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 첫 강의 때마다 제가 하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풀어보시겠어요? 다음 중 그리스 신화가 들어 있는 문학작품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1.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노동과 나날』
2.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3. 오비디우스의 『변신』
4.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5.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6. 토머스 불핀치의 『불핀치의 신화』
너무 쉬운 질문이죠? 답은 6번입니다. 토머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1867가 쓴 『불핀치의 신화Bulfinch’s Mythology』1867는 보기에 있는 여러 문학작품 속의 그리스 신화를 비롯해서 북유럽 신화와 게르만 신화, 인도 신화 등 세계의 주요 신화를 모아서 읽기 쉽게 재구성한 신화 모음집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보기 중에서 운문韻文으로 쓰인 작품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답은 6번입니다. 『불핀치의 신화』만 산문으로 쓰였고, 다른 모든 작품은 운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작품은 모두 시로 간주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이스킬로스기원전 525년/524년~기원전 456년/455년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기원전 5세기와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96년~기원전 406/405년의 『오이디푸스 왕』기원전 429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기원전 441년경, 『안티고네』기원전 441년는 희곡 작품인데 왜 시냐고 묻는 분이 분명히 계실 겁니다. 물론, 시와 희곡은 엄연히 다른 장르입니다. 희곡에는 등장인물이 있고, 이 등장인물들의 대사로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반면에 시에는 등장인물이 없고 시적 화자인 페르소나persona가 이야기를 전개하죠. 그런데 고대 그리스의 시와 희곡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등장인물의 대사가 시처럼 일정한 운율이 있는 운문 형태로 이루어진 겁니다. 희곡인데 시로 이루어진 이런 작품을 극시劇詩, dramatic verse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가 『시학詩學』기원전 335년에서 비극을 시로 규정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1564~1616의 희곡 작품도 모두 운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운문 대사가 산문으로 바뀐 거죠. 지금은 운문 형태의 희곡 작품을 찾기 힘듭니다.
헤시오도스기원전 8세기~7세기경의 『신통기神統記』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 신들의 기원과 계보系譜에 대한 시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신들의 족보죠. 호메로스기원전 8세기의 『일리아드』기원전 8세기와 『오디세이』기원전 8세기, 오비디우스기원전 43년~서기 17/18년의 『변신』8세기도 모두 시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운문이 산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원래는 시였다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노동과 나날』기원전 7세기,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 나옵니다.
『신통기』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가이아대지와 우라노스하늘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중 하나인 이아페토스의 아들입니다. 이아페토스는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형제고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과 신이 소의 어느 부위를 먹을지 협상을 벌일 때 소를 잡아 둘로 나눠 놓고 제우스에게 하나를 고르게 합니다. 반쪽은 살코기를 가죽과 위장으로 싸고, 다른 반쪽은 소뼈를 윤기 나는 기름 덩어리로 싸서요. 두 번째 반쪽은 겉으로만 맛있는 부위처럼 보일 뿐이고 속은 뼈다귀가 가득합니다. 인간에게 유리한 협상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 프로메테우스가 꾀를 낸 거죠. 겉모습에 속은 제우스는 두 번째 반쪽을 고릅니다. 헤시오도스는 “언제나 지혜로운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의 계략을 미리 눈치 챘다고 “쉴드”해 줍니다. 제우스는 물푸레나무 속에 불을 감춰두고 불을 주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속인 인간에게 분풀이하죠. 그러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몰래, 속이 비어있는 회양목 줄기 안에 불을 숨겨서 훔쳐 옵니다. 회양목의 영어 이름은 ‘자이언트 펜넬giant fennel’입니다. 양파처럼 생긴 뿌리채소 펜넬에 어떻게 불을 숨겨왔을지 궁금했는데,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자이언트 펜넬 사진을 보니 바로 납득할 수 있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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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ages.app.goo.gl/x4GwCeBoW5zn819f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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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로메테우스』, 1636~1637년. 패널에 유화, 25.7 × 16.6 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https://www.museodelprado.es›the-collection›art-work 제공. |
회양목 줄기 안쪽에는 수지가 많이 들어 있어서 줄기 바깥 부분은 손상하지 않은 채 천천히, 고르게 불씨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씨를 옮길 때 회양목 줄기를 이용한 거겠죠. 제우스는 인간이 불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더욱 분기탱천해서 판도라의 상자를 통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립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는 쇠말뚝에 쇠사슬로 묶어 놓은 다음 독수리를 보내 간을 파먹게 하는 벌을 내리고요.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나서야 프로메테우스는 이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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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 『프로메테우스』, 1611~1612년. 캔버스에 유화, 243.5 × 209.5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필라델피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ubens_-_Prometheus_Bound.jpg#/media/File:Rubens_-_Prometheus_Bound.jpg 제공. |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인류가 어떻게 불을 처음 사용하게 됐는지에 대한 고대 그리스식 설명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은 불을 사용하면서 시작됐죠. 불을 이용해서 다른 동물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들 수 있었고, 땅을 경작할 수 있는 도구도 만들었고요. 불로 난방도 하고, 예술 활동도 시작했습니다. 장사와 상업의 수단인 화폐도 만들었죠. 불이 문명의 기원임을 보여주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는 어떤 선택이 이루어졌을까요? 이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은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오기로 결심한 순간일 겁니다. 사실, 불을 훔쳐 오는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이 선택의 결과인지, 과연 그가 딜레마 상황에 빠져 있는지 알아차리기가 쉽진 않습니다. 『신통기』에서도, 『노동과 나날』에서도,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도 불을 훔쳐 오기 전에 프로메테우스가 고민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노동과 나날』에는 “제우스는 불을 숨겼다. 그러나 이아페토스의 훌륭한 아들이 이 불을 충고하는 자인 제우스 신에게서 속 빈 회양목 줄기에 넣어 인간에게 훔쳐다 줬다”라고만 묘사돼 있습니다. 텍스트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이 선택의 결과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앞에 놓인 선택지 중 하나는 ‘제우스의 뜻에 따라 불을 찾지 않을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위해 불을 훔쳐 올 것인가?’입니다. ‘제우스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불복할 것인가?’라는 이 선택의 상황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나오는 딜레마입니다. 불을 훔쳐 오지 않으면 “불쌍한 인간들”이 고통받을 것이고, 불을 훔치면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명을 거역하는 죄를 범하게 되니까요. 이 딜레마는 어떤 갈등 구조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이 이 딜레마를 권위에 대한 순응혹은 복종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설명합니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아이스킬로스의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헤시오도스는 제우스의 입장에 서서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한 제우스를 옹호하고 정당화하죠.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의 속임수에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혜로운 제우스는 속임수를 알아차렸다”라고 변호해 주면서요. 프로메테우스에 대해서는 “약삭빠르고” “교활하며” “간사하고” “교활한 술책과 속임수”를 일삼는 존재라고 비난합니다. 헤시오도스와 달리 아이스킬로스는 프로메테우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보여줍니다. 프로메테우스는 “교활한” 악당이 아니라, “불쌍한” 인간에게 문명과 예술, 과학을 가져다준 멘토이자 인간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인간의 대변자로 등장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때로 인간의 창조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메리 셸리Mary Shelley, 1797~1851가 자신의 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1818에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라는 부제를 단 것은 이런 신화에 바탕을 둔 겁니다. 신화시대에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현대의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을 창조하려고 시도했으니까요. 인간의 대변자, 혹은 창조자인 프로메테우스가 보기에 제우스는 “불쌍한” 인간을 몰살할 방법을 궁리하는 “폭군”입니다. 반면에 프로메테우스는 “폭군”에 저항하는 정의의 사도가 됩니다.
사실,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를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대립 구도로 이해하는 데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대립 구도가 훤히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런데 불을 지식/진리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면 이와는 다른 대립 구도가 나타납니다. 불을 훔치는 프로메테우스의 행위는 지식 추구로, 불을 숨기는 제우스의 행동은 자유로운 지식 추구에 대한 규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을 훔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의 딜레마가 ‘지적 호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규제에 순응할 것인가?’라는 딜레마가 되는 겁니다. 첫 번째 대립 구도인 체제에 대한 순응 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적 호기심 대 규제의 대립 구도는 첫 번째 대립 구도의 구체적인 예가 되겠죠. 지적 호기심을 자유롭게 추구하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쇠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고, 인류 전체에게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나온 온갖 재앙이 들이닥칩니다. 그러나 새로운 지식 추구를 규제하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변화도, 발전도 없이 현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문명 이전의 원시 상태에 말이죠.
프로메테우스의 선택의 딜레마를 지적 탐구와 규제라는 대립 구도로 연결하려면 먼저 불/빛이 어떻게 지식/진리를 나타내는 은유가 되는지 살펴봐야겠죠? 불은 빛과 연관되고 빛은 흔히 앎과 연관됩니다. 그래서 무지는 어둠으로, 지식은 빛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무지몽매無知蒙昧; 아는 것이 없고 사리에 어두움’ ‘까막눈’ ‘까맣게 모르고 있다’ 같은 표현에서는 무지와 어둠이 연결돼 있습니다. ‘명석明晳’ ‘총명聰明’ ‘명백明白한 사실’ 같은 표현에서는 지식과 빛이 연관돼 있죠.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 진리는 나의 빛’라는 한 대학교의 라틴어 표어에서도 진리와 빛의 연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진리/진실/사실과 빛을 연결한 표현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계몽啓蒙;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말 ‘계몽’보다는 영어 단어, ‘enlightenment’에 지식과 빛의 연관관계가 훨씬 더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무지의 어둠이 지식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 그것이 ‘계몽’인 거죠. 개화開化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화’는 흔히 ‘enlightenment’ 뿐만 아니라 ‘civilization’으로도 번역됩니다. ‘문명’도 빛과 연관이 있는 거죠. 주변을 둘러보면 ‘빛과 진리’라는 교회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이자 “진리”이며 “빛”으로 부르니까요요한일서 1장 1절~10절. 불교에서도 진리와 빛을 연결하더군요. 경주박물관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제목, 「진리의 빛, 비로자나부처」2007에도 진리와 빛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내용을 다룬 회화작품이나 조각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후광後光 혹은 광배光背에도 진리와 빛이 연결돼 있습니다. 예수와 부처, 성인들 모두 진리를 깨우친 존재들이고 이들이 진리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 후광을 통해 드러나는 겁니다.
무지를 어둠으로, 지식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모두 은유입니다. 어둠과 무지, 빛과 지식/진리가 어둡고 밝은 상태라는 유사성에 의해 연결된 거니까요. 물리적 어둠을 밝혀주는 빛처럼 지식이나 진리는 정신적 암흑 상태인 무지를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런데 지식이나 진리는 숨겨지거나 묻혀 있는 것으로 묘사하곤 하죠. 이런 표현에는 진리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는데 인간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식은 ‘발견하고discover’ 진실은 ‘드러난다reveal’라고 표현합니다. ‘숨겨진 불을 훔친다’라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지식을 발견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입니다. 반면에 ‘불을 숨긴다’라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찾지 못하도록 규제를 가한다’라는 것에 대한 은유이고요. 이 두 은유는 신화에서 제우스가 불을 숨기고,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여러 은유를 통해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불을 훔칠 것인가? 아니면 제우스의 명령을 따를 것인가?’라는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는 ‘자유롭게 지적 호기심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는 사회적 규제를 따를 것인가?’로 바뀔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에서 찾아낸 지식 추구 대 규제의 대립 구도에 대해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두 대립 요소 모두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중 하나가 더 낫거나 우위에 있는 선택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딜레마라는 이름이 붙은 거죠.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는 자유롭게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그것을 규제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적 탐구를 규제하면 현상status quo을 유지할 수는 있는 반면, 변화나 발전이 불가능합니다. 자유로운 지적 탐구가 허용되면 변화와 발전은 일어나지만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기고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형벌과 인류 전체에 내린 형벌이 이런 부작용에 대한 은유로 표현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부작용이 나타났고, 또 나타날 수 있을까요?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는 현재 완료형이 아니고 현재 진행형입니다. 불의 발견으로 문명이 시작됐고, 지적 탐구가 진행되면서 학문과 기술이 고도로 발전했습니다. 지적 탐구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그 결실인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건강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됐고요. 컴퓨터와 인터넷은 일상화가 됐고 우주여행도 가능해졌습니다. 이제는 챗지피티ChatGPT 같은 인공지능 기술을 학습 현장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됐죠. 모두 자유로운 지적 탐구의 찬란한 결과물들입니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효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불평등이 심화했고, 민주주의는 약화했으며, 환경 파괴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죠. 지구 온난화로 이제는 기후 재난이 거의 일상화됐고요. 핵무기를 비롯한 현대화된 전쟁 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의 위협과 피해는 더욱 커지고 있죠.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맞춤 아기’나 인간 복제 문제는 윤리적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유전자 변형GM 식품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공지능AI이 인간처럼 생각하는 지능을 갖게 되면서 인간의 고유 영역으로 간주되던 예술활동이나 창작 영역을 넘보게 됐고, 전쟁 무기로 악용될 위험도 커졌습니다. 이미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고요. 이런 여러 부작용 때문에 제도적 장치를 통한 규제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죠. 대표적인 예로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법안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법안에 대해 과학탐구의 자유를 제한하고 의료의 진보를 억제한다고 반대하는 과학자도 있습니다. 지식 탐구의 자유를 무제한으로 허용하자니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고, 지식 탐구를 규제하자니 학문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기술 발전이 저해되는 거죠. 이도 저도 못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딜레마가 현대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지속되고 있는 겁니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심각한 형태로 말이죠.
지식 탐구를 무제한으로 허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규제해야 할까요? 규제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규제가 이루어져야 할까요? 여러분이 프로메테우스라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