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Curiosity killed the cat’라는 속담을 들어보셨죠? “불필요한 조사나 실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속담”으로 “호기심이 때로는 위험이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위키피디아」한다고 합니다. 속담의 원래 형태는 ‘걱정이 고양이를 죽인다Care killed the cat’였답니다.
![]() |
바구니 안이 궁금한 뚱냥이들. |
‘걱정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말은 셰익스피어의 동시대 극작가인 벤 존슨Benjamin Jonson, 1572~1637의 『십인십색Every Man in His Humour』1598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런던의 국립초상화 미술관the National Portrait Gallery에 갔더니 셰익스피어와 존슨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더군요. 형이상학파 시인 존 던John Donne, 1571/1572~1631의 초상화와 함께요. 제가 좋아하는 세 작가의 초상화를 한자리에서 보게 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예민하고 냉철해 보이는 존 던, 냉소적인 눈빛의 벤 존슨, 깐깐하면서도 영리해 보이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가 세 작가의 글과 닮아 있는 것 같더군요. 신화에 대한 글에서 이 사진을 보여드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
왼쪽부터 존 던, 벤 존슨,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초상화. 국립초상화 미술관, 런던. |
그런데 20세기 초에 ‘걱정이 고양이를 죽인다’가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로 바뀌었답니다. 이것도 의아한 일인데 나중에 ‘그러나 만족감에 고양이가 되살아난다But satisfaction brought it back’라는 구절이 덧붙여졌다고 하네요. 이제는 반대로 호기심의 긍정적 효과가 강조되는 겁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속담의 의미 변천사를 살펴보면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리스 신화 수업 시간에 호기심의 부정적 효과와 연관해서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속담을 언급했더니 영국에서 온 닐이 뒷부분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그리스신화를 비롯해서 호기심의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창의력 같은 호기심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하는 쪽으로 바뀌었고, 이런 사회적 변화가 이 속담에 반영된 것은 아닌가 혼자 추측해 봅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판도라일 겁니다. 판도라는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가져다준 것에 대해 제우스가 인간에게 내린 처벌 방식입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쇠말뚝에 쇠사슬로 묶어 놓은 다음 독수리를 보내 간을 파먹게 하는 벌을 내렸고요. 판도라의 신화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2부라 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와 대립각을 세우다 불을 훔쳐 오고 처벌받는 과정까지가 1부라면, 2부에서는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불을 사용한 것에 대해 인간이 판도라를 통해 벌을 받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일종의 두 폭 그림diptych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 당연히 판도라의 신화도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노동과 나날』에 나옵니다. 『신통기』에는 판도라를 창조하는 과정까지만 나오고, 『노동과 나날』에서는 판도라의 창조 과정뿐만 아니라 판도라가 상자를 여는 장면까지 들어 있습니다. 이 두 작품을 연결하고 중간에 빠진 부분을 에디스 해밀턴Edith Hamilton, 1867~1963의 『신화Mythology』1942로 보충해서 하나의 스토리로 짜깁기해 봤습니다.(인용문은 휴 G. 에블린 화이트[Hugh. G. Evelyn-White]와 휴 제라드[Hugh Gerard, 1884~1924]가 영어로 번역한 『신통기』와 『노동과 나날』[1914], 해밀턴의 『신화』를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제우스는 멀리 인간들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이자 곧장 불에 대한 대가로 인간들에게 줄 재앙an evil thing을 만들었다. 유명한 절름발이 신이 진흙으로 제우스가 원하는 대로 정숙한 처녀를 빚었다. 그리고 빛나는 눈을 가진 아테나는 그녀에게 은빛 옷을 입히고 허리띠를 매준 다음 그녀의 머리에 수놓은 면사포를 손수 씌워 줬다. 경탄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런 다음 팔라스 아테나는 갓 돋아난 풀꽃으로 만든 예쁜 화환을 그녀의 머리에 얹어줬다. 여신은 유명한 절름발이 신이 아버지 제우스를 기쁘게 하려고 직접 만들고 공들여 손으로 작업한 황금 관도 그녀에게 씌웠다. 황금 관 위에는 매우 진기한 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장관이었다. 관 위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자란 끔찍한 짐승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괴물들이 여럿 새겨져 있었는데 하나하나가 반짝이는 기적 같았다. 마치 살아서 말이라도 할 것처럼 생생했다. 황금 관은 엄청난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절름발이 신은 불의 축복에 대한 대가로 이 아름다운 재앙a beautiful evil을 만든 다음 다른 신들과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빛나는 눈의 딸이 준 장신구를 한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이 완전한 속임수a sheer guile를 봤을 때 불멸의 신들과 필멸의 인간들은 모두 얼이 나갔다. 인간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녀로부터 여자와 여성의 종족이 생겨난다. 남자들 속에 살면서 그들에게 커다란 재앙great trouble이 될 치명적인 여자의 종족과 부족a deadly race and tribe이 그녀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남자가 가난할 때는 동반자로 살지 않고, 풍족할 때만 동반자로 산다. 마치 풀로 이어 만든 벌집 속에서 일벌들이 못된 짓만 일삼는 본성을 지닌 수벌을 먹여 살리는 것과 같다. 날마다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일벌들이 바쁘게 하얀 벌집을 짓는 동안, 수벌들은 꿀 벌집 안에서 편히 쉬면서 다른 벌들이 수고해서 얻은 것을 거둬들여 자기 배를 채운다. 높은 곳에서 천둥을 내리치는 제우스는 바로 이 수벌들처럼 남자들에게 재앙an evil이 되도록 나쁜 짓을 일삼는 본성을 가진 여자들을 만들었다. 또한 제우스는 인간들이 가진 불이라는 좋은 것에 대한 대가로 그들에게 두 번째 재앙을 내렸다. 결혼과 여자들로 인한 슬픔을 피해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돌봐줄 사람 하나 없이 노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생계에 부족함이 없겠지만 죽으면 먼 친척들이 그의 재산을 나눠 가질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운명을 선택해서 마음이 잘 맞는 좋은 아내를 얻은 사람에게도 불행이 끊임없이 행복과 다툰다. 혹시 자식들이 못되기라도 하면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끝없는 슬픔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불행은 치유할 수도 없다.(헤시오도스, 『신통기』)
또한 아르고스를 죽인 전령의 신은 요란하게 천둥 치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그녀의 마음속에 거짓말과 간계와 남을 속이는 본성을 심어 줬다. 또한 신들의 전령은 그녀에게 말하는 능력을 줬다. 그리고 이 여자를 판도라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올림푸스에 사는 신들 모두 그녀에게 선물을 하나씩, 빵을 먹는 인간들에게 재앙을 하나씩 줬기 때문이다. 판도라Pandora는 ‘모든pan 선물dora을 다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미끼a snare가 완성됐을 때 제우스는 헤르메스에게 명해서 그녀를 에피메테우스에게 선물로 보냈다. 발 빠른 전령신은 선물을 전달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올림포스의 제우스가 주는 선물을 받지 말고, 곧장 돌려보내지 않으면 인간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에피메테우스는 선물을 덥석 받고 나서야 그 말을 떠올렸다. 그때까지 인간의 종족은 인간에게 죽음을 초래하는 불행도, 힘든 일도, 병이나 고통도 없이 오래 살았다. 불행한 사람은 빨리 늙는 법이다.(헤시오도스, 『노동과 나날』)
신들은 각자 해로운 것을 하나씩 넣은 항아리를 판도라에게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명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녀를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냈다.(해밀턴, 『신화』)
그 여인이 큰 항아리의 뚜껑을 손으로 열자 인류에게 슬픔을 가져올 온갖 불행이 빠져나와 흩어졌다. 깨트릴 수 없는 항아리 안에는 희망만 남아 있었다. 희망은 항아리 뚜껑 가장자리 밑에 붙어서 밖으로 날아가질 못했다. 그 여인은 먼저 뚜껑으로 항아리를 덮었다. 모든 것이 아이기스 방패를 지니고 다니며 구름을 모으는 제우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무수한 재앙은 인간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이제는 지상과 바다에 재앙이 가득 찼다. 재앙 중에서 질병이 밤이고 낮이고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들이닥쳐 조용히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쳤다.(헤시오도스, 『노동과 나날』)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에는 우리가 흔히 ‘상자box’로 알고 있는 것이 ‘항아리jar’로 표현돼 있습니다. 16세기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가 판도라의 이야기를 설명할 때 그리스어 ‘pithos항아리’를 ‘pyxis상자’로 바꿨기 때문에 ‘판도라의 항아리’보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표현이 더 일반화됐다고 합니다. 판도라의 신화를 읽다 보면 판도라 저리 가라 할 만큼 호기심이 모락모락 솟구칩니다. 저만 그럴까요? 판도라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도대체 얼마나 아름다우면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할까요? 이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판도라 그림을 몇 점 준비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판도라를 ‘원픽’해 보세요.
![]() |
샤를-아마블 르누아르, 『판도라』, 1902년. 33.5 × 20 cm, 뒤셸도르프 옥션하우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ildplatte_KPM_Pandora.jpg#/media/File:Bildplatte_KPM_Pandora.jpg 제공. |
![]() |
찰스 에드워드 페루지니, 『판도라의 상자』. 캔버스에 유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Charles_Edward_Perugini_-_Pandora%27s_box.jpg#/media/File:Charles_Edward_Perugini_-_Pandora's_box.jpg 제공. |
![]()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판도라』, 1896년. 캔버스에 유화, 152 × 91 cm. 개인 소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andora_-_John_William_Waterhouse.jpg#/media/File:Pandora_-_John_William_Waterhouse.jpg 제공. |
위 세 그림에서는 모두 판도라가 상자를 들거나 열고 있죠. 항아리로 그려진 그림을 보고 싶으신 분은 1화에 나오는 로런스 알마-타데마Lawrence Alma-Tadema, 1836~1912의 『판도라』1881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첫 번째 『판도라』는 신고전주의 화가인 샤를 아마블 르누아르Charles-Amable Lenoir, 1860~1926의 작품이고, 두 번째 『판도라』는 빅토리아 시대 낭만주의 화가인 찰스 에드워드 페루지니Charles Edward Perugini, 1839~1918의 작품입니다. 세 번째 『판도라』는 라파엘 전파 화가인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의 작품이고요. 앞의 두 판도라는 “와,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지만, 상자를 열어보고 싶어 하는 판도라의 호기심이 그림에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나 있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판도라는 앞의 두 판도라만큼 성숙해 보이지는 않는 대신 호기심만큼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 표현하고 있죠. 이 세 판도라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판도라를 하나만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같은 라파엘 전파 그림인데도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판도라와 워터하우스의 판도라는 다릅니다. 워터하우스의 판도라가 상자를 열까 말까 주저하다가 한참 만에 뚜껑을 살짝 여는 우유부단한 소녀의 모습이라면, 로세티의 판도라는 밖으로 음산하게 빠져나온 온갖 해로운 것에도 놀라거나 슬퍼하는 모습이 아니라 초연하면서도 우울한 모습이죠.
![]()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판도라』, 1871년. 캔버스에 유화, 131 × 79 cm. 개인 소장.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Dante_Gabriel_Rossetti_-_Pandora.jpg#/media/File:Dante_Gabriel_Rossetti_-_Pandora.jpg 제공. |
판도라의 신화는 여성의 기원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앙의 기원에 대한 신화입니다. 이 둘을 연결해 주는 것이 바로 호기심이라는 요소이고요. 여성은 원래 악한 존재로 창조됐고, 호기심 때문에 인류에게 온갖 재앙을 초래한 장본인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재앙의 원인이 여성이라는 말이죠. 여성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그린 신화가 또 있을까요? 아마도 이에 필적할 유일한 상대는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 창조 신화일 겁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여성이 출산의 고통을 겪고, 남성이 힘든 노동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이브 탓으로 그려지니까요. 수업 시간에 판도라의 신화를 다룰 때면 먼저 학생들에게 여성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부분, 즉 여성혐오가 들어 있는 구절을 찾아보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텍스트를 프로젝터 스크린에 띄워 놓고 학생들에게 나와서 그 구절을 빨간색으로 강조해 보라고 하죠. 한 학생이 빠뜨린 부분이 있으면 다른 학생이 나와서 보충하고요. 세계경제포럼WEF의 2023년 세계 젠더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23에서 성평등 지수 2위를 차지한 노르웨이에서 온 로라가 분개하며 신화 텍스트에 빨간색 표시를 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여러분도 빨간색 표시를 한번 해보시겠어요? 다 표시해 놓고 보면 텍스트 전체가 벌겋습니다. 괄호 안에 영어로 표시해 둔 부분은 절대 빠트리면 안 됩니다.
여성혐오 외에 또 다른 가부장적인 요소로는 뭐가 있을까요? 학생들에게 찾아보라고 하면 여성의 ‘대상화objectification’라고 똑똑한 답을 내놓습니다. 대상화란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 취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도라가 ‘것thing,’ ‘선물gift,’ 혹은 ‘덫snare’으로 불리는 것에서 대상화의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판도라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부장적 요소는 아마도 남자보다 여자가 나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일 겁니다. 판도라가 최초의 여성이라면 헤시오도스가 ‘인간들men’이라고 지칭한 것은 ‘남자들men’입니다. 판도라 이전에 남자들만 존재했다는 거죠. 가능한 일인가요? 또 판도라에게서 ‘여자 종족’만 나오다니요. 이것도 가능한가요? 여자의 존재를 부정한 이유는 「도정일의 신화 읽기: 신화의 공백, 또는 허위의 진실」1997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원을 확립하는 서사에서 여자는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원은 신성하고 신성한 것은 여성적 성질이 아니다. 신성한 것에서만 신성한 것이 나온다. 신성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신성한 것이 나올 수는 없다. 같은 것은 같은 것에서 나오므로 여자가 남자의 기원이 될 수 없다” 이것이 그 공백의 정보 내용이다. 기원 신화 속에 여자가 공백으로 처리되는 것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무존재여야 하고 그 정치적 지위가 공백이어야 했기 때문이며, 그리스 사회가 ‘여성 곧 열등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중력권에 나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것에서 다른 것이 나올 수 있는가?’라는 그리스 특유의 질문은 한 차원에서는 진지한 철학적 화두이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기원의 남성성이라는 ‘상상적 허구’를 위해 여성은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인 여성에게서 남성이 나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성의 존재를 부정했던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판도라의 신화에 반영된 겁니다.
판도라의 신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이 글의 주제인 딜레마의 문제로 들어가 볼까요? 판도라의 신화에서는 어떤 선택이 이루어졌을까요? 이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은 판도라가 항아리의 뚜껑을 열기로 결심한 순간일 겁니다. 판도라는 ‘호기심을 쫓아 항아리 뚜껑을 열 것인가?’ 아니면 ‘신들의 금지 명령에 따라 항아리 뚜껑을 열지 않을 것인가?’ 고민했을 겁니다. 뚜껑을 열면 호기심은 충족할 수 있는 대신 신들의 명을 어기는 것이고, 뚜껑을 닫아두면 신들의 명에 따르는 대신 항아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계속 궁금하겠죠. ‘신들의 명에 따라 항아리를 열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신들의 명을 무시하고 항아리 뚜껑을 열 것인가?’라는 이 선택의 상황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딜레마입니다.
판도라의 딜레마 역시 프로메테우스가 처했던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판도라의 딜레마는 프로메테우스 딜레마의 반복입니다. 먼저, 판도라의 딜레마도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항아리를 열지 말라는 신들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신들의 권위에 대한 순응이고, 신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뚜껑을 여는 것은 신들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이니까요. 이 대결 구도의 범위를 조금 좁히면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따를 것인가? 호기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가 됩니다. 판도라의 딜레마도 결국에는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인 거죠.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를 설명할 때는 불을 지식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 내는 과정이 필요했다면, 판도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는 ‘불을 숨기는 것’을 ‘지식에 대한 금지 및 규제’에 대한 은유로, ‘불을 훔치는 것’을 ‘지식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읽어냈습니다. 항아리 안에 “해로운 것”이건 “희망”이건 무엇인가를 담아서 뚜껑을 덮어두고 열지 말라고 명하는 것은 항아리 안에 들어 있는 것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그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거죠. 어디에 감췄건 상관없습니다. 상자건, 항아리건, 병이건, 뚜껑으로 덮어 둔다cover/hide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반면에 뚜껑을 연다uncover/discover는 것은 금지된 정보와 지식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신들이 무엇인가를 넣어서 밀봉한다는 것은 ‘불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에 대한 금지 및 규제’에 대한 은유로, 판도라의 상자 뚜껑을 연다는 것은 ‘지식을 발견하는 것’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라는 표현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이 공개된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반대로, ‘상자 안에 넣어 꽁꽁 숨겨놓다’라는 표현은 정보/지식/진실/진리를 비밀로 간직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요. 상자/항아리 뚜껑을 열었을 때 온갖 해악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지식을 발견한 인류가 치러야 하는 대가를 상징합니다. 지식이 “항아리 안에” 얌전히 규제된 상태에서는 지식의 부정적 효과가 통제되지만, “항아리 밖으로 쏟아져 나온” 금지된 지식이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해악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겁니다. 또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기 전에는 지상에 죽음이 없었다는 것은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무지했다는 말이겠죠. 지식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 대해,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해 인식하게 됐을 겁니다. 인식을 통해 죽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거죠. 만약에 항아리 안에 들어 있던 희망마저 항아리 밖으로 나왔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혼돈 그 자체가 되지 않았을까요? 인간이 처한 온갖 불행한 상황에 대한 지식/인식을 하나씩 습득해 가는 과정에서 지식에 입각한 생존 방식을 모색하는 대신 터무니없는 낙관주의에 빠졌을 테니까요.
지식 추구의 자유가 허용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부작용과 위험뿐만 아니라 규제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다룬 앞글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대신 지식 추구를 규제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새로운 지식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함을 제공해 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죠. 개인적으로는 정보에 입각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복잡한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진보와 혁신이 촉진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며, 사회, 경제적 발전이 이뤄질 수 있고요. 당연히 윤리적인 문제, 환경 문제, 대량 살상 무기 개발, 일자리 감소, 사생활 침해 같은 부정적인 결과도 생겨나죠. 그런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결과만 강조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억제하려고 합니다. 지적 호기심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한 사례 1이 프로메테우스고, 사례 2는 판도라입니다. 판도라의 경우에는 비극적인 결과가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인류 전체로 확대됩니다. 사례 1과 사례 2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알려고 하지 마라. 알려고 하면 다칠 것이다.’ 앞으로 살펴볼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를 지닌 여러 신화 역시 전달하는 메시지는 똑같습니다. ‘알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그런데 사례들이 무한정 이어지지 않고 일정한 수로 한정되는 것은 신들과 지배층의 명령에 따라 지식 추구를 포기한 순응자들이 많았다는 말이 되겠죠. 변화를 포기하고 익숙함을 선택한 대다수의 순응자에 의해 현상status quo이 유지되는 정체 상태에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의 위험에 과감히 뛰어든 소수의 반역자에 의해 세상에는 변화와 변혁이 이루어진 겁니다.
지식 추구의 긍정적인 효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규제/억압을 받습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Ernst Peter Fischer, 1947~ 는 『금지된 지식Das wichtigste Wissen』2020에서 지식을 규제/억압하는 가장 큰 이유가 지식이 곧 힘이자 권력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글자를 해독하는 특권층은 평민들이 글자를 해독할 수 없게 만드는 정책을 폈다고 합니다. 무지한 평민들을 특권층의 도구로 삼은 거죠. 종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종교인들이 일반인들이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 해가 되는 지식을 금지했습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성 제롬St. Jerome이 히브리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Vulgata’ 성경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교회의 사제들은 일반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만 설교했고요. 이 전통은 지금도 교황이 미사를 집전할 때 라틴어로 설교하는 것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일반인은 성경을 소유하는 것조차 죄가 됐다고 합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도 오직 사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된 거죠. 사제를 통하지 않으면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인에게는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라틴어에 대한 지식의 독점이 일반인 신자를 교회에 묶어두는 한 방법이 된 겁니다.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시도했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3/1406~1468의 금속 활판 인쇄술의 발명과 맞물려서 성경이 대중에게 보급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교회가 지식을 독점하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의 소설 『장미의 이름이탈리아어: Il nome della rosa』1980이 떠오릅니다. 웃음은 저급한 것이라고 믿는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아리스토텔레스그리스어: Aristotélēs, 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의 『시학詩學』기원전 335년 2부를 금서로 지정해서 장서관에 숨겨놓았을 뿐만 아니라 책장에 독을 발라 둡니다.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은 사람은 독이 퍼져 죽게 되는 겁니다. 이 책에 담긴 희극에 대한 내용이 세간에 알려지면 기독교 교리가 망가질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죠.
『장미의 이름』은 지식에 대한 “금지”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규제’라는 용어를 ‘금지’와 ‘통제’ 두 의미를 모두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금지된 지식』에서는 이 둘을 분리해서 사용하더군요.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 누구도 지식을 향한 추구를 인간에게서, 예컨대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빼앗아갈 수 없으며, 예컨대 정치권력을 통해서 금지시킬 수도 없다. 이 뿌리 뽑을 수 없는 근원적 욕망은 마지막까지 어떤 아름다운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권력에의 의지가 아닌 지식에의 의지가 호모사피엔스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만든다.” “지식은 금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통제되어야 한다”는 말이 지식 추구의 자유 대 규제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자를 열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판도라의 선택은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 추구에 대한 규제를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지식 탐구를 무제한으로 허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규제해야 할까요? 여러분이 판도라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