는 지중해 전역과 유럽으로 퍼져나가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 같은 언어가 라틴어에서 파생됐다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라틴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이후 라틴어는 교회의 언어가 됐고 지금도 교황의 조서나 칙령에는 라틴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변신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당연히 ‘변신’입니다. 오비디우스 자신이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변신 이야기』는 “형태가 바뀌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총 15권, 11,995행으로 이루어진 250편 이상의 신화 중 많은 신화에 다양한 형태의 변신이 등장합니다.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로, 동물이 사람으로, 사람이 무생물로, 무생물이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성별이 바뀌기도 합니다. 이 중 사람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이야기가 가장 많죠. 몇 가지만 예로 들면, 뤼카온은 이리로, 다프네는 월계수로, 쉬링크스는 갈대로, 헬리아데스는 나무로, 퀴크노스는 백조로, 오퀴로에는 말로, 에우로파는 소로, 악타이온은 사슴으로, 아라크네는 거미로, 뤼키아의 농부들은 개구리로, 프로크네와 필로멜라는 새로, 페르딕스는 자고새로, 멜레아그로스의 누이들은 산비둘기로, 휘아킨토스는 꽃으로, 뮈라는 고무인 몰약沒藥으로,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는 사자로, 아도니스는 아네모네로 변신합니다. 별이나 돌, 샘물 같은 무생물로 변신하는 경우도 가끔 있고요. 칼리토스 모자는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 별로, 아레투스는 샘으로, 이리는 대리석으로 변신합니다. 이런 변신의 주제가 그리스 신화에만 등장할까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나라의 신화에 변신이 등장하니까요. 우리나라만 해도, 곰이 여자로 변신하는 단군신화를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겠죠. 이런 변신의 주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화는 서사를 통해 세상과 자연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리나 사자 같은 동물은 어떻게 생겨났고, 월계수나 몰약 같은 식물은 어떻게 존재하게 됐으며, 하늘의 별자리는 무슨 연유로 만들어졌는지 허구적인 변신 이야기를 통해 설명해 보는 거죠. 신화시대에는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했으니까요.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여러 예들 속 변신은 자발적 변신과 외부 힘에 의한 변신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변신은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처벌의 한 방식으로 주로 나옵니다. 보상 차원에서 변신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죠. 물론 신의 처벌과 상관없는 변신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신한 것은 아폴론의 추격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프네에게 변신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강의 신인 아버지 페네오스Peneus의 도움을 받아 월계수로 바뀐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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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 『아폴론과 다프네』, 1622~1625년. 대리석, 243 cm.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
반면, 그리스 신화 속 신들에게는 처벌이나 보상 차원에서 다른 것을 변신하게 만드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신들은 인간을 시험하거나 속이기 위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나타나곤 하죠. 예를 들어, 아테나 여신은 베 짜기와 자수 솜씨가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도전하는 아라크네를 찾아갈 때 노파로 변신합니다. 헤라도 세멜레를 찾아갈 때 노파로 변신하고요. 그러나 변신의 최고봉은 단연 제우스라 할 수 있습니다. 올림포스 최고신일 뿐 아니라 변신의 귀재죠. 아내인 헤라 여신 몰래 바람을 피울 때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의 최고신답게 최고로 창의적인 방식으로 변신합니다.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인 이오를 유혹할 때는 구름으로, 스파르타의 왕 튄다레오스의 왕비인 레다에게 접근할 때는 백조로, 페니키아의 공주인 에우로페를 납치할 때는 황소로 변신합니다. 제우스의 변신 중 압권은 청동 탑에 갇힌 아르고스의 공주 다나에에게 다가가기 위해 황금 비로 변신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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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다 코레조, 『유페테르와 이오』, 1530년. 캔버스에 유화, 162 × 73.5 cm. 미술사박물관, 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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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미켈란젤로 원작에 대한 모사본, 『레다와 백조』, 1530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105 × 55.5 cm. 국립미술관, 런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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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 『다나에』, 1554년 이후. 캔버스에 유화, 135 × 152 cm. 미술사박물관, 빈. |
제우스가 이오와 레다, 다나에와 에우로페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사실 연애나 사랑이라기보다 성범죄라 할 수 있죠. 그러다 보니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가 에우로페를 납치해 가는 장면을 그린 작품에는 『에우로페의 강간The Rape of Europa』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의미를 조금 순화해서 보통은 『에우로페의 납치』로 번역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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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치아노 베첼리오, 『에우로페의 강간』, 1560-1562년. 캔버스에 유화, 178 × 205 cm.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보스턴. |
이렇게 제우스가 여성들에게 접근하는 방식이 워낙 독창적이다 보니 인간으로 변신해서 세멜레에게 접근한 방식은 지극히 평범해 보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제우스와 세멜레의 신화가 들어 있는 『변신 이야기』에는 제우스가 어떤 모습으로 변신했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들의 이름을 사칭해서 정숙한 여인들의 침실에 들어간 남자들이 더러 있다”라는 헤라의 말을 토대로 제우스가 남자로 변신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제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늘의 주제인 제우스와 세멜레의 신화로 넘어왔습니다. 세멜레는 제우스가 황소로 변신해서 납치한 에우로페의 조카입니다. 세멜레의 아버지인 카드모스가 에우로페의 오빠니까요. 제우스와 2대에 걸친 악연이라 할 수 있죠. 제우스가 세멜레를 어떻게 유혹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세멜레는 제우스의 자식을 잉태합니다. 이 소식에 분노한 헤라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럴 리가요. 헤라의 분노는 부정不貞한 남편 대신 항상 상대 여성에게 투사됩니다. 사실 상대 여성들도 피해자인데 말이죠. 헤라는 세멜레의 늙은 유모로 변신해서 세멜레를 찾아간 다음, 세멜레의 호기심을 부추기죠. 인용문은 이안 존스턴[Ian Johnston]이 영어로 번역한 『변신 이야기』를 제가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ian.johnston@viu.ca 제공.
그분이 제우스이길 진심으로 바라지만, 그런 일에 대해서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어요. 신들의 이름을 사칭해서 정숙한 여인들의 침실에 들어간 남자들이 더러 있으니까요. 설사 그분이 진짜 제우스 신이 맞다 해도, 그분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사랑의 증표를 내놓게 해야죠. 헤라 여신의 영접을 받을 때와 같은 차림새와 권능을 갖추고 안아 달라고 해봐요. 안기 전에 그분의 위엄을 온전히 드러낼 상징들을 다 걸치고요.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유모의 조언에 따라 세멜레는 제우스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든 다음, 헤라 여신을 안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자신에게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제우스는 이미 스튁스강에 대고 맹세한 후라 약속을 물릴 수 없는 상태였죠. 결국 제우스는 신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들인 “구름, 비, 번개, 천둥, 낙뢰落雷”를 들고 세멜레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다 아실 겁니다. 인간의 몸을 지닌 세멜레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타죽죠. 제우스는 세멜레 뱃속의 태아를 꺼내 자기 허벅지에 기워 넣고 열 달을 채웁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들이 디오니소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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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프 모로, 『제우스와 세멜레』, 1894~1895년. 캔버스에 유화, 213 × 118 cm, 모로 미술관, 파리. |
제우스가 세멜레에게 번개와 천둥의 신으로서 자신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그린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의 『제우스와 세멜레프랑스어: Jupiter et Sémélé』1894~1895입니다. 그런데 파리의 귀스타프 모로 미술관에서 본 이 그림은 살짝 실망스러웠습니다. 제우스가 발산하는 빛과 열기가 장엄하고 압도적이라기보다 조금 특이하게 생긴 후광이나 머리 장식 정도로 보였으니까요. 세멜레 또한 번개와 천둥에서 나오는 빛과 열 때문에 충격을 받아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이라기보다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이고요. 물론, 세멜레의 옆구리에 번진 붉은 핏자국이 죽음을 암시하지만 세멜레가 워낙 작게 그려져서 핏자국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채색 안 된 아래 에칭 작품이 광휘光輝로서의 제우스와 그 찬란한 빛에 압도당해서 죽는 세멜레의 모습을 더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항상 마지막에 던졌던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세멜레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자신이 제우스 신이라는 남편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남편의 정체가 무엇인지 기어코 밝혀내는 것이 좋을까요? 이 선택 역시 어느 쪽을 택하든 부정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딜레마입니다. 믿자니 찜찜하고, 사실을 밝히려니 결과가 두렵죠. 남편의 말을 믿으면, 진짜 제우스 신이 아닌 경우에는 속아 사는 삶을 살 겁니다. 남편의 정체를 끝까지 추적하면, 진짜 제우스 신이 아닌 경우 남편의 실체가 사기꾼이라는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릴 수 있고요. 남편이 진짜 제우스 신이라 해도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제우스 신이 천둥과 벼락의 신으로서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인간은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수 있으니까요.
세멜레의 딜레마 역시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가 처했던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세멜레의 딜레마도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제우스 신이다”라는 제우스의 말을 믿는 것은 제우스 신의 권위에 대한 순응이고, 제우스 신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신의 권위에 대한 저항이니까요. 프로메테우스나 판도라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이 대결 구도의 범위를 조금 좁히면 ‘제우스 신의 정체를 알고 싶은 욕구를 따를 것인가? 제우스의 말에 순응함으로써 호기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됩니다. 세멜레의 딜레마도 결국에는 진실 혹은 진리에 대한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입니다.
세멜레의 신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거의 농담조로 말하자면, 이 신화는 다른 사람의 말을 너무 쉽게 믿을 때 어떤 불행한 결과가 벌어질지 경고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제우스라는 남편의 말도, 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해 보라는 헤라의 말도 의심 없이 믿은 세멜레가 결국 불행하게 죽었으니까요. 두 번째는, 인간이 신의 권위에 도전할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 경고하는 신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세멜레의 죽음을 일종의 처벌로 보는 거죠. 다음으로는, 규제를 어기고 지적 호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할 때 어떤 불행한 결과가 생기는지 경고하는 신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해석은 세멜레 신화를 프로메테우스와 판도라 신화와 같은 범주로 상정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해석과 연관해서 한 가지 의미를 더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멜레의 신화는 지식에 대한 완전한 인지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로, 진리 혹은 지식의 직접적 재현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흔히 보고자 하는 욕망과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장 간단한 예를 들면, “알겠어.”는 영어로 “I see.”입니다. “보다see”가 “알다know 혹은 understand” 대신 쓰이는 거죠. 진실을 알고 싶은 세멜레의 욕망은 최고신임을 증명하는 모든 장비와 상징을 갖춘 제우스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완전한 진실을 마주한 순간 세멜레는 죽음을 맞이하죠. 진실을 조우하는 시간이 죽음의 시간이라면 진실을 인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세멜레의 죽음은 완전한 진실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 혹은 도달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알레고리일 수 있습니다. 세멜레의 신화는 살아서는 절대 진실을 직면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는 것이죠. 진실을 죽는 순간에나 마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살아있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진실이란 부분에 불과합니다. 피터 브룩스Peter Brooks, 1938~ 는 『육체와 예술Body Work: Objects of Desire in Modern Narrative』1993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알고자 하는 충동, 그리고 보고자 하는 충동에서 태어난 욕망은 이것은 본질적으로 충족이 불가능하다 지식의 대상을 오직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부분적으로만 눈에 보이게 할 뿐, 관찰자-탐구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전체에 대한 조망과 이해에 도달시키지는 못한다.”
세멜레의 신화처럼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다른 신화가 있을까요? 진실을 본 순간 죽거나 변신한 인간이 등장하는 신화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먼저 악타이온의 신화가 있습니다. 악타이온은 숲에서 사냥하다가 목욕하고 있는 아르테미스를 우연히, 그야말로 우연히 보게 되죠.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본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변신시켜 버립니다. 결국 악타이온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 사냥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말죠.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보는 것은 진실Truth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진실은 흔히 여성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진실이 알레테이아Aletheia 여신으로, 로마신화에서는 베리타스Veritas 여신으로 구현됩니다. 또한 진실은 어떤 것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벌거벗은 상태로 묘사되고요. ‘적나라한 진실’이라거나 ‘베일을 벗은 진실’이라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회화나 조각에서......진실을 상징하는 여자의 모습은 벌거벗었거나 베일을 쓰고” 있죠. “베일을 쓰고 있는 경우, 그것은 곧 벗겨지게 되어 있어야 하며 바로 이 벗기는 동작이 진실 발견의 과정을 상징화”한다고 브룩스는 말합니다.
악타이온이 여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본 순간 사슴으로 변신하는 것 역시 세멜레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진실을 인지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우의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슴에게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요. 비슷한 또 다른 신화로는 메두사를 꼽을 수 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아름다운 메두사를 아테나 신전으로 데려가서 사랑을 나눕니다.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었을 수 있습니다. 모욕감을 느낀 아테나는 포세이돈 대신 메두사를 처벌하죠. 아름다웠던 메두사의 머리카락은 뱀으로 바뀌었고,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모두 돌이 됐습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세멜레와 악타이온처럼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보는 대신 그녀의 얼굴을 청동 방패에 비춰 보면서 그녀의 머리를 베죠.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메두사에 대한 공포를 남성의 거세 공포로 설명했고, 페미니스트들은 메두사의 모습이 여성의 분노를 상징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엘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 는 메두사를 괴물로 변형시킨 남성적 서사가 여성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해석했죠. 이런 정신분석학적 해석이나 여성학적인 설명 방식 외에도 메두사의 신화는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는 것의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습니다.
세멜레와 악타이온, 메두사의 신화를 바탕으로 호기심의 대상인 지식이나 진실, 혹은 진리의 특성을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이 제우스의 본래 모습을 보면 번갯불에 타죽고, 아르테미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 동물로 변신하고, 메두사의 눈을 마주 보면 돌로 변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식 대상을 완전하게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지식의 특성을 조금 변형하면 “지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됩니다. 이것은 지식 대상 혹은 진실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죠. 언어를 통하지 않은 채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언어는 대상을 인식하고 재현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모든 지식은 언어를 통해서만 표현되고 인식될 수 있습니다. 형태와 선, 색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미술 작품은 어떨까요? 형태와 선, 색 역시 차이를 토대로 의미를 발생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기호 체계라 할 수 있습니다.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경우 돌로 바뀐다는 것은 지식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얼굴을 보면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대상을 인식하고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거죠. 인간으로 변신한 제우스의 모습을 볼 때는 안전했지만, 변신하지 않은 제우스의 본래 모습을 본 세멜레가 번갯불에 타 죽는 것도, 아르테미스 여신의 벌거벗은 몸을 본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신한 후 사냥개에 물려 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멜레와 악타이온, 메두사의 신화는 지식의 대상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변신한 형태로만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어가 지식 대상을 100퍼센트 온전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이죠. 언어로 재현된 대상이 실제 대상을 대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쉬운 예를 들면, ‘빵’이라는 대상을 언어로 아무리 잘 묘사한다 해도 언어를 통해 재현된 ‘빵’을 먹을 수는 없죠. 이것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상징언어이란 사물의 죽음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영역, 상징화를 벗어난 영역을 라캉은 실재계the Real라고 부릅니다. 실재계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벗어난 불가능의 영역입니다. 제우스의 본래 모습이나 아르테미스의 벌거벗은 모습, 메두사의 얼굴은 불가능의 영역에 대한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우스의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제우스의 실체를 확인할 것인가?’라는 세멜레의 선택을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로 설명해 보는 것이 이 글의 핵심 주제인데 지식 혹은 진실의 특성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죠? 대상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이나 직접적 재현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 욕심을 부려 봤습니다. 그저 제우스의 화려한 연애 이야기 중 하나로 치부될 수 있는 세멜레의 신화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니 놀랍지 않나요? 단순해 보이는 연애담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 신화를 읽는 현대의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이죠. 그러니 다시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답하는 과정에서 세멜레의 신화에 대해 여러분만의 새로운 해석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멜레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제우스 신이라는 남편의 말을 믿으시겠어요? 아니면 남편의 실체를 밝혀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