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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제도가 민주주의를 목 졸라 죽이고 있다고?
서구에서 귀족들이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면서 엘리트 의회통치 체제를 도입하고자 했을 때 이들에게는 돈과 쪽수의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유산자들을 정치에 끌어들였습니다. 이들은 의회의 대표자들을 뽑을 때 유산자들의 동의라는 선거 절차를 거치도록 했습니다. 선거는 신의 의지나 우연이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제비뽑기보다 자신이 직접 대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주권의 행사라는 손에 잡히는 권력 행사로 손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처음에 선거권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자 농민들과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흥 자본가들도 선거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노자동맹을 맺어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이 있었습니다만 자본가의 배신으로 자본가만 선거권을 얻고 노동자는 배제되었습니다.
1838~1848년의 인민헌장운동Chartist Movement은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얻기 위해 벌인 선거법 개정운동이자 혁명 투쟁이었습니다. 그 결과 1867년 드디어 우선 도시노동자부터 선거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엥겔스는 노동계급의 투표권이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얻은 가장 예리한 새로운 혁명 무기라고 극찬해 마지않았습니다.
미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민주정을 극도로 기피하고 경멸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노예 소유주였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민주주의자들은 이 나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온갖 시도를 다할 것입니다”라며 두려움을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대의정을 선택한 미국도 당연히 건국 초기에는 선거권자가 10명 중 2명에 불과했습니다. 노동자들과 여성들의 길고도 치열한 참정권 투쟁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통선거권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여성 참정권 획득 하나만 보더라도 미국은 1920년,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4년에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심지어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 참정권을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거 제도가 이제는 민주주의의 눈과 귀를 가리고 목을 조르고 있습니다. 선거가 민주주의라는 가짜뉴스가 이제는 확고부동한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는 대의정의 도구이지 민주주의의 도구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원리에 충실한 선출 제도는 오히려 제비뽑기입니다. 무엇보다도 국가의 주요 정책과 의제를 주권자가 직접 결정하는 국민발의제와 국민투표제가 민주주의의 핵심 지표입니다.
히틀러를 선택한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바이마르 대의정이었다고?
1933년 히틀러의 집권에 대해 흔히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를 단골손님으로 소환하면서 나오는 분석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도 가짜뉴스입니다. 히틀러의 독일은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닙니다. 명백히 서구 대의정의 예정된 실패입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동안 2백만의 독일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많은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 체제였지만, 천문학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불평등한 강화조약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정치는 부패했고 독일 국민들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해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는 엘리트 귀족들의 대의정에 대해 지긋지긋해하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권력 장악 이전 14년 동안 무려 21번이나 내각이 바뀌었습니다.
수백만의 독일 국민들이 음모론에 빠져들었습니다. 적에 의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 자본가, 유태인, 프리메이슨 등 내부의 적에 의해 등에 칼을 맞고 독일이 패배했고 지금도 독일은 이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정치를 혐오했고 ‘정치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치, 강력한 메시아 지도자가 독일을 구원해 줄 것을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일 국민들의 현실도피 정치가 나치 제국입니다. 현실 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할 때 당연히 강력한 지도자, 독재자가 등장합니다. 독일 대의정의 실패가 다름 아닌 히틀러와 나치즘으로 귀결되고 만 것입니다.
엘리트 대의정 실패의 종착역 대기실에는 늘 ‘양두구육’의 히틀러와 트럼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의정 체제 열차 또한 고속으로 히틀러가 기다리고 있는 종착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현행 대통령제 헌법은 언제든 박정희를 다시 소환할 수 있습니다.
여의도 정치는 설국열차처럼 주권자를 함정에 빠뜨려 요리해 먹는 개미지옥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적대적 공존의 여의도 두 거대 정당은 매일같이 서로를 공격하면서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보수-진보도 전혀 아닌데 보수-진보를 자처하면서 이른바 ‘태극기부대’와 ‘개딸부대’를 결집시키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정치투쟁이 아닌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사이 기후위기와 불평등으로 인해 시급한 주권자들의 삶의 문제는 의제로도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쌓여있는 현안에 대한 그 어떤 대안과 정책 수립 또한 정치의 관심 밖으로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적대적 공존의 한국 정당정치는 주권자들을 짜릿한 격투기 극장정치 쇼에만 정신을 팔리게 만들면서 돈과 권력과 언론을 틀어쥔 기득권자들에게 천문학의 잇속을 챙길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선거에서 히틀러를 지지한 독일 국민들은 1/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곧바로 공산주의자들의 방화사건을 조작해냈고,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하는 비상대권과 긴급명령으로 순식간에 나치 체제를 완성해 버렸습니다. 윤석열을 지지한 한국의 선거권자도 1/3 정도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해석이 아닙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 그 자체도 아닙니다. 역사는 ‘지금 여기’의 밖에서 보는 지금 여기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늘 현재의 역사입니다. 역사 다시 보기이고 지금 여기를 다시 보는 역사 성찰입니다
퇴진시켜야 할 것은 윤석열이 아니라 엘리트 대의정이라고?
한국의 검찰은 권한을 권력으로 만들어 칼을 휘두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이는 전문가 비적 떼 집단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숱한 국민들이 검찰의 칼에 삶을 갈갈이 찢기고 가정 파탄에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멀쩡한 국민이 어느 날 간첩으로 조작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갔습니다.
이런 검찰의 칼을 없애기 위해서는 헌법 개정이 필요합니다. 경찰과 검찰, 법원의 사법권은 주권자인 국민이 행사해야 합니다. 경찰과 검사, 판사는 국민이 행사하는 사법권의 도우미 역할로 충분합니다.
지금의 대의정 체제 자체를 바꿔야 정치도 바뀌고 경제도 바뀌고 기후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기후체제 전환도 가능해집니다. 무늬만 다른 보수-진보 진영 논리에 갇힌 여의도 정치를 국민의 직접 정치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태극기부대’와 ‘개딸부대’의 적대적 공존은 주권자들을 영원히 머슴의 골방에 가두어 둘 뿐입니다.
분권형 대통령제건 내각제건 이원집정부제건 중대선거구제건 지금의 정치 제도를 바꾸는 것은 현상을 타파한다는 점에서 일보 전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 개혁의 핵심은 국민발의권입니다. 원포인트 개헌을 한다면 국민발의 개헌을 해야 합니다.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19대 국회 말인 2020년 3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의원 148명이 국민발의 개헌안을 발의한 적이 있습니다. 1954년 도입된 국민발의 제도는 박정희가 유신체제 개헌을 하면서 없앴습니다.
국민이 헌법 개정을 포함해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주요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체제, 이것이 민주주의 체제의 요체입니다. 국민만이 히틀러와 트럼프와 박정희가 기다리고 있는 대합실을 향해 열차가 가지 못하게끔 멈춰 세울 수 있습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둘 다 한반도 평균 기온을 1.5도 올려놓은 기후범죄자들입니다. 전두환부터 문재인에 이르기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후범죄자들이긴 매한가지입니다. 기후범죄자는 윤석열에서 끝내야 합니다. 퇴진시켜야 할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엘리트 대의정 체제 자체입니다.
대의정 체제를 퇴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지극히 자명한 사실입니다. 기후위기와 불평등 해결을 과제로 내걸고 국민발의 헌법 개정을 공약하는 진정한 주권자 민주주의의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선거에 나서면 됩니다. 6공화국 체제에서 정치를 바꾸기 위한 방법은 선거가 가장 유력한 방법입니다. 지금의 국힘당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까지 포함해서 적대적 공존의 극장정치를 끝내고 중장기 미래를 성찰하고자 하는 수많은 다양한 주권자들이 연대연합 정당을 통해 선거에서 이기면 됩니다.
다시 주권자 정치의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2024년의 총선은 그러므로 기후체제 전환의 주권자 정치를 가시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정치 지형도 변하고 있습니다. 선거제도의 변화 가능성도 있고,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의 분열을 점치는 전망도 많습니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제3의 정당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내각제를 고리로 한 여의도 정치의 변화가능성도 점쳐지고 있습니다.
대의정의 정치 쇼 극장에서 뛰쳐나와야 대리인을 내세워 대리만족하는 대리 정치를 끝낼 수 있습니다. 관객 없는 극장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권자들만이. 스타 정치인을 내세워 극장 쇼 정치를 벌이는 소모성 엘리트 마적 떼 정치를 과감하게 버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문맹의 시대도 아니고 정보가 부족한 시대도 아닙니다. 능력이나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국민들이 검사, 판사, 변호사, 교수, 고위 공무원 등 이른바 여의도 엘리트 정치꾼보다 못한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권자에 의한 주권자를 위한 주권자의 직접 정치, 지금이 딱 좋은 때입니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기다렸다는 듯이 긴급명령을 내리고 노동조합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고 거침없이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구속하는 것을 보면서 히틀러와 트럼프, 윤석열, 그리고 주권자 민주주의에 대해 두서없이 적어 보았습니다.
★ 이 글은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